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8/40)

마지막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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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인사

하우드와의 만남이 있은 이후 던전 도시는 예상 외로 조용했다.

폭풍전야라는 말이 이런 것일까?

"길드원이 되신 것을 축하드려요!"

"잘 해봐요!"

"우후후~"

조용한 틈을 운현은 놓치지 않았다.

천검자의 죽음에 라닌이 어떻게 대응할지가 걱정이었지만 라닌은 나타나지 않았고 하우드 역시도 그날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앞으로 잘 부탁해."

"든든하구만!"

그 틈을 노려 운현은 동료들과 함께 빠르게 레벨을 올려나갔다

불과 삼주도 지나지 않아 300레벨에 도달한 운현 일행은 사전에 약속한대로 모험가 길드의 길드원이 될 수 있었다.

"운현. 너는 직업 심화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글쎄."

"검사의 경우 격투 직업을 추가로 얻는 사람들이 많은데...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방긋 웃으며 미야가 말을 걸었지만 운현은 쓴웃음을 지을 뿐 이었다.

직업 심화를 하려면 수행이 필요했다.

마법사 직업을 얻어 마검사가 되려면 마력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했고 격투가 직업을 얻어 검투사가 되려면 기력을 사용할 수 있어야 했다.

그 외의 다른 직업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런 것을 할 여유도, 시간도 없는 운현으로서는 직업 심화를 선택할 수 없었다.

'하고자 하면 마검사가 낫겠지.'

높은 지력 스탯 덕분에 마력은 넘쳐날 정도다.

그렇다면 마검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마검사가 되려면 던전 도시를 떠나 마법학교로 가야했다.

가는데만 해도 일주일이 걸리는 여정을 선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운현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직업 심화를 선택하지 않을거야."

"에? 왜?"

"글쎄. 너희들은 어떤데?"

"음..."

직업 심화과정을 선택하면 확실히 말해 좀 더 강해질 수 있었다.

추가적인 직업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기에 여인들은 고민했다.

기본이 한달, 길게는 일년정도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했다.

만약 운현이 함께 한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닌 이상 운현과 떨어져야 했고 그것은 여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선택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저도 안할래요."

"나도."

"음... 나도 딱히."

"그럼 어제와 마찬가지로 레벨업에 힘써야겠네."

"헤헤~"

아무것도 모르는 헤스티아와 미야는 마냥 좋았지만 바제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운현이 직업 심화과정을 선택하지 않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같은 곳에 있지 않는 이상 자신들의 죽음을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왜 그렇게 봐?"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운현이 말을 걸자 바제트는 살짝 고개를 젓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너도 똑같이 해."

바제트에게만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운현이 속삭이자 그녀는 움찔했지만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야야! 술 마시자! 술!"

애써 밝은 목소리로 외치며 동료들에게 걸어가는 바제트의 뒷모습을 보며 운현은 눈을 감았다.

오늘이다.

레나가 시체로 발견된 날.

다행히 아직 레나는 파티장 구석에 앉아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운명은 아직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혼자 계세요?"

"아... 운현씨."

운현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회귀를 했다고만 생각하고 있는 레나는 그가 다가오자 힘겹게 웃었다.

"잘못하면 저에게 다른 사람들이 휘말릴 수 있으니까..."

운명에 의해 자신의 죽음이 예정되어 있고 그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레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기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괜히 그것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나씨."

"잠깐 산책하실래요?"

"...그러죠."

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며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술을 권하는 길드원의 제안을 사양하며 레나와 함께 밖으로 나온 운현은 어두컴컴한 거리에 서 있는 레나에게 천천히 말했다.

"아직까지는 별 일 없죠?"

"네."

"다행이네요."

"운현씨."

"말씀하세요."

"저를 지켜야 하는 일... 쉽지 않으시겠죠?"

"그래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레벨업도 빠르시고... 듣자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레벨업만 계속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힘들지 않으세요?"

"괜찮습니다.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인걸요."

운현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빠르게 레벨업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다른 파티들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가혹하게 전투를 진행하며 레벨을 올린다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레나의 가슴은 찢어질 것 같았다.

강해진다.

자신을 위해서.

기쁘기도 하지만 그와 반대로 슬픔도 있었다.

자신 때문에 그가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제... 괜찮은 건가요?"

"아직 멀었습니다."

"조금 쉬어도..."

"쉴 틈은 없습니다."

딱 잘라 그가 말하자 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죽음은 무엇인가요."

"...굳이 아실 필요는..."

"아니요. 알고 싶어요."

"하아. 다난교의 인신공양 제물이 되어버립니다. 롤랑 심판관님처럼..."

"그... 런가요."

자신에게 있는 신성을 얻기 위해서겠지.

레나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자 운현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반드시 제가 지키겠습니다."

천검자도 죽었고, 남은 것은 라닌 뿐이다.

라닌이 어떤 수작을 부릴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지키고 있는 이상 어중간한 죽음의 방법은 전부 무시할 수 있었다.

'오늘이야. 오늘인데... 언제 움직일 것인가.'

원래의 운명대로라면 다난교가 움직여 그녀를 인신공양의 제물로 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라닌과 자신은 손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었다.

'천검자를 죽일 수 있는 자는 나 외에는 없지.'

라닌이 천검자를 제거하자고 제안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힘이 천검자를 능가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지 못한다고 한 것도 속임수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최대한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이다.

"....."

"왜 그런 표정이세요?"

"당신을 지켜야 하니..."

평소의 운현이 짓던 느긋한 웃음과 달리 지금 운현은 상당히 긴장한 얼굴이었다.

여유따위는 찾아 볼 수 없는 그 얼굴에 레나가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운현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운현씨?"

"제 뒤로 오세요."

골목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제들이 걸어나온다.

다난교의 사제들이다.

라닌의 명령일까? 아니면 운명에 따라서?

아무래도 좋다.

운현이 검을 뽑아 겨눴지만 검은 사제들이 다가오는 것은 멈춰지지 않았다.

"거기까지."

싸늘한 어조로 운현이 말하자 검은 사제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느정도 거리가 벌어진 상황에서 운현이 검끝을 가볍게 흔들었을 때 검은 사제들이 천천히 자리를 벌렸다.

"운현."

"그동안 뭐 하다가 이제 나온거냐?"

"천검자를 죽였군요."

"엣!? 운현씨가!?"

세계 최강의 검사라 불리는 천검자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던전 도시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운현의 손에 죽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레나가 놀라자 검은 사제들 사이에서 나온 라닌은 빠득 이를 갈았다.

"날 속였어!"

"뭐야. 날 믿었냐?"

"개자식... 그런 힘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이런 말도 있지 않나? 모르는게 등신이라고."

이를 드러내며 운현이 노골적으로 비웃자 라닌은 빠득빠득 이를 갈았다.

"더 숨기고 있는게 있나요?"

"네가 숨기고 있는 것정도로 숨기고 있는게 있지 않을까? 라닌. 이거 왜 이래. 선수끼리."

라닌이나 자신이나 책사다.

책략가는 모든 것을 보이면 안되는 법.

속았다고?

속은 게 등신이지.

운현이 키득거리며 도발하자 라닌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만졌다.

방금 전까지 얼굴 가득 드러나 있던 증오와 짜증이 한순간에 웃음으로 변했다.

그것에 레나가 흠칫 놀라자 라닌은 양 팔을 벌린 후 차분한 어조로 부드럽게 말했다.

"좋아요. 뭐 그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나저나 운현. 천검자까지 제거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왜?"

"왜라니요... 당신이 시간을 벌겠다고 한 이유는 당신의 레벨업 때문 아니었나요? 세계 최강자인 천검자도 죽일 수 있을 정도라면 굳이 레벨업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물론 그렇긴 한데 굳이 네 의견을 따라 줄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이래도?"

"챙!!"

"뭐. 어쩌게."

어둠 속에서 날아 온 검은색 화살이 운현의 검에 맞아 튕겨져 날아갔다.

그 화살이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에 레나가 겁먹은 얼굴이 되자 운현은 그녀를 돌아보며 조용히 말했다.

"제가 지켜줄테니 걱정마세요."

"운현씨..."

"지킨다라...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까요?"

"챙! 챙! 챙!"

세대의 화살이 검에 맞아 날아간다. 눈을 돌려 화살을 날린 쪽을 찾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너 지금 나 협박하는거냐?"

"모르셨어요?"

빙긋빙긋 웃으며 라닌은 운현의 뒤에 서 있는 레나를 가리켰다.

"당신의 약점이 드러나 있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서 좋은 협박거리가 되지요."

"콰아앙!!"

근처의 건물이 폭발한다.

그 기세에 놀란 레나가 움찔한 순간 운현은 준비해 놓은 스크롤을 찢었다.

반투명한 배리어가 생성되어 레나와 자신을 파편으로부터 보호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고작 이거야? 너무 소란 피우는 것 같은데. 지금 던전 도시는 무척이나 열받아 있다고. 괜히 까불다가 뒈지지 말고 어서 꺼지지 그래?"

"던전 도시가 열받았다라... 천검자의 일때문이겠죠? 후후후... 알고 있어요. 던전 도시의 시장이든 용병 연맹 연맹장이든 다들 화가 나 있겠죠."

"....."

"그런데. 이거 알아요? 운현?"

생긋 웃은 라닌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엄청난 폭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나도 화가 났다고!!!"

"미친년."

드디어 전쟁이구나.

천검자도 없는 주제에 무슨 깡으로 덤비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죽여!!"

"할 수 있으면 해보시지."

라닌의 광기 어린 외침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검은 사제들이 덤벼들었다.

적어도 300레벨 이상은 되는 듯한 정예들이다.

비록 검은 날개는 아니지만 각자 한가락 하는 실력을 그대로 드러낸 사제들이 달려들었지만 운현은 가볍게 검을 당겨 베어낸 후 레나를 안아들었다.

"꺄악!?"

"도망치겠습니다. 길드로 가지요."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콰아앙!!"

바람처럼 달려가는 운현의 뒤로 라닌의 악에 바친 외침이 들렸다.

하지만 운현은 그녀의 외침을 무시한 채 그대로 길드로 도망칠 뿐 이었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몰려드는 검은 사제들을 치워내며 벽을 타고 올라 지붕 위에 도착한 운현은 허공에서 쏘아진 화살을 잡았다.

아까 전에 화살을 어디서 쏘나 했더니 검은 옷을 입은 검은 날개들이 쏜 것이었나보다.

"에라이."

"카흑!!"

손으로 낚아 챈 화살을 되돌린다.

활을 들고 있던 검은 날개의 어깨에 화살이 박힌 순간 허공에 있던 검을 든 검은 날개 두명이 운현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자신의 머리와 레나의 머리를 동시에 노리는 공격.

그것을 보며 운현은 검을 당긴 손에 힘을 넣었다.

"흡!!"

반월형으로 터져나온 청색 검기가 레나를 노리는 검은 날개의 머리를 잘랐다.

돌격하던 상태 그대로 옆으로 비껴 떨어진 순간 운현은 자신의 머리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검을 가볍게 고개를 비틀어내는 것으로 피해 낸 후 검은 날개의 옆구리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꺼헉!!"

"같잖다."

"미... 친..."

복부를 맞아버린 검은 날개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자신에게 보이자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짓밟아 부숴버렸다.

수박 터지듯 머리가 터지는 것을 본 레나가 눈을 질끈 감자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눈 감고 계세요. 보기 험하니까."

"으... 네. 운현씨. 제가 돕..."

"그냥 다물고 있어주세요. 그게 돕는 거니까."

"......"

여기서 레나가 돕겠다고 까불다가 죽으면?

딱히 상관없다.

레나가 죽어도 운현의 계획은 큰 변화가 없으니까.

'문제는 길드인데... 이 폭발이면 길드 뿐만 아니라 다들 움직이겠군. 시간은?'

아직 다음날이 되려면 삼십분 정도 남았다.

일단 삼십분만 버티면 된다는 건가?

그렇다면 할만하다.

레나를 옆구리에 낀 채 운현은 가볍게 검을 돌리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운현을 잡기 위해 지붕 위로 올라오던 검은 사제들이 다시 내려오고 멀리서 라닌이 걸어오는 것을 본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자... 쇼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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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인사

"....."

무언가 이상하다.

잘못되었다.

저 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걸까?

천검자를 죽인 자는 운현이다.

천검자의 시체를 확인했을 때 그녀의 몸에 난 상처를 보자마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오로지 운현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절대적인 무기.

그 무기를 든 순간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절망과 공포를 보여주었던 강력한 무기.

보통 사람이 쓰기에는 부족하다고 할 만한 그 무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있을 수 없다.

그런 일 따위 있을 수 없었다.

자신조차도 가지고 오지 못한 힘을 그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세웠던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다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아하하하핫!!"

광소를 터트리며 일격에 검은 사제의 몸을 반으로 갈라버린 운현은 자신의 검을 던져 창을 들고 달려드는 검은 사제를 맞추고 떨어진 창을 들었다.

그는 검사다.

검사 주제에 창을 쓰는 창수 이상의 무용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알던 운현 처럼 말이다.

"이럴리 없어!! 라훌라!!"

"하아아압!!"

자신을 지키는 검은 날개가 달려드는 것을 보며 운현은 비릿하게 웃었다.

저 웃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지?

그리고 왜 저 레나라는 자를 지키는 것이지?

알 수 없다.

도대체 저 인간은...

"끄아아악!!"

라훌라의 검은 날개가 반으로 잘려 그녀가 쓰러지는 것을 본 라닌은 공포에 질린 채 뒤로 주춤 물러났다.

도대체 왜 이렇게 일이...

"빌어먹을!"

지금 그를 계속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물러날 수 밖에.

라닌이 몸을 돌리고 도망가는 것을 보며 운현은 히죽 웃었다.

'저 년의 움직임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겠군.'

천검자의 죽음.

그리고 규격 외의 모습을 보이는 자신의 힘.

그녀의 계산은 운현의 힘을 잘못 측정한 순간부터 완전히 틀린 상태였다.

그것만 믿고 있었던 라닌이 자신의 실패에 당황하는 것을 즐기며 바라보던 운현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본격적인 테러가 시작된 탓에 평화롭던 던전 도시의 여기저기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신성을 이용한 폭탄 테러인가? 아니면 단순히 마법을 이용한 테러인가.

"그건 나한테 중요한 것이 아니지..."

과거 카야가 했던 것처럼 다난 교의 모든 힘을 쏟아부은 듯한 공격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운현은 이를 드러내었다.

만약 라닌이 자신의 힘을, 그리고 자신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라닌 역시 책사이니 자신의 수를 숨기고 있을테니까.

"라고 생각하기에는 수가 너무 많군."

달려드는 검은 사제의 목을 베어넘긴 운현은 바닥에 떨어진 머리를 짓밟아 부숴버렸다.

"우... 운현씨."

"두려워마세요."

"그..."

그의 푸른 머리가 붉다고 생각될 정도로 운현의 몸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레나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이 상황이 아니다.

자신을 잡고 있는 운현이다.

비록 자신을 지키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많은 이들을 가볍게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의 옆에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공포일 수 밖에 없었다.

"...네."

하지만 레나는 자신의 생각을 빠르게 지울 수 밖에 없었다.

두려우면?

무서우면?

어쩔 것인가.

지금 운현은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그가 두렵다고 물러날 것인가?

그런 그가 무섭다고 도망칠 것인가?

그것만큼은 해선 안된다는 생각에 레나가 입을 열려는 순간 운현은 멀리서 들려오는 폭음에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나."

"예? 왜...?"

"일단 길드로 복귀하죠."

상아와 바제트, 그리고 제니스와 필레에게 절대 길드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말해놨다.

그들이 함께 있다면 어느정도는 안전하겠지.

그렇지만 라닌이 이렇게 날뛰고 있는 이상 마냥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신성을 이용하는 자고 그 신성을 이용한다면 운명의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죽음의 운명을 부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들리는 폭음과 함성.

그것은 던전 도시의 내부에서 들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던전 도시의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

"운현씨...?"

다난교, 그리고 라닌. 이 둘 외에도 신성의 존재를 알고 그 신성을 이용할 수 있는 이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하우드의 말에 따르면 그들 역시 신성을 원하고 있으니 이렇게 움직이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올 놈들이 온건가..."

"쿠우우웅!!"

엄청난 폭음을 들으며 바제트는 자신의 활을 꽉 잡았다.

단순한 모험가라면 던전 안으로 대피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던전 도시의 모험가 길드 길드원인 그녀로서는 속편하게 도망칠 수 없었다.

던전 도시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던전 도시에서 일어나는 테러를 막기 위해 나갈 수 없었다.

"이렇게 있어도 될까요?"

"괜찮아."

여유있는 얼굴로 차를 홀짝이는 제니스를 보며 바제트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모험가 길드의 길드원들 뿐만 아니라 각 클랜의 클랜장들이나 클랜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는데 이렇게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다.

"운현 오빠는요!?"

"운현이 나가서 들어오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헤스티아와 미야가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바제트는 그녀들의 걱정을 해소시켜 줄 수 없었다.

운현과의 약속이다.

초인의 경지에 올라가 있는 운현이라면 이정도 테러 속에서도 여유로울 것이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자신들 뿐이다.

'만약... 이 테러가 운현을 적대하는 이들의 짓이라면...'

운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약점은 자신들이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그들에게 잡히지 않게 숨거나 피하는 것 뿐.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빙긋 웃으며 펠리시아는 자신의 지팡이에 마력을 불어 넣은 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그녀의 지팡이에서 터져나온 빛줄기는 순식간에 모험가 길드의 건물을 가득 메운 후 바깥으로 퍼졌다.

"이 정도의 보호막을..."

"간단하죠. 그나저나 상아. 이제 어쩌죠? 저희도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닌가요?"

길드 간부 중 넷이 길드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만약 상아가 죽기라도 한다면 모험가 길드의 지휘 체계가 크게 무너질 테니까.

펠리시아의 말에 상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 소집령은 내렸으니까 던전에 있는 모험가들도 복귀할거야. 이 정도 상황이라면..."

"바깥에 적이!"

"허...!? 다난교!?"

방어막이 펼쳐진 바깥에 검은 사제복을 입은 이들이 무기를 들고 걸어오는 것이 보이자 모험가들은 이를 드러내었다.

파르티 교단에 의해 사교로 지정된 집단인 다난교도가 던전 도시에 이렇게 모여 있었단 말인가?

거리를 빽빽하게 메울 정도로 많은 다난교도들이 보호막을 깨트리려고 하는 것을 본 모험가들은 히죽 웃었다.

"진짜 살다살다 별일이네. 사교들 주제에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뭐 죽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몬스터를 상대하는 일이라면 모를까 사람과 상대하는 일은 용병 연맹에 비해 약하다고 할 수 있는 모험가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력이 모자라다는 것은 아니었다.

자유를 중요시여기는 모험가들이다.

만약 타인이 자신들을 공격한다면 그냥 맞고만 있는 이들은 절대로 아니다.

두배, 세배로 갚아주는 이들이지.

살벌히 웃으며 무기를 들고 보호막이 깨지는 순간만을 기다리는 그들을 보며 필레는 얼굴에 가득한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운현은 나가지 말고 있으라고 해놓고 자기가 나가버렸으니... 이를 어쩌죠?"

"걘 걱정 안해도 돼."

"예? 상아 길드장!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심드렁한 상아의 말에 필레는 당황하더니 곧 분노하며 외쳤다.

그런 그녀의 외침에도 상아는 그저 떨떠름한 얼굴일 뿐 이었다.

'운현이 말한 때는 지금이 아닌데... 왜 이런 일이...'

"어... 보호막 깨지겠네요. 어쩌죠? 한번 더 걸까요?"

자신이 친 마법 보호막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펠리시아는 차분히 말했다.

바깥의 검은 사제들이 많기는 했지만 이곳은 모험가 길드의 거점이다.

저런 어중간한 이들을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약한 이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쓰잘데기 없는 싸움을 하지 않고 만약을 대비한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지만 만약 모험가 길드가 공격당하면 그녀로서도 얌전히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일단 대기. 보호막 쳐봤자 쟤들이 없어질 이유는 없으니까. 깨지는 순간 바로 공격들어간다."

모험가 길드에는 식량도 많은데다가 무기나 장비도 상당히 여유분이 있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농성전을 펼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리고 던전 도시에 있는 무력집단은 자신들 뿐만이 아니다.

비록 신참이기는 하지만 아르토리우스라는 강력한 이가 이끄는 용병 연맹이 있었다.

사람과 사람간의 전투에 있어서는 자신들보다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는 용병 연맹이 시청과 연합하여 움직인다면 이런 소란은 금방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운현인데...'

이 상황이 운현과 관계되어 있을까?

상아는 오로지 그것만이 걱정될 뿐 이었다.

인간의 힘으로 가짜 신의 자리에 올라 세상의 섭리와 싸우는 자다.

던전 도시가 세워지고 몇백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만큼의 혼란은 처음이다.

상아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모든 상황이 운현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이렇게 있을 수 없지.'

"5초 후 보호막 파괴됩니다. 준비하세요."

지팡이를 들어 올린 펠리시아의 말에 모험가들이 무기를 잡았다.

전투 준비를 마친 이들이 이를 드러낸 순간 반투명한 보호막이 사라졌고 그 순간 검은 사제들이 물밀듯 길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하하하!! 건방진 년들!! 모험가들의 힘을 보여주마!"

그리고 달려 들어오는 검은 사제들을 향해 모험가들 역시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느긋하게 있을 여유 없어!! 공격해!"

성벽 바깥이 무서울 정도다.

에스카는 성벽 바깥에 몰려 있는 군대들을 보며 이를 갈며 외쳤다.

"제길...! 마치 노렸다는 것처럼...!!"

던전 도시에서 각국의 유력자들이 살해당한 것이 몇일 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성 바깥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군대들이 모여 있었다.

각국의 정예병력들이라고 생각되는 병력들만이 잔뜩 모였다.

"다른 곳은!?"

"지금 던전 도시에 테러가 일어났어요! 그것을 막느라...!"

"빌어먹을!!"

용병 연맹의 지원을 받았지만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정예들이 많은 던전 도시라고는 하지만 모든 이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전문으로 하는 용병 연맹의 용병들 중 3/4는 지금 세계 각지에 있다.

던전 도시가 공격받는다는 것을 알면 그들은 하던 전쟁을 멈추고 돌아오겠지만 그들이 오려면 시간이 걸린다.

이미 모여 있는 저들을 상대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에스카는 자신의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화살이 만들어낸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닦았다.

"개새끼들...!!"

던전 도시와 가까운 나라부터 먼 나라까지 모여 있다.

개미떼처럼 주변을 가득 메운 군대들을 노려보며 이를 간 에스카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동료, 로지에게 말했다.

"그렇게 쳐 앉아 있을때야!?"

"그럼 어쩌라고..."

힘없이 말한 로지는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았다.

화살에 맞아 상처가 난 복부는 붕대로 감겨져 있지만 그 붕대의 효과도 그리 크지 않았다.

"포션 내놔... 포션."

"젠장! 윈드 대장님은 언제 오시는거야!?"

"나도 몰라."

"아아아아!! 빌어먹을!"

이렇게 기습을 할 줄이야. 던전 도시 바깥의 척후병들도 많았는데 그들이 모두 잡힌 것인지. 아니면 배신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이만큼의 군대가 움직이는 것을 상인 조합에서도 모를리 없는데 그들 역시 이런 상황에 난감해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야!!"

"...헤에."

모험가 길드의 앞으로 이동한 운현은 검은 사제들을 상대로 잘 싸우고 있는 모험가들을 보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 되려던 이유가 모험가들을 이용해서 다난교든 뭐든 자신의 적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난교가 지들 멋대로 달려들어주어 모험가들을 공격하니 운현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편해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거 일이 쉽게 흘러가는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수 없었다.

이 더러운 운명이 언제 또 뒤통수를 칠지 몰랐으니 말이다.

"운현씨!"

어느새 자신의 뒤에 나타난 검은 사제를 보며 운현의 옆에 서 있던 레나가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이 무색하게 모험가 길드에서 쏘아져 나간 한줄기 빛줄기는 운현의 머리를 노리던 검은 사제의 목을 꿰뚫었다.

"운현!"

"어디 갔다와!"

"빨리 들어와요!"

모험가 길드 안쪽에서 농성을 하던 여인들의 모습에 운현은 빙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상아, 필레, 헤스티아, 바제트가 안쪽에 있는 것을 본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야는?"

"미야는 다른 사람들이랑 밖에 있어."

"...뭐?"

바제트의 말에 운현은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딱딱히 굳은 그의 표정을 확인한 헤스티아는 쓰게 웃었다.

"저기 바로 앞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안돼."

"예?"

주먹을 꽉 쥔 운현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

그때도 그랬다.

미야의 죽음. 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미야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때...

"미야!!"

"운현!"

모험가들과 함께 검은 사제들과 싸우는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겨우 안심했다.

얼른 그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리 생각한 운현이 다가가려고 할 때 운현의 옆에 쓰러져 있던 어깨에 화살을 맞은 검은 사제 하나가 기계처럼 몸을 움직였다.

"모든. 것은. 다난을. 위해..."

몸에서 은은한 붉은색이 피어오르는 여인.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불길한 기운.

그것을 본 미야는 무기와 무기가 부딪히는 소란 속에서 운현을 향해 뛰었다.

"운혀어어언!"

"미야! 금방 갈..."

"모든 것은! 다난을 위하여!!'

408====================

마지막 인사

지켜야 한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자신이 막아야 한다.

그리 생각한 미야는 운현에게 빠르게 뛰어가 그의 앞을 막았다.

"미야!!"

"모든 것은 다난을 위하여!!"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렸던 미야의 모습이 환상처럼 떠오른 운현이 손을 뻗어 미야를 잡은 순간 미야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검은 사제의 몸에서 나기 시작한 빛이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미야는 양 손을 올렸다.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폭염이 밀려온다.

그것을 검막으로 막아낸 운현은 흙먼지 속에서 양 손을 올린 채 서 있는 미야를 발견했다.

"...후아. 죽는 줄 알았네..."

기운이 다 빠진 목소리로 미야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손에서 펼쳐진 절대적인 방어마법.

운현이 준 반지를 써서 만들어낸 실드가 폭발로부터 그녀를 막아내었다.

"야 이 등신아!!"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운현은 미야의 멱살을 잡아챘다.

항상 상냥하고 자신을 아껴주던 운현이 이토록 분노하는 모습에 미야는 오히려 놀랐다.

"뭐, 뭐야!? 왜?"

"내가 들어가있으라고 했을텐데."

"그렇지만 다들 이렇게 싸우는데... 나도 길드원이라고!"

"길드원인게 문제가 아니라!"

사정을 모르는 미야인만큼 그녀가 나선 것도 어느정도는 감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현은 방금 전 미야가 한 행동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또다시 위험을 감수 한 것.

그것으로 떠오른 과거의 기억.

운현이 이를 드러내며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그의 뒤로 검은 사제가 달려들었다.

"죽어라!!"

날카로운 검을 들고 달려오는 그녀의 공격에 운현은 미야를 살짝 밀어낸 후 검날을 그대로 손으로 잡아버렸다.

그것을 보고 놀란 미야가 입을 벌린 순간 검을 꺽어 부러트리고 남은 검조각을 던져 그 사제의 머리에 꽂은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들어가."

"방금... 어떻게 한거야?"

운현의 손은 맨손이다.

상대의 머리를 꿰뚫을 정도로 날카로운 검날을 손으로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에 상처가 하나도 없다는 것에 놀란 미야가 묻자 운현은 다시 한번 천천히 말했다.

"들어가."

"으, 으응."

더 이상 그의 말에 토를 달 수 없었던 미야는 전투를 하는 이들을 피하며 길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미야가 안으로 들어가고 바제트와 상아가 미안한 듯 살짝 고개를 숙이자 운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청소나 해야겠군."

라닌이 자신의 힘을 알아 챈 이상 숨길 필요는 없었다. 상아와 바제트가 연인들을 데리고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운현은 자신의 장검을 꺼내어 들고 진각을 밟았다.

"쿠우우우우웅!!!"

땅이 흔들릴 정도의 강한 충격음이 운현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그것에 놀란 모든 이가 자신에게 시선을 꽂은 순간 운현은 입을 크게 벌리고 포효했다.

"하아아아압!!"

"으악...!"

"무슨 외침이...!"

모험가들과 검은 사제들이 귀를 막고 주저앉을 정도로 커다란 포효를 터트린 운현은 빈틈을 보이고 있는 검은 사제들의 목을 베기 시작했다.

한번에 하나씩.

모험가들이 섞여 있는 탓에 스킬을 제대로 쓸 수 없었지만 운현이 가세한 순간 길드를 공격하던 검은 사제들의 수는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양떼 무리에서 날뛰는 사자처럼 검은 사제들을 베어넘기던 운현이 검을 멈췄을 때 운현은 모험가들이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뭘 봐?"

"아, 아니."

"당신... 굉...장한데?"

"이정도는 쉽지. 고작 이런 놈들에게 이렇게 시간을 뺏길거야?"

"윽..."

이제 막 300레벨이 되었다는 운현의 투덜거림에 모험가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운현의 레벨보다 더 높은 이들은 특히 더욱 그랬다.

아무리 모험가들의 특성상 대인전투에 약하다고는 하지만 이정도로 차이가 나다니.

거기에 운현 역시 모험가가 아닌가.

"됐고. 일단 들어가서 상황 파악부터 하자고.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까."

"분위기?"

"응. 이정도로 소란이 일어났는데 시청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아."

"....."

운현의 말대로다.

모험가 길드가 습격당할 정도의 소동이 났는데 시청에서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다른 큰 일이 터졌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모험가들은 빠르게 길드 안으로 들어갔고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운현은 이를 드러내었다.

"뭐가 어떻게 된거야?"

"이상한데...?"

던전에서 올라 온 모험가들의 표정이 이상하다.

그들을 맞이하며 상황을 설명해 준 실비아는 2계층을 탐험하던 모험가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던전의 몬스터가 없어졌다고."

"응. 돌아오는 길에 한번 정도는 몬스터를 마주쳐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한번도 마주치지 못했어."

1계층과 2계층을 탐험하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아니, 그것 뿐만이 아니다.

"아니 도대체...!?"

"아둔씨!"

"소집령을 듣고 복귀하는데 4계층으로 통하는 마법문을 통과했는데 바로 1계층으로 와버렸어."

복귀하는데 적어도 하루는 걸릴 것이라고 생각한 아둔이 소집령을 내리자마자 바로 복귀한 것에 놀랄 겨를 따위는 없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3계층 이상부터는 마법문이 아예 1계층과 연결되어 버린 것에 놀라면서도 실비아는 차라리 잘 되었다 생각했다.

"큰일이에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건데?"

"던전 도시에서 테러가 발생했어요. 거기에 던전 밖에 각국의 군대가 몰려들었어요."

"뭐?"

모험가들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각국의 군대가 왜?

던전 도시는 중립지역이다.

던전 도시에서 밖에 구할 수 없는 코어는 이미 세계 각지에 퍼져 그것이 없으면 생활이 힘들 정도가 되었다.

그렇기에 코어는 주요한 물품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유일하게 코어를 공급하는 던전 도시는 그 어떤 나라도 공격하지 말자는 조약이 맺어져 있었다.

그런데 각국의 군대가 던전 도시를 침범한다고?

"던전 도시 바깥을 순회하는 척후병들은? 첩자들도 있을 것 아냐."

던전 도시를 공격하려는 목적을 가진 나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던전 도시에서는 각국에 첩자와 함께 척후병들을 보내어 순찰을 돌고 있었다.

군대 수준의 움직임이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파악하고 있었을 터.

그런데도 그것을 잡지 못하고 던전 도시까지 군대가 오는 것을 방치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 이유는 모르겠어요. 시청에 갔지만 시청에서도 던전 도시에서 벌어진 테러와 바깥의 군대와 협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비운 상태에요!"

"하... 진짜 난감하구만.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지금 각 조직의 수장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해 방침을 결정해야 하는데... 당장 바깥의 군대를 막느라 윈디아씨와 용병 연맹장은 성벽에 있고 피스나씨는 수성 병기를 설치한다고 여기저기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요."

"상아 길드장은?"

"길드장님은 지금 길드에 계세요."

"그나마 다행이네. 가자.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길드장이니까."

마법문에서 나온 모험가들이 장비를 챙기고 길드 회관으로 나왔을 때 그들은 반파되어 있는 회관의 모습에 분노했다.

늘상 봐 왔던, 시끄럽고 무례하지만 즐겁고 평온했던 길드 회관이 박살나 있는 것에 깊은 짜증과 분노를 느낀 그들은 사무소에서 나온 필레를 향해 외쳤다.

"필레!"

"아. 모두 오셨나요."

"상아 길드장은? 이제 어떻게 할거야?"

"지금 당장 길드의 방침은 길드를 지키는 것이에요. 그리고 길드의 구역을 순찰하는 것이구요."

"어떤 새끼들이 이런 짓을 한거야?"

분개한 검사 한명이 이를 갈며 외치자 필레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다난교도들이에요. 다난교의 습격에 의해서..."

"아아아... 그 개새끼들!!"

"감히 사교 나부랭이가 모험가 길드를 쳐! 가만두지 않겠어!"

어두운 복도를 걸어 방에 도착한 라닌은 그곳에 들어오자마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지?

의자에 앉아서 신성을 배출해야 할 이들을 노려보며 라닌은 작게 중얼거렸다.

"왜!!"

운명의 세 여신의 심장에 단검이 꽂혀 있다.

그래도 신이라는 위치에 있는 자들인데 이들이 허망하게 죽어있는 것을 보며 라닌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파르티는!?"

저 셋은 그렇다고 치자.

중요한 것은 파르티다.

황급히 기둥 뒤에 있는 파르티의 자리로 간 라닌은 어이없어하며 키득거렸다.

"쿡쿡... 크크크...하하하하!!"

없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할 파르티는 시체조차 없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라닌은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하우드으으으!!!"

"나 불렀나?"

"왜 이런 짓을 한 것이지!?"

복도 끝에서 걸어 나온 하우드. 그리고 그의 뒤에 서 있는 창백한 안색의 파르티.

그 둘을 보며 라닌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분노로 완전히 일그러져 있는 그들을 보며 라닌이 검을 뽑은 순간 하우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유들유들한 어조로 말했다.

"필요하니까."

"뭐?"

"생각보다 잘 해주었어. 라닌."

"뭐라는거야!!"

"거기까진 당신이 알 필요가 없네요. 라닌... 아니. 제갈량."

"어이... 지금 장난하는거야? 이게 무슨 짓인데!!"

그동안 라닌에게 신성을 갈취 당한 탓에 상태는 좋아보이지 않았지만 파르티는 확실히 서 있었다.

비록 하우드에게 부축받고 있지만 그녀는 라닌이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당한 여신의 모습.

그녀를 마주하며 이를 드러낸 라닌이 벽면의 장치를 만지려는 순간 하우드의 손이 올라갔다.

"컥!!"

마력의 흐름이 몸에서 비틀어진다.

복부를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에 라닌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자 하우드는 그녀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파르티에게 말했다.

"준비는?"

"다 됐어요."

"하아... 과연 이번에는 성공할까?"

"글쎄요... 하지만 그의 말대로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어요. 일단 저 여자 자체가 그의 패 중 하나니까요."

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라닌을 무감정히 내려다보며 파르티는 하우드의 어깨를 잡았다.

아무리 필요하다지만 과할 정도로 신성을 빼앗긴 것에 힘겨운 것이다.

간신히 서 있는 그녀가 자신을 잡는 것에 기분나빠하면서도 하우드는 애써 담담한 어조를 유지했다.

"교단은?"

"교단은 움직이고 있어요. 남아 있는 신성으로 교황에게 신탁을 내렸습니다."

"던전 도시를 공격하라고?"

"예... 이제 모든 것이 끝나는 시간이네요."

"그럼 쟤는 이제 어쩌지?"

"글쎄요..."

고통에 겨워 흐느끼고 있는 라닌을 내려다보며 파르티는 무감정한 시선을 지우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힌 라닌이었지만 그것에 대한 증오나 분노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감사를 해도 모자랄 것이다.

라닌이 있었기에 이만큼 일이 편하게 진행되었으니.

"그의 말대로라면 저자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디다 써먹으려는 건가요. 저 가짜따위."

"그거야 나도 모르지. 애초에 이 모든 것을 계획한 것은 그잖아."

"하지만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처해하며 파르티는 볼에 손을 대고 생각을 하다가 빙긋 웃었다.

"아무래도 좋네요. 저 여자따위는. 이제 저희들이 할 일을 하러 가죠."

"그래..."

말을 마친 파르티와 하우드가 방에서 사라진다.

쓰레기처럼 버려져 고통스러워하던 라닌은 겨우 몸 안에 있던 고통이 사그라들자 눈물 젖은 눈을 들었다.

독기와 광기, 그리고 분노로 점칠되어 있는 검은색 눈동자에 빛이 들어 오자 라닌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계획... 이라고? 그럼 내가... 고작 해야 장기말에 불과했단 말야...?"

하우드를 끌어들인 것은 자신이다.

방심한 카야를 속여 그녀를 의자에 앉힌 것도 자신이다.

신에 대한 모든 것, 그리고 이 세계의 모든 비밀을 밝혀낸 것도 자신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토록 비웃던 운명에 묶여 있는 다른 이들과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고?

"웃기지마."

아니다.

절대 아니다.

라닌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꼭두각시... 인형 따위가 아니야!!"

이 세계를 지배할 신이 될 몸이다.

이 세계를 완성시킬 절대자가 될 몸이다.

한낱 타인의 계략이나 판에 휩쓸릴 그런 장기말 따위가 아니다.

자신의 강한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만들어 낸 하우드와 파르티. 그리고 이렇게까지 상황을 만들어나간 운현에 대한 막대한 증오심에 라닌은 하나 남은 공간이동 마석을 잡으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나는... 나는 신이 될 사람이다...!! 그때처럼 당할 생각은... 없어!"

409====================

마지막 인사

"상황은 어때?"

"좋지 않아."

전력을 발휘하면 전 세계와 맞붙어도 승산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던전 도시이지만 상황은 이상할 정도로 좋지 않았다.

상인 조합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교섭은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었고 마법적인 방해 때문에 다른 나라에 가 있는 용병들에 대한 연락은 할 수 조차 없었다.

식량이나 물자는 많이 있었지만 이번 전투로 죽은 이들이 상당했다.

즉 싸울 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조작한 판 같은데..."

다난교에 의한 내부의 테러는 진압되었지만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바깥의 적을 해결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각 조직의 장들과 간부들이 모인 회의장에서 윈디아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발렌타인 가문에 연락을 취해봤습니다만... 어머님도 지금 이 상황이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다만... 한가지."

"......"

"파르티 교단의 총단에서 던전 도시를 이단이고 말살해야 할 곳이라고 정해버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각국에서 군대를 보낸 것 같아요."

"파르티 교단에서 왜!? 아둔! 이야기 들은 것 있어?"

"아, 아뇨..."

아둔과 에리스 역시 들은 적이 없는 모양이다.

당황한 그녀들이 어리둥절해하며 각자의 성물로 본단에 연락하려고 해보았지만 그녀들 역시 본단에 연락할 수 없었다.

"파르티 교단과 연락을 시도해봤지만 저희들도 모두 실패했어요. 파르티 교단이 던전 도시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이들을 멸절시키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윈디아의 무거운 말에 회의장의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물론 버텨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해가 발생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용병 연맹장. 당신은 회의가 시작하고 나서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는군요."

"딱히 할 말이 없어서요."

회의가 시작되고 나서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아르토리우스에게 윈디아는 날카로운 어조로 말을 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상황에서 주도적으로 나서야 할 용병연맹의 연맹장이 이토록 소극적인 모습만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할 말이 없다? 그게 할 소린가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바깥의 용병들과 연락이 되지 않는 이상 지금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수성 뿐이잖습니까. 그리고..."

탁자에 놓여져 있는 물을 한모금 마신 그녀는 자신에게 주목되어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찬찬히 흝어 본 후 히죽 웃었다.

"이 상황이 재밌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재밌다구요? 뭐가요?"

"너무 딱 들어맞습니다."

"....."

"너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어요. 시장 선거로 모두가 바쁜 시기. 던전 도시의 테러. 그리고 모험가 길드에서 뭐라고 했죠? 던전 내의 몬스터가 소실되고 3계층 이상은 들어갈 수 조차 없게 되었다구요?"

"그래."

"더 이상 코어를 얻을 수 없는 상황. 거기에 파르티 교단이 대놓고 적대표시를 한 데다가 각국의 군대가 신기하게도 정찰에 걸리지도 않고 이곳까지 왔다는 것."

담담한 어조이지만 그녀의 말을 넘길 수는 없었다.

모든 이들이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을 바라 보던 아르토리우스는 차분히 마지막 말을 꺼내었다.

"이 모든 상황을 누군가가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그 누군가는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한참동안 생각하던 피스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아르토리우스는 히죽 웃었다.

"신."

"....."

"아니면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마치 '정해져 있는 것' 처럼 일이 흘러가고 있는데 말이죠."

아르토리우스의 차분한 말에 모두들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절대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않았다.

각국에서 협력하여 던전 도시를 치는 이런 미친 일이 일어날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또한 파르티 교단에서 뜬금없이 던전 도시를 악이라고 지정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몇번이나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이 상황은 정말 운명에 정해져 있는 일 같기도 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글쎄요."

상아의 싸늘한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빙긋 웃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상아가 저런 이야기를 하면 안되지.

아르토리우스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에 상아가 천천히 입술을 열어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자 상아의 뒤애 서 있던 펠리시아는 그녀를 말렸다.

"아르토리우스. 당신은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요?"

"모르겠는데요. 제가 아는게 뭐가 있겠나요."

"그런가요. 그럼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토리우스는 주변을 둘러 본 후 싸늘히 말했다.

"지금 여기서 입방아만 찧고 있기보다는 나가서 검이라도 한번 더 닦는게 좋은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의미없는 회의는 관두시죠."

"뭐!?"

"당장 앉아!"

"아무래도 바깥에 있는 저들은 당장 저희를 공격할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저 시위에 불과한 군대 같아요. 포위망을 구성하고 더 이상의 공격이 없는 것을 보면요."

아르토리우스의 싸늘한 반응에 회의장의 모두가 발끈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것을 만류하듯 전 연맹장인 티르빙은 황급히 주변을 보며 성난 이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용병 연맹과 시청의 병사들이 순찰을 돌고 있습니다만... 아까 낮의 테러가 있을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저들은 경계를 삼엄히 하고 던전 도시에서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공격은 하지 않고 있어요. 용병들이 던전 도시로 오게 되면 불리한 것은 그들인데도 말이죠. 이상하지 않나요?"

"확실히..."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상대가 시간을 끌고 있다고는 하지만 던전 도시에서 보내는 코어와 몬스터 사체 가공품은 각 나라 뿐만 아니라 용병단에게도 보내지고 있어요. 상인 조합에서 보낼 물자들이 이곳에서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것에 대한 문제는 그들도 깨달을 터. 거기에 용병 연맹과 정기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친다면 용병들이 던전 도시로 올거에요. 그 기간은 길어야 일주일. 일주일만 버틴다면 활로가 생길 것입니다."

"흐으음..."

티르빙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에서 용병들이 온다면 바깥의 적들을 처치할 수 있다.

그리고 모여 든 용병들과 함께 던전 도시의 물자를 이용한다면 세계를 향해 싸울 수도 있다.

"문제는 던전의 몬스터가 사라졌다는 것인데..."

"...그게 가장 큰 문제지."

"상아 길드장. 그에 대해서는?"

"조사중이야. 하지만 원인을 알아내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아."

우울한 이야기이지만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상아의 말에 모두의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던전 도시의 존재 이유는 던전에서 나오는 몬스터 코어와 몬스터 사체를 이용한 가공품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없어졌다는 것은 던전 도시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우울해하자 상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힐끔 아르토리우스를 보았다.

"저 여자의 말대로 이렇게 의미없는 회의를 할 시간에 좀 더 조사를 하는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모험가 길드는 던전의 변화가 왜 일어난 것인지 파악해보도록 할게. 뭔가 일이 있다면 바로 알려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하세요. 상아 길드장.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아."

더 이상의 회의는 무리다.

일단은 현재 가지고 있는 물자와 바깥의 용병의 구원을 기다리자는 결론만 남은 채 회의가 끝나버렸다.

"상아 길드장."

"뭐야?"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모두가 빠져나가는 와중에 아르토리우스가 다가와 말을 걸자 상아는 기분나쁘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의 조력자.

기분나쁘기는 하지만 그녀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상아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야기는 나중에 해."

"...운현님."

"어라? 여긴 왜 온거야?"

"걱정돼서 말이지."

던전 도시에 있는 다난교를 모두 쓸어버리기는 했지만 운현은 이 상황이 어째서 이렇게 흘러갔는지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다.

아마 하우드, 혹은 파르티. 아니면 둘 모두의 짓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이런 사태를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야말로 신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벌어질 수 없을 정도의 일들이니 말이다.

"돌아가도록 해요."

"....."

"할 말이 있으면 나에게 하지 그래?"

"...아닙니다."

상아와 상아의 옆에 있는 운현의 연인들을 원망스럽다는 듯 말없이 바라보던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의 말에 고개를 저은 후 몸을 휙 돌려 용병 연맹의 간부들과 함께 복도를 걸어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상아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운현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왜?"

"아르토리우스... 좀 위험하지 않아?"

"아니."

"에?"

"아르토리우스만큼은 절대 날 배신하지 못해."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는거야?"

"그야... 아무튼 그런 이유가 있어."

아르토리우스가 자신의 위신체라는 것은 말해주지 않았던 운현이 장난스럽게 웃자 상아는 그의 볼을 꼬집었다.

그것에 장난스럽게 아파하며 키득거린 운현은 뒤를 돌아 자신을 슬픈 눈으로 응시하는 아르토리우스에게 작게 신호를 보냈다.

그의 신호를 본 아르토리우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양 팔을 벌린 후 느긋하게 말했다.

"자자. 돌아가서 밥 먹자."

"부르셨습니까."

"응. 아까 상아는 왜 만나자고 한 것이지?"

"몇가지 물을 것과 해줄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밀장소에 도착해 아르토리우스와 만난 운현은 그녀의 우울한 안색을 보며 피식 웃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건..."

"쓸데없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뭐 좋아. 네가 내 신뢰를 무너트리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까."

"...네."

운현의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움찔했지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신뢰를 받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르토리우스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 것을 본 운현은 의자에 앉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운현님께는 나쁜 일은 아닌 듯 싶군요."

"그렇다 이거지..."

운현의 목적은 던전 도시의 부흥이나 안전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상아, 필레,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의 안전.

그 외에는 망하든 말든 관심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깥에 군대가 몰려들어 던전 도시 내 사람들의 움직임이 경직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오히려 편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군대가 막고 있음으로써 물자 및 인구의 유동이 적어지고 상황의 변화가 줄어 예측해야 할 것들이 상당부분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속 편하게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니..."

"....."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나?"

"그다지... 다만 제 독자적인 정보망에 의하면 파르티 교단의 본단에서 교황을 비롯한 중추 세력들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거기에 새롭게 뽑은 이단심판관들과..."

"과?"

"신성 수호자라는, 교황 직속의 특수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렇다 이거지."

아르토리우스의 말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이것으로 대략적인 흐름은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을 주도한 자, 그리고 그자가 원하는 것.

운현이 이를 드러내며 웃자 아르토리우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천천히 말했다.

"던전의 변화. 그리고 파르티 교단이 움직이는 것... 그리고..."

'하우드와 파르티의 목적.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나다. 그렇다면 그들은 나를 찾기 위해 던전 도시 안으로 들어오겠지.'

"용병들의 움직임은 어떻지?"

"아직 제대로 연락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럼 됐어."

"네?"

"일단은 기다리는 것이 좋은 방법이겠군."

"......."

"상대가 낚시바늘을 물 때까지는 말야."

410====================

마지막 인사

"낚시바늘을 물다뇨?"

아르토리우스의 질문에 운현은 히죽 웃었다.

그의 웃음을 본 그녀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 찰나 멀리서 폭음이 들렸다.

성벽을 공격하는 소리다.

그것에 아르토리우스가 움찔한 순간 운현은 품에서 꺼낸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자... 그럼 가볼까."

"예?"

"넌 네 할일이나 해라."

차분히 말하고 운현은 곧장 길드로 향했다.

바깥의 군대가 공격을 들어 온 것 때문에 길드의 움직임이 분주해졌지만 운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처음은 레나지.'

레나에 대한 공격은 일단 막아내었다.

신성을 이용하여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라닌을 한번 물리친 이상 다음이 어떻게 될지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운현씨!"

"여기 계셨나요?"

"지금... 큰일이! 꺄악!!"

천장이 무너져내리며 커다란 돌이 레나의 머리로 떨어졌다.

가볍게 손을 뻗어 레나를 끌어당긴 운현은 레나의 얼굴이 파랗게 물들자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가요?"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라고 말을 하지만 운현은 이게 운명의 공격이라고 생각했다.

던전 도시를 군대가 공격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공교롭게 레나의 머리를 노리며 이렇게 날카로운 파편이 떨어질 근거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와...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네."

사정을 모르는 길드원 중 하나가 기겁하며 바닥의 파편을 보았다.

날카로운 철골과 함께 묵직한 돌들을 치우는 그들을 말없이 바라보던 레나는 운현의 팔을 꽉 잡은 채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제... 어쩌죠?"

"저와 같이 있으면 위험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네에..."

"운현!"

"음?"

문이 열리고 상아가 들어왔다.

다급한 얼굴인 그녀의 모습에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상아는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큰일이야!"

"무슨 일인데 그래?"

"빨리 나와봐! 하늘이...!"

"....."

시작되는 것인가.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밖으로 나갔다.

이미 바깥에 있던 사람들은 하늘의 모습에 놀라 당황하고 있었다.

"저건... 마법 문이잖아."

"왜 하늘에..."

"흐으음..."

"저 상황! 뭔지 알아!?"

"대충은."

"뭔데?"

"저거?"

하늘을 올려다보며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계의 문이 열리는 거다."

"이계의... 문?"

던전 안에서 계층이 바뀔 때 통과해야 하는 마법문에 걸려 있는 마법과 같은 마법이 하늘에 펼쳐져 있었다.

그때의 작은 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커다란 마법은 던전 도시를 전부 뒤덮고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거야?"

"글쎄. 나도 모르지."

아마 천검자가 살해한 이들.

그리고 던전 도시를 공격한 군대로 인해 운명의 틀어짐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번에서는 없었던 일들이 크게 벌어지고 있다.

운현이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옆으로 백금발의 사내, 하우드가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당신인가? 저건?"

"알고 계시면서 뭘 그리 물으십니까."

빙긋 웃은 하우드는 하늘을 가리켰다.

"저게 무엇인지 알고 계시지요?"

"마법문 아닙니까."

"네. 운명의 틀어짐이 강해져서 저의 본체인 악신의 힘이 깨어나려고 하는 것이죠."

"하지만 당신이 있기 때문에 악신은 깨어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저와 악신은 같은 존재. 제가 살아 있는 한 악신이 봉인에서 풀려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던전 안의 몬스터가 사라진 것도 그것 때문입니까?"

"네. 저는 악신이 혼을 나눠 만든 위신체입니다. 제가 이 공간, 이 시간에 살아 있는 이상 악신은 절대로 자신의 힘을 드러낼 수는 없지요."

"그럼 당신을 죽이지 않는다면 악신이 살아날 일은 없겠군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요?"

"....."

하우드의 미소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시간을 끌고 싶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저기 보세요."

"....."

"맙소사!"

"저건 고블린이잖아!!"

골목에서 다섯마리의 고블린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던전의 고블린이다.

던전 바깥의 고블린이 아닌 고블린들이 나타나자 모험가들과 시민들은 당황하며 무기를 들어 고블린을 공격했다.

"왜! 던전의 몬스터가 여기에!?"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운명의 뒤틀림이 강해질 수록 악신은 더더욱 많은 균열을 만들어내어 부활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풀기 시작할겁니다. 아직은 뒤틀림이 약해 약한 이들을 풀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강한 이들이 나타나겠죠."

"5계층의 몬스터들까지 풀려나고 그들을 모두 처치하면 어떻게 됩니까?"

운현의 질문에 하우드는 껄껄 웃었다.

"그러기 전에 이 세계의 모든 존재가 말살당할 겁니다."

"제가 있는데도요?"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당신의 몸은 하나인데... 가능할 것 같습니까? 그리고 만약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던전도시 안의 사람들은 최소한 멸절하겠지요. 지금 이 상황은 던전도시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죽지 않아야 할 이들이 악신의 힘에 의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계속된다면 결국은 종말 뿐이죠."

"하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던전 도시 안의 사람들은 죽든 말든 상관없는데요. 제가 지켜야 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요."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하우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은 후 입을 열었다.

"아무리 당신이라고 하더라도 병을,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비웃는 듯한 그의 말에 운현은 빠득 이를 갈았다.

마치 너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것에 분노하며 운현은 싸늘히 말했다.

"...그거야 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쉬운 길을 버려두는 것입니까? 당신이 신이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하우드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다 알고 있습니다. 상아를 비롯한 다른 여인들이지요. 그들을 지키겠다고요? 뭐 좋습니다. 하세요.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가능할 것 같습니까? 애초에 당신이 세운 계획이 있잖아요. 최악의 경우 해야 할 방법."

"지금이 최악의 상황이라는 건가요?"

"네."

단호한 얼굴로 하우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상으로 최악의 상황은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왜죠?"

"왜냐하면..."

"쿠우우우웅!!"

먼 곳에서 빛이 터져나왔다.

던전 도시 내부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빛에 운현이 인상을 찌푸리자 하우드는 양 팔을 벌리며 조롱하듯 웃었다.

"마지막 단계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참... 진상이네. 너희들 모두."

"짜증나시는 건가요? 화가 나시는 건가요? 그럼 죽여주세요. 저도, 파르티도. 둘 모두를 죽여서 당신이 신이 되십시요. 그러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제 세상에 남은 신은 저와 파르티 뿐입니다. 모두 죽어 신성화되거나 흡수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일한 신이 될 자격을 가진 것은 당신... 그리고 파르티가 데려 온 그 여자 뿐. 하지만 그 여자는 끝장났으니 당신 뿐이겠군요."

하우드의 강렬한 외침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의 말대로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하우드와 파르티를 죽이고 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맞았다.

그렇게 유일한 존재가 되어 운명을 새로 써 그녀들이 행복할 수 있는 삶을 만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신이 된다라..."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신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전에도 말했을 텐데. 되고 싶지 않다고."

"왜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 여자? 만들어낸다. 돈? 만들어낸다. 힘? 만들어낸다. 그런 세계에 무슨 의미가 있지?"

"오히려 그렇기에 재미있는 것 아닙니까?"

"자꾸 너 나한테 개수작 부리는데. 그렇게 좋은 거면 네가 하라고. 네가."

"...."

하우드의 입이 다물어지자 운현은 빈정거리는 듯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너도 하기 싫은 것을 달콤한 소리로 남에게 권하지 마라. 쓰레기가."

"하하... 역시 쉽게는 안되는군요. 좋아요."

운현의 거절에 키득거린 하우드는 눈을 번뜩이며 단검을 들어 자신의 손등을 그었다..

"누가 이기나 한번 시험해볼까요?"

"카아아아아!!"

"꺄아악!"

"모, 몬스터다!!"

"어째서 던전의 몬스터가!?"

"......"

수라장으로 변한다.

점점 많아지는 몬스터들이 거리를 뒤덮기 시작하자 운현은 이를 갈며 검을 들어 크게 베었다.

그의 검에서 피어오른 푸른 검기가 물밀듯 밀려나오는 몬스터들을 싸그리 소멸시키자 하우드는 키득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마법문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당신이 저 마법문을 막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할 수 있다면 어디 한번 잘 막아보시지요."

"하아..."

"그리고 항복하실 것이라면 언제든지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파르티라면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죽어 드릴 수 있으니까요."

비릿하게 웃으며 하우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순간 레나는 운현의 팔을 꽉 잡았다.

"운현씨! 도망쳐야해요!"

"못 봤어요?"

"네?"

"아니 방금..."

"뭘요?"

"참나..."

"운현!"

"운현 오빠!'

'하우드 개새끼.'

속으로 중얼거리며 운현이 검을 잡았을 때 길드 건물에서 상아와 필레,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가 달려나왔다.

모두 무장을 한 모습이었다.

던전의 몬스터가 도시에 출몰했다는 것에 그 토벌을 하려고 나온 그녀들을 보며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쟤네를 지키려면 하우드를 죽이고 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하우드가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한 것처럼 수가 너무 많았다.

지금이야 고블린이나 오크 정도의 약한 몬스터들만 출몰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심층의 몬스터들이 나올 것이고 더 지나면 바깥의 군대도 움직일 것이다.

거기에 아까의 빛을 보면 파르티 교단까지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듯 했다.

"이거 되게 기분 나쁘네."

"응?"

"뭐가?"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리 초인의 경지에 올라와 있는 운현이라고 할지라도 저 많은 수를 상대로 모두를 지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거기에 아직 헤스티아와 바제트, 미야는 400레벨조차 되지 않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이 생길까봐 어떻게든 바짝 레벨을 올려두려고 한 것인데.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지."

"운현?"

"일단 사람들을 모아. 시청으로 대피한다. 길드에서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으응...!"

고블린과 오크들이 넘쳐나는 골목을 걸어 전투를 하는 모험가들을 구한다.

약한 몬스터들이라 그런지 쉽게 합류를 할 수 있었지만 슬슬 강한 몬스터들이 나오는 것을 운현은 볼 수 있었다.

"우지끈!"

"이런 개..."

길드의 구역을 벗어난 순간 운현은 눈 앞의 광경에 이를 갈았다.

사막화가 되어 있다.

던전의 몬스터 뿐만 아니라 지형까지 끌어들이는 건가?

운현이 욕설을 내뱉으려는 순간 사막의 거대한 웜이 모래를 뚫고 나와 바제트를 향해 독침을 쏘았다.

"채앵!"

"어림없다."

과거에 바제트를 죽였던 독침이다.

그것을 검으로 막아낸 운현이 중얼거렸을 때 운현은 자신의 뒤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에 이를 갈았다.

"이런 씨!"

"우우웅!!"

좀비 마법사다.

미야의 복부를 꿰뚫었었던 좀비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강력한 레이저가 발사되는 것을 본 운현이 나서려는 순간 상아는 자신의 광검을 펼쳐 그 레이저를 막아내고 마법사를 제거했다.

"일부러냐...?"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기라도 하듯 공격이 들어온다.

자신이 있는 이상 절대로 당할 일이 없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에 운현은 빠득 이를 갈았다.

"하우드... 이 개."

"운현님!"

"제니스씨. 다른 사람들은?"

"시청으로 보내고 있어요.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골목과 골목에서 생성되어 나오기 시작하는 몬스터들을 막기에는 수가 너무 부족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어떻게고 자시고..."

"운현 때문입니다."

"...너 이러기냐?"

사막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웜의 머리 위에 서 있던 하우드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가 누군지 모르는 이들은 그의 말에 당황했지만 그를 알고 있는 제니스는 입을 꽉 다물었다.

"운현. 당신이 문제입니다. 당신이 절 죽여주면 되는 것을 왜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는 겁니까?"

"운현...? 그게 무슨 소리야?"

"이게 다 운현 오빠 때문이라구요?"

"무슨 소리야. 운현... 설명해줘."

미야와 헤스티아 필레는 아무것도 모르니 그저 당황할 뿐 이었지만 사정을 알고 있는 상아와 바제트는 하우드의 말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게 왜 운현 때문인데!?"

"왜 운현이 그것을 감당해야 하지?"

"왜냐구요?"

하우드는 이를 드러내며 싸늘히 말했다.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만들길 원했던 것이 바로 운현! 당신이니까!!"

411====================

마지막 인사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모르겠는데. 너 무슨 개소리냐?"

"하하하... 아직은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자. 운현. 이제 마지막단계입니다. 당신이 절 죽이고 신의 힘을 손에 넣는다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모래 속에서 몬스터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2계층의 몬스터가 아니다.

4계층, 5계층의 거대 몬스터들이 하나 둘 씩 모습을 보이자 하우드는 즐거운 듯 외쳤다.

"이제 마지막!! 선택을 하십시요! 운현! 신이 될 것인지! 아니면 다시 할 것인지!"

"......."

하우드의 협박같은 제안에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하나하나 사람 짜증나게 만드는 녀석이다.

"그게 싫으면... 저들을 모두 죽이면 되는 건가요?"

"그만."

하우드가 손을 들어 올리자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몬스터들이 각자의 손톱이나 이빨을 드러내었다.

당장이라도 공격해 들어 올 것 같은 그들의 모습에 여인들이 무기를 들자 운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너 뒤나 보지 그래?"

"뒤... 컥!?"

몸을 돌린 하우드의 복부에 긴 장검이 꽂힌다.

등을 꿰뚫고 나온 검에 모두가 놀랐지만 운현만은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저년을 무시하면 쓰나."

"난... 가짜가 아니야!! 내가 진짜다!"

"커어어억!!"

"무려 나도 엿먹인 년인데."

헝클어진 머리.

독기에 가득 찬 눈동자.

미모는 광기와 분노로 완전히 일그러져 있는 라닌이 공간이동을 통해 나타나 하우드의 복부를 공격한 것을 보며 운현은 싸늘히 외쳤다.

"목을 베. 이계의 존재인 너라면 가능할거다."

"안그래도!"

"아흑...! 윽...!!"

복부에서 검이 빠져나간다. 쓰러진 하우드가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라닌은 두 손으로 검을 잡아 하우드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러려고 했어!!"

하우드는 라닌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운현은 라닌 역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도 자격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계에서 왔고 자신과 같이 이 세계를 바꾸려 하고.

거기에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머리를 굴릴 수 있는 라닌이라면 뭔가 최후의 수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운현이 외치자 라닌은 이를 갈며 반항하듯 소리쳤다.

"콰직!"

하우드의 머리가 둘로 잘려진다.

이정도면 즉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계인만이 운명을 끊어낼 수 있다고?

비록 가짜 세계의 주민이기는 하지만 라닌 역시 이계인이다.

하우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운현은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라닌을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이다.

그녀의 성격상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테니까.

그렇다면 그녀는 기를 쓰고 살아남아 기회를 엿보고 그것을 놓치지 않을테니까.

"라니이인!!"

하우드를 쓰러트린 라닌이 숨을 헐떡이자 하우드에 의해서 소환된 몬스터들이 포효하며 라닌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쓰러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검을 뽑아들고 달려나가 몬스터들을 공격해 그들을 쓰러트린 운현은 피칠갑이 된 라닌에게 다가갔다.

"어이. 어떻게 되가고 있는거야."

"후...후후... 후후후후후..."

피로 물들어버린 손을 들어올리며 라닌은 작게 키득거렸다.

설마 미친건가?

이렇게 되면 완전 나가린데.

운현이 그녀의 어깨를 잡은 순간 라닌은 고개를 쳐들고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핫!!!"

"야."

"이게... 이게 신의 힘이란 말인가!!"

라닌의 등에서 검은 날개가 모습을 보였다.

다난교의 검은 날개들이 가진 날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크기의 날개가 펼쳐지자 운현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나와의 약속은 잊지 말라고."

"약속...? 후후후... 아아. 운명을 바꿔달라는 거였지?"

운현의 시큰둥한 말에 라닌은 화사하게 웃었다.

"바꿔줄게. 이 세계를 완전히 지우고 나서."

"어이. 약속이 다르잖아."

"아하하하하핫!! 약속? 그게 뭔데? 어차피 너도 나를 믿지 않았잖아?"

"큭...!"

가볍게 휘둘려진 날개 바람에 밀려난 운현이 크게 밀려났다.

그것을 잡은 여인들은 허공으로 날아 오른 라닌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저게... 뭐야?"

"저게 신?"

"저건... 도대체..."

"아하하하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내 세계가 완성되는구나!! 이 가짜 세계는 사라지고 진짜가 오리라!!"

"뭘 만들고 싶은건지 모르겠네."

"넌 왜 이렇게 태평해!?"

"아니 뭐."

라닌이 신의 힘을 손에 넣으면 저렇게 변할 것이라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기에 운현은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고 상아는 당황하며 그를 꽉 잡고 외쳤다.

"어째서!? 어째서 저 여자가 여기!?"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고."

또다시 몰려 온 몬스터들이 자신을 공격하려는 것을 바라보며 라닌은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몬스터들은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렸고 운현은 시큰둥한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제 됐냐?"

"하하...하하하하하!! 이게 신의 힘인가!! 이게 운명을 다스리는 자의 힘인가!!"

힘에 취해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라닌을 향해 운현은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자. 이제 어쩔거냐."

"어쩔거냐고? 이렇게 할거다."

이를 드러낸 그녀의 손이 올라간다.

그 순간 건물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며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중화 양식의 모습이 만들어진다.

운현에게 있어서는 꽤나 익숙한 건물들이다.

"이것으로 세계가 완성되었다!"

하늘이 바뀌고 땅이 바뀐다.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것을 지켜보며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건가.'

"그만!! 이게 뭐하는 짓이야! 어째서 네가!!"

"아하하하하하!! 파르티!! 파르티이이이!!! 네년만 잡으면 네가 완전한 신이 된다!!"

라닌이 모든 것을 바꾸어가는 것에 당황했는지 하늘을 날아 카야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던전 도시를 시작으로 모든 것이 바뀌어져간다.

"이건... 이건 네 세계의...!"

"그게 가짜였다고? 아니. 이제부터는 진짜다!"

"그렇게 다시 되돌리고 싶었냐."

"그래!! 내가 원한 세계는 바로 이것이다!! 네놈의 유희가 아니다. 진정한 나의 세계를 만들 것이다!"

라닌.

아니 제갈량이 원래 있었던 세계의 모습이 이 세계에 덧칠해진다.

그것을 보며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좋은데 사람들은 어쩔건데."

"어쩔거냐고? 모두가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들의 운명을 소재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 것이다."

"아... 그래."

예상했던 것이지만 라닌은 자신의 세계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운현이 원하는 것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

"어쩌려는 건데? 고작해야 가짜 신인 네가 진짜 신인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아니지... 불가능하지!! 너도 느끼고 있을텐데? 나의 이 막대한 힘을!"

하우드를 죽이고 봉인되어 있던 악신의 힘을 흡수한 라닌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객관적으로 봐도 지금의 자신은 라닌과 붙어도 승산이 없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운현은 조금도 겁먹지 않은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하나 남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문 운현은 그것에 불을 붙인 후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자... 그럼 나도 내가 가진 비장의 카드를 꺼내야겠네."

"...네놈. 그거."

인벤토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검을 보자 라닌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히죽 웃은 운현이 척 거검을 겨누자 라닌은 당황하며 외쳤다.

"안돼!!"

"그건 네 사정이고. 여기까지 일이 진행되었으니... 어쩔 수 없나."

운현으로서도 이 방법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다.

확신을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라닌이 신의 힘을 손에 넣고 모든 것을 바꿔버리려고 한다면 어쩔 수 없다.

"내가 신이 되어주는 수 밖에!"

하우드는 라닌에게 힘을 빼앗겼고 파르티는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만들려고 한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뿐이다.

"뭐...?"

"운현!"

"오빠! 뭘 하려는 거에요! 도대체...!?"

"그만둬!"

운현의 얼굴에 깃든 슬픔과 안타까움을 읽은 여인들은 당황하며 그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그의 모습은 사라졌고 라닌은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네가 약속만 지켰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만. 너무 큰 기대였나?"

"안돼... 안돼! 그러지마!! 지킬게! 네가 원하는 걸...!"

"그걸 어떻게 믿냐. 아니, 사실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지만 말이지."

건물 위로 올라간 운현이 거검을 당겨 잡자 라닌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운현에게 손을 뻗었다.

무형의 기운이 그의 몸을 덮으려 했지만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거검은 단 한번의 베기만으로 그 힘을 모두 잘라버렸다.

"네노오옴!!"

"내가 왜 기껏 신성을 모아서 이런 검을 만들었을 것 같냐? 남들에게 공포나 주려고? 아니야. 이건 말이지... 열쇠야."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투박한 검을 툭 치며 운현은 그것을 허공에 쭉 뻗은 후 작게 중얼거렸다.

"와라. 수라여. 내 앞을 가로막는 적을 분쇄하라."

신조차도 멸할 수 있는 최강의 무기.

라닌이 이 세계의 법칙을 진 삼국 연희무쌍의 세계로 바꿔버린 순간 운현의 거검의 본체를 가리고 있던 철판이 갈라져 부숴져 내렸다.

녹이 벗겨지듯 껍질이 부서져내린 거검의 표면이 바뀐다.

넓은 검면에 그려지기 시작한 수라도.

가죽으로 감싸져 있던 자루는 인간의 살가죽으로 바뀌어져간다.

"수라마검을 어떻게!!"

"가짜야. 가짜. 고작 신성 몇개만으로 규격외의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그렇지만... 일회용이면 충분하지."

"크아아아아아아!!"

공간이 찢어지며 거대한 삼면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라닌은 강대한 신의 힘을 가지고도 그것에 질려 덜덜 몸을 떨었다.

"철컥."

운현의 손에 쥐어진 수라마검이 라닌에게 겨눠진 순간 라닌은 그것을 피하려고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세계는 바뀌어버렸다.

그 세계의 법칙이 자신에게 새겨진 순간 이계에서 나온 수라는 포효하며 거대한 손을 뻗어 라닌을 붙잡았다.

"안돼에에에에에!!"

"으적!"

라닌의 몸을 산 채로 입 안에 넣은 수라가 라닌을 뜯어먹기 시작한다.

커다란 날개, 그리고 몸통. 작은 팔과 다리까지 모두 씹어 삼킨 수라의 몸이 사라진 순간 운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결국 이것이었군."

"운현!!"

"돌아와!! 신이 되어서는 안돼!"

"이미 늦었어."

라닌이 힘을 써버린 순간 이 세계의 변화는 시작되었다.

악신, 파르티, 그리고 라닌.

이 셋이 비틀어버린 세상은 조만간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그 종말 이후에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시작되겠지.

결국은 무한 반복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운현이 바란 것도, 운현이 계획한 것도 아니었다.

"...당신."

"그랬군.... 내가 바란 게 이거였지?"

"......"

심드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운현을 향해 파르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 상황을 만들고, 또 이 상황이 만들어지길 원한 것은 나였어."

"...그래요. 결국 모든 것이 당신의 뜻대로 되었군요."

운현의 말에 파르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닌을 죽이고 그녀가 보유하고 있던 신의 힘을 손에 넣고 나서 하우드의 기억을 손에 넣어 알게 되었다.

자신이 바라던 것은 이 상황이었다는 것을.

진정한 신의 힘을 손에 넣는 것.

그리고 운명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하지만... 이해할 수 없어요. 처음의 당신은 고작해야 아무 힘 없는 인간. 그런 인간이 어떻게 여기까지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었던 겁니까?

파르티의 질문에 운현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든 자신이 있는 곳까지 올라오려고 애를 쓰는 연인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운현이 고개를 돌렸을 때 건물의 옥상에서 아르토리우스가 안타까운 눈으로 응시하는 것을 발견했다.

"쟤들을 위해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을 정말로..."

"네가 날 이해하든 말든 그건 중요한게 아니야."

작게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애달픈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상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하느냐지."

말을 마친 순간 운현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부러진 거검을 휙 바닥에 던졌다.

"다시 한번 물어보겠는데... 내가 운명을 만들고 세계를 구축하면 신 따위는 없을거야. 그래도 괜찮냐? 정 뭐하면..."

"그렇다고 죽어 줄 생각인가요? 제 입장에서는 그게 더 좋죠. 제가 원하는 운명에는..."

"...됐다."

싸늘한 그의 말에 파르티는 부드럽게 웃으며 양 팔을 벌렸다.

"이 지긋지긋한 신의 자리에서 저를 벗어나게 해주세요. 아니면 당신도 사라지고 모든 운명이 정해져 있는대로 돌아가게 해주던가."

"원한다면 그리 해야지."

"운현!! 안돼!! 하지마!!"

어느새 건물 위로 올라 온 연인들이 다급히 그를 막으려 했지만 운현과 파르티 주변에 펼쳐진 보호막은 그녀들의 개입을 막고 있었다.

"운현 오빠!! 신이 되어선 안돼요!!"

"하지마!! 하지마아아아아!!!"

"제발!! 다른 운명따윈 필요 없어!! 너만 있으면 된다고!! 운현!!"

아래에서 올라오며 상아와 바제트에게 들은 것일까?

헤스티아와 미야, 필레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자신을 말리는 것이 들린다.

"원하신다면 잠시 시간을 드리겠습니다만..."

파르티의 말에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

"안타깝군요."

"그럼 네가 하라니까."

"거절합니다."

파르티의 말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파르티도, 악신도.

결국 이 둘 모두 신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

신이 된다는 것은 저주나 다름없다.

불로불사이며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자리.

욕망도, 성취감도, 후회도, 기쁨도

그 모든 것이 없는 것이 신의 자리라는 것이다.

결국 그 자리에서 벗어나게 된 파르티는 희미하게 웃으며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럼 준비 됐냐."

인벤토리에서 꺼낸 검을 주워 들며 운현이 말할 때 바깥의 여인들은 어떻게든 보호막을 부수기 위해 최대한 공격을 하고 있었다.

상아의 광검, 헤스티아의 마법. 필레의 검술. 미야의 주먹. 바제트의 화살.

그것을 즐겁게 본 운현은 검을 내린 후 보호막을 향해 걸었다.

"운현!! 제발!!"

"그러다가 다친다. 그만해."

"다쳐도 상관없어!! 말했잖아! 운현! 신이 되면 다시는 우리를 만나지 못할 거라고!"

"아마 그렇게 되겠지."

"그럼... 하지마! 제발!!"

눈물을 쏟으며 외치는 바제트를 향해 운현은 손을 뻗으려다가 보호막을 눈치채고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동안 행복했다. 이제 너희들은 너희들의 행복을 찾아 살아... 그리고...."

"운혀어어어언!! 안돼!!"

"나를..."

목이 메인다.

현실로 회귀를 한 이후 단 한번도 울지 않았던 자신이다.

연기를 위한 거짓 눈물따위는 얼마든지 흘려보았지만 진심으로 눈물을 흘린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잊어줘."

"운현! 운혀어어언!!"

빙긋 웃은 운현은 모두를 향해 말하고 다시 파르티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모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운현은 매정히 그것을 무시한 채 파르티를 향해 검을 뻗었다.

"이걸로 끝이다."

그의 검이 파르티의 머리를 내려 친 순간 세상에 빛이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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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현님!!"

눈을 뜨자 라티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그것을 보며 운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으세요!?"

"얼마나 지났지?"

"운현님께서 눈을 감으시고 십분도 지나지 않았어요."

"그런가..."

천천히 얼굴을 쓸어만진 운현의 어깨가 떨린다.

"운현...님?"

설마.

그가 우는 것일까?

걱정스러웠던 라티나는 운현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크...크크...으하하하하하핫!!"

"......"

갑작스럽게 웃기 시작한 운현의 모습에 라티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왜 그가 웃는 것일까.

미친듯이 웃는 그의 모습에 라티나가 침을 꿀꺽 삼킨 순간 운현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배고프다. 먹을 것 좀 가지고 와라."

"예!"

황급히 냉장고를 열어 빵과 음료수를 가지고 온 그녀는 운현이 말없이 먹기 시작하자 침을 꿀꺽 삼키며 기다렸다.

"끄억..."

"어, 어떻게 되었어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그녀가 묻자 운현은 손을 뻗었다.

그가 자신을 끌어안기를 원하는 것임을 눈치챈 라티나는 살며시 그의 품에 안겼고 그녀를 안은 채 운현은 느긋하게 말했다.

"위신체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예?"

"신이 강림하기 위한 육체... 하지만 제약이 많지. 단순하게 아바타라고 치기에는 너무 제약이 많아.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는 존재할 수 없다고? 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갑자기 그건 왜..."

"크크크크... 참나."

참을 수 없다는 듯 키득거리며 운현은 라티나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일단 하자."

"예!? 자, 잠깐... 우... 운현님... 아흣!"

그의 손이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건드리는 탓에 라티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운현이 자신을 원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갑자기 왜?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라티나는 운현이 만들어주는 쾌락에 굴복하며 신음성을 터트려나갔다.

"......"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는 라티나를 내려다보며 운현은 책상 위에 있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어두운 방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직시하며 그는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메시지창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험을 들어두길 잘했군."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지력이 100 상승합니다.]

[냉철한 이성 상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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