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7화 (7/325)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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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을 갈아입기 위해 자신의 밴에 오른 태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형, 찍었어?”

태준의 매니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태준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어, 근데 장난 없던데 촬영 괜찮겠어?”

“아, 괜찮아야지 그럼. 초짜가 감정 쏟아붓는 거에 내가 휘말려서야 되겠어? 어차피 피디님도 내가 중간에서 잘 조절하니깐 그냥 바로 컷 한 거야.

윤 진 같은 배역 하면서 감정까지 조절하게 하려면 진짜 주연만큼 돈 줘야 해. 내가 주연이니깐 돈값은 해줘야지.”

태준의 장난스러운 대꾸에 매니저는 한숨을 쉬었다.

“야, 그래도 저건 아니지 어디서 연기를 잘 못 배웠나. 에휴..”

태준은 옷을 다 갈아 입고 다시 촬영 장으로 나섰다.

“킥킥, 아마 잘못 배운 거 맞을걸. 뭐 어쨌든 남은 것도 잘 촬영해줘. 그럼 난 간다.”

나가는 태준을 보며 매니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편 민수는 조용히 스텝을 따라 옷까지가 놓은 방으로 가서 지정된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후…. 진짜 미안하네. 와, 이게 조절이 안 되는구나.’

지금껏 제대로 감정을 쏟아 넣은 경험이 없던 민수는 중간중간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감정에 당혹스러웠으니 컷이나 NG 사인이 나지 않아 그대로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씬이 NG가 나지 않고 제대로 촬영된 원인은 태준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진짜 대단하긴 하네, 그냥 대사 한마디랑 눈빛으로 다 표현하네. 저게 진짜 배우지 후..’

민수가 거대하게 불어나는 치즈 덩이라면 태준은 그냥 한 자루의 칼이었다.

민수의 감정 과잉이 일정 수준으로 넘어서기 전에 태준의 대사와 눈빛이 적절하게 견제를 해주어서 감정 레벨을 한 단계 끌어 내린다.

마치 불어나는 치즈를 한칼로 모서리를 베어내 총량을 맞춰주는 것처럼.

방금 촬영 현장은 그렇게 유지된 것이다.

‘원래는 주연배우가 그렇게까지 안 해주지. 그냥 NG 내고 다시 찍는 게 편하지. 어디 주연배우가 단역배우 돋보이게 연기 맞춰 주겠어.’

민수가 진짜 대단하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이점이었다. 어찌 보면 상황에 따라 맞춰서 연기 하는 게 당연한 것 같지만 이 바닥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주연배우 입장에서 단역배우는 언제든 자신의 목줄을 노리고 있는 승냥이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미래의 적에게 누가 경솔하게 먹이를 주겠는가.

상황에 따라 단역배우한테 까지 맞춰줄 수 있는 배포와 상대역의 감정까지 제어 할 수 있는 섬세 눈빛과 대사 호흡, 민수는 다시 한번 높은 진짜 배우의 벽을 느꼈다.

‘후…. 재대로 된 배우들은 다 저 정도는 우습게 하겠지? 뭐 좋아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고 당장 촬영에서 윤태준 발목이나 잡지 말아야겠어’

옷을 다 갈아입은 민수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촬영장에 들어섰다.

민수가 촬영할 다음 씬은 마찬가지로 진료실 1에서 촬영하는 장면으로 이제 더 이상 고통을 견디지 못한 윤 진이 자살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진 수를 만나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하는 장면이었다.

슬레이트 소리가 나자 윤 진은 천천히 평소처럼 진료실 1에 들어선다. 진 수는 언제나처럼 윤 진을 맞이한다.

“요즘은 좀 어때?”

“뭐.. 다를 바 없어. 낮에는 좀 멍멍하고 밤에는 잠을 좀 설치고 그렇게 평소처럼..”

평소와 같다는 윤 진의 목소리가 여느 때 보다는 밝아 보였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인데….”

진 수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윤 진의 분위기에 의아함을 느낀다.

순간 윤 진의 분위기가 침중해진다.

“형, 형은 꿈이 뭐였어?”

“글쎄…꿈이라…원래는 외과의가 되는 거였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네. 진짜 내가 의사가 되고 싶었던 걸까.. 그러는 넌?”

“그러게. 난 꿈이 뭐였을까… 정말 그런 게 있었는지도 생각이 안 나는데.”

진 수는 자신이 물어 놓고 전혀 생각 안 해 봤다는 윤 진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게. 뭔가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거 없었어?”

진 수의 말에 윤 진은 멍하니 빈 곳을 바라보았다.

윤 진의 눈동자가 공허해지며 분위기가 급속도로 침울해져 갔다.

“먼 훗날 보다…당장은 바다를 보고 싶네…”

‘여기선 분출이 아니라 제어를 해야….’

민수는 감정을 추스르며 절제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 겨울이니 바다에도 아무도 없겠지. 서해로 가서 해안선을 따라 쭉. 그렇게 말이야.”

윤 진의 말을 들은 진 수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왜 동해가 아니라 서해야? 여행은 대부분 동해로 가지 않나? 볼 것도 많고.”

윤 진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답하는 윤 진은 웃고 있었으나 진 수는 그 웃음이 애달프기만 했다.

“볼 것도 많고.. 그래서 사람도 많고.. 난 사람 많은 데는 싫더라고”

“야, 요즘엔 서해도 사람 많아. 그리고 바다야 지금이라도 가면 되지.”

말을 돌리며 윤 진의 동정을 살피던 진 수는 순간 굳은 표정으로 윤 진을 응시한다.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던 민수는 순간 자신의 감정 위에 진 수의 감정까지 덧붙여지는 감각을 느꼈다. 저기서 바라보는 진수가 마치 자신인 것 같은 생소한 감각이었다.

“진아, 너 진짜… 너 지금 설마.. 아니지?”

진수가 말하는 동시에 민수는 진수가 윤 진을 향하여 가지는 우려와 걱정 의심 등의 감정이 자신에게 밀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에이, 형은.. 무슨 소리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느닷없이”

순간 분위기를 바꿔 의뭉을 떨던 윤 진은 자리에서 일어 났다.

윤 진은 애써 웃으며 진료실을 나섰다.

“형, 나 갈게. 건강해. 고마웠어”

방을 나서는 민수는 보고 있지 않음에도 진 수가 느끼는 의구심과 의심 그리고 염려하는 감정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진 수를 연기하는 윤태준은 표정만으로 그런 감정을 연기하고 있으리라.

“컷”

컷 사인이 나고 민수는 작가 한숨을 쉬고 박 PD 에게 다가갔다.“민수 씨 잘해 줬어요. 생각했던 것만큼 잘나 온 거 같아요. 이따가 개인 촬영도 이만큼 만 해주세요”

웃고 있는 박 PD를 보니 자신의 연기가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 민수는 적잖이 안심되었다.

촬영을 마치고 다음 개인 촬영을 생각하고 있는 민수에게 태준이 다가왔다.

“민수 씨, 수고하셨어요. 다음은 개인 촬영이죠?”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태준을 보며 민수는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네, 태준 씨. 제 어설픈 연기를 잘 받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경험이 없어서 첫 씬에서 너무 누를 끼친 거 같아 죄송스럽네요.”

“아니요. 어려운 배역을 설정에 맞게 잘 연기해 주셨는데 나머지는 당연히 제가 맞춰 드려야죠. 그나저나 감정이 너무 잘 나와서 저도 기분 좋게 연기 했습니다. 어떻게 준비하신 거에요?”

어떻게 준비했냐는 물음에 민수는 그냥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이건 그냥 얻어걸린 거라서.. “

민수가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윤태준의 씬이 준비되었는지 연출 스텝이 태준에게 다가왔다.

“윤태준씨. 회의실씬 준비 다 마쳤습니다.”

“아, 네 민수 씨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민수는 웃으며 떠나가는 태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 다시 윤태준하고 연기할 기회가 있으려나…. 그나저나 그건 뭐였지. 분명 보지도 않았는데 감정이 느껴졌어.

흠…점점 뭔가 이상한 일이 생기는 기분인데.. 그러고 보니 저번에 처음 만날 때도 뭔가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나… 대체 무슨 일 인 것인지'

"민수 씨, 다음 장면 바로 갈게요”

“네”

피디의 부름을 받은 민수가 찍을 장면은 윤 진의 개인 촬영 장면으로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자던 윤 진이 악몽으로 깨고 화장실 거울 앞에서 오열하는 씬이였다. 윤 진이 받는 고통을 직관적으로 보여 주는 그야말로 윤 진 촬영 부분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슬라이트 소리가 울리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윤 진은 침대에 누워있다.

잠을 자는 윤 진의 표정이 좋지 않다. 미묘하게 인상을 쓰는 윤 진. 윤 진의 고개가 조금씩 떨리더니 눈을 부릅뜨며 급하게 일어난다.

“헉.헉..헉…”

숨을 몰아쉬는 윤 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이며 화장실로 들어선다. 세면대에 물을 틀고 쏟아지는 물을 바라보던 윤 진의 시선이 살며시 올라가며 거울을 바라본다.

거울 속 자신의 화상 자국을 바라보던 윤 진은 순간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으로 거울을 내려친다.

“쨍!”

윤 진이 내려치자 충격 부분부터 밖으로 여러 갈래로 금이 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거울을 내려친 주먹에서 서서히 피가 세어져 나왔고 거울을 타고 조금 흘러 내렸다.

그리고 거울에 금이 간 사이로 괴로워하는 윤 진의 표정이 2부분으로 나뉘어 비치고 있었다.

민수가 내리친 거울이 깨지며 민수의 손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자 촬영을 하던 스텝들과 피디는 대본과는 다른 상황에서 살짝 당혹함을 느꼈지만 영상 자체는 예상보다 더 좋게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소품인 거울이 깨진 이상 만약 다시 찍는다면 새로운 거울도 급하게 공수해 와야 하는 애로사항도 존재했으니 가능하면 이번 촬영 자체로 가기를 기원했다.

거울을 깬 윤 진의 무릎이 자연스럽게 무너지며 세면대를 끌어 앉는 자세가 되었다.

조금씩 흘러 세면대를 어지럽히는 핏방울이 더 애처롭게 느껴진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나도 그냥 타 죽었어야 했어? 다 같이 그렇게? 나도… 나도 이렇게 벌 받고 있잖아? 어? 그러니깐..제발 제발 이제 좀 그만 괴롭혀…. 나 진짜 죽을 거 같다고…”

고통으로 울부짖는 윤 진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른다.

“컷!”

PD의 컷 사인이 나자 스텝 하나가 부리나케 뛰어가 민수의 손을 수건을 감싼다.

“민수씨, 괜찮아요?”

예상과는 달리 거울이 깨져서 내심 당황했던 민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피디에게 다가갔다.

“이거.. PD님 죄송합니다. 저게 깨질지 몰라서.. 혹시 다시 가야 하나요?”

민수의 말에 PD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당황하긴 했는데 덕분에 결과적으로 영상 자체는 더 좋게 나왔어요.

민수 씨 생각보다 더 힘이 좋네요.

세면대 거울이 웬만하면 저렇게 깨지지 않는데 그 손은 괜찮아요?”

다시 가지 않아도 된다는 PD의 말에 적잖이 안심을 느끼며 민수는 괜찮다고 말했다.

“민수 씨, 이제 외부 씬 2개 만 찍으면 되네요.

그건 외부 카메라 2개로 촬영 할 거예요.

수고하셨어요 출연료는 알려준 계좌로 보내놨으니 촬영 마치시고 바로 돌아가셔도 좋아요”

PD의 말에 민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세트장 밖으로 나섰다.

“피디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래요 민수 씨, 나중에라도 다시 봤으면 좋겠어요”

피디와 인사를 한 민수는 촬영을 도와준 스텝들에게 다시 일일이 인사를 한 후 외부 촬영을 나섰다.

외부 촬영은 별것 없었다.

그냥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외롭게 걸어가는 윤 진의 모습을 멀리서 촬영하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홀로 동떨어진 윤 진의 모습을 촬영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목소리만 나오는 편지 회상씬을 가볍게 녹음하고 마지막 자살 씬 까지 가볍게 마친 민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후…이거…. 기분이 장난 아니네.. 솔직히..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무거운 몸을 눕힌 민수는 촬영 중 느낀 감정이 계속하여 자신을 짓누르자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

6년 전 아니 사실은 36년 전 겪었던 고통, 오래전이라 가볍게 치부했던 그 기억은 아마 민수의 기억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밀려오는 감정의 편린을 견디며 한편으로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연기를 한 짜릿함까지 민수는 오묘한 감정을 느끼며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다시 한번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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