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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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공작
"제니스와 펠리시아를..."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그 둘을 운현의 파티에 붙여놓는 것은 다른 길드 간부나 길드원이 지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라고 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만... 그 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안돼?"
"안돼."
"아둔이나 에리스는 어때? 뒤에서 버프를 걸어 줄 수도 있고. 너희 파티는 제대로 된 탱커가 없잖아. 미야나 너나 탱커라기보다는 보조에 가까운 것 아닌가?"
"그렇긴 하지. 그래도 안돼."
자신의 의견에서 한발자국도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는 운현의 모습에 상아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어쩔 수 없다.
"그 둘이 해야 할 일은 많아."
"그럼 이렇게 하자. 매일 같이 붙어다닐 필요는 없어. 그리고 동시에 둘이 올 필요도 없고."
"흐음..."
"조율이라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지. 어때? 난 내가 할 수 있는 양보는 다 한 것 같은데."
솔직히 길드원이 되는 것은 운현에게 있어서 나쁘지 않은, 아니. 어쩌면 필수적인 제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은 채 상아에게 협상을 걸었고 운현의 속내를 알 수 없었던 상아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아아! 정말. 넌 매번 날 곤란하게 하는구나! 미치겠구만! 좋아! 받아들이겠어!"
"감사할 만한 일이군."
"그렇지만 그 둘이 거절하면 나로서도 방법이 없어. 그건 이해해줘야 해."
"알았어."
상아가 입술을 삐쭉거리며 말하자 운현은 그녀를 향해 빙긋 웃었다. 그의 미소에 상아는 살짝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린 후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왜 이렇게 쟤한테는 말리는 걸까?"
'과거에는 내가 항상 말려왔으니까. 이제 좀 갚는 거다.'
"아. 그리고 한가지 부탁하고 싶은게 있는데."
"또 뭐?"
"우리 레벨이 이제 100이 다 되가거든. 아마 내일 아침에 마석을 납품하면 그걸로 100레벨이 될 수 있을거야. 곧장 다음 층으로 가고 싶은데 계층 수호자 토벌대에 넣어 줄 수 있어? 알아보니까 내일 출발하는 토벌대가 있던 것 같던데."
"그건 또 언제 알아본거야? 음... 있기는 한데. 뭐. 상관없겠지. 너희들이 다음 계층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여기서 버티는 것도 우리에게 손해니까. 좋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해줄게."
"고마워."
"별 말씀을. 그보다 운현."
"응?"
"진심으로 물어볼게. 정말 내 스승님... 현자가 어디 있는지 몰라?"
간절한 시선을 마주하며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로서도 현재 현자의 위치는 알 수 없었다. 과거에 던져 놓은 후부터 현자에 대한 소식이나 정보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을 꺼놨으니 말이다.
'현자의 시간으로 내 기억과 감정, 현자의 지식을 공유하기는 했지만...'
"몰라."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해봐."
"진짜 몰라."
"으..."
상아와 얼굴을 가깝게 한 후 그녀의 회백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운현은 당당히 말했다. 그의 곧은 시선에 상아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신음했다.
"알았어..."
기대가 컸던 만큼, 그에게 그런 기분을 느꼈던 만큼 실망감은 더욱 큰 모양이다. 상아는 풀죽은 얼굴로 시무룩히 말했고 그녀를 향해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난 이만 돌아가볼게."
"아... 그."
"응? 왜?"
자리에서 일어난 운현의 옷자락을 상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잡았다.
"...저기 한가지 부탁이 있는데 말야."
"부탁...? 아. 오늘 있었던 일을 비밀로 해달라는 것? 괜찮아. 말 안할게."
"아, 아니 그것도 있고."
"그럼?"
"그... 으으... 가, 가끔이라도 좋으니까."
"...?"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상아는 입술을 달짝거리며 머뭇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손을 뻗어 상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얼굴을 가까히 하며 웃었다.
"가끔이라도 좋으니까 이렇게 쓰다듬어주고 위로해달라고? 내가 원하는 일이야. 상아. 너는 너무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려고 하는 것 같아. 그게 문제라고. 가끔씩이 아니여도 괜찮아. 힘들때면 언제든지 내게 기대. 내가 너를 지탱해줄테니까."
"뭐, 뭐야! 아직 100 레벨도 안되면서!"
"레벨이 중요한게 아니지. 다들 그러더라고. 표면적인 것에 너무 집중하지마. 사람의 강함은 레벨이 전부가 아니야."
'중요한 것은 스탯이지.'
"...말은 잘해요. 300레벨이나 찍고 직업 심화나 이루지 그래? 아. 그리고 내가 준 반지는 착용하고 있어?"
"응."
오른쪽 검지 손가락에 채워져 있는 반지를 들어 올리자 상아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300레벨이 되면 직업 심화에 도전할 수 있어. 직업 심화를 했느냐 안했느냐에 따라 고급 모험가와 일반 모험가의 차이가 갈리니까 꼭 도전해봐. 아마 너라면 가능할 것 같지만..."
"직업 심화라... 너도 직업 심화로 마법을 쓸 수 있게 된거야?"
"응. 그 반지 덕분에 마법사의 직업 적응력을 높일 수 있었어. 300레벨이 되어 잡파인더를 통해 추가 직업을 얻을 수 있으니까 꼭 도전해."
"알았어."
이 세계의 직업은 재능과 적성에 따라 결정된다. 검사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300레벨이 될때까지의 행동에 따라 격투가가 되거나 전사의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검사가 마법사의 직업을 얻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말야.'
행동 방침에 따라 직업 적성이 발달되는 것이기에 검사나 전사처럼 육체를 다루는 이들이 마력을 이용하고 정신을 단련하는 마법 직종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검사가 그토록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나랑은 상관이 없군.'
잡파인더가 운현의 직업을 정하지 못한 이유가 운현이 모든 종류의 직업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모든 종류의 직업과 적성이 맞기 때문에 잡파인더가 그에게 맞는 직업을 찾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세계에서 각종 직업이란 직업을 경험하고, 그것에서 달인의 경지에 올라간 경험을 가진 운현에게 있어서 행동방침에 따라 직업이 결정된다는 이야기는 운현이 모든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마검사라. 뭐 나쁘지 않네."
"응. 네가 내 뒤를 이었으면 좋겠어."
"그래. 알았어."
상아의 기대감 섞인 목소리에 웃어보이며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떼었다.
그것이 아쉬웠는지 상아의 입에서는 작게 탄식이 터져나왔지만 그녀는 더 이상 운현을 조르지 않았다.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 준 상아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운현은 느긋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럼 진짜 갈게."
"응... 잠깐만!"
"어? 왜?"
"어? 왜? 는 무슨! 너 말 안한 거 있잖아!"
"말 안한... 아. 그거."
흰 후드 검사의 정체. 운현이 원하는 사람을 지원해주기로 하고 대답을 듣기로 했던 것을 떠올린 상아는 그냥 나가버리려는 그를 향해 발끈하며 소리쳤다.
"아. 그거? 날로 먹으려고!?"
"그냥 까먹은 것 뿐이야. 화내지마."
씩씩거리는 상아를 향해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인 운현은 볼을 긁적거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굴 것 같아?"
"몰라!"
"너는 타인의 스킬을 보는 능력이 있다고 했잖아. 그럼 대충 알 수 있지 않아?"
"일반적인 검사의 스킬만 가지고 있다고. 몰라."
"흐음... 그래. 그럼 말해줄게."
과거 천검자와 상아는 함께 던전을 탐험한 적이 있었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벌써 눈치챘을 것이라 생각한 운현은 상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천검자."
"...응?"
"천검자라고. 400레벨이 넘는 너와 비타씨를 압도할 정도의 힘을 가진 자. 그 자는 바로 천검자야. 현재 세계 최강의 검사. 초인이라 불리는 자. 그자라면 너를 압도한 것도 이해가 가지."
"천검자... 그 여자가 왜?"
"다난과 손을 잡았으니까. 내가 알아낸 것도 이정도 까지야. 자세한 것을 알게 되면 알려줄게."
한때이기는 하지만 함께 던전을 같이 탐험했던 동료였던 천검자가 어째서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일까. 그녀의 성격이 날카롭기는 했지만 함부로 사람을 죽일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던 상아는 멍한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천검자가 확실해?"
"응."
"잘못... 안게 아닐까?"
"믿을 수 없다면 믿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천검자가 은거를 풀고 세상에 나왔다는 소식은 조금만 조사해보면 될거야. 정 뭐하면 나중에 만났을 때 물어보든가."
"믿을 수 없어. 그 여자가 왜 날...?"
"그거야 난 모르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가로저은 운현은 충격받은 듯한 상아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운현은 그녀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너무 그렇게 실망하고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 초인이라고 하지만 결국 한 사람일 뿐이야. 그리고 네 곁에는 너를 믿고 너를 아끼는 사람들이 많아. 절대 네가 천검자에게 당하게 그냥 두지 않을거야."
'그러기 전에 내가 끝장을 내버릴 거니까.'
라닌과의 대화가 끝나면 천검자와 라닌, 필요하다면 모두 제거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신성을 공급받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아의 정해져 있는 운명 전에 그녀를 위협할 수 있다면 그들은 운현에게 있어서 최우선 적으로 제거해야 될 대상에 불과했다.
"으, 두렵긴 누가 두려워."
운현의 품에 안기고 나서야 서서히 정신을 차렸는지 상아는 작게 떨리는 어조로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은 상아는 꼬물거리며 운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냥... 날 알던 사람이 날 죽이려고 한 것에 놀랐을 뿐이야.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인 내가 고작 천검자 정도를 두려워할 것 같아?"
"그래. 그래야 상아지."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고, 5계층의 몬스터들 앞에서도 두려움을 몰랐던 상아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 운현은 씨익 웃었고 상아 역시 그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난 이제 진짜 가볼게. 오늘 여러 일이 있어서 피곤했을텐데 어서 쉬어."
"응... 그리고 운현."
"왜?"
"고... 마워."
"뭐가? 딱히 그럴 만한 일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 아르토리우스와의 일? 하하. 괜찮아. 그건 신경 안써도 괜찮으니까 말야."
"후. 알았어. 푹 쉬어. 안녕. 잘자."
"그래. 너도."
문을 나서는 운현에게 작게 손을 흔들어 준 상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터벅터벅 걸어 침대 위에 살짝 걸터 앉았다.
"...오래간만이었어. 이런 느낌."
스승님이 없어진 이후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 그리고 마음의 따스함. 상아는 살며시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대고 눈을 감았다.
'오늘은 스승님의 꿈을 꿀 것 같아.'
천천히 침대 위로 쓰러진 상아는 살며시 손을 들어 머리를 만졌다. 아직도 그의 손길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온 몸 가득히 느낄 수 있었던 운현의 품 안. 그리고 그때 맡았던 그의 향기를 떠올리며 상아는 살며시 미소지었다.
"잘자..."
"......"
상아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운현은 길드를 나섰다. 빠르게 움직여 용병 연맹 건물 근처까지 온 운현은 하이딩을 걸고 용병 연맹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연맹장이 바뀐지 얼마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는지 과거처럼 제대로 된 경비를 서는 이들은 없었다.
하이딩을 걸고 여유롭게 그들을 피해 연맹장의 방으로 이동한 운현은 열려 있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
넓은 방. 장식따위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고 책상 하나와 책장 하나만이 있는 넓은 방의 책상 앞에 앉은 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인을 발견한 운현은 빠득 이를 갈았다.
"아르토리우스."
"...찾아 오실 줄 알았습니다."
빈 공간에서 운현이 나타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르토리우스는 놀라기보다는 반가운 얼굴이었다. 달빛을 등지고 어두워져 있는 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웃음에 운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성큼성큼 다가갔다.
"큭."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토리우스가 다가오자 운현은 그녀의 하얀 목을 강하게 잡아챘다. 자신의 목을 잡은 강한 힘에 아르토리우스가 고통스러운 얼굴이 되자 운현은 그녀를 끌어당기며 싸늘히 말했다.
"왜 상아를 공격했지?"
"...커윽...컥."
목이 졸리는 고통에도 아르토리우스는 저항을 하지 않았다.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고 있음에도, 숨이 가파로워지고 있음에도 아르토리우스는 그저 순순히 운현이 주는 고통을 받아들였다.
"콜록! 콜록!"
한계까지 그녀의 목을 잡고 있던 운현은 그녀의 눈에서 힘이 풀리자 손에 넣은 힘을 풀었다.
"대답해."
"커헉...헉...헉..."
바닥에 허물어져 숨을 헐떡거리는 아르토리우스를 싸늘히 노려보며 운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운현을 힘겹게 올려다 본 아르토리우스는 광기와 애정이 섞인 묘한 눈으로 운현을 올려다보며 간절히 말했다.
"운현님... 당신을... 위해섭니다."
"뭐가 날 위해서냐. 내가 널 만들어낸 이유는 그녀들을 구하기 위해서다. 그것을 무시할 생각이냐?"
아르토리우스의 말에 운현은 인상을 쓰며 검자루를 잡았다. 그런 그를 향해 작게 한숨을 내쉰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더 운현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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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공작
"네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르토리우스를 비웃으며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행복? 운명과 싸워 그녀들을 구하기 전 까지 행복하겠다는 꿈은 포기한지 오래다.
"네가 날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네. 저는 가능합니다. 저는 그 여자와 다릅니다."
"뭐가 다른데?"
"상아는... 모험가 길드에 속박되어 그것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인 것은 운현님이 아닌 모험가 길드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나를 위해서라면 용병 연맹도 버릴 수 있다는 거지?"
"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르토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 연맹? 이딴 것은 운현을 모시는데 거추장스럽기만한 조직이다. 아니. 이런 던전 도시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던전 도시에서 아르토리우스가 가진 기억은 우울한 기억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굳이 하나 있다면 운현을 만난 정도. 그 외에는 던전 도시에 좋은 기억이 단 하나도 없었던 아르토리우스는 굳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이딴 것 필요 없습니다. 높은 지위도, 명예도. 많은 돈도. 제가 운현님과 함께 한다면 운현님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겠습니다. 그 여자를 구하기 위해서 운현님께서 고생하시는 것... 저는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제작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위신체답게 아르토리우스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다름아닌 운현이었다. 그런 운현이 스스로의 행복을 버리고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이 거슬렸던 그녀는 간절한 얼굴로 그를 보며 운현의 발을 잡았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제가 사랑하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
"운현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습니다. 저는 운현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 그렇기에 운현님이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운현님께서 너무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그건 네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이다."
과거의 아르토리우스를 떠올리며 운현은 얼굴을 쓸어만졌다. 과거의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현이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그와 함께 살아갈 각오를 아르토리우스는 늘상 가지고 있었다. 그저 운현에게 필요하기에 용병 연맹을 움직이고, 그저 운현이 원하기에 미워하는 다른 여인들을 지켰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결국 똑같구나."
아르토리우스가 왜 감정을 잃어버렸는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과거의 자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르토리우스의 간절한 구애와 부탁에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회귀를 반복하며 그녀들을 구할 방법을 찾아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그냥 지켜 볼 수 밖에 없었겠지.'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몇번이나 죽을 고생을 하고 고통을 겪는 것을 지켜보며 멀쩡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아르토리우스 역시 감정을 지운 것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절망을 감추기 위해서 늘 웃을 수 밖에 없었던 운현.
절망을 숨기기 위해서 늘 웃을 수 밖에 없었던 아르토리우스.
운현은 눈을 감은 채 깊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
"제발... 제발 부탁입니다. 뭐든 하겠습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제발 그들을 구하는 것을 포기해주세요. 그들 때문에 당신이 고통받는 것을 더 이상 보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어떤 시련이 막아도, 그 어떤 고난이 있어도 운현은 단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궁리하고 고생하고, 몇번이나 넘어지며 구르는 한이 있어도 운현은 자신의 목적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편법을 이용하면 이용했지 난 포기하지 않아."
"운현님..."
마치 가면과도 같은 얼굴로 그가 말하자 아르토리우스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운현의 다리를 잡고 있던 팔에 힘이 빠진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를 내려다보던 운현은 쪼그리고 앉아 아르토리우스의 어깨를 잡았다.
"네가 날 생각해 주는 것은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운현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세운 계획. 최악의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구상도...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처도 알고 있습니다."
"....."
"그래도... 저에게 당신을 도우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무덤덤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토리우스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아르토리우스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을 참지 못한 그녀가 고개를 들고 무시무시한 얼굴로 자신을 쏘아봄에도 불구하고 운현의 얼굴은 가면같은 무표정 그대로 변하지 않았다.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제가 당신을 방해한다면요?"
"할 수 있겠냐?"
"불가능...하겠죠."
운현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운현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니 말이다.
"상아를 공격할 때만 해도 손이 제대로 나가지 않았었으니까요. 위신체인 저에게는 의지가 없으니까... 결국 운현님의 의지를 따를 수 밖에 없으니까."
"알고 있군."
아까 전 상아를 공격했을 때 진심을 낼 수 없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쏟아 붓는다면 상아와 싸워 이기는 것은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몸이 거부를 한 것이다.
'그녀들을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네... 제 부하들을 이용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넌 그렇게 못할거야."
"....."
그의 말대로다. 만약 자신이 부하들을 이용해 상아를 비롯한 그의 다른 연인들을 공격해 죽이기라도 했다간 운현이 자신을 적대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운현에게 의지와 생명, 사명을 받은 아르토리우스에게 있어서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운현에게 미움 받는 것. 운현이 자신을 보지 않는 것. 운현이 자신을 증오하는 것.
"제가... 못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약간의 허세를 부려보았지만 운현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무심한 그의 시선에 결국 고개를 푹 숙여버린 아르토리우스는 북받쳐 오르는 슬픔에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흑..."
"울지마라."
"흐흑...흑..."
"울고불고 질질 짜도 소용없으니까 말이지."
임시방편으로 달래봤자 그녀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해 줄 수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운현이 무심한 어조로 말하자 아르토리우스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다가 겨우 울음을 멈추고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해야 할 일이 있다."
"...뭔가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아르토리우스가 천천히 답하자 운현은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이번 시장 선거에서 피스나가 시장에 당선되게 만들어라."
아침이 되자 헤스티아는 살며시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침대 주변에는 미야와 바제트만이 누워 잠들어 있을 뿐 운현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또...?'
운현과 만나고, 그와 맺어진 이후 운현과 같이 잠든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늘상 밤마다 어딜 가는지 옆에서 자는 것을 본 적이 없던 헤스티아는 작게 한숨을 폭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오빠는 매번... 도대체 뭐 때문일까."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나간 사이 다른 여자 모험가들이 다가와 운현을 꼬실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물어 보는 이들이 꽤 있었다.
자신과 비교해서 전혀 밀리지 않을. 아니 오히려 더욱 매력적인데다가 레벨도 높은 모험가들인데도 운현은 눈꼽만큼의 관심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이 더 놀랬었지.'
운현과 어떻게 만나게 되고 연인이 되었느냐는 질문에 헤스티아는 숨기는 것 없이 답했었다. 그가 먼저 다가오고 그가 먼저 사랑을 고백했다. 그 외에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라는 대답에 그 모험가들의 표정은 우습기 짝이 없었다.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했다. 길드 뿐만이 아니라 많은 클랜들의 관심을 받는 운현이다.
비록 근접 딜러라는 직업 군 내에서 그리 선호받지 않는 위치에 있지만 그래도 남자 모험가라는 것 때문에 여기저기서 유혹을 받는 운현이었지만 그는 묘할 정도로 타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상냥함과 애정을 보이는 대상은 오직 자신들, 그리고 모험가 길드의 몇명에 불과했다.
"으으으..."
"똑똑."
문이 두드려지는 소리에 헤스티아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다. 꽤 이른 시간이지만 다른 모험가들이라면 벌써 일어나 던전에 갈 준비를 했을 시간이다.
"미야 언니. 바제트 언니. 이제 일어나요."
"으으음... 조금만 더..."
"오분만..."
"아아! 정말! 빨리 일어나라구요! 오빠가 기다리니까!"
"알았어어..."
아침에 깨울 때마다 매번 고역을 치루는 헤스티아는 둘이 밍기적거리며 일어나는 것에 쓴웃음을 지었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로브를 걸쳐 입은 후 살그머니 바깥으로 나간 그녀는 계단의 난간에서 1층을 쭉 둘러보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회관의 테이블 중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헤스티아는 자신도 모르게 환히 웃으며 계단을 뛰어내려가 그에게 폭 안겼다.
"오빠!"
"일어났어?"
"네! 헤헤... 어제는 어디서 주무셨어요?"
"방에서. 너희들 잘 자던데?"
"정말요?"
"그럼. 너 잘때 침흘리면서 자더라."
"에엑!? 보, 보신거에요?"
그렇게 칠칠맞은 모습으로 잤단 말인가? 항상 예쁜 모습만 보이고 싶었던 헤스티아는 운현이 웃으며 입가를 손가락으로 닦아주자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손은 헤스티아의 허리에 감겨 있었고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그가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빨개진 얼굴로 고스란히 당할 수 밖에 없었던 헤스티아는 그가 손을 풀어주자 후다닥 도망쳐 올라갔다.
"어, 얼른 씻고 올게요!"
"천천히 해. 급할 거 없으니까."
"왜요?"
"사무소에서 레벨 올리고 오늘은 바로 계층주를 잡으러 갈거야."
방에 들어가서 자기는 커녕 밤새 길드 회관의 구석진 테이블에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그리고 오늘 만날 라닌에 대해서 생각하며 밤을 샌 운현은 헤스티아가 손을 흔들며 방으로 돌아가자 웃는 얼굴을 지우고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커피 한잔 더 하시겠습니까?"
"아. 응."
메이드가 따라 준 커피를 홀짝이며 운현이 생각을 이어가는 동안 길드 사무소의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걸어나왔다.
"운현씨. 잠깐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모험가 길드의 간부 중 하나인 펠리시아다.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오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는 힘들겠죠?"
아침부터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모험가들이 많다. 그들을 둘러보며 운현이 묻자 펠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스티아들이 나오면 얘기 좀 전해줘. 기다리고 있으라고."
"알겠습니다."
다른 모험가의 주문을 받아 주방으로 향한 메이드에게 1골드를 쥐어주며 부탁한 후 펠리시아의 뒤를 따랐다. 사무소가 아닌 길드 바깥으로 이동한 펠리시아는 운현을 길드 뒤의 작은 공터로 데려갔다.
'여기서 필레랑 티르빙이 붙었었지... 티르빙이 아르토리우스에게 패배했으니 둘 사이의 대립 관계는 없어졌으려나.'
"운현씨."
"네."
"왜 저죠?"
"예?"
"상아 길드장님에게 들었어요. 운현씨를 지원하는 길드원으로 왜 저를 선택하신 건가요? 제가 그렇게 한가해보이나요?"
약간 화가 난 듯 날선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무덤덤히 받던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그런 거죠."
370====================
뒷공작
"믿을 만한 사람? 그게 무슨..."
"상아를 좋아하나요?"
"좋아하냐 싫어하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좋아하긴 합니다만 그게 왜 지금 여기서 나오죠?"
"알고 있어요. 당신이 상아를 좋아하고, 또 믿고 따르고 있다는 것 쯤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에요."
"그러니 당신을 선택한겁니다."
"그렇게 심각하게 얘기해봤자 저랑은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요. 전 바쁘다구요. 지원이라면 다른 사람을 골라주세요."
펠리시아는 안경을 고쳐쓰며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상아가 운현을 마음에 들어하고, 필레가 운현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알고 있다.
운현의 능력이 뛰어나 레벨을 올리면 길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때의 일이다. 지금 당장 눈 앞에 있는 일도 처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를 지원할 여유따위는 없었다.
"지금 눈 앞에 산적한 문제만 해도 엄청나요. 당장 시장 선거에서 피스나씨가 당선되지 않는다면 저희에게 큰 손해가 발생할 거에요."
"피스나가 당선되야 한다...? 왜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던전 도시의 힘이 너무 강해졌다는 거죠. 윈디아 시장은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안전한 방향을 중시하는 사람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서 던전 도시의 부를 축적시켰죠. 가뜩이나 여기저기의 견제를 받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윈디아 시장이 재선에 성공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요?"
"돈은 돈을 부른다. 지금까지 쌓은 부를 이용해서 더 많은 부를 쌓으려 하겠죠."
"네. 새롭게 용병 연맹의 연맹장이 된 아르토리우스야 그녀에 대해서 잘 알 수 없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윈디아가 시장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해요. 모아 놓은 자원을 어느정도는 써버려야 한다구요."
"그래서 피스나씨다?"
"네. 피스나의 목표는 던전 도시의 자원을 활용해서 던전 도시의 기술력과 연구수준을 높이려고 하니까요. 다음을 위해서라도 던전 도시의 시장은 피스나가 되어야 해요. 하지만..."
펠리시아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현재의 상황이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것이 불만인 그녀는 작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아... 제가 왜 이런 얘기를 운현씨에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마법사가 필요하시다면 다른 사람을 추천해줄게요.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마법사 중에 지원하는 것을 잘 하는 사람을 알고 있으니까요."
"마법사가 딱히 필요한게 아닙니다."
"그럼 왜 저죠?"
"당신은 믿을 수 있으니까."
"...헤에. 그거 신기한 얘기네요. 운현씨. 저를 아세요?"
펠리시아의 질문에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은 있죠."
"아... 그러시구나. 그럼 바쁜 사람 보는 눈은 없으신가보네요."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운현에게 이죽거린 펠리시아는 한숨을 푹 내쉰 후 안경을 벗었다.
"지금 이런 일로 운현씨랑 싸울 생각은 없어요. 오늘만 해도 상아 길드장님을 보좌해야 한다구요."
"하세요. 상아에게도 이야기했는데요. 제니스씨와 펠리시아씨 둘 모두 필요한 건 아니라구요."
"왜요?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죠? 이상해요. 운현씨. 운현씨의 행동을 보면 항상 효율적인 방법만을 채택했잖아요. 그런데 왜 이런 비효율적인 방법을 쓰려는 거죠? 당신이 원한다면 3계층이나 4계층에서 움직이는 길드원을 열명 이상 지원해 줄 용의가 충분히 있어요. 그런데 왜 간부급을 요청한거에요? 그것도 운현씨와 사이가 좋은 필레나 상아가 아니라 제니스씨와 저를 선택하신거죠?"
펠리시아의 눈에 담겨 있는 의문을 마주하던 운현은 빙긋 웃었다.
"음. 제가 펠리시아씨와 제니스씨를 좋아해서?"
"...못 말릴 사람이네."
질렸다는 듯 펠리시아는 혀를 내둘렀다. 뭐 이런 난봉꾼이 다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상아와 연인이라고 하던 것이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치더라도 상아나 필레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운현의 행동은 충분히 그녀들을 유혹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자신과 제니스에게까지 손을 뻗겠다?
"제가 그렇게 쉬운 여자로 보이나요?"
"그럴리가요. 무척 어려워보이는데요."
"하아... 계속 그렇게 장난만 치실 거라면 이야기는 없었던 걸로 할게요. 제가 운현님을 지원하는 것은 불가..."
"그냥 해드리자."
"제니스씨!"
언제 나타난 것인지 제니스가 공터로 걸어들어왔다. 나풀거리는 드레스를 입은 채 얼굴을 안대로 가리고 있는 그녀가 걸어오자 펠리시아는 인상을 왕창 쓰며 외쳤다.
"장난하자는 거 아니에요!!"
"나도 장난 아니야. 운현씨."
"말씀하시죠."
"펠리시아를 끌어들이려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까?"
"네."
"그렇다면... 한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만."
"얼마든지요."
"...지금 뭐하는거에요?"
하이엘프이며 나이가 수천살이 넘는 제니스. 아무리 많이 잡아도 삼십대 중반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운현. 가진 명성이나 힘, 직위. 그 외 모든 것을 따져도 운현은 제니스에게 밀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대화는 뭐란 말인가. 제니스가 오히려 운현을 어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운현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대하고 있고.
"두분... 무슨 사이에요?"
궁금함을 참지 못한 펠리시아는 제니스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물었다. 자신에게 질문하는 펠리시아에게 고개를 돌린 제니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은인이야."
"네!? 은인요?"
"응. 내가 위험할 때 날 도와주신 분이야."
"헤에에..."
이런 인연이 있었다니. 펠리시아는 아까와는 다른 시선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의문, 그리고 짜증이 섞여 있던 시선이 흥미로 바뀌자 제니스는 운현을 향해 조심스레 말했다.
"저희 모험가 길드는 지금 시장 선거와 비타를 살해한 자를 뒤쫓는 것 때문에 간부 급 인원을 빼는 것이 조금 망설여지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시장 선거라면 피스나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예!?"
"그게 정말인가요?"
"운현씨가 도와주신다면 확실히 저희의 뜻대로 시장 선거가 이루어질 수 있겠군요."
"네."
아르토리우스, 그리고 윈디아. 거기에 피스나까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쥐고 있는 운현이 이번 시장 선거를 자신의 마음대로 조율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여차하면 사퇴하라고 하면 되니까.'
"운현씨. 도대체 정체가 뭐에요?"
던전 도시의 시장 선거는 거대한 정치다. 그것은 일개 모험가가 여유있게 돕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만만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운현은 너무나도 쉽게 돕겠다고 말했고 제니스 역시도 일개 모험가가 돕겠다는 것만으로 안심할 정도로 그를 믿고 있었다.
그 둘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펠리시아가 묻자 운현은 빙그레 웃었다.
"그건 중요한게 아니죠. 시장 선거에서 피스나씨가 당선되는 거죠. 그런데 왜 상아 길드장을 추천하지 않는거죠?"
"상아 길드장이 해봤자 의미 없어요. 가뜩이나 길드장 자리도 부담스러워하는데..."
"흐음..."
상아의 마음을 알고 있었는지 펠리시아는 작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상아 길드장이 무리를 하고는 있죠. 하지만... 그녀를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어요. 길드 내부와 모험가들 중에 상아 길드장의 방식이나 그녀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죠. 하지만 다른 누가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일거에요. 아니. 오히려 더 많은 욕을 먹고 분쟁을 일으키겠죠."
"상아가 부담을 갖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거였군요."
"네. 하지만... 마땅한 인재가 없어요. 운현씨. 알고 있나요? 조직을 이끄는 자가 가장 먼저 가지고 있어야 할 재능이 뭔지?"
"필요하다면 버릴 수 있는 것."
"...혹시 무슨 조직을 이끌었었나요? 네. 저 역시 운현씨와 같은 생각이에요. 필요하다면 아무리 중요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칼같이 잘라낼 수 있어야 하죠. 그렇기에 상아 외에는 길드장을 맡을 만한 사람이 없는거에요."
"왜죠?"
"그녀가 엘프이기 때문이에요. 엘프들은 장수하죠. 그렇기에 타인과 큰 관계를 맺지 않고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는 것에 그리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아요. 그렇기에 믿고 맡길 수 있는 거랍니다."
"호오... 개인의 욕심이 크지 않기 때문인가요? 근데 상아를 보면..."
"상아가 가진 욕심은 그리 큰 것이 아니에요. 그녀는 술을 좋아하고 남자들을 만나 노는 것을 좋아하죠. 하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누군가와 애인이 된 적이 없어요.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연이 없는 것인지. 어떤 남자와도 일정 이상 친해지면 그 이상의 관계로 진행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운현씨가 상아의 애인이었다는 것이 큰 이슈가 된 거라구요."
"신기한 일이군요. 그녀의 성격상 그리 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제니스씨도?"
"아시잖습니까."
쓰게 웃으며 제니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하우드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것일까? 입을 다물어버린 그녀에게서 답을 얻기는 어려워보였다.
"자신의 이득을 위한 부의 축적, 타인과의 관계로 인해 권력의 독점. 그것이 극히 적은 상아 길드장이기에 모험가 길드가 이만큼의 순수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에요. 다른 조직들과 다르게 말이죠."
"다른 조직들은 다른가요?"
"네. 모험가 길드와 다르게 용병 연맹은 연맹장이 가지는 부와 명예, 그리고 그 권력이 상당합니다. 그리고 제작자 연합은 높은 위치에 있을 수록 사용할 수 있는 대장간이나 장비의 수가 많아지죠. 상인 조합은 말할 것도 없고. 유일하게 모험가 길드만이 직위에 상관없이 조직이 운영되고 있어요."
모험가 길드가 모험가들을 부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모험가들이 길드원을 부렸으면 부렸을 뿐이다. 위기에 처해지면 모험가 길드에서 구조를 하러 간다. 모험가들이 구해 온 사체를 큰 수수료 없이 매입하여 판매한다.
모험가들이 어디 가서 깽판을 치면 길드에 청구를 하고, 길드에서는 그것에 대한 처벌과 배상을 모험가를 잡아 얻어낸다. 그 모든 것을 생각했을 때 모험가 길드가 모험가들을 지배한다기보다는 모험가들이 모험가 길드를 이용한다는 것이 더욱 알맞아보였다.
"만약 제니스씨나 상아 길드장이 아니었다면 이런 광경은 나올 수 없었겠죠. 그런 상황에서 상아 길드장이 시장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모험가 길드는 새롭게 길드장을 선출해야 하게 됩니다. 모험가 길드장은 다른 조직들과 다르게 길드 내에서 주둔하며 위기시 바로 움직여야 하니까 말이죠."
"그렇군요... 그럼 모험가 길드 내에서 상아를 대신할 만한 인재가 없다는 것이군요."
"네. 간부급들 중에는 없어요. 제니스씨가 그나마 괜찮긴 하지만."
"난 사양이라고 말했잖아. 나에겐 해야 할 일이 있어."
제니스는 펠리시아의 시선을 무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그녀의 거절에 펠리시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하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렇기에 계속 상아 길드장이 길드장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지요."
"아무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펠리시아. 당신도?"
"네."
"왜죠?"
운현의 질문에 펠리시아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한 거잖아요. 얻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걸요? 저도 상아 길드장과 제니스씨가 아니었다면 길드에서 나갔을 거라구요."
"그 둘은 왜...?"
"둘 다 제 취향이라? 후후. 상아 길드장이 침대에서 앙탈을 부리는 걸 생각하면..."
"결국은 개인의 사리사욕이군요. 뭐 좋습니다. 그런 당신이라면 제 계획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계획?"
펠리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니스를 보았다. 하지만 제니스도 딱히 아는 것은 없었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레벨이 올라 정식 길드원이 된다면 제가 길드장이 되겠습니다."
"......."
"운현씨. 그게 무슨 말씀... 이십니까?"
스스로 길드장이 되겠다 선언하는 운현의 말에 제니스는 황당해하며 떨떠름히 물었다. 현자의 예언에 나온 인물인데다가 그 능력의 끝을 알 수 없는 자다. 거기에 운명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자가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 되겠다니.
"부담이 큽니다."
운현이 해야 할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는 제니스는 운현을 대하며 처음으로 화난 목소리를 보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피식 웃은 운현이 입을 열려는 순간 패닉 상태에서 빠져나온 펠리시아는 운현의 손을 꽉 잡으며 밝게 웃었다.
"어머!? 그게 정말이신가요!? 운현씨. 제니스씨의 인정도 받는 운현씨라면 잘하실 수 있을 거에요!"
"펠리시아!"
길드 간부 중에 누구도 길드장이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없었다. 운현이야 레벨만 낮을 뿐이지 그 능력이야 이미 입증된 상태가 아닌가. 상아만 아니라면 누가 길드장이 되든 상관이 없었던 펠리시아는 반색하며 운현의 손을 잡았다.
"운현씨. 정말이에요? 길드장이 되실 생각인가요?"
"네."
"하지만 운현씨. 그 전에 말씀드리는 건데 길드장이 된다고 해서 길드를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길드의 방향은 길드 회의를 통해 결정되고 그 길드 회의는 길드 간부들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구요. 그래도요?"
"네."
"왜요?"
일단 고마운 일인 만큼 펠리시아는 웃는 얼굴로 물었고 그녀의 미소를 마주하며 운현은 담담히 말했다.
"상아가 힘들어하니까요."
"아아아아~ 진짜 상아 길드장을 좋아하는가 보네~ 이야~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죠. 저도 운현씨를 돕겠어요."
멋도 모르고 좋아하는 펠리시아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운현에게 고개를 돌린 제니스의 앞에서 운현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내 목적을 위해서는 길드장의 자리가 반드시 필요하거든... 그야말로 일석이조로군.'
371====================
뒷공작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하죠?"
"일단 상아를 호위하도록 해주세요. 1계층 계층주의 토벌이 끝나고 복귀할 거고 그때부터 함께 하도록 합시다. 처음은 제니스씨가 좋겠군요."
운현이 레벨을 올리면 간부에 등록하고, 거기에 바로 길드장으로 나서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펠리시아는 운현을 돕는 것에 적그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녀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던 제니스는 운현의 손을 잡고 끈 후 귀에 대고 속삭였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저에게 생각이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운명을 바꾸는 방법, 그리고 그 계획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면 제니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은 다른 조직의 수장과는 다르다. 정말 심할 정도로 권한이 적은 것이다. 기껏 있는 정도라고 해봐야 길드 소집령 정도?
하지만 그 길드 소집령을 내리는 것은 모험가 길드 간부의 과반수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 것이다. 부재시 투표가 무조건 반대가 된다는 길드 전통의 룰에 따라 현재 다른 나라로 가 있는 길드 간부 셋의 반대는 고정되어 있고, 또 파르티 교단과 모험가 길드의 계약으로 파견나와 간부 직에 있는 아둔과 에리스는 온건파인 관계로 길드 소집령에 대해서는 정말 큰 일이 아닌 이상에야 무조건 반대표를 던진다.
거기에 아직 비타의 후임이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라 그녀의 표가 반대가 된다는 가정까지 한다면 길드 소집령을 내리는 것은 일단 불가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외에는 특별한 권한은 커녕 의무만 잔뜩 있는 길드장의 자리를 운현이 노린다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던 제니스는 태평한 운현을 보며 답답해 했다.
"운현씨."
"알겠습니다. 펠리시아씨. 그럼 다음에 뵙죠."
지금 당장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기세로 제니스가 자신을 이끌고 가자 운현은 그녀와 함께 공터에서 멀어졌다. 빠르게 뛰어 올라 건물을 타고 지붕 위에 오른 제니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운현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무슨 생각이냐라... 길드를 좀 이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은 큰 권한이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권한보다는 의무가 잔뜩인 것이 길드장이죠. 기본급이 나오기는 한다지만 모험가 길드의 간부쯤 되면 5계층을 다니고, 그것은 5계층에서 전투가 가능한 모험가가 얻는 수입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정도죠."
"그런데 왜 그런 것을 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운현님은 바쁘지 않습니까?"
"실질적으로 간부급... 길드장의 자리에 오를 정도가 된다면 그리 바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바쁘지 않다구요!?"
"네."
"무슨 생각이십니까."
"당신은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부디 조심해주시기 바랍니다."
운현은 끝까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운현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채 제니스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지붕 밑으로 내려갔고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운현은 비릿하게 웃었다.
'모험가 길드는 그녀들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줘야 해. 그때까지는 얌전히 모험가 길드를 위해 움직여주지.'
"오빠!"
"다들 나왔네? 식사는?"
"이제 막 시켰어. 운현. 넌 뭐 먹을거야?"
"난 간단하게 베이컨이랑 빵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느새 1층의 회관에 모여 있는 동료들에게 다가간 운현은 메이드에게 간단한 식사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어제 협상은 어떻게 됐어?"
"내 생각대로 잘 됐어. 우리가 받기로 한게..."
"운현씨!"
어제 상아와 협상에서 얻은 것에 대해서 설명하려던 운현은 뒤쪽에서 들린 밝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환한 꽃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필레였다. 그녀의 등장에 여인들은 움찔했지만 운현은 그저 씨익 웃을 뿐 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네에~ 좋은 아침이네요. 자. 이거요."
"오...?"
모험가 길드의 증표. 필레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브로치를 운현과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에게 순서대로 나누어 준 후 방긋 웃었다.
"이제부터는 정말 동료가 되었네요."
"그렇군요."
"헤에... 이게 모험가 길드원의 증표란 말이지?"
던전 도시에 처음 들어와 모험가 길드원을 사칭하는 사기범에게 당할 뻔 했던 기억을 떠올린 미야는 싱글싱글 웃으며 그 브로치를 흉갑의 가죽 부분에 끼웠다.
다른 여인들 역시 각자 마음에 드는 부분에 브로치를 끼웠고 운현은 손에 들려 있는 증표를 보다가 필레에게 물었다.
"이거 꼭 껴야 하나요?"
"뭐 안끼셔도 상관없는데. 왜요? 하지만 그게 없으면 모험가 길드의 길드원으로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전부 받지 못하게 되는데...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이유라기보다는 습관이라. 어딘가에 소속된 적이 별로 없어서 좀 어색하네요."
"후후후... 금방 익숙해지실 거에요."
"그럴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운현은 브로치를 착용하는 대신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그가 브로치를 끼우지 않는 것에 필레는 조금 불만이었는지 살짝 입술을 삐쭉거렸다.
"운현씨는 모험가 길드의 길드원이 되는 것이 싫으신건가요?"
"싫다기 보다는 아직 어색할 뿐이죠. 어차피 이번 토벌이 끝나면 갑옷도 바꿀 생각이라서... 그때 달게요."
"흐으음... 뭐 그러세요. 아. 그리고 토벌대에 자리가 났어요. 한시간 후에 출발이니까 필요한 장비나 물품이 있으시면 얼른 구입을 해주세요. 여러분은 이제 모험가 길드 소속의 길드원이시니까 던전 앞의 상점을 이용하신다면 좀 더 저렴하게 좋은 장비를 구입할 수 있답니다."
"와~! 진짜요?"
"나도 건틀렛 바꾸고 싶었는데."
"난 활이랑 화살 좀 좋은 거 썼으면 좋겠다..."
"한번 가보시겠어요? 좋은 물건이 많이 있으니까 여유가 있을때 가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기뻐하는 여인들에게 필레는 상냥한 어조로 말한 후 운현의 갑옷을 톡 쳤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는 그녀의 신호에 운현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요?"
"잠깐 화장실에."
"그럼 여러분. 한시간 후에 사무소로 와주세요. 사무소 앞에서 토벌대가 출발할 예정이니까요~"
"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온 운현은 화장실 앞에 서 있는 필레가 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쓰게 웃었다. 필레가 이런 얼굴을 하는 이유는 뻔했다.
"운현씨.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지원 때문에 그런건가요?"
"꼬, 꼭 그런 것만도 아니지만서도..."
운현이 대놓고 안쪽 꽉찬 직구를 던지자 필레는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침에 상아가 운현 파티의 지원을 펠리시아와 제니스로 하겠다는 것에 불만을 표시했지만 그것이 운현의 선택이라는 것에 크게 실망한 필레는 일단 운현의 말이나 들어보자고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제니스씨와 펠리시아씨에게 부탁한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뭔데요?"
"상아 길드장을 지켜주세요."
"예?"
상아를 지키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상아가 자신보다 강한데 누가 누굴 지킨단 말인가. 그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레나 이단심판관과 제가 같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네. 들었어요. 그것과 관련되어 있는 건가요?"
"네."
"도대체 누가 상아 길드장님을 노리는 건데..."
"천검자요."
"........"
필레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뜬금없는 소리다. 은거하고 있다고 소문난 천검자가 왜 갑자기 상아 길드장을 노린단 말인가.
"천검자가 왜요? 아니... 천검자가 이 도시에 있단 말이에요?"
"네."
자신과 비교해 크게 밀리지 않을 실력을 가진 천검자가 자신이 없는 사이 상아를 노린다면 상아가 혼자 있을 떄는 무조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운현은 절대 상아를 혼자 둘 수 없었다. 최소한 둘 이상. 아무리 천검자라고 하더라도 셋 이상의 간부급이 같이 다닌다면 쉽게 상아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필레씨."
"네?"
"저는 필레씨를 믿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운현의 진지한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필레는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운현은 달아오른 필레의 얼굴을 더더욱 진하게 바라보았다.
"절대 상아를 혼자 두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필레씨도. 최소한 세명이 함께 다녀주세요. 이왕이면 아둔님이 함께 했으면 좋겠군요."
"아둔님도 알아요?"
"제가 레나 이단심판관님과 함께 일을 한다고 했잖아요. 던전 도시에 있는 파르티 교단의 중요 사제들에 대한 조사는 해봤습니다. 아둔 사제님이라면 그레이터 힐을 가지고 계실 터. 즉사만 피한다면 반드시 살릴 수 있으니 꼭. 반드시. 절대로. 아둔 사제님과 함께 상아를 지켜주세요. 그리고 필레씨도 지키시고."
"......."
레벨이 100도 되지 않은데다가 1계층의 계층주를 만나러 가는 주제에 400레벨이 넘는 자신을 이렇게 걱정한다는 생각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의 뜨거운 시선. 그리고 진심이 담긴 걱정. 그것만으로도 필레는 정신이 아득할 정도였다.
"그, 그... 이 손 좀 놓고..."
"약속해주실거죠?"
"아, 알겠으니까요!"
당황한 필레는 누가 볼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도 은근히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입은 싫다고 하면서 몸은 정직하구나. 필레의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은 운현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아... 으엑!?"
아쉬움에 탄식을 터트렸던 필레는 그가 자신을 꽉 끌어 안아버리자 기겁하며 개구리 터지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터트렸다. 운현의 품에 안기게 된 필레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지만 운현은 그것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필레의 가녀린 허리를 부서져라 꽉 안았다.
"고마워요! 필레씨! 정말 사랑해요!!"
"사, 사랑!? 으... 고, 고맙..."
그의 말에 필레는 한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망상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하고, 아이는 셋쯤 낳고, 행복한 삶을 살다가 안락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저세상으로 가버리는 망상을 한 필레는 후다닥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붕붕 저으며 운현을 살짝 밀었다.
"저, 저도 좋긴 한데 그게 뭐랄까. 너무 갑작스럽달까. 마음의 준비를..."
"네?"
"아뇨. 그게 아니라... 저기!"
"네. 필레씨."
생긋 웃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필레는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 운현씨 말대로 할테니까!"
"네."
"...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녁이나 같이... 드시러 가시는게... 어떨까 싶기도 하고..."
"단 둘이요?"
"....네."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가 차라리 크겠다. 거의 입술이 달짝이는 정도로 작게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요."
라닌과의 대화 여부에 따라서 어느정도 안정적인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 자신에게 있어서 최우선적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은 천검자와 라닌이다. 이 둘을 제어할 수만 있다면 운명의 날까지 시간이 생긴다.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운현에게 있어서 필레의 이런 제안은 환영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정말요!?"
상아를 비롯해 다른 여인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운현이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은 몰랐던 필레가 놀란 얼굴로 바라보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미안한 듯 쓰게 웃었다.
"제가 먼저 데이트를 신청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 아뇨!! 아니에요! 죄송이라뇨! 별 말씀을! 저같은 것이랑 어찌...! 우, 운현씨는 멋지니까 이런 거에 죄송해할 필요는 없... 으아아아! 내가 뭔 소리를...!?"
"...."
눈에 띄게 당황한 필레는 횡설수설하다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빙긋 웃은 운현은 필레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저...저두요..."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을 수 밖에 없었던 필레에게 웃어보이며 운현은 복도를 걸어 나갔다. 그가 멀어지고 나서야 필레는 힘이 풀렸는지 털썩 벽에 등을 기대고 쭈르륵 주저앉았다.
"서, 성공...인가?"
"우와아아!!! 축하해!"
"뭐야!? 필레! 데이트 하는거야!? 얘들아! 죽창 챙겨라! 죽창!"
여성용 화장실에서 운현과 필레의 대화를 모두 들은 모험가와 길드원들은 주저앉은 채 행복해하는 필레를 보며 놀려대기 시작했다.
"근데 얘 왜 이래?"
"완전히 맛이 가버린 것 같은데...?
평소라면 그 놀림에 부끄러워하거나 화를 내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그런 반응은 커녕 행복과 기쁨으로 가득 차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는 필레의 모습에 여인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인상을 구기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필레따위도 꼬시는 남자가 있는데..."
"난 이게 뭐냐..."
"술이나 먹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자괴감이 든다. 여인들은 필레를 부러운 듯 보다가 궁시렁거리며 복도에서 빠져나갔고 그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필레는 작게 중얼거렸다.
"운현씨..."
372====================
뒷공작
"넌 안사도 괜찮아?"
헤스티아는 지팡이, 미야는 건틀릿, 바제트는 새로운 활과 은제 화살. 다들 새로운 장비를 구입했지만 운현은 투척용 나이프만 구입했을 뿐 별다른 장비를 사지 않았다.
"응. 난 아직은 괜찮아."
힐더크의 가게에서 구입한 검, 2계층의 언데드들을 상대하기에 좋은 성검 일레인. 애초에 장비에 크게 연연할 필요가 없는 운현에게 있어서 이 두 무기 외에는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괜찮은 갑옷이었는데..."
상점에서 꽤나 좋은 갑옷들이 있었지만 가격이 블랙 플래그 세트 이상이었던지라 차마 그것을 사라고 말을 하지 못한 미야는 운현의 나이트 호크 세트 갑옷을 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전투를 통해 얻은 마석을 팔아도 자신들의 장비값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 대부분의 비용을 운현이 지불한 것이 미안했는지 미야는 운현의 손을 꼭 잡으며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2계층에서 얻은 아이템은 모두 운현이 써서 장비를 구했으면 좋겠어. 다들 같은 생각이라고. 그렇지?"
"응. 나이트 호크 세트가 좋은 갑옷이기는 하지만 2계층부터는 좀 힘들지도 몰라. 인챈트도 제대로 하고..."
"맞아요. 아무리 오빠의 지론이 장비의 좋고 나쁨이 사람의 강함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좋은 장비가 있으면 더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잖아요. 이제 길드의 지원 혜택도 받을 수 있는데 너무 아끼지 말아요."
"하하하... 알았어."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에게 따로 준 악세사리 값만 해도 어지간한 400대 레벨의 모험가가 사용할만한 평균적인 장비 정도는 맞추고도 남는다.
그 악세사리의 가격을 듣고 얼마나 놀랬는지. 헤스티아를 비롯한 다른 여인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그에게 말했고 그들을 향해 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이제 가볼까?"
한시간여의 쇼핑이 끝나고 사무소로 복귀한 운현 일행은 사무소 앞에 모여 있는 모험가들을 볼 수 있었다. 스무명의 모험가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무기를 꽉 잡고 있는 것을 본 운현은 토벌대의 대장으로 보이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아. 당신들인가? 모험가 길드의 준 길드원이?"
"네. 운현이라고 합니다."
"흐으음... 장비는 괜찮아보이지만... 실력도 그러려나 모르겠네."
운현 일행이 특별한 마석으로 빠르게 레벨업을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한 것이었다. 돈으로 레벨을 올린 사람들이 실제 전투에서 허둥거리기만 하며 레벨 만큼의 실력을 보이지 못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기에 그녀는 운현과 다른 여인들을 위 아래로 흝어 본 후 퉁명스레 말했다.
"발목 잡을 일은 없을테니 걱정 마시죠."
"그래줬으면 좋겠네. 당신들을 넣느라 다른 사람 중에 손해 본 사람이 있으니까."
"어... 그게 정말이에요?"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던 헤스티아가 놀란 듯 묻자 토벌대의 대장은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층주에게 도전할 수 있는 수는 최대 스물 다섯명이야. 당신들이 파티에 끼느라 다른 한 파티가 양보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그게 누군가요? 제가 사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르의 파티. 나중에 꼭 사과를 하고 사례를 해줘. 아. 소개가 늦었군. 마인드 클랜의 파인이라고 해. 직업은 성기사고."
"저도 다시 소개하죠. 운현입니다. 이쪽은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 각각 화염 마법사와 격투가, 드루이드입니다. 저는 검사구요."
"그런가... 도적이 없는게 아쉽군. 이번 토벌대의 도적은 윌로네 한명 뿐인지라."
'윌로네라... 그러고보니 그녀에게 물품감정에 대해서 배우지 못했었군.'
과거 그녀에게 물품감정에 대해서 배우기로 했었는데 다른 일들이 많아 그것을 놓쳤다는 것을 떠올린 운현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층주 공략에 대해서는 교육을 받았겠지? 운현, 당신과 미야씨는 근접 딜러이니 전위를 맡아야 겠네. 나머지 사람들은 후위에서 지원을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파인씨."
과거와 다르게 파인은 자신들을 그리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과거의 자신은 도적이라는 귀족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길드의 지원 역시도 받지 않았다. 정식으로 토벌대 등록을 하고 순서에 맞춰서 움직였기에 환영을 받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뭐 이런 잡음은 예상한 것이니 말야.'
앞으로 이런 일이 많을텐데 괜히 그것에 대해 궁시렁 거릴 이유는 없었다. 운현은 파인의 날선 반응에 어깨를 으쓱였고 그를 차분히 바라보던 파인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기다리고 있는 토벌대원들에게 외쳤다.
"시간이 됐군요! 자. 안녕하세요! 저는 마인드 클랜의 파인이라고 합니다! 직업은 성기사구요. 탱커입니다. 예전 클랜을 따라 트롤 공략을 공부하러 그 공략에 참여한 공격이 있습니다. 트롤의 공격법이나 특성을 알고 있으니 제가 지휘를 하려 합니다만... 다들 괜찮으신가요?"
"파인씨면 괜찮아요."
"좋으실대로 하세요."
"마인드 클랜이라면 괜찮겠지."
'그때와 다를 바 없는 반응이군...'
중견급 클랜인 마인드 클랜의 파인은 지금도 꽤나 인망이 있었는지 그녀가 지휘를 한다는 것에 다른 사람들은 별다른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렇게 여기저기의 환호와 인정을 받고 나서야 파인은 만족한 듯 씨익 웃었다.
"지휘는 네가 해도 괜찮지 않아?"
"맞아. 운현. 너도 지휘라면 꽤 하잖아?"
"아니. 그냥 맡기는게 낫겠다. 여러명을 지휘해 본 적도 없고 말야. 차라리 파인씨가 더 낫겠지."
"그래요...?"
"응. 자. 이제 간다."
마인드 클랜의 간단한 소개와 함께 클랜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하고 나서 파인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토벌대가 움직이자 운현은 동료들을 각 진영으로 보낸 후 선두로 나섰다. 근접 딜러인 이상 다른 사람들과 합을 맞추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이야기를 나눠야했기 때문이었다.
"....."
"어째 분위기가 살벌하네."
과거와 다르게 운현에게 접근하는 이들은 없었다. 흔하디 흔한 검사인데다가 길드의 권한으로 새치기를 한 것 때문인지 다들 경계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미야가 속삭이자 운현은 쓰게 웃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저기... 운현씨라고 했죠?"
"아. 네."
"반가워요. 미누아라고 합니다. 창수죠. 그... 이번 토벌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괜찮나요?"
"물론이죠."
"흐흠... 다른 사람들과는 합의를 본 내용인데요. 이번에 전투에서 운현씨와 미야씨가 선두에 나서주셨으면 합니다."
"엑? 왜요?"
미누아의 말에 미야는 놀라며 물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미누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분들과 다르게 여러분은 길드의 지원을 받는 분들이잖아요? 거기에 장비도 좋고. 다들 장비가 좋지 않다보니 전투에 조금 소극적이라서요. 물론 여러분만 공격을 하라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탱커가 파인씨 한명이라 어쩔 수가 없네요. 운현씨나 미야씨나 보조 탱킹은 가능하지 않으신가요? 아니면 그... 고급 코어로 레벨업을 하셔서 경험이 모자르신가?"
"...지금 이거 싸우자는 건가요?"
"설마요~"
능글맞게 웃으며 미노아가 말하자 미야는 빠득 이를 갈며 싸늘히 말했다.
'기죽이기, 아니면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프다... 이거군.'
대부분의 모험가들은 돈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던전에 들어간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고급 마석으로 한번에 레벨업을 한 운현 파티가 좋게 보일리는 없는 것이다. 물론 고레벨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이런 저레벨들 사이에서는 어느정도는 밉상이 될 것을 각오했었던 운현은 미노아를 비롯한 다른 근접 딜러진을 힐끔 본 후 씨익 웃었다.
"뭐 그렇게 하죠."
"정말요!? 고맙습니다!"
"운현!"
"아냐. 차라리 이게 나아."
'좋은 훈련도 되고 말야.'
5계층의 코어로 한번에 폭렙을 하고 제대로 전투법에 대해 강의를 하지 못했던 운현으로서는 어떻게 보면 나쁘지 않은 찬스라고 할 수 있었다. 미야는 파티의 전위다. 탱커의 역할도 해야 하는데다가 그녀의 장비도 좋으니 트롤 정도는 큰 위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운현의 판단이었다.
'다른 애들도 뭐...'
옆에서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 토벌을 한번 하면 어느정도는 감이 잡힐 것이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에게 그리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하고 있는지 헤스티아와 바제트의 표정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장비가 좋으니까 잘 되겠지.'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그녀들에게 좋은 장비를 준 것이다. 그것이라면 충분히 무리 없이 이번 토벌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운현은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툭 치자 그곳을 보았다.
"왜요? 파인씨."
"하아... 아무래도 좀 미움받는것 같군."
"뭐. 어쩔 수 없죠. 가지지 못한 자들은 다 저런 법이니까."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자에 대한 질투를 한다. 그 전의 상황이나 사정이야 어쨌든 자신들은 목숨걸고 레벨업을 하는데 비싼 코어 하나 받아서 빠르게 레벨업을 한 것에 대한 질투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의 대우에 운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파인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상 밖이네. 꽤 기분 나빠할 줄 알았는데."
"이런 걸로 매번 기분나빠할 수는 없죠. 그래도 파인씨는 좀 다르군요."
"나야 타인의 인연이 가져 온 결과도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대체적으로 중견급 클랜 쯤 된다면 싹수가 보이는 모험가의 경우 그런 식으로 레벨 업을 도와주는 경우도 있고. 친분에 따라 할당되는 코어가 늘어나는 경우도 있어."
"파인씨도?"
"응. 나도 길드 간부 중에 고향의 지인이 있어서..."
'이 동네도 학연, 지연, 혈연은 무시 못하는군.'
어쨌든 팔은 안으로 굽을 수 밖에 없다. 똑같은 능력이라면 그래도 뭔가 인연이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상아나 제니스처럼 타인과 크게 연을 맺지 않는 엘프가 조직의 수장이 되었을 때 가장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길드장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이겠지.'
"아무튼. 이것도 좋게 생각하면 기회라고 볼 수 있어. 어쨌든 능력이 중요한 거니까 말야. 저들이 찍소리 못할 정도의 실력만 보여주면 괜찮아."
"그건 맡겨주세요."
"우, 운현."
"걱정 마. 평소 하던대로 하면 괜찮을거라고. 트롤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홉고블린의 거대화 된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거야."
"홉고블린의 거대화 치고는 너무 큰데다가 재생력도 강하지만... 그런 마음이 좋아. 트롤에 대한 교육은 확실히 받은데다가 잡는 법도 많이 봐왔으니까 걱정 말라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파인은 운현과 미야에게 꽤나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에 흥미를 느낀 미야는 하얀 꼬리를 까딱거리며 물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우리를 적대하지 않네?"
"그야... 당신들 준 길드원이라면서? 중견급 클랜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길드의 신세를 지는 것은 사실이야. 거기에 길드에서 키워주려고 하는 길드원이라면 오래 가지 않아 길드 내에서 높은 위치에 올라갈테고... 그럼 이렇게 친분을 다져두는 것이 좋지. 아무리 길드와 모험가의 관계가 대등하다고는 하지만 일반 모험가는 길드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는 입장이잖아? 이런 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지."
"그렇...네."
"응. 저런 뜨내기들과 달라. 우리 마인드 클랜은 진지하다고. 언젠가는 아라크네 클랜 이상의 대형 클랜이 될 예정이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길드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클랜의 규율이라고."
"그런가..."
결국은 필요에 의해서다. 미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파인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그녀의 행동에 미야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파인은 볼을 긁적거린 후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 날 기억해달라고."
"으음... 알겠어."
요약하자면 나중에도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다. 알아서 굽실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처음에 보였던 경계심과는 많이 달라보였다. 그런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미야는 파인이 멀어지자 운현의 옆구리를 콕 찌르며 말했다.
"저 여자. 뭔가 좀 이상한데."
"아니. 저게 당연한거지. 아니면 직감이 좋은 것이거나."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게 있단다."
"히야욱!? 가, 갑자기 만지면 어떡해!"
살랑거리는 꼬리를 잡아 챈 운현은 부드러운 하얀 털을 쓸어만졌다. 그 손길에 놀란 미야가 뿔난 어조로 외쳤지만 운현은 그저 씨익 웃을 뿐 이었다.
'아라크네 클랜은 첫번째 방패로 쓸 예정이지만... 너희들은 일단 지켜보도록 하지.'
"어이!!"
"여기야!"
운현이 미야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걷는 동안 토벌대는 어느새 1계층의 신전에 도착했다. 커다란 신전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여인은 선두에서 걷고 있는 파인을 향해 손을 흔들며 토벌대를 불렀다.
"아! 마미아씨! 칼로이씨!"
"저 사람들은 누굴까?"
"마인드 클랜에서 보낸 사람들인가보지. 중견급 이상의 클랜은 하급 클랜원의 성장을 위해서 위험 요소에 대한 대비를 한다고 하니까 말야. 계층주 정도 되면 전투 도중 클랜원이 죽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 클랜원이 당할 것 같으면 끼어들어서 구해주고 계층주를 제거하는 거야. 물론 그렇게 된다면 다른 토벌대원에게 크게 민폐를 끼치게 되지만... 중견급 이상의 클랜은 그것에 대한 보상이 가능하니 그걸로 퉁 치려는 거고."
"헤에에... 그렇구나. 운현은 교육도 안받았는데 잘 아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거든. 어쨌든 자기 사람이 더 소중한 것은 사실이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미야를 향해 웃어보인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뒤쪽을 보았다. 불편한 얼굴로 걷고 있는 헤스티아와 바제트를 발견한 그는 그녀들 주변에서 그녀들을 고깝게 바라보고 있는 모험가들을 향해 이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고...'
373====================
뒷공작
파인을 지원하기 위해 온 마인드 클랜의 사람들을 보며 몇몇 모험가들은 좋아했지만 몇몇 모험가들은 불편하다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어쨌든 이 토벌대에서 마인드 클랜 사람은 파인이고 파인이 죽거나 크게 다친다면 이번 토벌이 실패가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자. 윌로네씨. 부탁할게요."
"아아아~ 귀찮네~"
귀족 직업인 도적답게 이곳으로 오며 칼 한번 휘두르지 않았던 윌로네가 앞으로 나섰다. 함정 해체 작업을 위해서 일행들의 앞으로 이동한 그녀가 함정을 해제하기 시작하자 파인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저런 도적을 클랜으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마인드 클랜에는 도적이 없나요? 저 사람도 마땅히 들어간 클랜이 없는 것 같은데 꼬드기지 그래요?"
"없지. 도적은. 남자도 몇명 없어. 그래도 쟤는 좀..."
"왜요? 도적 클래스는 귀한 것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쟤는 소문이 안좋아서. 좀 실력 좋은 도적 하나가 있으면 진짜 클랜이 금방 성장할텐데 말야."
"도적이 그렇게 귀한 가요?"
"응. 모험가 백명 중 한명이 있을까 말까 하니까 말야."
"그렇군요. 매번 이렇게 함정을 해제해야 하다니..."
"여기 말고도 각지에 함정은 여러개 있어. 시간이 지나면 함정이 재설치 되니까 도적이 있으면 무척 편하다고. 아직 도적과 파티를 맺어 본 적이 없어?"
"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도적과 파티를 맺어봐. 엄청 편할거야. 특히 전위직들에게 있어서 함정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지."
"그렇군요... 그나저나 혼자서 하려니 힘들겠네요."
"그래도 어쩌겠어. 정 힘들면 몸으로 때우는 걸 요청하겠지."
"이봐! 누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앞서 걷던 윌로네의 외침에 파인은 앞으로 걸어나갔다. 함정을 해제하며 뭔가 문제가 있었는지 윌로네와 파인은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아... 이거 골치아프네."
"왜요?"
"윌로네가 좀 자신이 없는 부분이 있나봐."
"도적이 함정 해제에 자신이 없을 수가 있나요?"
"아무래도 함정 해제의 경우는 지력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 지력이 낮은 도적 같은 경우는 저렇게 망설일때가 많지."
그래도 간신히 도적을 하나 토벌대에 끼워 넣기는 했지만 윌로네가 영 믿음직스럽지 않았는지 파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위직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야겠는데..."
"그 말은 함정을 몸으로 때워야 한다는 건가요?"
"응. 원래는 방어력이 강한 탱커가 나서는게 정석이지만... 아무래도 나는 지휘자라 그렇게 하긴 좀 어렵겠네. 내가 다치면 토벌대가 퍼져버리니까."
"그런가요."
"아무튼 전위직들을 다 모아서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현재 토벌대에 있는 전위직은 탱커인 파인을 제외하고 검사인 운현, 격투가인 미야, 창수인 미누아, 전사 제노, 쌍검사 일투나였다. 그들을 불러모아 파인은 사정을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미누아와 제노, 일투나는 당당히 미야를 가리켰다.
"그런 거라면 격투가가 하는게 낫지 않을까요?"
"맞아요. 격투가는 보조 탱킹도 가능하잖아요?"
"저희들이 하기는 좀..."
정론이기는 했다. 어쨌든 미야의 경우 흑암권도 있는데다가 전투에서 탱커 역할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적의를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해봐야 누가 그걸 쉽게 받아들이겠는가.
"당신들 너무한 것 아니야!?"
"아니 너무하고 자시고..."
"미야. 당신이 우리보다 방어력도 높고 장비도 좋잖아. 지금끼고 있는 건틀렛 보라고. 그거 굉장히 비싼건데 그렇게 끼고 다니는게..."
"우리는 그냥 일반 상점표 장비에 불과해. 거기에 방어력도 낮고."
질시다. 가진 자에 대한 질투심을 여과없이 드러낸 그 셋의 모습에 미야가 한소리 하려는 찰나 뒤쪽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마인드 클랜의 마미아와 칼로이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그들 사이로 들어갔다.
"자자. 흥분하지 말자고."
"여기서 사이가 틀어져봐야 토벌만 힘들어질 뿐이야."
"하지만...!"
"이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야. 미야라고 했지? 계층주를 토벌하기 위한 토벌대는 자주 만들어져. 2계층이나 3계층, 더 높은 곳을 다니면 도적이 없는 상태로 계층주에게 도전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단 말야. 그때는 가장 방어력이 높은 인원이 함정을 몸으로 때울 수 밖에 없지."
"......"
"뒷편에 있는 사제들과 힐러들에게 이야기를 해놓을테니까. 이번에는 그쪽에서 양보해주면 안될까?"
"그렇다고 저희에게 생기는 이득이 없지 않나요?"
"당신은 누구지?"
"운현이라고 합니다."
다섯이나 되는 사람이 미야를 압박해들어가자 운현은 손을 들어 올리며 그들을 막았다. 그가 나서자 파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미아노에게 말했다.
"그 운현입니다."
"아... 상아 길드장과 전 연인이라는...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최악의 경우가 아닌 이상에는 우리가 낄 수도 없고."
"흐으음..."
가지지 못했기에 가진 이인 운현 파티를 질투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미아노와 칼로이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무척이나 미안해하는 그들과 것 보라는 듯 의기양양해 있는 나머지 셋을 번갈아 바라 본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제가 나서는 수 밖에."
"그래! 그래! 네가 나가면 되겠네. 듣자하니 상아 길드장과 모험도 했다면서? 이것저것 많이 배웠을 것 아니야!"
"이야~ 이거 이번 토벌은 무척 편해지겠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해 놓을게. 힐러진이 제대로 지원할 수 있도록 말이야."
운현이 나서자 미누아, 제노, 일투나는 기쁜 얼굴로 외쳤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질투의 대상은 바로 운현일 것이다.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인 상아의 전 연인이라는 이유로 그 비싼 코어를 받아 레벨업을 한 사람이니 말이다.
"그거 고맙군요."
"우, 운현. 괜찮겠어?"
"너무 무리는 하지 말라고."
검사인 그가 나선다는 것에 미야와 파인은 당황했다. 격투가나 성기사에 비해 검사의 방어 스킬은 그다지 효율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운현이 입고 있는 방어구인 나이트호크 세트는 좋은 갑옷이기는 했지만 지금 제노가 입고 있는 갑옷과 비교해서 방어력 면에서는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딱히 무리는 없어. 알잖아. 난 원래 솔로 모험가였다고. 바깥의 던전에도 함정은 있어. 그걸 혼자서 파괴하고 다녔다는 얘기지."
"그래도 그렇지... 당신들 진짜 너무하네!!"
그가 나서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미야는 고개를 돌려 셋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에도 그 셋은 뭐 어쩌라는 거냐는 얼굴로 히죽거릴 뿐 이었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마."
"...알았어. 무리하지는 말아줘. 다른 힐러들에게도 얘기해 놓을게."
"하아... 이거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네. 이봐. 운현."
"예?"
토벌대를 책임지는 토벌대장으로서 운현에게 이런 무리한 일을 시켜야 된다는 것이 내키지 않은 파인은 한숨을 푹 내쉰 후 주머니에서 작은 마법석을 꺼내었다.
"약소하지만 받아줘. 이걸 사용하면 한시간동안 방어력이 올라갈거야. 그리고 방패 정도는 빌려 줄 수 있어. 조금 무겁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을까?"
원래라면 자신이 나서야 하는 일인데 나서지 못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 것인지 파인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해주고 싶었다. 그녀의 배려에 운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석은 잘 받을게요. 방패는... 괜찮습니다. 다만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요."
"뭐지?"
"제가 함정을 몸으로 때우는 것은 좋지만... 그 여파가 어떻게 될지는 몰라요."
"그게 무슨 소리지?"
"아무래도 저는 솔로 모험가라서... 제가 함정을 막을때는 최대한 그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쳐내기나 흘리기를 쓰거든요. 그 파편으로 피해가 생길 수 있으니..."
"아아. 그건 걱정마. 전위진에서 그 문제는 어떻게든 막아볼테니까."
"엑?"
"그, 그걸 왜!?"
"아니 그건 아니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운현이 총대는 매겠지만 날아오는 파편은 자신들이 막아야 한다는 것에 셋은 기겁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인상을 왕창 구긴 파인은 선두에 있는 미노아에게 외쳤다.
"아무리 토벌대가 서로 협력을 하고 누군가는 피해를 보는 것이 맞다지만 이건 너무한 것 아니야!?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토벌대의 토벌대장으로써 당신들을 토벌대에서 빼버리는 수가 있어!"
"큭..."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쳇."
합당한 이유로 토벌대에서 쫓겨난다면 다음 토벌대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파인의 으름장에 한숨을 내쉰 그들이 동의하자 파인은 운현의 어깨를 툭 치며 빙긋 웃었다.
"어때?"
"고맙네요. 자. 그럼 전 윌로네씨와 이야기를 좀 해볼게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니까."
토벌대의 위치가 바뀌는 것을 확인한 운현은 통로에서 고민하고 있는 윌로네에게 다가갔다. 꽤나 골치가 아팠는지 윌로네는 운현이 다가오자 미안한 듯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미안해. 내 실력이 좀 안 좋아서..."
'확실히 여기는 내가 해제를 했던 구간이군.'
과거에는 윌로네와 둘이서 함정해제를 했었다. 함정해제 스킬이 지력에 영향을 받는다면 현자의 시간과 레벨업에 따른 보너스 스탯 덕분에 지력이 남들보다 월등한 운현이 해제할 수 있었던 함정을 윌로네가 해제 못하는 것도 말이 안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여기는 화살 함정이었지... 괜찮네.'
발동되면 벽의 구멍에서 세발의 날카로운 화살이 날아오는 함정이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운현은 함정이 발동되는 통로의 장치를 확인한 후 윌로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함정을 발동시켜야 하는데... 어디에 있는 건지 모르겠어. 내 스킬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부근에 함정이 있다는 정도야. 무척이나 고난이도의 함정 같아."
"그런가요.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윌로네씨는 일단 제 뒤에... 가 아니라 저기 딜러진 근처에 계세요."
"알겠어. 저기까지만 확인해서 발동시키면 괜찮아. 더 나아가지는 말고. 그쪽은 확인 못했으니까."
벽에 있는 붉은색 돌 부분을 가리킨 윌로네가 뒤로 빠지자 운현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뒤쪽에서 미야와 바제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낀 운현은 함정의 발동 위치를 찾는 척 적당히 헤메다가 검날에 비춰진 뒤를 확인하고 함정 발동 장치를 밟았다.
"챙! 챙! 챙!"
거의 동시나 다름없는 세발의 검은색 화살이 날아들었다. 비반사처리까지 완벽하게 되어 있는 검은 화살이 날아 온 것을 잡아낸 운현은 한발은 검을 휘둘러 부숴버리고. 한발은 내리쳐 방향을 벽으로 향하게 하고, 나머지 한발은 흘려내버렸다.
"으아악!!"
"괘, 괜찮아요!?"
운현이 흘려낸 화살은 그 기세를 거의 잃지 않은 채 미누아의 어깨에 적중했다. 날카로운데다가 기형적으로 생긴 화살촉이 어깨뼈를 부숴버릴 정도로 강하게 어깨에 박히자 미누아는 자신의 어깨를 잡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아아아악!! 아파! 으아아아!!"
"세상에...!! 어서 화살을 빼고 치료해야해!"
"큭... 조금만 참아요!"
"아파앗!! 아파!!"
눈물을 펑펑 쏟으며 고통의 비명을 내지르는 미누아를 향해 힐끔 시선을 돌린 운현은 그들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검은색 화살 부러트리고 단검으로 어깨를 후벼 판 파인은 운현을 향해 씨익 웃었다.
"굉장한데!? 이정도 위력의 화살을 쳐낸거야!?
미누아의 철판 어깨 보호대를 박살내고 안의 어깨뼈까지 부러트릴 정도의 위력이 담긴 화살을 두대나 쳐내 막았다는 것에 파인은 감탄했다. 그리고 그것에 놀란 것은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운현의 실력을 믿고 있던 그의 동료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 심지어 마인드 클랜의 지원인 마미아와 칼로이마저도 운현이 화살을 막아낸 것에 무척 놀랬다.
"와! 진짜 대단하네!"
"괜히 상아 길드장의 연인이 아니구나..."
"한발 놓치기는 했지만 저정도 실력이라면 상아 길드장에게 받은 코어가 아니더라도 금방 레벨을 올리겠는걸?"
"아직 100레벨 밖에 안된 것 같은데... 도대체 전직이 뭐였지?"
남은 아파 죽겠는데 타인의 신위에 감탄하는 그들의 모습에 눈물을 펑펑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던 미누아는 빠득 이를 갈았다.
"이딴 것도 못 막아내!?"
"아이 참. 이거 미안하군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제 실력이 이정도 밖에 안되는 걸. 두발은 막아내서 다행이죠."
능글맞게 웃으며 쪼그려 앉은 운현은 미누아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일부러는 아닙니다."
"큭..."
"누가 그걸 일부러라고 생각하겠어. 난 하라고 시켜도 못하겠는걸."
"검술이 정말 대단하던데? 나중에 대련 부탁할게."
자신들보다 고레벨의 마미아와 칼로이가 운현을 칭찬하고 운현이 화살을 쳐낸 것에 감탄하자 미누아는 빠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해봤자 자기만 바보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아는 그녀는 이를 갈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옆에 서서 자신이 맞지 않아 다행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는 제노와 일투나를 향해 운현은 살며시 미소지었다.
'아직 안끝났어.'
374====================
뒷공작
"우왓!!"
또다시 날아 온 철조각을 막아내려던 제노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왼쪽 팔에 맞아버렸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이제는 힐러진에서도 슬슬 짜증을 내고 있었다.
"아니... 그런 것도 못막어요?"
"정말... 힐 주는건 그냥 하는 줄 아나."
"으으으... 뭐가 어쩌고 어째!?"
"아니. 그렇잖아요."
힐러 중 한명이 인상을 쓰며 운현을 가리켰다. 더 앞에서, 그리고 더 강한 공격을 여유있게 튕겨내는 그에 비해 이들이 하는 일이라곤 뭐가 있는가. 자기들을 지키는 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이렇게 상처를 입으니 힐러로서는 화가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면 미야씨처럼 잘 막든가."
사제인 이스트가 투덜거리자 미누아, 제노, 일투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다만 지금 원딜러들이나 힐러들이 자기들을 고깝게 보는 이상 여기서 뭔가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예 모험가 직을 때려치지 않는 이상은 토벌대에서 함부로 까불 수는 없는 것이다.
"아... 이거 참. 죄송합니다."
유들유들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 온 운현이 느긋하게 말하자 미누아, 제노, 일투나는 그를 쏘아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녀들이 입을 다물자 힐러들과 원딜러들은 운현을 향해 손사레를 쳤다.
"어휴~ 운현씨가 그렇게 죄송할 이유는 없죠. 혼자서 그렇게 막아주고 있는데요."
"암만. 암만."
"이야~ 길드에 가입된 것만 아니면 우리 클랜으로 모시고 싶을 정도네. 무슨 검술을 쓰는거에요?"
"하하... 다년간 모험가 생활로 익힌 아류 검술입니다."
"혹시 그거 저희 클랜의 검사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나요?"
"시간이 나면 한번 봐드리죠."
상아의 연인이라는 이유로 레벨을 올린 것 치고는 실력이 대단하다.
아니, 운현 뿐만 아니라 운현의 파티원이라는 미야도 침착하게 운현이 튕겨낸 화살이나 쇳조각, 함정 파편을 굉장히 잘 막아내지 않는가.
그들의 실력에 문제를 삼았던 미누아, 제노, 일투나가 운현이 튕겨낸 함정 파편에 맞아 크게 다친 것에 비하면 이들은 정말 양반이다.
"저기. 운현."
"응?"
그들의 칭찬을 얌전히 듣던 미야는 운현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다.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물론 미야의 장비가 다른 미누아, 제노, 일투나에 비해 좋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정도는 좀 너무하지 않은가.
운현이 튕겨낸 화살을 막아낼 때 그녀는 화살에 거의 힘이 실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정도면 100레벨은 커녕 50레벨 정도면 여유있게 막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저들이 이것을 막지 못한다? 이해가 가지 않았던 미야는 운현에게 자신이 알아낸 것에 대해 조심스레 물었지만 운현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 볼 뿐 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내가 힘 조절을 하고 있다는거야? 에이~ 아무리 나라지만 그건 좀 힘들어. 지금 막는 것에 집중하기도 힘들다고."
"그, 그렇겠지?"
운현이 숙련된 모험가이고 엄청난 검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일부러 노리고 그정도로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미야는 운현이 쓰게 웃자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고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당연히 노린거지.'
딱히 미누아, 제노, 일투나에게 원한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운현이 원하는 것이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는 것 때문이었다.
어쨌든 특별한 실적을 쌓지 않고 길드에 들어갔고, 길드에서 제니스와 펠리시아의 도움으로 빠르게 레벨업을 해야 했다.
남 일이라면 상관없지만 길드에 소속이 되고 그 길드를 움직여야 하는 이상 괜한 마찰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이렇게 토벌대에서, 그리고 중견급 클랜인 마인드 클랜의 사람이 나와 있을 때 자신과 동료들의 이름을 알려나간다면 빠른 레벨업도 다른 모험가들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만 해도 코어 하나로 레벨 업 좀 빨리했다고 몇몇 모험가들이 고깝게 보는데 그것이 계속된다면 어쩌겠는가? 나중에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 자리에 올랐을 때 모험가들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려면 어느정도는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미누아, 제노, 일투나는 그를 위한 비교대상에 불과했다.
같은 100레벨이지만 실력 차이가 확실히 난다는 것을 보여주어 사람들의 시선을 더 좋게 하려고 한 운현은 빙긋 웃으며 윌로네를 향해 걸었다.
"이제 얼마나 남았나요?"
"음... 다 한 것 같은데."
"그럼 끝이군요."
"응. 고마워. 당신 덕분에 살았어. 하하."
선두에 나서서 일부러 함정을 발동시키고, 그 함정을 몸으로 때워 자신이 해제하지 못한 함정을 막아주었다. 윌로네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자신의 일을 덜어 준 사람이니만큼 고마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운현. 고생했어."
토벌대의 리더인 파인 역시도 운현에게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운현이 아니었다면 토벌대를 뒤로 물리고 또 다른 도적을 모집했어야 했을테니까. 두 여인의 인사에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괜찮습니다.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보다... 이제 얼마 안남았다면 좀 쉬었다가 가는게 좋지 않을까요?"
딱히 지친 사람은 없겠지만 사람들이 자신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칭찬도 들어야 한다. 그렇게 떠들어대면 떠들어 댈 수록 자신들의 위상이 높아질테니 말이다.
"그러고 싶지만 시간이 얼마 없네. 계층주가 바뀌는 것은 알지? 당신과 미야가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쩝... 다른 근접 전투진이 생각보다 약한 것 같아서..."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시간 내에 트롤을 토벌하지 못하면 다른 계층주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파인이 아쉬워하며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적 여유가 안된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안되는 것을 계속 잡고 있을 필요는 없었기에 운현은 검을 허리의 검집에 넣은 후 말했다.
"그럼 전투는 어떻게...?"
"아. 자세한 것은 정리를 한 후에 말해줄게. 일단 진행하자고."
전투 방식은 일단 그 안에서 결정할 모양인가보다. 함정을 거의 다 해제했다는 윌로네의 보고를 받은 파인이 앞서 걷자 미야는 운현의 옆으로 온 후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운현."
"왜?"
"저쪽에서 지금..."
힐끔 뒤쪽을 본 미야는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미누아, 제노, 일투나를 확인했다. 이번 일로 꽤나 자존심이 꺾인데다가 많은 이들의 빈축을 사게 된 그들이 이를 갈고 있는 것에 미야가 걱정하자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설마 별 일이야 하겠어?"
'그 전에 내가 죽일거거든.'
저들의 이용가치는 이제 없었다. 살아 있어봤자 괜한 의문만 던져 줄 뿐이니 만큼 운현의 입장에서 저들을 살려 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차피 토벌을 진행하며 한두명이 죽는 것은 일상다반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죽이면 된다. 원래 죽은 자는 말이 없지 않은가. 일단 죽여 놓는다면 의문이 생겨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미야나 나, 그리고 저들을 조사한다면 내가 날아오는 함정파편에 힘이 실렸다는 것은 밝혀낼 수 있겠지. 하지만 죽으면 끝이다.'
자신은 아니라고 우기면 되고 미야는 아무것도 모르니 막을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못막은 저들이 등신이 되는 것 뿐이다. 그 정도면 운현은 자신이 원하는 정도로 일을 진행할 수 있기에 자신들을 죽일 듯 노려보는 저 셋의 운명을 가볍게 결정했다.
"자. 저기 보이지? 이 선을 넘어가면 바로 전투가 시작되는 거야."
어그로를 끌어야 하는 근접딜러진을 모아 놓고 파인은 설명을 시작했다. 메인탱커인 파인, 보조탱커인 미야. 그리고 나머지 근접딜러진인 운현, 미누아, 제노, 일투나가 적당히 시선을 끌어야 한다.
"트롤의 회복력은 대단하니까 공격을 한번이라도 멈추면 곤란해. 자. 트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
"근데 무기가 없네요?"
"트롤은 무기 안써."
"...그런가요."
과거와 다른 점이 발견되었다. 예전에는 트롤이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의 트롤은 맨손이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에게 뿔이 있는대로 나 있는 미누아, 제노, 일투나는 이를 드러내며 빈정거렸다.
"트롤에 대해서도 몰라?"
"도대체 할 줄 아는게 뭐야?"
"숙련된 모험가라더니."
"아. 제가 할 줄 아는 건 날아오는 투척 무기를 막는 정도죠."
"......"
괜히 빈정거렸다가 본전도 못찾은 셋이 또다시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았지만 운현의 입장에서는 이제 곧 사라질 것들이 까부는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분위기에 난감해하며 미야는 손을 들며 파인에게 외쳤다.
"그럼 시작은 파인씨가 하는거야?"
"응. 내가 먼저 갈게. 차례대로 들어와줘."
"알았어! 맡겨달라고! 운현. 들었지?"
"응."
"잘 할 수 있으려나 몰라. 투척무기 막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응. 잘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댁 어깨는 괜찮나요? 그거 맞아놓고 힐을 몇번이나 받았는데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트롤 공격 한방에 무기 놓치는거 아닌가 몰라."
"이자식이...!"
미누아의 이죽거림에 비웃음으로 답해 준 운현은 그녀가 창을 꽉 들자 파인을 보았다.
둘의 모습에 파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여기저기 있는 모험가들을 끌어모은 것이 토벌대라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그녀가 깊게 한숨을 내쉬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내가 예전에 막공 운영할때도 이랬지.'
별 희안한 트롤들을 이끌며 막공을 운영해야 하는 공대장은 원래 이런 고충을 가지기 마련이다. 이런 시련이 그녀를 더욱 단련시켜 줄 것이다. 라고 생각한 운현은 여유있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시작할 때 불러줘요. 미야. 가자. 애들이랑 얘기 좀 하고 가게."
"아, 응!"
"저 새끼... 전투가 끝나면 죽여버리겠어..."
미누아, 제노, 일투나가 이를 갈며 싸늘히 말하는 것을 들은 운현은 콧방귀를 뀌었다. 전투가 끝나면? 이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궁금하네.
그녀들을 비웃으며 원거리 딜러진과 힐러진이 있는 곳에 도착한 운현과 미야는 사람들 사이에서 곤란해하는 그 둘을 발견했다.
"욥."
"아! 운현!"
"운현 오빠!
"뭐야? 왜 그래?"
"아하하... 아니 그게 사람들이.'
"당신이 운현씬가요? 반가워요! 전 이레나라고 해요! 아까 정말 잘 봤어요! 대단하던데요? 혹시 사제 필요 없으세요?"
"전 이니아 라고 합니다! 원거리 딜링에는 자신있어요!"
"...뭐야?"
"아, 그게..."
아까 운현과 미야의 실력을 본 탓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투사체를 여유있게 막아내는 운현, 파편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미야.
이 둘이 앞에서 막아준다면 원딜러이고 힐러인 헤스티아와 바제트가 무척 안정적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들의 파티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원딜러와 힐러가 생긴 것이다.
어쨌든 강하고 능력 있는 탱커와 근접 딜러가 있다면 원딜과 힐러는 중간만 해도 잘하는 정도가 되니 말이다.
"원하신다면 제 몸도..."
"아, 아니 그건 원하고 자시고 메리트가 아닌데."
거기에 근접 딜러이지만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남자다.
모험가 직업의 특성상 고레벨이 되면 남자 모험가의 수가 줄어들기 마련인데 이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라면 고레벨이 되어도 위험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이들이 파티에 가입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아하하하..."
"죄, 죄송해요."
쉽게 거부를 하지 못한 헤스티아와 바제트가 난처해하자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기대감을 가득 담은 여인들의 눈을 슬그머니 피한 운현은 볼을 긁적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저희는 이제 길드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파티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군요. 한번 확인해볼게요."
"오오오!! 고마워요!"
"정 뭐하면 운현씨와 미야씨라도 가끔 파견나와주세요!"
"길드 소속이면 그런 것도 하잖아요!"
길드원의 일 중 하나가 도저히 파티가 구해지지 않는 경우 수수료와 인건비를 제공하고 길드원이 파견나가 일정기간 동안 같이 파티를 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것을 이야기하자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지요. 자세한 것은 길드에 문의해주세요."
"아싸!"
'할 이유가 없지만 말이지...'
제니스, 펠리시아를 이용해서 빠르게 레벨업을 한다면 이들과 엮일 일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운현은 자신의 속내도 모르고 좋아하는 이들을 바라 본 후 동료들을 모았다.
"자... 조금 있으면 토벌 시작되는데 긴장되거나 그런 것 없지?"
"응!"
"네!"
"딱히 긴장되거나 그러지는 않네. 운현. 너는 괜찮아?"
"나야 뭐... 평소 하던대로 하자고. 헤스티아. 바제트. 특히 너희들."
"에? 왜?"
"저희는 왜요?"
"미야는 내가 옆에 있을 거지만 너희들은 떨어져 있잖아. 장비만 믿고 너무 남발하지 마. 어느정도 여유를 갖고 하라고."
"으... 알겠어요."
"리더의 오더인데 따라야지. 알았어. 걱정마."
"좋아. 그럼 잘 버텨. 다치지 말고."
"오빠랑 미야언니가 더 걱정이네요. 다치지 말아요!"
헤스티아와 바제트의 응원을 들으며 자리로 돌아 온 운현과 미야는 이미 진형을 꾸린 파인의 옆에 섰다. 전위는 파인과 미야 중위는 운현과 미누아. 후위는 제노와 일투나다. 이렇게 먼저 달려가서 최대한 어그로를 끈 후 전투를 시작하자는 파인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년부터 죽이는 건가.'
"저기... 결원이 생기면 어떡하지? 치명상을 입거나 죽으면 말이야."
제노가 손을 들며 운현과 미야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모습에 파인은 얼굴을 딱딱히 굳혔지만 나무라지는 않았다. 근접 딜러인 이상 그런 위험은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한명씩 앞으로 당겨야지."
"그래...? 알았어. 그럼 가자고."
분위기가 살벌하기 그지 없다. 그런 상황에서 토벌대를 지휘해야 하는 파인은 한숨을 푹 내쉰 후 모두에게 외쳤다.
"이제부터 토벌을 시작하겠어!! 먼저 근접진이 트롤의 주의를 끌테니 원딜러들은 힐러들을 보호하며 내가 신호하기 전까지는 공격하지 말아줘!"
"알겠어요!"
"그럼 시작한다!!"
375====================
뒷공작
"하아아아압!!"
신성 마법으로 자신의 방어력을 올린 파인이 방패와 해머를 들고 달려나가자 그 뒤를 미야가 바짝 따라 달렸다. 그리고 그 뒤로 운현과 미누아, 또 뒤를 제노와 일루나가 따르는 방식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선을 넘은 탓에 트롤은 달려드는 이들을 확인하고 포효했다. 큼지막한 양 손이 움직이며 먼저 달려 든 파인을 공격한 순간 미야는 양 손의 주먹에 힘을 넣었다.
"지뢰진!"
땅을 흔들며 트롤의 움직임을 방해한다. 덩치가 큰 탓인지 트롤은 다른 몬스터들과 다르게 넘어지는 대신 자세만 흐트러질 뿐 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파인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트롤의 주의를 끌기는 괜찮은 듯 보였다. 흰 빛이 감싸진 해머가 트롤의 정강이를 몇번 후려치자 트롤은 그것에 고통을 받았는지 포효하며 파인을 공격했다.
"이제 시작해도 괜찮아!!"
미야가 파인을 지원하는 동안 트롤의 집중을 자신에게 완전히 끌어버린 파인은 트롤의 연속 공격을 방패로 막아내며 외쳤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누아는 자신의 무기를 들어 트롤에게 공격하며 운현에게 싸늘히 말했다.
"몸 조심해라. 전투 끝나면 네 차례니까."
"응. 고마워."
그녀의 협박에 가까운 경고를 비웃으며 트롤의 팔 공격을 검으로 쳐낸 후 운현은 힐끔 뒤를 보았다. 제노와 일루나 역시도 슬슬 공격에 참여하려는 것인지 접근하고 있었다.
'한번에 최대한 많이 쓸자.'
트롤에 대해서는 제니스에게 들었다. 자신이 알던 트롤과는 다르지만 전체적인 공격 방식은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1페이즈때는 탱커에게 집중공격. 어느정도 체력이 깎여나가면 다음부터는 무작위로 가끔씩 어그로가 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걸 이용하면 되겠지.'
자신에게 어그로가 튈 경우 그것을 다른 년들에게 옮길 수 있었다. 일단 운현의 검술은 방어에 최적화되어 있는 검술이다. 공격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버릴 수도 있는 검술이기에 운현은 오히려 그 어그로가 자신에게 튀기를 바랬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다른 여인들이 공격을 하는 동안 운현은 슬그머니 팔찌를 꺼내 가슴팍의 주머니에 넣었다. 살아있는 몬스터들의 어그로를 끄는 방법은 운현이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하아아압!!"
슬슬 원딜러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공격 범위 안에 들어 온 원딜러들의 마법과 화살이 트롤에게 꽂히고 먼저 트롤과 싸우던 근접 딜러진에게 힐링이 쏟아졌다.
"고마워!"
힐러진에게 외친 파인은 방패를 꽉 잡고 크게 내리찍어 트롤의 발등을 공격했다. 카이트 쉴드의 뾰족한 끝이 자신의 발등을 공격한 것에 놀란 것일까? 트롤은 찍힌 다리를 뒤로 빼며 크게 몸을 돌렸다.
"흑암권!!"
풍차처럼 몸을 돌리며 주변의 딜러들을 공격하려는 트롤의 앞으로 나서며 미야는 흑암권을 사용해 그 공격을 막았다. 트롤의 공격을 막고 뒤로 주르륵 밀려났지만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는지 미야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하아아압!!"
흑암권을 사용하며 소모된 기력을 채우기 위해서 미야는 트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운현에게 받은 장비의 효과로 공격을 하면 할 수록 기력이 채워지는 그녀가 다시 기력을 채웠을 때 트롤의 머리에 불꽃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미야 언니!!"
"너무 세게 공격하지 마!! 어그로 튀면 곤란해!"
화염 마법사의 공격력은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월등하다. 거기에 장비까지 좋은 만큼 어그로가 그녀에게 튈 가능성을 생각해야 했던 운현은 헤스티아를 향해 다급히 외쳤고 그 말을 들은 헤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법을 외우는 속도를 줄여나갔다.
"크윽!!"
큰 무리 없이 토벌은 잘 진행되었다. 윌로네가 가끔씩 거는 함정. 그리고 마법사들 중에서 바인드 스킬을 쓰거나 주술사나 다른 직업의 메즈기들이 타이밍 좋게 트롤의 몸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공격하던 도중 운현은 트롤의 움직임이 변한 것을 눈치챘다. 아까와 다르게 트롤 양손의 손톱이 길어진 것이다.
'이게 2페이즈군.'
1페이즈는 그냥 주먹이지만 이제부터는 손톱을 이용한 공격이 추가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어그로가 제대로 튀기 시작하고 트롤의 공격 속도도 훨씬 빨라진다. 제니스가 해줬던 트롤의 전투법을 떠올리며 운현은 검을 들고 외쳤다.
"미야! 뒤로 빠져!"
"에!? 하지만!"
"빠져!!"
두번이나 운현의 오더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미야가 뒤로 빠지자 파인은 다급히 외쳤다.
"나 혼자서는 힘들다고!!"
"연환한다! 내가 나설게!!"
"큭! 하지만!"
"트롤의 손톱을 봐!"
"...알았어!"
아까 전 운현이 함정을 처리할때를 떠올리면 차라리 지금 보조 탱킹은 운현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의 움직임은 마미아나 칼로이조차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빨랐으니 말이다. 함정에서 날아오는 화살이나 파편들을 막아낼 정도의 움직임이라면 잠시동안은 운현이 보조탱킹을 하는게 낫겠다 생각한 파인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바인딩에 묶여 있던 트롤은 바인딩이 풀리자마자 크게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아!!!"
"윽...!"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큰 포효가 공동에 울리자 모두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귀를 막았다. 그렇게 잠시 틈을 만들어낸 트롤이 손톱을 번뜩이며 파인에게 달려들자 운현은 잽싸게 아까 전에 꺼내 놓은 사자의 팔찌를 착용했다.
"크아아아!!"
'아무도 못봤겠지.'
트롤의 포효로 모두가 비틀거리는 동안 착용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나서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못봤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운현은 트롤의 눈에 증오가 섞인 것을 확인하고 히죽 웃었다.
"카아아!! 카아아아아악!!"
"운현! 위험해! 운현에게 어그로가 튀었어!"
"알았어! 걱정 말라고!!"
자신에게 오던 트롤이 방향을 바꿔 운현을 공격하려 하자 파인은 다급히 외쳤다. 그녀의 외침에 운현은 씨익 웃으며 옷자락으로 팔찌를 가렸다. 이걸 착용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상당히 골치가 아프다. 왼팔에 있는 암가드를 살짝 움직여 팔찌를 가린 운현은 트롤의 증오 섞인 공격을 검으로 막아내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운현! 도울게!"
"오지마! 위험해! 큭... 뭔 힘이...!"
아무리 운현이라지만 트롤의 공격을 혼자서 막아내는 것은 무리인 건가? 트롤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낸 운현이 몇걸음 물러나는 것을 본 미야는 이를 갈며 주변의 딜러들에게 외쳤다.
"지원해야 해!"
"아니... 저 잘난 운현이 밀리는데 우리가 지원한다고 되겠어?"
"파인!"
"빨리 안붙고 뭐해!!"
운현이 트롤을 상대하며 밀리는 것을 본 근접 딜러들은 끝까지 나서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토벌대장인 파인의 외침에 그녀들은 결국 투덜거리며 트롤을 향해 달려나갔고 그 순간 운현은 트롤의 공격을 검으로 흘려내었다.
"퍽!!"
"끄악!!"
운현이 튕겨낸 공격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미노아는 황급히 자신의 무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 공격에 실려 있는 힘이 보통이 아니었는지 미노아는 방어에 실패해버렸고 트롤의 공격에 맞아 멀리 날아가버렸다.
"미노아!!"
"안돼!!"
몇차례 바닥을 구른 미노아가 잠시 꿈틀거리다가 축 늘어져버렸다. 몇몇 힐러들이 황급히 그녀에게 힐을 써보았지만 미노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절했거나, 최악의 경우 죽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힐러들은 눈을 질끈 감고 미노아가 아닌 다른 근접 딜러진에게 힐을 주기 시작했다.
"트롤이 이렇게 강하다니!!"
아무리 미노아가 함정 공략때 방어력이 약한 모습을 보여줬다지만 한방을 버티지 못할 줄이야. 파인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외쳤을 때 운현은 또다시 날아 온 공격을 막아내었다.
"크악!! 더럽게 쎄네!!"
미노아는 한방에 전투불능이 되었는데 운현은 꽤나 잘 버텨내었다. 그것에 파인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운현!! 혼자 너무 감당하려고 하지마!"
"캬아아아아!!"
"윽!"
운현 혼자 저 정도 공격을 감당하는 것은 무리다. 파인은 운현의 앞으로 나서며 트롤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엄청난 힘이다. 하지만 이정도로는...? 그녀가 트롤의 공격을 전담하려는 순간 트롤은 운현을 공격하는 것을 방해하는 파인에게 분노하며 다시 강한 일격을 날렸다.
"커억!!"
숨이 멎을 정도의 일격이다. 방패가 아니었다면 자신도 저 미노아 꼴이 났을지도 모른다 생각될 정도의 강력한 일격에 파인이 뒤로 밀려난 순간 운현은 이어지는 공격을 검으로 흘려내며 파인에게 외쳤다.
"젠장!! 이걸 어떻게 잡아!"
"큭... 어, 어떻게든 버텨야해!!"
트롤이 예상 외로 강하다. 이상했다. 몇번 트롤 공략을 보았을 때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방어력은 도대체 얼마나 높았던 것일까.
"운현!! 내가..."
"비켜!!"
"으악!!"
자꾸만 끼어드는 이들이 거슬린 탓일까? 트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양 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 공격을 검으로 흘려낸 운현은 자신이 흘려낸 공격에 제노와 일투나가 맞아 나가 떨어지자 만족스럽게 히죽 웃었다.
'살아나면 칭찬해주지.'
제일 좋은 것은 여기서 저 둘이 죽는 것이지만 안죽어도 딱히 큰 문제는 없었다. 하이딩으로 나중에 몰래 죽이면 되니 말이다. 운현이 원하는 것은 저들의 죽음보다는 자신들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 말이다.
"캬아아아아!!"
"큭!!"
트롤의 발차기를 정면에서 막아낸 운현은 검을 떨어트리고 바닥을 굴렀다. 그것에 놀란 파인과 미야가 트롤을 막는 동안 바닥을 몇번 구르며 왼쪽 손목에 걸려 있는 사자의 팔찌를 풀어 인벤토리에 던져 놓은 운현은 힐러진에게서 힐링이 들어오자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기도 힘들군.'
애초에 트롤따위의 공격에 다칠 정도도 아니다. 별 의미가 없는 힐이지만 어쨌든 인기 관리는 해야 하는 법. 운현은 힐러진을 향해 감사를 표시하고 빠르게 움직여 바닥의 검을 집어 들었다.
"저 셋은!?"
"아무래도 전투 불능인 것 같아!! 젠장!! 세명이나...!!"
토벌대의 리더로서 근접딜러진이 세명이나 죽다니. 탱커로서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낙담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힘이 많이 빠진 것 같아! 공격이 아까 같지 않은걸!?"
파인과 둘이서 어느정도는 막아낼 수 있게 된 것에 미야는 다부진 어조로 말했다.
'그러겠지.'
트롤이 방어는 신경 안쓰고 공격에 모든 힘을 담은 이유는 아까까지 운현이 차고 있던 사자의 팔찌 때문이었다. 몬스터의 어그로를 끄는데 있어서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사자의 팔찌를 착용한 운현을 죽이기 위해서 트롤이 방어보다 공격에 온 힘을 실었기에 그정도의 공격력이 나온 것이었던 것이다.
"모두 집중해!! 이제부터 한명이라도 쓰러졌다간 큰일이야!!"
트롤의 움직임을 세명이서 막아야 한다. 아까 운현이 보인 실력이라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운현도 맞아 나가 떨어진 것을 보면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파인은 방패와 해머를 꽉 잡으며 외쳤고 운현과 미야는 그녀의 지시에 따라 트롤을 상대해나갔다.
"크어어어어...!"
"하아...하아..."
낮은 포효음을 끝으로 트롤의 몸이 쓰러졌다. 근접 딜러 세명이 전투불능이 되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잡기는 잡았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으으..."
지친 몸을 이끌며 파인은 미누아, 제노, 일투나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마력이 남은 힐러들이 그녀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말없이 고개를 젓는 것에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토벌대에서 누군가 죽거나 부상을 입는 일은 적은 일이 아니야."
"그래. 너무 그렇게 마음 쓰지마."
마인드 클랜에서 지원을 나온 마미아와 칼로이는 시무룩해진 파인의 어깨를 두드려 그녀를 응원해주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저 셋만의 희생으로 끝난 것이 다행인 일일지도 몰랐다.
"운현과 미야라고 했지? 정말 잘 싸우던데?"
여섯명이서 나눠야 할 데미지를 탱커도 아닌 운현과 미야가 잘도 버텼다. 파인이야 클랜 내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제대로 된 클랜도 없이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다니. 칼로이는 쓰게 웃으며 운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시했던 것 미안해. 역시 재능이 있으니 길드에서 선점하는 것이군."
"하하하... 별 말씀을요."
지친 얼굴로 운현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운현이나 미야는 확실히 성장할만한 인재다. 길드에 들어간 것만 아니면 당장 스카웃을 하고 싶을 정도로 뛰어난 그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던 칼로이는 공동 끝의 마법문에 빛이 발해지자 크게 외쳤다.
"오늘 정말 다들 고생 많았어!! 뒷정리는 우리들이 할테니까 2계층으로 진입하고 싶은 사람들은 진입하고 복귀하고 싶은 사람들은 복귀하도록 해줘!!"
376====================
뒷공작
"후... 세명이나 죽을 줄이야..."
"토벌은 성공했지만 마음이 아프네요."
"그러게 말야..."
죽은 이들과 별반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헤스티아와 바제트는 떨떠름해할 뿐 이었지만 미야는 복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들을 노리겠다고 으르렁대던 이들이 죽은 것이지만 그래도 같이 싸우던 동료다.
"미야."
"응?"
복잡한 얼굴로 생각을 이어나가는 미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운현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너무 그렇게 우울해하지마."
"에... 운현. 너는 괜찮아?"
"응. 뭐... 이런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숙련된 모험가인만큼 모험을 하다가 동료가 죽은 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닐 것이다. 그의 무덤덤한 모습에 미야는 쓰게 웃었다.
"내가 다치거나 죽어도 그렇게 무덤덤할거야?"
"그럴리가 있나. 그들과 네가 같을 수 없잖아."
"헤헤..."
딱 부러지는 어조로 말하며 운현은 미야의 말을 부정했다. 이게 다 그녀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런데 미야가 죽는다면 이렇게 있을 수 있을까?
'아마 미쳐서 다 죽이고 다시 처음부터 하겠지...'
준비한 것이 아깝기는 하지만 한명이라도 죽었다간 모든 것이 실패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운현은 동료들을 모아 놓고 조용히 말했다.
"나를 믿고, 나를 좋아한다면... 한가지 약속해줘."
"응? 뭘?"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들의 생명을 우선시 여겨줘."
"그 말은... 살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라는 이야기야?"
"응. 다치는 정도는 괜찮아. 팔 하나, 다리 하나 부러지는 정도도 괜찮아. 정 뭐하면 날 미끼로 삼아도 괜찮아. 그러니까 절대로 목숨 걸고 움직일 생각 하지마."
"싫다... 무서운데? 그런 얘기는."
운현의 진지한 말에 바제트는 웃으며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그의 표정에 장난기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진심을 담은 듯한 그의 분위기에 눌린 여인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금방 표정을 푼 후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 1계층 돌파도 했으니까 오늘은 좀 쉴까? 내일 2계층에 들어가면 되겠다. 길드의 지원도 받으면서 하면 되니까 오늘은 푹 쉬는게 낫겠어."
"와! 그럼 오빠! 오늘은 우리 같이 쇼핑을..."
"운현님."
오늘은 쉬자는 운현의 말에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기뻐하며 그에게 놀러갈 것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어느새 다가 온 메이드는 무감정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운현님께 쪽지가..."
"이게 뭐지? 잠깐만..."
메이드가 건넨 쪽지를 받은 운현은 그것을 펼쳐보고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바제트는 다가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쪽지를 보았다.
"성당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R? 누구야?"
"아아... 나랑 일적으로 만나고 있는 사람. 잘 됐네. 금방 갔다올테니까 다들 씻고 옷 갈아입고 기다리고 있어."
"혼자 가려고?"
"응. 이 양반이 낯가림이 심한 사람이라 딴 사람이 오면 곤란해하거든."
"괜찮겠어요?"
헤스티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운현은 그저 싱글거리며 웃을 뿐 이었다. 별다른 걱정이 없어보이는 그 얼굴에 여인들은 아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는 방에 있을게요. 다녀 오세요~"
"그래. 술은 마시지 말고. 뭣하면 먹고 싶은거 시켜서 놀고 있어. 금방 올거니까 어디 나가지 말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운현은 은근히 나가지 말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아직 라닌과 천검자에 대한 일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들이 길드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상당히 일이 꼬여버리게 된다.
'다들 길드에 있을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지금으로서는 주의해야 할 사람은 천검자와 라닌 정도다. 카야가 어디 짱박혀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그 둘을 주의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던 운현이 차분히 말하자 여인들은 웃으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2층으로 올라갔다.
"운현씨! 토벌은 잘 끝났어요?"
사무소에 있던 필레가 웃으며 다가오자 그녀를 향해 운현도 빙긋 웃었다. 그의 웃음에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 필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필레씨. 오늘은 어디 안나가나요?"
"네? 네. 원래는 아침에 상아 길드장님이 시청에 가서 윈디아씨를 만나기로 했는데 그게 취소되서 어디 안나가요. 윈디아 시장님과 윈드가 이쪽으로 오후에 오기로 했거든요."
"그렇군요."
'필레랑 상아도 길드에 있다는 건가... 그럼 천검자가 들어와도 어느정도는 막을 수 있겠군.'
"그런데 레나 심판관님은 어디 계신가요?"
성당에서 만나자고 했다는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을 대비해 성당에 대한 것을 듣기 위해 레나를 찾은 운현은 필레가 쓰게 웃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레나씨는 지금 성당에 갔어요. 가져 올 것이 있다고..."
"...아 그래요."
등신같은 년. 하마터면 욕을 할 뻔했다. 그것을 꾹 억누른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필레에게 말했다.
"그런가요? 이런... 물어 볼 것이 있었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성당에 가보면 되겠군요."
"후후후... 그나저나 운현씨."
"네?"
"음... 그... 아침에 이야기했던 것 있잖아요..."
"아침에...? 아. 저녁 같이 먹자는 거요?"
"네. 괜찮으시면 오늘 저녁 어떤가요?"
"오늘 저녁. 음... 나쁘지는 않은데 제가 저녁에는 시간이 애매하군요. 지금 답변을 드리기는 힘드니 성당에 갔다 온 다음에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라닌과의 대화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상 운현으로서는 함부로 필레와 저녁 약속을 잡기 어려웠다. 만약 라닌과의 대화가 틀어지면 그 즉시 라닌을 죽이고 바로 천검자를 잡으러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천검자인만큼 숨어서 천검자가 상아를 습격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운현에게 있어서 저녁 약속은 함부로 잡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가요?"
거절이 아닌 일단 보류라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인가. 필레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가 애써 웃었다.
"그럼 이따가 꼭 말씀해주셔야 해요! 알았죠?"
"물론이죠. 필레씨와의 식사는 저도 기대하고 있는 건데요."
"어머. 아이 참~ 운현씨는 장난도..."
"장난 아닌데요?"
"에... 지, 진짜요?"
"물론이죠. 정말 기대하고 있으니까 최대한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노력해볼게요. 그럼 필레씨. 저 갔다올게요~"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운현이 웃으며 말하자 필레는 손을 붕붕 흔들었다. 그가 나가자 기쁜 나머지 폴짝폴짝 뛰며 환호성을 내질렀고 필레의 그 모습에 모험가들은 인상을 왕창 구기며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레나가 성당에 가 있고 라닌이 성당에서 만나자고 했다라... 그럼 뭐, 레나는 이미 죽었다고 보는게 맞는 건가..."
한숨을 내쉬며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어떻게든 좀 이용해먹으려고 살려 놓으려 했는데 없는 사이에 홀라당 성당으로 가버렸을 줄이야.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
천검자의 말에 따르면 라닌도 운명을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했다. 어떤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성을 펑펑 공급받는다는 가정을 했을 때 방법만 알면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은 아직 죽음의 때가 아닌 레나가 오늘 훅 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레나가 죽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용을 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지 연인들처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그토록 바라는 기사 직을 번번히 거절했던 것 아닌가.
"중요한 건 왜 서당니냔데... 뭐 레나의 목숨 가지고 협박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런 거면 차라리 좋다."
자신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알려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운현으로서는 차라리 라닌이 레나를 가지고 협박을 하길 바랬다. 그렇다면 레나를 이용해서 라닌을 제대로 엿먹일 수 있으니까.
"그게 나한테 제일 리스크가 적긴 한데 말이지..."
운현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천검자와 라닌이 서로 한편이 되었다는 것은 잘만 하면 둘 다 한방에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부디 그래주길..."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 성당 앞에 도착한 운현은 성당의 문이 열려 있는 것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나를 데리고 모험가 길드에 갈 때 그녀는 분명히 성당의 문을 잠궜었다.
"흐으음..."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뭔가 흉악한 분위기는 없었다.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 운현은 성당의 중앙에 앉아 있는 레나를 발견했다.
"레나씨. 왜 여기..."
"운현씨..."
천천히 고개를 돌린 레나의 얼굴에 눈물이 가득했다. 얼마나 운 것일까? 눈매가 퉁퉁 부어 있는 그녀의 모습에 운현이 인상을 찌푸렸을 때 그의 뒤로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반가워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
처음 듣는 목소리? 아니다.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다. 그 목소리에 운현은 히죽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신이 라닌인가?"
"네. 제가 라닌입니다."
천천히 몸을 돌린다. 드디어 라닌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이다. 몸을 돌린 운현은 성당의 문을 닫는 흰 사제복의 여인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넌."
"오래간만이군요. 운현."
목소리의 주인을 보자마자 운현은 이를 갈았다. 아, 이거 일이 더럽게 귀찮게 되었구나. 그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확인한 라닌은 기쁜 듯 크게 웃었다.
"아하하하하하!!! 운현!! 당신과 이렇게 만나길 얼마나 기대했는지 몰라요!!"
"하아... 네가 왜 여깄냐?"
퉁명스러운 그의 말투에 라닌은 더더욱 기쁘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무덤덤히 바라보던 운현이 허리춤의 단검에 손을 가져간 순간 라닌은 레나를 가리켰다.
"어머. 절 공격하시려구요? 그래서는 곤란하죠."
"그때 그냥 죽일 걸 그랬네."
긴 흑발. 청초한 미모. 하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 과거 자신이 했던 가상현실에서 처참하게 발리고 봉인당한 게임 캐릭터인 제갈량이었다.
"분명히 그 공간에 처박아 뒀을텐데... 왜 니가 여기 있는거냐?"
"그건 중요한게 아니죠. 중요한 것은 왜가 아니랍니다. 제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죠. 그렇지 않나요? 가짜 양반...?"
"가짜... 뭐 좋아. 아무튼 오래간만에 만나서 반갑다고 손 흔들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라닌. 제갈량은 자신이 했던 진 삼국 연희무쌍3의 캐릭터 중 하나였다. 운현의 플레이때마다 항상 거의 라이벌 수준의 캐릭터였던지라 상대할때마다 머리가 빠져라 생각을 해야 그나마 상대할 수 있었던 제갈량을 바라보며 운현은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난 건.... 죽여달라고 나타난 건 아닐테고."
운현에게 있어서 가상현실게임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하나의 세계를 끝내며 그 세계에서 쌓은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운영하며 자신의 실력을 높이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 운현이 에디터까지 써야 할 정도로 자신의 뒷통수를 제대로 후려친 제갈량이 눈 앞에 있다. 운현의 입장으로서는 쳐죽여 마땅한 존재이고 라닌의 입장에서는 운현에 의해 엄한 공간에 봉인되어 제대로 고통을 겪었으니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상대일 것이다.
"왜 내 앞에 나타났냐? 거기서 나왔으면 얌전히 숨어 살지. 왜? 죽여달라고?"
평소 운현이 하는 말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싸늘하고 잔혹한 말에도 라닌은 그저 기쁜 듯 웃을 뿐 이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운현이 단검을 잡은 순간 라닌의 뒤로 검은 날개를 가진 사제가 날아내려와 손가락을 튕겼다.
"아아... 우, 운현씨!!"
"그만둬."
레나의 몸에서 붉은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하자 운현은 단검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런 그를 보며 까르륵 웃은 라닌은 운현을 향해 싱글거리며 말했다.
"운현. 당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요."
"내가 원하는게 뭔데?"
"저 여자를 지키는 것."
'빙고.'
그동안 운현이 다난교에게 보인, 레나를 지키려는 모습 때문인지 라닌은 그가 지키려는 존재가 레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빠득 이를 간 운현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자 레나의 몸에서 빛이 천천히 사라졌다.
"이제 누가 우위에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요? 이상했어요. 왜 당신이 여기까지 와서 이런 짓을 할까. 가짜의 세계에서 신이라 불리울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가 여기서 목숨 걸고 움직일까..."
"......"
"당신에게도 지킬 것이 있기 때문이었군요?"
비웃음 가득한 라닌의 말에 운현은 힐끔 레나를 쳐다보았다. 자책, 후회, 그리고 미안함. 자신 때문에 운현이 위기에 처해졌다 생각하고 있는 레나는 차마 운현을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제안합니다. 과거의 일은 일단 잊도록 하지요."
"눈물 날 것 같군.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제가 신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럼 당신이 원하는 것... 저 여자의 목숨을 보장해주지요. 저 여자의 삶은 제가 개입하든 하지 않든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그것을 바꿔드리죠."
"...그게 무슨 소리지?"
운현의 말에 라닌은 양 팔을 벌렸다.
"이계인, 그리고 신성. 이것만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그건 잘못된 방법입니다. 운현... 당신같은 이계인이나 신성을 이용해서 운명을 바꾼다 하여 그 바뀐 운명이 영원토록 진행되는 것은 아니죠. 제대로 운명을 바꾸려면 신이 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신이 되어... 세상의 운명을 다시 쓰는 겁니다!"
377====================
뒷공작
"신이 된다라... 되게 쉽게 얘기하네."
라닌의 말에 운현은 시큰둥한 어조로 답한 후 팔짱을 꼈다. 그의 심드렁한 태도를 예상했는지 라닌은 자신의 안경을 가볍게 밀어 올린 후 느긋하게 말했다.
"운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까?"
"뭘."
"신성이라는 것이 왜 존재하는 걸까요?"
"그걸 내가 알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지?"
"있지요. 당신은 저 여자를 살리고 싶은 것 아닙니까?"
"그건 네 생각이고."
"허세 부리지 마시죠."
운현의 시큰둥한 태도를 그저 허세라고 생각한 라닌은 즐거워 미치겠다는 얼굴로 키득거리더니 여유있게 양 팔을 벌렸다. 그 순간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여인이 손을 들어 올렸고 레나의 몸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아! 그만! 그래! 네가 원하는게 뭔데?"
"이제야 대화를 하실 준비가 되었군요. 제 앞에 무릎꿇고 신발을 핥으라고는 하지 않을테니 좀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시겠습니까?"
'이년이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 날 이용해먹으려는 것 같군.'
끝없는 시간동안 쾌락의 고통 속에 가둬 둔 장본인을 두고도 라닌은 자신을 공격하거나 괴롭히기보다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려는, 무척이나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운현은 그녀의 속셈을 눈치챘다.
'빼먹을 만큼 빼먹고 치려는 거겠지. 같잖은 년 같으니라고.'
운현 역시 책사라 불리는 사람이다. 책략, 그리고 이득을 위해서는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다.
필요하다면 적의 발가락이라도 빨아야 하는 것이 책사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라도 내쳐버릴 수 있는 것이 책략가다.
그리고 라닌은 비록 게임상이라지만 자신을 엿먹인 몇 안되는 책사 중 하나였다. 그런 그녀가 사감 때문에 자신의 목적을 버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운현은 가소롭다는 듯 라닌을 응시했다.
"그 시선은 뭡니까?"
"아니. 대단하다 생각되서 말이지. 만약 내가 너였으면 날 찢어죽이려고 할텐데."
"그건 중요한게 아니죠. 그런 작은 일로 대의를 무너트릴 순 없지 않습니까?"
"헤에. 대의 좋지. 그래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자는 건가요? 자... 신성이라는 것이 왜 존재하는 걸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어?"
"회귀까지 하셨다는 분이 그렇게 조사를 안하셨다니... 실망스럽네요."
"나 욕할려고 여기까지 부른거냐? 그럼 그냥 공격하지 그래?"
빈정거리는 운현을 향해 라닌은 능글맞게 웃었다. 운현이 저렇게 나온다는 것은 그 스스로 지금 궁지에 몰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운현이 욕을 하면 할 수록 오히려 즐거워진 라닌은 히죽 웃은 후 품에서 금색의 잔을 꺼내었다.
"성배."
"아시는군요. 성배입니다. 신성을 담아 둘 수 있는 그릇... 이게 왜 존재할까요? 그리고 신성은 왜 존재할까요? 이 세계에 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신이 세상에 강림하기 위해서는 위신체라는 그릇이 필요하지요."
"그렇지."
"그런데 신성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뭐죠? 신성은 신의 힘입니다. 그 신의 힘이 무슨 이유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걸까요? 신의 존재는 운명을 만드는 것 외에는 세상에 개입할 수 없는 존재인데."
"......"
라닌의 말에 운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라닌은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 세계는 잘못되어 있습니다. 신성이 존재하는 이유? 이 세계의 운명 자체가 틀어졌기 때문이지요. 누구 때문에? 바로 악신 때문입니다. 이 세계의 주신은 파르티. 파르티가 만들어진 운명은 세계를 구축하고 그 세계를 유지해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악신의 탄생으로 인하여 죽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죽어버리고 악신의 저주라는 이름 하에 운명을 빼앗긴 존재가 생겨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틀어짐을 막기 위해서 파르티가 신성을 뿌린 것이라는 거네?"
"네. 그렇습니다. 자... 그럼 여기서 궁금한 점."
"뭔데."
"왜 신성이 남아 있을까요? 왜 신성을 담는 이 성배가 남아 있는 것일까요?"
"......"
"그리고, 온전한 신성 하나를 가진 존재가 처녀성을 잃지 않은 채 자연사 한다면... 그 신성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
"신성은... 돌아가겠지."
"누구에게?"
"파르티에게."
"맞아요."
빙긋 웃으며 라닌은 키득거렸다. 그런 그녀를 노려보던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뭐냐. 파르티가 고의적으로 신성을 뿌려서 그 신성으로 사람들이 깽판을 치게 만들고 있다는 얘기냐? 악신이 틀어 놓은 운명을 메꾸라고?"
"네. 바로 그거에요. 제가 조사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확인까지 했구요."
"어떻게 확인했는데?"
"쿡쿡쿡..."
키득거리던 라닌은 운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마주하던 운현이 인상을 구기자 라닌은 느긋한 얼굴로 차분히 말했다.
"여기서 제안하는 겁니다. 운현. 이계인. 신성 없이도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이 세계의 유일한 존재. 당신에게 요청하겠습니다. 저와 손을 잡죠. 당신이 저 여자를 살리고 싶다면...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제가 신이 되어 제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고... 그 안에서 저 여자의 삶을 보장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일단 그걸 믿을 수가 없지.'
지금이야 지가 아쉬우니 이렇게 나오고 있겠지만 신이라는 위치에 올라가 자신을 제대로 엿먹일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라닌은 반드시 자신을 엿먹일 것이다.
'내가 그 위치에 올라가면 그렇게 할거니까.'
상대에 대한 신뢰따위는 눈꼽만큼도 없는 상황 속에서 이런 제안에 넘어 갈 정도로 운현은 순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가 말하는 세계의 비밀에 대한 접근은 확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의 운명을 계속 바꿔 죽음을 회피하게 하여 악신이 부활한다면... 그 악신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라닌과 지금은 관계를 유지하는 수 밖에 없겠군.'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운현 역시 라닌을 이용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녀가 다가간 세계의 비밀. 악신과 파르티의 관계. 그리고 신이 될 수 있는 방법. 최악의 경우 자신이 신이 되어 그녀들의 생존을 보장해야 하는 이상 운현은 라닌의 제안에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널 믿을 거라고 생각하냐?"
"믿기 싫으면 어쩌실 건데요?"
"흠... 하긴 뭐."
"당신이 아무리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계속된 운명의 틀어짐은 악신을 부활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군. 아. 천검자에게 내 얘기는 들었겠지? 너라면 대답해 줄 수 있지 않나? 파르티는 도대체 뭐냐? 걘 어디에 있는건데?"
"당신이 제 손을 잡으시면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끙..."
"운현씨... 안돼요. 저 여자의..."
"당신은 닥쳐. 한낱 운명이라는 실에 걸려 있는 꼭두각시 주제에 감히."
"꺄아아악!!"
덜덜 떨며 레나는 간절히 운현을 막으려 했지만 라닌은 더 없을 정도의 경멸을 담아 레나를 바라보며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간 검은 기운은 레나의 몸을 후려쳤고 레나는 그 즉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저건 검은 채찍.'
본 적이 있는 기술이다. 미믹이 사용하는 기술. 그것을 라닌이 사용했다는 것에 운현은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신이 되겠다고 까부는 이유를 알겠구만... 아니면 스킬 훔쳐배우기인가? 저년이 그걸 쓰지 못한다고는 자신할 수 없군.'
자신이 아둔의 스킬을 훔쳐 배운 것처럼 라닌이 미믹의 검은 채찍을 훔쳐배우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니 일단 감안하도록 하자. 머릿 속에서 빠르게 결정을 내린 운현은 레나를 기절시킨 라닌을 향해 빠르게 단검을 던졌다.
"큭!!"
"감히 누굴 건드려. 신이고 나발이고 과거의 고통을 다시 겪고 싶은가보지?"
운현이 던진 단검은 라닌의 앞으로 나온 검은 날개의 사재의 어깨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것에 파랗게 질린 사제가 피가 터져나오는 어깨를 꽉 잡았을 때 운현은 다른 단검을 꺼내어 잡았다.
"이런.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 당신이 하던 짓과 틀리지 않잖아요? 가짜의 세계에서 가짜의 존재들을 가지고 놀던 짓... 왜 그런 짓을 하나 했더니 이런 재미가 있었군요. 아아.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요. 그래도 죽이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죠."
'쓸데 없이 여유로운게 기분나쁘군.'
자기 역시 가짜 세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주제에 힘을 얻었다고 저렇게 까부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같잖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운현이 지금 상황에서 제갈량을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는 얘길 들어보니 저년이 파르티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는 것 같군. 나보다는 더 비밀에 접근을 한 것 같아.'
신이라는 위치.
비록 가짜 신이라는 자리에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운현은 신이 아니었다.
가짜 신이기에 가짜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고 가짜의 세계에서 마음대로 힘을 쓸 수는 있었지만 어쨌든 그 본질은 가짜인 것이다.
'가짜이기에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지만...'
신은 이 세계에 강림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과거의 자신은 성배를 대가로 '가짜' 신이 되길 바란 것이겠지.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너. 신이 된다고 했지."
"네."
"신이 된다는 것은 세계에 간섭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 아닌가? 그저 세계를 창조하고 싶을 뿐이냐?"
"그럴리가요. 신이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존재입니다. 오로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감정을 버리고 오로지 세계의 유지와 관리, 그리고 운명을 만들어내는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신이 되려는 거지? 창작 욕구가 넘쳐 흘러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신이 되어 자신이 원하는 운명을 만들 수 있다면. 왜 과거의 자신은 그것을 선택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인가.
운현의 질문에 제갈량은 쓰게 웃었다.
"글쎄요... 이유는 있습니다만 그것까지 제가 당신에게 말씀드릴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뭐 좋아."
라닌도 바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운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고 운현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내가 뭘 해줘야 하지?"
"그 말씀은 저와 손을 잡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손을 잡는 정도는 나쁠 것 없겠지...."
의외라는 얼굴로 자신을 보는 라닌을 향해 한숨을 내쉬며 운현은 뒤쪽에 널부러져 있는 레나를 가리켰다.
"네가 진짜로 레나를 살려준다면 말이지."
"하...하하하... 좋아요. 운현. 당신이 저와 진심으로 손을 잡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뭐 어쩌자는거야?"
"일단 목적은 같죠. 궁극적으로는 다를 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린 서로 '이용' 할 수 있는 관계잖아요? 그때까지는 손을 잡죠."
"야야. 썰은 그만 풀고 본론만 말해."
제갈량의 긴 서두에 운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어쨌든 운현의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는 일이었다.
동료들의 레벨을 올려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라닌이 미친척 하고 날뛰기 시작하면 그것에 대한 대비를 하기 위해서 운현은 어쨌든 동료들의 레벨업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소극적인 방어태세를 갖추는 것 밖에 답이 없군.'
짜증이 나지만 어쩌겠는가. 상황이 그러한걸. 모든 것이 자신의 입맛대로만 흘러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진짜 내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일단 첫번째. 던전 도시를 지배해주세요."
"지배라는 것은 시장 선거에 승리하라는 거냐?"
"시장 선거에 승리했다고 해서 모든 것을 가진 것은 아니겠죠. 던전 도시에 있는 4대 조직의 수장들이 다난교를 인정하게 해주세요."
"그게 쉽겠냐..."
"당신이라면 가능하지 않나요? 당신의 책략이 있다면. 그리고 당신의 힘이 있다면 그들을 굴복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을 텐데요."
"날 너무 과대평가 하는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능력도 모잘라."
투덜거리는 운현을 향해 라닌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이미 하나는 해낸 것 아닌가요? 아르토리우스. 당신이 만든 위신체잖아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윈디아는 어쩔건데? 윈디아도 그렇고 피스나도 그렇고 난 아직 얼굴 한번 본 적이 없어. 시간이 필요하다고."
"얼마나 필요한가요?"
"대충 일년?"
"너무 길군요. 한달 드리겠습니다."
자신이 제시한 기간을 한번에 1/12로 줄여버리는 라닌을 향해 운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라닌은 뭐 어쩔거냐는 태도로 레나를 가리켰다.
"젠장."
"칼자루는 제가 쥐고 있습니다."
레나가 운현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라닌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를 향해 이를 갈면서도 운현은 빠르게 속으로 생각했다.
'라닌도 책사다.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순진한 것이지.'
자신이 레나를 자신의 약점으로 내세운 것처럼 라닌 역시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위해서 사기를 칠 수 있었다.
라닌은 자신이 인정할 정도로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책략가였다. 그런 자가 순진하게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말할리 없다고 생각한 운현은 인상을 왕창 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달... 힘들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해보지. 그게 다야?"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
"이건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한달 후에 누군가를 죽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378====================
뒷공작
"그게 누군데?"
"누군지 아는게 중요한가요?"
"딱히 중요하지는 않지만 궁금해서. 왜 네가 죽이지 않지? 너는 운명을 바꿀 수 없는 건가? 혹시 너도 회귀를 경험했냐?"
라닌이 인도주의자라서 사람을 함부로 못죽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죽일 수 없는 상대라서 죽이지 못한다?
그것도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라닌은 현재 천검자라는 세계 최강의 검사를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자신에게 죽여달라고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운현은 생각했다.
"그냥 해주면 안되나요?"
"레나를 가지고 협박하는 것도 적당히 해라. 수틀리면 나도 내가 어떻게 움직일지 장담 못하니까."
짜증을 내는 라닌을 향해 피식 웃은 운현은 천천히 검을 들었다. 그 검끝이 자신에게 향해진 순간 라닌은 비릿하게 웃었다.
"저 여자가 죽을텐데?"
"뭔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레나가 죽었다? 물론 괴롭겠지. 힘들겠지. 고통스럽겠지... 그런데 말야. 난 이계인이야. 이번에 실패했다면 다음을 노리면 된다."
"......."
"레나를 가지고 협박을 하는 것도 적당히 해라. 라닌. 다시 한번 그 고통을 겪고 싶은 건 아니겠지?"
운현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져간다. 그 무심한. 자신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길가의 돌멩이를 쳐다보는 것 같은 시선에 라닌은 움찔했다.
'너무 나댔나?'
자신을 지옥에 보냈던 초강자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것에 너무 설친 것에 라닌은 이를 악물었다. 실수다. 너무 건드렸다간 저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속으론 다급했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라닌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 지옥같은 회귀를 반복하려구요?"
"한번이나 두번이나."
시큰둥히 말했지만 운현의 입장에서는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번의 회귀는 과거의 자신이 수천, 수만번의 회귀를 겪어가며 만들어낸 기회였다.
그것을 이렇게 날려먹었다간 아무리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고통을 받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상아가 공격받은 것만으로도 꼭지가 돌아버릴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른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이번에 실패를 경험하면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좋아요."
결국 항복 선언을 한 것은 라닌이었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신이 죽여줘야 할 사람은 하우드입니다."
"하우드....라면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매일 자살을 시도한다는 하이엘프 아닌가?"
"네."
"그 사람을 왜 죽여?"
"하우드는 이 세상의 비밀에 가장 근접한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왜 자꾸 자살에 실패할까요?"
"그건..."
"그는 자살에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무언가 찝찝함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운현은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하던 것이 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위신체를 만드는 법. 운명을 읽는 법. 신성을 찾는 법. 세계의 운명을 바꾸는 법.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가 다른 존재도 아니고 자신의 생명을 끊는 법. 그것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요."
"......."
"그는 자살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것을 발견한 것에 기쁨과 함께 당혹감을 느낀 그를 향해 라닌은 천천히 말했다.
"다만... 자살을 성공하고 되살아나는 것 뿐이지요."
"잠깐만... 그럼 그건."
죽음 이후 되살아난다. 그것과 같은 현상을 운현은 알고 있었다.
"던전?"
던전 안의 몬스터. 아니. 정확하게는 던전 안의 모든 것. 악신이 만든 세계의 모든 것이 죽음과 동시에 되살아나는 것.
파괴 후 시간이 경과하면 다시 되살아나는 상황.
그것에 생각이 미친 운현은 한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자신의 영혼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고. 같은 존재는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함께 존재할 수 없기에 죽음의 상태에 되어 있는 현자.
그리고 자신.
운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하우드가?"
"네."
고개를 끄덕인 라닌은 무거운 한숨을 토해내었다.
"하우드가 악신입니다. 정확히는 악신의 위신체, 악신의 혼이 나눠진 분신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우드가..."
"네."
'잠깐만... 하우드가 위신체라고?'
뭔가 이상했다. 라닌의 말을 듣고 운현은 천천히 자신의 기억과 자신의 추론, 그리고 현자에게서 얻은 진실들을 곱씹었다.
'위신체는 운명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야. 그리고 나 역시도 운명에서 벗어난 존재고. 그런데... 제니스나 바제트의 운명에 내가 걸리는게... 말이 되나?'
지금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지난번의 삶에서 운현은 바제트에게 자신이 바제트의 운명의 상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운현이 울며 사랑을 고백하던 것을 끝으로 목숨을 잃었었다.
'말이 안되는데... 어째서지?'
제니스는 자신의 운명의 상대가 하우드라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하우드 역시 제니스의 운명에 엮여 있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운명이 없는 존재가 운명에 걸려 있는 자의 운명에 등장한다? 이건... 뭔가 이상한데. 조사가 필요하겠군.'
하우드를 만나서 정확한 것을 파악해야 한다. 운현이 입을 다물고 심각한 얼굴로 생각을 이어나가자 라닌은 차분히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하우드를 죽일 수 있나? 이계인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하지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너 역시 가능한 일이잖아. 거기에 천검자도 신성을 사용하면 바꿀 수 있고."
"제가 그걸 놓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건가요? 이미 해봤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저희들의 공격에도 하우드는 부활했습니다."
"그럼 내가 공격해도 그가 부활하는 것 아닌가?"
"글쎄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제 2계를 쓰는 수 밖에요."
"왜 하우드가 부활하는 것이지? 위신체라고 하지만 위신체는 어디까지나 이 세계의 섭리에 한발자국 나가 있는 존재에 불과해. 아무리 악신의 위신체라고 하더라도..."
"간단합니다. 파르티 때문이죠. 이 세상의 섭리. 모든 것은 순환하기 마련입니다. 하나의 운명, 하나의 영혼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속에서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르티는 악신이 부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죽음을 막아놨습니다."
"파르티가 막아 놓은 것을 내가 어떻게 죽여.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가능할겁니다. 그리고 불가능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 2계를 사용하면 되니까요."
자신있는 미소를 짓는 라닌의 모습에 운현은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2계가 뭐지?"
"그건 지금 당신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우드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때 말씀드리죠."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 라닌은 천천히 말한 후 입을 다물었다. 이제 라닌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는 듯 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 해보지. 그런데 하우드는 어디에 있지?"
"하우드는 우리가 찾아서 당신에게 보내드리지요."
"알겠어. 그럼 한달 후? 연락은 어떻게 해야 하지?"
"저희가 당신과 접촉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라닌은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었는지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나가려 했다. 그런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운현은 손가락을 튕긴 후 물었다.
"그런데 카야는 어딨냐?"
"글쎄요? 한번 찾아보시죠."
운현의 질문에 살짝 고개만 돌린 라닌은 부드럽게 미소지은 후 멈춘 발걸음을 다시 돌렸다.
그녀가 나가버리자 운현은 팔짱을 끼고 자리에 앉았다.
라닌과의 만남. 일단 소득은 많았다. 지금 당장 라닌을 찢어죽일 수도 있지만 그녀의 계획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한달이라는 시간... 그정도면 충분해.'
다른 모험가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자신이 이끄는 이상 동료들의 레벨을 400대로 끄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쟤 죽이고 끝나는거면 만사가 편했겠지만... 젠장. 그럴 수가 없으니...'
단순하게 다난교를 끝장내는 것이라면 이렇게 숨길 것도 없이 혼자 움직이며 다난교를 하나하나 작살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운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운명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었다. 현자와의 이야기를 통해 세운 계획이 있지만 현자 역시도 추론과 과거의 자신과의 지령을 통해 얻은 것이만큼 완벽할 수 없었다.
'이 세계에 운명을 만들어낸 신을 만나서. 그 신에게 운명의 변경을 받아내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했었지. 그렇기에 가짜 신의 자리에 오른 것이고.'
가짜 신이기에 신과 상대할 수 있다. 신과 싸울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신 뿐. 그렇기에 현세에 개입할 수 있으며 신과 싸울 수 있는 어중간한 가짜 신의 자리에 머무르길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악신과 파르티라..."
현자와의 이야기에서 악신과 파르티, 그리고 하우드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일부러 숨겼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현자는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운현의 목표, 운현의 성향, 운현의 감정, 운현의 기억. 그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현자가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운현은 눈을 감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그래도 내 계획은 크게 틀어지지 않는군. 그리고 오히려 쉬워질 수도 있겠어..."
감았던 눈을 뜨며 운현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슬며시 눈을 돌린 그는 라닌에게 맞아 기절해버린 레나를 보며 이를 드러내었다.
'드디어 널 써먹을 때가 왔구나.'
"운...현씨?"
"깨어나셨나요."
고통에서 정신을 차린 레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당혹스러워하며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그녀를 향해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없습니다."
"아...아아... 운현씨."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운현의 질문에 레나는 한참동안이나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생각을 정리하는 것인가. 아니면 갈등하는 것인가. 입술만 달짝거리던 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운현씨. 그 답변을 하기 전에 한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얼마든지요."
"제가... 운현씨의 약점이라는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가요. 그리고 운현씨가... 절 살리기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했다는 것도 무슨 이야기구요?"
잔뜩 떨리는 목소리를 받으며 운현은 난처함을 감추기 위해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가 대답해주기만을 기다리던 레나는 운현의 입이 열리자 긴장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알 필요는 없는 일입니다."
"저와 관련되었잖아요!!"
"그렇지만 제 개인의 일입니다. 레나 심판관님께서 신경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운현의 담담한 말에 레나는 고운 아미를 잔뜩 찡그렸다.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보인 운현은 천천히, 하지만 확신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한가지만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당신을 위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
"믿을 수 없나요?"
"네."
레나의 딱딱히 굳은 목소리에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차분히 바라보던 운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왜요? 제가 어떤 일을 했다 하더라도 저는 당신을 위해서 많은 것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제가 원하는 것은 당신이..."
"제가 살아남는 것... 을 바라시는 건가요?"
"네."
"그것이 운명을 바꾸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디까지 들으셨습니까?"
성당에 들어왔을 때 레나는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울고 있었다.
그것을 보았을 때 운현은 눈치챌 수 있었다.
라닌이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음을.
"당신의 삶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운명을 바꿔서라도 저를 살리려 한다는 것을..."
"......"
"그리고 그 운명이 바뀜으로서... 많은 이가 제가 살아남기 위해서 희생당할 것임을요.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운현씨가 엄청난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것을..."
'김칫국을 장독째 들이마시고 있군.'
주모라도 불러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운현이 레나를 살리고 보호하는 이유는 세가지 뿐이었다.
첫번째. 다난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두번째. 그녀를 이용해 파르티 교단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
세번째. 차후를 위해 신성을 보존하기 위한 그릇으로 쓰기 위해서.
운현에게 있어서 레나의 가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첫번째는 이미 성과를 이뤘고 두번째는 망했다.
'세번째는... 의미가 없겠군.'
라닌이 모종의 방법으로 신성을 공급받는다면 그것을 이용한다면 운현 역시 별다른 패널티 없이 다량의 신성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그렇다면 굳이 심력을 낭비해서 레나를 지킬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이번에 네번째 이유가 생겼다.'
연인들을 지키기 위한 방패. 라닌의 관심을 옮기고 만약의 경우 희생양으로 써먹기 위한 미끼. 어찌보면 앞의 세가지 이유보다 더욱 큰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었기에 운현은 레나의 시선을 무시하는 대신 슬픈 눈으로 마주했다.
'아직은 이용가치가 남아 있으니 일단은 지켜주지.'
379====================
방해자
"일단은 돌아가도록 하지요."
"...네."
진실이야 어쨌든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운현까지 많은 희생을 하고 있다는 것에 침울해하던 레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그것 뿐이다. 운현이 손을 내밀자 레나는 그 손을 천천히 잡았고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 저를 살리려고 하시는 건가요?"
"과거의 삶에서... 저는 당신이 죽게 방치해뒀습니다. 그것을 바꾸고 싶었을 뿐입니다."
"왜요?"
"글쎄요..."
"...저를... 사랑하셨던건가요?"
'그럴리가 있나.'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
난처해하는 운현을 지그시 바라보던 레나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내었다. 하지만 그것 뿐이다. 레나나 운현이나 서로에게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레나를 호위하며 길드로 돌아 온 그는 비척거리며 걷는 레나가 길드의 숙소에 들어가자 회관으로 돌아 온 후 빙긋 웃었다.
'저정도로 침울해하니 당분간은 손을 대지 않아도 좋겠군.'
라닌과의 협상을 빙자한 사기 행동을 통해 한달이나 되는 시간을 벌었으니 이것을 효율적으로 써야 할 것이다.
'일단 그녀들의 레벨업이 우선이겠군. 그거에 대한 판은 깔아놨고...'
제니스 정도면 혼자 움직였을 경우 3계층까지는 큰 무리 없이 전투를 지속할 수 있다. 운현 파티를 거점으로 삼아 제니스나 펠리시아가 혼자, 혹은 둘이 움직이게 하며 마석을 수집케 하고 자신들이 전투를 하며 레벨업을 한다.
거기에 모아 온 코어에 저번의 삶에서 모아 놓은 3, 4계층의 코어를 섞어서 레벨업을 한다면 오래가지 않아 200레벨에 오를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한달 정도면 충분히 400레벨까지 올릴 수 있을거야. 문제는 하우드인데... 하우드가 뭐하는 놈인지 파악하기 어려우니...'
과연 라닌의 말대로일까? 하우드가 진짜 악신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라닌이 하우드를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젠장..."
"어라? 운현 아니야?"
"아. 상아."
"뭐 하는데 여기에 혼자 있는거야?"
"하하... 그냥."
사무소에서 걸아나온 상아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트롤은 잡았다면서? 그 와중에 좀 힘들긴 했다고 들었는데... 다친데는 없지?"
"헤에... 걱정하는거야?"
"그야 당연하지."
뭐 이상하냐는 듯 상아는 운현의 질문에 되물었고 그녀를 향해 운현은 빙긋 웃었다.
"너희들의 평판이 무척 좋아졌어. 이번 토벌에서 무척이나 활약했다면서? 다들 칭찬이 자자해."
"그거 잘됐네."
"음... 그리고 너희들을 길드로 받아들인 것에 대한 내 평판도 올라갔지. 그래서 말인데. 그거에 대한 보답 겸 해서 오늘 저녁을 사주고 싶은데."
"저녁?"
오늘 저녁은 필레와 선약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물쭈물거리며 은근히 다가오는 상아의 얼굴을 보니 매몰차게 거절하기 어려웠던 운현이 망설이는 동안 사무소에 있던 필레는 운현과 상아를 보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머? 운현씨. 볼일은 다 보신거에요?"
"예? 아. 예."
"그럼 오늘 저녁에 좋은 분위기의 레스토랑이 있으니까 거기로 가요."
"뭐야. 필레랑 약속 있었던 거였어?"
"뭐 그렇지."
"...헤에. 필레랑 말이지..."
눈을 가늘게 뜨고 상아는 필레와 운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불안감을 느낀 필레는 슬쩍 운현의 뒤로 물러났다.
"왜, 왜요?"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그런데 오늘 어디서 먹기로 했어?"
"...그건 왜요?"
"아하하하~ 그냥. 나도 나중에 운현이랑 먹으러 갈건데 중복은 피하고 싶어서 말이지."
"그건 나중에 갔다와서 말씀드릴게요."
"에이~ 뭘 그렇게 경계해."
"경계 안하게 생겼나요?"
날선 그녀의 반응에 상아는 쓴웃음을 짓고 능글맞게 말했지만 필레는 가르쳐 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딱 봐도 와서 방해를 할 생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가르쳐주는게 바보다. 필레가 딱 잘라버리자 상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흑... 부하가 믿어주지도 않네... 운현.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고 자시고 부하들에게 신망을 얻으려면 평소에 잘해야 하는 법이지.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려무나."
"너무해!"
"잘했어요!"
운현이 도와줄 줄 알았건만 오히려 웃으며 그리 말하자 상아는 볼을 부풀리고 사무소 안으로 휙 들어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필레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 7시에 분수대 광장에서 만나도록 해요."
"분수대 광장이요? 그냥 여기서 같이 출발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데이트 비스무리한건데..."
"분위기라... 뭐 그렇게 하죠."
"헤헤헤~ 그럼 이따가 만나요~"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기뻐하며 필레가 뛰어가자 근처의 모험가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필레나 상아가 남자와 좋은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영 거슬린 모양이다.
"필레도 저러는데..."
"상아도 저러는데..."
"왜 난 남자가 없냐..."
동료들이 내려오고 동료들과 함께 늦은 점심을 해결한 후 적당히 시간을 때우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의 동료들은 얼굴에 의문을 품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디가?"
"음? 응. 약속이 있어서."
"무슨 약속인데?"
"필레씨와 저녁약속."
"필레씨랑...?"
"흐음.... 우리랑은 안노는거야?"
바제트와 미야가 애절한 시선을 보냈지만 운현은 간신히 그것을 외면했다. 그들의 모습에 헤스티아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너무 그러지들 말아요."
"그치만 우리랑은 데이트 한번 안해놓고..."
"아. 저는 해봐서."
"뭣!?"
"치, 치사해!"
"아니...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들을 만나기 전에 운현과 데이트를 했던 것인지라 헤스티아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눈물로 가득 찬 미야와 바제트의 시선에 운현은 식은땀을 흘렸다.
"다음 던전 탐색이 끝나면 하자."
"약속이야!"
"꼭!"
"그, 그래."
진심이 담겨 있는 그녀들의 말에 운현은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 풀려날 수 있었다.
방에서 나온 운현이 1층의 회관을 지나려 할 때 회관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던 레나는 그를 발견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운현씨."
"네."
"잠깐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잠깐이라면..."
"괜찮아요. 그정도면."
진지한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고 레나와 함께 밖으로 나간 운현은 공터에 들어서자마자 레나의 시선을 느끼고 이를 드러내었다.
'적의군.'
자신을 적이라 생각하는 시선이다. 그 시선에 운현이 천천히 허리의 검자루에 손을 가져가자 레나는 긴장으로 딱딱해진 입술을 간신히 떼었다.
"운현씨. 그때 말씀하셨죠. 운현씨가 절 구하려는 이유를 말씀해주시지 못한다구요."
"네."
"왜죠?"
"당신이 알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죠!?"
"당신이 운명을 알게 되면, 당신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면 그것을 바꿀 수 없으니까."
"........."
"진짜 알고 싶나요? 정말?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 수많은 고생을 한 저를 위해서 그냥 참아주면 안되나요?"
"...그건."
"예. 운명을 바꾸는데는 많은 희생이 필요해요. 당연하잖아요? 운명은 섭리이고 그 세계를 이루는 규칙이에요. 그 거대한 규칙을 인간인 제가 바꾸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대가가 없을리 없잖아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절 위해서 운현씨가 희생할 필요는 없잖아요."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필요한 일입니다."
"...왜요? 설마... 설마."
"무슨 생각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건 아닙니다."
"......."
그의 말에 당혹스러워하던 레나의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자 운현은 딱 부러지게 말했다. 그것에 순간 실망한 레나는 한숨을 폭 내쉰 후 쓸쓸한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롤랑 이단심판관님은요? 설마 저때문에 그 분이 돌아가신 건 아니겠죠?"
"그건 아닙니다."
"롤랑님을 구하지 않은 이유가 뭔가요?"
"구하려 했습니다. 다만 실패했을 뿐이죠."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르토리우스를 위신체로 만들고 신성 반쪽을 쉽게 손에 넣기 위해 그녀의 죽음을 방치한 것이었지만 굳이 사실을 말할 이유는 없었다. 레나는 미끼가 되어줘야 할 존재다. 굳이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는 것이다.
"........."
"당신마저 잃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한 희생은 어떻게..."
"하나를 얻기 위해서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죠.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게 당신의 동료들이라 할지라도요?"
레나가 동료들을 언급하자 운현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를 차마 보지 못하고 망설이던 운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간... 당신이 아파지잖아요!"
"상관없습니다."
"뭐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려는 건가요!? 네!?"
레나의 외침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레나씨. 부탁입니다. 저를 위해서 살아주십시요."
운현의 간절한 목소리에 레나는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귀찮게 시리.'
그냥 세뇌를 해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라닌의 눈을 속여야 하는터라 그러는 것도 쉽지 않았다.
'라닌의 얼굴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런 라닌의 외모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야.'
다른 이들의 정신을 한계까지 분석하고 뽑아가며 라닌에 대한 것을 알아내려 했지만 마치 무언가 잘린 것처럼 라닌에 대한 정보를 얻어낼 수 없었다.
그 말은 라닌이 모종의 방법을 통해 사람들의 정신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라닌의 감시를 받고 있는 레나의 정신에 손을 댄다? 만약 그랬다가 라닌이 레나가 미끼라는 것을 눈치챈다면 일이 골치아파진다.
"아."
레나와 헤어지고 중앙 분수대로 걸어가던 운현은 손가락을 튕겼다. 하마터면 까먹을 뻔 한 것이다.
"내 정신 좀 보소."
발걸음을 돌려 길 옆의 골목으로 들어 간 운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골목 밖으로 다시 나왔다.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화려한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어차피 밥은 다 됐고 뜸도 다 들었어. 지금까지 필레의 반응을 보면 그녀를 끌어들이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다. 시간이 없으니 속공으로 필레를 공략해야겠네.'
남은 시간은 한달. 그 안에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운명을 바꿀 준비를 해야 한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 그 시간 안에 많은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은 운현으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10분... 그럼 슬슬 준비를 해야겠네.'
"오오오... 필레씨. 가는거에요?"
"으, 으응. 어때? 이옷?"
"하..."
산뜻한 하얀색 원피스에 베이지색 가디건. 녹색의 머리칼을 한쪽만 땋아 내린 필레가 상아빛 볼을 긁적거리며 묻자 그녀의 옷차림을 봐주던 실비아는 감탄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굿!"
"저, 정말?"
"네. 가디건도 그렇고... 근데 가방에는 뭐가 들어 있어요?"
갈색의 손가방을 가리키며 실비아가 묻자 필레는 살며시 가방을 열어주었다. 가방에 있는 손수건과 화장품. 여성용 물품들과 함께 날카로운 대거 두자루가 들려 있자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아요!"
"그렇지?"
"이 대거만 빼고. 이건 왜 가져가는거에요?"
가방 안의 대거를 빼내며 실비아가 묻자 필레는 잠시 망설였다. 그녀의 모습에 실비아는 대거를 빼서 자신의 옆에 놓았다.
"단순한 데이트잖아요."
"그치만 위험할 때 운현씨를 지켜야 하고."
"운현씨가 뭔 일이 생기겠어요. 그리고 크게 걱정할 것도 없잖아요. 지금은 평화기라구요."
"그렇지만..."
"아아.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어서 가요! 맨주먹으로도 꽤 싸울 수 있잖아요! 비타님이 침투경을 괜히 가르쳐 주신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진짜 겁만 많아가지고...""
"그러겠지..."
"자자. 어서 가라구요. 운현씨 기다리겠네. 식당 예약은 해놨으니까 걱정 말구요."
"응. 그럼 갔다올게."
순수하게 웃으며 필레가 나가자 실비아는 피식 웃었다.
"자... 그럼 나도 일을 해... 꺅!?"
"헤에... 이쁘게 차려입고 나가는 걸 보니 좋은데 가나보네?"
필레와 실비아의 대화를 모두 숨어서 들었는지 어느새 상아는 실비아의 뒤에 나타나 있었다. 그녀를 보고 기겁하던 실비아가 식은땀을.흘리며 당혹스러워하자 상아는 히죽 웃었다.
"그 가게란 말이지..."
"저기... 상아 길드장님?"
"응? 왜?"
"혹시 방해하실 생각은 아니겠죠? 에이~ 설마~"
"하하하하하... 당연히 아니지. 날 뭘로보고~"
실비아의 질문에 상아는 밝게 웃은 후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가버리자 실비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