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8화 (8/325)

# 8

1

오늘 촬영을 마친 윤태준은 자신이 매니저에게 부탁했던 정민수를 촬영했던 영상으로 보며 소속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히야… 이건 진짜 괜찮게 나왔네”

민수의 오늘 촬영본 중에 백미인 오열씬을 보면서 태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형, 형이 보기엔 얘가 어때 보여?”

태준의 물음에 매니저는 조금 생각한 후 대답했다.

“글쎄, 많이 부족하지 뭐 “

매니저의 대답을 듣고 태준은 키득 하고 웃으며 말했다.

“맞아, 호흡 발성은 진성 초짜고, 초반엔 자기감정에 휘둘렸지. 아마 윤 준 같이 극단적인 역할 아니었으면 아마 배역 맡지 못했을지도 몰라”

“근데 마지막에 무슨 말 한 거야? 서로”

“아, 감정씬 너무 좋은 거 같아서 어려운 걸 어떻게 준비 했냐고 했더니 민수 씨가 얻어걸렸다고 하더라고”

태준의 말에 매니저는 의문을 느꼈다.

“얻어걸리다니. 뭐야? 그건...”

매니저의 질문에 태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배우가 감정이 얻어걸렸다. 그게 뭐냐면…. 준비한 게 아니란 거야. 그러니깐 준비할 필요 없을 정도로 배우 자신이 배역하고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거야.”

“뭐? 그럼 설마”

“어, 민수 씨 아마 과거에 윤 진하고 비슷한 경험을 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런 유사한 마음의 상처가 있다. 뭐 이런 거?”

매니저는 태준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야, 그럼 더 문제인 거 아니야? 그나마 장점이 감정표현인데 그것조차 연기가 아니었다는 거잖아? 대표님한테 보여 드릴 수 있겠어?”

“에이, 그게 또 그런 게 아니야. 근데 그걸 떠나서 같이 연기 해본 바로는 민수 씨 뭔가 느낌이 있어.”

잠시 뜸 들이던 태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처음 씬 에서 자신이 감정 과잉 돼서 내가 제어했다는 거까지 알고 있더라고.

대부분 그런 건 자기 자신은 잘 모르거든.

뭐 그런 점도 참 느낌이 좋더라고

매니저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태준을 바라 보았다.

“야, 느낌은 개뿔, 느낌 느낌만으로 소속사 계약을 하자고?”

“그리고 이건 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데 예전에 아버지가 연기 할 때 느껴지던 감 같은 거 그런 게 있거든 그에게서 아버지의 향기가 느껴진다? 뭐 이런 거?”

“무슨, 너 지금 제정신이냐? 걔 너랑 동갑인 25살이거든 그건 무슨 개소리야?”

매니저의 면박에 태준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참 내가 사람은 그래도 잘 보는데 말이야. 어쨌든 이거 아버지께 보여 드릴 거야. 우리도 이제 활기를 채울 필요가 있어. 언제까지 늘어져 있을 거야? 대체”

“에휴, 마음대로 하세요. 윤배우”

의미심장한 태준의 모습에 매니저는 그저 한숨만 쉬었다.

소속사에 도착한 태준은 바로 대표실로 직행했다.

윤태준의 아버지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레전드 배우 윤강철은 자기 아들이 대표실로 들어오자 의야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태준이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야? 촬영은 잘 되고 있어?”

“네, 뭐 괜찮아요.”

태준의 대답에 강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괜찮아야지. 모두가 망한다고 하지 말라고 하는 드라마를 굳이 제 맘대로 자기가 하고 싶다고 들어갔는데 안 그래?”

강철의 면박에 태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배우는 무조건 자기 하고 싶은 배역은 작품의 성공과는 상관없이 무조건해야 한다고 하신 대배우 윤강철 님은 어디 가시고 소속사 대표님만 남으셨을까요?”

“에휴, 야. 그건 어느 정도 입지가 확고해진 다음에 그런 거지 너처럼 애송이가 어떻게 하고 싶은 거 다해?”

“아이고, 윤 대표님 저희 회사 창립이념을 잊으셨나요? 배역은 무조건 배우가 선택한다. 이거 윤 대표님 창립이념인데요?”

태준의 너스레에 강철의 한숨이 이어졌다.

“그래, 그래서 말리기만 하고 막진 않지 않았느냐. 그런 답답한 소리는 더 이상 됐고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야?”

태준은 웃으며 핸드폰으로 촬영한 민수의 영상을 강철에게 보여 주었다.

“이게 뭐야?”

“우선 보세요”

영상이 시작되자 강철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영상에 집중했다.

영상이 다 끝나자 강철의 입에서 탄성이 튀어 나왔다.

“허…. 뭐야 이 이상한 배우는….”

“어때요? 대표님. 느낌 오나요?”

강철은 실실 웃는 태준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래, 손볼 곳 많은 느낌 있는 연기를 하는 배우..”

말을 마친 강철은 다시 한번 촬영된 민수의 영상을 진지하게 돌려 보았다.

강철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지자 곁에 있던 태준의 표정도 진지하게 변하였다.

“아버지, 다시 움직일 때도 됐잖아요. 언제까지 낚시만 하고 계실 거에요? 하는 김에 설아도 봐주시고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강철은 태준을 바라 보며 피식 웃었다.

“어째 두 번째 목적이 더 실질적인 목표인 거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아. 아버지도 맨날 설아한테 들들 볶이면 제 맘을 이해 하실 텐데 아쉽네요. 걔 얼굴을 방치하는 건 그냥 직무 유기 아닙니까?”

말이 새서 자신의 딸에 대하여 말이 나오자 강철의 입에서 한숨이 세어 나왔다.

“너도 그 녀석 대사 치는 거 들었으면서 그러는 거냐?”

“그건 모르겠네요. 대배우 윤강철 님이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강철은 휴대폰으로 캐스팅 매니저를 호출하며 태준에게 말했다.

“괜히 또 두 번째 놈처럼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강철의 입에서 “두 번째 놈” 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태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아버지보다 유일하게 잘난 게 사람 보는 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놈도 애당초 제가 글러 먹었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몇 마디만 나누어 봐도 알아요. 그런 건.”

태준이 자신 있게 말하자 강철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대표님, 부르셨습니까?”

잠시 시간이 지나고 캐스팅 매니저가 들어왔다.

“최실장, 오늘 태준이랑 연기했다는 정민수 배우 계약 관련 해서 이야기 나눠 보세요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한번 만나 봤으면 좋겠네요”

“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매니저가 나가자 태준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적 달성 했으니 소자는 이만 물러 가겠습니다.”

“그래, 추운데 지방에 촬영 다니는데 수고가 많겠구나. 몸조리 잘해라”

아버지의 따듯한 염려에 태준은 웃음지으며 대표실을 나섰다.

태준이 나가고 홀로 남은 윤강철 대표는 다시 한번 정민수의 영상을 살펴 보았다.

영상을 살펴보는 윤 대표의 눈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음날 고된 정신노동에 녹초가 된 민수는 조금 늦게 하루를 시작했다.

발성과 호흡을 연습하고 거울을 보는 건 민수의 오랜 습관이었다. 거울 앞에 선 민수는 또 조금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그냥 별생각 없이 지나치고는 이 찬성 조연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민수야 촬영 잘했다며? 그쪽 조연출이 소개 고맙다고 연락 왔었다. 잘됐다. 녀석]

찬성의 푸근한 말에 민수는 오랜만에 미소 지을 수 있었다.

“네, 형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경험 했네요”

[그래, 그런 건 무조건 잡아야지. 그래야 조금이라도 올라갈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거야]

“네, 형님 명심하겠습니다.”

[이 찬성 어디 갔어?! 네! 지금 갑니다. 민수야 지금 좀 바빠서 나중에 다시 연락하자. 수고했어]

“네, 형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찬성에게 감사 연락까지 한 민수는 이제 앞으로 무얼 할까에 대한 고민에 빠져 들었다.

오디션을 보고 짧은 배역을 소화한 2일간의 경험, 비록 힘들었지만 짧은 시간의 경험은 민수에게 커다란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즐겁네.. 연기한다는 건… 짧고 우울한 역할이었는데도 이리 즐거운데 정말 제대로 된 역할을 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민수는 자신의 마음이 계속 연기 쪽으로 기울어지자 다시 한번 애써 마음을 다 잡아 먹었다.

“왜? 예전 경험 빨로 배역하나 먹어 보니 윤태준 같은 진짜 배우가 될 수 있을 거 같아? 30년 굴러먹었으니 기본은 되다고 생각하는 거야?”

민수는 현재 자신의 근본 없는 연기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한 번 점검해 보았다.

“확실히 호흡 발성은 엉망이지만 이건 시간만 조금 있으면 확실히 나아질 수 있어. 이건 내가 자신 있는 부분이니깐, 감성은…. 흠.. 예전엔 약한 부분이긴 했지. 실제로도 어제 감정이 넘쳐서 내 뜻대로 연기 하지 못했으니깐. 그리고 진짜 문제는 디테일.. 과 섬세함 .. 이건 진짜 답이 없어”

그리고는 비교 대상으로 어제의 윤태준을 떠올렸다.

“진짜 섬세했지. 표정 하나하나가 내가 거의 열 마디 할 때 한 마디씩 한 꼴인데.. 어떻게 그렇게 하지? 아무리 대배우 재목이라지만… 지금은 나랑 같은 25살 아냐?”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 속에 처음 보는 번호에 민수는 의아함을 느꼈지만 서둘러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기에서 활기차지만 정중한 어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윤 엔터테인먼트 케스팅실장 최준식 이라고 합니다 정민수씨 맞으십니까?]

“네, 제가 정민수인데요”

전생의 기억을 뒤져봐도 윤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여긴 어떤 기회사지… 내가 전혀 기억을 못하는 걸 보니 큰 곳은 아닌가 본데..또 나를 어떻게 알고 캐스팅 실장이…’

[네, 반갑습니다. 정민수 배우님. 혹시 지금 몸담고 계신 소속사가 있으신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뇨, 딱히 소속되어 있는 곳은 없습니다만..”

[그럼 혹시 저희와 계약에 대하여 이야기 나누어 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저희 기획사는 ..]

말이 길어질 거 같은 분위기에 민수는 말을 잠시 끊고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저... 근데 저를 어떻게 알고 연락을 주셨는지…”

[아 .저희 기획사에 윤태준 배우님이 몸담고 계십니다.

어제 윤태준 배우님의 추천으로 대표님이 정민수 배우님에게 계약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라고 오더가 내려와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분명 후회되지 않는 시간이 되실 겁니다. 혹시 시간 되시면 저희 기획사에 한 번 방문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아, 윤태준네 기획사였어? 윤태준이 1인 기획사가 아니었나 보네… 윤태준이 나를 좋게 봤나.. 이거 기분 나쁘진 않네’

“예, 알겠습니다. 한번 방문해 보고 싶은데 장소를 알 수 있을까요? 가능하면 오늘 바로 방문해 보고 싶습니다.”

[아, 오늘 말씀입니까 그럼 장소를 보내드릴 테니 정문 앞에서 이 번호로 연락 주시면 제가 바로 나가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따가 뵙죠..”

전화가 끊어지고 뒤이어 바로 강남 쪽 한 번화가의 주소가 전화기에 찍혔다.

“와, 좋은 데 있네… 여기 세도 만만치 않을 텐데…. 대뜸 오라는 거 보니.. 완전 소규모는 아닌가 보네 배우 전문 기획사들은 거의 규모가 작은 곳들 뿐이라.”

민수가 알기에 배우들만 전문적으로 돌보는 소속사는 다들 규모가 작았다.

배우가 가수처럼 큰 연습공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연습생이 있더라도 숫자가 많지 않아서 대부분 직원들이 일하는 사무실 몇 개 정도의 규모에 기껏해야 연습실 한두 개 정도만 추가된 정도의 크기의 기획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민수가 기억 못 하는 배우 전문 기획사의 수는 아마 수백 곳도 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이 배우 한두 명 가지고 큰 소속사에서 독립해 나온 매니저들의 1인 2인 소속사였다.. .

“그래도 전생의 소속사는 큰 편이었지. 연습실도 2개나 있었고.. 배우들 수도 5명이 넘었나?”

사실 전생에 1년 동안 오디션만 맴돌다 소속사에서 전력 외 판단 받은 기억 때문인지 민수는 전체적으로 소속사에 대하여는 좀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앞으로의 미래에 대하여 고민하는 중요한 시기, 계속 스스로 생각해 봤지만 답이 안 나오는 상황에서 타인의 눈을 빌어 스스로를 평가 해볼 참으로 소속사 방문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래도 윤태준이있는 곳이라니 그래도 믿을 만한 곳 이겠지?”

전생에 민수는 윤태준의 재계약이나 소속사 변경에 대하여 전혀 들어본 바가 없었다. 윤태준 정도의 배우가 소속사를 옮겼거나 재계약 했으면 분명 소식이 들려 왔을 텐데 소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냥 1인 소속사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윤태준이 소속사가 따로 있긴 했구나… 뭐 그건 좋고 우선 가보자 어떤 곳인지, 혹시 알아내게 진짜 좋은 기회가 될지.”

점점 연기에 대하여 미련만 쌓이던 민수는 진짜 마지막으로 자신이 연기를 해도 되는 이유를 찾던지 미련을 버리는 결정을 내릴 근거를 찾든지 확실한 선택을 하기 위하여 윤 엔터테인먼트를 향해 출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