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6/40)
  • 레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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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벨업

    동료들과 함께 신전에 들어 선 운현은 신전 안의 마법문을 확인해보았다. 혹시 모를 한글이 있나 확인해보았지만 마법문에 있는 글자는 자신조차 알 수 없는 글귀들 뿐이었다.

    "이게 뭐지?"

    "아. 이건 아직 밝혀지지 않은 마법 문자에요. 처음 던전을 발견한 분들도 이 글자를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 풀리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언어라서 더욱 학문적 가치가 있다고 했어요."

    마법문의 글자를 가리키며 운현이 묻자 헤스티아는 얼른 나서 그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그녀의 답변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운현은 피식 웃은 후 뒤를 돌아보았다.

    "2계층의 초입은 사막이야. 열풍 때문에 놀랄 수도 있으니까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헤에... 그런데 넌 어떻게 알아?"

    "나야 여기저기서 주워들은게 있으니까. 정보 수집은 모험가에게 있어서 기본 소양이라고."

    미야의 질문에 여유있게 답해준 후 운현은 마법문으로 한걸음 발을 내딛었다. 길드에서 1계층으로 들어설때 처럼 별다른 일 없이 운현은 마법문을 통과했다.

    "여기가 2계층이야?"

    "와... 신기하네요. 제니스님. 이정도면 공간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거겠죠?"

    "응. 던전에 대한 것은 아직 모든 것이 밝혀진 것이 아니야. 잘만 연구하면 공간과 시간에 대한 것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그 던전에 대한 조사를 하는 것도 모험가들이 하는 일이지."

    "헤에~ 저희가 굉장한 일을 하는 거네요~"

    "그렇지. 그럼 운현씨. 저는 이만."

    "아. 네. 부탁드립니다."

    "에? 운현. 제니스님은 왜?"

    2계층에서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서는 이미 결정했지만 그것을 파티원들에게 말해주지는 않았었다. 제니스가 따로 움직인다는 것에 놀란 바제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주변을 둘러본 후 말했다.

    "사막지대는 레벨을 올리는데 비효율적이지. 제니스씨에게는 사막지대의 탐사와 코어의 수집을 부탁드렸어."

    "그렇지만..."

    "불안한거야? 하지만 차라리 이게 나아. 길드원이 된다는 것은 많은 전투를 치뤄야 하고 비상시에 움직일 수 있는 순발력과 판단력이 중요해. 나 정도 되는 사람이 뒤에 있다면 그것을 훈련하기는 어렵지. 여기 운현씨정도라면 내가 없어도 그것을 정확히 너희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을거야."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를 향해 제니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달래주었다. 그녀들의 걱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운현이 함께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제니스는 운현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빠른 속도로 이동해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우리도 가자."

    "괜찮겠어?"

    "제니스님이 계시면 운현의 부담이 줄어들텐데..."

    "걱정마. 인챈트도 했고 무기도 있으니까. 아무튼 사막지대에서는 레벨업을 하기 좀 그러니까 언데드 서식지로 이동하자."

    성스러운 무기를 들고 있으면 추가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언데드 서식지에서 레벨업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빠르다. 독 데미지의 위험이 있지만 그것을 대비한 물약도 잔뜩 구비했으니 큰 문제가 없었다.

    "앞으로의 전투법에 대해서 일러줄게. 미야. 네가 해야 할 일은 크게 바뀌지 않았어. 일단은 탱킹을 위주로 움직이도록 해. 하지만 과하게 공격을 받으면 그에 대한 중독 상태 이상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 가급적 상처는 입지 않도록 흑암권을 계속 발동시켜줘. 힘들겠다 싶으면 바로 말하고."

    "응."

    "바제트. 속성 공격으로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것 알지? 언데드들에게 힐을 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 있어. 마력의 회복량이나 전체량이 상당할테니까 언데드들을 상대할 때 네가 주력 딜러가 되는거야."

    "힐링을 쓰라는 거지? 알았어."

    "헤스티아. 미야가 지뢰진으로 적들을 잡으면 바로 파이어 볼을 날려. 그리고 적당히 많이 몰린다 싶으면 파이어 월로 상대를 막고.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해볼게요!"

    "나도 전방에서 움직일 예정이야. 주력 딜링은 나와 바제트가 할거니까 각자 맡은 임무에 충실하도록."

    힐링으로 원거리 딜링을 하고 운현이 성검을 써서 언데드들을 공격한다. 지원은 헤스티아. 탱킹은 바제트. 1계층과는 조금 다른 대형이 만들어진 것이기에 여인들은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너무 그렇게 굳어 있으면 할 수 있는 것도 못해. 그러니까 걱정들 하지 말라고."

    "응..."

    '주눅들어 있군.'

    트롤을 잡으며 자신감이 붙기는 했지만 정상적인 루트로 레벨업을 한 것이 아닌만큼 2계층에 들어 온 동료들은 자신들의 실력이 이곳에서도 통할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일단 그녀들의 기를 살려주는 것이 우선이다.

    "가자."

    사막지대를 벗어나 음침한 지역으로 이동하자마자 운현은 천천히 성검을 뽑아들었다. 파르티 교단의 성검이 은은한 빛을 뿜어내자 음침한 분위기에 눌려 있던 동료들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체적으로도 음기를 뿜어내는 탓인지 기운이 가라앉네. 주의하도록 해."

    "운현."

    "아아."

    약간 떨어져 있는 수풀이 움직이는 것을 본 미야는 조용히 운현을 불렀다. 적을 발견한 것에 그녀가 긴장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바제트를 향해 손을 들었다.

    "...크르르르...!!"

    언데드는 산자를 증오한다. 사자의 팔찌를 착용하면 근처의 몬스터들이 모든 것을 제쳐두고 달려드는 것처럼 언데드들 역시 마찬가지다.

    살아 있는 운현 파티가 근처에 접근하자 배회하던 언데드들은 그들의 기운을 눈치채고 조금씩 접근하기 시작했다.

    "온다."

    "크아아아아!!"

    좀비 셋과 스켈레톤 둘. 2계층 초반, 언데드 출몰지에서  상대하기는 괜찮은 무리다. 사취를 뿜으며 달려드는 좀비들과 더러운 뼈를 덜그럭거리며 달려오는 스켈레톤을 본 미야와 바제트, 헤스티아의 얼굴이 파래졌지만 운현은 지금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반성회는 나중.'

    "이야아아압!!"

    언데드가 뿜어내는 사취와 강렬한 증오를 느낀 미야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달려드는 스켈레톤의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주먹을 바닥에 내리꽂은 그녀는 지뢰진에 맞은 스켈레톤들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자 헤스티아에게 외쳤다.

    "지금!!"

    "파이어 볼!!"

    좀비까지 끼면 좋겠지만 스켈레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이동속도가 느린 만큼 그들을 범위 안에 밀어 넣기는 어려웠다. 일단 데미지 확인이 우선이다 생각한 미야가 외치자 헤스티아는 준비하고 있던 파이어 볼을 쓰러진 스켈레톤들에게 날렸다.

    "달칵! 달칵! 달칵!"

    강력한 폭염이 몸을 감싸며 터져나가 스켈레톤들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대신 마구 턱을 움직였다. 그들의 뼈가 열기에 녹거나 타버리는 것을 확인할 때 쯤 불길이 가라앉자 좀비들은 끈적한 타액을 흘리며 미야와 운현에게 달려들었다.

    "나에게 와랏!! 너희들의 상대는 나야!!"

    도발을 사용해 운현에게 가는 좀비들까지 자신에게 끌어들인 미야는 악취 때문인지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고운 미모를 잔뜩 찡그리고 좀비들의 공격을 막아내던 미야가 뒤로 한걸음 물러났을 때 바제트는 빠르게 활을 움직였다.

    "힐링!!"

    "크아아아!!"

    힐링에 적중당한 좀비 하나가 비명을 내지르며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나머지 좀비들은 미야에게 달라붙었다. 두마리 좀비의 공격이 이어진다. 악취와 함께 끈적거리는 타액이 몸 여기저기에 닿는 것에 기분 나빠하던 미야는 쿨타임이 다 되었는지 다시 한번 지뢰진을 날린 후 뒤로 물러났다.

    "헤스티아!!"

    "파이어 볼!!"

    "왼편에서 좀비 세마리가 추가된다!!"

    파이어 볼에 맞은 좀비 무리가 불타오르는 사이 수풀에서 나온 좀비 셋이 비척거리며 걸어왔다. 갑작스러운 좀비들의 난입에 미야는 고운 얼굴을 잔뜩 찌푸린 후 외쳤다.

    "으아아아!! 이 자식들! 냄새 엄청 나네!!"

    "사취라는게 다 그렇지. 묘족이라 그런가? 냄새에 민감하구만."

    운현이나 헤스티아, 바제트 역시 처음의 사취에 코를 틀어 쥘 뻔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후각이 마비 된 것인지 더 이상 그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수인족의 특성 때문인지 미야는 아직까지 악취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었다.

    "으랴아압!!"

    달려드는 좀비를 잡아당겨 기존의 좀비 무리를 향해 집어 던진 미야는 나머지 좀비들을 끌어들였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파티의 움직임도 변한다. 적당히 몬스터들을 한쪽으로 몰아 넣기 위한 움직임에 운현은 히죽 웃었다.

    '이정도면 나쁘지 않군.'

    함정을 이용할 때와는 다르다. 과거에는 함정이 주력 딜링과 구속을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것이 일반적인 파티의 전투법이다. 범위 공격을 할 수 있는 딜러, 그리고 안정된 곳에서 최대한 빠르게 주문이나 원거리 딜러. 이 둘이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파티의 방향이나 형세 등을 탱커가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

    "운현! 그쪽으로 간다!"

    "흥."

    "카아아악!!"

    "우와..."

    "저게 성검인가?"

    바닥에서 구르던 스켈레톤이 몸을 일으켜 운현에게 달려가자 미야는 다급히 외쳤지만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운현은 여유롭기 그지 없었다. 그저 한번. 가볍게 휘두른 정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척이나 여유롭게 그가 성검을 움직인 순간 성검에 베인 스켈레톤은 빛에 휩쌓인 채 그대로 정화되어버렸다.

    "엄청나네! 굉장하잖아!! 운현! 그걸로...!"

    운현이 너무나도 쉽게 스켈레톤을 잡은 것에 놀라며 미야는 달려드는 좀비의 턱을 날려버린 후 그 좀비를 걷어차 밀어내며 외쳤다.

    "아까도 말했지만 성검을 쓰는 것은 위기시에만이야. 그냥 성검으로 잡을 거였으면 제니스씨를 다른 곳으로 안보냈지. 레벨업에 대한 걱정은 일단 제쳐두고 전투에 익숙해지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해둬."

    "그런..."

    "자. 그럼 계속해."

    성검을 쓰면 2계층 정도의 언데드들을 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말대로 지금 레벨업이 문제가 아니었다. 레벨은 제니스가 가져오는 코어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 전투를 익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전투와 위기상황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운명에 정해져 있는 죽음을 회피할 때 힘들어진다.'

    갓난아이에게는 세상 자체가 위험이지만 건장하고 운동을 많이 한 성인에게는 그 위험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동료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대신 이렇게 가혹할 정도로 훈련을 시키는 것도 그와 같았다.

    아무리 자신이 움직인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운명에 정해져 있는 같은 형태의 죽음은 없다. 그렇다면 그 수를 최소화시켜 죽음의 방법을 줄여나가야 한다.

    '아무리 악신을 깨우고 라닌의 방법대로 신이 되니 마니를 한다고 하더라도 얘네들을 강하게 만들어 놓으면 내가 움직이기도 좋지.'

    어쨌든 다난의 공격이나 다른 이들의 공격에서도 버텨내기 위해서는 최대한 레벨을 올리고 전투 감각과 센스를 올려 놓는 것이 좋다. 라닌과의 거래로 한달이라는 시간을 얻은 이상 이것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것에 운현은 다시 한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꺄아악! 또 와요!!"

    "큭...!! 진짜 엄청 모이네!!"

    "근처에 있는 놈들은 다 오는 것 같은데...?!"

    또다시 한무리의 좀비와 스켈레톤들이 몰려오자 여인들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단 한명도 포기한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전의를 불태우며 다시 싸울 준비를 하는 그들을 바라보며 운현은 빙긋 웃었다.

    "후아... 힘들었다."

    "아이고..."

    "죽겠다..."

    한시간에 걸친 전투가 끝났다. 한 장소에서 잡은 스켈레톤만 모두 백여마리, 좀비만 해도 팔십여마리였다. 이제 막 2계층에 들어 온 신참 파티 치고는 상당한 속도다. 물론 그 뒷배경에는 운현이 있었다. 적절히 수를 조절해가며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정도만큼의 몬스터들을 보내고 나머지는 그가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성검이 아니라서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군.'

    처음 성검의 위력을 보여 준 이유도 동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성검의 강력한 위력을 보여주고 나서 그녀들이 자신이 성검을 쓰는 것만을 의식하게 한다.

    몬스터의 수가 늘어나서 상대하기 힘들겠다 싶으면 은근슬쩍 침투경을 날리거나 주먹질을 해서 몬스터들을 반죽음으로 만들어 놓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오로지 눈 앞에 있는 적들에게만 집중하게 하고 다가오는 적들을 자신이 상대하여 그녀들을 보호한 운현은 여인들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에 만족하며 빙긋 웃었다.

    "모두 수고 많았어. 자. 이것들 마셔."

    "이게 뭐야?"

    "피로회복제."

    "처음 보는 건데..."

    검은색 병에 담겨져 있는 액체를 보며 바제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보는 것은 다른 여인들도 마찬가지. 그녀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운현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병의 뚜껑을 열었다.

    "인연이 있는 제조사에게 받은거야. 적당히 몸의 피로를 해소해주는 거니까 먹어둬."

    "음... 그런 거라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운현이 보증한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들이 모두 피로회복제를 마시자 운현은 병을 회수해 가방에 넣은 후 말했다.

    "일단 조금 쉬었다가 움직이도록 하자. 다들 흥분도는 어때?"

    "음... 전 괜찮아요."

    "나도. 그렇지만 한번 더 이정도로 싸우면 중간쯤에 흥분해서 전투가 힘들어질지도 몰라."

    "난 아직 괜찮아."

    헤스티아와 바제트는 괜찮다고 하지만 전위로 나선 탓인지 미야의 얼굴을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의 말에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주변을 둘러 본 후 말했다.

    "그럼 베이스 캠프를 만들고 거기서 쉬자."

    "에?"

    "우, 운현?"

    "오빠...?"

    "다들 왜 그렇게 봐?"

    "그... 쉬자는게 그런 의미가... 맞아?"

    기대감을 담아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미야가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자 운현은 피식 웃은 후 그녀의 쫑긋 솟은 귀를 꾹꾹 눌렀다.

    "그래. 그런 의미다."

    "아... 나도 생각해보니까 조금 흥분한..."

    "저두요!!"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일단 베이스캠프 만들러 가자. 근처에 안전지대가 있으니까 거기에 만들면 되겠지."

    여인들이 손을 들며 외치자 운현은 쓰게 웃으며 지도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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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벨업

    "우, 운혀언..."

    안전지대로 가는 동안 만난 언데드들을 상대하며 몬스터들이 내뿜는 체액의 효과 때문에 더욱 흥분상태가 되어버린 미야가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며 달라붙는 동안 빠르게 텐트를 친 운현은 그 안으로 미야를 휙 집어 넣었다. 그의 손길에 순순히 안으로 들어가버린 미야를 힐끔 본 운현은 부럽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헤스티아와 바제트에게 말했다.

    "일단 미야를 진정시켜야 하니까 준비를 부탁할게."

    "우... 알겠어요."

    그녀들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당장 미야를 어떻게든 해야 하는 것이다. 캠프를 만든 김에 이곳을 베이스 삼아 근처의 언데드들을 처분하도록 하자. 가볍게 앞으로의 전략을 생각하며 텐트 안으로 들어 온 운현은 어느새 미야가 자신의 갑옷을 다 벗어버린 것에 쓴웃음을 지었다.

    '수인족들은 쉽게 흥분하지 않지만 한번 흥분하면 대단하지.'

    "운혀어어언..."

    운현이 안으로 들어오자 미야는 하얀 꼬리를 살랑거리며 그에게 엉금엉금 기었다. 5, 6인용의 대형 텐트다. 꽤 넓은 텐트 안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여인의 색향은 이미 텐트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 하고 싶어..."

    검은색 타이즈의 가운데 부분은 이미 흠뻑 젖어 촉촉해져 있었다. 검은색 타이즈를 적신 투명하고 끈적한 애액이 방울져 똑똑 떨어지는 것을 본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미야를 끌어안았다.

    "하흡..."

    하얀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하얀 귀가 까딱거린다. 살짝 달아오른 건강한 갈색의 피부가 뜨끈하다. 자신의 얼굴에 얼굴을 비벼대던 미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곧장 운현의 입술에 키스했다.

    "쯔읍...쪽..."

    탐욕스러울 정도로 강렬히, 몬스터의 체액과 향이 만들어낸 효과에 간신히 정신을 잡고 있었던 미야는 운현의 타액을 마시자마자 자신의 자제심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매끈한 긴 팔을 움직여 운현의 귀를 막고 미야는 그와 다시 진한 키스를 나눴다.

    "쪼옥...핥짝. 으음.."

    타액과 타액을 나누며 설육을 비비는 음란한 소리를 들을 수록 몸을 태우는 흥분은 강렬해진다. 미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는 남은 옷들마저 다 벗어버렸다.

    탄탄한 상체에 딱 달라붙어 있는 하얀색 셔츠, 그리고 근육으로 탄탄한 하체를 막고 있는 검은색 타이즈. 완전히 알몸이 되어버린 미야는 앉아 있는 운현의 품에 가볍게 뛰어들었다.

    "으하응..."

    운현의 손길이 자신의 나긋한 등을 쓰다듬자 그것만으로도 꽤나 쾌감을 느낀 모양이다. 미야는 귀를 쫑긋 세우며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발가락이 오무라들고 몸이 딱딱해진다. 하얀 꼬리가 쭉 뻗어 있는 것을 본 운현이 그 꼬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미야는 한숨을 내뱉으며 운현의 목을 살짝 깨물고 핥기 시작했다.

    "춥...쭈룹.."

    게걸스럽게 키스를 하던 미야는 숨이 가빴는지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었다. 참고 참던 흥분을 막고 있던 것이 풀린 탓일까? 미야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있었다.

    "운현. 운현. 운현."

    연신 그의 이름을 불러대며 미야는 거칠게 운현의 몸을 만졌다. 갑옷의 걸쇠를 뜯어내듯 풀어내고 그 안의 하얀 셔츠를 빠르게 위로 올린 후 탄탄한 가슴 근육에 입맞춘다.

    "어디 안도망가니까 천천히 해도 좋아."

    마치 동정이 처음 여자를 안을 때처럼 완전히 흥분상태가 되어 거칠기만한 그녀의 손길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의 말 따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미야는 더더욱 진하게 운현의 몸을 물고 빨며 핥아댔다.

    "후... 운현도 흥분했어? 응? 내 애무로...?"

    운현의 유두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던 미야는 아까의 키스 때문에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가를 긴 혀로 핥아 훔쳐낸 후 다시 그의 유두를 쪽쪽 빨았다. 강렬하고 거친 애무, 몸에 닿고 있는 미야의 탄력적인 살결.

    애로함이 잔뜩 뭍어나는 미야를 끌어안으며 운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마음대로 해보려무나."

    "흣. 그, 그렇게 여유부리는 것도 지금 뿐이야."

    자신과 다르게 운현은 몇번이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일까? 미야는 애써 자신있게 웃은 후 운현의 복부를 핥다가 그의 바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바지를 뚫을 것처럼 솟아 있는 그의 양물을 본 미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보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나 그림으로 밖에 본 적이 없었던 남자의 양물을 실제로 처음 보게 된 미야는 눈을 질끈 감은 후 그의 바지를 벗겨내었다.

    허리를 들어 그녀가 자신의 바지를 벗기 편하게 해 준 운현은 미야가 자신의 양물에 시선을 고정하고 딱딱히 굳은 것을 보고 키득거렸다.

    "괜찮겠어?"

    "내, 내가 할거야."

    자신이 주도하겠다. 이럴 때 여자가 리드하지 않으면 어쩐단 말인가. 자랑스러운 묘족의 여성 답게 미야는 운현의 양물을 살며시 잡았다.

    '그때 언니들이 이렇게 말했지...'

    마을에 있을 때 남자 경험이 있었던 언니들이 잘난체를 하며 남자를 애무할 때는 이렇게 해야 한다. 라는 것을 떠올린 미야는 그의 남성을 손으로 흝다가 손 위로 올라와 있는 양물의 머리 부분을 긴 혀로 핥았다. 약간 까끌거리는 혀가 살짝 닿았을 때 미야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빼었다.

    "왜?"

    "아니... 그게."

    흥분은 했고, 덮치고 싶지만 실제로 하는 것은 처음이다보니 좀 당황스럽다. 미야는 어쩔 줄 몰라하며 연신 운현의 얼굴과 양물을 번갈아보다가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벌렸다.

    "합..."

    "오오..."

    처음부터 펠라치오를? 운현은 씨익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운현이 만족스러워한다는 것에 자신감을 얻은 미야는 머리를 위 아래로 움직이며 그의 양물을 쪽쪽 핥았다.

    "으으음..."

    운현이 낮게 신음성을 토해내고 살짝 몸을 떨자 미야는 그가 쾌감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서툰 애무에도 반응하는 그를 살짝 올려다 본 미야는 입에 양물을 문 채 베시시 웃었다.

    "계속 해줘."

    머리를 쓰다듬던 운현이 머리를 잡고 힘을 주자 미야는 다시 그의 양물을 애무하는데 집중했다. 아릿한 맛이 몸의 흥분을 더욱 불태운다.

    "찔꺽...쭈륵..."

    한 손은 자신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입으로는 운현의 양물을 핥던 미야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손을 넣었다. 이미 젖을대로 푹 젖어 애액이 방울져 떨어지는 계곡의 사이를 손가락으로 자극해나가던 그녀는 운현이 거칠게 자신의 머리를 잡자 놀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웅?"

    "읍...싼다!"

    "으으읍!!"

    진한 정액이 입 안으로 쏟아져들어왔다. 아릿하고 약간은 짜릿한 맛이다. 목구멍에 걸릴 정도의 진하고 끈적한 정액을 맛보며 머리를 흔들어 남아 있는 모든 정액까지 쪽쪽 핥아낸 미야는 살며시 입 안에 있던 양물을 뱉어내었다.

    "콜록... 너무 많잖아... 후후. 좋았어?"

    "응..."

    "아직도 딱딱하네... 핥짝."

    입가에 남아 있는 하얀 정액을 혀로 핥아 꿀꺽 삼킨 미야는 긴장되는 몸을 움직였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타액과 정액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검붉은 양물을 자신의 안으로 넣어야 한다.

    '처음은 아프다는데... 그래도.'

    언니들의 말을 떠올렸다. 첫 경험은 무척이나 아프지만 그만큼 기쁘다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서 기대감과 약간의 두려움에 빠져 있던 미야는 입술을 핥으며 운현의 가슴을 잡아 눕혔다.

    "후으읏..."

    바닥에 누워 있는 운현. 그리고 빳빳하게 서 있는 남성. 그것을 살며시 잡은 미야는 양 다리를 벌리고 그의 위에 쪼그려 앉았다. 그의 양물을 잡고 자신의 계곡에 몇번 문지르며 쾌감을 높히던 미야는 꼬리를 움직여 운현의 허벅지와 두개의 알을 자극하고 물었다.

    "이제 할게. 괜찮지?"

    "응. 얼마든지."

    "굉장히 여유롭네..."

    "나야 처음도 아니니까."

    빙긋 웃는 운현을 말없이 바라보던 미야는 계곡의 입구에 양물을 가져다 대고 심호흡을 했다. 처음부터 한번에 하면 서로 고통스럽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녀는 살며시 몸을 내렸다.

    "으읏...!!"

    좁디 좁은 구멍 안을 파고드는 남성에 미야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토해내었다. 아프다. 하지만 아픈만큼 가려웠던 곳이 자극되는 기분이다. 눈 앞이 하얗게 물드는 것 같은 기분에 미야는 한 손을 움직여 운현의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하윽...윽..."

    "힘들면 그만해."

    "안.... 힘들거든!? 꺄악!? 크하응!!"

    운현의 말에 발끈한 미야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다시 힘을 넣었다. 그의 양물이 계곡 입구에 있는 곳을 자극하자 미야는 등줄기에 힘이 쫙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탓에 버티고 있던 다리의 힘이 풀렸다.

    "하으...으으으으..."

    언니들이 그토록 주의하던 일을 벌이고 말았다. 한번에 깊은 곳까지 그의 남성을 받아들이게 된 미야가 허공을 바라보며 혀를 빼물고 신음하는 것을 본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미야를 끌어당겨 안았다.

    "하아... 하아..."

    고통, 그리고 쾌감. 두가지 상반된 기분이 미야가 정신을 못차리고 있자 운현은 그녀의 안에 양물을 넣은 채 미야를 꼭 끌어안았다. 맨 살아 닿는 미끌거리는 땀과 달콤한 피부의 향기가 기분이 좋다. 헐떡거릴 때마다 느껴지는 계곡안의 자극에도 운현은 사정을 하기보다는 미야를 걱정하는 것을 우선했다.

    "괜찮아?"

    "으아...으... 우, 움직이면...하으으으으!!"

    잠깐 꿈틀거린 것만으로도 깊숙히 박혀 있던 양물이 안쪽의 끝을 건드린 것인지 미야는 자지러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수많은 촉수들이 양물을 압박하는 듯한 쾌감에 빠졌지만 운현은 그것보다는 미야의 상태가 더 걱정되었다.

    "괘, 괜찮아?"

    "아흐...으..."

    축 늘어져 꼬리조차 움직이지 못한 채 미야는 운현의 위에 쓰러져 질질 타액을 흘려내었다. 아마도 크게 가버린 모양이다. 이어져 있는 부근이 축축한 것이 실금까지 한 것 같아 운현은 빙긋 웃었다.

    "좋았나보네."

    "우...우우..."

    정신이 아득해질정도로 가버린 것이 부끄럽다. 운현은 아직 기미도 안보이는데 자기만 먼저 가버리다니. 미야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진 것을 본 운현은 참고 있던 사정감을 풀어내었다.

    "하으으응!!"

    "아... 좋았다."

    "후우... 저, 정말이야?"

    완전히 기가 죽어버린 듯, 귀가 축 늘어진 미야는 운현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촉촉히 젖어들어 있는 미야의 눈을 응시하며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으로 미야는 조금 자존심을 되찾았는지 헤죽 웃었다.

    "다행이다... 그, 그래도 아직 딱딱하네."

    자신의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양물을 느낀 미야는 어쨌든 넣자마자 자신이 가버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킨 후 텐트의 다른 곳을 보며 허둥지둥거렸다.

    "그... 마, 많이 쌓였었나봐."

    "응. 그런 것 같더라."

    "...아직 더 할 수 있지?"

    "물론."

    "헤헤... 그럼 이번에는 제대로 해줄게."

    "응."

    "으읏..."

    운현의 가슴에 양 손을 올린 후 다시 몸을 일으킨 미야는 살며시, 이번에는 강하지 않게 허리를 흔들었다. 전투와 훈련으로 다져진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한 허리가 움직이며 음란한 소리가 텐트를 가득 채운다.

    "하..으윽...가, 갈것 같..."

    '음... 적응이 되지 않은 모양이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얼마나 했다고 벌써 가버린단 말인가. 미야의 얼굴에 드리운 당혹감과 수치심을 본 운현은 슬며시 몸을 일으켜 미야를 꽉 끌어안았다.

    "처, 천천히 해. 나 갈 것 같아."

    미야의 자존심을 무너트리고 싶지 않았다. 미야의 몸을 꽉 끌어안아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며 얼굴과 작은 가슴을 만지작거린 운현은 미야의 몸이 안정되자 살며시 그녀를 눕혔다. 기승위에서 정상위로 체위를 바꾸고 나자 미야는 운현을 올려다보며 달콤한 숨을 내뱉었다.

    "으... 괜찮은데."

    "내가 힘들어서 그래. 네 안이 너무 좋아서..."

    "그, 그래? 그럼... 흣..."

    "조금만 참아줘....!"

    미야를 눕힌 채 운현은 허리를 흔들었다. 아까의 미야가 하던 것과 다르게 절묘한 테크닉과 강약을 조절하여 미야와 안을 괴롭히던 운현은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얼굴을 적시고 계곡의 안쪽이 강하게 조여오자 깊숙히 남성을 밀어 넣은 후 말했다.

    "이제 쌀게...!"

    "으응!! 응!! 하으응!!"

    길고 아름다운 양 팔과 양 다리를 움직여 운현을 꽉 끌어안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은 미야는 운현의 양물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 쾌감을 억누르던 미야의 몸이 크게 흔들렸을 때 운현은 미야가 절정에 올랐던 것을 참는걸 보고 살며시 키스했다.

    '이정도면 자존심은 채워줬겠지?'

    "하아...으... 싸. 쌌네...?"

    조금만 더 움직였다면 자기도 가버릴 뻔 했다.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자신이 운현을 절정에 도달하게 했다고 생각한 미야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운현의 볼에 키스했다.

    "으응...너무 좋았어..."

    나른한 목소리로 말한 운현은 미야의 얼굴 여기저기에 키스했다. 그것이 간지러웠는지 작게 웃은 미야는 아직도 운현의 남성이 자신의 안을 가득 채우고 있자 베시시 웃으며 속삭였다.

    "조금 더... 할까?"

    390====================

    레벨업

    "하아....하아... 진짜 대단해... 이게 진짜란 말야...?"

    "후우... 좋았다. 어때? 이제 좀 가라앉았어?"

    가랑이 사이가 얼얼할 정도로 운현과 하고 나서야 미야는 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흥분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미야는 살며시 몸을 일으켜 그의 위에 올라탄 후 꼬리를 흔들었다.

    "너무 좋았어..."

    "다행이네. 우와... 땀 범벅."

    "너무 많이한건가..."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넌 누워 있어."

    운현이 네번, 미야가 일곱번 정도. 거기에 운현에게 숨기려 했지만 그녀도 모르게 가버린 것이 추가로 세번이 있으니 이정도로 축축해 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텐트 바닥에 있는 하얀 천을 들어 둘둘 말아 가방에 넣은 운현은 다른 천을 꺼내어 바닥에 깔았다. 바닥에서 뒹굴거리며 그가 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미야는 운현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헤헤헤~"

    "왜?"

    "으응~ 아니이~"

    그저 운현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미야가 헤죽거리자 운현은 마주 웃어 준 후 대충 옷을 걸쳤다.

    "씻어야겠는데. 움직일 수 있겠어?"

    "으음... 조금 힘들...까나?"

    "그럼 데리고 가주지. 샤워실은 아까 설치했으니까 거기서 씻자."

    과거에 샀던 텐트보다 몇배는 비싼 텐트를 샀다. 텐트 크기부터 샤워실 크기와 다른 물품들은 비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았기에 운현은 미야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우와... 그거 나한테는 너무 과한것 같은데."

    "싫어?"

    "아니~! 좋아!"

    "그럼 잠깐만."

    텐트 밖으로 나가 본 운현은 바제트와 헤스티아가 야영지의 입구쪽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체스를 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터덜터덜 그녀들에게 걸어간 운현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 바제트에게 물었다.

    "오래 기다렸어?"

    "으응. 아니. 그나저나 다 한거야?"

    "음. 일단 오늘은 여기서 쉴 생각인데. 별 문제는 없겠지?"

    "네. 어차피 저녁 식사도 해야 하고... 그런데 제니스님은 어떻게 하실거에요?"

    "이쪽으로 올 예정이야. 애초에 제니스와 약속한 지점이 여기기도 하니까. 제니스 용으로 작은 텐트 하나 깔아놨으니까 저기에서 제니스가 자면 되겠지."

    자신들이 잘 텐트 옆에 있는 작은 텐트를 가리키며 운현이 말하자 헤스티아와 바제트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미야랑 같이 씻고 올테니까... 너희들은 씻었어?"

    "네."

    "아까 씻었어."

    "응. 그럼 됐네. 잠깐 기다리고 있어줘."

    샤워실에 미야를 데리고 들어가 씻기고 나온 운현은 좀 더 쉬고 싶어하는 미야를 텐트 안에 눕혀 놓은 후 밖으로 나왔다. 느긋한 움직임으로 적당히 끓고 있는 냄비에 재료를 넣어 간단한 스튜를 만든 운현은 아직도 체스에 열중인 둘을 불렀다.

    "미야 언니는요?"

    "좀 쉬고 싶다고 하네. 이따가 제니스씨가 오면 같이 먹으면 되니까 걱정하지마."

    첫경험을 치룬 미야가 나오지 않은 것을 걱정한 헤스티아가 묻자 차분히 답해 준 운현은 스튜와 빵을 먹고 있는 여인들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자기는 먹지도 않고 바라만 보고 있는 운현의 시선에 바제트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할 말이라도 있어?"

    "아니. 맛있게 먹어주니 고마워서."

    "별게 다 고맙네. 하하하... 자자. 운현. 너도 보기만 하지 말고 먹어."

    "그래요~ 같이 먹어야 맛있죠~"

    싱글거리는 그녀들을 향해 웃으며 운현도 스푼을 들었다.

    '지금은 이렇게 여유롭지만 본격적으로 운명이 움직이면 이런 것도 힘들겠지.'

    한달이라는 시간을 받았지만 그 안에 레나의 죽음이 결정되고, 그리고 그때부터 미야, 바제트, 헤스티아, 필레, 상아의 순으로 죽음이 다가올 것이다. 그것을 막아낼 수 있을까?

    '그 전에...'

    2계층에 들어왔을 때 미야는 좀비 마법사의 공격에 맞아 위험에 쳐해졌었다. 그것이 죽음의 운명이라면 그것부터 막아야 한다.

    '죽음은 연속적으로 찾아오지 않아. 일단 한번 막아내면 시간적 여유가 있지.'

    그 틈을 노려야 한다. 생각을 이어나가며 스튜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운현을 보며 헤스티아는 걱정을 담아 물었다.

    "오빠. 진짜 무슨 일 있어요?"

    "응? 아냐아냐. 별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별거 아닌 것 치고는 안색이 좋지 않은데..."

    "하하. 진짜 별거 아니라니까."

    생각을 이어나가며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웃음을 지웠던 모양이다. 괜히 그녀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운현은 얼른 얼굴 가득 미소를 그린 후 스튜를 퍼 먹었다.

    "그럼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응."

    설거지라고 해봐야 요리에 사용한 접시 정도를 닦는 것이다. 근처의 물가로 걸어간 헤스티아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운현은 바제트의 장비를 점검해주었다. 늘어진 활대와 활줄을 점검하고 그녀의 갑옷 여기저기를 살피던 그는 캠프 입구에서 한 여인이 걸어오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했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혼자 움직이며 마석을 모으는 임무를 맡은 제니스는 운현이 자신을 반겨주자 지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옆구리에 걸려 있는 커다란 주머니를 꺼내 운현에게 준 제니스는 배고프다는 듯 터덜터덜 걸어 식탁에 앉았다.

    "아. 식사하셔야죠? 바제트. 미야를 불러줘."

    "응."

    "후으으... 피곤하네요. 오늘은 일찍 자야 할 것 같은데."

    "저곳에서 주무세요."

    "제 자리까지 만들어 주신 건가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오늘 저녁은 스튠데 괜찮으시죠?"

    "물론입니다."

    "으으... 배고파."

    바제트가 미야를 데리고 나와 식탁에 앉히자 운현은 미야와 제니스에게 스튜를 퍼주었다. 빵과 스튜로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해결한 제니스는 아까 말한 것처럼 정말 피곤했는지 그대로 자신의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불침번은 어떻게 하지?"

    "내가 혼자 설테니까 너희들은 쉬고 있어."

    자도 그만, 안자도 그만인 운현은 느긋한 목소리로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넣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세 여인들은 어이없어하며 그를 보았고 운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야!?"

    "오빠 혼자 고생할 생각하지 말아요."

    "내일도 전투를 해야 하는데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세 여인들의 집중 포화에 운현은 두 손을 들었다. 결국 초번은 바제트, 둘번은 운현, 삼번은 미야, 말번은 헤스티아가 하기로 결정하고 나서야 여인들은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서로 쉬면서 내일의 전투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시간이 늦어지자 헤스티아와 미야는 하품을 하며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쉴 생각이 없었던 운현은 모닥불 근처에 앉아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안자?"

    "아...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앞으로의 전투 때문에?"

    "응. 오늘 전투로 5레벨이 올랐으니까... 조금 느리긴 하지만 그래도 내일은 아침부터 움직이면 더 빨리 올릴 수 있겠지. 최대한 빠르게 레벨업을 해야 해."

    하루 전투를 치룬 것만으로 5레벨이 올랐다는 것은 상당히 빠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급 레벨의 사냥터에서 전투를 해봤자 하루 종일 해도 1레벨 올리기 힘들다. 그런데도 운현 일행이 이렇게 빠른 레벨업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파티들과 다르게 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수 있었다.

    목숨은 귀한 것이다. 그렇기에 모험가들은 한번의 전투가 끝나면 안전지대로 물러나 정비를 다시 하고 전투를 치룬다. 운현 일행이 했던 것처럼 계속해서 몬스터를 끌어모으는 방식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전투를 해도 괜찮으려나..."

    자칫 잘못하면 파티가 전멸할 수도 있는 전투법이다. 몬스터들을 잔뜩 끌어모아 쉬는 틈 없이 미친듯이 전투를 이어나간다. 아무리 장비가 좋다고 하더라도 장비의 피로도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고 만약의 사태도 대비해야 하는데 그런 것 따위는 없이 전투를 이어간다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바제트가 걱정스레 말하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것이겠지만..."

    계층이 높아질 수록, 더욱 깊숙히 들어갈 수록 지원을 받기는 어렵다. 바제트는 한숨을 폭 내쉰 후 고개를 끄덕이고 모닥불을 지켜보고 있는 운현의 옆으로 다가갔다.

    "다른 애들은?"

    "벌써 잠들었어. 오늘 전투는 격렬했으니까 말야."

    "넌 안쉬어도 괜찮아? 나 혼자 불침번을 봐도 괜찮은데..."

    "됐네요. 그보다 네가 더 걱정인데."

    "뭐가?"

    "...음. 뭐랄까."

    머뭇거리던 바제트는 살며시 손을 움직여 운현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이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과 얽히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운현은 바제트의 이어진 말에 움찔 몸을 떨었다.

    "너 혼자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아니 내가 무슨 고생을. 전투는 너희들이 다 했는걸."

    "후후후... 운현. 난 봤다고."

    "뭘?"

    "네 공격에 맞은 언데드들은 다른 언데드들에 비해 빨리 소멸되는 것을 말야."

    "........"

    다른 무엇보다 동료들의 안전을 우선해야 하는 운현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레벨업은 해야 했고, 동료들의 안전은 지켜야 했다. 그렇기에 전투 양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힘들겠다 싶으면 언데드들을 공격해 그들의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줄여나갔던 운현은 바제트가 그것을 봤다는 것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무슨 소리야?"

    일단은 발뺌한다. 미야나 헤스티아와 다르게 바제트는 아직 관계도 없었다. 만약 여기서 바제트가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운현으로서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숨기려는거야?"

    "이해가 되질 않는데. 내가 뭘 숨긴다고..."

    "운현."

    "......"

    "내가 던전 도시에 오기 전에 뭘 했다고 생각해?"

    "글쎄?"

    "나도 모험가였어. 물론 너처럼 숙련되지는 않았지. 여기저기 움직이며 다른 곳의 의뢰를 해결하거나 했는데..."

    "....."

    "그래도 나름 모험가들의 세계에선 꽤 발이 넓은 편이었거든. 그런데 말야. 그런 곳에서도 너의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어. 아니. 이름을 떠나서 너의 인상착의를 알고 있는 모험가들은 단 한명도 없더라고."

    "그거야 내가 솔로 플레이를 즐기고..."

    "그런 문제가 아니야."

    운현의 말에 바제트는 쓰게 웃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모닥불 안에 나뭇가지 하나를 휙 던져 놓았다.

    "모험가들 중에는 너처럼 솔로 플레이를 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던전에 가거나 하는 것은 아니야. 아무리 작은 던전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둘 이상 팀을 유지하곤 해."

    "......."

    "바깥에도 모험가 길드는 많아. 그리고 내가 의뢰를 한 길드는 전 세계의 길드나 조직들과 연계를 하고 있고. 그들에게 의뢰를 해봤지만 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곳은 단 한곳도 없었어."

    "그건..."

    그녀의 말대로이다. 운현은 바깥에서 모험가 생활을 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것에 운현이 머뭇거리자 바제트는 빙긋 웃은 후 운현을 보았다.

    "아, 추궁하려는 건 아니야. 다만... 네가 우리에게도 말하지 못할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구나... 라고 생각할 뿐이지."

    "....."

    "어쨌든 우리는 너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고. 레벨업만 해도 그래."

    "아... 그거."

    상아와 연인관계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이 부분에 대해서 동료들 중 누군가가 말을 할 것 같기는 했었다. 상아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 코어는 어디서 구했단 말인가. 바제트가 맑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쓰게 웃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야."

    "거짓말."

    "거짓말이라니..."

    "운현."

    "응?"

    "그... 내가 파티 브레이커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응."

    "그게 왜 일것 같아?"

    "그거야..."

    길드의 소문은 바제트가 함부로 말을 하고 특유의 마이 페이스 때문이라고 했었다. 그것을 말해도 될까 망설이는 운현을 향해 바제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함부로 말을 하고 마이 페이스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그렇지? 사실은 그게 아니야."

    "...그럼?"

    운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바제트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의심보다는 걱정이 더욱 담겨 있는 그 손길과 시선에 운현이 입술을 달짝이자 바제트는 천천히 얼굴을 가져가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으음..."

    "....."

    "내가 다른 파티에서 막말을 하고 다녔던 이유는 간단해. 내가 아니더라도 그 파티는 얼마 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야."

    부드럽게 웃으며 바제트가 말하자 운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이 페이스에 막말을 한다지만 바제트는 합류한 이후로 단 한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맏언니처럼 미야와 헤스티아를 잘 이끌었으면 이끌었지 그녀들에게 함부로 대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미야나 헤스티아도 늦게 합류한 바제트를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지금은 정말 친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바제트가 정말 막말을 해서 파티 브레이커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그 말은... 일부러 막말을 해서..."

    바제트의 착한 성격. 그리고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을 위하는 성향을 보았을 때 운현은 그녀가 왜 막말을 하며 일부러 파티의 적이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으응... 사실은 일부러였어. 그게... 그렇잖아. 겉으로는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 파티는 전투 중 전멸할 수 있는걸."

    운현의 파티야 운현이 정확한 상황 판단과 분석, 그리고 압도적인 무력으로 안심하며 전투를 치룰 수 있지만 다른 파티는 달랐다.

    어쨌든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파티간 손발이 안맞는다면 그 파티에서 사망자가 나오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바제트는 그것 때문에 일부러 파티를 부숴버리는 것이었다.

    자신이 욕을 먹고, 파티의 문제점을 대놓고 지적하며 분위기를 완전히 무너트려 서로 적대하더라도 어중간한 유대감으로 전투를 이어나가다가 전멸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애초에 막아버리는 것이다.

    그로 인해 자신이 크게 상처받는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자신이 경원시 당한다 하더라도.

    착하기 그지 없는 바제트는 일부러 자신이 악역을 맡아갔던 것이다.

    391====================

    레벨업

    "왜 그랬어?"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빙긋 웃은 바제트는 운현의 떨리는 목소리에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선을 돌려 타오르는 모닥불에 고정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운현도. 바제트도. 서로 아무런 말도 없이 모닥불만 바라보고 있다.

    "지금은?"

    "응?"

    "지금은 어떤데?"

    운현의 질문에 바제트는 입술을 달짝거렸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지만 말을 꺼내지 않는다.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파티도 문제가 있구나."

    "...응."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문제가 있으면 고치면 된다. 그것을 생각하며 운현이 조용히 묻자 바제트는 고개를 돌려 운현을 보았다. 약간의 눈물이 고여 있는 촉촉한 시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슬픈 눈으로 바제트는 운현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건 너야."

    "나?"

    "응."

    "내가... 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모든 것을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이 문제라는 바제트의 말에 운현은 당황했다.

    "내가 무슨 문제가 있는데?"

    "넌 모든 것을 숨기고 있잖아."

    "...그건."

    "운현."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있는 것을 눈치챈다. 아니. 이미 눈물을 흐르고 있었다. 바제트의 눈가에서 흘러나온 투명한 액체가 모닥불 빛에 비춰져 반짝이는 것을 보며 운현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무엇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는거야?"

    "말했잖아. 너희들에게 반했다고. 너희들을 사랑한다고."

    "그건... 믿고 있어."

    "그거면 된 것 아니야?"

    "...지금은 그렇지. 지금은 너무나도 좋아. 나나, 미야나, 헤스티아나. 우리 모두 널 좋아하고 있어. 아니, 사랑한다고 보는게 맞을거야."

    "그게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뭐?"

    "인정할게. 넌 매력적인 남자야. 다른 소극적인 남자들과 다르게 자신감이 넘치고 능력도 많아. 모든 것을 여자들에게 맡기려고 하지도 않고 적당히 야하기까지 하지.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 외에는 관심도 주지 않고."

    "나쁜게... 아니잖아."

    운현의 말에 바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일그러져 있었다. 슬픔, 그리고 자신이 이런 말을 함으로써 운현이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 모든 감정이 복잡하게 섞인 채 바제트는 운현의 손을 꽉 잡았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손이 너무나도 안쓰럽다.

    "맞아. 나쁜게 아니지. 더할나위 없이 좋아. 그래서 그래. 운현. 한가지만 물어볼게."

    "얼마든지."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정체라... 난 운현이야. 너희들을 사랑하고 너희들의 파티 리더인 운현.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니야? 뭐가 그렇게..."

    "중요해. 운현. 솔직하게 말해줘.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모든 것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야."

    바제트의 질문에 운현은 타이르듯 말했다. 말해주는 것? 무엇을 말해준단 말인가.

    너희들을 구하기 위해 회귀를 했다.

    너희들을 구하기 위해 수천의 세계를 겪었다.

    너희들을 구하기 위해서 타인을 이용했다.

    너희들을 구하기 위해 세계를 무너트리겠다.

    이런 것을 말해서 뭐하겠는가. 운현이 원하는 것은 그녀들의 행복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희생시킬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파티의 악역을 자처하며 파티 브레이커라는 오명이 씌워져도 웃으며 살아가는 바제트에게 있어서 자신의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는 안봐도 뻔했다.

    '바제트라면 절대로 막겠지.'

    다른 것도 아닌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서 운현이 타인을 희생시킨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위해서 자신이 이토록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바제트는 어떻게든 운현을 막으려 할 것이다.

    아니. 최악의 경우 운현이 자신때문에 힘들지 않도록 던전 도시에서 사라질 가능성도 있었다.

    "알려줘."

    "정말 별 거 없어. 그냥 굴러다니던 모험가였고 어쩌다보니 실력을 쌓게 된거야."

    "정말이야?"

    "응."

    "거짓말."

    "진짜라니까. 아니... 내가 아무리 진짜라고 말해도 너는 믿을 생각이 없구나. 내가 그토록 믿어달라고 말해도 말야."

    운현의 진지한 말에 바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제트의 얼굴은 슬픔과 공포로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이미 폭주해버린 마차다. 그것을 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한 바제트는 운현의 손을 더더욱 강하게 잡으며 외쳤다.

    "말해줘!!"

    "알아서 뭐하게."

    "내가... 널 도울 수 있잖아. 운현... 왜 숨기는거야? 도대체 왜?"

    "내가 뭘 숨긴다고 생각하는건데? 난 오히려 네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바제트."

    "네 강함.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능력. 그런데도 우리들과 함께 하는 이유. 네가 우리들을 이용하려는 것이라면... 그래도 괜찮아."

    "아니 그런게 아니라니까..."

    쓴웃음을 지으며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그런 반응에 바제트는 입을 꾹 다문 채 운현을 바라보았다.

    "정말 끝까지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야?"

    "뭘 원하는건데? 아니... 그보다 나도 궁금한게 있어. 왜 그런 생각을 하는거지? 난 너희들을 이용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어. 그리고 너희들을 사랑해. 그게 뭐가 나쁜 건데? 네 말대로 너희들도 날 사랑하고, 나 역시도 너희들을 사랑해. 그러면 된 것 아니야?"

    "...그래.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도대체 뭐가!"

    "우리가... 내가 널 사랑하는 이유."

    "...뭐?"

    바제트의 말에 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반응에 바제트는 고개를 끄덕인 후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왜... 내가 널 사랑할까?"

    "그건... 내가 능력이 많아서..."

    "운현. 넌 다른 대부분의 남자들과 달라. 하지만 그건 대부분이지 절대는 아니야.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엘프와 다른 종족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 중에는 너보다 잘생긴 사람도 많았고 너보다 능력이 있는 남자들도 많았어. 나에게 접근한 자들도 있었지."

    "...그래서? 너 인기 많았다고 자랑하는거야? 어휴~ 잘나셨어~"

    바제트의 진지한 분위기에 운현은 애써 웃으며 농담을 걸었다. 하지만 바제트는 그 농담을 받아주는 대신 천천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하지만 그들을 아무리 만나도 난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어. 너와는 달라. 너의 한마디, 너의 손짓 한번. 너의 웃음 한번에 내 마음은 미친듯이 요동쳐. 너와 함께 하게 되고나서 난 매일이 행복했고, 매일이 충실해."

    "그건... 고마워... 라고 말해야 하나?"

    "...왜 그럴까?"

    "그냥 반한 거겠지! 뭐가 그렇게 복잡한건데!?"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만한 것이 아니라니까. 운현. 난 엘프야. 다른 사람들과 달라."

    "엘프가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잘났다는게 아니야. 운현. 나에게는 천년이라는 수명이 보장되어 있어. 엘프들은 인간이나 다른 종족들에 비해서 긴 수명을 가지고 있다고.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무슨 뜻인데?"

    "수명이 다른 종족에게 반하고 그를 사랑하는 것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고."

    "........"

    "그런 내가 널 사랑하게 되었어. 운현. 넌 인간이지."

    "그래."

    "고작해야 백년의 삶을 사는 인간과 천년의 삶을 사는 엘프. 너라면 그 결말이 어떨지 모르지는 않을거야. 그런데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

    "...그건... 그건."

    "어쩌면 운명일 수도 있겠지. 내가 널 만나게 된 것. 내가 너와 함께 하게 된 것. 그리고... 내가 널 사랑하게 된 것."

    바제트의 말에 운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말대로다. 지금의 바제트는 모르고 있지만 바제트의 운명은 바로 자신과 이어져 있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바제트와 운명으로 이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운명을 바꿔야 한다. 바제트의 말 한마디에 운현은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결국 이 빌어먹을 운명이라는 놈이 또 내 발목을 잡는군.'

    도대체 이 운명은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인가. 이세계의 존재인 자신. 현재의 세계가 가진 운명에 존재할 수 없는 자신. 그리고 그 자신과 이어져 있는 바제트.

    운현은 나지막한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운명이니 뭐니, 그런 알 수 없는 얘기들은 제쳐두자고. 바제트. 난 그런 복잡한 것은 잘 몰라. 하지만 한가지 알고 있는 것은 나는 널 사랑한다는 거야."

    "...후후..."

    눈물을 흘리며 멍하니 운현을 바라보던 바제트는 그의 진지한 말에 빙긋 웃어버렸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쁜 듯 웃어버린 바제트는 살며시 눈물을 닦은 후 그의 품에 안겼다.

    "그래... 그게 문제지. 나 역시도 널 사랑한다는 것.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을 정도로 널 사랑한다는 거. 그게 가장 큰 문제야."

    "...그거면 되는 것 아니야? 바제트. 모든 것을 알아야 할 이유는 없어. 오히려 모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굳이 알 필요 없어. 내가. 내가 할게. 내가 모든 것을..."

    "그 과정에서 네가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바라만 봐야 하는 나는? 우리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바제트는 운현을 끌어안은 채 말했다. 그녀의 몸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운현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말해야 한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서로의 가려진 상처만을 핥는다는 것은 결국 파국을 만들어 낼거야. 운현. 난 어떤 것이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어. 네가 날, 우리를 이용하려고 한다 해도...!"

    "아니야!!"

    그것만큼은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을 이용하고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너희들만은 지키겠다. 그 어떤 것이라고 하더라도 너희들의 행복은 지켜낼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에게 있어서 그녀들을 이용한다는 것만큼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너희들을 이용한다고? 너희들을 희생시킨다고? 그건..."

    "그럼 말해줘."

    "...너 정말."

    "말해줘... 말하지 않으면 몰라. 운현."

    살며시 손을 들어 운현의 딱딱히 굳어 있는 얼굴을 쓰다듬은 바제트는 그의 입술에 키스한 후 차분히 말했다.

    "널 믿어달라고 했지?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날 믿어줘. 우리를 믿어줘."

    바제트의 말에 운현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는 말해줬어야 할 일이었다. 다만 그것은 지금이 아니다. 최소한 그녀들이 자신들의 몸을 어느정도는 지킬 수 있는 상황이 될때까지는 숨겨야 할 비밀이었다.

    "정말 궁금해?"

    "응."

    "그걸 알게 됨으로써 너희들은 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아니, 오히려 상처받을 수 있겠지."

    "그래도 알고 싶어."

    "빌어먹을."

    바제트의 맑은 눈을 응시한 운현은 결국 욕지기를 내뱉어버렸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는 건가? 운현은 바제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피스나의 캡슐을 이용해서 바제트의 기억을 날려버리면 된다. 기절을 시키고 이런 상황이 생겼다는 것을 지워버리면 되는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바제트에게 고통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어떤가.

    원래 자신의 방식대로라면 이런 것은....

    '그것만큼은 안돼.'

    떠오른 생각을 빠르게 지웠다. 그래서야 본말전도다. 지키기 위한 존재다. 아끼기 위한 존재이고 행복하게 만들 존재다.

    캡슐을 사용해서 가상현실의 세계로 보내는 것이 아닌, 기억을 조작하는 것은 큰 위험과 부담이 있는 일이었다.

    "외통수인가... 하아."

    "후후후..."

    "나중에 말해주면 안될까?"

    "안돼."

    "왜 그걸 꼭 들어야 하는데?"

    "네가 나에게 숨기고 있는 것. 그것을 알아야만 너를 지킬 수 있어."

    "웃기지마. 그딴 생각 절대 하지마. 날 지킨다고? 네가? 그따위 소리는 집어 치워."

    과거를 떠올렸다. 미야도, 바제트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잃었다.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바제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고통을 또다시 겪는 것만큼은 사양이다. 운현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자 바제트는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뭔가... 있구나."

    "......."

    "부탁이야. 말해줘."

    "...그건."

    "널 볼때마다 항상 생각했어. 운현. 네가 우리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동료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어. 연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아니었고."

    "......"

    "네 눈은 부모님의 눈이었어. 오로지 지켜야 할 존재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고. 그건 싫어. 너와 대등하고 싶어. 네가 우리를 지키는 만큼 나 역시, 우리 역시 널 지키고 싶어. 그러니까 말해줘. 숨기고 있는게 뭐야."

    바제트의 말에 운현은 또다시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방법은 없다.

    "내가 모든 것을 말해도..."

    "......."

    "내 말을 따라줄거야? 날 믿고 움직여 줄거야?"

    "말했잖아."

    운현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바제트는 부드럽게 웃으며 운현의 입술에 키스했다. 이번에는 아까와 다르게 짧은 키스가 아니다. 진하디 진한, 타액과 타액을 교환하는 키스였다. 달콤한 입맞춤을 마친 바제트는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며 운현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네가 어떤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난 널 사랑할거야."

    392====================

    레벨업

    "........"

    "........"

    운현도, 바제트도. 둘 모두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운현이 무언가를 자신들에게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이야기일 줄이야.

    "...하아."

    "이제 속이 시원해?"

    회귀, 운명, 이계. 그리고 신. 자신에게 있었던 일 대부분을 바제트에게 말해 준 운현이 차분한 어조로 말하자 그녀는 운현의 다리 위에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런 이야기였을 줄이야."

    "그러게 듣지 말라고 했잖아."

    "아니... 차라리 나아. 운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바제트는 손을 들어 운현의 볼을 쓰다듬었다. 과거, 아니 과거라고 할 수 있을까? 운현의 삶 속에서 자신이 그런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바제트는 두려움이나 거부감따위는 느끼지 못한 듯 했다.

    "정말 고생 많았구나..."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 역경과 고난을 겪었을 줄이야.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을 줄이야. 바제트는 운현에 대한 안쓰러움과 그토록 고생을 하면서도 자신들을 포기하지 않아 준 운현에 대한 고마움을 동시에 느꼈다.

    "정말... 힘들었겠구나."

    "별로 힘들지는 않았어."

    "거짓말."

    볼을 쓰다듬던 손으로 살짝 꼬집었다. 떨리고 있는 손길을 느끼며 운현은 바제트를 끌어안았다. 순순히 그에게 안긴 바제트는 운현의 머리를 사랑스럽다는 듯 안아주며 속삭였다.

    "고마워."

    "두렵지 않아?"

    "뭐가?"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 엘프인 너의 입장에서 본다면 네 삶의 오분의 일도 제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막기 위해서 네가 이토록 노력하고 있는 거잖아."

    빙긋 웃은 바제트는 운현의 이마에 키스했다.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남자다. 그를 바라보며 바제트는 살며시 속삭였다.

    "정말 고마워."

    "날 위해서기도 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고마움을 느끼지 못할 이유는 아니지."

    "아니 그건..."

    "운현."

    "응."

    "이제 그만..."

    "웃기지마."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는 바제트를 정면에서 부정했다. 포기하라고? 그만하라고? 이제 거의 다 왔다. 이제와서 포기할 이유는 없었다.

    "........"

    "포기할 생각 없어. 너희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진창에서 구를 수 있고 얼마든지 똥통에 빠질 수 있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네가 너무..."

    "내 생각은 하지 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내가 말해주길 바랬지? 내가 너희들을 믿어주길 바랬지? 나 역시 같아. 날 위해서 내 뜻을 따라줘. 네가 그것을 거절한다면 나는..."

    "운현..."

    운명을 바꾸는 것. 그 과정에서 운현이 얼마나 고생하고 괴로울지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바제트는 운현이 포기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것을 쉽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를 방해할 수도 없었다.

    살고 싶어서? 물론 그런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한 이유는 바로 운현 때문이었다.

    '운현의 고생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기억 속에 없는 운현이, 그리고 기억 속에 있는 운현이 얼마나 가시밭길을 걸어왔는지 들은 이상 바제트로서는 아무렇지 않게 포기하라 말할 수 없었다. 지금의 운현에게 있어서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 뿐 이었다. 그것을 부정했다간 운현이 운현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아무것도 모른 척 조용히 있어줘."

    "하지만."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후우... 운현. 이게 전부야? 네가 지금까지 했던 일들... 이게 네 전부라는 거지?"

    "대충은."

    "...그 말은 또 숨기는게 있다는 거네?"

    "숨긴다기 보다는 시간관계상 다 말하지 못한거지. 나중에 때가 되면 전부 말해줄게."

    그녀들을 구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이 희생되는 것까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고생과 희생만 알면 된다. 그리 생각한 운현은 바제트의 가는 눈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 치부까지 말해주기는 곤란해서 말이지. 부끄럽다고."

    "후우... 알았어."

    더 이상 추궁하기는 힘들었다. 바제트는 운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한번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정말이지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남자다. 어쩜 이럴까. 이 세계의 다른 남자들과 비교해서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너에게 반한 것도 이런 것 때문일까?"

    "뭐가?"

    "운명... 뭐 그런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너의 강철같은 의지... 이 세계의 사람들이라면, 아니. 그 어떤 이라고 하더라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그 의지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된걸까?"

    "글쎄. 뭐 내가 잘난 덕분이지 않겠어?"

    "후후... 정말이지 못말린다니까."

    다시 한번 키스를 한 바제트는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닿아 있는 딱딱함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운현이 자신의 몸에 흥분을 한다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내가 그렇게 좋았어?"

    "아니라고는 못하겠네."

    "어휴... 귀여워라."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물론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있지만 어쨌든 좋게 본다면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만큼 사랑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이 좋은 일인지 모른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운현이 엄청난 고통을 겪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심은 기분이 좋았다.

    "후후후..."

    "뭐냐? 그 웃음은?"

    퉁명스러운 운현의 말투. 지금까지 운현이 보였던 상냥함은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바제트는 기분이 더욱 좋았다.

    "아니 뭐랄까... 이제야 진짜 너를 보게 된 것 같아서."

    "흠..."

    "자자.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이 바제트님이 키스해줄테니까 그런 표정은 그만 지으라고."

    뚱한 운현의 얼굴에 연신 키스를 날리며 바제트는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그런 반응에 운현은 한숨을 폭 내쉬고 그녀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짧은 버드 키스, 그리고 입술에 닿은 순간 설육이 오가는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아음...쯥... 후후..."

    "왜 그렇게 웃어?"

    "후후후후..."

    "아니.."

    "우헤헤헤.."

    "야야."

    "자아. 자아. 이제부터 이 누나가 널 즐겁게 해주겠어용."

    "넌 다 들어놓고 누나라고 하는거냐...?"

    아무리 백년을 넘게 살았다고는 하지만 운현이 겪어 온 시간을 따지면 정신적인 나이는 운현이 더 많았다. 그렇지만 바제트는 그것을 무시한 채 여유롭게 운현의 바지를 벗겨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딱딱해져놓고 불만은... 아흠."

    "웃..."

    다짜고짜 남성을 물어버린 바제트는 자신의 긴 머리를 살짝 귀 뒤로 넘기며 쪽쪽 그것을 핥기 시작했다. 애정과 사랑이 담겨 있는 애무다. 길고 하얀, 섬세한 손가락으로 양물을 쓰다듬으며 두개의 알을 자극하던 바제트는 운현이 움찔거리기 시작하자 귀엽다는 듯 빙긋 웃었다.

    "쪼옥...쪽...추릅... 후후... 좋아?"

    "응."

    "솔직해서 좋네. 얼마나 좋아? 처음부터 이랬으면... 하음. 으읍..."

    "시끄러워."

    궁시렁거리며 운현이 자신의 머리를 잡자 바제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생긋 눈웃음치고 다시 그의 양물을 핥는데 집중했다. 한참동안이나 운현의 두꺼운 양물을 애무하던 그녀는 입 안에 있던 남성이 순간적으로 단단해지자 손에 쥐고 있던 구슬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큭...!"

    "꺄악...하음... 꿀꺽."

    성대하게 뿜어진 진한 정액. 그것이 입 안을 가득 메우자 모두 마시지 못한 바제트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입에서 떼어내고 말았다. 반쯤 남아 있던 정액이 얼굴을 더럽히자 바제트는 입 안에 있는 질척거리는 정액을 모두 삼킨 후 베시시 웃었다.

    "후후후... 좋았나보네. 이만큼이나 싼 걸 보니까."

    "너 얼굴에 있는거나 닦아라."

    "아까운걸... 냠."

    진한 정액을 손가락으로 핥아 쪽쪽 빨아마신 바제트는 달아오른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살며시 운현을 밀어 바닥에 눕힌 바제트는 천천히 자신의 바지를 벗었다.

    "다 안벗어?"

    "음... 그냥 여기만."

    "괜찮아. 작은 건 취향으로 퉁 칠 수 있으니까."

    "...그,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거든!?"

    전에도 자신의 작은 가슴에 부끄러워하던 것을 떠올린 운현이 장난스레 말하자 바제트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빽 소리쳤다. 그리고 그 순간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이것도... 전에 있었던 일이야."

    "음... 뭐랄까."

    "...에잇!"

    운현이 말을 잇지 못하자 바제트는 운현의 남성을 잡고 자신의 계곡에 가져다 대었다. 슬슬 비벼대며 자극하던 그녀는 단번에 자신의 안에 운현의 양물을 넣었다.

    "하으... 배 안이 가득..."

    "괜찮아?"

    "이. 이정도는..."

    "처음치고는 제법이네..."

    "후...후후후.... 네가 생각하는 것 처럼 난 약하지 않다고."

    파과의 고통에 눈물을 찔끔거리면서도 바제트는 애써 웃었다. 아름다운 눈매에 글썽거리는 눈물을 손을 뻗어 닦아 준 운현은 바제트를 살며시 잡아 당겼다. 그의 위에 안기며 바제트는 운현의 입술에 키스했다.

    "으음...쪽..."

    "괜찮아? 무리하지 말라고."

    "괜찮아. 그... 이제 움직여 줄..."

    "워. 아니. 내가 할거야."

    "엣!?"

    "이미 다 알게 되었는데 굳이 숨길 필요는 없겠지. 말했잖아. 난 이 세상의 남자가 아니라고."

    기본적으로 이 세계는 여성 주도의 여성 상위 체위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 세계의 일이고 이계인인 운현에게 있어서는 남성의 정상위가 보편적이다. 살며시 바제트를 바닥에 눕히고 그녀의 긴 다리를 잡아 쭉 올린 운현은 바제트의 얼굴에 당황과 부끄러움이 떠오르자 빙긋 웃었다.

    "이런 자세는 싫어?"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이건 변태들이나 하는... 나, 난 당하는 취미는 없다구."

    "그래? 그럼 이제부터 가져야겠네."

    '바꿔 말하면 이게 여성 상위라고 보면 되는 건가. 흠. 뭐 나쁘지 않네.'

    남녀 역전의 세계와 비슷한 세계관인만큼 성관계시의 체위도 이런 구분이 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살며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 흐읏... 으응!"

    음부에 꽂아져 있는 양물이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쾌감에 바제트는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빼물어진 혀를 핥으며 바제트의 긴 귀를 만지작거리던 운현이 손을 움직여 가슴에 가져가려 하자 바제트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아... 가슴은 싫으시다?"

    "...응."

    "싫다면..."

    "꺅!?"

    "더 하고 싶은게 나지."

    "저, 정마알!! 뭐야. 지금까지는 연기였단 말야?"

    "응. 연기였어. 원래 내 성격은 이래."

    능글맞게 웃으며 운현은 바제트의 옷을 걷어 올렸다. 평평하다. 정말 탄탄한 하얀 가슴과 분홍빛 유륜. 유두를 본 운현은 바제트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부끄러워하자 키득거렸다.

    "못됐어..."

    "나 좋은 놈 아니라니까."

    "진짜 못됐... 하으응!!"

    앙증맞은 갈비뼈를 핥으며 운현은 바제트의 납작한 가슴 주변을 핥았다. 그것에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바제트는 운현의 머리를 꽉 잡았다. 떼려는 것보다는 오히려 당기는. 좀 더 해달라는 듯한 그 행위에 운현은 웃으며 오똑히 솟은 유두를 살짝 손가락으로 꼬집었다.

    "읏! 으응! 하으응! 거긴...!!"

    "내 세계에서는 자주 만져주면 가슴이 커진다는 이야기가 있지. 내가 크게 만들어줄게."

    "으으으... 정말?"

    "응."

    "지, 진짜 커지는거... 맞지?"

    기대감을 품은 눈으로 바제트가 조심스레 묻자 운현은 피식 웃었다. 사실 속설에 불과하지만 굳이 이런 것까지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빈유도 스테이터스라고."

    "으으... 그래도 네가 좋아하니까... 다행이다."

    "별 말씀을."

    씩 웃으며 운현은 다시 가슴을 애무하는데 집중했다. 오독한 유두를 잘근거리고 다른 쪽 유두도 손가락으로 자극한다. 타액으로 범벅이 된 핑크빛 유륜이 달빛에 반짝거리는 것을 보며 운현은 허리를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으... 대, 대단해...으으으... 운현... 키스...키스해줘엉..."

    "자아."

    "쪼롭...쭉...핥짝. 춥.."

    고작해야 첫경험에 불과한 바제트가 운현이 전력을 다하는 테크닉에 버텨낼리는 만무했다. 바들바들 몸에 떨며 쾌락의 파도에 몸을 맡긴 바제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손을 뻗어 운현을 꽉 끌어 안았다.

    "하으...! 가, 간다!! 흐아앙! 이상해애애!!"

    "참지 마."

    "으아아아아아아!!"

    머리를 흔들며 바제트는 더더욱 강하게 그를 끌어 안았다. 안쪽에 차오르고 있던 감각에 터질 것만 같다. 바제트는 부들부들 떨다가 축 늘어졌고 그 순간 운현은 그녀의 계곡 안쪽이 자신의 양물을 꽉 무는 것을 느꼈다.

    "읏...!"

    녹을 정도로 뜨거워진 계곡 안쪽에 운현 역시 사정감을 참지 않았다. 허리 끝의 뻐근함을 그대로 풀어낸 운현은 바제트의 몸이 움찔거리자 그녀를 끌어안으며 이마에 입맞춰주었다.

    "좋았어?"

    "하아...하아..."

    "아직 안끝났으니까 한번 더 하자."

    "에...? 아흑....!!"

    393====================

    레벨업

    "일단은 이거 비밀로 해줘."

    "...하아... 응."

    결국 세번이나 운현과 하고 나서 녹초가 되어버린 바제트는 그가 자신을 씻겨줄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 씻고 나서 그의 품 안에 안긴 채 차를 홀짝이던 그녀는 그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말하면 모두 혼란스러워할테니까."

    "그렇겠지... 그리고. 헤헤..."

    "왜?"

    "음... 아니 뭐랄까. 너랑 둘만의 비밀을 공유했다는 생각에 기뻐서..."

    살짝 운현의 목에 키스한 바제트는 발그레한 얼굴로 속삭였다. 가장 늦게 파티에 합류한 자신이다. 거기에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길드에서 파티 브레이커라는 이명으로 경원시 당하던 자신인데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니.

    "운현. 그..."

    "알았어. 그 때가 되면 모두에게 말할게."

    "응..."

    부드럽게 웃으며 바제트는 운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긴장이 풀린데다가 운현과 한차례 하고 났더니 피곤한 모양이다. 많은 일이 있었던 것 때문에 바제트가 피곤해하자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졸리면 들어가서 자."

    "그치만 불침번은..."

    "아까 말했잖아."

    쓴웃음을 지으며 운현은 바제트의 하얀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회귀를 하고 가짜 신의 힘을 손에 넣은 운현이다. 450레벨의 검사 따위는 우습게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운현이 몇시간 자지 않는다 하여 큰 무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바제트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운현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네 옆에 있고 싶어."

    "그런 것이라면 어쩔 수 없지."

    자신의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드는 바제트를 향해 운현은 피식 웃었다. 나이 때문에 파티의 맏언니 역할을 하는 터라 이런 애교를 부린 적이 없었지만 운현이 자신에 대한 것을 알리고 나자 바제트는 은근슬쩍 그에게 애교를 부렸다.

    "나보다 더 오래살았으면서."

    "헤헹~ 그치만 운현이 겪은 시간을 생각한다면 내가 더 어린걸?"

    "아까는 누나라더니. 참나."

    "후후후~"

    운현의 투덜거림에 바제트는 싱글거리다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곧 이어지는 작은 숨소리에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주었다.

    '그래도 이정도로 끝나서 다행이군.'

    최악의 경우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운현은 품 안에서 새근거리고 있는 바제트를 내려다보며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바제트가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떠나려고 한다면 운현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바제트를 가둬두거나 기억을 지워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군."

    "운현! 왜 안깨운거야?"

    "깨웠는데 안일어났잖아."

    "그, 그랬어?"

    아침이 되자 미야와 헤스티아는 운현에게 당황하며 외쳤고 그녀들을 향해 운현은 느긋하게 답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깨우지 않았다. 완전히 잠들어버린 바제트를 텐트 안에 넣어주고나서 운현은 혼자서 밤을 새웠다.

    '앞으로의 일도 생각해야 하고...'

    생각보다 빨리 바제트에게 알리게 되었지만 그것이 계획에 큰 문제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지. 약간의 불안감을 안은 채 계획을 진행해야 되는 것이기에 운현은 혼자서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미안..."

    "아니. 뭐 괜찮아. 그보다 아침 식사를 해야지? 간단하게 준비했으니까 어서 먹자."

    "아침 준비까지 했어요!?"

    "응."

    부드럽게 웃으며 운현은 테이블을 가리켰다. 먹음직스러운 팬케이크가 채워져 있는 접시, 따뜻한 스프가 가득 담긴 그릇까지. 그가 불침번을 서며 아침 준비까지 했다는 것에 미야와 헤스티아는 미안해 어쩔 줄 몰라했다.

    "그만큼 오늘 더 고생을 해야 하니까 신경 쓰지 마. 자. 먹자고."

    "으하아암..."

    "바제트. 제니스씨를 깨워줘."

    "일어났어요."

    "아. 그래요?"

    제니스가 걸어나오자 운현은 모두를 테이블에 앉혔다. 던전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던 여인들에 비해 제니스는 묵묵히 운현이 구워 놓은 팬케이크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자신의 몫을 다 먹은 제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운현은 그녀에게 차분히 물었다.

    "어제 얼마나 모으셨나요?"

    "음... 마석을 대충 이백개 가량 모았습니다."

    "그런가요."

    "하루만에 이백개... 대단하네요."

    "아니... 내 레벨 정도 되면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오늘은 어떻게 하실 예정인가요?"

    "어제와 같이 해주세요. 베이스캠프는 여기이니까 저녁때가 되면 만나도록 하지요. 자. 여기 있어요. 오늘 점심은 이걸로 해결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에 뵙도록 하죠."

    운현이 건네 준 주머니를 받은 제니스는 곧장 캠프 밖으로 이동했다.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여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아뇨... 저희들도 빨리 강해지고 싶어서요."

    "응. 제니스씨 정도는 아니더라도 말이지."

    "운현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으니까."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다. 바제트를 향해 피식 웃어 준 운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그럼 좀 더 열심히 싸워야겠지? 자. 어서 준비하고 우리도 이동하자."

    사흘간의 던전행을 통해 운현 일행은 평균 160까지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사흘만에 60레벨. 과할 정도로 빠른 속도다. 다른 이들이 봤다면 기겁을 할 정도의 성장 속도이지만 운현은 생각보다 레벨업이 느리다는 것에 초조함을 느꼈다.

    '이런 속도로는...'

    "왜 그런 표정이야?"

    "아니야. 아무것도."

    "사흘만에 육십이나 올리다니... 이거 기록 아니에요?"

    "으음... 운현씨가 같이 하니 뭐."

    "그보다 제니스씨. 왜 운현에게는 존댓말을 쓰시는 거에요?"

    "전에 말하지 않았나? 업무적으로 관계되어 있어서 그런거야."

    제니스와 헤스티아, 미야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운현은 제니스가 모아 온 마석들을 살폈다. 대부분이 2계층의 마석이지만 개중에는 운현이 섞어 놓은 3계층과 4계층의 마석이 있었다. 이것을 이용한다면 길드로 돌아갔을 때 200레벨까지 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우리 많아 벌었죠?"

    "그걸로 운현 갑옷 바꿔."

    "아니. 이걸로는 레벨업을 할거야. 갑옷은 이거면 괜찮아. 그보다 슬슬 너희들의 장비를 바꿔야겠다."

    "에!?"

    "하지만...!"

    이번에 열심히 전투를 한 이유가 운현에게도 좋은 장비를 맞춰주고 싶었던 것이었기에 헤스티아와 미야는 그의 말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나이트 호크 세트 갑옷은 좋은 갑옷이야.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운현씨를 압박하지 마렴."

    "그래도...!"

    "다음 던전때는 고급 언데드들을 잡아야 하는데... 운현의 장비가 저래서야."

    "자자. 너무 그러지 말자고. 운현도 다 생각이 있을테니까."

    사정을 알고 있는 바제트는 미야와 헤스티아를 달래며 힐끔 운현을 보고 살짝 윙크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바제트에게 알려 준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준 운현은 길드로 향하는 마법문에 발걸음을 옮겼다.

    "난 잠깐 볼 일이 있어. 다들 모험자 카드 줘. 내가 정산할테니까 씻고 방에서 쉬어."

    "괜찮겠어요? 오빠도 피곤한 것 아니에요?"

    "난 괜찮아. 오늘도 전투를 하느라 무리했잖아? 피곤할테니까 내 걱정은 하지마."

    빙긋 웃으며 운현이 손을 내밀자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모험자 카드를 건네주었다. 제니스에게 받은 마석과 자신들이 전투를 하며 치룬 마석까지 모두 정산하여 레벨업을 하고 자신들의 장비를 살 것이 뻔했지만 운현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들이 숙소로 올라가자 운현은 제니스를 힐끔 보며 조용히 말했다.

    "제니스씨가 레벨업을 시켜주세요."

    "하아. 알겠습니다."

    사흘간 던전에 다닌 것만으로 60레벨을 올렸다는 것이 알려지면 또 소란이 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번과는 다르다. 일단 제니스라는 든든한 지원이 있는데다가 운현 일행이 1계층의 계층주 토벌전에서 상당한 활약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레벨업에 시비를 걸 만한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거기에 아라크네 클랜도 여기 있으니...'

    자신의 노예가 되어 있는 아라크네가 1계층의 회관에서 클랜의 간부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힐끔 본 운현은 제니스와 함께 사무소로 향했다.

    "어? 운현!"

    사무소에서 서무를 보고 있던 필레는 운현이 다가오자 밝게 웃었다. 주변이 환해질 정도로 밝은 그녀의 웃음에 근처에 있던 길드원들과 모험가들은 기분나쁘다는 듯 휙 고개를 돌렸다.

    "던전에 갔다온거야? 정말 고생 많았어~"

    "하하하... 별 말씀을. 그보다 별 일 없었지?"

    "음... 딱히? 아. 이제 시장선거 시즌이 되었다는 정도?"

    "그래? 선거에는 누가 출마했어?"

    "다들 출마하게 되었어. 그래서 우리도 조금 바빠 질 것 같아..."

    시장선거를 치루게 되었기에 간부들도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비타가 죽은 후 아직 새로운 간부를 뽑지 않은데다가 운현의 지원으로 제니스나 펠리시아가 빠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생이 많네. 다음에 밥이라도 같이 먹자. 맛있는 거 사줄게."

    "헤헤헤~ 고마워."

    "필레."

    "아. 제니스씨!"

    "음... 잠깐 쉬지 그래? 운현씨와 차라도 한잔 하고 와."

    "에!? 정말? 괜찮아요?"

    "물론이지. 나도 해야 할 일이 있고 말야."

    "그럼 고마워요~ 운현. 조금만 기다려줘~ 금방 옷 갈아입고 올게~"

    운현에게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었던 필레는 황급히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 전에 레벨업을 마쳐야 한다. 운현이 모험자 카드와 마석이 담긴 주머니를 내밀자 제니스는 빠르게 마석을 정산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이게 뭔 소리야?"

    "또야?"

    사무소에서 들려 온 소리에 몇몇 모험자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작업을 계속한 제니스는 모험자 카드를 꺼내 운현에게 건네주었다.

    "축하드립니다. 193레벨을 달성하셨네요."

    "엑!?"

    "저 사람...! 운현 아니야!? 몇일 전에 계층주를 잡은 걸로 알고 있는데?"

    "사흘 전이야! 그럼 사흘만에 90레벨을 넘게 올린거야!?"

    "어떻게 한거야!?"

    "비법을 좀 가르쳐줘!"

    "하하하... 그건 좀."

    상아와 필레의 일로 유명해진 운현이다. 그가 사흘 전에 계층주 토벌에 다녀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몇몇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운현에게 다가가 비법을 물으려 하자 얌전히 앉아서 술을 마시던 아라크네는 술잔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쨍그랑!!"

    "엑?"

    "뭐, 뭐야?"

    단 한번에 사람들의 주의를 끈 아라크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운현에게 달라붙어 있는 모험자들을 가리켰다. 그녀의 서슬퍼런 기세에 움찔한 모험자들이 슬며시 고개를 돌리자 아라크네는 그녀들을 응시하며 싸늘히 말했다.

    "정보는 곧 힘이다!! 저 자가 어떻게 레벨업을 했는지 그것을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얻으려 한다면 이 아라크네가 용서하지 않겠어!"

    "그, 그러고보니 저번에 아라크네 클랜에서 운현을 데리고 갔었지."

    "끙... 확실히. 아라크네 클랜이 대가를 받고 정보를 얻었다면..."

    전에 운현이 레벨업을 한 것에 대해 아라크네 클랜이 그를 초청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별다른 말이 없어서 그냥 넘어갔나 싶었는데 지금 아라크네 클랜장의 말을 들어보면 모종의 계약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라크네 클랜장의 외침 이후 아라크네 클랜의 간부들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를 잡자 운현의 곁에 달라붙어 있던 초급 모험자들은 움찔하며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정당한 대가! 이 아라크네가 지불한 만큼의 대가가 수준으로 지불할 생각이 아니라면 운현에게 그런 것을 묻지 마라!"

    아무리 클랜들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아라크네 클랜은 모험가 길드에서도 유명한 대형 클랜이다. 길드의 운영 방침에 어느정도 의견을 피력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강력한 아라크네 클랜의 클랜장이 당당히 외쳤는데 초급 모험가들이 그것을 쉽게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자. 아라크네. 너무 화내지 말도록."

    그리고 그 사이를 중재하듯 제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며 차분히 말했다. 모험가들간의 다툼을 중재하는 것도 길드의 일이다. 그녀가 나서자 아라크네는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콧방귀를 뀐 후 자리에 앉았다.

    "쳇. 치사하긴."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아라크네 클랜에서 정보료를 지불했는데 우리가 그냥 꽁으로 얻으려 한다면..."

    "그래도 그렇지..."

    불만스럽기는 초급 모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이 흩어지자 운현은 힐끔 아라크네 클랜장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역시 쓸만하군.'

    394====================

    레벨업

    세뇌가 이루어진 아라크네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은 운현은 어느정도 분위기가 소강되자 제니스가 건네 준 모험자 카드를 받았다. 레벨에 200이 표시되어 있는 모험자 카드를 확인한 그는 비상시를 대비해 일단 인벤토리 안에 모험자 카드를 밀어 넣고 빈 테이블에 앉았다.

    "오래 기다렸지?"

    커피 한잔을 시켜놓은 후 한잔을 전부 다 비웠을 때 쯤 필레가 나왔다. 아까 전에 입고 있던 펑퍼짐한 평상복이 아닌 멋드러진 몸매를 드러내는 타이트한 복장이다. 하얀 민소매 블라우스와 청색의 바지. 갈색의 가방을 들고 엷은 화장까지 한 그녀가 걸어나오자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기다리는 건데 이정도면 빠른거지."

    "아이 참~"

    "으..."

    "짜증..."

    운현의 말과 그것을 듣고 좋아 어쩔 줄 몰라하는 필레를 보며 몇몇 모험가들과 길드원들은 속이 거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대부분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필레다.

    "그럼 나갈까?"

    "응!"

    한쪽 손을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필레의 손을 잡아 챈 운현은 그녀와 깍지를 끼고 빙긋 웃었다. 그의 가벼운 스킨쉽에 잠깐 놀란 필레였지만 그녀는 곧 밝게 웃으며 운현과 함께 나갔다.

    "으아아아!!"

    "부러워 죽겠네!"

    그리고 필레와 운현을 보며 짝 없는 모험가들은 절망의 오오라를 마구 뿜어내었다.

    "어디로 갈까?"

    "어디든 좋아~"

    "그럼 내가 아는 곳으로 가자. 멀리 가긴 좀 그러니까 근처로 가는게 좋겠지."

    "응!"

    그냥 물 떠다가 공원 벤치에서 마셔도 좋다고 할 기세다. 필레가 생글거리는 것을 힐끔 보며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그녀를 데리고 모험가 길드 근처의 작은 카페로 향했다.

    "요새 정말 바빠서 큰일이야."

    "일이 많아?"

    "그렇다기보다는... 음. 뭐랄까. 상아 길드장이..."

    "왜?"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사와 가게 앞의 테이블에서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상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이 귀여웠는지 부드럽게 미소지은 필레는 머뭇거리다가 손을 내밀었다.

    "저기 운현. 손 잡아도 괜찮아?"

    "물론이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운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은 필레는 기뻐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쓴웃음을 지어보인 운현이 입을 열기 전 필레는 차가운 커피를 한모금 마신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치유된다~"

    "그정도로 힘들어?"

    "시장 선거 기간인데... 지금 각 조직에서 전부 선거 후보로 등록했거든."

    "길드도?"

    "응. 그런데 상아 길드장이 요새 상태가 많이 안좋은가봐. 말을 해도 들은 둥 마는 둥 하고..."

    "그거 큰일이네."

    "그러게 말야. 거기다가 요새 던전 도시 내에 안좋은 일이 자꾸 발생하고 있거든."

    "안좋은 일?"

    고작 사흘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운현은 필레의 말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필레는 커피를 한모금 마신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문의 살인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있어. 운현. 너도 알지? 전에 길드 앞에 누군가가 살해당해 죽어 있었던 것."

    "응..."

    "던전 도시에 와 있는 다른 나라의 귀족이나 왕족들이 습격을 당했어."

    "허어... 뭐 왕위다툼같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닐까? 아니, 그보다 경호원들은 뭘 했데?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경호원 정도는 데리고 오잖아."

    운현의 질문에 필레는 동의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경호원은 있었지. 유명한 사람 중에는 레벨이 440이나 되는 강한 검사도 있었고. 그런데 죽었어."

    "...헤에. 그게 정말이야?"

    "아마 비타 씨를 살해한 자가 아닐까 싶어. 수법을 봐도 그렇고 그 강함을 봐도 그렇고 말야."

    필레의 말을 들으며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과거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누군가가 운명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라는 이야기였고 운현은 그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라닌, 그리고 천검자.'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운명을 바꿔야 할 정도라는 것은 그들의 죽음이 반드시 자신들의 일에 필요한 일일 것이기에 저질렀을 것이다. 천검자가 살인에 미친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그들만 특정해서 죽일 이유는 없었다.

    곰곰히 생각하던 운현은 부르르 몸을 떤 후 필레를 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무섭네."

    "걱정하지마. 넌 내가 반드시 지켜줄테니까."

    필레도 레벨이 400이 넘는 강자다. 운현이 두려워한다면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서라도 그를 지키겠다. 자신의 손 안에 있는 운현의 손을 꽉 잡으며 필레는 굳은 의지를 드러내었고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이거 안심이 되는데?"

    "헤헤~"

    "어머~ 운현씨 아닌가요?"

    "....."

    "누구...?"

    뒤쪽에서 들려 온 목소리에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한참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방핸가 싶어 필레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다. 긴 흑발이 아름다운 미녀다. 그녀의 등장에 필레가 무언가 말하려고 하자 운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 오래간만이네요."

    "후후훗~ 앞의 아가씨는 누군가요?"

    "제 애인입니다."

    "어머~ 그래요?"

    "애... 애인. 에헤헤~ 운혀언~"

    자신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아니 어떻게 보면 더욱 아름다운 여인을 앞에 두고도 운현은 자신을 애인이라 소개했다. 그것이 기뻤던 필레가 헤죽거리자 흑발의 미녀는 필레나 운현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의자를 끌고와 앉았다.

    "운현씨. 괜찮다면 잠깐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필레. 미안하지만 먼저 돌아가줄래? 예전 일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거든."

    "으음... 그래? 아쉽네."

    운현의 말에 필레는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빨리 운현과 헤어지게 되는 것이 아쉽지만 일을 하던 도중에 나온 것이라 시간을 많이 낼 수도 없었다.

    "그럼 운현. 이따가 봐."

    "응."

    힐끔 힐끔 흑발의 미녀를 견제하듯 쳐다보던 필레는 보란 듯이 운현의 볼에 키스한 후 후다닥 걸어갔다.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지금까지 얼굴에 그리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왜 왔냐. 라닌."

    "저 여자는 뭔가요?"

    "알아서 뭐하게."

    "레나를 안지 못하니까 다른 여자를 찾는 건가요? 아니면 속임수? 그것도 아니면..."

    "쟤는 신경 끄시지. 왜 왔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하지 그래. 요새 공사가 아주 다망하신 듯 한데 말야."

    흑발의 미녀. 라닌은 운현의 날선 분위기에 무섭다는 듯 과장스레 몸을 떨었다. 그런 그녀를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던 운현이 허리의 검에 손을 가져가려는 순간 라닌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우드를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그를 죽여주셨으면 합니다만."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걸 왜 지금? 나 바쁜데. 한달간 시간을 주기로 한 것 아니었나?"

    "물론 그렇긴 하죠. 하지만 굳이 한달을 기다릴 필요는 없지 않나요? 저희도 나름의 준비가 필요하니까... 그리고 그런 걸 떠나서 당신은 지금 제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 입장 아닌가요?"

    "헤... 너 지금 누구한테 그런 소릴 지껄이는거냐?"

    슬그머니 운현이 검집에서 검을 반쯤 뽑았다. 그가 자신의 한마디에 발끈한 것에 라니은 양 손을 들어 붕붕 저었다.

    "워워. 흥분하지 말아요."

    "......"

    "그래. 지금은 흥분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어느새 나타난 흑발의 여인이 자리에 앉았다. 두 손에 들려 있는 아이스 커피 중 하나를 라닌의 앞에 놓아 준 그녀가 자리에 앉자 운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천검자. 넌 요새 왜 사람들 죽이고 다니냐?"

    "필요한 일이니까."

    "일단은 한배를 탄 몸인데 이유나 좀 알자."

    "그건 당신이 상관할..."

    운현의 질문에 라닌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다음에 이어진 천검자의 말에 잘리고 말았다.

    "운명의 뒤틀림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봐요."

    짜증이 섞인 목소리다. 그것에 통쾌함을 느낀 운현이 이를 드러내자 천검자는 라닌을 응시하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누군가를 이용하려면 아무런 이유 없이 이용하지 마라."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 않나요?"

    "그렇지는 않지. 너와 일을 함께 하는 것은 나니까 말야. 그 말은 너와 나는 동등하다는 거다."

    "건방지게...!"

    라닌이 이를 드러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천검자는 가소롭다는 듯 그녀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커피를 홀짝였다. 자신 혼자만 이렇게 열을 내고 있다는 것에 씩씩거리던 라닌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 앉았다.

    "정말이지 못말릴 사람이네요~ 우후후. 제가 운현에게만 신경을 쓰는 것이 그렇게 질투났나요?"

    "가급적 나에게는 신경도 써주지 않는게 좋은데 말야."

    "흐응~ 뭐 좋아요. 그런데 당신. 왜 여기에 온 거죠?"

    "신성이 더 필요해."

    "그만큼 줬는데도요?"

    자신을 앞에두고 둘이 투닥거리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한시가 바쁜데 이런 곳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 운현은 검자루를 덜그럭거리며 싸늘히 말했다.

    "야야. 사람 앞에서 니들끼리 얘기할래? 확 다 쓸어버릴까?"

    "할 수 있겠어?"

    "못할 것 같냐?"

    천검자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짙어지고 운현의 손이 검자루를 잡는다. 금방이라도 서로를 공격할 기세를 보이는 둘을 보며 라닌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감싸쥐었다.

    "아아아... 진짜 둘 다 마음에 안들어."

    "피차일반이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야. 어차피 우리는 서로의 목적에 따라 만난 사이 아닌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뒷통수를 칠 수 있는 사인데 뭐 마음에 들 것 까지 있나."

    운현이나 천검자나 라닌이나. 서로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만약 운명을 바꾼다는 동일한 목적이 아니었다면 누가 먼저 공격해도 이상치 않을 사이였다.

    "그래서. 천검자. 당신은 신성이 모자르다는 거죠? 그러니까 왜 그렇게 많이 죽인거에요?"

    "어차피 운명의 뒤틀림이 강해지려면 죽지 않아야 할 자들이 죽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차피 써야 할 신성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구요."

    "내가 보기엔 쉽게 구하던 것 같은데. 그년에게서 갈취하면 되는 것 아닌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생각이에요?"

    "그건 네 사정이지."

    라닌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즐겁게 들으며 천검자는 커피를 단번에 들이 마신 후 느긋하게 말했다. 라닌이 고생하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운 듯한 천검자는 그녀가 자신의 생각대로 인상을 왕창 구기자 즐겁게 키득거렸다.

    "빠드드득...!!"

    "야야. 그렇게 이 갈다가 나중에 죽도 못먹겠다. 살살하라고."

    "당신은 닥쳐요."

    "하하. 이게 미쳤나. 누구한테 그따위 막말을 하고 있어."

    퉁명스레 운현에게 한마디 내뱉은 라닌이었지만 운현의 반응은 더 없이 싸늘했다. 결국 본전도 찾지 못한 라닌은 끙끙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요. 천검자. 따라와요. 신성을 보충해주죠."

    "야. 좋은 거 있으면 나눠먹자. 나도 좀 줘."

    "당신은 신성이 없어도 운명을 바꿀 수 있잖아요."

    "유비무환이라. 신성을 가지고 있으면 어딘가에는 써먹을 수 있겠지."

    "이미 반개의 신성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신성은 하나 이상 가질 수 없다는 것 몰라요?"

    "응. 그건 아는데 천검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더 가질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단 말이지.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더 가질 수 있다면 더 가져두는 것이 예의 아닐까? 날 이용하고 싶으면 대가를 지불하라고."

    "하... 진짜 이 미친 인간들이... 보자보자하니까...!!"

    "왜? 싫어? 불만이야? 그럼 한판 뜰까?"

    "그거 바라던 바군."

    결국 분을 참지 못한 라닌이 이를 갈며 손을 들어 올린 순간 운현과 천검자는 각자의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언제라도 둘을 공격할 수 있는 상태를 보이며 그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동안 결국 라닌이 먼저 백기를 들고 말았다.

    "제길!! 당신들 절대 곱게는 안죽일거야."

    "그런 건 기대도 안했네."

    "그럼 그냥 죽일 생각이었단 말야? 이야~ 우리 라닌. 착하네~"

    자신의 욕지기에 천검자와 운현이 서로 빈정거림으로 답한다. 분노와 굴욕감으로 얼굴을 붉히고 부들부들 떨던 그녀가 앞서 걸어가자 천검자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이번 기회에 잡는게 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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