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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윤 대표는 민수에게 말했다.
“우선 민수 씨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몇 가지 있어요.
먼저 감정연기에 대한 것인데.. 자기 자신의 경험한 일이기 때문에 더 실감 나게 감정 표현 할 수 있었다.
자신은 다른 연기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건 정확한 사실이 아니에요.
경험한 배우가 자신이 경험한 내용은 좀 더 수월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그냥 도움을 주는 수준에 불과해요.
민수 씨는 분명 다른 연기에서도 그렇게 감정을 표현 할 수 있어요.
설령 민수 씨가 정말 민수 씨 말대로 자신의 경험한 것밖에는 검정표현 할 수 없다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럼 그냥 다 경험해 보면 되잖아요.
자신이 경험은 그렇게 세심하게 감정표현 할 수 있는 배우라니. 그야말로 전가의 보도가 아니겠어요?
그냥 원하는 배역이 있을 때 그에 관한 경험과 체험을 거치면 그에 대한 감성을 얻을 수 있다니.
다른 배우들이 알면 매우 부러워할 만한 능력이겠군요.
사실 난 민수 씨가 그런 배우는 아닌 거 같아요.
확실히 민수 씨 말을 들어보니 슬픔에 있을 것 관한 감성 연기는 더 섬세하고 기쁨이나 긍정적인 감정에 대한 연기는 다소 미흡 할 수 있을 수는 같아요.
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극복 가능한 부분이에요.
그리고 다음으로 제가 민수 씨의 감정연기가 마음에 들었다는 건 민수 씨의 감정연기의 내용이 아니었어요.
사실 감정연기 내용 자체는 제 마음에 들지 않은 점이 더 많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제가 마음에 들었던 건 그 감정연기가 아니라 그런 감정을 토해 내 표현 할 수 있었다는 것 그냥 그 자체에요.
연기의 기술, 섬세하고 디테일한 표현들, 그리고 대사와 호흡.
이런 건 다 그냥 가르칠 수 있어요.
하지만 감정을 배운 기술들을 토대로 토해내는 것, 그래서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
이건 절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민수 씨는 그렇게 했어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했던 아니면 자신의 상상대로 했던 자신이 생각한 것을 그대로 뿜어내서 사람들에게 공감시켰어요. 전 그 부분이 마음에 들었던 겁니다.
제 설명이 민수 씨가 이 캐스팅 제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윤 대표의 말을 듣는 민수는 윤 대표가 자신의 연기를 보는 시선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윤 대표의 말을 들으니 왠지 자기도 다시 노력하면 정말 배우가 될 수 있을 것도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긴 나도 처음에는 전혀 못 했지. 전혀 느낌이 없었어.
나중에 극단까지 거치고 그때야 비로소 표현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었지.
아마 윤 대표님이 말하는 뿜어 낸다는 것이 그걸 말하는 게 아닐까.
내가 죽기 직전에서야 겨우 한줄기 깨우쳤다고 느꼈던 그런 느낌들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민수도 희망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자기 생각과는 다르게 이제는 자신도 약간의 재능을 가지게 되었다는 그런 작은 희망 말이다.
“대표님. 그럼 제가 좀 더 배우고 연마하면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는 건가요?”
“음.. 민수 씨는 생각보다 자신의 가능성을 전혀 믿지 않는 것 같군요. 민수 씨가 생각하는 좋은 배우의 기준이 어떤 것인지 잘 몰라서 정확히 대답하긴 어렵네요.
만약 민수 씨가 생각하는 좋은 배우가 1000만 1500만을 밥 먹듯이 찍고 등장만으로 시청률을 10% 올릴 수 있는 배우라면 그건 장담 못 하겠네요.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배우보다는 배우 이름보다 배역 이름이 더 기억나는 그런 배우가 더 좋은 배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민수 씨는 그런 배우는 충분히 될 수 있고요”
생각보다 후한 평가에 민수는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고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레 이기도 했다.
“그럼 만약 계약하게 되면 전 어떤 활동을 하게 되나요?”
“음…민수 씨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민수 씨는 부족한 점이 많아요.
사실 발성 호흡 디테일 그리고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제가 예상하기에는 아마 이해도까지. 전반적으로 배워야 할거에요.
그리고 그런 과정은 전부 우리 소속사에서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과정은 분명 힘들고 지루하겠지만 분명 민수 씨가 나아가는 데에는 큰 뿌리가 되어 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꼭 나를 믿어 줬으면 좋겠어요”
민수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체크해 준 윤 대표의 말에 민수는 무조건 계약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대표님이 나를 과대평가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내가 생각보다 더 재능이 없지만 단지 회귀빨로 이 정도 능력을 갖춘 것이라 전혀 연기력이 상승할 수 없을 수도 있고.. 하지만.. 정말 재대로는 한번 배워보고 싶어.’
전생에서 여기저기서 단편적으로밖에 배울 수 없었던 연기. 민수는 체계적으로 그리고 심도 있게 배워 본 적이 없었다.
연기 학원이라 해 봤자 여러 명을 대상으로 보편적인 것만 가르쳤고 개인 교습을 해주는 배우 겸 강사들은 대상을 가렸다.
전생 소속사에서는 연기를 가르치기보단 그냥 그대로 이용할 생각만 했었다.
그렇게 독학에 독학만 경험했다. 연기를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것 그것은 민수 전생에 한이었다.
배움의 기회를 제공 받을 수 있다는 것 이것만 해도 민수에게 계약의 가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할게요. 계약. 대표님 계약하게 해주세요.”
민수에 계약 의사에 윤 대표는 웃음을 지으며 계약서를 꺼냈다.
“이제 계약 조건에 대하여 말해 볼게요”
‘이런 좋은 환경의 기획사에서는 대체 어떤 조건으로 계약을 할까? 정산비도 낮고 교육까지 담당한다니 아마 계약 기간도 길겠지 하긴 그게 다 무슨 상관이냐.. ‘
“우선, 우리 회사는 계약 양식이 한 가지밖에 없어요. 모든 배우가 이 양식대로 계약해요.
우선 정산비는 7:3이에요. 계약금은 없고요. 대신 배우가 필요하다면 무이자 대출은 가능해요. 이 부분은 근래에 새로 추가된 조항이에요.
계약 기간은 명확한 종료 시점은 없어요.
대신 매년 배우가 계약종료 의사를 표시하면 그해 계약이 종결하고 아무 의사를 표시하지 않으면 다음 해까지 계약이 자동연장 돼요.
배우의 스케줄이나 배우가 맡을 배역은 배우가 선택해요. 우리는 추천은 해도 배우의 결정을 반대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배역에 대한 추가적인 부분이 있어요.
저희 소속사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배역 끼워 넣기를 하지 않아요.
또한 투자를 빌미로 배역 배정을 요구하지도 않고요.
무조건 오디션이나 제작사의 요청을 통해서만 배역을 받아야 해요.
대신 오디션은 어떠한 배역이라도 무조건 보게 해줄 수 있어요.
설령 주연 배우가 결정되었다 해도 오디션 자체는 보게 해줄 수 있어요. 배역을 따내는 건 본인의 능력이지만요.
그리고 이 부분은 강제적인 부분이니 꼭 체크 해 주세요.
소속사에서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때 배우의 교육을 강제 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배우의 교육에 대한 비용은 소속사가 부담한다.
이건 처음에 소속사에 들어와서 부족한 부분이 있는 배우나 아니면 배우로 데뷔한 후에도 필요하다가 생각되는 때에 기획사에서 배우에게 연기를 가르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부분이에요.
이게 본인이 거부해도 강제로 교육을 받아야 하는 부분이라 꼭 알고 있어야 해요.
물론 필요성을 설득하는 과정은 거치게 되지만 교육을 피할 수는 없어요.
나머지는 일반적인 정산 날짜나 세금 납부 나 소소한 부분들이니 나중에 읽어 보시면 되는 부분이고요. 어떤가요? 혹시 의문 나는 점이 있나요?”
윤 대표의 말을 듣던 민수는 어이없음에 할 말을 잃었다.
‘뭐야, 이 계약서는… 이런 게 말이 되나….’
민수가 어이없게 생각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였다.
‘우선, 정산비부터가 7:3으로 동일.. 게다가 계약기간은 년 단위 갱신.. 이거 그냥 적당히 크면 그냥 딴 데로 튀라는 거네
게다가 교육비용은 소속사가 부담.
이거 그냥 공짜로 가르쳐 주겠다는 거고… 계약금이 없다 이건 안 좋은 것 처럼 보이지만 계약금 자체가 그냥 족쇄잖아 사실, 계약중간에 파기해도 책임 안 묻겠다는 거고.
심지어 계약 양식은 1가지 밖에 없다는 것은 계약금 없고 7:3인 계약이 기성 배우에게도 같다는 건데. 이거 뭐 그냥 기존 배우들은 따로 스카우트할 생각이 아예 없다는 의미밖에 안되는데..
끼워팔기 안 하겠다는 건 배우 입장에서 손해인 부분도 있지만 사실 소속사가 더 손해지.
배우가 자리 잡는데 더 시간 많이 걸리게 되니깐. 그 기간에 소속사는 이익이 발생하지 않으니.
배역이나 스케줄 배우가 결정, 이건 뭐 배우 우대의 끝판왕 같은 조건이고…
가장 엽기적인 것은 오디션이네.. 진짜 모든 배역에 오디션을 보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고? 이게 가능해? 대체 인맥이 어디까지 뻗어 있다는 거야?
투자해서 배역 뺏어 주겠다는 거보다 이게 훨씬 어려운 거 아냐?’
민수가 판단하기에 이건 그냥 호구 계약서의 결정판이었다. 민수는 애잔하게 웃으며 윤 대표를 바라보았다.
“민수 씨, 표정을 보니 무슨 생을 하는지 알 것 같군요.
이건 그냥 개인적인 궁금함인데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눈을 빛내며 질문해 오는 윤 대표의 눈에서 민수는 깊은 호기심과 기대감을 읽었다.
“네, 그러세요. 대표님”
“좋아요. 민수씨의 표정을 보니 계약 내용 자체는 매우 맘에 들어 하는 같아요. 그렇죠?”
“네, 아마 어떤 신인도 이런 계약서를 마다하진 않을 거 같아요”
“그렇군요. 어떤 점이 그렇죠?”
“아니, 이거 배우 입장에서 혜택만 잔뜩 있고 손해나 페널티는 전혀 없잖아요?”
“그래요? 그럼 민수 씨는 계약서의 어떤 점이 가장 맘에 들었나요?”
민수는 윤 대표의 말에 잠시 생각하고는 자기 생각을 말했다.
“우선, 교육 이거 그냥 소속사가 비용 대서 배우 하나 제대로 만들어 주겠다는 거고, 그다음으로는 오디션 이거 배우가 원하는 대로 배우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거 이점이 제일 마음에 드네요.”
“음.. 그렇군요. 그러면 끼워 넣기나 투자로 배역배정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 대하여 불만은 없나요?”
“하하 대표님도 참, 오디션을 볼 수 있는데 오디션 보고도 떨어진 배역을 끼워 넣기로 받게 된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오디션도 못 본다면 어떻게든 끼워서 넣어줬으면 싶겠지만. 오디션으로 기회는 보장해 준다는 거잖아요.
배역에 맞는 연기를 할 수 있으면 어떻게든 오디션으로 뽑힐 수 있었겠죠. 전 적어도 제가 하고 싶은 배역을 맡을 기회만 얻을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거면 되는 거 같아요”
민수에 말을 들은 윤 대표의 얼굴에 미소가 비친다.
“아, 그리고 이건 조금 다른 내용인데 아까 민수 씨 우리 소속사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자신의 과거까지 말하면서 고사했어요. 혹시 그냥 계약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고사를 하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윤 대표의 물음에 민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음.. 제가 사실 많이 배우진 못했지만 알고 있는 게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능력 이상의 것을 탐하면 결국 망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과 상대가 진심으로 대하면 자신도 진심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죠.
대표님의 설명을 듣기 전엔 전 이곳에 몸담는 것이 제 능력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여기까지 말한 민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표님의 계약제안이 마냥 비즈니스적인 것은 아니라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냥 제 마음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제 대답이 대표님의 질문에 적당한 답이 되었는지요?”
“네, 그렇네요”
대답을 하는 윤 대표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민수 씨. 이제 사인 하시겠어요?”
계약서로 펜을 옮기는 민수의 손이 조금씩 떨려 오고 있었다.
30년간 기약 없는 노력을 하며 서서히 죽어갔던 전생, 자신을 재능 없다 치부하며 자신의 욕망을 애써 부정하며 눈을 돌리려 했던 근 며칠.
그러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떻게든 자기 합리화하며 놓지 못했던 미련의 끈.
그리고 지금 싸인 한 번으로 다시 한번 길에 들어서게 된다. 어쩌면 꽃길이지만 높은 확률로 가시밭길이 될 이 길을..
그리고 민수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래, 그냥 하고 싶다. 성공 실패에 상관없이. 30년 동안 삽질해서 좀 괴롭긴 했어. 근데 그게 뭐? 성공 좀 못했다고.
뭐 큰일 났나? 돈 좀 없었어. 그게 뭐? 어차피 홀몸인데 배라도 곪았어?
이젠 피하지 않아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거 할 거야’
사인을 하는 민수 입가가 비장하게 물들었다.
“좋아요. 민수 씨 이제 우리 기획사의 식구가 되었군요? 혹시 더 물어보고 싶은 거 없나요?”
민수는 윤 대표를 쳐다보았다.
“저기, 대표님. 제가 걱정되어서 그러는데 소속사 운영에는 문제가 없는 거죠?”
민수의 질문에 윤 대표는 양팔을 벌렸다.
“민수 씨,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소속사 문 닫을 리 없어요. 여기 아리 재단 빌딩 이거 내겁니다”
민수는 말하는 윤 대표의 등 뒤로 후광이 비치는 듯 눈이 부심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