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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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으으음..."
천천히 몸을 일으킨 상아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익숙한 방이다.
자느라 눌려 있는 머리를 만지작거린 그녀는 비단으로 만들어진 잠옷을 입은 채 종종걸음으로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아무도 없어?"
"아. 길드장님. 일어나셨어요? 어서 옷 갈아입으셔야죠. 오늘은 윈드씨의 결혼식 날이라구요."
밝게 웃으며 말을 거는 펠리시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느긋하게 하품한 상아는 잠옷을 대충 벗어 놓고 세면대로 향했다.
"...눈물?"
눈이 탱탱 부어 있다.
밤새 울었던 것일까?
얼굴에 나 있는 눈물 자국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아는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몸을 적시며 잠에 취해 있는 머리를 일깨운다.
"음... 무슨 꿈을 꾼건지 모르겠네..."
씻는 도중에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분명히 슬프고 안타까운 꿈을 꾸었는데.
잊어서는, 잃어서는 안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에휴. 나에게 그런 일이 있을리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게는 맞지 않았다.
남자라니.
생길 남자였으면 벌써 생겼을 것이다.
지난 6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로맨스는 커녕 모험가 생활에만 집중해온 자신에게 애인따위 생길리가 있나.
투덜거리며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은 상아가 밖으로 나왔을 때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던 여인들을 발견했다.
"욥."
"아. 길드장님!"
"왜 이제 나와요!"
"빨리 빨리 합시다!"
"진짜 느려 터져서..."
"네, 네녀석들...!"
모험가 길드의 길드 간부들과 길드원들이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며 상아는 인상을 왕창 구겼다.
"너넨 이런 자리에 같이 갈 남자도 없냐..."
"그런 것 따위."
"있을리 없잖아요.'
드문 직업인 화염 마법사인 헤스티아가 시무룩히 말하자 같은 엘프이며 드루이드인 바제트는 더더욱 우울하게 말했다.
그런 그들을 달래는 필레와 미야 역시도 애인따위는 없었다.
"그럼 부케는 내걸로..."
"아앗!?"
"그래도 친구인 제가 받는게 낫지 않을까요?"
모험가가 되기 전 기사였던 필레는 기사 동기였던 윈드의 결혼식에 무척이나 분개해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친구가 꽃길을 걷겠다는데 인정해줘야지.
"이미 사전에 다 얘기해 놨다구요. 부케는 제가 받기로."
"모험가면 모험가답게 먼저 먹는게 임자 아니야?"
몸놀림이라면 지지 않는 미야가 씩 웃으며 말하자 필레의 얼굴이 점점 무표정으로 변해갔다.
진짜 화가 났을때만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미야는 당황하며 손을 휘저었다.
"그렇지만 선약이 있으면 인정해줘야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어휴..."
"야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자. 오늘 결혼식 때문에 퀘스트 깨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고."
각지에 있는 던전과 몬스터 토벌이 주 임무인 모험가인 이상 하루 쉬는 것은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윈드의 결혼식 때문에 원래 예정되어 있던 몬스터 토벌을 빨리 끝내고 돌아 왔던 상아가 말하자 여인들은 투덜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우와~ 날씨 좋다~"
도시의 경비대장이자 시장의 언니인 윈드의 결혼식인만큼 도시는 축제 분위기나 다름없었다.
길가에 즐비한 노점들.
간만에 벌여진 축제에 기뻐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하아... 남자가 이렇게 많은데 내 님은 어디에 있으려나..."
맥빠진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바제트를 향해 상아는 피식 웃었다.
"운명의 상대는 언젠가 나온다!"
"그 언젠가가 벌써 백년이나 지났다구요..."
"난 육백년이 넘었거든?"
"그나저나 진짜 이상하네요. 젊은 저희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상아 길드장님이나 바제트 언니 정도면 충분히 애인이 생길만 하지 않나요?"
"...젊은 저희?"
"네."
당당히 말하는 헤스티아를 보며 상아는 눈쌀을 확 찌푸렸지만 할 말은 없었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남자 운이 없는 상아였다.
아니, 상아 뿐만이 아니다.
헤스티아든 미야든 바제트든 필레든.
모두 매력이 넘치는 여인들인데 정말 신기하게 남자 인연이 없었다.
괜찮다 싶은 남자들은 사이 좋은 정혼자가 있었고 멀쩡하다 싶은 남자들은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을 두었다.
가끔씩 접근하는 남자들은 자신들을 속여먹으려는 사기꾼들이 태반이었다.
"하아..."
한숨을 푹 내쉰 상아는 터덜거리며 시청을 향해 걸었다.
오늘의 식은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다.
윈드는 경비대장이기도 했지만 뛰어난 기사이고 발렌타인 가문의 후계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상대는 무려 세계에서 유명한 카를로스가 아닌가.
잘하면 오늘 인연을 만날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상아는 남몰래 기대감을 품으며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
결혼식이 진행된다.
평생 결혼하지 못할 것 같았던 윈드의 결혼식이 진행되는 것을 보며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윈드와 결혼하는 것은 카를로스다.
카를로스는 엘프이지만 윈드가 어렸을 때부터 그녀와 함께 있었고 늘 볼때마다 잘 어울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카를로스도 그렇고 윈드도 그렇고 서로 결혼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윈드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걸까?
"상아!"
"피스나!"
"여기 있었네. 후후훗..."
제작자 연합의 연합장이자 모험가 길드에 많은 지원을 해주는 드워프 피스나가 평소 입던 작업복이 아닌 드레스를 입고 걸어오는 것을 보며 상아는 환하게 웃었다.
"이럴 때라도 좋으니까 드레스를 입지 그랬어?"
"어라? 요한. 몸은 괜찮은거야?"
"내 몸? 내 몸은 예전부터 멀쩡했는데?"
"우리 요한이 밤에도 대단하다고."
"피, 피스나!"
얼굴이 붉어진 요한이 피스나를 말리려 했지만 피스나는 그저 깔깔 웃을 뿐 이었다.
사이 좋기로 유명한 잉꼬부분인 피스나와 요한이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이 나온 걸까?
"...으. 어제 너무 마셨나보다."
윈드가 결혼한다는 이야기에 짜증이 치밀어 올라서 어제 친한 동료들과 너무 퍼먹은게 문제인가보다.
상아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몸을 돌렸다.
"저건...?"
용병 연맹의 연맹장 아르토리우스가 검은 옷을 입은 채 서 있는 것을 보며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상아는 그녀의 손에 쥐어진 반검을 보고 움찔 몸을 떨었다.
"...저 검은."
아르토리우스의 무기는 저 반검이 아니다.
여기저기 금이 가 있는데다가 보는 것만으로도 흉측해보이는 저 반검을 왜 들고 이런 자리에 온 것일까?
혹시 결혼식을 깽판치러 온걸까?
상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무슨 소리에요?"
"아니. 저기..."
헤스티아의 말에 상아는 아르토리우스가 있던 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어느새 그녀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놀란 상아가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동안 어느새 결혼식은 끝나고 부케를 던지는 때가 왔다.
부케를 받고 싶었던 상아는 동료들과 함께 얼른 자리로 달려갔다.
"행복해야 해!!"
"나한테 줘!"
"그렇게 카를로스씨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더니 결국 하는구나!?"
윈드의 친인척들이 야유를 불렀지만 윈드는 무척이나 행복해보였다.
"자! 그럼 던질게!"
뒤를 돌아 선 윈드가 부케를 던진 순간 부케를 받고자 하는 상아와 바제트, 미야, 헤스티아, 필레는 앞다투어 달렸다.
"으라차!"
힘찬 기합과 함께 점프를 해 부케를 낚아 챈 상아의 모습에 윈드는 피식 웃었다.
분한 얼굴의 다른 여인들이 부케를 바라보는 것을 보며 윈드는 상아에게 다가갔다.
"길드장님도 얼른 결혼하셔야죠."
"그러고 싶긴 한데..."
"후후. 피로연에서 잘 찾아봐요. 가문이랑 왕국에서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하니까요."
"응. 고마워~"
윈드의 배려에 상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그녀를 보며 바제트는 입술을 삐쭉거리며 투덜거렸다.
"진짜... 어제 꿈자리도 뒤숭숭하더니만."
"언니도요? 저도 그랬는데."
"무슨 꿈을 꿨는데?"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되게 슬펐던 것... 같은데."
"...너희들 모두?"
"상아 길드장님도요?"
"이거 뭔가 이상한데... 어제 우리가 마셨던 술에 문제라도 있는 것 아냐?"
애써 웃으며 상아가 말했지만 여인들의 표정은 그리 밝아보이지 않았다.
같은 자리에 있었던 다섯명이 모두 비슷한 느낌의 꿈을 꿨다니.
"전에 갔던 던전에서 저주라도 받은 게 아닌가..."
"끄, 끔찍한 소리 하지 말라구요!"
"저주라니... 으. 싫다."
부르르 몸을 떠는 동료들을 향해 키득거리며 상아는 부케를 소중히 안았다.
"그럼 난 좀 볼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갈게."
"피로연은 참가 안하세요?"
"참가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으음... 그럼 다녀오세요."
"저녁 2차 피로연때는 참가할거니까 내 자리는 맡아둬!"
자꾸만 아르토리우스가 거슬린다.
그녀가 왜 이곳에 온 것일까.
그리고 그 반검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밖으로 나온 그녀는 부케를 든 채 용병 연맹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
말없이 걸으며 어젯밤의 꿈을 떠올린다.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무척이나 슬프고 안타까웠다는 것만 기억날 뿐.
그것을 생각하며 걷던 상아는 멀리 보이는 아르토리우스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뛰었다.
"앗!?"
"이히히힝!!"
골목 사이에서 튀어나온 마차가 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잡지 않았더라면 마차에 치였을것이다.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 했다는 것에 긴장하던 상아는 자신을 잡아 준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푼수같은 건 여전하군. 별 것 아니야. 그럼."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이 가볍게 답하고 걸어가자 상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목소리 같은데.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아르토리우스를 쫓아야 한다.
황급히 길을 건넌 그녀는 아르토리우스가 들어간 골목으로 이동했지만 복잡한 골목 안의 길을 모두 뒤질 수는 없었다.
"하아..."
한숨만 나온다.
"그냥 피로연이나 갈껄..."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한숨을 내쉰 상아는 털레털레 피로연장을 향해 걸어갔다.
"......"
건물의 지붕 위에서 상아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아르토리우스는 입술을 꽉 깨물고 몸을 돌렸다.
정말이지 보는 것만으로 짜증과 분노가 치미는 여자다.
"...쳇."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아르토리우스는 빠르게 몸을 날렸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조금만 더.
정신이 들자마자 그녀는 상황을 파악했다.
이 세계는 바뀌어져 있었다.
그가 원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의 수가 늘어났고 던전이 사라졌으며 파르티 교단 역시도 사라졌다.
"헉...헉..."
겨우 도착한 건물의 옥상 위에서 아르토리우스는 필사적으로 흔적을 찾았다.
그가 사라진 곳이다.
"...운현님."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반검.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공포가 느껴지는 반검이지만 아르토리우스는 그것을 버릴 수 없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운현이 파르티를 죽이기 전 필사적으로 챙긴 그의 반검 덕분인지 바뀌어버린 세상 속에서도 그녀는 운현을 기억할 수 있었다.
"좀 더 많은 흔적... 좀 더 많은 것이 필요해."
신성.
운현이 신이 되었다면 그를 불러오기 위해서 신성을 구해야 한다.
신성을 이용하면 위신체를 만들 수 있고 그 위신체를 통해 운현을 소환한다.
그것만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아아..."
하지만 파르티 교단도, 다난 교단도 이제 이 세상에는 없다.
아니.
신성의 흔적은 오로지 자신 밖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지 않을까?
"아으...으...흑...운현님... 저는... 저는 이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무엇을..."
어쩌면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 반토막 남은 거검 한자루만이 그의 유일한 흔적이지도 모른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절대로... 절대로 그냥 보내지 않을 거에요. 당신을.... 반드시 부를 겁니다."
의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아르토리우스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러지 마라."
"....."
무뚝뚝한 목소리에 아르토리우스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설마?"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 쓴 이의 목소리에 아르토리우스의 몸이 떨렸다.
"...어떻게?"
천천히 로브가 벗겨진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적색의 머리칼.
얼굴 여기저기에 나 있는 작은 상처들.
비쩍 마른 얼굴이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운현의 마력을 받았기에 느껴지는 혼의 기운도.
아르토리우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운...현님?"
비록 수척하고 피곤해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운현이었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운현의 마력은 눈 앞의 상대가 비록 운현과 다른 모습이지만 운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신이 되어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 이 세계는 바뀌어졌다.
악신과 파르티가 사라졌다.
신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다.
던전도, 파르티 교단도, 그리고 다난교단마저도.
천검자라는 이름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남은 흔적은 위신체인 자신과 이 반검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운현이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아르토리우스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마주하며 사내는 쓰게 웃었다.
"보험을 들어두길 잘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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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거였나."
무력하다.
신의 힘을 손에 넣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이게 내 한계란 말인가."
처음 이 세계에 도착했을 때 아무런 힘도 없었다.
그저 무력한 인간에 불과한 자신이었다.
필사적으로 도망쳐서 살아남았을 때 자신을 구해 준 사람들을 떠올렸다.
"헤스티아..."
고블린 한마리도 잡지 못하는 자신과 비교해 너무나도 강했던 그녀.
친구에게 배신당해 사람을 믿지 못하던 자신에게 타인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가르쳐 주었던 그녀.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헤스티아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미야..."
너무나도 굳건한 힘으로 자신을 지켜왔던 그녀.
무력만이 아니라 상냥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던 그녀.
산산히 조각난 몸은 사라지고 머리만 남아 있는 미야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바제트..."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그녀.
자신이 좌절하고 뒤로 물러날 때마다 언제나 지탱해 준 그녀.
독에 중독되어 파랗게 질려있는 바제트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운현은 눈을 감았다.
"필레..."
늘상 웃으며 자신에게 길을 제시해주던 그녀.
사람이 나설 수 있는 용기가 무엇인지 가르쳐 준 그녀.
심장이 파괴되어 그대로 쓰러져 있는 필레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운현은 무릎을 꿇었다.
"상아..."
모험가 길드의 수장으로서 언제나 당당했던 그녀.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순진하고 귀여웠던 그녀.
수많은 몬스터들에게서 자신을 구하느라 완전히 체력이 떨어져 죽어버린 상아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운현은 눈물을 흘렸다.
"또 이렇게 되어버렸어... 또.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이 세계에 도착한 이후 운현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했던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사람을 믿지 못한 자신을 그들은 아껴주고 지켜주었다.
믿음을 주었고 사랑을 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렇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믿지 못했다.
알량한 생각.
쓸데없는 자존심.
그리고 타인을 믿지 않겠다는 거짓된 신념.
그것들 때문에 이들을 상처입혔다.
"......"
그녀들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운현은 천천히 눈물을 닦았다.
"...이대로는 안돼."
이 세계의 잘못된 모습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운명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운명의 끝에는 그녀들의 죽음이 있었다.
"이렇게 멈춰 있을 여유는 없어."
상아가 남겨 둔 마검을 잡았다.
자신의 적은 마력으로는 마검의 마법 조차 제대로 발동시킬 수 없었지만 그녀의 유품을 버릴 수는 없었다.
헤스티아의 브로치, 미야의 귀걸이. 바제트의 활. 필레의 검.
그녀들이 남긴 유품을 들었다.
"운현..."
상처입은 운현을 바라보며 윈드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친구를, 지인을 잃은 자신의 슬픔도 크지만 운현은 그보다 더욱 큰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대로 떠날거야?"
"...응."
이 세계는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
어째서 남자의 수가 극단적으로 적은 것일까?
악신은?
파르티는?
다난교는?
그리고 이 세상에 만연해 있는 신들이라는 존재는?
이 모든 의문을 풀어야 했다.
그리고 물어야 했다.
어째서 그녀들을 죽게 내버려 둔 것이냐고.
그녀들이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왜 그딴 운명을 만든 것이냐고 물어야 했다.
"운명론에 의하면 죽어야 할 사람은 죽기 마련이지. 운명을 알지 못하는 이상 운명과 싸울 방법은 없어."
운현의 싸늘한 말에 윈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넌 약하잖아. 몬스터 하나 제대로 잡을 수 없잖아."
"그렇지."
"그런 네가 어떻게 세계와 싸우려는건데?"
"일단 필요한 것은 운명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거야."
"어쩔 수 없네."
도시의 경비대장 자리에서 물러난 만큼 지금이라면 운현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방법을 알아낸다면 그들을 구할거야?"
"응."
운명에 의해서 죽었다면.
그 운명을 바꿔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살릴 수 있을거야."
헛된 희망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가능성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답하는 운현을 보며 윈드는 눈을 감았다.
운현은 약한 자다.
그렇기에 자신을 지켜주고 사랑해 준 연인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겠지.
그렇기에 그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겠지.
비록 자신이 운현에 대한 감정이 없다 하더라도 그는 친구의 연인이다.
그가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야?"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그럼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그게 누군데?"
"운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 제일 처음 만나야 할 것은 하우드다."
"하우드? 그 자살을 반복하고 있다는 하이엘프를 말하는거야?"
"응."
하우드 역시 운명을 바꾸고자 매일 자살시도를 한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운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배워야 한다.
운명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만 그것과 싸울 수 있다.
"함께 하지. 돕겠다."
"...고마워."
"별 말씀을."
윈드와 함께 한 여행은 힘겨웠다.
연인들과 함께 한 파티에서도 무력하기 그지 없는 그였다.
할 수 있는 것은 짐을 들어주는 것과 상인들과 거래를 하는 정도.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던 운현을 데리고 다니면서도 윈드는 단 한번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년여를 여행한 끝에 그들은 하이엘프의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야."
"...그동안 고생 많았어."
힘겨운 여행이었다.
상인들은 어떻게든 등쳐먹고자 했고 윈드와 자신을 노예로 팔아먹기 위한 사기꾼들은 넘쳐났다.
아무런 힘도 없는 운현을 데리고 그들과 싸워야 했던 윈드는 많은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몸은 괜찮아?"
"이정도는."
쓰게 웃으며 윈드는 고개를 저었다.
하이 엘프의 숲에 들어오기 위해 싸운 고스트가 빙의된 흔적은 아직도 윈드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가끔씩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는게 문제긴 하지만."
"그거 심각한 거 아니야?"
"괜찮아."
고스트에게 빙의당하면 정신과 마음이 마모된다.
간신히 운현의 기책으로 고스트에게서 풀려나긴 했지만 윈드의 정신은 상당히 파괴된 상태였다.
그저 운현을 하이엘프의 숲에 데려다 주어야 한다는 사명. 그리고 죽어버린 친구를 살려야한다는 욕망이 그녀를 움직이게 하고 있을 뿐 이었다.
"...사실은 심각해. 지금도 계속 모두를 증오하고 있어."
"....."
"고스트는 언데드야. 언데드는 산자를 증오하지."
힘겹게 말하며 윈드는 고개를 다시 몇번이나 저었다.
끓어오르는 살기를 감출 수 없었던 윈드는 황급히 자신의 검을 꺼내어 운현에게 건네주었다.
"받아. 이걸 내가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너."
"가. 운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진가 보네."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어 고통을 만들어내 정신을 차리려고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인 것 같다.
"내가 완전히 미쳐버리기 전에... 날 죽여주든가. 아니면 빨리 가든가."
"...미안하다."
윈드를 구할 방법은 없었다.
운현은 사제도 아니었고 사제라 하더라도 윈드를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운현은 눈을 감았다.
"...날 위해서."
"널 위해서가 아니야. 날 위해서지."
쓰게 웃으며 윈드는 운현을 향해 말하고 몸을 돌렸다.
"이대로 있다간 완전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는데... 이거 위험해. 운현. 하이엘프의 숲에는 너 혼자 들어갈 수 밖에 없겠어."
"같이 가자. 하우드라면 뭔가 방법을 알지도 몰라."
"그 전에 내가 널 죽일지도 몰라."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한 윈드는 몸을 돌리고 운현에게서 멀어지며 힘겹게 말했다.
"부디 그들을 구해줘. 운명을 바꿔줘."
말을 마친 윈드가 멀어졌다.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져버린 윈드의 뒷모습을 보며 운현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필레의 검과 비슷한 모양인 윈드의 검.
두자루의 검을 내려다보며 운현은 질끈 눈을 감고 하이엘프의 숲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이엘프의 숲 안으로 들어간 운현은 오두막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백금발의 미청년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운현에게 다가가 인사했고 그 인사에 운현은 당혹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기다리고... 있었다니?"
"운명에 의해서 고통받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운현! 운현입니다! 당신이 하우드야!? 운명을 바꾸려고 하는 그!?"
"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하우드는 긴장이 풀려 허물어진 운현을 잡아주었다.
긴 여행으로 지친 몸.
그리고 윈드의 희생 때문에 정신적 한계에 도달했던 운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우드의 앞에 엎드렸다.
"제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줘!"
"운명을 바꾼다... 왜 바꿉니까?"
"그들을 구해야해. 운명을 바꾸면 그들이 되살아날..."
"그럴 수 없습니다."
"뭐...?"
하우드의 말에 운현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 자살을 한다는 하우드의 얼굴은 냉정하기 그지 없었다.
"운명을 바꿔봤자 그들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제가 벌써 했겠지요."
"...그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다시 해야 합니다. 방법이 잘못되었고 시작이 잘못되었습니다."
"다시 한다니!? 그게 무슨...!"
"운현."
"....."
"운명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운명론에 대해서는..."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말씀드리지요. 이계인인 당신은 이 세계의 운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운명에 엮여 있습니다. 그 운명의 수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죽거나 살거나. 그 모든 것은 정해진 운명의 수 안에서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허나 당신은 다릅니다."
"......"
"이계인. 이계의 존재. 운현. 당신은 이 세계의 운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지요. 그렇기에 운명의 법칙에서 어긋나 있습니다."
"......"
"당신이 죽으면 세계는 당신에게 반응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황하겠지요. 당신은 원래 이 세계에서 존재해서는 안되는 자이니까. 그렇기에 세계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처음으로 되돌릴 것입니다. 당신이 이 세계에 왔던 때로."
"그건 왜...?"
"다시 하며 당신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세계가 파악하기 위해서."
"그 말은... 나라는 버그를 잡기 위해서 세계가 계속 디버깅을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그건 당신의 세계의 말입니까?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만... 틀리지는 않은 것 같군요. 당신은 이 세계라는 거대한 법칙 안에 출몰한 작은 오류입니다."
"...잠깐만. 그럼 내가 이 세계에 온 이유는 뭔데?"
"당신이 이 세계에 온 이유요..."
하우드는 난처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저와 파르티가 당신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뭐?"
예상하지 못한 말에 운현은 당황했다.
그런 그를 보며 하우드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악신에 대해서는 알고 계십니까?"
"그... 파르티와 싸워 봉인되었다는..."
"대충이나마 알고 계시는군요. 네. 저는 봉인당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이 하이엘프의 숲에서 벗어날 수 없지요. 그리고 누구와도 만날 수 없지요. 아니... 원래대로라면 그 누구도 들어 올 수 없는 곳이 이 하이엘프의 숲입니다."
"....."
"운명을 바꾸기 위해 자살을 하는 하이엘프라는 소문을 낸 것도 저입니다. 파르티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데리고 있듯이 저 역시 저를 따르는 추종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소문을 내게 만들었지요. 매일같이 자살을 하며 운명을 바꾸려고 하는 것. 그것이 알려지면 운명이 바뀌길 원하는 자는 반드시 저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리고 이 세계의 운명을 지닌 자는 이곳에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그리 된다면... 이곳에 들어 올 수 있는 자는 이 세계의 운명에 속하지 않았으면서 운명을 바꾸고 싶어하는 자가 되지요."
"그럼... 나는 왜...?"
"아아... 파르티와의 싸움 이후 운명이 크게 뒤틀려졌습니다. 그 때문에 세계의 법칙이 흔들렸고 그로 인해 당신들이 이 세계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당신 들?"
"당신 외에도 한명 있기는 했습니다만... 그녀는 모든 것에 절망을 느끼고 포기해버렸지요."
쓴웃음을 지은 하우드는 잠시 침묵한 후 입을 열었다.
"당신은 포기하지 않을 건가요?"
"물론...! 그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저를 죽이세요."
"...뭐?"
"저를 죽이고 신성을 얻어야 합니다. 반쪽짜리 신성이나마 가지고 있다면 알트리아에 진입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곳에서 세 여신에게 회귀를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하우드는 알트리아의 위치를 말해주었다.
그것을 들은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우드는 말없이 눈을 감았고 운현은 망설이지 않았다.
414====================
에필로그
"왜지? 왜? 왜!?"
수백번의 회귀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방법은 달라도 그들은 항상 죽었다.
회귀를 반복하며 힘을 얻어도 그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어째서냐!! 대답해! 하우드!"
"그건 당신에게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는...?"
하우드의 옆에 서 있는 여인을 보며 운현은 의아해했다.
수백번의 회귀를 거치며 하우드와 수련을 해 힘을 얻었지만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들어 올 수 없다 했던 하이 엘프의 숲에 등장한 파르티 교단의 사제를 운현이 가리키자 그녀는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군요. 드디어 만나게 되었습니다. 운현."
"...너는."
"저는 파르티. 이 세계의 주신입니다. 이 여자는 제 신성을 받은 존재이지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군. 대답해. 왜 계속 실패하는 것이지? 그들을 구했다. 그들의 죽음을 막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들이 죽는거냐."
분노한 운현을 보며 파르티는 한숨을 내쉬었다.
"회귀를 반복하며 세계가 당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뭐?"
"당신이라는 이물질을 이 세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그 말은."
"당신이 이계인이 아닌 이 세계의 존재가 되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당신을 눈치채게 된 것이구요."
파르티의 말을 받으며 하우드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미안합니다. 제 가설이 실패한 것 같군요."
"미안하다고?"
수백번이나 그녀들의 죽음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고통과 괴로움, 무력감에 이를 갈 수 밖에 없었던 자신에게 그저 실패라고?
운현에게서 피어오르는 증오와 분노에 하우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장난하냐? 지금?"
"...죄송합니다."
"그만하세요. 운현. 하우드의 방법은 틀린 것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당신의 힘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내 힘이 약했다고? 그게 무슨 소린데."
"개미가 아무리 강해져봤자 호랑이를 이길 수는 없지요. 지금 당신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이 세계의 법칙입니다. 결코 바뀌지 못하는 법칙을 당신 정도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어요."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뭔데?"
파르티의 말에 이를 갈며 운현이 쏘아붙이듯 말하자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의 힘이 약하면 힘을 강하게 하면 그만이지요."
"...그게 무슨 소리지?"
"하우드가 준 반쪽짜리 신성으로 회귀라는 이 세계의 법칙과 어긋난 수를 쓸 수 있는 당신입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신성을 보유한 당신이라면?"
"....."
"당신에게 허용된 힘 이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신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 신성을 보유한 이의 처녀성을 빼앗는 것과 죽이는 것입니다. 하우드와 당신의 성별은 같으니 처녀성을 빼앗는 것은 무리겠지요. 그러니..."
파르티는 천천히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벗었다.
"이 여자에게 나눠 준 제 신성을 가져가십시요. 그리고 그것으로 힘을 얻으십시요."
"하지만 이미 늦었다면서? 나는 이 세계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면서? 이제 의미없는 일이 된 것 아닌가?"
운현의 싸늘한 말에 파르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미없는 일이 되었다면 의미가 있는 일이 되게 하면 그만이지요. 당신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알트리아를 통해 회귀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의 죽음은 다시 규격 외의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 세계는 당신이라는 이물질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당신이 없는 사이 파르티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운현. 당신의 힘은 미약합니다. 너무나 미약해서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니 당신은 이 세계의 힘이 아닌 당신만의 힘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뭐지?"
"그것은 당신이 생각할 일이지요. 저희들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저희들의 조언은 이 세계의 것. 당신만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얻어내세요."
하우드의 말에 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들이 가진 신성을 이용해서 힘을 만들어내라?
운현은 파르티의 나신을 바라보았다.
"...잠깐만."
"뭡니까?"
"너희들은 신이라고 했지. 그런데 어째서 이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거지?"
"정확하게는 저희의 간섭이라고 할 수 없지요. 파르티는 실체를 가지지 못해 다른 이들에게 신성을 주며 그것으로 움직이게 할 뿐이고 저는 이 하이엘프의 숲 외에는 나갈 수 없습니다."
"신성을 이용하면 가능한 것 아닌가?"
"글쎄요.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지 시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동안 회귀를 반복하며 나도 놀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야. 일단 파르티."
"네."
"널 안아야겟다. 신성이 필요해."
수백번의 회귀를 경험하며 그녀들을 구하기 위해 많은 비술들을 익혔다.
그것을 생각하며 운현은 파르티를 끌고 가 그녀를 안아 신성을 얻어냈다.
운현에게 안겼던 파르티가 주섬주섬 옷을 입으려 하자 운현은 그녀가 옷을 입는 것을 막았다.
"이 여자의 끝은 어떻게 되지?"
"이미 죽은 자의 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여자의 운명은 끝났어요. 잠시 제가 데리고 있을 뿐이지요."
파르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신성과 비법을 떠올렸다.
그녀들의 죽음을 막는 것이 아닌, 죽음 이후에 되살리기 위한 방법을 위해 금지된 비법들을 연구했었던 운현은 흥미롭게 지켜보는 하우드의 시선을 받으며 파르티를 눕혔다.
"뭘 하려는 겁니까?"
"잠깐 기다려봐."
파르티를 눕히고 그녀의 가슴에 손을 올린 후 운현은 주문을 외웠다.
그의 주문에 의해 몰려들기 시작한 막대한 불사의 기운에 파르티는 당황했다.
"뭘 하려는 겁니까!"
"모여라. 뭉쳐라. 흩어져라. 그리하여 그곳에서 남겨져 있는 자의 운명을 되돌려라."
"이건 언데드를 만드는...!"
"신성한 힘과 더불어 그 뜻은 이곳에서 되살아날지니."
"큭...!"
파르티는 운현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불사의 기운은 파르티의 몸을 완전히 억누르고 있었다.
세계의 법칙에 어긋나는 금지된 비술이 시행되는 것에 고통스러워하며 파르티는 몸부림을 쳤지만 운현의 비술은 거의 끝난 상태였다.
"아으윽!!"
신성이 빠져나간다.
완성되어 있는 완전한 신성이 파르티의 몸에 쏟아져 내려간 순간 운현은 그녀의 가슴에서 손을 떼었다.
"...어때?"
"윽...으윽... 이건... 도대체..."
"어떻게... 한겁니까?"
"신을 육체에 가둬두었어. 언데드를 만드는 비술 중에 이런 것이 있더군. 법칙을 거스르고 죽은 자를 움직이게 한다. 그 안에 혼을 넣었고 원래 넣어야 할 타인의 운명 대신 신성을 넣었어."
"호오... 이거 신기하군요. 그러니까 이건..."
당황하며 자신의 몸을 만지작거리는 파르티를 보며 하우드는 흥미로운 듯 말했다.
"파르티. 기분이 어떻습니까? 육체를 가진 기분이...?"
"...이상해. 하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파르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것이 아니야. 하지만 나와 같군. 내 신체는 여전히 봉인되어 있지만 이 육체를 통해서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겠어."
"애초에 법칙을 어기고 다니는 사람이기에 만들 수 있는 것이군요. 운현. 한번 더 가능합니까?"
"불가능해. 신성이 없어."
"신성이라면 내가 줄 수 있어."
"그랬다간 본말 전도지. 네가 들어 올 수 있는 육체를 만들어 놓았는데 널 죽이면 다시 만들어야 해. 그리고 그 몸은 처녀성을 잃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신성은 반쪽 뿐이야."
"그렇다면 저를 안으면 되지 않습니까!"
"청년막 관통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여기까지니까."
"뭐...라구요?"
"하우드. 내가 회귀를 한 이후에도 그 전의 기억은 가지고 있겠지?"
"예."
"그럼 네가 할 일이 있다. 너의 추종자들을 움직여 회귀를 한 이후에 날 찾아. 그리고 파르티. 만약 내가 회귀를 한 이후에도 기억이 남아 있다면 이곳으로 와라."
"뭘 할 생각인가요?"
"지금 제일 큰 문제는 내가 이 세계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거야. 그렇다면 모든 힘을 포기하고 다시 하는 수 밖에."
"....."
"만약 이것이 성공한다면... 다시 시작한다"
눈을 빛내며 그가 말하자 하우드와 파르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내가 가진 모든 비술과 비법에 대한 것을 정리해야겠군. 다시 얻으려면 그것도 한세월이니."
수백번의 회귀를 겪으며 간신히 완성해낸 것들이다.
그것을 버릴 수는 없었다.
운현이 말을 마치자 파르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렇다면 책이 필요하겠군요."
"그래. 빈 책과 잉크, 그 외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해와라.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으니까."
"알겠어요."
가짜 육체를 손에 넣은 파르티가 하이엘프의 숲 밖으로 나가자 하우드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팔짱을 끼고 심각한 얼굴로 생각을 하는 그를 보며 하우드는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아니. 좀 많이 바뀌신 것 같아서..."
처음의 운현은 무력하고 힘없는 보통 사람이었다.
하지만 수백번의 회귀를 거친 운현은 달랐다.
무엇이든 객관적으로.
고통과 슬픔이 있더라도 그것을 분석할 줄 알았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그를 향해 하우드가 걱정스레 묻자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싸늘히 말했다.
"바뀌지 않으면? 그 멍청하고 무력하고 한심한 상태 그대로 있어서 그녀들을 어떻게 구하라는 건데? 난 바뀔 거다. 그녀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비법과 비술에 대한 정리를 끝낸 운현은 하우드의 집에 그것들을 모두 쑤셔 넣었다.
어떤 것은 해보았고 어떤 것은 검증을 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이 모든 것을 정리한 후에야 운현은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 내가 회귀를 하면 하우드는 추종자를 이용해서 나를 찾아. 모든 기억을 잃은 나는 아마 그 동굴에서 시작할거다. 그리고 전과 같이 그녀들을 만나게 되겠지. 그리고... 윈드와 함께 이곳으로 올 것이고. 그리 된다면 넌 나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고 이것들을 보여줘. 그리고 파르티. 너는 네 추종자들을 이용해서 너의 것 이외의 신을 찾아. 그리고 그들의 신성을 빼앗아라."
"제 추종자라고 해봤자..."
"네가 쓸 수 있는 너의 신성을 이용해. 파르티 교단과 다난 교단. 그 둘이 너의 추종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을 적절히 이용해."
"...."
"조사한 바로 파르티 교단 외의 다른 작은 교단들도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신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들었어. 다난교 이용하든 파르티 교단을 이용하든 상관없어. 신성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놔. 내가 만들어 놓은 비법 중에는 신성을 모을 수 있게 하기 위한 연구 자료가 있으니까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저희가 당신의 명령을 받는 것 같죠? 저희는 신인데."
"신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운명 앞에선 무력한 건 마찬가지 아닌가? 하우드. 파르티. 너희 둘 모두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아니야?"
"그거야 그렇긴 합니다만."
"......"
"우리의 목적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고. 파르티, 그리고 하우드. 너희들은 신의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겠지."
"네."
"그래요."
"그리고 난 그녀들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적은 같아. 그러니..."
"...."
"군소리 말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싸늘한 그의 말에 파르티와 하우드는 자신들의 눈 앞에 있는 것이 한낱 인간이라는 것 조차도 잊을 뻔 했다.
무저갱과 같이 깊은 그의 시선에 질린 그들이 고개를 돌리자 운현은 단검을 쥐고 말했다.
"만약 실패하면... 개망이겠군."
알트리아에서 세 여신의 도움을 받지 않은 상태로 회귀를 하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세계의 불순물이 되는 것이다. 만약 생각한 것처럼 일이 풀리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리지만 이 방법 밖에 없었다.
"제길. 알고는 있지만..."
투덜거리듯 중얼거린 운현은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베었다.
415====================
에필로그
"아...아아아... 어째서... 왜 이렇게 되어버린거야..."
상아가 몬스터들에게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나섰고 그들에 의해 갈갈히 찢겨 죽은 것을 보며 운현은 절망했다.
왜 나는 힘이 없는 것일까.
어째서 이렇게 무력한 것일까.
이럴 것이라면 차라리... 차라리 아무도 믿지 말고 아무도 사랑하지 말것을.
눈물을 쏟으며 엎드려 있는 운현에게 한마리 오우거가 걸어왔다
커다란 덩치의 오우거가 침을 흘리며 몽둥이를 드는 것을 보며 운현은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헤스티아도, 미야도, 바제트도, 필레도, 상아도.
모두가 죽어버린 이 세계에 미련 따위는 없었다.
"차라리... 죽을까...?"
예전에 얻었던 독약을 손에 쥔 채 운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그의 자결도 허락하지 않았다.
절망하던 운현을 비웃듯 내려다보던 오우거가 몽둥이를 든 순간 오우거의 머리에서 화살이 솟아났다.
그것을 시작으로 오우거의 팔이 잘려나가고 주변의 몬스터들이 학살당한다.
고작 열명의 엘프들에 의해서.
"......."
"당신이 운현입니까."
"...당신은 누굽니까."
강한 자다.
상아조차 감당할 수 없었던 저 몬스터들을 쓸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여인을 보며 운현이 울먹거리며 묻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는 제니스라고 합니다.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십니다."
"제니스...?"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제니스는 고개를 끄덕인 후 뒤에 서 있는 엘프들에게 손짓했다.
그녀의 신호를 받은 엘프들은 운현을 잡아 들고 걸어 마차에 넣었다.
마차를 타고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물도 간신히 먹어 생명만 유지되고 있는 정도로 겨우 버티던 운현을 제니스는 마차에서 끌어내린 후 하이엘프의 숲 입구로 데리고 갔다.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그곳에서 제니스는 운현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
"당신을 만나길 원하는 분이 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상관없어. 난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다른 누군가와 연관되고 싶지 않다.
자신에게 이제 더 이상 살아간다는 것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초췌한 그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던 제니스는 그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왜?"
"바꾸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꾸기 위해서."
"뭐...?"
멍청히 자신을 바라보는 운현을 향해 한숨을 내쉰 제니스는 그를 숲 속으로 밀어 넣었다.
제니스에 의해서 안으로 들어가게 된 운현은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바꾼다.
모든 것을 바꾼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힘없이 터벅거리며 걸어 숲 끝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한 남자와 파르티 교단의 복장을 한 여인을 발견했다.
"당신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운현."
"어서 들어오십시요."
"당신들은... 누구야."
"기억을 모두 잃었군요. 파르티. 어떻습니까?"
"...완벽해. 세계는 그를 불순물로 인식하고 있어. 지금의 그라면 가능해."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거야..."
"일단 이것을 보시지요."
담담한 어조로 말한 그는 한통의 편지를 운현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천천히 읽던 운현의 눈이 커지자 사내는 담담히 말했다.
"당신이 말한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파르티. 신성은 얼마나 모았죠?"
"여섯의 신성을 모았어. 그리고 신성을 모아 둘 수 있는 성배도 만들었고."
"...이게... 진짜야?"
"당신의 필체입니다. 그리고 당신만이 아는 것을 적어놨습니다. 당신의 과거. 그 모든 것을."
편지를 다시 한번 읽으며 운현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게 진짜라면 어째서?
"왜... 회귀를 했는데 이것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지?"
"그것은 제 영향입니다. 이 숲은 제 영역입니다. 일종의 이세계라고 볼 수 있지요. 이곳만큼은 파르티도, 그리고 이 세계의 법칙도 적용받지 않습니다."
"그럼! 그녀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면!?"
"그건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들어 올 수조차 없어요. 이계인인 당신. 그리고 가짜 신체. 저희들은 위신체라고 이름지었습니다만... 그것처럼 법칙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합니다."
"...그럼... 그럼..."
"당신의 계획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자. 이것을 받으세요."
"이게... 뭐지?"
"당신이 모아놓으라 말한 신성입니다. 몬스터, 그리고 각지의 작은 교단을 멸절시켜 그들이 따르는 신에게서 신성을 빼앗았습니다."
황금색 잔을 내민 파르티의 눈을 마주하며 운현은 그 잔을 받았다.
"당신이 말하길 당신을 데려 오면 이 오두막 안으로 들여보내라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당신은 힘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럼."
"...내가 왜 그 말을 믿어야 하지?"
"믿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결국 반복을 할테니까요."
이것만큼은 하우드도, 파르티도 간섭할 수 없었다.
운현이 스스로 하지 않으면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운현은 눈을 감았다.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는 그녀들의 죽음.
그리고 자신의 무력감.
그 모든 것에 절망할 수 밖에 없던 자신.
"여기로 들어가면 된다는 건가?"
"네."
"...알았어."
하우드의 오두막에 들어간 운현은 오두막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자료들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수백번의 회귀를 통해 얻은 자신의 지식.
기억에는 없는, 자신이 절치부심하며 모아 놓은 세계의 비밀.
그리고 금지된 비법들.
그것들이 모여 있는 곳에 선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들을 살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하겠어."
개중에는 소지한 것만으로도 국가 공적으로 낙인 받을 만한 지식도 있었고 개중에는 한권을 차지하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지배할 수 있을 힘을 가질만한 지식도 있었다.
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시간과 공간의 비법 뿐만 아니라 언데드를 만드는 방법 등 많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서도 죽은 자를 온전히 살리는 법에 대한 것은 없었다.
운현은 그것에 실망하는 대신 오두막에 있는 모든 비법을 가리지 않고 모두 읽고 읽혔다.
분명히 처음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익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운현은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것을 빠르게 받아들여나갔다.
그렇게 일년이 지나고 운현이 오두막에서 나왔을 때 하우드는 담담한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다음 계획은?"
"........"
하우드의 말에 운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하우드가 무언가 말을 꺼내기 전에 운현은 그에게 손을 뻗었다.
"일단 당신을 위신체로 만들 필요가 있어."
"원하던 바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도 필요해."
"그게 뭡니까?"
"많은 것이 필요해. 많은 것이. 그리고 실험도..."
"......"
"정리하자. 하우드. 당신은 신의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야."
"저는... 신의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 여자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게 누구지?"
"...제니스. 언제나 절 따라준 여인."
"그 여자인가. 좋아. 그리고 파르티. 당신은?"
"하우드가 신이 되어버리며 만들어진 균열을 되돌리고 싶어."
"악신의 저주로 인해 남자의 수가 줄어들어버린 것을 말하는 건가. 좋아. 그리고?"
"그리고... 신의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좋아. 그럼 계획을 이어나간다. 첫번째 필요한 것... 당신들이 신의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것을 대신해야 할 자가 필요해."
"대신...? "
"그래."
"어찌 해야 합니까?"
"일단 힘을 최대한 깍아야겠지. 하우드. 너는 신이지만 운명에 속해 있는 존재다.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운명의 바깥에 있는 자에게 죽을 필요가 있어."
"그것은 위신체도 가능한 겁니까? 그럼 파르티가."
"아니. 파르티로는 부족할거야. 그리고 파르티 역시도 마찬가지. 지금의 파르티는 위신체에 묶여 있는 존재야. 아마 나 이외에는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없을것이고."
"위신체라고 하지만 이 세계에서 만들어진 존재 아닌가요? 그녀의 원래 육체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야. 제일 큰 문제는 너희들이 너무 강하다는 거야. 너무 강력해서 세계조차 함부로 없앨 수 없어. 아무리 죽여도 다시 되살아날거다. 내가 회귀하는 것처럼 말이지."
"그럼... 저의 소망은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까?"
"....."
"아니. 그건 아니야. 첫번째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거야. 위신체로 너를 끌어낸다. 그리고 네가 가진 신의 힘을 소모시킬 필요가 있어."
"...그걸 어떻게...?"
"던전을 만든다. 그리고 그 던전을 다른 이들이 탐험하게 만들어서 너의 힘을 깍아먹게 만든다."
"무슨 소립니까?"
"이 하이엘프의 숲을 넓힐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경계가 애매해져서 이 세계에 속하게 될겁니다."
"그리 되면 드나드는 것 자체가 힘들어지지는 않겠군. 네 힘을 기반으로 던전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을거야. 네가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몬스터로 하고 재생하게 만들며 그 힘을 소모하게 해라. 불가능하지는 않을거다."
"이건... 시간의 비법!? 하지만 이걸 썼다간 세계가 어그러질텐데!?"
"차라리 없어지길 바라는 세계다. 우리가 하려는 짓은 이 세계의 운명 자체를 바꾸려는 것이야. 고작 과거 따위 바꾸는게 뭐가 두렵나?"
표지가 없는 한권의 책을 하우드에게 던진 운현은 그가 그것을 받아 읽으며 기겁하자 바로 파르티에게 시선을 돌렸다.
"파르티. 너도 할 일이 있다."
"뭐지?"
"교단의 힘을 최대한 넓혀라. 파르티 교단의 영향력이 세계에 닿을 정도가 되면 된다. 그리고 이 위신체는 그 파르티 교단에 대항하는 교단의 상징으로 움직여라."
"그건 왜?"
"필요하니까. 나중에 설명하지."
둘에게 명령을 내린 운현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성배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비술을 시행했다.
신 외에는 할 수 없는 막강한 비법.
공간의 비법이 가동되자 운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필요한 것은 네가지. 내 현재의 상황을 기록하기 위한 로그. 그리고 힘을 저장할 법칙. 물건들을 받아들일 인벤토리. 마지막으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지도.'
자신에게 거는 비술이다.
비록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는 했지만 과거의 자신은 모든 준비를 해 놓은 상태였기에 운현은 겁먹지 않았다.
"우우우웅!!"
운현의 몸 주변으로 신성한 빛이 뿜어져 나오자 파르티와 하우드는 긴장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의 몸이 번쩍이다가 그 빛이 사그라들자 하우드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힘을 저장하기 위한 스테이터스창이 눈 앞에 보였고 바닥에서 주운 돌멩이가 인벤토리 안으로 사라졌으며 현재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맵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로그가 보였다.
"남은 신성은 둘. 둘로는 위신체를 만들어야겠군. 하우드."
"네."
"널 위신체로 만들겠다. 신과 떨어트린다 하더라도 본질은 신이기에 그 신의 힘을 이용하여 던전을 만드는 것은 위신체가 되어서도 할 수 있어. 다만..."
"뭡니까?"
"위신체가 되어 던전을 만들고 나면 너는 신의 힘을 대부분 사용하지 못하게 될거다. 그래도 괜찮나?"
"상관없습니다."
냉정한 운현의 말에도 하우드는 두려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힘을 잃는 것?
오히려 바라는 일이다.
그가 동의하자 운현은 하우드의 몸을 눕힌 후 검을 들었다.
"그럼..."
"잠깐만!"
"뭐냐."
"나는 이 여자의 몸에 빙의된 상태였는데... 하우드의 몸은 자신의 것이야. 만약 저 자가 위신체가 되어 신의 힘을 잃게 되면 이 공간은 어찌 되는 것이지?"
"그건 문제없어."
"...."
"아마도."
"불안해 죽겠네."
"위험 없이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지. 내 계산대로라면 괜찮을거다."
단검을 든 운현은 하우드의 심장에 단검을 냅다 내리 꽂았다.
그 충격에 하우드의 눈쌀이 찌푸려지자 운현은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린 후 나지막히 주문을 외웠다.
신성을 쏟아붓고 그의 몸을 위신체로 만든 운현은 하우드의 몸이 위신체로 변하자 차분히 말했다.
"지금의 너는 하우드이지만 하우드가 아니게 되었다."
"...그런 것 같군요. 파르티와는 다른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그래. 네가 살아 있는 한 악신. 즉 너의 본체은 이 세계에서 의식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렇군요. 같은 존재이기에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건가요?"
"이해가 빨라 좋군. 자... 나머지는 나다."
"...예?"
"미안하지만 한번 더 부탁한다. 하우드, 파르티."
"뭘... 하려는 거에요?"
"내 몸을 위신체로 만들 생각이다."
"그게 가능해요!?"
"불가능하지는 않아. 결국은 복제를 만드는 것이니까..."
"그건 왜요?"
"해야 할 일이 있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의 말에 파르티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하우드는 담담히 수긍했다.
"이미 수천, 수만년 동안 신의 자리에서 벗어나기만을 기다렸는데 한번 더가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하하하... 좋아. 그럼 간다."
주머니에서 꺼낸 독약을 손에 넣은 운현은 그것을 입에 머금고 자신의 몸에 비술을 걸었다.
이 독약이 온 몸에 퍼지게 된다면 운현 자신은 죽게 될 것이고 그 육체는 남아 있는 운현의 혼으로 위신체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며 운현은 눈을 감았다.
416====================
에필로그
"......"
"여기까지가 당신이 지금까지 했던 일입니다."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한 시체를 내려다보며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남긴 편지.
그리고 하우드.
마지막으로 자신이 볼 수 있는 스탯창과 인벤토리, 로그, 맵.
그것들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성은 얼마나 모았지?"
"고작 세개 뿐..."
머뭇거리며 파르티가 작게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셋이면 충분하다.
"일단 내놔."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계획을 말해 줄 수는 없어?"
파르티의 날선 말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자신이 남긴 비술, 그리고 자신의 혼을 공유하고 있는 위신체.
이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단 이것부터 해야겠군. 그나저나 던전은 제대로 만들어진건가?"
쓸데없이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없다.
그렇다면 빠르게 움직이는 수 밖에.
운현이 싸늘한 어조로 말하자 하우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말한대로 제 운명을 사용해서 몬스터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계를 만들었고..."
"그 연결은?"
"알트리아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됐어. 몇가지를 추가하자고."
"몇가지를요?"
"응."
고개를 끄덕이고 운현은 신성이 담겨 있는 성배를 시체의 손에 쥐어주었다.
만약 생각대로만 된다면 던전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운현이 모든 준비를 끝내고 비술을 시전하자 허공에 균열이 생겼다.
"세상에... 시간의 틈?"
"몇백년 전으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비술이 성공하여 과거가 바뀌어서 악신이 던전화되었다면 내 계획도 한단계씩 더 진행되겠지."
시간의 틈을 보며 운현은 망설임없이 자신의 위신체를 집어 던졌다.
언제로 갈지도 모르는 시간의 틈으로 위신체를 보내버리는 그의 행동에 하우드와 파르티는 경악했다.
잘못하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고 현재의 역사가 바뀔지도 몰랐다.
그것도 지금 저 안에 들어간 것은 다른 자도 아닌 온갖 종류의 비술을 전부 익힌 운현의 위신체다.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우드의 말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걱정?"
자신이 남긴 편지를 불태운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싸늘히 말했다.
"내 계획이 잘 이루어지기나 걱정하라고.. 파르티."
"음?"
"따라와."
"난 왜..."
"신성이 필요해. 처녀성은 유지되고 있나?"
운현이 회귀를 겪으며 되돌아 간 탓인지 기억은 유지되었지만 육체는 변해버렸다.
그에게 신성을 주기 위해 처녀성을 잃었던 파르티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그녀의 옷을 벗겨나갔다.
"한다."
빠르게 파르티를 범하고 그녀에게서 신성을 갈취한 운현은 반쪽의 신성을 가지고 하이엘프의 숲을 나갔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파르티는 떨떠름히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우리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았다. 그렇다면 거기까지만 하면 되는 것이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파르티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우리는 이용만 당하는 것이 아닐까? 너도 봤잖아. 그는 이 세계를 위험하게 만드는 모든 종류의 비술을 알고 있어."
"그렇군. 그래서?"
"그래서라니? 만약 그가 다른 마음을 먹기라도 한다면?"
"나에게 있어서는 상관없어. 어차피 운현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신의 힘이 필요할테니까."
운현이 원하는 것은 그가 사랑하는 연인들이 죽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운명에 속해있지 않은 그라고 하더라도 그가 그들을 살리려면 운명을 바꿔야 한다.
단순한 인간에 불과한 그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단편적인 운명의 흐름 뿐.
제대로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신이 되는 것이 필수조건이었다.
신의 자리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하우드는 큰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파르티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나도 신의 자리에서 벗어나길 원하지만 그래도 운명이 크게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건 욕심이지."
하우드의 비웃음 섞인 말에 파르티는 씩 웃었다.
"아무튼 난 이 위신체가 있으니... 나 역시 그 비술을 쓸 수 있지."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넌 보고만 있으라고. 내가 좀 더 많은 것을 해 놓을테니까. 모든 것을 인간 하나에게 맡겨만 두기에는 불안해. 보험을 들어놔야겠어."
'...성공이다.'
파르티를 안으며 운현은 자신의 눈 앞에 떠오른 메시지창을 확인했다.
파르티나 하우드가 모르게 자신의 위신체에 운현은 몇가지 조작을 해놓았었다.
성욕이 사라진 순간 모든 남자들이 가지는 현자 타임.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그 시기에 자신의 위신체와 기억, 감정을 공유할 수 있도록 링크를 걸어 둔 것이다.
"링크는 제대로 되어 있군. 그럼 어느 쪽에서 접속할지를 결정하면 되는 건가."
주고 받는 것을 어찌 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었다.
어쨌든 그 위신체 역시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이를 드러내었다.
"중요한 것은 그 자식이 얼마나 잘 해 주느냐군. 그리고 파르티가 문제인데..."
하우드와 다르게 파르티에게는 욕심이 있었다.
그녀는 기존의 운명이 유지되는 것을 원했다.
신의 자리에서 벗어나되 기존의 운명, 즉 하우드가 개입하기 전의 운명대로 모든 것이 흘러가길 바라고 있었다.
"...떡밥은 물었을 것이고."
입술을 비틀어 올려 웃으며 운현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파르티가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공간의 비술이라면 그녀도 이계진입을 할 수 있을 터... 그렇다면 그녀는 나 외의 보험을 들기 위해 움직이겠지."
모든 것은 예정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파르티가 데려 올 이계인은 결국 자신에게 적대적인 인물이 될 것이다.
모든 기억을 잃게 된다면 믿기보다는 적대감을 품게 될 터.
그 적은 결국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 자신의 움직임을 운현이 원하는 결말로 이끌어주는데 도움을 줄 것이 분명했다.
만약 파르티가 이계인을 데려와 자신을 대체하려고 하지 않는다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의 자신과 한번의 회귀를 하여 힘을 쌓은 후의 자신이 어찌 움직일지 예측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과거의 자신이 남겨 놓은 편지대로 흘러가고 있다면 걱정은 없다.
"그럼 나머지는... 내가 할 일만 남은 것인가."
"허억...헉..."
알트리아에 진입하여 회귀를 한 후 운현은 롤랑의 신성을 빼앗았다.
레나를 납치해 그녀를 가둬 둔 후 그가 곧장 한 것은 바로 새로운 위신체를 만들어 두는 것이었다.
파르티, 하우드와는 별개로 던전 도시 내에서 자신을 도와 움직여 줄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깨어났나?"
"나는... 나는 도대체...?"
"섭리에서 벗어난 것을 환영한다."
긴 흑발의 용병을 위신체로 만들어 살려낸 운현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자신의 마력과 비술을 통해 되살아난 여인.
아르토리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은 멍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
"난 운현이라고 한다."
"......"
"너도 느끼고 있겠지만 너의 육체는 죽음을 경험했다. 자. 나와 함께 가겠나?"
설명따위는 없었다.
그저 명령만이 존재할 뿐.
운현이 손을 내밀자 아르토리우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아르토리우스를 위신체로 만들어 낸 후 운현은 그녀를 관찰했다.
위신체로 살려냈지만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종류의 비법을 익힌 자신의 마력이 섞인 것 때문일까?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하우드가 만들어낸 던전에서 몬스터들을 토벌해가며 빠르게 레벨을 올려나간 아르토리우스는 자신을 이끄는 운현을 따르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걸로는 부족해..."
"무엇이 말입니까?"
많은 비술을 이용하여 모험가 중에서도 탑급의 주술사의 위치에 올라 있는 운현이었지만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비틀었다.
"나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힘이 부족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신경쓰지 마라. 그리고..."
"....."
"결국 너는 안되었군."
운명의 섭리에서 한발자국 벗어나 있는 아르토리우스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그녀에게 연인들의 보호를 맡겨봤지만 결국 실패였다.
파티는 끝장난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운현과 아르토리우스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전멸했기 때문에.
"...죄송합니다."
"아니. 됐어."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다.
운현은 심각한 얼굴로 연인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하면 되니까. 다시... 다시."
"회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담담한 얼굴로 말한 운현이 알트리아에 진입하는 것을 보며 아르토리우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마력을 기본으로 만들어진 자신이기에 운현에 대한 것을 많이 알 수 있었던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포기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운현님. 당신은 너무나 많은 고통을..."
"그딴 고통따위 이제 잊은지 오래다."
회귀를 겪으며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이제는 슬프지 않다는 것이었다.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무력함도.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도.
그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에 아무런 감흥이 없다.
"......"
"필요 없어. 절망따위는 사치다. 이번에는 왜 죽었지?"
"심장마비... 그리고 전투 중 튕겨나간 돌이 머리에 맞아서..."
"좋아. 그정도면 됐다."
죽음이 결정되어 있는 자는 무슨 짓을 해도 죽는다.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팔짱을 끼고 생각하는 운현을 보며 아르토리우스는 걱정스레 물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어떻게 막습니까. 고작 백년 살 수 있는 인간의 경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 백년... 고작 백년. 하지만 그정도면 충분해. 가능성은 있다."
"...예?"
던전이 만들어지고 현자는 활동을 했다.
악신에 의해 가사상태에 빠진 요한을 구하기 위해 피스나는 현자와의 대담에서 방법을 착안해 가상의 차원을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고작 1, 2년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무리 천재인 피스나라 할지라도 백년 이상의 고심을 해야 만들어낼 수 있는 가상의 차원.
그녀가 그것을 연구하게 하기 위해서 현자를 과거로 보낸 것인데 성공적으로 움직인 듯 했다.
자신의 계획대로 피스나가 움직여 가상세계의 기반을 만들어 놓는다면 그것을 활용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다시 회귀를 한다. 준비하도록."
"네."
의문이 생겼지만 아르토리우스는 더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운현이 꺼내 놓은 관에 누운 그녀가 독약을 먹고 가사상태에 빠지자 운현은 그녀가 들어 있는 관을 인벤토리에 넣은 후 다시 회귀를 시도했다.
"아르토리우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말씀만 하십시요."
"다음 회귀가 시작하자마자 위신체를 만들어라."
"예? 하지만..."
운현이 위신체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긴장했다.
혹시 운현이 자신을 버리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떨며 그녀는 눈물지었지만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널 버릴 생각은 없다. 너는 날 위해 움직여줘야 하니까. 그 위신체는 다른 세계의 나를 위해서 움직여 줘야 할 자다."
"...어제 그 피스나라는 자를 만난 것 때문에 생각하신 것입니까?"
"그래. 거기에 과거로 보내 놓은 위신체가 한 일들에 대한 결과를 확인했으니 됐다."
"과거로 보내 놓은...?"
"그래. 지금은현자라 불리는 자다. 그의 흔적은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을 터. 피스나의 남편. 요한에 대한 것도 그렇지.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요한을 잃고 반 폐인이 된 상태에서 모험가들을 지원하는 일만 했었지. 하지만 정신의 비술을 이용하여 피스나가 캡슐을 만들어낸 이상 그것을 이용한다면 이 부족한 통찰력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알아야 할 것은 회귀를 하여 모든 기억을 잃은 내가 300레벨이 되기 전까지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가던 운현은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과연 이 방법이 통할 것인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상태의 자신이라면 반드시 가능하다.
"절대 모든 것을 말해서는 안된다. 던전에도 내 기억의 파편을 넣어두었으니... 그것만으로 해결해야 해."
"모든 것을 알면 세상의 섭리에 잡혀버리기 때문에?"
"그래."
그녀들을 구하기 위한 비술을 몸에 익혀두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아선 안되었다.
세계 자체를 무너트릴 수도 있는 강력한 비술 때문에 마법을 사용할 수 없지만 마법 이상의 힘을 쓸 수 있으니 상관없을 것이다.
"레벨이 오르면 오를 수록 내가 익힌 비술이 드러나겠지. 회귀를 통해 얼마나 많이 오를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직업은 도적이니... 도적의 직업을 얻을 수 있도록 조정만 해두면 되겠군."
"...운현님."
"뭐냐."
"제가 해야 할 일은 그것 뿐입니까? 제가 더 도울 일은 없습니까?"
아르토리우스의 간절한 말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비록 자신을 위한 말이라고는 하지만 아르토리우스는 정말 많은 것을 해주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너는 모든 기억을 잃겠지."
"상관없습니다. 운현님을 위해서라면..."
"미안하다."
"예?"
지금까지 수많은 일을 시키며 미안하다거나 감사하다는 말을 단 한번도 꺼낸 적이 없던 운현이 조용히 말하자 아르토리우스는 너무나도 놀랬다.
그런 그녀를 향해 쓰게 웃으며 운현은 천천히 말했다.
"네가 있어 준 덕분에 모든 계획을 만들 수 있었다. 네 덕분이다."
"아, 아닙니다..."
"반드시 너를 살려주겠다. 반드시... 너를 만들겠다."
"......"
"그러니. 살길 바란다."
운현에게 받은 반절의 신성을 손에 쥔 아르토리우스는 눈 앞의 마법문을 보았다.
알트리아에 진입하는 문이다.
시체가 되어 인벤토리에서 운현과 함께 회귀를 한 것이 아닌 자신이 알트리아에 진입하여 회귀를 하는 것은 처음이기에 아르토리우스로서는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저는."
"....가라."
단검을 손에 쥔 운현이 담담히 말하자 아르토리우스는 눈물을 흘리며 알트리아로 들어갔다.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운현은 히죽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부탁한다. 운현."
말을 마친 운현은 단검을 자신의 심장에 꽂아 넣었다.
417====================
에필로그
"........"
"뭐. 네가 믿든 말든 상관없어."
자신 역시 과거의 변화를 보았기에 아르토리우스로서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현자입니까?"
"뭐. 현자라고 할 수도 있고 운현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애초에 내가 원래의 운현이었으니까."
담담한 어조로 그가 말하자 아르토리우스는 복잡했는지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은 현자. 아니 이제는 운현이라 불러야 할 사내는 즐거운 어조로 말했다.
"섭리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 없었어. 이계인도, 그리고 이 세계의 사람도 아닌 존재가 되어야 했으니까. 세상의 섭리에 접근하여 속하게 된 상태에서 그 섭리에서 벗어난다. 그럼으로서 운명이라는 것에 거슬림이 없도록 만들게 한 것이지."
"....."
"그럼. 가볼까?"
"네? 어딜요?"
"어디긴. 내 원래 목적을 이루러 가는 것이지."
"자, 잠깐만요!!"
시큰둥한 그의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당황하며 그를 잡았다.
"왜?"
피식 웃는 그의 웃음을 보니 눈물이 나온다.
"그럼... 이제 끝난 것입니까?"
"응. 회귀도, 과거의 변화도 불가능해. 비록 나에게 비술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비술의 대부분은 신성이라는 규격 외의 힘을 이용해야하는 것이지. 하지만 이 세계에 더 이상 신은 없어. 그렇기에 신성조차도 존재하지 않아. 남은 신성은... 나, 그리고 너. 우리 둘 뿐이다."
"그런... 그럼. 원래의 운현님은...?"
"링크가 완전히 되어 있으니 내가 느끼는 것, 내 기억. 그리고 내 감정. 그 모든 것을 그가 받겠지. 그리고 그가 느끼는 것, 그의 기억, 그리고 그의 감정도 모두 받을 수 있고."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해가 되질 않는데..."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설명하기 난감했는지 운현은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그와 나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지. 하지만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각자 있기 때문에 동시 존재가 가능한거야. 하지만 본질은 같은 존재지. 영혼을 나누어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그것이 가능한거야.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지. 쉽게 생각하면 돼. 영혼이라는 주전자에서 두개로 이어져 있는 그릇에 감정과 기억을 담는 것이야. 그리고 그 반대도 가능하고."
"그 말은... 당신이 운현님이라고 봐야 한다는 건가요?"
"응."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아르토리우스는 어이가 없었다.
섭리를 속이기 위해서 자신을 나누는 짓까지 서슴없이 해버리다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웃음이 나와버린다.
"풋... 후후후..."
"뭐야? 왜 웃어?"
"아아... 역시 당신은 운현님이 맞네요. 그 거침없는 행동. 그리고 대책없는 수행력까지..."
"아까부터 말했잖아. 내가 운현이고 그가 곧 운현이라고. 결국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돼."
"그렇군요. 하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운현이 사라졌다는 슬픔은 이제 사라졌다.
눈 앞에 운현이 남아 있으니까.
고통과 절망, 그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난 운현이 씩 웃고 있는 것을 마주보며 웃은 아르토리우스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연인들을 만나러 갈 생각이야."
"그들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텐데요."
"글쎄..."
빙긋 웃은 운현은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찾던 것이 나오지 않았는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그런 그를 향해 웃으며 아르토리우스는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를 내밀었다.
"이걸 찾으시는 건가요?"
"그래."
그녀가 건넨 담배를 입에 문 운현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이 세계의 운명을 만든 것은 운현이야. 원래의 운명에서 조금 틀어 놓은 정도에 불과하지만 말이지."
"....."
"그럼 가볼까?"
"잠깐만요."
"왜 또."
"...운현님. 전 어떻게 해야 하나요?"
"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운현이 자신을 바라보자 아르토리우스는 바람에 흔들리는 길고 아름다운 머리칼을 귓등으로 넘겼다.
"저는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아르토리우스의 질문에 운현은 팔짱을 끼고 피식 웃었다.
"이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제가 하고 싶은 일이요...?"
"그래. 널 위신체로 되살려낸 것은 나고 과거에도 너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 죽었어야 할 너를 살려 준 대가라고 생각해줘. 너는 이제 자유야."
담담한 그의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더더욱 기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음?"
"제가 운현님과 함께 있어도 되는 건가요?"
"그 대답이 나올줄은 예상 못했네."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르토리우스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었고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다.
자신을 살린 이유가 모두 그녀들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줬는데도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운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말리지는 않겠어."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라."
시큰둥한 어조로 말한 운현이 몸을 돌려 옥상에서 내려가자 아르토리우스는 그를 따랐다.
신의 영역에 도달해 있던 운현 치고는 많이 약해보인다.
그런 그를 향해 아르토리우스는 조심스레 물었다.
"많이 약해지신 것 같은데..."
"페널티지. 지금의 나는 세계를 무너트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어. 신성이 필요한 비술 외에도 다른 것들은 얼마든지 있지. 예를 들어서..."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 순간 그의 눈 앞에 아공간이 생성되었다.
그것을 본 아르토리우스가 입을 벌리며 감탄하자 운현은 그곳에서 한자루 지팡이를 꺼내었다.
"이제는 찾아 볼 수 없는 공간을 다룬다거나..."
"....."
"시간을 다룬다거나."
자신의 바지가 벗겨져 있다는 것에 아르토리우스는 기겁했다.
시간을 멈춘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인식을 막은 것인가?
그녀를 향해 키득거리며 운현은 지팡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중요한 것은 힘이 아니지.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려느냐야."
"어렵네요..."
"그렇게 생각할 것도 없어. 자. 할 일은 정해졌다."
"......."
"던전은 사라졌지만 모험자 길드는 남아 있군. 그렇다면 일단은 모험자가 되는 것이 우선이겠지?"
"용병이 되실 생각은... 만약 용병이 되신다면 제가 운현님을 도울 수 있을텐데요."
"용병이 될 생각은 없어. 그리고 그거 내놔."
눈을 빛내며 아르토리우스는 간절히 말했지만 운현은 그저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은 후 손을 내밀 뿐 이었다.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고 아르토리우스의 손에 들려 있는 반검을 챙긴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거리를 걸었다.
많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미소지었다.
"...그래도... 당신이 있어서 용기를 낼 수 있어요. 당신이 있어서 살아갈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언제까지고 쫓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모험가 길드의 문이 열리고 검은 로브를 입은 붉은 머리의 사내가 걸어들어오자 자리에 앉아서 사무를 보던 필레는 빙긋 웃었다.
그녀의 인사에 붉은 머리의 사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살며시 그녀에게 다가갔다.
"모험가가 되고 싶은데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모험가요? 으음... 그렇지만 당신은 너무 약해보이는데... 괜찮으신가요?"
키는 크지만 얼굴은 말랐고 피부는 거칠었다.
가지고 있는 무기도 없고 가진 것은 그저 지팡이 하나 뿐.
하지만 마법사라고 보기에는 마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필레가 떨떠름한 어조로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것을 작성해주세요."
모험가는 많은 일을 한다.
간단하게는 잡일부터 크게는 몬스터 퇴치까지.
그렇기에 기본적인 능력은 필요한 것이다.
"운...현? 당신의 이름인가요?"
"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운현을 마주하며 필레는 자신도 모르게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남자다.
잘생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능력이 있어보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필레는 눈 앞의 사내가 너무나도 친숙하고 너무나도 가깝다고 느껴졌다.
"반가워요. 저는 모험가 길드의 필레라고 합니다. 직업은... 주술사? 와... 진짜라면 굉장하네요. 주술사 분들은 쉽게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아무튼 반가워요. 그리고 등급 체크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지금 가능하시겠어요?"
"그렇게 하시죠."
"그럼 따라와주세요."
필레와 함께 밖으로 나간 운현은 필레가 목검을 들어 올리자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시작할게요."
목검이 움직인다.
물 흐르듯 움직이는 목검을 지팡이로 쳐낸 운현은 필레가 뒤로 밀려나자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윽!?"
보이지 않는 밧줄에 의해 몸이 묶여버린 필레에게 운현은 차분히 지팡이를 가져다 대었다.
그것에 놀란 필레가 아무런 말도 못하자 운현은 싱글거렸다.
"이정도면 될까요?"
"어... 어떻게 하신거에요?"
"간단한 주술입니다."
"...이걸로는 실력 확인이 안되는데..."
방심한 것도 있지만 길드의 간부인 자신을 이렇게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다니.
얼마 지나지 않아 구속이 풀린 것에 놀라며 필레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당신의 실력을 파악할 수 없겠네요. 그리고..."
"....."
"괜찮으시면 가끔이라도 좋으니 저와 대련을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주술사와 상대한 적이 없어서..."
"물론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인데요."
"정말요!? 기뻐라~"
밝게 웃는 필레를 향해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운현의 몸이 딱딱히 굳었다.
"헤에... 필레를 그렇게 쉽게 제압했단 말이지?"
"그럼 나도 해볼까?"
"주술사라면 저도 상대해 본 적이 별로 없으니까요."
미야, 바제트, 그리고 헤스티아까지.
셋이 한꺼번에 모습을 보이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 웃음이 기분나빴던 것일까?
미야는 고운 눈썹을 찌푸리며 꼬리를 곧게 세웠다.
"그럼 나도 간다! 하아아...!?"
"체크메이트."
"치, 치사해!"
"이게 주술사의 싸움법이라는 겁니다."
미야가 주먹을 쥐고 달려오자 운현은 그녀의 발 밑을 진창으로 만들어버린 후 미야의 목에 지팡이를 가져다 대었다.
그것에 굴욕감을 느낀 미야가 빽 소리치자 운현은 씩 웃으며 다른 여인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여러분도 괜찮다면 부디."
"저게 새롭게 가입한 주술사야?"
"실력이 대단하다는데?"
"필레씨랑 헤스티아씨, 그리고 미야씨랑 바제트씨가 꼼짝도 못했다고 하네."
"우와... 그럼 거의 상아 길드장 수준 아니야?"
길드 회관에서 맥주를 마시던 운현은 자신을 보며 수근거리는 모험가들을 무시하며 눈 앞에 있는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필레와 미야, 바제트, 헤스티아를 향해 운현은 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식사 대접도 받고. 감사합니다."
"뭘요. 운현씨 정도면 굉장한 실력자 같은데.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것은 없죠."
"혹시 길드원이 되실 생각은 없어요?"
"거기다가 왠지 남 같지도 않고 말야."
"응. 처음 본 순간부터 되게 친근감이 느껴지더라고."
여인들은 웃으며 운현에게 호감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저 웃기만 할 뿐 이었던 운현이 샐러드를 조금씩 먹고 있을 때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잡았다.
"음?"
은회색 긴 머리칼이 인상적인 엘프 여인이다.
잊을 수 없는 얼굴.
그녀를 마주하며 운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상아."
"오? 날 알아? 이름이 뭐야? 주술사가 새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
"뭐 그건 나중에 확인하면 될 것이고. 주술사라니.... 간부들을 쓰러트렸으면 나랑도 붙어야겠지?"
"...그것도 나쁘지 않네."
"헤에... 그런 사람은 좋아한다고... 근데 말야."
"음?"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상아는 결국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머리를 마구 헝크러트린 후 끈으로 질끈 묶어버렸다.
"자자. 쓸데없는 소리는 관두고 빨리 붙어보자고."
"실력 테스트는 끝난 것 같은데..."
"응. 실력 테스트는 끝났지. 그거와는 별개야."
"뭐 상관없으려나..."
자리에서 일어난 운현이 상아와 함께 밖으로 나가자 필레는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저러다가 또 혼날라."
"또요?"
"에? 내가 그랬나?"
"왜 하필이면 이 건물이야?"
"이 건물이 내꺼거든. 그리고 옥상에서 붙어야지 어디서 붙어? 가뜩이나 모험자들이 사고치는 것 때문에 말이 많은데 우리가 싸우는 걸 다른 사람들이 보면 골치아프다고."
상아가 운현을 데리고 간 곳은 운현이 파르티의 목을 치고 신이 된 그 건물 옥상이었다.
옥상의 난간에 걸터앉은 상아가 웃으며 말하자 운현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간 후 차분히 말했다.
"그런 것이라면... 상관없으려나."
"그래. 실력 테스트를 하기 전에 몇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아?"
"얼마든지."
부드럽게 웃으며 운현은 근처에 있는 상자를 당겨 그 위에 앉았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간 상아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살짝 미간을 꾹 누르며 물었다.
"우리 언제 만난 적이 있어?"
"글쎄?"
"장난하지 말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운현의 질문에 상아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처음 그를 본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슬펐다.
그리고 그 슬픔 이상으로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왜 인지, 어째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어제 꾼 꿈도 그렇고. 오늘 있었던 일도 그렇고."
"음?"
"뭐랄까...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것 같아서 말야. 조금만 더 생각하면 기억 날 것 같은데..."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쉰 그녀를 향해 운현은 피식 웃은 후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반검에 힘을 넣어 마지막 비술을 발동시켰다.
그 순간 그의 반검이 어둠이 되어 사라져버렸고 그것을 확인한 운현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보다 잠깐.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는데 이리로 와볼래? 널 보면 제대로 기억이 날 것 같아. 왠지 모르게..."
떨떠름한 얼굴로 상아는 운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운현에게 다가갈 수록 상아의 표정은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잊어달라고 말했는데 말은 더럽게 안듣네. 할매. 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지 그래?"
"누가 할매냐!? 누가!? 그리고 잊으란다고 잊겠...."
"......"
"...냐...?"
발끈하여 외친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하고 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무엇을 기억한다는 것이지?
그런 상아를 보며 운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양 팔을 벌렸다.
"다녀왔어."
"...아..."
그 순간 상아의 눈이 커졌다.
어째서 잊었던 것일까.
신.
기억.
운명.
그리고...
"아아...아!"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그저 한밤의 꿈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천천히 떠오른다.
그것에 눈물 흘리며 상아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혼란스러움?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더 없이 슬픈 웃음을 지으며 스스로를 희생해 모든 것을 바꿔버린 그가 눈 앞에 있다.
"아으...으..."
"나 팔 아파."
그의 말에 상아는 힘겹게 걸어가 그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돌아와줘서... 고마워..."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