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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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앞으로 교육부터 받기로 한 거야?”
둘의 대화는 민수의 앞으로의 행보로 넘어갔다.
“어,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바래 마지않던 것 이기도 하고.”
“만만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걸. 생각보다 쉽지 않거든.”
“아.. 그러고 보니 혹시 너도 여기서 연기 배웠었어?”
“그래.. 그렇지 그랬었어. 좋은 시간이었어. 내가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던 것들 그리고 내가 잘 못 하는 부분을 잘 알 수 있었지.”
좋은 시간이었다는 태준의 표정은 반대로 다소 어두웠다. 방금까지 웃으며 말하던 태준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민수는 감각적으로 뭔가 숨겨진 뒷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 사람마다 맞춤으로 부족한 부분을 중점적으로 교육하는 거라 정확히 네가 무엇을 배울지는 알 수 없지만 잘 배우기만 하면 아마 한 발 더 나아 갈 수 있을 거야.”
“그런가.. 근데 어떤 분한테 배우는 거야? 대표님이 아는 전문 연기 선생님께 배우는 건가? 너까지 배운 경험이 있다는 거보니 전속 연기 선생님이 있는 건가?”
“아.. 그건 음.. 그건 그래. 그날의 즐거움을 남겨 두자고? 그나저나 너도 그럼 그 대본 하나 받았을 건데 테스트용으로.”
민수는 태준에게 방금 받은 대본을 건네 주었다.
“음.. 이거 주시더라고”
대본을 건내 받은 태준은 받은 것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어? 이거.. 혹시 대표님이 다른 말씀은 없으시디?”
“아... 내일 상대역으로 같이 연습할 사람이 하나 있다 하더라고. 그리고 흘리듯 집중 잘해야 할거라 하시던가…”
민수의 말에 태준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먼. 정 배우 앞날이 쉽지 않겠어. 내일 많이 놀라겠는데. 청심환이라도 하나 먹고 오게나. 안 그러면 당황함에 대사조차 못 뱉을 수가 있어요.”
장난스러운 태준의 말에 민수는 어림없다는 듯 거들먹거렸다.
“이봐요, 윤 배우님 제가 연기는 아직 초짜지만 인생은 산전수전 다 겪었어요. 제 평정심이 그리 물렁물렁하진 않답니다.”
“오호, 정 배우 자신만만하군요. 과연 그럴까요. 내일 꼭 다시 와봐야겠네요.
실신한 우리 정 배우 위로해 줘야 할 테니.
이제 슬슬 가봐야 하는 시간인가. 시간이 금방 가버렸구먼.
야간 촬영 전에 잠깐 짬 낸 거라.”
“바쁘시군요. 윤 배우님 그럼 어서 촬영하러 가보시지요”
“그럼 .. 이만 갑니다.”
“그럼 나도 가봐야지 가서 대본도 좀 봐야 하고”
같이 나가 태준은 주차장이 있는 지하로 민수는 자신의 집으로 서로 갈라 섰다.
집으로 향하는 민수는 자신을 편하게 대하는 태준에 대하여 생각했다.
‘윤태준.. 내가 윤태준이랑 편하게 대화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윤태준은 분명 민수의 롤모델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민수가 가장 시샘하던 인물이기도 했다.
대배우인 아버지를 등 뒤에 두고 예고, 예전을 거쳐 성공을 향한 황금길을 걸어간 인물.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재능과 환경 모든 것을 가진 남자. 미치도록 부러운 남자였다. 그는.
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찍었을 때. 상영관 입장 관객 수가 1500만이 넘는 영화를 찍었을 때.
그리고 청룡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 주작에서 최고배우상을 받았을 때.
민수는 윤태준의 커리어가 하나하나 높아 갈 때마다 같은 나이의 자신과 비교하며 자괴감 느끼곤 했다.
‘그러고 보니 감정이 무디고 타인에 대하여 다소 무감각하던 내가 유일하게 자극 받았던 것이 윤태준이었네.
그땐 참 그랬었는데. 근데 실제로 대화를 해봐서 그런지.. 이번에는 그렇게 미치도록 샘 나거나 그러진 않네.
생각보다 대화도 더 잘 통하는 거 같고 마치 오랫동안 보아온 친구 같은 기분도 들고.
아니 나야 윤태준을 30년 넘게 알아 왔으니 그렇다 치지. 쟤는 워낙 유명했으니.
쟤는 왜 그렇게 내게 친근하지? 영문을 모르겠구만.. 좋은 게 좋은 것이긴 하지만 말이야.’
민수는 자신이 이제 태준에게 크게 열등감 느끼지 않고 있다는 점에 감사했다.
열등감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저열한 감정 때문에 이제 한 식구가 된 태준같이 좋은 배우와 교감하지 못한다면 그건 참 슬픈 일일 테니 말이다.
‘많이 배우고 많이 느끼자. 그리고 성장하자’
집에 도착한 민수는 대본을 꺼내서 폈다.
“어디 보자. 설정 자체는 간단한데 흠. 역할1.편의점 남자. 이건…”
지정된 역할1 은 편의점 남자였다.
넉넉하게 살았지만, 갑작스레 집안이 몰락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남자.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몰락으로 인하여 그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고 그녀를 놓아주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일하는 편의점으로 찾아온 여자를 매몰차게 떼어낸다.
민수가 연기할 씬1은 찾아온 여자를 떼어내는 장면.
“음, 이건 그래도 할 만하겠는데. 자괴감 느껴지게 대사를 하면서 사랑하는 여자를 보내야 하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을 기본으로 연기하면 되겠는데.”
대본의 뒤쪽에는 이 이야기의 뒷이야기가 적혀있었다.
“흠.. 남자는 편의점에 일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하고 낮에는 자신이 하던 연구를 이어가 우여곡절 끝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자신이 떠나보낸 여자를 찾아 헤매었지만, 그녀를 찾을 순 없었다. 음. 뭔가 찝찝한 이야기인데.”
민수는 다음 씬을 찾아 보았다.
“이건.. 보자. 연구실 남자.
새로운 신약을 개발한 두 남녀 연구원 신약이 팔려 나갈 때마다 두 남녀는 막대한 거금을 손에 쥐게 되고 약은 날개 돋친 듯 팔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신약의 부작용을 알게 된 두 남녀.
아주 작은 확률로 발생하는 부작용이 알려진다면 두 남녀는 큰 책임을 지게 된다.
이에 남자는 불안해하는 여자를 설득하여 이 치명적인 부작용을 은폐하려 한다.
흠..
이건 좀 비열하게 그리고 약간 강압적으로 연기 해야겠군.
대사도 보니 약간 협박도 포함되어 있고 말이야.”
민수는 뒤쪽 부분에 기록된 뒷이야기를 살펴보았다.
“불안해하는 여자의 우울증은 점점 심해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쇠약해진다.
불안에 떠는 여자를 보는 남자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이대로 는 안 되겠다고 결심하고는 모든 사실을 밝히고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진다..
남자는 스스로 모든 것을 짊어지려 하지면 결국 여자도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책임을 지고 큰 처벌을 받게 되었다.
뭐야. 이것도 엄청 찝찝한데..”
민수는 마지막 씬을 살펴 보았다. 마지막 씬은 두 남녀가 결혼식장에서 서로에게 맹세는 장면이었다.
“서로를 바로 보며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두 남녀. 이건 짧네 대사 이거 뭐야 왁…”
민수는 못 볼 것을 본 듯 뒷장으로 넘기며 뒷이야기를 확인했다.
“아. 이건 진짜 별거 없네 서로 사랑하는 남녀는 알콩달콩 서로를 아끼며 잘 살았다.
그들의 시작이 고난과 고통으로 얼룩졌지만 그들의 결실은 실로 달콤하고 아름다웠다. 이건 단순하지만 찝찝하진 않네.”
민수는 대본들을 살펴보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거 이거.. 셋 다 남녀 2인이 하는 대본이네.
그럼 내 상대 역이 여자란 거고.
아닌가? 설마 남자에게 여자역을? 아 그래서 태준이가 집중 잘해보라고 한 건가?
에이.. 설마 그런.. 하긴 뭐 안될 건 없는 일이지만.
남자든 여자든 지금 태준이 말에 따르면 다른 신인 배우는 없어.
그럼 누굴까. 나랑 연습 촬영을 해불 만한 사람은.
흠. 아… 설아씨구나.
어제 설아 씨가 대표실로 갔어.
세라가 이 시기에는 배우 지망이었나? 근데 설아씨랑 연기한다고 내가 집중 못 할 건 또 뭐야? 설아 씨가 예뻐서?
뭐 그래. 세라가 겁나 이쁘긴 하지.
화장 안 해도 세라는 세라더만.
하지만 예쁜 여자 하나 앞에 있다고 집중 못 할 내가 아니야.
날 너무 가볍게 봤는데 윤배우. 나 그래도 30년 굴러먹은 정민수라고 내가 공과 사를 구별 못 할까.
그리고 뭐 아까 보니 26살 전성기의 세라가 아니라 그냥 20살에 뽀송뽀송한 윤설아더구먼”
민수는 혼자서 단언하며 내일 있을 연습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
시간을 잠시 돌려 윤 엔터테인먼트 대표실
“아빠, 저 왔어요”
설아는 가볍게 문을 열고 윤 대표 옆에 붙어 앉았다.
“그래 왔니? 추운데 오느라 수고했다”
윤 대표의 자상한 말에 설아는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수고는요 아빠가 부르는데 당장 와야죠.”
“말은 잘하는구나 아빠 말은 귓등으로만 흘려들으면서.”
“에이, 아빠가 자꾸 포기하라고만 하니깐 그렇죠.”
설아는 윤 대표에 핀잔에 불퉁하며 대꾸한다.
“후.. 그렇게 해야겠냐?”
윤 대표는 진지하게 그리고 안쓰러운 눈으로 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럼요. 꼭 해야죠. 꼭. 그래서 지금까지 아빠가 시키는 거 다 했어요.
아빠도 이때쯤이면 아마 느끼셨을 거예요 절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래, 내 억지 다 들어 주었더구나. 나도 사실 놀랐다. 너의 의지에 경의를 느낀다.”
윤 대표는 손에서 대본 하나를 꺼내서 설아에게 건네주었다.
“아까 들어오면서 봤을 거다 정민수 배우라고”
“네, 봤어요. 바보 오라버니랑 신나서 대화하던 그 희멀끔한 오라버니 말씀이죠?”
설아의 말에 윤 대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준이가 정배우랑 신나서 대화했다고?”
“네, 저도 좀 놀랐는데 뭐 물 만난 고기처럼 착 끌고는 휴게실 쪽으로 가서는 아주 폭풍수다를.. 그냥. “
“허허, 의외로구나 그 아이가… 그건 그거대로 좋은 일이긴 하구나”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윤 대표를 보며 설아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오빠의 취향을 잠시 의심했다니까요. 안 그러던 사람이 왜 저런데요?”
“뭐, 그건 그렇고 그 정배우가 내일 그 대본으로 연습 영상 찍을 거다.
그걸 너도 같이 찍어라.”
“와.. 진짜요? 저도 테스트 봐주시는 거예요?”
신을 내는 설 아를 보며 윤 대표는 체념한 듯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너를 손 놓고 있었던 것 그건 내 불찰이었다.
그냥 흐지부지 넘기려고 했던 건 너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어.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해보자꾸나.
최선을 다해보고 안되면 그때 생각하자.”
“고마워요. 아빠.”
“모두가 머리를 모으고 궁리하면 어쩌면 해결책이 있을 수도 있다.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하자꾸나.”
윤 대표의 굳은 표정을 보며 설아는 결의에 차서 다짐한다.
“알아요. 진짜 안되면 그냥 마음을 접는다. 이거 말씀하시려고 했죠?”
“그래, 잘 아는구나. 지금까지 안 된 것이 하루아침에 될 수는 없는 거야.
어쩌면 영원히 안 될 수도 있고 원인도 모르는 일이잖느냐.
하지만 그동안은 나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알겠지?”
“네, 믿을게요. 아빠. 왠지 잘될 거 같아요.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희망에 찬 듯 웃음 짓은 설아의 표정을 본 윤 대표는 저 표정이 절망과 고통으로 일그러지지 않기만을 마음속 깊이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