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3/40)
  • 회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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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자

    "도착했군."

    "네."

    짙은 흑발. 약간 치솟은 길고 짙은 눈썹. 눈썹만큼이나 올라가 있어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눈매, 삼백안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싸늘한 검은색 눈동자. 상아처럼 깨끗한 피부. 그야말로 아름다움을 조각해 놓은 것 같은 미녀는 커다란 성벽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과거를 회상하듯 성벽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의 옆에 서 있는, 그 미녀와 마찬가지로 아름답지만 날카로운 검 같은 차가운 매력을 가진 그녀와는 다른 조용한 숲 같은 매력을 가진 흑발의 미녀는 자신의 안경을 살짝 고쳐쓰며 검 같은 미녀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오래간만에 오니 어떤가요?"

    "보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군."

    무뚝뚝한 어조로 답한 그녀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등허리에 걸려 있는 장검을 뽑아 눈에 보이는 모든 이를 도륙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빌어먹을 던전 도시에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어. 고맙군. 라닌."

    "별 말씀을. 천검자의 귀환을 던전 도시가 알게 되면 얼마나 기뻐할지 상상만 해도 즐겁군요."

    "비꼬는 거다."

    "알고 있습니다."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검같은 미녀. 현재 세계 최강의 인물이며 알려진 레벨만 해도 500에 도달해 초인의 경지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라 알려진 천검자는 싸늘한 눈으로 자신의 옆에 있는 미녀를 노려보았다.

    라닌. 다난 교의 책략가이며 다난의 성녀인 카야가 영입한 천재.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든지 굽힐 줄 아는 정체 불명의 그녀만 아니었다면 이곳에 다시 돌아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말해두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겠지?"

    "걱정마세요."

    천검자의 싸늘한 말에 라닌은 빙긋 웃었다. 천검자가 일검을 펼치기만해도 자신의 목은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닌은 전혀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넌 정말 겁대가리가 없군. 세번이나 나에게 죽을 뻔 했는데도..."

    "당신 이상의 무서운 존재와도 싸운 접니다. 당신 정도에게 두려움을 느낄 이유는 없지요."

    빙긋 웃은 라닌은 잠들 때마다 자신의 꿈에 나타나는 악몽의 주인공을 생각했다. 한자루 거검을 휘두르며 광소하는 푸른 머리의 사내. 당장이라도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악마같은 남자를 떠올린 라닌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제는 아니야.'

    과거의 자신이 아니다. 힘을 얻었다. 가짜 힘이 아닌 진짜 힘. 그를 죽일 수도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더 이상 그를 두려워 할 이유는 없었다.

    "후우..."

    떨리는 몸을 진정시킨 라닌은 안경 너머의 검은 눈동자를 빛냈다.

    "이제 들어가실까요?"

    "너는?"

    "저는 오늘 제 두려움과 마주해야 합니다."

    "그 두려움과 마주하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그럼 당신이 지켜주시면 되는 것 아닌가요?"

    비웃음이 잔뜩 섞인 웃음을 보이며 천검자는 라닌의 얇은 몸을 가리키며 말했지만 라닌은 그저 웃는 낯으로 느긋하게 대꾸할 뿐 이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천검자는 빠득 이를 간 후 그대로 몸을 돌렸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것이 고역이다. 던전 도시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쁘다. 과거 던전 도시를 떠나며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그것을 자신 스스로 어기는 것에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천검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정지. 신분증을 확인해야겠습니다만..."

    "아. 이 분의 신분은 확인할 필요가 없답니다. 확인은 됐을 거에요."

    어느새 천검자의 뒤를 따라 온 라닌은 던전 도시의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들에게 살풋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긴 순간 경비병들의 눈이 풀려버렸다. 한순간에 정신을 빼앗겨버린 경비병들은 무감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을 확인한 라닌은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들어갈까요?"

    "다른 사람의 정신을 가지고 노는 네년은 정말 재수가 없군."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제 능력이 싫답니다. 정말 지배하고 싶은 사람은 지배하지 못하니까 말이죠."

    생글생글 웃으며 대꾸하는 라닌을 한차례 쏘아 본 천검자는 제지하던 경비병들이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콧방귀를 꼈다. 고작 저따위 사술에 걸려 들 정도로 경비병의 질이 떨어졌다니. 과거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옛날에는 모험가 길드와 용병 연맹이 돌아가며 근무를 섰었지.'

    어지간한 사술에 대한 면역이 있을 뿐더러 어지간한 마물이 덤벼도 경비병만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과거와 고작 저따위 사술에 걸려들어 정신을 빼앗겨버리는 지금의 경비병. 그 차이를 생각하면 던전 도시의 질이 확실히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이따위 사술이 있어서 편한거라구요. 그동안 제 덕을 많이 봤으면서 자꾸 그러실꺼에요?"

    "부탁한 적 없다. 다 네가 필요해서 그런 짓을 한 것 아닌가?"

    "뭐 그렇긴 하죠. 천검자가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 알려지면 곤란하니까 말이에요."

    "난 전혀 곤란할 일이 없는데."

    "저한테 곤란해요. 저와 당신은 이제 일심동체. 한 배를 탄 몸이라구요. 아무리 개같아도 일단 같은 배를 탄 이상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아줬으면 해요. 오월동주라구요."

    "네가 가끔씩 내뱉는 그 비유는 알아듣기 힘들다. 네년의 세계에서 쓰던 말을 이곳에서 쓰지 마라."

    "그러는 당신도 그러잖아요. 참나. 맨날 나만 가지고 뭐라 그러네."

    천검자의 타박에도 라닌의 얼굴에는 웃음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천검자는 그 웃음이 거짓된 웃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과 비견될 정도의 매력을 지니고 있고, 그 아름다움에 항상 짓는 미소만으로 상당히 사랑스럽고 착한 이미지를 보이고 있지만 그 속은 어떤 마물보다도 더럽고 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천검자는 코웃음을 치며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아앗~ 같이 가자구요~"

    "꺼져. 여기까지 온 이상 너와 내가 할 일은 없지 않나? 가뜩이나 역겨운 던전 도시 안에 있는데 너까지 옆에 있다면 진짜 미쳐버릴지도 몰라. 아니면... 내 손에 죽고 싶은거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절 죽일 생각은 없잖아요?"

    온 몸을 조이는 살기에도 라닌은 능글맞은 어투로 도발하듯 천검자를 조롱했다. 어차피 저 여자와 자신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아쉬운 쪽은 천검자 쪽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라닌은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를 놀렸고 그것에 천검자는 빠득 이를 갈았다.

    "생각은 있다. 하지만 아쉬워서 못하는 것 뿐이지."

    "그런가요? 어머~ 이제 알았네요. 그럼 당신에게 죽는 것은 무서우니 이제 저는 사라지도록 할게요. 그러니..."

    "....."

    "상아를 확실히 죽여야 합니다. 그녀의 죽음으로 작전이 시작되는 거니까요. 할 수 있겠죠? 옛날의 동료라고 하더라도."

    "...할 수 있다."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군요. 그러니까 순순히 제 스킬에 걸려주시면 아주 좋을텐데 말이죠."

    "내가 미쳤냐? 너같은 마녀의 손에 내 목숨을 맡기게?"

    아쉽다며 힐끔힐끔 자신의 몸을 핥듯이 쳐다보는 라닌을 향해 검을 뽑으려던 천검자는 간신히 분노를 참아내고 몸을 돌렸다. 더 이상 같이 있고 싶지도 않았던 그녀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자 라닌은 어깨를 으쓱이며 얼굴에 그리고 있던 웃음을 지웠다.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은 무표정이 된 라닌은 이를 드러내며 싸늘히 중얼거렸다.

    "개년. 내 목적이 실현된 이후에는 네년은 내 발 앞에 조아리게 될 것이다."

    아돌과의 일을 처리하고 돌아 온 운현은 던전에 대한 것을 생각하며 시간을 때웠다. 부족한 정보는 판단을 유보시킨다. 가설은 몇개나 세웠고 행복회로를 돌리며 자신에게 유리한 가설을 몇가지 세워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최악의 시나리오보다 신빙성이 떨어졌다.

    '절망할 틈은 없지. 그리고 보험도 들어놨고 말야.'

    "오빠!"

    "어? 교육은 잘 받았어?"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가 사무소에서 나와 자신의 테이블에 앉자 운현은 심각한 생각을 머리속에서 지웠다. 가뜩이나 요즘 눈치가 빨라진 동료들이 자신의 표정을 읽을 지도 몰랐기에 머릿 속에서 그리던 최악의 시나리오를 지운 운현이 웃으며 반기자 그녀들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야~ 좋은 교육이었어."

    "그래? 그럼 나한테도 가르쳐 주겠어?"

    "알겠어요. 오빠. 오늘 밤은 길다구요~"

    "그, 그러냐. 근데 넌 왜 아무런 말이 없냐? 들은 거 맞아?"

    "에... 그게 말이지."

    과거에도 교육을 받을 때 미야는 쿨쿨 자기만 했었다. 그것을 떠올리며 빙긋 웃은 운현이 묻자 미야는 볼을 긁적거리며 귀를 축 늘어트렸다.

    "미, 미안해."

    "하하... 그럴 것 같더라. 뭐 괜찮아. 그것도 네 매력이니까 말이지."

    "헤헤헤~ 그렇지?"

    푼수처럼 웃으며 다시 귀를 쫑긋 세운 미야가 하얀 꼬리를 살랑거리며 웃자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운현을 보며 헤스티아는 다가 온 메이드에게 손을 들었다.

    "좀 늦었지만 저녁 어때요? 아라크네 클랜에서 뭐 드시고 오셨어요?"

    "응? 아니. 그냥 얘기만 하고 온거야."

    "무슨 얘기를 하신 거에요?"

    "음... 뭐 아라크네 클랜에 들어오라고 하더라고."

    거짓은 아니었다. 아라크네의 제안은 확실히 운현과 운현의 동료들이 아라크네 클랜에 들어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쏙 빼고 과정 중 하나만 말한 운현을 말없이 바라보던 바제트는 작게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진짜야?"

    "응."

    "거짓은 아니겠지... 그렇지만 말하지 않은 것도 있는 것 아냐?"

    "응."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오히려 놀란 바제트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운현은 탁자를 톡톡 치며 말했다.

    "날 믿는다고 했지? 그럼 믿어줘. 반드시 모든 것을 말할테니까."

    "...그럼 오빠."

    작게 숨을 들이마쉰 헤스티아는 운현의 옷자락을 꼭 잡았다. 그녀의 간절한 시선을 마주하며 운현은 방긋 웃었다.

    "왜?"

    "상아 길드장님과의 일에도... 말하지 않은게 있어요?"

    "흐음..."

    '상아가 밝혔나? 으이그. 등신같긴.'

    운현에게 있어서는 진짜지만 지금의 상아에게 있어서는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것을 그냥 말해버릴 줄이야. 푼수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푼수라니. 역시 상아는 길드장이라는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며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게 뭔데요? 말해 줄 수 있어요? 상아 길드장님은..."

    "자세한 일은 나중에. 듣는 사람들이 많아."

    늦은 시간이지만 아직 회관에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들을 의식하며 운현이 차분히 말하자 헤스티아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너희들을 위해서야. 그리고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날 믿어줘. 내가 너희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것 뿐이야. 날 믿고 날 따라와줘."

    "....."

    운현은 간절한 어조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자신이 하려는 일은 자신만으로 처리하기 힘들었다.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피스나의 캡슐을 이용해 그녀들의 정신을 봉인한 후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거나 아라크네에게 한 것처럼 그녀들을 세뇌하면 될 것이다.

    '그것만은 절대 하고 싶지 않군.'

    최선의 방법이 있지만 그녀들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에 그토록 상처를 준 여인들이다. 그녀들에게 괜한 상처를 줄 필요는 없었다.

    "언젠가는 말해 줄 거야? 그게 언제인데?"

    진심이 담긴 그의 말에 미야는 잠시 생각하다가 차분히 물었다. 재촉하거나 책망하는 어조는 아니다. 그것에 안심하며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너희들의 레벨이 한 400정도 된다면 그때 말해줄게."

    "사백..."

    "열심히 해야겠네."

    "그래서 말인데요. 오빠."

    "응? 왜?"

    "상아 길드장님이 오빠랑 저희들을 길드원으로 받아들이고 싶다고 하셨어요. 레벨업에 대한 지원도 약속하셨구요."

    "헤에..."

    상아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과거에도 이런 이야기는 있었지만 그때는 레벨업의 지원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나쁘지 않은데?"

    어차피 레벨업의 과정 따위는 운현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적절한 훈련, 그리고 빠른 레벨업. 그것이 있다면 오히려 운현에게 더욱 좋은 일이었기에 그는 느긋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의외네..."

    운현이 시원스럽게 긍정할 줄은 몰랐는지 바제트와 미야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에 운현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 됐네. 길드원이 된다면 레벨업도 빠를테고 말이야. 더 안전하기도 하고. 지원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를 듣지 못했어?"

    "아. 오빠의 허락을 받은 후에 진행하기로 했거든요. 그리고 상아 길드장님이 이야기를 하다가 나가기도 했구요."

    "...뭐?"

    상아가 나갔다? 운현은 섬뜩한 기분에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 그의 분위기 변화에 놀라며 헤스티아는 천천히 운현의 질문에 답했다.

    "어... 그 아르토리우스 라는 사람이 용병 연맹의 연맹장이 되고 시장 선거에 후보 등록을 하고, 지금 시장인 윈디아씨가 재선 등록을 했다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제작자 연합의 연합장인 피스나를 만나러 간..."

    "아! 운현씨!"

    "여기 계셨네요. 드릴 말씀이 있..."

    사무소에서 필레와 펠리시아가 나오자 운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좋은 예감이 든다. 그의 딱딱히 굳은 얼굴에 놀란 필레와 펠리시아가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운현은 그녀들의 말을 잘랐다.

    "부탁이 있어요. 제가 올때까지 얘들이랑 같이 있어주시겠어요?"

    "예? 아... 예."

    "어려운 일은 아닌데... 왜요?"

    "그건 나중에. 상아는 언제 나갔죠?"

    "한 이십분 정도 됐어요. 길드의 뒷문으로 나가서 못보신 것..."

    "고맙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을 필요는 없었다. 운현은 그대로 빠르게 길드를 나갔고 그의 그런 모습에 여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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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자

    "칫... 티르빙이 그런 이름도 없는 자에게 패할 줄이야..."

    티르빙이라면 조사가 되어 있는 만큼 시장 선거에 나와도 질 리가 없었다. 그리고 윈디아는? 대부분의 시장들은 그 과도한 업무 때문에 재선에 도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윈디아가 시장 선거에 출마한다? 상아는 자신의 계획이 꼬여가는 것에 이를 갈며 발걸음을 바삐 놀렸다.

    "이번에는 피스나가 꼭 되야 하는데..."

    다급한 마음을 추스리며 피스나의 집을 향해 걷던 상아는 자신의 목 뒤가 따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살기다. 명백히 자신을 노리는 살기에 상아는 천천히 허리에 걸려 있는 광검의 자루를 잡았다.

    "...나와."

    숨길 생각도 없는 살기의 근원지인 골목을 노려보며 상아는 싸늘히 말했다. 그녀의 말에 골목 안에서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너는...?"

    흰색 후드를 뒤집어 쓰고 얼굴에 가면을 쓴 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몸매에 검을 들고 있는 그를 노려보며 상아는 이를 드러내었다.

    "그 복장... 하하. 설마?"

    "스르릉."

    허리에 걸려 있는 검이 뽑힌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일반적인 검이다. 그리고 검이 뽑힌 순간 상아는 깨달았다.

    "강하구나... 그 정도면 400레벨은 문제도 아니겠는데?"

    "....."

    상아의 말에도 흰 로브는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검을 앞으로 겨눌 뿐. 단지 검을 겨눴을 뿐인데도 자신의 몸이 오싹해 질 정도의 살기와 투기에 상아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너냐?"

    "......"

    "비타를 죽인게!!"

    "주와아아앙!!"

    광검에 마력이 주입되고 빛의 날이 뻗어졌다. 거리따위는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광검이 자신에게 향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흰 로브는 움직일 생각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

    죽여달라고 온 것인가? 그것이 소원이라면 죽여주지. 살기를 가득 담아 광검에 마력을 부여 넣은 상아는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광검의 날을 향해 흰 로브가 검을 휘두르자 싸늘히 웃었다.

    '검 째로 베어주지.'

    "우웅!"

    "...뭐?"

    아무런 특징따위 없는 검에 광검이 밀려나간다. 어지간한 두께의 철판도 쉽게 자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절삭력을 가진 광검이 고작 저런 검 하나 자르지 못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상아가 광검을 회수한 순간 흰로브가 흔들렸다.

    "읏!?"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흰 로브의 검이 자신의 목을 노리고 들어오자 상아는 움찔하며 뒤로 크게 물러났다. 단 일격. 그것만으로 상대와 자신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강하다.'

    강하다. 확실히 강하다. 비타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은 이유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상대는 강했다. 자신이라고 해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자신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그렇다해도!"

    비타를 죽인 자라고 생각되는 이가 자신을 공격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낼만한 것이었다. 상아는 광검을 꽉 잡아 당긴 후 힘껏 찔렀다.

    "하압!!"

    상아의 슈트가 빛나기 시작한다. 뭉쳐진 마력이 그녀의 몸에서 아홉 줄기의 빛을 만들어내 흰 후드의 검사의 몸을 노렸다. 한줄기 한줄기에 담겨 있는 강력한 마력을 경계했는지 흰 후드의 검사는 벽을 차고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그걸 노렸다!"

    아무리 강자라고 하지만 허공에서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날카롭게 웃으며 광검에 마력을 한계까지 주입한 상아는 흰 후드의 검사에게 검을 내밀었다.

    "우우웅...!!"

    광검에 주입된 마력이 뭉쳐졌다. 흰색의 구체가 광검의 끝에 생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아의 몸 정도 크기의 거대한 섬광이 터졌다. 주변이 순간 밝아 질 정도의 강한 빛이 흰 후드의 검사를 감싸는 것을 본 상아는 마력의 소모로 인해 헐떡이면서도 희미하게 웃었다.

    "이정도라면... 읏!?"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에 직격당한 이상 절대로 멀쩡하지 못할텐데. 상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

    빛에 휩쌓여 데미지를 입고 땅에 추락한 흰 후드의 검사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는지 툭툭 몸에 뭍은 흙먼지를 털어낼 뿐 이었다. 그것을 본 상아가 광검을 꽉 잡은 순간 흰 후드의 검사는 아까 이상의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당한건가.'

    힘을 일부러 숨긴 것이다. 자신보다 아주 약간 강하다는 기분이 들게 해 일부러 강력한 공격을 유도하고 그 공격을 버텨내 전의를 상실하게 해버려 심리적인 압박감을 주는 수. 그것에 고스란히 걸려버린 상아는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로 광검을 휘둘렀다.

    "큭!"

    아까의 공격으로 많은 마력을 갑자기 소모한 탓일까. 광검의 날이 약하다. 흐물거린다 생각될 정도의 광검을 휘둘러보았지만 만전 상태의 광검을 막아내는 상대다. 이런 상태의 공격이 통할리 없다는 것은 상아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챙!"

    숨겨둔 비책이라 할 수 있는 단검투척마저도 흰 후드의 검사는 여유롭게 막아낸 후 검을 내질렀다. 날카로운 검날이 상아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은회색의 긴 머리칼이 몇가닥 잘려 하늘하늘 떨어지는 것을 본 상아는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거 위험하겠는걸...'

    상대가 예상 이상으로 강하다. 만전의 상태에서 전투를 끌며 다른 이들을 기다려 협공을 한다면 모를까 이런 상태에서 혼자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쳇!"

    하지만 상아에게도 숨겨 둔 비장의 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흰 후드의 검사가 자신에게 검을 겨눈 채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며 상아는 허리띠에 걸려 있는 마법석을 들어 바닥에 던지며 마력을 불어 넣었다.

    "월 오브 아이스!"

    길드의 인챈터에게 받은 마법석의 마법을 발동시킨다. 커다란 얼음의 벽이 상대와 자신을 가리자 상아는 뒤로 물러나며 황급히 스크롤을 꺼내었다. 이런 상황에서 쓰기에는 아깝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다.

    "이거라면...!"

    현자에게 물려받은 스크롤 중 상대를 구속하는 마법이 들어 있는 스크롤을 꺼낸 그녀는 적이 얼음벽을 깨고 나오길 기다렸다. 얼음벽은 그저 눈속임이고 상대에게 잠깐의 틈만 만들어 놓아면 대성공이다. 그 틈을 노려 적을 구속한 후 길드원을 소집하면 저자를 잡을 수 있다.

    빠르게 전략을 구상한 상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 얼음벽이 부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얼음벽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설마 도망갔나.'

    다 잡은 먹이를 이렇게 놔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상아가 의문을 품은 순간 한줄기 섬광이 얼음벽을 뚫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아윽!!"

    반응하기 조차 어려울 정도로 빠른 공격이다. 그 공격이 자신을 지나갔다고 생각한 그녀는 어깨에서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스크롤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무슨...!"

    "와장창!!"

    순식간에 얼음의 벽이 무너진다. 허물어지는 얼음벽 사이에서 검을 든 흰 후드의 검사는 가볍게 검을 돌리며 천천히 상아에게 걸어왔다.

    "빌어먹을... 누구냐."

    자신을 이렇게까지 압도할 줄이야.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상대의 강함에 상아는 빠득 이를 갈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흰 후드의 검사에게 물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무덤덤히 넘기며 검을 치켜 든 흰 후드의 검사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넣었을 때 상아는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

    "...어?"

    검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이 들어오지 않자 상아는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자신의 앞에 서 있던 이가 어느새 떨어져 있는 것에 놀란 상아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신은?"

    "처음 뵙겠습니다."

    이토록 사무적이고 감정따위 찾아 볼 수 없는 말투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단 한번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긴 흑발, 균형잡힌 몸매에 용병들이나 입는 효율 중심의 경갑을 착용한 미녀의 말에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신지...?"

    "용병 연맹의 연맹장. 아르토리우스라고 합니다. 일단 그 상처부터 치료하시죠."

    주머니에서 힐링 포션을 꺼내 아르토리우스는 상아에게 휙 던졌다. 그것을 받은 상아는 고맙다고 인사하기보단 빨리 치료를 하고 아르토리우스를 도와야겠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윽...!"

    어깨에 뚫려버린 구멍에 새살이 돋아 오르는 이질감을 느끼며 상아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스크롤과 광검을 챙겼다. 피를 많이 흘리고 마력을 상당히 소모한 탓에 아직도 상아의 얼굴은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힐끔 본 아르토리우스는 자신의 장검을 천천히 거두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라고 하지만 정말이지..."

    "...."

    "약하군요."

    "큭."

    당한 것은 사실이다. 아르토리우스의 비난에 상아는 분통이 터졌지만 이렇게 깨져버렸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상아는 부들부들 떨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자는 강해."

    "그런 것 같군요."

    강자는 강자를 안다. 운현에 의해 만들어진 강자라고 하나 용병 연맹의 연맹장에 오르기 위해 짧은 시간동안 무수한 실전과 전투를 겪으며 스스로 강해진 아르토리우스는 상아의 말에 동의하며 검을 들어 흰 후드의 검사에게 겨눴다.

    "......"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자를 건드리는 것은 안됩니다."

    "퍼엉!"

    연막이 터진다. 상아와 아르토리우스를 둘 다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 생각해서 였을까? 전투 내내 상아를 압도하던 흰 두건의 검사가 연막을 터트리고 도망치자 상아는 이를 갈며 그를 쫓으려 했다.

    하지만 아르토리우스는 쫓으려고 하기는 커녕 검을 회수해 검집에 넣을 뿐 이었다. 적을 섬멸하려는 의지를 조금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상아는 발을 쿵 구르며 외쳤다.

    "뭐야!?"

    "뭐가요?"

    "저 자를 쫓아야지!"

    "왜요?"

    "뭐? 저 자는 위험한 자야. 던전 도시에서 살인을 저질렀고 또 나를 죽이려고까지 했어. 용병 연맹의 연맹장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닌가?"

    던전 도시를 지키는 용병 연맹의 연맹장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규율이다. 던전 도시를 지킨다. 도시 내 위험인물을 배제한다. 정확히 본다면 저런 위험 인물에 대한 배제는 아르토리우스가 해야 할 일임에도 그녀는 그 의무에 대한 것을 모르는듯 무심한 얼굴로 상아를 바라 볼 뿐 이었다.

    "딱히 하고 싶지는 않군요."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말 그대롭니다."

    "헤에... 용병 연맹의 연맹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자신의 의무조차 모른단 말야? 이거 실망인걸."

    "그거 죄송하군요. 아직 초짜라서 말이죠. 그보다... 그 의무는 제가 알기론 각 조직의 수장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서?"

    "아뇨... 뭐랄까. 그 작은 키와 가슴만큼이나 별 볼일 없는 실력으로 그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피식,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지만. 무감정한 목소리에는 여전히 감정이 실려 있지 않지만 아르토리우스의 예쁜 입술이 살짝 끌어올려졌다. 아무리 좋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명백한 비웃음에 가까운 그 모습에 상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아. 어쨌든 고마웠어. 덕분에 산 것은 사실이니까."

    화는 나지만 참는다. 아르토리우스의 등장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 여기서는 어른의 양보를 보여주는 것이다. 상아는 부들부들 떨며 천천히 말했고 그녀의 감사 인사에 아르토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 말씀을요. 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를 구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도리니까요."

    "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 그거 누구한테 하는 소리지?"

    "당신이요."

    "하... 너무 도발하려는 것 아니야? 지금 내가 마력이 떨어졌다고 해서 만만하게 보는 건 아니겠지?"

    참는 것에도 한계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상대의 명백한 도발이다. 아무리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한 조직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상대 조직의 수장이 대놓고 거는 도발에 허허 웃으며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요. 마력이 떨어졌다고 해서 만만하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

    "그냥 만만하게 보는 것이지."

    "주와앙!!"

    아르토리우스의 입가에 완전히 그려진 비웃음에 상아는 빠득 이를 갈며 광검을 뽑았다. 그녀의 손에 들려진 광검의 빛이 자신에게 겨눠지자 아르토리우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도움을 준 사람에게 검을 겨누는 몰염치함까지. 역시 대단하군요. 천박한 모험가들의 수장다워요."

    차마 공격은 하지 못하는 상아를 노려보며 말한 아르토리우스는 주먹을 꽉 쥐며 자신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왜 이딴 여자를 위해서 당신은 그렇게까지..."

    362====================

    회귀자

    아르토리우스는 상아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진한 은회색의 아름다운 머리칼, 지그시 자신을 노려보는 커다란 눈. 하얀 피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절묘한 균형을 이룬 사랑스러운 소녀의 미모.

    늘 올곧은 시선은 그녀의 우직하고 바른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 보였다. 하얀 슈트에 감싸진 매력적인 몸,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쓸 수 있는데다가 많은 이들의 존경과 친애를 받는 묘한 카리스마까지.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을 보았을 때 아르토리우스는 깨달았다.

    '사랑할 수 밖에 없겠네...'

    자신과는 다르다. 운현에 의해 위신체가 되기 전의 자신은 바닥을 구르는 벌레와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없어 용병이 되었지만 검부터 시작해서 도끼, 창, 그 외의 모든 것 까지 자신에게 재능은 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 자체도 힘겨웠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버리는 전장. 한개의 빵을 위해서 다른 여자의 음부를 핥아야 했던 삶.

    몇년이라는 시간동안 전장에서 굴러먹으면서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져야 했던 자신.

    그런 자신.

    벌레같은 자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신.

    "........"

    살아남기 위해서 다난교에 입교하게 되고 다난교의 명령과 도움에 의해 용병 연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용병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있어서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는 용병 연맹의 용병이 된다. 그것만으로도 아르토리우스는 자신이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용병 연맹 내부에서도 자신의 모자란 재능과 실력은 다른 용병에게 멸시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다른 강한 용병들 밑에서 또다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될 뿐이었던 자신은 결국 다난교의 임무도 몇번이나 실패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은 다난교의 인신공양의 제물이 될 뿐 이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이런 죽음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의 앞에서 모두를 이끄는 삶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람답게. 자신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들과 사랑하며 살고 싶을 뿐 이었다.

    허나 결국은 불가능한 일에 불과했던 것이다. 헛된 꿈에 불과했던 것이다.

    심장에 칼이 꽂히는 고통을 느끼며 정신을 잃고 한없이 허무의 공간에서 절망을 하던 자신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많은 것이 바뀌어져 있었다.

    '운현님.'

    죽음 속에서 자신을 구해 준 이. 끝없는 어둠 속에서 내려 앉은 한줄기 빛. 자신의 희망이며 영광이고 신과 같은 분.

    그리고 자신과 같이 상처를 가지고 있는 분.

    그 운현에게 가진 동질감과 찬양은 곧 호감으로 바뀌어져버렸다.

    운현이 원한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 운현이 바란다면 어떤 것이든 주겠다. 당신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면, 당신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 앞을 막아서는 어떤 존재라도 부숴버리겠다.

    다시 태어난 자신에게 과거의 자신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재능과 힘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아르토리우스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이라면 그에게 다가갈 수 있다. 이것이라면 그를 도울 수 있다.

    이것이라면...

    그를 위해서 많은 것을 했다. 용병 연맹의 간부에 오르기 위해서 많은 이를 쓰러트렸고 많은 이를 죽였고 많은 이의 마음을 부쉈다. 오로지 운현을 위해서. 그의 도움이 되기 위해서. 그가 가진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큿..."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운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동안에도 그에 대한 행보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암살자 길드에 의뢰하거나 몰래 그를 만나러 가거나 모험가 길드에 잠입시켜 놓은 용병 연맹의 첩자를 이용해 그의 소식을 들어나갔다.

    운현이 모험가 길드에 가입을 했을 때 용병 연맹을 나가 그와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운현은 용병 연맹의 간부가 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것이 그의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명령을 수행했다.

    운현이 동료를 얻었을 때 용병 연맹을 나가 그의 동료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운현은 다른 이들을 제압하라 말했고 자신은 그것이 그의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명령을 수행했다.

    운현이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인 상아와 연인관계라는 소리를 들었고, 아직도 서로 좋은 관계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용병 연맹을 나가 자신이 그를 더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운현은 용병 연맹의 연맹장이 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것이 그의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명령을 수행했다.

    "......"

    "뭐야? 그 시선은?"

    말로만 들었던 모험가 길드의 수장을 눈 앞에 두니 아르토리우스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많은 것을 가진 상아다. 그런데. 운현까지 가지려는 것인가?

    이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이란 말인가. 다른 것은 좋다. 당신의 노력이니까. 그리고 나와 상관이 없으니까.

    하지만 운현은 다르다. 그는  자신의 희망이고 빛이며 주인이다.

    '그분을 가져가지 말아줘.'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 되잖아. 당신이라면 가능하잔아. 많은 이들이 당신을 따르고 있잖아.

    "...당신따위보다."

    상아의 시선을 마주하면 마주할 수록 자신의 초라함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저 여자는 당당히 운현과 연인이고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선언했는데.

    왜 나는.

    왜 나만.

    왜 너만.

    "당신같은 여자보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음습하고 치졸한 질투에 불과하다는 것 쯤은 알고 있다.

    그녀에게 잘못따위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상아에게 피어오르는 증오와 원망은 아르토리우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더..."

    천천히 검이 들어올려진다. 아르토리우스에게서 피어오르는 적의에 상아는 눈을 빛내며 광검을 꽉 잡았다.

    "어차피 용병 연맹과는 어느정도 대립관계이니 마찰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 붙을 줄은 몰랐네. 이번 용병 연맹의 연맹장이 교활한 수법으로 연맹장이 되었다고 하던데... 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승냥이 같은 자였군."

    상아의 입에서 신랄한 비난이 터져나왔지만 아르토리우스에게는 조금의 흥분도, 분노도 일으키지 못했다.

    이미 아르토리우스는 지극할 정도의 분노와 흥분으로 꼭지가 돌아버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를..."

    당겨진 검 끝에 살기가 치솟는다. 필살의 일격을 준비한다는 것을 깨달은 상아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진짜로 해볼 생각인가...?'

    지금까지 역대 용병 연맹의 연맹장들과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개인적으로 친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용병 연맹과 모험가 길드가 가지는 위치상 처음의 경우 어느정도의 적대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용병 연맹장도 처음 만난 순간 이토록 자신에게 증오를 품은 이는 없었다. 이정도 수준이면 개인적인 원한 수준이다. 하지만 기억을 뒤져봐도 저 아르토리우스라는 자와 척을 진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용병 연맹의 연맹장이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에게 저렇게 증오를 품고 있다면... 받아주지.'

    애써 참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지 상아도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였다. 어쨌든 가족처럼 지내던 동료를 죽인 자로 확신할 만한 이를 어이없이 놓쳐버리게 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긴 시간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으로서 살아왔던 상아는 도의를 버릴 수 없었다.

    "도와준 답례로 선공은 양보하지."

    "어머... 간도 크시네요. 자기과시?"

    상아와 비교해서 전혀 밀리지 않는 힘을 가진 아르토리우스는 그녀의 말에 피식 비웃음을 던졌다. 저딴 여유. 지금 당장 짓밟아주겠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아르토리우스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상아는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글쎄. 과시일까?"

    양보할 수 있는 것은 한번 뿐. 상아는 이를 악물고 광검을 당겨 자신의 몸을 가린 후 주문을 외웠다. 자신이 쓸 수 있는 보호 마법을 자신의 몸에 건 상아가 이를 악문 순간 아르토리우스의 몸이 폭발하듯 앞으로 터져나왔다.

    '빨라!'

    아까 그 흰 후드의 검사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돌진력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그보다 더욱 강한 기세일지도 몰랐다.

    진심이 담겨 있는 돌진 공격에 상아는 광검에 넣어 둔 마력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

    "쿠우웅!!"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굉음이 터져나왔다. 보호 마법이 깨지고 광검의 방어가 흔들릴 정도의 강력한 일격.

    '5계층의 다크 오우거 이상인데...!'

    단순 힘만으로는 현재 발견된 5계층의 몬스터 중 그 어떤 몬스터보다 강한 다크 오우거의 일격을 받아낼 때도 이정도의 충격은 아니었다. 팔이 쩌릿할 정도의 고통,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살벌히, 반드시 자신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돋보이는 아르토리우스를 향해 히죽 웃어보인 상아는 왼손을 움직여 모아 놓은 마력을 터트렸다.

    "흥!"

    상아의 손에서 쏘아진 마력탄을 몸을 굴려 피해낸 아르토리우스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운현에게 받은 힘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자신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전 연맹장인 티르빙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티르빙 이상이라는 건가.'

    자신의 일격을 경험했음에도 전혀 물러남이 없다. 오히려 더더욱 전의가 돋았는지 상아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전의와 살기에 아르토리우스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상아에 대해서, 아니 운현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이들에 대해서는 호승심 같은 감정은 전혀 없었다. 오로지 그들을 모두 배제하고 운현을 오로지 홀로 독점하고 싶은 아르토리우스는 상아가 자신의 공격에도 두려움 없이 한걸음 앞서 나오는 것에 이를 갈았다.

    "적당히 할 것이지...!"

    죽이고 싶다. 끝장내버리고 싶다. 저 의기양양한 얼굴을 짓밟아버리고 싶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에 아르토리우스는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당겼다.

    "한번의 선공은 양보했어! 이제부터는 나도 진짜로 간다!"

    방어 상태로 돌려 넓어져 있던 광검의 날이 응축되어 한줄기의 검날이 되자 상아는 그 검을 아르토리우스에게 겨눴다. 언제든지 공격을 하겠다는 그녀의 의지에 아르토리우스는 더더욱 분노하며 발을 굴렀다.

    "챙!!"

    아르토리우스의 검이 섬광을 쳐낸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녀와 자신과의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자신의 공격이 아니다.

    "무슨?"

    달빛을 받은 한줄기 섬광이 아르토리우스의 공격을 막은 것이다. 그것에 의아해하며 상아는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멈췄다.

    "거기까지다."

    설산의 얼음이 이정도로 차가울 수 있을까?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상아는 온몸이 떨릴 정도의 한기를 느꼈다. 어떤 몬스터의 앞에서도. 그리고 아까 자신을 압도한 흰 후드 검사의 앞에서도 이정도의 두려움은 느낀 적이 없었다.

    "너는..."

    "다행이다. 다친데는..."

    어둠 속에서 걸아 나온 것은 다름아닌 운현이었다. 100레벨도 되지 못한, 1계층의 계층주조차 잡지 못한 초보 모험가인 운현이 이런 목소리와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단 말인가?

    늘상 생글거리며 사람 좋아보이는 분위기의 운현이 이토록 차가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상아는 어느새 자신의 옆으로 다가 온 운현이 자신을 보는 것에 움찔 몸을 떨었다.

    "우... 운현."

    "다행이다. 어디 다친데는..."

    자신의 몸을 흝어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운현의 몸이 딱딱히 굳는 것을 본 상아는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보았다.

    힐링포션으로 새살이 돋았지만 그녀의 구멍난 슈트를 보았을때 상아는 분명히 상처를 입었다.

    "너..."

    상아의 상처를 보며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운현의 시선을 받은 아르토리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상아를 공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를 상처입힌 것은 자신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상아에게 공격을 하여 그녀를 죽이려 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차마 그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었다.

    "타닷!"

    운현의 시선을 이길 수 없었던 아르토리우스는 그대로 몸을 돌리고 뛰었다. 순식간에 멀어져버린 아르토리우스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고 상아를 보았다.

    "다친거야?"

    "아...아니. 괜찮아. 아르토리우스가 준 포션으로 치료했어. 그... 그리고 슈트도 재생될거야. 이건 스승님이 주신 최고의 걸작이니까... 그보다 여긴 어떻게...?"

    "아... 잠깐 일이 있어서 지나가는 길에 큰 소리가 나길래 와봤어."

    "그래? 하아... 으... 이거 미안하네. 하하..."

    아까 느꼈던 공포는 마치 거짓같다. 운현에게서 느껴지는 시선과 어조. 그리고 분위기는 오로지 자신을 걱정하는 따스함 뿐이었다.

    "......"

    길드의 장이 된 이후 항상 모두의 벽이 되었던 상아는 눈 앞에 있는 운현의 시선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모두를 지탱해야했다. 모두를 지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어떤 공포 앞에서도 물러서지 말아야 했고 어떤 좌절 앞에서도 쓰러질 수 없었다.

    막연한 기대, 자신만을 바라보는 모든 이의 시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모두의 벽이 되어 모두를 지킨다.

    그것이 한 조직의 수장으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었다.

    '스승님...'

    하지만 그것은 모두 자신이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 되며 생긴 마음가짐에 불과했을 뿐이다.

    제니스와 만나기 전. 모험가가 되기 전에 스승인 현자의 밑에서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울때는 이렇지 않았다.

    좀 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응석을 부리는 것에 인색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기댈 줄 알았었다.

    '스승님이 없어진 이후부터...'

    언제나 자신의 응석을 받아주며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위험에 나서서 자신을 보호해주던 스승이 사라진 이후부터 상아는 홀로 자립해야 했다.

    벌써 몇백년이나 지난 과거의 일이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누군가의 곁에서 안식을 느낀다는 것 자체를 잊었다고 생각한 상아는 운현이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자 그 감정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에..."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안정감과 포근함에 상아는 당황했다.

    어째서지? 왜 내가 이 사람의 옆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지?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인데. 내가 지켜야 할 조직의 사람인데. 어째서 이 사람의 곁에서...

    '스승님의 옆에 있었을 때나 느꼈을 기분을... 느끼는 걸까.'

    363====================

    회귀자

    스승인 현자와 분위기가 같냐고 물어보면 확실히 달랐다. 누구에게나 냉정하고 차가웠지만 오로지 자신에게만 가끔씩 따스한 미소를 보여주던 현자.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가끔씩 싸늘한 웃음을 짓는 운현

    정 반대의 성향과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모두 겪어보았던 상아로서는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을 쉽게 정의할 수 없었다.

    "어, 어쨌든 빨리 돌아가자. 여기 계속 있다간 위험해. 그자가 다시 나올지도 모르니까 말야."

    붕붕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감정을 정리한다. 운현에게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사정이다. 그의 레벨은 낮고 자신의 레벨은 높다. 한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현자와 다르게 운현은 그저 경험 많은 인간 모험가에 불과했다.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이다. 그에게 기댔다간 운현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강해져야 한다.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으로서. 타인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으로써 누구보다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상아는 운현의 팔을 꽉 잡았다.

    "지금 당장 돌아가자."

    "아... 응."

    흰 후드의 검사에 대한 것을 모험가 길드에 알리고 길드의 정예들과 움직여야 한다. 자신보다 강한 실력이라고는 하나 아르토리우스가 나타났을 때 그는 둘을 상대하는 대신 그대로 후퇴해버렸다. 그렇다면 1:1에는 강하지만 다대 일에는 약한 클래스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간부들과 함께 움직여야 해. 지금 길드에 있는 간부들이 함께 움직인다면... 운현? 뭘 보는 거야?"

    "응? 아. 응. 어서 돌아가자."

    운현이 골목의 끝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에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을 상아도 보았지만 그녀의 눈에는 특별할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 후우... 앞으로 바빠지겠네."

    레나의 일, 그리고 비타의 죽음. 새로운 용병 연맹장. 거기에 자신을 압도할 정도의 정체불명의 강자의 등장. 이것이 던전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갈지는 의문이었다.

    상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여 운현을 호위하며 길드로 향했고 그녀의 호위를 받으면서도 운현은 힐끔힐끔 골목의 끝쪽을 쳐다보았다.

    "오빠?"

    "어디 갔다 온... 상아! 어떻게 된거야!? 왜 둘이 같이 들어와?"

    운현과 상아가 길드로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던 펠리시아와 필레, 그리고 운현의 동료들은 그들을 보며 놀라 외쳤다.

    "큰일이 있었어. 지금 당장 회의를 해야 할 것 같으니까 비번인 간부들은 모두 회의실로 불러와."

    "잠깐! 길드장님! 어깨는 왜 그래요!?"

    상아의 급한 말을 들은 필레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녀의 어깨를 확인한 펠리시아는 슈트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외쳤다.

    "이것 때문에 그런거야. 어서 들어와. 자세한 것은 나중에 설명해줄테니까."

    "아... 예. 그럼 여러분. 자세한 것은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해요."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 그리고 운현이 길드에 들어왔을 때의 특전과 임무,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펠리시아와 필레는 여인들엑 인사한 후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그들이 빠져버리자 자리에 남게 된 여인들은 운현을 보며 물었다.

    "오빠.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급하게 나가신 거였어요?"

    "너... 뭔가 아는 것 있어?"

    "음... 응.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해줄게."

    "그게 우리들에게 숨기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일이야?"

    "아. 그런 건 아니고... 하하하. 너무 걱정하지마."

    바제트의 질문에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충분히 의심스러운 모습이다. 뜬금없이 벌떡 일어나서 나갔다가 상아와 함께 들어왔다. 돌아 온 상아의 어깨에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모든 것이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보다.

    "오빠..."

    상아를 찾으러 나갔던 운현이 돌아오고, 그 강한 상아가 상처를 입을 정도의 상대를 만났다. 그들이 운현과 어떻게든 관계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헤스티아는 운현을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조금만 기다려줘. 금방 모든 것을 알려 줄테니까."

    길드에 가입하고 길드의 지원을 받아 레벨업을 하게 된다면 여인들의 레벨을 더욱 빠르게 올릴 수 있게 된다. 목표 레벨인 400까지. 운명에 정해져 있는 그 날까지 그녀들을 보호하며 움직여야 한다.

    '운명의 날은 얼마 남지 않았어.'

    길드에 들어가 상아, 제니스의 협력을 받아 동료들의 레벨을 올린다. 4계층과 5계층 몬스터의 코어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것을 이용한다면 여인들의 레벨을 올리는 것 따위는 일도 아닐 것이다.

    '최대한 많이 레벨을 올려두고 운명의 공격을 한정시켜나가면 된다. 그리고 내가 함께 있다면 아무리 운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막아낼 수 있어.'

    굳은 얼굴로 운현은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끝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운현에게 여인들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궁금할만도 하지만, 괴로울 만도 하지만 끝까지 자신을 믿어주는 그녀들을 보며 운현은 쓰게 웃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

    간절하다 느껴질 정도의 애원이다. 운현의 말에 여인들은 서로를 바라본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그 대신 한가지만 약속해줘."

    "얼마든지 해줄게. 뭔데?"

    "너무 무리하지마. 우리를 위해서 네가 너무 고생할 필요는 없어."

    "...어?"

    바제트의 말에 운현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설마 알아챈 것일까? 그의 얼굴이 굳어진 것을 눈치채지 못한 바제트는 볼을 긁적거렸다.

    "아니... 매번 넌 우리를 위해서 움직이는 것 같단 말이지.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네가 고통받지 않았으면 해. 그... 이래뵈도 우린 널 무척이나 좋아하니까 말이지."

    하얀 볼이 복숭아빛으로 달아오른다. 바제트가 시선을 회피하며 머쓱하니 말하자 운현은 그녀와 미야, 헤스티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치채지는 않은 건가.'

    운현이 운명을 바꿔서라도, 운명을 바꿈으로서 그 피해가 다른 모두에게 갈지라도 자신들을 살리려 한다는 것을 아직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겨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운현은 그 특유의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것으로 자신의 긴장된 얼굴을 가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느긋하게 말했다.

    "아무튼 오늘은 늦었으니까 이만 자도록 하자. 음... 헤스티아."

    "네?"

    "오늘은 모두와 같이 잘래? 난 잠깐 길드 사무소에 몇가지 보고를 하고 제니스씨와 이야기를 나눠야 하거든."

    "무슨 이야기를요?"

    "길드에 가입하는 것 말야. 가입하는 것은 좋지만 아무래도 스카웃을 당하는 것이니까 최대한 이득을 얻어야지."

    파티의 리더인 운현이 길드원이 되는 것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서 운현이 말하자 헤스티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네요. 그럼 내일도 던전에 들어가실 건가요?"

    "응. 길드의 지원을 받아서 계층 공략대에 껴볼까 생각중이야. 길드원이 된다면 그정도 특전은 받아야겠지. 우리가 레벨을 빨리 올리는 것도 길드에 이득이 될테니까."

    "언제 들어오려고?? 내일 하면 안돼?"

    "오래 걸리지는 않을거야. 어차피 우리 레벨은 이제 100레벨이 거의 다 됐잖아. 다음 계층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결국 운현의 제안을 따르게 된 여인들이 한 방으로 들어가자 운현은 인벤토리에 있는 스크롤을 꺼내주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찢어서 마법 발동시켜. 길드 간부들이 모여 있는 만큼 큰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말야."

    "알겠어요. 오빠거는요?"

    "내껀 여기있어."

    자신의 스크롤을 들어올린 운현은 헤스티아의 머리를 박박 쓰다듬어준 후 1층으로 내려온 후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하이딩을 걸고 밖으로 나갔다.

    "후..."

    사람들의 눈을 피하며 던전 도시의 골목을 걸어다닌 운현은 인적이 드문 골목 안의 작은 공터 앞에 도착하자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나와."

    이미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길드를 나온 순간부터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었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어떤 존재인지를 운현은 '알고' 있었다.

    "....."

    아무런 말 없이 골목의 어둠 속에서 흰 후드를 뒤집어 쓰고 마스크를 쓴 이가 걸어나왔다. 자신이 가진 미믹맨의 복장과 미묘하게 닮아 있는 흰색 위주의 옷을 입고 있는 이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를 노려보며 운현은 허리의 검에 손을 가져가는 대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 뿐 이었다.

    "여러 말 하고 싶지 않은데."

    "...후."

    그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놀라고 있는 것처럼 상대 역시도 무척이나 놀란 모양이었다. 내뿜어지는 한숨에 담긴 경악, 혼란. 그리고 그 안에 미묘하게 담겨 있는 허탈감. 그것을 눈치챈 운현은 상대가 마스크를 벗고 뒤집어 쓴 후드를 걷어내자 상대를 노려보았다.

    "누구냐?"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하다못해 자신이 했던 게임 중에서도 본 적이 없던 외모였다. 레밍의 저택에서 보았던 붉은 빛으로 만들어진 얼굴과도 달랐다. 맹세코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청순한 미모의 여인은 자신에게 꽂히는 운현의 시선을 마주하며 싸늘히 입을 열었다.

    "그러는 너는 누구냐."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스르릉."

    문답무용인가. 상대가 무력을 쓰려는 모습을 보이자 운현 역시 검을 뽑았다. 서로에게 겨눠진 검끝이 순간적으로 흔들린 순간 운현과 여인은 어느새 서로의 검을 맞부딪히고 있었다.

    "헤에..."

    진심을 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일격을 이렇게 막아낼 줄이야. 운현이 흥미롭다는 듯 웃자 상대 여인 역시 재밌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이격, 삼격, 사격. 검과 검이 부딪히는 위력으로 공터가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운현이나 여인이나 서로 그것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역시 강하네."

    처음으로 입이 열렸다. 여인은 느긋하게 웃으며 검압에 흐트러진 긴 머리를 쓸어 올린 후 뒤로 물러났다. 상대가 전의를 지우자 운현 역시 전의를 지운 후 검을 거둬 검집에 넣었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충격으로 불이 꺼져버린 담배에 다시 불을 붙인 운현은 눈 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검격을 이렇게 여유롭게 맞부딪힐 수 있는 사람. 운현이 알기로는 단 한명 밖에 없었다.

    "천검자."

    "날 알고 있군."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데 알아둬야하지 않겠어?"

    유들유들한 그의 말에 흑발 미녀. 천검자는 피식 웃은 후 검을 검집에 밀어 넣은 후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공터 구석에 굴러다니던 나무 상자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움직여 그녀의 옆으로 이동했다.

    "일단 상아를 죽이지 않아서 고맙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감히 건드리면 안될 사람을 건드린 것에 대한 단죄를 해야 하나."

    상대가 천검자라면. 자신과 같이 초인의 경지에 올라 있는 이라면 상아를 제압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깨에 구멍 하나만 내주고 말았다는 것에 감사를 해야 할 지, 아니면 그에 대한 단죄를 해야 할지 운현으로서는 고민이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군. 그리고 저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이 이질감... 이게 뭐지...? 아무래도 좋아. 어차피 내 계획을 의해서 저년은 죽어줘야 하니까.'

    애초에 천검자에게 비타를 죽인 누명을 씌우고 그녀를 죽일 생각이었던 운현은 머릿 속에서 퍼지기 시작한 고민을 단번에 끊어내었다. 천검자는 죽어야 한다. 천검자가 라닌이 가진 가장 강한 패라면 그것을 죽여 라닌의 수를 막아낸다. 그것이 계획이다. 그 계획을 의미없이 무너트릴 필요가 없다 생각한 운현은 천검자가 방심하고 있는 틈을 노리기 위해 살기를 줄인 후 그녀에게 다가갔다.

    "쉬는 시간은 대충 하고 빨리 끝내자."

    "상아를 죽이니 마니 그딴 것은 지금 중요한게 아니야."

    "헤에... 나한테 있어선 그게 가장 중요한데."

    그의 말에 천검자는 피식 웃은 후 운현을 노려보며 싸늘히 말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했을 텐데. 이계의 회귀자."

    "...뭐?"

    364====================

    회귀자

    "너... 뭐라고 했냐?"

    "이계의 회귀자. 너도 느꼈을 텐데. 내게서 압도적인 이질감과 동시에 동질감이 느껴진다는 것 쯤은 말야."

    운현을 똑바로 마주하며 천검자는 무심한 얼굴로 대꾸했다. 같은 이계인이기에 느끼는 동질감. 그리고 이 세계를 한번 겪어봤기에 느낄 수 있었던 이질감.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운명을 가지지 못한 자 라는 건가."

    "세계의 비밀에 어느정도는 접근했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아. 소개가 늦었군. 천검자라고 불러."

    "운현."

    "호오... 네가 운현인가?"

    "날 알고 있는 건가?"

    "...뭐야. 넌 모르는거냐?"

    자신의 이름을 밝힌 운현은 천검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상함을 느꼈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운현이 자신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자 천검자는 어깨를 으쓱인 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뭐 됐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중요한 것? 뭐가 더 중요한 거지?"

    "이계인들이 가지는 빌어먹을 운명과 관련된 것들이지."

    천검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막대한 증오가 섞여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운현이 입을 다물자 천검자는 운현을 보며 피식 웃었다.

    "보아하니 넌 스스로 회귀를 선택한 자 같은데... 그렇다는 것은 바꾸고 싶은,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회귀를 선택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럼 같은 이계인으로서 말하지. 우리와 손을 잡자."

    "...우리?"

    다른 세력이 있단 말인가. 운현은 천검자의 말을 놓치지 않게 주의하며 근처에 있는 상자를 끌어 앉았다. 이야기를 들을 자세가 된 운현을 향해 천검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라... 뭔가 세력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건가?"

    "너에게는 아직 접근하지 않았겠군."

    "누가?"

    "라닌."

    "...잠깐만. 라닌이 너에게 접근했다는 건가?"

    "그래. 지금의 나는 일단 다난교 소속이다. 다난교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지는 않겠지? 라닌은 다난교의 책사이고... 또다른 이계인이다."

    "라닌이 이계인이라..."

    "그래. 그렇기에 내가 알고 있는 운명에 존재하지 않던 인물이지. 너와 같이 말야."

    '그래서였나.'

    과거의 세계에서 천검자의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지만 라닌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었다. 다난교의 수장인 카야까지 잡았는데도 라닌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운현은 이 세계가 자신이 알던 것과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 이해가 갔다.

    '운명을 바꾸는 자.'

    라닌이 개입했기 때문에. 정해져 있는 운명을 바꾸는 이계인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운명은 바뀌어져 있었다. 원래 살아있어야 할 자가 죽어있고, 던전 도시에 나타나 있어야 할 카야가 나오지 않았고, 윈드가 죽을 뻔 하고. 그 외에 다른 소소한 것들이 변한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된 운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년의 말이 거짓일 것을 감안하더라도... 라닌이 이계인이라면 이해가 가는군.'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이계인, 그리고 신성을 손에 쥔자. 마지막으로 신성으로 만들어진 위신체 뿐이다. 위신체의 경우 제작자의 의지를 따르는 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대로 운명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까지의 변화는 모두 라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운현이 심각한 얼굴로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천검자는 손을 들어 천천히 얼굴을 쓸어만졌다.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던 운현은 팔짱을 낀 후 눈을 감았다. 라닌도, 천검자도 이계인이다. 그 말은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계인이 적어도 셋은 된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라닌이 이계인이라... 카를로스가 잘도 그년의 부하가 되었군. 이계인이라면 이를 갈던 놈인데. 알고 있었어?"

    "몰라. 라닌과 손을 잡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서로 각자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자는 생각 밖에 없으니까 말이지. 라닌도 나에 대해서 잘 모르고 나도 라닌에 대해서 잘 몰라. 알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 이 빌어먹을 운명이라는 것을 바꾸고 싶어하는 거니까 말야."

    "빌어먹을 운명이라. 충분히 동감하고 있지만... 라닌은 이해가 되질 않는군. 라닌은 다난교의 일원이다. 다난교의 입장에서는 이 운명이 그다지 바뀌지 않길 바랄텐데? 다난교는 신성을 이용해서 운명을 읽어 이 세계의 운명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고 밝혔다. 그런 그들에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이계인이 있다는 것은 도움은 커녕 문제의 소지만 일으키는 것 아닌가?"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운현이 묻자 천검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이 세계의 끝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천검자는 운현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심이 담겨 있는 것을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이계인에 회귀자. 만약 내 일만 아니었다면 나도 믿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너도 알고 있잖아.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 쯤은."

    "거짓은 아니지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지."

    사람의 표정과 기세만으로 상대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를 어느정도 알아내는 것 쯤은 운현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름 책략가로서 살아오고, 수많은 도박을 하며 상대의 블러핑을 읽어내야 했던 자신에게 있어서 지금 천검자의 얼굴을 읽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너도 이계인이고, 또 회귀를 반복했다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 정도는 믿어주지. 하지만 네게 바꾸고 싶은 운명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 라닌과 협력했다는 것에서는 의문만 생기는군."

    "뭐가?"

    "네가 진짜로 원하는게 뭔지 너는 말하지 않고 있잖아. 운명을 바꾼다? 운명을 바꾸려고 손을 잡는다? 웃기는 일이다. 운명을 바꿈으로서 생기는 그 파생효과는 나도 쉽게 읽을 수 없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운명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다른 자가 원하는 방향의 운명으로까지 조율을 한다..."

    "....."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상대가 자신과 같은 이계인이고 회귀자고. 놀라운 일이다. 그래. 놀라운 일이고 당혹스러울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카를로스나 다른 이들의 정보에 의하면 이 세계에 이계인이 자신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 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거기에 던전에서 오크의 말과 다른 정보들을 통해 이 세계에는 숨겨져 있는 비밀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운현 자신 외에 다른 이계인이나 회귀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 정도는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운현은 천검자의 제안에 시큰둥했고 천검자는 그의 반응에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회귀를 선택한 것 아닌가?"

    "맞아.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회귀를 했지.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타인의 도움? 있으면 좋다. 하지만 각자 원하는 것이 다를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한다면 운현은 함부로 천검자와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만약 천검자가 원하는 운명이 자신의 연인들의 죽음이 필수조건이라면? 지금 운현이 원하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그런 상태에서 괜히 자신의 약점을 공개할 이유는 없었던 운현은 시큰둥한 얼굴로 천검자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 목적을 혼자서 이룰 수 있어."

    "하. 악신을 혼자서 상대할 수 있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거냐? 회귀는 어떻게 한거지? 아니면 그냥 정보를 얻고 싶다는 건가?"

    눈을 가늘게 뜬 천검자는 운현을 노려보며 싸늘히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문 채 운현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자 천검자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는지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력할 생각이 아니라면 너는 적에 불과하다."

    "네 목적이 뭐지?"

    "무슨 목적."

    "운명을 바꾸려는 것. 왜 운명을 바꾸려는 거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 이계인에 회귀를 경험했다는 것은 이 세상의 재화나 힘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겠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누굴 살리려는 거냐."

    "살린다라..."

    운현의 질문에 천검자는 피식 웃었다. 회한이 가득 담겨 있는 그 웃음을 운현이 마주하는 동안 천검자는 천천히 얼굴을 쓸어만진 후 입을 열었다.

    "운명을 바꿈으로서 누군가를 살린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회귀를 얼마 안했나보군. 아니면 모든 기억을 잃었다거나."

    "부정하지는 않겠어. 완전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운현이 기억하는 자신의 회귀는 한번에 불과했다. 아르토리우스나 현자에 의해서 회귀의 흔적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것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갖지 않은 이상 운현으로서도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있다는 거네. 하지만... 불가능할걸."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운명을 바꾼다라... 나비효과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그래."

    "한가지가 바뀌면 열가지가 그것에 맞춰지기 위해서 변한다. 정해져 있는 틀이 무너지고 그 틀이 새롭게 구축된다. 그러면서 세계는 뒤틀리게 되어버린다."

    천검자는 운현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마치 자신의 잘못을 곱씹는 것처럼 심각한 어조로 말한 그녀는 상자 위에 걸터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끝이 무엇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나?"

    "글쎄?"

    "봉인된 악신이 풀려난다."

    "악신이 풀려난다라... 그래서?"

    "그래서라... 하하하. 너. 악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거냐?"

    운현의 시큰둥한 발언에 천검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자신 역시도 저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악신을 무시했던 적이 있었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힘을 손에 얻고 많은 것을 바꿨다. 죽이고, 살리고, 상처입히고. 있어야 할 존재를 무너트리고 죽어야 할 존재를 살려나갔다.

    그런 식으로 세상에 커다란 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그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꿔나갔다.

    "세상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많은 이들을 소멸시킨 존재가 아닌가? 파르티에 의해서 봉인되었다고 들었는데."

    "대충은 맞아. 하지만 정확한 것은 다르지."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수많은 회귀를 경험하며 자신 역시도 바로 전의 생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악신의 강함에 대해서. 그 압도적인 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운현을 바라보며 천검자는 이를 드러내었다.

    "위신체를 알고 있겠지? 신을 강림시키기 위한 육체에 대해서."

    "그거야 알고 있는데. 그게 어쨌다는 것이지?"

    "왜 신이 강림하는데 위신체가 있어야 할까?"

    "그거야..."

    "신이라 불리는 것은 전지전능한 존재다. 그런 존재가 이 세계에 현신하는데 어째서 위신체라는 육체가 있어야 강림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

    운현이 아무런 대답을 못하자 천검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건 간단하다. 운명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지. 환생, 전생, 삶과 죽음.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는 이 세상이 만들어질때부터 주어진 운명이 있다. 그 운명은 무한히 반복되며 그 반복 속에서 새롭게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것이다."

    "잠깐만. 그 말은... 한명이 죽어야 다른 생명이 태어난다는 건가?"

    "그래. 하우드를 아나?"

    "하우드라면 매일 자살을 시도하는 하이엘프를 말하는 건가? 그라면 알고 있지."

    "하우드와 만난 적은?"

    "아직."

    "그렇다면 하우드와 만나보는 것이 좋을거다. 하우드가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 말야.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야. 하우드의 말에 따르면, 그리고 내가 겪은 것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순환 안에서 그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그렇기에 신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이 세상에 들어 올 수 없는 거다."

    "흠..."

    "위신체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

    "알아. 시체, 막대한 마력. 그리고 영혼. 마지막으로 신성."

    "위신체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이유도 그것과 같아. 죽음이라는 섭리에서 되돌리는 것이니까. 막대한 마력과 특별한 주문을 통해 그 존재가 세상의 섭리에서 한발자국 벗어나게 만드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운명이라는 틀에 존재하지만 세상의 섭리에서는 벗어난 존재가 되는 것이지. 그리고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유일하게 위신체에만 신이 강림할 수 있는 것이야. 세상의 섭리에서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군. 그렇다면 네 말은 계속해서 운명을 바꿔나가면 순환이 깨져 그 균형이 무너지고 세상의 섭리가 흔들린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 흔들린 섭리로 인해서 악신이 깨어나고?"

    "그래. 흔들린 섭리와 부서진 운명에 의해서 봉인되어 있는 악신이 풀려난다면 그는 위신체를 이용하지 않은 채 강림하게 된다. 신이 강림하기 위해서는 위신체가 필요하다는 것은 운명과 같이 바꿀 수 없는 섭리다. 하지만 운명이 틀어지고 섭리가 무너지게 되면서 신이 세상에 강림하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위신체가 없어도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렇군. 그래서?"

    "그래서라... 악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머리가 안돌아가는 건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건가?"

    운현의 말에 천검자는 눈쌀을 찌푸린 후 싸늘히 말했다.

    "악신이 깨어난 순간 이 세상은 끝난다. 모든 섭리는 무너지고 운명의 순환은 깨어지게 되어버려. 그리고..."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해야한다. 이 지옥같은 반복을...!"

    365====================

    회귀자

    "악신이 깨어난 순간 회귀를 해버린다는 건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악신이 깨어난 순간 세계가 무너진다. 아무리 이 세계의 섭리 바깥에 있는 이계인이라 할지라도 이 세계의 안에서 살아가는 이상 세계가 무너지면 죽어버린다. 그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기억과 능력, 힘을 가지고 회귀를 하는 정도에 불과하지. 하지만 그래서야 운명에 고정되어 버리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 되어버리지."

    천검자의 말에 운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의 노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 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녀들의 죽음은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 있었다. 앞으로 몇일 후. 몇일 후에 그녀들은 죽는다. 그녀들의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그것을 막으면 막을수록 운명의 공격은 거세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해서 막다보면 결국 악신이 부활해 세계를 부숴버린다.

    '젠장.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일이 흘러가는군.'

    "흠... 왜지? 왜 악신이 깨어난 순간 회귀를 하게 되는 것이지? 내가 알고 있는 회귀의 방법은 두가지야. 첫번째 죽는다. 두번째, 알트리아에서 회귀를 한다."

    현자와 아르토리우스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회귀를 하는 조건은 저 두가지였다. 그 외의 회귀의 조건 따위는 없었던 것을 떠올린 운현이 묻자 천검자는 갸름한 턱을 매만지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 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그냥 죽을 경우 모든 기억과 회귀를 반복하며 얻은 힘을 잃은 채 회귀를 하게 되지. 알트리아에서 회귀를 하게 되면 모든 기억과 힘을 가진 채 회귀를 하고. 너도 회귀를 했다면 그 정도는 알고 있는 것 아닌가?"

    "그냥 죽은 적은 없... 너 설마."

    "뭐."

    "그 위신체. 네가 만든 거냐?"

    "아르토리우스를 말하는 건가? 맞아. 내가 만든 거다."

    "그런 방법이 있었나... 하긴. 위신체라면 섭리에서 벗어난 존재. 그 의지는 제작자의 의지를 따오는 것이니만큼 회귀를 했을 때 기억을 그대로 유지할 가능성이 높아. 그렇다면..."

    위신체를 이용해서 기억을 보존할 방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천검자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모든 기억과 능력을 가진 채 회귀를 하게 되어버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운명을 크게 바꿀 수는 없게 되어버리지."

    "그럼 너는 과거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건가?"

    "그래. 기억과 능력을 가진 채 회귀를 하게 된다면 운명에 고정되어버리기 때문에 운명을 바꿀 수 없게 된다. 지금 내 상태는 그 상태야."

    "그래서 그렇게 강한 거군. 레벨이 500이라는 것도 회귀를 통해 얻은 힘인가? 대단하네."

    비웃음 섞인 그의 말에 천검자는 빠득 이를 갈았다.

    "이딴 힘과 기억따위에 집착할 것 같아? 운명을 바꿀 수만 있다면 그런 것 따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어. 하지만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다시 시작한다? 그렇게 될 경우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아. 결과적으로 운명을 바꿀 수 없게 되어버린다고. 결국은 본말전도다."

    "그렇긴 하지."

    딜레마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능력으로는 택도 없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형태로 운명이 공격해들어 올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이렇게 한거지.'

    아슬아슬하게 운명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기억만을 가진 채 450레벨이 되고, 그 힘을 가지고 현실로 회귀하여 가상현실을 경험한다. 수많은 세계를 경험한 통찰력과 분석력을 얻은 후에야 운명과 간신히 운명에 저항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한 천검자가 운명과 싸워 이길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자고. 그래서?"

    "뭐가."

    "모든 기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운명에 걸려 있는 존재라는 것이지. 결국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아닌가? 그런 너와 내가 손을 잡을 필요가 있나?"

    "그렇긴 하지. 하지만 한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군."

    "그게 뭐지?"

    "신성. 신성이 있으면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신성이라..."

    천검자는 초인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자다. 거기에 수많은 회귀를 경험하며 많은 경험을 했다. 그렇다면 운명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은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신성 하나를 소모했을 때 한번 밖에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 아닌가? 운명의 공격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 그렇지."

    운현의 질문에 천검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시원스레 긍정하자 오히려 당황한 운현이 지그시 바라보자 천검자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검을 잡았다.

    "방법은 있다. 실제로 확인도 했고. 이제 네가 선택할 시간이야. 운현. 이계인이여. 운명을 바꾸고 싶은 자여. 우리와 손을 잡자. 그렇다면 우리가 조사한 모든 방법을 알려주겠어."

    "흠."

    여기서 천검자와 손을 잡는 것이 옳은 일인가. 운현은 천검자의 내밀어진 손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은 아니야."

    "하긴. 라닌과의 만남이 남아 있겠지. 그래. 좋아. 라닌과 대화를 끝내. 그리고 나서 결정하도록 하지. 내가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할 일... 그러고보니 상아를 공격했었지."

    "그래. 상아를 죽여야 한다."

    "어째서?"

    천검자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운현은 그것을 꾹 억눌렀다.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을 알릴 수는 없었다. 운현이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묻자 천검자는 팔짱을 낀 후 생각을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던전을 차지해야 한다."

    "던전을? 왜? 알트리아의 진입 때문인가?"

    "아직 못 본 건가? 던전의 몬스터가 생성되는 이유, 그리고 던전에 남아 있는 마법문. 거기에 던전의 몬스터 중 특정 몇몇 몬스터들이 사람의 말을 하는 것. 그걸 확인하지 못한거야?"

    "그건..."

    운현 역시도 아직 의문으로 품고 있는 일들이다. 그것을 천검자가 묻자 운현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던 천검자는 피식 웃었다.

    "알트리아에는 악신이 봉인되어 있다. 그리고 던전은 악신의 영역이야."

    "악신의 영역이라는 건..."

    던전 안의 몬스터가 회귀와 비슷한 부활을 하는 것. 사람의 말을 하며 자신을 알아 본 오크. 그리고 악신의 전설. 자신이 새겨 놓았던 마법문의 글귀들. 정해져 있는 운명. 정해져 있는 탄생과 죽음.

    자신이 알고 있는 단서들을 종합하며 빠르게 정리를 한 운현은 눈을 번뜩이며 천검자를 바라보았다.

    "던전 안의 몬스터는... 악신이 죽인 이들이란 말인가?"

    "정답."

    "잠깐만. 그럼 뭔가 이상한데? 악신에 의해서 그들이 죽었다. 하지만 신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섭리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이 죽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다시 새로운 탄생으로... 아."

    천검자에게 말하던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튕겼다. 던전은 이 세계와는 다른 세계다. 마법문을 통해 들어간 던전을 보며 기겁했던 처음을 떠올린 운현이 입을 다물자 천검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신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의 세계지. 던전은 그것이야. 아무것도 없는 세계 안에 이 세계의 운명이 들어가 있는 것. 악신이 부활하게 된다면 악신의 세계가 넓어지게 된다."

    "...자. 그럼 정리해볼까. 악신의 목적은 뭐지?"

    "아마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는 것이겠지. 파르티에 의해 봉인당했을 때 악신은 던전을 만들었으니까. 자신이 빼앗은 타인의 운명들로 불완전하지만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으니까 말야."

    "악신은 뭐지?"

    "그건 나도 몰라. 악신을 만난 것은 단 두번 뿐. 그 두번 모두 힘도 제대로 못쓰고 죽어버렸으니까. 그만큼 악신은 강하다. 아니... 강하다는 것을 떠나서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섭리에 벗어난 존재이니 말야."

    천검자는 회한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파르티는?"

    "응?"

    "악신을 봉인한 것은 파르티다. 봉인되어진 악신이 부활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고. 그럼 파르티는? 전설에 따르면 파르티는 악신을 봉인하며 자신 역시 봉인당했다고 했어. 악신의 봉인이 풀리면 파르티 역시 봉인이 풀려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그렇다면 파르티를 지원하여 악신을 상대하게 하면 될텐데. 왜 그런 방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지?"

    "......"

    운현의 질문에 천검자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운현의 입꼬리가 끌어올려지자 천검자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패다. 만약 네가 우리와 함께 한다면 그것을 알려주지."

    "흐음... 뭐 좋아. 라닌과는 내일 만나기로 되어 있어. 자세한 이야기는 라닌과 함께 하도록 하지."

    "좋아. 그럼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되겠군."

    "아. 그것에 관해서 할 말이 있는데 말야."

    천검자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상아를 죽이는 일이다. 상아를 죽여 모험가 길드를 혼란스럽게 하고 그 틈을 노려 모험가 길드를 장악한다. 그 말은 다난교의 인물 중 하나가 모험가 길드 내에 길드장을 노릴만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상아를 죽이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왜?"

    "상아는 내가 이용해야 하니까. 지금까지 열심히 작업해놨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날려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내 계획을 무너트렸다간 이계인이고 회귀자고, 협상은 끝이다. 악신을 걱정하기 전에 나부터 걱정해야 할걸."

    "음.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겠군."

    딱 잘라 말하는 운현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현재로서 가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운현 뿐이니 말이다. 신성이 없이도 운명을 바꿀 수 있고, 수많은 회귀를 하며 많은 힘을 쌓은 자신과 상대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상아에 대한 작업은 내일 모레로 미루겠어. 라닌과 협상하여 우리가 손을 잡게 된다면 굳이 모험가 길드를 차지할 이유는 없겠지. 좋아."

    그런 운현과 손을 잡을 수 있다면 상아를 굳이 죽일 이유는 없었다. 강한 힘을 가진 운현이라면 상아의 죽음이 아니더라도 자신과 라닌의 지원을 받아 모험가 길드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천검자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인 후 후드를 뒤집어 쓰고 마스크를 착용한 후 몸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갔다. 텅 빈 공터에 혼자 남게 된 운현은 마지막 하나 남은 담배를 입에 문 후 불을 붙였다.

    "하..."

    정리가 필요하다. 운명을 바꿈으로서 악신이 부활한다. 악신이 부활하면 세계가 무너진다. 그리고 세계가 무너진다면 모든 것은 끝이 나버린다.

    '그건 피해야겠군.'

    그동안 했던 모든 노력의 결과가 다시 회귀를 하여 처음부터 하게 되는 것이라면 그것만큼은 사양이다. 천검자의 말을 떠올리며 운현은 깊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두번째. 저들은 신성을 어디서 구하는 것이지?"

    천검자의 말을 들어보면 그녀는 모든 기억과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운명과 맞서 싸울 수 있을 정도의 신성을 다난교가 보유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운현은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에도 카야는 여기저기를 뒤져가고, 큰 피해를 입어가면서까지 내가 가진 신성을 얻으려고 했어. 만약 신성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았겠지. 그렇지만 이번에는 달라. 뭐가 다르지?'

    과거와 지금. 다난교에서의 다른 점을 생각한 운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닌."

    이계인인 라닌이 추가되었다. 과거에는 없었던 존재인 라닌이 어째서 이 세계에 들어오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정체도, 그녀의 목적도 알 수 없었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라닌이 다난교에 들어간 것만으로 다난교는 신성을 쉽게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라닌 역시 이계인. 이계인이기에 운명의 영향을 받지 않아. 그렇다면 뭔가 방법을 써서 신성을 공급받는다는 것인데... 그게 뭘까.'

    아직까지는 이렇데 할 답을 내놓기가 애매했다. 결국 그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다난교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하기로 했지. 그렇다면 다난교와도 손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아. 하지만 문제는 라닌과 천검자의 목적이지.'

    라닌의 목적, 천검자의 목적. 그들이 무엇을 위해서 운명을 바꾸려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이상 과도하게 발을 들이밀 수는 없었다.

    "일단 해야 할 일은 내일 라닌을 만나는 것이겠군. 그리고 그것에 따라 방침을 정할 수 밖에."

    천검자와의 만남을 끝내고 길드로 복귀한 운현은 사무소에 필레가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던 필레는 운현이 다가오자 표정을 바꾸며 부드럽게 웃었다.

    "어머, 운현씨."

    "좋은 밤이에요."

    "후훗. 그런 인사는 좀 어색하네요. 어디 다녀오시나봐요?"

    "네. 생각할 일이 있어서 잠깐 산책을 다녀왔네요. 그나저나 간부 회의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아... 그거요. 네. 회의가 있었죠. 내일 모험가들에게 공표를 할 생각이기는 해요."

    "어떤 건데요?"

    "비타씨를 살해한 자를 상아 길드장님이 만났다고 하시네요. 상아 길드장님도 휘둘릴 정도의 강자이니 흰 후드에 흰색 옷을 입은 이를 조심하고, 혹시라도 보게 된다면 바로 길드에 보고를 해달라는 전체 퀘스트를 공지할거에요."

    '굳이 내가 누명을 씌울 필요도 없군.'

    천검자가 왜 그런 옷을 입고 다녔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알아서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여 준다면 그것이야 말로 편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운현은 느긋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후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들으셨어요?"

    "길드원이 되신다는 이야기요? 후훗. 네. 들었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아니... 아직 된다는 얘기는 안했는데요?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고 한거지."

    366====================

    회귀자

    "예?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까 전까지만 해도 길드에 들어 오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운현이 이제와서 딴소리를 하려고 하자 필레는 당황했다. 무슨 말을 꺼내서 그의 마음을 돌려야 하나 고민하는 필레를 향해 운현은 쓰게 웃었다.

    "아뇨. 안들어가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저 몇가지 확인을 하고 확답을 받은 후에 결정하겠다는 거죠."

    "휴우... 뭘 확인하고 싶으신건데요?"

    "음... 자세한 것은 상아와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는데. 괜찮을까요?"

    "아... 상아 길드장님이랑요... 저기. 그... 운현씨?"

    "네?"

    상아의 이름이 나오자 필레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필레는 손짓하여 운현을 불렀고 그녀의 손짓에 사무소 너머로 얼굴을 가져갔다.

    "왜요?"

    "저기... 진짜 상아 길드장님이랑 별 사이 아닌거 맞아요?"

    "별 사이가 아니긴 하지만 별 사이가 되고 싶은 관계라고 생각하시면 좋겠네요."

    "...우와. 진심이에요?"

    "전 항상 진심이라구요. 상아 뿐만 아니라 필레씨에 대해서도 말이죠."

    또다시 시작된 그의 달콤한 말에 필레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상아의 일 이후로 사람들은 운현의 취향이 정말 특이하다는 말을 많이 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며 많은 남자들을 만났지만 단 한번도 그들의 호감이나 관심을 받은 적이 없었던 필레로서는 왠지 모르게 서글퍼지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진짜 특이한 사람 외에는 나한테 관심을 주지 않는 걸까...'

    자신이 보기에도 상아는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을만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물론 그녀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여자와 남자가 느끼는 매력은 달랐다. 상아는 명백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타입이지 남자들의 인기를 끌기는 어려운 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필레는 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운현씨. 참. 운현씨에게 관심을 받는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닌데... 진짜 취향 특이하시네요."

    "그래요? 나름 보통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 그... 상아 길드장님이나 저나 어디가서 남자들에게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거든요. 지금까지를 생각해도 그렇고... 그런데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나오시니 몸 둘바를 모르겠네요."

    "하하하... 그건 사람들이 상아나 필레씨의 매력을 몰라서 그런거죠. 저로서는 오히려 다행인 일인걸요?"

    "네?"

    손을 뻗은 운현은 필레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감싸 잡고 쓸어내렸다. 비단처럼 매끈한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서 물결치는 것을 즐기며 운현은 살짝 얼굴을 가깝게 가져갔다.

    "우...우와."

    "다른 사람이 필레씨의 매력을 알았더라면 그 사람에게서 당신을 뺏는 가혹한 일을 해야 했을테니까 말이에요."

    "저, 저, 우, 운현씨이? 너... 너무 가까운게..."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의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 온 그의 얼굴을 차마 마주하지도 못하며 필레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예상이 된 필레는 어쩔 줄 몰라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입술이 굳어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 해낸 필레는 그의 숨결이 떨어지자 눈꼬리를 파르르 떨며 살며시 눈을 떴다. 어느새 떨어져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크게 한숨을 내쉰 필레는 달궈진 얼굴을 식히기 위해 손부채질을 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 그럼 상아 길드장님을 만나야 된다는... 거죠?"

    "네. 있죠?"

    "네... 있긴 한데... 아니 있었나?"

    콩닥거리는 심장 때문에 사고가 정리되지 않았다. 상아가 길드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헷갈렸던 그녀가 횡설수설하는 것을 보며 빙긋 웃은 운현은 필레와 운현의 대화를 구경하던 길드원 중 하나가 실실 웃으며 나와 사무소의 문을 열어주자 안으로 들어갔다.

    "상아 길드장님은 안에 계세요. 그보다 운현씨."

    "네?"

    "방금 뭐 하려고 했어요? 설마 기습 키스? 어휴~ 바람둥이~"

    "하하하~ 하마터면 할 뻔 했죠. 필레씨가 워낙 매력적인지라. 그러는 당신도 무척 매력적인 분이군요. 성함이..."

    "아이 참! 저한테까지 작업거시는 거에요? 필레씨랑 상아 길드장님이 무서우니까 사양할게요~"

    운현이 웃으며 자신에게 말을 걸자 길드원은 그의 팔을 찰싹 때리고 한쪽 눈을 깜빡였다. 운현과 길드원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 필레의 얼굴이 점점 무표정해지기 시작하자 길드원은 운현의 팔을 살짝 꼬집고 필레를 가리켰다.

    "봐봐요. 무섭죠? 그러니까 필레씨한테 잘해줘요. 저래뵈도 되게 독점욕이 강한 사람이니까요."

    "누, 누가 독점욕이 강해!"

    "에이~ 아닌 척 하기는. 그럼 운현씨. 길드장님은 안에 계시니까 들어가보세요."

    길드원이 놀리자 필레의 얼굴은 다시 붉어졌다. 그녀가 빽 소리치는 것을 들으며 길드원은 운현에게 안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고 운현은 씩 웃으며 필레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필레씨! 이따가 봐요~"

    "네, 네엣!"

    '슬슬 필레와도 관계를 맺어야겠군.'

    필레 역시도 자신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와 좋은 관계를 발전시켜 연인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보였다. 다만 필레가 가끔씩 보이는 독점적 성향을 제어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지만 그 정도 문제는 운현이 지금부터 상대해야 할 상아와의 문제를 생각하면 그리 큰 일도 아니었다.

    '상아가 어느정도 눈치를 챌 수도 있다는 건데...'

    아르토리우스와 있던 자리에서 운현은 아르토리우스가 상아를 공격하는 것에 순간 꼭지가 돌 뻔했다. 자신이 만든 위신체가 상아를 공격하다니. 운현이 조금만 더 냉정하지 않았다면 그때 던진 단검으로 아르토리우스의 머리를 날려버렸을 지도 몰랐었다.

    '아르토리우스가 이정도로 적의를 품을 줄은 몰랐군.'

    과거에도 아르토리우스는 상아를 비롯한 다른 운현의 연인들에게 무척이나 냉소적이었다. 운현이 그녀들을 구하길 원하기 때문에 협조해 준 것이지 만약 운현이 포기를 했더라면 스스로 나서서 그녀들을 모두 죽였을지도 몰랐을 정도로 아르토리우스는 그녀들을 싫어했었다.

    '아마 그건... 지금과 같은 감정이겠지.'

    아르토리우스가 자신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잘 알고 있었다. 임프린팅. 알에서 깨어난 새가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착각하는 것처럼 죽음에서 끌어 올려 준 만큼 아르토리우스는 자신을 거의 부모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것을 조율해야 할텐데...'

    만약 끝까지 아르토리우스가 자신의 감정에 이끌리며 본래의 사명을 잊어버린다면 차라리 폐기를 시키는 것이 나을 것이다.

    "흐음. 문제는 얜데... 참... 얘도 힘들게 사네."

    밑에 있는 대형 클랜은 어떻게 하면 통수를 칠까 고민하고 있고 기껏 보호하려는 모험가들 사이에는 여기저기의 첩자들이 넘쳐난다. 거기에 필사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던전이 악신이 봉인되어 있는 곳이라니.

    "똑똑."

    장식따위는 찾아 볼 수 없는 투박한 문을 두드린 운현은 안쪽에서 들려 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작게 심호흡한 운현은 허락이 떨어질때까지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타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음? 어. 운현아냐?"

    "안녕."

    "헤에~ 어서와. 내가 보고 싶었어?"

    입꼬리가 끌어올려진다. 평소에 입는 하얀 슈트가 아닌,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펑퍼짐한 하얀색 셔츠 하나만을 입고 있는 상아는 자신의 긴 머리를 머리끈으로 질끈 묶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웃음기 가득한 그녀의 예쁜 얼굴을 마주하며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고 싶었어."

    "어? 어어... 그, 그래. 어서 들어와. 그럼."

    오히려 대범하게 나오는 운현의 말에 상아는 더 놀랐는지 머뭇거리다가 그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바깥의 복도를 보며 다른 사람이 없나 확인한 그녀는 운현이 안으로 들어오자 씨익 웃으며 문을 잠궜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서 있는 상아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양 손을 들어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으흐흐흐~ 오밤중에 남자가 겁도 없이 내 방에 찾아오다니. 각오는 되어 있는 것이겠지?"

    "그런 각오는 얼마든지 되어 있으니까 좀 참지 그래? 어깨도 아직 아플 것 아냐."

    "으... 괜찮아. 아둔에게도 치료를 받았으니까 걱정 말라고. 그보다 무슨 일이야?"

    "이야기 하고 싶어서. 길드 가입 건도 있고."

    "마침 잘 됐네. 나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까."

    얼굴에 그려져 있던 음흉한 웃음이 사라진다. 양 손을 꿈틀거리는 것은 멈춰지지 않았지만 상아의 분위기가 바뀐 것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으쌰!"

    "....."

    두번의 페이크를 건 다리 후리기. 공중에 떠버린 자신의 몸을 잡은 상아는 운현을 끌어당기며 침대로 집어 던졌다. 숙소에 있는 침대의 두배쯤 되어보이는 커다란 침대 위에 몸이 던져 진 운현은 허공에서 뛰어 오른 상아의 손에 들려 있는 단검을 발견했다.

    "푹!"

    조금만 빗나갔다면 귀가 잘렸을지도 몰랐을 정도다. 머리카락 몇가닥이 잘려나갈 정도로 예리하고 근접한 단검투척에도 운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허공에서 날아올라 가볍게 자신의 위에 착지한 상아는 운현을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피하지 않아?"

    "왜?"

    "내가 널 죽일지도 모르는데."

    "네가? 왜?"

    "네가 있으면 위험하니까. 운현. 너는 지금 나의 커다란 약점이야. 그 약점을 제거하기 위해서 내가 손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떻게 하고 있는거지? 아니... 애초에 너. 도대체 뭐야?"

    상아의 싸늘한 시선에 운현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웃음을 마주하던 상아는 이를 드러내며 운현의 머리 옆에 박혀 있는 단검을 뽑아 그의 목에 겨눴다.

    "농담하는 것 같아? 나는 모험가 길드를 책임져야 하는 길드장이야. 내가 흔들리면 모험가 길드가 흔들리고, 모험가 길드가 흔들리면 던전 도시가 흔들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난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어."

    단단한 의지가 담겨 있는 눈빛이다. 무거운 책임감과 묵직한 부담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선을 마주하며 운현은 천천히 중얼거렸다.

    "뭐냐라..."

    "내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네가 가지고 있는 스킬. 그리고 아까 전 아르토리우스에게 날린 단검 투척. 네가 스승님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말해. 날 이용해서 뭘 하려는 거지?"

    상아의 작은 손이 목을 감쌌다. 자신의 손에 비하면 무척이나 작은 손이지만 그 손에 힘이 담기면 어느정도인지 예상할 수 있었던 운현은 그녀가 자신의 급소를 잡고 있음에도 얼굴에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딱히 뭘 할 생각은 없어."

    "그럼? 아르토리우스와는 무슨 관계냐?"

    "무슨 관계냐라... 특별한 관계는 아니야. 물론 아예 관계 없는 것은 아니지. 업무적으로 엮여 있을 뿐이니까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좋아."

    '지금은 말이지.'

    나중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자신과 아르토리우스간의 관계에 대해 상아가 신경을 쓸 필요는 전혀 없었다. 지금 상아가 신경써야 할 일은 다른 일이었다.

    "숨기려는 거야? 혹시 용병 연맹의 첩자야? 말해. 지금 당장 널 고문하기 전에!"

    "하늘에 맹세코 그것만큼은 절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수상해."

    "수상하다... 뭐가?"

    자신의 위에 엎드려 있는 상아에게서 좋은 향기가 난다. 길게 늘어진 회백색 머리칼이 얼굴을 간지럽히자 그것을 손으로 치운 운현은 손을 벋어 상아의 얇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뭐하는 짓이야."

    그의 손길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안자 상아는 빠득 이를 갈고 더더욱 거센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단검을 움직였다. 단검의 날이 목에 닿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상처가 생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도 운현은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지금 내가 보기에는 네가 더 수상한데? 남자를 침대에 눕혀 놓고 이 위에서 뭘 할 생각이지? 이 귀여운 아가씨야."

    "그런 달콤한 말로 꼬드기려고 해도 소용없거든?"

    "꼬드긴다기보다는 진심인데... 자."

    나긋한 허리를 잡아 당긴다. 큰 힘이 실려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상아는 그 손길을 저항할 수 없었다. 스승에게 배운 주문을 성공시켰을 때 현자가 부드럽게 안아줄때의 그 기분이다.

    '운현은 스승님이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그리운 향기가 나는 걸까.'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키도, 생김새도. 심지어 가진 스킬 마저도 다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상아는 운현이 자신의 몸을 만지고 칭찬하며 애정을 보일 때마다 몸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우우..."

    자신도 알 수 없는 기분에 상아는 입술을 비쭉 내밀며 버티던 힘을 풀고 말았다. 자연스레 운현의 위에 눕게 된 상아는 운현의 가슴에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두근거리는 심장고동소리. 숨을 내쉬고 들이마실 때마다 몸이 움직이고, 그 움직임이 가져오는 편안함.

    상아는 결국 손에 쥐고 있는 단검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너 진짜 누구야. 도대체 뭔데... 도대체 "

    367====================

    회귀자

    "운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이상해."

    "뭐가?"

    "널 만난 것은 분명 처음이야. 너의 다른 동료들과 다르게 너에게서 느껴지는 친밀감은 없어. 하지만 왜...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무슨 기분인데? 아니 그보다. 다른 동료들에게서 친밀감이 느껴지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다. 운현이 살짝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상아는 그의 가슴에 턱을 괴고 운현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너에게서 스승님의 향기가 느껴져. 모든게 다른데도... 혹시 네가 스승님의 환생이 아닐까?"

    '그런 거였나...'

    상아가 자신에게서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자는 운현의 복제라고 할 수 있는 위신체다. 현자의 시간을 통해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는데다가 현자에 주입된 혼은 운현이 복제한 자신의 혼이다.

    '그러니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함께 할 수 없지.'

    만약 현자를 움직일 수 있다면 아르토리우스 이상으로 자신에게 가장 큰 협력자가 될 인물이지만 이 세계의 섭리를 어길 수는 없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어 상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엣?"

    그의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자 상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운현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이럴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의 정체를 알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뭐란 말인가. 이 편안함은, 이 안도감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단 한명. 스승님에게서만 느낄 수 있었던 이 기분이 다시 느껴지는 건 왜란 말인가.

    "착하다..."

    딱딱히 긴장해 있던 상아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몸의 기운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힘든 수련을 마치고 스승님이 있는 작은 오두막에 들어갔을 때. 책을 읽던 스승님은 무뚝뚝한 어조로, 하지만 애정을 담아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항상 저렇게 말했었다.

    "뭐, 뭐하는거야."

    이상하게 눈물이 나려 한다. 분명 이럴 생각은 없었다. 그를 협박하고, 필요하다면 고문을 해서라도 그의 정체를 알아내려 했었다. 길드장이라는 막중한 책임감을 간직하며 자신보다는 타인, 타인보다는 길드를 위해서 살아와야 했던 상아는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에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멈춰야해.'

    이 남자는 이상하다. 살아온 날만 따지면 스무배나 차이가 나는데다가 레벨, 경험을 따져도 자신보다 한참 아래다. 그런데 왜...

    "그, 그만!!"

    스승님의 옆에 있을 때처럼 마음이 약해진다.

    스승님의 옆에 있을 때처럼 마음이 작아진다.

    스승님의 옆에 있을 때처럼 기대고 싶어진다.

    스승님의 옆에 있을 때처럼...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어진다.

    '이래서는...'

    머리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 운현이 있다면 자신은 약해질 것이다. 던전 도시를 책임지는 네개 조직 중 하나인 모험가 길드의 수장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감과 부담은 일반적인 정신력으로는 버틸 수 없는 것이다. 그 막중한 무게를 버티기 위해서 많은 것을 버리고, 많은 것을 가려왔다.

    나약한 자신을 숨기고, 나약한 마음을 가리고, 나약한 얼굴을 위장해왔다. 겨우 이제야 그것에 익숙해져 있는 자신이 되었는데. 이제와서... 이제와서.

    "잘했어. 정말 잘했어."

    순수하고 부드러운 칭찬이다. 아랫사람의 존경이 아닌, 약한 사람의 감탄이 아닌 순수하고 따뜻한 칭찬이다. 그것에 상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것을 보여서는 곤란했다.

    "그...그만해!"

    그의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약한 마음을 가리고 있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기분이다. 왜일까. 어째서일까. 의문은 샘솟는다.

    하지만 그래서는 곤란하다. 이렇게 무너져서는 안된다. 상아는 간신히 손을 움직여 자신의 머리를 만지는 운현의 손을 막으려 했다.

    "정말 많이 힘들었겠구나."

    "큭."

    따스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 순간 상아는 눈물이 터져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알아주길 바랬다. 자신이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나 고생하며 남들을 위하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인정해주기를 바랬다. 누군가가 위로해주고, 누군가가 자신을 칭찬해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런 것은 곤란했다. 자신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나약하고, 응석부리기 좋아하고, 외로움을 잘 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이 사라지고 몇날 몇일을 엉엉 울며 오두막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자신을 떠올렸다. 제니스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스승님을 찾다가 굶어 죽든, 울다 지쳐 죽든 했을지도 몰랐다.

    "놔..."

    모험가 길드장으로서 가져야 할 강인함은 사라졌다.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부담감과 책임감, 그것이 주는 압박감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상아는 붕붕 고개를 저었다.

    "놔... 놔. 왜... 왜 네가 이러는 건데. 네가... 왜."

    "글쎄..."

    쓰게 웃으면서도 운현은 상아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과거처럼. 이제는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 지난 삶처럼. 상아는 자신의 손에서, 자신의 품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날 잊지마!'

    눈물을 흘리며 애써 웃어보였던 상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회귀를 시키기 위해서, 운현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는 불확실한 말마저도 아무런 의심없이 믿어주며 죽음을 각오했던 상아의 얼굴이 떠오르자 운현은 그녀의 작은 뒤통수를 잡고 꼭 끌어안았다.

    "흣...!"

    부드럽고 달콤한 향기가 느껴진다. 품 안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상아의 모습은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도. 400레벨이 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모험가도 아니었다.

    그저 막중한 책임감에 눌려 자신을 숨겨 온 작은 소녀에 불과했다.

    '소녀 치고는 나이가 많지만...'

    애같은 모습과 푼수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마 그녀가 느끼는 막대한 책임감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본심을 내세울 수 없으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부담감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 수 없기 때문에 상아는 스스로를 낮추며 더 이상의 부담감을 갖지 않으려 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뭐 이젠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지.'

    과거의 자신은 불가능했다. 약했으니까. 아무런 힘도, 기억도, 능력도 없는 주제에 쓸데없는 정신적 트라우마에 빠져 힘들어 하는 그녀를 돕기는 커녕 그녀에게 기대왔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가짜 신이라는 위치에 올라 있고 초인의 영역에 들어 왔는 자신이다. 또한 수많은 세계를 경험하며 지도자로서도 활동하여 성공한 경험이 있었다.

    "이제는 좀 편해져도 괜찮아."

    "으...으으..."

    작게 떨리는 어깨. 묘하게 축축한 가슴팍. 얼굴을 숨기고 있지만 운현은 상아가 흐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라도 그녀의 부담감을 줄여주고 싶다. 이렇게나마 그녀가 가진 고통을 가져가고 싶다.

    그렇게 한동안 운현은 상아를 꼭 끌어 안은 채 그녀를 칭찬하고 달래주었다.

    "...크흠."

    "훗."

    "우, 웃지마."

    몇백년만일까. 남 앞에서 이렇게 울어 본 적이. 상아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운현에게 뾰로통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도 운현에게 있어서는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모습에 불과했다.

    "아니. 사람이 귀여운 것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웃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내가 귀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좀..."

    "그래. 그래. 아이고 귀엽다. 아이고 잘한다."

    "하, 하지 말라고 했지!"

    자신의 투정에도 운현이 그저 웃으며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상아는 당혹스러워하며 몸을 뒤로 젖혀 그의 손길을 피했다. 이상하게 운현의 앞에서 수백년동안 쳐 놓은 자신의 벽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에게는 통하는 자신의 벽이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에 이상해하면서도 상아는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진 것을 느꼈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안정감이란 말인가. 상아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아까도 말했지만 운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하아... 뭐 좋아. 그럼 운현."

    "응?"

    "내가 묻는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어?"

    "어떤 질문이냐에 따라 다르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그가 말하자 상아는 주먹을 꼭 쥔 후 자신이 가진 첫번째 의문을 던졌다.

    "아르토리우스와 무슨 관계야?"

    "사무적인 관계? 한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손을 잡은 정도라고 해둘게."

    "해둘게... 라는 것은 다른 관계도 있다는 거네."

    "응.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해주도록 하지."

    위신체와 신성, 그리고 세계의 비밀.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지금 말할 필요는 없었다. 가뜩이나 부담감에 짓눌려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상아에게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운현이 느긋하게 말하자 상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째려보았다.

    "좋아. 그럼 하나 더."

    "얼마든지."

    "필레와 펠리시아에게 들어보니 너... 내가 나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불안해하면서 바로 뛰어나갔다고 했어. 맞지?"

    "응."

    "내가 습격당할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좋아하는 사람이 야밤에 혼자 나갔다는데 얌전히 있을 남자는 없지."

    "장난치지 말고."

    뚱한 얼굴로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레나씨와 함께 다난교를 쫓고 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지? 그것에 관해서 나도 나름대로 조사를 하고 있었어. 그리고 다난의 공격 대상 중 하나가 너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다난이 날? 왜?"

    "왜겠어?"

    "모험가 길드를 혼란에 빠트리기 위해서?"

    "반쯤 맞았어. 널 공격해서 쓰러트림으로서 모험가 길드를 차지하려는 속셈이었지. 혼란에 빠진 모험가 길드를 손에 넣음으로서 던전을 통제하려고."

    "심각한 일이네."

    그저 남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자신마저도 다난의 표적이 되어 있을 줄이야. 상아는 심각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싱글거리며 바라보던 운현은 탁자를 톡톡 친 후 말했다.

    "그러니 너도 협조를 해줬으면 좋겠어. 이제는 파르티 교단만의 일이 아니잖아? 다난교는 명백히 던전 도시를 노리고 있다고."

    "으음... 그건 내가 혼자 결정할 만한 일이 아니야. 그리고 한가지 더. 증거가 없어."

    "증거라."

    "날 공격했던 자. 그가 누군지 알아?"

    "응."

    "엥?"

    혹시나 해서 물어 본 상아는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히려 놀랬다. 멍청히 자신을 바라보는 상아를 마주보며 빙그레 웃은 운현은 팔짱을 낀 후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누군지 알아."

    "누, 누군데!?"

    "맨입으로 말해 줄 수는 없지."

    "...치사하게 그럴거야? 너 나 좋아한다면서. 좋아하는 사람의 부탁 정도는 들어달라고."

    "너도 모험가라면 알텐데? 공은 공, 사는 사. 내가 널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호구 잡힐 생각은 없어. 거기에 우리 연인도 아니잖아."

    "윽..."

    자신이 떡하니 운현의 동료들에게 밝혀버렸으니 할 말이 없다. 그의 말대로다. 정보는 힘이고 돈이 된다. 그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얻으려는 것은 도둑놈 심보나 다름없는 것이다.

    "워, 원하는게 뭐야."

    "흠... 글쎄. 뭘 원할까?"

    "쳇. 어쩔 수 없군. 이 몸과 하룻밤을 지낼 수 있는 영광을..."

    "아. 그건 됐고."

    "...흥. 나,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어차피 뭐 반쯤은 넘어 온 것 같은데.'

    운현이 딱 잘라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상아는 상처받은 얼굴로 시무룩히 투덜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피식 웃은 운현은 테이블에 손을 올리고 차분히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와 내 동료들의 레벨 업이야."

    "그런 것이라면 길드에 가입하고 지원이 예정되어 있어. 각 레벨에 맞는 길드원들이..."

    "내가 원하는 지원자는 두명이면 괜찮아."

    "두명?"

    예상 외의 발언에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수의 길드원이 지원하여 운현 파티의 레벨을 빠르게 올리려던 그녀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자 운현은 탁자를 톡 친 후 말했다.

    "제니스와 펠리시아. 이 둘이 우리를 지원하게 해줘. 그렇게 해준다면 그자의 정체를 알려주지."

    "엑!?"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길드 간부의 핵심 전력이다. 특히 제니스와 펠리시아는 더욱 그랬다. 모험가 길드의 창시자이자 하이엘프이며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제니스와 모험가 길드의 거의 부길드장 수준의 일을 하고 있는 펠리시아. 이 둘이 특정 파티를 지원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꽤나 큰 이슈가 될 것이다.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필레는 어때? 필레라면 너랑 사이도 좋고 말야."

    "매우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아까도 말했지. 공은 공, 사는 사. 나에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이런 제안을 하는 거라고. 그리고 그리 길지는 않을거야."

    "...?"

    '내가 원하는 것은 명분이니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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