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1/40)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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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절대... 절대 잊지 않을게...!!"

자신의 손에 들어와 있는 광검을 꽉 잡은 운현은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활성화된 마법문이 이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열린 것에 운현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상아를 보았다.

"크윽!!"

헬하운드의 몸통박치기에 맞은 상아는 허공에서 몸을 회전하며 착지했지만 충격을 어쩌지는 못했다. 그녀는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운현을 지켰다.

"여긴 못가!!"

"크아아아앙!!"

"하아아압!!"

상아의 손에 들린 검에서 빛이 터져나간다. 아홉줄기의 빛이 헬하운드의 몸에 직격하자 헬하운드는 그대로 나가 떨어져 움직임을 멈췄다.

"카아아앙!?"

"잘했어!!"

운현의 함정에 의해 헬하운드가 잡혔다. 그것을 본 상아는 환하게 웃은 후 훌쩍 뛰어 헬하운드의 목을 베었다. 세번 정도 크게 베고 나서야 헬하운드를 완전히 죽일 수 있었던 상아는 지친 얼굴로 운현을 향해 걸어갔다.

"운현..."

"조심해!!"

"채앵!!"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은 상아를 보며 운현은 다급히 외쳤다. 열린 문에서 또다시 몬스터들이 나온다. 헬하운드 둘. 그리고 양과 비슷한 모습을 한 거대한 덩치의 몬스터다. 거대한 낫을 양 손에 든 그가 걸어나오며 포효하자 공동이 크게 흔들릴 정도로 울렸다.

"저건 또 뭐야!?"

"망할...! 바포메트!? 설마 저게 나온다고!?"

"그게 뭔데!?"

"악마야! 파르티 교단에서 파르티께 창을 들이댄 악마군단장의 수하! 젠장...! 혼자서는 힘들 것 같은데!"

"메에에에에에에!!!"

바포메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헬하운드들을 힐끔 본 후 낫을 크게 휘둘렀다. 상아가 그토록 고생하며 잡은 헬하운드들이 단 한방에 죽어버렸다. 바포메트는 운현과 상아를 향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낫을 겨눴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압박감이 느껴진다. 운현이 이를 갈며 한걸음 나서려고 하자 상아는 그를 막으며 빙긋 웃었다.

"운현."

"......"

상아는 운현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아마 이게 마지막 키스가 되겠지. 그가 회귀를 성공하든, 실패하고 돌아오게 되든. 이번 생에서의 마지막 입맞춤이 될 것이다.

"가. 어서."

"...상아."

"가라고!!!"

상아는 운현이 머뭇거리자 그를 힘껏 밀었다. 상아의 힘에 밀린 운현이 마법문 쪽으로 들어가자 상아는 히죽 웃으며 검을 꽉 잡았다.

"네가 내 운명의 죽음인지 볼까? 운명을 거스르는 자는 이제 없다고... 자. 그럼 간다!!"

전투는 치열했다. 온 몸에 상처가 가득 난 상아는 바포메트의 목을 보고 피식 웃었다. 결국 바포메트라 하더라도 목숨을 걸고 덤비면 이길 수 있다는 건가? 피를 너무 흘려서 그런지 몰라도 눈 앞이 어지럽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상아는 자신의 몸이 점점 따뜻해지고 체력이 회복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아아아아... 아름다운 아가씨..."

"...하. 진짜."

상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5계층을 탐험하는 모험가들에게 있어서 가장 끔찍한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인큐버스라니..."

여인을 홀려 그녀를 강간하고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리는 가장 끔찍한 악마. 잘 생긴 남자 악마가 통로에서 걸어나오며 자신에게 힐링을 건 것에 상아는 피식 웃었다.

"나와 함께 하지 않겠나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상아의 눈이 흐리멍텅해진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비척 걸어오자 인큐버스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양 팔을 벌렸다.

"저와 함께 한다면 당신은 영원히 행복해 질 수 있어요..."

"...그래..."

"저는 당신의 전부랍니다. 자... 말해주세요. 저를 사랑한다고..."

"저는... 당신을..."

인큐버스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상아는 들고 있던 검을 내린 후 도톰한 입술을 열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할 줄 알았냐!!"

인큐버스가 방심한 틈을 노려 상아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서큐버스의 검은 인큐버스의 목을 단번에 날려버렸고 인큐버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바닥에 툭 쓰러지자 상아는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한명 뿐이라고..."

"크르르르...!"

열린 문에서 헬하운드들이 다시 나오기 시작하자 상아는 씨익 웃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녀가 검을 겨누자 헬하운드들은 그녀를 향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아아아아아!! 상아!! 아아!!"

혼자서 버틸 수 있을까? 마법문을 지나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른 운현은 공간 이동이 끝나자 엎드린 채 절망했다. 결국 자신은 아무도 지킬 수 없었다. 그것에 한참동안이나 절망하던 그는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절망만 해서는 안돼. 지금부터가 진짜다. 상아의 희생을 이대로 날려먹을 수는 없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대로 그냥 흘러가는대로 몸을 맡겼다간 모든 노력과 고통, 절망이 허사가 되어버린다. 운현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광검을 꽉 쥐었다.

"반드시 되돌리겠어."

다짐하듯 중얼거린 운현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눈 앞에 무언가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이게 뭐야..."

운현은 눈 앞에 메시지창이 떠오르자 그것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세계에 처음 깨어나서 로그를 보았을 때 남아 있던 글귀. 그것을 본 그는 자신이 이 세계에 진입한 것이 확실히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트리아에 진입합니다.]

하얀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의 끝에는 검은색 일색의 고풍스러운 문이 있었다. 그 문을 향해 걸어가던 운현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인벤토리를 열었다. 인벤토리 안에는 많은 것들이 있었다. 마석부터 시작해서 코어, 몬스터 사체. 그리고 두개의 관과 미믹들까지. 그 중 라티나가 들어가 있는 관을 꺼내 놓은 운현은 그 관을 향해 스킬을 걸었다..

"스틸."

"......"

스틸이 발동되자 관이 인벤토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본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된다. 가능하다.

"된다..."

운현은 자신의 스킬이 이곳에서도 가능한 것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침을 꿀꺽 삼킨 그는 하이딩을 건 채 눈 앞에 보이는 방문의 열었다. 피스나가 만든 하얀 공간과 같은 방. 그 방 안에서 운현은 회귀자의 기억 파편을 얻었을 때 보았던 세 여인이 자신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환영합니다. 운현."

"결국 당신은 해냈군요. 많은 일을 거치고 이곳 알트리아에 들어왔어요. 처음 치고는 훌륭합니다. 아무런 힘도 없이 처음 이세계에 들어와서 당신이 한 일은 정말 대단했어요. 이제 그 포상을 받을 시간입니다."

"원하는 소원이 무엇입니까?"

'날 몰라? 그렇다면... 저 여신들 역시 내 회귀를 모른다는 건데... 기억이 없는 상태로 회귀를 한다는 것은 이 세계마저도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인가? 그리고 소원?'

회귀를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운현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아직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니 여쭤보겠습니다. 이곳은 어디고 당신들은 누굽니까."

"이곳은 알트리아. 운명을 만드는 곳."

"세계의 섭리가 완성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운명을 관리하는 세 여신이지요."

금발여인이 생긋, 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에 빠질 법한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운현은 그 미소에 현혹되지 않았다.

'소원을 이루는 곳이라면... 이곳에서 운명을 바꿀 수 있는건가?'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거린다. 운현은 그녀들을 바라보며 당당히 말했다.

"미야와 바제트를 살려주세요!"

"그건 곤란합니다."

"어째서?"

"이미 그녀들의 운명은 끝났기 때문이지요. 흐르는 물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것처럼 끝나버린 운명이 다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그녀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글쎄요..."

운현의 질문에 금발의 여신은 잠시 생각하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다시 해보는 것은 어떠신가요? 당신의 힘과 기억이 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운명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건가요?"

"글쎄요..."

"당신이라면 가능할거에요."

"지금까지 운명을 바꿔 온 당신이에요! 힘과 기억만 가지고 있다면 가능할거에요!"

대답 대신, 그녀는 미소를 지엇고 옆의 은발과 흑발의 여신은 응원하듯 밝게 말했다. 그리고 운현은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불가능하다고 했어. 하지만 저들은 가능하다고 했지... 누굴 믿어야 하지?'

운현은 그녀들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가짜 신이 무엇입니까?"

"가짜 신? 그건 또 어디서 들으셨는지 모르겠군요. 가짜 신은 인간이되 신인 자. 신의 힘을 인계에서 쓸 수 있는 존재입니다. 보유한 신성을 활용하여 스스로 창조가 가능하고, 스스로 파괴가 가능한. 운명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할 수 있지요."

운현의 질문에 은발 여신은 고개를 갸웃거린 후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운현은 점점 자신의 계획에 확신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가짜 신이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성배가 있다면 가능합니다. 보아하니 당신은 성배를 가지고 있는 듯 하군요. 그것을 저희들에게 돌려주시겠습니까? 성배는 원래 저희들의 물건입니다. 그것을 돌려주신다면 당신에게 가짜 신의 힘을 드리지요."

금발 여신은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신성이 빠져나가 빈껍데기만 남은 성배를 운현은 그녀의 손 위에 올려주었다. 그것을 받은 금발 여신의 미소가 짙어지고 흑발과 은발의 여신은 커다란 상자를 가볍게 들어 옮겼다. 그것이 열리며 거대한 장치가 상자에서 튀어나오자 운현은 그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게 뭡니까?"

"운명의 오르골입니다. 이곳에서 운명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운명을 만든다... 그렇다면?'

운현은 이제서야 그의 계획을 완벽하게 알 수 있었다. 그가 바란 것은 운명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성배로 인해 지금까지의 운명이 확정되었다? 성배가 없을 때는 확정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메뉴얼대로 흘러는 가지만 변경이 충분히 가능한. 그러한 세계라는 것이다.

'처음의 나는 운명을 바꿀 수 있어. 이 세계의 기억이 없다면... 또 하나의 다른 조건은 이 세계에 처음 들어오는 것이라면...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아주 강력한 힘이. 초반부터 모두에게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모든 것을 따르게 할 강력한 힘이.

'그리고 그건... 이 계획의 중요한 일부 중 하나지.'

"그렇군요... 그럼 그게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없어진다? 애초에 세계의 시간축이며 좌표이고 중심입니다. 다른 공간에라도 들어가지 않는 이상 없어질 이유는 없죠."

"그리고 없어져도 상관없습니다. 이미 성배로 운명이 고정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운명은 이미 정해진대로 흘러가겠지요."

운현의 질문에 흑발 여신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하고 성배를 그 장치 안에 밀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장치가 크게 요동치며 은은한 음악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당신으로 인해 어그러진 운명이 조정되었습니다. 이계인이여. 이계인 한운현이여. 당신의 운명 역시 이 운명에 받아들여지게 될것입니다. 자.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아직 결정을 못하셨나요? 후후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빙긋 웃은 은발 여신은 작은 구슬을 운현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것을 받은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차분히 말했다.

"구슬을 쥐고 당신이 희망하는 것을 강렬하게 염원하세요. 그럼 그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짜 신의 힘은요? 그리고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힘은? 기억은? 이것으로 저는 과거로 돌아가 그녀들을 구할 수 있는 겁니까?"

"이 알트리아에서 나가시면 당신은 가짜 신의 힘을 손에 넣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원한다면... 다시 도전할 수는 있겠죠. 그 힘과 능력, 기억을 가지고."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짓는 흑발 여인을 보며 운현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구슬을 바라보았다. 이제 결정의 순간이다. 이것을 위해서 그토록 많은 회귀를 하고, 그토록 많은 그녀들의 죽음을 보았다.

'처음의 나는 저 선량한 미소에 속았겠지. 믿지 마라. 운현. 선량한 자의 웃음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무기다. 소리비도를 기억해라. 그리고... 저년들을 엿먹일 기회를 놓치지 마라.'

은발 여인이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오르골을 상자에 담는다. 상자의 뚜껑이 닫히자 운현은 씨익 웃은 후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틸!"

"무슨!?"

상자의 뚜껑이 닫힌 순간 운명의 오르골이 상자째 사라져버린 것에 세 여신은 당황하다가 증오와 분노로 가득찬 눈으로 운현을 노려보았다. 아까 전까지의 선량하고 따뜻한, 유혹의 분위기따위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운현을 찢어죽이고 싶은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들은 운현의 왼손에 들려 있는 구슬을 보며 경악했다.

"네놈!!?

"지금 무슨 짓을 하는거야!? 당장 돌려주지 못해!?"

"신의 힘으로 명한다! 운명의 오르골이여! 이곳에 다시...! 안되잖아!? 네놈! 무슨 짓을 한거냐!!"

프리저브가 활성화 되어 있었다. 애초에 프리저브의 스킬 설명을 봤을 때부터 이상했다. 훔쳐배우기로 배운 스킬이 바뀌지 않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스틸로 훔친 것을 돌려주지 않는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었단 말인가. 운현은 이제서야 왜 프리저브라는 스킬이 자신에게 생겼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신의 힘마저도 부정하기 위해서!

당황한 그녀들이 이를 갈며 달려오는 것을 본 운현은 구슬을 꽉 쥔 채 외쳤다.

"큭큭큭...! 나는!! 돌아가는 것을 희망한다!! 이 세계를 가짜로 만들고! 내가 있던 원래의 세계로 회귀하길 염원한다!"

그토록 염원하던 비원. 그것을 외친 순간 시야가 흔들렸고 악귀같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세 여신을 향해 비웃음을 던지며 운현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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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띠띠띠띠띠!!!"

"으어어어..."

알람시계가 울리는 소리에 정신이 든다. 뭔가 긴 꿈을 꾼 느낌이 든 운현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어째 온 몸이 찌뿌둥하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그가 팬티만 입은 채 밖으로 나온 그는 터덜터덜 화장실로 향했다.

"...뭐야?"

오줌을 싸며 거울을 본 그는 자신의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슬픔 꿈이라도 꾼 걸까? 하지만 기억따위는 나지 않는다. 까치집이 된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는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으어어어어어어~"

십분만에 대충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밖으로 나온 운현은 부엌으로 향했다. 된장국의 향기가 허기진 배를 울리게 했다.

"밥줘요. 밥."

"어머? 왠일이니? 아침밥도 챙겨먹고? 평소엔 그렇게 깨워도 안일어나는 녀석이..."

"그, 그러게요? 오늘은 배가 고프네요."

평상시와 다른 그의 행동에 어머니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에 어색해하던 운현은 아버지와 형이 나오자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한운현. 임마. 너 중간고사 성적이 그게 뭐냐?"

"에...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

"그래가지고 대학교는 어떻게 가려고 그래? 야. 윤지 반만 닮아봐라. 응? 애가 얼마나 착해? 어른들 속도 안썩히고. 소꿉친구가 되가지고..."

"어휴~ 아침부터 애를 왜 이렇게 구박해요? 더 해요. 더."

성적으로 자신을 구박하는 아버지의 말에 신난 어머니가 응원하자 아버지는 아예 날 잡았다는 듯 신나게 운현을 갈궜다. 참 부담스러운 아침식사 시간이다.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후다닥 밥을 먹은 그는 도망치듯 식탁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어휴. 그놈의 성적 구박."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반이다. 이제 슬슬 나가야 한다. 옷장에 있는 교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그는 거울 속에 보이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역시 오늘도 잘생겼어."

싱글벙글 웃으며 그는 아침의 등교길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20분. 걸어서 10분. 그가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때 쯤 그의 등을 누군가가 톡 쳤다.

"운현아!"

"어... 윤지냐."

"왜 혼자 갔어? 같이 가자니까."

"에...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아침부터 붙어다닐 필요 있냐. 안그래도 같은 반 옆자린데."

"후후후... 부끄러워하긴."

예쁘장하고 순진하며 청초한 분위기와 더불어 누구에게나 살갑게 대하는 덕분에 학교의 마돈나라 불리는 그녀가 자신의 볼을 꼬집으려 하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휙 떨어졌다. 늘상 하던 행동을 그가 회피하자 윤지는 당황하며 손을 내렸다.

"아, 시. 싫었어?"

"아니 그게..."

왜지? 몸이 격렬히 거부한다. 하지만 이유는 모른다. 그는 어색해하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야! 한운현! 임마!"

그의 등에 농구공이 날아온다. 그것에 맞은 운현이 인상을 구겼을 때 굉장히 잘생긴 남자가 걸어왔다. 키는 운현보다 조금 작았지만 그래도 180이 넘는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이 매력적인 그가 다가오자 운현은 떨떠름히 손을 올렸다.

"여어."

"아침부터 왜 죽상이야? 윤지야. 얘 뭔 일 있었어?"

"아냐... 찬성아. 아무것도. 그럼 나 먼저 갈게~"

"에... 은찬성...?"

"허... 이놈보소. 베프 이름도 까먹었냐?"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찬성은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친근하게 다가오는 그의 행동이 묘하게 거슬린다. 그는 입맛을 다시다가 그의 손을 쳐내고 터덜터덜 학교로 향했다.

"저새끼 왜 저래?"

그리고 방금 전까지 친근하던 눈빛은 사라진 채 찬성은 경멸을 담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눈치챈건 아니겠지...?"

학교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하루를 보낸 운현은 놀다 가자는 윤지와 찬성을 무시한 채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몸이 아무래도 안좋다. 불과 어제 학교에 갔다왔는데 굉장히 어색하다.

"왜 이렇게 수업 내용이 쉽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모르던 수학문제가 보는 것만으로도 이해가 되었다. 국어나 역사 같은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과 계통의 수업 내용이 들으면 들을 수록 간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으으...그럴리 없어."

수포자인 자신이 갑작스러운 수학 쪽지 시험에서 만점을 받을 줄이야. 아무래도 몸이 안좋은 모양이다.

"이럴때는 한발 빼는게 최고지."

조용히 집으로 돌아 온 그는 자신의 방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살그머니 들어 온 그는 문을 잠구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문을 잠군 후 컴퓨터를 틀었다. 그리고 EBS 특강 폴더를 열고 그 안에서 수학 폴더를 연 후 몇개의 폴더를 더 열고 나서야 자신의 이상향을 발견하고 히죽 웃었다.

"하. 시발. 볼거 없네."

무려 3테라가 넘는 야동들이 즐비했지만 어느것도 고르기 쉽지 않다. 한참 야동을 고르던 그는 윤지와 닮은 AV배우의 명작을 틀었다.

"아오... 윤지랑 사귀면 이런 것도 하고 저런 것도 할텐데..."

자신에게 찰싹 달라붙는 것을 보면 윤지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고백을 하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알고 지낸 탓인지 영 쑥스럽기 그지없었다.

"아흥..."

AV배우의 얼굴과 윤지의 얼굴이 비슷하다. 그녀가 신음성을 토해내는 상상을 하며 운현은 서서히 준비를 마쳤다.

"탁탁탁..."

야동을 보며 조용히 자기 위로를 시작한 그는 십여분이 지나고 나서야 손의 움직임을 빠르게 하며 휴지를 잡았다.

"으읏...!!"

절정이 찾아온다. 그는 낮게 신음하며 휴지를 든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딱딱하게 굳었다.

"...하...아아..."

분명히 기억에 없던 여인의 간절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 외에도 많은 것들이. 기억이 되돌아오며 수많은 것들이 떠오르며 운현은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악!!"

운현은 눈 앞에 떠오른 메시지창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패시브 스킬 :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냉철한 이성 상태가 됩니다.]

[지력이 100 상승합니다.]

"쿵!!"

"야! 운현! 이게 무슨 소리....야...?"

잠겨져 있던 문이 부숴지듯 열린다. 모니터에는 남자의 위에서 헉헉거리는 여자가 있었고 동생이 바지를 벗은 채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그의 형은 코 밑을 쓱 닦은 후 훈훈하게 웃으며 말했다.

"짜식. 굉장한 명작인가 보구만. 나중에 나한테도 보내줘."

"...어. 알았어."

지금의 상황만 보면 굉장한 명작을 보고 감동을 해서 우는 것 같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니지만 운현은 대충 답해 준 후 형이 문을 닫고 나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입었다.

"성공했다. 성공했어... 하지만 지금 좋아하긴 이르지."

컴퓨터를 끄고 냉정한 얼굴로 침대에 앉았다. 왜 현자의 시간이 발동되며 기억이 돌아온 것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 역시 계획의 일부일지도 몰랐다.

"후우우..."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는 것이 어렵다. 만약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운현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메뉴."

그가 말을 내뱉은 순간 그의 앞으로 창이 떠올랐다. 이세계에 갔을 때 보았던 창과 똑같은 창. 그것에 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게 된다는 것은 다른 것도 된다는 이야기다.

"인벤토리.... 있구나...!!"

자신이 이세계에서 챙긴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것을 보며 운현은 이를 드러내었다. 완벽하다. 스탯창을 열어 본 운현은 레벨이 450이고 자신이 회귀를 하기 전에 올려 둔 스탯이 모두 그대로 있었다. 바뀐 것은 두가지.

"직업이 사라지고 칭호에 가짜 신이 들어왔다는 거... 하하. 직업이 아니라는 건가?"

나쁘지 않다. 이정도라면 정말 괜찮은 상황이다. 운현은 숨을 몰아쉰 후 스킬창을 열어보았다. 도적 직업으로 인해 얻었던 모든 스킬이 사라졌지만 직업으로 얻지 않은 스킬은 모두 남아 있었다. 그거면 된다.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없어지면 가장 곤란했는데..."

재료 합성의 스킬이 사라지지 않은 것에 운현은 안도할 수 있었다. 책상 위의 연필과 지우개, 그리고 철사를 손에 넣은 그는 눈을 감고 스킬을 발동시켰다.

"...되는군."

상표가 붙어 있지 않은 샤프가 만들어진 것에 운현은 히죽 웃었다. 가짜 신이라는 칭호를 손에 넣으며 가짜의 세계에서 가능했던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된 것일까? 아니. 이유나 근거, 이론따위는 관심없다. 중요한 것은 '가능하다' 라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생각해야겠군..."

운현은 인벤토리 안에 있는 방대한 양의 자료 중 하나를 꺼내어 보았다. 한글이 아닌 글씨들로 빽빽한 책이지만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책장에서 영어 교과서를 꺼냈다. 해석할 때 골머리를 썩히던 영어 교과서가 마치 한글로 만들어진 책을 읽을 때처럼 술술 읽어졌다.

"좋아."

다음 확인해야 할 것은?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로그창을 열어보았다. 로그의 모든 내용은 지워져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단 세줄.

[알트리아에 진입했습니다.]

[진안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자택에 복귀했습니다.]

단 이 세줄 뿐 이었다. 이것을 보아 회귀를 하게 되면 로그가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트리아. 자신이 회귀를 한 곳. 그 글자를 무섭도록 노려보던 운현은 메뉴를 모두 닫았다.

"이제부터 할 일은 정해져 있지..."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라티나가 들어가 있는 관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숨도 쉬지 않은 채, 마치 인형처럼 잠들어 있는 그녀의 가슴팍에 서큐버스 퀸이 봉인된 보석을 넣은 그는 천천히 라티나가 눈을 뜨자 그녀에게 물었다.

"정신이 드나?"

"여긴... 어딥니까."

"기억은? 네 이름은 뭐지?"

"라티나... 아니. 서큐버스 퀸...?"

"몸에 각인된 기억과 혼에 각인된 기억이 충돌하는가보군... 네 목적은?"

"...당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좋아. 신성을 다룰 수는 있겠지?"

"제 몸 안에 있는 신성을 배출할 수는 있습니다만..."

라티나가 조심스레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운명의 오르골을 꺼내어 그 안에 있는 성배를 빼내었다. 빛을 잃은 성배를 운현이 내밀자 라티나는 그 안에 신성을 채워넣었다. 황금색으로 반짝이기 시작한 성배를 받아 인벤토리에 넣은 운현은 라티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은 원래 내가 살던 세계다. 네가 살던 세계가 아니지. 일단은 잠들어 있는게 나을거야."

"한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뭐지?"

"저는... 라티나입니까. 서큐버스 퀸입니까?"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향해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건 네가 정해. 네가 누구인지는 중요한게 아니야. 중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하느냐지. 날 도울 생각은 있나? 네 목적이 무엇이지?"

"...제 목적은 절 만들어주신 아르토리우스님의 비원을 이루어주는 것... 제가 있던 세계의 운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다행히 혼보다는 육체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모양이다. 운현은 그녀를 향해 빙긋 웃었다.

"그럼 일단 자고 있어."

라티나를 아직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녀가 관에 눕자 그녀의 가슴에서 보석을 뺀 운현은 관뚜껑을 닫고 인벤토리 안에 넣었다.

"흐음..."

대략적인 확인은 끝났다. 이제 남은 일은... 운현은 피스나의 연구를 이어받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일단 군대로 시간을 날려먹을 수는 없지. 학교도 그래. 굳이 학교를 다닐 필요는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은 그곳으로 돌아가 운명을 바꾸는 것이니까... 그리고 돈도 필요하고...'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싸늘히 웃었다.

'거기에 실험체도 필요하지.'

연구를 하려면 시간과 돈, 그리고 실험대상이 필요했다. 자신의 몸은 소중한 몸이다. 피스나는 스스로의 몸으로 실험을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기술과 지식에 자신이 있었고 자신은 그런 것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그렇다면 할 일도 많은데 그것으로 시간과 힘을 낭비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렇게 부담없이 써먹을 실험체들이 있는데.

자신이 회귀를 한 시간은 자신이 사랑한다 생각했고, 또 자신을 사랑한다 생각했던 여자와 친구라 믿었던 개자식에게 엿을 먹기 전이다. 어쩌다가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운현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좋은 일이었다. 아무런 부담없이 실험체로 써먹을 년놈들을 찾게 된 셈이니 말이다.

"딱히 복수를 할 시간도, 여유도 없지만 뭐... 마땅한 실험체를 고르기도 어려우니."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있는 사진을 보았다. 자신이 중앙에, 왼쪽에는 찬성이. 오른쪽에는 윤지가. 셋이 함께 찍은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던 운현은 액자에서 그것을 꺼낸 후 그들의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 응시했다.

"날 엿먹인 대가는 치뤄줘야겠지? 나의 사랑스러운 실험체들아?"

230====================

회귀

멍하니 앉아 생각을 정리하던 운현은 어느새 현자의 시간이 비활성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앉아서 쉴만한 여유는 없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면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한다.

"일단 해야 될 일은 증거 수집이겠네."

자리에서 일어난 운현은 서랍을 뒤졌다. 분명 18살때 생일 선물로 받은 것들 중에 쓸만한 것이 있었다. 정리따위와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인 서랍을 뒤져 필요한 물건을 찾아낸 그는 손 안에 들어 온 작은 녹음기를 보며 히죽 웃었다.

'수업 녹음용으로 받았지만 한번도 안썼지.'

운현은 그것의 충전상태를 확인한 후 주머니에 넣고 다른 몇가지 물건들도 챙겼다. 대충 준비를 마친 그는 날짜를 확인했다. 5월 17일. 자신이 윤지와 찬성의 함정에 빠졌던 것은 5월 21일이었다. 아직 사일이라는 시간이 남은 것에 만족한 운현은 터덜터덜 방 밖으로 나갔다.

"우왓! 깜짝이야!"

방에서 나온 운현은 자신을 본 형이 화들짝 놀라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를 보며 운현이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형은 그의 얼굴을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야야. 딸치다가 걸렸다고 무게 좀 잡지 마라. 깜짝놀랬잖아."

"무슨..."

"완전 똥씹은 표정이잖아. 거울이나 좀 보고 나가라. 사람들 보면 다 놀래겠다."

그의 말에 운현은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았다. 현자의 시간이 가지는 기본 표정인 무표정이 아니었다. 잔뜩 일그러져 주름이 잡히는 것에 운현은 곧장 화장실로 향해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하... 놀랄만도 하네."

운현은 거울 안의 자신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일그러져 있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표정을 바꾼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서였나... 아르토리우스가 언제나 웃고 다닌 이유가.'

그녀가 항상 웃음을 짓고 다니는 이유를 떠올렸다. 그나마 이 표정에서 의식하고 바꾸기 쉬운 표정이 웃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하...하하하..."

웃음따위 나올리 없었다. 나와도 자조적인 웃음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래도 웃어야 한다. 과거의 자신은 어땠지? 세상 물정 모르는 등신 호구에 불과했다. 항상 세상은 아름다웠고 모든 것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생각했던 철부지에 불과했다. 그때 아무 생각없이 웃고 다녔던 자신을 떠올리며 운현은 웃었다.

"하하하하...!!"

거울 속의 자신이 웃는다. 하지만 그 웃음은 여전히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그렇기에 운현은 자신의 표정에 새겨져 있는 얼굴이 자연스러워질때까지 계속 웃었다.

"으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핫!!"

즐겁다? 즐겁기는 개뿔. 조금도 재밌지 않고 조금도 즐겁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웃어야 했다. 이런 표정으로 다니면 사람들은 자신을 경계하게 된다. 연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세상과 거래를 해야 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색해하지 않을 정도로 준비해야 한다.

"아하하하하핫!!"

그녀들을 구하지 못한 자신에게 웃을 자격따위 없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웃는다.

증오는 감춘다. 그저 억지로 만들어낸 즐거움만 남겨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방심한다. 웃는 얼굴은 상대의 의심을 풀고 그의 마음을 놓게 만든다. 그렇기에 아르토리우스는 다른 표정들 중에서 웃는 얼굴을 고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도 웃는다. 웃어서. 웃고 또 웃고 웃어서. 타인의 경계심을 풀어버린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래야 가능성이 생겨난다. 그녀들을 구하기 위한 준비작업이다. 그렇다면 엿같더라도 웃어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웃을 수 있을 때까지 운현은 거울 안의 자신을 보며 미친듯이 웃었다.

야자따윈 제껴버리고 학교에서 돌아온 것이라 아직 바깥은 무척이나 밝았다. 아무 걱정 없이 걷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문구점에 들어간 그는 전선과 작은 모터 하나를 산 후 공원의 구석에 앉았다.

"...얍."

마인의 코어. 그리고 전선과 모터. 과연 가능할 것인가? 운현은 손 안에 들려 있는 세가지 물품을 가지고 재료합성을 시전했다.

"호오. 되는구만."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료합성은 성공적이었다. 검은 코어 위에 모터의 작은 나사가 있고 전선이 코어의 여기저기에서 삐져나와 있었다. 문제는 과연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느냐다. 그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살며시 마력을 불어 넣었다.

"위이이이잉!!"

빠른 속도와 함께 마력을 원동력으로 톱니바퀴가 돌기 시작한다. 그것을 본 운현은 빙그레 웃었다. 이정도면 된 것인가? 아무리 뒤져봐도 코어에는 접합면이 보이지 않았다. X-ray를 찍어봐도 안의 내용물은 모를 것이다.

'알면 뭐하겠나.'

코어의 마력을 기반으로 회전하는 모터를 인벤토리에 넣은 채 운현은 다시 길을 걸었다. 준비할 것은 많고 시간은 없었다.

"그럼 다음은 자금 조달인데..."

뒷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열어보니 천원짜리 몇개뿐이다.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연구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대략적인 미래는 알고 있으니 주식투자를 하면 꽤 돈을 벌 수 있겠지만 지금의 자신은 미성년이고 그 주식투자를 하기 위한 종잣돈따위는 없었다.

"아니 종잣돈을 떠나서 당장 쓸 돈이 필요하니..."

윤지와 찬성의 개수작을 회피하고 그년놈들을 엿먹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적어도 이천에서 삼천 이상. 더 많으면 좋겠지만 당장 마련하기는 힘들다.

'보석을 훔쳐봤자 팔아먹기도 힘드니... 쩝. 어쩔 수 없군. 이 동네에서 가장 현찰을 많이 돌리는 곳을 터는 수 밖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린 후 동네의 시장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을 지나 한 허름한 건물 앞에 도착한 운현은 그 건물의 화장실에 들어간 후 하이딩을 걸고 나왔다.

"형님! 수금 다녀오겠습니다!"

동네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치를 떠는 사채업자 사무실이다. 서울 어딘가의 거대한 조직과 연계되어 있다는 작은 사무실에서 하루 굴리는 돈만 몇천만원대라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그는 열린 문 사이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얼굴얼굴에 흉터가 있는 사내, 옷을 벗고 등에 있는 문신을 씰룩이는 남자. 책상에 앉아 100만 단위로 돈을 묶는 남자. 총 세명의 건장하고 험상궂은 남자들이 있는 것을 본 운현은 잠시 고민했다.

'스킬 훔치기로 보유하고 있는 스킬은 그레이터 힐이지... 쳇. 이건 나중에 써먹어야 하니 미믹의 검은 채찍을 훔칠 수도 없겠군.'

"사, 살려주세요!"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끌려들어왔다. 술집 여인으로 보이는 30대 초반의 여인이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채 얼굴에 피멍이 들어 있는 것을 본 운현은 잘하면 돈주고도 못볼 장면을 구경할 수 있겠다 싶었다.

"어이. 희정씨.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

"이, 이번달만 좀 기다려주세요. 지, 지금 사정이...!"

"확! 사정이 어렵다는 년이 명품 가방을 들고 다녀?"

"이거 짭이에요!"

끌려 들어 온 여자가 무릎을 꿇고 사정사정하는 것을 보며 네 남자들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돈을 세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자 그녀는 그의 발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상윤 오빠! 제가 어떻게든..."

"희정아. 오빠가 그랬잖니. 돈은 빨리빨리 갚아야 한다고. 그렇지?"

"네에... 네."

"근데 못갚았으니 어쩐다... 그래. 이렇게 할까?"

"네...?"

"섬에 잠깐 갔다오자."

"아으... 그, 그것만은!!"

완전히 겁에 질린 희정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려 하자 상윤을 제외한 두 남자가 그녀를 잡았다. 그들이 그녀를 데리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운현은 싱긋 웃었다.

"에... 어디보자."

안쪽의 방에서 옷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들렸다. 남자들이 그녀를 강간하려는 듯한 상황이 예측되었지만 운현은 그녀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구하려면 하이딩을 풀고 저 남자들과 싸워야 했다. 물론 싸워서 질 것 같다는 생각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스테이터스의 보정을 받은 지금이라면 맨손으로 수십명과 싸워도 충분히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귀찮아지지.'

구해줬다고 치자. 그럼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물론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실험체, 혹은 자신의 수족으로 써먹기 위해서 희정을 구하고 다른 사채업자들을 작살내 놓을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녀를 수족으로 써먹을 이유는 없었다.

'할 일이나 마저하자.'

힐끔 방 천장에 있는 감시카메라 세대를 보며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인벤토리에서 광검을 꺼내 마력을 불어 넣었다. 주머니 칼 수준 정도로만 광검이 빛을 발하자 가볍게 뛰어 천장의 감시카메라들을 모두 박살낸 운현은 안쪽의 여성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신음하는 것을 듣고 광검을 꽉 잡았다.

"빨리 처리하고 나가야겠군."

아까 전 상윤이 돈을 집어 넣은 금고에 다가간 운현은 광검으로 금고의 자물쇠를 잘라내었다. 두부 잘리듯 슥 잘려버린 금고를 연 운현은 그 안에 있는 만원짜리 다발 열개와 오만원짜리 다발 다섯개,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금괴들과 보석들을 모두 챙긴 그는 수표만 남겨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흣!"

누군가가 절정에 달했나보다. 희정의 신음성이 커지고 울음소리가 들렸다. 슬슬 저들이 나올 차례인가? 운현은 하이딩을 건 상태로 아무렇지도 않게 방을 나섰다.

"혀, 형님!!"

운현이 계단을 걸어내려가는 동안 사채업자의 방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그들이 당황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금괴와 보석은 있어봤자 당장 쓸 수 없으니 인벤토리에 쟁여 놓는다 치더라도 현금은 차분히 쓸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이 '쟤 뭐야?' 라고 할만한 정도로 쓰기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복권 당첨된거 아니냐는 소리 들으면서 괜히 시간 뺏기긴 싫고...'

윤지의 집으로 향한 운현은 훌쩍 뛰어 담장을 넘었다. 높아진 신체능력으로 인해 담장을 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볍게 착지한 그는 느긋하게 현관문을 향해 걸었고 현관문이 잠겨져 있자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인벤토리에서 밧줄을 꺼냈다.

"휘리릭!"

그의 손에서 날아간 밧줄은 지붕의 장식에 걸렸다. 그것을 잡고 벽을 탄 그는 창문을 슬쩍 열어보았다. 열린다.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그는 여자애 답게 깨끗하고 향기가 나는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여기다가 숨겨 놓으면 되겠지.'

침대의 밑에 녹음기를 붙여 놓고 다시 창문을 통해 빠져나온 그는 멀리서 윤지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의 옆에는 찬성이 함께 걷고 있었다.

'오호라... 나 없다고 이렇게 붙어다니는건가?'

솔직히 그 둘이 붙어다니든 말든 이제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하이딩을 건 채 벽에 기대어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운현 그새끼 뭔가 좀 이상하던데?"

"뭐가?"

"아니. 평상시 답게 찌질하지도 않고... 말 걸어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가끔씩은 그런 날도 있어야지. 그나저나 찬성아."

"응?"

"오늘 우리 집 비는데... 어때?"

"어이구~ 벌써부터 근질근질 거려?"

"후후후~"

찬성의 팔을 끌어안으며 그녀는 요염히 웃었다. 다른 이가 보면 청순한 윤지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이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저딴 년이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지랄을 했는지 모르겠구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냥 어장관리하는 여자다. 집안끼리 친하고 부모님의 이야기에 그저 자신에게 접근했을 뿐이지 결국 그녀는 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여자에 불과했다.

"알았어. 내가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이렇게 밝히는 여자인 줄 알았지."

"아잉~ 몰라~"

"근데 너 생리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잖아. 괜찮아?"

"콘돔 있잖아. 어서 가자. 응?"

윤지의 교복 엉덩이 부분을 능글맞게 주무르며 찬성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을 보니 운현은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입학하고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에게 묘하게 친하게 굴더니 그게 윤지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였다는 건가? 뭐 둘이 붙어먹든 말든 이제와서 별로 상관은 없었다.

'그래도 운이 좋네. 이렇게 쉽게 녹음기를 써먹게 될 줄은 몰랐는데.'

윤지와 콘돔없이 하다가 위험일에 그녀의 안에 싸버리고, 찬성은 윤지를 설득해서 운현과 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홀딱 빠져 있는 윤지는 운현과 해버렸고 임신했다. 찬성의 앤지, 운현의 앤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는 찬성에게 책임지고 결혼을 하자고 말했지만 찬성은 윤지를 차버렸고 윤지는 그대로 운현이 자신을 강간해서 임신해버렸다고 말해버렸다.

항상 청순하고 순수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윤지와 성적도 별로 안좋은데다가 수업태도도 안좋은 운현. 둘 중 누구의 말을 믿을지는 뻔했다. 거기에 운현이 윤지와 하지 않은 것도 아닌만큼 그는 그것이 자신의 실수인지 알 수 없었고 결국 그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땐 뭐 그랬지만.'

그때야 멍청하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등신이었으니 그것에 고스란히 당해버렸다. 애초에 윤지와 찬성이 그런 사인인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윤지와 만나기 위해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리던 도중 찬성과 다시 만난 윤지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듣고 나서야 운현은 자신이 그들이 만든 함정에 빠져버린 것을 알게 되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윤지와 찬성이 서로를 끌어안고 키스를 하는 것을 팔짱을 낀 채 무덤덤히 지켜보던 운현은 그들이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가자 히죽 웃었다.

'마음껏 하도록.'

그들의 즐거운 밤을 기도해준 운현은 느긋한 걸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운 운현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꿈을 꿨다. 그녀들이 나오는 꿈을. 깨고 싶지 않은 꿈에서 안정을 느끼던 운현은 알람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학교를 가야한다는 것에 인상을 구긴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남아 있는 꿈의 기억을 되새기며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진 운현은 인벤토리 안에 있는 운명의 오르골을 노려보았다.

학교 생활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기억대로 찬성과 윤지에게 살갑게 대하며 그들을 속으로 경멸한 운현은 야자를 째고 윤지의 집으로 들어갔다. 침대 밑에 있는 녹음기를 회수한 그는 집으로 돌아와 이어폰을 꽂고 그 내용을 들었다.

231====================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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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흥... 으..."

"유, 윤지야. 나 이거 빼고 한번만 하면 안될까?"

"바보야... 위험한 날이라구."

"그래도 하고 싶어. 응? 한번만 하자. 응?"

"정말... 알았어. 그럼 내가 삼십 셀때까지만 하는거야... 알았지?"

헐떡거리던 윤지의 목소리에 찬성이 힘을 내는지 그녀의 신음성이 강해진다. 그것을 들으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왜 그녀가 임신을 하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콧소리를 내며 열띤 신음성과 함께 숫자를 세던 윤지의 신음소리가 거세어졌다. 찬성의 헐떡이는 소리가 빨라짐과 동시에 침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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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으으..."

"아아아앙! 찬성아! 내가 안에다가 하면 안된다고 했잖아!"

결국 참지 못하고 삼십을 세기도 전에 찬성이 싸버렸나보다. 윤지는 색기 넘치는 목소리로 앙탈을 부렸고 그것에 찬성은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

"하아...하아... 그래도 너 안에 싸주는거 좋아하잖아... 다른 애들이랑 할때도 그랬다면서... 사후 피임약 먹어."

"그렇긴 하지만..."

"정 뭐하면 운현 그 새끼랑 자고 오는게 어때? 너 걔랑도 해보고 싶다고 했잖아. 운현 그 병신 새끼가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 한번 대줘~ 난 니가 딴 새끼랑 하는 거 보는게 제일 흥분되더라. 후후후... 임신하면 내가 책임질게. 우리 결혼하면 되잖아? 응?"

"후후후... 말은 잘해~ 그나저나 운현 그 찐따랑? 하긴... 걔 운동해서 자지는 큰 것 같던데. 너 그러다가 내가 운현이한테 가면 어쩔라고 그래?"

"야야. 그 새끼한테? 걔가 나보다 잘할 것 같아? 걔한테 만족할 수 있으면 뭐 난 우리 이쁜 섹파하나 잃는거지."

"흥! 내가 네 자지 말고 다른 사람 자지에 빠질 것 같아? 지금까지 한 애들 중에서 네가 제일 좋더라... 어휴. 찬성아! 그렇게 내가 좋았어? 많이도 쌌네."

'어린노무 쉬키가 섹파같은 소리하고 있네.'

찬성의 외모 정도면 얼마든지 생길 것 같긴 했다. 거기에 집도 부자인데다가 몸도 괜찮고 겉으로 보이는 매너도 좋았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가능성이 없는 얘기기는 했다.

'찐따라니. 내가 찐따라니...!? 하긴. 찐따 맞지.'

아무것도 모르던 고등학교때는 세상은 마냥 아름답고 좋은 줄로만 알았다. 남들이 그토록 원하는 미인 소꿉친구에 잘생긴 친구도 있고 집도 괜찮게 살았다. 성적은 나쁘지만 남들이 들으면 네가 무슨 라이트 노벨의 주인공이냐. 라고 말할 정도였다.

'다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지.'

세상을 우습게 봤다가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운현은 피식 웃으며 녹음기를 껐다. 이정도면 충분하지만 아직 몇가지를 좀 더 준비해야 한다.

녹음기 속에서 또다시 그들의 섹스 소리가 들린다. 안에 한번 싼거나 두번 싼거나 차이가 없다는 둥, 너도 좋지 않냐. 라는 식으로 다시 윤지를 구슬린 찬성이 다시 허리를 흔드는 소리를 들으며 운현은 녹음기를 끄고 인벤토리 안에 넣었다.

"자... 그럼 다음 준비를 할 시간이구만."

싱글벙글 웃으며 지하실로 내려간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마석을 꺼내었다. 마력을 운용하여 마석 안의 몬스터를 꺼낸 운현은 아직도 따끈따끈한 블랙 오크의 시체에 단검을 꽂은 후 흐르는 피를 통에 담았다.

"마석으로 몬스터 빼는 법을 배우길 잘했네."

카야가 죽은 이후 운현은 헤스티아에게 마석에서 몬스터를 빼내는 것을 배웠다. 긴장을 풀지 않기 위한 발버둥 중 하나가 이렇게 쓰일 줄이야. 작은 물통에 가득 피를 담아 그것을 인벤토리 안에 넣고 사체를 다시 마석에 담은 운현은 지하실을 보며 중얼거렸다.

"에이. 더럽고 치사해서 빨리 뜨던가 해야지."

자신만의 작업공간이 없으니 이렇게 불편하다. 투덜거리며 지하실에서 올라온 운현은 지하실 벽에 붙어 있는 조폭 영화 포스터를 보고 문득 떠오른 생각에 쓰게 웃었다.

"아... 이거 참. 등신같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었네. 주식투자고 나발이고 더 좋은게 있으니..."

힘과 돈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 시간과 돈, 힘을 얻기 전까지 유용하게 쓰일만한 방법이 있는데 엄한 짓을 할 뻔 했다. 운현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며 지하실에서 올라가 곧장 동네의 전자상가로 향했다.

"화질 좋은 캠코더 하나 주세요."

"그런 거라면 이거죠."

점원이 내민 것은 사백만원짜리 캠코더였다. 연속촬영만 다섯시간이 가능하고 고화질 촬영이 가능하다. 사백만원을 일시불로 내고 캠코더를 챙긴 운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제 갔던 사채사무실로 향했다.

"이 개새끼들아!!"

안에서 험한 소리가 들린다. 예상했던대로 금고가 털린 것에 대한 처벌을 받는 모양이다. 인벤토리에서 미믹맨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그는 닫혀 있는 문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열며 외쳤다.

"안녕들 하신가!!"

"뭐야!?"

사무실 안에는 피투성이가 된 사채업자 둘이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고 그들을 보며 승윤은 어쩔 줄 몰라했다. 그들의 상위 조직의 조직원으로 보이는 검은 정장의 조폭들 다섯명이 쇠파이프를 들고 있는 것을 본 운현은 마스크를 내린 후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넌 뭐하는 새끼냐!?"

"어... 어제 여기서 금고 턴 사람."

"뭐?"

"이런 애새끼한테 털린거야!?"

척 봐도 고등학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운현에게 사무실이 털렸다는 것에 기가 막힌 조폭 하나가 쇠파이프로 쓰러져 있는 사채업자를 후려쳤다. 그것에 맞은 사채업자가 엉엉 울며 살려달라고 비는 것을 느긋하게 보던 운현은 조폭들이 다가오자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자자. 좋은 사업 이야기 하러 왔으니까 우리 싸우지 말자고. 러브 앤 피스 몰라? 우린 대화가 필요하다고~"

"미친 애새끼가!!"

능글맞게 말하는 운현을 향해 이를 드러낸 조폭 1이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이 세계에서 만났던 몬스터들의 공격에 비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공격이다. 그것을 무덤덤히 바라보던 운현은 단검을 꺼내 그것을 막아낸 후 조폭의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뻐어억!!"

"뛃!"

가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한대 맞고 조폭 1이 나가 떨어진다. 자신들에 비하면 핏덩이에 불과한 운현의 주먹에 조폭 1이 나가떨어지자 그를 비웃으며 다른 조폭들이 나섰다.

"뻑! 뻑! 뻑! 빠악!"

한사람당 한방씩. 조폭들이 그의 주먹에 맞고 쓰러져 자기들보다 더 고통스러워하자 사채업자 승윤은 놀란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뭐하는 새끼란 말인가. 그가 경악하자 운현은 성큼성큼 다가가 승윤의 머리채를 잡아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저씨. 난 처음에 대화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쌩깐 건 저 양반들이지. 안그래?"

"그, 그래. 그렇지..."

"그럼 아저씨가 해야 할 일은 뭘까?"

"뭐... 뭐...얼까...?"

싱글거리고 있지만 눈만은 웃고 잇지 않다. 운현의 눈과 마주친 승윤은 두려워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고 운현은 그의 볼을 톡톡 친 후 조폭의 양복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사업 이야기 할 정도의 위치에 있는 양반한테 전화 걸어. 서울의 큰 조직이랑 연계되어 있다면서. 이왕이면 좀 똑똑하고 그런... 왜 영화에도 나오잖아? 그냥 싸움만 잘하는 양반 말고 적당히 야심 있는 양반. 알면 걸고 모르면... 그냥 뭐 높은 사람 아무나 찍어서 걸어봐."

"히익? 하, 하지만..."

"그럼 뭐. 내가 아무나한테 걸어도 괜찮아?"

"끄응... 내. 내가 할게."

"좋아. 음... 넉넉하게 삼십분 줄게. 그정도면 괜찮지?"

운현은 승윤의 의자에 앉아 등을 편하게 기댄 후 책상 위에 발을 올렸다.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담배. 그것을 본 운현은 키득거린 후 담배를 손에 쥐었다.

"몸에도 안좋은거 왜 이렇게 펴대는지 몰라..."

담배를 꺼내 입에 문 그는 라이터의 불을 켰다. 지금까지 담배는 손도 댄 적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운현일 뿐이다.

"나는 그놈이랑은..."

'한운현'을 인식하고 있는 세계를 향해. 무력한 자신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던 엿같은 세계를 향해 증오를 태우며 운현은 담배에 불을 붙인 후 연기를 흠뻑 빨아들였다. 생소한 연기가 폐 안을 감돈다. 가슴이 답답하다. 아무래도 담배는 몸에 맞지 않는 모양이다. 한모금 빤 것만으로도 목이 따끔거리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도대체 이게 뭐가 좋다고... 편안하다는 건지 모르겠네.'

하지만 그렇기에 핀다. 담배를 핌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킨다. 자해를 하고 싶지만 함부로 자해를 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앞으로 할 일은 무수히 많은데. 그저 그녀들을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신에 대한 증오를 담배로 풀어내기로 한 운현은 서툴게 연기를 내뿜으며 중얼거렸다.

"차원이 다를거다."

"네... 네 팀장님. 네... 그... 그 털어간 도둑놈이 왔는데... 사, 사업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승윤이 벌벌 떨며 전화통화를 하는 것을 보며 운현은 눈을 감았다.

"콰당!"

"어떤 새끼야!?"

"후루루룩!"

문이 거칠게 열리며 검은 양복을 입은 이들이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하나같이 덩치가 있는 거구의 사내들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운현은 싱글거릴 뿐 이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승윤이 시켜 준 짜장면을 먹던 운현은 그들이 기가막히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자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만 기다려줘. 냠... 식사중이니까."

"허..."

아무리 봐도 새파랗게 어린 놈의 새끼다. 그런 놈이 팔자 좋게 책상 위에 양반다리로 걸터앉아 짜장면을 먹고 있는 것에 기가 막혔던 거구의 조폭은 고개를 까딱거린 후 운현에게 걸어갔다.

"이 새끼가..."

"빠악!"

"뛃!"

다가 온 조폭이 이를 드러내며 주먹을 올리자 운현은 들고 있던 짜장면 그릇을 책상 위에 놓고 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복부에 정통으로 그 주먹을 맞은 조폭이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허물어지자 운현은 승윤이 가져다 준 휴지로 입을 닦았다.

"자. 그럼 나랑 이야기하실 분은 누구신가?"

"이런 씨발새끼가!"

"하... 아저씨. 제대로 전한 거 맞아?"

"마, 맞아! 난 강팀장님을 불렀다고!"

오라는 강팀장은 안오고 왠 덩어리들이 난입한 것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하긴. 고작 이정도 깽판치고 괜찮은 양반이 올리가 없지. 운현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조폭을 들어 옆으로 치운 후 쇠파이프와 각목, 사시미로 무장한 십여명의 조폭을 향해 말했다.

"자. 그럼 일단 우리 대화해볼까? 대화 좋잖아. 사람이 짐승과 다른게 뭔데. 대화를 통해 쌍방간의 협의점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거잖아? 생긴거 답게 놀지 말고 자자. 여기 앉으라고. 우리 얘기 좀 하자."

"한가닥 하는 새끼다! 조심해서 쳐!"

"하 시발. 짐승같은 새끼들."

달려드는 조폭들을 보며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쉰 후 주먹을 들었다. 또다시 시작된 타작. 침투경을 활용해서 치는데 한방 이상을 버틸리가 없었다. 5분도 되지 않아 달려든 조폭들을 모두 쓰러트린 운현은 조폭 중 하나의 휴대폰을 꺼내 승윤에게 주었다.

"아조씨. 이게 마지막이야. 좀 더 절실히.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 줄 정도로 기원하라고."

"아, 아, 알, 알았...어..."

승윤은 완전히 질린 얼굴로 운현을 보았다. 이놈은 괴물이다. 그냥 겉보기로 평가하면 안되는 놈이다. 승윤은 덜덜 떨며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가, 강팀장님. 그게... 오, 온 형님들이 다... 네. 네. 네 알겠습니다."

"온대?"

"하, 한시간 정도..."

"하아... 한시간이라... 그럼 뭐. 기다리지. 그런데 뭐 재밌는 거 없을까? 없으면..."

운현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사시미를 들어 올린 후 빙긋 웃었다.

"즐겁고 신나는 해체쇼? 한번 할까? 여기 실험체도 많은데."

그의 말에 승윤은 기겁했다. 실실 웃고 있는 놈이지만 이 놈은 왠지 제정신이 아닌 놈 같았다. 자신이 아무런 말도 못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고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조폭의 머리를 밟고 사시미를 들어 올렸다.

"바, 밥 먹었는데 후식 먹어야 되지 않아? 커피 사줄게. 영길다방 미스리가 진짜..."

"그것도 좋겠네. 아. 보기 싫으니까 저 짐승같은 놈들 좀 옆방으로 치우고."

승윤의 필사적인 제안에 운현은 들어올린 사시미를 천천히 내렸다. 그가 사시미를 치우자 승윤은 침을 꿀꺽 삼킨 후 주변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 나 혼자?"

"그럼 내가 할까?"

"내가 할게! 내가! 내가 해야지!!"

낑낑거리며 열 다섯명의 덩치 큰 조폭들을 옆방으로 옮겨 놓은 승윤이 나오자 운현은 그에게 핸드폰을 던졌다. 다방 레지를 부르라는 그의 행동에 승윤은 부들부들 떨며 전화기를 들었다.

"어... 여, 영길다방이지? 미스리 있어? 뭐? 티켓 세장 끊었다고? 진짜 죽을래...!? 티켓 30장 끊어줄테니까 빨리 일로 와!"

"이야~! 대단한데!? 근데 티켓 삼십장이면 얼마야?"

열댓명이 넘는 성인 남자. 그것도 조폭들을 쓰러트린 주제에 저렇게 대담하다니. 간이 부은 것인가. 아니면 제정신이 아닌 것인가.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혹시 즐거워하는 건가? 어쩌면 또 다른 조폭들이 들이닥치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승윤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끊고 애써 웃었다.

"하...하하하... 그, 어... 얼마 안돼... 요. 그..."

전화를 끊은 승윤은 행여나 자기가 반말을 하는게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걱정됐다. 만약 그가 수틀리면 자신도 저렇게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운현의 눈치를 살피며 존대했고 운현은 그를 향해 생글생글 웃었다.

"에이~ 아자씨~ 우리 사이에 왜 존댓말이야~ 친하게 지내자. 응? 콜?"

"...코, 콜."

생글거리는 그의 얼굴을 보며 승윤은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덜컹."

문이 열리자 의자에 앉아 있던 운현은 나른한 시선을 보냈다.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의. 척 봐서는 일반 사무직 직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올백의 건장한 30대 중반의 청년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미스 리의 가슴을 만지던 승윤은 벌떡 일어나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강팀장님!!"

"...병신새끼. 여자끼고 놀 생각이 드냐?"

"아니 그게..."

"우리 아조씨 욕하지마. 내가 불렀으니까."

232====================

회귀

히죽 웃은 운현은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아까 왔던 덩어리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다가오자 강팀장은 빠르게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욥."

조폭들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지만 역시 운현에게는 느리기 짝이 없었다. 가볍게 그가 주먹을 피하자 눈을 빛낸 강팀장은 주먹을 회수한 후 손을 내밀었다.

"강원석이다."

"내 이름은 뭐... 아실 것 없고... 사업 이야기하러 온 거니까 이야기나 합시다."

"좋아. 무슨 사업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궁금하군. 해봐."

"당신네. 음... 뭐 범법 행위는 하시나?"

"...뭐? 우리는 건전하고 법을 지키는 선량한 시민들이다. 범법 행위라니. 그런 되도 않는 개소리를 하려거든 당장 꺼져."

"자자. 그러지 말고. 거기 승윤 아저씨랑 미스리누님은 좀 나가 있어주겠어? 아저씨. 티켓도 끊었는데 좋은 모텔에서 즐기고 오쇼."

"...으, 으응."

"알았어..."

승윤과 미스리가 밖으로 나가자 운현은 책상을 잡고 그대로 인벤토리에 넣었다. 삽시간에 사라져버린 책상을 본 강원석은 잘못봤나 싶어 눈을 비볐다. 작은 카드도 아니고 커다란 책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당황하자 운현은 키득거리며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사업은 이거야."

"마술쇼하자는 건 아닐테고... 설마 그거냐?"

"음. 글쎄? 뭘까? 아이 참~ 진짜 선량한 시민인 내 입으로는 말하기 힘드네. 헤헤헤~"

순진한 척 웃고 있지만 원석은 그가 그렇게 순진한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런 실력을 가지고 다짜고짜 쳐들어와 자신을 불러댈 정도라면 상당한 계산을 할 수 있는 녀석이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원석은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가진 그 정신나간 능력이 진짜라면... 밀수냐?"

"빙고."

반짝 눈을 빛내며 운현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말에 원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밀수란게 그렇게 쉬운 줄 아나? 단순히 마술기술로는 택도 없는 것이 바로 밀수다. 특히나 대한민국은 밀수 품목에 대한 점검이 까다로워서 잘못 걸렸다간 큰코다친다.

"...속임수가 아닌가?"

"얼마든지 확인해봐."

양 팔을 벌린 운현은 의자에 앉아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말에 강원석은 사무실 주변에 장치가 있나 확인해보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없었다.

"어떻게 한거지?"

"그건 댁이 알 것 없고. 자. 다시 책상 나온다~"

".....!!"

"어때?"

"그거 다른 곳에서도 가능한건가?"

"물론. 옥상에 가서 해볼까?"

운현은 책상을 인벤토리 안에 넣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가 책상을 손쉽게 꺼내자 강원석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택배상하차 알바하면 개꿀이겠군."

"뭐 그럴 것 같긴 한데 단기간에 벌기는 좀 힘들어서. 거기에 좀 하고 싶은 것도 있고. 어때? 나랑 손 잡겠어?"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네놈을 믿기에는 좀 불안하군. 좀 더 확인이 필요해."

마스크를 쓴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말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그럼 내일 저녁에 여기서 만나자고."

의심이 많은 상대다. 그를 향해 운현은 빙긋 웃으며 말하고 옥상에서 터벅터벅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며 운현은 마스크를 벗고 히죽 웃었다.

자신의 무력을 보고도, 그리고 힘을 보고도 의심을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좋다. 저정도는 되어야 같이 일을 할 수 있지. 힘을 좀 보여줬다고 냉큼 달려드는 하이에나같은 자식이 아닌게 다행이었다.

'그런 놈이었다면 괜찮은 놈 만날때까지 소모품으로 쓰려고 했는데... 다행이야. 시간을 아낄 수 있어서.'

굳이 자신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움직일 이유는 없었다. 적당히 내세울 만한 사람 하나를 앞세우고 그를 통해서 일을 진행하면 된다. 거기에 자신의 계획이 중반쯤 된다면 쓸데없이 돈 냄새 맡고 달려들 잡것들이 넘쳐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저정도 되는 인물을 이용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괜찮은 장기말을 하나 얻게 되겠군..."

다음날이 되자 운현은 생글생글 웃으며 학교로 향했다. 어찌보면 조금 어수룩해보일 정도로 웃는 그를 보며 몇몇 사람들은 힐끔거렸지만 전에 형이 보인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그저 재밌다는 듯, 혹은 귀엽다는 듯 키득거릴 뿐 이었다.

'좋군.'

소리비도라는 말이 있다. 웃는 얼굴 뒤에 장도를 숨긴다. 운현은 사람들이 자신의 웃음을 보며 안심하고 경계심을 푸는 것에 만족했다. 조금 어리숙해보인다고? 그럼 안된다. 완전 어리숙해보여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단검을 숨길 수 있으니.

"운현!"

"아. 윤지야~"

어제와는 다른 살가운 반응에 윤지는 생긋 미소지었다. 단지 웃는 것만으로도 주위가 밝아지는 것 같은 청초한 미소다. 그리고 그 미소 뒤에 숨겨져 있는 그녀의 음탕함에 운현은 그녀의 미소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걸 훔친다.'

자신마저도, 아니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웃음 뒤에 숨겨진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것을 배운다. 적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운현은 윤지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오늘도 예쁘네~"

"아이~ 참~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해달라구~ 둘이 있을때 말야~!"

운현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며 윤지는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내가 어떨까? 찐따같은 새끼가 보는 눈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안봐도 훤하다. 운현은 그녀를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

"오늘은 뭐 기분 좋은 일이 있나봐?"

"응? 응.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거든."

"헤에~ 그래?"

"야! 한운현!"

"오오~ 마이 베프! 찬성아!"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운현은 더더욱 활짝 웃었다. 그의 웃음을 본 찬성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상쾌한 웃음을 지으며 운현에게 다가와 그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오오 친구여. 오늘은 기분이 괜찮은가봐?"

"그러게. 아침에 쾌변을 했더니..."

"뭐? 어휴. 더러운 새끼."

"뭐 임마? 장운동이 활발한 거라고 해."

"쿡쿡쿡~ 우리 운현이가 말은 참 잘해."

밝게 웃으며 윤지가 말하자 찬성은 그녀를 향해 히죽 웃었다. 둘만의 눈빛 교환을 눈치채지 못한 척 운현은 어수룩하게 웃었다.

4교시 체육시간이 되자 운현은 오늘 점심시간의 농구를 위해서 체력을 보존하겠다는 개소리와 함께 조용히 학교 건물 뒤로 빠졌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하이딩을 건 운현은 교실로 돌아가 윤지의 가방을 열었다. 그녀의 가방 안에 있는 커다란 물통. 다이어트와 독소 해소를 위해 만들었다는 마녀주스가 가득 담겨져 있는 그 통을 연 운현은 어제 뺀 오크의 피를 섞기 시작했다.

"이거면 아주 죽을 정돌거다..."

티스푼으로 하나정도에 불과했지만 과연 윤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마 미쳐서 찬성에게 달려들지 않을까? 운현은 그녀의 꼴이 우습게 될 것을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어이구 힘들어!"

"밥먹으러 가자!"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학생들이 미친듯이 급식실로 달려가자 운현은 매점에서 빵 두개를 사가지고 교실로 돌아왔다. 윤지는 여느때와 같이 점심 대신 마녀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오크의 피가 섞인 마녀주스를 꼴깍꼴깍 마시던 그녀는 운현이 빵을 들고 돌아오자 살짝 눈쌀을 찌푸렸다.

"또 빵이야?"

"빵 좋지. 왜. 너도 먹을래?"

"아니... 난 살빼야돼서."

"니가 뺄데가 어딨다고~"

"에헤헤~ 말만으로도 고마워~"

운현의 말에 윤지는 활짝 웃었다. 그녀가 마녀주스를 모두 마시는 것을 본 운현은 빵 하나를 순식간에 먹고 책상에 엎드렸다.

"으으... 졸려 죽겠다. 난 좀 잘게."

"밤에 뭐한거야? 으휴~ 잘자~"

윤지는 운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히죽 웃어준 운현이 엎드리고 십분 쯤 지났을 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윤지는 조금씩 헐떡이기 시작했다.

'왔구나!'

슬슬 발동이 걸린 것인가? 운현은 어깨 너머로 슬쩍 윤지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송글송글 땀이 내려오고 고등학생치고 큰 가슴을 꽉 죄고 있는 교복 상의는 살짝 튀어 올라 있었다.

'발정나기 시작했네... 자. 얼마나 버티나 볼까?'

아무리 걸레라고 하더라도 설마 학교에서 할까? 아니면 찬성을 불러서 밖에서 할까? 그것도 아니면 자위? 하지만 운현은 자위로는 몬스터 피로 인한 흥분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변을 힐끔 힐끔 보며 가랑이 사이로 살짝 손을 넣은 윤지가 헐떡거리기 시작할 때 타이밍 좋게 점심을 다 먹은 찬성이 교실로 들어왔다.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윤지는 찬성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행동에 찬성이 어리둥절해 하는 것을 본 운현은 씨익 웃었다.

'니들이 가봤자 어디로 가겠냐...'

학교 내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얼마 없었다. 창가로 걸어간 운현은 찬성을 데리고 윤지가 학교 뒤의 산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씩 웃었다.

'아직 애들은 많이 없으니...'

몇명 있기는 했지만 4교시 체육에 점심을 먹은 탓에 다들 곯아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운현은 하이딩을 걸고 2층 창문에서 폴짝 뛰어 내려 차분히 그들의 뒤를 쫓았다.

"야!? 너 왜 이래?"

"하아... 나, 나 좀 어떻게 해줘..."

교복 상의를 찢듯이 벗어던진 윤지는 찬성을 보며 헐떡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당황한 찬성은 비릿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일단 빨아줘보실까?"

그동안 펠라치오는 잘 안해주려던 윤지가 이렇게 달아올랐다면 자기기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보리라. 찬성은 실실 웃으며 바지를 벗었다.

"아음..."

윤지는 찬성의 양물을 단번에 입에 물고 쪽쪽 빨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신의 양물을 빨기 시작하자 찬성은 기분 좋다는 듯 느끼며 그녀의 길고 아름다운 생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운현은 하이딩을 한 채 그 장면을 하나도 남김없이 고화질 촬영이 가능한 사백만원짜리 캠코더로 아주 즐겁게 촬영했다.

233====================

회귀

"여어."

학교가 끝난 후 어제와 같은 시간이 되자 운현은 사채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은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을 부르지는 않은 듯 사무실에는 원석만이 있을 뿐 이었다.

"뭘 이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왔어?"

금속탐지기부터 정체불명의 기계에 커다란 금고, 그리고 금괴 하나. 봉지에 담겨진 약까지. 마약견으로 보이는 도베르만 하나가 줄에 묶여 있는 것을 본 운현은 담담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자. 그럼 이것부터 하면 되지?"

가장 먼저 커다란 금고.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절대 혼자서는 들지 못할 금고를 인벤토리에 넣은 운현은 원석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빙긋 웃었다.

"왜?"

"아니 그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럼 다음이다."

그가 내민 금괴를 받아 인벤토리 안에 넣은 운현은 그가 금속탐지기를 들고 오자 벨트를 풀고 양 팔을 벌렸다. 그의 몸에 아무리 가깝게 가져다 대봐도 금속 탐지기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원석은 운현에게 정체불명의, 마치 공항 검문대에나 있을 법한 기계 안으로 들어가라 말했고 운현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도 안걸리는군."

검문대를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보이지 않자 원석은 책상 위에 있는 비닐봉투를 들었다. 마약으로 보이는 하얀 가루를 보며 운현이 신기해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운현은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으르르..."

원석이 개를 끌고 왔지만 개는 운현의 몸에서 마약의 냄새를 맡지 못했다. 그저 그의 주변을 돌다가 뒷다리로 얼굴만 긁적거리는 도베르만을 본 원석은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너 뭐냐."

"글쎄... 굳이 말하자면..."

그의 질문에 운현은 아르토리우스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이 다난교에게 불릴 이명. 저번에는 한번도 불리지 않았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불릴 이명을 떠올린 그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마왕."

농담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를 노려보던 원석은 인상을 왕창 구겼다. 그를 향해 키득거린 운현이 어깨를 으쓱이자 원석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농담하자는 거 아니야. 좋아. 네 능력이 진짜라는 것은 알았다. 보아하니 금괴 한두개 정도 숨길 수 있는 능력은 아닌 것 같은데... 나에게 원하는게 뭐지?"

"원하는거? 많지. 그 전에 나부터 물어보겠어. 댁네 조직... 아. 요즘같은 시대에는 회사라고 하나? 그 회사 이름이 뭐야?"

"하... 영화가 진짜 애들을 다 버려놨군."

"어? 회사같은 거 없어?"

운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표정을 보며 원석은 피식 웃었다.

"주식회사 성경."

"아니 거기가 조폭 회사였단 말야!?"

연예계부터 시작해서 여기저기 손을 뻗지 않는 곳이 없는, 요새 한참 성장하고 있으며 뉴스나 티비에도 몇번이나 등장한 회사를 조폭이 운영하고 있을 줄이야. 운현은 황당해하며 그를 보았지만 원석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그래도 차라리 우리가 나은 경우도 많아. 세상에는 웃는 얼굴로 사람 찌를 수 있는 기업이 얼마든지 있거든. 아무튼 우리는 최소한 그런 양아치짓은 안해."

"양아치라고 하지 말고 치밀하다고 해줘. 소리비도라니. 멋있잖아."

"멋있긴 개뿔..."

원석은 이를 갈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를 향해 빙긋 웃은 운현은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원석의 것으로 보이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쿨럭!"

"담배도 못피는 놈 같은데... 어린 놈이 담배피는 거 아니다."

"어린 놈이 사람패고 밀수 하려는 건 되고? 이미 법이랑 원수 진 몸이야."

자신의 말에 원석이 피식 웃자 운현은 어색하게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거기서 당신 위치가 어떻게 돼?"

"해외 영업 및 국내 영업 팀장. 저번에 줄을 잘못서서 꽤 밀렸지. 서열로는 14위정도 된다."

"그럼 나랑 손을 잡고 밀수를 아주 성공적으로 했을 때 얼마나 높아질 수 있지?"

"...최대가 3위다. 회장과 회장의 아들이 있는 이상... 그리고 그것도 쉽지가 않아. 날 따르는 부하들이 별로 없어서. 내가 힘을 가지면 견제할 놈들이 많아. 당장 큰 거래를 성공시키면 바로 날 죽이려고 할걸?"

그의 말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이거 생각보다 귀찮게 됐다. 그냥 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는게 나을까? 운현이 고민하는 듯 하자 원석은 눈을 빛냈다.

"하지만 네가 조금만 도와주면 된다. 마침 다음달에 큰 거래가 있어. 그것만 성공시키면..."

"성공하면 칼맞는다면서."

"너 정도 실력자라면 날 가드하는게 가능할거다. 어때? 거래라는 것은 이렇게 하는 거지."

조폭 열다섯을 손쉽게 쓰러트릴 정도의 실력에 자신의 공격을 여유있게 피했다. 거기에 이 담력. 잘만 키우면 자신의 든든한 부하 겸 동료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원석은 씨익 웃었다.

"흠..."

"너 역시 뭔가 원하는게 있으니 나와 손을 잡으려는 것 아닌가? 아쉬운 것은 너야. 어때? 결정해. 이번 거래를 도와주고 날 가드해준다면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지. 어때?"

원석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하자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댄 후 침투경을 날렸다.

"크아아아아아악!!!"

온 몸이 찢어지고 잘게 부숴지는 고통에 원석은 비명을 내질렀다. 단지 어깨에 손만 올렸을 뿐인데 이런 고통이라니. 그가 눈물과 콧물, 침을 질질 흘리며 고통에 바닥을 구르자 그의 머리를 강하게 짓밟은 운현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당신이 생각하는 거래고. 내가 생각하는 거래는 좀 달라. 내가 생각하는 진짜 거래는 이거야. 난 시키고. 당신은 한다."

부드럽고 차분하게 말하고 있지만 원석은 그것을 들을 여유도 없었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그에게 머리가 밟힌 상태에서도 들썩거리던 그가 축 늘어지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아아...윽...아아아악..."

"한번 더 할까?"

조폭으로 살아오며 온갖 고통을 다 겪었지만 이런 고통은 처음이다. 원석은 서른살 이후로 한번도 흘리지 않는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은 운현은 쪼그려 앉아 원석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내 눈을 똑바로 봐."

"...하아...하아..."

"내가 누구라고 했지?"

"마...마...마왕..."

"맞아."

얼굴 가득 순박하고 약간 어리석어보이는 웃음이 지어져 있었지만 살짝 떠진 그 눈만큼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와 눈이 마주쳐진 원석이 두려움에 떨자 운현은 그의 머리를 놓아 준 후 말했다.

"사실 난 당신을 좀 이용할 생각이야. 오우. 그렇다고 해서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줘. 난 당신에게 꽤 많은 것을 양보할 생각이거든. 밀수를 해서 얻는 수익의 8은 당분간 당신이 가져가도 괜찮아.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안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당신이 마련해주는 거니까. 어때?"

"하아...하아..."

"내 말 안들려?"

"아, 알겠... 알겠습니다."

절로 존대가 나온다. 또다시 그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원석이 덜덜 떨며 말하자 운현은 씩 웃었다.

"이제야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네. 자. 그럼 해보자고. 두달 후에 있을 거래라는게 뭐지?"

"...주, 중국에서 마약과 총기. 그리고 금괴의 밀매가 있을 예정입니다. 그게... 그..."

"그?"

"준비. 준비 과정과 그 비용이 상당해서 조직 내에서도 이번 거래에 회의적입니다. 하지만 이걸 성공시킨다면... 그럼 저는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을겁니다. 그, 그렇지만 아까 말씀드린대로..."

"성공하면 죽는다 이거지?"

"네..."

"흠... 어쩐다."

원석이 얼마나 제대로 일해 줄 수 있는지 모르는 이상 이 인간을 이용하는게 맞는가 의문이 들었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그래도 머리는 잘 굴러가는 듯 싶은데... 운현은 그를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이제와서 다른 사람을 찾기도 힘드니 어쩔 수 없군."

"그럼...?"

"한번만 가드해주면 되지? 이번 거래를 성공했을 때 얼마나 기다려야 안정적으로 서열을 올릴 수 있어?"

"두, 두달이면 됩니다."

"그럼 두달간 널 가드하라고?"

"...그게... 네."

운현이 인상을 찡그리자 원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쉰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일단 내 일부터 처리하자. 40평짜리 단독주택 하나. 거기에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환경을 만들어 놔. 지하실 큰거는 있어야 해. 그리고 흥신소 직원 몇명 불러다가 사람 두명 감시 좀 해라."

"예?"

"내 일부터 처리하자니까. 두달동안 가드? 해주지 뭐."

어차피 자신의 장기말로 쓰기로 마음먹은 이상 성장할때까지는 키워줘야 한다. 그런 것이라면 자신의 바다와 같은 아량으로 받아들여줘야하지 않겠는가. 당장의 이득과 편의를 위해 장기적인 이득과 편의를 포기할 이유는 없었다.

원석은 야망이 있다. 그리고 그 야망을 위해서라면 자신처럼 정체불명의 인물과도 손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계산이 빠른 남자다. 그렇다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쓰기에는 딱 좋지 않은가. 운현이 느긋하게 말하자 원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누굴 감시해야 하나요?"

"그게 말이지..."

원석에게 창석과 윤지에 대한 뒷조사를 맡긴 운현은 집으로 돌아와 낮에 찍은 동영상을 확인해보았다. 둘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는 영상을 차분히 본 운현은 작게 키득거렸다.

'이정도면 좋겠지만... 좀 더 모아야겠지.'

아침이 되자 느긋하게 학교로 향한 운현은 윤지가 평상시와 다르게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아직 흥분이 모두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하며 찬성의 자리만 바라보고 있을 때 수업종이 울리며 담임선생이 들어왔다.

"어... 찬성이는 오늘 쉰다더라. 몸이 굉장히 안좋은가보네."

"네!? 어째서요!?"

옆자리에 있던 윤지가 벌떡 일어나며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담임 선생은 오히려 당황했다. 반 학생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자 윤지는 발갛게 물든 얼굴로 의자에 앉았고 담임선생은 쓴웃음을 지었다.

"몸이 과하게 안좋다고 하는데 별 수 있나. 아무튼 반장. 인사."

찬성이 결석했다는 것에 윤지가 과하게 반응한 이유를 알고 있는 운현은 그녀를 힐끔 보며 물었다.

"왜? 찬성이한테 할 말 있어?"

"그런게 아니라... 저기... 운현아."

"왜?"

"...오늘 저녁에 뭐해?"

"어. 저녁에? 어... 좀 일 있는데. 9시 넘어야 괜찮을 것 같아. 왜?"

"...아냐."

'나랑도 하고 싶은거냐. 하... 됐다. 너는.'

히죽 웃은 운현은 칠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결국 찬성은 등교를 하지 못했고 윤지는 하루 종일 안절부절 못하다가 하교종이 울리자마자 뛰쳐나갔다. 자율학습따위는 개나줘버리라는 기세로 그녀가 나가버리자 운현은 학교 밖으로 나와 원석에게 받은 휴대폰을 들었다.

"준비는 됐지?"

"예."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원석의 목소리에 운현은 싸늘히 웃었다.

집으로 돌아 온 운현은 자신의 휴대폰으로 사진이 전송되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찬성의 집 창문으로 윤지가 찬성의 위에서 허리를 흔드는 것이 찍혀 있었다. 그들이 떡치는 장면. 계속 요구하는 윤지를 찬성이 결국 쫓아내버리는 것. 그녀가 터덜터덜 찬성의 집에서 나오는 장면. 길에 있던 남자들에게 추근덕대는 장면. 그것들을 본 운현은 창문을 통해 윤지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

"...."

멀리 윤지가 허탈한 얼굴로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그녀가 오는 것을 본 운현은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어? 어디 갔다와?"

윤지를 보자 운현은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그의 인사를 받은 윤지는 달아오른 얼굴로 운현에게 다가가 그에게 안겼다.

"운현아..."

"...야. 너 무슨 일 있었어?"

달뜬 신음성. 풍겨오는 여인의 향기. 운현은 그녀의 상태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궁금하다는 듯 물었고 그런 그를 벽으로 밀친 윤지는 운현의 입술에 키스했다.

"하아...나. 나 몸이 이상해... 너, 너무 뜨거워..."

"야..."

"운현아... 나... 나..."

청순함과 섹시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녀가 자신의 목을 핥짝거리자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이거면 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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