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40)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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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운현아... 하으응..."

그녀와 함께 윤지의 방에 들어 온 운현은 그녀와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타액을 게걸스럽게 탐하며 자신의 타액을 넣는 윤지를 향해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쉰 후 인벤토리에서 전기충격봉을 꺼내었다.

"운현아... 나 더 이상은..."

"파지직!"

"......"

전기 충격 봉 한방에 윤지가 기절하자 운현은 그녀를 향해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청순하고 매력적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더 이상 그녀에게서는 조금의 성욕도 들지 않았다.

"현자의 시간도 아닌데 말이지... 하긴. 뭐 할 생각도 없었으니 말야."

윤지의 방과 가방을 뒤진 운현은 그것을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윤지가 어떤 사후피임약을 쓰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바꿔치기를 할 때 안전하게 그녀를 엿먹일 수 있지. 그 외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챙긴 운현은 쓰러진 윤지를 침대 위에 눕힌 후 고민했다.

"아 진짜 하기 싫다."

솔직히 말하자면 건드리는 것 자체도 싫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역시 그녀에게 저항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던 운현은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젠장. 어쩔 수 없지."

윤지의 옷을 모두 벗긴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블랙 오크의 피를 잔에 따라 한모금 마셨다. 아무리 봐도 성욕이 들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블랙 오크의 피 한잔으로도 성욕이 들지 않자 운현은 한잔 더 마셨고 그제서야 양물에서 감각이 솟았다.

"하... 별 짓을 다하는구만. 환장하겠군."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쉰 후 양물을 잡고 손을 움직였다. 한참을 자위를 하고 나서야 간신히 정액을 싸낸 그는 그 정액을 바늘을 뺀 주사기로 빨아들인 후 윤지의 계곡 안에 모두 넣었다.

"이정도면 되려나..."

사실 이걸로 임신을 하든 말든 관심은 없었다. 어차피 이 여자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싶었을 뿐이다. 물론 자신의 절륜한 정력으로 상대해준다면 그녀의 흥분은 모두 가실 것이다. 하지만 윤지와 하고 싶기는 커녕 손가락 하나 닿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던 운현은 이정도면 됐다 싶어 윤지를 향해 그레이터 힐을 걸었다.

"으으음..."

그레이터 힐 덕분에 기절에서 깨어난 윤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운현과 자신이 옷을 벗고 있는 것에 윤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운현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유, 윤지야. 괜찮아?"

"...나 왜..."

"너... 너 아까 하다가... 기절했잖아."

"내가?"

"응. 진짜 괜찮은거야? 그렇게 신음했는데..."

주르륵 흘러내려오는 하얀 정액을 보며 윤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한 것 같은데 기억이 안난다. 몸에 흥분은 그대로고 운현의 양물이 점점 힘을 잃는 것을 본 윤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이새끼는 안돼...'

분명 한번 한 것 같은데 전혀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우물쭈물해하며 부끄러워하는 듯 보이는 그를 몰래 한심하게 바라보던 윤지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운현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운현아... 이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알았지?"

"으, 으응... 근데... 이제 우리 사귀는거야?"

"음... 비밀연애? 후후훗~"

운현의 볼에 키스해 준 윤지는 살며시 이불을 들어 자신의 몸을 가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헤벌레 하며 웃었고 윤지는 운현이 자신에게 다가오려 하자 살며시 손을 들었다.

"운현아... 나도 너랑 해서 되게 좋은데... 지, 지금은 좀 힘들 것 같아. 네거 너무 커서 아파..."

아프기는 커녕 들어 온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윤지는 운현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말을 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그녀의 말에 운현은 어수룩하게 웃으며 우쭐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내거가 크긴 하지... 그럼... 윤지야. 나 너..."

말을 하려던 운현은 입을 다물었다.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 그래야 저년을 안심시킬 수 있다. 하지만... 잠시. 하지만 운현에게는 굉장히 긴 시간이었다.

"..사랑해."

"응. 나도... 다음에 또 하자... 너랑 해서 정말 좋았어. 후후후... 역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는게 제일인 것 같아..."

운현이 부끄러워서 머뭇거린 것이라 생각한 윤지는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운현은 후다닥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는 것을 보며 윤지는 얼굴에 짓고 있던 웃음을 지우고 한숨을 내쉰 후 자신의 계곡을 만지작거렸다.

"우웩!!"

구역질이 난다. 다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아닌, 저딴 쓰레기같은 년에게 사랑한다는 말까지 해야 하다니. 필요했기에 한 것이지만 그 역겨움은 참을 수 없었다.

"하아..."

인벤토리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입에 물고 피기 시작한 그는 벽에 기댄 채 피식 웃었다.

"하긴. 이정도로 힘들어해서는 안되지..."

앞으로 가짜의 세계를 겪으면서 얼마든지 거짓을 말하고, 사기를 치고. 남을 엿먹여가며 강해져야 했다. 그런 자신이 되어야 운명과 제대로 싸울 수 있었다. 운명을 상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만 했다. 그렇다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어야 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한다 말하고,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이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죽일 수 있어야 했다. 그 와중에 누군가를 짓밟고, 속이고는 일은 숨 쉬듯이 당연해야 할 것이다.

'그게 아니면 구할 수 없어...'

어리숙하고 순진하고, 타인에게 이끌려다니느라 운명을 신경쓰지 못했다. 결국 그런 자신이기에 그들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운현은 비록 모든 것이 계획이었다고는 하나 그녀들이 모두 죽어버렸다는 것에 아직도 고통스러웠다.

"난 강해진다."

담배 연기가 폐를 쿡쿡 찌르는 것을 느끼며 운현은 싸늘히 중얼거리고 녹음기의 녹음된 내용을 들었다. 윤지와 마지막에 나눈 대화가 제대로 녹음되어 있는 것에 운현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 첫번째는 바로 너다.'

"하루만에 구하다니. 대단하네."

학교가 끝나고 야자를 짼 운현은 지금 살고 있는 집 근처에 마련된 단독주택을 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원석이 하루만에 마련해 준 집을 천천히 둘러 본 그가 웃으며 말하자 원석은 조심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으신지..."

"이정도면 충분하지."

지하실에 내려가 본 운현은 넓은 지하실을 보고 히죽 웃었다. 이정도면 매우 만족이다. 전기와 가스같은 것은 내일 모든 것이 마련된다고 했으니 남은 것은 작업뿐이다.

"그...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글쎄. 알고 싶어?"

히죽 웃은 운현이 묻자 원석은 움찔했다. 그는 붕붕 고개를 저었다. 저자는 악마고 마왕이다. 괜히 일관계 이상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던 그가 뒤로 물러나자 운현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너도 나중에 함께 해야 할 일이야."

"위험한 일입니까?"

"위험... 뭐 위험할 수도 있겠지. 왜. 싫어?"

"그건..."

싫다고 말하면 지금 위험해 질 것 같았다. 그가 대답을 망설이자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단검을 잡고 그의 가슴에 톡톡 쳤다.

"싫으면 지금이라도 말해."

"싫...지 않습니다."

그의 웃는 얼굴에 하마터면 싫다고 말할 뻔 했다. 그랬다간 저 단검이 자신의 심장에 틀어밖힐 것을 예상한 원석이 입을 다물자 운현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다음 일을 하자고."

"언제까지... 이러는 겁니까?"

"언제까지고 자시고 우리의 거래가 끝날때까지? 내가 할 일을 마치려면 네 도움이 무척이나 필요하거든. 도와줄 거지?"

"....."

똥밟았다 생각한 원석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런 놈과 엮이게 된 것일까. 주제넘는 거래를 제안한 과거의 자신을 한대 치고 싶어 진 원석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자 운현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잘 알고 있는 변호사나 소개시켜줘."

"변호사... 말씀이십니까? 그건 왜..."

"아아. 이제부터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거든."

앞으로의 일을 떠올린 운현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에 원석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이럴수가... 왜? 왜?"

안에 싼 이후에는 반드시 사후피임약은 확실히 먹었다. 그런데 왜...? 생리때가 지나도 생리가 안오는 것에 이상해하며 임신테스트기로 확인을 해 본 윤지는 선명하게 그어져 있는 두줄에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이 안에 허락한 것은 찬성 뿐이다. 운현 때는 하다가 정신을 놔버려서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안에 하얀 정액같은 것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운현의 정액인지 알 수 없었던 그녀는 불안감에 엄지손톱을 아득아득 씹었다.

"어쩌지... 어쩌지...?"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그래. 찬성이 책임져주기로 했잖아. 그렇게 안에다가 싸질렀으니 같이 생각이라도 해주겠지. 윤지는 벌떡 일어나 찬성의 집으로 향했다.

"뭐?"

"나...이. 임신한 것 같아. 어떡해? 어떡해... 찬성아..."

그렇게 발정난 개새끼처럼 달려들더니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구만. 찬성은 혼란스러웠다. 분명 그때 콘돔을 끼지 않고 한 이후로 꾸준히 그냥 했었다. 하지만 사후피임약은 잘 먹었는데? 그런데도 임신을 한 것인가. 찬성이 혼란스러워하자 윤지는 그의 팔을 꼭 잡으며 다급히 말했다.

"어떡해... 어떡해..."

두렵다. 그동안 아무 생각없이 쾌락만 탐하던 자신에게 내려진 벌일까? 윤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주륵 흐르는 것을 보며 찬성은 이를 갈았다.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하래!?"

"네가 싼거잖아!! 너 밖에 없다고!!"

"그걸 어떻게 믿어."

"뭐...?"

찬성은 피식 웃었다. 그의 말에 윤지는 당황하며 그를 보았다. 불안감. 설마 하는 마음. 그녀가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찬성은 유들유들한 어조로 말했다.

"너 걸레잖아. 나 말고 딴새끼랑 했는지 어떻게 알아. 그러고보니 저번에 너 엄청 발정났을 때 그건 어떻게 해결했냐?"

"그, 그건... 그냥 참았어. 참았다고!"

"참아? 하이고~ 개가 똥을 끊지. 네가? 잘도 그러겠다."

"아니라고! 난 다른 사람과 한 적 없어!"

"그게 사실이야? 근데 말이지. 저번에 이런게 나한테 왔는데 말이지."

찬성은 품에서 꺼낸 사진 한장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자신이 운현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 두장의 사진을 본 윤지가 부들부들 떨자 찬성은 피식 웃었다.

"하긴... 그렇게 안달난것처럼 날뛰더니 쉽게 가라앉지 않았겠지. 그래서. 운현새끼랑 한거냐? 뭐 그건 상관없는데 네가 운현이랑 생으로 했는지 콘돔끼고 한건지 내가 어떻게 믿냐?"

"아, 아니야! 아니라고!!"

악을 쓰듯 말하는 그녀를 비웃으며 찬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너 못믿어. 평소 하는 꼴을 생각해야지. 정액에 미친 갈보년 주제에."

"너... 너 개새끼...!!"

찬성의 이죽거림에 윤지는 부들부들 몸을 떨다가 손을 들었다. 그녀가 자신의 뺨을 때리려는 것을 가볍게 막은 찬성은 윤지를 노려보며 싸늘히 말했다.

"당장 내 눈 앞에서 꺼져. 썅년아."

"너 진짜... 쓰레기구나. 개새끼. 내가 사람을 잘못봤네."

"에이~ 쓰레기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걸레년아."

"닥쳐! 개새끼야!!"

분을 참지 못한 윤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몸을 휙 돌리고 뛰어갔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찬성은 입맛을 다셨다.

"아쉽네. 몸은 좋은 년이었는데."

찬성은 윤지의 먹음직스러운 몸을 떠올렸다. 윤지만큼 색골인 여고생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뭐, 요새 너무 달라붙기도 했고 그것 때문에 다른 섹파들과 만나지 못했던 찬성은 잘 됐다 싶었다.

"어. 은정 누나. 난데. 응. 응. 오늘 만날까? 후후후... 아주 죽여줄게."

곧장 휴대폰을 꺼내 다른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은 찬성이 집으로 들어가자 운현은 녹음기를 껐다. 하이딩을 건 상태에서 그들의 대화를 모두 녹음한 운현은 작게 키득거렸다.

"참... 사람이란게 단순하구만..."

윤지의 방에 있는, 그리고 그녀가 가지고 다니는 사후 피임약을 모두 비슷한 색의 다른 약으로 바꿔놓았던 운현은 빙긋 웃었다. 한번 한 놈이 뭐가 두렵겠는가. 사후 피임약만 믿고 꾸준히 윤지의 안에 싸질렀고 윤지는 생각없이 그것을 받아 준 대가를 치루게 된 것이다.

"그걸 받으면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은 예상했지만 이렇게 너무 예상대로 흘러갈 줄이야. 쯧쯧. 단순하 새끼."

윤지와 운현이 함께 있었던 사진은 당연하겠지만 운현이 찬성에게 보낸 것이었다. 처음에 그것을 받은 찬성이 분노하며 화를 내던 때를 떠올린 그는 빠르게 태세를 바꿔버린 그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정말 단순하다. 저래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련지.

"친구로서 그런 거는 좀 교정해줘야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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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윤지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고 일주일이 지났다. 거의 정서불안이 되어버린 그녀가 매일매일 흠칫 놀라는 것을 구경하며 속으로 비웃던 운현은 야간 자율학습까지 마친 후 집에 돌아오자 집에서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여자와 남자가 악을 쓰는 소리. 아버지가 고함치는 소리.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 그것을 들으며 운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집에서 무슨 일인가 싶어 구경나온 사람들이 꽤 있다.

'때가 됐군.'

궁지에 몰린 윤지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타락시키는 것. 자신에게 강간 누명을 씌우려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도 지겨웠는데 잘됐군.'

운현은 느긋한 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난장판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것 같은 윤지의 아버지는 운현을 보자마자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이 개 강간범 새끼야!! 네가 내 딸을 이렇게 만들어!?"

"아이고! 그만해요!"

"흑흑흑..."

가증스럽게도 윤지는 그저 자신이 당한 것처럼 흐느끼고 있었다. 참 표정관리부터 시작해서 연기까지. 끝내준다. 저런 것은 정말 보고 배워야겠다 생각하며 운현은 윤지의 아버지에게 외쳤다.

"뭐, 뭐에요!? 아저씨! 왜 그래요!?"

"왜? 왜에~?! 이 새끼가! 너같은 새끼는 콩밥 먹어야해!"

"아이고! 윤지 아버지! 왜 그러는거에요! 우리 운현이가 뭘 어쨌길래!!"

"저 새끼가 우리 윤지를 강간했다고!! 그리고 윤지가 임신했어! 어쩔거야!? 응!?"

"운현! 너 진짜야!?"

"아, 아니에요! 저는...!!"

아버지의 외침에 운현은 두려워하는 연기를 펼치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런 그를 보며 윤지의 아버지가 몽둥이를 다시 들어 올렸을 때 윤지의 어머니는 운현의 등짱을 때리며 외쳤다.

"아이고! 이 나쁜 놈아!! 우리 윤지 어떡할거야!! 아직 졸업도 안한애를... 아이고!! 아이고!!"

"윤지 어머니! 그만 하세요! 그만! 우리 운현이가 그럴 놈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 아십니까!"

"그럴 놈이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봐도 강간범처럼 생겼는데!!"

"윤지 어머니!!"

개판이다. 악을 써대는 윤지네 부모님과 그를 말리며 운현을 어서 방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부모님. 그리고 뒤에서 팔짱을 낀 채 구경하고 있는 큰형 한지웅. 운현은 부모님을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야. 한운현."

"어. 형."

"네가 진짜 했냐?"

"그럴리가..."

"야. 근데 저번에 너 윤지네 집에 간거 옆집에서 봤다더라. 잘못하면 좃되겠는데?"

누명이든 아니든 대한민국은 성범죄에 한해서는 무죄추정의 법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지웅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 어쩌지? 형? 나 어떡..."

"하 이 새끼 사기치네."

"무슨 소리하는거야...?"

"야. 내가 널 몇년을 봤는데 모르겠냐?"

한지웅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무덤덤히 말했다.

"네 눈은 전혀 흔들리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거 설마 네가 짠 계획이냐?"

운현은 한지웅의 말에 움찔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던 한지웅은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등신을 쳐다보는 눈으로 쳐다볼 뿐 이었지.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이 사기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잘 파악하던 한지웅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형과 자신까지 속은 포경수술을 유일하게 혼자만 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

그런 한지웅이 자신의 가면까지도 꿰뚫어 본 것에 놀란 운현이 입을 다물자 그는 어깨를 으쓱인 후 운현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뭔 판을 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잘해라. 등신같이 당하지 말고."

"...응."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자신이 표정관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색하다고 하지만 벌써 들킬 줄이야. 형이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본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나도 모자르구만... 그래도 잘됐어.'

최대한 노력해서 표정관리를 했다. 누구도 자신이 이런 판을 꾸미고 있고,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도 한지웅만이 자신을 의심하는 것에 운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형이 쓸데없이 내 통수를 칠 이유는 없겠지. 그럼 잘됐어. 형만 속일 수 있다면 대부분을 속일 수 있다.'

운현이 윤지를 강간해서 임신시켰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제 윤지네 부모님이 그 난리를 치고 간 덕분인지 동네에 소문은 쫙 퍼졌다.

"오늘 고소한다고 하더라."

무거운 분위기다. 운현의 아버지, 한성우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를 향해 아버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난 널 믿는다. 네가 그런 녀석이 아니라고 생각해."

"아버지..."

"하지만 그래도 임마. 여자애 방에 그렇게 막 들어가고 그러는 거 아니야. 남녀칠세 부동석이라고 하는데..."

"여보..."

운현의 어머니인 김운정은 한성우를 향해 한숨을 내쉰 후 운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런 그녀에게 힘없이 웃어보인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성우는 운정에게 담담히 물었다.

"우리 돈이 얼마나 있지? 변호사를 고용해야겠는데..."

"그... 노후 자금 있잖아요. 그걸로 어떻게든..."

운현이 성인이 되면 시골로 내려가려고 모아 놓은 돈이 있었다. 그것을 쓰면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 그녀가 말하자 한성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휴... 자식놈이 이렇게 속을 썩일 줄이야..."

방으로 돌아 온 운현은 침대에 앉아 희미하게 웃었다. 원래 과거에서는 변호사를 고용하고 별 짓을 다 했지만 결국 자신의 책임이 되어버렸고 그 결과 가족들은 보상금과 합의금 명목으로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아버지의 도장. 집. 그리고 그들의 노후자금까지.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부모님은 매일 한숨과 술만 마시며 그를 원망했다.

그런 그들에게 운현 역시도 반발했었던 기억을 떠올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바꾼다.'

변호사를 구하지만 그 변호사는 등신같은 변호실력으로 결국 패소하게 만들어버렸다. 결국 운현은 소년원에 가게 되고 모든 것은 망해버린다. 운현은 하이딩을 걸고 안방으로 들어가 패물과 집문서, 통장 등등을 모두 훔쳐내었다.

'이정도면 되겠지.'

쓸데없이 변호사를 고용해봤자 의미는 없었다. 이미 변호사는 구해놨으니 말이다. 원석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훌륭한 실력의 변호사를 구해놓은데다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만 봐도 절대 질리 없었다. 만약 지면? 그럼 원석과 그 변호사의 목을 싸그리 날려버리고 다시 준비를 시작하면 된다.

'하긴 자기를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놈을 움직이겠지.'

만약 자신이 소년원에 가게 된다면 강원석에게 더 손해였다. 이미 집까지 준비해 준 마당에 물러서기는 어려웠다. 당장 한달 후에 운현과 함께 밀수를 해야 하는데 그가 소년원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겨우 조직을 설득해 그 밀수를 책임지고 하겠다고 말했는데 밀수 계획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운현이 없으면 자신도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아는 그는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변호사를 구해 올 것이다.

"그럼 가볼까."

교복으로 갈아입고 학교에 온 운현은 곧장 담임선생의 호출에 끌려갔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담임선생은 운현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무슨 생각으로 그딴 짓을 한거냐!!"

"저 아니에요!!"

"아니긴 새꺄!!"

윤지를 굉장히 좋아하는 선생이다. 아니, 어쩌면 학교에서는 운현보다 모두 윤지를 좋아하고 있을 것이다. 당연한 것 아닌가? 타인에게 상냥하고 이쁜데다가 부드러운 말투와 행동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윤지와 그냥 양아치 운현. 누굴 선호할지는 당연한 것이었다.

'뭐 그건 내가 알바가 아니고.'

"넌 새끼야! 퇴학이야! 퇴학!"

"제가 뭘 어쨌다고요!"

'이유없이 학교를 그만둘 수는 없지.'

일이 잘 풀리면 부모님은 다시 학교를 가라고 할 것이 분명했고 시간이 필요한 운현에게 있어서 그것은 정말 피하고 싶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아예 대놓고 퇴학을 당하거나 학교에서 심한 모욕을 당하면 그것을 핑계로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으니 운현은 자신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담임을 향해 바락거리며 대들었다.

"야!! 개소..."

"어허. 윤선생. 그렇게 험하게 말하면 쓰나."

담임선생이 지랄하는 것을 보며 교무주임은 그를 달랜 후 운현을 데리고 교직원 휴게실로 데리고 갔다. 화가 난 것처럼 씩씩거리는 운현을 향해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운현 학생. 자네가 그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네... 지금 분위기가 안좋아."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전 아니라구요!"

"그래. 물론 자네는 아니겠지. 하지만 지금 사람들을 보게나. 자네를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 줄 아나?"

"...그건..."

그의 말에 운현은 입을 다물었다. 불안감이 가득한 얼굴을 보며 그는 교무주임의 손을 잡았다.

"선생님! 전 진짜 아니라구요! 선생님은 믿어주시는거죠!? 네!?"

운현의 말에 그는 빙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런 그를 눈물 젖은 눈으로 바라보던 운현은 교무주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급히 물었다.

"선생님!!"

"물론이지. 믿고 말고. 그러니 일단 집에 가서 쉬고 있게나. 그런 일로 힘들텐데 말야."

"하아... 감사합니다..."

교무주임에게 고개를 숙인 운현은 교직원 휴게실에서 나왔다. 그런 그를 선생들은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으며 조심스레 교무실에서 나온 운현은 힐끔거리며 자신을 보는 학생들의 시선에서 도망치듯 화장실로 향한 후 빠르게 하이딩을 걸고 교무실로 다시 들어갔다.

"교무주임 선생님. 정말 운현 그 놈을...?"

담임의 말에 교무주임은 씨익 웃었다.

"학교의 명예를 어지럽힌 그런 놈을 어떻게 믿어주나? 윤지고 운현이고 둘 다 징계먹여야지. 흥. 최대한 이 사건 수습해!"

"그런데 운현이 진짜 그랬을까요?"

다른 선생 중 한명이 조심스레 말하자 교무주임은 이를 갈며 외쳤다.

"공부도 못하는 그딴 쓰레기 같은 놈이 할 일이야 뻔하지! 어휴! 이번 기회에 성적 낮은 새끼들은 다 조져!"

"어... 그럼 국회의원 정한수님 아드님인 정문지는..."

"...걔는 빼고. 아무튼 눈치껏! 돈 없고 빽 없는 애들 있잖아! 걔들 잡아서 딴 놈들이 헛짓거리 못하게 조져놔!!"

"헤헤... 이번 기회에 돈 좀 만지겠네요."

"크흠. 뭐 그래서 그러는 건 아니고."

돈 없고 빽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학교 차원에서 크게 처벌을 내리고 학생들을 쥐어짜면 부모들이 애들 좀 잘 부탁한다며 성의 표시를 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며 담임과 교무주임이 시시덕거리는 것을 들은 운현은 피식 웃으며 캠코더의 녹화를 정지시켰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자신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퇴학시키는데 앞장섰던 것이 담임과 교무주임이다. 모두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는 그들의 말을 촬영 한 후 운현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학교에서 나왔다.

'요정도면 학교 쪽은 해결됐고.'

운현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딱히 자신을 퇴학시켰기 때문은 아니었다. 연구를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수작에 불과했던 그는 캠코더를 인벤토리에 휙 던져 놓았다.

'진짜 할 일은 더럽게 많은데 건드릴 인간들도 많군. 강원석을 제대로 굴려야겠어.'

자신 대신 열심히 굴러 시간을 마련해줄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도울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운현은 털레털레 자신을 위해 마련된 아지트로 들어갔다.

철통 보안을 필요로 했기에 집을 구하자마자 완벽한 보안 체계를 구축해 놓았다. 거의 어지간한 연구소급의 보안을 마련하느라 원석의 지출이 크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아쉬운 것은 그이고 두려운 것은 그인데.

"우우웅..."

지하실로 향하는 문을 열고 들어간 운현은 지하실 내부에 빽빽히 채워져 있는 책장에서 책 한권을 꺼내었다.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연구 자료 중 가장 기본이 되고 가장 중요한 부분. 정신에 대한 연구자료를 꺼내 운현은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확실히 천재는 천재군...'

대부분의 자료는 피스나가 만든 것이었다. 그녀가 작성한 자료를 조용히 읽던 그는 책상 위에 올려 놓은 휴대폰이 진동하자 그것을 보았다.

"왜."

"지금 숙소에 계십니까? 제가 잘 아는 변호사를 지금 데리고 갈까 하는데..."

마침 잘 됐다. 운현은 자료들을 챙긴 후 1층으로 올라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그가 문을 열어주자 원석과 함께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이 모습을 보였다.

"반갑습니다. 이앤박의 이한도라고 합니다."

"한운현입니다."

236====================

준비

"성함이... 한운현이었습니까?"

"아. 그러고보니 내 이름도 말 안했군."

원석이나 운현이나 서로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었다. 운현은 원석을 이용할 생각 밖에 없었고 원석 역시 운현을 이용할 생각 밖에 없었다. 서로 언제 뒷통수를 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모두 경계한 것이다. 그 둘의 모습에 한도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원석아. 너 이 사람이랑 무슨 관계냐?"

"어... 사업상 아는 사이입니다."

"흠... 보아하니 그리 나이가 많아보이지는 않는데..."

"18세입니다. 여기 서서 이야기 하긴 그러니 들어들 오시죠."

냉장고에 비치된 캔 음료 세개를 가져 온 운현이 그것을 내밀자 한도와 원석은 그것을 받아 마셨다. 한도에게 현재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 해 준 그는 영상을 보고 녹음기의 내용을 모두 들은 후 황당해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운현씨에게 누명을 씌우려 한다... 이건가요? 하지만 이정도 자료면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하지만 이건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잖아요. 영화에서 보니까 성범죄는 안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전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거든요."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까지도 성 관련 문제는 결정적인 증거를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은 변호사 싸움이라는 것이기에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차분히 말했다.

"큰거 두장으로 끝내드리죠. 성공보수는 한장만 주시고."

"큰거 두장이면에 성공보수 한장이라... 도합 삼천?"

"네."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상대는 청순하며 이런 것은 전혀 모른다는 컨셉을 가진 여자다. 상대쪽 변호사도 이것을 예를 들며 주변을 조사하고 있을 것이기에 한도는 담담히 말했다.

"이정도 자료에 그녀와 잔 남자가 운현씨 말고도 많이 있다면 깔끔하게 끝낼 수 있습니다."

"어. 그럼 몇가지 더 부탁드리죠."

운현은 학교에서 촬영한 비디오도 보여주었다. 그것을 어떻게 찍었는지 아까의 영상과 같이 의문이었지만 조작한 흔적따위는 없는 것 같았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긴 했지만 말이다.

동영상 안에서 학교 교무주임과 담임이 이야기하는 것을 다 본 한도는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어쩌자는겁니까?"

"이 양반들을 어떻게 끝장낼 방법이 없을까요?"

"...음. 이 영상이 있으면 방법이야 여러가지가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거기에 촌지를 받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니까..."

"그건 제가 구해다 드리죠. 어때요?"

"운현씨. 도대체 뭘 하고 싶은겁니까? 그걸 말씀해주신다면..."

"별 건 없어요. 그냥 절 건드린 인간들이 발 뻗고 못자게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아주 단순한 화풀이? 그들 덕분에 제가 좀 고생을 했거든요."

찬성과 윤지는 실험체로 쓴다지만 학교의 선생들 때문에 인간불신이 걸렸을 정도였던 운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의 웃음을 빤히 바라보던 한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고 돈이 좀 더 듭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원석 형."

"형?"

"그럼 원석아라고 할까?"

"...아뇨. 그냥 원석이라고 불러주세요."

"이번 일 끝나면 돈 좀 제대로 벌 수 있지? 얘기했던 대로 수익을 나눌 테니까 대신 좀 내줘."

"하아... 알겠습니다."

어차피 지금 운현이 가진 것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그이기에 결국 변호사 선임비용은 자신이 낼 수 밖에 없었던 원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도는 원석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야야. 너 저 사람이랑 무슨 사이야?"

"무슨 사이라고 해봤자..."

이름도 오늘 안 사이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귀신처럼 세다는 것과 사람을 이용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을 못느끼는 자라는 것. 그리고 정체불명의 능력을 지녔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 정체는 알아? 나이도 어린데..."

"정체..."

한도의 질문에 원석은 힐끔 운현을 보았다. 그의 순박한 웃음을 보니 오히려 등골이 오싹하다. 원석은 천천히 고개를 저은 후 말했다.

"마왕이라고 하더만."

"뭐? 마왕?"

"응. 마왕..."

잘못들었나 싶은 한도가 다시 묻자 원석은 씨익 웃는 운현을 보며 힘없이 답했다.

집으로 돌아 온 운현은 집의 문에 '강간범 꺼져라.' 라는 락카 글씨가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에 창문은 돌에 맞았는지 몇개가 깨져 있었다. 그것을 보며 운현은 휘파람을 불었다.

'동네 난리나게 하길 잘했군.'

부모님의 꿈은 시골로 가서 저택 하나 짓고 사는 것이었다. 운현이 대학교에 들어가면 바로 귀농하는 것을 생각하시던 그들이었기에 운현은 아예 이번 기회에 보내버릴 생각을 했다.

'연구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괜히 숙소 집 왔다갔다 할 이유는 없지.'

모든 것을 버리고 연구에 몰두해도 시간적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최대한 빨리 해야 한다. 최대한 빨리 그들을 다시 만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것 저것 수단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누군기를 짓밟고. 더 필요하다면 누군가를 죽이는 것도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집에 들어 온 운현은 또다시 집안이 난리가 난 것에 손가락을 튕기고 피식 웃었다. 변호사를 선임하려고 돈을 챙기려던 부모님들은 모든 문서와 통장, 서류, 패물이 싹 다 사라진 것에 망연자실해하고 있었다.

"운현아... 어떡하냐..."

거의 울 기세를 보이는 어머니 운정을 향해 운현은 빙긋 웃었다.

"왜요?"

"도둑 들었나봐... 어떡해... 너 변호사..."

"아. 변호사건이요. 그건 신경쓰지 마세요."

"뭐!? 그걸 어떻게 신경 안써!?"

"아는 형님이 도와주기로 했어요. 선임비 없이 그냥. 무보수로."

"뭐? 그게 말이 되니!?"

운현의 말에 운정은 기가막혀하며 버럭 화를 냈다. 그런 그녀를 말리며 다가 온 한성우는 진지한 시선으로 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진짜냐?"

"네. 여기 명함이요."

"...."

그가 명함을 내밀자 한성우는 그 명함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대형 로펌과 함께 그 밑에 적혀 있는 변호사의 이름을 본 그는 전화기를 들어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예. 이한도 변호사님 되십니까? 예. 저는 한성우라고... 한운현이라는 녀석의... 아. 예. 예. 아아... 정말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죠!"

전화를 끊은 한성우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운현에게 이런 인맥이 있을 줄은 몰랐던 한성우는 부들부들 떨다가 운현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짜식! 그래도 지 앞가림은 지가 알아서 하는구나!?"

"여보? 뭐에요? 어떻게 된거에요?"

"이 녀석 말이 사실이야. 내일 사무실로 와달라고 하더군."

"운현아. 그게 진짜니?"

어머니의 얼굴에 절망이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것을 본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운현을 끌어안았다.

"아이고 다행이다... 다행이야..."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끝난 것처럼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며 운현은 작게 웃었다.

"그나저나 집 꼴이 이게 뭐에요?"

"모르겠다... 집에 있는데 갑자기 여기저기서 날라오더구나..."

"윤지네 부모님이 동네에 영향력이 있어서 그런지... 하아..."

도장을 운영하는 한성원은 오늘만 해도 벌써 반 이상 사람들이 관둬버린 것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고소가 이루어지는 와중에 다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아. 이건 제가 가져갔어요."

"...어? 네가 가져갔던 거냐?"

"네."

느긋한 얼굴로 운현이 챙긴 서류와 패물, 통장을 건네자 그것을 멍하니 보던 한성우는 한숨을 푹 내쉬고 몽둥이를 들었다.

"네가 네 앞가림을 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것때문에 부모 속을 썪여야 쓰겠냐? 오늘 찜질 좀 하자."

"자, 잠깐만요! 제가 이거 안가져갔으면 아버지는 바로 변호사 만나러 가셨을거죠"

"그렇지."

"제가 아는 형이 있다고 해도?"

"...아니라고는 못하겠지."

상식적으로 봤을 때 일반 고등학생이 저런 대형 로펌의 변호사와 연줄이 있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그가 떨떠름하게 말하자 운현은 히죽 웃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니!? 해보지도 않고 네 멋대로 했다는 거잖아!"

어머니의 억지소리에 결국 등짝을 한대 맞은 운현은 과장스럽게 아파하는 얼굴로 안방에서 도망쳤다. 날아 든 돌멩이에 의해 유리창이 깨져 있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운현은 핸드폰을 들었다.

"에. 접니다. 찍었나요?"

"네."

핸드폰 너머의 흥신소 직원이 답하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완벽하다. 이걸로 부모님은 동네에 환멸을 느끼고 부담없이 떠날 것이 분명했다.

"다녀왔습니다."

"오. 왔어? 근데 옷에 왠 피야?"

형이 들어오자 운현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질문에 한지웅은 가슴팍에 뭍어 있는 피를 보고 피식 웃었다.

"집에 오는데 왠 미친놈이 덤벼들더라고. 개박살 내줬지."

"누군데?"

"삼거리 마트 집 아들. 윤지를 좋아하고 있었나봐."

대수롭지 않게 말한 그는 운현의 어깨를 툭 치고 난장판이 된 집을 흝어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패하면 내가 너 죽인다."

"걱정마쇼."

운현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이미 눈치챈 한정우는 운현의 느긋한 대답에 작게 키득거린 후 위로 올라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운현은 자신의 핸드폰으로 온 사진을 보았다. 옆집 아들과 뒷집 아들이 집에 난리를 쳤다. 그 애들 모두 윤지를 좋아하던 애들이다.

"짜식들. 고맙다."

어쩜 이렇게 자신의 생각대로 잘 어울려줄까. 운현은 작게 키득거린 후 느긋하게 2층으로 올라가며 중얼거렸다.

"그 보답으로 너희들을 위한 딸감은 내가 마련해주마. 그리고 그냥 가기는 섭섭하니까 아주 맛있는 고구마도 처먹여주지. 인생이 퍽퍽해 질 정도의 고구마를 말야..."

다음날이 되자 운현은 학교를 가는 대신 부모님과 함께 이앤박 법률 사무소로 향했다. 쭈뼛거리는 부모님을 데리고 당당히 들어 선 운현은 다른 변호사들과 다르게 커다란 개인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이한도의 방으로 거리낌없이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오... 어서 오십쇼."

운현이 가볍게 손을 들며 인사하는 반면 그의 부모님은 허리까지 숙여가며 인사했다. 자신의 아들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는 생각에 그들이 굽히고 들어오자 이한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부분은 자식도 저러던데...'

로펌의 수석 변호사로 근무하며 운현처럼 누명을 쓰든 아니면 실제로 했든. 자식이 사고를 쳐서 부모들이 함께 오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또 처음이다. 당사자인 운현은 대수롭지 않아하고 부모들이 더 걱정을 하는 것에 그는 어이없어하며 비서에게 차를 내오라 말했다.

"에... 제가 운현과 좀 친분이 있어서 비용은 전액 무료로 해드리지요. 그리고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부모님은 나서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네? 하지만..."

걱정이 안될 수 없었다. 한도의 자신에 찬 말에 한도는 운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운현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제가 더 잘 압니다. 반드시 운현에게 씌여진 누명을 제가 벗겨내겠습니다."

"그래도 부모가 있는게..."

"상대가 어떤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경우의 사건에서 변호사들이 부모님을 설득해 감형을 하겠다는 빌미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죠. 아직 운현이 미성년자라 자칫 잘못했다간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도 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부모님들께서는 절대로 나서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저를, 그리고 운현을 믿어주십시요."

"그 말... 진짜입니까?"

한성우가 눈을 빛내며 묻자 이한도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이 시킨대로 말을 한 그는 한성우와 김운정이 불안해하며 자신을 보자 더더욱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그에게 말려버린 한성우와 김운정이 나가자 운현은 그들을 배웅했다.

"전 이 형님과 이야기 좀 하다가 갈게요."

"그래라. 너무 늦게 들어오진 말고."

"네."

부모님이 나가자마자 운현은 한도의 책상 위에서 담배를 들었다. 흡연 구역을 찾는 그를 보며 한도는 환풍기를 튼 후 말했다.

"그냥 여기서 펴도 됩니다. 그나저나 왜 남았습니까?"

"아. 하는 김에 이것도 좀 처리해달라구요."

운현은 어젯밤 자신의 집에 깽판을 치고 간 이들의 사진을 꺼내 그의 앞에 휙 던졌다. 수십장의 선명한 사진을 보며 한도가 어이없어하자 운현은 싱글거리며 말했다.

"가급적 좀 크게 한방 먹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돈은 있습니까?"

"돈은 넘쳐날 정도로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밀수를 성공시키면 돈은 문제가 안된다. 정 안되겠다 싶으면 근처 은행이나 다른 사채업자 사무실이라도 털겠다는 생각을 하며 운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한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하아... 원석이랑 무슨 관계입니까?"

"궁금해하지 않는게 좋을텐데..."

운현의 말에도 한도는 굉장히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가 강한 의지를 보이자 운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후회는 안하시죠?"

237====================

준비

"물론입니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여기 방음은 잘 되나요?"

"의뢰인과의 대화가 밖으로 나가면 곤란하니 방음은 완벽합니다."

사서 고생을 하는구나. 운현은 안타깝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운현의 눈에 담겨 있는 딱하다는 시선에 한도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운현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온 몸이 찢어지는 고통. 온 몸이 분쇄기에 갈려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한도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가 쓰러지지 않게 잡아 의자에 잘 앉혀 준 운현은 담배를 입에 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길래 왜 궁금해합니까. 궁금해하긴.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 몰라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고통에 신음하고 가끔씩 경련을 일으키는 그를 바라보며 운현은 빙긋 웃었다. 고통 때문에 시야가 흐리다. 연기 너머로 실실 웃고 있는 운현의 얼굴이 두려워진 한도는 부들부들 떨었다. 바지춤이 축축하다. 큰 고통 때문에 오줌까지 지려버린 한도가 눈물을 흘리자 운현은 다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아... 아..."

이제서야 알겠다. 마왕이라고? 사람에게 이런 끔찍한 고통을 줄 수 있고, 이 정도의 공포심을 불러오게 하는 자가 마왕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한도는 괜히 궁금해했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흠... 뭐. 당신도 제 장기말이 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하긴. 원석 하나만 가지고는 불안하지. 좋아요. 이렇게 합시다. 한도씨."

"...하아...아..."

"너. 내 부하가 되라. 돈을 원하나? 이깟 변호사질따위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돈을 안겨주지. 어때?"

운현은 원석의 머리를 잡고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담배 연기가 콧가를 간지럽히며 고통에 축 늘어진 몸을 일깨운다. 그가 헐떡거리는 것을 보며 운현은 이를 드러내었고 원석은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시, 싫다고 한다면?"

"싫다고 한다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지. 어쨌든 당신이 이번 일을 나와 함께 하기로 한 것은 사실이니까 말야."

"그럼..."

싫다. 솔직히 말해서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싫다. 단지 어깨를 건드린 것만으로도 이정도의 고통을 줄 수 있는 자다. 무슨 능력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래서였던가? 숨겨진 직업이 사람 때려잡고 고통을 주는 원석이 운현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했던 것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애송이가 반말을 해도 아무런 말도 못한 것은?

"싫..."

"나 싫다는 놈은 딱히 관심이 없지만 내가 필요로 하는 개, 아니 사람이 싫다고 하면..."

운현은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잡았다.

"몽둥이를 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또다시 끔찍한 고통이 몸을 감싼다. 입에 거품이 날 정도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비명을 내지른 그는 어서 빨리 이 끔찍한 고통이 끝나길 빌었다. 한참동안 고통스러워하던 그가 겨우 고통에서 헤어나왔을 때 운현은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었다.

"히익!?"

"오우.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신은 내 충실한 개가 되어줘야 하니까 말야. 너무 아파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프군."

운현은 자신이 손을 올리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두려워하는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레이터 힐."

"...어어...?"

고통으로 욱씬거렸던 몸이 점점 나아간다. 그것 뿐만 아니라 매일 책상에 앉아서 자료만 본 탓에 고질병처럼 아팠던 허리와 목의 고통도 사라져가는 것을 느낀 한도는 멍하니 운현을 바라보았다.

"자... 마지막 기회야. 선택해. 내 개가 되겠나?"

"...당신... 당신은 뭡니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지옥같은 고통에 빠트리고, 또 모든 고통을 치료한다. 악마인가. 아니면 천사인가. 그는 두려움과 경외감에 떨며 조심스레 물었고 운현은 그를 향해 키득거리며 웃은 후 말했다.

"말했잖아. 원석이."

"...마왕..."

그렇다면 자신은 마왕을 변호하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한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 일. 절대로 실패하면 안된다. 한도는 아까와는 사뭇 다른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바, 반드시 성공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자세야. 그래... 날 따른다면 최소한 내가 이유없이 버릴 일은 없을거니까 말야..."

자신의 계획을 진행하면 수많은 돈이 들어올 것이고 또 엄청난 기술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것을 노리는 한국 및 세계의 기업들이 가만히 있을까? 법적으로 그들을 상대하려면 최소한 변호인단 정도는 구성을 해야 할 것이다. 운현은 그들을 이끌 사람으로 한도를 선택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얘기를 시작해볼까? 난 일을 좀 크게 벌리고 싶어. 일단 재판까지 가자고. 무혐의로 허망하게 끝나게 하지 말고 혐의가 인정되게 만들어. 그리고 난 다음에 일을 진행하라고. 알겠어?"

"알겠습니다."

"좋아. 아주 좋은 자세야."

한도는 성실하게 그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였다. 혐의가 인정되도록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운현이 뭘 바라고 있는지 대충 눈치를 챈 한도가 별다른 질문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그의 어깨를 툭툭 쳐 준 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밖으로 나갔다.

숙소로 돌아 온 운현은 피스나의 책에 집중했다. 인간의 구성 요소인 혼, 정신, 그리고 육체. 이 세가지에 대한 내용을 천천히 읽던 그는 한권의 책을 전부 다 읽었을 때 쯤 핸드폰이 울리자 그것을 받았다.

"...원석입니다."

"왜?"

"숙소에 계십니까? 괜찮으시다면... 조금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뭔데 또."

운현이 퉁명스레 말하자 원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천천히 말했다.

"제 사무실에 조직의 다른 놈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마 이번에 제가 저희 일을 맡게 된 것에 불만을 품은 놈들 같은데... 수가 수인지라 제 쪽에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이번만 좀 도와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진짜로 급한가 보다. 그의 간절한 전화에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할 일은 넘쳐나는데 여기저기 귀찮게 구는 것들이 많다.

"어딘데?"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만..."

"알았어. 위치나 찍어놔."

자리에서 일어난 운현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블랙플래그 세트로 옷을 갈아입었다. 날씨에 걸맞지 않지만 얇고 큰 코트를 걸쳐 입으면 그냥 시선 끄는 정도에 불과하겠지. 그리 생각하며 택시를 타고 원석이 기다리는 곳으로 간 운현은 커다란 건물의 밖에서 덩치 큰 조폭 세명과 자신을 기다리는 원석을 발견하고 투덜거렸다.

"얼마나 많길래 그래?"

"열다섯명 정도. 다들 사시미와 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녀석들이라서... 그리고 개중에는 살인자들도 있습니다."

"여기 아저씨들로는 안돼?"

"어린 노무 시키가 아으으으으으!!"

운현이 덩치 큰 조폭을 툭 치며 말하자 그는 인상을 구기며 운현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꽉 잡아 가볍게 비틀어버린 운현은 그가 고통스러워하자 옆으로 휙 밀쳤다. 아파하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그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 원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젠장... 시체 치워도 괜찮아?"

그냥 빨리 처리하고 들어가서 책이나 보고 싶다. 운현이 궁시렁거리자 원석은 사색이 되었다.

"그, 그건 안됩니다. 한국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굉장히 골치아픈 일인지라..."

"그럼 어디 한두군데만 부러트리라 이거지. 알았어."

원석은 운현을 세상 물정 모르는, 진짜 마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보면 절대 말이 안돼는 힘을 가지고 있는 운현이 한국의 상식을 잘 모르는 줄 알고 살인만을 막은 것에 만족한 그는 운현이 히죽 웃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아무것도 아냐. 일 끝나면 부를테니까 여기서 놀고 있어. 셋이서 홀짝이나 하든가."

그들에게 대충 말해 준 운현은 코트의 주머니에 손을 꽂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후 건물의 계단을 타고 올랐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원석의 뒤에 있던 조폭은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팀장님. 저 새끼 뭡니까? 도대체 왜 저딴 애새끼한테 저렇게..."

"그건..."

"썅! 쳐!!"

"...저런 것 때문이지."

창문을 통해 검은 그림자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그들이 한두방 맞고 퍽퍽 쓰러지는 실루엣을 본 조폭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싸움은 순식간에 끝났다. 올라간지 5분도 안되서 쳐들어 온 놈들을 다 때려잡은 운현은 창문을 통해 외쳤다.

"다 끝났으니까 들어와."

"...저런 인간한테 대들고 싶겠냐?"

"....."

원석의 말에 조폭들은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운현은 쓰러져 신음하는 조폭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인 후 책상에 앉았다.

"여기 금연구역 아니지?"

"네. 그, 역시 대단하시네요."

쓰러져 신음하는 조폭들을 보며 원석은 감탄했다. 보통 놈들은 아니었는데 이들을 이렇게 쉽게 잡아버린 것에 만족한 그는 운현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웃었다.

"대단하십니다. 역시... 마왕이라는 이름이 괜한 것이 아니군요."

끔찍한 고통을 주고, 끔찍한 두려움을 주지만 이 자와 함께 한다면 조직의 최정상에 오르는 것도 문제는 아닐 것 같았다. 일당 백. 아니 일당 천이라고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다. 그와 함께 한다면?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것이 꿈만도 아니라는 생각에 원석은 씨익 웃었고 그를 조용히 바라보던 운현은 책상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쓸데없는 생각을 할 것 같아서."

운현은 빙긋 웃은 후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그가 비명을 내지르려 하자 운현은 그의 턱을 콱 잡았다.

"날 이용하려고 하지 마라."

"...아..아아..."

"내가 이런 일에 나서주는 것은 네가 지금 필요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쓸데없는 짓으로 사람을 가지고 놀려고 하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날 실망시킨다면... 어쩔 수 없지만 너라는 개는..."

"......"

"살처분을 하는 수 밖에 없겠지?"

빙긋 웃으며 그가 말하자 원석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고개만 까딱거렸다. 그의 반응에 빙그레 웃은 운현은 원석의 볼을 톡톡 쳐 준 후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그, 그런 생각 안했습니다."

"그래? 내가 보기엔 한 것 같은데. 아님 말고. 미안."

히죽거리는 그의 모습에 원석은 눈을 감았다. 원석은 아픈 어깨를 어루만진 후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한도 형님을 만나신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잘 되어가고 있지. 아마 내일이나 내일 모레쯤이면 경찰에서 혐의 조사한다고 나설거야."

"그럼 금방 끝나겠군요."

"에... 뭐 끝낼 수는 있겠지만 말이지. 난 일을 좀 더 키우고 싶거든."

"하지만 하실 일이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운현이 일을 키워 시간을 더 끌겠다고 하자 원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하러? 그가 궁금해하자 운현은 입에 물고 있는 담배의 필터를 잘근잘근 씹었다.

"훌륭한 실험체를 마련하려면 공을 들여야 하거든..."

삼주일이 지났다. 삼주일동안 상황은 무척이나 재미있게 흘러갔다. 운현은 경찰의 출두 명령도 몸이 안좋다는 이유로 나가지 않았고 그의 담당 변호사인 한도도 별다른 제지가 없었다. 그것에 신나하며 윤지의 부모가 고용한 변호사는 고소를 진행해나갔고 이주일이 지났을 때 혐의가 인정되어 결국 이 사건이 검찰로 넘어가버렸다. 이제는 전처럼 그냥 안나갔다간 패소해버린다.

"상대는 역시 별다른 증거 없이, 그저 피해자의 증언과 저희가 움직이지 않은 것을 밀고 나가고 있습니다. 나온 증언이라고 해봐야 이웃집 사람의 증언 뿐. 거기에 학교나 주변의 평판 정도에 불과합니다."

즉, 운현이 강간을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따위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에 만족하며 한도는 씨익 웃었다. 그들이 내미는 증거라고 해봐야 정황증거밖에 없고 윤지라는 여자가 주변의 평판이 좋다는 것에 불과했다. 그동안 운현이 경찰의 출두 명령을 계속 넘겨버린 것에 완전히 자신만만해져 있다는 것을 말해 준 그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이제 시작입니다. 마음 단단히 먹으십시요. "

운현이 지금까지 구해 온 모든 자료를 챙긴 한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운현에게 말했다. 그의 말에 운현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마음은 네가 단단히 먹어야지... 지면 어떻게 될지 알텐데 말야."

"그, 그렇죠."

만약 재판에서 패배했다간 그 끔찍한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한다. 한도는 운현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전의를 불태웠다. 모든 것을 불살라서라도 이번에 끝내야 한다.

"하긴 질려고 마음먹지 않는 이상 질 수가 없는 거지."

운현은 피식 웃었고 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지와 운현이 나눈 대화가 녹음된 녹음기를 들은 순간 정말 이 인간이 작정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마지막에 내놓고. 준비된 자료부터 잘 꺼내놓자고. 자자. 그럼 가자."

꾸준히 피는데도 아직 익숙해지지 않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238====================

준비

"드라마에서는 좀 큰데로 가던데 지금은 아니네."

"네. 좀 진행되고 그러면 큰 법원으로 가지만... 지금은 여기면 됩니다."

운현이 대기업 총수의 자제도 아니고, 겉보기에는 그냥 일반 고등학생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소송에 걸려 법정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신경쓰는 이는 거의 없었다.

"흠... 뭐 상관없으려나."

어차피 법원에 한두번 불려가는 것으로 일이 끝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운현은 여유로운 얼굴로 걸어 법원 안으로 들어왔다. 운현이 가야 할 법정에는 이미 윤지와 윤지의 부모님이 나와 있었다.

"싸가지 없는 새끼!! 넌 콩밥 좀 처먹어야해!"

"글쎄요."

지금까지 경찰서에 한번도 오지 않고 변호사만 보냈던 운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윤지의 부모님은 운현의 멱살을 잡고 씩씩거렸다. 그런 그를 향해 운현이 빙긋 웃자 윤지는 조금 불안해졌다.

'왜 저러지...?'

운현이 데려 온 변호사는 티비나 신문을 보면 자주 나오는 이앤박이라는 커다란 로펌의 변호사였다. 그런 변호사를 어떻게 운현이 데리고 있을 수 있는 것일까. 평상시 보이던 어수룩한 미소 대신 뭔가 알 수 없는 태도를 보이는 그를 보며 불안해하던 윤지는 부모님이 자신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 불안감을 지웠다.

'그냥 허세일거야...'

"가시죠."

윤지측 변호사와 검사가 안으로 들어가자 운현은 한도와 함께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작은 사무실과 비슷한 법정 안에서 운현은 팔짱을 낀 채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고 그런 그를 보며 윤지의 부모님은 이를 갈았다.

"야. 근데 너 임신했다면서 이렇게 나와도 되냐? 몸조리 해야 되는거 아냐?"

"이 새끼가!!"

"으흠~"

운현의 유들유들한 태도, 그리고 의자에 편하게 앉는 모습에 윤지의 부모님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죄송하다고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도 모자란 판국에 운현이 이렇게 나오자 그들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운현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았다.

"이 새끼야!!"

"퍽!"

"아이고!"

윤지의 아버지는 운현의 비릿한 미소에 결국 주먹을 날렸다. 그의 주먹이 얼굴을 치자 운현은 과장스럽게 쓰러졌고 그것을 본 한도는 그를 막으며 말했다.

"이거 폭행죄로 고소할 수도 있습니다."

"고소? 해봐! 이 더러운 강간범 새끼야!!"

"아직 운현의 죄가 확정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하는 것도 모욕죄로 고소할 수 있습니다."

"넌 빠져! 이 개새끼야!!"

윤지의 아버지가 성질을 내는 것을 보며 윤지측 변호사가 그를 말렸다. 한바탕 소란이 나고 결국 법원의 경비들이 와서 그들을 떼어내었다.

"아. 입 다 터졌네."

입이 찢어진 듯, 피 섞인 침을 뱉어낸 운현이 자리에 앉았을 때 판사가 나왔다. 중년으로 보이는 판사가 자리에 앉자 모두가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에... 사건번호..."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판사가 사건번호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운현은 팔짱을 낀 채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럼. 피고인 측 변론 시작하세요."

"네."

검사와 윤지측의 변호사 원인수가 운현이 윤지와 함께 윤지네 집에 가는 것을 봤다는 동네 주민까지 불러서 신나게 떠들어대는 것을 느긋하게 듣던 한도는 판사가 자신들의 변론을 시작하라고 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후 말했다.

"증거물 제출하겠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사전에 신고되지 않은 증거는..."

"뭐, 별 것 있겠습니까. 그냥 하시죠."

한도를 힐끔 본 판사는 검사와 윤지측 변호인의 이의제기를 무시했다. 그런 그들이 분통을 터트렸을 때 한도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에. 윤지 양에게 묻겠습니다. 윤지양. 운현이 당신을 강간했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네."

연기 참 잘한다. 무척이나 충격을 받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작게 대답한 그녀를 향해 한도는 빙긋 웃었다.

"그럼 다른 남자와는 하지 않았다는... 그런 얘기겠죠?"

"...네. 운현이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자. 제시된 증거물을..."

한도는 아까 전 판사에게 보여 주었던 녹음기를 틀었다. 볼륨을 최대로 한 녹음기에서 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 윤지야. 나 이거 빼고 한번만 하면 안될까?"

"바보야... 위험한 날이라고..."

그 목소리를 들은 윤지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충격과 공포로 물든 그녀의 얼굴이 자신에게 향해지자 운현은 싸늘히 웃었다. 평소 그가 짓던 어수룩한 미소가 아닌. 그야말로 상대를 조롱하며 가소롭다고 비웃는 웃음. 그 웃음에 윤지는 불안한 얼굴로 변호사를 보았다.

인수 역시 녹음기의 목소리에 무척 당황한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던 그가 딱딱히 굳었을 때 한도는 이를 드러내었다.

"자, 잠깐만요! 이게 뭡니까!?"

"뭐냐고 여쭤보신다면 윤지 양과... 뭐 주인공의 이름은 내용에서 나올겁니다만."

인수는 필사적으로 녹음기가 재생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런 그를 향해 한도는 무덤덤히 말했고 윤지측 변호사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하다가 판사에게 외쳤다.

"이의있습니다!! 피고측 변호인은 본 사건과 관련되지 않은 증거로 법정을 흔들려 하고 있습니다!"

"기각합니다. 피고측 변호인. 계속 하세요."

녹음기에 담겨 있는 목소리가 윤지의 목소리라는 것을 판사는 눈치챘다. 그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하자 한도는 씨익 웃으며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래도 하고 싶어. 응? 한번만 하자. 응?]

["정말... 알았어. 그럼 내가 삼십 셀때까지만 하는거야... 알았지?"]

녹음기 안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섹스를 할 때의 신음소리였다. 조용한 법정 안에 윤지의 신음소리와 정체불명의 남자가 헐떡대는 소리가 계속되었을 때 인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의있습니다!! 피고측 변호인은 누군지도 모를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해와 본 법정을 농락하고 있습니다!"

"...뭐. 일단 더 들어보죠."

또다시 기각된 자신의 이의 신청에 인수는 자리에 앉으며 이를 빠득 갈았다. 이런 년인 줄 알았다면 의뢰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들어도 이 목소리는 윤지의 목소리였다. 물론 신음성이 섞여 있어서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있었지만 이름이 나온 이상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거는 절대 아니었다.

["아아아앙! 찬성아! 내가 안에다가 하면 안된다고 했잖아!"]

["하아... 하아... 그래도 너 안에 싸주는거 좋아하잖아... 다른 애들이랑 할때도 그랬다면서... 사후 피임약 먹어."]

["그렇긴 하지만..."]

["정 뭐하면 운현 그 새끼랑 자고 오는게 어때? 너 걔랑도 해보고 싶다고 했잖아. 운현 그 병신 새끼가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 한번 대줘~ 난 니가 딴 새끼랑 하는 거 보는게 제일 흥분되더라. 후후후... 임신하면 내가 책임질게. 우리 결혼하면 되잖아? 응?"]

["후후후... 말은 잘해~ 그나저나 운현 그 찐따랑? 하긴... 걔..."]

"......"

판사는 피식 웃었다. 상황이 아주 재미있게 흘러가는 것에 그는 윤지와 운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윤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운현은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원고측 변호인.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저 목소리의 주인공이 윤지양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저 목소리일 뿐이잖습니까."

지친 얼굴로 인수가 말하자 한도는 어깨를 으쓱였다. 녹음기의 목소리만으로는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들이 가진 증거자료는 무척 많았기에 한도는 인수의 이의 제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합니다."

"피고측 변호인이 인정한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이 증거는 일단 진위여부를 파악한 후 증거 적격 심사를 거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오늘의 법정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주일 후에 다시 이곳에서 뵙도록 하지요."

판사가 나가자 운현은 한도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해진 윤지 쪽을 보며 피식 웃은 운현은 한도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한도의 차에 타자마자 운현은 한도의 담배를 입에 물며 물었다.

"나 좀 바쁜데 어쩌지?"

"원석과의 일 말씀이십니까? 원석이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루 정도면 된다고 하던데... 중국에 나가신다고 하셨죠?"

"응."

"첫번째 증거를 파기한다는 조건으로 상대측과 교섭을 하면 될겁니다."

이번에 보인 증거는 자신들에게 유리하면 유리했지 윤지 측에게 절대 유리할 일은 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자신들은 이것 말고도 증거가 있지 않은가. 그것도 결정적인 증거가. 한도의 말에 운현은 작게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띠리링."

핸드폰이 울린다. 운현이 핸드폰을 보자 한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굽니까?"

"윤지네. 에... '우리 지금 만나'... 라는데. 어떻게 할까?"

물어보고 있지만 운현은 나갈 생각따위는 조금도 없는 듯 했다. 그런 그를 향해 피식 웃은 한도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만나실 겁니까? 괜히 만나시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지? 귀찮기도 하고. 출발하자. 숙소로 가. 그리고 그쪽 변호사랑은 당신이 알아서 합의보고. 다음주에 나 바쁘니까 다다음주에 재판 하자고. 오케?"

"네. 그런데 무슨 일을 하시려는 겁니까?"

"니 돈 줄라고 돈 벌러 간다. 왜. 진짜 무보수로 할래?"

운현이 퉁명스레 말하자 한도는 피식 웃었다. 사실 이제 보수는 딱히 큰 상관이 없는 듯 했다. 이정도면 자신이 아니라 애송이 변호사 하나 붙여놔도 절대 질리 없는 판이었다.

'그와 함께 하는게 오히려 내게 이득이 될 것 같은데...'

절대 만들 수 없는 증거를 떡하니 만들어오는 능력 뿐만 아니라 일반인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능력들까지. 그의 말대로 운현은 진짜 인간이 아닌 마왕일지도 몰랐다.

'엿같은 헬반도에서 마왕과 손을 잡는다... 나쁘지 않잖아?'

어차피 변호사 일이라는 것이 마냥 깨끗한 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본다면 돈이라는 것을 받고 추한 일도 수도 없이 하는 것이 변호사 일이다. 그렇다면 마왕과 손을 잡는 것도 나쁜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기에 한도는 웃으며 말했다.

"무보수로 하신다면... 저에게 뭘 주실 겁니까?"

"뭘 원하는데?"

"먼저 물어 본 것은 접니다. 그리고 저 운전대 잡고 있으니 그 고통 주실 생각은 마시죠."

장난스럽게 그가 말하자 운현은 키득거리고 웃었다. 이정도 개김은 웃으면서 봐줄 수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널 함부로 무시할 수 없게 만들어주지. 어때?"

"이미 저 무시하는 사람은 몇명 없습니다만... 뭐, 그런 것따위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당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도 궁금하군요. 현세에 강림한 마왕이라... 제대로 따라보죠."

"이게 어떻게 된겁니까!! 저에게 거짓말을 하신거에요!?"

"그게..."

윤지를 데리고 변호사 사무실로 들어간 인수는 그녀를 향해 외쳤다. 괜한 의뢰를 맡아 자신의 커리어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그가 씩씩거리며 화를 내자 윤지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사, 사실 운현과 하고 난 후에... 다른 남자랑 했어요."

"내용이 이상하잖습니까!! 사실대로 말하세요!"

"...그게..."

윤지는 상당한 패닉 상태였다. 도대체 이 내용을 운현이 어떻게 녹음한 것일까. 찬성과 할때 운현은 없었다. 그녀가 당황하며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자 윤지측 변호인이 화를 내려고 하는 찰나 그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날아왔다. 그것을 차분히 읽은 그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상대측에서 증거로 제출한 녹음기를 증거로 쓰지 않겠다고 하는군요. 그 대신 재판을 일주일 미루자는데 괜찮으십니까?"

"...사, 상관없어요! 그런 것이라면...!"

윤지는 그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며 안도했다. 위험할 만한 증거였다. 그녀는 다행이라는 얼굴로 안도했지만 인수는 마냥 행복해할 만은 없었다.

'그 정도 되는 자료를 고작 일주일 재판을 미루는 것으로 날려먹겠다니... 도대체 또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는거야?'

그는 속이 쓰리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푹 내쉰 후 말했다.

"그 녹음기에 나왔던 찬성이라는 사람과 알고 있습니까? 조사하면 다 나오니까 거짓말 하지 마세요."

"...네. 알고 있어요. 그, 그치만 걔랑 한 것은 한번 뿐이라구요!"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죠. 하아... 알겠습니다. 일단 그 친구를 증인으로 데려와야겠군요."

239====================

준비

"이야. 이게 중국이야?"

태어나서 비행기라고는 한번도 타 본 적이 없던 운현은 베이징 국제 공항에 도착하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촌놈처럼 두리번거리는 그를 향해 피식 웃은 원석은 운현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괜히 그렇게 두리번 거리지 마십쇼. 짱깨 놈들은 그런 모습을 보이면 촌놈이라고 생각해서 사기치거나 소매치기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해보라지."

자신의 인벤토리라는 아공간에 손을 넣어 그것을 훔쳐 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놈이라면 오히려 환영이다. 엄청난 연구의 대상이 되어 줄 존재이기에 운현은 더 어리숙한 모습을 보였고 그런 그를 보며 원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냥 신나 하는 운현을 데리고 원석이 간 곳은 아만 앳 서머 팰리스였다. 북경 최고급 호텔 중 하나인 그곳에 들어 선 그는 화려한 호텔 내부를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는 운현을 데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꾸 이러실 거에요?"

"뭐 어때."

"일부러 이러시는 것 같은데..."

"응. 맞아."

"왜요? 빨리 일 처리하고 돌아가야죠. 가서 재판도 받으셔야 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젠장. 그래서 어쩌라고?"

"그냥 좀 평상시처럼 해주세요. 평상시처럼."

"호오...  평상시처럼?"

원석의 말에 운현은 입가의 웃음을 더더욱 짙게 만들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만큼은 웃고 있지 않는, 기괴하며 꺼림찍한 그의 표정에 원석은 움찔했다.

"...그냥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하긴, 저 인간을 습격하거나 소매치기 하는 인간이 있으면 그 사람이 불쌍한 사람이지. 원석이 두 손 들자 운현은 싱글거리며 비치된 의자에 앉았다.

"나 여기서 쉬고 있을테니까 볼 일 보고 오쇼."

"네."

편안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은 운현은 피스나의 책을 펼쳤다. 화려한 호텔의 모습? 보기는 좋다. 그런데 어쩌라고.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관광하러 온 것도 아니고 그럴 틈도 없었다. 이렇게 여유시간이라도 챙겨서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운현이 피스나의 책을 펼치고 삼십분 정도 읽었을 때 운현은 자신의 옆에 아리따운 아가씨 두명이 앉는 것을 보았다. 한국의 연예인급의 미모를 가진 그녀들이 다가와 중국어로 떠들자 운현은 인상을 구기고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이 능력으로 대화는 안통하는가보군.'

모든 언어를 해독가능하지만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중국어 간판을 읽어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알았지만 중국어는 한마디도 못하는 운현은 아가씨들이 당황하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책을 읽었다.

"운현님."

"음? 다 했냐?"

"옆에는 누굽니까?"

"몰라."

체크인을 끝낸 원석이 다가오자 운현은 이어폰을 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 그와 옆의 여자들을 번갈아 바라 본 원석은 피식 웃었다.

'이런 호텔에 어린 나이인 걸 보고 어딘가의 재벌 3세 정도 되는 줄 알았나보군.'

최고급 호텔인만큼 이곳에서 투숙하는 이들의 신분은 정말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 중에서 어린 나이라면 적어도 재벌급은 된다는 생각에 그를 꼬셔서 신데렐라가 되고 싶어하는 이들은 꽤 있었다.

재벌들은 미녀들을 만나 좋고, 미녀들은 즐기면서 돈도 벌고 신분 상승까지 할 수 있어서 좋다. 윈윈 정신에 입각한 호텔의 라운지의 모습에 원석이 쓴웃음을 지었을 때 운현은 책을 가방에 넣은 후 말했다.

"가자."

"시간도 남는데 즐기실 생각 없으십니까? 원하신다면..."

"됐어."

미녀냐. 아니냐. 라고 물어본다면 확실히 미녀들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현자의 시간 상태이든 아니든 이제 운현은 현실의 여자에 딱히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그들에게 받은 사랑만큼 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야...'

"어... 음."

운현이 무덤덤히 거절하자 원석은 순간 당황했다. 저 정도의 미녀라면 한국에서 찾아보기도 힘든 미녀들이다. 그런 그들과 즐기는 것이 싫다고 말한 운현을 위 아래로 흝어보던 원석은 운현에게서 한걸음 떨어져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남자 좋아하십니까?"

"앙!?"

"아닙니다. 그게... 원래 남자 고교생들은 여자만 보면 환장하는 그런거... 아닙니까?"

"미친 소리는 관둬. 됐고 방에나 들어가자. 작업은 언제 하는거지?"

"저녁에 시작될겁니다. 방에 계시면 제가 모시러 가죠."

"그래."

원석이 마련해 준 방은 무척이나 넓고 화려했다. 스위트 룸 정도는 아닌 듯 했지만 혼자 쓰기에는 꽤나 좋은 방이었지만 운현은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내일 갈건데 무슨...'

관광하러 온 것도 아니고 다른 밀수 수법과 다르게 운현이 인벤토리에 밀수품을 챙겨 넣고 다시 한국으로 복귀하면 되는 것이다. 별로 어려울 일도 아니고 시간이 걸릴 일도 아니기에 짐도 얼마 안가져 온 운현은 샤워를 하고 침대에 앉아 책을 읽었다.

"똑똑."

문이 열리고 짧은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미녀가 들어왔다. 호텔 종업원으로 보이는 그녀는 운현을 보며 어색한 한국어로 물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에 손님의 접대를 맡은 링링이라고 합니다. 원석님께서 운현님이 불편한 것이 없도록..."

"됐으니까 나가."

"...네?"

"나가서 원석 이새끼 데리고 들어와."

"...알겠습니다."

그녀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석이 들어왔다. 그가 오자 운현은 책을 옆으로 휙 던진 후 그의 목을 잡았다.

"컥!"

"너 진짜 사람 자꾸 빡치게 할래?"

"커억...컥..."

"이상한 걸로 사람 흥분하게 하지 마라. 거래고 나발이고 진짜 다 죽여버리기 전에."

"컥..."

한 손으로 목을 잡고 그를 가볍게 들어 올린 운현은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두려워하며 덜덜 떨자 운현은 그녀에게 싸늘히 물었다.

"이새끼가 뭐 시켰어."

"그... 운현님을 모시라고..."

"몸과 마음을 다해서?"

"...네. 사,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털썩."

"커억! 콜록! 콜록!"

"머리가 좋은 것 같아서 쓰려고 했는데... 아직 교육이 덜 된건가. 그럼 내 잘못이군."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고 원석을 잡아 의자에 앉혔다. 운현이 자신을 의자에 앉히자 원석은 당황하며 외쳤다.

"우, 운현님!! 이건 그게 제가 운현님이 쉬시는 동안 즐기시라고..."

"내가 씨발 필요 없다고 했냐. 안했냐."

과잉 충성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저 할 일만 하고,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 운현을 이제 튼튼한 동앗줄이라 생각하고 있는 원석은 운현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여자를 보낸 것이지만 운현에게 있어서는 시간을 뺏는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이 진행된다면 원석을 앞세워 이런 일 저런 일을 해야 한다. 그때마다 원석이 쓸데없는 충성심으로 나대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지금 제대로 교육을 시키는게 낫겠다 싶은 운현은 두려워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시작한다."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악!!!"

침투경이 몸 안에 파고들자 끔찍한 고통이 온 몸을 감싼다. 운현이 때린 것도 아니고 그저 손만 가져다 댄 것 뿐인데 그가 고통스러워하자 링링은 두려워하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아...악...으으..."

"자. 이제 네가 해야 할 일을 알았지?"

"허억...헉...네."

"뭐지?"

"시... 시킨 일만 하고..."

"그래. 그거야. 넌 그냥 내 의중을 읽으려고 할 필요 없어. 그냥 시키는대로.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거야."

"하아...으... 아,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교육은 이정도면 된 것 같군. 모르겠으면 말해. 수고스럽지만 다시 한번..."

"아닙니다! 아닙니다!"

원석은 겁에 질린 얼굴로 운현에게 말했다. 그의 모습에 운현은 피식 웃고 다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원석이 숨을 헐떡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링링은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흑흑... 흑... 저, 저는..."

"...그냥 나가."

"네에...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링링이 밖으로 나가자 원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대체 저 인간은 뭘 원하는 것인가. 돈? 여자? 그것도 아니면 힘? 권력?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르겠다.

"괜히 머리 굴리지 마라."

"...알겠습니다."

저녁이 되자 원석은 운현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자 운현은 블랙 플래그 세트로 옷을 갈아입은 후 그와 함께 준비된 검은색 승용차에 탔다.

"누구랑 하는거야?"

"삼합회와 하는 겁니다. 괜한 얘기를 하면 거래가 무너질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운현의 무신경함때문에 거래가 파토날까봐 원석은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괜히 일을 그르칠 생각이 없었던 운현은 별다른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차를 타고 간 후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커다란 창고였다. 덩치 큰 중국인 네명이 창고의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보며 원석과 운현은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검은 양복을 입은 건장한 중년인은 원석과 운현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어서 오시게나."

"반갑습니다. 왕대인."

원석은 중년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운현 역시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그것에 왕대인이라 불린 중년인은 빙긋 웃었다.

"그쪽이 이번에 받은 아우인가? 잘 생겼구만. 그런데... 물건을 가지고 가기에는 힘들지 않을까? 준비는 어떻게 된거지?"

"그건 저희쪽에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뭐 마음대로 하게. 대금은?"

"여기..."

원석은 운현이 들고 있는 두개의 커다란 가방을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그것을 받은 왕대인이 가방을 열고 고개를 끄덕이자 왕대인의 뒤에 있던 이들은 커다란 상자 두개와 가방 하나를 가져왔다.

"자. 물건들이네. 확인해봐도 좋아."

"그렇다면..."

상대가 사기를 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확인을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원석이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한 후 만족하자 왕대인은 빙그레 웃은 후 말했다.

"물건은 줬는데... 그걸 잘 운반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군. 새로운 루트를 찾은 건가? 괜찮다면 우리에게도 소개시켜주지 그래?"

밀수라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일단 뇌물을 먹여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다가 배를 이용할 경우 여러 나라를 들러야 했기에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래서 각 조직들마다 독자적인 밀수 루트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원석이 그 루트를 쓰지 않고 직접 거래를 하겠다는 것에 왕대인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자네가 그냥 무식하게 움직일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죠. 왕대인.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원석의 인사에 왕대인은 사람좋은 미소를 지은 후 운현에게 다가왔다. 자신에게까지 악수를 하려는 것일까? 운현은 왕대인의 손을 잡고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왕대인은 운현을 보며 씩 웃었다.

"내가 관상을 볼 줄 아는데... 자네의 눈에 강한 목표와 함께 무언가에 대한 증오가 섞여 있군. 뭐가 자네를 이렇게 만든건가?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자네의 적인 것 같은데... 맞나?"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왕대인이 말하자 운현은 잠시 생각한 후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의 웃음에 오히려 확신을 한 듯 왕대인은 손을 놓아 준 후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운현의 대답에 빙긋 웃은 왕대인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후 말했다.

"과한 증오심은 오히려 자네의 몸을 망치게 될 것인데... 괜찮겠나?"

"이미 각오한 바입니다. 그리고 증오... 사실 별로 관심없습니다. 저에게는 이루고자 하는 목표만 있을 뿐이죠."

몸을 상한다고? 그들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상하라지. 운현이 무덤덤히 답하자 왕대인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그는 껄껄 웃은 후 운현에게 말했다.

"하하하하... 그런가. 자네에게 요청 하나만 하지. 나중에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나? 그렇다면 나도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지. 어때?"

"동등한 거래라면 받아들이죠."

240====================

준비

왕대인과의 거래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 온 운현은 테이블 위에 왕대인에게 구입한 물건들을 올려 놓았다. 금괴가 잔뜩 담겨져 있는 상자. 권총이 가득 담겨 있는 상자. 가방에 가득 담겨져 있는 하얀 가루. 그것을 일일히 확인한 원석은 씨익 웃었다.

"한국에서 나올때도 안걸렸고, 이곳 세관을 통과할때도 안걸렸으니 문제는 없겠죠?"

"직접 보고 나서도 믿지 못하는 너의 의심은 칭찬할 만하지만 뭐... 정 뭐하면 때려치든가."

"아뇨. 그런 의미가 아니라..."

작은 일이 아니기에 한국에서 출국할 때 금괴 하나, 그리고 총 한자루, 마약 한봉지까지 운현에게 맡기고 실험을 했던 원석은 그의 능력이 진짜라는 것에 감탄했지만 여전히 불안감은 있는 모양이었다. 주의, 또 주의를 하는 그를 향해 피식 웃은 운현이 무덤덤히 말하자 원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나저나 왕대인이 처음 본 사람의 관상을 읽고 그렇게 호의적으로 나오는 것은 처음인데. 무엇에 대한 증오입니까?"

운현이 지금까지 말해주지 않은 증오라는 것에 원석은 흥미를 느꼈다. 설마 지금 하고 있는 재판은 아니겠지? 한도에게 듣

기론 지금 진행중인 재판은 지려고 마음 먹고 깽판을 치지 않는 이상 질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그 윤지라는 여자에 대한 증오는 아닐 것이다.

"알아서 뭐하게?"

"제가 도울 수 있는게 있나 싶어서요."

"어차피 나랑 함께 하고 있는 이상 넌 내 일을 돕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야. 이 거래도 그것 중 하나니까. 부탁이니 제발 넌 쓸데없는 짓이나 하지 마라. 넌 내 계획의 중요한 장기말 중 하나라고. 널 잃으면... 으 생각만 해도 빡치네."

기껏 공들였는데 그가 죽어버리면 그 분노는 누구에게 풀어야 한단 말인가. 운현이 싸늘히 말하자 그는 당황하다가 낮게 헛기침했다.

"크흠... 일단 이 물건들은 운현님께 맡기겠습니다. 이정도라면 소지한 것만으로도 위험하니까요. 세관에도 안걸린다면 여기서도 안걸리겠죠."

"근데 이정도면 얼마야?"

"한국에서 팔거나 다른 곳으로 넘기면 적어도 몇십억에서 잘만하면 몇백억까지 이득을 남길 수 있을겁니다. 솔직히 조금 아쉽군요. 이걸 조직에 바치면 저희가 받을 수 있는 돈은 새발의 피에 불과할텐데..."

"어차피 네 목적은 조직을 접수하는 것 아닌가? 그럼 그냥 선투자 한다고 생각해."

운현 역시도 피스나의 자료에 대한 분석이 어느정도 끝나기 전까지는 크게 돈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별다른 아쉬움없이 말했고 원석은 그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 밖에 없겠군요. 그래도 아깝군."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니야."

"의외의 말씀이군요. 뭐, 사랑. 우정. 그런게 중요하다는 겁니까?"

"아니. 힘이 짱이지."

"....."

돈이 있어봤자 그녀들을 살릴 수 없고 운명과 싸워 이길 수 없었다. 운명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압도적인 힘이 있어야 했다. 지금보다 몇배는 강력하고, 몇배는 더 치밀해져야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원석은 그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 푹 쉬십쇼."

"음. 잘자라... 아. 야."

"네?"

"나 이거 조금만 써도 되냐?"

"...그거 조금이 얼만지 아세요?"

"에이~ 좀만 쓸게~"

"마약은 관두시는게 좋습니다. 조직에 약쟁이들이 훅 가는걸 몇번이나 봤는데..."

"안해. 그냥 쓸데가 있어서 그런거야."

운현은 마약을 조금 덜어 작은 병에 담았다. 이정도면 시가로 삼천만원은 넘어갈 정도의 마약이다. 그가 그것을 챙기는 것을 말없이 응시한 원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된다고 해봤자 제 손해겠죠?"

"응."

"그럼 왜 물어보신겁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하하하하~ 감사. 감사. 잘 자라고~"

그의 인사를 받으며 원석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나갔고 운현은 병에 담겨져 있는 하얀 가루를 보고 빙긋 웃었다.

원석의 걱정과 다르게 밀수는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끝났다. 운현의 숙소에 물건이 놓이자 원석은 떨떠름한 얼굴로 운현을 보았다.

"뭐."

"아니... 참. 이게 이렇게 쉽게 될 줄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검사를 통과하는 운현을 보며 혼자 쫄려 있던 원석은 운현과 함께라면 정말 돈을 버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린 후 운현에게 카드를 하나 주었다.

"뭐냐?"

"필요한 거 있으시면 알아서 사세요. 현금 필요하시면 말씀하시고... 수익은 말씀하셨던대로 제가 8을 가져가겠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음대로 해. 그리고 이제부터 가드해달라면서? 얌전히 있다가 나 재판 끝나면 이거 내보내. 네가 힘을 키우기 전에 죽어버리면 다시 이짓을 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원석은 운현을 든든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지간한 연구소 이상의 보안이 되어 있는 집이니 누가 들어와도 걱정이 없었다. 원석이 웃으며 말하자 운현은 거실에 있는 컴퓨터로 메일을 확인한 후 쇼파에 앉아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무슨 책을 보시는 겁니까?"

운현이 비행기에서 책을 읽는 것을 보았던 원석은 그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알 수 없는 글자가 빽빽히 적혀져 있는 책을 떠올리며 그가 묻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인간의 정신과 혼, 육체를 구성하고 그것을 분리하는 방법."

"...무슨 마술서입니까? 판타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군요."

"그렇게 단순했으면 좋겠군."

자신은 이것을 현실에 적용시켜야 했다. 비록 몬스터의 코어를 이용한 방법이기는 했지만 그 코어가 현대의 물건과 합성을 했을 때 잘 움직인다는 것은 실험을 통해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전력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이 아닐까?

"우우우웅. 우우우웅."

"전화 온 것 같은데요?"

"흠."

운현의 전화기가 울리는 것을 보고 원석이 말하자 운현은 전화기를 들었다. 아버지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예. 아버지."

"잠깐 집에 좀 오거라. 네 엄마가 너 먹으라고 이것 저것 해놨다고 하더라. 재판 진행이 잘 되고 있다면서? 한도 변호사님 드시라고 녹용도 달여놨다고 하니 그것도 가져가고."

지금 부모님에게 운현은 한도와 함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운현을 위해서 무보수로 개고생하고 있을 한도를 생각하며 부모님이 이것저것 준비했다는 말에 운현은 떨떠름히 말했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다. 도와주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것을 갚아야 하는 거지."

"하아. 알겠어요."

괜찮다고 계속 거부하면 극성맞은 어머니는 그것을 들고 한도의 사무실로 직접 찾아올 것이다. 그랬다간 자신이 한도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수 있었고 그랬다간 이 여유로운 생활도 끝이다.

"나 잠깐 집에 좀 갔다올게."

"모셔다 드릴까요?"

"됐으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어디 나가서 쳐 맞고 울지 말고."

"하...하하하..."

무투파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디가서 싸움으로 밀린 적이 없었던 원석이다. 그런 자신을 어디가서 맞고다니는 약해빠진 놈으로 취급하는 운현을 향해 원석은 그저 머쓱해 할 뿐 이었다. 그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운현은 책을 인벤토리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르는 사람이 문 열어달라고 해도 문 열어주지 말고."

"제가 앱니까?"

"하는 짓 보면 애보다 심해. 아무튼 까불지 말고 여기에 얌전히 있어. 너는 가드해달라고 했고 난 그것을 허락했지. 네 멋대로 움직이면서 내 가드에서 벗어나 뒈지면 그건 내 책임아니니까 알아서 잘 처신해."

"알겠습니다."

원석을 숙소에 내버려두고 운현은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숙소였기에 운현은 느긋하게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골목을 지나 집 근처에 도착한 운현은 집 앞에 누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니가 왜 여기 있냐?"

"...어디 갔다온거야?"

윤지다. 불안한 얼굴로 집 근처에서 서성이는 그녀가 자신을 보고 걸어오며 묻자 운현은 팔짱을 끼고 피식 웃었다.

"우리가 그런 걸 이야기 할 사인가?"

이미 갈데까지 간 사이다. 운현은 평소의 어리숙한 웃음 대신 잔혹하고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본 윤지가 딱딱히 굳었을 때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담담히 말했다.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내 변호사랑 이야기 하지 그래?"

"운현아..."

"왜?"

"...그... 네가 나한테 되게 안좋은 기분일 수 있는데... 저기..."

"응."

"...우, 우리 화해하지 않을래?"

"헤에... 왜? 찬성이가 증인 안해준다디?"

"어떻게 그걸...? 너 설마 찬성이도 포섭한거니? 그런거니? 응?"

운현의 말대로 운현이 밀수를 하는 동안 찬성에게 증인을 요청했던 윤지는 그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한 것에 불안해했다. 찬성이 증언을 해주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상당히 불리하다.

"아니 딱히 포섭은 안했는데. 걔 포섭해서 어따쓰겠냐? 그거 없어도 알아서 잘 할 수 있는데."

"너, 너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엥? 내가 뭘 어쨌는데?"

윤지가 발악하며 외치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윤지에게 뭔가 한 기억은... 있다. 그녀의 마녀주스에 블랙 오크의 피를 탄 것. 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한 것이 없는 운현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윤지는 자신의 가슴을 꽉 잡으며 외쳤다.

"너때문에... 너 때문에...!! 네가 그때 안에다가 싸지만 안았어도!!"

"아니. 그걸 나한테 뭐라고 하면 어떡하냐? 찬성이 잡아와서 걔한테 따져. 왜 엄한 나한테..."

"네가 나를 강간 했잖아!"

"내가?"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린 후 피식 웃었다.

"그럴리가. 난 안했는데."

"...뭐? 이 나쁜놈...!"

윤지가 절망한 얼굴로 말하자 운현은 작게 키득거린 후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자 윤지는 뒷걸음질쳤고 운현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꺄악!?"

"야. 숨기려면 좀 잘 숨기든가. 훤히 보인다."

운현은 윤지의 옷자락 뒤에 있는 녹음기를 잡고 빙글 돌렸다. 그의 손에 녹음기가 들리자 윤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하면 그걸 녹음해서 어떻게든 쓰려고 한 모양인데. 난 언제나 진실만을 말할거야."

"너... 너 왜 이렇게 변했니... 이런거... 너 아니잖아. 왜 이렇게 날 힘들게... 너 나 좋아하잖아... 날 위해서... 날 위해서 이번 한번만 넘어가주면 안되니? 너 나 사랑한다고 했잖아... 운현아... 응?"

"사랑이라..."

확실히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하긴 했다. 운현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했다. 사랑이라. 사랑 좋지.

운현이 잠시 생각하는 동안 윤지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후 울먹거렸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운현은 쓰게 웃으며 쪼그려 앉아 윤지의 볼을 쓰다듬었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그녀의 얼굴을 운현은 천천히 흝어보았다. 아기처럼 부드러워보이던 피부는 요새 고생이 많았는지 꽤나 거칠어져 있었다.

"윤지야."

"응... 으응..."

예전에 들었던 운현의 자상한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안타까운 시선을 받으며 운현은 천천히 얼굴을 가져간 후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아직 멀었어."

"어...?"

"딴건 모르겠고... 날 엿먹이려고 한 것에 대한 내 보답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운현아... 운현아. 너. 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두렵다. 아무런 감정조차, 복수를 하는 것에 대한 흥분과 기쁨도. 자신에 대한 증오도 느껴지지 않는. 마치 무기질에 대고 이야기하는 듯한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에 윤지는 움찔 몸을 떨었다.

"무슨 짓이라..."

"내가. 내가 빌면 될까? 응? 운현아... 고소는 취하할게. 응? 이제 여기서 끝내자."

"시작할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끝낼때는 아니란다."

여기서 윤지가 고소를 취하하는 것은 운현에게 있어서 딱히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운현이 일을 이렇게 키운 것은 그들에 대한 복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찬성과 윤지를 적절히 파멸시키고 그들을 컨트롤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실험을 위한 실험체로 만드는 것. 그것도 매우 협력적인 실험체로 만드는 것이었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정말 많은 것을 준비했으니까 꼭 기대해줘."

"...뭐?"

"준비하느라 정말 힘들었다고. 그리고 찬성이가 안 도와줬다고? 걱정마. 그건 내가 꼭 해결해줄테니까 말야."

"무슨... 무슨 소리야?"

"그건 다음 재판을 기대하도록. 아주 재밌는 재판이 될테니까 말야."

"야! 야야야!!"

"그럼 조심히 들어가. 홀몸도 아닌데 주의해야지."

운현은 윤지의 머리를 쓱 쓰다듬어 준 후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마치 오물이라도 만진 것처럼 행동하는 그를 절망감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던 윤지는 빠득 이를 갈았다.

"너... 후회할거야."

"뭐. 지금의 내 인생 자체가 후회 덩어리라서 여기서 후회 몇개 추가한다고 해서 티나 나겠냐. 그런 걱정은 하지 말고 어여 들어가. 밤바람 춥다. 그러다가 애 다치면 어떡하려고."

히죽 웃은 운현은 느긋하게 말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자 윤지는 빠드득 이를 갈고 눈에 핏발을 세우며 그의 집을 노려보았다.

241====================

준비

"저 왔어요."

"왜 이제야 오니!? 그래. 한도 변호사님 말씀은 잘 듣고 있고?"

"네."

어머니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식탁에 앉았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식탁을 물끄러미 보던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린 후 물었다.

"왜 이렇게 차렸어요?"

"어... 네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고생은 고생인데... 분위기가 좀 안좋네요. 뭔 일있어요?"

운현의 질문에 어머니는 잠시 고민하다가 살며시 시선을 돌려 아버지를 보았고 한성우는 한숨을 푹 내쉰 후 말했다.

"운현아. 놀라지 말고 들으렴. 그... 학교에서 말이다..."

"저 퇴학처리했다구요?"

"...그걸 어떻게... 그 사람들이 너한테도 전화했냐?"

"아니 뭐, 이런 소동을 냈는데 그 인간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진 않았죠."

지금 누구보다 힘든 것은 운현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한성우와 김운정은 운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멍하니 그를 보았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 중 갈비찜을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린 그가 자신들을 보자 한성우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뭐 고등학교 검정고시로도 충분하지. 이런 일이 네 인생에 큰 도움이 될거다. 좋은 경험이 될거야."

애써 위로를 하는 한성우를 향해 운현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힘들어하는데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 밖에 없다는 것에 김운정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웃으며 운현은 차분히 말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근데 동네에서는 별 얘기 없어요?"

"우리 일도 신경쓰지 말렴."

김운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운현은 자신이 숙소에 가 있는 동안 흥신소 직원이 가져다 준 정보를 모두 확인했고 그 덕분에 동네의 주민들이 운현네 집에 이상한 소문을 내고 테러를 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보다 훨씬 심해진 테러에도 그들은 운현이 걱정할까봐 애써 웃고 있었다.

'동네에 정은 확 떨어지겠군.'

"이번 일 잘 풀리면 시골로 내려가시는 건 어때요? 어차피 저 졸업하고 대학들어가면 시골로 가신다고 하셨잖아요?"

그의 말에 한성우와 김운정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안그래도 운현의 일 때문에 동네에서 안좋은 시선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도망치듯 가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한성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려 하자 운현은 차분히 말했다.

"그냥 가면 뭐하니까 뒷 일은 한도 형님과 함께 제가 처리할게요."

"뭘 어쩌려고? 넌 그냥 딴 생각 말고 검정고시 치룰 준비나 하려무나. 이한도 변호사님 말씀이 특별한 일 없으면 우리가 이긴다고 했으니까. 알았지?"

"흠... 뭐 알겠어요."

어차피 쉽게 마음을 바꾸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강제로라도 보내버리는 수 밖에. 일부러 강한 모습을 보이는 부모님을 향해 빙긋 웃은 운현은 저녁을 다 먹고 녹용을 챙긴 후 밖으로 나와 숙소로 향했다.

"드르륵..."

"예상은 했지만 너무 예상대로 나오니까 진짜 식상하다. 하아... 윤지가 시키더냐."

골목에 들어서자 쇠파이프를 들고 얼굴에 복면을 쓴 덩치 네명이 앞을 막는 것을 본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윤지가 죽일 듯 노려보던게 뭔가 수작을 부릴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던 운현은 팔짱을 낀 채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귀찮으니까 빨리 끝내자."

"야아아아아!!"

조폭을 상대하는 일도 쉬운데 아직 덜 여문 이놈들이 뭐가 걱정이겠는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게 날아오는 쇠파이프를 가볍게 피해낸 운현은 그의 명치를 주먹으로 강하게 후려쳤다.

"퍽!!"

"커억! 쿨럭! 쿨럭!"

명치를 제대로 맞은 그가 바닥에 쓰러지자 운현은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 찍은 후 복면을 벗겼다. 뒷집 상근이다. 윤지를 좋아하던 녀석인만큼 윤지가 부탁을 했으니 마치 자기가 정의의 흑기사라도 된 것처럼 나선 것이겠지. 운현은 숨도 제대로 못쉬며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머리채를 잡아올린 후 말했다.

"윤지가 시키디?"

"쿨럭! 쿨럭!"

"에라이."

한방에 전의를 상실하고 울고 있는 그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운현은 다른 녀석이 각목을 자신에게 휘두르자 그것을 피해낸 후 다시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는 턱에 한방. 턱을 맞고 그가 쓰러지자 운현은 그의 복면도 벗겨보았다. 앞집 윤호다.

"이새끼는 지 여자친구도 있는 놈이 왜 여길 낀거지?"

기절한 녀석에게 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운현은 그를 집어 뒤로 휙 던졌다. 단번에 두명을 때려잡은 그의 모습에 복면인들은 당황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그들을 바라보던 운현은 윤호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피우며 윤호의 등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너넨 누구냐? 아. 안말해도 괜찮아. 어차피 얘들 깨면 물어봐서 다 조져버릴거니까."

"이. 이야아아아아!!"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운현을 향해 달려들었고 운현은 그 둘의 공격을 피해낸 후 연속으로 주먹을 날렸다. 각각 명치와 턱을 맞은 그들이 허물어지듯 쓰러지자 운현은 그들의 복면을 벗긴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들은 또 누구야?"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놈들이다. 별 놈들에게까지 습격을 받은 운현은 입맛을 다시다가 명치를 맞고 꺽꺽 거리는 정체 불명의 청년의 볼을 톡톡 치며 물었다.

"이름. 나이. 좋아하는 가수, 취미생활, 좋아하는 야동 취향... 까지는 필요 없고. 이름이 뭐유?"

"커억... 이... 새끼..."

"짜악!"

이를 꽉 깨물며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려는 그의 볼을 강하게 후려친 운현은 입술이 터진 그를 잡고 다시 물었다.

"이름."

"이... 이형근..."

"나이."

"스, 스물 한살..."

"허. 거 참 살만큼 사신 분이 뭔 깡으로 이런 일을..."

상근이나 윤호야 아직 미성년자니까 이런 일 해도 빨간 줄 그일 일 없는데 이 인간은 이제 걸리면 빨간 줄인데 뭔 깡으로 이렇게 덤벼든 것인지 모르겠다. 운현은 어이없어하며 그의 머리칼을 꽉 잡아 올렸다.

"왜 이런 짓을 한거유?"

"그... 그년이 대준다고 해서..."

"이야. 참 훌륭하다."

자신이 가진 무기는 풀 활용하는구나. 윤지에게 감탄한 운현은 히죽 웃었다. 윤지야 객관적으로 보면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으니 그런 애가 대준다고 하면 나이 먹고도 일진놀이에 심취한 녀석들은 충분히 나설만한 이유가 되었다. 형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쓰러져 있는 그들을 둘러본 후 히죽 웃었다.

"에... 그래도 날 습격한 인간들을 그냥 보내주긴 좀 그렇고. 어디 한두군데는 좀 부러져야 좋겠지만..."

운현은 히죽 웃은 후 그들을 내버려두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너 새끼를 그냥 놔두고 부러트리면 일이 좀 힘들어질거야. 그렇겠지? 윤만아."

"히익!?"

골목에서 카메라를 들고 운현을 찍던 운현네 뒷집 아들인 윤만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캠코더를 챙겨 운현은 내용을 확인했다. 운현이 골목에 들어왔을 때부터 저들이 자신을 습격하는 모든 영상이 찍혀 있는 것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런 걸 찍은걸까?

"윤지냐?"

"...아, 아니. 그게... 이. 이런 거라도 하면 윤지가 한번 해주지 않을까해서..."

"아아... 이 안타까운 중생들 같으니라고."

여자 하나에 낚여서 이렇게 휘둘리다니. 참 가슴아픈 일이다. 성욕의 노예가 되어 이쁜 여자가 대준다고 하니 범법행위도 마구 저지르는 그들의 모습에 탄식을 터트린 운현은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쌍한 것들. 내 친히 너희들에게 가르침을 내리겠노라. 색욕이야말로 인생 망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무슨...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침투경이 온 몸을 타고 돌자 윤만은 고통의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운현은 윤만이 침투경의 고통에서 간신히 나오자 그를 향해 말했다.

"자자. 윤지에게 전해. 이런 짓 해도 재미없고 시간만 날려먹으니까 몸 소중히 여기라고."

"아으...으..."

너무 큰 고통에 정신을 놔버린 듯한 그의 볼을 후려친 운현은 그의 정신이 돌아오자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윤지한테 전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라고."

"응! 응! 아, 알았어!"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윤만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만족한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냥 가려고 하자 윤만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 운현아."

"왜?"

"그냥... 가는거야? 우, 우리한테 뭐. 다. 다른 뭐... 보, 보복같은 건 안하는거야?"

평소 알고 지내던 운현이 아닌 것 같다. 이 고통도 그렇고. 네명을 순식간에 쓰러트리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무감정한 시선도 그렇고. 그가 두려워진 윤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보복이라고 해봤자... 너네가 나한테 한 일이라고 해봤자 나 길가는 거 막은 것 밖에 더 있냐?"

"응...? 우리가 널 공격..."

"네가... 아니, 너네가 나한테 할 수 있는... 아니 한 일이 뭐가 있었는데?"

운현은 가소롭다는 듯 차갑게 비웃었다. 그의 말에 윤만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의 말대로다. 자신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그저 그가 지나가는 길을 막은 정도에 불과했다.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고 아무런 경각심도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것에 운현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을 느낀 윤만은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고 운현은 그를 향해 피식 웃은 후 몸을 돌리려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 그래도 나중에 또 깨어나서 사람 귀찮게 할 수도 있으니."

사람이란게 망각의 동물이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금방 사라지기 마련이다. 자신도 그렇지 않은가. 실패했지만 다시 도전하려 한다. 이들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에 운현은 씨익 웃은 후 쓰러져 있는 네명에게 다가갔다.

"우드득!"

"아아아아아악!!"

"시끄러워."

한명 한명 한쪽씩 팔을 부러트린 운현은 고통에 신음하며 눈물흘리는 그들을 본 후 윤만에게 다가갔다.

"구급차 좀 불러주렴. 에... 그래도 넌 안덤볐으니까 봐줬다."

운현은 피식 웃고 골목을 빠져나갔고 윤만은 바닥에 쓰러져 엉엉 울고 있는 네명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 재판 날입니다. 잘하면 오늘 끝날 수도 있겠군요. 증인으로 은찬성이 나오기로 했는데... 준비는 다 하셨습니까?"

"뭔 준비. 아아. 그거? 응. 했지. 당연히. 그게 제일 중요한건데~"

재판날이 되자 숙소로 온 한도는 운현을 향해 현재 상황을 말해주었다. 중국에 다녀오고 난 이후 몇가지 일을 하러 밖에 잠깐 나간 것 외에는 계속 원석과 숙소에만 짱밖혀서 책만 읽었던 그는 한도의 말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겉옷을 입었다.

"오늘 끝... 뭐 그래. 계속 이걸로 끌기도 그러니까. 대충 마무리 짓자고."

찬성이 나왔다면 됐다. 윤지가 어떻게 찬성을 끌어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괜한 일을 줄였다는 생각에 운현은 무심히 말했고 한도는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그럼 남은 것은 무고죄로 저희가 고소를 하는 건데...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시킨 대로 해. 아니면 내 말 어기고 고소하고 싶어?"

"그럴리가요."

운현이 도발하자 한도는 어깨를 으쓱인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들의 전문이 이런 것 아니겠는가. 한도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하자 운현은 씩 웃었다.

"그럼 이거 끝나고 다른 자료들 줄테니까 한꺼번에 고소 조치 가능하지? 이왕 하는거 너네 사무실 할 일 없는 변호사들 좀 움직여줬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돈이 듭니다만..."

"원석쿤!"

"하아. 네."

오늘 재판이 끝나 운현이 자유로워지면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투자금이라고 생각하며 원석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물었다.

"얼마가 필요합니까?"

"큰거 열장만 줘."

"일억!?"

"운현님이 원하시는게 완전히 작살을 내는 거라면 그정도는 있어야지. 최고의 변호사들만 선임할거니까 말야."

부모님이 동네에 미련을 가지고 있으니 동네 자체를 부숴버릴 생각을 한 운현은 한도에게 요청했고 한도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자료는 차고 넘쳤다. 운현이 죄가 없다는 것이 밝혀지고 무고죄로 윤지네를 고소하게 된다면 그동안 운현의 집에 가해진 괴롭힘을 고스란히 돌려 줄 수 있었다.

"그 흥신소 일 잘하네. 걔들도 포섭할까?"

진짜 일 잘해줬다. 그들은 동네에서 운현의 집에 시비를 걸거나 깽판을 놓은 집들을 완벽하게 조사를 하고 증거자료까지 마련해 놨다. 이정도면 매우 훌륭하다. 그가 웃으며 말하자 원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잘 풀리면 그렇게 하죠. 그럼 슬슬 나가셔야 할 것 같은데... 가시죠."

"넌 어디 나가서 쳐맞고 울면서 들어오지 말고 여기 있어라."

"...네."

법원에 도착한 운현과 한도는 처음과 달리 꽤나 가라앉아 있는 윤지측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여유롭게 자리에 앉은 운현이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그를 바라보던 원인수는 운현에게 다가갔다.

"뭡니까?"

"아, 아뇨. 선배님. 그게 아니라..."

"내 고용주와 이야기 하려면 나랑 먼저 이야기하는게 좋을텐데..."

"끙..."

운현이 나이가 어린 만큼 잘 꼬드겨서 그냥 이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적당히 합의금을 주고 끝내고 싶었던 윤지측 변호사는 한도가 나서자 결국 한마디도 못한 채 돌아가버렸다. 그가 가버리자 한도는 윤지의 부모를 보고 피식 웃었다. 처음에 그렇게 득의양양하더니만 지금은 완전히 똥씹은 표정들이다.

'자기들도 이제 딸을 믿지 못하겠지...'

십팔년동안 기른 딸의 목소리다. 아무리 신음소리라고 하지만 그것을 모르겠는가. 한도는 똥씹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윤지의 아버지를 보며 피식 웃은 후 자리에 앉았다

"재판장님 들어오십니다."

242====================

준비

"자... 그럼 사건번호 63-4711번. 시작하겠습니다. 원고측 변호인. 증인 신청하셨죠?"

"네. 저번에 기각된 피고측 증거물에서 나온 찬성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뭐, 동명이인인 듯 싶습니다만..."

"피고측. 증인 참석에 동의하십니까?"

"네."

증인을 부르든 뭘 하든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의미 없을 테니까. 한도는 재판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문이 열리며 찬성이 나왔다.

"야! 니가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느긋하게 있던 운현이 벌떡 일어나 낭패한 얼굴로 소리치자 원인수는 이를 드러내었다. 저렇게 당황하는 것을 보니 저번에 냈던 증거가 날조된 것이 확실했다. 그러니 고작 재판을 미루는데 써버리지. 그가 키득거리자 운현은 씩씩거리며 찬성을 보았고 찬성은 운현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다. 친구야. 그래도 거짓을 말할 수는 없잖아."

"거짓은 무슨!! 너...!!"

"친구여. 미안하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능글맞게 웃은 찬성은 증인석에 섰다. 증인의 선서를 마친 그를 향해 빙긋 웃은 인수는 찬성에게 다가가 물었다.

"증인. 원고인과 피고인과 무슨 관계입니까?"

"친구입니다."

"혹시 원고와... 그 성관계를 맺은 일이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이새끼야!!"

"피고인! 조용히 하세요!!"

당황하는 운현을 보며 인수와 윤지의 부모님은 씨익 웃었다. 하지만 윤지만은 불안한 얼굴이었다. 운현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저것 마저도 운현이 꾸미는 개수작으로 보인 그녀는 찬성을 힐끔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 운현이 찬성을 꼬드긴 것이 아닐까? 자신을 엿먹이기 위해 저 두놈이 짠 것은 아닐까 싶었던 그녀가 두려워할 때 인수는 찬성에게 몇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모두 윤지에게 유리할 만한 질문들이었고 찬성은 그가 원하는대로 그녀에게 유리한 답변을 했다.

'아니겠지... 지금 이렇게 되는데... 아니겠지?'

불안해하던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운현과 한도를 보았다. 둘 다 당황한 표정이다. 그럼 안심해도 되지 않을까? 그때 윤지는 운현의 말이 떠올랐다.

'준비하느라 정말 힘들었다고. 그리고 찬성이가 안 도와줬다고? 걱정마. 그건 내가 꼭 해결해줄테니까 말야.'

'설마... 이것도 저 자식이 꾸민 일인가?'

자기가 그토록 부탁해도 증인이 되지 않겠다던 찬성이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가 뭘까? 그녀는 운현을 힐끔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찬성이... 윤지가 불안해하는 동안 모든 질문을 마친 인수는 자리로 돌아왔고 재판장은 그것을 보다가 한도에게 물었다.

"피고측 질문 없으십니까?"

"에... 찬성군. 이라고 했죠? 자자. 윤지양과 그냥 친구 관계라는게 사실입니까? 육체적 관계 없구요?"

"네. 사실입니다."

"그... 제가 알기로는 이번 일의 증인이 되는 것에 상당히 부정적이라고 들었는데... 왜 마음을 바꾸셨습니까?"

한도의 질문에 찬성은 빙긋 웃었다.

"제 친한 친구가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을 막고 싶었습니다. 어쨌든 운현은 제 베스트 프렌드이니까요. 그가 죄값을 받고 나와 새로운 삶을 살았으면 했습니다."

"혹시 금품같은걸 받은 건 아니죠?"

한도의 질문에 인수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의있습니다! 지금 피고측은 증인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금품이라니요! 저희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인정합니다. 피고측 변호인. 주의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방금 발언은 사과드리도록 하지요. 원고측에서 금품으로 매수한 일은 없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한도는 빙긋 웃었다. 당연히 그들이 금품으로 매수할리는 없었다.

'내가 매수를 했는데.'

운현은 찬성이 증인으로 나와주길 바랬고 한도 역시도 그가 증인으로 나와서 윤지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주길 바랬다. 그렇기에 사람을 사서 찬성을 매수한 한도는 생각보다 쉽게 그가 넘어 온 것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고작 천만원에 낚일 줄은 몰랐지만...'

맥스로 따지면 일억까지도 생각을 했는데 찬성은 고작 푼돈에 증언을 한다고 나와버렸다. 이래서 애들은 안되는 것이다. 천만원은 솔직히 자신들의 입장에서 큰 의미가 없는 돈이었다. 특히나 원석의 말에 따르면 운현이 한번 움직이면 벌 수 있는 돈이 수십억 단위라고 했으니 더욱 그랬다.

'이 증거물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그가 나오는 것이 낫지.'

한도는 씩 웃은 후 재판장을 보았다.

"증거물 하나 제출해도 되겠습니까?"

"뭐!? 또!? 안돼! 인정할 수 없어!! 사전에 등록하지 않은 증거물을 왜!!"

"이번엔 뭡니까? 또?"

재판장은 피식 웃은 후 물었다. 저번에 냈던 증거물을 취소신청한 것에 흥미를 느낀 재판장은 이번 증거물은 또 뭔가 싶었다. 그가 묻자 한도는 박수를 쳤고 밖에서 기다리던 기사들이 나와 40인치 TV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게 뭡니까?"

"아. 이번 증거물은 동영상이거든요."

"동영...상이요?"

저번에는 소리만 내더니 이번에는 동영상이란 말인가? 재판장이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윤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한운현! 설마!?"

당황한 윤지와 무슨 일인지 모르는 찬성. 그리고 창백한 안색이 된 인수. 그들을 보며 한도는 어깨를 으쓱인 후 티비와 캠코더를 연결했다.

["야!? 너 왜 이래!?"]

야산의 후미진 곳에 서 있던 찬성이 말하는 영상이 틀어졌다. 그것을 본 찬성과 윤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자 운현은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편히 기댔다.

["하아... 나, 나 좀 어떻게 해줘.."]

잔뜩 달아오른 윤지가 찬성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고 그녀를 보며 찬성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럼 일단 빨아줘보실까?"]

윤지가 자신을 원하는 것에 전혀 당황한 기색도 없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장면이 나오자 윤지측과 찬성은 기겁했다.

"이, 이의 있습니다... 그, 시, 신성한 법정에서 저런..."

"왜요? 증거물입니다. 증거물. 일단 첫번째. 저 증인이 위증을 하고 있다는 증거물이고 두번째. 윤지 양이 제 의뢰인인 운현 외에 다른 남자랑도 했다는 증거. 음란물이 아니라는 거죠."

한도는 키득거리며 말했고 그의 말에 인수는 인상을 왕창 구긴 후 찬성과 윤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윤지가 찬성의 양물을 정신없이 핥는 그 모습에 윤지의 부모는 완전히 멘탈이 나가버렸는지 아무런 말도 못했다.

"한운현! 이 개새끼야!! 이건 어떻게 찍은거야!?"

마치 셋이 합의하에 이런 장면을 촬영한 것처럼 적나라하게 둘의 얼굴이 모두 나오는 장면이 나오자 윤지는 이를 갈며 날뛰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방금 전까지의 낭패한 모습을 완전히 지운 후 무척이나 즐거워하며 키득거린 후 여유있게 말했다.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준비했다니까? 어때? 마음에 들었어?"

"그만! 그만 틀어!! 아아아아!! 보지마아아아앗!! 은찬성! 이 개새끼야!! 빨리 막아! 빨리 저거 꺼버리라고오오오!!!"

히스테릭하게 외치는 윤지의 모습에는 지금까지 그녀가 보였던 청순함과 피해자 코스프레 따위는 없었다. 날카롭게 째지는 그녀의 외침에 찬성은 허둥지둥 티비를 끄려 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티비 앞으로 간 운현은 그의 몸을 가볍게 막았다.

"친구여!! 내 친한 친구가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은 내가 막아야겠네! 법정 증거물에 손대려 하다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비켜! 이 개새끼야!!"

자신과 윤지가 하는 장면이 계속 틀어지는 것에 찬성은 이를 갈며 그에게 주먹을 내뻗었다. 그 주먹에 얼굴을 맞은 운현이 비틀거리며 쓰러지자 찬성은 티비로 달려가 그 선을 뽑아내고 캠코더를 집어 바닥에 내던졌다.

"와직!!"

"허억...허억..."

"증거물 파손이라. 이거 꽤 큰 죄인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요?"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운현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찬성을 바라보고 있는 재판장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재판장은 인상을 왕창 쓰며 말했다.

"그렇지. 증인.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압니까?"

"헉... 아... 그, 그게..."

그제서야 냉정을 되찾은 찬성은 자신이 한 일에 당황했다. 그를 향해 운현은 피식 웃은 후 능글맞은 어조로 말했다.

"저 자식 약 빤거 아니에요? 맨 정신으로는 이런 짓 못하잖아요."

"증인 데리고 나가세요."

법정에서 일어난 소란에 경비원들이 나왔다. 그들이 찬성을 잡았을 때 운현은 낭패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찬성에게 다가가 그의 볼을 톡 쳐 준 후 부드럽게 말했다.

"친구여.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너, 너 이 개새끼...!!"

찬성이 이를 갈며 말했지만 운현은 그저 싱글거릴 뿐 이었다. 그가 끌려나가자 한도는 손을 들어 올리며 재판장에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위증입니다. 증인에 대한 금품 수수 여부를 확인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우리는 그런 짓 안했다고!!"

인수는 다급히 외쳤다. 찬성이 왜 위증을 한 것인가. 그것은 자신 역시 의문이었다. 차라리 나오지나 말 것이지. 이것으로 자신의 커리어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것에 절망한 인수가 외쳤지만 한도나 재판장은 그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군요. 지금 증인의 집에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금품수수가 사실이라면 이건 그냥 넘어갈만한 일이 아니다. 재판장은 대기하고 있는 경비에게 몇가지를 이야기했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인 후 법정에서 나갔다.

"자. 그럼 하던 일 마저 할까요?"

거의 넉 다운 되어 있는 윤지측을 보며 한도는 느긋하게 말했다. 재판장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더 해보라는 표정이 되었다. 이정도 되었다면 재판의 결과는 운현의 승리다. 다만 완벽한 승리를 위해서는 운현의 강간 혐의를 벗겨야 하는 것이 있었다.

"제 의뢰인이 강간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여기 있습니다."

"똡니까... 또? 저는 인정 못합니다."

"한번 들어보죠."

"재판장님!! 자꾸 이러실 겁니까!?"

증거가 나오면 나올 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해진다. 인수가 발작하듯 외치자 재판장은 피식 웃은 후 싸늘히 말했다.

"지금 저는 한 여인이 거짓으로 한 남자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어 가려던 것이 막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괜히 나서서 엄한 사람 파멸시키려는 측에 끼지 말고 얌전히 계시지요."

지금까지 나온 증거와 상황으로 보았을 때 재판장은 이미 운현측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듯 보였다. 그것에 인수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만진 후 윤지와 윤지의 부모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저 개 갈보년만 아니었어도...'

저런 갈보년인 줄만 알았어도 이딴 의뢰는 안받았을텐데.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속아서 이 일을 맡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파고 들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애인 사이끼리도 강간죄는 성립된다. 그가 그것에만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 한도는 녹음기를 재생시켰다.

["유, 윤지야. 괜찮아?"]

운현의 목소리가 나오자 윤지는 절망했다. 설마 그때 녹음을 했단 말인가? 그녀가 부르르 떨자 인수는 휙 그녀를 노려보았다.

["...나 왜..."]

["너... 너 아까 하다가... 기절했잖아."]

"이의... 있습니다."

인수가 힘없이 말했지만 재판장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만 집중한 그는 녹음된 모든 소리를 듣고 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도면 실제로 했다고 하더라도 강간이 성립되지는 않겠군요."

재판장의 말에 인수는 절망했다. 윤지. 이 멍청한 년이 스스로 자백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합의간의 성관계를 한게 되어버린다. 물론 여기서 파고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더 해봤자 상대가 무슨 증거를 또 가지고 있을지 몰랐다. 괜한 발버둥이 되어버린다는 것에 절망한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재판장은 피식 웃으며 선고했다.

"더 볼 것도 없군요. 사건번호 63-4711번 사건은 원고측의 위증으로 파악되므로 피고측에 무죄를 선고합니다."

모든 증언이 거짓이다. 윤지의 첫 남자가 운현이라는 것도. 그녀가 운현 외에는 한 적이 없다는 것도. 심지어는 강간이라는 것도. 이정도 되면 재판을 할 여지조차 없는 것이었다. 선고를 마친 그는 운현에게 다가와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이런 증거가 있는데 왜 경찰 조사때는 안나왔던 겁니까?"

사건이 검찰로 넘어와 재판을 치루기 전까지 운현은 한번도 경찰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나와도 한도가 와서 몇가지 형식적인 답변만 해주고 갔다는 것을 아는 그가 궁금해하며 묻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바빴어요."

"허... 내가 보기에 이건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든 것 같은데... 아닌가요?"

"아. 그렇게 보였나요? 그렇게 보이셨다면 그런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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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흠..."

재판장은 운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이 나빴다. 운현은 이 재판을 이용해 한 여자를 타락시킨 것이다. 재판관으로서 이 재판같지도 않은 허접한 재판을 담당했다는 것이 기분이 나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운현이 꽤 마음에 들었다.

'사람이 이정도로 치밀해야지. 그런 걸 떠나서 저런 증거는 어떻게 마련한건지...'

당사자도 모를 정도로 증거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신기할 뿐 이었다. 특히 그 동영상. 아무리 봐도 셋이 함께 있을 때 찍은 것인데 찬성과 윤지는 그 영상이 촬영된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도 능력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멍청하게 당하는 자보다는 이용하고 승리하는 자가 더 좋은 그는 운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뭡니까?"

"그러고보니 제 소개도 안했군요. 저는 천민규라고 합니다."

"한운현입니다."

"압니다. 그거... 제가 보기에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군요."

"아니라고는 못하겠네요."

"후후후... 재밌어요. 좋아요. 운현씨. 다음에 또 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이런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천민규는 피식 웃으며 법정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운현은 느긋하게 기지개를 편 후 자료를 챙기는 한도에게 말했다.

"온 김에 일 처리 다하고 가는게 어때?"

"그러죠."

한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윤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앉아 있는 인수에게 다가간 한도는 고소장을 들어 올린 후 말했다.

"무고죄로 고소할테니까 준비하십쇼."

"이... 이 씨발! 난 안해! 젠장! 엿같은게 걸려서 왜 이딴 일을... 씨발!"

지금까지 당한 것도 열받는데 무고죄로 고소가 들어온다? 인수는 윤지를 보며 싸늘히 말했다.

"지 변호사한테까지 구라를 치는 년을 어떻게 변호해! 어디 아무 변호사나 구해보시지!"

거칠게 외친 그가 나가자 한도는 어깨를 으쓱인 후 윤지에게 고소장을 보여주었다.

"그럼 준비하세요. 뭐, 볼 것도 없겠군요. 여성학교에서 좋은 경험 치루기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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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아... 우, 운현아! 운현아아아!!"

한도를 밀치고 윤지는 튀어나가 운현에게 다가갔다. 폭포수처럼 눈물을 흘리며 윤지는 운현의 다리를 잡았다.

"운현아! 운현아! 내가 잘못했어! 응? 운현아아아!!"

"야야. 바지 벗겨진다. 좀 놔라."

"내, 내가 잘못했어! 응? 차, 찬성이가 시킨 일이야! 흐어어엉!! 너도 녹음기로 들었잖아아아!! 찬성이 그 새끼가 시킨 일이라고오오!! 난 잘 못 없어!! 응? 운현아아아!!"

윤지는 눈물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그의 다리를 잡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쪼그려 앉은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윤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운현...아?"

자상한 그의 행동에 윤지는 희망을 가졌다. 혹시? 운현이 자신을 용서해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찬성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모든 잘못은 은찬성 그 개새끼 때문이다. 그 새끼가 안에다가 싸지만 않았어도. 그새끼가 임신했을 때 책임진다고만 했었어도 운현에게 누명을 씌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운현아... 내가 잠깐. 잠깐 미쳤었나봐? 응? 미안해. 잘못했어... 내가, 내가 진짜 잘못했어. 응? 운현아아아아!! 우리 친구잖아. 너 나 사랑한다면서... 나도 너 사랑해. 그러니까 제발..."

"어휴. 이쁜 얼굴 다 망가지네. 그만 울어."

운현은 싱글거리며 윤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의 부드러운 태도에 윤지가 간신히 눈물을 그치자 운현은 그녀를 들어 자리에 앉힌 후 말했다.

"뭐... 원한다면 고소는 안해 줄 수 있는데 말이지."

"정말? 정말이야? 응? 진짜? 고마워... 고마워 운현아... 나 진짜 잘할게... 흑...으허어어엉!!"

"우, 운현아. 그... 그게 정말이니?"

"고맙다! 고마워!!"

"별 말씀을. 그래도 그냥 제가 고소 안하고 합의해주는 거는 좀 비싼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래! 얼마든지 해줄게!"

윤지의 아버지는 딸을 고소하지 않겠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고마웠는지 눈물을 흘리며 운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를 보며 빙긋 웃은 운현은 한도를 불렀다.

"자세한 것은 제 변호사랑 이야기해주세요."

'자... 이정도면 됐군.'

법원의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며 운현은 낮게 중얼거렸다. 윤지에 대한 복수심만 가지고 있었다면 이번에 그녀에게 고소미를 먹이고 소년원에 보내버려 인생을 쫑내버리겠지만 운현은 그녀에 대한 복수심은 거의 없었다. 그저 원하는 것은 좋은 실험체를 구하는 것 뿐 이었다.

강제로 의식을 분리시킬 수 있다면 고소미까지 처먹이고 납치해서 실험에 써버리겠지만 피스나의 연구일지에 따르면 의식을 분리하는 것은 스스로 원할 때 가능한 것이었다. 실험체가 스스로 실험에 자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 놓은 다음 봐줘서 자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심어 준 운현은 윤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큭큭큭... 그 꼴이라니... 진짜 웃기...쿨럭! 쿨럭! 크억..."

여전히 담배 연기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운현이 인상을 구겼을 때 흡연구역으로 온 한도는 담배를 입에 문 후 물었다.

"찬성의 집에서 마약이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

"자기는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일단 지금 구속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 역시 대한민국 공권력. 훌륭하다. 세금 낸 보람이 있구만."

"미성년자가 세금을 내봤자 얼마나 냈다고... 아무튼 왜 그러신 겁니까?"

"뭐가?"

"그 윤지네... 아.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고소장은 모두 접수시켰습니다. 내일부터 일 시작될겁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죠."

"응. 잘 했어. 윤지한테 왜 그랬냐라... 뭐. 개인적인 사정?"

아직은 실험체에 대한 내용까지 밝힐 이유는 없었다. 운현의 말에 한도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용서해줄 것이었으면 이정도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까지 진행한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던 한도는 볼을 긁적거렸다.

"말씀하시기론 합의금을 최대한 뜯으라고 하셨잖습니까. 이정도면 그냥 소년원 가는게 나을 정돈데요. 걔네 집 망할겁니다. 그리고 윤지라는 걔도... 저희쪽에서 최대한 힘을 발휘하면 윤지를 신용불량자로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을텐데... 그정도면 봐준 것도 아니잖습니까."

한도의 질문에 운현은 키득거린 후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누가 봐줬다고 했어? 개인적인 사정이라고 했지."

"그 개인적인 사정이 도대체 뭐길래."

"궁금해?"

"네. 궁금..."

운현이 씨익 웃으며 묻자 대답을 하려던 그는 그의 손이 올라오자 딱딱히 굳은 얼굴로 붕붕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니 궁금하진 않군요. 다 깊으신 생각이 있으시겠죠."

저번에 괜히 궁금해했다가 코꿰지 않았는가. 한도는 떨떠름히 웃으며 말했고 그를 향해 운현은 피식 마주 웃어주었다.

"응. 괜한 호기심은 몸을 상하게 하는 지름길이지. 아. 아무튼 재기 불능할 정도로 최대한 빼놓으라고."

"알겠습니다."

첫번째. 그녀에게 감사의 마음을 심어주기. 두번째. 그녀의 삶을 무너트리기. 아직 성인도 아닌데 성인이 되자마자 신용불량자가 되게 만들어버려 삶을 무너트린다.

세번째. 세번째는... 일단 세상의 가혹함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혹함 속에서 자신의 실험체가 되는 일만이 그 가혹함의 고리를 끊는 것이라 인식시켜주면 된다.

'제대로 된 실험체 하나 만드는게 쓸데없는 실험체 열 만들어서 실험하는 것보다 효과가 좋으니 어쩔 수 없지. 아직 실험을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숙성단계라고 생각하자. 그렇다고 내 몸을 가지고 실험을 할 수는 없으니... 젠장. 실험체 2도 꼬셔야 하는데 귀찮겠군. 얼른 원석을 키워야겠어.'

지금이야 원석이 힘이 없으니 제대로 움직일 수 없지만 그가 성경 그룹을 차지한다면 자신은 속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다만 그 기간이 한두달로는 택도 없다는 것이 문제지.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한도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몇가지 부탁할게 있는데."

"부탁입니까? 명령입니까?"

"명령."

"말씀하시죠."

"우리 부모님한테 전화오면 잘 좀 얘기해줘."

"예? 뭘요?"

밑도 끝도 없이 뭔 소린가. 한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운현은 다 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후 느긋하게 말했다.

"너랑 같이 살면서 검정고시 치루고 사법고시 준비한다고."

"...볼겁니까?"

"미쳤냐."

지금 당장 연구하고 공부할게 태산인데 검정고시나 사법고시를 치룰 여유따위는 없었다. 연구가 어느정도 성과를 이루게 된다면 모를까 지금은 택도 없는 얘기다. 그가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라고 명령하는 것에 한도는 어이가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다. 법조인으로서 이런 상황에 처해진 것이 무척 안타깝지만 그는 운현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숙소에서 하루 쉬고 다음날 집으로 들어 온 운현은 집 앞이 바글거리는 것에 피식 웃었다. 놀랍겠지. 뜬금없이 경찰들이 와서 난리를 치고 고소장이 접수됐을 테니 말이다.

"우, 운현아!!"

"운현아! 이게 무슨 일이냐! 왜 우리 아들이..."

"운현아! 미안하다! 이, 일부러 그런게 아니다!"

동네 주민들이 자신을 보며 달려들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까지 남의 집에다가 테러를 저지르고, 욕하고, 비웃던 사람들이 당장 자신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굽실거리기 시작한다. 그것을 보며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고 사람들은 운현을 애타게 불렀다.

"운현아아아아!!"

"이게 뭔 소란이냐. 도대체. 네가 한거니?"

"네."

어머니 운정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운현을 보며 물었고 운현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정이라고 화가 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친하게 지내던 동네 사람들이 한순간에 안면몰수하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것에 슬프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던 그녀는 운현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운현아... 하지만 이건."

"잘했어."

"여보?"

"저런 걸 보고 인면수심이라고 하는 거다. 사람이 어려울 때는 몰려들어서 치고 때리고 하더니. 이제와서 저렇게 말을 바꿔? 쓰레기같은 놈들."

아버지 성원은 오히려 잘 했다는 듯 운현을 보며 말했고 운정은 어찌 할 바를 몰라하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런데 변호사 선임비는 괜찮은거냐? 듣자하니 한두명을 고소한게 아니던데. 거의 동네 전체를 고소한 수준이던데..."

"네. 그건 걱정마세요."

"흐음... 이렇게 된 이상 진짜 시골로 내려가야겠구만."

한성원은 이정도로 고소를 해버렸으니 어쨌든 이 동네는 풍비박산이 날 것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이들 중에 자신들을 끝까지 믿어 준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현성이네랑 자웅이네랑 은혼이네는 우리랑 같이 시골로 간다고 하더구나."

"에... 걔네 집이랑요? 현성이랑 자웅이랑 은혼이는요?"

"걔들은 어차피 다른 지역의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니... 셋이 같이 살 집을 마련해준다고 하니 오히려 좋아하더구나."

'아니 그 미소녀 오타쿠들이라면 죽이 잘 맞겠지.'

과거에도 끝까지 친구로 남아 있던 녀석들이다. 결국 이번에도 끝까지 남아 준 질긴 악연에 운현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튼 정리 끝나는대로 바로 내려갈거다. 넌 어쩔거냐?"

"아. 전 한도 형님과 같이 살면서 검정고시 치루고 사법고시 준비하려구요. 한도 형님같은 법조인이 되고 싶네요."

"그래! 잘 생각했다! 이번에 한도 변호사님한테 큰 도움을 받았는데 그런 훌륭한 변호사가 되거라."

운현의 말에 한성원은 찬성을 해주었다. 아직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를 혼자 두고 시골로 간다는 것이 안타까운 운정이었지만 남편의 말, 그리고 이번에 큰 도움을 준 한도와 함께 있겠다는 운현의 뜻을 꺽을 수는 없었다.

"내가 전화해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겠구만."

예상대로 아버지가 한도에게 전화를 하는 것을 보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한도와 통화를 마친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 저 졸립네요. 가서 잘게요."

"그래. 그동안 고생 많았다."

운현이 방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 복도에서 기다리던 한지웅은 운현의 어깨를 툭 친 후 말했다.

"고생했다."

"별 말씀을. 근데 형은 어쩔거야? 아버지랑 어머니는 시골로 내려가신다는데."

"나? 나야 뭐. 집 하나 구해야지. 그동안 모아 놓은 돈도 있고... 그리고 이번에 고소한걸로 합의금 좀 받으면 회사 근처에 집 하나 구하는게 어렵겠냐? 마침 잘 됐네. 마누라랑 예은이도 보고 싶고. 이제 기러기 아빠는 끝이지 뭐."

오히려 잘됐다는 듯 한지웅은 느긋하게 말했고 운현은 지지리 말도 안듣는 조카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방에 들어 온 운현은 핸드폰을 들었다. 동네쪽은 해결이 됐으니 학교 쪽도 해결을 봐야지. 운현은 원석에게 전화를 건 후 그에게 물었다.

"야. 잘 아는 기자 없냐?"

"네? 기자요? 아는 사람은 몇명 있는데..."

"그럼 학교 관련된 사항으로 제보할거 있으니까 소개 좀 시켜줘. 그리고..."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차분히 말했다.

"마약 관련 건도 있으니까 특종 갖고 싶으면 얼른 연락하라고 그래."

244====================

준비

"학교랑... 마약 뭐요?"

"마약 거래에 관련된 정보도 줄거니까 말야."

"...저기 운현님. 저희가 취급하는 품목이 뭔지 아시면서 그런 말씀 하시는거에요?"

"뭐 어때."

어이없어하는 원석을 향해 대수롭지 않게 말한 운현은 수화기 너머의 원석이 침묵하자 피식 웃었다.

"야야. 그냥 학교에 마약 있다고 알려주고 싶을 뿐이야. 나 못믿어?"

믿을만 해야 믿지. 원석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하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히 개겨봐야 자기 손해다. 그리고 자신과 운현은 같은 배를 탄 처지다. 괜히 배에다가 구멍을 뚫는 일은 없지 않을까. 라고 자기 최면을 걸며 원석은 문자로 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를 보내주었고 그것을 받은 운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별 일 아니니까 걱정 말고 얌전히 숙소에 있어."

"언제 오실건데요?"

"내일 아침에."

"그럼 내일 물건 가져다 주고 보고하러 갈겁니다."

"그래라. 그리고 시킨 건 다 했지?"

"네. 이거 지출이 너무 심한데... 저 일 끝나면 밀수 한번 더 하시는거 어떠세요? 이번엔 멕시코로 가려고 하는데."

"오. 멕시코. 좋지."

"알겠습니다. 좋은 곳 알아두죠.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아침까지 꼭 오셔야 합니다."

"알았어. 암튼 겁은 더럽게 많아요."

"주의 깊은거라고 해주십쇼. 그럼."

이제부터 원석을 가드해야 한다. 그가 움직일 때는 함께 움직여야 했기에 운현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전화를 끊었다.

'한두달이야 내가 움직이면서 가드를 해 줄 수 있다고 치더라도 매번 하기는 힘드니 다른 녀석을 구해야 하는데... 젠장. 라티나를 쓰는게 좋은데 신성을 빼는 방법을 모르니... 성배에 대한 연구도 해야 하는군. 그나저나 신성은 어디다 쓰는거지?'

할 일은 많았고 여유는 없다. 운현은 인상을 구기며 입술을 비틀어 싸늘히 웃었다.

"표정관리. 표정관리... 하아... 어디보자..."

운현이 윤지를 강간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학교에서는 일진을 비롯한 공부 못하고 가난한 애들을 쥐어 짜기 시작했다. 물론 그 일진 중에서 돈 있고 빽 있는 녀석들은 별다른 조치 없이 빠져버렸다. 윤지와 운현으로 인해 들썩이는 학교를 잠재우기 위해 다른 애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신나게 그들을 두들겨 패고, 또 그들의 부모에게 촌지를 받아 챙긴 교무주임과 담임, 그 외 학교 선생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원석에게 받은 메일로 그대로 쏴버린 운현은 찬성의 방에다 쟁여 둔 마약말고 몰래 챙겨 놓은 다른 마약을 들고 창문을 통해 나갔다.

행여나 누가 볼까 하이딩을 건 상태로 학교로 온 운현은 야간 자율학습 때문에 아직 불이 켜져 있는 학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불쌍한 것들. 내가 너희들을 구해주마.'

일이 터지면 야자고 나발이고 당분간 학교는 개판이 될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한동안 야자는 커녕 등교나 할 수 있으면 다행일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해 학생들의 수업일수가 모잘라 방학이 줄어드는 일이 생길 수 있겠지만 그거야 운현이 알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운현은 퇴학당했는데.

'교무실 불은 켜져 있는데 좀 불안하군.'

목을 비틀며 스트레칭을 한 운현은 나무를 잡고 쉽게 올라 2층의 교장실에 도착했다. 창문을 슬쩍 열어보니 잠겨 있었다.

'하 시바.'

역시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인벤토리에서 광검을 꺼낸 운현은 광검의 날을 조금 뽑아 창문의 걸쇠를 잘랐다. 두부 잘리듯  걸쇠가 잘려나가자 운현은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일반 학생들이라면 쉽게 들어 올 수 없는 교무실에 도착한 운현은 마약이 담겨져 있는 작은 통을 교무주임 책상 안쪽에 쓱 밀어 넣은 후 그의 책상을 뒤졌다. 뭔가 더 엿먹일만한 자료가 있나 싶었지만 딱히 그럴만한 자료는 없었기에 운현은 아쉬워하며 교무실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야. 운현이가 윤지 강간한 거 아니라면서?"

"윤지 걔. 안그런 척 하더니 완전 까졌네.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몰라."

"하긴. 운현이 걔가 얼마나 착한 애였는데. 그랬겠어?"

"그나저나 난리 났네. 운현이가 그랬다고 퇴학먹여놨는데 운현이네가 난리치면 어쩔까나..."

"잘 됐지 뭐. 그 꼰대 재수없었는데. 운현이가 와서 깽판쳐줬으면 좋겠다."

"요새 애들 개잡듯이 잡고 다니는데 말야. 어휴... 진짜 싫어."

같은 학년의 여자애들이 지나가며 하는 말을 들으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과거에는 학교에서 쌍욕만 먹었던 자신이 이런 평가를 받게 될 줄이야. 본의 아니게 정의의 히어로가 된 기분이다.

느긋한 걸음으로 학교를 나온 운현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를 갈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찬성을 볼 수 있었다.

"어? 야. 너 왜 여기 있냐?"

"운혀어어언!!"

"워워. 친구. 흥분하지 말게. 너 어떻게 나왔냐? 구속수사받고 있다면서."

"너 잡으려고 탈주했다. 이 씨발새끼야!"

'그래도 일은 잘하는군. 역시 여기는 돈이 힘인가...'

자신의 계획대로 찬성이 탈주에 성공한 것에 운현은 빙긋 웃었다.

"다행이다. 친구야! 밥은 먹었냐? 국밥이나 한그릇 어때?"

"친구? 친구 좋아하네! 넌 씨발새끼야! 오늘 나한테 죽었어!"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듯 찬성은 날카로운 사시미를 들고 운현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를 보며 운현은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워워. 야. 찬성아. 왜 이래. 진정하라고. 칼 내려 놓고. 응?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래."

"죄? 죄?? 씨발놈아? 죄? 살아 있는게 죄다! 이 개새끼야!! 어차피 이렇게 된거 너 죽이고 윤지 그 개썅년도 죽여주겠어!"

어차피 이제 인생 막장으로 가버린 이상 분이라도 풀자는 생각으로 찬성은 운현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자신을 향해 칼을 휘두르자 뒤로 물러나며 그것을 피한 운현은 큰 소리로 외쳤다.

"찬성아!! 정신 차려! 너 이런 놈 아니잖아!!"

"닥쳐어어어어!!"

광기 섞인 고함 소리에 어둠이 내려앉은 동네에 하나둘 씩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운현은 힐끔 집쪽을 보았다. 다행히 부모님은 출타중이신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만 2층에서 담배를 문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지웅이 있을 뿐. 그는 난입할 생각이 없었는지. 아니면 증거자료를 만들고 싶었는지 카메라를 들고 조용히 촬영을 하고 있을 뿐 이었다.

'진짜 못당하겠네.'

"이 개새끼야아아아아!!"

"으앗!!"

크게 휘둘러진 칼이 운현 복부의 옷자락과 피부를 살짝 베었다. 피가 조금 흘러나오는 것에 운현은 당황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고 그가 피를 흘리는 것을 보자 찬성은 씨익 웃으며 칼을 꽉 잡았다.

"너 죽이고 윤지도 죽인다..."

"뭐 이새끼야!? 윤지는 안돼! 윤지는 손대지마!!"

"닥쳐!! 그 걸레같은 썅년도 죽여버릴거야아아아!!"

"안돼!!"

힐끔 윤지네 집 쪽을 본 운현은 윤지가 창문을 통해 이 소란을 보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어쩜 이렇게 타이밍이 잘 맞을까. 윤지마저도 죽여버린다는 찬성의 말에 윤지가 당황하며 몸을 움츠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의식하며 크게 고함친 운현은 찬성에게 달려들었다.

"다 죽여도 윤지는 못죽여!!"

"놔! 놔! 이 새끼야!!"

한참 엎치락 뒷치락 거리며 찬성은 운현을 칼로 찌르려 했다. 그의 손을 잡고 부들부들 떨며 일부러 위기 상황을 만들어낸 운현은 칼이 자신의 얼굴 근처를 왔다갔다 하자 다급히 외쳤다.

"형!! 도와줘!"

"뭐?"

이곳은 운현의 집 근처다. 이정도 소란을 일으켰으면 그의 형이 나올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기에 찬성은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고 찬성은 이를 갈며 운현을 보았다.

"속았지. 요놈아."

운현은 머리를 움직여 그의 코를 들이받았다. 오똑한 그의 코가 뭉개지며 코피가 흘러나오자 찬성은 고통스러웠는지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 덕분에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된 운현은 얼굴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찬성의 손을 걷어 차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을 떨군 후 그의 팔에 관절기를 걸었다.

"우득!"

"아아아아아악! 아악!! 아흐으윽!!"

찬성의 팔을 꺽어 한번에 부러트린 운현은 그가 고통에 겨워 비명을 내지르는 것을 보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완전히 힘이 빠져버린 것처럼 보이는 그가 한숨을 내쉴 때 사이렌이 들렸다.

"용의자 확보!! 용의자 확보!!"

경찰들이 달려와 찬성을 제압했다. 이미 다 제압해 놓은 걸 또 뭘 제압하겠냐만은 덩치 큰 형사들이 나서자 운현은 겨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하아..."

"학생. 괜찮나?"

"네... 아오 씨. 죽을 뻔 했네."

"자네가 이렇게 한건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칼과 찬성을 본 경찰 중 한명이 운현에게 다가와 묻자 운현은 말없이 힘겨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을 든 사람을 제압하다니. 무서웠을 텐데 잘도 버텨줬다는 것에 그는 감탄하며 운현의 어깨를 쳐줬다.

"어디 다친데는 없니?"

"네. 어휴...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탈주한거에요?"

"미, 미안하다. 어떻게 탈주한 건지는 내부적으로 조사를 해봐야겠구나. 그래도 대단하다. 마약 소지로 잡힌 용의자를 잡았으니... 허허. 용감한 시민상이라도 받겠는걸? 보아하니 고등학생으로 보이는데... 대학은 쉽게 가겠구나?"

"퇴학 당했는데요."

"...응? 아니. 어쩌다가?"

"그게. 그렇게 됐네요. 아무튼 쟤 좀 잘 잡아요. 진짜 무서워서 살겠나. 국민 신문고에 확 올려버릴까보다."

마약을 소지한 혐의로 잡혀 있던 용의자가 탈주해 일반 시민을 공격하려 한 것만으로도 이미 여러명의 목이 날아갈 정도의 큰 일이다. 그런데 그 범인을 잡은 학생이 경찰을 원망하며 그것을 국민신문고에 올린다? 안그래도 큰 일이 더 커질까 두려워진 그는 애써 웃으며 운현에게 말했다.

"어휴. 정말 고생 많았다. 내가 어떻게든 너 용감한 시민상은 받게 해줄게."

"... 뭐 주신다니... 감사히 받죠."

대학 갈 생각도 없는 운현에게 있어서 포상금이래봐야 쥐꼬리만큼 나오는 용감한 시민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그래도 있는게 없는 것 보다는 낫다.

'세상에. 몇백억대의 밀수를 하고 조폭이랑 같이 놀고 있는 내가 용감한 시민상이라니. 이거 국민의 세금을 날로 먹는 기분이구만.'

원래대로라면 용감한 시민상은 커녕 마약 및 총기 소지 및 불법 유통, 금괴 밀수 등으로 징역은 수십년은 살아야 하는 운현으로서는 떨떠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래서 공직자들이 탈세를 하고 정부 지원금을 날로 먹는 것이구나. 운현은 왠지 모를 뿌듯함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운현아! 괜찮아!?"

찬성이 운현을 죽이고 자신도 죽일 것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다. 운현이 찬성과 싸우고 있었지만 무서워서 차마 나올 수 없었던 윤지는 운현이 찬성을 제압하고 경찰이 와서 찬성을 데리고 가자 겨우 밖으로 나왔다.

"운현아... 운현아..."

도망칠 수도 있는데 자기를 구하려고 칼을 든 찬성과 싸우다니. 윤지는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자신이 비참했다. 이 사람 좋은 운현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걸까. 자책감과 후회에 그녀가 엉엉 울자 운현은 그녀에게 다가가 쓴웃음을 지었다.

"왜 나왔어."

"그치만... 너... 다쳤잖아. 괜찮아? 응?"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나오며 안좋은 눈으로 윤지를 보았다. 그들이 도끼 눈을 뜨고 자신들을 바라보는 것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윤지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운현아... 어서 치료하자. 응?"

그의 복부에 살짝 긁힌 상처를 보며 윤지는 안절부절하며 말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웃으며 운현은 담담히 말했다.

"이정도는 침바르면 나아. 너 여기 있다가 너희 부모님한테 혼나는 거 아냐? 어서 들어가. 에... 사람들 아직 밖에 있으니까. 좀만 있다가 가. 어... 커피 마실래? 아. 커피는 좀 그런가?"

"...그게... 운현아. 나..."

임신을 한 것과 운현과의 일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윤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심스레 말했다. 그녀의 말을 못들은 척 차를 챙긴 운현은 형이 내려오려 하자 손을 휘저으며 올라가라고 했다. 형이 다시 사라지자 운현은 윤지의 앞에 잔을 놓아주었다.

"녹차야. 집에 차가 이것 밖에 없네."

"고마워..."

따뜻한 녹차가 차갑게 굳어버린 마음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윤지는 그가 준 차를 홀짝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왜 이렇게 된걸까?"

"글쎄..."

어렸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진 윤지는 어깨를 흔들며 작게 흐느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만 좀 울어."

"운현아..."

"뭐. 지금까지야 어떻게 됐든. 네가 내 소중한 소꿉친구라는 것은 변하지 않아. 남녀간의 관계야 뭐... 어떻게든 되겠지. 참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그러네. 힘내. 앞으론 좋은 일만 있을거야."

"으응... 그... 운현아."

"응?"

"우리 집 이사가..."

벌금을 내고 막대한 합의금을 지불하느라 지금 집을 유지할 수 없었다. 더 안좋은 동네로 가게 된 것에도 그녀는 운현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정도만으로도 감지덕지하는 것이다. 그녀는 눈물을 그렁그렁 맺은 채 운현을 바라보며 애써 웃었다.

"나... 어렸을 때는 너 되게 좋아했다? 근데... 왜 이렇게 된걸까... 왜..."

윤지가 허무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자 윤지는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았고 운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너무 그렇게 슬퍼하지마.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가끔씩 크게 흔들릴때가 있는 법이니까. 난 네가 나에게 누명을 씌운 것도 이해해. 얼마나 힘들었길래 그랬겠어. 다 용서할게."

"흑...흐흑....으아아아아앙!! 운현아아아아!!"

한참을 울던 윤지는 진정이 됐는지 퉁퉁 부은 눈으로 운현에게 쓰게 웃었다. 이제 마지막인데 못 볼 꼴만 보였다. 그에게 모든 것을 보여버린 윤지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럼 안녕... 정말 고마웠어. 나... 내가 너한테 무슨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줘. 나 메일 주소 절대 안바꾸고 있을게. 꼭... 꼭 연락해줘."

"그래. 잘 들어가라. 꼭 연락할게. 만약에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줘.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합의금 관련해서 내가 어느정도 힘을 쓰면 그걸 미루게 할 수 있을테니까..."

"으응... 아냐.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인데. 고마워."

윤지가 집을 나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본 운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 방금 전에 윤지의 머리를 쓰다듬은 손을 때수건으로 박박 씻었다. 마치 오물이라도 만진 것처럼 손을 깨끗하게 씻어낸 그는 물기에 젖은 손으로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올린 후 싸늘히 웃었다.

"이걸로 윤지년에 대한 작업 끝났군..."

245====================

준비

고소를 안했을 뿐이지만 합의금으로 상당한 돈을 빼앗았다. 사람이라는게 간사하기 짝이 없어서 자신의 잘못은 금방 잊고 현재의 불편함만을 떠올리게 된다.

한도가 맘먹고 작업을 했으니 윤지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녀에게는 막대한 빚이 넘어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녀의 인생은 무척이나 퍽퍽해질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죄니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슬슬 불만이 생길 수 있었다.

'내 연구가 1, 2년 안에 끝나서 바로 실험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 보험은 들어놔야지.'

과한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윤지가 자살이라도 해버리면 운현은 이 짓거리를 또 해야했다. 기껏 쓸만한 실험체를 준비했는데 그 실험체가 실험 한번 못해보고 죽어버리면 그게 무슨 뻘짓인가.

일단은 어느정도의 보호는 필요했다. 원석과 한도에게 말해 그녀에 대한 감시를 멈추지 말라고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기에 그녀의 마음 속에 자신이라는 벽을 세워놓는다. 힘들고 괴로울때 자신에게 기댈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는 역할을 일부러 자처한 것이다.

'그리고 딴 새끼한테 넘어가면 골치아프니 그것도 막아야겠지. 하... 진짜 쉬운게 하나도 없구만.'

실험체라고 하더라도 막 굴리면 안되었기에 일부러 이런 상황을 준비한 운현은 핸드폰을 들고 원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네."

"일은 잘 해줬더라. 이야. 경찰에도 손이 닿아 있었어?"

찬성이 탈주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운현의 계획의 일부였다. 그게 아니라면 찬성이 그렇게 쉽게 탈주할 수 있었겠는가. 이게 다 운현의 명령에 의해 원석이 움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네. 뭐... 지금 세상에선 돈으로 안되는 일이 없으니까요."

"잘했어. 다음에도 또 부탁하지."

운현은 성질이 급한데다가 당장의 이득만을 보는 찬성이 탈주를 하면 절대 숨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물론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에 경찰서 인근에 흥신소 직원을 깔아 두어 그가 동네로 오지 않으면 잡아서 경찰서에 보내라고 했었다.

다행히 그는 운현의 생각대로 운현과 윤지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자신의 미래는 이미 포기해버렸다. 아무리 아니라고 주장해봐야 위증과 마약소지 콤보를 혼자서 버텨낼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포기를 해버린 그가 자포자기한 기세로 운현과 윤지를 습격하러 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일부러 베이는 것도 힘들구만."

사시미가 날카롭기는 하지만 레벨 450에 내구력 스탯이 최대치를 넘어선 운현은 칼로 스쳐봤자 의도하지 않는다면 기스도 나지 않았다. 일부러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있도록 집중을 해서 방어력을 최대한 낮춘 운현은 생각보다 얉게 베어진 상처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이미 인간의 한계는 넘어 선 것 같네."

벌써 상처는 아물어 딱지가 생길 정도였다.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린 후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

"할 일은 많은데... 젠장. 찬성이 그 새끼 면회도 가야하는군."

실험체로 써야 하는 것은 윤지뿐만이 아니다. 찬성 역시 자신의 소중한 실험체다. 마약 소지를 했다고 하더라도 초범이고 학생인데다가 실제로 그가 마약을 하지는 않았으니 소년원만 가고 말 것이다. 탈주만 안했더라면 집행유예에 보호감찰 정도로 끝날 수 있었지만 탈주를 하고 자신을 습격했으니 100% 소년원을 가긴 갈 것이다.

'가는 건 가는거고 또 케어도 해줘야 하니까...'

너무 오랜 기간 소년원에 잡혀 있으면 곤란했다. 자신이 원할 때 그를 빼올 수 있어야 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그와 어느정도 관계를 유지하기는 해야 했다.

'날 너무 증오하면 내가 빼주려고 할때도 거절할 수 있고 빼주더라도 실험에 비협조적일 수 있으니 그 증오심을 어느정도는 깍아 둘 필요가 있겠군.'

실험체로 써먹기 위해서는 상대가 자신을 신뢰하게 만들어야 했다. 윤지는 어느정도 기반을 마련했으니 조금씩 관리만 하면 되지만 찬성은 과연 윤지처럼 쉽게 될 것인가? 운현은 턱을 쓰다듬은 후 피식 웃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다음날이 되자 운현은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원석은 운현이 오자마자 그와 함께 준비된 자가용에 올랐다.

"운현님은 그냥 뒤에 계세요."

"상관은 없는데 얼마나 걸려?"

"한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그럼 알아서 해. 난 책 보고 있을테니까."

이어폰을 꽂고 운현은 책을 펼쳤다. 피스나의 연구자료도 이제 간신히 1/20을 봤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 모두 한번 흝으면 대략적인 이해는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에 운현은 한글자 한글자 집중해서 책을 읽었고 그를 보며 원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왜 거기 계시지...?'

회장을 직접 만나 보고를 해야 하는데 회장이 지금 성경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서 몇일째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에 원석은 입맛을 다셨다. 올해로 나이가 일흔이 넘는 영감이 연예인들 쫓아다니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닐테고. 원석이 궁금해하는 동안 차는 빠르게 도로를 달려 강남에 있는 성경 엔터테인먼트에 도착했다.

"내리시죠."

"응."

원석과 함께 차에서 내린 운현은 말로만 듣던 성경 엔터테인먼트 건물을 보며 감탄했다. 고등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와보고 싶은 곳이 바로 이곳일 것이다. 티비에 나오는 연예인들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곳이니만큼 그들에게 있어서는 꿈과 같은 곳이겠지만 운현은 그저 심드렁할 뿐 이었다.

"잠깐 여기 계세요. 커피라도 사드시고 계시죠."

방문증을 받아와 목에 찬 원석은 방문증 하나를 꺼내 운현에게 내밀었다. 이제 회장을 만나면 일은 끝났다. 연예인 지망생부터 시작해서 아직 뜨지 못한 연예인들. 아이돌을 꿈꾸는 아이들. 그 외 등등.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2층의 라운지에 운현을 놓고 원석은 3층으로 올라갔다. 3층부터는 진짜 연예인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 사람들과 성경 엔터테인먼트의 직원들이 있는 곳이다.

"빨리 와."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

회장을 만나는 일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런 자리에서 자신을 어찌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방해가 있을 것이기에 원석은 운현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3층으로 올라가자 운현은 2층의 라운지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아메리카노를 하나 주문해 창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이게 뭐 좋은 일이라고 이렇게 하고 싶어서 안달일까..."

오디션을 보고 떨어졌는지 엉엉 울고 있는 학생이 보였다. 외모만으로 따지자면 윤지와 비슷할 정도로 예쁜 학생이지만 요새 연예인이라는게 외모만 가지고 되는게 아니니 저런 미모를 가지고도 연습생조차 못되는 모양이다. 그들을 힐끔 본 후 운현은 이어폰을 꽂고 책을 펼쳤다.

"자네는 다른 사람과 좀 다르구만."

"......"

"학생?"

"......"

"어른이 말을 하면 좀 관심 좀 가져주게나."

운현의 어깨를 툭 치며 누군가가 계속 말을 걸었다. 그냥 무시로 일관하려던 운현은 그가 끈질기게 말을 걸자 침투경을 날릴까 말까 하다가 보는 눈이 많아 그 욕구를 참아내고 그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뭡니까?"

오십대 중 후반 쯤. 한성우와 동년배로 보이는 사내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을 보며 운현은 까칠하게 말했다. 방문증 대신 직원 신분증을 목에 달고 있는 것이 성경 엔터테인먼트든 아니면 성경 그룹이든 그 소속의 직원 같았다.

운현의 까칠한 태도에 그는 피식 웃고 그의 앞에 앉았다.

"스타가 되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 아닌가?"

"아닌데요."

스타라니.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최대한 자중하며 얌전히 찌그러져 연구하고 목적을 위해 시간을 써도 계획으로 따지면 시간이 모자르다고 할 수 있는 운현에게 있어서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시선에 제약을 받는 연예인은 절대 되고 싶지 않은 일 중 하나였다.

지금 이렇게 돌아다닌 것도 필요하니까 하는 것이지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벌써 지하실에 짱밖혀서 다른 연구자료를 읽고 있었을 것이다.

"허. 아니야?"

하지만 운현의 속내를 알 수 없었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 성경 엔터테인먼트의 2층은 오디션을 보기 위해 찾아 온 지망생들과 연습생들만이 들어 올 수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 있으면서 스타가 되는 것을 거부하다니.

다시 책에 시선을 돌리는 운현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던 그는 그가 읽고 있는 책을 힐끔 본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느나라 말인가?"

"과테말라 라이오니아 남부 소수민족 언어요. 아. 거 진짜. 자꾸 귀찮게 할거요?"

"그, 그게 어딘가?"

"나도 몰라요."

"신기한 컨셉을 잡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컨셉종자?"

"...이 썅..."

자꾸 방해를 하는 그를 향해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좀 소란스럽겠지만 어쩔 수 없지. 운현이 그에게 침투경을 날리려고 손을 가져가려고 할 때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도 여기 오면 될 줄 알았는데."

"뭐가요."

"자네는 연습생이 아니지?"

"네. 지망생도 아니구요. 그러니까 좀 신경 끄고 딴데 가주실래요?"

"그럼 괜찮겠군. 사실 내가 여기 온 것은 좀 파릇파릇한 애들을 보면."

"보면?"

"...내 주니어가 힘을 받지 않을까 싶어서네."

"...헐."

그에게 침투경을 날리려던 운현은 그의 말에 황당함을 느꼈다. 아무리 봐도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다. 그런 주제에 뭐가 어쩌고 어째? 주변을 둘러 본 운현은 연습생과 지망생들의 연령대를 대충 파악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례지만 연세가..."

"올해로 쉰 셋이네."

"이런 로리콘 영감탱이가!?"

"......"

딸이 있다면 딸보다 어릴 애들을 보고 성욕을 느끼러 왔단 말인가? 운현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로리콘 영감은 죽어 마땅하다. 그에게 침투경을 날리려던 운현은 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자 손을 멈췄다. 아무래도 단순한 로리콘 영감은 아닌 듯 했다.

"나도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네. 그렇지만... 요즘 들어 주니어가 반응을 안한단 말야. 이런 약 저런 약 다 먹어봤는데... 안서. 안된다고. 그래서 다른 여자라도 보면 설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남자만이 느낄 수 있는 비애가 느껴진다. 그것에 운현은 침투경을 날리려던 손을 멈췄다.

'하... 그냥 로리콘은 아닌 것 같고...'

그냥 자존심을 잃은 남자였단 말인가.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침투경을 날려 이 인간을 기절시키고 소란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빠르게 해결할 만한 방법을 찾았다.

"이거나 드셔보슈."

"이게 뭔데?"

"정력제...? 뭐 비슷한 거니까. 이거 받고 좀 꺼져주쇼."

운현이 건넨 것은 블랙 오크의 피를 따로 담은 작은 앰플이었다. 붉은색 액체가 찰랑이는 작은 병을 보며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운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허허..."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는지 운현은 입을 꾹 다물고 책에만 집중했다. 자신의 손에 놓여진 앰플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빙긋 웃은 후 자신의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어 그에게 주었다.

"이거 고맙군. 신세를 진 것 같은데 연예계에 관심있으면 연락하게나."

"네네. 알겠습니다."

그가 명함을 옆에 놓는 것을 보지도 않은 채 운현은 대충 답했다. 그런 운현을 향해 화를 내지도 않고 허허 웃은 그가 지나가자 운현이 있던 자리로 매력적인 미녀 셋이 다가왔다.

"저, 저기."

"...씨발 진짜."

자꾸 방해받는 이 분노를 어떻게 풀어야 하지? 그래. 원석을 갈구고 괴롭히자. 그게 답인 것 같다. 아니면 그냥 깽판을 칠까? 어차피 운현에게 현실의 여자는 이미 의미가 없었다. 그게 미녀든 추녀든 말이다. 다가온 셋에게 침투경을 날릴까 말까 고민하며 그가 으르렁 거리자 그것에 놀란 그녀들은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네?"

"뭐야? 또?"

운현이 이를 갈며 으르렁거리자 그것에 놀랐는지 그녀들은 더더욱 뒤로 주춤 물러났다. 눈빛만 봐도 움찔할 정도로 운현이 사나운 시선을 보내자 그녀들의 리더로 보이는 긴 검은색 생머리의 미녀는 조심스럽게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장 대표님과 잘 아는 사이세요?"

"그게 누군데."

"방금 이야기하신..."

"초면인데. 그 사람이 여기 대표였어?"

"......"

처음 원석과 함께 2층에 왔을 때부터 보통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던 운현이다. 3층에 올라갈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성경 그룹의 직원과 함께와서 다른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카페테리아의 구석에 찌그러져 커피를 마시고 책을 보는 것 부터 심상치 않았다. 거기에 그에게 자신들은 쳐다보지도 못할 위치의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고, 그런 그를 귀찮다는 듯 대하는 것을 보며 운현에게 관심을 가진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킨 후 물었다.

"전 샤이니아의 리더 상아라고 해요."

"...."

그녀의 말에 운현은 몸을 움찔 떨었다. 아니다. 듣도보도 못한 그룹명때문은 아니었다.

이름 때문이다.

그녀는 아니다. 외모부터 말투,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다른 여자다. 하지만 이름만으로도 운현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만약 다른 이름이었다면, 그녀를 떠올리지 않게 할 사람이었다면 대답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운현은 자신을 부담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상아와 눈을 마주치고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기... 아까 보니까 성경 그룹의 직원분과 아시는 사이인 것 같은데..."

"같은데. 뭐. 소개라도 시켜달라고?"

운현은 까칠한 어조로 그녀에게 말한 후 이를 드러내며 비웃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명함을 주는 정도 뿐이군. 자. 가지고 가시게나."

어차피 장대표고 나발이고 연락할 일따위는 없었다. 원석이 일만 끝내면 이곳에 올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차갑게 말하자 상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가 준 장대표의 명함을 받았다.

"그... 다른 분은."

"말했잖아.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 명함을 주는 정도 뿐이라고. 왜. 싫어?"

"아, 아뇨. 그런게 아니라..."

아쉽다. 연예계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인맥도 무척이나 중요하다. 누구의 지지를 받느냐에 따라 티비에 한번 나올 것이 두번 나오고, 세번 나오고 하는 것이다. 한번이라도 더 티비에 나오는 것이 중요했던 그녀가 말을 이어나가려고 했을 때 3층에서 원석이 내려와 운현에게 다가갔다.

"운현님."

"야. 가자. 피곤하다."

"네... 그런데 얘들은 뭡니까?"

"몰라."

"흐음..."

246====================

준비

"아,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샤이니아라고 합니다!"

성경 엔터테인먼트가 단순한 회사라면 모를까 성경 그룹이라는 거대 그룹의 계열사였다. 그런만큼 성경 그룹과 연계될 일은 많았고 성경 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데뷔를 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성경 그룹의 주요 인물들의 얼굴과 이름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강원석 해외 영업팀 팀장...'

그 중에서도 그룹 서열 1위부터 20위까지는 필수적으로 외워야 할 만한 것이기에 상아는 강원석의 심드렁한 얼굴을 보며 크게 긴장했다. 비록 요새 그룹 서열에서 순위가 내려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실세 중 한명이다. 그런 강원석이 무려 '님'자까지 붙여서 말을 걸 정도라면?

상아의 눈이 빛났을 때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네."

"저, 저기요!"

"쟤는 좀 치워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좀 비켜주지 않겠나?"

원석의 싸늘한 말에 상아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안타까운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지만 운현은 그녀의 시선은 그냥 무시해버린 채 원석과 함께 차로 돌아갔다.

"관심있는 애들 있습니까?"

"없어."

"흠..."

"너 혹시 이것도 저번에 했던 그런 거랑 같은거라면 개기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아, 그런건 아닙니다. 1층보다는 2층이 더 편안하실 것 같아서 2층으로 모신 것 뿐이죠."

운현이 손을 들어 올리자 원석은 움찔하며 붕붕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를 가는 눈으로 바라보던 운현은 피식 웃은 후 그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히이이이익!?"

고통이 찾아올까 두려워하던 원석은 고통이 오지 않자 어리둥절한 눈으로 운현을 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피식 웃은 운현은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는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잘 기억해둬."

"아, 알겠습니다. 출발해."

운현과 원석이 탄 차량이 도로로 나가기 시작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책에만 집중을 하던 운현은 갑자기 차가 휙 돌자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미행이 붙었습니다."

"하. 진짜 빠르기도 하지."

"어쩌죠?"

"어쩌긴."

저 꼬리를 달고 숙소로 갔다간 더 귀찮아질 것이 분명했다. 이왕 이리 된거 아예 덤벼들지 못하게 압도적으로 밟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한적한 곳으로 몰아."

"한두대가 아닌 것 같은데요."

운전을 하던 조폭은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괜히 운전대를 잡아서 원석과 함께 지옥가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는 그를 향해 운현은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내가 알아서 잡을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말고 운전이나 잘 해라. 덩치는 산만한게 뭐 그리 겁이 많냐?"

저번에 운현이 조폭 열 다섯을 순식간에 때려잡은 것을 보았던 그는 운현의 말에도 그저 비굴하게 실실 웃을 뿐 이었다. 운전은 그에게 맡기고 운현은 다시 책에 집중했다. 어느새 차량은 도심지를 벗어나 시골길을 타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검은색 밴과 봉고, 그리고 검은색 그렌져 몇대가 뒤따르고 있었다.

"야."

"네."

긴장한 원석이 조심스레 답하자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제부터 전쟁이라고 봐도 되는거지?"

"그, 그렇죠."

"네 부하들은 언제쯤 들어오냐?"

"이번 거래 성공으로 제 영향력이 커졌습니다. 두달 안에 제 예전 세력을 복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운현님이 밀수 한번만 더 해주시면 더 빠르고요."

"준비해놔. 그리고..."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광검을 꺼낸 후 미믹맨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후 미믹맨의 코트를 걸쳐 입어 후드를 뒤집어 썼다..

"이번엔 제대로 짓밟을 거니까 살인 어쩌고 그딴 말 하지 마라. 알아서 잘 처리해."

"...네. 그래도 너무 많이 죽이시면..."

"몇명 안죽일거야."

어차피 상대도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살인?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운현이 살인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원석이 떨떠름히 답하자 운현은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뒷처리 하는 거에만 집중해라. 야. 얼마나 더 가야해? 대충 하고 여기서 멈추지?"

"조금만 더 가면 사람들이 오지 않는 폐 공장터가 있습니다. 거기서 멈추겠습니다."

"그래라. 그럼. 도착하면 불러."

잔뜩 긴장한 둘에 비해 운현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듯 했다. 그가 책에 집중하자 원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석과 운현이 탄 차가 폐공장터에 도착했다. 한참 달리던 차가 멈추자 뒤따르던 차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어이! 강원석이!!"

차들에서 덩치들이 내린다. 수십은 되어보이는 그들이 몽둥이나 칼을 들고 내리는 것을 본 원석은 담배를 입에 문 후 심드렁히 말했다.

"양지환. 결국 할 수 있는게 이것 밖에 없나?"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나대래? 응? 얌전히 찌그려져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 서로 편하게 말야."

"쟨 누구냐?"

"양지환이라고 서열 20위도 안되는 놈입니다. 국내 영업부 서열 6위 정운택 본부장의 심복이죠. 아주..."

덩치가 준 칼을 들며 야비하게 웃는 그를 보며 원석은 이를 갈았다.

"야비한 놈이죠."

"오. 야비. 그거 내가 좋아하는 말이지. 그건 그렇고... 몇명이야? 하나.. 둘..."

"나 하나 잡겠다고 몇명이나 데려온거냐?"

"몇명 안돼. 나까지 해서 육십명? 다들 너한테 칼빵 한번씩 놔주고 싶어 안달난 애들만 데리고 왔지... 근데 옆에는 왠 애새끼냐?"

"...."

"하이고~ 강원석 다됐네~ 보아하니 가드 같은데 저런 조그만한 애새끼를 가드로 데리고 다니고~"

이제 그 애새끼가 벌일 피의 축제만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지는 원석은 아무것도 모르고 운현의 호리호리한 덩치만 보며 팔자 좋게 말하는 양지환이 안쓰러워졌다.

"조그만 애새끼라... 일단 쟤는 죽인다. 쟤가 여기서 대장이지?"

아무래도 운현은 양지환을 타겟으로 삼은 듯 싶었다. 그것도 모른 채 그는 신나게 떠들어댔고 운현은 지루하다는 얼굴을 한 채 원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담배 좀 줘."

신나게 떠들던 양지환은 운현과 원석이 담배를 물고 심드렁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빠득 이를 갈았다. 저 여유도 이제 끝이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이런 자리에 끼어 든 저 애새끼까지! 양지환은 칼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야야. 이 형님이 한번 담궈줄테니까 다들 구경하고 있어!"

"...등신인가."

쪽수에서 이만큼이나 유리한데 뭘 믿고 저렇게 나서는 건가. 무리를 이끄는 대장 주제에 생각없이 위험으로 나서는 그를 보며 운현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원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겁니다. 그래도 나름 유명한 칼잡이니까요."

"흠... 저기 아저씨."

"뭐냐. 애송아."

가까이 오니 더 확실해졌다. 후드를 뒤집어 쓰고 마스크를 썼지만 언듯 보이는 눈이나 피부를 보면 아무리 많이 봐줘도 이십대는 넘어가지 않는 듯 보였기에 양지환은 더욱 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몇명 데려왔다고 했죠?"

"육십명. 왜. 이제 무섭냐? 그래도 어쩌겠냐. 이쪽 세계에 들어왔으면 죽을 날이 온다고 각오는 했어야지. 자자. 아저씨가 안아프게 몇번만 찔러줄게~"

양지환은 실실 웃으며 운현에게 걸어갔다. 요즘 어린 놈들이 아무리 겁대가리가 없다지만 실제 칼을 쓰는 것은 다르다.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각오를 다지지 않으면 칼을 쓸 수 없다. 그것을 자신하며 그가 다가왔을 때 운현은 광검에 마력을 넣었다.

"어...?"

"주와아앙!!"

광검의 날이 장난스럽게 내밀어진 양지환의 팔을 잘랐다. 단 일격에 팔이 잘려진 것을 본 양지환은 멍하니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팔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왜 내 팔이? 타는 듯한 고통이 찾아오기도 전에 운현은 양지환의 앞에서 광검을 십자로 두번 그었다.

"어어..."

성경 그룹의 실력파 칼잡이 중 하나인 양지환의 최후는 무척이나 허망했다. 몸이 네쪽 나버린 그가 허물어지자 그가 데려 온 조폭들 모두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몇몇은 양지환의 내장과 시체를 보며 기겁을 하며 구토까지 해버렸다.

"우웨에에에엑!!"

"뭐, 뭐야!?"

"방금 뭐한거야!?"

적들이 패닉에 빠졌다. 자신들 중 가장 강하다고 할 만한 양지환이 허무하게, 그리고 저토록 처첨하게 죽어버린 것에 그들이 당황할 때 운현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으로 쥔 후 어색하게 연기를 내뿜고 담담히 말했다.

"이제 오십 구."

247====================

준비

"제길! 쳐!!"

양지환이 죽어버린 것은 죽어버린 것이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기에 용기를 낸 조폭 중 하나가 달려오자 그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낸 운현은 그의 다리를 걸었다. 허공에 붕 뜬 그의 머리를 잡아 그대로 양지환의 내장에 박아버린 운현은 그가 버둥거리자 침투경을 걸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거, 걸렸구나."

그의 끔찍한 비명 소리에 원석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저 고통. 당해본 사람만 알지. 양지환의 내장과 피에 얼굴이 파뭍힌 채 버둥거리던 그의 몸이 축 늘어지자 운현은 그의 칼을 잡은 후 그의 목에 푹 쑤셔 넣었다.

"오십 팔."

"히, 히이이익!?"

"다, 다 같이 덤벼!!"

용기를 낸 조폭들 중 셋이 달려나왔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운현은 광검을 당긴 후 마력을 불어 넣으며 크게 베었다. 일검. 가로로 크게 베어진 광검은 달려오던 그들을 허리째 베어버렸다.

마치 마술 같다. 아니. 영화 같다. 꽤나 먼 거리에서 빛이 번쩍였을 뿐인데 방금 전까지 살아 있던 세명이 반토막이 되어버려 죽어버린 것에 조폭들은 공포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오십 오."

운현이 무감정하게 숫자를 말하는 것을 들은 조폭들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아까부터 뭘 말하나 싶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저 숫자는 자신들의 숫자다. 다섯명이 죽었으니 이제 오십오명 남았다는 것. 그것에 완전히 공포에 질려버린 그들은 몸을 돌려 차를 향해 달려갔다.

"아아아악!!"

"괴물이다!!"

"도, 도망쳐!"

"어 딜도 망가."

도망가려는 그들이 차에 타려 하자 운현은 광검을 뻗어 커다란 밴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그냥 빛이 번쩍였을 뿐인데 벤이 박살이 나버리자 그들 중 몇몇은 압도적인 힘과 공포에 울음까지 터트렸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냥 싸우는 것이라면 상관없지만 이런 죽음은 진짜 개죽음이나 다름없기에 그들은 부숴진 밴을 포기하고 차에 낑겨 타기 시작했고 운현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장격적, 양장격심이라. 용기 있는 자 몇을 죽임으로서 적의 사기를 완전히 무너트린다... 병법서도 사람의 심리 공부에 큰 도움이 되는구만."

운현이 그동안 피스나의 연구자료만 읽은 것은 아니었다. 가상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세계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심리까지 파악해야 했다. 그렇기에 심리서적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는 대부분의 서적까지 구매해 숙소에 마련해 둔 운현은 얼마 전에 보았던 병법서의 구절을 떠올리며 느긋하게 말했다.

"...바, 방금 뭐한 겁니까?"

운현이 보통 놈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이건 진짜 놀랄만한 일이다. 원석은 평소에도 두려웠지만 더더욱 두려워하며 운현에게 다가갔다.

"응? 아. 이거. 멋있지."

"주왕! 주왕!"

"으악! 그만 휘둘러요!"

"스타워즈 같지 않냐? 아임 유어 파덜."

다섯명을 죽인 사람 치고는 너무 평온하다. 총으로 사람을 죽여도 한동안 정신을 못차리는데 저 정체불명의 광선검으로 사람을. 그것도 저렇게 처참하게 죽인 사람 치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그의 모습에 원석은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그 시선은. 이정도 했으면 내가 있을땐 직접적으로 덤벼들지는 못하겠지."

"...그, 그렇긴 하겠지만."

이런 미친 인간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자신을 보호해주는 것에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원석은 고민되었다.

"그럼 일단 집에 갈까? 배고프다."

"...네.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처리한다..."

"대충 파묻어 두고 나중에 와서 처리하면 될 일 아닌가?"

"아니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서... 휴우. 이건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아니 다른 나라에서도 시체 처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처참한 시체를 처리하는 일은 더욱 더. 원석은 창백해진 얼굴로 생각하다가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통화를 시작했다. 통화가 끝나자 그는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하는 운현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운현님."

"왜."

"그... 사람을 죽였는데 죄책감이나... 그런 건 없으세요?"

원석도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참 현역으로 뛰어다닐 때. 좀 더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 적대 조직의 부두목을 직접 죽인 적이 있었다. 나름 강심장이라 자부하는 그조차도 첫 살인 이후 일주일동안 제대로 밥도 못먹고 잠도 못잤던 것을 떠올렸던 그는 운현을 향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운현의 나이는 열 여덟살이었다. 기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국은 애라고 할 수 있는데 살인이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주지 않을까 걱정된 그가 묻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럼 저 칼에 맞아서 죽었어야 했다는거야?"

"그런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게..."

"사람이 사람 죽이는게 뭐 잘못된 일인가. 죽기 싫으니까 죽인다. 그리고 귀찮은 일 줄이려고 많이 안죽였잖아. 맘만 먹었으면 그 인간들 싸그리 다 죽일 수 있었는데도 말야. 내가 뭐 정신나간 살인귀라서 저렇게 잔혹하게 죽인게 아니라고. 난 필요하니까 한 것 뿐이야."

"...그 필요하다는게."

"용기 있는 자를 최대한 잔혹하게 쓰러트려 적들의 사기를 꺽어놓는다. 섬멸전이 아닌 이상에야 그것만으로도 적을 물러나게 하는 것은 충분해. 거기에 이렇게 저들을 보냄으로서 널 공격하려는 자에게 경각심을 심어 줄 수 있지. 거기에 양지환? 그 양반과 아까 몇명이 죽고, 밴이 박살난 상태에서 오십명이 넘는 사람들이 두려워서 못하겠다고 난리를 치면 널 습격하려는 자들도 쉽게 움직이지 못하지 않을까? 난 사람 죽이는게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니라고. 명심해둬. 다만 귀찮은 일을 줄여 내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에 저들을 저렇게 죽인 것 뿐이야. 네가 습격을 덜 받으면 나도 연구할 시간이 늘어서 좋지."

"어, 음. 네."

자신이 걱정했던 죄책감이나 트라우마따위는 조금도 없어보이는 운현의 모습에 원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그의 말에 믿음이 가기 시작했다.

'마왕.'

사람에 대한 가치를 필요하냐, 필요하지 않느냐로만 구분하며 그것을 이용의 대상으로 밖에 삼지 않는 마왕의 모습. 순진해보이는 저 얼굴과 순박한 웃음이라는 가면 안에 담겨 있는 저 무시무시함에 원석은 다시는 운현에게 개기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원석이 운현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동안 운현은 폐공장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앉은 후 책을 펼쳤다.

'죄책감이라...'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 그건 이미 저번 세계에서 충분히 겪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죄책감이나 두려움에 괴로워 할 여유도 없었다. 그럴 여유가 있으면 책을 한번 더 보겠다. 지금의 자신에게 그런 감정적인 모습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애들이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난리를 치겠군.'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들을 생각하는 것만이 유일한 치유다. 과거의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린 운현은 다시 책에 집중했다.

"이제 출발하시죠."

두어시간 쯤 지나고 나서야 검은 밴이 와서 시체를 검은 봉투에 담기 시작하자 담배를 태우며 그것을 지켜보던 원석은 운현을 불렀다. 그의 말에 상념에서 벗어난 운현은 차에 탔다.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로 운현에게 공손히 인사한 운전수는 최대한 그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조심스레 운전을 시작했고 운현은 책을 읽기 훨씬 편한 상태에 만족하며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편히 기댔다.

"여보~"

아직 마흔 밖에 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아내. 미경이 자신을 부르자 성경 엔터테이먼트의 대표이며 성경 그룹의 실세 중 하나이며 회장의 조카인 장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내를 사랑한다. 재벌가의 사람이고 정략을 통해 결혼을 했지만 아내는 재벌가 사람답지 않게 소박하고 순수하며 착했다.

'내가 사랑하기에는 너무나도 고귀한 사람이지.'

순수하고 착하고, 또 나이에 비해 애교도 많다. 수많은 이들의 피를 손에 적셔 온 자신이 사랑하기에는 과분한 사람이다. 그런 자신을 알면서도 사랑해주는 미경을 향해 다가간 그는 자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그녀가 생긋 웃자 움찔 몸을 떨었다.

"오늘... 어때요? 김비서님이 좋은 약을 구해왔다고 하던데..."

"아... 그, 그래."

돈도 있고 권력도 있고 사랑하는 아내도 있다. 자식이 없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나름 괜찮은 삶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단 하나. 자신과 아내의 나이차가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외도 한번 없이 자신을 사랑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도 아내를 사랑했다.

다만 요새 나이 탓인지 주니어가 영 힘을 못쓰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었던 그는 백방으로 수소문해 정력에 좋다는 것을 모두 구하고 있었지만 마땅히 이렇다 할 효과를 본 것은 없었다.

'오늘은 부디...'

자신의 주니어가 힘을 써주길 빌며 김비서가 가져다 준 약을 먹은 그는 침실에 누워 있는 사랑스러운 아내를 보았다. 사십세이지만 삼십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나체에도 그의 주니어는 반응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도에요?"

"그... 미안."

고개숙인 남편을 보며 미경은 부드럽게 웃었다. 남자가 이럴 수도 있지. 비록 그와 몸을 섞지 못하는게 아쉽지만 그래도 그를 사랑하는 미경은 장천후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뭐 그럴 수도 있죠. 오늘은 제가 손으로 해드릴까요?"

"으응..."

머뭇거리며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경은 고운 손으로 축 늘어져 있는 천후의 양물을 만지작거렸다. 자극은 온다. 흥분도 된다. 하지만 주니어는 여전히 힘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으음... 병원 가보시는게 어떨까요?"

"아니 요즘 조금 피곤해서 그런 것 같아. 너무 걱정하지마."

사랑하는 남편이 발기부전이라니. 미경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고 그녀를 향해 천후는 쓰게 웃었다.

'좋은 약 다 소용없구나...'

"후훗. 와인이라도 한잔 할래요?"

기죽은 남편을 달래기 위해 그녀는 빙긋 웃으며 와인셀러에서 와인을 꺼내왔다. 붉은색 와인을 잔에 따른 그녀가 잔을 건네주자 그것을 받은 천후는 피처럼 붉은 와인을 보고 잠시 생각하다가 아까 전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여보. 잠깐만."

오늘 회사에서 만났던 정체불명의 젊은이에게 받았던 것이 떠오른다. 붉은색 와인을 보니 그 앰플이 떠올랐던 그는 자신의 양복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내왔다.

"그게 뭐에요?"

"음... 사실 오늘... 아. 회사에서 한 학생을 만났는데 이런 걸 주더라고."

아내를 위해서 주니어에 힘을 주러 2층의 젊은 애들을 보러 갔다고는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며 운현과 만났던 이야기를 한 그는 그의 특이함에 빙긋 웃었다.

"오디션을 보러 온 애들이랑은 좀 달랐던 것 같은데. 아무튼 요즘 고등학생들은 뭐 이런 정력제나 흥분제 같은거에 오히려 우리보다 더 잘 안다고 하더만."

아무리 봐도 모범생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좀 심하게 보면 동네 노는 양아치 수준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다가 태도도 까칠하기 그지 없었던 그였기에 오히려 믿음이 간 그는 앰플의 뚜껑을 열었다.

"향기 좋네요?"

뚜껑을 열자마자 좋은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미경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살짝 얼굴을 붉히자 천후는 빙긋 웃었다.

"혹시 나쁜 약이나 그런 거면 어쩌죠?"

"이정도면 뭐 큰 문제는 없을거야. 그리고 1층에 닥터 김도 있는데 뭐. 너무 걱정 말자고."

성경 엔터테인먼트 말고도 그룹의 일을 하며 마약계통의 약도 꽤 취급해 본 그는 이 앰플에 딱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꿀꺽."

고작해야 몇방울에 불과한 붉은 액체를 탈탈 털어 입에 넣은 그는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에 쓴웃음을 지었다. 냄새는 좋았는데... 그렇게 생각한 그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보는 아내가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보인다. 평소에도 사랑스러웠지만 붉은색 실크 가운을 입은 그녀의 몸을 보니 침이 절로 넘어간다.

"여, 여보?"

"으응?"

"그... 여보께..."

"오...오오오!?"

어떤 약을 먹어도 힘을 내는 일이 없던 양물이 발딱 서버렸다. 젊었을 때, 아니 젊은 시절 이상으로 단단하게 발기한 양물을 보며 천후가 기뻐하자 미경은 얼굴을 붉힌 후 살며시 그의 양물을 잡았다.

"어, 엄청 뜨거워요..."

"후후후... 그리고 당신도 뜨겁지."

천후는 미경을 끌어안았다. 매끈한 배에 닿는 뜨거운 양물에 그녀가 얼굴을 붉히자 천후는 그녀를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에서는 미경의 신음소리가 터져나왔고 그 신음성은 몇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김비서님. 구해오신 약이 꽤 효과가 좋나보네요?"

"후후후후... 그 약이 좀 좋죠."

1층까지 울릴 정도로 미경의 신음성이 거세어지자 천후의 비서인 김미선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정도라면 자신에 대한 천후의 주가가 상승했을 것이다. 실세 중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천후에게 잘 보여 차후 성경 그룹의 실세 반열에 오르고 싶었던 그녀는 커피를 홀짝이며 안경 너머의 눈을 번뜩였다.

"하아...여보오..."

온 몸이 뻐근하다. 행복한 피로에 미경은 신음하며 천후의 입술을 핥았다. 그녀가 애교를 피우는 것에 만족하며 천후는 자신의 양물을 쓱 만졌다. 몇번이나 사정했는데도 아직 힘을 잃지 않은 양물에 만족한 그는 미경의 몸을 끌어 안고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쪽쪽 빨았다. 그런 그가 사랑스러웠는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미경은 낮게 신음하며 물었다.

"아항...으... 여보... 무슨 일이에요? 정말...?"

"응?"

"이렇게 갑자기... 혹시 그 약 때문일까요?"

"...그 약이라면..."

회사에서 만났던 학생이 주었던 붉은색 앰플. 그것을 먹자마자 반응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김비서가 가져다 준 약 때문일까?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입 안에 있는 오돌토돌한 유두를 살짝 깨문 그는 사랑스러운 아내를 올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지금은 그것보다는... 그동안 못한 걸 채우자고."

"후후후후... 알겠어요... 아흣...!"

248====================

준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거냐?"

성경 그룹의 국내 영업부 정운택 본부장은 기가 막혔다. 자신의 앞에서 덜덜 떨고 있는 부하의 말이 믿기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장난하냐!"

"어이쿠!"

화를 참지 못한 정운택은 무릎꿇고 있는 덩치를 발로 걷어찼다. 어디서 되도 않는 개소리인가. 양지환이 누군가. 성경그룹이 제대로 빛을 보기 전부터 음지에서 활약하던, 국내 조폭계에서도 꽤나 유명한 칼잡이가 아닌가.

"그 새끼 살인하기 싫어서 튄 거 아니야!?"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빛이 번쩍이더니 양지환이 시체, 그것도 네토막 나버려서 죽어버렸다. 또 빛이 번쩍이더니 셋이나 죽고 벤이 박살났다. 아무리 들어도 개소리로 밖에 생각되지 않은 그가 이를 갈자 그의 앞에 있던 조폭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외쳤다.

"하지만 진짭니다! 저만 본게 아니라구요! 그렇지?"

"네!"

"진짭니다!"

"영화같았어요!"

"어이구... 등신들. 내가 이런 놈들이랑 무슨 일을 하냐! 응! 내가!!"

씩씩거리며 그의 뺨을 몇번 때린 정운택은 숨을 가라앉힌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원석을 치러 가지 않은 부하들은 지금 정운택의 앞에 무릎꿇고 있는 사내들을 보며 비웃고 있었다.

"야. 잘 들어. 이 쓰레기같은 새끼들아. 이번에 강원석 못잡아오면 너네가 네토막 날 줄 알아. 알았어!?"

"하지만 형님!"

"누가 형님이야! 누가!!"

그토록 본부장님이라 부르라고 했거늘. 정운택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조폭의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그것에 맞은 그가 쓰러지자 정운택은 화를 참지 못하고 옆에 있는 골프채를 들었다.

"이! 새! 끼! 야!"

"악! 악! 자, 잘못했습니다! 형, 아니! 본부장님! 아악! 그, 그렇지만 진짭니다!"

"퍽! 퍽!"

계속해서 자신의 말이 진짜라는 그를 몇번이나 후려친 정운택은 휘어진 골프채를 뒤로 휙 던졌다. 갑자기 힘을 섰더니 땀이 난다. 씩씩거리던 그를 말리며 정운택의 뒤에 있던 이십대 후반의 요염한 미녀가 그를 말렸다.

정운택의 수족이자 비서이고, 또 그의 애인인 양미혜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말리고 말했다.

"본부장님. 갑자기 그렇게 움직이시면 혈압이..."

"내가 이새끼들 때문에 혈압터져 죽는다!"

양미혜가 손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에 난 땀을 닦아주자 정운택은 또다시 열을 내었고 그런 그를 보며 그녀는 쓰게 웃었다.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쨌든 한두명도 아니고 쉰명이 같은 얘기를 하는데... 주의 할 필요는 있을거에요."

"하아... 시발. 진짜. 어휴! 야! 꼴보기 싫으니까 다 데리고 나가!"

부하들이 나가자 정운택은 인상을 구기며 책상에 몸을 기댔다. 그런 그에게 다가간 양미혜는 부드럽게 웃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마세요. 강원석은 이제 힘도 없는데 뭘 어쩌겠어요..."

"그 힘도 없는 새끼가 지금 뭔 방법을 썼는지 해외 영업을 해냈다는게 문제지. 그것도 거의 공짜에 가까운 방법으로 말야."

금괴와 마약, 총기를 원가에 들고 와버린 것에 그룹 내 간부들은 기겁했다. 밀수라는게 이런 저런 수수료와 밀수 비용을 붙이면 원가의 두배에서 세배의 가격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도 상당히 남는 장사다. 그런 것을 그냥 삼합회에 지불한 비용만 가지고 해결해버린 것이다.

이정도로 성과를 내버리면 아무리 끈 떨어진 신세라고 할 수 있는 강원석을 회장인 장천상이나 차기 회장이라 할 수 있는 회장의 아들 장천하가 다시 볼 수 밖에 없었다. 이번 한번의 영업으로 백억이 넘는 막대한 이득을 남겨버렸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강원석 그 새끼가 따르던 김갑수가 가버리고 갑수 부하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졌는데... 이렇게 그가 회장님의 주목을 받게 되고 힘을 되찾으면 그들이 강원석에게 합류할 가능성이 높다.'

그룹 내에서 평가하는 강원석은 꽤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데다가 야망까지 있는 녀석었다. 만약 그에게 힘이 주어진다면 그는 낮아진 서열을 복구하는 것으로 모잘라 다시 급히 치고 오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제 나이를 먹어 은퇴를 앞두고 있는 장천상을 대신하여 성경이라는 거대 그룹의 주인, 혹은 장천하와 함께 그룹을 양분할 기대주로 다시 재도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열 2위이기는 하지만 장천하는 애송이에 불과해. 그 녀석의 후견인으로 내가 나설 수만 있다면 성경 그룹은 내것이 된다.'

결혼한 이후로 완전히 세력다툼에서 멀어져 성경 엔터테인먼트만 운영하고 있는 장천상의 조카 장천후는 신경쓸 필요도 없었고 자신의 바로 위에 있는 곽경림은 장천상의 수족과 같은 사람이라 장천상이 은퇴하면 같이 은퇴할거라고 했었다. 그렇게 되면 남은 것은 애송이 장천하와 자신 뿐이다.

'강원석 그 새끼를 상대하느니 차라리 장천하를 상대하는게 낫지.'

부모의 후광으로 후계자가 된 것 뿐이지 제대로 된 실력도, 성과도 내지 못해 그룹내에서 입지가 그리 좋지 않은 장천하에는 충분히 자신이 커버할 수 있는 상대였다. 하지만 맨주먹으로 치고 올라 여기까지 온 강원석이 상대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삼십대 중반에 불과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밑바닥에서 굴러 온갖 일을 다 겪어보았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인 장천하와 비교해도 충분히 무섭다고 생각할 만한 상대였다.

"제길..."

"일단 그가 어떻게 밀수를 성공시켰는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양미혜는 이를 갈며 분통을 터트린 정운택에게 몇가지 서류를 내밀었다. 신상명세가 적혀 있는 서류를 받은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양미혜는 생글거리며 조용히 말했다.

"강원석이 해외로 나갈 때 함께 갔던 사람입니다. 이름은 김철수... 아마 가명이겠지요. 뒷조사를 해보니 한운현이라는 이름의 고등학생이더군요. 정확하게는 이번에 퇴학을 당한..."

"그래서?"

고등학생 하나 데리고 간게 뭐가 문제라는 건가. 양미혜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 그럼... 이 한운현이라는 놈이 밀수를 했다는건가? 하지만 출입국 기록을 보면 강원석과 한운현은 같이 나갔다가 하루만에 돌아왔어. 그것도 아예 세관을 통해서 말이지. 그럼 아니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조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흐으음..."

양미혜의 조언은 항상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된다. 주의깊은 그녀의 성격 덕분에 위기에서 몇번이나 목숨을 건졌었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 정도는 큰 문제가 안된다.

"네 말대로 하지."

"그러실 것 같아서 이미 준비해놨습니다. 그리고 강원석을 잡을 킬러두요. 솜씨 좋은 스나이퍼라고 하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을거에요~"

잘 아는 흥신소에 이미 한운현이라는 자에 대한 수배를 해 놓고 또 정공법으로 안되니 다른 방법으로 끝낼 방법까지 준비해놓은 양미혜는 정운택을 향해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정운택은 씨익 마주 웃은 후 그녀의 치마를 천천히 벗겨나갔다.

"역시 너랑 함께 있으니까 일이 잘 풀리는 것 같단 말이지..."

"후후... 그렇죠?"

그의 손길이 검은색 스타킹에 감싸진 탄력적인 허벅지를 쓰다듬자 양미혜는 살며시 그의 바지를 벗겨나갔다. 오십대임에도 불구하고 이십대 청년과 같은 위용을 자랑하는 그의 남성을 부드럽게 잡은 그녀는 도톰한 입술을 벌린 후 말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제가 조사하고 말씀드릴게요. 만약 그가 이상한 능력으로 밀수를 할 수 있는 거라면... 후후후. 본부장님 부하로 삼는게 좋지 않겠어요? 조사해보니 고작 고등학생 정도에 불과한데... 그런 남자애들이야 구워삶는 건 금방이죠."

"으음... 그럼 그 건은 너에게 맡기지. 괜히 애새끼들 보냈다가 또 저런 보고 들어오면 나 열불터져 죽는다."

"으읏... 아, 알겠어요. 하으응..."

"은찬성이 오늘 아침에 김천 소년원으로 송치되었다고 합니다."

"어? 벌써?"

예상보다 판결이 빠르다. 고작 이틀만에 보내진단 말인가? 운현이 궁금해하자 한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탈주를 하고 운현님을 습격하려고 한게 너무 노골적이라서... 경찰에서도 오래 데리고 있고 싶지 않은 것 같더군요. 거기에 괘씸죄까지 추가되어서 바로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변호사 선임 안했어?"

"은찬성의 아버지는 그냥 소년원 보내라고 하시더군요. 저런 놈에게는 합의금으로 낼 돈이 한푼도 아깝다고... 제가 사람을 써서 공탁금을 넣어 최대한 줄이긴 했지만 정식 합의를 못한 상황이라 형량이 저렇게 나왔습니다. 그나마 그래도 줄은 겁니다. 10년이 넘어갈 것을 2년으로 줄인거니까요."

하긴. 마약 소지에 탈주에 살인미수까지 적용되어버렸으니 그냥 연을 끊고 싶겠지. 하지만 이래서는 곤란했다.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떨떠름히 말했다.

"김천이면 여기서 얼마나 걸리지?"

"차로 다섯시간쯤..."

"하 시발... 진짜 내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 놈이네. 안되겠다. 이놈은 진짜 골수까지 빨아먹어야지."

그에 대한 작업을 제대로 끝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게 될 줄이야. 역시 대한민국 공무원. 감히 예측을 할 수가 없다. 운현이 짜증을 내며 중얼거리자 한도는 그를 향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손을 쓰기도 전에 움직이는 것은 한도 역시도 예상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탈주한 범인이 살인미수를 저지른 탓에 여론을 생각해서 빠르게 처리한 모양입니다. 경찰 쪽 얘기로는 그 탈주 때문에 경찰 두명과 검사 한명이 징계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괜히 오래 끌고 싶지 않아서 바로 보낸 모양입니다만... 좀 이례적이긴 하죠."

"끙... 그래도 그렇지. 어쩜 법치국가에서..."

운현은 인상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생각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쩌겠는가. 가야지.

"가자."

"그러실 것 같아서 준비 다해놨습니다. 차에 타시죠."

한도, 그리고 아직은 혼자 내버려 둘 수 없는 원석을 데리고 운현은 김천 소년원으로 향했다. 을씨년스러운 소년원의 분위기를 즐기며 운현은 소년원 안에 들어갔다. 이미 한도가 면회 요청을 다 해놓은 덕분인지 기다리는 일 없이 운현은 원석과 만날 수 있었다.

"여."

"여? 이 씨발...!"

"워워. 진정하게 친구여. 지금 날뛰었다간 독방신세일세."

파란색 죄수복을 입고 있는 찬성은 운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화를 내려했고 운현은 그를 말리고 뒤쪽을 가리켰다. 이제 들어온지 하루도 안되었는데 괜히 소란을 피우면 너만 손해라는 식으로 운현이 말하자 찬성은 독기 서린 눈으로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 개... 후우..."

자신이 움직이자 근처에 있던 덩치 큰 간수들이 이를 드러내었다. 괜히 여기서 화를 내고 성질을 내봤자 자기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찬성이 씩씩거리며 자신을 노려보자 운현은 느긋하게 웃은 후 물었다.

"야. 너 판결봤다. 소년원에서 5년이라면서? 위증 반년 마약소지 일년 반. 탈주 일년 나 습격한거 이년."

"...그래서? 너 지금 나 놀리려고 왔냐? 내가 나가면..."

"나가면?"

"......"

여기서 말하면 협박죄까지 추가되어 형량이 길어질 수 있었다. 찬성은 씩씩거리며 죽일 듯 운현을 노려보았고 그 시선을 받으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찬성아."

"....."

"친구여."

"친구라는 얘기 꺼내지도 마!! 개새끼야!!"

느긋한 운현의 말에 찬성이 화를 냈다. 그런 그를 향해 운현은 책상을 톡톡 친 후 말했다.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해도 난 널 아직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어."

"너 병신이냐? 날 친구라고 생각한다고? 야. 네가 날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너 습격한거 봐줄 수도 있겠네? 응? 어디 한번..."

"그러려고 왔다네. 마이 소울 프렌드여."

"...뭐?"

정말 예상 못한 발언이다. 운현의 말에 찬성은 자기가 잘못들었나 싶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상대를 용서한단 말인가? 찬성은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그, 그게 정말이야!?"

"그래. 짜식아. 내가 누구냐? 한운현. 은찬성의 소울 프렌드 아니냐. 사람이 급박한 상황에 빠지면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야야. 형이 네 맘 다 이해한다. 형이 까짓거. 무보수... 는 좀 곤란하고. 네가 빚지는 형태로 합의를 봐줄 수 있다."

"우, 운현아..."

그의 말에 찬성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렇다면 5년 살 것을 3년만 소년원에서 버티면 된다는 것 아닌가. 그가 눈물을 흘리려 하자 운현은 피식 웃은 후 담담히 말했다.

"일단 너도 알다시피 내가 아는 형님이 이한도. 이앤박이라는 거대 로펌의 수석 변호사님이거든. 그 분한테 부탁해서 날 습격한 것은 그냥 합의하는 걸로 퉁 칠 수 있어. 그래도 탈주랑 마약 소지는 좀..."

"야야... 나 진짜 마약 안해... 네가 더 잘 알잖아..."

"물론 알고 있지 친구여. 자네가 마약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더 잘 알고 있네만... 그래도 어쩌겠냐. 너네 집에서. 그것도 네 방에서 마약이 나왔다는데.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그건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 그냥 좃됐구나... 생각하렴."

"흑...흐흑..."

어쩌다가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찬성은 후회했다. 운현을 적대한 것도, 그리고 괜히 거짓 증언을 한 것도 모두가 후회된다. 찬성이 눈물을 뚝뚝 흘리자 운현은 그의 어깨를 팡 치며 말했다.

"야! 사내새끼가 왜 쫄고 그러냐!? 살다보면 소년원 가고 그럴 수도 있는거지. 너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사식은 형이 알아서 잘 챙겨줄테니까. 응? 거기 애들이랑 잘 나눠먹고 그래."

"흑...고맙다... 고마워... 운현아... 그, 그리고 미안해... 내 잘못했어..."

자신을 죽이려고 했는데도 자신을 믿어주고 또 이렇게까지 해주는 운현에게 찬성은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 아버지마저도 자신을 버렸는데 친구가 이렇게 해주는 것에 감동한 그가 엉엉 울자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안아주었다.

어린애처럼 운현을 끌어안고 찬성이 엉엉 울자 운현은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 놈도 작업은 끝났군. 젠장... 이렇게 쉽게 끝날거 괜히 다섯시간이나 써서 내려왔잖아.'

249====================

준비

사온 치킨을 정신없이 먹고 콜라를 다 마신 찬성이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본 후에야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도 소년원에 있어봐서 아는데 이제 한달만 지나면 찬성의 정신은 거의 붕괴상태 수준으로 가버릴 지도 몰랐다. 그의 정신을 이용해서 일을 해야 하는데 정신이 붕괴되면 곤란한 운현으로서는 이렇게나마 그를 케어해야 했다.

"운현님."

"아. 반갑습니다."

운현이 나오자 한도는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바코드 머리에 덩치가 큰 교도관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얼굴에 탐욕이 득실거리는 그에게 인사한 운현은 거만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가 손을 내밀자 악수를 한 후 말했다.

"박한우다. 이곳 소년 교도소의 부소장이지."

"한운현입니다. 은찬성. 제 친구이니까 잘 좀 부탁드립니다."

"허... 돈 많은 친구 둬서 좋겠네. 듣자하니 그 새끼가 자넬 죽이려고 했다면서? 그래도 돕고 싶은건가?"

찬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억이나 되는 돈을 그에게 찔러 준 운현은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소년원에 갇힌 자기 자식을 잘 부탁한다면서 돈을 찔러 준 이들 중 가장 많은 금액을 준 운현을 가만히 바라보던 박한우는 싱글거리며 말했고 그를 향해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친구잖아요. 이정도는 해줘야죠."

'그 새끼가 나한테 해 줄 걸 생각하면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온전히 보전한 정신은 자신을 위해서 쓰일 것이다. 필요하니 보호한다. 물론 필요성이 떨어진다면 얼마든지 버릴 생각이다. 그 속내를 알리가 없는 박한우는 그저 신기하다는 듯 바라 볼 뿐 이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일 생기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그래. 하... 이런 좋은 친구를 죽이려고 하다니. 원한다면 어떻게 좀 빡빡하게 해 줄 수 있는데."

돈도 많고, 꽤 능력도 있어보이는 운현이 마음에 들었던 그는 어떻게 잘 보여서 퇴직 후에 뭔가 더 얻어낼 것을 기대하며 물었지만 운현은 그저 웃을 뿐 이었다. 그것이 거절의 의미라는 것을 눈치챈 박한우는 입맛을 다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자네가 부탁한 것은 알아서 처리해주겠네. 걱정 말게나."

"부탁드립니다."

'일이 잘 안되면 지옥이 뭔지 보여주지...'

성경 그룹은 어린 시절부터 그룹의 인재로 써먹기 위해서 각 소년원과 교도소에 몇몇의 조직원을 보내 놓은 상태였다. 당연히 김천 소년 교도소에도 성경 그룹의 조직원은 있었고 그에게도 찬성을 감시하라고 말해 놓은 운현은  돈을 처먹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경우 박한우를 작살 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박한우는 그저 기분 좋게 웃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운현은 몸을 돌려 차에 올라탔다.

"다 끝나셨습니까?"

"그래. 가자."

몇시간을 달려 겨우 숙소에 도착한 운현과 원석은 한도를 보내고 같이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로 돌아 온 운현은 곧장 지하실로 향했다.

"음..."

라티나가 들어 있는 관을 꺼낸 운현은 그녀의 가슴에 서큐버스의 봉인석을 끼워 넣고 그녀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라티나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너 성배에 신성을 담을 수 있냐?"

"네."

괜히 과거의 자신이 아르토리우스에게 라티나를 만들라고 한 것이 아닐 것이다 생각한 운현은 그녀를 깨워 물었고 만족할만한 대답을 얻어냈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숨겨진 기능이 몇가지 더 있을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운현은 차분히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거 잘됐군. 아. 그리고 몇가지만 더 묻자. 신성을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냐? 운명 바꾸는 것 말고."

과거의 자신이 신성을 모으라고 한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저 회귀를 하는 것을 위해서만이라면 신성은 절반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열개 이상 모아두라고 한 이유를 그가 묻자 라티나는 천천히 답했다.

"신성을 이용하면 고유의 스킬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였나...'

운현은 눈을 감았다.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한 스킬들. 한손검 숙련이나 하이딩, 프리저브, 훔쳐배우기. 그리고 패시브 스킬인 현자의 시간까지. 다른 어떤 직업을 찾아도 이러한 스킬들을 가지고 있는 직업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과거의 자신이 안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있겠지...'

현자의 관에 들어 있던 것들을 떠올리며 운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운명의 오르골에서 성배를 꺼내어 라티나에게 넘겼고 라티나는 그것을 받은 후 조심스레 물었다.

"성배에 신성을 옮겨 담는 것은 신성을 하나 소모해야 합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어. 해."

"알겠습니다."

매번 자신이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 수준으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자가 필요했는데 지금 상황에서 쓸만한 것은 라티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은 이것을 예상했기에 아르토리우스에게 위신체라는 강력한 도구를 만들어 놓으라고 한 것이겠지. 운현은 철저하게 계산된 그의 계획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적어도 그 수준까지는 올라가야 한다 이거지... 좋아. 해주지.'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하는 찬성과 윤지에 대한 작업을 끝마쳤으니 나머지는 라티나에게 떠넘기고 연구를 하려고 했던 운현은 그녀가 자신이 가진 신성을 성배로 모두 옮겨 놓자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성배를 받아 인벤토리에 넣은 후 물었다.

"신성을 이용해서 스킬을 만든다라... 그럼 이 신성을 옮기는 능력은 네가 가진 고유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신성을 제어하는 것은 카야만이 가능한 능력이 아니었던가. 운현이 궁금해하며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토리우스님 말씀으로는 신성제어도 신성을 통해서 만든 스킬이라고 하더군요."

"흐음... 그럼 신성을 이용해서 스킬을 만드는 것은 어떻게 하는거지?"

"성배를 들고 간절히 빌면 됩니다."

'그 구슬과 비슷한 원린가...'

회귀를 할 때 구슬에 자신의 소원을 빌었던 것을 떠올리며 운현은 생각을 마쳤다. 어색한 얼굴로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던 운현은 준비한 것들을 모두 인벤토리에 넣은 후 말했다.

"일 좀 하자."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운현은 그녀를 데리고 위로 올라갔다. 자신이 알던 세계가 아닌 것에 라티나가 당황하는 동안 운현은 원석의 방문을 열었다.

"야."

"네. 어...? 그, 그 미녀는 누굽니까?"

운현의 옆에 서 있는 라티나를 가리키며 원석은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며 눈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물었다. 어지간한 연예인 이상의 미녀다. 복장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이정도라면 외모만으로도 경국지색이라 불려도 시원찮을 여자이기에 원석은 쓰게 웃은 후 운현에게 다가갔다.

"라티나라고. 내가 데리고 있던 애다."

"이런 여자가 있어서 그렇게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안가지신 겁니까?"

"그런 거 아니다. 앞으로 얘가 널 가드할거야."

"예? 하지만."

아무런 표정 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미녀. 라티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미녀다. 얇은 몸. 가는 팔 다리. 어떻게 보면 청순하고 또 어떻게 보면 요염해보이는 두가지 속성을 동시에 보유한 그녀의 모습에 원석은 절로 흑심이 돋았다.

"내가 매번 따라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 뭐 그렇긴 합니다만. 하긴 운현님은 연구하느라 바쁘셨죠. 근데 저런 호리호리한 여자가 가드가 가능할까요?"

좋냐 싫냐만 따진다면 당연히 좋았다. 일단 눈이 즐겁지 않은가. 직업적 특성상 미녀들은 수도 없이 만나봤지만 이런 미녀는 만나 본 적이 없었던 원석은 침을 꼴깍 삼키고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운현의 힘은 자신이 직접 봤으니 알겠지만 라티나의 힘을 본 적이 없는 원석으로서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물론 운현이 데리고 왔으니 필경 보통 이상은 하겠지만 자신이 상대해야 할 자는 보통 이상의 상대였다. 특히나 여자가. 그것도 저런 미녀가 이런 일을 하다가 잘못되면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 잘 아는 원석은 조심스레 말했고 그런 그를 보며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 뭐하면 대련이라도 해볼텐가?"

"그건 좀... 아. 물론 제가 질 것 같아서요."

저 운현이 자신만만하게 내보낸 여자니 반드시 자신보다 강할 것이다. 괜히 나서서 고통받고 싶지 않았던 원석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고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얘를 데리고 습격을 갔다오자."

"네?"

"라티나가 얼마나 강한지 확인하고 싶잖아. 물론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얘도 그리 약하지 않아."

라티나의 레벨은 400이 넘었다. 만렙인 자신에 비하면 확실히 약하다고 볼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세계의 그 어떤 누구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운현이 느긋하게 말하자 원석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군요. 몇군데 쳐야 할 곳이 있었는데. 인원 채워지면 가려고 기다리던 곳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시죠."

"음. 그렇게 하지. 아. 가기 전에 얘 옷 좀 사서 입히자. 이런 옷 입히고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라티나가 입고 있는 옷은 판타지 세계에서 입던 옷이었다. 물론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너무 눈에 띈다. 가뜩이나 그 미모때문에 더욱 눈에 띄는데 괜히 더 눈에 띌 필요가 없다 생각한 운현이 말하자 원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백화점으로 가시죠."

원석과 함께 라티나를 데리고 백화점으로 향한 운현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라티나를 보며 쓰게 웃었다. 자신이야 원래 세계로 돌아 온 것이지만 라티나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차원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도, 그리고 그녀 안에 있는 서큐버스의 혼도 이런 광경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운현님. 여긴."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백화점에 들어 선 라티나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국어가 아니다. 운현의 후즐그래한 츄리닝을 입고 있지만 그 미모가 빛을 잃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괜히 입 열지 마라."

"....."

라티나가 하는 말은 한국어가 아닌 그쪽 세계의 언어였다. 그쪽 세계의 언어로 라티나에게 말해 준 운현은 넘치는 사람들을 지나 라티나와 원석을 데리고 여성 속옷 코너로 향했다.

"치수 재고 괜찮은 걸로 속옷 입혀주세요. 외국인이라 한국어 잘 못하니까 물어보지 마시고 그냥 저한테 말씀하세요."

"어머... 완전 미인이시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수많은 여성 속옷들과 여성들로 넘쳐나는 매장에 당당히 들어간 운현은 땅만 내리보고 있는 원석과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신기해하는 라티나를 무시한 채 포켓북을 꺼내었다. 언제 어디서든 읽을 수 있게 포켓북에 연구자료를 정리한 것을 적어와 그것을 읽으며 생각하던 운현은 점원이 다가오자 고개를 들고 물었다.

"왜요?"

"혹시... 연인이신가요? 아니면 가족... 은 아닌 것 같고."

외국인처럼 보이는 라티나에 비해 운현은 확실히 한국인으로 보였다. 그것에 그녀가 떨떠름히 묻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왜요?"

"그게... 손님분의 체형이 너무 좋아서 속옷을 어떤 것을 입혀도 아름다우신데... 어떤게 좋으세요?"

"스포츠 브라와 스포츠 팬티. 활동성이 좋은 것으로 해주세요."

"네? 하지만."

"해달라는대로 해줘요."

"아... 알겠습니다."

라티나가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나신이 되자 여자인 자신마저도 반할 정도의 체형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아름다운 체형에 고작 스포츠 브라와 스포츠 팬티라니. 안타까워 한마디 하려던 그녀는 운현의 싸늘한 시선에 움찔하며 괜찮은 속옷을 고르러 갔다.

"넌 뭐하냐?"

"크흠. 아, 아무리 저라고 해도 여기 대놓고 서 있긴 좀 그렇군요."

힐끔힐끔 야한 속옷을 보던 그는 자신을 째릿 노려보는 다른 여성들의 시선에 쓰게 웃었다. 단순한 조폭이라면 모를까 나름 사회적 위치도 있는 성경 그룹의 해외 영업팀 팀장이다. 오히려 이런 시선이 그에게는 더욱 무서운 것이었기에 그는 떨떠름해 했다.

"세상의 눈에 휩쓸리지 말라고."

"그런데 운현님."

"왜."

"그... 라티나라는 여자와 나누시던 언어는 어느나라 말입니까? 이래뵈도 해외 여러 곳을 다녀서 꽤 외국어에는 익숙한데 처음 듣는 언어더군요."

"몰라도 돼."

사실 운현 역시도 왜 자신만 한국어와 그쪽 세계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몰랐다. 추측하기론 아마 이것 역시도 현자의 시간처럼 과거의 자신이 신성을 소모하여 넣은 능력이 아닐까 싶었던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한 후 운현의 츄리닝을 입고 한보따리 짐을 챙겨 든 라티나가 다가오자 점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해주세요."

"네... 혹시 다른 속옷은...?"

"필요 없습니다. 가자."

250====================

준비

어느 매장을 가든 라티나의 미모는 돋보였다. 그녀를 보며 몇몇 남자들은 번호를 따려 했지만 운현과 원석에게 막혀 헛수고였고 간신히 그녀에게 말을 걸더라도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라티나의 뚱한 표정에 결국 고개를 푹 숙인채 가버렸다. 정장 세벌. 츄리닝 세벌. 그 외에 캐쥬얼한 청바지와 티셔츠 몇벌과 신발 몇켤레. 거기에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책과 동영상 씨디까지 사가지고 온 운현은 검은색 스트라이프 정장과 정장바지. 구두를 신고 어색해 하는 그녀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라티나가 정장을 입으니 미야가 생각났다. 처음 미야를 만났을 때도 그녀는 저런 정장을 입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미야와는 다른 매력을 가진 라티나이지만 그 세계의 인간이 비슷한 옷을 입은 것만으로도 그녀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 운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기다려.'

반드시 돌아간다. 그리고 반드시 구해낼 것이다. 주먹을 꽉 쥐며 생각한 그는 라티나가 차에 오르자 그녀에게 말했다.

"옷은 마음에 드나?"

"예. 제가 입던 옷보다는 확실히 좋은 듯 싶습니다만... 여기는 어딥니까?"

"내가 이계인이라는 것은 들었겠지? 여긴 내가 살던 세계다."

"차원이동... 가능한 것이었습니까? 공간을 다루는 것은 신만이 가능한 일인데..."

"내가 누군지 잊었나?"

"...가짜 신이셨지요."

가짜라 할지라도 신은 신이다. 아니. 어쩌면 세상에 강림할 수 없는 그 어떤 신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가졌을 지도 모르는 운현을 보며 라티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일단 실력 테스트. 지금 가는 곳에 있는 놈들을 다 쓸어버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세계에는 남자가 많군요."

"왜. 하고 싶냐?"

운현이 웃으며 묻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은 그 세계의 존재이지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고 자신의 창조자인 아르토리우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존재하는 자였다.

"섹스는 가능하지만 굳이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아르토리우스님께선 운현님이 저의 주인이라고 하셨으니... 말씀하신다면 하겠습니다만... 원하십니까?"

고개를 갸웃거린 라티나는 자신의 옷자락을 살짝 벌리며 물었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가로 저은 후 차분히 말했다.

"그래? 그럼 됐어. 여긴 피임하는 것도 골치아프니 어지간하면 하지 마라."

마법으로 100% 피임이 가능한 그곳과 다르게 이곳은 콘돔을 끼고 하더라도 임신이 안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운현은 그녀에게 주의를 준 후 담담히 말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존재. 다른 사람에게 정을 주는 것도 금한다. 이 세계의 존재는 우리의 목적을 위해 이용해야 할 존재. 괜히 나서서 정을 주고 사랑을 하지 마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기에 고생길을 걷고 있는 운현은 라티나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라티나는 자신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 도구가 다른 사람에게 정을 주고 목적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운현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골치아픈 일이 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라티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일단은 만족한 운현은 앞좌석에 앉은 원석이 백밀러로 힐끔힐끔 라티나를 훔쳐보자 그의 어깨를 툭 친 후 말했다.

"너도 괜히 얘 좋아하지 마라. 그러다 다친다."

"제, 제가 무슨..."

"눈 돌아가는 거 보인다."

"하하하... 그게 미인을 보면 눈이 돌아가는 것은 남자의 슬픈 숙명이잖습니까. 그 정도는 봐주시죠."

"그렇게 봐주다가 큰코다치는 법이지. 아무튼 난 경고했다."

"알겠습니다..."

라티나의 미모가 뛰어나긴 했지만 운현의 경고를 어기고 그녀에게 껄떡댈 정도로 원석은 등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년간 조폭 생활을 하며 다져진 그의 직감은 라티나가 운현만큼이나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괜히 나대다가 개망신 당하지 말고 얌전히 있자.'

운현이라는 정체 불명의 인간이 데려 온 정체불명의 여자다. 괜히 관심을 가졌다간 자기만 피를 보는 결과가 예측된 원석은 차를 몰고 목적지로 향했다.

한시간쯤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하자 원석은 길 건너편의 큰 건물을 가리켰다. 낡고 허름한 4층 건물의 꼭대기에 현대 인력사무소라는 간판만 달려 있고 나머지는 아무런 간판도 걸려 있지 않은 건물이었다.

"여기가 정운택의 부하들이 있는 곳입니다. 인력 사무소로 위장을 했지만 실상은 조폭 사무실이죠. 여길 한번 쓸면 정운택이 함부로 나서지는 못할 것입니다만..."

"다만?"

"그룹 내의 소문에 정운택은 지금 얌전히 있다고 하더군요.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되지나 않을까 싶습니다만."

"긁어 부스럼으로 상대의 전력을 무너트릴 수 있으면 좋은 일이지."

직접 나서지 않을 수 있다면 운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라티나 정도 된다면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스탯상으로만 따져도 자신과 크게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그녀이기에 운현은 라티나를 보며 물었다.

"지금 저 남자랑 싸우면 이길 수 있겠나?"

"네."

"......"

아무렇지도 않게 라티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원석은 운현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심히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없다는 얼굴로 운현은 담담히 물었다.

"몇명 정도?"

"할버드만 있으면 오백도 문제 없습니다."

"무기 없이 주먹만으로는?"

"상대는 무기가 있는 겁니까?"

"음."

"흠... 무기에 따라 다르지만 고레벨의 무기가 있다면..."

"크게 고레벨의 무기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그렇다면 백명까지는 여유가 있을 겁니다."

잠시 생각하던 라티나가 차분히 답하자 운현은 피식 웃은 후 그녀에게 광검을 꺼내주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라티나가 눈을 빛내자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혹시 모르니 위기시에 쓰도록. 그리고 이것도 착용하고."

"마스크입니까..."

미믹맨으로 활동할 때 쓰던 마스크를 받은 라티나는 그것을 착용한 후 운현이 준 커다란 천으로 머리를 묶었다. 눈만 드러난 상태가 된 그녀는 운현이 옆 건물을 가리키자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죽일까요?"

운현이 얼굴을 가리라고 한 것으로 그의 생각을 읽은 라티나는 차분히 물었다. 모두 죽이는 것이라면 차라리 쉽다. 상아 길드장의 광검만 있다면 저 건물째로 다 박살낼 수도 있었던 그녀가 묻자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소한으로. 만약 위험하다 싶으면 전부 죽여도 상관없지만 처리가 귀찮으니 어디 한두군데 부러트리는 정도로 끝내."

"알겠습니다."

쉬운 길을 내버려두고 왜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 역시도 명령이다. 라티나가 성큼성큼 나가자 원석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괜찮을까요?"

"여차하면 내가 들어가지 뭐."

"와장창!!"

"으아아악!!"

창문을 통해 큰 덩치의 사내가 떨어졌다. 벌써 시작한 것일까? 2층부터 쓸기로 한 것인지 2층의 창문을 통해 누군가가 날뛰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떨떠름히 바라보던 원석은 운현이 손을 내밀자 그의 손에 담배를 쥐어 준 후 말했다.

"저 여자도 마왕의 일족입니까?"

"비슷해."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3층까지 정리를 시작했다. 3층의 창문이 깨지며 그 틈으로 라티나가 날뛰는 것을 본 원석은 절대로 그녀에게도 개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운현님. 저 새끼 총쓰는 것 같은데요?"

"냅둬."

총알 한방에 위신체가 죽을리 없다고 생각한 운현은 만약 위험하다 싶으면 튀어나갈 준비를 했다. 어차피 그레이터 힐이 있으니 즉사만 아니라면 살릴 수 있었다.

'이정도 내구력으로 총알에도 버틸 수 있는지 궁금했으니까...'

내구력만 해도 400이 넘어간다. 만약 총으로 상처를 입힐 수 있다면 더 볼 것 없이 총부터 구매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운현은 총소리가 울리며 라티나가 움찔 몸을 떨자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상처를 안입지는 않는군. 그래도 큰 타격은 없는건가.'

어깨에 총을 맞은 라티나는 잠시 어깨를 본 후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쇠파이프를 들었다. 무기를 쓰는 용병이다. 핼버드가 전용 무기이지만 검을 쓰는 것도 어렵지 않았던 그녀가 쇠파이프를 들자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총을 꺼낸 이들의 양 팔이 박살나기 시작한 것이다

"와우..."

'그래도 광검은 안쓰는 걸 보니 할만한가보군.'

총을 맞고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한 것일까. 운현은 라티나가 3층의 정리를 끝내고 방에서 나가는 것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총은 큰 의미가 없겠군.'

물론 저레벨의 사냥 구역에서는 좋겠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챙길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그걸 모으는게 더 힘들겠다 생각한 운현이 앞으로의 일을 구상할 때 모든 층의 정리를 끝낸 라티나는 터벅터벅 내려와 운현이 있는 차에 도착했다.

"끝냈습니다."

"수고했어. 타."

삼십분도 되지 않아 한 건물에 있는 조폭들을 모두 때려잡은 라티나가 돌아오자 운현은 그녀를 차에 태웠다. 어깨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본 운현이 그것을 가리키자 라티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말했다.

"200레벨 후반대의 궁사가 쏜 화살 수준이더군요. 사용자의 레벨은 그리 높아보이지 않았습니다만."

"치명타는 아니라는건가?"

"방심한 상태에서 머리에 맞으면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무기인지 몰라 집중을 하지 않아 다친 것이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 말은 집중만 하면 총알도 큰 무리 없이 버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긴. 내구력이 몇인데. 운현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도라면 안심하고 맡겨도 되겠군.'

"광검은 가지고 있다가..."

"죄송합니다만 광검보다는 전 창이나 할버드 같은 장병이 더 손에 익습니다. 전력을 다하려면 그것이 좋은데 괜찮다면 그런 무기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리고?"

"이 무기는 상아 길드장의 것이 아닙니까? 운현님께도 소중한 것일텐데 제가 가지고 있기에는..."

운현과 상아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라티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에게 광검을 돌려주었다. 어지간한 무기 이상의 힘을 가진 광검을 그녀가 거절하자 운현은 피식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

"창은 좀 힘들고 봉을 구해주지."

광검이야 총도법 위반에 걸리지 않을 수 있지만 창은 위험하다. 원석을 가드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런 무기를 들고 다니게 할 수 없었던 운현이 느긋하게 말하자 라티나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석."

"네?"

"봉 하나만 구해와. 접을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이정도면 실력 테스트는 괜찮은 것이라고 봐도 되겠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정도라면... 좋습니다. 총에 맞아도 저렇게 움직일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지요. 그런데..."

"왜?"

"대화가 안통하는데..."

가장 큰 문제다. 원석이 떨떠름히 말하자 운현은 라티나의 머리를 꽉 잡으며 천천히 물었다.

"언어를 익혀야겠는데 시간을 얼마나 줄까?"

"일주일이면 됩니다."

"일주일만 기다리면 얘가 어느정도 대화는 할 수 있을거다. 그때까진 내가 움직여주지."

251====================

준비

숙소로 돌아 온 운현은 뒤통수가 쌔한 느낌에 발길을 멈췄다. 주차를 시키고 돌아 온 원석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운현은 광검을 들었다.

"운현님? 왜 그러십니까?"

"어. 아니."

"주와앙!!"

"헉!?"

"아아아악!!"

운현은 옆 건물의 옥상을 향해 광검을 뻗었다. 그 순간 수십미터 길이의 빛의 검이 만들어졌고 그 검에 누군가가 맞았는지 비명을 터트렸다. 그 순간 라티나는 빠르게 뛰어 벽을 타고 올랐다. 원숭이처럼 건물의 요철을 밟고 잡으며 쉽게 옥상으로 오른 그녀는 어깨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사내를 발견했다.

"....."

바닥에 굴러다니는 검은 카메라와 스나이퍼 라이플,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내를 들고 3층에서 뛰어내린 그녀가 가볍게 착지하고 사내를 짊어지고 오자 운현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와 라이플을 가리켰다.

"흠... 남의 사진은 왜 찍고 이런 흉흉한건 왜 들고 계실까."

운현과 원석, 그리고 라티나가 같이 찍혀 있는 사진을 보며 운현은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내의 턱을 꽉 잡았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그가 눈에 띄게 당황하자 운현은 피식 웃은 후 말했다.

"딱히 고문에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침투경을 몇방이나 견딜 수 있는지 궁금하구만. 데리고 가자."

"히익!? 살려... 살려주세..."

"퍽!"

"끄르륵..."

운현의 싸늘한 시선에 그는 울먹거리던 것도 멈춘 채 비명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라티나는 그의 뒷목을 후려쳐 기절시켰다.

"누굴까요?"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알겠냐. 니가 알아야지. 고문은 내가 할테니까 넌 질문이나 해."

"네."

실험실 용도로 만들었지만 아직 제대로 된 연구가 진행되지 않아 넓직한 지하실로 그를 데리고 들어간 운현은 그를 의자에 꽉 묶어 둔 후 1층으로 돌아왔다. 쇼파에 얌전히 앉아 있는 라티나에게 작은 방을 준 후 그곳에서 옷을 갈아입게 한 운현은 그녀가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커다란 티비를 틀고 사온 동영상 씨디를 플레이어에 넣어 재생시켰다.

"알아서 공부해라."

"네."

책과 영상이 있으니 어느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겠지. 커다란 화면에 사람이 나오고 그가 말을 하는 것을 보며 잠시 놀란 라티나였지만 그녀는 곧 한국어를 익히는 것에 집중했다. 그녀가 공부를 시작하자 운현은 원석과 함께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레이터 힐."

어깨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사내를 치료해준 운현은 원석이 자신을 보며 당황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바, 방금 뭐 하신 겁니까?"

"응? 아. 너한테는 보여 준 적 없었나?"

그러고보니 그레이터 힐은 한도에게만 썼었다. 운현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저어 그의 질문을 봉쇄한 후 기절해 있는 사내의 뺨을 후려갈겼다.

"쫘아아아악!!"

입술이 다 터질 정도로 강하게 그가 뺨을 갈기자 사내는 한방에 정신을 차렸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어깨와 운현을 바라보자 원석은 그의 목을 잡으며 물었다.

"너 뭐하는 새끼냐?"

"다, 당신들 뭐요!? 나, 나는 그 건물에 사는 사람인데..."

"그럼 도촬범이네. 그리고 이건 모델건이고. 어휴. 무거워. 요새 뉴스에 보니까 정신나간 소시오패스 새끼들이 모델건으로 사람 쏘고 그런다는데 너 새끼도 그런 새끼냐?"

"...그게..."

운현이 카메라를 들어올리며 묻자 그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운현은 느긋한 어조로 물었다.

"어디 사는 뉘신지도 모를 분이 날 찍었다라..."

"그, 그냥 풍경 찍다가 찍힌거다. 그리고 어린노무 시키가 어른한테 무슨 말버릇이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문답무용. 운현은 그의 어깨를 잡고 침투경을 날렸다. 침투경의 고통에 그가 비명을 내지르자 운현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카메라에 저장된 다른 사진들을 천천히 보았다.

"많이도 찍었네. 남의 가족 사진은 왜 찍은겨?"

카메라 안의 모든 사진들은 자신과 원석의 사진, 그리고 운현의 가족들 사진 뿐 이었다. 그것을 모두 본 운현이 원석에게 카메라를 건네자 그것을 본 원석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운현님의 정체를 알고 협박 하려는 것 같군요. 덤으로 저도 죽이고."

"누가?"

"아마 정운택... 그놈의 비서인 양미혜겠죠."

"양미혜? 여자야?"

"네. 나이는 어리지만 독심이 보통이 아닌데다가 머리도 잘 굴러가서 정운택의 애인 겸 비서 겸 책사 짓을 하는 년입니다. 아주 사갈같은 년이죠. 제가 모시던 형님도 그년의 마수에 걸려 돌아가셨습니다."

빠득 이를 갈며 원석이 말하자 운현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다가 침투경의 효과가 끝나 땀을 흘리며 헐떡거리는 사내의 머리채를 잡았다.

"양미혜가 보내드냐."

그의 머리를 운현이 잡아 당기자 원석은 그를 보며 싸늘히 물었다. 하지만 그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 그게 누구야아...허억...헉...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또다시 침투경이 몸을 파고들었다. 두번째의 침투경에 맞은 그가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내지르자 원석은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진짜 당해본 사람만 안다. 저 고통이 어떤 고통인지.

"아으...아...왜, 왜 이러세요..."

"양미혜가 보내드냐?"

"그, 그게 누군지... 아아아아아아아악!! 말할게!! 말할게에에에!!!"

세번째의 침투경을 겪고 나서야 그는 결국 항복해버렸다. 고통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침투경 두방만으로 공손해진 그는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공포에 질린 얼굴로 운현에게 말했다. 그의 말에 운현은 다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고 또다시 고통이 찾아 올 것에 두려워 한 그는 다급히 외쳤다.

"야, 양미혜 그년이 시켰습니다! 그년이 강원석 당신을 죽이고 한운현에 대한 정보를 알아오라고 했습니다!"

"허... 너까지 죽이라고 했댄다. 이야~ 이거 또 예상 밖이네. 너네 킬러도 고용하냐?"

"끙... 이런 짓은 잘 안하는데..."

이런 민가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면 그 조사는 대대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대체적으로 일을 처리할 때 의문사, 혹은 실종으로 끝내지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정석인데 그 정석을 정운택이 깨버린 것이다.

"왜 이런 자충수를 뒀을까요? 그리고 운현님의 사진은 왜 찍은 거죠? 거기에... 운현님 부모님과 형님의 사진도 있군요."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킬러에게 죽는다면 그 의심은 정운택에게 갈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지금 자신을 적대하는 자는 정운택 뿐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이런 눈에 뻔히 보이는 수를 썼다는 것에 원석이 궁금해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느긋하게 말했다.

"그거야 지금 알아보면 되겠지."

"네?"

"갔다올게. 그 여자네 집 어딘지 알아?"

운현의 말에 원석은 순간 패닉상태에 빠졌다. 지금 저 인간이 뭐라고 말한거지? 잠시 생각하며 정리를 한 원석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 설마 혼자서 양미혜를 잡으러 가시려는 건 아니죠? 운현님의 실력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지금 양미혜를 건드려서 정운택이 열받아 날뛰면 곤란합니다. 물론 운현님이나 라티나님이 나서시면 그 놈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그 놈은 제가 힘을 모아서 쓰러트려야 그 자식이 가지고 있던 힘을 제가 흡수할 수 있다구요. 그래서 제가 운현님께 그 자식을 죽여달라고 안하는 겁니다."

"알아. 그년만 잡아와서 몇개만 물어볼거야. 만약 그년이 진짜로 날 노리고 이런 짓거리를 한거라면..."

"....."

"뭐. 나중에 어떻게든 되겠지."

소중한 실험체는 둘이 마련되었으니 별로 안소중한 실험체를 마련해보자는 생각에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 웃음에 움찔한 원석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어떻게든 되겠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것일까. 그가 두려워하자 운현은 실실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치고 1층으로 올라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라티나입니다."

티비를 보며 한국어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말을 하는 라티나를 본 운현은 그녀의 빠른 흡수력에 감탄했다. 예상은 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할만해?"

"생각보다 어렵지 않군요."

"그럼 됐어. 나 나갔다 올테니까 쟤 잘 지키고 있어."

"어디 가십니까?"

"주제파악 못하고 날 건드리려는 썅년이 있다길래... 걔 잡으러 간다. 그렇게 나에 대해서 궁금하면 직접 가르쳐줘야지. 몸에다가 말이야."

"무슨...?"

하지만 굳이 그녀에게 더 설명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운현은 뒤따라 나온 원석이 망설이며 주소 하나를 적어주자 그것을 받고 라티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좋은데 사네."

말로만 듣던 청담동이다. 운현은 주소를 보며 떨떠름히 말했다. 회장도 아닌 일개 본부장의 비서가 이런데 살 수 있단 말인가? 그가 궁금해하자 원석은 쓰게 웃으며 그의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말씀드렸지만 양미혜는 정원택의 애인이기도 합니다. 정원택이 마련해 준 집이죠."

"와... 진짜 대단하다."

"제가 힘만 되찾으면 그런 곳에 숙소를 마련해 드릴 수도 있는데... 가시겠습니까? 아니 그걸 떠나서 영업 몇번만 뛰시면..."

"아니. 난 소박하니까 여기에 만족할래."

언제 또 이사를 가고 거기에 보안시설을 설치하겠는가. 그리고 좋은 집 살면 뭐하나. 다 의미가 없었다. 지금 숙소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운현이 말하자 원석은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 집도 보안시설비용까지 치면 어지간한 고급 주택 이상의 돈이 투자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다녀올테니까 얌전히 있어라."

밖으로 나와 지하철 역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많은 지하철을 타고 청담역에서 내린 그는 그에게서 얻은 정보대로 고급 주택단지로 향했다.

동네 입구 분위기부터 으리으리했다. 골목 골목에는 경찰과 CCTV가 있었고 사설 경비원으로 보이는 이들도 꽤나 많았다. 개중에는 운현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힐끔거리며 보는 이들도 있었다.

"어이. 이봐."

"네?"

"여긴 무슨 일이지?"

"대한민국 사람이 길도 못걸어요?"

"그런 건 아닌데..."

경찰이 자신을 잡으며 묻자 운현은 그를 향해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대놓고 당당한 그의 모습에 오히려 경찰이 더 놀랐는지 그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이 동네 사는 사람이니?"

"그렇다면 어쩔건데요?"

"아니 옷차림이..."

운현이 입고 있는 옷은 싸구려 캐쥬얼 청바지에 후즐근한 티셔츠 하나였다. 아무리 봐도 이런 고급 주택이 넘쳐나는 곳에 사는 애가 입을 만한 복장이 아니기에 경찰은 그에게 다시 물었고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사는 사람 맞아요. 왜요. 같이 가시게요? 그런데 아저씨 이름이랑 직책이 뭐에요?"

"으, 응? 그건 왜?"

"왜긴요. 아버지한테 말씀드리려구요. 우리 아버지가 검소하신거 좋아해서 저 항상 이런 거 입고 다니는데 왠 순경이 저 거지처럼 입고 다닌다고 의심한다고 말씀드리게요. 집에도 못들어가게 잡으니까 이제 좀 비싼거 사달라고 할건데."

"아니아니! 그,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하하하. 조, 조심히 들어가렴."

까칠한 어조로 그가 말하자 경찰은 당황하며 그의 팔을 놓아주었다. 그를 위 아래로 흝어 본 운현이 다시 말을 걸려 하자 그는 후다닥 도망가버렸다.

'이거 맘 놓고 다니기도 힘들겠군.'

적당한 사각지대에 들어선 운현은 하이딩을 걸고 주소지를 찾아 움직였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 수록 CCTV와 경비원들이 늘어난다.

'여긴가.'

경비원 사무소와 CCTV가 넘쳐나는 골목에 들어 선 운현은 커다란 고급 주택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이건 뭐 애인의 집이 아니라 정운택 본부장의 집같아 보인다.

'이래서 재벌을 조져야 한다고 다들 난리를 친 거구만.'

하루 한끼 먹고 사는 사람도 있고 이런 으리으리한 집을 애인에게 척 줄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더러운 빈부격차. 절로 애국심이 솟아나는 헬조선의 빈부격차를 생각하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뭐 그건 내 알바 아니고... 자. 어디 올라가볼까?'

2층 높이의 담벼락이 있었지만 운현에게는 그리 높은 벽이 아니었다. 벽의 요철을 가볍게 밟고 뛰어 오른 운현은 벽 위에 걸려 있는 철조망을 휙 넘어 안전하게 정원에 착지했다. 화려한 정원을 지나 집 앞에 도착한 운현은 불이 꺼져 있는 집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이를 어쩐다. 그냥 때려부셨다간 새콤이 울릴 것 같고.'

팔짱을 끼고 생각하던 운현은 부수고 들어갈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정원의 의자에 앉은 후 책을 들었다. 슬슬 저녁이라 그런지 자동으로 정원의 가로등이 켜졌다. 그 불빛에 의존해 책을 읽던 운현은 한권의 책을 다 읽었을 때 정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호오.'

짧은 단발머리에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커다란 둔부를 지닌. 요부라는 것이 딱 들어맞을법한 미녀가 검은색 스타킹에 감싸진 매끈한 다리를 움직여 계단을 올라오는 것을 본 운현은 빙긋 웃었다.

'저 여잔가보군.'

"아아아... 피곤해."

커다란 가슴을 쭉 내밀며 기지개를 편 그녀가 현관을 향해 걸어가자 운현은 그녀의 뒤를 바짝 따랐다. 그녀가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대로 따라 들어간 운현은 그녀가 새콤을 끄자마자 바로 그녀의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퍽!"

"끄윽..."

한방에 그녀가 기절하자 운현은 그녀의 가방을 뒤졌다. 지갑 안에서 신분증을 확인해 그녀가 양미혜임을 알게 된 운현은 쓰러져 있는 그녀를 보며 싸늘히 웃었다.

'이걸 어떻게 요리할까...'

252====================

준비

"일단 얘를 옮겨야겠는데."

정운택의 애인이라고 하니 정운택이 들어올지도 몰랐다. 운현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방으로 데리고 가 옷을 벗겼다. 능숙하게 그녀의 옷을 벗겨낸 운현은 자신의 주먹 한방에 그녀의 군살없는 복부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따가 힐해줘야겠군.'

지금은 이렇게 기절해 있는게 낫다. 맥을 짚어 살아 있는지만 확인한 운현은 화려한 속옷과 장신구들만 남겨 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저건 좀 위험하겠군.'

설마 속옷에 GPS를 달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속옷의 여기저기를 만져 혹시 모를 GPS가 있나 확인한 그는 브래지어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무언가에 쓰게 웃었다.

'일단 이것부터 갈아입히자.'

갑자기 고장나면 정운택이 움직일 수도 있었다. 자신의 목적은 그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정운택을 끌어들인다? 끌어들여서 뭐 어쩌겠는가. 정운택은 원석에게 당해야 한다. 그의 말대로 정운택을 지금 자신이 잡았다간 죽도 밥도 안된다.

'일단 준비 다 하고 나가기 전에 해야지.'

"으쌰."

브래지어를 푸니 크고 탄력적인 가슴이 출렁거렸다. 관리를 잘 하고 있는지 핑크색의 유륜과 오똑하고 앙증맞은 유두가 모습을 보였다. 일반적인 고등학생이라면 뒤도 안보고 그것을 빨고 싶어지겠지만 운현은 일반적인 고등학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거면 되려나."

옷장을 뒤져 브래지어 중에서 GPS가 없을만한 스포츠 브래지어를 꺼내 그녀에게 입히고 팬티와 스타킹도 갈아입혔다. 일단 자기 주먹에 맞았으니 쉽게 깨어날 일은 없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다. 인벤토리에서 전기 충격 봉을 꺼낸 운현은 양미혜의 몸에 가져다대고 꽤 아슬아슬할때까지 전기 충격을 먹였다. 작살에 꽂힌 참치처럼 퍼덕거리던 그녀의 몸이 다시 축 늘어지자 운현은 맥박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같은데... 음. 도수 70도. 이정도면 되겠군. 그리고... 에. 이것도 챙기자."

찬장에 있는 양주 중에서 가장 도수가 높은 술 몇병을 꺼내 인벤토리에 넣은 후 집에서 챙겨 온 분무기에 술을 넣은 후 그녀의 몸에 마구 뿌렸다.

코가 진동할 정도로의 술냄새가 그녀의 몸에서 풍기자 운현은 만족스러워하며 웃었다.

'일단 이정도면 됐고...'

남은 술을 입에 머금은 운현은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운현은 전혀 색욕따위는 없었다. 그저 입 안에 있는 술을 그녀에게 보내기만 했을 뿐. 굉장히 독한 술이라 그런지 입에 머금은 것만으로도 취기가 오르려 하는 것에 운현은 붕붕 고개를 저었다.

"뭔 술이 이렇게 독해?"

궁시렁거리며 그 작업을 몇번 더 한 운현은 양미혜의 예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자 술의 뚜껑을 닫고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마지막 작업으로 실내용으로 보이는 츄리닝으로 그녀의 빠르게 옷을 완전히 갈아입힌 운현은 양미혜가 착용하고 있는 장신구를 바라보았다.

'자... 이제 슬슬 가야하는데 뭘 하는게 좋으려나...'

반지와 귀걸이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목걸이에는 GPS가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운현은 뒤통수를 긁저거린 후 양미혜를 잡아 번쩍 들었다.

'일단 혹시 모르니 다 해놔야겠군.'

반지와 귀걸이. 목걸이. 그리고 그녀가 입고 있는 옷. 그것들을 한데 모은 후 운현은 그것들에 전기 충격봉을 가져다 대고 마력을 불어 넣었다. 운현의 막강한 마력을 받은 전기충격봉에서 강력한 전기가 흘러나오자 모여있는 것들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전기 충격 봉을 보면 마력과 코어로 전력을 생산하는게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은데... 한번 뜯어봐야겠군.'

이제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마력에 의해 GPS가 무력화된 것들을 인벤토리에 넣은 후 운현은 양미혜를 들처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GPS의 신호가 사라졌으니 이제 슬슬 정운택이 움직일 것이다.

'그 전에 튀어야지.'

기절한 양미혜를 어깨에 맨 운현은 왼손에 광검을 들었다. 아까 들어오며 탈출시 방해되는 CCTV의 위치는 모두 확인해 두었으니 문제는 없다. 처음의 CCTV를 광검으로 부수자마자 운현은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전력을 다해 그가 뛰기시작하자 운현의 주변이 빠르게 움직여졌다.

"펑!"

그 와중에도 운현은 광검을 쏘아 CCTV를 정확히 부숴나갔다. 그 소리에 몇몇 경비원들이 움직였지만 그들이 움직인 순간 운현은 이미 자리를 뜬 상태였다.

"휴우."

3분도 되지 않아 청담동에서 벗어난 운현은 쌀가마니처럼 어깨에 들쳐메고 있던 양미혜를 가볍게 들어 업었다. 그녀가 축 늘어져 있는데다가 술냄새가 풀풀 풍기는 모습은 기절한 것이 아닌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차라도 있었으면 이런 짓은 안하겠지만 차도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택시!"

"에... 취한 사람은 안태우는데."

거리로 나온 운현은 택시를 잡았다. 운현에게 업혀 있는 양미혜를 본 택시 기사가 인상을 구기자 운현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토하면 제가 시트값 물어낼게요. 토하지는 않을거에요."

"음... 타세요. 어디까지 가십니까?"

"에..."

택시 기사에게 숙소에서 삼십분 정도 떨어져 있는 동네를 말한 운현은 택시가 움직이며 도로를 질주하자 빙긋 웃었다. 이정도면 됐다. 여기서 정운택이 자신의 흔적을 발견한다면? 그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덤비면 박살내면 그만이다. 물론 계획이 상당부분 틀어지긴 하겠지만 말이다.

'발견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양미혜의 집에서 꽤 떨어진 곳부터 아예 하이딩을 하고 움직인 운현이었다. 그것도 모잘라 집 안에서조차 하이딩을 걸고 있는데다가 자신의 이동 경로에 있는 CCTV까지 다 날려먹었으니 자신이 발견되면 그것은 그야말로 운명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운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진짜 걸리지는 않겠지.'

후드를 푹 눌러 쓴 운현은 느긋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 흔들거린 탓에 양미혜는 살며시 운현의 몸쪽으로 쓰러졌다. 향수 냄새와 술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에 운현이 인상을 구기자 택시기사는 백미러로 양미혜의 얼굴을 본 후 웃으며 말했다.

"애인이신가봐요? 미인이네."

"누나에요. 누나. 어휴 진짜. 술만 먹으먼 완전 꽐라가 되서... 알콜중독자라 환장하겠어요. 옷도 봐봐요. 동네 친구 만난다고 집에 사기치고 나가더니 세상에 강남에서 술을 퍼먹고 있을 줄이야."

운현이 인상을 왕창 구기며 격한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택시기사는 머쓱하니 웃었다. 누나라면 이쁘든 아니든 꼬추 안달린 형이다. 자신의 아들과 딸도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서로를 죽여라. 라고 프로그래밍 된 것처럼 사이가 엄청 안좋은 것을 알기에 그는 운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누나랑 사이가 안좋나봐요?"

"누나만 아니었으면 집에 안가고 한남대교로 가달라고 했을거에요. 확 강에 던져버리게."

"어휴... 그래도 누님이 엄청 예쁘신데..."

"다 성형이에요!! 으아아!! 얼굴에 속지 말라구요! 겉만 멀쩡하면 뭐해!! 속이 쓰레긴데!!"

운현의 실감나는 연기에 택시기사는 당황하며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운현이 핏발까지 세우며 씩씩거리는 것에 기가 죽은 것이다. 안그래도 요새 택시기사 폭행이다 뭐다 말이 많은데 괜히 그의 성질을 건드렸다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그는 입을 다물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이제 좀 조용해지겠군.'

운현은 자신의 옆으로 쓰러져 있는 양미혜를 휙 밀쳤다. 자신의 몸에 닿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을 느끼는 것처럼 행동하는 그를 본 택시기사는 쓰게 웃으며 정면으로 눈을 돌렸다.

조금 막히기는 했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자 운현은 그에게 택시요금을 지불한 후 택시에서 내렸다. 일단 빠르게 움직이려면 사람들 눈에 안띄는 것이 좋다. 양미혜를 업고 골목으로 들어간 운현은 골목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고 있는 양아치 둘을 발견했다.

'하 시발.'

"어? 뭐야."

"골뱅이 주웠냐?"

"우리 누난데요."

"아닌 것 같은데... 어디보... 아아아아아악!!"

"넌 뭐... 아아아아아악!!"

동네 자체가 술집과 모텔이 많아서 그런지 술에 잔뜩 꼴아버린 여자가 많았기 때문에 운현이 그런 여자 하나 들고 하러 가는 건 줄로 안 그들에게 운현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그대로 침투경을 걸어버렸다. 두 양아치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자 그들을 싸늘히 바라보던 운현은 그들의 팔을 가볍게 부러트렸다.

"으아아악!!"

"아아아아악!!"

"잘 기어서 나가면 119는 탈 수 있겠지."

그럴리는 없겠지만 정운택이 자신의 흔적을 여기까지 발견했다면 저들은 좋은 미끼가 되어 줄 것이다. 운현이 이곳 어딘가의 모텔로 양미혜를 데리고 간 것으로 말이다. 느긋하게 모텔촌을 걸어 으슥한 골목에 들어 선 운현은 마스크를 쓴 후 모텔 벽을 몇번 박차고 뛰어 올랐다. 가볍게 4층 높이의 모텔 옥상에 도착한 그는 자신의 숙소를 향해 일직선으로 뛰었다.

빠른 몸놀림을 이용해 순식간에 숙소에 도착한 그가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를 기다리던 원석은 운현과 운현의 어깨에 짐덩이처럼 짊어져 있는 양미혜를 보고 기겁했다.

"아니! 진짜 납치한거에요!?"

"응."

"걸리기라도 한다면..."

"안걸려. 안걸려. 걸리면 내가 다 책임질게."

"...하아. 정운택은 양미혜에게 거의 집착할 정도로 그녀를 아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소지품의 대부분에는 GPS가 있다구요."

"이 츄리닝에도?"

"그건 아닌 것 같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그녀의 옷에 금속탐지기를 대 본 원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의 생각대로 집 안에서만 입는 츄리닝이라 그런지 거기까지는 GPS를 달지 않은 모양이다.

"자. 옷 갈아입히자."

"네?"

운현이 인벤토리에서 장신구와 옷을 꺼내자 원석은 기겁하며 그를 말렸다. 츄리닝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다른 것에는 확실히 GPS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여기서 꺼내는 것은 멍청한 짓이나 다름없었기에 원석은 운현을 말렸다.

"야야. 다 제거했어. 걱정마. 전기로 제대로 지져놨으니까 남아나지 않겠지."

"그, 그럼 다행이지만... 근데 옷은 왜 갈아입힙니까?"

"할게 있어서."

"뭘...요?"

대수롭지 않게 그가 말하자 원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하려고 여기까지 데려 온 것일까. 그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묻자 운현은 차분히 말했다.

"응. 가벼운 세뇌."

"아... 그렇구나."

그의 말에 원석은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가벼운 세뇌라니. 혹시 잡아 죽이면 어쩌나. 라고 생각하던 그는 번쩍 고개를 들며 외쳤다.

"뭐, 뭘 어쩐다고요!?"

"세뇌. 가볍게 살짝만 한번 걸어볼게."

"....."

"한번만! 한번만 걸게해줘!"

"...아, 아니 잠깐만요. 세뇌라는게 가볍게 걸 수 있는 그런거에요?"

원석이 어이없어하며 묻자 운현은 오히려 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며 물었다.

"뭔 소리야. 너도 걸려 있잖아."

"네? 그게 무슨..."

"메스미디어에 노출되어 있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세뇌가 걸려 있기 마련이지."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얘가 순진한 소리 하네. 자. 내가 말하는 거 듣고 연상되는 다음 말을 말해봐. 높은 물가 힘드시죠."

"어... 우리는 달라. 홈플러스. 홈플러스."

"여성 대출은?"

"미즈사랑."

"봤냐?"

"이게 뭐요?"

원석의 말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린 후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하... 야. 높은 물가 힘드시죠 한마디에 바로 홈플러스 CM송이 나왔어. 왜 그게 나왔냐? 여성 대출은? 하고 물어보니까 미즈사랑이 나온 이유는?"

"그건..."

운현의 말에 원석은 당황했다. 그야 TV만 틀면 나오는 광고이니 그렇게 하는 것인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원석의 표정이 딱딱히 굳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같은 광고를 연속적으로 내보는 것도 일종의 세뇌야. TV라는 매체를 통해 연속적으로 정보가 주어진다면 인간의 뇌는 그것을 당연시 여기지. 세뇌라는게 어려운 게 아니라고.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인간 하나를 완전히 바꾸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그 사람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는 것도 세뇌의 일종이라고."

"..으음. 그, 그렇군요."

"그래서 중독성 높은 광고나 CM송을 만들어 내려고 광고팀이 난리를 치는 거다.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이 홍보하는 물품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아무튼 내가 하려는 것도 아주 간단한 세뇌야. 시간적 여유가 되면 좀 깊은 세뇌를 걸어야지. 덤으로..."

"덤으로?"

"정운택의 모사이며 신뢰받는 애인이라면서?"

운현은 양미혜를 바라보며 싸늘히 웃었다.

"그 사이가 얼마나 갈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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