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9/40)

운명을 바꾸려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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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려는 자

윈드와 윈디아의 미래는 알고 있다. 자신이 그녀의 운명을 바꾸지 않는 이상 윈드는 일년 후에 죽는다.

'방금 전에 내가 그녀를 살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반드시 죽었을거야.'

윈드의 부상은 금방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만약 자신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그녀는 그대로 죽어버렸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윈드를 공격한 자지."

자신의 개입으로 그녀가 위험에 빠졌다면 이해를 하겠다. 하지만 아까 전의 그 폭발은 다난교의 폭탄마가 만들어낸 폭발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다난교가 운명을 바꾸려 한다는 것인데 그것 역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은 아니었다.

'전에 보았던 편지에 운명은 다난교가 원하는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했어. 그렇다면 다난교가 운명을 바꿀 이유는 없다. 왜? 운명을 바꾸려는 나를 척살하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운명을 바꾸려 하는 것이지?'

팔짱을 낀 채 운현은 곰곰히 생각을 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존재는 둘. 이계인인 자신과 운명의 섭리에서 벗어난 위신체. 하지만 위신체는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것을 만든 이가 목적의식을 주지 않는다면 이유없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신체를 만들 수 있는 자는 신성을 가지고 있는 자 뿐. 현재 신성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자는 다난교일텐데... 다난교에서 윈드를 공격한다?'

단순하게 생각할 만한 문제는 아닌 듯 싶었다. 윈디아는 다난교를 이용해서 던전 도시의 안정과 균형, 외부의 세력이 개입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고 다난교는 윈디아와의 거래를 통해 던전 도시 내에서 인신공양의 제물을 얻음과 동시에 그녀의 지원을 받는다.

아직은 제대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는데 다난교가 윈디아를 공격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카를로스의 죽음이 관련되어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갑작스러운데.'

정보가 없으니 추론은 수십가지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무리 높은 통찰력과 분석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정된 정보를 가지고 상황을 예측하는 것은 운현으로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런 상태에서 지금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몇가지 되지 않았다.

'첫번째. 나 외에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이가 있다. 두번째. 운명을 바꾸려는 자의 소속은 다난교라고 할 수 있다.'

카를로스에게 얻은 정보에 의하면 폭탄마인 랑그리사는 다난교에서도 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는 검은 날개의 소유자로 그녀가 움직이게 할 수 있도록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는 몇명 되지 않았다. 그 대상은 총 셋. 카를로스, 카야, 그리고 카야의 오른팔이자 다난교의 책략가인 라닌 뿐. 하지만 카를로스는 자신이 죽였고 카야는 운명을 바꾸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결국은 그 책략가인지 뭔지 하는 년이라는 건가.'

과거에는 없었는지, 아니면 있었는데 자신이 정보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존재다. 그녀의 존재가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운현은 미믹맨의 마스크를 착용하고 하이딩을 걸었다.

'그건 이제부터 알아보도록 하면 되겠군.'

상인 조합의 간부인 레밍의 저택에 근처에 도착한 운현은 하이딩을 걸고 여유있는 걸음으로 그녀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정문을 굳게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하이딩에 걸려 있는 운현을 눈치채지 못했다. 느긋하게 저택 뒤로 들어간 그는 함정과 알람 마법들을 피하며 2층으로 올라간 후 창문에 박스테이프를 붙이기 시작했다.

"퍽!"

박스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창문을 주먹으로 쳐 부숴버린 운현은 테이프를 잡아 뜯어 인벤토리에 휙 던져 넣었다. 작게 구멍이 뚫린 창문 안으로 손을 넣어 창문을 열고 안에 잠입한 운현은 여유있는 걸음으로 레밍의 방으로 향했다.

'여기였던가.'

전에는 메이드를 따라 방에 들어갔지만 지금은 혼자인 상태다. 문에 귀를 가져다 대고 인기척을 살핀 운현은 내부에서 소리가 들리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들어가서 고문을 하는게 나을까... 아니면 그냥 기다릴까.'

레밍이 다난교이고, 또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만큼 그녀를 고문하든, 아니면 조사를 하든 해서 정보를 얻어내야 했다. 특히나 자신 외에 운명을 바꾸려는 자.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있는 만큼 그녀에 대한 조사는 반드시 해야 했다.

'깽판을 치긴 좀 그렇고...'

깽판을 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운현은 팔짱을 끼고 잠시 기다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분간은 얌전해야 하니 잠입을 해야겠는데... 이거 미치겠... 오우. 이런 공교로울데가 있나.'

멀리서 음식을 들고 메이드가 걸어오는 것이 보이자 운현은 슬쩍 뒤로 물러났다. 레밍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러 오는 모양인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음식은 먹음직스럽기 그지 없는 것들이었다.

"똑똑."

가볍게 노크를 한 그녀가 문을 열자 운현은 잽싸게 메이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자신에게 엿만 먹이려고 하는 하늘이 이렇게 도와주는구나. 속으로 감탄하며 안으로 들어 선 운현은 레밍이 자신의 책상에 앉아 서류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 히죽 웃었다.

"레밍님. 식사를..."

"거기 놔둬."

먹음직스럽고 예쁜 샌드위치를 보지도 않은 채 그녀가 서류에 집중하며 말하자 메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용무를 마친 그녀가 나가자 운현은 팔짱을 낀 채 레밍이 업무를 마치길 기다렸다.

"으으음..."

한참동안이나 서류를 보던 레밍은 굳은 어깨를 풀며 기지개를 폈다. 계속 같은 자세로 있어서 그런지 몸이 결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몸을 비틀던 그녀는 샌드위치를 물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드륵."

무언가가 밀리는 소리와 함께 레밍의 방 구석에 있는 책장이 비틀어졌다. 그것에 놀란 레밍이 고개를 들었을 때 비밀통로에서 검은 사제복을 입은 여인이 걸어들어왔다.

"레밍 사제님."

"무슨 일이지? 낮에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텐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녀가 싸늘히 말했지만 검은 사제복의 여인은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윈드의 살해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뭐?"

'역시 다난교의 짓이었군. 하긴...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던전 도시의 다난교 지부장인 그녀가 모를리가 없겠지.'

시청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 '윈드'를 공격하는 것. 검은 사제의 말과 레밍의 반응에 운현은 그것이 계획된 일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단순하 사고가 아닌, 윈드를 노리고 한 계획. 그 말은 다난교는 윈디아와 거리를 두려는 것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기에 운현은 느긋하게 웃을 수 있었다.

'윈디아를 제대로 굴릴 수 있겠군.'

오랜 시간 던전 도시를 지키고 그것을 수호하던 암살자 길드의 길드장인데다가 상인 조합의 조합장이며 카를로스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윈디아다. 거기에 속까지 능구렁이인 주제에 확실하 약점이 있어 잘만 이용하면 제니스 이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패가 될 수 있는 그녀이기에 운현은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그럼 이년을 어떻게 써먹어야 잘 써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이런... 라닌님께서는?"

"아직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내가 하겠다."

기분 좋은 운현에 비해 레밍은 상당히 난처한 모양이었다. 레밍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검은 사제의 여인은 뒤로 물러났고 레밍은 금고를 열어 다난교의 디바인마크를 꺼낸 후 루비가 했던 것처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촤악."

날카로운 단검으로 레밍이 자신의 피를 철판에 떨어트린 순간 철판에서 붉은 빛이 터져나왔다. 은은하게 피어오른 붉은 빛은 곧 한 사람의 얼굴을 만들어냈고 그 얼굴을 보며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닌님. 큰일입니다. 윈드에 대한 공작이..."

[실패했나요?]

'라닌... 카야가 데려 온 책략가. 근데... 처음 보는 얼굴인데.'

붉은 빛으로 만들어진 얼굴이지만 꽤나 정교했기에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기억에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상당한 미인인 것 같기는 했지만 본 적이 없는 얼굴이기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거에는 이런 여자가 없었는데... 아니, 있었는데 내가 못본건가.'

라닌이라는 이름도. 저렇게 생긴 여자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다 제쳐두고 자신의 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자이기에 운현은 그녀의 얼굴을 확실히 머릿속에 집어 넣었다

"네."

[이거 난처하게 되었군요... 그렇게 된다면 윈디아는 윈드를 최대한 보호하려고 할테고 그는 윈드를 약점으로 잡아 윈디아를 이용하려고 할텐데.]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실패에 대한 계획도 세워놨으니까요. 윈디아는 이번 사건이 저희가 한 일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레밍. 윈디아에게 제안하세요. 윈드를 보호하기 위해서 저희가 선물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선물이라면... 이지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이지스의 보호를 받는다면 운명파괴자라고 할지라도 윈드를 함부로 죽이지 못할테니까요.]

'이지스는 또 뭐야? 하... 운명파괴자라. 그건 날 지칭하는 것이겠지? 나에 대해서 알고 있고, 또 나를 적대한다라...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잣같은 일이군.'

붉은빛의 여인. 카야의 책사 라닌과 레밍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차분히 들으며 운현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정보를 손에 넣었다.

왜 윈드를 공격해서 죽이려 했는가. 윈디아의 약점을 없앤 후 그 죄를 자신에게 덮어씌우기 위해서다. 윈드의 원래 운명은 지금 죽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죽어버리고, 그 죽음이 이계인인 운현의 탓이라는 정도만 흘려넣고 그녀가 그것을 믿게 만든다면 윈디아는 자신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성을 잃고 덤벼 들 것이 분명했다.

윈디아의 약점을 없앰과 동시에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강력한 패를 손에 넣기 위해서 윈드를 죽여버리려고 한 라닌의 책략에  하마터면 당할 뻔 했다는 것에 운현은 깊은 짜증과 빡침이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저 썅년.'

여유롭게 웃고 있는 저 얼굴을 짓이겨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 자신의 욕구를 억누를 수 밖에 없다. 낮게 한숨을 내쉰 운현은 팔짱을 끼고 조용히 생각했다.

'저년이 뭐하는 년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 최대의 적이라고 할 수 있겠군.'

건방지게 자신에게 차도살인의 계책을 쓰다니. 확실히 윈디아가 자신의 적이 된다면 운현으로서도 행동에 제약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저들이 자신의 목적을 모른다지만 만약 운현의 궁극적인 목적이 그녀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암살자들을 총 동원해서 그녀들을 죽이려 할 것이고 그리 된다면 자신의 계획을 진행시키는 것은 상당히 복잡해진다.

'아주 작살을 내버려야지.'

운현이 자신에게 막대한 적의를 품는 것도 모른 채 붉은 빛의 여인. 라닌은 레밍의 질문에 답해 준 후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천검자와 시프 마스터를 회유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세상에! 그거 잘 된 일이군요!"

'천검자라... 현재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자였지.'

과거 필레가 말해 준 이름을 떠올리며 운현은 싸늘히 웃었다. 450의 레벨을 초월한 자. 현재의 자신보다 강한 자라고 할 수 있는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운현은 라닌을 노려보았다. 저년. 정말 사람 귀찮게 하는 년이다.

[그녀를 초빙하기 위해서 세번이나 찾아갔지요... 후훗. 옛날 일이 떠오르네요.]

"네? 그게 무슨... 아. 카야님의 삼고초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야~ 카야님께서 라닌님을 초대하기 위해서 세번이나 모옥을 찾아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라닌님도 천검자를 초빙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건가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뭐?'

레밍의 말에 운현은 온 몸이 딱딱히 굳는 것을 느꼈다. 천검자나 시프 마스터가 다난교에 합류했다?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자신보다 레벨이 높다고 해봤자 50정도의 차이에 불과했고 그정도는 스탯빨로도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었다. 거기에 과거처럼 유틸직도 아닌 전투직이지 않은가. 스킬의 보정까지 받는다면 천검자든 누구든 아무리 덤벼봐야 자신에게 아무런 두려움이 될 것이 없었다.

다만 운현이 긴장한 것은 레밍의 말 때문이었다.

'삼고초려라니. 그게 무슨...'

삼고초려라는 단어가 이 세계에 절대 나올리 없었다. 애초에 삼고초려라는 말의 기원이 유비가 제갈량을 초빙하기 위해서 세번이나 제갈량이 숨어 있는 초가집으로 찾아간 것에 대한 고사성어지 않은가.

그것이 이세계에서 언급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운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라닌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네년은 도대체... 누구냐.'

[천검자는 삼일 후에 던전도시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때까지 운명 파괴자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녀가 오게 되면 운명 파괴자와 저희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처분해주세요.]

"네. 모험가 길드의 상아 길드장과 용병 연맹의 티르빙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이미 그들에 대한 처분의 준비는 끝났습니다. 랑그릿사님께 인간 폭탄을 꽤 받았으니 그들을 이용하면..."

[글쎄요... 저는 천검자와 함께 움직이는 것을 추천하겠습니다만.]

"맡겨주십시요! 그들을 제거하지는 못하더라도 큰 피해를 입힐 수..."

레밍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라닌은 잠시 입을 다문 후 천천히 말했다.

[꼭 명령이라는 말을 꺼내야 알아들을 수 있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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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려는 자

"죄, 죄송합니다."

라닌의 부드러운 말이 그저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레밍은 움찔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그녀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라닌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 주의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하... 시발.'

안그래도 찢어죽여야 할 년인데 더 찢어죽여야 할 필요성이 느껴진다. 뭐가 어쩌고 어째? 누굴 죽여? 티르빙은 그렇다고 치고 상아마저도 죽여야 한다는 그녀의 말에 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간이 배밖으로 튀어나왔군.'

세상 다 건드려도 그녀들만은 건드리면 안된다.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점점 사라지는 라닌의 형상을 노려보았다.

"그럼 이제..."

"으음. 모험가 길드에 보내 놓은 인간 폭탄은 회수하도록."

"알겠습니다."

'이년을 지금 조져놓고 싶지만... 아직은 쓸모가 있으니 살려둬야겠군. 으으. 참자. 참아.'

스스럼없이 상아를 죽인다는 말에 꼭지가 돌아버릴 뻔 했지만 운현은 냉정한 이성을 발휘하며 그것을 꾹 억눌렀다. 하지만 넘치는 살기만큼은 완전히 제어할 수 없었다.

"....!"

하이딩을 걸며 자제하고 있었지만 한줄기 살기가 뻗어나왔나보다. 그것에 레밍은 휙 고개를 돌려 운현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탓인가..."

자신의 살기를 눈치챘지만 하이딩을 걸고 있는 것까지는 몰랐는지 그녀는 뒤통수를 긁적거린 후 검은 사제에게 몇가지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을 받은 그녀가 걸어나가자 레밍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아... 라닌님의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 에휴."

레밍의 집에서 나온 운현은 골목에 들어서서 옷을 갈아입은 후 주먹을 꽉 쥐고 벽을 후려쳤다. 그의 주먹에 맞은 벽에 금이 가며 흙먼지가 떨어진다. 당장이라도 레밍을 고문해서 모든 정보를 털어내고 싶었지만 그것은 참아야 했다.

'라닌 이년을 이용하려면 레밍은 얌전히 살려둬야 해. 참아라. 냉정해져라.'

"후우..."

심호흡을 하며 분노를 덜어냈다. 이 분노는 나중에, 라닌을 만나서 그년의 목을 딸 때 터트려도 늦지 않다. 괜한 감정의 움직임으로 일을 그르치는 것은 삼류들이나 하는 짓이다. 차분히 자신을 달랜 운현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만졌다. 방금 전까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던 얼굴에 웃음의 가면이 돌아왔다.

"자. 그럼 다음 일을 해보실까."

"어? 다녀오셨어요?"

"어디 갔다 오신거에요?"

"아. 좀 볼 일이 있어서. 별 일 없었지?"

길드 회관에서 맥주를 마시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미야와 헤스티아는 운현을 발견하고 밝게 웃으며 반겼다. 그녀들이 자신을 반기는 것에 마주 웃어 준 운현이 테이블에 앉자 미야는 운현을 위한 맥주를 주문하고 느긋하게 말했다.

"미믹을 처리했다고 하네."

"내일부터는 바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굳이 내일부터 들어갈 필요 없겠지만 저녁에 또 일이 있으니 안되겠군."

"에엣!?"

운현이 또 나간다는 말에 미야와 헤스티아는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그녀들이 울상을 짓자 운현은 빙긋 웃은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냥 잠깐 이야기만 하고 오는거니까 너무 그렇게 우울해 하지 말라고. 아. 그보다 미믹은 어떻게 잡았다고 했어?"

그녀들이 너무 우울해하자 운현은 웃으며 이야기를 돌렸다. 그가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눈치챈 미야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헤스티아는 애써 그의 분위기에 맞춰주기 위해 방긋 웃었다.

"상아 길드장님이 복귀하는 길에 잡았다고 하네요."

"상아... 길드장이라."

"정말 다행이지. 뭐야. 몇몇 모험가들이 미믹에게 습격을 당하려고 하는 찰나에 상아 길드장이 연극처럼 쫙 나타나서 미믹을 한방에 해치웠다고 하더라고."

"헤에..."

헤스티아의 말을 받으며 근처에 있던 모험가가 호프 잔을 들어 올리며 밝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운현이 감탄하자 그녀의 앞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모험가는 한숨을 내쉬며 아련한 눈으로 길드 사무소를 바라보았다.

"아... 난 언제쯤 그 레벨에 도달하려나."

"상아 길드장님의 레벨은 몇인데요?"

"430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아무도 몰라. 들리는 얘기로는 상아 길드장님도 450의 레벨에 근접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럼 천검자 아르시나와 비슷한 수준인가요?"

"에이~ 천검자와 비교하기는 좀 그렇지. 그 여자는 진짜 초인이라니까. 사람의 반열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불리던데."

천검자에 대해서는 이름만 들어봤지 그녀의 실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운현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운현도 450레벨에서 벗어난 초인의 반열에 올라 있는 사람이다. 그런 자신과 비교해서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알아보기 위해 운현이 묻자 그의 질문에 여인들은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으음.. 글쎄."

"한번도 천검자가 본 실력을 발휘했다는 이야기가 없어서."

"들리는 소문으로는 혼자서 일천기의 기병대를 무찔렀다는 말이 있어."

"일기당천이라... 결국 소문인가요?"

"다들 쉬쉬하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뭐, 혼자서 일천기의 기병을 상대하는게 정말 쉬운 일도 아니고 그정도까지는 아니겠지."

운현이 웃으며 묻자 그녀는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녀 외에도 몇몇 사람들이 천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으며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어쨌든 만만한 년은 아니라는 거지.'

쉽게 봤다가 뒤통수를 맞고 훅 가느니 차라리 빠르게 레벨업을 하는게 낫겠다. 천검자가 던전 도시에 오는 것은 앞으로 사흘 후. 그렇다면 그녀가 들어온 순간 그녀를 죽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레벨 50을 넘길 필요가 있었다.

'정 뭐하면 내 진짜 실력을 발휘하면 되겠지만 라닌 그년의 시선도 있으니 풀 파워는 힘들겠군.'

차도살인의 계책까지 쓰려는 자가 던전 도시에 꼴랑 레밍 하나만 시선으로 두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적어도 수십이상의 눈을 두었을 것이고 수백 이상의 귀를 두었을 것이다.

'아니. 이미 던전 도시에 들어 왔을 수도 있지.'

상대가 보통 년이 아니라는 것을 안 이상 운현은 방심할 수 없었다. 삼고초려라는 단어가 나온 이상 더욱 더 방심하기는 어려웠다. 상대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자신과 같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이계인이며 치밀하고 주도면밀하게 움직이려는 자다.

자신의 손이 아닌 다른 이의 손을 써서 일을 이루려 한다면, 자신 역시 '운현'이 아닌 다른 자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머리 굴리면서 싸우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 이거 참. 역시 쉬운 일은 하나도 없군.'

자신의 계획에 재를 뿌릴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에 불쾌하기는 했지만 불안감은 크지 않았다. 적이 책략을 꾸민다면? 책략으로 갚아주면 될 일. 운현이 희미하게 웃었을 때 미야는 운현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응? 아니. 하하. 너네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해져서 말이지. 아유~ 이 귀여운 것들."

"뭐, 뭐라는거야."

"...헤헤헤..."

운현이 웃으며 말하자 미야와 헤스티아는 얼굴을 붉혔다. 투덜거리기는 하지만 싫지 않은 듯한 미야와 순수하게 기뻐하는 헤스티아. 둘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지은 운현이 맥주를 들이마셨을 때 길드의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나타났다.

"여기 운현님 계신가요?"

"난데..."

"아. 안녕하세요. 성당의 레나 대사제님의 부탁으로 찾아왔어요."

"아. 그래? 왜?"

심부름꾼으로 보이는 작은 소녀가 다가오자 운현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 방심하지는 않았다. 만약 다난의 인간폭탄이라면 그대로 목을 날려버릴 생각으로 빙긋 웃은 운현은 차분히 검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모르겠어요. 지금 성당으로 와달라고 하시는데요?"

"그래?"

"네!"

"혼자?"

"네."

뒤에서 기대감을 품고 바라보는 헤스티아와 미야에게 운현은 미안한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레나 대사제와의 만남은 운현의 개인적인 일이다. 그것까지는 자신들이 손을 댈 수 없었기에 미야와 헤스티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구. 뭐 이렇게 바빠요?"

"그러니까 말야. 좀 파티원끼리 친목도모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미안. 미안. 갔다와서 벌충할게. 아무래도 이건 내 개인적인 의뢰에 가까운 일이라서 말야."

모험가들의 임무 중에는 비밀엄수 서약을 하는 것도 많았다. 특히 종교적인 일들 같은 경우는 그 내용을 함부로 말하면 안되는 것들이 많았기에 미야와 헤스티아는 더는 그에게 말을 하지 못했고 운현은 쓰게 웃으며 헤스티아에게 키스를 해주고 미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자. 그럼 갔다올테니까 얌전히 여기 있... 아."

폭탄마의 움직임을 라닌이 막았다고는 하지만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몰랐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준비는 해야 할 터.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세장의 스크롤 중 두장을 헤스티아에게. 한장을 미야에게 주었다.

"만약 위험한 일이 발생하면 바로 찢고 길드 사무소 안으로 도망치도록 해. 제니스를 찾아서 그녀에게 보호해달라고 말하면 그녀가 도와줄거야."

"이게 뭔데?"

"강력한 배리어 마법이 걸려 있는 스크롤. 사용법은 알지? 그냥 찢으면 발동해. 그리고 헤스티아는 이것도 같이 가지고 있어. 배리어 마법이 깨지고 나면 바로 발동시켜. 파티 효과가 있는 마법이니까 위기시에 한번 정도는 목숨을 구해줄거야."

"우와... 이거 귀한 것 아니에요?"

스크롤의 질만 봐도 초고가의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헤스티아가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귀하다고 해봤자 너희들보다 귀하지 않아."

스크롤 한 두장으로 헤스티아와 미야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오히려 싼것이다. 운현은 빙긋 웃으며 말했고 그의 말에 헤스티아와 미야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럼 갔다올게. 얌전히들 있어."

"네!"

"다녀와~"

"찾으셨나요?"

파르티 교단의 대성당에 들어 선 운현은 레나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기도를 하고 있던 그녀는 운현이 오자 자리에서 일어난 후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물었다.

"혹시... 들으셨나요?"

"뭘요?"

"윈드씨가 습격을 당했는데 어떤 성인께서 나타나셨다고."

"......"

"교단 내에서도 쉽게 쓸 수 없는 그레이터 힐을 쓰실 수 있는 분이 던전 도시에 계신 것 같아요. 그럼 당장이라도 그 분을 찾는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 음."

레나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하자 운현은 볼을 긁적거렸다. 그런 그의 반응에도 레나는 마냥 기쁠 뿐 이었다. 롤랑이 당해버리고 상황이 안좋게 흘러가는 이때 그정도로 강한 사제가 이 던전 도시에 있을 줄이야. 그녀가 희망에 가득 찬 얼굴을 하는 것을 보며 운현은 떨떠름히 말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군요."

"네. 그래서 운현님을 모신 거에요. 운현님.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그 분을 찾아주시겠어요? 아. 정식으로 의뢰를 하는 거에요. 만약 그 분을 발견하시고 이곳으로 모시고 오신다면... 신성한 갑주를 드릴게요."

"아. 예..."

"아아아~ 어떤 분일까. 혹시 전 세대의 비숍님이실까요? 아아, 그레이터 힐을 쓰실 정도로 수양이 깊으신 사제님이라면... 음..."

레나가 눈에 띄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운현 오빠는 뭐하는 사람일까요?"

"으음... 그러게."

손에 쥐어진 스크롤을 보며 헤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진 실력이나 돈, 성격. 하는 행동. 그리고 이런 스크롤까지. 이정도 스크롤이면 거의 유물급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스크롤이다.

"만약 마법학교의 선생님들이 보면 난리를 칠 정도의 스크롤을 그냥 내어주다니."

이걸 가져다 마법학교에 보여주면 몇천골드는 가볍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부자로는 보이지 않는 운현인데 이런 것을...

"헤헤헤..."

이런 것을 세장이나 자신들에게 준 것에 헤스티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만큼 운현이 자신들을 믿어준다는 것 아닌가. 그녀가 테이블 위에 있는 스크롤을 보며 헤죽거리고 있을 때 작은 그림자가 테이블을 덮었다.

"에?"

"그 스크롤. 잠깐 볼 수 있을까?"

맑고 강한 목소리다. 그것에 미야와 헤스티아는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 시선을 보냈고 그녀들의 시선을 받은 은회색 긴 머리의 다부진 미녀는 볼을 긁적거렸다.

"내가 아는 사람의 스크롤 같아서... 잠깐 확인하게만 해줘."

"누구...신데요?"

하얀색 슈트를 입고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있는 작은 키의 미녀를 보며 헤스티아는 후다닥 스크롤을 잡았다. 운현이 준 스크롤이다. 이 스크롤의 가치를 알고 노리는 것이 아닐까 싶었던 그녀가 말하자 은회색 머리칼의 여인은 당황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 사기꾼이 아니니까. 난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 상아라고 해."

"...그걸 어떻게 믿지?"

이미 한차례 사기꾼에게 당했던 미야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상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헤스티아의 시선에 당황하던 상아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주변의 모험가들에게 외쳤다.

"내가 누구지!?"

"사기꾼!"

"야!!"

모험가들이 싱글싱글 웃으며 장난기 넘치는 어조로 외치자 상아는 그녀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른 후 길드 사무소에서 길드원들과 필레를 데리고 나왔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해줘."

"에...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님이요."

"일은 참 안하지만."

"지, 진짠가?"

"필레씨랑 실비아씨가 맞다고 한다면 그런 거 같은데... 이 스크롤은 왜요?"

헤스티아는 여전히 경계의 시선을 풀지 않은 채 물었고 상아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스크롤을 가리키며 차분히 말했다.

"그 스크롤... 아무래도 내가 아는 사람이 만든 것 같아서. 그리고 그게 절대 밖으로 나갔을 리 없거든. 그러니까 확인만 하게 해줘."

그녀의 말에 헤스티아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스크롤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은 상아는 스크롤의 봉인 부분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봉인을 풀고 안의 마력을 살폈다. 그녀가 스크롤을 확인하는 것을 불안한 듯 바라보던 헤스티아는 작게 한숨을 내쉰 상아가 스크롤을 돌려주자 후다닥 그것을 받았다.

"이 스크롤. 누구에게 받은거야?"

"....."

"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어. 다만 확인하고 싶은게 있을 뿐이니까. 부디 가르쳐줬으면 해."

320====================

운명을 바꾸려는 자

"그것 때문에 부르신 건가요?"

일단 자신의 정체는 숨겨놓고 이야기를 해야 하니 운현은 레나를 향해 차분히 물었다. 그의 질문에 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 그것 뿐만은 아니구요. 여기요."

"이게 뭔가요?"

"그때 말씀드렸던 검이에요."

"아."

레나는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있던 길죽한 상자를 운현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은 운현이 상자를 열자 레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파르티 교단의 이단 심판관에게 내려오는 검입니다. 이 검과 성스러운 갑옷이 있으면 파르티 교단의 팔라딘 자격을 받을 수 있어요. 운현씨라면 충분히 팔라딘의 자격이 있지만..."

"있지만?"

"저는 교단에서 좀 배척받는 존재라서 말이죠."

자조적인 어조로 말하며 레나는 쓰게 웃었다. 배척받는 존재라. 운현이 자신을 차분히 바라보자 레나는 볼을 긁적거린 후 머뭇거렸다.

"에... 이건 교 내부의 사정인데."

"괜찮다면 말씀해주세요. 제가 뭔가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나요?"

교 내부의 사정이라는 것이 윈디아가 말했던 것일까? 파르티 교단도 마냥 좋은 곳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만큼 어느정도는 파르티 교단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기에 운현은 차분히 물었고 그의 질문에 레나는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운현씨 마음은 고마워요. 하지만... 이것은 저희 교단 내부의 일이에요. 음. 만약 운현씨가 제 수호기사가 되어주신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수호기사요? 그게 뭐죠?"

"수호기사는... 음. 무력이 약한 사제들을 평생 지키기로 맹세하고 거의 부부... 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연을 맺는 그런거에요. 어느정도 레벨이 오르고 직급이 있는 사제들의 경우 수호기사가 있죠."

"헤에."

"다만 저나 다른 신성을 가지신 분들은 처녀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수호기사를 맞이하지 못해요. 처녀막이 파괴된 순간 그 신성이 빠져나가버리니... 수호기사의 의식이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도 있거든요."

"그렇군요."

운현이 무덤덤히 고개를 끄덕이자 레나는 머뭇거리다가 힐끔힐끔 운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 운현씨랑은 이미 하기도 했고, 처, 처녀성도 없는 만큼 운현씨랑은 수호기사의 연을 맺을 수..."

"아. 죄송합니다. 그런 일이라면 제가 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성격상 누군가에게 메여 있는 일은 사양이라서."

"아니! 수호기사는 부부나 다름없는 생활을 할 분이지 기본적으로는 서로의 자유를 중시하는..."

"그런 것을 하지 않아도 레나 심판관님을 도울테니 걱정마세요."

다급한 그녀의 말에 운현은 딱 잘라 거절했다.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는지 레나는 시무룩히 고개를 숙였고 그녀를 보며 운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연인들 지키는 것도 바쁘다.'

만약 라닌이라는, 정체 불명의 책사가 적이 아니라면 운명에게서 레나를 지키는 것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자신이 상정하고 제어 할 수 없는 변수가 존재하고 그 변수를 완전히 제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최대한 그녀들을 지키는데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그녀들의 운명의 날이 시간이 남았다고 하더라도 안심할 수는 없지.'

라닌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던전 도시를 공격하고, 또 상아를 죽이려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또 그 힘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최대한 집중해서 위기를 넘겨야지. 기회가 된다면 운명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해주겠지만...'

과거 자신의 첫 동정을 가져간 여자이지만 그녀에 대한 좋은 기억은 그다지 없다고 할 수 있는 운현은 쓱쓱 눈물고인 눈을 닦으며 레나가 한숨을 내쉬자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수호사제만큼은 아니지만 최대한 레나 이단심판관님을 돕겠습니다.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우, 울긴 누가 울어요!"

"아니면 말구요."

"......"

레나의 시선이 따갑지만 어쩌겠는가. 운현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상자를 열었다. 상자의 안에는 꽤 좋아보이는 장검이 들어 있었다.

"스르릉."

하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본 운현은 검자루를 잡고 검날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균형을 확인했다. 검자루의 가죽은 꽤 잘 관리되고 있었는지 손바닥에 찰싹 감겨들어왔다.

"흡."

검을 잡고 가볍게 휘둘러 본 운현은 검끝이 초의 심지를 가볍게 잘라내는 것에 만족했다. 검을 검집에 밀어 넣은 그가 허리에 검을 착용하자 레나는 아까의 시무룩한 표정을 지운 후 놀랍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맙소사... 운현씨는 보통 분이 아닌 것 같네요."

"예? 왜요? 이정도는 검을 다루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할 수 있는 건데."

정확하게 심지만을 잘라낼 정도의 정교한 컨트롤이지만 이곳은 자신이 있던 현실이 아닌, 검과 마법이 일상적인 곳이다. 조금 오버한다면 뒷집에 다른 게임에서 소드마스터 급이라 불릴 만한 이들이 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곳에서 이정도 가지고 감탄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볼 수 있었기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뇨. 일레인은 자격이 없는 자가 잡으면 아무것도 벨 수 없거든요. 성검들의 대부분이 그래요. 독실한 파르티 교의 성기사들 중에도 성검을 다루지 못하는 분들이 꽤 있는걸요."

"...좀 자세하게 말씀해주시겠어요?"

성검인데 성기사가 사용할 수 없다? 그것에 의문을 품은 운현이 묻자 레나는 운현의 허리에 있는 성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성스러운 무기들과 다르게 이름이 있는 성검의 경우 대부분 역사와 전통이 있답니다. 특히 일레인 같은 경우가 그러는데... 일레인은 과거 악신과 싸웠던 파르티 교단의 성자님께서 사용하시던 무기랍니다. 사용하기 위한 조건 중 밝혀진 것은 신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 외에는 없어요."

"아니 그럼 그런 무기를 쓰라고 준 거였어요?"

운현이 어이없어하며 묻자 레나는 볼을 긁적거리며 뻘쭘히 웃었다.

"하지만 성검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체 치유력이 증가하고 신성 보호막을 쓸 수 있어요. 일종의 성유물과 같은 의미로 쓰일 수 있고 또 파르티 교단이나 파르티 교단과 우호적인 세력의 지원을 받기 좋아요. 운현씨는 모험가잖아요? 던전 도시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모험을 하실때 성검을 가지고 계시면 꽤나 이득이 되기 때문에..."

"그렇군요."

쉽게 말해 성검을 검으로 쓰는 것이 아닌 일종의 신분증으로 쓰라는 의미로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가. 그제서야 운현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레인을 쓰실 수 있으시면 이건 의미가 없겠네요."

운현이 일레인을 제대로 다룰 지는 몰랐던 레나는 입맛을 다시며 다른 상자를 치웠다. 그것을 보며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뭔데요?"

"성검은 아니지만 교단에서 성기사들이 쓰는 검이에요. 한번 보시겠어요?"

"흠..."

레나가 준 검을 잡아 본 운현은 그것을 뽑아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순수하게 검의 등급으로 따진다면 힐더크의 가게에서 산 검과 비교해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 검이었다. 굳이 이것까지 챙길 필요는 없었던 운현이 그 검을 돌려주자 레나는 그것을 받아 상자에 넣고 말했다.

"몇일간 다난교에 대해서 조사를 해봤어요. 아, 그리고 모험가 길드의 상아 길드장이 복귀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아시나요? 던전에 미믹이 발생해서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 모험가 길드에서 던전에 있는 간부들을 소집했다던데..."

"아. 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럼 얘기는 빨라지겠네요.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으신가요? 상아 길드장님과 자리를 마련..."

"저녁에는 시간이 안될 것 같은데..."

상아와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윈디아와 협상을 하는 일도 중요했다. 그녀를 효율적으로 이용하지 못한다면 라닌의 움직임과 책략에 휘둘려 다닐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만약 그렇게 되었다간 지금까지 해 온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해.'

그녀들의 죽음은 막아야 한다. 운현이 차분한 어조로 말하자 레나는 안타까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내일 아침에 바로 만나는게 좋겠어요."

"그럼 그렇게 하시죠. 상아 길드장님에게는 레나님이 연락하실 건가요?"

"뭐 그게 낫겠죠? 운현씨는 바로 모험가 길드로 가실 예정이신가요?"

"아뇨. 몇군데 들릴 곳이 있어서. 레나씨는요?"

"음... 저는 잠시 후에 예배가 있네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아침에 제가 모험가 길드로 찾아뵙겠습니다. 내일 뵙도록 하지요."

"그러시죠."

성당에서 빠져나온 운현은 허리에 걸려 있는 두자루의 검 중 힐더크에게서 구입한 검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아무리 운현이 초인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초인의 반열에 올라 있는 이가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어느정도 구색은 맞춰놔야 했다.

"일단 해야 할 일이..."

"꺼져! 이 건방진 엘프년아!"

"그렇게 말할 것 까지 없잖아. 난 모두를 위해서 말했..."

"모두? 네 말은 그냥 사람 성질 벅벅 긁어대는 얘기일 뿐이라고!! 지독할 정도로 마이페이스구만!"

분수대 광장에 울려퍼지는 고함, 상당한 짜증과 깊은 분노가 담겨 있는 여인의 외침에 운현은 움찔하며 그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분명히 이런 목소리는 몇번 들었던 것 같은데. 그가 그곳으로 시선을 던졌을 때 운현은 늘씬한 엘프가 당황하며 손을 휘젓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저 나는 너희들이..."

"아아! 됐어! 바제트! 너같은 엘프년이 우리 마음을 알리가 없지. 우리는 사람이라고! 너처럼 천년의 생이 보장되지 않았어!"

"......"

짙은 적갈색 긴 머리에 거친 피부와 얼굴의 상처가 인상적인 여인이 외치자 바제트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를 노려보던 여인이 몸을 돌려 걸어가자 그녀의 옆에 있던 여인들 역시 침을 뱉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하아... 또 인가."

'지금은 만나기 곤란하니 일단 빠져야겠군.'

바제트를 영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아보였다. 이렇게 말하면 좀 미안하지만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는 천덕꾸러기인 엘프를 쉽게 받아들일만한 파티는 없을 듯 싶었다. 그녀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널 위로해주고 싶지만... 지금은...'

"하아... 내가 이렇지 뭐... 술이나 마시러 가자."

한숨을 푹 내쉬며 바제트가 터덜터덜 걸어가자 운현은 가슴이 아팠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안아주고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욕구를 참지 못해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책략가가 할 일이 아니지. 지금은 바제트와 만나는 것보다 다른 일이 더 중요하다.'

멀어지는 바제트의 뒷모습을 쓸쓸히 바라보던 운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시청으로 향한 그는 구석진 곳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하이딩을 걸고 시장실로 향했다.

시장실에는 윈드의 손을 꼭 잡은 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 윈디아와 그런 그녀를 향해 쓴웃음을 짓고 있는 윈드가 있었다. 문이 열려 있는지도 모른 채 윈디아는 윈드에게 연신 물었다.

"언니, 어디 아픈데는 없죠?"

"괜찮다니까~ 그보다 날 살려 준 사람은 누구야? 만나뵙고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

"그 분께는 제가 인사를 드렸어요. 그러니까 신경쓰지 않으셔도 좋아요."

윈디아는 힐끔 문쪽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 친 운현은 비릿하게 웃으며 윈드의 뒤로 다가갔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단검. 그것을 봤는지 윈디아는 순간 눈을 번뜩였다.

"응? 뒤에 뭐라도 있어?"

"아하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언니.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언니를 지킬거에요. 만약... 만약 언니를 해하려하는 자를 발견하면."

"너무 그렇게 무섭게 하지마. 싸움도 못하는 기집애가 성격만 더러워서는."

"서, 성격이 더럽다뇨! 언니가 너무 착한거라구요!"

운현이 보기에는 윈드의 성격도 딱히 착해보이지는 않았지만 윈디아의 입장에서는 세상 천사가 따로 없는 모양이다. 그녀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하자 윈드는 부드럽게 웃으며 윈디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에구. 아무튼 그 분에 대해서 알게 되면 나한테 꼭 가르쳐줘. 꼭이야. 꼭."

"알겠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그만 퇴근해서 쉬도록 하세요."

"아니, 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몸도 멀쩡하고. 하던 일이 있으니까 그걸 마무리 지어야겠어."

"언니."

"내가 열심히 일해야 네가 편해지지. 하하하. 그럼 수고해~"

"네..."

아까 낮에 폭발에 휘말렸던 것 치고는 상당히 멀쩡한 윈드가 방을 나가자마자 윈디아는 한숨을 푹 내쉬고 운현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이며 하이딩을 푼 운현은 단검의 날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히죽 웃었다.

"뭘 그렇게 협박까지 하시나."

"...언니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만 해봐."

"이거 무서워서 하겠나... 크흐... 자. 이야기를 나누러 온 것이니까 이야기나 하자고."

운현이 낮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자 윈디아는 빠득 이를 갈았다.

321====================

운명을 바꾸려는 자

"원하는게 뭐지?"

"원하는게 뭐냐니. 당연한 것 아닌가?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날 위해 움직여라. 애초에 거래 내용은 그것 아니었나? 이제와서 딴 소리를 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윈드의 목숨은 내가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언니를 살려 준 것은 고맙다... 하지만 너무 타이밍이 좋지 않아? 나와 거래를 하고 있는 와중에 언니가 습격당했어. 정체도 알 수 없는 인간 폭탄에..."

"그 정체는 내가 가르쳐주지. 다난교다."

"...지금 그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야? 다난교가 왜 언니를 죽이려 하는 거지? 그리고 다난교는 나와 협력관계다. 그들이 날 배신할 리..."

"네가 내 부하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지. 그들은 네 최대의 약점을 알고 있어. 지금 상태에서 다난교는 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너의 약점을 잡을 이유가 없지만 거기에 내가 낀다면 이야기는 달라져. 만약 내가 윈드를 납치하고 그녀의 목숨을 빌미로 내 명령을 듣게 한다면 넌 어쩔 생각이냐?"

"맙소사. 그럼 약점을 없애겠다는 이유로 언니를 죽이려 했다는거야? 믿을 수 없어."

"믿기 싫으면 관둬.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니까."

"....."

"지금 중요한 것은 너는 네 약점을 드러냈다는 것이지. 자. 나에게서 윈드를 보호할 수 있나?"

"지킬 수 있냐고? 그건 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지."

가볍게 말하는 윈디아의 말에 운현은 순간 이성이 끊어질 뻔 했다.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빠득 이를 갈자 윈디아는 운현을 향해 싸늘히 웃었다.

"내 모든 힘을 발휘하면..."

"철컥."

인벤토리에서 거검을 꺼낸다. 그 순간 윈디아는 공포에 질려버렸다. 사람 몸만한 거검을 운현이 한손에 잡아 들고 자신에게 겨눈 순간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이길 수 없다. 절대 이길 수 없다. 암살자 길드의 수장이며 수많은 죽음을 만들어 온 그녀였기에 알 수 있는 그 끝없는 공포에 윈디아는 부들부들 떨었다.

"나에게서 지킬 수 있다고?"

"아...아아..."

운현을 상대하며 쓰고 있던 가면이 무너져 내린다. 윈디아의 얼굴에 내려앉은 공포를 마주하며 운현은 최대한 무감정을 연기했다.

"내가 운명이고, 내가 죽음이며, 내가 결정권자다. 그런 나에게서 지킬 수 있다고?"

"아...으아...아..."

압도적인 힘이 느껴진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의 차가운 공포에 윈디아가 털썩 주저앉았을 때 운현은 한걸음 그녀에게 나아갔다.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으...으..."

"윈디아. 그러고보니..."

문이 열렸다. 함부로 지킬 수 있다고 말하는 윈디아의 말에 이성이 반쯤 날아간 상태이기 때문에 운현마저도 신경을 쓰지 못했고 공포에 완전히 질려 있었기 때문에 윈디아 역시 신경을 쓰지 못했다. 문이 열리고 윈드가 들어오자 윈디아는 기겁하며 외쳤다.

"안돼!! 언니!!"

"챙!!"

운현에게서 피어오르는 막대한 공포, 살가죽이 떨릴 정도의 엄청난 무력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윈드는 검을 뽑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는 운현에게 검을 겨누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흥."

과거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면. 자신에게 가타부타 말도 없이 검을 휘두르는 그녀를 향해 운현은 거검을 휘둘렀다. 거검이지만 세검 이상의 속도. 바람을 가르는 소리마저 늦게 들릴 정도의 베기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윈드는 그것을 막는 대신 몸을 굴려 운현을 피하고 윈디아의 앞에 섰다.

"누구냐!"

"으아... 언니... 도, 도망가!!"

"하... 쌍으로 사람을 열받게 만드는군. 그래. 어디 한번 지킬 수 있다면..."

"큭...!"

운현이 내뿜는 막강할 정도의 살의에 윈드는 이를 꽉 깨물었다. 절대 이길 수 없다. 아니, 방금 전의 일검을 피한 것 조차도 요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이 저자를 막을 수 있을까? 윈드가 검을 꽉 쥐고 윈디아를 지키기 위해 앞에 선 순간 운현은 거검을 들었다.

"알았어!! 당신의 뜻대로 하겠어!!"

운현이 진심으로 검을 휘두를 것이라고 직감한 윈디아는 다급히 외쳤다. 그녀의 외침에 운현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진한 살기에 헐떡거리던 윈드가 간신히 안정을 되찾았을 때 운현은 거검을 인벤토리에 넣은 후 말했다.

"말했겠다? 두 말하지는 않겠지?"

"아, 알았어. 당신의 부하가 되겠..."

"무슨 소리야!"

"...언니. 미안."

"당신. 누구지?"

"내가 누군지는 댁이 알 필요가 없는 것 같지만, 굳이 얘기한다면... 당신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

"내 생명의 은인? 헉! 설마!?"

'죽음' 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보인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줬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그레이터 힐을 써 준 사람이 이 사람이란 말인가? 운현을 한차례 위 아래로 흝어 본 윈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제야?"

"글쎄."

"믿을 수 없어."

"사실이야. 언니."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당신. 내 동생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는 거지? 당신 정도의 힘을 가졌다면 윈디아의 도움따위 필요 없지 않아?"

"물론 그렇게 볼 수 있겠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은 작자들인지라."

어깨를 으쓱이며 운현은 담담한 어조로 윈디아를 향해 말했다.

"만약 내가 죽이고자 했다면 굳이 그런 수를 쓰지 않았겠지. 이제 날 믿을 수 있겠나?"

운현의 말에 윈디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이 진짜로 마음을 먹고 움직이려고 했다면 그런 수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믿어진다. 그녀가 동의를 하자 운현은 자리에 앉은 후 말했다.

"잘 됐군. 당신도 앉아."

"언니는 왜!"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나라는 존재를 알았으니 어쩔 수 없지."

심드렁한 어조로 운현이 말하자 윈디아는 이를 갈았다. 자신의 멍청함, 자신이 상대를 믿지 못해 언니까지 위험한 일을 하게 생긴 것이다. 그녀가 우울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윈드는 운현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 본 후 쓴웃음을 짓고 윈디아의 볼을 꽉 꼬집었다.

"이 바보같은 기집애. 또 혼자서 머리 굴리다가 일 냈구나?"

"으어..."

"에휴. 어쩔 수 없지. 이봐."

"뭐냐."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해줬다는 것. 사실이겠지?"

"그렇다면?"

"그럼 나에게 당신 목숨을 맡겨도 괜찮겠지. 어차피 당신이 준 생명이니까."

이리 재고 저리 재는 윈디아에 비해 윈드는 심플하기 그지 없었다. 당황하는 윈디아를 제쳐 두고 윈드는 운현의 앞에 다가가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자신의 검을 바쳤다.

"윈드 발렌타인. 당신에게 생명을 빚졌으니 그 빚을 갚을 때까지 당신의 수족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지금은... 없다고 해두지."

지금은 얼굴을 가리고 미믹맨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일이 커진다면 모를까 지금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곤란했다. 운현이 차분한 어조로 답하자 그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던 윈드는 빙긋 미소지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마스터라고 부르겠습니다. 상관없으십니까?"

"이름따위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아니요. 이름은 중요합니다. 이름은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 중 하나.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게 무슨 소리지?"

책략을 쓰고 일을 꾸밀 때 가명따위 얼마든지 사용하는 운현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름은 그저 책략의 도구에 불과했던 운현이었기에 그는 윈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윈드는 쓰게 웃었다.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이름입니다. 만약 이름이 없다면 그 존재는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지음받지 못한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럼... 가명은?"

"가명 역시 그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지요. 만약 당신의 이름이 없다고 한다면 당신이 아닌 다른 이가 당신을 부를 수 없게 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는 타인과 관련되어 살아가기에 그 존재를 지칭하기 마련이지요."

"흥미롭군."

윈드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윈드는 주변을 둘러본 후 볼을 긁적거렸다.

"흥미로우시다면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발렌타인 가문의 역사와 관련된 것이니... 아무튼 마스터로 괜찮지요?"

"그래."

예상치 못한 윈드라는 패를 손에 넣었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윈드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윈디아를 보며 말했다.

"윈디아."

"...네. 언니."

"네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 하지만 발렌타인 가문의 가훈은 알고 있지?"

"네."

"그럼."

"휴우. 알겠어요."

고지식한 윈드이기에 책략이든, 상황판단이든 그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윈드의 재촉에 윈디아는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운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 윈디아 발렌타인. 거래의 대가로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자 합니다. 당신을 마스터로 모시겠습니다."

"정말 간단하군. 그런데 발렌타인 가문의 가훈이 뭐지?"

"아 그거요? 그랑디슈 발렌타인의 피를 이어받은 자. 식언을 하지 않는다."

"그랑디슈 발렌타인이 누군데?"

"어..."

운현의 질문에 윈드는 당황했다. 그랑디슈 발렌타인을 모를 줄이야. 그녀가 떨떠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랑디슈 발렌타인은 과거 악신과 싸웠던 파르티의 용사와 함께 악신에 대항했던 기사입니다. 평생 거짓을 말하지 않고 평생 단 한번의 약속도 어기지 않았던 사람으로 유명하죠. 그렇기에 악신을 상대하며 언령이라는 강력한 힘을 손에 넣어 용사와 함께 세상을 구원하신 분입니다. 저희 가문의 시조님이시죠. 그런데 이거 꽤 유명한 일인데 모르시나요? 이야기 책으로도 많이 알려진 얘긴데..."

"책이랑은 거리가 먼 사람이라서 말이지."

"저랑 비슷하네요!"

"아, 그러냐..."

이런 상황에서도 대책없이 긍정적인 윈드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운현은 윈디아의 눈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 꽤나 노력을 하는 모양인데 그래봤자 헛수고였다.

"자."

"이건..."

"뭔데요?"

"넌 알 것 없다."

"에이~"

윈드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지만 운현과 윈디아는 그녀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 줄 생각이 없는 듯 싶었다. 그녀가 그것을 받아 품에 넣자 윈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뭘 해야 하죠?"

"넌 지금 할 것이 없다. 가서 쿠키나 가져와라."

"...."

운현이 윈디아에게만 무언가 주고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자 윈드는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윈디아를 지키고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이에게 충성을 맹세했는데 왠지 모르게 이 자리에서 따돌림 당하는 기분이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운현은 윈디아에게 말했다.

"다난교의 조직도다. 거기에 랑그리사라는 이름이 있을 터. 그녀를 찾아라."

"랑그리사... 누굽니까?"

"인간폭탄을 만드는 자."

"....!!"

윈디아의 눈이 커졌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에 증오가 감돌자 운현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년을 찾으면 죽이지 말고 바로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랑그리사는 자신도 찾아야 하지만 윈디아 역시도 찾고 싶어 안달이 난 여자일 것이다. 윈드를 죽이려 한 자인만큼 그녀에 대한 복수심을 잔뜩 가지고 있는 윈디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견한다면 용병 연맹의 아르토리우스에게 알리도록."

"용병 연맹의 아르토리우스라면... 이번에 새롭게 간부가 된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그녀 역시 내게 충성을 맹세한 자다. 또 그녀는 지금 용병 연맹의 맹주가 되려고 하고 있다. 그에 대한 지원도 해주도록."

"알겠습니다."

갑자기 등장해서 단숨에 용병 연맹의 간부가 된 아르토리우스라는 이름은 들은 적이 있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간부 후보들을 모두 쓰러트려 단순 실력만으로 간부가 된 그녀도 이 자의 부하라니. 윈디아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떨떠름히 물었다.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던전 도시를 차지하는 겁니까?"

"그딴 건 관심없어."

그딴 것이라니. 던전 도시를 차지한다면 세계를 차지할 힘을 손에 넣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것을 그딴 것이라고 말한다? 윈디아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야. 그저.... 그저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지."

322====================

운명을 바꾸려는 자

시청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거리를 비춘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밖으로 나온 운현은 터덜터덜 길드 회관을 향해 걸었다.

"하아... 언제쯤이나..."

"음?"

술에 취한 듯한 비틀거리는 움직임, 그리고 잔뜩 잠겨 있는 목소리.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며 걷던 운현은 들려 온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제트잖아.'

혼자서 술이라도 잔뜩 먹은 것일까? '우울함' 이라는 감정 그 자체가 된 듯한 그녀를 보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늘상 마이페이스에 모두에게 조언을 하던 그녀였지만 혼자일때는 저런 모습일까? 바제트가 비틀거리는 것을 보며 운현은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툭."

"응?"

"하... 뭐야? 이 주정뱅이는?"

"딸꾹... 뭐긴 뭐야?"

술병을 들고 비틀거리던 바제트가 길거리를 걷던 세 여인들에게 부딪혔다. 그녀가 부딪힌 것과 바제트의 몸에서 풍기는 술냄새에 여인들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에이 재수없게."

"뭐? 재수없어? 재수없다고!? 내가 재수없는 엘프년이다 이거냐!?"

'꽤나 마음에 상처를 입었나보군.'

항상 괜찮아보이고, 느긋해보였기에 모두에게 버림받는 것에 익숙한 줄 알았는데. 바제트는 화가 잔뜩 난 어조로 여인들에게 소리쳤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인상을 구긴 세 여인 중 덩치 큰 여자는 그녀의 멱살을 잡아챈 후 소매에서 꺼낸 단검을 잡아 다짜고짜 바제트의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헉!"

'이런 씨발!?'

"재수없게 시리. 가자. 오늘은 길드의 미아노님께서 주최하신 연회다. 늦었다간 크게 경을 칠거라고."

"가자."

"큭...헉..."

옆구리에 찔려 있던 단검이 뽑히며 바제트가 무릎을 꿇자 그녀를 찌른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 본 후 피묻은 단검을 바제트의 옷으로 닦아내고 그것을 다시 소매에 넣었다.

"술은 적당히 먹어라. 너같은 년이 앞으로 술 마실 일이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크으..."

옆구리의 고통에 술이 다 깬 것일까? 바제트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했다. 그런 그녀를 싸늘한 눈으로 응시하던 여인은 몸을 돌리고 기겁했다.

"넌... 컥!"

"너 지금 뭐한거냐?"

여인의 목을 한 손으로 잡아버린 운현은 얼음같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목이 꽉 잡혀 숨을 쉴 수조차 없게 된 여인이 고통을 호소하며 자신의 몸을 두들겼지만 운현은 그것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커억...컥..."

"놔! 지, 진짜 죽는다고!"

"놔!!"

그녀의 옆에 있던 두 여인들은 운현의 손에 힘이 들어갈 수록 동료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무기를 꺼내 운현에게 겨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운현의 손에 잡혔던 여인이 거품을 물고 기절해버리자 운현은 그녀의 목을 잡던 손을 놔 준 후 허리의 검을 검집째 뽑아 휘둘렀다.

"퍽! 퍽!"

번개같은 움직임이다. 두 여인의 머리를 빠르게 후려갈겨 두명을 기절시킨 운현은 바제트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자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술은 좀 적당히 마시라고.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왜 그렇게 마셨어?"

"누구..."

고통과 출혈에 정신을 잃기 시작한 바제트는 감기는 눈을 뜨려고 했지만 결국 천천히 눈을 감고 말았다. 그녀가 기절하자 그녀의 몸에 그레이터 힐을 걸어 준 운현은 바제트를 일단 내버려 둔 채 밧줄을 들어 세 여인을 묶어 습기차고 진흙으로 지저분한 골목에 던져 놓았다.

'잠깐 사이에 누가 가져가지는 않겠지.'

바제트를 공격한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일단 인적이 드문 곳이니만큼 발견하지는 못하겠지. 바제트를 길드에 데려다 놓은 후 그들을 단죄하기로 마음먹은 운현은 바제트를 가볍게 안아들었다. 큰 키에 비해 호리호리한 몸매, 그리고 눈물이 날 정도로 평평한 가슴. 곱게 잠들 듯 기절해 있는 바제트의 하얀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던 운현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 보고 싶었어."

"으으음..."

운현의 말을 들은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바제트는 작게 미소지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며 흐뭇하게 웃은 그는 빠르게 뛰어 길드 회관으로 들어갔다. 길드에 들어서자마자 길드 사무소의 길드원에게 바제트를 맡기고 운현은 곧장 그녀들을 숨겨 놓은 곳으로 향했다.

"허."

골목으로 돌아 온 운현은 밧줄이 풀어져 있는 것을 보며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여인들은 없었다. 아무리 운현이 대충 숨겨놨다고 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사라졌다고?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긴가? 잠시 생각하던 운현은 아까 전 그녀가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길드의 미아노가 주최한 연회라고 했어.'

던전 도시에 현재 운현이 알고 있는 길드라고 불리는 것은 총 둘이었다. 모험가 길드, 그리고 암살자 길드. 그렇다면 두 길드 중 하나라는 것인가. 운현은 이 세계에 들어와 처음으로 도적 스킬이 그리워졌다.

"추적술이 있으면 편할텐데... 쩝. 어쩔 수 없나."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운현은 바닥의 흔적을 살펴보았다. 아까 전 그들을 처밖아 놓을 때 진흙이 많은 곳에 던져 놓은 이유가 만약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각기 다른 발자국 중 골목을 빠져나간 발자국을 살핀 운현은 그 발자국이 골목에서 나와 오른쪽, 분수대 광장으로 향한 것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왜 하필 그쪽이냐.'

유동인구가 많은 분수대 광장에서 추적술 없이 그들만을 특정해서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가상현실에서 추적술에 대한 공부와 훈련을 마치기는 했지만 이런 도시에서 추적술을 성공하는 일은 운현으로서도 그리 많지 않았다.

"쩝..."

단서는 길드, 그리고 미아노라는 이름뿐. 그렇다면 지금 운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벌써 써먹게 될 줄이야.'

"......"

"왜?"

"길드라... 던전 도시에 길드를 쓰는 곳이 얼마나 많다고 생각하세요?"

"모험가 길드, 그리고 암살자 길드?"

"그 외에도 비공식적으로 길드라는 이름을 쓰는 곳은 상당히 많아요."

"다짜고짜 사람한테 칼침 놓을 만한 인간이 있는 길드는 어딜까?"

"그런 곳이라면... 한 세군데 정도로 압축할 수 있겠군요."

다짜고짜 찾아와 길드라는 이름을 쓰는 곳, 그리고 미아노라는 사람의 이름. 그것만으로 그 위치를 찾아내라는 운현의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는데. 윈디아는 골치가 아팠는지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은데요?"

"얼마나?"

"만약 시청에 등록된 이름이라면 찾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 길드라는 곳과 미아노라는 자의 이름이 시청에 등록되지 않았다면 찾는 일은 쉽지 않아요. 적어도 일주일은..."

"너무 길어."

"의심가는 곳이 몇곳 있기는 하지만 그곳이라고 확신할 수 없어요. 오늘 암살자 길드에 연회 초청 메시지가 왔거든요. 뒷세계 쪽이라면 조사를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정확히 찾을 필요는 없어. 내가 움직일거니까 대략적인 위치 정도만 잡을 수 있으면 괜찮아. 가장 확률이 높은 곳을 말해줘. 그리고 조사는 계속 하도록 하고. 만약 잘못 잡았다 싶으면 네 정보를 이용할테니 말야."

"그렇다면 일단 뒷세계 쪽의 정보를 드릴게요. 자."

운현을 향해 카드 세장을 건네주며 윈디아는 안경을 밀어 올린 후 차분히 말했다.

"첫번째는 경매인 길드에요. 상인 조합의 방계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불법적인 경매 물품도 다루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몸을 내세우지는 못하고 있어요. 오늘 그들이 연회를 가진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건 투사 길드의 초대장. 이곳 역시도 불법적인 연회가 예정되어 있어요. 연회라기보다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이 역시도 공식적으로는 내세울 수 없는 것이죠. 세번째는 여기. 용병 연맹의 산하 길드라고 할 수 있는 곳이기는 한데..."

"인데?"

"이곳은 별로 관련되고 싶지 않은 곳이에요. 음... 뭐라고 해야 하나."

"뭐길래 그렇게 떨떠름한 얼굴이야?"

암살까지 하는 주제에 윈디아가 관계되고 싶어하지 않는 얼굴을 하자 운현은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의 질문에 윈디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순수의 암살자 길드에요."

"순수의... 뭐? 뭔 암살자 길드...? 너희 길드인가?"

"정확히 말하자면 암살자 길드에서 분화된 곳이죠. 그들은 저희들의 암살이 순수하지 않다고 말하며 떠나갔어요. 솔직히 저희들의 암살이 순수하지는 않거든요. 여기저기의 이권과 관련되어 있죠."

"암살따위에 순수함이 어딨어. 어이없는 놈들이군."

결국은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다. 그것에 무슨 순수를 찾는단 말인가. 운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윈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에요. 결국은 사람 죽여서 돈 벌어먹는 것인데 그것에 대해 순수니 정의니 뭐니. 쓸데없는 의식을 담는 자들이죠. 음... 뭐랄까. 자신들이 죽음을 내리는 사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이득을 위해서 암살을 하는 저희를 무시하고 있지요."

"그런가?"

암살자 길드끼리의 알력다툼에는 그닥 관심이 없었다. 지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든 말든 운현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들을 이용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심드렁한 반응에 윈디아는 입맛을 다신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그들이 꽤 강하다는 것이죠. 의뢰를 받더라도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움직이지 않는 그들이지만 그들이 움직이게 되면 굉장히 집요하게 움직이거든요."

"뭔가 좀 이야기가 찝찝한데."

"그렇죠? 그러니 그들과 관련되지 말..."

"알았어."

"......"

윈디아의 계속되는 만류에 운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모습에 윈디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고 그녀를 향해 운현은 빙긋 웃었다.

'네 속셈은 훤히 보인다.'

운현은 윈디아가 자신을 걱정해서 그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윈디아의 입장에서 운현은 방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무력은 자신이 함부로 건드릴만한 수준은 아니었고 그렇다보니 결국은 윈디아의 입장에서는 골치거리일 뿐 이었다.

"...그거 참 현명한 생각이군요."

"그러게 말야."

"그런데 그 사람들은 왜 찾는 것이죠?"

"아아. 날 좀 짜증나게 만들었거든."

"그런 것이라면..."

"그래도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어깨를 으쓱이며 운현은 윈디아를 향해 느긋하게 말했다. 그런 그의 말에 윈디아는 애써 표정관리를 하는 듯 했지만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운현은 놓치지 않았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그 다른 암살자 길드도 윈디아에게 상당히 골칫거리인 것 같은데. 결국은 이이제이일 뿐이군.'

운현이라는 골칫거리를 이용해서 순수의 암살자 길드를 제거한다. 그 과정에서 운현도 큰 상처를 입고 사라져주면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다. 윈디아가 얄팍한 계략을 쓴 것을 눈치챈 운현은 차분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럼 일단 혹시 모르니 그 셋의 위치를 말해줘. 조사는 해봐야겠네."

윈디아의 계획에 이용당하는 것은 거절이다. 윈디아는 자신이 이용해야 하는 존재이지 자신을 이용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바제트를 공격한 년을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법. 비록 그녀가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녀들을 건드리는 자들을 운현은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 그렇죠?"

"그래. 그러니 일단 내놔봐."

운현의 말에 윈디아의 눈에 회심의 기세가 드러났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운현은 마스크로 가려진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들과 정면 승부를 할 이유는 없지. 그년만 잡으면 되니까.'

운현의 목적은 순수의 암살자 길드가 아니었다. 일단 조사를 해보고 바제트를 공격한 년이 있다면 그년을 잡아 죽이면 되는 것이다. 그의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윈디아는 빠르게 세장의 카드를 그에게 주었다.

"위치가 각각 다른 곳에 있는데 괜찮겠어요? 어떻게 지원이라도..."

"꼬리는 됐어."

"뭐, 도와드리려는 건데 거절하신다면..."

그가 거절하자 윈디아는 입맛을 다셨다. 정말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만 다시 재각인된 채 윈디아는 운현이 나가는 것을 볼 수 밖에 없었다.

"하아..."

"윈디아? 뭐해?"

"아. 언니."

문이 열리고 윈드가 들어오자 윈디아는 쓰게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아직까지 퇴근을 하지 않은 윈디아를 기다리느라 윈드 역시 아직 퇴근을 하지 않았다. 경비대장의 복장이 아닌 평상복을 입은 채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윈디아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혹시 그가 왔었어?"

"예."

"흐으음..."

"왜요?"

"음... 윈디아."

"네?"

"그를 너무 그렇게 미워하지 마."

"...네?"

323====================

운명을 바꾸려는 자

윈드의 말에 윈디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록 운현이 윈드를 구해주기는 했지만 그는 좋아할만한 건덕지가 조금도 없는 사람이었다. 아직까지 그 거검을 들었을 때의 운현이 보인 기운을 잊을 수 없을 정도다. 윈디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윈드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볼을 긁적거렸다.

"아니 뭐랄까..."

"....."

"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예?"

운현은 아무리 봐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로 보였다. 그의 행동, 말투, 그리고 그가 보여준 난폭함. 그 모든 것을 따져봐도 운현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악당' 그 이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니. 그 사람은..."

윈드가 그에게 마음을 품은 것 처럼 보이자 윈디아는 황급히 그녀를 말리려 했다.

"언니가 그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는 것은 그저 착각이라고 생각되요."

"응? 좋은 감정? 아니 좋은 감정같은 것은 별로 없는데."

"그럼...?"

"음... 뭐랄까. 그냥 느낌일 뿐이야. 무조건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논리와 확실한 증거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직감에 따라 움직이는 윈드이기에 윈디아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직감은 대부분 맞아 떨어졌었다. 전투에서도, 그리고 사건에서도. 윈디아가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자 윈드는 빙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북북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저 내 느낌일 뿐이니까 말야. 그리고 이왕 마스터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했는데 기분 좋게 하자구."

"하아. 언니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윈드의 의견에 수용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윈디아는 운현에 대한 경계심을 풀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경계하고, 최대한 의심하여 윈드를 지켜야 한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자기에게 충성을 맹세한 윈드 언니마저도 버릴 수 있는 사람이야.'

윈드의 직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윈디아는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윈드는 애써 웃으며 윈디아의 볼을 꼬집었다.

"너 언니 말 안들을거야?"

"으으..."

"언니한테 혼나기 싫으면 말 들어!"

"우... 알았어요."

'여기 있었군.'

경매인 길드에서 허탕을 치고 검투사 길드에 도착해 하이딩을 걸고 그 안으로 들어선 운현은 초췌한 얼굴로 커다란 저택의 문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 초청이라기보다는 경비원의 역을 위해서 이곳에 온 모양이다. 얼굴 한쪽이 붉은 것이 잡힌 것에 대한 처벌을 받은 듯 보였다.

'아니면 기절한 것을 깨우기 위한 소행일 수도 있고.'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운현이 원하는 것은 검투사 길드도, 이 저택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 여자 뿐 이었다.

'라지만 지금 이년을 데려갈 수도 없고.'

최대한 소동은 피하고 싶었던 운현은 빠르게 뛰어 건물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경비를 하루 종일 볼 수 있는 것은 아닌만큼 교대시간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교대를 하게 된다면 그녀를 잡아 족치면 된다. 하이딩을 풀고 지붕 위에서 그녀를 감시하던 운현은 한시간 정도 지난 후에 그녀의 교대자가 교대를 해주자 씨익 웃으며 하이딩을 걸고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안으로 들어갔나.'

건물의 내부로 그녀가 들어간 것을 본 운현은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저택에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멋드러진 드레스를 입은 미녀들부터 시작해서 갑옷을 입은 경호원, 혹은 정장을 입은 수인족들까지. 많은 이들이 기묘한 열기를 내뿜으며 서 있는 것을 지나치며 그 여자를 찾던 운현은 복도의 끝에서 와인을 잡고 그것을 마시고 있는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이나!"

'이름은 시이나인가?'

"아! 네!! 미아노님!"

"네 차례다."

"예? 하지만 저는..."

"네가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알고 있잖아. 빚을 갚고 싶으면 내 명령을 따라야지."

"...알겠습니다."

"두번만 이기면 되는거야. 두번만. 그럼 네 빚은 모두 탕감될거야."

검은 드레스를 입은 풍만한 가슴의 매혹적인 미녀가 느긋하게 말하자 시이나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빙긋 웃은 미아노가 몸을 돌리자 시이나라 불린 그녀는 미아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뭐해? 빨리 와."

'음... 이를 어쩌나.'

그냥 죽이는 것이라면 단순하게 목을 따고 그냥 가면 되겠지만 운현이 원하는 것은 응징이었지 단순하게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미아노와 함께 시이나가 걸어가는 길은 사람들이 많은 곳 뿐이었다. 그곳에서 자신이 시이나를 납치해간다면 분명히 소란이 일어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일은 상당히 골치아파진다. 입맛을 다시며 운현은 그녀들의 뒤를 조용히 쫓았다.

"어서오십시요. 미아노님."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의 중앙 계단 앞에 도착한 미아노와 시이나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막고 있는 경비병의 인사를 받으며 그들이 열어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와아아아아!!"

"....."

"죽여! 죽여! 죽여!!"

지하실이라기보다는 지하 공동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정도로 지하는 무척 넓었다. 그 지하실의 중앙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있었고 그 안에서 두 여인이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며 미친듯이 싸우고 있었다. 검과 도끼를 든 이들이 서로를 공격하며 피가 터져나오는 것을 보면서 구경하는 이들은 골드가 가득 든 주머니를 들고 흔들고 있었다.

"죽여!!"

"살리나!! 너한테 오만골이나 걸었다고!!"

"죽여!! 물어 뜯어서라도 죽여!!"

"와아아아!!"

"....."

'이건가.'

윈디아가 말한 검투사들이 이런 것이었나. 서로를 죽여가며 자신의 승리를 자신하는 곳. 피와 광기, 안전한 곳에서 타인의 고통을 구경하는 악취미들이 모여 있는 곳.

'딱히 나쁜 공기는 아니군.'

"시이나!!"

"시이나다!!"

"......"

시이나와 미아노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곳에서도 꽤나 유명한 검투사였는지 시이나가 들어오자 관객들은 그녀를 향해 기뻐했다.

"시이나!! 이번에도 제대로 된 단검술을 보여줘!!"

"전에 내장 뽑기 멋있었어!!"

"아아아!! 최고야!!"

"시이나!!"

"....."

자신에게 쏟아지는 광기의 칭찬. 더 많은 잔혹함을 보여달라는 관객들이 외침에 시이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미아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면 되는거야.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지."

"...그를 놔주는 겁니까?"

"흠.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담담한 어조로 고개를 끄덕인 미아노가 손뼉을 치자 검은 정장을 입은 개귀의 수인 둘은 사슬에 목이 묶여 있는 곱상한 사내 한명을 끌고 왔다. 그의 등장에 시이나는 기겁하며 외쳤다.

"말론!!"

"그를 구하고 싶으면 네가 잘 해야지. 안그래?"

"큭..."

"시이나. 나, 날 위해서 그러지마. 넌..."

"...미아노님."

"응?"

"제가 몇번을 이겨야 합니까."

"으음... 글쎄? 이번에는 널 위해서 이런 저런 준비를 많이 했으니까 말야. 세번만 이겨. 세번만 이기면 그를 풀어줄게. 그럼 너는 자유의 몸이 되겠지?"

미아노는 절대 시이나가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이를 갈며 시이나는 전투가 끝난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오오오오!!"

"시이나다!!"

"이번엔 어떤 걸 보여줄거냐!!"

피와 살점, 인간과 몬스터의 흔적들로 더럽혀져 있는 구덩이 안에 들어 선 그녀는 자신의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등장에 관객들이 환호하자 구덩이 위의 진행자는 기뻐하며 외쳤다.

"자!! 여러분!! 오늘은 시이나가 참가했습니다!! 내장뽑기의 시이나! 그녀가 이번에 상대해야 할 상대는 누구일까요!?"

"월렛!!"

"길니아스!!"

"누구라도 좋아!! 누구라도!! 시이나를 이길 수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무패의 시이나! 무혈사신 시이나!!"

"와아아아!!"

'그럭저럭 실력은 있나보군.'

무패라는 이름까지 받을 정도라면 이곳에서 꽤 오랫동안 버텨왔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시이나가 무심한 얼굴로 단검을 꽉 잡고 상대를 기다리고 있을 때 진행자는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무패의 시이나!! 그~!! 상대는!"

"와아아아아!!"

"흑마법사! 블랙 스컬!"

"블랙 스컬!! 블랙 스컬이다!!"

검은 해골을 들고 나타난 빼빼 마른 여인의 등장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시이나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운현은 블랙 스컬이 움직이기 전에 시이나가 움직이자 피식 웃었다.

'적어도 300레벨은 넘는 것 같군.'

"블랙 와인..."

"푹!"

시이나의 손에 들려 있던 단검이 블랙 스컬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것에 맞은 블랙 스컬이 비틀거렸을때 시이나의 긴 다리가 블랙 스컬의 머리를 후려쳤고 그 순간 블랙 스컬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왼팔을 내뻗었다.

"와이어트!"

"큭!"

블랙 스컬의 손에서 뻗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시이나의 몸을 감쌌다. 그 순간 시이나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났고 그것을 놓치지 않고 블랙 스컬은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외쳤다.

"와라! 골렘!"

"우우우...!!"

바닥에 있던 살점들이 모여 하나의 골렘을 만들어내었다. 인간의 크기정도에 지나지 않는 골렘이지만 그 끔찍한 모습에 몇몇 여인들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오히려 그것을 보고 더욱 기뻐했다.

"왔다!! 플래시 골램!"

"죽여! 죽여! 이번에야말로 시이나를 죽이는거다!!"

"와아아아!!"

환호성을 내지르는 이들의 기대에 대응하려는 것일까? 플래시 골렘은 한차례 포효한 후 시이나에게 달려들었다. 플래시 골렘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며 이를 간 시이나는 벽을 타고 뛰어 올라 플래시 골렘을 피한 후 블랙 스컬에게 달라붙었다.

"이년! 떠, 떨어..."

"아득!!"

블랙 스컬의 목을 크게 베어 물고 힘차게 뜯어낸 그녀는 입 안에 가득 들어있는 블랙 스컬의 살점을 우물거리며 씹어 삼켰다. 그녀의 그 공격에 목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은 블랙스컬은 이를 갈며 외쳤다.

"개같은 년!"

"피의 반은 개니까."

무덤덤히 말한 그녀는 단검을 들고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플래시 골렘을 부르기 위해 블랙 스컬이 지팡이를 휘둘렀을 때 시이나는 숨겨둔 단검을 꺼내 한 손에 들었다.

"죽어어엇!!"

"너나 죽어."

플래시 골렘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힐끔 보고 플래시 골렘에게 단검을 던진 시이나는 플래시 골렘이 단검에 맞자 수인을 맺었다.

"퍼엉!!"

"말도 안... 뭐야!?"

단검에 맞은 플래시 골렘의 다리가 터져버린다. 플래시 골렘의 다리가 끊어져버리고 플래시 골렘이 바닥을 구르자 블랙 스컬은 당황하며 시이나를 보았다. 하지만 그 순간 시이나의 단검은 블랙 스컬의 목에 박혀버렸고 블랙 스컬은 단검을 뽑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시이나는 그 단검을 더더욱 깊게 쑤셔 넣은 후 말했다.

"새롭게 무기를 손에 넣었지."

"이..."

"퍼엉!!"

단검을 제대로 박아 넣은 그녀가 뒤로 빠지며 손가락을 튕기자 블랙 스컬의 목에 박혀 있던 단검이 폭발했다. 피와 뇌수, 터져버린 눈알이 바닥에 구르고 블랙 스컬의 몸이 천천히 허물어지는 것을 본 시이나는 다른 단검을 꺼낸 후 진행자를 보았다.

"승자는!! 무패의 시이나!!"

"역시 시이나야!!"

"최고라니까!!"

"아아아악!! 블랙 스컬! 이 씨발년!!"

"플래시 골렘 하나 얻었다고 까불더니!!"

블랙 스컬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져버린 것을 본 관객들이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것에 진행자는 실실 웃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시이나는 당당히 외쳤다.

"자!! 다음은 누구냐!!"

"으음... 블랙 스컬이 이렇게 쉽게 죽을 줄은 몰랐는데요. 어쩌죠? 아직 당신의 상대가 도착하지 않았는데."

"흠. 그럼 누구라도 좋다. 와라!! 누구든지 상대해주겠다!"

미아노가 고개를 젓는 것을 본 시이나는 관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관객들의 가드들 중에 누구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외쳤을 때 운현은 지금이 찬스라고 생각했다.

'이거 공개적으로 제대로 응징을 할 수 있겠군.'

어차피 생사의 여부는 의미가 없는 곳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굳이 그녀를 어렵게 납치해서 처벌을 내리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시합을 빌미로 조져놓는 것이 낫지 않을까? 운현은 비릿하게 웃으며 하이딩을 풀었다.

"내가 상대하지."

"오오오오!! 뉴페이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마스크에... 처음 보는 복장인데? 당신 누구야!?"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는 것에 진행자는 난감해했지만 예상치 못한 등장에 기뻐하며 운현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질문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은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내가 누군지가 중요한가? 지금은 저 무패의 시이나를 꺽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 같은데... 안그렇습니까!?"

시이나가 블랙 스컬을 꺽은 것에 관객들은 흥분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관객석에서 나타난 뉴페이스. 이런 극적인 상황에 관객들은 진행자를 향해 외쳤다.

"누구든지 무슨 상관이야!"

"그냥 해!!"

"하얀 두건!"

"죽여!! 시이나를 죽여!!"

"어때?"

운현은 진행자를 향해 느긋하게 말했다. 어차피 룰 따위는 없는 이 지하 검투장에서 신분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진행자는 빙긋 웃으며 외쳤다.

"무패의 시이나가 블랙 스컬을 꺽은 가운데!! 그녀의 상대를 위해 뉴 페이스가 나타났습니다!!"

"와아아아아!!"

"무패의 시이나!! 그 상대는!"

"....."

"상대는... 음, 뭐라고 할까요? 링 네임이 있나요?"

진행자의 질문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검을 들고 구덩이로 내려갔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그를 보며 진행자는 잠시 난감해하다가 입을 벌리고 크게 외쳤다.

"하얀 사신!! 연방의 괴물!!"

'연방의 괴물은 또 뭐야?'

링 네임 따위 아무래도 좋다. 운현은 느긋한 눈으로 시이나를 바라보았고 그의 시선을 한몸에 받던 시이나는 움찔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설마... 당신."

"오... 날 알아보는건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간 운현은 시이나에게만 자신의 얼굴을 살짝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시이나의 몸이 딱딱히 굳자 운현은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싸늘히 말했다.

"넌 건드려선 안될 사람을 건드렸어."

"그... 그건."

"이제부터 단죄의 시간이다."

324====================

운명을 바꾸려는 자

"자, 잠깐만."

"이런 곳이라면 대놓고 단죄를 할 수 있겠군."

흰 마스크를 쓰고 후드를 뒤집어 쓴 사내의 섬뜩한 눈을 본 순간 시이나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아까 전 자신을 가볍게 제압한 그 실력을 본다면 자신은 이길 수 없다. 아니, 이기는 것은 둘째치고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지 조차도 의문이었다.

"자...!! 그럼 승률은!? 무패의 시이나와 신규 참전한 하얀 사신!!"

마땅히 이름을 밝히지 않아서 연방에서 온 하얀 사신이라고만 말했을 뿐이지만 진행자는 자신의 네이밍 센스에 만족했다. 구덩이 경기장의 둘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것에 관객들이 돈을 걸기 시작하자 운현은 양 팔을 벌리며 느긋하게 말했다.

"자. 관객들이 원하는 것이 피의 축제라면... 그것을 해결해주는 것이 좋겠지?"

"이익!"

"배당이 나왔습니다!! 신인인 하얀 사신이 이긴다면 배당금이 무려!! 7배!"

"하얀 사신!!!"

"연방의 무서움을 보여다오!!"

"무패의 시이나!! 너의 힘을 보여줘!!"

"이번에도 너한테 걸었어!! 지면 죽여버릴거야!!"

"와아아아!!"

관객석에서 텨자나오는 환호성을 들으며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질린 눈으로 응시하던 시이나는 단검을 들었다. 자신에게도 이겨야 할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전력을 다할 뿐. 그녀가 단검을 든 순간 여유로운 포즈를 취하고 있던 운현은 허리의 장검을 천천히 꺼내들었다.

"자. 그럼 시작은..."

"촤악!"

운현의 검이 반원을 그리며 시이나의 가슴팍을 베었다. 가슴에 있는 보호구가 순식간에 반토막이 나버린 것에 시이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관객석이 조용해진다. 무패의 시이나라 불리는 자가 반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에 그들은 당황하며 외쳤다.

"뭐, 뭐야!?"

"저 자식!! 도대체!?"

'맙소사.'

검이 움직이는 것 조차도 볼 수 없었다. 시이나는 봉긋한 가슴에 나 있는 가느다란 붉은색 실선에서 조금씩 피가 베어나오는 것을 보며 절망했다.

"가볍게 가볼까? 일단 굴욕부터 주는게 낫겠군. 감히 건드리면 안될 사람을 건드린 죄값을 치뤄야 하니까... 쉽게는 못 죽을 거다."

'이, 이길 수가...'

상대의 의도를 파악했다. 상대는 아까 전 그가 말했던 것처럼 '단죄'를 위해서 이 자리에 온 것이다. 다른 검투사들처럼 싸우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빌어먹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다. 자신의 온 힘을 다하지 않는 이상,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지 않는 이상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시이나가 이를 드러내며 힘을 모으자 긴장하던 관객들은 다급히 외쳤다.

"시이나!!"

"너한테 일만골드나 걸었다고!!"

"이겨!! 못이기면 내가 널 죽인다!!"

"하아아아압!!"

시이나의 양 손에 들려 있는 단검이 운현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까 전 블랙 스컬을 상대할 때 썼던 폭발 단검인가? 운현은 그것을 가볍게 검으로 쳐냈고 그 순간 단검은 허공에서 폭발해 검은 연기를 만들어내었다.

"펑!! 펑!!"

두번의 폭발, 그리고 그 순간 이어지는 시이나의 낮은 공격. 애초에 단검의 폭발에 운현이 당할 것이라는 생각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은 듯 시이나는 기다렸다는 듯 운현에게 돌진했다. 폭발의 밑에서 그녀는 거미처럼 뛰어 운현의 다리를 베려 했다. 하지만.

"퍽!"

"컥!"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운현의 발은 가볍게 움직이며 시이나의 얼굴을 걷어차버렸다. 회심의 일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너무 쉽게 막혀버린 것이다. 그것에 놀란 시이나는 빠득 이를 갈며 운현을 노려보았다.

'저자. 강한 것 뿐만 아니라... 더러워.'

"뭐냐. 고작 그정도냐?"

자신의 수는 일반적인 검투사들이 쓰지 않는 치졸하고 비열한 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손에 쥐고 있는 흙을 운현이 검으로 가리키는 것을 보며 손에서 흙을 떨어트린 그녀는 빠득 이를 갈았고 그런 그녀를 향해 실실 웃으며 운현은 검을 빙글 돌린 후 다시 가볍게 휘둘렀다.

은색의 검격은 시이나의 견갑을 또다시 박살내버렸고 그녀는 부들부들 뜰며 힐끔 자신의 연인인 말론을 바라보았다. 미아노의 경호원들에게 잡힌 채 당혹스러운 얼굴로 시이나를 바라보던 그는 다급히 외쳤다.

"시이나!! 시이나!!"

"말론!!"

"호오... 저게 네 애인인가?"

"....."

"아니. 뭐 애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지. 저게 네 소중한 사람이라면..."

"무, 무슨 짓을 하려고?"

"아니... 별 건 아니고."

어깨를 으쓱인 운현은 실실 웃으며 자신의 뒤에 있는 말론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킨 후 느긋하게 말했다.

"전투 중 검이나 이 바닥에 있는 파편이 튀어 '불행한 사고'로 저 자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을 뿐이야."

"말론을 건드리면 용서 못해!"

"아. 물론 그러시겠지. 그렇다면 어디 한번..."

눈을 번뜩인 운현은 검을 가볍게 잡은 후 싸늘히 말했다.

"해보시게나."

"허억...헉..."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시이나를 보며 운현은 가볍게 검을 검집에 넣었다. 관객석은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지하 검투장에서도 무패의 칭호를 가지고 있던 시이나다. 그런 시이나가 저꼴이 될 줄이야. 이건 그저 농락이다. 아득할 정도의 실력차이에 시이나는 제대로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의 공격 중간중간에 운현은 시이나가 걸치고 있는 갑옷과 옷을 모두 파괴시켜버렸고 알몸이 된 그녀의 피부 여기저기를 가볍게 포 뜨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하얀 사신!!"

"당신 최고야!!"

그리고 그 정적을 깨버린 것은 하얀 사신에게 돈을 건 이들이었다. 이토록 압도적인 실력차라니. 시이나가 이기는 것이 눈꼴시었던 이들이나 지하 검투장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길 바랬던 이들로서는 기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하얀 사신!! 당신 내 부하가 되라고! 최고로 쳐줄테니까!"

던전 도시의 인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호화스러운 복장을 한 붉은 머리의 여인이 강하게 외치자 그를 구매하고 싶다고 외치는 이들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미아노 역시 마찬가지. 시이나가 운현의 상대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안 순간 시이나의 이용가치는 완전히 없어져버렸다.

"하악...윽..."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시이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비틀거리고 일어난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단검을 쥐었다.

"호오."

"더, 덤벼...!"

"흥."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시이나의 단검을 검으로 쳐내고 운현은 시이나의 볼을 후려갈겼다. 그것에 맞은 시이나가 바닥에 쓰러진 순간 운현은 자리에서 훌쩍 뛰어올랐다.

"죽여!!"

"죽여버리라고!"

"끝장 내라고!! 이렇게까지 하고 끝내려는거야!?"

한번의 도약으로 구덩이 위로 올라 온 운현이 관객석 사이로 걸어가자 피에 취한 관객들은 강렬한 외침을 던져내었다. 그런 그들의 외침을 들으며 운현은 가볍게 숨을 들이마신 후 외쳤다.

"닥쳐!!"

"....."

"댁들이 그렇게 안떠들어도."

"...."

"저 년은 오늘 다 살았으니까."

"우..."

"우와아아아아아아!!"

이런 쇼맨쉽이라니. 진행자는 운현의 행동이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저정도면 충분히 이 지하검투장의 스타가 될 수 있다. 처음 등장함으로서 손님들에게 이정도의 인상을 남길 수 있다면 다른 경기에서는 더더욱 큰 흥행을 보증할 수 있으리라.

"뭐, 뭐야. 나에게 오려고? 좋아!! 네가 얼마든 내가 사주..."

"시끄러워."

성큼성큼 걸어 미아노의 앞으로 간 운현은 미아노가 눈을 빛내며 자신에게 말하자 그녀의 말을 무시한 후 그녀의 옆에 있는 말론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의 시선이 말론에게 닿자 말론은 증오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고 그를 잡고 있던 경호원들은 자신들의 무기에 손을 올렸다.

"퍽! 퍽!"

경호원들을 한방에 날려버리고 운현은 말론의 목을 잡아 든 후 구덩이로 내려왔다. 운현의 손에 말론이 들려 있는 것을 본 시이나는 당황했다.

"컥컥..."

"마, 말론은 왜!! 말론은 아무런 잘 못 없어!! 내, 내가 잘못했다면..."

"아니 원래 세상이란게 말이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시이나의 단검을 들어 올린 운현은 그것의 날카로운 날로 말론의 목을 살짝 긁었다. 말론의 마른 목에서 피가 베어내오는 것을 본 시이나는 다시 일어나 운현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운현의 발차기 한방에 막혀버렸다.

"크윽..."

"아무 죄도 없지만 힘있는 놈의 횡포에 의해서 이래저래 바뀌기 마련이거든."

"...."

"네가 찌른 그 여자도 말이지. 물론 술에 취해서 화를 낸게 그리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말이지. 그래도 칼에 찔릴 정도는 아니었잖아. 안그래?"

"...그, 그건. 내... 내가 사과를 하겠어."

"세상 일이 사과만으로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담담하지만 잔혹한 어조. 운현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말론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운현은 그의 팔에 냅다 단검을 꽂아버렸다.

"아악!"

"안돼!! 안돼! 말론! 안돼에에에에에!! 이 개자식!!"

피가 줄어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시이나는 눈을 뒤집어가며 거품을 물고 달려들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킬킬 웃으며 말론을 뒤로 밀치고 시이나를 잡아 그대로 바닥에 쓰러트려버린 운현은 시이나의 얼굴을 짓밟은 후 인벤토리에서 힐링포션을 꺼내었다.

"자. 넌 아직 살아남아야 해."

"으아아아!!"

"넌 좀 맞아야하고."

"퍽!"

시이나의 몸에 힐링포션을 두병이나 뿌린 운현은 시이나를 위해 자신에게 달려 든 말론을 보지도 않은 채 걷어찬 후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말론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 올렸다.

"자... 그럼 일단 무릎부터 꿇어주실까?"

"...."

운현이 말론의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댄 후 말하자 시이나는 얼른 무릎을 꿇었다. 알몸이 된 채 무릎을 꿇은 시이나를 보며 운현은 말론의 귀에 단검을 가져다 댄 후 아무렇지 않게 긁어내리려 했다.

"콰아아앙!"

"아니 이정도 폭발적인 반응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위쪽에서 들려 온 폭음에 운현은 당황했다. 말론의 귀를 잘라내기도 전에 이런 반응이라니.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폭음이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폭염과 연기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튀어나왔다.

"죽여라."

선두에 선 흑의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그를 따르는 복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들의 공격에 관객들은 당황하며 자신의 호위병들을 움직이려 했지만 흑의인들이 가진 무력이 보통이 아니었는지 경비병들은 큰 저항을 하지 못하고 밀려날 뿐 이었다.

"이런! 하얀 사신! 이봐! 하얀 사신!!"

단상 위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진행자는 당황했다. 이런 큰 장사가 벌어지는 날 이런 개망신이라니. 위의 경비병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그녀는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뻘쭘히 서 있는 운현을 향해 외쳤다.

"이봐!!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테니까 저 작자들 좀 잡아줘!"

"흠. 무척 내키는 제안이기는 하지만."

"흡!"

구덩이 아래로도 흑의인들이 내려왔다. 그들이 자신을 향해,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말론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자 그것을 쳐낸 운현은 검을 움직여 그들의 목을 베어낸 후 어깨를 으쓱였다.

"상황은 일단 지켜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이곳에 들어 오기 전, 그리고 들어와서 하이딩을 걸고 주변을 살필 때 운현은 이곳에 있는 이들의 대화를 통해 이들의 신분이 보통이 아닌 이들만 모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던전 도시의 높은 직위에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각국의 고위층, 돈과 시간은 많지만 할 일은 없는 그런 귀하신 금수저들이 자신들의 썩어빠진 취미생활을 위해 모인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높으신 양반들이 피보고 즐거워하는 거야 내가 알바가 아니지만... 이런 곳을 습격한다?'

두번째 흑의인의 머리를 두개로 만들어 버린 후 운현은 피식 웃었다.

"이거 일이 정말 재밌게 흘러가는군."

이만큼 많은 고귀하신 분들을 공격한 이유가 무엇일까? 납치? 아니면 살해? 그것도 아니면 누명? 아니면...

"아아악!! 시이나! 날 지켜! 날!!"

흑의인들이 미아노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것을 본 운현은 그녀가 다급히 시이나를 부르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시이나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말론은 자신의 손에 잡혀 있다. 과연 시이나가 어떻게 움직일까? 시이나는 운현의 생각대로 미아노를 구하기보다는 말론을 잡고 있는 운현에게만 집중했다.

"시이나!! 이, 이년! 네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쳇!"

빠득 이를 간 시이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움직여 훌쩍 뛰어 구덩이 위로 올라가 미아노의 옆에 서서 그녀에게 접근하는 흑의인들을 공격했다. 운현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 치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이나는 어떻게든 움직이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운현은 힐끔 말론에게 시선을 던졌다.

"얘는 어쩌려고 저기 가서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만."

어깨를 으쓱인 운현은 말론을 들어 올린 후 히죽 웃었다.

"좋은 고기방패 하나 생겼군."

325====================

운명을 바꾸려는 자

"큭..."

말론을 지키기 위해서 미아노에게 왔지만 말론의 생명을 거둘 수 있는 자가 둘이나 되어버리니 시이나로서는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흑의인들의 공격이 매섭기는 했지만 블랙 스컬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하아아아아아!!"

미아노의 허리춤에 있는 힐링포션을 억지로 빼앗아 들이마신 그녀는 병을 내던지고 기합성을 터트렸다. 그녀의 포효에 주변에 돌아다니던 흑의인들은 시이나에게 집중했고 수십의 흑의인들이 달려들었다.

"시, 시이나! 미쳤어!?"

그녀에게 보호를 받는 미아노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달려드는 흑의인들에게서 느껴지는 흉흉한 기세에 미아노가 잔뜩 얼어붙어 있는 동안 시이나는 주먹을 꽉 쥐고 힘을 모았다.

"지뢰진!!"

'격투가였나!?'

단검을 쓰길래 다른 직업인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아까의 포효는 도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운현은 자신에게 오던 흑의인마저 시이나에게 달려가 그녀가 쓴 지뢰진에 맞아버린 것을 보고 감탄했다.

'저런 류의 스킬도 일반인에게 쓸 수 있다는 건가.'

그것이 아니면. 저 흑의인들이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그제서야 운현은 흑의인들의 움직임에 집중할 수 있었다. 확실히 일반적인 사람들의 스킬과는 다르게 그들의 스킬은 몬스터의 스킬과 닮아 있었다.

"흠..."

"컥!"

구덩이를 뛰어 넘어 시이나에게 달려드는 흑의인을 공중에서 잡아 채 바닥에 패대기 친 운현은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흑의인을 짓밟았다. 그의 발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던 흑의인의 머리에 있는 두건을 잡아 챈 운현은 두건 안의 얼굴을 본 후 입맛을 다셨다.

"으라쌰."

"크윽!"

또다시 달려드는 흑의인을 잡아 가슴을 베어 넘긴 운현은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다른 흑의인의 두건도 벗겨내었다.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생긴 얼굴이다. 다른 흑의인도 조사를 해보니 역시 비슷한 얼굴이다. 세쌍둥이가 아니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

"야!!"

더 이상 자신에게 접근하는 흑의인이 없자 운현은 말론의 뒷목을 잡은 채 뛰어 올랐다. 지뢰진을 맞고 쓰러진 이들읰 머리통을 박살내고 있는 시이나를 향해 운현은 당당히 외쳤다.

"한년 두건 까봐!"

"뭐!?"

당장 한놈이라도 더 때려잡아도 모자랄 판국에 두건을 까라니. 운현의 말에 시이나는 이를 드러내며 짜증을 내려 했지만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말론을 본 순간 그녀는 이를 악물 수 밖에 없었다.

"됐어!?"

"좋아."

시이나의 손에 의해 두건이 벗겨진 흑의인 역시 비슷한 얼굴이다. 그것을 보며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잠시 생각하던 운현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폭발로 만들어진 구멍을 통해 검은 날개를 가진 여인이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직도 정리가 되지 않았나. 미토?"

"...닥쳐. 아이돈."

"라닌님께 유물을 받아놓고 아직까지 이정도라니. 역시 네 복제는 쓸모가 없군."

"닥치라고 했을텐데!! 아이돈!!"

'라닌이라. 이년은 진짜 낄데 안낄데 모르고 겁나 껴대는 구만.'

검은 날개를 보아하니 이 흑의인들을 이끌고 온 이들이 다난 교도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라닌. 카야가 데려 온 책략가. 그 책략가의 수작에 의해서 이곳 지하 검투장이 공격받는 것이라면?

'그럼 방해를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

"아직 표적은 살아 있군."

시이나와 경비병에 의해서 꽤 많은 흑의인들이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져버린 것에 입맛을 다시며 새롭게 등장한 검은 날개의 사제. 아이돈은 자신의 장검을 가볍게 꺼떡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이를 간 진녹색 단발 머리의 날카로운 인상의 사제는 단호한 어조로 외쳤다.

"미아노를 죽여!!"

"내,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죄는 많이 졌잖아!"

다짜고짜 자신을 죽이라는 외침에 당황한 미아노는 뒤로 주춤 물러나며 외쳤다. 그녀의 외침을 받은 시이나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여자는 절대 혼자 죽을 여자가 아니다. 만약 이 여자가 죽는다면 말론 역시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미아노를 지켜야 한다.

"흣!!"

이제 남아 있는 흑의인은 스무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들 정도라면 지금 남아 있는 경비병과 자신이 가세한다면 상대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진짜 위험한 것은 저 뒤에 있는 진녹색 머리의 여자와 검은 날개의 사제다. 저 둘을 자신이 상대할 수 있을까?

'부디...'

저들이 나타난 순간부터 하얀 사신이라 불린 이의 눈빛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였지만 저들이 등장하자마자 하얀 사신의 눈빛은 증오와 분노로 바뀌어진 것이다. 부디 저 자가 저들을 상대해주기를 빌며 시이나는 달려드는 흑의인들에게 주먹을 뻗었다.

"하압!"

강렬한 기세를 가진 주먹이 흑의인들의 몸을 날려버렸다. 흑의인들의 손에 들려 있는 무기가 자신의 몸을 스치거나 긁고 지나갈 때마다 피가 터져나오기는 했지만 격투가로 다져진 단단한 피부와 아이언 스킨이라는 스킬 덕분에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던 시이나는 세명의 흑의인이 달려오자 주먹을 당긴 후 날카롭게 외쳤다.

"트리플 스매쉬!"

"퍽! 퍽! 퍽!"

빛과 같은 속도로 주먹이 뻗어나가며 흑의인들의 머리를 부쉈다. 피와 뇌수가 터져나가는 것을 흥미깊게 바라보던 운현은 그 흑의인들의 뒤에 숨어 있던 작은 체구의 흑의인이 뛰어 달려들어 시이나의 몸을 꽉 잡은 것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 안돼!"

"모든 것은... 다난을 위하여."

무언가에 홀린 듯한 목소리. 다른 흑의인들과는 다른 목소리에 체구다. 그렇다면 복제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인가. 시이나는 자신의 몸에 달라붙은 흑의인을 떼어내기 위해서 몇번이나 주먹을 날렸지만 그 주먹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터지면서도 작은 체구의 흑의인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으읏...!"

자신의 몸에 달라붙은 흑의인의 몸에서 점점 붉은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하자 시이나는 당황했다. 불안감. 죽음을 눈 앞에 둔 것과 같은 미칠 정도의 공포. 운현을 눈 앞에 뒀을 때와 마찬가지의 공포에 시이나는 겁에 질린 얼굴로 운현의 손에 잡혀 있는 말론에게 시선을 보냈다.

"말...론!"

"시이나!!"

"사랑...해..."

"안돼!"

"모든 것은 다..."

죽음을 예감한 것일까? 시이나는 살짝 눈을 감았다.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살아갈 수 있다면 말론과 행복하게 살아가겠다. 이런 싸움따위 하지 않고, 작은 시골 마을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시이나가 감은 눈에서 주르륵 한방울의 눈물이 떨어진 순간 시이나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흑의인의 몸에서 새어나오던 빛이 강렬해졌다.

"모든 것은 나를 위해서다."

"서걱."

"...에?"

"다난 같은 소리하고 있네."

죽음이 사라졌다? 시이나는 감았던 눈을 살짝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흑의인의 양 팔과 양 다리, 그리고 목이 잘려나가져 있다. 오체분시 된 시체가 바닥에 툭 떨어지는 것을 본 그녀는 눈물젖은 얼굴로 운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 목숨은 일단 내가 하나 살렸다."

"고, 고맙..."

"그리고... 어이. 아가씨."

"에? 나, 나?"

"너 죽지 마라."

"...아. 네."

상대가 자신에게 반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아노는 잔뜩 주눅들어 그것에 대한 지적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작게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만족한 운현은 기분나쁘다는 티를 팍팍 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다난교의 두 여인들에게 검을 겨눴다.

"에... 실례지만 뉘신지?"

"그러는 너는?"

"누구길래 우리 일을 방해하는거냐?"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하... 죽여."

운현의 시큰둥한 반응에 미토는 남아 있는 흑의인들을 움직였다. 일곱의 흑의인들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을 무덤덤히 바라보던 운현은 검을 당겼다.

"참나. 나도 되게 얕보였나보군."

아까 전 흑의인들을 상대하던 것을 못 본 건지, 아니면 목표물만 잡고 빨리 나가려던 것인지. 운현이 흑의인들을 상대하던 것을 봤다면 이런 식의 돌진따위는 하지 않았을 텐데 미토는 아무렇지 않게 명령했고 운현 역시 아무렇지 않게 반응했다.

"에?"

"우우우웅!!"

두마리의 미믹이 나타났다. 그것을 본 미토와 아이돈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당황했다. 저게 뭐지? 의아해할 새도 없이 미믹은 검은 기운을 흩뿌리며 흑의인들을 공격했고 그 틈을 노려 운현은 빠르게 뛰어 미토에게 돌진했다.

"아, 안돼!"

장검의 날이 번뜩이며 시퍼런 기세를 자신에게 뿜어내는 것을 본 미토는 당황하며 외쳤다. 그런 그녀를 향해 비웃음을 던진 운현은 검을 가볍게 내렸다.

"돼."

"크억!"

오른쪽 어깨죽지부터 왼쪽 옆구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상처가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고통을 호소하며 자신의 손으로 상처를 부여잡으려 했지만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내장, 살점을 막아내기에 그녀의 팔은 너무나도 작았다. 선홍빛의 살점과 내장이 후드득 떨어지는 모습에 다짜고짜 습격을 당한 관객들은 환호하며 외쳤다.

"죽여!!"

"저 개같은 년들!!"

"다 죽여버려!!"

"어. 음. 이런 상황을 노리고 한 건 아닌데 본의아니게 됐네."

지금 상황도 잊고 저렇게 환호하는 것을 보니 정말 저 인간들이 제정신인지가 의문스럽다. 운현은 힐끔 분노와 광기, 그리고 자신들이 공격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 시작되었다는 통쾌함에 취해 열띤 응원을 하는 그들을 향해 떨떠름히 손을 흔들었다.

"와아아!!"

"하얀 사신!!"

"아니... 방금 꺼낸 저 상자는...?"

"상자로 공격했으니까 미믹맨이라고 하자!"

"옷을 보아하니 남자니까!? 그거 좋은데!?"

'이렇게 또 미믹맨이라는 이름이...'

운현이 입고 있는 옷은 남성용 옷이었고 그의 목소리도 남성이었으며 가슴팍이 평평한 것과 드러나 있는 목젖으로 남성임을 추측한 관객들이 미믹맨이라는 이름을 만들어내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식이라도 상관없다. 어쨌든 미믹맨이라는 이름은 알릴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크억!!"

마지막 흑의인의 복부를 꿰뚫어버린 미믹이 꿈틀거리며 다음 사냥감을 찾는 것을 보며 운현은 미믹에게 다가가 그 검은 촉수를 피해낸 후 미믹을 회수했다. 운현이 미믹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 처럼 보이는 모습에 아이돈은 당황하며 검을 들었다.

"네놈...!! 네놈은 누구냐!"

"그건 네가 알바가 아니고... 라닌에 대해서 알고 있나?"

"...."

"아까 분명히 들었거든. 라닌 어쩌고 저쩌고. 아주 좋아. 이것 참..."

고개를 돌려 미아노의 앞에서 말론을 지키고 있는 시이나의 몸을 위 아래로 흝어 본 운현은 빙그레 웃었다. 단죄의 순간이 되어 단죄를 하러 왔는데 이런 기회라니. 카를로스에게서 빼낸 정보에서는 라닌에 대한 것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 여자는? 라닌에 대해서 뭔가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운현은 실실 웃으며 검을 까딱거렸다.

"이렇게 공교롭게 타이밍이 잘 맞을 줄이야."

"하아압!!"

"흥."

검은 날개가 펼쳐지며 빠르게 돌진해오는 아이돈의 공격을 피해낸 운현은 그녀의 뒤통수를 팔꿈치로 후려찍었다. 그것을 간신히 피해낸 아이돈은 검은 날개로 운현의 몸을 후려친 후 뒤로 빠지며 미아노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챙!"

"큭!"

미아노의 단검 투척에 놀란 시이나는 자신의 단검으로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그것에 실린 힘이 자신의 예상보다 강해 공격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겨우 방향만 틀어버린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게 된 시이나가 눈을 번뜩이자 아이돈은 이를 갈며 날개를 펼친 후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건방진 필멸자들 따위가!!"

검은 날개에서 어두운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무심히 바라보던 운현은 무릎을 굽혔다가 피며 뛰어 올라 아이돈을 잡아 그대로 바닥으로 내던졌고 허공에서 추락한 아이돈이 고통에 신음하는 순간 뛰어내린 운현은 아이돈을 짓밟으며 그녀의 머리를 꽉 잡고 말했다.

"쓸데없이 저항하면 귀찮으니까... 그런 애들에겐 이게 특효약이지."

"뭐...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너도 한방 나도 한방. 맞으면 누구나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침투경이 작렬하자 아이돈은 지하 검투장이 떠나가라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끔찍한 비명을 즐거운 BGM 삼아 앞으로의 고문을 생각하던 운현은 자신의 머리를 향해 무언가가 날아오자 고개를 비틀어 피한 후 인상을 구겼다.

"뭐냐?"

"당신은 누굽니까."

"뭐?"

사람들 사이에서 걸어 나온 짙은 흑발의 청초한 미녀. 검은색 정장을 입은 짧은 뾰족한 귀에 적색 단발머리의 미녀는 안경 너머의 붉은 눈을 번뜩이며 싸늘히 말했다.

"어째서 당신이 침투경을 쓰는 겁니까."

"내가 침투경을 쓰든 말든 당신이 알바가 아닐텐데."

"말하시죠."

검은 장갑에 감싸진 주먹을 들어 올린 그녀는 운현에게 주먹을 겨눈 후 싸늘히 말했다.

"침투경은 비인부전의 비기. 그것을 전수해 준 이를 밝히지 않는다면... 침투경의 창시자로서 용서치 않겠습니다."

326====================

운명을 바꾸려는 자

"......"

자신의 앞에 나선 여인을 마주하며 운현은 살짝 눈을 감았다. 과거 자신에게 침투경을 가르쳐 준 것은 필레였다. 그녀가 침투경을 가르쳐 주었을 때의 말을 떠올리며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긴 한데 침투경을 가르쳐 준 선배와 약속했거든. 비인부전. 사람이 아닌 자에게는 가르쳐 주지 말라...]

그 당시 필레는 자신을 믿었고 자신 역시도  악이라기보다는 당장 살아가는데 집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보인 행동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본다면 더할 나위 없는 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지금 상태에서는 숨길 생각도 없고.'

미믹맨의 옷에 하얀 마스크를 써서 정체를 숨길 수 있는 상황인만큼 운현은 자신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여인을 향해 적의를 드러낼 수 있었다. 자신에게 주먹을 뻗은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던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검을 들어 겨누며 말했다.

"비인부전 좋아하네."

"뭐라구요?"

"비인부전? 사람이 아닌 자에게는 전수하지 마라? 그런 말을 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인간을 본 적은 없다만. 그래. 그렇게 고귀한 기술을 창시하신 양반이 왜 이렇게 사람 죽어나가는데 얌전히 계셨나?"

"애초에 쓸어버릴 악이기 때문이지요.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겠나요."

'정말 거슬리는 년이군.'

올곧은 기세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노려보며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확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다. 저렇게 도도한 눈으로 사람을 내리까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저 여자를 짓밟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지금 당장 모험가 길드의 간부를 건드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그렇게 됐다가 상아와 마찰이라도 생긴다면...'

상아와 필레, 그 외에 나머지 여인들과 어느정도 관계를 깊게 하기 전까지 큰 사고는 치면 안된다. 쳐도 그 대상은 모험가 길드와 제작자 연합의 경계 바깥에 있는 대상에 한정해야 한다. 운현은 끓어오르는 속을 참아내린 후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년을 그냥 놔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카를로스 이후 처음으로 찾아낸 검은 날개다. 이년을 고문해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가 만들어낼 이득과 저 여자와 맞부딪혀 생기는 리스크를 생각한다면 지금 어느정도 충돌을 감수하는 것이 나을 정도다.

"음."

"당신 발 밑에 있는 여자를 넘겨주세요."

"이게 누군 줄 알고 넘기라는 건가?"

"다난 교의 핵심 전력이 아닌가요? 검은 날개라면..."

"한가지만 확인하자. 너는 다난교인가?"

"그렇다면요?"

무감정한 얼굴로 말하고 있지만 안경 너머의 그 눈동자에는 증오가 섞여 있었다. 다난교에 대한 친밀감보다는 반감을 더 느끼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서 운현은 피식 웃은 후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말이군. 다난교를 증오하고 있어."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닌 것 같은데요."

"적의 적은 친구라고 하지. 내가 익힌 침투경이 너에게서 파생된 것이라면 어느정도 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일단 협상을 요청한다. 운현이 적대감을 풀고 느긋하게 말하자 그를 노려보던 여인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풀고 운현에게 다가갔다.

"전 비타라고 합니다."

"그래. 난..."

"쩌정!!"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신의 거리 안에 들어 오자 운현은 검을 휘둘렀다. 검날이 아닌 검면으로 비타를 공격한 운현은 그 검면의 공격을 손등의 암가드로 막아낸 비타가 자신의 복부를 향해 손을 뻗자 그 팔목을 잡아챈 후 싸늘히 말했다.

"비인부전을 입에 담은 것 치고는 좀 더러운 것 아닌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갈까요?"

애초에 운현이나 비타나 서로 협상을 통해 대화로 풀어갈 생각따위는 없었다. 기절을 시키든 무력화를 시키든, 어떻게든 아이돈을 서로 확보하려고 기회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만한 것은 둘의 적이 다난교이기 때문에 아이돈이 도망가지 못하게 서로 한방씩 공격을 날린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년은 내가 잡았어."

"그래요? 수고 많았군요. 그런데 어쩌죠? 저도 저 여자를 잡으려고 이 지하 검투장에서 몇일이나 날밤을 샜는데요."

"그럼 아까 나서지 그랬냐?"

"나서려고 했죠. 당신만 아니었으면. 아주 타이밍 잘 맞추시던데요?"

서로를 노려보며 비타와 운현은 으르렁거렸다. 당장이라도 주먹과 검이 날아갈만한 분위기다. 금방 터질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긴장하던 사람들은 힐끔 힐끔 눈치를 보다가 지하 검투장에서 도망가기 시작했고 그것은 미아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어딜."

"도망가."

"하... 진짜."

"당신 정말 마음에 안드는군요."

다난교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다난교가 왜 미아노를 공격하려고 하는 것인지 궁금한 것은 비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운현과 손을 잡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비타는 살벌한 눈으로 운현을 노려보다가 얇은 입술을 드러내며 하얀 송곳니를 번뜩였다.

"정말 죽고 싶은건가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어머... 후후."

"하아... 젠장."

"채애앵!!"

어떻게든 협상으로 넘어가려고 했건만. 운현은 검을 휘둘렀고 비타는 주먹을 움직였다. 둘의 공격이 공중에서 맞부딪히는 소리에 도망치려던 관객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한차례 소란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두 괴물이 서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꺄아아악!"

"저거 뭐야!?"

"하아압!!"

"으랴아압!!"

말로 해서 안되면 몽둥이 찜질 맛을 보여줘야지. 운현의 검은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며 비타의 몸 여기저기를 베어들어갔다. 그 공격 중 치명타만을 피해내며 어지간한 것은 몸으로 받아내던 비타는 운현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맞췄고 그 공격에 운현은 뒤로 몇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하... 보통 분이 아니네... 이거 재밌는데!?"

팔과 몸 여기저기에서 흐르는 피에 더욱 전의가 끓어올랐는지 비타는 주먹을 들어 올린 후 힐끔 바닥을 보았다. 쓰러져 있는 아이돈이 침투경의 고통에서 풀려나는 것을 본 그녀는 양 손을 뒤로 모은 후 운현에게 내뻗었다.

"파동권!!"

"쿠우웅!!"

과거 미야가 썼던 파동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강력한 힘이 실린 기의 구체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운현은 검을 역수로 잡은 후 기합을 넣으며 그것을 베어냈다. 구체가 반으로 잘리며 양 옆으로 튕겨져 나가 벽을 무너트린 순간 비타는 빠르게 뛰어 일어나려하는 아이돈의 턱에 주먹을 날려 기절시켰다.

"이 여자는 내가 데려간다!"

"어이! 말투가 변했는데!?"

가슴에 쩌릿한 충격. 400대 레벨이 넘어가는 이의 공격을 맞은 것은 처음이었던 운현은 만족스러워하며 빙글 검을 돌린 후 단검을 던졌다. 진심 펀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정도 충격이라면 400레벨 정도의 딜러가 하는 공격도 어느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이 된다.

'진심이 된다면 나도 진심이 되겠지만... 아무래도 저 여자도 진심은 아닌 듯 하고.'

일단 복장 자체도 전투복이 아닌 평범한 정장을 입었을 뿐이다. 가지고 있는 장비래야 양손을 보호하는 작은 암가드에 불과한 격투가인 그녀의 현재 상태를 파악한 운현은 비타가 자신의 단검을 손으로 쳐내자 빠르게 돌진해 그녀의 목을 잡고 다리를 걸어 바닥에 쓰러트린 후 다리를 들어 그녀의 머리를 짓밟았다.

"큭!"

물 흐르듯 이어지는 운현의 공격에 맞아 바닥에 쓰러져버린 비타는 머리를 공격하는 운현의 발을 가까스로 피해낸 후 바닥을 굴러 거리를 벌렸다. 아이돈의 소유는 여전히 운현에게 있었다.

"젠장! 그 여자를 내놔!"

"거절이다. 정보를 원한다면 내가 어느정도는 주지. 다난교의 적이라면 나와 뜻을 같이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야."

"그리고 침투경을 가르쳐 준 자에 대해서도 말해."

"그건 거절이다. 아니... 너 지금 누구한테 명령하는거냐?"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원만히 진행하기 위해서 비타에게 진심을 담은 공격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자신의 마음도 생각하지 못한 채 저토록 잘났다는 듯 떠는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하. 진짜."

뒤통수를 긁적거린 운현은 검을 바닥에 꽂은 후 인벤토리에서 거검을 잡았다. 자신의 본 실력을 보여준다면 저 여자도 포기하겠지. 그의 손이 허공의 아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본 비타는 움찔하며 양 손을 들어 올렸다.

"무슨..."

"흡!"

인벤토리에서 거검을 꺼낸 운현은 그것을 그대로 비타에게 휘둘렀다. 아까 전의 공격과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힘이 실린 공격. 양손의 암가드로 막았다간 팔 째로 잘려버릴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 비타는 황급히 크게 뛰어 뒤로 물러났다.

"네놈...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베기 한번 한거 가지고 내 진짜 힘을 모두 파악했다고 생각하나? 자. 침투경 얘기는 관두자고. 네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간다고? 내가 간다. 그러니까 헛소리하지말고..."

힐끔, 운현은 겁에 질린 채 덜덜 떨고 있는 미아노와 시이나, 그리고 말론을 쳐다 본 후 말했다.

"저것들이나 챙겨. 정보 교환은 나중에 하자고."

"....."

이게 그가 양보할 수 있는 최대한이라는 것을 비타는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그걸 떠나서 이 모든 것이 저자의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너는 누구지?"

"지금 그딴게 중요해? 네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저 년놈들을 챙기고 나서 나와 정보를 교환하는 것. 그게 싫다면."

"철컥."

거검의 날카로운 날끝이 자신에게 향해진 순간 비타는 죽음을 직감했다. 만약 여기서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간?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5계층 몬스터들에게 몰렸을 때 조차 느끼지 못했던 압도적인 공포와 살이 떨릴 정도의 무력에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천검자이십니까?"

"아니야."

"......"

지금까지 자신을 이토록 압도할 정도의 무력을 가진 자는 세계 최강의 검사라 불리는, 벽을 넘은 존재라고 불리우는 초인 천검자 외에는 없었다.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인 상아조차도 이정도의 위압감을 보이지 않았었던 것을 떠올리며 세상에 알려진 강자들의 이름을 더듬어간 그녀는 운현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인 후 뒤로 물러났다.

"...일단 받아들이죠. 하지만... 저에게도 물러설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뭐. 또 뭐. 침투경? 아이 씨. 침투경은 신경끄라니까."

"....."

짜증 섞인 그의 말에 비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지그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거검을 인벤토리에 넣고 바닥에 있는 검을 잡았다.

"정 알고 싶으면 내게 필요한 정보를 내놓던가."

"좋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휙 몸을 돌려 미아노와 시이나, 말론을 본 후 주먹을 휘둘렀다. 가볍게 그들을 기절시킨 그녀가 빠르게 밖으로 나가자 운현은 쓰러져 있는 아이돈을 잡아 들쳐 멘 후 단상 위에서 겁에 질려 있는 진행자에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내가 이긴 대가는 못받았군."

"히익!?"

"승리자에 대한 대가가 있는 것 아닌가?"

"그, 그건..."

엄밀히 말하자면 승부가 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저 괴물로부터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

"으라차!"

가볍게 발을 놀려 관객들의 돈을 모아 놓은 커다란 상자 앞으로 간 운현은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은 후 느긋하게 말했다.

"이건 댁들 목숨 값이라고 생각해두지."

"그, 그건 안돼..."

"안된다고?"

"지 않아요. 피, 필요하시면 가져가셔야죠."

아까 전의 행동, 그리고 그의 자비없는 손속. 필요하다면 자신마저도 죽일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에 진행자 뿐만 아니라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던 관객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향해 피식 웃은 운현은 느긋한 걸음으로 바깥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이걸로 당분간 자금이 부족하지는 않겠군.'

아이돈을 데리고 밖으로 나온 운현은 빠르게 뛰어 건물 위로 올라가 자리에서 벗어났다. 아까의 소란 때문에 시청에서 병사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그들을 피해 여기저기로 움직이던 운현은 적당히 한적한 곳에 도착하자 아이돈을 내려 놓은 후 인벤토리에서 캡슐을 꺼내었다.

"자... 즐겁고 신나는 고문..."

"아앗!? 그건!?"

"....."

"당신!! 그게 뭔가요!? 그건... 생명유지 캡슐인데!? 그거 어디서 났어요!? 혹시 그 여자도 악신의 저주에 걸린 사람?"

밝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운현은 슬쩍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건물의 2층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거기었나.'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동했는데 이곳이 그곳이었을 줄이야. 운현은 2층의 창문에 걸려 있는 밧줄을 타고 주르륵 내려 온 파자마 차림의 작은 키의 여인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녀를 향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피스나씨."

"에? 절 아세요?"

캡슐의 프로토 타입을 만든 진짜 천재. 그녀와의 만남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327====================

운명을 바꾸려는 자

"우와... 저랑 똑같은 연구를 하고 계신 분인가요?"

흥미롭다는 얼굴로 캡슐을 바라보는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던 운현은 손을 움직였다. 어차피 이 캡슐은 쓸 일이 다 끝나면 피스나에게 넘길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의 손은 피스나의 머리를 가볍게 후려쳤고 그 공격을 맞은 피스나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후."

툭 쓰러져버린 피스나를 내려다보며 운현은 아이돈에게 다시 한번 침투경을 날린 후 그녀를 캡슐 안에 밀어 넣었다. 캡슐이 작동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동 조정 버튼을 눌러 그녀가 숨기고 있는 모든 정보를 수집하도록 해 놓은 운현은 피스나를 들고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요한인가.'

과거의 만났었던 사내. 자신이 가상현실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남자. 운현은 피스나에게 받은 캡슐과 비슷한 모양의 캡슐 안에서 생명만 유지되고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다가 쓰게 웃으며 창문을 넘어 캡슐로 돌아갔다. 불과 몇분만에 아이돈의 정신은 상당히 무너져내렸다. 그녀가 반복되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정보를 뱉어내는 것을 차분히 보던 운현은 이 정보 속에서도 라닌에 대한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것에 입을 다물었다.

'의도적으로 막아 놓은 것인가.'

카를로스도, 그리고 아이돈도. 교묘하게 정보가 모두 가려져 있었다. 사람의 기억이란 유기적이기에 특정한 기억만을 지운다 하더라도 다른 기억과 기억의 연계가 이루어져 사라진 기억을 재생해 낼 수 있다. 그렇기에 특정 부분만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내뱉어 놓은 모든 정보를 보아도,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흝어 보아도 카야에 대한 것, 라닌에 대한 것. 그리고 다난교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것. 그 모든 것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될 정도로 찾아 볼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콘솔의 화면 안에 보이는 수치를 보며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또다시 원점이란 말인가. 속이 쓰리다.

'다난이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라닌이라는 그 년이 도대체 뭐하는 년인지. 카야는 어디 간건지...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하는데.'

자신의 목적인 운명을 바꾸는 것. 단순하게 생각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현자의 말에 따르면 과거, 수천번의 회귀를 겪어내며 단 한명이라도 살려내기 위해서 모두를 포기하고 생존 확률이 가장 높은 상아만을 살리기 위해 발버둥치던 운현이 발견한 이 세계의 위화감. 그것에서 발견한 돌파구.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중요한 조각이 몇가지 더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난이 가지고 있지.'

이정도 쯤 된다면 라닌이 자신을 엿먹이기 위해서 일부러 조금씩 저들을 보낸다고 생각될 정도다. 운현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피식 웃었다.

"날 알고 있다면 날 직접 공격하면 될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년 역시도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건가."

운현이 막강한 힘을 가진데다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 가짜 신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지만 조직을 이용하고 있는 라닌에 비한다면 책략가의 입장에서는 밀린다고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운현은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 없었기에 그 밀림은 더욱 심하다고 볼 수 있었다.

"정리해보자."

일단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면 첫번째가 그녀들을 지키는 것. 그리고 그녀들을 지키며 만들어지는 운명의 틀어짐을 관측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라닌이 원하는 것은? 카야가 원하는 것은 운현이나 라닌이 쓸데없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운명이 틀어지지 않게, 이 상태의 운명대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닌은 운명대로가 아닌, 오히려 운명에 거슬린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움직임을 마구 보이고 있었다. 카를로스의 죽음, 이 아이돈의 죽음. 그리고 윈드를 죽이려 한 것. 그 모든 것을 종합해보았을 때 라닌은 카야의 부하이지만 카야와는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년도 운명을 바꾸려 하고 있어. 왜지?'

라닌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빌어먹을 운명에 증오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정보가 너무 적다. 일단 상대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인지해야 그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마스크를 내리고 담배를 입에 문 운현은 연기를 내뿜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썅년 하나 때문에 머리 터지겠군."

라닌을 얼른 제거하든, 아니면 라닌이 낀 계획을 만들어 전체적인 방향을 조율하든 해야지 안되겠다. 라닌에 대한 증오와 짜증을 불태우며 담배를 피우던 운현은 캡슐에서 들려 온 소리에 그곳으로 시선을 보냈다.

"다 썼군."

정신적인 고문이라고 해서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돈의 정신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것을 보며 입맛을 다신 운현은 캡슐을 통해 알아낸 정보를 빠르게 갈무리하여 머릿 속에 집어 넣은 후 캡슐에서 아이돈을 꺼내었다.

"으헤...헤..."

정신이 완전히 파괴되어 백치가 된 아이돈이 입술 사이로 침을 질질 흘리며 흐리멍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힐끔 본 운현은 검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날리려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 후에 비타와 만나 정보 교환을 해야 한다. 만약 아이돈을 죽인 채 정보를 내줘봤자 자신에게 어느정도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비타가 모두 믿을리 없으니 그녀를 데리고 가서 고문을 해서 정보를 얻어냈다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구만."

백치가 된 아이돈의 양 팔과 양 다리를 묶은 후 캡슐을 인벤토리에 넣은 운현은 비타와 약속한 곳을 향해 이동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 선 운현은 이미 도착해 있는 비타와 시이나, 미아노, 말론이 자신을 향해 시선을 보내자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너무 심하게 고문을 했나봐."

"....."

입가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멍하니 앉아 있는 아이돈의 모습에 비타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정보를 캐오겠다고 하면서 데려갔더니 사람을 병신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것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한 그의 모습에 이를 간 비타가 주먹을 쥔 순간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능글맞게 말했다.

"자자. 흥분하지 말자고. 얻어내야 할 정보는 모두 얻었으니까."

"모두라... 내가 원하는 정보를 알아냈을지는 모르겠군."

"일단 얘네가 지하 검투장을 습격한 이유정도는 알아냈어. 쟤들 잡으려고 한거야."

"네!? 저, 저는 왜요!?"

"너 밀린 공국의 공녀였냐?"

"그... 걸 어떻게."

"정보를 캐냈다니까."

밀린 공국은 던전 도시에서 마차로 일주일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나라였다. 미야의 부족이 속해 있는 나라이기도 한 그곳의 공녀인 미아노는 당황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를 왜요?"

"아니 보아하니 여기저기서 원한 많이 산 것 같은데..."

"......."

당장 시이나부터 미아노에 대한 적대감이 상당했다. 그것을 언급하며 운현은 느긋하게 말했고 그것에 미아노가 입을 다물자 비타는 운현을 보며 물었다.

"왜 죽이려고 한 걸까요?"

"이 여자를 심문해보니까... 알아선 안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더군. 음... 혹시 이 여자를 본 적이 있나?"

"누구요?"

운현은 레밍의 집에서 보았던 라닌의 얼굴을 종이에 쓱쓱 그렸다. 순식간에 그림을 다 그린 운현이 그 그림을 건네주었을 때 미아노는 그림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입맛을 다셨다.

"어디서 본 얼굴이기는 한데..."

"그래? 그럼 얘는?"

"이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그래?"

그렇다면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가물가물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라면 기억이 나게 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 정신의 안쪽을 잘 뒤져보면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에 운현은 미아노를 향해 빠르게 주먹을 내뻗었다.

"컥!"

턱을 스치고 지나간 주먹에 미아노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툭 바닥에 쓰러져 기절하자 시이나는 눈을 빛내며 운현을 보았다. 운현 정도 되는 강자가 미아노를 죽이려 한다면. 그리고 그녀가 말론을 죽일 수 없다면 그녀가 죽는 것은 시이나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뭘 그리 좋아하냐? 넌 얘들 본 적 없냐?"

"이 여자는 기억이 납니다."

"호오? 그래? 어디서 봤어?"

"두달 전 밀린 공국의 무도회에서 만난 적이 있는 여자입니다. 아마... 귀족 중 한명이었던 것 같은데."

"귀족?"

"네. 저 같은 호위무사로 온 것이 아니라 드레스를 입고 있었습니다. 대화를 나누지 못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아노에게 인사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호오..."

두달 전이라고는 하지만 밀린 공국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인가. 그리고 무도회에 참가할 수 있을 정도 위치의 귀족이라. 운현이 팔짱을 끼고 생각을 하자 비타는 운현의 손에 들려 있는 그림을 본 후 물었다.

"이 여자는 카야와 라닌이잖아요. 당신은 이들을 만난 적이 있나요?"

"아니. 나도 실제로 본 적은 없어."

'카야는 본 적이 있지만.'

비타가 카야와 라닌을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빨라진다. 어쨌든 밀린 공국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미아노의 정신을 뒤져 그녀의 기억 속에서 흔적을 찾아가면 된다.

"당신. 다난교와 무슨 사이죠?"

"뭐, 굳이 말하자면 지금으로서는 좋은 사이라고 보긴 좀 어렵지. 서로 이용해먹는 관계라고 보는게 맞을거야."

"협력... 이라고 봐야 하나요?"

라비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다난교에 상당한 적의를 품고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워워. 그리 흥분하지 말라고. 절대 아니니까. 어떻게 하면 단물만 쏙 빼먹고 찢어발길 수 있을까 하는 사이라는거야. 질문은 끝났나? 그럼 내가 묻지. 넌 다난교랑 무슨 사이냐?"

"다난교와는 별 사이가 아닙니다. 제가 관심이 있는 것은 저 여자. 라닌이죠."

"라닌? 라닌은 왜?"

"해서는 안될 짓을 하는 자이니까요."

"그게 뭔데?"

"운명을 바꾸는 일을 하고 있는 자입니다."

"....."

운명을 바꾸는 일은 운현도 하고 있었다. 그 말은 비타 역시 운현과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운현이 눈웃음을 치며 자신을 바라보자 비타는 그의 웃음을 마주하며 싸늘히 말했다.

"운명은 바뀌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헤에. 운명을 바꾼다라. 그걸 어떻게 알지?"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운명을 알아야 했다. 지금까지 운현이 알고 있는 바로 운명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는 회귀자, 혹은 운명을 읽을 수 있는 하이엘프 하우드 뿐 이었다. 그 외에는 미야의 부족 족장과 다난교 뿐. 자신의 과거를 뒤져봐도 비타가 운명을 읽고 자신을 방해했던 적은 없었던 것을 떠올리며 운현이 묻자 그녀는 그를 똑바로 바라 본 후 말했다.

"스승님의 가르침입니다."

"헤. 스승? 뭐, 혹시 은거하고 있는 현자님이라도 되시나?"

운현의 비웃음 섞인 말에 그녀는 고개를 차분히 가로 저은 후 말했다.

"하이엘프. 운명을 바꾸는 것에 실패하고 좌절하며 매일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는 자. 하우드님이 저의 스승님이십니다."

"....."

그녀의 말에 운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운명을 읽고 운명을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은 운명을 바꾸는데 실패하여 매일 자살을 시도하고 있는 미친 하이엘프. 제니스의 운명의 상대이기도 한 그의 제자라 자칭하는 비타를 가만히 바라보던 운현은 고민했다.

'이걸 죽일까 말까.'

운명을 바꾸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방해하려고 하는 비타는 라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방해인 존재라고 볼 수 있었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검자루에 손을 가져간 운현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운명이 바뀌면 왜 안되지? 까짓거 좀 바뀌어도 되는 것 아닌가? 당장 댁의 스승마저도 운명을 바꾸겠다고 그렇게 자살시도를 하고 있는데 말야."

운현의 말에 비타는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운명이 바뀌고 세계의 흐름이 무너지면 악신이 깨어납니다.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까?"

'모를리가. 내가 원하는 것인데.'

카를로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비타는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악신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스승님의 말씀에 의하면 악신이라 불리우고 있지만 현재 세상에 만들어진 모든 운명은 그 악신에 의해서 구성되어지고 관리된다고 하지요."

"이미 소멸한 것 아닌가? 파르티 교단의 말에 따르면 파르티의 힘에 의해서 악신이 쓰러졌다고 했는데."

"파르티 교단이 파르티를 높이기 위해 떠든 선전문구를 그대로 믿다니... 악신은 소멸하지도, 패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세계의 운명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구성하고 그 관리를 위해서 세계에서 물러난 것에 불과하지요."

"그게 신의 강림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는 건가?"

신은 이 세계에 강림할 수 없다. 위신체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어째서? 가짜 신인 자신은 이 세계에서 머무르며 운명을 마음대로 바꾸고 있는데 이 세계의 가장 높은 존재라 할 수 있는 진짜 신은 왜 강림할 수 없는 것인가. 운현이 묻자 비타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거기까지 알고 계신건가요? 맞아요. 신은 강림할 수 없지요. 신이 강림하는 것은 운명이 틀어져 세계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입니다. 운명을 관리하는 관리자인 신이 강림한 순간... 무너진 모든 운명은 순리대로 흘러가겠지요."

"순리라... 악신이 강림한다면 악신이 원하는대로 모든 것이 파멸한다는 것인가?"

"네. 악신이 강림한 순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존재를 무너트리는 운명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이 세계의 운명은 이미 크게 뒤틀려진 상태에요. 여기에서 좀 더 뒤틀려져 이 세상을 무너트리고자 하는 악신이 강림한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절대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됩니다."

말하자면 비타는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서 운명을 바꾸는 것을 막으려 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옳곧은 시선을 마주하며 운현은 싸늘히 웃었다.

'과연 일이 네가 원하는대로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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