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흔한 배우 정민수-4화 (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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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이요?”

제안을 받자마자 민수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민수는 전생에도 이 제안을 받았고 그때는 승낙하고 오디션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오디션인지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그때는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 못 하고 떨어지고 말았지만 사실 그가 오디션을 보는 그 역할은 어쩌면 그가 가장 잘 연기 할 수 있는 그에게 맞춰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그런 배역이었다.

아마 이 찬성은 그런 것까지는 알지 못하고 그냥 제안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민수에게 아주 좋은 기회를 준 셈이었다.

‘그래, 내가 연기를 할지 안 할지는 잘 모르겠고, 아마 안 할 가능성이 더 크겠지. 하지만 그렇게 미친 듯이 30년을 했는데 뭐라도 하나 해 봐야 하는 거 아니겠어? 죽기 전에는 조연하나에 그렇게 목을 맸지.

어쩌면 이 역은 등장시간은 더 짧아도 임팩트는 더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텐데 이런 기회를 놓칠 필요는 없겠지.

만약 내가 이 역조차 못 따내면 난 진짜 연기를 할 필요가 없는 인간이라는 의미일 터, 홀가분하게 연기를 포기 할 수 있을 것이니 떨어져도 손해는 전혀 없어. 하자. 이건 해야 해’

“네, 찬성 형님 감사합니다. 오디션은 언제인가요”

[하하. 그래 잘 생각했어 내일 TVA 방송국 드라마국으로 나와봐. 작가님도 나오신다고 했어.

이거 진짜 기회야 떨어져도 임팩트만 남기면 손해가 아닐 거야. 무려 작가가 이희연 작가님이라고]

이 찬성 조연출은 내일 꼭 나와서 잘하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래 “서쪽 해변”이란 말이지…”

“서쪽 해변”, 민수가 오디션 보려고 하는 이 드라마는 무려 10시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드라마 여제 이희연 작가의 드라마였다.

믿고 쓰는 이희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작품을 내기만 하면 공중파에서 모셔가는 스타 작가인 이희연이 케이블 방송 드라마에 편성을 결정한 데에는 약간의 사정이 있었다.

우선 “서쪽 해변” 이 편성된 그 시간은 처음부터 “서쪽 해변”이 편성된 것이 아니었다.

원래 편성된 드라마가 제작사 쪽에서 문제가 생기면서 뒤집히자 방송국은 서둘러서 제작될 수 있는 드라마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급박한 시간에 제작할 드라마를 구할 방법은 요원했다.

이런 일이 발생 할 경우 방송국이 가장 먼저 취하는 방법은 네임벨류 있는 작가에게 부탁하거나 힘 있는 제작사에 편성될 만한 드라마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름있는 작가가 움직이거나 힘 있는 제작사가 움직여 줘야 배우들 섭외가 별 잡음 없이 빠르게 결정되고 그만큼 시간을 벌 수 있는 법인데 문제는 어떤 제작사나 작가도 선뜻 총대를 메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인은 같은 시간대에 공중파인 KBC에서 자체 제작한 “태풍”이였는데 이 드라마의 작가가 미니스리즈 3대장 중 한 명인 정명숙 작가였고 주연이 지금 시대 가장 잘나간다는 남자 배우인 조태식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드라마 “태풍”은 영화만 찍던 조태식 배우의 드라마 데뷔작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중이었다.

즉 누가 봐도 시청률을 대박 칠 드라마가 그 시간에 방영 결정되어 있었으니 제작사 입장에서는 그런 의미 없는 모험을 할 필요성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가고 TVA쪽은 점점 곤란한 상황에 빠져들고 있는 그 시점.

그때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던 TVA에 찾아온 게 이희연 작가였고 이희연 작가가 TVA 에 제안한 드라마가 바로 이 “서쪽 해변” 이였다.

방송국 측에선 제안자가 이희연 작가였고 이희연 드라마라면 시청률은 둘째 치고라도 우선 배우들 모으기 쉬울 테니 당장 급한 불을 끌 수 있겠다는 계산하에 편성을 허락하게 된 것이다.

그럼 대체 이희연 작가는 왜 모두가 기피하는 그 시간대에 굳이 대타를 자청 했을까?

그 이유는 “서쪽 해변” 이라는 극본의 특수성에 있었다.

“서쪽 해변”은 이희연 작가가 작가로 등단하기 전에 창작한 최초의 작품이자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었다.

그녀는 진작이 이 작품을 드라마로 제작하고 싶었지만, 이 작품이 드라마로 만들었을 때 망작이 될 거라는 예상 속에 모든 제작사와 방송국에 외면을 당하고 만 비운의 작품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휴머니즘적인 요소가 주된 드라마의 주제이긴 하지만 정신질환과 자살이라는 심각한 소재를 다루고 있기도 하고 또한 로맨스 요소보다는 여주와 남주의 인간적인 유대감에 더 초점을 맞추는가 하면 갈등적인 요소조차 잔잔하게 흘러가니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의 눈을 끌 거리가 거의 없는 그런 내용이었으니 전문가들의 평가는 일순 타당하다 할 수 있었다.

작품성 자체가 관객을 끌어 올 힘이 되는 영화와는 다르게 드라마의 작품성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재미가 보장되지 않으면 시청자들이 눈을 돌리기 때문에 어떤 제작자도 “서쪽 해변”을 제작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당연할 결과였다.

하지만 작가인 이희연은 입장이 전혀 달랐다.

이미 유명 드라마 극작가로 자리를 잡은 이희연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 작품을 드라마로 제작하고 싶었고, 이 “서쪽 해변”은 언제나 상업적인 로맨스만 쓰던 그녀의 마음속에 남은 유일한 오아시스였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같은 기회가 아니면 “서쪽 해변”이 제작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외통수에 몰린 TVA에 당당하게 “서쪽 해변”의 극본을 가져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TVA 드라마국에서는 과연 “서쪽 해변”에 대하여 몰랐을까? 당연히 알고 있었다.

시청률이 곧 수익인 방송국이 시청률이 안 나올 게 뻔한 드라마를 편성한 데에는 몇 가지 계산이 있었다.

먼저. “태풍” 의 기세를 봤을 때 어차피 어떤 드라마가 들어간다 할지라도 시청률 참패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 한 것이다.

둘째. 어차피 시청률 안 나올 거라면 스타작가에게 점수라도 따서 다음에 좋은 극본을 받을 수 있는 토대라도 마련하자는 얄팍한 계산이었다.

어차피 작가도 안될 극본이란 걸 알고 있는데 그걸 받아서 제작해 주면 작은 빚이라도 하나 지워 준 게 아니냐는 거였다.

셋째. 그리고 이희연이면 그래도 배우는 잘 데려올 테니 스타작가 이희연의 이름과 배우 이름을 팔아서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도모해 보자는 판단이었다.

넷째. 게다가 만약 조금이라도 성공한다면 상업성보다 작품성이 남다른 드라마를 최초로 방영하여 성공을 거두었다는 의미 있는 선전 타이틀을 얻을 수도 있으니 한번 지켜보자는 거였다.

그렇게 이희연의 욕망, 방송국의 속셈, 이희연의 자발적인 페이컷 세 가지가 앙상블을 이루면서 이희연 극본 TVA 자체 제작 드라마 “서쪽 해변”이 편성하게 된 것이다.

“오디션…오디션이라…”

전화를 끊은 민수는 조용히 앉아 내일 오디션에 대하여 생각했다.

“잘 돼도 좋고 안 돼도 상관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진짜 떨리네.

전생에선 뭐 죽기 직전 빼고는 오디션에 붙어 본 역사가 없으니 당연한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하던 민수는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문제점을 발견했다.

“와.. 이거 발성하고 대사 뱉는 호흡이 완전 처음으로 돌아왔네. 이건 좀 문제인걸.

몸이 돌아와서 그런지 깊게 호흡할 때마다 배에 근육이 땅기는 것이 아무래도 다시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네.

하긴 몸 자체가 돌아왔는데 20년 뒤에 익숙해진 호흡이 몸에 배어 있으면 그게 말이나 되겠냐”

한동안 호흡과 발성 연습을 한 민수는 밤이 점점 어두워 오자 몸을 그대로 침대에 던졌다.

“어차피 배역 생각하면 오늘 내일은 차라리 밥을 먹지 않는 게 나을 거야.

오늘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 우선 자야겠다. 내일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자”

스스로를 달래며 민수는 혼란 설렘 고뇌에 찬 하루를 평소보다는 좀 빠르게 마쳤다.

다음날이 되고 민수는 이른 아침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는 20년 동안 해왔던 발성 연습과 호흡연습을 마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제 버릇 개 못 주는구먼. 하긴 하루도 빼먹지 않았으니 몸은 익숙하지 않아도 머리는 아마 기억하고 있겠지”

연습을 마친 민수는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살펴봤다.

끼니를 두 번이나 걸러 초췌해진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보며 민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 이거 뭔가…다른데”

이 시점의 민수는 분명 절세미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제법 날렵하고 준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선이 너무 가늘어 카메라를 통하여 본다면 이목구비 자체가 크게 선명하게 남지 않는 단점이 있어서 예전에 소속사로부터 ‘적당한 조연에 어울리며 주연 재목감은 못됨’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는 민수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었고, 민수는 같은 얼굴이라도 카메라에 뚜렷하게 선이 남는가 남지 않는가가 주연으로 설 수 있는가 없는가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며 그 선을 주연으로서의 존재감이라고 정의 내렸다.

“이거.. 내 얼굴이 분명 맞는데…”

그러나 오늘 본 자신의 얼굴은 예전의 기억과는 약간 달랐다.

생긴 것 자체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분명 느낌이 달랐다.

뭔가 더 생생한 느낌, 예전에 자신이 풀 죽은 상추였다면 지금의 자신은 상추는 상추인데 물먹고 싱싱해진 상추 같았다.

“와.. 이게 내가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건가? 아니면 설마 야수 카드에 뭔가 이런 효과가 있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한 민수는 어차피 알 수도 없는 것에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좋아졌다고 느껴지면 그게 기분 탓이든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이유가 있든 간에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 지금은 그런 거 생각할 여유는 없지. 당장 지금 오디션에 가야 하니깐”

생각을 마친 민수는 자신의 옷 중에 가장 심플한 청바지와 면티를 집어 들었다. 청바지와 면티 그리고 두 끼를 굶어서 초췌해진 얼굴 이게 바로 민수가 생각한 가장 적당한 배역의 외모였다.

서둘러 출발한 민수는 예상시간보다는 조금 빠르게 TVA드라마팀 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려던 민수는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시 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 작가님 이건 진짜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윤 진이 작가님이 크게 힘준 캐릭터인 건 알겠는데 아니 애당초 이게 말이나 되는 설정이냐는 겁니다.

솔직히 윤 진 이거 막말로 조연도 아니고 그냥 단역인데, 지금 주연들은 다 정해져서 한창 촬영하고 있는 상황에 아직 윤 진 역할을 할 배우는 정해지지도 않아서 초반

부 촬영은 하지도 못하고 있잖습니까?

그냥 좀 기준을 낮춰서 뽑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후…박 PD 미안해요. 나도 이거 내 욕심인 거 알고는 있어요.

하지만 윤 진 역이 공감을 주지 못한다면 뒤에 주인공이 고뇌하는 것도 전혀 공감을 주지 못하고 극 자체가 그냥 산으로 가고 말아요.

윤 진이 나오는 씬은 다행히 많이 없으니깐 배우만 정해지면 하루 정도만 투자해도 충분히 촬영 할 수 있잖아요.

박 PD, 박 PD도 알다시피 이 작품은 내가 많이 아끼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부탁하니깐 조금만 더 찾아봐요.

이번 주말까지 도저히 못 찾으면 그때는 박 PD가 원하는 배우 아무나 선택하도록 할게요”

“후…. 알았습니다.

날카롭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시간이 얼마 없다 보니 제가 너무 마음이 급해서 그랬습니다.

오늘 오기로 한 배우들이 조연출들이 추천한 배우 맞죠?

오늘 꼭 윤 진 찾았으면 좋겠네요”

밖에서 들어보던 민수는 지금 윤 진 이라는 역할에 대하여 작가하고 피디가 생각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생각이 다르다기보다는 작가님 욕심에 계속 선택이 늦어지고 그에 따라 도입부 촬영이 늦어지니 피디님이 마음이 조급해 지고 있는 거겠지 피디님 입장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빠르게 1~2회분을 찍어야 할 테니깐’

민수는 순간 피디의 입장에선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윤 진은 어이없는 배역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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