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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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윤 진은 화재 사고의 피해자였다.
화재 사고로 양친을 모두 잃고 본인조차 얼굴의 한쪽에 심한 화상을 입은 체 밤마다 사고의 악몽으로 수면제가 없으면 잘 수조차 없는 피폐한 인물.
이것이 “서쪽 해변”에서 윤 진의 설정이었다.
이희은 작가는 “서쪽 해변”을 집필할 때 윤 진에 대하여 가능하면 최대한 어리며(최소한 주연 배우보다는 어려 보여야 함) 외모는 최대한 시청자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 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고 대사만으로도 자신을 피폐함을 표현 해 줄 수 있는 연기력을 가진 배우라고 캐스팅 가이드를 작성해 놨었다.
이 배역이 주연이나 비중 있는 조연급 역할이었으면 캐스팅에 큰 난항은 없었겠지만, 문제는 이 배역은 단역이었고 그냥 단역도 아니라 출연 내내 얼굴의 일부를 화상 상처로 가리고 1화 때 사라지는 배역이라는 것이었다.
주연급 배우들은 이희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시청률도 기대할 수 없는 드라마에 단역으로 연기하고 싶지 않아 했고 기회를 잡으려는 단역배우 들은 연기가 약하거나 아니면 외모가 적합하지 않아 이희은 작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작품을 완벽하게 꾸리고 싶은 작가의 욕심이 창조한 인물 윤 진은 단역급 명성을 가지고 있으나 주연급 외모와 연기력을 가진 배우를 기다리는 그런 어이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민수는 문에 노크를 하면서 윤 진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래, 솔직히 일반적인 연기였으면 나도 형편없이 수준 미달이지. 그게 어디 20대 젊은 배우가 할 수 있는 표현이겠어?’
“들어 오세요”
민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문을 열고 회의실 안에 들어섰다.
회의실 안에는 작가와 피디만이 피곤한 듯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아 있었다.
천천히 걸어간 민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배우 지망생 정민수입니다”
이희은 작가는 민수가 문을 열고 천천히 들어오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수척하고 창백한 낯빛은 불면증을 연상케 했고 민수의 섬세한 얼굴선과 다소 짧은 머리는 본래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외모만은 가장 윤 진 같네..’
“우리 드라마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민수 씨가 연기 해야 하는 건 즉흥 연기 한가지입니다.
사고로 양친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남은 남자가 양친의 장례를 지내고 혼자 남은 집에 들어왔어요. 그 모습을 연기해 보세요. 시간은 얼마나 드릴까요?”
‘아.. 오디션 내용도 내 기억과 별로 다르지 않네..’
“아뇨, 바로 해보겠습니다.”
민수가 바로 해보겠다고 하자 피디의 눈빛이 피곤함에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민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민수는 25살의 민수가 아니라 19살의 민수가 되어 있었다.
민수는 천천히 걸어갔다. 한발 한발 걷는 민수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몇 발자국을 걸었을까. 민수는 앞에 놓인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흐 흐 흐 흐 흐”
의자에 걸터앉아 잠시 하늘을 보고 헛웃음을 뱉어낸 민수는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흐 흐 흐 흐 흐 “
내뱉던 헛웃음은 그대로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허탈함으로 물들었던 민수의 얼굴은 허탈함이 사라지며 자괴감과 고통으로 얼룩져 갔다.
민수의 눈이 붉어지며 눈물이 맺혀 갈 때쯤 피디의 컷 사인이 떨어졌다.
“OK. 컷. 좋아요”
이희연 작가는 민수의 연기를 보며 전율을 느꼈다.
대사 한마디 없었는데 그가 느끼는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옴을 느꼈다. 순간 민수의 모습과 자신이 상상하던 윤 진의 모습이 서서히 겹쳐졌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고통스러운 웃음을 짓던 윤 진의 얼굴이 서서히 민수의 얼굴로 변해갔다.
그리고는 민수가 윤 진을 연기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보자 그때부터는 상상하던 모든 윤 진이 민수로 보였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민수는 그냥 윤 진으로 보였다.
작가의 머릿속에 윤 진과 민수가 동일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외모부터 마음에 들었는데 연기를 보니 이제 작가는 민수 외에 다른 윤 진이 생각나지 않았다.
“박 PD님 민수 씨로 가죠”
박 PD는 지금까지 깐깐하게 배우들을 쳐내던 이희연이 단번에 배역을 확정하자 일순 어이없음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저 배우만큼 어울리는 배우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만은 바로 인정했다.
“작가님,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네, 그냥 윤 진 그 자체네요. 원래 대본 연기도 보려고 했는데 시간 낭비 일 거 같아요”
작가와 잠시 이야기 나누던 피디는 배역이 정해졌음을 느끼고 이제 촬영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피디는 이제야 시작 부분을 찍을 수 있다는 생각에 홀가분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민수 씨, 우선 축하드려요. 그런데 저희가 지금 촬영 일정이 매우 촉박해요
아마 내일 당장 스튜디오 촬영을 시작할 텐데 내일부터 괜찮은가요?”
작가와 피디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민수는 피디가 직접 축하의 말을 건네 오자 비로소 자신이 이 배역을 따냈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예, 물론 괜찮습니다. 내일 바로 나오겠습니다.”
민수의 말을 듣고 피디는 웃으며 말했다.
“좋네요. 윤 진 배역은 감정노동이 심해도 씬 자체는 몇 씬 안 들어가니 하루면 빠듯해도 충분할 거에요.
나가셔서 조연출한테 대본 받고 계약서 작성하시고 내일 다시 오시면 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민수는 피디와 작가에게 인사하고는 서둘러 나가 조연출과 출연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 시간 회의실에서는 이희연과 박 PD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작가는 저 배우로 가는 거죠? 나중에 다른 소리 하시면 안 됩니다?”
박 PD의 엄포에 이희연은 작게 웃음 지으며 대꾸했다.
“박 PD는 내가 언제 정해진 캐스팅으로 뒷말 한 적 있어요? 아 그보다 내일 윤 진 촬영 부분이 태준 씨하고만 접점이 있으니 태준 씨한테 시간 알려줘야 하는데 촬영 일정 안내했나요?”
“걱정 마세요. 조연출이 계약서 작성 마치면 바로 태준 씨한테 연락 할 겁니다.
“그래요. 이제야 안심하겠네요. 시청률이야 어차피 안될 거 알지만 적어도 격 떨어지는 드라마란 말은 안 들어야 하는데 연기 때문에 격 떨어질 일은 없을 거 같네요”
윤희연이 도도한 표정으로 말하자 박 PD는 어이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 작가님은 연기보다 극본을 더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어머, 당연히 극본은 걱정 안 하죠 저 이희연이에요 제 극본에 격 떨어지는 거 보셨어요?”
“예~예 그렇죠. 10시의 여왕 이희연 작가님 하하”
둘은 오랜만에 편하게 대화하며 머리를 짓누르던 커다란 바윗돌이 사라진 듯 상쾌함을 느꼈다.
민수가 계약을 마치고 돌아가던 시점
그날 외부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던 “서쪽 해변”의 주인공 윤태준은 내일 촬영 소식을 전해 들었다.
“태준아, 내일 스튜디오 촬영이라는데?”
“헤….윤 진 구했나 보네….대체 누가 그런 괴랄한 역할을 맡았으려나?”
“윤 진 역이 어려운 배역인가 보네?”
“어, 이거 완전 웃긴 배역이거든. 20대가 30대 이상이 해야 할 연기를 해야 해 게다가 단역이야.
이런 건 차라리 카메오로 연기력 되는 배우 섭외하면 편한데 이건 씬이 여러 개 들어가서 카메오도 못써 초반 단역 하나에 작가님이 힘을 줘도 너무 줬어 하하.
하긴 내용 전체를 보면 윤 진이 엉망이면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좀 붕 뜨긴 하니 이해는 하는데..”
윤태준의 말을 들은 매니저가 웃으며 다시 묻는다
“이거, 너도 못 할 정도로 어려운 거야?”
매니저의 말을 들은 태준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 감정에 완전히 먹혀서 해야 하는 거라 엄청 피곤하긴 하겠지만 할 수야 있겠지.
근데 그거 너무 손해 보는 짓이잖아?
솔직히 그거 하나 찍을 에너지면 다른 거 주연 출연하는 게 더 이득 아니겠어?
그래서 누구래? 맡은 배우가?”
“이거, 완전 초짜 신인이라는데? 나도 첨 들어보는 배우야 정민수라고 이 찬성 조연출인가 그 양반이 추천한 배우인 모양이야.”
“재미있네. 윤 진에 초짜 배우라…..작가님 마음에 들었으니 들어갔을 테고..”
윤 진이 생짜 신인 배우라는 소리에 윤태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형, 내일 촬영할 때 그 배우 연기 하는 거랑 마치고 갈 때까지 행동 하나하나 다 찍어놔 봐.”
윤태준의 말에 매니저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너 꺼 찍으라면 몰라도 왜 생판 신인배우를 찍어? 게다가 연기하는 것만 찍으면 됐지 행동은 왜 찍어?”
“물건이면 아버지 보여 드리려고 아버지가 지금 5년을 놀았는데 더 이상 저렇게 계시면 안 될 거 같아.
윤 진 역에 신인 배우 뭔가 느낌이 오네. 아버지 정신 좀 차리게 제발 물건이었으면 좋겠다.”
태준의 말을 들은 매니저는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긴 하지. 그 아이가 떠나고 나서 대표님의 실망이 크긴 했지 아직 저러고 계시니..”
“실망이기 보다는 아마 후회 일 거야. 내막을 알고 보니 어이가 없어서 원…뭐 어쨌든 그건 이미 지난 일이니 내일 수고 좀 해줘 형”
“오케이 알았어 그 정도는 해줘야지 우리 윤 배우님 부탁인데”
윤태준은 피식 웃으며 내일 자신이 해야 할 연기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상기했다.
출연 계약서에 사인한 민수는 집으로 돌아와 오늘 받은 대본을 처음부터 살펴봤다.
“서쪽 해변”의 내용은 자신이 알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람을 살리는 외과의가 되고 싶었던 주인공 “진수”는 자신이 혈액공포증으로 외과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정신과 상담 의가 된다.
정신과 상담의로서 처음 만나게 되는 환자가 우울증 말기의 환자 “윤 진”, 상담의로서도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진수는 윤 진의 치료와 상담에 온 힘을 기울이지만 윤 진은 스스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진수는 자신의 무력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의사 가운을 벗어 던진다.
모든 것을 벗어 던진 채 여행을 떠난 진수는 태안 근처 해변에서 한겨울에 서서히 바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자 “미영”을 발견하여 뛰어들어서 잡아 나온다.
애인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은 여자 미영은 자살의 시도가 진수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진수를 원망하고 진수는 미영을 설득하고 삶을 이어가게 하려고 여행을 제안한다.
“서쪽 해변”은 이런 진수와 미영이 서해의 해안선을 타고 여행하며 일어나는 일들을 극으로 꾸민 이야기였다.
대본을 다 살펴본 민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인기가 없을 만하네. 없을 만 해….대체 왜 이런 걸 쓰신 거지?..”
민수가 생각하기에 이런 내용의 극을 쓰고 싶으면 차라리 압축해서 영화로 시나리오를 쓰던지.
드라마로 제작하고자 했으면 두 사람이 해안 여행을 할 때 다양하고 다소 자극적인 에피소드를 추가 해야 했는데 막상 대본을 보니 여행을 하는 중에 보여주는 건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과 주인공들의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뇌와 고찰 그리고 서해안의 아름다운 절경들의 모습들 뿐이었다.
“이게 다큐멘터리인지..드라마인지…그래도 워낙 주연배우 들이 연기를 잘하고 영상미가 너무 좋아서 보는 사람들은 봤다고 했던 거 같은데”
민수가 기억하기에 이희은 작가는 드라마에서도 단순히 막장적 요소나 로맨스 같은 것 말고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고뇌나 다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주인공들이 자아를 찾아가는 휴머니즘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나중에 인터뷰했었다.
“그런 면에서는 맞는 드라마이긴 하네. 아 그러고 보니..이거 극본 때문에 망한 게 아니였지..”
그렇다. 민수의 기억 속에서 “서쪽 해변” 의 중반. 후반부는 나름대로 좋은 평을 받았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스타일의 드라마, 힐링 되는 드라마”로 일부 시청자들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시청률은 바닥을 기었는데 그건 초반에 들 망조로 시청자들이 다 떠나갔고 후반부에 좋은 평가가 쌓여도 돌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