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5/40)

방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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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자

"그 가게란 말이지..."

송어와 와인. 그리고 좋은 분위기로 유명한 레스토랑이다. 아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린 상아가 입술을 비틀었을때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두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아 그러니까 그걸 그렇게 하면 안되지! 그럼 너무 파르티 교단에 힘이 주어진다고."

"나쁠 것 없잖아요. 칼리오스. 그러지말고..."

"오오오! 오늘도 바쁜가보네!"

"엑..."

"...뭐야? 그 맥빠지는 소리는?"

"상아 길드장님... 어디갔다 온거에요? 오늘 저희랑 회의하기로 잊었어요? 빨리 들어와요."

"이야~ 이거 내가 미안하게 됐군."

"미안 한 줄 알면 좀 시간 약속 지키라고... 댁 기다리느라 오늘 일정 다 날렸잖아."

칼리오스의 쓴 소리에 상아는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것처럼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좋아. 내가 사과의 의미로 오늘 저녁을 사겠어. 어때?"

"뭐 사줄건데요?"

"난 생선 먹고 싶어. 요새 생선 요리에 꽂혔거든."

아둔과 칼리오스는 상아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아가 회의 시간에 늦거나 땡땡이 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그때마다 머쓱하니 웃거나 능글맞게 넘어가려 했는데 이번에는 자기가 직접 사과를 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우리 상아 길드장이 이렇게까지 하다니... 좀 감동적이네요. 제가 원래 눈물이 없는데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이제 정신 차리는 건가요?"

"그래. 그래. 나도 좀 잘보여야 하는 사람이 생겼거든. 타인의 모범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잘보여야 하는 사람? 혹시 그 운현이라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듣기로는 진짜 연인은 아니라면서요?"

펠리시아에게 들었던 운현의 이야기를 떠올린 아둔이 묻자 상아는 부끄러운 듯 살짝 볼을 붉혔다.

액면가와 비슷한, 순진한 사춘기의 소녀들이 보일법한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칼리오스와 아둔은 당황했다.

"으악!! 내눈! 아니 이 할망구가!? 미쳤나!? "

"나이 먹고 그러면 추태에요."

"에, 엘프한테 나이를 가지고 따져봐야 의미 없잖아!"

"예예. 어쩜 이렇게 양심이 없을까. 아둔. 파르티 교단에는 양심에 털난 사람 교육도 시켜줘?"

"그런 건 답도 없어요."

"너, 너희들... 진짜 이럴거야?"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여봤자 이미 길드 간부들은 상아의 볼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다. 그런 그녀가 순수한 얼굴로 볼을 붉혀봤자 닭살만 돋을 뿐 이었던 칼리오스와 아둔은 인상을 구기며 상아에게 외쳤다.

"그러니까 평소에 좀 잘하라구요! 필레 반만 닮으라구요!"

"필레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좀..."

"큭... 어, 어쨌든 내가 사과한다니까. 사과의 의미로 저녁 살테니까 가자고."

"흐음... 어쩔까요?"

"아니 뭐. 솔직히 경계를 하긴 해야겠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잖아. 어차피 저녁도 먹어야 하고 회의도 해야 하니까 가서 하자."

아둔은 고민하는 칼리오스를 향해 물었다. 마침 시간대도 슬슬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다. 그것을 상아가 사겠다고 했고 어차피 상아와 회의를 해야 할 안건도 있었기에 칼리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디서 사겠다는건데?"

"그게 말이지..."

"후우... 긴장하지 말자. 긴장하지 말자."

분수대 광장으로 가는 길은 이제 눈을 감고도 찾아 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레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 지 고민을 해야 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하으으..."

시간은 이제 5분 밖에 남지 않았다. 운현이 먼저 나와 있으면 어떡하지? 나오기는 더 일찍 나왔지만 거의 반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지라 필레는 익숙한 길까지 헤메가며 결국 이곳에 도착했다.

"으..."

긴장된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킨 필레는 약속한 장소인 분수대 광장으로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분수대 광장 북쪽에 있는 시계탑으로 향한 필레는 시계탑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검은색 셔츠, 갈색 바지. 검은색 신발. 노을을 받으며 서 있는 남자의 얼굴에 드러나 있는 부드러운 미소. 다듬지 않은 듯 약간 거칠어보이는 수염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남자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푸른색의 정리되지 않은 긴 머리를 가볍게 쓸어만져 올린 그. 한 손에 들려 있는 붉은색 장미 꽃다발.

발끝으로 땅을 톡톡 때리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운현을 발견한 순간 필레는 느끼고 말았다.

"......."

저 사람이야 말로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어라? 필레 아냐?"

"어!? 위, 윈드!?"

"이야~ 오늘 무슨 좋은 일 있나봐? 되게 깔끔하게 입고 나왔네. 음음. 아주 보기 좋아. 평소에도 이렇게 입고 다니지 그래?"

필레가 잘 차려 입은 것을 보며 윈드는 감탄했다. 평소에 싸구려 옷만 입고 다니던 필레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제대로 차려입은데다가 엷은 화장까지 했다.

그것에 감탄하며 윈드가 씨익 웃자 필레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이를 어쩌지...?'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자들과 인연이 무척이나 없는 윈드였다. 그런 윈드가 자신이 남자를, 그것도 저렇게나 멋진데다가 자신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꽃다발까지 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나올까.

'큰일났네...'

윈드의 성격상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나, 혹은 운현에게 투덜거리며 자기에게도 남자를 소개시켜달라고 징징댈것이 분명했다.

'그냥 나한테만 하는 거면 상관없는데 운현씨에게까지 저럴테니까...'

"응? 왜? 내 얼굴에 뭐 뭍었어?"

필레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윈드는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보았다. 예쁘지만 업무가 없는 지금은 긴장이 풀려 약간은 나사가 빠져보이는, 어딘지 푼수떼기 같기에 오히려 매력적인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흝어보던 윈드를 향해 필레는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저기 윈드..."

"아! 필레씨!"

"......."

윈드를 일단 다른 곳으로 보내려던 필레는 자신을 부르는 밝은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어? 어... 어."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은 윈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와 다른 화장, 깔끔한 옷. 그리고 운현과 운현의 손에 들려 있는 꽃다발. 그것들을 번갈아 보던 윈드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필레... 너 설마? 아, 아니지?"

"...그게 말이지..."

"큭..."

"어라? 윈드씨 아닌가요?"

던전 도시에 들어 올때 만났던 윈드를 향해 운현은 웃으며 가볍게 목례했다. 그런 그와 필레를 말없이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던 윈드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추, 축하해."

'어라?'

과거에 윈드는 자신과 필레의 데이트 장면을 보고 열폭을 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윈드는 이상할 정도로 담담해보였다. 물론 충격을 받은 듯 했지만 열폭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에 운현은 오히려 놀랐다.

"윈드씨?"

"이, 이야아아~ 운현이라고 했었나요? 필레와 데이트를 하려나본데... 우리 필레가 참 좋은 여자에요. 잘 부탁드릴게요."

"아... 네."

"윈드?"

"크흠. 이렇게 된 거. 이번 기회에 나도 말해야겠네. 그... 필레."

"응."

"나 사실 좀 끌리는 사람이 생겼어. 그, 그리고 그 사람도 날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에엑!?"

윈드의 폭탄 발언에 필레는 기겁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자들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하는 윈드였다. 그런 윈드가 갑자기 남자가 생겼다? 아직 사귀거나 그런 단계는 아닌 듯 했지만 적어도 썸타는 정도까지는 간 것 같다는 그녀의 말에 필레가 당황하자 윈드는 멋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거렸다.

"헤헤... 그게 말이지. 사실 내게 주군이 생겼거든."

"주군? 그게 정말이야?"

"응."

"주군이라뇨? 윈드씨는 기사가 아니지 않나요?"

"아. 그게 어쩌다보니까 그렇게 되었어요."

윈드가 말하는 주군은 바로 자신이었다. 미믹맨의 복장을 한 자신이 윈디아를 공략하며 어쩌다보니 윈드까지 자신의 부하로 받아들였었다.

운현은 자신의 행동 중에 윈드를 꼬드긴 일이 있었나 되돌아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은 없었다.

'윈디아는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을텐데 왜 윈드가 이런 발언을 하는거지?'

"어쩌다보니라뇨?"

"하하하... 좀 그런게 있어요."

"그게 뭔데요?"

"후후후... 그건 비밀이랍니다. 어쨌든... 저도 그 분과 잘 될 것 같으니까. 필레. 축하해줄게."

"어, 으응. 고, 고마워."

"그럼 운현씨! 필레를 잘 부탁해요!"

"예...."

윈드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가버리자 필레와 운현은 멍청히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음. 그. 갈까요?"

"그... 그래요. 아 맞다. 필레씨. 이거요."

패닉 상태에서 빠져나온 필레가 떨떠름한 어조로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 들려있는 꽃다발을 건넸다.

자신이 윈드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감도 안잡히지만 지금 상황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윈드에게 잡혀 그녀에게 소개시켜줄만한 남자를 찾느니 차라리 이런 방식으로 그녀의 방해를 막는 것이 되려 운현에게 있어선 편하다.

"우와아... 예쁘다.. 이거 진짜 저한테 주시는 거에요?"

"네. 필레씨와 꼭 닮은 꽃이라서... 그리고 저희 첫 데이트잖아요? 기념할 겸 해서 산거에요."

상냥한 웃음과 함께 운현이 꽃을 건네자 필레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고... 고마워요. 운현씨. 전 아무것도 준비 못했는데. 어쩌죠?"

원래 이런 자리에서는 여성이 남성에게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긴장과 기대로 머리가 완전히 굳어 그것을 마련하지 못했던 필레가 시무룩히 말하자 운현은 빙그레 웃었다.

"그럼 오늘 저녁은 기대하고 있을게요."

"네? 아. 물론이죠!"

필레의 반응을 보니 오늘 저녁 식사를 기대한다고 들은 모양이다. 하지만 운현이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오늘 내로 필레와 이어져야겠어.'

라닌의 목적을 듣고 한달이라는 시간을 손에 넣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다른 여인들과 맺어진 후 그들의 협력을 얻어내야 했다.

'내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날 믿고 따르게 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어.'

몸과 마음을 녹여 자신을 믿게 만드는 수 밖에. 함께 전투를 하는 동료들이야 전투를 통해 신뢰를 얻어낼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상아나 필레에게서 단기간에 신뢰를 얻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가장 빠르고.

가장 쉽고.

가장 효율적으로.

자신의 생각도 모르고 순진하게 웃고 있는 필레를 보며 운현은 손을 내밀었다.

"왜요?"

"아. 손 잡고 갈까 해서요."

"그래요!!"

초장부터 진하게 나오는 것이 이상할만 하지만 그간 운현이 보인 모습을 보면 필레로서도 기대를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오늘 꽃. 그리고 그가 먼저 다가오는 것.

'어...어쩌지?'

만약 그가 자신을 원한다면? 아니 그걸 떠나서 키스라도 하려고 한다면? 그... 여자답게 먼저 그에게 하는게 좋지 않을까?

연애 소설에서는 여자들이 먼저 남자에게 다가간다. 그런 소설을 읽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던 필레는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괜찮....겠지?'

분명 운현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어보인다. 그가 지금까지 자신에게 한 행동들을 보면... 그치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냥하다. 그런 것을 따지면 괜히 다가갔다가 그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필레씨."

"네엣!?"

"긴장하셨나봐요?"

재밌다는 듯 히죽 웃은 그는 살짝 잡혀진 손을 들어올렸다. 눈에 보일 정도로 축축해진 손. 긴장으로 땀이 잔뜩 난 것에 필레는 붉게 얼굴을 붉혔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하하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손을 놓는다. 허전해진 손에 필레는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지만 운현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아...."

"그럼 갈까요?"

축축한 손을 전부 닦고 운현은 필레와 깍지까지 껴서 손을 잡고 힘을 주었다. 단단히 잡힌 손에 힘이 들어가자 필레는 침을 꼴깍 삼켰다.

"어디로 가야하나요??"

"제가 안내할게요!"

운현의 손을 잡고 간신히 걸어 목적지인 레스토랑 앞에 도착하자 필레는 그를 보며 말했다.

"여기에요!....운현씨?"

"아... 그런가요?"

"표정이 왜... 마음에 안드세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과거 필레와 데이트를 했을 때 저녁을 먹었던 식당이다. 그 전에 길드 근처의 식당에서는 상아가 난입을 했었지. 운현은 과거의 추억을 상기하며 씁쓸한 얼굴과 동시에 그리움에 가득한 웃음을 지었고 필레는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평소 그녀가 알고 있는 얼굴과 다른 모습에 필레는 위화감을 느꼈다. 운현과 자신의 나이는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순간만큼은 운현이 자신 이상의 경험과 삶을 살아 온 노인처럼 보였다.

'이건 그 사람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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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자

"혹시 운현씨."

"네."

"아... 일단 들어가죠."

식당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이상하다. 운현과 함께 안으로 들어간 필레는 예약된 자리로 이동한 후 빙긋 웃었다.

"풍경이 좋죠?"

"네. 아주 좋네요. 바람도 좋고..."

"실례하겠습니다. 와인은 어떤 것으로..."

과거의 추억에 잠겨있던 운현을 향해 웃어보인 필레는 와인을 주문하고 미안한 듯 작게 웃었다.

"운현씨. 잠깐만요. 헤헤헤..."

가방을 들고 필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가 자리를 비우자 운현은 슬쩍 가게 바깥으로 시선을 돌럈다.

"우와! 여기 비싼데 아니에요?"

"너무 무리하는것 같은데!?"

"괜찮아~ 괜찮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와 자신감이 담긴 목소리. 운현은 움찔하며 고개를 더욱 내밀었다.

"쟤는 또 어떻게 알고 여길..."

상아. 칼리오스. 그리고 아둔. 모험가 길드의 간부 셋이 가게로 들어오는 것을 본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

'장소는 다르지만... 그리고 인원도 다르지만 결국 이렇게 되는군.'

상아가 이곳까지 온 이유? 굳이 머리굴려가며 예상을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운현씨. 오래 기다리셨죠?"

화장을 고친 필레가 웃으며 자리에 앉자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헤헤... 왠지 이렇게 운현씨랑 이런 곳에 오고..."

"주문하신 와인 나왔습니다."

가게의 메이드가 와인과 와인잔을 들고 다가와 잔을 놓아주고 한잔씩 따라주었다. 그것을 받은 필레는 와인을 살짝 들어올렸다.

"이렇게 같이 와인을 마실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네..."

"이야~ 여기 좋네~!"

말을 하려던 필레가 딱딱히 굳었다.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쓰게 웃었다. 성큼성큼 걸어 와 운현과 필레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은 상아는 그들을 향해 놀란 척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엇!? 너희가 여긴 왠일이야?"

"우와아아... 설마 이 인간..."

"아이고... 필레씨. 미, 미안해요."

돌처럼 굳어버린 필레. 그리고 쓰게 웃는 운현. 둘을 번갈아 바라본 아둔과 칼리오스는 이제서야 자신들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상아 길드장님. 여긴 저쪽에 방해되니까 저기로 가요."

힐끔 힐끔 필레의 눈치를 보며 아둔은 자리에 앉지 못했다. 그런 그녀와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칼리오스를 무시하며 상아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물었다.

"운혀어어언~ 혹시 방해야?"

얼굴 가득 귀여움을 담은 상아가 애교를 피우며 말하자 아둔과 칼리오스는 속이 거북해진 듯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지만 운현은 피식 웃었다.

"방해라니. 그런 건 없지."

"거봐! 자자. 앉으라고."

"아고... 필레. 미안."

"죄...죄송해요."

본의 아니게 데이트를 방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둔과 칼리오스는 미안함에 몸둘바를 몰랐다.

그간 필레가 제대로 된 연인은 커녕 다른 남자들과 사적인 대화를 하는 것도 보지 못했던 그녀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한 것이리라.

"길드장님. 진짜 딴데로..."

"아니! 운현이 괜찮다잖아!"

"그래도 그렇지!"

"하하... 괜찮아요.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상아를 갈구려던 칼리오스는 한숨을 푹 내쉰 후 싱글거리는 상아를 한번 째려보고 운현의 질문에 답했다.

"다음 던전 탐험에 관한 회의를 해야하는데 상아 길드장이 늦어서... 자기가 사과의 의미로 여기서 저녁 사줄테니 하자고 하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그렇군요. 그럼 저희는 저희대로 볼 일을 볼테니 그쪽은..."

"알겠어요! 그건 맡겨주세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상아가 끼지 못하게 막아달라는 운현의 부탁에 칼리오스와 아둔은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운현과 필레 쪽으로 접근하지도 못하게 자리를 잡은 그녀들은 상아가 불만스러웠는지 볼을 부풀리자 빠득 이를 갈았다.

'차라리 잘됐군.'

그리고 운현은 필레와 상아를 번갈아 바라본 후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길드 간부 세명과 상급 길드원 다섯 이상이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간부급에서 세명이나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 지금 새로운 간부급 길드원도 없다고. 비타씨가 죽은데다가 운현 파티를 키우는 것 때문에 펠리시아와 제니스씨가 쉽게 자리를 비울 수 없단 말야."

"흐음... 상아 길드장님. 어떻게 생각해요?"

"응? 아. 응. 뭐라고 했지?"

"........"

한참동안이나 칼리오스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상아는 자신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기보다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 했다.

"상아... 당신 지금 뭐하자는 거야."

진짜로 화가 난 모양이다. 칼리오스가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싸늘히 입을 열자 상아는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하... 하하하. 미안. 미안. 다시 한번 말해줄래?"

"지금 세번째거든!? 정신 똑바로 안차릴래!?"

"아하하하~ 그래서요?"

"그래서 말이죠..."

자신들의 험악한 분위기와 다르게 운현과 필레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화기애애 했다.

운현의 화술이 무척이나 좋은데다가 필레는 좋은 청자였다. 그의 말에 붕붕 고개를 끄덕이거나 박수를 치고, 가끔식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운현의 말에 분위기를 살려나갔다.

가끔씩 들리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흥미진진한데 운현에게 마음이 있어 이 자리까지 온 상아가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상아."

"응?"

"회의는 여기서 종료할까?"

"아! 진짜!? 그래도 괜찮아!?"

"괜찮겠냐... 으씨. 됐어. 당신은 그냥 빠져. 이건 아둔과 내가 결정할테니까."

"그럼..."

"그래도 상아 길드장님. 길드장님이 자리를 비우면 곤란하죠."

자기들끼리만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화가 났는지 아둔은 평소와 다르게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상아는 칼리오스의 말에 기뻐하던 기세를 그대로 바꿔 급속히 시무룩해졌다.

"헤에~ 운현씨도 무척이나 고생했겠네요."

'나도 잘 들을 수 있는데...'

두병의 와인을 비우며 화기 애애한 분위기를 보이는 필레와 운현을 보며 상아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운현에게 은근히 끌리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놀랬다. 하지만 그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자신은 한 단체를 이끄는 장이다. 그것도 던전 도시라는 거대한 세력을 지탱하는 조직의 탑이었다.

그런 자신이 사욕을 가지고 타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지금까지 모험가 길드를 이루고 있던 자유로움이라는 가치관을 송두리째 무너트릴 수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길드장따위 관두고 싶다...'

타 종족보다 오랜 삶을 보장받은 엘프이기에 다른 모험가들과 길드원들, 그리고 길드의 간부와 전임 길드장에게 추천을 받은 상아로서는 자신이 그만두고 싶다고 해서 이 자리를 쉽게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길드장을 그만두기 위해서는 일단 후임이 결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후임은 길드 간부들이나 길드 소속의 클랜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뿐이 아니다. 길드의 장이 된다는 것은 그 강함과 지식을 충분히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 인재가 뭐가 아쉬워서 이 족쇄덩어리인 모험가 길드의 장이 되려고 하겠는가? 자신도 관둘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관두고 싶은 것이 이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 자리였다.

"후아... 조금 취하는 것 같네요."

'너 주량 그거보다 세잖아!'

필레와 운현이 마신 와인을 확인한 상아는 필레가 달콤하게 녹는 듯한 목소리로 운현에게 말하자 주먹을 꽉 쥐고 속으로 외쳤다.

저번 길드 간부급 회식때 필레가 끝까지 남았던 것을 떠올리면 고작 저정도에 취할리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 그런가요? 그럼 그만 마시는게 낫겠네요."

하지만 운현이 그것을 알리가 없었다. 필레의 흔들림에 낚여버린 그를 본 상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만히 좀 있어! 어째 매번 이래!?"

"좀 얌전히 있을 수 없어요?"

"으윽..."

'뭐가 숙련된 모험가야!?'

눈에 훤히 보이는 저 연기에 속는거야? 상아는 바보같이 필레를 걱정하는 운현을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았다. 하지만 운현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필레에게 다정하게 물을 따라 건네주었다.

"이제 와인은 그만 마시도록 해요."

"그렇지만 운현씨 혼자 마시게 되는 거 잖아요. 혼자 마시는건 싫어요."

작정을 한 것인지 필레는 귀엽게 고개를 저으며 볼을 부풀렸다. 술기운에 발그레 달아오른 그녀의 볼을 본 운현은 빙긋 웃은 후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취했잖나요."

"우에에엣..."

"......."

괜히 이런 자리에 온 것 같다. 상아는 운현이 필레를 걱정해주고 그녀의 볼을 쓰다듬는 것에 화가 났다.

필레는 자신이 아끼는 부하이며 친구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자신이 모험가 길드로 끌어들인 이이기도 했기에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

하지만 운현과 관계되면 뭐랄까.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자신의 질투심에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다른 남자들과는 달랐다. 마치 자신의 것을. 자신의 소중한 것을 빼앗기는 기분에 몸을 떨던 상아는 필레와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하아... 상아 길드장."

"...응."

"뭐 당신의 연애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는 상관없지만 일 좀 제대로 하지 그래요?"

"그러니까. 차라리 빨리 끝내는게 낫지 않겠어? 집중해서 결정할 건 결정하자고."

"우으... 그치만."

"펠리시아씨나 제니스씨가 있었으면 대리를 하겠지만 지금 둘 다 운현을 지원하기 위해 빠졌잖아요. 그럼 당신이라도 해야죠. 그게 싫었으면 둘 중 하나는 뺐어야지."

"그럼. 그럼. 잘 한다. 아둔."

"으...."

정론을 말하는 그들을 향해 상아는 결국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시무룩해진 상아는 힐끔 힐끔 운현과 필레를 훔쳐보다가 연신 둘에게 핀잔을 들었고 운현은 그녀의 반응에 피식 웃었다.

"운현씨?"

"흠. 이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까요? 필레씨도 많이 취하신 것 같고."

"벌써요?"

"간단하게 차라도 한잔 하고 들어가죠. 시간도 늦은 것 같으니..."

"우... 네."

괜히 취한 척 연기를 했나보다. 운현이 얼굴을 쓰다듬어 준 것은 좋았지만 그것 뿐이다. 자신의 연기 때문에 운현과 식사가 빨리 끝나버린 것에 우울해하며 필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는 어디서 드실건가요?"

"음... 분위기 좋은 곳을 알고 있어요. 그쪽으로 가시죠."

"네~"

운현이 알고 있다는 곳으로 필레는 차분히 걸었다. 중간 중간 대화가 끊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그와 쓰잘데기 없는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지만 필레는 행복했다.

"혹시 운현씨."

"네?"

"운현씨 나이가 스물 아홉이라고 하셨죠?"

"네..."

"혹시 노안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시죠?"

"...그거 필레씨가 동안이라고 그러는거에요?"

"아! 아니에요! 그런거! 그게... 혹시 전에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던 마을에 가신 적이 있던가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필레는 당황하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아까 전에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필라니아 몬스터 웨이브때 제가 참전했었거든요."

"아. 알아요. 그때 무척 활약하셨다면서요?"

"활약은요... 그건 표면적인 일에 불과해요. 저나 윈드나... 윈드와 제가 전에는 기사였다는 것은 들은 적이 있으신가요? 그때 당시 저희들은 리치의 부활 때문에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곳에 파견된 적이 있어요."

"그렇군요."

"그때... 저희들은 경험 없는 풋내기 기사에 불과했어요. 할 수 있는 일은 몬스터를 베는 일 밖에 없었죠. 그때 저희들을 도와주신 분이 계세요."

"...아 그런가요?"

"네. 그 분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지만... 무척이나 대단하신 분이었죠. 놀라운 마법과 더불어 기묘한 검술. 그리고 무서울 정도로 정확한 분석과 판단, 통찰력으로 마을을 지켜내신 분이에요. 몬스터들의 압박과 리치의 부활에 몰려 있던 저희는 아마 그 분이 아니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헤에... 그랬군요. 그 사람이 누군가요? 아시는 분인가요?"

"아뇨."

고개를 숙이고 차분히 걷던 필레는 잠시 고민했다. 어쩌면 이런 질문은 무척이나 실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은인이기도 한 그를 만날 수 있다면 꼭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 분의 검술은 정말 기묘했어요."

"그렇군요."

"그 어떤 공격도 막아내거나 흘려낼 수 있는 검술이었죠."

"...그렇군요."

운현의 답변에 필레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혹시 그 분과 무언가 관련이 있는 건가요?"

"글쎄요... 저는 제 검술이 그렇게까지 특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걸요."

느긋하게 말하고 있지만 운현은 자신의 검술이 가진 특수성을 알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세계를 경험하며 축적된 경험, 판단, 그리고 정확한 분석과 예측이 없으면 모든 공격을 흘려내거나 막을 수 없다. 적절하게 흐름을 끊어낼 수 있어야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펼칠 수 있는 자는 아마 이 세상에 단 둘 뿐일 것이다.

운현, 그리고 운현의 모든 지식과 기억, 경험을 공유하는 현자.

'현자가 필레를 도왔나보군.'

과거의 필레도 몬스터 웨이브 당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그때의 그 역시 현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현자가 왜 상아를 키우고 필레를 도와줬느냐였는데... 이제 대충 알겠네. 그들의 호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군.'

382====================

방해자

접점이다. 운현과 현자는 어찌보면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사상. 그리고 목적. 영혼과 기억까지. 단지 육체만 다를 뿐 거의 모든 것이 같은 존재인데 다르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만약 같은 순간 같이 존재해 서로를 인식하고 스스로 진짜가 되려고 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들은 같은 시간대의 같은 차원에서 절대로 같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현자를 만났던 모두가 위화감을 느끼는 것이다. 분명히 다른 사람이다. 외모도. 그리고 나이도.

그렇기에 현자와 비슷한 분위기를 보이는 운현에게 상아와 필레는 관심을 보였다.

'보험인가.'

그럴리 없겠지만 만약의 경우라는 것이 있다. 필레와 상아에게 강한 인상을 부여함으로써 그녀들이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쫓게 한다.

매일같이 함께 다녀야 하는 셋이라면 모를까 상대적으로 만남이 적을 수 밖에 없는 필레와 상아에게 이런 작업을 해놓은 것만으로도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

현자가 작업을 해 놓은 덕분이 상아와 필레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운현은 빙긋 웃은 후 말했다.

"기분 탓이겠죠."

"그... 그럴까요?"

"네."

한치의 거짓도 없는 듯 밝은 미소를 지으며 운현이 여유롭게 답하자 필레로써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혹시 좋아하던 사람이었나요?"

"그럴리가요! 그저 도움을 받았지만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해서..."

"조금 질투나네요. 필레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니."

쓰게 웃으며 그가 말하자 필레는 당황하며 양 손을 휘저었다. 그를 좋아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에게서 느끼던 분위기를 느낀 것 뿐이지.

"그런 건 아니에요! 그...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은?"

"......"

말을 꺼내지 못하고 필레는 촉촉히 젖은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향해지는 그녀의 시선을 응시하던 운현이 손을 내밀었을 때 필레는 그 손을 살며시 잡고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운현씨.... 에요."

"....."

달콤한 고백. 필레는 운현의 손이 굳는 것을 느꼈다.

그가 거절할까? 분위기는 좋다.

그는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 남아 있는 만약이라는 불안감은 필레를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운현...씨?"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신의 고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운현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것에 필레는 두려움을 느꼈다.

몬스터 웨이브 때 수많은 몬스터들에게 둘러쌓였을 때 조차 느끼지 못했던 긴장과 두려움에 그녀가 눈을 꼬옥 감았을 때 운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당신을 좋아합니다."

"저, 정말요!?"

"네."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뺀 운현은 살며시 그녀를 끌아당겼다. 힘이라고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 손길을 필레는 저항할 수 없었다.

"아아... 운현씨..."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다. 그의 품에 안긴 것이 기쁘고, 그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 준 것이 행복하다.

"다만..."

"......"

불안하게 왜 이럴까. 그의 품에 안긴 필레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뭔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긴장으로 딱딱히 굳어 있는 필레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운현은 필레의 귀에 살짝 속삭였다.

"저에게는 함께 해야 될 사람들이 이미 있답니다."

"그건... 헤스티아씨나 미야씨, 바제트씨를 말씀하시는 거에요?"

"네."

"...그건 알고 있었어요."

운현과 함께 다니는 여인들. 그녀들과 운현의 관계가 단순한 동료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다른 여인들의 유무와는 관계 없었다. 어차피 남자의 수가 적은 세상에서 한남자를 혼자 독점하겠다는 것은 욕심이나 마찬가지였다.

"운현씨를 혼자 가지고 싶다는 것은 제 욕심이죠... 그러니 좋아요. 운현씨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더라도. 저를 사랑한다면..."

"그런가요? 고맙네요."

"고, 고맙긴요..."

"필레씨."

"네에...?"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고마워요. 용기를 내줘서. 제게 다가와줘서."

상냥한 웃음과 함께 운현은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살며시 그녀의 부드러운 볼을 쓰다듬었다.

"아..."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얼굴. 잔뜩 긴장하던 필레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감겨진 눈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운현은 옆통수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씨익 웃었다.

'됐구나.'

살며시 필레의 입술을 빼앗는다. 입술에 닿는 달콤한 감각. 촉촉하고 작은 입술을 가진 순간 운현은 자신의 품 안에 있는 필레가 어색할 정도로 경직하는 것을 느꼈다.

과거나 지금이나, 이런 것에 일일히 반응하는 것도 필레답다. 그녀의 반응에 빙긋 웃은 운현은 필레가 행복한 얼굴로 웃으며 자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는 것에 살짝 웃고 숱 많은 녹색 머리칼에 얼굴을 가져갔다.

"항상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은 못하겠네요. 그렇지만... 최소한 당신이 저로 인해 슬퍼하는 것은 막고 싶어요. 노력할게요."

"으응... 저두요."

"고마워요. 필레. 아니... 고마워. 필레."

지금까지 거리감이 느껴지던 존대가 사라졌다.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느낀 필레는 방긋 웃었다.

"으응... 저야... 아니. 나야말로 고맙지."

달콤한 목소리다. 서로를 향해 나누는 그 밀담. 운현과 필레는 서로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응시했고 길의 끝에 서 있던. 간신히 회의를 끝마치고 운현과 필레를 쫓아왔던 상아는 그 둘이 끌어안고 있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왜지."

어째서 이렇게 운현에게 집착을 하게 되는 걸까? 상아는 자신의 심장이 미친듯이 요동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난..."

운현을 좋아하는 것일까? 자신에게 이런 감정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솔직해지자. 운현과 필레가 서로를 끌어안고 키스를 하는 것을 보고 난 이후 상아는 요동치는 심장과 딱딱해진 몸과는 별개로 자신의 심정을 냉정히 정리할 수 있었다.

'그를 좋아하는건가?'

알 수 없다.

물론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호감이 과연 남녀간의 그런 호감을 말하는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몇번 만난 사이도 아니다. 알고 있는 것은 그가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것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사를 해봤지만 그와 자신의 접점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운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어느것도 없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그에 대한 정보는 완전히 베일에 감춰져 있었다.

한 조직을 이끄는 장으로써 그런 자가 조직 안에 들어 온다는 것은 충분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거기에 운현은 제니스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데다가 차기 간부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 뿐인가? 새롭게 용병 연맹의 연맹장이 된 아르토리우스와도 관계가 있는데다가 파르티 교단의 이단 심판관인 레나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듯 보였다.

출신도, 그리고 살아 온 과거도 알 수 없는 자가 쟁쟁한 이들과 관계되어 있다.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석대로라면 자신은 그를 완전히 경계해야 했다.

그는 안정된 호수에 던져진 돌과 같은 존재다. 그의 존재는 파란을 일으킬 것이고 그의 행동은 모두를 기겁하게 만들 것이다.

운현이 레벨업을 한 것만 해도 그렇다.

갑작스러울 정도로 빠른 레벨업.

그것 때문에 길드가 얼마나 난처했는지는 길드의 모든 이가 알고 있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자신의 연인이라는 거짓말까지 해야했다.

그만한 피해를 입었다면 상식적으로 봤을 때 운현이라는 사람은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으로서 무조건 경계해 마지 않아야 할 인물이다.

"...그런데 왜."

머리로는 알고 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하지만 마음은 머리의 결론을 막았다.

자신도 모르게 끌린다.

자신도 모르게 따뜻해진다.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가고 만다.

그의 곁에 있으면 가장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고 만다.

"스승님... 왜... 사라지신 거에요..."

500살 이후로 말라버렸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며 상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스승님이 보고 싶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스승님이 너무나도 원망스럽고, 너무나도 그립다.

"......"

날은 따뜻하지만 마음이 춥다. 상아는 살며시 손을 올려 자신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스승인 현자가 남겨 둔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자기 재생 슈트. 그리고 수많은 스크롤들.

스승이 생각날 때마다 그것을 떠올리고 그것을 만지며 추억을 회상하며 그리움을 달랬지만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무리였다.

"운현..."

바로 운현이라는 존재 때문에.

운현이 나타나 그를 알게 되고, 그와 만나 그에게서 스승의 향기를 느낀 순간부터 스승이 남겨 둔 모든 것에서 추억을 회상할 수 없었다. 오로지 운현만이 자신의 추운 마음을 달래준다는 것을 느꼈다.

"운현..."

그에게 다가가고 싶다. 그를 끌어안고 싶다. 그리고... 그에게 안기고 싶다.

"운현..."

입 안에서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벌써 사라진 운현과 필레가 있던 자리로 천천히 걸어간 상아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만약 여기에..."

그가 끌어안은 사람이 자신이고, 그가 키스한 사람이 자신이고, 그가 사랑한다고 말한 사람이 자신이었다면. 눈을 감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상아는 자신의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아아... 흑..."

다리에 힘이 풀린다. 바닥에 주저앉은 상아는 두 손을 모아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토록 감정이 움직일 줄이야. 이정도로 자신이 흔들릴 줄이야.

"흑...흐흑...흑... 구해줘... 구해줘... 운현..."

울음이 멈추지 않는다. 스승님이 말도 없이 사라져버린 이후로 이렇게 감정이 크게 흔들려 본 적은 처음이다. 상아는 부들부들 떨며 생김새와 같이 연약한 여인처럼 펑펑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녀의 울음을. 지붕 위의 작은 굴뚝에 가려진 그림자 속에서 진한 흑발의 여인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네..."

용병 연맹의 연맹장이자 운현이 만든 위신체인 아르토리우스는 상아가 자신의 감정에 취해, 운현을 그리워하며 흐느끼는 것에 진한 분노를 느꼈다.

상아는 운현에게 안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운현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여인들을 구하기 위해서 운현은 많은 것을 희생했다.

그런 그가 상아가 저토록 괴로워한다는 것을 본다면 가만히 있을 것인가? 아르토리우스는 단언코 아니라고 생각했다.

"빠드득..."

절로 이가 갈린다. 단지 조금의 괴로움에 저토록 울고 있는 상아가 너무나도 얄미웠다.

자신은 이토록 힘들지만 한마디 내색조차 할 수 없는데.

그는 그토록 괴로워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숨기고 있는데.

"운현님은..."

그의 마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기에 시간이 지날 수록 그의 기억을 단편적으로나마 읽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르토리우스는 알고 있었다.

괴로움과 고통, 자괴감, 후회, 절망. 무력감.

만약 자신이었다면 벌써 미쳐버렸을 정도의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운현은 단 한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고뇌하고, 궁리하고, 구상하며, 상상하고, 예측하고, 분석했다.

수도 없이 실패를 하고 그때마다 그 고통을 곱씹으며 각오를 다졌고 무력한 스스로에게 어이없어하며 실망할지언정 그는 단 한번도 멈추지 않았다.

그 어떤 장애 속에서도 운현은 강철같은 의지로 그것을 버텨내며 여기까지 왔다.

그런 운현만큼의 고통을 겪어 본 것도 아니면서 세상 다 산 것처럼 저토록 절망하는 상아가 아르토리우스는 미치도록 미웠다.

'너만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저 목을 부러트려버리고 싶은 마음에 살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르토리우스는 차마 그녀를 공격할 수 없었다.

상아는, 그리고 그의 연인들은. 운현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오로지 그것에만 매달려야 했던 운현을 또다시 그 끝없는 절망 속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운현님..."

정말 울고 싶은 것은 자신인데.

정말 슬픈 것은 자신인데.

정말 괴로운 것은 운현인데.

아르토리우스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다는 것에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

먼 지붕 위에서 상아를 바라보고 있는 흑발 미녀가 눈에 띄였다. 천검자다. 아직까지 상아를 노리는 것인가? 그렇다면 막아주겠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고 죽이고 싶어하는 상대를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갈망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지킨다. 아르토리우스는 천검자의 살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검을 꽉 잡았다.

"...후우."

얼마 지나지 않아 상아를 바라보던 천검자가 몸을 돌려 사라졌다. 지붕 위에서 북쪽으로 뛰어가는 그녀를 힐끔 본 아르토리우스는 상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비척 길드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조용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383====================

방해자

"......"

운현과의 짧은 키스만으로도 몸이 달아오른다. 필레는 달콤하게 녹는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는 듯, 운현은 다시 그녀의 갸름한 턱을 잡았다. 거의 힘이 실리지 않은 손길이지만 필레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저항 없이 그의 손길에 따라 고개를 든 필레는 운현의 입술이 다시 자신의 입술에 겹춰지자 살며시 눈을 감았다.

'어떡해...'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온 몸에 힘이 빠진다. 다리가 덜덜 떨리며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레는 운현을 밀치지 않았다. 아니, 밀칠 수 없었다.

"으음..."

"여기서 계속 이럴 수는 없겠네."

"...으, 으응. 그렇겠...지?"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골목이라고 하지만 이런 곳에서 계속 키스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운현의 말에 필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운현."

아직은 반말이 어색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와 친해질 수 있다면. 그와 더 가까워 질 수 있다면 이 정도의 어색함은 환영이다.

"내 방에... 갈래?"

"어? 네 방은 길드에 있는 것 아냐?"

"그건 길드의 일을 하기 위해 마련해 둔 숙소고... 진짜 내 집은 다른 곳에 있어."

첫 데이트 만에 그를 꼬드기는 것이다. 물론 키스를 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는 것은 필레에게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지, 집에 맛있는 과자도 있고! 차도 있고! 그, 그러니까..."

"하하하..."

"...우, 우리집에서... 과자 먹고 갈래?"

"좋아."

"그...렇겠지. 벌써 집에 초청은엑!?"

"뭐야?"

잠시 생각하던 운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필레는 낙담하다가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운현이 자신을 보자 필레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지, 집에 간다고!?"

"응. 왜? 이제 와서 싫은 건 아니겠지?"

"아냐! 환영이야!"

운현이 자신의 집에 온다. 그러고보니 청소는 했던가? 머리가 패닉상태에 빠졌다. 필레는 당황하다가 달아오른 얼굴로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자!"

필레의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모험가 길드의 영역 끝에 있는 작은 건물의 2층. 담쟁이 덩쿨로 벽이 덮혀져 있어 고풍스러운 멋이 물씬 풍기는 집 앞에 도착한 운현이 감탄하자 필레는 운현을 세워두고 말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줘! 오분, 아니 십분만!"

"알았어."

집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빙긋 웃으며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필레는 빠르게 집으로 들어갔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며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상아가 봤군. 이제 슬슬 입질이 올텐데...'

지금까지 상아의 반응을 보면 그녀는 자신에게 상당히 반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인지. 상아는 자신에게 접근하기보다는 혼자서 끙끙 앓고 있는 것을 선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현자가 심어 준 임프린팅은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상아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그가 심어 놓은 씨앗은 운현을 만남으로서 발아할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아의 마음을 완전히 잠식하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해야 할 일은 많았다. 현자의 행동은 그것을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될 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문 운현은 필레가 내려오길 기다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앗!?"

"어라?"

담배를 물고 피우던 운현은 거리의 끝에서 터덜터덜 걸어 오는 윈드를 발견했다. 어슴푸레한 곳에서 보이는 담뱃불을 본 윈드 역시도 운현을 발견했는지 그에게 다가갔다.

"여긴 왠일... 아."

이 건물의 2층이 필레의 집인 것을 아는 윈드는 능글맞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운현은 말없이 히죽 웃었고 윈드는 말없이 2층을 가리켰다.

"오호... 이거 참."

"뭡니까?"

"아니. 아이 참. 이거 뭐라고 할까... 내 친구가 오늘 처음을 겪는다는게 참 부럽기도 하고. 뭐랄까..."

"아니 부러워 할 필요 있습니까? 윈드씨도 조만간 생길 것 같다면서요. 그 뭐냐..."

"아아. 그거? 후후후... 내 매력이라면 충분하지."

그녀의 자신만만한 말에 운현은 쓰게 웃었다. 매력? 윈드는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윈드에게 넘어갈것인가는 다른 문제다.

"그렇군요."

"후후후. 그럼 좋은 한때 보내라고."

"아. 윈드씨."

"음? 왜?"

"그 윈드씨가 말씀하셨던 분..."

"그분? 왜?"

"어떤 분인가요?"

"으음... 뭐랄까. 굉장히 신비로운 분위기였어. 하지만 좀 무섭지."

"뭔가 그리운 기분을 느끼거나 그러지는 않으셨나요?"

"그리운? 아니. 전혀."

'윈드에게는 접근하지 않았던 건가? 아니면 일부러 그런 태도를 취한 거였나.'

몬스터 웨이브에는 윈드도 참가했었다. 필레가 몬스터 웨이브때 현자를 만났다면 윈드 역시 그때 현자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도 윈드와 필레가 내린 평가는 달랐다.

"헤에... 필레에게 들었는데 필라니아 몬스터 웨이브때 저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던데. 윈드씨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엥? 글쎄? 난 모르겠는데."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현자가 접근한건 필레 뿐인가보군.'

윈드의 반응으로 운현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윈드는 씨익 웃은 후 운현의 어깨를 툭 쳤다.

"저래뵈도 꽤나 소심한 성격이니까 잘 해줘."

"알겠어요."

과거와는 다른 반응이다. 과거에 필레를 질투하며 자신을 노리기까지 했던 윈드가 이렇게 담백하게 나오자 신선한 느낌까지 들었던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향해 마주 웃어 준 윈드가 손을 흔들고 멀어졌을 때 건물의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하아. 오래 기다렸지?"

"아냐. 그나저나 땀 좀 봐. 뭐 한거야?"

"헤헤... 조금 청소를. 그럼 들어갈까?"

지금까지 남성의 출입을 금한, 아니 남성이 출입을 하지 않은 방에 남자를, 그것도 오늘 키스를 하고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를 들이는 것이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필레가 심호흡을 하며 2층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는 집의 문을 열었을 때 운현은 방에서 풍기는 향기에 쓰게 웃었다.

'방향제를 잔뜩 뿌렸군. 청소는... 잘 하지 않는 모양이야.'

어쨌든 필레의 본가는 커다란 저택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그녀는 귀족신분이다. 거기에 모험가 길드의 길드 간부로서 모험가 길드에서 생활을 하는 것이니 청소를 자주 할리 없지.

'하지만 그걸 지적할 이유는 없지.'

청소안한다고 갈굴 이유는 없다. 어차피 잘 쓰지 않는 집이라면 더욱 그렇고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생활 상태를 확인하러 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저기 쇼파에 앉아서 기다려줄래?"

"남의 집에 온 것인데 빈 손으로 와서 좀 그렇군. 뭐라도 사오는게 나을까?"

"아, 아냐! 괜찮아! 이거면 되는걸!"

자신이 사 온 꽃다발이 꽃병에 담겨져 있는 것을 본 운현은 피식 웃었다. 저 꽃병도 자주 쓰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기껏 방향을 가린다고 해놨지만 병목에 검은 때가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알았어. 그럼."

"응!"

운현이 쇼파로 가자 필레는 후다닥 움직이며 차를 끓였다. 은은한 향기를 뿜는 홍차가 준비되자 필레는 웃으며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약간 달콤한 향과 맛이다. 그것을 한모금 마신 운현이 빙긋 웃자 필레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물었다.

"어, 어때?"

"맛있네."

"정말? 다행이다아~ 차를 타는 것은 오래간만이라... 아. 과자도 있어!"

"그래?"

"응. 가끔씩 윈드네 가문의 메이드가 와서 이것저것 채워주거든. 잠깐만 있어줘~"

운현이 자신의 차에 만족한 듯 하자 필레는 기뻐 어쩔 줄 몰라하다가 찬장에서 과자를 꺼내었다. 고급스러운 작은 통 안에 있는 과자를 들어 접시에 담아 내 온 필레는 운현이 오도독오도독 과자를 먹는 것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벌써 다 마셨네?"

"응. 아주 맛있었어."

"한잔 더 줄까?"

"내가 타줄게."

"에?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단순한 저급의 차를 타는 정도라면 모험가들에게 기본적인 소양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끓인 물만 마시기 뭣해서 타는 정도에 불과하니 이런 자리에서 대접한다고 할 만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제대로 된 다도는 삶이 풍요로운 귀족이나 상인들이나 할 수 있는 것. 자신 역시도 귀족이기에 소양으로 배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운현이 그것을 한다고 하자 필레로써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정도야 뭐."

"와아... 응. 고마워!"

일단 기대는 하지 말자.

필레는 속마음을 감추고 밝게 웃었다. 알려져 있는 운현의 과거는 모험자일 뿐이다. 그것도 1, 2년 정도 구른 어설픈 초급 모험자 수준이 아닌 정말 과거가 궁금할 정도의 숙련된 모험가다. 그런 운현이 다도라는 교양까지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은 필레였기에 그녀는 그리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꽤, 꽤 하네?"

하지만 그 생각도 금새 사라졌다. 팔짱을 끼고 다도구를 바라보던 운현은 단순히 모험가들이 하는 방식이 아닌 상당히 정교하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차를 타기 시작했다.

교육을 받은 자신이 민망할 정도로 정확한 물조절과 차의 조절을 끝낸 운현은 빙그레 웃으며 필레의 앞에 차를 놓아주었다.

"자. 어때?"

"우와..."

차를 탄다는 것은 보기에는 쉬워보여도 상당한 감각과 조절이 필요한 일이다. 물을 끓이는 양과 불조절부터 티캔팅이나 그 외의 다른 부분까지. 단순한 모험가들이 물에 가루 차를 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인데 그것을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너무나도 능숙하게 해낸 것에 필레는 입을 벌리며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교육을 받은거야?"

"다년간의 모험가 생활이 날 이렇게 만든거지."

정확하게는 가상현실에서 배웠다. 차는 기호식품이다. 이런 기호식품을 애용하는 이들은 어느정도의 권력과 힘이 있는 자들 뿐이고 그들과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런 교양은 필수였다. 익힐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익혀야했던 운현으로서는 당연히 알 수 밖에 없는 것이 다도였다.

"우와... 우와. 정말 궁금하네... 운현."

"응?"

"이제 슬슬 가르쳐 줄 때가 되지 않았어?"

"흐음... 일단 한잔 하자."

"...맛있어!"

코끝에 닿는 얇은 향기와 입 안에서 느껴지는 따스함. 마시는 이를 배려한 섬세함이 느껴진다. 그것에 필레가 눈을 감고 감탄하자 운현은 빙긋 웃은 후 차분히 말했다.

"가르쳐 준다라..."

"응."

"잠깐 이리 와볼래?"

"에?"

"여기."

운현이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치며 말하자 필레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리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여, 여기?"

"응."

"아...아하하. 조금 덥네."

그의 옆에 앉은 필레는 상기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그녀의 행동에 운현은 손을 움직였다.

"읏..."

그가 자신의 손을 잡고 뜨거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필레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심장이 뛴다. 살며시 눈을 감은 필레는 운현의 얼굴을 향해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아아..."

달콤한 입맞춤. 키스를 한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필레는 운현을 살며시 밀어 눕혔다.

"하아... 이럴때는 여자가 리드하는게 맞...지?"

다른 남자들과는 다른 행동을 보이는 운현이다. 그런 그에게 이렇게 행동하는게 과연 맞을까? 책에서 읽거나 길드의 다른 여인들이 남창과 놀거나 애인과 애정행각을 벌일 때 하는 일들을 떠올린 필레가 조심스레 묻자 그녀의 밑에 깔려 있는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아."

그의 양 손이 움직여 자신의 몸을 잡고 끌어당긴다. 그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다 차려진 밥상을 거절하는 것은 여자의 수치지.'

침을 꼴깍 삼킨 필레는 양 손으로 운현의 볼을 잡은 후 천천히, 하지만 다부진 어조로 말했다.

"이, 이제와서 거절하거나 빼면 진짜 화낼거야."

"물론이지."

운현에 대해서 알아야겠다는 생각은 일단 제쳐둔다. 그토록 원하던 사람이다.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핥은 필레는 살며시 운현의 입술에 키스했다.

"으으음...쪽..."

짧은 키스다. 책에서 본 대로 혀를 움직여 그의 입술과 입 안을 범한 필레는 살며시 입술을 떼었다. 아무래도 이런 깊은 키스는 처음인지라 어색하다.

'여기서 운현이 안좋아하면...'

남자들은 경험 많은 여자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필레는 혹시나 운현이 자신의 테크닉이 없음을 문제로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그를 보았다.

"흠."

"아...그, 안... 좋았어?"

목소리가 작아진다. 자신감이 줄어 든 필레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하자 운현은 피식 웃은 후 그녀의 얇은 허리를 감싸 안은 후 속삭였다.

"너무 좋았어."

"저, 정말!?"

"응.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 다 해도 괜찮아."

"진짜지!? 진짜!?"

384====================

방해자

"그럼..."

안 그런 척 했지만 꽤나 이런 것에 흥미가 많았던 필레는 운현이 무방비 상태로 자신의 아래에 깔려 저항하지 않자 헤죽 웃고 그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강아지가 우유를 핥는 것처럼 그의 얼굴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핥던 그녀는 운현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고 그 자리에 연신 짧은 키스를 했고 그것에 운현은 간지러웠는지 키득거렸다.

"아. 기분나빴어?"

"아냐. 간지러워서 그래. 괜찮아."

운현의 반응에 일일히 반응하며 필레는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운현이 웃으며 그리 말하자 용기가 났는지 더 이상 말하는 대신 필레는 운현의 입술에 다시 키스한 후 살며시 옷을 벗기 시작했따. 가디건은 이미 벗어던진지 오래. 원피스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낸 필레는 머뭇거리다가 운현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로 가자."

쇼파 위에서 해도 괜찮지만 그래도 처음인만큼 제대로 된 자리에서 하고 싶었다. 필레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순간 필레는 손을 움직여 운현은 가볍게 안아 들었다.

"우왓."

"후후후... 이런 거 한번 정도는 해보고 싶었단 말이지."

공주님 안기를 하듯 필레는 운현을 가볍게 안아들었다. 필레 역시 400레벨이 넘는 강자에 속했다. 운현 정도의 무게는 어렵지 않게 들 수 있는 것이다. 자신보다 작은 필레에게 안긴 운현은 쓰게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뭔가 조금 어색하네."

"뭐가?"

"아냐. 아무것도."

"후후훗. 이상한 운현."

이 세계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 세계이다. 같은 레벨이라면 남자의 힘이 더 강하지만 레벨이라는 시스템을 따르며 스탯이 존재하는 이상 필레 정도의 레벨이라면 어지간한 남자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그녀의 직업은 검사. 레벨이 오를 수록 스킬에 따라 힘이 더 강해진다. 어렵지 않게 운현을 안아 들어 침대로 데리고 간 필레는 운현을 눕히고 어깨에 걸쳐져 있다 시피 한 자신의 원피스를 벗어내렸다.

"우와."

"조, 조금 부끄럽네."

운현의 시선이 지산의 몸에 꽂히자 필레는 볼을 긁적거렸다. 은은한 마법등에 비춰진 필레의 백옥같은 하얀 몸. 기사 수행과 길드원으로서 움직이며 많은 훈련을 쌓은 덕분에 필레의 몸은 군살하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탄력적인 근육으로 덮혀 있었다.

"그, 그만 보라고."

"아니. 예뻐서. 생각보다 가슴이 크네."

"그... 고맙다고 해야 하나."

브래지어에 감춰져 있는 가슴은 필레의 호리호리한 몸에 비해 상당히 큼지막했다. 그것을 운현이 말하자 필레는 머뭇거리다가 뻘쭘히 웃으며 중얼거렸고 운현은 싱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 매력적이야."

"아이 참~"

그의 계속된 칭찬에 필레는 좋아 어쩔 줄 몰라 몸을 베베 꼬다가 침대 위로 몸을 이동시켰다. 더블 사이즈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운현의 위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간 필레는 운현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렀다.

"핥짝."

맨살이 드러난 운현의 몸을 여기저기 핥아가던 필레는 운현이 움찔거리자 히죽 웃었다. 자신의 애무에 그가 반응해주는 것이 좋다. 필레는 살짝 고개를 들어 운현의 얼굴을 보고 그의 가슴 유두를 살짝 빨았다.

"쪼옥..."

"읏."

"후후후... 어때?"

"뭔가 어색하지만 되게 좋네."

손을 들어 필레의 녹색 머리칼을 쓰다듬어 준 운현은 색기가 담겨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웃어보였다. 그 웃음에 필레는 뭔가 찝찝함을 느꼈다. 자기는 되게 긴장하고 있는데 운현은 이런 상황에서도 무척이나 여유롭다.

"..다른 여자들이 있어서 그런가."

"응?"

"아냐. 아무것도."

이런 자리에서 다른 여자의 이야기를 꺼내봤자 무드 없는 여자로 인식될 뿐이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속마음에 화들짝 놀란 필레는 붕붕 고개를 저은 후 다시 운현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혀 있는 그의 가슴과 복부를 정신없이 핥던 필레는 자신의 아랫배를 콕콕 찌르는 무언가에 살며시 얼굴을 붉히고 능글맞게 웃었다.

"진짜 기분 좋았어?"

"으응..."

"후후후... 여기가 벌써 이렇게 되어 있네."

바지춤 앞섬을 뚫고 나올 것처럼 빳빳하게 서 있는 그의 양물을 확인한 필레는 천천히 그의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살짝 내렸다. 그 순간 튕기듯 운현의 남성은 밖으로 튀어나왔고 처음으로 남자의 양물을 보게 된 필레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우와아..."

"...조금 부끄러운데. 그렇게 보면."

"헤에. 운현. 너도 이런 거에 부끄러워하는거야?"

"저도 사람인지라."

"가끔 보면 넌 사람같지 않단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

"후후후... 글쎄?"

운현의 행동이나 그의 카리스마. 그리고 다른 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운현이 이 세계의 남자 같지 않다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다. 이 세계의 남자들은 운현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수동적이며 소극적이고 자신의 일을 타인에게 맡기며 즐거움만 가지려 한다.

하지만 운현은 어떻지? 그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충실하며 모든 일에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비록 레벨은 낮지만 그 레벨을 커버할 정도의 뛰어난 식견과 분석력, 그리고 지휘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질투나.'

다른 사람은 차라리 몰랐으면 좋겠다. 아니, 운현이 다른 남자들처럼 소극적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미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다. 자신이 소개시켜 준 헤스티아부터 시작해 미야, 바제트. 거기에 상아 길드장까지. 그 외에도 다른 길드원이나 모험가들은 남자 답지 않게 털털하고 성격 좋은 운현에게 끌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에게 끌렸을지도 몰랐지.'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신기한 사람이었다. 잡 파인더로도 직업 적성을 찾을 수 없는 희귀한 케이스를 가진 남자에 불과했고 그에 대한 끌림도 그정도에 불과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와 만나게 되고 알게 되면서 점점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유? 이유따위는 없었다. 그저 그에게 마음이 갔다. 과거 몬스터 웨이브때 만났던 사람에게 느꼈던 기분을 그와 만나며 느끼게 된 것은 계기일 뿐이다. 그 계기를 시작으로 운현에게 자신도 모르게 관심이 갔다. 그의 행동, 행보. 그 모든 것에 관심이 가고 끌렸다.

"으읏."

"아, 아팠어?"

"아냐. 기분 좋아서..."

"후후후~"

자신과 비슷한 나이이지만 동안인 자신보다 오히려 나이가 많아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는 운현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 모든 것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울퉁불퉁한 양물을 살며시 쓰다듬을 때마다 운현이 움찔거리는 것이 너무나도 귀여워 필레는 그의 입술을 훔치고 말았다.

"흐음...쪽...핥짝..."

처음의 어색했던 딥키스도 이제는 점점 익숙해져간다. 운현과 타액을 섞어갈 수록 몸 안 여기저기가 뜨거워지고 그가 사랑스러워진다.

"후아..."

은색의 실이 허공에서 죽 늘어지며 끊어진다. 뜨끈해진 자신의 얼굴을 생각할 겨를따위는 없었다. 좀 더 그를 느끼고 싶다. 좀 더 그를 독점하고 싶다. 필레는 다시 한번 그에게 키스한 후 그의 양물을 흝는 손을 점점 빠르게 했다.

"으읏. 피, 필레 잠깐..."

"싫어..."

입술을 떼려 하는 그의 입술을 쫓아 다시 입술로 막아버리고 손을 점점 더 빠르고 농염하게 움직였다. 양물의 끝에서 나온 투명하고 미끌거리는 액체가 손을 더럽히는 것도 무시한 채 운현과 키스하던 필레는 운현의 헐떡임이 심해지자 요염히 웃었다.

"후후후..."

"하아...하아..."

"귀여워..."

"...너 성격이 좀."

"쿡쿡. 자아... 이제 어떻게 할 건지는 알고 있지?"

뜨거워질대로 뜨거워지고, 단단해질대로 단단해진 양물에서 손을 떼었다. 끈적한 액체가 손끝을 따라 길어지는 것을 보며 필레는 손을 들어 살짝 그 액체를 핥았다. 아릿하면서도 시큼한. 하지만 몸의 흥분을 더더욱 돋구워주는 맛이다. 정신없이 자신의 손가락과 손바닥을 핥은 필레는 이미 축축해진 자신의 하복부에 손을 가져갔다.

"으음..."

하얀색 로우라이즈 팬티는 이미 자신의 애액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안이 비춰질 정도로 젖은 팬티를 살며시 벗어 내린 필레는 브래지어마저도 풀어버리고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

"괜찮...지?"

"응."

달뜬 숨을 내뱉으며 필레는 운현의 위로 올라갔다. 손을 내려 그의 양물을 잡아 자신의 계곡 입구에 맞춘 필레는 작게 심호흡했다. 여성의 처음은 고통스럽다고 했다.

고통에는 꽤나 익숙해져 있는 자신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양물을 계곡의 입구에서 밀어 넣었다.

"쯔륵...!"

"크학! 으읏..."

푹 젖어 완전히 흐물거리는 계곡이 양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안쪽을 양물이 가득 메우는 충실감에 필레는 몸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으..."

쓰러지듯 운현의 품에 안긴다. 묵직한 가슴이 자신의 가슴에 짓눌리는 것을 느끼며 운현은 필레의 이마에 살짝 입맞췄다.

"으...으흐..."

"무리하지마."

처녀막이야 훈련과 전투 때문에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이런 경험은 처음일 것인 필레를 향해 운현은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런 그의 배려심 섞인 말에 필레는 오히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운현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맞추려면 이래서는 곤란했다.

"괘, 괜찮...아흣...!"

몸을 일으키려던 필레는 자신의 안에 있는 남성이 움직이며 만들어낸 자극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의 귀여운 반응에 쓴웃음을 지은 운현은 필레를 꼭 끌어안았다.

"천천히 해도 괜찮아."

"으응..."

아프거나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와 맺어졌다는 것에 행복감과 쾌감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과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라는 것에 놀라며 운현의 위에서 숨을 헐떡거리던 필레는 겨우 자신의 안에 있는 양물에 익숙해지자 운현의 입술에 진하게 키스한 후 말했다.

"이제... 할게."

"응."

살며시 몸을 일으킨 필레는 고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몸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안쪽이 자극되는 것이 금방이라도 힘이 풀릴 것 같다. 휘청거리는 그녀를 향해 운현은 손을 뻗었다. 내밀어진 운현의 양 손에 자신의 양 손을 가져간다. 깍지를 끼고 꽉 잡은 채 필레는 심호흡을 하며 살며시 허리를 움직였다.

"으응..! 읏...하읏...!"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쾌감이 증폭되어간다. 운현과 맞잡고 있는 손이 아니었다면 벌써 쓰러졌을 정도의 진한 쾌감에 헐떡거리던 필레는 다시 몸에 주고 있던 힘이 풀려 그의 위로 쓰러졌다.

"쭈룹...핥짝...쪽."

"으음..."

진한 쾌감에 목이 탄다. 운현과 키스를 하며 그의 타액을 감로수처럼 쪽쪽 빨아 마신 필레는 어느새 자신의 허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뭐. 뭐야?"

머리가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 하지만 몸이 자연스레 움직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진한 쾌감을 원하는 몸은 필레의 의지와 상관없이 음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찔꺽...찔꺽..."

"흥아앗...!"

"으읏..."

많은 쾌감을 탐하며 음란하고 요염하게 움직이는 하체에 놀라며 필레는 운현을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포옹을 받아들이며 운현은 하복부에서 느껴지는 쾌감을 깨닫고 그녀에게 속삭였다.

"쌀게."

"흐윽...윽? 으응..."

그의 말에 필레는 더욱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찔꺽거리는, 음란한 소리가 방을 가득 메우고 애액과 음액의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그럴 수록 더욱 빠르고 질퍽하게 허리를 움직이던 필레는 운현의 남성이 순간 뜨거워지자 그것에 절정에 올랐다.

"하으응!!"

"으읏...!!"

뜨거운 정액이 자신의 몸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낀다. 그것에 눈을 치켜뜨며 부들부들 떨던 필레는 운현의 입술은 간신히 찾아 키스했다.

"쭈릅..쪽...하으으..."

"후우... 좋았다."

"하아...하아... 정말...?"

처음 치고는 잘한 것일까? 운현의 말에 필레는 살짝 웃었다. 그녀의 미소를 마주하며 부드럽게 키스해 준 운현은 가볍게 몸을 들어 필레를 바로 눕혔다. 아직 안쪽의 양물이 딱딱한 것이 힘이 풀리지 않아 자세를 바꾸니 그 자극에 쾌감이 돋는다.

"아으..."

"이제 내가 해줄게."

"응? 허으윽!!"

필레의 길고 아름다운 양 다리를 잡아 위쪽으로 올린 운현은 정상위 자세를 취하며 허리를 움직였다. 아까 전 자신이 움직일 때 이상으로 빠르고 강하게 그의 양물이 자신의 계곡 안쪽을 자극하자 필레는 양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아흐으으으!! 그.. 그으읏...! 가...으하응!!"

혀를 빼물고 헐떡거리며 다리를 움직여 자신의 허리를 꽉 끌어 안은 필레를 보며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의 웃음에 필레는 흐트러진 얼굴로 애써 미소지으며 말했다.

"사랑해... 운현."

385====================

방해자

"후아아..."

네번이나 절정에 도달한 후 녹초가 되어버린 필레는 자신의 옆에 누워 있는 운현을 보고 베시시 웃었다. 그의 팔을 베고 누운 채 손으로 그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던 필레는 운현의 미소를 보고 손을 뻗었다.

"아야."

"이 남자가 내 남자라니... 후훗."

"그렇게 좋아?"

"응..."

운현의 볼을 살짝 꼬집은 필레는 그의 살에 얼굴을 비볐다. 땀냄새와 함께 애액과 정액의 향기가 아직도 느껴진다. 그렇지만 나쁜 냄새는 아니다.

"으... 아직도 안쪽에 있는 것 같아."

음부가 얼얼하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필레가 아랫배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좀 더 해줄 수 있는데."

"무지하게 기쁜 얘기지만 오늘은 더는 힘들 것 같아... 후후. 미안해."

"아니 뭐."

쾌락을 탐하기 위해 필레를 안은 것이 아닌 만큼 운현은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더 진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반응에 조금 아쉬웠던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거야?"

"글쎄. 내일 아침 바로 던전에 들어갈 예정이라서 숙소로 돌아갈 생각인데. 너는?"

"음... 난 조금."

지친 것은 둘째치고 움직이려면 씻어야 하는데 몸에 남아 있는 이 감각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필레는 쓰게 웃으며 운현의 입술에 키스한 후 말했다.

"자고가면 안돼?"

"응."

"냉정하네."

"그게 내 매력이니까. 아. 잡은 물고기라고 이러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마."

"당연하지."

상냥하게 웃으며 필레는 운현의 입술에 키스했다. 기분 좋은 피곤함에 눈이 자꾸 감기려 한다. 그녀가 자신의 품에 안겨 꾸벅거리자 운현은 필레의 나긋한 등을 쓰다듬었다.

"피곤하면 자도 괜찮아."

"그치만..."

"괜찮아. 너 잠드는 거 보고 갈거니까."

"으응..."

그가 간다는 것이 아쉽지만 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운현은 다른 여인들과도 관계가 되어 있으니까. 괜히 자신이 나서서 독점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랑도... 이런 관계인거야?"

"다른 사람이라면 헤스티아들을 말하는 거야? 응."

"즉답이네."

"말했잖아. 그게 내 매력이라고."

"바보."

"별 말씀을."

빙긋 웃으며 운현은 필레의 볼을 잡고 쭉 늘렸다. 밀가루 반죽처럼 말랑말랑한 볼을 가지고 놀던 운현은 필레의 숨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자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했다. 새근거리는 필레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운현은 그녀의 분홍빛 입술에 살짝 키스한 후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팔을 빼었다.

"자... 그럼 가볼까."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 필레의 몸을 이불로 잘 덮어 준 후 운현은 그녀의 집에서 나왔다.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새벽 한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 들어가봤자 다들 자고 있겠군. 그럼 나도 내 볼일이나 보러 가볼까..."

한달이라는 시간을 받았지만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원래 잠을 잘 자지도 않았지만 초인의 반열에 오른 운현인 이상 굳이 자지 않아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기에 그는 숙소로 가는 대신 골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일단 해야 할 일은 피스나군."

윈디아와 아르토리우스에 대한 공작은 의미가 없었다. 계획대로 일이 흘러간다면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은 자신이 될 터. 그럼 공략해야 할 대상은 피스나 뿐이다.

'그 여자를 안기는 좀 그러니 다른 방법을 써야겠군.'

피스나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운현으로써는 그녀를 공략하는 일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볍게 발을 차 뛰어 오른 운현은 지붕 위에 오르자마자 곧장 피스나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운현일때라면 힘들지만 미믹맨의 복장을 착용하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상황에서는 전력을 발휘해도 문제가 없었다. 거의 빛과 같은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던전 도시를 가로질러 피스나의 집 근처에 도착한 운현은 그녀의 작업실을 확인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자네."

2층의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본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1층의 작업실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깽판을 치러 온 것이 아닌 만큼 문을 깨부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조용히 들어가야겠군."

인벤토리에서 광검을 꺼내 작은 날을 만들어 자물쇠를 한번에 잘라버린 후 작업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1층의 작업실을 지나쳐 2층에 도착한 운현은 열린 방문 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요한... 조금만 기다려줘요... 요한."

피스나의 목소리는 잔뜩 젖어 있었다. 자신의 반려이자 악신의 저주에 걸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요한을 구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지금의 그녀로서는 그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던전 도시의 힘을 모두 쏟아 부어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

과거에 피스나가 시장이 된 이후에도 그녀는 요한을 깨울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요한을 그곳에서 생활하게 하는 정도였다.

'큰 변화는 없군. 그럼 가능하다.'

"끼익."

"누구!?"

이 밤중에 자신을 찾을 사람이 없다는 것은 피스나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특히나 작업장의 문은 완전히 잠궈놨을 텐데. 피스나는 문소리에 놀라며 자신의 옆에 놓여져 있는 단검을 들었다. 비록 전투 기술은 적다지만 그래도 그녀 역시 400레벨을 넘어서는 제작자 연합의 장이다.

어지간한 레벨의 도둑 정도라면 스탯빨로 잡을 수 있었던 그녀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넣었을 때 운현은 완전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이거 밤 늦게 실례가 많군."

"그때 그..."

피스나는 경계하며 운현을 노려보았다. 과거 운현과 피스나는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피스나는 운현이 가지고 있었던 캡슐에 흥미를 느꼈었고 운현은 그녀를 기절시킨 후 자신의 일을 했었다.

"혹시 당신이 비타씨를 죽인 자인가!?"

운현의 복장을 확인한 피스나는 빠득 이를 갈며 그에게 단검을 겨눴다. 날카로운 단검의 끝이 자신에게 겨눠졌지만 운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난장판인 방을 둘러보았다.

"대답해!!"

이 시간에 이런 식으로 찾아왔다. 그것도 비타를 죽인 위험인물이 자신을 찾았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거기에 지금은 요한까지 있지 않은가. 자신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요한까지 있는 이상 도망칠 수조차 없었다.

"저게 악신의 저주에 걸린 자인가?"

"요한은 건드리지마!!"

커다란 캡슐 안에 누워 있는 요한을 가리키며 운현이 느긋하게 말하자 피스나는 움찔하며 빠르게 움직여 캡슐을 몸으로 가렸다. 하지만 작은 키와 덩치를 가지고 있는 그녀가 가려봤자 캡슐이 가려질리는 만무했다.

"무슨 일이야!! 당장 꺼져!! 그렇지 않으면...!"

"오오. 과연 나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도 좋을까?"

경계심이 잔뜩 담겨 있는 피스나를 향해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운현은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난 거래를 제안하러 온건데 말이야..."

"...뭐?"

운현이 공격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피스나였지만 경계심을 풀 수는 없었다. 힐끔힐끔 그를 보며 차를 준비한 피스나는 운현의 앞에 놓아 준 후 말했다.

"얼굴 조차 보이지 않는 상대와 거래라니..."

미믹맨의 가면을 쓰고 있는 운현을 노려보며 피스나는 투덜거렸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거래라. 하지만 상대는 비타라는 강자를 죽였다고 알려진 실력자다.

'여기선 일단...'

상대와의 거래를 받아들이는 척 하며 어느정도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

'경계벨은 눌렀으니까.'

제작자 연합의 장인 만큼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물품들은 상당히 위험하고 강력한 장비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시청과 모험가 길드에서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비상벨을 만들어 위기시 요청하도록 되어 있었다.

만들어 놓고 쓸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쓰게되다니. 이미 비상벨은 눌렀고 오분만 버티면 시청과 모험가 길드에서 지원이 올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며 피스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운현을 노려보았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닐텐데. 중요한 것은 거래 내용과 조건이지."

"무슨 거래를 하고 싶은건데?"

"저 남자."

".....!"

자신이 가진 최대의 약점이다. 운현이 요한이 누워 있는 캡슐을 가리키자 피스나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낮게 키득거린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캡슐로 다가갔다.

"가까히 오지마!!"

경계할 수 밖에 없다. 상대는 위험인물이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피스나가 단검을 들어 자신에게 겨누자 운현은 웃으며 허리의 검을 움직여 단검을 쳐냈다.

"요한만은...!!"

"이자가 누워 있는 캡슐... 생명유지 기능만 달려 있는 거군. 그리고 의식의 분할까지 이루어져 있고."

"...뭐?"

이 캡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악신의 저주에 걸려 의식불명인 이를 지키는 가족이나 각 기관의 몇몇 외에는 캡슐의 기능을 잘 모른다. 그런데도 상대는 한눈에 캡슐에 대해서 알아차렸다.

아니 그뿐이 아니다. 의식의 분할. 자신이 요즘 생각하고 있는 기술의 초기 단계를 정확히 알아차린 것이다.

"당신... 뭐야. 당신도 제작자야?"

"제작자라기보다는... 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

만약 상대가 제작자이고, 자신과 버금갈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비타를 죽였다? 그건 물론 용서하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만약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요한을 깨울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자신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거래라고 했지... 그가 원하는 게... 그가 대가로 내놓을 것이...'

만약 상대가 자신을 죽이거나 요한을 납치할 생각이라면 이렇게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까 전 검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이 눈 앞에 있는 자의 일초지적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힘으로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았다. 그것에 약간의 기대감을 담아 피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알고... 있는건가?"

"크크크...알고 있다기보다는 이게 좋겠군."

피스나가 미끼 뿐만 아니라 낚시바늘까지 목구멍에 넣어버리자 운현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나지막한 웃음에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피스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운현을 보았다.

"자."

인벤토리에서 캡슐을 꺼낸 운현은 그 캡슐을 보자마자 피스나의 눈이 크게 떠지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라면 알 것이다. 부들부들 몸을 떨며 운현이 보인 캡슐 앞으로 다가가간 그녀는 캡슐의 여기저기와 내부를 확인한 후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거 설마."

"오호. 보자마자 눈치챈건가?"

모를리가 없다. 자신이 그토록 구현하고자 했던 장치이니 말이다. 엄청난 자금과 코어, 그리고 기술의 연구가 필요했지만 그 끝은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예상하고 있던 것과 약간 다른 생김새이지만 이것은 분명히 그것이 맞았다.

"...가상현실 접속기?"

"그래."

"이걸 어떻게 만든거지? 당신도 악신의 저주에 당한 피해자의 가족인가? 아니면? 아니, 그것보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피스나는 허둥거리며 운현에게 다가갔다. 그의 발이라도 핥을 기세로 간절히 운현에게 외치던 그녀는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움찔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

"오호. 사람을 불렀나?"

"...크윽...!"

상대는 위험인물이다. 그런 위험인물이라면 지금 그를 잡아두는 것이 맞다. 하지만 지금 상대가 가져 온 것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것일지도 몰랐다.

"자... 선택해라. 피스나."

"......."

그의 말에 피스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던전 도시를 지키는 네개 조직 중 하나의 수장으로서 이 위험인물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잠시 고민하던 피스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줘."

그녀가 손을 내민 것은 던전 도시가 아니었다. 그녀가 맥빠진 목소리로 말한 후 방을 나가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시청과 모험가 길드에서 온 이들에게 무언가 이야기하고 돌려보낸 피스나가 올라오자 운현은 의자에 앉은 채 말했다.

"이제 이야기 할 준비가 된 것 같군."

"그 전에 한가지만 답변해줬으면 좋겠군. 저건 진짜 그게 맞는건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정 궁금하면 실험해보지 그래?"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캡슐을 열었다. 그 안을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던 피스나는 자신의 캡슐을 열어 축 늘어져 있는 요한을 들어 운현의 캡슐로 옮겼다.

"제발...제발..."

캡슐 안의 접속기를 요한의 머리에 씌운 피스나는 부들부들 떨며 작게 중얼거렸다. 제발 이게 진짜이길.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요한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덜덜 떨면서 장치를 닫은 피스나는 운현이 콘솔을 넘기자 그것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작동방식은?"

"공용으로 쓰이는 거니까 댁도 알겠지. 자. 해보라고."

"...꿀꺽."

긴장하며 전원버튼을 누른 피스나는 빠르게 콘솔을 조작해나갔다. 그녀의 옆에서 콘솔의 조작법을 지시해 준 운현은 캡슐 옆에 달려 있는 액정에 빛이 차오르자 히죽 웃으며 말했다.

"마음껏 이야기를 나누시지."

[으으... 여긴 어디야?]

"요...한?"

[피스나...? 피스나!?]

"요한!!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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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자

[도대체... 여긴!?]

액정 안에 나타난 요한이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을 확인한 피스나는 콘솔을 조작하려 했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운현의 손에 의해 막혔다. 반 광란 상태가 되어 운현을 밀치려 했지만 힘에서 밀리는 피스나는 곧 씩씩거리며 눈물을 가득 담은 눈으로 운현을 노려볼 수 밖에 없었다.

"놔!! 놔아!!"

"진정하라고."

"...큭!!"

[피스나!! 피스나아!! 피스나에게서 떨어져!! 이 개자식...!!]

"그런 매도는 적당히 하지 그래. 이제 거래를 할 시간이니까. 당신은 이만 자라고."

피식 웃으며 콘솔을 조작해 요한의 접속을 종료시킨 운현은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달려 들 것 같은 기세를 뿜는 피스나를 향해 유들유들한 어조로 말했다.

"자. 이제 거래를 시작해볼까?"

"원하는게 뭐야. 뭐든 하겠어."

"얘기가 빨라서 좋군."

피스나의 입장에서는 미칠것만 같았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것이 눈 앞에 있다. 이것을 위해서 지금까지 연구를 멈추지 않았었다. 그 결실이 눈 앞에 있는데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피스나가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이겠다는 것에 운현은 싱글거렸다.

"자. 그럼 조건을 말하지. 내 부하가 되라."

"되겠어. 아니, 되겠습니다."

상관없다. 부하가 되는 것? 던전 도시를 넘기는 것? 제작자 연합의 장 자리를 넘기는 것? 그딴 것은 아무래도 좋다. 요한과 만날 수 있다면, 요한과 한마디라도 더 할 수 있다면 뭐든 관계 없었다.

"...너무 쉬운거 아냐?"

"그 기계... 그 기계를 주십시요. 아니, 한달 아니. 아니...!! 이주, 일주일이라도!!"

콘솔의 방식이나 캡슐의 형태를 보면 자신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만들어 배포한 캡슐을 개조한 것 같으니 해제를 해 조사하고 연구한다면 이와 똑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렵지 않지. 주는 것은 힘들지만 빌려주는 정도라면 말야."

"그럼...!?"

"하지만 널 어떻게 믿지?"

"예?"

"이런 기술의 경우 한번 베끼고 나면 끝 아닌가?"

"...그건."

운현의 심드렁한 말투에 피스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다. 처음 만들기는 어렵지만 복제 자체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복제에 성공하고 나서 자신이 운현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보장따위는 없었다.

"저, 저는 배신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거래를 끝낼 수는 없었다. 피스나는 운현의 바지를 잡고 엎드리며 간절히 애원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히죽 웃었다.

"뭐... 사실 보증따위는 필요 없긴 하지만 말야."

"....."

"아무래도 내 움직임이 걸리면 상당히 골치아프단 말이지."

"뭘 원하십니까!"

"절대적인 충성이지만 내가 이 자... 요한이라고 했나? 이자를 가지고 너와 거래를 했듯 다른 이가 이자를 가지고 나에 대한 배신을 빌미로 거래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의 말대로다. 만약 누군가 요한을 납치해 자신에게 협박을 한다면 자신은 그것을 따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피스나가 우울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히죽 웃었다.

"그런고로 너에게 절대적인 충성은 딱히 기대하지 않아."

"그럼...?"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을 해준다면 이 장치를 연구하도록 해주지."

"......"

지금 당장은 안된다는 것인가. 피스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감았다. 이자의 목적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자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던전 도시를 차지하려고 할 것이다.

"어떤 일을 하시려고 하는 겁니까."

"그게 궁금한가? 왜? 네가 원하는게 뭔지 잘 생각해보라고..."

피스나의 질문을 받은 운현은 그녀를 비웃었다. 모든 것을 투자해도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법. 그런데도 다른 것에 얽매이고 있는 피스나가 가소로운 운현은 자신의 캡슐을 챙겼다.

"기회는 항상 오는 것이 아니야. 지금 네 앞에 놓여져 있는 기회가 또다시 네게 다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건..."

이론은 세워 놓았다. 다만 연구를 위한 자금과 코어가 부족할 뿐이다. 그것을 위해서 던전 도시의 막대한 힘을 이용하고자 시장이 되려 했지만 제작자에 불과한 자신이 시장이 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던전 도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 그 시장이 된다는 것은 던전 도시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잘 생각해. 너따위가 시장에 오를 수 있을 것 같나?"

"저를 너무 무시하시네요."

"무시할 수 밖에.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다면 넌 이미 시장의 자리에 올라있을 테니까."

지금까지 전적을 따져보면 피스나가 던전 도시의 시장이 된 것은 단 한번도 없었다. 상인 조합, 아니면 용병 연맹. 이 둘 외에는 던전 도시의 시장이 된 조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던전 도시의 힘은 막강하다. 전력을 투자한다면 한 나라쯤은 가볍게 잡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 던전 도시다. 정책의 방향을 모두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정책의 방향을 가볍게나마 건드릴 수 있는 것이 던전 도시의 시장 자리다.

엄청난 이권, 엄청난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지만 그만큼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강한 무구를 만들 수 있지만 스킬과 레벨의 보정을 받는 용병 연맹, 그리고 막대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어 자금만으로 한 나라를 흔들리게 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상인 조합이 아닌 이상에야 던전 도시를 지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

운현이 정곡을 찌르자 피스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분한 듯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며 운현은 손을 내밀었다.

"현명한 선택을 기대하겠다. 자. 너에게 줄 수 있는 기회는 이것이 마지막이야. 네가 거절한다면 난 다른 방법을 쓰는 수 밖에 없으니까."

"...만약 제가 당신의 명령을 따른다면."

"음."

"그 장치를 제가 연구할 수 있게 해주실 겁니까?"

"어렵지 않지."

피스나의 질문에 운현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내 말만 잘 따른다면."

선택의 여지따위는 없었다. 그의 말대로 기회는 항상 찾아 오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요한이 악신의 저주에 걸려 의식불명상태가 되고 긴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좋은 기회는 단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거기에 자신은 방금 보지 않았던가. 비록 화면에 불과하지만 요한을 확인했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이렇게 뛰는데 여기서 뭘 어쩌란 말인가.

"...그가 요한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나요?"

한가지 의문을 풀어야 했다. 그 화면에 나타난 것이 진짜 요한인지 하는 것이다. 피스나의 굳은 얼굴을 보며 어깨를 으쓱인 운현은 캡슐을 꺼낸 후 그 안에 요한을 넣었다.

"너희 둘만이 아는 것이 있겠지. 자. 확인을 해보도록."

[피스나!?]

"요... 요한."

[피스나!?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여긴...!?]

"요한! 요한!! 잘 들어!! 내 질문에 답해줘!!"

[...응.]

액정 안에서 당혹스러워하던 요한은 피스나의 다급한 반응에 혼란을 참아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던 피스나는 몇가지 질문을 그에게 던졌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피스나의 질문에 답했다. 피스나의 성적 취향부터 시작해서 처음 만난 곳. 그리고 사소하기 그지 없는 둘만의 비밀들.

그 모든 것에 요한이 어렵지 않게 답하자 피스나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장치는 진짜고 저 안에 있는 것은 요한이 맞다. 피스나의 얼굴에 허탈감이 감싸돌자 요한은 콘솔 안에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피스나의 뒤에 있던 운현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내가 누군지가 중요한가?"

[...피스나를 괴롭히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가소롭기 짝이 없는 말이다. 이 세계에 존재조차 할 수 없는 자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협박을 하는 건가. 피식 터져나온 비웃음을 가릴 생각도 없이 운현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피스나에게 말했다.

"결정해."

결정이고 자시고 피스나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만약 그녀가 거래를 할 생각이 없었다면 아까 전 사람들이 왔을 때 운현을 공격했겠지.

그때 사람들을 보낸 순간부터 이미 피스나는 마음을 정한 상태나 다름없었다.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좋아. 그럼 잠깐 나가 있어줬으면 좋겠군."

"네?"

"나와 거래를 하기로 하지 않았나? 잠깐 나가. 요한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그와 거래를 하기로 한 이상 운현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다. 피스나가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겨 방 밖으로 나가자 운현은 캡슐을 작동시킨 후 가면을 벗었다.

[당신은...?]

"날 아나?"

[당신과 비슷한 느낌을 가진 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럴 것 같더군."

과거에도 요한은 자신을 보자 무언가 아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의 말에 운현은 천천히 얼굴을 쓸어만졌다.

[하지만 그건...]

"뭔가 아는 것이 있나?"

[...그 전에 당신이 먼저 답해줬으면 합니다.]

"얼마든지."

[피스나를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그녀를 죽일 겁니까?]

요한의 딱딱히 굳은 얼굴을 마주하며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스나의 죽음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적어도 운현이 아는 한 그녀의 죽음은 운명에서 비껴나 있었기에 그는 요한의 질문에 부정했고 그제서야 안심한 듯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악신의 저주에 걸리기 전... 한 남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을 현자라 말했고...]

"......."

[자신과 같은 느낌을 가진 자를 만나게 되면 그를 도우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그 현자라는 자가 말했던 것이 내가 맞나?"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 착각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현자가 제대로 일을 해줬군. 이 부분은 사전에 얘기가 되어 있던 것이니까...'

자신의 계획에 피스나의 움직임은 반드시 필요했었다. 하지만 피스나가 자신을 위해 움직이기 위한 목적의식은 부족하기 그지 없었다. 어쨌든 그녀의 이론은 거의 완성되어 있었고 필요한 것은 코어와 자금이었으니 말이다.

'다난교에서 피스나에게 접근하지 않았지만 만약 피스나를 손에 넣으려면 이것보다 쉬운 것은 없지.'

다난교가 움직이며 코어와 자금을 댄다면 피스나는 얼마든지 다난교를 위해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이 세계에서 최고의 기술자라 할 수 있는 피스나가 다난과 손을 잡게 된다면 상당히 일이 귀찮아진다. 현자와 운현은그것을 막고자 요한에게 접근하여 그의 협력을 얻어내기로 했고 과거로 간 현자가 요한과 만나 그와 거래를 한 것이다.

"그 대가로 받은게 뭐지?"

[피스나를 지키는 것. 그는 당신이 피스나를 지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악신의 저주에 걸려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할 때 저 대신 피스나를 지킬 것이라고...]

"그런 것인가. 좋아. 그자의 말대로다. 요한. 거래를 계속 이어갈텐가?"

[이어가야지요. 그것이 피스나를 위한 일이라면.]

현자가 밑밥을 깔아 둔 덕분인지 요한을 끌어들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간단하게 몇마디 나누는 것만으로 그의 협력을 얻어낸 운현은 문을 열고 밖에서 불안한 얼굴로 서성거리는 피스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요한!!"

[피스나. 내 말 잘 들어.]

"응...?"

[저 자를 도와줘.]

"요한? 갑자기 그건 왜..."

[부탁이야.]

요한의 말에 피스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요한의 뜻이다. 하지만 그것을 과연 따라야 하는 것인가?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이것으로 됐습니까?]

"아아."

가면을 쓴 운현을 향해 차분히 말한 요한은 슬픈 눈으로 피스나를 바라보았다.

[피스나... 조금만 기다려줘. 이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거야.]

"응... 응. 알았어."

결국 참고 있던 눈물을 흘린 피스나는 액정 너머의 요한에게 손을 뻗었다. 만질 수 있는 것은 그저 액정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는지 피스나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좋아. 여기까지."

"조, 조금만 더...!"

"아니."

여기서 계속 신파극을 찍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운현은 냉정히 피스나를 떼어낸 후 캡슐 안에서 요한을 꺼내어 피스나의 생명유지장치 안에 넣었다. 그가 요한을 빼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던 피스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그에게 말했다.

"제가 뭘 해야 하나요."

"해야 할 일은 일단 시장 선거에 등록하는 것. 시장이 되어줘야겠어. 그 이후의 일은 지시를 기다려라. 선거운동따위 필요 없으니까 등록만 하고 대기해."

"그건..."

"왜. 불만인가?"

"...알겠어요."

시장선거에 나서봤자 자신이 될 가능성은 낮았다. 그런데도 시장선거에 나선다? 거기에 선거운동도 하지 말라

고?

피스나는 그의 명령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연락하지."

"자, 잠깐!"

"뭐냐?"

"당신은 누군가요. 누구길래..."

"그건 알 것 없어. 그리고 이걸 인챈트하고 내가 말한 곳에 보내놔."

"이건..."

"인챈트 시간은 네시간을 주지. 네시간 안에 내가 원하는 만큼의 인챈트를 끝내놓도록."

그가 건네 준 장비를 확인한 피스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트호크 세트와 인챈트를 위한 코어들이었다. 꽤나 고급의 코어들을 서슴없이 넘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싸늘히 말했다.

"뻘짓 하지 마라."

싸늘한 어조로 그녀에게 말해 준 후 캡슐을 챙긴 운현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고 그가 나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피스나는 생명유지장치 안에 있는 요한의 볼을 쓰다듬으며 흐느꼈다.

"요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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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자

"운현. 어제는 외박하고 온거야?"

"외박이라기보다는... 좀 늦게 들어왔지. 너희들 깨울 것 같아서 다른 방에서 잤어."

거짓은 아니다. 피스나와의 만남을 마치고 2계층을 돌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나니 새벽 세시가 넘었고 방에 들어오니 다들 자고 있어서 빈 방을 빌려 거기서 잤으니 말이다.

"으으... 요새 너무 바쁜 거 아니야?"

"하하. 미안. 그런 만큼 이번에 벌충할게."

"그나저나 그건 뭐야?"

"아. 이거."

길드회관 1층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운현의 옆에 놓여진 커다란 배낭을 보며 미야가 묻자 운현은 그것을 가볍게 들어보였다.

"캠핑도구랑 기타 필요한 물품들. 당분간은 당일치기 던전행은 관두려고."

"헤에... 본격적으로 레벨업을 하겠다는 건가요?"

"응. 길드의 지원을 받기로 했으니까 말야. 바짝 돌아야지. 제니스씨나 펠리시아씨가 한가한 것도 아니고. 그렇죠? 제니스씨?"

"네. 그러게 말이에요."

길드에서 받는 지원을 위해 임시 파티에 참여한 제니스는 운현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기도 하며 하이엘프인 제니스가 지원해준다는 것에 바제트는 신기해하며 운현에게 물었다.

"우리 리더님은 능력도 좋아. 그나저나 제니스님이 끼면 어떻게 할거야?"

"음... 그건 생각해놨으니까 걱정마."

제니스를 파티에 끼워 넣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2계층에 들어가자마자 운현은 제니스에게 단독행동을 시킬 예정이었다.

'원래 이런 지원이라면 위기시 도우는 것과 전투법의 학습. 그리고 그 외의 서포트겠지만 말야.'

전투법의 학습은 운현이 충분히 가르칠 수 있었고 위기 상황도 운현 혼자서 막을 수 있었다.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그레이터 힐을 쓸 수 있는 이상 어지간한 문제는 막을 수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최고급 해독 포션과 성물을 잔뜩 챙겨왔으니 이정도라면 2계층 정도는 제니스 없이도 동료들의 레벨업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건 오빠에게 맡길게요. 그런데 오빠는 장비... 그대로 가려구요? 갑옷은요?"

"내 장비는 이걸로 할거야."

"그게 뭐에요?"

"성검 일레인. 던전 2계층은 언데들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고. 이게 있으면 여유있게 움직일 수 있겠지."

"방어구는? 방어구를 입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 맡겨논거야?"

운현이 입고 있는 것은 검은색 평상복이었다. 설마 그걸 입고 던전에 들어가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던 바제트가 묻자 운현은 피식 웃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운현님이세요?"

길드 회관의 문이 열리며 짐을 든 소녀가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운현을 발견하고 쪼르르 그에게 달려갔다. 달려 온 소녀의 지게 위에 올려져 있는 커다란 주머니를 확인한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운현인데..."

"아스님이 보내신 짐이에요. 오실버입니다."

어젯밤 피스나에게 던져 놓은 나이트 호크 세트가 돌아왔다. 운현이 어젯밤 피스나에게 준 주소는 아르토리우스의 숙소 주소였다. 운현과 밀회를 위해서 준비해 놓은 그 숙소로 나이트호크 세트를 보내게 한 운현은 아르토리우스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 준 것에 만족했다.

"아스? 그건 또 누구야?"

새로운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미야는 뾰로통한 얼굴로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런 그녀의 볼을 쿡 찌른 운현은 소녀가 건네 준 짐을 받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아입고 올게."

"응."

운현이 장비를 챙겨들고 위로 올라가자 자리에 모여 있던 여인들은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운현과 파티가 되어서 빠르게 레벨업을 하고 실력이 느는 것은 좋다.

"분명히 좋은 관계가 되는 것 같긴 한데 말이지..."

그에게 큰 도움을 받은 미야는 도톰한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와 좋은 관계가 된 것 같기는 하다. 분명히 그는 자신을 돕고 또 아껴주고 있었다.

"이정도면 슬슬 좀 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미야의 투덜거림에 동의하듯 바제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과 좋은 관계가 될 가능성은 무척이나 많았다. 하지만 별을 따려면 일단 별을 같이 봐야 할 것 아닌가.

"매번 밤마다 사라지니 이거 원..."

"헤헤헤..."

그런 그녀들에 비해 헤스티아는 나름 괜찮은 상황이었다. 어쨌든 운현과 공식적으로 연인이라는 위치에 있지 않은가. 그녀의 머쓱한 웃음에 미야와 바제트는 발끈했다.

"너 지금 우리 동정하니!?"

"요게 진짜~!!"

"꺄악~!!"

성질을 내고 있지만 진심은 아닌 듯 보였다. 장난스럽게 자신에게 꿀밤을 때리고 볼을 꼬집는 둘을 피하며 제니스의 뒤에 숨은 헤스티아는 문득 생각난 듯 제니스의 드레스를 살짝 잡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제니스님."

"음? 왜?"

"혹시... 제니스님도...?"

운현과 엮이는 여자들이 대부분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헤스티아는 걱정을 담아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제니스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운현씨와는 그저 업무상으로 알게 된 관계일 뿐이야. 물론 내가 그에게 큰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녀간의 관계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도록."

"그, 그럼 다행이지만."

이렇게 말해놓고 나중에 뒤통수 치는 것은 아닐까? 살그머니 제니스를 바라 본 헤스티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이엘프라는 종족답게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무척이나 고상하고 아름다웠다. 비록 얼굴의 반을 붕대와 같은 안대로 가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매력이 감춰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

얼굴의 반을 가렸기 때문에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가 넘쳐난다. 그것에 헤스티아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 길드회관의 문이 열렸다.

"오! 필레 아냐!?"

"어제 어땠어!?"

"......."

"아하하... 그게."

어제 운현이 필레와 약속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린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긴장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섭기는 필레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길드에서도 무척이나 인기가 있는 그녀다. 그녀까지 가세하면 진짜 운현과 시간을 가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어라? 필레 아냐."

"우, 운현..."

어느새 갑옷을 다 입은 운현은 회관에 서서 사람들의 야유와 환호를 받는 필레를 발견하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본 필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머뭇거리며 말을 제대로 꺼내지도 못하고 행복한 미소를 짓다가 몸을 베베 꼰 그녀가 후다닥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버리자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했네, 했어.'

"뭐야? 이 분위기는."

"저기 운현."

"왜?"

"그... 뭐랄까. 했어?"

회관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험가들의 공통적으로 궁금해하지만 차마 묻지 못한 것을 대변하듯 미야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글쎄?"

"했구나!!"

"으아아아!! 필레보다 늦어지다니!!"

"죽고 싶다..."

"끙..."

"피, 필레씨보다 늦어지다니..."

운현과 같은 파티인데도, 그와 가까워 질 수 있는 계기나 기회는 더 많은데도 필레보다 늦어졌다는 것에 미야와 바제트는 절망했다. 그녀들을 보며 키득거린 운현은 바닥의 가방을 들어 메고 제니스에게 말했다.

"들었겠지만 이번 던전행은 최소 3일입니다. 준비는 끝나셨나요?"

"네."

자신의 옆에 있는 짐을 보여주며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갑시다."

2계층으로 가기 위한 신전으로 걸어가며 미야와 바제트는 뒤에서 원망스러운 눈으로 운현의 뒤통수를 노려보았고 헤스티아는 쓰게 웃으며 그녀들을 달랬다.

제니스와 함께 앞서 걸으면서 그녀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운현은 빙글빙글 웃었다.

"인기 많으셔서 좋으시겠군요."

"별말씀을... 그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죠."

"지원 부분인가요?"

"네. 2계층에서 제니스씨는 따로 움직여주셔야겠습니다."

"따로라... 코어를 모아 오라는 건가요?"

"네. 저번 계층주 토벌때 사람들에게 상당한 호감을 얻었습니다. 물론 갑작스럽게 큰 레벨업은 무리겠지만 자잘한 정도의 레벨업은 괜찮겠지요. 이것을 추가해주세요."

"이건..."

운현이 건넨 주머니의 내용물을 확인한 제니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3계층과 4계층의 코어가 잔뜩 들어 있는 마석을 받은 그녀는 운현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고 여쭤봐도..."

"네. 답변 안할겁니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주세요."

"......"

생긋 웃고 있지만 가혹하기 그지 없는 발언이다. 그의 말에 제니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토라진 듯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걷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우드는..."

"네."

"제가 얻은 정보로 하우드는 자살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처음 듣는 이야기인듯 제니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보았다. 그녀의 반응에 운현은 입을 다물었다. 제니스가 자신을 속이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기에 그녀의 행동은 이상하다.

이런 반응이라면 제니스는 진짜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물론 희대의 연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 가능성은 낮겠군. 이유가 없어.'

현자와 둘이 내린 결론으로 제니스는 위험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녀에게는 이유가 없다. 굳이 이유를 따진다면 그녀가 진짜로 사랑하는 연인이 누구냐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현자의 의견에서도 제니스가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이유는 없었다.

'진짜 하우드를 사랑하기 때문인가.'

하우드를 사랑하기에 제니스는 그를 위해 운명을 바꾸려 한다. 과연 그것이 진짜일까? 운현은 제니스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악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죄송합니다. 아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과거 파르티와 대결하여 패배한 신이고 어딘가에 봉인되었다는 정도 밖에..."

"그런가요? 그렇다면 됐습니다."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제니스가 차분히 답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겟다면 됐다. 굳이 여기서 제니스를 추궁할 이유는 없었다.

"만약 하우드가 죽는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가 죽는다... 그는 죽지 않습니다."

"저는 이계인.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입니다. 만약 제가 그를 죽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그를 사랑하기에 살리고 싶은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저와 하우드의 관계는..."

제니스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하우드와 자신의 관계는 사랑하니 마니 같은 것으로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관계가 아니었다.

"애증... 일까요."

"애증? 그를 증오한다는 겁니까?"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요... 저의 운명은 그에게 엮여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안정되고 편안하며 조용한 삶이었지요.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무너트리게 만든 하우드를 증오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운명에 의해 그를 사랑하기도 한다는 것이군요."

"...네. 하우드와 저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곳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거의 남매나 다름없지요. 그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라고 여쭤보신다면 사랑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렵군요."

"흐음... 그럼 제니스씨. 당신은 하우드를 남자로 보지 않는다는 건가요?"

"글쎄요. 그에게 안겼을 때 두근거리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만 뭡니까?"

"후훗. 그건 제 개인적인 감정일 뿐입니다. 어쨌든 하우드는 운명을 거스르려 저와 맺어지기보다는 계속된 죽음을 택했죠. 그런 그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나요?"

"그런가요..."

운명에 정해져 있는 사람이지만 그가 운명을 거스르려 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공공연히 말하고 죽음을 반복하는 하우드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하우드에 대해서 뭔가 알고 계신 것이 있나요? 아까 말씀하신 것은..."

"아직 확인해봐야 합니다. 하우드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삼백년 전입니다. 그는 저와 만나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바로 죽음을 택했고 그 이후로 그와 만난 적이 없어요. 들리는 이야기로는 아직 엘프의 숲에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게 진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는 많은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고 엘프의 숲에서 할 수 있는 죽음의 방법은 거의 전부 시도해봤을테니... 지금쯤이면 다른 방법으로 죽기 위해 세계를 돌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렇습니까?"

"네."

한치의 거짓도 없는 듯 제니스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하우드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은 라닌 뿐이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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