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40)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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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여긴..."

낡은 골방에서 몸을 일으킨 사내는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나갔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다. 그곳에서 나온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긴... 아니야... 내 세계가 아니야."

제대로 치우지 않아 냄새가 나는 허름한 방. 이곳이 나의 공간일리가 없다.

"유리아...!"

동료들을 찾아야 한다. 나의 연인들을 찾아야 한다.

그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칼을 주웠다. 뭐지? 종이처럼 가벼웠던 단검이 무겁다. 몸이 무겁다. 한걸음 한걸음 옮길때마다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큭... 상태이상 마법이라도 걸린건가."

그는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딘가의 건물이다. 비틀거리며 걷던 그는 구르듯 계단을 내려갔다. 아프다. 힐링을 걸어 줄 사제는 없나?

"으으..."

주변을 두리번거린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고함을 내질렀다.

"어디냐!! 마왕!! 마왕 빌피오르!!"

그가 칼을 들고 성난 얼굴로 외치자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갔다. 그런 그들을 보며 자신의 스킬이 성공했다 생각한 그는 터덜터덜 걸었다.

"흐흐흠~"

오늘은 사랑스러운 아들과 저녁식사가 예정되어 있다. 이제는 자신의 희망이라고 할 만한 녀석이다. 어미 없이 자라면서도 한번도 비뚫어지지 않은, 자신에게는 과분하기 그지 없는 아들과 오래간만에 외식을 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진 이선우는 생글생글 웃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응. 어디니~ 아들아."

[조금만 있으면 도착해요.]

"그래. 아. 세인이랑 세연이도 불렀니?"

[네. 너무 걱정 마세요.]

아들의 소꿉친구이며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쌍둥이 미소녀들. 아들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귀여운 아이들을 떠올리며 그는 빙긋 웃었다. 매일 야근에 주말에도 출근을 하는 그는 이번 보너스로 구매한. 요새 없으면 없는 집 자식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가상현실 접속기 구매권을 들었다.

"우리 혁이가 좋아하겠지?"

아들의 18번째 생일 선물이다. 그동안 이렇게 잘 자라 준 녀석에 대한 자신의 보답이며, 사랑하는 아들에게 줄 선물이다. 없는 형편이라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TV에서 광고를 할 때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것이 안쓰러웠던 그는 구매권을 소중히 주머니에 넣었다.

"응? 저 사람은...?"

왠 청년이 비틀거리며 칼을 들고 걷고 있는 것을 보며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다친 사람인가? 아니면... 그는 걸어오는 사내를 보며 떨떠름히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아아아아악!! 죽어!!!"

칼을 든, 어딘지 이상해보이는 사내는 광기어린 외침을 토해내며 자신의 앞에 있던 여자를 향해 달려갔다. 일반인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빠른 움직임에 놀란 여인은 그것을 보며 비명을 내질렀다.

"꺄아아아아악!!"

"이런!"

항상 아들에게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던 자신에게 있어서 이런 상황은 그냥 넘어가지 못할 일이었다. 그는 여인을 공격하는 사내를 막았다.

"무슨 힘이...!?"

건설현장의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지만 나름 현장 작업을 도와주고 있는지라 젊은 청년보다 힘이 강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거품을 물며 달려드는 사내의 힘에 당황했다. 비쩍 마른 주제에 이런 힘이라니? 그는 힘에서 밀리며 뒤에 있는 여인에게 외쳤다.

"아가씨!! 도망가! 어서 다른 사람을 불러!"

"네, 네에!!"

그녀가 사람을 부르기 위해 도망가자 선우는 필사적으로 그를 막았다. 어떻게든 여자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그녀를 잡으려 자신을 뿌리치는 그의 허리를 잡은 선우는 그를 들어 힘껏 던졌다.

"크악!!"

"헉...헉... 이봐! 정신 차려!! 뭐하는 짓이야!!"

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자신과 청년의 싸움, 그리고 청년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을 보고 도망가버렸다. 남은 것은 자신과 그 뿐이라는 것에 선우는 빠득 이를 갈았다.

"나도 도망가고 싶지만..."

지금 이 남자를 여기 잡아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남자가 어떤 짓을 할지 몰랐다.

'사람은 정의로워야 한다. 악에 물들지 말고,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정의를 관철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남자라는 것이다. 알겠니?'

항상 아들에게 자랑하듯이 말했던 자신이다. 아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선우는 차마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는 청년을 노려보았다.

"아버지의 힘을 보여주지!!"

"야. 내가 가도 되냐? 아니 내가 니네 밥먹는데 왜 껴야되냐?"

"괜찮다니까. 그냥 오빠는 아무말 하지 말고 밥만 먹고 가. 큰엄마가 시켰단 말야. 좀 나이 먹었으면 큰엄마 속 좀 그만 썩혀."

"그리고 백수 오빠 배에 기름칠 시켜주는 동생들에게 고맙다고는 못할 망정 그게 무슨 태도야? 오빠가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같이 밥 먹을 정도의 사이도 아니지. 막말로 몇번 본게 단데."

"됐어. 됐어. 이번엔 우리가 살거니까 그냥 오빠는 아무 말하지 말고 그냥 퍼먹고 가. 큰엄마한테 오빠 밥 먹이라고 용돈까지 잔뜩 받았다고."

"먹다 체하겠다... 알았어."

사촌동생인 세인이가 옆구리를 푹푹 찌르며 말하자 운현은 귀찮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오늘은 새로 나온 게임을 분석해야 한다. 팀 레이스가 정식으로 활동하며 많은 패치를 만들어내기 시작하고 기존의 가상현실 게임들을 말 그대로 탈탈 털어버리자 후속주자들은 긴장했다.

왠 정체불명의 집단이 대기업의 게임을 정말 가루가 되도록 까버린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게임의 문제점부터 시작해서 기반 시스템, 어중간한 리미터. 몇번 해보면 느낄 수 있는 부족한 리얼감. 그런 것들을 그들이 지적하며 보완시키는 패치를 만들어내자 진 삼국 연희무쌍을 만들어낸 개발사는 결국 그들의 패치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굴욕일 수 밖에 없다. 팀원은 고작해야 셋에 불과했는데 거대 기업이 그들에게 굴복해버린 것이다. 어찌 굴욕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팀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고작해야 아직 박사학위조차 따지 못한 대학원생이라고 하니 더욱 굴욕적일 것이다.

결국 그들의 지적을 피하기 위해 개발사들은 다음 게임을 만들때 신중해질 수 밖에 없었다. 더욱 현실감있게, 더욱 재미있게. 그들은 그렇게 건드리면 안되는 선을 건드리고 말았다. 운현이 걸어 둔 리미터를 해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 개입해야 하나... 리미터 그렇게 함부로 해제해서 사고나면 규제가 엄청 걸릴텐데...'

리미터를 해제하지 않고 현실감을 살리는 방법은 아직 운현으로서도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그거 연구하라고 개발사들의 게임을 털었는데 이 미친 인간들이 어려운 방법보다는 쉬운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것에 대한 지적과 문제성에 대해서 정리를 하고 내일 발표를 할 생각이었던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혼자서는 발표 못하니 뭐...'

괜한 일로 얽매여서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운현과 만들어내는 패치마다 상상을 초월하는 변태 패치인 라젠카. 이 둘보다는 얼굴마담으로 나오기에 좋은 것이 김박사였다. 어쨌든 고졸인 운현이나 마찬가지로 고졸인 라젠카보다 학벌이 좋으니 말이다.

"하아... 공식적으로 움직이는건 정말 귀찮은 일이구만."

여차하면 미혜나 원석을 끌어들여야겠다. 미헤라면 기쁘게 받아 줄 것이고 원석이라면 궁시렁거리겠지만 침투경 몇방 날려주면 되겠지.

아무튼 그 부분에 대해서는 김박사나 라젠카도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 것이라 오늘 회의를 통해 다음 진행 방향을 결정하기로 했었던 운현이었지만 그 회의는 미뤄지고 말았다. 김박사가 논문을 써야한다고 하고 라젠카가 큰 거래 때문에 일본에 가야 한다고 한 것 때문에 시간이 비어버린 것이다.

"집에서 책이나 읽으려고 했는데."

"에이~ 오빠도 오래간만에 보는 거잖아~ 그리고 혁이가 얼마나 대단한데. 오빠도 좀 보고 배워. 걔 이번에 가상현실 공학 부분에서 상도 탔다고. 그거 축하 겸 가는 거니까. 응? 오빠도 가상현실에 대해서 관심 많잖아. 집에 가보니까 책들 대부분이 가상현실관련된 부분이더만."

긴 머리의 한세인, 단발에 안경을 쓴 한세연. 둘 다 연예인을 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미모의 소녀들이다. 그녀들과 함께 길을 걷는 운현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목 늘어난 티. 후즐근한 반바지. 싸구려 신발. 파란색으로 염색한 긴 머리를 대충 묶고 있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양아치 백수의 모습이었다. 그것을 보며 남자들은 부럽다는 표정을, 여자들은 왜 저런 인간이랑 같이? 혹시 부잔가? 라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운현의 입장에서는 딱히 기쁠 일도, 좋을 일도 아니었다.

"큰 엄마가 오빠 밥 잘 먹고 다니나 감시하라고 했다고."

"사법고시 준비 중이라는 인간이 머리꼬라지는 그게 뭐야?"

"냅둬."

한세인과 한세연의 갈굼을 귓등으로 넘기며 운현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현역 미소녀 고등학생 둘이 옆에 있는데 대놓고 담배를 피려는 그의 모습에 한세인은 기가막혀하며 그의 옆구리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크억!"

사실 아프지도 않지만 이런 모션을 취해줘야 갈굼이 없다. 운현은 입에 문 담배를 담배갑에 집어 넣었다.

"담배피는 건 좋은데 꼭 여기서 길빵을 해야겠어?"

"저기 골목에 들어가서 피고 오든가."

"에이 씨."

운현이 궁시렁거리며 골목으로 향하자 한세인과 한세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큰어머니에게 듣기로 뭔가 큰 일이 있어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치룬 후 사법고시를 준비한다고 하는데 하는 꼴을 보니 공부는 커녕 제대로 살 수나 있을지가 걱정이다.

"그나저나 혁이는?"

"응. 조금 있으면 온대... 헤헤... 오늘은 아저씨랑 같이 혁이 생일 축하 파티네."

"너 혁이 좋아하지? 언제 고백할거야?"

자신의 쌍둥이 동생 세연을 보며 세인은 빙긋 웃었다. 자신 역시 그를 좋아하긴 하지만 동생이 먼저 좋아해서 양보를 하려고 하는 그녀가 말하자 세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언니는?"

"나, 나? 나... 난 걔 그냥 친군데."

"거짓말 하지마."

"...혁이한테는 얘기하지마."

세인이 떨떠름히 말하자 세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 언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니까. 그녀가 자신을 위해서 그 마음을 숨기려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세연은 멀리서 한 소년이 다가오자 손을 흔들었다.

"혁아!!"

"아. 세인아. 세연아."

짧은 머리에 순진해보이는 착한 고등학생이다. 교복을 입고 있는 그는 세인과 세연을 향해 뛰어갔다. 그가 다가오자 그녀들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와... 오늘 예쁘게 입고 왔네?"

늘상 입던 교복이 아닌 화사한 원피스를 입은 세연, 캐쥬얼하지만 세련미가 넘치는 복장을 한 세인을 보며 소년이 생긋 웃자 세연과 세인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이 녀석은 항상 자각없이 이런 얘길르 꺼내는게 문제다.

"어? 그런데... 다른 사람 데리고 온다고 하지 않았어?"

"어... 이 인간은 담배피러 어디까지 간거야?"

운현이 담배를 피러 간다고 하고 사라진 것에 당황한 세인은 골목 쪽을 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한숨을 내쉰 그녀는 운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가게 이름이랑 주소 찍어줄테니까 그리로 와.]

가볍게 문자를 보낸 그녀는 소년을 향해 느긋하게 말했다.

"어서 가자. 아저씨 기다리시겠아."

"응... 그치만 기다리는게 좋지 않을까? 헤메실지도 모르고. 너희 사촌 오빠라면서?"

"너도 옛날에 봤을 텐데... 기억 안나? 운현오빠."

"혁이 너랑도 몇번 놀았던 것 같은데."

"하하하..."

소년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리자 세인과 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야 파란 머리에 동네 양아치 백수이지만 그때당시만 해도 운현은 별 특징없는 소년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서 가자. 사혁. 아저씨 기다리시겠다."

운현에게 답장이 오지 않자 핸드폰을 빤히 바라보던 세인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아쉬움 없이 말했다. 만약 도망친 것이라면 큰엄마에게 이르면 된다. 그럼 혼은 큰어머니가 내주시겠지. 그렇게 생각한 세인과 세연, 그리고 사혁이 약속장소인 고깃집 근처로 향했을 때 그들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이지?"

"글세? 한번 가볼까?"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을 보며 사혁은 고개를 갸웃거린 후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갔고 그 순간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 아빠!?"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하나 뿐인 가족인 아버지가 복부와 가슴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본 그는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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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라이터가 고장났을 줄이야. 하... 되는 일도 없지."

골목에 들어와 라이터를 키던 그는 라이터가 고장난 것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 오는 동네다보니 편의점이나 슈퍼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궁시렁거린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 골목의 반대편으로 빠져나와 근처에 보이는 슈퍼에 들어가 라이터를 하나 사가지고 나왔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 연기를 빨아들인 운현이 터덜터덜 다시 세인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던 그는 왠 아가씨가 울먹거리며 자신에게 달려오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뭡니까."

"도, 도와주세요!"

"에?"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그녀가 달려 온 쪽에서 피투성이의 남자가 칼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맞았는지 얼굴 여기저기에 멍이 들어 있었지만 그의 옷을 적시고 있는 피는 자신의 피가 아닌 듯 보였다. 손에 들고 있는 식칼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며 담배를 핀 운현은 자신을 꽉 잡고 덜덜 떨고 있는 여자를 뒤로 보냈다.

"구급차나 불러주세요."

"네!? 겨, 경찰이 아니구요!?"

"경찰도 부르고."

"그런데 구급차는 왜...?"

"저거 미친놈 같으니까."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 그리고 넘쳐오르는 위화감. 그것을 보며 운현은 저 남자가 어떤 상태인지 깨달았다. 저 인간. 가상현실 중독자다. 과거 윤지나 찬성이 보였던 것과 같은 눈빛을 본 운현은 고개를 까딱거린 후 손을 뻗었다.

"와라."

"카아아아아!! 마왕의 졸개!!"

그는 침을 질질 흘리며 인간같지 않은 속도로 달려들었다. 가상현실은 인간의 뇌를 건드리는 부분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신체 성능을 모두 발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 출시된 게임들은 조금씩 리미터를 해제하여 현실감을 증대시키려 했고 결국 그것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정신이 나가버림과 동시에 육체의 리미터까지 해제해버린 것 같아보인다.

'이거 연구 대상이군.'

광기를 마구 흩뿌리며 그가 달려오자 운현은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식칼을 가볍게 피한 후 그의 다리를 걸었다. 그가 바닥을 구르자 운현은 그가 칼을 들고 있는 손을 잡고 그대로 비틀었다.

"빠각!"

"크악!!"

"연구대상은 연구대상이고..."

운현은 입에 담배를 문 채 그의 다른 팔을 잡았다. 팔이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그가 개거품을 물고 다시 일어나려 하자 나머지 팔도 부러트려버린 운현은 두 다리도 가볍게 부러트렸다.

"어...어...?"

그냥 동네 양아치 백수로 보이는 인간이 저 미친놈을 손쉽게 잡아버리자 그녀는 당황했다. 뭐란 말인가. 아까 덩치 큰 아저씨조차 그를 막는 것이 다였는데. 운현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어, 어떡해요!"

"뭐가요?"

소란을 보고 사람들이 나온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할 일이 남았단 말인가?

"아까... 어떤 아저씨가 저 사람을 막았는데..."

그제서야 저 미친놈을 막기 위해 어떤 아저씨가 나섰고, 그때 저 사람에게 저 정도의 피가 없었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는 당황하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운현은 얼굴을 감싸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씨발.'

결국 일이 터졌구나. 이걸로 자신의 계획이 상당부분 늦어지게 생겼다. 가상현실 게임으로 인해 이런 사고가 터졌다면 한국 정부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엄청난 제제를 걸 것이 분명했다.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뭐야."

세인의 문자다. 지금은 그것을 신경 쓸 여력따위는 없었다. 운현은 그녀의 문자를 무시한 후 현재 상황과 그것을 무마시켜달라는 문자를 원석에게 보낸 후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아가씨? 구급차는 불렀고? 경찰은?"

"아... 아. 네."

운현이 워낙 빠르게 그를 제압해버려 전화를 하지 못한 그녀가 경찰과 구급차를 부르자 운현은 담배를 비벼 끈 후 다른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진짜 되는 일도 없지. 개 시발.'

경찰이 오자 자신의 신분을 밝힌 운현은 미국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파란 머리에 동네 양아치 백수 꼴을 하고 있던 운현을 보며 귀찮은 표정을 짓던 그들은 운현이 대사 신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파랗게 질렸다. 한국인이 미국 대사를 공격한 것이다. 자칫 잘못했다간 국제적인 이슈가 만들어 질 수 있기에 그들은 어떻게든 운현을 잡으려 했지만 운현은 나중에 하자고 한 후 그대로 현장에서 떠나 약속장소로 향했다.

'세인이한테 쌍욕 먹겠군.'

터덜터덜 약속장소인 고깃집으로 걸어간 운현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남자의 우는 목소리와 세인이, 세연이의 우는 소리에 운현은 사람들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세인아! 세연아!!"

"흐아아아앙!! 오빠!!"

"어떡해... 아저씨가... 아저씨가..."

"아아...아...아빠... 아빠..."

'빌어먹을.'

아까 사지를 박살내버린 미친놈의 몸에 뭍어 있는 피의 정체를 알게 된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사고를 쳐버렸다. 그것도 아주 큰 사고를.

"아빠...아빠아아!! 아아아아악!!"

아버지가 죽은 것에 절망하던 소년이 결국 쓰러져 기절해버리자 세인과 세연은 그를 잡고 엉엉 울었다. 그들을 말없이 지켜보던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죽지만 않았다면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밀치며 칼에 찔린 중년인의 상태를 확인해 본 운현은 천천히 손을 뗐다. 이미 죽어버린 것이다.

'나라고 하더라도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없지.'

이것은 현실이다. 만약 게임이라면 죽어버린 NPC를 살리는 것처럼 살릴 수 있겠지만 이 현실 속에서 가짜 신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운현은 무력히, 기절한 소년을 안고 엉엉 우는 사촌동생들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운현이 그 미친놈을 잡아줬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인사했다. 그의 인사에 운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얘기는 들어봤는데."

"네..."

"그 새끼에 대한 처벌은 없다더라. 그냥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거래."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운현의 말에 사혁은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를 죽였다. 자신이 찢어 죽여도 모자랄 판국에 뭐라고? 처벌이 없다고? 정신병원에 감금당하는게 다라고? 사혁의 말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한도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관련 법이 없는데다가 그 새끼의 상태가 완전히 맛이 가버려서 수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 그가 즐기던 가상현실 게임으로 인해서 그의 뇌가 미쳐버린 것이거든. 탓하려면 그런 병신같은 가상현실 게임을 만든 새끼들을 조져야지."

운현으로서도 상당히 열받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가상현실 게임에 대한 세간의 시선이 나빠졌고 그와 동시에 발매 예정이던 몇가지 게임이 발매를 취소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각 회사들에 대한 정부와 가상현실 협회 주도의 감사가 이루어져 제대로 된 리미터를 검증받고 그것에 대해 가상현실 협회에 등록하지 않으면 게임 출시를 못하게 막겠다는 정부측 이야기를 떠올린 운현이 이를 드러내며 싸늘히 말하자 사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버지를... 죽인 놈이..."

"아. 그리고 내가 잘 부숴놔서 이제 자기 손으로 밥 처먹을 수 있는 일은 없을거야."

"......"

운현이 어느정도 응징을 해놨다고 하지만 사혁은 참을 수 없었다. 그 미친 놈을 그냥 놔둔다고? 그 개자식을 그냥 놔둔다고?

"애초에 문제는 주제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그저 현실감만을 살리기 위해 리미터를 건드려버린 그 게임사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어."

"하...하하하..."

그의 말을 귓등으로 넘기며 사혁은 절망했다. 왜 아버지가 죽어야 하는가. 왜 그 미친놈을 만들어서 아버지가 죽어야 했는가.

"...가상현실... 게임이라구요?"

그건 흉기다. 그런 미친놈을 만들어내는 것이 게임이라고? 그건 더할 나위 없는 악이며 증오해 마지해야 할 마다. 사혁은 이를 갈며 운현을 보았다.

"가상현실... 그게 이런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나요?"

"나야 모르지."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에게 답한 후 그를 데리고 나갔다. 걱정스레 자신들을 바라보는 세인과 세연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그는 어둠이 내려앉은 병원 밖 흡연구역으로 그와 함게 온 후 그에게 담배를 주었다.

"피나?"

"...아뇨."

복잡한 얼굴로 사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말에 빙긋 웃은 운현은 그의 입술에 담배를 물려주고 불을 붙였다. 뭘 하자는 것인가. 텅 빈 눈으로 사혁이 자신을 바라보자 그의 담배에 불을 붙인 운현은 자신의 입에도 담배를 문 후 담담히 말했다.

"담배를 핀지 벌써 몇년은 된 것 같은데 아직도 담배는 나한테 안맞는 것 같단 말이지."

"그런데 왜... 피시는 거에요?"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해서."

"...네?"

사혁은 운현의 말에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운현은 주머니에서 피에 젖은 가상현실 캡슐 교환권과 작은 생일카드 하나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죽은 그의 아버지 품에서 나온 것이다.

"이게..."

"너희 아버지가 너에게 생일 선물로 주시려던 것 같은데."

"흑..."

사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가 교환권과 카드를 들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바라보며 운현은 폐 안 깊숙히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폐가 따끔거리며 담배연기가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을 느낀 운현은 사혁의 어깨를 잡고 싸늘히 말했다.

"가상현실 접속기라... 가상현실에 관심이 많았나?"

"이제는 싫어요... 아버지를 죽게 만든... 그런 인간들을 만들어내는 것 따위..."

"그렇다면 관심을 가지는게 낫지 않을까?"

"......?"

운현은 사혁의 텅 빈 눈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의 눈이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목적조차 잃어버린 빈껍데기. 그냥 내버려 둔다면 사혁은 그저 아무것 조차 할 수 없는 폐인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쓴다.'

본의는 아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어찌보면 인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만나기 전 세연과 세인에게 사혁이라는 녀석이 얼마나 대단하고, 얼마나 총명한 녀석인지에 대해서 들었다. 물론 척 봐도 콩깍지가 씌인 녀석들이니만큼 어느정도는 허풍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사혁의 고등학교 성적이나 가상현실 부분 수상 경력만 따져도 보통 녀석은 아닌 듯 싶었다.

'라젠카나 김박사. 그 외에 카페의 잉여인간들 중에서 패치 만드는 인간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나이는 확실히 의미가 없지. 중요한 것은 목적의식이다.'

박사학위를 따고 가상현실에 대해서 아네 모르네 떠드는 인간들보다 차라리 이런 이들이 나을지도 몰랐다.

김박사는 이제 세상에 나온지 몇년 되지도 않은 가상현실 부분의 박사라고 떠드는 인간들을 비웃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라젠카는 자신의 사업을 완전히 무너트려버린 가상현실에 대한 분노와 그것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버리겠다는 변태적인 욕망로 연구를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사혁은?

운현은 그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그저 손 놓은 채 멍하니 시간만 보낼것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반드시 이런 일은 또 생길 것이고 너와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은 점점 늘어나겠지."

"....."

사혁이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연기를 내뿜었다. 그 담배 연기를 마시며 사혁의 눈에 눈물이 고이자 운현은 다시 그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었다.

"그렇다면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너의 아버지를 앗아간 미친놈을 만들어낸 가상현실. 그들이 진짜의 세계라고 구축해내는 그 잘못된 세계를 무너트리는 것. 그것이 너의 복수가 되지 않을까?"

"그건... 저보고 가상현실을 연구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너의 아버지를 앗아간 세계를 연구해라. 그리고... 그것을 파괴해라. 그들이 만들어낸 잘못된 가짜를 부수고 비웃고 조롱하여 너와 같은 피해자가 생겨나지 않게 해라."

"...저는..."

사혁이 망설이자 운현은 그의 어깨를 잡은 후 작은 쪽지에 자신의 집 주소와 핸드폰 번호를 적어 준 후 말했다.

"뭐, 동생들에 대한 정이다. 너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지. 그를 죽일 것인지. 아니면 가상현실을 무너트릴 것인지. 결정해라. 만약 그를 죽이고 싶다면 네 손으로 죽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지. 하지만 그것이 아닌, 가상현실을 무너트릴 것이라면 이 집으로 찾아와라."

씨앗은 던져 놨으니 그것을 피울 것인지, 아니면 씹어먹을 것인지는 사혁이 결정할 일이다. 운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 흡연실을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사혁은 입에 물려 있는 담배의 감촉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연기를, 눈물이 나올정도로 매운 연기를 힘껏 빨아들인 후 주먹을 꽉 쥐었다.

사혁과 만나고 나서 일주일이 지났다. 뉴스에서는 가상현실에 대한 문제,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운현은 그것이 곧 사그라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돈이 되니까.'

사고가 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금방 무마될 것이다. 문제는 리미터를 해제한 개발사에 있지 가상현실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극한의 리얼을 추구하는 개발사, 그리고 그것을 원하는 소비자.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득을 위해서 정부는 가상현실 게임을 절대 막지 못할 것이다.

'원석도 그랬고.'

성경 그룹의 총재로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과 선이 닿아 있는 그의 말이니만큼 확실할 것이다. 운현은 무덤덤한 얼굴로 티비를 보다가 초인종이 울리자 현관의 문을 열어주고 안으로 끌어들였다.

"....."

사흘만에 시체처럼 변해버린 그를 보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처럼 홀쭉 말라 있는 얼굴. 그렇지만 그 눈에 담겨 있는 강렬한 의지와 증오. 운현은 그의 모습에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결정했나? 아니... 물어 볼 필요도 없겠군. 전화가 아니라 날 찾아 온 것을 보니."

"...한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얼마든지."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만들어낸 가짜 세계를 뭉개버릴 수 있을까요?"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확신을 원하고 있었다. 자신이 가상현실을,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거대 개발사들과 싸울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운현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싸늘히 말했다.

"반드시 할 수 있다."

'절대 못하겠지.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넌 나를 위해서 움직여줘야겠다. 만약 플랜 B대로 일이 흘러간다면...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당신은 누구입니까. 누구길래...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까."

사혁은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세인과 세연에게 들었지만 그저 사법고시를 준비한다는 이유로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는 백수 오빠라고 했다.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특별함도 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 저렇게 자신만만한 것인가.

사혁의 질문을 받은 운현은 작게 키득거린 후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후 그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것을 받은 사혁이 힘없이 연기를 빨아들이자 운현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글쎄... 이제는 나도 모르겠군. 그래도 한가지 말하라고 한다면..."

자신이 누구냐고 묻는 이들에게 언제나 내뱉는 말. 운현은 사혁을 날카로운 눈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마왕."

282====================

마지막

정부 규모에서 가상현실게임에 대한 제제를 걸었지만 운현의 예상대로 그 제제는 오래 가지 못했다. 엄청난 로비, 그리고 사람들의 분노에 결국 정부는 가상현실 게임에 대한 제제를 풀었고 사람들은 다시 가상현실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고작 팔개월. 사혁의 아버지가 가상현실 중독자에 대한 사고로 죽은지 8개월만에 가상현실에 대한 제제가 풀린 것이다.

"이번에는 좀 다른 겁니다."

마이크에 대고 운현은 느긋하게 말했다. 가상현실과 현실간의 괴리감, 그 위화감을 없애기 위해서 리미터를 해제하는 것은 좋다. 그동안의 많은 연구로 가상현실과 현실과의 차이점을 분석한 팀 레이스는 결국 한가지 대안을 내놓게 되었다.

"시간을 조정합시다. 인식하고 있는 시간과 다른 현실 시간을 제시하여 그것으로 사용자가 그 세계가 가짜라는 것을 인식하게 합시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위험합니다.]

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고작 8개월만에 사혁은 운현이 준 모든 연구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였고 벌써 팀 레이스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시간의 비율을 조정한다 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매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합니다. 리미터를 제외하고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키려고 하는 의식을 하게 해야 하는데...]

자신의 의견에 사혁이 반대했지만 운현은 그다지 기분나빠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시도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3:1. 그럼 이번 것은 시간 배율의 조정으로 하죠."

[테스트는 레드님이 하실 건가요?]

"그러죠. 결과서는 일주일 후에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느정도 진행한 소스코드는 언제나처럼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성경과 거래를 끊었지만 장대인과의 커넥션은 아직 남아 있었다. 성경과 거래를 끊고 미혜와 함께 중국으로 가서 장대인의 관절염과 그의 부하들 몇을 치료해 준 후 운현은 그와 독자적인 거래망을 가지게 되었다. 실험체를 원하는 운현, 그리고 밀수를 원하는 장대인. 그와 손을 잡고 실험체가 필요할 때마다 중국인, 혹은 조선족을 통해 실험체를 공급받았던 운현은 컴퓨터를 끄고 밖으로 나갔다.

"어서 오십시요."

동네 근처에 있는 양꼬치집에 들어간 운현은 자신에게 정중히 인사하는 커다란 덩치의 주방장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의 냉장고를 살짝 밀어 그 뒤의 비밀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간 운현은 혈향이 물씬 풍기는 방문을 두들겼다.

"들어갑니다. 삼주만인가요? 정청씨."

"아아. 어서오십시요. 한대인. 오늘은 몇일이나 있으실 예정이십니까?"

"일주일 정도면 될겁니다."

레이스의 팀원들에게 말하기 전부터 현실감을 살리며 리미터를 해제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은 하고 있었던 운현이다. 코드로 현실감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 스스로 위화감을 느끼고 자신이 즐기는 세계가 가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방법으로 생각한 것 중 한가지를 선택한 운현은 샘플로 만든 코드를 개조한 접속기에 넣고 몇가지 설정을 수정했다.

"오늘은 이분인가요?"

씩씩거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사내에게 다가간 운현은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양 팔이 묶인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그가 자신을 죽일 듯 째려보는 것에 키득거린 운현은 그의 뺨을 몇대 후려갈긴 후 물었다.

"이놈은 뭐하다가 잡힌 놈인가요?"

"에... 조선족인데요. 인신매매요. 애들 잡아다가 앵벌이로 팔아먹고 있는 아주 악질인 놈이죠."

유창한 한국어로 그가 답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악질이라... 눈 앞의 사내가 하는 일들을 생각하면 인신매매는 귀여운 축에 속할지도 몰랐다.

"예~! 생명연장의 꿈을 이루어드리는 한수 매매원입니다."

장기매매까지 하는 인간이나 인신매매를 하는 놈이나. 어차피 운현의 입장에서 보자면 거기서 거기인 놈이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에서 보자면 운현 역시 더할 나위 없는 쓰레기일 것이다. 지금까지 운현이 실험을 한다며 미쳐버리게 만든 인간이 몇인가.

"오...RH + O형이요? 예에... 있죠. 그런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그가 힐끔, 운현의 앞에 있는 사내의 목에 걸려 있는 종이를 보며 말했다. 나이와 혈액형을 확인한 그는 미안한 듯 운현을 보며 친절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한대인. 가급적 빠르게 가능하십니까?"

"뭐, 노력해보죠. 사흘 안에 끝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청은 싱긋 웃은 후 다시 통화를 시작했다. 요새 운현이 하는 실험은 대부분 리미터 해제에 관련된 실험이었다. 그 실험을 하며 뇌의 일부분을 건드리는 것 때문인지 이상하게 장기가 팔팔해지는 것에 그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네네. 알겠습니다. 네에에~"

밝게 웃으며 전화를 끊은 진대인은 콧등에 있는 커다란 상처를 씰룩거리며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삼합회 최고 간부 중 하나인 장대인의 소개로 그를 향해 손을 비비며 말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오늘도 수고하셔야 하는데... 어떻게 양꼬치에 칭따오 한잔 하시겠습니까? 거기에 또 저희 중국의 미녀들이..."

"하하하. 양꼬치는 괜찮지만 미녀와 칭따오는 사양하죠."

"에이~ 참. 한대인님. 나이도 젊으시면서 왜 이렇게 빼십니까. 아무튼 알겠습니다. 야! 음식 준비하라고 해!"

운현과 알게 된 이후 그의 실험을 위해 실험체를 구해다주며 정청은 단 한번도 운현이 술을 마시거나 여자를 탐한 적이 없다는 것에 놀랐다. 장대인이 자신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라는 명령에 이딴 애송이를 왜 그렇게 대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가 보인 놀라운 능력, 그리고 실험이 끝난 인간의 장기가 엄청나게 팔팔해지는 점까지 따지면 확실히 그렇게 대할 만도 했다.

"저기. 한대인."

"네?"

"죄송한데... 저희 애 하나 좀 봐주실 수 있으십니까?"

"애라면...?"

"아. 그... 요 몇일 전에 야쿠자들이랑 한판 했거든요. 저새끼랑 짜고 밀매하던 새끼들인데... 그 새끼들 잡다가 저희 애가 좀 다쳐서."

"뭐. 그러죠."

그레이터 힐 한번 걸어주는게 뭐 어렵겠는가. 운현은 느긋하게 그의 요청에 응하고 정청이 안내한 방으로 향했다.

"여잡니까?"

"네. 야쿠자쪽에 잠입해 있던 앤데. 첩자짓하던게 걸려서 제대로 돌림빵을 당하고 고문을 당했지 뭡니까. 정신도 반쯤 놔버린 것 같고... 상당한 실력을 가진 녀석이고 장대인도 아끼는 애라서..."

"흠..."

침대에 멍청히 앉아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몸 여기저기에 시퍼런 멍이 나 있고 상처를 꿰맨 자국이 있는 것을 본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우웅."

밝은 빛과 함께 그녀의 몸에 나 있던 상처들이 치료되었다. 거친 피부가 깨끗해지고 여기저기 나 있던 멍과 붓기가 사라지며 상처자국이 없어진다.

"이야!! 역시 한대인의 기공술은 정말 대단하군요!"

"별 것 아닙니다. 그렇지만 정신적인 문제는 해결하는게 쉽지 않은데..."

그녀의 눈 앞에서 손가락을 몇번 튕겨 본 운현은 여전히 반응이 없는 그녀를 보며 차분히 말했다. 자폐증의 증세를 보이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운현은 씨익 웃었다.

'이거다.'

"이 아가씨도 그 방으로 옮겨주시죠."

"예? 하지만."

"아아. 실험대상으로 쓰려는 것은 아닙니다. 몇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이죠."

자폐증은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일종의 외부세계와의 격리를 위한 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벽이 생성되는 원리와 해제할 수 있는 방법만 조절할 수 있게만 한다면 사용자는 별다른 리미터 없이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야..."

"그럼 부탁합니다."

운현의 말에 정청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세번째 실험체에게 벽을 세운 후 그에게 모든 리미터를 해제한 채 가상현실 게임을 즐기게 한 운현은 일주일째 리미터를 푼 상태로 게임을 하면서도 게임과 현실을 명확히 구분한 실험체를 보며 키득거렸다.

"방금 네가 한 게임은?"

"위가드."

"네 동생의 이름은?"

"샤오 잔."

"네가 죽인 놈들이 몇명이지?"

"게임에서? 현실에서?"

운현의 질문에 실험체는 순순히 답했다. 헛소리를 하면 맞으니까. 그리고 앞서 이 방에 끌려 온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예상이 갔으니까. 저 무서운 사람들이 이 젊은 남자에게 꾸벅거리는 것을 보면 이 남자가 가장 높은 사람일 것이라 생각한 그는 운현의 실험에 최대한 협조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사는 겁니까?"

"아니. 죽을 것이다."

"네!? 왜, 왜요!?"

"나는 살려줄거지만..."

운현이 살인이 좋아서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고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인성을 부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필요하니까 그렇게 한 것에 불과했다.

실험을 성공한 이상 운현이 그를 죽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저들은 아니겠지.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을 위해서 그의 몸에 있는 장기를 꺼낼 생각을 하던 정청은 그의 정상적인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대인. 어떻게 된겁니까?"

"음? 뭐 말씀이십니까?"

"왜 전과 다른 반응이..."

"아아. 이제 실험은 끝났거든요. 성공했으니 여기까지만 해야겠습니다."

"이런... 이렇게 아쉬울데가."

그 덕분에 상당한 이득을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장기 매매 없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어갈 정도로 질 좋은 장기를 팔게 되었는데 그것도 끝나버린 것이다. 정청이 시무룩해하자 운현은 빙긋 웃은 후 말했다.

"그러실 것 같아서 몇가지 장치를 준비했습니다. 이걸 한시간 정도만 씌우면 됩니다."

운현은 정청에게 헤드기어 하나를 던졌다. 인격을 완전히 부숴버리는 게임이 설치된 접속기다. 그것을 받은 정청이 환하게 웃자 운현은 그를 향해 마주 웃어 준 후 자료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

"대인."

"음? 아아. 이제 많이 괜찮아지셨나보군요. 그... 메이린씨라고 했던가요?"

"네. 대인. 대인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검은 흑발이 아름다운 중국인 미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하자 운현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번 실험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보면 감사인사는 그녀에게 해야 할 터.

"은혜라니요. 별 것 아닙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대인."

"네?"

생글생글 웃는 그를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던 메이린은 그에게 고개를 숙인 후 완전히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대인을 모시고 싶습니다."

"흐음... 장대인의 허락은 맡았나요?"

"네. 대인을 모시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제 허락이 필요하겠군요. 필요 없습니다."

"네? 하지만."

그의 단호한 거절에 메이린은 당황했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자신을 어필하기 시작했다.

"보시다시피 저는 꽤 예쁩니다. 대인께서 원하신다면 저를 이용하여 성욕을.."

"압니다. 하지만 정청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여색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강합니다. 한대인을 위험에서 지킬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허리에서 연검을 뽑았다. 낭창거리는 연검이 뽑혀나오자 그녀는 그것을 빠르게 휘둘렀다. 다루기 힘든 연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그녀가 연검을 쥔 손에 힘을 넣었을 때 연검의 날카로운 날은 책상 위에 있는 펜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대단하군요. 연검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만... 그래도 필요 없습니다."

"한대인. 한대인은 보물입니다. 그 기공치료 뿐만 아니라 가상현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그 능력은 인류에 있어서 큰 보물입니다. 그런 보물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십시요.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운현의 거절에 메이린은 다시 허리를 숙여 부탁했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운현은 그냥 계속 거절만 했다간 끝도 없고, 또 최악의 경우 라티나나 미혜에게 이 여자에 대해서 걸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안그래도 요새 집착이 심한데 이 여자까지 꼈다간 진짜 귀찮아진다. 그리고 운현은 이 메이린이라는 여자의 정신을 분석했을 때 이 여자도 라티나나 미혜처럼 얀끼가 넘치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이런 여자들의 집착은 대단하다. 운현은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저를 상대로 5분을 버틸 수 있다면 제 호위로 인정해드리겠습니다."

"네?"

아무리 봐도 비실비실한 것이 오분은 커녕 오초 안에 그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았던 메이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한수 하는 작자인가? 그녀는 정청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정청은 어깨를 으쓱일 뿐 이었다.

"으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한대인을 다치게 하지는 않겠으니 걱정 마시길."

"저도 살살하죠."

자신만만한 그를 보며 메이린은 살풋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살살 한다라. 자신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자신은 삼합회에서도 특수 임무를 맡을 정도로 강하다. 아무리 운현이 강하다고 해봤자 자신의 상대는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메이린이 웃는 동안 심판을 보기로 한 정청은 동전을 들었다.

"자. 그럼 동전이 떨어지면 시작입니다."

"탱!"

동전이 허공에 날아오르며 바닥에 떨어진 순간. 메이린은 정신을 잃었고 그녀의 늘씬한 복부에 장저를 한방 날려 그녀를 기절시킨 운현은 그 결과에 당황하는 정청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깨어나면 그정도 실력으로 까불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그럼."

"아... 예."

283====================

마지막

운현이 만든 프로토 타입 방어벽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리미터를 대부분 해제한 상태에서도 가상현실 사용자들은 현실의 자신과 게임 속의 자신을 정확히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임 속의 자신과 현실의 자신에 대한 방호벽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한 팀 레이스는 그것을 더욱 보완하여 세간에 발표했다. 많은 이들이 확인을 하고, 또 실험을 하여 그것이 안정적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가상현실 게임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많은 게임이 출시되는 것은 운현에게 있어서 상당히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가상현실 게임들이 출시되자 운현은 가상 현실에 대한 연구보다는 게임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켜나갔다. 현실에서 가지고 있는 힘을 쓰는 것보다 게임 속의 자신이 사용하는 힘에 익숙해 질 정도로, 운현은 게임과 가상현실에 대한 개발에 집중했다.

운현이 스물 아홉살이 될때까지 말이다.

"삼촌!! 빨래 내놓으라고 했지!! 그리고 이것 좀 버리라니까!!"

운현이 오년동안 소중히 간직한 목 늘어난 티셔츠와 반바지를 든 예은은 버럭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좀! 애야!? 응!? 왜 이렇게 말 안들어!? 할머니한테 이른다!?"

"워워. 진정하거라 마이 러블리 니스. 그렇게 인상쓰고 화를 내면 이쁜 얼굴에 주름지잖니."

"이, 이쁜.... 크아아아!! 러블리 니스 같은 소리하고 있네!! 저 게임들도 다 했으면 팔든가 버리든가 좀 하라고!!"

"아하하~ 삼촌~ 또 혼난다~!"

또다른 조카, 둘째 형의 딸 지혜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둘째 형이 떡하니 보내 놓은 귀찮은 짐덩이 2가 깔깔거리며 웃는 것을 본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리 미혜랑 사는게 낫지.'

최소한 잔소리는 하지 않으니까. 예은과 지혜를 돌보, 아니 그들이 자신을 돌보게 되었다는 말에 미혜는 쓴웃음을 지으며 더 이상 운현의 집을 찾지 않았다. 다만 그녀들이 집에 없는 동안 틈틈히 찾아오는 정도에 불과했다.

몇년이나 시간이 흘렀는데도, 미혜는 보답받지 않는 사랑을 계속하고 있었다. 운현이 가상현실 게임이 빠져서 계속 그 세계에 있을 때조차 그녀는 집에 찾아와 운현을 돌봐주었다.

"너도 똑같아!! 속옷 좀 내놓지 말라고!"

"에이~ 삼촌인데 어때~"

자신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글거리며 말하자 예은은 이마에 힘줄을 띄우며 빠득 이를 갈았다. 진짜로 그녀가 화를 내려는 모습에 운현과 지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소를 시작했다.

"이야~ 빨리 치우자~"

"그, 그러게. 삼촌. 분리수거는 내가 할게."

"난 음식물 쓰레기 버리고 올게."

지혜와 운현이 자신의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예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시공부한다는 인간이 고시 공부는 커녕 책 한번 읽지 않는다. 운현의 방에 있는 커다란 책장은 자신이 왔을 때 상당한 먼지로 가득 쌓여져 있었다. 아마 몇년 정도는 보지도 않았다 싶을 정도로 먼지투성이였것을 떠올린 그녀는 운현과 지혜가 분리수거 거리와 음식물쓰레기를 들고 나가자 빽 외쳤다.

"올때 메로나 사와!"

"알았어."

분리수거를 하고 슈퍼에서 메로나와 음료수를 사가지고 돌아 온 운현과 지혜는 예은이 어느새 청소를 끝마치고 세탁기를 돌리며 식사 준비를 하는 것에 감탄했다.

"쟤 가만 보면 되게 아줌마 같다니까."

"너 아줌마한테 주리 틀리기 싫으면 입 조심하는게 좋을 거다. 식칼 들고 있는 사람한테 그런 소리하면 못써."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는 것을 식탁에 앉아 바라보던 지혜가 한마디 하자 운현은 예은의 눈치를 살폈다. 힘이나 지력으로, 말싸움으로 이겨먹으려고 하면 못 이길 것이 없는 조카인 예은이지만 괜히 까불었다가 예은이 형이나 어머니에게 이르기라도 한다면 굉장히 골치아파진다.

'그리고 그것도 오늘로 끝이지.'

"그나저나... 얘들아?"

"왜?"

"예은아. 너도 일루 와서 앉아봐."

운현은 그녀들을 불러 식탁에 앉혔다. 요리를 하던 예은이 다가와서 식탁에 앉자 운현은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너네 나가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집 좋은거 알아놨으니까 나가라고."

심드렁한 어조로 운현이 말하자 예은과 지혜는 황당했다. 아니, 매일 집에서 게임만 하는 백수가 무슨 돈이 있어서 집을 구했다는 것인가.

"자. 여기 계약서. 저어기 아파트 옆동이니까 가서 살렴."

멀지도 않았다. 아파트 옆동의 매매 계약서를 들어 올리며 운현이 말하자 예은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삼촌 로또 됐어?"

"그런 거 될 정도로 내 운이 트이지는 않았는데."

"무슨 돈으로? 산건데?"

"다 삼촌이 하고 일이 있어서 들어오는 돈이 짭짤하단다. 아니! 너네 그럼 내가 보통 백수로 보였단 말야?"

그간 운현이 산 게임들만 해도 몇천만원은 훌쩍 넘어간다. 벽장 하나를 가득 메우는 디스크들을 가리키며 운현이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말하자 지혜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떨떠름히 말했다.

"보통 백수는 아닌 것 같았고 좀 특별한 백수로 보였는데..."

"야야. 잘 생각해보라고. 너네 나이가 몇인데 지금 응? 이 혼기 꽉 찬 삼촌이랑 계속 살아야겠냐? 내가 여자면 모를까. 주위에 보는 눈도 그러니까 다 꺼져... 가 아니라 다 나가주렴. 삼촌은 혼자 있고 싶단다."

"말도 안돼!!"

예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어떻게 같이 살게 되었는데.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고 생각한 예은이 핸드폰을 들자 운현은 씩 웃으며 말했다.

"형이랑 아버지한테는 이미 말해서 허락 받았다. 그리고 어머니한테도."

"......"

운현이 벌써 수작을 부려놨을 줄이야. 예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논리적으로도,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확실히 자신이 밀린다."

"효주 선생님 때문이야?"

"응. 뭐 그렇지. 요새 좀 잘 되는 느낌이거든. 야야. 삼촌 연애 활동 좀 도와주라."

운현은 씩 웃으며 말했다. 요새 담임 선생님인 은효주와 자주 어울린다 싶더니만... 지혜는 피식 웃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야!"

"넌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당황한 예은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간 지혜는 뾰로통한 예은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어차피 삼촌과 결혼을 할 수는 없는 거 알지?"

"...으윽. 갑자기 정론을 얘기하지 말라고.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삼촌과는 현실적으로 맺어질 수 없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혜는 예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 후 느긋하게 말했다.

"삼촌이 이번에는 꽤 큰 수를 쓴 것 같은데... 아빠랑 엄마, 그리고 할아버지랑 할머니의 허락을 받아버렸다면 우리가 지금 뭔가 할 수는 없어. 그리고 너무 같이 붙어사는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니야. 그러니까 일단 나가자. 전략적 후퇴라고 생각하자고. 괜히 버텼다가 아빠들이 접근 금지를 하게 해버리면 이 동네에서도 떨어져야 한다고."

"......"

지혜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말에 예은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만 삼촌은..."

"나가서 살라고 한 것이지 오지 말라는 얘기는 없었잖아? 그러니까... 앞으로 매일 오면 되는거라고. 잠만 거기서 자면 되지. 어차피 아파트 앞동이잖아?"

지혜의 말에 예은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갔나."

지혜와 예은의 이사를 도와주고 집으로 돌아 온 운현은 확 넓어진 집을 보며 이를 드러내었다. 모든 명분은 자신에게 있었다. 갈 곳 없는 조카를 쫓아낸 것도 아니다. 거기에 예은과 지혜가 잘 알고 있는 학교 선생인 은효주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녀와 잘 되어간다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서 혼기 꽉찬 남자가 연애 좀 하려면 집이 비어야 한다는 논리로 형과 아버지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어휴. 이제 좀 편하게 됐네."

예은과 지혜가 있음으로서 집안의 분위기가 산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운현에게 있어서 집안의 분위기가 사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녀들이 나간 것을 알면 미혜가 찾아올 것이고,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 가사노동을 해 줄 것이다. 그리고 라티나도 가끔씩 찾아오니 문제는 없다.

"흐으음..."

그간 조카들 때문에 집에서 담배를 피지 못했던 운현은 담배를 물고 거실에 있는 커다란 책장을 보았다. 책장에는 책 대신 수많은 게임 타이틀이 있었다. 책장을 가득 메운 게임들을 보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진 삼국 연희무쌍... 어나더 라이프... 워 오브 르네상스... 많이도 했구만."

운현이 이미 끝내버린 세계들은 타이틀이라는 이름으로 책장에 모셔져 있었다. 그것들 외에도 많은 세계들로 채워져 있는. 천장은 가볍게 넘어보이는 타이틀을 담배를 피우며 바라보던 운현은 쓰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제 가능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점점 세계의 흐름을 익힐 수 있었다. 아무리 가상현실의, 타인이 만든 세계라 할지라도 결국 본질은 같았다.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각자의 욕망에 충실한다는 것. 그것을 파악해가며 세계의 흐름과 법칙을 연구한 결과 천번째 게임을 끝냈을 때 운현은 대부분의 법칙과 패턴을 알아낼 수 있었다.

'예상 밖의 변수만 없다면 내가 세운 계획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다.'

가상현실이라 할지라도 그 주역은 사람이고, 그 사람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만큼 그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물론 그 계획이 무조건 들어맞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변수는 어느정도 배제해나가면 자신의 목적대로 세계의 움직임을 마음껏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모든 것은 쉬웠다.

철저할 정도로의 악행, 배려와 자비 따위는 없는, 완벽하다고 자부할 수는 없더라도 상황에 맞추어 계획을 짤 수 있는 능력. 그것만으로도 운현은 쉽게 게임들을 클리어해나갈 수 있었다.

"문제는..."

담배를 비벼 끄며 운현은 얼굴 전체를 손으로 크게 비볐다. 이제는 표전 변화부터 시작해서 모든 감정들을 거짓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 대한 엄청난 훈련을 겪었고 어지간한 게임이라 할지라도 무리없이 클리어 해 낼 수 있을 통찰력과 분석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슬슬 정체되어간다는 것이지...'

수많은 가상현실 게임들을 통해 자신에 대한 단련을 멈추지 않았던 운현은 어느 순간부터 가상현실 게임도, 그리고 자신도 정체되었다는 것

불이 꺼진 거실에서 라티나가 걸어나왔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실패하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움직이던 스타일 때문인지 운현은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자신이 어떤 수를 둬야 할 지 아직 막연했던 운현은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그녀들을 구하는 것에 실패를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약을 위한 준비까지 모두 해 놓았지만 그것들마저도 통하지 않는다면 어찌 되는 것인가.

"운현님이 그렇게 고뇌하는 것은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군요."

가상현실 게임을 하게 된 지 4년차가 된 순간부터 운현은 거짓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너무나 능숙해졌다.

본질은 상처입고 절망한 인간이지만 그는 스스로의 얼굴에 자신감과 행복함, 태평할 정도의 낙천주의자의 가면을 씌워 놓았고 많은 이들이 그것에 속아넘어갔다.

자신을 걱정하는 가족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을 염려하는 미혜에게 관심을 줄이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모습을 만들어 내던 운현이 너무나도 오래간만에 고뇌와 두려움에 찬 얼굴로 한숨을 내쉬자 라티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동안 밖에서만 찾더니 이제는 아니네."

"...슬슬 운현님께서 결심을 하셨을 것 같아서요."

최대한 많은 준비를 하기 위해서 운현은 자신과 가상현실의 발전이 정체되었다는 것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로 들어가는 대신 더욱 열심히 가상 현실 게임을 했다. 그가 자신이 정체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의 낭패한 얼굴을 떠올린 라티나가 조심스레 말하자 운현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결심은 이미 예전에 했지... 다만 한걸음 내딛는 것이 망설여질 뿐이야."

"두려우십니까?"

"두렵냐고?"

라티나의 말에 운현은 키득거렸다. 즐거워서가 아닌,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공포를 억누르기 위한 웃음이다.

"이번에 실패하면 또다시, 또다시, 또다시... 그 길을 걸어야 한다. 두렵지 않겠냐?"

"그럼 포기하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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