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7/40)

신과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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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신

"그럼 그냥 죽이지 그러냐?"

"그러고 싶지. 하지만 나도 원하는게 있으니까 말야. 그리고 너도 딱히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니란 걸 명심해둬."

"어련하시겠어."

천검자의 도발을 비웃으며 운현은 라닌의 뒤를 쫓았다. 느긋하게 걸어 골목 끝에 도착한 라닌은 주변을 둘러 본 후 운현과 천검자에게 붉은색 돌을 하나씩 넘겨주었다.

"이게 뭐야?"

"알 필요 없어요."

천검자는 알고 있었는지 순순히 그것을 받아 손에 쥐었다. 질문하는 운현을 향해 한차례 쏘아붙인 라닌은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그녀의 주문이 끝난 순간 운현은 주변이 변화한 것을 느꼈다.

"여긴..."

어두컴컴한 넓은 공간이다. 제단과 함께 몇가지 석재 장식이 있는 넓은 방 안으로 이동하게 된 운현은 주변을 둘러보며 떨떠름히 말했고 그런 그를 보며 천검자는 느긋하게 말했다.

"신성을 이용한 스킬이지. 바로 공간이동이야."

"...헤에. 어쩐지 존나게 찾아도 발견하기 힘들더니만... 이런 곳에 있었단 말야?"

"여기서 기다려요."

싸늘한 눈으로 운현을 응시한 라닌은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천검자는 귀찮다는 듯 바닥에 드러누웠고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크어어어..."

'이거 대놓고 날 유혹하는 거군.'

열린 문. 감시자가 없는 방. 그리고 라닌이 나간 것. 아무리 봐도 함정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걸려주지.'

애초에 라닌과 천검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좋은 기회를 준 것 자체가 웃긴 일이다. 아마 이들은 이런 상황을 원했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라닌은 이런 것을 원했겠지. 그렇다면 받아주지. 천검자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운현은 라닌이 나간 문을 향해 걸어나가며 하이드를 시전했다.

'이정도면 됐겠지...'

하이드를 시전하더라도 몇몇 감이 예민한 자들에게는 들킬 수 있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까 전 문을 나섰을 때 라닌이 갔던 방향으로 차분히 걷기 시작한 운현은 복도의 끝에 가까워질 수록 느껴지는 이질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어디서 많이 느낀 기운인데... 어디지?'

자리에 멈춰 선 운현은 팔짱을 낀 채 생각을 이어나갔다. 분명히 이 이질감은 어딘가에서 느껴보았었다. 잠시 생각하던 운현은 짧게 혀를 찼다.

'로그.'

낮은 한마디만으로 자신의 눈 앞에 로그창이 떠올랐다. 현재의 위치가 어디인지 파악하려면 차라리 로그를 확인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 로그를 본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알트리아에 진입합니다.]

'알트리아? 여기가 알트리아란 말야?'

알트리아는 던전을 통해 진입할 수 있는 운명의 세 여신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곳은 이런 살풍경한 곳이 아니었는데? 운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에 서서 머뭇거리다가 로그를 닫았다.

'알트리아든 어디든 상관없지.'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라닌이 어떤 방식으로 신성을 공급받느냐다. 침을 꿀꺽 삼킨 운현은 최대한 발소리를 줄이며 복도를 걸었다.

'이 냄새는...'

한참 복도를 걸었을 때 운현은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향기를 느꼈다. 피냄새다. 그리고 피 냄새와 섞여 있는 냄새에 그는 의아함을 느꼈다.

'이건 여자 냄샌데.'

여자냄새, 특히 여성이 흥분했을 때 뿜어내는 애액이 만들어내는 시큼한 향이다. 하지만 이정도로 짙은 향이라면 한두명의 애액으로는 택도 없을 텐데. 도대체 저 끝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으읍..."

"읍..."

"읍읍.."

"읍..."

'씨발 이게 뭐여.'

복도의 끝에 도착한 운현은 방의 광경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복도의 끝에 있는 방의 중앙에는 석재로 기둥이 있었고 기둥의 각 면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여인들이 앉아 있었다.

'저건...'

분명히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흑발, 백발, 금발의 미녀들. 알트리아에 있던 운명의 세 여신이다.

'저 의자는...'

자신이 예전 만들어서 사용했던 성고문용 도구가 아닌가. 아닌게 아니라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들의 입에는 투명한 관이 물려져 있었고 그 관을 통해 피빛의 액체가 끊임없이 주입되고 있었다.

운명의 세 여신들의 양 팔과 양 다리는 의자에 단단히 고정되어져 있었고 그녀들의 벌려진 다리 사이에서는 투명한 애액과 함께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이건 뭔.'

정면에 있는 금발 여신과 그녀의 양 옆에 있는 다른 여신들을 찬찬히 흝어 본 운현은 입구에서 보이지 않는 반대편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을 눈치챘다. 꿀꺽 침을 삼키고 천천히 이동한 운현은 그곳에 묶여 있는 여인을 보고 기겁했다.

"맙..."

"읍...?"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운현은 입을 꾹 다물고 묶여 있는 흑발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이 여자가 왜 여기에 이런 꼴로 묶여 있단 말인가.

'카야...?'

과거 다난 교를 이끌던 다난 교의 성녀. 카야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카야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운현은 복도를 통해 누군가가 걸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벽쪽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마력은 충분하군.'

하이딩을 마스터 레벨로 올려 마력의 소모가 적은데다가 막대한 스탯의 영향으로 마력은 넘쳐 흘렀다. 이정도라면 이곳에서 일주일도 버틸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한 운현은 방으로 들어 온 이를 발견하고 이를 악물었다.

'라닌...'

운현이 하이딩을 쓰고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라닌은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에 구속되어 있는 여신들과 카야를 차분히 흝어보았다. 그저 실험실의 쥐를 보는 듯한 연구자의 눈으로 무감정히 그들을 흝어보던 라닌은 벽에 있는 장치를 가볍게 잡아 당긴 후 인상을 구겼다.

"천검자. 이 개년..."

장치가 작동하자 바닥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온 것은 바로 운명의 오르골이었다. 알트리아의 세 여신이 가지고 있던, 운명을 제어할 수 있는 도구인 운명의 오르골을 만지작거리던 라닌은 여신들과 카야가 쏟아낸 애액들이 모여 있는 단지를 들어 성배에 담고 오르골에 올려 놓았다.

"우우웅..."

낮은 진동음과 함께 오르골이 음악을 뱉어낸다. 은은하지만 소름끼치는 음색의 음악을 즐겁게 듣던 라닌은 성배를 다시 뺀 후 그 안을 확인하며 이를 갈았다.

"젠장!! 고작 이정도 밖에 안나온단 말야!?"

"으으..."

"읍..."

"아직 모자른가 보네. 후후후... 세 여신님들? 더 내놔. 네년들의 신성을 더 내놓으라고."

"으으..."

"읍읍..."

라닌의 말이 들리는 것인지 세 여신은 비참하게 몸을 흔들며 저항했다. 하지만 그것 뿐이다. 운현이 오르골을 훔쳐 회귀를 할 때와는 사뭇 다른 그 연약한 모습을 보며 라닌은 비릿하게 웃었다.

"철컥."

벽면의 다른 장치를 작동시키자 세 여신들과 카야는 구슬프게 몸을 떨며 신음했다. 그리고 잠시 후 투명한 관으로부터 붉은색 액체가 꾸물거리며 쏟아져 들어왔다.

"으으으으으!!"

"읍!!"

"으으으읍!"

"읍!!"

어떻게든 그 액체를 마시지 않으려 했지만 입에 고정된 탓에 그것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쏟아지는 붉은색 액체를 꾸역꾸역 마시게 된 여신들과 카야는 크게 몸을 비틀며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막으려 했다.

"으읍!!"

"으으응!"

하지만 그것도 헛된 저항일 뿐이었다. 관에서 흘러내린 액체를 마시면 마실 수록 그녀들의 계곡에서는 투명한 애액과 빛이 마구 쏟아져 흘러내렸다. 그것이 계속 될 수록 그녀들의 안색이 점점 파랗게 질려가는 것을 보던 라닌은 혀를 차며 장치를 멈췄다.

붉은 액체의 주입이 멈춰지자 그녀들의 신음성은 줄어들었지만 파랗게 질린 안색은 여전했다. 더 하면 위험하다는 것인가? 라닌은 항아리에 모인 애액과 빛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아아아아!! 천검자! 이 개같은 년!! 계획따위는 다 무시해버리는구나...!! 크...!! 빌어먹을 년...!!"

악귀처럼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라닌이 발을 구르며 화를 내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운현은 그녀가 주변 정리를 끝내고 씩씩거리며 나가자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이건...'

기절이라도 한 듯, 카야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서 조금 배어나온 붉은색 액체를 조심스레 훔쳐 맛을 본 운현은 이를 드러냈다.

'몬스터의 피군.'

아는 맛이다. 현실세계에서 미약을 만들기 위해 몬스터들의 피를 뽑아 맛을 본 적이 있었던 운현은 여신들과 카야에게 강제로 먹이던 것이 몬스터의 피라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잠깐만... 던전은 악신이라고 볼 수 있어. 그리고 던전 내의 몬스터들은 악신에게 영향을 받아 운명을 빼앗긴 이들인데. 그렇다면... 이 몬스터들의 피는 악신의 피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악신의 피를 여신에게 먹임으로서 신성을 강제로 빼앗는다?'

실제로 해본 적이 없고 증명할 길이 없으니 자신의 가설이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증명해보는 수 밖에. 성큼성큼 걸어 금발 여신의 앞으로 이동한 운현은 인벤토리에 모아 둔 몬스터 피의 앰플을 꺼냈다.

'아까 맛을 봤을 때 그리 효과가 진하지 않았던 걸로 보아 잘 쳐도 2계층 정도겠군. 그럼 5계층 몬스터의 피를 먹이면 어떻게 되려나.'

열병이 넘는 앰플의 피를 한데 모은 후 금발 여인의 입에 고정되어 있는 관을 풀어내었다. 간신히 의식을 유지하고 있던 금발 여신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아. 하이딩이 풀렸나보군."

금발 여신의 입에 있는 관을 풀어내기 위해 건드린 탓인지 하이딩이 풀려버렸다. 가늘게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무심히 바라보던 운현이 몬스터의 피가 담긴 잔을 가져가려는 순간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운...현?"

"날 아는건가? 알리가 없는데."

"오르골을 가지고 도망간...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원망이 가득 담겨 있는 그녀의 시선을 무덤덤히 받으며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원망을 하든 말든 그건 알바가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운명을 만들어 줄 수 조차 없는 무력한 신따위. 라닌에게 잡혀 신성을 배출하는 도구로 쓰이라지.

"그런 것 보다 네년이 날 기억한다라... 그렇다면 신들에게 있어서 그 회귀는 의미가 없었다는 건가..."

"자, 잠깐."

느긋하게 중얼거린 운현은 왼손을 움직여 금발 여신의 입을 잡았다. 운현의 다른 손에 들려 있는 잔을 발견한 그녀는 그것에 담겨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는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으...으어..."

턱관절을 잡아 눌러 입을 강제로 벌리게 한 운현이 천천히 컵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자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힘겹게 말했다.

"하, 하흐히..."

"뭐?"

"파르티... 님을 구해줘."

"파르티가 또 왜 여기서 나오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 악마같은 년이... 파르티님마저도 여기에 가둬놨단 말이야. 파르티님이라도... 제발. 난 어떻게 되도 좋으니..."

간절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에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파르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괜히 시간을 끌려고 개수작을 부리는 건가 싶어 운현이 다시 턱을 잡으려 하자 금발 여신은 다급히 외쳤다.

"저기!! 저기 있단 말이야!"

"저기면 어디... 엥? 설마."

"그 분이 파르티님이야. 그분을 구해줘. 제발... 제발... 파르티님이 계속 신성을 빼앗기게 되면... 악신이 깨어난다고..."

절망과 공포, 후회가 가득 담긴 얼굴로 금발 여신은 애원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운현은 여신의 턱을 잡아 벌린 후 그녀의 입 안에 몬스터의 피를 쏟아부었다.

"크억... 꿀럭...컥..."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너는 신경 끄시지."

차분한 얼굴로 금발 여신에게 몬스터 피를 전부 먹인 운현은 다시 그녀의 입에 관을 끼워 넣었다.

"으읍...! 읍!!"

아까보다 훨씬 더 괴로워하며 몸을 비틀던 금발 여신의 음부에서 투명한 애액과 함께 빛이 흘러나왔다. 그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운현은 몬스터 피를 신에게 먹이고, 그들이 배출한 애액과 이 빛으로 신성을 만들어내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신성을 만들려면 일단 성배가 필요하다는 건데..."

저번에 훔쳐 온 오르골은 인벤토리에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성배 뿐인데. 성배는 가짜 신이 되는 대가로 바쳤으니 지금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성배는 라닌이 가지고 있는 성배 뿐이었다.

"흐으음... 성배는 파르티가 준 것이라고 했었지. 그럼 본인에게 물어보는게 나은 건가?"

경련을 일으키며 애액을 뿜어내는 금발 여신을 지나친 운현은 카야의 앞에 도착한 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과거 자신을 죽이려 발버둥치던, 파르티 교단을 무너트리고 다난 교가 세상을 지배하게 하려했던 다난교의 성녀가 파르티다?

"이거 정말 웃기는 일이군."

이를 드러내며 운현은 카야의 입을 막고 있는 관을 풀어낸 후 파르티의 머리를 꽉 잡았다.

"그레이터 힐."

"으...당...신은?"

"네가 진짜 신이라면 날 알겠지."

만약 단순히 회귀 전의 카야라면 그녀는 자신을 모를 것이다. 어쨌든 이번에는 처음 만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운명의 세 여신처럼 카야가 자신을 알아본다면 금발 여신의 말대로 카야가 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레이터 힐로 체력이 회복된 덕분일까? 카야의 흔들리던 눈에 촛점이 생겼다. 그녀는 멍하니 운현을 바라보다가 쓰게 웃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요. 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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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신

"날 알고 있군."

"당연히 알 수 밖에요."

카야가 신, 그것도 파르티였다는 말을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운현은 심드렁한 눈으로 카야를 내려다보았다.

"왜 파르티인 것을 숨겼지?"

"...당신은 '아직' 이군요."

운현의 질문에 카야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입을 다물어버렸다.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입을 열지 않는 그녀를 응시하던 운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꽉 잡았다.

"어이. 사람이 물어보면 리플 정도는 달아주는 게 예의 아니야?"

"....."

살기가 넘치는 그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지금 운현이 자신을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파르티는 겁은 커녕 아예 무기질을 보는 듯한 눈으로 운현을 볼 뿐 이었다. 증오도, 기대도, 흥미도 없는 그 무감정한 시선에 운현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젠장.'

자신이 이들을 만났다는 것이 라닌에게 알려지면 곤란했다. 운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카야의 입에 관을 채워놓고 하이딩을 건 후 뒤로 빠졌다.

"언제까지 그 개년놈들의 뒤치닥거리를 해야 하는 건지..."

빠득빠득 이를 갈면서 방으로 들어 온 라닌은 들고 온 상자 안의 내용물을 벽에 있는 구멍 안에 넣었다. 잠시 후 방이 흔들릴 정도의 소리가 들리자 라닌은 이를 갈며 의자에 앉아 있는 여신들 주변을 돌며 싸늘히 말했다.

"신성을 더 내놔."

"으읍..."

"읍..."

"내놓지 않는다면 쥐어짤 수 밖에."

잔혹한 웃음을 지으며 기계장치들이 있는 벽쪽으로 걸어간 라닌이 장치를 작동시키자 관을 통해 붉은 색 액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며 그 액체를 꾸역꾸역 받아마시는 여신들과 카야를 번갈아 바라 본 운현은 다른 여신들과 달리 카야가 별다른 부담 없이 그 액체를 마시는 것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저년이 다난이든 파르티든, 아니면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이든 신이긴 한가보네.'

"뭐야? 아직 안온거야?"

"신성이란게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거였나?"

방으로 돌아와 생각을 이어나가는 동안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천검자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물었다. 팔자 좋은 그녀를 싸늘히 바라보며 운현이 묻자 천검자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물론 얻기 쉬운 것은 아니지. 하지만 그년은 그걸 할 수 있어."

"말하는 투를 보니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당신 성격치고는 꽤나 잘지내는구만."

운현의 질문에 천검자는 키득거리더니 눈을 번뜩였다.

"지금은 그년을 이용해야 할 때니까 말이지.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죽인다."

"무섭구만~"

"남의 험담을 하려면 다른 곳에서 해주시겠어요?"

천검자가 자신을 죽이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나보다. 라닌은 생긋 웃으며 걸어들어와 운현과 천검자에게 각각 작은 주머니 하나씩을 넘겼다.

"운현. 당신에게는 신성 하나를 드리죠. 당신이 신성을 쓸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는 건 감사히 받도록 하지."

신성을 받아낸 운현이 히죽 웃자 라닌은 주머니 안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고작 이것 밖에 안되는 거야?"

"고작? 장난해요? 신성을 무한정 공급받을 수 없다고 말했을텐데요. 아껴써요. 필요한 만큼만 쓰라구요."

"쳇."

운현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들어 있는 듯 보였지만 천검자의 마음에 들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궁시렁거리며 주머니를 챙겼고 라닌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빠득 이를 갈았다.

"이래서 힘만 센 멍청이들은..."

"그 힘만 센 멍청이한테 목이 따여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자꾸 주제파악 못하고 까부는데... 미안하지만 당신의 이용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왜? 운현 때문에? 하. 우습군. 저 인간은 나보다 더 널 죽이고 싶어할텐데."

"헤에... 과연 그럴까요?"

운현이라는 강력한 힘이 어찌되었든 자신과 함께 하는 이상 자꾸 저런 식으로 나오는 천검자가 마음에 들리 없었던 라닌은 진하게 미소지었다.

"어차피 당신은 운현이 저와 함께 하지 않을 때를 대비한 패에 불과하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어이구~ 알아모십죠."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천검자는 라닌이 준 붉은색 돌을 깨트려버렸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이 사라졌고 운현은 시큰둥한 눈으로 둘을 보다가 떨떠름히 말했다.

"뭔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둘이 치고박고 싸우려면 딴데가서 해라."

"후후후~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그보다 잠깐 이야기를 하실 수 있으세요?"

"이야기라. 이야기 좋지. 지성의 동물끼리 말야. 뭔 얘기를 하고 싶은데?"

"저 뇌가 근육으로 만들어진 듯한 멍청한 검사와는 다르게 당신과는 말이 통할 것 같으니까요."

좋든 싫은 운현의 능력만큼은 확실히 인정해줘야 한다. 비록 자신이 한번 승리를 하기는 했지만 그 전에 운현은 천하를 쥐락펴락할 정도로 뛰어난 지략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라면 단순히 감정 수준에서 움직이는 천검자와는 확실히 다를 것이라 생각한 라닌은 운현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신의 힘을 가지고 싶으신가요?"

"그런 거 가지고 있어서 어디다가 쓰게?"

"후후후... 그럼 다행이군요."

"왜. 신이 두명일 수는 없는 거냐? 악신이든 파르티든, 거기에 다난이나 다른 신들도 존재하는데 왜?"

"그렇긴 하죠.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고작 계략이나 운명에 묶여 있는 신이 아니니까 그래요. 파르티나 악신이나. 그들 역시 운명이라는 거대한 법칙 안에 묶여 있는 장기말에 불과한걸요. 제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닌... 운명 자체를 지배할 정도의 신이 되는 것이랍니다."

"그 자리는 하나 뿐이다?"

"네."

"뭐 그건 관신없어. 위신체가 없으면 세상에 관여조차 할 수 없는 신의 자리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레나님을 살리는 것만이 목적이다?"

"그렇다고 해두지."

"후후후~ 그런가요? 아. 그러고보니 당신에게 동료들이 있더군요. 그리고 아까의 그 아가씨도 그렇고."

"그게 뭐."

운현의 시큰둥한 표정에 라닌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동료나 여자가 필요하시다면 말씀해주세요. 더 괜찮은 이들이 있으니까요. 모험가의 클래스에서 도적이라는 직업은 무척이나 귀한 직업이잖아요? 제 부하 중에 도적 클래스를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이가 있으니까 원하신다면 빌려드리지요."

"뭔가 되게 친절한데?"

"당신이 강해져야 움직이기 편해지니까요."

"왜. 천검자를 상대하는 것 때문에? 슬슬 죽일 때가 되었나보지?"

아까 전의 천검자의 반응도 그렇고 라닌의 날선 반응도 그렇고.

둘 다 거의 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모습이다.

그것을 떠올리며 운현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런 그의 비웃음에 라닌의 얼굴은 딱딱히 굳었다.

"...지금 그 여자 이름이 왜 나오는 건가요?"

"아니 딱 봐도 서로 언제 뒷통수를 칠까 고민하는 단계 같아서. 천검자가 요새 신나게 사람 죽이고 다니는데... 그걸 생각하면 천검자를 그냥 놔둘 수 없는 것 아닌가?"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겁니다. 천검자와 저는 서로 필요에 의해서 이용하기 위한 관계에 불과하죠. 천검자는 신성만 있으면 어떤 이도 죽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저와 좀 더 가까운 관계가 된다면..."

부드럽게, 하지만 무척이나 색기가 감도는 미소를 지으며 라닌은 운현에게 걸어갔다. 확실히 미모로 따진다면 운현이 만난 여인들 중 탑클래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겹다. 꺼져."

하지만 운현이 한낱 미모에 굽힐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라닌을 밀쳤고 그 손길에 라닌은 살짝 입술을 삐쭉거렸다.

"치... 뭐 좋아요. 하지만 당신이 이렇게 순순히 저와 손을 잡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그에 대한 대비로 천검자를 데려 온 것인데... 저렇게 자기 맘대로 움직인다면 골치아프죠. 운현. 당신이라면 알잖아요? 통제할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얼마나 짜증나는 존재인지를요."

"물론 그렇긴 하지. 하지만 네가 천검자를 잡을 수나 있냐?"

"그녀가 규격 외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당신이 도와주신다면 그년을 잡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때요? 생각 있나요? 천검자는 당신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잖아요."

"흐으음..."

라닌의 말대로 천검자에게는 죄를 물어야 했다.

감히 상아에게 손을 댄 자이니 말이다. 사지를 찢어버려도 용서를 하기 힘들 죄를 저지른 자다. 지금이야 필요가 있기에 살려두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후후후... 관심있나요?"

"천검자의 레벨은 500.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최대 레벨인 450을 넘길 수는 없을텐데."

운현의 질문에 라닌은 작게 키득거렸다.

"그 한계를 정한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누군데."

"신입니다. 파르티, 아니면 악신. 이 둘 중 하나겠지요."

"...그래서?"

"그 신조차도 어찌하지 못하는 운명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신성이에요. 신성만 있다면 그 한계 정도는 얼마든지 풀 수 있다구요."

"그럼 네가 하지 그러냐?"

"그건 좀 곤란하네요."

빙긋 웃으며 운현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은 라닌은 그의 볼을 살짝 쓰다듬은 후 입술을 가까히 가져갔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것을 느끼며 운현이 인상을 쓰자 라닌은 달달하게 녹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저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그래서?"

"당신이 저와 손을 잡고 제대로 움직이고 싶다면... 말씀해주세요. 당신의 한계를 없애드리지요. 그리고 그 힘으로 천검자를 죽여주세요. 그럼 당신에게 그 대가를 드리지요."

"그 대가라. 이거 눈물날 것 같군. 뭘 주겠다는건데?"

"글쎄요? 제가 신이 되어 새롭게 운명을 만들었을 때... 당신을 신으로 만들어드릴까요? 저만큼은 아니지만 이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강력함을 가지게 된다구요."

"말했을 텐데. 신이 되는 것은 사양이라고."

운현의 목적은 일인지하 만인지상도 아니고 막대한 힘도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안정된 운명을 통해 그의 연인들이 행복을 가지는 것 뿐이었다.

천하의 운현이 그런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라닌의 제안은 그에게 전혀 흥미를 못느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신기한 사람이군요. 뭐 좋아요."

"그럼 보내줘. 너랑 단 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참기 힘드니까 말이지."

"오호호... 그렇게 제가 매혹적인가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운현은 호색한이었고 여자를 보면 항상 건드렸었다. 그런 그가 자신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참기 힘들다고 말하자 라닌은 웃으며 살며시 자신의 사제복의 단추를 풀려 했다.

"아니 네 목을 꺽어버리고 싶어서 말이지."

"...아 그러세요. 그럼 가시죠. 당신에게 죽는 것은 사양이니까요."

그의 살벌한 말에 혀를 차며 라닌은 운현의 손에 붉은 돌을 쥐어주었다. 아까 전 천검자가 했던 것처럼 그가 붉은 돌을 부숴버리자 운현의 몸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홀로 남게 된 라닌은 빠득 이를 갈았다.

"개년놈들... 그렇게 까부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흠."

이미 천검자는 간 모양이다. 아까 전의 골목으로 돌아오게 된 운현은 느긋하게 기지개를 펴며 골목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시간은 많이 지나지 않은 모양이다. 터덜터덜 걸어 골목 밖으로 나온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길드를 향해 걸었다.

"시장 선거 유세가 한참인가보군..."

던전 도시의 4대 조직에서 모두 시장으로 나섰다는 것 때문인지 거리는 시끄럽기 그지 없었다.

거기에 천검자가 일으킨 살인사건까지. 던전 도시는 평소와는 다르게 묘한 흥분감으로 들떠 있었다.

그 분위기를 느끼며 길드로 걷던 운현은 멀리서 터벅터벅 걷고 있는 여인을 발견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가 왜 여기 있지?"

은회색 머리칼에 검은 망토. 흰색의 슈트를 입고 있는 여인이 자신 쪽을 향해 아무런 표정 없이 걷고 있는 것을 본 운현은 그녀를 향해 걸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상아!"

"운...현?"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본 여인.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인 상아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헬쑥하던 얼굴에 생기가 돌아오자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어디 갔다와?"

"음... 운현."

"왜?"

"시간 있으면 나랑 술이나 한잔 할까?"

묘한 기대감이 담겨 있는 그녀의 권유에 운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늦은 시간은 아니다.

"괜찮긴 한데. 너 바쁜 거 아니야? 시장 선거 기간이라면서."

"에이~ 괜찮아~ 괜찮아~"

운현의 걱정이 담긴 질문에 상아는 히죽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끌었다.

"너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한테 걸리면..."

"그럼 네가 도와주면 되지~ 듣기로는 벌써 200레벨에 도달했다던데. 이 정도 속도로 간다면 금방 길드원이 되고 길드 간부가 될 수 있겠는걸?"

397====================

신과 신

"왜 그런 표정이야?"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탓인지 식당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4대 조직의 하나인 모험가 길드의 수장이 들어갈 법한 가게는 아닌 허름한 식당에서 맥주 한잔을 시켜 홀짝이는 상아를 마주하던 운현은 그녀의 질문에 쓰게 웃었다.

"아니 별로. 그나저나 정말 괜찮아?"

"괜찮다니까~"

여유있게 말하는 상아를 보며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을리가 있나. 아마 길드에서는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한참 바쁠 때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상아가 이렇게 놀고 있는 것을 보면 칼리오스나 아둔, 펠리시아가 빠득빠득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그건 내가 알바가 아니지.'

어차피 시장 선거의 결과는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운현은 잘 알고 있었다. 아르토리우스, 피스나. 그리고 오늘 밤에 찾아갈 윈디아까지.

자신의 손에 의해서 결정될 시장 선거에 대비하여 의미없는 회의를 하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과 이렇게 술이나 마시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이 상아의 마음에 더 나을 것이라 생각한 운현이 부드럽게 웃은 순간 상아는 휙 고개를 돌렸다.

"왜?"

"아, 아니 아무것도."

"흐음. 그래? 자."

가볍게 맥주잔을 들어 운현이 내밀자 상아는 허둥거리며 맥주잔을 들었다. 유리와 유리가 맞부딪히는 맑은 소리와 함께 운현이 맥주를 시원스레 마시자 상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사람 보면서 한숨을 내쉬어?"

"그게 말이지. 아이 참. 이거 뭐라고 해야 할까."

머뭇거리면서 말을 잇지 못하던 상아는 결국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가 맥주를 한모금 마셨을 때 운현은 능글맞게 웃었다.

"나랑 마시니까 긴장돼?"

"에이~ 설마~"

"그럼?"

"그... 글쎄?"

낮게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우는 그녀를 향해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멍하니 바라보던 상아가 입을 열려는 순간 종업원이 잘 익은 통닭 한마리를 가져왔다.

"와. 와아. 맛있겠다."

"책 읽어? 되게 맛없는 것처럼 얘기하네."

"무슨 소릴 하는거야. 진짜~ 아하하하. 자. 먹자. 다리 먹을래? 내가 해줄까?"

"됐어. 내가 할게. 접시나 줘봐."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통닭의 다리를 쭉 찢어 상아의 접시 위에 올려 준 운현은 그녀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빙긋 웃었다.

"으... 그런 미소는 반칙이잖아."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상아는 포크와 나이프로 닭다리를 쭉쭉 찢었다. 기름지고 좋은 향기가 나는 닭고기를 앞에 두고도 상아가 포크를 움직이지 않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다른 것 시킬 걸 그랬나?"

"아냐. 이거면 충분해."

"그럼? 뭔가 걱정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

운현의 부드러운 말에 상아는 도톰한 입술을 달짝거렸다. 하지만 말을 꺼내지는 않는다. 그런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은 운현은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어찌나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지. 상아는 그 속을 달래기 위해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고 그것을 보며 운현은 차분히 말했다.

"필레 때문에 그래?"

"푸웁! 콜록! 콜록!"

"그렇구만."

저번에 필레와 데이트를 할 때 상아가 쫓아왔었고 자신과 필레의 좋은 분위기가 영 불편해 보였던 상아를 떠올린 운현이 말하자 상아는 정곡이 찔렸는지 마시던 맥주를 뱉어내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무, 무, 무슨 소리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 그러고보니 그때 너희들이 데이트를 했었지~ 이야~"

"야. 숨기려면 좀 티 안나게 해라."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입가에는 맥주가 흐르고 있는 상아가 허둥거리며 말하자 운현은 어이없어하며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입을 닦아주었다. 그의 손길에 딱딱히 굳은 상아가 아무런 반응도 못하자 운현은 차분한 눈으로 상아를 응시했다.

"그래서?"

"응?"

"그래서 감상은 어땠어?"

"가, 가, 감... 상이라니?"

"음? 뭐야. 난 또 질투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질투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네~"

운현에 대한 마음을 아직 확실히 정하지 않은 상아였다. 운현은 인간이고 자신은 엘프다. 종족이 다른, 수명조차 확연히 차이가 나는 존재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종족적으로 거의 금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특히 자신은 그것에 대해 한번 상처를 입지 않았던가.

현자의 제자가 된 이후 현자에게 깊은 정을 느꼈다. 거의 부모 자식 수준의 정을 느끼다가 그가 사라졌을 때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것에 대한 방어기재 때문인지 상아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쉽사리 긍정할 수 없었다.

"그래?"

'귀엽구만~'

당황한 기색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 아니라고 바득바득 우겨대는 것이 무척이나 귀엽다. 슬금슬금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닭고기를 오물거리는 상아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운현은 맥주를 한모금 마신 후 말했다.

"아. 그러고보니."

"응?"

"필레랑..."

"...말도 놓는 사이가 된거야?"

분명 데이트를 할때까지만 해도 서로 존대를 하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상아는 운현이 필레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자 자신도 모르게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반응에 미소지으며 운현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놓고, 손도 잡고. 뭐 나름 좋은 사이가 되긴 했지."

"우우우우...."

그런 분위기가 있다 못해 철철 넘쳐 흐르더니만. 결국 했구나. 상아가 상처받은 얼굴로 작게 신음하자 운현은 그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과거에도 상아는 필레와 자신의 데이트를 방해하고 끼어들 정도로 질투심이 강했다. 물론 아닌 척 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나이나 직위에 걸맞지 않는 행동이긴 했었다.

"그, 그래서...?"

"뭐 좋은 관계가 되었다고 할 수 있..."

"한잔 더 줘!!"

운현의 말에 상아는 욱하며 손에 쥔 맥주잔을 한번에 비워버린 후 거칠게 맥주를 한잔 더 시켰다. 그녀의 거친 말투에 놀란 종업원이 허둥거리며 맥주를 가져다주자 상아는 그것을 단번에 비워버린 후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뭐 어쨌다고?"

"좋은 관계가 되었다고."

"...아이 참. 내가 맥주 두잔에 취했나?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리네~"

현실도피를 하는 그녀를 보며 운현은 키득거렸다. 잔뜩 울상을 지은 상아를 보며 웃던 운현은 상아가 맥주가 아닌 위스키를 시켜서 병나발을 불자 손을 내밀어 그 병을 빼앗았다.

"정말 바쁜 거 아니야?"

"괜찮아. 이정도로는 취하지도 않는다구."

입술을 삐쭉거리며 상아는 휙 고개를 돌렸다. 쳐다보기도 싫은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진짜 싫었다면 상아의 성격상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겠지.

그저 투정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하면서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상아는 빠르게 손을 움직여 운현의 손에 들려 있는 위스키를 빼앗은 후 다시 벌컥벌컥 마셨다.

"크하~ 그래서. 필레랑 좋은 관계가 되셨으니 다 되셨다?"

"뭐가?"

"좋으시겠네~? 길드 간부인 필레와 좋은 관계까지 되시고? 거기에 제니스씨랑 펠리시아랑 다른 사람들한테도 인정받아서?"

"나쁠 건 없지."

"이익...!"

빈정거리듯 말했지만 운현은 그저 싱글거릴 뿐 이었다. 그것에 화가 치밀어 오른 상아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다시 위스키를 마셔버렸다.

"푸하..."

내뱉는 숨결에 술냄새가 풍겨온다. 그것에 운현이 히죽거리자 상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뭐가 그렇게 웃겨?"

"아니. 귀여워서."

"...또 그런 소릴 하네."

"내가 뭘 어쨌는데?"

"넌 사람 마음도 모르잖아."

"모른다라..."

약간의 취기가 섞여 있는 상아의 투정에 운현은 쓰게 웃었다.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타인의 감정따위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

눈 앞에 있는 상아를 바라보며 운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나의 만족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희생해 준 그녀들을 위해서.

이제는 자신의 행복이 아닌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짓밟아왔다.

그것이 진짜이든 가짜이든 말이다.

"어...? 우, 운현?"

운현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상아는 놀라버렸다. 늘상 부드럽게 웃거나 유들유들한 미소만을 짓던 운현이 이런 얼굴을 한 것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혹시 자신의 말에 상처받은 것은 아닐까 싶었던 상아는 주저하며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저기... 미, 미안해."

"엥? 뭐가?"

"...내가 막말해서... 화난거... 아냐?"

"하하하... 화났다면 어쩔래?"

"안났구만!"

"화났어. 그러니까 풀어줘."

"에?"

"안풀어주면 나 갈거야."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상아의 모습이 귀여운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심술궂어져버렸다. 운현은 어리둥절해하는 상아를 보며 뚱한 얼굴로 말했다.

"빨리 나 풀어줘."

"어, 어떻게?"

"그건 네가 생각할 일이지. 아. 가게가 춥네. 누가 안아줘서 따뜻하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야~"

"그럼 내가..."

"응. 자."

빙긋 웃으며 운현은 안쪽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가 벽에 달라붙어 양 손을 벌리자 상아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에. 에잇!"

이래도 될까? 라는 생각보다는 그의 품에 안긴다는 것이 좋다.

그것도 자신이 원해서가 아닌 운현이 추워서 안아준다는 말도 안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부하의 애인과 이런 스킨쉽을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도 있었다.

상아는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품에 달라붙었다.

"오오. 따뜻하구만. 술을 마셔서 그런가?"

포근한 향기와 함께 찰싹 달라붙은 상아의 몸이 가져다주는 부드러움과 따스함에 만족하며 운현은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움찔움찔하면서도 상아는 자신도 모르게 운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내가 더 만족하는 것 같은데...'

"자. 그럼 됐어."

"엣?"

"이제 좀 낫네."

"어...그."

이렇게 안긴 것은 운현이 원해서다. 즉 운현이 그만하자고 하면 그만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품에 안겨 느끼게 된 충족감과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상아는 살짝 고개를 들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먹거렸다.

"왜?"

"으으... 나도 추운 것 같아."

"여기 난방 좀...!"

"...이씨!"

또다시 능글맞게 웃으며 운현이 외치려 하자 상아는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이제는 그냥 힘으로 밀고 나가버리자.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양 팔을 손으로 꽉 잡은 상아는 운현의 가슴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저... 길드장님. 여기서 이러시면..."

상아가 운현을 덮치는 것처럼 안겨 있는 것을 본 종업원은 난감해하며 상아에게 다가갔다. 여기가 무슨 룸살롱이나 남창들이 있는 가게도 아니고 일반 음식점인데 이런 곳에서 상아가 하는 것 같은 애정행각을 벌이면 분위기에 좋지 않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만큼 종업원으로서는 긴장될 수 밖에 없었다.

"그치만!"

종업원의 만류에 상아는 억울해하며 운현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빙긋 웃은 운현은 상아를 안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

"죄송합니다. 애가 많이 취해서... 제가 데리고 가지요. 얼마인가요?"

"아... 5골드입니다."

"여기요."

코알라처럼 자신에게 매달려 안겨 있는 상아를 무시하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지불한 운현은 상아를 안은 채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대로 갔다간 그에게 안긴 채 밖에 나가게 생긴 상아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게 좋긴 하다. 자신의 허리를 안아주고 있는 그의 팔이 주는 안정감을 계속 느끼고 싶다.

하지만 이래서는 곤란하다. 자신은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며 엘프다. 한순간의 미혹으로 이렇게 되는 것이라면 괜찮지만 이게 알려지면...

"자. 이제 나간다."

"...으으...잠깐만."

자신의 고민을 알고 있는 듯 운현은 문 앞에서 멈춰섰다. 가게 안에 손님이라고는 없었다. 이것을 본 것은 종업원과 가게 주인이 다이지만 이곳의 단골인 만큼 그들이 오늘 일에 대해서 떠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밖의, 일면식도 없는 다른 사람들이 이걸 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대로 밖에 나갔다간 시장 선거에 출마했는데 자칫 잘못했다간 스캔들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았다.

"으으으으으으..."

하지만 놓고 싶지 않다. 머리는 운현의 몸에서 떨어지라고 난리를 치고 있었지만 마음은, 몸은 그를 원하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안겨 있고 싶다는 생각에 상아가 눈물을 글썽거리자 운현은 피식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

"자. 이제 내려."

"어어!?"

방금 이마에 뭐가 닿은 거지? 상아는 멍한 얼굴로 운현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설마. 몸에 힘이 풀려 그를 안고 있던 팔과 다리가 풀려버렸다.

"자. 가자고."

"으...으응."

살며시 손을 들어 이마를 만져본 상아는 이마에 남아 있는 촉촉한 감촉에 꼴깍 침을 삼켰다.

"바.바.바...방금 그거..."

"뭐?"

"으씨... 하, 한번 더 해줘!!"

398====================

신과 신

"이제 어디로 갈거야?"

"엥?"

"어?"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가게를 나온 운현은 상아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상아 역시도 운현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왜?"

"왜라니...?"

"아니... 그..."

생각해보니 운현과 만난 것은 우연히 거리에서 만났을 뿐이다. 자신이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해서 가게에 들어왔는데 얼마 놀지도 못하고 쫓겨난 것이다.

"으..."

"하하하. 술은 마셨으니 이제 슬슬 돌아가볼까 했는데. 어이쿠. 우리 길드장님은 아직 모자른가보군. 어디보자~ 뭐가 좋으려나?"

"응응!"

자신의 생각을 읽은 듯한 운현이 약간 수염이 난 턱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상아는 눈을 반짝거렸다. 기대감에 잔뜩 물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운현은 히죽 웃었다.

"길드로 돌아가서 일을..."

"야!"

"아하하.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으니까 다른 곳에서 먹을까? 괜찮은 곳을 알고 있는데."

장난기 넘치는 그의 말에 발끈한 상아가 정강이를 걷어찼지만 그것에 힘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투정에 불과한 그녀의 공격에 웃으며 운현이 말하자 상아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갈거야?"

"글쎄..."

"이왕이면 멀리 떠나고 싶어..."

떨리는 손으로 운현의 옷자락을 살짝 잡은 상아는 촉촉히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라면, 아니 여자라고 할지라도 심장이 두근거릴 법한 그녀의 분위기에도 운현은 그저 즐겁게 웃을 뿐 이었다.

"길드에서?"

"...응."

금방 떨떠름한 얼굴이 되어 길드 반대쪽을 향해 슬며시 고개를 돌린 상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키득거렸다. 역시나. 아마 길드로 돌아가면 상아는 펠리시아나 칼리오스에게 갈굼을 당하겠디. 이래서야 누가 길드장인지 알 수도 없다.

"그럼 반대쪽으로 모시도록 하지."

"응!! 헤헤~ 기대해도 괜찮지?"

"물론. 네가 좋아할만한 것일테니까."

운현이 상아를 데리고 간 가게는 과거에 상아와 둘이 왔었던 가게였다. 바베큐를 주 메뉴로 하지만 다른 음식들도 많은데다가 양도 싸고 맛도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배부르게 먹고 마신 상아와 운현이 나왔을 때는 어느새 해가 지고 있는 저녁이었다. 은은한 노을빛을 즐기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상아는 운현의 발걸음이 멈추자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아니. 이대로 들어가긴 좀 아쉬워서 말이지."

"헤, 헤에~ 그럼 어디 다른 곳이라도 갈까? 아. 내가 잘 아는 곳이 있는데...!"

아쉬운 것은 상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절해야 한다. 그와 더 이상 엮여서는 안된다. 머리는 알고 있지만 그와 함께 할 수록 즐겁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스승이 사라진 이후로 텅 비워진 마음은 운현과 함께 할 수록 충족되어진다. 어째서일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온 상태였다.

그를 좋아한다.

그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와 함께 있으면 즐거운 것이다.

"그건 좀 그렇고... 자. 일단 길드로 복귀할까?"

"우..."

"너무 펠리시아씨 괴롭히지 마라."

"...펠리시아랑 무슨 사이야?"

"별 사이 아닌데?"

"그런데 왜 펠리시아를 걱정해? 나야? 그 여자야?"

"얌마... 펠리시아씨 들으면 울겠다."

운현의 옷자락을 꾹꾹 잡아당기며 상아는 토라진 듯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런 그녀의 이마에 딱밥을 날린 운현이 성큼성큼 걸어가자 상아는 시무룩히 그의 뒤를 쫓았다.

"저기 봐봐! 저거!"

"왜?"

"아이스크림이래! 먹고 가자!"

거리낌없이 그의 손을 잡아 끌며 상아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길드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녀의 꼼수가 훤히 보였지만 운현은 그저 피식 웃을 뿐 이었다.

아이스크림 하나 먹는게 뭐가 힘들겠는가. 돌아가봤자 펠리시아들에게 신나게 혼나고 갈굼먹을 것이 뻔한 상아를 보며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무슨 맛 먹을래?"

"딸기."

"딸기 하나랑 사과 하나 주세요."

아이스크림이라기보다는 샤베트에 가까운 것을 컵에 받아 나온 운현은 나무로 만들어진 스푼을 들어 한입 먹었다. 상큼한 사과향이 입 안에 감도는 것을 느끼던 그는 상아가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길가에서 서서 먹지 말고 좀 앉아서 먹자. 여기서 조금만 가면 작은 공원이 있거든. 거기에서 먹고 가면 안될까?"

"안될거야 없지."

눈을 깜빡깜빡거리며 최대한 귀엽게 말하려 용을 쓰는 상아의 모습에 운현은 웃어버렸다. 그녀의 머리를 애정을 담아 마구 쓰다듬어 준 운현이 앞서 걸어가자 상아는 그가 헝크러트린 머리를 긁적거리며 베시시 웃었다.

"같이 가!"

그녀의 말대로 얼마 걷지 않아 공원이 나왔다. 분수대 중앙공원과 다르게 작은 공원은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노을이 비추어지는 공원의 벤치에 앉은 운현과 상아는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에 들려 있는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먹었다.

"운현."

"왜."

"그거 맛있어?"

"응. 괜찮은데."

"나도 먹어보고 싶어."

"자."

"아~"

운현이 컵째 내밀자 상아는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귀엽다. 진짜 속이 훤히 드러나는 수를 쓰는 것이 귀엽기 짝이 없다. 그것을 보고 웃는 대신 운현은 순순히 아이스크림을 퍼 그녀의 입에 물려주었다.

"헤헤~"

"좋냐?"

"응. 맛있어. 자. 운현. 너도 이거 먹어봐."

"나 딸기 별로 안좋아..."

"우..."

어쩜 이렇게 놀리는게 재미있을까. 하나하나 일일히 반응하는 상아의 모습에 킬킬 웃으며 운현은 입을 벌렸고 상아는 볼을 부풀린 후 아이스크림을 양껏 퍼 그의 입에 물려주었다.

"딸기도 괜찮네."

"그치?"

"응. 그나저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노을이 사라지며 어둠이 다가온다. 공원에 있는 작은 가로등에 하나 둘씩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운현은 차분히 중얼거렸고 그의 말에 상아는 시무룩히 고개를 숙였다.

"으... 돌아가기 싫어."

"왜?"

"일이 많은 걸. 거기에 요새 왠 정신나간 자가 살인을 저지르고 다녀서 그것에 대한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각국의 중요 요인들을 죽이는 거... 그것 때문인가?"

"응."

요새 산적한 문제가 많은데다가 마음에 걸리는 운현까지 있다. 지금까지 던전 도시의 모험가 길드 길드장으로 있으며 이정도로 힘들었던 적이 없었던 상아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상해. 몇백년간 이렇게 던전 도시가 흔들린 적이 없었는데... 왜 이렇게 된걸까?"

"그러게."

"네가 나타난 이후로 많은 것이 흔들리고 있어."

"그런가?"

상아의 말대로다. 던전 도시가 이렇게 흔들리고 일이 터져나가는 것은 운현이 던전 도시로 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

연인들을 지키기 위해 판을 만들고, 그 판을 만드는 과정에서 라닌이나 천검자가 끼고.

이렇게 되면서 만들어진 혼란에 상아는 힘들어하고 있었다.

"모험가 길드 길드장이라는 자리가 만만한게 아니구나."

"응. 어휴... 빨리 그만두고 싶다."

"그만두지 그래?"

"쉽지 않은 자리야. 내가 하기 싫다고 그만뒀다간 다른 사람이 힘들어질걸? 책임은 많은데 권리는 없는 자리니까..."

"내가 할까?"

"네가?"

"응. 나 그런 거 잘해. 그리고 네가 고생하는 것도 별로 보고 싶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운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상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길드장이라는 자리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4대 조직 정도 되면 길드장의 활동 하나하나는 정치적인 행위가 되어버린다.

던전 도시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나라들에서 집중을 하고 그것에 대한 견제까지 받을 수 있는 자리이기에 상당히 피곤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을 일개 인간이 한다? 인간은 엘프와 달라서 개인의 욕심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 개인의 욕심과 조직의 안정에 괴리감을 느껴 고통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은 현명한 운현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네가 지금까지 한 행동을 보면 못할 것 같지는 않아. 다른 사람들의 평가도 그렇고."

"그럼 됐네."

"그치만 넌 안돼."

"왜?"

"이 자리 힘들어. 쉽게 할 수 있는 그런게 아니라고. 그리고 그런 말은 펠리시아에게 절대 하지 말도록."

"흠..."

이미 펠리시아를 끌어들이기 위해 길드장의 자리에 지원하겠다고 한 운현이었지만 상아의 걱정스러운 태도에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 운현이 아이스크림을 모두 먹고 컵을 옆에 놓자 상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에구에구~ 우리 이쁜 애기가 이 누나 고생하는 것도 알아주고~ 많이 컸네~"

"뭐하는거야..."

"이뻐서 그래. 이뻐서. 자자. 머리 더 이리 갖구와."

"....."

과거에도 이랬다. 자신보다 더 오래 산 상아는 언제나 자신을 동생처럼, 아이처럼 대했었다. 그리고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지.

"어? 운현? 왜... 그래?"

상아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키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버렸다. 살짝 일그러져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상아는 움찔하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떼었다.

"혹시... 기분 나빴어?"

자신이 나이가 많다 하더라도 운현 역시 거의 삼십대에 가까운 나이다.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아이 취급하는 것이 기분나빴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상아는 약간 겁먹은 어조로 물었지만 뒤이은 그의 말에 밝게 웃었다.

"아니. 좋아서... 더 쓰다듬어 줄래?"

"물론이지! 자! 여기 누워! 너 키만 커서 손 뻗기 힘들다!"

상아의 입장에서는 환영할만한 일이다. 운현을 끌어당겨 자신의 허벅지 위에 눕힌 상아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푸른색의 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상아는 그를 내려다보고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

"좋아?"

"응. 복실복실해서 큰 개를 만지는 것 같네."

"하하. 개라."

"아니 개같다는 건 아니고. 그냥..."

"흐흥~ 과연 그럴까~"

"이게 누나를 놀려~!"

"누나라기보다는 할머니 아냐?"

"할머니... 으씨!"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다. 실제로 뭔가 같이 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상아는 운현이 너무나도 편했다. 물론 상아 자신이 타인과 엮일 때 그렇게 거리감을 두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상아의 긴 삶 속에서 이렇게까지 빠른 시간에 자신의 마음 안에 들어 온 이는 운현 단 한명이었다.

"이상하네."

"뭐가?"

"음... 내가 너에게 이렇게 대하는 거..."

"이상할게 있나..."

"이상해. 정말 이상한거라고."

"네가 엘프고 내가 인간인데 네가 날 이렇게까지 좋아한다는 거? 이야~ 이놈의 인기는..."

"그러게 말야. 쉬운 일이 아닌데..."

"나쁠 것 없잖아.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자고."

"그 솔직이라는게 쉬운게 아니란다. 아가야."

"가끔씩 생각하는데 넌 너무 일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 쉽게 가자고. 어려울 것 없잖아."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있는 자리가 그걸 자꾸 막네."

만약 자신이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단순하게 모험가. 아니. 그저 길드 간부 수준만 되었더라도 운현에게 접근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지 않았을까?

길드장이라는 높은 위치는 만나는 사람마저도 통제하고 마음을 주는 것마저도 검증을 해야 한다. 상아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하자 운현은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상아의 손을 살며시 감싸잡았다.

"너무 힘들어하지마."

"이 누나를 응원하려면 좀 더 강해진 다음에 오려무나."

"이정도면 나름 강한 것 같은데~"

"하이고~ 고작 200레벨로 강하다고 떠들지 말라고."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상아는 운현의 볼을 꽉 꼬집어 당겼다. 쭉쭉 늘어나는 그의 볼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 재미있었는지 상아의 손길은 점점 거세어져갔다.

"쪽."

"응? 뭐, 뭐한거야?"

"아니. 이런 걸 원하나 싶어서."

자신의 볼과 얼굴을 마구 괴롭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챈 운현은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자신의 입술 근처로 가져가 입맞췄다. 그것에 놀란 상아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

긴장으로 침이 넘어간다. 이건... 그도 바라는 거겠지? 아직까지 머리는 마음을 막고 있다. 이래서는 안된다. 이래서는... 그녀의 몸을 잡고 있는 한가지 고삐가 그녀의 움직임을 막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운현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 정말 사람 없네. 이런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르겠어. 살인이 나도... 그리고 연인이 키스를 해도."

"그...렇겠지?"

아무도 없다. 자리를 만드는 것은 타인의 눈이다. 하지만 그 타인이 없다면? 지금 정도라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 아닌. 그저 상아라는 단 하나의 엘프가 되어도 나쁘지 않은 것 아닐까?

그의 달콤한 유혹에 결국 상아는 눈을 질끈 감고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순간.

"빌어먹을...!!"

운현은 벌떡 일어나며 상아를 잡고 벤치에서 훌쩍 뛰었다.

"우지끈!!"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벤치가 부숴졌다. 그것에 놀란 상아가 휙 고개를 돌린 순간 상아는 운현의 입에서 나온 서늘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천검자아아아아!!!"

399====================

신과 신

듣는 것만으로 공포가 느껴질 정도의 외침이다. 그것에 움찔한 상아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운현은 그것을 신경 쓸 수 없었다.

'신성을 받아간 것이 이것 때문이었나!'

상아가 죽는 것은 아직 멀었다. 가장 처음은 레나. 그 다음은 미야. 그리고 그 다음은 바제트. 헤스티아, 필레. 마지막으로 상아다. 아직 레나에게 찾아 올 죽음의 날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검자가 상아를 노린다는 이유를 운현은 알고 있었다.

'운명을 뒤흔들려고...'

"이게 무슨 짓이냐!!"

"흥."

흙먼지 속에서 걸어 나온 흰 옷의 가면인을 노려보던 운현이 검을 뽑자 상아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광검을 쥐었다. 운현과 상아가 자신에게 무기를 겨누자 가면인은 어깨를 으쓱인 후 후드와 가면을 벗었다.

"어째서!?"

진짜로 저게 천검자일 줄이야. 상아는 당혹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와 자신의 사이는 나쁘지 않다. 아니, 한때는 함께 던전을 탐험한 사이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가 왜 나를...?

"무슨 짓이냐고 물었는데."

이를 드러내며 운현이 검을 겨누자 천검자는 비릿하게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검 끝에 맺혀 있던 푸른색 기운이 운현을 공격하자 상아는 빠득 이를 악물고 운현을 밀쳤다.

"채애앵!!"

백색의 빛으로 만들어진 검이 청색 검기를 상쇄해냈다. 그것을 보며 천검자가 씨익 웃은 순간 상아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운현! 도망가!"

"너나 도망가!"

"네가 천검자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게! 다른 사람들을..."

"하압!!"

두줄기의 청광이 날아든다. 자신과 운현을 동시에 노리는 공격에 상아는 광검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넓게 펼쳐진 광검이 만들어낸 보호막이 자신들을 감쌌지만 그 방어로 마력이 상당히 깍여버렸다.

"제길!!"

"천검자!! 상아를 노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 아닌가!"

"약속...?"

"약속은 했지. 하지만 그 약속도 라닌 그 개년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을 때 얘기 아닌가?"

"뭐?"

"라닌은 널 이용하려 한다. 그리고 날 제물로 삼으려고 하지... 그렇다면 한껏 방해해주는게 예의 아니겠어?"

"그래서...!! 날 적으로 삼으시겠다!!"

"어차피 저 계집 역시 라닌의 계획 안에 있는 계집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던전 도시의 지배자급이라면 누구든지!!"

"운현!? 저게 무슨 소리야!?"

"큭...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천검자가 이렇게 깽판을 치다니. 역시 쉽게는 못죽이겠다. 운현이 증오를 담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천검자는 깔깔 웃은 후 상아에게 달려들었다.

"으읏!!"

레벨이 500인 천검자다. 아직 450 레벨에 도달하지 못한 상아는 천검자의 일격을 간신히 막아내며 뒤로 비틀거리고 물러났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천검자는 허리춤에 숨겨 둔 단검을 빠르게 던졌다.

"채앵!!"

"방해할 생각이냐!?"

"이미 적인데 방해는 무슨!!"

힘을 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상아가 죽었다간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다. 자신의 전력이 담겨 있는 단검을 운현이 튕겨낸 것에 웃으며 천검자는 빠르게 검을 흩뿌려 상아를 밀쳐낸 후 운현에게 검기를 쏟아내었다.

"같잖다!!"

"위험..."

진각을 밟은 운현이 검을 크게 당긴 후 빠르게 벤 순간 그의 검에 맺혀 있던 붉은색 기운이 넓게 퍼졌다. 저 스킬은 상아도 알고 있는 기술이었다. 검사가 110레벨에 도달하면 배울 수 있는 검막. 하지만 검막의 방어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직 200레벨에 불과한 운현의 검막으로는 천검자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

그리 생각한 상아가 마력을 끌어 올려 운현에게 배리어를 치려는 순간 운현의 검막을 청색 검기들은 꿰뚫지 못하고 소멸해버렸다.

"..해?"

"헤에... 역시 한 수 하는구나."

"닥치고 넌 그냥 죽어라."

"하하하핫!!"

강하게 웃으며 천검자가 달려들자 운현 역시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아의 눈으로도 보기 힘들 정도로 빠른 쾌검술이 천검자의 손에서 펼쳐졌다.

일검 일검에 담겨 있는 위력에 주변이 부숴질 정도다. 그 공격을 운현이 너무나도 여유있게 막아내거나 흘려내는 것에 상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스승님의 검술!!"

"젠장...!"

아무리 운현이라고 하지만 천검자 역시 500레벨이라는 초인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이였다. 그런 그녀의 공격을 본신의 힘을 다 해서 상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운현은 상아의 외침을 듣고 이를 악물었다.

"죽어!!"

"닥쳐!! 넌 그냥 아가리 다물고 있엇!!"

"채애애앵!!"

검과 검이 부딪힌 순간 천검자의 몸이 크게 밀려났다. 그것에 천검자도, 상아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운현을 바라보았다.

"너... 무슨 힘이."

"운현? 운현... 너... 도대체."

"이야기는 나중에!! 상아! 일단 도망쳐!"

"시, 싫어!! 그러다가 네가 다치면!!"

"하하핫!! 뭐야!! 그런 거였나!?"

운현이 필사적으로 상아를 도망치게 만들려 하자 천검자는 이제서야 알았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것에 움찔한 운현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천검자의 몸이 흐릿하게 변했다.

"꺄악!!"

"상아!!"

"이년이었구나!! 이년이었어!! 레나가 아니라 이년이었..."

"탕!!"

"큭!?"

순식간에 상아의 뒤로 이동한 천검자가 상아의 머리를 향해 검을 움직인 순간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총을 꺼내 천검자를 향해 쏘았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손을 맞은 천검자가 비틀거리는 동안 빠르게 몸을 피해 운현의 곁으로 온 상아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야!?"

"저 년부터 죽이고 얘기하자!"

지금은 상아를 설득할 여유가 없었다. 천검자가 자신의 약점을 눈치채버렸다. 그렇다면?

"하아... 죽인다."

감정은 검끝을 흔들리게 하고 분노는 눈을 멀게 만든다. 이럴 때 일 수록 냉정해야 한다. 차갑게 한숨을 내쉬어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힌 운현이 천천히 검을 들어 자신에게 겨누자 천검자는 키득거리며 싸늘히 말했다.

"네놈을 죽일 필요가 없겠군. 저년을 죽이고 나면 네놈은 결국 모든 것을 다시하려고 하겠... 큭!"

"닥치라고 했을텐데."

"후후후..."

"일부러 지껄이는 거냐? 나 엿먹으라고?"

"그걸..."

힐끔 운현의 옆에 있는 상아를 바라 본 천검자는 운현의 손에 들려 있던 단검이 날아들자 그것을 검으로 튕겨낸 후 달려들며 외쳤다.

"이제 알았어!?"

"쿠우우웅!!"

밀려오는 강력한 청색의 기운에도 운현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저 무감정한 얼굴로 검을 휘둘렀을 뿐.

호각을 보이는 둘의 모습에 상아는 광검을 꽉 잡았다.

자신을 죽이려는 천검자.

자신을 지키려는 운현.

누구를 도와야 할 지는 고민할 이유조차 없었다.

"천검자아아아!!!"

"건방진!!"

운현과 공방을 나누던 중 상아의 광검이 자신을 노리자 천검자는 이를 갈며 허리의 소검을 뽑아들었다. 왼손의 소검을 휘둘러 그녀의 광검을 쳐낸 천검자가 뒤로 밀려났을 때 운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천검자의 머리를 노렸다.

"머리 대. 머리."

"걸렸구나!"

"스틸!!"

"뭣!?"

천검자의 머리를 쪼갤 기세로 날아들던 검이 사라졌다. 그것에 당황한 운현을 보며 천검자는 히죽 웃은 후 운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자신의 심장을 노리는 공격. 그것에 운현이 이를 악문 순간 상아의 광검이 빛을 뿜었다.

"챙!!"

"쳇!!"

회심의 찬스였는데. 운현이 허공에서 몸을 틀어 바닥을 구른 후 잽싸게 뒤로 빠진 후 단검을 꺼내 쥐자 상아는 빠르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아아. 죽을 뻔 했네."

"흐으음... 이봐. 천검자. 고작 상아 하나 못잡으면 어떡해? 그리고 저 자는 누구고?"

진한 갈색의 긴 머리를 한 도적 복장의 여인이 수풀에서 걸어나왔다. 방금 전 운현에게 스틸을 써 빼앗은 성검 일레인을 가볍게 움직여 본 그녀는 그것을 잡고 스킬을 발동시켰다.

"웨폰 브레이크."

"쩌정!!"

"어머? 꽤 좋은 검인가보네."

"너는... 씨프 마스터 베제키엘!!"

"아는 사람이야?"

"도적 중 최고 레벨에 올라가 있는 자야. 과거에 같이 던전을 돌았는데..."

상아의 말에 운현은 갈색 머리의 여인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방해를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그런 이름이었지.'

과거 필레에게 베제키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450레벨을 달성한 도적 중 최고. 그때 당시에는 시큰둥하게 넘겼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던 운현이 단검을 그녀에게 겨누자 베제키엘은 히죽거리며 말했다.

"빨리 저년을 죽이고 길드를 차지하자고."

"길드를... 노릴 셈이냐?"

베제키엘의 말에 상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갑자기? 이제와서? 그녀의 질문에 베제키엘은 능글맞게 웃은 후 성검을 가볍게 빙글빙글 돌렸다.

"음... 상아. 오래간만이네."

"왜!!"

"왜겠어? 돈 때문이지. 그리고 돈도 돈이지만... 힘을 좀 손에 넣어야 해서 말야. 은거하는 것도 지겹고."

"...그럼 너도 천검자와 한패라는 거야?"

"뭐. 이득이 되니까?"

히죽거리며 척 상아에게 검을 겨눈 베제키엘은 그 검끝을 운현에게 돌린 후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오~ 내 취향의 남잔데. 이왕이면 쟤는 살리면 안될까?"

"가장 먼저 죽여야 할 자다."

"헤에... 아르시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 내 취향의 이쁜이지만... 말야!!"

멈췄던 전투가 이어진다. 지금까지는 2:1이었지만 이제는 2:2가 되어버렸다. 슬금 슬금 거리를 재는 천검자와 베제키엘을 노려보며 운현은 자신의 옆에 있는 상아에게 조용히 말했다.

"상아. 도망가."

"너나 도망쳐."

도망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어보였다. 운현이 아까 전 천검자와 비등할 정도의 힘을 보인 것은 보았다. 하지만 그라고 하더라도 시프 마스터까지 끼어 협공을 하면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 그녀는 판단했다.

아무리 전투직이 아니라지만, 도적은 위험하다. 아까 전의 스틸도 스틸이거니와 함정을 설치하는 것이나 밧줄을 다루는 것. 그 외에 각종 유틸기가 있는 것이 도적이고 그 도적의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저 시프 마스터 베제키엘이다.

"내가 어떻게든 막아 볼 테니까..."

"도망치려고!? 이미 주변에 함정을 모두 깔아놨는데!?"

"큭..."

"할 수 있으면 해보시지...!!!"

말을 마친 베제키엘이 단검을 던지기 시작하자 상아는 광검을 휘두르며 그것을 튕겨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천검자의 공격. 운현은 이를 갈며 앞으로 나서 천검자의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단검도 잘 쓰지만... 검사가 검 없이 어떻게 싸우려고 하시나!!"

"나 정도 되면 무기는 의미가 없지!"

이를 드러내며 그가 말했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천검자 역시 초인의 반열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균형을 유지하며 운현과 천검자가 싸우는 동안 상아는 베제키엘과 붙었다.

"네가 어떻게!!"

"멍청한 소리 하지 말라고! 상아!! 세상은 힘이 전부야!! 그 힘도 제대로 못쓰는 모험가 길드따위 내가 접수해주지!!"

"베제키에에에엘!!"

"하하하하!!"

분노하며 온 힘을 다해 공격해 들어오는 상아를 맞이하며 베제키엘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펼쳤다. 함정부터 시작해서 밧줄, 그리고 틈날때마다 치고 들어오는 매스기와 유틸기들.

전투직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베제키엘의 기묘한 움직임에 상아는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큭...!"

"걸렸구나!"

만약 천검자와 싸우며 마력 소비만 안했더라면 이렇게 밀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까 전 운현을 공격하는 강력한 공격을 막아내느라 마력을 소모한 탓에 베제키엘의 다양한 공격에 상아는 밀릴 수 밖에 없었다.

'한번만...'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 아무리 레벨이 높고 유틸기가 많다고 하더라도 비전투직이라는 것은 한방이 없다는 것이다. 결정타를 날릴 수 없는 이상 반드시 기회는 올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상아는 침착하게 모든 공격을 막아내었다.

"윽!?"

뒷걸음질 치던 상아의 몸에 흰 줄이 쏟아졌다. 베제키엘이 만들어낸 함정이다. 그것에 걸려버린 상아가 낭패한 얼굴을 하자 베제키엘은 이를 드러내며 도끼를 들어 상아에게 달려들었다.

"더럽게 잘 막네!! 하지만 이걸로 끝이다!!"

"윈드 라이저!!"

"뭐!?"

하지만 그것은 상아의 함정이었다. 베제키엘이 만들어낸 함정에 걸렸지만 상아의 슈트는 현자가 만든 특제 슈트. 이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마법 정도는 걸려 있었던 것이다. 백색의 슈트에서 빛이 터져나오며 그녀의 몸을 감고 있던 흰 줄이 사라진 순간 상아는 달려오는 베제키엘을 향해 광검을 뻗었다.

"스틸!!"

"이런...!!"

하지만 그것 역시 베제키엘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운현에게 쓴 스틸의 쿨타임이 줄어들때까지 스틸을 쓰지 않고 버티던 그녀는 상아가 내민 광검을 노리고 스틸을 사용했고 그것에 당해버린 상아가 낭패한 순간 베제키엘은 자신의 손에 들어 온 광검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큭!!"

비록 광검이 마력을 많이 잡아먹는 무기라고는 하지만 그 절삭력이나 효용은 어떤 무기와 비교해도 그것을 압도할 수 있었다. 그 무기를 빼앗겨버린 상아는 베제키엘이 마음대로 마력을 쏟아부어 광검의 날을 만들어 공격하자 필사적으로 그 공격을 피해내었다.

"하하하!! 이게 광검이군!! 죽이는데!!"

"남의 무기로...!!"

"이걸로 끝이다!!"

"상아!!!"

베제키엘이 마력을 불어 넣어 광검의 날을 길게 만들어 공격하려 하는 순간 상아는 운현의 목소리를 들었다. 천검자를 크게 공격해 밀쳐낸 후 자신에게 무언가를 던지는 것을 본 상아는 그것을 잡아채고 흠칫 놀랬다.

"이건...!"

"죽어!!"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검은색 원통형 물체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주와아아앙!!"

"컥!!"

검은색 원통형 물체에서 빛이 터져나오며 베제키엘의 심장을 꿰뚫었다. 상아의 광검을 빼앗았다는 것에 방심하고 있던 베제키엘이 천천히 허물어지자 상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베제키엘에게 빼앗겼던 자신의 광검을 들었다.

"...이럴수가."

똑같은 형태, 똑같은 위력.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두개의 광검. 피스나가 만든 최고 걸작이고 세계에 단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광검.

그것이 자신의 손에 두개나 들려 있다는 것에 상아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멍하니 운현을 바라 보았다.

400====================

신과 신

"날 앞에 두고 딴 짓을 하다니!"

운현이 자신을 밀어버리고 상아를 구원한 것에 천검자는 분노했다. 이놈이나 저년이나 자기를 무시하다니. 이를 갈며 천검자가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운현은 뒤로 훌쩍 뛰어 물러난 후 숨을 들이마셨다.

"끝이다."

상아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저 상아의 표정.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두자루의 광검을 보며 운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상아에게만큼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걸려버렸다.

'젠장.'

상아가 자신에게 무슨 소리를 할지 걱정된다. 그것에 안타까움을 느끼던 운현은 뒤로 한걸음 물러나 천검자의 공격을 피한 후 손을 뻗었다.

"어차피 걸린거... 숨길 필요는 없겠지."

가지고 있던 성검은 빼앗겼고 단검은 이가 반쯤 나가 거의 부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검사의 클래스를 가지고 있는 만큼 스킬을 쓰려면 무기가 필요했다.

"철컥."

"무슨...?"

뻗어진 손이 공간을 꿰뚫었다. 인벤토리 안의 공간에 들어간 손이 당겨지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긴 검자루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뭐, 무, 무... 무슨 짓을...!!"

본능적인 공포를 느낀다. 그 어떤 이를 상대하면서도 단 한번도 공포를 느낀 적이 없었던 천검자가 전의를 잃어버릴 정도의 공포와 두려움이 터져나왔다.

"찌직...찍...!"

공간이 찢어발겨지듯, 운현의 손이 검자루를 잡아 당기자 검이 빠져나오며 만들어내는 소리에 천검자는 귀를 틀어막았다. 두렵다. 저 검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다. 당황과 공포로 혼란상태에 빠진 천검자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필사적으로 운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빠가각!!"

"카윽!!"

무언가가 자신의 가슴팍을 크게 베어버렸다. 내장이 쏟아질 정도의 고통에 헐떡이며 천검자는 운현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보았다. 자신의 키만큼이나 커다란 검날. 몸통만큼이나 두툼한 검면.

다루기에 무척이나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거검이었다.

"무슨..."

둔해빠지게 생겼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거검의 속도는 운현이 장검을 다룰 때 이상이었다. 그것을 막지도 못하고 당해버린 천검자가 베어진 복부에서 흘러나오는 내장을 막기 위해 힘겹게 손을 올린 순간 운현은 무감정한 얼굴로 천검자에게 다가갔다.

"안..."

"퍼걱!!"

천검자의 마지막은 허무하기 그지 없었다. 단 이격.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검사의 최후 치고는 너무나도 허무한 마지막이었다. 머리와 몸이 분리된 천검자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보너스 스탯을 획득하였습니다.]

[보너스 스킬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40이나 올랐군.'

500레벨인 천검자를 죽인 덕분일까? 메시지창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운현은 얼굴을 쓸어만졌다. 이제 해명의 시간이다. 천검자를 상대할 때 이상으로 골치아픈 상황이 되어버린 것에 한숨을 내쉬며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운...현?"

"......."

"운현... 도대체...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야... 왜 네가 이걸 가지고 있어? 그 검은 뭐고... 천검자가 했던 말은... 아니. 아니. 너... 어떻게 천검자를 죽일 수 있었던거야."

아까 전까지의 훈훈한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다. 상아가 자신을 보는 시선에는 의심과 공포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은 도대체..."

"...이게 있으면 대화가 안되겠군."

거검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은 후 운현은 천천히 상아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며 물씬 풍기는 혈향. 그리고 아까 전 천검자를 아무런 감정없이 죽이는 모습.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광검. 운현이 다가오자 상아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아..."

운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늘상 짓고 있던 부드러운 표정과 밝은 웃음이 사라진,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상아가 느낀 것은 다름아닌 슬픔이었다.

"왜."

"...내가..."

"...."

"내가...두려워?"

"그건..."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은 후가 무엇인지 모르고 죽음 후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즉 미지의 존재는, 자신의 상식과 생각 안에서 판단할 수 없는 존재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따진다면 상아에게 있어서 운현은 두려운 존재라고 볼 수 있었다.

소속도, 신분도, 출신도. 그리고 그의 압도적인 무력도.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두려워 할 존재인가? 라는 것에 상아는 고개를 저었다. 비록 자신이 알지 못하는 운현의 모습을 보았을지라도 운현은 운현이다.

천검자를 간단하게 끝장내버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운현을 보았지만, 저렇게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처럼 일그러져 있는 얼굴을 한 운현을 본 순간 상아는 그가 너무나도 약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자만이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얼굴을 보며 상아는 주먹을 꽉 쥐고 한걸음 내딛었다.

"....."

멈춰 선 운현. 자신이 뒤로 물러난 이후 어찌 할 바를 몰라하는 운현에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간다. 자신이 다가 갈 수록 운현의 얼굴에 그려진 일그러짐이 진해지는 것을 본 상아는 겨우 그의 앞에 선 후에야 손을 뻗을 수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운현의 얼굴을 만진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겠지. 꺼림찍하지 않다면 거짓이겠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운현에게 빠져 있는 자신의 마음을 믿으며 상아는 운현의 얼굴을 애정을 담아 쓰다듬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그건."

"나에게 할 말이 있겠지?"

애써 즐거운 목소리를 낸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당장이라도 광검을 뽑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상아는 부드럽게 웃었다.

"나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있겠지?"

한 손에 들려 있는 광검. 운현에게 받았던 광검을 내민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운현이 그것을 받아들자 상아는 천천히 손을 내려 그의 다른 손을 잡았다.

"따라와. 여기서 이야기하기는 조금 힘들 것 같네."

빙긋 웃은 상아는 머뭇거리는 운현을 데리고 공원을 둘러보았다. 천검자와 운현, 자신과 베제키엘이 싸운 흔적은 공원을 거의 반파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이정도 소란이라면 시청의 경비병들이 금방 나타날 것이다.

"...저 시체들은 어떻게 하지?"

"뭐 어떻게든 되겠지."

쓴웃음을 지으며 상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검자. 그리고 베제키엘. 특히나 천검자가 입고 있는 옷은 지금까지 던전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의 용의자가 입고 다니는 옷과 같은 옷이었다.

저것을 본다면 시청에서 나머지 뒷처리는 해줄 것이다. 그리 생각한 상아가 차분히 말하자 운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원에서 꽤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용한 술집에 들어간 상아는 주인에게 말을 해 안쪽에 있는 작은 방으로 이동했다. 꽤나 고급진 술집으로 보이는 내부를 둘러보며 운현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곳이네. 능력도 좋아."

"뭐 이정도 가지고. 비밀 이야기를 하기에는 좋은 곳이야."

"그래? 다행이네..."

털썩 쇼파에 앉은 운현을 말없이 바라보던 상아는 벽장에 있는 술병을 들고 이빨로 뚜껑을 따버렸다. 생긴것에 걸맞지 않게 너무나도 아저씨같은 모습에 운현이 쓴웃음을 짓자 상아는 잔을 들어 그에게 건네 준 후 그곳에 술을 따랐다.

호박색 액체가 가득 담긴 술과 그 잔에서 피어오르는 강한 취향에 운현이 인상을 찌푸리자 상아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른 후 느긋하게 말했다.

"마셔."

"아아. 고마워."

"별 말씀을..."

목구멍이 타버릴 것 같을 정도로 독한 술이다. 그제서야 겨우 정신을 다잡은 운현이 입을 열려고 하자 상아는 담담한 어조로 첫번째 의문을 드러내었다.

"왜 네가 그걸 가지고 있어?"

"뭘?"

"모르는 척 할거야?"

"아아... 광검? 그건 그냥..."

"나 속일 생각하지마. 광검에 있는 문양. 그건 내가 쓰는 문양이야. 다른 이들은 절대로 쓰지 않는 문양이라고."

상아의 말에 운현은 광검을 보았다. 검은색 광검의 손잡이 밑 부분에 있는 회색의 달과 검의 문양. 그것을 본 운현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상아는 자신의 광검을 들었다.

"이 문양은 피스나도 몰라. 나만 아는 거야. 스승님도, 카를로스도 모르는 거라고."

광검의 끝부분을 열어 가리고 있던 부분을 보여 준 상아의 행동에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를 말없이 바라보던 상아는 자신의 잔에 채워진 술을 단번에 들이마신 후 침을 꿀꺽 삼켰다.

"말해주면 네가 믿을 수 있을까 궁금하네."

"천검자가 날 죽이려 하는 상황에... 네가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천검자를 어렵지 않게 죽이는 것 까지 봤어. 고작 이백레벨에 불과한 네가 천검자를 쓰러트리는 말도 안되는 것 까지 봤는데 뭘 못 믿겠어?"

"그것도 그런가. 하... 이걸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나 몰라."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운현은 손에 들려 있는 잔을 가볍게 흔든 후 그 내용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독한 술을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마시는 그를 보며 상아는 빙긋 웃었다.

"맨 정신에 말하기 힘들면 술에 취한 상태라도 괜찮으니까."

"그것도 좋군. 지금까지 술에 취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헤에... 술이 강한가봐?"

"뭐 그런 건 아니고."

가득 채워진 술을 다시 단번에 들이마신다. 하지만 취기보다는 냉정함이 머리에 가득 차버린다. 이 독한 술을 저렇게 빠르게 마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현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자 상아는 탁자를 톡톡 두드리다가 벽장을 열었다.

"안주도 먹어."

"도대체 여기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거야?"

"신기해?"

벽장에 들어 있는 과일안주는 신선하고 먹음직스러워보였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준비한 것일까. 운현이 어이없어하며 묻자 상아는 장난스럽게 웃은 후 과일을 들어 내밀었다.

"자. 아~"

"나한테 그런 걸 하고 싶어?"

"왜? 불만있어?"

"아니... 아까 그거."

"아."

아까 전 자신이 뒷걸음질 친 것. 그것 때문에 운현이 겁먹은 것을 깨달은 상아는 미안한 듯 웃으며 볼을 긁적거렸다.

"야야. 그건 이해해주라고. 그런 상황이면 누구라도 그랬을거야."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자. 아."

"음..."

상아가 먹여주는 과일을 한입 베어 문 운현은 다시 한번 독한 술을 한번에 비웠다. 그런 그를 보며 쓰게 웃은 상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운현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뭐야?"

"내가 두려워?"

"무슨 말도 안되는..."

"근데 왜 말을 하지 않는거야? 운현. 내가 보기에 넌 지금 두려워하고 있어."

"내가? 뭘?"

"음... 글쎄. 내가 널 거부한다는 것을...?"

은근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것은 운현의 정곡을 정확하게 찌른 것이었다. 운현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상아가 모든 것을 듣고 나서 자신을 거부할까, 자신에게 거리를 둘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바제트때랑 비슷하군... 하지만 상아는...'

바제트는 함께 한 시간이 길다. 그런 만큼 그녀의 호감은 많이 얻어냈다고 볼 수 있었지만 상아의 경우도 그렇다고 볼 수 있을까? 비록 상아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것이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제길... 천검자. 그 개년을 먼저 찢어죽이고 시작했어야 했나...'

라닌과 다르게 천검자는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초인의 경지에 있으니 차후 써먹을 길이 있을까 내버려 둔 것이 자신의 패인이다. 운현이 주먹을 꽉 쥐었을 때 상아는 빙긋 웃으며 그의 손을 감싸잡았다.

"운현."

"응?"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모르겠는데... 날 너무 얕보는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이래뵈도 600년을 넘게 살아왔고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을 겪기도 했으며 별에 별 일을 다 경험해봤다고. 네가 어떤 것을 말해도 난 그것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거야."

상아의 말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과연 그럴까? 하지만 상아의 굳은 의지가 담긴 눈을 보니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세상의..."

"....."

"세상의 모든 존재의 시작과 끝은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어?"

"...하. 이거 운명론 이야기가 나오네. 진짜 예상 못한 이야기인걸?"

"운명론? 그걸 알아?"

"음... 과거 엘프들이 믿었던 학론 중 하나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그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존재는 운명과 연결되지 않은 자들 뿐이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정해져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세상은 순환한다. 대충 골자는 이런 내용이지. 자세하게 파고들면 더 깊지만."

"그걸 어디서 들은건데?"

"하우드라고 하이엘프 중에 정신나간 하이엘프가 하나 있지. 그 하이엘프가 주장하는 것이 운명론이니까. 스승님도 그것에 대해 꽤 관심이 많았고."

"그래?"

"응. 그런데 갑자기 운명은 왜?"

"하우드가 매일 자살을 시도한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지."

"응."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정해져 있는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서 자살을 시도한다는 이야기..."

"그건 안다니까."

"나도 그와 같다면?"

"...뭐?"

"나 역시... 운명을 바꾸길 원한다면. 그래서...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라면?"

"...그게 무슨 소리야?"

운현의 메마른 목소리에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를 안타까운 듯 바라보던 운현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나에게 있어서... 널 만난 것이 첫번째가 아니야."

401====================

신과 신

"그게 뭔..."

"달칵."

인벤토리에서 총을 꺼낸 운현은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총알은 아까 전 상아를 구하느라 다 써버렸다. 검은색 권총이 테이블 위에 올려지자 상아는 신기하다는 듯 그것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쥐어보았다.

"이건 아까 그거..."

"그래."

"어떤 마법도구야?"

"마법도구는 아니야. 기술이지."

상아의 손에 들려 있는 총을 가져 온 후 인벤토리에서 총알을 꺼내 장전하고 망설임없이 벽장의 술병을 향해 쏘았다. 낮은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벽장의 술병이 산산조각나자 상아는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방금 뭐한... 거야?"

"기술이야."

"이런 기술은 본 적이 없어! 피스나도 못만들..."

"원리만 알면 만들 수 있을걸. 아무튼 그건 중요한게 아니야."

"......"

"지금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하아... 그러니까."

운현은 탁자를 톡톡 두들기며 서두를 생각했다. 한참동안이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그는 살며시 상아에게 시선을 보냈다.

"나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야."

"...그 말은 네가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는 거네? 이계인? 그... 운명론에 나오는 운명에 속하지 않는 존재라는 거야?"

"응."

"헤, 헤에. 그거 신기하네. 그래서? 아까 운명론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 운명을 바꾸느니 어쩌느니..."

"그래."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에 상아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나와버려 당혹스럽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운현은 다시 한번 술을 입 안에 머금었다. 독한 술을 마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더더욱 맑아진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나는 이 세계에 왔어."

"그거 재밌네... 그래서였구나. 너에 대한 것을 아무리 찾아봐도 알아낼 수 없었던 이유가."

그동안 운현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찾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다. 아예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웃기지도 않는 정체불명이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상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손가락을 튕겼다.

"어? 잠깐만. 다른 세계의 존재인 네가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이 세계로 왔다고? 왜?"

"...."

"이상하잖아. 다른 세계에서 살던 네가 무슨 이유로 이 세계의 운명을 바꾸..."

상아의 질문에 운현은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담겨 있는 의미를 읽게 된 상아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다른 세계의 존재인 운현이 무슨 이유로 이 세계까지 와서 운명을 바꾸려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한 답은 금새 상아의 머릿 속에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이 안된다.

"내... 운명을 바꾸려고?"

"...너 뿐만이 아니야. 다른 사람들도 있어."

"다른 사람이라면... 지금의 네 동료들이나 필레를 말하는 거야?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는...?"

"그래."

"하지만 난 널 만난 적이 없어!! 너를 만난 것은 던전 도시에서... 그리고 만난지 몇일 되지도 않는다고!"

"그러겠지."

"그런데 네가 왜 내 운명을 바꾸려는 건데!?"

당혹감에 빠져 목소리가 높아진다. 흥분한 상아가 자신을 향해 외치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운현이 광검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자 상아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설마."

"....."

"설마... 너."

"그래..."

잔뜩 힘이 빠진 목소리로 운현은 천천히 말했다.

"내가 널 만난 것은 처음이 아니야."

침묵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아까 전에 마신 술이 남긴 취기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자신을 만난 것이 처음이 아니라고?

분명 자신에게는 운현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만약 운현을 과거에 만났더라면 운현을 잊을리 없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신경이 쓰였고 이만큼이나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잊을 리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울컥한 상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운현의 멱살을 잡았다. 어찌나 거칠게 잡았는지 운현의 셔츠 단추가 뜯어질 정도였다.

"...이건 뭐야."

그의 목에 걸려 있는 것을 본 상아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것에 시선을 보냈다. 은색의 체인에 감겨 있는 목걸이. 그것을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이거... 이건 내 슈트와 한쌍인 목걸이잖아."

현자가 만들어 준 슈트다.

신의 영역에 있는 공간에 대한 마법이 담겨 있는 목걸이. 슈트와 한쌍이며 강하게 생각하면 슈트를 입은 사람을 소환할 수 있는 목걸이가 운현의 목에 걸려 있다는 것에 당황하며 상아는 황급히 자신의 슈트를 만졌다.

"...이건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는 목걸이야. 그런데 왜 그게 너한테 있어? 스승님께 받은 이후로 그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는데."

광검은 그렇다고 치자. 더 조사해서 광검의 문양까지 흉내냈다고 치자. 하지만 이 목걸이만큼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오죽하면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것이 신의 영역이라고 하겠는가. 그 누구도 다룰 수 없기에 신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스승이 현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납득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다.

공간을 다루는 마법을 쓸 수 있었기에. 그것을 인챈트할 수 있었기에 스승은 현자라 불릴 수 있었던 것이다.

"스승님은 이것 외에는 공간의 마법을 인챈트 한 적이 없다고 했어."

"그랬겠지."

"말해. 스승님과 무슨 사이지?"

이것까지 가지고 있는데 운현이 현자와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상아는 잡아먹을 기세로 으르렁거리며 그에게 물었고 운현은 쓰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내가 말한 것을 믿을거야?"

"일단 들어보고."

"현자와 나는 같은 존재다."

"...뭐?"

믿어달라고 하더니 이런 믿기 힘든 말을 할 줄이야. 상아는 머릿속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지금 들은 이야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 정돈데 자신의 스승인 현자와 같은 존재라고? 자신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이 풀려버리자 운현은 손을 뻗어 상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미안."

"잠깐만... 잠깐만. 그럼 네가... 스승님이란 말이야?"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똑바로 말해줘!! 스승님은 어디에 있어!?"

"음... 위신체에 대해서 알고 있어?"

"위신체는... 신성이라는 것을 이용해 신이 강림할 수 있는 가짜 육체를 말하는 거잖아."

"위신체에 강림할 수 있는 것은 신만이 아니야. 현자는... 내 위신체야. 내 혼의 일부를 받고, 내 기억을 받아 만들어진 존재. 같은 시간, 같은 존재에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존재."

"자. 잠깐만... 정리 좀 하자."

너무 갑작스럽게 충격적인 정보가 들어 온 탓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상아는 자리에 앉아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운현 너는 이계인이고... 운명을 바꾸기 위해 이 세계에 왔으며... 스승님이 너의 위신체라는 거야?"

"응."

"그리고... 나에게 접근한 것도. 내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라고?"

"그래."

"왜? 그럼 스승님이 내 스승님이 된 것도... 네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거야?"

"....그래. 하지만 마냥 같다고는 할 수 없겠군. 나에게서 파생되었고 나와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지만 어쨌든 다른 존재이니까."

상아의 질문에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상아는 충격받은 얼굴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운현이 이계인이다. 그리고 그가 운명을 바꾸기 위해 이 세계에 들어왔다.

그것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스승인 현자가 운현의 위신체이고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미안."

다른 이들과 다르게 상아에게 함부로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상아는 현자를 거의 부모와 동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소중한 기억을 안겨 준 자. 그리고 가장 큰 고통을 안겨 준 자가 현자다. 그런 그가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것이 상아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하하... 왜?"

"널 구하기 위해서였어."

"날 구해? 네가? 왜? 너랑 내가 무슨 사인데? 뭐 때문에 나한테 접근한건데? 뭐 때문에 스승님을... 현자를 보내서 날..."

"널 지키기 위해서."

"무엇으로부터!!"

"운명으로부터."

"...뭐?"

"이 빌어먹을 운명으로부터 너희들을 지키기 위해서."

담담한 한마디지만 그 한마디에 담겨 있는 의미, 그리고 그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운현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운명에 대한 강렬한 증오가 섞여 있는 그의 말에 상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설명해줘."

"긴 이야기야. 괜찮겠어?"

"지금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 그러니까 괜찮아."

"...좋아."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운현이 과거에 겪었던 일들과 힘을 얻기 위해 치뤘던 고생. 그리고 이 세계에 와서 자신을 모르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뒤에서 움직였던 모든 일들.

그 모든 것을 듣고 나서야 상아는 무거운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 모든게... 나와... 우리를 위해서였다고?"

"응."

"왜?"

"왜라니."

"왜 그런 고통을 일부러 나서서 겪은거야?"

"그건... 내가 너희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사랑이라..."

연인을 구하기 위해 회귀를 하고, 역사를 바꾸고, 항거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힘에 저항한다. 그 고통과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이야기만 들어도 알 수 있었던 상아는 슬픈 눈으로 운현을 볼 수 밖에 없었다.

"고작 그것 때문에?"

"고작? 너 지금 고작이라고 했냐?"

"그래. 고작이라고 했다."

"함부로 말하지마."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것은 너희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고작이라고? 운현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자 상아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이를 드러내었다.

"함부로 말하는 것 아니야. 왜? 왜 이런 짓을 한건데? 과거의 내가 부탁이라도 한거야?"

"......"

상아는 자신이 회귀를 한다는 것에 반대를 했었다. 운현이 실패를 했을 때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이 실패한다면 그는 그 고통을 감내하고 분석한 후 다시 시도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될 수록 운현의 감정과 정신은 또다시 마모되고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었겠지. 그것을 생각하며 상아가 싸늘히 말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부탁따위는 하지 않았어."

"그럼 내가 부탁할게. 그만둬."

"그만두라... 싫다면?"

"왜? 네가 날 구해 줄 이유는 없잖아."

"내가 널 사랑하기 때문이다. 널 지키고, 너희들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런데 그것을 이제와서 포기하라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거다! 이 등신아!"

"뭐!?"

"운명을 바꾼다고? 운명을 바꿔서 우리를 살리겠다고? 그래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너 뿐이라면서."

"그래."

"그럼 너는?"

"뭐...?"

"너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다는 거잖아. 그래서 네가 얻는 것이 무엇인데."

상아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버려서 여기까지 온 운현이 안타깝고 불쌍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울어서는 안된다. 그래야 그를 포기시킬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운현. 포기해. 그리고 너의 삶을 살아."

"이게 나의 삶이다!!"

"....!"

"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그것 뿐이야. 내 행복? 내 기쁨? 너희들이 사는 거다. 너희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것이 나의 행복이고 기쁨이다!!"

자신조차 움찔할 정도의 강한 의지가 담긴 외침이다. 오로지 그것 하나만 바라보며 수많은 세계를 넘어 이곳까지 도달한 운현만이 외칠 수 있는 그 의지에 상아는 입을 다문 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포기하지 못하겠다 이거지?"

"그래. 난 절대 포기 못해."

"이래도?"

히죽 웃은 상아가 광검을 손에 잡은 순간 운현은 빠득 이를 갈았다. 광검의 날이 생성되는 곳이 상아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402====================

신과 신

"이게 무슨 짓이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넌 포기하지 않을거잖아!!"

과거에 도적이라는 직업을 가져 민첩성에 스탯 투자를 하지 않았더라면 상아의 자살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진 운현이 거칠게 외치자 상아는 이를 갈며 대꾸했다.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것 같아? 다시할거다. 다시 하고! 다시 하고!! 또다시 하더라도!! 나는 너희들을 살릴거야!!"

"그럼 그 안에서 너는!!"

"......"

과거에도 상아는 이렇게 말했었다. 자신이 실패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을 했고 그것을 걱정하며 상아는 실패할 경우 포기해달라고 말했었다.

"회귀를 할 수 있다고? 대단하네. 회귀를 하고, 회귀를 하고, 다시 회귀를 하면서... 너는 우리들을 구하려고 하겠지. 네가 말해줬던 그 고통을 다시 겪어가면서 고통받고, 울고, 쓰러지고, 좌절하면서도 너는 포기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는?"

"나는..."

"그 반복 속에서 너의 행복은!!"

"너희들이 사는 것이 나의 행복이다! 왜 그걸 모르는 건데!!"

"운현..."

처연한 얼굴을 하던 상아는 결국 눈물을 흘려버렸다. 스승이 사라진 이후 절대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운현과 관계될 때마다 눈물이 나온다.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부탁이야... 포기해줘."

"거절한다."

"바보냐!!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해!!"

"그래!! 바보다!! 포기? 그건 배추 셀때나 쓰는 말이지. 난 절대 포기 못해. 그러니까 너도 그냥 받아들여."

"네가 그 고통의 길로 걸어들어가겠다는데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

"이번엔 반드시 성공할테니까!!"

"......"

"과거의 나도, 그리고 네가 그토록 따르던 현자도. 이번이야말로 최고의 기회라고 말했다.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모든 것은 제대로 흘러가고 있어!!"

"운현..."

"포기? 포기는 너나 해. 그 누구도 날 막을 수 없으니까."

싸늘한 어조로 운현이 말하자 상아는 눈물을 쓱쓱 닦았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상아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던 운현은 상아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부탁이야... 나를 믿어줘. 날 믿고..."

"널 믿으니까 이러는 거잖아..."

운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거절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명을 살리려는 것에 상아 자신은 거절하고, 그것을 구하려고 하는 운현이 오히려 부탁을 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기 그지 없는 일이지만 상아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널 믿으니까... 널 좋아하니까... 이럴 수 밖에 없는 거잖아. 왜 그걸 모르는건데..."

그를 좋아하기에, 그를 사랑하기에 그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위험한 길을 걷고 그것에 도박을 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냥 포기하면 되는 거잖아... 다른 사람들이 안되겠다면 나만이라도 포기하면 되잖아... 그럼 네 부담이..."

"내 부담따위는 신경쓰지마.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야."

"그걸 지켜봐야 하는 나는!!"

"그 정도는 감안하라고."

"...진짜 나쁜 놈이구나... 너."

"그걸 이제 알았어?"

상아의 외침에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웃음에 상아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런 고집불통일 줄이야. 이 정도로 성격이 나쁜 남자였을 줄이야.

마냥 웃고다니는 모습은 거짓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쳇. 반칙이야."

"뭐가."

"그렇게 쳐다보는거."

"그럼 계속 봐야겠네. 네가 마음을 돌릴 가능성이 있다면 얼마든지 바라봐주겠어."

"...하아... 진짜 못말리겠네."

"나 원래 이런 놈이야. 알아차리지 못한 네가 바보지."

상아의 몸이 으스러져라 운현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답답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외곬수인 운현이지만 상아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놔줘."

"거절이다."

"진짜... 놓으라니까!"

"싫다고 했을텐데."

자신의 투정에 오히려 힘을 주는 운현을 올려다보며 상아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운현에 대한 걱정을 배재한다면, 솔직히 말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무척이나 기뻤다. 수많은 세계를 거치면서까지 자신을 구해주겠다고 한 사람이다.

비록 스승에 대한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운현의 말에 따르면 자신을 제자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운현도 관계하지 않았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현자가 판단한 일이라는 것.

현자가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접근했지만 그에게 제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 것은 자신이었고 자신을 제자로 삼은 순간부터 현자는 정말 훌륭한 스승이며 아버지의 노릇을 해주었었다.

그렇다면 그것에 대한 불만을 운현에게 쏟아붓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고 말했지."

"그래."

"그것을 바꾸는 것은 오직 너만이 가능하고."

"그래."

"놔줘봐."

"싫어. 내가 하는 일을 막지 않겠다고. 내가 하는 일을 따라주겠다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놔줄 생각 없어."

"아으...!! 진짜! 알았으니까 놔봐! 좀!"

"알았으니까? 너 말했다. 알았다고. 내 말을 따른다고 말한거다?"

"그래! 알았으니까 좀...!"

그제서야 겨우 상아를 안고 있던 힘을 풀어낸 운현은 상아가 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쓰게 웃었다. 알았다고는 말했지만 또다시 말을 바꿀 가능성을 생각하면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럼 일단 생각 좀 해보자."

"뭐?"

"너 절대 포기 안할거라면서. 회귀를 하든 신을 죽이든 모든 짓을 다 해서라도 우리를 살리겠다면서."

"...그래."

"그리고 난 네가 그 고통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고."

"그렇겠지."

"그러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 밖에 없잖아."

뚱한 얼굴 그대로 운현을 바라보던 상아는 그의 얼굴을 꽉 잡은 후 싸늘히 말했다.

"눈 감아."

"왜?"

"감으라면 감아. 바보야."

상아의 말에 운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입술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눈을 뜨려 해보았지만 어느새 상아의 손은 그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하아..."

"너..."

"네가 고통받는 것은 싫어. 그렇다면 방법은 이것 뿐이지."

마음의 정리를 끝낸 듯 상아의 얼굴에는 웃음이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운현의 볼을 잡은 후 다시 한번 키스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반드시 성공시키자. 네가 운명을 완전히 바꿔버리고 새롭게 써서. 우리들이 살아날 수 있는 운명을 만들어낸다면 회귀를 반복하지 않아도 되잖아.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잖아."

"...그렇지."

최상의 시나리오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공시키는 것. 그렇게 된다면 그녀들의 죽음을 보지 않아도 되고 회귀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내가 최대한 돕는 수 밖에. 자. 정리하자."

"....."

일하기 싫어 매번 농땡이를 피우고 도망다니지만 상아는 결코 바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만약 바보라면 던전 도시의 모험가 길드장 자리에 조차 오르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운현. 너는 일의 당사자인만큼 눈치채지 못한 것들이 있을지도 몰라. 거기에 너는 우리들이 목숨이 위험하다면 얼마든지 그것을 중심으로 일을 생각할 수 밖에 없겠지."

"그럴 수 밖에 없으니..."

"그렇다면 나도 생각할 수 밖에 없어. 네 계획은 좋지만 그것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어. 모든 것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상 계획은 틀어지기 마련이거든."

"그건 나도 아는 거야."

"후후. 훌륭하네."

운현의 말에 상아는 빙긋 웃으며 그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그가 마음에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상아는 운현의 무릎 위에 앉은 채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하우드야."

"하우드..."

"응. 네가 말한 그녀. 라닌의 말대로라면 하우드는 중요한 존재겠지. 하지만 천검자의 행동을 생각해봐야 해. 네가 하우드를 죽인 순간 악신이 깨어난다면... 왜 라닌은 천검자를 시켜서 왕족이나 귀족들을 죽이라고 한 걸까?"

"흐음..."

"악신이 깨어나고 라닌이 악신의 힘을 빼앗아서 신의 자리에 오른다고 했었지.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이 종료되는 것 아닌가? 굳이 운명을 비틀 이유는 없잖아."

"운명의 비틀어짐이 일정 이상이 되지 않으면 악신이 부활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해. 확실히 이번에 죽은 이들을 생각하면 각 나라나 도시에서 중요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더 중요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고."

"나비 효과를 생각해야지. 왕인 A가 있고 신하인 B가 있다고 쳤을 때 현재 가장 영향력이 큰 이는 왕인 A지. 하지만 운명에 따르면 신하인 B가 반란을 일으켜 내란이 벌어져 나라가 멸망한다고 생각한다면 전체적인 영향력은 B가 더 커."

"물론 그 가능성을 놓칠 수도 없는 것이지. 확실한 것이 필요해. 다른 나라에는 죽은 이들이 없는지 알아볼게."

"그거 고맙네."

"뭘. 날 위해서이기도 한데... 그리고 라닌. 라닌이라는 자가 왜 던전 도시에 다난교를 받아들이라고 말한 것일까? 네 말에 따르면 카야가 파르티이기도 한데. 굳이 다난교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잖아."

"내가 보기엔 그건 그저 겉표면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내가 레나를 앞세워서 너희들을 숨기려 한 것 처럼 말이지."

"단순하게 그런 것이라면 좋을텐데... 일단 이 부분은 제쳐두자. 정보가 적으니까 말야. 너의 계획을 정리해보자. 운현. 네가 원하는 것은 우리들이 살아나는 운명을 만들길 원하는 것이지?"

"응."

운현의 말에 상아는 침묵했다. 운명을 바꾼다. 말은 쉽지만 그것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은 감도 잡히지 않을 정도다. 단편적인 변화 정도는 운현이 나서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지만 운명은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기 위해서 계속 움직여 공격해들어 올 것이다. 그것의 끝을 알 수 없는데다가 악신의 부활이라는 타임 리미트까지 존재하는 이상 단순하게 운현이 자신들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라닌의 제안은 자신이 신이 되어 운명을 다시 쓴다는 것이고."

"그렇지."

"라닌을 믿을 수는 있어?"

"그럴리가."

서로 생살을 씹어먹길 원하는 상대다. 라닌을 믿느니 차라리 지나가는 개를 믿지. 운현이 시큰둥하게 말하자 상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다물었다.

"네 계획은 뭐야?"

"여러가지 세워두긴 했지만 이상적인 방법으로는 파르티와 협상을 하는 것이지. 원래대로라면 운명의 세 여신과 협상을 할 생각이었지만... 카야가 진짜 파르티라면 오히려 더 잘됐다고 생각해."

"......"

"파르티가 봉인된 이유는 악신 때문이야. 악신이 부활한다면 파르티 역시 부활하는 것이 당연하겠지. 그때 악신을 잡고 파르티를 구하면..."

"신을 잡는게 그렇게 쉽다고 생각해?"

"문제는 없어. 그것에 대한 대비도 해놨고."

빙긋 웃는 그를 멍청히 바라보던 상아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그것이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한 운현이 뚱한 얼굴이 되자 상아는 사랑스럽다는 듯 그의 볼을 꼬집고 입술에 키스했다.

"그런 표정 짓지마. 너무 황당무계한 이야기라 그런 거니까."

"오히려 놀리는 것 같은데 말야..."

"아니야. 가짜 신이라지만 가짜 신 역시 신이겠지. 그리고 네가 스승님...과 생각한 방법이라면 문제는 없을거라고 생각해."

"칭찬해줘서 고맙구만."

"놀리는거 아니라니까. 어휴~ 이렇게 잘 삐져서야 어떻게 일을 잘 할 수 있겠어?"

운현의 투덜거림에 상아는 키득거리며 그의 입술에 연신 키스했다. 쪼는 듯한 짧은 키스가 계속되자 운현은 상아의 뒤통수를 잡고 끌어당겼다.

"쭈룹..."

살며시 들어오는 혀를 반갑게 맞이하며 상아 역시 운현과 진한 키스를 나누는 것에 동참했다. 타액과 타액이 교환될 정도로 진하게 입맞춘 상아는 살짝 달아오른 이마를 그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고마워."

"뭐가?"

운현의 말에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맙다는 말은 자신의 것이다. 그런데 운현이 그것을 꺼내버리자 의문이 생긴 상아는 그것을 물었고 운현은 상아의 얇은 허리를 꽉 끌어안은 후 속삭였다.

"나를 믿어줘서... 나와 함께 해줘서."

"별 말씀을..."

작게 속삭이는 그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상아는 운현의 머리를 꽉 끌어안고 다시 키스했다.

"똑똑."

"...한참 좋을때 누구야."

진한 키스를 몇번이나 나누며 몸이 달아오른 상아가 농염한 표정이 되었을 때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에 한숨을 내쉰 상아는 운현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폭 내쉬고 그의 몸에서 떨어졌다.

"왜?"

"저기... 길드장님."

"...."

"길드의 펠리시아씨가 찾아오셨습니다."

"윽..."

"당장 안나오면 시장 선거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못하고 일만 시킬 거라는..."

"으아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금방 나갈게..."

"네."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가게의 주인이 조심스레 말하자 상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운현은 키득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가서 일 해."

"그치만... 네 말대로라면 시장 선거는 의미가 없는 것 아니야?"

"그렇긴 하겠지만... 그래도 라닌의 행동을 제어해야 하니까. 일단 그년과 손을 잡는 척이라도 하려면 최대한 맞춰 줄 수 밖에."

아직 라닌은 던전 도시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모른다. 숨길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숨기고 알아내야 할 것은 최대한 알아내야 한다. 운현이 느긋하게 말하자 상아는 불만스러웠는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럼 너도 와서 도와줘!"

"돕는다기보다는 너랑 꽁냥거리가 밖에 안할 것 같은데... 하하. 미안."

"...씨이!"

403====================

신과 신

툴툴거리며 상아가 펠리시아와 칼리오스에게 끌려가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운현은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입가에 그리고 있던 웃음을 지웠다.

'자... 이제 나도 생각을 좀 해봐야겠군.'

상아가 자신을 돕겠다고 나선 이상 모험가 길드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아니, 모험가 길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상아의 인정이었다. 그녀가 모든 것을 받아들인 이상 운현은 두렵지 않았다.

'그래도 비타를 죽인 것은 숨기는게 낫겠지.'

비타를 죽인 것이 천검자라고 알려진 이상 굳이 이것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천천히 걸어 아까의 공원으로 이동한 운현은 시청의 경비병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며 의아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뭔 일이라도 있었어요?"

"엇? 당신은?"

"어... 로지씨?"

"정답. 여긴 무슨 일이야?"

"아니 좀 산책하다가 시끄러워서..."

"그게 말이지."

"뭣들하는거야!!"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던 운현이 묻자 로지는 실실 웃으며 사건에 대해서 말해주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갑옷을 차려입은 윈드의 불호령에 로지는 움찔하며 휙 고개를 돌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오..."

"아니긴!! 어? 당신은... 운현 아냐? 여긴 왠일이야?"

"산책하다가..."

"으음... 살인 사건이 일어났어. 자세한 것은 말해주기 어렵고... 아무튼 분위기가 뒤숭숭하니까 얼른 들어가도록 해."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실 수는 없나요?"

"미안."

살해된 자가 천검자에 시프 마스터라는 것을 밝히기는 곤란했나보다. 그도 그럴 것이다. 시프 마스터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천검자는 세계 최강의 검사로 알려진 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던전 도시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용의자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 알려지만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가뜩이나 시장 선거로 정신이 없는데다가 분위기가 떠 있는 던전 도시에 그것이 알려졌다간 더욱 혼란이 가속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윈드는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고 그것에 운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수고하세요."

"음... 아. 운현."

"네?"

"나중에 식사나 같이 할까?"

"식사요? 왜요?"

윈드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일까? 과거에 자신을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윈드가 몇번 바라보기는 했지만 큰 관계는 없었다. 물론 매력적인 여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까지 자신의 마수를 뻗칠 생각은 없었던 운현이 궁금해하며 묻자 윈드는 빙긋 웃었다.

"내 소중한 친구의 연인이 되었다는데 밥 한끼 정도는 사줄 수 있지."

"엣!?"

"필레씨의!?"

"응. 저게 그 필레를 공략한 남자다."

"우와... 용자네."

"대단하구만."

시청의 경비대원들에게도 이름이 알려져 있는 필레다. 그녀의 애인이라는 소리에 경비대원들은 수근거리며 운현을 쳐다보았다. 많은 여인들의 시선에 뻘쭘해하며 뒤통수를 긁적거린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자리에서 이동해 으슥한 곳에서 하이딩을 걸고 현장으로 이동했다.

"천검자였을 줄이야..."

"그보다 천검자가 이렇게 죽다니..."

"시프 마스터까지. 진짜 누굴까?"

던전 도시의 검시관들이 심각한 얼굴로 시체를 살피는 것을 보며 운현은 싸늘히 웃었다. 이들의 시체가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 다난 쪽에서 회수를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과거 카를로스의 시체나 다난 교의 시체가 사라졌던 것을 생각하면 자신의 가설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하고 운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이동했다.

으슥한 곳에서 하이딩을 풀고 나서야 운현은 작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이딩이라고 해서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이 좋거나 특수한 스킬을 가지고 있는 이는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최대한 기척을 줄이느라 숨까지 참고 있던 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 후 주머니에서 거울을 꺼내 표정을 정리했다.

"좋아."

아직은 사람 좋은 모험가의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 얼굴에 가짜로 만든 표정을 씌우고 골목을 빠져나온 운현은 느긋한 걸음으로 천천히 길드를 향해 걸었다.

"어이쿠. 실례."

"실례랄 것 까지는 없습니다."

공원에서의 사건 때문인지 거리에는 은근히 사람들이 넘쳐났다. 살인 사건이 난 근처라서 그것을 구경하거나 궁금해서 온 사람들을 지나치다가 한 남자와 부딪힌 운현이 가볍게 사과했을 때 그는 중후한 어조로 말한 후 운현의 팔을 잡았다.

"뭡니까?"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까?"

"에..."

목소리에 비해 상당히 곱상한 얼굴이다. 백금색 짧은 머리에 긴 귀. 말쑥한 차림새와 수염 하나 찾아 볼 수 없는 깨끗한 피부. 미형을 지닌 남성 엘프가 자신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하자 운현은 인상을 구기며 떨떠름히 말했다.

"저 남창 아닌데요. 남자에게는 관심없습니다."

"하하하... 오해를 하고 계시군요. 저도 여자가 좋습니다. 아니... 그걸 떠나서 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이미 있습니다. 그녀를 놔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주지 않아요. 저는."

"...헤에."

"시간 괜찮으시다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괜찮습니까?"

"....."

"운현씨."

"절 아시나보군요."

"당신도 절 아실 것 같은데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백금발 엘프는 운현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그가 잡고 있던 팔에 붉은 손자국이 나 있었다. 그것을 힐끔 본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습니까? 조금 늦기는 했지만 간단하게 한잔 어떠십니까? 좋은 가게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지요."

"...후후."

"하우드."

자신의 이름을 들은 백금발의 엘프. 하우드는 운현을 향해 짙은 미소를 지었다.

하우드가 안내한 곳은 용병 연맹 근처의 작은 호프였다. 낮에는 커피나 차를 판매하고 저녁에는 술을 판매하는, 던전 도시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작은 가게에 운현과 하우드가 들어가자 시끌벅적하던 가게가 조용해졌다.

"와우..."

"죽이는데...?"

"저런 엘프는 또 오래간만에 보는군... 진짜 맛있어보여."

"옆의 남자도 그럭저럭 괜찮은데..."

"그래도 저 엘프보다야..."

'다 들린다. 썅년들아.'

물론 객관적으로 봐서 미모만 따진다면 하우드에 비해 심각하게 밀리는 운현이었다. 그야말로 달빛과 반딧불 수준. 남자인 운현이 봐도 아름답기 그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외모를 지닌 하우드라면 저런 반응은 당연할 것이다.

"어라? 이게 누구야."

"오래간만이네."

"거의 백오십년 만인가? 여기는 무슨 일이지? 요즘 바쁘다고 들었는데."

"후후. 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

"자살하는 하우드가 엘프의 숲을 벗어났다라. 이거 놀랄 일이군. 남의 동네에서 자살할 생각은 말아줘."

씨익 웃은 드워프 여주인은 별다른 주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곧장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자주 마시던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하우드는 운현을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밤 바람도 쐴 겸 밖에서 드시겠습니까? 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번잡할 것 같군요."

"그러지요."

아닌게 아니라 안쪽에 있는 여인들이 금방이라도 하우드에게 달려들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하우드는 운현과 함께 바깥에 앉았다.

"나도!"

"밖에서 먹자!!"

"이런... 소란스럽군요."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고 하잖습니까."

몇몇 용병들이 따라나와 근처의 테이블에 앉아 침만 꼴깍 꼴깍 삼키고, 개중에는 자신의 가슴이나 사타구니를 슬쩍 주무르는 여인들도 있었다. 아마 하우드 혼자 내보내면 금방 강간이라도 당할 것 같다.

"남자들 뿐이네? 어때? 내가 한잔 살테니까 같이..."

"죄송합니다. 지금은 이 친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눠야 하거든요.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어요?"

"후후후... 그런 것이라면 뭐."

그래도 양식이 있는 여인은 하우드의 부드러운 거절에 웃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몇몇 여인들이 다가와 유혹을 했지만 하우드나 운현이나 그들에게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여기나 안이나 번잡하긴 매한가진데 그냥 다른데로 가시죠?"

"이해해주세요. 이 가게에서 먹고 싶었거든요."

"왜죠?"

"향취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몇백년간 엘프의 숲에서 자결만 하셨다는 분의 이야기 치고는 좀 이상하군요. 던전 도시에 오신 적이 있으십니까?"

"몇번 정도는 왔습니다."

"왜죠?"

운현의 질문에 하우드는 빙긋 웃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던 그는 드워프 주인이 고풍스러운 병 하나와 잔 두개를 가지고 나오자 주변이 밝아질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바이슨."

"뭘. 네가 맡겨 둔 건데."

"그게 뭐죠?"

"신의 눈물이라는 브랜디입니다. 드셔보시겠어요?"

"뭐 주신다면야."

딱히 좋은 술을 마셔도 술맛이 이렇다 할 정도로 술을 즐기지 않았던 터라 운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주변에 있는 여인들은 신의 눈물이라는 이야기에 다들 침을 꿀떡꿀떡 삼키고 있었다.

"좋은 술인가요?"

"그저 그런 술 중 하나입니다."

"주변의 반응은 좀..."

"단지 세상에 몇병 남지 않았기 때문에 희소가치가 높을 뿐입니다. 예전에 제가 만든 술이거든요."

"헤에... 그렇군요. 듣자하니 꽤나 오래사셨다고 들었는데..."

"후후후..."

운현의 질문에 하우드는 그저 낮게 웃을 뿐 이었다. 그렇게 신의 눈물을 한잔 가득 따라 준 하우드는 운현이 그것을 마시자 빙긋 웃으며 물었다.

"어떠신가요?"

"별로군요."

"기대했던 반응입니다."

시큰둥한 그의 반응에도 하우드는 그저 기쁘게 웃을 뿐 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달랐다. 신의 눈물을 마시고도 운현이 별 반응을 하지 않자 다들 아까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저... 저기."

"네?"

"여기 천골드짜리 보석입니다! 감정서도 있어요!"

"그래서...요?"

"하, 한잔만 주실 수 있으신가요?"

참다 못한 한 용병 하나가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들고 와 하우드에게 비굴하게 웃었다.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하우드는 쓴웃음을 짓고 자신의 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은 여인은 환희로 부들부들 떨다가 눈을 감고 그것을 천천히 마셨다.

"아아아아아..."

한모금, 한모금. 천천히 맛을 음미하려던 그녀가 단번에 신의 눈물을 마시고 무릎을 꿇으며 그 맛에 전율하자 운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술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저들의 반응은 왜 저런단 말인가.

"쿡쿡쿡..."

"뭡니까?"

한잔의 술을 마시고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하던 여인이 비척거리며 자리로 돌아가자 하우드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다이아몬드를 주머니에 넣은 후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시끄럽던 주변이 조용해졌다.

"마법을 쓴겁니까?"

"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좀 조용히 했으면 좋겠어서 말이죠."

"그러시죠.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그의 질문에 하우드는 눈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가짜 신의 자리에 오르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이제 준비가 끝나신 겁니까?"

"가짜 신이라... 어떻게 그걸 알고 있죠?"

자신이 가짜 신의 자리에 올라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처음 만난 하우드가 그것을 알고 있다? 운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하우드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당연히... 신의 눈물은 단순한 브랜디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신성이 담겨 있지요. 신성을 이용해서 만든 술을 마시고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셋 뿐입니다. 악신인 저. 그리고 파르티. 마지막으로... 운현. 당신."

"저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가보군요. 제 기억에 당신을 만난 적은 없는데."

"그럴 수 밖에요."

"그런데 저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고 계신겁니까?"

"신이기에 알고 있는 것이지요."

한모금 신의 눈물을 머금은 하우드는 잔을 내려 놓은 후 안주로 나온 치즈를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그리고 다시 신의 눈물을 한모금. 차분히 그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운현이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할 때 한잔의 신의 눈물을 모두 비운 하우드는 작게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신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에 대해서 신이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 당연한 것에 대해서 저는 잘 모르겠군요. 왜 제 앞에 나타난 것입니까?"

"당신과 한가지 계약을 맺고 싶어서입니다."

"뭡니까."

하우드는 운현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신이 되는 날. 당신이 모든 운명을 조율할 수 있게 되는 때.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주십시요."

404====================

신과 신

신이 된다?

신이 될 생각은 없다.

위신체가 없으면 세상에 나올 수 조차 없는 무력한 신 따위 될 생각이 없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 신이 될 사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저는 신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만."

"왜죠? 가짜 신이라는 것은 신이 될 자격을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가짜만이 진짜를 노릴 수 있지요. 가짜나마 될 수 있는 자만이 진짜를 동경하는 것입니다."

말을 마친 하우드는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들을 힐끔힐끔 보고 있는 사람들을 같잖다는 듯 응시했다.

"운명이라는 굴레에 묶여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꼭두각시들과는 다릅니다."

"그런 자가 하나 더 있지 않나요?"

이계에서 온 존재.

이미 천검자는 죽였으니 라닌이 남아 있다.

라닌이 신의 힘을 손에 넣는 순간 그녀를 죽이고 남아 있는 신인 파르티와 협상해서 원하는 운명을 얻어낸다.

그것이 운현이 바라는 것이었다.

그 계획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하우드가 곱게 보일리 없었던 운현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자... 라닌을 말하는 건가요?"

"네. 그녀는 신이 되길 원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는 가짜 신이 아니지요. 그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저나 파르티 정도에 불과할겁니다."

"그 말은 그녀가 운명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인가요?"

"후후후..."

쓰게 웃으며 하우드는 남은 신의 눈물을 입에 머금었다.

천천히 그것을 마신 그는 잔을 내려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는 안됩니다."

"그런 것 치고는 무지하게 자신만만하던데."

이 말을 라닌에게 들려주고 싶다.

라닌을 이용하는 것은 둘째치고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사실이니까.

천검자 하나 제대로 관리 못하고 그렇게 미친 짓을 하게 둬버린 것만 생각해도 속이 터지는 운현의 입장에서는 라닌도 한번 제대로 엿을 먹었으면 싶었다.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하고 있지요. 그래봤자 그녀 역시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음? 이계인은 운명에 걸려 있지 않은 존재가 아닌가요?"

"하하하하하하... 운현."

"네."

"꼭 운명만이 모두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중이 되면 당신이 더욱 잘 아실 겁니다. 그럼 오늘의 만남은 여기까지로 해두지요."

"아. 잠깐만."

"네."

"라닌이 말하길 당신이 죽으면 악신이 부활한다고 했는데... 당신은 뭡니까? 당신이 악신입니까? 그리고 카야는 뭐고."

라닌에게 물어봤자 대답해 줄리도 없고 카야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렇다면 그나마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이는 하우드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만난 김에 필요한 정보를 캐낼 수 있을만큼 캐내자는 생각에 운현이 묻자 하우드는 난처하다는 얼굴로 볼을 긁적거렸다.

"저는 뭐냐라... 굳이 말하자면 봉인이라고 해둘 수 있겠지요."

"봉인?"

"네.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저와 파르티는 서로를 봉인시켰습니다. 그렇지만 둘 다 필요에 의해서 봉인된 만큼 각자 움직임은 있어야 했지요. 그래서 저는 저를 따르는 이들에게 하우드라는 위신체를 만들게 했고 파르티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카야라는 위신체를 만들게 했습니다."

"음... 조금 이해가 가질 않는데요. 왜 그런 짓을 했습니까? 당신은 그렇다고 치고 파르티는 자신의 교단이 있는데 왜 다난이라는 교단을 만든 것인지 알 수 없군요."

"하하하... 그건 간단합니다. 지금의 파르티 교단은 파르티를 숭배하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소... 아."

그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의 세계에도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가장 간단한 예를 들면 기독교를 볼 수 있었다.

기독교의 대부분은 다른 곳의 신이나 전승을 따온 것이 많았다.

예를 들어서 크리스마스. 12월 25일이며 그리스도의 탄생일이라는 크리스마스도 원래는 태양신의 축일이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 수록 전승의 원래 의미는 사라지며 믿는 자의 이름 아래 다른 것으로 변질된다.

파르티 교단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해가 가셨나요? 지금의 파르티 교단은 원래 파르티를 숭배하는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방의 다른 신을 모시는 이들이었지요."

"흐음..."

"파르티가 봉인되고 원래 파르티를 따르던 이들의 대부분이 힘을 잃었습니다. 그때 지금의 파르티 교단이 원래의 파르티 교단을 덥쳤지요. 신관을 살해하고 신전을 무너트리며 신성과 성구를 훔쳤습니다."

"그럼 지금의 파르티 교단은..."

"진정한 의미로 파르티를 따르는 이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제례방식부터 시작해서 그 외의 모든 것. 파르티를 따르던 이들의 방식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입맛에 맞게 모든 것을 바꾸었지요."

"그렇지만 파르티의 이름아래에 신성도 받고 신성마법도 쓰는데요?"

"네. 그렇겠지요."

"그게 가능한 이야기인가요?"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지금의 파르티 교단이 다른 교단을 인정하는 척 하며 그들을 말살시키고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네... 뭐 들었습니다만."

"신성은 신에게 닿은 존재라면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저나 파르티 정도로 강한 신이 아니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들의 신성을 갈취하여 파르티라는 이름을 내걸고 사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요."

몬스터의 피를 먹여 신성이 갈취당하는 운명의 세 여신과 카야가 떠오른다.

그것을 생각하니 운현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럼 파르티 교단이 보유한 신성이 모두 소모되면?"

"그들이 쓰는 신성마법은 사용 불가능해지겠지요."

"그렇군요."

왜 다난교가 파르티 교단을 철천지 원수로 찍었는지.

왜 파르티 교단이 다난교를 어떻게든 말살시키려고 하는지.

이제야 대충 이해가 갔다.

"그럼 파르티 교단에서는 필사적으로 카야를 찾으려 하겠군요."

"네. 카야를 이용하면 신성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파르티 교단에서 다난교단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나 카야 이상으로 신성을 짜낼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요."

"이걸 파르티 교단의 사람들은 알고 있나요?"

"아마 교황과 그 밑의 추기경 정도 된다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나요? 그렇게 따지면 당신 역시 파르티 교단에게 쫓겨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신을 바라보며 운현이 비릿하게 웃자 하우드는 작게 키득거렸다.

"파르티... 카야와 다르게 저에게는 신성이 없습니다."

"왜죠?"

"제가 왜 매일 자살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신성을 소모하려고 자살하는 것입니다."

"한 여인을 잃은 슬픔에 자살하려는 것이 아니라요?"

운현의 질문에 하우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 쓴웃음을 지으며 머뭇거리던 그는 탁자를 톡톡 치며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에게는 그것을 슬퍼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럼 제니스는요?"

"제니스... 하하하... 그건 제가 알바가 아니지요."

"제니스의 운명의 상대가 당신인데요?"

"운현. 놓치고 있는 것이 있군요."

"뭡니까."

"저는 악신입니다.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많은 이들의 운명을 갈취하고 부쉈습니다."

"그래서요?"

"그리고 그것에 실패해서 많은 남자들이 운명을 잃고 던전의 몬스터가 되었지요."

"네. 대충 예상했습니다."

저번의 던전에서 만났던 오크를 떠올렸다.

그리고 무한히 재생되는 몬스터들을 떠올렸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우드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여기서 질문. 그들이 사라짐으로서 원래 운명의 상대를 잃은 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운명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사라졌다 하여 그 운명이 바뀔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그렇지 않나요?"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빙그레 웃은 하우드는 탁자를 톡톡 두들기다가 치즈를 들어 한입 물었다.

"운명의 상대를 잃은 이는 다른 이를 찾게 됩니다."

"......"

"그리고 그 상대는 운명을 가지지 않은 이가 되겠지요. 운명을 잃은 자이기 때문에 운명이 없는 자에게 다가갈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운명을 잃은 자들은 운명이 없는 자를 제외하고 다른 이들에게 배척받게 됩니다."

"어... 잠깐만. 뭐라고?"

지금 뭐라고 한거지?

운명이 없는 자가 뭐라고?

"......"

"운명을 빼앗긴 자이기에 운명에 얽메이지 않는 자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

"운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하하... 이거 참."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운현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었다.

속이 복잡하다.

거친 담배연기가 기도를 타고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운현은 이를 드러내었다.

"그러니까 내가 인기가 많은 이유가 내 매력 때문이 아니라는 건가?"

"오오... 물론 운현. 당신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남자입니다. 엄청난 능력, 그리고 타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강대한 카리스마."

"....."

"그렇기에 다른 이들이 납득을 하는 것이지요. 아. 운현 정도라면 반할만 하다. 운현 정도라면 사랑할만 하다... 이런 식으로요."

"...그런가."

그렇다면 어느정도는 이해가 간다.

만약 자신의 매력이 넘쳐 흐르고 이 세계에 남자의 수가 적기에 인기가 많은 것이었다면 다른 여인들도 자신에게 사랑에 빠졌겠지.

하지만 몸을 섞었던 힐더크나 그 외의 다른 여인들을 봐도 사랑에 빠졌다기보다는 한순간의 쾌락을 위한 것 뿐이었다.

지금처럼 가짜 신의 힘을 얻고 막대한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타인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이용할 줄 만 알던 찌질한 자신을 그녀들이 아무렇지 않게 믿어주고 사랑한 것이 자신의 매력이 아닌 운명 때문이라는 것에 운현은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바제트의 운명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면...

운현은 입을 다문 채 생각을 이어나갔고 하우드는 그를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준비가 되시면 불러주십시요."

"아니. 잠깐만요."

"말씀하시지요."

"당신의 계약. 제가 신이 되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달라는 것. 그것이 누구입니까."

"그건 그때 가서 말씀드리지요."

"만약 제가 당신을 돕는것에 계약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지요?"

"당신이 신이 되게 해드리겠습니다."

"말씀드렸지만 신이 되는 것은 저에게 큰 메리트가 없습니다. 아니... 그걸 떠나서 계약을 하지 않아도 신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은 저 뿐 아닌가요? 그렇다면 이 계약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오해를 하고 계시군요."

운현의 말에 하우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나 파르티 역시 신이 될 자격을 갖췄습니다."

"그렇다면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차라리 제가 당신이 신이 되도롭 돕겠습니다. 저는 신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당신이 신이 되어 원하는 운명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신이 된다면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십시요. 그러면 만사가 편해지는 것 아닙니까?"

달콤한 꿀에는 독이 있다.

하우드의 제안은 자신에게 상당히 유리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운현은 그 제안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운현의 말이 정곡을 찌른 것인지 하우드의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운현이 이를 드러낸 순간 하우드는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만진 후 다시 웃었다.

"역시 당신을 속이는 것은 힘들군요. 맞아요. 저도 신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와 같은 이유인가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존재하기만 해야 하는 신이라는 것.

운명을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뭐하겠는가.

힘은 써야 힘이다.

하우드는 차마 운현의 질문에 답변하지 못했다.

"......"

"날 이용하려고 한다라..."

"이용이 아닙니다. 당신이 신이 된다면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습니다."

"차라리 파르티와 협상하겠다면?"

"파르티는 안됩니다."

"왜죠?"

"파르티가 원하는 운명은 이미 만들어져 있으니까요."

"고작 몇명의 운명만 틀어주면 되는 건데 그게 그렇게 힘들까요."

"고작 몇명이 아닙니다. 운현. 당신이 이렇게 운명을 바꾸어 나갈 수 있기에 쉽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

"한명의 운명이 바뀌면 그 여파로 모든 이의 운명이 바뀌어져버립니다. 틀어져버린 운명은 절대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운현. 당신이 원하는 것은 당신의 연인과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우드는 음울한 얼굴로 천천히 웃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있는 자. 그런 위험한 자를 파르티가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그거야 협상을 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지요."

운현의 비릿한 미소를 보며 하우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그럴까요? 아무튼 마음이 결정되시면 이것을 부숴주시기 바랍니다."

운현이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자 하우드는 품에서 작은 석패 하나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라닌이 주었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돌이다.

색은 다르지만 형태가 비슷한 것에 운현이 그것을 주머니에 넣자 하우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아. 잠깐만."

"네."

"제가 당신을 죽이면 어떻게 되는 것니까?"

"어떻게 되고 자시고... 악신과 파르티가 풀려납니다. 그리고 나서 운명은 가속되겠지요."

"가속된다는게 무슨 의미죠?"

"이미 무너져내리기 시작한 운명입니다. 죽어야 할 이가 죽고 살아야 할 이도 죽지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운명은 그대로 흘러갑니다. 원하신다면 절 죽이지 않고 도망쳐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쓰게 웃은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차피 다시하게 되실테지만..."

"회귀를 한다는 건가요?"

"예. 비틀어진 운명은 점점 균열을 크게 만들어갈 것이고 그리 되면 언젠간 저나 파르티의 봉인은 풀려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법칙이 무너지고 세계가 멸망할것입니다. 하지만 예정되어 있는 멸망이 아닌 만큼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시기로 회귀를 하겠지요."

"그런 경우에 대해서는 뭔가 잘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경험이라도 해봤나보군요?"

"이게 벌써 수천번째입니다. 제가 신의 힘을 손에 넣은 순간부터 모든 것이 틀어져버렸습니다."

이를 드러내며 토해내듯 말한 하우드는 벌떡 일어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차분히 바라보던 운현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라닌이 문제가 아니군.'

405====================

신과 신

하우드와 만나고 난 후 길드로 복귀했다.

저녁 시간이 거의 지난 탓일까?

회관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맥주 한잔 줘."

회관의 메이드에게 맥주를 주문하고 운현은 테이블에 앉았다.

식당에서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들고 나온 메이드가 맥주를 건네주자 그것을 한번에 반쯤 마신 운현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했다.

'하우드... 이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우드가 원하는 것.

파르티가 원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

신이 되면 그녀들의 운명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그리 된다면 자신은 이 세계에 개입하지 못하게 된다.

파르티가 신이 되면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운명을 만들 것이다.

그 운명 속에 그녀들의 삶이 제대로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우드가 신이 되면?

"...그럼 세상은 끝이군."

너무 스케일이 크다보니 생각하면 할 수록 깝깝한 마음 뿐이다.

"세계와 싸운다는게 이런 거구만."

정말이지 짜증 밖에 나지 않는 상황이다.

쉬운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전의 내가 바보는 아닐터.'

그는 지금 모든 것이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불안해하고 있을터.

자신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는가.

운현은 맥주를 단번에 마신 후 다른 맥주를 한잔 더 시켰다.

그렇게 다섯잔의 맥주를 마시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 사무소의 문이 열렸다.

"으으..."

"또 땡땡이 치면 가만 안둬요!"

"풋!"

질린 얼굴로 상아가 시무룩히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문 안에서 들리는 것은 펠리시아의 목소리.

아마 제대로 혼쭐이 난 모양이다.

힘 없이 터벅거리며 걸어 나오던 그녀는 회관의 테이블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운현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방금 전 까지 시체라고 생각될 정도의 얼굴이 금방 밝아지며 빠르게 달려오자 운현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어서 와."

"으아아아! 이 자식! 날 버리고 튀다니!"

"무슨 그런 험한 말씀을."

"펠리시아가 그렇게 좋아? 응? 응!?"

"글쎄."

머리를 꽉 잡고 흔드는 상아를 향해 웃어보이며 운현은 손을 뻗었다.

"헉.'

"왜?"

"아, 아니. 그 사람들도 많은데."

운현이 손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자 당황한 상아는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거렸지만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좋은데?"

"응. 있어. 위로해줘."

"헤헤~ 그럼 내 방에서 이야기할까?"

그의 말에 상아는 밝게 웃으며 허리에 감겨진 운현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상아의 방으로 이동한 운현은 상아가 건네 준 와인을 마시며 말했다.

"하우드와 만났어."

"......"

"신이 되어달라고 하더군."

"신...? 햐. 신이라니. 이거 대단한데?"

"그렇게 쉽게 말할 만한 것이 아니야."

"왜?"

"신이 된 순간 난 이 세상에 개입할 수 없게 되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하우드가 말하는 신은 파르티나 악신처럼 위신체를 이용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그저 운명을 만들기만 하는 자에 불과하지."

"...그럼."

"그래서 고민이야."

만약 신이 된다면 운현의 고민은 완전히 해소될 수 있었다.

신의 자리에 올라 모든 운명을 자신의 마음대로 고친다면 상아 뿐만 아니라 모두의 삶을 제대로 만들 수 있을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만사 오케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 삶 속에서 나는 없을테니까."

신은 이 세상에 개입할 수 없다.

그리고 완벽한 운명을 위해서는 이계인이 사라져야 한다.

만약 자신이 자신이 만든 운명 속에 들어간다면 반드시 운명은 틀어지게 되어 있다.

그리 된다면 또 다시 반복에 불과했다.

"잠깐만. 그럼 네가 신이 되면..."

상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의 딱딱한 얼굴을 마주하며 운현은 쓰게 웃었다.

"그래. 내가 없는 세상에서 너희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되겠지. 아마 운명대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 가능성도 있겠지."

"싫어! 그런거!"

내 말에 상아는 크게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슬픈 표정을 마주하며 운현은 쓰게 웃었다.

"나도 싫어. 그런 거. 하지만..."

만약 과거의 자신이 바란 것이 이것이었다면?

만약 그녀들아 자신을 잊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 것이라면?

모든 방법을 써도 답이 나오지 않아 이것을 원했던 것이라면?

그렇다면 신이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럴리 없다. 내가 그런 쪼다같은 짓을 할리 없어. 그리고 보험도 있고... 만약의 경우는 모두 대비했다. 아마... 그게 정답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싫어. 운현. 날 잊고 살아갈 수 있겠어? 날 만나지 않고..."

"그럴리 없잖아."

눈물이 가득한 상아의 얼굴을 보며 필요하다면 할 수 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운현은 상아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그의 몸 안에 힘없이 끌려 온 상아는 운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싫어... 그런거."

"그래. 나도 싫어."

"방법을 찾아보자? 응? 다른 방법이 있을거야. 그러니까..."

"응..."

필사적으로 말하는 상아를 더더욱 강하게 끌어안은 운현은 상아의 얼굴을 잡고 들어올렸다.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안그래도 못생긴 얼굴이 더 못생겨졌네."

"너 지금 그게 할 소리야!?"

"이렇게 못생긴데다가 바보같은 기집애니... 어떻게든 내가 책임져줘야지."

상아의 얼굴에 있는 눈물을 닦아 준 운현은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달콤하게 파고드는 키스에 당황하면서도 상아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으음..."

입 안을 누비는 촉촉한 설육에 당황하면서도 상아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부드러운 자극이 몸을 달아오르게 만든다.

그것을 즐기며 운현과의 키스를 나눈 상아는 물기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쪼옥..."

작은 혀가 움직인다. 입 안으로 침입한 설육을 자극하듯 톡톡 건드리며 그를 흥분시킨 상아는 운현의 손이 자신의 슈트의 걸쇠를 풀기 시작하자 몸을 살짝 살짝 틀어 그가 벗기기 좋게 만들어주었다.

"아응... 손놀림이 야한데?"

천천히 떨어진 입술 사이로 은색의 끈이 이어진다.

투명한 은색의 끈이 톡 떨어지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야해 상아는 즐겁게 웃었다.

"읏... 응. 거길... 너 진짜 잘하는데?"

"처음이 아니니까."

"그랬지..."

슈트를 벗기는 법은 굉장히 복잡했다. 하지만 운현은 단 한번의 망설임이나 머뭇거림 없이 여유롭게 자신의 슈트를 벗겼고 그것에 상아는 질투를 해야 할지, 아니면 좋아해야 할 지 고민했다.

"으..."

"하. 여전하구만."

"뭐가?"

"네 살결."

이름과 같은 상아색의 부드럽고 깨끗한 살결을 보며 운현은 빙긋 웃었다.

벗겨진 슈트의 안에 있는 도자기같은 희고 매끈한 피부를 바라보던 운현은 그녀의 작은 어깨에 살짝 입맞췄다.

"웃."

"핥짝."

"아하하... 간지러워."

"그래도 좀 참아."

"으응..."

자신의 어깨를 깨물며 핥던 운현이 서서히 쇄골을 건드리자 상아는 그의 머리를 사랑스럽다는 듯 꼭 끌어안았다.

복실거리는 푸른색 머리칼을 쓰다듬던 그녀는 운현의 손길이 허리에서 내려와 탄력적인 둔부로 향하자 생긋 웃으며 그의 머리를 살짝 깨물었다.

"야해."

"누가 할 소리를 하고 계시나."

"흥..."

그의 손길이 노골적으로 둔부를 주무르기 시작하자 달아오르던 몸은 점점 뜨거워졌다.

슈트는 상의만 벗겨졌을 뿐이다.

하의는 아직 슈트에 감싸져 있다.

운현의 얼굴은 상아의 상체를 애무하고 있었고 그의 손은 하체를 애무하고 있었다.

"으으으... 하응..."

처음으로 느끼는 흥분과 행복에 신음이 터져나온다. 상아가 몸을 비틀자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든 운현은 상아를 침대 위에 눕혔다.

"버, 벗기려는... 거야?"

"응."

"야해."

"그럼 하지 말까?"

"...몰라. 바보야."

살짝 고개를 틀어버린 상아는 씩 웃은 운현이 슈트를 모두 벗기기 편하게 허리를 들었다. 완전히 나신이 되어버린 상아를 보며 운현은 빙긋 웃었다.

"...보기만 할거야?"

"감상하는 것도 좋지."

작은 체구이지만 나올 곳과 들어갈 곳이 확실히 나 있는 상아의 몸은 하나의 예술작품과 같았다.

그것을 바라보던 운현이 천천히 자신의 위로 올라오자 상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

"흐읏!"

하얀 피부 위에 솟아 있는 분홍빛 유두에 입술이 닿았다.

촉촉한 혀가 자신의 가슴을 깨물고 애무하자 상아는 침대보를 꽉 잡으며 신음을 참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이 양 다리의 사이로 내려가자 상아는 자신도 모르게 참던 신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흑! 으,,으읏..!"

"벌써 이렇게 젖었네."

"그, 그게 뭐 나빠!?"

"아니. 좋네."

히죽 웃은 운현은 빠르게 옷을 벗었다.

순식간에 나체가 된 그의 알몸을 보며 상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굉장하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뭔가 본색을 드러내고부터 변한 것 같은데."

늘상 보이던 차분한 모습도 좋지만 이렇게 능글맞은 모습도 나쁘지 않다.

상아는 쓰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와줘."

"분부대로 합지요."

상아의 얇은 다리를 잡아 천천히 벌린 운현은 그것을 그대로 위로 올렸다.

음액으로 흠뻑 젖어 번들거리는 계곡은 선홍색 살결을 훤히 보이고 있었다.

그것이 부끄러웠는지 상아는 슬그머니 자신의 손을 내려 음부를 가렸다.

"왜. 예쁜데."

"우, 웃기지 마! 빨리 해!"

"하하하하... 그냥 이렇게 보는 것도..."

"우으..."

운현의 장난에 상아는 결국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것을 본 그는 키득거린 후 자신의 남성을 잡아 계곡 사이에 대고 슬쩍 비볐다.

"윽! 으읏..."

작은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음부가 자극될 때마다 그녀의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투명한 애액이 더욱 많아진다.

양물을 흠뻑 적실 정도로 젖어 있는 계곡에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그녀의 입구에 가져다 댄 후 슬쩍 밀어 넣었다.

"핫! 아윽...!"

달콤한 비음과 함께 그녀의 몸이 굳었다.

이물질이 침입하며 만들어낸 쾌감과 약간의 고통에 상아의 얼굴이 찌푸려지자 운현은 그녀의 입술에 살짝 키스한 후 속삭였다.

"아프면...."

"....."

"참아."

"이씨...! 하으으윽!!"

계곡의 입구에 끼워져 있던 양물이 단숨에 끝까지 파고들었다.

복부가 꽉 차는 느낌과 함께 강한 쾌감에 빠진 상아가 고개를 쳐들며 부들부들 떨자 운현은 상아의 몸을 꼭 끌어안은 후 그녀의 긴 귀를 깨물었다.

"어때?"

"아...아으...으...으아앙..."

"대답할 여유는 없나보군."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허덕거리는 상아의 볼을 쓰다듬어주며 운현은 그녀가 진정될때까지 얌전히 안아주었다.

잠시동안 헐떡거리던 상아의 몸이 그나마 진정되자 운현은 상기된 상아의 볼에 키스해주고 물었다.

"좀 괜찮아?"

"으...으응... 하으... 오래간만이라 정신이... 나갈뻔했어..."

"그럼 더 나가게 해줘야겠네."

"하윽! 윽! 으하아응!!"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허리가 만들어낸 쾌감에 몸이 떨린다.

상아가 혀를 빼물고 신음을 하는 것을 들으며 가볍게 상아와 즐기던 운현은 자신의 양물을 꽉꽉 물어오는 상아의 음부가 만들어낸 쾌감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워..."

"으으으..."

달콤한 비명과 신음, 그리고 상아와 맺어졌다는 쾌감에 운현은 몸이 떨렸다.

하지만 아직이다.

운현의 허리가 더욱 빠르게 움직여지자 상아는 부들부들 떨다가 운현을 꽉 끌어안았다.

"아으으으으!!"

양물이 들어가 있는 음부 안이 뜨거워지며 사정없이 조여진다.

그것에 운현은 허리끝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흣...!"

"아흐..."

달뜬 신음소리와 함께 상아의 몸이 축 늘어졌다.

한계까지 도달한 절정에 그저 숨을 헐떡이는 정도 밖에 할 수 없게 된 상아를 사랑스럽다는 듯 안아주며 운현은 부드럽게 속삭였다.

"좋았어?"

"아...후우... 으..."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살짝 고개만 주억거린 상아는 힘겹게 손을 뻗어 운현을 안았다.

자신의 위에 있는 운현의 볼에 입맞춘 상아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좋았어..."

"그럼 한번으로 끝내기는 아쉽겠지? 더 할게."

"엑? 아흣! 으응!!"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운현의 허리에 상아는 그저 힘없이 몸을 떨기만 했다.

생각보다 연약한 상아의 모습에 빙긋 웃은 운현이 자세를 바꾸어 앉은 상태로 상아를 끌어안자 상아는 운현의 품에 안긴 채 속삭였다.

"운혀어언..."

"왜?"

"흐...우우... 사랑해... 사랑해... 그러니까..."

물기에 젖은 목소리.

쾌락보다는 슬픔이 담겨 있는.

슬픔보다는 애착이 담겨 있는 목소리다.

그녀의 목소리에 운현은 눈을 감고 상아를 꽉 끌어안았다.

"날 잊지 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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