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및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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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및 후기
"......"
널부러져 자고 있는 운현을 내려다보며 상아는 쓰게 웃었다.
피곤할만 하겠지.
어쨌든 그는 많은 것을 한 사람이니까.
자신들을 구하고, 결국은 파멸이 되어버릴 세계를 구한 사람이니까.
그래도 이주일 내내 잠만 자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닌가?
길드 업무 때문에 바쁜 자신이 나간 사이 일어나서 밥먹고 잠들어버렸다는 이야기에 어이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붙어 있고 싶지만 길드장이라는 자리는 그렇게 자유로운 자리가 아니다.
자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만 일어나는 것에 안타까워하던 것도 어제까지의 일에 불과했다.
"야!!"
"헉!"
결국 참지 못한 상아가 빽 외치자 그제서야 운현은 떡진 머리를 긁적거리며 늘어지게 하품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지금 몇시야?"
"지금 몇시야? 그게 할 소리냐? 응?"
따지듯 묻는 상아를 향해 운현은 피식 웃었다.
운현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해해달라고 했잖아."
지금 운현의 몸은 오로지 운현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이 몸은 위신체다.
신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따로 떨어진 자신의 육체.
비록 같은 혼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지만 상당한 시간동안 다른 의식이 지배하던 몸이다.
그런만큼 조율은 필수적인 것.
가장 좋은 조율법은 아무 생각없이 잠을 자는 것이었기에 이럴 수 밖에 없었다.
"이해? 이해는 하지. 그래도 이주일은 너무한 거 아니야? 일주일이면 조율이 끝난다면서!"
"응. 그랬지."
"벌써 일주일이 더 지났다고!"
"그래? 벌써?"
아무 생각없이 잠만 자다보니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버렸다.
상아의 외침에 운현은 눈을 감고 위신체를 확인해보았다.
현실의 운현과 링크는 제대로 되어 있었다.
"하... 별 일들이 다 있네. 잘 해내려나."
잠들어 있는 사이 현실의 운현에게 별 희안한 일이 발생했다.
링크된 현실의 운현에게 받은 기억과 그것을 해결한 방안을 생각해 전달해 준 운현이 느긋하게 말하자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별일이라니?"
"그쪽 일은 그쪽의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신경 안써도 괜찮아."
"뭐? 그래도 네 일인데..."
"어차피 신성도 없어서 그곳으로 가지도 못해."
만약 이 위신체를 가지고 현실로 간다면 현실의 운현에게 벌어진 일을 돕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차원은 나뉘어져 있었고 남겨 둔 신성을 모두 소모해 연인들의 기억을 풀어 준 이상 이곳의 운현이 현실의 운현을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조율도 끝난거면 이제 나가서 데이트나 하자. 응? 나 엄청 기대하고 있었다고."
운현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고 나서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걱정없이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지만 다시 만나게 되고 운현은 곧장 잠들어버려 제대로 된 데이트 한번 못한 것이다.
열불이 터질만도 하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상아가 투덜거리자 운현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것에 못이기는 척 손을 잡은 상아는 운현이 자신을 끌어당기자 힘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바보."
"같이 자자."
"....빠득."
상아를 품에 안은 채 다시 침대에 누워 운현이 눈을 감으려 하자 그녀는 이를 갈며 운현의 목을 졸랐다.
"으하아아암..."
"그렇게 자놓고 하품이 나와?"
결국 상아에게 이끌려 밖에 나오게 된 운현은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이란게 무서운 거라서 한번 빠지면 빠져나오기가 힘든거야."
"잘나셨어..."
"오오? 길드장님? 옆의 그 분은 누구세요?"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으로서 발이 넓은 상아다.
평생 남자와는 인연이 없는 상아가 옆에 남자를 끼고 걷는 것을 보며 꽃집 주인이 놀리듯 말하자 상아는 베시시 웃으며 운현의 팔을 끌어안았다.
"내 애인!"
"하필이면... 쯧쯧. 젊은 총각이 안됐어. 아무리 여자가 없어도 상아 길드장을..."
"그렇죠?"
"그렇긴 뭐가 그래!"
꽃집 주인의 말에 운현이 동의하자 상아는 그의 옆구리를 냅다 후려치고 빠르게 걸었다.
한마디만으로 쉽게 토라져버린 그녀를 보며 씩 웃은 운현에게 꽃집 주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상아 길드장한테 잘해줘요. 자. 이건 총각에게 주는 거. 상아 길드장에게 줘요."
"어이구. 뭐 이런 걸 다."
꽃집 주인이 후다닥 만든 회색꽃다발을 받으며 운현은 고개를 숙이고 얼른 상아를 쫓았다.
성질을 내며 걸어간 것 치고는 멀리 가지 못했다.
상아 정도의 실력이라면 맘만 먹으면 이미 훨씬 멀어졌을 텐데.
사람들 틈에서 힐끔힐끔 고개를 돌려 자신이 쫓아오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모습에 너털웃음을 터트린 운현은 자신을 발견한 상아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리자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야야~ 화내지 마~"
"...씨이..."
"자. 첫 데이트... 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내가 깨어나고 첫 데이트이니 그 기념이다. 받아줘."
"...고, 고마워."
운현이 내민 꽃다발에 상아는 멍하니 운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계속 보지 못하고 붉게 얼굴을 물들인 상아는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평생을 살며 이런 꽃다발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상아가 희미하게 웃자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 그럼 제대로 데이트를 해볼까? 뭐 먹고 싶어? 뭐 갖고 싶어? 뭐 하고 싶어?"
"그럼 나... 저기! 저기 가보고 싶어!"
"저기면... 레스토랑?"
척봐도 굉장히 비싸보이는 레스토랑이다.
연인들이 자주 찾는 명소인 그곳을 가리키며 상아가 밝게 웃자 운현은 히죽 웃었다.
"얼마든지 가주지... 인데."
".....?"
"생각해보니 내가 돈이 없네."
"...."
세상을 부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비술과 시간과 공간을 다룰 수 있는 힘이 있으면 뭐하나.
현자의 몸을 움직이게 된 이후 운현이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아이템과 금은 현실의 운현이 가져갔고 현자로 활동하며 얻은 아이템과 돈은 이미 모두 써버렸다.
결국 그의 아공간과 주머니에 있는 것은 먼지 밖에 없었다.
운현이 쓴웃음을 짓자 상아는 못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쉰 후 그의 손을 잡았다.
"어쩔 수 없네. 능력없는 남자는 이 능력있는 상아님이 평생 먹여살려줘야지."
세상에 몇 없는 주술사이고, 그 주술사 가운데에서도 탑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운현인만큼 자기 혼자 먹고 살려면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아 역시 알고 있는 일이고.
그런데도 평생 먹여살려주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운현은 붉어진 얼굴로 툴툴대는 상아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디 평생 신세져 볼까...?"
"정말!?"
"그래."
불안해하며 눈치를 살피던 상아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녀가 자신의 품 안에 들려들자 운현은 그녀를 꼭 끌어안아 준 후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평생 놔주지 않을거야."
"평생이라면 고맙군."
"어라? 왜 상아 길드장님만 그렇게 하려는거에요?"
"에? 너희들...?"
운현의 품에 안겨 행복해하던 상아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피식 웃은 후 상아를 놓아주었고 그녀는 운현의 손을 꼬옥 잡은 채 불안한 얼굴로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운현이 구하고자 했던 연인들.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 필레다.
그녀들이 생긋 웃으며 다가오자 상아는 떨떠름히 운현을 보며 물었다.
"나만... 된거 아니었어?"
"세상 일이 그렇게 만만하지만은 않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운현을 향해 상아는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다.
"야이 짜샤!!"
"비겁해요! 상아 길드장!"
"어쩜 이렇게 치사하게... 운현 오빠를 독점하는 건 용서 못해요!"
"이야~ 역시 상아 길드장. 육백년 넘게 살아 온 사람의 치사함은...!"
상아가 운현에게 프로포즈하는 것을 똑똑히 본 그녀들이 화를 내며 다가오자 상아는 움찔하며 식은땀을 흘리다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웃으며 마주하는 운현을 향해 빠득 이를 간 상아는 그의 손을 잡고 뛰었다.
"이런 건 먼저 먹는게 임자다!"
"아앗! 기다려요!"
"이 치사한 엘프!!"
화려한 테라스에 기댄 채 아르토리우스는 상아와 함께 뛰는 운현, 그리고 그들을 쫓기 시작하는 여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과거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상관없다.
운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으니까.
그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아르토리우스에게 불안감따위는 없었다.
"어차피 당신은 저에게 빠지실 거니까요..."
상아?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 그들보다 자신의 매력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을 아는 아르토리우스는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녀가 일어난 순간 가게에 있던 남자들의 얼굴이 멍하니 풀렸다.
"와..."
"진짜 최고다..."
깊게 파인 슬릿 사이로 보이는 하얀 다리를 보며 몇몇 남성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한걸음 한걸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이 넘쳐 흐르는 아르토리우스는 힐끔 바깥을 본 후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긴 하더라도... 제 것에 손을 대려 하는 날파리들이 거슬리지 않는 것은 사실이니까... 적당히 방해하러 가볼까요?"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