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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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강림
"...뭐?"
라티나의 슬픈 목소리에 운현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그에게 그것을 시키지 않았다. 그녀들을 구하는 일은 오로지 운현이 원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그가 그것에 너무나도 얽매여 있는 것이 안타까웠던 라티나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다가 그의 손이 자신의 목을 꽉 잡자 입을 다물었다.
"감히...!"
"큭... 그렇다면... 망설이지 마세요."
"...."
그녀들을 포기하라고? 이제와서 포기하라고? 안한다. 아니 못한다. 그녀들을 구하겠다는, 운명을 바꿔버리겠다 집념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이제와서 포기한다고?
"웃기는 소리지."
라티나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며 운현은 이를 드러내고 싸늘히 웃었다.
망설임? 두려움? 지금까지의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인가. 일천이 넘는 세계를 넘나들며 수많은 가짜 세계를 농락하고 비웃으며 그들을 짓밟은 자신이다.
그런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뭘 믿는단 말인가.
"콜록...!"
"들어간다."
망설임은 끝났다. 두려움은 이제 없다. 자신을 믿는다. 운현은 머릿속에 미약하게 남아 있는 '어쩌면' 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확실히 지웠다.
"생각해보니 최악의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움직이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지. 굳이 그것을 예측하여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그것이면 됩니다."
라티나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그렸다. 그녀를 바라보며 운현은 힐끔 시계를 보았다. 11시 55분. 지난 시간동안 매일같이 자신을 괴롭혀왔던 그 고통이, 그 세계로 자신을 이끌 고통이 찾아 올 때가 되자 운현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저를 데려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만약을 대비해야 하니까. 넌 이곳에 남아서 기다려라. 만약 내가 실패하고 돌아온다면 너는 그것을 잡아주는 존재가 되어야 하니까."
운현의 담담한 말에 라티나는 슬픈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은 그가 성공한다면...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수도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저를... 버리시는 겁니까?"
"그럴리가. 날 위해서 남아줘."
눈물을 흘려버린 라티나의 볼을 만져주며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에 라티나는 눈물을 천천히 닦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정도 예상은 했습니다만... 진짜로 이렇게 되니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군요."
"그래? 하하하... 그렇다고 내가 실패하기를 빌지는 말라고."
"딸깍."
조용한 집에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운현은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고 모든 계획을 다시 정리한 후 시계를 보았다. 11시 59분 54초. 이제... 곧이다.
"큭....!"
언제나와 같은 고통이 찾아온다.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운현은 이 세계에서 피우는 마지막 담배의 연기를 크게 내뿜고 그것을 재떨이에 비볐다.
"이게 내가 해야 할 마지막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다. 나는... 반드시 성공한다."
다짐하듯 말를 내뱉은 운현은 강해지는 고통 속에서 버티는 대신 정신을 천천히 놓았다.
"크읏. 쿠리앗!"
얼굴에 축축하고 끈적한 액체가 달라붙는 듯한 기분에 운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크라. 크우앗!"
약한 불빛에 비추어진 무언가가 눈 앞에 보인다.
녹색의 우둘투둘한 거친 피부, 째진 눈, 갈색의 눈동자. 동화에 나오는 마귀같은 길쭉한 코, 툭 튀어나온 입.
"....!"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고 몸은 나신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눈 앞의 흉칙한 괴물이 상체를 깔고 앉아 있었다.
"읍!"
양 팔과 양 다리는 무언가로 묶여 있었다.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눈 앞의 괴물은 마치 웃기라도 하는 듯 두툼한 입술을 끌어올렸다.
"....!"
괴물의 손이 양물을 잡고 흝기 시작한다.
기분나쁜 쾌감에 온 몸에 오한이 감돌았다.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남성에 힘이 들어가자 괴물은 더더욱 짙게 웃고는 천천히 몸을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퍽!!"
운현은 자신의 왼쪽 팔을 움직였다. 땅에 고정되어 있던 말뚝이 가볍게 뽑히자 운현은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있는 괴물의 머리를 후려친 후 몸을 일으켰다.
"크앗!? 크루앗!?"
운현이 무덤덤히 일어나는 것을 본 괴물, 고블린은 당황하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무심히 바라보던 운현은 그 고블린의 머리를 가볍게 잡았다.
"크앗! 크악!"
머리가 잡힌 고블린이 발버둥을 치자 운현은 성큼성큼 걸어 울퉁불퉁한 벽으로 향했다. 운현의 몸을 작은 발과 팔로 몇번 후려쳤지만 그는 그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고블린을 벽에 후려쳤다.
"콰직!!"
단 한번. 한번만에 고블린의 머리가 박살이 나버린다. 운현은 양 팔과 양 다리에 걸려 있는 줄을 풀어낸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아... 도대체 이 동굴은 뭐야. 아무튼... 일단 확인부터 해볼까?"
메뉴창을 열어 스테이터스를 확인한 운현은 비릿하게 웃었다.
"레벨이 1이고 스텟이 초기화가 되었는데도 이정도 힘이라... 그렇다면 생각대로 흘러간다는 얘긴데..."
상당히 좋은 예감이 든다. 운현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고블린의 몸을 잡은 후 가볍게 힘을 주었다. 단 한번 힘을 준 것만으로 고블린의 몸이 두쪽으로 찢어져버린 것을 본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레벨과 스탯은 초기화가 되지만 신성으로 만든 고유스킬은 그대로 있군. 내 힘은 그 세계에서 가지고 있던 힘 그대로다.'
과거에 이 세계에 들어왔던 것은 군대를 앞두고 친구라고 생각한 이들에게 배신당해 절망하고 삐뚫어진, 나약한 21살의 운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운현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통찰력과 분석력을 가진 29살의 운현이었다.
손을 들어 턱을 매만진 운현은 꺼칠꺼칠하게 돋아 있는 수염에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첫번째는 성공했다... 내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어...! 좋아.. 그럼 다음 작업을 해볼까!?"
인벤토리를 열어 본 운현은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대부분의 물품들은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 인벤토리에서 운명의 성배와 현자가 들어 있는 관을 꺼낸 운현은 현자의 관에서 얻은 스크롤을 찢었다.
"우우웅...!"
성배가 떨리며 천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사라져버린 성배, 그리고 스크롤을 찢음으로서 생긴 시간의 틈. 그것을 바라보던 운현은 현자가 들어 있는 관을 가볍게 들어 그곳으로 휙 던졌다.
"자... 오백년 전으로 가서 넌 네 할 일을 해라."
현자를 보내야 한다. 현자를 과거로 보내 인과를 맞춘다. 현자가 상아를 만나고, 또 피스나를 만나고, 필레를 만나야 한다. 그리고 필레의 영지에서 잠들어 기다려야 한다.
"그럼 나머지는 내 일이군."
과거가 변해져 현재가 어떻게 바뀔지는 운현으로서도 예측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려 현자다. 자신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자신과 같은 정신을 가지며 자신과 같은 혼을 가진 위신체다. 그렇다면 적어도 일이 틀어지게 하는 뻘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 운현은 판단할 수 있었다.
"카르륵!?"
자신이 있던 동굴의 통로에서 고블린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들은 운현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송곳을 가볍게 든 후 느긋하게 동굴의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고블린 세마리가 동굴 안쪽으로 들어오자 운현은 여유있는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카악?!"
운현을 본 고블린들은 당황함과 동시에 기쁜 듯 웃었다.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낡은 숏소드를 물끄러미 바라 본 운현은 인벤토리에 있는 한자루의 검을 잡았다.
"이거 만드느라 신성 다 썼다. 스킬 몇개 갖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말이지!!"
거검이다. 검이라고 치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검을 그가 손에 들자 고블린들의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이 사라졌다. 저정도 검을 한 손으로 여유있게 잡고 있는 것에 긴장한 그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외쳤다.
"그러니까 너희가 실험상대가 되어줘!!"
"캬아아악!!"
"부우우웅!!"
"카드드득!!"
워낙 커다란 검이라 동굴의 벽에 검이 걸렸지만 운현은 압도적인 힘으로 벽마저도 긁어 부숴버리며 검을 휘둘렀다. 전혀 막힘없이 휘둘러진 거검은 고블린들 세마리의 몸을 단번에 두쪽으로 내버렸다. 그들이 경악한 얼굴로 죽어버린 것을 본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거검을 가볍게 들어 어깨에 걸쳤다.
"에... 생각보다 좋구만. 그리고 일단 옷부터 입어볼까."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속옷과 블랙 플래그 세트를 꺼내 입었다.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의 능력치로 따지자면 발가벗고 다녀도 어디 긁힐 걱정은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이제 만날 상대가 상대이다보니 나름 격식은 취해야 하는 것이다.
"흥흥흥~"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블랙 플래그 세트를 모두 입은 운현은 거검을 든 채 통로를 지나갔다. 과거 이 통로를 지나갈 때 겁에 잔뜩 질린 채 덜덜 떨며 걸어갔을 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캬륵!?"
시체들이 있는 공간에 도착한 운현은 시체를 가져다 놓는 고블린들과 마주쳤다. 과거 자신이 뒤졌던 시체를 가져다 놓는 고블린들과 만난 운현은 씨익 웃으며 검을 들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거대한 검을 본 고블린들이 당황하며 자신들의, 운현의 검에 비하면 이쑤시개나 다름없는 숏소드나 단검을 들어 올렸을 때 운현은 그들을 향해 튕기듯 뛰어나갔다.
"캬륵!?"
당황한 고블린들이 자세조차 취하지 못하자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거검을 휘둘렀다. 단 일격에 세마리의 고블린의 머리를 반으로 잘라버린 운현은 아슬아슬하게 검의 궤적 바깥에 있던 고블린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고 그것에 맞은 고블린이 튕겨져 벽으로 날아가자 바닥에 있는 고블린의 숏소드를 들어 그의 머리를 부숴버렸다.
"콰직!!"
고블린의 머리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을 무심히 바라보던 운현은 바닥에 떨어진 시체들 중에서 여도적의 시체를 뒤져 모험가 카드를 손에 넣은 후 그것을 인벤토리에 던졌다.
"자... 아가씨들이 잘 있으려나 모르겠네."
여유있는 발걸음으로 통로를 통과한 운현은 바깥의 제단에 아무도 없는 것에 입맛을 다셨다. 저번에 봤을 때는 고블린들의 수를 줄이고 들키지 않으려고 하이딩을 쓰며 버틴 터라 시간이 안맞을 수도 있었다.
"뭐. 기다리지."
거검을 인벤토리에 넣은 후 운현은 통로에 기대 앉아 고블린들이 롤랑과 롤랑을 수행하는 사제들을 데리고 오길 기다렸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이다. 그동안 앞으로 할 일들을 생각하며 눈을 감고 있던 운현은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히죽 웃었다.
'왔구나.'
고블린들 한무리가 제단으로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기절을 한 것인지 축 늘어진 세 사람을 고블린들이 데리고 와서 제단에 올리고 양 팔과 양 다리를 묶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 고블린들은 자신들의 타액을 마구 흘려 넣기 시작했다. 타액이든 피든, 몬스터의 체액이 만들어내는 흥분효과는 비슷하니 그들을 흥분시키고 그들을 인신공양의 제물로 삼으려는 듯 했다.
'레나는 그냥 데려가는군.'
제단에 자리가 없는 탓인지. 아니면 따로 계획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레나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 제단에서 죽이지 않으려는 듯 홉고블린의 지시 아래 고블린들이 레나를 데리고 다른 동굴로 이동했다.
'과연 어찌 되려나...'
운현은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느꼈다. 만약 자신의 생각대로 이번이 1회차가 되는 것이라면 저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회차가 아니라면? 저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다 해도 죽을 것이 분명했다.
롤랑과 저 두 남자를 구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이 모든 계획의 성공과 실패가 갈려진다는 것에 운현은 오랜만에 긴장했다.
"크르르르..."
아직이다. 거대한 괴물이 오기 전까지 일단은 기다린다. 운현은 하이딩을 건 채 팔짱을 끼고 괴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때 한번 보고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정체불명의 괴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운현은 통로에서 그 괴물이 모습을 보이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제야 알겠군. 저건...'
도망치느라 정신없어 제대로 주의깊게 볼 수 없었던 터라 이번에는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괴물의 커다란 성기를 가리고 있는 가죽에 날개 문장이 있는 것을 본 운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을 수 있었다.
'저 놈도 다난 소속인가보군... 아주 좋아. 매우 훌륭해.'
"캬르륵!!
제단에 갈색의 홉고블린이 올라가고, 그의 뒤로 괴물이 따라 올라가자 운현은 자리에서 움직였다. 하이딩을 건 채 제단으로 걸어간 운현은 홉고블린의 인도 아래 괴물이 자신의 양물을 가리는 가죽을 치우자 거검을 들어 올렸다.
"히이익! 살려..."
"서걱!"
"카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악!!"
어린아이 팔뚝만한 양물이 잘려나간다. 그 고통에 괴물이 비명을 내지른 순간 제단 위에 있던 홉고블린은 하이딩이 풀린 운현을 보고 당황했다. 그가 무언가 하기 전에 운현은 거검을 크게 휘둘러 그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캬르르르륵!!"
"흡!!"
양물이 잘린 것에 고통스러워하는 괴물과 제단 근처에 있던 고블린들이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며 운현은 낮게 기함성을 터트리며 괴물의 몸을 베었다. 그의 공격에 맞은 괴물의 몸이 반으로 잘려 쓰러지자 운현은 고블린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와라."
"캬...캬아아악!!"
운현의 도발 때문일까? 아니면 의식이 멈춰진 것 때문일까. 고블린들은 운현을 향해 분노를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고작해야 수십의 고블린에 불과했다. 빠르게 뛰어 제단의 밑으로 내려간 운현은 거검을 휘두르며 고블린들을 학살해 나갔다. 일격에 세, 네마리씩 고블린들을 죽여나가던 운현은 수십마리의 고블린이 그에게 학살당하자 살아남은 고블린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것을 보고 비릿하게 웃었다.
"아...으으... 다, 당신은...?"
하마터면 저 괴물에게 강간당할 뻔 했다는 것에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짙은 금발에 풍만한 유방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은 운현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운현은 그녀에게 대답을 하는 대신 자신의 망토를 들어 그녀의 몸을 가려 준 후 벽 앞에 섰다.
"하아....아아아압!!!"
에리스의 방패 밀치기로 부숴질 정도로 얇은 벽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공격력을 버틸 수 없다 생각한 운현은 그 벽에 거검을 냅다 휘둘렀다.
"우지끈!! 퍼서서석...!!"
저 괴물마저도 일격에 죽여버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이 담긴 일격은 벽을 단번에 부숴버렸다. 벽이 무너지며 그 안에 있는 중년 사내와 젊은 여인을를 본 운현은 그들의 옷을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다난...!! 요 새끼들!!"
"뭐야!?"
"이 자식!!"
뒤에 있는 사내를 지키는 역할로 보이는 검은 사제가 검을 들고 자신에게 달려들자 운현은 그 공격을 가볍게 막아낸 후 검을 휘둘렀다. 그 공격을 막지 못하고 허리가 잘려나가자 운현은 바닥에 떨어진 다난 교도의 검을 들어 왼손에 쥐었다.
"너...너는..."
"이야~ 반갑다. 진짜 보고 싶었거든...!!"
"이건... 이건 운명이... 아닌데...? 이럴리가... 이럴 수가..."
심각하게 당황한 중년인은 운현을 바라보며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더더욱 확신을 얻은 운현은 그의 목을 베어넘기며 나지막히 말했다.
"이젠..."
"크르륵..."
피끓는 소리가 난다. 목이 반쯤 베어진 사내가 그 상처에서 나오는 피를 막으려고 손으로 올려 상처를 막았지만 그 손 사이로 피는 터지듯 배어나왔다. 결국 그대로 쓰러져 죽어버린 중년인을 바라보며 운현은 거검을 인벤토리에 넣은 후 다난 교도의 검을 오른손에 쥐며 무척이나 즐겁게 말했다.
"내가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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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강림
중년인을 죽이고 운현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집을 주워 검집에 검을 밀어 넣은 후 그것을 허리에 착용했다. 거검을 매번 들고다닐 수도 없는 노릇인데다가 그 검은 들고다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실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레벨 1의 좃밥 허접으로 움직여야 하니까 말이지...'
모든 시뮬레이션을 끝마친 상태라면 모를까, 그것이 아닌 이상에야 운현은 어느정도는 운명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방침으로 세운 후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저번에는 철수를 한 이후라서 정보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철수는 커녕 신성을 빼앗기 위한 작업이 한참 진행중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자료를 대부분 가지고 있었다. 전과 다르게 빽빽하게 차 있는 책장과 책상 위의 실험물품들, 그리고 커다란 조직도를 확인한 운현은 조직도를 끌어 그것을 보았다.
"카를로스 이 씹쌔."
절로 욕이 나온다. 저번에는 약했으니까 굽신거렸지만 이번에는 좀 다를 거다. 다난교의 조직도를 빠르게 흝어 본 운현은 책장에 있는 책들과 실험물품, 그리고 그들이 보내고 받은 편지들과 그들이 입고 있던 옷까지 모두 챙겨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럼 우리 롤랑짜응을 한번 만나볼까... 전에."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을 향해 다가간 운현은 거울 안의 자신을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21살의 자신과는 다른 얼굴이다. 조금 더 마르고, 조금 더 날카로운 인상의 자신을 확인한 운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바깥으로 나갔다.
"누, 누구세요?"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다. 이단심판관 중 한명인 롤랑.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던 운현은 힐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다 기절해 있군...'
남자들이 모두 기절해 있는 것을 확인한 운현은 롤랑의 양 팔과 다리의 천을 풀어주었다. 그가 자신을 구해 준 것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롤랑은 무척이나 고마웠는지 커다란 가슴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운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도와주셔서..."
"큰일 날 뻔 했군요."
'일단은 선량하게.'
선량하고 순수하며 착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서 환심을 산다. 과거의 자신은 힘이 없기에 그런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필요에 의해서 자신의 성향을 숨긴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롤랑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큰일날 뻔 했습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파르티 교단의 대사제 롤랑이라고 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말..."
"오. 높으신 분이었군요. 저는 운현이라고 하는 시골의 모험가입니다."
"굉장한 실력이시던데... 그 거검. 지금은 가지고 계시지 않으시군요. 혹시 무거워서 버리신 건가요? 그렇다면 제가 스트렝스 업 마법을 걸어드릴 수 있습니다만."
"아아.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마법이 걸려 있는 무기라서 그렇습니다."
"공간 계열의 마법인가요!? 굉장하군요! 어디서 구하신 건가요?"
운현이 인벤토리에서 거검을 꺼내 보여주자 그녀는 감탄하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시간과 공간은 신의 영역이라 하여 어지간한 마법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정도의 마법이다. 그런 마법이 걸려 있다는 운현의 말에 그녀가 놀라자 운현은 볼을 긁적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가 이상한 던전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얻었습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그런데 롤랑 대 사제님은 왜 여기에...?"
"아... 그게.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근처의 던전 도시로 향하던 도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서..."
"이런... 고생이 많으셨군요."
롤랑은 죽은 사람들이 떠올랐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쉰 운현은 묶여 있는 다른 남자들을 가리켰다.
"저분들도 파르티 교단의 분들인가요?"
"네. 저희 신전의 사제들입니다. 아아... 그래도 저들이라도 살 수 있어서 다행이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아!"
"무슨 일이신가요?"
"그. 큰일이에요. 저희 교단의 대사제님이 한분 더 계신데... 그 분을 구해야 합니다!! 운현님. 부탁드리겠습니다.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 도와드려야지요."
'레나가 지금 죽거나 신성을 잃으면 곤란하거든.'
레나도 구해야 한다. 저 남자들이야 죽든지 말든지 알바가 아니지만 그녀는 자신의 계획에 필요한 존재이니 함부로 둘 수 없었다. 운현이 듬직하게 말하자 롤랑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안겼다.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파르티님의 가호가 함께 하실 거에요!"
"별 말씀을... 그런데 저들은 어쩌죠?"
"어떻게든 깨워봐야죠."
운현과 함께 제단으로 향한 롤랑은 운현이 그들의 사지를 구속하고 있는 천을 풀어주자 그들을 향해 기도를 시작했다. 신성마법이 발휘되어 그들이 정신을 차리자 롤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윅스. 가린.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롤랑 이... 대사제님!!"
"아아... 이게 무슨..."
"다행이에요. 저 괴물들에게 끔찍한 일을 당할 뻔 했는데 운현님 덕분에 살아남게 되었어요. 정말... 파르티님의 가호가 있었습니다. 정말 다행인 일입니다..."
롤랑이 이단심판관인 것을 숨기려고 한 것인지 윅스라 불린 사내는 힐끔 운현을 보고 말을 바꿨다. 그런 그들을 시큰둥히 바라보던 운현은 롤랑이 그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하는 것을 본 후 말했다.
"아. 이런... 그런 상태로 돌아다니시면 힘드실텐데. 이것이라도 입으시겠습니까?"
"이건!?"
"설마...!?"
운현이 가지고 온 다난교도 사제의 옷을 본 롤랑과 윅스, 가린은 기겁하며 서로를 보았다. 자신들을 납치한 것이 다난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겠지. 다난교를 잡으러 온 주제에 다난교에 납치당한 것에 부끄러움과 동시에 분노를 느낀 그들이 이를 갈았을 때 운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운현님. 혹시 무기로 쓸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셨나요?"
"그런 것이라고 해봐야 고블린의 숏소드 정도 뿐인데..."
바닥에 굴러다니는 숏소드 두개를 들어 올린 운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그녀는 침울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윅스와 가린을 보았다. 저것으로도 괜찮냐는 듯한 질문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도면 됩니다."
"운현님. 저희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지금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롤랑님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슨 일이시길래 이리 급하게... 그리고 이 동굴을 빠져나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함께 움직이시죠."
"괜찮습니다. 저희도 레벨이 꽤 높으니까... 이정도 고블린들이라면."
읙스와 가린은 운현의 떨떠름한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그들의 생사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다면야..."
"롤랑님의 레벨도 높으니까 특별한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윅스와 가릭이 통로를 통해 나가자 운현은 롤랑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단 둘이 남게 된 상황이다. 이미 자신이 운명을 비튼 덕분인지 죽음을 피하게 된 그녀는 운현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시는 건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가실까요?"
"네... 그런데 운현님."
"네?"
"혹시 이 동굴의 길을 알고 계시나요?"
"아...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일일히 찾아봐야겠군요..."
롤랑이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고 계시니까 윅스와 가릭이란 분들이 그냥 나가신 것 아닌가요?"
"아. 윅스 사제님은 바람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셔서 출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요. 그래서 급하게 그분들을 내보낸 거랍니다. 바깥에 나가서 지원을 요청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런 건지..."
"죄송합니다. 교단 내의 일이라서 함부로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운현의 질문에 롤랑은 미안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후 그녀와 함께 동굴을 이동했다.
'레나는 분명 거기 있을거고 당분간은 죽을 일이 없겠지...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일단 완전한 신성을 보유해야 한다. 제일 편한 방법은 롤랑을 죽이고 그녀의 신성을 강탈하는 것이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다난도 어느정도 신성을 보유해야 해. 그렇다면...'
운현은 앞서 걷는 롤랑이 커다란 둔부를 씰룩거리는 것을 보고 히죽 웃었다.
'그냥 강간... 은 무리겠고 상황을 만들어야겠군.'
"롤랑님!"
"읏...!?"
운현은 롤랑을 밀치고 앞서 튀어나갔다. 통로에서 나온 고블린을 본 운현이 다난교도의 검을 휘둘렀을 때 롤랑은 다급히 외쳤다.
"운현님! 조심하세요!!"
"하아아압!!"
자신을 발견한 고블린이 뛰어오르자 운현은 그의 몸을 반토막 냈다. 그 순간 고블린의 몸에서 피가 터져나와 운현의 몸을 흠뻑 적셨다.
"운현님!?"
"이야아압!!"
남은 고블린은 넷. 일부러 그들의 몸을 처참히 조각내며 피를 뿌리게 하고, 그것을 맞은 운현이 숨을 헐떡거리자 롤랑은 당황하며 운현에게 달려왔다.
"운현님!? 괜찮으세요?"
"하아...아..."
"이럴수가... 운현님! 안됩니다!! 음욕에 굴복하지 마세요!!"
아까 전 그 많은 고블린을 죽이고 괴물을 처치한데다가 고블린의 피를 잔뜩 뒤집어 썼다. 아무리 약한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그정도면... 롤랑은 운현의 바지 앞섬이 크게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보며 뒤로 물러났다.
"운현님! 정신차리세요! 음욕에 지배당하시면..."
"흐흐흐..."
운현의 입가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오자 롤랑은 당황했다. 그의 눈이 자신의 몸을 핥듯이 쳐다보는 것에 놀란 롤랑은 눈을 질끈 감은 후 외쳤다.
"운현님! 죄송합니다! 홀리 스트라이크!!"
롤랑의 손에서 밝은 빛의 구체가 날아왔다. 그것을 본 운현은 일부러 그것에 맞아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가 바닥에서 뒹굴며 신음하자 롤랑은 정말 미안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운현님... 제 몸을 안으시면 안됩니다. 저는..."
"크으..."
"운현님! 그대로 계세요!! 제가 여자를 데리고 올테니..."
"아아아아아!!"
차마 그를 죽일 수 없어 약하게 스킬을 썼던 롤랑은 운현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포효하고 욕망으로 가득 찬 시선을 자신에게 보내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대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른다.
'어쩌지...'
만약 운현이 자신을 안게 된다면 그에게 신성이 전해진다. 비록 반쪽짜리 신성일지라도 다난교도가 이렇게 움직인 이상 그가 신성을 가지게 된다면 운현 역시도 다난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롤랑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운현님!! 제 말 들리세요!?"
"허억... 하악... 큭..."
자신의 목소리에 반응을 한 것일까? 아니면 넘쳐오르는 욕망에 저항하려는 것일까. 운현이 머리를 잡고 붕붕 젓자 롤랑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운현님!!!"
"도망... 큭...치세요."
"하지만...!!"
"이대로는 제가... 아아아... 안고 싶어..."
"운현님...!"
운현이 필사적으로 욕망과 싸우고 있는 모습에 롤랑은 너무나 안타까웠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그를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슬프고 안타까웠던 그녀는 눈물을 한방울 흘렸다.
"운현님... 어떻게든 여자를 데리고 올게요!! 그러니!! 부디!!"
그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처녀를 내어 줄 수는 없었다. 롤랑은 눈물을 흩뿌리며 통로 반대편으로 뛰어나갔고 그런 그녀가 통로에서 빠져나가자 운현은 욕망으로 가득 찬 얼굴을 지우고 무심한 얼굴이 된 채 중얼거렸다.
"아니 굳이 데려 올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너희들을 이용할 테니까 말야."
하이딩을 걸고 운현은 빠르게 뛰어 롤랑을 따라잡았다. 그녀는 이미 죽음의 때를 지났다. 만약 혼자 두었다간 언제 운명이 그녀를 죽일 지 몰랐기에 운현은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암중에서 그녀를 호위했다. 통로에 숨어 있는 고블린을 몰래 죽이고, 근처에 있는 홉고블린의 목을 꺽어가며 롤랑이 레나를 찾길 기다리던 운현은 그녀가 레나가 갇혀 있는 동굴에 들어서자 히죽 웃었다.
"레나 심판관님!"
"하아...하아... 로, 롤랑 심판관님..."
"어째서!? 어째서 이런 일이!?"
"도, 도망치세요... 다난... 다난이 몬스터를..."
그녀의 목소리에서 담겨져 있는 음란함을 눈치챈 롤랑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녀가 당황하는 동안 통로에 숨어 있던 운현은 하이딩을 풀고 동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여자다!!"
"히익!? 운현님!!!"
"하악... 윽...여자..."
"아아아아아아!! 파르티님!! 어째서 이런 시련을...!! 운현님! 죄송합니다!! 홀리 스트라...!"
"히얍!!"
"퍽!!"
레나까지 그녀가 발견했으니 이제 됐다. 운현은 음욕에 물들어 있는 얼굴로 달려가 그녀가 마법을 완성하기 전 그녀의 복부를 후려쳤고 그 공격에 롤랑은 슬픈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며 힘겹게 말했다.
"절... 안으시면.... 안됩...니....다."
"아하하하하하!! 여자다!!!"
"하아...하아... 당신... 무슨.... 무슨 짓을... 누구야..."
옷을 벗어던진 운현이 롤랑을 잡은 것을 보며 레나는 힘겹게 말했다. 몸이 뜨겁다. 저기 있는 남자를 안고 싶다. 그의 양물을 쪽쪽 빨고 자신의 안에 넣고 싶다. 심각할 정도로 음욕에 물들어버린 레나는 롤랑을 안으려 하는 운현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안돼...!! 그녀는... 그녀는...!!"
롤랑은 이단심판관. 그녀의 처녀에는 신성이 걸려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처녀성을 유지해야 하는 그녀가 저 남자에게 처녀성을 잃게 된다면? 레나는 눈이 뻘개진 채 외쳤다.
"안돼!! 차라리... 차라리...!"
"으하하하하!! 맛있어..!! 넌 내꺼야... 흐흐흐흐...!! 으하하하핫!!!!"
레나의 말을 귓등으로 넘긴 채 운현은 롤랑을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쪽쪽 빨며 운현은 힐끔 레나를 보았다. 곧 있으면 벌어질 자신과 롤랑의 섹스를 생으로 보게 된다면 성욕에 지배되어 가는 그녀 역시도 자신을 거부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걸로 신성 하나는 확보했군.'
욕망에 빠져 이성을 잃은 사람의 연기를 하며 운현은 힐끔 레나와 자신의 밑에 깔려 있는 롤랑을 번갈아 보고 조용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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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강림
축 늘어져 있는 그녀를 보며 운현은 실실 웃었다.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처럼, 그가 잔혹하게 웃자 철창 안에 있는 레나는 다급히 외쳤다.
"멈춰!! 무슨 짓이야!!"
"크흐흐..."
쓰려져 있는 레나를 안아 든 운현은 그녀의 입술을 게걸스럽게 탐했다. 도톰한 앵두빛의 촉촉한 입술이 운현의 입술에 빨려들어가는 것을 본 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의 몸이 달아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눈이 빨개진 채 자신을 바라보는 동안 운현은 레나의 풍만한 가슴에 손을 올렸다.
"으으...."
정신이 돌아오려는 것일까? 아니면 가슴이 만져지는 쾌감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운현과의 키스 때문일까. 은백색의 줄이 입술과 입술에서 길게 늘어졌다가 뚝 끊어지는 동안 롤랑은 힘겨운 어조로 말했다.
"안됩니다... 안됩니다..."
"시끄러!!"
거칠게 외친 운현은 다시 롤랑의 입술을 범했다. 이번에는 저항을 하려는 듯 그녀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꽉 잡은 채 다시 입술을 탐했다. 도톰한 입술을 꼭 오무리고 키스를 하지 않으려 하는 그녀의 행동에 운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작은 턱관절을 꽉 잡았다.
"아아..."
턱관절이 열리며 입술이 벌어지자 운현은 그녀의 입 안에 자신의 혀를 밀어넣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는지 롤랑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하기만 할 뿐 그를 강하게 밀어내지 못했다.
"쭈읍...핥짝..."
타액과 타액이 교환되기 시작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운현의 타액이 멋대로 넘어오고 그가 자신의 혀와 입 안을 자극해 만들어낸 타액을 마음대로 가져가는 것이다. 딱딱히 굳은 혀를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롤랑은 힘겹게 운현을 밀어 내었다.
"운현님!! 안됩니다!! 저는...!!"
"시끄럽다고!!"
"홀리... 꺄악!"
주문을 외워야 하는 사제의 특성 때문인지 접근한 상태에서 운현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성마법이 발동되기 전 운현이 허리를 꽉 끌어안고 들어 올리는 것에 당황했다.
"운현님!!"
"너는 그냥 얌전히 있으라고!!"
"쿵!!"
그녀를 들어 올린 운현은 그대로 그녀를 탁자 위에 던지듯 내리꽂았다. 그 충격에 롤랑이 눈쌀을 찌푸린 순간 운현은 헐떡거리며 그녀의 커다란 가슴을 보았다. 우윳빛 깨끗한 피부와 커다란 가슴. 그리고 연분홍색의 유두와 작은 유륜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킨 운현은 롤랑이 주문을 외우려 하자 그녀의 입을 입으로 막았다.
"으으읍!! 아읏...!!"
필사적으로 몸을 흔들며 저항하던 그녀가 양 손으로 자신의 몸을 밀려 하자 운현은 그녀의 양 팔을 빠르게 한 손으로 잡아 올렸다. 얇은 팔이라서 그런지 운현의 큰 손으로 한번에 그것을 다 잡을 수 있었다.
"아아아아!! 운현님!! 안됩니다!! 부디!! 부디!!"
롤랑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은 운현에게 처녀성을 빼앗길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운현도 다난의 표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다급한 저항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흥분을 돋아주는 양념에 불과했다.
입고 있는 옷이라고는 운현이 준 망토 하나뿐인 롤랑이다. 그녀의 육덕지고 아름다운 몸이 흔들릴 때마다 커다란 가슴과 매끄러운 허벅지가 씰룩거리는 것에 운현은 오히려 더 흥분한 듯 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거대함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가슴의 유두를 꽉 물었다.
"흐아앗!! 아, 아파요!!"
운현이 잘근잘근 유두를 씹으며 쪽쪽 빨기 시작하자 롤랑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처음으로 당하는 애무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누군가가 이렇게 자신을 탐하려 한 적도, 그리고 그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롤랑은 당황해 어찌 할 바를 몰라하면서도 어떻게든 운현을 말리려 외쳤다.
"운현님!! 제발!!"
"시끄러워!!"
'진짜 더럽게 시끄럽네.'
자꾸 쫑알대는 것이 슬슬 짜증나진 운현은 롤랑의 매끈한 옆구리를 냅다 후려쳤다. 그것에 충격을 받은 롤랑이 거칠게 숨을 토해내자 운현은 그녀의 입술을 핥으며 속삭였다.
"넌 내꺼야..."
"아아아..."
운현의 눈에 섞여 있는 욕망과 광기를 눈치챈 롤랑은 결국 눈물을 흘려버렸다. 사제인 자신으로서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힘으로 밀려버리는 이상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에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눈을 살며시 감았다.
"파르티님... 어째서 이런 시련을..."
눈물을 흘리며 작게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운현은 다시 그 커다란 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의 가슴을 희롱하는 것에 살며시 몸을 비틀던 롤랑이었지만 다년간의 세계를 통해 꽤나 능숙해져 있는 운현의 애무를 버텨내는 것은 힘들었던 모양이다.
"앗...하읏...으으응...!"
"쪽...우물..."
"아윽... 사, 살살..."
왼쪽 유두를 한참동안 희롱하던 운현은 그녀의 유두를 잡고 쭉 늘렸다. 원뿔형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가슴에서부터 태어나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짜릿한 쾌감을 느낀 롤랑은 몸을 비틀며 강한 신음성을 토해내었다. 고통과 함께 등줄기에서 치솟은 쾌감에 헐떡거리던 그녀는 동굴과 이어져 있는 통로에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아아...저건..."
홉고블린이다. 홉고블린이 무기를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본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을 흔들었다. 그녀의 거친 반항에 운현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고 그 순간 빠르게 주문을 외운 롤랑은 운현과 홉고블린 사이에서 갈등했다.
'아아아... 파르티시여...!'
운현을 공격할 것인가. 아니면 홉고블린을 공격할 것인가. 운현은 저 홉고블린을 눈치채지 못한 듯 싶었다. 만약 저 홉고블린이 운현을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하지만... 지금 위험한 것은 운현이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다. 저 사람을 공격해도 되는 것일까? 불과 수초에 지나지 않았지만 롤랑은 엄청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홀리 스트라이크!!"
결국 그녀는 운현을 공격하지 못했다. 옷을 벗고 있는 운현이 저 홉고블린의 검에 맞기라도 한다면? 차마 그것을 볼 수 없었던 롤랑은 홉고블린의 머리를 향해 마법을 쏘아내었고 신성한 빛에 맞은 홉고블린의 머리가 터져버리자 롤랑은 다급히 외쳤다.
"운현님!! 정신 차리세요!! 제발...!!"
"크흐..."
홉고블린이 죽은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운현은 다시 롤랑에게 접근했다. 그를 구속하기 위해서 주문을 외운 롤랑의 손에서 백색의 고리가 생성되어 자신에게 날아오자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거검을 뽑아 그것을 강하게 베었다.
"서걱!!"
"맙소사!?"
마법을 베다니! 보통 검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는데 저정도일 줄이야. 롤랑이 당황한 사이 거검을 뒤로 휙 던진 운현은 다시 롤랑을 잡았다. 또다시 그에게 안겨버린 롤랑은 버둥거리며 운현에게서 벗어나려 애를 썼지만 그녀는 또다시 테이블 위에 몸을 눕힌 상태가 되어버렸다.
"제발...제발 운현님!! 읍!"
이어지는 키스. 운현은 롤랑이 입고 있는 망토의 끈을 빼낸 후 그녀의 얇은 팔을 빠르게 묶어 올렸다. 그가 자신의 팔을 묶어 올려버린 것에 당황하며 롤랑은 긴 다리로 그를 밀치려 했지만 운현은 교묘하게 그녀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몸을 넣어버렸다.
"꺄악!! 아아앗!! 운현님!!"
아까 전 가슴을 희롱하던 것 때문일까? 이미 자신의 계곡에서 조금씩 애액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눈치챈 롤랑은 운현의 뜨거운 양물이 자신의 계곡을 슬쩍 슬쩍 건드리자 당황하며 더더욱 크게 외쳤다.
"레나 심판관님!! 도와주세요!!"
"하아...하아..."
다급히 레나를 불렀지만 레나는 이미 운현의 나체에 정신이 팔려버린 듯 숨을 헐떡이며 옷을 벗은 채 자신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녀가 쪼그리고 앉아 자신의 계곡을 문지르는 것을 본 롤랑은 이를 악물고 운현을 바라보았다.
"아아!!"
운현의 손이 자신의 다리를 잡아 위로 천천히 올리는 것에 롤랑은 당황했다. 지금까지 남에게 한번도 보이지 않았던 소중한 계곡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에 그녀는 울먹거리며 외쳤다.
"운현님!! 제발!! 제발!!"
'아 진짜 더럽게 시끄럽네.'
재갈이라도 물릴 걸 그랬나? 욕망에 정신줄을 놓은 연기를 하면서도 실상은 맨정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운현은 그녀가 떠드는 것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사실 애무를 좀 더 해서 손쉽게 그녀를 안을까도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빨리 끝내버리자 라는 생각만이 머릿 속에 맴돌 뿐 이었다.
"흐흐흐...!"
"아아... 꿀꺽."
운현의 양물이 자신의 계곡을 문지르자 그녀는 긴장, 그리고 작게 피어나기 시작하는 기대감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남자의 양물이 자신의 음부 바로 앞에 있는 것이다. 교단 내에 있을 때 교단의 사제들이 다른 남자들과 했다는 음담패설을 들으며 그저 생글거리기만 했고, 자신에게 이런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도 못한 곳에서 처녀딱지를 떼게 된 것에 그녀는 어쩔 줄 몰라했다.
"제발..."
그저 간절히 애원하는 것 외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에 롤랑은 슬펐다.
"쯔릇..."
"아읏...!!"
계곡이 억지로 벌려지는 것에 롤랑은 고통을 느꼈다. 아름다운 미모가 찡그려지고 그녀의 입술에서 고통의 신음성이 나오자 운현은 더더욱 허리에 힘을 넣었다.
"아아아... 그만...!"
"쯔릅! 찔꺽!!"
몇번 앞 뒤로 양물을 넣었다가 빼던 운현은 단번에 허리를 밀어 넣었다. 계곡의 중간 부분에 양물의 움직임을 방해하던 얇은 막을 거침없이 찢어버리고 계곡의 깊은 곳에 양물을 넣은 운현은 롤랑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축 늘어지자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키스했다.
"아아...이제..."
처녀를 빼앗기며 신성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막을 수 없다. 운현도 다난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롤랑은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아...으..."
하지만 그 슬픔도 잠시에 불과했다. 운현의 허리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파과의 고통과 함께 찾아오는 미약한 쾌감이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하얗고 아름다운 몸에서 조금씩 땀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첫 정사 치고는 너무 쾌감이 강하다. 자신의 약한 부위를 찾으려는 듯 양물은 이리저리 살짝살짝 각도를 바꿔가며 계곡을 자극시켜나갔고 그것에 롤랑은 자신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아읏...거, 거기...!"
'여기구만.'
맨정신인 상태로 하는 거라면 적당한 애무를 통해 그녀의 성감대를 정확히 찾을 수 있겠지만 일단은 정신이 나가버려 강간을 하는 입장이다보니 어느정도는 미숙함을 보여줘야 한다. 몇차례 일부러 다른 곳을 공략한 후 롤랑의 얼굴이 쾌감으로 조금씩 물들어가기 시작하자 운현은 그녀의 약한 부위를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아흑! 읏!? 하으으응!!"
롤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운현의 양물이 자신의 약한 부분을 정확히 찌르기 시작하자 롤랑은 등줄기를 타고 빠르게 치솟는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저 혀를 빼물고 쾌감에 몸을 흔드는 것 뿐. 그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으으으으으!!"
수십번이나 찔려지고 괴롭혀지며 롤랑은 쾌락으로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난도, 신성도. 그리고 심지어 파르티마저도 잊어버린 채 롤랑은 좀 더 많은 쾌락을 위해서 허리를 살짝 살짝 움직여나갔다. 그런 그녀를 보며 조용히 웃은 운현은 허리의 스퍼트를 올렸다.
"찔꺽! 찔꺽! 찔꺽!"
그녀의 몸이 흔들린다. 커다란 가슴이 그 흔들림에 맞추어 출렁거리는 것을 본 운현은 그녀의 가슴을 쥐어짜듯 비틀었다. 그것에 쾌락을 느낀 것일까? 롤랑은 눈을 치켜뜨고 생전 처음으로 절정에 올라버렸다.
"아흐으으으으윽!!"
"으읏...!!"
사실 좀 더 버틸 수 있었지만 어차피 쾌락이 목적이 아니니 계속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저 신성도 차지해야 하니까.'
쇠창살 너머에서 운현과 롤랑의 정사를 보며 눈을 떼지 못하고 자신의 계곡을 혼자 쓸쓸히 애무하는 레나에게 시선을 돌린 운현은 롤랑이 부들부들 떨다가 축 늘어지자 그녀의 계곡에서 양물을 빼낸 후 레나에게 다가갔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레나는 흠칫 놀랐다. 뜨거운 김이 나는 것 처럼 보이는 검붉은 운현의 양물을 보고 침을 꿀꺽 삼킨 레나는 눈을 감고 고민하다가 뒤로 슬쩍 물러났다.
"하아...하아..."
눈만큼은 운현에게 고정되어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 운현이 자신을 안았다간... 하지만 그는 이미 롤랑을 안았다. 그렇다면 어차피 다난에게 쫓기게 될 텐데... 반개나 하나나 상관없지 않을까? 아니야. 그렇지만... 하지만... 하고 싶어... 레나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지리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워 했다.
그녀가 고민하는 동안 철창 앞까지 다가 온 운현은 철창의 사이에 자신의 딱딱한 양물을 쓱 밀었다. 그것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킨 레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떨리는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엎드린 채 자신의 둔부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것으로 끝이군. 신성 하나는 챙겼다.'
탄력적인 하얀 둔부와 그 가운데 있는 앙증맞고 주름진 항문, 그리고 흠뻑 젖어 있는 계곡이 구멍을 작게 벌름거리는 것을 보며 운현은 싸늘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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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강림
"이걸로 하나는 손에 넣었고..."
운현은 롤랑과 레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롤랑과 레나가 가지고 있는 신성을 반씩 강탈해 하나의 완전한 신성을 소유하게 된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그들을 깨웠다.
"롤랑님."
"아아...으..."
정신을 차린 롤랑은 자신의 하복부를 만지며 눈물지었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운현이 자신의 신성을 반을 앗아갔으니 그도 저 악독한 다난의 표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복부의 핏물을 보며 그녀가 눈물을 글썽거렸을 때 운현은 그녀에게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제가 음욕에 빠져버려서..."
"...어쩔 수 없는 일이군요. 아아... 파르티님. 어째서 이러한 시련을..."
자신의 처녀를 빼앗기고, 또 신성이 반이나 사라졌다는 것에 절망하기보다 롤랑은 그저 운현이 걱정스러울 뿐 이었다.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그녀는 옆에서 레나의 신음소리가 들리자 그녀를 보고 화들짝 놀랬다.
"레, 레나 심판관님 마저도!?"
"....."
그녀가 놀라자 운현은 더더욱 송구스럽다는 듯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의 하복부와 여기저기 울긋불긋해 있는 하얀 피부를 보며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있던 롤랑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아... 이를 어찌합니까."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책임을..."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후우... 운현님."
"네?"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다는 기세를 연기하며 운현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운현의 표정을 보며 쓰게 웃은 롤랑은 운현에게 다가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요. 너무 그렇게 죄책감을 가지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큰 일은 바로 운현님입니다."
"네? 제가 뭘요?"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 같군요... 운현님. 혹시 신성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어... 음. 아니요. 그게 뭔가요?"
사실은 신성에 대한 모든 연구를 끝내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까지도 알고 있는 운현이지만 지금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촌뜨기 시골 모험자여야했다. 그렇기에 운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런 그를 보며 롤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성은... 윽...!"
'왔구나.'
"카읏...윽..."
무언가 말하려던 롤랑이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헐떡이자 운현은 당황하며 그녀를 잡았다. 숨을 제대로 못쉬고 있다. 죽음의 운명에서 벗겨나가 운명을 바꾸는 자의 곁에 있는 그녀를 운명이 죽이려 하는 것이다. 그녀가 헐떡거리는 것을 본 운현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아주며 말했다.
"롤랑님!! 정신차리세요!! 롤랑님!!"
"아...윽...큭... 커억....!"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녀가 헐떡거리자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착용했다. 그런 그를 힘겹게 바라보던 롤랑이 털썩 쓰러지자 운현은 이를 드러내었다.
'고작해야 심장마비냐? 그건 나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다. 개같은 운명아.'
가상현실 게임에서 심장마비에 걸린 사람들을 수천번도 넘게 치료했다. 운현은 그레이터 힐을 쓰는 대신 레나를 눕힌 후 그녀에게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며 운현은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현실의 세계에서 개조한 전기충격 봉을 꺼내 들었다. 가상현실의 세계에서 이것과 비슷한 아이템을 다수 만들어 이것으로도 심장마비 환자를 치료한 경험이 있었던 운현은 그것을 그녀의 심장 가까이 대고 마력을 불어 넣었다.
"파지지직!!"
"컥!!"
"후웁! 후웁!"
롤랑의 몸이 크게 들썩거리자 운현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다시 숨을 불어 넣었다. 그렇게 몇번의 전기 충격과 심폐소생술이 시전되어 롤랑이 숨을 토해내자 운현은 빙긋 웃은 후 그녀의 볼을 톡톡 쳤다.
"괜찮습니까?"
"허억...헉...어떻게 된..."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으셨길래..."
"도대체 무슨 일이..."
'이걸로 운명을 확실히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군...'
"모험가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이 많습니다.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아아아... 운현님.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
운현이 자신을 살렸다는 것을 깨달은 롤랑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단순한 시골 모험가라고 자신을 지칭하기는 했지만 죽음을 코 앞에 둔 사람마저도 살릴 수 있을 줄이야. 그녀가 과도하게 부담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몸이 아직 안좋으실 수 있으시니 치료를 제대로 받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물론이지요. 운현님께서 살려주신 이 생명을 헛되이 날릴 수는 없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롤랑은 눈을 감고 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기도를 끝낸 순간 그녀의 양 손에 은은한 백색의 빛이 터져나왔다.
"그레이터 힐."
자신의 몸에 그레이터 힐을 건 롤랑은 꽤나 힘이 들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레이터 힐이라니. 굉장하군요!"
초 고위의 사제들이나 가능한 그레이터 힐을 사용한다는 것에 운현이 놀란 표정을 짓자 롤랑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은 저희... 저나 레나 님 같은 특수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원래 제 레벨로는 그레이터 힐을 사용할 수 없지요."
"특수한 위치요?"
"...네. 운현님께는 모두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사실... 저와 레나님은 대사제가 아닙니다."
"어... 그럼요?"
"저희들은 파르티 교단의 4대 이단심판관입니다."
"그, 죄송합니다. 제가 시골뜨기라 잘 모르는데... 이단 심판관이 뭔가요?"
운현이 떨떠름한 얼굴로 웃으며 묻자 롤랑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이단 심판관은 파르티님께 신성을 받은 사제들 중 파르티 교단을 위협하고 세계를 흔들려는 악에 맞서는 이들을 이끄는 자를 말합니다.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신성을 이용한다면 교단 내의 고위 성직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고위 주문도 사용할 수 있지요. 그것을 이용해서 파르티님께 적대하는 사교들을 제거하는 일을 한답니다."
"아아... 그런 훌륭한 일을. 그럼 파르티 교도가 아닌 이들을 제거하는 것도...?"
"어머, 그렇게까지는 아니랍니다. 다만, 사람들의 삶을 어지럽히고 파르티 교단을 적대하는 이들을 심판하는 것이죠."
"그렇군요."
"운현님은 파르티 교의 신자가 아닌가요? 아니면 다른 교단?"
"아, 모험가 생활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여러 곳의 신전을 다녀야 하는지라 특정 종교인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여러 곳의 신전이라. 혹시 다난교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다난교요?"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롤랑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무서운 교단입니다. 인신공양은 물론이거니와 자신들이 정의이고 선이라고 치부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아주 모순적인 곳이지요."
"허어... 인신공양이라. 인신공양을 하는 교단은 몇번 본 적이 있지만 다난교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군요."
"그런가요... 아무튼. 저와 레나 심판관은 지금 다난교를 쫓고 있답니다."
"그건 이미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왜 굳이..."
롤랑은 그의 질문에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것은 기밀이지만... 이젠 운현님도 관련되어 버렸으니 말씀드려야겠군요. 저희 이단심판관은 모두 네명이 있습니다. 그들 중 두 이단심판관이... 살해당했습니다."
"네!? 그게 정말인가요?"
'이건 내가 아는 정보대로군.'
예전 레나에게 들었던 대로 이단심판관 둘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롤랑이 말해주자 운현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의 표정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롤랑은 운현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이 살해당한 이유는 단 하나. 신성 때문입니다."
"신성이요...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길래..."
"지금 다난교는 신성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불명이지만... 그들은 신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강간하고 죽여 신성을 강탈하고 있어요. 파르티 교단에 협력적인 작은 교단의 성녀도 다난교에 의해서 신성을 강탈당하고 끔찍하게 간살당했습니다."
"허어... 무서운 일이군요. 그런데 그게 무슨..."
"이제부터 잘 들어주십시요. 운현님."
롤랑은 운현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운현을 이 끔찍한 일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 슬프고 안타까웠던 그녀는 운현의 손을 꼬옥 잡은 후 머뭇거렸다.
"말씀해주세요. 롤랑님. 이래뵈도 모험가 생활을 하며 많은 일을 겪었으니까요. 놀라지 않겠습니다."
"하아... 운현님.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성의 경우 처녀성과 생명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파르티께선 신성한 처녀만이 신성을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 뜻에 따라 태어나자마자 신성을 부여받은 이들은 처녀성을 유지하며 살아간답니다."
"허... 이럴 수가. 그럼 저 때문에 신성을 잃게 되신 건가요!?"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처녀성을 잃게 되면 가지고 있던 신성의 절반이... 그 처녀성을 빼앗은 이에게 넘어가지요. 그리고 운현님께서 저를 죽이신다면 저의 신성 모두를 온전히 가지실 수 있게 되시는 겁니다. 운현님께선 저와 레나 심판관의 처녀성을 가져가셨으니... 하나의 완전한 신성을 보유하게 되셨구요."
"이런... 큰일 아닌가요!? 신성이 없다면..."
"저희들은 괜찮습니다. 신성이 하나이든 절반이든 저희가 파르티님을 따르는 믿음이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운현이 안타까운 듯 말하자 롤랑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가 죄책감에 몸둘바를 몰라하자 롤랑은 그의 손을 단단히 잡아주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운명일지도 모르겠군요.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는 말아주십시요. 후후... 평생 여자로서 기쁨을 모르고 살아갈 뻔 했는데... 그리고 운현님이 아니었다면 저와 레나는 그 괴물들에게 신성을 모두 빼앗기고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감사를 드려도 모자르지요."
"...하지만 그래도..."
"운현님은... 싫으신건가요? 저와, 그리고 레나 심판관과 한 것이..."
그녀가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자 운현은 머뭇거리다가 살며시 얼굴을 붉히고 작게 중얼거렸다.
"조, 좋았습니다만..."
"그럼 된 것입니다. 저 역시... 좋았으니까요..."
서로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린다. 전형적인 쑥맥들의 대화에 롤랑은 낮게 헛기침을 한 후 말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운현님. 저희들의 신성이 운현님께 흘러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게 무슨... 아."
"눈치채셨습니까... 다난교는 신성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제 운현님마저도 다난교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롤랑의 말에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를 차분히 바라보던 롤랑은 운현의 손을 단단히 잡은 후 말했다.
"지금 다난교도들이 저희들을 습격하고, 또 알 수 없는 악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이때 운현님의 위치가 무척이나 중요해졌습니다. 운현님. 혹시 일이 없으시다면 저희와 함께 움직여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 던전도시로 파르티 교단의 성기사와 사제들이 결집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다난교와 싸우면 운현님을 지킬 수 있을겁니다. 아니. 지키겠습니다."
"......"
운현이 심각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롤랑은 그를 조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운현이 경험 많은 숙련된 모험가처럼 보이지만 아무리 그라고 하더라도 혼자서 다난교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 그녀는 그의 손을 꽉 잡고 다급히 말했다.
"저희 파르티 교단은 던전 도시의 실력자들과 많은 연계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요청하여 다난교를 물리칠 것입니다!! 부디... 다난교를 쓰러트릴때까지만이라도 저희와 함께 있어주세요!"
"그건... 제가 신성을 빼앗길 것 같아서 인가요?"
"그런건... 아닙니다. 그저 운현님을 지키고 싶을 뿐입니다."
운현의 말에 롤랑은 흠칫 놀라다가 붕붕 고개를 저었다. 운현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녀의 마음 속 한구석에 다난교에게 신성을 빼앗기면 안된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난이 무슨 생각으로 신성을 모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얌전히 있던 다난교가 이렇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분명 좋은 의도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그들이 신성을 모으는 것을 막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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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강림
"흐음..."
"운현님의 레벨은 몇이십니까? 보아하니 상당히 고레벨 같은데... 아무리 고레벨이라고 하시더라도 혼자의 힘으로 다난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디 저희와 함께 가주세요."
운현이 팔짱을 낀 상태로 생각하자 롤랑은 다시 한번 운현에게 말했다. 이 남자를 그냥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롤랑이 진지하게 말했을 때 기절해 있던 레나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으으음... 아앗!? 아... 그,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야...!?"
레나는 자신이 완전히 나신이 되어 있고 하복부에서 주르륵 하얀 정액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기겁했다. 롤랑이야 사정을 알고 있으니 운현을 탓하지 않았지만 레나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강간을 당한 것이다. 그녀가 이를 드러내며 운현에게 손을 뻗었을 때 롤랑은 황급히 레나를 막으며 외쳤다.
"그러지 마세요!! 사고일 뿐입니다!"
"하지만 롤랑 심판관님!!"
"...이것 역시 파르티님의 인도라고 할 수 있을지도... 운현님. 어찌하시겠습니까?"
"혹시 제가... 여러분께 죽는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신성이 여러분께 돌아가는 건가요?"
운현이 난감한 얼굴로 묻자 롤랑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운현님을 죽이게 될 경우 저는 한개 이상의 신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신성은 기본적으로 하나 이상을 소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신체로는 그 막대한 힘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가요."
"롤랑님. 설마...?"
"...네. 저 역시도 저분께..."
"당신... 뭐야? 당신도 다난의?"
"레나 심판관님. 흥분하지 말아주세요. 사정을 알면 레나 심판관님도 납득하실 것입니다."
레나가 운현을 경계하는 것을 보며 롤랑은 차분히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것을 전부 들은 레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운현을 가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한가지만 여쭤볼게요. 운현이라고 하셨죠? 이 동굴에는 어떻게 오신 것입니까?"
"저도 납치당했는데요... 라기보다는 술집에서 술 마시고 있었는데 정신을 잃었어요. 깨어보니 여기더군요."
"그런데 그 복장은...? 평범한 블랙 플레그 세트 같은데 어떻게 가지고 계신 겁니까?"
레나는 아무래도 의심을 지울 수 없는 모양이다. 너무 이야기가 잘 풀려간다. 다난의 제물이 되어 신성을 빼앗길 처지가 된 심판관을 이곳에서 제대로 장비를 입은 모험가가 나타나 구해준다? 너무 작위적이고 계획적인 일 같아 레나가 의심을 품으며 말하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건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거검을 꺼내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나온듯한 거검의 등장에 레나가 깜짝 놀라자 운현은 그 검을 톡 친 후 담담히 말했다.
"모험을 하던 도중 우연찮게 얻은 검입니다. 공간을 다루는 힘이 있더군요. 이 검을 얻고 나니 상자 하나 정도 크기의 물품을 넣을 수 있었습니다. 모험가는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직업. 그래서 그 공간에 여분의 갑옷을 넣어놓고 다녔죠. 이 갑옷은 제 여분의 갑옷입니다. 실제로는 좀 더 좋고 편한 갑옷을 입고 다녔지요."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었다. 운현이 빈 공간에서 저런 거검을 꺼내는 것을 본 이상 그 검에 다른 기능이 없다고도 할 수 없었던 레나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운현은 생긋 웃었다.
'참으로 의심이 많은 프렌즈구나! 그냥 죽여버릴까.'
참자. 레나 역시 자신의 계획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그냥 죽였다간 기껏 세운 계획이 어그러질 수 있었다. 거기에 자신에게도 신성이 하나 존재하기에 이 신성을 쓰기 전까지는 그녀들을 죽일 수 없었다.
"레나 심판관님. 의심은 그만하도록 하세요. 어찌되었든 저희들은 운현님 덕분에 목숨을 잃지 않았습니다. 또한 다난교에게 신성을 빼앗긴 것도 아니지요. 어찌보면 저희들은 오히려 운현님께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롤랑 심판관님."
"레나 심판관님. 만약 운현님께서 다난교의 사람이라면 이런 복잡한 방법으로 저희들의 신성을 빼앗으려 하겠습니까? 선의를 의심하는 것은 정말 나쁜 행동이랍니다."
롤랑이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올리자 레나는 더 이상 운현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직 자신에 대한 의심의 시선을 보내고는 있지만 롤랑이 있는 이상 레나가 자신에게 문제 제기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눈치챈 운현은 롤랑의 손을 잡으며 빙긋 웃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이번 일은 오히려 저희쪽에서 운현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일이지요. 그리고 사죄를 드려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운현님.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와 함께 던전 도시로 가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물론 운현님께도 다른 일정이라는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이것은 운현님의 보호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계를 지키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디..."
"하지만... 저에게도 예정이라는 것이 있는데."
운현은 난감해하며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런 그를 보며 롤랑은 더더욱 필사적이 되었다.
"무슨 예정이십니까? 다난의 일만 해결하면 제가 반드시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게 이 스크롤을 만든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운현이 보여 준 것은 과거 상아에게 받은 현자의 스크롤이었다. 형태 변환의 스크롤. 그것을 본 롤랑은 자신 역시도 이것에 대한 정체를 알 수 없었는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특이한 양식의 스크롤이군요. 이런 것은... 저도 본 적이 없습니다만... 마침 잘 됐군요. 던전 도시에 같이 가시는게 어떠시겠습니까?"
"던전 도시에는 왜요? 마법 학교의 마법사분들께 의뢰를 해보았지만 그분들도 모르겠다고 하시던 것인데... 던전 도시에 뛰어난 마법사님이 계신가요?"
"아... 그것도 그렇지만 던전 도시에 있는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 상아님이 이러한 마법물품에 대해 잘 알고 계시다고 합니다."
"모험가 길드... 이야기는 들어봤습니다."
'좋아...'
운현이 자신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자 롤랑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상아 길드장님과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소개를 시켜드릴게요. 어떤가요? 그리고 운현님도 모험가시라면 던전 도시의 모험가 길드에 등록을 하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으음... 어쩔까나... 하아. 좋습니다. 그런데 롤랑 심판관님은 던전 도시에 무슨 일때문에 가시는 것인가요?"
그의 질문에 롤랑은 잠시 망설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던전 도시 내에 다난 교도들이 잠입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롤랑과 레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 운현은 최대한 롤랑의 보호에 주의했다. 그녀는 이미 죽음의 시기를 넘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그녀는 아직 살아 있어줘야 했기에 운현은 롤랑의 옆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레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롤랑 심판관님이 미녀이기는 하지만 너무 그렇게 붙는 거 아닌가요?"
"레나 심판관님."
운현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곁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은 자신도 가지고 있었다. 동굴을 빠져나오며 생기는 위험요소, 하다못해 거미줄마저도 주의하며 운현이 자신을 지켜주려 했으니 말이다.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보호를 받는 것은 처음이었던 롤랑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것을 레나가 지적하자 롤랑은 당황하며 힐끔 운현을 살폈다. 자신의 처음을 가져간 사람이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저 순수한 미소. 그리고 욕망에 휩쓸려 자신을 안았다는 것에 심하게 미안해하던 그 얼굴을 떠올리며 자연스레 웃음이 나온 그녀는 레나가 가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붕붕 고개를 저었다.
"그, 제가 미녀라서... 그러신건가요?"
"하하하... 그렇다기 보다는 안 좋은 예감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아까의 일도 있구요."
"아..."
아까 전, 자신의 심장이 멈춰 죽을 뻔 했던 것을 떠올린 그녀는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가지 기술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운현이다. 동굴을 빠져나오며 이야기를 나눴을 때 그가 가진 식견이 대단했던 것을 떠올린 그녀는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그, 그렇군요."
"일단 이곳에서 하룻밤 머물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운현이 가져다 준 대장장이의 옷을 입고 있던 롤랑은 그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야숙은 익숙치 않았는지 롤랑은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던전 도시의 대사제로 있으며 모험가 길드나 용병 연맹의 의뢰를 받아 야숙을 꽤 했었던 레나는 근처에 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주웠다.
"롤랑 심판관님. 저랑 같이 마른 나뭇가지를..."
"롤랑 심판관님. 저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
두명이 자신을 부르자 롤랑은 움찔했다. 원래대로라면 레나를 돕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은 운현을 도우라 말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레나는 피식 웃은 후 말했다.
"생각해보니 마른 나뭇가지는 저 혼자 주워도 될 것 같네요. 롤랑 심판관님. 운현씨를 도와드려주세요."
생긋 웃은 그녀는 롤랑의 어깨를 톡 치고 숲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자 운현은 고블린에게서 획득한 단검을 손에 든 후 빠르게 던졌다
"푹!!"
수풀 사이에 있던 토끼의 몸통에 정확히 단검이 꽂힌다. 그것을 본 롤랑이 감탄하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아무래도 모험가 생활을 하다보면 야영과 사냥에 익숙해 질 수 밖에 없거든요. 혹시 가죽을 벗길 줄 아시나요?"
"아, 아뇨."
"흐음... 어쩐다. 그럼 요리는요?"
"...그것도..."
롤랑은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니. 같은 이단 심판관인 레나마저도 야영을 해봤는지 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자신만... 신성마저 운현에게 넘겨주게 되어 그를 위험에 빠트리게 되었다는 생각과 자신을 잡기 위해서 다난교가 습격을 했고, 그 결과 자신을 수행하던 많은 이들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에 우울해진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자 운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우울해하지 말아주세요."
"에?"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아닌가요? 여러가지 일로..."
"아... 그건."
운현이 자신의 생각을 눈치채자 롤랑은 부끄러워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은 운현은 단검으로 토끼의 가죽을 벗기며 담담히 말했다.
"저와 함께 모험을 하던 모험가분께서 해주신 말씀입니다. 오늘은 슬퍼 울어도 내일은 기쁨이 찾아올지 모른다. 오늘은 분노로 가득차나 내일은 소리내어 크게 웃을지도 모른다. 오늘 괴로운 일이 있어도 내일은 즐거운 일이 있을지 모른다. 과거에 집착하여 자신을 구멍 안에 밀어 넣는 것이야말로 모든 가능성을 죽이는 일이다..."
"......"
"롤랑님께서 지금 어떤 기분이신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우직."
토끼의 가죽을 모두 벗겨내고 내장까지 빼낸 운현은 피가 흐르는 토끼고기를 들고 생긋 웃은 후 다난교도들의 방에서 얻은 물통의 물로 토끼고기를 씻은 후 말했다.
"오늘의 우울함과 괴로움을 간직하지 마세요. 그것이 쌓여 가시가 되어 스스로를 결박한다면 내일로 나아갈 수 없답니다."
부드러운 음색, 선량한 웃음. 그리고 그의 따스한 말. 그것에 롤랑은 멍하니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롤랑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 그..."
"롤랑 심판관님?"
"가, 감사합니다..."
운현이 자신을 위로해주려는 것을 눈치챈 롤랑은 점점 달아오르는 얼굴을 살며시 돌리며 작게 말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빙그레 웃은 운현은 롤랑과 함께 야영지로 돌아간 후 말없이 식사준비를 시작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저녁 준비를 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롤랑은 운현이 자신을 보고 생긋 웃자 당황하며 푹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롤랑님."
"네!?"
"던전 도시의 다난교... 그게 큰 위협이 되기 때문에 가시는 건가요?"
"아아... 네. 그게..."
그녀는 말을 꺼낼까 말까 망설였다. 운현은 이미 외부자가 아니었다. 그가 신성을 보유한 이상 남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이 일은 상당히 위험하다. 던전 도시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다난교를 공격하여 다난교를 박멸할 기회이기도 했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역전당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롤랑은 머뭇거리며 말을 하지 못했다.
"위험한 일인가요?"
"......"
롤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롤랑님께서 이 스크롤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을 소개시켜주신다면... 저도 롤랑님을 돕겠습니다."
"네!? 하지만 위험합니다!!"
운현의 말에 롤랑은 당황하며 외쳤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젠 남이 아니잖습니까."
"에에...!?"
남이 아니다? 그 말에 롤랑은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운현은 자신의 가슴을 톡 쳤다.
"저에게도 신성이 있으니 다난은 저의 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아...네에... 그, 그렇죠..."
그리고 그의 이어진 말에 롤랑은 시무룩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일히 반응하는 그녀를 보며 운현은 그녀 몰래 싸늘히 웃었다.
'롤랑에 대한 작업은 이정도면 되었군... 자. 문제는 내 생각대로 상황이 만들어졌느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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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강림
"우와! 맛있네요!!"
"이정도면 가게 차려도 괜찮겠는데요? 모험가가 아니라 요리사 아니에요?"
"하하. 뭘요."
레나와 롤랑은 운현이 만든 토끼고기 스튜를 한입 먹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다년간 운현이 가상현실게임을 하며 운현은 요리같은, 현실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스킬같은 경우는 어지간하면 스킬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직접 만들곤 했었다. 그 결과 상당한 요리실력을 갖추게 된 운현은 싱글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험생활을 하다보니까 익숙해졌을 뿐이에요. 만들 수 있는 요리도 몇가지 안된다구요. 그리고 롤랑님과 레나님은 오늘 큰 일을 겪으신 탓에 많이 허기지실거에요. 그 덕분도 있죠. 이런 말도 있잖아요? 시장이 반찬이라고."
"헤에..."
운현의 말에 레나와 롤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것이다. 날때부터 신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대 교단인 파르티 교단인만큼 그런 그들이 특별 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할 터. 그런 그들에게 허기짐이란 그리 자주 접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있으니 천천히 드세요."
커다란 냄비에 가득 있는 스튜에서 국자를 들어 자신의 그릇에도 옮긴 운현은 힐끔 주변을 살폈다. 기척이 느껴진다. 당장의 스튜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듯한 롤랑이나 레나는 눈치채지 못한 듯 하지만 운현은 확실히 적의를 느꼈다.
'누굴까나...'
슬그머니 허리에 걸려 있는 단검을 빼 언제라도 던질 준비를 하며 운현은 스튜를 한입 떠 먹었다. 뜨거운 스튜의 맛이 입 안에 퍼지는 것을 느끼며 경계하던 운현은 수풀이 움직이고 레나와 롤랑이 그것에 고개를 돌렸을 때 수풀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꺄악!?"
늑대다. 모닥불과 스튜 냄새 때문에 이끌린 것인지 커다란 덩치의 늑대가 자신을 공격하자 롤랑은 당황하며 스튜 그릇을 떨어트렸다.
"푹."
"어...?"
커다란 늑대의 양 미간에 정확히 단검이 꽂힌다. 어찌나 강한 힘으로 박혔는지 칼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단검은 깊게 박혔고 늑대는 뛰어오르는 기세 그대로 롤랑을 공격하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이거 밥 먹을 시간도 안주는 구만!!"
"아아아...!!"
자신들의 기습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본 늑대들이 수풀 사이에서 튀어나오자 롤랑과 레나는 아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나 고레벨의 그녀들이다. 물론 주문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앞에서 막아 줄 사람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운현이면 충분하다.
"흡!"
"캐앵!!"
다난교도에게서 빼앗은 검을 휘둘러 늑대를 쳐낸 운현은 자신의 공격을 맞은 늑대가 뒤로 나가떨어지자 빙글 검을 돌려 방어자세를 취한 후 레나와 롤랑을 가리고 섰다. 늑대 일곱마리. 그들이 자신들의 주변을 도는 것을 보던 운현은 레나와 롤랑의 주문이 완성되자 씩 웃었다.
"홀리 라이트!!"
"홀리 스매쉬!!"
"퍼펑!!"
"깨갱! 깽!!"
레나의 손에서 터져나온 세줄기의 빛과 롤랑이 만들어낸 듯한 빛의 구슬은 견제하는 늑대들을 한방에 날려버렸다. 그것을 본 늑대들이 당황하며 후다닥 도망가는 것을 본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큰일 날 뻔 했군요."
"그, 그러게요... 그런데 운현님."
"네?"
"단검 던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신데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늑대의 미간을 가리키며 레나는 씩 웃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다른 단검을 잡은 후 빠르게 던졌다.
"푹!!"
"비장의 한수죠. 단검 던지기에 있어선 다른 누군가에게 밀린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헤에... 굉장하신데요?"
운현이 단검을 던지는 모습조차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무척이나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이다. 롤랑의 뒤에 있는 나무에서 내려오는 독사의 머리를 단검으로 날려버린 운현은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흙먼지는 안들어간 것 같군요. 넉넉하게 만들어두길 잘했네요."
전투가 시작되기 전 잽싸게 냄비에 뚜껑을 덮어 두었던 운현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릇 대신 가방에 넣어두었던 다른 그릇을 꺼내었다. 놋쇠로 만들어진 그릇을 다시 받은 그녀들이 멋쩍은 웃음을 짓는 것을 보며 그들에게 스튜를 따라 준 운현은 롤랑을 힐끔 본 후 씩 웃었다.
'이걸로 확정되었군...'
현자와의 대화를 떠올린 운현은 생글거리며 스튜를 먹는 롤랑을 보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맞이할 뻔한 죽음은 총 넷. 첫번째는 간살, 두번째는 심정지, 세번째는 늑대에게 물려 죽는 것, 네번째는 독사에게 물릴 뻔 한 것. 하루만에 네번의 죽음을 맞이한 그녀는 이제 내일까지는 안전할 것이다.
'현자의 말에 의하면 운명의 공격은 절대 같은 종류의 죽음과 이유없는 죽음은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어. 그렇다면 현재로서 가장 처치 곤란하다고 할 수 있는 심정지에 의한 죽음은 회피한 셈이다.'
자신이 죽을뻔했다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롤랑은 그저 맛있다는 듯 스튜를 퍼먹고 있었다. 스튜를 만든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부드럽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목에 음식이 걸릴 가능성까지 배제하기 위해서 토끼고기를 최대한 잘게 잘라 스튜를 만든 운현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롤랑을 바라보았다.
어찌보면 단순하고, 또 어찌보면 가련하다.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운현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미소지었고 그 미소를 본 롤랑은 당황하며 고개를 숙인 채 조신한 얼굴로 급하게 먹던 스튜를 한입씩 천천히 예의를 갖추어 먹기 시작했다.
'어쨌든 조심해야 하니까.'
롤랑이 자신에게 호감을 갖게하여 자신이 보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위험을 피할 수 있으니 좋다. 어쨌든 운현으로서는 그녀들을 구하는 것도 아닌 것에 괜한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이봐요."
"네."
많이 피곤했는지 롤랑은 금새 자리에 누워 잠들어버렸다. 레나와 다르게 그녀는 오늘 괴물에게 간살당할 뻔 했을 뿐더러 심정지로 죽을뻔 하기까지 했다.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할 것이다. 그녀가 금새 잠들어버리자 불침번을 자처한 운현은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넣으며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뭐 하시려는 건가요?"
"마침 좋은 찻잎이 있더군요. 기회가 있다면 쓰는 것이 좋죠."
"헤에... 이런 곳에서 차를 즐길 수도 있네요. 저도 한잔 주시겠어요?"
"그러죠. 레나님은 피곤하지 않으신가요? 오늘 많은 일이 있었는데..."
"던전 도시에는 더 피곤한 일들이 많은걸요. 뭐... 처녀를 빼앗긴 것이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레나가 책망하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난처한 듯 쓰게 웃었다. 그런 그를 향해 짖궂은 얼굴을 한 레나는 살짝 몸을 돌려 모포를 당겼다.
"농담이에요. 어떻게 보면 고맙다고 해야겠네요. 당신 덕분에 적어도 처녀로 죽을 일은 없게 되었으니까."
"하하하..."
"그나저나... 당신 진짜 정체가 뭔가요?"
"이름없는 시골뜨기 촌마을의 모험자입니다. 정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나요?"
"롤랑 심판관님처럼 절 쉽게 속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교단에만 있던 저 순진한 분이랑 저는 다르다구요."
"그런가요?"
"네. 난폭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용병들과 말이라고는 지지리 안듣는 모험가들. 그리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제작자들, 돈만 밝히는 상인들. 그런 그들이 모여 있는 던전 도시에서 무려 오년이나 살아 왔다구요."
"흐으음..."
레나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롤랑과 자신은 다르다는 것을 어필하며 레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고 모닥불에 손을 뻗었다.
"사실대로 말해줘요. 당신. 다난 교도인가요?"
"그렇다면요?"
운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레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 개종하세요.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어요."
"이건 또 예상 밖의 말씀이군요. 개종이라... 믿음이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입니까?"
"사람에게 가치는 여러가지가 있는 법이니까요. 솔직히 다난교는... 정상이 아니에요. 그들은 모두 광신도라구요."
"흐으음..."
"그리고 우리 여신님이 얼마나 예쁜데요. 나중에 신상을 보면 깜짝 놀라실걸요?"
운현이 재밌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레나는 살짝 웃고는 농담을 던졌다. 그런 그녀를 향해 더더욱 짙게 웃은 운현이 입을 다물고 머그컵에 차를 따라 건네자 그것을 받은 레나는 양 손으로 따뜻한 차를 감싸 쥔 후 말했다.
"롤랑 심판관님을 좋아하시나요?"
"글쎄요. 이걸 좋아한다는 감정으로 치부하기는 좀 그렇군요."
"흐음?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자주 쳐다보시던데..."
"하하하... 매력적인 분은 틀림없으니까요. 절로 눈이 가더군요."
"그럼 사귀는 것은 어떤가요? 저희 파르티 교단은 성직자라 하여도 결혼을 허락한답니다. 무척이나 자유로운 곳이죠. 어때요? 파르티 교단의..."
"모험가의 특성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타 지역의 교단과도 거래를 하며 의뢰를 받는지라 쉽게 한 종교에 얽메이고 싶지는 않군요."
"아쉬워라..."
"고작해야 모험가 하나이잖습니까."
레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의 말에 레나는 빙긋 웃은 후 롤랑을 가리켰다.
"아까 말했죠? 교단에만 있어서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롤랑님과 저는 다르다구요."
"......"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는 사람도 모를 정도로 저는 바보가 아니에요. 아, 이렇게 말하면 롤랑님이 바보가 되는 건가?"
레나는 생긋 웃으며 운현에게 말했고 그 순간 운현은 그녀를 죽일까 말까 고민했다. 자신의 정체는 알려지면 곤란했다. 특히 레나는 카야라는 개썅년과 같은 성당에서 근무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자신에 대해서 카야에게 말할 수 있었고 그리 된다면 계획은 대부분 틀어져버린다.
"제가 힘을 숨긴다라... 원래 사람은 자신의 모든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법이죠."
"하긴... 그런가요?"
"네. 그리고 말씀드렸지만 저는 실력없는 모험가라서... 단검 던지기 외에는 그리 잘하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정말 강한 힘을 가졌다면 아까 늑대들을 혼자서 잡았겠지요."
"흐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운현의 말을 레나는 전혀 믿지 않는 듯 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생긋 웃은 후 담담히 말했다.
"그러니 어디가서 쓸데없는 소리는 말아주세요. 괜한 기대로 싱거운 사람이 될 수 있으니 말이에요."
"그렇게 하죠. 파르티님께 맹세코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겠어요."
"그거 고마운 일이군요."
'만약 네년이 그 정도로 맹세를 하지 않았다면 네년의 양 퍌과 다리를 잘라 놓고 늑대굴에 던져놨을 테니 말야. 그 수고를 덜게 해줘서 고맙다.'
신성을 잃는 것과 계획이 틀어져 리스크를 감당하는 것. 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운현은 당연히 신성을 잃는 것을 택할 것이다. 신성이야 다시 구하면 되지만 리스크를 잘못 감당하다가 계획이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은 원래 유동적으로 돌아가기에 계획의 수정이 불가피하다지만... 그래도 가급적 수정을 하지 않는 것이 낫지.'
레나가 성직자가 아니었다면 저 맹세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려 파르티 교단의 이단심판관. 신성을 몸에 지니고 있는 그녀가 파르티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말을 믿어도 될 것이다.
"하하. 그거야 당연하죠. 어쨌든 당신은 이제 저희와 함께 움직일 것인데요. 그리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요."
"네?"
"저희들이 습격을 당한 것... 뭔가 이상해요.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그리고 최악의 경우일지도 모르지만 던전 도시 내, 그리고 파르티 교단 내에 변질자가 있을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롤랑님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말이죠."
'뭔가 다르군... 아니. 예측인가. 그리고 그때 내가 말했던 것으로 확신을 한 것이었군.'
과거 레나에게 상인 조합의 간부의 집에서 발견했던 것을 말해 주었을 때 그녀는 굉장히 당황하고 성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인신공양의 제물이 되어 신성을 빼앗기고 죽었었다.
"설마 그러겠어요?"
운현이 웃으며 말하자 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쓰게 웃었다.
"저도 그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네요. 아하아암... 저도 졸립군요."
"어서 주무시도록 하세요.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할 예정이니까요."
"그래야겠어요. 그나저나 운현씨. 정말 밤새도록 불침번을 서도 괜찮으시겠어요? 오늘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은 운현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레나는 운현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그저 빙긋 웃을 뿐 이었고 결국 레나는 미안해하며 몸을 눕히고 잠들었다.
290====================
마왕강림
"저기가 던전 도시에요!"
"그렇군요. 굉장히 크네요."
새삼스러운 감정에 휩쌓인 운현이 조용히 말하자 롤랑과 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상 웃던 운현의 표정이 한순간 딱딱히 굳어버린 것에 이상해하던 그녀들은 운현의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큰 성벽은 처음봐요."
"수도 같은 곳은 못가보셨나봐요?"
"하하... 아무래도 그렇죠. 저는 신분증도 없어서."
"에엣!? 진짜요?"
"모험가들 중에는 불법적인 일을 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래서 신분을 증명할 물품은 가급적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이 좋죠."
"헤에..."
"그럼 운현님도 불법적인 일을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롤랑이 떨떠름한 얼굴로 묻자 운현은 쓰게 웃었다. 하지만 레나는 운현을 이해하는 듯 했다. 아무래도 모험가들이나 용병들과 많이 마주치다보니 운현을 이해한 그녀는 운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운현님의 신분은 저희가 증명할 수 있으니 괜찮아요. 그리고 던전 도시에서 신분 등록을 하시면 되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자신과 롤랑의 처녀를 빼앗았다고는 하나 운현이 자신들을 도와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실력이라면 다난교와 상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레나는 웃으며 그에게 말한 후 앞서 걸었다.
"어? 레나 대 사제님."
이단 심판관이라는 것은 숨기고 있었기에 성문을 지키던 여인들은 그녀를 보며 활짝 웃고는 성호를 그었다. 파르티 교도인 에스카와 로지가 웃으며 자신을 반기자 레나는 그녀들에게 성호를 그어 준 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에스카님. 로지님. 오늘도 근무중이시군요."
"아아... 로지 때문에..."
"네가 남자들 희롱해서 그런거잖아!!"
"그건 희롱이 아니라고!!"
에스카와 로지가 서로를 보며 투닥거리는 것을 보고 레나는 쓰게 웃었다. 꽤 실력이 있는 병사들이지만 남자만 보면 희롱을 하려고 하는 그녀들의 성향상 또 근무를 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나저나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
"오! 멋진 남자!!"
"어디!?"
레나가 웃으며 입을 열었을 때 에스카는 롤랑의 옆에 서 있는 운현을 보며 눈을 빛냈다. 푸른색 긴 머리. 큰 키. 약간 거칠어보이지만 그 나름의 야성미가 넘치는 얼굴. 생글거리는 얼굴은 무척이나 선하게 보여 그 매력이 넘쳐보인다. 블랙플레그 세트 갑옷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운현을 보며 에스카는 휙 고개를 돌려 레나에게 물었다.
"저 남자는 누군가요!?"
"혹시 호위무사? 이야~ 남자 호위무사라니~"
"하하하..."
남자만 보면 사족을 못쓰고 덤벼드는 그 둘이 운현을 보고 흥분하자 레나는 뻘쭘히 웃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빙긋 웃은 에스카와 로지는 성큼성큼 운현에게 다가가 당당히 말했다.
"보아하니 무기가 있으신 것 같은데."
"소지품을 검사해야겠다. 신분증을 내놓도록."
"하하하... 이거 곤란한데."
어쩜 이렇게 변화가 없을까. 처음에 만나자마자 자신의 몸을 더듬으며 성희롱을 했던 그녀들을 떠올린 운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에게 손을 뻗는 에스카의 손을 잡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에?"
"귀부인께 이런 실례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지만... 죄송합니다. 야인이라 제 신분을 증명할 것이 없군요. 다만 청컨데 저 레나 대사제님의 얼굴을 봐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주실 수 있으십니까? 레나 대사제님께서 이곳 던전 도시에서 신분 등록이 가능하다고 하셨으니... 부탁드립니다."
"어... 어. 음."
에스카는 자신의 손등에 키스하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운현의 모습에 당황했다.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던 그녀가 머뭇거리자 로지는 그녀의 손을 확 뺀 후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물론 이쪽의 아름다운 아가씨께도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하하!! 그럼 어쩔 수 없지! 통..."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알고 여자도 꼬셔 본 놈이 잘 꼬신다고 다년간의 가상현실로 단련된 운현의 사탕발림은 남성에게 그리 좋은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에스카와 로지를 흔들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그녀들이 웃으며 통과를 시켜주려고 할 때 뒤쪽에서 엄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저 망할 눈치 없는 기지배.'
과거나 지금이나 진짜 눈치 없이 끼어드는 것은 타고 났구나. 운현은 다 된 밥에 재를 확 뿌려버리는 이의 등장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분 검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통과를 시킨다!? 이게 무슨 짓이지!? 그것이 성문 경비병의 권한인가!?"
"윽... 윈드 대장님."
"...하아..."
"이 한심한 것들... 너희들! 근무 끝나고 시청으로 오도록!! 그 정신상태를 제대로 고쳐줄테니!"
윈드의 엄한 외침에 에스카와 로지의 표정이 푸르죽죽하게 죽었다. 그런 그녀들을 보며 쓰게 웃은 운현은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 누구지?"
그때와 다르게 윈드는 운현을 경계하며 말했다. 신분도 밝히지 않고 에스카와 로지를 꼬셔서 통과하려고 하는 그 모습에 경계심이 일어난 윈드가 허리춤의 검자루에 느긋하게 손을 가져가자 레나는 다급히 그녀를 말렸다.
"윈드 경비대장님!"
"음? 아니. 레나 대사제님 아니십니까!?"
"저 분들은 저의 일행입니다. 신분은 제가 보장할 수 있어요. 사정상 모두 신분증을 잃어버리셔서..."
레나의 말에 윈드는 운현, 그리고 난처한 얼굴로 서 있는 롤랑을 번갈아 쳐다본 후 한숨을 내쉬었다. 레나는 이 던전 도시에 있는 대성당의 사제다. 그런 그녀가 신분을 보장한다면 맞는 것이겠지. 레나가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주며 말하자 윈드는 고개를 끄덕인 후 운현에게 시선을 보냈다.
'오래간만이지만 사람 속 긁는 것은 여전하구만.'
"당신."
"네."
"이름이 뭐지?"
"운현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주의하도록. 이러한 방법으로 경비병들에게 수작을 부리는 것이 한번 더 보인다면... 그때는 레나 대사제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용서치 않겠다."
고지식한 말을 내뱉는 그녀를 향해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는 운현이 에스카와 로지에게 성희롱을 당한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운현이 그녀들을 꼬시는 입장이었다. 확연히 달라진 행동으로 그녀의 반응도 달라졌다. 그때는 상당히 호의적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을 꽤나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는 윈드를 향해 운현은 웃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아가씨. 저는 운현이라고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아가씨의 고귀한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부드럽게 웃은 운현은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물었다. 그의 차분하고 깔끔한 말투에 윈드는 멍청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인상을 구기고 검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지금 날 놀리는 것인가? 아니면 날 쉽게 생각하는 것인가?"
"그럴리가요."
생글생글 웃으며 운현은 그녀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자 윈드는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접근한 남자들은 단언컨데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 그녀는 운현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이를 악물고 검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아름다운 아가씨에게는 검보다는 이것이 더 어울리는군요."
"어느새..."
자신의 눈 앞에 나와 있는 화사한 들꽃을 보며 윈드는 멍하니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순수한 미소를 지어보인 운현은 윈드가 그 꽃을 받자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괜찮다면 화를 내지 말고, 자신의 마음에 있는 말을 조금 천천히 생각하며 말씀해보세요. 그것이 당신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키우는 길이랍니다."
"...천천히."
첫 만남에서 좋은 감정을 얻지 못했다면 좋은 감정이 들게 만들면 그만이다. 자신의 움직임과 계획에는 윈드를 이용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윈드에게 사탕발림을 날린 운현은 그녀가 멍하니 들꽃을 바라보자 뒤로 물러난 후 조용히 말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아가씨."
"아... 으, 네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윈드는 자신도 모르게 존대를 해버렸다. 다소곳해진 그녀를 향해 웃어보이며 운현은 레나와 롤랑과 함께 던전 도시 안으로 들어갔고 윈드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들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용히 미소지었다.
"조금 더 생각하고 천천히... 그래 급할 거 없잖아."
내일은 지금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귀족 남자와의 데이트가 있다. 연애와 결혼이 너무나 하고 싶은 자신에게 있어서 어쩌면 좋은 조언일지도 모른다. 항상 자신이 들이대는 것을 멈추고 천천히 다가가보자. 그것을 다짐하며 윈드는 작게 중얼거렸다.
"운현이라고 했던가... 조언 고마워."
"굉장하네요."
던전 도시에 들어 온 운현이 감탄하자 레나는 기분이 좋았다. 막나가는 인간들이 넘쳐나는 도시이지만 그만큼 생기 넘치는 도시다. 자신 역시 이 던전 도시를 좋아하기에 운현의 감탄이 마음에 들었던 그녀는 롤랑을 향해 물었다.
"롤랑 대사제님은 어떠세요?"
"예? 아. 멋지네요."
아까 전 운현이 에스카나 로지, 그리고 윈드에게 대하던 행동이 조금 거슬렸던 롤랑은 레나의 말에 깜짝 놀라며 베시시 웃었다.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던 레나는 운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조금 자제하는게 어때요? 바람둥이씨."
"바람둥이라니요. 제 입은 항상 진실만을 말한답니다. 레나님도 아름답고, 또 롤랑님도 아름답지요. 아름다움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닌 듯 싶습니다만."
"어머... 아름답다뇨. 아이 참. 운현님도..."
운현이 웃으며 자신을 아름답다고 말해주자 롤랑은 기분 좋게 웃으며 그의 팔을 살짝 때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은 운현은 그녀를 잡고 살짝 당긴 후 자리를 바꿨다.
"그럼 가실까요? 레나님. 어디로 가야 하나요?"
"따라오세요."
"턱."
레나와 롤랑이 앞서 걷자 운현은 위에서 떨어진 화분을 가볍게 잡았다. 아까 전 롤랑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그녀의 머리에 맞았을 것이다. 롤랑이 서 있던 곳 위의 선반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던 운현은 그것을 예상하고 그녀와 자리를 바꾼 것이다.
'집요하구만.'
운명은 끈질기게 롤랑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운현에게 어김없이 막혀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향해지는 위험을 느긋하게 막아내며 운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유 없는 죽음은 없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막으면 죽음이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지.'
아무런 힘도, 지식도, 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 통찰력과 그것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결과를 분석할 수 있는 분석력이 없는 21살의 자신이었다면 단 한번의 죽음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롤랑에게 가해지는 죽음을 몇번이나, 그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여유있게 막아내고 있었다. 일천의 세계를 경험하며 얻어낸 통찰력과 분석력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과거에 얻은 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만한 일이다.
'모든 가능성을 막는 것이 좋지만... 그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
운현은 빠르게 걸어 앞서 걷는 롤랑을 따라잡았다. 레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그녀가 던전 도시에 오는 것은 처음이 아닌 듯 했다. 여유있게 레나와 함께 걷던 롤랑과 함께 운현은 던전 도시의 중앙 분수대 광장에 도착했다.
"와~ 분수. 전 여기가 정말 좋아요."
"...그렇군요."
과거가 떠오른다. 중앙 분수대 광장에서 헤스티아와 트윈문 축제때 춤을 췄던 것이 떠오른 운현은 살며시 눈을 감고 작게 답했다.
"운현...님?"
"네?"
"왜. 눈물을..."
"아하하... 눈에 뭐가 들어갔나보네요."
그동안 가라앉았다 생각한 감정이 치솟는 것에 눈물이 한방울 흘러 내린 것을 롤랑이 본 모양이다. 그녀는 당황하며 운현에게 다가가 물었고 운현은 머쓱한 얼굴로 눈을 쓱쓱 닦았다.
"혹시 안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줄 알고 놀랐잖아요. 레나 대사제님? 이제 성당으로 갈까요?"
"그러죠. 이쪽이에요."
레나의 인솔 아래 롤랑과 운현은 파르티 대성당으로 향했다. 골목을 통해 커다란 대성당 앞에 도착한 운현은 위화감을 느꼈다.
'어째서?'
대성당의 옆에 커다란 건물이 있어야 한다. 카야가 성물을 팔던 그 건물. 그 건물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빈 공터 밖에 없었다.
"...설마..."
"네?"
"아니. 아니에요."
운현이 당혹스러워하자 롤랑과 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의 당혹감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원래의 생글거리는 얼굴이 되어버렸다.
"아. 레나님."
"네?"
"괜찮다면 성물을 조금 구입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모험을 하다보니 신성한 물건이 있으면 좋은데."
"아아... 성물이라면 대성당 안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운현님이라면 반값에 제공해드릴 수 있어요."
"그거 다행이군요."
'어쨌든 성물을 팔기는 판다는 거지. 그럼 카야를 만날 수 있겠군.'
카야의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 레나와 롤랑과 함께 대성당 안으로 들어간 운현은 레나가 대성당 입구의 안쪽 옆에 있는 작은 방으로 자신을 데리고 들어가자 그곳에 들어선 후 주먹을 꽉 쥐었다.
"어서오세요~"
'어째서지?'
카야가 없다. 운현은 애써 당혹감을 감추고 그녀에게 성자의 눈물 하나를 구입한 후 레나에게 말했다.
"굉장히 큰 성당이네요. 이 성당에는 레나 대사제님과 저분 밖에 안계신 건가요?"
"으음. 네. 성당의 관리는 대부분 파르티 교도분들께서 도와주시고 있어요. 실제 파르티 교단의 성직자는 저와 레민 사제 뿐이랍니다."
"다른 사제는 없다...구요?"
"네."
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심장이 크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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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강림
'침착해라. 이것은 공명의 함정이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운현은 생각했다. 자신이 카야와 만난 것은 2계층에 들어가기 전, 그러니까 던전 도시에 도착했을 때가 아니다. 원래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성물을 파는 곳이 있다는 것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정도 오차는 상정범위 안이다. 운현은 롤랑과 레나가 눈치채지 못하게 빠른 표정관리를 한 후 물었다.
"그렇군요. 사제님 두분이라... 힘들지 않으신가요?"
"음... 그렇긴 해요. 하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고 당분간은 롤랑 대사제님이 함께 계시기로 했으니까... 롤랑님이 안계시다면 다난에 대한 대비로 다른 사제님을 요청할 수도 있었겠죠."
'그래서였나. 그때 롤랑은 죽었고, 그렇기에 레나가 교단에 다른 사제에 대한 지원 요청으로...'
"그렇군요. 그런데... 이제부터 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다난교에 대한 건가요?"
"네."
레나가 목소리를 낮추며 묻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이 도시 내에 다난교도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건가요?"
"일단 제보가 몇가지 있었어요. 물론 모든 제보가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없지만?"
"그래도 조사의 필요는 있죠. 롤랑 심판관님께서 데리고 오실 예정이었던 사제들과 성기사분들이 있으면 그들과 함께 그곳을 모두 조사하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이상 저희가 조사할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네요. 잠깐 따라와주시겠어요?"
운현과 롤랑을 데리고 레나는 성당 내부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들어선 그녀는 방 구석에 있는 작은 여신상에 손을 가져간 후 신성력을 불어 넣었다.
"우우웅..."
낮은 진동음과 함께 여신상의 위로 빛이 터져나왔다. 세개의 이름이 떠오른다. 그것을 바라보며 레나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파악한 곳은 던전 도시 북쪽에 있는 작은 술집인 풍월관, 그리고 던전 도시의 중앙 분수대 공원 옆에 있는 술집인 미아드. 세번째는 로윈이라는 던전도시 남동쪽에 있는 작은 꽃집이에요. 이 셋 중 하나에 다난교도들이 결집할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어요."
"누구에게서요?"
"다난교에 파견되어 있는 저희 사제 중 한명입니다. 그녀는 다난교에 첩자로 파견되어 많은 정보를 보내주고 있어요. 머리도 좋고, 또 강단도 있는데다가 꽤 좋은 정보를 많이 가져다주는 분이죠."
과거 그런 사람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 물론 과거에는 파르티 교단과 연계하기보다는 모험가 길드나 용병 연맹과 손을 잡고 움직이는 일이 많았으니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기에 운현은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녀의 이름이 뭔가요?"
"그건... 죄송해요. 그건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그의 질문에 레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 수록 좋다. 레나가 다난교에 있는 첩자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물었다.
"그럼 그 셋 중 어디로 가는게 좋은 건가요?"
"음... 제 생각엔 저희 셋이 하나씩 나눠져서 찾는 것이 좋을 듯 싶지만 그건 말도 안되는 일 같고..."
아무것도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모여 있는 다난교들과 상대해야 할지도 몰랐다. 운현이나 레나나 롤랑이나 다난교에서 어떻게든 잡아서 신성을 빼앗으려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혼자 있다는 것은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밀어 넣는 것과 같기에 레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렇게 하는게 어떨까요?"
"어떻게요?"
"운현님께서 정해주세요."
"흐음..."
레나의 말에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으로 하죠. 던전 도시 중앙에 있는 술집 미아드."
"왜요?"
"그냥요. 찍었는데요."
사실 찍은 것은 아니다. 운현은 반드시 그곳에 가야 했고 그곳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그곳이 맞을 것이다.
"하하하..."
운현이 당당히 말하자 레나는 뻘쭘한 웃음을 지은 후 롤랑을 보았다. 어차피 이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더 이상의 정보는 없었던 그녀는 롤랑에게 의견을 물었고 롤랑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지 운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곳으로 가죠. 큰 일이 아니라면 조사를 마친 후 다른 곳으로 가도록 합시다."
"아, 그 전에 저 신분등록부터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도시 같은 곳에서는 신분등록이 안된 상태라면 괜히 검문에 걸릴 수도 있으니..."
"그것도 그렇죠. 그럼 시청에 들렀다가 가도록 할까요?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등록만 하고 바로 그 술집으로 가도록 합시다."
운현의 제안에 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러운 사제복을 벗으려다가 운현을 힐끔 보며 쓰게 웃었다. 이미 볼것 못볼것 다 본 사이이지만 그래도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여주기 뻘쭘했던 그녀의 시선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롤랑님도 갈아입으셔야겠죠?"
"아, 네."
어떻게 보면 적지에 가는 것이니 레나가 사제복을 갈아입으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롤랑은 조금 달랐다. 그녀가 입고 있는 곳은 시체가 입고 있던 싸구려 옷이다. 그것을 계속 입히기는 그랬던 운현이 웃으며 말하자 롤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운현은 느긋하게 방 밖으로 나와 언제든지 뛰어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덜컹."
성당의 문이 열리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혹시 다난교돈가? 그가 그것을 생각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음."
"어라? 아무도 안계신가요?"
눈물이 날 것 같다. 그토록 그리웠고,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사람의 등장에 운현은 눈을 감아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레나 사제님... 안계신가보네."
항상 성당의 안에 있던 레나가 없는 것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린 후 성물을 파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자 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필레.'
자신의 연인. 자신이 지켜야 하는 사람. 운명이 가져다 주는 가혹한 죽음의 시련에서 반드시 구해내야 하는 사람. 그녀를 보자 두근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억누른 운현은 옷을 갈아입은 레나와 롤랑이 나오자 애써 웃었다.
"운현님? 표정이 왜..."
"아... 먼지가 들어가서..."
"그런가요? 청소를 못했더니..."
운현의 말에 레나는 뻘쭘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자원 봉사 형식이 되다보니 완전히 깨끗하게 청소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운현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일이 잘 풀리면 사람들을 고용해서 청소를 해야겠어요. 가죠."
필레와는 조만간 다시 만날 것이다. 그러니 지금 그녀를 만날 필요는 없다. 그녀와 만나고 싶고, 또 그녀를 안고 싶은 욕망을 억누른 운현은 레나와 롤랑과 함께 성당을 나갔다.
"신규 등록이라. 등록금은 오골드입니다. 복장을 보아하니 모험가 같으신데... 모험가 길드에서 모험가로 등록하신다면 신분 등록은 따로 안하셔도 될텐데 그렇게 하시는게 낫지 않나요?"
그녀들과 함께 시청에 도착한 운현은 시청 안내원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이다.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으니 모험가 길드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일단 등록해주세요."
"등록하시는 것은 좋은데 환불은 불가능합니다."
"네."
어차피 인벤토리 안에는 일만골드에 가까운 금화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던전에서 움직이게 된다면 고작 오골드 구하는 것은 일도 아니기에 운현은 금화 다섯개를 꺼내어 그녀에게 주었고 잠시 기다리자 안내원은 운현에게 서류를 건네주었다.
빠르게 서류에 필요사항을 적어 그가 돌려주자 그녀는 그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하얀색 카드를 만들어 주었다. 던전 도시의 시민임을 증명하는 카드를 받은 그가 그것을 주머니에 넣자 안내원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던전 도시의 시민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앞으로 별다른 문제 없으시길 빌겠습니다."
"네."
사고치지 말라는 소리일까?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 준 운현은 뒤에서 기다리던 레나들에게 화장실을 갔다 온다고 말한 후 빠르게 자위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용병들이 기세등등하네요."
"하긴... 자기네 연맹장이 이번 시장 선거에 나선다고 하니.."
"연맹장? 누구요?"
"용병연맹의 연맹장인 티르빙이 시장 선거에 나선다고 하네요. 티르빙 정도라면 충분히 시장을 노릴만 하지만..."
"티르빙이라... 혹시 아르토리우스라는 용병에 대해서는 모르시나요?"
운현의 질문에 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이름이기에 그녀는 운현을 의문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고 운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모험 도중에 만난 용병인데 꽤 강해서... 여기서도 이름이 알려진 줄 알았죠."
"글쎄요... 저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롤랑님은요?"
던전 도시에서 많은 용병들을 만나는 레나조차도 모르는 이름이다. 만나는 사람들이 교단 내의 사람들이 대부분인 그녀가 알리 없었던지라 롤랑은 고개를 저었고 운현은 알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이건 예상대론데... 원하지 않는 예상이라 오히려 기분이 나쁘군.'
자신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이 세계는 자신에게 있어서 '첫번째'로 인식되는 세계라는 것이다. 그 말은 과거에 수많은 회귀를 통해 자신이 만들어 냈던 아르토리우스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마 아르토리우스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네.'
현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르토리우스의 죽음은 운현이 이 세계로 들어오기 일주일 전이라고 했다. 인신공양의 제물이 되어 그 혼은 환생의 굴레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육체에 남아 끝없는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 뒀다간 그 혼마저도 다난에 의해서 이용당해 소멸되어버릴 것이다.
'그녀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위신체를 만드는 것 뿐.'
운현은 우울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자에게 위신체를 만드는 법에 방법에 대해서는 들었다.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만 현자가 남겨 둔 유산이 있으니 그것으로 바로 위신체를 만들어 그 안에 아르토리우스의 혼을 넣으면 된다. 하나의 온전한 신성이 있어야 가능한 위신체 제작을 위해서 롤랑과 레나의 신성을 강탈한 운현은 앞서 걷는 그녀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정말 활용가치가 넘쳐나는군.'
"저곳이에요."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으음... 일단 제가 먼저 들어가볼게요. 그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시죠. 레나님께서 들어가시면 다음은 저희가 들어가도록 할게요."
"좋아요. 그럼 이건 위치 추적의 마법석이니까 잘 가지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자신이 건네 준 마법석을 운현과 레나가 주머니에 넣는 것을 본 레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안으로 들어갔다. 거리가 가까워 질 수록 마법석에서 신호가 갈테니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그것으로 서로를 찾으면 된다.
'일단 한번 잡혀주는게 좋을텐데.'
중요한 것은 아르토리우스의 시체가 있는 곳을 알아내는 것이다. 레나가 안으로 들어가고 이십분 정도 밖에서 개기던 운현은 마법석의 신호가 사라지자 롤랑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없군.'
소란스러운 술집이다. 몇몇 테이블에는 이미 술판을 벌이고 있는 이들이 있었고 카운터의 바에는 럼주를 물처럼 들이마시는 용병 둘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어디를 찾아봐도 레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레나는 아직 안죽어.'
자신이 개입하지 않는 이상 레나는 운명대로 살다가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그녀에게서 신경을 꺼도 된다. 롤랑과 함께 테이블에 앉은 운현은 점원이 다가오자 웃으며 말했다.
"맥주 두잔이랑 감자튀김."
"알겠습니다."
점원이 걸어가자 롤랑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운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레나님이 안보여요."
"아마 잠입했나보죠. 아니면 잡혔든가..."
"그럼 큰일 아닌가요?"
"당장 그녀를 죽이거나 하지는 못할 거에요. 너무 걱정마세요."
'지금 위험한 것은 너다. 등신같은 기집애야.'
운현은 술집에 들어오자마자 느꼈다. 술을 퍼 마시거나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듯 했지만 술집에 있던 모두가 자신들을 동시에 슬쩍 바라봤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기에 의식하지 않으면 모를 수준이었지만 운명의 흐름마저도 예측할 수 있을 정도의 통찰력을 지닌 운현에게 있어서 그들의 움직임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잡히면 과연 인신공양의 장소로 끌려가는게 맞느냔데...'
운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마법석을 꺼낸 후 그것을 인벤토리 안에 휙 던졌고 잠시 후 가게에서 맥주와 감자튀김을 가져오자 운현은 맥주잔을 들어 올린 후 롤랑과 건배를 했다.
"푸하... 시원해라."
"잘 드시네요?"
"헤헤... 제가 술을 좋아해서요... 으음... 왜 이렇게 졸립지..."
'역시 술에다가 약을 탔군. 이런 식으로 인신공양의 제물을 구하는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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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강림
현자가 말하길 냉철한 이성 상태일때는 모든 종류의 상태 이상에 면역이 된다고 했었다. 과거 아르토리우스는 술집에 있다가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어 다난교에 의해서 죽었다고 말했었다. 만약 이곳이 아르토리우스를 잡아간 곳이라면 반드시 먹을 것이나 술에 약을 탔을 것이라 생각한 운현은 그렇기에 시청에서 자위를 하여 현자의 시간을 발동시킨 것이었다.
"남자라... 아까운데?"
"생긴 것도 괜찮아보이고... 그냥 빼돌리면 안될까? 잘만 쓰면 남창으로 팔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야."
"이상한 소리들 하지마. 라닌 그 개년 때문에 비틀란 님이 얼마나 히스테릭을 부리는지 알면서도 그래? 만약 걸리면 죄송합니다로는 끝나지 않을걸?"
'라닌? 비틀란?'
동굴의 비밀방에서 얻은 조직도에는 없던 이름이 나오자 운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과거에도 자신이 알던 이름은 카야와 카를로스밖에 없었다. 이름을 안다고 하더라도 얼굴을 모르니 대처하기는 어려웠다.
'모든 이들을 정확히 알 필요도 없고. 나중에 천천히 알아가도록 하지.'
롤랑을 들어 그녀의 양 팔과 양 다리를 구속한 여인들은 그녀를 가볍게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녀에 대한 작업을 마친 이들이 자신도 구속하고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자 운현은 축 늘어진 채 눈을 감고 그들의 발소리를 귀에 새겨 넣었다.
약 일만보 가량. 그 후 롤랑과 함께 수레에 태워졌고 수레가 움직이자 운현은 입을 다문 채 실눈을 뜨고 상황을 살폈다. 어느새 던전 도시 바깥으로 나와 있다는 것에 놀라지도 않은 채 조용히 기다리던 운현은 과거에 발견했던 다난 교도의 신전이 있던 헛간에 도착하자 눈을 감고 정신을 잃은 척 연기를 계속했다.
"비싼 갑옷인데. 이거."
"벗기자. 절대 남자 몸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다난교도들이 자신의 블랙플레그 세트를 벗기는 것에도 운현은 얌전히 기다렸다. 그녀들은 운현의 양물을 은근슬쩍 만지작거리며 그의 옷을 모두 벗겨낸 후 지하실로 들고 들어갔다.
"이럴수가... 레나와 롤랑이라니...!! 신성 보유자가 둘이나!!"
안에서 기다리던 이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 그녀의 말에 운현과 롤랑을 데리고 들어간 여인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모두 비틀란님께서 다시 자리를 찾길 바라는 저희들의 마음입니다!!"
"아아아...! 잘했다. 어디서 굴러먹다 나온 것인지 모를 라닌 그 개년도 이제는 끝이구나. 신성을 손에 넣는다면 카야님도 나를 다시 중용하실 터... 나도 검은 날개가 될 수 있다!"
운현과 롤랑, 그리고 아까 전에 잡아 온 레나에게 신성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그녀는 기쁜 얼굴로 외친 후 주변의 여인들에게 말했다.
"어서 의식을 준비해라!! 마인을 불러!"
'마인?'
설마 그 마인이 자신이 아는 마인인가? 운현은 눈을 감은 채 비틀란의 명령을 수행하는 여인들이 무언가를 끌고 오는 것을 보았다.
'저게 마인인가...'
동굴에서 본 괴물이다. 그 괴물이 여인들의 손에 이끌려 걸어나오는 것을 본 비틀란은 밝게 웃은 후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주문을 외웠다.
"크르르..."
얌전하던 마인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것을 본 비틀란은 묶여 있는 레나와 롤랑, 그리고 운현을 보며 적의를 드러내었다. 그런 그를 진정시킨 비틀란은 부하들에게 시켜 셋을 제단 위에 묶었다.
"저 년들의 신성은 마인에 보관한다."
"네!!"
"축하드립니다!! 다시 검은 날개에 복귀하신다면 저희들은..."
"날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 준 너희들을 잊지 않겠다!! 고맙다!!"
비틀란이 자신들에게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부하들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한 비틀란은 마인이 당장이라도 롤랑과 레나를 범하고 싶어하는 것을 보며 말했다.
"자!! 마인이여!! 저년들의 신성을 갈취하라!!"
"크아아아!!"
'여기까지군.'
더 이상은 볼 이유가 없다. 자신을 보며 히죽 웃는 비틀란이 바지를 벗고 자신의 남성을 만지작거리자 운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우직!!"
힘을 준 것만으로 끈이 끊겨버린다. 그것에 놀란 비틀란이 뒤로 물러난 순간 운현은 그녀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꺄악!?"
강력한 일격을 맞은 그녀가 나가 떨어지자 운현은 다리의 끈을 풀었다.
"네, 네놈!? 뭐냐!!"
"뭔지 아실 필요는 없으시고... 으랴압!!"
인벤토리에서 거검을 꺼낸 운현은 허리를 크게 비튼 후 거검을 던졌다. 큰 원을 그리며 날아간 거검은 마인의 목을 자르고 벽 한쪽을 박살내버렸다. 갑작스러운 광경에 놀란 이들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벙쪄 있을 때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바닥에 구르는 한자루 검을 주웠다.
"자... 그럼 즐겁고 신나는 피의 축제 시간이다."
"네놈은!! 네놈은 누구냐!! 뭐하는 놈이길래!!"
"말했잖아. 알 것 없다고!!"
일갈하며 운현은 빠르게 튀어나갔다. 그의 속도를 잡지 못한 여인이 당황한 사이 운현은 검을 크게 휘둘러 그녀의 팔을 베어버렸다. 자신의 팔이 잘려버린 것에 놀란 그녀가 고통스러워할 새도 없이 운현은 몸을 돌며 검을 휘둘렀고 단 일격에 그녀의 목이 날아가버렸다.
"에...에에?"
방금 전까지 자신과 농담따먹기를 하던 동료가 죽어버린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다. 동료의 피로 범벅이 된 여인이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향해 강하게 발길질을 한 후 씩 웃으며 다가갔다.
"이보시게."
"히익!? 힉! 사, 살려줘!!"
"워워. 내가 자네도 죽일 수 있는데 이렇게 살려 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그...그...그게...그..."
운현은 싱긋 웃은 운현이 묻자 그녀는 당황하다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나... 아니 저, 저에게 여쭤보실 것이..."
"오오오!! 훌륭해!!"
"......"
"지금까지 잡아다가 죽은 시체들은 어디에 보관하고 있지? 한두구가 아닐텐데 그냥 길가에 휙휙 버리지는 않았을 것 아냐."
"...그건 여기에... 근데 그거 말씀드리면 살려주시는... 건가요?"
그녀가 덜덜 떨며 묻자 운현은 빙긋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한줄기 희망을 얻은 그녀는 주섬주섬 일어나며 벽의 한쪽 면을 꾹 눌렀다. 운현도 알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만한 정교한 비밀장치. 그것이 작동되자 운현은 시체 썩는 냄새에 쓴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보관해서 어디다가 쓰려고..."
"그... 라닌의 요청입니다. 시, 시체를 숙성시켜서..."
"시켜서?"
"시독을 만들겠다고..."
"시독...? 차라리 언데드를 만든다고 하지."
언데드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독을 만들어서 어디다 쓰려는 것인지. 하긴, 그런 것은 만들어두면 어딘가에는 쓰게 되어 있다. 시체들이 보관된 방에 들어 선 운현은 차분히 시체들을 살폈다. 꽤나 오래된 시체부터 얼마 되지 않은 시체들까지. 그것들 중 운현은 반쯤 썩어 있는 여인의 시체를 발견하고 눈을 감았다.
'역시 여기 있구나.'
긴 흑발의, 반쯤 썩어버린 시체를 보며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와 팔에 걸려 있는 용병의 인식표. 그 인식표에 새겨진 이름을 읽은 운현은 차분히 그녀의 이름을 말했다.
"아르토리우스."
자신이 오기 전에 이렇게 되어버렸다면 자신으로서도 구할 도리가 없다. 운현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에 대해서 아나?"
"에...네? 어... 그..."
시체를, 그것도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부패하거나 마른 시체들을 보고 그게 누군지 어떻게 알겠는가. 운현이 아르토리우스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하자 그녀는 당황하다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모, 모르겠어요..."
"아니. 뭐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니까."
"그럼... 저는 살, 살려주시는...건가요?"
"음. 한가지 날 도와주면."
"뭐죠?"
그의 말에 그녀는 눈물을 쏟으며 겁에 질린 얼굴로 물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운현은 아르토리우스의 시체 앞에 그녀를 세운 후 인벤토리에서 스크롤을 꺼낸 후 가볍게 찢었다.
"우우웅...!!"
낮은 진동음과 함께 아르토리우스의 시체, 운현, 그리고 이름 모를 여인의 몸에서 청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본 그녀는 덜덜 떨다가 운현을 보며 다급히 외쳤다.
"뭐, 뭐하시려는 거에요!? 뭐에요!? 절 살려주신다고..."
"아, 그거."
자신의 몸에서 신성이 빠져나간다. 그것이 아르토리우스의 몸에 빨려들어가는 것을 본 운현은 절망한 얼굴의 여인을 보며 생긋 웃었다.
"거짓말이야."
"아아아아!! 이 나쁜...!!"
위신체를 만들 수 있는 마법이 발동되었다. 그녀는 운현을 저주하며 고래고래 비명을 내질렀지만 이미 마법은 발동되었다. 신성이 아르토리우스의 시체에 제대로 안착한 순간 운현은 그녀의 몸 위에 은색의 사슬로 묶여 있는 아르토리우스를 볼 수 있었다.
'와라. 나의 충실한 부하여.'
"개자식!! 개자...!!"
그녀의 생기가 점점 사라진다. 탱탱한 피부는 쪼그라들고 검은 머리는 점점 흰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손톱은 마르고 머리칼은 점점 빠진다. 근육이 쪼그라들고 살가죽에 검버섯이 피어오르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던 운현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저주하는 눈빛을 보내고 완전히 늙은 미라가 되어 툭 쓰러지자 아르토리우스의 시체, 아니 이제는 불완전한 위신체가 된 아르토리우스를 바라보았다.
"......"
과거의 미모를 그대로 간직한 채 위신체로 부활한 아르토리우스를 보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위신체가 되기는 했지만 아직 자신이 원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다. 그녀에게 다가간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마인의 코어를 들어 그녀의 가슴 위에 올려 놓았다.
"파직!"
마인의 코어가 부숴지며 그 안의 기운이 아르토리우스의 몸에 빨려들어갔다. 위신체를 만드는데 필요한 것은 신성, 그리고 위신체가 될 대상의 시체. 그 대상의 영혼, 살아 있는 자의 생명. 마지막으로 막대한 마력이었다.
'마인을 만든 것은 나다. 일반 마인은 기억 보관자를 만들려다가 생성된 실패작들이지.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나의 기억이 들어있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잘 되면 과거의 아르토리우스가 생길지도 모르겠군.'
이 세계에는 마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과거 회귀를 하지 않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자가 수를 써놨다면 마인이 생성될 수 있지만 그 가능성이 그리 높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운현이 부여하는 마력은 과거의 세계. 즉 자신의 기억과 마력이 담겨 있는 코어라는 것이다. 그것을 기반으로 위신체가 만들어진다면 과연 어떤 상태가 될 것인가.
마력을 마인의 코어로 대체하기로 한 운현은 다섯개째의 코어를 흡수하고 나서야 아르토리우스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으으음..."
낮은 신음성과 함께 아르토리우스가 살며시 눈을 뜨자 운현은 그녀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자신의 몸을 살핀 후 운현을 보며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당신은...?"
'날 모르나. 실패... 인건가.'
"날 모르겠나?"
"...네. 분명 저는..."
아르토리우스가 죽기 전의 기억을 떠올리자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인벤토리에서 꺼낸 망토를 휙 던졌다. 그것을 받은 그녀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그런 생각을 할 여유는 없다. 이곳에 계속 있고 싶나? 죽음을 기다리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닙니다."
아르토리우스가 조심스레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르토리우스가 따라 나왔을 때 운현은 롤랑의 위에 앉아 단검을 들고 있는 비틀란을 보았다.
"허."
"신성은... 내거야!!"
"푹!!"
"컥!"
심장이 아닌 목을 제대로 찔렀다. 롤랑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본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쉰 후 검을 들었다.
'너무 예상대로 흘러가는데.'
"크크... 이제... 이제 저년의 신성만..."
여자가 여자를 강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직 레나와 롤랑이 신성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반씩의 신성만이라도 챙겨 온전한 하나의 신성을 만들기 위해 레나를 죽이려고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걸어갔다.
"...저년...!"
"뭐, 뭐냐!! 너... 네놈!! 네놈이 감히!!"
운현과 아르토리우스가 나온 것을 본 비틀란은 증오와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단검을 꽉 쥐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반쪽짜리 검은 날개가 펼쳐지자 아르토리우스는 그녀를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
"죽인다!! 다난의 개년!! 감히... 감히 날 속이다니!!"
"누구냐!! 네년은!!"
"자."
강렬한 증오를 뿜어내는 아르토리우스에게 운현은 검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은 아르토리우스는 알몸인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갈며 검을 꽉 잡고 비틀란에게 뛰어갔다. 그녀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을 보고 비웃은 비틀란이 검은 날개를 펼치고 날아들었을 때 아르토리우스는 눈을 빛내며 그녀에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아아아악!!"
한쪽 어깻죽지가 날아가버렸다. 단검을 든 팔째 그녀를 베어버린 아르토리우스는 증오에 부들부들 떨며 검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고 어느새 부숴진 벽에서 자신의 거검을 챙긴 운현은 그녀에게 다가간 후 말했다.
"아. 미안하지만 끝장은 내가 내야 할 것 같네."
"하지만!! 하지만!!"
"다난의 총 책임자를 찢어죽일 수 있게 해줄테니까 걱정말라고."
"...알겠습니다."
운현의 기세에 눌린 것일까? 아니면 그가 자신을 만들어낸 주인임을 알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의 말에 화를 참으며 뒤로 물러났고 그런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 준 운현은 거검을 들고 여유있는 걸음으로 걸어갔다.
"네놈은...!! 네놈은 도대체... 누구냐! 누구길래 감히 정의와 선을 집행하는 다난교의 의식을 방해하는 것이냐!!"
"나. 음... 글쎄. 스스로를 정의라 부르짖는 너희들은 날 이렇게 부르게 되겠지."
운현은 빙그레 웃은 후 거검을 휘둘러 그녀의 목을 베고 조용히 말했다.
"마왕, 불의의 결정체... 그리고 절대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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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강림
'롤랑은 결국 죽었군. 어차피 오래 살려 둘 필요는 없었으니 아쉬울 것은 없다만.'
롤랑이 살아 있는 한 레나는 추가지원을 부르지 않을 것이고 그리 된다면 카야가 이곳에 오지 않는다. 어느정도의 선에서 상황을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했기에 운현은 바틀린이 롤랑을 죽이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지 않았다.
그것이 아니고서라도 운현이 롤랑의 죽음을 막을 의리는 없었다. 또한 자신의 모든 계획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 역시도 바뀔 것이다.
'이걸로 신성은 반... 굳이 하나를 채울 필요는 없다.'
레나의 신성을 갈취할 수는 있지만 그녀를 죽여 온전한 신성을 하나 만드는 것보다 그녀를 자신의 패로 써먹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운현은 아르토리우스에게 망토와 검을 준 후 말했다.
"저 시체들을 치우고 던전 도시에 숨어 있도록. 자정이 되면 분수대 광장에서 만나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아직도 자신이 어째서 이렇게 살아나게 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 아르토리우스는 복잡한 얼굴을 한 채 바틀린과 다른 여인의 시체를 들어 아까 시체들이 넘쳐나는 곳에 던져놓은 후 위로 올라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운현은 레나의 양 팔과 다리를 묶고 있는 줄을 푼 후 다급히 외쳤다.
"레나님!! 레나님!!"
"으으음... 헉!! 여긴!?"
정신을 차린 레나는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술집이었는데. 자신이 정신을 잃었다는 것에 당황한 레나는 운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며 외치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또 운현님의 도움을 받게 된 건가요?"
"저도 납치되었습니다. 다만 저는 모험가 생활 때문에 이런 저런 약에 내성이 강해서... 먼저 일어났습니다만."
"...혹시... 롤랑님은?"
"...네."
운현의 낮고 우울한 목소리에 레나는 눈을 꼭 감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가? 운현이 옷을 모두 벗고 있는 것을 본 그녀는 그의 양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설마 운현님도...?"
"...네. 강간당하며 신성을 빼앗긴 것 같습니다."
"이럴수가... 남자에게도 그것이 통한다는 건가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절 강간한 자의 반응에 의하면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여자는 절 강간하고 이걸로 완전한 신성을 만들었다고 떠들고 다른 이에게 절 죽이게 한다고 한 후 떠났거든요."
"그럴리가 없는데... 어째서..."
운현이 신성 하나를 소모해서 아르토리우스를 위신체로 만들고, 그리고 바틀린이 갈취한 신성을 다시 갈취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레나는 그저 안타까운 얼굴로 운현을 바라 볼 뿐 이었다. 아직 약기운이 남아 있는 레나가 비틀거리자 운현은 그녀를 부축해 준 후 말했다.
"롤랑님의 시체를... 어쩌죠?"
"...일단 나가도록 하죠."
이 자리에 계속 있다가 다른 이들이 찾아오면 곤란하다. 레나는 안타까운 눈으로 롤랑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운현과 함께 위로 올라갔다. 지하실을 빠져나와 위로 올라간 레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긴..."
"어딘지 아세요?"
"아, 아뇨. 그냥 헛간인 것 같네요."
농기구와 낡은 옷가지, 그 외 잡동사니들을 보며 레나가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나는 옷을 제대로 입고 있지만 자신의 옷은 없다. 운현이 낡은 옷을 입는 것을 지켜보던 레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또 운현님께 도움을 받았군요."
"이제 남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다난. 롤랑님을 죽이다니..."
운현이 이를 갈며 다난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자 레나는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큰일이네요. 롤랑님이 가지고 있는 신성과 운현님이 가지고 있던 신성을 빼앗겻으니... 하나의 신성을 다난이 가져가게 되었어요."
"도대체 신성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요."
실제 신성을 가져간 것은 운현이지만 운현은 입술에 침도 안바르고 느긋하게 거짓을 말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레나는 심각한 얼굴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교단에 증원 요청을 해야겠어요. 그리고 그 가게..."
"그 가게를 쳐야겠죠?"
"네. 하지만 저희들만으로는 무리일 것 같아요."
"그럼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데... 어디가 좋을까요?"
"저와 친분이 있는 분들께 부탁하면 될거에요. 일단 모험가 길드로 가시죠."
"모험가 길드요..."
올 것이 왔다. 운현은 침을 꿀꺽 삼킨 후 말했다.
"그럼 일단 돌아가시죠. 그리고... 이꼴로 계속 다닐 수는 없으니까 저는 장비를 새로 구해야겠어요. 만약 전투라도 벌어진다면..."
"블랙 플래그 세트는 꽤나 비싼데... 큰 손해를 보게 되셨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전의 갑옷도 좋은 갑옷이었는데."
다난에 의해서 갑옷을 두번이나 잃어버리게 된 운현을 향해 레나는 애써 웃었다. 롤랑이 죽어버렸다는 큰 충격을 가라앉히려 무리하는 그녀를 향해 웃어보인 운현은 그녀와 함께 다시 던전 도시로 향했다.
에스카와 로지가 특별한 모양인지 성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레나가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주자 웃으며 운현까지 같이 통과시켜주었다. 그렇게 파르티 교단의 성당에 들어 온 운현에게 레나는 금화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약소하지만 갑옷을 구매하는데 사용해주시겠습니까? 어쨌든 저희 일에 말려들게 되었으니... 그리고 무기도 구매해주세요."
"흐음... 이천골드인가요."
백골드짜리 금화가 스무개 들어 있는 주머니를 보며 운현이 떨떠름히 말하자 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입고 있던 블랙 플레그 세트의 가격에 반도 되지 않는 금화이지만 지금 그녀가 융통할 수 있는 돈은 그게 전부였다.
"죄송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싼 갑옷이라도 사는 수 밖에."
"정말 죄송해요."
레나는 몸둘바를 몰라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은 운현은 성당을 나와 힐더크의 가게로 향했다.
"오오~!! 멋진 남자잖아? 갑옷 사러 온 건가?"
"네."
다시 봐도 끝내주는 가슴이다. 더운 대장간 안에서 철을 두들기던 힐더크는 운현이 가게로 들어오자 그를 보며 밝게 웃었고 그녀의 가슴을 빤히 바라보며 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나이트호크 세트를 구입하고 싶은데요."
"나이트호크 세트. 그거 좋은 갑옷이지. 돈은 있어? 음... 뭣하면 몸으로 해도 괜찮은데? 너 딱 내 타입이라서 말이지."
힐더크는 요염히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톡 쳤다. 커다란 가슴이 출렁이는 것을 보며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척이나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군요. 돈이라면 있습니다. 아, 그리고 괜찮은 장검이 있다면 하나 추천해주시겠어요?"
"쩝. 자. 이것까지 해서 이천골드."
그가 거절하는 것이 상당히 아쉬운 모양인지 힐더크는 입맛을 다시며 나이트호크 세트가 들어 있는 상자와 두자루의 장검을 가지고 왔다.
"어때? 나는 장검보다 단검이나 다른 무기를 좋아하거든. 그렇지만 꽤 좋은 검이니까."
"스르릉."
"호오. 이거 좋군요."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오는 섬뜩한 소리에 운현은 감탄하며 검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균형도 좋고 어디 이 나간 곳도 없다. 그가 검자루를 잡고 가볍게 검을 움직여보자 힐더크는 히죽 웃은 후 말했다.
"베는 맛도 꽤 좋다고. 경도나 내구도 좋고 말야. 뭐하면 짚단이라도 베어보겠어?"
"하하하... 좋은 검이겠죠. 뭐."
자신의 손에 들린 이상 고블린의 이빠진 숏소드도 막강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어차피 무기라는 것은 특별한 마법이 걸리지 않는 이상 압도적인 실력차를 이길 수 없다. 이 세계에서 최강의 레벨이라고 할 수 있는 450 레벨의 스테이터스 뿐만 아니라 레벨업의 효과로 얻은 스탯까지 모두 보유한 채 온 운현이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검을 검집에 넣었다.
"여기요."
"흐음... 이거 돈만 받기 아쉽네. 어떻게 한번 안될까?"
과거의 운현보다 지금의 운현이 더 취향인 것일까? 힐더크는 입술을 핥으며 요염한 어조로 말했지만 운현은 그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 이었다. 그가 계속 거부하자 힐더크는 시무룩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다음에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면 찾아뵙지요."
"정말?"
"물론이죠."
"꼭이야! 꼭! 그때를 대비해서 좋은 장비를 마련해줄테니까."
공짜로 안을 생각은 없는 힐더크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웃음을 뒤로 한 채 가게를 나온 운현은 성당을 향해 천천히 길을 걸었다.
"이보게."
"음?"
노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운현은 하얀 귀와 꼬리가 인상적인 노파가 쪼그리고 앉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일은 없었는데...'
"뭡니까?"
"뭔가 근심걱정이 가득한 얼굴인데... 어디 점 볼 생각 없나?"
"제 얼굴의 어딜 보고 근심걱정이 가득한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점이라..."
그녀의 말에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피식 웃은 후 그녀에게 다가갔다. 좌판을 깔아 두고 검은 로브로 몸을 두르고 있는 묘족 노파가 실실 웃으며 손을 내밀자 그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운현은 은화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무슨 점을 봅니까?"
"연애, 재물, 학업, 그 외에 전부. 자신이 하는 일이 성공하는지 아닌지 알고 싶다면 그것을 가르쳐 줄 수도 있지."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지금 목표로 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어찌되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흐음... 어디보자."
그의 말에 노파는 운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어라?"
"뭡니까. 왜 그런..."
"자네... 사람이 맞나?"
"......."
"이상한데..."
그녀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의 말에 운현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그녀는 정말 이상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왜 이렇게 자네의 주변에 죽음의 기운이 많나?"
"아... 제가 모험자라서."
"아니... 미래에. 자네의 미래에 자네와 깊은 관계를 맺은 이들의 죽음이 넘쳐나는군. 그리고 자네는... 으음. 이런 것을 말해도 되려나 모르겠네."
"해보시죠."
지금의 정해져 있는 운명을 따르면 자신과 깊이 관계를 맺은 이들은 모두 죽는다. 그것을 알아냈다면 이 노파가 보통 노인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운명을 읽은 셈이니 말이다.
"한없이 절망하게 될 것일세. 자네가 원하는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실패할 걸세."
"그럴지도 모르죠."
'운명의 흐름을 읽는 것이 점. 운명을 거스르고 그것을 무너트리려는 나에게 있어서는 더할나위 없는 좋은 답변이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운명의 흐름을 따른다면 절망하겠지만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운현이 아니었다. 운현은 그녀의 점에 웃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를 다급히 잡은 노파는 황급히 바닥에 있는 물건 중 하나를 들어 보여주었다.
"괜찮다면 자네에게 달라붙은 악운을 떼어주고 싶은데... 이거라도 사게나."
"...잠깐만요. 가져가게가 아니라 사게나?"
"당연하지. 이 귀한 것을 그냥 줄 줄 알았나? 이것이 자네의 인생에서 큰 도움이 될텐데."
노파는 운현의 말에 어이없어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고 노파는 히죽 웃은 후 차분히 말했다.
"오백골드만 내게."
"비싸!"
노파가 내민 것은 작은 브로치였다. 아무리 봐도 마력 따위 느껴지지 않는 브로치였다. 그것이 오백골드나 하는 것에 운현이 어이없어하며 말하자 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라그랏슈 가문의 비전이 담겨 있는 브로치네. 그것을 단돈 오백골드에 산다면 오히려 싼거지. 이것을 사려고 마을에 찾아오는 외부인이 있을 정도니까 말야."
"라그랏슈... 혹시. 당신이 바운티아 라그랏슈?"
그녀의 말에 운현은 미야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이름을 떠올렸다. 미야의 부족 족장인, 세계 최고의 점쟁이 바운티아 라그랏슈. 그 라그랏슈라는 단어가 나오자 운현은 그녀를 보며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비나 라그랏슈. 바운티아 라그랏슈는 내 사촌 언니지."
"흐음..."
그녀의 말에 운현은 생각했다. 점이라는 것은 그저 배넘효과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는 운현이고, 또 그녀가 말한 것은 잘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맞을 법한 이야기였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언제나 죽음을 옆에 둔다는 것이다. 미래에 죽음이 넘쳐나는 것은 어찌보면 모든 이에게 공통적으로 통하는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자요."
하지만 운현은 그녀의 말에 순순히 오백골드를 지불했다. 단순한 기분 전환이다. 이것을 전부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이라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마음을 다질 수 있다면 오백골드는 싼 것이다. 운현이 순순히 오백골드를 지불하자 그것을 보며 비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뭡니까?"
"아니, 그냥 거렁뱅이로 보였는데... 혹시 다른 물품은 필요 없나?"
"됐어요. 호구 잡으려면 딴 사람 잡으시죠."
"케케케... 좋아. 좋은 호갱님께 한가지 조언을 해주지."
"뭔 조언을..."
"내일, 남쪽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가게. 그곳에서 자네는 귀인을 만날거야. 자네의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되겠지."
"하하... 그거요."
내일. 자신이 이세계에 오고 나서 그 다음날. 운현은 헤스티아와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것을 비나가 맞추자 운현은 빙그레 웃은 후 조용히 말했다.
"이미 알고 있는 거네요."
"...혹시 동종업계 종사잔가?"
그의 말에 비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고 운현은 그저 말없이 웃으며 성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