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13화 (13/325)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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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민수는 굳은 표정을 하고 윤 엔터테인먼트를 찾았다.

다시 찾은 아리 재단 빌딩, 아래에서 빌딩을 올려다보던 민수는 빌딩 자체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와, 저 빌딩이 지금 배우들 두세 명 몫을 해주고 있단 거잖아.

사랑한다 아리 재단 부디 망하지 말고 영원해라.”

아리 재단의 번영을 기원하며 건물에 들어가려는 민수를 어떤 건장한 체격의 어르신이 막아섰다.

“자네, 뭐 하는 놈인데 아리 재단에 들어가려 하는가?”

보안 요원처럼 단단히 방검복으로 무장한 어르신을 보며 살짝 당황함을 느낀 민수는 자신이 윤 엔터테인먼트의 배우 지망생이며 아리 재단이 아니라 윤 엔터테인먼트로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호라, 이제 보니 희멀끔하게 생긴 것이… 어제 들은 신인 배우구먼.

반갑네. 여기 아리 빌딩 1층 경비 책임자 박춘섭이야.

윤 엔터 새 식구는 참 오랜만이구먼.

건물 근처에서 곤란한 일을 당하면 이쪽으로 달려오라고.”

“에이, 어르신. 곤란한 일이랄게 뭐가 있겠어요?”

민수는 춘섭의 말을 가볍게 웃어넘겼다.

“쯧쯧, 아직 사회를 모르는 친구시구만.

하여간 명심하게 수상한 사람 발견하면 바로 이곳으로 오는 거 말이야.

어여 올라가시게.”

민수는 춘섭에 재촉에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아니.. 원래 빌딩 경비 하시는 분이 방검복을 착용하나?

후.. 회귀한 이후에 왠지 내 상식과 어긋나는 일들이 자꾸 발생하는 것 같아.

저 어르신 말대로 내가 진짜 사회를 몰라서 그런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민수는 드디어 6층 연습실 1에 도착했고, 크게 심호흡하며 연습실의 문을 열었다.

연습실 안에는 면바지에 블라우스와 카디건을 단정하게 걸친 설아가 대본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본에 집중하던 설아는 연습실 문이 열리고 민수가 들어오자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민수 씨. 어제 잠시 뵈었는데. 윤설아라고 합니다.”

“네, 기억합니다. 정민수라고 합니다.

저랑 같이 테스트 영상을 찍어 주신다는 분이 설아 씨인가 보네요.”

“네, 맞아요. 혹시 예상하셨나요?”

설아의 질문에 민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건 아닌데, 대본을 보고 여성분이 있으실 거 같다는 생각만 했어요.

설아 씨도 연기자 지망생이신 건가요?”

설아는 잠시 생각하다 망설이며 대답했다.

“음… 좀 비슷한 거라고 해야 할까요.

배우를 지망하고 있는 건 맞아요.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 숙이는 설아에게 민수도 같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그럼.. 한번 시작해 볼까요”

비장한 표정을 짓던 설아는 카메라에 다가가 카메라와 마이크를 켜고 카메라 앞으로 이동했다.

대본 없이 연기 준비를 하는 것을 보니 그녀 역시 민수처럼 대본을 완전히 암기했으리라.

설아를 보며 민수도 자신의 캐릭터에 몰입하기 위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럼 1번부터 시작 해 볼게요. 민수 씨 준비되었나요?”

“네, 시작하죠”

민수의 말을 들은 설아는 저쪽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더니 서서히 만수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창밖에서 편의점 안쪽에 민수를 보는 것처럼 아련하게 민수를 바라봤다.

‘와… 대박. 표정이..’

민수를 바라보는 설아의 표정에는 아련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표정 진짜 좋네. 저 표정에 설아 씨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더해지면. 와 정말 좋은 연기 나오겠는데’

잠시 바라보던 설아는 만수 쪽으로 조금 더 다가왔다. 그리고는 편의점 문을 여는 듯한 모션을 하고 민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민수는 못 본 척 편의점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모션을 취하고 있다.

“오랜만이에요. 민수씨.”

다음 대사를 준비하며 한껏 감정에 집중하고 있던 민수는 설아의 한마디에 맥이 탁 풀리며 입에서 다음 대사를 내뱉을 수가 없었다.

“아, 아니.. 잠시만. 잠시만요”

‘아니.. 뭐야 이게. 이게 말이 되나.’

민수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 들어갔다.

설아의 소리는 너무나도 좋았다. 예전부터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목소리였으니까.

다만 억양의 높낮이가 전무했다. 그리고 박자도 일정했다.

그런데 발음이 워낙 정확해서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굳이 비교하자면 아름다운 소리로 컴퓨터로 재생하는 기계음을 만들어서 귀 바로 옆에서 틀어주는 것과 같으리라.

‘아니.. 발연기나 이런 것을 떠나서 저런 소리를 인간이 물리적으로 낼 수가 있다니.’

민수는 사람이 저렇게 명확한 발음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박자로 소리의 고저 없이 말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민수가 당황해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시간 동안 설아는 잠시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저.. 민수 씨? 당황하셨나요? 그 죄송해요. 먼저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사람들이 말로는 이해를 잘 못 해서요.

차라리 우선 보여드리는 게 빠르겠다 싶어서 그랬는데.

미리 말씀을 드릴걸 그랬나 봐요”

미안해 하는 설아의 모습을 보면서 민수는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회귀했다는 것도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다른 곳에서 말이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진다고 내가 당황하면 그건 진짜 웃기는 일이잖아? 우선 진정하자.’

“저, 설아 씨 정말 죄송합니다. 갑자기 제가 멈춰서 난감하셨지요? 부끄럽네요”

사과하는 민수를 보며 설아는 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에요. 누구라도 처음 듣는 사람들은 그렇게 당황하곤 해요.”

설아의 말을 듣고 민수는 설아의 사정보다는 지금 당장 직면한 촬영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네, 어쨌든 지금 당장 촬영을 해야 해요.

다시 시작해보죠. 저도 최대한 아까 같은 불상사를 일으키지는 않을게요”

둘은 다시 한번 의기투합하며 촬영을 계시했다.

하지만 촬영의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민수는 매 순간 감정을 끌어 올렸지만 설아의 대사를 들을 때마다 집중력이 급하게 흐트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민수가 노력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기계음 같다고 한다면 견뎌낼 수 있었겠지만 설아의 목소리는 그런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아의 아름답고 선명한 발음은 그냥 그대로 귓가에 때려 박혔고 그 울림이 그대로 민수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우여곡절 끝에 수십 번의 NG를 낸 민수는 촬영 자체는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혀 자신의 연기를 내보이지 못한 민수는 고민에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시 심각한 생각을 하고 있던 민수를 가만히 쳐다보던 설아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민수씨. 지금 점심시간이 다 되었는데 잠시 식사부터 하시면 어떨까요?”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는 설아를 보며 민수는 피식 하고 웃음을 지었다.

“그렇네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밥은 먹어야죠. 갑시다. 밥 먹으러.”

민수가 미소를 되찾자 설아는 배시시 웃으며 민수를 이끌었다.

“그럼요. 배가 고프면 머리도 안 돌아가는 거라고 했어요. 혹시 알아요? 밥 먹고 생각하면 더 좋은 생각이 날지.”

그렇게 둘은 5층에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 안에는 몇 명의 직원들이 식사하고 있었다.

설아와 민수는 식사하고 있던 직원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식사를 받아 한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현미밥에 호박과 감자가 큼직한 된장찌개 나물 반찬과 소고기 고추조림이 소담스레 차려진 정갈한 밥상이었다.

설아는 앉자마자 음식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민수도 밥을 한술 뜨고 반찬을 집어 먹었다.

태준이 엄살떤 것에 비하면 음식 맛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민수의 입에는 그러했다.

“잘 드시네요. 설아씨”

식사가 끝나 갈 때쯤 민수가 입을 열었다.

“헤헤.. 제가 너무 무식하게 퍼먹었죠?

사람 앞에서 연기한 게 정말 오랜만이라 너무 허기가 졌네요.

보기 흉했죠? 죄송해요”

설아의 말에 민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복스럽게 드시는 게 보기 좋았어요.

음식 앞에서 깨작거리는 것보다는 잘 드시는 게 훨씬 낫네요”

민수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는지 설아는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심각하게 연기하는 모습이 아닌 방실방실 웃고 있는 설아의 모습은 연기자 지망생이 아니라 그냥 그 나이 때의 아가씨로 보였다.

‘이렇게 잘 웃는 여자가 가수로 데뷔한 이후로는 짙은 눈 화장을 하고 애잔하고 애절한 노래만 불렀다니.’

민수는 성공한 가수 세라의 삶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아련한 회상에 잠긴 민수는 다음에 들려오는 설아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현실로 돌아왔다.

“저.. 민수 씨 제 연기가 너무 엉망이었죠? 오빠는 제 연기를 꿈에 볼까 두려운 연기라고 했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윤 배우는 알고 있었겠네요. 설아 씨가 대사 어떻게 치는지...”

“네, 오빠는 알고 있었어요.

예전에 한번 같이 연습하다가 때려치우라고 소리 지르고 나가서는 그다음부터는 같이 연습 안 해 주더라고요”

민수는 태준의 행태를 듣고는 크게 한숨지었다.

“아후, 망할 윤 배우 진짜.”

아마 태준은 이 상황을 정확히 예측하고 민수를 골탕 먹일 생각에 전혀 언질 해 주지 않은 것이리라.

태준은 겨우 예쁜 여자랑 같이 밀폐된 장소에서 연기 한다는 점 때문에 민수가 재 기량을 다 발휘하지 못 알 것이라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생각한 것이었다.

민수는 가볍게 태준의 예상을 깨고 완벽한 연기를 할 것이라 다짐한 어제의 자신을 반성했다.

“어제 윤 배우가 긴장하라고 하더라고요.

전 단지 예쁜 분이랑 밀폐된 공간에서 연기하는 것에 긴장 하지 말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

민수의 말을 들은 설아의 입에 미소가 걸린다.

“헤~. 제가 그 예쁜 분? 그나저나 밀폐된 공간에 남녀 단둘이라니.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었는데 민수 씨 생각보다… “

설아의 입꼬리를 올리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몇 시간 동안 같이 연기하고 당황하고 촬영한 시간 덕분에 민수를 조금은 더 편하게 대하게 된 것이다.

“에휴, 남매가 짓궂은 건 똑같네요.

윤 배우가 말했을 때 저는 공과 사를 구별해서 연기에 엉뚱한 사감 안 넣는다고 생각했었거든요. “

민수의 말에 설아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그러고 보니 민수 씨 태준 오빠랑은 말도 편하게 하고 친밀하게 지내시네요?

호칭도 윤 배우 라고 하고.

흠. 그럼 저도 민수 씨를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민수 씨란 호칭은 너무 딱딱한 거 같아서요”

선배님이라는 호칭을 들은 민수는 순간 민망함이 몰려왔다.

“에이, 선배님은요. 저도 아직 그냥 배우 지망생이잖아요. 제가 무슨 설아 씨 선배에요?”

민수의 말에 설아의 표정이 월척을 낚은 강태공과 같은 표정으로 변하였다.

“그럼… 오빠?”

“쿠..쿨럭”

갑작스레 오빠라고 말하며 눈을 상큼하게 뜨는 설아의 모습에 민수는 순간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와. 이거.. 데미지가 상당하네.. 남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오빠란 말에 껌뻑 죽는 다더니.. 저렇게 예쁜 애가 오빠라고 부르니. 아후..’

“차라리 그냥 선배님이라고 부르세요. 오빠는 금지.”

단호한 민수의 말에 설아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요?”

“제 특성상 오빠라고 부르시면 집중을 못 할 거 같네요.

호칭은 그냥 선배님으로?”

“와..이건 또 예상치 못한 반응이네요.”

묘한 표정을 짓는 설아를 보며 민수가 덧붙었다.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에요.

설마 내가 오빠라 부르는 걸 거절하다니 그런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머 그런 거 하진 않겠죠?”

“풋, 선배님 엉뚱한 걸 너무 많이 보셨네요!

밀폐된 공간 드립 하실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몇 마디 잡소리로 긴장을 푼 민수는 이제 설아와 진지한 대화를 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자, 이제 일 이야기를 좀 해봐요. 설아 씨.”

민수가 진지하게 일 이야기를 좀 하자고 하자 설아도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버리고 진지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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