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8/40)

악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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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신

"아하하하핫!!"

쏘아진 화살이 날아가는 것처럼 운현은 당황하고 있는 카를로스에게 돌진했다. 머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검. 그것을 자신의 검으로 막아낸 카를로스는 이를 드러내며 싸늘히 말했다.

"네놈. 단순한 10레벨이 아니구나."

"하! 모험자 카드라도 보여줄까!?"

"경박하긴!"

운현이 이를 드러내며 외치자 카를로스는 가소롭다는 듯 받아치며 왼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붉은 광선이 맺히자 운현은 옆으로 몸을 굴려 그 광선을 피해내었다. 과거 상아와 함께 싸웠던 검을 든 검은 사제와 같은 공격. 그것까지 쓸 수 있는 카를로스를 향해 휘파람을 분 운현은 검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숨겨 둔 한수는 있나보네?"

"뭐하는 놈이냐?"

"나도 몰라! 이새끼야!!"

"채애앵!!"

카를로스를 향해 이죽거리며 운현은 다시 한번 화살처럼 쏘아져나갔다. 공격이 무겁다. 한 손으로 막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생각한 카를로스는 양 손으로 검을 잡고 운현을 튕겨냈다.

"엇쌰!!"

"상정 레벨 이상이라... 신기한 능력이군."

"그래? 이제 더 신기해질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잔뜩 기분이 올라간 운현을 보며 카를로스는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뀐 후 눈을 번뜩였다. 그의 왼쪽 눈이 순간 붉어졌고 그것을 본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단검을 던졌다.

"이까짓거."

"진짜는 이거다!"

단검의 투척공격에도 카를로스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은 채 검을 휘둘러 단검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가 여유있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을 보며 송곳과 단검을 시간차를 두어 던진 운현은 날카로운 단검에 어깨가 베어진 카를로스가 인상을 쓰자 그를 가리키며 기쁜 얼굴로 웃었다.

"하하하하하!! 어떠냐!"

"흥."

고작해야 스친 상처에 불과하다. 독이 발려져 있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카를로스는 안심하며 검을 들어올렸다. 그가 진심이 된 듯 하자 운현도 즐기는 얼굴은 지운 채 무심한 얼굴이 되어 그를 향해 검을 겨눴다.

"네놈. 이계인인가?"

"그건 알아서 뭐하...게!"

"우직."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이 패일 정도로 강하게 진각을 밟으며 운현이 빠르게 쏘아져나갔다. 또다시 다가오는 돌격베기. 카를로스는 이를 드러낸 후 한걸음 옆으로 물러나 운현의 진행방향을 향해 검을 찔렀다.

"치직!"

카를로스의 검이 팔을 스치고 지나간다. 붉은 실선과 함께 고통이 밀려오자 운현은 뒤로 물러난 후 피가 흘러나오는 팔의 상처를 핥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카를로스는 어깨를 으쓱인 후 느긋하게 말했다.

"할 줄 아는 공격은 무식하게 돌진하는 것 밖에 모르나? 이계인 치고는 약해빠졌군."

"이계인 이계인 하지 마라!! 아직 들어 온지 하루 밖에 안됐다고!!"

"흡!!"

운현이 빠르게 다가와 검을 휘두르자 그것을 막아낸 카를로스는 운현의 머리를 노리며 다리를 들어 올렸다. 공기를 찢어발기며 강한 위력이 담긴 발차기가 머리를 향해 꽂히려 하자 운현은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 다리는 그대로 방향을 바꿔 운현의 어깨를 때렸다.

"퍽!"

"큭!"

그것까지는 피하지 못한 운현이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나자 카를로스는 운현을 보며 히죽 웃었다.

"이것 역시 다난의 은총인가."

"뭐?"

"이계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 만약 일년 후, 아니 반년 후에 나와 만났더라면 내가 졌을지도 모르지."

"스르릉."

카를로스는 자신의 장검을 한손에 든 후 허리에 차고 있던 작은 소도를 꺼내 쥐었다. 장검과 소도. 두 자루의 무기를 양 손에 쥔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차분히 웃었다.

"하지만 이계에 오자마자 날 만나게 되다니. 이것 역시 너의 운명인가? 아니면 세계를 지키라는 다난님의 의지인가?"

"뭔지도 모르는 개소리는 저승가서 지껄이시지!!"

카를로스는 운현이 달려오자 무심한 얼굴을 한 채 왼손에 들려진 소도를 쭉 뻗었다. 운현이 공격을 하기도 전 그의 흐름을 끊어버리는 짧은 공격이다. 그것에 놀란 운현이 돌진을 멈추었을 때 오른손에 준비되어 있던 카를로스의 검이 운현의 머리를 노렸다.

"우와! 맞을 뻔 했잖아! 개자식아!!"

"맞으라고 친거다."

운현이 또다시 자신의 공격을 피하자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카를로스는 피식 웃은 후 한걸음 내딛었다. 계속되는 공방 동안 방어만 하던 그가 처음으로 공세를 취하려는 것에 운현은 긴장한 얼굴로 침울 꿀꺽 삼키고 검을 꽉 잡았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큭...!!"

카를로스의 검이 빨라진다. 뒤로 밀려나던 운현이 이를 갈며 검을 크게 휘둘렀을 때 카를로스는 그 공격을 피해낸 후 운현의 머리를 향해 날카로운 찌르기를 시전했다. 하마터면 머리가 꿰뚫릴 뻔한 운현이 바닥을 굴렀을 때 카를로스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검에 마력을 담아 휘둘렀다.

"젠장...!"

공교롭게도 구른 곳 뒤에 미야가 쓰러져 있다. 만약 저 공격을 피했다간 미야가 맞을 수도 있다. 운현은 검을 들어 그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그 순간 운현은 옆구리에 불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저 여자를 구하려고? 우습군. 네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많은 이의 불행을 부르는 것인데."

운현이 미야를 구하려고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것을 보며 카를로스는 천천히 그의 복부에서 손을 빼내었다. 운현의 옆구리에 자신의 소도를 깊숙히 박아 넣은 그는 운현이 자신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허물어지자 뒤로 한걸음 물러난 후 비릿하게 웃었다.

"크헉...크아...!! 쿨럭!"

미야에게 향해진 공격을 막아낸 운현은 자신의 옆구리에 깊숙히 찔린 소도를 한 손으로 잡고 힘겹게 빼내며 피를 토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그가 자리에 주저앉자 카를로스는 어깨를 으쓱인 후 뒤로 물러나 그를 향해 검을 뻗었다.

"의외로군. 저 여자가 너에게 무슨 가치가 있길래 목숨까지 바쳐서 구하려고 하는거지?"

"큭... 가치가 어딨어.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려야지."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이계인인 네가 그렇게 말을 하다니."

"혼자서만... 쿨럭! 알지 말고... 같이 알자고."

"그 전에."

"촤악!!"

카를로스는 만전을 기하겠다는 얼굴로 운현의 가슴을 베었다. 가슴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은 베기에 운현의 얼굴이 파래지며 그가 완전히 힘을 잃은 채 엎드려 헐떡거리자 그를 향해 검을 겨누며 카를로스는 담담히 말했다.

"네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모든 이들에게 위험이다."

"무슨... 쿨럭!! 개소리야..."

죽어가는 어조로 운현은 나지막히 말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카를로스는 잠시 생각한 후 쓰게 웃었다.

"정녕 아무것도 모르는 자란 말인가... 한가지 묻지. 너는 어째서 이세계에 온 것인가."

"내가... 어떻게 알아."

카를로스의 질문에 운현은 힘겹게 답했다. 그의 말에 카를로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팔짱을 끼고 턱을 매만졌다.

"그래서였나."

"무슨..."

"운명에 대해서 알고 있나?"

"......"

운현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카를로스는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죽어가는 그를 위한 마지막 선물일까? 카를로스는 운현의 표정을 보지도 않은 채 자아도취된 얼굴로 말했다.

"이 세계를 지탱하는 섭리,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운명이 존재하기에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고, 운명이 존재하기에 이 세계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삶과 업이 있다. 그것은 운명으로 정해져 있고 그 운명은 누구도 바꿀 수 없다."

"...크..."

"아직 살아 있나? 대단한 체력이군. 하지만 보아하니 그것도 얼마 안남은 것 같은데..."

운현의 손가락이 까딱거리는 것을 보며 카를로스는 어깨를 으쓱인 후 말을 이어나갔다.

"운명은 모두와 엮여 있다. 대륙 끝의 마을에 사는 아이가 뱉은 재채기가 대륙 반대편에 살고 있는 왕을 죽일 수도 있다. 비록 불규칙적이며 우연이라 생각될 지라도 그 모든 운명은 치밀한 인과의 관계로 이어져있고 그 인과를 통해서 운명이 이루어져 세상은 순환하게 된다."

"...그게... 나랑... 무슨..."

"그 운명에 포함되지 않은 존재가 바로 너같은 이계인들이다."

"......."

카를로스는 운현을 죽일 듯 노려보며 말했다.

"너희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인과조차 없는 자들이 이 완벽한 세계에 들어와 운명을 부수고, 인과를 무너트린다. 그저 단순하게 생각하나? 모든 것의 삶과 죽음은 정해져 있다. 아니. 세상 모든 것의 흐름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봐도 된다. 그것을 통해 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지는데 너희 같은 생각 없는 이계의 존재들이 끼어드는 것만으로 그것이 무너져가는 것이다."

"...난... 아무...짓도..."

"과연 그럴까? 네가 이 세계에 들어온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겠지. 그동안 네가 먹은 음식 역시 운명의 순환에 걸려 있는 것이다. 네가 먹어버린 빵 한조각 때문에 누군가는 그 빵을 먹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그가 죽을 수도 있다.

"그건....억측이야...!"

운현이 이를 갈며 고개를 쳐들자 그의 눈을 마주하며 카를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억측이 아니다. 이미 전례가 있거든."

"뭐...?"

"이 세계에 이계인이 들어 온 적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과 즐거움을 위해서 이 세계를 마음대로 들쑤시고 다니며 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꿨다. 운명이 없는 자이기에 운명을 마음대로 바꿔나가게 되지. 그녀는 자신의 뜻을 펼치겠다며 하나의 왕국을 무너트렸고 하나의 종족을 멸종시켰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나? 아니다."

"......"

"그녀가 운명을 바꾸고, 그 바뀌어진 운명을 원래대로 수복하기 위해 세계는 정해져 있는 운명의 고리를 바꾸고, 수정하고, 덮어쓰고."

"...그게..."

"그 과정을 통해 운명은 더이상 복구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래서 세계가 내린 결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그건 바로 세계의 모든 힘을 다해 운명이 없는 존재를 말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될 존재를 없애기 위해서 강력한 의지를 담은 자. 악신 발트아르를 만들어냈다."

"...그게... 그게 뭔..."

"그 이계인은 세상을 바꾸겠다며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수해나갔지. 이계인 특유의 강력한 힘을 이용해서 많은 이들을 감화시키고 많은 존재를 죽여나갔다. 세계의 절반 가까이가 그녀와 관계되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영향력을 끼친 그녀를 제거하기 위해서 악신이 선택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

"멸절이다. 그녀와 말 한마디 나눈 자, 그녀와 손 한번 잡은 자. 심지어 그녀를 남몰래 사모한 자와 증오한 자마저도. 그녀가 만들어낸 문물과 문화를 경험한 자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악신은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많은 이들을 소멸시켜버렸다. 운명의 순환고리에조차 들어갈 수 없도록 그들을 모두 없애버린 것이다. 운명의 안정화를 위해. 이렇게 여자의 수만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세계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난 그런거..."

"안할 것이라고? 하게 될 것이다. 네가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지.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있지. 그것이 나락에 가까운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운명이 없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그 빌어먹을 권리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따르게 된다. 많은 이들이 널 좋아하게 될 것이고, 널 사랑하게 될 것이고, 또 많은 이들이 널 증오하게 될 것이다."

"...쿨럭!!'

한차례 피를 토해낸 운현이 비틀거리자 그를 싸늘히 바라보며 카를로스는 검을 들었다. 제대로 끝내겠다는 듯 그는 검을 운현의 목을 향해 겨누었다.

"네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면 또다시 발트아르가 나타날 것이다. 그 저주받아 마땅한 이계인 여자로 인해서 많은 남자들이 소멸되어버렸다. 많은 가능성이 사라져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네가 이 세계에서 살아간다면... 이번엔 많은 여자들이 소멸되겠지. 난 이 세계를 지킨다. 비록 반쪽밖에 남지 않은 세계라 할지라도 반드시 지켜내고 말겠다."

"쿨럭! 쿨럭!"

운현은 또다시 피를 토하며 기침을 했다. 그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파리해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카를로스는 그의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누구에 의해서 이 세계에 끌려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계인이여. 이제 너의 인생은 여기서 끝이다."

"날... 여기로 데려 온 것이... 누구지?"

"글쎄? 다난께서 보내셨을 수도 있고... 발트아르와 함께 봉인된 파르티일 수도 있겠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신일 수도 있고."

"...그렇단 말이지."

"네놈? 어떻게...!?"

방금 전까지 죽어가던 목소리가 멀쩡해졌다. 그것에 카를로스는 당황하며 빠르게 검을 휘둘렀지만 운현은 바닥에 있는 검을 잽싸게 잡아 그 공격을 쳐낸 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네놈!! 아직도 힘이 남아 있었나!?"

"아아..."

파리한 안색을 한 채 여유롭게 웃으며 운현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가져간 후 천천히 말했다.

"그레이터 힐."

"....!!"

카를로스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그런 그를 향해 멀쩡해진 얼굴로 빙긋 웃은 운현은 느긋한 어조로 조롱하듯 이죽거렸다.

"왜 이계인인 날 죽이려 하는 것인지 궁금했는데... 그런 사정이었나? 그럼 이걸로 퍼즐은 모두 맞춰졌군. 자. 그럼... 다른 것을 물어보도록 할까? 시간도 없으니 특별한 도구를 사용해야겠군."

손에 쥔 검을 휙 바닥에 던져 빈 손이 된 그의 모습에 카를로스는 온 몸에 오한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무기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까 이상의, 온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끔찍한 공포가 느껴진다.

두려움에 질려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그를 향해 키득거린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거검의 자루를 잡고 천천히 당겼다.

"자... 이제 2페이즈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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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신

"여긴...?"

천천히 눈을 뜬 카를로스는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벽과 통로. 석벽과 함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통로다.

"난 분명히..."

이해가 가질 않는 상황. 분명히... 그가 정신을 잃기 전의 상황을 떠올리려고 했을 때 뒤쪽에서 낮은, 하지만 온 몸이 오싹해 질 정도의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크르르..."

"...!"

괴물의 소리다. 그는 긴장하며 허리의 검을 뽑았다. 다행히 가지고 있던 장비는 그대로 있는 모양이다. 한자루 장검에 든든함을 느낀 그가 어두운 통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기겁했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마물들이 합쳐진 듯한 끔찍한 괴물이다. 수백개의 다리를 움직이고 수십개의 팔을 꿈틀거리며 수천개의 눈을 번득인 괴물이 단 하나의 커다란 입을 벌리며 타액을 흘리고 달려오는 것을 본 그는 당황하며 검을 당겼다.

"하압!!"

마력을 모아 스킬을 쓴 그는 자신의 스킬이 발동되지 않는 것에 놀랐다. 검은 그저 허망히 허공을 가를 뿐이다. 무언가 잘못됐다. 무언가 이상하다. 하지만 그 의문을 해소할 여유따위는 없었다. 통로를 꽉 채운 괴물이 자신을 발견하고 빠른 속도로 뛰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수백개의 다리가 움직이며 괴물이 자신 쪽으로 달려오자 그는 공포와 혐오감을 동시에 느꼈다.

"윽...!!"

검은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 오르려던 그는 자신의 몸이 떠오르지 않는 것에 당황했다. 날개를 몇번이나 퍼덕여봤지만 몸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두 다리로 뛰기 시작했다.

"헉...헉..."

괴물의 움직임은 빨랐지만 자신의 몸은 더욱 빨랐다. 괴물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일직선의 통로를 뛰어 도망친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대신 눈 앞의 벽을 보며 절망했다.

"이럴수가..."

아까의 괴물은 명백히 자신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주변을 보며 외쳤다.

"뭐냐!! 아무도 없나!!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있는거냐!!"

"....."

허공에 외칠 뿐이다. 자신의 외침을 받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에 카를로스는 급박함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까 들었던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큭...!"

싸울 수 밖에 없나? 스킬도 쓸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몸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단지 스킬이 봉인되었을 뿐이지 신체의 움직임은 가능했다. 그렇다면...

"크르르...!"

"와라! 괴물아!!"

"으아..."

난전이 펼쳐졌지만 스킬도 쓰지 못한 채 괴물을 이길 수는 없었다. 자신의 검은 부러진지 오래. 맨주먹으로 괴물과 싸우던 그가 수십의 팔에 잡히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었다. 커다란 입이 쩍 벌어진다. 수백, 수천의 어금니로 만들어진 듯한 이빨들이 괴물의 입 안에 있는 것에 카를로스는 붕붕 고개를 저었다.

"이, 이건 정신계 마법의 일종이다!! 이런 일 따위는 없어!! 이런 일 따위는 없다고!!"

애써 현실을 부정하며 그는 강렬히 외쳤다. 하지만 괴물은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카를로스의 몸을 입 안으로 끌어들였다.

"아아아악!! 사, 산채로!?"

차라리 죽인 다음이라면. 저 어금니에 자신의 몸이 잘근잘근 씹힐 것을 생각하니 오한이 돋은 카를로스는 있는 힘껏 외쳤다.

"다난이시여!! 다난이시여!! 당신의 종이..."

"으드득!"

"끄아아아악!!"

필사적으로 다난을 외치며 다난에게 도움을 요청하던 카를로스는 자신의 한쪽 다리가 이빨에 씹히는 순간 다난을 외치는 것도 잊어버리고 비명을 내질렀다. 다리에서부터 치솟아 오른 엄청난 고통, 산채로 괴물에게 자신의 다리가 씹어먹히는 그것을 두려움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카를로스는 맛이라도 보듯, 마치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는 듯 자신의 다리를 야금야금 씹어먹는 괴물을 보며 외쳤다.

"놔!! 놔!! 으아아아악!!"

"찌직...!"

다난에게 받은, 자신의 신앙에 대한 증거라고 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검은 날개가 괴물의 팔에 잡혔다. 카를로스는 날개만큼은 뺏기지 않으려 몸부림을 쳤지만 괴물의 팔들은 카를로스의 몸을 꽉 잡은 채 천천히, 어린 아이가 잠자리의 날개를 찢든 아주 천천히 그의 날개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안돼!! 안돼애애애애!!"

신앙심이 찢어지고, 절망이 몸을 감싼다. 등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 그 고통에 기절할만도 했지만 카를로스는 오히려 점점 의식이 명확해지는 것을 느꼈다.

"싫어!! 싫어어어!!"

"아작...!"

떨어져 나간 한쪽 날개가 괴물의 입 안으로 들어간다. 그것을 절망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카를은 이를 갈며 괴물에게 외쳤다.

"내 신앙심은 나의 것이다!!"

혀를 길게 빼문 그가 혀를 깨물기 위해 입을 다물려는 순간 괴물의 긴 팔이 움직였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팔처럼 길게 뻗어 나온 팔이 카를로스의 입 안으로 들어가 그의 입을 막았다.

"으읍!!"

"아작!"

"으으으윽!!"

입 안이 괴물의 손으로 막혀버리자 혀를 깨물기도 힘들었다. 어떻게든 씹어보려 했지만 괴물의 손만 씹게 될 뿐 이었다. 고무처럼 탄력적인 괴물의 손은 자신의 깨물기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입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으저적. 오독...오독..."

한쪽 다리가 모두 씹혀 사라지고 괴물은 다른 쪽 다리를 노렸다. 이만큼의 출혈량이라면 기절할만도 하지만 괴물의 타액때문인지, 아니면 무슨 효과인지 출혈로 인한 고통은 있지만 정신은 점점 또렷해져갔다.

'이건 꿈이야... 악몽이라고...!'

기절하거나 죽을 수 없는 상황에 카를로스는 미쳐버릴 것 같은 정신을 붙잡았다. 유일한 희망. 이 상황이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하며 카를로스는 자신의 몸이 완전히 괴물에게 씹어삼켜지는 동안 정신을 유지했다.

"헉!!"

정말 꿈이었던가? 눈을 뜬 카를로스는 붕붕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고 절망했다.

"이럴수가..."

아까의 복도다. 아까의 복도에 자신이 서 있는 것에 카를로스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허리의 검은? 아까 전 괴물을 상대하느라 부러졌던 검은 부러진 흔적따위는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멀쩡했다.

"내 다리. 내 날개!"

다리와 날개, 팔과 몸. 여기저기를 확인해 본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았다. 정말 꿈이었구나.

"크르르..."

어두운 통로의 끝에서 공포가 밀려온다. 자신의 몸을 산채로 씹어삼켰던 괴물이 등장한다. 그것을 본 카를로스는 덜덜 떨며 황급히 통로의 끝을 향해 뛰었다. 비록 그 끝에 있는 것이 막혀 있는 벽일지라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고자 하는 그는 절박한 얼굴로 간절히 기원했다.

"부디...부디..."

통로가 막혀 있지 않기를. 이 통로가 계속 이어지기를.

하지만 그의 기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통로의 끝은 딱딱한 벽으로 막혀 있었다.

"아아아아아악!! 아아!!"

절망의 외침이 터져나온다. 검을 들어 스킬을 발동시키며 벽을 수차례 때려보았지만 검은 그저 허망히 단단한 벽에 흠집 정도만 내 놓을 뿐 이었다.

"싫어..."

그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하는건가? 그렇다면...

카를로스는 아까 전 괴물에게 방해받아 실패했던 자살을 결심하고 검을 들어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고 힘껏 찔렀다.

"...어째서?"

분명히 죽었는데? 칼로 목을 베었는데? 왜...?

"왜 또!!"

카를로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서? 분명히 죽었는데 왜 자신이 여기에 다시 있는 것인가. 왜 아까의 그 통로에 다시? 그는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통로의 끝에서 아까와 마찬가지로 괴물의 소리가 들리자 이를 갈았다.

"뭐냐!! 뭐냐! 네놈은!!"

검을 뽑아들고 카를로스는 광분하며 괴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괴물과 맞상대를 하리라. 그렇게 해서 이 지옥에서 벗어나리라. 그렇게 생각한 그는 통로의 끝에 괴물 대신 갈림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혹시...!?"

이 갈림길 중 하나가 괴물이 아닌 다른 곳으로 빠지는 곳이 나오는 것인가? 절망감 속에 한줄기 희망이 내려온다. 카를로스는 끝이 보이지 않는 두 갈림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왼쪽을 향해 뛰었다.

"헉헉..."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때까지 통로를 뛰던 그는 통로의 끝에 문이 보이자 기쁜 얼굴이 되었다. 아까부터 뒤쪽에서 무언가가 쫓아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차마 뒤를 돌아 볼 수 없었던 그는 문을 부수듯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분수대가 있는 작은 방이다. 와인이라도 되는 듯 투명한 붉은색 액체가 아름답게 솟구치는 분수대와 그 앞에 나체로 누워있는 아름다운 미녀 셋. 그녀들은 문을 열고 들어 온 카를로스를 향해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이곳에 사람이 올 줄은 몰랐는데."

"여긴... 여긴 어디냐. 여긴!!"

카를로스는 긴장을 풀지 않고 검을 들었다. 그가 무기를 들고 자신들을 향해 흉포한 외침을 보내자 미녀들은 꺄르륵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 무서운 것은 치우고 우리와 놀아요~"

"남자가 오길 기다렸다구요~"

"놔라!"

끈적한 웃음을 보내며 그녀들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는 힐끔힐끔 문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언제 괴물이 나올지 모른다. 그것에 두려워하던 그는 문이 열리며 긴 팔들이 안으로 들어오자 검을 들고 그 팔들을 쳐냈다.

"빌어먹을!"

"이런 건 필요 없는데."

"사라져주겠어?"

"이곳에 들어 올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사람 뿐이라고."

카를로스를 그토록 공포에 떨게 했던 괴물을 보면서도 여인들은 전혀 두렵지 않은 듯 살랑살랑 걸어 문쪽으로 향했다. 그녀들이 시간을 벌어준다면 다행이지.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덜컹."

팔들을 잡아 문 밖으로 밀어버리고 그녀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어린 아이라도 내쫓듯 괴물을 내쫓아버리고 문을 닫았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를로스는 미녀들이 자신을 향해 생긋 웃자 천천히 검을 내렸다. 말도 안통하는 괴물보다는 차라리 이들이 낫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자 그녀들은 카를로스에게 다가갔다.

"달콤한 향기가..."

"후후. 이건 사향의 향이야."

"어때? 더 맡고 싶어?"

풍만한 가슴을 들이밀며 미녀들이 자신의 몸을 끌어안는다. 그 향기에 취한 카를로스가 살며시 눈을 감았을 때 그는 자신의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몸을 비틀었다.

"아아악!!"

"피다... 피..."

"흐, 흡혈귄가!?"

"피!!!"

괴물을 피해 도착한 곳에 흡혈귀라니. 카를로스는 뒤로 물러나며 검을 들었다. 그런 그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세 미녀는 입술 안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카를로스에게 달려들었다.

"꺼져라!! 이 더러운...!"

"캬아아아!!"

"피!!"

"다, 다난의 뜻이 함께 하리라!!"

"하하하하!!"

"다난따위!!"

높은 지성을 가지고 있는 흡혈귀는 카를로스의 말을 비웃으며 그의 양 팔을 잡았다. 강력한 힘에 의해 자신의 팔이 잡히고 검이 떨어졌을 때 그는 금발의 흡혈귀가 자신의 목을 물어뜯고 피를 쪽쪽 빠는 것을 느끼며 절망했다.

"다난이시여... 어째서..."

다난의 뜻을 따르는 자신이 왜 이런 일을. 어째서 다난은 자신을 구해주지 않는 것인가. 어찌하여 이러한 시련을 주는 것인가. 절망과 고통 속에서 카를로스는 몸 안의 피를 모두 흡혈귀에게 빨리며 죽어갔다.

"아직인가."

카를로스를 만나자마자 그에게 침투경을 날려 무력화시킨 운현은 자신이 개조한 피스나의 가상현실 접속기와 캡슐을 꺼내 그곳에 카를로스를 넣었다. 가상현실을 연구하며 시간 배율마저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던 운현은 카를로스의 정신이 나가든 말든 관심없다는 태도로 모든 리미터를 해제하고 시간배율마저도 10000:1로 조정한 후 연속된 그의 죽음을 실행시켰다.

"생각보다 잘 버티네."

고작해야 몇분 지나지 않았지만 카를로스가 느끼는 그의 시간은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수많은 죽음과 고통, 괴로움. 절망을 겪으면서도 카를로스는 정신이 붕괴되지 않고 잘 버텨나갔다. 차라리 정신이 붕괴되면 좋을 것을.

"....."

"쟤 일어나기 전에 끝내는게 좋은데."

미야가 기절을 한 채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며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자기 손으로 미야를 다시 기절시키는 상황은 어지간하면 하고 싶지 않았던 운현은 힐끔 콘솔 안을 보았다. 수많은 벌레들에게 몸이 뜯기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다난을 부르짖는 그를 보며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뭐, 이걸 버티는 놈은 없었으니까 한번 끝까지 가보자."

309====================

악의 신

"죽...여줘... 이제... 이제..."

죽음의 중간마다 자신의 질문을 던진 운현은 콘솔 안의 카를로스의 정신이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보며 히죽 웃었다. 좀비들에게 살이 뜯어지면서도 고통을 억제하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질문에 답한 카를로스를 바라보던 운현은 자신이 알아야 할 대부분의 것들을 알아낸 후 히죽 웃었다.

'폭탄마 년은 그년이란 말이지...'

동굴의 비밀방에서 얻은 조직도를 보며 운현은 히죽 웃었다. 랑그리사. 다난교에서 검은 날개를 이끄는 대장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여 그들을 인간 폭탄으로 만드는 여자.

그 인간 폭탄에 의해서 미야를 잃었던 운현은 최우선적으로 찢어죽여야 할 자를 체크해 둔 후 가상현실 접속기의 뚜껑을 열었다.

"크억!"

강제적인 종료가 이루어진다. 정신이 반 이상 파괴되어버린 카를로스는 멍한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며 침을 주륵 흘렸다. 최고의 미남이자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연극배우 카를로스답지 않은 그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운현은 가상현실 접속기를 인벤토리에 넣은 후 검을 들었다.

"헤...헤헤헤...헤..."

"툭."

사제복에서 떨어진 것을 본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담배다. 부싯돌과 담배가 바닥에 구르는 것을 보며 운현은 그것을 주워 들었다.

"찰칵."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빨아들인 운현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녀들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시작한 담배의 연기가 폐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을 느낀다.

'쉽지 않겠군.'

현자와의 이야기. 카를로스에게서 얻은 정보. 자신의 추론. 그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운현은 자신의 최종 목표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도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의문이 들 정도다. 그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서 담배연기를 강하게 빨아들인 운현은 거친 기침을 토해내며 담배필터를 꽉 물었다.

"쿨럭! 젠장. 이노무 담배는 진짜 익숙해 질 생각을 안하네."

현실에서 10년 가까이, 가상현실까지 따지면 몇백년이 넘는 시간동안 핀 담배지만 담배 연기는 정말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자신에게 직접 고통을 주는 것을 위해 피기 시작한 담배를 여기까지 와서도 피게 될 줄이야.

"에라이."

"헤에...헤..."

침을 주르륵 흘리는 카를로스의 머리를 향해 운현은 짜증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한계까지 그에게서 빼낼 수 있는 모든 정보는 빼놨으니 이제 그는 필요가 없다. 있어봤자 자신에 대해 알려질 가능성만 높아질 뿐. 운현은 망설임없이 카를로스의 목을 날려버린 후 담배를 던져 바닥에 비벼껐다.

"그나저나 새롭게 등장한 책략가라..."

카야가 데려 온 책략가. 그녀는 카야의 밑에서 그녀를 따르며 많은 책략을 펼쳐 신성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과연 그녀는 누굴까? 세상에 퍼져 있는 신성들을 끌어모을 정도라면 보통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잡아 올 필요가 있겠군.'

최 우선 적으로 잡을 상대, 그리고 반드시 잡아야 할 상대. 그들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우겨 넣은 운현은 넓은 방의 구석에 있는 가방들을 살폈다. 꽤나 많은 이들에게 사기를 친 것인지 자신들의 짐 말고도 다른 이들의 짐이 많았다. 그것들 중에 꽤나 고급으로 보이는 상자를 본 운현은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잠겼나."

잠겨 있는 고급진 상자. 운현은 그것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인 후 검을 휘둘렀다. 철로 된 자물쇠가 부서지 뚜껑이 열리자 운현은 그 안에 들어 있는 브로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비싸보이지는 않는데...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물품 감정 스킬을 익혀두는 건데.'

과거에 한 도적이 자신의 함정으로 사기를 쳤고 그녀에게 물품 감정 스킬을 배우기로 했었는데 그것을 배우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며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 배우면 되지 뭐.'

방에 있는 모든 물품을 챙겨 인벤토리에 싹 넣은 운현은 세상 모르고 기절해 있는 미야에게 걸어갔다. 그녀를 구하느라 많은 정보를 얻었다.

"에구, 이 복덩어리. 사랑스럽기 그지 없구나."

미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그녀를 가볍게 짊어진 운현은 누군가 오기 전에 자리를 떠야겠다 생각했다. 이만큼 깽판을 쳐놨으니 다른 사람이 와서 보면 난리가 나겠지. 느긋한 얼굴로 방을 나선 운현은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오자 한숨을 내쉬었다.

"쩝."

"어...? 어!?"

"굳이 잡을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너... 너, 여, 여긴 어떻게!?"

미야와 자신에게 사기를 친 레빈은 이번에 또 사기를 치는데 성공한 것인지 가방 하나를 들고 복도에 멈춰섰다. 그녀는 운현을 발견하고 창백한 안색으로 무언가 말하려다가 복도에 쓰러져 있는 이들을 보고 바로 몸을 돌렸다.

"히익..."

"푹."

도망치려는 그녀를 향해 운현은 빠르게 단검을 던졌다. 아이라가 죽었던 것처럼 뒤통수에 깊숙히 단검이 꽂힌 그녀가 바닥에 툭 쓰러지자 운현은 느긋하게 걸어 그녀에게 간 후 그 머리에 있는 단검을 뽑아내었다.

"이렇게 편하게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오늘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으니까 자비심을 베풀어주지... 어. 하하. 이게 그런 건가?"

아까 전 카를로스가 멋도 모르고 신나게 떠들어대던 것을 떠올린 운현은 죽어버린 레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자신이 이 세계에 관계함으로서 운명은 꼬이고 만다.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고 죽지 않아야 할 자가 죽는다. 그의 말을 들은지 한시간도 되지 않아 그것이 실천된 것에 운현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하하!! 이거 진짜냐!? 걸작인데..."

살아 있는 한, 이 세계에 존재하는 한 운명은 꼬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환영이다.

"죽어야 할 내 귀염둥이들이 살 수 있다는 거잖아. 이야. 이거 희망이 생기는구만."

다른 이들이 죽는다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어차피 모두가 하하호호 웃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이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의자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난 나의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하겠다. 운현은 자신의 어깨에 있는 미야를 힐끔 본 후 부드럽게 웃었다.

"신이 온다면 신마저도 죽여주지."

"우왓!?"

"오우. 정신이 들어?"

미야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업혀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랬다. 큰 충격을 받고 기절을 했는데...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 운현은 자신에게 업혀 있는 미야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어떻게 된거야?"

"너 한대 맞고 기절했어. 그래도 그렇게 강한 마법사가 아니라서 그런지 쉽게 잡기는 했지만 말야."

"이야..."

운현의 말에 미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가 혼자서 나머지를 처리했다는 것이 아닌가. 보기보다 운현이 강하다는 것을 깨달은 미야는 그를 보며 감탄했다.

"내려줘."

"그러지."

계속 업혀 있는 것도 실례다. 미야는 그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린 후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도움만 받게 됐구나. 미야가 부끄러워하자 운현은 그녀에게 자루를 꺼내어 주었다.

"내 장비는 꺼냈으니까. 이거 맞아?"

"어디... 응!"

"돈도 3골드였지? 다행히 다 있더라."

"휴우...그 여자는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됐을것 같아?"

미야의 질문에 운현은 웃으며 가볍게 목을 그었다. 그의 말에 미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복수까지 그가 해줬구나. 미야는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마워! 초면에 너무 큰 신세를 졌네."

"아니 뭐. 대가를 받고 한 거니까 말야."

"대가?"

"응. 대가."

운현은 미야의 엉덩이 사이에서 솟아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하얀 꼬리를 가리켰다. 그가 자신의 꼬리를 가리키자 그제서야 그의 말이 떠올랐던 미야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어, 어음. 그게."

"싫어?"

"그런건 아닌데... 그, 그래도 조금. 뭐랄까 부끄럽달까."

"헤에... 싫구나. 나는 기껏 이렇게 도와주고 그랬는데 꼬리도 못만지게 할 정도로 싫구나. 알았어."

"으아! 아니야! 그런거!"

운현이 자신의 양심을 마구 찌르는 말을 꺼내자 미야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붉게 물들어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귀엽게 찡그려져 있는 것에 빙긋 웃은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담담히 말했다.

"모험가 길드에 등록할거지? 그럼 나와 파티를 하지 않겠어?"

"에? 괜찮겠어? 너 굉장히 강한 것 아냐?"

"그렇게까지 강한 것도 아니야. 보여줬잖아. 내 레벨은 10이라고."

"아... 그랬지."

"응. 지금 같이 하고 있는 파티원이 있는데 걔도 10레벨이니까 얼추 맞겠다. 어때? 던전에 가려는 거라면 우리와 파티를 하는게 낫지 않겠어?"

"그것도 좋지만 너무 너한테 신세를 지는 것 같은데..."

운현의 제안은 나쁠 것이 없었다. 일단 운현의 실력은 검증된 것이나 마찬가지고 그와 함께 할 정도라면 다른 사람의 실력은 안봐도 훤히 알만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너무 신세를 지고 있다는 정도. 그녀가 고민하는 듯 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그녀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내가 너의 귀인일지도 모른다면서?"

"그, 그건 그렇긴 한데."

이 도시에 와서 크게 신세를 진 사람이다.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고. 아니 보답을 바라기는 했지만 어쩌면 자신에게 더 좋을지도 모르는 보답이니 이것 역시 신세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녀가 망설이자 운현은 웃으며 말했다.

"정 뭐하면 내일까지 생각해봐. 우리는 내일도 던전에 갈거니까. 길드회관 1층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으응..."

미야가 망설이는 것을 보며 운현은 더 권유하지 않았다. 그가 느긋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걸어가자 자신의 짐을 든 채 미야는 멍하니 운현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한숨을 폭 내쉬고 눈 앞에 있는 건물. 자신의 목적이었던 모험가 길드 회관을 보았다.

"파티라..."

'이정도면 됐지.'

더 권유를 해봤자 의미는 없었다. 미야의 마음 속에 자신이라는 존재감을 크게 담아놨으니 이제 그녀는 다른 파티를 들어가도 자신만큼 실력이 있는 이를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리 된다면 그녀는 다시 제안을 했을 때 운현의 파티에 들어 올 가능성이 높았다.

'안들어 온다면 뭐.'

그래도 안들어 온다? 그럼 따로 답이 필요한가? 그냥 다 죽여버리면 된다. 미야와 함께 하는 파티가 생길 때마다 그들을 제거하면 자연스레 그녀는 혼자가 될 것이다. 그리 된다면 다시 그녀와 파티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운현은 무척이나 느긋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갔다.

"운현오빠!"

"오오. 왜 여기 있어? 식사는 했니?"

침대에 앉아서 책을 보던 헤스티아는 운현이 들어오자 쪼르르 달려 그의 앞에 섰다. 귀엽게 방긋 웃는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 운현은 던전에 들어갈 준비를 모두 마친 듯한 그녀에게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 갈까?"

"예! 그, 그리고..."

"음?"

"오. 오늘 있잖아요... 그게..."

헤스티아는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보인 운현은 헤스티아의 볼을 사랑스럽다는 듯 살짝 꼬집고 이마에 입맞춘 후 속삭였다.

"트윈문 축제? 그거 나도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는거니까."

"에헤헤헤헤~~~"

'그리고 오늘 너와 다시 맺어지게 되겠지.'

밝게 웃는 그녀를 보며 운현은 진심으로 음욕이 솟는 것을 느꼈다. 운현이 자신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 방긋 방긋 마주 웃어보이던 헤스티아는 운현이 살며시 자신을 끌어안자 당황했다.

"에? 우, 운현오빠?"

"하하하. 이거 너무 귀여워서 내가 실례를 저질렀네."

"아, 아뇨!! 이런 실례는 얼마든지...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래..."

운현이 자신을 끌어안은 것에 헤스티아도 무지하게 당황했나보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를 내뱉어버린 헤스티아가 부끄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하자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은 후 손을 잡았다.

"자자. 가자고."

"네에...!"

"우와! 이 반지 대단해요!"

"그래?"

"네! 마력이 계속 샘솟는데요!?"

제니스에게 받은 반지를 착용한 상태로 파이어 볼트를 날리던 그녀는 파이어 볼트를 쓴 마력이 순식간에 다시 복구되는 것에 놀라며 운현에게 외쳤다. 벌써 일곱마리의 고블린을 해치웠는데 마력이 부족하기는 커녕 오히려 넘쳐 흐른다. 그리고 높아지만 마력량때문에 한계까지 파이어 볼트에 마력을 담을 수 있어서 고블린도 파이어 볼트 두 세방에 해결할 수 있었다.

"흠... 그럼 슬슬 다른 곳으로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런가요? 음... 고블린 다음은 어디였죠?"

"코볼트. 그 전에 파티원을 하나 더 영입했으면 좋겠다."

"에..."

헤스티아는 싫은 티를 팍팍 내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빙긋 웃은 운현이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헤스티아는 망설이다가 운현의 옷자락을 꼭 잡았다.

"오빠랑 둘이는... 안돼요?"

"나라고 해서 완전한 탱커는 아니니까 말야. 메인 딜이 네가 되고 내가 딜러 겸 탱커 역을 하려면 혼자서는 힘들지."

운현의 거짓말에 헤스티아는 우울한 얼굴이 되었다. 이렇게 멋진 사람인데. 만약 다른 사람이 파티원으로 들어오면 운현에게 반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 모양이다.

"오빠."

"응?"

"저기..."

"왜?"

다른 사람이 파티에 들어와도 저만 바라봐줄 수 있나요? 라는 복에 겨운 소리는 차마 꺼낼 수 없다. 헤스티아는 말하고 싶은 욕망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운현을 향해 베시시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운현은 빙긋 마주 웃으며 생각했다.

'날 독점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미안. 그건 좀 곤란해.'

자신이 사랑해야 할 상대는 헤스티아 뿐만이 아니다. 미야, 바제트, 필레, 상아. 그들 모두 자신에게 한없이 큰 애정과 믿음을 준 사람들이다. 그들 중 하나만 고른다? 그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능력만 있으면 애정은 무한한 법.'

다년간 가상현실게임으로 다져 놓은 하렘의 운영을 떠올리며 운현은 느긋하게 웃었다.

310====================

악의 신

"파이어 볼트!"

"캬아악!"

파이어 볼트에 맞은 고블린이 벌러덩 뒤로 나가 떨어지는 것을 본 운현은 검을 당겨 검집에 넣었다. 이제 고블린 세마리의 공격 정도는 두렵지도 않게 된 헤스티아는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저 레벨 업했어요!"

"축하해. 이제 그럼 11인가?"

"네!"

밝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정도면 됐겠지. 시간을 확인한 그는 고블린 시체들을 마석에 담은 후 헤스티아에게 말했다.

"슬슬 나가볼까?"

"어... 벌써요?"

아직 마력이나 흥분도는 괜찮은데. 하지만 그것보다도 헤스티아는 은근히 모르는 척을 하며 떨떠름히 말했다. 그녀가 만들어낸 아쉬움을 표현하자 운현은 쓰게 웃었다.

"오늘은 트윈문 축제잖아. 안갈거야?"

"아. 그, 그랬죠!? 아이 참. 나도 깜빡하고 있었네~"

허둥지둥 거리며 헤스티아는 밝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피식 웃은 운현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하는 그녀에게 손을 내민 운현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가자. 전투는 나중에 해도 괜찮잖아?"

"네!"

트윈문 축제에 나선 헤스티아는 지금의 상황이 꿈이 아닌가 싶었다. 그와 깍지를 끼고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많은 것을 보고 즐겼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그녀는 커플이 된 사람들이 분수대 광장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작게 탄식을 내질렀다.

"아..."

"왜?"

"아니 그게.. 짝을 이룬 사람들만 들어 갈 수 있는 곳이거든요. 음악 들리시죠? 이곳에서 춤을 춘 후에 서로 목걸이를 선물하고 함께 돌아가 동침을 하는 것으로 트윈문 축제에서 짝이 되었다는 것을 선포해요. 모르세요?"

"알지."

'네가 이야기해준건데.'

부럽다는 듯 분수대 광장으로 들어가는 커플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는 헤스티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운현은 그녀의 손을 끌고 분수대 광장으로 향했다. 설마 그가 여기까지 해 줄 줄은 몰랐던 헤스티아는 당황하면서도 기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아가씨. 한곡 어떠십니까?"

분수대 광장에는 많은 커플들이 있었다. 그들이 즐겁게 춤을 추는 것을 보며 운현은 헤스티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능숙한 예법을 보이는 그를 보며 헤스티아는 기쁨에 살짝 눈물을 글썽거리고 밝게 외쳤다.

"네!"

약간 느리다 싶을 정도의 왈츠의 박자를 맞추며 운현은 헤스티아를 리드하며 가볍게 스텝을 밟았다. 그의 능숙한 춤 실력에 헤스티아는 놀랬다. 야인들은 대부분 이런 춤에 익숙하지 못한데, 그는 주변의 커플들이 춤을 추는 것을 몇번 본 것만으로 가볍게 자신을 리드할 정도가 된 것이다.

"알고 있던 춤이에요?"

그의 품에 안긴 채 가볍게 턴을 한 헤스티아는 운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자신이야 마법학교에서 교양수업으로 댄스를 배웠지만 야인 모험가인 운현이 이렇게까지 잘 알 수 있을까?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이정도는 기본이지."

"헤헤헤..."

못하는게 없다. 운현의 자신만만한 말에 더더욱 그가 좋아진 헤스티아는 음악이 끝나가는 것을 듣고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한곡 더?"

"좋아요!"

즐겁다. 너무 오래간만에 춤을 추는 것이. 아니, 이 순간을 운현과 즐기는 것이 너무나도 즐겁고 행복하다. 헤스티아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와 춤을 즐겼다. 한곡의 음악이 끝나고 나서야 헤스티아는 땀을 흘리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뒤로 물러났다.

"헥헥..."

"하하하. 지쳤어?"

"네에..."

"자. 물."

"고마워요."

땀을 흘리며 지친 기색을 드러내는 자신에 비해 운현은 땀 한방울도, 그리고 거친 숨결 한번도 토해내지 않았다. 무척이나 여유로워보이는 그의 모습에 헤스티아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운현을 보며 물었다.

"오빠."

"예. 아가씨."

"아이 참~"

"하하하. 왜?"

아무리 날씨가 좋다지만 이만큼 땀을 흘리고 찬 밤공기를 맞으면 감기에 걸릴 수 있다. 운현은 자신의 망토를 벗어 헤스티아에게 둘러주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헤스티아는 잔뜩 기대감을 담은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오빠."

"왜?"

"...이거. 받아 주실 수 있어요?"

운현이 오늘 나간 사이 시장에서 있는 돈을 다 털어 산 목걸이다. 서로에게 목걸이를 교환하며 애정을 확인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동침을 하는 것으로 짝이 되었다는 것을 선포한다. 헤스티아의 고백이나 다름없는 선물에 운현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빠?"

늘상 즐겁고 상냥하게 웃던 운현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던 표정. 자신이 잘못본 것인가 싶었던 헤스티아는 눈을 깜빡이며 그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잘못 본건가?'

운현의 얼굴은 여전히 상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잘못 본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잃었던 사람들이나 지을 법한. 전쟁통에 모든 재산과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서나 볼 법한 표정을 운현이 짓겠는가. 헤스티아는 애써 방금 전 자신이 본 운현의 얼굴을 지웠다.

"오빠?"

"아아. 음... 걸어줄래?"

그의 말에 헤스티아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색 초승달 모양의 장식이 걸려 있는 목걸이. 그것의 고리를 풀어 운현의 목에 걸어 준 헤스티아는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목걸이를 보고 방긋 웃었다.

"역시 잘 어울려요!"

"음. 그리고 나도."

"에!? 지, 진짜!?"

"뭐야. 싫어?"

운현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자 헤스티아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예뻐하고 있지만 그게 진짜란 말인가? 그녀는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너무 좋아요!"

"그럼 받아줄거지? 자. 눈 감아."

"네에!"

헤스티아가 눈을 감자 운현은 목걸이를 꺼내었다. 과거 그녀에게 선물해줬던 목걸이다. 그녀가 죽었을 때 챙긴 목걸이. 그것을 다시 채워주게 된 것에 운현은 가슴이 아려왔다.

'이번에는 다시 안챙겨.'

헤스티아와 맞이하게 된 두번째 트윈문 축제. 다시는 그녀를 놓치지 않겠다. 운현은 살며시 눈을 감은 헤스티아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준 후 그녀의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자신의 손길에 헤스티아가 움찔했을 때 휴식을 마친 악사들의 음악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에 살짝 눈을 뜬 헤스티아는 운현이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자 침을 꿀꺽 삼키고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그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감싼다. 그녀는 다시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헤스티아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어찌나 긴장을 한 것인지 그녀의 몸이 딱딱히 굳어 있는 것을 느끼며 운현은 살며시 헤스티아에게 키스를 했다.

"아아아..."

입술과 입술이 닿는 정도에 불과한 짧은 입맞춤. 그것이 끝나자 운현은 그녀를 꽉 끌어안은 후 속삭였다.

"넌 내거야."

"으... 네에..."

선언하듯 그가 말하자 헤스티아는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허리를 감은 힘이 너무 강해 숨이 막힐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스티아는 불편함보다는 기쁨에 숨을 쉬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다.

"그럼 갈까?"

"네에...?"

아까의 입맞춤만으로, 그리고 아까의 강렬한 포옹만으로도 거의 정신을 놔버린 듯한 헤스티아는 운현의 말에 멍하니 되물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피식 웃은 운현은 헤스티아의 이마에 살짝 키스해주었다.

"트윈문의 마지막은 동침이라면서?"

"우... 그, 그렇죠."

"싫어?"

"그런건 아니에요! 절대! 기, 기대하고 있다구요..."

"그럼 좋네."

"으..."

운현은 헤스티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의 손길에 어쩔 줄 몰라하던 헤스티아는 운현이 자신의 손을 잡자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갈까?"

"....."

"오늘 밤은 안재울 거니까 말야."

"처, 처음이니까 살살 부탁드려요..."

"아하하하. 알았어. 너무 걱정 말라고."

"우우우..."

무척이나 여유로워보이는 운현에 비해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억울하다. 헤스티아는 운현을 쭉 째려보았지만 그의 시선에 그것은 금방 풀려버리고 말았다.

"...힝."

헤스티아와 손을 잡고 느긋하게 걸어 길드에 도착한 운현은 그녀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선 운현은 헤스티아에게 잠시 나갔다 온다 말한 후 길드 밖으로 걸어나왔다.

"나와."

"...말씀하신대로 간부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수고했다."

트윈문 축제를 즐기기 위해 밖에 나갔을 때부터 아르토리우스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던 운현은 그녀가 길드까지 따라 들어오려 하자 일부러 밖으로 나와 그녀와 만났다. 운현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낸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을 간절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번째 할 일. 다음 시장 선거에 현 연맹장인 티르빙이 출마한다고 했던가?"

"티르빙은 지금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왜?"

"용병 연맹 내부의 간부들이 티르빙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민, 그리고 라그라시아. 미니아스. 이 셋이 주축이 되어 티르빙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호오. 그래서?"

"다른 간부들은 모두 중립을 택하고 있습니다. 티르빙이 지난 전투에서 용병 연맹에 큰 손실을 입혔다는 것 때문에... 아마 티르빙은 연맹장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될 것이고 바민이 다음 연맹장을 노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

바민이라. 그녀가 다난교도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모험가 길드를 공격하기까지 했었다. 무감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르토리우스를 향해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지시했다.

"다음 연맹장이 되라."

"예? 하, 하지만."

"뭔가 문제라도?"

"그게..."

운현의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머뭇거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맹장이라는 자리는 그저 실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모두를 따르게 할 수 있는 인망, 그리고 지략, 거기에 행정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것까지. 운현에 의해 위신체가 됨으로서 강력한 힘을 얻었지만 그녀가 얻은 것은 그저 힘에 불과했다. 하급 용병이었던 자신이 그런 지식과 지혜가 있을리 없었기에 아르토리우스는 무리라는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저는 힘듭니다."

"내가 도와주지."

"예? 하지만..."

오늘 그와 함께 다니던 헤스티아를 떠올리며 아르토리우스는 머뭇거렸다.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운현과 잘 맞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과는 다르게. 그저 운현이 목적을 위해서 되살려낸 자신과는 다르게...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에서도 운현은 자신을 헤스티아에게 했던 것처럼 아끼고 상냥하게 대해주기보다는 무감정하게 대했던 것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바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뭐, 널 위한 일이 날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어떻게든 짬을 내야지."

그의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살짝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말은... 운현이 자신에게도 관심을 보인다는 것인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아르토리우스는 간절히 운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가르침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매일은 힘들고 이틀에 한번씩 이 시간에 이곳으로 와라. 너라면 빠르게 배울 수 있을거다."

"제가...요?"

"그래. 너라면 가능할거다."

신뢰감이 가득 담긴 그의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위신체가 된 이후로, 아니 위신체가 되기 전부터 하루하루 전쟁과 전투만으로 살아오던 자신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한다.

"저... 운현님."

"뭐지?"

"저는... 운현님께 있어서 어떤 존재입니까?"

"현재로서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

자신이 만든 위신체이며, 과거의 기억을 생각해도 자신의 가장 강력한 협력자였다. 현자가 없는 이상 연인들을 제외하고 그녀 이상으로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운현이 담담히 말하자 아르토리우스는 위신체가 된 후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기뻐요."

"그런가?"

그녀의 순수한 미소. 그것을 본 운현은 과거의 아르토리우스를 떠올렸다. 항상 저 미소를 짓고 있었지.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 저 미소로 가면을 만들어왔지.

'나처럼... 아니, 나 역시 그녀의 미소를 보며 가면을 만든 것이니.'

"표정 좋네."

"네?"

"그 웃는 얼굴. 보기 좋아."

"에..."

운현의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거울을 들었다. 거울 안의 자신이 생글거리는 것을 본 그녀는 살며시 운현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보, 보기 좋으시다면 언제나 이 미소를 짓고 있을게요."

"그래. 웃음은 상대방의 방심을 부르니까. 가장 먼저 네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웃을 수 있도록 표정을 관리하는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틀 후. 이곳에서 만나도록 하지."

말을 마친 운현이 몸을 돌리고 가버리자 아르토리우스는 살짝 손을 들어 그를 부르려다가 조심스레 손을 내렸다.

'지금의 나는 그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 상태야.'

연맹장이 되라고? 운현이 말했으니 한다. 그가 시킨 이상 어떻게든 그 명령을 완수하고야 말겠다. 아르토리우스는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따뜻함에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311====================

악의 신

"다녀오셨어요?"

불이 꺼진 방에서 달빛을 받으며 헤스티아는 이불 속에 들어간 채 운현을 맞이했다. 그녀를 향해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린 후 물었다.

"왜 이불을... 아하."

"우..."

이불 사이로 살짝 드러나 있는 맨 어깨를 본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에 헤스티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고 그녀를 향해 웃으며 운현은 갑옷을 벗었다. 그가 셔츠와 바지만 입은 채 다가오자 헤스티아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오빠..."

달콤한 목소리. 하지만 두려움이 담겨 있는 목소리다. 운현은 그녀의 깨끗한 이마에 키스한 후 도톰히 내밀어진 작은 입술을 빼앗았다. 저항없이 자신의 입술을 받아들이는 헤스티아의 사랑스러움에 욕정이 치솟는다.

"꺄악... 부, 부끄러워요."

이불을 걷어내자 헤스티아는 부끄러워하며 살며시 시선을 피했다. 침대에 앉아 있는 그녀의 갈색 피부가 달빛이 비추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요?"

"응? 아냐."

수없이 많은 세계를 지나며 많은 여인들을 안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단 한번도 두근거린 적이 없었는데 어째서. 그토록 기다려왔던 순간이 온 것에 운현은 침대에 앉아 그녀를 살며시 끌어당겨 안았다. 몸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몸이 파르르 떨린다. 그녀의 나긋한 등을 천천히 쓰다듬은 운현은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맞췄다.

"쭈릅..."

아까와 같은 짧은 키스가 아닌, 타액과 타액을 교환하는 짙은 입맞춤이 시작된다. 능숙한 운현의 혀에 비해 헤스티아의 작고 얇은 혀는 서툴기 그지 없는 움직임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아아..."

달빛이 비춰진 은색 실이 길게 늘어지며 톡 끊어진다. 몽롱한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던 헤스티아는 그가 자신의 얼굴 여기저기에 키스하자 간지러웠는지 작게 키득거렸다.

"오빠..."

달콤히 녹는 듯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헤스티아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그의 셔츠를 잡았다. 어떻게든 벗겨보려는 듯한 그녀의 딸리는 손에 맞추어 몸을 움직여 준 운현은 헤스티아가 자신의 반나체를 보자 깜짝 놀라며 눈을 꼭 감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남자 몸은 처음봐?"

"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마법학교에는 남자가 없었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어울린 적은 없었으니까."

"그거 영광이군."

그녀의 첫번째를 가져간다는 것이 기분이 좋았던 운현은 침대에 걸터 앉아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맨살과 맨살이 닿는 기분이 좋다. 가슴에 닿는 말캉한 가슴과 오똑히 서 있는 유두의 딱딱함이 자신의 가슴을 간지럽히자 운현은 다시 그녀에게 키스를 하며 그녀를 눕혔다.

"오빠..."

그저 운현을 부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와 손을 꽉 마주 잡은 채 헤스티아는 운현이 자신의 위를 덮치는 것을 받아들였다. 진한 키스. 그 후 강아지처럼 자신의 핥는 것에 작게 미소지으며 상냥히 그를 끌어안아 준 헤스티아는 운현의 목덜미를 살짝 깨물고 쪽쪽 빨며 자국을 남기자 간지러움과 동시에 은근한 쾌감을 받았다.

"아흣..."

"쪽... 핥짝."

운현의 타액으로 목이 번들거린다. 그의 타액이 닿는 부분이, 그의 혀가 닿는 부분이 화끈거릴 정도다. 심장은 이미 터질 것처럼 미친듯이 요동치고 있다.

"...."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헤스티아는 운현의 손이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잡자 움찔 몸을 떨았다. 짜릿한, 지금까지 느껴 본 적없던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에 움찔거리던 헤스티아는 그 손이 자신의 가슴을 부드럽게 모아 잡으며 주무르자 부끄러운 듯 멋쩍게 웃으며 속삭였다.

"조, 좋아요?"

"응. 탄력적이고 딱 손에 맞아서 좋아."

"기쁘네요..."

방긋 웃으며 헤스티아는 운현의 자신의 가슴을 즐기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한 손으로 왼쪽의 가슴을 주무르며 그의 입술이 탱글거리는 가슴을 쪽쪽 빨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 쾌감에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밤공기가 싸늘한데도 몸에서 땀은 주륵주륵 흘러나온다.

긴장, 쾌감,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분. 그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어우러져 온 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헤스티아는 숨을 헐떡거렸다. 가랑이 사이의 계곡이 질척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길고 매끈한 다리가 벌어지고 그 사이로 운현의 몸이 들어오자 헤스티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읏...흣... 아, 아파...!"

운현의 손이 유두를 본격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한다. 딱딱히 솟은 오독한 유두를 꼬집고, 비틀며 꾹 누르는 등 마음대로 장난을 치듯 괴롭히자 헤스티아는 고운 미모를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고통보다는 쾌감이 더욱 강하다. 약한 고통 이후 찾아오는 쾌감에 그녀는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키, 키스해줘요."

"음."

자신의 마른 입술을 벌리며 헤스티아는 운현의 타액을 애타게 찾았다. 오랫동안 사막에 있었던 여행자처럼 그의 타액을 정신없이 빨아마신 헤스티아는 그의 양 손이 가슴을 꾹꾹 애무하는 것에 키스를 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쪽... 흐읏..! 으!?"

유두를 어루만지던 손이 천천히 내려간다. 군살을 찾아보기 힘든 배를 쓰다듬고, 앙증맞은 배꼽을 살짝 건드린 그의 손이 자신의 수북한 음모를 쓰다듬자 헤스티아는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거, 거긴..."

"싫어?"

"...아뇨. 오빠. 그런 건 반칙이잖아요..."

운현의 말에 헤스티아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투덜거렸다. 그런 모습조차도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마치 달의 요정처럼 반짝거리는 그녀의 입술에 쪽 입맞춰 준 운현이 천천히 몸을 내리자 헤스티아는 살며시 손을 내려 자신의 고간을 가렸다.

"가리지 마."

"그치만..."

"네 몸 중에 이상한 부분은 하나도 없으니까."

"...우으..."

헤스티아의 손에 힘이 빠진다. 그녀의 손목을 잡아 치운 운현은 모아진 긴 다리를 살며시 벌렸다. 자신의 음부를 훤히 드러내게 된 헤스티아는 양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지만 이런 상황은 너무 부끄럽다. 그녀가 얼굴을 가리고 양 다리를 벌린 채 무방비 상태가 된 것을 보며 운현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가져갔다.

"축축하네."

"아아아... 부끄러워요."

이미 투명하고 끈적한 애액은 질퍽거릴 정도로 도톰한 계곡 사이에서 주륵주륵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많은 애액이 흐르는 것을 보며 손가락으로 살짝 그것을 찍은 운현은 쭉 늘어지는 긴 실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냥 키스하고 가슴을 애무한 것만으로 이렇게 젖은거야?"

"아아아아....아... 마, 말하지 마요..."

"하하하. 나쁘다는게 아니라니까."

히죽 웃은 운현은 긴 다리를 더욱 벌린 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탄력적인 허벅지에 살짝 키스한 운현은 그녀의 몸이 딱딱히 굳어버리자 그 허벅지를 살짝 깨물고 쪽 빤 후 말했다.

"그렇게 긴장하지마. 내가 무서운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 그래도."

"여자답지 않게 왜 이래?"

"...처음인걸요."

남성보다는 여성의 성욕이 더욱 강하고 여성의 수가 많은 세계에서 이토록 부끄러워하다니. 헤스티아는 그러면서도 용케 다리를 감싸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가린 채 어쩔 줄 몰라할 뿐. 그런 성실함에 웃으며 허벅지를 깨물고 괴롭히던 운현은 은은한 여인의 향기를 마구 내뿜는 계곡 사이에 얼굴을 가져갔다.

"후우..."

"힉!? 으흐읏!"

운현의 숨결이 계곡에서 느껴지자 헤스티아는 허리를 쭉 펴며 딱딱히 굳었다. 앙증맞은 발가락이 한없이 오무라들며 긴 다리에 힘이 솟는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쾌감을 느낀 것인지 계곡에서 토해내어지는 애액의 양이 단번에 많아져 넘쳐 흐르는 것을 본 운현은 헤스티아가 울상이 된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왜?"

"으... 그치만..."

아직 제대로 애무를 한 것도 아닌데. 벌써 절정에 올라버린 자신이 부끄러워 죽고 싶다. 헤스티아는 이불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히잉..."

"하하하... 괜찮다니까. 처음에는 다 그런거지."

"우우으...그치만...그치만..."

'이건 창녀촌에 가서 삽입도 안한 상태로 싸버린 동정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되나.'

헤스티아가 좌절하고 있는 것을 보며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좀 더 제대로 된 애무는 나중을 노려야 하나. 천천히 바지를 벗은 운현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신의 양물을 그녀의 도톰한 계곡 사이에 가져다 대었다.

"이제 할게."

"....."

"쯔륵..."

그의 말에 움찔한 헤스티아는 몸에 최대한 힘을 풀었다. 살짝 벌어진 계곡 사이로 또다시 애액이 주륵주륵 흘러내린다. 그것에 자신의 양물을 가져다 댄 운현은 천천히 계곡의 입구 안으로 남성을 밀어 넣었다.

"학...커, 커엇...아파..."

"조금만 참아봐."

머리 부분을 압사시키려는 듯 계곡은 갑작스러운 침입자를 꽉 물고 놓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쾌감이지만 여기서 쌀 수는 없었다. 운현은 천천히 남성을 전진시켜나갔고 그것에 고통을 호소하며 헤스티아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파...아파..."

"자자. 이제 다 됐다."

"에? 저, 정말...?"

벌써 끝인가? 헤스티아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살짝 들어 운현과 결합된 부분을 보려고 했다. 그 순간 힘이 풀리자 운현은 냅다 허리를 쭉 밀어 넣었다. 뜨거운 음부 안의 중간쯤에 무언가가 막고 있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마저 한번에 뚫어버린 운현의 양물은 단숨에 그녀의 안 깊숙한 곳을 자극했다.

"찔꺽!!!"

"하윽!! 거, 거지말... 쟁이!"

"한번에 해야 오히려 안아파"

"흑...흐...아, 아프잖아요..."

"하하하... 조금만 참아줘."

"우우..."

파과의 고통, 그리고 운현과 맺어졌다는 기쁨. 하복부에서 오는 쾌감과 고통에 헤스티아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팔을 뻗어 운현의 몸을 끌어당겼다. 그녀가 포옹과 키스를 요구하자 운현은 그녀의 계곡 안에 양물을 꽂은 채 그녀가 원하는대로 키스를 해주었다.

"쪼옥... 핥짝..."

"하아...하아..."

"아직도 아파?"

"으... 그...참을만 해요."

운현의 따뜻한 시선에 헤스티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깨무는 것이 아파도 참겠다는 듯한 모습이다. 그녀의 그런 행동을 무시할 수는 없지. 첫 섹스를 이렇게 아파만하며 끝낼 수는 없기에 운현은 살짝 양물을 빼내었다.

"아흑..."

양물이 움직이는 것에 고통을 느낀 헤스티아가 비명을 내지른 순간 운현은 그녀의 몸에 그레이터 힐을 날렸다. 그녀가 눈을 감은 순간 그레이터 힐로 고통을 줄여 준 운현은 다시 쓱 양물을 밀어 넣으며 헤스티아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

"아직도 아파?"

"으으...조, 조금 괜찮은... 아니 안아파..."

"자아. 그럼 이제부터 제대로 할게."

"...네."

운현이 쪽쪽 키스를 해주자 진짜로 고통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대신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의 쾌감이 몰려오자 헤스티아는 헐떡거리며 눈을 감았다. 긴 다리는 절로 움직여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더 깊게 그를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과 쾌락을 탐하는 것만이 남은 그녀는 운현의 허리가 빠르게 움직이자 그것에 큰 절정을 느끼며 혀를 빼물었다.

"하으으으!!"

"으읏...!"

사정없이 조여오는 음부에 운현은 사정감을 느꼈다. 이만하면 됐다. 운현은 그녀의 계곡 안에 최대한 남성을 밀어 넣고 참았던 사정감을 해제했다. 그 순간 그의 양물에서 터지듯 정액이 발사되었고 헤스티아는 눈을 치켜뜨며 혀를 빼물었다.

"아으..하으으으응!! 쪽...핥짝. 추릅..."

운현의 머리를 꽉 끌어안고 정신없이 키스를 하며 그의 허리를 긴 다리로 꽉 당기던 헤스티아는 계곡 안에 차오르던 정액이 멈추자 천천히 침대 위로 허물어져 숨을 헐떡거렸다. 첫 섹스에서 이만한 절정을 느끼게 될 줄이야.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헤스티아는 운현의 허리가 살며시 움직이며 자극을 가하자 그것에 눈쌀을 찌푸렸다.

"아흐..."

"말했잖아."

"...네?"

"오늘 밤은 안재울거라고."

"히잉...? 저, 정말?"

"물론이지."

빙긋 웃은 운현은 헤스티아의 앙증맞은 입술에 키스한 후 다시 허리를 흔들었다.

312====================

악의 신

아침이 되자마자 운현은 길드회관의 1층으로 내려와 커피를 주문하고 마시며 사람들을 살폈다. 과거 도적일때와는 다르게 사람들이 힐끔거리기만 할 뿐 파티에 들어오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역시 천민 딜러.'

아무래도 수가 많은 딜러. 그 중에서도 상당수를 차지하는 근접딜러 중 하나라서 그런지 접근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거기에 남자 근접 딜러다보니까...'

틈틈히 보이는 남자 모험가들을 보며 운현은 빙긋 웃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의 복장을 보면 모두 원거리 딜러거나 유틸, 혹은 사제직이 많았다.

'자극을 받아서 싸버릴 수 있으니 말야.'

근접전을 해야 하는 이상 상대적으로 몬스터의 체액과 닿을 일이 많고, 그렇게 된다면 흥분하는 일도 많다. 그런 경우 과도한 자극으로 싸버리는 경우가 생기고 결국 정작 필요할 때 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러다보니 남자 모험가들 중에서 근접 딜러는 그리 선호되지는 않았다.

그것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는 운현이었지만 그는 전혀 아쉬움이 없었다. 어차피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을 끌고 싶은 생각따위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운현씨?"

"아. 필레씨."

필레가 웃으며 다가오자 운현은 앞자리를 가리켰다. 그것에 웃으며 그녀가 앉자 운현은 커피와 차를 주문했다. 두잔째의 커피를 그가 마시기 시작하자 필레는 웃으며 물었다.

"어제 일은 잘 처리하셨어요?"

"네. 다행히 미야씨의 장비를 되찾을 수 있었어요."

"헤에... 그렇군요. 그런데 운현씨."

"네?"

"혹시..."

"으음?"

"에이... 그럴리 없나?"

운현에게 물으려던 필레는 볼을 긁적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할지 뻔히 보이는 운현이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른 척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으음... 어제 살인사건이 또 발생했어요."

"허... 또요? 뭔 살인사건이 이렇게 많이 발생한데요?"

"그러게 말이에요. 이번에 죽은 사람은 상인조합에 소속되어 있는 마법산데... 레벨이 220이나 되는 꽤 실력있는 마법사거든요. 그 마법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살해당했어요."

"이거 무서워서 돌아다니지도 못하겠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그 건물에 남아 있는..."

"건물이요? 건물 안에서 벌어졌다는 건가요?"

"네. 상인 조합 소속의 레밍이라는 간부의 건물인데. 그녀가 창고로 쓰는 건물 중 하나에요. 거기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어요."

'레밍이라... 그년도 다난교도 중 하나였지.'

과거 상인조합 소속 간부인 레밍의 금고를 털때 보았던 다난의 증표를 떠올린 운현은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운현이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해주자 필레는 탁자를 톡톡 두들기며 더욱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죽은 사람은 총 둘이에요. 그 마법사와 레빈이라는 검사. 모두 레밍의 부하들인데 그들이 모두 죽었어요. 특히 레빈의 몸에 남아 있는 흔적을 보면 범인은 아이라를 죽인 사람과 같은 사람 같아요. 뒤통수에 깊숙한 검상이..."

"둘이요? 둘이나 죽었단 말이에요?"

운현이 놀라며 말하자 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절한 사람이 몇몇 있기는 하지만 죽은 사람은 둘 뿐이에요."

'둘이라... 분명히 카를로스의 시체도 거기다가 던져놓고 왔는데 둘이라고?'

필레의 말에서 운현은 무언가 웃기지도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카를로스의 시체를 누군가가 숨겼다? 왜? 어째서?

'가능성은 셋. 첫번째는 레밍. 일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고 그녀가 숨겼을 가능성이 있지. 하지만 그러려면 차라리 시체를 모두 다 숨기는게 좋았을거야. 이건 아닌 것 같고... 두번째는 다난교. 카를로스의 등에는 날개가 있어. 그 날개를 숨기기도 전에 내가 죽여놨고 분명 그 시체에도 날개가 남아 있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다난교의 누군가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카를로스의 시체만 따로 챙겼다는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고... 세번째는 제3의 인물이라는 건데. 이것도 부정할 수 없구만. 아무튼 카를로스가 죽은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거지?'

"하... 흉흉하네요. 무서워서 이거 돌아다니겠나."

"네네. 운현씨도 밖에 돌아다니실 때는 꼭 주의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조언 고마워요."

"후후... 차 얻어마신 것에 대한 보답이에요. 오늘도 던전에 들어가시나요?"

"네."

"아, 그리고 어제 레나 대사제님이 찾아오셨는데... 레나 대사제님과도 친분이 있으신가봐요?"

"아아... 네. 던전 도시에 들어오기 전에 몇가지 일을 같이 했었죠."

"우와~ 굉장하네요. 레나 대사제님과 같이 일을 했다라... 어떤 일인가요?"

필레가 눈을 빛내며 묻자 운현은 쓰게 웃으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가 말하기를 꺼려하는 듯 하자 필레는 볼을 긁적거리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아, 죄송해요. 의뢰에 따라 내용의 비밀 엄수가 있을 수도 있는데."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구요. 다만 제 일뿐만이 아니라 레나 대사제님의 일도 관련되어 있는 것이라 말씀드리기 조금 그러네요. 레나 대사제님께 여쭤본 후 말씀드릴게요."

"후후후... 운현씨는 친절하고 상냥하시네요."

"네?"

운현이 웃으며 말하자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필레는 입술을 가리며 작게 키득거린 후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필레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사람의 일도 생각하시는 거잖아요. 그런 분 싫지 않아요."

"어? 그 말씀은 제가 좋다는 이야기? 이얏호~! 오늘 데이트 할까요?"

필레의 상냥한 미소에 운현은 기뻐하며 밝게 외쳤다. 그의 말에 필레는 재밌다는 듯 키득거린 후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쪽 눈을 깜빡였다.

"정말 기쁜 제안이지만 오늘은 제가 하루 종일 근무에요. 다음에 또 말씀해주시겠어요? 그때는 꼭 데이트 해요."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아이 참..."

운현이 자신을 향해 데이트를 신청한 것이 기뻤는지 필레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녀와 가볍게 인사를 한 운현은 자신의 앞에 놓여져 있는 커피를 한모금 마신 후 생각했다.

'현재로서 다난과 관련되어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년들 뿐이군. 자. 하나씩하나씩 조져나가볼까?'

다난교도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인물. 루비, 그리고 레밍. 이 둘을 시작으로 하나씩 하나씩 파헤쳐야한다. 그리고...

'책략가라... 뭐하는 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또 책략 싸움이 된다 이거지. 그렇다면 그건 내 전문이지. 어떤 년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수정과의 잣같은 상황을 만들어 줄 수 있겠구만.'

책략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자신의 예상과 예정대로 일이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난교도의 목표가 신성인 이상 자신과 레나를 노리기 위해서 던전 도시를 공격할 것은 당연한 일. 그리고 상황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면 이미 던전 도시에는 많은 수의 다난교도가 들어 와 있을 것이다.

'숨기고 있다고? 그러면 쓰나. 아주 다 까발려놔야지.'

비릿한 미소를 지은 운현이 커피를 모두 마시고 세잔째의 커피를 시킬 때 쯤 씻고 준비를 마친 헤스티아가 걸어내려왔다. 그녀는 운현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거리며 그의 앞에 다가와 앉았다.

"저...저어..."

"왜 이렇게 부끄러워해?"

"힝... 그치만."

운현을 볼때마다 어젯밤이 떠오른다. 생각하면 할 수록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헤스티아가 고개를 푹 숙이자 운현은 그녀를 보며 빙긋 웃었다.

"이런 일에 대해서 몰라?"

"그, 그런건 아닌데."

"그럼?"

"그치만... 이, 이제 오빠랑 여, 여, 여...연...인이 된거잖아요."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부끄러움과 기쁨에 어쩔 줄 몰라하던 헤스티아는 크게 마음을 먹고 힘겹게 말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한점의 부끄러움과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트윈문 축제때 목걸이를 선물받고, 또 그와 밤을 함께 지냈다. 운현이 사랑한다고 달콤히 속삭여주었고 자신 역시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항상 원하고 또 꿈꾸던 일이다.

자신은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럽고 또 신나고, 거기에 기쁘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데 운현은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생글생글 웃는 얼굴 그대로다. 항상 자신에게 보여주는 그 미소에 헤스티아는 오히려 위화감을 느꼈다. 감정의 변화가 없는 듯하다. 항상 즐겁고 상냥해보이는 모습이 어색하다고 순간 생각한 헤스티아는 붕붕 고개를 저었다.

'오빠한테 실례야.'

자기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은 만큼 이런 일에도 표정 관리를 할 수 있는 것이겠지. 뇌내 행복회로를 돌리며 헤스티아는 운현을 향해 방긋방긋 웃으며 살며시 말했다.

"마, 마, 망상으로는 많이 했는데... 헤헤. 시, 실감이 안나네요."

행복에 겨워 죽을 것 같은 얼굴로 헤스티아는 밝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피식 웃은 운현은 메이드가 다가오자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운현 오빠?"

"왜?"

"오빠는... 안... 기뻐요?"

몇번이나 망설이던 헤스티아는 어제와 전혀 다를 바 없어보이는 운현의 모습에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빙긋 웃었다.

"물론 기쁘지. 당장 춤이라도 추고 싶은걸?"

"그, 그렇죠? 그런데 오빠는 좀 변화가 없는 것 같네요."

"흐음... 어떻게 한다."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헤스티아는 약간 두렵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일부러 자신에게 맞춰주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그녀가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자 운현은 턱을 쓰다듬은 후 그녀의 옆자리로 가 머리를 쓰다듬고 키스했다.

"읍...!"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도 애정표현을 하면 믿어줄거야?"

"으으... 그, 그런..."

입술에 남아 있는 달콤함 감각.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그 느낌에 헤스티아는 환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고 히죽 웃은 운현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2층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여인이 내려왔다.

"오. 운현."

"여어."

하얀 귀를 쫑긋 세우고 긴 꼬리를 살랑거리며 늘씬한 미녀가 다가오자 헤스티아는 움찔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원시원한 인상의 묘인족 미녀다. 그녀가 운현에게 아는체 하며 다가오자 헤스티아는 경계의 시선으로 그녀를 보다가 운현에게 물었다.

"오빠. 이 분은?"

"아. 미야라고. 어제 만난 사람이야."

"내가 큰 도움을 받았지."

"아니 뭐 도움이랄것 까지야... 그래서. 파티는 찾으셨나?"

"아하하... 그게."

미야는 멋쩍은 듯 웃고는 볼을 긁적거렸다. 어제 거절한 주제에 이렇게 다가가려니, 그리고 또 신세를 지려는 것 같아 뻘쭘해하던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말했다.

"날 파티에 넣어줬으면 해."

"환영이야."

운현의 입장에서는 바라마지 않던 일이다. 그것에 놀란 헤스티아는 당황하며 운현을 보고 그의 옷자락을 꾹꾹 잡아당기며 물었다.

"에... 다른 사람을 넣겠다더니... 이 분이에요?"

"응."

"저기... 무슨 관계이신지 여쭤봐도 되나요?"

"안될 건 없지."

헤스티아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운현의 저 미소. 늘상 짓고 있는 미소와는 다른 미소다. 이 순간만큼은 그가 진심으로 즐거워한다는 것을 깨달은 헤스티아는 우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반한 상대니까 말야."

"으... 저한테도 반했다면서요."

"엣!? 그,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면 내가 부끄럽지. 하, 하하하."

헤스티아와 미야의 상반된 반응에 운현은 작게 키득거린 후 느긋하게 말했다.

"아니... 이게 잘못된건가?"

"그건... 아니지만서도."

상대적으로 남자의 수가 적은 세상이다. 서로 단 하나만을 사랑한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은 없겠지만 한 남자가 여러 여자와 결혼하는 일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지라 운현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다만. 뭐랄까.

'그래도 하루만에 이러는 건...'

헤스티아는 살짝 토라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미야는 쓰게 웃었다.

"에... 잘나신 분이랑 파티를 하니 이거 뒤에서 공격당하지 않으려나 모르겠네."

"그럴리가. 헤스티아가 절대 그럴리 없어."

그의 신뢰가 담긴 말에 헤스티아는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도 다 운현이 자신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일까? 적어도 그가 숨기지는 않는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헤스티아가 고개를 들자 운현은 그녀의 작은 손을 꽉 잡았다.

"뭐 아무튼 그렇게 됐어. 서로 인사들 해."

"으... 안녕하세요. 헤스티아라고 합니다. 레벨 11의 마법사에요."

"후후. 그래. 반가워. 난 미야. 11레벨의 권사야. 탱킹은 맡겨달라고."

"어? 그럼 운현 오빠는 탱커를 안하시는 거에요?"

"음. 적당히 왔다갔다 하면서 하려고."

어차피 탱이니 딜이니 하는 상황은 자신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헤스티아와 미야의 레벨을 올리는 것이기에 운현은 느긋하게 말하며 그녀들의 뒤에서 초보 모험가들에게 신나게 떠들어대는 여인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금은 다난에 대해서 파악하는 일이지.'

313====================

악의 신

"하압!"

미야가 낀 이후 전투 속도가 상당히 빨라졌다. 물론 그 뒷면에는 운현의 수가 포함된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야... 던전 내의 몬스터가 밖의 몬스터보다 강하다고 하던데. 역시 보통이 아니네."

"그렇지?"

"응."

던전에 들어 온 다른 파티와 전투를 해 본 적이 없었던 미야가 생글거리며 강철 건틀렛의 주먹을 꽉 쥐며 말하자 헤스티아는 약간 심통난 얼굴로 입술을 삐쭉거렸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라서 입이 한댓발 나왔어?"

"그치만..."

"하하하... 거기 아가씨는 내가 불만인가보네."

헤스티아가 살며시 미야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미야는 볼을 긁적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헤스티아는 운현에게 홀딱 반해 있었다. 자신이 파티에 끼어들어 방해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헤스티아에게 다가갔다.

"음. 아가씨."

"네."

운현이 몬스터들을 마석에 넣는 것을 가리키며 미야는 헤스티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저 남자 좋아하지?"

"조, 좋아하는게 아니라 사랑하는 거라구요."

"그래? 하긴, 저렇게 괜찮은 남잔데."

"우우..."

미야가 운현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 하자 헤스티아는 작게 신음했다.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미야는 손을 들어 헤스티아의 작은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좀 마음이 없다고는 못하겠네."

"아아... 결국."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도움을 받은데다가 저정도로 능숙하게 전투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남자다. 묘인족의 입장에서 남편감으로는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운현인만큼 미야 역시 운현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여자가 있다고 해서 포기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잘 해보자고."

"....."

"에이~ 너무 그러지 말라고~"

만약 미야가 먼저 운현을 만나고 자신이 끼었다면, 자신 역시 미야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헤스티아는 미야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는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둘이 뭐해?"

"...오빠!"

"응?"

"한가지만 여쭤볼게요."

"더 물어봐도 돼."

"이제 다른 사람을 파티에 끌어들일 예정은 없는건가요?"

"그럴리가."

"엑!?"

"응!?"

지금도 상당히 안정적인 전투를 하고 있었다. 미야의 탱킹, 헤스티아의 파이어 볼트. 그리고 운현의 견제와 공격. 어지간한 삼인 파티로는 꿈도 못꿀 정도의 속도로 레벨업을 하여 벌써 4레벨이나 올려 15레벨이 된 그녀들이 당황하자 운현은 느긋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힐러나 원딜러가 있었으면 더 좋지 않을까 싶은데."

"그, 그렇지만! 원딜은 제가 할 수 있잖아요!"

"힐링은 괜찮아!"

"에이. 자자. 그렇게들 생각하지 말라고. 지금 생각하고 있는 직업군은 드루이드야. 드루이드는 힐링, 딜링, 그리고 유틸까지 잘 쓸 수 있잖아? 지금이야 능숙하게 전투를 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다른 몬스터를 잡다보면 쉽지 않을 수 있다고."

"그, 그건."

"그렇긴 하지만..."

운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봤자 고블린은 고블린일 뿐이다. 이런 식의 전투가 솔직히 말하자면 불안하다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닌만큼 미야와 헤스티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쩌지?"

"그러게요."

"음?"

한걸음 떨어져 생글생글 웃고 있는 운현을 보며 미야와 헤스티아는 서로를 향해 속삭였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경계를 하던 것을 잊어버린 헤스티아는 미야의 손을 꼭 잡은 후 말했다.

"으으으... 지금 미야씨를 걱정할 여유가 있는건 아니네요."

'뭐 둘이 알아서 하겠지.'

지들 딴에는 안들린다고 속삭이겠지만 초인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운현에게 있어서는 조금만 집중하면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정도였다. 이미 들어와버린 미야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새로운 파티원은 어떻게든 운현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만한 사람을 고르자. 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모험가들과 안면이 없어 추천할 사람이 없는 그들은 둘이 똑같이 한숨을 내쉬며 절망했다.

'쿡쿡쿡...'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럭저럭 사이좋게 지낼 수는 있는 모양이다. 미야나 헤스티아나 서로 워낙 착한만큼 질투심으로 인한 뻘짓은 없을 것 같았다.

'전에도 그랬으니 말이지.'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그녀들이 아닌 다른 곳에 신경을 집중했다. 일단 해야 할 일인 미야를 영입하는 것은 성공했으니 바제트를 끌어들일 때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 남는 시간 동안 할 일은?

'미믹은 어느정도 여유가 있으니 됐고... 다난에 대해서 파악하는 일이지.'

카를로스에게서 얻은 정보는 정신을 파괴하며 얻은 정보이니 신뢰성은 100퍼센트라고 볼 수 있었다. 그 정보를 완전히 믿는다는 가정 하에 카야는 새로운 책사를 활용하여 대륙 각지에 있는 신성을 긁어모으고 있다고 했다.

'첫번째 의문점. 신성을 모으는 이유. 두번째 의문점. 그 의문의 책사. 세번째 의문점... 다난의 목적.'

세가지 의문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움직이기 곤란했다. 그렇다면? 의문을 해결하려면 역시 조사가 필수겠지. 운현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린 후 느긋하게 말했다.

"나 잠깐 주변 탐색 좀 하고 올게."

"어? 혼자서? 같이 갈까?"

"워워.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미안하지만 식사 준비를 해주겠어? 일단 이 근처는 안전한 것 같으니까 말야."

"음... 그런 거라면."

"오빠. 저도..."

"헤스티아를 도와줘. 아무래도 보니까 둘이 서로 어색한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친해지라고."

"에엣!?"

"그, 그렇게 어색하지도 않은데."

"자. 재료는 여기 있으니까. 친해지는데는 술이 최고지. 미야. 반주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을 만들어줘. 할 수 있지?"

"응? 어. 응. 맡겨줘... 우왓!? 뭐야? 이 무게는?"

운현이 웃으며 말하자 미야는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을 받았다. 자신의 힘으로도 묵직하기 짝이 없는 가방을 매고 그런 움직임을 보였단 말인가? 그녀가 놀라며 바라보자 운현은 손을 흔든 후 느긋한 걸음으로 숲 안으로 향했다.

"진짜 정체가... 우와. 이 재료들은 뭐지?"

요리도구들 대부분이 자신의 손에 찰싹 달라붙을 정도로 좋다. 그리 비싼 요리도구는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식칼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요리재료를 보며 감탄했다.

"우와... 이거면 뭐든 만들 수 있겠는데? 그럼 실력 발휘해볼까. 헤스티아. 먹고 싶은 것 있어?"

"으음... 전 좀 매운게 먹고 싶네요."

"그래? 매운 요리는 묘인족의 특기지. 조금만 기다리라고~"

"저도 도와드릴게요."

미야와 계속 담을 쌓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같은 편이 된 것이나 다름없는 미야를 바라보며 헤스티아는 머뭇거리며 다가갔고 그녀를 향해 미야는 피식 웃었다.

"요리를 해 본 적은 있어?"

"...아뇨."

"그럼 이걸 썰어줘."

"맡겨주세요!"

'나머지는 둘이 알아서 잘 할 것이고... 나머지는 내 일이군.'

하이딩을 건 채 운현은 조용히 홉고블린의 서식지를 걸어 들어갔다. 최대한 많은 미믹을 가지고 있어야 앞으로의 활동에 유리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던전에 들어오는 틈틈히 많은 보물상자를 모아둬야 했다.

"이야아압!!"

"캬악!"

'호오. 이리 공교로운 일이 있나.'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 홉고블린의 서식지 안에 네 여인이 있었다. 그리고 선두에서 커다란 배틀 액스를 휘두르는 여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여인이었다.

'루비.'

"빨리빨리들 움직여!"

"네!"

"야얍!!"

루비의 공격이 이어진 이후 그녀가 뒤로 빠지자 궁사와 마법사의 공격이 홉고블린의 몸을 후려쳤다. 그것 방어하며 뒤로 밀려나간 홉고블린이 포효한 순간 루비는 빠르게 튀어나가며 홉고블린의 몸을 향해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크아아!!"

루비와 같은 파티를 한 이들의 레벨은 그리 높지 않은 듯 보였다. 아까 전 길드에서 떠들어 댈 때 클랜원들의 레벨을 올려야 한다며 이번에 잘 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포상을 주겠다던 루비의 말을 떠올린 운현은 팔짱을 낀 채 그들을 지켜보았다.

'특별한 포상이 다난교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일단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루비는 다난교도다. 그녀가 다난교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비밀종교라고 할 수 있는 다난교의 일원이라면 그 내부적인 일, 혹은 이 던전 도시에 있는 다난교도에 대해서 알 수 있을 터.

'사실 몰라도 상관은 없지만.'

다난교도라면 눈에 띄는 대로 최대한 박멸을 해둬야 한다. 만약 이것이 자신과 카야의 싸움이라면 루비를 내버려 둔 채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책략가와의 싸움이 된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최대한 빼먹을 수 있는 것은 빼먹고 없애버리는 것이 좋지.'

던전 도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난교도의 수와 정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이상 자신의 움직임이 알려질 수 있는 존재는 최대한 줄이는 것이 좋았다. 운현 역시도 책략가라면 책략가. 비록 지금은 이렇다 할 세력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말. 그리고 만들어 내어 활용할 수 있는 판이 없는지라 스스로 움직이고 있지만 정체불명의 상대와 제대로 된 장기를 두기 위해서는 그 역시도 판을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대방의 말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잡아 먹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먹어두는 것이 좋지.'

이미 자신은 카를로스라는 상대의 강력한 말 중 하나를 잡아먹었다. 카를로스의 시체가 사라진 것이 상대의 책략 중 하나라면 던전 도시 내에서의 움직임은 그 책략가에게 있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변수가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모를까... 아니, 알고 있어도 상관없겠지.'

만약 상대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면 자신을 처리하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아내야 할 것이다.

다난교의 조직도에 의하면 카를로스는 카야와 더불어 다난교를 이끄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렸다는 것은 다난교로서도, 그리고 다난교 내부에 있는 정체 불명의 책략가로서도 긴장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만약 운현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운현은 다난교의 행동에 있어서 가장 큰 최악의 변수라고 할 수 있었다. 운현의 움직임을 예상할 수 없는 이상 다난교의 움직임은 운현의 행동에 큰 영향을 받을 것이고 책략가의 입장에서 자신이 통제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변수의 존재는 가장 짜증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운현을 끌어들이든, 아니면 제거하려고 하든 할 것이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접촉이 없다는 것은 아직은 모른다고 봐야 하나. 아니면 일단 기다려봐야하나. 내가 보기엔 아직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일텐데...'

"하아아압!!"

"크아아!!"

운현이 생각을 하는 동안 루비 일행은 홉고블린을 쓰러트리는데 성공했다. 루비의 도끼가 홉고블린의 머리를 반쪽 낸 순간 홉고블린은 포효하며 그 자리에 허물어졌고 그녀를 따르던 루비의 파티원들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헐떡거렸다.

"하아... 하아."

"히, 힘들다."

"끙... 이거 쉽지 않네요."

"약한 소리들 하지 말라고!! 자자!!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가서 보물 상자 가지고 와!"

"네!!"

루비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파티원들을 독려했다. 전투를 끝냈으니 그 보상을 받을 차례라는 것에 그녀들은 기뻐하며 우르르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들은 작은 보물상자를 들고 나올 수 있었다.

"빨리 열어보고 싶은데."

"참아. 그러다가 미믹이 나오면 우리 모두 다 죽는다고."

보물상자를 보며 탐욕스러운 얼굴로 클랜원 중 하나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루비는 쓰게 웃으며 그녀를 말렸다. 보물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싶어서 보물상자를 부수는 미친 짓을 했다간 미믹이 생성된다. 던전을 탐험하는 이로서 절대 해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그녀가 다시 떠들기 시작했을 때 하이딩 상태에 있던 운현은 단검을 뽑은 후 힘껏 던졌다.

"콰직!"

"그러니까 보물 상자는... 에!?"

"으득...으드드득!!"

"이, 이런 미친!? 어떤 놈이야!!"

보물상자를 손에 들고 있던 루비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보물상자의 자물쇠가 단검에 의해서 박살난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 도대체 누가? 단검이 날아 온 쪽을 향해 그녀가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의 클랜원들은 공포에 질린 비명을 터트렸다.

"꺄아아악!!"

"아아악!"

"미, 미믹이다!!"

"빌어먹을!!"

1계층의 미믹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다. 루비는 빠득 이를 갈았다. 자신이 떨어트린 보물상자가 열리고 그곳에서 스멀스멀 검은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을 본 그녀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외쳤다.

"막아!!"

"하, 하지만!!"

"막아!! 어떻게든 막아!!"

침까지 흘려가며 강렬히 외치는 그녀를 보며 그녀의 클랜원들은 당황했다. 이제 막 20레벨 밖에 되지 않은 자신들이 막아봤자 뭘 어쩐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들은 루비의 지시에 따라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순간.

"아아아앗!!?"

"클랜장!!"

미믹이 세 여인들을 인식한 순간 루비는 몸을 돌리고 빠르게 도망쳤다. 가장 강한 그녀가 도망치는 것을 본 세 여인들은 절망한 얼굴로 외쳤지만 루비는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고 그 순간 미믹의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나와 여인들을 덮쳤다.

그리고 운현은 팔짱을 낀 채 도망을 가는 루비와 미믹에 의해 공격당하는 여인들을 말없이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314====================

악의 신

"왜 이런 일이...!?"

홉고블린의 서식지에서 한참을 떨어져 도망친 후에야 루비는 달리던 다리를 멈출 수 있었다. 이정도 떨어졌다면 미믹이 쫓아오진 않겠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누가."

누가 단검을 날린 것인가. 누가 그런 짓을. 아니 그 전에 단검 한방으로 그 자물쇠가 부서질 수 있는 건가? 70레벨의 전사가 수십방을 내려쳐야 간신히 부술 수 있는 것이 보물상자의 자물쇠다. 그것을 단검던지기 한방으로 부순다?

"설마."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킨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품에 고이 모셔 둔 작은 철판을 잡았다.

"...꿀꺽."

절대 누구도 알아서는 안되는 일이다. 철판을 꽉 잡은 그녀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모험가들이 모시고 있는 파르티 교의 기도가 아닌 다른 종류의 기도. 기도를 마친 그녀는 단검을 꺼내 자신의 팔뚝을 쓱 그었다.

팔뚝에서 흘러나온 피가 뚝뚝 방울져 떨어져 철판에 맺혔다. 그 순간 철판에서 은은한 붉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그녀는 뒤로 물러나 철판을 향해 공손히 엎드렸다.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며 이 시간을 이끌어가실 검은 날개의 여신 다난님께 청하옵니다. 지부장님과 연락을 허가해주시옵소서."

자신의 피를 매개체로 발동시킨 마법이다. 다른 이들이 보면 기겁을 하다 못해 기절을 할지도 모르는 광경이다. 아무리 독실한 신자라 할지라도 직업이 다른 이상 이런 종류의 마법은 쓸 수 없다. 하지만 피를 매개체로 하여 이렇게 마법을 발동시키다니.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중요치 않은 듯 루비는 철판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어서 자신이 원하는 상대와 연결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잠시 후. 붉은 빛은 서서히 하나의 모양을 만들어 내었다. 누군가의 얼굴이 만들어지자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빛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레밍 지부장님. 발견한 것 같습니다."

[뭐? 뭐를.]

"카를로스님을 죽인 그 자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뭣이라!?]

루비의 보고에 던전 도시의 다난교 지부장 레밍은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카를로스를 죽인 자를 발견하다니. 별로 기대도 하지 않던 루비에게서 그런 보고가 들어온 것에 레밍은 놀란 얼굴로 다급히 물었다.

[그게 누구냐!]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이 던전에 들어 올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모험가 길드 소속의 모험가 인듯 싶습니다."

[그 외의 정보는?]

"아직... 저도 방금 발견한 것이라."

루비가 가져 온 정보에 레밍은 부족함을 느꼈다. 좀 더 특정 지을 수 있는 정보가 필요했다. 하지만 없는 정보를 들들 볶아봤자 나올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아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조용히 말했다.

[좋아. 그대로 정보를 파악하도록.]

"그리고... 레밍 지부장님."

[뭐지?]

"저, 정보를 파악하고 움직이기 위해서 자금과 무기가 필요합니다."

루비의 눈에 탐욕이 깃드는 것이 보인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레밍은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루비가 사용하는 돈은 자신이 하루에 벌어들이는 돈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무기라고 해봤자 고급의 무기도 아니다. 레밍이 잠시의 생각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비는 환하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난님의 은혜이다. 너는 모험가 길드 내의 다른 다난의 깃털들과 함께 힘을 합쳐 정보를 파악하도록 .]

"알겠습니다. 그, 그리고 레밍님."

[뭐지?]

"저는... 언제쯤이면 라닌님과..."

[...카를로스님을 죽인 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온다면 라닌님과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지. 공도 세우지 않은 주제에 욕심을 부리려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클랜원 셋을 잃기는 했지만 고작해야 셋에 불과하다. 클랜에 가입하지 못하는 초보 모험가들은 얼마든지 있었고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약간의 지원, 그리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 파티에서 쫓겨나는 실력 없는 모험가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기뻐하며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후후후..."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들이 약해졌을 때를 노리면 된다. 기존에 노리던 그 화염마법사가 왠 이상한 남자의 파티에 들어간 것이 아쉽지만 그런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여차하면 그 남자까지 해서 자신의 클랜으로 끌어들이도록 하자. 비록 근접 딜러이기는 하지만 남자이니 높아진 흥분도를 해소하는데 어느정도 도움은 되겠지.

"후후후후.."

그리고 이런 식으로 그들을 키워 자신의 발판으로 만들고. 그들을 다난교도로 끌어들이면? 이런 식으로 자신의 파벌을 만들어가면 얼마 가지 않아 저 레밍 만큼은 아니더라도 레밍의 오른팔 수준까지는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하고, 또 성장하면

"검은 날개도 꿈만은 아니야."

카야님의 인정을 받고, 카야님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라닌님의 오른팔이 되어 그녀의 뜻을 펼치는데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다.

"이제 곧 다난님의 세상이 온다."

다난이 강림하여 세상을 정의로 지배할 때, 그 높은 권좌에 자신도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할 수록 기쁘다. 루비는 헤죽헤죽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 전에... 그 단검사부터 찾아야겠는데 말이지."

그 모든 것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단검사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한다. 이제는 자신이 버린 세명의 클랜원에 대한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보이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주머니에서 모험자 카드를 꺼내었다.

"큰일이야!! 미믹이 나타났어!! 1계층 홉고블린이 있는 곳에... 우리 클랜원들이 날 살리겠다고... 흑..."

자신이 클랜원 셋을 데리고 전투 훈련을 나갔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아직 모험가 길드에는 클랜원들이 꽤 있었고 그들에게 자신은 많은 인망을 얻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정도 연극은 해줘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버린 것이 아니고 그들이 자신을 지키려 했다는 것. 그것만 말해주면 된다.

'미믹에게서 살아남을리는 없지만... 그래도 일단 가볼까.'

여차하면 다시 도망가면 된다. 그리 생각한 루비는 최대한 주의하며 아까 전 미믹이 발생한 곳까지 조심스레 걸어갔다.

'없구나. 다행이다...'

미믹은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는지 남아 있는 것은 클랜원 세구의 시체 뿐이었다. 복부, 가슴, 머리에 큰 상처를 입은 그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루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쳇. 비싼 갑옷인데."

그들의 죽음이 아닌, 그들이 착용했던 장비들이 파괴된 것에 더 아쉬워하며 그녀는 그나마 멀쩡한 장비들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클랜원들의 주머니에서 돈 될만한 것들을 모두 챙겨 넣은 그녀는 힐끔 힐끔 주변을 살폈다.

"아직 없겠지?"

길드의 구조반과 처리반이 오기 전에 어느정도는 자신도 상처를 입었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연기를 하려면 제대로. 단검을 들어 자신의 팔과 몸 여기저기에 상처를 낸 루비는 피를 흘리며 홉고블린의 서식지에서 빠져나왔다.

"여차하면 써야겠군."

아까 전 레밍과 연락을 취할 때 썼던 철판을 꺼내든 그녀가 주변을 살피며 바깥으로 나갈 때 그녀의 모든 것을 하이딩을 건 채 지켜보던 운현은 빙긋 웃었다.

'레밍이 지부장이라. 그럼 그년을 잡으면 던전 도시에 있는 다난교도가 누군지는 대충 알 수 있겠군. 나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면이라... 그거 잘됐네.'

"아! 오셨어요?"

"하하! 어서 와. 뭐 특별한 거 있었어?"

"아니. 별거 없더라. 우와~ 맛있겠는데?"

운현이 돌아왔을 때 요리를 마친 미야는 생긋 웃으며 운현을 반겼다. 그녀가 스프와 빵, 그리고 조림요리를 만들어 앞에 내어준 것을 보며 운현은 감탄했다.

"헤스티아가 도와줘서 살았어."

"에이~ 미야 언니 요리 솜씨가 좋아서 그런걸요~"

"하하... 둘이 벌써 친해진거야?"

"음. 뭐... 그, 그런 셈이죠."

아까 전과 비교해서 꽤나 사이가 좋아 진 듯한 둘을 보며 운현은 느긋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헤스티아와 미야는 서로를 보고 빙긋 웃었다.

"아니. 뭐 일단은 동맹같은거? 그런거야. 어쨌든간..."

"어서 먹어요! 배고프시죠?"

"맛있겠네~"

미야와 헤스티아가 만든 요리를 한입 먹으며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면서도 운현은 다음 할 일을 생각하는데 집중했다. 미야와 헤스티아간의 사이가 좋아졌으니 자신의 일만 생각하면 된다고 판단한 그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미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응? 그럴리가."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아하하. 아무것도 아냐. 이거 꽤 매콤한데? 묘인족의 요리라 그런거야?"

운현이 조림을 들어 올리며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빙긋 웃었다. 묘인족 특유의 요리에 대해서 그녀가 말해주는 것을 듣던 운현은 멀리서 다가오는 이들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운현씨!?"

"뭐야. 실비아씨랑 필레씨... 왜 여기에 오셨어요?"

"지금 식사를 하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어서 도망치세요!!"

"네!? 왜요?"

"지금 미믹이 나타났다는 신고가 들어왔어요!! 홉고블린 서식지에서 미믹이 발생해서 벌써 세명이나 죽었어요!!"

"힉!? 미믹요!?"

미믹에 대해 알고 있는 헤스티아가 깜짝 놀라자 아무것도 모르는 미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분위기를 봐선 보통 일이 아니다 싶었던 그녀는 운현을 향해 다급히 말했다.

"이거 진짜 식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어서요!!"

"아아... 더 먹고 싶었는데."

아직 반이나 넘게 남은 조림을 보며 운현이 중얼거리자 미야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요리를 좋아해주는 것도 좋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러다니. 왠지 기분이 좋아진 미야는 운현의 옷을 꾹꾹 당겼다.

"이런 건 얼마든지 해줄테니까 일단 피하자!"

"에휴. 알았어."

요리를 바닥에 버리고 설거지도 끝내지 못한 조리도구와 그릇을 대충 가방에 쑤셔 넣은 운현과 미야, 헤스티아는 길드원 하나의 호위를 받으며 던전에서 빠져나왔다. 던전에서 나온 미야는 가방을 들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 방으로 올라갔고 운현과 헤스티아는 길드 회관에 자리를 잡았다.

"미믹이라..."

"큰일이네요. 미믹이 발생하다니."

"넌 미믹에 대해서 알고 있어?"

"네. 마법학교의 선생님께 배웠어요. 던전의 미믹은 보통 미믹과 달라서 엄청나게 무섭고 강하다고..."

'마법학교에서 이걸 알고 있다? 저번에는 몰랐는데... 뭔가 바뀐 건가?'

"오빠도 미믹에 대해서 알죠?"

"음. 알지. 필레씨에게 이야기를 들었어."

"그럼 다행이네요. 미믹이 발생했다고 하면 무조건 도망치는게 최고에요. 오빠도 꼭 기억해두세요."

"하하하... 알았어. 걱정하지마.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것은 모험가들에게 기본이라고.

운현을 걱정하며 헤스티아는 조심스레 말했고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1계층에 미믹이 발생해서 1계층에 있는 모험가들은 어지간하면 미믹을 잡을 때까지 던전에 들어가지 말라는 주의까지 내려왔다.

'잘 됐군. 그동안 바깥에서 일을 해야겠네.'

아르토리우스에게 가르쳐야 할 것도 있고 다난에 대한 정보도 파악해야 한다. 아까 밀려나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루비가 나오는 것까지 발견한 이상 바제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던전에 들어가지 않아도 좋을 듯 싶었다.

'바제트와 만나는 것은 코볼트를 잡을 때 정도였지. 지금 우리 상황이라면 코볼트도 무리없이 사냥할 수 있을테니까... 이틀이나 삼일. 잘만하면 오늘 만날 수도 있겠군.'

315====================

악의 신

상황이 바뀌었다. 미믹에 의해서 1계층의 모험가들을 길드에서 보호하고 있는 상황이 된 것에도 운현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어쨌든 어느정도는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란 예상은 했으니 말이다.

'과거에도 미믹에 대한 경고는 있었고 말야. 다만 마인이 나타나지 않아서 미믹이 계속 남아 있다는게 문제긴 하지.'

과거의 미믹은 자신이 기억보관자를 만들다 실패하여 만들어진 마인을 소환하기 위한 존재로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는 없었다. 마인이 없는 이상 미믹은 죽을 때까지 던전에 있을 것이다. 그런 위험한 존재가 남아 있으면 모험가들이 레벨을 올리는 것이 불가능하니 길드에서 토벌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오빠?"

"응?"

"이제 어쩌죠? 길드에서 미믹을 발견할때까지 던전에 들어가는 것은 힘들텐데."

"음... 뭐 어쩔 수 없지. 아가 물어보니까 하루 정도면 미믹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니..."

"운현씨?"

"어. 제니스씨."

길드의 간부인 제니스가 그녀의 전투용 드레스를 챙겨 입고 나와 자신을 부르자 운현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갑작스레 이야기에 끼어든 제니스를 보며 헤스티아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의 인사에 부드럽게 미소지은 제니스는 운현을 바라보았고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괜찮아요. 헤스티아. 여기 있다가 미야가 내려오면 미야랑 같이 놀고 있을래? 난 제니스씨와 좀 할 일이 있어서."

"무슨 일인데요?"

"아아. 내가 던전 도시에 온 이유가 의뢰때문이었거든. 그 의뢰에 관련된게 제니스씨라서 그래."

"그게 어떤..."

"나중에 말해줄게."

빙긋 웃으며 운현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헤스티아는 살짝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런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너털웃음을 터트린 운현은 헤스티아의 입술에 살짝 키스해 준 후 몸을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헤스티아가 입을 다물자 운현은 느긋한 걸음으로 제니스와 함께 길드를 나섰다.

"무슨 일입니까."

"그들을 죽인 것이 운현님이십니까?"

그가 아니고 그들이다. 제니스의 질문에 운현은 '그들'이 뜻하는 것이 아이라, 다난의 마법사, 그리고 레빈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알고 있는 듯한 그녀의 말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운현님께서 아이라를 죽이는 것을 제가 봤습니다. 창문을 통해 나온 아이라의 뒤통수를 향해 단검을 던지시더군요."

'그건 또 언제봤데.'

제니스가 떨떠름히 말하자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정신을 파괴하며 정보를 얻어내 알고 있는 사람들을 싸그리 다 죽여 살인멸구를 했겠지만 제니스는 일단은 자신에게 협력하는 사람이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지?"

"...암살자 길드에서 운현님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공터에서 본론을 꺼낸 제니스는 심각한 듯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그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암살자 길드는 집요합니다. 그들이 목표로 했다면..."

"그것도 그렇군."

"예. 그러니 당분간 저와 함께."

"그들을 이용해야겠어."

"네. 제가 돕... 네?"

운현이 당분간은 얌전히 자신과 같이 있어주길 바랬던 제니스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현자의 선택을 받은 예언의 인물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보호하고 싶었던 그녀는 운현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자 이해를 하지 못한 듯 떨떠름히 말했다.

"암살자 길드를 너무 얕보시는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암살자들은 강..."

"그들이 강하다고 해봤자 날 잡을 수 있겠어?"

"...어느새."

운현의 손에 단검이 들렸고 그것이 자신의 목에 닿아 있는 것을 본 제니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보이지조차 않았다. 그의 실력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제니스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운현님은 그렇다 치더라도 운현님과 함께 하고 있는 그 여인들은."

"그건 너에게 부탁하지. 당분간 걔들 좀 보살펴라."

"음... 알겠습니다. 하지만 조심해주십시요. 암살자들은 정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운현님을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들이 찾는 것은 아이라라는 자를 죽인..."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카를로스를 죽인 사람을 찾고 있는 겁니다."

'호오...'

"카를로스? 그게 누구지?"

운현이 느긋하게 웃으며 묻자 제니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대부분을 알고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카를로스가 죽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어느정도는 예측이었습니다만... 역시 운현님이 그를 죽인 것이군요."

"말해."

그의 무감정한 말에 제니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다난교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지만 뛰어난 연극배우이기도 합니다. 단 한번도 스케쥴을 어긴 적이 없고 뛰어난 연기 실력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요. 그런 그가 지금 계획된 연극에 무단으로 세번이나 불참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스케쥴을 어긴 적이 없는 남자가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내가 그를 죽였다고 추측한 건가?"

운현이 조용히 묻자 제니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번째 이유는 카를로스가 숙소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작 하루?"

"고작 하루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정해진 숙소 외에의 곳에서 자는 일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걸 어떻게 알아?"

"알 수 밖에요. 그는 다난교의 주요 인물입니다. 그리고 카를로스는 저희가 파악하고 있는 다난의 검은 날개 중 유일하 사람입니다. 그가 다른 검은 날개와 접촉하는 순간을 찾아내기 위해서 그를 주도면밀히 조사했습니다. 그의 습관, 정체, 정보. 그런 것을 모를리 없지요."

"호오. 그럼 다난교에 대해서 꽤 알고 있다는 얘긴가?"

제니스의 말에 운현은 느긋한 어조로 물었다. 만약 제니스가 다난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쉬워진다. 운현이 묻자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세한 정보를 말씀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지금 말씀드리기는 힘들 것 같군요. 운현님. 만약 암살자 길드를 접수하실 생각이라면 윈디아씨와 상의를 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이번에 카를로스를 죽인 자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것도, 그리고 운현님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그녀이니까요."

"윈디아?"

윈디아라면 윈드의 동생이 아닌가. 상인 조합의 조합장이며 던전 도시의 시장인 그녀다. 그녀와 상의를 하라는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운현이 궁금해하며 묻자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암살자 길드의 길드장이 그녀입니다."

"...뭐?"

이건 과거에도 몰랐던 일이다. 그가 당황하자 제니스는 차분히 주머니에서 녹색의 작은 패를 꺼내어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저 역시도 암살자 길드의 간부이기도 하죠."

"...어 음. 잠깐만. 그게 진짜야?"

"네."

"당신 모험가 길드의 간부잖아. 그런데 무슨..."

운현의 질문에 제니스는 잠시 망설였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과 같은 일이기에 한참이나 망설이던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운현은 강력한 힘을 가졌다. 만약 그가 암살자 길드와 부딪히기로 마음먹는다면 암살자 길드가 되었든 운현이 되었든 둘 중 하나는 무사하지 못할 터. 그리고 그 둘 모두 자신에게 있어서 절대로 좋은 일은 아니었기에 제니스는 암살자 길드에 대해서 말해주기 시작했다.

"암살자 길드의 역사는 깁니다. 어떻게 본다면 모험가 길드보다 더 길지요. 던전은 많은 이권을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그곳을 차지한 도시가 만들어지는데... 각 나라에서 불만이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런가. 그 불만들을 억제하는 것보다는..."

"네. 모두를 죽였습니다. 시작은 저였지요."

"그렇다면 네가... 던전 도시를 만들었다고 봐도 되는 건가? 아니. 암살자 길드가 만들었다고 해야 하나?"

"네."

"그렇다면 이건 좀 이상하군. 윈디아의 나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길드장이라고? 누구냐. 암살자 길드를 세운 자는. 암살자들을 움직여서 던전 도시가 만들어지길 원한 자는 누구지?"

운현의 질문에 제니스는 한점의 망설임없이 답했다.

"저입니다."

"왜?"

"현자의 지시였으니까요. 현자의 지시에 따라 던전 도시가 만들어질 틀을 세우고, 던전을 저희 모험가 길드에서 관리하는 것. 그 모든 것이 현자의 지시였습니다."

제니스는 차분한 어조로 말한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깁니다. 다만 암살자 길드와 적대하지 않으실 것이라면 이 패를 가지고 윈디아와 만나주시길 바랍니다. 그녀도 바보가 아니니 운현님과의 거래에서 충분히 협의점을 얻으려 할 것입니다."

"뭐 이래저래 질문할 것은 많지만 협의점이란 말에는 좀 기분이 나쁘군. 협의? 미안하지만 이미 암살자에게 한번 공격을 당했어. 협의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아마 그에 대한 보상은 그녀가 충분히 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암살자 길드는..."

"알아. 암살자 길드를 박살내는 것보다는 이용하는 것이 좋다는 거지. 하지만 그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거 영 기분이 나쁘구만."

자신의 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운현이 이를 드러내며 싸늘히 말하자 제니스는 난처한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럼 어찌하신다면 기분이 풀리시겠습니까?"

"아니 뭐. 네가 풀 필요는 없어. 지금 길드장은 윈디아라고?"

패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후 운현은 공터에서 걸어나갔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제니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은 여러가지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군.'

제니스에게는 투덜거렸지만 지금의 상황은 운현에게 있어서 꽤나 좋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인 조합의 조합장이자 현 시장인 윈디아가 암살자 길드의 길드장이다. 암살자에게 한번 습격을 당한데다가 암살자 길드가 자신을 찾고 있다면 그들은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했다.

'레밍. 윈디아. 다난... 그리고 암살자 길드. 하하. 이거 진짜 일이 재밌게 흘러가는군.'

과거에는 알지 못했던 일들이 점점 수면 위로 솟아 오르는 것에 운현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과거에 윈드의 일로 자신을 귀찮게 했던 그녀를 이번에는 자신이 귀찮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니스는 일단 나에 대해서는 암살자 길드에 알리지 않은 것 같고..."

운명을 바꾸고 싶어하는 제니스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손을 들지 않고 암살자 길드의 손을 들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운현은 눈 앞에 보이는 시청을 보고 하이딩을 걸었다.

'일단 만전을 가하자.'

최대한 자신을 숨겨야 한다. 제니스가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말할 가능성은 적은 만큼 자신의 정체가 탄로났다고 보긴 어려웠다. 그렇기에 운현은 평소 입고다니는 나이트호크세트가 아닌 미믹맨의 복장을 한 채 하이딩을 걸고 시청에 잠입했다.

시간이 꽤나 지났지만 이 세계의 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운현이었다. 여유롭게 사람들 사이를 지나 시장실 앞에 도착한 운현은 시장실의 문에 기대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지 확인했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것을 확인한 운현은 작게 침을 삼킨 후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아무도 없나.'

조용한 시장실 안에 도착한 운현은 과거 피스나가 사용할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시장실의 구석에 등을 기대고 서서 윈디아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해주세요."

"네. 시장님. 그리고..."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들린다. 하나의 목소리는 귀에 익고 하나의 목소리는 과거에 들었던 목소리다. 윈드와 윈디아가 걸어들어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운현은 그녀들이 들어오자 숨을 죽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었다.

"어휴 힘들다."

한참동안이나 공무에 대한 보고를 끝낸 윈드는 푹신한 쇼파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빙긋 웃은 윈디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끓여 내어주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소개시켜드린 라탄씨와는 어때요?"

"아아... 그게 말이지."

윈디아의 질문에 윈드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베시시 웃었다. 어째 잘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는지 윈디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라탄씨와 잘 되면 언니는 발렌타인 가문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아마도... 그렇지만 널 혼자 두고 가기는 좀 그런데. 너도 같이 가는 건 어때?"

"죄송해요."

자신을 걱정하는 윈드를 향해 윈디아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시장일도 이제 끝나잖아? 네가 할 일이 있어? 칼도 제대로 못쓰면서 혼자 여기 있다가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몇가지 마무리 지을 일이 있거든요. 그래도 걱정말아요. 금방 따라갈테니까. 그리고... 절 지켜주는 상인 조합의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언니한테 배운 검술이 있잖아요. 너무 걱정마세요."

"에구. 그거가지고 뭘 하겠다고. 100레벨도 되지 않는 애들이랑 싸워도 지면서.... 어휴. 그래. 그래. 에구 이쁜 것. 이 언니는 항상 네가 걱정이다."

윈드는 싱글싱글 웃으며 윈디아의 볼을 꼬집었다. 그녀가 해주는 애정표현에 난처하게 웃은 윈디아는 몇가지 서류를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그것을 받은 윈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폈다.

"으아아~!! 아. 내일 우리 저녁 먹기로 한 거 잊지 마."

"알겠어요. 오늘도 그럼 수고하세요."

"아아~"

직급은 자신보다 위이지만 항상 자신의 동생 역할만 해주었던 착한 동생 윈디아에게 웃어보인 윈드가 밖으로 나가자 윈디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치운 후 자신의 책상에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책상 옆의 비밀 버튼을 눌러 서랍을 연 그녀는 그곳에서 장검을 꺼낸 후 잡은 후 운현이 있는 곳을 향해 능숙하게 검을 겨누며 싸늘히 말했다.

"나와."

316====================

악의 신

"헤에."

자신을 정확히 보고 있는 듯한 윈디아의 모습에 감탄하며 운현은 차분히 하이딩을 풀었다. 그를 보고도 윈디아는 전혀 겁먹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사냥감을 발견한 포식자처럼 더더욱 짙게 웃기 시작했다. 아까 전 윈드의 앞에서 보였던 미소와 다른 잔혹하기 그지 없는 그 웃음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단검을 들었다.

"딱히 싸울 생각은 없지만 싸우는 것을 원한다면 붙어주지."

"바민이 보낸 것이 아닌가?"

"바민 얘기는 왜 나와?"

"그 스킬은 암살자들이나 가능할 법한 스킬인데."

운현의 하이딩을 떠올리며 윈디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직 경계심을 풀지는 않은 것인지 윈디아는 운현에게 겨누고 있던 검을 치우지 않은 채 그에게 물었다.

"뭐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지?"

"옛다."

적대적인 윈디아를 향해 운현은 제니스가 준 패를 휙 던졌다. 그것을 받은 윈디아는 차가운 미모를 살짝 찌푸리고 천천히 검을 거뒀다.

"제니스가 보낸 건가?"

"뭐 그렇게 생각하는게 좋겠지?"

"당신은 누구지?"

"지금 암살자 길드에서 열심히 찾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두는게 좋겠지."

느긋한 그의 말에 윈디아는 다시 그에게 검을 겨눴다. 그런 그녀를 향해 피식 웃은 운현은 단검을 까딱거리며 여유있는 어조로 말했다.

"그 칼 안 거두면 카를로스 꼴 날텐데."

"카를로스 하나 잡았다고 기고만장하는 것 같은데. 난 좀 다를걸?"

윈디아의 싸늘한 말. 그리고 자신에게 겨눠진 그녀의 검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살기에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일단 패놓고 시작을 할까? 아니면. 잠시 생각하던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제 파악 못하는 년은 맞아야지.'

단검을 든 채 운현은 빠르게 튀어나갔다. 생각보다 빠른 운현의 움직임에 놀란 윈디아가 겨누던 검을 움직인 순간 운현은 단검을 역수로 잡은 채 그녀의 검을 쳐내고 윈디아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 주먹을 무릎으로 막아낸 윈디아가 공격을 이어나가려는 순간 운현은 그녀의 무릎에 침투경을 날렸다.

"카학!? 큭...으윽...!"

"오오... 이거 맞고 그렇게 반응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네."

기습적인 침투경이라 방어할 여지도 주지 않았다. 제대로 침투경이 들어갔는데 고통을 참아내며 검을 들어 방어자세를 취하는 윈디아의 모습에 운현은 감탄하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방은 버텼다고 치고. 두방째도 버틸 수 있을까?"

"이런 더러운 자식. 모험가 길드의 길드원이었나."

자신이 당한 기술이 침투경이라는 것을 알게 된 윈디아는 고통을 참아내느라 땀을 주륵주륵 흘리면서도 적의를 풀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빙긋 웃은 후 단검을 겨누고 말했다.

"아니라고 해봤자 믿지는 않겠지? 자. 이제 대화라는 것을 해볼까?"

"크윽...흡! 확실히 카를로스보다는 강한 것 같군."

아까의 일격. 그리고 침투경을 저토록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실력. 자신을 상대로 하며 저 여유를 부리는 것. 아무리봐도 자신보다 밑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윈디아는 운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자 길드의 길드장이기도 하지만 상인 조합의 조합장이기까지 한 그녀다. 어떤 것이 이득이고, 어떤 것이 손해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울리 없었다.

"그래서. 날 왜 그토록 애타게 찾았지? 다난교의 의뢰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

"그런 것도 있지.. 라는 것은 그 외의 이유도 있다는 건가?"

운현의 질문에 윈디아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하자면 길어지는데. 차라도 한잔 할텐가? 그리고 이왕이면 그 마스크 좀 벗어줬으면 좋겠는데."

"아. 내가 겁이 되게 많아서 말야."

"......"

운현이 착용하고 있는 마스크가 거슬렸던 윈디아였지만 그가 능글맞은 어조로 말하자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협상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녀가 고민하자 운현은 탁자를 톡톡 치며 말했다.

"협상하기 싫으면 관둬."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암살자 길드에서 널 노리는 이유는 암살자 길드의 목적에 네가 방해되기 때문이다."

"내가? 내가 뭘 어쨌다고? 아니 그보다 암살자 길드의 목적이 뭔데."

"던전 도시를 지키며 다른 세력이 던전 도시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암살자 길드의 목표다."

윈디아의 말에 운현은 제니스가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던전 도시의 설립, 막대한 이득과 힘을 위해 움직이려는 타국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 암살자 길드가 만들어졌다. 즉 던전 도시의 수호자를 자칭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던전 도시를 지키며 다른 세력이 던전 도시에 개입하지 못하게 한다? 이미 던전 도시에는 많은 다른 세력이 개입한 상태다. 그 중 특히 많은 개입을 한 것은 다난교. 그 다난교의 카를로스를 자신이 제거해줬으면 오히려 감사하다는 소리를 해도 모자랄 판국인데 일부러 찾고 있다?

운현은 윈디아가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고 찾는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웃기는 소리네. 그럼 다난부터 없애버리는게 어때? 지금 던전 도시에 다난교가 잠입한게..."

"알고 있어."

"어?"

"다난교도가 던전 도시에 있는 것정도는 알고 있어. 그 수도 대충 파악하고 있고. 명단도 가지고 있지."

"그런 걸 다 조사한건가?"

"대략적으로는.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다난교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차를 한모금 마신 윈디아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암살자 길드와 꽤나 협력적인 관계다. 당연히 그들에 대해 파악하고 있어야겠지."

"호오..."

암살자 길드를 접수하려고 했는데 다난과 한패라면 그냥 깔끔하게 지워버리는게 낫겠다.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윈디아는 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다난교도와 적인가?"

"음. 뭐 일단은 그렇다고 봐야겠지?"

카를로스를 제거했지만 자신에게 신성이 있는 이상 신성을 모으려 하는 카야는 자신과 어쨌든 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윈디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암살자 길드와 적이 될 이유는 없겠지."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물론.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암살자 길드와 다난교단은 같은 편이 아니야. 협력을 하고 있는 관계에 지나지 않아. 그들과 손을 잡는 것보다 너와 손을 잡는 것이 더 이득이라면 우리는 너와 협력을 할 용의가 충분히 있어."

"지금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다난과 그렇게 친한 관계는 아니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운현의 질문에 윈디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에 운현이 인상을 구기자 윈디아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다난교는 그저 던전 도시의 균형과 안정을 위해서 받아들인 것 뿐이지. 일단 나는 이래뵈도 파르티 교단의 독실한 신자라고."

"그거 의외군. 파르티 교단은 다난교를 사교로 인정하고 척살하기 바쁜 것 아니었나? 그런데도 독실한 신자라니. 독실한 신자가 다 죽었나본데."

"그거야 표면적인 이야기일 뿐이지."

이죽거리는 그를 향해 윈디아는 무덤덤히 말했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표면적인 부분이다?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윈디아는 그의 생각이 정리되길 기다렸다.

"설마. 파르티 교단은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다난교를 처리하지 않고 있는건가."

"그래. 이유는..."

"파르티 교단을 위해서? 표면적이라... 그럼 다른 종교를 허가한다는 것도 거짓에 불과하겠군."

운현의 말에 윈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파르티 교단의 진짜 교리는 유일신 신앙이야. 파르티 외의 모든 신은 인정하지 않는다. 파르티 교단의 성전에 등장하지 않는 신은 이단이고 존재해서는 안되는 신이다. 하지만 자비를 표면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상 다른 종교에 대한 탄압을 하기는 어렵지. 그렇기에 파르티 교단은 외부적으로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많은 탄압을 가하고 있어. 그러면서 각지에 파르티의 성당을 세우고 있고."

"인정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신앙을 따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밖에 없으니까. 많은 것을 베품으로서 무의식적으로 파르티 교단을 따르게 만드는 것인가?"

탄압이라는게 무자비하게 짓밟는 것만이 탄압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개종을 하면 많은 혜택을 준다. 기존의 종교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이득을 줄 수 있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그것만을 내세운다면 당장은 힘들더라도 세대가 지날 수록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종교를 향해 고개를 돌리게 될 수 밖에 없다.

"꽤나 장기적인 계획인데."

"그래. 파르티 교단은 오랜 시간 전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공략해나갔다. 무수히 많은 토착신앙이 존재한 곳들에 그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과 세련된 문화를 제공하고 신성력을 이용하여 그들을 돕게 함으로써 사람들 스스로가 파르티 교를 믿게 만들었지. 그리고 그런 식으로 잡을 수 없는 종교의 경우 사교로 지정하고 말야."

많은 이들이 따르는 종교다. 표면적으로는 자애롭고 자비로우며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따르게 만드는 종교인 이상 그들이 사교로 지정하여 물리적인 탄압을 시작한다면 대중이 바라보는 시선은 어떨 것인가.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대의를 따를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파르티 교단에게 세뇌당하고 있는 것이지. 그들은 빵과 술, 문화로 사람들의 마음을 세뇌시켜 자신들이 절대적인 정의라고 말하고 있어. 파르티를 따르는 것만이 선이고, 파르티를 숭배하는 것만이 옳은 일이다. 이런 식으로 말야."

"헤에. 그래서?"

"이미 대륙에 살아가는 이들의 7할 이상이 파르티를 따르고 있다. 이제는 파르티 교단은 각 주요 도시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고 강력한 집단이 되었지. 그런 그들이 이 엄청난 이득과 힘을 얻을 수 있는 던전 도시에 영향력을 끼치지 않을 것 같나?"

"그렇군... 그들을 막기 위해서 다난교를 이용하는 건가?"

"그래."

윈디아의 말에 운현은 그녀가 왜 다난교와 협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파르티 교단에 의해 사교로 지정된 다난교, 그리고 다른 세력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설립된 암살자 길드. 이 둘이 손을 잡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난교는 인신공양을 하는 종교가 아닌가? 그런 그들과 손을 잡아봤자 이득은 커녕 오히려 손해만 보게 될텐데."

"물론 그런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그 인신공양의 제물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인신공양의 제물이 되는 이들이 단순한 파르티 교단의 교도들, 아니면 그저 민간인에 불과한 이들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첩자들인가?"

"그래. 거기에 던전 도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들. 하루에 던전 도시에 들어오는 이들은 수십에서 수백명이나 된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이들이고, 또 던전을 공략하거나 상인 조합에 들어오고 싶어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기술을 배우고. 또 용병이 되려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타국 귀족의 첩자나 몰래 망명을 온 다른 종교의 교주들도 존재하고 있어. 그런 그들이 들어와 말썽을 피우는 것을 지켜보느니 우리는 차라리 그들을 제거하기를 원했지."

"던전 도시에서 나서서 제거하면 타 세력에게 트집을 잡힐 가능성이 있으니 다난교를 이용했다 이건가?"

"그래. 스파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즉결처분.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는 경우에는 산제물. 이런 식으로 처리를 하고 있지."

너무나도 담담히 말하는 윈디아의 모습에 운현은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에 희생된 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의 시선에 윈디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운현을 보며 말했다.

"물론 개중에는 죄 없는 일반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 우리도 사람이니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말야. 또 다난교 역시도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의 제물을 얻지 못해 아무나 잡아오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그 정도는 어쩔 수 없지."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분통이 터질만한 이야기를 윈디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거리낌없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겠다는 이야기다.

"왜. 내가 나쁜 년이라고 생각되나?"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자 윈디아는 쓰게 웃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아는 이들은 경멸의 시선을 보낸다. 안정을 위해서 소를 희생한다? 말이 좋지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녀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운현은 무덤덤할 뿐 이었다.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

317====================

악의 신

애초에 모든 이를 위해서 마련된 행복의 의자는 없다는 것이 운현의 지론이었다. 아니 애초에 운현 역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니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들을 구하기 위해서 몇천명이 죽든 말든 관심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인 운현이 윈디아를 욕할 처지는 못되었다.

"그건 그렇고."

"그, 그냥 넘기는 건가."

"던전 도시의 누굴 죽이든 말든 내 알바는 아니니까. 내 사람만 안죽이면 되지."

"끙. 그래서?"

"당신이 다난교와 협력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잘 들었어. 그건 그렇다고 치자고. 하지만 다난교와 손을 잡는 것은 오히려 파르티 교단이 이곳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쉬운 일 아닌가? 다난교는 파르티 교단에 의해 공적이 된 종교야. 그들이 이 던전 도시에 있다면 그들을 치기 위해서 파르티 교단이 사람을 보낼 것인데..."

"명백한 증거거 없으니 건드릴 수 없을 뿐더러,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이단 심판관이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어. 그녀에게 안좋은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파르티 교단이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은 없지."

"단순하긴."

"뭐?"

"그 명분이라는 것이 레나 하나뿐이라고?"

윈디아의 말을 비웃으며 운현은 싸늘히 말했다. 그의 말에 윈디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다른 제약사항도 있지만 가장 큰 것은 그녀..."

"만약 파르티 교단에서 그녀를 버린다면? 그녀가 다난교에게 습격당한 것처럼 꾸민다면 어떻게 할건데?"

"그건 불가능해."

"왜?"

"이유는 있어. 하지만 당신에게 말해 줄 수는 없는 거지."

"흐음..."

협상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이지 운현이 아군이 아니라는 것에 경계하며 윈디아는 무심한 얼굴로 운현을 보며 말했다.

"만약 당신이 암살자 길드의 소속이 된다면, 그리고 모든 것을 던전 도시를 위한다고 맹세한다면 모든 것을 가르쳐주겠어. 그리고 당신의 뜻대로 다난교를 적대할 수도 있지."

"헤에. 날 꽤나 높게 평가하고 있군."

"당신의 실력은 적어도 450 레벨 이상으로 보이니까 말야."

"내가? 그정도로 강하지는 않은데."

그녀의 말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안 것이지? 운현이 자신을 바라보자 윈디아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카를로스의 시체를 살펴봤어. 그는 아무런 저항조차 못한 채 목이 베어 죽었지. 아무리 약하다고 하지만 카를로스의 레벨은 430이 넘어. 그정도 레벨을 가진 자를 그렇게 간단하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레벨이 450은 된다는 이야기. 아직까지 450 레벨에 도달한 사람은 이 대륙을 통틀어 천검자 단 한명 뿐이야."

"그래서?"

"그 천검자가 만약 던전 도시를 공격한다면, 그녀를 상대할 만한 사람은 없다고 볼 수 있지. 그런 그녀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히든카드는 가지고 있는 게 좋으니까 말야. 다난교가 하는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이들은 많아. 하지만 천검자를 상대할 수 있는 이는 별로 없는 편이지."

"흐음..."

윈디아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품에서 한장의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테이블 위에 놓여진 글자를 읽은 운현은 피식 웃었다.

"계약선가?"

"저주에 가깝긴 하지만 그래도 쌍방 효력을 발휘하는 계약서다. 여기에 서명만 한다면 암살자 길드는 당신의 뜻을 따르도록 하지. 그게 어떤 일이라도. 던전 도시에 해악을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반드시 돕겠다."

결국 말하자면 윈디아는 운현이 던전 도시를 위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불순분자를 제거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파르티 교단이 더 이상 던전 도시에서 힘을 키우지 못하게 하기 위해 다난교를 이용하는 특별한 방법도 있지만 그런 것을 제쳐두고서라도 운현이라는 강자를 보유하고 있는다는 것은 던전 도시를 지키고자 하는 암살자 길드에 있어서 상당히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나쁜 얘기는 아니지만 기분은 좋지 않군.'

자신은 말을 쓰는 존재지 말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은 그녀들이지 던전 도시가 아니다. 이런 계약서를 써서 자신의 행동이 강제가 되어버린다면 오히려 본말전도가 되어버릴 수가 있기에 운현은 무덤덤한 얼굴로 계약서를 들어 북 찢어버렸다.

"좋은 이야기였는데."

"그렇긴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군."

"그래... 그렇다면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군."

대화는 끝난 것인가. 윈디아는 입맛을 다시며 옆에 둔 검을 잡았다. 그녀가 검을 잡자 운현은 손을 들어 그녀를 말렸다.

"내 얘기는 아직 안끝났어. 일단 네가 말한 것에 몇가지 문제가 있다."

"뭐지?"

"다난교가 언제까지 얌전하게 이용당할 것이라 생각하나?"

"알바 아니야. 다난교가 까불어봤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그건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소리지. 내가 보기엔 좀 힘들 것 같은데."

아르토리우스에게 들었던 윈드와 윈디아의 미래를 떠올리며 운현은 쓰게 웃었다. 윈디아는 자신과 닮은 사람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른 것 따위는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렇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최고로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그 목적 뿐.

'던전 도시를 위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윈드뿐이지.'

던전 도시가 다난에 의해 습격을 당했을 때도 윈디아는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윈드의 죽음으로 정신이 나가버렸다는 아르토리우스의 말을 떠올린 운현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날 적대하면 네가 가장 원하는 것을 잃을텐데."

"내가 가장 원하는 것? 그게 뭔데? 내가 원하는 것은 발렌타인 가문의 안정. 그리고 던전 도시의 평화와 중립이다."

"아아... 그래? 그럼 윈드는 내가 죽여도 상관없다는 건가?"

"마음대로 해. 그녀가 없어진다면 발렌타인 가문은 내것이 될테니까. 오히려 부탁하고 싶군."

"그래?"

강하게 나오는 그녀를 보며 운현은 빙긋 웃었다. 표정관리 정말 잘한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운현은 그녀의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뜻대로 하지."

"누구 마음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넌 던전 도시의 적이다. 그런 자를 이곳에서 내가 쉽게 내보낼 것 같은가? 내 허락 없이 이 자리에서 나갈 수 없다. 계약을 하여 던전 도시의 수호자가 되든. 아니면 여기서 목을 내놓고 가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하... 누구한테 협박질이야?"

윈디아가 살기를 뿜어내자 운현 역시 그녀를 향해 막강한 살기를 내뿜었다. 서로 노려보며 본격적으로 무기를 움직이려는 순간 엄청난 폭음이 시청의 바깥에서 터져나왔다.

"쨍그랑!!"

강력한 폭발이다. 그 폭발이 만들어낸 진동에 창문이 깨지거나 금이 갈 정도. 그것에 놀란 윈디아가 고개를 돌린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이런.'

갑작스러운 난입. 운현은 하이딩을 걸고 몸을 숨겼다. 운현이 사라진 것에 신경을 쓰지도 않은 윈디아는 들어 온 시청 직원을 향해 외쳤다.

"이게 무슨 소리지!"

"크, 큰일입니다!"

"무슨 일인데!!"

"윈드 경비대장이..."

"...뭐?"

"그... 폭발에 휩쓸렸어요!"

"뭐라고!?"

'이 폭발... 이건 다난의 폭탄마가 만들어낸 폭발인데.'

이정도 폭음, 그리고 위력. 운현은 과거 미야를 죽였던 폭발과 같은 폭발이 시청에서 터져나온 것에 이를 드러내었다. 설마 폭탄마가 움직인 것인가? 그렇다면 감사할 일이다. 카를로스에 이어서 찢어죽여 마땅할 년이 나타난 것이니까.

시청 직원과 함께 윈디아가 문을 통해 나가자 운현은 깨진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뛰어갔다. 그녀의 얼굴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바로 죽인다. 윈디아가 다난교와 어느정도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굳이 그녀에게서 정보를 캘 필요는 없다. 그냥 윈디아를 잡아 그녀의 정신을 붕괴시키고 정보를 빼내면 되는 것이다.

반쯤 박살나버린 시청의 문앞을 지나치려던 운현은 그 폭발의 중심에 쓰러져 있는 이를 발견했다. 하이딩을 건 그를 발견하지 못한 시청의 다른 경비병과 직원들은 쓰러져 있는 이에게 다가갔다.

"윈드 경비대장님!!"

"정신차리세요!!"

"힐링포션!! 힐링 포션 가진 사람없어!?"

"이, 이런 상처는 힐링포션으로는...!"

윈드의 몸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어찌나 폭발이 강력했는지 윈드의 갑옷은 거의 박살나 있었고 그녀의 몸의 반신의 피부는 완전히 다 타버렸다. 양 팔과 양 다리는 기이한 방향으로 부러져 있고 머리카락의 대부분은 바짝 타들어갔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태에서 겨우 숨만 부지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은 듯 싶었다.

"윈드 경비대... 언니!!!!"

'그녀가 없어지면 발렌타인 가문이 어쩌고 어째? 하이고. 잘도 그러겠다.'

애써 침착한 얼굴로 달려 온 윈디아는 주변의 시선을 느끼고 윈드의 직책을 부르려 했지만 그녀의 처참한 몰골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강하게 외쳤다. 안구마저 타버렸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힘겹게 손을 들어 올린 윈드를 보며 윈디아는 자신을 막는 사람들을 강하게 밀쳐내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아!! 어, 언니!! 언니!! 언니이이이이이!!"

"아...으...으으..."

"언니! 안돼!! 아아... 안돼!! 안돼애애!! 빠, 빨리!! 빨리 누구든지 성직자를 불러!! 빨리이이이!!"

윈드의 끔찍한 몰골에 윈디아는 거의 반 광란 상태가 되었다. 늘 냉정 침착한 윈디아가 이렇게 되다니. 시청의 직원들이 당황하는 동안 윈디아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다급히 외쳤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청에서 보관하고 있는 힐링포션을 가지러 가는 사람. 힐링을 쓸 수 있는 사람을 부르러 가는 사람. 모험가 길드에 가는 사람. 성당에 가는 사람. 각지로 그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며 윈디아는 윈드의 손을 꽉 잡으며 간절히 외쳤다.

"아.... 언니!! 언니!! 주, 죽으면 안돼!! 으아아아!! 언니!! 왜!! 왜!!!!"

"흠."

"아아...으으...언니... 언니.... 죽지마...흑...언니!! 언니이이!! 제발 죽지마!! 아아아아!!"

"으아...아..."

"안돼!! 안돼!!"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윈드의 손에 힘이 점점 빠지는 것을 보며 윈디아는 발악하듯 외쳤다. 그녀의 손을 꽉 잡은 그녀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운현은 쪼그리고 앉아 윈드를 보고 말했다.

"이제 죽겠군."

"거짓말... 왜!! 왜!! 웃기지마!! 안죽어!! 언니는 안죽는다고!!"

운현이 하이딩을 풀고 나온 것을 보며 윈디아는 강렬한 증오를 담아 그에게 외쳤다. 사랑하고,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언니가 죽는다는 것을 저리 쉽게 말하는 그를 향해 이글거리는 증오를 담아 외친 그녀는 윈드가 가쁜 숨을 토해내자 당황하며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언니!!"

"칵...으..."

"언니!! 조금만 정신차려!! 언니!! 아아아아!! 언니... 제발... 제발..."

"내가 살려 줄 수 있는데."

"...뭐?"

"자. 협상의 시간이다."

상대방이 아쉬운 처지에 빠졌다? 그렇다면 그때가 협상하기 가장 좋은 기회다. 그런 그의 말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윈디아가 이를 빠득 갈았을 때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자. 협상의 주제는 이거다.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나? 그렇다면 너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자를 살려주지. 하지만 거절하겠다면 어쩔 수 없어. 어차피 네가 나와의 거래를 거부한다면 너와 나는 적이니까 말야."

"어떻게 그런..."

"원래 거래란 것이 이런 것이지. 자. 윈디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고. 아주 간단한 계약이지. 어때? 아니면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 윈드의 앞에서 다시 한번 말해보지 그래? 윈드만 없다면..."

"닥쳐!!"

"오오. 나에게 그렇게 욕을 하고 분노를 할 시간이 있다면 빨리 결정하는게 좋을거야. 아무래도 그녀는.."

"커억! 윈...디아..."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혀로 힘겹게 윈드가 말하자 윈디아는 당황했다. 윈드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그녀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운현을 쏘아보았다.

"언니를 구해줘."

"현명한 선택이다. 이제 너와 나는 한배를 타게 되었으니... 내 능력을 보여주지."

운현이 느긋하게 말하고 손을 뻗자 그녀는 멍청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레이터 힐."

"뭐...?"

그레이터 힐이라면 초 고위의 사제들이나 가능한 최고의 회복술이 아닌가. 어떤 상처라도 회복할 수 있는 강력한 회복마법이 그의 손에서 발동되자 윈디아는 멍하니 윈드를 바라보았다.

"아아... 언니..."

밝은 빛에 감싸진 윈드의 상처가 재생되어간다. 타버린 피부가 하얗게 돌아오고 부러진 뼈가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엉망이었던 윈드의 몸이 치료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윈디아는 운현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넌... 도대체 누구냐."

"글쎄다."

가진 힘, 그리고 아까 보인 스킬. 거기에 그레이터 힐까지. 도무지 직업을 종잡을 수도 없다. 모험가인가? 아니면 사제인가. 그것도 아니면 암살자인가. 윈디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그레이터 힐을 걸어 윈드를 완전히 치료한 후 담담히 말했다.

"오늘 밤 다시 찾아오겠다. 이제와서 또 개소리는 하지 않겠지? 만약 헛소리를 한다면... 내가 살린 목숨."

"....."

운현은 이제는 안정적인 숨을 내쉬는 윈드를 가리켰다.

"다시 거둬가겠다."

"...좋아."

윈디아가 자신을 노려보다가 결국 굴복하자 운현은 빙긋 웃은 후 몸을 돌렸다. 그가 멀어지는 것과 자신의 품 안에서 안정적으로 숨을 쉬고 있는 윈드를 번갈아 바라 본 윈디아는 윈드가 신음하며 눈을 뜨자 그녀의 코를 꽉 비틀며 울먹거렸다.

"바보 언니야... 좀 걱정 시키지 말라고."

예상치 못한 일로 윈디아와의 거래에서 큰 이득을 보게 되었지만 운현의 속은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골목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운현은 심각한 얼굴로 레밍의 집으로 향하며 이를 드러내고 싸늘히 중얼거렸다.

"나 외의 다른 누군가가 운명을 바꾸려 하고 있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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