#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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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의 제안으로 우선 녹음실로 이동한 민수와 설아.
설아는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녹음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그냥 설아 씨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하나만 해주시면 돼요.”
민수가 웃으며 말하자 설아는 가볍게 한숨을 폭 하고 쉰 후 호흡을 가다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말 넌 다 잊었더라~ 반갑게 날 보는 ~ 너의 얼굴~보니~~ 그제야~ 어렴풋이 아파 오더라~~”
반주 없이 부르는 설아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민수의 귀에 울려 퍼졌다.
대사를 할 때 와는 전혀 다른 느낌 어쩌면 설아는 정말 노래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일 지도 모르겠다.
저음 부분은 살짝 긁히는 듯한 느낌이 자극적이다. 게다가 저 미묘한 목소리의 떨림. 민수는 자기 생각을 정정했다.
아니다 설아는 연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목소리와 표정 작은 제스쳐까지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고 있었다.
‘하이유의 나만 몰랐던 이야기.. 허허.. 노래를 배우지 않은 기본 실력으로 부른 무반주 노래가 이렇다고?’
민수가 감탄하는 사이 노래는 이제 클라이막스를 넘어 결말로 향하고 있었다.
매끄럽게 올라갔지만, 감성을 울리는 고음부가 지나고 다시 마지막 나지막하며 약간 허스키한 듯 긁히는 결말 부를 끝으로 설아의 노래가 끝났다.
“짝짝짝”
노래가 끝나고 민수는 설아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 주었다.
설아에게 연기연습의 해답을 주기 위해 설아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설아의 노래를 듣고 싶었던 순수한 욕심을 충족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민수가 기대했던 대로 설아의 노래는 지금 상태에서도 대단했다.
‘참 재능이란 게… 노력해서 안 될 것이 없다고 하는데.. 되겠냐? 저런 애들도 노력하는데..’
“설아씨. 진짜 대단하네요. 그냥 가수를 하시는 게 어때요?”
민수는 농담 반 진담 반 섞어서 웃으며 설아에게 말했다.
설아는 입을 삐죽이 내밀고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뭐에요.. 선배님.. 선배님까지 그런 말씀을 하세요. 자 노래 불렀어요. 그러니 이제 제게 방법을 알려 주세요.”
“힐링멘토”에서 본 수많은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 대한 지식.
그 중에 특별히 민수의 눈에 든 내용이 있었다.
“의식과 무의식” 이란 주제의 내용이었는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강력한 트라우마나 그에 준하는 이유로 특정 행동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강제되거나 제한되는 경우.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그 트라우마 자체를 배제하는 것이지만 가장 효율적인 해결은 그냥 트라우마를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를 피하는 것에는 자신이 문제행동을 하고 있다는 의식 자체를 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 후 문제행동을 유도하여 무의식적으로 문제행동이 전혀 트라우마를 자극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느껴 서서히 트라우마를 잦아들게 하거나.
문제행동을 하면서 이것은 문제행동이 아니라 다른 행동이라고 스스로 판단함으로 트라우마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문제행동을 수행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자, 설아 씨. 노래 정말 잘 부르네요.
노래에 감정 표현 가사 다 들어가 있네요. 좋아요. 그럼 첫 번째 제가 제안해 볼게요.
설아 씨가 지금 부른 “나만 몰랐던 이야기”를 부르는 거예요.
자, 잘 생각해 보세요. “나만 몰랐던 이야기”를 지금 설아 씨가 편곡했어요. 어때요. 상황이 그려지나요?”
설아는 민수가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는 이해가 안 갔지만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좋아요. 지금 설아 씨가 편곡한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설아 씨는 “나만 몰랐던 이야기” 초반부가 조금 더 담담하게 부르고 싶어서 그래서 중간에 클라이막스 부분을 더 강조하고 싶은 거죠.
그래서 조금 무리하지만, 시작 1소절을 담담하게 나레이션으로 표현 할 거예요.
어떤 상황인지 이해 가나요.”
민수의 설명을 들은 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한번 불러보세요. 당신이 편곡한 그 노래를..”
민수의 말이 끝나자 설아의 입이 열리고 다시 노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작 부분은 담담한 독백 같은 나레이션이었다.
“정말 넌 다 잊었더라. 반갑게 날 보는 너의 얼굴 보니…”
그리고 뒤이어 노래를 시작하려 하자 민수가 중간에 멈췄다.
“좋아요. 자자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죠.”
설아는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감이 안 잡힌 상태에서 분주하게 행동하는 민수를 바라보았다.
민수는 지금까지 설아가 줄곧 연습한 대본을 들고 녹음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민수는 오늘 종일 연습했던 설아의 대사 한 부분을 가리켰다.
“자, 오늘 이 부분이 설아 씨가 부를 노래에요.
설아 씨는 조금 전처럼 이 부분을 나레이션으로 표현하고 뒤에 노래를 부를 거예요.
노래는 음.. 그래 하이유씨의 “좋은 날” 이 좋겠군요.
이 부분을 나레이션으로 처리하고 바로 “좋은 날” 부르는 거예요”
그때쯤이 되자 설아는 민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설아의 표정으로 긴장으로 조금 굳어졌다.
설아의 입이 열리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그…렇게 그 사람이.. 떠나. 갔어..하지만 나는.. “
설아의 목소리는 분명 조금씩 떨리고 있었지만 분명 예전의 기계음처럼 딱딱하고 선명한 소리가 아니라 평소에 말하는 듯한 부드러운 소리로 대본을 읽고 있었다.
그런 설아의 모습을 웃으며 바라본 민수는 설아가 대본을 다 읽자 설아를 데리고 연습실로 이동했다.
웃으며 연습실에 도착한 민수는 설아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 지금 설아 씨는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나랑 같이 듀엣을 하고 있는 거에요.
내가 나레이션을 하고 설아 씨는 노래를 불러요. 다만 그 노래가 멜로디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 부르는 것만 다른 거죠.”
말을 마친 민수는 카메라와 마이크를 켰다.
“자, 시작해요. 제가 먼저 부르겠어요”
말을 마친 민수는 조용히 설아에게 다가갔다.
“이제는 끝났어. 더 이상 나에게 찾아오지 마. 널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민수의 말이 끝나자 설아는 애절한 눈으로 민수를 바라 보았다.
“아니야. 아..직 아니야. 당신..의 끝을.. 나에게.. 강요..하지..마..”
분명 완벽한 대사 처리는 아니었다.
오랫동안 기름칠하지 않은 태엽이 안간힘을 쓰고 돌아가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저 태엽에 서서히 기름칠이 들어가고 꾸준히 돌다 보면 어느 세 어느 무엇보다도 튼튼하고 성능 좋은 태엽이 되리라.
그렇게 몇 번의 대사를 주고받았을까.
그 장면이 끝나고 민수는 마이크와 카메라를 껐다.
그리고 무언가에 북받치는 표정의 설아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자 .. 오늘 희대의 배우가 탄생했네요..
이 배우가 얼마나 대단한 배우냐 하면.
연기로 관객을 속이는 것을 넘어서 배우가 자기 자신을 속여 버리는군요.
설아 씨. 오늘 연기 정말 훌륭했어요.”
민수의 말을 듣고 있던 설아의 눈가에서는 어느 세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오빠..”
시간적으로 따지면 지금을 기준으로 한 3~4년 이후일까… 미국에 “케리 그레이스” 라는 신인 배우가 있었다.
매우 유망한 배우였지만 촬영 중에 한 괴한이 총기로 난사하는 사건 때문에 그녀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연기를 하려고만 하면 그때의 공포가 몸을 굳게 하여 전혀 연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다시 연기 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섰다.
어떤 쉽게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고통받던 중 어떤 심리학자가 그녀에게 가볍게 충고하였다.
“연기를 못하겠으면 그걸 그냥 연기 아닌 무언가로 생각해라. 그렇게 몸을 속이면 연기를 다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순한 힌트를 믿은 그녀는 그때부터 연기를 노래라 생각하고 연습하기 시작했다.
물론 초반에는 힘들었다.
다시 연기임을 깨달은 정신이 그녀를 괴롭히기도 했고.
노래처럼 연기하다 보니 정작 연기를 할 수 있어도 연기력을 보장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결국 제기해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배우가 되기에 이른다.
민수는 자신의 알고 있던 그녀의 일화 그리고 “힐링맨토”에서 주워들은 지식을 접목해서 설아에게 추천해 준 것이다.
물론 민수도 추천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극적으로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날 저녁 설아의 영상을 확인하고 놀란 윤 대표는 설아와 민수를 동시에 호출했다.
설아와 민수가 소파에 앉기 무섭게 윤 대표는 설아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설아는 윤 대표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녹음식에서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하자 윤 대표는 크게 장탄식하며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허… 그런 방법으로.. 이렇게 쉽게…”
민수는 윤 대표의 반응을 보면서 작게 웃으며 말하였다.
“하하,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거죠. 사람이 어떤 일이든 가족이 걸려 버리면 냉정함을 잃어버리잖아요. 전 타인이라 좀 객관적으로 생각 할 수 있었던 거고요.”
“헤헤. 아빠 이제 나도 아빠한테 연기 배울래..”
배시시 웃는 설아를 보며 윤 대표는 따듯하게 웃으며 설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그러자. 당장은 무리고 대사가 조금만 더 가다듬어 지면 바로 시작하자.”
신나 하는 설아에게 민수는 조용히 주의점을 당부했다.
“설아 씨, 아직 완전한 건 아닐 거에요.
당분간은 의식적으로 생각을 해야 대사가 나올 테니 그 점 너무 실망하지 마시고 꾸준히 숙달하다 보면 언젠간 의식하지 않고도 정상적으로 대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힘내세요”
“네, 오빠~ 명심할게요”
그렇게 민수는 설아의 감사와 윤 대표의 치하를 받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밤 깊은 시간 설아와 민수가 돌아간 후 윤 대표의 방에 태준이 들어왔다.
자리에 앉는 태준을 바라보며 윤 대표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느냐?”
윤 대표의 말에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설아가 말문이 틔었다고요? 나이가 몇 살인데 성인이 돼서야 말문이 트이다니.”
소식을 전해 들은 태준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그러게나 말이다. 그나저나… 너의 말이 맞았구나.”
웃음 짓던 윤 대표의 표정이 자책으로 물들자 태준은 의뭉스럽게 말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제 생각이 맞긴 했네요.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말이죠.”
자신과 아버지가 몇 년 동안 고민한 사실을 민수가 한 달도 안 된 시간에 해결해 버린 점에서 태준은 작은 회의감과 설아에 대한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민수녀석은 우리가 가족이 걸린 일이라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해서 시야가 좁아져서 그렇다고는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나로서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이었어. 그래서 그런지 설아에게 정말 미안하더구나.
아마 민수가 없었으면.. 저 아이가 자신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좌절하고 또 좌절했겠지?
그리고 난 그걸 그냥 지켜볼 수 밖에 없었을 테고.
내 생각이 너무 고루했어.
스스로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다니..
차라리 내가 해결 못 할 바에는 병원에 계속 다니게 하면서 여러 해결책을 찾아봤어야 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 한 가지만 밀어붙일게 아니라..”
자책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태준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날도 그랬지.
넌 25억이든 30억이든 그냥 던져줘 버리고 다시 데리고 오자고 했지.
하지만 내가 그 말을 무시했다.
이제 우리 손을 떠난 일이니 순리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자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장소에서 잘 헤쳐나가기를 기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태준아.
내 말이 틀리고 너의 말이 맞았다.
나는 오늘 그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단다.”
거기까지 말을 마친 윤 대표는 손을 내밀어 태준의 손 위에 얹었다.
“내가 오늘 널 부른 건 사과하고 싶어서다.
나이 좁은 시야 때문에 상처 입었을 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을 말이다.”
태준은 윤 대표의 진지한 사과에 애써 웃음 지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잇지 못하는 태준을 보며 윤 대표가 다시 한번 말했다.
“이제는 나도 알겠다.
사람은 어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말이야.”
“하하, 이거 다른 것은 몰라도 정 배우가 한 말이 아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 있었네요.”
윤 대표가 의문스럽게 쳐다보자 태준은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좀 나서야겠어 윤 배우. 너무 효과가 좋을지도 모르니까 놀라지는 마.
정 배우가 이렇게 말했었거든요.
정말 여러 방면에서 너무 효과가 좋아서 놀랄 지경이니까요.”
태준에 말에 윤 대표도 피식하고 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