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4/40)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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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

다음날이 되자 출근을 한 장천후는 곧장 2층으로 향했다. 2층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둘러 본 그는 운현과 만났던 카페테리아에 다가가 점원에게 물었다.

"혹시 몇일 전에... 이렇게 생긴 사람 못봤나?"

CCTV를 뒤져 운현의 사진을 획득한 그가 묻자 점원은 당황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군지 기억도 안나는 얼굴이다. 하긴, 하루에 이 카페테리아를 이용하는 사람이 몇인데.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나 잡고 물어봐봤자 의미는 없을 것 같고... 어쩔 수 없군.'

회사에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를 반드시 찾아야했던 장천후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민희야!"

"네. 사장님."

시무룩한 얼굴로 비서 김민희는 그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구해 준 약이 아닌 다른 사람이 준 약을 찾는 것에 실망한 것이다. 그런 그녀를 향해 장천후는 운현의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남자를 찾아. 혹시 본 사람, 찾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개인적으로 큰 포상을 해준다고 해."

"으음... 알겠습니다."

카페테리아의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별 특징없는 남자애의 모습을 본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간쯤 지났을 때 성경 엔터테인먼트 2층과 3층 벽면에 운현의 사진이 잔뜩 붙어졌다. 그것을 본 연습생이나 연예인들은 사진 밑의 글귀를 차분히 읽었다.

"이 남자를 알거나 찾은 사람은 김민희 비서에게 바로 연락하거나 3층의 나에게 찾아올 것. 찾으면 장천후 대표의 이름으로 사례함...?"

성경 엔터테인먼트의 대표가 직접 사례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연습생들과 아직 뜨지 못한 연예인들의 눈이 빛났다.

"이 남자는 누구야?"

"알아?"

"혹시 오디션 왔던 애들?"

눈이 뒤집힌 것은 직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손이 크기로 유명한 장천후 대표다. 그가 직접 사람을 찾고 사례한다는 것은 잘만 하면 엄청난 보너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기에 그들은 허둥거리며 오디션을 본 연예인이나 지망생, 연습생들의 이력서를 뒤지기 시작했다.

"히잉... 또 떨어졌어..."

핸드폰을 본 상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또 오디션에서 떨어졌다는 문자다. 노래와 춤은 정말 자신이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출연진을 모집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발탁되기 위해서 오디션을 보았고 최종 선발 후보까지 들어갔지만 지금 연예계 탑 스타와 열애중이라는 이슈가 있는 아이돌에게 그 자리를 빼앗겨버렸다.

"언니. 괜찮아."

"응응. 지방 공연 한번 더 하자."

"미안해..."

샤이니아라는 팀의 리더로서 동생들에게 미안해 죽을 것 같았다.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은 동생들이 괜히 못난 리더를 만나 이렇게 되어버린 것 같다. 그녀가 시무룩해하자 샤이니아의 멤버인 안솔은 생글거리며 상아의 볼을 꼬집었다.

"이쁜 얼굴 그렇게 하지 말랬지."

"응응. 언니는 웃는게 훨씬 예뻐."

"얘들아..."

안솔과 윤아의 말에 상아는 글썽거리던 눈물을 쓱쓱 닦았다.

"에휴..."

"그리고 지금 발표 예정인거 하나 더 있잖아~ 너무 그러지마~ 그건 우리가 될 것 같다면서!"

애써 밝은 목소리로 안솔이 말하자 상아는 빙긋 웃었다. 케이블 방송에서 하는 게임 쇼였다. 게임은 잘 못하는 상아였지만 안솔과 윤아가 게임을 굉장히 잘해 그녀들이 그 게임 쇼의 진행을 맡을 수도 있는 것에 상아는 밝게 웃었다.

"근데 언니는 그거 하면 그냥 바보역할이나 다름없는데... 괜찮아?"

그 게임쇼의 내용은 바보처럼 자신이 계속해서 트롤짓을 하면 동생들이 나서서 깨주는 역할이었다. 동생들에게 도움을 받는 언니 역할이기에 잘못하면 푼수 이미지가 남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응! 어차피 매번 너희들한테 도움을 받는데 뭘~"

안솔과 윤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 그녀가 밝게 웃었을 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기다리던 소식인가 싶었다. 전화기를 든 그녀는 전화번호가 그 방송의 담당 PD라는 것에 환하게 웃었다.

"연락왔다!"

"진짜?"

"응응. 잠깐만. 여보세요?"

[네. 상아씨. 정한솔PD입니다.]

"아! 이준 PD님! 안녕하셨어요!?"

"언니! 우린 올라가 있을게~!"

생글 생글 웃으며 동생들이 먼저 들어가자 상아는 전화기를 들고 상기된 얼굴로 벽에 기댄 후 입을 열었다.

"저희 언제가요? 언제든지 괜찮아요! 계약서도..."

[아... 그게. 미안하게 됐어요.]

"네? 뭐... 가요?"

[그게... 아이 참. 저는 안된다고 했는데 본부장님이...]

"무슨 말씀이세요?"

상아는 머뭇거리는 PD의 목소리에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반드시 자신들이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막판 캐스팅까지 하고 계약서만 쓰면되는데 설마. 그녀가 당황하며 묻자 전화기 너머의 이준 PD는 한숨을 푹 내쉰 후 말했다.

[상아씨. 내가 상아씨가 굉장히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요. 이번 캐스팅에 외압이 좀 있었어요.]

"예? 그게 무슨..."

[자세한 건 말해줄 수 없구요... 아무튼 미안해요. 그... 스폰서 중 한명이 자기 딸이 연예인이라고...]

이준 PD가 굉장히 미안한 듯 말하자 상아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또다시 빼앗겨버렸다. 아등바등 노력해서 겨우 데뷔를 했지만 자신의 능력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기회를 빼앗겨버렸다.

눈물이 날 것 같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려 눈물을 참은 그녀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하다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고... 고맙습니다. 알려주셔서..."

[샤이니아가 괜찮은 그룹인데... 실력도 있고 끼도 넘치고... 미안해요. 저도 노력해봤는데...]

이준 PD의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간신히 그와 통화를 마친 그녀는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동생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이 눈물로 적셔진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멈추려고 해보았지만 터져버린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의지를 배반하고 눈물이 떨어지고 있을 때 1층의 입구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야야! 빨리 수배 걸어!"

"그 남자 찾아봐! 다른 방송국에도 가보고!"

데뷔를 하지 못한 연습생이나 자신과 같은 처지의 다른 연예인. 그리고 기획사의 직원들이 무언가를 손에 들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우루루 나가는 것을 멍하니 보던 그녀는 나가던 사람 중 하나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떨어트리자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건..."

"어? 상아 아냐? 너 여기서 뭐해? 너 울었어?"

"아. 언니..."

기획사 직원 중 하나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상아는 쓱쓱 눈물을 닦았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주었다.

"너 이 남자 알어?"

"예? 누구요?"

그녀의 질문에 상아는 종이를 받았다. 종이에는 컬러로 한 남자의 얼굴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이 사람은 왜요?"

"사장님이 수배 걸었어. 이 남자를 찾으면 사장님이 특별 포상을 지급해준데. 상아야. 너도 잘 됐다. 이 남자만 찾으면 사장님 눈에 뛸테고 그럼 프로그램 하나 정도는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

성경 엔터테인먼트는 거대 기획사 중 하나다. 거기에 성경 그룹에서 지원하는 방송국이나 프로그램은 무척 많았다. 장천후는 성경 그룹 내에서도 실세라고 불릴 만한 힘이 있으니 그의 특별 포상으로 프로그램에 하나 꽂아달라고 한다면 기회가 생길 수도 있는 것에 상아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에요?"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난리지."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넘쳐났다. 샤이니아 말고도 제대로 기회를 잡지 못해 스타가 되지 못한 연예인은 넘쳐났다. 그런 그들에게 어쩌면 이것은 어둠 속에서 내려온 동앗줄 같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

상아는 뚫어지게 사진을 바라보았다. 아는 얼굴이다. 몇일 전 카페테리아에서 장천후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였다.

'이 사람을 왜 찾는 거지...?'

아니. 왜 찾는지는 중요한게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남자에 대해서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킨 후 종이를 잡았다.

"고마워요! 언니!"

"그래!! 잘 해봐!!"

종이를 들고 단숨에 2층으로 올라간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종이를 들고 있는 동생들을 보았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그녀들은 상아에게 달려가 속삭였다.

"언니! 이 사람 그 사람 아냐?"

"그때..."

"으응. 그런 것 같아. 얼른 갔다오자."

"응!"

그녀들은 후다닥 3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 있는 경비원들은 그녀들이 다가오자 손을 들어 막았지만 상아는 잽싸게 그들에게 종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저 이 사람 알아요!"

"진짜?"

"네. 그러니까 사장님과 만나게 해주세요."

상아는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경비원은 무전기를 들었고 잠시 후 그들 중 하나는 그녀들을 데리고 3층으로 올라갔다.

"우와아..."

3층에는 처음 와보는 상아와 한솔, 윤아는 주변의 풍경에 감탄했다. 때깔부터가 다르다. 2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최고급품들로만 이루어진 내부 장식이나 가구들, 그리고 향기. 벽지. 모든 것이 달랐다.

"어, 언니. 저 사람. 김태호다.'

"우와 F.드래곤..."

같은 연예인이지만 급이 다르다.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몰려들다 못해 그들을 납치하고 싶어 할 정도로 초 특급의 연예인들이 의자에 널부러져 있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혹은 책을 보는 것을 보며 그녀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야야. 너희 진짜 아는 거 맞지?"

"네."

"만약 아니면..."

"지, 진짜 맞거든요?"

"...알았어."

안쪽 화려한 방으로 들어간 그는 문을 두드렸다. 그것에 김민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며 그들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김민희 비서님. 저기... 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그 사람을 찾은 건가요?"

"네."

"이렇게 빨리?"

수배를 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김민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상아들을 보았다. 장천후 대표의 비서인 김민희의 시선에 그녀들은 움찔 몸을 떨었다.

"만약 거짓말이면..."

"거, 거짓말 아니에요!"

"맞아요!"

"무슨 소리야!?"

안에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이 열리고 장천후가 나오자 상아는 당황하다가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샤이니아의 리더 상아라고 합니다!"

"한솔이에요!"

"윤아입니다!"

"...뭐야?"

장천후는 짜증 섞인 얼굴로 그녀들을 보았다. C급 연예인들 중에 이런 애들이 꼭 있다. 죽어도 사장님과 만나야겠다고 달려드는 그런 애들을 막기 위해서 경비까지 세워놨는데 이렇게 또 찾아와서 소란을 피우다니. 라고 생각하던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너희... 아냐?"

"네!!"

"들어와! 들어와! 어서!"

초조함과 짜증이 뭍어 있는 얼굴이 확 펴진다. 그가 기쁜 얼굴로 말하자 상아는 긴장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혹시 사장님이 알고 있는 것이라면 어쩌지? 갑자기 두려워진 그녀가 머뭇거리자 김민희는 상아들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 그 사람을 알고 있다고?"

"네에..."

"누구냐? 그는?"

"...그... 이름은 운현이라고 해요."

"오오오!! 그런 이름이었나!! 그래. 그럼 그 사람과 연락할 방법은 있나?"

"네? 그, 그건 아니지만."

"하아... 그래?"

이름만 알고 있는 것인가. 장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실망한 듯한 그의 표정에 상아는 잠시 생각한 후 조심스레 말했다.

"그, 그렇지만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은 알아요."

"누군데?"

"...그게..."

"왜? 말해봐. 걱정하지 말고."

장천후의 부드러운 말에 상아는 고민했다. 그녀가 망설이자 장천후는 어깨를 으쓱이며 지갑을 꺼내었다. 지갑에 서 천만원짜리 수표를 그가 꺼내자 상아는 붕붕 고개를 저은 후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이걸 말씀드리면... 저희를 프로그램 하나에 꽂아 주실 수 있으세요?"

"호오...?"

상아의 절박한 말에 장천후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녀들을 보았다. 다리까지 후들거리고 있는 것이 필사적으로 보인다.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응시하던 장천후는 피식 웃은 후 말했다.

"만약 그와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약속하지."

"지, 진짜죠!?"

"그래. 각서라도 써줄까?"

만약 그를 만나서 다시 한번 주니어를 살릴 수 있다면 그깟 프로그램. 얼마든지 꽂아 줄 수 있다. 장천후는 상아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고 그의 말에 상아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강원석 해외영업팀 팀장이 그와 아는 사이 같았어요. 그에게 무려 '님'자 까지 붙였다구요. 그리고 그 운현이라는 사람은 강원석 팀장에게 반말까지 했고. 너무 당연한 듯 했어요."

"...뭐?"

그녀의 말에 장천후는 자신이 잘못들었나 싶었다. 강원석이 뭐 어쨌다고?

"지, 진짜에요!!"

"저희도 들었어요!!"

"되게 공손했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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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

"강원석이라..."

강원석. 해외 영업팀 팀장이라고 하지만 지금 그 위치는 고작 팀장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정도였다. 커다란 영업 하나를 해와서 기반을 다짐과 동시에 정운택을 꺽은. 지금 실세 중의 실세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떻게 구슬렸는지 몰라도 정운택의 비서이며 모사였던 양미혜까지 끌어들여 지금 그룹 내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강원석이 그 남자와 알고 있다. 그것도 존대까지 한다?

'그는 아무리 봐도 고등학생으로 밖에 안보였어. 그런데... 무려 한달이나 지속되는 엄청난 정력제를 가지고 있었단 말이지... 혹시?'

장천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만약 이 모든 일에 그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라면?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진짜에요!! 믿어주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흐음... 어쩐다."

지금 와서 강원석을 함부로 건드릴만한 사람은 없다고 볼 수 있었다. 굳이 있다면 회장인 장천상 정도? 서열 2위인 장천하는 그냥 쓰레기이니 제쳐둔다고 친다면 그야말로 언터쳐블의 영역에 있는 남자다. 그가 갑자기 힘을 얻은 것에 질투한 몇몇이 킬러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강원석은 아무런 이상 없이 지난 한달간 꾸준히 출근해 성경 그룹에 장악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성경 그룹을 장악하려면 회장 일가 중 누군가가 그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데...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군.'

실세라고는 하지만 역사도, 그리고 배경도 없는 것이 강원석이다. 그렇다면 그와 손을 잡는다면? 어차피 그룹의 경영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장천후였다. 그룹을 장천상 회장이 가지든, 장천하가 가지든, 강원석이 가지든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하자."

"...예?"

장천후는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고 그 모습에 상아는 불안감을 느꼈다.

"내가 강원석과 만날테니 너희들이 지원사격을 해다오."

"...네에에!?"

강원석의 하루 일과는 정말 바쁘기 그지 없었다. 직함은 해외 영업팀 팀장이지만 정운택을 쓰러트리고 공석이 된 국내 영업본부의 본부장의 일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 젠장."

"궁시렁 거릴 틈 있으면 어서 서류나 보시죠."

양미혜가 자신의 손을 들어 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안정적으로 국내 영업본부를 차지할 수 없었을테니까. 자신의 밑으로 들어 온 이들의 약점부터 시작해서 그들을 포섭하는 일까지. 양미혜는 정말 일을 잘해주고 있었다.

"쿵!"

한뭉치의 서류더미를 던지듯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를 보며 원석은 빠득 이를 갈았다. 정말 하나하나 밉상인 년이다.

"운현을 불러다가..."

"서류를 더 드릴까요?"

직책상 비서이니 존대는 하지만 태도는 적이나 다름없는 양미혜와 둘이 일을 하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쉰 후 다른 쪽을 보았다.

"......"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이라도 하듯 눈을 감고 있는 라티나를 본 그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뭘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자신과 함께 있으며 대부분의 시간은 저렇게 명상으로 시간을 때웠다. 외출하거나 다른 사람과 만날 때는 칼같이 움직이지만 그 외에는 자신과 말도 섞기 싫은 지 말을 걸어도 대꾸는 커녕 쳐다도 보지 않았다.

'젠장.'

차라리 운현이랑 둘이 있는게 낫지. 그래도 운현은 농담이라도 건네면 받아주기라도 했으니 말이다. 남들이 보면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녀 둘과 같이 있는 것이지만 원석은 그 자리가 고역스럽기 짝이 없었다.

"...빠득."

거기에 양미혜는 라티나만 보면 빠득빠득 이를 갈아댔다. 공적으로는 서로 어떻게든 같이 일을 하고 있지만 사적으로는 친하게 지낼 생각은 커녕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를 정도로 라티나와 양미혜는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다.

"대충 정리는 끝난 것 같지만... 확실히 저희가 뒷배는 약하군요. 장천상, 장천후, 혹은 장천하. 이 셋 중 하나의 지지가 없으면 성경 그룹의 톱이 되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만."

그들을 보며 생각을 하던 원석은 양미혜의 말에 고개를 들고 떨떠름히 물었다.

"그래서 어쩌자고?"

"그들과 연이 없습니까?"

"없어."

장천상은 그저 회장님으로 모시고 있을 뿐이고 장천후는 안면도 별로 없었다. 장천하? 걔는 그냥 쓰레기다. 부모 잘 만난 덕분에 매일 술처먹고 다니며 사고치기 바쁜 애새끼에 불과했다.

'같은 애새끼라면 차라리 운현님이 낫지.'

"하아.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역시 접촉하기 가장 만만한 것은 장천하이니 그와 만나도록 하시죠. 그 자식은 미녀를 좋아하니 라티나를 보내는게 어떨까요?"

"당신도 꽤나 미녀인데 당신이 가는 건 어때?"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라티나는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장천하에 대해서는 이미 익히 들어서 안다. 미녀만 보면 껄떡대고 마약을 써서라도 차지하려는 그 집요함. 능력은 없는 주제에 야망만 높고 잘난척만 하는. 그야말로 쓰레기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남자였다.

이번에 또 미녀 연예인에게 껄떡대다가 성추행으로 신고당해 겨우 자중하고 있는 그를 떠올린 라티나가 차분히 말하자 양미혜는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어머. 운현이 그렇게 찾을 정도로 미녀인 당신이 가는게 낫지 않을까요?"

"훗. 질투하는 겁니까?"

"질투라뇨. 전 그저 사실을 얘기했을 뿐입니다. 당신은 아름답잖아요. 충분히 장천하를 구슬릴 수 있을거에요. 그 몸과 미모로 말이죠."

"거절합니다. 그건 제 임무가 아니라서."

"제 임무도 아니죠."

"씨발... 그냥 내가 간다."

궁시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원석은 둘을 노려보며 핸드폰을 들었다. 엿같은 새끼지만 어쩔 수 없다.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이 성경 그룹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때 그의 전화기가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에 고개를 갸웃거린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강원석입니다."

[강원석 본부장님.]

"뉘신...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전화기라 그런지 어색하다. 그는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고 전화기 너머의 그는 자신을 밝혔다.

[저 장천후입니다.]

"장천후? 당신이 왜 나한테 전화를 건거죠?"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정중한 그의 말투에 강원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과 장천후의 접점은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얽히는 분야도 없고. 또 장천후는 세력다툼에 관심이 없어서 아예 손을 떼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주칠 일이 없었던 강원석은 마침 잘됐다 싶었다.

'그 씨발 새끼보다는 낫지.'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놈보다는 그래도 장천후가 차라리 나았다. 어찌되었든 그와 접점이 생기는 것은 자신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기에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시죠. 마침 저도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네. 거기서 뵙죠."

"나가십니까?"

"아. 응. 장천후가 만나자고 하는데. 너희들도 같이 가자."

"......"

"......"

"...제발 말 좀 들어라."

서로를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노려보는 그 둘을 보며 강원석은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지..."

동생들은 오지 않게 하고 일단 자신만 장천후와 함께 온 상아는 커피숍에서 앉아 어쩔 줄 몰라했다. 강원석은 들리는 소문으로는 조폭이라고 했었다. 괜한 얘기로 그의 심기를 거슬린 것이 아닐까 싶었던 그녀가 두려워하자 장천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만약 그가 운현이라는 사람을 안다고 하면 약속은 꼭지키마."

"네..."

"마침 오는군. 그런데..."

강원석이 걸어오는 것을 보며 중얼거린 장천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뒤에서 걷는 양미혜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 정장을 입은 미녀는 누구란 말인가. 연예계 기획사 사장으로 있으면 많은 미녀들을 만나봤지만 저런 미녀는 처음이었던 장천후는 그들이 들어오자 자신도 모르게 명함을 꺼내 라티나에게 내밀었다.

"혹시 연예인 되실 생각 없습니까?"

"...."

라티나의 무감정한 시선에 장천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은 이제 기획사 스카우터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누구라도 알아 줄 만한 거대 기획사의 사장인데 이런 모습이라니. 그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고 강원석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보다가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으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곧 만들어질 총괄 영업본부의 본부장이 되신다고..."

"아. 감사합니다. 그것 때문에 부르신 것입니까? 그런 것이라면 그냥 공식회의때 말씀하셔도 될 것을... 그런데 옆에는...? 그때 봤던 아가씨 같은데."

눈썰미 좋은 강원석은 장천후의 옆에 앉아 있는 상아를 힐끔 본 후 떨떠름히 말했다. 예전 운현과 자신의 앞에 나섰던 여자다. 이름이...

"샤이니아였던가. 그곳의 리더 상아라고 했었지?"

"기, 기억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상아는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름을 알아 준 것이 그리 기쁜가? 강원석이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장천후는 씨익 웃은 후 말했다.

"사실이었군. 강원석 본부장님. 이렇게 만나뵙자고 한 것은 한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뭡니까?"

"운현... 이라고 했던가요?"

"....."

장천후의 입에서 운현의 이름이 나오자 세명은 긴장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모두가 긴장한 것이다. 원석은 자신의 최대 급소이자 최강의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자의 이름이 나온 것에 놀랐고 양미혜는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라는 사람의 이름이 나온 것에 장천후를 경계했고 라티나는 혹시 모를 적임을 대비해 살기와 적의를 내뿜었다. 그리고 그 살기에 장천후와 상아는 딱딱히 굳었다.

"...그게 누굽니까?"

"그때 말씀하셨잖아요! 이 분이요!"

원석이 무덤덤히 묻자 상아는 종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것을 본 원석은 속으로 상아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만약 이런 자리만 아니었다면 당장 납치해 섬에다가 가져다 팔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난 그는 오히려 냉정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그때 아가씨와 나는 잠깐 부딪힌 정도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CCTV에 본부장님과 그가 나가는 장면이 찍혔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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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리가요."

"쓰잘데기 없는 소리 하러 오신거라면 나중에 하시죠. 저희 본부장님은 바쁘신 몸입니다. 이제 장천하 부회장님과 만나야 하거든요. 그럼 이만 일어나시죠."

강원석을 지원하며 양미혜는 차분히 말했다. 그녀의 말에 장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원석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본부장님! 부탁입니다! 그를 만나게 해주십시요!"

"...누구를요?"

"운현을요! 그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허... 저는 그 사람을 모른다니까요."

원석이 차분히 말했지만 장천후는 붕붕 고개를 가로저은 후 그의 다리를 잡았다. 커피숍의 사람들이 놀라 모두 쳐다보기 시작하자 원석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장천하를 만나는 것이 그룹의 장악 때문이라면... 제가 돕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룹의 운영따위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잠깐만요."

그가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에 원석은 힐끔 양미혜를 보았다. 양미혜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천후와 손을 잡으면 일은 편해지지만 운현을 장천후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성경 엔터테인먼트의 사장. 그와 운현이 친하게 지내면...'

자연스레 그는 운현을 꼬드기기 위해서 많은 여자 연예인들을 데려 올 것이다. 그가 다른 여자들에게 눈독을 들일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의 옆에 누군가가 꼬이는 것이 싫었던 양미혜가 거절하자 원석은 라티나를 보았다.

"....."

라티나는 양미혜와 다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로서는 빨리 운현과 함께 그의 연구를 돕고 싶을 뿐 이었다. 그러려면 원석이 빨리 그룹을 완전히 장악해 위험에서 줄어들어야 하는데 장천후가 이런 식으로 나와 원석을 돕는다면 원석은 빠르게 그룹을 장악할 것이고 자신은 운현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쩐다...'

둘의 대답이 다르니 원석의 입장으로서는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으음... 그..."

263====================

거래

'장천하 그 새끼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새끼니까 포섭했다 하더라도 안심할 수 없어. 하지만 장천후는 다르지. 그는 포섭만 하면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럼 이번 기회에 그에게 빚을 지워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텐데... 하지만.'

문제는 운현이었다. 라티나와 양미혜를 보낸 후 운현은 자신을 찾지 말라고 말한 후 자신이 보낸 정운택과 그를 충성스럽게 따르는 부하 셋을 데리고 잠수를 타버렸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그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라티나 뿐이었다. 그 외에는 자신이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았기에 답답했던 원석은 입을 다물고 한참동안이나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핸드폰을 들어 운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띠리링."

씹힐 것이라 생각했던 문자에 답변이 바로 온다. 그가 놀라며 문자를 보았을 때 원석은 인상을 왕창 구겼다.

'일단 데려오고 나도 오라니... 으으...'

현재의 상황을 상세히 적어 보냈으니 영특한 그라면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리 없었다. 다만 문제는 그의 반응이다. '일단 데려오고 너도 와' 스무줄이 넘는 글에 단 한줄의 답변 뿐이라는 것이 심히 불안했던 원석은 한숨을 푹 내쉰 후 장천후를 일으켜세웠다.

"에... 장 사장님."

"네."

"데리고 오랍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저도 갈게요."

"지금 운현은 중요한 연구 중이야. 라티나가 가는 이유도 그 연구를 위해서니까 쓸데없는 질투심 부리지마. 정 만나고 싶으면 네가 직접 전화해."

한달이나 운현을 못 본 양미혜는 원석의 말에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왜 저 여자만. 그녀가 눈을 빛내며 이를 악물자 라티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 정말인가요?"

드디어 주니어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인가? 장천후는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그의 뒤에 뻘쭘히 서 있던 상아 역시 크게 기뻐했다. 이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원석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아가씨도 오라고 하는군."

"...네? 전 왜...요?"

"쟤는 왜!?"

"내가 어떻게 알아. 전화해서 물어보라니까."

양미혜는 발끈하며 외쳤다. 저 꼬맹이는 왜 데려오라는 건가. 푼수처럼 생겨먹은 계집이 취향인가? 그럼 당장 성형수술을... 양미혜가 그런 반응을 보이자 원석은 한숨을 내쉬며 말한 후 장천후와 함께 나갔고 라티나는 양미혜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당신은 안된다고 하는군요."

"닥쳐..."

"그럼 저는 저 인간을 가드해야 하니. 어서 사무실로 돌아가서 일이나 하시죠."

라티나의 비웃음 섞인 말을 들으며 양미혜는 부르르 떨다가 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이어진다. 전화통화도 힘들었던 그가 부디 받아주길 기다리던 그녀는 통화가 연결되자 다급히 외쳤다.

"운현!"

[응? 왜?]

"응? 왜? 무슨 연구를 하길래 나도 못부르는거야!?"

[하하하... 미안. 지금 집이 완전 엉망이라서 말이지. 냄새도 나고. 그리고 나 씻지도 못했다구.]

느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미안한 감정이 전해진다. 자신을 일부러 피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양미혜는 안도한 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동안 왜 전화는 안받았어?"

[전자파 때문에. 미안해. 급한 연구는 얼추 끝났으니까 이제 통화가 안되는 일은 없을거야.]

"정말? 진짜지? 그... 연구는 잘 되어가고 있어?"

[응. 걱정마.]

"그럼 좀 쉬어야 하지 않아? 내가 좋은 레스토랑 알아볼 수 있는데... 그, 그리고 호텔도..."

[이번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일요일 어때?]

"진짜? 너무 좋아~"

양미혜는 라티나에 의해 쌓여 있던 분노가 눈 녹듯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연구를 돕는다고? 너는 그냥 평생 연구나 도와라. 나는 그와 즐길테니까. 그는 나만을 봐주고 나만을 사랑해준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양미혜는 전화기 안의 운현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연구만 하지 말고 조금 밖에 나가서 바람도 쐬고 그래. 걱정된다구. 연락도 자주 하고."

[하하... 알았어. 일은 어때? 힘들지 않아?]

"응. 난 괜찮아."

그 외에 사소한 몇가지 이야기를 하고 통화가 끝났다.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양미혜는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번주... 후후훗.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해야지~"

그녀는 기쁜 얼굴로 생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후..."

양미혜와 전화통화를 마친 운현은 드라이버를 들고 다시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에는 거대한 장치가 있었다. 한달만에 이정도까지 진행을 하게 되다니. 이것도 다 원석의 덕이다.

"끄으..."

"죽...여줘... 죽여..."

의자에 꽁꽁 묶인 채 앉아 있는 네 남자를 보며 운현은 그들의 머리에 착용되어 있는 장치의 나사를 조인 후 전원을 연결했다. 그리고 콘솔을 작동시켰고 그 순간 네 남자들의 눈이 멍해졌다.

"...좋아."

모니터에 나타나는 수많은 문자들. 그것들을 빠르게 캐치해낸 그는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들겼다. 옆의 화면에 순식간에 수백줄의 문자가 적히기 시작한다. 뇌를 한계까지 작동시켜가던 그는 초콜렛을 한움큼 집에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타자를 치는 것을 이어갔다.

"됐어."

엔터키를 눌러 프로그램을 작동시킨 운현은 화면을 보았다. 각각 네개의 화면 속에는 푸른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에는 검은색 각진 모델들이 서 있었다.

"안녕들 하신가."

"여긴... 어디야?"

"난... 난..."

"살려줘... 살려줘..."

"내보내줘..."

화면 속에서 네 모델들이 멋대로 떠드는 것을 지켜보며 운현은 진한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벌써 몇일째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연구를 한 결과 이정도까지 구현할 수 있었다.

'문제는 자연스럽게 인식할 상대가 필요한데...'

완성되지 않았으니 불안감은 있을 수 밖에 없다. 운현은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들의 접속을 강제로 종료시켰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정운택에게 다가가 그의 볼을 드라이버로 톡톡 치며 물었다.

"어땠어?"

"으으..."

"어땠냐고 묻잖아."

"아, 아무것도.... 없는 푸른... 공간..."

'그래도 인식은 하는군.'

정운택이 그래도 셋보다 낫다. 꽤나 정신력이 강한 덕분에 가상현실에 억지로 집어 넣고 빼어도 꽤나 기억을 유지하고 있었다.

"넌 누구지?"

"정운택..."

"흠."

이제 몇가지 조정만 더 하면 된다. 피스나의 샘플이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비록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그 원리는 거의 비슷했기에 정운택과 그의 부하들의 몸에서 정신을 빼내 가상현실에 집어 넣을 수 있었던 운현은 다른 프로그램을 작동시킨 후 엔터키를 눌렀다.

"으어어어..."

정운택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난다. 그 후 그가 가상현실에 운현이 만든 더미 안으로 이동되자 운현은 키보드를 빠르게 두들겼다.

"너...!! 강원석!! 양미혜!! 개년!!"

화면 속에 하얀 모델이 생성된다. 그것을 본 검은색 더미. 정운택이 이를 갈며 외치자 운현은 그들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서로 부딪히고, 싸우는 것처럼 모델들이 움직이는 것을 본 운현은 다시 접속을 끊은 후 정운택에게 물었다.

"어땠어?"

"죽인다... 죽인다... 개년놈....들..."

"매우 훌륭하군."

양미혜를 세뇌하고 이들마저도 세뇌한 후 그 결과를 바탕으로 인공지능을 만들었다. 비록 허접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 잘 작동하는 것에 만족하며 운현은 정운택과 그의 부하들의 입에 재갈을 물린 후 그들의 얼굴에 마취제를 뿌렸다.

"으어어..."

이미 정신이 상당히 나가버린 그들이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괜히 실험도구들을 망가트리게 할 수는 없었다.

"피스나가 연구 자료를 이렇게나 만들어 놓고 그렇게 늦게 만든 이유가 있었군."

운현은 피스나가 마련해 놓은 길을 걸으며 그것을 현실의 기술로 바꿔나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 다였지만 피스나는 아예 처음부터 모든 것을 준비했어야 했다. 그러니 그녀의 연구의 결실이 그토록 오래 걸린 것이다.

하지만 운현은 그녀가 결과물을 늦게 만들어낸 이유는 다른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너무 착했다. 그게 문제였던 것이다.

착한 그녀는 안전을 생각해서 무리한 실험이나 연구를 하지 않았다. 거기에 대부분의 실험은 자신의 몸으로 해야 했기에 안정적인 실험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니 데이터를 얻는 것이 난감했고 결국 그토록 늦게 결과물을 내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운현처럼 대놓고 다른 이들을 잡아와서 실험을 해서 연구를 진행하지 못한 것이다. 운현이 원석에게서 실험체와 원하는 장비, 그리고 필요한 자금과 전력까지 풍부하게 지원받은것과 다르게 그녀는 한정된 자원에 실험체도 없는 상황에서 연구를 진행했으니 당연히 느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천재는 천재군.'

만약 자신이 혼자 피스나와 같은 조건으로 연구를 진행하라고 했으면 아마 백년 정도로는 택도 없었을 것이다. 수천번을 넘게 자위를 해서 지력을 올려도 가능할지 의문일 정도다. 운현은 피스나의 연구서적을 접어 인벤토리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씻자."

잠시 후에는 손님까지 온다. 잘하면 새로운 실험체. 못돼도 자신의 계획을 위해 충실히 움직여 줄 장기말들이다. 그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괜히 호러 분위기를 낼 필요는 없다 생각한 운현은 시뮬레이터를 가동시킨 후 하품을 하며 1층으로 올라갔다. 한달동안 제대로 청소는 커녕 돌아다니지도 않은 덕분에 여기저기가 먼지투성이다. 그것을 치울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운현은 샤워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온 후 옷을 갈아입고 먼지투성이 쇼파 위에 앉은 후 담배를 입에 물었다.

"푸흐..."

이제는 어느정도 익숙해진 모습으로 담배연기를 내뿜은 운현은 여전히 폐가 욱씬거리는 것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고통이 그녀들을 일깨운다. 악행이라고 할만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에 자신을 잃지 않게 해주는 그녀들의 기억. 운현은 담배를 피우며 그녀들을 추억했다.

"띵동."

벨소리가 울린다. CCTV를 통해 그들이 누구인지 확인한 운현은 보안장치를 해제한 후 문을 열어주었다.

"별 일 없죠?"

"아아. 그래."

"아 옷 좀 좋은거 사드렸는데 왜 자꾸 그런거 입으십니까."

원석이 들어오며 커다란 박스를 건네자 그것을 받은 운현은 박스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핫식스와 레드불, 그리고 커피다. 그것이 잔뜩 들어 있는 박스를 받아 옆으로 치운 운현은 자신의 옷을 보며 원석이 궁시렁거리자 그를 향해 피식 웃었다. 운현이 입고 있는 것은 후즐근하고 목이 늘어난 싸구려 티셔츠, 그리고 다 헤진 반바지였다. 운현이 옷 입는 꼬라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원석과 양미혜가 사 온 좋은 옷들이 있지만 운현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원래부터 자신이 입던 옷만을 고집하며 입었다.

그를 따라 들어 온 이들 중 낯선 사내가 자신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것을 보며 담배를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들어오슈. 어... 그리고 그쪽은..."

"저는 샤이니아의..."

"됐어. 이름 말하지마."

상아가 다시 자신을 소개하려 하자 운현은 냉정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것에 그녀가 시무룩히 고개를 숙이자 운현은 터덜터덜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 투성이의 집의 모습에 원석은 한숨을 내쉬고 창문을 열었다. 어떻게 환기라도 시키려는 그의 행동에 운현은 원석이 가져온 상자에서 각자에게 캔커피 하나씩을 던진 후 물었다.

"그래서. 나한테 볼일이 뭐지?"

이젠 대놓고 반말이다. 운현이 심드렁히 묻자 장천후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나만 더 주세요!"

"흠... 이걸 말하는건가."

장천후라는 인간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에 운현은 그가 몬스터의 피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몬스터의 피는 넘치도록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공해줘야 할 합당한 이유가 없다. 운현은 앰플 세개를 손에 든 후 차분히 말했고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앰플을 바라보았다.

"이걸 내가 주는 건 주는 건데... 왜?"

"...예?"

"내가 왜 이걸 당신에게 줘야하지? 재능기부나 적선. 그딴 소리 할거면 다른 걸 준비해놨으니까 기대해도 좋아. 대가 없는 호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저는 강원석 본부장과 손을 잡기로 했습니다."

"그건 쟤랑 손잡는거지 나랑 손잡는게 아니잖아. 애초에 난 쟤랑 손잡고 있는 것도 아냐."

"네? 그럼..."

"쟤는 그냥 내 장기말 중 하나일 뿐이야."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운현이 말하자 장천후는 황당했다. 대 성경 그룹의 실세중의 실세라 할 수 있는 강원석이 이 남자의 개에 불과하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무덤덤히 그를 보았고 원석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자신은 운현의 부하와 같은 것이니 말이다.

"장기말은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그래도 신뢰하는 부하 1이라고 해주시죠."

"그럼 신뢰하는 부하 1이라고 해두지. 쫑알거리기는 해도 일은 잘 하고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셋 추가해줘."

"하아. 알겠습니다."

원석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장천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을 추가한다는 것일까. 그가 궁금해하는 동안 운현은 손에 들려 있는 앰플을 하나 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둘 남았다. 나에게 제시할 것이 없으면..."

"그...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돈? 강원석을 부하로 부리고 있는 이상 그에게 돈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는 한참동안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여자를 원하신다면 준비해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뭘 원하십니까!? 남자를 원한다면 남자도!!"

"...누굴 게이로 아나. 하아... 당신. 연예 기획사 사장이랬지."

"네."

"그럼 잘 됐군."

운현은 팔짱을 낀 후 상아를 보며 말했다.

"너.. 스타가 되고 싶냐?"

"...네."

자신보다 어려보이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압도적인 두려움이었다. 그렇기에 장천후도, 강원석도 존대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던 그녀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피식 웃은 후 말했다.

"내가 널 스타가 될 수 있게 해준다면 넌 나한테 뭘 줄래?"

"네?"

"나에게 뭘 줄 수 있냐고."

"뭐, 뭐든지요! 어떤 것이든 하겠어요!"

"몸도 마음도 다 줄 수 있다 이건가? 네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타가 되었을 때 내 명령을 따를 수 있다 이건가?"

"...네."

굳은 얼굴로 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계에 입문한 이상 사랑하는 사람에게 처음을 주는 것은 포기한지 오래다. 눈 앞의 남자에게 몸을 바치면... 그의 스폰을 받는다면 스타가 될 수 있겠지.

"저만으로도 충분하시다고 하시면요."

상아는 굳은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자신은 괜찮다. 하지만 동생들은 안된다. 그녀가 동생들을 지키기 위해 굳은 결의를 다지며 말하자 운현은 볼을 긁적거린 후 피식 웃었다.

"너 지금 내가 너를 무슨 육노예 그런 걸로 만들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서라. 널 안을바에는 차라리 라티나나 미혜를 안지. 걔들보다 못생긴 주제에 무슨. 거울 좀 보고 오지 않으련?"

"윽..."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연구가 끝난 후 아무 의심없이 내 연구의 결과를 체험하고 홍보해주길 바라는 거지. 대중적으로 인기 높은 스타가 홍보를 하면 아무래도 확 퍼지지 않겠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장천후를 보았다.

"얘를 최대한 키워봐. 대한민국을 대표할 스타로 만들어. 그럼 한달에 한번씩 약을 주지. 한달만에 날 찾은 걸 보니 이거의 효과가 한달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가능하겠어?"

그의 말에 장천후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264====================

거래

장천후의 말에 운현은 빙긋 웃으며 그에게 앰플 세개를 넘겼다. 그것을 받은 장천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운현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샤이니아라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 약의 공급은 없다. 석달을 주지."

"석달... 알겠습니다."

이번에 새롭게 시작하는 드라마와 예능, 그리고 음악방속에 압박을 넣으면 샤이니아를 이슈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며 장천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그와 상아를 보며 말했다.

"볼일 다 봤으면 가라."

"저는요?"

"넌 좀 남아."

"네."

자신도 가야되나 싶어서 원석이 물었지만 운현은 그를 잡았다. 장천후와 상아가 나가자 운현은 궁금해하는 원석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가냐?"

"음... 뭐 잘 되가고 있습니다. 다만 라티나와 양미혜의 관계가..."

"왜?"

"둘이 사이가 안좋아요."

이번 기회에 운현의 힘으로 둘의 사이를 좀 좋게 만들 생각이었던 원석은 미주알고주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말해주었다. 그가 고자질하는 것을 라티나는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았고 운현은 원석의 말을 모두 들은 후 라티나를 보며 물었다.

"진짜야?"

"...네."

"왜?"

"그 여자가 먼저 시비를 걸었습니다."

"왜 시비를 걸었다고 생각하지?"

운현은 라티나가 아닌 원석에게 물었다. 원석은 잠시의 생각도 없이 단호히 말했다.

"양미혜가 라티나를 질투하고 라티나도 양미혜를 질투합니다."

"허... 미혜야 그렇다고 치고 네가 걔를 질투할 거리는 뭐가 있냐?"

고개를 갸웃거린 운현이 묻자 라티나는 머뭇거렸다. 평소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모습과 다른 그 모습에 원석이 신기해하는 동안 운현은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본 후 말했다.

"다음부터 이런 소리 나오면 확..."

"그 여자가 싫습니다."

"왜 싫지?"

"...운현님의 목표를 막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이미 얘기를 했을텐데. 미혜가 나에게 집착을 하는 것도 예측범위 내이고 그것에 대한 커버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나를 믿지 못하는 건가?"

"....."

운현의 차분한 말에 라티나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 여자는 운현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알아. 그게 뭐 어쨌다고."

"운현님. 운현님."

그의 퉁명스런 반응에 라티나는 더더욱 곤혹스러워했다. 그런 그녀와 운현을 번갈아 바라 본 원석은 운현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라티나는 운현님을 좋아하는 모양인데요."

"맞냐?"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여자가 상당히 눈에 거슬릴 뿐입니다."

혼란스러워하며 라티나는 조용히 말했다. 위신체라 하더라도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혼이 서큐버스 퀸의 혼이라 할지라도 그녀의 정신은 라티나라는, 아르토리우스가 만든 위신체의 기질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제작자와 닮는다 이건가... 그렇다면 좋군.'

아르토리우스 역시 자신에게 상당히 집착했었던 것을 떠올리며 운현은 빙그레 웃었다. 그녀가 만든 위신체이기에 아무래도 아르토리우스와 닮을 수 밖에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르토리우스는 내가 만든 위신체... 그렇기에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었다라... 그렇다면 첫번째 위신체인 '그 녀석'도 결국은 내 뜻대로 움직인다는 것이군.'

"뭐 어쨌든 좋아. 라티나. 날 좋아하나?"

운현은 아예 대놓고 물어봤다. 다른 여자들이라면 당황할만한 질문에 라티나는 도톰한 입술을 다물고 잠시 생각한 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이 다른 여자와 있는 것이, 그것도 양미혜와 함께 있는 것은 상당히 거슬리고 불편했다. 그에 반동하듯 운현을 돕고 그를 아끼고 싶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행복한 기분이 들며 마음이 충족되었다. 만약 이 기분이 좋아한다는 것이라면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됐어. 그럼. 미혜와 너무 싸우지 마. 네가 날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지만 그것 때문에 임무를 무너트릴 생각은 하지 마라."

"...에. 운현님. 그게 답니까?"

"그럼 뭐."

양미혜때와는 다르다. 그녀를 꼬드기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한 운현은 라티나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원석이 묻자 운현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개인의 감정을 앞세워 임무를 무너트릴 생각은 없다. 라티나. 네가 날 좋아한다면 내 말대로 해라."

"...그럼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뭐지?"

"저도 안아주시기 바랍니다."

"...우와. 진짜 말했어."

라티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담담히 요구했고 그 모습에 원석은 움찔 놀랬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후 피식 웃었다.

"그러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언제... 입니까?"

"내 연구가 완료되는 날. 그러니 너는 미혜와 어떻게든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해라. 적당히 알아서. 너희들의 불화가 원석을 방해하고 내 목적을 방해한다면..."

그녀를 바라보며 운현은 싸늘히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됐군. 그리고 원석."

"네?"

"자금이 더 필요하니 일억 보내놔. 그리고 소형 발전기 세개 추가다. 거기에 실험체 셋까지. 쟤들은 이제 거의 다 쓴 것 같으니까 처분해."

정운택과 그의 심복 셋의 정신은 거의 나가버렸다. 더 이상 그들을 가지고 실험을 해봐야 좋은 데이터를 얻을 수 없었던 운현은 싱싱한 실험체를 요구했다.

"의지가 강한... 이번 실험으로 확인해보니 악행을 많이 저지른 놈이 정신력이 강하더군. 하긴, 정신력이 강하니 양심이라는 죄책감에 눌리지 않는 것이겠지. 선별해서 그룹 내 가장 쓰레기 같다고 생각하는 놈들 셋을 보내도록."

장천후에게 앰플을 준지 두달이 지났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샤이니아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정말 많은 곳에 그녀들을 출연시켰다. 갑작스레 바빠진 그녀들이지만 그녀들의 재능은 확실히 있었는지 그녀들의 인지도는 두달만에 꽤나 올라 있었다.

'지금은 대학교 행사 섭외 1위라고 했지.'

갑작스레 스타덤에 오른 것이지만 샤이니아는 별다른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다. 열애설같은 것도 없고 갑질도 없었다.

"아마 필사적이겠지."

니퍼로 전선을 끊은 후 다른 전선을 연결한 운현은 장치의 스위치를 올렸다. 그와 동시에 만들어진 장치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고 운현은 화면을 보며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흠..."

수천줄의 글씨가 화면에서 움직인다.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던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는 자신의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보았다.

"예. 아버지."

"시골에 집 구해놨다. 내일 이사갈 생각이다."

요새 바뻐서 집에는 신경을 못쓰고 있었다. 운현은 그의 말에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보니 동네를 개박살내놨는데 그게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기도 한 그는 드라이버를 잡고 손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어디에 구하셨어요?"

"광주에. 네 엄마 고향이 거기잖냐. 아버지도 거기고. 거기로 내려가기로 했다. 네 형들이랑 형수들도 오기로 했으니까 너도 이번에 와. 오래간만에 가족끼리 저녁이나 먹자. 그리고 한도 변호사님도 오실 수 있으면 오시라고 해라."

"한도 형님은 요새 바빠서 못오실 것 같아요."

거짓이 아니라 진짜였다. 원석이 성경 그룹을 손에 넣고 그는 성경 그룹 전담 변호사로 한도를 고용했다. 매월 월급 수준으로 받아가는 돈이 오천만원 이상이라고 하니 그는 정말 돈 걱정 없이 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더욱 바빠져 운현도 쉽게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

'볼 일도 없지만.'

당분간 한도를 쓸 일은 없었기에 원석에게 가끔식 연락을 듣는 정도로 밖에 소식을 듣지 않았던 운현이 말하자 한성우는 입맛을 다셨다.

"그럼 너라도 오너라."

"알겠어요. 내일 갈... 근데 예은이랑 지혜는... 와요?"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문 후 조심스레 말했다. 조카다. 나이차가 꽤 나는 형들이 낳은 딸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만나기만 하면 달라붙어서 어찌나 귀찮게 하는지 운현은 그 이름을 내뱉는 것만으로도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당연히 오지."

'그래서 이렇게 목소리가 좋으셨구만...'

"지웅이가 서울에 집을 구한다고 해서 네 형수랑 예은이도 올라온다고 하더라. 그래. 가족은 그렇게 떨어져서 지내는 거 아니지."

"끙..."

가고 싶지 않았다. 연구도 잘 되어가고 있었고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는데 심력까지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운현이 신음하자 한성우는 전화기 너머로 강하게 말했다.

"반드시 오거라. 예은이랑 지혜도 널 무척이나 보고 싶어하니까."

"에... 좀 바쁠 것 같..."

"운현이니? 엄마다. 너 주려고 갈비찜이랑 해물탕 해놓고 있단다. 공부하느라 힘들지?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니? 엄마가 갈까? 응?"

"그냥 제가 갈게요."

어머니를 부르느니 차라리 하루 고생을 하는게 낫다. 운현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고 그 말에 전화기 너머의 김운정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아들이 살고 있는 집도 보고 음식도 해주고 싶었던 그녀가 다시 전화기를 한성우에게 넘기자 그는 다시 한번 꼭 오라고 못을 박은 후 전화를 끊었다.

"에휴."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운현은 화면을 보았다. 통화를 하는 동안 시뮬레이션이 완료되었는지 화면에서 움직이던 수천줄의 글자는 모두 사라져 있었다.

"내일은 바쁘니까 오늘 철야를 해야겠군."

옆의 박스에서 핫식스를 꺼내 단번에 들이마신 운현은 빈 캔을 뒤로 휙 던지고 담배를 물었다. 정리같은 것은 할 여유가 없었다. 이미 그의 컴퓨터 주변에는 담뱃재와 빈 핫식스, 그리고 커피캔과 사탕껍질, 초콜릿 껍질로 난잡해져 있었다. 그 더러운 공간에서 빠르게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들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뒤로 걸어갔다.

"읍! 으으읍!!"

입에 재갈이 물린 아주 신선한 실험체들이 눈물을 흘리며 운현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간 운현은 그들의 머리에 이제는 그럴듯해진 접속기를 끼웠다. 착용하지 않으려고 붕붕 고개를 돌리며 저항하는 그를 보며 운현은 입맛을 다신 후 의자에 있는 줄로 그의 얼굴을 감아 고정시켰다.

"으읍! 읍!!"

자비를 바라는 그 시선을 보며 운현은 빙긋 웃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민정훈. 성경 그룹에 있는 원석의 반대 파벌에 있던 악당이다. 인신매매는 물론이거니와 14세 미만의 소녀들을 강간하고 그들을 앵벌이로 만들어 매춘의 길에 보내버리는 아주 개같은 녀석이다.

"힘이 있다고 까부는 것은 좋아. 사람이 힘을 가지면 쓰고 싶지. 그건 당연한거야."

운현은 저항하는 그의 머리를 제대로 고정시킨 후 그의 볼을 톡톡 치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 웃음이 오히려 더욱 공포스러웠던 민정훈이 닭똥처럼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운현은 그의 머리에 접속기를 착용시킨 후 말했다.

"하지만 그 힘을 쓴 대가는 치뤄야겠지?"

"으으으읍!!"

후회스럽다. 만약 기회가 있으면 나쁜 일따위는 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고 싶다. 어린 여자애들을 강간하던 그 미친 쾌락을 잊고 살고 싶다. 하지만 그에게 더 이상 남은 기회따위는 없었다.

"악이라면 미학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너같은 싸구려 천박한 악은..."

운현은 장치를 고정시킨 후 자리로 돌아가 접속기를 작동시키며 말했다.

"더 큰 악에게 삼켜지기 마련이다."

"으으으으읍!!!!!"

그의 신음성이 터져나오자 운현은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 구성된 세계에 민정훈이 나타났다. 그가 가상의 세계에 구현된 것을 확인한 운현은 화면 안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그를 향해 말했다.

"어이. 민정훈이. 거긴 좀 어때?"

"싫어... 싫어...! 살려줘...! 살려줘!!"

"야. 내가 너 살아남으라고 장비까지 줬는데 이러기냐? 칼이랑 방패. 얼마나 좋아. 그거 두개면 세상 천지에 무서울게 없겠구만."

공포에 덜덜 떨던 그가 발악하듯 외쳤을 때 운현은 그를 응원한 후 키보드를 두들겼다. 그 순간 그의 앞에 긴 검과 방패가 생성되었다.

"크아아아아!!"

그 직후 만들어진 것은 블랙 오크였다. 4계층의 대표적인 몬스터인 블랙 오크가 가상 현실에 구현되자 민정훈은 그 기세에 눌려 아까의 전의를 잃었다. 그런 그를 향해 블랙 오크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몸을 잡고 양 팔과 양 다리를 찢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아악! 끄아아아아악!!"

고통을 느끼는지 그는 비명을 내질렀다.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죽지 않은 그의 머리를 블랙오크가 잡고 크게 베어물었을 때가 되서야 그는 결국 가상 현실 내에서의 죽음을 맞이했다.

"으읍...읍..."

죽음을 경험하자 그는 가상 현실의 접속이 끊어졌다.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그가 숨을 몰아쉬기 시작하자 운현은 그의 입에서 재갈을 풀어 준 후 물었다.

"아직 버틸만 하지?"

"이... 이제.... 그마안..."

가상 현실의 세계에서 죽음을 경험했을 때 그 충격을 최대한 완화시켜야 한다. 이것만큼은 피스나도 연구하지 않은 분야이기에 운현으로서는 맨땅에 헤딩하며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오우. 아냐. 아냐. 고작해야 오십번 밖에 안죽었잖아. 좀 더 해보자고. 진짜로 죽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고통스러워해? 좀만 참아봐. 너한테 당하던 애들도 죽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을거야. 속죄한다고 생각하라고."

"이번엔 꼭 성공할거야. 자. 힘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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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

몇차례 코드를 수정한 운현이 그것을 적용시키고 다시 입에 재갈을 물리자 민정훈은 눈물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살려줘...! 살려줘!! 사람 살려!!"

지하실이다. 방음처리가 제대로 된 지하실에서 힘껏 외쳐봤자 들릴 일따위는 없었다. 운현은 그가 있는 힘껏 외치는 것을 들으며 어깨를 으쓱이고 단검을 든 후 그의 턱을 꽉 잡았다.

"혀를 잘라놔야 좀 조용히 할거냐?"

"...으아...아..."

"그럼 시작한다."

웃는 얼굴 그대로 한점의 감정도 실리지 않은. 연민, 자애, 자신에 대한 비웃음조차 없이 오로지 실험용 쥐를 보는 듯한 그의 시선에 민정훈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민정훈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빙그레 웃은 후 그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장치를 작동시켰다.

"아으으으으!!"

그가 다시 화면에 나타나자 운현은 그에게 칼과 방패를 만들어 준 후 다시 블랙 오크를 만들었다. 블랙 오크를 보며 도망치기 시작한 그는 얼마 도망치지 못하고 블랙오크에게 잡혀 사지가 뜯기고 머리가 씹혀 죽었다.

"...어?"

"어때!?"

"아... 고, 고통은 없... 분명히 죽었는데?"

수십번이나 저 가상의 세계에서 살해당했다. 그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있었던 민정훈은 사지가 뜯기는 고통도, 머리가 씹히는 고통도, 그리고 생명이 끊어지는 공포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야말로 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그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빙그레 웃었다.

"거봐. 이번엔 성공할 거라고 했잖아!"

"그럼... 그럼 날 풀어주는... 건가요?"

애처로운 얼굴로 민정훈은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보며 운현은 방긋 웃은 후 즐거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 설마~"

"네...?"

"아직 실험 안끝났어. 자. 그럼 다른 놈들을 불러보자."

운현의 말에 민정훈은 절망했다.

"으음~ 역시 올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거지같은 동네다. 과거에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동네 주민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을 본 운현은 그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운현과 운현의 가족들을 모욕하고 괴롭히다가 단체 고소를 맞아 결국 가정이 파괴되거나 큰 손해를 입은 그들이다.

그들은 운현의 인사에도 이를 갈기만 할 뿐 받아 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것에 운현은 실망하지 않았다. 애초에 응답을 바라고 한 인사도 아니었다. 그냥 기분 좀 더 나쁘라고 한 인사였지.

"하아..."

마주치는 동네 주민들에게 느긋하게 인사를 하며 집 앞에 도착한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님을 만나는 것은 좋다. 그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문제는...

"덜컹."

"삼초오오온!!"

"삼촌이다!!"

맑고 영롱한 목소리가 집의 2층 창문. 과거 자신이 쓰던 방의 창문에서 터져나오자 운현은 인상을 왕창 구겼다.

"...저 껌딱지들."

피하고 싶었던 껌딱지들이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2층에서 내려와 현관문을 열었다. 한예은, 한지혜. 겉보기로는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소녀들이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둘은 말똥말똥 밝은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보브컷을 하고 한쪽을 땋아 내려 귀여움을 강조한 갈색 머리칼에 하얀 피부와 큰 눈,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분홍색 바탕에 곰돌이가 여기저기 그려져 있는 귀여운 티셔츠와 하얀색 반바지를 입은 소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러워 어른들의 귀여움을 한번에 독차지할만한 사랑스러운 여자아이 큰형의 딸이자 운현이 로리를 극혐하게 된 큰 원인 중 하나인 한예은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움찔했다.

"......"

"삼촌!!"

또다시 맑은 미성이 터져나온다. 한예은과는 다른 매력을 가진 소녀다. 짙은 흑단같은 긴 검은 머리칼. 귀엽다기보다는 아름답다고 하는게 맞을 정도로 무척이나 세련된 미모를 가진 소녀는 자신의 피부와 비슷한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채 운현을 올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마치 얼음처럼 차갑다고 느껴질만한 그녀의 미모에 어울리지 않는 밝은 미소는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두근거리게 할 정도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운현 역시 그 미소를 보고 두근거렸다. 물론 다른 이들과 달리 긴장으로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삼촌!!"

한예은이 밝게 웃으며 자신을 부르자 운현은 딱딱하게 굳은 상태에서 겨우 그것이 풀리고 입을 다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밝게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은 정말이지 사람 더럽게 귀찮게 하는 꼬맹이의 미소에 불과했다.

"오래간만이야!! 삼촌!"

한지혜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자신을 향해 말하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정말이지 익숙해지지 않는 녀석들이다. 다른 꼬맹이들? 그들이 어떤 미소를 짓든, 아니면 세상 떠나라 울든 운현은 그런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 녀석들만큼은 달랐다. 어쨌든 가족이니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전에도 그랬지...'

과거. 소년원에 갔다와 자신이 한참 삐뚫어졌을 때도 이 녀석들만큼은 자신을 좋아했었다. 성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하더라도 한예은과 한지혜만큼은 자신을 믿어주었다. 그렇기에 더욱 거북스럽다.

"어디 갔다왔어?"

"이제 같이 사는거야!?"

"오랜만에 봤는데 빨리 안아줘."

"삼촌. 난 뽀뽀면 괜찮아. 자. 여기다가 해줘."

초롱초롱 눈을 빛내면서도 예은과 지혜는 문을 가로막은 채 운현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반갑다고 안아주고 뽀뽀해 주기 전까지는 절대 들여보내지 않을 기세. 마치 장판파의 장비와 같은 기세로 그녀들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자 그녀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운현은 배에 힘을 준 후 숨을 들이마시고 외쳤다.

"혀어어어엉수우우우우우니이이이이임!!"

남들이 보면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미소이지만 운현에게 있어서만큼은 저승을 지키는 문지기들과 다를 바 없는 그녀들을 향해 운현은 냅다 외쳤다.

그의 외침에 예은과 지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작년에도 만났을 때 운현을 곤혹스럽게 하다가 결국 운현의 형수들, 예은과 지혜의 어머니에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났던 것을 떠올린 그녀들이 오들오들 떨었을 때 현관문이 열렸다.

"어머. 도련님! 지혜야! 삼촌 못들어오게 막고 있는거야? 엄마가 그럼 된다고 그랬어. 안된다고 그랬어?"

"한예은!! 엄마가 삼촌 괴롭히지 말라고 했어? 안했어!?"

"히잉..."

"삼촌이 안안아줘서 그런건데..."

"엄마가 변명은 죄악이라고 했어? 안했어?"

"했어요..."

예은이 시무룩해하자 지혜는 그녀를 보며 키득거렸다. 삼촌을 노리는 못된 불여우같은 기집애다. 그녀가 혼나니까 기분이 좋았던 지혜는 자신의 귀가 당겨지는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아야야야야!!"

"한지혜? 엄마한테 혼나고 있는데 웃음이 나와야돼요~ 안나와야돼요~?"

"아야야! 아야야!! 으아아앙!!"

형수들이 나와 단번에 조카들을 제압하자 운현은 히죽 웃었다. 그녀들에 의해 한지혜와 한예은이 끌려서 안으로 들어가자 운현은 씩 웃었다.

"역시 형수님들이 짱이군."

물론 힘이나 머리 싸움으로 운현이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조카들에게 질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애들을 쥐어팰 것인가? 아니면 말싸움으로 이길 것인가. 쥐어 팰 수도 없고, 또 말을 해도 통하지 않으니 답이 없는 상대인 그 둘에게 대처하는 법은 결국 형수님들 뿐 이었다.

'형들이나 아버지한테 얘기해봐야 씨알도 안먹히니.'

딸바보인 그들에게 얘기해봤자 넌 삼촌이 돼서 왜 그 모양이냐? 라는 소리 밖에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운현은 코를 쓱 문지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머. 운현아. 왔어?"

"어서 와라. 뭐 그리 바쁘길래 집에 코빼기도 안비추냐?"

"하하하... 공부하느라요. 검정고시는 어서 치뤄야죠."

"도련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찾아뵙지 못해서 미안해요."

"어우. 아니에요. 형수님. 지방에서 예은이 혼자 키우느라 형수님이 더 고생이죠."

"후후후... 형님. 우리 도련님이 그래도 난 사람은 난 사람이에요. 그죠?"

"그러게~"

"에... 그나저나 형들은요?"

"예은이 아빠는 지금 예은이 선물 사러 갔고 도련님도 지혜 선물사러 같이 갔어요."

"헤에... 그럼 애들은요?"

아까 전에 끌려 들어간 예은과 지혜를 떠올리며 운현이 묻자 첫째 형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 저기 방에서 무릎꿇고 손들고 있어요. 오기 전에도 그렇게 말했는데 정말... 누구 닮아서 저렇게 뺀질거리는지."

"에이~ 다 저 좋다고 그러는건데요~  그러니까 좀만 더 혼내주세요. 어른 무서운 줄 모르는 녀석들 아주 그냥 버릇을 고쳐놔야지."

"......."

운현이 씩 웃으며 말하자 형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번 기회에 아주 버릇이 확 고쳐졌으면 싶었던 운현이 실실 웃으며 말하자 둘째 형수는 당황하며 운현을 당겼다.

"도련님. 차 한잔 어떠세요? 커피 드릴까요?"

"네. 좋죠."

"얌마. 넌 어른스럽지 못하게 애들한테 왜 그러냐?"

한성우가 자신에게 꿀밤을 먹이며 말했지만 운현은 그저 기분 좋게 웃을 뿐 이었다. 아이 신나. 자신의 손으로 감당하기 힘든 녀석들을 형수들이 제압해 준 것에 뿌듯해하며 운현은 둘째 형수가 끓여 준 커피를 홀짝거렸다.

"우리 왔다."

"지혜야~! 아빠왔다! 어? 너 왔냐? 짜식. 고생했다면서? 수고했다."

지웅이야 일년정도 같이 살았다고 하더라도 지웅의 동생이며 한씨 집안의 둘째 아들인 지현은 운현이 그런 일을 당한 것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그는 운현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하자 그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었다.

"아빠아아!!"

"흐아아아아앙!!"

"....."

"억! 형! 형!"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운현이 당황하며 외치자 지현은 딱딱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쟤들이 왜 울고 있을까?"

"나야 모르지."

"흐아아앙~ 삼촌이... 삼촌이!!"

"아아아아아앙~!! 삼촌때문에... 훌쩍... 흐아아앙!!"

"...망할."

"...넌 잠깐 나 좀 보자."

지혜와 예은이 엉엉 울며 나오자 지웅과 지현은 운현을 향해 살벌히 웃었다. 그들의 웃음에 운현은 움찔하며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의 뒤를 따라나가다가 예은과 지혜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고보자."

그녀들은 운현을 보며 혀를 날름거리고 싱긋 웃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어쩐다고?"

저녁식사를 마치고 안방에 모인 한씨 일가의 남자들 중 대장이라 할 수 있는 아버지 한성우는 운현을 부러운 듯 바라보며 물었다. 지혜와 예은이 그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쿨쿨 자고 있는 것이 정말 부러웠나보다. 뭐 때문에 저렇게 운현을 좋아하는 것일까. 지들 아빠보다 운현을 더 좋아하는 것에 성우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전에 말씀드렸던대로요. 검정고시 치루고 한도 형님 밑에서 공부 좀 하다가..."

"근데 너 군대는 어떡하려고?"

"신검도 안나온 애한테 군대는 왜 얘기하냐? 아무튼 잘 해봐라."

"응."

지웅의 말에 운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말없이 바라보던 지웅은 그의 한쪽 다리를 베고 있는 예은을 들어 자신의 다리로 옮기려고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찰싹."

"...얘 안자는 거 맞지?"

"그런 거 같다... 하아."

"음냐~"

자신의 손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처럼 확 쳐낸 한예은이 잠꼬대를 하자 지웅과 운현은 서로를 바라보며 떨떠름히 말했다. 그런 그들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던 지현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자신은 다를 것처럼 으스대던 그가 손을 뻗었을 때 한지혜는 지현의 손을 잡고 비틀어버렸다.

"....."

"뭐. 왜. 뭐. 나보고 어쩌라고."

지웅과 지현이 자신을 노려보자 운현은 굉장히 어이가 없었다. 아니 딸 관리 못한 자기들 잘못이지 이 상황이 자기가 뭘 어쨌다는 것인가. 운현이 어이없아하며 말하자 성우는 피식 웃은 후 말했다.

"네가 쟤들 방에 좀 데려다 주거라."

"분부대로 합죠."

안그래도 자꾸 달라붙는 게 귀찮았던 운현은 두 미소녀를 짐짝 들듯 양 손에 들어 옆구리에 끼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의 침대에 예은과 지혜를 내려 놓은 운현은 그녀들이 자신의 옷자락을 꽉 잡자 씩 웃었다.

"내가 이럴 것 같아서 이 옷을 입고 왔지!"

"찌직!"

"아앗!?"

"삼촌!"

운현의 다 낡아빠진 상의가 그의 힘에 의해 뜯어지자 예은과 지혜는 낭패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그런 그녀들을 향해 운현은 손을 흔들어주며 킬킬 웃었다.

"잘자라! 꼬맹이들아! 안녕이다!!"

266====================

거래

방에 있는 남방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온 운현은 남방을 걸쳐 입고 단추를 채우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엄마. 저 이제 갈게요."

"벌써? 자고 가지 그러니."

"에이~ 내일 이사도 해야 하고 바쁘실텐데. 가시기 전에 올게요. 제 방은 쟤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잘 곳도 없잖아요."

"그래도.."

아들을 재우지도 못하고 보내야 하는 것이 아쉬운 김운정은 한껏 싼 음식들을 식탁 위에 올려 놓은 후 말했다.

"이것들 가져가. 그리고 꼬박꼬박 전화 하고. 응?"

"걱정 마세요."

김운정의 얼굴을 보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과거의 자신은 자신 때문에 엄청나게 손해를 본 부모님을 대하는게 어려워 막 나갔었다. 그런 자신이니만큼 부모님도 그런 식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겠지. 아무것도 모른 채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김운정을 한번 꽉 안아 준 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갈게요."

"그래. 아들. 잘 하고 있어!! 먹는 것도 잘 먹고!"

집에서 나온 운현은 부담없는 마음으로 숙소를 향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지하실로 향한 운현은 자신이 오자 두려움에 덜덜 떠는 실험체들을 향해 밝게 웃었다.

"자! 또 즐겁게 실험하자!!"

"이번 주 인기가요 1위는 샤이니아입니다!!"

"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기투표, 노래, 그리고 예능까지. 이제 샤이니아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아씨. 축하드려요. 샤이니아가 컴백한지 1주일만에 또다시 1위를 탈환하셨네요!"

"인기의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진행자의 질문에 이제는 무명 가수에서 하루에도 수십통의 출연 러브콜을 받고 있는 상아는 그 질문에 밝고 활기찬 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모두 여러분의 덕이에요!! 팬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 사랑해요~"

"늘 감사드려요~"

"그럼 이번주 1위를 차지한 샤이니아의 '오빠가 좋아요'를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인사드리겠습니다~ 인기가요의 하민!"

"정수였습니다~"

인기 오인조 남성 아이돌 유마인에서도 여성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둘의 인삿말을 끝으로 무대가 시작되었다. 상아는 마이크를 잡고 손을 흔들며 밝게 외쳤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상아야!"

인기가요 생방송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나온 상아는 대기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민이 말을 걸자 밝게 웃었다.

"네. 하민 오빠."

"이번에 우리 애들이랑 같이 가평 가기로 했는데 같이갈래? 동생들도 같이!"

"우리가 다 쏠게. 너희들은 몸만 와!"

"에... 그치만."

상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과는 달랐다. 입는 것도 먹는 것도.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도.

이제는 하민이나 정수같은 인기 많은 선배 아이돌 가수가 말을 건다. 과거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자신을 만나기 위해 이렇게 대기실에서 기다리기까지 하는 것에 그녀는 쓰게 웃었다.

"우리 사장님이 너 꼭 만나고 싶어하신다고. 그, 그리고 나도 너한테 하고 싶은 말도 있고..."

"그래. 상아야. 같이 와서 놀고 먹고만 하면 되는거야. 알아보니까 너 내일 ㅣ스케줄도 없다면서?"

자신의 스케줄까지 조사한 것인가. 상아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 그들의 뒤로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 뭐하냐."

"아, 사장님!"

장천후의 등장에 하민과 정수는 움찔했다. 그런 그들을 싸늘한 눈으로 응시하던 장천후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 하민은 용기를 내며 말했다."

"사장님. 저 사실 상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의 폭탄 발언에도 장천후는 시큰둥할 뿐 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당황한 하민이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장천후는 핸드폰을 들었다.

"응. 난데. 유마인 이슈 있지."

"에?"

"하민이 C급 여자 연예인 건드린거. 그거."

"어, 어떻게!?"

과거 자신이 기대받는 연습생일 때 딱 한번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마되었을텐데? 하민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자 장천후는 담담히 말했다.

"그거 터트려."

"자, 장천후 사장님!"

"감히 누굴 건드려."

장천후는 더 없이 싸늘한 눈으로 하민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에 하민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장님... 그, 하민 오빠는 잘못이..."

상아가 당황하며 둘 사이를 중재하려 하자 장천후는 가소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상아는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시선. 자신이 실수를 하거나 이런 일이 생길때마다 장천후에게 느끼는 시선이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2년동안 탑 연예인 생활을 하며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을 때 알게 된 그 시선.

그의 시선은 '주제 파악 하라는 것' 이었다.

"...죄송합니다."

"알면 됐다."

이제는 성경 엔터테인먼트에서 탑급에 속하는, 3층에 올라갈 수 있는 연예인이 되었지만 상아는 자신이 어떻게 스타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난... 만들어진 스타이니까...'

장천후의 혹독할 정도의 관리 아래에 샤이니아는 2년동안 무섭도록 성장했다. 하룻밤 만에 세상이 변했다. 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였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2년 전 그 날. 그와 장천후간의 거래. 고작해야 고등학생 정도에 불과했던 그에게 이 무서운 장천후는 무릎을 꿀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졌다. 그동안의 노력과 고생이 허망하게 실패하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녀들은 승승 가도를 달렸다. 다른 연예인들이나 소속사의 시기에 의한 이슈나 헛소문조차 장천후는 완벽하게 잘라내었고 그 결과 샤이니아는 스타가 되었다.

"가자."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민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상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한 스타라면 장천후를 말릴 수 있겠지만 자신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언니."

"어? 하민 오빠랑 정수 오빠?"

옷을 갈아입고 나온 한솔과 윤아는 대기실 앞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장천후의 싸늘한 시선에 결국 그의 뒤를 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들이 조잘거리는 것에 상아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가 떠오른다. 그 누구에게도 오만하고 당당할 수 있었던 그. 자신과의 거래를 통해 저 무서운 장천후에게 자신을 스타로 만들라 '명령'을 할 수 있는 그. 오늘따라 그가 떠오르는 상아였다.

'그는... 지금 무엇을...'

"으아아아아아!!"

운현은 손에 쥔 편지봉투를 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결국 올 것이 와버렸다.

"야! 너네 빨리 튀어와!"

한도에게 전화를 건 운현은 눈 앞의 편지봉투를 보며 이를 갈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도와 원석이 숙소로 오자 운현은 그들에게 편지봉투를 던졌다.

"이게 뭡니까?"

"뭐로 보이냐?"

"...음. 국방부에서 보낸 거군요."

"보아하니 신검통지서 같은데..."

"군대 가기 싫어!"

".........."

이것은 돈 없고 빽 없는, 아니 돈이 있고 빽이 있어도 상당히 거슬리는 문제다.

"으음..."

한도는 낮게 신음했고 원석은 피식 웃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운현은 당당히 말했다.

"뺄 수 있는 방법은?"

88"없어요."

"뭐!?"

"작년에 고위 공직자 자식들이 비리를 저질러서 군대에 안간게 걸렸어요. 그리고 조사한 결과 연예인들도 상당수가 병역 비리를 저지른게 들통났죠. 지금 핫한 상황이라서..."

"저희 애들 중에서도 뺄 수 있는 애들은 다 빼려고 하지만 힘듭니다. 씨알도 안먹히던데요?"

한도와 원석의 말에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대한민국을 주름잡는 성경 그룹의 총재가 민간인 군대 하나 못뺀단 말인가? 운현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원석과 한도는 쓰게 웃었다.

"최대로 빼면 공익 정도로 뺄 수 있겠군요."

"공익으로 가도 훈련소는 가야 하잖아. 거절이다. 그럴 시간 있으면 연구를 한번이라도 더 하지."

운현의 말에 한도와 원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안그래도 이런 청탁과 자문이 엄청 들어오고 있는 한도는 잠시 생각하다가 차분히 말했다.

"운현님."

"뭐."

"포기하면 편합니다. 공익으로 만족하시죠."

"하. 포기하면 편하다라... 그럼 너네도 포기해라."

"예?"

"내 손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을!!"

"으아아아아악!!"

한도와 원석에게 침투경을 날려 다시 한번 물어보았지만 정말 답이 없는 모양이었다.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왜 하필이면 지금 이런단 말인가.

'면제로 빠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거지...'

기준이 강화되어서 원래 면제로 빠져야 될 사람들도 현역으로 입대를 하게 된 것에 사람들은 분노를 했지만 헬조선이 괜히 헬조선이겠는가. 이런 전시용 행정이 하루 이틀도 아닌지라 이걸 탓해봤자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빌어먹을.'

운현은 빠득 이를 갈았다. 군대 문제는 한도만 믿고 있었는데.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차분히 말했다.

"군대를 안갈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지?"

"허억...허억... 일단 첫번째. 빨간 줄 그이는 겁니다."

"빨간 줄 그이면 교도소 가야하잖아. 빨간 줄 그이든 말든 상관없지만 교도소 가 있는 시간도 아깝다."

"그럼 두번째. 해외로 탈주입니다."

"현재의 삶에서 탈주시켜줄까? 가뜩이나 사람 심란한데 자꾸 사람 짜증나게 만들래?"

운현이 손을 들어올리며 으르렁거리자 원석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한도는 차분히 말했다.

"국적 변경은 어떻습니까?"

"국적 변경... 아. 그렇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의 말에 운현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가 자신의 의견을 채택하자 한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빙긋 웃었다.

"20세의 대한민국 청년이 국적을 변경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까짓거 한번 해보죠!"

근성이 넘치는 어조로 그가 말하자 운현은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아서라. 까불다 괜히 공격받지 말고. 지금 그런 짓 하다가 잘못하면 훅 간다면서."

"에..."

운현의 말에 한도는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대로였다. 다른 때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시기가 상당히 안좋았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테니꺼 너네들은 그냥 가라. 이 인생에 하등 도움도 안되는 것들아."

원석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한도야 모르겠지만 자신은 큰 도움이 되질 않는가. 그런 그가 물기젖은 눈으로 바라보자 운현은 그에게 딱밤을 날린 후 손을 휘저었다.

"그냥 너네들은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렴."

"......."

한도와 원석이 나가자 운현은 지하실로 향했다. 군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제 만든 장치가 제대로 작동해야 했다. 이것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군대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자신이 전의 세계에서 품었던 의문과 위화감을 대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후우..."

될 것인가. 운현은 눈을 감았다.

지난 2년동안 운현은 많은 연구를 했고 그 성과를 보았다. 원석의 막대한 지원으로 빠르게 연구를 진행해 피스나의 연구를 모두 따라잡은 운현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현 상황에 대한. 그리고 지금 자신이 확인하지 못한 문제에 대한 정리였다.

요한은 자신을 보고 당황했었다.

상아는 자신을 보고 스승, 현자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었다.

운현은 현자의 무덤에서 얻은 관에 있는 시체를 확인했다.

아르토리우스와 닮은 라티나.

자신의 목적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자신과 비슷하게 행동하는 아르토리우스.

그리고 현자의 시간.

왜 하필이면 현자의 시간이라는 이름인가. 왜 지력이 상승하고 왜 감정이 사라지는가. 운현은 그것에 집중했고 한가지 가설을 세웠다. 그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프로토 타입의 접속기를 만들었고 이제 그 결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거 나라고 하더라도 상당히 긴장되는군."

만약 이 방법이 실패한다면? 그렇다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럼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그리 된다면 그녀들을 구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지체 될 수도 있었다.

"젠장.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운현은 이를 갈며 엔터키를 누른 채 천천히 눈을 떴다. 만약 화면 안에 자신의 생각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성공이다. 그는 긴장하며 천천히 화면을 보았다.

[결국 성공했군. 예상대로다. 훌륭하다.]

"하하하... 그러게."

운현은 화면을 보며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무뚝뚝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를 바라 본 운현이 의자에서 일어나 콘솔을 향해 다가가자 화면 안의 그는 천천히 자신의 머리를 덮고 있는 로브를 벗었다.

"너는... 누구냐."

[알고 있으면서 묻는 건가? 네가 예상하고 있는 존재다.]

무뚝뚝한 목소리에 힘이 담긴다. 이 순간을 그 역시도 미치도록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무심한 시선 끝에 남아 있는 강한 열망. 화면으로도 느껴지는 맹렬한 의지. 그것을 마주하며 운현은 입을 열었다.

"현자."

[그리고 네가 만든 첫번째 위신체. 그녀들을 구하기 위해 과거의 네가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얻은 성배를 이용해. 단 한번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의 힘을 손에 넣어 500년 전의 과거로 보낸 자다.]

화면 바깥에 있는 20대 어린 청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운현과 화면 안의 세상의 고진 풍파를 겪어 피곤해보이면서도 그 강렬한 의지만은 오히려 더욱 불타오르는 듯한 눈을 가진 30대 청년의 모습을 한. 운현과 무척이나 닮은 얼굴을 한 현자는 서로를 보며 나지막히 웃었다.

267====================

거래

"현자의 시간은 뭐지?"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운현의 질문에 현자는 무감정한 얼굴, 운현의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 되었을때의 표정으로 답했다. 그런 그를 향해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감정이 없어지는지.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것을 파악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는지. 그리고 왜 전투에 더 능숙해지는지에 대한 의문은 그를 보게 된 순간 어느정도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링크."

[더 정확하게는 공유다. 나의 사고능력과 통찰력을 네가 얻고 네가 느낀 감정이 나에게 오는 것이지. 왜 현자의 시간이냐고? 그것이 활성화 된 동안만큼은 너의 행동과 사고는 운현이 아닌 '현자'가 되기 때문이다.]

감정을 현자에게 주는 대가로 사고력과 통찰력을 얻어온다. 그렇기에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되면 자신의 행동방침이 아닌 현자의 행동방침대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운현은 이상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째서 그게 가능한 것이지?"

[위신체를 만들때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느냐에 따라 그것이 가능하지. 위신체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현자의 질문에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을 잃기 전이라면 알지도 모르지만 한정된 기억만을 되찾은 운현이기에 그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의 대답에 현자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내가 설명해주기는 어려운데... 하긴. 더 이상 위신체를 만들 일도 없을테니 상관없으려나. 위신체를 만들때 자신의 혼과 정신을 나눠 줄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 둔 존재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움직일 수 없게되지만 한가지 강력한 이점이 있지.]

"현자의 시간처럼 공유하게 된다는 것인가?"

[그래. 남자가 진리에 도달할 정도의 무욕의 상태가 되었을때 공유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 싸고 나면 이렇게 되는 것이었나. 운현이 입을 다물었을때 현자는 그를 보며 말했다.

[너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건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 되었을때 뿐이다. 나 역시 너에게 많은 것을 물어야하니... 잘 됐군.]

"계획에 포함된 일인가?"

운현의 질문에 현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 중요 사항 중 하나다. 우리가 해야 하는 마지막 사기를 위해.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공유해야한다.]

"마지막... 사기?"

현자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숨겨진 것이 있단 말인가? 그런 그를 향해 현자는 이를 드러내며 강하게 말했다.

[그래. 우리가 마지막의 순간에 반드시 성공시켜 모든 것을 손에 넣기 위한 최후의 사기, 신과 세계, 운명마저도 속여야 하는 궁극의 사기를 위해서!]

일주일간 운현은 현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알지 못한 계획의 전부를 듣게 되고, 현자는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되지 않은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들었다.

[나머지는 맡기겠다.]

"아아."

운현은 홀가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현자의 눈이 감기자 운현은 현자를 캡슐에서 꺼내 관에 담고 인벤토리에 넣었다.

"일단은 군대문제부터 해결하는게 우선이군."

운현은 자신이 만든 접속기와 접속에 필요한 장비를 들어 인벤토리에 넣은 후 거실로 올라왔다.

"띠리리리링~"

일주일동안 쳐다도 보지 않고 있던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힐끔 뷴 운현은 그것을 들었다. 장천후다. 벌써 약속한 한달이 된 것인가? 날짜를 보니 이미 사흘은 지났다. 부재중 전화만 백통이 넘고 문자도 이백여개는 와 있었다.

"여보세요."

[접니다!]

장천후의 다급한 목소리에 운현은 인상을 찡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리가 없는 장천후는 다급히 외쳤다.

[지금 어디십니까!?]

"숙소."

[지금 가겠습니다.]

"나 바쁘니까.내일 와라.."

[시간 많이 안 뺏겠습니다! 약만...!]

다급한 것은 장천후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그가 참지 못하고 온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제 나갈건데. 운현은 장천후의 말을 무시하며 전화를 끊고 옷을 챙겨입은 후 밖으로 나갔다. 이미 어둑어둑한 밤이다. 후드를 뒤집어 쓴 그는 곧장 광화문의 주한 미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어디보자..."

높은 대사관의 벽을 보며 운현은 하이딩을 걸고 훌쩍 뛰었다.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는 대사관에 들어선 운현은 터덜터덜 걸어 1층 정문으로 들어갔다. 정문의 안내도를 본 그는 3층에 있는 대사관실 앞으로 이동했다.

"다행이구만."

대사관이 퇴근했으면 어쩌나 했던 운현은 대사관실의 문틈에서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빙긋 웃은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

"헬로."

다행스럽게도 한국어가 흘러나오자 운현은 안심했다. 여차하면 필담으로 이야기를 나눠야했는데 그 수고가 줄어든 것이다.

"철컥."

문이 열리며 운현은 안에 있는 사람들을 확인했다.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는 대머리 노인과 건장한 체구의 흑인 두명이 정장을 입고 서 있는 것을 본 운현은 문을 열고 들어온 자신을 향해 그들이 총을 겨누자 느긋한 웃음을 지었다.

굳이 그들과 적대하고 싶지 않았던 운현이 가볍게 손을 들어올리자 그들이 무전기에 손을 가져갔다.

"에이! 그건 곤란하지!"

소동은 일을 귀찮게 만들 뿐이다. 운현의 광검이 빛을 뿜은 순간 경호원의 손에 들린 무전기가 반토막 났다.

"왔더..."

"퍽!"

발을 굴러 단 한번에 뛰어 경호원의 복부를 후려쳐 기절시킨 운현은 다른 경호원도 가볍게 제압하고 아무렇지 않은, 숙련된 경호원 둘을 순식간에 쓰러트린 것에 아무런 자부심조차 느끼지 않는 순박한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어...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대사의 자리에 있으면서 CIA나 FBI. 그 외 다른 민간 경호원들의 무술 실력을 보았던 그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운현처럼 빠르게 움직이던 것을 본 적이 없던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윌포드."

"운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밤 늦게 찾아오게 된 것은 한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만. 아이 참. 이거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네요."

생글생글 웃으며 순박한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에 윌포드는 어이가 없었다. 경호원 둘을 쓰러트리고 이렇게 무단 침입을 한 주제에 뭐가 어쩌고 어째?

"주와앙!"

"...스타워즌가?"

운현은 광검을 휘둘러 윌포드가 앉아 있는 책상을 반쪽 내었

다. 책상 밑의 비상벨을 누르려던 그는 운현의 손에 들려있는 광검을 가리키며 떨떠름히 물었다. 그런 그를 향해 운현은 실실 웃었다.

"오우. 아시는군요. 역시."

"한국인인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짓인가. 한국 정부가 미국과 적대하기로 한건가? 그 새로운 기술로?"

윌포드는 운현의 손에 들려있는 광검을 보며 물었다. 퍼포먼스용 장난감이 아닌 진짜 광검을 보며 그가 묻자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국 정부랑은 별로 상관없는데요?"

"그럼... 러시아인가? 아니면 중국??"

"에... 거기랑도 별로... 그냥 개인적인 물품입니다. 음...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것은 별건 아니구요."

생긋 웃은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접속기와 콘솔을 꺼내었다. 혹시 몰라 가져온 led 모니터는 대사관실의 모니터로 대체하기로 하고 장치를 연결시킨 운현은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는 윌포드에게 말했다.

"제 재밌는 장난감을 팔죠. 그 대신 저에게 미국 시민권과 미 대사관 신분을 주세요."

"이게 무슨...."

은은한 노을이 환상적인 해변이다. 붉은 노을에 비춰진 바다가 아름답다. 그것을 보며 윌포드는 눈만 껌뻑거리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은 바다였고 자신이 있는 곳은 그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이었다. 통나무 집 하나와 야자수 몇개만 있는 바다섬에서 멍한 얼굴로 걸어간 그는 바닥에 밝히는 잔디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도대체..."

모래 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잔디가? 그는 당황하다가 잔디 정원의 끝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마치 온천이라도 되는 것처럼 뜨거운 물이 펑펑 솟는 작은 샘이 있었다.

"......."

일본에서 겪었던 자연온천과 비슷한 모습에 그는 살며시 손을 담궈보았다. 체온보다 조금 더 높은 따뜻한 물이 손을 감싸자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왜... 내가 여기 있는거지?"

윌포드는 현재 상황에 당황했다. 분명히 그 운현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머리에 무언가 씌운 것 까지는 기억이 났다. 분명 그때 자신은 대사관실에 있었다. 그런데 왜??

그가 당황하는 동안 오두막의 문이 열리며 두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어머~"

"윌포드님~"

"무슨...!?"

눈이 확 뜨일 정도의 매력적인 미녀들이다. 한 손에 잡기조차 어려운 커다란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풍만한 둔부. 근육이 탄탄해보이는 허벅지. 금발과 적발의 두 미녀는 가린 곳보다 노출이 더 많은 끈 비키니를 입은 채 윌포드에게 다가갔다.

"여긴... 어디야?"

윌포드는 두 미녀들에게서 풍겨지는 달콤한 향기에 당황하면서도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런 그를 향해 적발의 미녀는 생긋 웃은 후 그의 볼을 핥고 풍성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아이 귀여워..."

"우리 키스할까요?"

"너, 너희들은... 어?"

그는 천천히 손을 올려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았다. 손안 가득 느껴지는 풍성함. 그리고 자신의 다리를 보았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겪어 가끔씩 절고 있는 다리가 자유롭게 움직여진다.

"이게 무슨... 무슨...! 주, 주님. 이것이 악마의 소행이라면 부디 주님의 은총 아래에..."

"그런 말은 그만 하고 우리 같이 놀아요~"

"원하신다면 윌포드님의 이걸 핥짝핥짝 해드릴 수도 있다구요~"

자신이 팬티만 입고 있고. 두 미녀들은 생글거리며 자신의 남성 부분을 만지려고 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그가 그녀들을 밀치고 뒤로 물러나며 성호를 긋자 그녀들은 울상을 지었다.

"히잉..."

"우리가 싫어요?"

"아, 아니 그게..."

"그럼... 좋아요?"

"나. 나에게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가족이 있네. 미안하지만..."

"후후후... 괜찮아요. 윌포드님."

붉은 머리의 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에게 다가간 후 살며시 자신의 끈 비키니를 풀었다. 거대한 푸딩이 출렁이는 것처럼 그녀의 아름다운 가슴이 모습을 보이자 윌포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은 진실된 공간이 아니니까요..."

"뭐?"

[어떤가요?]

순간 윌포드의 눈 앞에 창이 떠올랐다.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던 윌포드는 그 창 안에 있는 남자가 아까 전 대사관실에 있던 남자라는 것을 눈치챘다.

"다, 당신! 이건 뭐야!? 여긴 어디지!? 나에게 무슨 짓을..."

[제가 가진 장난감을 시연하는 것이죠.]

운현은 빙그레 웃은 후 화면을 돌렸다. 그의 조작에 의해 윌포드는 거대한 화면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머리에 이상한 장치를 착용한 채 양 팔과 양 다리, 허리가 박스테이프로 고정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

"이건... 뭐지?"

[무엇인 것 같습니까?]

화면 속의 운현이 빙그레 웃는 것을 본 그는 눈을 감았다.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저 남자가 아까 전에 보인 물건. 실제로 구현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광선검을 구현하여 자유자재로 사용이 가능한 자라면... 영화나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기술을 구체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라면.

"...이건. 가상현실인가?"

[빙고.]

운현은 방긋 웃은 후 말했다.

[이 세계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가상현실 접속기.어떻습니까?]

말을 마친 그는 화면 속에서 콘솔을 조작했다. 잠시 후 주변이 검게 물들며 모든 것이 사라지자 윌포드는 눈을 감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흔드는 느낌에 눈을 뜬 윌포드는 운현이 웃으며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방금 전의 그거... 진짠가?"

"최면이나 마약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뭐 믿기 싫으시면 관두시죠."

운현의 말에 윌포드는 입을 다물었다. 반토막난 책상, 그리고 부숴진 무전기. 그리고 자신의 머리에 씌여져 있는 물건. 그것을 번갈아 바라 본 윌포드는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넌... 누구냐."

그의 질문에 운현은 작게 키득거렸다. 그것이 자신을 비웃는 것이라 생각한 윌포드가 화를 내려 하자 운현은 피식 웃었다.

"마왕."

268====================

거래

"...지금 장난하나?"

"장난같이 보이나요?"

운현은 자신을 노려보는 윌포드를 보며 빙긋 웃었다.

"솔직히 믿든 말든 관심은 없습니다만... 미국을 선택한 것도 그냥 만만해서 선택한거지 꼭 미국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뭐?"

미국이 만만하다니.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윌포드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운현은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를 입에 문 후 불을 붙였다.

"이거.. 거짓이라고 생각되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방금 자신이 체험한 기술이 거짓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최면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한 느낌이다. 바다의 냄새도, 달콤한 여인의 향기도. 그리고 느껴지던 풍성한 머리숱도.

걷는 것에 불편함이 없는 것도. 그 모든 것이 마치 진짜처럼 느껴졌었다.

"이 장난감의 활용법은 아까처럼 단순 휴양에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사용자가 추가함에 따라 상황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 한번 더 경험해 볼까요?"

말을 마친 그는 윌포드의 머리에 장착된 장치의 버튼을 누른 후 콘솔을 작동시켰다. 잠시 후 윌포드는 아까 전과 비슷하게 시야가 검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눈을 깜빡인 그는 자신의 몸이 수술대에 눕혀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뭐야!?"

"저벅. 저벅."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는 몸을 일으키려 해보았지만 그의 양 팔과 양 다리는 수술대에 잡혀 묶여 있었다.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그것에 그가 두려움에 떨었을 때 주변이 밝아지며 그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악!!"

삐에로 분장을 한 사내가 메스를 들고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얀 가운에는 피로 보이는 얼룩이 여기저기 뭍어 있었다. 주변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수술대가 있었고 그 위에 처음 보는 사람들이 개복된 채 눈을 까뒤집고 죽어 있었다.

"히익! 저, 저리가! 저리가아아아!! 오지말란 말이다!!"

"히히...이힛! 히히히히히!!"

미치광이 삐에로 의사는 윌포드의 공포에 질린 목소리에 더더욱 즐거워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도망치려 해보았지만 구속장치는 그의 양 팔과 양 다리를 꽉 잡고 있었다.

"아아악! 악!!"

"히잇!!"

어느새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 온 삐에로는 윌포드에게 입김을 내뿜었다. 혈향이 물씬 풍기는 그 입냄새에 윌포드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삐에로의 손에 들려 있는 메스가 자신의 툭 튀어나온 배를 살짝 스치고 지나가자 윌포드는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악! 아아아아아악!!"

"히이잇!! 히히히히히히!!!"

"푹!"

"아악! 살려줘! 살려줘어어어!!"

[어때요?]

순간 삐에로가 움직임을 멈췄다. 삐에로의 얼굴을 가리며 아까의 그 창이 떠오르며 운현의 얼굴이 나오자 윌포드는 붕붕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제발...제발 멈춰줘!!"

"이건 싫으신가요? 그럼 이건 어떠신가요?"

그가 콘솔을 두들기자 상황이 바뀌어졌다. 이번엔 돌로 만들어진 통로다. 아까 전 삐에로가 자신의 배를 갈랐던 것에 대한 고통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여긴...?"

"크오오오오오오오오!!!"

통로의 저편에서 정체불명의, 하지만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끔찍한 포효가 들려오자 윌포드는 오싹한 몸을 이끌고 본능적으로 반대편으로 뛰었다. 네발 짐승이 뛰어 오는 소리가 통로에 울린다. 그는 절뚝거리지도 않은 채 최대한 열심히 뛰었다.

"크오오오오!! 크오오!!"

"으르릉!!"

"캬오오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늑대, 호랑이, 그리고 정체 불명의 괴물들. 그들이 침을 뚝뚝 흘리며 달려오는 것에 윌포드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달렸다.

"철컹!"

한참 달리던 그는 자신이 통로의 막다른 끝에 도착한 것에 절망했다. 자신이 들어오자 달려오던 짐승과 괴물들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철창이 튀어올라 그들의 진행을 막았다.

"캬오!"

"으르렁!! 크르...!!"

"까득...까득..."

철창 너머에 있는 윌포드를 잡기 위해서 괴물들은 철창을 물고 뜯기 시작했다.

"우둑."

괴물이 철창을 물고 힘을 주었을 때 철창이 조금씩 우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짐승과 괴물들은 더욱 더 열심히 철창을 물고 뜯어댔다.

"히익!! 시, 싫어!!"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이미 막다른 통로다. 그는 두려워하다가 통로의 막힌 벽에 적혀 있는 글씨를 보았다.

[당신의 직책, 경력을 입력하시오.]

질문을 본 그는 황급히 버튼을 눌러 직책과 경력을 입력했다. 그 순간 막혀 있던 통로가 열렸고 그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가 멀리 떨어졌을 때 철창이 휘어지고 짐승과 괴물들은 다시 윌포드의 뒤를 쫓았다.

"아아악!! 운현! 운현!!"

운현의 답변은 없었다. 끔찍할 정도로 무서운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는 아까처럼 운현을 불렀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아아아!! 퍽킹!!"

욕설을 터트리며 윌포드는 다시 뛰었다. 또다시 막다른 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또다시 막다른 곳에 도착하자 황급히 콘솔을 보았다.

"....이건."

미국의 기밀사항에 대한 질문이다. 그것을 본 윌포드는 당황했다.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그가 어쩔 줄 몰라할 때 어느새 괴물들과 짐승들은 나타난 철창을 물어뜯고 있었다.

"...아아아아!!"

그는 결국 콘솔을 입력하지 못했다. 미국에 대한 애국심. 그리고 비밀을 지켜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에 그가 몸을 부르르 떤 순간 철창이 뜯어졌다.

"크르르르!!"

"아그작!"

"끄아아아아아악!!"

산채로 팔이 뜯어진다.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그들이 뜯어먹는 고통과 공포에 윌포드는 눈을 감았다. 이제 끝이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몸의 고통이 사라지자 살며시 눈을 떴다.

"...어째서?"

아까의 복도다. 그가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을 때 뒤쪽에서 포효가 터져나왔다.

"어째서!? 어째서!!? 운현! 뭐하는 건가! 운혀어어어언!!!"

당황한 그가 외쳤지만 운현의 답변은 없었다. 또다시 그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진짜였다. 생생히 느껴지는 지독하고 끔찍한 고통에 부르르 몸을 떤 윌포드는 통로 저편에서 자신의 몸을 찢어먹었던 이들이 달려오자 눈을 질끈 감았다.

"퍽킹!!"

그렇게 일곱번이나 죽음을 경험한 윌포드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제 싫다. 터벅터벅 통로의 끝으로 향한 그는 눈물을 흘리며 콘솔 그 기밀사항에 대한 질문의 답변을 넣었다.

"....."

"어떻습니까."

콘솔을 작동시킨 순간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온 몸이 끈적거리고 찝찝하다. 윌포드는 운현이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것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이 장치의 실효성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이죠. 즐기는 것? 가능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죠. 사람의 공포를 지배함과 동시에 끝없는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 기절조차 할 수 없고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

"제대로 통제를 할 수 있다는 거죠. 사실 좀 고민했습니다. 이 장치의 컨셉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보다는 러시아나 중국과 더 맞으니까요."

"...당신."

운현의 말에 윌포드는 긴장으로 딱딱히 굳었다. 중국이나 러시아나. 그들은 사회주의 체제를 바탕으로 반 독재에 가까운 사회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이런 장치를 제공한다? 그렇게 되면 어떤 상황이 만들어질 것인가.

"생각만해도 끔찍하군."

미국과는 반대되는 입장을 보이는 강대국들이다. 그들에게 이런 것이. 그 어떤 비밀도 캐낼 수 있고 상대를 마음대로 고문하고 괴롭힐 수 있는 장치가 생긴다면?

"인터넷에 보면 CIA랑 러시아 정보국, 중국 정보국. 그 외 조직들은 어느정도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하던데... 재밌겠죠?? 어느 한쪽이 이런 것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정보를 캐낼 수 있다면?"

"........."

고문과 고통에 훈련을 받는 이들이지만 그들이 과연 수십번의 끔찍한 죽음마저 견뎌낼 수 있을까? 요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어찌보면 최후의 도피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장치는 그것마저도 완전히 봉쇄해버리는 것이기에 윌포드는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른 곳과... 연락했나?"

"아뇨. 아직은요."

운현의 말에 윌포드는 입을 꾹 다물고 생각했다. 이 장치가 가진 이점은 그것이 다가 아니다. 그는 한참동안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자네가 요청한 것은 솔직히 말하자면 내 권한을 넘어선 것이네."

"그럴 것 같았어요."

"그러니 시간을 주게."

"얼마나?"

"삼일. CIA국장과 숙련된 CIA 요원, 그리고 다른 몇명을 데리고 와야겠네. 그들에게 이것을 보여줘야겠어. 그들의 시험도 통과한다면... 자네와 거래를 하지."

"하... 복잡스럽네요."

그의 말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장치들을 챙겼다. 그가 그냥 가려고 하자 윌포드는 당황하며 외쳤다.

"다, 다른 곳에 가도 마찬가지일 걸세!! 이런 것은 기본 확인 절차라는 것이 필요하니 말이야!!"

"흠..."

그의 말에 운현은 담배를 피며 생각했다. 삼일정도는 괜찮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윌포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것 좀 풀어주겠나?"

"얼마든지요."

빙긋 웃은 운현은 그의 구속을 풀어주려다가 손가락을 튕긴 후 그의 어깨를 잡았다.

"아. 생각해보니... 그럴리는 없겠지만 정말 사람 귀찮게 하려는... 뭐 저를 습격해서 이 장치를 빼앗거나 절 납치하려는 시도를 할까봐 그 예방을 좀 해야겠네요. 제가 워낙 겁이 많은 사람이라. 하하하."

"뭐, 뭐하려는 건가!?"

당황한 윌포드가 외쳤을 때 운현은 그의 입에 테이프를 붙였다. 입이 테이프로 봉인 된 그가 당황하며 몸을 흔들었을 때 운현은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사람은 좋게 이야기하면 꼭 잔머리를 굴리더군요. 물론 윌포드 대사관님이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왜 이런 말도 있잖습니까. 유비무환이라고."

"으으으으읍!!!"

그의 어깨를 잡은 운현은 망설임없이 침투경을 날렸다. 그 순간 엄청난 고통이 윌포드의 몸을 감쌌다. 의자에 고정되어 그저 들썩거리는 정도로 밖에 고통을 표현할 수 없었던 그가 식은땀을 주륵주륵 흘리며 고통을 호소하자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이 고통을 꼭 기억해주세요. 괜히 시간을 드렸는데 사람을 귀찮게 만들거나... 약속을 어기거나 한다면..."

상대가 마왕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자신의 생사여탈을 손에 쥐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순수한 웃음.

착해보이는 미소.

정중한 태도.

하지만 그 진실은 악마와 같은 자라는 것을.

"이 고통은 당신 뿐만 아니라 당신의 가족들에게도 전해질 거라는 겁니다. 아까 전. 당신이 필사적으로 적은 것들 중에 당신의 집주소도 있었던 것 알죠? 미국으로 도망친다고 해서 제가 당신을 잡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운현의 말에 윌포드는 주먹을 꽉 쥐고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보며 빙그레 웃은 운현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저 장치에서 느끼셨겠지만... 만약 저를 실망시키신다면... 죽음이 행복이라는 것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허억...헉..."

운현은 느긋하게 웃으며 윌포드의 몸을 구속하고 있는 테이프를 풀어주었다. 그가 바닥에 쓰러지듯 의자에서 떨어지자 운현은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이건 잘 부탁드린다는 제 성의표시입니다. 이거 말고도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거든요."

"뭐... 뭔가."

이젠 뭘 꺼낸다는 것이 두려워진 윌포드는 움찔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또다시 고통을 준다는 것일까? 그가 떨떠름히 묻자 운현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히익!?"

또 그 고통인가? 그가 겁에 질렸을 때 운현은 그에게 그레이터 힐을 걸었다.

"...어?"

몸이 편안해진다. 허리와 어깨, 목의 고질적인 고통이 사라진 것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운현은 그의 허리를 툭 치며 말했다.

"아까 보니 좀 절뚝거리시던 것 같던데."

"...맙소사."

소아마비로 인해 절던 다리가 제대로 움직여진다. 마치 그 세계에서처럼 자유롭게 움직여지는 몸에 그가 벙찐 얼굴이 되자 운현은 작게 키득거린 후 살짝 목례하고 나갔다.

"세상에... 세상에..."

모든 일이 꿈만 같다. 그가 들어오고 고작 한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만약 저 반토막 난 책상과 기절해 있는 경호원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다리가 멀쩡해진 것을 멍하니 보며 천천히 바닥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

269====================

거래

"흥흥흥~"

생각이 있다면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운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엥?"

숙소의 앞에 검은 밴이 한대 서 있었다. 그것을 본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그가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밴의 문이 열리며 세 여인과 한 남자가 밴에서 내렸다.

장천후. 그리고 지금 한국의 핫한 걸그룹인 샤이니아다. 그들이 밴에서 내리는 것을 본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여긴 왠일이냐?"

"운현님!! 전화도 안받으시고!!"

운현의 시큰둥한 반응에 비해 장천후의 반응은 무서울 정도로 다급했다. 절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모습에 운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나 오늘 바쁘다고 했잖아. 너넨 안바쁘냐?"

"바빠도 운현님을 만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올거면 혼자 오지 그럼 쟤들은 왜 데려온거야?"

장천후의 다급한 말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약을 못받은지 삼일이나 지났다. 장천후는 다급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운현님!! 약속을 지켜주세요!!"

"약속이라... 뭐 좋아. 일단 들어와."

장천후의 말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숙소로 들어갔다. 그가 가타부타 말도없이 안으로 들어가자 장천후는 후다닥 그의 뒤를 쫓았다.

"언니... 저 사람 누구야?"

저 무서운 사장님이 쩔쩔맬 정도라니. 보아하니 나이도 자기와 비슷해보이는데. 안솔이 상아의 옷자락을 잡고 물어봤지만 상아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어떻게 말해...'

자신들이 스타가 된 이유가 저 남자 때문이라는 것을. 오로지 실력으로 이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동생들에게 상아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다.

"흐으음..."

집의 꼴을 보며 상아는 기겁했다. 분명 2년전에는 먼지가 많긴 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청소 따위와는 거리가 먼 집구석에 그녀가 황당해하자 운현은 적당히 쓰레기들을 밀어 자리를 마련한 후 말했다.

"앉아."

"......."

차라리 서 있는게 낫지 않을까 싶었던 상아가 머뭇거리자 장천후는 그녀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 후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흘러내린 음료수들로 엉망인 바다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은 그는 운현을 향해 말했다.

"운현님. 말씀하신대로 이 녀석들을 대한민국에서 이름만 대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스타로 만들었습니다."

장천후의 말에 상아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고 한솔과 윤아는 딱딱히 굳었다.

"어... 언니."

"방금 그게 무슨..."

"응. 수고했어. 그런데 어쩌지? 지금 당장 쟤들을 써먹기는 힘든데."

"...그럼?"

"이왕 하는거 다른 애들도 좀 키워볼래? 이야~ 프린세스 메이커 하는 거 같네."

운현의 말에 상아는 당황했다. 장천후가 다른 연예인을 키운다? 그렇다면? 그녀는 운현을 향해 외쳤다.

"운현씨!"

"씨?"

2년간 탑 연예인으로 살아가며 장천후 외에는 무서운 것이 별로 없었고, 모두에게 사랑받던 탓에 나온 말실수다.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자 운현은 피식 웃었다.

"왜?"

"저, 저는 약속을 지킬거에요! 운현...님께서 어떤 일을 시키셔도..."

"언니!"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저 남자... 도대체 뭔데?"

"동생들은... 동생들은 손대지 말아주세요. 제가 다 할게요.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상아는 천천히 바닥에 무릎꿇고 앉았다. 그녀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운현은 볼을 긁적거렸다.

"아니. 너 저번에도 그러더니..."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탁이니 주제파악 좀 해주지 않으련? 못생긴게."

"모, 못생긴..."

퉁명스럽게 그가 말하자 상아는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나름 미모에는 자신이 있었던 그녀다. 여자친구로 사귀고 싶은 여자 연예인 1위에도 올랐던 그녀는 운현의 말에 시무룩히 고개를 숙였지만 운현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뿐 이었다.

탑 아이돌? 근데 뭐. 어쩌라고. 이미 다른 세계에서 그녀 이상의 아름다움을 가진 이들과 연인이 되었고 지금 함께 움직이고 있는 미혜나 라티나는 샤이니아보다 더더욱 아름다웠다.

그런 그들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애걸복걸하고 있는 판국에 상아따위가 어딜 감히. 운현은 풀죽은 그녀와 그녀의 뒤에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한솔, 윤아를 가리킨 후 말했다.

"니들은 그냥 얌전히 찌그러져 있어주려무나. 내가 예상치 못한 일 때문에 너희들을 쓸지 안쓸지 고민 중이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럴 일이 있어."

"그, 그럼 저는...?"

장천후는 당황했다. 그가 준 앰플을 먹을 때마다 한달은 거뜬하게 아내를 녹여 줄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의 주니어는 마치 사춘기의 소년처럼 불끈거리며 힘을 발휘했다. 이제는 그의 주니어가 가진 힘에 홀딱 빠져버린 아내는 약의 효과를 받지 못하는 사흘만에 무척이나 풀이 죽어버렸다. 그녀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던 장천후가 절박한 어조로 말하자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앰플 열 두개를 꺼내 휙 던졌다.

"매달 주는 것도 이제 귀찮다. 1년에 한번씩만 와라."

"감사합니다!!!"

장천후의 입장에서는 감사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앰플을 받아 그것을 소중히 품에 넣은 그가 환하게 웃으며 감사하자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상아와 한솔, 윤아를 바라보았다.

"문제는 얘들인데..."

"마음에 안드십니까? 그래도 말씀하신대로..."

"들고 자시고 난 연예인은 잘 몰라서. 인지도가 어떻게 되냐?"

"그... 여기 드시고 있는 핫식스 광고랑 커피. 이 초코바 광고까지 저희가 하고 있어요! 그리고 광고도 하고 드라마도 찍고 이번에 인기가요 1위도 했다구요!"

"아. 그래? 이야~ 너 사진빨 좋다."

운현은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핫식스 캔을 들었다. 그곳에 프린트 되어 있는 여인의 얼굴과 상아를 번갈아 바라 본 운현이 피식 웃자 상아는 울컥했지만 꾹 참았다. 괜히 그의 성질을 건드려봤자 자신들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샤이니아의 인지도는 지금 대한민국 최대입니다. 아직 세계를 노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유명합니다."

"흐음... 그래?"

티비 볼 시간이 있으면 코드 한줄을 더 입력하자 라는 생각을 가진 채 그동안 필사적으로 연구를 진행해 왔던 운현은 장천후의 말을 듣고 샤이니아의 멤버들을 하나씩 하나씩 핥듯 흝어보았다.

"뭇..."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 건가요?"

한솔과 윤아는 운현의 뱀같은 시선에 당황했다. 그동안 그녀들을 그런 눈으로 봤던 이들은 많았다. 유명 피디, 행사를 갔을 때 높은 분들. 그들이 자신들을 바라보던 탐욕어린 시선과 같은 시선을 눈치챈 그녀들이 움찔했을 때 상아는 몸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동생들은 안돼요!"

"나도 미성년자는 싫어."

"...미, 미성년자 아닌데... 올해로 스물이라구요."

"그래? 야~ 어려보여서 좋겠네. 너네 다 성인이야?"

"네..."

그의 질문에 상아는 시무룩히 답했다. 나름 유명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는 진짜 자신들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자기가 스타로 만들어주겠다고 한 주제에 말이다.

"지금 당장 너희들을 써먹기에는 내 연구가 안끝났으니... 자. 장천후!"

"네?"

"1년만 더 해봐라."

"알겠습니다."

어쨌든 현상유지라는 것이다. 운현의 말에 장천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다른 일이 없다는 것에 안심한 장천후가 샤이니아를 데리고 나가려고 하자 운현은 손을 들었다.

"아. 너네."

"네?"

운현이 자신들에 대한 터치를 안한다는 것에 안심했던 상아는 그가 말을 걸자 화들짝 놀랬다. 그녀가 딱딱한 얼굴로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운현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일 할 일 없으면 여기 와서 청소나 좀 해라."

세상에. 남들이 보면 기겁할만한 일이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라도 만나고 말 한번 나눠보는 것이 소원인 샤이니아의 멤버들에게 운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청소를 시켰고 상아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후 안심하며 물었다.

"저 혼자요?"

"혼자하든 셋이 하든. 그건 알아서들 하시게나."

"이정도면 청소 업체를 부르는게 낫지 않을까요?"

안솔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이 집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개판' 이라고 할 수 있었다. 쓰레기 천지인 이 집을 자신들이 청소하는 것보다 전문 업자를 부르는게 낫지 않을까 싶었던 그녀들이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집에 들어 올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어. 청소업자같은 놈들 부르고 싶지도 않다. 싫으면 관둬."

"할게요! 하게 해주세요!"

물론 스케쥴은 넘쳐났다. 하지만 장천후는 도끼눈을 뜨고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스케쥴 문제는 장천후가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한 상아는 다급히 외쳤다.

"아니 바쁘면 안해도 괜찮...."

"하나도 안바빠요! 저 청소랑 집안일 잘해요!"

"그래? 이야~ 이거 잘됐네. 사실 여길 아무나 들여놓기 좀 그랬거든. 그럼 내일부터 시작해."

집에 들어 올 때 수많은 보안인증을 거치고 나서야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을 떠올린 상아는 차라리 이게 낫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대가 없이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불편했던 그녀가 격렬히 동의하자 안솔과 윤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3일이 지나고 운현은 곧장 미 대사관으로 향했다. 공식적인 방문도 아니기에 저번과 같이 하이딩을 써서 대사관실로 들어간 운현은 기다리고 있는 윌포드와 그의 뒤에 서 있는 두 남녀를 가리키며 물었다.

"여잔데 괜찮겠어요?"

"괜찮네."

나이가 많은 남자가 CIA의 높은 사람일 것이라 생각한 운현은 그녀를 가리키며 물었다. 꽤 예쁜 서양인이다. 그녀에게 다가간 운현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슉!"

그가 악수를 청한 순간 여인은 운현에게 바로 주먹을 날렸다. 숙련된 복서와 같은 펀치였지만 운현에게는 느리기 짝이 없는 펀치였다. 그것을 가볍게 피해낸 운현은 그 팔을 잡고 업어친 후 그녀의 팔을 비틀어 꺽었다.

"우득!"

"큿!"

운현이 팔을 부러트리려는 것을 알고 그녀는 어깨뼈를 억지로 탈골시킨 후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고통스러워보이는 얼굴이지만 신음성을 거의 내지 않았다. 그것에 운현이 신기해했을 때 윌포드와 함께 서 있던 노인이 손을 들었다.

"안제."

"......."

"굉장하군요. 안제를 한번에..."

윌포드가 놀라며 말하자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자 그것을 느낀 윌포드 옆의 사내는 천천히 품 속으로 손을 넣었다.

"이게 CIA식 인사인가요? 이야~ 새로운 걸 알았네. 그럼 나도 이번에 배운 인사를... 해볼까!?"

운현이 이를 드러내며 광검을 잡자 윌포드는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말렸다.

"잠깐! 잠깐! 그만 하게!"

"......."

"영감. 오늘 목숨 하나 번 줄 아쇼... 가 아니지. 수틀리면 다 죽여버리고 러시아 대사관으로 가면 되니까. 그냥 수명 한 삼십분 정도 늘었다고 생각하쇼."

그의 싸늘한 말에 윌포드는 긴장으로 침을 삼켰다. 만약 이번 거래가 틀어지면 운현의 저 수명 삼십분 늘어났다는 말에 자신도 포함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신기한 장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시험의 대상으로 안제를 지목하겠네."

"괜찮겠어요? 엄청난 트라우마가 될지도 모르는데. 이래뵈도 난 페미니스트라서."

"상관없다."

"오우. 한국어?"

"특수 요원에게 4개국어는 기본이지. 나는 특수 정보국 국장인 스미스라고 하네. 저쪽은 특수정보국 요원인 안제. "

"한운현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럼 바로 시작할까?"

스미스는 운현의 장치가 상당히 궁금했나보다. 그가 손을 비비며 말하자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장치들을 꺼내었다.

"...방금 뭐한건가?"

"그건 비밀."

분명 아무것도 없다. 가방은 커녕 작은 봉투도 안들고 있는 그가 빈 공간에서 콘솔과 접속기를 꺼내는 것을 본 스미스는 눈을 비비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 그 전에. 만약 이 거래가 되면 시민권과 대사관 신분은 언제 줄거유?"

"바로 주지."

스미스는 빙긋 웃으며 두장의 서류를 꺼내었다. 그것을 받은 운현이 차분히 서류를 읽자 스미스는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영어를 할 줄 알았나?"

"읽는것만 됩니다. 읽는것만. 에에... 이게 대통령 인장인가?"

"그렇다네."

윌포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이것만 있으면 이제 군대랑은 안녕이다. 라는 것인가. 생긋 웃은 운현은 벽에 어깨를 부딪혀 탈골된 어깨를 고정시킨 안제에게 다가갔다.

"자. 마음 편하게 먹고 여기 앉아."

"......."

일수의 교환만으로 상대가 보통 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안제는 긴장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생글거린 운현은 그녀가 자리에 앉자 테이프로 그녀의 팔과 다리를 의자에 고정시키고 머리에 접속기를 착용시켰다.

"자. 그럼 놀라지 말라고. 혹시 임신했어? 그럼..."

"안했으니까 걱정 말게."

"그럼 시작하지. 방법은... 어떻게 할까?"

운현은 스미스를 향해 물었다. 그의 질문에 스미스는 빙긋 웃은 후 담담히 말했다.

"안제에게 세가지 키워드를 말해 놓았네. 그것을 이번 실험에서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해놨으니 자네는 그것을 알아내면 된다네."

"그거 깔끔하고 좋네. 그럼 시작하죠."

270====================

거래

"허억...억..."

안제가 타액을 질질 흘리며 숨을 헐떡이는 것을 보며 운현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정말 잘 버텨주었다. 하지만 수십번의 죽음. 온 몸이 갈갈히 찢겨지는 고통. 수십명의 남자에게 강간당하는 것까지. 그 모든 고문을 버티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 키워드를 말해버리고 나서야 그녀는 지옥같은 가상현실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흑...흐흑...흑..."

"세상에...."

CIA에서 특수 요원을 만들때 세뇌에 가까운 정신 조작을 한다. 명령은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 그것마저도 깨버린 가상현실의 위력에 스미스는 감탄했다. 이것만 있다면 못 얻을 정보는 없을 것이다.

"대단하군... 아주 대단해!"

CIA에서 건 세뇌마저도 풀어버릴 정도로 가상 현실이 주는 정신적인 고문은 대단했다. 스미스가 그것에 감탄하자 운현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이정도면 인정?"

"물론!! 미국인이 된 것을 환영하네!"

스미스는 양 팔을 벌리며 운현에게 다가갔다. 그가 자신을 끌어안으려 하자 운현은 손을 들어 올린 후 말했다.

"몇가지 협상을 하고 싶은데. 괜찮겠죠?"

"뭐든지."

"에... 일단 첫번째. 제품을 파는 거지 기술을 파는 것은 아니니까 이거 기술 달라고 하지 마요."

"그건..."

운현의 말에 스미스는 당황했다. 이 멋진 장치를 더 만들 수 없다는 것인가? 그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자 운현은 빙긋 웃은 후 말했다.

"추가로 한 세대 정도는 더 만들어줄 용의가 있으니까 삐지지 말고. 물론 대가는 받을겁니다."

"세대라... 더 안되겠나?"

제작 기술을 얻는다면 좋겠지만 그것을 딱 잘라 그가 거절하자 스미스는 아쉬워하며 말했다. 그의 말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두대 더. 총 다섯대를 드리죠."

"좋아."

그정도라면 아쉽지만 괜찮다. 어차피 어지간한 놈들은 기본 고문에서 끝날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놈들에게만 쓰면 되니 문제가 없다 생각한 그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담담히 두번째 조건을 제시했다.

"두번째. 댁들한테만 팔테니까 딴데 소문내지 마요. 행여나 내가 가상현실 기술을 가지고 있다든가 이런 장치를 만들었다든가 그딴 소문내면... 댁들한테 이거 씌울테니까."

"그거야 우리쪽에서 제시하고 싶은 거네."

무기는 독점할 수록 좋은 것이다. 스미스는 오히려 자신 쪽에서 원하는 일이기에 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고 한마디 더 추가했다.

"그럼 자네의 이런 기술력은 우리에게만 공급하는 건가?"

"그건 아니고."

"응?"

"물론 이런 군사적인 용도로 쓰일만한 기술은 댁들에게만 납품을 하겠지만 가상현실을 구축하고 접속하는 베이스는 일단 풀어 놓을 생각입니다."

"뭐!?"

그의 말에 스미스는 더더욱 당황했다. 기술은 힘이고 돈이다. 이 시대에서 가상현실은 아직 구현되지도 않은 상태다. 그런 기술이라면 독점을 해서 자국의 이득에만 쓰이는 것이 좋은데 그걸 풀겠다니.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이런 기술은..."

"그럼 러시아로..."

"끙..."

이 장치의 엄청난 위력을 알게 된 스미스는 그의 말에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 천조국 CIA 특수 정보국 국장을 눈 앞에 두고 저렇게 간을 보다니.

'하지만 이런 것 따위가 문제가 아니야.'

스미스는 운현의 가치를 굉장히 높게 평가했다. 그가 가진 이 장치가 그가 구현한 것이라면, 그는 더 한 것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같은 시대에 기술은 힘이지. 그리고 이런 몇세대는 앞서나갈 기술을 가진 것은...'

미국 내에도 가상현실을 구축하려는 연구는 꽤나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것이 인간의 정신과 뇌를 건드려하는 실험이 필요했기 때문에 연구의 진척이 무척이나 느려 완성이 요원했던 것을 눈 앞의 이 청년이 완성해버린 것이다.

"그럼 몇가지만 묻지."

"그러시죠."

"이 기술을 세상에 풀 거라고 했지. 자네가 말하는 이 기술이라면... 가상현실 기술을 말하는 건가?"

"네."

"왜?"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 아무리 봐도 이 운현이라는 사내는 단순한 공돌이가 아니었다. 그는 무언가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이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만약 그가 정말 연구를 위해서 자신들과 접촉했다면 대사 자격이라는 요구보다는 미국에 연구소를 차려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것을 보면 그는 이 가상현실을 완성시키겠다는 것보다는 뭔가 다른 것을 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우리를 이용해서 말이지...'

"세상은 넓고 능력자는 많죠."

"그렇지. 그래서?"

"그들을 놀려먹기 싫어서 말이죠... 일단은 이걸로 저도 미국인이니 기술이 만들어지면 특허는 미국에 신청을 할게요. 기술을 공개하고 배포하기는 하겠지만 공짜로 할 생각은 없거든요. 가상현실의 종주국이라는 타이틀을 가지는 것으로 만족해줘요."

"흐음... 그 말은 가상현실 기술을 세상에 퍼트림으로서 사람들이 그것을 발전시켜나가길 원한다는 거지?"

"그렇다고 해두죠."

기본 틀과 방법은 제공한다. 운현은 반드시 이 방법이 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가상 현실을 구축할 수 있는 기술이 활성화된다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만들 것이 무엇일까.

'바로 섹스지.'

현실에서는 만나볼 수조차 없는 미남과 미녀. 그들과 자유롭게 섹스를 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넘쳐났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저장매체의 용량이 커져가는 이유가 바로 야동을 저장하기 위해서라고.

'인간은 성기에 지배받는 존재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인간들도 있겠지만 운현은 대다수의 인간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3대 욕구. 수면욕, 식욕, 성욕. 그것 중 성욕을 쉽게 해결 할 수 있는 기술이 세상에 퍼진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미친듯이 노력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성욕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면 다음은? 운현이 노리는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게임이 만들어지겠지.'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현실이 시궁창이니 게임 속에서라도 대리만족을 느껴보자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게임에 매달리고 그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 현실의 시간을 투자한다. 재미있는 게임이 나오면 줄을 서서 사고 밤을 새워서 플레이를 한다. 시궁창같은 현실을 잊고 새로운 세계를 즐기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세계. 내가 모르는 수없이 많은 가짜의 세계가 만들어지겠지.'

운현은 팔짱을 끼고 빙그레 웃었다. 과거의 자신은 수많은 세계를 경험하고 또 경험하여 강해지라고 말했다. 운현은 그것이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가짜 신의 위치에 오르고 만레벨에 오른 운현이다. 그가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은 이제 다양한 경험을 통해 레벨과 관계 없이 기본적인 스펙을 올리는 것 뿐이었다.

'과거의 나도 수십, 수백번의 회귀를 통해 많은 세계를 경험해 강해졌다. 그렇다면 이 방법도 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겠지. 이 방법을 통해 초반에는 좀 힘들겠지만... 가장 안정적으로 세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흠... 자네도 개발을 할건가?"

"어느정도는요. 물론 그 특허는 미국에 있겠죠. 하지만 제 연구에 대한 발표와 광고는 한국에서 할겁니다."

"왜?"

"그거야... 제 능력이 부족해서."

"응?"

운현의 말에 윌포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허 뿐만 아니라 발표와 광고도 미국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를 향해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 제가 한국어밖에 못해서요. 읽고 쓰는 것은 되지만 듣기 말하기가 안되거든요."

"그게 무슨 상관인데?"

"에. 하하. 한글패치 나오는거 기다리기 싫어서요."

"흠... 그래서... 특허는 어쨌든 미국의 것이라 이거지? 그럼 미국의 특허법을 따르겠다는 건가?"

"물론이죠. 몇가지 조건만 들어준다면 말이죠. 일단 한국 개발사한테는 특허비용을 좀 싸게 받아주세요. 이유는 아시겠지만..."

"한국어 패치 때문에? 좋네. 아예 이렇게 하는게 어떤가? 이 기술을 이용한 모든 생산품의 기본 언어를 한국어로 하게 해달라고."

"그거 좋네요."

"그럼 광고와 발표는..."

"그래도 한국에서 할게요. 그정도는 해줘야 한국에서 개발 욕구가 높아지겠죠."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담담히 말하자 스미스는 아쉬웠지만 더 욕심을 낼 수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갑은 자신도, 윌포드도 아닌 저 스무살의 청년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이라도 좋다. 가상현실 시스템의 종주국이라는 명예, 그리고 그 특허의 소유국. 그것이 자신들에게 있다면 러시아나 중국이라도 함부로 까불지는 못할 것이다.

'이 기술은 돈이 된다. 엄청난 힘이 될거야.'

스미스는 운현과 같은 생각을 했다. 군사적인 용도로 쓰는 것을 제한한다면 가상현실은 일단은 공공의 인식을 위해서 의학적인 용도로 쓰일 것이다. 그리고 나면? 그럼 사람들은 섹스를 위해서 가상현실을 마하의 속도로 발전시킬 것이고 그 이후에는 각종 유흥을 위해 가상현실을 발전시켜나갈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 것이고 따르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문화적인 압박을 제대로 걸 수 있는 것이다.

'러시아나 중국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기본 욕구를 감당하지 못하겠지.'

스미스는 운현을 보며 빙긋 웃었다. 초반에 그가 개입해서 연구를 한다고 했으니 모든 신기술이 가진 초반의 느림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운현이 원하는 것은 기술이 발전하여 세상에 퍼지는 것이니 말이다.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낸 것이... 나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리고 이 기술의 소유주인 이 운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스미스는 운현을 보며 나직히 웃었다.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고작 CIA의 국장이 아니라... 더 높은 자리를 노릴 수도 있을 것이다.

"후후후후..."

"하하하하."

스미스와 운현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기 시작하자 윌포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망이 강한 친구이니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인다.

"그럼 운현. 여기에 싸인을 해주게."

"기꺼이."

스미스가 내민 서류에 서명을 한 운현은 그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은 스미스는 운현에게 손을 뻗었다.

"악수를 이제야 하네. 그래서... 특허는 언제 신청할 생각인가?"

"아직 몇가지 실험을 더해야 해서... 한 일년만 기다려줬으면 싶은데요."

"실험? 더 할게 남았는가?"

스미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수 요원인 안제마저도 진짜라고 인식해 결국 버티지 못할 정도로 리얼한 가상현실에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그가 궁금해하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인간은 좋은 것에는 쉽게 빠지기 마련이죠. 중독이 될 경우를 대비한 리미터를 연구해야 합니다."

"아하. 그렇군."

그것을 생각 하지 못했던 스미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인들에게 대중적으로 쓰이려면 당연히 중독의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

가상현실은 쾌락을 위해서 쓰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인간은 쾌락에 쉽게 중독되어버린다. 사람들이 마약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현실도피와 자신의 쾌락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다. 그것을 한번에 충족시켜줄만한 기술인데 당연히 중독성의 위험이 있을 것이기에 스미스는 운현의 말에 동의했다.

"좋아. 필요한 것이 있나?"

"없으니까 기밀 유지나 잘 해주쇼."

"알겠네. 윌포드. 자네도 꼭 돕게나."

"하아. 알겠어."

나름 깔끔한 거래를 마쳤다. 운현은 싱글거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한국도 쉽게 손을 대지 못할 정도의 권한을 손에 넣은 셈이니 이제 군대에 대한 압박은 없어진 것이다. 안심이 된 운현은 숙소로 돌아 온 후 천천히 숙소를 둘러보았다.

"이야... 너희 대단한데?"

"으으..."

"힘들어요."

"배고파..."

대한민국 톱 아이돌 셋이 완전히 지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하는 것을 보며 운현은 싱긋 웃었다. 그녀들은 3일만에 완벽하게 청소를 끝냈다.

삼일 전과 비교하면 새집이나 다름없게 변한 집을 보며 운현이 감탄하자 상아는 지친 얼굴로 말했다.

"집 좀 치우고 사세요..."

"그럴 시간 없어. 야야. 고생했다. 이제 가라. 장천후 어디갔어?"

"끝나면 부르라고... 배고파요."

"먹을 거 없어요?"

"집에 있는 거라고는 초코바랑 에너지바 밖에 없는데?"

"...그럼 뭐라도 시켜주세요... 진짜 힘들고 배고파서 꼼짝을 못하겠어요..."

한솔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스타가 되기 전에 많은 알바를 했고, 또 스타가 된 후 살인적인 스케쥴을 견뎌냈지만 이런 단순 노동은 처음이었던 그녀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하자 운현은 피식 웃은 후 핸드폰을 들었다.

"야. 피자랑 치킨이랑 사가지고 빨리 와라."

"저기... 누구한테 전화거신 거에요?"

운현이 통화를 하는 것을 들으며 윤아는 조심스레 물었다. 장천후도 존댓말을 쓰며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저렇게 간단하게 전화통화를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보통 신분의 사람은 아닐 것이기에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강원석."

"설마... 성경그룹 총재님!? 으으..."

삼십분 쯤 지나자 숙소의 문이 열렸다. 피자 세판과 치킨 세마리. 그리고 맥주와 콜라를 사가지고 그가 들어 오자 윤아는 어쩔 줄 몰라하며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강원석 총재님!"

"어... 샤이니아? 왠일로 숙소에 다른 사람을 부르셨어요?"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사진과 뉴스, 신문에서나 보았던 인물이 진짜로 피자와 치킨을 들고 나타나자 윤아는 심각한 패닉 상태에 빠졌다. 장천후 대표에게 막대하는 것도 모잘라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한다고 할 수 있는 강원석마저도 존대를 하다니.

그녀가 서있지도 못한 채 머뭇거릴 때 원석은 숙소를 보며 감탄했다.

"세상에! 바닥이 보이다니!"

"그러니까 내가 청소 좀 하라고 했잖냐."

"라티나랑 미혜한테 시키면 되죠. 둘다 좋다고 할텐데."

"시켜봤는데 말이지."

원석의 말에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걔들은 나보다 더 심하더라. 정리 못하는 여자 1, 2였어."

"...하긴 걔들이 좀 그렇죠. 일은 잘하는데."

라티나와 미혜에게 청소를 시켜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정말 대단했다. 청소를 시켜놨더니 더 어지럽힐 줄이야. 나름 분리수거를 한다고 잘 모아 놓은 것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고 둘이 엄한 곳을 청소하는 것을 보며 운현은 그냥 포기를 해버렸다.

"아무튼 대단하네요. 종종 불러다가 시켜야겠군요."

"응. 내 일과 아예 관련되지 않은 것도 아니니까 한달에 한번씩 부르려고."

"라티나나 미혜가 알면 난리를 치겠지만..."

"그럼 어디 가서 청소하는 법이라도 좀 익히고 오라고 해라. 그럼 걔들한테 시킬테니까."

"평생가도 안될걸요... 아무튼. 너희들. 고생했다. 쟤들 깨우고 와서 먹어라."

"네...네에..."

원석이 손짓하며 부르자 그녀는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상아와 한솔을 깨웠다. 피곤해 잠들어 있던 그녀들이 일어나 원석을 보고 딱딱하게 굳자 운현은 피자 한판을 들고 옆으로 빠진 후 그에게 말했다.

"슬슬 작업 좀 해야겠다."

"무슨 작업이요?"

"내 연구의 마지막 실험."

271====================

거래

"후우..."

6평짜리 작은 원룸에 올라가며 윤지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운현과의 일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부모님은 많은 빚을 졌고 성인이 된 자신에게도 큰 빚이 생겼다.

"힘들어라..."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 온 그녀는 문에 꽂혀 있는 독촉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과거의 자신을 만난다면 정말 뺨이라도 갈기고 싶은 그녀였다.

"수도세도 밀렸구나..."

돈 나올 구석이 없다. 이번달 월급의 반이 차압되고, 그 남은 반으로 또다시 한달을 아둥바둥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 어두운 복도 끝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욥. 잘 지냈어?"

"...너!?"

복도의 전구가 번쩍거린다. 죽어가던 전구가 복도를 밝혔다가 다시 어둡게 만들어가는 동안 윤지는 그 복도의 끝에 서 있던 남자가 차분히 걸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운....현?"

"오래간만이다."

2년만에. 윤지는 운현과 만날 수 있었다.

"잘 지냈어?"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헤어지기 전까지 가지고 있던 예쁜 모습은 사라졌다. 부모님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어서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바로 검정고시를 치룬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느라 제대로 꾸미지도, 씻지도 못한 윤지는 낡은 후드티의 후드로 기름지고 헝클어진 머리를 가렸다.

"저, 저기 운현아... 여기 너무 비싼데 아니야?"

윤지의 원룸에서 운현이 낡은 차를 끌고 도착한 곳은 강남에서도 비싸기로 소문난, 대한민국 최대의 그룹인 성경에서 운영하는 최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집이 잘 살때조차 함부로 가기 힘들 정도의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 온 윤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걱정스레 말했지만 운현은 그저 싱글거릴 뿐 이었다. 윤지나 운현이나 싸구려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을 본 레스토랑의 경비원이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운현은 지갑의 카드 하나를 보여주었고 그것을 본 그들은 곧 정중히 운현과 윤지를 입장시켰다.

레스토랑 안에서도 2층의. 룸 형태의 화려한 방으로 레스토랑의 지배인이 안내하자 윤지는 걱정스러웠다. 운현이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이정도는 괜찮아."

운현이 입고 있는 옷은 그리 비싼 옷이 아닌 것 같았다. 나이키 짭퉁인 나이스 티. 바지는 어디것인지도 모를 청바지. 신발은 고등학교때도 보았던 리복 신발이다.

"그치만 무리하는 거 아냐?"

메뉴판을 보자마자 윤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파스타 하나가 자기 일주일 식비를 훌쩍 넘어버리는 것에 그녀가 당황하며 묻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여기 코스 요리 맛있다더라."

"코, 코스? 잠깐만. 그건..."

"레인지 C코스 두개 주세요."

"와인은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와인 마실래?"

"...아, 아니 난 물이면 괜찮아..."

레인지 C 코스면 메뉴판의 가장 뒤에 있던, 50만원짜리 코스요리가 아닌가. 그것을 운현이 주문하자 윤지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붕붕 고개를 저었다. 이것만으로도 월세 포함 한달 생활비다. 운현의 요리까지 치면 한달동안 죽어라 알바를 해도 간신히 맞출 수 있을지 의문인데 여기에 와인까지 추가한다니. 그녀가 당황하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보졸레누보로 주세요."

"운현아!!"

"걱정 말라니까."

한병이 20만원짜리 와인을 운현이 주문하자 지배인은 메뉴를 받고 밖으로 나갔다.

"너... 로또라도 됐니?"

윤지는 운현의 씀씀이를 보며 당혹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정도면 스무살 청년이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의 한계는 훨씬 넘은 것이다. 운현네 집이 갑부집도 아닌데... 그녀가 묻자 운현은 키득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리가."

"그럼??"

"아아. 요새 연구를 좀 하고 있거든. 그 연구가 성과를 내서 돈이 좀 생겼어."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코스 요리의 첫번째 스프가 등장했다. 지배인은 절도 있고 정중한 움직임으로 윤지와 운현의 앞에 스프를 놓아주었다.

"바닷거북 알과 제비집을 베이스로 한 스프입니다."

"제비집..."

"먹자. 여기 맛있더라."

"너... 와봤어?"

"응."

"운현님은 한달에 한번씩 오시는 분이죠."

지배인이 빙긋 웃으며 말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고 윤지는 당황했다. 한달에 한번 이런 곳에 올 정도로? 도대체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녀가 궁금해하자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먹어."

스프를 시작으로 각 코스의 요리들이 나올 때마다 윤지는 화들짝 놀랬다. 이러게 된 이후는 커녕 이렇게 되기 전에도 구경하기 힘든 고급 요리들이다. 입에 대자마자 살살 녹는 그 맛에 윤지가 행복해할 때 운현은 그녀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어때?"

"맛있어..."

오래간만에 라면이 아닌 제대로 된, 그것도 초 고급의 식사를 하게 된 것에 기뻐하며 윤지는 와인을 한모금 마셨다. 그런 그녀를 향해 빙긋 웃은 운현은 테이블을 톡톡 치며 말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은 별거 아니라."

"응."

"이제 합의금 갚으려고 발악 안해도 괜찮아."

"에?"

운현의 말에 윤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그 빚을 갚으려면 더 일을 해야 할텐데? 그녀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자 운현은 싱글거렸다.

"아아. 연구가 어느정도 궤도에 올라서 더 이상 돈이 필요가 없거든. 그리고 스폰서도 붙었고."

"스폰.... 너 무슨 연구하는건데?"

"뭐 이것 저것. 스폰은 성경 그룹이 해주기로 했어."

"성경!? 그 성경 말야?"

"니가 말하는 그 성경이 여기 운영하는 성경이라면 맞아."

"맙소사... 너 지난 2년동안 뭐 한거야?"

"공부 좀 하고. 예전부터 준비하던 몇가지 일을 했지."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그것에 윤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운현은 담담히 말했다.

"괜찮아요."

"운현님. 지금 총재님께서..."

"아아. 들어오시라고 해주세요."

총재? 총재는 또 뭐야. 너무 갑작스럽고 큰 정보가 들어 온 것에 윤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의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있는 와중에 문이 열리며 검은 정장을 입은 삼십대 후반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와요."

"뭐야. 같이 오자니까 먼저 와... 어라? 이쪽은?"

"아. 인사들 하세요. 얘는 윤지라고... 제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아...아...아....우, 운현... 운현아. 서, 설마..."

윤지는 당당히 걸어와 자리에 앉은 사내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강... 원석?"

"요즘 열심히 티비에 나온 보람이 있군요. 반가워요. 아가씨. 강원석이라고 합니다."

원석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윤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윤지는 붕붕 고개를 젓다가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지금 자신이 일하고 있는 공장은 성경 그룹의 하청의 하청을 통해 일을 받고 있었다. 그 공장의 사장이 한때 성경 그룹에서 일했다고 엄청나게 뻐기고 자랑을 했는데 그 사장보다 훨씬 위에 있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운현과 상당히 친한 모습으로 말이다.

"아우... 안녕하세요."

그녀는 어찌할바를 몰라하다가 손을 자신의 바지로 쓱쓱 닦은 후 그와 악수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은 원석은 운현에게 물었다.

"운현씨. 이런 미녀랑 알고 지냈단 말이에요? 어쩐지 여기저기서 대쉬하는데 다 거절하더니."

"하하하. 윤지랑은 그냥 친구에요. 소중한 친구."

"운현아..."

자기가 그런 짓을 했는데도... 윤지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 성경 그룹 총재인 강원석에게 자신을 좋게 소개해주는 것이 고마웠던 그녀는 다음으로 이어진 강원석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래서. 이제 어쩔거에요? 이번 프로젝트 신규채용 건으로 누굴 선택할건지 안정했잖아요."

"그래서 이 자리를 마련한거에요. 윤지야."

"응!?"

"오늘 이렇게 찾은건... 그 빚을 해결하는 것과 더불어서 너에게 한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래."

"뭐든지 할게!"

그녀가 다급히 말하자 운현은 키득거린 후 입을 열었다.

"내가 한 연구는 바로 가상현실이야. 자세한 것은 사내 기밀이라서 말해줄 수는 없지만... 그것을 체험하고 홍보하는 일을 하는 거지. 어때? 같이 하겠어?"

"윤지씨를요? 하지만 그건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나요? 지금 이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외부인력으로 대체한다구요? 저는 좀..."

원석은 이것을 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떨떠름히 말했다. 성경 그룹의 총재가 관심을 가질 정도의 커다란 일이라는 것에 윤지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운현을 보았다.

"운현아. 내, 내가 해도 괜찮은거야? 그치만 난 고졸이고..."

"나도 고졸인데 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야."

"한운현씨.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 아무리 당신이 이 프로젝트의 최고 매니저라고 하지만... 스폰서는 접니다. 우리의 계약은 이 일을 한성 그룹 내의 사람만으로 한다는 거였을텐데요."

원석이 싸늘히 말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고 윤지를 바라보았다. 그것에 윤지가 당황하자 운현은 원석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가져갈 지분을 좀 줄일게요. 어떻습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저 아가씨를 포함시키려는 이유가 뭡니까?"

운현의 말에 원석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질문에 운현은 빙긋 웃은 후 윤지를 따뜻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제 소중한 친구니까요."

"그럼 잘 생각해봐."

운현이 내민 계약서를 본 윤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월급 500만원. 숙소 지급. 그 외 성경 그룹의 복지를 모두 이용 가능. 다만 기밀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이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는 것을 밝히지 않아야 한다는 보안서약을 해야 한다.

이런 저런 말이 있지만 요지는 그것이었기에 윤지는 그 계약서를 보며 말했다.

"이걸... 안하면... 빚은 어떻게 되는거야?"

"응? 아. 그건 상관없어. 아마 네 계좌로 지금까지 낸 돈의 절반 이상이 들어갔을걸? 내년까지 모두 돌아갈거야."

운현의 말에 윤지는 싸구려 핸드폰을 들어 계좌 정보를 확인해보았다. 그의 말대로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잔고가 이천원에 불과했는데 2억이 넘는 돈이 들어와 있었다.

"운현아! 너..."

"이번 프로젝트. 정말 중요한 프로젝트고 성공할 프로젝트지. 원래 널 여기에 끼워 넣는 것은 계약 위반이라고 할 수 있어. 그치만..."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윤지의 손을 잡고 담담히 말했다.

"우리는 친구잖아. 그리고 너는 내가 믿을 수 있는 몇안되는 사람이니까 말야"

"운현아... 나... 나... 하지만 내가 이걸 잘 할 수 있을까? 나는 아는 것도 별로 없고..."

"하하하. 괜찮아. 내가 다 가르쳐 줄테니까."

"왜 나야?"

윤지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성경 그룹에서 선발한 인재들이 아닌 , 운현이 자신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는 운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고 운현은 잠시 생각한 후 담담히 말했다.

"이 일은 정말 중요한 일이라서...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보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너라면 잘 해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거야."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어지간히 불안한 모양이다. 그녀가 주눅든 어조로 묻자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면 반드시."

"......"

그의 신뢰에 윤지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자신은 정말 어떻게 되먹은 년일까. 이런 운현에게 왜 그딴 짓을 한 것일까. 그녀가 주륵주륵 눈물을 흘리자 운현은 손수건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준 후 조용히 말했다.

"그만 울어. 이쁜 얼굴 다 망가지겠네. 그럼 내일까지 잘 생각해서 이야기해줘."

"흑... 운현아."

"응?"

"너는...훌쩍. 내가 이걸 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필요해?"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윤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나 할게. 너한테 도움이 된다면 나 무슨 일이든 할게."

"정말!? 고마워!"

"내가 더... 고맙지."

그녀의 울음기 섞인 환한 미소를 보며 운현 역시 빙그레 웃었다.

'내가 더 고맙지. 2년동안 이렇게 잘 자라줬는데...'

272====================

거래

"출감이다. 은찬성. 이젠 죄 짓지 말고 살아라."

"...하아."

소년원의 철문이 열리며 바깥이 보인다. 찬성은 눈부신 빛에 살짝 눈쌀을 찌푸렸다. 과거 연예인을 해도 좋겠다던 얼굴은 소년원 생활의 고생 때문인지 좀 더 거칠어지고 투박해졌다.

"출감이라."

원래 예상보다 반년이나 일찍 출감하게 되는 것이다. 은찬성은 터벅터벅 걸었다. 통로를 지나 바깥으로 나온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안오셨구나."

단 한번 면회를 온 아버지는 널 없는 자식으로 치겠다고 말한 후 한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사식은 커녕 면회 한번 오지 않은 아버지 대신 자주 면회를 온 것은 운현이 보낸 사람이라고 하는 젊은 남자 뿐이었다.

"여. 마이 소울 브라더."

낡은 경차 앞에 기대어 서 있던 청년이 걸어오며 손을 들어 올리자 찬성은 쓰게 웃었다. 모든 친구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 중에 오로지 단 한명. 자신이 그토록 무시하고 가소롭다 생각했던 운현이 걸어오며 담배를 건네자 찬성은 그것을 받아 피우며 빙긋 웃고 양 팔을 벌렸다.

"고생 많았다."

"미안하다."

찬성은 운현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아마 자살을 했을지도 몰랐다. 힘들 때마다 그가 보내 준 사식과 함께 그가 손을 쓴 것으로 보이는 소년원 간수들의 보호 덕분에 큰 일 없이 수감생활을 마칠 수 있었던 그는 운현이 자신을 꽉 끌어안고 등을 두들기자 그를 향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 배고프다."

"아아. 그렇지. 사바세계로 나왔으니 일단 식사부터 해야되지 않겠어? 뭐 먹고 싶냐?"

"하하하... 뭐든지 좋아."

찬성은 쓰게 웃으며 운현의 낡은 경차에 올랐다. 그가 운전대를 잡고 운전을 하자 찬성은 정면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

"고작 2년만에 나오는 것 같은데... 정말 많이 변했네.'

"원래 세상이란게 이렇게 팍팍 변해가는 거지. 야. 국밥 먹을래?"

"국밥 좋지."

국밥도 좋고 편의점 라면도 좋다. 아무거나 바깥 세상의 음식을 먹고 싶었던 찬성은 운현이 도로 옆에 있는 국밥집을 가리키며 말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국밥과 수육을 시킨 운현은 그것을 정신없이 먹는 찬성에게 소주를 한잔 따라주었다. 그것을 단번에 들이마신 찬성이 부르르 몸을 떨며 기뻐하자 운현은 그를 향해 차분히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냐?"

"응? 뭘?"

"밖에 나왔으니까 뭔가 해야지."

"아..."

미래의 일. 찬성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원 수감생활을 하며 많은 공부를 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글쎄... 검정고시는 통과했으니까. 카센터 일이나 해보려고. 자동차 정비 기술 배웠거든. 네 차 좀 봐줄까?"

"흠... 그것도 좋지만. 야."

"왜?"

"너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일?"

"그래."

운현은 빙긋 웃은 후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그것을 받은 찬성이 서류봉투 안의 내용물을 모두 읽고 당황했을 때 운현은 팔짱을 끼고 키득거리며 말했다.

"어때?"

"너... 너... 성경 그룹... 사람이었어?"

"응.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더라고."

"이야..."

소년원에 있더라도 뉴스나 신문은 볼 수 있었다. 성경 그룹. 대한민국 굴지의 기업이며 이제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거대 기업이다. 아직 스무살 밖에 되지 않은 운현이 그 성경 그룹의 사람이라니. 찬성은 침을 꿀꺽 삼킨 후 물었다.

"내가... 뭘 해줘야 하는데?"

"별거 없어. 이번에 성경 그룹과 내가 손을 잡고 몇가지 장치를 만들었는데 그것에 대한 테스트야. 1년 정도지만 이정도 금액이면 1년동안 바짝 벌고 네 힘으로 카센터 하나 차릴 수 있을텐데. 어때? 땡기지 않아?"

운현의 말에 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서에 적힌 금액은 무려 3억이나 되는 금액이었다. 계약금으로 이천만원과 숙소 제공. 그리고 비밀 서약을 한 후 1년동안 성실히 테스트에 임하면 3억이 모두 지급된다는 계약서. 그것과 운현을 번갈아 바라보던 찬성은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해야지!!"

"어떤 건지도 안물어보고?"

"야. 네가 하자는 건데 내가 뭔 토를 달겠냐."

아버지도 자신을 버렸을 때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 준 운현이다. 그런 그를 위해서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원한다면 목숨마저도 줄 용의가 있는 찬성이 가슴을 치며 말하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럼 서명부터 해."

"응."

운현이 내민 펜을 받아 빠르게 서명한 그가 계약서를 돌려주자 운현은 그것을 받아 가방에 넣은 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한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

운현이 찬성을 데리고 간 곳은 윤지를 넣은 곳과 비슷하게 생긴 작은 빌라였다. 도심지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 있는 빌라에 도착한 찬성이 두리번거리는 동안 운현은 그를 데리고 곧장 안으로 향했다. 경비원으로 보이는 큰 덩치의 사내 셋이 문 앞에서 막자 운현은 보안카드를 보여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연구소장님."

"연구소장? 우와... 운현아. 너 연구소장이였어?"

"응."

"굉장한데!?"

고작 2년만에 연구소장이라니. 찬성은 그를 보며 감탄했다. 자랑스럽다. 이런 녀석이 자신을 돕고 자신과 친구라는 것이 뿌듯해진 그는 경비원들이 자신에게도 인사를 하자 살짝 목례한 후 운현을 따라 들어갔다.

"여기가 앞으로 네가 생활할 곳이야."

"이야.."

스무평 정도 되는 원룸이다. 생활에 필요한 용품들은 대부분 구비되어 있는, 마치 TV에서나 볼 법한 깨끗하고 멋진 원룸을 보며 가방을 내려 놓은 찬성이 이것저것 살피자 운현은 그를 향해 말했다.

"필요한게 있으면 저기에 적어놔. 그리고 계약서 대로... 1년 간은 너 이 건물에서 못나가."

"이정도면 살만하겠는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다 있었다. 운동기구부터 시작해서 티비, 컴퓨터. 잡지. 그 외에 모든 것이 구비된 원룸에 찬성은 별다른 걱정없이 말했다.

"자. 그리고 네가 일할 곳을 보여주지."

운현은 그를 데리고 빌라의 지하로 향했다. 엘레베이터를 타는 것 조차 보안이 필요한 곳이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그가 지하 2층을 누르자 엘레베이터는 지하로 향했다.

"지하 2층인데 꽤 걸리네. 엘레베이터가 느린가봐?"

"아아. 좀 깊은 곳이거든. 네 말대로 엘레베이터가 느리기도 하고."

"띵!"

엘레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운현은 엘레베이터 앞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생활해야 할 원룸의 절반 정도 되는 공간에 정체불명의 기기가 있었다.

"이게 뭐야?"

"놀라지 마시라. 가상현실 접속기라는 거다."

"...뭔 접속기?"

"가상현실 접속기."

2년동안 사회와 떨어져 있었는데 그런 것이 나왔단 말인가? 찬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를 향해 운현은 실실 웃으며 옷장을 가리켰다.

"갈아입을 옷은 저기 있어. 아. 기저귀는 꼭 착용하고."

"엑? 기저귀는 왜?"

"다 필요하니까 그런거다. 어서 하려무나."

운현의 말에 찬성은 쓰게 웃으며 옷장을 열었다. 파란색 환자복과 비슷한 헐렁한 옷과 기저귀를 본 그는 망설임없이 옷을 벗고 그것들을 입었다.

"됐어."

"그럼 여기 누워."

캡슐을 오픈한 운현은 그 안을 가리켰다. 그의 말에 순순히 그 안으로 들어간 찬성을 향해 운현은 여기저기를 체크하며 물었다.

"불편한데는 없지?"

"응."

"그럼 거기 있는 접속기를 머리에 써."

"이거?"

마치 만화에나 나올법한 선글라스와 헤드셋이 합쳐진 기기를 머리에 착용한 그는 운현의 지시를 따라 접속기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헐렁하던 접속기가 머리에 제대로 채워졌다.

"딱 맞지? 헐렁한 부분은 없고?"

"응. 괜찮아."

"그럼 누워서 마음 편하게 먹어."

"에... 가상현실이라니. 이게 진짜야?"

"그래. 가상현실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상하다는 듯 말하는 찬성을 향해 피식 웃어보인 운현은 캡슐의 뚜껑을 닫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캡슐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헉!?"

검었던 시야가 밝아지자 찬성은 당황했다. 분명 이상한 장치를 착용하고 누웠었는데? 왜 여기에 있는 것이지? 그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거리다. 유럽의 거리와 비슷한 거리의 모습에 그는 당황하며 길가를 걷는 사람을 잡고 물었다.

"저기..."

"어머? 무슨 일이세요?"

"우와..."

녹색의 맑은 눈동자. 하얀 피부. 장미꽃처럼 붉은 입술과 청순한 외모. 금색 긴 생머리의 미녀가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감탄했다.

"귀, 귀가!?"

"에? 제 귀가요? 아... 후훗. 엘프는 처음 보시는 건가요? 다른 도시에서 오신 분 같네요."

"엘프!? 아, 아니..."

그녀의 복장은 자신이 알고 있는 현대의 복장과 달랐다. 마치 코스프레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방어력따위는 개나줘버리고 섹시함을 강조하는 비키니 아머를 입고 있는 것에 그가 당황하자 그녀는 찬성의 얼굴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어디 아프시기라도 하신 건가요?"

그녀가 아름다운 미모를 가깝게 대며 묻자 그는 당황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콧가를 간지럽히는 좋은 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2년만에 만난 여자가 이런 미녀라니...'

그녀의 노출된 몸과 미모를 보는 것만으로도 지를 것 같았던 찬성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 미녀잖아!?'

눈이 튀어나올 법한 미녀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힐끔힐끔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말이라고 걸고 싶은 것처럼 자신을 보는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찬성은 눈 앞의 엘프 미녀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죠?"

"으음... 그런 질문은 처음인데. 후후훗. 혹시 다른 세계에서 오신 분인가요?"

"다른 세계라면..."

"음...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 같네요. 괜찮으시면 저곳에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시겠어요?"

"네? 네..."

찬성은 주눅든 어조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그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살풋 웃은 미녀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전 엘리아라고 해요. 당신은요?"

"저는 은찬성이라고 합니다."

"생각보다 잘 하는군."

콘솔로 찬성이 엘리아와 만나는 것을 본 운현은 그녀와 함께 찻집에 들어간 후 그가 이야기를 나누고, 엘리아와 동료가 되어 그녀에게 그 세계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채널을 돌렸다.

[위험해요!!]

윤지의 손에 들려 있는 검에서 불꽃이 터져나오며 잘생긴 청발 미남을 구했다. 그것에 그가 화사한 웃음을 짓자 윤지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역시 윤지양. 이세계의 성녀답네요!]

[청인씨. 너무 치켜세우지 말아요~]

[그렇지만 사실인걸요. 정말 반해버릴지도 모르겠어요.]

[아이 참...]

"저쪽도 잘해주고 있고..."

윤지가 가상현실을 즐기는 것을 보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찬성보다 사흘정도 일찍 이 건물에 들어와 운현이 만든 가상현실 게임을 즐기며 그녀는 가상현실의 세계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곳에서의 그녀는 아무런 힘도 없는 여자가 아닌, 검과 마법, 그리고 치트에 가까운 몇가지 능력을 준 것만으로 그녀는 이세계의 성녀라는 이름을 얻으며 모두에게 추앙받고 있었다.

거기에 연예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미남과 파티를 맺고 모험을 한다. 윤지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미남과 모험을 하며 점점 그에게 빠져들고 있던 그녀의 플레이를 확인한 운현은 비릿한 웃음을 짓고 채널을 돌렸다.

[하윽! 윽!]

[엘리아씨! 엘리아!!]

"역시 은찬성. 훌륭하다. 벌써 딸 줄이야."

세상에 들어간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하나 공략인가. 물론 운현이 찬성을 위해서 여성을 공략하기 위한 난이도를 거의 없다 시피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엘리아를 공략해서 그녀와 섹스를 할 줄이야. 그가 엘리아와 진한 키스를 나누며 허리를 흔드는 것을 본 운현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좋은 세계를 즐겁게 즐기라고... 시궁창 같은 현실로 돌아왔을 때 더욱 괴리감을 느낄 수 있게 말이야."

273====================

거래

"운현아... 나 조금만 더 하면 안될까?"

윤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운현에게 말했다. 그 세계에서 잠에 빠져들거나 제한시간인 네시간 이상 접속한 상태가 되면 현실로 돌아온다.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세계가 거짓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윤지는 아쉬움에 캡슐에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안돼. 너무 오래 하면 몸에 안좋아."

"괜찮으니까! 응!? 한시간만! 아니, 삼십분만이라도...!!"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그, 그건..."

윤지가 게임 속에서 청인과 키스를 하는 것을 보고 그녀의 게임을 종료시켰기에 그녀가 뭘 했는지 다 알고 있었지만 운현은 모르는 척 그녀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윤지를 향해 운현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이거 전력 소모도 엄청나서 비용이 꽤 들어간다고."

"나, 나한테 줄 돈을 빼면 되잖아!"

빚은 모두 갚았으니 돈은 천천히 벌면 된다. 아니, 이제 돈 따위는 관심없다. 청인과 만나고 싶다. 그와 함께 하고 싶다. 그리고... 오히려 거짓이길 바라는 진짜 세계가 아닌 진짜이길 바라는 거짓된 세계에서 살아가고 싶다.

"아니 그렇게 말해도..."

"조금만 더 하게 해줘!! 부탁이야!! 운현아... 응? 조금만. 조금만이면 돼!"

"어쩔 수 없네."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의 말에 윤지는 환하게 웃으며 캡슐로 들어가 접속기를 착용했다. 실험을 시작한지 이주만에 그녀는 운현이 예상한 중독 초기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윤지가 좀 더 버티는군.'

중독 중기 증세를 보이고 있는 찬성에 비해 윤지는 아직까지 잘 버티고 있었다. 하긴, 아직 그녀는 가상현실 내에서 섹스를 경험하지 않았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운현은 캡슐의 전원을 올린 후 그녀의 플레이를 지켜보았다.

청인과 키스를 마친 그녀가 청인의 목을 꽉 끌어안는 것을 본 운현인 빙긋 웃었다. 제한시간이 주어졌으니 빨리 진도를 빼고 싶어하는 윤지가 보며 청인과 더더욱 짙은 키스를 하고 그의 몸을 만지작거리자 청인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꽉 끌어안은 후 화려한 침대로 그녀를 이끌고 갔다.

[아... 청인...]

[윤지야...]

[사랑해...]

[네가 없으면... 나는... 나는...]

[나도... 너 없이는...]

윤지와 청인이 다시 키스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것을 지켜보며 접속기에서 오는 반응과 윤지의 정신 상태를 분석한 코드를 자신의 단말기로 옮긴 운현은 그 코드를 분석하여 수정된 코드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현실과의 괴리감이지. 너무 리얼한 상황은 게임을 현실로 인식하게 된단 말야... 이것이 가짜임을 알면서도 말이지.'

진짜 현실과 가상 현실간의 괴리감. 그것을 줄이고 그에 대한 리미터를 확실하게 만들어야 한다. 운현이 프로그램을 수정하는 동안 그가 있던 방의 문이 열렸다.

"운현님."

"오. 왜?"

라티나가 들어오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의 질문에 라티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은찬성이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에. 벌써?"

"네. 어서 그 세계로 보내달라고..."

"에휴. 새끼."

운현이 그동안 실험을 통해 얻은 가상현실의 중독 증세는 다음과 같았다.

초기 증세. 집착. 가상현실은 진짜가 아닌 거짓임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곳에 애착을 갖는 정도에 불과하고 게임의 플레이를 더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중기 증세. 절망. 가상현실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나오며 시궁창 같은 현실이 자신의 진짜 세계라는 것에 절망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상태다. 이제는 게임이고 나발이고 상관없이 오로지 생존을 위한 적은 활동을 제외하고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대망의 말기 증세. 부정. 뇌내 행복회로를 돌려 가상의 현실이 자신의 진짜 현실이라 믿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사라진다. 가상 세계도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진짜 세계도 현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행복한 현실에서 시궁창같은 현실로 끌고나오는 이들을 적대하게 되겠지.'

운현은 빙긋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찬성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찬성은 정말 제대로 가상현실을 즐기고 있었다. 세계를 구해낸 용사로서 그 세계를 살아가며 주지육림을 즐기던 와중에 접속 만료 시간이 되어 현실로 돌아오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난폭해져버린 그를 생각하며 찬성이 있는 방에 들어간 운현은 모든 것을 다 때려부숴놓고 캡슐과 접속기에만은 차마 손을 대지 못한 채 야수처럼 신음성을 내고 있는 그를 보았다.

"마이 소울 브라더. 왜 그러는거야?"

"어째서 날 이곳으로 부른 것이지!?"

"부르다니. 돌아 온 것이라고 해야지."

"아니야!! 나는...!!"

"너는?"

"나는... 용사다."

"흐음."

"날 왜 소환한 것이지? 날 돌려보내!! 마법인가? 나에게 적대하는 흑마법사의 소행인가? 아니면 마왕의 수작인가? 네놈은... 누구냐!? 왜 날 이곳으로 보낸 것이지? 너희들이 날 소환한 것인가!? 아무래도 좋아!! 날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줘!!"

"원래 세계라..."

운현은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피식 웃은 후 그의 옆에 있는 캡슐을 가리켰다.

"한가지 묻자. 찬성아. 다 부숴놓고 저건 왜 남겨둔거냐?"

"그... 그건."

"부정하지 마려무나. 친구여. 자네는 지금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건 가짜 세계야. 자네는 용사가 아니고 그저 소년원 갔다 온 스무살에 힘 없는 대한민국 남자라네. 그걸 잊지 말게나."

"거짓말!! 날 속이려고 하지 마라!! 마왕!!"

그는 부숴진 티비의 날카로운 액정을 손에 쥐었다. 그것에 베여 피가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찬성은 광기에 사로잡힌 눈으로 운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날 돌려보내!! 그렇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얼마든지."

"광월참!!"

운현의 비웃음조차 인식하지 못한 그는 액정을 크게 휘두르며 외쳤다. 그가 가상현실의 세계에서 사용하는 주력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던 운현은 찬성이 당황하자 웃으며 말했다.

"뭘 한거냐?"

"이럴리가... 자, 잠깐. 몸이 안좋은 건가? 아니면 이계로의 소환의 문제인가? 큭... 혈광포!!"

느긋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당황하던 찬성은 운현에게 한 손을 내뻗으며 외쳤다. 그런 그를 담배 연기 너머로 바라보던 운현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고 그 순간 운현의 뒤에 서 있던 라티나가 튀어나가 찬성을 제압했다.

"놔라!! 놔!! 마왕의 주구여!!"

"시끄럽습니다."

"큭..."

손쉽게 라티나에게 제압당한 찬성은 운현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제 그의 머릿 속에서 운현이 자신의 은인이라는 것은 사라져 있었다. 너무나도 가상 현실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나머지 현실의 진실을 부정하고 가상 현실의 세계관에 맞추어 현실을 바라보게 된 찬성은 운현을 바라보며 외쳤다.

"마왕이여!! 나와 손을 잡자!! 나를 그 세계로 돌려보내다오!! 그렇다면..."

"뭐 나쁘지 않겠지. 라티나."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라티나에게 말했다. 그의 지시에 라티나는 찬성을 잡아 캡슐 안에 던지듯 눕혔고 찬성은 허겁지겁 가상현실 접속기를 착용했다."

"시작한다. 즐기시게나."

"고맙다!! 마왕!!"

"우우웅!!"

찬성이 다시 가상현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본 운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난장판이 된 주변을 운현이 주섬주섬 치우기 시작하자 라티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운현님.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다 필요하니까 하는거다. 그러니까 넌 신경쓰지 말고 일이나 해."

"...제 일은 운현님을 도와 원래의 세계를 구하는 것입니다. 운명에 휩쓸리는 이들을..."

"내가 알아서 할거라니까."

운현이 난장판이 된 바닥의 쓰레기들을 대충 치우고 나가자 라티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 온지 벌써 이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운현은 무슨 생각인지 다시 돌아가기보다는 정체불명의 연구만을 계속할 뿐 이었다. 그것이 답답했던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그녀는 운현에게 달려가 그의 팔을 잡고 물었다.

"운현님!! 도대체 무슨 계획이십니까!? 저에게도...!"

"넌 알 거 없어."

아르토리우스와 같이 자신의 진짜 얼굴을 숨기고 있던 운현은 그녀의 말에 자신의 가면을 벗었다. 무감정 속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표정. 절망감. 그것 밖에 없는 그의 얼굴에 놀란 라티나가 그의 팔을 놓고 뒤로 물러나자 운현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근처의 재떨이에 비벼 끈 후 휙 몸을 돌려 걸어갔다.

"아. 저 방에 모니터 다시 가져다 놔."

방으로 돌아 온 운현은 커피를 마시며 찬성이 마지막으로 접속했던 상황의 로그를 분석했다. 어디에서 문제가 걸리는 것인가. 한참동안이나 로그를 분석하던 운현은 정운택과 다른 이들의 정신이 붕괴했을 때와 비슷한 로그를 확인하고 쓰게 웃었다.

"결국은 쾌락이었군."

로그를 분석한 결과 그들이 가상현실에 중독이 원인은 극심한 쾌락이라고 볼 수 있었다. 현실과의 괴리감, 자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 현실과 다르게 가상의 현실은 자신의 뜻대로 모든 일이 흘러가고 현실에서 가지지 못한 강한 힘을 소유하게 된다. 어쨌든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답은 쾌락을 어느정도는 제어를 해야한다는건데..."

운현은 다 식은 커피를 단번에 들이마셨다. 쾌락을 제어하든 고통을 제어하든 그것은 운현이 결정할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운현은 가상현실 게임을 만들기 위한 발판을 마련해줄 뿐이고 그것은 그 가상현실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이 결정할 일이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내가 어느정도 리미터를 달아놔도 사람들은 그걸 해제하려고 하겠지."

운현은 자신이 리미터를 달아 놓는다 하더라도 더 높은 쾌락, 더 강한 자극을 위해서 사람들이 그 리미터를 해제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쾌락을 탐하는 존재이니... 뭐 여기까지는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지."

중독자들이 생겨나서 그것을 처리하고 규제를 하는 것은 정부의 일이지 운현이 할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로 인해서 피해자가 생겨날 가능성은 있었다. 지금 찬성이 보이는 행동이 더 심해지게 된다면. 아니. 그가 하고 있는 게임의 엔딩이 나온다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처음부터 다시 즐길 것인가? 아니면 납득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부정할 것인가? 그것은 운현으로서도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에이. 뭐. 알아서들 하겠지."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대부분은 끝난 상황이었다. 남은 것은 다른 이들이 알아서 잘 해주길 빌 뿐. 운현은 느긋한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실험 시작 한달째. 운현은 모니터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제 완전히 정신을 놔버렸구만.'

운현은 모니터를 통해 찬성과 윤지의 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은 한달만에 운현이 만든 게임의 끝을 보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제 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하다. 그가 커피를 홀짝이는 것을 보며 라티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찬성이라는 사람... 몇일 째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저 캡슐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겠지. 찬성에게 있어서는 세상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을테니까. 윤지는 그래도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구만."

찬성과 다르게 윤지는 가상현실 접속기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요청에 의해 결국 가상현실 접속기를 그들의 방 안으로 옮겨 두었던 운현은 각기 다른 반응에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했다.

"찬성은 이제 끝났고 윤지는... 어쩌려나."

스스로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 그녀를 보며 운현은 빙긋 웃었다. 만약 그 가상현실의 중독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녀는 충분히 연구의 가치가 있는 여자다.

"운현님."

그의 옆에 서 있던 라티나는 모니터를 가리켰다. 몇일 째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멍하니 캡슐만 바라보던 찬성이 옷가지를 주섬주섬 들어 천장의 고리에 거는 것이 보였다.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다. 자신이 진짜라고 생각했던 세계가 끝나버린 것에 대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그가 자살을 시도하자 라티나는 운현에게 물었다.

"막을까요?"

"저정도로 진행됐으면 답 없어. 중독은 남이 어떻게 해준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게 아니야."

"그럼..."

"냅둬."

운현은 냉정히 찬성에게서 돌려 윤지에게 집중했다. 찬성은 운현이 예상했던 중독자의 반응을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더 테스트할 것은 없기에 운현은 무덤덤히 말했고 결국 그가 목을 메는 것은 라티나만이 지켜보게 되었다.

"슬슬 가볼까."

"어딜...?"

"윤지한테. 어떻게든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진짜로 그런 것인지 알아보려고."

운현은 빙긋 웃은 후 그대로 밖으로 나가 윤지의 방으로 향했다. 윤지의 방 앞에 도착한 운현은 초인종을 눌렀고 윤지는 초췌한 얼굴로 희미하게 웃으며 운현을 반겼다.

"어서 와. 청인아."

"......"

'얘도 제정신은 아니구만.'

274====================

거래

"아. 미, 미안. 운현아."

운현이 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윤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후다닥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은 운현은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소감이 어때?"

"무슨 소감?"

"가상현실을 체험한 소감."

"너무 좋았어. 정말 최고였어... 그래서 말인데 운현아."

윤지는 운현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말했다.

"다른 건... 없니?"

"다른 거라니?"

"다른 테스트... 그 세계 말고 다른 세계."

"음... 있긴 한데 왜? 원한다면 한번 더 해도 괜찮은데."

운현의 말에 윤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의식적으로 거부를 하는 것이다. 왜일까? 그가 묻자 윤지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청인을... 잊지 못하겠어..."

"청인이라면 그 캐릭터? 윤지야. 그건 가짜야."

"가짜라고 하지 말아줘. 나에게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이야."

윤지의 눈에 광기가 번뜩였다. 그것을 본 운현은 피식 웃은 후 담담히 말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짜지. 뭐 좋아. 아직 두개 정도 남았으니까 그것을 줄게."

운현이 웃으며 말하자 윤지는 힘겹게 웃었다. 그럴 것 같아 준비한 디스크를 꺼낸 운현은 캡슐의 숨겨진 버튼을 누른 후 디스크를 꺼내었다.

"그럼 이건 다른 실험자에게 줄게. 그 사람들의 반응도 살펴야..."

"안돼!!"

운현이 꺼낸 디스크를 바라보던 윤지는 그의 말에 버럭 외치고 달려들었다. 운현의 손에 들려 있는 디스크를 빼앗아 소중히 품 안에 쥔 윤지는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다가 힘겹게 말했다.

"운현아... 이거... 청인을 나에게 줘. 응? 부탁이야. 운현아..."

'얘는 다른 종류군.'

집착이다. 세계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에서의 기억을 잊지 못해 다른 이가 자신이 사랑했던 이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부류다. 그녀의 반응을 보며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니 청인을 준다고 해봤자... 지금 다른 실험자가 그걸 하고 있는데... 그걸 가지고 있어봤자 어차피..."

"뭐...? 자, 잠깐만. 이 세계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단 말야?"

"응."

당연하다는 듯 운현이 대답하자 윤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반응에 운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안돼... 청인은 나만의 것이야... 다른 누구에게도... 못줘... 못줘어어어어어!!!"

"야. 윤지야!"

"다른 실험자가 있다고? 그럼 죽일거야... 청인은 내거야. 내거라고!!"

운현을 밀치고 윤지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운현이 말하길 모든 실험자는 이 건물 내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건물 어딘가에 청인과 만나고 있는 다른 여자가 있을 것이다. 그녀에 대한 극심한 질투심에 미쳐버린 윤지는 복도를 걸어 오는 라티나를 보자마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청인은 내거야!!!"

"무슨..."

자신에게 달려드는 윤지를 잡아 그 힘을 이용해 엎어쳐버린 라티나는 심한 충격을 받았는데도 고통보다는 증오와 질투심에 지배당해 벌떡 일어난 윤지를 보며 당황했다.

"청인은 못줘!"

"무슨 소릴 하는거냐!"

"내놔아아아!!"

"큭...!!"

윤지가 달려들자 라티나는 이를 갈며 그녀에게 주먹을 뻗었다. 턱을 날려버려 기절을 시킨 라티나는 그녀가 허물어지자 그녀에게 다시 주먹을 뻗으려 했다.

"거기까지."

"운현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정신이 나가긴 했는데... 찬성이보다 더 나쁜 케이스군."

가상현실 게임이 한사람만을 위한 것일리 없다. 같은 캐릭터를 여러명이 빠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과도한 집착은 그녀가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결국 이것 역시도 가상현실에 대한 문제점 중 하나겠지.  운현은 나름 만족스러운 얼굴로 윤지를 가리킨 후 목을 그었다.

"쟤는 원석이한테 말에서 처분 시켜라. 멀쩡해보이지만 그 안은 제대로 망가졌으니까."

"알겠습니다."

찬성과 윤지를 이용해 중독성에 대한 실험을 모두 마친 운현은 실험 결과를 정리한 후 프로그램을 수정했다. 어떤 부분에서 인간이 쾌락을 느끼는지는 천차만별이다보니 꽤나 많은 부분에 리미터가 걸릴 수 밖에 없었다. 기존에 생각했던 수준에서 상당부분 떨어진 감도로 기본 프로그램을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운현은 마지막 코드를 정리하여 수정한 후 저장했다.

"자... 이제 가볼까."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남은 것은 이것이 세상에 퍼지고 적용되는 것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운현은 대용량의 하드디스크를 들고 미 대사관으로 향했다. 사전에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스미스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자네가 만든 그 장치는 정말 최고더군. 벌써 꽤 많은 이들에게 많은 것을 얻어냈어."

"그런가요? 뭐 그건 알아서 하시고."

스미스가 웃으며 말하자 시큰둥히 그에게 답한 운현은 윌포드에게 하드디스크를 넘겼다. 가상현실을 구축할 수 있는 툴. 그에 관련된 기본 소스 코드까지. 모든 것을 그에게 넘긴 운현은 싱글거리며 말했다.

"특허 부분은 맡기겠습니다."

"허... 그거 좋군. 그런데 이건 뭔가?"

"가상현실 접속기에 대한 개발 권리는 성경 그룹에 넘길 겁니다만. 그거에 대한 권리증서입니다."

"어째서!?"

성경 그룹이 한국에서 거대한 기업이라고 하지만 세계의 수준에서 따진다면 그렇게 큰 기업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미국에도 상당히 많은 기업이 있는데. 윌포드가 아쉬워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저도 초반에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 관여해서 수정해나갈거고, 그 부분에 대한 것은 스미스씨에게 보내 놓을게요. 접속기랑 캡슐과 관련된 문제는 저 말고 성경 그룹과 상의해서 받으시길 바랍니다."

"끙..."

"그럼 저는 이만!"

자기 할말만 마치고 운현이 자리를 뜨려 하자 스미스는 그를 잡았다.

"뭡니까?"

"에... 그.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겠나?"

"흠. 뭐 잠깐이라면."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대기하는 것 뿐 이었다. 그렇기에 시간적 여유가 상당했던 운현은 느긋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네."

"혹시 대선 출마하실때 밀어달라는 것이라면 사양할게요."

"뭐!?"

스미스를 처음 봤을 때, 그리고 그와 거래를 하며 그에게 느낀 야망을 눈치챈 운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스미스가 당황하자 운현은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가상현실 가지고 인기를 끌어서 뭔가 한다는 건 좋은데 이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거든요."

"무슨 소린가?"

이것처럼 좋은 것이 어딨다고? 이것은 혁신이고, 인간이 인간의 의식을 초월하는 첫 걸음이다. 그것이 나쁠리 없다 생각하는 스미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저는 리미터를 걸어놨습니다만... 사람의 욕심이란게 한도 끝도 없는 것인지라 좀 더 나은 현실감, 좀 더 좋은 쾌락. 좀 더 끝내주는 스릴을 위해서 사람들은 리미터를 풀겁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사고는 반드시 터지겠죠.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재산 피해는 물론이거니와 인명피해도 반드시 날텐데. 이걸로 인기 끌고 대통령 됐다가 무슨 쌍욕을 먹을라고."

자신이 리미터를 걸었지만 운현은 그것이 반드시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대단한데. 반드시 그들은 답을 찾을 것이고 그 위험한 다리를 건너려고 할 것이다.

"그래도..."

운현의 말에도 스미스는 아쉬운 모양이었다. 어차피 대통령이 된다면 무슨 일을 해도 욕은 먹게 되어 있었다. 대통령이 되고 난 후의 이점을 생각하면 그정도는 감안할 수 있다고 생각한 스미스가 뭔가 더 말하려고 하자 운현은 그의 말을 끊었다.

"정 하고 싶으시면 말리지는 않을게요. 당신이 발굴했다고 하세요. 세상사에 나오고 싶지 않아하는 과학자를 끌어들여 가상현실이라는 세계를 인간에게 주었다. 그거. 해도 됩니다만 제 이름을 말씀하지는 마시죠. 윌포드씨. 제 모든 정보는 극비 취급해주세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자네 명예나... 그런건."

"명예같은거에 관심없어요."

운현이 원하는 것은 명예도,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자기 잘났다고 으스대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들을 구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을단련하기 위한 세계을 다른 이들이 만들고, 그 세계를 경험하여 자신을 강하게 하는 것 뿐 이었다.

만약 그가 유명해지고, 또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이런 일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밀수를 수백번 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마약왕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 그 세계의 운명을 바꾸고 그녀들을 구하는 것 뿐 이었다.

'그때까지 생활하기 위해 쓸 돈도 넘쳐나고.'

솔직히 특허료따위 어찌되어도 상관없었다. 성경 그룹에서 커미션을 받고 있었고 밀수로 쌓아 둔 돈만 해도 이미 수십억 가까히 있는데다가 인벤토리 안에는 꽤 많은 금과 마약이 있었다. 그 뿐인가? 인벤토리에 잠들어 있는 수백개의 마석에서 몬스터의 피만 채취해 팔아도 운현은 자존심을 잃은 남자들에게 존경받으며 떼부자가 될 수 있었다.

"으음... 그럼 이건 어떤가? 자네가 날 도와준다면..."

"미안하지만 이제 제가 할 일은 다 한 것 같군요. 특허가 등록되면 그때 말씀해주세요. 아, 일주일 내로 이거 처리 안되면 저 러시아로 갈겁니다. 러시아가 싫다고 하면 중국으로 가죠."

아쉬울 것이 없는 운현은 빙긋 웃으며 느긋하게 말한 후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그가 나가는 것을 본 윌포드와 스미사는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에서 가상현실에 대한 특허가 발표되고 그게 공개되어 세상에 퍼지면... 당장은 뭔가 할 수 있는게 없겠지. 그래도 기본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으니까 그럭저럭 이슈화는 되겠지?'

"따르릉."

전화기가 울린다. 그것을 받은 운현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에 입맛을 다셨다.

"운현님!! 이거 뭡니까!?"

"뭐가?"

"라티나가 가져 온 이거요!"

원석이 해봤구나. 라티나에게 가상현실 접속기를 다루는 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원석에게 체험해보라고 말했던 운현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말했다.

"하루에 네시간 이상은 하지 마라. 그리고... 가상현실이라고 너무 까불지 말고."

"그동안 연구하신게 이거 만들려고 하셨던 거 였어요!?"

"응."

"우와... 이거 끝내주는데요?"

애들처럼 흥분한 목소리로 원석이 떠들어대자 운현은 피식 웃은 후 말했다.

"야. 너 지금 숙소로 와라."

"네? 지금요?"

가상현실에 푹 빠진 원석은 운현의 말에 조금 내키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된 운현은 키득거린 후 말했다.

"그거 관련해서 할 얘기 있으니까 뻘짓하지 말고 한시간 내로 와라."

"끙... 알겠습니다."

숙소에 도착한 운현은 청소를 하고 있는 샤이니아 멤버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들은 바쁜 스케쥴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와서 숙소의 청소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그녀들의 집안일을 멍하니 지켜보던 운현은 벨이 울리자 터덜거리며 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왔냐."

"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으아아아악!!!"

빨리 돌아가서 가상현실을 하고 싶었던 원석이 다급히 묻자 운현은 그의 어깨를 잡고 침투경을 날렸다. 온 몸을 타고 흐르는 고통. 오래간만에 느끼는 그 고통에 원석이 비명을 내지르자 샤이니아의 멤버들은 놀라며 그들을 보았다.

"허억... 왜, 왜?"

"몇가지 중요한 얘기를 해줘야 하는데 지금 네 상태로는 정신 못차릴 것 같아서. 자. 이거 받아."

"이게... 뭡니까?"

"그거 설계도."

"...네?"

원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운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원석의 시선을 무덤덤히 받은 운현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재떨이를 끌어당긴 후 말했다.

"설계도 줄테니까 공장 만들어서 열심히 만들어라. 일주일 후에 미국에서 가상현실에 대한 발표가 있을 예정이다. 끝내면 그거 가지고 캡슐이랑 접속기 만들어. 그리고 쟤들 써서 홍보 열심히 해라. 대충 원가 계산해보니까 가상현실 접속기랑 캡슐 만드는데 가격이 사백에서 오백이면 떡을 치겠더라고. 대량 생산하면 삼백까지 줄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가격은 적당히 받아먹고. 오케이? 한 이년 정도 그거가지고 너네 개발팀이랑 열심히 보완하든 추가하든 알아서 하고 그 설계도 인터넷에 풀어."

"...자, 잠깐만요."

갑작스러운, 그리고 꽤나 황당한 이야기에 원석은 정신이 없었다. 지금 이 인간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그가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인상을 구긴 후 손을 들었다.

"정신 못차리지?"

275====================

거래

"아니, 아니. 잠깐만요. 그러니까 제 방에 있는 그거의 설계도라구요!?"

"응."

"그걸 왜..."

"왜라니?"

"이거 세상에 푸시게요?"

"그럼 뒀다가 국끓여먹을까?"

원석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좋은 것을 왜 푼단 말인가. 꼭꼭 숨겨 둬도 모자랄 판국에 그냥 인터넷에 올려버리라는 그의 말이 납득이 되지 않은 그가 묻자 운현은 느긋하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이거 개선의 방향이 얼마든지 있고 처음부터 커스터마이징 가능하게 만들어놨어. 그리고 가상현실 구축하는 개발 툴과 소프트웨어. 개념같은 것은 다 미국에 있으니까 독점할 생각하지 마라."

"그러니까 왜요!? 이거만 있으면 떼돈을... 아니, 세계까지 지배할 수 있을텐데요!?"

"그딴거 관심없어. 뭐 독점하고 싶으면 해라. 네가 안하면 내가 하면 되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날로 우리 인연은 끝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지? 내가 필요 없는 것들 어떻게 하는지."

운현이 담배를 문 채 싸늘히 말하자 원석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와 인연이 끝이다. 라는 것은 그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장 라티나 하나를 잡는 것도 불가능한데 운현이 자신의 적이 된다면? 그를 따르는 라티나는 당연히 그의 편을 들 것이고 그럼 자신은... 원석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어요. 알았어. 그럼 2년동안은 저희가 독점해도 된다는 거죠?"

"응. 사전에 유출되도 상관은 없는데 그래도 너네 먹고 살라고 주는 거니까 그걸로 열심히 해처먹으렴."

"하아... 그래도 감사하네요. 생각은 해주시니 말이에요."

"내가 안하면 누가해주겠냐?"

원석이 투덜거리듯 말하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해놨어요? 그냥 저희한테 다 주면 됐잖아요. 그럼 저희가 특허도 다 할텐데. 미국이랑은 또 어떻게 거래를 했대..."

"독점을 막아야지. 너희에게 다 준다고 하면 한국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내가 보기엔 뭔 가상현실 협횐지 뭔지 만들어지고 그거 관련해서 겁나 태클걸껄? 그리고 쓸데없는 규제도 엄청 생길거고. 내가 보기에 대한민국에서 돈 될만한 거 발표하면 진짜 헬이다. 헬. 그나마 미국이 나으니까 미국에서 한 것 뿐이야. 그리고 성경그룹에서 그 기술 받아갈때 이용료 조금만 받으라고 해놨으니까 좀 씨발거리지 좀 마라. 짜증날라고 하니까."

"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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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의 말이 점점 거칠어지자 원석은 입을 꾹 다물었다. 괜히 그의 성질 건드렸다가 피보기 싫었던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샤이니아를 가리켰다.

"그럼 쟤네들한테 홍보 시켜야 해요?"

".....!"

"그래. 그리고 너네. 이거 직접 체험해봐야 하는데 알아서들 해라. 망하면 진짜..."

"자, 잘할게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어요."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샤이니아의 멤버들은 딱딱히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미국이 어쩌고, 독점이 어쩌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보통 물건은 아닌 듯 한데 그것에 대한 홍보를 맡기겠다는 것이다.

"흐음... 쟤들 보다 더 나은 애들이 있을텐데."

"그래도 이거 시키려고 키웠는데 일단 좀 시켜봐야 하지 않을까? 한달 쯤 해보고 홍보효과 없으면 걍 장천후한테 다 때려치라고 그래. 마땅히 청소 시킬 사람도 없는데 여기 전속 청소부랑 가사 일이나 시키자."

"그럴까요?"

"진짜 잘 할게요!!"

운현의 말에 원석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신들의 인생이 결정된다 생각한 샤이니아의 멤버들은 기겁하며 외쳤다. 그녀들이 굳은 얼굴로 외치자 자리에서 일어난 운현은 상아와 한솔, 윤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네 멘탈 좀 강하냐?"

"멘탈 하면 또 저희죠."

상아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운현은 피식 웃은 후 그녀들을 데리고 지하실로 향했다. 이 집을 청소하며 한번도 지하실에 들어간 적이 없었던 그녀들은 넓고 지저분한 지하실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다가 그나마 깨끗한 곳에 놓여져 있는 캡슐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에요?"

"아까 쟤랑 말하던 가상현실 접속기다. 자. 그럼 한명씩 체험해보자. 여기서 멘탈 갑이 누구야?"

"음... 저요."

한솔이 손을 들어올리며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찬장에서 성인용 기저귀를 꺼내었다. 그것을 보며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운현은 무덤덤히 말했다.

"그거 착용해."

"예!? 왜, 왜요!?"

"오줌 지릴까봐."

"무슨 소리하시는거에요!? 아이돌은 오줌같은거 안싸요!"

한솔이 당황한 나머지 어린애도 하지 않을 법한 뻥을 치는 것에 운현은 기가 막혔다. 결국 그녀는 끝까지 기저귀를 착용하는 것을 거부했고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른 멤버들에게 기저귀를 내밀었다.

"저, 저도 오줌같은 거 안싸요!"

"저두요."

"그래? 그럼 너네 오줌싸면 녹화한거 인터넷에 뿌려도 되지?"

"......"

"아니 그건 좀."

"하는 걸로 알고. 너부터 저기 안에 들어가."

그녀들이 떨떠름히 말하는 것을 무시하고 운현은 한솔에게 캡슐 안으로 들어가라 말했다. 그녀가 떨떠름한 얼굴로 캡슐에 들어가 눕자 운현은 그녀에게 접속기를 씌워 준 후 디스크를 바꾸고 캡슐을 닫았다.

"저기 운현님."

"왜."

"저도 해봤는데 되게 재밌고 신기하긴 했지만 지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미 체험을 해 본 원석이 조용히 묻자 운현은 피식 웃은 후 말했다.

"아, 이건 다른거거든."

"진짜요? 뭔데요?"

"응. 호러물."

"....."

그의 말에 원석은 샤이니아의 미래가 보였다.

"으아아아앙!!"

"흐어어엉!"

"히끅...히끅...으아아앙!!"

결론만 말하자면 세명 다 쌌다. 그것도 제대로. 캡슐의 자동세척 기능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운현은 그녀들이 싼 오줌이 모두 세척되어 뽀송뽀송해진 캡슐 안을 확인한 후 그녀들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사람이 말을 하면 들었어야지."

"흐어엉...지, 진짜 무서웠어요..."

"삐. 삐에로... 이제 무서워..."

"훌쩍...훌쩍..."

세 미녀들이 훌쩍거리든 말든 운현은 신경쓰지 않은 채 캡슐의 세척기능이 재대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후 팔짱을 끼며 생각했다. 확실히 개선사항은 있었다.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리미터도 있어야 할 것 같았기에 운현은 의자에 앉아 코드를 수정하고 원석에게 말했다.

"쟤들 데리고 가서 씻으라고 해라. 참나. 그렇게 오줌 지릴 거였으면..."

"으아아아아아아앙!!"

"흐어어어어어엉!!"

"엄마아아아아!!"

운현의 말에 샤이니아의 멤버들은 다시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그녀들을 보며 운현이 인상을 찡그리자 원석은 한숨을 내쉬고 그녀들을 데리고 올라갔고 삼십분 쯤 지나 훌쩍거리는 그녀들을 데리고 내려왔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네?"

내려온 그녀들을 향해 운현은 기저귀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은 그녀들이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운현은 히죽 웃었다.

"말했잖아. 홍보 제대로 하려면 익숙해져야 한다고. 최소한 스테이지 1은 클리어 할 수 있어야지. 지금 준비해 놓은 게 이것 밖에 없으니까. 이거 제대로 하면 어떤 가상현실을 해도 능숙하게 움직일 수 있을거다.

[이제 인류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티비를 보며 운현은 빙긋 웃었다. 자신이 그렇게 말했건만 스미스는 결국 대선에 나가기로  선택한 모양이다. 미국 CIA 기술국장의 이름으로 가상현실에 대해 발표한 그가 연설하고, 실제 체험하는 영상을 뉴스로 보며 운현은 핸드폰을 들어 인터넷에 접속했다. 역시나 인터넷의 모든 사이트들은 가상현실에 대한 것으로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미국의 음모다. 외계인을 제대로 고문했다. 가짜다. 신성모독이다. 등등. 여러가지 의견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주된 의견은 바로 '신세계' 라는 것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모든 인간은 구속되어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경제적인 여건, 사회적인 여건, 종교적인 여건. 그 외에 신체적인 여건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한정된 세상에서 밖에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제약이 풀리게 된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않을 손가.

대부분의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인기 검색어 1위는 가상현실, 그리고 2위는 그것을 발표한 스미스였다. 그리고 그것을 빠르게 추격하는 것이 바로 성경 그룹이었다.

스미스가 발표할 때 한국계 미국인 과학자와 성경그룹이 제휴하여 가상현실 기술을 만들어냈다고 발표를 했으니 성경 그룹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휴. 등신들."

종편 뉴스들은 성경 그룹에 대한 비난 일색이었다. 이런 기술을 개발하는데 왜 자국과 하지 않고 미국과 개발을 한 것인가. 한국계 미국인 과학자가 누구냐. 그것을 꽁꽁 숨기고 있던 성경 그룹을 대한민국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등 자극적인 기사로 성경 그룹을 비판해나갔다.

"내 이럴 것 같더라."

아쉬울 것이다. 그 위험성은 어쨌든 가상현실 기술이라는 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을테니 말이다. 그것을 놓쳐버린 한국 정부가 난리를 치는 것은 당연할 것이기에 운현은 피식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내일 쯤 성경 그룹에 대한 세무조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검찰의 긴급 발표가 종편 뉴스 하단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보복성 세무조사를 하겠다는 것이지만 딱히 거슬리지 않았다. 어차피 거쳐야 할 일이고, 자신과는 큰 상관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들이 까불어봤자지."

이번 일을 계기로 성경 그룹이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 및 중국에 엄청난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것을 원석에게 들었던 운현은 원석을 불러다가 회유를 하는 것이 아닌 이런 뻘짓을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무능함에 쓴웃음만 나왔다.

"따르르릉!"

"어. 왜."

[운현님. 이제 어쩌죠?]

원석이다. 이번 일로 여기저기서 하도 연락이 와서 답답한 마음에 자신에게 전화를 했으리라 생각한 운현은 그의 답답함을 풀어주기 위해 느긋하게 말했다.

"어쩌긴 뭘 어째. 자꾸 까불면 진짜 미국으로 뜬다고 그래. 윌포드 대사랑 얘기해 놨으니까 자세한건 윌포드 대사랑 이야기해라. 귀찮게 나 부르지 말고."

[하지만 운현님. 그래도...]

"그리고 만약 이번 일에 내 이름이 밝혀진다.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알지?"

[끙... 그게.]

"그럼 잘 해봐! 임마! 세계로! 미래로! 성경 그룹이 인도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 찾지 말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 그럼 안녕이다!!"

[예!? 운현님!? 잠깐만요!! 무슨 소리에요!? 운현님!?]

운현의 말에 원석은 황당했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가 다급히 외쳤지만 운현은 망설임없이 전화를 끊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로 챙길만한 짐은 없었다. 이곳에 있는 중요한 물품들은 이미 인벤토리에 넣은 지 오래였다.

"여기도 안녕이구만!"

더 이상 이곳에 볼 일은 없었고 지금까지 만든 인연들과 할 일도 없었다. 그들을 자신의 일에 끌어들인 것은 가상현실을 개발하고 그것이 세상에 쉽게 퍼지게 하기 위해서에 불과했다. 그것이 완료된 이상 이제 더 이상 그들과 만날 이유도, 또 그들과 함께 일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버린다. 괜히 엮여봐야 이제 자기 시간만 빼앗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더 이상 그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이용가치가 없었기에 운현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그들을 버렸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기본을 만드는 부분은 끝났으니 이제 코드를 뚜닥거릴 일만 남은 것이다. 가상현실 접속기? 조금만 기다리면 성경 그룹에서 양산할 것이다. 그것을 사서 그것을 기준으로 작업을 하면 된다.

"이제 할 일은 기다리는 것 뿐. 그동안 개인적인 공부나 해둬야겠구만."

담배를 입에 물고 운현은 2년동안 먹고자며 머물렀던 숙소에서 빠져나왔다. 국적도 미국으로 확실히 바꿨고 대사 신분을 이용해 자신의 정보를 모두 비공개화 시켜놨으니 미국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원석과 한도 몰래 지금 있는 숙소에서 꽤나 떨어진 다른 도시에 구입해 놓은 아파트로 이동한 운현은 넓은 거실, 그리고 벽면을 가득 메운 책들을 보며 씩 웃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다른 연구를 시작해보실까..."

미혜와 함께 운현의 숙소로 향한 원석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무도 없다. 텅 빈 숙소를 보며 당황한 그는 허겁지겁 지하실에 들어가보았지만 캡슐 한대가 사라진 것 외에는 변한 것이 없었다.

"이럴 수가..."

양미혜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운현이 사라졌다는 말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붕붕 고개를 저은 후 뒤따라 들어 온 라티나의 멱살을 잡으며 외쳤다.

"어디에 숨겼어!!"

"나, 나도 몰라요."

"...이럴수가... 진짜... 없어진거야?"

"흑...흐흑...운현... 운혀어어언..."

미혜의 흐느낌과 원석의 당혹스러운 목소리. 그것을 보며 라티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새로운 아파트에서의 생활은 잉여롭기 그지 없었다. 운현은 책을 보며 정신수양을 함과 동시에 가상현실 개발 뉴스를 매일같이 체크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가상현실 기술을 배우기 위해 매일 수만명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미국을 찾았고 그들은 효율적인 연구를 위해 미국에 남기를 바랬다.

고급 인력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신청하는 것에 미국 이민국은 때 아닌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미국이 패권주의를 시작했다며 각국은 미국을 공격했지만 미국의 반응은 시큰둥하기 그지 없을 뿐 이었다. 그것에 각국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고 그 중에서 가장 속이 타들어가는 것은 한국 정부였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직도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한국계 미국인 과학자 그리고 한국 소재의 기업인 성경에서 그 기술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한국 정부로서는 손가락만 쪽쪽 빨며 그 기술로 인한 이득을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 마냥 기다릴 뿐 이었다.

라는 사설을 읽으며 신문을 덮은 운현은 달력을 본 후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이군."

오후 11시 59분. 운현은 눈을 감았다. 자신이 21살이 된 오늘. 자신은 이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지금은 안돼."

아직 아무런 세계도 경험하지 못했다. 자신의 생각보다 사람들은 가상현실 기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운현이 베이스로 삼으라고 만들어 놓은 허접하기 그지 없는 가상현실 세계만을 즐기는 그들의 반응에 운현은 어이가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신기술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큭..."

시계가 12시 정각을 가리키자 운현은 머리를 깨는 듯한 두통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다. 과거 현자와 이야기를 나눴을 때 자신이 어떻게 그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인지 알게 되었던 운현은 이 두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의식을 잃으면 그 세계로 끌려들어간다는 것을 들었다.

[가짜의 신인 너는 그것을 막을 수 있다. 그것을 최대한 미뤄야 한다. 물론 고통스러울 것이지만... 버텨내야 한다.]

자신이 그 세계로 가게 된 것은 그 세계의 신의 부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저 인간에 불과했던 자신이라면 그것을 버티지 못하고 바로 끌려갔을 것이다

"크으윽...!"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비록 가짜이기는 하지만. 현계에 강림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운현 역시 '신'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에 저항할 수 있었던 운현은 자신이 만든 가상현실 속에서 등장하는 삐에로가 머리를 도끼로 쪼갤때 이상의 고통을 느끼며 쇼파에서 쓰러졌다.

"크아아악!!!"

버틴다. 어떻게든 버텨낸다. 신의 힘을 신의 의지로 버텨내고 버텨낸다. 비틀거리며 일어선 운현은 거실에 있는 테이블을 꽉 쥐었다. 엄청난 힘에 테이블이 우겨지며 부서지는 것을 본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비틀비틀 걸어 거실 벽에 있는 서랍장을 열었다. 그곳에 있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문 그는 그것을 피우며 거울을 지켜보았다.

"크... 하하하...으윽...!"

너무 강한 고통을 버텨내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의 힘에 저항하기 위해 가짜 신의 힘을 사용하기 때문일까? 운현은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눈이 섬뜩할 정도로 붉게 빛나는 것을 보며 이를 드러내었다.

"신의 힘이라... 윽... 이거지...!"

담배필터를 잘근잘근 깨물며 불을 붙인 운현은 폐가 따끔거릴 정도로 강하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담배가 만들어낸 고통은 두통을 가라앉힌다. 그녀들을 구해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가 신의 힘을 억누르는 것을 느끼며 운현은 시계가 움직이길 기다렸다.

"짤깍."

"후우우..."

일년같은 1분이 지났다. 운현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피식 웃었다. 신의 힘을 버텨내었다. 자신을 이세계로 끌어들이려 하는 신의 힘을 이겨낸 운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현자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이 고통을 매일 겪어야 한다 이거지... 좋아. 아주 좋아."

자신이 이세계로 가는 것은 그 세계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이 버텨냈다고 한들 신의 힘은 내일 다시 자신을 찾을 것이고 그 끔찍한 고통을 버텨내야 했다. 최소한 자신이 확신을 가질 정도로 강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거 나도 버티기 힘든데... 어쩔 수 없이 개입을 해야겠군.'

자신의 손이 닿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의 손으로 거짓된 세계가 만들어지길 바랬다. 하지만 이래서야 너무 늦다. 가짜 신의 힘으로 버텨내고 있지만 언제 신의 부름에 자신이 굴복할지 몰랐던 운현은 담배를 다 피고 재떨이에 비벼 끈 후 진통제를 입 안에 넣고 씹어 삼키며 의자에 앉았다.

"...딱히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운현은 자조적인 어조로 중얼거린 후 자신의 ip를 추적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은 툴을 실행시키고 자주 접속하는 가상현실 카페에 자신이 만들어낸 프로그램을 올렸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가상현실 제작 툴보다 훨씬 직관적이고 간편한 툴을 카페에 올린 그는 자신의 카페 아이디를 보며 자신의 고통을 토해내듯 중얼거렸다.

"유령이 되어 움직여주지."

"운현님."

낮은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라티나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부르자 운현은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어째서 가시지 않으신겁니까?"

그녀가 눈을 빛내며 말하자 운현은 작게 키득거린 후 싸늘히 답했다.

"아직 때가 아니니까."

"......"

운현의 말에 라티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바라는 때는 언제란 말인가. 원래 예정되어 있던 그 날짜를 넘겨버리고도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운현을 말없이 바라보던 라티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276====================

거래

[...가상현실에 대한 추가 법안을 마련하여...]

홈플러스에 비치된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운현은 입에 물고 있던, 내용물을 다 빨아먹어 껍데기만 남은 쭈쭈바를 쓰레기통에 휙 버린 후 몸을 돌렸다. 싸구려 티셔츠에 반바지. 삼선 슬리퍼. 떡진 머리. 거뭇거뭇한 수염. 한 손에 들려 있는 특가 판매되는 5+1 라면까지.

영락없는 동네 백수의 모습으로 홈플러스에서 나온 운현은 1층의 입구에서 특가로 판매되고 있는 성경그룹의 가상현실 접속기를 보았다.

가상현실이 세상에 등장한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운현의 말대로 성경 그룹은 독점하다 시피한 가상현실 접속기와 캡슐에 대한 기본 제조법과 설계도면을 1년만에 세상에 공개했고 많은 기업들은 그것을 받아 더욱 저렴하고, 더욱 성능이 좋은 접속기와 캡슐을 만들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에서 공개한 가상현실 제작법 역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의료, 군사, 교육 및 생활 전반 부분에 가상현실은 큰 영향을 끼쳤고 이제는 운현의 예상대로 섹스와 게임에 대한 분야로 가상현실은 진화하기 시작했다. 벌써 한국의 몇몇 개발사는 가상현실 게임 제작을 시작했고 다음달이면 1세대 가상현실 게임이라 할 수 있는 게임이 등장할 것이다.

"흐음..."

홈플러스옆에 있는 큰 건물의 가상현실 체험 및 소프트웨어, 기기 판매샵을 본 운현은 이제는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그룹인 샤이니아가 모델이 된 게임과 무척 아름다운 여인들이 무기를 들고 서 있는 게임 포스터를 보고 피식 웃었다.

"잘 되어가고 있나보네."

운현도 가상현실의 안정화 및 개발 편의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원석이나 미혜, 한도. 그 외의 다른 사람들과 인연을 끊어내고 모든 시간과 노력을 그곳에만 투자를 해야 했던 운현은 그 노력의 결실이 빛을 보이는 것에 웃을 수 있었다.

'시발. 투자금을 그렇게 쏟아부었는데 망하면 곤란하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현금을 운현은 몇몇 개발사에 투자하여 가상현실 게임 개발에 힘을 쏟도록 했다. 투자금에 목말랐던 그들은 운현이 뿌린 투자금으로 가상현실을 연구하여 드디어 게임을 만든 것이다.

'물론 먹튀하려는 새끼들도 있긴 했지만 뭐.'

투자금을 들고 튀려고 한 몇몇 쓰레기 개발사 사장을 떠올리며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가상현실에 대한 지식 없이. 과거 게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돈이 될만하니까 아무 생각없이 뛰어들어 개발자들을 갈아 넣으면 된다는 생각을 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에게 투자를 하고 조사를 하여 먹튀의 기미가 보이면 철저하게 응징했던 운현은 투자를 한 멀쩡한 회사 중 그 첫번째 회사가 게임을 출시한다는 것에 빙긋 웃었다.

'진 삼국 연희무쌍이라...'

삼국지를 기반으로 하여 그들과 연애를 하고, 또 천하를 정복하는 류의 게임. 운현도 꽤나 기대를 하고 있는 게임인지라 벌써 예약을 걸어놨었다. 이제 일주일 후면 그 게임이 출시가 된다.

'얼마나 강해질 수 있으려나...'

개발 금액만 300억이 넘어가는 엄청난 시도다. 개발사의 사운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큰 도전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 게임의 출시를 기대했다.

게임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운현은 포스터를 보며 담배를 물고 터덜터덜 도서관으로 가 몇권의 책을 빌린 후 집으로 향했다.

"....."

아파트 입구에 도착한 운현은 현관문 위의 도어락을 비밀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반응하지 않는다. 죽어버린 도어락을 보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도둑인가.'

전자 도어락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것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이제는 실험 따위는 하지 않았고 집에 비싼 물품이래봐야 구형 가상현실 접속기와 캡슐 밖에 없었던 운현은 심드렁한 얼굴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왓더."

집은 깨끗했다. 너무 깨끗해서 운현은 엄청난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나오기 전의 집은 완전 개판이었다. 청소나 정리따위와는 담을 쌓고 살아가는 운현인지라 책상 근처에는 담배꽁초와 담뱃재, 그리고 초콜렛이나 과자들의 껍질들이 사라져 있고 세탁기는 샀지만 한번도 돌리지 않아 세탁물이 산처럼 쌓여 있던 자리는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가 우렁각시를 구했었나.'

운현은 드디어 사람이 살만한 집이 된 공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혹시 홈플러스에서 사온 라면이 사는 꼬라지를 보다 못해 여체화되어 집안일을 해준 것이 아닐까? 라고 어이없는 생각을 하던 운현은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헉!"

"흥흥~"

여성의 콧노래 소리, 그리고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들의 목소리. 그것에 운현은 기겁했다. 이제 만날 일 없다고 생각한 인간들이 있는 것을 본 운현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야! 너네 뭐야!?"

"운현님!"

그 소리의 주인공들은 바로 원석, 그리고 장천후. 마지막으로 미혜였다. 자신은 사둔 적도 없는 고풍스러운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는 그 둘과 앞치마를 두르고 생글생글 웃으며 요리를 하고 있는 미혜를 본 운현이 기겁하며 외치자 그들은 휙 고개를 돌린 후 그에게 달려갔다.

"어디 계셨습니까!!"

"약 주세요! 약!"

"운혀어어언!! 왜 사라졌던거야! 왜!"

성인 세명이 자신에게 달라붙는 모습에 운현은 기겁했다. 원석은 그동안 고생이 많았는지 얼굴이 많이 초췌해져 있었고 장천후는 다급하기 그지없어보였고 미혜의 예쁜 얼굴과 아름다운 눈은 곧 눈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에 당황한 운현은 자신을 꽉 끌어안고 미혜가 울먹거리자 낮게 신음한 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 음."

"왜... 왜 그랬어... 왜..."

"그 뭐냐. 음. 미안."

일단 지금 해야 할 말은 사과다. 괜히 떠들어봤자 시끄러운 일만 생길 것 같기에 운현은 미혜를 달래주며 생각했다. 어떻게 찾은 거지? 이들이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적어도 삼년 안에는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운현은 고작 1년만에 자신을 찾은 것에 당황하며 물었다.

"어떻게 찾았냐?"

"찾고자 하면 못찾을게 없죠. 가상현실 접속기 판매점이 지금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는데... 저희 직영점 뿐만 아니라 협력업체도 상당하거든요. 독점 포기하면서 설계도면을 좀 일찍 풀었습니다. 그거 풀면서 운현님의 사진을 걸고 이 사람 발견하면 포상금 주겠다고 하니까 금방 찾아지던데요?"

"...시발."

그냥 미국으로 떴어야 했던 건가. 운현은 자신을 끌어안고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잡은 채 엉엉 울고 있는 미혜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각 업체들이 가상현실 접속기를 만들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업계 탑은 성경그룹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기술전수와 함께 자신을 찾으려고 이정도까지 했다면 미국을 떴어도 어차피 결국은 잡힐 것이었다.

"미혜가 고생 많았습니다. 이 계획은 다 쟤가 세운거에요. 운현님 찾겠다고 진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일을 했으니까요. 칭찬해주세요."

"...칭찬이라."

인간의 집착. 무시할게 못된다. 운현은 이제 진정이 되었지만 자신의 손을 잡고 놓아 줄 생각을 하지 않는 미혜. 운현이 아예 튀지 못하게 문쪽에 자리를 잡은 장천후와 원석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잠수를 탔는데 인력만으로 이렇게 자신을 찾게 될 줄이야. 이럴 것 같아서 성경 그룹과 관련된 곳은 가지도 않은 것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삶을 집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고 버텨냈었다. 한달에 한번 나오면 많이 나왔다고 할 정도로 바깥 출입을 자제하여 절대 그들이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운현은 자신의 안이함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설마 2년간의 독점을 포기하고 다른 곳에 손을 뻗었을 줄이야. 원석이 막대한 이익을 포기할 줄은 몰랐던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쉰 후 물었다.

"혹시 거기도 너네 입김이 닿아 있냐?"

운현이 자기 주소를 적은 곳은 단 하나. 홈플러스 옆의 게임샵 이었다. 어쨌든 게임을 배달시켜야 하니 말이다. 아무리 조사를 해도 성경그룹과 관련이 없었던 곳이었기에 안심하고 있었던 운현이 떨떠름히 묻자 장천후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린 후 말했다.

"아. 거긴 제가 따로 만든 기획사와 관련된 곳이죠. 저도 운현님 엄청 찾았습니다. 아무래도 모델링을 하려면 미남 미녀들을 직접 만나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각 게임사들과도 꽤 연계가 되어 있거든요. 성경 그룹과는 별도로 제가 작게 세운 기획사와 연계하여 운현님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래서 내가 걸렸구만."

운현을 찾고 싶은 것은 원석이나 미혜 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장천후도 미혜나 원석 수준으로 시급했을 것이다. 힘잃은 주니어를 위해서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씨익 웃는 장천후를 보며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하자 원석은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왜 잠수 타신 겁니까?"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이제 내가 너희들과 할 일은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랑은 있잖습니까!"

"야야. 갖고 꺼져. 너만 아니었어도... 안걸릴 수 있었을텐데... 이제 얼굴 비치지 마라? 응? 그거면 너 죽을때까지 쓸테니까. 딴 사람 주지 말고. 이제 진짜 안녕이다. 한번만 더 내 앞에 나타나면 그 약 다 파기시켜버릴거니까 알아서 해라."

"이걸 왜 다른 사람한테 줍니까? 감사합니다!"

장천후를 죽일 듯 노려보며 운현은 그동안 만들어 놓은 블랙 오크의 피 앰플이 잔뜩 담긴 상자를 그에게 던져주었다. 그것을 받은 장천후가 세상을 다 얻은 얼굴로 씩 웃자 운현은 그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어차피 약 외에는 그에게 볼 일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던 장천후다. 그는 운현에게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를 하고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어서 아내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싶은 그가 나가자 운현은 원석을 보며 말했다.

"너와 나 사이에 계약은 끝났어."

"그럼 재계약 하시죠."

"이해가 안되네. 그래. 얘는 그렇다고 치자."

운현은 미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자신을 찾은 이유는 알 수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서 삶의 이유는 오로지 운현 뿐이니 말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 미혜가 필사적인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원석은? 원석은 자신이 원하던 것을 이룩했다. 성경 그룹을 손에 넣어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그가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너는 뭔데 나한테 이러냐? 뭐 또 필요한거 있냐?"

"흠... 모시고 싶습니다."

"왜? 어디다가 쓰려고? 나 없어도 돈 엄청 벌잖아. 뭐야 죽일 놈 있어? 그냥 죽여. 아니면 라티나 시키든가."

"뭐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그래도 마왕이 함께한다면 무서울게 없잖습니까. 듣자하니 미국과도 관련되신 것 같고."

"너 나 좋아하냐? 내가 아무리 매력적인 남자라고 하지만 그래도 내 인생에 BL은 없다."

운현이 떨떠름한 얼굴로 묻자 미혜는 휙 눈을 돌려 죽일 듯 원석을 바라보았다. 마치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씩씩거리는 그녀와 기분나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운현의 시선에 당황한 원석은 질색하며 외쳤다.

"무슨 소리하시는 겁니까!? 저도 여자가 좋거든요!?"

"근데 왜 나한테 이렇게 집착하는건데. 마왕 어쩌고는 둘째치자고. 뉴스나 신문은 자주 보는데 이제 네 위에 있을만한 사람은 없잖아. 세계 순위권 안에 드는 갑부라며."

"뭐 그렇긴 하죠."

지난 시간동안 독점을 하며 다른 업체들보다 가상현실 접속기 분야에서는 거의 탑급이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는데다가 운현이 준 설계도를 분석하고 동시에 스미스와 연계하여 타 기업보다 더욱 많은 기술을 보유했기에 미국 정부라 하여도 성경 그룹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것을 운현이 지적하자 원석은 무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왜?"

"음... 뭐랄까. 스릴? 그런게 없네요."

"스릴같은 소리하고 있네. 야. 가상현실 호러 모드나 해라."

"그거 몇번 했는데 이제 시큰둥하네요. 그리고 그런 가짜따위는 관심없습니다."

원석은 진지한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운현님. 당신이 원하는 끝이 무엇인지 보고 싶습니다."

"별 거 없고 너랑도 관련 없어."

애초에 이 세계와도 큰 상관이 없는 일이다. 운현이 무심한 얼굴로 말하자 원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말하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관련이 없다라..."

원석은 빙긋 웃은 후 입을 열었다.

"그래도 신뢰받는 부하 1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인생을 섭섭하게 해줄까? 왜 이렇게 귀찮게 하냐? 나 바뻐."

277====================

거래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허..."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손꼽히는 갑부가 별 이득도 없이 보필한다고 하는 것에 운현은 기가 막혔다. 제정신인가? 아무런 이득 없이 이런 짓을 한다고? 그가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보자 원석은 잠시 생각한 후 쓰게 웃었다.

"그리고 운현님이 없으면 재미가 없거든요."

"재미 찾을거면 그냥 얌전히 집에서 가상현실 게임이나 하렴. 그게 더 재밌을거니까. 이제 내가 할 일은..."

"재미를 찾는 일은 내가 하는 거죠. 진짜 운현님이 재미가 없어지면 그때는 제가 알아서 손 떼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정도면..."

"하... 이해가 안되는구만. 뭐 니 맘대로 해라. 다만 나 귀찮게 하지 말고."

어차피 나쁠 것은 없었다. 어찌되었든 운현은 원석에게 신경을 끄고 살 것이니 말이다. 저러다가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겠지. 거슬리게 하면 박살을 내면 된다. 운현은 원석에게서 시선을 돌린 후 자신의 옆에 있는 미혜를 보았다.

'문제는 얜데...'

아무리 봐도 원석은 1, 2년 안에 자신에게서 큰 관심을 끊을 것이다. 라티나를 붙여놨으니 경호 문제는 해결될 것이고 자신은 이제부터 가상현실 세계에서 단련을 해야 했다. 지식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사용해가며 그 숙련도와 노하우를 익히고, 또 사람들을 상대하며 그들과의 관계를 다지는 법을 익혀야 했다. 고로 게임 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 너 볼 일 다 봤으면 그냥 가라."

"또 도망가실겁니까?"

"가봤자 의미 없을 것 아냐. 안갈테니까 가라. 얘랑 얘기 좀 하게."

"흠. 알겠습니다."

어차피 도망쳐봤자 같은 방법을 쓰면 운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운현이 아예 사람이 없는 두메산골에 틀어박힌다면 모를까 그의 목적이 산에서 도닦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 원석은 안심을 하고 나가자 운현은 미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났는데 훨씬 어린 모습이 되어 있는 그녀를 바라보던 운현은 미혜가 자신의 얼굴을 잡고 키스하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말해둘게. 나 할 일 있어."

"알아."

"무슨 할 일인지도 들었어? 누구한테?"

"강원석에게 들었어. 너한테는 목표가 있다면서. 그것을 위해서 우리를 떠난 것이라면서. 전에 나한테도 말했잖아. 나 잃어도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응."

운현에게 이제 남은 것은 그것 뿐이다. 그 세계로 돌아가 그녀들을 구하는 것.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이렇게 움직여 온 운현이 담담히 말하자 미혜는 운현의 이마에 키스한 후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도와줄 수 없어?"

"없어."

그녀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운현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도 터치하지 않는 삶이었다. 그 세계에서 효율적이고 제대로 움직이기 위한 훈련과 공부만이 필요할 뿐. 운현이 단호하게 말하자 미혜는 눈물을 주륵 흘렸다.

"나... 버릴거야?"

"버린다기보다는 홀로서기를 하게 해주고 싶을 뿐이지."

"나... 너 없어지고 나서 많이 노력했어. 집안일도 배우고..."

"그래서?"

"내가 너의 옆에 있을게. 나는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그냥 네 곁에 있게만 해줘."

절박한 그녀의 말에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뇌를 너무 세게 걸었나? 그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볼을 긁적거린 후 말했다.

"내가 하려는 일은 다른 여자를 구하는 일이야. 그래도 내 곁에 있겠다는거야?"

"그건..."

그의 말에 미혜는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운현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를 위해서 움직인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그것이 어찌나 고통스러웠는지 가슴을 꽉 잡으며 신음했다.

"으... 상관없어."

"허..."

이 질투심 많은 미혜가 그것을 참아내겠다고? 운현은 그녀의 말에 쓰게 웃었다. 과연 가능할까? 운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그녀는 단호한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할 수 있어. 네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날 보지 않더라도 난 널 사랑할 수 있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 가능해."

담담히 말하는 미혜를 보며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능하다고?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잠수를 탄 순간부터 많은 사람들의 심리 분석을 하고 그들의 정신을 파악하며 가상현실이 생김으로서 사람들의 기대를 보고 하나의 정의를, 그리고 확신을 내릴 수 있었다.

인간은 날때부터 '악'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관능적 욕망과 살아남고자 하는 충동이 있고, 또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며 타인의 기회를 빼앗는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순자는 인간은 비록 악하지만 그 욕망을 교육과 교정을 통해 억누르며 살아와 본질을 감추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상의 세계가 생겨난 이후 사람들의 플레이 성향은 어떤가 조사를 해 본 결과를 통해 운현은 순자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부분을 한 후 결과적으로는 악 성향의 행동을 보인 것이다. 일반적인 사회에서는 할 수 없는 행동들. 만약 했다간 사회적으로 규탄받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무너져 내릴 법한 일들을 가상현실 이용자들은 가상의 세계에서 서슴없이 그것을 자행했다.

가상의 세계에서 돈이 없다고? 그렇다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 그들을 강간하고 빼앗는다. 아니, 돈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빼앗고 좋은 여자나 남자가 있으면 강간한다. 막대한 힘이 주어지면 결국 그들의 마지막은 대부분이 똑같았다.

그것을 보며 운현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파악해나갔다. 한꺼풀, 한꺼풀 벗겨나가면 인간은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악을 긍정하고 그것이 원하는대로 행동한다.

운현은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뭐가 나쁘단 말인가. 인간이 발전할 수 있는 것 역시 욕망이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악' 덕분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런 보답없이도 운현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미혜의 말을 운현은 순수하게 믿을 수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아무런 보답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압박에 처해지는 일이다. 운현이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에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할 수 있다고?

결국 그녀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 없다는 것에 절망하고 또 절망하여 끝내는 스스로 무너지든가, 아니면 자신의 사랑에 대한 보답을 받기 위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이다.

운현은 안타까운 눈으로 미혜를 바라보았다.

만약 그녀가 끝까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보답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을 하기 위해 스스로 고행을 자처하여 그것을 수행해나간다면...

그녀의 얼굴에서 다른 여인들의 얼굴이 보이자 운현은 차마 그녀를 계속 보지 못한 채 살며시 시선을 돌린 후 자조적인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보답받지 못할수도 있을텐데? 그래도 가능하겠어? 너 엄청 고통스러울거야. 내가 제대로 상대해주지 못할 수도 있고 그 짜증을 너에게 풀 수도 있어. 그런데도 하겠다고? 하지마. 널 위해서 말하는 거야.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져. 그냥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고 살아."

담담한 어조로 자신을 포기하라 말하는 운현을 똑바로 응시하던 미혜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포기하라고? 그를 포기한 순간 자신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안식처는 운현 뿐이다. 만약 운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은 그를 끝까지 사랑할 것이다. 그것을 다짐하며 미혜는 운현을 향해 말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널 사랑하고, 널 지킬거야."

"......"

그녀의 이글거리는 시선에 운현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그녀와 닮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 세계에서도 그녀들은 그랬다. 자신의 멍청함에, 이기심에, 한낱 감정의 변덕 때문에 운현이 그녀들을 외면했지만 그녀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위했고, 또 사랑했다.

미혜의 표정에서 그것을 느낀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괴로울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감수하겠다? 과연 미혜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해봐."

"헤헤... 그럼 앞으로 매주 주말마다 찾아올게."

"주말에 내가 없을 수도 있어. 와도 내가 제대로 너랑 뭔가 할 수 없을거야."

"그럼 밥 해놓고 청소해놓고 기다릴게. 그래도 사람인데 먹고는 살아야 하잖아? 너 하고 사는 거 보니까 네가 원하는 그 목표 이루기 전에 죽을 것 같은데. 맨날 라면만 먹고 있지? 아니면 빵만 먹든가. 그래서는 몸 다 버려요. 누나 말 들어."

운현의 허락을 받은 미혜의 얼굴은 밝기 그지 없었다. 지금은 그것만이라도 충분하다. 그에게 당장 사랑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옆에서 그를 도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미혜의 말에 운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처해서 가정부를 해주겠다는 데 굳이 말릴 필요는 없지. 자신 역시 불가능이라 할 수 있는 것에 도전하는 입장이다. 자신과 같은 처지라고 할 수 있는 미혜를 응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던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고마워."

"별 말씀을."

운현의 말에 미혜는 그를 끌어안은 후 그에게 키스했다.

"왜 그녀를 다시 받아주신거죠?"

이계로 자신을 소환하기 위한 그 신의 힘에 저항하는 것을 끝낸 운현이 붉어진 눈을 떴을 때 어느새 어둠 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티나는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여자가 필요한 것이라면 자신이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여자를 운현이 받아 준 것인가. 라티나의 질문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불가능에 도전하려는 모습이 가련하고 안타깝고, 또 나와 같아보여서."

"운명을 바꾸는 수라도를 걸으실 분이 자비를 베푸시는 겁니까?"

"이게 자비라고 생각하냐?"

라티나의 질문에 운현은 웃으며 되물었다. 그의 말대로. 어쩌면 미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렁 속에 몸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운현의 집념과 집착은 이미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정도까지 되었다. 그 집착을 한낱 인간인. 그것도 세뇌로 인해 운현을 사랑하게 된 미혜가 그것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결국은 희망고문에 불과한 것이다. 행복회로를 돌리며 언젠가 운현이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는, 보답받지 않을 사랑을 그녀는 시작해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만약 플랜 B대로 흘러간다면 모를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일에 대한 모든 것은 나의 통제 아래에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나를 통제하려고 하지 마라."

그의 싸늘한 말에 라티나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 그런 고통을 겪으시면서까지 이렇게 버티셔야 할 필요가 있으신 겁니까?"

운현이 행여나 자신을 놓고 그 세계로 가버릴까 걱정스러웠던 라티나는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던 운현은 그녀에게 손을 뻗었고 그녀는 망설이다가 운현의 품에 안겼다.

"네가 날 걱정하는 것은 잘 알고 있어. 그리고 그 세계로 갈때 널 버리고 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도 있다. 약속하지. 반드시 널 데리고 가겠다."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라티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오직 운현 외에는 보이지 않는 그 미소. 그것을 보며 운현은 손을 뻗었다. 운현의 손가락이 자신의 입술에 닿자 라티나는 홍조를 띄었다.

"돌아가서 원석을 서포트해. 아직 가상현실이 세상에 보급되는 것이 늦다. 너는 그것에 집중해라."

"알겠...습니다."

자신을 안아주는 대신, 그저 명령만을 내릴 뿐인 운현을 라티나는 아쉽다는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그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가 자신의 품에서 떠나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운현은 무덤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직 멀었어."

게임이 도착했다. 그의 손에 들어 온 것은 패키지 두개였다. 자신이 만든 짧은 가상현실 세계가 아닌, 인간이 스스로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낸 세계다. 이 세계가 어떤 형태일지는 운현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세계겠지.'

아름다운 여성들이 프린트된 패키지를 바라보며 운현은 그 뒷면을 보았다. 지금까지 인터넷에 꾸준히 올라오고 있는 문제인 가상현실 내에서 인간들이 난폭하고 잔혹해지는 것에 대한 경고를 하려는 듯 패키지에는 한줄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가상 세계 안의 자신은 또다른 자신입니다. 정상적인 플레이를 지향하도록 합시다.]

"큭큭..."

과거의 자신 역시 이것을 예상했겠지. 운현은 패키지에 적혀 있는 글귀를 보며 작게 키득거렸다. 결국 그 역시 자신과 같은 판단을 내렸고 이런 글귀가 적힐 것을 예상했던 것이기에 그리 말했을 것이다.

'너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또다른 너는 가능하다.'

수많은 가상의 세계를 겪어 성장하게 된다면. 그것이 과연 지금의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운현은 패키지를 뜯으며 생각한 후 디스크를 캡슐 안에 밀어 넣었다. 디스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캡슐에 게임이 설치되자 운현은 캡슐 안에 누우며 접속기를 착용했다.

"글쎄. 완성된 또다른 내가 과연 누굴까... 신일지, 악마일지... 아니면 그저 한명의 악에 물든 인간일지... 결과는 나와봐야 알겠지."

눈을 감은 운현은 진 삼국 연희무쌍이라는 화려한 글씨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가상의 세계 안으로 빠져들었다.

278====================

거래

"와씨! 이게 뭐야!"

접속 알람을 맞춰 놓았던 운현은 오후 11시 50분이 되자 캡슐에서 튕겨지듯 나오며 투덜거렸다. 뭐 이렇게 어려워? 이미 신의 힘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레벨 450인 운현에게 있어선 오히려 가상현실게임이 현실보다 더욱 어려웠다.

원소군의 부장으로 들어가 첫 전투에서 죽어버린 것이 벌써 일곱번째다. 어이없어하며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입에 물었다.

"더럽게 어렵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궁창인 현실을 잊기 위해 가상현실을 택하지만 운현은 오히려 가상현실이 더 시궁창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반은 커녕 십분의 일도 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뭘 어쩌라는 것인가. 담배를 입에 물고 궁시렁거리던 운현은 인터넷의 반응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만 이러는구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즐기기 위한 가상현실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특히 진 삼국 연희무쌍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운현이 기본으로 만들어 놓은 가상현실의 경우 한정된 AI를 가지고 있었다. 높은 사고는 커녕 단순하기 그지 없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지만 이 게임은 아예 작정하고 AI를 만든 것인지 실제 사람보다 더욱 사람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거기서 뒤통수를 칠 줄이야..."

병사들을 이끌고 돌진하던 운현이 죽은 이유는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서였다. 운현을 따르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고 탈주한 것이다. 필살기에 속하는 오의나 극오의가 있었지만 그걸 다 쓰고 그냥 죽어버렸던 기억을 떠올린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린 후 한숨을 내쉬었다.

"아예 초장부터 악당으로 움직여야겠구만..."

일단은 가상현실이고, 병사들의 비위를 맞춰주느라 알랑거렸던 것이 실패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운현은 자신의 플레이를 차분히 점검했다.

"큭...!"

그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또다시 고통이 찾아왔다. 이세계로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한 신의 부름. 그것에 저항하며 운현은 빠득 이를 갈았다.

"아직... 멀었다고."

하나의 세계조차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자신이다. 이런 상태에서 자신이 그 세계로 끌려들어가봤자 결국은 같은 일밖에 생기지 않을 것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상대해야 할 것이 운명이라는 거대한 적인 이상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여 나올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대처를 할 수 있어야 했다.

'심장마비 뿐만 아니야.'

자신이 손도 댈 수 없었던 심장마비같은 경우를 떠올리며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헤스티아와 필레는 심장마비로 죽었다.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운명이 그녀들을 그렇게 죽였던 것을 떠올리며 운현은 눈을 감았다.

'최대한 많은 상황을 경험한다. 그리고 가장 최적의 답을 구한다. 그리고 그것에 이어지는 결과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해.'

바제트의 죽음이 떠오른다. 안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이 가장 안심하고 있는 순간.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는 틈을 준 후 그 틈을 공략한 운명을 떠올리면 운현은 아직 자신이 멀었다고 생각했다.

"크하앗!! 씨발!!"

이 빌어먹을 고통은 벌써 수백번도 넘게 겪었는데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다. 운현이 이를 갈며 고통을 토해냈을 때 어둠 속에서 라티나가 걸어나왔다. 몰래 나온 것인지 검은색 점퍼와 후드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운현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조금만 더 힘내주시기 바랍니다..."

"아아. 그래야지..."

운현은 라티나의 푹신한 가슴에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그가 자신의 가슴에서 안정을 취하는 것을 보며 라티나는 사랑스럽다는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얼굴이 자신의 가슴을 찾듯 꼬물거리고 그의 손길이 자신의 탄력적인 둔부를 주무르기 시작하자 라티나는 작게 신음성을 내었다.

"으읏..."

"좋아. 그럼 다시 해볼까!?"

"......"

라티나는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빙긋 웃은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준 후 말했다.

"첫번째 세계를 끝내면 기념으로 안아주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제 좀 익숙해질만한데..."

첫번째 엔딩을 본 운현은 담배를 입에 물고 중얼거렸다. 한달이라는 시간. 남들은 이주에서 삼주 정도면 엔딩을 보는 게임을 한달이나 걸려서 겨우 끝낸 운현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하면 할 수록 위화감이 생기는군."

그 이유를 운현은 알고 있었다. 바로 리미터 때문이다. 과거 운현이 만든 초기형. 찬성이나 윤지가 했던 것처럼 일정치 이상의 감정의 변화가 생기면 그것을 막아주는 리미터가 존재하기 때문에 게임 내에서 무감정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운현은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에 접속했다.

"호오... 이것 보소?"

한달만에 많은 유저패치들이 등장했다. 역시 대한민국 잉여들은 대단하다. 오픈 소스로 가상현실 툴을 돌린 순간부터 이 인간들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다 싶을 정도의 패치를 만들어나갔는데 이번에도 또 그런 것이다. 물론 개발사의 경우 유저 패치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음성적으로 패치가 거래되고 있었다.

"패치 하나에 백만원이라..."

이 게임 가격만 해도 몇백만원인데 패치 하나에 백만원에 팔린다? 다른 패치들의 경우 만원에서 비싸봐야 십만원인데 대번에 그 가격을 확 높인 패치를 본 운현은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그 글을 클릭했다.

"Dr. K라..."

작성자의 이름을 본 운현은 그의 정보를 확인했다. 지금까지 패치를 만들었던 사람이 아니다. 접속일수도 십일정도고 카페 레벨도 1레벨에 불과했다.

"리미터 해제 패치를 만들었다 이거지... 이 미친 새끼. 이게 어떤 반응을 나올지 알면서도 이걸 만든건가?"

일단 이게 진짜라는 보장은 없었다. 리미터는 운현이 일차로 걸어 놓았고 거기에 개발사들까지 안전을 위해서 미친듯이 걸어 놓은 것이 리미터다. 각 개발사들 역시 가상현실의 위험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만든 게임으로 인해 중독자가 생기고, 그 중독자가 사고라도 쳤다간 기껏 만든 게임이 사장당할 수 있기에 덕지덕지 리미터를 붙여 놓은 것이다.

'이 패치가 모든 리미터를 해제하는 패치면 찬성이나 윤지같은 년놈들이 냅다 튀어나오겠군.'

현실과 완벽하게 같은 가상현실은 인간을 망가트린다. 그렇기에 일부러 리미터를 걸어 가상현실의 리얼함을 줄여 기본 가상현실에 포함시켰던 운현은 게시글의 설명을 차분히 읽어보았다.

"리미터를 해제할 수록 리얼하게 즐길 수 있지만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리미터 해제 후 게임 플레이시 심각한 후유증이 생길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라."

아예 그냥 다 해제하세요. 라고 쓰는게 나을 정도다. 인간은 자기가 당해보지 않으면 절대 공감하지 못한다. 어디 한번 큰 일이 터져야 그 위험성을 알지.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지 말라면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망이고 기본이다. 그것을 단 몇줄의 글만으로 자극시킨 것에 운현은 리미터 해제시 나올 결과와 위험성 대해 댓글을 달려다가 히죽 웃었다.

'이 정신나간 놈의 실력이 어떻게 되는지 볼까?'

고작 100만원에 불과했다. 운현은 카페에서 현금 대신 사용되는 포인트를 그에게 보냈다. 잠시 후 그의 메일로 하나의 패치 파일아 날아왔다. 그것을 캡슐에 적용시킨 후 캡슐 내의 코드를 살펴 본 운현은 놀랍게도 자신이 건 리미터까지 모두 해제할 수 있는 패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와... 이놈도 천재 부륜가."

아니면 싸이코든가. 가상현실의 리미터를 해제할 수 있으려면 인간의 정신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알아야 한다. 자신이 공개한 모든 연구자료를 읽고 실험 데이터를 납득한 후 그것을 이해해야만 손을 댈 수 있는 부분을 여유롭게 손을 댄 것에 감탄하며 운현은 그에게 쪽지를 보냈다.

[놀랍군요.]

과연 믿을 것인가? 운현은 잠시 후 쪽지가 날아오자 그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그동안 카페에 많은 글을 올렸었고 많은 실험 데이터와 패치를 올렸던 운현은 기다렸다는 듯 답장을 보낸 그가 음성채팅을 요청하자 그것을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레드님. 저는 김박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라젠카라고 하구요. 그동안 레드님께서 올리신 패치나 코드들은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이렇게 연락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김박사님이 올리신 패치는 잘 봤습니다. 상당하더군요."

[레드님 정도 되는 분이 인정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동안 노력의 보람이 있는 것 같군요.]

변조된 두개의 목소리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동안 자신이 올린 자료로 운현이 보통 놈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 역시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한시간 정도 그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운현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의 가상현실은 문제가 있습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리미터가 걸려 있어서 리얼감이 떨어지죠. 지금이야 좋다고 하지만 향후 게임들이 나온다면 그것은 곧 괴리감으로 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리미터 해제 패치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안정성은 추가했습니다만... 실제 실험을 해보지 못해서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군요. 하하하하!]

"그 결과로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십니까?"

운현의 말에 김박사는 깔깔 웃더니 느긋한 어조로 답했다.

[제가 알바는 아니죠. 저는 칼날 위를 걸으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길이 있다고 제시를 해줬을 뿐이죠. 선택은 스스로 하는 겁니다.]

'이놈도 제정신은 아니군.'

느긋하게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놈은 그것이 어떤 반응을 보일 줄 예상하면서도 그 실제 결과가 어찌 될지 오히려 궁금해하고 있었다. 모든 리미터를 해제한 상태에서 최소한의 보안장치만 가지고 인간이 어떻게 변할 수 있을지. 그것이 궁금해 이런 패치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운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가 만든 패치도 보시죠. 저는 좀 인간의 성적 욕망을 긍정하는 편이라서 말이죠.]

라젠카가 자신에게 보낸 패치를 확인한 운현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놈도 진짜 보통 놈은 아니었다. 패치의 내용은 SM을 위한 변태들이 사용할만한 물품들. 거기에 촉수괴물 소환스킬까지. 진 삼국 연희무쌍에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섹스 전용 아이템과 스킬들을 떡하니 추가시켜 놓은 것에 운현은 할 말을 잃어 입을 다물었다.

[어때요? 재밌겠죠? 아무래도 전 섹스가 너무 단조로운 것 같더라구요.]

"하하하..."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자신의 연구 결과가 어떤 일을 내든 말든 관심없는 실험 주의자인. 매드 사이언티스트라고 불려도 시원찮을 김박사.

어떻게 구현했는지 감도 안 잡히는, 별 희안한 변태 물품부터 시작해서 촉수괴물까지 만들어낸 변태 사이언티스트 라젠카.

이 둘과 만나게 된 것에 운현은 기가 막혔다.

'하긴... 나도 제정신은 아니지.'

운현은 이 둘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패치를 차분히 본 운현은 피식 웃은 후 천천히 말했다.

"이거... 굉장하군요. 대단해요."

[하하하... 별말씀을.]

[이거 부끄럽네요.]

"그래서 말인데... 저희 팀 하나 만들지 않으시겠습니까?"

[팀이요?]

"네."

인간이 발전을 하려면 자극이 필요하다. 솔직히 운현은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느꼈지만 그래도 이정도라면 가상현실용 게임으로는 수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운현에게 있어서 수작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완전한 리얼. 그리고 진짜와 같은 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성을 가질 수 있는 것. 그런 세계가 필요했다.

"가상현실을 만들어내는 이들에게 강심제가 되어 줄... 그럼 팀. 어떻습니까?"

[강심제라... 재밌겠네요. 근데 연구비용은 어떻게 하실거죠? 가난한 대학원생인지라 먹고 살 돈이 없는데...]

[아무래도 저는 본업이 다른 것인지라...]

"본업이 뭔데요?"

[성인용품점 사장이요. 괜찮은 오나홀 하나 있는데 보내드릴까요? 요새 가상현실때문에 재고가 쌓여서... 아예 이쪽으로 나가볼까 하고 독학했습니다.]

생각치도 못한 답변이 나오자 운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떨떠름히 답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음... 자금같은 것은 저희가 만들어낸 밝은 쪽의 패치들로 해결하죠. 그리고 가상현실 게임을 해킹하고 부숴버리면서..."

운현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패키지 상자를 우그러트리며 말했다.

"그들이 더 좋은 세계를 만들게 합시다."

279====================

거래

"하나의 세계가 끝났다. 좀 어중간하기는 하지만 말이지."

운현은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타임 랙부터 시작해서 전체적인 밸런스, 사람들의 행동거지. 그리고 그 안에서 적응해야 하는 자신까지. 예상했던 것보다 상당부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첫 엔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부분은 영.

"축하드립니다. 이제 돌아가시는 겁니까?"

"그럴리가."

고작 하나의 세계를 끝낸 것만으로 돌아간다? 차라리 안하는 것만 못하다. 운현이 고개를 가로젓자 라티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운현님. 운현님께선..."

"내 걱정은 하지 마라. 그보다."

운현은 라티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가 하나의 세계를 끝낸 후 자신을 안아주기로 했던 것을 떠올린 라티나는 그의 손짓에 살며시 얼굴을 붉히고 그에게 다가갔다. 늘상 입고 다니는 정장이 아닌 검은색 점퍼를 벗은 그녀는 찰싹 달라붙는 트레이닝 복으로 육감적인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예상한 건가?"

"....."

운현은 풍만한 가슴을 가리고 있는 타이트한 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에 라티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살며시 고개만 끄덕였다. 속옷따위 입지 않고 있었기에 티 너머로 긴장과 기대로 딱딱히 굳은 유두가 드러난 상태였다.

"흐음. 한번 더 할까."

"운현님..."

무덤덤한 그의 목소리에 라티나의 목소리가 젖었다. 자신을 놀리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일일히 이렇게 반응하고 만다. 아마 창조자인 아르토리우스의 영향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몸이 안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농담이니 그렇게 신경쓰지마라."

"짖궂으시네요."

"뭐, 예전처럼 등신같이 굴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지."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 위에 올린 운현은 달콤한 라티나의 향기를 마음껏 즐겼다. 진 삼국 연희무쌍 내에서 많은 여인들을 안았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역시 리미터가 걸려 있는 탓에 모든 부분에서 위화감은 확실히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오래간만에 실제로 하는 기분이구만."

라티나의 긴 머리를 쓰다듬은 운현은 그녀의 예쁜 얼굴을 당겼다. 그가 자신의 입술을 원한다는 것을 눈치챈 라티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 댄 운현은 능숙하게 혀를 움직여 그녀의 입 안을 마구 범했다.

"츄릅...쭙..."

음란하고 타락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녀의 탱글거리는 가슴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그녀와 키스를 나눈 운현은 천천히 입술을 떼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잔뜩 기대와 흥분으로 달아 올라 있는 라티나의 미모를 보며 그는 피식 웃었다.

"훗."

"왜, 왜 그러세요?"

"아니... 너랑 키스를 하는게 처음은 아닌데 굉장히 익숙한 기분인데. 아니면 다른 놈이랑 한건가?"

"그럴리가요."

운현이 웃으며 말하자 라티나는 정색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남자라니. 건드리는 것 조차도 싫다. 그녀가 미모를 딱딱히 굳히며 싸늘히 말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어."

"아닙니다. 저는... 읍?"

운현은 다시 라티나의 입술을 범했다. 게걸스럽게 자신의 타액을 빨아들이고 입 안과 혀를 농락하는 그의 스킬에 라티나는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그의 손길은 계속해서 자신의 가슴을 터트릴 듯 주무르고 있었다. 아프다기보다는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몸 여기저기에 쾌감이 증폭되어져 가는 느낌을 받은 그녀가 탄성을 내지르며 살며시 고개를 돌리자 운현은 그녀의 갸름한 턱을 잡았다.

"왜 피하냐. 응??"

"그, 그게 조금 부끄러워서..."

"위신체에게 그런 감각이 있는건가?"

"위신체라고 해서 사람과 다른 것은 아닙니다."

"그래?"

"읏..."

라티나의 입술에 짧게 키스하고 운현은 본격적으로 그녀의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길고 깨끗한 목을 핥으며 깨물고, 쪽쪽 빨아 키스마크를 남긴 그는 딱 달라붙는 그녀의 티셔츠를 벗겼다. 운현이 옷을 벗기기 쉽게 살짝살짝 몸을 움직여 준 라티나가 수줍은 듯 고개를 돌리자 운현은 그녀의 몸을 보며 피식 웃었다.

"꽤나 예쁘구만."

남성의 이상적인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몸이 이런 모습일까?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군살하나 찾아보기 힘든 복부와 허리까지. 달빛에 비춰진 그녀의 약간 까무잡잡한 몸을 바라보던 운현은 연분홍빛 유륜이 아플 정도로 딱딱히 서 있는 것에 웃으며 그것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보았다.

"하읏...!"

유두를 조금 자극한 것만으로도 꽤나 쾌감을 받은 모양이다. 라티나는 달콤한 비음을 터트리며 운현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비릿하게 웃은 그는 그녀의 물풍선같은 커다란 가슴을 쓰윽 주무르고 그것을 들어 쪽쪽 핥기 시작했다.

"흐으.... 읏.."

운현의 혀가 가슴을 자극할 때마다 라티나는 미칠 것 같았다. 타오르는 듯한 느낌에 빠진 그녀가 고개를 비틀며 연신 탄성을 내질렀을 때 운현은 그녀의 몸을 잡고 빙글 돌렸다.

"운현...님?"

"아. 이렇게도 해보고 싶어서 말이지."

그가 자신의 등을 잡자 라티나는 움찔하며 자신의 다리 사이를 보았다. 헐렁한 반바지 츄리닝의 앞섬이 불룩 튀어나와 자신의 고간을 톡톡 건드리는 것에 그녀는 얼굴을 붉힌 후 그의 바지 사이로 손을 넣었다.

"뜨거워..."

"좋구만."

남은 긴장돼 죽겠는데 태평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라티나는 운현을 살짝 노려 본 후 손으로 감싸쥔 그의 양물을 위 아래로 흝었다.

"쪽... 핥짝."

"히잇...!?"

분명 자신이 더 자극적인 부분을 건드리고 있는데? 라티나는 운현의 손이 뒤에서 양 가슴을 주무르고 그의 혀가 목덜미를 핥는 것에 움찔움찔 놀랬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웃으며 그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뭐하는거야."

"죄, 죄송해요."

"흐음... 이대로는 힘든가?"

운현은 라티나를 내려놓고 바지를 벗었다. 크게 발기되어 꺼떡거리는 그의 양물을 본 라티나는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핥아라."

"네에..."

양물을 보는 것도, 그리고 그것을 핥는 것도 처음이지만 라티나는 왠지 모르게 자신이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몸에 들어 온 서큐버스 퀸의 혼 때문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라티나는 운현의 커다란 양물을 한 입에 머금었다.

"쪼옥...핥짝...쪽..."

처음치고는 정말 능숙한 혀놀림이다. 정열적으로 펠라치오를 하며 목구멍으로 그의 남성 끝을 자극하고 혀를 연신 움직이던 그녀는 쌉싸름한 쿠퍼액이 입 안에 맴돌자 그것을 꿀꺽 삼킨 후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남성을 보았다.

"영차..."

커다란 가슴 사이에 그것을 끼우고 양 팔로 꾹 누르며 위 아래로 비비던 그녀는 가슴골 위로 튀어나온 그의 양물의 머리부분을 혀로 자극해나갔다. 달빛을 받으며 자신의 양물을 자극해나가는 라티나의 모습은 비주얼적으로 보아도 환상적이라 생각될 정도로 아름답고, 또 음란했다.

'흠.'

하지만 운현은 그녀의 모습에 흥분되기는 커녕 오히려 점점 냉정해져갔다. 육체 자체가 주는 쾌감은 좋았지만 그게 정신적인 교감따위는 전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라티나 역시 눈치채고 있는 듯 싶었다.

"운현님..."

"아아. 됐어. 하던거나 마저 해."

"...네."

운현이 자신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 볼 뿐, 애정따위는 조금도 담지 않은 것에 라티나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꾹 참았다. 그저 운현이 자신을 성욕처리를 위한 도구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기분에도 그녀는 기분나빠하기보다는 우울할 뿐 이었다.

"핥짝...쪽..."

'이런 반응도 넣을 수 있겠군.'

라티나가 자신을 정성스레 애무하는 것을 보며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그녀가 자신의 양물을 애무하자 운현은 허리 끝에서 사정감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음. 이제 쌀 것 같은데."

"아... 네."

그의 말에 가슴을 움직이던 손을 멈춘 라티나는 그의 양물을 입에 머금고 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술을 최대한 붙여 입 안을 진공상태로 만들고 혀로 자극해나가며 운현의 남성을 자극하던 그녀는 입 안에서 그의 남성이 꿈틀거리자 사정을 예감했다.

"푸흡... 웃."

입안 가득 끈적하고 뜨거운, 수컷의 정액이 쏟아졌다. 그것을 입 안에 머금은 채 그의 남성을 끝까지 자극해 정액을 모두 빼낸 라티나는 천천히 운현의 남성을 입 안에서 빼내고 입속에 남은 정액을 오물거리다가 꿀꺽 삼켰다.

"뭐하러 그런 걸 삼키냐?"

"운현님 것이라서..."

"하겠다면 딱히 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만... 뭐 좋아. 이제 본격적으로 할 차례인가."

운현이 자신을 일으켜 세우자 라티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양물을 애무하고, 아까 전 운현이 자신을 애무해 줄 때 꽤나 느낀 흔적이 보이는 것을 직감한 그녀는 운현이 자신의 트레이닝복 가운데 부분의 흥건함을 빤히 바라보자 더더욱 흥분했다.

"어휴... 위신체가 아니라 그냥 변태네."

"아, 아니에요... 그...런거."

"아니라고?"

"으읏...!"

요가복 수준으로 찰싹 달라붙어 있는 트레이닝복의 축축한 가운데 부분을 손가락으로 긁어낸 운현은 도톰한 계곡이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흠뻑 젖은 것을 보며 라티나를 향해 능글맞은 어조로 말했다. 그것이 상당히 부끄러웠는지 라티나는 눈을 감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처럼이니 모두 벗기는 것보다는..."

"찌직!"

"운현님!?"

"어차피 옷은 여기 많으니까 그거 입고 가라고."

"...많다고 하셔봤자 다 남자 옷이잖아요."

"아니면 벗고 가든가."

"......."

라티나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던 라티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숙였다. 운현의 손에 의해 가랑이 사이는 완전히 찢어져 있었다. 속옷따위는 입지 않은 상태였던 그녀는 자신의 계곡에서 촉촉한 애액이 방울져 떨어지는 것을 보고 운현에게 말했다.

"...일단 이대로 갈테니까..."

"헤에. 그 꼴 하고 가는 것을 보고 싶은데."

"절 놀리시는게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라티나가 울먹거리며 말하자 운현은 킬킬 웃었다. 그런 그를 노려보던 라티나는 운현을 꽉 끌어안은 후 그의 남성을 잡았다.

"자꾸 그렇게 놀리시면 저 안나갈거에요."

"안나가면 쫓아내주지."

"흐읏!?"

"무섭다고 앵앵거릴 정도로 박아줄거니까 말야."

"읏....!? 으윽...!!"

운현의 양물이 살을 가르며 단번에 끝까지 파고들자 라티나는 한번에 절정에 올랐다. 그녀가 긴 혀를 빼물고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본 운현은 그녀의 얇은 허리를 꽉 끌어 안아 누르며 키스했다.

"후룹...쪼옥...핥짝..쪽..."

"하으...으아으..."

멍청한 얼굴로 허우적거리는 라티나를 꽉 잡은 운현은 그녀의 눈에 촛점이 돌아올때까지 기다렸다. 맑은 눈동자에 조금씩 빛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운현은 그녀의 탄력적인 둔부를 주무르며 말했다.

"어때?"

"하...으으... 모, 모르겠..."

"그래?"

운현은 빙긋 웃은 후 라티나의 작은 귓볼을 깨물었다.

"그럼 알 때까지 해주는 수 밖에."

"히익...!?"

"하윽! 윽...으읏...!! 너무... 너무 세게..."

라티나는 이제 반응조차 하지 못하며 그저 운현이 허리를 움직이는 것을 받아들기만 할 뿐 이었다. 비정상적일 정도의 쾌감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긴 다리를 양 손으로 꽉 잡은 채 허리를 흠들던 운현은 그녀의 계곡이 또다시 뜨거워지며 양물을 꽉 깨물자 미뤄두었던 사정감을 배출시켰다.

"하윽! 으윽...!"

배 안쪽이 뜨거워질 정도의 농축된 정액이 안으로 파고들자 라티나는 혀를 축 내민 채 신음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운현은 천천히 자신의 남성을 빼낸 후 그녀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멍한 얼굴로 운현의 남성을 보던 라티나는 힘겹게 그의 양물을 천천히 핥았고 그녀를 보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이래도 안갈래?"

"...네에... 조, 좋아여어..."

"허... 내가 널 얕봤구나."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아예 끝장을 보려고 했는데 라티나가 의외로 잘 버틴다. 이제 몇번만 더 하면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 될 것 같았던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을 하다가 인벤토리에 있는 미믹맨 복장을 꺼내 그녀에게 주고 말했다.

"너무 많이 하는 것도 몸에 안좋으니까 다음 세계를 끝낼때까지 참아."

"우우..."

좀 더 많은 쾌감을 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운현을 방해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라티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운현은 의자에 앉아 라티나가 샤워실로 향하는 것을 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현자의 시간은 당분간 멈춰놔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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