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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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름 충실한 촬영을 마치고 민수가 돌아간 그 날 밤.
윤 대표의 대표실에서는 윤 대표와 한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 그러니깐, 지금 형님 말씀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녀석의 호흡하고 발성을 봐 달라?”
“그래, 환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 방면은 네가 진정한 전문가잖아. 어때? 해줄 수 있지?”
대학로의 지배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고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연극배우이자 윤 엔터 식구인 강 환은 다소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요, 형님. 해드려야지. 그런 거 도와드리는 조건으로 내가 브라운관이나 영화판에 안 뛰어들고 연극판에서만 놀고 있는 거니깐. 뭐 좋으니 우선 그 녀석 연기 하는 영상이나 좀 봅시다.”
강 환이 소파에 몸을 깊이 기대고 거만한 표정으로 말하자 윤 대표의 얼굴에서 실소가 맺힌다.
한때 카메라 공포증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어린 녀석이 연극판으로 도망가더니 그곳에서 최고가 되고 이제는 카메라 공포증까지 완전히 극복했다.
그런데도 눈을 돌리지 않고 연극의 매력에 빠져 연극만 주야장천 파고 있는 괴짜.
그리고 자신과의 의리 때문에 다른 어떤 컨텍도 다 거절하고 있는 고마운 동생.
윤 대표는 그런 강환이 대견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큭큭, 그래 좋아 그래야지. 야 근데 그 거만한 행동은 오늘 컨셉이냐? 언제까지 그럴 거야? 안 어울리게?”
윤 대표의 말에 강 환은 더욱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이 강환이가, 예전에 형님 바지 끄덩이나 잡고 울던 그 옛날의 강환이가 아닙니다.
몇 년 만에 오라고 해서는 대뜸 일 이야기나 하시다니 이 강환이가 아주 섭섭합니다.”
“야, 이놈아. 네놈은 발이 없냐? 궁금하면 네 발로 오면 되지. 꼭 불러야 와?”
윤 대표가 혀를 끌끌 차며 대가리 하자 강환은 김이 샜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고쳐 앉았다.
“에잉, 그건 형님이 워낙.. 에잉 됐어요. 우선 영상부터 빨리 봅시다.”
강환이 왜 저러는지 충분히 알고 있는 윤 대표는 내심 미안하게 생각하면서도 전혀 모르는 척 영상을 틀었다.
강환은 윤 대표가 틀어준 영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서쪽 해변”에서의 영상 그리고 3일 뒤 오늘 설아와 찍은 영상.
영상이 하나하나 넘어갈 때마다 강환은 추임새를 넣었다.
“에… 감성은 죽여주네. 이런 식으로 감성 뿜는 애들은 연극을 해야 하는데.. “
“어이쿠, 설아 폭탄 만나서 당황해하는 것 봐. 킥킥”
그리고 영상이 말없이 연기하는 설아와 민수의 영상에 이르자 강환은 진지하게 영상을 응시했다.
“형님. 저 녀석 보다, 설아 대사 고쳐주는데 더 열 올리셔야 할 거 같은데요.
설아 표정 좀 보세요.”
그 부분에서는 같은 생각이던 윤 대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딴에는 녀석 포기시키려고 어려운 것 이것저것 막 시켰는데 다 소화한 모양이야.
근데 저 대사는 도저히 고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
설아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어때, 민수 어떻게 가르칠지 계획이 좀 서나?”
윤 대표의 말에 강환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님, 재미있는 배우 주워 오셨네. 저거 10년 이상 무명으로 이 바닥 떠도는 망령들이나 저런 식으로 연기 하거든요?
처음 우울증 연기는 배역이 워낙 치우친 역할이라 잘 몰랐는데 설아랑 하는 거 보니 알겠네요. 제 20대 맞아요? 킥킥 형님 고생 좀 하시겠네요.
뭐 연기는 내 영역이 아니니 호흡만 생각하면 걱정할 거 없겠네요. 저거 처음에 촬영할 때 호흡이 들쭉날쭉 거친 게 완전 엉망이었죠?
오늘 한 거 보세요. 다소 엉성해도 발성 나오는 거 보면 호흡 조금 안정된 거에요. 연극판에 저런 애들이 가끔 있는데 연기 공부하면서 자기 호흡부터 연구한 애들이 있어요.
자기 나름대로 자료 찾아가며 자기 몸에 맞게 조절해서 익히는 애들이요.
사실 일반적인 발성 호흡은 그냥 그렇게 해도 충분히 익힐 수 있거든요.
나한테 배우는 것보다 자기에게 맞는 발성 호흡 하는 게 아마 더 잘 맞을 거예요.
연기 배우는 와중에 호흡이 거슬리게 되면 그때나 조금씩 고쳐주면 만사 OK. 그럼 전 3주 후에 와서 확인만 해 보겠습니다. 인정? 형님만 좀 더 수고해 주시면 되시겠습니다.”
강환이 장난스럽게 말하는 가운데 화면은 어두워지고 설아와 민수가 연기하는 음성만 들려왔다.
“저거.. 중지시키고 잠시 연습한 뒤 다시 촬영하려고 한 게 실수로 카메라만 끄고 마이크는 그대로 녹음 되었구먼”
윤 대표는 잠시 혀를 차는 사이 민수의 대사를 듣던 강환은 잠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안 흔들리네..”
강환이 중얼거림에 윤 대표는 의야한 표정을 지었다.
“뭐? 왜 그래?”
강환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잠시 앞으로 돌려서 다시 한번 보여주시죠.”
윤 대표는 말없이 화면을 앞으로 돌렸다.
“형님. 잘 들어보세요. 목소리 떨리는 거.”
강환의 말대로 카메라로 촬영한 민수의 목소리가 조금씩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럼 다시 방금 마이크만 녹음된 거 틀어서 잘 비교해 보세요”
윤 대표가 강환의 말대로 마이크만 녹음된 것을 틀어 귀 기울여 들었다.
“정말이네. 전혀 안 떨리네. 난 당연히 호흡이 불안해서 떨리게 나오는 줄 알았는데… “
“얘가 호흡이 딸리긴 하는데 발성이 흔들릴 정도로 안 좋은 건 아닌 모양이에요.”
“아.. 그럼 이거.. 설마”
“형님 연기보다 우선 병원부터 가야겠네요. 카메라 공포증 거의 확실해요”
“확실할까?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잖아.?”
혹시나 하는 희망적인 기대를 하고 있는듯해 보이는 윤 대표를 바라보며 강환은 다시 한번 확신하며 말을 이었다.
“형님. 제가 연극판에서 그거 걸린 애들만 수십 명을 봤어요.
작게는 목소리 떨림과 손발 떨림 심하게는 아예 대사 못 말하는 애들부터 카메라 들이대면 식은땀부터 진탕 흘리는 애들까지.
그런 애들이 제일 처음 모이는 데가 연극판이잖아요.
내 경험도 그렇고 다른 건 몰라도 카메라 공포증은 제 전문 분야에요.
의사보다도 더 잘 안다고요.”
윤 대표가 씁쓸한 표정을 짓자 강환은 안심하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형님. 보아하니 본인도 전혀 체감 못 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그럼 분명히 초기 아니면 극복기에요. 그럼 조금의 케어만 해 줘도 잘 이겨낼 수 있어요.
형님 중증 공포증인 저도 극복했는데요.
지금 발견된 것만 해도 저 녀석이 복이 있어요.”
강환의 말에 윤 대표는 애써 웃음 지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되었다.
저 녀석 과거 생각하면 뭔가 또 다른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 차라리 내일 당장 병원부터 가서 전체적으로 확인해 봐야겠어.”
의아해하는 강환에게 윤 대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민수의 과거 몇 가지를 이야기 해 줬다.
“쩝, 대충 카메라 공포증이 왜 생겼는지 알 만하네요.
형님. 그래도 원래 상처 많은 애들이 배우가 되면 진짜 거대한 배우가 되는 법이라고 합디다.
형님 이런 거 전문이시잖아요.”
강환의 말에 윤 대표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래, 그래야지. 그러려고 만든 소속사야. 차라리 저런 배우가 나에게 온 게 잘 되었다 싶구나.”
윤 대표와 말을 마친 강환은 조용히 일어섰다.
“그럼 전 약속한 대로 지금 하던 거 다 마치면 3주 후에 올게요. 그때 가서 저 녀석 상태 봐서 가르칠게요”
“그래, 들어가 봐라.”
강환이 대표실을 나가고 나서도 윤 대표는 민수의 영상을 틀어보고 다시 틀어봤다.
다음 날 아침에 대표님의 부름을 받고 아리 재단 빌딩에 도착한 민수, 그리고 민수는 어제처럼 방검복으로 무장한 박춘섭 어르신을 만날 수 있었다.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가려는 민수의 팔을 춘섭이 가볍게 잡아 제지했다.
“거기, 자네. 민수라고 했던가?”
“네, 어르신. 무슨 일이신지?”
민수가 의아해하며 묻자 춘섭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 자네, 어제 설아 작은 아가씨랑 단둘이서 온종일 연기 연습인가 머시기 인가했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가?”
‘작은 아가씨?’
특별한 단어선정에 살짝 당황함을 느꼈지만 민수는 놀라지 않고 가볍게 대꾸했다.
“네, 공교롭게 그렇게 되었네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건가요?”
민수가 가볍게 대답하자 춘섭은 더욱 인상 쓰며 민수를 바라보았다.
“그.. 설마, 다 큰 남녀가 어, 둘이서만 한방에서 하루 종일, 어 별다른 일이 있진 않았겠지?”
흥분한 듯 콧김을 내 뿜으며 인상 쓰는 춘섭을 보며 민수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에이, 어르신 설마요. 그냥 연기연습만 한 거예요. 연기 연습실에서요.”
민수의 가벼운 대답에 춘섭은 진정이 되었는지 민수의 어깨를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려.. 믿어도 되겠지? 그리고 설마 설아 작은 아가씨에게 딴 맘 같은 거 먹진 말도록 혀.”
두서없는 추궁에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민수는 그냥 어르신이 설아랑 친한 관계인가 싶어 별다른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네, 그럴게요. 어르신 저 빨리 올라가 봐야 해요. 그럼 나중에 봬요.”
‘헤, 설아 씨가 오며 가며 어르신하고 친분을 많이 쌓았나 보네.
하긴 어려도 그렇게 예쁘니 어르신 입장에서라면 걱정될 만도 하겠어.
하긴 나라도 내 손녀 같은 아이가 남자랑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다면 근심이 많이 되겠지’
민수가 그냥 어이없게 생각한 이 해프닝이 그날 하루에만 겪을 그런 단발성 이벤트는 아니었다는 것을 그날의 민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가벼운 해프닝 끝에 대표실로 올라가 윤 대표를 만난 민수는 윤 대표에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예? 카메라 공포증이요? 제가요?”
자신의 카메라 공포증일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에 민수는 어안이 벙벙함을 느꼈다.
‘내가 카메라 공포증이라고? 근데 자신도 모르는 카메라 공포증이 있어?’
민수가 전혀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윤 대표는 어제 자신의 본 영상을 비교하며 민수에게 설명했다.
“그러니깐 제가 평소에 그냥 연기 할 때랑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때에 소리가 다르다는 거네요.
그리고 잘 들어 보니 진짜 좀 다르긴 하네요. 떨림 자체가 좀 더 떨리면서 나오는 게…”
민수가 수긍하는 듯한 분위기를 보이자 윤 대표는 자세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본인은 거의 체감을 못 하고 있지만 너의 몸은 반응하고 있다는 거야.
그래서 잘 생각을 해보니 정말 너에게 카메라 공포증이 있을 만한 계기가 있더구나.”
윤 대표의 말에 민수는 과거에 자신이 기자들에게 도망 나왔던 경험을 떠올렸다.
“그러네요. 보기만하면 멀리서부터 달려들어 카메라부터 들이대던 기자 양반들이 몇몇 있었죠.
그게 진저리가 쳐져서 무작정 서울로 도망 온 것이기도 했고요”
‘그러네. 생각해보니 충분히 카메라 공포증이 무의식중에 있을 만도 한데.
아마 내가 전혀 몰랐던 건 아마 전생에선 카메라에 설 일 자체가 없었기 때문일 테고. 그런데 이번 촬영 때도 카메라가 두렵거나 그런 것은 전혀 못 느꼈는데.’
체감상 35년이나 지난 일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옛일 때문에 자신의 몸이 반응한다는 것에 민수는 어이없음을 느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우선 병원부터 가서 정확한 진단을 받아 보고 싶구나.
현재의 상태에 따라서 극복방법도 달라진다. 그러니 우선 병원에 가보자꾸나.”
“그 병원이면 정신과를 말씀 하시는 것이죠?”
민수가 꺼리는듯한 표정을 짓자 윤 대표는 웃으며 설득했다.
“정신과라고 해서 별다른 것이 있는 건 아니야.
정신이 아프면 그냥 정신과에 가는 거야.
눈이 아프면 안과에 가는 것처럼. 정신과라고 별다른 이상한 사람들이 가는 곳은 아니란다.”
그렇게 민수를 달래면서 윤 대표가 말을 덧붙였다.
“배우는 필연적으로 감정 노동을 하고 그런 노동은 자연적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수반해.
한 배역에 깊게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배우들의 이야기를 너도 많이 들어 봤을 거야. 그래서 배우들은 정신과와 밀접하게 지내야 해.
나도 배역 하나가 끝나면 정신과에서 필수적으로 상담받았단다. 그리고 윤태준도 그건 마찬가지. 난 우리 소속사의 배우가 배역을 마치면 무조건 정신과 상담을 받도록 종용하고 있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조금 더 일찍 간다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가지거라.”
민수는 자신의 전생을 생각하며 윤 대표의 말이 타당하다고 느꼈다.
지금이야 사람들이 정신과라는 말을 다소 부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사실 민수가 죽기 전에만 해도 많은 배우들이 정신적인 치료를 받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와.. 대표님 벌써부터 정신적 케어에 관심이 있으셨구나. 확실히 난 분은 난 분이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병원에 가나요?”
민수가 병원에 가겠다는 의사를 표하자 윤 대표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