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294====================
만남
"다녀오셨나요?"
운현이 성당으로 돌아오자 레나는 쓰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그가 입고 있는 나이트호크 세트 갑옷. 전의 블랙 플래그 세트 갑옷에 비하면 훨씬 좋지 않은 갑옷이다. 자신들 일에 엮여 이런 일을 겪게 된 것이 안타까웠던 그녀는 운현을 향해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럼 가실까요?"
"가는 것은 좋지만 지금 그들을 치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군요."
"....."
운현의 말에 레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꼬리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그들을 공격하여 섬멸해봤자 다른 꼬리가 나타날 수도 있었고 결국 자신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꼬리만 잡을 수 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그럼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일단은 교단에 지원요청을 하는게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지원요청... 하지만 롤랑님께서..."
"롤랑님 말고 다른 능력 있는 성직자 분을 요청하는게 어떨까요?"
"으음..."
운현의 말에 레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자신과 운현만으로는 다난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좀 더 고레벨의 사제와 성기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레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운현에게 말했다.
"그럼 제가 본단에 요청을 할게요. 아마 삼일에서 사일 정도 걸릴 것 같은데. 그동안 운현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돈을 좀 벌어야겠는데... 블랙 플레그 세트 정도는 아니더라도 괜찮은 갑옷과 무기가 필요합니다. 제 거검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건 아무래도 눈에 너무 띄이는 지라."
"흐음... 검은 제가 마련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오? 어떤 검을..."
"이단 심판관에게 지급되는 축복받은 무기가 있답니다. 그걸 쓰시면 될 것 같아요. 저는 검을 잘 못다루는데다가 전속 성기사가 없어서 아직 그 검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그런가요? 그거 잘 됐군요. 하지만 그걸 제가 써도 되는 건가요?"
운현이 걱정스레 묻자 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데다가 신성까지 가지고 있는 그라면 충분히 잘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자신과 같은 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그럼 본단에서 지원이 올때까지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그 무기를 본단에 두고 와서..."
"알겠습니다. 그래도 돈은 필요하니..."
"그럼 모험가 길드에 등록하시는게 어떤가요? 운현님 정도라면 충분히 던전을 탐험하실 수 있으실테니까 그 마석과 코어로 돈을 버시면 될 것 같아요."
"그게 좋겠군요."
"아, 그리고 제가 상아씨를 소개시켜드리기로 했었죠? 같이 갈까요?"
"네."
그녀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레나와 함께 성당을 나섰다. 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모험가 길드 앞에 서자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녀들을 만나는 시작이다. 레나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운현은 소란스럽던 회관이 순간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오... 남자잖아!?"
"갑옷을 보아하니 나이트 호크 세트... 그래도 어느정도 실력은 있는 모험가 같은데? 이봐. 우리 파티에 들어오는 건 어때?"
회관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몇몇 모험가들이 운현에게 추파를 던졌다. 던전 내의 몬스터를 상대하면 바깥의 몬스터보다 더욱 많은 흥분도가 올라간다. 심층을 노린다면 남자 파티원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모험가들이 웃으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들으며 운현은 빙긋 웃은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등록도 안한지라."
"그래? 그럼 등록하고 오라고!"
여전히 자유분방하며 밝은 모험가 길드의 분위기가 마음을 풀어준다. 운현이 쓴웃음을 짓자 앞서 걷던 레나는 그에게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인기 많네요. 예상은 했지만."
"뭐 그럴 것 같았습니다. 다른 모험가들과 상대할때도 이런 분위기였으니까요."
"헤에... 아. 어라? 필레씨는 없나보네요?"
"필레는 시청에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어요. 레나 사제님. 모험가 길드에 오시는 것은 또 오래간만이군요. 무슨 일이신가요?"
사무소에 앉아 있는 것은 실비아였다. 자신의 약혼자를 인질로 잡혀 운현을 배신하고 죽이려 했던 그녀다. 그때의 광기와 슬픔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의 그녀를 다시 마주하자 운현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운현이라고 합니다. 모험가 등록을 하고 싶어서 그런데..."
"오오오~ 잘생기신 남자분이시네요~ 모험가 등록이요!? 남자 모험가는 언제든지 환영이죠."
"실비아씨. 잠깐만요. 그 전에 상아 길드장님을 만나뵙고 싶은데... 지금 계신가요?"
"이런... 어쩌죠? 상아 길드장님은 지금 던전에 계신데... 일주일 후에나 나오실 예정이라고 하시네요."
"시장선거 등록이 얼마 안남았는데도... 여전하시네요."
"그게 장점이니까요."
레나가 쓰게 웃으며 말하자 실비아는 빙긋 웃어 준 후 고개를 끄덕이고 운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운현씨라고 하셨죠? 이걸 작성해주시겠어요?"
모험가 등록을 위한 용지를 받은 운현은 능숙하게 글을 써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은 실비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운현에게 잡파인더를 내밀었다.
"이걸 잡아주세요."
"우우웅..."
별다른 설명없이 잡파인더를 건넨 그녀는 운현이 잡파인더를 잡자 그곳에 떠오르는 문자를 읽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어라?"
"왜 그러세요?"
"아니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실비아는 잡파인더의 수정에 떠오른 문자에 이상함을 느끼며 서랍을 뒤져 한권의 두꺼운 책을 꺼내어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한참 찾던 그녀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운현을 보며 말했다.
"직업 적성에 맞는 것이 단 하나도 없네요. 이런 적은 처음인데. 고장났나?"
지금까지 등록을 한 모험가들 중에 직업 적성이 떠오르지 않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실비아는 그것에 의문을 품으며 미안하다는 얼굴로 운현에게 잡파인더를 내민 후 다시 요청했다.
"한번만 더 잡아주시겠어요?"
"우우웅..."
잡파인더에 손을 올린 운현이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았을 때 실비아는 더더욱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마찬가지다. 추천 직업이 떠오르지 않는 것에 난처한 얼굴을 하던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볼을 긁적거린 후 말했다.
"저기... 죄송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왜요?"
"음. 그게 말이죠.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다른 간부님들이 보시는게 맞을 것 같아요. 저희 길드를 세우셨던 제니스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라면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아실 것 같아요. 지금 1계층에 계시다고 하니까 금방 오실거에요."
'제니스...'
모험가 길드를 세우고 모험가의 틀을 만든. 운명의 농락에 의해 희생된 여인이다. 그것을 떠올린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운현에게 물었다.
"꽤 좋은 실력을 가지고 계신데도 이러시는 걸 보니... 사실 실력이 없으신 것 아니에요?"
"그럴지도 모르죠."
레나의 농담에 운현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런 그를 향해 빙긋 웃은 레나는 운현의 어깨를 톡 친 후 말했다.
"그럼 저는 일단 성당에 가 있을게요. 등록을 마치시면 성당으로 와주시겠어요?"
"그러죠."
레나가 밖으로 나가자 운현은 모험가 길드에 홀로 남게 되었다. 그가 테이블에 앉아서 맥주를 주문해 홀짝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큰 덩치의 여인이 다가왔다.
"헤에... 남자 모험가는 또 오래간만이군. 나는 루비라고 해."
"...그런가요. 반갑습니다. 운현이라고 합니다."
"생긴거와 다르게 예의바르네. 모험가 아니야? 직업은?"
루비는 운현의 복장과 외모를 보며 느긋하게 물었다가 그의 부드러운 어조, 그리고 공손한 태도에 놀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빙긋 웃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운현은 그녀가 자신의 앞에 앉자 맥주를 홀짝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직업은 어떻게 되시나?"
"글쎄요. 아직 직업이 없네요. 등록도 하지 않은 상태라서 말이죠."
"등록을 안했어? 그럼 잘 됐네. 등록하면 어떤 직업이든 상관없으니까 우리 클랜에 들어와주지 않겠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만 조금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군요. 당신의 클랜은 대형 클랜인가요? 그리 실력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데..."
"하하하. 정곡을 찔렀네. 맞아. 우리는 아직 1, 2계층을 다니는 클랜일 뿐이야. 하지만 어때? 낮은 곳부터 시작해서 높은 곳을 노리자고."
"음... 역시 좀 더 생각을 해보고 싶네요."
"쳇. 그럼 어쩔 수 없나."
루비는 생각보다 집요하지 않았다. 좀 더 끈질기게 말을 걸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녀가 쉽게 물러나는 것에 운현은 빙긋 웃었다.
과거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허접한 도적에 불과했고, 또 복장도 나이트호크 세트가 아닌 일반 천옷에 불과했었다. 그랬기에 루비는 운현이 갈 곳이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좀 더 열정적으로 권유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운현은? 던전 도시의 대사제인 레나와 함께 들어왔고 입고 있는 복장도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자가 입을 만한 복장이 아닌 나이트호크 세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날 죽이기 어려울테니 말야.'
루비의 목적은 던전 도시 내의 모험가 길드의 힘을 끊어내는 것. 그리고 모종의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다. 과거 자신의 함정에 걸려 죽었던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운현은 부드럽게 웃은 후 말했다.
"아무튼 당신의 이름은 기억해두겠습니다."
"나 역시 기억해두지. 그럼 던전에서 만나게 되면 좀 도와달라고."
"물론이죠."
'아주 깔끔히 목을 잘라주지.'
그녀가 다난 교도인 이상 자신의 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필요할때까지는 살아남겠지. 하지만 필요가 없어진다면? 위험의 대상이 된다면 싹을 잘라낸다. 운현은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고 그녀가 멀어지자 다른 여인들 몇몇이 다가와 운현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 직업이 결정되지 않았다면!"
"우리 클랜으로 꼭!"
"하하..."
도적이든 아니든 남자 모험가는 귀하다. 거기에 어느정도 숙련되어 보이는 운현 정도의 모험가라면 즉시 실전에 투입할 수 있으니 더욱 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꽤 많은 여인들은 운현에게 파티를 제안했지만 운현은 그들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개중에는 아르의 파티도 있었다. 다난에 의해서 희생당한 이들. 그들이 제안을 했을 때는 조금 흔들리기는 했지만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는 그녀들과 파티를 해서는 곤란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를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의 최종적인 목적은 그녀들과 필레, 상아를 구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지난 삶을 살아왔던 운현이 모두를 물리쳤을 때 사무소에서 나온 실비아는 운현에게 다가와 물었다.
"제니스씨가 오셨어요. 같이 가시죠."
"알겠습니다."
'제니스... 현자와 무언가 관련이 있었지. 그렇다면 현자가 귀뜸을 해뒀을 수도 있어. 일단은 그녀를 떠봐야겠군.'
실비아의 안내로 사무소 안으로 들어간 운현은 복도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기한 듯 복도를 보는 운현을 향해 웃으며 실비아는 차분히 말했다.
"생각보다 호화스럽지는 않죠? 던전 도시를 지탱하는 네개의 기둥 치고는..."
"아하하..."
"이게 길드를 세우신 제니스님의 이념이라고 하시네요. 모험가는 권위를 가져서는 안된다. 권위는 멍에. 그 멍에에 잡힌 순간 모험가는 모험가로서의 뜻을 잃는다..."
"좋은 이야기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 여기서 제니스님이 기다리고 계실거에요. 들어가시면 되요."
운현이 웃으며 말하자 마주 웃어 준 실비아는 한쪽의 문에서 멈춰 문을 두들겼다.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리자 실비아는 문을 열어주었고 운현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굉장히 검소한 방이다. 침대 하나, 쇼파 하나, 그리고 테이블 하나와 나머지는 오로지 책장뿐. 그 쇼파에 앉아서 차를 준비한 여인을 보자 운현은 씨익 웃었다.
'눈에 안대는 여전하군.'
"어서 오세요. 운현님."
전투용 드레스를 입은 채 운현을 반긴 그녀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 앉은 운현이 입을 다문 채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제니스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직업 적성이 없으신 분이라구요?"
"네. 그렇다고 하네요. 잡 파인더로도 찾을 수 없다고..."
"하하하..."
운현의 말에 쓰게 웃은 제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운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백년간 당신을 만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운명을 파괴하실 구원자님이시여."
295====================
만남
"아니 이게 무슨..."
제니스가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간절한 어조로 말하자 운현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다가오는 것에도 일어나지 않은 채 고개를 조아리던 제니스는 운현을 올려다 본 후 말했다.
"현자의 예언입니다. 오백년 후, 잡 파인더로도 직업을 찾을 수 없는 분이 나타나면 그야말로 진실된 운명을 가져 올 수 있는 사람이라고..."
"진실된 운명이라..."
운현이 낮게 중얼거리자 제니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만이 운명에 의해 고통받는 저희들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이라 들었습니다."
"현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믿습니까? 그저 가짜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제니스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운현의 말을 부정했다.
"그럴리 없습니다. 현자께서는 미래를 보시는 분. 그 분이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진실이지요."
'세뇌라도 한건가...'
의심을 하지 않는, 맹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니스의 말에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이번의 이계 진입을 통해 아르토리우스라는 협력자가 없을 것에 대해서는 현자와의 이야기를 통해 예상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는 협력자가 필요했다.
'협력자를 만들어 놓겠다고 했더니... 이게 제니스였나.'
"잡 파인더는 누가 만든 것입니까?"
"현자가 구상하고 제가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잡 파인더로 자신의 직업을 찾지 못한 이는 단 두명 뿐. 바로 현자와 당신뿐입니다."
"그런가요..."
과거에도 제니스는 현자와 어느정도 관련이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제니스를 자신의 계획에 넣어야 하는 것인가. 모험가 길드 내에서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움직여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괜찮은 일이었다. 빠르게 자신의 계획에서 제니스가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한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제 목적을 아십니까?"
"네."
"그게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운명을 바꾸는 것."
"자칫 잘못했다간 당신의 운명도 바뀔 수 있습니다. 저와 관계된다는 것은 예정된 운명의 흐름을 따라간다는 것이지요. 제니스씨. 당신은 하이엘프지요?"
"네... 역시 절 알고 계시는군요."
"수많은 세계를 경험한 저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이곳도 포함되어 있지요."
운현의 말에 제니스는 우울한 듯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운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운명을 바꾸려 하는 하우드, 그리고 그 하우드와 맺어 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인 당신. 묻겠습니다. 당신은 하우드를 사랑합니까?"
"...네."
"하우드가 자신의 운명을 거절한다 하더라도 그가 가진 운명의 상대는 당신입니다. 그런데도 운명을 바꾸고 싶다는 건가요?"
"네."
"어째서죠?"
운현의 질문에 제니스는 입을 다물고 머뭇거렸다. 그런 그녀의 대답이 나오길 얌전히 기다리던 운현은 제니스의 도톰한 입술이 열리자 쓰게 웃었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운명에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볼 수 없어요."
"후.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지도 모르는데... 돕겠다는 것입니까?"
"네."
제니스는 이미 마음을 먹은 모양이다. 그녀가 단호히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합니다. 제니스씨. 앞으로 제 말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현자가 선택할 정도고, 그녀 역시 운명에 대한 강한 증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움직여 줄 말이 될 가치가 있었기에 운현은 그녀와 손을 잡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운현님."
"자. 그럼 이제부터 할 일을 해야겠군요. 제가 왜 직업을 가질 수 없는 것일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너무나 많은 직업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잡 파인더가 당신의 직업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자 역시 마찬가지지요. 당신이나 현자나 인간의 한계를 넘어 선 힘을 가졌습니다. 그렇기에..."
"그렇군요. 그럼 방법은 하나겠군요. 잡 파인더가 추천하지 않는 직업을 가지는 것."
"네. 어떤 직업을 원하십니까?"
어차피 스킬은 큰 의미가 없는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담담히 말했다.
"검사로 하지요."
다른 유틸 능력이 많은 직업도 나쁘지 않지만 제대로 움직이려면 전투 능력을 갖추는 것이 나았다. 전처럼 도적 직업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직업 적성이 맞지 않는다면 스킬이 제대로 들어온다고 볼 수 없었고 또 보물상자나 함정에 큰 위험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기에 운현은 대수롭지 않게 검사의 직업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이것을."
그의 말에 제니스는 고개를 끄덕인 후 주머니에서 작은 카드 하나를 넘겼다. 검사 직업이 설정된 카드다. 그것을 운현이 받자 제니스는 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 마력을 넣어주세요."
"우웅..."
마력이 카드에 흘러가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과 레벨이 떠오르자 운현은 카드를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레와 만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이제 모험가 길드에서 뭔가 할 일은 없었다. 내일 헤스티아와 만나면 된다. 운현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제니스는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숙소를 결정하지 않으셨다면 제 방을 드리겠습니다. 누추하지만..."
"괜찮습니다. 제 걱정은 마시고 일단 평상시대로 행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제니스는 운현이 나가자 공손히 고개를 숙였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운현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존대와 그 공손한 태도는 그만둬주십시요."
"하지만..."
"명령입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아니, 알겠어."
가타부타 설명 없이 명령이라고만 했을 뿐인데도 제니스는 그저 당혹스러워하기만 할 뿐 이었다. 그녀가 순순히 예전의 모습을 보이자 운현은 조용히 그녀에게 말했다.
"일단 첫번째 목표는 다난입니다. 허나 바로 다난을 치는 것은 곤란합니다. 저는 신경쓰지 마시고 원래 하던대로 행동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필요할때 제가 요청하겠습니다."
"분부대로 하지요."
"그럼 안녕히."
"조심히 들어가십시요."
제니스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배웅하자 운현은 그녀의 방을 나왔다. 터덜터덜 걸어 길드 밖으로 나온 운현은 쥐고 있는 카드를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검사라...'
어떻게보면 잘 맞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킬 중 전투에 써먹을 수 있는 스킬도 한손검 숙련이다. 거검이라고는 하지만 양 손으로도, 한 손으로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니 큰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앞으로군.'
앞으로의 행동이 중요하다. 운현은 자신의 모험자 카드를 주머니에 넣은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내일부터 시작인 것이다. 머릿 속이 복잡하다. 그는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들었다.
"재수 없는 엘프년!"
"이래서 엘프년이랑은 같이 다니기 싫다니까!!"
한무리의 모험가들이 궁시렁거리며 지나치는 것을 본 운현은 가게 앞에 서서 시무룩한 얼굴을 한 여인을 발견했다. 긴 귀가 축 늘어져 있고 실패했다는 얼굴로 양 손에 커다란 고기꼬치를 들고 있는 미녀다. 늘씬한 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언동과 특유의 마이페이스를 가지고 있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여인이 한숨을 내쉬 터덜터덜 자신을 지나치는 것에 운현은 딱딱히 굳었다.
"친해지고 싶었는데..."
시무룩한 목소리. 상처받은 목소리.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그녀가 지나치는 것을 보며 운현은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바제트.'
엘프 특유의 마이 페이스때문에 다른 파티원들에게 배척받는 그녀다. 하지만 실상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많고, 또 생각이 깊은 그녀다. 그것을 알아차려주지 못해 상처받은 그녀를 달래고 싶다.
'참아야 해.'
지금 그녀와 만나는 것은 곤란하다.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느정도는 그때 당시를 재현할 필요가 있었다. 운현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바제트를 지나쳤다.
"...하아."
분수대 광장에 도착한 운현은 눈을 감은 채 명상을 시작했다. 혼자 있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몇몇 여인들이 있었지만 그녀들의 말은 그냥 무시하는 것으로 넘겨버린 운현은 자신의 앞에 인기척이 느껴지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왔나?"
"당신은 누구...입니까."
혼란스러운 얼굴이다. 늘상 짓고 있던 미소가 아닌, 현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복잡해하는 그녀. 아르토리우스가 자신을 보며 묻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지?"
"...다난교의 집회에 참가했다가... 술을 마시고... 그리고 인신공양의 제물이... 하지만... 하지만 어째서."
"......"
"어째서 저에게 이런 기억이 있는거죠?"
아르토리우스는 절박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의 반응에 운현은 입을 다물고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길 바랬다. 그의 시선을 마주하던 아르토리우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저, 전... 전 당신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왜 당신과 만난 기억이... 당신의 품에 안긴 기억이... 있는 겁니까. 도대체 저에게, 저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진정하고 앉아."
운현은 자신이 앉아 있는 옆자리를 톡톡 쳤다. 그의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가 옆에 앉자 운현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위신체라고 알고 있나?"
"...신성을 사용해서 만든 신체라고... 신을 받아들이기 위한 육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일단 내가 한 일은 죽은 너를 위신체로 만든 것이다."
"...제 몸에 신을 받아들이게 하게 위해서.... 인가요?"
"아니."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반응에 아르토리우스는 놀란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무시한 채 운현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나를 도와줘야겠다."
"제가...요? 하지만 저는 초보 용병에 불과한데..."
"너는?"
"...약하니까."
"약하다라."
운현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을 마주하던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당황하며 따라 일어났다.
"뭐, 뭐하시려고..."
"막아봐라."
그녀의 허리에 걸려 있는 검을 가리키며 운현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검을 잡지 않았을 때는 그저 일반인으로 생각되던 운현이 검을 잡은 순간 아르토리우스는 긴장했다. 첫 전쟁에 나섰을 때, 막강한 군대를 앞에 두었을 때 이상으로 두렵다고 느껴진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검을 뽑아 잡자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채애애애앵!!!"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그 막강한 충격에 주변에 공기가 터져나갈 정도다. 근처의 분수대의 물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파가 퍼져나가자 그 소리에 놀란 새들과 작은 짐승들이 후다닥 자리에서 벗어났다.
"넌 강해졌다. 너에게 얼마나 많은 마력이 들어갔는지 모르는건가?"
"그, 그런..."
위신체가 되며 그녀에게 마인의 코어 다섯개가 들어갔다. 아마 단순 레벨과 스탯만 따진다면 최소한 400레벨은 넘겼을 정도일 것이다. 아르토리우스는 당황하면서도 운현의 일격을 막아낸 자신의 팔과 검을 바라보았다. 죽기 전의 자신이었다면 절대 막지 못했을 그 공격을 쟈신이 막아내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에 아르토리우스는 어리둥절해했고 그녀를 바라보며 운현은 차분히 말했다.
"복수를 하고 싶지 않나?"
"...복수요."
그 말에 아르토리우스의 목소리가 잠겼다. 다난에게 그토록 충성을 맹세했는데, 자신은 그저 다난에게 일개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화가 난다. 아르토리우스가 이를 갈며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너털웃음을 터트린 후 말했다.
"네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해주지. 일단 용병 연맹으로 돌아가라. 그곳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도록 해라."
"...높은 지위라면 어느정도까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고작해야 초급 용병에 불과했던 자신이 용병 연맹의 높은 지위에 오른다. 이 힘이 있으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닐 것이다. 두렵지만 할 수 있다. 복수를 위해서, 그리고 알 수 없지만... 이상할 정도로 끌리는 그를 위해서. 그녀가 굳게 다짐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천천히 말했다.
"최소한 간부급까지."
"간부급... 가능할까요?"
"가능하다."
자신의 힘이 담긴 일격을 막아내고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라면 분명 가능하다. 운현이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하자 아르토리우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한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왜 접니까."
"음?"
"다난에 의해서 죽은 이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접니까? 아, 물론 싫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만 궁금할 뿐입니다."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뭐 전생의 인연이라도 있나보지."
"...그것이 제 안의 기억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애절히 묻는 그녀를 향해 운현은 빙긋 웃을 뿐 아무런 답변도 해 주지 않고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없어지는 것을 보며 아르토리우스는 눈을 감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296====================
만남
"안녕하세요."
"오오? 운현씨라고 했죠?"
"네."
아르토리우스와 헤어진 후 성당이 아닌 길드로 복귀한 운현이 웃으며 들어오자 졸린 얼굴로 꾸벅거리던 실비아는 문소리를 듣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없다.
'필레는 아직도 안 온건가.'
원래대로라면 자신과 이야기를 하느라 시청에서 볼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아르토리우스를 위신체로 만드느라 시간을 써서 그녀와 만나지 못한 운현은 필레가 시청에 가서 꽤나 늦게 온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나.'
자신의 욕심 때문에 모든 계획을 무너트릴 수는 없다. 갑자기 나타나서 저는 과거의 당신과 인연이 있습니다. 라고 해봤자 이상한 놈 취급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완벽하게 그녀들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그 이후에 그녀들과 이어지는 것이 낫다.
'제니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건 지금으로서는 의미가 없지.'
"늦게까지 계시네요. 계속 이렇게 계시는 건가요?"
"네에. 원래 오늘 근무는 제가 아닌데... 다른 분이 시청에서 일을 보시느라 대신 보고 있네요. 그래도 오실 시간은 지났는데 굉장히 늦으시네요."
"흐음... 혹시 위험에 빠지신 건 아니겠죠?"
"에이~ 설마요. 그래도 이 모험가 길드의 간부님이신데요."
"간부요? 아까 만났던 제니스님과 같은..."
"네. 필레씨라고 무척이나 강하고 상냥한 사람이에요. 길드에서도 무척 인기 있는 사람이라구요. 운현씨도 보시면 무척 마음에 들어하실 거에요."
"으음... 그런가요."
"운현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요? 이제 스물 아홉입니다만..."
"와~~ 나이도 딱 맞네~"
"......"
실비아는 과거에도 운현과 필레를 엮으려고 했었다. 필레를 사랑하고 또 좋아하는 그녀였지만 자신의 약혼자가 운현을 꾀어내기 위한 다난에게 죽었을 때 그녀는 광기와 증오에 휩쌓여 운현과 필레, 헤스티아를 죽이려고 했었다.
"혹시 애인, 결혼을 약속한 약혼녀, 혹은 마음에 드는 사람. 있나요?"
"하하하... 소개를 하시려는 것이면 사양하겠습니다. 이래뵈도 모험가라서..."
"딸랑!"
"어휴!! 갑자기 왠 비람?"
"다녀왔습니다~"
"아앗! 필레씨! 어서와요~ 일은 다 보셨어요?"
한아름 서류뭉치를 들고 필레가 돌아오자 사무소를 지키던 실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연녹색 단발 머리에 안경을 낀 슬렌더한 미녀가 머리에 있는 물기를 탁탁 털며 말하자 그녀는 실비아를 향해 방긋 미소지었다.
"미안해요. 실비아. 너무 늦었죠? 윈드와 몇가지 상의할게 있어서..."
"에이~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 저도 당직이었는걸요."
"후후... 어라? 남자분이시네? 실비아씨~ 고향이 약혼자가 있다면서 지금 바람피우는거에요?"
실비아의 앞에 있는 운현을 본 필레는 생글생글 웃으며 실비아를 놀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장난기 넘치는 웃음을 지은 실비아는 운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능력 있는 여자는 현지 애인을 구하는 법이죠~ 에헤헤~"
"우우~ 부러워라... 실비아씨는 능력도 좋네요~"
그녀의 말투에서 그것이 농담이라는 것을 눈치 챈 필레는 씩 웃은 후 운현에게 다가갔다.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빤히 자신을 바라보자 필레는 고개를 갸웃거린 후 손을 내밀었다.
"새로운 모험가이신가요? 반가워요. 필레라고 합니다. 모험가 길드의 간부랍니다."
"아... 음. 네. 반갑습니다."
필레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운현을 본 실비아는 생긋 웃은 후 운현에게 말했다.
"휙휙~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절 꼬시더니 이젠 필레씨에게 눈독들이는 거에요? 우와~ 바람둥이~"
"하하.. 그런 거 아니에요."
"흐음... 그런데 운현씨... 라고 했던가요?"
"네."
"혹시 저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나요?"
"...글쎄요. 저는 던전 도시는 처음이라서."
"아니 던전 도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필레의 말에 운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는 자신의 머리가 흠뻑 젖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실비아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실비아. 저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샤워도 하고 오세요. 다 젖으셨는데."
"후후후~ 고마워요. 금방 올게요."
실비아의 배려로 샤워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가지게 된 필레는 운현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사무소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던 실비아는 생긋 웃은 후 운현을 잡고 물었다.
"어때요? 어때요? 예쁘죠? 매력 넘치지 않아요?"
"그렇네요."
"와~ 그럼 어떻게. 제가 자리 좀 마련해드릴까요?"
운현의 반응에 실비아는 기쁜 듯 웃으며 그의 팔을 톡톡 쳤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에이~ 튕기시긴. 무척 잘 어울려보이는데. 그보다 운현씨."
"네?"
"모험가 카드는 받으셨나요? 제가 일이 있어서 확인을 못했는데..."
"아. 네. 받았어요."
실비아에게 자신의 모험자 카드를 보여 준 운현은 그녀가 자신의 모험자 카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웃으며 물었다.
"뭔가 이상한가요?"
"에... 꽤나 실력이 있어보이시는데 레벨 8이라니..."
"글쎄요. 제니스님이 이렇게 주시더라구요."
"뭐 제니스님이 결정하신 것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레벨 8이라... 뭔가 좀 찝찝하겠네요."
"아니 나쁠 건 없죠. 실제로도 전투는 그리 많이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쁠 것은 없었다. 어쨌든 450까지 레벨을 올리며 스탯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니 말이다.
'레벨업 보너스는 받았으니 말이지. 저번과 똑같다.'
레벨이 올라가며 모든 스탯이 1씩 증가하고 보너스 스탯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힘을 손에 넣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니 말이다. 이 세계에 오기 전에 450레벨의 스탯을 가지고 있던 운현이고, 그것이 스탯에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그 힘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 말은 운현이 여기서 레벨을 올려 스탯을 찍는다면 450레벨대 이상의 힘을 가질 수도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힘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
다난과 언제 대놓고 치고 박고 싸울지도 몰랐고 또 바제트때처럼 원한을 품은, 혹은 사고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 뿐인가? 감당하기 힘든 정도의 폭력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검사라... 아, 괜찮으시면 제가 검사에 대해서 알려드릴까요? 전투를 많이 하지 않으셨다면 직업 설명을 듣는 것이 좋으실텐데."
"하하하... 괜찮습니다. 어쨌든 검사는 검을 다루는 직업 아닌가요? 싸움을 많이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 익힌 검술이 있으니까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헤에... 그럼 어쩔 수 없죠. 음. 그렇지만. 이따가 필레씨가 나오시면 필레씨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에요. 필레씨는 꽤나 고레벨의 검사거든요. 이런 저런 조언을 많이 해주실 수 있을거에요."
"그건 기대할만한 건가요? 알겠습니다."
실비아는 필레의 이름이 나오자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장난스레 웃었다. 운현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는지 실비아는 운현의 손을 톡톡 친 후 말했다.
"운현씨. 아까 필레씨 보고 나서 멍하니 계시던데... 반한건가요?"
"아하하하하... 노코멘트요."
"에이~ 반했구만 뭐~"
"그런 거 아니에요."
"달칵."
운현이 웃으며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더더욱 재밌다는 듯 운현을 놀리려던 실비아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고 편한 복장을 한 채 필레가 걸어나오자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와이~ 필레씨! 운현씨가 필레씨 마음에 든다고 하네요~"
"아이 참. 실비아. 자꾸 남자 모험가들만 보면 그렇게 말하는 것 관둬줘요. 진짜 부탁이라구요. 무슨 실례에요. 정말이지..."
실비아가 이러는 것이 한두번이 아닌가보다. 필레는 쓰게 웃으며 실비아의 하얀 이마를 향해 손가락을 튕겨 딱밤을 먹이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실비아. 그럼 가서 쉬세요.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으음~ 진짠데. 쳇. 뭐 그럼 두 분이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세요~ 그럼 저는 이만~!!"
실비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둘에게 말한 후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고 나자 필레는 운현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지은 후 물었다.
"이번에 새롭게 모험가 길드에 들어오게 되신 운현씨라고 하셨죠?"
"네. 8레벨의 검사입니다."
"음... 검사라. 좋은 직업이네요! 저도 검사인데 검사란 직업은 탱킹과 함께 딜링도 가능한 직업이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답니다. 그렇지만 운현씨는 남자라서..."
"제가 남자인게 문제라도 되는 건가요?"
"네. 아무래도 남자 모험가의 수가 적다보니까 파티 내에서 위험한 일은 잘 시키지 않으려고 하거든요.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으니까..."
"으음... 그렇군요."
"그렇지만 운현씨는 복장을 보니 모험 자체가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다른 지역의 모험가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분인가요?"
"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으음... 이렇게 말해도 되려나? 불법적인 모험가라서."
"아하하하하... 도굴꾼 같은거 말씀하시는 거죠?"
"후후..."
"이해해요. 다른 지역의 모험가 길드의 경우 모험 물품에 대한 과도한 세금이나 길드 내에서 강탈이 있다고 하니까. 그것 때문에 모험가로 활동하며 모험가 길드에 등록을 하지 않는 분도 계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여기는 달라요. 이 도시가 왜 던전 도시라고 불리는지 아세요?"
"네. 도시 내에 던전이 있기 때문에..."
"으음. 그럼 설명이 간단해지겠네요. 저희 던전 도시의 길드의 경우 다른 모험가 길드와 다르게 주 목적은 던전을 탐험하는 모험가들에 대한 지원이랍니다. 던전의 몬스터 같은 경우 바깥의 몬스터와 다르게 몸 속에 코어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요. 아실련지 모르겠지만 던전 도시에서 만들어진 마법물품이 무척 비싸게 팔리는 이유도 그 물품들에 코어가 들어가기 때문이죠. 코어에 대해서는 아시나요?"
"네. 들어봤습니다."
"저희들이 하는 일은 그 코어와 몬스터 사체의 수집이에요. 모험가 분들이 던전에서 몬스터들의 사체와 코어를 이런 마석에 담아 오신다면 저희가 그것을 매입해드리는 것이지요. 물론 필요하시다면 길드에 팔지 않고 직접 처분하셔도 상관없답니다."
"그런가요."
필레가 즐겁게 설명하는 것을 운현은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녀가 밝게 웃으며 말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그녀의 맑은 목소리를 들으며 생글거리던 운현은 한참 떠들던 필레가 입을 다물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어... 재미 없죠...? 이런 설명."
"아니요. 던전 도시의 모험가로 살아가야 하는데 있어서 무척 중요한 설명 같은데... 저에게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라 귀담아 듣고 있답니다."
"그, 그런가요?"
운현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자 필레는 머쓱한 웃음을 지은 후 볼을 긁적거렸다.
"여기까지가 던전 도시 내에서 해야 하는 주의사항입니다. 혹시 여쭤보실 것은 있나요?"
"음... 던전 안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뭔가요?"
"일단 첫번째는 몬스터 붙이기에요."
"자신들을 공격하는 몬스터를 다른 이들에게 보내버리는 수법을 말하는 건가요?"
"네. 잘 아시네요?"
"아하하... 다른 지역에도 비슷한 일을 하는 녀석들이 있거든요. 그런 식으로 타인을 죽여 그들이 가진 물품을 빼앗는 도적같은 놈들이 있어요."
운현의 말에 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몬스터 붙이기를 하고 그들과 함께 싸운 후 전리품을 모두 몰아주는 등, 그런 식으로 화해를 한다면 상관이 없지만 고의적으로 몬스터를 붙이고 일부러 상대가 죽게 하는 행위가 발견되면 즉결처단이에요. 꼭 기억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후후후... 그리고 두번째.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랍니다."
필레는 진지한 어조로 말한 후 책상의 밑에 있는 작은 상자를 들어 올려 보여준 후 말했다.
"던전에서 전투를 하다보면 이런 모양의 상자를 발견할 수 있을 거에요. 이 상자들은 모두 잠겨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보물상자라고 하는데..."
"......"
"이 보물상자를 열 수 있는 것은 도적 직업을 가진 이가 자물쇠 따기 스킬을 사용했을 때 뿐이랍니다. 보물상자를 발견한다면 반드시 도적 직업을 가지신 분께 요청을 드리도록 하세요."
"그정도 상자라면 자물쇠를 부술 수 있지 않나요?"
"그것은 던전 내에서 절대 해서는 금기 중 하나입니다. 절대 하면 안되요."
"왜죠?"
"그렇게 될 경우 미믹이 생성되니까요."
297====================
만남
"미믹이라... 미믹은 저도 알아요. 상자의 형태로 의태하여 숨어 있는 몬스터잖아요? 하지만 그리 강하지 않을텐데."
과거에 얻었던 정보대로 운현이 말하자 필레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은 후 보물상자를 톡 친 후 말했다.
"던전의 미믹은 바깥의 미믹과는 달라요. 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죠. 잠깐 나와주시겠어요?"
필레는 운현이 미믹을 가소롭게 보는 듯 하자 보물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온 운현은 모험가 길드 뒷편의 공터로 그녀가 이동하자 팔짱을 끼고 그녀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조심하세요. 처음 보시는 분들은 미믹의 기세에 공포에 질리기도 하니까요."
"네."
보물상자를 공터의 끝에 놓은 후 필레는 자신의 검을 뽑고 눈을 감은 후 빠르게 베었다. 그녀의 검에서 피어난 푸른색 기운이 반월형이 되어 보물상자에 직격한 순간 보물상자의 자물쇠가 부서졌다.
"으드득...!!"
"촤아아악!!"
보물상자의 뚜껑이 열리며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넘실거린다. 그것을 보며 운현이 뒤로 주춤 물러나자 필레는 반쯤 부서진 보물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던전의 미믹은 저런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운현씨도 바깥의 미믹을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저런 형태의 미믹이 만들어지지는 않죠."
검은 기운을 뿜어대던 미믹은 필레와 운현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미끌어지듯 이동했다. 검은 기운이 일렁거리며 그것이 자신에게 향해지자 가볍게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아낸 필레는 훌쩍 뛰어 미믹에게 검을 휘둘렀다.
"우지끈!"
일격을 맞은 미믹이 나가떨어져 반파되었을 때 필레는 미믹에게 추가타를 날려 미믹을 완전히 부서버렸다. 검은 기운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리자 운현은 놀란 얼굴로 미믹을 보며 말했다.
"굉장하네요."
"네. 운현씨도 느끼셨겠지만 미믹은 일반 몬스터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어요. 보물 상자는 각 계층에 있고 각 계층의 보물상자를 부쉈을 때 나오는 미믹도 계층별로 힘이 달라요. 기본적으로 1계층의 미믹은 2계층의 계층주 같은... 아, 계층에 대해서는 아시나요?"
"네. 제니스씨에게 간단하게 들었어요."
"후후. 그럼 설명드리지 않아도 좋겠군요. 각 계층의 미믹은 다음 계층의 계층주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어요. 계층주를 잡을 때 많은 파티원들이 모여서 가는 것을 생각한다면... 미믹을 함부로 만들어내면 안된다는 것은 아시겠죠?"
"네."
'미믹이 생긴다라... 그렇다면 마인도 생기는 건가? 하지만 마인은 과거의 내가 기억 보관자를 만들다 실패한 것들인데...'
"미믹을 방치하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큰일나죠."
"어떤...?"
"미믹이 던전을 돌며 몬스터들을 해치우고, 또 사람들을 습격합니다."
"으음... 그 밖에는요? 뭔가 다른 몬스터로 변한다거나 그런 것은 없나요?"
"아직까지는 그런 이야기는 없네요."
'마인은 생성되지 않는다. 그런데 미믹은 있다? 그럼 현자가 준비해 둔 것인가? 아무튼 좋아. 저 미믹을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다면 계획에 써먹을 수 있겠군.'
운현이 심각한 얼굴로 부서진 미믹을 바라보자 필레는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너무 놀란 것처럼 보이자 그를 달래주기 위해 다가간 필레는 운현의 팔을 부드럽게 잡고 생긋 예쁜 미소를 지었다.
"너무 그렇게 겁먹지 마세요. 보물상자를 부수지만 않으면 되니까요. 보물상자를 발견하면 도적 클래스를 가진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아니면 길드로 가져오시면 소정의 수수료를 받고 보물상자를 열어드릴게요."
"으음... 절대 부수면 안되겠군요."
'필레의 공격으로 부서질 정도라면 1계층의 미믹은 그리 강하지 않군. 그럼 내가 잡을 수도 있다는 건데... 일단 실험을 해봐야겠다.'
운현은 필레에게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바닥에 부서져 있는 미믹의 사체를 챙긴 후 길드로 복귀했다.
"그런데 그 미믹에서는 코어가 나오지 않는 건가요?"
"네. 미믹은 코어가 없어요. 잡더라도 기존 보물 상자에 있던 아이템을 얻는 정도에 불과하니까 아무런 이득도 얻을 수 없죠. 미믹은 최대한 발생시키지 않는게 좋아요."
"헤에... 그럼 미믹을 만날 일은 없겠네요."
"일반적으로 보면 그렇죠. 하지만 꼭 세상에는 하지 말라고 하면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리고 전투 도중에 보물상자에 충격이 가서 본의 아니게 미믹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어요. 만약 그런 일이 생기거나 미믹을 발견하신다면 절대 상대하지 말고 길드에 연락을 해주세요. 모험자 카드로 길드에 구조 요청을 할 수 있는 것은 아시죠?"
"네. 제니스씨에게 들었어요."
"후후... 이정도가 다에요. 자세한 것은 나중에 초보 모험가를 위한 교육이 있을 예정이니까 그때 참가해주세요."
"알겠어요. 조언 감사합니다."
"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네?"
"모험도 좋고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안전이랍니다. 절대 무리는 하지말아주세요. 던전에 들어가는 것도 최소한 2인 이상의 파티를 이루는 것을 추천할게요. 바깥에서 모험을 하던 분들 중에는 솔로로 활동하던 분들이 던전도 같다고 생각하며 혼자 움직이시는 분들도 종종 계시는데... 정말 위험한 거니까 그렇게 하지 마시구요. 파티를 만들거나 다른 파티에 들어가고 싶으시면 저 파티 모집 게시판을 확인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자신을 걱정하며 필레가 말하자 운현은 부드럽게 웃어주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미소에 순간 움찔한 필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운현에게 물었다.
"에... 저기 운현씨."
"네?"
"저희 진짜 어디서 만난 적 없나요?"
"글쎄요..."
이 세계가 아닌 과거의 반복된 세계라면 모를까, 이 세계에서 필레와 마주친 적은 없었다. 운현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자 필레는 볼을 긁적거리며 베시시 웃었다.
"왠지 모르게 운현씨를 볼때마다 마음이 차분해 지는 것 같네요."
"그런가요? 하하하... 필레씨 같은 미인분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군요."
"아이 참~ 말씀도 잘하시네요. 음. 운현씨의 숙소는 여기로 하셨죠? 그럼 오늘은 푹 쉬세요~ 좋은 밤 되세요~"
"네. 필레씨도요. 고생하세요~"
필레와 가볍게 인사를 하고 2층에 잡아 둔 방에 들어 온 운현은 잠시 기다리다가 하이딩을 걸고 밖으로 나왔다. 내일부터는 헤스티아와 함께 움직여야 하니 솔로 행동은 힘들다. 하이딩 상태에서 조용히 움직이며 필레가 다른 곳을 보는 것을 확인한 운현은 잽싸게 뛰어 던전 입구로 향했다.
'특별히 변한 것은 없군.'
던전 입구 내 마련된 시장은 늦은 밤이라 그런지 장사를 하고 있는 곳은 별로 없었다. 시장을 지나 던전 입구에 선 운현은 눈 앞의 마법문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길 다시 들어가게 되다니... 감개무량하군.'
운현은 마음을 다잡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마법문을 통과한 그는 과거 보았던 것과 같은 던전의 1계층이 눈 앞에 펼쳐지자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빙긋 웃었다.
'여전해... 일단 중요한 것은 미믹에 대해서 확인하는 것이지. 가장 가까운 보물상자 위치는...'
홉고블린의 서식지. 십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그곳을 향해 운현은 빠르게 뛰었다. 오분도 채 되지 않아 홉고블린 서식지에 도착한 운현은 하이딩을 풀고 검을 뽑아들었다.
"키리릭!?"
순찰을 도는 것으로 보이는 고블린 세마리가 운현을 발견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과거, 고레벨일때는 저들이 주눅들어 덤비지조차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실제 능력은 458레벨이지만 모험자 카드에 표기된 레벨은 8레벨에 불과했다. 저들이 주눅들 것인가. 아니면 덤벼들 것인가.
"캬아아아악!"
'생각대로군.'
몬스터들이 보는 것은 스탯이나 진짜 실력이 아닌 레벨이다. 고블린들이 무기를 들고 달려오는 것을 보며 운현은 비릿하게 웃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상황이다.
'애들이랑 같이 움직일때 몬스터들이 겁먹으면 곤란했거든...'
그들에게 자신은 8레벨의 검사여야지 458레벨의 가짜 신이 되어서는 곤란했다. 그들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은 나중 일이다. 일단 그들의 레벨을 최대한 올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며 운현은 달려드는 고블린의 목을 향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세 고블린, 아니 이제는 두 고블린이 되어버린 고블린 무리는 운현의 일격에 동료의 목이 허망하게 떨어지자 당황했다. 그저 횡베기 한방을 막지 못한 것에 그들이 당황하는 동안 운현은 가볍게 검을 털어낸 후 검을 겨눴다.
"캬야!!"
"캬르르륵!!"
공포나 이상함보다는 동료가 죽은 것에 대한 분노가 앞선 모양이다. 운현은 그들의 행동에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교묘히 휘둘러진 검은 고블린의 방어를 미끄러지듯 스치며 고블린의 급소를 정확히 꿰뚫었고 순식간에 고블린 세마리는 운현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레벨업은 아직이고... 아마 홉고블린을 잡으면 1레벨 정도 오를 것 같은데."
너무 많은 레벨이 오르면 헤스티아와의 레벨 격차 때문에 그녀가 파티를 거절할 수도 있었다.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이고 하이딩을 건 후 홉고블린 서식지로 향했다.
'아.'
고블린 부락을 지나 홉고블린이 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 선 운현은 동굴 안에 생성되는 함정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과거에는 함정 해제 스킬이 있어서 여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어찌 될 것인가. 몰래 들어가서 보물상자만 가지고 나오려 했던 운현은 어쩔 수 없이 소란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는 것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젠장."
"우직!"
"우드드드드득!!"
이를 갈며 함정이 있는 위치에 한걸음을 내딛은 운현은 동굴 옆면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수십개의 말뚝이 고정된 장치가 튀어나오자 그것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갈지자 베기. 운현의 손에서 펼쳐진 검격에 나무로 만들어진 함정은 그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한 채 부서져버렸다.
"크아아아!!"
"들었나. 쩝."
동굴 안쪽에서 홉고블린의 포효 소리가 들려오자 입맛을 다신 운현은 성큼성큼 그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몽둥이를 든 홉고블린이 동굴 밖으로 나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오는 운현을 본 홉고블린은 곧장 그의 머리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고 운현은 검을 들어 그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었다.
"크아...캬!?"
고작해야 약해빠진 인간이 자신의 공격을 한손으로 막아내는 것을 보며 홉고블린은 당황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양 손으로 몽둥이를 잡은 홉고블린이 다시 몇번 공격을 했지만 운현은 그것을 여유있게 막아낼 뿐 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홉고블린은 이상함을 느끼며 뒤로 주춤 물러났고 그것을 본 운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오... 싸움은 나도 별로 내키지 않아."
"크르...크아아!!"
본능은 저 자가 약한 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그 현상은? 자신의 필사적인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고 자신을 눈 앞에 두고도 저렇게 여유를 보이는 저 자는 도대체...? 홉고블린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운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동굴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있구만."
보물상자를 발견한 운현은 웃으며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예전과 같이 그대로 인벤토리 안에 들어가자 운현은 싱글싱글 웃으며 홉고블린을 지나쳤다.
"캬아!?"
본능이 외쳤다. 저자를 죽여라.
하지만 얼마 없는 이성이 필사적으로 말리고 있었다. 저 자를 건드리지 마라.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두 감정이 외치는 것에 혼란스러워하던 홉고블린은 결국 몬스터답게 자신의 본능대로 움직여버렸다.
"캬아아아!!"
"흡."
"크아아아아악!!!"
동굴이 터져나갈 정도의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홉고블린의 복부에 장저를 날리며 그에게 침투경을 쓴 운현은 홉고블린이 끔찍한 비명과 함께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하자 그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짓밟으며 말했다.
"까불지 마라. 조만간 네놈의 목을 따주러 올테니까. 죽고 싶으면 그때까지 기다려."
"크아...아악...아...!"
고블린 서식지를 돌며 보물상자 일곱개를 가져 온 운현은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동한 후 보물상자 하나를 꺼내 망설임없이 그것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단 일격에 자물쇠가 부서지고 미믹이 소환되자 운현은 4계층 몬스터의 시신이 들어 있는 마석을 꺼내 미믹을 향해 휙 던졌다. 만약 저 미믹이 자신이 아는 미믹이라면 자신을 공격하는 것보다 저 마석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촤아아악!!"
'내가 아는 미믹이랑은 다르군. 그럼 저건 현자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봐야하나.'
미믹이 마석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자신을 공격하자 그 공격을 검으로 막아낸 운현은 궁리를 하며 미믹을 향해 접근했다. 또다시 날아드는 수십줄기의 공격을 여유있게 막아낸 운현은 미믹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미믹을 잡아 인벤토리에 넣어보았다.
'인벤토리에는 들어간다 이거지... 그럼 일단 내 계획에 이용할 수는 있겠어.'
298====================
만남
"어쩌지..."
마법사 학교에서 나와 부푼 마음으로 던전 도시에 올때까지만 해도 무척이나 좋았다. 수석으로 졸업을 한 자신과 함께 파티를 하고 싶어하는 친구들은 많았으니 말이다. 그 중에서 차석에 둘도 없는 친구이자 라이벌인 에릴과 함께 던전 도시에 들어와 다른 파티와 함께 던전을 갔다 오고 나서 헤스티아는 당황했다.
"화염 마법이 그렇게 안좋을 줄이야..."
화염 마법은 강력한 데미지와 함께 상대방의 몸에 화염 마법의 흔적이 남아 지속적인 데미지를 줄 수 있는 마법이다. 바깥의 몬스터들 같은 경우는 한방에 잡을 수 있어서 그저 강한 마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던전에 들어와 던전의 몬스터에게 마법을 써보니 확실히 달랐다.
딜러와 탱커, 힐러의 포지션을 갖춘 파티가 기본인 던전의 파티에서 자신이 마법을 쏠 때마다 몬스터에게 화염이 남아 근접 딜러들이나 탱커들에게 오히려 방해가 되어버린 것이다.
"넌 여기까지네."
그래도 높은 데미지 때문에 계속 같이 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던전을 돌았던 파티원들은 에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을 외면했다. 화염 마법사가 나중에는 강력해진다고 하지만 그만큼 던전의 몬스터들은 더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빠르게 레벨업을 해야 하는 이때 딜로스를 발생시키는 화염 마법사와 함께 하는 것은 아무런 메리트가 없었다. 차라리 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수계 마법사와 함께 다니는 것이 좋지.
"미안하지만 헤스티아. 파티에서 나가줬으면 해."
짙은 청발의, 파티의 리더인 전사는 자신의 얼굴에 난 화상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제 자신이 쏜 파이어 볼트의 여파로 얼굴에 화상을 입은 이후부터 자신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던 그녀다. 그녀의 말에 헤스티아는 당황하며 다른 딜러인 검사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헤스티아를 내보내는 것에는 찬성이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법의 데미지가 좋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파이어 볼트 한발로 몬스터를 잡을 수 없는 이상... 네가 쏜 마법이 사라질때까지 딜로스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몸에 붙은 화염이 사그라들때까지 공격을 계속할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궁사나 다른 계열의 마법사를 영입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한 전사가 말하자 헤스티아는 다급히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에릴이 도와주면 되잖아요!! 그녀가 워터 볼트를 날리면...!"
"그럼 에릴에게 말해보지 그래?"
파티 리더인 전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들의 뒤에 서 있는 에릴에게 말했다. 그녀라면 자신의 편을 들어 줄 것이다. 헤스티아는 다급히 그녀에게 시선을 보냈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에릴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어...?"
"네가 쏜 이후에 내가 마법을 쏘면... 다른 몬스터는 어떻게 잡고? 그렇게 하면 캐스팅에 따른 딜로스가 생기는 거잖아. 난 싫어. 난 빨리 강해지고 싶다고."
"하지만 에릴...!!"
"하아... 헤스티아."
마법 학교에서 그렇게 자신과 붙어 다니며 던전 도시에서도 함께 다니자고 말했던 그녀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헤스티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간신히 그것을 참아낸 헤스티아는 에릴의 싸늘한 말에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너 방해되니까."
"......"
"그러니까 눈치 좀 파악하고 다른 파티에 가. 벌써 다른 원딜러는 구했다고."
"...그런...거야?"
"그래. 몇번을 말해야 알겠니? 이 눈치 없는 계집애야."
에릴의 싸늘한 말에 헤스티아는 그녀를 물기 젖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편을 들 줄 알았다. 하지만 에릴은 자신을 돕기는 커녕 어서 빨리 파티를 나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초라함에 몸이 떨린다. 헤스티아는 눈물이 나려는 것을 간신히, 정말 간신히 참아낸 후 몸을 돌렸다. 그녀의 작은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에릴은 빙긋 웃었다.
"그럼 갈까요? 여러분."
"오오!! 오늘은 홉고블린까지 잡아보자고!!"
"하아... 어쩌지..."
길드의 숙소에서 한참을 울고 나서야 진정이 된 헤스티아는 세수를 하고 방으로 나와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가진 돈은 얼마 없었다. 이 돈을 다 쓰기 전까지 파티를 구하지 못한다면 던전 도시에서 떠나야 할지도 몰랐다.
"화염 마법사인데..."
수가 적은 화염마법사다. 그런만큼 인기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인기가 없을 줄이야. 몇몇 파티에 신청을 해보았지만 나오는 대답은 미적지근할 뿐 이었다. 고레벨의 화염마법사라면 인기가 있지만 이런 저레벨의 화염마법사는 돈을 내고 클랜에 들어가 클랜의 도움을 받아 레벨업을 해야 한다는 어느 모험가의 조언을 따를 수 밖에 없는 걸까?
'하지만 클랜에는...'
소규모 클랜의 경우는 당장 자신들이 움직이기 바쁘다. 그리고 대규모 클랜은 기존의 저레벨 모험가들을 키우느라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할 것이다.
'하아...'
몇몇 클랜에 가입 요청을 넣어두었지만 돌아 온 대답은 아직 없었다. 결국 이대로 끝나버리는 건가. 일주일째 파티를 구하지 못하고 파티 게시판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와 쉬는 생활을 한 헤스티아는 자신의 남은 돈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은 돈도 이제 얼마 없고..."
던전 도시에 와서 첫 파티를 통해 얻은 마석은 레벨을 올리는 데 써버렸다. 이러다간 진짜 다른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코어를 구매해 레벨을 올릴 수 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또다시 한숨을 내쉰 후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찾아보면... 있을지도 몰라."
새롭게 파티를 만드는 저레벨 모험가들이나, 아니면 원딜러를 구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헤스티아는 애써 자신에게 힘을 불어 넣고 방 밖으로 나갔다.
"...하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없다. 아침 일찍부터 나와 파티 모집 게시판에서 서성거렸지만 10레벨 이하의 모험가, 그 중에서 원딜러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개중에 단순히 딜러를 찾는 이들도 있었지만 자신이 화염 마법사라는 말에 그들은 질색하며 거절했다. 딜링만은 자신이 있는데. 마법을 쓰는 것은 정말 잘하는데. 헤스티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길드 사무소로 향했다. 혹시 저레벨이라도 괜찮으니 화염 마법사와 함께 던전에 갈만한 파티가 없나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저기..."
"아. 헤스티아씨."
길드의 사무소에 앉아 있는 연녹색 머리칼의 미녀. 필레를 보며 헤스티아는 부러운 듯 웃었다. 길드의 간부의 위치에 있을 만큼 강한데다가 상냥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그녀다.
'친구에게 버림받고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는 나와는 다르게 말야...'
보면 볼 수록 눈이 부시는 사람이다. 그녀의 앞에 서자 헤스티아는 자신이 주눅드는 것을 느꼈다. 마법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누구에게나 당당하고, 누구에게나 사랑받았는데. 고작 이주도 되지 않아 완전히 의기소침해져버린 헤스티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다가오자 필레는 쓴웃음을 지었다.
'참 착한 사람인데...'
화염 마법사의 특성상 초기에는 무척이나 힘들다. 레벨이 높아져 탱커들이나 근접 딜러들에게 화염 내성이라는 스킬이 생기거나 그에 준하는 아이템을 획득한다면 화염마법사는 무척이나 사랑받는 상위권의 인기 딜러이겠지만 지금처럼 저레벨일때는 근접 딜러의 딜링을 방해하거나 탱킹의 난이도를 올리는 직업이다.
"오늘도 파티를 찾으시는건가요?"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필레가 묻자 헤스티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몇일째 파티를 찾는 그녀의 모습에 필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사람인데. 무척 착하고 상냥한 사람인데 이렇게 여기저기 치이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어쩌죠? 다른 클랜이나 파티에 이야기를 해봤지만..."
화염 마법사가 귀하다고 하지만 그녀가 심층에 갈때까지 키워야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만약 그녀가 도적 클래스라면 모르겠지만 화염 마법사는 딜량이 높은 딜러이고 광 속성의 마법을 추가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뿐이지 그에 대한 투자 효율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한마디로 알아서 잘 크면 데려갈 수 있지만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 그런가요."
필레의 말에 헤스티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필레는 안타까운 표정을 짓다가 손뼉을 치고 외쳤다.
"아, 그, 괜찮다면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는데 소개시켜드릴까요?"
"하아... 조금만 더 찾아볼게요."
화염마법사 같은 특수한 마법을 사용하거나 그녀와 비슷하게 딜량은 높지만 다른 이들에게 방해를 주는 마법사들의 경우 자신의 돈으로 사람들을 고용해서 전투를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것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주려 한 필레는 헤스티아가 우울한 얼굴로 답하자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으음... 헤스티아씨."
"네?"
"어제 모험가 길드에 등록하신 모험가 분이 있는데... 그 분과 사냥을 해보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검사이기는 하지만 꽤 숙련된 모험가처럼 보였으니까 헤스티아씨의 화염 마법에도 피해 없이 전투를 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일반적으로 던전 도시에서 모험가가 되는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헤스티아처럼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엘리트라고 불리는 모험가들. 그리고 바깥에서 모험가 생활을 하며 막 구르다가 던전 도시로 온 잡초같은 사람들. 대체적으로 그 두 부류는 잘 어울리지 못한다. 생활 환경 자체가 다르고 사고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었다.
"숙련된 모험가라면... 기존에 모험가 생활을 하시던 분이라는 말씀이시네요."
필레의 말에 헤스티아는 겁먹은 얼굴로 조심스레 말했다. 야인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자신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라고 조롱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의 선배들 중에는 그런 모험가들에게 뒤통수를 맞아 크게 당한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헤스티아로서는 겁먹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아.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분은 그런 분은 아닌 것 같았어요."
헤스티아의 표정에 두려움이 떠오르자 필레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꽤나 예의도 발라보였고, 정중한데다가 신사같았으니까요. 특별히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는 않아요."
"...음. 제가 지금 가릴 처지는 아니죠..."
필레가 열심히 그를 변호했을 때 헤스티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폐 마법사라 불리는 자신이 찬물 더운 물을 가릴 처지가 아니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애써 웃으며 필레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필레씨. 그런데 그 분은 어디에 계신가요?"
"음... 오늘부터 던전에 들어가신다고 했으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거에요. 테이블에서 기다려주시겠어요? 그 분이 오시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네에... 고맙습니다.
필레에게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한 헤스티아는 테이블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야인 생활을 한 모험가. 그들 중에는 투박한 사람도 많았고 야한 농담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개중에는 여자인데도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전투 중에 덥치는 사람도 있다고 했었다.
'제발 그런 사람만은 아니길...'
무례한 사람 정도라면 괜찮다. 난폭한 사람이라면 괜찮다. 하지만 자신의 처녀를 노리는 레즈비언만 아니기를 간절히 빌던 그녀는 자신의 앞으로 메이드가 다가오자 쓰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동전 몇개를 꺼내어 내밀었다.
"빵 하나만 가져다 주세요."
"알겠습니다."
식사를 할 돈을 아껴야 한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저녁까지 버텨내도록 하자. 어차피 자신이 화염마법사라서 제대로 전투를 하면 오래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는 그녀는 부디 오늘 하루만이라도 제대로 던전에서 전투를 하여 돈을 벌 수 있기를 빌었다.
"터벅..."
시끄럽던 길드회관이 순간 조용해진다. 그것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헤스티아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설마 저 사람일까? 지난 시간동안 한번도 이곳에서 보지 못했던 남자다. 짙은 푸른 머리를 머리띠로 대충 묶고, 얼굴은 거칠어보이지만 눈만큼은 강철같은 의지로 불타오르는 남자. 한걸음 한걸음 걷는 걸음걸이에는 중후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나이는... 아마 자신보다 열살 정도는 더 많아보이는 큰 키의 사내가 걸어내려오자 몇몇 여인들이 그에게 다가갔다.
"하아..."
아닌가보다. 다가 온 여인들에게 거칠어보이는 인상과 비교될 정도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이야기를 나누자 헤스티아는 실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자신을 지나치고 여인들과 함께 사무소로 향하는 것을 본 헤스티아는 메이드가 빵을 가져오자 그것을 받아 오물오물 씹었다.
"털썩."
"...에?"
"여기 스테이크 하나."
그 남자다. 그 남자가 자신의 앞에 앉는 것에 헤스티아는 씹던 빵을 삼키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강렬한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그런 헤스티아를 향해 사내는 담담히, 하지만 무척이나 상냥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반가워요. 귀여운 아가씨. 저는 운현이라고 합니다. 레벨 8의 검사죠. 아직 파티가 없다면 저와 함께 파티를 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그의 상냥한 파티 제안에 헤스티아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299====================
만남
"운현씨. 운현씨."
결전의 날. 운현이 장비를 착용하고 1층에 내려왔을 때 운현은 자신을 부르는 필레의 손짓에 그녀에게 걸어갔다. 1층 회관에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 있는 헤스티아에게 말을 걸려던 운현은 필레가 자신을 부르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혹시... 아직 파티를 못구하셨나요?"
"네."
구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저기 혼자 외롭고 쓸쓸히 앉아 있는 헤스티아가 있지 않은가. 그 외와는 파티를 할 생각이 없던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필레는 박수를 치며 밝게 웃었다.
"그럼 제가 한분 추천해드려도 될까요?"
"누구인가요?"
들어보고 얼토당토 않은 소리면 일단 제껴버리자. 라고 생각하던 운현은 필레가 테이블을 가리키자 피식 웃었다. 적금색 긴 머리칼에 약간 탄 듯한 피부를 가진 귀여운 여인이었다. 그녀가 우울한 얼굴로 빵을 우물거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운현이 웃으며 자신을 보자 필레는 마주 웃으며 말했다.
"화염 마법사인데요. 함께 파티를 하실 생각은..."
"화염 마법사라..."
"화염 마법사는 무척이나 좋다구요. 특히나..."
"아. 광 속성의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알아요. 그렇지만 화염..."
운현이 떨떠름한 어조로 말하자 필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숙련된 모험가처럼 보이는 운현이기에 저 레벨의 화염마법사가 꽤나 민폐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뭐. 상관없겠죠."
"에?"
"예전에 화염 마법사와 같이 파티를 한 적이 있거든요. 전투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오오? 역시 운현씨!!"
운현이 흔쾌히 승낙하자 필레는 밝게 웃었다. 그런 그녀의 웃음에 마주 웃어 준 운현은 그녀를 향해 차분히 물었다.
"그 대신 솔직하게 말씀해주시겠어요?"
"네. 얼마든지요."
"제가 다른 직업... 예를 들어 귀족 클래스라 불리는 도적 직업이었다면 필레씨는 저 아가씨에게 저를 소개시켜주셨을건가요?"
운현이 웃으며 묻자 필레는 입을 다물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약 그가 도적 클래스라면? 그렇다면 아마 헤스티아에게 소개시켜주기보다는 길드에서 아예 예약을 걸어 키워주려 했을 것이다. 물론 운현의 의사를 확인한 후에 말이다.
"그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도적 직업을 선택하지 않은게 잘한 것 같군.'
흔하다고 할 수 있는 검사 직업에 만족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가 포함되어 있었다. 남자 모험가는 흔치 않다. 거기에 귀족클래스인 도적직업까지 손에 넣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각 고위 클랜이나 길드에서 운현을 데려가기 위해 이래저래 말을 걸고 시간을 빼앗으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들의 제안이 아예 시작조차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한가지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도적 직업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남자이길 포기하느냐. 후자는 말이 안되기 때문에 도적 직업을 얻지 못한 것에 전혀 아쉬워하지 않은 운현은 느긋한 걸음으로 헤스티아에게 다가간 후 그녀의 앞에 앉으며 말했다.
"반가워요. 귀여운 아가씨. 저는 운현이라고 합니다. 레벨 8의 검사죠. 아직 파티가 없다면 저와 함께 파티를 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와... 그럼 운현씨는 여기저기 많이 다녔겠네요?"
"응. 뭐 그렇지. 그리고 오빠라고 부르라니까. 아니면 그냥 이름만 부르든가. 이제부터 같이 다녀야 하는데 친밀감 있게 서로를 대하자고. 어때?"
걱정했던 것이 바보같을 정도로 운현은 상냥하고 예의바른데다가 친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진 돈도 많아 이번 던전 탐험에 들어가는 비용을 혼자서 감당하기까지 했다. 여자가 아니고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데 그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헤스티아는 금새 운현과 친해질 수 있었다.
그것이 운현의 꿍꿍이인줄도 모른 채 말이다.
"헤...헤헤헤... 오빠."
마법학교 출신의 엘리트인 자신이 야인인 운현에게 이렇게 부르는 것을 마법학교의 다른 사람들이 보면 기겁을 할 것이다. 아무리 남자라고 하지만 남자가 세상에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직업조차도 흔하디 흔한 검사에 불과했다. 숙련되었다고 하지만 레벨은 8에 불과하고 나이도 스물 아홉이나 된다.
하지만 헤스티아에게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에릴에게 배신당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민폐라고 취급받던 자신이다. 그런 자신에게 있어서 엘리트니 야인이니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사람의 온기와 따스함이 그리웠던 그녀는 근접 딜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파티를 해 준 운현이 마냥 좋을 뿐 이었다.
그녀가 부끄러운 듯 살짝 얼굴을 붉히고 베시시 웃으며 말하자 운현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와 다시 재회한 것에, 그리고 이토록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는 것에 가슴이 뛰는 것을 애써 감추고 자신의 표정을 감춘 거짓된 웃음을 지은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헤헤헤... 우, 운현 오빠가 이렇게 쓰다듬어주니까... 어딘지 되게 그립고... 그러네요."
"......"
'그립다라... 필레도 그랬지. 어디서 만난 적이 있냐고. 하지만 이 세계에서 난 이들과 만난 적이 없다. 의심하지 말자.'
그녀들이 자신에 대해서 기억을 한다는 것은 계획에서 한참 벗어난 이야기이고, 또 잘못했다간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다. 아르토리우스야 자신의 기억이 조금씩 담겨 있는 마인의 마석을 통해 위신체가 되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이들은 안된다.
'절대 안돼.'
"그럼... 레벨은 3이라고 했지? 일단 늑대부터 잡으러 갈까?"
운현은 그녀의 미소를 보며 빙긋 웃어 준 후 담담히 말했다. 그의 손이 자신의 머리에서 떨어지자 헤스티아는 아쉬운 듯 살짝 입술을 내밀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 늑대요?"
"왜? 잡아 본 적 없어?"
"그런 건 아니지만... 운현 오빠는 더 강한 몬스터를 잡고 싶으신 거 아니에요? 장비도 좋으신데... 그 갑옷. 그... 나이트 호크 세트 맞죠??"
"알아?"
"네. 전에 같이 파티를 하던 검사가... 그 갑옷이 갖고 싶다고 하던 걸 들었거든요. 10레벨이 넘는 검사였는데도 그 사람도 갖고 싶어만 하고 살 엄두도 못내던 건데..."
"하하하... 사정이 있어서 돈을 좀 벌었거든. 실제 실력은 그 정도는 아니니까.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마."
"오빠도 던전에 들어 오는 것은 처음 아니에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몬스터를 상대하는 일은 많았거든. 일단 늑대를 잡아보고 할만하다 싶으면 고블린을 잡으러 가자. 어때?"
"오빠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헤스티아가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상당히 어색했다. 하지만 어떤가. 지금 나이대나 외모를 봐도 지금의 운현은 헤스티아와 비슷한 나이대라고 볼 수 없었다.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이런 식으로 거리감을 최대한 줄여나가자.'
과거의 자신이 아니다. 배신당해 사람을 믿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애정을 거절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다. 굳이 거리감을 만들 이유가 없었던 운현은 헤스티아가 자신을 좀 더 빠르게 친근함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했고 경험이 적은 그녀는 그의 교활하기 그지 없는 화술에 낚여 만난지 한시간도 채 되지 않아 오빠라고 부르며 친근함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걱정되는구만...'
가상 현실 게임을 하며 혓바닥만 놀려 사람들을 농락해왔던 자신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쉽게 경계를 풀 줄이야. 운현은 헤스티아가 적금색 맑은 눈을 깜빡거리며 자신을 바라보자 쓰게 웃은 후 몸을 돌려 걸었다. 어느정도의 경계심은 있어야 위험에서 몸을 뺄 수 있다. 어쨌든 계획대로 흘러가려면 운현은 헤스티아의 죽음을 방관할 수 없었고 그것을 위해서 헤스티아도 어느정도는 자신에게 협조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그건 차분히 가르치면 되겠지.'
아직 헤스티아의 죽음이 오는 때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운현은 세상 물정 모르는 헤스티아가 자신의 뒤롤 쫄래쫄래 쫓아오자 피식 웃으며 이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충분하고.'
가상 현실 게임 내에서 수많은 이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스승이라 불리던 자신이다. 고작 헤스티아 하나 자신의 입맛대로 성장하지 못하게 한다면 과거의 경험들이 운다.
"아! 늑대다!"
"그럼 먼저 파이어 볼트를 날려. 내가 탱킹을 할테니까."
"그, 그치만... 저기 운현 오빠."
"응?"
"저... 화염 마법사인건 아시죠."
"알지."
"...파이어 볼트에 적중당하면 몬스터의 몸에 불이 붙어요. 그거 잘못하면 화상 입을 수도 있는데..."
"아아. 그거? 괜찮아. 방법이 있으니까."
"예? 어떻게요?"
"일단 지켜보라고."
운현은 차분히 검을 뽑아 한손으로 잡고 여유있는 얼굴로 말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헤스티아는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파이어 볼트를 날렸다.
'운현 오빠도 날 떠나면 어떡하지?'
만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운현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헤스티아는 운현이 자신의 파이어 볼트 때문에 전투가 늦어지거나 다치게 될까 걱정되었다. 힐링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모를까... 힐링포션만 가지고 있는데 그 힐링포션을 쓰게 된다면 늑대를 잡는 정도로는 큰 적자라고 할 수 있었다.
운현의 배려로 전투에 대한 준비를 하는데 자신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는데 괜히 그의 돈만 날리게 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을 하던 그녀는 자신의 파이어 볼트에 늑대가 맞고 늑대가 불꽃에 휩쌓여 고통스러워하다가 그대로 달려오는 것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캐앵!"
"에?"
달려오던 늑대를 향해 운현은 가볍게 검을 들고 찔렀다. 불타오르는 늑대가 장검의 끝에 찔려 밀려나는 것에 헤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럴수가. 불타오르며 고통스러워하던 늑대나 다른 몬스터들은 악에 바쳐 공격을 받아도 그것에 밀려나지 않았었다. 그것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런데 자신의 파이어 볼트에 맞아 불타오르는 늑대는 달려오다가 운현의 찌르기 한번에 달려 오던 것을 멈추고 그대로 밀려날 뿐 이었다.
"어떻게!?"
"다 요령이 있지. 자. 한방 더 날려."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니 불길이 무서울 이유가 없다. 왼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여유롭게 웃으며 늑대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그것을 보며 헤스티아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네!!"
'이런 것도 가능하군.'
가상 현실 게임 내에서 주로 사용하던 방어형 검법이 실제로도 제대로 먹히는 것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상 현실 게임에서도 어느정도 몸에 익은 기술은 가상 현실의 스킬 보정을 받지 않더라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시간 배율 조정으로 인해 시간은 넘쳐났으니 이 세계에서의 활용을 위해 어지간한 기술들을 거의 숙련에 가깝게 익혀 놓은 운현에게 있어선 저정도 늑대 한두마리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빠! 대단해요!! 와!!"
마력을 다 쓸 때까지 단 한번도 운현은 늑대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헤스티아가 마력을 모두 담은 파이어 볼트를 날려 늑대를 쓰러트리고 외치자 운현은 빙그레 웃으며 검집에 검을 넣었다.
"뭐 이정도야. 가뿐하지."
"진짜 대단해요!! 우와... 어떻게 하신 거에요?"
"모든 것에는 흐름이라는 것이 있어. 그 흐름을 끊었을 뿐이지."
말은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절대 간단한 기술이 아니었다. 운현도 이 검법을 배우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는 방긋 웃으며 다가 온 헤스티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가방에서 빵을 꺼내 내밀었다.
"자. 그럼 어느정도 레벨도 오른 듯 하니까... 고블린을 잡으러 가볼까?"
"네!!"
300====================
만남
어느새 레벨이 5에 도달한 헤스티아가 바인드를 배우자 운현은 그녀에게 사냥터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여러명과 전투를 할 때보다 훨씬 쉽고 빠르게 레벨업을 할 수 있었던 그녀는 그저 운현을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고블린은... 음. 기본이 셋에서 다섯마리씩 몰려다니지. 여기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네. 그렇게 몰려다닌다고 해요."
"그럼 이렇게 하자. 난 아직 도발 스킬이 없지만, 적당히 투척이 가능하니까 고블린을 잘 몰아볼게. 너는 바인드, 그리고 내가 공격하는 고블린을 향해 파이어 볼트를 날려."
"하지만 운현 오빠 혼자 괜찮겠어요?"
탱킹을 전문적으로 하는 전사마저도 고블린 세마리가 달라붙으면 꽤나 힘들어 했다. 아무리 자신의 바인드가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괜찮을까? 헤스티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지만 운현은 그저 여유로울 뿐 이었다.
결국 운현의 말대로 하게 된 헤스티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앞에 서 있는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니 그래도 조금 마음이 놓인다.
"온다."
느긋한 목소리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헤스티아가 지팡이를 꽉 쥐었을 때 수풀이 흔들리며 세마리의 고블린이 튀어나왔다.
"캬아악!!"
"흡!"
낮은 기합성과 함께 운현은 힘을 조절하여 고블린 한마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것에 맞은 고블린이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을 때 운현은 강하게 외쳣다.
"바인드!!"
"캬아아악!?"
헤스티아가 준비한 바인드가 고블린 한마리를 묶었다. 그것을 노리고 운현은 아직 공격받지 않은 고블린을 잡은 후 뒤로 물러난 고블린을 향해 집어 던졌다.
"캬르륵!!"
"캭!!"
'오히려 이렇게 싸우려니 골치아프군. 그냥 애들한테 가르친다고 생각하면서 싸워야 하나.'
힘 조절을 조금만 잘못해도 고블린의 몸이 터져나갈 것이다. 최대한 억누르며 고블린을 묶어두던 운현은 헤스티아의 파이어 볼트가 뒤에서 날아와 고블린의 머리를 맞추자 빠르게 검을 휘둘러 그 녀석을 날려버렸다.
"캬아아악!!"
머리에 붙은 불보다 운현에게 맞은 복부가 더 아픈 모양인지 나가 떨어진 고블린은 배를 잡고 바닥에서 뒹굴거렸다. 그런 동료를 본 고블린들이 적의를 드러내며 자신에게 달려들자 운현은 뒤로 물러나며 방어 위주의 검법을 펼쳤다. 고블린 두마리가 접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번번히 공격을 실패하며 주춤거렸을 때 헤스티아는 두번째 파이어 볼트를 날릴 수 있었고 고블린이 파이어 볼트에 맞은 순간 운현은 찌르던 검에 힘을 주어 고블린을 날려버렸다.
"카악!!"
"파이어 볼트!!"
"카아아악!!"
파이어 볼트에 맞은 세번째 고블린의 복부에 찌르기가 꽂힌다. 그것에 맞은 고블린이 나가 떨어지고 처음 나가 떨어졌던 고블린이 일어나 덤벼들자 운현은 그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며 헤스티아가 다음 파이어 볼트를 날리기를 기다렸다.
"얍!!"
"화르르륵!"
"카악!! 카아아악!!"
얼굴에 또다시 불이 붙어버린 고블린이 고통스러워하며 달려드는 것을 여유있게 막아내며 운현은 상황을 살폈다. 나가 떨어진 고블린들이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이제 슬슬 끝내야 될 시간인가. 지금까지는 찌르기에 제대로 힘을 주지 않았지만 검에 조금씩 힘을 담기 시작하자 달려들던 고블린의 기세가 눈에 띄게 약해져갔다.
"파이어 볼트!!"
또다시 날아든 파이어 볼트. 운현의 찌르기로 상당히 체력이 깍여버린 고블린이 그것에 맞고 축 늘어졌을 때 운현은 검을 회수한 후 일어나 달려드는 고블린을 크게 베었다.
"촤악!"
고블린의 목에서 피가 터져나온다. 그것을 본 헤스티아가 다시 파이어 볼트를 날려 고블린을 쓰러트렸을 때 운현은 뒤를 보며 외쳤다.
"잘 했어!!"
"하아... 네!!"
운현이 공격당할까봐 무리하게 마력을 끌어올려 파이어 볼트를 날린 헤스티아는 그의 칭찬에 힘든 것도 잊고 환하게 웃었다. 다른 고블린이 일어나는 것을 본 그녀는 정신을 집중해 남은 마력을 모두 써서 파이어 볼트를 날렸다.
"캬아아아아!!"
파이어 볼트에 맞는 것과 동시에 운현의 찌르기가 고블린의 목을 꿰뚫었다. 그것에 맞은 고블린이 운현에게 접근하지도 못한 채 부들부들 떨다가 축 늘어지자 헤스티아는 환한 얼굴로 감탄성을 터트렸다.
"우와!! 우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이렇게 쉽게 전투가 끝나다니. 그냥 앉은 자리에서 파이어 볼트와 바인드만 썼을 뿐인데 고블린 세마리를 순식간에 처치한 것에 헤스티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했다.
전의 파티와 비교해서 1/3도 안되는 시간으로 전투가 끝난 것에 기뻐하던 그녀는 운현에게 달려가 그에게 안겼다.
"진짜 대단해요!! 정말 레벨 8 맞아요?"
"모험자 카드 보여줄까? 결국은 요령이라니까. 요령."
고블린을 밀어낼때마다 들어가는 데미지가 상당했지만 헤스티아는 다행스럽게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그녀가 마냥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은 운현은 마석을 들고 고블린의 시체를 챙겼다.
"파이어 볼트 데미지가 좋아서 이런 것 같은데. 역시 화염 마법사."
"헤헤헤... 그치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저번의 파티때는 이렇지 않았거든요."
"모든 것에는 흐름과 궁합이라는 것이이 있고, 그것을 정확히 잡을 수만 있다면 기본 이상의 힘을 낼 수 있지. 너랑 나는 아무래도 잘 맞나보다."
기분 좋은 말이다. 점점 운현에게 호감이 늘어나던 헤스티아는 운현의 부드러운 말에 기뻐 어쩔 줄 몰라하며 그의 품에 더더욱 안겼다. 달콤한 헤스티아의 향기를 맡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운현은 헤스티아를 떨어트린 후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 계속 해볼까? 마력은 여유 있지?"
"네!!"
"우와아..."
하루만에 10레벨이 되어버렸다. 코어를 경험치로 바꾼 것도 아닌, 순수하게 전투만으로 10레벨에 도달한 것에 헤스티아는 믿을 수가 없었다.
"운현 오빠!! 봐봐요!! 저 10레벨이에요!!"
"그래. 그래."
과거 연인이었지만 지금은 활발한 동생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린 그녀다. 헤스티아가 기뻐하며 폴짝거리는 것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운현은 자신의 모험자 카드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내 레벨은 안올랐군.'
실질적인 전투 데미지는 거의 헤스티아가 줬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한 일은 고블린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헤스티아의 마력이 떨어져간다 싶으면 찌르기에 힘을 주고, 그것이 아니라면 단순하게 접근을 하지 못하는 찌르기만 하여 그녀가 레벨업을 빠르게 할 수 있도록 도와 준 운현은 손수건을 꺼내 땀방울로 반짝거리는 헤스티아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헤헤..."
운현이 자신의 얼굴을 닦을 정도의 스킨쉽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헤스티아는 전혀 피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에게 마음이 주어진 헤스티아를 보며 운현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진짜 속이 편한 애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겁도 없지. 이렇게 순진할 줄이야. 그동안 타락의 길을 걸었던 운현에게 있어서는 정말 제대로 이용하기 좋은 캐릭터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곤란하니.'
헤스티아는 지켜야 할 사람이지 자신이 가지고 놀 캐릭터가 아니다. 그녀의 얼굴에 있는 땀을 다 닦아 준 운현은 헤스티아가 지친 얼굴로 쪼그리고 앉자 마주 쪼그리고 앉아 그녀의 얼굴을 톡톡 찌르며 부드럽게 웃었다.
"지쳤어?"
"헤에... 그것보다... 그..."
3레벨에서 10레벨에 도달할 때까지 전투를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흥분도가 상당히 올라버렸다. 그녀는 조금 물기에 젖은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다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이것까지 운현 오빠한테 기대면...'
오늘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운현은 자신의 마법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헤스티아는 절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파이어 볼트가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는가. 그리고 다른 파티와 함께 전투를 할 때 이 정도의 위력은 나오지 않았었다.
'아마 안심하고 마법을 쓸 수 있어서 그랬겠지...'
저번 파티의 경우는 어그로가 튀거나 화염을 이기지 못하고 놓쳐버린 탱커와 근접 딜러들이 고블린을 놓쳐 그 고블린이 자신에게 돌격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에 제대로 마법을 완성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운현이 앞선 지금은 달랐다. 운현은 완벽하게 몬스터들의 접근을 차단했고 그렇기에 자신이 제대로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운현 오빠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리고 그의 찌르기. 아무리 8레벨이라고 하지만 운현의 찌르기에 맞을 때마다 고블린들이 비틀거리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하지만 운현은 그것에 대해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잘했다고 말해줄 뿐 이었다.
"...헤헤헤..."
"응?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헤스티아는 주머니에서 꺼낸 흥분 억제제를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몸이 조금 늘어지는 기분이 든다.
"오빠는 괜찮아요?"
"나야 뭐."
'신기한 사람이야...'
야인이지만 야인답지 않은 모습, 그리고 화염 마법사에 대한 편견이나 불편함 따위는 전혀 없는 태도. 그리고 자신의 취향과 전투시 보이는 습관을 빠르게 캐치해내는 센스까지. 모든 것이 신기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신기함보다, 헤스티아는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그... 운현 오빠?"
"응?"
상냥한 웃음. 그의 부드러운 표정. 그것을 보며 헤스티아는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헤스티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살며시 입술을 달짝거렸다.
"저..."
"이야~ 헤스티아 아냐? 왜 니가 여기에 있어?"
큰 용기를 내며 운현에게 말하려던 헤스티아는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입을 꾹 다물고 딱딱히 굳었다.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다. 그녀가 움츠려들자 운현은 힐끔 뒤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년.'
에릴. 헤스티아의 죽음. 다난의 앞잡이. 그리고...
'반드시 죽여야 할 년 중 하나.'
"헤스티아. 무슨 객기로 고블린이 나오는 곳 까지 온거야? 괜히 와서 까불다가 사람들한테 민폐끼치지 말라고."
"오. 남자? 고용한건가?"
에릴과 전사, 그리고 검사와 궁사가 걸어오는 것을 본 헤스티아는 굳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에릴은 능글맞게 웃으며 뒤로 물러난 후 말했다.
"돈은 어디서 벌었어? 혹시 가랑이라도 벌린 건 아니겠지?"
"에릴~ 말이 너무 심하다~"
"에이~ 그치만 마법학교에서 저 계집애 한번 먹어보고 싶다던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던걸요? 수석이라고 엄청 건방지게 하고 다니던데."
"...에릴."
"응? 왜? 수석 아가씨? 어떻게... 다리 좀 벌려서 좋은 가드를 구한 모양인데."
운현을 파티원이 아닌, 그저 가드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에릴은 그를 위 아래로 흝어 본 후 감탄했다.
"헤에... 생긴 건 그렇다고 치고 장비는 꽤나 좋은걸? 이봐요. 얼마에 가드해주기로 한 거에요? 괜찮으면 우리 가드도 부탁하고 싶은데. 다리 벌려 줄 사람은 여기 꽤 있다구요."
"아하하하~~ 당신 정도면 괜찮지~"
전사는 유쾌하게 웃으며 운현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그런 그녀와 에릴, 그리고 아무런 말 없이 서 있는 검사와 궁사를 바라 본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가격이야 얘기하기 나름이지. 내 마음에 드는 미녀라면 싸고 내 마음에 안드는 추녀라면 비싸고."
"헤에... 그럼 나 정도면 얼마에요? 그래도 나름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에릴은 요염히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출렁거렸다. 타이트한 마법사 복장 덕분인지 그녀의 굴곡진 몸매는 더욱 도드라졌다. 그것을 바라보며 운현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하루에 이십골드. 열흘은 백구십오골드. 오골드는 할인가."
"이십골드? 쎄네... 헤스티아한테는 얼마 받았는데요?"
지갑을 꺼내려던 에릴은 십골드라는 말에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고 운현은 작게 키득거린 후 헤스티아를 잡아 당겨 안은 후 그녀의 긴 머리에 키스하고 느긋하게 답했다.
"내가 돈을 드려야지. 완전히 내 취향 저격이거든. 이렇게 예쁘고 상냥하면서도 귀여운 아가씬데. 댁같은 갈보와는 가격 차이가 쎈 건 당연한 것 아닌가?"
"...뭐!?"
"푸하하하!! 갈보래!!"
"에릴이 마법학교 출신 엘리트 치고는 갈보스럽긴 하지!!"
"아하하하하!!"
운현의 말에 에릴은 이를 갈며 분노했지만 다른 이들은 낄낄 거릴 뿐 이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키득거린 운현은 마찬가지의 여유롭고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같은 갈보끼리 비웃으면 쓰나. 친하게들 지내셔야지."
"......"
301====================
만남
"뭐가 어쩌고 어째!?"
운현의 느긋한 조롱에 에릴 일행이 무기를 꺼내들며 으르렁거렸다. 그녀들의 적의에 운현의 품에 안겨 있던 헤스티아는 당황했지만 자신을 안고 있는 운현의 팔은 단단히 자신을 잡고 있었다. 그것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헤스티아는 운현을 돕기 위해 지팡이를 들었다.
"그 개년이랑 같이 죽고 싶나보지!?"
"그리고 너희들은 던전 내에서 같은 모험가를 친 죄로 패널티를 먹겠지."
빙긋 웃은 운현은 검을 들어 옆을 가리켰다. 그것을 본 에릴 일행은 검은 머리의 수인 검사와 그녀를 따르는 두 여인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저 년들을 믿은거냐?"
"설마."
"이 새끼... 남자라고 내가 봐줄 것 같아?"
에릴 파티의 리더로 보이는 여전사가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분노를 터트리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여유로운 얼굴로 검을 까딱거렸다.
"뭐 좋은 꼴 보시겠다고 봐주시려고까지.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말야."
"죽인다!!"
느긋한 어조에 담겨 있는 조롱을 들은 그녀가 자신의 투핸드 소드를 꽉 잡고 달려나가려 하자 검사와 궁사는 그녀를 잡았다. 자신을 말리는 파티원들을 향해 그녀가 성질을 내자 에릴은 싸늘한 얼굴로 운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실력에 꽤나 자신이 있나본데... 그렇게 함부로 까불다가 강간당해서 죽을지도 몰라."
"그건 좀 무섭네."
"그럼 앞으로 입 조심..."
"너 같은 갈보년에게 강간당하다니.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이 개...!!"
"워워. 뭐하는거야. 다들 진정하라고."
운현의 비웃음 섞인 조롱에 에릴이 이를 드러내며 지팡이를 내밀고 마력을 모으려 할 때 그저 지켜보기만 하던 검은 머리의 수인 일행이 다가왔다. 그녀들의 등장에 여전사는 자신을 잡는 파티원들을 뿌리친 후 외쳤다.
"네년들도 저 새끼랑 한패냐!?"
"한패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아는 사람?"
싸움이 나는 것을 보고 말리려 다가 온 것이지만 오는 말이 거칠다보니 돌아가는 말도 그리 고깝지는 않았다. 검은 머리의 수인이 씩 웃으며 검자루에 손을 가져가자 그녀들을 노려보던 여전사는 이를 갈며 검을 들었다.
"오냐... 남자 보고 꼬리치는 개년들. 이 자리에서 싸그리 죽여주지! 이 투핸드의 바리사님께서 말야!"
"헤에... 진짜로 해보려고? 헤라. 루티."
"흥."
"남자 돕는거라면 이 헤라님이 안 나설 수 없지. 그 대신 이따가 부탁해~"
루티라 불린 녹색 머리칼의 여인과 헤라라 불린 건장한 덩치의 여인이 각자 무기를 잡고 전투를 준비하자 그녀들의 앞에 서 있던 검은 머리의 수인은 빠르게 검을 뽑아 에릴의 파티에게 겨눴다. 당장이라도 전투가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다. 그것에 에릴은 이를 갈다가 뒤로 물러났다.
"흥. 가요. 바리사. 지금은 숫적으로 밀려요. 그리고 저들. 아르의 파티에요. 레벨도 꽤 높으니..."
"...두고보자."
운현과 헤스티아 뿐만 아니라 아르의 파티가 낀 이상 자신들이 불리했다. 에릴은 헤스티아와 운현을 죽일 듯 노려보다가 뒤로 물러났고 그녀의 말에 바리사는 운현을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파티원들 역시 이를 갈며 운현을 노려보고 떠났고 그들이 떠나자 아르는 쓰게 웃으며 검을 검집에 넣었다.
"큰일 날 뻔 했네. 뭐 때문에 그렇게 싸운거야?"
"도와줘서 고마워."
다난에게 속아 그들의 이용물이 되었던 여인들. 아르와 루티, 헤라를 다시 만나게 된 것에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그의 모습에 아르는 피식 웃고 그와 손을 마주잡았다.
"아르라고 해."
"헤라."
"나는 루티야."
"운현."
"헤스티아에요...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자신이 모욕당하는 것에 운현이 나서 준 것은 고맙지만 그것 때문에 운현이 크게 다칠 뻔 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헤스티아는 우울한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말했다. 그녀의 말에 아르는 고개를 갸웃거린 후 운현을 보며 물었다.
"아까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 아가씨 때문이야?"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어깨를 으쓱이며 그가 느긋하게 말하자 아르는 작게 키득거린 후 그의 품에 안겨 있는 헤스티아를 가리켰다.
"연인이 모욕이라도 당했나보지? 남자들 중에 그것 때문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여, 연인..."
"아닌가?"
운현이 헤스티아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며 아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헤스티아는 당황하며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팔은 여전히 강철같은 힘으로 그녀를 꽉 잡고 있었다. 잠시 낑낑거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포기해버린 헤스티아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운현을 보고 물었다.
"그것... 때문이에요?"
"뭐 비슷해."
"......"
만약 그런 것이라면... 헤스티아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쩌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멈추질 않아. 그녀가 당황하며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며 귀엽다는 듯 실실 웃은 아르는 운현의 장비를 위 아래로 흝어 본 후 물었다.
"꽤 고레벨의 검사 같은데... 어때? 그 아가씨도 같이 파티 하는건?"
"저, 정말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좀 힘들 것 같군. 너희들의 레벨은 몇이지?"
"내가 31. 그리고 얘들이 27정도?"
"28이야."
"난 27."
"우와아..."
진짜 고레벨이구나. 헤스티아는 그들을 보며 감탄했고 운현은 주머니에서 꺼낸 자신의 모험자 카드를 그녀들에게 휙 던져 보여주었다. 그것을 받은 아르는 모험자 카드에 적혀 있는 레벨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8레벨인데 나이트 호크 세트라... 무기도 보아하니 힐더크가 만든 것 같은데... 돈이 많나봐?"
"아무래도 장비가 좋아야 살아날 확률이 높아지는터라. 가진 재산을 장비에 털어 넣었지."
"사치를 하지 않는 점도 좋군. 그럼 레벨이 맞아지면 언제든지 같이 가자고."
운현이나 헤스티아나 둘 다 딜러였다. 아르가 딜러, 루티가 궁사인 딜러, 그리고 헤라 정도가 탱커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녀들에게 있어서 급한 것은 유틸기를 쓸 수 있는 직업이나 힐러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파티를 제안하는 것을 보면 꽤나 운현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상황이 맞으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오늘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은 하겠어."
"오오오!! 그럼 나중에 만나면 흥분도를 해결해 주겠다는거야?"
헤라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아르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운현을 보았다. 남자 모험가는 드물다. 몇명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대형 클랜, 혹은 길드나 다른 파티에 속해 던전 탐험을 하곤 했다. 몬스터와 전투를 치루면 치룰 수록 흥분도가 쌓이는데 흥분 억제제를 먹는 것보다 남자와 한번 하는게 더 좋기 때문에 아르 역시 기대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정도로 괜찮다면 얼마든지."
운현이 웃으며 말하자 아르와 헤라, 루티는 서로를 보며 기뻐했다. 1계층에서도 이런 초심자들이나 다닐법한 곳에서 제대로 된 파티 없이 남자 모험가를 만난 것도 드문 일인데 그에게 호감을 산 것이 기뻤던 아르는 환한 얼굴로 말했다.
"이야~ 진짜지? 그럼 나중에 꼭 부탁할게."
"맡겨두라고."
"그럼... 어떻게. 길드까지 호위해줄까? 아까 그년들이 그냥 물러나기는 했지만 너희 둘만 남게 된다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아르는 생글생글 웃으며 뒤를 보고 말했다. 뒤에 서 있던 헤라와 루티가 붕붕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하지."
"자자~ 그럼 갑시다~"
어차피 지금 복귀하려던 차인지라 아르는 앞장서며 걸었다. 그 뒤를 헤라와 루티가 따르자 운현은 헤스티아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주었다.
"아..."
그의 품에서 풀려나는 것이 아쉬웠나보다. 헤스티아가 낮게 탄식을 터트리자 운현은 그녀의 작은 손을 잽싸게 잡아챘다.
"에?"
"갈까?"
"...네!"
그가 자신의 손을 잡고 깍지를 껴주자 헤스티아는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 없이 기쁜 얼굴이 되어 환하게 웃었다. 점점 운현이 마음에 든다. 하루만에 이렇게 마음에 들 수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가 자신의 마음 속에 크게 자리잡는 것에 헤스티아는 마냥 기쁜 얼굴로 그와 맞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모두 합쳐서 삼십 삼 골드네요. 코어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르의 파티와 함께 길드로 복귀한 운현은 모아 온 마석을 전부 환전했다. 몬스터 사체의 비용이 삼십 삼 골드. 코어를 경험치로 바꾸겠는가, 아니면 장비로 바꾸겠는가 하는 길드원의 질문에 운현은 헤스티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레벨 10이였지? 난 아직 8이거든. 내 레벨을 올리는데 쓰자. 그리고 나머지는 장비를 구하고. 너 장비는 그 로브랑 지팡이 밖에 없지 않아? 마력 회복을 빠르게 하는 장비가 있었으면 싶은데."
"네!"
어차피 운현이 아니었다면 이정도까지 레벨을 올릴 수도, 그리고 몬스터 사체와 코어를 얻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헤스티아는 운현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고 운현은 그녀를 향해 미소지어 준 후 자신의 레벨을 2 올렸다.
"아. 혹시 제니스씨 계신가요?"
"제니스씨요? 안에 계신데..."
"그럼 잠깐 면회를 하고 싶은데... 괜찮다면 전달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렵지는 않습니다만..."
길드 간부 중에서도 모험가들과 친한 간부가 있고 그리 살갑지 않은 간부들이 있었다. 제니스가 그런 케이스다. 제니스는 모험가들과 친하게 지낸다기보다는 다들 조금 어려워 하는 간부 중 하나였다. 그런 제니스와 면회라니.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 운현을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갔고 헤스티아는 운현의 옷자락을 꾹꾹 당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니스씨는 왜요?"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말야. 몇가지 얘기해 줄게 있거든."
"아...그, 그럼 혹시..."
"음?"
운현이 제니스를 만난다는 것에 헤스티아는 불안해졌다. 혹시 운현이 다른 일로 파티를 깨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입술을 달짝거리며 망설이다가 여전히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운현을 보며 용기를 냈다.
"저랑... 파, 파티 계속... 해 주 실 수 있으세요?"
"영광이지."
"네!? 저, 정말이세요!?"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머리를 크고 따뜻한 손이 애정을 담아 쓰다듬는다. 그의 말에 헤스티아는 놀란 얼굴로 운현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넌 내 취향을 저격한다니까.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은걸?"
살짝 허리를 숙여 헤스티아와 눈을 마주한 운현이 웃으며 말하자 헤스티아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며 몸을 베베 꼬았다. 흥분과 기쁨으로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웃으며 응시하던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톡톡 친 후 몸을 바로 세웠다.
"자. 삼십골드. 이걸로 방 잡고 식사를 주문해줘. 먹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먹어도 괜찮으니까 말야."
"운현 오빠는요?"
"난 금방 나올거니까... 스테이크 주문해줘."
"알겠어요! 얼른 와야 해요!!"
헤스티아가 1층의 테이블로 향하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던 운현은 사무소에서 길드원이 나오자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떨떠름한 얼굴로 운현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고 자신의 방에서 기다리던 제니스는 운현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공손히 말했다.
"무슨 일로..."
"이걸로 괜찮은 마력 회복용 장신구를 구해주겠어요? 100레벨에서 200레벨대가 사용하는 정도면 괜찮습니다."
운현이 건넨 것은 4계층 몬스터인 블랙 오크의 사체가 담겨 있는 마석 세개였다. 그것을 받은 제니스는 고개를 갸웃거린 후 이상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구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이정도면 더 좋은 것을 구할 수 있을텐데요."
"그냥 시키는대로 해주지 않을래요?"
"...알겠습니다."
존대를 하지만 그 내용은 틀림없는 명령이었다. 그 명령에 담겨 있는 강한 힘을 눈치 챈 제니스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답한 후 서랍장에서 밋밋한 장식의 반지를 꺼내었다.
"라플란의 반지입니다. 마력 회복량이 증가하는 반지입니다. 거기에 총 마력량도 올려주고 50레벨이 되면 마력 보호막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장비죠."
"코어 교환용 장비는 아닌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장비입니다. 비슷한 수준의 장비는 많이 있으니 괘념치 말아주십시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여."
운현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반지를 받았다. 그가 반지를 주머니에 넣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던 제니스는 간절한 어조로 물었다.
"운명은... 언제 바뀌는 겁니까?"
"기다리기 힘드신가요?"
"...이미 오백년을 기다렸습니다. 더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 힘들겠습니까. 다만..."
"다만?"
"...실패가 두려울 뿐.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알면 그것을 방해하는 자가 나타날 것인데..."
제니스는 명백히 다난을 걱정하고 있었다. 운명이 바뀜으로서 큰 피해를 입을 그들에 대해 제니스가 말하자 운현은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은 후 문을 열며 담담히 말했다.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없애버리면 그만입니다."
"...."
제니스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자 운현은 천천히 문을 닫으며 얼굴에 항상 씌워두고 있는 웃음을 지운, 더할나위 없이 음울한 얼굴로 이를 드러내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설령 그것이 신이라 할지라도."
302====================
만남
"다녀오셨어요?"
"응. 먹고 싶은 것 주문했어?"
헤스티아가 테이블에 지루한 듯 앉아 있는 것을 보며 그녀의 앞에 앉은 운현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의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던 헤스티아가 붕붕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탁자를 톡톡 두들기다가 천천히 말했다.
"오늘 전투로 이것 저것 생각해봤는데 말이지."
"네에..."
"너. 마력 회복량이 좀 약한 것 같은데? 마력량도 그렇고."
"우우... 그래도 학교에서는 꽤 높은 편이었는데."
그의 말에 헤스티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마법학교 내에서는 수석이라 불리며 높은 마력량과 마력회복속도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운현이 자신의 마력량과 회복량이 적다고 말하자 우울한 듯 중얼거렸고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웃으며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
"에? 뭐에요?"
"예전에 모험하다가 얻은거야. 나야 검사니까 마력을 쓸 일이 없어서 가지고만 있던 거지."
빙긋 웃은 운현이 손을 내밀자 헤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라온 작은 손을 차분히 바라보던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던 헤스티아는 운현이 자신의 왼손을 잡자 놀라며 도톰한 입술을 꼭 다물었다.
"내가 주는 선물이야. 꼭 받아줬으면 해."
"에...에에...!?"
운현이 자신의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자 헤스티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연인들에게나 하는 그런 일을... 그녀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싫어?"
"시, 싫을리가요! 정말 좋아요!!"
반지의 효과따위는 둘째치고 그가 반지를 끼워줬다는 것만으로도 헤스티아는 무척이나 감격스러웠다. 그도 자신을 좋아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렇다면. 헤스티아는 눈에 기쁨의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를 향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별 말씀을."
완전히 감동한 듯한 그녀의 말에 운현은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린 후 살며시 얼굴을 가져갔다. 그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오자 헤스티아는 눈을 꼭 감고 어깨를 움츠렸다.
'이, 이렇게 첫키스를... 사, 사람들도 많은데... 난 몰라...!'
"이건 족쇄야."
"...네?"
운현의 약간 낮은 듯한 목소리가 자신의 귓가를 간지럽히자 헤스티아는 살며시 눈을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헤스티아는 멍청히 운현을 바라보았고 운현은 그녀의 적금색 아름다운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 반지를 끼고 있는 동안은 내 옆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할거야."
"아... 우우..."
뭐라고 해야 할까. 헤스티아는 운현의 깊은 시선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좋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건 뭐란 말인가.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흉폭한 육식동물의 눈과 마주한 느낌을 받은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두려움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추워? 아니면... 이걸 기대한건가?"
운현은 빙긋 웃으며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고 깨끗한 이마에 키스했다. 이마에 닿는 촉촉한 느낌에 헤스티아는 방금 전까지 온 몸을 감싸던 공포심이 한번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마에서부터 뜨거움이 느껴진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헤스티아는 운현이 이마에 키스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에에에에!!!"
"싫어?"
"아, 아, 으아...아...그... 그런건 아닌데... 그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운현에게 휘둘리는 느낌이다. 마치 그의 장난감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녀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다가 결국 힘이 빠져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운현오빠."
"음?"
"그...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에요?"
"말하지 않았나?"
"네?"
"하하하... 말했잖아. 에릴인가? 그 갈보년과 만났을 때 말야."
생글생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험한 말을 내뱉는 그의 언밸런스함에 헤스티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그게 진짜란 말인가?
"제, 제가 오빠의 취향... 이란거요?"
"응. 처음 봤을 때부터 반했어."
한쪽 팔로 턱을 괴고 운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헤스티아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기쁘다기보다는 이상하다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
"왜요?"
"왜라고 한다면 내가 뭐라고 말해주길 바라는거야? 그 아름다운 적금발에 홀렸다? 깨끗한 피부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깊은 적금색 눈동자에 빠졌다? 아니면 내가 작은 여자를 좋아해서 그런다? 뭘 원해?"
"아, 아니 그게..."
"흠... 아니면 접근이 잘못되었나."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운현이 느긋하게 말하자 헤스티아는 혼란스러웠다. 책에서 봤던 연애 소설들은 대부분 여자들이 먼저 대쉬를 하고 남자들은 부끄러워하거나 퉁명스러워하면서 천천히 사랑에 빠지고 마는데... 운현과 자신은 오늘 처음 만났다.
'우, 운현 오빠가 멋있고 상냥한데다가 자상하고... 또 능력도 있다지만...'
오늘 만난 사이고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는데 이렇게 나가는 것은 조금 이르지 않을까? 운현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의 능력이 너무 대단하다보니 되려 이해가 되질 않은 헤스티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운현오빠."
"응?"
"그... 저기 저희는 오늘 처음..."
"내가 싫어?"
"그런 건 아니에요!! 오, 오빠는 멋있고 상냥한데다가, 저, 저한테 잘해주시고!"
"그럼 된것 아닌가?"
"그... 그렇긴 한데."
"뭐가 문제야?"
문제? 딱히 문제 될 것은 없다. 다만 자꾸만 드는 위화감이 거슬릴 뿐이다. 왜 자신이란 말인가. 마법 학교에서는 예쁘고 귀여운 외모와 수석이라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던전 도시에서는 자기보다 훨씬 예쁘고 귀여운 사람도 많았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왜? 운현은 레벨이 낮다지만 가진 전투 센스는 보통이 아니었다. 거기에 드문 남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라면 자기보다 더 예쁘고 좋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텐데 왜 자신이란 말인가.
지난 몇일동안 한없이 자존감이 바닥이 되어버린 헤스티아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운현 오빠."
"응."
"왜 저...에요?"
"왜 너냐..."
그녀의 말에 운현은 쓰게 웃었다.
왜? 그것만이 나의 목표였으니까.
왜? 그것만을 위해서 천의 세계를 넘었으니까.
왜?
'그거야말로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왜 너희들은 날 사랑했지? 왜 너희들은 보답없는 애정을 보내왔지? 왜 너희들은... 운현은 애써 웃음을 유지하며 그녀를 향해 천천히 말했다.
"이유는 없어. 내가 널 좋아하기 때문이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첫 눈에 반했기 때문이지. 사람이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에 이유가 필요해? 그냥 마음이 내키기 때문이야."
"....."
운현의 부드러운 말에 헤스티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저토록 자상히 사랑한다. 자신에게 반했다. 라고 말하는 것에 의심을 품을 겨를 따위는 없었다. 던전 도시에 와서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는데...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훌쩍거리자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아주었다.
"흐에엥..."
"에구. 울지 마. 왜 울어."
"그치만... 훌쩍."
조금 늦은 시간이라 근처에 사람이 없고 또 구석진 자리이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다 쳐다봤을 것이다. 헤스티아는 훌쩍거리며 운현의 품에서 잉잉거렸다. 던전 도시에 와서, 아니 마법학교에서부터 수석이라는 자리에 올라 많은 이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부터 다른 누군가에게 이렇게 응석을 부려 본 적이 없는 헤스티아는 운현을 꽉 잡고 계속 훌쩍거렸다.
"조금 진정이 됐어?"
"네에... 훌쩍. 죄송해요오..."
"아니 죄송할 것 까지야."
헤스티아가 운현의 품에서 훌쩍거린 탓에 음식을 가지고 나왔던 메이드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결국 조금 식어버린 음식을 들고 나왔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음식을 깔아두고 가자 운현은 손수건을 꺼내 헤스티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 너무 울지만 말고 이제 먹자. 와인 마실래?"
"...네."
추태도 이런 추태가 없다. 좋은 모습만 보여줘도 모자란 판국에 운현에게 이런 추한 꼴을 보여주다니. 헤스티아는 과거의 자신을 한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가 건네 준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은 그녀는 아직 충혈된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조금은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저기... 그게... 아,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 말은?"
"...모, 몰라요!"
마법 학교에서 그토록 당찼던 자신이 왜 이렇게 된걸까. 학교에서 몰래몰래 연애소설을 봤을 때 소설의 주인공처럼 저렇게 당당하게 애인에게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학교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여자가 먼저 고백을 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 각오는 온데간데 없이 그저 맘 약한 남자애처럼 수줍고, 또 부끄러워하는 자신이 한심해진 헤스티아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하하. 자. 먹자."
"네에..."
꽤나 즐거운 저녁식사였다. 약속을 지켰다는 것에 마음이 가벼워진 운현과 그 운현과 함께 하게 된 첫번째 저녁 식사에 감동한 헤스티아. 즐겁게 식사를 마친 헤스티아는 와인에 살짝 취한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헤헤헤~ 운현 오빠아~"
"그래.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이제 올라갈까?"
"어... 우, 우리 같이 자는거에요?"
"응."
"부끄러워요오~"
반쯤 풀린 눈으로 헤스티아가 수줍은 듯 속삭이자 운현은 빙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길이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던 헤스티아는 살며시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즐겼다. 그의 쓰다듬을 즐기던 헤스티아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운현은 그녀를 안아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우우웅..."
제대로 취한 모양이다. 헤스티아는 자신이 이마를 만져주고 있어도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하며 뒤척거릴 뿐 이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쓴웃음을 지은 운현은 그녀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취한 여자 먹는 취향은 없지."
헤스티아가 만약 멀쩡한 정신상태라면 상관없겠지만 그녀와 기념할 만한 처음을 제대로 정신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내일 트윈문의 축제가 있는 날이지. 차라리 그때 제대로 하는게 낫겠다.'
침대를 헤스티아에게 준 후 운현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한다. 헤스티아와는 만났고 그녀의 호감을 쉽게 얻었다.
'다음은 미야인가.'
미야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녀는 모험가 길드의 길드원이라고 떠들어 댄 사기꾼에게 속아 짐과 돈을 모두 잃고 자신과 만났다.
'굳이 그 상황까지는 재현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그 년이 누군지도 보고 싶고 말야.'
과거에 끝까지 미야를 사기 친 년을 잡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궁금하기도 했던 운현이다. 그 과정에서 미야를 돕는 것으로 그녀의 호감을 살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다 생각한 운현은 망토를 들어 자신의 몸을 가린 후 빙긋 웃었다.
"음냐아... 운현 오빠아... 아잉... 거긴..."
"뭔 꿈을 꾸는거야. 으이구."
헤스티아가 입맛을 다시며 잠꼬대를 하는 것을 보며 운현은 작게 키득거렸다. 주는대로 넙죽넙죽 잘도 마시더니. 만약 깨어 있었다면 꿈이 아니라 진짜로 했을 텐데. 그녀를 보며 빙그레 웃은 운현은 의자를 끌어 침대 옆에 가져다 놓은 후 거기 앉으며 헤스티아의 긴 머리를 손에 잡았다. 매끄럽고 아름다운 적금색의 긴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즐기며 운현은 천천히 눈을 감으려다 창문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도둑인가... 아니면.'
아까 낮의 일을 떠올린 운현은 헤스티아에게 지어주던 자상한 웃음이 아닌 학살자의 흉포한 웃음을 지으며 검을 잡았다.
303====================
만남
달칵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망토 아래에 검을 잡은 손에 힘을 넣은 채 운현은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그렇게 잠시 후 창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오자 운현은 검은 야행복을 입은 이에게 망토를 던진 후 빠르게 달려들었다.
"꺄...읍!"
"우리 공주님 주무시는데 소란 피우면 쓰나."
커다란 손으로 입을 막아버린 후 운현은 검자루로 상대의 명치를 후려쳤다. 숨이 턱 막히는 고통. 명치를 칠때 손에 닿는 감각으로 보아 여자다. 큰 고통에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며 허물어지자 그녀를 가볍게 받은 운현은 힐끔 헤스티아를 보았다.
'잘 자는구만.'
와인을 잔뜩 먹여 둔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일까? 운현은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어 준 후 여인을 잡아 의자에 앉힌 후 긴 끈으로 그녀를 의자에 고정시켰다.
"흠..."
달빛에 비춰진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에릴의 파티원도 아니고, 하다못해 자신이 아는 얼굴도 아니다.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운현은 느긋한 얼굴로 그녀의 볼을 강하게 후려쳤다.
"짜악!!"
"컥...억!"
입술이 다 터져나갈 정도의 강렬한 충격에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운현은 그녀의 턱관절을 가볍게 뽑아버렸다. 턱이 벌어지고 자결을 못하게 막은 운현은 그녀가 당황하며 자신을 노려보자 빙그레 웃은 후 현실에서 작업을 할 때 넣어 두었던 박스테이프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읍...!"
"그럼 간단하게 침투경부터 시작해볼까."
심문? 그건 나중에 해도 된다. 운현은 의자를 끌어 와 그녀의 앞에 놓은 후 그녀의 어깨를 잡고 망설임없이 침투경을 날렸다. 모험가 길드에서 난동을 피우는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개발된 침투경은 이제 운현의 좋은 고문도구가 되어버렸다.
"으으읍!!"
여인의 눈에 핏발이 돋는다. 테이프로 감싸진데다가 턱관절까지 뽑히고, 양 팔과 양 다리가 의자에 고정되어 고통을 호소할 수 조차 없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던 그녀는 운현이 싱글벙글 웃으며 즐겁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더더욱 두려움에 빠졌다.
"읍...읍..."
침투경의 고통이 가라앉고 그녀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검은색 야행복은 완전히 젖어 그녀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요염함을 드러내었지만 운현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다시 한번 손을 들어 올렸다.
"읍!!"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또다시 그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 고개만 붕붕 젓는 그녀를 향해 운현은 그 특유의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고. 밤은 기니까 말야."
"으으으읍...!"
침투경이 네방. 이제는 고통에 신음할 힘 조차 없어진 여인은 고통이 몸을 자극할 때마다 몸을 움찔 거리는 정도로 밖에 반응할 수 없었다. 눈에 촛점은 풀려버렸다. 바닥은 그녀가 흘린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을 정도다.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던 운현은 그녀의 몸이 천천히 가라앉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
간절한 시선. 눈물과 호소.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던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스러운 공주님이 주무시고 계신데... 소란 피울 생각은 없지?"
"....!!"
침투경이 아닌 상냥한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저 상냥한 말투조차 공포가 되어버린 여인은 붕붕 고개를 끄덕이며 간절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에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그녀의 입에서 박스테이프를 뜯어 인벤토리에 던져 놓은 후 타액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상냥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닦아주었다.
"정말이지... 칠칠맞게 이렇게 다 흘리고 말야."
"....."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오싹한 감정이 온 몸을 감돈다. 목소리와 말투, 행동은 너무나도 상냥하고 부드럽다. 마치 연인에게 하는 것과 같은 그의 행동은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사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눈 앞에 있는 저 남자가 제대로 미친 놈이라는 것을. 저렇게 웃으며 상대에게 고통을 주고, 그 반응을 즐기는 광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달칵."
빠진 턱관절이 가볍게 끼워진다. 턱에서 오는 은은한 고통에 신음할 새도 없이 그녀는 황급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 살려주세요."
"오오. 누가 죽인다고 했던가?"
"...."
"이름이 뭐야? 이쁜이?"
운현의 손길이 볼을 쓰다듬는다. 그 손길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다급히 그의 질문에 답했다.
"아이라라고 합니다."
"직업은?"
"도, 도둑..."
"아직 정신을 못차렸나봐?"
생긋 웃은 운현이 턱을 꽉 잡자 그녀는 빠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가 턱관절을 다시 뽑고 고문을 시작할까 두려웠던 아이라는 다시 입술을 움직여 아까의 말을 정정했다.
"암사...암살자...입니다."
"레벨은?"
"1, 108."
"누굴 죽이러 온거지?"
"......"
그의 말에 아이라는 눈을 꼭 감았다. 누굴 죽이러 왔냐고? 눈 앞에 있는 이 남자다. 고작해야 레벨 10 안팍이라는 말에 푼돈을 받고 그를 죽이러 온 것이다.
'내가 미쳤지...'
고작 레벨 10이라고. 자신의 레벨이 100이 넘는데? 100레벨이 넘는 자신을 이렇게 쉽게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10레벨 안팍이라고? 만약 여기서 살아돌아갈 수 있다면 자신에게 이런 의뢰를 맡긴 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아이라는 침을 꿀꺽 삼킨 후 차마 입을 열지 못한 채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혹시... 나?"
"자, 잘못했어요."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이라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간절히 빌었다. 행여나 소리를 질러 그가 기분 나빠했다간? 아니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처음 마주쳤을 때 그의 공격은 암살로 다져진 자신의 체술로도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으니 말이다. 일수의 교환만으로 상대가 자신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득히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간절히 애원하자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으음. 곤란하네."
"제발..."
"그렇지. 벌을 주는 것은 너무하니까 깔끔하게 목을..."
"제발...제발... 시, 시키는건 뭐든 할테니 제발..."
"흐음... 그래. 그럼 날 죽이라고 한게 누구야?"
"그, 이, 이름은 모르는데..."
"모르는데? 인상착의는 있을것 아니야."
"검은색 긴 머리의 여인이었어요. 그... 안경을 쓰고, 묘, 묘한 분위기를... 가진."
검은 머리? 안경? 그것만으로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던 운현이 입맛을 다셨을 때 그녀는 황급히 말했다.
"아. 가, 같이 온 사람을 뒷조사 했을 때... 다, 다난교라고..."
"다난교라..."
"같이 온 사람은?"
"푸른색 다, 단발 머리의 마법사였어요."
"호오..."
푸른색 단발 머리의 마법사라.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알지. 운현은 종이를 들어 에릴의 얼굴을 빠르게 스케치한 후 아이라에게 보여주었다. 순식간에 대략적인 그림을 그려낸 운현을 놀란 눈으로 응시하던 아이라는 운현이 그림을 보여주자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자에요."
"그렇단 말이지..."
'그럼 처음부터 다난과 연계되어 있던 년이라는 건가? 흠... 그럼 잘 됐군. 이년을 이용해서 다난교를 아주 개박살을 낼 수 있겠는데... 지만 카야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건드리기 힘들겠군. 젠장.'
자신의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카야가 어느정도의 신성을 모을 필요가 있었다. 다난 교의 내부에 스파이를 둬서 카야가 신성을 얼마나 모았는지 알면 좋으련만. 시간을 두고 세뇌를 할 여유만 있다면 에릴을 그렇게 쓸 수 있을텐데. 잠시 생각하던 운현은 빙긋 웃은 후 아이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암살자들도 길드나 연합같은게 있나?"
"네...네. 이, 있어요."
"접선하는 방법은?"
"그... 그건 마. 말씀드리면 저, 저를 살려주실 건가요?"
"물론이지. 따지고보면 네가 나쁜 것은 아니잖아. 넌 그저 너의 일을 했을 뿐이야."
운현이 상냥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아이라는 경계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운현은 쓰게 웃은 후 검을 잡았다.
"아니 말해주기 싫으면 관두고. 딱히 알고 싶은 것도 아닌..."
"사, 상인 조합 영영에 있는 미다스라는 술집에서 스테이크를 주문하시면 됩니다! 그, 그럼 가진 돈을 보고 암살 의뢰를 할 수 있어요."
"그렇단 말이지."
그녀의 답변을 들은 운현은 검을 놓고 잠시 생각했다. 암살자라. 암살자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암살자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니 그 활용도를 측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자신의 장기말로는 충분히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
"더, 더 여쭙고 싶으신 것은...?"
"없어."
"그럼...?"
아이라는 일말의 기대감을 담아 운현을 올려다보았다. 부디 살려주길. 그녀가 덜덜 떨며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빙그레 웃은 후 그녀의 구속을 풀어주었다.
"자자. 조심해서 가라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나에 대해서는 비밀이야. 알았지?"
"네...!! 저, 절대 말하지 않겠습니다!"
운현이 볼을 톡 건드리며 말하자 아이라는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다짐을 받아낸 운현이 열린 창문을 가리키자 아이라는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가 바닥에 떨어져 힘겹게 걸어가는 것을 본 운현은 품에서 밧줄에 감겨진 단검을 꺼내 그녀를 향해 아무런 주저 없이 던졌다.
"퍽!!"
450이 넘는 힘이 담긴 단검은 아이라의 뒤통수를 한방에 꿰뚫어버렸다. 그것에 맞은 아이라가 털썩 쓰러져 죽어버리자 운현은 밧줄을 당겨 그녀의 머리에서 단검을 회수한 후 그녀를 무감정한 눈으로 응시했다.
'고문에 의해서 비밀을 불 정도라면 다른 고문에 의해서 비밀을 불 가능성이 있지.'
암살을 실패한 주제에 살아서 돌아온다? 만약 암살자가 당해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면 모를까 살아 돌아온 것이라면 정보를 캐내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 암살자 길드든 아니면 다난교이든. 고작 침투경 몇방을 맞았을 뿐인데 암살자에게 있어서 최대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의뢰인에 대해서도 술술 불어버린 아이라를 뭘 믿고 살려주겠는가.
모험가 길드에서 꽤 떨어진 거리에서 그녀가 죽었으니 자신을 의심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혹시 모르지. 자신이 죽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지 몰랐다. 하지만 운현의 레벨은 공식적으로는 10에 불과했다. 108레벨의 암살자가 10레벨의 검사에게 당했다고 한다면 모두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비웃을 수 밖에 없다.
'결국 이 세계에서 힘의 척도는 레벨과 직업이니까 말야.'
그렇기에 운현은 자신의 힘을 숨긴 채 움직일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460이지만 과거에 찍었던 레벨과 그 스탯은 운현 자신이 '기본적으로 보유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 만큼 모든 이들은 운현을 그저 숙련된 10레벨의 검사로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힘의 30을 숨기지 말고 99를 숨겨놔야지. 그래야 상대가 방심을 한다.'
자신의 적은 운명이지만 운명은 절대 말도 안되는 어이없는 죽음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타당한 이유가 없으면 운명조차도 함부로 공격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 상황이 만들어질 때까지는 그녀들을 자신이 지켜야 했기에 운현은 나름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모든 계획은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어.'
창문을 천천히 닫으며 운현은 헤스티아를 바라보았다. 운현과 아리아가 난리를 피우는 동안에도 여전히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것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의자를 끌어 그녀의 앞에 가져다 놓은 운현은 헤스티아의 긴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헤헤..."
운현이 머리를 만지는 것이 꽤나 기분이 좋았나보다. 헤스티아는 아직도 술기운이 남아 있는 얼굴로 베시시 웃었다. 그 사랑스러운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운현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긴 머리를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그래그래. 넌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있으려무나... 그동안 내가 받았던 것을 이제 갚아 줄 차례니까 말야."
"운현오빠아..."
뒤척거리며 그녀가 자신을 향해 얼굴을 돌리자 운현은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항상 보여주어야 할 상냥한 얼굴. 그녀들에게 절대로 가져야 할 마음가짐. 그것을 다짐하며 운현은 밤새도록 안심하고 잠들어 있는 헤스티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304====================
만남
창문을 통해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어진다. 정말 오래간만에 다음 날 걱정 없이 푹 잠든 것 같다. 멍하니 눈도 뜨지 못한 채 침대의 따뜻함에 뒤척거리던 그녀는 오늘도 파티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눈을 번쩍 떴다.
"...아."
그러고보니 어제... 운현과 만났다. 너무나도 멋있고, 너무나도 상냥하며, 자신을 좋아한다 말해 준 멋진 사람. 그 사람과 이제 같이 움직이는구나. 그러고보니 어제... 어떤 일이 있었지?
천천히 머리를 굴리며 헤스티아는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이 선명히 떠오를때마다 자신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우와아아아아!!"
술에 취해서 무슨 짓을 한거지? 운현에게 업히고, 소리지르고, 징징거리고. 그에게 또다시 추태를 보여버렸다. 잘보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런 짓을 해버리다니. 헤스티아가 절망하며 비명을 내지르고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때 그녀의 귓가에 부드럽고 상냥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아... 아. 아으... 아..."
운현을 보며 헤스티아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입만 뻥끗 거리며 어버버 거리는 그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운현은 그녀의 헝크러진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어 정리해 준 후 말했다.
"오늘은 어떻게 할래? 던전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오늘은 축제가 있는 날 같은데."
"에...에..."
"아침에는 일이 있거든. 잠깐 나갔다 올테니까 방에서 쉬고 있어. 늦어도 정오때까지는 돌아 올 생각이니까... 낮에는 던전에 잠깐이라도 가서 레벨업을 하고 저녁에는 축제를 즐길까?"
"어...으..."
"그럼 그렇게 하자."
헤스티아가 대답하지도 않았지만 운현은 자신의 일정을 그녀에게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길이 닿았던 부분이 따끈따끈하게 느껴진다. 운현의 상냥한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후다닥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우아아아아아!"
"하하하... 왜 그래?"
"그, 그치만..."
아침이라 제대로 꾸미지도 못했다. 입가가 축축한게 어제 침을 흘리고 잔 것 같은데!? 거기에... 거기에... 아침인데도 어제와 똑같이 멀쩡한 운현의 모습에 비해 자신의 모습이 추할 것이라 생각한 헤스티아가 자신을 숨기려 이불로 몸을 감싸자 운현은 그것을 당겨 낸 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헤스티아의 볼을 쓰다듬었다.
"우우..."
"괜찮아. 여전히 예쁘니까."
"우와아..."
이런 말을 실제로 하는 사람이 있다니. 헤스티아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그녀의 이마에 살짝 키스해 준 후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우당탕!!"
문이 닫히고 침대에서 헤스티아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을 들으며 키득거린 운현은 1층의 회관으로 내려와 느긋한 얼굴로 생각했다.
'헤스티아는 헤스티아고... 오늘 시간을 좀 내서 암살자 길드를 다녀와야겠군.'
"어머? 운현씨. 좋은 아침이에요. 일찍 나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잖아요? 아직 레벨이 낮으니까 빨리 레벨업을 하려구요."
밝게 웃으며 다가 온 필레가 인사하자 운현은 마주 인사하며 조용한 미소를 보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그의 미소에 필레는 기분 좋게 마주 웃어 준 후 그의 앞의 자리를 가리켰다.
"잠깐 앉아도 되나요?"
"물론이죠."
필레가 자리에 앉자 운현은 커피와 차를 주문했다. 메이드가 그것을 가지고 나오자 운현은 차를 필레에게 내밀었다.
"피곤해보이시는데 한잔 하시겠어요?"
"어머. 고마워요."
사양하는 대신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인 필레는 차를 한모금 마시고 노곤한 얼굴로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운현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굉장히 피곤해보이시는데."
"아아... 네. 살인사건이 있었어요."
"살인사건이요? 그거 큰일이네요."
"그러니까요... 용병 연맹의 연맹원 중 하나가 모험가 길드의 영역에서 뒤통수에 칼을 맞고 죽었어요. 상처 깊이를 보니 보통 힘이 아닌 것 같은데..."
"흐음... 용병 연맹이라."
"네. 용병 연맹. 지금 용병 연맹은 한참 시끄럽거든요."
"왜요?"
"음... 뭐라고 해야 하나. 놀라운 실력을 가진 용병 하나가 지금의 연맹장을 부정하고 나섰거든요. 하극상은 늘상 있는 일이지만... 그녀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서 그런지 지금 현 용병 연맹의 연맹장인 티르빙마저도 주의하고 있거든요."
"헤에... 굉장한가보네요."
"네. 초급 용병이었는데 갑자기 실력을 드러내어서 간부가 된다고... 기존에 간부로 예정되어 있던 용병들을 쓰러트려버려서 지금 용병 연맹은 무척 혼란스러운 상태에요. 그 간부 예정자들도 무척 반발하고 있구요."
"그런가요? 그래서요?"
"그 죽은 용병이 간부로 예정되어 있던 용병이 신뢰하던 부하라 그런지 그것 때문에 또 시끄러워지게 생겼어요. 그 용병은 이게 다 그 아르토리우스라는 신규 간부가 죽인 것이다 라고 길길이 날뛰고 있고... 다른 용병들은 모험가 길드에서 죽인 것이 아니냐고 하고 있고."
"호오... 범인은 못찾았나요?"
"네. 무기를 보아하니 단검 같은데... 일격이에요. 다른 상처는 거의 없고. 그 용병의 레벨이 100이 넘어서 아마 추측하기론 레벨 300이상인 사람이 죽인 것 같은데. 정말 큰일이네요. 300레벨이 넘는 사람이 이렇게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면..."
"그렇군요..."
'역시 레벨로 규정을 짓는군.'
필레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운현은 그녀를 향해 빙긋 웃었다. 이 세계에서 강함의 척도는 레벨이다보니 공식적으로 100레벨도 되지 않는 운현은 자연스럽게 범인 후보에서 아예 제외되어버렸다.
'문제는 레난데... 뭐 잡아떼면 장땡이지.'
자신의 단검술을 본 레나라면 충분히 운현을 의심할 수 있겠지만 단검술이 운현만 쓸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가 그가 이번에 쓴 단검은 시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저번 세계에서 챙긴 단검 중 하나였다. 거기에 범행 무기도 인벤토리 안에 넣어놨으니 절대 들킬 일은 없었다.
"휴... 차 잘 마셨어요."
"별 말씀을요."
"그보다... 헤스티아씨와는 잘 지내시나봐요?"
"하하하... 어제 보셨나보죠?"
"네."
살풋 웃으며 필레는 부러운 듯 운현을 바라보았다.
"우우... 좋겠다."
"뭐가요?"
"저도 저레벨때 운현씨같은 멋진 사람이랑 같이 다녔으면 좋았을 텐데... 같이 다닌게 윈드 하나라니... 하아."
"윈드?"
'필레의 친구... 그리고 눈치없는 기집애.'
필레의 말에 운현은 윈드를 떠올렸다. 필레와 같이 다니기 위해서는 정말 주요 체크를 해야 할 인간이다. 자칫 잘못했다간 그녀에게 휘말릴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그렇게 될 필요가 없지.'
과거의 자신이야 경험도 없고 힘도 없는데다가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 통찰력이나 분석력도 없었으니 그녀에게 말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과연 지금은 어떨까?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를 향해 손뼉을 짝 치며 필레는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 모르시나요? 윈드는 운현씨를 아는 것 같던데."
"어... 아. 혹시 성문 경비대장?"
"성문 경비대장이라기보다는 도시 경비대장이죠. 제 친한 친구에요. 윈드가 운현씨를 아주 좋게 보고 있던데요? 후후후... 정말이지 바람둥이라니까요~"
필레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놀리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남자에게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니 자신의 간단한 사탕발림에도 쉽게 넘어간다. 그때야 경계심 때문에 자신을 적대하는 분위기를 보였지만 과연?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필레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튼 좋겠다..."
과장스럽게 시무룩한 표정과 포즈를 취하며 필레가 축 늘어지자 운현은 작게 키득거린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하하하... 제가 레벨을 많이 올리면 같이 다니시면 되죠."
"어머~ 기분 좋은 말씀을 해주시네요~"
운현의 말에 필레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팔을 톡 쳤다. 그녀의 좋은 반응에 미소지은 운현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분히 물었다.
"필레씨. 이 던전 도시로 들어 올 수 있는 성문은 몇개가 있나요?"
"음... 둘이요. 북문과 남문. 운현씨가 윈드와 만나신 곳이 남문이에요."
"그런가요... 혹시 묘인족 마을에 대해서 알고 계세요?"
"묘인족이요? 뭐 유명한 곳이라면..."
"바운티아 라그라슈가 족장으로 있는 곳은요?"
"오! 최고의 점쟁이인 바운티아 라그라슈!? 알아요! 음... 그녀가 족장으로 있는 묘인족 마을에 가려면 여기서 남문으로 가는게 제일이에요. 그런데 그건 왜요? 점 치실게 있으신가요?"
"하하. 네. 몇가지 점을 쳐보고 싶네요."
"우음. 운현씨는 그런 것 별로 안좋아하시는 것 같았는데."
"예? 제가요?"
필레가 갸름한 턱에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말하자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반응에 필레는 머쓱한 웃음을 지은 후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네. 음, 그냥 느낌인데요. 운현씨는 운명이나 점 같은 것은 잘 안믿으실 것 같아서요."
"하하하... 틀린 말은 아니네요. 운명 같은건 안믿거든요."
"그래요? 그런 것 치고는 처음 만난 헤스티아씨랑은..."
"운명은 믿지 않지만 취향은 믿죠. 하하하."
"후훗. 하긴 헤스티아씨가 귀엽긴 하죠. 그런 분이 취향이신가봐요?"
"필레씨같은 분들도 취향인데요?"
"어머~ 기뻐라. 고마워요~ 저도 운현씨 같은 분 좋아해요~"
그저 입발린 소리라고 생각한 것일까? 필레는 부끄럽다기보다는 즐겁다는 얼굴로 그의 팔을 톡톡 쳤다. 그녀의 반응에 어깨를 으쓱인 운현은 탁자를 톡톡 치며 생각에 빠졌고 그가 입을 다물자 필레는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사무소로 향했다.
'미야를 만나러 가야 되는데... 여기서 그 마을로 가려면 남문으로 가는게 가장 빠르다 이거지. 미야와의 대화를 떠올려보면 그녀는 다른 곳에 들리지 않고 바로 왔다고 했었어. 그럼 남문으로 통과하는게 맞겠군.'
분명 미야가 던전 도시에 들어 온 것은 오늘이라고 했었다. 문제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는 것. 그녀가 사기를 당하기 전에 그녀를 만나야 했던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남문으로 가볼까. 그 전에 몇가지 준비해야겠군."
과거에 미야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 운현은 히죽 웃은 후 길드 근처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길드에 막 가입한 초보자들을 위한 무기와 갑옷들이 놓여져 있는 곳에서 하드레더 아머 하나와 싸구려 장검을 구입한 운현은 입고 있던 나이트호크 세트와 장검을 챙겨 인벤토리에 넣은 후 그것들로 장비한 후 빠르게 남문으로 향했다.
남문에 도착한 운현은 한가해보이는 경비병 둘이 서로 농담따먹기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들이 하라는 경계는 서지 않고 짤짤이를 하는 것을 본 운현은 느긋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우왓!"
"어? 어... 반가워! 멋진 남자!"
에스카와 로지다. 운현이 말을 걸자 화들짝 놀라며 짤짤이를 하던 손을 감춘 그녀들은 운현이 웃으며 다가오자 그에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둘이 짤짤이를 하는 것보다 그를 상대하는게 더 재밌겠다 생각한 것이다.
"운현이라고 합니다."
"오... 좋은 이름인데? 난 에스카."
"난 로지야."
덩치 큰 두 경비병들이 살갑게 인사를 하자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들에게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바구니를 내밀었다. 그녀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운현은 바구니를 열었다.
"저 때문에 고생하신 것 같아서 간단하게나마 선물을 준비했어요. 성문 경비라는 자리가 무척이나 지루한 곳이잖아요?"
"우와!"
"이쁜 짓만 골라서 하네~"
운현이 가져 온 바구니에는 육포와 음료수, 샌드위치와 쿠키가 담겨 있었다. 그것을 본 에스카와 로지가 활짝 웃으며 안의 육포를 꺼내 씹기 시작하자 웃으며 물었다.
"오늘은 어째 한가하네요?"
"음. 한 이십분 쯤? 그 전에 한명 들어온게 다야. 아. 말 편하게 해도 괜찮지?"
"물론이죠."
"나이는 우리보다 많아보이는데... 어떻게. 오빠라고 불러줄까?"
"하하하... 괜찮습니다."
"그, 그래?"
로지가 은근한 말투로 말했지만 운현은 칼같이 잘라버렸다. 그것에 로지가 시무룩해하자 에스카는 자기가 말 꺼내지 않은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왔었나요? 던전 도시는 큰 도시라서 유동인구가 많을 줄 알았는데."
"음. 남문으로는 여행자들이나 좀 왔다 갔다 하는 정도지."
"막 시골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그 정도 외에는 잘 안와. 아까 왔던 여자도 시골에서 막 올라온 것처럼 보이던데? 묘족이었지?"
"응."
'빙고.'
생각보다 쉽게 미야를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에스카와 로지는 운현에게 환심을 사려는 듯 아까 전에 들어왔던 시골뜨기 묘족 여인에 대해서 떠들어댔고 그들에게서 꽤 많은 정보를 얻게 된 운현은 싱글거리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윈드씨는 원래 좀 성격이 그런가요?"
"윈드 대장?"
"으음... 좀 눈치가 없지.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야. 다만..."
"다만?"
"남자들이랑 이상하게 인연이 없는게 좀."
"하하하!! 윈드 대장의 남성 사정은 진짜 재밌지. 한번 들어볼래?"
"하하하하하!! 그거 꼭 듣고 싶지만."
"오호오... 남 이야기를 할 정도로 한가한가보지?"
305====================
만남
에스카와 로지가 신나하며 윈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을 때 그녀들의 뒤로 싸늘한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것을 들은 그녀들의 몸이 딱딱히 굳었을 때 성문으로 걸어 온 갑옷의 미녀. 윈드는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꽉 쥐고 에스카와 로지의 머리를 후려찼다.
"아야야!"
"윽!"
"그렇게 한가롭게 떠들 힘이 있는 걸 보니 근무 끝나고 추가 훈련을 받아도 별 소리를 못하겠군."
"우에에엥!"
"잘못했어요!!"
에스카와 로지가 징징거리는 것을 무시하며 한걸음 나선 윈드는 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근무를 서고 있는 경비병들에게 이런 것을 주지 마라."
"하하하... 저번의 실례에 대한 보답일뿐입니다.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끙... 그래. 나에 대해서가 궁금한가? 흠흠. 하지만 자세하게 가르쳐 줄 수는 없군."
"왜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만나는 남자가 있기 때문이다. 난 한 남자에게만 집중하는 좋은 여자이기 때문이지. 이른바 해바라기 타입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네 관심은 고맙지만 사양이다."
'김칫국을 한사발 드링킹 하는구만.'
주모라도 불러야 될 것 같은 그녀의 반응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자 윈드는 찝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지? 그 시선은?"
"아무것도요. 뭐, 만나시는 분과 잘 되길 빌겠습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운현은 절대 안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혹시 아는가. 잘 될지. 운현이 웃으며 자신을 응원해주자 윈드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빙긋 마주 웃었다.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운현은 아까 전 에스카와 로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일단 모험가 길드에 가기 전에 식사를 할 수 잇는 곳부터 갔다고 했고, 그들이 추천한 식당은...'
빠르게 뛰어 에스카와 로지가 말한 식당 앞에 도착한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딱히 허름한 식당에 대해서 폄훼할 생각은 없지만 이런 식당이니만큼 사기꾼이나 그런 인간들이 많을 것이다.
'아무리 싸고 맛있다고 하더라도 이제 막 올라 온 시골뜨기를 이런 곳에 보내다니.'
양이 많은데다가 가격도 싸고, 또 맛있는 음식으로 유명한 덕분인지 식당은 안과 바깥에도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아직 식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며 운현은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여기가 아니면 어쩌지...? 젠장. 그럼 어쩔 수 없지.'
이것만큼은 운현도 운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미야를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미야와는 길드에서 결국 만나게 될 것이다.
"오호? 남창인가?"
"이런 곳에서 남자 혼자... 못보던 얼굴인데?"
"하하. 남창은 아닙니다. 자리가 비워지길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어제 던전 도시에 들어 왔습니다."
"헤에... 그럼 우리랑 합석 어때?"
"음식도 사줄테니까. 응?"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식당 안을 바라보는 운현에게 몇몇 여인들이 다가왔다. 얼굴에 흉터가 있거나 큰 덩치를 한. 아무리 봐도 왈패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들이 자신에게 치근덕거리자 운현은 그녀들을 날려버릴까 고민했다.
'괜한 소란 피우지 말자.'
소란이 일어나면 미야나 그 사기꾼이 자리를 바꿀 수도 있었다. 자신에게 찝쩍거리는 여인들을 향해 쓰게 웃은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그 특유의 부드럽고 상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뭐야?"
"되게 비싸게 구네. 야. 좆달고 태어난게 유세냐?"
"암튼 이런 새끼들 때문에 진짜... 어휴."
"니가 그렇게 잘났으면 왜 여기서 밥을 처먹냐?"
'하 시발.'
격렬한 고민에 휩쌓인다. 운현이 거절하자 그녀들은 빠르게 태세를 전환해 운현의 성질을 마구 건드렸다. 어쩔까. 칠까 말까. 칠까 말까. 한참 고민하던 운현이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주먹을 쥐었을 때 그들의 뒤에서 맑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어이! 뭐하는거야!?"
"힉?"
"레빈?"
"그, 그게."
"너희들. 자꾸 이런 식으로 까불면 국물도 없다고 했냐. 안했냐."
"레빈. 그, 그게 아니라..."
"자꾸 이러면 국물도 없다. 알아?"
성실하게 생긴 금발의 여인이 당당히 말하자 여인들은 우물쭈물하다가 우루루 도망쳐버렸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운현은 쓰게 웃으며 쥐었던 주먹을 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요. 던전 도시를 지탱하는 네개의 조직 중 하나인 모험가 길드의 길드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인상만으로도 사람의 신뢰를 얻을 정도의 선량한 얼굴, 그리고 모험가 길드원이라는 자부심 섞인 말. 능숙한 그녀의 행동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이 년이구만.'
"식사를 하시고 싶으신데 자리가 없으셨나요? 마침 잘 됐네요. 저희 자리에 합석하시겠어요?"
"아... 괜찮습니다."
"너무 그렇게 사양하지 마세요. 던전 도시에 오신 분들을 환영하는 것도 저희들이 할 일이니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촌뜨기를 꼬드기겠다는 것인가? 운현은 그녀의 말에 히죽 웃었다.
'바라던 바다.'
자신이 입고 있는 나이트호크 세트를 보아 절대 촌뜨기는 아니지만 던전 도시에 온지는 하루 밖에 되지 않았다고 운현 스스로 말했으니 던전 도시에 대해서는 촌뜨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를 데리고 가던 그녀는 운현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복장이 좋은데. 혹시 어디 소속되셨나요?"
"아, 아니요. 어제 들어와서 아직 어딘가에 소속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자자. 이리로 오세요."
"에? 누구?"
"......"
식탁에 앉아 국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 여인을 보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회백색의 거칠면서도 야성적인 매력이 듬뿍 느껴지는 머리칼, 약간 까무잡잡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히 탄 피부. 쫑긋 솟은 흰색 귀여운 귀. 다부지면서도 상냥함이 돋보이는 미모. 늘씬한 몸매와 의자 사이로 나와 살랑살랑 흔들리는 하얀 꼬리.
'미야.'
가장 먼저 죽은 그녀.
날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그녀.
언제나 상냥하고 강한 웃음으로 우리를 지켜주었던 그녀.
강물에서 헤엄치며, 고향의 강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던 그녀.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했던 그녀.
사랑한다는 말 조차도... 과분할 정도의 애정에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그녀.
스푼을 입에 문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 친 운현은 하마터면 그녀의 이름을 부를 뻔 한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얼굴에 씌어 둔 웃음이라는 가면이 금새 부서질 뻔 했다.
하지만지금의 자신은 그녀를 몰라야 한다. 운현이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레빈은 운현을 미야의 옆에 앉혔다.
"여기 국밥 하나 줘요! 수육도 주고!"
"네에~"
"저기..."
"아아. 이건 내가 대접하는거야. 너무 그렇게 부담갖지 말아줘."
"하지만 그래도."
레빈이 멋대로 주문하자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으려 했지만 그녀는 더더욱 단호히 말했다.
"길드원으로서 영입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정도 투자는 애교지. 자자. 사양 말고 먹어. 아, 그리고 미야씨도 많이 먹고."
"고마워요. 레빈씨. 수육 좀 더 먹어도 될까요?"
레빈의 말에 미야는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그녀를 향해 빙긋 웃은 레빈이 수육을 하나 더 시키자 미야는 생글생글 웃으며 운현을 보고 물었다.
"당신도 여기 처음 온 사람이야? 아. 난 미야라고 해. 반가워."
"아... 네. 반갑군요."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운현은 미야와 악수했다. 사랑스럽게 살랑거리는 하얀 꼬리에 운현이 시선을 주자 미야는 싱글싱글 고양이같은 미소를 지으며 꼬리를 움직여 운현의 팔을 톡톡 쳤다.
"수인을 보는게 처음이야? 왜 그렇게 신기한 듯 봐?"
"아. 무척이나 예쁜 꼬리라서."
"헤, 헤헤헤. 그렇지?"
꼬리를 칭찬받았던게 기뻤던지 미야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꼬리를 더욱 활발히 움직였다. 그것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은 운현은 수육과 국밥이 나오자 미야에게 말했다.
"고기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좀 더 드시겠어요?"
"으음, 처음 본 사람에게 이유 없는 호의를 받는 것은 좀..."
"그럼 그 멋진 꼬리를 보여주신 것에 대한 감사라고 해둘게요."
"하하하~ 이거 재밌는 얘기를 해주는데? 알았어."
운현이 웃으며 자신에게 수육을 내밀자 미야는 싱글거리며 그의 수육을 받았다. 국밥 한그릇으로도 모잘랐던지 그녀가 고기와 국밥을 열심히 먹는 것을 바라보던 레빈은 운현과 미야를 향해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모험가 길드의 길드원이야. 당신들. 꽤나 실력이 있어보이는데... 모험가 길드에 들어오지 않겠어? 아. 미야. 당신은 이미 하기로 했지?"
"냠. 음. 애초에 이 도시에 온 것이 모험가가 되기 위해서니까."
"그럼 운현. 당신은?"
"저 역시 모험가가 되고 싶어서 온 것이니까요."
"그거 잘 됐군. 그럼 식사를 하고 있어주겠어? 내가 등록을 하고 올게. 등록비를 준다면 바로 등록해서 모험자 카드를 가져다주지. 그리고 모험가들의 정규 장비도 말야."
"정규 장비가 있나요?"
'말하는게 능숙하군. 특유의 선한 분위기에 신뢰감이 더해져서 아무것도 모르는 촌뜨기들은 속을 수 밖에 없겠어.'
운현 역시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나 사기를 치는데는 나름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였다. 그렇기에 운현은 눈 앞에 있는 이 여자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수는 얕기 그지 없군. 마치 비온 뒤의 도랑같을 정도로 얕아. 선의를 베풀고 그 선의를 기반으로 얕은 신뢰를 쌓아봤자 얻을 수 있는 것은 작은 이득 뿐. 나라면... 아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자신에게까지 사기를 치려고 하는 그녀를 보며 운현은 어떻게 하면 좀 더 다른 이들을 벗겨 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생각을 지웠다. 지금 자신은 사기를 치러 온 것이 아니다. 목적이 바뀌어서는 곤란했다.
"응응. 모험가가 되려는 사람들 중에는 제대로 된 장비를 착용하지 않고, 음. 당신처럼 말야. 그런 싸구려 하드 레더와 검 한자루만 달랑 들고 던전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많단 말이지. 3골드나 되는 가입비를 받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야. 최소한의 무장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 모험가 길드가 땅파서 장사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래도 초보자들에 대한 지원 정책삼아 10골드 수준의 장비를 무상으로 대여해주고 있는데 그것까지 가져다 줄게."
"헤에... 그렇군요."
"그럼 그 장비를 주겠어?"
"장비는 왜요?"
"모험가가 되는 이들 중에는 지급받은 장비가 손에 익지 않다고 금새 장비를 원래 장비로 되돌리는 이들이 있거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야. 모험가 길드에서 지급되는 장비는 분명히 말하지만 기존의 장비보다 훨씬 좋은 장비야. 무려 던전의 몬스터들의 사체와 코어가 담겨 있는 장비니까 말야. 한명이라도 덜 죽게 하려는 길드장 상아씨의 뜻이 담긴 정책이지."
"그런 훌륭한 정책이라면 따라야지요."
그녀의 말에 운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가 준 주머니에 하드레더와 싸구려 검을 넣고 3골드를 주었다. 그것을 받은 레빈은 빙긋 웃은 후 운현의 키와 몸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식사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계산은 내가 해놓고 갈테니까 말야."
레빈이 웃으며 걸어나가자 운현은 옆에 앉은 미야를 힐끔 보았다. 자신이야 그녀의 사기에 넘어가지 않지만 미야는 이미 그녀에게 넘어가버렸는지 한치의 의심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휴. 바보같은 기집애.'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라지만 이렇게 쉽게 당하다니. 안쓰럽다기보다는 그저 귀여울 뿐이다. 운현은 미야를 향해 쓰게 웃으며 생각했다.
'그런 만큼 내가 지켜 줄 수 밖에 없겠구만.'
306====================
만남
"너무 늦는 것 같은데... 혹시 무슨 사고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
미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운현에게 말했다. 식사는 끝난 지 오래다. 슬슬 사람들이 빠지기 시작한 식당에 남아 있는 사람들 중 몇 안되는 이들의 무리가 되어버린 미야는 운현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한번 찾아보지 않겠어? 너는 나보다 하루 빨리 왔으니까 모험가 길드의 위치를 알고 있지?"
"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빙긋 웃은 운현은 탁자를 톡톡 두들긴 후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까 그 여자가 모험가 길드의 길드 직원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죠."
"...뭐?"
운현의 말에 미야는 이해를 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어떻게 된건가. 미야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싱긋 웃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장비를 찾으러 가볼까요?"
"뭐? 뭐?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응?"
당혹스러운 얼굴로 미야가 다급히 물었지만 운현은 그저 부드럽게 웃을 뿐 이었다. 던전 도시에 들어오자마자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미야가 운현을 잡았을 때 운현은 그녀를 따뜻한 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말했잖아요. 아까 그 사람은 모험가 길드의 길드원이 아니라고."
"그게 무슨. 그, 그럼 진짜 사기란 말야? 믿을 수 없어. 그렇게 선량하게 생긴 사람이...?"
"선량함은 외모가 아닙니다.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크게 충격을 받은 듯한 미야가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운현은 그녀의 손을 감싸 잡은 후 당겼다. 여기서 주저 앉아 있을 시간은 없다. 미야를 당겨 일으킨 운현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저는 제 물건을 찾으러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까요? 오후에는 약속이 있어서 말이죠."
"으, 응!! 날 속이다니!! 용서 못해!"
"좋은 자세입니다."
미야는 분노로 씩씩거리다가 한순간 기세를 잃었다. 머릿 속에 남아 있는 '혹시나' 라는 생각이 자신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반응에 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때도 그랬지.'
필레가 그토록 말해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던 미야를 떠올리며 운현은 빙긋 웃었다. 전혀 변한 것이 없다.
'변한 것은 나지.'
"그럼 모험가 길드로 가보시겠어요?"
"알아?"
"나름 길드 소속의 모험가입니다만."
미야가 떨떠름히 묻자 운현은 모험자 카드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미야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모험자 카드를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모험자 카드를 보여주고 믿으라고 해봤자지. 어차피 가르쳐 줄 거 지금 이렇게 가는게 나을 것이다.
"길드로 갈거니까 같이 가요. 제 말이 진짜라는 것을 가르쳐드리죠."
미야를 데리고 길드로 간 운현은 미야가 세상 다 산 얼굴로 바닥에 쪼그려 앉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어쩜 반응이 이렇게 똑같을까. 그녀가 완전히 풀이 죽어버리자 운현은 그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제 제 말을 믿으시겠어요? 모험가 길드에 가입하고 모험가가 되는데 등록금은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10레벨 이상이면 장비를 받을 수도 없구요."
"아아아... 그럼 어떡하지? 내 장비랑 전 재산을 다 줬는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미야를 바라보며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런 그의 웃음에 미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고마워. 네 덕분에 모험가로 등록은 했네... 장비는 없지만. 어떻게든 아르바이트를 소개받아서라도 싼 장비를 구매해야지. 아아아아... 족장님한테 조르고 졸라 받은 장비가..."
"그렇게 되찾고 싶으시면 같이 가실래요?"
"응?"
"아까 말했잖아요. 장비를 찾으러 간다고."
운현의 말에 미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보니 운현은 레빈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장비를 그냥 넘겼다. 왜 그런 것일까? 그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돌려 사무소에 있는 필레에게 말했다.
"필레씨. 모험가 길드를 사칭한 사칭범을 잡으러 갈건데... 괜찮으면 장비를 좀 빌려주실래요?"
"장비요? 어떤 것을요? 그런데 위험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럼 도와주시겠어요?"
"으음... 죄송해요. 그런 문제에는 저희가 나설 수가 없어요. 시청에 의뢰하시는게..."
"그럼 일단 조사라도 해보려구요. 권사가 쓸만한 갑옷과 장갑을 빌려주세요."
"그것도 규정상..."
운현이 부탁을 했지만 필레는 그것을 들어 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장비를 모두 털려버린 미야는 필레의 말에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운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쩝. 어쩔 수 없나. 그럼 길드에서 판매하는 장비는 없나요?"
"초급자들을 위한 장비는 있지만 그리 좋지는 않은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런 것이라도 상관없어! 내 장비를 찾으면 되니까! 운현. 반드시 찾을 수 있는 거지?"
미야는 간절한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이제 희망은 운현 뿐이라는 것에 그녀가 기대를 잔뜩 담자 운현은 느긋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2골드에요."
"자요."
주머니에서 2골드를 꺼낸 운현은 필레가 미야에게 허름한 가죽 장갑과 가죽 흉갑을 건네주자 그것을 받아 빠르게 착용했다. 정장의 마이를 벗고 흰색 셔츠 위에 가죽갑옷을 착용한 그녀가 검은색 가죽 장갑을 착용하자 운현은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와 인벤토리에서 자신의 장검을 꺼내 쥐었다.
"방금 뭐한거야?"
"아. 이거요. 제 개인적인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나중에 가르쳐줄게요."
"음..."
운현의 능력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해하던 미야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볼을 긁적거렸다.
"저기. 운현이라고 했지?"
"네."
"괜찮으니까. 말 편하게 해주겠어? 나, 나이도 내가 더 어린 것 같고..."
"몇살인가요?"
"이제 스물 넷."
"그럼 확실히 저보다 어리군요. 그럼 이제부터 말 편하게 할게. 정식 소개를 하지 않았지? 운현. 레벨 10의 검사야. 잘 부탁해."
"응. 난 미야. 레벨 11의 권사야."
"체격을 보니까 그런 것 같더라고. 자... 그럼 가볼까."
롤랑과 레나가 가지고 있던 마법석을 꺼내 든 운현은 그것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아까 갑옷에 짝이 되는 마법석을 끼워 넣었기 때문에 그 위치를 알 수 있었던 운현은 마법석이 붉은 빛을 내며 선을 그리자 그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운현. 너는 왜 장비를 준거야?"
"글쎄...? 널 돕고 싶어서? 하하하. 그런 것이라면 그냥 거기서 깽판을 쳤겠지?"
"그것도 그렇네. 그럼 왜?"
"몇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거든."
과거 모험가 길드를 사칭해서 사기를 쳤고, 그것을 가지고 필레를 자극해서 모험가 길드가 그 사기꾼을 잡게 했는데 그들은 자신이 회귀를 할때까지 잡지 못했다. 무려 던전 도시를 지탱하는 4개의 조직 중 하나인 모험가 길드가 말이다.
'그들이 다른 세력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 또한 재밌는 일이지.'
과연 누가 관련되어 있을까? 다난? 아니면 용병 연맹? 그것도 아니면 상인 조합? 제작자 연합일 수도 있고 제 3세력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누구든간에 내가 알 수 없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불쾌한 일이지.'
"확인하고 싶은 것? 그게 뭔데?"
"그건 나중에... 이쪽인가."
남문쪽을 지나쳐 골목으로 들어간 운현은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높은 건물들 사이사이에 있는 골목을 지나칠때마다 골목 특유의 악취와 함께 지저분한 거리가 보였다.
"오우... 잘 생긴 총각. 어딜 그렇게 가시나?"
"하하하. 목적지는 도착한 것 같네. 미야. 싸움 좀 잘해?"
"마을에서 싸움이라면 져 본 적이 없지."
"그럼 시작해볼까?"
마법석이 건물 앞을 가리키자 운현은 검을 들어 올리며 느긋하게 말했다. 그의 모습에 미야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주먹을 꽉 쥐었다. 10레벨 둘이서 뭘 할 수 있겠냐만은 미야는 이상하게 옆에서 검을 들고 있는 운현이 든든하기 그지 없었다.
"그럼 간다."
생긋 웃은 운현이 검집째 검을 휘둘러 눈 앞의 여인을 한방에 쓰러트리자 미야는 당황한 다른 여인에게 빠르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턱을 정확히 후려갈긴 그녀는 여인이 쓰러지려 하자 그녀를 잡고 그녀의 복부에 니킥을 날렸다.
"퍽!"
"끄윽..."
"꽤 하네?"
"너야말로."
자기야 대인 전투는 부족의 언니들이나 동생들과 많이 치뤘던 만큼 경험이 많지만 저 남자는 도대체? 검을 휘두르는 것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미야는 놀란 눈으로 운현을 보다가 환하게 웃었다.
"어쩌면 네가 귀인일까?"
"응?"
"족장님께서 말씀하셨거든. 던전 도시에서 나의 귀인을 만날 수 있을거라고... 그게 네가 아닐까?"
"글쎄. 그렇다면 다행이겠는데?"
"응?"
"너같은 미인의 귀인이라면 충분히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테니까 말야."
계단을 올라가려던 미야는 운현이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보고 말하자 순간 당황해 발걸음을 멈췄다. 그런 그녀의 볼을 톡 쳐준 운현은 검을 꽉 잡은 후 나지막히 말했다.
"장비 찾으면 내 부탁 하나 들어줄래?"
"뭐, 뭐...뭘?"
"한시간동안 그 꼬리 내가 마음대로 만지게 해줘!"
"에엣!?"
"아까도 말했잖아. 정말 멋진 꼬린데. 반할 것 같은걸."
"아...으으..."
묘인족에게 있어서 꼬리를 칭찬받는 것은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당황하자 운현은 키득거린 후 그녀에게 마스크 하나를 휙 던졌다.
"일단 습격하러 온 거니까 정체 정도는 숨겨주는게 예의겠지? 자자. 얼굴 가리고 가자고."
"으...으응."
그녀가 당황하며 마스크를 쓰자 운현 역시 마스크를 착용했다. 서로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얼굴을 가린 운현과 미야는 빠르게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왠 년들... 윽!"
2층의 복도에 있던 여인들은 운현과 미야가 들어오자 당황하며 몽둥이를 들었지만 빠른 기습 덕분에 그들은 힘도 쓰지 못한채 쓰러졌다. 그것을 본 운현은 복도 끝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마법석이 가리키는 곳이 저기다. 그렇다면 저기 장비가 있을 것이다. 라는 것이기에 미야는 후다닥 뛰어 문을 열었다.
"퍼엉!!"
문을 열자마자 미야가 녹색의 마력탄을 맞고 나가 떨어졌다. 그녀가 쓰러지는 것을 본 운현은 당황하며 그녀에게 뛰어갔다.
"으으...윽."
충격이 꽤나 큰 모양이다. 미야가 쓰러져 기절하자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것은 아니다. 상대도 죽일 생각으로 마력탄을 쏜 것은 아닌 것 같았기에 운현은 문 안쪽에 있는 상대를 보았다. 지팡이를 들고 있는 여인. 그리고.
'오호라.'
제3세력은 아니다. 운현은 마법사 옆의 사내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마침 잘 됐군요. 인신공양의 제물이 부족하다고 라닌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저들도 그 제물로 삼아야겠습니다."
"그것도 좋지... 그보다 네놈은 누구냐."
어쩜 이렇게 상황이 좋을 수가 있나.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이것만큼은 정말 운현도 예상치 못했다. 그는 이 기묘한 상황이 만들어낸 절호의 기회에 부들부들 떨며 기뻐했다. 힐끔 미야를 보니 미야는 기절한 상태였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보니 마스크는 착용된 상태였다. 아주 좋다. 정말 이렇게 좋을 수가.
"누구냐고 물었을 텐데."
"스릉."
질문에 답변하는 대신 운현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가 검을 뽑는 것을 보며 어이가 없었는지 마법사는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부탁하지."
마법사가 말을 하자 그는 마법사의 어깨를 툭 친 후 뒤로 물러났다. 척 봐도 그리 강해보이지 않는 상대다. 부하들 몇을 쓰러트린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자는 그리 강하지 않아보인다.
"레벨 스캔!"
마법사의 마법이 자신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운현의 눈은 뒤에서 여유있는 얼굴로 웃고 있는 이를 응시할 뿐 이었다. 그런 그의 스캔을 마친 마법사는 히죽 웃으며 지팡이를 들었다.
"고작해야 레벨 10따위..."
마법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에게 달려가 검을 휘두른 운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머리가 바닥에 툭 떨어지고, 그것을 본 이가 황당해하는 것을 보며 무척이나 기쁜 얼굴로 말했다.
"정말... 정말 만나고 싶었다. 네가... 네가 진짜 보고 싶었어...!"
"...날 아나?"
다난교도의 복장을 입고, 등 뒤에 두장의 검은 날개를 꺼낸 상태인 남자를 향해 운현은 과거의 연인들을 만났을 때만큼이나 기쁜 감정을 터트렸다.
"너한테 묻고 싶은게 너무 많았거든...!! 카를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