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40)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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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

"아무튼 그런 이유로 라닌을 찾고 있는 것이라 이거지."

'하우드에게 배웠다면 이 여자 역시도 운명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거군. 그렇다면 주의할 필요가 있어.'

운명을 바꾸고 싶어하는 것은 라닌 뿐만이 아니다. 운현 역시도 운명을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인 만큼 비타를 주의해야 했다.

'그냥 여기서 죽일까.'

과거를 생각했을 때 비타와 만난 적도 없었고, 또 비타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여기서 비타를 죽이면 운명이 바뀌고 자신을 방해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원래는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그녀가 살아 있다면. 그리고 운명을 바꾸는 것을 거부하는 자라면 자신의 위험이 한가지 더 추가되는 것이다.

라닌이 하는 행동을 보았을 때 그녀는 카야의 밑에 있지만 카야와는 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바뀌지 않는 운명은 다난교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운명을 라닌은 계속해서 바꾸려 하고 있었고 그것을 생각한다면 카야에 대한 조절은 라닌이 알아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바꾸느냐가 문제지. 그렇다면 그것이 판가름 날때까지는 라닌을 이용하는게 더 이득이겠군.'

운현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연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운명이었다. 그것이 결정되는 분기점까지는 라닌을 살려두는 것이 이득이다.

하지만 비타와 카야의 행동은 확실히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득은 운명을 바꾸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이 여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나에게 유리할 일이 없군.'

모험가 길드에 큰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서 어지간하면 모험가 길드의 인원은 건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정도로 큰 변수가 된다면, 그리고 그 변수가 자신의 계획을 틀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제거하는 것이 더 이득이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운명을 바꿈으로서 악신이 나타난다. 그 악신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

"...지금 뭐하자는 거죠?"

"손을 잡자는 것이지. 나 역시도 다난교와는 척을 지고 있는 상황이거든. 그년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손을 잡고 움직이자고. 아무래도 넌 나보다 다난과 오래 싸운 것 같으니까 말야. 나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함께 한다면 너에게도 꽤 도움이 되지 않겠어?"

"흐으음..."

운현이 자신에게 연합을 제의하자 비타는 의심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압도할 정도의 강한 힘을 가진 자다. 그런 자와 손을 잡는다면 나쁠 것은 없겠지만 한점 남아 있는 불안감은 비타를 망설이게 만들고 있었다.

"왜? 싫어?"

"그렇다기보다는... 다난교와 적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가요?"

"적어도 같은 하늘에서 계속 살아가지는 못하겠지."

"...하긴 아까 다난 교와 싸우던 것을 보니까 그런 것 같긴 하던데."

"그 전에 몇가지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 너는 운명을 읽을 수 있나?"

"아니요. 단편적인 몇가지는 알 수 있지만..."

"단편적인 몇가지?"

"네. 운명을 모두 읽을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얼마 없어요. 묘족의 뛰어난 점쟁이, 그리고 저의 스승님. 제가 알기론 이 둘 밖에는 없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요한 인물 몇몇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알 뿐이에요."

"호오? 그래? 그럼 그걸 가르쳐 줄 수 있겠어? 운명이 바뀌는 것을 막으려면 나도 움직여야 하니까 말이지. 내가 그들을 가드하며 운명의 때까지 지켜낸다면 운명의 틀어짐이 상당히 막아지지 않을까?"

"...그 말. 믿어도 되나요?"

"물론이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운현이 말하자 비타는 떨떠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운현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를 가리켰다.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자를 믿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군요."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보여주지."

"에?"

운현은 순순히 후드를 벗고 자신의 마스크를 풀었다. 약간 마른 듯한, 조금은 신경질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거친 인상의 남자의 얼굴이 드러나자 비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러겠지."

'아직 모험가로 이름을 날리지 않았으니까.'

과거 도적이었을 때는 모험가 길드에서 큰 이슈가 될 정도로 유명해졌지만 지금의 운현은 그저 남자 모험가라는 특수성만을 지닌, 그다지 신경쓸 정도가 아닌 검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모험가 길드에서도 유명해지지 않았던 운현은 비타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본 후 느긋하게 말했다.

"어때. 이정도면 괜찮나?"

"네. 뭐..."

찝찝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힘이 되어 줄 사람이다. 침투경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가 궁금하지만 이제 손을 잡기로 했으니 천천히 알아가면 될 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은 총 다섯이에요. 첫번째. 저희 길드의 길드장이신 상아 길드장님. 상아 길드장님의 죽음은 약 한달 후에 찾아 올거에요. 많은 몬스터들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것이죠. 그리고 두번째는 윈드 경비대장. 윈드 경비대장은 다난교에게 잡혀 인신공양의 제물이 되어버리죠. 세번째는 발렌타인 가문의 가주에요. 윈드 경비대장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녀는 윈드 경비대장의 죽음에 분노하며 다난교를 공격하던 도중 전사합니다. 네번째는 저에요. 저는 삼년 후. 다난교의 성녀라고 불리우는 카야를 죽이고 폭사하게 됩니다. 다섯번째는 제작자 연합의 연합장인 피스나. 그녀는 악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게됩니다만... 결국 실패하고 좌절하며 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래?"

발렌타인 가문의 가주, 그리고 비타, 피스나의 죽음은 모르겠지만 상아와 윈드의 죽음은 알고 있는 것이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타는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가를 지불하면 운명을 읽어 주는 이가 있어요. 바운티아 라그랏슈. 묘족, 아니 세계 제일의 점쟁이입니다. 그녀에게 의뢰한다면 중요한 사람들의 운명을 읽을 수 있어요."

"이야기는 들어봤어. 뛰어난 점쟁이라면서? 믿을 수 있나?"

"스승님께서 인정하실 정도니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팔짱을 낀 후 비타에게 몇가지 더 물어보았다. 운현의 질문에 비타는 망설이면서도 순순히 대답을 해 주었다. 그녀에게서 얻을만한 정보를 대충 다 얻었다고 생각한 운현은 힐끔 시선을 돌리 미아노와 시이나, 말론을 가리켰다.

"그럼 문제는 쟤들인데."

"다난 교에서 노리는 것이라면 저들의 죽음 역시도 예정되어 있는 운명의 흐름이 아닐 거에요. 그들을 지키는 것이..."

"촤악!!"

"어...?"

말을 꺼내던 비타는 자신의 복부 손을 가져갔다. 따끔한 감각이 점점 거세어지는 것을 느낀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어 올린 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째...서?"

"다난교는 잡는다. 라닌도 잡는다."

"쿨럭...왜? 왜...날?"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맞은 탓인지, 아니면 협력을 제의하고 한시간도 되지 않아 자신을 공격한 것에 어이가 없었던 탓인지 비타의 얼굴에는 큰 충격과 의문이 서려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운현은 가볍게 검을 움직였고 몸을 비틀어 피하려던 비타의 움직임을 제대로 쫓은 운현의 검은 그녀의 목을 가볍게 꿰뚫어버렸다.

"끄르륵..."

피 끓는 소리와 함께 비타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고 느긋하게 말했다.

"그리고 운명도 바꿔야지."

"히. 히익!?"

운현의 말을 들은 미아노는 기겁하며 뒷걸음질쳤다. 운명을 바꾼다. 운명이 유지되면 자신은 살아남지만 자신을 죽이려는 자가 운명을 바꾸려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운현 역시도 자신을 죽이려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 살려주..."

"촤아아악!!"

공포에 질려 있는 미아노의 옆에 있는 시이나의 목을 벤 운현은 그녀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충격을 받은 듯한 말론 역시도 단칼에 죽여버렸다. 둘, 아니 비타까지 포함해서 셋을 죽이는데 아무런 망설임도 보이지 않은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캡슐을 꺼낸 후 미아노에게 검을 겨눴다.

"자. 즐겁고 신나는 고문 시간이다."

"살려...살려주..."

"오오. 살려주지. 살려주고 말고. 너에게는 알아내야 할 정보가 많이 있으니까."

"뭐든 말씀드릴게요! 뭐든지!"

저 강한 비타도, 그리고 자신을 지켜 줄 시이나마저도 죽어버린 이상 할 수 있는 방법은 이 남자에게 최대한 빌고 협조하는 것 뿐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이가 갑자기 칼부림을 한 것에 두려워하며 미아노는 다급히 외쳤고 그녀의 반응에 웃으며 운현은 캡슐의 뚜껑을 열었다.

"자. 그럼 들어와 보실까?"

"흐음..."

캡슐의 콘솔을 보며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미아노의 정신을 뒤져가며 그녀가 잊고 있는 기억을 얻어냈지만 영 좋지가 않다.

'그냥 단순하게 인사만 했을 줄이야.'

그 외에 다른 기억이 있나 아무리 뒤져보아도 특별할만한 것은 없었다. 그래도 한가지 얻어낸 단서는 귀족으로 위장한 라닌이 자신의 영지를 '성도'라고 한 것이었다. 이 세계의 지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그 성도라는 영지가 어디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무리였다.

"쩝."

"으헤에..."

한계까지 정신을 뒤진 탓에 미아노 역시 백치가 되어버렸다.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던 운현은 캡슐을 인벤토리에 넣은 후 검을 휘둘로 미아노의 목을 따버렸다.

"정신이 파괴된 사람을 되돌릴 방법 따위는 없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야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정보를 얻어낸다면? 거기까지 한다면 운현으로서도 대책이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아니, 차라리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다.

"아무튼... 긴 밤이었군."

오늘 하루 정말 많은 일을 했다. 시간을 확인한 운현은 자신의 흔적을 모두 없애고 옷을 갈아입은 후 하이딩을 걸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특별한 것 없는 작은 건물이고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만큼 이 시체들이 발견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모험가 길드의 간부. 그리고 공국의 공녀가 살해당했다. 이것이 알려진다면 큰 소란이 일어나겠지. 내일 아침에 상아를 만나고 잠잠해질 때까지는 얌전히 던전에서 레벨업을 해야겠군.'

몇일만 있으면 천검자가 던전 도시로 온다. 지금으로도 천검자를 상대하며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압도적으로 눌러버리려면 레벨업을 해두는 것이 낫다.

느긋한 걸음으로 길드로 향한 운현은 길드 건물의 입구에서 서성거리는 한 여인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필레다. 필레가 이 시간에 저기서 뭐하는 것일까. 운현은 궁금해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필레씨."

"아. 운현씨! 어디 다녀오세요?"

"네. 잠깐 볼일이... 그런데 필레씨는 왜 여기 계세요?"

"우우... 저희 길드장님이 나가서 또 안들어오시네요. 오실때가 됐는데."

"길드장님은 왜요?"

"오늘 밤에 회의가 있거든요. 아침에 일이 있다고 하셔서 오늘 하려고 하는 건데. 으으... 지금 길드의 간부들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안오셔서 나가서 찾을까 생각 중이에요."

"헤에..."

상아 역시도 마이페이스로 유명한 엘프다보니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운현이 쓴웃음을 짓자 필레는 볼을 긁적거린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러고보니 운현씨. 바제트씨를 도와주셨다면서요?"

"네? 아... 아. 아까요."

"네. 후후. 길드원으로서 감사드려야겠네요. 모험가 분들이 던전 도시에서 술 먹고 여기저기 뻗어 있는 것을 시청에서 지적하거든요. 엄청 취하신 것 같던데. 바제트씨가 모험가인 것은 어떻게 아신 거에요? 원래 알고 계시던 분이었나요?"

필레의 질문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던전 왔다갔다 하는 길에 잠깐 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모험가다 싶었던 거죠."

"후후후... 아무튼 고마워요."

"별 말씀을요. 매번 고생하시는 필레씨의 부담을 덜어드릴 수 있다면 이정도는 가뿐하죠."

생긋 웃으며 운현이 말하자 필레는 그의 웃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그의 팔을 토닥거렸다.

"아이 참~! 기분 좋은 말씀만 하시네~!! 정말~ 자꾸 그러시면 오해한다구요."

"뭐... 기분 좋은 오해라면 저야 영광이죠."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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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필레는 붕붕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운현이 상당히 좋은 사람이고, 또 좋은 말만 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슷하게 대한다. 괜한 오해때문에 기대를 했다가 그것이 무너지면 자신만 손해다.

"하하하... 너무 그러지마세요. 자꾸 그러시면."

"그러시면요?"

성큼 한걸음 다가 온 운현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술냄새와 담배의 냄새가 아찔하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리던 필레는 그 냄새의 끝에 있는 작은 특이한 향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

"음? 왜요?"

"아니... 왜 피냄새가."

'개콘가.'

비타와 미아노, 시이나, 말론을 죽이며 조금 뭍은 피의 냄새를 찾아낼 줄이야. 일부러 담배를 피우고 술을 몸에 뿌려 그것으로 지우려 했던 운현은 필레가 코끝을 쫑긋거리며 냄새를 맡으려 하자 쓰게 웃으며 말했다.

"필레씨가 이러시는게 더..."

"아앗!? 죄, 죄송해요!"

운현의 몸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가 향기를 맡는 모습이 자칫 잘못하면 추행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깜짝 놀란 필레가 뒤로 물러나며 외치자 운현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이런 것은 저에게 있어서 영광이에요."

"으으... 운현씨. 놀리지 말아요."

"네?"

"자꾸 그러시면 오해한다니까요."

"흠... 저는 상관없는데."

"...네?"

"필레씨 같은 아름다운 분과 엮이는 것은 저에게 오히려 영광이죠. 오히려..."

부드럽게 웃으며 운현은 필레의 손을 잡았다. 그가 자신의 손을 잡는 것에 놀란 필레의 몸이 딱딱히 굳었을 때 운현은 그 손을 들어 티끌 하나 찾아보기 힘든 하얀 손등에 살며시 입맞췄다.

"히익!?"

촉촉한 입술이 손등에 닿는 것에 놀라며 필레는 기겁했다. 지금까지 이런 경험은 단 한번도 없었다. 비록 상대가 자신보다 연상이고 야인이라고 하지만 생긴 것도 물론이거니와 그 분위기나 하는 행동거지. 그 외의 모든 것이 '야인'이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어딘가의 귀족들보다 더욱 귀족같은 운현이다.

그런 그에게 손등 키스를 당했으니 지금까지 남자의 면역이 없던 필레로써는 당황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인걸요."

"아, 으... 그..."

금방이라도 얼굴이 터질 것 처럼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필레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말도 제대로 못하고 후다닥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녀가 들어가자 빙긋 웃은 운현은 손에 남아 있는 필레의 감촉을 만끽하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정도면 필레에 대한 공략은 크게 필요 없겠군.'

헤스티아나 필레. 아마 미야나 바제트, 상아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남자에게 크게 면역이 없는 사람들인데다가 세계에 남자가 적다보니 남자의 접근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런 이상 그녀들과 다시 연인이 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위화감이라는 건데.'

연인들이 자신에게 호감을 갖는 이유가 지금까지 자신이 보인 행동. 즉 상냥하고 능력있는 매너남이라는 것 때문이라고 본다면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을 그녀들이 알게 된다면 골치아픈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피 냄새를 맡았다라... 주의해야겠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운현은 한개피 남은 담배를 입에 문 후 피우며 터덜터덜 잡화점으로 향했다. 담배냄새, 그리고 술냄새, 그 외에도 냄새를 지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최대한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적마족인 필레마저도 느낄 정도의 혈향이라면 묘족인 미야도 눈치챌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그것을 대비해서 탈취제라든가 아니면 향수를 더 구입해야겠다 생각한 운현이 길드회관 근처의 잡화점에 들어갔을 때 그는 그곳에 서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입술을 비틀었다.

"너 왜 여기있냐?"

"...그게."

손에 들려 있는 독한 술병. 그리고 안주용으로 쓰일만한 작은 육포, 그리고 들려 있는 담배와 향수. 그것들을 보며 운현이 떨떠름히 묻자 아르토리우스는 당황하다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너 담배 피냐?"

저번에 만났을 때는 그녀에게서 그런 냄새가 나지 않았었다. 운현이 궁금해하며 묻자 아르토리우스는 움찔하며 붕붕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요."

"그럼 왜?"

"...아까 운현님이 그... 모험가 길드의 간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어서..."

"......."

아까 전 필레와 나누던 이야기를 들었다는 건가. 그리고 자신이 피냄새를 감추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것을 준비했다는 건가. 운현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아르토리우스는 더더욱 우물쭈물하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따라와."

아르토리우스를 데리고 공터로 향한 운현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술병의 뚜껑을 열었다. 화악 치밀어 오르는 독한 술냄새에 만족한 운현이 그것을 손바닥에 뿌려 몸 여기저기에 바르자 아르토리우스는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이 향수도 피 냄새를 없애는데 좋습니다."

"아아. 고맙군.... 그런데 왜 여기 왔냐?"

"네?"

"모험가 길드의 영역에 네가 왜 와 있냐고 물었다. 네 할 일은 날 서포트 하는게 아닐텐데?"

필레나 다른 여인들에게 대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싸늘한 어조다. 그것에 아르토리우스는 머뭇거리다가 아무런 답변도 꺼내지 못했다.

"그게..."

"....."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왜 이곳으로 왔는지. 왜..."

"......"

"자꾸만 운현님이 생각나는지..."

"흠."

마인의 마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위신체라 그런지 꽤나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아르토리우스의 모습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던 그녀는 운현이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자 움찔하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아..."

운현의 손이 아르토리우스의 가는 허리를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그의 품에 안기게 된 아르토리우스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과거 자신을 쥐었다 폈다 하며 즐거워하던 아르토리우스의 모습은 상상도 하기 힘든 그 모습에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훔쳤다.

"으음..."

자연스레 이어지는 키스에 놀라면서도 그녀는 순순히 운현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입 안을 파고드는 혀를 반기며 그와 타액을 교환하던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의 입술이 떨어지자 아쉬워하며 애처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저는. 저는... 그게..."

"돌아가."

"네?"

"네가 할 일을 해라."

"...하. 하지만..."

냉정하기 그지 없는 그의 목소리에 아르토리우스는 시무룩한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살짝 손을 뻗었다. 운현의 옷자락을 잡은 그녀가 무언가 말을 꺼내기도 전 운현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명령을 따라라."

"...네."

무언가 더 말하려던 아르토리우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돌리며 터덜터덜 걸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제자리에 서서 바라보던 운현은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뭔가 잘못된건가."

"아. 다녀오셨어요?"

"안자고 있었어?"

꽤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아직 자지 않고 있는 헤스티아를 본 운현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방긋 미소지은 헤스티아는 운현의 품에 안긴 채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에... 술 냄새? 술 드셨어요?"

"응. 조금."

"흐으으음~ 많이 드셨나보네요."

"조금 마셨어. 조금."

술냄새를 맡는 척 그의 품에 얼굴을 비벼대던 헤스티아는 운현이 옷을 벗자 살며시 침대에 다가가 앉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웃어보이며 침대에 누운 운현은 헤스티아가 폴싹 자신의 품에 안기자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에 입맞췄다.

"내일 아침에 잠깐 나가야 할 것 같아."

"또요?"

"아아. 어쩌겠어. 내 의뢰인걸."

"너무 거기에 매달리는 것 같아요."

"하하하. 미안."

"아니... 미안하실 것 까지는 없는데."

운현과 함께 있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웠던 헤스티아는 말로는 그리 말하면서도 아쉽다는 감정을 지우지는 못한 듯 싶었다. 입술을 삐쭉 내밀며 작게 말한 그녀를 꽉 끌어안아 준 운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마 오전 중에 대부분 일이 끝날거야. 그러니까 오후에는 같이 던전에 들어가자. 미야랑은 많이 친해졌지? 같이 놀고 있어."

"우... 알겠어요."

이 파티의 리더는 운현이고 던전 탐색을 어찌 할지는 운현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에게 홀딱 빠져 있는 헤스티아는 운현의 말에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일은 누굴 만나는거에요?"

"레나 대사제님이지."

"파르티 교단의 퀘스트 때문에? 괜찮으니까 같이 하는 건..."

"미안."

그녀들이 다난교와 싸우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난교를 완벽하게 컨트롤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라닌이라는 존재가 있어 자신이 정확히 예측을 하고 분석을 할 수 없는 이상 최대한 안정적인 방향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던 운현은 헤스티아의 이마에 키스해준 후 작게 속삭였다.

"비밀 의뢰라서 어쩔 수 없어. 미안해."

"아, 아니에요."

운현이 연거푸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자 헤스티아는 붕붕 고개를 가로젓고 그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도톰한 입술이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미소지은 운현은 헤스티아가 적금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는 것에 살며시 손을 움직여 그녀를 끌어안았다.

"언제나 오빠한테는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는걸요..."

"그럼 다행이고. 자자. 오늘은 이만 잘까?"

"네... 그. 오늘은 안하는... 거에요?"

조금은 기대한 모양이다. 헤스티아가 침을 꼴깍 삼키며 묻자 운현은 그녀의 가냘픈 목덜미를 핥으며 천천히 그녀의 옷을 벗겨나갔다. 운현의 손길이 자신의 몸을 더듬는 것을 즐기며 헤스티아는 살며시 쾌락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우당탕탕!"

"....."

잠귀가 밝은 운현은 1층에서 들려 온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습격인가? 조용히 숨을 멈춘 채 바깥의 소리에 집중해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분주한 움직임이 들리기는 했지만 싸우는 소리는 아니다. 운현을 살며시 몸을 일으킨 후 시간을 살폈다. 아직 새벽 다섯시도 되지 않은 이른 아침. 평소의 길드라면 이정도까지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벌써 발견한건가.'

길드가 이렇게 분주하다는 것에 운현은 대충 예상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았다. 파랗게 질려 있는 모험가 길드의 길드원들. 그리고 얼굴을 아는 길드의 간부들 몇몇이 들것에 실린 채 흰색 천으로 덮혀 있는 이의 곁에서 엉엉 울고 있는 것을 보게 된 운현은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빨리도 발견했군. 자... 그럼 라닌이 어떻게 움직이려나.'

라닌이 원하는 것은 미아노와 시이나가 죽는 것이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서 그 둘도 죽여 놓은 채 그 자리에 있었던 운현은 조용히 뒤로 물러난 후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하이딩을 걸고 레밍의 집으로 향했다. 전속력을 다해 뛰어 십분만에 그녀의 저택에 도착한 운현은 비밀통로를 이용해 레밍의 방에 숨어 들어갔다.

"레밍님!"

"으음... 무슨 소란이야."

"큰일입니다! 미아노 공녀가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뭐?"

"그 뿐만 아니라 모험가 길드의 간부인 비타도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지금 윈디아님께서 상인 조합의 간부들에 대한 소집령을 내리셨습니다! 어서 가보시는게...!"

바깥에서 들어 온 메이드가 다급히 전하자 잠에 취해 있던 레밍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내보냈다. 자리에 앉아 잠시 생각하던 레밍은 얼른 철판을 꺼낸 후 철판 위에 자신의 피를 뿌렸다.

[무슨 일이신가요?]

"라닌님. 미아노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모험가 길드의 간부인 비타도 죽었다고 합니다. 그 둘을 죽인 것은 아마... 그 지하 검투장에서 아이돈을 데려 간 것으로 보이는 흰 옷의 남자 같습니다만."

[보고에는... 실패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아이돈을 보냈지만 미아노를 죽이는 것에 실패했고, 그것에 레밍에게 크게 실망했던 라닌은 그녀의 보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돈 뿐만 아니라 미아노가 실종된 것이 고작 어제다. 그런데 목표였던 그녀가 살해당했다? 그것에 의문을 품은 그녀가 차분히 묻자 레밍 역시 답을 내놓기 애매한 듯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누가 죽였는지 알아보세요. 그리고... 만약 괜찮다면 그 자와 접촉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자와는 왜요?"

[만약 저와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협상을. 그리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저희의 편을 들게 해야 하니까요.]

"그런... 묘수이십니다."

'이리 좋을데가 있나.'

[레밍.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그자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만약 알아낸다면 좋지만 알아내지 못한 상태라도 좋습니다. 반드시 그를 끌어들이도록 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그 외의 몇가지 보고를 마친 레밍은 한숨을 푹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이를 찾아내고 그자의 정체까지 밝혀야 하다니. 정체를 밝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라닌의 성격상 확실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낼 것이 뻔하다. 레밍은 입맛을 다시며 옷을 벗었고 그녀의 뒤에서 하이딩을 쓴 채 그것을 지켜보던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이제 슬슬 라닌과 만날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하는구만.'

330====================

기회

레밍의 저택에서 빠져나온 운현은 시간을 확인하고 곧장 성당으로 향했다. 어차피 레나와 만나야 하는 상황이니 조금 이르긴 하지만 가서 기다리는게 낫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머? 운현씨."

운현이 온 것을 반기며 레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빗자루를 들고 성당의 앞마당을 쓸고 있던 그녀는 빗자루를 든 채 운현에게 살포시 걸어오며 물었다.

"이르시네요?"

"아침에 눈이 떠져서요."

"아아... 전 그 일 때문인 줄 알고. 숙련된 모험가인 운현님이 길드에 요청을 받은 걸로 생각했거든요."

"그 일이라면...?"

비타가 죽은 일을 말하는 것일까? 운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를 향해 쓰게 웃은 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에휴... 그게요. 모험가 길드의 비타씨가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허... 비타씨요? 그게 누구죠?"

"모험가 길드의 간부 중 한명이죠. 꽤나 강하신데다가 정의로운 분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존경했는데... 왜 그런 분이 돌아가신 것인지..."

"그거 큰일이군요."

"네. 정말이지 큰일이 아닐 수가 없네요. 비타씨 뿐만 아니라 밀린 공국의 공녀님과 그 호위무사도 살해당했어요."

"진짠가요?"

자신이 죽인 주제에 운현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척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운현이 범인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레나는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짜 큰일이죠. 그 일 때문에 시청에서도 지금 큰 소란이 벌어지고 있어요."

"용의자는 누구라고 하던가요?"

"글쎄요... 아직 거기까지는 잘."

성당의 관리인인데다가 미아노와 비타가 파르티 교도였기에 그들의 장례를 치뤄주기 위해 새벽에 시청에 불려나갔던 레나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인지... 이것도 모두 다난의 짓일까요?"

"그 악독한 자들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겠죠. 그 외에 다른 일들은 없었던가요?"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시체는 총 다섯이어야 한다. 비타, 아이돈, 미아노, 시이나. 그리고 말론까지. 그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이고 나왔던 운현은 넌지시 레나에게 물었고 그의 무덤덤한 질문에 레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흐음. 그런가요?"

'만약 발견된 시체가 둘 밖에 없는 것이라면... 누군가가 상황을 제어하려고 하는 것일테고 다섯이 모두 남아 있었다면 이 일은 내 단독으로 이루어진 일이겠지.'

아까 전 레밍의 저택에서 레밍이 라닌에게 보고를 할 때 라닌의 반응으로 보아 시체가 사라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제 3자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인만큼 운현은 시청에 가서 확인을 해봐야겠다 생각하며 레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모험가 길드의 상아 길드장님은 언제 오시는 건가요? 저도 오늘은 던전에 들어가봐야 할 것 같아서 시간을 많이 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헤스티아나 미야가 걱정하는 것도 문제지만 슬슬 바제트를 동료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에 레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다난을 견제하고 파르티 교단을 위해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운현에게 있어서 최우선적인 일은 그녀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야기만 들었을 땐 몰랐지만...'

이정도로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일 줄은 몰랐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바제트에 대한 호감이 크니 그녀가 평소 하는 행동에 대한 냉정한 평가보다는 그녀가 안쓰럽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은 운현은 애물단지 취급 밖에 받지 못하는 바제트를 얼른 끌어들이고 싶을 뿐 이었다.

"으음... 어쩌죠."

운현의 질문에 레나는 뻘쭘히 웃으며 볼을 긁적거렸다. 굉장히 난처한 듯한 그녀의 모습에 운현이 입을 다물자 레나는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폭 내쉰 후 말했다.

"에휴. 그... 비타씨와 밀린 공국의 공녀가 죽은 일 때문에 상아씨가 아침부터 시청에 불려갔거든요. 길드원이 살해당하는 것도 큰 일인데 무려 간부가 살해당했으니..."

"그렇군요. 그럼 다난교에 대한 일은 어떻게 진행해야 하나요?"

'상아와 관련되지 못하는게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상아는 언제든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운현은 쓴 입맛을 다시며 레나에게 물었고 그의 질문에 레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 부분은 일단 파르티 교단 내에서 진행을 하도록 할게요. 이틀 후에 중앙 본단에서 성기사분들과 몽크 분들을 보내주신다고 했거든요. 그분들이 있으면 어떻게든 될거에요."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러게요. 후후. 이것도 다 파르티님의 가호 덕분이죠."

"흐음... 그렇다면 레나 대사제님."

"네?"

"그 이틀동안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어떻게라면..."

"요즘들어 던전 도시의 분위기도 살벌한데... 성당에 계시는 것은 조금 불안하지 않으신가요? 괜찮다면 좀 안전한 곳에 가 계시는 것이 어떨까요?"

"안전한 곳이라면. 음... 운현씨 말씀대로네요. 성당이라고 해서 완전히 안전한 곳이라고 할 수 없을테니까요. 그럼 모험가 길드나 용병 연맹인데... 모험가 길드에 잠시 신세를 지는게 좋을 것 같네요. 운현씨. 모험가 길드로 가실 건가요? 그럼 같이 가시죠."

"모시겠습니다."

'넌 지금 죽어서는 곤란하지.'

만약 모든 것이 운명의 흐름대로 흘러간다면 모를까. 지금 당장 라닌이 어떻게 움직일지 확인할 수 없는데다가 그녀가 성당에 폭탄테러라도 저질렀다간 자신의 패가 허무하게 날아갈지도 몰랐다. 레나라는 중요한 패를 함부로 쓰고 싶지 않았던 운현은 그녀에게 안전을 이유로 모험가 길드에 가길 제시했고 그녀가 그것을 받아들이자 씨익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라닌이 내게 접촉을 하겠다는 것인데... 과연 어떻게 나올까?'

운현이 미믹맨의 복장을 입은 채 자신의 진짜 얼굴을 숨기고 움직인 것도 라닌이 어떻게 나오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이 방법을 씀으로서 운현은 라닌이 자신을 알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었다.

만약 미믹맨이 운현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운현과 접촉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난교의 끄나풀이라고 할 수 있는 루비가 아직 모험가 길드에 남아 있었고 루비는 레밍의 부하였다. 그렇다면 루비에게 시켜 운현과 약속을 잡는 것으로 접촉은 간단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미믹맨이 운현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좋은 일이다. 그렇다면 더욱 운현이 움직이는 것이 자유로워지기 때문이었다.

'어떤 상황이든 나한테 불리할 일은 없겠군. 똥줄이 타는 것은 그쪽일테니 말야.'

세력이 없다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본진이 없기에 단독행동이 가능하고 자유로운 전략과 전술을 응용할 수 있다.

아쉬운 쪽이 우물을 팔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의 상황에서 아쉬운 것은 라닌, 다난 측이다. 그렇기에 운현은 어느정도는 느긋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어느정도 라닌의 행보와 비슷한 방향을 보이며 깽판을 침으로써 그녀의 흥미를 끌고, 그녀가 자신과 접촉을 유도하게 함으로써 라닌의 행동을 통제하려 했던 운현은 레나를 주시하며 이를 드러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레나가 필요하지.'

상대를 통제할 때 필수적인 것은 상대의 움직임을 적절히 제어 해 줄 적의 존재다. 그런 면에 있어서 파르티 교단은 다난이라는 패를 움직이는 라닌을 통제하기에 아주 좋은 패라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다난교를 핍박하는 것이 파르티 교였으니 다난교의 주의를 끌게 하는 것으로 레나는 무척 쓸모가 있는 존재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패를 놀려먹을 이유도, 그리고 쉽게 버릴 이유도 없다. 파르티 교단을 움직이는데 필수적으로 쓰여야 할 존재인 레나를 필요한 순간까지는 보호해야 한다 생각한 운현은 빙긋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갈까요?"

간단하게 갈아입을 옷과 기도를 위한 성물 몇가지만을 챙긴 후 레나가 걸어오자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이 옆에 있는 것이 꽤나 든든한 모양인지 레나는 운현을 힐끔힐끔 보며 아쉬운 듯 말했다.

"운현씨가 제 기사님이 되어주시면 참 좋을텐데..."

"하하하. 그건 좀. 그래도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그건 강요할 수 없는거니까... 그런데 성검은 잘 쓰고 계세요?"

"아직 실전에 투입되지 못했네요."

"잘 써주세요. 헤헤헤."

"감사할 따름이죠. 아. 그리고 레나 대사제님."

"이제 좀 편하게 부르셔도 괜찮아요. 매번 대사제님이라고 부를 필요까지야..."

운현과의 거리감을 줄이고 싶었던 레나는 운현이 매번 직함까지 포함해 자신을 부르는 것이 영 거슬린 모양이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말하자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레나님."

"에휴... 그냥 레나로도 좋은데."

"그럴 수는 없죠."

"끙... 네. 아무튼 왜 부르신거에요?"

철저하게 선을 긋고 그 이상은 넘어가지 않으려는 운현의 행동에 레나는 속이 쓰렸지만 계속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떨떠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거검을 쓰는 것은 비밀로 해 주실 수 있나요?"

"거검을... 왜요?"

"아무래도 귀한 물건이다보니... 모험가 길드에 속해 있는 다른 모험가들을 신뢰하기 어렵군요. 아직은."

"아아..."

보물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골치를 썩힐 수 있다. 운현이 가지고 있는, 아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검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기술 중 공간을 다루는 기술과 관련되어 있었다.

'마법사들이라면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갖고 싶겠지. 아니... 보물을 수집하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럴거야.'

어찌보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모험가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모험가라고는 하지만 뒷배를 봐주는 세력 하나 없는 운현인만큼 거대한 세력. 예를 들어 하나의 왕국이나 마법 학교 같은 거대한 세력이 그것을 노리고 접근하기라도 한다면 운현으로서는 상당히 골치아픈 일에 얽힐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군요. 네. 주의하도록 할게요."

운현이 비록 자신을 거절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호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던 레나로서는 그의 부탁을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부탁은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거니까... 아니... 그런 것보단.'

그는 자신을 구해줌과 동시에 자신과 함께 다난교와 맞서 싸우는 사람이다. 출신도 모르고 신분도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그가 보인 행동거지를 보았을 때 일반적인 야인 모험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마 신분을 숨기고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

가진 기술이나 지식, 행동거지를 보면 자신이 예전에 보았던 단순 무식한데다가 개인의 욕망에만 충실한, 그리고 신분 상승의 욕구가 강한 야인 모험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운현이다. 그렇기에 운현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던 레나는 운현을 힐끔 본 후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것이라면 더욱 좋지.'

사람이 신분을 숨긴다는 것은 자신의 신분이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신분을 숨기는 것인가? 무언가 켕기거나, 위험한 일에 엮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파르티 교단에서 보호해 줄 수 있다면? 운현이 파르티 교단을 신뢰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면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도록 주장하고, 그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헤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아뇨."

자신의 기사가 되는 것을 거절한 운현이 그것을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레나는 베시시 웃었고 그녀의 웃음을 마주하며 운현 역시 씩 웃었다.

'내가 신분을 숨기고 있으니 나에게 빚을 만들어 두면 자기 기사가 되니 파르티의 팔라딘이 되니 어쩌니 같은 쓸데없는 생각이라도 하는가보군.'

애초에 신분을 숨기는 것 같은 뉘앙스를 보이고, 또 비밀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도 어느정도는 이것을 노린 것이었다. 비밀은 사람을 신비하게 만든다. 비록 쥐뿔도 없는 신분이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몸이지만 운현이 그간 가상현실로 단련한 정신과 예법만으로도 운현의 행동거지는 일반인과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이기에 사람들은 자기들 멋대로 그런 긍정적인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운현의 행동에 상당히 유리한 반응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사람들의 기대심리라는게 무섭지. 스스로 희망고문을 한단 말이야.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운명이라는 거대한 적과 싸우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이용해야 하는 운현에게 있어서 그들의 비정상적인 기대심리는 아주 좋은 도구라고 할 수 있었다.

자기들이 멋대로 자신이 무언가 있는 존재라 믿고, 또 그것을 멋대로 예측하며 자신에게 좋은 행동을 보이는 것을 굳이 막을 필요는 없었다. 그것을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자기들 멋대로 행복회로를 가동시키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지.'

"하하하~ 그럼 가실까요?"

"그러시죠."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레드에이어입니다;;;

와 이게 뭔가요... 바쁠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진짜 주말에 미친듯이 써서 비축분 안만들어 놓으면 평일 연재는 힘들겠네요.

으음... 일단 이번 주말에 좀 바짝 써야겠습니다;

그럼 좋은 밤 되세요~

331====================

기회

혼잡스러운 길드 안으로 들어 온 레나가 길드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길드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운현은 그녀가 떠나가자 길드 회관의 테이블에 앉아 생각했다.

'문제는 바제트를 어떻게 끌어들이냐는 건데.'

과거에 바제트를 끌어들이는 것은 홉고블린을 상대하는데 원거리 딜러와 힐러가 필요하다는 당위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영 내켜하지 않았던 미야와 헤스티아, 자신을 납득시킨 것은 바제트이지만 지금의 자신들에게 있어서 원거리 딜러는 커녕 힐러도 거의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조금 이르지.'

코볼트를 상대할 때 바제트와 만났었던 것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은 운현은 숙소의 2층에서 내려오는 늘씬한 몸매의 여인을 발견했다.

숙취 때문인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시무룩한 얼굴로 터덜터덜 내려오던 바제트는 테이블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운현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당신은."

"안녕. 몸은 좀 괜찮아?"

부드러운 어조로 자신에게 묻는 운현의 모습에 바제트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빈 자리를 운현이 권하자 그곳에 앉은 그녀는 쓰게 웃은 후 운현에게 물었다.

"혹시 어제 날 도와 준 사람인가?"

"기억이 있어?"

"칼에 찔리는 기억 정도는. 그때 당신이 날 도와줬던 것 같은데."

"응. 그 기억이라면 맞을거야."

"헤에... 보아하니 성직자나 드루이드는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내 상처를 치료해준거야?"

바제트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묻자 운현은 그녀를 향해 웃어보이며 차분히 말했다.

"그 전에 해야 할 말이 있지 않을까?"

"아, 이런. 미안미안. 도와줘서 고마워. 난 바제트라고 해. 당신의 이름은?"

"운현. 여기저기서 굴러먹던 모험가지. 직업은 검사. 잘 부탁해."

"운현이라... 저기. 혹시 우리 예전에 만난 적이 있어?"

"글쎄? 하하하.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만난 것이 아닐까?"

운현이 웃으며 말하자 바제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메이드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다가 온 메이드에게 빵과 차를 주문한 그녀는 운현을 가리키며 메이드에게 말했다.

"이쪽 남자분이 원하는 것도 좀 가져다 줘. 운현. 뭐 먹겠어? 도와 준 답례 치고는 좀 싼 것 같지만 식사 정도는 대접하게 해달라고."

"그럼 커피로."

"알겠습니다."

메이드가 주방을 향해 걸어가자 바제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운현에게 물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만난 정도로... 아니 뭔가 가슴이 찡한게 말이지."

"운명의 상대라거나? 엘프들은 이그드라실에 의해서 운명의 상대를 볼 수 있다고 하잖아. 그런..."

바제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운현은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과거 바제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운명의 상대로 운현을 만났었다고 했었다. 그것을 운현이 언급하자 바제트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응?"

"이그드라실에 의해서 운명의 상대를 보다니? 이그드라실에 그런 능력따위는 없는데."

"...뭐?"

바제트의 떨떠름한 표정을 마주하며 운현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의 당황한 표정을 보며 바제트는 볼을 긁적거렸다.

"운명을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고귀한 하이엘프들 뿐이야.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군."

'그게 무슨....'

자신은 분명히 바제트와 상아에게 들었었다. 엘프들은 열살이 되는 생일 자신의 운명을 한번 볼 수 있다고.

바제트는 그것으로 자신의 운명의 상대가 운현이라는 것을 알고 운현에게 접근했었던 것을 떠올린 운현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하게 알아둬야 해.'

운현이 심각한 얼굴이 되자 바제트는 머뭇거리다가 운현을 향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아, 아니 난 조금 일찍 숲에서 나와서 잘 모를 수도 있으니까... 내가 아는 다른 엘프들에게 물어봐줄까? 그럼..."

"음. 그렇게 해주겠어?"

운현이 심각한 어조로 말하자 바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이 유지되었다. 그것은 메이드가 커피와 아침식사를 가져올 때까지 계속되었고 메이드가 음식을 가져오자 바제트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커피 한잔으로 괜찮겠어? 아침을 제대로 챙겨먹지 않으면 힘을 낼 수 없다고."

"아, 응. 그렇지."

"그런데... 레벨이 어떻게 돼?"

"왜?"

"아... 특별하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같이 파티를 하지 않겠어? 보아하니 그리 레벨이 높아보이지 않는데. 나는 20레벨의 드루이드야. 사제보다 약하기는 하지만 힐링도 할 수 있고 유틸기도 쓸 수 있다고. 거기에 활을 쓸 수 있어서 원거리 딜링도 가능해. 네 레벨이 그리 높지 않다면 내가 뒤에서 힐링으로 밀대를 해 줄 수도 있는데 말야. 동레벨이 될 때까지는 코어도 몰아 줄 수 있고."

"흠."

"어때? 괜찮지 않아? 나도 마침 파티원들과 헤어지게 되었거든."

"왜?"

"응?"

"왜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하는거지?"

만약 바제트가 운현을 운명의 상대라고 알고 있고, 그와 연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녀의 제안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바제트는 지금 자신의 운명을 모른다. 운현이 운명의 상대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가 자신이 크게 손해를 볼 수 있는 이런 제안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운현에게만 좋은 제안을 한다는 것에 운현은 의문을 품으며 물었고 바제트는 그의 질문에 당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싫어?"

"나에게 너무 좋은 제안인데? 만약 내가 20레벨이 되어서 안녕이다! 라고 한다면 어쩌려고?"

"그건..."

"그건?"

"넌 그럴 사람 같지 않아보여."

"응?"

"마,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뭐랄까. 그런 느낌이 든다고. 너만은 절대 날 버리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시무룩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쉰 바제트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파티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 그 사람들과 파티를 하고 나면 항상 날 떠나더라고."

"그래서?"

"그런 경험을 꽤 겪고 나니까... 어느정도는 알 것 같아서. 이 사람이 날 버릴 것이다. 이 사람은 날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느낌이 말야. 하지만 너에게서는 그런 것을 느낄 수 없었어."

"요컨데. 그냥 직감이라는 거야?"

운현의 말에 바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저 느낌에 불과하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그 직감이 틀렸다면?"

"뭐, 너에게 신세를 진 것도 있으니까 그걸 갚았다고 생각하면 되지. 내 직감이 틀렸다는 것에 조금 괴롭긴 하겠지만 말야."

애써 웃으며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신이 바제트를 배신할리 없다. 그녀를 이용할리도 없고, 그녀를 버릴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지금까지 해온 모든 노력.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고 이용하며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가까스로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닌가.

이 모든 것이 바제트 뿐만 아니라 그녀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바제트의 직감은 틀린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문제는 내가 아는 과거와 다르다는 건데. 일단 이그드라실에 대해서는 제니스에게 물어보는게 낫겠군.'

운명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제니스인만큼 그녀와의 이야기를 통해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추론이라도 해놔야 한다.

"조, 좋다고!?"

"응."

"그... 혹시 해서 묻는건데 말야. 너 엘프에 대해서 잘 몰라?"

"지극히 마이페이스인 성격과 머릿 속에서 필터링하지 않고 말을 내뱉는 것?"

"...그, 그거 말고도 단점은 꽤 있는데."

"난 그런 거 신경 안써."

대범한 운현의 말에 바제트는 조금 놀란 얼굴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어깨를 으쓱인 운현은 커피를 홀짝인 후 말했다.

"문제는 내가 아니지."

"에?"

"일단은 동료가 있거든. 마법사, 그리고 격투가."

새로운 동료를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서 전에 헤스티아나 미야에게 말을 해 둔 적이 있으니 걱정은 없었다.

적당히 설득을 하면 그녀들의 반대를 억누를 수도 있었기에 부담도 없었던 운현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나야 그 마이페이스적인 분위기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지만 다른 애들이 어쩔지는 모르겠군."

"으, 으음... 다른 애들이라면 여자인가?"

"응."

"끙... 아무래도 난 여자들에게 꽤나 미움받는 지라. 좀 불안한데."

"그러니까 적당히 자중하라고."

반쯤 식은 커피를 한모금 홀짝이며 마신 운현은 슬슬 사람들이 늘어난 길드 회관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침의 소란이 거짓말인 것처럼 주변의 분위기는 꽤나 가라앉아 있었다. 던전에 가기 위해서 파티원을 모집하거나 파티를 모집하는 이들 사이를 길드원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바라보던 운현은 2층의 숙소에서 미야와 헤스티아가 내려오는 것을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여기야."

"어? 운현 오빠. 일찍 일어나....셨네요."

"누구야? 저 사람은?"

운현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을 본 그녀들은 밝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다가 운현의 앞에 앉아서 머쓱히 웃고 있는 바제트를 보았다.

밝았던 헤스티아의 목소리가 가라앉고 미야는 바제트의 긴 귀를 보며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인사들 해. 새로운 동료다."

"엘프를!?"

"왜 하필이면...!"

과거나 지금이나 엘프는 여전히 밉상의 대상인 모양이다. 질색한 얼굴로 헤스티아와 미야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운현은 씨익 웃었다.

"뭐 이런 저런 인연이 있었지. 실력도 꽤 괜찮은 것 같고 말야."

"난 반댄데."

"저도 좀..."

"...우우."

"사람 앞에 두고 그런 소리하는 거 아니다. 일단 한번 전투를 같이 해보자고."

"거기다가 이 사람은 그 유명한 파티 브레이커잖아요."

헤스티아는 바제트를 가리키며 무척이나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잔뜩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바제트는 머쓱한 얼굴로 볼을 긁적거렸다.

"파, 파티 브레이커까지는 아니라고."

"그치만 유명한데요. 제가 모험가로 등록했을 때도 이 엘프분이 낀 파티가 서로 싸우면서 해산한 것을 보았다구요."

뚱한 얼굴로 헤스티아는 반대의 의사를 풀풀 풍겼다.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바제트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운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게, 난 그저 파티 움직임의 효율이 나쁘니 좀 더 열심히 하자고 했을 뿐이라고."

"효율..."

헤스티아도 효율을 따지느라 파티에서 쫓겨난 케이스다. 그런 그녀이기에 바제트를 곱게 볼 수 없었는지 헤스티아는 더욱 더 싫다는 표정을 지었고 바제트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흠..."

"우, 운현! 내가 널 서포트하면 넌 더 강해질 수 있어. 그러니까 날..."

"당신이 서포트하지 않아도 운현 오빠는 무척 강하거든요?"

헤스티아의 날 선 목소리에 미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헤스티아가 운현을 좋아하는 것은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다른 파티원이 끼는 것을 반기지 않았던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 미야는 상황을 중재하기 시작했다.

"자자. 그렇게들 싸우지 말자고. 바제트씨? 그런데 직업이 어떻게 되시나요?"

"으음. 난 드루이드야."

"드루이드라면 직업도 좋네. 헤스티아. 너무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자고."

"그치만 미야씨."

"네 마음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우리도 조만간 유틸러와 힐러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 아무리 운현과 내가 탱킹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힐러 없이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단 말야.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말자고."

미야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헤스티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애처로운 시선에 운현은 피식 웃은 후 말했다.

"내가 들이자고 했으니 그렇게 봐봤자 어쩔 수 없지. 미야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하지만 네가 정 그렇게 불만이 많다면 어쩔 수 없지."

"정말요!?"

"운현!?"

운현이 헤스티아의 손을 들어 주는 듯 하자 바제트는 당황하며 그를 보았다. 이제 와서 안된다고 하려는 건가? 그녀의 큰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며 운현은 무덤덤히 말했다.

"내가 잘 아는 사제와 도적과 궁사가 있으니까 걔들을 데리고 오도록 하자."

332====================

기회

"........"

"세, 세명이야?"

"응."

혹 떼려다가 혹을 더 붙이게 생겼다. 헤스티아가 바제트를 거절하려고 한 이유는 그녀가 파티 브레이커라는 이명이 있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제트 같은 미녀가 운현과 함께 하는 것이 불만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빠는 내 연인인데...'

비록 세계의 남자 수가 적어 일부다처인 상황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연인이 된지 얼마나 됐다고.

"저기 바제트씨."

"바제트라고 불러도 괜찮아."

"그럼 바제트. 혹시 운현을 좋아하는거야?"

"흐음..."

그런 헤스티아의 마음을 알았는지 미야는 쓴웃음을 지으며 운현을 가리키고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바제트는 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아니라고 하면 좀 이상한데. 일단 호감은 가지고 있어.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는 건가?"

"문제가 될 것은 없지. 나도 좋아하니까."

"......"

"자자. 헤스티아. 선택하자고. 나는 찬성이야. "

"우... 오빠."

"네가 정 싫다면 다른 세명을 부르는게 낫겠지."

바제트 하나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세 여자를 받아들일 것인가. 헤스티아는 운현이 웃으며 자신에게 선택권을 넘기는 것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알겠어요."

"잘 생각했어."

'전과는 좀 다르군.'

과거에는 끌고 끌고 끌은데다가 연인의 관계까지는 가지 않은 탓인지 헤스티아가 이정도로 자신에게 집착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상당한 집착과 독점욕을 보이는 헤스티아의 모습에 운현은 속으로 그녀에게 웃어보였다.

'이정도는 커버할 수 있는 변화니까.'

"너무 그렇게 우울해하지마. 바제트를 파티원으로 끌어들인다고 해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말야."

"우... 알겠어요."

운현까지 이렇게 말하는데 자신이 뭐라고 더 할 수는 없었다. 상식적으로 그와 둘이서 계속 던전을 탐험하는 것도 말이 안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오빠."

"응?"

"한가지만 말씀해주세요."

"뭔데?"

"미야씨랑 바제트씨를 좋아하세요?"

"응."

"....즈, 즉답이네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니까. 그럼 널 속이고 뒤에서 숨어서 쟤들이랑 꽁냥거릴까? 그건 오히려 너에게 더 실례인 것 같은데."

그의 말에 헤스티아는 난감해하면서도 불만을 표출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난감해하며 고개를 숙이자 미야와 바제트는 눈을 빛내며 운현을 보았다.

"그게 정말이야?"

"날 좋아한다고? 이야~ 확실히 내가 매력적이기는 하지."

"응."

"아, 아하하하."

"그렇게 대놓고 말하니까 좀 부끄럽구만."

미야와 바제트가 만족스럽게 웃는 모습에 헤스티아는 볼을 빵빵히 부풀렸다. 토라진 듯한 그녀를 끌어 당겨 안은 운현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너무 불안해하지마. 능력만 있다면 애정은 무한한 법. 내가 쟤들이랑 좋은 분위기로 간다고 해서 널 버릴 일은 없어."

"...정말이죠."

"물론."

부드러운 운현의 미소에 헤스티아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헤스티아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우으으으으."

"자자. 그럼 파티원으로 바제트를 받아들이는 것은 됐고."

"하하하... 앞으로 잘 부탁해."

"음. 나도. 나는 미야. 격투가야."

"든든하겠구만. 저기 아가씨는 마법사지?"

"...네."

"하하하... 나이는 내가 더 많은 것 같으니까 언니라고 불러도 괜찮아."

분위기 파악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는다. 헤스티아가 자신을 꺼려하는 것을 알면서도 바제트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고 그녀의 말에 헤스티아는 짧게 혀를 차고 휙 고개를 돌렸다.

"헤스티아."

그런 그녀에게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길에 굴복해버린 헤스티아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제트를 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잘 부탁해요. 바제트 언니."

"하하하하~ 나도 잘 부탁해. 그럼... 파티의 리더는 여기 운현인것 같은데. 전체적인 레벨이 다들 어떻게 돼?"

"평균 레벨을 잡자면 15레벨 정도."

"그럼 고블린을 잡는 건가?"

"코볼트까지는 가능할 것 같은데."

"흠... 셋이서 코볼트라. 그럼 나까지 끼면 윌 오 위스프도 잡을 수 있겠는데? 윌 오 위스프는 알아?"

바제트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알고 있는 듯 하자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바제트는 밝게 웃은 후 말했다.

"그럼 윌 오 위스프를 잡으며 레벨을 올리는게 좋지 않을까? 평균 레벨이 비슷해 질때까지는 안정적으로 전투를 하는게 나을 것 같은데 말야."

바제트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윌 오 위스프를 잡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잡기 쉬운 주제에 전투 경험치를 많이 주는 윌 오 위스프는 경쟁자가 많다. 굳이 힘들게 몬스터를 찾아다니며 레벨업을 할 이유가 없었던 운현은 차분한 어조로 다음 전투 대상을 말했다.

"홉고블린을 잡자."

"엑?"

"가, 갑자기 홉고블린을?"

"가능할까요...? 아, 운현 오빠를 못 믿는 것은 아닌데."

"윌 오 위스프는 인기가 많은 몬스터라서 그곳에서 버티는 모험가가 많아. 그들과 경쟁을 하면서 싸우느니 차라리 좀 무리를 하더라도 안정적으로 대상을 찾을 수 있는 홉고블린을 잡는게 나을 것 같아."

파티의 리더는 운현이다. 운현이 낸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는지라 미야와 헤스티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이제 막 파티에 합류한 바제트는 머뭇거리며 운현에게 말했다.

"으음. 저기 운현. 이제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게 좀 찝찝하지만 드루이드는 만능인만큼 한가지에 특화되지 않아서 위력이 어중간하다고. 인탱글이나 힐링같은 경우는 다른 전문 유틸러나 힐러에 비해서 많이 약한다... 괜찮겠어?"

"어렵지는 않겠지."

일단 위기시에는 자신이 힘을 좀 쓰면 되었기에 운현은 별다른 부담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바제트는 불안해하면서 운현을 보았지만 운현이 가능하다고 한 이상 미야와 헤스티아는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았다.

"오빠. 가능하죠?"

"응."

"그럼 됐네. 준비해야 할게 뭐 있으려나?"

홉고블린을 상대하려는 것 치고는 전체적인 레벨이나 장비가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야와 헤스티아는 무척이나 여유로워보였다. 단지 운현이 제안했고, 그가 자신있다고 한 것 만으로 걱정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는 모습에 바제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다들 괜찮아?"

아무래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자신을 받아 준 파티인만큼 그대로 무너지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던 그녀가 걱정스레 말했지만 헤스티아나 미야는 그저 태평한 얼굴로 답할 뿐 이었다.

"운현 오빠는 숙련된 모험가니까요."

"운현과 전투를 한번 해보면 알거야."

'도대체 어떻길래.'

아직 파티의 평균 레벨이 20도 채 되지 않는데 저토록 자신만만한 것을 보니 오히려 위화감이 든다. 바제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으으... 알았어. 나도 최선을 다할게."

그 웃음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린 바제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씩 초보 모험자들이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며 무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저번 파티도 그랬다. 코볼트를 잡기에는 무리가 있는 파티였고, 바로 윌 오 위스프를 노리기보다는 고블린 무리를 처치하며 파티간 연계를 더욱 능숙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다른 이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나갔지만 그것만으로도 파티를 깨져버렸다.

'이번에는 싫어...'

자신이 원했다기보다는 운현이, 다른 파티의 리더가 자신과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운현이 자신의 은인인만큼, 그리고 그가 파티 브레이커라 불리는 자신을 믿어 준 만큼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바제트는 싱글거리는 운현과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는 미야와 헤스티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

'내가 모두를 지키겠어.'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운현 파티는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새롭게 파티원이 된 바제트가 낀 만큼 파티의 진형을 다시 꾸릴 필요가 있었던 운현은 전위에 미야를 보낸 후 자신은 아예 뒤로 빠져버렸다.

"에?"

자신과 함께 탱킹을 할 것이라 생각했던 운현이 뒤로 빠져버리자 미야는 당황했다. 단독 탱킹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근접 딜과 근접 탱이 가능한 운현이 원거리 딜러보다 뒤로 가버리면 어쩌자는 것인가. 그녀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싱글거리며 단검을 들었다.

"내 주특기를 가르쳐주지 않았었나? 난 단순 근접 딜링보다는 이런..."

"푹!"

"....."

나무의 커다란 둥지에 깊숙히 박혀버린 단검이 아직도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미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보이지도 않았다.

"방금... 뭐한거야?"

"단검 투척. 내 주특기가 이거거든. 이번에는 좀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내가 뒤에 있을게."

"으음... 하지만."

"단검 다 쓰면 앞으로 나갈거니까 걱정하지마. 그리고 나는 탱킹보다는 딜러 역할이 더 잘 맞는다고. 너도 알잖아. 검사의 스킬은 대부분이 공격 스킬이라는 걸."

"그렇긴 하지만. 에휴. 알았어."

운현과 함께 탱킹을 하면 무척 편하지만 그의 말대로 검사는 탱킹이 '가능'할 뿐이지 탱커 역할에 그리 맞는 것은 아니었다. 운현이 웃으며 말하자 미야는 결국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바제트에게 말했다.

"탱커는 나니까 힐링은 나에게 위주로 해줘."

"응. 맡겨둬."

"헤스티아. 운현이 빠져서 좀 힘들지도 모르니까 주의해야 해. 바인드 잘 걸고."

"알았어요!"

"그럼 진형이 바뀌었으니까... 간단하게 고블린부터 잡아볼까?"

"아. 내가 몰아 올게."

엘프라 그런지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바제트는 이번에도 손을 들며 몬스터를 몰아 오는 역을 자청했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부탁할게."

과거에는 함정을 이용하는 전투를 치뤘기 때문에 몬스터를 몰아오는 것이 좋았지만 지금도 과연 그럴 것인가에는 의문이었지만 고블린이 그리 강한 몬스터도 아니기에 운현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의 허락에 바제트는 방긋 웃으며 빠르게 뛰어 수풀 너머로 이동했고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본 헤스티아는 운현을 힐끔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을까요?"

"뭐가?"

"바제트씨. 혼자 움직여서..."

"에구. 싫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그래도 걱정은 다 하는구나?"

"으... 그치만 이제 같은 파티원이고... 그, 저, 전에 미야 언니랑 얘기했던 건데."

"....?"

"운현 오빠를 독점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독점하고 싶지만... 전투를 치루다보면 당연히 다른 분들도 흥분하실거고. 그걸 제 욕심때문에 안된다고 하면 안되는 거니까... 그, 그리고 오빠는 멋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반하는 것도 당연한 거고..."

그녀의 말에 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에 살며시 홍조를 띄운 헤스티아는 운현의 옷자락을 살짝 잡은 후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치만 첫번째는 저라구요."

"언제나 내 처음은 너였어."

"헤헤헤..."

'네가 시작이었으니까...'

운현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헤스티아는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았는지 생글거리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 그들을 고개를 돌려 힐끔 본 미야는 부럽다는 듯 하얀 꼬리를 살랑거리며 말했다.

"우씨. 나도!"

"아직 미야 언니는 안돼요!"

"헤에... 아직이라는 건 나중에 운현이랑 자고나면 나도 가능하다는 건가? 히히. 나도 운현이랑 꽁냥거리고 싶..."

"온다."

"예?"

미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것을 끊으며 운현은 허리에 있는 단검집에서 단검을 뽑아 잡았다. 부드럽고 상냥하던 그의 분위기가 일변한다. 그것에 놀란 미야가 운현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수풀이 흔들리며 바제트가 뛰어나왔다.

"미, 미안! 고블린을 좀 많이 몬 것 같아!"

"다친데는 없지?"

"없긴 한데. 고블린이 일곱마리..."

"그정도면 할만하지. 일단 투척은 하지 않을테니까 너희들끼리 싸워봐."

"뭐!?"

고블린 일곱마리. 아무리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평균레벨이 20도 되지 않는 파티에게는 쉽지 않은 상대다. 그런데 거기서 운현이 한걸음 물러난다고? 바제트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지만 미야와 헤스티아는 전의를 다질 뿐 이었다.

"아아! 정말 나도 몰라!"

"크에에에엑!"

"캬아아악!!"

바제트가 나온 풀숲에서 일곱마리의 고블린이 쏟아지듯 튀어나왔다. 그들의 흉흉한 기세를 느끼며 미야는 크게 발을 굴렀다.

"와라!! 너희들의 적은 나다!"

도발을 시전하여 고블린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향하게 한 미야는 귀걸이에 걸려 있는 마법을 발동시켰다.

디펜스 업 마법이 발동되며 미야의 몸을 황색 빛이 감쌌다. 그것을 본 고블린들 중 소검을 든 고블린 셋이 뛰어 올랐을 때 헤스티아는 뒤쪽에서 슬링을 장전한 고블린에게 파이어 볼트를 날렸다.

"미야 언니!! 저 셋은 부탁해요! 바제트씨! 활로 공격해요! 일단 원거리 딜러부터 잡아요!"

"아, 알았어!"

헤스티아의 외침을 받은 바제트는 허둥지둥 활을 들어 시위를 먹였다. 팽팽히 당겨진 장궁의 화살이 파이어 볼트에 맞은 고블린의 머리에 박히는 것을 본 헤스티아는 두번째 파이어 볼트를 준비하며 힐끔 미야를 보았다.

'미야 언니는 잘 버티고 있으니까...'

걱정은 없었다. 뒤에서 팔짱을 낀 채 파티가 위험해지면 언제든지 나설 운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오히려 더욱 차분해진 헤스티아는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파이어 볼트!!"

333====================

기회

"헉헉..."

쓰러져 있는 일곱의 고블린 시체를 보며 바제트는 할 말을 잃었다. 힘들기는 했지만 큰 부상 없이 고블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것에 그녀는 놀란 얼굴로 헤스티아를 바라보았다.

"굉장하네!"

"예? 뭐가요?"

마력을 갈무리하던 헤스티아는 바제트가 감탄하며 자신에게 다가오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이번 전투에 쓴 파이어 볼트만 해도 수십발이 넘었고 바인드만 해도 수십번이 넘었다. 20레벨도 되지 않는 일반적인 마법사의 마력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만약 다른 마법사였다면 중반쯤에서 벌써 탈진하여 쓰러졌을 정도의 마법을 써놓고서 조금 피곤한 듯한 표정만 하고 있는 헤스티아를 향해 바제트는 방긋 웃었다.

"마력량이 대단한데? 마법사 학교 출신이라서 그런거야? 아니면..."

"아, 그거요."

바제트의 감탄에 헤스티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미야와 함께 고블린 시체를 챙기는 운현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의 끝에 운현이 있는 것을 발견한 바제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현 오빠가 주신 이 반지 덕분이에요."

"헤에? 어디 봐봐."

"여기요."

왼쪽 약지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반지를 헤스티아가 보여주자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제트는 기겁하며 휙 고개를 돌려 운현을 보았다.

"라, 라, 라플란의 반지잖아!!"

"에엑!? 이게 라플란의 반지였어요!?"

바제트가 반지의 이름을 말해주자 헤스티아도 기겁하며 외쳤다. 그녀들의 소란에 고블린 시체의 정리를 끝마친 미야와 바제트는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 다가왔다.

"왜들 그래?"

"우, 운현! 이거 어디서 난거야!?"

"뭐가?"

"라플란의 반지!!"

"그게 왜?"

"라플란의 반지가... 뭔지 몰라서 그래?"

"잘 모르겠는데... 그냥 마력량 상승과 마력회복 속도가 증가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는지라..."

제니스에게 반지를 받을 때 라플란의 반지라는 이름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운현은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바제트를 무덤덤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바제트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

"라플란의 반지는 마법 학교를 설립한 대마법사 라플란이 사용한 반지야. 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이 귀한 반지를... 운현. 이곳에 오기 전에 어디에 있었어?"

"오빠! 말씀해주세요! 혹시 라플란님의 연구실을 찾으신거에요!?"

"아니 나도 우연히 얻은 거라서. 내막은 잘 모르겠는데. 그게 그렇게 귀한거야?"

"당연하죠! 라플란님은 모든 마법사들의 우상이고 목표라고 할 수 있는 분이라구요! 과거 현자, 그리고 용사와 함께 세상을 구하신 위대한 분인데..."

'현자와 함께 했다라...'

현자는 스크롤을 비롯한 여러가지 마법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라플란의 반지 역시 현자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현자는 나에게 이런 일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어. 현자의 활동에 없던 일... 그렇다면 이번에 과거로 보낸 현자가 필요에 의해서 그런 활동을 했다는 건가.'

"흐음... 그래?"

"네! 우와... 이게 라플란의 반지였을 줄이야..."

"넌 모르고 있었어?"

"네. 라플란의 반지인줄 알았다면 안 받았죠... 이거 엄청 귀한 거라구요."

"어쨌든 세상에 단 세개만 존재하는 것이니까 말이지. 하나는 마법 학교 교장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신물이고. 하나는 하이엘프의 수장에게 전해지는 신물이고, 나머지 하나는 사라졌다고 했으니까 말야."

"그래?"

'제니스가 준게 하이엘프가 가지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어쨌든 제니스가 상당히 귀한 아이템을 준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며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머뭇거리는 헤스티아를 보며 물었다.

"왜?"

"...이거 돌려드리는게 나은가 싶어서요."

"응? 왜?"

"하, 하지만 이거 정말 귀한 거라구요."

"그래봤자 너보다 귀하지는 않아."

"에엣!?"

무덤덤한 운현의 말에 헤스티아는 놀라면서도 기쁨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세상에 단 세개밖에 없는 귀한 아이템보다 자신이 더 귀하다니. 그녀가 감동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은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세상에 세개 있든 하나 있든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딴 반지보다 너야."

"오빠..."

"...이거 부럽네."

"나한테도 뭔가 줄 것 없어?"

"구하면 줄게. 구하면."

"약속이야!"

"아니 그보다... 운현."

"음?"

마냥 좋은 미야와 다르게 바제트는 심각했다. 라플란의 반지를 그냥 동네 금은방에서 살 수 있을 법한 일반적인 반지라고 생각하는 운현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위화감이 넘친다.

"이 반지를 얻기 위해서 국가 하나가 전쟁을 벌일 정도인데...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다니. 도대체 넌..."

"어. 그래? 헤스티아."

"네!?"

"그 반지 잘 가리고 다녀. 정 뭐하면 장갑이라도 사서 끼고 다니고."

"에에... 알겠어요."

운현이 자신을 부르자 화들짝 놀란 헤스티아는 그가 반지를 달라고 하는 대신 잘 숨기라는 말만 하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녀와 운현을 번갈아 바라 본 바제트는 골치가 아팠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운현. 당신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그냥 일개 모험가."

"일개 모험가라... 왜 모험가가 된거야?"

"그게 중요해?"

"응.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야. 모험가가 되는 이들은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서 던전에 들어오기 마련이지. 하지만 저 라플란의 반지 하나만 있다면 평생 써도 모자랄 정도의 돈을 벌 수 있어. 그런 것을 아무에게나 줘버리는..."

"아무에게나라니. 나에게 있어선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에게 주는 것인데."

"...그럼 어쨌든 그것을 넘기는 것이나. 아까 전에 네가 보인 그 단검 투척을 봐도... 넌 저레벨의 단순한 모험가로 생각되지 않아."

"흐음. 그래서?"

"네 정체가 뭐야?"

바제트의 날카로운 질문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헤스티아와 미야 역시도 궁금했는지 그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운현의 검술 실력부터 전황을 파악하는 것, 그리고 빠르게 지시를 내리는 판단력이나 상황을 인식하는 분석력. 그리고 단검 투척, 요리. 그 외에 파르티 교단의 비밀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 까지. 운현은 단순한 저레벨의 모험가라고 보기에는 확실히 위화감이 넘쳐나는 사람이었다.

"운현."

"응?"

"운현이야. 딱히 다를 것도 없고, 거짓을 말하는 것도 없어. 레벨은 17... 아니, 이번에 18이 되었군. 자. 모험가 카드. 모험가 카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다만 내 진짜 스탯을 보여주지 않을 뿐이지.'

"...한가지만 더 물어볼게."

그의 말대로 모험자카드의 레벨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운현의 레벨은 정확히 18. 검사라는 직업이 적혀 있었다. 바제트는 가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왜 스킬을 쓰지 않아?"

"아. 그거?"

왜 그 질문이 나오지 않나 했다. 바제트의 질문에 운현은 히죽거리며 천천히 말했다.

"내 직업 적성은 원래 검사가 아니었거든. 지금 내가 배운 스킬은 없어."

"...으, 으응? 그게 무슨 소리야?"

직업 적성에 맞지 않는 직업을 가질 경우 스킬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바제트는 운현의 말에 황당해하며 물었다.

"직업 적성이 맞지 않다니... 직업을 선택할 때 검사가 아니었어?"

"응."

"원래는 뭐였는데?"

"직업 적성을 확인하는 잡파인더에서 내 직업을 찾지 못했지. 그래서 그냥 평소에 쓰는게 검이니까 검사로 직업을 고른 것 뿐이야. 뭣하면 길드에 물어봐도 괜찮아."

느긋한 어조로 운현이 말하자 바제트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직업 적성이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직업을 갖는 이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같은 직업을 가진, 직업 적성에 맞는 이들보다 성장이 느리고 획득하지 못하는 스킬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런 이들이 있기는 했었다.

"왜?"

"그걸 내가 아나. 직업을 갖기 전에 워낙 잡다한 일을 많이 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바깥의 모험가들은 정말 별 일을 다하거든. 활 좀 줘볼래?"

"응."

운현이 손을 내밀자 바제트는 그에게 활과 화살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은 운현은 시위를 몇번 튕겨 본 후 화살을 시위에 먹인 후 가볍게 화살을 쏘았다.

"피잉!!"

"세상에..."

백보는 떨어져 있는 나무의 앙상한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나뭇잎을 꿰뚫어버린 화살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본 바제트는 입을 쩍 벌린 채 운현을 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빙긋 웃어 보인 운현은 다음 화살을 시위에 먹인 후 느긋하게 말했다.

"모험가 생활을 하다보면 활을 써야 할 일도 있지."

"피잉!"

"...도, 도대체."

손에 익은 활도 아닌데. 두번째 화살이 아까 전 운현이 맞춘 나뭇가지에 있는 나뭇잎을 또 떨어트린 것을 보자 바제트는 벌려진 입을 힘겹게 다물며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별에 별 일을 다 한다니까. 그러다보니 이렇다 할 적성따위는 없더라고. 검도 어느정도 쓸 수 있고, 활도 어느정도 쓸 수 있고. 맨몸 전투도... 뭐 어느정도는 가능하지."

"진짜? 그럼 이것도 막아봐!"

"응."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바제트에게 활과 화살을 돌려 준 운현은 자세를 잡으며 빠르게 주먹을 내뻗은 미야의 공격을 가볍게 흘려낸 후 그녀의 목을 감싸잡았다.

"우와..."

"험난한 모험을 하다보면 무기가 파괴되는 일도 있지. 살아남기 위해서, 목적을 위해서 맨손 전투도 연습했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직업 적성을 찾지 못한게 아니네. 잘 하는 것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잡 파인더가 맞는 직업을 찾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맞는 걸까?"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

바제트의 말에 운현은 느긋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녀의 말이 맞을 것이다. 수많은 가상현실의 세계를 경험하며 운현은 대부분의 전투직을 경험했고 그 경험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노력했다. 운명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반응할 수 있어야 했다. 특정한 직업만을 추구했다간 언제 낭패에 빠질지 모르기에 게임 속에서 그 모든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이기 위해 운현은 정말 많은 노력을 가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실 스킬이 없는 것은 아니지.'

직업 적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모든 직업의 적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운현은 스스로 검사 직업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검사들과 마찬가지로 스킬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은 지금 셋. 삼단베기. 그리고 검풍. 도발... 하지만 지금 스킬을 쓸 수는 없지.'

어느정도 대중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운현의 막강한 힘이 가미된 스킬이 발동되었다간 대부분의 적들이 한방에 죽을 수 있었다. 가뜩이나 힘조절하느라 힘든데 굳이 스킬을 써가면서까지 힘조절을 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운현은 아예 아직 스킬을 배우지 못했다고 말해버렸고 그의 말에 바제트를 비롯한 미야, 헤스티아는 어느정도는 수긍한 눈치였다.

"으음... 미, 미안해."

"응? 미안할게 있나?"

"아니... 내가 널 너무 의심하는 것처럼 말해서."

운현이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자신을 응시하자 바제트는 당황하며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항상 자신의 생각이 그대로 나와 파티원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이렇게 캐묻는 것은 확실히 좋은 행동이 아니다. 기껏 자신을 받아 준 헤스티아와 미야를 봐서도 계속 캐묻는 것은 실례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며 바제트가 사과하자 그녀의 사과에 오히려 의아해하며 운현은 느긋하게 물었고 바제트는 볼을 긁적거린 후 멋적은 얼굴로 말했다.

"너에게도 사정이 있는건데... 너무 캐물은 것 같아서."

"아아. 그런 의문을 품을 수는 있지.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헤스티아 뿐만 아니라 너와 미야도 좋아해. 어떻게 보면 한눈에 반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그런 너희들인만큼 때가 된다면 모든 것을 말해 줄 생각이야."

"때가 된다면 말해준다... 그 말은 숨기는게 있다는 거네?"

가끔씩 예리해지는 미야가 조심스레 묻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미야가 살짝 얼굴을 붉히자 운현은 손을 뻗어 미야의 하얀 귀를 만지작거렸다.

"당연하지. 아니, 그럼 없다고 생각한거야?"

운현의 행동은 비밀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씩 혼자서 나가는 것이나 20레벨도 채 되지 않는, 그리고 아직 젊은 나이로 보이는데도 어지간한 베테랑 모험가 이상의 통찰력을 보이는 것은 확실히 이상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게... 파르티 교단과 관련되어 있는 일인가요?"

그의 말에 헤스티아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차분히 답했다.

"어느정도는. 비밀 서약... 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신용에 관련된 일도 섞여 있는지라... 일이 잘 풀리면 모든 것을 말해줄테니까 지금은 날 믿어주면 안될까?"

예전에는 무조건적으로 그들에게 숨겼지만, 지금은 합당한 이유를 제시했다. 운현이 지금까지 한 파르티 교단과의 일. 그것을 자신이 숨기고 있는 것으로 적당히 포장하자 헤스티아와 미야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저흴 속이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닐테니까요."

"음. 그때 날 도와 준 사람인데... 난 널 믿겠어."

헤스티아와 미야가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비해 바제트는 아직까지는 망설임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 역시 운현에게 신세를 진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비밀이 있다고 말하는 상대를 완전히 신뢰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싶었던 그녀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자 운현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네가 날 믿지 못하고, 파티를 계속 유지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원한다면 나가도 좋아."

쓸쓸한 시선을 그녀에게 보내며 운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없지만 말야.'

334====================

기회

들어올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때도 마음대로 일리는 없었다. 바제트를 끌어들인 이상 이제 와서 그녀를 놓아 줄 생각따위는 조금도 없었던 운현은 망설이는 바제트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너무 부담갖지 말아줬으면 해. 내가 누구든, 그리고 무슨 짓을 하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제 소중한 동료라는 것이지."

"...도, 동료?"

"응."

자신의 손을 꼭 잡으며 운현이 부드럽게 웃자 그의 얼굴을 보며 바제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동료라 말해주는 사람이다. 그 사람을 자신이 떠나도 되는 것일까?

바제트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눈치챈 운현은 더더욱 따뜻하고 달콤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네가 그동안 많이 고생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어. 네 마이페이스적인 성격이나 말투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널 고깝게 바라봤겠지.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그렇지 않아. 네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행동을 하든 우리와 파티를 맺고 손발을 맞춘 것만으로도 인연은 시작된거라고. 그 인연을 쉽게 끝내고 싶지는 않아."

"그, 그런..."

점점 흔들린다. 바제트와 마찬가지로 다른 파티에서 민폐라며 쫓겨난 경험이 있는 헤스티아는 날을 세우고 바라보던 바제트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것에 그녀에 대한 적대감을 억누를 수 있었다. 화염 마법사라는 특성 때문에 근접 딜러가 공격을 하기 힘들고, 그 탓에 결국 파티에서 쫓겨나버린 아픈 기억을 떠올린 그녀는 살그머니 운현을 보았다.

'만약 오빠가 아니었다면...'

운현이 아니었다면 자신 역시도 바제트와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을 의심하며 살아가야 했을지도 몰랐다. 친구라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헤스티아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미야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에. 아니에요."

미야가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자 애써 웃어보인 헤스티아는 다시 운현과 바제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바제트를 말없이 바라보던 운현은 그녀가 자신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다는 것에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바제트는 못 벗어난다.'

사람의 심리라는 것은 결국 다들 똑같다. 힘든 시기에 누군가가 옆에서 지원해주고, 응원해주며 기대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신뢰를 보내게 된다. 괜히 의존증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편안함이란 달콤한 독과 같아서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강력한 의지가 없는 이상 그 달콤함에서 사람은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파티원들에게 몇번이나 쫓겨나고, 다른 사람들에게 파티 브레이커라 불리며 경원시당하는 바제트인 이상 그녀가 자신의 달콤한 말에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운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바제트. 날 믿어줘. 빠른 시일 안에 모든 것을 밝힐테니까."

"...운현. 넌 내가 곁에 있어줬으면 해?"

"응."

단 한치의 망설임없이. 운현은 곧은 시선으로 바제트를 보았다. 자신에게 향해지는 그의 시선에 바제트는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어버렸다.

"믿을게. 그, 그리고..."

"응?"

"고마워. 날 이렇게까지 잡아두려고 해서..."

손발을 맞췄다고는 하지만 아직 한번의 전투에 불과했고 도움은 오히려 자신이 더 받은 셈이다. 헤스티아와 미야의 전투를 보아도 이들은 분명히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나 같은 하이브리드 직업이 아닌 전문 직업이 더 좋겠지만...'

다양한 스킬을 쓸 수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유틸러도 아니고, 또 힐러도 아닌 드루이드다. 운현의 단검 투척술이나 그의 지휘를 보면 굳이 자신이 끼지 않아도 운현의 파티는 머지 않아 모험가들 사이에서 곧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한가지만 약속해 줄 수 있어?"

"뭔데?"

"날... 배신하지 않을거야?"

떨리고 있는 바제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운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 뿐만 아니라 헤스티아, 미야. 둘 모두 긴장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기대에 응하듯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너 뿐만이 아니라 헤스티아, 미야. 모두 버리지 않을거야. 이것만큼은 거짓이 없어. 숨기는 것도 없고.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너희들의 편이 될거야. 그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말이지."

그녀들을 지키고, 그녀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꿨고 모든 것을 버렸다. 그런 운현에게 있어서 바제트나 헤스티아, 미야를 배신하는 일만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운현이 굳은 얼굴로 맹세를 하자 바제트는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준 이가 없었다. 그의 진실된 표정에 바제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밝은 어조로 말했다.

"좋아! 나도 여자야!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물러설 수 없지! 운현! 나도 널 믿겠어!"

"오, 오빠! 저두요!"

"으음. 난 어떻게 할까..."

바제트가 밝은 얼굴로 외치자 헤스티아는 당황하며 허둥지둥 외쳤다. 그런 그 둘을 웃으며 바라보던 미야는 생글거리며 어깨를 으쓱였고 운현은 손을 뻗어 그녀의 하얀 꼬리를 살짝 잡은 후 흔들었다.

"너도 날 믿어. 믿어라.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헤에... 알았어. 으음, 딱히 네가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말야."

"좋아. 그럼 이제야 제대로 된 파티가 만들어 진 것 같네."

아직 이것만으로 모두의 신뢰를 얻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자신이야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움직인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이들의 마음 속에 자신이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이상 최대한 안전장치를 만들어야 했다.

'모두가 날 믿고, 날 사랑하게 만들어야해. 그렇지 않으면...'

과거에 자신이 보인 행동만으로도 모두의 사랑을 받은 것이 정말 어이없을 정도다. 만약 지금의 자신이 봤다면 그때의 운현은 정말이지 좋아할래야 좋아할 구석이 하나도 없는 작자였으니 말이다. 그런 인간마저도 사랑해 줄 정도로 사랑과 애정에 굶주려 있는 이들이라면 특별한 공략 없이도 과거 수준으로 그녀들이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예정대로 홉고블린을 잡으러 가볼까? 바제트. 뭐 문제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응? 음... 던전에 들어 오기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의 레벨이 너무 낮은 것 같아. 그걸 주의해야 할 것 같은데. 헤스티아에게 라플란의 반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홉고블린을 잡는 적정 파티 레벨은 25야. 그정도가 되지 않는 이상 홉고블린을 쓰러트리는 일은 쉽지 않을거야."

"그렇긴 하지. 하지만 고블린 일곱마리를 상대하는 것도 우리 레벨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여차하면 나도 탱킹과 근접 딜링으로 홉고블린을 커버하면 되니까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은데."

"고블린 일곱이 홉고블린 수준이라고 생각하는거야?"

"그럴리가. 더 강하겠지. 하지만 고블린을 상대하며 큰 피해도 없었잖아. 그러니까 가자."

"으음..."

운현의 말대로다. 고블린 일곱을 상대하며 피해라도 입었다면 모를까 조금 지친 정도에 불과할 정도라면 홉고블린을 상대한다는 것도 그리 무리한 이야기라고는 볼 수 없었다. 결국 바제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운현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고 운현은 헤스티아와 미야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너희들은?"

"운현 오빠가 있다면 뭐든지 상관없을 것 같아요."

"나도 좀 더 열심히 할게. 그러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좋아. 그럼 가자."

"홉고블린의 서식지는 알아?"

"응. 조사해놨어. 이쪽으로 가면 돼."

바제트의 질문에 웃으며 답한 운현은 파티의 선두에 나서며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간 걸었을까. 운현 일행은 수풀 사이에 자리잡은 오솔길에 도착했고 그 오솔길의 앞에서 운현은 검을 뽑으며 말했다.

"홉고블린의 서식지에는 고블린들이 머무르고 있어. 홉고블린은 동굴 안에 있지. 일단 해야 할 일은 고블린을 정리하는 일이야. 내가 들어가서 고블린들을 몰아올테니까 여기서 대기하고 있도록 해. 그리고 미야. 고블린이 몇마리가 될지는 모르지만 넌 여기서 기다리다가 내가 끌고 오는 고블린을 막아줘."

"알았어. 조심해야 해."

"오빠. 혼자 괜찮겠어요?"

"몬스터를 몰아오는 것이라면 내가 하는게 나을텐데..."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헤스티아와 바제트를 향해 운현은 그저 웃는 것만으로 답해 준 후 느긋하게 걸어 오솔길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마 걷지 않아 오솔길이 넓어지며 홉고블린 서식지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앞에서 운현은 검을 든 채 아무런 망설임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키이익!?"

"캬아아악!"

'굳이 여기서 힘 뺄 필요는 없지.'

운현이 원하는 것은 운명의 시간이 오기 전까지 이들의 레벨을 최대한 올려 놓는 것이었다. 미야나 헤스티아, 바제트의 전투 센스는 상당했다. 거기에 자신이 가르친다면 그녀들의 전투 센스는 더더욱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굳이 쓸데없는 전투를 함으로써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일단 상대해야 할 것은... 홉고블린이지.'

하이딩을 걸고 느긋하게 홉고블린 서식지 안으로 들어간 운현은 내부에 있는 고블린들을 힐끔 거리며 살핀 후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에서 들리는 코골이 소리를 들으며 함정 앞에 선 그는 함정의 범위에 검을 꽂아 넣었다.

"파가각!!"

나무로 만들어진 함정이 발동되며 자신의 머리를 치려 하자 그것을 가볍게 피해낸 후 함정의 기관장치를 부숴 그것을 멈추게 한 그는 홉고블린이 깨지 않은 것에 만족했다. 잠시 후의 미래를 알지 못하고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홉고블린의 복부를 향해 단검을 들어 올린 운현은 단검을 들어 복부에 냅다 쑤셔 넣었다.

"크어...업!!"

복부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며 홉고블린이 깨어나자 운현은 홉고블린의 입에 바닥에 굴러다니는 주먹만한 돌멩이를 집어 넣었다. 자신을 움직이게도 못하는 강력한 힘에 눌려 입에 돌멩이를 물어버린 홉고블린이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홉고블린과 눈을 마주하며 빙긋 웃었다.

"쉬잇."

"크...어어...어...업!!"

"아직 두개 더 넣어야 하거든."

인벤토리에서 꺼낸 단검을 홉고블린의 복부에 더 쑤셔 넣은 후 단검의 자루를 비틀어 자루와 날을 분리해낸 그는 단검의 날을 홉고블린의 복부에 밀어 넣은 후 힐링포션을 꺼내 상처에 붓기 시작했다. 복부 깊숙히 파고 든 단검의 날을 그대로 둔 채 상처를 치료한 운현은 홉고블린의 턱관절을 뽑아버린 후 돌멩이를 꺼내고 다시 턱관절을 고쳐주었다.

"크르...크..."

완전히 공포에 질려버린 홉고블린이 차마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움찔거리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던 운현은 그의 볼을 톡 쳐 준 후 느긋하게 밖으로 나왔다.

'최대한 빠르게. 최대한 안전히.'

바제트의 말대로 지금 레벨로 홉고블린을 상대하는 일이 쉬울리는 없었다. 최대한 안정적으로 홉고블린을 잡으려면 정말 파티 평균레벨이 25는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지금 홉고블린을 잡는다면 더욱 빠르게 레벨업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안정적으로 레벨업을 하려면 이런 식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어. 제니스가 있으니 몇가지 방법을 더 써먹을 수 있겠군.'

잡몹을 여럿 잡는 것보다 네임드 몬스터를 여럿 잡아 빠르게 레벨업을 하는 것이 좋았고 그것보다 더욱 빠르게 레벨을 올릴 수 있는 방법도 존재했다. 그것도 가장 빠르고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말이다.

'전투에 대한 것은 내가 가르쳐 주면 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빠르게 레벨을 올리는거야.'

운현은 무심한 얼굴로 동굴에서 빠져나왔고 하이딩이 풀려 있는 그를 발견한 고블린들은 운현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며 포효했다.

"캬아아!!"

소검을 든 고블린이 뛰어드는 것을 힐끔 보며 운현은 검을 움직여 고블린의 입을 꿰뚫어버렸다. 단번에 산적꼬치가 되어버린 고블린이 발버둥치다 축 늘어지는 것을 본 운현은 고블린을 들어 수풀 쪽으로 휙 던져 놓았다.

"다음."

"크르...?"

"캬아! 캭!!"

먼저 달려 든 고블린이 순식간에 죽어버린 것에 고블린들은 당황한 모양이다. 그들이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피다가 동시에 달려들자 운현은 검을 역수로 잡은 후 가볍게 허공에 그어 올리며 스킬을 발동시켰다.

"반월참."

"우우웅!"

검이 흔들리며 푸른색 반월형 기운이 검에서 뿜어지며 고블린 둘의 몸을 동시에 갈라버렸다. 피와 내장이 쏟아지는 광경을 무덤덤한 눈으로 바라보던 운현은 소란을 듣고 나온 고블린들의 숫자를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넷이라... 한놈만 더 잡아주지."

무기를 가지러 가는 고블린들을 보며 바닥의 고블린 시체를 마석에 담아 현장을 정리한 그는 고블린들이 달려오자 바닥에 있는 고블린의 몽둥이를 들어 달려오는 고블린을 향해 휘둘렀다.

"퍼걱!"

선두에서 달려오던 고블린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몽둥이에 담긴 힘 때문에 그 작은 몸 마저도 수풀 깊숙한 곳으로 쭉 날아가버렸다. 피를 흩뿌리며 고블린 시체가 멀리 떨어진 것을 본 운현은 적의를 드러낸 고블린들을 향해 싸늘히 웃었다.

"자. 잘 따라와라."

"캬아아아악!!"

"운현!! 어서 와!"

"응. 셋이야. 조심해."

"하! 세마리정도야 우습지!"

운현이 별다른 일 없이 돌아오길 노심초사하며 기다리던 미야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강철 건틀린에 감싸진 주먹을 내밀며 미야는 크게 진각을 밟고 외쳤다.

"와라! 내가 너희들을 상대해주겠어!!"

"캬아아아!!"

"에!?"

335====================

기회

도발을 쓴 미야는 고블린들이 자신이 아닌 운현을 계속 쫓는 것에 당황했다. 도발이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인가? 그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본 운현은 도망치던 몸을 돌린 후 외쳤다.

"어쩔 수 없네! 내가 막을테니까 공격해!"

"아, 알았어!"

스킬이 실패한 것에 실망하면서도 미야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주먹을 쥐었다. 탱커이기도 하지만 근접 딜러이기도 한 격투가의 특성을 살리면 된다. 미야가 주먹을 쥐고 고블린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운현은 검을 움직여 고블린들의 공격 흐름을 적당히 끊어가며 외쳤다.

"헤스티아!"

"파이어 볼트!"

탱커가 미야에서 운현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헤스티아는 운현의 찌르기에 의해 밀려난 고블린을 향해 파이어 볼트를 날린 후 곧장 바인드를 준비했다. 그녀가 바인드를 준비하는 동안 활을 쏴서 운현의 부담을 줄여주려던 바제트는 시위를 강하게 당겨 고블린의 투구를 맞춘 후 주문을 외웠다.

"인탱글!"

바닥의 풀이 피어나며 고블린의 몸을 감쌌다. 덩굴에 의해서 몸이 묶여버린 고블린이 당황하는 동안 미야와 헤스티아의 집중공격에 맞은 고블린이 푹 쓰러져버렸고 그 고블린을 시작으로 다른 고블린 역시 운현이 제대로 고블린들을 잡아 둔 덕분에 손쉽게 세마리의 고블린을 잡을 수 있었다.

"으음. 도발이 실패한 것은 처음이네."

"도발이라고 해서 매번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보다 운현. 대단한데? 어떻게 한거야?"

"아. 아까 고블린들을 잡아둔 거? 별 거 아니야."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별 거 아니야. 라고 말할 만한 것이 아니다. 모든 공격과 방어, 행동의 흐름을 정확히 캐치할 수 없는 이상 쓸 수 없는 방법이니 말이다. 잘만 한다면 어지간한 상대의 모든 공격을 무효화 시킬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검술이지만 검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바제트와 미야, 헤스티아는 그의 말에 그저 고개만 갸웃거릴 뿐 이었다.

"예전에 모험을 하다가 작은 마을에 들어갔는데 그곳의 경비병들이 쓰던 검술을 약간 어레인지 한 것 뿐이야. 난동을 부리는 이들을 제압하기 위한 검술이거든. 어쨌든 사람이 적은 곳이다보니 다들 친하게 지내는지라... 취한 사람들을 제압하기 위한 용도로 그들이 쓰더라고. 꽤 좋은 것 같아서 배워뒀지."

과거 게임을 하며 습득한 검술에 대해 말해주며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말에 바제트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헤에... 그래서구나."

"어려운 기술이에요?"

"그렇게 어렵지 않아. 다른 경비병들은 창이나 주먹으로도 하던 것 같던데... 그곳에 머무는 시간이 적어서 난 검술밖에 익히지 못했어. 왜? 배우고 싶어?"

"검술 밖에 모르신다면 배울 수도 없겠네요."

"아쉽네..."

"....."

수많은 세계를 경험하며 익힌 통찰력과 분석력이 없다면 절대로 쓸 수 없는 기술이지만 운현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의 말에 바제트는 쓰게 웃으며 볼을 긁적거렸다.

"아니 라플란의 반지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너한테 있어서 네가 별거 아니야... 라고 말해봤자..."

"내 주특기는 단검투척이라니까. 자자. 쓸데없는 소리는 적당히 하고... 다친 사람있어? 미야. 괜찮아?"

다치기는 커녕 긁힌 상처도 없는 미야를 향해 힐링 포션을 들어올리며 운현은 너스레를 떨었고 그의 걱정 섞인 말에 미야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작 고블린 셋을, 그것도 탱커가 아닌 딜러로 상대를 했으니 다칠 이유는 없었다.

"나보다 운현. 네가 더 걱정인데. 아까 고블린 공격에 맞는 것 같더니만. 괜찮아?"

다른 이들의 시선을 생각해야 하는 만큼 운현은 적당히 고블린의 공격을 허용했고 그것을 언급하며 미야는 그의 팔을 가리켰다. 아까 전 고블린의 몽둥이를 몸으로 막은 그가 다치지는 않았을 까 걱정하던 미야는 운현이 여유롭게 팔을 움직이자 작게 한숨을 내쉬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음... 미안."

"왜? 아. 도발이 실패한 것 때문에? 하하하... 괜찮아. 네 잘못 아니니까. 내가 어그로를 너무 많이 끌었나보지."

"그래도..."

나름 탱커의 역할을 맡고 있는데 자신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한 것이 미안한 모양이다. 늘 쫑긋 세워져 있던 귀가 축 늘어졌고 그녀의 꼬리가 흔들리지 않자 운현은 웃으며 그녀의 복실복실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이야. 이번 일은 내 실수라고 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마."

'너무 임팩트가 강렬했나보군. 일곱마리가 있던 고블린 중 넷을 자신이 순식간에 죽여버렸으니 본능적인 공포에 질려 어떻게든 날 공격하려고 한 모양이네. 그럼 홉고블린도 날 공격하려 하겠군. 어느정도 준비는 해놔야 하나...'

홉고블린과 다르게 무리를 이루고 있는 탓인지, 아니면 동료가 있다는 점 때문인지 고블린들은 도발을 쓴 미야보다 운현을 더 빨리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거의 광기나 다름없는 상태이상에 빠져 미야를 공격하지 않고 자신을 공격한 것이라 생각한 운현은 여전히 시무룩한 미야의 볼을 살짝 꼬집고 그녀의 깨끗한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앗...!"

이마에 부드럽게 닿는 촉촉한 입술에 미야는 놀라며 고개를 들어 운현을 보았다. 그녀의 서글서글한 눈망울을 마주 응시하며 운현은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가져다 댄 후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너의 서포트를 해줄거야. 그리고 아까도 말했잖아. 이번 일은 내가 몬스터를 잘못 끌어 왔기 때문에 생긴 일 같다고.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좌절하지 말아줘. 네가 그렇게 시무룩해 있으면 나도 힘들다고."

"에에... 그 말은."

"넌 웃는게 더 잘 어울려."

미야의 볼을 톡 건드린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다시 한번 애정을 듬뿍 담아 북북 쓰다듬은 후 몸을 돌렸다. 그가 멀어지자 살짝 손을 들어 이마를 만져 본 미야는 운현의 뒷모습을 보며 베시시 웃었다.

"헤헤헤..."

"자! 다들 별 부상은 없는 것 같고. 흥분한 사람들 없지? 그럼 이제 가볼까?"

"오오!"

일행들과 함께 홉고블린의 서식지에 들어 간 운현은 텅 비어있는 서식지 안에서 주의를 기울여 주변을 탐색하는 동료들을 지켜보다가 슬쩍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 있는 항아리를 부숴 홉고블린이 체력을 회복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그는 주변에 고블린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동료들이 나오자 웃으며 말했다.

"이 동굴 안에 홉고블린이 있는 것 같아. 내가 가서 데리고 나올게."

"괜찮겠어?"

"응. 아까 전에는 그저 실수일 뿐이야.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고."

미야의 걱정 섞인 말에 웃으며 어깨를 으쓱여 준 운현은 터덜터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박살내 놓은 함정은 여전히 부서진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것을 보며 홉고블린이 아직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동굴의 깊숙한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복부를 칼로 헤집으며 단검의 날을 빼고 있는 홉고블린을 발견했다.

"크아아아악! 크악! 크아아아!!"

복부에 있는 단검의 날을 겨우 빼낸 홉고블린은 공포와 고통, 그리고 이것을 만들어낸 운현에 대한 증오심에 이를 갈며 눈을 번뜩였다. 복부에서 철철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던 그가 일어나 몽둥이를 잡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뒤로 물러났다.

"굳이 도발할 필요는 없겠군."

"크아아아아아아아!!!"

동굴이 떠나가라 포효를 터트린 홉고블린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운현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 공격을 가볍게 막아낸 운현은 홉고블린이 스스로 만들어낸 복부의 상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크아! 아아아아악!!"

복부를 꿰뚫은 손이 상처를 헤집기 시작하자 홉고블린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운현을 떼어 놓으려 다시 한번 몽둥이를 휘둘렀다. 자신의 몸통만한 몽둥이를 뒤로 물러나는 것만으로 피해낸 운현은 느긋하게 동굴의 통로로 이동했다.

'이정도면 미야가 탱킹하긴 힘들겠는데.'

증오로 눈이 뒤집혀진 홉고블린이다. 그가 쿵쾅거리며 뛰어나오는 것을 힐끔 본 운현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다급히 외쳤다.

"미야!! 위험해! 누가 홉고블린을 자극해놨나봐!"

"에!? 그게 무슨!?"

안정적인 상태도 위험하기 그지 없는데 누군가 홉고블린을 자극하기까지 했다? 그것에 놀란 미야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이거 피해야 하는 거..."

"크아아아아아아아!!"

수풀이 떨릴 정도의 큰 외침이다. 그 괴성에 미야와 바제트, 헤스티아는 깜짝 놀라며 귀를 막았다.

"저, 저게 홉고블린이야!? 바, 바깥에서는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던전의 몬스터는 바깥의 몬스터보다 훨씬 강하니까!! 으으...!! 인탱글!"

다급히 수인을 맺으며 운현을 쫓아오는 홉고블린을 향해 손을 내뻗은 바제트는 덩굴이 올라오며 홉고블린의 몸을 감싸자 운현을 향해 빠르게 외쳤다.

"운현! 도망치자! 저 녀석을 잡기는 어려울 것 같아!"

"아니! 홉고블린의 복부를 봐봐! 저정도 상처를 입었으니 오히려 쉬울지도 몰라!"

"그치만!"

파티의 안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제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운현을 보았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홉고블린은 미야나 헤스티아, 자신이 아닌 오로지 운현만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도발 썼어!?"

"아니!"

"아아아아! 운현! 인탱글이 풀릴거야! 헤스티아! 빨리 바인드를 준비해!"

"에, 네!! 알겠어요!"

홉고블린이 풍기는 무시무시한 기세에 놀라면서도 그 홉고블린이 주시하는 것이 운현이라는 것을 발견한 헤스티아는 다급한 마음을 억누르고 최대한 집중하여 마법을 완성시켰다.

"크아아아아!!"

"얍!!"

내밀어진 지팡이에서 뻗어나간 붉은 기운은 홉고블린의 거체를 묶어버렸다. 그 틈을 노려 운현이 검을 들어 홉고블린의 몸에 상처를 만들어내자 미야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 이를 악물고 주먹을 뻗었다.

"운현! 혼자 막을 생각하지 마!"

"하핫! 이거 믿음직스러운데!? 알았어!"

홉고블린이 만들어내는 증오와 광기, 폭력에 두려워하면서도 미야는 용감히 앞으로 나섰다. 운현 혼자서 홉고블린을 상대하게 놔두지 않겠다는 기세로 그의 옆에 선 미야가 주먹을 들어 올리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운현! 조심해! 저 녀석! 다른 홉고블린과 조금 다른 것 같아!"

사람의 인식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일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개체를 발견하면 그 개체의 특성이 다른 보편적인 개체와 다른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을 노려 일부러 홉고블린의 복부에 단검의 날을 집어 넣어 고통을 준 운현은 자신에 대한 공포, 그리고 몬스터가 가지는 다른 생명체에 대한 증오가 적절히 섞여 광기를 드러낸 홉고블린이 다른 홉고블린과 다르다고 다른 파티원이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성공하자 운현은 조용히 웃었다.

'이정도면 됐다.'

"큭! 미야! 조심해! 보통이 아니니까!"

"하아아압!!"

운현이 공격을 막아내며 만들어낸 빈틈. 복부의 상처를 향해 발차기를 날린 미야는 자신의 공격에 맞고 비틀거리는 홉고블린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복부가 약점이다.

"아아아!! 정말!"

"크아아아아!!"

미야가 공격을 했지만 아직까진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은 홉고블린은 운현을 노려보며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혼자라면 추격해서 끝장내겠지만 그는 추격을 하는 대신 아까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힘들었다는 것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한쪽 팔을 축 늘어트리며 외쳤다.

"젠장! 조심해!"

"알았어요! 바제트 언니! 운현 오빠에게 힐을!"

"알았어!"

홉고블린이 뒤로 물러난 틈을 노려 운현에게 힐을 날린 바제트는 운현이 늘어트린 팔을 들어 올리자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웃어보인 운현은 헤스티아와 바제트를 보며 빙긋 웃었다.

'위기시에 결속이 잘 되는 것은 어디든 똑같군.'

공동의 적이 있다면 어색한 사이도 가깝게 만들 수 있다. 내우를 다스리는데 가장 좋은 것은 외환이라는 말이 있듯 운현은 이번 홉고블린과의 전투에서 미야, 헤스티아, 바제트 사이에 있는 미묘하게 어색한 공기를 풀어버리려 했다. 헤스티아 나름대로 인정하려 했지만 아직 그들 사이에 남아 있는 미묘한 어색함도 이번 기회에 날려버리려 생각한 운현은 헤스티아와 바제트가 차례로 연계하며 스킬을 쓰는 것에 만족했다.

"크아아아아!!"

운현이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 그리고 그의 옆에 그의 동료가 있다는 것에 홉고블린은 이를 갈다가 주변에 놓여져 있는 바위를 들었다. 나름대로 접근하지 않은 채 싸우려는 모습에 미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안돼!"

저 바위를 운현이 막을 수 있을까? 자신이 저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그녀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홉고블린은 들고 있던 바위를 운현에게 던져버렸다.

"오빠!!"

"운현!!"

'저정도야...'

그냥 옆으로 몸을 굴리는 것으로 피할 수 있다. 나름대로 빠르게 날아오는 듯 하지만 초인의 반열에 올라 있는 운현에게는 맞아도 큰 충격이 없는 정도의 속도와 크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랬다간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옆으로 몸을 피하려 했다.

"위험하잖아!"

"주와아아앙!!"

수풀에서 은회색의 섬광이 튀어나온다.

길고 아름다운 은백색의 머리칼.

검은 망토에 둘러쌓여진 은백색의 슈트.

한 손에 들려 있는 빛의 검.

이제 막 피어나려는 듯한 꽃망울같은 아름다움과 천진난만함,

그리고 자유로움을 간직한 여인은 은회색 눈을 반짝이며 날아오는 바위를 향해 빛의 검을 내밀었다.

"하압!!"

일곱줄기의 빛의 기운이 쏘아지며 바위를 가루로 만들어버린다. 갑작스레 난입한 그녀의 모습에 모두가 당황하는 동안 그녀는 멀리 서 있는 홉고블린을 향해 빛의 검을 휘둘렀다.

"카아아아악!!"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붉은 선이 그어진다. 그 선이 점점 붉어지고 홉고블린의 몸이 둘로 나뉘어져 양쪽으로 쓰러지자 빛의 검을 든 여인은 귀엽기 그지 없는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려 약간 뾰로통해진 얼굴로 외쳤다.

"당신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레벨에 홉고블린에게 도전한거야!? 내가 아니었다면... 어?"

걱정과 분노가 섞인 외침을 던지려던 그녀는 운현이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자 당황했다. 그녀의 표정을 마주하며 운현은 천천히,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꾹 억누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의 목소리를 들은 은회색 머리칼의 여인은 잠시 그를 마주보다가 볼을 긁적거리고 떨떠름히 말했다.

"난 상아라고 해. 음... 뭐냐.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지."

336====================

기회

"상아..."

"왜... 그런 눈으로 보는거지?"

운현의 젖은 눈을 본 상아는 이상하다는 듯 그를 마주보며 물었다.

[가. 어서.]

마지막 기억. 알트리아로 자신을 보낸 상아가 남긴 마지막 말. 강력한 몬스터를 앞에 두고 운현을 지키기 위해서, 운명을 바꾸도록 마법 문으로 자신을 밀어 넣은 그녀의 눈물로 범벅이었던, 하지만 자신을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듯한 그녀의 웃는 얼굴이 떠오른 운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지금와서 흔들려서는 안된다.'

그녀가 만들어 준 기회를 간신히 잇고, 또 이어가며 여기까지 왔다. 그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운현은 여전히 이상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상아를 향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상아 길드장님이라구요?"

"응."

한순간 분위기가 바뀐다. 안타까움, 슬픔, 그리움. 그리고 애정. 복잡한 여러가지 감정이 섞여 있던 눈빛은 사라지고 부드럽고 선량한 시선만이 느껴지자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갑습니다. 저는 운현이라고 합니다."

"운현이라고!? 어... 그러고보니... 너희들은... 응. 반가워. 아니 그보다."

운현의 변화에 당혹스러워하던 그녀는 지금 그것에 대해서 떠들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곧 화난 얼굴로 표정을 바꿨다. 그런 그녀의 등장에 놀라고 있던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후다닥 운현의 곁으로 다가갔다.

"당신들. 레벨이 몇이야? 아무리 봐도 평균 레벨이 20은 넘지 않은 것 같은데."

"뭐 그렇긴 하죠."

"운현. 당신이 이 파티의 리더인가?"

"네."

상아는 골치아프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고 이마를 꾹 누른 후 둘로 나뉘어진 홉고블린을 가리켰다.

"홉고블린을 상대하려면 평균 레벨이 25는 되어야 한다고. 괜히 적정레벨을 만들어 놓은게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그게 필수는 아니지 않나요?"

"뭐?"

운현이 느긋하게 말하자 상아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상아를 내려다보며 운현은 홉고블린의 복부를 가리켰다.

"홉고블린을 잡는 평균 레벨이 25라는 것은 그저 평균일 뿐이죠. 사람의 자질에 따라 적은 레벨이라고 하더라도 더 강한 몬스터를 잡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들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올 정도로 강해보이지는 않는데?"

"으음. 뭐."

"당신의 장비는 좀 좋아보이긴 하지만 말야. 다들..."

머쓱해하는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를 흝어 본 상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봐도 그리 좋은 장비들로 보이지는 않는다. 초보 모험가들 중에는 클랜이나 가문, 혹은 자신이 소속해 있는 세력의 지원을 받아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 좋은 장비를 둘둘 두르고 있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그런 이들로 뭉쳐진 파티의 경우는 적정 레벨 이상의 몬스터를 잡아 빠르게 레벨업을 했지만 아무리 봐도 운현의 파티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장비잖아."

"뭐 그렇긴 한데... 장비가 좋다고 해서 무조건 강한 것은 아니지 않나요? 파티라는 것은 서로의 연계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기... 상아 길드장님."

"뭐지?"

"화를 내시는 것도 당연하시겠지만... 그래도 운현 오빠는 숙련된 모험가니까요. 다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거니까... 저기 그게."

상아가 화를 내며 나무라는 것도 초보 모험자들이 전투의 성공으로 의기양양해져 더 강한 몬스터를 잡다가 죽거나 다치는 것을 걱정해서 그런 것에 불과했다. 길드에서도 푼수떼기라 불리는 상아지만 모험가들을 아낀다고 알려져 있는 그녀인만큼 헤스티아는 그녀가 운현을 나무라는 것에도 화를 내기보다는 웃으며 중재하려 하였다.

"숙련된 모험가?"

헤스티아의 말에 상아는 운현을 위 아래로 흝어보았다. 숙련된 모험가라 불리우는 것 치고는 상당히 젊어보인다. 자신과 같은 엘프인가 싶어 귀를 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인간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그였기에 상아는 볼을 긁적거리고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저기 혹시 나이가..."

"스물 아홉입니다."

"젊잖아! 숙련되었다고 치기에는 너무 젊어!"

"이제 서른이 코 앞인데 젊다라. 뭐 엘프분들에 비하면 그렇겠죠."

"끙... 아무튼 홉고블린을 상대하고 싶으면 레벨을 더 올리고 가라고."

"조언. 감사합니다."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라고 하더라도 비상시가 아닌 이상 모험가들의 통제권따위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운현이 '조언'이라고 하는 것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뚱한 눈으로 그를 바라 볼 뿐 이었다.

"그보다... 저 홉고블린. 상태가 이상하던데?"

"던전의 홉고블린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라...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신가요?"

"아니... 홉고블린이 저렇게 바위를 던지는 일은 별로 없단 말이지. 그것도 저레벨을 상대로 말야. 홉고블린은 잔인하기로 유명한 몬스터야. 특히 사람의 살을 찢는 것을 좋아하는 몬스터야. 그런 몬스터가 직접 공격을 하지 않고 원거리 투척 공격을 하다니..."

"그렇죠!? 확실히 이상하긴 했어요!"

자신이 들었던 홉고블린의 특징과는 상당히 달랐던 홉고블린에 이상함을 느꼈던 바제트 역시 상아의 말에 동의했다. 그녀가 말하자 상아는 잠시 생각을 한 후 홉고블린을 가리켰다.

"미안하지만 저 몬스터의 시체를 챙겨서 길드의 간부인 제니스에게 보고를 해 줄 수 있겠어? 이건 내 나름의 의뢰니까 보상을 주지."

"왜요?"

몬스터를 잡으면 시체를 마석에 담아 길드에 보고하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방법인데 그것이 아닌 특정인에게 보고를 해달라는 상아의 의뢰에 미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질문에 상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이 던전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제니스씨거든. 제니스씨라면 이 홉고블린에 대해서 조사할 수 있을거야."

"그런 것이라면 어렵지 않죠."

홉고블린의 이상함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상아를 향해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으로 답했다. 아까 전에 자신의 말에 저항하던 그가 순순히 수긍하자 상아는 그제서야 화가 조금 풀렸는지 예쁜 미소를 지으며 운현을 보고 말했다.

"그나저나... 당신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군."

"오빠는 숙련된 모험가라니까요!"

"숙련된... 뭐 좋아. 굳이 지금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을 것 같구만. 괜찮다면 오늘 오후에 시간을 좀 내줄 수 있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내 스킬을 봤나보군.'

상아는 상대방의 스킬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운현의 직업은 검사. 하지만 그가 보유하고 있는 스킬은 검사의 스킬 외에도 하이딩, 한손검 숙련, 재료 합성 등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스킬이 있었다.

'그래도 배려를 해주는 건가?'

헤스티아의 말을 듣고 그녀와 다른 여인들을 힐끔 본 상아는 쓰게 웃을 뿐 그의 스킬과 정체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상아 나름대로의 배려라는 것에 운현은 상아와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상아 길드장님."

"왜?"

"그게 소문의 광검인가요?"

"아아... 이거?"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인 상아만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무기인 광검에 바제트는 관심을 보였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원통형 자루를 가리키며 바제트가 묻자 이런 질문을 받은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는지 상아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광검을 들어 올려보여주었다.

"한번 써볼래?"

"오오! 진짜요!? 고맙습니다!"

상아에게 광검을 받은 바제트는 그것을 받고 마력을 집중했다. 비록 활이 주무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소문의 그 광검이니만큼 한번 정도는 만져보고 싶었던 그녀는 과도 수준의 빛의 검날이 튀어나오자 신기해하며 눈을 반짝였다.

"우와!"

"저도 해보고 싶은데!"

"나도!"

"얼마든지 해봐. 괜찮으니까."

"오빠는요?"

"나? 음... 글쎄?"

"......"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다는 광검, 직업 불문하고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보고도 운현은 관심이 없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런 운현의 모습에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상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안당해. 그 광검에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 줄 알고.'

광검의 주 재료는 마인의 코어를 이용하는 것이다. 과거 운현이 만들다 실패한 위신체들의 찌꺼기가 가진 막대한 마력이 담긴 코어가 아니라면 광검을 만들 수 없을텐데도 상아는 과거에 가지고 있던 광검과 똑같은 광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연이 광검에 있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장치도 있을 수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표정 관리는 잘 하네.'

그때도 그랬다. 상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넌지시 광검을 넘기는 것으로 운현을 낚았었고 기억을 잃어 순진하기, 아니 멍청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단순했던 자신은 상아가 내민 미끼를 바늘째 꿀꺽 삼켜버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많은 가상현실을 경험하며 많은 책략가들을 가지고 놀 정도로 경험과 지혜를 쌓은 운현이 이런 정체도 알 수 없는 장치를 순순히 만질리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무기를 마음대로 만지는 것은 실례인 것 같으니까 말야."

"그다지 실례는 아닌데? 광검을 만져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무척 많아. 괜찮으니까 사양하지 말라고. 좋은 경험이 될거야. 거기다가 너는 검사 아닌가? 검사는 좋은 검을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실력을 높일 수 있잖아. 괜찮아."

운현이 광검을 잡는 것을 저어하자 상아는 애써 본심을 숨기며 부드럽게 광검을 내밀었다.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광검을 바라보던 운현은 광검의 자루에 있는 문양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 문양은 여전하군. 직접 새긴건가?'

상아에게 받았던 광검의 자루에도 있는 초승달 형상의 문양이다. 과거의 광검과 완전히 똑같은 생김새에 똑같은 문양이 있는 광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은 물건을 본다면 그 물건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허나 무인이라면 좋은 무기가 아닌, 일반적인 무기로도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작해야 몸 바깥의 물건에 불과한 것에 집착하고 싶지는 않군요."

"...정론이라 열받네."

귀한 보물을 보고도 무심한 운현의 모습에 상아는 어쩐지 기분나쁘다는 얼굴로 떨떠름히 말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보인 운현은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가 멋쩍은 웃음을 짓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 내 말이 무조건 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야. 사람이 발전하는 것은 욕심 때문이기도 하지. 좋은 물건을 보고 그것에 대한 욕심을 부리며 사람은 성장하기 마련이니까. 결국은 성향의 차이에 불과해. 그러니까 그런 표정들 짓지 마."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이의 물건에 욕심을 내기보단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한다는 운현의 말에 괜스레 찔린 그녀들은 뻘쭘히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녀들이 광검에 관심을 끊자 상아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후 운현을 향해 말했다.

"숙련된 모험가라기보다는 숙련된 검사같은 말을 하는데. 그 말만큼 실력이 뛰어난지 궁금하구만."

"운현은 강합니다."

"제가 봤던 그 어떤 검사보다 강해요!"

"오빠는 정말 강하다구요! 말 뿐이 아니라!"

"헤에... 그래? 하지만 보기에는 그리 강해보이지 않는데... 어디. 괜찮다면 실력 좀 볼 수 있을까? 나는 무기를 쓰지 않을테니까. 어때?"

자신에 대해 좀 더 파악하려는 듯한 상아의 행동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과거라면 자신을 무시하는 그녀의 말에 무작정 달려들었겠지만 지금은? 그녀가 격장지계를 펼치는 것이 아무리 봐도 운현에게 있어서는 귀엽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전 약합니다. 다만 노력할 뿐이지요."

"...그, 그래?"

"네. 상아 길드장님 말씀대로 저의 레벨은 아직 20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요. 점점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하아. 좋아. 운현."

"네?"

"아까 나랑 한 약속 잊지 말라고."

운현이 광검을 만지지도, 그리고 자신의 도발에도 걸려들지 않는 것에 상아는 입맛을 다셨다. 모험가만 아니라면 일단 공격을 해버리겠지만 모험가 길드 소속의 모험가이다보니 그런 짓을 하기도 난감하다. 그녀가 투덜거리며 뒤통수를 긁적거리고 몸을 돌리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약속이야! 쳇! 두고보자!"

자신의 뜻대로 풀린 것이 하나도 없다. 상아가 짜증 섞인 외침을 남기고 등장할때와 마찬가지로 바람같이 사라지자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그녀의 움직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와... 저게 진짜 강자의 모습이구나. 저 빠른 몸놀림..."

"대단해..."

"마력량도 상당한 것 같은데... 소문이 사실이었나보네요. 상아 길드장님이 마검사라는게... 저도 저 정도로 마력이 강했으면 좋을텐데..."

높은 경지에서 자신의 힘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탓인지 여인들은 상아의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작게 주눅이 들어버렸다. 너무 높은 벽을 마주한 탓에 시무룩해진 그녀들을 향해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도 강해질 수 있어. 너무 걱정하지마."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337====================

기회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녀들을 위해서라도 그녀들이 강해지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따스한 시선으로 자신들을 바라보자 여인들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렇게 되야겠죠!"

"나도 강해질거야!"

"후후후... 상아 길드장님 정도는 무리더라도... 길드 간부 수준까지는 오를 수 있겠지."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가 다짐하는 것을 보며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아의 등장으로 홉고블린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갔지만 오히려 그녀들의 의욕을 고취시킨 것 같아 오히려 좋다. 운현은 의지를 불태우는 그녀들을 향해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아주 좋은데. 그럼 다른 홉고블린을 잡으러 가볼까?"

"에."

"그치만."

"아까 상아 길드장님도..."

"괜찮아. 장비와 레벨의 강함이 강함의 증거는 아니라는 것에는 상아 길드장도 동의했잖아? 우리의 연계라면 홉고블린도 충분히 잡을 수 있을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가자."

'최소한 넷은 더 잡아야 할 것 같은데...'

"으응."

걱정하는 동료들을 격려하며 운현은 다음 홉고블린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지도에 있는 홉고블린의 서식지 근처에 도착한 운현은 앞서 나서려는 바제트를 말리며 담담히 말했다.

"이번에도 내가 갔다올게. 만약 홉고블린이 나와 있다면 내가 상대하는게 나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만약 아까 같은 홉고블린이라면 어쩌려고!?"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으으... 정말. 무리하지 말라고."

생글거리며 운현이 말하자 바제트는 한숨을 푹 내쉰 후 주머니에서 작은 구슬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은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바제트는 구슬을 가리키며 말했다.

"연막탄이야. 나도 어렵게 구한거니까 위기시에 사용해줘."

"헤에... 이건 어디서 구한거야?"

"제작자 연합의 일을 도와주고 얻은거야. 제작자 연합의 연합장인 피스나가 만든 특제니까 효과도 좋아. 나도 이것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있거든."

피스나가 만든 것이라면 성능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딱히 쓸 일은 없겠지만 자신을 걱정하는 바제트가 준 것인만큼 그것을 거절하기 난감했던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연막탄을 받았다.

"고마워. 잘 쓸게."

"귀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너보다 귀하지 않아. 그러니까 조심해."

"알았어. 그럼 갔다올테니까..."

"운현! 아까처럼 무리하지마!"

아까 전 고블린을 몰아 올 때 고블린들이 운현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던 것을 떠올리며 미야는 황급히 말했다. 그녀의 외침에 손을 흔들어주는 것으로 답변을 마친 운현은 느긋한 걸음으로 고블린 서식지 안으로 들어간 후 하이딩을 걸고 곧장 홉고블린이 있는 동굴 안으로 이동했다.

'여기는 함정이 없나.'

첫 동굴과 다르게 홉고블린이 누워 있는 동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함정은 발동되지 않았다. 그것에 쓴웃음을 지으며 운현은 하이딩을 풀고 홉고블린에게 다가갔다.

"크르...으으읍..."

"이 짓도 여러번 해야 하니 익숙해 질 필요가 있군."

굳이 힘을 줘서 무력화 시킬 필요는 없었다. 홉고블린에게 정상적인 침투경을 먹여 무력화시킨 운현은 자신을 보며 눈만 껌뻑거리는 홉고블린의 복부를 향해 단검을 깊게 내리 꽂았다.

"...크으!"

침투경에 맞은 상태인 홉고블린은 약간 꿈틀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손쉽게 다섯개의 검날을 홉고블린의 복부에 집어 넣은 그는 상처를 힐링포션으로 치료한 후 말없이 동굴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머지는 이 고블린들인데..."

"키익!?"

동굴에서 걸어나온 운현을 보며 고블린들은 당황했다. 언제 저 안으로 들어갔단 말인가. 고블린들이 당황하는 사이 빠르게 검을 뽑은 운현은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고블린의 목을 쳐 날리며 말했다.

"너희들을 상대하는 것이 현명한 짓은 아닌 것 같다."

"운현!"

"이곳에는 고블린이 없어. 동굴 안에 홉고블린만 하나 있을 뿐이야."

운현이 오기만을 노심초사 기다리던 일행들은 운현이 웃으며 여유있게 돌아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홉고블린이라는 강한 적을 상대하기 전에 힘을 빼지 않게 된 것에 좋아하며 그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운현의 말대로 고블린이 없는 것에 환하게 웃었다.

"이야~! 운이 좋은데1?"

"그러게 말이에요. 후후. 오빠가 정찰을 갔다와서 그런걸까?"

"그럴지도 몰라. 그럼... 이번에 홉고블린을 끌고 오는 것은 내가 할게."

"아냐. 위험하니까 내가 간다."

"운현! 정말 혼자서 다 할 생각이야!? 동료라면 믿고 맡겨줘!"

바제트의 말에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강한 의지에 두 손을 들어버린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바제트는 활과 화살을 꺼내 든 후 그에게 말했다.

"금방 올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만약 아까와 같은 상태라면..."

"나와 미야가 어떻게든 주의를 끌테니까 걱정하지마."

"응!"

"바제트 언니. 조심해야 해요!"

"하하하... 알았어. 걱정마."

아까 전 위기를 겪은 것만으로도 유대감이라는 것이 생긴 모양이다. 헤스티아가 머뭇거리며 응원하자 바제트는 코를 쓱 문지르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동굴 안쪽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헤스티아는 운현의 옷자락을 꾹꾹 잡아당기며 말했다.

"괜찮을까요?"

"괜찮겠지..."

"크아아아아아!!"

"...드, 들어가봐야 하는 거 아냐?"

"지금 나오고 있어."

미야와 헤스티아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작고 가벼운 발소리와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동굴에서 들려왔다. 그것을 눈치챈 운현은 검을 뽑은 후 미야에게 말했다.

"홉고블린이 나오면 곧장 공격한다. 바제트에게 주의가 계속 끌려 있으면 그녀가 위험하니까 말야. 최대한 빠르게 홉고블린의 주의를 끌어야 해. 가능하겠지?"

"응!"

미야의 든든한 대답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에서 바제트가 뛰어나오자 운현은 미야와 함께 동굴 입구를 향해 돌진했다.

"캬아아아아아!!"

두 눈에 핏발이 서 있고 복부에 커다란 상처가 있다. 마치 복부를 누군가가 헤집어 놓은 듯한 그 끔찍한 상처에 홉고블린이 분노와 고통으로 포효하는 것에 저 홉고블린이 아까와 같은 상태라는 것이라 생각한 바제트는 달려드는 운현과 미야에게 외쳤다.

"아까랑 같은 상태야!! 조심해!"

"알았어! 뒤로 가서 바로 인탱글 준비해! 미야! 디펜스 업 걸어!"

"응!"

"그럼 시작해볼까!! 하아아압!!"

"히, 힘들어..."

"이상한데... 내가 아는 홉고블린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새롭게 만난 홉고블린을 처치한 운현의 파티원들은 쓰러진 홉고블린을 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운현의 안내에 따라 찾아낸 홉고블린의 서식지를 공격해 또다시 홉고블린과 만난 그녀들은 이번의 홉고블린도 저번의 홉고블린과 마찬가지로 복부에 상처가 있고 막대한 증오와 분노를 터트리는 것에 기겁했다.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마저도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홉고블린의 상태와 흉폭함에도 그녀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운현의 지휘 아래 그녀들은 겨우 홉고블린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래도 레벨업은 빠르게 했네..."

파티 평균레벨을 훨씬 윗도는 몬스터를 잡은 덕분에 모두의 레벨이 20으로 오르기는 했지만 그 후유증은 대단했다. 라플란의 반지를 가지고 있어 최대 마력량과 마력 회복량이 늘어나 있는 헤스티아마저도 거의 탈진에 가까울 정도로 지쳐버린 것이다. 미야 역시도 제대로 지쳤는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고 바제트는 하도 많이 시위를 당기느라 손가락에 상처까지 생겨버렸다.

"바제트. 손 좀 줘볼래?"

"운현... 넌 지치지도 않아?"

"이정도는 가뿐하지. 모험가들의 필수 소양 중 하나가 강행이라는 거야. 어떤 피로가 있어도 할 일을 끝내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다고."

"...네 얘기를 들어보면 바깥의 모험가야 말로 진짜 먼치킨 같다... 아 따가워!"

"자... 됐다."

퉁퉁 불어 오르고 터진 손가락에 힐링포션을 발라 준 운현은 그 치료가 아팠는지 눈쌀을 찌푸린 바제트를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운현은 미야와 헤스티아를 가볍게 들어 올린 후 말했다.

"여기서 계속 쉴 수는 없으니까 일단 이동할까? 홉고블린의 사체는 내가 처리할게."

홉고블린과 고블린들의 피와 살점이 넘쳐 흐르는 흉흉하 곳에서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운현은 헤스티아와 미야를 가볍게 들어 올린 후 바제트에게 말했다.

"미안. 남는 손이 없네. 어떻게... 등에 매달릴래?"

"무척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괜찮아. 너도 힘들텐데 부담 줄 수는 없지."

운현 역시 똑같이 전투에 참여했다. 홉고블린의 공격 대부분을 운현이 감당해내느라 그 역시도 힘들었을 텐데 내색하나 하지 않는 모습에 점점 운현이 마음에 들었던 바제트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고 그녀의 말에 운현은 마주 웃어보였다.

"으으으... 나도 걸을게..."

"저도요..."

"힘들때 기대는 것도 동료... 아니, 애인이 해야 할 일이야."

"...헤헤..."

"애, 애인?"

"그래. 뭐, 아직 한명은 진행중이라고 해도 상관없겠지? 정 미안하면 나중에 진하게 키스나 해달라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운현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미야를 가볍게 잡은 후 성큼성큼 걸었다. 운현과 미야의 대화에 바제트는 그냥 매달릴 걸 그랬나 하고 중얼거렸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다.

그녀들과 함께 홉고블린 서식지로 들어가는 입구 앞으로 이동한 운현은 가방에서 모험가용 캠프파이어 키트를 이용해 불을 피웠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냄비와 물통을 꺼낸 그는 주머니에 담아 둔 죽의 재료를 냄비 안에 넣은 후 말했다.

"사체 회수해 올테니까 이거 끓으면 좀 빼줘."

"나 힘들어서 못 먹을 것 같은데..."

"영양죽이야. 체력 회복에 좋으니까 먹어둬. 몸에 좋은 재료로만 만든 거라고."

"우와... 오빠 요리."

"기대해도 괜찮지?"

"응. 금방 갔다올게. 혹시 모르니까 퍼지지는 말고 있어."

"응!"

"다녀오세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를 고블린의 습격을 대비하라는 말을 해준 후 운현은 빠르게 홉고블린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쓰러져 있는 홉고블린을 무감정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운현은 홉고블린의 사체를 마석에 담은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정도면 됐나."

홉고블린 뿐만 아니라 고블린들의 시체까지 모두 마석에 챙겨 담은 운현은 동굴 안으로 들어가 보물상자를 챙겼다. 차후 미믹으로 만들어 써먹기 위해서는 몰래 챙겨 놓는 것이 낫기에 일부러 혼자 오겠다고 한 그가 모든 것을 챙기고 나왔을 때 운현은 빈 공터에 서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상아 길드장님.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약속 시간은 지금이 아닌 것 같은데요."

"너희들의 전투를 지켜봤어."

"그런가요? 그래서요?"

"오후에 만나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너에게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

"뭔가요? 얼마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언가 기대감이 잔뜩 담겨 있는 얼굴로 상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는 듯한 상아는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현자와 무슨 관계야?"

"현자라..."

떨리는 목소리. 그리움이 무척이나 담겨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물었다.

"현자가 누구입니까?"

"하아... 좋아. 그럼 질문을 달리 해볼게. 전에 바제트와 미야, 헤스티아와 만난 적이 있어. 그리고 그녀들이 가지고 있던 스크롤을 본 적도 있지."

"그런가요?"

그녀들에게 주었던 스크롤은 과거 상아에게 받았던, 현자가 제작한 스크롤이다. 그것을 상아가 보았을지는 몰랐던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요?"

"그정도의 스크롤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내 스승님. 바로 현자 뿐이야."

"너무 높게 평가하시는 것 아닌가요? 아무리 그래도 스크롤은 세상에 많이 있잖아요. 기껏해야 보호막 마법의 스크롤일 뿐인데."

"절대. 그 스크롤의 구동식은 스승님께서 쓰시던 독자적인 구동식이라고. 지금의 멍청한 마법사들은 절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고위 구동식이야."

"그렇군요."

심드렁한 운현의 말에 상아는 애가 탔는지 마른 입술을 핥아 적시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이야. 스승님을 만난 적이 있어?"

"스승님이라고 하셔도... 제가 알기로 상아 길드장님의 나이는 500살이 넘었다고 들었는데... 아직까지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요. 아, 혹시 엘프신가요? 하지만 저는 던전 도시에 들어 오기 전까지 엘프들과 그렇게 친분을 다진 적이 없는데..."

애타게 현자를 찾는 상아를 향해 운현은 질투심을 억누른 후 천천히 말했다. 그런 그의 말에 상아는 머뭇거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은 인간이되 인간의 경지에 벗어나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신 분이야. 그 분이라면 분명히 인간 수명의 한계를 넘으셨을 거라고."

"그럼 제가 슬픈 답변을 드려야겠군요. 저는 그 스크롤을 다른 사람에게 받았을 뿐이지, 현자에게 받지 않았습니다."

거짓은 없었다. 운현에게 이 스크롤을 준 것은 다름아닌 과거의 상아였으니 말이다. 그의 말에 상아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물었다.

"그 사람은 누구지!? 만날 수 있어!? 혹시 남자였어? 나이는 너와 비슷한..."

"여잡니다. 아무리 인간의 경지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성별이 바뀌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럼 그 스크롤을 준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괜찮다면 소개시켜주지 않겠어?"

운현의 말에 상아는 시무룩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불가능할겁니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운현은 상아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에 절망한 상아는 고개를 축 떨군 후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간신히 스승님의 단서를 찾았나 했는데..."

"영문을 모르겠군요. 저는 현자라는 분에게 그 스크롤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왜 제가 그의 단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운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묻자 상아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분은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야. 그분은 스스로를 다른 세상에서 온 자라고 말씀하셨지. 이계에서 오신 분이라고..."

"......"

상아의 말에 운현은 희미하게 웃었고 그 웃음을 마주하며 상아는 다부진 어조로 물었다.

"스승님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만 존재하는 스킬을 가진 자와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어... 그런 너 외에 단서는 없을거야."

"훗..."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계인 운현?"

338====================

기회

"무슨 말씀이신가요?"

상아가 확신을 가지고 묻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그를 말없이 바라보던 상아는 천천히 광검을 뽑아들었다. 원통형 광검이 자신에게 겨눠지는 것에도 운현은 여전히 무덤덤할 뿐 이었다.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님께서 길드 소속의 모험가를 무력으로 핍박하실 생각이신가요?"

"다들 뭔가 나에 대해서 착각을 하는 것 같던데 말야. 난 필요하다면 폭력도 불사하는 인간이라고."

"헤에. 그렇군요."

"내가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거야?"

"뭐. 그건 저도 모르죠. 제 생사에 대한 것은 지금 상아 길드장님이 쥐고 계시니까요. 하지만 제가 이계인이라니. 저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것을 상아 길드장님께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부정하고 저를 핍박하신다면... 약한 저는 그저 당해야 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이제 막 레벨 20이 된 검사인 저로서는 상아 길드장님을 당해낼 수 없으니까요."

'상아에게 모든 것을 밝히는 날은 오늘이 아니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아직은 오픈해서는 곤란했기에 운현은 상아의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말 공격한다."

"하세요. 어차피 저는 막을 수도 없으니까요."

상아의 진지한 표정을 보면서도 운현은 싱긋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할 뿐 이었다. 약간의 자포자기 기운이 느껴지는 그의 말을 들으며 상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방어 자세도 취하고 있지 않은 운현을 향해 빠르게 튕겨져 날아들었다.

"주와앙!!"

상아의 광검이 빠르게 움직여 자신의 가슴에 향해졌지만 운현은 피하는 대신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빛의 검이 몸에 근접했을 때나 되어서야 운현의 몸에 움직임이 보였다.

'쳇...'

운현은 방어하거나 반격을 하는 대신 그저 눈을 질끈 감을 뿐 이었다. 저항의 의사가 전혀 없는 그를 차마 벨 수 없었던 상아는 바로 앞에서 광검을 멈춰버렸다.

"숙련된 모험가라더니, 심장도 강심장이네."

"모험가라는게 별에 별 일을 다 겪다보니 말이죠."

"아니면... 내가 진짜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던거야?"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지금은 어쩔 수 없구나. 라고 생각할 뿐이니까요."

상아에게 있어서 운현은 현자를 찾기 위한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단서라고 볼 수 있었다. 운현이 부정하고 있지만 상아는 운현이 이계인임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날 죽일 수는 없지.'

거기에 만약 상아가 실수로 자신을 공격했다손 치더라도 운현의 능력을 따지면 광검 한두방 맞아봐야 죽을 정도로 부상을 입지 않을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키지는 않지만 계획을 위해서 움직일 수 밖에 없지.'

상아가 자신을 공격하는데 성공한다면 그녀가 알고 있는 기억을 바꿔야 했다. 피스나의 캡슐을 가지고 있는 이상 한두명의 기억을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특히 자신과 상아만이 알고 있는 기억을 바꾸는 것이라면 더욱 더 쉬웠기에 운현은 상아의 공격에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잘 됐군. 바보. 착해빠져가지고...'

결과적으로 보자면 결국은 자신을 공격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최후의 순간에 멈춰버린 상아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던 운현은 그녀가 고개를 들자 쓰게 웃으며 말했다.

"왜 제가 현자와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이계인이라는 그 말도 안되는 게 근거인가요?"

"그걸 떠나서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스크롤. 그 스크롤은 스승님께서 만드신 물건이야. 스승님의 모든 유산은 내가 관리하고 있다고. 스승님이 남기신 스크롤은 내가 모두 관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사라진 것은 없었어. 그 말은 그 스크롤은 스승님이 따로 만드신 것이라고 할 수 있잖아."

"그렇군요."

"스승님은 나와 내 사형. 카를로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고 갑자기 사라지셨어... 스승님께 받은 은혜를 다 갚지도 못했는데. 부탁이야. 스승님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꼭 가르쳐줘.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해줄게."

현자를 애타게 찾는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존재하는 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현자는 살아 움직일 수 없으니 말이다.

위신체이지만 같은 혼과 같은 정신, 그리고 현자의 시간으로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는. 현자는 쉽게 말해 자신의 분신이며 세컨드 라이프라고 할 수 있는 존재다.

쉽게 생각하면 슈팅 게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슈팅 게임에서 첫번째 기체가 아직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데 잔여기가 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 지금의 운현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한 현자는 절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과거에는 현자의 죽음을 확인했지만 지금은 아닌가보군. 잘 해주고 있어.'

자신이 말해주기를 기대하며 긴장한 눈으로 운현을 응시하던 상아는 운현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자 침을 꼴깍 삼켰다. 잔뜩 기대감이 담겨 있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래...?"

상아는 떨리는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에게 미안해하며 운현은 천천히 물었다.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요? 만약 아는 것이 생긴다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아냐. 미안.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보네. 그... 어쨌든 오후에 시간을 비워줘. 몇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말이야."

"현자와 관련된 일입니까?"

"아니. 파르티 교단의 의뢰때문에."

"호오?"

레나는 자신의 일을 위해서 상아와 협조할 것이라고 했었다. 그것을 그녀가 언급하자 운현은 낮게 휘파람을 불며 물었다.

"바쁘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바쁘지. 비타를 죽인 원수도 찾아야 하고 시장 선거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그렇지만 파르티 교단의 레나 이단 심판관에게는 신세를 졌으니까 갚아야 하거든. 모험가 길드에 신관을 파견해주기도 하니까 말야."

"그렇군요."

"레나에게 듣기로는 당신... 꽤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레벨이 너무 낮은 것 아니야?"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음... 다난교의 공격에서 자기들을 구해줬다 정도? 그리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하던데... 괜찮다면 언제 술이나 한잔 하자고. 요 근래 이상한 일이 자꾸 벌어져서 지혜를 구하고 싶으니까 말야."

"이상한 일이요?"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상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실종 사건이 자꾸 벌어지고 있어. 지금은 비밀이지만..."

"그렇군요..."

실종사건. 아마 다난교가 인신공양의 제물로 삼기 위해서 사람들을 납치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 상아는 실종 사건에 대한 일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라닌의 짓이라고 볼 수 있는 건가.'

운명의 흐름에 저항하는 것인가. 무슨 이유로? 과거에는 멀쩡하게 잘 살아남아야 할 사람들의 죽음을 가속화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운현은 상아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 요리와 술이라면 못들어드릴 것도 없지요. 그리고 상아 길드장님처럼 아름다우신 분의 부탁이라면 더욱 해드려야죠."

"어? 아하하하! 이쁜 말을 하네. 흐음... 그럼 내 미모에 반한 남자에게 몇가지 더 물어볼 수 있을까?"

"그건 나중에. 일행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쩝.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오늘 약속은 잊지 마. 오후 다섯시까지 길드 사무소로 와서 날 만나겠다고 말하면 내 방으로 안내해줄거야."

"알겠습니다."

"오셨어요?"

"늦었네? 혹시 고블린들이 있었어?"

"아. 아니. 상아 길드장이 따라왔더라고. 걱정됐나봐. 이따가 오후에 잡은 약속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어."

사체만 챙기고 돌아올 거라고 말한 것 치고는 꽤 늦은 운현을 향해 헤스티아와 미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물었지만 그의 대답에 안심했는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다들 몸은 좀 괜찮아?"

"응. 쉬었더니 괜찮아졌어. 그보다... 이거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얼른 먹어보고 싶어."

운현이 만든 요리를 먹어 본 적이 없었던 바제트는 냄비에서 피어나는 향긋한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며 침을 삼켰다. 고소한 향기가 물씬 풍기는 것이 식욕을 마구 자극한다.

거친 전투 때문에 입맛이 없을만도 했는데 이 냄새만으로도 잃었던 식욕이 돌아 온 것에 바제트가 말하자 운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먹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배고프면 먼저 먹지 그랬어?"

"에이~ 어떻게 그래."

"맞아요. 오빠도 없는데."

"우리가 그렇게 의리없는 사람들은 아니라구."

동료들이 웃으며 말하자 운현은 그녀들의 말에 편안함을 느꼈다. 가상현실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단 한번도 느끼지 못한 편안함이다. 오로지 이들을 만나고, 이들의 웃음을 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노력했던 운현은 그녀들의 웃음에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 머, 먹자."

"뭐야? 이 정도로 감동한거야?"

운현의 목소리가 조금 떨린 것을 눈치 챈 미야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운현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흔들리는 목소리를 다잡은 후 미야의 볼을 꽉 꼬집었다.

"헤헤헤~ 오빠가 이러는 거 처음 보네요. 감동했어요?"

"그래. 감동했다. 이쁜 소리들만 하네. 정말. 이뻐 죽겠다! 자! 한번씩 안아 줄테니까 이리 와!"

헤스티아의 말에 운현은 키득거린 후 양 팔을 벌려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꼭 안긴 헤스티아가 기쁜 듯 웃자 미야는 머뭇거리다가 살며시 그의 품에 안겼다.

"오오...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

운현의 든든한 품 안에 안긴 것이 꽤나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남자들의 수가 적다보니 남자는 자연스레 보호해야 할 존재라고만 생각했던 그녀였지만 이렇게 기대는 것도 은근히 기분이 좋다.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꼬리를 흔들자 운현은 미야의 깨끗한 이마에 살짝 키스해 준 후 어쩔 줄 몰라하는 바제트에게 손짓했다.

"너도 와."

"에? 나, 나도?"

"그래. 너도 파티의 동료잖아. 그리고 날 생각해주기도 했고. 안아주는 정도야 어렵지 않지. 그게 아니면 싫어?"

"시...싫을리가. 헤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안긴다기보다는 스스로 안아버린 바제트는 운현의 얼굴을 마주하며 장난스럽게 웃다가 그의 볼에 살짝 입맞췄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미야와 헤스티아는 움찔하고 아쉬운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나, 나도 할걸..."

"그러고보니 매번 오빠가 해준 듯한... 이상하게 오빠한테는 못하겠어요. 자꾸 말려드는 기분이..."

"그런 것이 불만이라면 얼마든지 하라고. 미녀의 스킨쉽을 거절할 남자는 없으니까. 그보다 죽 다 타겠다. 어서 먹자."

스스로 나서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는 그녀들에게 웃어보이며 운현은 죽을 그릇에 나눠 담았다. 한가득 담긴 영양죽을 받은 동료들이 그것을 먹는 동안 운현은 아까 전 상아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상아가 그정도로 현자를 그리워하다니... 생각보다 일처리를 잘 해주었군. 카를로스에게는 적대감을, 그리고 상아에게는 그리움을... 뭐 좋아. 어쨌든 이정도는 상정범위 안의 일이다. 그렇다면 다음 일을 생각해야겠는데...'

현재 상아에게 있어서 관심이 갈만한 주제는 다섯 가지. 현자, 비타를 죽인 자, 시장 선거, 그리고 파르티 교단의 일과 실종사건이었다. 이 중 세가지는 나와 관련된 일이군.'

현자, 비타를 죽인 자, 시장선거. 이 셋은 자신과 깊게 관련되어 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현자와 비타를 죽인 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시장 선거에 대해서는 이미 아르토리우스에게 명령을 내려 놓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르토리우스가 움직인다면 시장 선거 역시 자신의 의도대로 진행될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윈디아까지 쓸 수 있으니.'

비록 미믹맨의 복장으로 움직여야 그녀를 이용할 수 있지만 윈디아 역시 시장선거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 중 하나다. 아르토리우스, 그리고 윈디아를 잘만 이용한다면 지난 번 처럼 다음 시장마저도 운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두가지인데... 파르티 교단의 일과 실종사건은 어쨌든 다난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테니까. 결국 답은 라닌에 대한 처리라고 볼 수 있겠군.'

라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리고 그녀를 어떻게 의도대로 움직이게 할 것인가.

'어차피 라닌은 나와 마찬가지로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그녀를 잘만 이용하면 내 의도대로 일을 쉽게 풀어갈 수 있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년의 정체군.'

라닌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 그녀의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다. 그것을 모르는 이상 그녀를 이용하는 것은 일단은 보류라고 볼 수 있었다.

'일단 천검자와 만나 천검자를 쓰러트리고 라닌의 수를 무력화시킨다면... 그년이 나를 찾겠지. 그렇다면 나에게 이득이다.'

현재로서 라닌의 수는 천검자라고 볼 수 있었다. 천검자를 이용해서 상아를 쓰러트린다. 그녀의 목표 안에 상아가 있는 이상 협상따위는 할 이유가 없었다.

"오빠?"

"응?"

"왜 안드세요?"

운현이 그릇을 든 채 멍하니 생각만 하는 것을 보며 헤스티아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녀 외에도 미야, 바제트 역시 걱정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고 그녀들의 시선에 운현은 쓰게 웃었다.

"아냐. 이제 먹어야지. 자... 많이들 먹어. 오늘 목표는 홉고블린 다섯마리니까. 이제 셋 남았다!"

339====================

기회

"으으으으..."

"히, 힘들어..."

"오빠는 안힘들어요...?"

운현이 선언한대로, 운현의 파티는 결국 총 다섯마리의 홉고블린을 잡고 말았다. 체력이 떨어지면 운현이 만든 특제 음식을 먹어 체력을 회복하는 방법을 써가며, 마지막에는 거의 어거지에 가까운 방식으로 홉고블린을 잡은 그들은 힘이 쭉 빠진 얼굴로 길드로 복귀했다.

"나도 힘들지. 그렇지만 나까지 처질 수는 없잖아. 상아 길드장의 퀘스트도 처리해야 하는데 말야."

"오빠... 미안해요..

"괜찮아. 신경쓰지마. 이렇게 서로 돕고 그러는거지. 나도 오늘 네 바인드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상대적으로 체력이 낮은 헤스티아는 운현에게 업힌 것이 무척이나 미안한 모양이다. 그녀의 속삭임에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강철같은 체력을 가지고 있는 운현도 꽤나 힘들었던 모양인지 지친 표정을 짓는 것에 헤스티아는 운현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고 부끄러운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오, 오늘은 제가 해드릴테니까 오빠는 움직이지 말고..."

"치사해! 나도!"

"나도 하고 싶다고!"

홉고블린을 무려 다섯이나 잡았다. 비록 한마리는 상아가 처리했다고 하지만 레벨에 비해 높은 몬스터를 잡은 셈이니 흥분도가 쌓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운현을 유혹하는 헤스티아를 향해 미야와 바제트는 버럭 외쳤고 그녀들의 외침에 길드의 회관에서 쉬고 있던 모험가들은 재밌다는 듯 그들을 지켜보았다.

자고로 남의 사랑 싸움이야말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이지 않은가. 비타의 죽음으로 가라앉아 있던 길드 회관의 분위기가 운현을 두고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가 싸우는 것에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았다.

"어머? 운현씨."

"아. 필레씨. 안녕하세요."

평소와 다르게 전투복을 입고 있는 필레는 운현과 운현의 뒤에 있는 여인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꽤나 지쳐있는 듯한 그들을 보며 필레는 머뭇거리다가 주머니에서 작은 알약 세개를 꺼내었다.

"굉장히 힘들어보이시는데... 다들 이거 하나씩 드세요. 체력 보조제니까... 뭐하시면 신관님이라도 불러드릴까요? 마침 길드에 레나 대사제님이 계신데."

오늘 아침에 길드에 머무르기로 한 레나를 언급하며 필레가 묻자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그저 체력이 방전되었을 뿐이다. 방에서 조금 쉬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한 그가 거절하자 필레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운현에게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운현씨. 운현씨가 파티 리더이고 숙련된 모험가인 것은 알겠지만 파티원들을 너무 혹사시키면 곤란해요."

"오, 오빠 잘못 아니에요. 그저 저희들이..."

"맞아. 운현이 잘못한게 아니라고. 운현은 정말 잘해줬어."

운현의 지휘, 그리고 그의 적절한 방어와 흐름을 끊어주는 공격이 아니었다면 세번째 홉고블린에게 파티는 전멸당했을지도 몰랐다. 그것만 따져도 운현은 자신의 몫 이상의 일을 충분히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바제트씨. 그게 정말인가요?"

모두의 레벨을 알고 있는 필레는 이 중 가장 레벨이 높은 바제트에게 물었다. 필레의 질문에 바제트는 기운없는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원들이 모두 운현을 옹호하자 필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쉰 후 운현을 향해 조심스레 말했다.

"운현씨. 너무 기분나빠하지 말아요. 지금 길드에서..."

"아. 들었어요. 비타씨가 돌아가셨다고..."

"...네. 비타씨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해서... 지금 길드에서는 길드원뿐만 아니라 길드 소속의 모험가들의 안전에 대해 민감해져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할게요."

"후훗. 고마워요. 안그래도 저희들은 지금 운현씨를 무척이나 주목하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다치시면 곤란하다구요. 알았죠?"

"알겠어요. 그런데 저를 주목한다는게 왜..."

"아, 레나 대사제님께서 운현씨에 대해서 말씀해주셨거든요. 그게..."

"오빠..."

필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지친 동료들을 어서 쉬게 하는 것이 우선인 것 같았다. 운현은 미안하다는 얼굴로 필레의 말을 끊은 후 그녀들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평소 쓰는 방보다 더욱 큰 방을 고른 운현은 세개의 큰 침대에 각각 여인들을 눕혀 놓은 후 웃으며 말했다.

"난 퀘스트 완료 보고랑 사체를 처리하고 올게. 피곤할텐데 좀 쉬고 있어."

"으... 운현. 너는?"

"나도 금방 들어올거니까 걱정하지말고."

바제트가 묻자 운현은 손을 들어 올리며 웃어보인 후 방 밖으로 나갔다.

"후."

지치기는 커녕 아직도 전투를 수천번은 더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이 남아 있는 운현은 방문 너머에서 곧 들리기 시작한 코고는 소리에 피식 웃었다. 확실히 피곤하긴 했나보다. 흥분을 해소하는 것보다 체력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는지 순식간에 곯아떨어져버린 그녀들을 떠올리며 운현은 터덜터덜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운현씨는... 안쉬세요?"

"아. 저는 아직 체력이 남아 있거든요. 처리 해야 할 일도 있고."

운현이 내려 온 것에 놀라며 필레는 걱정스레 물었지만 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 이었다. 그의 대답에 필레는 아까 전 내밀었던 체력 보조제를 운현의 손에 억지로 쥐어주었다.

"그렇게 피로를 무시하다가 한방에 훅 가버린다구요. 예전 기사단에서도 피로를 무시하면서 계속 움직이다가 결국 쓰러져버린 훈련생도 있었어요."

"하하하...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지금 드세요. 지금."

체력 보조제를 받은 운현이 그것을 주머니에 넣자 필레는 눈꼬리를 올리며 강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인 운현은 메이드가 가져다 준 물컵을 받아 체력 보조제를 입에 넣었다.

운현이 자신이 준 체력 보조제를 먹는 것을 보고 나서야 필레는 올린 눈꼬리를 내렸다. 온화하게 바뀐 그녀의 표정을 보며 운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항상 필레씨에게는 신세만 지는 것 같네요."

"후후후후... 투자라고 생각해줘요."

"투자? 어떤?"

"레나 대사제님의 추천도 있고... 또 파티원들을 생각하는 파티 리더의 마음도 그렇고. 거기에 운현씨는 숙련된 모험가라고 하셨잖아요? 앞으로 저희가 도움을 많이 받을 것 같은데... 그것을 대비하는 것도 있죠. 아, 레벨만 올리시면 길드원이 되시는 것도 좋겠네요. 만약 허락하신다면 길드에서 운현씨의 레벨업에 최대한 지원하도록 할게요."

"스카웃 제의인가요? 하하하... 저는 그정도는 아닙니다만."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한테 침발라 놓는 것도 길드 사무원의 일입니다~ 후후훗. 어때요?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라구요. 저도 막내이기는 하지만 길드 간부인만큼 제 추천이 있다면..."

"고맙지만 지금은 파티원들과 함께 전투를 하는게 나을 것 같네요."

"파티원을 버리지 않는 의리까지! 더 탐나는데요?"

눈을 반짝이는 필레를 향해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의 미소에 마음이 조금 들뜬 필레가 마주 미소지었을 때 운현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것보단 필레씨와 더 가깝게 지내고 싶군요."

"아이 참~ 운현씨는 맨날 그러신다니까~"

"어라? 진심인데요?"

"...저기 그... 이거 좋은 분위기라고 생각해도 되는거죠? 그런거죠? 네?"

"하하하하. 물론이죠."

"뭐야!? 뭐야!? 필레 애인 생기는거야!? 그런거야!?"

필레와 운현의 대화를 듣던 모험가들 중 하나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만년 처녀였던 필레를 꼬시는 남자가 나오다니. 그야말로 일대 사건이나 다름없다.

"필레한테 작업거는 남자가 있다!!"

"와아아!"

"뭐야!? 어떤 정신 나간..."

"...으으... 우, 운현씨. 이. 이 얘기는 나중에 해요!"

모험가들 뿐만 아니라 길드 직원들마저도 눈을 빛내며 일어나 다가오려 하자 필레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많은 이들의 시선에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하던 필레는 휙 몸을 돌리고 사무소 안으로 도망쳐버렸다. 그녀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을 본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 씨익 웃는 운현을 향해 외쳤다.

"용자네! 용자여!"

"세상에... 저 마녀라 불리는 필레에게 작업을 거는 남자가 있을 줄이야!"

"세계가 종말하는 건가? 아니면 악신이 깨어나려는 건가?"

"윈드와 더불어 평생 처녀성을 유지할 것이라 생각한 필레에게 드디어 봄이 오는 것인가!?"

'이해할 수가 없군. 필레 정도면 상당한 미녀에 능력도 출중한데 왜 이런 얘기들이 나오는 거지?'

윈드도 그렇고 필레도 그렇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남자의 수가 적다고는 하지만 필레 정도면 상당한 능력자다. 바꿔 말하자면 그 능력과 미모만으로도 얼마든지 애인을 만들 수 있을 텐데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필레나 윈드나 다들 남자와는 아예 연이 없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저기 한가지만 물어봅시다."

"용자님의 질문은 언제든지 환영이지. 뭔데?"

"필레씨가... 인기가 없어요?"

"응. 이상하게 남자들에게는 인기가 없더라고. 몇년 전에 필레와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가 혼인 사기꾼이라는게 밝혀졌어. 그 외에도 필레의 능력을 이용해먹으려는 놈팽이들 몇몇이 접근하기는 했지만..."

"...아 그래요."

건방지게 누구에게... 커다란 덩치에 날카로운 인상이 특징인 여 전사는 같은 테이블에 있는 동료에게 말했다.

"그 놈들 다 어떻게 됐더라?"

"어떻게 되긴. 필레를 좋아하는 다른 모험가들에게 죽도록 맞고 죽었지."

"...에. 필레씨를 좋아하는 모험가?"

"아. 필레랑 윈드는 이상하게 여자들에게만 인기가 많더라고."

".............."

'타고 난건가. 아니면... 이것 역시도 그녀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운현이 입을 다물자 여전사는 더 물어볼 것이 없냐는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마땅히 더 물어 볼 것이 없었던 운현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자 여전사는 운현의 엉덩이를 툭 치며 말했다.

"아무튼 필레를 좋아하고 꼬시려는 거면 각오하는게 좋을거야. 모험가들 가운데 필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많으니까 말이지. 걔들의 꼬장을 받아내려면 보통 능력으로는 안될거라고."

"하하하하... 조언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그리고..."

여전사는 눈을 번뜩이며 운현을 노려보고 차갑게 말했다.

"만약 그 쓰레기같은 놈들과 같은 부류라면 지금이라도 포기하는게 좋을거다."

"절 뭘로 보고. 저 처럼 순수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만큼은 진실이다. 운현에게 있어서 필레는 사랑의 대상이지 이용의 대상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 단 다섯. 그 다섯만큼은 절대로 자신의 계략을 위한 패로 쓸 수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게."

"믿어주세요. 그리고 기대해주시길. 필레씨를 반드시 행복하게 해드릴테니까."

"오오오오~ 멋있는데? 그런데 다른 여자들도 있지 않아?"

아까 전 운현이 파티원들을 데리고 올라가던 것을 본 그녀가 묻자 운현은 씨익 웃었다.

"능력만 있다면 애정은 무한한 법이죠."

"오오오오오오오... 재수없는 발언이네. 허 참."

"하하하하!"

여전사가 퉁명스레 말하자 운현은 크게 웃은 후 사무소로 향했다. 어쨌든 해야 할 일은 이게 아니니 말이다. 그가 다가오자 사무소에 있는 길드원은 눈을 반짝거리며 운현에게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용감한 운현씨. 어쩐 일이세요? 필레씨 불러드릴까요?"

"하하하하...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지금은 공적인 일을 해야 하는지라. 상아 길드장님의 의뢰입니다."

"에?"

상아의 이름이 나오자 길드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에게 웃어보인 운현은 사무소의 접수대를 톡톡 치며 말했다.

"제니스씨와 만나 이야기를 나눠야합니다. 제니스씨는 지금 자리에 계신가요?"

"어... 네. 들어오세요."

길드원의 안내를 받아 제니스의 방으로 들어간 운현은 안대를 낀 채 책상에 앉아 점자책을 보던 그녀가 일어나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걸어와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몇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씀해주세요."

"비타를 죽인 자를 찾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에 대한 정보가 있습니까?"

일단 비타를 죽인 것이 자신이라는 것이 밝혀져서는 곤란했다. 혹시 자신에 대한 정보가 알려졌다면 그에 맞추어서 움직여야했기에 그는 가장 먼저 그것을 물었다.

"아쉽게도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의심가는 자가 있기는 합니다만..."

"의심가는 자?"

"네. 비타는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다난 교와 적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다난교에 대한 정보를 얻어 이동한 곳에서 하얀 사신이라는 자와 전투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놀라운 실력을 가진 자라고 하더군요. 첫번째는 그자고... 두번째는 다난 교입니다."

"흐음... 그 놀라운 실력을 가진 자에 대해서는 뭔가 나온 것이 없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암살자 길드의 정보로는... 그 자가 아마 천검자가 아닐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검자가 은거를 풀고 세상에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렇군요..."

'천검자에게 뒤집어 씌워야겠군.'

비타 정도 되는 실력자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저항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는 것은 비타가 안심할 수 있는 자, 혹은 비타의 실력으로는 감히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이 된다.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문제는 윈디아인데... 윈디아는 아마 알겠지. 하지만 쉽게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윈디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던전 도시도, 그리고 암살자 길드도 아니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윈드였다. 비타마저도 운현이 쉽게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윈디아는 윈드 때문에라도 함부로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일단 안심할 수 있겠군.'

윈디아를 이용해서 정보를 약간 조작한다면 비타를 죽인 인물을 천검자에게 뒤집어 씌울 수 있다. 마침 천검자는 다난교에게 포섭되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더욱 잘됐다 생각한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음 안건을 꺼내었다.

"이것을 봐주시겠습니까?"

"이건..."

운현이 꺼낸 것을 만진 제니스는 놀라며 입을 쩍 벌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크고... 아름답군요. 도대체... 이걸 어디서 구하신 것입니까?"

340====================

기회

"이걸 어디서 구하신건가요?"

주먹만한 크기에 눈에 보일 정도의 진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검은색 코어를 보며 제니스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 크기, 그리고 이 마력량. 아무리 봐도 5계층에서 발견할 수 있는 헬하운드의 코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설마 5계층에 들어가셨던 건가요?"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이걸 이용한다면 저희 파티의 레벨을 얼마나 올릴 수 있는 건가요?"

"어디서 구하셨는지가 궁금한데..."

"비밀입니다."

"지금 던전의 5계층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습니다. 혹시 다른 협력자가 있으신건가요?"

던전의 5계층에 진입하려면 적어도 레벨이 400이 넘는, 평균 인원이 일곱 이상이나 되어야 하는 파티가 필요했다. 그렇기에 대형 클랜이나 모험가 길드의 간부급들을 제외하고는 5계층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었다.

만약 운현에게 다른 협력자가 있다면 그들과 힘을 합치는 것이 낫겠다 생각한 제니스가 조심스레 물었지만 운현은 그에 대한 답변 대신 입을 다문 채 제니스가 자신의 질문에 답하기만을 기다렸다.

"하아. 아무것도 가르쳐주시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이건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요. 제니스씨. 당신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저는."

"당신의 목적은 운명을 바꾸는 것이 아닌가요? 던전을 얼마나 탐험했느니 다른 협력자가 있느니... 그것이 중요한겁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제가 시키는대로 해주시는 것을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모욕적인 발언일 수 있었지만 제니스는 그의 말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자신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운명을 바꿔 하운드를 그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니 말이다. 더불어 자신 역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운현 뿐이라면 그에게 최대한 협력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었다.

그것을 다시 상기하며 제니스는 손에 들려 있는 코어를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말했다.

"지금의 여러분들이라면 적어도 85레벨까지는 끌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코어 하나로요?"

"네. 어쨌든 이 코어에 들어 있는 마력량은 상당한 것이니까요."

"흐음... 이런 식으로 레벨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나요?"

"드물기는 하지만 있습니다. 특히 상인 조합이나 거대 왕국의 왕족들 같은 경우 이런 식으로 레벨업을 하는 이들이 많죠. 레벨이 올라가면 어쨌든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니 말이에요. 강해지는 것만으로도 사고나 암살에 어느정도 보호를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방법은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레벨만 오르고 전투를 경험하지 못해 레벨 만큼의 힘을 반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죠. 쉽게 말해..."

"돈지랄?"

"...뭐 그렇다고 볼 수 있겠군요."

그녀의 말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가상 현실 게임을 할 때도 게임사의 홈페이지에 이러한 이야기가 자주 올라오곤 했었다. 캐쉬템이나 특전 아이템을 받았는데 왜 이렇게 약하냐는 투정들. 대부분 그 게임을 처음 구매한 사람들이 올리는 글이었다. 실제 전투나 운용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고 그저 레벨이나 장비만 믿고 까불다가 게임오버 당하는 그들을 떠올리면 제니스의 말이 틀린 것만도 아닐 것이다.

"운현님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들의 레벨은 왜 올리는 건가요?"

"그들을 키워야 하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군요."

"뭐죠?"

"이 코어를 이용하면 레벨을 쉽게 올릴 수 있지만 그런만큼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코어 하나의 가격이 얼만지 아시나요?"

"글쎄요? 얼마 정도 하나요?"

"5계층 몬스터의 경우 그 희소성과 가치 때문에 가격이 3계층이나 4계층의 몬스터의 코어에 비해 가격이 작게는 열배, 크게는 수십배까지 넘어버립니다. 이 코어의 가격은... 경매에 붙인다면 적어도 사천만 골드 이상의 가격이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그런가요..."

"네. 만약 운현님께서 이것을 비밀경매를 통해 처분한다면 모를까. 이것으로 레벨업을 하신다면 다른 사람들이 운현님께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운현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시겠지요. 차라리 이렇게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코어로 천천히..."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

"1계층의 특수종. 네임드 몬스터를 잡았는데 얻었다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발표해주십시요."

"끙..."

운현의 말에 제니스는 살짝 입술을 비틀었다. 운현의 말대로 했다간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 20 언저리 레벨의 모험가를 단번에 80레벨까지, 그것도 한명이 아니라 네명이나 그렇게 레벨업을 시킬 수 있는 코어가 1계층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많은 이들이 1계층으로 몰려들 것이 분명했다. 그럼으로서 자연스레 2계층과 3계층, 더 나아가 4계층에서 활약하는 모험가나 클랜이 움직일 가능성이 높아지게 될 것이고 그리 된다면 모험가들이 수집해오는 몬스터 사체나 코어의 수급이 늦어지게 될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자칫 잘못했다간...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원하는 바입니다."

"네?"

제니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비릿하게 웃어보인 운현은 천천히 입을 열며 말했다.

"혼란. 많은 혼란이 있어야 그 안에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께 다시 한번 부탁드리지요. 1계층의 네임드 몬스터 중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특수종 몬스터가 있는데... 그 몬스터를 잡으니 특별한 코어가 나왔고 그 코어가 주는 경험치가 일반적인 수준의 경험치가 아니라는 것을 공표해주십시요."

"으..."

앞으로의 일이 상상이 된다. 아마 1계층은 난리가 날 것이고 힘 있는 자들은 약한 모험가들을 방해하며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닐 것이다.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 길드의 행동 방침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눈에 훤하다. 그녀가 침울한 목소리로 신음하자 운현은 빙긋 웃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그리고... 그 라플란의 반지는 잘 쓰겠습니다. 괜찮다면 다른 물품도 구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떤걸로요?"

힘빠진 목소리로 제니스가 묻자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5계층 몬스터의 코어 두개를 꺼내어 내민 후 빙긋 웃었다.

"이 코어의 가치와 비교해서 밀리지 않을 정도면 됩니다. 격투가, 그리고 드루이드에게 맞는 장신구를 구해주세요. 이왕이면 반지류가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면 괜찮은 것들이 있습니다."

운현의 말에 제니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터덜터덜 걸어 벽장의 금고를 열고 금고 앞에서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금고 안에 있는 아이템을 꺼낸 후 그에게 걸어갔다. 그녀의 손에는 팔찌 하나와 목걸이 하나가 담긴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과거 비타가 사용하던 팔찌입니다. 격투가와 검사가 사용할 수 있는 팔찌인데... 최대 기력량 증가하고 하루에 단 한번. 남은 기력과 마력을 전부 소모하는 것으로 앱솔루트 쉴드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스킬 '흡기'를 사용하게 해줘서 몬스터를 직접 공격하거나 방어를 함으로서 몬스터의 힘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호오. 그거 좋군요."

근접 탱과 딜링을 동시에 해야 하는 미야에게 꼭 맞는 아이템이다. 그리고 앱솔루트 쉴드를 사용해서 단 한번이기는 하지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준다면 운현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을 받은 운현이 목걸이로 시선을 돌리자 제니스는 잠시 망설인 후 결심을 다진 듯 쓰게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것은 제가 쓰던 목걸이입니다. 라플란의 반지보다는 못하지만 최대 마력량과 마력 회복량을 증가시켜줌과 힐링의 위력을 증가시켜줍니다. 저는 검사라서 저에겐 큰 의미가 없는 아이템이었지요."

"그런데도 사용했다는 것은... 뭔가 의미가 있는 아이템이라는 것 아닌가요?"

옵션을 아무리 따져봐도 검사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제니스가 사용했다는 것에 이상함을 느낀 운현이 묻자 제니스는 쓴 입맛을 다시며 조용히 말했다.

"그에게 받았던 것입니다."

"그라면..."

"...하운드."

"그에게 받은 것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부디 소중히 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무겁군요. 이것 말고 다른 것은 없습니까?"

"괜찮습니다. 저는 당신을 만났으니까요. 당신이 있다면 운명은 바뀔 것이고... 이것은 제 소유가 되지 않겠지요."

씁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팔짱을 꼈다. 그가 망설이는 듯 하자 제니스는 애써 웃으며 손에 들려 있는 장신구를 내밀었다.

"이보다 더 괜찮은 아이템은 없습니다. 지금 보유하고 있는 것은 이게 다군요. 다른 아이템을 구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부디 이것을 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제니스의 사연이 담겨 있는 목걸이를 바라보며 운현은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그 갈등도 잠시 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제니스가 준 아이템을 모두 챙겼다.

'다른 아이템도 찾아보면 사연은 있겠지. 당장 라플란의 반지조차도 무슨 사연인지 모르니 말야.'

"잘 쓰겠습니다."

"부디. 그럼 하실 말씀은 없으신 겁니까?"

"네. 이정도면 됩니다."

"더 시키실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와주시기 바랍니다. 운현님 파티의 레벨업은 다음에 파티원들과 함께 사무소로 가셔서 레벨업을 신청하시면 됩니다."

씁쓸한 표정의 제니스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운현은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목적한 것을 모두 이뤘다.

'이걸 보면 기뻐하겠군.'

헤스티아가 좋은 아이템을 가진 것을 미야와 바제트가 부러워하는 것을 떠올리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이런 좋은 아이템이 있다면 그녀들의 성장은 더더욱 빨라지겠지.

'이번 레벨업도 그렇고 장비도 그렇고... 할 일은 태산이네.'

제니스의 말대로 레벨만 올려서는 곤란했다. 쉽게 레벨을 올리면 레벨이 올라간 만큼 기본 전투능력과 센스도 키워줘야 하는 법이다.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험난하고 빡쎈 전투지...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고 문제를 타파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만큼은 운현으로서도 최대한 굴리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피스나의 캡슐을 이용한다면 억지로 그녀들의 정신에 전투 능력과 센스를 불어 넣어 줄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그녀들의 정신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만큼은 곤란하지.'

세상 다 죽여도 그녀들만큼은 살려야 한다. 운현은 머릿속에 떠오른 쉬운 방법을 단번에 제거한 후 길드 사무소에서 나와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주문했다.

"혼자야? 어때? 용돈 좀 벌어 볼 생각 없어?"

"혼자긴 하지만 생각은 없군. 미안."

막 전투를 끝내고 나온 듯한 모험가 중 몇몇이 혼자서 맥주를 홀짝이는 운현을 보며 추파를 던졌다. 남창을 통해 흥분을 해소하기보다는 혼자 있는 남성 모험가를 꼬셔서 그와 동침하여 흥분을 해소하는 것이 더 싸게 먹히기에 그녀들이 접근했지만 운현은 관심없다는 태도로 그들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시간은 됐는데..."

"운현씨!"

사무소의 문이 열리며 레나가 나오자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운현의 인사에 방긋 웃어준 레나는 그의 앞에 놓여져 있는 술잔을 보며 물었다.

"혼자 드시는 거에요?"

"네. 잠깐 시간이 남아서... 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맥주 한두잔을 마셨을 뿐이니까요."

"그거 다행이네요. 지금 괜찮으시죠? 상아 길드장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그런가요. 그럼 가실까요?"

"네."

레나와 함께 사무소로 들어 선 운현은 아까 전 자신을 제니스에게 안내해줬던 길드원이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그녀에게 빙긋 웃어주었다. 그의 웃음에 길드원이 떨떠름하게 웃었을 때 레나는 힐끔 그녀와 운현을 번갈아 바라 본 후 찝찝하다는 어조로 물었다.

"혹시 저런 사람이 취향이신가요?"

"아뇨. 이런게 사회생활이라는 거죠. 제가 관심있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만."

"아...예. 그러시겠죠."

어떤 취향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사 제안도 거절한 운현이다. 그의 무덤덤한 태도에 레나는 입술을 비쭉인 후 앞서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아, 운현에게는 그립기 짝이 없는 낡은 나무 문이 보였을 때 레나는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상아 길드장님. 들어갈게요. 운현씨. 들어가죠."

"오오. 왔어? 그리고... 당신도 왔군."

상아의 방에는 상아 뿐만 아니라 상아의 보좌라고 할 수 있는 펠리시아가 있었다. 상아의 뒤에 서 있는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레나와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레나 대사제님. 그리고... 당신인가요? 레나 대사제님이 그토록 칭찬하신 운현이라는 분이?"

"처음 뵙겠습니다. 운현이라고 합니다."

341====================

기회

"흐음... 남자 모험가라."

펠리시아는 운현을 조용히 위 아래로 흝어 본 후 안경 너머의 눈을 빛냈다.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는 듯한 그녀를 주시하며 레나와 함께 상아가 권한 자리에 앉은 운현은 펠리시아가 차를 타오는 것에 살짝 고개를 숙였다.

"몸에 좋은 차랍니다. 편하게 드세요."

"아.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요."

한쪽 눈을 깜빡이며 운현에게 요염한 미소를 보낸 펠리시아는 오똑히 치솟은 탄력적인 둔부를 씰룩거리며 운현을 유혹하듯 걸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운현이 말없이 바라보자 상아와 레나는 헛기침을 하며 이야기를 진행시켜나갔다.

"크흠! 자. 바쁜 사람들끼리 괜히 시간 빼앗을 필요는 없겠지?"

"콜록! 콜록! 마, 맞아요. 빨리 이야기를 끝내도록 하죠."

"그래서... 레나. 원하는게 뭐라고?"

"던전 도시에서 다난교를 색출하여 박멸하는 것. 저희는 모험가 길드가 이것에 협조를 해주었으면 합니다."

레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던전 도시에 다난교가 있다는 것이었다. 파르티 교단에 의해 사교로 지정되어 있는 다난 교가 던전 도시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험이다. 거기에 자신과 운현의 목숨까지 노리고 있지 않은가. 레나는 단호한 얼굴로 상아에게 말했고 그녀의 말에 상아는 갸냘픈 턱을 쓰다듬다가 펠리시아가 타 준 차를 한모금 마신 후 말했다.

"불가."

"어째서죠!?"

"기본적으로 던전 도시는 종교 선택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고 있어. 그런 상황에서 특정 종교를 핍박할 수는 없지. 파르티 교단이 성기사단을 이끌고와서 대가를 지불하고 던전 도시를 수색하는 것까지는 인정하겠지만 모험가 길드나 용병 연맹, 제작자 연합, 그리고 상인 조합이 그런 일에 손을 댈 수는 없을거야."

"하지만 다난교는 사교라구요!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상아의 다부진 거절에 레나는 당혹스러워하며 다급히 외쳤다. 믿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셈이다. 모험가 길드의 상아라면 반드시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녀가 거절한 것에 레나가 급히 말하자 상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개인적인 친분을 생각한다면 정말 도와주고 싶어. 그리고 다난교에 대해 좋게 보는 길드 간부도 없다고. 하지만 이게 원칙이고 룰이야. 그것을 우리가 나서서 어길 수는 없어."

"즉... 개인은 가능하지만 집단은 불가능하다는 겁니까?"

"뭐 그렇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집단에 소속된 개인은 불가능하지만 그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은 가능해. 즉 레나나 파르티 교단이 공식적으로 퀘스트를 발주하여 다난교를 쓸어버려라! 라고 하고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내세운다면 우리로서는 모험가들을 막을 수는 없어."

"하지만... 그만큼의 비용은 없다구요!"

"왜?"

"네?"

"왜 없어? 파르티 교단 부자 아니야?"

"그, 그렇긴 하지만..."

상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레나는 머뭇거리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아요. 교단 내에 알력다툼이 있어서요... 교황님께서 돌아가시고 루나 추기경님과 베스 추기경님이 서로 교황의 자리를 두고 싸우고 있거든요. 본단의 지원을 받는 것이 쉽지 않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오지 않았던 건가요?"

"네..."

원래라면 벌써 본단의 지원이 있었어야 했지만 파르티 교단의 본단에서는 아직 성기사는 커녕 사제 하나 보내지 않았다. 롤랑이 데려왔던 이들을 제외하고는 던전 도시로 아무도 파견을 보내지 않는 것에 분통을 터트렸지만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이단심판관들이 모두 죽어버린 이상 다음 대의 이단심판관이 정해질 때까지 레나의 힘은 약하기 그지 없었다.

"이거 쉬운 일이 아니군요. 파르티 교단의 도움 없이 다난교를 상대한다라..."

"하, 하지만 그 분쟁은 금방 끝날 거에요. 누가 교황이 되시든 어쨌든 던전 도시의 성당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본단에서는..."

"그 전에 다난교가 움직이면요?"

"......"

운현의 날카로운 질문에 레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자 운현은 상아에게 시선을 돌린 후 물었다.

"이런 상황인데 도움을 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어쩔 수 없어. 만약 우리가 움직인다면 용병 연맹이나 제작자 연합, 상인 조합이 가만히 있지 않을테니까. 파르티 교단에 의해서 이단이라 찍히기는 했지만 던전 도시를 뒤져보면 각 세력이나 왕족, 귀족 중에 다난 교를 비롯해 파르티 교단에서 사교로 지정한 종교를 믿는 이들이 상당 수 있을거야. 우리가 파르티 교단의 요청에 따라 다난교를 공격했다간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반발이 대단할걸. 그리고 잘못했다간 모험가 길드가 오히려 다른 세 세력에게 공적이 될 수도 있어. 나는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야. 모험가 길드가 위험에 쳐해지는 일을 할 수는 없어."

"그런가요. 그럼 한가지만 여쭤볼게요."

"뭐지?"

"던전 도시의 사대 조직이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공식적으로 움직이려면 말이죠."

"음... 던전 도시의 네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오래 전의 일이야. 던전을 탐험하고, 던전을 탐험하는 이들을 위한 물품을 만들고, 그것들을 팔고. 던전 도시의 이득을 노리는 이들에게서 던전 도시를 지키기 위해 용병들이 모이고. 즉 '던전 도시를 위한 일' 이라면 사대 조직이 움직일 수 있어."

"그럼 됐군요. 상아 길드장님."

"상아로 괜찮아."

운현이 자신의 직위까지 말하자 상아는 손사레를 치며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운현에 대한 미련, 그가 이계인이고 현자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날같은 희망을 놓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의 기대감 섞인 눈빛에 어깨를 으쓱인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말했다.

"만약 다난교가 던전 도시를 공격한다면요?"

"그렇다면 공식적으로 움직일 수 있지. 하지만..."

"증거가 필요하다?"

"네. 저희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증거에요. 다른 것도 있죠. 만약..."

펠리시아는 도톰한 입술을 달짝거리며 말한 후 안경을 고쳐쓰고 싸늘히 말했다.

"비타 씨를 죽인 자가 다난 측 인물이라면... 그 애도를 위해서 다난교 자체를 쓸어버릴지도 모르구요."

"그것 역시도 증거가 필요하겠군요."

"네."

그녀의 말에 운현은 다시 한번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천검자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울 수 밖에 없다. 운현은 펠리시아와 상아를 바라보다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운현씨! 이렇게 물러나시면..."

"룰을 어길 수는 없지요. 룰을..."

대놓고 못한다고 뻐기고 있는데 어쩌겠는가. 낭패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나를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느긋하게 말한 운현은 상아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아, 그렇지만 레나 대사제님을 이곳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괜찮겠지요? 그리고 레나 대사제님은 지금 생명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롤랑 이단심판관님이 다난교의 손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을테고... 레나 대사제님을 지켜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정도는 개인적인 친분을 내세우면 괜찮을거야. 길드에 머무른다면 큰 문제는 없겠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걸로 모험가 길드가 다난교와 대적하는 것은 거의 확정이라고 볼 수 있겠군.'

레나가 모험가 길드에 있는 이상 다난교는 신성의 탈취를 위해서 모험가 길드를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레나가 모험가 길드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다난교는 레나를 끌어내기 위해서 개수작을 부릴 것이고 그것을 적절히 차단한다면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간 다난교는 결국 모험가 길드를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천검자... 혹은 카야나 라닌이 되겠지.'

레나를 죽인 자가 신성을 얻는다. 그렇다면 신성을 다뤄야 하는 카야가 나올 것이 분명했고 그 틈을 노려 카야를 사로잡아 그녀의 모든 정보를 빼낸다. 레나를 미끼로 씀으로서 여러가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운현의 속내는 모른 채 모험가 길드의 지원이 없다는 것에 레나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시무룩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운현은 살짝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운현씨?"

"네."

"차... 안드세요?"

레나나 상아, 펠리시아와 다르게 운현은 내어진 차에 손도 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기에 레나는 운현의 옷자락을 꾹꾹 당기며 입이라도 대라는 시늉을 했지만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 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조금 기다리면서 맥주를 많이 마셔서 그런지 마실 것은 지금 내키지 않군요."

"그러세요....?"

펠리시아의 눈이 빛난다. 그녀의 흥미깊다는 듯한 시선을 마주하며 빙긋 웃은 운현은 레나와 함께 밖으로 나갔고 그가 나가자 상아는 씨익 웃으며 펠리시아에게 말했다.

"굉장한데."

"그러게요. 본능적으로 감지한 걸까요? 아니면... 예측한 걸까요?"

"상당한 강심장이야. 그리고 레나나 그의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긴 것 답지 않게 상황의 분석이나 판단, 전략에 능하기도 하고."

"후후후... 정말 끌어들이고 싶은 사람이네요."

직업이 검사인 것이 아쉬울 정도다. 만약 도적이나 다른 귀족 직업이었다면 다른 클랜들이나 길드원들, 모험가들에게 비난을 듣는다 하더라도 길드 가입 레벨을 무시한 채 그를 끌어들였을 정도다.

"그나저나 비싼 마취 수면제인데 아쉽네요. 어떻게 상아님이라도 한잔 하실래요?"

"너나 마셔. 너나."

운현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를 잡아 자신의 제대로 그를 심문해 운현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었던 상아는 펠리시아와 공모해 운현의 차에 마취 수면제를 타 놨었다. 그것을 이용해서 운현에게 정보를 얻어내고 싶었지만 운현은 차에 손도 가져다 대지 않았다.

"정말 정체가 궁금하군요. 어쩔 수 없네요."

"뭐가?"

약삭빠른 것인지, 아니면 눈치가 빠른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자신들의 생각을 모두 눈치채고 있었던 것인지. 운현은 결국 자신들의 수를 가볍게 건너뛰어버렸다. 그것에 화는 커녕 오히려 그를 끌어들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 진 펠리시아는 입술을 핥으며 요염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긴 뭐에요. 미인계죠. 자고로 선남과 선녀는 이렇게 만나는 법. 저도 슬슬 시집을 꿈꿀 때가..."

"야. 너보다는 내가 낫지 않겠냐? 그래도 운현이라는 자는 나에게 꽤나 호의적이었다고."

"그런 호의적인 사람에게 칼을 들이댔으니 호감도는 팍 깍이지 않았을까요?"

펠리시아와 상아는 서로를 노려보며 씨익 웃고는 자신이 미인계를 쓸거라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얄팍하기 그지없군.'

상아는 바보가 아니고 펠리시아는 더욱 바보가 아니다. 거기에 상아는 절박하기 그지 없는 상태이고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기까지 했었다.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라는 위치에서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모험가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칼을 들이댔다는 것이 알려지만 길드의 명성이 크게 흔들릴 법한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더한 짓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에 운현은 주의를 기울였고 결국 그들의 수를 가볍게 넘어버릴 수 있었다.

"정말. 운현씨. 대접한 차를 손도 대지 않는 것은 진짜 실례라구요. 항상 예의바르신 운현씨가 그런 예절을 모르실 줄이야..."

"하하하. 죄송합니다.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봐요."

"끙... 다음부터는 주의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모험가 길드의 지원을 받지 못해 아쉽게 됐군요. 원래 보내주기로 했던 병력도 못오게 된 건가요?"

"네... 루나 추기경이 그것을 막아버렸어요. 지금은 성기사단을 움직일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그 루나 추기경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데 이런 위기시에 성기사단의 파견도 막은 건가요? 혹시..."

운현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묻자 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교단 내부의 사정을 말해주기 부끄러운 것이다. 그녀가 말을 꺼내는 대신 연신 한숨만 내쉬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군요. 일단은 저희들만으로 움직이는 수 밖에. 그래도 다난교가 사람을 납치해 인신공양의 제물로 쓴다는 사실은 알고 있잖아요? 그에 대한 증거 자료만 찾으면 모험가 길드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아... 그렇게 쉬울까요? 저번에 증거를 발견했어야 했는데... 멍청하게 당해버린 제가 너무 한심하네요."

우울한 얼굴로 레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파르티의 신성을 받은 이단 심판관인 주제에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그녀가 좌절하자 운현은 레나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좌절감이 사람을 키우는 법입니다. 너무 그렇게 낙담하지 마세요."

"운현씨..."

그가 자신을 달래주자 레나는 살짝 풀린 얼굴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점점 그에게 빠져드는 자신의 마음을 느낀 레나는 다시 용기를 내 운현에게 말했다.

"운현씨. 정말 부탁드릴게요. 제 기사가 되어주세요. 저에게는 이제 정말 운현씨 밖에 없어요. 운현씨가 모험가를 계속 하고 싶으시다면 괜찮아요. 제가 돕겠습니다. 그러니..."

"아 그건 거절이네요."

"흐에엥..."

칼같이 잘라버리는 운현의 말에 레나는 또다시 좌절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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