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40)

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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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크어어어어어!!!"

일반 오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포효가 터져나왔다. 그것에 움찔한 여인들이 비틀거리는 동안 운현은 꼿꼿히 선 채 내려오고 있는 오크 워리어들을 바라보았다.

'두 세마리라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일곱이라... 힘들겠군.'

운현이 본래의 힘을 낸다면 모를까, 그것을 억누른 상태에서 지금의 파티원들이 저들과 상대해 이길리는 만무했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문제다. 오크 워리어들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내려오는 동안 빠르게 전략을 생각하던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담담히 말했다.

"일단 도망갈 준비는 하자."

"네?"

"싸, 싸운다면서!"

"물론 싸우긴 싸워야지. 헤스티아. 파이어 볼 준비해둬. 미야는 지뢰진. 바제트는 가장 먼저 오는 오크 워리어에게 인탱글 날려."

그냥 튀면 후위가 위험해진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어느정도 상대를 하는 척 하다가 튀는 것이 맞는 일일 것이다. 운현의 빠른 지시에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그가 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집중했고 그 순간 운현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투척 단검을 왼손에 들었다.

'돌진 하는 순간 한놈 잡고 시작해야겠군. 젠장. 아직은 안된다고.'

모두에게 자신의 힘을 알리는 것은, 자신의 정체를 알리는 것은 미뤄야 한다. 이들에게 큰 호감을 얻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완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이들이 다른 모든 것보다 자신을 위한다고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이상 운현은 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힐 수 없엇다.

'적어도 300레벨에 오를때까지는...'

그녀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경계한다 하더라도 솔직히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으로 생기는 틈이다. 레벨이 낮을 때는 파티의 연계, 그리고 효율적이고 정확한 지시와 그것을 순순히 따르는 파티원들의 움직임이 강함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을 의심하게 된다면?

운현이 생각하고 분석하여 판단한 결정에 망설이게 될 것이고 운명은 그 틈을 노려 그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려 할 것이다. 상아나 필레 정도 되는 경험과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아직 100레벨도 되지 못한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에게 있어서 운명이 만들어내는 죽음을 피하는 방법은 그녀들에게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지시일지도 몰랐다.

'걔들이라면 내 지시에 빠르게 판단을 내릴 수 있겠지만...'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이다. 레벨을 올리며 무수한 위기를 겪어왔다면 자신의 지시가 옳은 것이라고 그들은 판단하겠지만 이들은 달랐다. 아직 경험이 적기 때문에 자신의 지시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지금이야 자신에 대한 호감이 크고 그 신뢰가 있기에 군말않고 따르는 것이지만 만약 자신을 의심하게 된다면 운현이 내린 지시를 어기고 움직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카아아아!!"

천천히 내려오던 오크 워리어들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면 첫번째 오크 워리어가 공격이 들어 올 거리가 만들어지자 운현은 들고 있던 단검을 던졌고 그 순간 언덕 위에 남아 있던 오크가 지팡이를 들었다.

"커억!"

달려오던 오크 워리어들의 속도가 늦춰졌다. 운현의 손에서 날아간 단검은 오크 워리어의 어깨를 맞췄고 헤스티아의 파이어 볼이 오크 워리어들을 덮쳤다.

"지뢰...!"

"잠깐!"

"에?"

"왜!?"

"싸울 생각이 없어보이는군."

공격을 당했음에도 오크 워리어들은 싸우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무기를 내려 놓은 채 씩씩거리며 운현들을 노려보기만 할 뿐 그들은 천천히 이동하며 어느정도 거리를 벌린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오크 워리어들을 조종하는 건가. 저건 또 뭐지?'

수많은 오크들을 잡았지만 저런 오크는 본 적이 없었다. 운현이 언덕 위를 노려보자 언덕 위에 있던 오크는 다시 지팡이를 휘둘렀고 그 순간 그 오크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버렸다.

"맙소사!"

"저게 뭐야!?"

"운현!! 어떻게 해야해!! 공격해!?"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오크를 보며 바제트는 활을 들고 다급히 물었다. 지금이라면 공격할 수 있다. 그녀가 시위에 화살을 먹이자 운현은 입을 다물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오크 워리어들이 무기를 내려 놓고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운현은 자신의 단검에 어깨를 맞은 오크만이 무릎을 꿇기보다는 분노에 가득 찬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것을 발견했다.

"크아아아악!!"

어깨의 고통 때문일까? 오크 워리어는 분노밖에 느껴지지 않는 포효를 터트리며 무기를 들고 운현에게 달려들었다. 다른 오크들과 다르게 혼자 달려오는 오크를 보며 운현은 검을 들어 오크 워리어에게 겨눴고 미야와 헤스티아, 바제트는 이를 갈며 달려오는 오크 워리어를 공격하려 했다.

"쿠우우웅!!"

운현의 파티와 거의 근접한 오크 워리어의 몸이 쓰러졌다. 사지가 바닥에 틀어밖힌 오크 워리어가 꿈틀대는 것을 본 운현은 고개를 들어 허공의 오크를 바라보았다. 오크의 지팡이가 오크 워리어에게 겨눠져 있었다.

'저 자식이 한 일인가.'

오크 워리어의 양 팔과 양 다리에는 빛으로 만들어진 창이 틀어박혀 있었다. 5계층의 몬스터 조차 이런 기술은 쓰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면 저 오크는 충분히 경계를 해야 할 만한 상대라고 생각한 운현이 이를 드러내자 그의 뒤에서 준비하고 있던 여인들이 떨떠름한 어조로 조용히 말했다.

"우... 운현."

"어떻게 해?"

"도. 도망칠까?"

"도망쳐봤자 의미 없는 것 같은데..."

오크 워리어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냥 저 창으로 머리를 공격했으면 끝날 일이다. 그런데도 굳이 양 팔과 양 다리를 공격하는, 네개의 창을 만들어낸 이유는 무엇일까. 동시 네개의 원거리 공격을 날릴 수 있다는 것을 시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운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지팡이를 든 오크를 바라보았다.

"크르르..."

허공에 있던 오크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던 운현이 단검을 손에 쥐었을 때 오크는 지팡이를 휘둘렀고 그 순간 대기하고 있던 오크 워리어들이 빠르게 움직여 운현 일행을 포위했다. 마치 도망치는 것을 막으려 하려는 듯 말이다.

"운현..."

이제는 도망치기도 힘들다. 바제트는 이를 악물며 활을 잡고 운현의 곁으로 이동했다.

"기습을 할거라면..."

"크르르...!"

"온다."

"뭐?"

오크의 지팡이가 자신들에게 겨눠지자 운현은 검을 들었다. 오크의 지팡이 끝에서 네줄기 빛이 터져나왔다. 그 빛줄기는 운현과 여인들의 몸에 적중했다. 순간 현기증이 느껴지고 졸음이 쏟아졌지만 이미 초인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운현에게 있어서 이정도 수면욕을 물리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문 것만으로 그 효과를 날려버린 그는 황급히 자신의 곁에 있는 여인들을 돌아보았다.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

"으으..."

"아.."

"오...빠..."

공격이라기보다는 상태 이상인 것인가? 미야와 바제트, 헤스티아가 천천히 허물어진 것을 본 운현은 그녀들이 수면에 빠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레이터 힐."

자신에게 쏘아진 것과 같은 효과라면 특별히 독이나 다른 상태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저 수면상태로 만드는 상태이상 마법에 불과할 것이나 방심할 수는 없었다.

즉사만 아니라면 살릴 수 있다. 운현은 만약을 대비해 차례대로 여인들에게 그레이터 힐을 걸어 준 후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검을 쥐었다.

"간이 붓다 못해 정신을 놨구나. 감히 건드릴 사람이 없어서."

"크르!? 크르르르!?"

자신의 마법에 운현이 너무나도 쉽게 저항한 것에 놀랐는지 지팡이를 든 오크의 낯빛이 변했다. 흑색의 오크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지팡이를 휘저은 순간 대기하고 있던 오크 워리어들이 무기를 들고 운현에게 달려들었다. 여섯의 오크 워리어가 강맹한 기세를 뿜으며 달려오자 운현은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준비하고 있던 단검을 던졌다.

"크억! 크어어!!"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크들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오크 워리어들의 머리에 단검을 날려 그들의 머리를 아예 박살내버린 운현은 홀로 남은 오크를 노려보며 싸늘히 말했다.

"크르..."

오크 워리어를 단번에 학살해버린 운현의 무력에도 불구하고 지팡이를 든 오크는 겁을 먹기는 커녕 오히려 잘됐다는 듯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인 후 운현에게 지팡이를 겨눴다. 지팡의 끝에서 붉은색 구슬이 생성되어 자신에게 날아오자 운현은 성검으로 그것을 갈라버린 후 검을 크게 휘둘렀다.

"반월참!!"

푸른색 반월형 검기가 오크를 향해 날아간다. 지팡이를 움직여 보호막을 생성시켜 자신의 몸을 보호한 오크가 다음 마법을 준비하려는 순간 어느새 오크의 옆으로 이동한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검을 휘둘렀다.

"툭."

오크의 팔이 잘려나갔다. 그림같은 반원을 그린 검날에서 피가 배어나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오크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순간 운현은 오크의 몸을 걷어 찬 후 그의 다른 팔도 베었다.

"캬악!!"

"오크 주제에 마법을 쓰고, 꽤 강한 것 같지만 그래도 약해빠졌군."

아마 이정도라면 300레벨의 모험가도 혼자서 둘 이상은 상대할 수 있을 정도다. 마법의 위력이나 반응 속도. 그리고 오크 워리어를 지배할 수 있는 것. 그 모든 것을 따져보면 절대 1계층에 있을만한 몬스터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절대 그냥은 안죽여."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좀 더 연구를 해보겠지만 운현은 그런 연구따위는 일단 제쳐 둘 생각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분수를 모르고 감히 건드려선 안될 존재를 건드린 것에 대한 처절한 응징 뿐이다.

"크아... 크으으!!"

오크의 양 팔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며 운현은 힐링포션을 꺼내었다. 그것의 뚜껑을 열어 오크의 상처를 치료해 준 운현은 피스나의 캡슐을 꺼내었다.

"네가 뭐하는 새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기회에 정확하게 파악해주지. 과거에는 이런 일이 없었던 만큼 확실하게 알아주마."

만약 라닌이나 다난이 이런 짓을 한 것이라면? 협력이고 이용이고 간에 만나는 즉시 다 쓸어버린다. 과거 다난은 몬스터들의 신의 신성마저도 흡수해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좀 오버한다면 그들이 몬스터를 지배할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의 동굴에서 고블린들이 다난의 인신공양을 위해 움직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 의견도 마냥 오버라고만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무튼... 정확하게 파악해봐야지."

다난교는 고블린들을 이용해서 롤랑과 레나를 습격했다. 그녀들의 신성을 빼앗기 위해 몬스터를 움직였다면. 이들의 정신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틈새를 노리는 것으로 자신 역시 같은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동료들의 레벨을 올리는 일이 한결 쉬워질 것이다. 몬스터들의 정신을 조종해 그들을 공격이나 방어를 하지 못하게 하고 순순히 죽어주게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이놈은 좀 특별한 놈인 것 같으니... 더 확실하겠군."

좀 더 고차원적인 지능을 가지고 있는 듯 한 오크의 정신이 피스나의 캡슐에 의해서 분석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운현은 잠시 후 분석이 완료된 것을 알리는 전자음에 콘솔로 시선을 보냈다.

"...이게 뭐야."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맙소사."

어지간한 일 외에는 놀랄 일이 없었던 운현이 당황을 할 정도로 결과는 어이가 없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콘솔의 결과창에 나온 숫자와 문자를 읽으며 운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럴 수 없다. 이럴리가 없다. 당황하던 그는 근처에서 들려 온 오크의 괴성에 빠득 이를 갈았다.

"하압!"

운이 좋은 것일까. 운현은 다가 온 오크 셋 중 둘을 단번에 죽여버리고 남은 오크 하나의 머리를 쳐 기절시켰다. 그 오크를 끌고온 그는 캡슐을 열어 강제적인 정신 분석의 결과로 고통스러워하며 신음하는 오크 하나를 집어 밖으로 던진 후 기절한 오크를 캡슐 안에 밀어 넣고 다시 장치를 작동시켰다.

"...세상에. 이럴수가. 이럴수가.'

결과는 같았다. 말이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크르..."

정신이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은 듯 양 팔이 잘린 오크가 신음성을 토해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에게 눈을 돌린 운현은 당혹스러운 얼굴 그대로 다가가 오크의 멱살을 잡은 후 싸늘히 말했다.

"네놈. 누구냐. 너라면 말할 수 있을 터. 말해."

그의 말에 오크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어째서...? 하...하하."

오크의 입에서 인간의 말이 어색한 어조로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계에서 소환된 악마인 서큐버스조차도 서큐버스 퀸이 되지 않는 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고차원의 악마가 아니라면 말을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 오크는 어색하기는 하지만 말을 하고 있었다.

"또다시 만나게 되었구나. 이계에서 온 자여. 가짜 신의 영역에 있는 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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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날 어떻게 알고 있지?"

"큭...크르...크르르...카악... 나...나는..."

힘겹게 말을 내뱉으려 하지만 오크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아보였다. 그를 내려다보며 그레이터 힐을 걸려는 순간 오크는 눈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다시 하고 싶지...크으...않아."

"뭐!? 정신차려! 젠장...! 그레이터 힐!"

더 알아내야 한다.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운현은 생명을 잃어가는 오크를 향해 그레이터 힐을 날렸다. 하지만 그레이터 힐에도 불구하고 오크는 숨이 끊어지고 말았고 죽어버린 그를 내려다보며 운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 하하. 이럴 것 같았어."

오크가 말을 한 것. 놀라웠다. 오크의 정신을 뒤져 정보를 얻어내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정신 분석을 했을 때, 그 결과가 인간의 정신과 동일하다는 것이 놀랍기는 했다.

하지만 어쩌면 자신은 이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던전에 대해서 가장 처음 위화감을 느낀 것은 알트리아에 진입하기 전이었다. 알트리아에 진입하기 위한 마법문에서 발견한 한글. 자신이 남겼던 메시지를 보았을 때부터 외면하고 있었던 위화감이 현실로 다가온 것에 운현은 눈을 감았다.

"이럴 것 같았다고!! 빌어먹을!!"

회귀를 하면 모든 것이 초기화된다. 만났던 이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했던 일은 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죽었던 이는 되살아나고 사랑했던 이는 그 사랑을 기억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같이 회귀를 반복했던 위신체만이 유일하게 그 기억을 유지하며 같이 회귀를 할 뿐이지 그 어떤 것도 회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마법문에는 자신이 적었던 글자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분명히 자신의 필체였던 글귀들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시나리오가 완성되어가는구만..."

결국 죽어버린 오크를 내려다보며 운현은 토해내듯 중얼거렸다. 던전에 대한 의문은 항상 외면해왔던 것이다. 그것을 이제는 풀어야 할 때가 되었다.

'던전에 남아 있던 그 문자들. 그리고 날 다시 만났다고 말하는 이 오크... 그리고 오크들의 정신 분석 결과. 이게 말하는 것이 무엇일까.'

가져야 할 의문은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준비가 더 필요했다.

'지금은 곤란하군.'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향해 힐끔 시선을 보낸 운현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만졌다. 저들이 있을 때는 곤란했다. 어쨌든 그의 행동방침의 모든 것은 그녀들의 안전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캡슐과 여인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운현은 조급해지는 마음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아직은 판단을 쉽게 내려서는 안된다."

섣불리 판단을 내려서는 곤란했다. 운현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던전에 대한 의문을 풀고 가설을 세우려는 생각을 완전히 지웠다. 던전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중요한 존재다. 그런 존재를 적은 정보만으로 확정지었다간 자신도 모르게 그 답에 휘둘릴 가능성이 높았다.

"최대한 신중히."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 정리를 끝내고 동료들을 챙겼다. 이곳에 이대로 있어봤자 다른 오크들의 공격만 받을 것이다. 그녀들을 데리고 근처의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운현은 모닥불을 피우며 동료들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으음..."

"아이고 머리야..."

"오빠!?"

"잘 잤어?"

모닥불을 뒤적거리며 불을 강하게 한 운현은 주전자의 물이 다 끓자 차를 타기 시작했다. 태평한 그의 모습에 여인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긴?"

"어떻게 된거야?"

"오빠! 괘, 괜찮아요?"

"난 괜찮아. 아. 그 오크들은 물러갔어. 3계층으로 향하던 모험가들이 지나가던 길에 도와주고 갔어. 정말 다행이지."

씨익 웃으며 운현이 말하자 여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계층에서 위기에 빠진 모험가를 다른 계층으로 향하던 모험가들이 구하는 일은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일이다. 물론 그 행운을 받지 못해 죽거나 다치는 모험가들도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 바제트는 운현의 웃는 얼굴을 보며 물었다.

"누구였어?"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는데."

"헤에... 운이 좋네."

아무것도 모르는 바제트가 속편하게 웃는 것을 보며 운현 역시 마주 웃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 레벨이 오르고 어느정도 위험을 스스로 감당해 버틸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모를까 그것이 아니라면 벌써부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오빠..."

운현이 건네 준 차를 받은 미야와 바제트가 차를 홀짝이는 동안 헤스티아만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왜?"

"표정이 안 좋아보여요."

미야와 바제트도 눈치채지 못한 운현의 걱정거리를 헤스티아는 눈치챈 모양이다. 그녀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전 오크의 일. 그리고 던전에 대한 위화감이 만들어낸 의문이 아직 자신을 잡고 있는 모양이다.

"괜찮아. 별 일 아니야."

쓱쓱. 운현의 손이 자신의 머리를 애정을 담아 쓰다듬었지만 헤스티아의 걱정어린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운현은 헤스티아를 잡아 끌어당겨 살짝 안은 후 이마에 입맞춰주었다.

"괜찮다니까."

"오빠는 항상 그래요."

"응? 내가 뭘?"

"항상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건... 저희가 약해서 그런 건가요?"

가슴을 찌르는 말이다. 헤스티아의 말에 운현의 얼굴은 딱딱히 굳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던 운현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하다니. 너희들은 강하다고. 장비 뿐만이 아니라..."

"아뇨. 오빠랑 함께 하면서 항상 생각했던 거에요. 오빠는 강해요. 저나 미야 언니, 바제트 언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

"헤스티아. 그만해."

헤스티아의 말에 운현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본 미야는 헤스티아를 말렸다. 그녀의 제지에 헤스티아가 고개를 돌리자 미야는 운현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운현도 다 생각이 있겠지. 운현."

"어, 응?"

"난 널 믿어."

"...아 그래?"

미야의 말에 운현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의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야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뭐야? 그 맥빠진 반응은? 최소한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알았는데."

"아니 뭐, 너희가 날 믿어 줄 거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가끔 운현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넌 뭐든지 알고 있는 것 같단 말야. 정말 전직이 도대체 뭐야? 혹시 점쟁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바제트가 말하자 운현은 쓰게 웃었다.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여인들은 투덜거리며 그가 준 차를 한모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슬슬 얘들도 위화감을 느끼고 있나보군.'

조절한다고 조절했지만 마음이 급하다보니 어느정도는 티가 날 수 밖에 없었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우연히 만난 정체 불명의 남자가 그저 첫눈에 반했다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많은 것을 해준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어.'

같이 활동하며 서로간의 신뢰를 높여간다. 자신에 대한 것은 나중에 얼마든지 말해 줄 수 있었다. 쓸데없이 그녀들의 걱정거리를 늘려 줄 이유는 없었기에 운현은 빙긋 웃은 후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 미야. 날 믿어줘서."

부드럽고 따뜻한 운현의 말투에 미야는 빙긋 마주 웃어보였다. 그녀와 운현 사이의 훈훈한 분위기에 헤스티아와 바제트는 당황하며 얼른 그에게 말했다.

"저, 저도 오빠를 믿어요!"

"나도 믿는다고. 나도."

"그래. 너희들도 고맙다."

'그때까지는 셋의 견제를 이용할 수 밖에 없겠네.'

아직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서로에 대한 경쟁심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운현으로서는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예 까놓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려도 상관없겠지만 이들의 성격상 아마 그것을 이야기한다면 크게 충격을 받을 것이다.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떠나서... 내가 자기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많은 것을 희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운명과 맞서 싸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시키고, 많은 것을 투자해도 가능성이 낮다고 볼 수 있었다.

만약 다른 이가 죽어야 자신의 연인들이 살아날 수 있다면 운현은 가차없이 다른 이들을 죽여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녀들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 모르고 착한 이들은 그것에 가슴아파하고 슬퍼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어간다면? 그녀들은 자신을 구하는 것을 포기해달라고 말할지도 몰랐다.

'그것만큼은 안돼.'

그녀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녀들과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이제와서 잃을 수는 없다. 운현은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가 눈치채지 못하게 살며시 손을 뒤로 뺀 후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만큼은 곤란했다.

"오빠?"

"응? 아. 응. 몸은 다들 괜찮지?"

"어... 응. 딱히 무리가 있는 것 같진 않아."

"그럼 슬슬 가볼까?"

"운현. 너는? 너도 그 오크의 마법에 당했잖아."

"난 괜찮아. 예전에 이 갑옷에 상태이상 마법에 대한 저항 인챈트를 해놨거든."

"헤에... 그래요? 역시 숙련된 모험가!"

"이정도는 기본이지. 아무튼 난 괜찮으니까. 그래도 무리하면 곤란하니 힘든 사람 있으면 말해."

이곳으로 동료들을 데려 온 후 그레이터 힐까지 걸어 놨으니 딱히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겠지만 만약을 위해 운현은 차분히 말했고 그의 말에 동료들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다른 문제가 없어보이자 운현은 자리를 정리하고 검을 들었다.

"95레벨이 되면 나가자. 나머지는 코어로 레벨을 올리면 되겠지."

"이거 전부 레벨을 올리는데 사용해주세요."

전투를 마치고 길드로 복귀한 운현은 오크를 토벌하며 얻은 마석을 전부 길드의 사무소에 가져다주었다. 그것을 받은 길드 사무원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것도 상아 길드장님께 받은 거에요?"

"하하... 그런 거 아니에요."

"우우~ 필레 씨 뿐만 아니라 상아 길드장님... 그리고 저기 뒤에 있는 사람들까지. 운현씨. 정말 인기 많네요~ 이래서 남자들이란...!"

"제가 뭘 어쨌다고... 어서 레벨업이나 해주시죠."

"후후. 자. 여기 있어요. 모두 레벨이 100이 되셨네요. 이제 다음 계층으로 가셔야 할 것 같은데... 준비는 되셨나요? 혹시 계층주에 대해서 모르시다면 설명을 드릴 수가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음... 저는 일이 있어서 곤란하니까 다른 애들에게만 해주시겠어요?"

"그래요? 그럼 여러분은 잠시 후에 상아 길드장님과 필레 씨, 제니스씨 주최의 교육이 있으니 그것을 들어주세요. 계층주를 상대하기 위한 교육이니 만큼 빠질 생각은 하지 마시구요."

'걔들이 함께 하는 것이라면 맡겨도 괜찮겠군.'

굳이 교육을 파티원 전부 들을 필요는 없었기에 길드 사무원은 운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뒤에 있는 여인들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헤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운현을 보고 물었다.

"오빠는요?"

"아. 난 만날 사람이 있어서. 어제 일때문에 아라크네 클랜의 클랜장과 약속을 잡아놨거든."

"같이 갈까요?"

아라크네 클랜의 클랜장을 떠올린 헤스티아는 조심스레 물었다. 운현에게 말을 걸 때 그녀의 눈에 있는 탐욕을 읽은 것이다.

"아라크네 클랜이라면 대형 클랜... 그곳의 클랜장은 욕심이 많고 남자 좋아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야. 괜히 혼자 갔다가 위험한 일 당할지도 모르니까 우리와 함께 가자."

바제트 역시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운현이 혼자 가겠다는 말에 그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말했지만 운현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혼자 가도 괜찮아."

"하지만."

"걱정 말라니까. 내가 어디 가서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니잖아."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리고 난 일단은 상아의 전 연인이고 꽤 깊은 관계인 것을 보여줬으니까 대형 클랜의 클랜장이라고 하더라도 나에게 쉽게 손을 대지는 못하겠지."

"...그것도 마음에 안드는데."

"괜찮아. 괜찮아. 아까 말했잖아? 날 믿는다고."

"윽... 이제와서 그런 얘길 하다니."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가 말하자 바제트는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여인들 역시 마찬가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걱정스러웠던 그녀들은 차마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고 운현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난 걱정 말고 교육이나 잘 들어줘. 나도 계층주를 상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말야. 너희들만 믿는다."

"으... 알았어. 그래도 몸 조심해야해. 남자 혼자 보내기에는 좀 그런 곳이라..."

"알았어. 걱정 좀 그만 해."

자신을 향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하는 그녀들이 길드 사무원에게 이끌려 교육장으로 향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던 운현은 그녀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얼굴에 그리고 있던 웃음을 지운 후 몸을 돌렸다.

'아라크네 클랜이라면 알고 있겠지.'

353====================

던전

"여긴가."

길드에서 나와 얼마 걷지 않아 운현은 아라크네 클랜이 사용하고 있는 작은 저택 앞에 도착했다. 소형 클랜의 경우 길드에서 제공하는 방을 이용하곤 했지만 아라크네 클랜 정도의 대형 클랜이라면 클랜이 직접 소유하고 있는 건물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누구십니까."

아라크네 클랜의 특징인 거미 문양이 새겨진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저택 앞에서 서성이는 운현을 보며 물었다. 남자라고는 하지만 아라크네 클랜은 아무나 들어 올 수 있는 클랜이 아니었다. 자신의 성장을 위해 남자라는 것을 빌미로 클랜에 들어오려는 이들이 있었기에 그녀는 운현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운현이라고 합니다. 아라크네 클랜의 클랜장님과 만날 약속을 했습니다만."

"운현... 실례지만 모험자 카드를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직 의심을 풀지 않은 그녀가 손을 내밀며 말하자 운현은 품에서 모험자 카드를 꺼내어 그녀에게 넘겼다. 모험자 카드의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야 운현을 확인한 그녀는 한걸음 옆으로 비켜주었다.

"아라크네 클랜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들어가셔서 클랜장님을 만나러 왔다고 하시면 바로 클랜장님께 안내해드릴 것입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처음의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그녀가 공손히 말하자 운현은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넓고 깨끗한 정원에는 클랜의 인원으로 보이는 여인들이 속옷만 입은 채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개중에는 운현을 보고 유혹을 하려는 듯 다리를 벌리거나 가슴을 가리는 속옷을 풀려는 이들도 있었다.

"누구십니까."

그런 이들과는 반대로, 저택 건물의 입구에 서 있는 여인은 철저하게 자신의 신체를 가리고 있었다. 검은색 집사복을 입은 그녀는 운현을 위 아래로 흝어본 후 조용히 물었고 운현은 그녀에게 담담히 말했다.

"운현이라고 합니다. 아라크네 클랜장님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만."

"운현님이라구요? 아. 클랜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시지요."

절제된 동작을 보이며 집사복의 여인은 운현을 데리고 건물 2층으로 이동했다. 건물을 이동하며 운현을 본 여인들 몇몇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를 훔쳐보았다.

'남자가 잘못 들어가면 먹히고 들어온다더니... 위험하긴 한가보군.'

거대 클랜에 고레벨의 모험가들이 많은 만큼 남자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라크네 클랜의 클랜원들이 자신을 시간하는 것을 무시하며 집사복 여인과 함께 2층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 운현은 그녀가 문을 열어주자 내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진짜 대단하구만.'

성욕이라는 것을 방의 형태로 만들어 놓는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벽장을 가득 메우는 수십개의 딜도. 방 구석에 종류별로 모여 있는 촉수괴물. 그 외에 화려한 속옷이나 섹스용 물품들이 가득 차 있는 방을 보며 운현이 웃자 집사복의 여인은 부끄러운 듯 조용히 말했다.

"그... 클랜장님의 취향인지라."

"아니.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클랜장님은 어디에 계신지."

"난 여기 있어."

핑크색의 화려한 침대 위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을 들은 운현과 집사복의 여인이 시선을 보냈을 때 짙은 회색 머리의 여인이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힌 멋드러진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며 몸을 일으켰다.

"으으음... 피곤하네."

"아라크네씨! 중요한 손님을 맞이한다고 하시더니 이런 꼴이면 어떡해요! 최소한 응접실로 모셔야죠!"

손님을 맞이하는데 이런 방을 보여준다? 같은 여자라면 모르겠지만. 아니 여자라고 하더라도 개중에는 질색할만한 방인데도 불구하고 운현을 이리로 데려왔다는 것은 이것이 아라크네 클랜장의 명령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나. 시끄러워. 어젯밤에도 엄청 마셨단 말이야. 머리 울린다고."

"아아아아!! 정말이지! 아라크네님! 대 클랜을 이끄는 클랜장으로서... 평소에 그러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자기가 중요한 손님이라고 한 사람을 대접할 때만큼은 좀 예의와 격식을 갖추라구요!!"

"전 괜찮습니다."

아라크네 클랜장이 왜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왔는지, 그리고 그녀가 평소에 하던 행동 그대로인 상태에서 만나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의 차분한 말에 집사복 여인은 처음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눈물을 글썽거리며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어 운현의 손에 쥐어준 후 조심스레 말했다.

"부디 이 일은 비밀로..."

"하하하... 이렇게 안하셔도 좋지만 받지 않으면 오히려 불편하실테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받아 테이블 위에 놓은 운현은 푹신한 침대에서 엉금엉금 기어오는 아라크네 클랜장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미나. 차 좀 가져다 줘. 아니면 술을 가져다 주든가."

"물이나 드세요."

투덜거리면서도 미나라 불린 집사복의 여인은 그녀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 주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아라크네 클랜장과 단 둘이 된 운현은 그녀가 나신으로 의자에 앉으며 자리를 권하자 그녀의 앞에 앉았다.

"거래를 하시고 싶으셨지요."

"응."

"몬스터에 대한 것... 은 아닌 것 같군요."

표면상의 이유는 몬스터에 대한 것이지만 운현은 아라크네 클랜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몬스터를 위해서 자신과 거래를 하려고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호오?"

그의 말에 아라크네 클랜장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운현을 바라보았다. 놀란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운현은 탁자를 톡톡 친 후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것이 뭡니까."

"원하는 것이야 많지. 일단 눈 앞에 있는 멋진 남자를 먹는 것? 그리고..."

"...."

"뭐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실례하겠습니다."

밖으로 나갔던 미나가 음료가 담긴 병과 잔, 다과를 솜씨 좋게 들고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 위에 놓아주자 아라크네 클랜장은 인상을 찡그렸다. 술 아니면 차를 달라고 했는데 포도주스를 들고 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이거 말고 술줘. 술. 넌 진짜 왜 시키면 시키는대로 안하냐!? 내가 그렇게 우스워!?"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은 술보다는 주스가 더 나을 것 같아서..."

"에이... 이봐. 운현. 포도 주스 괜찮아? 우리 애들이 좀 이렇게 맹해. 포도 주스 싫어하면 다른 것을 가져다 줄게."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휴우... 감사합니다."

아라크네 클랜장의 짜증에 어쩔 줄 몰라하던 미나는 운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사를 표했다. 그런 둘이 마음에 안든다는 듯 눈쌀을 찌푸리던 아라크네는 미나가 나가자 어깨를 으쓱이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미안. 이런 얘기는 술을 마시면서 하는게 더 나을텐데."

"밑의 사람을 너무 괴롭히면 곤란하죠."

"그렇지만 밑의 사람이라면 좀 내 마음을 읽고 행동해줬으면 좋겠다고. 미나는 너무 고지식해서 탈이야. 고지식한 사람은 어때?"

"싫지 않아요."

"헤에... 그래? 아무튼 자. 포도주스라서 미안하긴 하지만 한잔 하겠어? 술이라면 더 좋았을텐데 말야."

생긋, 장난스럽게 웃은 아라크네 클랜장은 잔을 들어 포도주스를 가득 따라 운현에게 건네주었다. 금방이라도 넘칠 것처럼 가득 부어진 잔을 솜씨좋게 건넨 아라크네 클랜장은 운현이 잔을 받고 그대로 탁자 위에 올려 놓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왜 안마셔?"

"포도 주스는 별로 안좋아해서요."

"어? 그래?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어?"

"네. 아무거나 상관없지요."

빙긋 웃은 운현은 잔을 들어 그대로 거꾸로 뒤집었다. 아라크네 클랜장은 웃는 낯 그대로 가득 담겨 있던 핏빛 포도주스가 테이블과 바닥을 더럽히는 것을 지켜보았고 운현 역시 웃는 얼굴 그대로 그녀를 마주하며 싸늘히 말했다.

"어차피 당신들이 주는 것 따위 먹을 생각이 없으니까. 이게 뭔 줄 알고 마셔?"

"헤에..."

아라크네 클랜장은 자신들을 의심하는 무례한 행동에도 화를 내기보다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을 뿐 이었다. 레벨 차이만 해도 세배 이상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당당하게 행동하는 운현을 향해 싱글거리던 아라크네 클랜장은 탁자를 톡톡 치며 물었다.

"당신 보기보다 제법인데? 운현이라... 좀 알아보니까 당신. 나름 숙련된 모험가라면서? 레나 이단 심판관과 관계가 있는 것 같고... 그동안 보인 행동을 보면 초짜 모험가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말야. 출신지가 어디지?"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궁금하지. 아무리 파도 안나왔거든. 운현이라는 이름. 이 세상에서는 그리 흔한 이름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당신에 대해서는 조사를 해도 나오지 않았어. 그렇다는 것은 지금의 이름이 가짜라거나... 그것도 아니면 신분을 숨기고 있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건데 말야."

생긋 웃은 아라크네 클랜장은 천천히 입가에 그리고 있던 웃음을 지웠다.

"정말 수상하단 말이지. 정체 불명의 숙련된 모험가가 갑자기 나타나서 상아 길드장과 연인이었음을 주장한다... 그것도 이런 시기에."

"이런 시기라면 시장 선거?"

"머리도 팽팽 돌아가고. 그래. 시장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갑자기 나타난 상아 길드장의 전 연인이라. 아무래도 의심할만 하지 않아?"

"별게 다 의심스럽군. 그래서. 그거 물어보려고 날 여기까지 부른거였어?"

몬스터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이렇게 부르는 것이 아닌 그 자리에서 해결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라크네 클랜장은 굳이 시간 약속까지 잡아가며 운현을 자신의 영역까지 끌어들이려 했다. 그 말은 몬스터에 대한 것은 그저 구실에 불과할 뿐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뭐 솔직히 그건 관심없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야."

입가에 다시 웃음을 지은 아라크네 클랜장은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와 손을 잡자."

"당신과? 그 말은 나보고 아라크네 클랜에 들어오라는 건가?"

"그래. 원한다면 당신의 파티원들도 함께. 아라크네 클랜은 길드 내에서도 강력한 입지를 자랑하는 모험가 클랜이야. 가입한 모험가 수만 해도 천명 이상. 간부들만 해도 삼십이 넘어. 만약 당신이 가입을 한다면 당신 뿐만 아니라 당신과 꽤나 깊은 관계에 있는 것 같은 당신의 파티원들까지 레벨업을 지원하지. 그리고 당신을 제외한 나머지는 노력 여하에 따라 간부급까지 올라갈 수 있을거야."

"나는?"

"레벨만 된다면 부 클랜장의 직위를 약속하겠어."

아직 100레벨도 되지 않은 저레벨 모험가에게 이런 제안은 파격적인 제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천명이상의 클랜원을 가진 대형 클랜의 부 클랜장이라면 어지간한 나라에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직위였다. 그것도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인 것이 아닌 아라크네 클랜의 부클랜장이라면 어지간한 중소 왕국의 왕족 수준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아라크네 클랜장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피식 웃은 운현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담담히 물었다.

"내 실력을 봐서 끌어들이려는 것은 아닐테고... 원하는 것이 있을텐데?"

"어머? 다 알고 있으면서 묻는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거야? 어느쪽이든 너무 능글맞은 것 같은데~?"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아라크네 클랜장은 운현에게 다가가 그의 턱을 부드럽게 잡았다. 색기의 향이 코끝을 간지럽힐 정도로 요염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는 운현의 볼을 살짝 핥은 후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상아 길드장의 말이 거짓이라고 공표해줘. 그녀와 연인 사이가 아니었고, 너희가 잡은 몬스터에게서 그 코어를 얻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줘."

"이봐. 아라크네 클랜장."

"클랜장은 빼줘. 아라크네가 내 이름이니까 말야."

요염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은 후 그녀를 살짝 밀쳐내었다.

"뭐하러 그런 짓을 하는 거지?"

그의 질문에 아라크네는 싸늘히 웃었다.

"상아 길드장을 실각시키기 위해서."

354====================

던전

"상아를 실각시킨다라..."

"그래. 상아 길드장을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해. 그리고 덤으로 모험가 길드의 개편도 해야 하고."

"왜? 길드장을 바꿔서 뭐 하려고? 그리고 길드장이 바뀌길 바란다면 길드에 요청을 하는게 낫지 않나? 안그래도 다들 길드장 하기 싫어서 난리치고 있던데 말야."

상아든 필레든, 그 외의 길드의 다른 간부들 모두는 길드장이라는 위치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땅히 할 사람이 없는데다가 간부들끼리 던전 공략에 나설 때 리더라는 의미에서 상아가 길드장의 위치에 있을 뿐이지 다른 길드 간부들 누구라도 길드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상아를 실각시킨다? 큰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것을 위해서 자신에게 협력을 얻고자 하는 아라크네를 가소롭다는 듯 응시하던 운현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웃었다.

"멍청하기 그지 없는 소리 하려고 날 부른거라면 실망인데."

"아아. 당연히 그것은 알고 있지. 길드의 간부들은 실리보다는 명예를, 명예보다는 탐구를, 탐구보다는 관리를 좋아하는 멍청이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고. 내가 원하는 것은 길드장을 실각시킴과 동시에 길드 간부의 대부분을 갈아치우는 것이지."

"그 말은 길드의 방향성을 바꾸겠다는 건가?"

"그래. 지금의 모험가 길드는 답답하고 멍청하기 그지 없지. 가진 힘을 활용할 줄도 모른단 말이야. 조화? 균형? 다 좋아.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우리 모험가들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고 있는지 몰라서 그래."

"헤에... 나름 큰 뜻을 품었구만 그래."

비웃음 섞인 운현의 말에 아라크네는 싸늘한 웃음을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혹시나 해서 묻는건데 이거 안마실거지?"

"뭐가 타져 있는지도 모르는데 먹을 생각 없어."

"이래뵈도 여자들도 꼴리게 만들 수 있는 몸인데... 남창들에게도 인기가 많은데 마음에 들지 않아? 이래뵈도 내 조임은..."

"댁 자랑은 됐고."

색기가 가득한 포즈를 취하며 유혹해봤지만 운현은 그저 콧방귀만 뀔 뿐 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아라크네는 도톰한 입술을 삐쭉인 후 근처에 있는 가운을 잡아 입었다.

"이해할 수 없네."

"뭐가. 내가 네 수법에 안걸려든 거? 같잖아서 걸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런 섹스 용품이 넘쳐나는 개인의 방에서 만나게 된 것도, 미나와 아라크네의 실없는 꽁트도, 그리고 아라크네의 푼수같은 행동도 모두 자신을 유혹하기 위함 것을 운현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눈치채고 있었다.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운현의 긴장을 품과 동시에 공적인 자리가 아님을 보여줘 자신과의 만남을 운현이 사적으로 바라보게 만들려는 것.

인원수가 적은 소규모 클랜이라면 모를까 이정도 대형 클랜쯤 된다면 모험가들 뿐만 아니라 다른 세력의 이들도 상대하기 마련이다. 기본적인 에티켓은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그것을 무시하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이 자리가 사적인 자리임을 강조하는 것.

처음부터 아라크네가 자신에게 제안을 했을 때 그녀가 몬스터가 아닌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운현으로서는 대형 클랜의 수장이라는 자가 이런 푼수떼기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았다.

현재 자신의 위치는 아라크네 클랜에게 있어서 중요한 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를 동네 친구 대접하듯 대접을 한다? 그야말로 웃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일이다.

거기에 지금 아라크네가 들고 있는 포도주스에 대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불편한 분위기를 감당하지 않으려 한다. 아라크네는 미나에게 술이나 차를 요청했고 미나는 대놓고 엿먹으라는 듯 포도 주스를 가져왔다. 어떻게 보면 손님에 대한 대접을 하는데 있어서 술보다는 이런 주스가 더 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아라크네는 그것에 대해 미나에게 면박을 줬고 미나는 그것에 상당히 움츠려 들었다.

그러면서 은근히 운현의 의중을 물은 것이다. 싸해진 분위기를 달랠 수 있는 것은 손님의 입장에 있는, 어떻게 보면 현재 상황에서는 아라크네보다 윗줄의 위치에 있는 운현이 마음에 들어한다면 싸해진 분위기가 무마될테니까.

그런 식으로 운현이 자신 스스로가 포도주스로도 괜찮다. 라는 분위기를 만들게 하고 그가 포도주스를 마시게 하는 상황을 그린 아라크네의 계책을 운현이 눈치채지 못할리 없었다.

상대방을 안심시켜 상대가 스스로 독약을 먹게 하려는 방법으로 운현이 많이 쓰던 방법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 포도 주스에는 뭐. 음약이라도 들어 있나?"

"어떻게 알았어?"

"그럴 것 같더라. 너무 대놓고 했잖아."

"흐음... 다른 사람들은 이정도면 충분히 걸려 들던데."

시큰둥한 태도로 운현이 말하자 아라크네는 아쉬었는지 입을 쩝쩝 다신 후 포도주스를 선반 위에 올려 놓았다. 이미 바닥을 축축히 적셔버린 포도주스를 아깝다는 듯 바라보던 아라크네는 가운을 살짝 벌려 풍만한 유방을 보이고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래? 나 진짜 잘한다고. 뿅 가게 해줄 수 있는데 말야."

"됐거든요? 하던 얘기나 마저 하시죠. 쓸데없는 짓은 관두고."

만약 운현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아라크네의 유혹에 단번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의 미모나 몸매는 무척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욕구를 컨트롤하는데 있어선 거의 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운현에게 있어서 단순히 몸만을 이용한 유혹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비싼 약인데. 안먹을거면 그냥 먹지 말지 왜 버려?"

"나름의 연출이니까 신경꺼."

운현의 예상대로 포도주스에는 음약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꽤나 비싼 음약이었는지 아라크네는 아쉽다는 눈으로 바닥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상아가 길드장이고 길드가 현재의 방침을 이어감으로써 모험가들이 무슨 큰 피해를 입는데? 솔직히 피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지 않나?"

"피해지. 아주 큰 피해야."

"무슨 피해?"

"기회를 그냥 날려먹는 것."

더 이상 운현을 유혹할 생각은 없어졌는지 아라크네는 몸가짐을 바로 하고 운현의 앞에 앉았다. 지금까지 보인 푼수짓은 단순한 연기에 불과했는지 아라크네에게서는 대형 클랜의 수장으로서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위엄과 카리스마가 보이기 시작했다.

"모험가 길드가 강하다고 생각해?"

"나름 강하지 않나? 던전 도시의 4대 세력 중 하나인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글쎄."

눈을 가늘게 뜨고 아라크네가 자신을 노려보자 운현은 두루뭉술한 대답만을 내놓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말하지. 모험가 길드는 약해. 약해 빠졌어. 물러 터졌고."

"그럴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지가 아니야. 그런게 맞아. 지금까지 보인 길드의 소극적인 대처로 모험가 길드는 얻을 수 있는 많은 것을 놓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유는?"

운현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고 그 질문에 아라크네는 눈을 빛내며 신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던전 도시 발티아르. 던전 도시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이 도시의 구조는 던전에 너무 매달려 있어. 모험가 길드는 던전의 탐사와 탐색, 던전 내의 몬스터를 토벌하여 그 사체와 코어를 획득하여 공급하는데 전문화되어 있고 제작자 연합은 그 사체와 코어로 물품을 만드는데 특화되어 있지. 상인 조합은 제작자 연합이 만들어낸 물건들을 각지에 공급하고 있고 용병 연맹은 이 모든 활동을 지킨다... 말은 좋지. 아주 말은 좋아... 그런데. 이거 알아?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모험가 길드를 제외한 나머지는 의미가 없는 존재들이라는 거?"

"흠."

과거에도 생각했던 일이다. 던전을 관리하고 그 안에서 몬스터를 토벌하여 사체와 코어를 공급하는 유일한 조직인 모험가 길드가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까이는 모습을 보이는 것. 네개 조직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시청의 눈치를 너무 살피는 것. 그것에 대한 의문을 운현 역시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몬스터 사체와 코어를 이용해 물건을 만드는 것? 세상의 제작자들 중에 그것을 원하는 이는 얼마든지 있어. 그리고 그 실력이 있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고. 만들어진 물품을 유통하는 것? 던전의 몬스터의 사체와 코어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물품은 없어서 못파는 정도야. 하루에 모험가 길드에서 납품하는 몬스터 사체와 코어의 양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1, 2만 수준이 아니라고. 적어도 십만 이상의 마석이 길드에 들어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양이 적다고 사람들이 난리를 치고 있어. 그 정도로 잘 팔리는 물품인데 그것의 유통이 문제라고 생각해? 도시를 지키는 용병 연맹? 물론 대인전을 생각한다면 용병 연맹보다 모험가 길드가 약하겠지. 하지만 그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해. 세상은 넓고 돈을 원하는 이들은 많아. 그들을 이용한다면 용병 연맹 이상의 군대를 만들 수 있어. 거기에 고레벨의 모험가들이 낀다면 더더욱 좋고."

"그렇군. 그래서?"

"하지만 던전 안의 몬스터를 처리하고 던전에 익숙해져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몬스터의 사체와 코어를 수급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모험가 뿐이지. 숙련된 모험가인 운현. 어떻게 생각해?"

"일단은 동의."

던전 도시의 던전과 바깥의 던전은 다르다. 던전 도시의 몬스터와 바깥의 몬스터는 다르다. 그것에 대해서는 과거에 들은 기억이 있었다. 던전 도시의 던전이 가진 위험은 바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아라크네의 말대로 던전에서 효율적으로 몬스터 사체를 수급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던전 탐색의 노하우가 잔뜩 쌓여 있는 모험가 길드 외에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던전 도시의 네개 조직 중에서 다른 어떤 곳과 비교해 대체 불가능한 곳이 바로 모험가 길드라는 것이다.

"그렇지? 숙련된 모험가인 네가 봐도 그렇지?"

"말했다시피 일단은."

운현이 자신의 말에 동의하자 아라크네는 기뻤는지 흥분된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유리한 위치에 있는데도 지금의 모험가 길드는 어떻지? 막말로 조금만 더 나간다면 이 던전 도시를 시청이 관리하는 것이 아닌 모험가 길드가 관리할 수도 있다고. 전체의 힘을 쓴다면 일개 국가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막강한 힘을 모험가 길드가 다룰 수 있어. 그런데도 지금의 모험가 길드는 어떻지? 생각해보라고. 그저 모험가들의 관리, 던전의 유지. 마석의 납품에만 정신이 팔려서 제작자 연합에게 이리 끌리고, 용병 연맹에게 견제받고. 상인 조합에게 무절제하게 돈을 쓰는 멍청이 취급 당하고.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냔 말이야."

상당히 쌓여 있었는지 아라크네는 빠득 이를 갈며 탁자를 내리쳤다.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운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야. 모험가들이 그렇게 무시받을 처지는 아니지."

"맞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제작자 연합이든 용병 연맹이든 상인 조합이든. 아니면 시청이든 신경 쓸 필요가 없이 몬스터 사체와 코어의 납품을 조절하며 모험가 길드의 힘을 강화시키면 그들은 우리들에게 끌려 올 수 밖에 없다고."

"그렇겠지. 어쨌든 던전 도시의 주요 생산품은 몬스터 사체와 코어라고 할 수 있을테니 말야."

"그런데도 지금 모험가 길드의 장인 상아를 봐. 상아는 엘프야. 엘프는 장수하는 종족이지. 그렇기 때문에 열정이 없어. 그저 세상 만사에 속 편하게 대응할 뿐이라고. 전대 길드장인 제니스 역시 마찬가지야. 그런 이들이 모험가 길드의 장으로 있으니 모험가 길드의 방침이 이렇게 되어버린 거라고. 고작 많이 살아봐야 100년인 인간이 아니기에 그녀들은 모험가들이 그런 취급을 당해도 허허 웃으며 넘어가는 거라고. 인간인 너라면 알겠지? 목표를 위해서 살아가기에는 100년도 짧아. 그런 우리들을 이끄는 자가 엘프라고? 그리고 그 엘프가 만든 방침을 따라야 한다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빠득 이를 간 아라크네는 주먹을 쥔 후 운현을 노려보았다. 마치 운현이 상아라도 되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던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난 싫어. 거절한다. 힘이 있는데도 그 힘을 쓰지 않는 것은 멍청이나 다름없어. 그러니 바뀌어야 해. 길드장부터 길드의 방침까지. 전부. 모든 것이 바뀌어져야 해. 모험가 길드는 더 강해질 수 있어. 모험가들의 처우는 더욱 좋아질 수 있다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분을 토해낸 아라크네가 씩씩거리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던 운현이 툭 내뱉자 아라크네는 감았던 눈을 뜨고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날 도와. 너무 오랜 시간동안 상아 길드장과 제니스의 방침이 모험가 길드를 재우고 있었어. 그 결과 모험가들은 태평한 분위기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지. 그것을 바꿔야해. 운현.  그 몬스터가 있든 말든 중요한게 아니야. 문제는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이지. 이미 상아는 그런 몬스터가 없다고 말했어. 네가 진짜 상아의 전 연인이든 아니든 그딴 것은 내 알바가 아니야. 운현. 너는 인간이지. 인간이라면 날 도와줘. 준비는 우리가 다 하겠어. 그 코어는 상아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만 해준다면 몬스터든 코어든 그 뒷준비는 내가 다 할 수 있어."

"나에게 상아를 배신하라는 건가?"

아라크네의 말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보며 아라크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 상아를 배신하라는 것이지. 하지만 운현. 잘 생각해보라고. 엘프인 상아와 인간인 너.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355====================

던전

인간의 수명은 길게 잡아야 100년. 엘프의 수명은 길게 잡으면 천년. 당장 열배의 차이가 난다. 운현의 나이가 이제 스물 아홉이고 엘프인 상아의 나이는 600이 넘었다. 상아의 나이가 더 많다고 하더라도 남은 수명을 생각한다면 운현과 상아는 맞지 않았다. 상아가 요절하지 않는 이상 운현과 같은 죽음을 맞이할 수 없었다. 남겨진 누군가는 슬픔에 젖을 것이고 먼저 죽을 누군가는 남은 이를 생각하며 울게 될 것이다.

"어차피 너희들은 행복해질 수 없어."

"그거 웃기는 소리네. 내 파티에 누가 있는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거지? 바제트도 엘프라고."

"알아. 너에 대해서는 조사를 해뒀으니까. 바제트. 유명한 엘프지. 파티 브레이커로 소문난 그녀다. 지금이야 너와 잘 지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괜히 파티 브레이커라는 이명을 가진 것 같아? 그녀는 조만간 너희 파티를 깨게 될 것이다. 난 바제트와 네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묘인족인 미야... 라는 격투가나 인간 마법사인 헤스티아는 뭐, 어떻게든 잘 되겠지."

"....."

"종족간의 차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야. 운현. 현명해지라고."

"그건 일단 제쳐두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말야."

운현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본 아라크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진다.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 아라크네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아까의 이야기를 이어서 하도록 해볼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모험가들의 결집이야. 모험가들 하나하나는 강해. 개개인의 무력만 생각한다면 어떤 나라의 기사들과 대적해도 크게 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결집하지 않지. 왜? 길드에서 모험가들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니까. 모험가 길드는 모험가들에 대한 터치를 최소화했지. 그들이 모험가들에게 금지시키는 것은 던전 내에서 미믹을 만들지 말라, 다른 모험가들을 공격하지 말라. 그런 정도에 불과해. 하지만 이건 잘못된 거야."

"왜?"

"그래서는 협조성이 없기 때문이지. 결속력도 떨어지고. 모험가들 개개인에게 피해가 생기더라도 모험가들이 얌전히 있게 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는 집단으로서의 힘은 약화될 수 밖에 없어."

"흠..."

"애초에 비타라는 자의 일만 봐도 그래. 만약 모험가들의 결속력이 강했다면 어땠을까? 자신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모험가 길드의 간부가 누군지도 모를 자에게 살해당했다. 이건 단순한 살인사건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일이야. 모험가 길드 전체가 분노하고 이를 갈아야 할 거대한 사건이라고. 하지만 지금 모험가 길드는 어떻지? 모험가들이 비타를 죽인 자를 찾는 것을 지원하기는 커녕 오히려 막고 있어. 모험가 길드 내부에서 처리하겠다고만 하고 모험가 길드는 그저 던전의 관리와 모험가들의 관리에만 집중하고 있지."

"음. 뭐 그건 나도 문제라고 생각해."

'나한테는 다행스러운 일이지.'

비타를 죽인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 아라크네가 눈이 뒤집혀서 무기를 들었을 것이다. 만약 그녀의 말대로 모험가 길드가 모험가들까지 총 동원해서 자신에 대한 흔적을 찾으려 했다면 아무리 운현이라고 해도 등골이 오싹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모험가 길드는 그러는 대신 모험가들을 통제하고 그 일을 시청과 모험가 길드의 인원만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니 당연히 수사의 진척은 느릴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문제라고. 운현. 너도 모험가라면 내 말을 들어주겠지?"

"흐으음..."

팔짱을 끼고 운현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보며 아라크네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에게 힘든 결정을 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이것이 대의야. 모험가들을 생각해서 한발만 양보를 해준다면... 나도 많은 것을 줄게."

"한가지만 묻지."

"얼마든지."

"상아를 길드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고 치자. 그리고 모험가 길드를 쇄신했다고 하자고.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길드장의 자리는 누가 가지게 되는 것이지? 새롭게 재편된 길드의 주축은 누가 되고?"

"그건..."

운현의 질문에 아라크네는 말을 흐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신의 눈을 피하자 운현은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 좋아. 자. 내가 하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네 의견을 참고해주지. 첫번째. 길드장은 누가 되는 거지? 두번째. 네 의견에 찬동하는 클랜은 누구지? 세번째. 네가 말하는 것은 좋아. 모험가들의 권위를 올리고 그들의 이익을 챙기자.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용병, 제작자, 상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인데 그것에 대한 피해는 누가 감당해야 하지?"

"...그건 차차 생각하기로 하면 되는..."

"아주 좋군. 훌륭해. 자. 내가 답해볼까? 너는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첫번째. 길드장은 누가 되느냐... 아마 너는 스스로 길드장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진 않을거야. 혁명을 부르짖는 자가 스스로 권위있는 자리에 앉게 된다면 그것에 대한 반동이 클테니까. 적어도 너는 아니겠지."

"....."

비릿한 웃음과 함께 운현은 싸늘한 어조로 말하자 아라크네의 얼굴에 홍조가 돋았다. 부끄러운 것일까? 아니면 운현이 자신의 정곡을 찔러서였을까. 그녀의 얼굴색이 변하는 것을 보며 운현은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편히 기댄 후 느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영향력이 없는 사람을 추대할 수는 없겠지. 결국 아라크네의 입김에 닿은 이가 길드장으로 추대되겠지. 그리고 새롭게 바뀔 모험가 길드의 간부 및 핵심 인력은 아라크네의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고. 아니야? 그리고 그것에 따른 피해는? 모험가들이 고스란히 받게 되겠지."

"아니야! 나는 그저...!"

"그저?"

"새로운 시대를 열고 싶은 것 뿐이야! 지금의 모험가 길드는 잘못되어 있어! 모험가들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뭐가 나쁜데? 엘프인 상아는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고. 한순간을 살아도 열정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을 천년의 삶이 약속된 엘프가 이해할 수 있을리 없잖아!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데 희생은 불가피해. 하지만 그 희생은 잠깐에 불과해. 그것만 버티면 더 나은 삶을 얻을 수 있다고! 이것을 피력한다면..."

"그렇군... 뭐 그래. 좋아. 네 말대로라고 치자."

아라크네의 항변에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그녀를 보며 운현은 차분히 말했다.

"네 말대로 상아는 길드장이라는 지위에 어울리지 않아. 그리고 네 말대로 모험가 길드는 그 힘을 놀려먹고 있고. 네 말이 맞아. 모험가 길드는 상아의 방침에 따라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기는 하지."

"그렇지. 너도 상아가 길드장의 자리에 맞지 않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동의는 해. 동의는... 근데 말야."

"....?"

"길드원을 바꾸고 방침을 바꾸는 건 용납 못하겠다. 상아는 애가 순해빠져서 말이지. 이런 역적모의를 하는 애들을 알면서도 가만히 놔두는게 참 마음에 안들었는데..."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아라크네 클랜의 클랜장. 지금까지 모험가 길드의 지원이란 지원은 다 받아 놓고서 이제 살만하니까 윗사람 바꾸자고 작당모의를 하는데... 그게 역적모의가 아니면 뭐야? 정말 길드를 바꾸고 그 분위기를 바꿔 나가고 싶었다면 네가 길드에 들어가서 그것을 바꿔나갔어야지."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라크네의 분노에 찬 외침에 운현은 실실 웃으며 탁자를 톡톡 쳤다.

"네가 하는 말은 다 좋아. 하지만 지금까지 네가 한 말 중에서 한가지 큰 의문점이 있지. 길드의 방침을 바꾸고 던전 도시의 분위기를 쇄신하고... 모험자의 위상을 격상시킨다. 그리고 그 피해는 모험가들이 감수한다. 그런데 말이지... 아라크네 클랜. 그리고 너는 그 피해를 감수한다는 말은 하지 않네?"

"감수할거다!"

"어떻게?"

"그건...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되는 것이지. 정 뭐하면 내가 가진 재산이라도 내놓을 수 있다고!"

"재산을 내놓는다? 그게 의미가 있나? 네 뜻대로 일이 풀려간다면 너는 모험가 길드 뿐만 아니라 던전 도시 자체를 소유할 수 있게 되는데? 결국 네가 하는 희생은 희생이 아닌 투자가 되는 거야."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운현이 자신을 놀리며 비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아라크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먹을 쥐었다. 고작 100레벨도 되지 않은 애송이가 좋게 봐주고 있으니 함부로 날뛴다.

"좋은 말로 좋게좋게 넘어가고 싶었는데... 정말 주제파악을 못하는구나? 너 지금 누구한테 그따위로 말하고 있는 줄 알고 있는거냐?"

처음의 무례도 넘어갔다. 지금까지 톡톡 쏴가며 반말을 하는 것도 넘어갔다.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할 자가 함부로 까부는 것도 여기까지다. 조용히 살기를 피워가며 아라크네는 운현을 노려보았다.

"어이구 무서워라. 당장 눈 앞의 모험가를 핍박하려는 주제에 모험가의 위상이 어쩌고 저째?"

그런 그녀를 보며 운현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짜증이 치솟은 아라크네는 이를 드러내며 운현에게 말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오우. 스트레이트."

살짝 고개를 비트는 것으로 아라크네의 공격을 피해낸 운현은 실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의 모습에 더더욱 짙게 웃은 아라크네는 벽에 걸려 있는 창을 잡았다.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가려는 너를 이해를 못하겠군. 진짜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아? 지금 길드에 있는 아라크네 클랜원들에게 명령만 내리면 네 동료들을 모두 잡을 수 있어. 그들과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 이래도 좋을까 몰라."

"걔네들 지금 상아 주최의 교육받고 있어."

"하... 그럼 상아를 믿고 이따위 짓거리를 하는거냐? 뭐 그래. 그년들은 상아가 지켜준다고 치자. 그럼 너는?"

"나? 나는 뭐..."

"함부로 입을 놀린 대가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어디 한두군데 부러지고 터져야 말귀를 알아들을 것이라면 그렇게 하는게 낫겠지."

같잖은 예의와 머리 굴리는 것은 이제 끝이다. 말로 안된다면 힘으로 하는 수 밖에. 자고로 말로 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자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라크네는 고대의 진리를 수행하기 위해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욥."

"미꾸라지처럼 잘도 피하는구나!"

비록 견제의 일격이었다고는 하나 자신의 공격을 운현이 여유롭게 피하자 아라크네는 기분 좋게 웃으며 본격적으로 창을 움직였다.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는 삼연속 찌르기. 머리와 복부. 하체를 노리는 공격을 여유롭게 지켜보던 운현은 뒤로 한걸음 크게 물러나는 것으로 그 공격을 모두 피해내었다.

"호오? 한 수는 있나본데... 어디 이것도 피할 수 있나 볼까?"

본격적으로 그를 잡기 위한 수를 펼친다. 아라크네는 운현을 노려보며 창끝을 내렸고 그 순간 그녀의 창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터져나왔다.

"하압!"

"흥."

"....."

음속의 찌르기. 공기를 찢는 속도가 나중에 들릴 정도의 강력하고 빠른 찌르기가 운현의 어깨를 노렸다. 스킬은 정확히 발동했고 그녀의 손에는 찌르는 감각이 남아 있었다.

"...너... 뭐야."

"나? 글쎄...? 뭘까? 한번 맞춰보겠어? 첫번째. 일반인. 두번째. 고레벨인데 레벨을 숨긴 사람. 세번째...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

그녀의 날카로운 창 끝은 운현의 손가락에 잡혀 있었다. 자신의 스킬까지 이용한 찌르기다. 그것을 이렇게 막아? 그것도 100레벨도 되지 않는 검사따위가? 아라크네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인가. 분명 입구에서 확인을 했을 때 그의 레벨은 95레벨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너... 너 뭐야!? 너 뭐냐고!!"

아라크네의 상식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패닉에 빠진 아라크네를 바라보며 운현은 빙긋 웃은 후 차분히 말했다.

"쉬운 길을 냅두고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한다라... 있잖아."

"뚜둑."

손가락에 쥐어진 창날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단단한 창날이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숴져버린 것에 아라크네는 창을 놓고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압도적인 힘. 자신을 압도하는 공포. 5계층의 몬스터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위압감과 공포에 아라크네는 열리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너... 누구야..."

소리조차 지를 수 없다. 공포심으로 턱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낀다. 눈 앞의. 100레벨도 되지 않는 초보 모험가가 내뿜는 막대한 살기와 압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아라크네가 간신히 말하자 운현은 그녀를 즐겁게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나한테는 말이지."

운현의 손이 다가올 수록 공포감은 극대화된다. 아라크네의 오드아이가 완전히 공포로 물들어버렸다. 그녀의 탄력적인 다리가 힘을 잃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자 운현은 그녀의 턱을 손으로 잡은 후 무척이나 부드럽고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사...살려.."

"이게 제일 쉬운 길이라고."

356====================

던전

"실례하겠습니다."

운현이 들어가고 삼십분이 지나 방 안으로 들어 온 미나는 포도주스를 홀짝이는 아라크네와 운현의 모습에 빙긋 웃었다. 처음에는 설득, 두번째는 폭력. 가장 좋은 것이 설득이었는데 다행히 폭력까지 가지 않은 것에 만족한 그녀는 아라크네에게 다가갔다.

"잘 됐나보네요?"

"응. 운현이 협력하기로 했어."

"그렇군요... 그럼 운현님. 입단은 언제..."

"아. 그건 나중에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가요? 후후...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어요. 부 클랜장님."

생긋 웃으며 운현에게 인사한 미나가 밖으로 나가자 아라크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심한 운현의 시선을 마주하던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후 머리를 조아렸다.

"나의 신이시여... 이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훌륭하군."

"위대하신 신을 경배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얼마든지 할 수 있나이다."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 아라크네는 운현에게 존경을 넘어서 경배의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엉금엉금 기어 운현의 발 앞까지 간 그녀는 운현의 더러운 신발을 핥으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신이시여. 다른 무언가 할 것이 있습니까?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네가 할 일은 일단 대기다. 내 말이 있기 전까지는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알겠습니다. 신이시여. 당신의 뜻이 언제까지나 이어지기를 빌겠습니다."

경외의 표정을 담아 진심으로 아라크네는 운현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릿하게 웃은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라크네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의 다리를 잡으려다가 차마 손을 대지 못한 채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위대하신 신이시여. 벌써...?"

"내 시간은 너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니까."

"아아..."

운현이 자신의 곁에서 떠난다는 것이 무척이나 충격이었는지 아라크네는 눈물을 그렁그렁 맺은 채 고개를 숙였다. 쪼그려 앉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운현은 아라크네의 얼굴에 환희가 떠오르자 부드럽게 웃었다.

"너에게 영광이 있으리라."

"아아아... 신이시여..."

"후... 이것도 나쁘지 않군."

피스나의 캡슐을 이용해 아라크네의 세뇌를 마친 운현은 느긋한 걸음으로 길드로 향했다. 이로서 운현은 자신이 가진 패를 하나 더 늘릴 수 있었다. 시장이며 암살자 길드의 길드장이자 상인 조합의 수장인 윈디아. 용병 연맹에서 한참 주가를 날리고 있는 아르토리우스, 그리고 모험가 길드의 아라크네 클랜까지. 거대한 세개의 조직을 손에 넣은 운현은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피스나는 캡슐로 꼬드길 수 있어. 그럼 나머지 문제는...'

이제 남은 문제거리라 할 수 있는 것은 천검자를 상대하는 것이다. 라닌의 말에 따르면 천검자는 늦어도 오늘 정도면 던전 도시에 도착할 것이다. 그녀를 상대하여 그녀에게 비타 살해범의 누명을 씌우면 대략적인 일은 끝난다.

'그리고 라닌을 만나는 것이지.'

자신과 같이 운명을 바꾸려는 목적을 가진 자. 다난교에 새롭게 들어 온 책략가이며 아직까지도 운현이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자. 지금까지 많은 다난교의 핵심 인력들을 잡아 그들의 정신을 분석해보았지만 그 안에서 라닌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의 기억이 잘려나간 것처럼 라닌에 관련된 부분만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라닌... 하. 이년이 문제군."

상대가 자신을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녀와 협상을 하든, 때려잡든 해야 하는 상황이니 운현으로써는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라닌이 어느정도 되는 수준의 책사인지 알 수 없으니 그에 대한 대응을 하기 난감한 것이다.

"젠장. 괜한 거 가지고 고민해봤자 나오는 것도 없다. 일단 당장 처리해야 하는 일부터 처리해야겠네."

당장 해야 하는 일이라면 아돌의 일이 있다. 아돌은 미믹을 쉽게 잡는 법을 운현에게 제시했다. 미믹이야 운현도 쉽게 잡을 수 있으니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아돌이 그런 것을 제안한 이유를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2계층으로 가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군."

동료들의 레벨업은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얼마 없다. 그때까지 최대한 빠르고 많은 레벨을 올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시장선거..."

일단 운현의 목적은 상아가 시장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외에는 모두 자신의 입김에 닿아 있는 인물들이 출마를 할 것이니 누가 되든 상관이 없었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아르토리우스가 시장이 되는 것이지만 티르빙과 대결하는 정도에 불과한 힘을 가지고 있는 아르토리우스로서는 무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결국 만만한 건 윈디아 뿐이군.'

피스나가 시장이 되려는 것은 자신의 남편인 요한을 깨우기 위해서다. 그녀의 궁극적인 목적은 악신의 저주에 걸려 있는 사람을 구하는 것. 그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 던전 도시의 방침을 개발로 돌려 자신의 개발을 위한 지원을 얻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이미 운현이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고 피스나에게 이 캡슐을 보여주며 제안한다면 피스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운현의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시장 선거쪽은 걱정할 필요 없겠네."

자신의 계획이 잘못되어 상아가 시장 선거에 나선다 하더라도 둘 이상을 자신이 포섭할 수 있으니 죽었다 깨어나도 상아가 시장이 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운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터덜터덜 길드를 향해 걸었다.

"...이런 방식으로 계층주의 토벌은 이루어진다. 뭔가 질문사항이라도 있나?"

세시간 정도의 교육이 끝났다. 제대로 듣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목숨 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목숨까지 위험해 질 수 있는 것이 계층주를 잡는 일이기에 교육에 참석한 모험가들 대부분은 진지한 얼굴로 상아와 필레의 교육을 들었다.

"미야 언니..."

"으으... 난 수업만 들으면 졸려..."

마법학교 시절이 떠올라 진지하게 교육을 받았던 헤스티아에 비해 미야는 교육을 듣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나보다. 교육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속 졸기 시작한 미야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헤스티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야는 나중에 운현과 함께 들으면 될 것 같아. 헤스티아. 넌 잘 들었어?"

"네. 바제트 언니는요?"

"나야 뭐... 필기는 다 했지."

빽빽하게 적혀 있는 종이를 보여주며 바제트가 쓴웃음을 짓자 헤스티아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제트마저 제대로 듣지 않았다면 자신이 아는 지식만으로 운현을 가르쳐야했다.

안그래도 숙련된 모험가라 자신보다 훨씬 지식이 많은 운현인데 한번 들은 교육의 내용을 혼자 알려주려면 그것이 무척이나 부담이었던 것이다.

"어때? 잘 들었어?"

"아. 상아 길드장님."

상아와 필레가 다가오자 헤스티아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던전 도시를 지탱하는 네개의 조직 중 하나의 수장이자 강력한 검술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는 마검사인 그녀다. 마법의 길을 걷는 자로서 어쨌든 존경할 만한 이였기에 헤스티아는 그녀에게 공손히 인사했고 그런 헤스티아를 보며 상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괜한 예를 갖출 필요는 없어. 너희들에게는 좀 미안한 일을 해버렸으니까 말야. 빚을 진 것 같기도 하고."

"아..."

옆에서 뚱한 눈으로 상아를 바라보는 필레를 발견한 헤스티아는 작게 신음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한 것이다.

"괜찮다면 잠깐 시간을 내 줄 수 있을까?"

필레의 따가운 시선을 그대로 버텨내며 상아는 멋쩍은 듯 볼을 긁적거렸다. 그녀의 말에 헤스티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야나 바제트는 상관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헤스티아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었다.

"괜찮아요. 아. 그런데..."

"왜?"

"운현 오빠는 없는데... 괜찮아요? 지금 아라크네 클랜에 갔거든요."

"아라크네 클랜이라면..."

헤스티아의 말에 남은 정리를 끝마치고 다가 온 펠리시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운현과 상아의 스캔들에서 몬스터에 관심을 보였던 이들 중 가장 위험한 이다. 길드 내에서의 영향력이나 그 세력 규모로 인해 던전 도시에서의 영향력도 상당한 아라크네 클랜에 운현이 왜 간 것일까.

펠리시아의 얼굴이 복잡해졌지만 상아는 그것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빙그레 웃었다.

"물론. 운현이 없으면 더 좋지. 너희들과는 왠지 남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말야. 좋은 차와 과자가 있으니까 대접할게. 그렇지? 필레?"

"그 과자랑 차 제거잖아요..."

맥없는 목소리로 필레가 궁시렁거렸지만 상아는 그저 히죽거릴 뿐 이었다. 그런 그녀를 째려본 필레는 쓴웃음을 지으며 헤스티아에게 말했다.

"헤스티아씨. 좋은 차와 과자는 제가 대접할테니 상아 길드장님에게는 다른 걸 받으세요."

"엑? 필레! 이러기야?"

"누가 할 소리를요!?"

상당히 억울한 얼굴로 필레가 빽 소리치자 상아는 움찔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모험가 길드를 위해서 운현과 연인사이라는 말도 안되는 뻥을 날려 필레의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 지금으로써는 필레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었다.

"제가 진짜 길드장님때문에 못산다구요... 후..."

"미, 미안하다니까. 너무 그러지 말라고. 나 좋자고 한 일은 아니니까."

"그런 것 치고는 되게 신나보이시던데요오..."

운현에게 상당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필레인지라 볼 일을 보고 길드로 복귀했을 때 길드에 퍼진 소문에 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비록 과거의 인연이라고는 하지만 지금도 꽤나 좋은 분위기 같았다는 사람들의 말에 즉시 상아를 찾아갔던 필레에게 결국 그 이유를 말해 준 상아는 아직도 필레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니 내가 무슨 사감이 있거나 타의가 있는 건 아니라고."

"그런 사람이 왜 그런 걸 준비했어요?"

"응? 뭘?"

"제가 모를 줄 알아요? 평소에 그렇게 입고 다니라고 난리를 쳐도 거들떠도 안보던 드레스를 왜 구입..."

서무 업무도 함께 하는 필레인지라 상아가 구입한 것에 대해도 알고 있었던 필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늘상 입고다니는 것이 전투용 슈트, 그리고 마법 망토 뿐인 상아가 무려 드레스를 구입한 것이다. 그것도 요즘 유행하는 드레스를. 어디 공적인 자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누구에게 잘보이려고 그런 것을 샀겠는가.

"와와와!! 어서 가자! 맛있는 과자와 차가 기다리고 있다~!"

필레의 말에 상아는 움찔했다. 애써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했지만 다른 여인들의 시선에 결국 그녀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왜! 뭐! 나도 좀 핑크핑크해지면 안되냐!? 엉!?"

"우와... 이 사람 말했어."

"하하... 필레씨. 너무 그러지 말아요."

"으으음... 어, 어서 가실까요? 사람들이 다들 쳐다보는데..."

교육이 끝나 반절 이상이 나간 강의실이지만 아직 반절에 가까운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꽂히는 것에 부담스러워하며 헤스티아는 떨떠름히 말했다. 그녀의 말에 상아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고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필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못살아..."

"필레. 너무 갈구지마. 불쌍하잖아."

"갈구는거 아닌데요. 원망하는 거라구요."

"그것도 금지. 길드장님을 너무 핍박하지말라고. 다 깊은 뜻이 있었으니까..."

"깊은 뜻이요?"

펠리시아의 말에 헤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펠리시아는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자세한 것은 가서 말씀드릴게요."

357====================

던전

"교육이 끝나려면 두시간 정도 남았는데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생각보다 교육 시간이 길다. 아라크네 클랜에서 아라크네를 세뇌하여 자신의 노예로 만들었는데도 아직 교육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에 운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남는군.'

예상치 못한 시간적 여유다. 이것을 어떻게 쓰는게 좋을까. 혼자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던 운현은 자신의 앞에 누군가 다가오자 피식 웃었다.

"운현님."

"아. 당신인가요."

"예."

아돌이 나타나서 자신의 앞에 앉자 운현은 웃으며 그를 반겼다. 그에 대한 것도 해결해야 한다.

'길게 끌 필요 없겠군.'

운현이 줘야 할 정보는 몬스터에 대한 것. 그리고 아돌이 줄 정보는 미믹을 쉽게 잡는 법이다. 길어야 두시간 이상을 끌 일은 아니기에 운현은 남은 시간을 그와의 일을 처리하는데 쓰기로 마음먹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맥주를 주문해 운현과 자신의 앞에 놓은 아돌은 맥주를 한모금 마신 후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흠... 뭐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요. 던전을 다니며 미믹에 대한 위험이 없을 수는 없을테니까요. 그것에 대한 대비라고 생각한다면 아돌님의 제안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어디... 지금 바로 가실까요?"

"네?"

"아니, 미믹을 처리하는 법을 직접 보여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운현님도 실제로 보셔야 믿기 편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죠. 하지만 지금은 동료들도 없는데... 미믹을 잡다가 실패하면 어쩌지요?"

"그건 제 동료들이 있으니 걱정마시지요. 다들 250레벨이니 1계층의 미믹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들 와줘!"

운현이 혼자라는 것을 강조하자 아돌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자신의 동료들을 불렀다. 200레벨대의 전사와 마법사가 착용할만한 장비를 입은 두 견인족 여인들이 다가오자 아돌은 남은 맥주를 단번에 들이마신 후 차분히 말했다.

"미노타우르스 뿔도 단번에 빼라는 이야기가 있지요. 말 나온김에 바로 가시겠습니까?"

"그러죠. 동료들도 지금 교육을 받고 있으니... 금방 끝나겠죠?"

"교육이라면 상아 길드장님이 하고 계신 교육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하.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마침 저희 동료들이 보물상자가 있는 곳의 위치를 파악해놨거든요."

"그 위치라면... 홉고블린?"

"어라? 아십니까?"

운현의 질문에 아돌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반색했다. 이야기가 편해졌다고 생각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운현과 함께 걸으며 말했다.

"미믹을 처리하는 일은 길드로서도 상당히 골치아픈 일이죠. 생성되는 것만으로 그 계층의 모험가들로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요. 거기에 잡아도 나오는 것도 없고."

"그렇군요."

"저희도 미믹 때문에 꽤 고생을 했습니다. 길드에서는 쉬쉬하는 편이지만 은근히 미믹이 잘 발생하거든요. 전투라는 것이 생각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으니까요. 보물상자가 있는 곳에서 전투를 하다가 몬스터의 공격, 혹은 아군의 공격이 빗나가서 보물상자에 직격하는 경우도 많죠. 모험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길드에서는 미믹의 발생에 대한 것을 축소화하여 발표하는 편이랍니다."

"허어... 그런."

"1계층이야 한번의 공격으로 보물상자가 부서지는 일은 별로 없지만 2계층 이상부터는 조금 다르죠. 보물상자가 있는 곳의 몬스터들은 네임드 몬스터라 그들의 공격력은 일반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다르거든요. 그리고 모험가들의 공격력도 증가하고. 그 탓에 한번의 실수로 미믹이 발생되는 일이 꽤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대비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운현님께서 남는 장사죠."

생글거리며 운현과 함께 던전 안으로 들어간 아돌 일행은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당황했다. 1계층에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던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뭔 사람이 이렇게..."

"아. 이쪽에 사람들이 갑자기 몰리더라구요."

"그런가요... 흠. 뭐 좋습니다. 홉고블린 말고도 보물상자를 가지고 있는 몬스터는 많으니까요. 그럼 다른 곳으로 가실까요? 오크 워리어가 있는 곳에도 보물상자가 있습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하하하. 저희들이 함께라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운현의 레벨은 95였다. 오크 워리어보다는 높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갈만한 곳은 아니었다. 운현이 떨떠름히 묻자 아돌은 다시 한번 그의 걱정을 잠재우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저희가 설마 운현님을 버리고 가겠습니까? 저희를 좀 믿어주세요."

"맞아요. 운현씨."

"저희 그런 사람 아니라구요."

두 견인족 여인까지 웃으며 말하자 운현은 아무런 말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운현이 가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아돌 일행은 다시 운현과 함께 빠르게 움직였다. 고블린 서식지를 지나 코볼트 서식지로, 코볼트 서식지를 지나 평원에 도착한 아돌은 여유있는 얼굴로 활을 들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오크 워리어를 잡으러 가죠. 아, 운현씨는 쉬고 계셔도 좋습니다. 어쨌든 방해만 되니까요."

"그럼 부탁드리죠."

근처에 보이는 오크들을 보며 아돌은 빠르게 활을 쏘았다. 궁사라는 직업 덕분인지, 아니면 레벨 덕분인지 아돌의 화살은 바제트의 화살과 다르게 기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한번에 두, 세발씩 쏘아가며 순식간에 오크들을 전멸시킨 그는 견인족 여인에게 지시해 오크 워리어를 찾으라 말했다.

"부탁해. 알빈."

"네. 아돌."

기척을 탐지하며 오크 워리어가 있는 곳의 방향을 알아낸 그들은 순조롭게 오크 워리어가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어렵지 않게 오크 워리어의 둥지 근처에 있는 오크들을 소탕한 아돌은 밝은 미소와 함께 운현의 어깨를 잡았다.

"이제 오크 워리어를 잡을 생각인데. 운현씨도 끼시겠어요? 어쨌든 전투에 대한 경험치는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뇨. 괜찮습니다. 레벨업은 동료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요."

"그러시다면야... 그럼 빨리 끝내도록 하죠."

네임드 몬스터라고 하나 1계층의 네임드에 불과했다. 3계층을 다니는 자신을 이길리 없다 생각한 아돌은 성큼성큼 걸어 커다란 움막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오크 워리어의 포효와 함께 그는 움막 밖으로 뛰어나왔다.

"알빈! 루다!"

"하압!"

"얍!"

알빈이라 불린 견인족 전사와 루다라 불린 견인족 마법사는 솜씨 좋게 움직이며 오크 워리어를 압박해나갔다. 거의 순간이라 불러도 괜찮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미믹을 잡은 그들은 움막 안에 있는 보물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와 운현에게 보여주었다.

"미믹이 어떤 원리로 생성되는 것은 알고 계시죠?"

"네. 보물상자를 부수면 생긴다고."

"후후. 그렇습니다. 자. 일단 시범을 보여드릴게요. 알빈. 부탁해."

"알겠어."

아돌과 루다가 운현을 보호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자 알빈은 앞으로 걸어나가 자신의 도끼로 보물상자를 힘껏 내리쳤다. 강한 힘이 담긴 일격에 보물상자의 뚜껑이 박살나자 그 순간 보물상자의 안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저게 미믹입니다. 미믹이 생성되는 것을 보신 적은 있으신가요?"

"본 적이야 있습니다만."

"그럼 설명이 빠르겠군요. 저 기운은 미믹의 힘입니다. 저 기운을 상대해봐야 의미가 없죠. 중요한 것은 본체입니다. 미믹의 본체는 저 나무 상자죠. 저것을 제대로 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요? 쉽지는 않겠군요."

"여기서 미믹을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오는 겁니다. 알빈!"

"응!"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미믹이 자신을 공격 대상으로 삼고 다가오자 알빈은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었다. 은색 초승달 장식이 있는 목걸이를 팔목에 건 알빈은 빠르게 미믹을 향해 달려갔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알빈을 향해 미믹은 검은 기운을 내뿜었다.

"흐압!"

미믹의 검은 기운이 알빈의 몸에 맞았지만 알빈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공격을 그대로 무시한 채 미믹의 앞으로 이동한 그녀는 미믹의 본체를 향해 힘껏 도끼를 휘둘렀고 그 도끼에 맞은 미믹은 잠시 꿈틀거리고 그대로 박살나버렸다.

"호오."

"보셨습니까? 저것입니다. 알빈이 팔에 찬 목걸이."

"저건... 어떤 겁니까?"

미믹의 공격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한 모습에 운현은 흥미로워하며 아돌에게 물었다. 그의 질문에 아돌은 씨익 미소지은 후 말했다.

"파르티 교단 사제의 축복을 받은 목걸이입니다. 그것을 팔에 착용한 채 전투를 하게 되면 이상하게 미믹의 공격이 무효화되더군요."

"허... 신기하군요."

"좋은 기회이니 운현님도 한번 해보시지요. 근처에 오크 워리어의 부족이 있는 것 같으니... 준비는 저희가 해드리겠습니다."

'눈으로 보여줬는데 한번 해보라... 그건가.'

"제가 겁이 많은지라 미믹을 상대하는게 좀 저어되는군요."

"하하하! 저희가 있잖습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스킬을 쓰면 미믹을 잡는 일 따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마시지요."

"그럼 아돌님만 믿겠습니다."

"물론이죠. 자. 가실까요?"

걱정하는 운현을 데리고 다른 오크 워리어의 서식지에 도착한 아돌 일행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주변의 오크와 움막 안의 오크 워리어를 죽이고 그 사체를 마석에 담아 정리한 후 보물상자를 들고 나왔다. 보물 상자를 운현의 앞에 놓아 둔 알빈은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 운현의 팔에 감아주었다.

"운현님 레벨이 95였죠? 이 망치로 몇번 치시면 상자가 부서질 겁니다. 만약을 위해서 저희들은 뒤에서 대기하고 있을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위험할 때는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물론이죠."

아돌, 알빈, 루다가 뒤로 빠지자 운현은 묵직한 망치를 잡고 보물상자를 내려다보았다. 보물 상자의 뚜껑을 쳐서 부숴버리면 미믹이 나온다. 운현이 계속 망설이자 아돌은 씨익 웃으며 외쳤다.

"운현님! 힘드시면 제가 해드릴게요!"

"네? 잠깐..."

"파워 샷!!"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돌이 화살을 날렸다. 강한 힘이 들어가 있는 화살이 보물상자에 직격하자 운현은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직 준비가 안됐는데요!"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큭!"

황급히 목걸이를 팔에 감은 운현은 검을 뽑아 미믹과의 거리를 쟀다. 그런 그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던 아돌은 미믹의 공격을 운현이 막아내자 키득거리며 외쳤다.

"하하하! 운현님! 몸으로 막으셔야죠!"

"아무리 그래도 이거 무서운데요!?"

"빨리 하세요~"

생글거리던 아돌의 얼굴에 웃음기가 점점 사라진다. 그것을 힐끔 본 운현은 인상을 구기며 자신의 몸을 향해 검은 기운을 날리는 미믹을 향해 돌진했다.

"크악!!"

미믹의 공격은 알빈을 공격할때와 다르게 허무하게 없어지지 않았다. 미믹의 공격을 맞고 운현이 뒤로 나가 떨어지며 당황하자 아돌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한번으로는 곤란합니다. 더 해보시지요."

"아프잖...아!! 아돌!! 이게 무슨 짓이지!?"

"무슨 짓?"

그제서야 아돌은 얼굴에 웃음을 되찾았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른, 상대방을 경멸하고 비웃는 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면..."

"큭!!"

아돌의 화살이 자신의 뒤를 노리자 운현은 놀라며 바닥을 굴러 그의 화살을 피했다. 하지만 그 화살 공격을 피하느라 미믹의 공격에 또다시 당해버린 운현은 고통스러워하며 아돌에게 다급히 외쳤다.

"아돌씨!! 도와줘요!"

"도와? 뭘? 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아돌은 다급해보이는 운현을 향해 다시 화살을 쏘았다. 그가 화살을 피하고, 또다시 미믹의 공격에 맞아 쓰러져 꿈틀거리자 아돌은 기쁘게 웃으며 외쳤다.

"큭... 왜... 왜 날..."

"네놈이 상아의 연인이라니... 아주 좋군!! 너와 상아! 아주 친해보였어...! 비타가 죽고 너마저 죽어버린다면 상아의 정신은 말이 아니게 되겠지!? 그럼... 그럼...!"

"....."

"천검자께서 상아를 아주 여유있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면... 우리 다난의 세상이 올 것이다!!"

아돌의 등에서 날개가 펼쳐진다. 검은 날개를 활짝 펼친 아돌이 기쁘게 외친 순간 운현은 얼굴 가득 짓고 있던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웠다.

"역시 다난이었나."

"뭐?"

벌레처럼 바닥을 뒹굴던 운현이 아무런 데미지도 입지 않은 것처럼 몸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돌은 당황했다. 뭔가 이상하다. 그가 그것을 느낀 순간 알빈과 루다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아, 아돌님."

"저거..."

"뭐야...? 뭐야!?"

미믹은 하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미믹이 단 하나.

"말도 안돼. 미, 미믹이 증식한다는 말은 들은 적 없다고!!"

운현의 몸이 사라지고 그가 있던 자리에 열마리의 미믹이 생겨났다. 그것을 본 아돌 일행이 당황한 순간 모여 있던 미믹들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생명체인 아돌들에게 몸을 돌렸다.

"빌어먹을! 그래봤자 1계층의 미믹!! 알빈! 루다! 날 지켜라! 한방에 쓸어주겠어!"

358====================

던전

"아돌님! 이, 이만큼은 무리에요!"

"힘듭니다!"

열이나 되는 미믹의 공격을 고작 둘이서 버티기는 어려웠다. 동시다발적으로 쏘아지는 미믹의 검은 기운에 알빈이 다급히 외치자 아돌은 빠득 이를 갈며 활을 잡았다.

"하아아아압!!"

검은 날개가 활짝 펼쳐지고 활의 끝에 푸른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한방에 모든 것을 정리하려는 듯 힘을 모으던 그는 팽팽히 당겨진 활 시위가 끊어진 것에 크게 놀랐다.

"어째서!?"

"아돌님!"

"으아아악!!"

한계에 도달한 알빈과 루다의 몸에 검은 기운들이 빗발쳤다. 미믹들의 공격을 버티지 못한 그녀들이 미믹의 검은 기운에 당해버리자 아돌은 이를 갈며 몸을 돌렸다. 아무리 3계층을 다닐 수 있는 자신이라 할지라도 한마리가 아닌 열마리의 미믹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빌어먹을! 어째..."

"혼자 가시면 쓰나."

"힉!?"

어느새 자신의 뒤에 나타나 있는 운현을 본 그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난 순간 아돌의 몸에 검은 기운이 몰려들었다. 그것을 바닥을 굴러 피한 아돌은 미믹의 검은 기운이 운현의 몸에 맞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곳에서 죽을지언정 자신의 임무는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흠."

"뭐...?"

미믹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운현은 그저 모기가 물었나. 라는 수준의 반응만 보일 뿐 이었다. 아까 전에 미믹에게 맞았을 때는 그렇게 아파했는데.

"뭐야... 뭐가 어떻게 되가는거야!?"

"늘 생각하지만 참 멍청하단 말이지. 표면의 힘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말라고."

"뭐...?"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상아라면 크게 타격을 입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날 엿먹이려고 했으니 고스란히 돌려줘야겠지?"

아돌의 멱살을 잡아 가볍게 들어 올린 운현은 겁에 질린 그의 얼굴을 마주보며 히죽 웃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이상하다. 이럴리 없다. 수많은 의문이 머릿 속에서 피어올랐고 그것에 아돌은 덜덜 떨며 말했다.

"마, 마치 천검자 같잖아!? 너 뭐야!? 뭔데!?"

"천검자? 천검자가... 웃쌰. 뭘 어쨌는데?"

미믹의 공격을 피해낸 운현이 웃는 낯으로 묻자 아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것도 밝히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가 침묵을 고수하려 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너한테 쓰려고 캡슐 꺼내기는 좀 그렇군. 딱히 얻어낼 정보도 없는 것 같은데 말야. 그리고 시간도 많고."

"으악! 윽!"

운현이 아돌을 잡고 있는 동안에도 미믹은 주변에 있는 존재를 공격하려는 본능을 따르고 있었다. 자신과 아돌을 향해 검은 기운을 내뿜는 미믹을 힐끔 본 운현은 아돌을 들어 미믹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아직 애들 교육 끝나려면 시간 좀 걸릴 것 같으니 간단하게 고문이나 해야겠군. 자. 그럼 시작해볼... 에이 썅!!"

미믹으로 흥하려는 자. 미믹으로 망하리라를 보여주려고 모아 놓은 미믹을 냅다 뽑아 놓은 운현은 미믹들이 계속 공격을 하자 짜증을 터트리며 아돌을 들고 성큼성큼 미믹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가 다가오는 것에 미믹의 공격은 더더욱 거세어져갔지만 운현은 효율적으로 아돌을 움직여 그 공격들을 여유있게 막아내었다.

"크억!! 윽! 주, 죽..."

"죽일거야. 죽이긴 죽일건데... 으쌰."

미믹을 잡아 하나씩 인벤토리에 넣는 운현의 모습에 아돌은 패닉에 빠졌다. 그의 손에 닿은 미믹이 허공에서 사라져버리는 모습은 자신이 운현을 꼬드길때 쓴 미믹을 쉽게 잡는 방법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네놈... 속인거냐!?"

"속였다기보다는 낚았다고 해야지. 이 단촐한 떡밥에 이렇게 쉽게 걸려 들 줄은 몰랐거든."

미믹에게 수도 없이 맞아 거의 빈사상태가 되어버린 아돌이 힘없이 외치자 운현은 빙긋 웃으며 느긋하게 답했다. 여유롭게 열 하나의 미믹을 모두 챙겨 인벤토리에 고이 모셔 놓은 그는 미믹의 공격에 의해 죽어버린 두 견인족 여성에게 시선을 보냈다.

"조만간 쟤들 꼴 만들어 줄테니까 걱정 말게."

"큭! 다난이시여!! 당신의 곁으로 가겠나이다!!"

알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상대가 얼마나 잔혹하고 교활한 자인지 알게 된 이상 살아있을 수는 없었다. 상대는 자신을 고문해 정보를 얻어내려 할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아돌은 자신의 혀를 빼물고 강하게 이를 악물었다.

"아니 그렇게 안해도 고통은 조만간 줄 생각인데."

상대가 자살 시도를 했지만 운현은 그저 시큰둥할 뿐 이었다. 그의 반응에 놀란 것은 오히려 아돌이었다. 뭔데 이 인간은 이렇게 태평한 것인가. 그리고 그 의문은 곧장 풀리게 되었다.

"그레이터 힐."

"헉!"

미믹에게 맞아 생긴 상처와 자신이 혀를 깨물며 만들어진 상처가 모두 나아버렸다. 신앙에 몸을 바친 사제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궁극의 개인 회복 마법인 그레이터 힐을 검사인, 그것도 레벨이 100도 되지 않은 자가 쓴다?

"너도... 너도 천검자처럼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거냐?"

"천검자...? 그러고보니 아까 천검자 어쩌고 저쩌고 떠들었지. 자. 그럼 이번 고문의 주제는 그걸로 해볼까? 해보면서 다른 것도 좀 조사를 해보도록 하지."

빙긋, 운현은 겁에 질린 아돌의 볼을 툭 친 후 그를 그대로 내리 꽂은 뒤 주머니에서 긴 천을 꺼내 아돌의 입을 막았다.

"자. 그럼 이 더러운 닭날개부터 찢어볼까!?"

"으으읍!!"

"흐음."

"살려줘...살려..."

"아니. 야. 아까 전에 자결하려고 한 놈이 뭘 그리 약한 모습을 보여?"

사람들의 대부분이 오크를 잡기보다는 고블린과 홉고블린, 코볼트를 잡느라 오크를 잡으러 오지 않는 덕분인지 삼십분이나 지났는데 인기척은 커녕 오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여유롭게 아돌을 고문할 수 있었던 운현은 그의 날개를 수십번이나 더 찢고 붙여가며 그를 조롱하고 괴롭혔다.

"살려...살려..."

날개를 가진 사제로서 날개가 찢기는 굴욕과 고통은 버티기 힘든 것이었다. 과거에도 날개를 가진 사제들은 자신의 날개가 공격당한 것에 이상할 정도로 분노했었다. 거기에 날개를 가지지 못한 이들은 날개를 가지기 위해서 별 짓을 다했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지."

"다 말했잖아... 다..."

눈물과 콧물, 침으로 범벅이 된 아돌이 힘겹게 말하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린 후 다시 날개를 잡았다. 운현의 그레이터 힐로 재생된 날개가 또다시 찢겨나가는 고통이 예상되자 아돌은 다시 펑펑 울며 외쳤다.

"뭘 원하는 건데...! 뭘!"

"라닌이 누구야?"

"말했잖아!! 카야님이 데리고 온 책사라고! 몇번이나 말해!"

"뭔가 신체적 특징이나 그런 건 없어? 네 말에 의하면 천검자를 소개시켜주고 천검자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라닌이 직접 내린 것 같은데... 라닌에 대해서 넌 말하지 않았어."

"말했어!"

"아니. 넌 라닌에 대해서는 말한 것이 없어. 라닌의 외모, 성향, 그녀가 원래 있던 곳. 하다못해 라닌이 어디 있는지 조차도 답변을 못했어."

"...그, 그건 모르니까..."

"찌익!"

"아으으으으!!"

날개죽지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에 아돌은 또다시 눈물을 펑펑 흘렸다. 날개가 뜯기는 상실감에 그가 서럽게 우는 것을 지켜보던 운현은 그의 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라닌에 대해서 말해. 말하면 죽여주지."

"몰라... 몰라!"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단 말야?"

"기, 기억이 안나...!"

"흠... 이걸로도 무린가."

정신 분석으로 알 수 없다면 고문을 통해 얻을 수 있을까 했지만 고문으로도 라닌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돌에게 있어서 자랑이라 할 수 있는 검은 날개를 엉덩이로 깔아뭉개며 그의 위에 앉은 운현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하. 진짜 도대체 뭐하는 년인지 모르겠네... 아무튼 뭐. 네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정말 몇 없구만."

신나게 고문을 해봤지만 얻은 것은 손맛 정도에 불과했다. 천검자가 상아를 죽여 모험가 길드를 혼란케 만들고, 그 혼란을 틈타 던전 도시에 잠입해 있는 다난교도들이 움직인다. 그리고 덤으로 레나가 가진 신성을 빼앗는다. 이것이 그들의 기본적인 목적이었다.

"근데 왜 내 신성은 안뺏으려는거냐?"

"그건 나도 잘..."

"뭐 그럼 그렇다고 치자고."

신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레나 뿐만이 아니다. 운현 역시 신성을 가지고 있지만 레나를 습격하는 것처럼 운현을 습격하는 다난교도는 아직까지 없었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레나보다 운현의 레벨이 더 낮으니 그를 잡는 것이 더 쉬운데도 불구하고 다난교는 운현보다는 레나를 공략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이것도 라닌을 만나면 해결될 일이겠지. 쩝."

"크흑...큭..."

"음... 딱히 더 물을 건 없군. 이제 슬슬 끝내볼까?"

"주. 죽일... 죽일건가...?"

"응?"

그의 간절한 말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린 후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쭉 빨고 연기를 내뿜었다.

"응. 고문은 끝."

"...."

"이제 내 취미생활의 시작이지. 그동안 너무 조용히 지냈거든."

"히이익..."

넝마가 되어버린 아돌에게 그레이터 힐을 걸어 준 후 미믹을 꺼내 미믹으로 아돌을 죽게 만들고 나서야 아돌을 해방시켜 준 운현은 미믹을 회수한 후 생각했다.

'천검자는 오늘 저녁에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고 내일 아침. 상아가 시청에 가는 때를 노려서 공격할거라고 했지. 시장 선거 때문에 움직이는 공적인 일인 만큼 사적인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그녀는 움직일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라면 상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 짱박혀 있다는 얘긴데... 누굴까?'

아돌의 시체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생각을 정리하던 운현은 담배 하나를 다 피운 후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이상함을 느꼈다.

"...어."

떨떠름한 기분을 그대로 간직한 채 운현은 발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오크 워리어의 움막. 움막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 운현은 움막 안에서 잠들어 있는 오크 워리어를 보며 당황했다.

"...왜?"

"크르..."

운현의 목소리를 듣고 깬 것일까? 잠들어 있던 오크 워리어가 천천히 눈을 뜨고 흉포한 살기를 내뿜었다. 자신의 움막 안에 들어와 있는 운현을 노려보며 커다란 몽둥이를 휘두른 그는 그것에 맞은 운현이 뒤로 밀려 밖으로 나가자 그를 따라나오며 다시 포효했다.

"카아아아아악!!"

"시끄러워!! 생각하는 중이니까 닥쳐!"

움막 밖으로 오크 워리어가 나오자마자 운현은 오크 워리어의 목을 날려버렸다. 일격에 쓰러진 오크 워리어의 시체가 바닥을 뒹굴자 운현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거지?"

어째서 이 오크 워리어가 이 움막에 있는 것이지? 아무리 운현이 팔자 좋게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오크 워리어의 발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만약 오크 워리어가 걸어서 움막 안에 들어간 것이라면 사람을 보고 극대로 경계하거나 공격을 하는 몬스터의 특성상 오크 워리어는 움막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을 발견하고 공격을 하는게 맞았다.

"왜?"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움막 안으로 들어간 그는 움막의 구석에 놓여져 있는 보물상자를 발견했다. 그것을 들고 밖으로 나온 그는 보물상자의 위에 턱 걸터 앉아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잠깐만. 잠깐만 씨발. 지금 이게 뭐가... 설마."

낮에 만났던 오크의 말. 그리고 던전에서 하루에 공급되는 마석의 양. 그리고 이 움막에서 '생성된' 오크 워리어와 보물상자.

이것이 내놓는 결론은 무엇인가. 운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과 현재 얻은 정보들을 조합하며 토해내듯 힘겹게 말했다.

"설마... 이 던전도..."

홉고블린의 서식지에서 그냥 넘어갔었던 일들이 떠오른다. 처음 갔던 홉고블린 서식지에 있던 함정. 그 함정은 분명히 해제를 했고 수많은 고블린을 잡으며 고블린 중에 함정 설치의 스킬을 가진 고블린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홉고블린의 서식지를 다시 찾았을 때 그 홉고블린 서식지에는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함정이 그대로 설치되어 있었다. 함정을 설치할 수 있을 정도의 머리가 있는 놈이라면 그런 미친 짓은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함정이라는 것은 상대의 심리를 이용하는 기술이다. 상대가 '아무것도 없다' 라고 생각하는 곳에 설치를 해야 최대의 효과를 받을 수 있는 고급 기술인 것이다. 그런 고급 기술을 쓸 정도 되는 자가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함정을 반복적으로 설치한다?

"세상에... 잠깐만. 그럼..."

운현은 침을 꿀꺽 삼킨 후 죽어 있는 오크 워리어의 시체를 노려보았다.

"이놈들도 회귀를 한다고 봐야 하는건가?"

359====================

던전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란게...?"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를 데리고 필레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들어 온 상아는 헤스티아가 조심스레 말하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적을 앞에 두고도 늘 당당하며 많은 모험가들을 이끄는 길드의 장으로서 가지던 배짱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듯한 그녀의 모습에 펠리시아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다과를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면 술이라도?"

"술 좋네. 맨정신에는 이런 얘기 못하겠어."

"그러죠."

펠리시아가 밖으로 나가자 상아는 여전히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알 수 없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헤스티아는 움찔하며 떨떠름히 물었다.

"저기... 혹시 운현 오빠의 이야기에요?"

"응? 아, 아니. 운현의 일도 일이지만... 그보다 좀..."

상아는 그녀 답지 않게 상당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는지 그녀는 볼을 긁적거리며 한참을 주저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나?"

"예? 저랑요? 글쎄요... 마법학교에 오신 적이 있으세요?"

"마법학교에는 간 적이 있지만... 그건 100년도 전의 일이라서 말이지."

"그럼 아닐거에요."

어린시절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마력의 재능이 있어 마법학교에 입학한 이후 헤스티아가 만난 외부인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인연이 있다면 마법학교에서 모두를 만났을 것이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자 상아는 한숨을 폭 내쉰 후 미야에게 시선을 돌렸다.

"거기. 미야라고 했지? 너는?"

"에? 나도 없는 것 같은데. 나도 마을에서 나간 적이 없어서. 혹시 우리 마을에 온 적이 있어?"

"아니. 네 마을의 부족장은 바운티아 라그랏슈였지? 아니. 난 아직까지 그녀를 만난 적이 없어. 이름은 들어봤지만 말야. 그녀의 마을에도 간 적이 없고."

"그럼 나도 없는데. 그 마을에서 벗어난 적이 별로 없으니까."

"그래?"

미야마저도 모르겠다고 하자 상아는 기대감을 가지고 바제트를 보았다. 하지만 바제트는 아주 명확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아 길드장님은 엘프의 숲에서 꽤나 유명하신 분이라서... 제가 만났다면 모를리 없겠죠."

"그렇겠지..."

대놓고 시무룩한 얼굴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여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현의 일로 부른 것이라 생각했는데 왜 저러는 것일까?

"왜요?"

궁금함을 참지 못한 헤스티아가 묻자 상아는 볼을 긁적거렸다. 자신 역시 기억을 아무리 뒤져도 이들을 만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녀들에 대한 친근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상아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말했다.

"너희들이 굉장히 좋게 느껴져서 말이야. 분명히 처음 만나는 건데 굉장히 호감이 가기도 하고 말야."

"...전 그런 취미는 없는데요."

"나도. 저기 엘프인 바제트라면 모를까..."

"나도 아니거든!? 무슨 소릴 하는거야!"

부끄러워하며 상아가 말하자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는 꺼림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상아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그런 그들의 행동에 필레마저도 옆으로 비켜나자 상아는 당황하며 붕붕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남자가 좋다고! 내가 말하는 건 그런게 아니야. 그냥... 뭐랄까. 자매처럼 느껴지는 것 뿐이라고!"

"전 모르겠는데..."

"나도 그래. 모르겠는걸? 바제트. 넌 알겠어?"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저도..."

"끙... 그냥 나만 느끼는 건가. 아무튼 이건 됐다고 치자. 그냥 기분 탓인가보지."

쓴웃음을 지으며 상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더 이상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하자 헤스티아를 비롯한 다른 여인들 역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간 이어진 침묵. 그 침묵을 견디다 못한 헤스티아는 미야와 바제트의 눈치를 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저기... 하실 이야기는 그게 다인가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봐도..."

"아, 아냐. 운현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 하니까 조금 기다려줘."

'올게 왔구나.'

상아가 과거에 운현과 연인 관계였고, 또 그와 보인 행동은 아직도 서로를 사랑하는 듯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티격태격거리기는 하지만 말투나 행동에 애정이 담겨 있었던 것을 떠올린 헤스티아는 마음의 준비를 내렸다.

'만약 상아 길드장님이 우선권을 주장하면서 운현 오빠의 연인들을 부정하면 어떡하지? 아니... 오빠는 인재이니까 길드에 끌어들여야 한다고 하면 어떡하지?'

운현은 뛰어난 인재다. 가진 식견이나 재주는 물론이거니와 물욕이 거의 없고 사람간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돈을 벌고자 하면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모험가들을 위해서 일하는 모험가 길드의 입장에선 이만큼 어울리는 인재는 없을 것이다.

'대의를 이야기하면서 오빠를 달라고 하면 어쩌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상아를 바라보며 헤스티아는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운현이 모험가 길드로 들어가 길드원이 된다면 그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자신들에 대한 지휘능력, 각기 다른 클래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적절히 움직여 보다 강한 몬스터를 잡을 수 있는 그 능력이라면 이런 1계층보다는 5계층의, 아직 탐험하지 못한 곳을 탐험하는데 쓰이는 것이 더 이득일 것이다.

"운현을 길드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역시나.'

예상했던 말이 나오자 헤스티아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은 미야와 바제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오랫동안 전투를 한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현은 자신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며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런 능력이라면 자신들보다는 길드나 대형 클랜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운현을 위해서도 더 좋을 것이다.

"아. 그렇다고 해서 너희들의 파티를 깨라는 것은 아니야. 그럴 권한도 없고. 너희들 모두 길드에 소속되었으면 좋겠어."

"어? 하지만 모험가 길드의 길드원이 되려면 최저 레벨이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아직 100레벨도 되지 못했는데?"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의 우울한 얼굴을 보며 상아는 당황하며 붕붕 손을 휘저었다. 그녀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미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고 그녀의 말에 필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맞긴 해요. 하지만 운현씨 정도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것을 감안해도 좋을 거에요. 일단은 준 길드원이라는 명목 하에 길드에서 지원을 할 생각이랍니다."

"그거... 운현 때문인가?"

바제트의 질문에 필레는 난처해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운현이다. 운현을 위주로 움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너희들의 레벨업도 지원할 생각이야. 아, 자존심 상해하지는 말아줘. 그냥 좋은 거래라고 생각해주면 고맙겠어. 대형 클랜의 경우 싹수 있는 모험가를 발견하면 그 모험가에게 이런 제의를 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니까 말야. 필레 같은 경우도 그런 케이스고."

"에? 정말요?"

"네. 저 같은 경우는 윈드와 함께였지만... 윈드는 제가 길드에 가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험가 직을 버렸어요. 그리고 가문으로 돌아가 수련을 쌓고 돌아왔죠. 윈드는 모험가보다는 기사가 더 자신에게 맞는다고 했으니까요."

"헤에..."

모험가 길드의 마녀라고 불리는 필레도 길드에 스카웃된 케이스였다니. 그제서야 조금 안심이 된 헤스티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오빠가 그렇게 할거라는 건..."

"그래서 너희들에게 부탁하는거야. 운현에게 이런 제안을 해봤자 그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았거든. 아무래도 그는 바깥 세상의 모험가였고, 그 모험가 생활을 할 때 어딘가에 소속되기보다는 홀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고 들었으니까 말야."

운현 정도 되는 실력자가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고 자유 모험가로 움직였다는 이야기는 그에게 들었었다. 그 탓에 신분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던 헤스티아는 상아의 제안에 차분히 눈을 감았다.

"어쩔거야?"

"화염 마법사도. 그리고 격투가도. 거기에 여러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드루이드도 길드 입장에서는 반가운 인재야. 솔직히 직업만 따지면 운현보다는 너희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길드의 입장에서는 더 좋지."

"다만 이건 명령이 아니고 제안이라는 것만 알아주세요. 싫다고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길드에 들어오는 것보다 다른 대형 클랜에 들어가는 것이 여러분께는 더 이득일 수도 있어요. 모험가 길드 소속이라면 여러가지 보상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다 합쳐도 대형 클랜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벌어들이는 수입에 비하면 크게 모자란 편이니까요."

모험가 길드의 간부급 위치까지 올라간다 하더라도 대형 클랜의 간부와 비교해 직위상으로 큰 차이는 없었다. 물론 던전 도시에 영향력이 강한 모험가 길드인 만큼 공적인 자리에서는 더 우대받을 수 있지만 사적인 자리라든가 다른 나라간의 관계, 그리고 던전 도시 바깥에 있는 다른 모험가 길드의 관계를 따지면 오히려 대형 클랜이 대접을 받는 경우도 많다.

"모험가 길드에 소속되면 다른 세력에는 소속될 수 없어요. 그건 알죠? 다른 나라의 모험가 길드나 다른 클랜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거에요."

"물론 길드원이 된다면 여러가지 이득이 있을거야. 일단 장비에서부터 원한다면 고레벨 길드원과 함께 다니며 빠르고 안전한 레벨업을 보장하겠어. 물론 이건 다른 대형 클랜의 경우도 비슷한 방법을 쓰기는 하지만 말야."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를 길드원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하면서도 상아와 필레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오히려 안좋다고 할 만한 이야기들만 꺼내고 있었다.

"길드원이 되면 이득이 뭐야?"

"압도적인 명예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지. 모험가들을 지키는 자가 되는 거야. 그것 외에는 다른 대형 클랜과 비교해서 딱히 이득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어."

미야의 질문에 상아는 딱 잘라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 미안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운현에게 가려서 보이지 않고 있지만 헤스티아나 미야, 바제트 역시 뛰어난 인재라고 볼 수 있었다.

'뛰어난 지휘관은 그 밑에 뛰어난 부하가 있어야 만들어지는 것이지.'

운현의 지휘력이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그의 지휘를 정확히 따르고 이행할 수 있을 정도라면 다른 뛰어난 지휘관 밑에서도 잘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화염 마법사인 헤스티아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300레벨이 되어 직업의 고급화가 이루어지면 빛계열의 마법도 쓸 수 있게 되는데 플래시, 분신, 그 외에 전투에 유용한 디버프 마법을 쓸 수 있으니 더욱 그랬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 뿐이야. 어때?"

"자세한 것은 이 팜플렛을 봐주세요."

간단한 소개는 끝났고 길드원이 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특전이나 임무, 보상 등이 자세하게 적힌 팜플렛을 건네 준 필레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선택은 그녀들의 몫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강요는 하지 않겠어. 어떻게 보면 손해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말야."

"흠..."

팜플렛을 빠르게 읽어 본 바제트는 살짝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렸다. 던전 도시를 지탱하는 네개 조직 중 하나인 모험가 길드의 소속 치고는 상당히 짠 보상이 적혀 있는 것을 보며 바제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답변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운현에게 물어보려고?"

"네."

어쨌든 파티의 리더는 운현이다. 그리고 운현을 따르는 자신은 운현의 결정에 몸을 맡길 뿐이다. 헤스티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미야와 바제트 역시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팜플렛을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그 전에 저도 한가지 여쭤 볼 게 있어요."

"뭔데?"

"운현 오빠와... 진짜 연인 사이였어요?"

"어... 그게."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헤스티아의 곧은 시선에 상아는 어쩔 줄 몰라했다. 그녀가 망설이자 필레는 한숨을 내쉰 후 떨떠름히 말했다.

"아니에요."

"에? 정말요?"

질문을 한 헤스티아는 의외라는 얼굴로 필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필레는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쉰 후 말했다.

"여러분이 잡으신 그 몬스터에게서 얻은 코어에 대해 숨기기 위해서였어요. 본의 아니게 여러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려서 죄송... 왜 그런 표정인가요?"

상아라는 강력한 이가 적이 아니었다는 것에 기뻐할만 했지만 헤스티아의 얼굴은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아니, 그녀 뿐만이 아니라 미야와 바제트 역시도 복잡스러운 표정을 짓자 필레는 당황했다.

"어... 그럼."

"운현이?"

"왜?"

그녀들의 반응을 보며 상아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고 바제트는 무척이나 떨떠름한 어조로 조용히 답했다.

"운현은... 당신을 아직도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그럼 그게 거짓... 이라는 건가? 하지만 너무 진실 같았는데."

"맞아요. 오빠가 거짓말을 할리가 없어요."

"내가 보기에도 그래. 운현은 숨겼으면 숨겼지 우리에게 거짓을 말할 사람이 아니라고. 솔직히 말해."

"상아 길드장님. 이 말이 진짜에요?"

"어? 어어? 아, 아닌데!?"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운현과 만난 적은 없었다. 친분한 감정이나 익숙함은 운현보다는 오히려 이 셋에게 더 느끼고 있는 상아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을 때 길드장실의 문이 열렸다.

"길드장님."

"어? 펠리시아. 왜?"

"잠깐 나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인데?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용병 연맹의 연맹장이 바뀌었어요. 아르토리우스. 그녀가 티르빙을 쓰러트리고 용병 연맹의 장이 되었어요 거기에..."

펠리시아는 힐끔 주변을 둘러보았다. 헤스티아나 미야, 바제트가 있다는 것에 그녀가 망설이자 상아는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들어 흔들었고 그 답변에 펠리시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시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어요. 그리고 그녀 뿐만 아니라 윈디아 시장도 재선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구요."

"...이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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