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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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
"우선 해야 할 일은 다난교의 증거를 찾는 일이겠군요."
"네..."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앉아 있는 레나를 바라보며 운현은 조금의 걱정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조금 발끈한 레나는 그를 바라보며 날 선 어조로 말했다.
"이게 다 다난교 때문이에요."
"그렇겠죠. 자... 일단 지원은 없다. 그리고 레나씨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저 뿐이군요."
"운현씨도 위험하실텐데..."
다난 교에서 레나를 노리는 이유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신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신성은 운현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레나나 운현이나 누군가에게 목숨이 노려지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저는 신경쓰지 않으셔도 좋아요. 일단 저는 제 한몸 정도 지키는 일은 어렵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빨리 다난교에 대한 처리를 해야 레나씨나 저나 맘 편하게 발 뻗고 잘 수 있겠죠."
"운현씨..."
운현이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말에 레나는 감동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면 운현은 그저 말려들었을 뿐인데도 그는 스스로 위험을 감당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제가 더 이상 드릴 수 있는 것은 없는데..."
"괜찮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당신이 있음으로서 난 좀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거든.'
레나는 보험이다. 다난교가 자신을 노리며 본격적으로 깽판을 치기 시작한다면 던전 도시의 중진들이 다난교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수 있겠지만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레나를 미끼로 써먹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운현의 속셈을 알 수 없는 레나로서는 고맙고, 또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분명 운현의 행동을 보면 자신이 손해를 보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기사가 되는 것을 딱 잘라 거절하고 있었다.
"저기... 운현씨."
"네?"
"이, 이렇게 말씀드리긴 좀 그렇지만... 저 어때요? 여자로서..."
나름 외모나 몸매에도 자신이 있었던 레나는 애써 유혹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운현은 빙긋 웃은 후 차분히 말했다.
"무척이나 아름답고 매력적이시네요."
"...그런데 왜 자꾸 거절하시는 거에요!? 아니, 진짜 궁금한게... 왜 저한테 잘해주세요? 이해할 수가 없네요."
여성으로서의 유혹도, 그리고 기사라는 높은 신분도. 모두 거절하는 주제에 운현은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레나가 당황하며 묻자 운현은 볼을 긁적거린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저 선의라는 걸로는 안되는 건가요?"
"그렇지만 운현씨는 모험가잖아요."
"그렇죠."
"제가 지금까지 만났던 모험가들은 자신의 이익이 없으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구요. 당장 모험가 길드만 봐도 그렇잖아요. 명분과 이유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고... 그런데 운현씨가 이렇게까지 절 도와주시는 이유가 뭔가요?"
그녀의 말에 운현은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레나는 침을 꿀꺽 삼켰고 운현은 눈을 감고 생각을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저도 궁금하네요. 이유가 중요한 건가요?"
"...그, 그건."
"정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전 여기서 손을 떼겠습니다."
"아앗! 아, 안돼요!"
괜한 얘기를 꺼내 운현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아닌가 싶다. 운현의 차분한 목소리에 놀란 레나는 당황하며 붕붕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은 운현은 테이블을 톡톡 친 후 말했다.
"가장 큰 이유는 뭐... 저의 안전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저에게도 신성이 있는 이상 다난 교에 대한 처리를 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쫓길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목 뒤에 칼을 가져다 대고 편하게 잘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리고 뭐, 속물적인 이유를 대라면... 약간의 책임?"
"네? 책임요?"
"네. 비록 본의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레나님의 처녀성을 앗아간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룬다고 생각하는 거죠."
"본의는 아니었다... 에휴. 알겠습니다. 운현씨. 운현씨께는 늘 죄송스러울 뿐이네요."
운현이 자신의 처녀성을 앗아간 것도 자신들을 구하다가 사고가 일어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꿋꿋히 그 책임을 회피하기보다는 책임을 지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 남자답지 않은 사람이야...'
책임감은 개나줘버리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다른 남자들과 달리 운현은 자신의 행동과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아는 남자였다. 그런 그에게 마음이 이끌리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레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그에게 끌려봤자 똑같은 결과만 나올 것이 분명했다.
"하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었던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는 것에 레나가 풀죽은 목소리로 묻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지원군따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운현에게 있어서 특별히 바뀔 것이 없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 운현이 움직이는 것에 있어서는 더욱 좋은 일일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죠. 다난 교가 던전 도시에서 하는 일에 대한 증거를 찾는데 힘을 쏟는 수 밖에. 일단은 제 레벨이 낮은 만큼 레벨을 올리는데 집중해야겠네요."
"운현씨... 레벨이 낮아요?"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제 레벨은 그리 높지 않은데요."
그때 동굴에서 보인 운현의 무력을 생각하면 그의 레벨이 낮다는 것은 정말 믿어지지 않았지만 운현은 모험자카드를 레나에게 보여주었다. 자신보다 훨씬 낮은, 100 레벨조차 되지 않는 것에 레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럼 운현씨가 돌아다니는 것도 위험하잖아요!"
"전투, 그리고 행동은 레벨이 다가 아니죠. 레벨을 메꿀 정도의 경험이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하지만..."
"자.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일단 전에 보여주셨던. 던전 도시 내에 있는 다난 교의 위치를 저에게 주세요. 그리고 다른 정보들도. 그동안 모아 놓으신 것이 있지 않나요?"
"그것은 성당에 있는데..."
"그럼 바로 가도록 할까요?"
굳이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 자리에서 일어난 운현은 레나와 함께 곧장 파르티 교단의 성당으로 향했다. 레나가 길드로 복귀하며 잠구고 나온 성당의 문 앞에 선 레나는 열쇠를 꺼내 성당의 문에 꽂았다.
"어라?"
"왜요?"
"왜 문이 열려 있지...?"
분명히 잠구고 나왔었는데 걸쇠는 풀려 있었다. 그것에 당황해하면서도 레나는 조심스레 문의 손잡이를 잡았고 그 순간 운현은 성검을 꺼냈다.
"뒤로 물러나세요."
"예? 꺄악!"
레나의 뒷덜미를 잡고 뒤로 강하게 당긴 운현은 문틈에서 날카로운 검이 튀어나오자 그것을 쳐낸 후 성당의 문을 거칠게 걷어찼다. 강력한 힘이 실린 발차기에 성당의 문이 부숴지며 문 뒤에 숨어 있던 이의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으아악!"
"여기까지 온건가..."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성당의 내부에서 하나 둘 씩 검광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지기 시작한 석양의 빛이 창을 통해 비춰지며 성당의 내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된 운현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성검을 들어 그들에게 겨눴다.
"누구냐."
"...죽여라."
지휘관이라고 생각되는 이의 싸늘한 말에 여섯의 검은 사제들이 움직였다. 날개를 지니지 않은 그들이 달려드는 것을 보며 운현은 한걸음 앞서 나가며 레나에게 외쳤다.
"지원 부탁드립니다!"
"아, 알겠어요! 파르티시여. 당신을 따르는 종에게 힘을 주소서! 블레스!"
빠르게 주문을 완성시킨 레나는 운현을 향해 축복을 걸었다. 자신의 몸에서 은은한 백광이 퍼지기 시작하자 운현은 자신의 목을 노리는 검을 왼손의 암가드로 막아낸 후 오른손에 들려 있는 성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크앗!"
첫번째로 달려든 검은 사제의 가슴이 벌어질 정도의 깊은 상처가 만들어진 순간 이어서 검은 사제 둘이 운현을 향해 검을 뻗었다. 시퍼런 검날이 자신에게 날아드는 것을 암가드로 쳐낸 그가 다시 검을 휘둘렀을 때 두 검은 사제는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비명횡사해버렸다.
"세상에. 운현씨! 괜찮아요!?"
순식간에 셋이나 되는 적을 쓰러트려버린 운현의 실력에 레나는 당황했다. 저게 진짜 20레벨의 모험가가 보일 수 있는 능력이란 말인가. 척봐도 100레벨은 넘어보이는 검은 사제들을 너무나도 여유롭게 운현이 제압하자 레나는 그를 향해 외쳤다.
"보시다시피 별 문제는 없습니다. 지원이 굉장하군요. 이정도 힘을 내게 할 줄이야."
"예? 하, 하지만 이정도는..."
"다른 지원도 부탁드립니다! 저자는 보통이 아닌 것 같으니까요!"
"알겠어요! 파르티께서 함께 하시길. 그에 따른 당신의 죄는..."
블레싱보다 더 좋은 지원 마법을 쓰려는 것인지 레나가 블레싱보다 더욱 긴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검은 사제들을 이끄는 이는 당황한 얼굴로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세 검은 사제와 함께 협공이라도 하려는 듯 거리를 재며 성당 입구에서 나온 그녀는 운현을 노려보다가 눈을 빛내며 싸늘히 말했다.
"네놈! 신성을 가지고 있구나!"
"신께서 그대를 보호하시리라! 갓 오브 파워!"
운현과 레나에게 신성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가 욕망에 가득 찬 눈을 빛내며 입술을 핥은 순간 레나는 긴 주문을 끝내고 마법을 완성시켰다. 블레싱보다 더욱 강렬한 빛이 운현의 몸에서 터져나오자 검은 사제들은 이를 갈며 운현에게 달려들었다.
"잡아라!! 절대 죽여선 안된다!"
만약 레나나 운현이 검은 사제의 손에 죽게 되면 그들이 가진 신성이 검은 사제들에게 넘어가버린다. 신성을 가지고 싶었던 그녀는 자신의 부하들이 레나와 운현을 죽이지 못하게 외쳐버렸고 그녀의 외침에 검은 사제들의 검이 순간 무뎌져버렸다.
"멍청이."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국에 치명타는 날리지 않겠다고? 탐욕은 화를 부르는 법.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검격을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쳐낸 운현은 검을 당긴 후 검은 사제의 리더를 향해 빠르게 당겨진 검을 찔러 넣었다.
"소드 스피어."
"컥!!"
검사 20레벨때 습득할 수 있는 스킬인 소드 스피어가 운현의 검에서 발동되었다. 검에 맺혀 있는 푸른색 오러가 창날처럼 길어지며 자신에게 날아들자 검은 사제의 리더는 빠른 스킬에 놀라며 옆에 있는 부하를 잡아 자신의 앞에 세웠다.
"대...! 컥!"
"크억!"
"히야~ 프렌즈 쉴드를 쓸 줄은 몰랐네."
"이... 이런 위력이..."
부하의 가슴을 뚫은 푸른색 오러는 정확히 검은 사제 리더의 심장을 꿰뚫었다. 저레벨의 스킬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그 강력한 위력에 검은 사제의 리더는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며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네놈은..."
"운현씨! 괜찮아요!?"
"네. 레나님은요?"
"저도... 그보다 이들은 도대체..."
"다난교의 습격이군요. 다행입니다. 레나님이 이곳에 계속 계셨더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다난교가 성당까지 들어왔을 줄이야. 레나는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죽어있는 다난교의 사제들을 살폈다. 하나같이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그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응시하던 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운현에게 말했다.
"운현씨. 어서 방으로 가봐요."
"그게 낫겠군요."
던전 도시에 있는 다난교에 대해서 조사해 놓은 자료들을 저들이 처분했다면 큰일이다. 레나는 운현과 함께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집 같았던 성당에서 주의를 기울이며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무척 슬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꿀꺽."
긴장하며 침을 삼킨 레나가 방문을 잡으려 하자 운현은 그녀를 말리며 뒤로 당긴 후 직접 문을 열었다. 별다른 저항 없이 문이 열리고 난장판이 된 방이 보이자 레나는 우울한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제 방도 뒤졌나보네요."
"매너따위는 찾아 볼 수 없군요. 자료들은 무사한가요?"
"숨겨 놓기는 했는데... 잠시만요."
방의 구석에 있는 비밀 벽을 눌러 본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벽 안에 있는 작은 비밀 금고는 열린 흔적이 없었다. 그것에 만족해하며 그녀가 금고를 열려는 순간 운현은 그녀를 잡은 후 말했다.
"만약을 대비해야겠군요. 뒤로 가 계세요."
제니스에게 받은 팔찌를 착용한 후 운현은 심호흡을 하며 금고의 문을 열었다. 만약 자신이라면 이 금고에 폭탄을 설치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레나에게 쉽게 맡길 수 없었던 것이다.
'레나는 나중에 써먹어야 하니 이런 곳에서 날려먹을 수는 없지.'
책략의 기본은 마음의 틈을 공략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생각하며 방심했을 때가 바로 이런 때라고 할 수 있었고, 상대가 책사인 이상 이런 대응은 수많은 책략가들을 상대했던 운현에게 있어서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철컥."
"콰아아앙!!"
"앱솔루트 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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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
오른손에 착용된 팔찌에서 빛이 뿜어지며 커다란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운현의 기력과 마력을 모두 뽑아낸 강력한 방어막은 발동된 폭탄의 폭발에도 그들을 안전히 보호할 수 있었다.
"아아아... 운현씨!"
"흠."
마력과 기력이 전부 소모되기는 했지만 앱솔루트 쉴드 덕분인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폭염에 의해 완전히 타버린 방을 보며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쩐지 약해 빠진 년들만 보내더니... 아직 한번 더 있을 지도 모르겠군.'
"하하하하!! 드디어 찾았다!"
폭발로 인해 뻥 뚫린 벽 너머에서 검은 날개를 가진 여인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 운현은 무덤덤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이제 없냐?"
"뭐?"
"라닌이 숨긴 수는 이게 끝이냐고."
"흐흐흐... 간이 부었구나. 자... 너희들의 신성을 내놓아라."
길고 날카로운 창을 든 검은 날개의 사제가 자신들을 향해 창을 겨누는 것을 보며 레나는 굳은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만약 운현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저 여자에게 죽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증오심이 들끓는다.
"운현씨!"
"이거 큰일이네요."
"네?"
"아, 아까 그 마법은 제 마력과 기력을 전부 써서 발동된 것이거든요."
"그, 그럼..."
검은 날개를 가진 사제는 다난교에서도 요직에 있는, 이른바 간부라고 할 수 있는 이들 뿐이다. 그런 이를 상대하는데 기력과 마력이 없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큰 일이 일어날 수도 잇다는 것이기에 레나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굳은 얼굴로 말햇다.
"운현씨."
"네?"
"도망가주세요. 제가 최대한 막겠습니다."
"에. 가능하시겠어요?"
"...제 한 목숨을 버린다면 저 자를 잡을 수 있겠죠."
회복 및 지원형 캐스터라고 할 수 있는 레나와 저 창잡이 검은 날개의 상성을 따진다면 확실히 레나가 밀린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운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나섰다.
"항상 고마웠습니다. 운현님께 몇번이나 감사 인사를 드려도 모자랄 것 같아요."
"아니... 뭐."
"이번에는... 제가 운현씨를 지켜드리겠어요."
눈을 번뜩이며 레나는 한걸음 앞서 나서며 허공에 있는 여인에게 외쳤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 비니스나. 다난을 따르는 충실한..."
"홀리 스트라이크!!"
다 잡은 먹잇감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자신의 이름을 밝히던 비니스나를 향해 레나는 빠르게 손을 내밀며 몰래 외워 둔 주문을 발동시켰다.
"이년이!?"
흰색의 빛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비니스나는 당황하며 창을 들어 그 기운을 막았다. 공중에서 밀려날 정도로 강력한 위력에 비니스나가 당황하는 동안 다음 주문을 완성시킨 레나는 소매에서 꺼낸 단검을 비니스나에게 겨눴다.
"파르티님의 진노가 내려올지니!! 낙월!"
"아아악!!"
꽤 강력한 마법인가보다. 석양이 지며 생겨난 약한 달빛이 모여 레나의 단검에 집중되었고 그 순간 그 달빛은 강력한 레이저가 되어 비니스나의 어깨를 관통했다. 홀리 스트라이크에 맞아 휘청거리던 비니스나가 땅에 떨어진 것을 본 레나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운현에게 다급히 외쳤다.
"도망치세요!!"
"이정도면 잡은 것 아닌가요?"
"전 전투 사제가 아니라서... 이제 쓸 수 있는 공격 마법은 얼마 없다구요!"
"이녀어어어언!!"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어깨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비니스나는 헝크러진 자신의 보라색 머리를 쓸어넘기고 레나에게 창을 겨눴다. 창 끝에 집중되기 시작한 보라색 기운에 레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스파이럴!"
"홀리 실드!!"
창에서 터져나온 기운과 레나가 만들어낸 보호막이 힘겨루기를 시작한다. 뒤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레나가 밀리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던 운현은 어깨를 으쓱일 뿐 그녀의 말대로 피하지 않았다.
"운현씨!! 윽!"
운현이 피하지 않는 것에 놀라며 레나는 다급히 외쳤다. 그것에 집중이 흐트러졌는지 보호막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레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챙그랑!!"
"아아악!!"
결국 홀리 실드가 깨어지며 비니스나의 공격은 레나의 어깨를 관통했다. 그 충격에 레나가 바닥을 구르자 비니스나는 씩씩거리며 악귀같은 얼굴로 창을 들었다.
"개년아!!"
"아악!"
창대가 움직여지며 강한 기운이 레나의 몸을 후려쳤다. 그것을 피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맞아버린 레나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자 비니스나는 침을 퉤 뱉은 후 다시 창에 힘을 주었다.
"세상 다 살아도 네년은 오늘 죽는다... 아니, 어차피 다 죽일 거지만 말야."
살벌히 웃으며 다가 온 비니스나는 고통에 헐떡거리는 레나를 향해 날카로운 창끝을 겨눴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운현이 천천히 성검을 겨누자 비니스나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운현을 보았다.
"네놈은 얌전히 있어. 이년을 잡고 나면 네놈 차례니까."
"헤에... 꽤나 자신감이 넘치는군."
"그럼? 아까 보아하니 검자의 팔찌를 쓴 것 같은데... 앱솔루트 쉴드를 쓰느라 기력과 마력이 바닥난 것 아닌가? 하... 그런 주제에 이 창왕 비니스나님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오오... 창왕이라는 이름까지 가지고 있었어? 이거 대단하군."
창왕이라. 과거에는 듣지 못했던 이름이다. 운현이 알고 있는 강자는 단 하나. 천검자 뿐. 그렇다면 그리 경계를 해야 할 정도로 강한 이는 아닐 것이다.
'티르빙 정도에 불과하군.'
티르빙 정도면 던전 도시에도 손꼽힐 만한 강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운현에게 있어서는 가소롭기 그지 없는 상대에 불과했다. 그런 주제에 잘났다고 눈깔을 쳐들고 떠들어대는 꼴이라니.
"흥!!"
"웁쓰."
운현이 검을 거두지 않자 비니스나는 가소롭다는 듯 운현에게 창을 휘둘렀다. 창에 실려 있는 보라색 기운이 자신에게 날아들자 운현은 성검을 움직여 그 공격을 빗겨 흘려내었고 그것을 본 비니스나는 당황하며 그를 보았다.
"네놈... 무슨 짓을 한거냐."
"적당히 흐름을 끊은 거지... 어디보자."
"으읏!?"
발을 굴러 운현이 튀어나와 자신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그 속도에 놀란 비니스나는 레나를 공격하려던 것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단 일격만으로 그녀를 물러나게 한 운현은 레나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해버린 것을 보고 빙긋 웃었다.
"이거 좋구만."
"뭐?"
"아니, 이 여자의 정신이 멀쩡하면 꽤 골치가 아팠거든."
어깨를 으쓱이며 무덤덤히 말한 운현은 가볍게 검을 돌린 후 비니스나에게 척 겨눴다. 단지 검이 겨눠진 것 뿐이다. 마력도 없고 기력도 바닥난 상대다. 그런데 저 여유는 뭐란 말인가.
"네놈... 네놈 정체가 뭐냐."
"그건 댁이 알바가 아니고... 라닌이 보내서 온거냐? 아니면 카야가 보내서 온거냐."
"...지옥에 있는 카를로스에게 물어보시지!!"
운현의 질문에 비니스나는 이를 드러내며 운현에게 뛰어들었다. 창왕이라 불리는 자신이 저런 허접한 검사에게 위축되었던 것이 상당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강맹한 기세를 마구 흩뿌리며 달려드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레나를 잡고 뒤로 훌쩍 뛰었다.
"하! 도망치는 거냐!?"
"아무래도 내가 상대하기는 힘들 것 같아서 말이지. 네 말대로 기력도 없고 마력도 없는지라. 그럼 튀는게 정답 아니겠어?"
"놓칠 성 싶으냐!"
"놓칠 것 같아."
히죽 웃은 운현은 비니스나가 다시 달려들자 바제트에게 받았던 연막탄을 바닥에 강하게 던졌다.
"으윽!"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막이 시야를 가리자 비니스나는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창을 마구 휘둘렀다. 하지만 그녀의 창은 허공을 찌르기만 할 뿐 운현과 레나를 공격할 수 없었다.
"제기랄!! 이 개자식!! 어디로 도망간거냐!!"
창을 마구 휘둘러 뿌연 연기를 날려버린 그녀는 운현과 레나가 사라져 있는 것에 분통을 터트렸다. 다 잡은 먹잇감을 놓쳐버리다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푸슉!"
"아아아아!! 이 개새끼... 컥!?"
"푸슉! 푸슉!"
"커억! 컥...!!"
바람빠지는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배가된다. 복부와 어깨, 다리에서 흐르는 피와 엄청난 고통에 비니스나는 당황하며 자신을 공격한 이를 찾으려 해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개자식..."
"푸슉! 푸슉! 푸슉!"
또다시 들려 온 바람 빠지는 소리. 결국 몸에 바람구멍이 송송 뚤려버린 비니스나는 출혈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막대한 출혈량. 바닥이 흥건해 질 정도로 많은 피가 흘러나오는 것에 비니스나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의식을 잃지 않으려 했다.
"끄으...으으으..."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결국 막대한 출혈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창을 떨어트리고 그녀가 정신을 잃자 하이딩을 건 채 그녀를 지켜보던 운현은 손에 들려 있는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열발이나 맞춰야 기절할 정도인가.'
현실에서 장대인에게 밀수로 얻은 권총에 소음기를 달아 지근거리에서 쏘았는데도 생각보다 데미지는 얼마 되지 않은 듯 했다. 어지간해서는 네 다섯발이면 다 죽을 텐데.
'레벨은 무시 못하는구만. 하긴... 라티나도 한발 맞았지만 기별도 안갔지. 그보다... 이정도면 됐겠지?'
앱솔루트 쉴드를 쓰느라 마력이 모두 날아가버린 탓에 레나가 싸우는 동안 회복된 마력으로는 하이딩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건물의 옆 보이지 않을 정도의 구석에 눕혀 놓은 레나를 힐끔 본 운현은 하이딩을 풀고 마력을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으이구."
인벤토리에서 힐링포션을 꺼내 레나의 상처를 치료해 준 운현은 미믹맨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터덜터덜 쓰러져 있는 비니스나를 향해 걸어갔다.
총을 열방이나 맞았는데도 고통과 출혈 때문에 기절만 했을 뿐 아직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를 들어 인벤토리에서 꺼낸 캡슐 안에 집어 넣은 그는 빠르게 콘솔을 조작해 비니스나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빼내기 시작했다.
'흐음... 여긴가.'
비니스나의 정신을 고문하여 그녀의 정신을 무너트리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파악하던 운현은 던전 도시 내에 위치하고 있는 다난교의 흔적들이 콘솔창에 떠오르자 그것을 파악하며 자신의 지도창에 표시하기 시작했다.
'역시 라닌에 대해서는 없는건가. 이정도로 정보가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그년이 뭔가 개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다난교의 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이들의 정신을 고문해서 정보를 빼내었지만 라닌에 대한 정보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찾아낼 수 없었다. 이름, 그리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다난교에서의 위치. 그것 외에는 그녀에 대해서 찾아낼 수 없었던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쉰 후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잡았다.
"그만 쳐다보고 나오지 그래?"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네년이 나오길 기다렸지."
비니스나가 등장했을 때부터 누군가가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다는 기척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숨은 후 미믹맨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왔던 운현은 건물 뒷편에서 걸어나오는 여인을 보며 물었다.
"나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십니다."
"호오. 날? 누가? 너희 빌어먹을 다난의 갈보년들과 할 이야기는 없는데 말야."
싸늘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녀, 상인 조합의 간부이자 다난이 파견한 다난교의 인물인 레밍은 운현을 향해 작은 편지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이 종이에 적혀진 장소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당신께 이득이 되었으면 이득이 되었지 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이곳에 올 줄 알고 있었던 것인가?"
운현의 질문에 레밍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의 목표 중 하나를 잡으러 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기계 안에 있는 이를 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우연이라고 봐야하나...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으니 일단 경계는 해야겠군.'
미믹맨이 운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운현은 생각보다 자신을 빠르게 찾은 레밍을 보며 경계하며 물었지만 레밍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답변을 꺼내었다. 그런 대답을 한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던 운현은 캡슐의 작동을 정지시킨 후 캡슐을 열어 비니스나를 꺼내었다.
"으으으..."
정신의 고문이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정신이 파괴되지 않은 탓에 비니스나는 고통스러운 신음성을 토해내었다. 운현이 순순히 비니스나를 내어 줄 것처럼 보이자 레밍은 밝게 웃으며 품에서 커다란 보석을 꺼내었다.
"이 보석이라면 적어도 천만 골드는..."
"툭."
"......"
레밍을 웃는 눈으로 바라보며 운현은 검을 휘둘러 비니스나의 목을 베었다. 그녀의 머리가 몸과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지자 레밍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았고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즐겁다는 듯 키득거리며 무척이나 느긋하고 여유로운 어조로 말했다.
"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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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
"......."
비니스나를 죽이고 당당하게 서 있는 운현을 바라보며 레밍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창왕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리다니. 이 결과를 어떻게 보고해야 한단 말인가.
"편지 놓고 꺼지시게나."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자신들에게 더 잘된 일일 수도 있었다. 창왕 비니스나는 다난교 내부에서도 상당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런 그녀를 저렇게 간단하게 제압하고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자가 자신들의, 라닌과 손을 잡게 된다면 다난 교를 완전히 장악함과 동시에 다난의 뜻을 세상에 퍼트릴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전에 한가지 더 부탁을 드리고 싶..."
"헤에. 부탁? 부탁 좋지. 난 또 거절할 수 있고 말야."
빙글. 가볍게 검을 돌려 비니스나의 피가 잔뜩 뭍어 있는 검에서 피를 흩뿌린 운현은 레밍을 향해 검을 겨눈 후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움찔한 레밍은 주춤거리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아, 아닙니다."
"그럼 됐고. 몸 조심하라고. 뒤통수도 조심하고. 언제 칼 맞을지 모르니까 말야."
즐겁기 그지 없다는 목소리로 사람 속을 벅벅 긁어 놓는다. 레밍이 바닥에 편지를 놓고 자리에서 벗어나자 그 편지를 주워 든 운현은 편지를 열어본 후 어깨를 으쓱였다.
"허... 삼일 후에 시청의 앞에서 만나자라."
그렇다면 그토록 자신의 정체를 숨겨 온 라닌을 삼일 후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인가. 운현은 만족스럽게 웃은 후 레나를 숨겨둔 곳으로 이동해 그녀를 쌀가마니 들듯 주워들어 자리에서 벗어났다.
"으으음..."
"정신이 좀 들어요?"
살며시 눈을 뜬 레나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운현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키려다가 어깨에 남아 있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괜찮으니까 좀 더 누워 있어요. 힐링 포션을 발라 놓기는 했지만 다 치료가 된 것 같지는 않으니까."
"에...에에!?"
그제서야 자신이 운현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레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살며시 고개를 돌린 그녀는 현재 위치가 중앙 분수대 공원의 벤치 위라는 것을 알고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그 여자는 어떻게 됐나요!?"
자신을 공격한 검은 날개의 다난교도를 떠올린 레나는 다급히 물었지만 운현은 살며시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는 것만으로 레나를 안심시킬 수 있었다. 들썩거리던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을 느낀 레나는 운현의 손길에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어찌어찌 도망은 쳤습니다. 그래도 상처를 입혀놨으니까 추격은 없겠죠."
"운현씨가?"
"네."
"어떻게요?"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었던 강자였다. 그런 강자를 고작 20레벨에 불과한 운현이 쓰러트릴 수 없다고 생각한 레나는 기겁하며 물었고 운현은 쓰게 웃으며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게 뭔가요?"
"모험을 하다가 얻은 마법 아이템입니다. 강력한 기운이 담겨 있는 1회용 마법구지요."
"1회용이라는 것은... 운현씨. 설마 저 때문에 귀한 마법 아이템을 써버리신 건가요?"
"어쨌든 레나님은 중요한 분이니까요."
"운현씨..."
도무지 이 남자의 속을 알 수가 없다. 그 정도 강자를 물러나게 할 정도로 강력한 마법구라면 그 가격도 보통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망설임없이 써버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운현씨... 매번 죄송하네요."
"별 말씀을. 자. 여기요."
힐링 포션의 뚜껑을 딴 운현은 레나를 살며시 들어 올린 후 그녀의 상처에 발라준 후 남은 힐링 포션을 그녀에게 주었다.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힐링포션을 멍하니 바라보던 레나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작게 중얼거렸다.
"저 정말 민폐네요... 자료도 빼앗기고...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고..."
"아니에요. 레나님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됩니다."
'어쨌든 최후의 보험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야.'
레나의 시무룩한 기분을 풀어주려 운현은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를 달랬다. 그의 말에도 우울해하던 레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굳은 얼굴로 운현에게 말했다.
"어서 돌아가야겠어요."
"그렇게 하시죠. 비니스나를 상대로 도망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위험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성당까지 공격을 해버린 이상 계속 바깥에 있는 것은 안전한 행동이 아니었다. 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그녀를 데리고 모험가 길드 안으로 들어왔다. 그제서야 안심을 할 수 있었던 레나는 운현의 손을 살짝 잡은 후 허리를 숙였다.
"운현씨. 항상 절 지켜주시고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매번 이렇게 인사를 드리는 것 외에는 제가 해드릴 수 있는게 없어서 가슴 아프네요. 만약 교단 내부의 일이 정리가 된다면 운현씨에게 파르티 교단의 많은 지원을 약속드릴게요."
"그런 것이라면 저에게도 감사할 따름이지요. 이 일이 정리가 된다면 다시 모험을 해야 하니까요. 파르티 교단의 지원이 있다면 제 일도 조금은 편해지겠군요."
"반드시 그렇게 되게 만들겠어요!"
기운찬 목소리를 내며 레나는 운현을 향해 굳게 약속했다.
"후으..."
"배고파라..."
"어라? 운현. 넌 쉬지 않은거야? 왜 아직도 갑옷을 입고 있어?"
레나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에서 동료들이 내려왔다. 깔끔하게 샤워까지 마치고 편한 옷으로 갈이입은 그녀들이 내려오자 운현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그녀들을 불렀다. 그에게 다가 온 여인들은 운현이 아직까지 갑옷조차 벗고 있지 않은 것에 의아해하며 물었고 그녀들의 질문에 그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 일이 있었거든. 그보다 다들 푹 쉬었어?"
"네."
"배고프다... 아직 식사 안했지?"
"피곤할텐데 너도 얼른 먹고 가서 쉬는게 어때?"
"음... 난 아직 괜찮아. 자. 일어난 김에 다들 정산 받으러 가자. 아마 깜짝 놀랄거야."
장난스럽게 웃으며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랄만한 일이라니? 그녀들이 의아해하며 자신의 뒤를 따라오자 운현은 사무소 앞으로 가 사무소를 담당하고 있는 길드원에게 말했다.
"운현입니다. 제니스씨를 불러주시겠어요?"
"아.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이미 이야기가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길드 사무소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니스가 나오자 운현은 자신의 뒤에 있는 동료들의 모험자 카드를 받아 자신의 것과 합쳐 제니스에게 내밀었다.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이번에 획득하신 코어를 운현씨와 헤스티아씨, 미야씨, 바제트씨의 레벨업에 사용하시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시는 건가요?"
"괜찮지?"
"응. 빨리 레벨을 올리고 싶으니까."
"저도요."
"나도 불만 없어."
상아의 강함, 그리고 매번 운현에게 신세를 진다는 생각 때문인지 헤스티아와 미야, 그리고 바제트는 코어를 레벨업에 쓰자는 운현의 제안에 모두 동의했다. 그녀들의 말에 빙긋 웃은 운현이 제니스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 그리고 운현의 모험자 카드를 장치에 넣은 후 작동시켰다.
"우우우우우웅!!"
"이게 무슨 소리야!?"
"누가 돈지랄 한겨!?"
모험자 카드의 레벨이 올라가며 나는 소리에 사람들이 놀라며 쳐다보기 시작하자 운현을 제외한 운현 파티의 인물들은 당황했다. 상아가 특별한 몬스터라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한참동안이나 시끄럽게 울리던 기계가 작동을 멈추자 제니스는 운현에게 네장의 모험자 카드를 돌려주었다.
"축하드려요. 바제트씨는 87레벨.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85레벨이 되셨군요."
"세상에!?"
"맙소사..."
"우, 운현!? 이게 어떻게 된거야?"
"나... 나도 모르겠는데? 레벨이 많이 오를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정도라니... 제니스씨! 이게 어떻게 된건가요!?"
당황한 동료들의 외침에 운현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제니스에게 물었다. 그를 잠시 바라 본 제니스는 몰려들기 시작한 모험가들을 힐끔 본 후 생긋 웃었다.
"이번에 발견하신 코어 덕분인 것 같군요."
"세상에... 확실히 이상하긴 했는데..."
"무슨 일이야!?"
"이봐! 제니스씨! 우리에게도 말해달라고!"
"끄응... 사실은 말이죠. 여기 운현씨 파티가..."
"무슨 소란들이야!!"
길드 사무소 앞에 모험가들이 몰려들어 소란을 피우자 사무소 안에서 사나운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상아와 펠리시아, 그리고 상아의 호위라고 할 수 있는 파르티 교단의 성기사, 에리스였다. 그녀들이 나오자 모험가들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하나같이 외쳤다.
"지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고!!"
"어이! 이봐! 운현! 당신 혹시 무슨 왕족이나 그런거야? 높은 계층 몬스터의 코어라도 사서 레벨업을 한거야?"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다른 사람들도 레벨이 확 올랐다잖아!"
"설명해봐! 도대체 뭐야!?"
모험가들의 기세등등한 외침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고 제니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험가들의 흥분에 가득 차 있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에 상아는 골치가 아팠는지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일단 다들 사무소에서 떨어져. 자세한 사항은 공지할테니까!"
"우우!! 뭐야!"
"솔직히 말해!"
"정보를 독점할 생각하지 말라고!!"
일단 혼란을 잠재우고자 상아가 외쳤지만 그것은 불난 곳에 기름을 뿌리는 행위와 같았다. 모험가들이 누구인가. 레벨을 올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움직이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정보는 돈을 더 벌고 목숨을 좀 더 늘려 줄 수 있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독점 안해!! 엄한 짓 했다가 너네 다 뒤질까봐 그러는 거다!"
혼란을 만들어낸 시발점인 운현을 힐끔 바라 본 상아는 펠리시아와 에리스에게 손짓했고 그녀의 행동에 펠리시아와 에리스는 운현과 그의 일행들을 호위했다.
"잠시 따라와주시겠어요?"
"나쁜 짓은 안해요."
"어, 어쩌지?"
"오빠..."
"일단 길드의 말을 따르는게 좋을 것 같은데..."
어차피 이정도 혼란이 일어날 것은 예상했던 일이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상아에게 말했다.
"일단 길드장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좋아. 고맙군."
"우우우!!"
"정보 통제를 하지 마라!"
"우리가 왜 길드에 몬스터를 가져다 주는데!!"
"시끄러워!!"
길드의 수입 중 던전에서 얻은 몬스터 사체와 코어를 바깥의 다른 이들에게 판매하여 얻는 수수료의 비중도 상당했다. 물론 길드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던전 탐험을 해 몬스터 사체와 코어를 얻는 일도 많았지만 모험가들이 가져오는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것에 대한 수입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모험가들이기에 그들은 운현 일행을 챙기는 길드의 모습에 짜증과 야유를 보냈고 상아는 얼른 운현 일행과 제니스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간 후 다급히 물었다.
"제니스씨! 이게 어떻게 된거야!"
"말 그대로야. 운현씨 일행은 코어를 가져왔고 그 코어가 5계층 몬스터에 필적할 정도의 마력을 보유하고 있었어."
"맙소사... 설마 그 홉고블린?"
운현 일행이 홉고블린을 상대했던 것은 잘 알고 있는 상아로서는 기겁할 수 밖에 없는 말이었다. 분명 일반적인 홉고블린과 다르긴 했었다. 하지만 그 강함이라고 해봐야 일반 홉고블린보다 조금 더 흉포한 것에 불과했는데 5계층 코어의 마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니.
"이게 알려지면 큰 소란이 날텐데... 아아!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무슨 짓이라고 해봤자 그냥 코어 반납하고 레벨업 한게 다인데요."
상아가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외치자 운현은 씩 웃어보이며 느긋하게 답했다. 그의 말에 씩씩거리던 상아는 운현의 동료들을 보았지만 그녀들 조차 이 상황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는 판국에 답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제니스씨! 혹시 다른 코어라거나 그런 건 아니야? 코어의 분류가 잘못됐다거나."
"글쎄...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코어는 아니야."
상아의 질문에 제니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답했다. 제니스까지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운현이 잡은 그 홉고블린이 확실히 지금까지 나왔던 홉고블린과는 다르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만약 이것이 알려진다면? 일반 홉고블린보다 조금 더 강하지만 그 코어는 무려 20레벨대의 모험가 네명을 한번에 85레벨로 올릴 수 있을 정도의 마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그 순간 난리가 날 것이다.
"...일단 발표는 해야겠네. 정확한 조사를 위해 길드와 대형 클랜이 나서야 한다는 발표를 해야겠어요."
조용히 모든 것을 듣고 있던 펠리시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만약 이대로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면 모험가들에 대한 길드의 신뢰가 바닥을 칠 것이 분명했다. 그런 펠리시아를 잠시 바라보던 상아는 운현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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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구요?"
운현만 데리고 상아는 구석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상아는 한숨을 폭 내쉰 후 운현을 쏘아보며 싸늘히 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무슨 생각은 뭐고 이런 짓은 또 뭐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운현이 시치미를 떼자 상아의 하얀 이마에 혈관이 우뚝 솟아났다. 짜증을 한참 억누른 그녀는 숨을 몰아 쉰 후 운현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그 코어는 어디서 난거지?"
"홉고블린 잡았는데요."
"사실대로 말해주겠어?"
"한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허. 왜 못믿으세요?"
"그야...!"
대놓고 딱 잘라 뻥을 치는 운현을 노려보며 상아는 소리를 치려다 꾹 억눌렀다. 지금 아쉬운 것은 자신이지 운현이 아니었다.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화를 참아낸 상아는 애써 웃으며 그의 옷자락을 꼭 잡고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저기 있잖아. 운현이라고 했지. 난 당신을 꽤나 좋게 보고 있어."
"저도요. 상아 길드장님은 미녀에 귀여운데다가 사랑스럽기까지 하니까 무척 좋게 보고 있어요. 만약 제가 인생에서 존경하는 사람 한명을 고르라고 한다면 거기에 상아 길드장님이 있을지도 몰라요."
"....."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상대방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려 할 때는 밀고 당기기가 중요하다. 엘프의 매력을 활용하여 운현을 꼬드기려 했던 상아는 그의 달콤한 말에 오히려 자신이 말려드는 느낌을 받았다.
"아, 아니 나는 별 것 아니지. 그렇지만 당신. 대단하잖아. 특수종인 홉고블린까지 잡고... 거기에 그 배짱이나 전투를 지휘하는 능력까지. 정말 대단해."
"별 것 아닌 건 제가 더 심하겠죠. 저는 고작 20... 아, 이제는 85레벨이네요. 아무튼 상아 길드장님에 비하면 무척이나 적은 레벨이니까요. 그렇지만 상아 길드장님은 던전 도시를 지탱하는 네개 조직 중 하나인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기도 하면서 뛰어난 마검사잖아요? 마법 하나 쓸 수 없는 저로서는 무척이나 부럽기 짝이 없는 분이네요."
"오... 마법을 못 쓴다?"
운현의 말에 상아는 빙긋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운현이 입을 다물자 상아는 주머니에서 작은 반지 하나를 꺼내었다. 은은한 회색 빛이 감도는 은반지를 운현에게 내민 상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이 반지가 뭔지 알아?"
"모르겠는데요."
"마법의 반지라는 거야. 직업 적성이 없는 사람도 노력 여하에 따라 마법을 배우게 할 수 있는 세상에 단 하나 있는 아이템이지."
"헤에. 그렇군요."
이런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가? 운현이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자 상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의 옷자락을 꾹꾹 잡아당기며 최대한 귀여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한가지 부탁을 들어줬으면 해."
"말씀해보시지요."
"이 반지를 줄테니까..."
"줄테니까?"
"나와 입을 좀 맞춰 줄 수 있을까?"
"그 입을 맞춰달라는게 설마 키스해달라 뭐 그런 얘기는 아니겠죠?"
"으음..."
능글맞게 웃으며 운현이 말하자 상아는 인상을 찌푸린 후 잠시 생각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운현이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상아는 고개를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그게 낫겠다. 너. 내 애인이 될 생각 없어?"
"헐."
항상 그랬던 것처럼 상아는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날 만한 제안을 했다. 무척이나 오래간만에 느끼는, 과거에는 짜증스러웠지만 이제는 신선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유쾌한 그녀의 제안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것도 되게 끌리는 제안이긴 한데 되게 뜬금없기도 하네요. 갑자기 왜요? 혹시 저 좋아하세요? 물론 제가 굉장히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헛소리는 관둬. 일단 표면상으로 그렇게 하자는 거니까."
"헤에..."
상아의 말에 운현은 그녀의 속셈을 눈치챘다.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과 애인 사이가 되어 길드장이 개인의 호의로 운현에게 5계층의 코어를 주었고 운현은 그것을 이용해서 레벨업을 했다. 라는 이야기를 만들려는 속셈인 것이다.
'모험가 길드의 혼란을 피하게 하려고 이런 수를 쓰시겠다? 그래도 애가 착하네.'
만약 운현이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었다면 일단은 지금은 그냥 넘어간 후 이런 일을 일으킨 이를 독살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처리한 후 이렇게 공표했을 것이다.
'특별한 코어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몸에 무리를 줘서 금방 죽게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해버린다면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고 나머지는 길드를 이용해 쓸데없는 짓을 하는 이들을 막으면 된다.
가장 편하고, 가장 간단하게 모든 상황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그것을 쓰지 않고 어렵게 일을 해결하려는 상아의 행동에 운현은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바보.'
운현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는 기대감, 그리고 자신과 엮여 사람들의 관심에 시달릴 것에 대한 미안함. 두가지 감정이 혼재되어 있는 상아의 얼굴을 운현은 씁쓸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하나의 세력을 이끌면서 그렇게 순진한 소리만 하다니...'
"어, 어떻게 할거야?"
"음..."
솔직히 저 반지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계획한 것이 있으니 모험가 길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다면 말이지.'
아무래도 상아에게는 약해질 수 밖에 없었던 운현으로서는 그녀의 간절한 시선에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피도 눈물도 없고 다른 이의 제안따위는 냅다 거절하는 것이 취향인 그라고 하더라도 과거의 연인들을 위해서라면. 빠르게 계획을 수정해나가며 운현은 눈을 감았다.
'모험가 길드에 혼란을 일으킴으로서 다난교를 비롯한 다른 외부 세력이 움직이게 만들 기회를 만드는 것과 상아와 이런 스캔들에 말리는 것...'
어느것도 운현의 행동에 있어서는 나쁠 것이 없는 것들이다. 병법의 기본은 풍림화산이다. 움직일때는 바람처럼 빠르게, 나아가지 않을 때는 숲처럼 고요하게, 적을 치고 빼앗으며 공격할 때는 불이 번지듯 맹렬하게,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때는 산처럼 묵직하게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지금은 일단 대기를 하며 준비를 해야 하는 때지. 상대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그 흐름에 따라 내가 맞춰야 하는 시기인 만큼 모험가 길드의 헛점을 만들어 그들이 공격하게 만들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하지만...'
과거에 상아는 자신이 도적이기 때문에, 시장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서 자신과 연을 맺었었다. 그러면서 그녀와 친해지고, 그녀와 사랑에 빠졌었다.
'지금의 상황도 나쁘지 않아.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상아와 엮일 방법을 따로 생각해야 하지. 아직은 다난과 본격적으로 맞부딪히는 시점이 아닌 이상 이런 상황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거야.'
어차피 상아와 엮여야 하는 것은 언젠가 했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모험가 길드의 헛점을 만드는 일 정도는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좋죠."
"역시 싫겠지... 미안. 이런 제안... 에?"
한참동안 생각하던 운현이 느긋하게 말하자 한숨을 푹 내쉬고 떨떠름히 말하던 상아는 놀란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떠져 무척이나 귀여워진 상아의 얼굴을 마주하며 운현은 빙긋 웃었다.
"상아 길드장님 같은 분의 연인이 된다는 것은 비록 거짓이라 할지라도 나쁜 일은 아니겠죠."
'그리고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는 책략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의 연인이 된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런 일은 상당한 스캔들 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는 것은 잘만한다면 모험가 길드의 약점이 '운현' 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운명의 흐름을 조율할 수 있고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상아를 죽이고자 하는 천검자의 공격 대상이 내가 될 수 있고... 그것만으로도 상아의 죽음을 막는 것에 나설 명분이 된다.'
모든 상황은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 나서느냐,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하나의 행동이 책략이 될 수 있는 법. 운현은 느긋한 얼굴로 상아에게 손을 뻗었다.
"에? 에엑!?"
아직도 당황한 얼굴인 상아는 운현이 손을 뻗어 자신의 긴 머리칼을 부드럽게 잡자 더더욱 당황했다.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운현은 살며시, 비단처럼 부드럽고 깨끗한 머리를 잡아 올린 후 살짝 입맞췄다.
"후엣!?"
운현이 이정도로 나올 줄은 몰랐는지 상아는 개구리 터지는 소리와 비슷한, 괴상한 비명을 내질렀다. 상아의 그런 행동을 보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연인이라면 이정도 스킨쉽은 기본 아닌가요?"
"어...어어... 저기. 내가 말을 꺼내놓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제, 제정신이야?"
잠시동안 운현이 수백가지 경우의 수를 놓고 빠르게 책략을 구상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상아는 운현이 이렇게 노골적인 스킨쉽을 할 줄은 몰랐는지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음? 제정신인데요."
"...우와."
"아니 그런 것 보다. 상아 길드장.... 아니. 이제는 연인이니까 말을 편하게 할게요. 상아. 그러는 넌 내가 싫은거야?"
"아,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 으아아! 이런 일은 익숙하지 못하다고!"
"그럼 이제부터 익숙해져야지. 아니면 그냥 공표를 하든가."
운현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감싼다. 버티려고 하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아는 힘없이 끌려 운현의 품에 안겨버렸다. 큰 키에 넓은 가슴. 상아의 작은 몸 정도는 가볍게 감싸 안을 정도의 긴 팔. 운현의 품에 가볍게 안겨버린 상아는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변해버렸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씨익 웃은 운현은 상아의 이마에 살짝 키스한 후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버리는 것에도 상아는 여전히 패닉 상태에 빠진 채 어쩔 줄 몰라하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럼 만약을 위해서 몇가지는 조율을 해놔야겠군. 자. 빠르게 정보 교환을 해볼까?"
"운현 오빠?"
"상아 길드장과 무슨 이야기를..."
"뭔 얘기했어?"
"....."
상아 길드장은 어디로 가버리고, 혼자서 나와버린 운현을 반기며 여인들은 그에게 물었다. 자신에게 꽂히는 수많은 시선에 운현은 머쓱하니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한소리 듣고 왔어."
"에? 무슨 소리를요?"
"뭐야!? 설마 상아 길드장이 모험가를 협박이라도 했단 말이야!? 이거 진짜 모험가 길드가..."
공명 정대함, 투명함을 내세우는 모험가 길드가, 그것도 길드장이 일개 모험가를 협박해서 정보를 통제하려 했다면 큰 일이다. 사무소 앞에 몰려 있던 모험가들이 분노를 하려 하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떨떠름히 말했다.
"아. 그게 말이지."
"아니 협박같은 건 아니야."
문이 열리며 약간 상기된 얼굴의 상아가 걸어나왔다. 그런 그녀를 향해 모험가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향해졌다. 그들의 그런 시선을 느긋하게 받으며 상아는 운현의 옆구리를 툭 친 후 투덜거리듯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연인이 선물해 준 것을 그렇게 냅다 써버리는 걸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은 없잖아."
"아... 그렇구나."
"하긴. 나도 전에 사귀던 남자 모험가에게 선물해 준 코어를 그 남자가 써버려서 화를 내애애애애앳!?"
"뭔 소리야!?"
아까 이상의 소란이 터졌다. 사무소에 모여 있던 모험가들이 대경하며 상아와 운현을 번갈아 바라보았고 그런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상아는 뻘쭘한 웃음과 함께 운현의 손을 꼭 잡았다.
"사실 예전에 운현과 만난 적이 있는데... 서로 첫 눈에 반해버렸거든."
"아, 아아아아!? 오, 오빠! 그게 정말이에요!?"
"음. 모험을 하며 발견한 던전에서 우연히 만났지. 같이 그 던전을 탐험하다가 서로 반했고... 나도 맡은 임무가 있었고 상아도 맡은 임무가 있어서... 그때 상아에게 증표로 받은거야."
"우와..."
"진짜야?"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는 놀란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았고 모험가들은 운현의 얼굴을 보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저 망나니랑 연인이!?"
"구두도 짝이 있다더니!! 저 인간을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단 말인가!?"
"정보를 독점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필레에게 접근하는 용사라고 생각했더니만... 역시 보통 남자가 아니었네!?"
"거짓말 아니야?"
갤러리들 측에서 웅성거림이 커진다. 아직까지 특수한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이들과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지만 대부분은 운현과 상아가 연인관계였다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말 그대로야."
"자, 잠깐! 이의있소!"
운현과 상아가 투닥거리는 모습에 당황하던 미야는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저번에 상아 길드장과 만났을 때는 서로 처음 보는 것 처럼 굴었잖아! 그런데 연인이라니!"
"아... 운현이 너무 변해 있어서 몰랐어. 거의 십년만에 만나는 것이라서 말야. 그때는 이런 파란색 머리칼도 아니었다고. 정말이지. 검은 머리가 더 잘 어울렸는데 왜 염색같은 것을 해서."
상아는 입술을 삐쭉 내밀면서도 운현과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마찬가지로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러는 자기는. 내가 준 검은 어디다 팔아먹어놓고서. 난 보자마자 알았는데."
"그, 엘프는 십년 정도로 변하지 않는다고! 자꾸 그거 가지고 그럴거야!?"
"뭐. 여전히 귀엽긴 하지만 말이지."
"...정말이지 그 사탕발림은 여전하네. 으휴... 아무튼 그런 이야기야. 운현에게 받은 단검은 전에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잃어버렸어. 그래서 운현이 열받아서 그 코어를 써버린거고. 다들 설명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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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
"......"
상아의 말에 모험가들은 석연치 않다는 얼굴이 되었지만 이 이상 추궁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이야기는 맞아떨어지니 말이다.
"그럼 한가지만 물어볼게. 거기 운현. 그리고 거기 아가씨들. 당신들이 지금까지 잡은 몬스터는 어떤 것이지?"
"그게..."
"정보를 원하면 나름의 대가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상대적으로 맹해보이는 미야를 향해 짙은 회색 긴 머리에 붉은색과 금색의 오드아이를 가진 여전사가 묻자 운현은 대답을 하려는 미야를 막으며 빙긋 웃었다. 그의 행동에 살짝 혀를 찬 그녀는 입술을 핥으며 운현을 보며 물었다.
"나중에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어? 정보료는 지급할게. 아라크네 클랜의 부클랜장으로서 보장하겠어."
거대 클랜 중 하나인 아라크네의 이름으로 보장한다는 말에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만 확실하다면야 얼마든지 좋죠."
"후후후... 그런 건 맡겨달라고."
아라크네 클랜이 나선 탓일까? 운현이나 운현의 파티원에게 접근하는 모험가들은 몇 없었다. 그보다 그들은 운현이 상아의 전 애인이라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펠리시아씨."
"네?"
"이따가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네? 아... 네."
펠리시아 역시 운현과 상아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는 듯 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펠리시아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어떻게 된거야??"
"속일 생각 말고 얘기해줘."
소란이 잦아들자 운현은 답변을 원하는 동료들을 데리고 회관의 테이블에 앉았다. 그들의 주변에는 상아와 필레까지 꼬신 용자인 운현에게 관심을 가진 모험가들과 길드원들이 모여 있었다.
"어떻게고 자시고... 아까 얘기했잖아."
"그. 그럼 진짜란 말이에요?"
"응."
"이상한데...? 그럼 그 코어를 왜 지금 쓴거야? 전에 썼다면 더 빨리 레벨업할 수 있었던 것 아냐? 아니면 팔아서 더 좋은 장비를 얻든가."
바제트가 날카로운 질문을 건네자 의문을 품은 몇몇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운현은 그녀의 질문에 쓰게 웃었다.
"다른 사람이 질문했다면 니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라고 답변했겠지만 그래도 너니까 내가 말해준다. 자. 일단 그 코어를 왜 처분하지 않았냐면 상아에 대한 추억 때문이지. 내 나름대로 그때의 추억은 꽤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말야."
말을 마친 운현은 아련한 표정이 되어 빙긋 웃었다. 그의 말에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했다. 신경도 쓰지 않았던 강적이 나타난 기분이다.
"그럼 그걸 팔아서 운현. 당신 혼자 독점할 수 있었던 것 아냐?"
갤러리들 중 하나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자리에 앉아있는 동료들을 보았다.
"맞아요! 왜..."
"그 질문에는 내가 지금까지 보인 행동이면 답변이 되지 않을까? 애초에 나는 레벨과 장비가 그 사람의 강함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결속력이라고 생각해."
"......"
"전에 얘기하지 않았나? 난 너희들이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든다는 것은 마음 안으로 들어간다. 라는 말이야. 그런 이에게 나누는 것이 뭐가 그리 아깝고. 또 뭐가 그렇게 이상한거지?"
"어. 음. 그게..."
운현은 만났을때부터 자신들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는 맺고 끊는 것이 칼같은 사람이었다. 에릴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헤스티아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오빠는 이런 사람이었지...'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다른 이의 시선에도. 다른 이의 의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철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혼자가 되어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았기에. 자신의 모자란 점을 깨달았기에. 타인의 의지에 따라 자신이 결정되는 그 안타까움을 겪었기에 운현을 동경한 것일지도 몰랐다.
"알겠어요. 오빠."
"응?"
"오빠가 그런 분이라는 건 잘 알았어요. 그럼 저도 한가지만 여쭤볼게요."
과거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 뿐. 헤스티아는 진지한 얼굴로 운현에게 물었다.
"상아 길드장님과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글쎄."
"........"
"어찌 되었든 나에게 있어서 그 추억은 잊을 수 없는 것이야. 비록 지금 그녀와 엇갈렸다고 하더라도 그녀 역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지. 하지만 지금은 어떻냐라..."
진지한 얼굴로 운현이 말을 시작하자 테이블에 앉아있는 동료들 뿐만 아니라 주변의 갤러리들은 모두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마음에 들어. 음... 뭐랄까. 난 아직 좋아해. 상아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아.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마. 상아를 좋아한다고 해서 너희들이 싫다는 것은 아니야."
담담한 그의 말에 의외로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놀란 것은 다른 모험가들과 길드원들이었다.
"오오오오! 대단한데!?"
"필레 뿐만 아니라 상아 길드장에... 다른 여인들까지 있다고!?"
"굉장하잖아! 과연 감당할 수 있으려나!?"
그들의 외침을 들으며 미야는 피식 웃었다.
"뭐. 그럴 것 같았어."
"애초에 오빠가 한사람만 좋아할 사람은 아니었죠..."
세상의 틀에 맞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단 한사람만 바라 볼 것 같지는 않았던 헤스티아는 쓴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치만 내가 처음이 아니라서...'
"뭐 더 물어 볼 것은 없겠지?"
느긋한 어조로 운현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처음 운현과 그의 파티원들이 레벨업을 했을때 보였던 분위기는 사라져있었다.
다들 유명인인 상아의 전 애인인 운현, 그리고 필레를 꼬시며 다른 연인들도 데리고 있다는 것에만 흥미를 가질 뿐 이었다.
"그럼 특별한 몬스터를 잡은 것은 아니야?"
"특별이고 자시고..."
각자의 자리로 모험가들이 돌아가는 와중에 붉은 머리의 남자 모험가가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본 운현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렇지만 그 상아 길드장과 연인이라니... 그런데 그 마지막에 잡은 몬스터가 뭐였죠?"
"그건 아라크네 클랜에 정보료를 받고 알려주기로 한거라서 그냥 말씀드리긴 좀 그렇네요. 그리고 뉘신지도 모르겠는데... 정보라는 것은 곧 돈이 되는 것인데 그렇게 쉽게 얻으시려고 하는건 좀 그렇지 않나요?"
그를 빤히 바라보던 운현은 빙긋 웃으며 차분히 답했다. 그의 시선에 붉은 머리 사내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와일드 해머 클랜의 클랜장 아돌이라고 합니다. 레벨 270의 궁사입니다."
"그런가요. 저는 운현입니다. 클랜은 없고.. 85레벨의 검사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운현씨는 유명한걸요."
"그렇군요."
"아무튼... 정보를 거저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합당한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어떤 정보입니까?"
운현의 질문에 아돌은 히죽 웃은 후 그에게 다가간 후 작게 속삭였다.
"미믹을 쉽게 잡을 수 있는 정보입니다."
"진짜에요?"
"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상아를 보며 펠리시아는 눈쌀을 찌푸렸다. 그녀가 운현과 처음 만난 것은 레나와 함께 있을 때였다. 그때 당시 상아나 운현이나 서로를 보며 공적인 대화만을 나눴을 뿐이지 별다른 개인적인 감정은 보이지 않았었다.
"솔직히 말해봐요."
"솔직이고 자시고... 아까 말한 그대론데. 예전에 운현과 만난 적이 있었고..."
"그럼 아까 왜 둘이 얘기를 한거에요?"
"그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거니까. 난 좀 긴가민가했다고."
"남자 좋아하는 당신이?"
상아가 웃으며 답하자 펠리시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사나운 어조로 말했다. 상아가 남창들이나 남자 모험가들, 그리고 다른 남자들에게 찝적대며 차인 것을 본 것이 몇번인데. 만약 모험가 길드라는 거대한 조직의 수장이 아니었다면 아마 납치, 감금 및 강간으로 최악의 빌런이 되지 않았을 까 의심될 정도인 상아가 남자를. 그것도 서로 사랑했다는 연인의 얼굴도 못알아본다?
"에이~ 내가 뭘 좋아해~ 다 장난이지. 컨셉이라고."
"컨셉치고는 너무 진지했던 것 같은데... 좋아요. 뭐 그건 그렇다고 치자구요.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에요?"
"뭘 어째?"
"그 운현이라는 사람. 어떻게 할거냐구요. 처분할거에요?"
"남의 연인 맘대로 처분한다 만다는 소리 하지 말라고."
"바보에요!? 농담하지 말고..."
"농담 아닌데. 자... 던전에서 정체 불명의 몬스터가 나왔다. 그리고 그 몬스터가 가진 코어는 엄청난 마력을 가지고 있다... 이게 알려진다면 이건 단순히 모험가 길드의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야. 지금 그들의 레벨은 2계층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저레벨이야. 그런 그들이 잡을 정도의 몬스터가 1계층에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건..."
혼란이 일어난다. 단순히 모험가 뿐만이 아니라 용병 연맹까지 움직일 수 있다. 아니, 그것 뿐만이 아니다. 5계층의 코어로만 제작할 수 있는 물품의 가격은 엄청나게 비싸고 그 수량은 극히 드물었다. 수요는 많으나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1계층에서 5계층 수준의 코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
"물품들의 가격이 폭락하겠군요."
"그래. 단순히 모험가 길드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고. 작게는 던전 도시, 크게는 대륙의 모든 나라가 이 일에 휘말릴 수 있어.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이슈화 시키겠다는 건가요?"
"그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스캔들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적지. 그런 일이 벌어지느니 차라리 내가 나서는게 나아."
그저 남자 밝히는 푼수떼기라고 생각한 상아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펠리시아는 한숨을 푹 내쉰 후 투덜거렸다.
"그런 거라면 굳이 상아. 당신이 아니어도 되잖아요. 저라든가, 아니면 그 운현이랑 사이가 좋은 필레라든가. 얼마든지 있잖아요. 누누히 말하는 거지만 당신은 너무 위엄이 없어요."
"위엄따위 뭐가 필요해.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라는 존재는 모두를 대표하는 존재일 뿐이지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펠리시아의 말에 상아는 퉁명스레 대답하고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편히 기댔다. 그런 그녀를 조용히 응시한 펠리시아는 한숨을 폭 내쉰 후 말했다.
"그냥 그 남자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구요?"
"아니라고는 못하겠네. 솔직히 딱 내 타입이기도 했고 말야."
'그리고 이계인이기도 하지... 스승님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차라리 이런 방식으로 그와 엮이며 많은 것을 알아내는 것이 낫다.'
아직도 운현이 이계인이고, 스승인 현자와 무언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 상아였다.
'그의 스킬은 지금까지 내가 본 적이 없던 스킬... 스승님도 그랬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어. 그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별 거 아니야. 그보다... 아까 운현과 단 둘이 만나기로 한거야?"
"음. 네. 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흠... 혹시 모르니까 몇가지 준비를 해둬."
"뭘요?"
"너라면 알 수 있겠지. 아까 전, 내가 운현과 연인관계였다는 것을 밝혔을 때 그것보다 다른 것에...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한 사람들과 몬스터에 더 집중한 이들을 파악해놔."
"예? 그건 왜요?"
그녀의 질문에 상아는 빙긋 웃은 후 탁자를 톡톡 치며 말했다.
"아마 그는 그것을 물어 볼 테니까."
347====================
제안
"미믹을 쉽게 잡는 법이라..."
팔짱을 낀 채 앉아 운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이 세계에도 미믹은 있었다. 물론 과거처럼 미믹이 코어를 흡수해 마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보물상자를 부수면 미믹이 생성되는 매커니즘은 똑같았다.
"미믹을 잡아서 어디다가 쓰는데."
툭 화두를 내뱉은 운현은 자신의 말을 곱씹으며 머리를 굴렸다. 미믹은 생성되는 것 자체가 손해인 몬스터다. 과거처럼 시간이 지나면 마인을 소환하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잡았다고 해도 보물상자가 원래 가지고 있던 잡동사니를 내뱉을 뿐 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미믹을 쉽게 잡는 법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운현은 아돌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며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그 진위여부는 둘째치고 무척이나 고급 정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돌이 그런 정보를 별 쓰잘데기 없는 정보와 교환하려는 등신은 아닌 것처럼 보였기에 운현은 심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세계의 미믹에 대해서는 나도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했어. 만약 과거의 내가 미믹에 마인을 넣었던 것처럼 아돌이라는 놈이 그런 특별함을 발견했다면?'
그런 것이라면 웃으며 교환을 해 줄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어차피 운현이 가진 카드는 똥패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물론 이건 내가 머리를 해피밀화시켰을 때의 이야기고...'
행복회로를 돌리지 않고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다난의 졸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군."
1계층의 미믹이라고 하더라도 어지간한 레벨로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 미믹을 쉽게 잡을 수 있다는 정보를 내뱉으면 아돌은 운현에게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미믹을 소환할 것이고 그 미믹으로 운현을 죽이려 할 것이다. 아돌 스스로 자신의 레벨을 270이라고 했으니 그의 레벨이라면 충분히 미믹을 잡을 수 있었다.
"날 죽임으로서 상아에게 혼란을 줌과 동시에 모험가 길드를 혼란으로 빠트리는 수라고 생각하면 되겠군."
상아가 스스로 인정한 과거의 연인, 사람들 앞에서 보인 알콩달콩한 연인의 모습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과거의 연인이었지만 그 끝이 나쁘지 않아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상아의 평판을 따져봤을 때 그녀의 움직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남자를 좋아하고 애인을 원하지만 만나는 남자들마다 질색해서 결국 애인 수준까지 갔던 남자는 없었다. 그런 상아에게 무슨 이유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헤어졌던 애인이 나타났고, 아직까지 분위기도 괜찮다. 그런 남자가 던전에서 허망하게 죽어버린다면?
"발광을 하든 허탈감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든 하겠지. 그럼 그 틈을 노리겠다는 것인가?"
아마 상아는 모험가 길드 내에서 무력으로만 따졌을 때 적어도 열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길드 간부 중 하나인 비타가 죽고, 상아가 실의에 빠져 본 실력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거기에 조금만 더 공작질을 해서 모험가 길드의 간부를 몇명만 빼놓는다면?
"모험가 길드에 헛점을 크게 만들 수 있겠지."
운현이 가진 신성을 없애든가, 아니면 막타를 쳐서 빼앗고 모험가 길드에 숨어 있는 레나를 잡는다. 그리고 모험가 길드가 습격을 당한다면 책임감 강한 상아로서는 가만히 있지 못하게 되어 모험가 길드를 친 다난교를 공격하려고 온 힘을 다할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힘을 빼 놓은 후 천검자로 그녀를 처리한다면?
"쩝.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긴 했네."
여러가지 상황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해 보았을 때 현재의 상황은 가볍게 도출되었다.
"해피밀이 되든 안되든 결국 내가 해야 될 일은 별 것 없구만."
빙긋 웃은 운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서 들어오려 손잡이를 잡았던 바제트는 운현이 나오자 깜짝 놀라며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응? 왜?"
"아, 아니... 그냥. 보, 보고 싶어서. 그럼 안돼?"
"안될 것 있나... 아. 맞다."
"응? 왜? 꺅!?"
자신의 얼굴을 말똥말똥 바라보는 바제트를 가볍게 끌어당겨 품에 안은 운현은 놀란 얼굴의 그녀를 보며 부드럽게 웃은 후 살짝 입맞췄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더더욱 딱딱히 굳어버린 바제트가 어버버 거리는 동안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낸 운현은 살며시 바제트의 얇고 새하얀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이게 뭐...야?"
"목줄 달아 놓는 거다. 상아의 일로 마음 상한 것 같은데 어디 도망 못가게 잡아두는 거지."
아까 전 상아와의 일 때문에 바제트의 표정이 안좋았던 것을 떠올리며 운현은 다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숨이 가쁠 정도로 그의 품에 안겼지만 바제트는 괴롭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
그의 품에 안긴 것은 처음이다. 아니, 이렇게 남자의 품에 안긴 것 자체가 처음이다. 남창들과 몇번 논 적이 있지만 그들은 이상하게 자신에게 접근하기보다는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두었기에 혼자 술만 마신 것이 다였다.
"수, 숨막혀..."
두근거림과 어색함보다는, 바제트는 오히려 편안함과 안도감을 더욱 느꼈다. 이상한 일이다. 그의 품에 안긴 것은 처음이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익숙한 것일까. 왜 이렇게 편안한 것일까. 운현을 좋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감각을 느끼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
"아. 미안. 네 향기가 너무 좋아서."
바제트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운현은 너무나도 그리웠던 향기에 가슴이 아려왔다. 독침 한방을 맞고 그대로 죽어버렸던 그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사랑한다 말해주었던 그녀. 허망하게 보내버렸던 바제트를 다시 안을 수 있다는 것에 기쁨과 동시에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이 머릿 속을 지배했다.
"표정이 왜 그래?"
"응?"
"후후. 나같은 미녀를 안아놓고 그런 얼굴 할거야?"
"아. 미안."
빠르게 표정관리에 들어간 운현은 바제트의 이마에 키스해 준 후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톡 쳤다. 운현과의 첫 키스, 그리고 그가 준 목걸이. 그제서야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에서 은은한 기운이 몰려오며 자신의 마력회복량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을 깨달은 바제트는 손을 들어 목걸이를 보았다.
"이건... 뭐야?"
"예전에 모험을 하다가 얻은 아이템이야. 상아의 일을 말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사과의 선물이라고 생각해줬으면 하네."
"으으... 아니 상아 길드자님에 대한 건 뭐... 날 만나기 전이니까. 그, 그리고 우리가 아직 사귀는 그런 단계도 아니고."
좋으면서도 입술을 삐쭉 내민 바제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가렸다.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막으려는 그녀를 향해 키득거린 운현은 바제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계단으로 향했다.
"어디가!?"
"약속 있어서."
"여자랑?"
"그래. 그래. 내가 여자 말고 누구랑 약속 있겠냐~"
"으씨...!"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준 운현이 계단을 통해 내려가자 바제트는 못말리겠다는 듯 인상을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바로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마력 회복량과 마력량이 늘어난 것 보다 그에게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 더욱 기쁜 것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욱 기쁜 것은...
"헤...헤헤."
살며시 손을 들어 입술을 만져 본 바제트는 조용히 얼굴을 붉히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지금 괜찮으시겠죠?"
회관에 내려오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사무소 안으로 들어간 운현은 펠리시아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과거에도 와 본 적이 없는 펠리시아의 방에 들어 선 그는 저번처럼 차를 준비한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아. 저 차 안마셔요. 아까 좀 먹고 와서."
"후훗. 이번에는 아무것도 안 탔어요. 걱정마세요."
"제가 이래뵈도 꽤나 신중한 남자라서 말이죠."
"어머? 그런가요?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대담해보이는데."
끝까지 운현이 차를 거절하자 펠리시아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 운현이 앉아 있는 맞은편에 앉았다. 풍만한 가슴을 출렁거리며 고혹적인 웃음을 짓는 그녀를 마주하며 운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 온 것은..."
"아까 전 상아 길드장님과 당신의 스캔들에 대해 집중하는 것보다 특수종 몬스터의 진위 여부에 더욱 집중하던 사람들의 명단이죠? 조사해놨어요."
"헤에... 빠르시네요."
펠리시아가 두루마리 하나를 들어 올리며 말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펠리시아 정도라면 눈치챘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상아의 지시일지도 몰랐다.
"그럼 주세요."
"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래도 그냥 드리기는 싫은데."
"원하는게 뭔가요?"
서로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이 자리는 책략가들의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교섭을 통해 누가 더 많은 것을 얻어내느냐의 상황. 어찌보면 유리한 것은 펠리시아라고 할 수 있었다. 운현이 원하는 것은 명확하지만 펠리시아가 원하는 것은 명확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내가 유리해.'
그리고 그 상황은 펠리시아 역시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이 유리한 교섭의 상황이다. 그런 호기를 놓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그녀는 살짝 다리를 꼬며 물었다.
"상아 길드장... 상아와 무슨 관계에요?"
"전 연인사이입니다."
"거짓말 말고."
"진짠데요."
이것만큼은 진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운현은 상아를 사랑했고, 상아 역시 운현을 사랑했으니까. 다만 그것이 이 세계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운현의 진중한 시선에 농담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인지 펠리시아는 당황하며 물었다.
"어... 진짜에요?"
"네."
"그럴리가... 운현씨.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전 스물 아홉이죠."
"저랑 다섯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데...상아와 어디서 만났죠?"
"던전 도시에서요"
"흐으으음... 하지만 전 당신을 본 적이 없는데요?"
펠리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상아의 보좌가 된 것이 벌써 이십년 전의 일이다. 꼬꼬마 마법사일 때부터 상아와 연을 이어가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상아가 아는 사람의 대부분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줄래요?"
"솔직한 답변인데요. 저는 당신도 본 적이 있습니다."
"상아가 막장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린 애를 탐할 정도로 막장은 아니에요. 그렇다는 것은 당신과 상아가 연인이 되었던 것은 십년 정도라는 건데..."
"뭐 그정도 쯤 되죠."
펠리시아는 느긋한 운현의 얼굴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거짓을 말하는 기색은 없다. 지금까지 상아의 보좌로 있으며 상아를 이용하고 속이려는 많은 이들을 만났고, 그들의 거짓을 대부분 파악해 낸 펠리시아로서는 운현이 지금까지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네요. 저는 당신을 몰라요."
"그럴 수도 있겠죠. 당신이라고 해서 뭐든 아는 것은 아니잖아요?"
빙긋 웃은 운현은 탁자를 톡톡 친 후 케이크 위에 놓여진 포크를 들어 펠리시아를 가리켰다. 날카로운 포크의 끝이 자신에게 겨눠지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포크의 끝에서 몸을 피해버렸다.
"에?"
"왜 그래요?"
"아, 아뇨... 아무것도."
'왜 그런 거지?'
필레의 특기인 위기를 예감할 수 있는 직감이 있는 것도 아닌데 펠리시아는 포크의 끝에 계속 있으면 자신이 위험하다고 생각해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상대는 비록 폭렙을 했다지만 아직 1계층 조차 넘어서지 못한 풋내기 모험가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무기도 아닌, 그저 작은 포크 하나를 들어 겨눴을 뿐인데 그것에 이렇게 놀라게 될 줄이야. 아직까지 남아 있는 등줄기의 오싹함에 부르르 몸을 떤 펠리시아는 애써 웃으며 물었다.
"그, 그럼 그건 그렇다고 치죠. 상아를 좋아하세요?"
"네."
"얼만큼요?"
"제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바꿔서 그녀를 구할 수 있다면 웃으며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펠리시아씨. 저에게 원하는 것이 뭔가요? 이렇게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씀해주세요. 어지간한 것은 대부분 답변해드릴 수 있으니까요."
진지한 답변 이후 이어진 말에 펠리시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 가장 원하는 것은 지금 당장 던전 도시에서 나가달라는 것이다. 그게 최선이다.
상아와 운현의 스캔들로 이미 사람들의 관심은 코어의 정체보다 상아와 운현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성공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돌렸으니 이제 그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운현이 좀 사라져 있어주는 것이 펠리시아에게 있어서 가장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코어는 정말 상아에게서 얻은 건가요?"
"네."
"하지만 그때 당시 상아는 5계층의 초입에 들어가는 정도의 레벨에 불과했어요. 상아와 모험가 길드의 간부들이 본격적으로 5계층을 탐험한 것은 4년 전에 불과해요. 그런 그녀가 그정도의 코어를 줬다구요?"
하지만 펠리시아는 그것을 말하는 대신 자신의 의문을 해소하기로 했다.
"네. 그건 그녀가 준 것이 맞아요."
이번에도 거짓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펠리시아는 골치가 아팠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후 조용히 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제가 원하는 것은 당신이 당분간 던전 도시에서 떠나 있어주는 것이에요. 돈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코어? 레벨을 올리길 원하신다면 제가 개인적으로 보유한 코어를 다섯개 드릴게요. 모두 5계층에서 얻을 수 있는 코어입니다. 그것을 모두 운현씨의 레벨업에 사용하신다면 운현씨가 280레벨까지 오르는 것은 일도 아닐거에요. 원하신다면 더 드릴 수도 있답니다. 그것으로 레벨업을 하시고 한 일년 정도만 던전 도시에서 나가 있어 주실 수 있나요?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든 상아를 설득해서 레나씨의 일도 도와줄게요. 좋은 장비도 드리구요. 어떤가요?"
펠리시아는 자신이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제안을 운현에게 제시했다. 1년 던전 도시에서 벗어나 있는 것만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다른 누구라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제안에 운현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레벨업이나 장비가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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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
"...그럼 당신이 원하는게 뭔가요? 제가 주겠습니다."
과거의 꼬꼬마 마법사가 아니다. 이제는 던전 도시의 부길드장이라 불려도 모자랄 정도의 능력을 가진 대마법사 펠리시아다. 그런 자신이라면 이런 저레벨 모험가가 원하는 것은 얼마든지 구해 줄 수 있다라고 생각한 그녀는 자신있는 어조로 말했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운현은 쓰게 웃으며 물었다.
"제가 원하는 것을 당신이 해 줄 수는 없어요."
"저를 너무 무시하시는 것 아닌가요? 이래뵈도..."
"아아. 그런 것이 아니에요."
만약 펠리시아가 그녀들이 죽어야 할 운명을 바꿔 줄 수 있다면. 운현은 1년이 아니라 십년이라도 던전 도시에서 떠나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의 운명에 속해 있는 펠리시아에게 그런 힘이 있을리는 만무했다.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의 손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계인이기에. 운명에 걸려 있지 않은 존재이기에 나만이 할 수 있다.'
인형극에 등장할 수 없는. 인형사의 손에 흔들리지 않는 인형인 자신만이 다른 인형들을 구할 수 있었다. 운현은 깊은 눈으로 펠리시아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당신이 절대 해줄 수 없으니까 관두세요. 모험가 길드에 해가 될 일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주세요."
펠리시아가 원하는 것은 모험가 길드의 안정이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겠지. 그녀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운현은 담담한 어조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당신이 상아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항상 말하고 싶었죠. 고맙습니다."
"...어, 그, 그렇게 진지하게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은 안했는데."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거린 펠리시아는 운현의 허리가 세워질 생각을 하지 않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는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진심을 무시하는 행동은 할 수 없다.
"... 알겠습니다. 당신의 감사... 잘 받았습니다."
"후후후..."
낮게 웃으며 허리를 세운 운현은 다시 자리에 앉은 후 펠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처음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진 분위기다. 펠리시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운현의 시선을 마주하다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그에게 말했다.
"진짜 상아를 좋아하는 거에요?"
"네."
"그 망나니를? 어디가 좋아서요?"
"귀엽잖아요. 착하고. 활발하고... 그리고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우, 우와아아... 이 남자. 진심인가."
귀여운 것은 사실이지만 사랑스럽냐면 글쎄. 일단 자신보다 이십배는 많은 할망구가 사랑스럽냐고 물어본다면 펠리시아로써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워낙 오래 알고 지내며 상아가 친 사고를 수습하다보니 사랑스럽다기보다는 웬수가 따로 없는 존재였다.
"구두도 제 짝이 있다더니... 드디어 상아에게 봄날이 오는 건가. 허... 진짜 세상 살고 볼 일이네."
"하하하..."
"그럼 어쩌다가 연인이 된거에요?"
"그녀에게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거든요. 물론 그 전부터 홀딱 반해 있기는 했지만 제가 그때 당시는 좀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시기인지라..."
"헤에... 음. 뭐 좋아요. 아무튼 제 입장은 이거에요. 운현씨. 상아 길드장을 진짜 좋아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녀를 위해서 1년만..."
"그건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자신이 던전 도시를 떠난다면, 상아에게서 멀어진다면 상아는 죽는다. 자신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운명은 상아의 죽음을 그대로 이으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걸 떠나서 천검자가 상아를 죽이겠지.'
라닌이라는 정체불명의 책략가가 상아를 노리고 있는 지금 자신이 떠날 수 없었다. 만약 떠난다면 상아와 함께다. 운현은 굳은 얼굴로 펠리시아에게 말했고 그의 딱딱히 굳은 얼굴에 펠리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운현씨. 지금 상아는 크게 힘든 상황이에요. 시장 선거도 그렇고... 비타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해 그 범인을 찾는 일도 그렇고.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라는 스캔들거리가 생겨버려 상아의 위신은 거의 바닥으로 떨어져버렸어요. 안그래도 쓸데없이 책임감 강한 상아인데 당신이 있음으로서 생기는 수근거림까지 감당하려면 그녀의 고생은 이만저만하지 않을 것이라구요."
"이해할 수 없군요. 그것과 제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 혹시 상아가 시장 선거에 출마하려는 건가요?"
"아니요. 상아가 해야 하는 일은 용병 연맹의 티르빙이나 상인 조합의 윈디아가 시장이 되는 것을 막는 것이에요."
"티르빙과 윈디아... 왜요?"
티르빙은 아르토리우스로, 윈디아는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다. 마인의 코어를 흡수하여 고레벨의 위신체가 된 아르토리우스라면 티르빙을 어렵지 않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아르토리우스가 시장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아르토리우스가 전쟁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막으려고 상아가 시장 선거에 집중했었지... 하지만 아르토리우스는 없어. 티르빙이 주전파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티르빙이나 윈디아가 던전 도시의 시장이 된다면 문제가 생기거든요."
"무슨 문제인가요? 괜찮다면 저도 듣고 싶은데."
"으음..."
운현의 말에 펠리시아는 고민했다. 레나와 상아에 의한 운현의 평가는 굉장히 고평가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오늘 일만 아니었다면 펠리시아 역시 운현은 상당히 고평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아의 평판을 깍아먹어버린 지금에 있어서 운현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신중하고 모험가 길드를 생각하는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만약 모험가 길드를 생각하고 상아를 진짜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다른 핑계를 대든가 아니면 그렇게 친밀하게 상아를 대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과거의 연인이든 아니든 그건 둘째치고서라도 둘은 너무 다정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이 상아의 약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펠리시아는 한숨을 푹 내쉰 후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운현이 강한 남자라면 모르겠지만 그가 약한 이상 용병 연맹이나 상인 조합에 납치당할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어 고문이라도 당했다간 정보를 내뱉을 수 있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낫다.
"죄송해요. 하지만 모험가들에게 나쁜 일은 아니랍니다."
"그런 것이라면... 어쩔 수 없군요."
"네..."
"그럼 주시겠어요?"
"네?"
"그거."
펠리시아의 제안은 거절했지만 거절한 것은 거절한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받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운현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두루마리를 가리켰다. 그의 말에 그제서야 자신의 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본 펠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어디다 쓰시려구요?"
"펠리시아씨는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뭘요?"
"모험가들의 기본 성향이 어떤가요?"
"으음... 대부분 유쾌하죠. 목숨 걸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만큼 즐거운 거리나 농담 거리, 놀 거리가 있으면 정신 못차리기도 하고. 그리고 호기심도 강해요. 남의 일에 아주 관심이 많구요."
"돈을 탐하나요?"
"아주 탐합니다. 돈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것이니까요."
펠리시아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팔짱을 낀 후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돈이라면 용병들이 더 잘 벌지 않나요?"
몬스터 사체와 코어를 획득할 수 있는 모험가가 돈을 더 벌 것이라 일반인들은 착각하지만 실제로 평균 수입을 따졌을 때 같은 레벨에서 모험가보다 용병이 돈을 더 잘 벌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용병에게는 약탈이라는 좋은 자금 획득 수단이 있기 때문이었다.
용병은 던전 도시 바깥의 몬스터를 퇴치하는 의뢰나 호송, 호위 등의 임무를 맡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전쟁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라고 볼 수 있었다. 한 도시를 공격하거나, 다른 귀족의 영지를 공격하거나. 크게는 나라를 공격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전멸을 하거나 혹은 큰 부상을 입기도 하지만 그들은 승리를 했을 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남자, 노예, 보물, 돈, 식량. 그 외의 많은 것들.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나 영지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환전한다면 적어도 모험가의 두배 이상은 벌 수 있는 것이 용병이었다.
"물론 그렇긴 하죠."
"목숨 내놓고 사는 것은 용병이나 모험가나 마찬가지인데... 왜 모험가 길드의 모험가들은 용병이 되지 않은 걸까요?"
"글쎄요... 제가 알기론 적성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직업 적성과 마찬가지로 모험가가 되느냐, 용병이 되느냐는 결국 그 사람의 변할 수 없는 특징인 것 같아요. 천성이 태평하고 장난기 넘치며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오지랖 넓은 이들은 대부분 모험가가 되는 것 같더라구요. 그리고 그 반대의 사람들은 용병이나 기사가 되고."
"그렇군요. 그렇다면 바꿔 말하자면 모험가들은 자신의 목적보다는 남 일에 관심이 많은 그런 사람들이라는 거군요."
"뭐... 제가 보기엔 그래요. 대부분 100레벨을 전후로 자신의 적성을 깨닫게 되죠. 용병 연맹이나 모험가 길드나, 아니면 제작자 연합이나 상인 조합 대부분이 탈퇴와 가입을 자유롭게 하는 이유도 그거에요. 잡 파인더로 직업 적성을 찾기 전까지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100레벨이 되기 전까지는 자신에게 맞는 세력을 찾기 힘든 것이지요."
"네. 그게 맞아요. 그리고 모험가라는 직업 자체가 생각보다 많은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답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것이죠. 하지만 몬스터는 달라요. 각 모습이나 형태, 종족, 성향, 속성. 그 모든 것을 조합해서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죠. 그래서인지 모험가들은 대부분은 호기심이 강하고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이 많아요. 그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해결하면 할 수록 정보가 되어 자신들에게 큰 이득이 될테니까...요."
말을 하던 펠리시아가 천천히 의아함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 역시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
"왜죠? 왜...? 왜 이런 일이!?"
화들짝 놀란 그녀는 빠르게 두루마리를 펼쳐보았다. 자신이 조사한 두루마리 안에 있는 명단을 빠르게 읽어내리던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설마."
"주시겠어요?"
"...당신이나 상아. 이것을 위해서였나요?"
모험가 길드의 유명인이자 길드의 대표인 상아.
지금까지 남자와 사귀어 본 적이 없고 모험가 길드의 마녀라는 이명까지 가지고 있는 필레에게 접근해 용자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 운현.
이 둘은 안그래도 모험가들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존재다. 그런 이들이 예전에 연인이었다는 것은 스캔들을 떠나서 모험가들에게 큰 이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클랜이든, 무소속의 모험가든 모험가 길드가 관리하는 던전을 이용하는 입장에서 모험가 길드의 신세를 지지 않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 모험가 길드의 수장인 상아에게 100레벨도 되지 않는 초심자 모험가가 연인이었다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운현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상아의 지원을 더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인지 아닌지도 모를 특수종 몬스터와 코어따위보다 운현이라는 존재가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 왜 이들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펠리시아는 명단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100레벨도 되지 않아 레벨업에 더 관심을 가지는 모험가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200레벨이 넘는 이들이 왜 상아와 운현의 관계보다 운현이 레벨업에 사용한 코어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인가.
"이유는 모르죠. 하지만 의심을 하고 조사를 해 볼 여지는 충분히 있지 않을까요?"
당황하던 펠리시아는 운현이 자신을 향해 조용히 말하자 아까 전 그의 포크가 자신에게 겨눠졌을 때 이상의 섬뜩함을 느꼈다. 순간의 섬뜩함이 아니다. 마치 어느새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끝없는 늪에 턱끝까지 잠겨져 있는 듯한 찐득한 두려움이다.
"당신... 누구야."
'어쩌면 이자... 필레에게 접근한 것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이것을 위해서...?'
아직 100레벨도 되지 못했다. 보이는 모습이나 신분을 봐도 야인 이상은 아닌 자다. 그런 자가 이런 계책을 낸다? 자신조차 너무 갑작스러운 큰 스캔들에 놀라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며 이들의 진심을 집어낸다?
상아와 연인이라는, 저레벨 모험가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위험할 수 있는 자리에 스스로 올라가며 이런 함정을 만들어 버린 운현을 멍하니 바라보며 펠리시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싸늘히 웃으며 답했다.
"글쎄... 과연 내가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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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
"벌써 일어났어요?"
아침이 되자 부스스 몸을 일으킨 헤스티아는 운현을 보며 놀란 얼굴로 물었다. 방에 있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생각을 하고 있는 그를 본 그녀가 말을 걸자 운현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응. 아직 시간은 이른 것 같은데. 더 자도 괜찮아."
"아뇨... 이제 일어나야죠. 오늘은 어떻게 하실 거에요?"
"글쎄..."
일단 현재 예정되어 있는 일은 아라크네 클랜과 만나는 것, 아돌과 만나는 것. 그리고 라닌을 만나는 것, 더 나아가 천검자를 만나는 것이었다. 아라크네와는 오늘 만나면 될 것이고 아돌과는 내일 저녁에 만나면 된다. 천검자가 어디에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상아와 이렇게 관련이 되어버린 이상 천검자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라닌의 문제는 일단 제쳐둬야겠군.'
"오늘은 아침부터 움직이도록 할까? 지금 85레벨이니까 오늘 열심히 하면 90레벨까지 올릴 수 있을거야. 어서 2계층에 가고 싶은걸."
"헤에... 그럼 오늘부터 쭉 던전에 있는 거에요? 그런 거라면."
"아니. 당분간은 당일치기 밖에 계획에 없어."
운현이 바깥에 나올 때마다 일이 터지는 것이 영 불안했던 헤스티아는 그의 말에 기쁜 듯 말했지만 이어진 말에 우울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웃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운현은 문쪽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그럼 씻고 내려와. 다른 애들은 내가 깨울게."
아직까지 운현과 동침한 이는 헤스티아 뿐이었다. 적당히 흥분도를 조절해가며 전투를 한 덕분에 아직까지는 동침이 필요 없었는지 운현을 찾지 않은 그녀들을 떠올리며 문을 열고 나선 운현은 차례대로 여인들을 깨우고 길드 회관으로 향했다.
'과연 얼마나 움직이려나.'
어제 운현 일행이 폭렙을 하게 된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지나가는 몇몇 저레벨 모험가들이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수근거리는 것에 운현은 히죽 웃었다.
'생각대로 움직여주면 좋을텐데...'
원래 세상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기 마련이다. 진실을 이야기해도 자신만의 행복회로를 돌리며 그것을 뇌피셜화시키는 이들은 분명히 존재하기 마련이다.
운현과 그의 일행들이 단번에 레벨업을 하게 된 것이 상아가 운현에게 준 코어 때문이라고 알려졌지만 운현은 모든 이가 그것을 믿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특히 1계층에서 활동하는 저레벨 모험가는 더욱 더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가지지 못한 자들은 자신에게 가지지 못한 자의 행운이 올 것이라 믿고 있거든.'
현실에서 막대한 자산을 가진 채 그것을 숨기고 일반 소시민으로 살아가며 운현은 많은 인간 군상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가진 자는 행운을 바라지 않는다. 가진 자는 터무니 없는 행운으로 자신이 가진 것이 늘어나기를 기대하기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움직인다.
하지만 가지지 못한 자는? 그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부러움과 질시를 보내며 그것이 행운으로 인해 자신의 품에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단순하게 로또 판매율만 봐도 그렇다. 진정으로 가진 자들 로또나 복권을 사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로또 당첨 금액 십억 정도 되는 돈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수준의 행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것에 매달려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동안 다른 이들의 것을 빼앗을 생각만 할 뿐이다.
하지만 가지지 못한 이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로또 당첨은 희망이고 꿈이며 미래다. 천문학적인 확률을 노리며 그들은 로또를 구매한다.
저레벨 모험가들 역시 마찬가지다. 고레벨의 모험가에게 있어서 운현이 얻은 코어는 있으면 좋지만 반드시 그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있는지 없는 지도 모르는 것을 위해서 1계층으로 이동해 시간을 날리느니 차라리 자신에게 맞는 계층에서 몬스터를 잡으며 레벨을 올리고 그 코어를 얻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레벨의 모험가들은 다르다. 그들은 운현과 상아가 한 말을 믿지 않고 자신들도 특별한 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운현의 파티 평균 레벨을 분석해 그들의 레벨에 맞는 몬스터들을 잡으려 할 것이다.
'평균 레벨을 따지면 일반 늑대부터 시작해서 코볼트 정도까지군.'
"저기..."
"네?"
"오늘은 어디로 가실 건가요?"
힐끔 힐끔 자신을 쳐다보던 모험가 중 한명이 궁금하다는 듯 묻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글쎄요... 이번에 레벨업을 많이 하긴 했지만 아직 그게 익숙하지 않으니... 일단 익숙하게 잡던 몬스터들을 잡아 볼 생각입니다만."
"그게 어딘데요?"
"뭐 여기저기 있죠. 코볼트를 잡든 홉고블린을 잡든... 그 외에도 다른 몬스터를 잡을 수도 있구요."
정확한 이야기보다는 두루뭉술한 대답을 꺼낸 그는 주변의 모험가들이 슬그머니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우루루 빠져 움직이는 것을 본 운현은 순식간에 빈 자리가 많아지자 고개를 숙이고 싸늘히 웃었다.
'이걸로 사람들은 좀 줄겠군. 좀 편하게 사냥을 할 수 있겠어.'
운현 파티가 전투를 해야 할 적정 레벨의 몬스터는 오크다. 80레벨부터 100레벨까지 사냥하기 좋은 지역인 오크 평원의 경우 사람들이 많이 없는 편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는 곳이다.
시간은 아무리 있어도 모자르고 레벨은 아무리 올려도 부족하다. 한마리라도 더 많은 몬스터를 잡고 한번이라도 더 많은 전투를 치뤄 그녀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야 했다.
'최대한 많이, 최대한 빠르게 레벨업을 시켜야해.'
1레벨과 400레벨의 죽음에 대한 경우의 수는 그야말로 천지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5계층의 헬하운드가 400레벨의 모험가와 1레벨의 모험가를 죽일 수 있지만 1계층의 고블린은 1레벨의 모험가를 죽일 수 있어도 400레벨의 모험가를 죽일 수는 없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길가다가 떨어지는 화분에 맞아도 저레벨의 경우 맞고 한방에 가버릴 수 있지만 고레벨의 숙련된 모험가는 자신의 감각으로 그것을 쳐내거나 막아낼 수 있다.
오죽하면 미국의 크리스락이 이런 농담도 하지 않았겠는가.
80세가 넘으면 길가다가 차에 치여도 자연사라고. 그의 말에 부분적으로는 동의하는 운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많이. 좀 더 빠르고 정확하게 그녀들을 키워야한다.'
운명에 의한 죽음은 말도 안되는 죽음이 없다.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는 죽음만이 존재한다.
길가다가 푹 쓰러져 죽는 의문사따위는 없는 것이다.
심장 발작이든, 아니면 독에 맞든. 그것도 아니면 길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머리를 돌에 부딪혀 뇌진탕으로 죽든. 결국은 그 죽음에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죽음의 이유를 최소화 시켜나간다. 저레벨에 경험 없는 모험가라면 반드시 죽을만한 이유를 배제해나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운현이 그녀들을 지키는 한 그녀들은 쉽게 죽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그녀들을 지켜가며 레벨을 올려간다면 최후에는?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들의 숙련도를 최대한 올려놔야 한다. 그때까지는 내가 최대한 움직일 수 밖에 없어.'
"주문하시겠습니까?"
깊게 빠져 있던 상념에서 그를 깨운 것은 다름아닌 모험가 길드의 메이드였다. 진한 흑발의 메이드는 그녀 특유의 무심한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며 메뉴판을 내밀었고 운현은 내밀어진 메뉴판을 그대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아. 응. 빵이랑 커피를 줘."
"알겠습니다."
아침 식사용 빵과 커피를 주문한 운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자리에 빵과 커피가 놓여지자 빵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커피를 홀짝였다. 그가 두번째 커피를 주문하고 얼마지나지 않았을 때 계단을 통해 그의 동료들이 내려왔다.
"오빠!"
"어라? 오늘은 사람들이 별로 없네."
"빵 시킨거야?"
평소보다 휑한 길드의 1층을 둘러보며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가 한마디씩 하자 운현은 웃으며 그녀들을 반겼다. 떠들썩하게 아침 식사를 주문하고 빠르게 식사가 끝나자 운현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은 오크 잡으러 갈거야."
"오크..."
"괘, 괜찮을까요?"
"이야기만 들었는데... 던전의 오크는 강하다고. 아직 경험이 적은 우리가 가능할까?"
아까 전 모험가들에게 했던 이야기는 오크의 서식지에서 다른 모험가를 한명이라도 더 줄이려고 내뱉은 말에 불과했다. 그것에 훌륭히 낚인 듯한 모험가들이 꽤 있으니 당분간은 1계층의 저레벨 몬스터 서식지가 붐비고 고레벨 몬스터 서식지에 사람이 없을 것이다.
'화력은 충분하니까.'
자신이 있는데다가 그녀들을 위한 고급 장비까지 있다. 고작 오크를 사냥하면서 그녀들이 다치거나 죽을 일 따위는 없기에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 오크라고 해봤자 좀 강한 고블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아니 누가 오크를 고블린이라고 생각해..."
"괜찮다니까. 다른 전투 할 때도 그랬잖아?"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여인들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의 말대로다. 힘들기는 하지만 확실히 홉고블린을 잡기는 잡았으니 말이다. 그의 뛰어난 지휘만 있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음... 회복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오크의 공격력은 고블린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력하다고. 나도 방어에는 확실히 자신이... 그리고 새로 익힌 스킬의 사용도 어색하고 말야."
"아. 회복은 걱정마."
미야가 떨떠름히 말하자 파티의 회복담당인 바제트는 손을 들며 자신있게 말했다. 그녀의 반응에 미야와 헤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운현이 준 목걸이 덕분에 최대 마력량과 마력 회복 속도가 증가했거든. 거의 라플란의 반지 수준인데...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한거야? 이 정도라면 가격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거야. 마땅히 줄 타이밍을 찾지 못해서 못 준 것 뿐이니까 너무 부담갖지마."
"좋겠다..."
헤스티아나 바제트가 좋은 장비를 가졌다는 것 보다는 운현에게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 부러웠는지 미야는 자랑스러운 하얀 꼬리와 귀를 축 늘어트리고 힘없이 말했다. 긴 손가락을 턱에 대고 바제트의 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한차례 웃은 운현은 주머니에서 팔찌를 꺼내었다.
"어?"
"어라? 왜 내 주머니에 팔찌가 있지? 으음... 이 팔찌는 격투가나 검사가 사용할 수 있는 팔찐데.... 최대 기력량을 증가시키고 하루에 한번 뿐이지만 남은 기력과 마력을 전부 소모하는 것으로 앱솔루트 쉴드를 사용할 수 있는데다가 스킬 흡기를 사용하게 해줘서 몬스터를 직접 공격하거나 방어를 함으로써 몬스터의 힘을 빼앗아 기력을 보충할 수 있는 이 팔찌가... 왜 나한테 있을까?"
운현은 팔찌를 들어 미야의 앞에 보여주고 생글생글 웃었다. 옵션만 봐도 검사, 혹은 격투가용의 팔찌다. 장식이나 색을 보아도 화려한 것이 남성용이라기보다는 여성용에 가까운 팔찌이기에 미야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운현을 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헤, 헤헤헤... 설마 내꺼야?"
"글쎄~"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뻗은 운현은 미야의 오른팔에 팔찌를 끼워주었다. 마치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딱 들어맞는 팔찌를 보며 미야의 얼굴이 환해지자 운현은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었다.
"수갑까지 채워놨으니까 쫄래쫄래 다른 사람 따라가지마. 넌 내꺼니까 말야."
"우우... 고마워! 운현!"
여자된 몸으로 누군가에게 소유되는 듯한 느낌은 어찌보면 무척이나 기분나쁠 수 있는 것이지만 미야는 이 느낌이 생소하지 않았다. 탱커로서 모두를 지켜줘야 하지만 지킴을 받는다는 기분에 마음이 따뜻해진 미야는 촉촉해진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우. 왜 눈물이 나려고 그러지?"
"이 정도로 감동받으면 곤란하지. 자. 이제 오크를 잡는데는 큰 걱정 없겠지?"
"응!"
몬스터를 공격하거나 방어함으로써 기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은 탱커인 미야에게 무척이나 좋은 것이었다. 새롭게 얻은 스킬은 흑암권의 경우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기력이 소모되는데 몬스터에게 맞으면 맞을 수록 기력이 상승한다는 것은 흑암권을 계속 발동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이걸로 확실하게 모두를 지켜줄 수 있겠어. 그리고... 운현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을 수 있어.'
운현의 검술이 대단하긴 했지만 홉고블린과의 전투를 떠올려보면 그라고 하더라도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탱커도 아닌 운현이 계속 공격을 받다간 언젠가 무리가 와 공격을 허용하고 말 것이고 마땅한 방어 스킬도 없는 그에게 그것은 치명상이 될 수도 있었다.
"열심히 할게!"
"나도!"
"저두요!"
'이정도면 훌륭하군.'
레벨업에 대한 열의를 다지며 그녀들이 밝은 표정으로 웃자 운현은 그녀들을 마주하며 빙긋 웃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볼까? 오늘 목표는 5레벨을 더 올려 90레벨에 진입하는 것이지만 빨리 레벨업을 할 수 있다면 100레벨까지도 노릴 수 있겠네. 열심히 하자!"
350====================
제안
"우와... 저기 사람들이 저렇게 많은 건 처음 봐요."
"사람이란 다 저런 법이지."
입구 근처, 고블린들과 홉고블린을 잡으러 가는 길쪽에 평소보다 몇배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며 운현 일행들은 평소 다니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통해 오크들의 서식지로 향했다. 길드에서 구입한 지도를 보며 오크들이 서식하는 평원에 도착한 운현은 쓰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없군."
과거에 왔던 오크 서식지가 아닌 다른 오크 서식지에 도착한 운현이 느긋하게 말하자 바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그래도 이쪽은 그리 인기가 있는 곳이 아니니까."
"그래?"
"응. 던전이 넓다는 것은 알고 있지? 던전에는 각 몬스터들의 서식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그리고 이곳은 오크들이 서식하고 있지만 오크 외에도 코볼트들이 가끔씩 출몰하는데다가 오크 워리어의 수가 많아서 위험지역에 속한다고."
"흐음. 그렇군."
"왜 이런 곳으로 온거야?"
오크들이 많이 나오고 오크 워리어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곳이 아닌, 이런 곳으로 자신들을 이끌고 온 운현을 향해 미야는 궁금해하며 물었다. 좋은 장비를 얻어 오크 워리어를 상대하는 것이 두렵다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이곳을 지정해서 올 필요는 없었다.
"이유는 두가지야. 지금 우리는 사람들의 주목을 너무 받고 있어."
"우리가 아니라 너겠지."
"하하하. 그냥 우리라고 하자. 하나는 모두를 위해서. 모두는 하나를 위해서 몰라?"
"말은 잘해..."
상아와의 스캔들로 운현이 유명해져 안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바제트는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답하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주목을 피하기 위해서 이쪽으로 왔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자고. 그럼 두번째는?"
"너희들의 훈련을 위해서."
"에?"
"훈련이요?"
강한 장비를 가지게 되었고 레벨이 급상승해 자신감이 붙어 있는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운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훈련이 필요할까? 라고 생각한 그녀들을 향해 빙긋 웃은 운현은 자신의 투척용 단검을 잡은 후 힘껏 던졌다.
"크에에에엑!!"
수풀에 숨어서 기습을 노리던 오크의 미간에 단검이 적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수풀에 있던 오크 일곱마리가 무기를 들고 튀어나왔고 그것을 보며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자. 전투 시작이다."
"너, 너무 갑작스럽잖아!"
진형을 꾸린 것도 아니고 마법의 준비가 된 것도 아니다. 기습에 가까운 공격이기에 당황하면서도 미야는 잽싸게 앞으로 튀어나가 오크들을 맞이했다.
"하아아압!!"
파동권을 쏘아 세마리 오크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유도한 미야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힘껏 내질렀다.
"와라!! 내가 상대해주겠어!!!!"
포효에 가까운 도발이 발동되자 운현에게 선제공격을 당해버린 오크들이 시선을 돌렸다. 파동권과 도발에 의해 그들의 주의를 모두 끈 미야는 크게 발을 구르며 레벨업을 통해 얻은 스킬을 발동시켰다.
"흑암권!!"
신체를 검은 돌처럼 단단하게 하여 방어력을 극대화시키는 기술이 발동되자 오크들의 강한 공격도 어느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이거 좋은데!?"
거기에 운현에게 받은 팔찌 덕분인지 기력이 감소하기는 커녕 오히려 쑥쑥 증가하는 기분이다. 힘이 넘치는 기세로 미야가 기쁘게 외쳤을 때 바제트는 짧게 혀를 차고 미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힐!"
저렇게 갑자기 모든 공격을 감당하다니. 아무리 좋은 장비라고 하지만 너무 무모하다. 미야가 가지고 있는 팔찌는 체력이나 부상을 회복시켜주는 것이 아닌 기력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니 말이다.
"헤스티아!"
미야에게 힐을 넣어 준 후 활을 잡은 바제트는 뒤쪽에서 벌써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헤스티아에게 다급히 외쳤다. 새롭게 얻은 스킬을 사용하려는 듯 평소보다 주문이 길다. 짧게 혀를 차며 오크들에게 화살을 쏘아대던 바제트는 눈을 번쩍 뜬 헤스티아가 지팡이를 내밀자 미야에게 외쳤다.
"미야! 뒤로 빠져!"
"파이어 볼!!"
"쿠우우웅!!"
미야를 집중공격하는 오크들의 중심에 커다란 화염구가 떨어졌다. 라플란의 반지 덕분인지 과거 그녀가 썼던 파이어 볼보다 위력이 더욱 강해보인다.
"케에에엑!!"
불길에 휩쌓여진 오크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내며 바닥을 뒹구는 동안 후끈한 열기를 그대로 느끼게 된 미야는 혀를 내두르며 힐끔 뒤를 보았다. 방금 전의 강력한 마법이 끝나고 다른 마법을 준비하는 헤스티아를 보니 공격은 맡겨둬도 될 것 같았다.
"그럼 내가 할 일은 하나지!"
바제트와 헤스티아의 공격을 믿고 자신은 오크들을 잡아두기만 하면 된다. 미야는 빠득 이를 갈며 바닥을 굴러 몸에 붙은 불을 끄고 힘겹게 일어서는 오크들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지뢰진!!"
"카아아!"
"캬아아악!!"
바닥에 내리꽂혀진 주먹이 만들어낸 지진에 간신히 일어섰던 오크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덕분에 여기저기 타버린 오크들의 상처에 흙이 뭍었고 그때문인지 오크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다시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도 놀고 있을 수만은 없지."
의외로 잘 버티고, 또 연계가 잘 된다. 홉고블린과 싸우며 서로에 대해 마음을 연 탓인지 흔들림없이 오크를 상대하는 그녀들을 본 운현은 미야의 옆으로 걸어간 후 차분히 말했다.
"지뢰진으로 상대를 쓰러트렸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어. 예를 들어."
"캬악!!"
바닥에 쓰러져 있던 오크 중 하나가 분을 참지 못했는지, 아니면 다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발안인지 모를 정도로 강력한 힘을 담은 도끼를 집어 던졌다. 흑암권으로 방어력이 상승했다고는 하나 미야라 하더라도 이것에 당하면 큰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공격할 수 있거든."
회전하며 날아 든 도끼의 자루를 여유롭게 잡아 자신의 손에 넣은 운현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야를 향해 빙긋 웃어보이며 미야보다 더 놀란 오크를 향해 도끼를 휙 집어 던졌다. 단검 투척 한방으로 오크를 절명시킬 정도의 실력을 가진 운현이다. 그가 던진 도끼는 아까 오크의 힘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담겨 자신의 주인에게 돌아갔다.
"크어억..."
"세상에... 어떻게 한거야?"
"결국은 이것도 흐름이지."
운현이 던진 도끼에 정통으로 머리를 맞은 오크는 천천히 쓰러졌다. 그 광경에 오크들은 침을 꿀꺽 삼키고 힐끔 운현을 보았다. 어쩌면 저 뒤에서 마법을 준비하는 저 무서운 마법사보다 이 남자가 더 무서운 상대일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크르...크어...!"
"더블 파이어 볼트!!"
마법을 완성시킨 헤스티아가 지팡이를 내밀며 마법을 발동시키자 순간 멈춰 있던 전투가 재개되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미야는 달려드는 오크의 턱을 후려친 후 쓰러지는 오크의 머리에 무릎차기를 먹이고 운현에게 물었다.
"또 해 줄 말 없어?"
"강한 힘보다 정확한 타격이 중요해. 타점이 정확하다면 이런 것도 할 수 있지."
"캬아아!!"
달려드는 오크의 턱을 검자루로 툭 친 운현은 오크가 그대로 쓰러져버리는 것을 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그 광경에 미야는 당황하며 운현을 보았고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검자루의 끝을 손가락으로 톡 튕겼다.
"정확한 타점. 절제된 힘. 중요한 것은 공격의 흐름이 어디에 있느냐와 상대의 약점이 무엇이냐지. 그것을 정확히 파악한다면 상대의 공격력을 이용해서 그것을 그대로 적에게 돌려 줄 수 있어."
"우와! 그건 어떻게 한거야!? 나도 배울 수 있어?"
"노력 여하에 따라."
"캬아아아!"
"거기 앞에!! 그만 떠들고 빨리 싸우지 못할까!!"
미야와 운현이 적을 상대하는 도중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바제트는 발끈하며 화살을 쏘아내고 버럭 외쳤다. 그녀의 외침에 미야는 혀를 날름거린 후 달려드는 오크의 턱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톡."
"어?"
"캬아아아!!"
"쉬운게 아니야. 정확한 타점. 정확한 힘. 그리고 상대방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분석력과 통찰력이 필요하다고."
운현이 했던 것을 따라하려는 듯 미야는 최대한 힘을 주지 않은 채 오크의 턱을 쳤지만 오크는 그녀의 공격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도끼를 휘둘렀다. 기겁하며 그것을 피할 수 밖에 없었던 미야가 억울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운현은 쓰게 웃으며 자신을 공격하는 오크의 공격을 피한 후 검자루를 움직여 오크의 어깨를 친 후 비틀거리는 오크를 미야에게 끌어 밀어버렸다.
"잡아."
"응!"
그저 툭 건드린 정도에 불과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거의 힘이 들어가지 않아보였는데 오크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는지 무기를 들고 있는 팔을 들지조차 못했다. 저 육체적으로 강인한 오크가 이런 충격을 받다니. 미야는 운현이 가진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두근거려하며 눈을 빛냈다.
"그럼 마무리를 질까?"
전투는 거의 마무리 단계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마리 남은 오크가 숨을 헐떡거리며 증오를 담은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것에 빙긋 웃은 운현은 오크의 미간에 화살이 꽂히고 오크가 쓰러지자 뒤를 보며 말했다.
"이정도면 훌륭한데?"
"엄청 놀랐다고!"
"오빠는 어떻게 아신 거에요?"
만약 운현이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기습을 당했을 것이다. 아까의 위험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콩닥거렸는지 헤스티아는 쪼르르 그에게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잡고 조심스레 물었다.
"나야 다년간의 모험가 생활로 감각이 발달해 있으니까 그렇지."
"바제트 언니도 눈치챘어요? 언니도 엘프라서 감각이 예민하지 않나요?"
"난 눈치채지 못했는데..."
"하하. 그건 갑자기 레벨업을 했기 때문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걸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해지면 나보다 더 기척을 잘 느낄걸?"
"그런데 운현."
오크들의 사체를 마석에 담아 정리를 끝낸 미야는 복잡한 얼굴로 운현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다가오자 그는 웃으며 미야를 반겼고 미야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그 기술 있잖아."
"응."
"그거 내가 익힐 수 있는 기술이야? 굉장히 어려웠는데..."
"익숙하지 않을 뿐이야. 연습하면 익힐 수 있어. 그리고 상대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하지. 그것만 할 수 있다면 어렵지 않게 쓸 수 있을거야."
자신감이 떨어져버린 미야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하자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길에 용기를 받은 미야는 헤죽 웃었고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운현은 살며시 그녀의 볼에 키스해주었다.
"우왓!"
"하하... 이정도로 놀라지 말라고. 자... 그럼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해볼까? 힘들거나 그런 사람들은 없지? 흥분도는 어때?"
"전 괜찮아요."
"나도."
"나도 아직 괜찮아."
"그럼 가볼까?"
첫번째 오크 무리와 조우한 이후 운현 일행은 순조롭게 오크들과의 전투를 통해 올라간 레벨에 맞추어 자신의 전투 실력을 높여갈 수 있었다. 다들 센스가 없는 것도 아닌데다가 운현의 적절한 조언 덕분인지 그들은 전투를 시작한지 세시간에 3레벨을 올리는 쾌거를 달성해버렸다.
"아이고..."
"힘들다."
"왜 이렇게 몬스터들이 몰리는걸까?"
"그러게 말야."
미야와 바제트, 헤스티아가 지친 얼굴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자 운현은 슬그머니 손목에 걸려 있는 사자의 팔찌를 해제해 인벤토리에 넣었다. 사자의 팔찌를 착용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찾아온다. 전투 도중 몬스터를 몰아오겠다고 하며 적절히 사자의 팔찌로 오크들을 유인하고 배치하여 거의 틈을 두지 않고 동료들을 몰아친 그는 한계에 도달한 듯한 여인들을 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슬슬 점심 먹을까? 좀 이르긴 하지만 지금 먹어두는게 좋겠다."
"응? 왜?"
"이따가는 오크 워리어를 본격적으로 잡아볼까 하거든. 오늘의 목표는 오크 워리어 5마리 잡는 것으로 하자."
"으으..."
"오크 워리어라니."
"그래도 홉고블린을 상대할 때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안그래?"
순조롭게 레벨업을 하고 있으니 강한 상대에 대한 대응법도 마련해야 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오크 워리어라면 좋은 상대가 되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운현이 배낭에서 냄비와 물을 꺼내 조리 준비를 시작했을 때 지친 얼굴로 앉아 있던 바제트는 움찔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운현?"
"헤에... 이건 또 뭐야."
"응? 왜 그래?"
"무슨 일이에요?"
슬슬 레벨에 익숙해져 감각이 예민해진 바제트가 딱딱히 긴장하고 운현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자 미야와 헤스티아는 불안해하며 그들을 보았다. 그녀들의 의문 섞인 시선에도 바제트와 운현은 기척이 느껴지는 동쪽에 시선을 보내고 있을 뿐 이었다.
"....."
동쪽의 언덕 위에 오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일반 오크와는 다른 모습이다. 덩치도 더 크고 엄니도 더 길게 솟아 있었다. 몸에 화려한 문신을 하고 있었고 들고 있는 무기는 일반 오크들이 들고 다니는 도끼와 다른 길쭉한 언월도였다.
"저게 오크 워리어..."
"한놈이 아닌 것 같은데."
하나 둘 씩 오크 워리어가 언덕 위에 모습을 보였다. 총 숫자만 해도 일곱. 그들이 언덕 위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에 바제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운현에게 말했다.
"우, 운현. 어쩌지?"
"어쩌긴 뭘."
"스르릉."
"싸워야지."
운현은 살의를 품으며 언덕에서 내려오는 오크 워리어가 아닌, 언덕 위에 그대로 남아 있는 일반 오크와 비슷한 덩치를 가졌지만 좀 더 화려한 복장과 지팡이를 들고 있는 오크를 노려보며 싸늘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