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40)

Turning P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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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ing Point

"반갑습니다. 아둔이라고 합니다. 파르티 교단의... 부족하지만 아크 비숍의 위치에 있는 421레벨의 사제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네요. 후후후... 상아씨의 연인이라니."

폭동이 정리가 되자 운현은 상아에게 요청해 모험가 길드의 간부인 아둔을 소개시켜달라고 했다. 마침 길드에 올라와 있던 아둔을 부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에 그녀를 데리고 온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디 다친데 있어?"

"그런건 아니고... 아둔씨."

"네."

"사제가 가진 최고의 회복기술은 뭔가요?"

"최고의 회복기술이라... 파르티 교단의 전 교황님께선 부활을 쓰실 수 있으셨지만... 뭐 이제는 안계시니까요. 가장 강력한 회복마법은 올 오브 원이죠. 사제 다섯명이 모여 쓸 수 있는 스킬로..."

"아, 아니 개인이 쓸 수 있는 최고의 회복기술로 말씀해주세요."

"으음... 개인이라... 그렇다면 그레이터 힐이죠. 불치병을 제외한 모든 상처, 중독, 부정적인 상태이상. 저주마저도 치료하고 모든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스킬이에요. 사제 레벨 400이 되었을 때 익힐 수 있죠. 신성력 소모가 크긴 하지만... 위기시에 쓰기엔 좋아요."

그녀의 말에 운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은 채 그는 아둔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걸 저에게 써주실 수 있나요?"

"어렵지 않습니다만 왜요? 혹시 저주에 걸리셨나요? 그런거라면..."

"아 그게 요새 헛것이 자주 보이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몸도 안좋고..."

쓴웃음을 지으며 그가 말하자 아둔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빙긋 웃었다. 많은 이들을 치료하느라 신성력의 소모가 꽤 있었지만 그레이터 힐을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운현씨 부탁인데 해드려야죠. 우리 상아씨 연인인데."

"아, 아하하하하..."

아둔이 한쪽 눈을 깜빡이며 장난스레 말하자 상아는 부끄러운 듯 볼을 긁적거렸다.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아둔은 운현의 손을 살짝 잡은 후 엄한 얼굴로 말했다.

"그 대신 약속 하나 해주세요. 절대 상아씨를 울리지 않겠다고요."

"약속합니다."

운현의 진지한 시선에 아둔은 당황했다. 농담이었는데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그의 눈에 담겨 있는 강렬한 의지를 읽은 아둔의 얼굴이 붉어지며 살며시 시선을 피하자 상아는 당황하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뭐, 뭣들 하는거야!?"

"으음... 아뇨. 크흠. 그, 그냥 진지한 시선을 가진 남자는 멋있구나 하고..."

"운혀어어어언..."

아둔이 부끄러워하며 말하자 상아는 운현을 째릿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잠시간의 소란이 정리되자 아둔은 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시작할게요. 마음을 편하게 하시구요."

"네."

아둔의 말에 운현은 스탯창을 닫았다. 그가 준비가 된 듯 하자 아둔은 그에게 손을 뻗으며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레이터 힐."

"커아아악! 끄억...!!"

"뭐야!? 뭐!? 우, 운현!!"

"이럴리가 없는데!? 어째서!?"

그레이터 힐을 받은 운현이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워하자 아둔과 상아는 당황했다. 어째서 이런 반응이 나온단 말인가. 그를 바라보던 상아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운현의 팔을 걷었다.

"이 미친자식!!"

그의 팔에는 사자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아크 비숍인 아둔의 그레이터 힐이라면 강력한 언데드도 한방에 보내버릴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다. 그것을 일부러 맞았단 말인가? 아둔과 상아는 당황하며 허둥지둥 운현의 팔에 걸려 있는 풀어내었다.

"아둔!"

"그레이터 힐!"

"......"

"어째서!?"

그레이터 힐이 발동되지 않았다. 아둔이 당황하자 상아는 휙 운현을 노려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런 미친 짓을 한지 알게 된 것이다.

"너...!!"

"이, 일단 크리티컬 힐!"

운현의 손에서 팔찌를 풀어내자 아둔은 당황하며 주문을 외웠다. 그녀의 크리티컬 힐이 쓰러진채 움찔거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운현의 몸을 감쌌다. 하지만 한번의 크리티컬 힐로도 그의 고통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연신 피를 토하고 코에서 피를 흘리며 그가 고통스러워하자 상아는 운현의 멱살을 잡은 후 그의 입에 힐링포션을 들이 부었다.

"미친새끼! 미친새끼!!"

욕이 절로 나온다.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상아가 화를 내는 것을 본 아둔은 다시 한번 크리티컬 힐을 발동시켰다.

"커헉! 아악...큭... 크크크..."

"웃기냐!? 응!? 웃겨!? 사람 속을 얼마나 태워먹을 생각이야!!?"

상아는 운현의 멱살을 잡은 채 강하게 외쳤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힘겹게 웃었다. 떨리는 그의 손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자 상아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장난하냐!? 어!?"

"크흐...쿨럭! 큭큭... 아하하하..."

"크리티컬 힐!"

또다시 크리티컬 힐이 발동되었다. 연속된 크리티컬 힐로 아둔이 신성력을 모두 소모하고 바닥에 주저앉자 꽤나 상태가 안정된 운현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 힘겹게 말했다.

"아둔씨... 고맙습니다."

"정말... 용서 못해요. 후우... 상아씨를 울리지 않겠다고 하더니..."

"그 죄는... 나중에 받죠."

'그리고 그레이터 힐을 훔친 대가도...'

운현은 씨익 웃으며 자신의 스킬창을 보았다. 훔쳐배우기는 그레이터 힐로 변경되어 있었다. 이정도면 되었다. 그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것을 본 상아는 멍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너..."

"이제 그나마... 안심이다."

"등신아... 등신!"

"미야가 죽은 것도... 바제트가 죽은 것도... 내 탓이야... 너희들을 지키기 위해선 이정도 고통따위..."

"어차피 스킬 한방 맞으면 바뀌는 거잖아!"

상아의 말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이젠 아니야..."

"뭐?"

운현은 스킬창을 보며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풀린 것에 만족해했다. 그의 스킬창 가장 마지막에는 이번에 240이 되며 추가된 스킬이 있었다.

[프리저브 : 활성화시 훔쳐 배우기로 배운 스킬과 스틸로 훔친 아이템을 돌려주지 않는다. - 현재 적용중인 스킬 : 그레이터 힐, 현재 적용중인 아이템 : ----]

'이것만 있었어도...'

바제트를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르토리우스가 그토록 말하던 레벨 300. 만약 바제트가 죽기 전에 레벨을 300까지 올릴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이런 고통따위 얼마든지 감안해서라도 그레이터 힐을 배웠을 것이다.

게으름을 피운 것은 아니지만 운현은 후회가 되었다. 조금 더 열심히 레벨업을 할 것을, 조금 더. 조금 더 빨리 움직일 것을.

후회는 항상 늦다. 그렇다면 그 후회를 발판으로 전철을 밟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헤스티아와 상아, 필레가 미야나 바제트처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상 방심할 수는 없었다. 운현은 씨익 웃으며 털썩 주저앉아 숨을 헐떡거렸다.

"하아... 하하..."

"등신... 등신!"

"크흐... 이제 괜찮아."

운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눈물로 젖어 있는 상아의 얼굴을 닦아주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내가 지킬게."

"바보야... 넌. 진짜 바보야..."

그의 품에 안긴 채 상아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아... 으...?"

"정신이 들어?"

필레의 몸에 온기가 돌아온다. 창백했던 안색이 건강한 살색으로 돌아오고 그녀의 볼에 홍조가 들자 운현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 죽은거... 아니지?"

"그래. 바보야. 왜 그런 짓을 했어. 응?"

운현은 필레를 꽉 끌어안았다. 몸에 힘이 돌아 온 필레는 운현을 끌어안고 방긋 웃었다.

"널 지키기로 했으니까."

"그건 지키는게 아니라 부숴버리는 거라고. 앞으론 그러지마."

"후후후..."

대답하는 대신 필레는 자신의 가슴 부분을 만져보았다. 그녀의 슈트에는 주먹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마 조금만 지나갔어도 즉사였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죽음을 회피했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고마워. 넌 내 생명의 은인이야."

"아니 생명의 은인이긴 한데."

필레가 자신의 입술에 짧게 키스한 후 말하자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은인도 좀 위험할 것 같은데..."

"....."

카를로스와 활을 든 사제를 놓쳐버린 마인은 바닥에 구르고 있는 카를로스의 팔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있는 팔찌가 거슬렸는지 마인은 손을 뻗었고 그 순간 팔찌와 함께 카를로스의 팔이 폭발해버렸다.

"...튀, 튀는게 낫겠지?"

"응."

자리에서 일어난 운현과 필레는 마인이 자신들에게 관심을 갖기 전 도망가려고 움직였다. 하지만 마인은 그것을 눈치채고 검을 던졌고 그 검은 운현이 움직이려는 곳에 꽂혔다.

"...왜?"

죽이려고 한다면 일격에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인은 그저 자신들이 가지 못하게 막았을 뿐 별다른 위해를 끼치지 않았다. 필레가 던전을 돌며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나 싶어 그녀를 보았지만 필레는 떨리는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 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마인이 다가온다. 막강한 힘을 가진, 아군인지 적인지도 모를 마인이 걸어오자 운현과 필레는 검을 들었다. 어떻게 살린 필렌데 이렇게 죽게 할 수는 없다. 운현은 필레를 밀치며 말했다.

"도망쳐."

"뭐!? 웃기지 마! 너나 도망가!"

"...그럴 틈도 없겠다."

마인이 양 손을 뻗자 각기 다른 곳에 있던 검이 사라지고 그의 양 손에 검이 들려졌다. 어느새 바로 앞까지 온 마인이 검을 들어 올리자 운현과 필레는 그를 노려보며 무기를 들었다.

"...케..."

"....."

"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

"...뭔..."

"비웃는... 거같은데."

마치 웃는 것처럼 마인은 반복적으로 같은 소리를 내었다. 자신에게 저항하는 운현과 필레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인은 다시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

"...비웃는... 거냐!? 우리가 약하다고!?"

"......"

이어지던 소리가 멈춘다. 그것에 운현과 필레가 침을 꿀꺽 삼켰을 때 마인의 몸이 움찔움찔 떨리며 그는 들고 있던 검을 천천히 내렸다.

"케이스 3293 클리어. 계획 대비 오차율 3% 이하. 성공적인 진행 중입니다."

"...뭐?"

운현과 필레는 마인이 한 말에 멍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무슨 소리인가. 저 마인이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운현은 떨리는 눈으로 마인을 보며 물었다.

"너 무슨소리를..."

"로그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정중한 기계음이 들려온다. 운현은 그것에 움찔 몸을 떨었다. 로그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 중 하나가 아닌가. 그는 떨리는 손으로 메뉴창을 열어 로그를 확인하고 딱딱히 굳었다.

"왜?"

"이게... 무슨..."

그는 로그에 적혀 있는 글씨를 읽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도움말 : 기억 보관자를 쓰러트리고 회귀자의 기억 파편을 획득하시기 바랍니다.]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기억 보관자라니."

운현의 말에 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운현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네가... 기억 보관자냐?"

"....."

말없이 마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운현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을 가리켰다. 그것으로 자신을 죽이라는 것일까? 운현은 천천히 검을 들어 마인의 심장에 검을 가져갔다.

'그러고보니...'

1계층에서 마인을 만났을 때, 마인은 자신에게 다가와 검을 휘두르지 않고 그대로 멈췄었다. 마치 자기를 공격해달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도대체... 난 뭐지? 어째서 이런 일이...?'

운현은 복잡해진 머리속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마인의 심장에 검을 꽂았다. 그 순간 마인의 몸은 기화하여 사라졌고 그가 있던 자리에 주먹만한 코어가 툭 떨어졌다.

"이게 뭐야?"

필레가 궁금한 듯 물어보자 운현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잡았다. 그 순간 그는 세상이 검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검은색 코어를 손에 쥔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기억이, 끔찍하기 그지없는 장면이 떠오른다.

검을 쥔 검은 사제에게 목이 날아가버린 필레. 다난의 인신공양 제물이 되어버린 헤스티아.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잡혀 화형을 당하는 미야. 운현이 처음 동굴에서 만났던 몬스터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지는 바제트. 어딘지 모를 신전같은 건물 안에서 복부에 장검이 꽂힌 채 죽어버린 상아. 그들의 죽음 끝에 자신은 한없는 고통을 느꼈다.

맨 처음의 죽음에서는 고통, 그 다음은 분노, 그 다음은 슬픔, 그 다음은 무력한 자신에 대한 절망, 가끔씩 생기는 희망... 셀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의 끝에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

"실패. 다시 한다."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죽음들. 죽음의 중간 중간마다 운현은 같은 말을 반복할 뿐 이었다.

실패. 다시 한다.

실패. 다시 한다.

실패. 다시 한다.

그녀들의 죽음에 대한 분석. 운현은 모든 감정이 마모되고 인성이 마비되어 오로지 그녀들을 살려야 한다는 집념만을 유지했다. 남아 있는 감정은 없었다. 오로지 집념과 오기만이 남았을 뿐. 그녀들을 살리겠다는 목적만 가지고 있을 뿐. 수십, 수백번을 돌아가며 그는 그들의 죽음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지 확인하고 다시 할때 그것을 감안하여 움직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무수히 같은 날짜에 무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반드시 죽었다.

그렇게 그녀들의 죽음을 마주하며 점점 감정은 메말라가고 그녀들을 제외한 타인은 그저 그녀들을 살리기 위한 이용대상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들의 죽음을 넋놓고 바라보던 운현은 자신의 눈 앞에 떠오른 장면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째서 이런 기억이 떠오른단 말인가.

길드 지하의 복도에서 에릴의 마법에 의해 얼음 동상이 되어 산산히 부서지는 헤스티아. 그녀의 시체를 보며 깔깔 웃는 에릴 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인에 의해 피해를 입지 않은 카를로스와 다난의 집행자들이 필레를 죽이는 장면. 그녀의 심장에 칼을 쑤셔 넣고 싸늘히 웃는 카를로스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건 말도 안돼!'

분명히 구했다.

자신은 헤스티아를 구했다.

자신은 필레를 구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의문을 해소할 새도 없이 또다시 장면은 이어졌다. 하지만 운현은 이 장면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장면인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 명의 여인들. 그야말로 미의 정점이라 불릴만한 이들에게 자신이 말하고 있었다. 지친 목소리로 하지만 지금까지의 그녀들의 죽음 후 찾아오는 감정 중 그것이 처음으로 확신과 자신감에 차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너희들에게 원한다. 나에게 한번의 기회를 더 다오."

그것을 끝으로 운현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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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ing Point

"크윽..."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프다. 온 몸이 떨렸다. 자신이 필레를 구한 것이 진짜일까? 환각을 본 것은 아닐까? 머릿속의 기억이 뒤죽박죽이 된 운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그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렸다.

"운현씨!"

"운현!"

"괜찮아!? 마력 방해때문에 못 왔어! 다친건 아니지!? 말 좀 해봐!!"

헤스티아, 필레, 상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운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잡힌다. 환각이 아니다.

"헤스티아... 복도에서... 죽은거... 아니야?"

"죽긴 누가 죽어요! 그때 운현씨가 도와줬잖아요!"

헤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필레를 바라보았다. 멀쩡했다. 기억 속에서는 필레의 몸에 여기저기 상처가 있었다. 운현은 황급히 그녀를 잡아 당겨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꺄악!? 뭐하는거야!? 그, 그런 건 나중에 하자고!"

운현이 옷을 벗기는 것에 당황한 필레는 그의 팔을 꽉 잡았다.

운현은 그녀들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흐윽...흑...살았어... 살아 있었어... 살아... 으허어어엉!!"

"뭐, 뭐야!?"

"왜 그래요? 괜찮아요?"

"으음... 그 마인이 떨군 코어때문인가? 필레. 그거 어디갔어?"

"운현의 몸에 흡수됐어요. 저도 잘..."

그녀들이 당황하는 것을 보며 운현은 엉엉 울던 도중 문뜩 떠오른 생각에 울음을 멈췄다.

'잠깐만.'

자신이 손에 넣은 것의 이름은 회귀자의 기억 파편이었다. 그 말은...

'회귀가... 가능하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과거로 돌아가 죽은 연인을 살리는 영화도 본 적이 있었다.

'그 말은... 그 말은...'

운현은 미야의 환한 미소와 바제트의 여유로운 웃음을 떠올렸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살릴 수... 있다는건가."

"응? 뭐가?"

"무슨 소리 하는거야?"

지끈거리는 머리 탓에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운현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 후 창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머리를 식혀주는 것을 느끼며 운현은 다시 생각을 이어갔다.

'만약 회귀자의 기억파편이 진짜고... 그 모든 기억이 내가 겪은 기억이었다면? 하지만 기억 속에서 난 단 한번도 그녀들을 구하지 못했어.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어떻지? 그리고 이상한 것은 또 있어. 바제트와 미야가 죽은 날짜는 그날이 아니야.'

기억 속에 있었던 날짜들과 그녀들의 죽은 날짜는 달랐다. 비록 몇일 차이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달랐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던 미야와 바제트의 죽음이 모두 동일한 날짜였던 것을 생각하며 이상한 일이다.

운현은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여인들을 보았다. 순수하게 자신을 걱정하는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여인들. 그녀들의 죽음은 회피했다. 분명히 기억 속에서는 죽었던 장면을 넘어서서 이 자리에 있는 여인들이 있었다.

'알 수 없어. 정보가 부족해.'

당장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기억에 있는 그 자신감과 확신의 정체를 알아야 했다.

'아르토리우스.'

그녀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 300 레벨. 운현은 자신의 스탯창을 열어보았다. 그 카를로스와 다난의 집행자들을 벌레처럼 짓밟는 강함을 가진 기억 보관자를 죽인 덕분일까? 그의 레벨은 300이 되어 있었다.

'이걸 예상한 거라면... 그녀가 무언가 알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운현? 무슨 생각해?"

"너 지금 좀 이상해. 왜 이래? 혹시 냉철한 이성 상태야?"

"운현씨. 괜찮아요? 좀 더 자는게..."

"아냐. 그보다 상아."

"왜?"

"던전 도시로 돌아가야겠어."

"하지만 아직 도시의 분위기는..."

"중요한 일이야. 아니면... 아르토리우스를 불러줘."

"...하아. 또 그 여자야? 난 정말 그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래도 부탁해. 지금은 너 밖에 없어."

운현의 간절한 부탁에 상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부탁하는데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었던 상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깥으로 나갔다. 상아가 나가자 필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운현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도대체...?"

"아직 확신이 없어. 그냥 기다려줘."

만약 이게 맞다면. 자신이 생각한 일이 가능하다면 미야와 바제트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회귀를 하게 된다면 다시 이들과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운현은 그것에 고민했다. 완전히 실패를 했다면. 자신의 기억처럼 단 한명도 남지 못한 채 모두 죽어버렸다면 미련이나 아쉬움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들을 구했다. 헤스티아와 필레의 죽음을 회피시켜냈다.

그런 그들을 버리고,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그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물끄러미 필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향해지는 그 시선에 필레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에게 따뜻하고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생긋 웃는 필레를 보며 운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상아가 떠나고 이틀이 지났다. 그녀는 별다른 문제 없이 아르토리우스를 데리고 필레의 영지에 도착했고 상아는 여전히 침대신세를 지고 있는 운현에게 투덜거렸다.

"아아! 저 여자 진짜 사람 신경 더럽게 긁네!!"

"네가 그렇게 화내는 걸 보니 마음이 아프구나."

운현의 농담에 상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생글생글 웃은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에게 다가가 옆에 앉은 후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저도 저 여자 때문에 무척이나 힘들었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어이! 거기! 떨어지지 못할까!?"

"상아."

"왜!"

"부탁이야. 둘만 있게해줘."

"...뭐?"

상아는 어이가 없었다. 짜증나는 여자를 데려와달라는 부탁을 한 것만으로도 화가 나는데 단 둘이 있게 해달라? 둘이서 무슨 짓을 하려고? 상아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지자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 상아."

"사, 사랑한다고 하면 다 되는 줄 알아!? 바보!"

투덜거리면서도 상아는 운현이 키스해주자 못이기는 척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달콤하게 이어지는 키스가 끝나자 상아는 뚱한 눈으로 운현을 보다가 그의 가슴을 톡 쳤다.

"금방 올거니까 빨리 얘기 끝내줘."

"알았어. 고마워."

상아가 천천히 방 밖으로 나가자 침대에 앉아 있던 아르토리우스는 싱글거리며 웃는 얼굴 그대로 차갑게 말했다.

"제 앞에서 어떻게 그런 염장질을 할 수 있어요?"

"뭐 어때. 자. 그럼 이제 질문에 답할 시간이군."

"보아하니 회귀자의 기억파편은 얻으신 것 같은데 제 답변이 필요한가요?"

자신이 가진 기억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심장이 미친듯이 널뛰는 것을 느꼈다. 가능하다는 건가? 가능한건가? 그녀들을 다시 만나고, 살리려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응. 필요해. 확신이 있어야해."

서두르면 안된다. 그는 심호흡을 한 후 물었다.

"너는 누구지?"

"저요. 음... 뭐라고 해야 하나..."

한참동안이나 생각을 하던 그녀는 피식 웃은 후 말했다.

"당신의 둘도 없는 동료."

"그거 말고."

"그럼 이렇게 말하죠."

아르토리우스는 처음으로 운현을 보는 앞에서 표정을 지웠다. 그녀의 표정은 닮아 있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그녀들의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감정이 메말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오로지 집념과 오기만 남은 채 수백번의 회귀를 반복한 한운현과 닮아 있었다.

"당신과 함께 수십, 수백번의 회귀를 거친,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회귀자입니다."

"......"

"그리고 한가지 더 있죠."

아르토리우스는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만들어낸 위신체의 실험대상. 두번째 완성된 위신체입니다."

".....!!"

그것만큼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르토리우스가 아마 회귀를 경험한 회귀자가 아닐까 의심을 했었던 운현은 그녀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신을 강림시킬 수 있는, 가짜로 만들어낸 현실의 신체(神體)인 위신체라니. 그녀의 말에 운현이 당황하자 아르토리우스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며 말했다.

"이계인인 당신과 다르게 저의 몸은 이 세계의 운명에 거스를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회귀를 하고, 그 기억을 온존히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죠.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육체인 위신체가 되는 것. 운현님. 당신은 다난의 인신공양 제물이었던 저를 구해주고 죽어가는 저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비록 당신의 회귀에 맞추어 함께 회귀를 하며 고통을 겪어야 하는 몸이기는 하지만..."

"......"

아르토리우스의 말에 운현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자신이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런 기억따위는 없었다. 가지고 있는 기억은 그녀들의 죽음. 그리고 미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세 미녀들과의 마지막 대화뿐이다. 그가 당황하자 아르토리우스는 얼굴에 드러는 무표정을 지우고 살며시 웃었다.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좋으니까. 당신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상관없어요."

"...그건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야."

"저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중요한건데 말이죠."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쭉거린 그녀를 조용히 응시한 운현은 가장 묻고 싶은, 부정되었을 시 절망으로 자살을 하고 싶을 질문을 던졌다.

"미야와 바제트를 살릴 수 있나?"

"회귀를 통해서요? 네."

아르토리우스는 무척이나 시원스럽게 답했다. 그녀가 오기 전까지 운현이 그토록 두려워던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답한 그녀는 운현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말라니까요."

"어, 어떻게!? 방법은 뭐지!?"

그거면 됐다. 그녀들을 살릴 수 있다면, 다시 되돌아가 그들을 만나고 모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뭐든 상관없다. 수명? 그딴 것 얼마든지 주겠다. 신성? 가져가라. 그는 다급히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 그런 그를 향해 아르토리우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방법이요... 회귀 자체는 쉬워요. 모든 기억을 잃고, 지금까지 얻은 모든 힘을 잃고 회귀를 하려면 지금 여기서 당신의 목에 단검을 쑤셔 넣으면 되구요. 모든 기억과 능력을 가지고 회귀를 하려면 던전의 5계층을 지나 6계층에 진입하면 된답니다."

"6계층..."

이제 300레벨인 자신이 450레벨들도 진입하지 못했다는 6계층에 들어갈 수 있을까? 아니. 이딴 의문은 필요 없었다. 한다. 반드시 한다.

'힘이 없어서 잃었어. 그레이터 힐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들을 살릴 수 있을거야.'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벨업? 해주겠다. 온 몸이 부숴져라도 하겠다. 다짐을 하는 그를 향해 아르토리우스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대로 회귀를 하면 반복에 불과해요."

"무슨 소리야...?"

"계획은 아직 진행중입니다."

"계획? 무슨 계획?"

"모든 이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계획.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계획. 운명에 휩쓸리지 않는 세계를 만드는 계획."

"...그 말은..."

"당신에게 있어서는 궁극적인 목적이겠지요.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 상아, 필레. 그리고 당신에게 큰 호의를 가지고 있는 힐더크. 그리고 지금 저 방에서 1년 후 다난에게 처참하게 찢겨 죽는줄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놀고 있는 윈드, 그녀를 사랑하지만 서툰 성격 탓에 제대로 그 사랑을 전달할 수 없어 그것을 전달하지 못하고 윈드의 죽음에 미쳐버리는 윈디아. 그리고... 모험가 길드를 세운. 운명을 거스르려는 자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제니스. 당신을 죽이기 위해 파견된 마이엘에 의해 죽은 아르, 그녀를 돕다가 다난의 집행자에게 인신공양의 제물이 되어버린 루티. 마이엘이 건 마법에 세뇌당해 스스로 폭탄이 되어버린 헤라. 그 외에 당신과 관련된 모든 이들."

아르토리우스의 말에 운현은 경악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째서 이런 가혹한 운명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가혹한 운명에서 자신을 도와 다른 이들을 구원하려는 이는 누구란 말인가.

"...도대체 누가 그런 계획을 세운거야?"

운현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아르토리우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요."

"뭐?"

"당신이요. 수십, 수백번의 세계를 경험하며, 고통과 괴로움, 절망에 좌절하지 않고 그 집념과 오기만으로 끝까지 버텨 여기까지 온 당신이 세운 계획이에요."

205====================

Turning Point

"하지만... 난 기억이 없어."

그런 장대한 계획을 세웠다고 하지만 운현에게는 그런 기억따위는 없었다. 기억 보관자에게 기억 파편을 얻지 못했다면 그녀들의 죽음에 대한 운명조차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장대한 계획을 세웠다고? 운현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하자 아르토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하지만 난 운명을 바꿨어! 내가 가진 기억이 진짜 운명이라면... 난 헤스티아와 바제트, 상아가 죽었어야 할 날짜를 지나서까지 그녀들을 살게 했다고! 그들은 내가 지켰어!!"

"네. 그럴거에요. 당신이 말했죠. 이 세계에서 살아 왔던 기억이 없는 당신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운명에 종속된 사람이 아니니까. 이 세계의 운명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기에 다른 이들의 운명을 입맛대로 바꿀 수 있다고 했어요. 어... 당신은 이걸 이렇게 말했죠. 분탕종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운현의 떨리는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세계에서 살아간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세계의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척도가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 전의 당신은 모든 기억을 봉인하고 뿔뿔히 찢어 기억보관자에게 넣어놨어요."

"그... 기억 보관자는 뭐지?"

"당신이 위신체를 만들다 실패한 실패작이요.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이 담겨 있는 육체이기에 기억을 담을 수 있었던 거죠. 하지만 모든 기억을 담을 수는 없어요. 어쨌든 실패작이니까.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좋았죠. 하나에 몰아 담았다가 당신이 그것을 만나 당신의 기억이 완전해진다면 그때부터 당신은 이 세계의 운명에 소속되는 사람이 되니까."

"...하하... 뭐야 그럼. 그럼... 회귀를 해도 말짱 꽝이라는 얘기잖아."

아르토리우스의 말에 운현은 절망했다. 그녀들을 구하려면 힘과 기억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있는 순간부터 운명을 거스를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딜레마란 말인가.

"바제트와 미야를 구하려면 이 힘과 기억이 반드시 필요해!"

"네. 그녀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렇겠죠. 솔직히 저는 당신이 이번에 헤스티아씨와 필레씨, 상아씨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렇잖아요. 그토록 많은 실패를 옆에서 봤던 저에요. 당신이 그녀들을 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구요. 물론 그게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운명을 바꿨는데!?"

"어... 아. 제가 말씀을 못드렸네요. 아니, 알고 계시지 않나?"

아르토리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동그란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바제트씨와 미야씨가 죽은 날짜와, 당신의 기억 속에 있는 그녀들이 죽은 날짜가 같나요? 제가 알기론 좀 늦춰졌을텐데."

"....."

그녀의 말대로였다. 그녀들이 죽는 날은 훨씬 전이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이미 운명은 바뀌었다고...?"

"네. 만약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저는 지금 당신이 모두는 아닐 지라도 당신의 목적은 이루었다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그 두분이 죽었으니 결국 당신의 계획은 진행중이라는 것이겠죠."

"잠깐만. 그 말은... 헤스티아와 필레, 상아가 죽을 수도 있다는거야?"

"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해!!"

아르토리우스가 너무나도 무덤덤히, 마치 키우던 식물에서 잎이 떨어진 것처럼 말하자 운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가 다가가 분노를 터트리자 아르토리우스는 피식 웃었다.

"저는 그걸 수십번도 넘게 봤어요. 그리고 그 앞에서 그녀들의 죽음에 대해 분석하고 이 계획을 준비하는 당신을 봤어요. 그런 제가 그렇게 말하는게 뭐가 이상하죠?"

"......"

아르토리우스의 말에 운현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를 향해 아르토리우스는 살며시 웃으며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힘든가요? 괴로운가요? 그렇다면 포기해도 좋아요. 이전의 당신은 수많은 회귀를 반복하며 오로지 그녀들을 살리는데만 집중했죠. 지금이라면 달라요. 만약 당신이 원한다면 저는 당신이 사랑한 그녀들보다 더한 사랑을 줄게요. 영원토록. 당신의 곁에서..."

"...미안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방법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할것이다. 그런데 이미 자신이. 기억에는 없지만 수십, 수백번도 넘게 그녀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절망하고 고통받고 괴로워하면서도 여기까지 온 자신이 만들어 준 계획이 있다면.

"한다. 하겠어. 그게 어떤 계획이든 하겠어. 방법을 말해"

"그 과정에서 당신이 고통받을지도 모르는데요?"

"상관없어."

"그 과정에서 당신이 슬퍼할지도 모르는데요?"

"상관없어."

"그 과정에서... 당신이 실패해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르는데요?"

"...각오하겠다."

운현의 굳은 의지가 담긴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생긋 웃었다.

"그렇다면 하죠. 해야 할 일은 세가지입니다. 첫번째. 강해지는 것. 하지만 이건 큰 의미가 없겠군요. 능력 보관자... 여기서는 마인이라고 하죠? 그들을 잡아서 레벨이 얼마나 올랐죠? 20? 30? 능력 보관자는 당신이 만든 존재입니다. 절대 당신을 공격할 수 없어요. 그들을 죽여 당신의 힘을 되찾으세요."

"잠깐만. 그 마인도 운현이... 끙. 운현이 위신체를 만들다 만 실패작이라면... 그게 왜 미믹에서 소환되는 거지?"

"그거야 저도 모르죠. 전 당신이 시킨대로 하는 것 뿐이니까. 다만 예상하자면 던전을 통해서 회귀를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일거에요. 던전은 공간 마법이 항시 작동되는 곳이죠. 그곳에서 생성되는 미믹이기에 그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공간을 틀어 능력 보관자를 소환하는 걸거에요."

"도대체 저번의 나는 뭐하는 놈이었던거야?"

시간과 공간은 신의 영역이라고 했었다.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저번의 자신에 운현이 감탄하자 아르토리우스는 피식 웃었다.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아공간을 연구해서 얻었다고 하네요. 아마 이 세계에 처음 들어올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 같던데. 그것 말고도 다른게 있지 않나요? 전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당신이 말하길 이 세계의 힘이 아니기에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인벤토리...!"

그러고보니 인벤토리도 공간을 이용한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것 역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질문은 끝났나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죠. 마인을 죽여 당신의 힘을 되찾으세요."

"기억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더 이상 찾아서는 안됩니다. 당신의 기억이 어느정도 완성되는 순간 당신은 이 세계의 존재가 되어버려요. 그럼 끝장입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요. 그러니 기억 보관자를 소환할 수 있는 능력 보관자... 가 아니라 마인의 코어는 그냥 레벨업에 쓰세요."

"...좋아. 그리고?"

"신성을 모아야 합니다. 최소한 열개 이상. 이건 카야가 가지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신성을 하나 이상 보유하면 몸이 터져 죽는 것 아닌가?"

"아니요. 정확하게는 신성을 하나 이상 흡수하면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 자체는 상관이 없어요. 물론 신성을 사용하려면 그것을 흡수하는 스킬이 필요하지만... 용기가 따로 필요하지만 그것도 문제가 없죠. 이미 준비되었으니까."

"그 용기가 뭐지?"

"위신체요."

"하지만 난 그것을 만들지 못하는데..."

아르토리우스는 키득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아요. 준비해놨다고. 위신체는 이미 하나 만들어놨습니다. 이미 당신도 만났을텐데요?"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이 어리둥절해하자 그를 보며 키득거렸다.

"라티나에요. 제 비서. 그녀는 제가 이번 생에서 만든 위신체입니다. 그녀에게 신성을 맡기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이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번의 당신이 이번의 당신에게 전해달라고 한 말입니다. 아마 들으면 알거라고 하더군요."

"그게 뭐지?"

회귀 전의 자신이 전하라고 한 것이라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녀들을 살리기 위해 발버둥쳐 온 그가 한 말이라면 맞을 것이다. 운현이 묻자 아르토리우스는 살짝 입맛을 다셨다.

"에~ 상을 주셨으면 하는데."

"장난치지말고."

"흥."

아르토리우스가 삐진 듯 고개를 젓자 운현은 이를 갈았다. 그런 그를 보며 아르토리우스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상아씨에게는 그렇게 키스해주고서... 저는 싫다는 거에요?"

"...하아. 알았어."

운현은 아르토리우스의 얇은 허리를 잡았다. 그와 얼굴을 마주한 아르토리우스는 장난스럽게 웃고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쪼옥.... 핥짝...쪽..."

진한 키스가 이어진다. 그녀의 가는 손이 자신의 둔부를 어루만지자 운현은 그녀의 손을 그대로 둔 채 더욱 키스에 집중했다. 아예 딴소리를 하지 못하게 꽤나 길게 키스한 운현은 천천히 입술을 뗀 후 물었다.

"뭐지?"

"한번더..."

"진짜 나 화낸다."

"치. 알았어요. 큼큼. 놀랐을 것이다. 괴로웠을 것이다.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모두 예상한 일이고 계획 안의 일이다. 약간의 오차가 있을지언정 이 계획은 완벽하다. 그러니 잘 들어라."

"...그거 지금 성대모사 하는거야?"

"네. 똑같지 않아요?"

"하나도 안똑같거든? 그냥 말해."

오히려 집중에 방해가 된다. 운현은 인상을 구기며 말했고 아르토리우스는 인상을 왕창 구기고 궁시렁거린 후 자신의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또다른 너는 가능하다. 이 세계에서 경험한 모든 것이 너를 위해 우리가 준비한 것이다. 네가 도적이라는 직업을 가진 이상 절대 실패할리 없는 일이다. 그녀들의 죽음에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며 후회하는 너라면 반드시 가능한 일이다. 운명에 굴복하지 말고, 운명에 좌절하지 말고, 운명에 후회하지 말고 진행해라.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동일하다. 그러니 해라. 두려워하지 말고 진행해라. 이 세계를..."

"......"

잠시 말을 멈춘 아르토리우스는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가짜로 만들어라. 너라면 알것이다.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의 위화감. 그것이 무엇과 닮았는지 생각해라. 그리고 해라. 이 세계를 네가 아는, 네가 판단한 가짜로 만들어라. 그리고... 수 많은 가짜의 세계를 경험해라. 지금의 너라면 가능하다.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그것을 가능케하는 신성을 보유한 너라면 가능할 것이다. 이미 모든 검증은 끝났고 고통과 괴로움은 맛봤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겪었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그 절망감을 개같은 운명에게 돌려 줄 시간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지금부터..."

"...꿀꺽."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너와 내가.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낸 반격의 시간이다."

"...그게 다야?"

"네."

운현은 침묵한 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아르토리우스는 그저 생글생글 웃을 뿐 이었다.

'이 세계를 가짜로 만들라고? 처음 들어왔을 때의 위화감을 떠올리라고? 그리고 수많은 세계를 경험하라고? 나는 불가능하다? 또다른 나는 가능하다?'

뭔가 알듯말듯한 말이다. 그런 그를 향해 고양이처럼 웃은 아르토리우스는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너 뭐하냐?"

"아니. 지금 이해 못했죠? 그럼 방법은 하나 아니에요?"

순식간에 나신이 된 아르토리우스는 침대로 다가가 누운 후 긴 다리를 벌리며 자신의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 현자의 시간으로."

"그건... 그런데 그 현자의 시간은 뭐지?"

"글쎄요? 그건 당신이 저를 만들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힘이라서. 애초에 그때의 당신과 현자의 시간일때의 당신은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은 고민을 할때마다 저를 안았고 그 고민을 그것으로 해소했죠."

"......."

"싫다면 혼자서 열심히 고민해봐요."

아르토리우스가 토라진 얼굴로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그녀의 말대로 현자의 시간 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아르토리우스는 방긋 미소지었다. 그녀에게 다가간 운현은 자신을 끌어안은 아르토리우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네?"

"두번째 위신체라고 했지. 첫번째 위신체는 어디있지?"

운현의 질문에 아르토리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딘가에는 있겠죠. 시간너머에 있을지, 공간 너머에 있을지 알게 뭐에요? 당신이 절 만들고 저를 두번째 위신체라고 했으니 그것을 기억할 뿐 이에요."

말을 마친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이 더 물어보려 하자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206====================

Turning Point

[패시브 스킬 :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냉철한 이성 상태가 됩니다.]

[지력이 100 상승합니다.]

"......"

아르토리우스의 말을 떠올렸다. 기억에는 없는, 회귀를 한 자신이 한 말. 연인들의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며 고통받고 좌절하며 괴로워했던 자신의 말이라면 분명 허튼 소리는 아닐 것이다.

'이 세계를 가짜로 만든다. 처음 들어왔을 때의 위화감, 수많은 세계. 나는 불가능, 그리고... 또다른 나?'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그것을 추론해내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위화감이라고 한다면...'

이 세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자신이 느낀 위화감은 무엇이었지? 현실과 같지만 현실같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 무엇인지 떠올린 그는 피식 웃었다.

"설마..."

운현은 다른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자신만이 가능하고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능력을 떠올렸다.

'메뉴.'

메뉴, 스테이터스 창, 스킬창, 지도 창, 그리고 인벤토리와 로그까지. 운현은 그것을 보며 싸늘히 웃었다.

"게임."

게임의 시스템이다. 이 세계는 레벨을 기반으로 강해지고 스킬을 통해 자신의 기술을 수련한다. 그 누구도 직업의 한계를 초월하지 못한다. 전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는 레벨 업을 통해 특별한 수련 없이. 마치 '정해진 것처럼' 같은 직군의 스킬을 배운다. 이러한 상황을 봤을 때 이곳이 무엇인지, 이 세계에 처음 들어왔을 때 느낀 것이 무엇인지 운현은 어느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다.

'이걸 본건가... 이 말도 안되는 불합리한 시스템을...'

각양각색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단 하나도 같은 사람이 없는 것이다. 똑같이 수련을 해도 누군가는 한가지 기술을 익히고 누군가는 열가지 기술을 익힌다. 그런 재능의 차이가 있고 사람의 특징이 다른데 같은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같은 성장과 같은 기술을 가진다?

'이건 게임이다.'

운현은 확신했다. 자신이 왜 그런 가설을 내놓았는지. 어째서 이런 시스템이 세계에 적용되었는지는 알바가 아니다. 회귀하기 전의 자신이 세계에 간섭해 만들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이런 것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게임.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어느정도 맞아 떨어져.'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게임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하나의 스토리를 기반으로 움직인다. 모든 이들을 NPC라고 가정했을 때 그들은 지정된 스토리를 기반으로 움직이고, 살아가며 생활한다. 어째서? 그게 세계의 중심인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가 신일 수도 있고, 이 세계를 만들어낸 창조자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정해져 있는 스토리 라인을 따라간다고 생각한다면 이 세계가 만들어낸 운명이라는 것도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죽을 사람은 죽어야 하고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것이 스토리이고, 그것이 운명이다. 그리 생각한다면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만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역시 이해가 되었다.

'나는 이세계에서 온 자. 그렇다면 이 스토리에 원래는 없었던 존재가 된다는 것이겠지. 아무런 배역도 없기 때문에... 즉, 게임으로 따지면... 나는 버그다. 원래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되는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존재다.'

아무런 배역도 주어지지 않았고 아무런 역할도 받지 않았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운현은 이 세계에서 자신이 가진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자신만이 완성되어 있는 스토리를 변경시킬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참나. 이딴 개같은 스토리는 누가 생각한건지 얼굴 좀 보고 싶구만."

"으음... 무슨 소리에요?"

"별 거 아니야. 빨리 옷이나 입어."

"치. 냉정하긴. 그래도 멋있네요."

아르토리우스가 주섬주섬 옷을 입는 것을 보며 운현은 생각을 마저 이어나갔다.

'이 세계는 게임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운현은 눈을 감았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리를 하기 시작한 그는 쓴 입맛을 다셨다. 자신이 불가능하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계가 있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지금의 나는 불가능해.'

약하다. 이 세계의 버그와 같은 존재이기는 하지만 고작해야 작은 버그에 불과했다. 많은 시간을 가지고 움직인다면 이 세계를 분석해 그 틈을 노릴 수 있겠지만 연인들의 죽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뭐, 그건 이미 다 했겠지.'

모든 검증과 분석을 끝낸 상황이기에. 그가, 그들이. 내가, 우리가 판단했기 때문에 회귀 전의 자신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렇다면 하면 된다. 내가 아닌, 수없이 많은 '운현'을 믿으면 된다. 어차피 자신은 원래부터 자신밖에 믿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계획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차분히 웃으며 일어난 그는 옷을 다 입은 아르토리우스에게 말했다.

"던전 도시로 돌아가서 네 할 일을 해."

"제가 할 일은 당신의 곁에 있는건데요?"

"그럼 해야 할 일을 정해주지. 첫번째. 피스나를 보호해. 그녀가 중요하다. 두번째. 던전 도시에서 깝치는 다난 년들이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도록 해. 세번째. 모험가 길드를 지켜. 던전을 빼앗기면 골치 아프다."

던전을 통해 레벨업을 해야 하고 던전을 통해 회귀를 해야 한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던전이 그들의 손에 넘어가게 둘 수는 없었다.

"뒤의 두개는 알겠는데 피스나는 왜요?"

"윈드와 윈디아가 가문으로 복귀를 한 이상 마땅한 강자를 보유하지 않은 피스나가 위험해 질 수 있어. 내가 만든 계획에 그녀의 능력은 필수다. 그러니 시키는 대로 해."

"흐음... 알겠어요."

아르토리우스는 고개를 갸웃거렷지만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 되었을 때의 운현은 그녀가 그토록 따랐던 운현과 닮아 있었다. 그의 판단과 분석이 틀렸던 적은 없었기에 그녀는 별다른 의심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리고 또 뭐요?"

"몇가지만 확인을 하고 싶어. 너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어디지?"

만약을 대비해야 했다. 운현은 아르토리우스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물었고 그녀는 잠시 침묵한 후 떨떠름히 되물었다.

"그건 왜요?"

"보험을 들어두는거다."

"다난교에 의해서 실종된 사람 중에 제가 있을거에요. 실종되기 전에는 용병 연맹의 하급 용병이었죠. 중앙 분수대 광장 북쪽에 있는 라디크라는 펍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술에 약이 타져 있었어요. 그거 먹고 기절했다가 인신공양의 제물이 됐죠."

"그런가. 알았어.

차분히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아르토리우스에게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심각하게 생각을 하는 듯 하자 아르토리우스는 어깨를 으쓱인 후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아와 필레, 헤스티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들이 자신을 보며 달려 오다가 발걸음을 멈추자 운현은 상념에서 깨어나 피식 웃었다.

"뭐야? 오려면 오지."

"...너."

"응?"

"했지."

"뭘?"

"지금 냉철한 이성 상태 아니야?"

"아... 응."

상아의 질문에 운현은 무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에 인상을 왕창 구긴 상아는 주먹을 꽉 쥐고 운현에게 걸어갔다.

그녀가 자신의 앞으로 와 빤히 바라보자 운현은 말 없이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담담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운현을 응시하던 상아는 주먹을 쥐고 그의 가슴을 툭 때렸다.

"왜 자꾸 사람 힘들게 하는거야?"

"미안."

"미안하긴 해?"

"물론이지."

운현은 손을 뻗어 상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 상아는 볼을 부풀린 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쿵쾅거리며 나갔고 헤스티아와 필레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해해줘. 상아 길드장님은 네 일 말고도 무척이나 기분나쁜 일이 있거든."

"무슨 일?"

그의 질문에 필레는 볼을 긁적거린 후 말했다.

"그... 카를로스와 만났던 곳 있잖아. 그 무덤의 주인을 알게 됐다. 그 무덤의 주인이 바로 상아 길드장님의 스승이신 현자님의 무덤이래. 그곳이 난장판이 되어서..."

"....."

필레의 말에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아에게 있어서 현자는 스승 이상의 존재다. 그녀의 첫사랑이기도 했고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잠들어 있는 무덤에 그 난리를 쳐놨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을리 없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과 맞지 않는 아르토리우스를 데리고 온데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운현이 그 여자와 했다는 것까지 알았으니 상아의 기분은 완전 엉망일 것이다.

"따라가봐요. 상아 길드장님은 아마 그 무덤가에 가 계실 거에요."

헤스티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헤스티아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귀엽게 미소지은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운현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고마워."

"예? 뭐가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믿어줘서."

"에이~ 그거야 당연한거죠~"

"왜?"

"예? 아... 제가 운현씨를 사랑하니까...?"

헤스티아의 말에 운현은 눈을 감았다. 그는 잠시 고민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날 사랑한거지?"

"그, 글쎄요? 첫눈에 반했다?"

"...알겠어. 고마워."

운현은 헤스티아의 볼에 키스해준 후 몸을 돌려 필레를 보았다. 그녀를 끌어안아 주고 이마에 키스한 운현은 필레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필레."

"왜?"

"늘 고마워. 언제나 날 도와줘서..."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것 쯤은. 나도 널 사랑해."

"...너는 왜 날 사랑한거지?"

"왜... 이유가 필요한가?"

필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운현은 또다시 눈을 감았다. 무언가 큰 고통을 참아내는 것처럼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던 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상아에게 갔다올게. 저녁은 같이 먹자."

"으, 응."

"하스톤님이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거로 준비하신다고 했으니까 빨리 오세요~"

"알았어."

헤스티아와 상아에게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후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그녀들은 서로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왜 갑자기 저럴까요?"

"뭐, 운현이 저 상태일때 뜬금없는 건 한두번이 아니잖아?"

머릿속이 복잡하다.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 된 이후로 자신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확신을 가지지 못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문제만큼은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자박...자박..."

무덤이 있는 숲으로 향하는 길은 어느새 하얀 눈으로 가득 쌓여져 운현이 겪은 전투의 흔적을 꽤나 지워놓고 있었다. 다만...

"으음... 화 낼만 하겠군."

마인이 날뛴 자리, 카를로스와 다난의 집행자들이 죽으며 부숴진 나무들. 아름답고 차분하던 풍경이 망가진 것에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자박..."

하얀 눈길 위에 나 있는 작은 발자국을 보며 그것을 조용히 쫓았다. 아무런 말 없이 주머니에 손을 꼽은 채 걸어 무덤가에 도착한 운현은 반파된 무덤 위의 눈을 치우고 반쯤 파괴된 비석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상아의 뒤에 도착하자 입을 열었다.

"이게 현자의 무덤이야?"

"...왜 왔어?"

"네가 그렇게 나갔는데 당연히 와야지."

"...하아. 난 괜찮으니까 돌아가서 쉬어."

"그냥은 못가겠는데."

"맞고 갈래? 그냥 갈래."

"네가 그렇게 우는데 어떻게 그냥 가냐?"

상아의 떨리는 어깨를 보며 운현은 차분히 말했다. 그의 말에 상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뒤로 걸어간 운현은 살며시 그녀를 안아주었다. 냉철한 이성 상태이든, 그것이 아니든 운현은 운현이다. 다만 그가 어색할 뿐이었던 상아는 운현의 품 안에서 작게 흐느꼈다.

"흑...스승님의 무덤이..."

"미안해."

"...흑흑..."

다른 이었다면 아마 분노로 찢어죽이지 않았을까 싶다. 소중한 스승님이 잠든 곳이다. 그곳이 이렇게 엉망이 된 것에 슬퍼하던 상아는 몸을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흑... 그래도."

상아는 그를 꽉 끌어안았다. 작은 어깨를 떨며 흐느끼던 그녀는 그의 몸이 부서져라 끌어안으며 힘겹게 말했다.

"네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고마워."

"흑흑...흑..."

207====================

Turning Point

상아를 안아주며 운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작은 소녀. 물론 소녀라고 치기에는 나이가 꽤 많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이토록 사랑스럽고 귀엽고, 우는 모습마저도 아름다운데 무슨 상관인가.

"...너 그런 표정 짓지 말랬지."

운현이 자신을 보며 싸늘한 웃음을 짓자 상아는 그의 가슴을 툭 쳤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피식 웃은 운현은 안고 있던 상아를 풀어주며 말했다.

"슬슬 돌아가자."

"하지만 던전 도시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내 레벨이 너 이상으로 높아지면 되는 것 아닌가?"

"......"

그의 말대로다. 던전 도시에서 운현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쳐도 운현이 자신 이상으로 강해진다면 폭동이 일어나도 그들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헤스티아는? 지금까지는 운현이 약해 헤스티아를 인질로 삼지 않았을 뿐이지 만약 운현이 강해진다면 그를 손쉽게 잡기 위해서 헤스티아를 잡아 운현을 죽이려 할 것이다.

미야와 바제트의 죽음에 그토록 절망하고 괴로워한 운현이다. 그런 그를 공략하려면 헤스티아가 필수라는 사실을 다난교도들이 모를리 없다 생각한 상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운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헤스티아는 너희들에게 맡길게."

"혼자서 어떻게 레벨업을 하려고?"

"어렵지 않아."

"무슨...?"

"정 뭐하면 보여주지."

1계층의 미믹에서 마인을 소환하여 마인을 죽이는 것만으로도 쉽게 레벨업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은 쉬워진다. 운현이 무덤덤히 말하자 상아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의 운현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헛소리는 하지 않으니까...'

"하아... 좋아. 그럼 일단 복귀하도록 하자."

원래 계획은 던전 도시의 분위기가 잠잠해질때까지 운현을 이곳에서 보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확신을 가지고 말을 하는 이상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상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와 함께 필레의 집으로 돌아갔다.

"내일 복귀할 거야."

"내, 내일요? 하지만..."

"자세한 것은 운현에게 물어봐."

"왜?"

"강해질 수 있거든. 누가 건드리면 다 뒤집어 엎을 수 있을 정도로... 너도 봤잖아. 그 강한 마인을 내가 잡은거."

"끙. 그건..."

운현이 마인을 소환했고 그 마인을 단 한방에 죽였던 것을 떠올린 필레는 복잡한 표정을 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 강한 카를로스와 다난의 집행자들을 벌레 죽이는 것처럼 간단히 죽여버린 막강한 마인이다. 그 마인이 왜인지 모르지만 운현의 칼질 한방에 죽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운현의 말도 허튼 소리만은 아닐 것이다.

"어쩔 수 없네."

필레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와 좀 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가 저리 말하는 이상 강제할 수는 없었다.

"필레. 날 지켜주려고 해서 고마워. 다음에... 반드시 이곳에 오자. 그리고 그때 함께 있자."

"으, 으응..."

'그때는 모두와 함께다.'

미야, 바제트. 이제는 죽은 그들도 함께다. 운현은 굳은 다짐을 하며 그녀에게 말했고 그 진지한 시선에 필레는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

"오늘 난 생각할 것이 있으니까 혼자 있을래."

"에? 그치만!"

아르토리우스와 잔 주제에 혼자 자겠다는 그의 말에 상아는 움찔하며 외쳤다. 하지만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되어 있는 이상 성욕따위는 거의 없었던 운현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 모습에 상아와 필레, 헤스티아는 작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위, 위험할텐데?"

"걱정하지마."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된 상황에서의 전투 능력은 본래의 자신보다 훨씬 강했다. 레벨이 300이 된 지금이라면 아마 필레와 싸워도 밀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 운현은 자신의 스킬창을 보며 피식 웃었다.

'스킬의 레벨 제한도 풀렸고.'

기억보관자를 죽이며 레벨 300이 되고, 그 이후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을 때 운현은 어째서 아르토리우스가 300레벨이 되라고 그토록 떠들어댔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각 스킬들의 레벨 제한이 전부 풀렸어.'

300레벨 전에는 10레벨이 한계였던 한손검 숙련, 체술, 하이딩, 재료합성의 최대 레벨이 20레벨로 두배나 증가했다. 10레벨일때도 전투직과 비슷한 힘을 가질 수 있었는데 그게 두배로 늘어난 이상 큰 걱정은 없을 것이다.

'레벨을 올리는데 스킬포인트도 두배가 들기는 하지만 뭐...'

스탯 포인트와 다르게 남아 도는게 스킬 포인트였다. 모든 스킬들을 MAX로 만든 이상 운현은 다난교도들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다른 방에 있는 저들이 합류할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도..."

"괜찮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다난교도들도 지금은 날 공격할 수 없을거야. 너도 봤잖아. 카를로스와 그 날개달린 다난의 집행자가 셋이나 죽었다고. 아무리 다난교도들의 강하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손해를 입었는데 또 인력을 보내지는 못할거야. 적어도 당분간은."

운현의 말에 필레는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압도적인 힘을 가진 그 마인에 의해 다난교도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당분간은 그들로서도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럼 괜찮지? 오늘 하루 정도는 나도 생각을 할 시간을 줬으면 좋겠어."

"알았어. 그 대신 위험하면 바로 불러야해."

"응."

필레가 걱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필레와 상아, 헤스티아가 방을 나가자 운현은 의자에 앉은 후 생각했다.

'일단 지금 해야 할 일을 정리하자. 일단 첫번째는 내가 원활하게 움직이기 위한 힘을 가지는 것이군. 그건 던전 도시에 들어가서 바로 해결할 수 있어.'

마인을 소환해 죽이는 것으로 레벨은 쉽게 올릴 수 있다.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이 적어도 자신 이상의 힘을 가지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일주일 정도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면 될 것이다.

'성지를 써서 언데드들을 잡고...'

1계층의 마인으로 성장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2계층의 마인까지 쓴다면 그리 어렵지 않겠지. 300레벨이 되고 스킬이 강화된데다가 직업의 강화까지 이루어진다면 레벨업은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르토리우스는 내가 모험가 길드에 간 것에 의문을 품었었지. 내가 용병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그럴지조차 모른다고 했어. 그렇다면 내가 용병의 전투직을 얻을 필요는 없다는 것일거야. 그럼 결국 직업의 강화는 도적직으로 해야 한다는 거겠군. 그리고 애초에 도적이라는 직업을 얻은 순간부터 시작이라고 했으니까 다른 직업은 필요 없다는 거고... 하긴. 굳이 전투직의 스킬이 필요하지는 않겠다.'

지금 가진 스킬만으로도 강함을 이야기한다면 차고 넘친다. 운현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하필 도적이지?'

도적이라는 직업이 확실히 좋은 직업인 것은 알겠다. 그런데 왜 도적이란 말인가.

'무언가 도적 직업을 가짐으로서 생기는 스킬이 있는 걸까...?'

운현은 자신의 스킬창을 열어보았다. 도적직업과 관련되어 있는 스킬은 스틸, 함정 설치, 함정 발견, 자물쇠따기, 밧줄 활용 정도였다.

'훔쳐배우기는나 프리저브같은건 일단 제외한다고 생각한다면 저 스킬들. 그리고 스킬표에 있는 스킬중에 액티브로 쓸만한 스킬은 자동 스틸 능력인 '스내쳐' 뿐인데... 결국 훔치기 종류의 스킬때문이라는 건가...?'

도적의 주요 스킬은 훔치는 것, 그리고 함정과 관련된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재료 합성을 통해 함정카드를 만들어내 적들에게 데미지를 준다? 하지만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

최종적으로 운현의 계획상으로 본다면 운현은 마인을 죽여 금방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적들을 구속시킬 이유가 없었다. 구속을 한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보았을 때 적을 끝장내기 위해서다. 어차피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면 그런 방법보다는 그냥 강력한 기술을 쓸 수 있는 전투직이 나을것이다.

'훔치기... 무언가 내가 훔쳐야 할 것이 있는 것이군.'

기억이 완전하지 않은 이상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기억을 회복하는 무모한 짓거리를 할 수도 없다.

"결국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이군."

쓴웃음을 지은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쉰 후 창문을 향해 걸었다. 흩뿌려지듯 내리는 눈은 이미 멈췄다. 건물의 2층 창문에서 바깥을 바라보던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의문이 생긴다. 운현은 팔짱을 끼고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다.

"왜... 여기에 온 것이지?"

그는, 자신은 모든 것이 이미 계획된 상태이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것도 계획의 일부라는 것일까?

'이유 없이 이곳에 오게 되었다는 것은 말이 안돼.'

운현에게 있어서 던전은 무척이나 중요한 곳이다. 만약 던전의 관리를 다난교에게 빼앗기면 모든 기회를 잃을 수 있는데도 굳이 이곳으로 가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이 던전 도시를 떠나게 된다면 모험가 길드의 강자인 상아와 필레. 둘 중 하나 혹은 둘 모두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이곳으로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는?

'단순하게 폭동을 피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곳으로 오게 되어 폭동을 막은 것도 아니야. 그저 잠시간 시간을 번 정도에 불과하지. 그런데 굳이 그런 위험성을 감수한다?'

그토록 큰 그림을 그린 자신이 그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잠시 회피하는 것이 가치가 있는 일일까? 운현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으음..."

회귀자의 기억파편을 얻으며 떠올린 기억을 되돌려 본 운현은 그녀들의 죽음 속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눈치챘다. 대부분의 죽음은 던전 도시 내에서 이루어졌었다. 하지만 후반의 기억에 있는 필레의 마지막 죽음은 이곳. 그리고 그 숲에서 이루어졌었다.

"굳이?"

지금까지 계속 던전 도시에서 죽었던 그녀가 왜 이곳에서 죽었는가. 그녀의 죽음을 자신이 보았다는 것은 자신 역시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일부러다. 계획한 일이다. 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혹은 확인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어.'

왜 필레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운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그녀가 죽은 이유는 다난교에 의한 공격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왜 이 숲일까.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 '굳이' 그 숲에서 필레의 죽음을 볼 필요가 있었을까?

아르토리우스는 자신이 운명을 바꾸고 그녀들을 구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무런 이유없이 던전도시에서 떨어진 이곳까지 왔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내가 아무런 기억이 없으니 필레와 함께 나온 것이지만 기억이 있었을 때의 운현이 지금의 나와 같은 그런 이유로 움직였을까?'

아니다. 그럴리 없다.

운현은 창틀을 부서져라 꽉 잡았다.

'그 숲에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바로...'

운현은 하이딩을 걸고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다.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숲에 도착한 그는 반파된 무덤을 노려보며 이를 드러내었다.

'이것을 위해서겠군.'

그 역시 확신을 가지기 위해 이것을 보려 했을 것이다. 이 안에 있는. 이 무덤 안에 있는 현자를 확인하기 위해서. 운현은 망설임없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얼어붙어 있는 땅을 부수고 그것을 파내어 안에 있는 관을 본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가... 이걸 위해서였나... 그렇다면 모든 것이 나의 계획이라고 볼 수 있겠구만. 큭... 크크큭... 아하하하하핫!!"

운현은 관 안에 있는 존재를 보며 싸늘히 웃었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처음 시작한 동굴에서부터 지금까지 겪은 모든 상황이 운명이라는 막강한 적과 상대하기 위한 그가 세운 계획의 일부라는 것을 확신했다.

"하아... 미친놈.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군. 이딴 짓까지 했다니. 그럼 모든게 설명이 되는데..."

이정도까지 계획하다니. 어이가 없어진 운현은 회귀 전의 자신을 향해 욕지기를 내뱉으며 키득거렸다. 하긴, 그만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봤다면 제정신은 아니겠지. 그리고 보통놈도 아니겠지. 그는 관의 뚜껑을 닫은 후 작게 키득거리며 마지막 확인을 위해 손을 내뻗었다.

"스틸."

관이 자신의 인벤토리 안으로 들어온다. 그것을 보며 운현은 천천히 웃음을 지우고 흙을 덮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한 후 옷을 갈아입은 그는 침대에 앉아 차분히 기다렸다.

[패시브 스킬 : 현자의 시간이 비활성화 됩니다.]

[냉철한 이성 상태가 해제됩니다.]

[지력이 99 감소합니다.]

"그럼 가볼까."

썰렁한 복도를 걸어 필레의 방으로 향한 그는 필레의 방문 앞에 도착하자 작게 심호흡 한 후 문을 두드렸다. 방에서 우당탕 하며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린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이 열리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좋은 밤이야. 필레. 잠깐 괜찮을까?"

208====================

Turning Point

"어? 오늘은 혼자 있는다고 하지 않았어?"

"생각해보니까 네 방을 구경시켜준다고 했었잖아."

분홍색 하늘하늘한 잠옷과 가디건을 입은 채 필레는 샤워를 한지 얼마 안됐는지 약간 촉촉한 모습으로 운현을 맞이했다. 그가 온 것은 좋다. 나쁠 일은 아니기에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빙긋 웃었다.

"생각해보니 그랬지. 여러 일이 있어서 잊고 있었네. 자. 어서 들어와."

필레의 방에 들어 선 운현은 은은하게 감도는 자스민 향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 영지의 영주라고 생각되지 않을 소박한 방이다. 벽에 있는 책장과 책상. 그리고 침대 정도만 있는 작은 방에 들어 온 운현은 필레가 책상 위의 책을 책장에 후다닥 가져다 놓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책 보고 있었어?"

"어? 아. 으응! 그래! 응. 몇가지 좀 조사하고 싶은게 있었거든."

"무슨 이야기?"

"혀, 현자에 대해서."

"...현자라. 갑자기 왜?"

"그게, 그... 지금까지 몰랐는데 상아 길드장님이 그 무덤이 현자의 무덤이라고 했거든. 현자에 대해서는 아는게 없어서 혹시 역사서에 나오나 찾아봤는데 없네."

어딘지 어색해보이는 말투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런 말투지? 운현이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자 필레는 머뭇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기록에도 없다는 거야? 현자라고 불릴 정돈데?"

"그런가봐."

겨우 안정이 된 듯한 필레는 어깨를 으쓱인 후 운현이 앉아 있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 그의 옆에 앉았다. 달콤한 크림 비누의 향이 풍겨온다.

"어때?"

"뭐가?"

"내 방... 솔직히 보여 줄게 없어서 좀 창피하네. 아. 이거 볼래? 나 기사단 시절에..."

필레가 허둥거리며 일어나 무언가 가지러 가자 운현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것에 움찔한 필레는 살며시 고개를 숙였고 그녀를 끌어당기며 운현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은 널 보고 싶어."

"...진짜?"

필레의 눈빛이 변한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필레와 하기 위해서였다. 늘 자신에게 끌려다니던 필레가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눈을 빛내자 운현은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읍!"

운현이 대답하자마자 필레는 그를 끌어안고 키스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는 빠르게 운현의 옷을 벗겨나가기 시작했다.

"으읍!"

"하아... 쭙...쪼록... 네가 하자고 한거다. 후회하지마."

그동안 참았던 것이 폭발하는 것일까? 광기가 넘쳐 흐르는 필레의 시선에 운현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야 잠깐... 우왁!?"

운현이 자신을 잡으려 하자 필레는 빠르게 자신의 옷을 벗은 후 옷에 있는 끈으로 그의 팔을 묶었다. 아예 딴소리를 못하게 그의 움직임을 봉인하는 것부터 시작하려는 듯 필레는 운현의 팔을 묶어 침대의 위에 있는 철봉에 걸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자신의 밧줄활용 수준으로 빠르게 팔을 묶어버린 것에 운현은 당황했다. 그의 말에 씨익 웃은 필레는 운현의 얼굴을 핥으며 속삭였다.

"기사단의 필수 수업에 있지. 범죄자를 포박하는 기술이 말야."

"그, 그건 좋은데 야야.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있... 읍!"

시끄럽게 떠드는 입을 입으로 막은 필레는 그의 가슴을 더듬기 시작했다. 평상시의 필레가 보이는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에 운현이 당황하는 동안 마음대로 운현의 타액을 탐한 필레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의 위에 올라갔다.

"후후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핥으며 필레는 그의 배에 자신의 계곡을 비비기 시작했다. 옷이 벗겨져 맨살에 뜨거운 계곡이 느껴진다. 필레가 자신의 몸을 범하는 것에 당황한 운현은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300레벨에 도달한 만큼 힘도 꽤나 올랐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발버둥 치지 말라고... 밤은 기니까 말야."

"너, 너 원래 이래?"

"그동안 꿈꿔왔던 모든 걸 해주지..."

필레의 눈에 번뜩이는 광기에 운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동정 떼는 노총각처럼 그녀는 욕망에 지배된 채 운현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야야! 이렇게 안해도 할거야!"

"이렇게나 딱딱하게..."

그의 바지춤에 있는 남성을 만지작거리며 필레는 히죽 웃었다. 웃는게 무섭다. 운현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필레는 곧장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운현... 겁먹지마."

"...."

"아프지 않게 할테니까..."

필레의 말에 운현은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열지 말아야 할 문을 연 기분이다. 필레는 천천히 운현의 바지를 벗겼고 반쯤 선 그의 남성을 보자마자 침을 꼴깍 삼킨 후 그것을 혀로 핥았다.

"쭈륵...핥짝."

타액을 혀에 잔뜩 담아 그의 남성을 핥은 필레는 그것만으로도 황홀해졌는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미모가 광기에 젖어 자신의 남성을 핥는 모습에 운현은 흥분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거... 풀어어엇!!"

"자꾸 그러면 아프게 할거야."

생글거리며 자신을 올려다 본 필레는 그의 남성을 손으로 잡고 위 아래로 비비기 시작했다. 몇번 핥아 타액으로 미끌거리는 남성을 흔들던 필레는 주륵 타액을 넣어 더더욱 미끌거리게 하여 그의 쾌감을 증폭시켰다.

"너 S였냐!? 평소 행동은..."

"훗..."

질린 얼굴로 그가 말하자 필레는 그의 남성을 한번에 입에 물었다. 머리를 돌려가며 그의 양물을 쪽쪽 빨고 핥던 필레는 그의 남성을 입에 문 채 천천히 자신의 잠옷을 벗어나갔다.

"...와우."

예전 실비아가 말하길 필레가 벗으면 굉장하다고 했었다. 진짜 굉장하다. 저 갸냘픈 몸에 저정도의 가슴이라니. 지금까지 어떻게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상의 속옷을 벗자마자 뿌룽 하며 튀어나온 커다란 가슴에 운현이 긴장하자 필레는 입에 문 양물을 천천히 떼어낸 후 희미하게 웃었다.

"가슴으로 해줄게. 어때? 좋지? 응?"

"조, 좋긴 한데 이것 좀 풀어주지 않으련?"

"후후후~ 안~ 돼~ 그동안 날 괴롭힌 보답이야."

필레는 장난기 넘치는 웃음을 지으며 그의 남성을 자신의 풍만한 가슴골 사이에 끼웠다. 적어도 D컵 이상은 되는 크고 아름다운, 거기에 탄력까지 넘치는 가슴이 양물을 사이에 끼고 위 아래로 움직이자 운현은 그 쾌감에 움찔 몸을 떨었다.

"아이... 귀여워. 후후. 느끼는거야? 정말? 응?"

운현이 자신의 애무에 느낀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다. 필레는 눈을 빛내며 운현의 양물을 더더욱 강하게 감싸고 가슴을 움직여나갔다.

"으읏.. 야... 나 싼..."

허리 끝에서 사정감이 몰려온다. 운현이 움찔거리며 사정하려 하자 필레는 가슴으로 감싸 살짝 튀어나온 양물의 머리 부분을 혀끝으로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 쾌감에 운현이 사정하려 하자 잽싸게 입에 남성을 문 필레는 입 안에서 혀끝으로 자극을 계속해나갔고 결국 사정감을 참지 못한 필레는 폭발하듯 터져나온 뜨거운 정액을 단번에 꿀꺽 꿀꺽 삼켰다.

"하아... 하아... 목구멍이 끈적해..."

입 안에서 오물거리며 정액의 맛을 본 필레는 황홀한 얼굴로 입 안에 남아 있는 정액을 마저 맛보았다. 진심으로 색녀가 되어버린 듯한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있는 힘을 다해 끈을 풀려 했지만 끈은 풀리지 않았다.

"야! 이거 뭐야! 왜 안풀려!?"

자신의 힘이라면 이런 끈 정도는 풀리는게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도 안풀리는 것에 운현이 당황하자 필레는 작게 키득거린 후 운현의 위로 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말했잖아. 스킬이라고... 기사단원만 배울 수 있는 고유의 스킬이지. 자... 그럼 우리 사랑스러운 운현에게 뭘 또 해볼까...?"

"...나 너를 안고 싶어. 풀어주라."

"그것도 좋지만... 후후... 이제 널 가질 차례야."

"...네?"

운현이 불안감에 휩쌓인 얼굴로 말하자 필레는 그의 이마에 쪽 키스한 후 완전히 옷을 벗었다. 탄력적인 근육으로 다져진 굴곡진 몸매가 모습을 보였다. 필레는 눈을 빛내며 애액으로 촉촉해진 자신의 계곡을 살짝 벌렸다. 핑크빛의 건강한 계곡이 애액으로 반짝거리는 것을 본 운현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것에 집중하자 필레는 낮게 숨을 헐떡거렸다.

"아아... 운현이 봐주고 있어..."

"...너 성격이 바뀐 것 같은데..."

마치 자신의 현자의 시간과 같은 스킬이라도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운현은 필레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그의 말에 필레는 빙그레 웃은 후 촉촉해진 자신의 계곡을 천천히 운현의 양물에 가져다 대었다.

"자아... 이제 우리가 하나가 되는거야..."

"하나가 되는건 좋은데 이것 좀 풀어달라고!!"

"싫어~"

생긋 웃은 필레는 천천히 자신의 허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꽉 닫혀 있던 계곡을 억지로 열며 양물이 삽입되자 필레는 고통스러웠는지 살짝 눈쌀을 찌푸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있는 힘껏 줄을 당겨보았지만 줄은 풀리지 않았다.

'환장하겠네!'

"하아... 하아..."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필레는 허리를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그의 남성을 계곡 안에 넣던 필레는 반쯤 계곡 안에 남성이 들어오자 고통과 쾌감에 살짝 눈물 지었다.

"내가 해줄게! 아프니까! 내가 하는게...!"

"시끄러워!"

필레는 눈을 질끈 감고 한번에 완전히 허리를 내렸다. 양물의 끝이 계곡 안의 깊숙한 곳에 닿는다. 그것에 운현은 진한 쾌감을 느꼈고 필레는 부들부들 떨다가 천천히 운현의 위로 쓰러졌다.

"하아...하아..."

가슴에 닿는 풍만한 유방의 감촉이 좋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운현은 자신의 위에서 헐떡거리는 필레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괜찮아?"

"후우...괜찮아아... 최고야.. 이런 기분..."

달콤하게 녹는 듯한 목소리로 필레는 운현의 볼에 쪽 키스한 후 숨을 몰아쉬었다. 배 안에 가득 차 있는 듯한 운현의 남성이 쾌감을 조금씩 만들어가는 것을 즐기던 필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의 입술을 빼앗았다.

"쪼옥...쭉...쪼롭.."

"하으... 으..."

키스를 하는 와중에도 쾌감이 상당했는지 필레는 그의 입 속에 자신의 숨결을 조금씩 토해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없겠다 싶은 운현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흑! 읏...! 움직이지마...!"

"싫어. 네가 마음대로 할거면 나도 마음대로... 으읏!?"

한순간 엄청나게 조여오는 계곡에 운현은 당황하며 허리를 쭉 빼었다. 한참 조이던 계곡벽은 운현의 남성이 빠지는 것에 맞추어 쭈욱 끌려 움직였고 그 쾌감에 필레는 날씬한 허리를 활처럼 튕기며 다시 그의 위에 푹 쓰러졌다.

"하아...하아..."

"경험도 얼마 없으면서..."

"네가... 후후... 처음이야."

"...그, 그러냐. 그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

"후후후... 이제 시작이라고."

필레는 운현의 입술에 키스한 후 어색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은 체득하지 못한 듯한 그 허리놀림에 운현이 쾌감보다는 고통을 느꼈다. 차라리 가만히 있는게 더 쾌감이 느껴질 정도의 움직임에 운현이 아무런 반응도 못하자 그의 위에서 움직이던 필레는 요염히 웃다가 그의 표정을 보고 딱딱히 굳었다.

"뭐, 뭐야?"

"아니 그게 뭐냐..."

운현의 떨떠름한 얼굴에 필레는 당황하더니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여전히 오히려 거친 움직임에 아프기만할 뿐인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필레는 더더욱 당황했다.

"조, 좋지 않아?"

"그냥 가만히 있는게 낫겠다."

"으..."

운현의 말에 필레는 당황했다. 자신감과 요염함으로 물들어 있던 얼굴에 당혹감이 맴돌며 점차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하자 운현은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들었다.

"이거 좀 풀어줘봐."

"...으응."

아까의 기세는 온데간데 사라진 필레는 원래의 그녀로 돌아와 그의 손에 묶여 있는 줄을 풀어주었다. 간신히 자유의 몸이 된 운현은 필레의 늘씬한 허리를 살짝 잡은 채 차분히 말했다.

"이런건 그렇게 세게 움직인다고 되는게 아니라고."

"...응."

"자. 그럼 맞춰서 움직여보자."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운현은 필레의 허리를 잡고 천천히 위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고통보다는 쾌감이 더욱 들어 오는 것에 운현이 낮게 신음하자 필레는 살며시 몸을 내려 그를 끌어안았다.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로 아무런 말도 못한채 그의 움직임에 몸을 맡긴 필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쾌감을 느끼며 들뜬 신음성을 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달콤한 신음성에 운현은 빙긋 웃은 후 빠르게 허리를 들썩거렸다.

"아흣...윽..."

필사적으로 신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필레는 간헐적으로 신음성을 터트렸다. 운현의 남성이 점점 깊숙한 곳을 자극할때마다 쾌감이 퍼지기 시작한 필레는 침대보를 꽉 잡았고 그녀의 탄력적인 둔부를 쓰다듬은 운현은 필레의 하얀 목덜미를 살짝 깨물며 말했다.

"이제부터 진짜 간다."

"에? 아흣! 흐앙! 아앗!"

필레의 허리가 빠지지 않게 꽉 잡은 채 운현은 그녀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에 쾌락을 참지 못하고 비음을 터트린 필레는 운현의 목에 키스했다.

"운현! 운혀어어언!!"

계곡이 강렬하게 조여온다. 한차례 절정에 달한 듯 필레의 몸이 서서히 허물어지자 그녀의 몸을 옆으로 돌린 운현은 필레의  위로 올라간 후 그녀의 입술에 키스한 후 물었다.

"방금 전의 그건 뭐야?"

"....."

얼굴이 빨개진 채 눈을 꼭 감고 있는 필레의 모습에 운현은 허리를 쭉 움직였다. 계곡 벽을 자극하는 쾌감에 필레가 움찔 몸을 떨자 운현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주물렀고 필레는 결국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러는게 남자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누가?"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필레는 옆의 베게를 가져와 얼굴을 가렸다. 상당히 부끄러운 모양이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베게를 빼앗았고 필레는 눈을 꼭 감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까 보던 책에서..."

"...그래서 그런 반응이었구만."

쓴웃음을 지은 운현은 필레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아까 그런 모습을 보이던게 책에서 본 대로 한 것이라면 그냥 웃길 뿐이다. 마치 야동과 망가 만으로 섹스를 배운 동정들이나 하는 짓을 고대로 따라한 필레의 모습에 운현은 키득거린 후 그녀의 볼에 키스했다.

"그런 책보다는 진짜로 하는게 더 빨리 늘어난다고. 자... 그럼 우리 귀여운 필레에게 제대로 가르쳐줘볼까?"

[패시브 스킬 :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냉철한 이성 상태가 됩니다.]

[지력이 100 상승합니다.]

"큭큭..."

자신의 옆에 누워 헐떡거리는 필레를 내버려 둔 채 운현은 자신의 눈 앞에 떠오른 메시지창을 보고 싸늘히 웃었다. 나왔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209====================

Turning Point

"고작 몇일만에 복귀하게 될 줄이야... 분위기 한번 죽이는군."

던전 도시의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망토의 후드를 뒤집어 쓴 탓에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평화롭기 그지 없던 던전 도시의 사람들은 언제 폭동을 일으켜도 모자를 정도로 살기등등했고 시청 소속으로 보이는 경비병들은 무기를 든 채 긴장하며 걷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모험가 길드로 향한 운현은 로지가 투덜거리며 무기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지나치며 피식 웃었다. 그녀와 함께 있던 윈드를 떠올린 것이다.

윈드와 윈디아는 일단 가문으로 복귀했다. 던전 도시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는 윈드를 끌고가며 윈디아가 한 말을 떠올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언니가 어머님께 혼나는 것은 제가 어느정도 거들어야 하니까 말이죠...'

윈드의 죽음에 결국 미쳐버린다는 윈디아의 미래를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얼마나 서툰걸까. 그가 피식거리자 운현의 옆에 서 있던 헤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현씨?"

"아아. 그래... 헤스티아."

"네?"

"당분간 난 혼자 움직여야 할 것 같아. 미안하지만 길드에서 상아와 필레와 함께 있어주겠어?"

"네!? 하지만 운현씨는... 위험하잖아요."

"아니. 그다지 위험할 것 같지는 않은데..."

후드를 뒤집어 쓴 채 운현은 길드 회관의 앞을 가리켰다. 힐끔 힐끔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그는 길드 회관의 앞에 서서 마치 연인을 기다리는 듯 양 손을 수줍게 모은 채 서 있는 아르토리우스를 가리켰고 그녀를 보자 헤스티아는 무척이나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신보다는 아르토리우스와 함께 있는 것이 운현이 더 안전했다. 그것에 우울해하며 헤스티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자 운현은 그녀를 끌어안아주고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괜찮아. 그러니까 걱정하지마. 네가 안전하지 못하면 그게 더 불안하다고."

"운현씨..."

"그러니까 약속해줘. 어디 갈때 혼자 가지 마. 알았지?"

"에휴. 알았어요."

결국 헤스티아는 운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길드 회관 안으로 들어가자 길드 회관 입구에서 헤스티아가 자신에게 작게 목례하자 그것을 받아들인 아르토리우스는 사뿐사뿐 걸어 운현에게 다가왔다.

"다녀왔어요?"

"아아. 왜 여기 있는거지?"

"음... 당신이 복귀할 것 같았거든요."

"내가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있었던 거야?"

운현의 질문에 아르토리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라요. 이제부터는. 지금 당신의 행동은 저도 알지 못해요. 아마 회귀 전의 당신아라고 하더라도 예상 이상은 못하겠죠."

"그거 불안한 소리구만. 그래서. 피스나는 어디 있지?"

"시청에요. 피스나는 왜요?"

아르토리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확정되지 않은 길을 걷는 것이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신이 알 수 없는 계획을 더듬어가는 것이다. 과거의 자신은 그토록 자신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불안감이 없을 수는 없었다.

'맞기를 기원해야겠군.'

"피스나에게 확인할 것이 있어서."

"그럼 가요."

생긋 웃은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갑옷이 아닌 드레스를 입은 탓에 팔에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닿았다. 말캉거리는 가슴의 감촉에 운현이 움찔하자 아르토리우스는 재밌게 웃은 후 운현을 향해 말했다.

"후후후... 어때요? 저기 골목에서 한발 빼고 가는건?"

"...바쁘니까 그냥 가자. 피스나는 누가 가드하고 있지?"

"티르빙과 라티나가요. 그 둘이라면 카를로스나 다른 다난의 집행자가 덤비더라도 막을 수 있을거에요. 헬하운드들을 붙여놨으니까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죠."

"그렇군... 아. 그런데 바민은 어떻게 됐지? 조만간 용병 연맹의 연맹장이 바뀔거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던데."

상인 조합과 제작자 연합의 사주를 받아 용병 연맹의 간부들을 끌어들였던 바민을 떠올린 운현이 묻자 아르토리우스는 작게 키득거렸다. 무척이나 즐거운 듯한 그녀의 모습에 운현이 입을 다물자 아르토리우스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한테 반기를 든 용병 연맹의 간부 여섯명이요... 궁금하신가요? 구경가실래요?"

"...뭘 어떻게 한거야?"

"뭐... 크게 뭔가를 하진 않았어요. 그냥 의자에 앉혀놨을 뿐이죠."

"의자?"

"네. 나중에 꼭 보여드리고 싶네요. 과거 당신이 만든 기구인데요. 쿡쿡쿡... 아주 재밌을거에요. 아아. 또 하고 싶다~"

아르토리우스의 미소는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정말로 즐거운 것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반짝거리는 그녀의 미소가 왠지 두려워진 운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자신의 그림을 자랑하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신나하는 그녀와 함께 시청에 도착한 운현은 평소보다 더욱 삼엄한 경계태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용병인 것 같은데?"

경비병의 옷이 아닌, 자유 분방한 차림새에 무기도 제각각인 용병들을 보며 운현은 떨떠름히 물었다. 누가 본다면 시장이 제작자 연합의 피스나가 아닌 용병 연맹의 연맹장인 아르토리우스가 시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오셨습니까."

절도 있는 자세로 경례하는 용병에게 가볍게 손인사를 건넨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을 검문하려는 용병에게 생긋 웃어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뒤로 물러난 용병이 다시 경계를 시작하자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군기가 제대로 들었네."

"바민은 공개적으로 의자에 앉혀놨거든요. 공포정치라는 것은 상당히 좋은거랍니다. 단기간에 치고 빠질거라면 말이죠."

"...회귀 말인가?"

"네. 저들에게 신뢰와 신망을 얻어봤자 별로 필요 없거든요. 무겁기만 하고. 쿡쿡쿡... 정말이지 제가 좋게 한마디 해주면 좋아서 날뒤는 꼴이라니. 그래봤자 결국은 이용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할 뿐인데."

아르토리우스의 말에 운현은 입을 다물었다. 원래의 아르토리우스는 어땠을까? 자신의 목적, 그리고 소중한 존재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용대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그녀가 이렇게 되기 전에는 어땠을까?

"오셨습니까!"

시청의 건물에 들어선 운현은 헬하운드들을 지휘하던 티르빙이 달려오며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하지만 티르빙은 운현보다는 아르토리우스에게 더 관심이 많아보였다. 과도할 정도로 친절하고 예의를 갖춘 그녀는 아르토리우스가 부드럽게 손을 감싸쥐자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아, 아르토리우스님."

"티르빙. 매번 고마워요. 당신이 있기 때문에 제가 다른 업무를 볼 수 있답니다."

"아아아, 아닙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영광인 일입니다! 어떤 일이든 맡겨만 주신다면!"

"후훗. 고마워요."

방긋 웃은 그녀는 티르빙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티르빙은 그것만으로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운현을 가리켰다. 그것에 아르토리우스가 고개를 젓자 티르빙은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가죠."

"...응."

2층의 시장실로 향한 운현은 아르토리우스가 문을 열자 안을 보고 기겁했다. 윈디아가 시장일때는 깨끗하기 그지 없던 방이 지금은 난장판이 되었다. 각종 실험 도구들과 기계장치로 가득 차 있고 기름과 몬스터 사체 냄새로 그득한 내부를 본 운현은 아르토리우스가 능숙하게 길을 뚫고 지나가자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달깍...끼익...!"

예전 피스나의 공방에서 보았던 커다란 캡슐의 밑에 들어가 그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작은 몸이 보였다. 그것을 본 아르토리우스는 한숨을 폭 내쉰 후 그녀의 다리를 잡았다.

"꺄악!?"

"쿵!"

다리를 잡힌 것에 놀라며 몸을 일으킨 피스나가 캡슐에 머리를 부딪히며 만들어낸 소리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이마를 싸쥐고 낑낑거리며 밑에서 나온 피스나는 운현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운현씨! 무사했군요!

"네. 덕분에..."

"다행이에요..."

기름과 때로 더럽혀진 옷 채로 그녀는 운현을 끌어안았다. 자그마한 그녀이기에 운현이 안아주는 자세가 되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신경쓰지 않은 피스나는 생긋 웃은 후 물었다.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거에요?"

"필레의 영지에요. 이번에 복귀했어요."

"왜요? 아직 던전 도시의 분위기는 나빠요. 조금만 불꽃이 있어도 금방 터질 것 같은 분위기인데..."

"뭐,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런데 이건 뭐죠?"

"아... 생명 유지 장치를 개량하고 있는거에요. 그리고... 던전 도시의 정책을 연구로 돌렸더니 꽤나 많은 예산을 얻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전부터 하지 못했던 기능을 추가하는 거에요."

"뭔데요? 그게?"

"훗. 듣고 놀라지 마세요. 육체에 있는 정신을 다른 곳으로 표출시키는 기술이에요."

"......"

"어... 음. 그러니까 이해를 못하시는 건가요? 자. 그럼 잠깐만요."

피스나는 신난 얼굴로 뒷쪽에 있는 도구로 달려갔다. 수많은 전선과 부품들이 이어져 있는 작은 원형의 헤드셋 비슷한 물건을 가져 온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머리에 쓴 후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수정을 가리켰다.

"자... 보시면요."

의자에 앉아 버튼을 누른 그녀는 벽에 있는 커다란 화면 속에서 말했다.

"어때요!? 운현씨!?"

"이건..."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피스나의 모습을 본 운현은 헤드셋을 쓰고 있는 피스나를 톡톡 쳤다. 반응이 없다. 완전히 정신이 저곳으로 이동한 모양이다. 흰 공간에서 이런 저런 움직임을 보인 그녀는 운현을 향해 물었다.

"어때요? 운현씨? 감상은?"

"감상이고 자시고..."

"후후후. 요한은 지금 잠들어 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요. 정신은 분명히 살아 있을거라구요. 이걸 이용한다면! 이 공간 안에서라면 그와 만날 수 있을거라구요!"

"....."

그녀의 밝은 말에 운현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만졌다. 아르토리우스는 신기한지 화면 안의 피스나에게 물었다.

"그 공간은 뭐에요?"

"가짜로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이죠. 그리고 완전한 것도 아니에요. 만들어진 공간 안에는 저 하나의 정신만 들어갈 수 있어요. 그래서 요한과는 아직 만날 수 없죠. 정신과 정신을 싱크로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네요. 그치만 계속 연구를 하고 있으니까 금방 될거에요! 운현씨! 고마워요. 연구를 위한 코어와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이 방법의 가설만 세워 둔 상태였는데 겨우 이만큼 진행할 수 있었어요. 요한과 만나면 이걸 꼭 말해줄게요. 운현씨 덕분에 악신의 저주에 당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거에요! 운현씨 덕분에 제가..."

"제가..."

운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답했다.

"제가 더 고마워요..."

"네?"

"운현님? 무슨...?"

화면 안의 피스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현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 아르토리우스는 그를 잡고 물었지만 운현에게 그것을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뛴다. 한가지가 해결된 것이다.

"이 기술을 어디서 배웠냐구요?"

가상의 세계에서 나온 피스나는 난장판인 방 구석에서 간신히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테이블로 운현과 아르토리우스를 데리고 갔다. 그들에게 케이크와 차를 대접한 그녀는 운현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웠다... 라기 보다는 연구를 통한 것이죠."

"혼자서요?"

"음... 혼자라고 해야 하나. 요한이 저렇게 되고 그를 되돌리려고 연구를 하던 와중에 한 여행가가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하더군요. 여자 혼자 있는 집이라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는 코어를 많이 내밀었어요. 연구에 코어는 필수적이니까 저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재워줬죠. 그때 그는 제가 연구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고 그와 토론을 통해 이런 식으로 육체와 정신을 나눌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알게 되었어요. 그는 일주일 정도 저희 집에 머무르며 토론을 하고 토론이 끝나자 또 상당한 양의 코어를 주고 떠났어요. 그 코어들로 그와의 토론 중에 나온 것들을 확정하며 꽤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고 여기에 와서 운현씨 덕분에 그 연구의 결과를 꽤나 진척시킬 수 있었죠."

"그렇군요..."

피스나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은 피스나는 운현의 손을 꼬옥 잡으며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운현씨. 미야씨와 바제트씨의 일은 들었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이 얼마나 큰 줄 저도 잘 알고 있으니..."

"고마워요. 피스나씨. 아. 그리고 연구가 어느정도 성과를 보이면 저에게도 말씀해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운현씨 덕분에 얻은 기회를 절대 헛되이 쓰지 않을게요."

피스나의 웃음을 마주하며 운현은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아르토리우스가 따라나오자 운현은 그녀에게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 피스나씨를 보호하는 병력을 두배로 더 올려. 절대 그녀가 죽어서는 안돼."

"에... 운명으로 봤을 때 피스나는 적어도 3년 후 까지는 살 수 있을걸요?"

"그렇단 말이지. 그래도 연구가 멈춰지면 안되니까 최대한 보호하도록 해."

"음. 저 연구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응. 아마 내가 세운 계획에 필수적인 부분 중 하나일지도 몰라."

그의 진지한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잠시 생각한 후 입술을 내밀었다.

"맨입으로요?"

"쪽."

짧게 키스를 마친 운현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걸어가버리자 아르토리우스는 키스의 감촉이 남아 있는 입술을 매만지고 빙긋 웃었다.

"같이가요~"

"던전 갈거니까 안따라와도 괜찮아."

"그래도 혼자가면 위험하잖아요. 다난이 언제 덥칠지도 모르는건데."

운현이 성큼성큼 걸어가자 아르토리우스는 그에게 다가와 그의 팔을 꼭 끌어안고 방긋 웃었다.

210====================

Turning Point

길드에 돌아 온 운현은 곧장 던전으로 향했다. 후드를 뒤집어 쓴 채 던전에 들어 선 운현은 사람들 눈에 걸리지 않게 조심히 움직여 고블린 부락에 도착했다. 300레벨이 된 운현이 고블린 부락에 도착하자마자 부락 내에 있던 고블린들은 겁에 질려 그를 보지 못한 척,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의미가 없지.'

고블린 하나 잡아봤자 쓸데도 없었다. 운현이 원하는 것은 미믹. 그리고 그 미믹에게 먹일 강력한 몬스터의 코어에 불과했다.

'300레벨쯤 되면 2계층도 무난하게 다닐 수 있겠지.'

함정을 활용하고 여차하면 그레이터 힐을 써서 언데드까지 잡을 수 있다. 거기에 아직 성스러운 메이스를 팔지 않았으니 적당히 보물상자를 모은 후 2계층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차후의 계획을 생각하며 동굴 안에 들어 온 운현은 구석에 몰린 채 두려움에 바들바들 떠는 홉고블린을 향해 피식 웃었다. 초반에. 모두가 함께 했을 때는 저 홉고블린에게 죽음의 공포를 느꼈었다.

'그러고보니 바제트도 그때 만났지...'

홉고블린을 상대할 때 처음 만났던 바제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진 운현은 붕붕 고개를 저은 후 서큐버스의 검을 들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

죽어버린 그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녀. 하지만 그녀를 다시 만날 방법은 있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다.

"카악...크에에...!"

운현이 서큐버스의 검을 들고 다가오자 홉고블린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공포로 부들부들 떨었다. 겁에 완전히 질려 있는 홉고블린을 무심히 바라보던 운현은 서큐버스의 검을 들었고 그것에 홉고블린은 질끈 눈을 감았다.

"서걱!"

아무런 망설임없이 홉고블린의 목을 베어 한방에 죽여버린 운현은 시체를 마석에 담았다. 목적은 보물상자다. 다행히 보물상자는 있었고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은 운현은 후드를 뒤집어 쓴 채 차분히 동굴을 빠져나왔다.

"이야압!"

"하압!"

동굴에서 나온 운현은 세명으로 이루어진 파티가 고블린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격투가. 검사. 마법사로 이루어진 파티가 고블린들을 처리하는 장면을 보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미야가 꼈을 때도 저런 식이었지.'

앞으로 나서 고블린의 공격을 막아내며 싸우는 격투가를 향해 피식 웃어 준 운현은 하이딩을 걸고 다른 홉고블린 서식지를 돌았다. 이런 식으로 근처에 있는 모든 홉고블린의 서식지를 돌아 보물상자와 마석을 챙긴 운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마지막 홉고블린 서식지의 동굴에서 망치를 들고 보물상자를 깨기 시작했다.

"일곱이라..."

일곱 개체의 미믹을 손에 넣은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차분한 걸음으로 걸어간 그는 오크들의 서식지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딜 가도 미야와 바제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녀들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자꾸만 떠오르자 붕붕 고개를 저은 운현은 서큐버스의 검을 뽑아 든 채 차분히 오크 워리어의 서식지로 이동했다.

"....."

오크들 역시 고블린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운현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 못본 척 해버리는 그들을 무시한 채 운현은 대뜸 오크 워리어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누군가 들어 온 것에 놀란 오크 워리어는 두꺼운 근육을 꿈틀거리며 위협하려 했지만 운현이 서큐버스의 검을 들어 올리자 당황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있구만."

구석에 놓여져 있는 보물상자를 챙긴 운현은 자신이 보물상자를 챙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 도끼만 매만지는 오크 워리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일격에 오크 워리어의 목을 날려버린 운현은 오크 워리어의 사체도 챙긴 후 밖으로 나왔다.

"휑하네."

자신이 오크 워리어를 공격하려는 것을 눈치챈 것일까? 모든 오크들이 도망간 것을 본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다른 오크 워리어의 서식지로 향했다. 그렇게 다섯 곳의 오크 워리어를 잡고 그들의 보물상자를 갈취한 운현이 여섯번째 오크 워리어의 서식지로 향했을 때 그는 삼십여마리의 오크들이 뭉쳐져 있는 것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크아아아!!"

"크윽! 뭐야! 이건!?"

"왜 이렇게 많아!?"

"기껏 보물 상자를 얻었는데!!"

'저기꺼는 챙긴건가...'

"릴리! 어떻게 해!"

"저도 몰라요! 아아! 뭐야!? 왜 갑자기 오크들이 이렇게 몰려든거야!?"

'...나 때문인 것 같군.'

자신이 오크 워리어들을 잡으며 오크들이 도망가 강자인 다른 부족의 오크 워리어에게 붙은 것이라 생각된 운현은 밀려나고 있는 모험가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보물상자. 저들이 죽으면 저것을 챙기는게 낫지 않을까 싶었던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과거를 떠올렸다.

'아르가 공격당할 때 바제트와 미야는 돕자고 했었지...'

"하아..."

운현은 고민했다. 그녀들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바제트와 미야는 자신에게 결정을 맡겼겠지만 그녀들의 속내는 저들을 도우려 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나.'

아무런 이득 없이 타인을 돕는 것은 취향이 아니다.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하던 운현은 쓰게 웃고는 인벤토리에서 하얀 옷을 꺼내어 갈아입었다.

'소문을 만들어 주겠지.'

예전 빅-빌런 미믹맨으로 활동했을 때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운현은 서큐버스의 검을 든 채 차분히 걸었다. 오크들의 공격에 밀려나던 모험가들은 자신들의 뒤쪽으로 흰 옷을 입은 운현이 다가오자 놀라며 외쳤다.

"여긴 왜 와!!"

"혼자 오면 죽는다! 도망가!"

자신이 미믹맨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정신이 없어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긴, 뭐든 상관없었다.

"캬아아아아!!"

운현을 겁내며 도망친 오크들은 운현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포효했다. 모험가들을 압박하는 것에 자신감을 되찾은 모양이다. 그들 중 창을 든 오크는 운현을 향해 포효하며 창을 휘둘렀다.

"이봐!!"

"위험해!!"

머리를 향해 내리쳐지는 창을 가만히 바라보던 운현은 빠르게 검을 휘둘러 창대를 날려버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오크의 목을 날려버렸다. 일격에 오크가 쓰러지는 것을 본 모험가들과, 자신들의 동료인 오크가 한방에 죽어버리자 놀란 오크들이 아무런 행동도 못하는 동안 운현은 서큐버스의 검을 뽑아 그들에게 겨눴다.

"카아아아!!"

오크들이 질려버려 뒷걸음질을 치는 동안 오크들 사이에서 한 오크가 도끼를 들었다. 기존의 오크 워리어에 비해 확실히 더 강해보이는 오크 워리어였다. 양 손에 각각 하나씩 거대한 전투 도끼를 든 오크가 성큼성큼 걸어나오자 운현은 그를 향해 검을 겨눴다.

"꿀꺽..."

모험가들은 긴장한 얼굴로 운현과 오크 워리어를 바라보았다. 오크를 한방에 죽인 그라고 해도 저 변종 오크 워리어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감돌았을 때 오크 워리어는 도끼를 휘둘러 자신의 옆에 있는 오크를 한방에 죽여버렸다.

"크아아아아아아아!!!"

네가 한 일은 자신도 할 수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그가 나서자 운현은 서큐버스의 검을 까딱거렸다. 그것에 오크 워리어가 분노하며 달려들자 운현은 그 진로에 가시 줄 함정을 설치했다.

"촤아악!"

"크아!? 크아아아아악!!"

하얀 줄이 몸을 묶고 그 줄의 가시가 자신의 몸을 감싸자 오크 워리어는 고통의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 그를 향해 무심히 걸어간 운현은 피를 주륵주륵 흘리고 있는 오크 워리어의 목을 가볍게 베어낸 후 오크들을 바라보았다.

"크...크아..."

"저벅."

"크아아아아아!!"

운현을 질린 눈으로 보던 오크들은 그가 한걸음 더 내딛자 더 볼 것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도망치자 겨우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모험가들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아! 살았다!"

"고,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저는 전사 미라 라고 합니다. 레벨은..."

운현 덕분에 살아난 모험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아난 것에 기뻐했다. 파티의 리더로 보이는 푸른 머리의 여전사가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보이자 운현은 오크 워리어의 사체를 마석에 담은 후 검으로 모험가들이 가지고 있는 보물상자를 겨눴다.

"저, 저걸요?"

"....."

말없이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라는 고민했다. 저 보물 상자를 얻기 위해서 죽을 고생을 다했는데 이렇게 쉽게 내줘도 되는 것일까? 물론 그로 인해 죽음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잘만 도망치면 모두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고민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인벤토리에서 미믹을 꺼냈다.

"헉!?"

"미믹!!"

"서, 설마!?"

"빅-빌런 미믹맨!!"

옷차림은 모르겠지만 미믹을 소환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던전 도시 내에서 유명한 정보였다. 그녀들은 흰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린 미믹맨이 진짜 나타났다는 것에 공포에 질려 보물 상자를 놓고 빠르게 도망쳤다. 오크 무리따위보다 더 위험한 존재와 마주친 것에 두려워하며 그들이 도망치자 운현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보물상자를 주워 들었다.

'이 정도면 소문은 잘 나겠군.'

다난교가 던전 도시를 공격한 후 빅-빌런 미믹맨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미믹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미믹맨과 다난교가 한패거리라고 생각하겠지... 좋아. 그럼 나머지는...'

보물 상자를 챙긴 운현은 하이딩을 걸고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으로 가 옷을 갈아 입은 후 1계층의 신전으로 향했다. 길드원들의 눈을 피해 하이딩을 걸고 2계층으로 이동한 운현은 2계층에 진입하자마자 성스러운 메이스를 든 운현은 곧장 언데드들의 서식지로 향했다.

'언데드라면 1계층의 몬스터와 다르게 도망치지는 않겠지... 혼자서 가능할까?'

레벨 차이가 상당히 난다고 하지만 언데드들이 자신에게 위축될 것 같지는 않았던 운현은 좀비 세마리와 마주치자 그들에게 성스러운 메이스를 겨눴다.

"캬아!!"

"역시..."

3계층의 몬스터들이 상아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았던 것처럼 좀비들 역시 운현을 보고 도망치거나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잘만났다는 듯 그들은 운현에게 덤벼들었고 그들이 다가오자 운현은 성유 함정을 건 후 성스러운 메이스를 들었다.

"힘의 차이도 모르고 덤비는 놈들에겐 예로부터 이게 답이었지."

"캬아아아! 크아!"

성유 함정에 걸린 좀비들이 고통스러워하자 운현은 그들을 향해 망설임없이 메이스를 휘둘렀다. 300레벨이 된 운현의 힘, 20레벨의 한손 무기 숙련. 20레벨의 체술. 거기에 성스러운 메이스에 담겨 있는 신성력까지. 좀비들은 얼마 버티지 못한 채 그대로 움직임을 멈춰버렸고 그것을 마석에 담은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와 함께 할 때는 꽤 힘들었던 것들이 이제는 쉽네."

전투를 하면 할 수록 과거의 추억이 머리 속에 울린다. 슬픔과 함께 그리움이 마음을 괴롭히는 것에 씁쓸해하며 운현은 다시 전투를 시작했다.

"카아아아...!"

성지와 성유 함정을 이용해 구울 로드까지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었던 운현은 꽤나 많은 마석을 손에 넣자 슬슬 되었다는 생각에 미믹을 소환했다. 몬스터들의 사체가 없이, 운현만이 있는 공터에서 소환된 미믹이 검은 기운을 흩뿌리기 전 그 안에 마석 한줌을 집어 넣은 운현은 미믹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터져나오고 마인이 생성되자 서큐버스의 검을 들어 그에게 겨눴다.

"......"

아르토리우스의 말대로다. 다른 이들이나 몬스터가 있다면 그들을 공격했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 운현과 단 둘이 있기 때문인지 마인은 아무런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두 팔을 내린 채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그에게 다가간 운현은 서큐버서의 검으로 그의 심장을 찔렀고 마인은 아무런 방어자세도 취하지 않은 채 그의 검에 그대로 소멸되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추가 스탯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1계층의 마인 하나를 잡았을 뿐인데 레벨이 10이나 상승했다. 현재 소환할 수 있는 마인은 총 열. 이들을 모두 잡고 나면 400레벨이다.

'지금까지 내가 뚫은 계층은 2계층이 다지... 3계층과 4계층의 계층주를 잡으려면 최소한 450레벨까지는 올려야 한다는 건데... 젠장. 이대로는 쉽지가 않은데... 결국 보물찾기를 해야 하는 건가.'

1계층에 자신이 아는 보물상자는 거의 대부분 챙겼다. 그것들이 다시 생성되려면 꽤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까지 기다리느니 차라리 2계층의 보물상자를 찾는게 낫겠다 싶은 운현은 다음 미믹을 꺼내며 이를 드러내었다.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없군...'

211====================

Turning Point

2계층에서 미믹을 찾지 못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결국 운현은 마인을 일곱만 잡고 2계층을 돌 수밖에 없었다.

'레벨이 많이 오른 것이 알려지면 곤란해.'

모험가들이 레벨을 갱신하는 것은 모험가 길드를 통해 이루어진다. 자신의 레벨이 높아진 것이 다난교도들에게 알려진다면 그들이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길드 내에 다난 교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거지.'

상인 조합의 간부인 레밍도 다난교도인 이상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레벨을 숨기고 다난 교도가 자신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야 했다. 그렇기에 2계층에서 다른 모험가들을 피해가며 보물상자를 보유할만한 이들을 찾던 운현은 고급 언데드들이 있는 구역으로 이동했다.

일반 언데드들 중에 강자라고 불릴만한 구울 로드마저도 잡았는데 그곳에서 보물 상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급 언데드들 사이를 하이딩을 건 채 돌아다니던 그는 한 파티가 언데드들과 싸우는 것을 보았다.

성직자 둘, 성기사 하나. 그리고 궁사로 이루어진 파티는 꽤나 여유있게 언데드들을 제거하고 있었다. 확실히 신성 계열의 직업군이 많은 덕분인지 그들은 스켈레톤 마법사가 마법을 발동하기도 전에 그들을 쓰러트려 마석을 손에 넣었다.

'저건.'

그들의 전투를 유심히 훔쳐보던 운현은 그들이 쌓아 둔 짐 사이에 있는 상자를 발견했다. 보물상자다. 자신이 보유할 수 있었던 보물상자와는 생김새가 다른 보물상자가 그들의 짐 사이에 있는 것을 본 운현은 히죽 웃었다.

'1계층이 아닌 다른 계층의 보물상자다. 저걸 어디서 얻었는지만 알면... 그 전에 옷부터 갈아입어야겠군.'

보물상자의 수급이 가장 큰 관건이라 할 수 있는 운현에게 있어서 새로운 보물상자의 발견은 크게 관심을 가질만한 일이었다. 자신처럼 보물상자를 노리는 이들이 있는 만큼 운현이라는 사람이 보물상자를 수집하는 것이 걸리면 골치아팠다. 혼자서 던전을 돌며 보물상자를 모은다. 운현이 미믹맨이라는 것이 알려질 수도 있었기에 그는 최대한 신중을 가하기 위해 미믹맨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그들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지금 나설 수는 없지...'

"하아아압!"

성기사의 메이스가 크게 휘둘러져 스켈레톤 마법사의 머리를 부쉈다. 마법 한번 제대로 발동하지 못한 스켈레톤 마법사가 픽 쓰러지자 그것을 보던 성기사는 여유있게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가자. 다른 보물 상자도 챙겨야지!"

"스켈레톤 로드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할만하네요. 언데드 소환만 막으면 쉽겠어요!"

"파르티님의 덕분이죠."

'쟤들을 따라가면 찾을 수 있겠군...'

그들의 대화를 훔쳐들으며 운현은 그들의 뒤를 조용히 쫓았다. 적당히 거리를 벌린 채 MP가 떨어졌다 싶으면 하이딩을 풀고 그들이 진행하는 것을 구경하던 운현은 작은 무덤가 근처에 도착하자 성기사가 지금까지 둘고 있던 양손 메이스가 아닌 한손 메이스로 장비를 교체하고 방패를 드는 것을 보았다.

'쉬운 상대는 아닌가보네.'

탱킹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방패를 들고 있던 그녀가 본격적으로 장비를 교환하자 운현은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달각! 달각!"

무덤이 열리기 시작하며 다른 스켈레톤의 두배는 되어보이는 크기의 스켈레톤이 모습을 보였다. 저 무덤이다. 저 무덤에서 저 스켈레톤이 나온다. 운현은 그 스켈레톤이 나온 무덤의 자리에 있는 작은 상자를 발견하고 히죽 웃었다.

'저거다.'

"떴다! 스켈레톤 로드!"

"공격해!!"

사제들과 성기사, 궁사들이 스켈레톤 로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공격을 맞으며 저항하던 스켈레톤 로드는 양 팔을 벌리며 포효했고 그 순간 근처의 무덤에 있던 스켈레톤과 좀비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젠장! 시전 취소가 안먹히다니!"

"일단 후퇴하자! 쟤들 상대하면서 싸울 수는 없어! 스켈레톤 로드는 냅두고 저 자식들부터 잡자고!"

스켈레톤과 좀비가 깨어나면서 전투의 양상이 달라졌다. 스켈레톤 로드를 압도하던 파티는 여기저기서 공격해 들어오는 스켈레톤과 좀비들의 공격에 점점 밀리기 시작했고 그들은 이를 갈며 뒤로 물러났다.

"달각! 달각!'

스켈레톤 로드가 턱을 움직이며 큰 팔을 움직였다. 그것에 스켈레톤과 좀비들은 도망치는 모험자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것을 얌전히 하이딩을 쓴 상태로 지켜보던 운현은 스켈레톤 로드가 혼자 남게 되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이딩을 쓴 자신을 눈치채지 못한 스켈레톤 로드가 다시 무덤 속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운현은 그의 앞에 성지를 설치한 후 하이딩을 풀었다.

"카아아아!!"

스켈레톤 로드의 포효가 이어지고 그가 자신에게 달려왔다. 아까 전 모험가들에게 두드려 맞은 것에 대한 분노를 풀기 위한 것처럼 그가 거칠게 달려왔을 때 스켈레톤 로드는 운현이 설치한 성지 함정에 제대로 걸려버렸다.

"캬아! 캬아아아!!"

성지가 발동되며 스켈레톤 로드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터트렸다. 그래도 강한 몬스터라 그런지 쉽게 죽지는 않았다. 성지에 의해 몸 여기저기가 부서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켈레톤 로드는 비틀거리며 타격만 입었을 뿐 전의를 잃지 않았다.

"카아아아!!"

"어딜."

아까 전 모험가들을 상대하던 것처럼 스켈레톤과 좀비들을 부르려는 그의 모습에 운현은 잽싸게 뛰어 성스러운 메이스를 휘둘렀다. 일차적으로 모험가들에게, 이차적으로 성지에 의해 꽤 타격을 입은 스켈레톤 로드의 팔이 성스러운 메이스에 맞아 부러지자 운현은 바닥으로 착지하며 그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빠직!"

"크에에에!!"

다리가 부러진 스켈레톤 로드가 쓰러지자 운현은 메이스를 들고 그의 머리를 향해 다가갔다. 달각거리는 턱과 눈구멍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마주하던 운현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머리를 두들겼고 한참 그렇게 두드려 맞던 스켈레톤 로드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춰버렸다.

"....."

"아앗!? 당신!?"

"우리가 잡던 스켈레톤 로드를 잡다니!"

'이거 귀찮게 됐군.'

스켈레톤과 좀비들에 의해 쫓기던 모험가들은 운현을 보자마자 경계하며 무기를 들었다. 2계층에서 혼자 움직이는 모험가따위는 들어 본 적 없었다. 고레벨의 경우 다음 계층으로 가기 위한 루트만을 돌 뿐이지 이런 깊숙한 곳까지 혼자 오지 않는다. 클랜의 저레벨 모험가를 돕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것이 2계층이면 저레벨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계층주를 잡는 것도 아닌데 고레벨의 모험가가 이곳에 있다는 것에 의문을 품은 성기사가 경계하며 다가가려는 순간 사제 중 하나가 두려워하며 외쳤다.

"저 하얀 옷은! 미믹맨!?"

'옷만으로도 걸릴 줄이야.'

"무슨 소리야!? 미믹맨이라니! 미믹맨은 상아 길드장님이 쫓아냈잖아!"

"그, 그렇지만 난 봤다고! 저 옷을 입은 자가 헥토르와 싸우는 걸...!"

"...그, 그럼..."

그들이 자신을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단검을 들었다. 딱히 공격하지 않아도 알아서 도망가게 생겼다. 쓸데없는 전투를 피하고 싶었던 운현이 보물상자를 챙겼을 때 사제 한명이 그를 향해 신성 마법을 쏘았다.

"홀리 애로우!!"

"챙!!"

신성력이 담긴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운현은 그것을 성스러운 메이스로 막아냈다. 자신의 공격이 막힌 것에 사제가 두려워하자 운현은 깊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다 죽일까?'

어차피 회귀를 하면 다시 살아날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라면 자신의 행동에 방해가 되는 만큼 치우는게 낫지 않을까? 운현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려는 순간 사제의 뒤통수를 후려친 다른 사제는 운현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사, 살려주세요! 이 등신은 저희가 어떻게든..."

"......"

운현은 그들을 보며 고민하다가 궁사가 짊어지고 있는 보물상자를 가리켰다. 그의 단검이 자신을 가리키자 놀란 궁사는 붕붕 고개를 저었다.

"저, 저요? 전 아무것도 안했는데..."

"호....혹시 보물상자를... 노리시는 건가요?"

성기사는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레 물었다. 미믹은 보물상자로 인해 만들어진다. 미믹맨이 보물상자를 노린다는 것은 미믹을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보물상자를 주는 것이 자신들의 안전에 좋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 성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궁사에게 말했다.

"뭐!? 안돼!"

"하지만 미믹맨에게 덤비는 것보단 나아!"

"이, 이걸 얻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목숨을 잃는 것보단 낫다! 마이르! 포기해!"

궁사가 눈물을 흘리며 보물상자를 내려 놓자 성기사는 경계심을 멈추지 않은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자신을 공격한 사제를 이렇게 보내는 것이 찝찝하지만 운현의 입장에서는 저들과 싸우느라 굳이 시간을 날려먹지 않아도 되니 좋은 일이었다. 거기에 보물상자도 날로 하나 얻지 않았는가. 좋은게 좋은거다 생각한 운현은 그들이 멀리 떨어져 도망치자 보물상자를 회수해 인벤토리에 넣었다.

'저들을 쫓으면 되겠군.'

기껏 얻은 보물상자를 빼앗겼으니 그것을 만회하려 할 것이다. 자신의 손에 들어 와 있던 보물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는 이상 그들은 그 손해를 메꾸기 위해 다시 다른 스켈레톤 로드를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괜찮은 길잡이를 얻었네.'

2계층의 보물상자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던 운현은 빙긋 웃으며 그들의 발자국에 추적 스킬을 걸고 차분히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발견한 운현은 시무룩한 얼굴로 좀비들과 싸우는 그들을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아아! 정말! 그만들 좀 해! 스켈레톤 로드는 또 잡으면 되잖아!"

"그치만..."

풀이 완전히 죽어버린 사제가 시무룩히 말하자 성기사는 좀비의 머리를 날려버린 후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밝게 웃은 그녀의 미소에 겨우 마음이 풀렸는지 사제 마이르는 쓰게 웃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에에잇! 알았어! 자자! 기운 내자! 얼른 스켈레톤 로드 잡고 복귀하자고! 미믹맨을 발견한 것을 보고하면 보물상자 하나 날린 것 쯤은 만회할 수 있겠지! 가자! 스켈레톤 로드는 저쪽에 있는 것 같아!"

"길드의 간부들이 모두 움직인다면 잡을 수 있을거야! 그럼 콩고물이라도 얻을 수 있겠지! 후후. 마이르. 이번에 널 파티원으로 데려 온 게 내 인생 최고로 잘한 일 같다니까. 하하하~!"

"그러니까 말야! 마이르가 언데드 감지 스킬까지 익혔을줄 누가 알았겠어? 덕분에 편하게 전투해서 좋다. 고마워~ 마이르~"

"됐거든? 예전에는 힐량이 낮다고 파티에서 깔때는 언제고."

마이르가 투덜거리자 궁사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야. 그래도 그땐 어쩔 수 없었다고. 그 파티에서 나도 위치가 적었잖아. 그래도 이렇게 같이 하게 됐으니 다행이지. 안그래?"

"흥."

궁사의 말에 마이르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적당히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루카는 생긋 웃으며 일행을 이끌고 마이르가 가르킨 방향으로 걸었다.

미믹을 다루는 미믹맨을 상대할 수는 없으니 다른 이의 힘으로 그를 잡고 제보 포상금이라도 받으려는 듯 그들은 애써 즐거워하며 다른 스켈레톤 로드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 그들의 뒤에서 조용히 걷던 운현은 그들의 말도 안되는 꿈에 웃음만 나왔다.

'일단 그건 불가능할텐데...'

자신이 미믹맨이라는 증거따위는 없다. 애초에 인벤토리라는 아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이상 그것을 조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상아와 필레, 헤스티아에게 잔소리를 듣기는 하겠지만 그들이 자신을 가둬 놓을리는 없으니 저들이 원하는 것처럼 길드 간부들이 나선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잡힐리는 없었다.

'그것보다...'

운현은 아까 전 마이르라 불린 사제가 손쉽게 스켈레톤 로드의 위치를 확정한 것에 흥미를 느꼈다. 혹시 헤스티아의 열감지와 비슷한 스킬이 아닐까? 그렇다면... 운현은 히죽 웃은 후 그들의 뒤를 쫓아 천천히 걸었다.

"캬아아아!!"

한참 스켈레톤 로드들과 싸우던 마이르의 파티는 또다시 스켈레톤 로드가 스켈레톤과 좀비를 부르는 기술을 캔슬하지 못했다. 낭패한 얼굴로 그들이 뒷걸음질을 치려는 순간 그들이 후퇴하려는 길목에 선 채 하이딩을 푼 운현은 자신을 발견한 이들이 기겁하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히익!?"

"미믹맨이다!!"

"왜 여기 또!!"

"보물상자는 줬잖아!! 왜!!"

"...."

그들을 쫓아 달려오는 스켈레톤과 좀비의 사이에 성지를 설치한 운현은 그들이 성지에 맞아 소멸되자 무덤덤히 코어를 챙겼다. 그가 하는 행동을 멍하니 지켜보던 이들은 운현이 스켈레톤 로드 앞에 서자 인상을 딱딱히 굳혔다.

"방금 뭐한거야!?"

"시, 신성력 관련된 스킬 같은데!?"

"뭔지 알아? 마이르?"

"몰라요! 저런거!"

"카아아아아!!"

뒤에서 그들이 떠들건 말건 관심없이 운현은 스켈레톤 로드가 자신에게 포효하자 손을 뻗었다. 스켈레톤 로드는 언데드. 그렇다면 이 기술은 반드시 먹힌다.

'그레이터 힐'

"카악!!"

무려 400레벨에 배울 수 있는 사제의 필살 힐링이다. 지력에 영향을 받는 스킬 특성상 400레벨 이상의 지력을 가지고 있는 370레벨의 운현이 쓴 그레이터 힐인만큼 2계층의 스켈레톤 로드가 버틸리는 만무했다. 단 한방. 단 한방에 스켈레톤 로드가 정지해버리자 뒤에서 구경하던 모험가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버렸다.

"뭐야... 뭐야!?"

"스켈레톤 로드를 한방에!?"

"미... 미믹만 쓸 수 있는게 아니란 말인가!?"

그들이 패닉 상태에 빠진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마석으로 스켈레톤 로드의 사체를 챙긴 운현은 무덤 밑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제 이곳에는 볼일이 없다. 볼 일은 바로...

'저 여자지.'

깨끗한 흰색 사제복을 입은 연황색 긴 머리칼에 청순한 미모를 가진 사제. 마이르다. 운현은 성스러운 메이스 대신 서큐버스의 검을 꺼내 들었다.

"히익!?"

"뭐야!? 전투야!? 도망이야!? 루카! 빨리 결정해!"

"아아아! 나도 몰라!"

212====================

Turning Point

'목소리를 내면 목소리만으로 내 정체를 들킬 위험이 있지. 젠장. 이 세계에 남자가 적다는게 여기서 발목을 잡을 줄이야.'

남자가 많다면 그냥 비슷한 목소리입니다. 라고 우길 수 있겠지만 남자가 적다보니, 그리고 던전에 들어 올 정도의 능력을 가진 모험가의 수가 적다보니 이런 위험성이 있었다. 운현은 서큐버스의 검으로 바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슨... 저, 저는 루카라고 합니다."

운현이 적은 글씨는 이름이었다. 그것을 본 성기사는 긴장으로 인해 마른 입술을 핥으며 간신히 답했고 궁사와 사제 둘 역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마나라고..."

"이스."

"마이르...."

그들의 이름을 알아낸 운현은 다시 글씨를 적었다. 그것을 읽은 루카는 창백한 얼굴로 붕붕 고개를 저었다.

"아, 안됩니다! 마이르는 저희의 동료에요!"

"마이르를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얘들아..."

'어쩌지...'

말을 할 수 있으면 어떻게든 설득과 교섭을 통해서 마이르를 빼 올 수 있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한데다가 현재의 자신은 미믹맨이었다. 잔인하고 잔혹한, 그리고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미믹맨에게 동료를 내어줄 수 없다는 그들을 보며 운현은 서큐버스의 검을 꽉 잡았다.

'다 죽일 수도 없고...'

다 죽여서 된다면 그냥 죽이고 말 것이다. 어차피 회귀를 하면 모든 것이 초기화가 될 것인데 뭐가 문제가 있겠는가. 그들을 죽이는 것에 죄책감따위는 없었다. 다만 문제는 저들을 죽여도 마이르가 순순히 자신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는 의문이었다.

그가 죽일까 말까 고민을 하며 뿌린 살기에 루카는 움찔 몸을 떨었다. 거절을 하기는 했지만 뒷감당이 확실히 무섭긴 했다. 그는 던전 도시 최고의 악당. 빅-빌런 미믹맨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미믹을 소환해서 자신들을 모두 죽이면 어쩔까. 아니 미믹을 소환하는 것은 둘째치고 스켈레톤 로드를 한방에 장사지낼 정도의 힘이 자신들에게 쏟아지면 어쩔까 고민하던 루카는 운현의 몸에서 살기가 사라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죽음을 가지고 협박을 하는 것보다 더 지독한 방법을 쓰기 위해 운현이 마음을 다짐한 결과에 불과했다.

'으음... 어쩔 수 없나. 인간의 욕심을 이용하는 수 밖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린 후 2계층에서 얻은 마석이 잔뜩 담긴 주머니를 휙 던졌다. 그것을 본 루카의 눈이 탐욕으로 번뜩였다. 운현이 팔짱을 끼고 기다리자 주머니를 열어 본 그들은 마석을 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마이르의 목숨은 보장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가 아니라! 고작 마석 주머니 하나로..."

루카의 눈에 탐욕이 깃는 것을 본 운현은 다른 이들의 눈도 보았다. 마이르를 제외한 나머지 모험가들의 눈에도 욕심이 깃들었다.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던 운현은 주머니 하나만큼의 마석을 꺼내었다. 그가 마석 주머니 두개를 휙 던지자 그녀들은 심각하게 당황하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이만큼이나? 으음... 그, 그녀의 안전만 보장해주신다면..."

이만큼의 마석이라니. 자신들이 이주일 이상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사냥을 해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정도의 마석이 눈에 들어오자 루카는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마이르를 넘김으로서 생길,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한 질문이다. 이제 다 넘어왔다는 것에 만족한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카는 마이르를 보았다.

"루, 루카! 아니지? 응?"

"마이르! 부탁해! 그냥 아르바이트 한다고 생각하고!"

"미쳤어!? 저 사람은 미믹맨이라고! 그냥 모험가가 아니야!"

던전 도시에서 깽판을 친 미믹맨이다. 무려 현상금까지 걸려 있는 악당과 함께 다니라니.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이르가 황당해하며 외치자 루카는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마이르. 잘 들어. 미믹맨이 나쁜 놈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런 놈이 아닐지도 몰라."

"뭔 개소리야!?"

"아니. 사실 미믹맨이 모험가들에게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잖아. 지금까지 미믹맨이 깽판을 친 장소는 용병 연맹의 영역과 상인 조합의 영역이라고. 그런 것을 생각하면 안심할 수 있지 않을까?"

"......"

웃기지도 않는 논리에 마이르는 기가 막혔다. 그런 그녀를 향해 다가 온 이스와 마나는 간절한 어조로 그녀에게 부탁했다.

"이정도 마석이면 우리가 미친듯이 싸우고 전투를 치뤄야 얻을 수 있는 마석이라고. 부탁이야. 네가 좀..."

"아니 그걸 왜 내가!?"

결국 돈 때문에 파티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운현은 아까 전까지만 해도 동료를 지키려고 발악하던 그들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던 것에 쓴웃음이 나왔다.

'우리였다면 이렇지 않았겠지...'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결속력을 보였던 미야, 바제트, 헤스티아를 떠올린 운현이 슬슬 기다리는 것에 지쳐가는 동안 어느새 그들의 싸움은 극에 치닫고 있었다.

"싫어! 난 안가!"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마이르. 우리 파티는 여기까지야."

"뭐...?"

"그래. 그래. 너 혼자 살자고 모두의 이익을 날려버리려는 것. 좀 그렇지 않아?"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안죽인다잖아!"

"그걸 어떻게 믿어!!"

"그럼? 여기서 다 죽을까? 저 미믹맨의 기분이 수틀리면 우릴 다 죽일 수도 있는데!?"

"...루카. 솔직히 말해. 그냥 저 마석이 탐난다고."

마이르가 싸늘히 말하자 루카는 인상을 구겼다. 그녀는 한참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그래. 탐난다. 어쩔래. 파티 리더는 나야. 파티 리더의 명령을 듣지 않겠다는거야? 난 파티 리더로서 파티의 이득을 위해서 움직일 수 밖에 없어."

"아아아아!! 진짜! 너희들 정말 이러기야!"

마이르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은 채 간절히 말했다. 진짜 싫은 모양이다. 괜히 상처를 받은 운현이 시무룩하는 동안 어느새 그들은 마음을 굳혔는지 마이르를 제외한 파티원들은 그녀를 거세게 다그쳤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파티를 깨는 수가 있어!"

"여기서 혼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진짜 죽기 싫으면 이 아르바이트를 받아들이라고! 보수도 좋잖아! 특별히 너에게는 마석의 반을 줄테니까 말야!"

"...너희 진짜 쓰레기구나."

"뭐!? 쓰레기!? 말 다했어!?"

마이르가 눈물을 흘리며 쏘아붙이자 루카와 마나, 이스는 버럭 화를 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운현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들의 싸움을 구경했다. 이제는 마석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마이르와 루카, 마나, 이스가 서로를 욕하고 헐뜯었다.

"명중률도 허접한 궁사 주제에!"

"힐량도 제대로 안나와서 파티에서 까인 사제가 어딜!"

"유틸기라고는 쓰잘데기 없는 기술밖에 없으면서... 들리는 얘기론 100레벨을 넘긴 것도 다른 여자들의 보지나 빨아줘서 그런 거라면서? 한심하다. 파르티 교단의 성직자라는게..."

"아니야! 아니라고! 아아아아!! 진짜 너희들 따위와 파티를 하는게 아니었어!"

"힐량도 허접해서 어느 파티를 가도 한번 돌면 까이는 주제에! 기껏 데려와줬더니 뭐가 어쩌고 저째!?"

역시 싸움은 남의 싸움 구경이 재밌다. 운현은 팔짱을 낀 채 그들의 싸움을 구경하다가 주변에 슬금슬금 언데드들이 모이는 것을 발견했다. 더 구경하는 것도 좋겠지만 슬슬 이 싸움을 끝내야 한다. 운현은 크게 발을 굴렀고 루카는 빠득 이를 간 후 외쳤다.

"이 년 데려가요!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 이제 우리 파티도 아니니까!"

"자, 잠깐! 진짜 이러기야!?"

"항?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허접한 사제씨. 당신같은 낙오자를 우리같은 우월한 파티에서 받아 줄리 없잖아?"

"너!!"

"뭐!!"

이글거리는 눈으로 루카를 노려보던 마이르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성큼 몸을 돌려 운현에게 다가가 그를 죽일 듯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 내 능력이 필요한거죠!?"

"....."

운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긍정에 마이르는 빠드득 이를 간 후 루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년들에게 준 마석을 전부 저에게 줘요! 그럼 당신이 시키는대로 하죠!"

"야! 썅년아!"

"이따위로 나올거냐!"

"금방 저렇게 배신하고... 개같은 년!"

"배신은 누가 먼저했는데! 미믹맨! 어서 저년들이 가지고 있는 마석을 빼앗아줘요!"

"......."

'참... 내가 노린 모습이지만 진짜 이렇게 쉽게 될 줄이야.'

고작해야 두 주머니의 마석이다.

그렇게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특수한 능력으로 쉽게 마석을 챙길 수 있었던 운현이나 그렇게 생각할 만한 것이다. 다른 파티들이라면 이렇게 쉽게 많은 마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드물었다. 이 마석을 통해 골드와 코어를 얻는다면 쉽고 빠르게 지금보다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운현은 루카의 파티가 분열된 것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서큐버스의 검을 들었다.

"서, 설마 공격하려는 건 아니죠!? 우리는 당신의 뜻대로 저년을 넘겼습니다!"

"저년들이 가지고 있는 마석 주머니를 저에게 주세요!!"

세 여인들과 한 여인. 둘의 상반된 요구에 운현은 한치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운현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마이르지 루카의 파티가 아니었다. 그가 서큐버스의 검을 들고 겨누자 그녀들은 이를 갈며 무기를 들었다.

"우리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거라고!!"

"덤벼!!"

"도울게요!"

완전히 저들과 갈라선 마이르는 운현의 뒤로 이동해 그를 향해 지팡이를 들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의 신성력이 빛을 발하며 운현의 몸을 감싸자 루카와 그녀의 파티원들은 분통을 터트렸다.

"개년!! 저 악당의 편을 들다니!!"

"아까는 악당 아니라면서? 그렇다면 나에게 이득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힘을 주는게 낫지 않겠어? 미믹맨! 당신은 강해졌어요! 돌격해!"

"....쿠웅!!"

사제의 버프가 이런 것인가. 운현은 힘이 상당히 증가한 것을 느끼며 진각을 밟았다. 단 한차례 진각만으로도 땅이 크게 울리자 루카들은 이를 갈며 무기를 꽉 잡았다.

"...썅년. 두고보자!!"

운현에게서 피어오르는 투기. 그리고 그가 아직 소환하지 않았지만 미믹을 소환하게 된다면 자신들에게 승산은 없었다. 루카는 죽일 듯 마이르를 노려보며 외치고 주머니를 버린 채 뒤로 물러났다. 루카의 파티가 마석이 담긴 주머니를 놓고 뒤로 물러나 도망가자 운현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주머니를 가져와 마이르에게 던졌다.

"흑... 흐아아앙! 으으으... 맨날 이래... 맨날... 흑..."

"......"

씩씩거리며 루카들이 떠난 쪽을 노려보던 마이르는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자신이 버려졌다는 것에 진한 슬픔을 느낀 그녀가 흐느끼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던 운현은 서큐버스의 검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지금 그녀를 달래 줄 여유도, 의리도 없었다.

"...흑... 진짜 당신은 나쁜 악당이네요..."

"....."

그녀의 비난에도 운현은 어깨만 으쓱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씩씩거리던 그녀는 헐렁한 사제복의 소매로 눈물을 쓱쓱 닦은 후 말했다.

"반드시 강해져서 복수할거에요. 날 무시한 모두를..."

"......"

마이르의 분노 섞인 말에 운현은 마석 주머니를 검으로 찔러 그녀에게 휙 던졌다. 그것을 받은 마이르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스켈레톤 로드를 찾는 거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보물상자를 얻고 싶은것이라면 한가지 약속해줘요."

"....."

"절 지켜줘요. 제가 파악할 수 있는 2계층의 스켈레톤 로드와 좀비 로드는 총 스물. 그 중에 보물상자가 몇개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만 얻으면 절 1계층의 신전까지 데려다주세요."

그녀의 요구에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그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미믹맨. 마이르를 신전에 데려다 주다가 길드원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하이딩으로 숨으면 되겠지.'

어차피 미믹맨이 던전에 출몰했다는 소문은 나게 될 것이다.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운현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이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기세좋게 일어나 북쪽을 가리켰다.

"저기에 좀비 로드가 있어요."

213====================

Turning Point

"퍼어억!!"

"괴, 굉장해..."

혼자서 성지를 만들어내며 어렵지 않게 좀비 로드를 박살낸 운현이 보물상자를 챙기는 것을 본 마이르는 침을 꿀꺽 삼키며 감탄했다. 자신이 한 일은 그저 그에게 버프 정도만 걸어주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저 정도의 속도로 좀비 로드를 잡은 것에 놀란 마이르는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레벨이 어떻게 되시나요?"

그녀의 질문에도 운현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내고 싶지 않기에 못 들은 척 마석을 회수한 그가 돌아오자 마이르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후 투덜거렸다.

"힘들어요. 걷는 것도 그렇고..."

"스릉."

"아, 알았다구요!"

운현이 서큐버스의 검을 검집에서 뽑자 바닥에 주저앉았던 마이르는 허겁지겁 일어났다. 전투도 하지 않고 뒤에서 얌전히 대기만 하는 주제에 뭐가 힘들다는 건가. 획득한 보물상자는 아직 여덟개에 불과했다. 얻어야 할 보물상자는 모두 열 둘. 그것을 챙기기 전까지는 쉴 여유따위는 없었다.

'빨리 움직여야 해. 빨리...'

한시라도 빨리 회귀를 하고 싶었던 운현은 겉으로는 안정되어 있지만 속은 상당히 초조한 상태였다. 언제 헤스티아가 죽을 지 몰랐고 언제 필레가 사망할지 몰랐으며 언제 상아가 운명에 휩쓸릴 지 몰랐다.

"천천히 가요! 악!?"

"캬아아아!!"

마음이 급해진 운현이 발걸음을 빨리 놀리자 놀란 얼굴로 그를 쫓던 마이르의 발목을 땅에서 기어 나온 좀비가 잡았다. 그녀가 당황하며 비명을 내지른 순간 운현은 빠르게 뛰어 좀비의 몸을 서큐버스의 검집으로 후려쳤다. 강력한 힘이 실린 공격에 좀비의 몸이 두토막 나자 그는 서큐버스의 검을 허리에 찬 후 성스러운 메이스로 좀비를 박살내었다.

"하아... 고, 고마워요."

의도야 어쨌든 자신을 구해준 운현을 향해 마이르는 살며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 그녀에게 대충 고개만 끄덕여 준 운현이 다시 걷자 그녀는 자신의 발목을 만지며 인상을 썼다.

"아야야..."

"....."

좀비가 제대로 긁은 것인지 상처가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좀비의 시독에 당한 그녀는 다리를 절며 자신을 향해 힐을 걸었지만 힐량이 약하다는 말이 사실인지 마이르는 자신의 힐링으로 회복되지 않자 운현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우웅!"

그녀의 시선에 운현은 귀찮아하며 그레이터 힐을 걸어주었다. 단 한번의 힐링만으로 모든 상처와 피로가 회복되자 마이르는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고마워요. 저 바보같죠? 레벨이 올라도 힐량이 그리 높지 않아서... 그리고 큐어도 못배웠고..."

"....."

자조하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넘기며 운현은 앞서 걸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가버리는 그의 행동에 마이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캬아아아!!"

"딸각! 딸깍!"

스켈레톤 한무리와 좀비 한무리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운현이 성지를 펼치자 마이르는 운현을 향해 외쳤다.

"저, 저도 공격을 할게요!"

운현 정도의 강자가 공격할 때 조금이라도 공격해서 레벨을 올리고 싶었던 그녀는 머뭇거리며 힐과 다른 축복 계열의 마법으로 스켈레톤과 좀비를 공격했다. 기별도 가지 않는 공격이 적들을 덮쳐 어그로를 끌자 운현은 빠득 이를 갈며 그녀를 향해 검을 겨눴다.

"히익!?"

"....."

맘 같아선 욕설이라도 퍼붓고 싶다. 하지만 말을 해서는 안되는 만큼 운현은 시간을 끌게 하는 그녀의 행동에 위협만 할 뿐 아무런 말도 못하고 몸을 돌려 전투를 시작했다. 마이르에게 가는 좀비와 스켈레톤을 공격해 그들의 어그로를 자신에게 끈 그가 그들을 모두 처리하고 나자 마이르는 그를 향해 씁쓸한 얼굴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나서서..."

'이대로는 이런 일의 반복일 뿐이야. 뭔가 방법이 없을까?'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 불편하다니. 운현은 눈쌀을 찌푸리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뭔가... 잠시 생각하던 운현은 피식 웃었다. 굳이 불편을 감수할 필요가 있었나?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앞으로는 그러지마."

"어? 이 목소리는... 남자였어요?"

"보면 몰라?"

자신이 입고 있는 복장을 가리키며 운현이 말하자 그녀는 당황하며 붕붕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던 운현이 몸을 돌리고 걸어가자 마이르는 후다닥 그의 뒤로 쫓아와 물었다.

"왜 이런 일을 하세요?"

"필요해서."

"미믹을 보충하시려는 건가요?"

"그래."

단답형의 말이다. 하지만 전과 다르게 그가 대답을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던 마이르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어갔다.

"좋으시겠네요. 강하셔서..."

"나도 처음부터 강했던 것은 아니야."

운현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부터 미믹을 소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그래. 어쩌다보니 이렇게 된거지."

"......."

그의 목소리를 들은 마이르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그처럼 강해지고 싶다. 강해지고 나면 그 누구도 자신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마이르는 운현의 옷자락을 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저도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 당신의 제자로 받아주실 수 있나요?"

"거절한다."

"왜, 왜요!? 저 뭐든 할게요! 스켈레톤 로드나 좀비 로드, 2계층의 다른 로드들을 찾을 수 있다구요!"

"1계층은?"

"예?"

"1계층에 보물상자를 가진 강적들을 찾을 수는 있나?"

"...그건... 불가능한데요."

"그럼 됐어."

마이르가 할 수 있는 일은 2계층에 있는 보물상자를 가진 몬스터를 찾는 정도다. 그녀에게 관심을 끊은 운현이 싸늘한 어조로 말하자 마이르는 시무룩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언제까지 이렇게 다른 사람의 도움만 받으면서 살아가야 할까요?"

"그게 네 운명인가보지."

운현은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미야, 바제트, 그리고 헤스티아와 필레. 상아가 가진 운명처럼 그녀의 운명도 이런 것이리라.

"직업 적성으로 덕분에 사제 직을 가질 수 있게 되었지만 결국 재능의 한계는 있나봐요. 아무리 노력하고 공부해도 제 스킬은 약해요."

"그것 역시 운명일테니까."

"운명이라... 저 미믹맨님은 운명을 믿으세요?"

"운명... 믿지."

'인정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운명을 믿지 않으면 누가 믿을까. 그 운명때문에 연인이 둘이나 죽었고 나머지 셋이 위험해졌다. 그 외에 자신과 관련된 다른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미래를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 그 운명이라는 것을 바꾸기 위해 이렇게 혼자 움직이고 있는 운현은 마이르의 말에 쓰게 웃으며 답했다.

"하아... 그렇다면 저는 평생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건가요?"

"최소한 발버둥은 칠 수 있겠지. 앞으로 전투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나에게 버프만 걸어라."

"하지만."

"네가 나서봤자 오히려 방해다."

확실히 말한 운현은 몸을 돌리고 앞서 걸었다. 그가 자신에게 말을 해 준 것에 조금은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던 마이르는 풀죽은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점점 언데드 출몰 지역의 깊은 곳으로 이동한다. 그때마다 많은 몬스터들이 나왔고 운현은 여유있게 그들을 처리해나갔다. 운현이 놓친 몬스터 하나나 둘 정도는 미야르도 잡을 수 있었기에 그녀는 조금씩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저 131이 됐어요!"

"그거 축하할 일이군."

14번째의 좀비 로드를 잡은 운현은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온 그녀의 머리를 잡아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한 후 퉁명스레 말했다. 괜히 끼어 든 그녀 때문에 좀비 로드를 쉽게 잡지 못했다. MP가 모잘라 그레이터 힐을 쓰지 못해 성지와 축복받은 메이스로 좀비를 때려잡을 수 밖에 없었던 운현은 점점 마이르가 골칫거리로 생각되었다.

'이제 그만할까.'

열 다섯개의 보물상자를 획득했다. 이정도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잠시. 운현은 건너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자 인상을 구긴 후 마이르를 데리고 수풀 속으로 이동했다. 그녀와 함께 숨은 운현은 몰려 든 사람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럴 것 같더라.'

이 근처에 있는 모험가들을 끌어 온 것인지 루카는 자신의 뒤로 일곱명이 넘는 모험가를 데리고 있었다. 그들을 인솔하며 좀비와 스켈레톤을 죽여가던 루카는 탐욕과 분노에 감싸진 얼굴로 말했다.

"미믹맨은 이 근처에 있을거야! 찾아! 그 자식이 엄청나게 많은 마석을 가지고 있다고! 그걸 빼앗는다면 현상금에 마석까지... 부자가 될 수 있어!"

"하지만 미믹을 다루는데..."

"그래봤자 1계층의 미믹이잖아! 우리에겐 달튼 님이 계시다고!"

일행의 뒤쪽에서 귀찮은 얼굴을 하고 있는 푸른 단발 머리의 여검사와 검은 머리칼의 여창사를 가리키며 루카가 말하자 모험가들은 피식 웃었다.

"달튼님과 오렌님이 함께 하신다면 두려울게 없지."

"스켈레톤 로드를 한방에 쓰러트렸다고 하지만 달튼님도 그 정도는 하시니까 말야! 우리 모두와 달튼님이 덤벼든다면 잡을 수 있을거라고!"

모험가들은 크게 기뻐하며 벌써 운현을 쓰러트린 것처럼 소리쳤다. 수풀 속에 숨은 채 그들의 대화를 듣던 운현은 마이르를 데리고 그 자리에서 멀어진 후 그녀에게 물었다.

"달튼이라는 여자와 오렌이라는 사람은 뭐하는 작자들이지?"

"달튼은 310레벨의 검사에요. 포카드 클랜의 고급 클랜원으로 빠른 검으로 유명하죠. 그리고 오렌은 300레벨의, 마찬가지로 포카드 클랜의 고급 클랜원으로 번개처럼 무섭고 예리한 창술로 유명해요."

"유명한가?"

"유명... 유명하죠. 명성을 높이고 돈을 얻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미믹맨님을 잡기 위해서라고 루카가 꼬셨다면 그것을 위해서 올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에요. 저 사람들이 왜 2계층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뭐 돌아가는 걸 잡았을 수도 있겠지."

310레벨과 300레벨. 그리고 100레벨대의 모험가들. 그들이 모두 덤빈다고 해서 운현은 자신이 질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레벨과 능력은 둘째치고서라도 운현에게는 미믹과 마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마인 둘만 뽑아도 저들 정도는 간단하게 쓸어버리고 남았다.

"아무튼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미믹맨님이라고 하더라도 저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마이르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까지 잡을 것 같은데. 이제 슬슬 그만하는게 어떨까요?"

그녀가 약간 겁먹은 어조로 말하자 운현은 싸늘히 키득거린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속행한다."

214====================

Turning Point

루카들을 피하며 스켈레톤 로드를 잡은 운현은 마이르에게 다가가 물었다. 꽤나 전투를 치룬 탓에 흥분도가 쌓였는지 그녀의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했다.

"아아... 미믹맨님..."

달뜬 얼굴로 자신의 바지춤 사이를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운현은 바지를 벗는 대신 흥분 억제제를 주었다. 그것에 불만인 듯 볼을 부풀린 마이르 였지만 더 요구하지 못하고 결국 그것을 받아 먹었다.

"그런데 미믹맨님의 목적은 뭔가요?"

흥분 억제제로 능력치가 저하되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스켈레톤 로드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아보였다. 그녀가 동쪽을 가리키자 그쪽을 향해 걸으며 운현은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혼란."

"예? 혼란이라뇨? 왜 그런 짓을..."

"이유는 있지만 우리가 그런 것 까지 말해야 할 사이인지는 모르겠는데..."

"아... 그, 그렇죠."

머쓱한 얼굴로 마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이 자신을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것은 결국 필요에 의해서에 불과했다. 그것을 새삼 깨달은 마이르가 입을 꾹 다물었을 때 운현은 다가오는 좀비 무리를 보며 말했다.

"좀비가 온다. 뒤로 물러나."

"아... 알겠어요."

그녀가 무언가를 생각하며 뒤로 물러나자 운현은 축복받은 메이스를 들고 성지를 설치했다. 꽤나 깊숙한 곳에 들어와서 그런지 성지 한방으로 죽지 않는 언데드들이 많았다. 그 탓에 마무리를 메이스로 할 수 밖에 없었던 운현은 성지에 걸린 언데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자 그들을 향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대단하시네요. 진짜... 미믹맨님의 직업은 뭔가요? 성직 계열?"

"글쎄."

애매한 대답에 마이르는 볼을 부풀렸다. 그런 그녀를 달래 줄 생각도, 의리도 없었던 운현은 언데드들의 사체를 마석에 담았다. 지금까지 전투를 하며 운현이 마석을 제대로 챙기는 것을 본 그녀는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미믹맨님도 모험가죠? 레벨이 어떻게 되세요?"

"최소한 너보다는 높다."

"그런데 왜 2계층에 계세요? 미믹맨님 정도 되면 3계층도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그녀의 말대로 3계층 정도는 주의하면 혼자서 다닐 수 있을 정도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주의를 해야 하고 또 위험성도 존재하는데다가 보물 상자를 찾으려면 또 한세월이다. 여기 좋은 보물상자 네비게이터가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운현의 목적은 보물 상자의 수집이었지 던전의 돌파가 아니었다.

'4계층과 5계층을 뚫으려면 최대한 여기서 미믹을 많이 모아놔야지.'

4계층까지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5계층을 혼자 힘으로 돌파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가 있을 것이다. 길드의 간부들조차도 혼자서는 5계층을 돌아다니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운현이 안심할 수 있으려면 최대한 많은 미믹을 손에 넣어야 했다. 미믹은 몬스터를 우선적으로 공격하고 그 몬스터들을 모두 처리한 후 나온 마인은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미믹의 수는 운현이 안정적으로 5계층을 돌파할 무기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계층을 돌파하는 것은 문제가 안돼. 문제는...'

문제는 계층주다. 계층주를 쓰러트리지 못하면 다음 계층으로 넘어가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신전에서 일어난 일들 때문에 길드의 길드원들이 각 계층의 신전에서 조사와 계층주에 도전하는 이들을 지원하려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미믹을 쓴다면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겠지만 자신이 미믹을 쓴다는 것이 알려지면 미믹맨이 자신이라는 것이 알려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미믹맨인 상태에서 뚫을 수도 없고.'

미믹맨인 상태로 움직였다간 계층주를 잡기는 커녕 길드원들과 싸워야 할지도 몰랐다.

'상아에게 부탁하면 간단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지.'

신전에서 길드원들을 철수시킨다면 신전을 돌파할 때 미믹을 쓰든 마인을 쓰든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고 지금은 당장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최대한 미믹을 확보한다.

'3계층에서 보물상자를 얼마나 모을 수 있을지 모르니...'

3계층은 1, 2계층과 다르게 지하에 있는 미로를 통과해야 했다. 그 미로를 통과하여 신전에 도착하는 것도 힘든데 미로의 곳곳에 있을 보물 상자를 챙기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걷던 그는 마법사 좀비가 자신을 발견하고 마법을 쓰려 하자 밧줄을 움직여 그를 잡았다.

"흡!"

낮게 기합성을 내지른 운현은 강하게 힘을 주어 스켈레톤 마법사를 당겼다. 잠깐 사이에 밧줄에 묶여버린 스켈레톤 마법사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운현은 쥐고 있는 메이스로 그의 머리를 후려쳤고 단 한방에 스켈레톤 마법사의 몸은 큰 소리와 함께 부숴져 바닥을 굴렀다.

"우와! 이건 사령의 구슬! 귀한 아이템인데!"

스켈레톤 마법사를 처치하자 떨어진 구슬을 보며 마이르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이번 전투에서 한 일은 없다. 하지만 이 구슬은 성직자들의 능력을 올려주는데 큰 도움을 주는 아이템이다.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아이템의 발견에 그녀는 운현에게 다가가 베시시 웃었다.

"저기 미믹맨님. 이걸 제가 가지면..."

"마음대로 해."

코어가 아닌 이상에야 운현에게 있어서는 크게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아니, 회귀를 생각하는 그에게 있어서 마석을 모으는 이유도 차후 있을 계획에 대비하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지 그 이외의 이유는 없었다.

"헤헤헤! 감사해요!"

신난 얼굴로 사령의 구슬을 손에 쥔 그녀를 보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감사라. 과연 나중에도 자신에게 감사를 할까? 운현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다니며 생각치도 못한 이득을 얻게 된 마이르는 그와 멀어질까 두려워 후다닥 그의 뒤를 따랐다.

"이제 마지막이네요. 더 이상 느껴지는 로드급 언데드는 없어요."

넓은 무덤가에 도착하자 마이르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차분히 말했다. 이제 미믹맨과의 거래도 마지막이다. 미믹맨이 자기를 돌려보내주면 이 많은 마석과 코어로 레벨업을 하고 장비를 맞춘 후 새로운 파티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할까?

피어나는 의문에 마이르는 붕붕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일에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역시 여기 있었군."

"미믹맨!"

"...흠."

운현은 파헤쳐져 있는 무덤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벌써 빼앗긴 것이다. 스켈레톤 로드와 그가 가지고 있었을 보물상자가 없는 것에 운현이 몸을 돌리자 루카는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의 보물상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다! 이걸 원한다면 마석을 내놔! 어차피 너라면 마석따위 얼마든지 쉽게 모을 수 있잖아!"

"그리고 저년이 가지고 있는 마석도 주고!"

"어이. 어이. 너무 마석마석 하지 말라고."

루카와 다른 모험가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에 쓰게 웃은 달튼과 오렌이 앞으로 걸어나오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서큐버스의 검을 들었다. 그런 그를 향해 가소롭다는 듯 웃은 달튼이 손을 들어 올리자 모험가들 중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이들이 무기를 들어 운현에게 겨눴다.

"우린 솔직히 마석따윈 관심없어. 2계층의 마석이래봐야 우리도 모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모을 수 있으니까 말야."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명성이지. 던전 도시를 뜨겁게 달구고 용병 연맹의 엿을 먹인. 그리고 상아 길드장님이 쫓아냈던 그 미믹맨을 우리가 다시 잡는다. 그럼 포카드 클랜의 위상도 높아지겠지? 후후후..."

그녀들의 말에도 운현은 아무렇지 않게 검을 까딱거렸다. 자신들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감탄한 오렌은 자신의 창을 운현에게 겨눈 후 말했다.

"미믹맨. 저항을 포기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공개처형 하려고?"

"말했어!?"

"벙어리 아니었나!?"

운현과 만났었던 루카는 그가 말을 하자 깜짝 놀랬다. 말을 할 줄 아는데 왜 그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필담을 하려 한 것인가? 그 의문을 해소할 새도 없이 달튼은 키득거리며 검을 들었다.

"당연하지! 네놈을 잡고 모험가 길드와 포카드 클랜의 위상을 세우겠다! 던전 도시 최고는 모험가다! 하아아압!!"

달튼이 빠르게 달려와 점프에 자신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두르자 운현은 그녀의 공격을 여유있게 막은 후 왼손을 움직여 그녀의 복부를 후려쳤다. 얇은 가죽 갑옷에 감싸져 있는 그녀의 복부에 가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며 달튼이 뒤로 나가떨어지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다 함께 덤벼."

"커억...억!"

"하... 달튼. 뭐하는거야. 고작 한방 맞고..."

"커으으..."

달튼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저 단 한방일 뿐인데. 스킬도 아닌 주먹질 한방에 맞았을 뿐인데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일까. 그녀를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오렌은 이를 갈며 운현에게 달려갔다.

"이야아아압!!"

세번의 찌르기가 자신의 몸에 향해진다. 그것을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피해낸 운현은 서큐버스의 검을 휘둘렀고 그 일격을 막으며 뒤로 물러난 오렌은 자신의 손이 쩌릿해 질 정도의 고통에 당황했다.

"이, 이정도로 강하다는 이야기는 못들었는데!?"

지금까지의 정보로 미믹맨은 미믹을 소환해서 적들과 싸우게 할 뿐 직접적인 전투는 별로 치루지 않았다고 했다. 몸놀림 같은 것을 보아도 크게 강하지 않다고 들었기에 안심하고 그를 공격했었던 오렌이 긴장한 얼굴로 창을 꽉 들자 운현은 작게 키득거린 후 말했다.

"고작 이정도냐?"

"쳐, 쳐!!"

혼자서는 무리다. 달튼이 일어나기 전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녀는 뒤쪽에서 머뭇거리는 사제들을 향해 외쳤다.

"달튼을 회복시켜!"

"예!"

그녀의 외침에 사제들은 달튼에게 힐을 걸었다. 사제 세명에게 힐을 연속으로 받은 달튼은 멍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 후 자신의 배를 만져보았다. 남은 고통은 없다. 그런데 아까 그것은...

"이, 이건 침투경인데..."

"뭐!? 그건 길드 직원만 배울 수 있는... 그럼 설마!? 미믹맨이 길드원이란 말이야!?"

길드원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 레벨이 250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레벨이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기에 달튼과 오렌의 얼굴은 딱딱히 굳었다.

"고작 이정도냐?"

자신의 몸을 노리고 방패밀치기를 시전하는 루카의 공격을 피해낸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일격에 날려버렸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죽어버린 루카의 머리를 발로 걷어 찬 운현은 자신을 포위한 원딜러들이 화살과 마법을 쏘아내자 망설임없이 뒤로 크게 물러났다.

"콰앙!!"

작은 폭음과 함께 자신이 있던 자리에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그 흙먼지를 뚫으며 돌진한 운현이 일검을 휘두를 때마다 모험가들은 하나씩 목숨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십여명의 모험가들이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달튼과 오렌은 빠득 이를 갈았다.

"저 자는 위험하다! 일단 튀어! 지원이 필요해!"

"쳇! 내가 막고 있을테니까 네가 가라고! 나보다 레벨도 낮은 주제에!"

검놀림을 보면 절대 자신들의 하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달튼은 오렌을 뒤로 밀치며 외쳤다. 이대로 싸우면 필패다. 클랜의 강자, 혹은 간부들이 와야 저자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무자비하게 모험가들을 학살하던 그가 마지막 모험자의 등을 베어 쓰러트리고 그녀의 목을 날려버리자 달튼은 검을 들어 올려 운현에게 겨눴다.

"보통 놈이 아니구나...!"

"뭐 이정도 가지고. 그리고 도망가면 쓰나!!"

"어!? 아아아악!"

운현은 뒷걸음질치다가 몸을 돌리고 도망가려 하는 오렌의 앞에 구덩이 함정을 설치했다. 갑작스레 생겨난 함정에 오렌이 기겁하다가 바닥에 떨어지며 비명을 내지르자 달튼은 빠득 이를 갈았다.

"개자식! 정체가 뭐냐!? 네놈의 직업이 뭐냔 말이다!"

"알아서 뭐하시게!!"

운현에게 악을 쓴 달튼은 그가 자신에게 돌진해오자 기겁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방어를 서큐버스의 검을 강하게 휘둘러 쳐내는 것으로 무산시킨 운현은 그녀가 비틀거리자 왼손으로 송곳을 잡고 그녀의 갑옷 사이에 푹 찔러 넣었다.

옆구리에서 피어오르는 고통에 그녀가 고통스러워하자 운현은 그대로 서큐버스의 검을 휘둘렀다.

"서걱."

너무나도 싱거운 죽음이다. 달튼은 자신의 목을 지나간 검을 멍하니 보다가 천천히 손을 올려 피가 배어나오는 목을 잡았다. 하지만 상처는 더더욱 크게 벌어졌고 그곳에서 피분수가 터져나오자 운현은 뒤로 물러난 후 성큼성큼 구덩이 함정으로 향했다.

"으으윽..."

몸 여기저기에 죽창이 꽂힌 오렌이 점점 죽어가는 것을 보며 운현은 끝장을 내기 위해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가 다가오자 오렌은 손에 쥐고 있는 창으로 그를 위협했지만 운현은 그 공격을 가볍게 잡아낸 후 그녀의 목을 베었다.

"웃쌰."

오렌까지 깔끔하게 죽이고 나서야 구덩이 함정에서 올라 온 운현은 모험가들이 가지고 있던 마석과 보물상자를 챙겼다.

"대단해요! 굉장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미믹도 꺼내지 않고 저들을 쉽게 잡은 것에 감탄한 마이르가 다가오자 운현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저, 이제부터 미믹맨님을 따라... 어...?"

운현은 단검을 꺼내 마이르의 복부를 찔렀다. 그것에 놀란 마이르가 운현을 멍하니 바라보았을 때 운현은 얼굴의 복면을 벗은 후 빙긋 웃으며 서큐버스의 검을 휘둘렀다.

"너의 운명도 바꿔줄게. 회귀를 하면... 이런 삶을 살지 않도록 해주지. 이번에 큰 도움을 받았으니까 말야."

"서걱!"

"....."

마이르의 몸이 툭 쓰러졌다. 몸과 분리된 그녀의 머리가 바닥을 구르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던 운현은 피식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비밀 유지에는 살인멸구가 최고군..."

어차피 회귀를 하면 모두 되돌아간다. 자신이 이들을 학살한 것도 모두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방향대로, 빨리 회귀를 하여 미야와 바제트를 구하고 헤스티아, 필레, 상아가 운명에 의해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지 않는 방향을 향해 최대한 효율적이고 빠르게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정체를 들킬까봐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알게 뭔가. 어차피 보물상자만 얻으면 마이르의 이용가치는 없어지는데. 그녀가 3계층이나 1계층의 보물상자를 찾지 못하는 이상 자신에게 있어서 큰 의미가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자아... 그럼 다음으로 가보실까? 2계층의 보물상자도 얻을 수 있는 건 대충 다 얻었으니 레벨을 올리자. 그리고 나서... 피스나의 연구만 어느정도 성과를 얻으면... 이 더러운 운명과도 작별이다."

처음 살인을 했을 때는 두려웠다. 두번째 살인을 했을 때는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수많은 다난교도들을 죽인 지금 살인에 대한 후회나 망설임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차피 회귀를 하게 되면 다 없었던 일이 된다. 뭐가 문제란 말인가. 다 되돌아갈 텐데. 필요하다면, 그리고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고 안전하게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죽인다.

미야와 바제트를 구하고, 헤스티아와 필레, 상아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데 이까짓 살인. 그것도 회귀를 하면 모두 없었던 일이 될 살인따위가 뭐가 겁나고 뭐가 두렵단 말인가.

방침과 마음가짐을 정한 이상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미믹을 꺼낸 후 미믹의 몸통에 마석을 쑤셔 넣어 마인을 소환했다.

검은 폭발과 함께 소환되어 자신 앞에 멍청히 서 있는 마인의 가슴에 서큐버스의 검을 찔러 넣으며 작게 웃었다.

"기다려. 미야, 바제트. 반드시 구해줄테니까. 반드시 다시 만날 수 있을테니까... 그때는 너희들이 죽지 않게 하겠어. 그리고 모두를... 구하겠어."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추가 스탯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215====================

Turning Point

길드로 복귀한 운현이 옷을 갈아입으려고 방에 들어 온 순간 바깥에서 폭음이 들렸다. 또다시 다난 교가 습격을 한 것인가? 운현은 싸늘히 웃었다.

'예전과 다르다.'

2계층의 미믹이 일곱. 거기에 자신의 레벨은 벌써 450에 올랐다. 레벨만으로 따진다면 상아보다 강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는 싸늘한 얼굴로 벗으려던 갑옷을 다시 착용한 후 회관으로 내려왔다.

"운현!"

폭음을 듣고 나온 것은 길드의 간부들도 마찬가지인가보다. 상아를 비롯해 에리스, 펠리시아, 칼리아스. 그리고 제니스까지 나오자 운현은 상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거야?"

"일단 나와 제니스씨, 에리스만 가고 나머지는 여기서 대기할거야. 지금 공격은 시청에 집중되고 있는 것 같아. 다행히 시청은 용병 연맹이 보호하고 있지만 다난 교의 습격이 거세어서... 우리가 지원 나갈 예정이야. 아둔과 필레는 지하의 방에서 대기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그리고 헤스티아도. 거기에 1계층에서 대기하고 있는 고급 길드원들이 올라올거니까 길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그럼 됐어. 시청으로 갈거지? 가자."

그레이터 힐이 불가능하지만 크리티컬 힐도 상당한 힐링 스킬이다. 아둔이 함께 한다면 헤스티아와 필레의 안전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위협이 될만한 상대인 카를로스와 날개달린 강력한 다난의 집행자들은 이미 죽었다. 아무리 다난교도들이라고 하더라도 그정도 강자들이 또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은 운현은 아무런 걱정없이 말했고 그의 말에 상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너도 지하실에 가 있어! 무슨 소릴 하는거야?"

"괜찮아. 난 강해졌으니까."

상아에게 다가간 운현은 그녀의 볼을 톡 친 후 씩 웃었다.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진 상아가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또다시 폭음이 들렸다.

"그럼 먼저 간다!"

"야! 야!!"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단 둘이 있을때 하면 된다. 운현은 상아를 내버려두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다난 교도들의 습격이라니. 이렇게 공교로울데가 있나.

'다난이 보유한 신성을 가져오려면 정보가 필요한데... 아주 잘됐군.'

"콰아앙!"

"카를로스... 하아. 자기 힘만 믿고 까부는 쓰레기를 믿은 내가 바보지. 그런데 어째서지...?"

시청을 향해 달려가는 다난 교도의 몸이 폭발하며 용병들을 공격했다. 그 폭발을 대형 방패로 잘 막아내고 있지만 그래도 공격 한번 한번마다 용병들 서너명이 쓰러지고 있었다.

"카야 데 다난 성녀님!"

"뭔가요?"

"모험가 길드와 용병 연맹에서 대항하려 다가오고 있습니다만..."

"흥... 막고 있어요. 악신의 신성만 챙기고 나면 바로 돌아 갈거니까."

"하지만..."

"그정도도 못한다는 건가요?"

"...알겠습니다."

용병 연맹과 모험가 길드가 시청 쪽으로 오는 것을 자신들만으로 막아야 한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다난의 집행자들은 카야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수의 집행자들이 빠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카야는 날개를 펼친 후 검을 들었다.

"그동안 카를로스의 방해때문에 성배를 움직일 수 없었지만... 성배를 움직일 수 있는 이상 빠르게 신성을 회수할 수 있다. 그리고 나면... 큭큭큭..."

"성녀님?"

카야는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주머니를 만지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녀의 그런 행동에 집행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카야는 검을 크게 휘둘렀다.

"자! 공격해!! 오늘! 우리는 다난의 뜻을 집행한다!!"

"오오오오!!"

'카야... 네가 다난교의 성녀였나.'

헤이스트 마법까지 걸고 높아진 몸놀림을 활용해 순식간에 시청까지 도착한 운현은 다난 교도들을 지휘하고 있는 이를 보고 탄식을 터트렸다.

자신이 아는 얼굴이다. 축복받은 메이스를 건네주고 파르티 교단의 대사제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카야가 다난 교의 성녀라는 것을 알게 되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 의심을 안했지? 복장따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증명했다는 대사제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인데... 아무튼 이번에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군. 그나저나 악신의 신성이라...'

악신이라면 세계의 남자를 대부분 죽이고 이 세계를 기형적으로 만들게 한 신이 아닌가. 그 신의 신성도 남아 있다는 것에 놀란 운현은 팔짱을 낀 채 그녀의 행동을 얌전히 지켜보았다.

'시청에 신성을 탈취하러 온 것이라면... 저 여자는 신성을 보유하지 않고 있다는 뜻인가... 이거 골치아프네. 일단 지켜보자.'

하이딩을 건 채로 얌전히 뒤에서 지켜보던 운현은 계속되는 폭발에 용병들이 물러나자 다난 교도들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쓰게 웃었다. 강한 용병들을 모아놨다고는 하지만 결국 이런 류의 공격은 버티지 못하는 것인가.

"자! 공격해! 공격하라고!!"

꽤 고급의 집행자들만 남은 모양이다. 그들이 용병들을 쓰러트리며 진행해 나가자 카야는 자신을 따르는 두명의 날개 달린 집행자들과 함께 시청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막는 이는 없었다. 가끔씩 용병들이 무기를 들고 튀어나왔지만 카야와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두 집행자의 공격을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티르빙이나 헥토르는...'

"하아아압!!"

'역시 있구나.'

헥토르와 그녀의 정예부대인 헬하운드들이 포효하며 달려오자 카야의 뒤에 서 있던 둘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들이 긴 장검을 꺼내들고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자 카야는 자신의 날개를 활짝 피고 하늘로 솟아 올랐다.

"흐흥~ 자자. 저들을 잘 막고 있으라고. 내가 신성을 가져 올 때까진 말야."

"다녀오십시요."

"곧 따라가겠습니다."

헥토르와 헬하운드들을 상대하며 전혀 밀리지 않은 집행자들은 자신들의 팔찌에 힘을 불어 넣었다. 그 순간 그녀들의 검에 강렬한 청광이 번쩍였고 헥토르와 헬하운드들은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게 무슨...!?"

"성자의 유물력이다. 자... 그럼 간다!!"

"위대한 성자의 힘을 보여주지!!"

아까보다 더욱 강해진 그들의 힘에 헥토르와 헬하운드가 밀리기 시작한다. 그녀들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게 된 그들은 헥토르의 도끼를 쳐낸 후 그녀의 빈틈을 노려 검을 휘둘렀고 그것에 복부를 살짝 베인 헥토르는 낭패한 얼굴로 그녀들을 노려보았다.

"젠장!!"

"포기하기는 이르지."

"채앵!!"

"티르빙님! 우르나님!!"

"와... 진짜 세상 참 좋아졌네. 다난교따위가 이렇게 날뛸 줄 누가 알았겠어?"

티르빙과 함께 나타난, 긴 흑발에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듯 딱 달라붙는 슈트를 입은 여인은 자신의 검을 까딱거리며 느긋하게 조롱했다. 그녀를 향해 반갑게 외친 헥토르는 자신을 째릿 노려보는 티르빙의 시선에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고작 이런 년들따위에게 밀리다니. 훈련이 부족한가보지?"

"죄, 죄송합니다..."

"뭐. 헥토르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잖아. 그리고 이정도면 괜찮지. 동쪽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그년들을 잡을 때까지 이렇게 버텨준게 어디야? 대단해. 대단해."

헥토르를 갈구는 티르빙에 비해 우르나는 그저 즐거운 듯 느긋하게 말했다. 그녀의 모습에 티르빙은 한숨을 푹 내쉰 후 자신의 창을 잡았다.

"쓸데없는 소리 관두고 빨리 잡자. 저 안에 들어간 년도 찢어죽여버리게."

"헤헤~ 그거 반가운 소리구만."

"...용병 연맹의 간부들인가? 죽고 싶지 않다면 비켜라."

검은 날개를 활짝 피며 짙은 청발의 집행자가 싸늘히 말하자 그녀를 향해 우르나는 까르륵 웃고는 눈을 번뜩였다.

"건방지게 누구보고 비켜라 마라야!!!?"

단단한 화강암에 금이 갈 정도로 강하게 발을 구른 그녀가 폭발하듯 튀어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그 공격을 겨우 막은 집행자가 이를 드러내자 우르나는 재밌다는 얼굴로 검을 반바퀴 빙글 돌려 역수로 잡은 후 말했다.

"티르빙. 넌 끼지마!! 이년들은 내가 잡는다!"

"하아... 그럼 맡기죠."

"하하하하하!! 미믹맨 이후로 이런 녀석들은 처음이군!! 간다!!"

'저년이 나한테 아직도 원한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네.'

상아에게 걸리기 전 마지막으로 상대했던 우르나가 자신을 언급하자 운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의 전투 범위에서 떨어졌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압에 여기저기가 부서져 나갈 정도의 충격이 터져나간다. 그 공격을 두 집행자들이 잘도 막고 있는 것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럼 부탁한다.'

운현의 목적은 집행자가 아니라 카야다. 그녀는 시청 어딘가에 있는 악신의 신성을 빼앗기 위해서 시청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그녀를 잡으면 신성이 어디에 보관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시청에 들어 온 운현은 여기저기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시청 경비병과 용병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스카, 로지.'

자신이 이 도시에 처음 들어왔을 때 만났던 여자들. 자신을 성추행했던 그들이 피를 흘린 채 죽어 있는 모습을 본 운현은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것도 인연이니...'

회귀를 하여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이들 역시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아르토리우스는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이 계획을 실행시켜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준비한 계획. 그것이 이제 막바지에 달했다는 것을 운현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저년만 잡으면...'

운현은 차분히 계단을 올라갔다. 화려한 계단에도 시체들의 수가 상당했다. 대여섯명의 경비병들이 피를 토하고 죽어 있는 것을 본 그가 그 사이를 걸어 열려 있는 시장의 방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운현은 안에서 들려 오는 다급한 소리에 이를 갈았다.

'씨발!?'

설마 신성이 피스나에게 있었단 말인가? 피스나는 지금 죽어서는 안된다. 그녀의 연구가 자신의 계획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이상 절대 그녀를 죽게 둘 수 없었던 운현은 방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아르토리우스가 복부에 검이 꽂힌 채 헐떡거리며 카야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서 피스나는 눈물을 흘리며 절망하고 있었고 카야는 아르토리우스에게 한 손을 뻗은 채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더러운 배교자. 위신체라 하여 너무 자만하고 있던 것 아닌가? 나는 신성을 보유하고 있는 다난교의 성녀다. 너따위가 감히..."

'신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그럼 어떻게 신성을 흡수하려는 거지?'

신성을 하나 이상 보유하면 몸이 터져 죽는다. 그것을 보관하기 위해서는 위신체가 필요한데 카야의 주변에는 위신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크...쿨럭!"

"꺼져라."

담담한 말과 함께 카야는 손을 움직였고 그 순간 아르토리우스의 몸이 벽에 부딪혔다. 그녀가 축 늘어지자 카야는 피스나에게 시선을 돌린 후 그녀에게도 손을 뻗었다.

'젠장.'

"잠시 잠들어있어. 넌 우리를 위해서 움직여줘야 하니까..."

"아아아..."

'어라?'

피스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운현은 카야를 공격하려다가 그녀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스나를 죽이는 것이 아닌, 그저 그녀를 잠재우기만 한 그녀는 차분히 걸어 자신의 주먼에서 작은 잔을 꺼내었다.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그 잔을 손에 든 카야는 피스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 후 신성 주문을 외웠다.

"신성 조정. 성배여. 신성을 받으소서."

"우우우웅!!"

피스나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는 상태로 카야는 그녀의 머리에서 무언가를 뽑아내듯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무것도 없던 그녀의 손에 황금색의 작은 빛이 끌어 올려와졌다.

'숨은 쉬는 것 같은데...'

피스나의 등이 작게 움직이는 것을 보아 그냥 잠든 것에 불과한 듯 보였다. 그것을 지켜보던 운현은 카야가 황금색 빛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 이를 드러내었다.

'저게 신성인가...'

"드디어 악신의 신성을 손에 넣었다...! 이제 반개. 조금만 더 하면... 드디어 다난님이..."

황홀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부르르 몸을 떤 카야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신성을 황금색 잔에 담았다. 황금색의 빛은 금색의 잔에 닿자 그 안으로 빨려들어갔고 금색의 잔은 더더욱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었다.

"아하하하하!! 그자의 신성만! 그자의 신성만 빼앗으면 돼!! 아하하하하!!!"

그녀가 무척이나 즐거워하며 웃자 운현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이렇게 개고생하는데 니가 그렇게 좋아하면 안되지! 스틸!!"

216====================

Turning Point

"악!?"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황금색 잔이 사라지자 카야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키득거리고 웃은 운현은 자신의 손에 들어 온 황금색 잔을 인벤토리 안에 던진 후 검을 들었다.

"네노오오오옴!!"

"카야! 오래간만이다!! 그간 잘지냈냐!!"

하이딩을 푼 운현은 미야를 잃은 것에 대한 분노를 담아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성배를 빼앗긴 것에 당황하던 그녀는 운현이 달려들자 이를 드러내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푹!!"

"카악!?"

"촤악!!"

쓰러져 있던 아르토리우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벌떡 일어나 카야에게 검을 던졌다. 그녀의 검이 자신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카야는 비틀거렸고 그 틈을 노려 운현은 카야의 팔을 베었다.

"서걱."

"아아아아악!!"

팔이 잘린 카야가 비명을 내지르며 비틀거리자 운현은 히죽 웃었다. 역시. 위신체 주제에 이렇게 허망하게 죽으면 쓰나. 운현은 아르토리우스가 힘겹게 복부에 박혀 있던 검을 빼내 쥐자 그녀에게 그레이터 힐을 걸어주었다.

"고마워요! 저년이 성배를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당신이 도적이 된 게 이것을 위해서였군요! 성배를 훔치기 위해!"

"이게 뭔지 알아? 그럼 됐어! 저년에게 설명따위 들을 필요 없다! 아르토리우스! 공격한다!"

아르토리우스가 성배에 대해 알고 있는 듯 하자 운현은 카야를 살려 둬야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렸다. 미야의 복수다. 비록 회귀를 하여 모든 것을 되돌리겠지만 미야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을지 생각하면 저 여자를 그냥 두고 싶지 않았다.

"뒈져라!!"

운현은 그녀를 향해 달려갔고 카야는 자신의 잘린 팔을 멍하니 보다가 황급히 창문을 향해 뛰었다.

"쨍그랑!!"

"쳇..."

창문을 통해 탈출한 그녀가 날개를 피고 날아 도망가버리자 운현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아쉽게 놓쳤네요."

"그러게 말야. 그런데 악신의 신성이 왜 피스나에게 있는거야?"

"그, 글쎄요? 그건 저도 잘... 운현님이 300레벨을 달성한 이후의 일은 저도 몰라요. 애초에 카야가 이쪽을 습격할 줄 알았으면 아예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있었겠죠. 봐봐요. 저 갑옷도 안입었잖아요."

운현의 질문에 아르토리우스는 자신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드레스를 가리켰다. 방어력따위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그저 미적 감각만이 충분한 노출 많고 몸매를 드러내는 드레스의 모습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는 이런 적이 없었어?"

"네. 제가 회귀를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이런 일이 없었어요. 저도 꽤나 당황스럽네요."

아르토리우스 역시 피스나에게 신성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예상치 못한 신성을 얻었으니 다행이다.

"피스나에게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성배에 신성을 넣기 위해서 죽이지 않고 그냥 빼앗은 정도에 불과한 것 같아요. 그냥 잠든 것으로 밖에 안보이네요. 그나저나 성배라니... 이걸 위해서 운현님은 도적 직업을 선택한 거였군요. 신성을 보유한 자만이 쥘 수 있는 유물인데... 모든 것이 이것을 위해서였다니... 평소라면 다난교의 본단에서 절대 움직일리 없는 성배가 이렇게 밖으로 나온 것을 보니 정말 운현님이 제대로 계획을 짠 것 같네요."

카야가 가지고 온 성배. 신성을 잔뜩 모아 놓은 성배를 운현이 스틸로 쉽게 훔쳐낸 것에 아르토리우스는 감탄했다.

"성배가 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어?"

"드물다기보다는... 거의 불가능하죠. 성녀, 비숍, 대무관. 다난교의 최상위 집행자 셋의 동의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비숍인 카를로스는 죽었고 대무관은 없죠. 그러니 성녀인 카야가 이렇게 들고 나올 수 있었던 거에요. 원래대로라면 카를로스가 죽어도 안된다고 발악을 했을텐데 말이에요."

"예전에는 성배를 빼앗은 적이 없었어?"

"음? 아뇨. 몇번 있기는 했어요. 성배에 담긴 신성을 이용해서 여러가지 일을 했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운현님이 분을 참지 못하고 다난교를 쑥대밭으로 만들때 획득한 것이라서... 이런 식으로 얻은 적은 한번도 없어요. 잘 가지고 계세요. 나중에 꼭 쓰일테니까요."

"나중이라면?"

"운현님 얘기로는 회귀를 위해서 운명의 세 여신과 만났을 때 그녀들과의 거래 재료로 쓰인다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좀 이상하네요. 운현님이 회귀를 할 때 성배를 직접 가지고 간 적은 없었거든요. 왜 성배를 얻기 위한 안배를 해둔 것일까...?"

"운명의 세 여신은 뭐야?"

"아. 던전 6계층에 들어갔을 때 운명을 담당하는 세 여신과 만나 그녀들을 통해 회귀를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냥 자살과는 다르게 그렇게 해야만 특별한 회귀가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그런가. 아. 혹시 신성을 써서 운명을 바꾸려고 한 것 아닐까?"

"그렇게 해서 간단히 풀린다면 운현님이 당장 다난교도 때려잡고 성배를 빼앗았겠죠. 아니, 그걸 떠나서 직접 신성을 모으러 다니셨을걸요? 신성 하나를 써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운현님이 하신 것처럼 죽음을 한번 정도 회피하게 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해요. 뭐 그것도 엄청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죠. 그정도라면 지금의 운현님도 가능한 거잖아요. 굳이 신성을 쓰지 않고... 신성을 모으라고 한 이유는 다른 것 때문일거에요."

"흠... 그럼 하나 더. 위신체를 만드는 방법은 뭐야?"

"신성 하나를 위신체로 만들 시체에게 넣으면 됩니다. 간단하죠."

"...그럼 라티나에게 들어간 신성은 누구의 신성을 이용한거지? 지금 여기 성배에는 도대체 몇개의 신성이 있는거야?"

운현은 성배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황금색으로 반짝이기는 하지만 몇개의 신성이 들어가 있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기에 운현은 궁금해하며 물었고 아르토리우스는 그것을 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홉개 반 밖에 없네요."

"엥!? 어째서? 더 많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한데... 일단 카야가 하나 가지고 있고 다른 자에게 신성을 부여했을 수도 있죠. 일단 운현님이 가지고 있는 반개의 신성. 그리고 라티나의 몸에 있는 한개의 신성을 합치면 열한개는 나오겠네요. 그정도면 안정권이라고 볼 수 있을거에요."

"...뭔가 신성을 더 모아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자신은 최소 열개 이상을 모으라고 했다. 그렇다면 더 있으면 더 쓸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운현이 떨떠름히 묻자 아르토리우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있으면 좋죠. 하지만 문제는 신성을 꺼내고 부여하는 스킬이 없잖아요. 그건 카야만이 가진 고유의 힘이라구요. 그녀가 운현님의 계획에 동참할리 없으니 그 이상은 무리에요. 그냥 빠르게 포기하는게 낫겠네요."

"그렇군... 그리고 하나 더."

"뭔가요?"

"배교자라는게 무슨 뜻이지?"

"...아. 그거요."

운현의 질문에 아르토리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시장 선거 전. 그러니까 운현님이 회귀를 했을 때 쯤에 다난교에서 접근하더라구요. 다난교가 이제 세상을 지배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꼬드기던데요. 높은 지위와 막강한 유물 무기를 제공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냉큼 가입했죠. 아. 유물이 탐나서 그런 건 아니였어요. 일단 높은 지위에 있어야지 신성이 얼마나 있는지 파악할 수 있고 다난교도들의 움직임을 알 수 있으니까."

"그들을 배신한거야?"

"배신이라... 배신이라고 하긴 좀 뭐하죠. 처음부터 적이었으니까. 그냥 속였다고 말씀하시는게 맞을거에요."

"...그게 다야?"

"음... 나름 강하고 용병 연맹장의 위치에 있는 저라서 그런지 대무관의 자리를 제안하더라구요. 아까 대무관이 없다고 했죠? 당연한게 제가 나올때 대무관을 상징하는 증표부터 시작해서 대무관과 관련된걸 다 때려부수고 나왔거든요. 그래서 차기 대무관이 나올 수 없었던 거에요. 후후후... 차기 대무관을 노리던 그년들 얼굴을 생각하니 아직도 속이 시원하네."

위신체가 되기 전 다난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아르토리우스다. 그들에게 상당한 원한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던 그녀는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 질문하실 사항 있으신가요?"

"없어."

"그럼 피스나를 깨우죠. 하이딩 거세요. 하이딩. 보아하니 레벨은 숨기고 계신 것 같은데 숨기려면 제대로 숨겨야겠죠?"

아르토리우스는 잠들어 있는 피스나를 흔들었다. 카야의 마법에 의해 잠이 들었던 피스나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자 아르토리우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좀 괜찮아요?"

"아스씨! 괜찮아요!? 아까 다친..."

"아아. 그거요. 지나가던 사제님이 구해주셨어요."

말도 안되는 개소리에 피스나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아르토리우스가 죽지 않고 갑자기 나타난 다난교도가 패퇴해 물러난 것이 중요하지. 피스나는 눈물을 그렁그렁 맺은 채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행이에요... 정말."

'나에게도 다행이군...'

피스나가 죽었으면 정말 큰 낭패를 볼 뻔 했다. 운현은 그녀가 안전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곳에 볼 일은 없다. 자신이 있는 쪽을 보며 아르토리우스가 눈짓하자 운현은 조용히 다른 이들에게 걸리지 않게 얌전히 자리에서 이동했다.

"후우."

일단 한시름 놓았다. 아르토리우스가 함께 있으니 피스나에 대한 걱정은 줄일 수 있었던 운현이 길드로 돌아 왔을 때 운현은 길드 회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필레와 헤스티아를 볼 수 있었다.

"왜 여기 있어? 지하에 있는다고 하지 않았어?"

"아... 그게. 일이 정리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서..."

"그래?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래?"

길드의 분위기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에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필레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운현에게 다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미믹맨이 출몰했다는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올게 왔구나...'

미믹맨의 복장을 입고 움직이게 된다면 어차피 필레나 헤스티아, 상아의 귀에 들어갈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그것에 대해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운현은 그저 쓴 입맛을 다실 수 밖에 없었다.

"이건 어차피 상아에게도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일이니까 말야. 상아 오면 하자."

"하아... 알았어. 꼭이야."

운현을 잡겠다는 생각보다는 그가 다난 교도 뿐만 아니라 이제 던전 도시의 모험가와 용병까지 상대해야 하게 된 것 아닐까 싶어 걱정스러웠던 필레는 운현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그녀의 진지한 시선에 운현은 빙긋 웃는 것으로 대답하고 헤스티아를 보았다.

"왜 그래?"

"걱정 많이 했다구요. 정말... 왜 혼자 가신거에요? 상아씨가 돌아오면 엄청 혼낼거라고 했으니까 각오하시는게 좋을거에요."

"그, 그거 무섭네."

그러고보니 상아의 말을 무시하고 냅다 시청으로 뛰어갔었던 것에 대한 변명을 준비하지 않았다. 운현은 상아가 돌아오면 또 한소리 하겠다 싶어 떨떠름히 말했다.

"쾅!"

"운현!!"

"...양반은 못되겠군. 상아! 다행이야! 별 일 없었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 온 상아는 운현을 보자마자 그의 팔을 꽉 잡았다. 그녀가 자신을 당기자 운현은 힘을 주어 버텼다.

"...어라?"

있는 힘껏 힘을 쓰는데도 운현이 버틴다. 그것에 상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너... 레벨 몇이야."

궁금해하는 그녀의 귓가에 운현은 작게 속삭였다.

"450."

"어떻게!?"

"사정은 설명해줄게. 내가 아무런 대책없이 그냥 튀어나간 줄 알았어? 이래뵈도 몸보신은 확실히 하고 있다고."

'그녀들을 구하려면 말이지...'

아르토리우스의 말에 의하면 던전의 6계층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으면 기억과 힘을 잃고 회귀를 해버린다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계획이고 뭐고 다 나가리가 되어버린다. 그것만은 피해야 했기에 일부러 450레벨을 찍고 던전에서 복귀했던 운현은 상아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사실 나도 할 말이 있어. 부탁할 것도 있고."

그의 말에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

"지금 얘기하기는 그래. 다른 건의 이야기도 해야하니까 조용한 곳으로 가자."

"크윽!! 어떻게 이런 일이!!"

잘린 팔을 부여잡고 카야는 분통을 터트렸다. 신성을 모두 잃어버리다니.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가. 그녀는 빠득빠득 이를 갈다가 휙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된 이상..."

카를로스도 죽고 검은 날개의 대사제도 이제는 없었다. 고급 집행자들도 이번 습격으로 많이 다친데다가 성자가 남겨 둔 유물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 이상 방법은 없었다.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

운현이 가지고 있는 성배만 되찾으면 어떻게든 재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를 갈며 자신의 옆에 있는 두개의 관을 보았다.

"이들을 깨우는 수 밖에..."

217====================

Turning Point

"어째서 레벨이 그렇게 오른거야? 일단 그거부터 말해봐."

"그게 사실은..."

'잠깐만.'

회귀에 대해서 상아와 헤스티아, 필레에게 이야기하려던 운현은 입을 다물었다. 회귀를 한다. 미야와 바제트를 구하기 위해서 회귀를 한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필레와 헤스티아. 그리고 상아에게 닥쳐 올 죽음이라는 운명을 막기 위해서 회귀를 하는 것이다.

'괜찮을까...'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믿겠다고 한 그녀들인만큼 자신의 말을 못믿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운현도 회귀자의 기억파편을 얻지 못했다면, 그리고 마인을 그렇게 쉽게 잡지 못했다면 회귀라는 것을 믿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운현이 걱정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들에게 너희들은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른다. 라는 것을 말하는 것을 걱정했다.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것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에 그가 입을 다물자 상아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짓고 운현의 손을 잡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겁내지 말고 해봐. 뭔데 그래?"

"...화 안낼거지?"

"들어보고."

"날 믿지?"

"그것만큼은 자신할게요. 믿어요. 운현씨."

"나 역시. 네가 어떤 소리를 하든 믿을게. 자. 말해봐."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회귀를 해야해. 내가 레벨이 이렇게 빠르게 오른 것도. 그리고 미믹맨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도 다 그것 때문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회귀...?"

"이해가 안되는데요?"

역시나. 이것만으로는 이해를 하지 못한다. 운현은 그녀들에게 차분히 모든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미야와 바제트의 죽음이 운명때문이라는 것. 현자의 무덤이 있는 숲에서 특별한 마인과 만나고 그를 죽임으로서 전의 기억을 일부분. 그것도 그녀들의 죽음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까지.

'그래도 이건 말 못하겠다.'

미믹맨으로 모험가들을 싹쓸이 했다는 것만큼은 말하지 못한 운현이 모든 이야기를 마치자 헤스티아와 필레, 그리고 상아는 심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에 문제가 있는건 아니지?"

"특별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혹시 환각마법에 걸린 것 아니야? 아니면 암시라도...?"

상아는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둔과 제니스를 불렀다. 그녀들이 방에 들어와 운현을 검사하기 시작하자 상아는 아둔을 보며 물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는걸까?"

"특별히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요? 더 없이 건강해요."

"최면이나 암시같은 것도 걸리지 않은 것 같은데..."

아둔과 제니스는 운현을 검사한 후 떨떠름히 말했다. 저주나 정신계열의 마법에 걸린 흔적은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암시같은 것도 걸리지 않았다. 운현을 검사한 결과를 그녀들이 말해주자 상아는 그들을 내보낸 후 운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야?"

"아마도."

"회귀라니... 신의 영역이잖아요. 시간을 다루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구요."

"딱히 그렇게만도 생각되지 않아.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인벤토리라는 힘. 이것도 어떻게 보면 공간을 다루는 힘이지. 그리고 던전의 마법문. 이것도 공간을 이용한 힘이야."

"하지만 그건...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만든 것일 수도 있잖아요. 운현씨가 이계에서 온 것도 신의 힘이라면..."

"이 세계에 있는 존재가 공간의 힘을 다스렸다는 증거는 더 있어. 상아의 목걸이와 슈트. 그것도 공간을 다루는 힘이 적용된 것이니까 말야. 상아. 그 슈트는 현자가 만들었다고 했지?"

"응. 하지만..."

"신의 영역이라는 시간과 공간. 이 중 공간을 다루는 힘을 이 세계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 현자가 다뤘어. 그렇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회귀도 불가능한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

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힘 중 공간을 다루는 힘이 실제한다는 것이 증명된 이상 시간을 다루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운현의 주장이었다. 그 말에 상아는 입을 다물고 생각하다가 차분히 말했다.

"그래서? 그 계획이 뭔데?"

"계획의 전부는 알 수 없어. 다만..."

"다만?"

"수십, 수백번이나 너희들의 죽음을 경험하고, 같은 세계를 반복하며 내가 내린 세운 계획이라면... 이번엔 반드시 성공할거야."

"...잠깐만."

"왜?"

그의 말을 차분히 듣던 상아는 떨리는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가지 확인하고 싶은게 있어. 우리 모두의 죽음을 봤다고 했지?"

"응."

"내 죽음은 뭐였어?"

"어떤 정체불명의 신전에서 복부에 칼 맞고 죽는 거였어.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웃고 있었어."

"......."

그의 말에 상아의 몸이 딱딱히 굳었다.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말했지. 난 내 죽음을 봤다고."

"응."

"네가 말한 그 죽음. 내가 본 내 죽음과 같아. 그렇다면 네 말이 거짓은 아니라는 건데..."

엘프들이 평생 한번 볼 수 있는 자신의 미래 중 자신의 끝을 봤던 상아는 운현의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헤스티아와 필레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럼... 그게 진짜라는 거에요?"

"우리의 죽음이... 그리고 바제트와 미야의 죽음이?"

"아마 맞겠지. 난 이걸 운현을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어. 그런데 그것을 봤다면... 운현이 얻은 기억이 진짜라는 것이겠지. 상식적으로 칼 맞고 웃을 사람이 어디 있어?"

상아가 쓰게 웃으며 말하자 헤스티아와 필레는 휙 고개를 돌려 운현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녀들의 시선을 담담히 받은 운현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아무튼. 회귀를 하기 위해서는, 내 기억에는 없지만 내가 이렇게 쉽고 빠르게 레벨을 올릴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세운 계획을 실행시키기 위해 내가 마련한 장치 중 하나 같아. 마인을 제거해서 레벨을 올리고. 향후 6계층을 수월하게 돌기 위해서 마인을 활용하는 계획. 미믹은 사람과 몬스터가 있으면 몬스터를 우선적으로 공격해. 미믹이 몬스터를 제거하며 그들의 코어를 흡수하면 마인이 나타나지. 그 마인은 나를 제외한 모두를 공격해. 아마 그는 내가 6계층을 진입하려 던전을 돌 때 내 주변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 그렇기 때문에 마인을 제거해서 빨리 레벨을 올리라고 한 것 같아. 아무리 미믹과 마인이 있다고는 하지만 기본 레벨이 낮으면 위험하니까 말야."

"흐음... 네 말대로라고 치자. 그래서?"

"응?"

"미야와 바제트를 구하고 우리를 구한다라... 하지만 너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상아는 날카로운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상아는 운현의 심장이 멈출만한 말을 꺼내었다.

"성공 가능성은?"

"...뭐?"

"아무리 잘 세운 계획이라고 하더라도 헛점은 있을 수 밖에 없어. 하물며 지금의 너는 네가... 아니, 회귀를 수없이 반복한 네가 세운 계획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 못하잖아. 그렇다면 반드시 구멍은 있을 수 밖에 없지. 네가 생각하는 그 성공 가능성은 어느정도나 되지? 난 네가 세웠다는 그 계획. 반대야. 너무 위험해."

'성공 가능성...'

운현은 상아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절망 끝에 내려 온 구원의 동앗줄이기에 그것이 튼튼한지, 썩은 것인지조차 보지 않고 있었던 운현이 그것을 깨닫고 아무런 말도 못하자 상아는 딱딱히 굳은 운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모르는거야? 아니면 자신이 없는거야."

"...그런 건 아니야. 다만."

"확신하지 못하는 거지?"

"....."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면 해보는게 나쁜 것은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이대로 있는 것보단..."

미야와 바제트를 살릴 수 있다. 자신의 죽음따위는 상관이 없다. 헤스티아는 딱딱히 굳은 운현의 손을 잡으며 다급히 외쳤다. 그런 그녀의 말에도 상아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필레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상아에게 말했다.

"길드장님. 제 생각도 헤스티아씨와 같아요. 운현은 미야와 바제트의 죽음으로 너무 큰 고통을 겪었어요. 그것을 되돌릴 수 있다면.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도전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운현이 막는 것은 저희들의 죽음도 관련되어 있어요. 그럼..."

"너희들. 잠깐 나가줘."

운현의 의견에 찬성하는 헤스티아와 필레를 향해 상아는 싸늘히 말했다. 상아의 말에 헤스티아와 필레는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어서."

"왜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구요?"

"운현과 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까. 쓸데없는 짓 안할테니까 잠깐 나가 있어봐."

"싫어요."

헤스티아와 필레는 고집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들이 버티고 서 있자 상아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입술을 달짝거리며 말을 망설이던 상아는 결국 마음을 다잡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어쩔 수 없군. 하우드의 이야기는 알고 있지?"

"...응."

그녀들이 나갈 생각을 하지 않자 상아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하우드. 운명을 바꾸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결국 그것에 실패하고 운명에 저항하는 하이엘프. 그의 이야기를 꺼낸 상아는 충격받은 듯한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라고 해서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 같아? 그가 세운 계획은 수천, 수만가지야. 하이엘프 중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 운명에 순응하자는 것이 기본이고, 운명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하이엘프야. 그런 그마저도 실패한 것이 운명을 바꾸는 일이야."

"난 바꿨어! 운명을 바꿨다고! 나는 다른 세상에서 온 존재야. 이 세계의 운명과 관련되지 않았으니 운명을 바꿀 수 있어. 하우드가 실패한 것은 그가 이 세계에 묶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그래. 바꿨겠지. 헤스티아와 필레를 살렸으니까. 하지만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미야와 바제트의 운명까지도 바꾼 것 같은데. 그런데 왜 그녀들이 죽은 거지?"

"...그건 내가 이것을 몰랐으니까. 그래서 모든 준비를 하고 있어. 그레이터 힐도 가지고 있고..."

운현이 떨떠름히 말하자 상아는 더 없이 냉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레이터 힐만으로 가능할까? 만약 연속적으로 위기가 발생한다면? 헤스티아가 죽을 위기에 처해지고, 필레가 죽을 위기에 처해지고, 그것이 또 반복된다면? 바제트의 일을 생각해보자고. 바제트는 아마 그 몬스터들의 공격에서 죽었을 운명일거야. 하지만 네가 날 부른 것 때문에 그녀의 죽음은 회피되었지. 하지만 그것을 회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샌드웜의 독침에 바제트가 죽었어. 그걸 생각해보면 죽음은 언제 찾아 올지 모르는 거라고. 위기를 건너고 피하고 막아서. 그것을 모두 회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죽음이 찾아 올 수 있어. 네 마력에도 한계는 있어. 그 한계를 넘어서까지 그녀들에게 그레이터 힐을 걸어줄거야?"

"어떻게든 막을 수 있어. 아둔이나 다른 이들이 있다면..."

"그렇다고 치더라도 한계는 있어."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뭔데? 운명에 순응해서 운명을 바꾸지 말고 모두가 죽는 것을 지켜보라고? 그리고 얌전히 찌그러져 있으라고? 모두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그 가능성이 제시되었는데? 난 한다. 네가 거부하더라도 난 그녀들을 구하고 너도 구할거다. 모두를 구하고 말겠어!"

상아의 지적에 운현은 이를 갈며 일어나 소리쳤다. 지금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구원이라 생각하는 방법을 상아가 정면에서 부정하자 운현은 분노했다. 그럼 이대로 손 놓고 무력하게 모든 이들이 불행해지는 것을 지켜보라는 것인가?

그가 자신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 상아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난 거부한다. 네가 회귀를 하는 것. 인정할 수 없어."

"왜? 그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좌절감때문에? 상아. 내가 널 잘못본 것 같네. 고작 이렇게 주저앉..."

그가 이죽거리듯 말하자 상아는 결국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벌떡 일어난 그녀는 운현의 멱살을 잡아채고 그와 마찬가지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마주 응시했다.

"이 등신아! 내가 그딴 운명론때문에 그러는 줄 알아!? 나도 널 응원하고 싶어! 네가 성공해서 상처받지 않는 것을 보고 싶다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고 싶어!! 미야가 죽었을 때! 바제트가 죽었을 때! 네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봤는데 아무 생각없이, 그저 가능성이 없으니까 하지 마라고 하는 줄 알아!?"

운현의 말에 상아는 빠득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그럼 뭔데!?"

"그럼 물어보겠어. 운현. 넌 만약 네가 세운 완벽하다 자부하는 계획이 실패하면 어쩔건데?"

"...다시 한다. 회귀를 할 수 있는 이상 다시 하겠어. 몇번이고, 몇번이고, 몇번이고! 다시 도전하겠다. 너희들을 구할 수 있다면! 이 저주받은 운명에서 너희들의 죽음을 막을 방법이 있다면 난 포기하지 않겠어!!"

운현의 말에 상아의 표정이 달라졌다. 화가 난 얼굴에서 슬픈 표정으로.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운현이 당황한 순간 상아는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하지 말라는 거다. 이 등신아..."

"왜! 뭐가 나쁜데!"

"그럼 너는 모두를 구할때까지 수십, 수백, 수천! 아니 그 이상! 한번이 될 수도 있고 수억번이 될 수도 있겠지! 그렇게 많은 회귀를 거치며 우리의 죽음을 바라보겠다는 거잖아!! 성공할때까지!!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 했지. 운현. 회귀를 해서 실패를 하면 넌 다시 기억을 잃고 돌아갈거야? 내가 보기에 넌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 포기하지 않겠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기억과 능력을 가진 채 다시 회귀를 할거다. 그리고 다시 실패를 하고, 다시 실패 원인을 찾고 다시 분석을 하며 우리의 죽음을 마주하겠다는 거잖아..."

"아..."

"사, 상아 길드장님."

그제서야 헤스티아와 필레는 상아가 회귀하는 것에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두려워 한 것이다. 운명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 아닌, 운현의 계획이 실패해서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닌.

그 과정을 거치며 운현이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그건..."

"회귀? 좋아. 한가지만 약속해줘. 다음 회귀에서 실패하면 절대 다시 회귀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우리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우리를 구하지 않겠다고. 그것을 약속해준다면 나도 인정한다. 인정하고 네가 하려는 도전을 위해 내 모든 힘을 다해 돕겠어. 그러니 제발..."

상아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약속해줘..."

218====================

Turning Point

"거절한다면?"

"내 모든 힘을 다해 널 막을거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내가 하고자 한다면 막을 수 없을텐데? 내가 가진 힘에 대해서는 말해줬잖아."

"던전 6계층에 진입해야 한다고 했지? 그럼 길드의 힘을 총 동원해서 막을 수 있어. 아무리 너라고 해도 나와 길드의 간부들과 모험가들이 모든 힘을 쓰면 그것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가능하고? 단지 나 하나 막겠다는 걸로 길드를 움직이는게 가능할 것 같아? 그리고 그들이 끼더라도 날 막을 수 있을까? 3계층, 4계층의 미믹과 마인을 소환하면 그들이라고 하더라도 날 막을 수는 없을텐데?"

"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지."

상아의 단호한 말에 운현은 눈을 감았다. 그녀는 확고한 의지를 담은 채 그를 응시했다. 그에게 확답을 받지 않는 이상 절대 물러나지 않을 기세를 보이는 상아를 향해 운현은 차분히 말했다.

"약속할게."

"...정말이지?"

"그래. 만약 이번 회귀로 실패한다면 너희들을 구하지 않겠어."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응. 네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그토록 고통스러워해야 한다면... 차라리 포기를 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헤스티아와 필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 상아의 말대로 운현이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그토록 노력을 해야 한다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 굴레에 운현이 스스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상관없다.

"미야씨와 바제트씨라고 해도 저희와 같은 마음일거에요. 그러니까 운현씨. 죄책감을 가지지 마세요."

"이런 말 밖에 해줄 수 없네. 그러니까..."

"응. 알았어. 이번 회귀가 내게 있어서 마지막이 될거야."

"후우... 그럼 이제 우리가 해줘야 할 일은 뭐야?"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쉰 상아는 눈에서 힘을 풀고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상아를 잠시 바라보던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음... 일단 미믹맨이 나타났다는 것을 던전 도시에 알려줘. 미믹맨과 다난교가 한패다. 라고...다난교의 현재 최고위에 있는 카야를 놓쳤어. 그녀는 내게 빼앗긴 성배와 신성을 되찾기 위해서 최후의 공격을 할거야. 그것을 위해 던전 도시의 모든 전력을 끌어모을 필요가 있어. 다난교만으로 안된다면 미믹맨이 날뛰는 수 밖에 없겠지."

던전 도시는 강하다. 하지만 그 강함은 던전 도시가 자신들의 힘을 끌어모았을 때 최고조를 찍는다. 이미 다난교가 몇번이나 던전 도시를 습격했는데도 용병 연맹이나 모험가 길드에서는 비상시를 대비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을 막아야 한다.

"이번에는 카야를 잡는다. 그녀가 없어진다면 너희들에게 다시 닥칠지도 모르는 위협을 최소화 할 수 있겠지."

지금 운현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헤스티아와 필레, 상아를 죽일 수 있을 만한 존재는 다난교라고 볼 수 있었다. 모험가 길드의 가장 큰 적인 용병 연맹의 연맹장인 아르토리우스가 자신과 한편인 이상 그들만 잡고나면 운명 가져 올 위협을 한정지을 수 있었다.

"아르토리우스는 내 제안을 받아들일거야. 이미 꽤 많은 용병 연맹의 간부들이 처벌받고 있으니 새로운 간부를 뽑는다는 이유와 던전 도시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겠지. 용병 연맹은 모험가 길드와 다르게 간부의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는 이들이 상당하다고 들었어. 아르토리우스의 명령이 떨어진다면 그들은 반드시 움직인다. 그러니 상아. 각 계층에 있는 고급 길드원들과 각 클랜. 그리고 길드의 간부들을 모아줘."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그만큼의 힘을 모은다면 한 왕국이 덤벼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다. 고작 사교인 다난교 하나를 상대하는데 이만큼의 힘을 모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던 상아의 질문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금 싸우려는 상대는 다난교도가 아니야. 운명이지. 최대한 많은 힘을 보유해야해. 이번의 내 목표는 너희들을 안전하게 살린 상태에서 회귀를 하는 것이니까 말야."

"알았어. 준비해 놓을게. 아르토리우스에게는 어떻게...?"

"내가 말하고 올게."

"알았어. 그럼 이렇게 있을 여유는 없겠네. 필레. 헤스티아. 너희들은 반드시 운현 아니면 아둔과 함께 다니도록 해."

"알겠어요."

"네."

"그럼 난 갔다올게. 다들 조심하라고."

여인들에게 느긋하게 말해 준 후 방 밖으로 나온 운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했구나...'

어쩌면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 어쩌면 너무나도 희망에 가득 찬 말이라서 그것을 일부러 외면한 것일지도 몰랐다. 미야와 바제트를 구할 수 있고 다른 이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 그렇기에 실패의 가능성을 아예 외면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할 수 밖에 없다. 남은 이들은 모든 힘을 총 동원한다면 어떻게든 운명을 바꿔가며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바제트와 미야를 살리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

"실패하면...?"

상아의 말을 떠올리며 운현은 피식 웃었다. 실패한다면 포기하라고?

'웃기는 소리를...'

포기할리 있겠나?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그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인성이 마모된다고? 그게 어쨌다는 건데? 그녀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완벽하지 않은 계획이라 하더라도...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완벽을 향해 다가갈 수 있겠지. 불안해도 상관없다. 그럼 한다. 실패한다 하더라도 무의미한 실패는 아니야. 계획은 보완되어지고 완벽해 질거다. 그럼 반드시... 구할 수 있어.'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자기 멋대로 떠오른 생각에 운현은 붕붕 고개를 저었다. 실패할 생각따위는 지운다. 반드시 성공한다. 그것만을 생각해야 한다. 운현은 떨리는 주먹을 꽉 쥐고 시청으로 향했다.

시청에 도착한 운현은 다난교의 습격으로 여기저기 부서져 있느 시청 벽과 시청건물들을 발견했다. 하이딩을 하고 본 것이기는 하지만 피해는 상당한 것 같았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용병들과 경비병들.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신관들을 지나 시청의 중앙 건물 앞에 도착한 운현은 신관에게 치료를 받는 여인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혼자 잘도 덤비더니...'

몸 여기저기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우르나는 치료를 해주는 용병을 향해 인상을 왕창 구겼다. 검에 베인 상처에 힐링포션이 부어지는 것이 아팠는지 움찔 몸을 떤 그녀는 화를 내려다가 다가오고 있는 운현을 보고 히죽 웃었다.

"누구?"

"모험가 길드의 운현이라고 합니다. 피스나씨와 아르토리우스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흐음... 모험가 길드라..."

운현을 위 아래로 흝어 본 그녀는 웃는 얼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상처 치료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검을 잡은 그녀의 모습에 용병들은 기겁하며 그녀를 말렸다.

"우르나님!"

"이러다 상처가 더 벌어진다구요! 좀 기다리셨다가!"

"하하하!! 전투중에 입은 상처는 오히려 영광이지... 그보다 당신. 강해보이는데? 어때? 한판뜰까?"

진짜 전투광이다. 다난 교와 싸워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주제에 운현의 강함을 눈치채고 그녀는 검을 반쯤 뽑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용병들은 인상을 왕창 구기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 지금 싸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저는 전투직도 아니고 고작 도적에 불과한걸요."

"그런 것 치고는 상당히 강해보이는데."

"정말이에요. 아마 상대도 안될걸요?"

'당신이 말이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운현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에 우르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자신의 느낌상 운현은 강했다. 적어도 자신 수준의 레벨은 될 법한 느낌에 고민하던 그녀는 볼을 긁적거리고 자리에 앉았다.

"쳇. 그런가. 됐어. 그럼. 피스나씨와 연맹장님은 시청 건물에 있을테니까 가봐."

"고맙습니다. 그럼."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운현은 차분히 시청의 2층으로 향했다. 아직 박살난 문은 고쳐지지 않은 모양이다.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쉬고 있던 아르토리우스는 발소리를 듣자 눈을 뜨고 방긋 웃으며 운현에게 다가왔다.

"어머? 여긴 무슨 일이세요?"

"몇가지 물어보고 확인할게 있어서. 그리고 부탁할 것도 있고."

"저에게요? 아니면 피스나씨에게요?"

"둘 다. 피스나씨는?"

"지금 실험 중이에요. 신성이 없어져서 걱정했는데 큰 문제는 없는 것 같네요. 연구는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어요. 보실래요?"

"응."

아르토리우스와 함께 안으로 들어간 운현은 피스나가 예의 그 장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화면에 보이는 피스나는 저번의 그 흰 공간이 아닌 다른, 마치 모델링을 위한 박스들로 보이는 육면체들이 가득 한 공간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피스나씨."

"아. 운현씨. 왔어요?"

운현의 말에 피스나는 눈을 뜨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에게 인사를 마친 운현은 피스나가 가상의 공간에서 나오자 그녀의 몸을 보며 물었다.

"어디 다친데는 없어요? 다난교가 습격했다던데..."

"다행히 아르토리우스씨가 막아줘서 살았어요. 운현씨는요? 모험가 길드는 별 일 없나요?"

"네. 이쪽은 큰 일이... 그보다 피스나씨."

"네?"

"미믹맨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죠?"

"미믹맨이라... 네. 알죠. 시장 선거 전에 날뛰던 빌런 아닌가요?"

"네. 그자가 다시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 그거 큰일이네요."

운현의 말에 피스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용병 연맹의 간부들이 나서도 잡지 못하고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 나서서 겨우 쫓아냈다는 그 빌런이 다시 나타나다니. 피스나가 당황하자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아르토리우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난교가 이렇게 날뛰는데 맞춰서 미믹맨이 나타나다니... 그들이 한패일 가능성도 생각해봐야겠네요."

"그렇네요. 으음... 어쩌죠? 경비병들을 더 늘리는 것은 힘들텐데..."

다난교의 습격으로 많은 이들이 다쳤다. 불안감에 빠져 있는 시민들을 달래주려면 병력을 더 준비하는 것이 좋겠지만 지금 당장 새롭게 병력을 뽑는 것은 무리였다. 장비라면 제작자 연합의 연합장 위치에서 제공해 줄 수 있지만 그것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피스나가 낭패한 얼굴로 말하자 아르토리우스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병력은 제가 충원해 줄 수 있답니다. 마침 저희 용병 연맹의 간부 자리가 많이 비었거든요. 그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서 간부를 뽑아야 하는데... 그 심사 때문에 전쟁을 끝낸 용병들이 복귀할 예정이니까요. 너무 걱정마세요."

"그거 다행이네요! 그럼 아르토리우스씨!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운현씨. 상아에게 전해주겠어요? 장비나 도구를 지원해 줄테니 모험가 길드에서도 준비를 부탁한다고..."

"알겠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풀려가는 것에 운현은 만족스럽게 웃은 후 아르토리우스를 보았다. 말 한마디 안했는데 쉽게 자신의 의견대로 도와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운현은 피스나가 만들고 있는 장비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저 연구는 얼마나 남은 거에요?"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일주일에서 이주일 정도면 프로토 타입은 완성이 될 것 같아요. 물론 세부적인 조정까지 한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일단 제 목적은 요한의 의식을 가상의 세계로 불러오는 작업이니까요. 그것 뿐이라면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아요."

"쉽지 않은 일인데 잘 진행되고 있네요.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요?"

운현의 질문에 피스나는 쓴웃음을 짓고 차를 홀짝였다.

"방법이라기보다는... 필사적으로 하는 것 뿐이죠. 그만큼 요한을 구하고 싶다는 집념과 오기가 있으니까요."

'집념과 오기...'

피스나의 방에서 나온 운현은 아르토리우스가 따라나오자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자신의 생각을 읽고 잘 따라와준 것이 기특한 그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아르토리우스는 히죽거린 후 차분히 말했다.

"카야가 도망치기는 했지만 그년이 얌전히 포기할 년이 아니에요."

"그러겠지."

"그럼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운현님은 무슨 방법 있나요?"

"카야가 가진 힘이 얼마나 될까?"

"일단 지금 가지고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힘만 따지면 절대 운현님을 상대로 이길 수 없어요. 아니, 그걸 떠나서 운현님이 어떤 미믹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다르죠. 2계층 이상의 미믹을 다섯 이상 보유하셨다면 지금 카야와 만나도 그년을 찢어 죽일 수 있을거에요. 다만... 아니. 뭐 이건 나중에 얘기하죠."

"그럼 다행이군. 하지만..."

아르토리우스를 보며 운현은 말꼬리를 흐렸다. 카야가 바보가 아닌 이상 절대 정공법대로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운현은 그녀를 보며 떨떠름히 말했고 아르토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년도 머리는 있으니까요. 지금 운현님이 가진 최대의 약점은 바로 헤스티아와 필레, 그리고 상아에요."

"...그렇겠지."

"이왕 이렇게 된거 그들을 다 죽이면 안될까요? 그럼 안정적으로 회귀에만 집중할 수 있잖아요. 그녀들은 운현님 최고의 약점이라구요."

"미친 소리는 관둬."

아르토리우스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운현은 그녀의 멱살을 확 잡았다. 그가 자신을 싸늘히 바라보자 아르토리우스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들에게 집착하죠? 어차피 회귀를 하게 되면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갈텐데. 그들이 살아있건 죽었건 말이죠."

"헛소리 지껄이지마. 최대한 구할 수 있는만큼 구하고 간다."

"이해할 수 없군요. 뭐... 그게 운현님 뜻이라면 따르죠. 그렇다면 카야가 노릴 것은 헤스티아겠네요. 지금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는 필레나 상아를 납치할 수 없을테니까 말이죠."

"...음. 그에 대한 준비는 해놔야겠어. 그년이 무슨 짓을 할거라고 생각해?"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죠. 또 폭발로 테러를 일으키든가... 아니면. 아까 말하다 만것. 그녀에게 있어서 최후의 수단이라고 할 만한 일을 할 수도 있을지도 몰라요."

"아니면?"

"던전 도시에서 아크 리치를 깨우는것. 다난교에 보관되고 있는 성자의 유물 중에서 가장 강력한 유물 중 하나가 언데드 봉인 상자에요. 그 언데드 봉인 상자에는 다난교가 만든 최악의 언데드인 아크 리치가 잠들어 있어요. 그 아크 리치를 써서 모험가 길드를 공격하고, 그 틈을 노려 헤스티아를 빼돌린다고 생각하면..."

"자, 잠깐만! 아크리치라니? 그건 또 뭔데!?"

"으음... 뭐라고 해야 하나. 필라니아 몬스터 웨이브라고 알고 계세요?"

219====================

Turning Point

"응."

예전 윈드와 필레가 참가했던 전투다. 갑작스레 몬스터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그것을 막기 위해서 그녀들이 참가했던 전투. 그것을 운현이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토리우스는 설명하지 않아도 잘됐다고 생각한 후 말했다.

"몬스터 웨이브가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세요? 운현님은 한번 겪으셨죠?"

"사자의 팔찌로..."

"네. 사자의 팔찌는 착용자의 기운을 언데드로 바꾸는 것이에요. 언데드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증오해요. 그리고 그 반동으로 본능이 강한 몬스터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언데드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증오하는 것처럼 몬스터들 역시 그 언데드를 증오하죠. 그것과 같아요. 필라니아 지방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이유가."

"아니... 그럼 다난교에서 그 리치를 만들었다는 거야?"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진짜 하다하다 못해 별 짓을 다했구나. 그가 기가막혀하는 것을 보며 아르토리우스는 생긋 웃었다.

"카야 그년이 죽일 년이죠. 전대 성녀는 나름 다난교의 교리를 따르는 온건파였어요. 그런 그녀를 제거하고 그녀를 산체로 리치로 만들어버렸죠. 그 과정에서 필라니아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고요."

"...인신공양에 산채로 리치를 만들고... 진짜 대단하다."

악당도 이런 악당이 다 없다. 운현은 다난교의, 그리고 그 다난교를 이끄는 카야의 행동에 감탄이 나왔다. 적이지만 진짜 대단하다. 어쩜 저렇게 쓰레기같을 수 있을까.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녀의 방침에 감탄하던 운현은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아크 리치? 그게 얼마나 강한데?"

"흠... 추정 레벨은 한 430~40쯤 될걸요. 던전 안의 몬스터를 제외하면 거의 최강이라고 볼 수 있죠."

"와... 근데 그걸 왜 지금까지 안쓰고 있었지?"

"컨트롤이 불가능하니까요. 다난교도도 인신공양에 답이 없는 교단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신성력을 다루는데 언데드를 컨트롤 할 수는 없죠.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어요. 너 죽고 나 죽자. 뭐 이런? 거기에 산채로 리치로 만들어졌기 때문인지 산자에 대한 증오가 일반적인 다른 언데드에 비해 대단해서... 잘못 건드렸다간 카야마저도 죽을 수 있거든요. 자기 목숨은 정말 대단히 아끼는 그년인만큼 그것만은 쓰고 싶지 않았겠죠."

너무 구석으로 몰았나보다. 카야가 아크 리치를 꺼낼 정도로 분노하게 만든 게 잘한 짓일까? 운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큰 일 아닌가?"

"아니... 뭐 그렇다고 해서 못잡을 정도는 아니죠. 애초에 430~440이라고 해봤자 던전의 5계층 끝자락에 있는 몬스터들 레벨이고. 아마 길드의 간부들 모두랑 각 클랜의 클랜장들이 몇명 정도만 나서면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을걸요?"

"뭐야. 그럼 별 것 아니잖아."

고작 그정도라면 자신까지 합세한다면 손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운현이 맥빠진 얼굴로 대답하자 아르토리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끝이 아니에요. 아크 리치가 생성되면 그 아크 리치를 없애기 위해서 각지의 몬스터들이 던전 도시로 몰릴걸요? 물론 운현님이 던전에서 겪은 만큼은 아니겠지만 말이죠. 던전에는 한걸음 걸으면 몬스터 밭이니... 아마 던전 도시 인근에 있는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올거에요."

"허어..."

리치도 리치지만 던전 도시를 공격할 몬스터까지 상대해야 하는 것인가. 운현이 탄식을 터트리자 아르토리우스는 그를 향해 손가락을 하나 들고 히죽 웃었다.

"하지만 뭐, 큰 걱정은 안하셔도 된답니다."

"왜?"

"용병들이 모이고 있으니까요. 아까 피스나씨에게는 부를 거라고 얘기만 했지 사실은 이미 불렀거든요. 바민이 까불고 날뛰었을 때 신규 간부를 뽑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소집령을 내렸으니까 내일이나 내일 모레 쯤이면 간부직을 노리는 대부분의 용병단장들이 자기 용병대를 이끌고 모두 도착하겠네요. 예상 병력만 오만이 넘어요. 그리고 윈디아씨에게 얘기를 해놨으니 식량 문제도 없답니다. 또 피스나씨가 무기와 장비를 지원해준다고 했고."

"너 어째 이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운현이 가는 눈으로 바라보며 묻자 아르토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대충 예상을 했을 뿐이에요. 모든 것의 움직임에는 어쩔 수 없는 패턴이라는 것이 있어요. 개중에 엄청난 별종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궁지에 몰린 순간에 인간이 선택하는 선택지는 대부분 같답니다. 자살, 혹은 마지막 발악. 그것을 알고 있다면 그들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예측할 수 있어요."

"그래서?"

"회귀 전의 운현님은 이번 회귀를 끝으로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했어요. 바민이 반란을 일으키고 헤스티아와 필레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일이 이렇게 될 것 같더군요. 헤스티아와 필레가 죽지 않았다. 지금의 운현님이라면 반드시 그녀들을 살리려 할 것이다. 그리고 운현님은 회귀를 위해 던전에 들어가야 하니 레벨을 최대한 올리실 것이다. 아직 카야가 살아 있으니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한번 이상 던전 도시를 습격할 것이고 그때 운현님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왜? 다난교 때문에 미야씨가 죽었으니까. 그 복수를 위해서 운현님은 카야를 잡으러 올 것이다. 만약 잡게 된다면 모를까 카야를 놓치게 된다면 카야의 성격상 그냥 물러나지는 않을테니 성배를 써서 다른 이들에게 신성을 부여해 마지막 공격을 하든가, 아니면 사자의 팔찌를 써서 언데드를 불러오든가. 그것도 아니면 마지막 비밀병기인 아크리치를 쓸 것이다. 이 세가지. 세가지에 대항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용병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고 용병들이 버티기 위한 물자를 마련하는 일이에요. 예전에 제가 윈디아씨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청에 갔던 것 기억나시죠?"

"어? 응."

시장선거를 할 때 아르토리우스가 시청에 있던 것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린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토리우스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때부터 요청을 해놨어요. 언제 던전 도시에 일이 터질지 모르니 근교의 도시나 영지에 식량과 물자를 비축해달라고. 윈디아씨를 설득하기는 힘들었지만 뭐, 적당히 거래를 할 수 있었어요. 마차로 하루 거리 정도에 오만명이 일년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식량과 물자를 비축해놨답니다."

"허... 그냥 싸움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운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폼으로 한 조직의 연맹장을 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그의 시선에 아르토리우스는 그녀답지 않게 부끄러워했다.

"아, 아이참. 그렇게 보지 마세요. 다 운현님의 가르침인데요. 뭐..."

"엥?"

"많은 회귀를 거치면서 운현님께선 단순히 그녀들의 죽음에만 집중했던 것은 아니에요. 그녀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방법을 마련해야 하고, 그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아야 했죠. 하나의 현상으로 몇가지 예측을 해야 했고 그것에 따라 움직여야 했어요. 전 그걸 따라했을 뿐이에요."

"......"

아르토리우스는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것처럼 따뜻한 눈으로 운현을 응시하며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당신도 가능합니다. 회귀 전의 당신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수많은 가짜의 세계를 경험한다면... 그게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군. 알았어."

가짜 세계를 경험한다. 운현은 그녀의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가능할까? 아니.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면 되는 거다. 피스나의 연구가 끝나기만 한다면... 운현은 상념을 멈춘 후 원제로 돌아와 그녀에게 물었다.

"그리고 길드 내부에 다난교도가 있을 수도 있지. 어떤 방법을 쓸까?"

"제가 보기엔..."

아르토리우스는 희미하게 웃었고 그녀의 웃음을 보며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쓰겠지?"

"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니까요. 리치를 깨우고 그 리치에게 적대감을 품은 바깥의 몬스터들이 몰리게 하고, 그것으로 인해 만들어진 혼란을 이용해 길드 내부에 있을 다난교도, 혹은 배신자를 이용해서 헤스티아씨를 빼돌리겠죠?"

"그럼 그 대응책은 어떤 걸 쓰는게 좋을까?"

운현의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히죽 웃었다.

"그녀는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거에요.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죠."

"일부러 잡힌다?"

"네."

"...이거 위험하겠구만."

"하지만 그게 제일 좋아요. 일단 용병들을 모두 불러 모으면 그들만으로도 몰려 들 몬스터들을 막을 수 있어요. 그리고 모험가 길드의 고급 모험가들과 상위 클랜. 길드 간부들이 힘을 합치면 리치라고 해도 오래 버틸 수 없답니다. 리치는 카야의 히든카드에요. 리치가 발생하면 카야는 자신감을 가지고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그때 잡히신다면 카야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성배를 빼앗기 위해서 나타날 거에요."

"다른 녀석이 나타나지 않을까?"

"카야는 기본적으로 자신 외에는 믿지 않는 여자에요. 그런 자가 성배라는 초 중요 아이템을 다른 자의 손에 넘길까요? 자신의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절대 안심하지 못할 여자인데. 그리고 성배를 얻으면 운현님이 가지고 있는 신성을 손에 넣으려 하겠죠."

"그렇군... 하지만 용병들이 이렇게 몰려 있는데 카야가 과연 리치를 불러낼까? 오히려 도망가지 않을까?"

운현의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절대 그녀는 도망가지 않을 거에요. 꼴에 자존심은 강해서 운현님이 팔까지 잘라놨으니 그거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난리를 칠거에요. 사자의 팔찌를 쓰든, 아크 리치를 쓰든. 이 수가 오히려 자충수인지도 모르고 말이죠. 운현님. 잘 기억해두세요.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서 항상 자신의 기분에 맞는 선택을 하려고 한답니다. 그것의 성공 가능성보다는 단지 이것을 씀으로서 내가 성공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죠."

"......."

그녀의 말에 운현은 상아의 말을 떠올렸다. 회기를 해서 실패 할 경우를 생각해보았냐는 말이 왜 떠오르는 것일까. 그가 복잡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토리우스는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모든 책략의 기본은 이거에요. 사람의 마음을 읽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 평상시라면 모를까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이라면 그 마음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지금 카야는 성배까지 빼앗겨 완전히 궁지에 몰려 있어요. 그런 그녀가 할 선택지는 얼마 없답니다. 공격, 혹은 후퇴. 하지만 후퇴의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요. 카야의 성격상 그럴리 없거든요. 그렇다면 답은 하나 뿐이죠. 그녀는 자신의 방법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을거에요. 근거? 그런 것 따위 그녀에게 지금 중요한게 아닐걸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히든카드가 반드시 먹힐 것이라는 자신감 밖에 없을거에요."

"...허. 대단하네."

아르토리우스는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 키득거리며 눈을 반짝거렸다.

"아아~ 카야의 그 똥씹은 표정을 생각하니 몸이 두근두근 거리네요. 카야를 잡을때는 꼭 말씀해주세요. 저도 갈테니까 말이죠."

"...너 걔 진짜 싫어하나보다."

"당연히 싫죠. 아니... 전 다난교라면 다 씹어먹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는데요?

"좋아. 마지막으로 헤스티아, 필레, 상아의 위험성은?"

"없다고는 못하겠네요. 애초에 운명에 걸려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죠."

아르토리우스에게 있어서 헤스티아나 필레, 상아의 가치는 그리 높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회귀만이 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말에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들의 위험을 배제하는 방법까지 생각한다면?"

"방법이야 몇가지 있지만 그리 추천하고 싶지는 않네요. 운현님의 힘으로 그들을 기절시킨 다음에 어디다가 묶어놓고 숨겨놓으세요. 뭐, 그것도 완전히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

"그건 힘들겠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방법 없어?"

"헤스티아라면 모를까 상아와 필레는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해요. 거기에 아둔이나 다른 성직자들이 함께할테니 그녀가 죽을 일은 없을거에요."

아르토리우스는 걱정을 하는 운현을 향해 무덤덤히 말했다. 그런 그녀의 말에 또다시 한숨을 내쉰 운현은 쓴 입맛을 다시고 말했다.

"당분간은 내가 헤스티아에게 붙어 있어야겠네. 아르토리우스. 피스나의 보호를 부탁해."

"알겠어요. 그리고 운현님이 그렇게 걱정을 하시니 라티나를 붙여드리죠. 라티나라면 다난교의 눈에 띄이지 않게 헤스티아를 지킬 수 있을거에요."

"흠..."

"왜요?"

"아니 생각해보니까. 이게 최후의 수단이라고 했잖아. 그럼 이것만 버티면 카야가 더 힘을 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아닌가?"

"뭐... 그렇죠?"

"그럼 됐네. 괜히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겠다. 얌전히 길드 회관에서 기다려야겠어. 길드 회관에는 꽤 많은 모험가들이 있을거야. 그들과 함께라면 카야를 잡는 일도 더 수월해지겠지. 정 그녀가 무서워서 오지 않는다면야... 어쩔 수 없는거고."

카야에 대한 복수심? 물론 없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길드 간부들이 모두 움직이고 없는 상황에서 라티나 하나 믿고 헤스티아를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았다. 운현의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끝까지 헤스티아를 지키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을게요."

"넌 어떻게 할 생각인데?"

"일단 용병들을 이끌며 몬스터를 상대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카야가 나타났다 싶으면 바로 그년 잡으러 가야죠."

"후우... 그럼 미야와 바제트의 복수는 너에게 맡기지."

220====================

Turning Point

"쳇. 마음대로 하세요."

카야를 잡는 것이 회귀를 하는데 필수적인 일이 아닌 이상 굳이 그녀에게 집착할 필요가 없었던 운현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쉰 후 그녀에게 말했다. 그의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하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지금의 운현님을 보니까 알게 된 게 있네요."

"뭐가?"

"저에게 책략을 가르쳐 주신 것은 운현님 이었어요. 운현님은 책략의 기본이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라고 하셨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 운현님은 운현님도 모르고 있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의 일이기에 더 그런 듯..."

"뭐가?"

"운현님은 남이 싫어하는 일을 아주 잘한다는 것. 카야가 이렇게 최후의 수단까지 쓰면서 상대해주기를 원하는데 그걸 아예 회피해버리시겠다는 거잖아요?"

"음. 뭐 그렇게 되나?"

"네. 운현님이 헤스티아를 지키기로 마음먹고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한다면 카야가 심어 놓은 어떤 배신자나 집행자라 하더라도 그녀를 해할 수 없겠죠. 카야가 이번 일을 계획하는데 전제조건은 헤스티아를 빼돌린다는 것인데 그걸 원천 봉쇄하겠다는 거잖아요? 후후후... 정말 사람 짜증나게 하는건 기본 소양이신 것 같네요. 사람을 짜증나게 하고, 그가 싫어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끔 만드는 거. 그것도 정말 뛰어난 책사의 소양이라구요. 패턴을 단순화하게 해서 그에 대한 대응을 적절히 취할 수 있죠. "

"...칭찬이야?"

"물론이죠."

어째 욕 같다. 운현이 인상을 찡그리자 그를 향해 빙긋 웃은 아르토리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무운을 빌죠. 만약 카야가 미쳐서 길드로 들어오면 그년의 이야기는 듣지 말고 바로 목을 베어버리세요. 무슨 쥐구멍을 파놓았을 지 모르는 년이니까요."

"흐음... 알았어."

"왜,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나는 그저..."

"그저 당신은 모험가 길드의 길드원일 뿐이죠. 하지만 이것 하나만 알아두세요. 세상 일이란게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선택을 하는 것 역시 당신이 해야 할 일이죠."

어두운 방 안에서 실비아는 이를 갈며 검은 날개를 한 여인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뒤에 잡혀 있는 짙은 금발의 잘생긴 사내가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며 실비아는 욕지기를 내뱉었다.

"개년!! 나에게 길드를 배신하라고 하는 거냐!?"

"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 카야는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이 사랑하는 약혼자를 살리고 싶다면 제 말대로 하세요. 불가능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필레나 상아를 데리고 오라는 것이 아니잖아요. 기회는 저희가 만들어드립니다. 헤스티아. 그 여자만 데리고 나오세요. 그럼 됩니다. 당신의 힘이라면 가능하지 않나요?"

카야의 말에 실비아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자신이 존경하고 따르는 이를 배신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과 존경심.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실비아는 사내의 목을 날카로운 검이 살짝 긁자 결국 그녀의 말에 굴복하고 말았다.

"...하면 되잖아. 하면! 그럼 그를 풀어주는거겠지?"

"물론이에요. 저희가 당신에게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겠어요? 아니라구요. 저희는 정의를 수호하고 선을 숭상하는 다난 교의 독실한 신자라구요."

인질을 잡아 협박을 하는 주제에 잘도 말하는 저 혓바닥을 잘라버리고 싶다. 실비아는 빠득빠득 이를 갈며 그녀를 노려보다가 휙 몸을 돌려 나갔고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카야는 자신의 뒤에 있는 두 여인에게 말했다.

"운현이 나오면 반드시 잡아. 그놈이 가지고 있는 성배와 신성을 빼앗지 못하면..."

"알겠습니다."

"리치는 준비시켜놨습니다. 일주일만 기다리시면 깨어날 것입니다."

"좋아. 그럼 우리도 약속의 시간까지 힘을 회복하며 기다리자."

모두가 떠나가자 카야는 자신의 잘린 팔을 보며 빠득 이를 갈았다.

"두고보자... 이 개자식...!! 반드시 이 원한을 갚아주마...!!"

일주일이 지났지만 다난교의 습격은 없었다. 피스나 역시도 아직까지는 연구를 끝마치지 못한 듯 운현에게 연락을 주지 않았다. 그냥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것처럼 헤스티아와 자고, 낮에는 길드 회관에서 시간을 때우거나 둘이 근처를 나가는 등 조용히 시간을 보내던 와중 길드 회관에서 점심식사를 할 때 헤스티아는 걱정스레 물었다.

"운현씨."

"응? 왜?"

"에... 이렇게 있어도 괜찮은거에요?"

"아직은 기다려야 하니까..."

"뭘요?"

"...그런게 있어."

카야가 습격하기를 기다린다. 그녀가 만약 자신을 잡기 위해 길드 회관으로 온다면 찢어죽이겠지만 오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아르토리우스에게 맡긴다. 자신은 모르겠지만 아르토리우스가 자신에게 라티나를 붙여뒀다고 했으니 카야가 진짜로 나타나면 반드시 잡을 수 있었다.

그 사정을 알리 없는 헤스티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키스해주었다. 그의 키스에 헤스티아는 쓰게 웃었다.

"운현씨."

"왜?"

"만약... 회귀를 하게 된다면... 제가 운현씨를 사랑했던 것들이... 이렇게 보낸 시간들과 추억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이겠죠?"

"아마 그렇겠지."

"그건 좀 싫네요. 아, 하지만 미야씨와 바제트씨가 살 수 있다는 것은 좋아요."

헤스티아는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꽉 쥐었다. 예전 트윈문 축제때 사주었던 목걸이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운현은 담담히 말했다.

"만약 회귀를 하게 된다면... 너를 만나자마자 사랑한다고 말할게. 전처럼 내 말도 안되는 괴로움과 억지로 널 힘들게 하지 않을게."

"헤에... 그건 좀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반드시다. 이번에는 그런 것 따위는 없어. 내가 세운 계획에 의거한다면..."

"의거한다면?"

"돌아 올 나는 기억을 가지고 있을테니까. 너희들을 사랑한 기억을. 너희들을 지켜야 한다는 기억을 말야."

걱정하는 헤스티아를 꼭 끌어안아 준 운현은 그녀에게 다짐하듯 속삭였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된 헤스티아는 운현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약속은 지켜요."

"약속... 알았어."

거짓을 말했다. 진지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헤스티아를 향해 거짓말을 한 운현은 그녀가 방긋 웃자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차가 담긴 접시를 든 채 창문 근처에 있는 자리로 이동했다. 창문을 통해 내리쬐는 햇살이 기분 좋다.

"그나저나 날씨 좋네. 나가지 못하는게 아쉽구만."

아직 던전 도시 내에 운현을 다난교에 바쳐 더 이상의 습격을 막자. 라는 이야기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르토리우스를 비롯한 도시의 각 수장들이 몇일간 꾸준히 노력하고, 또 용병 연맹의 용병들이 대거 던전 도시로 몰려온데다가 길드의 간부들과 고급 모험가. 클랜들이 다난 교가 나타나면 갈아마셔버리겠다고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는 탓에 그들은 그 의견보다는 다난 교가 나타나면 이번에는 아예 작살을 내버리자. 라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나가봤자 분위기도 살벌한데요. 뭐..."

그 탓에 던전 도시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인 것이다. 상인 조합의 자금과 물자가 던전 도시로 유입되었고 제작자 연합의 장비들이 용병과 모험가들에게 지급되었다. 시청의 경비병들도 평소보다 더한 무장을 한 채 순찰 인력을 늘렸다. 거의 전시 분위기나 다름없는 상황이라 구경할 만한 것이나 놀만한 것도 없었기에 헤스티아는 운현을 향해 웃으며 그를 위로했다.

'설마 카야가 쫀건 아니겠지? 뭐 상관없나...'

회귀를 하게 된다면, 자신이 세운 계획에 의거하면 카야 따위 신경을 쓸 만한 적이 아니게 된다. 아니, 가장 먼저 때려잡아야 할 적이 되겠지. 복수따위 나중에 해도 충분했다.

'이왕이면 더 조사를 하고 가는게 좋겠지만... 뭐 이정도로 만족해야 하나.'

그녀의 계획을 무너트린데다가 기껏 모아 놓은 신성이 담긴 성배까지 가지고 있었다. 피스나의 연구가 끝나면 라티나에게 성배를 주고 그녀의 몸에 신성이 채워지면 곧장 던전의 6계층으로 들어가면 된다.

'차라리 이대로 얌전히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런 걱정 없이 이 세계의 마지막을 만끽하고 싶었던 운현은 자신을 향해 생글거리며 미소짓고 있는 헤스티아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무 일 없이. 모두의 응원을 받으며 도전하고 싶었던 그가 헤스티아의 도톰한 입술에 키스하려고 할 때.

"콰당탕!!"

"크, 큰일이야!! 모두 밖으로 나와봐!! 지금 몬스터들이 던전도시로 몰려오고 있어!!"

'나왔나.'

문을 열고 들어 온 모험가의 외침에 운현은 조용히 웃었다. 얌전히 지나가나 했더니 결국 시작되는 것이다. 카야를 잡기 위한 덫. 카야는 아직 자신의 정확한 실력을 알지 못한다. 일격을 먹이기는 했지만 아르토리우스의 공격에 맞아 빈틈을 보였을 때 날린 것이니 그것만으로 운현의 레벨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공방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지금이라면 그년을 잡을 수 있다.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헤스티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옷자락을 잡았다.

"운현씨..."

"걱정하지마. 너는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다른 길드 간부들과 함께 있어. 상아와 필레. 그리고 아둔씨가 함께 있다면 널 위협할 만한 일은 없을거야."

"운현씨는요?"

"나... 난...."

"어디 가지 말아요. 저와 함께 있어주세요."

헤스티아의 간절한 말에 운현은 주먹을 쥐었다. 불안해하는 그녀를 두고 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쓰게 웃었다.

"카야는 날 잡기 위해 움직일거야. 하지만 내가 길드 회관에 있으면 그녀는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카야는 자신이 완벽하게 승리했다고 여겨지는 상황이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는 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차분히 말했다.

"그래. 그럼 여기 있자."

"정말요? 후후후... 안심이에요."

카야가 길드로 오지 않으면 그녀에 대한 처리는 아르토리우스에게 넘긴다. 이미 아르토리우스와 모든 이야기를 마친 상황인만큼 운현은 헤스티아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운현과 헤스티아가 따뜻한 분위기를 만드는 동안 문 앞에 서 있는 모험가를 밀치고 다른 모험가가 들어왔다.

"그게 문제가 아니야!"

다급한 얼굴의 모험가를 밀친 다른 모험가는 창백한 얼굴로 외쳤다.

"마을 중앙 분수대 광장에... 아크리치가 나타났어!!"

"미친! 5계층에나 있을 법한 몬스터가 왜 여기 나타나!? 이것도 미믹맨 짓인가!?"

"아크 리치래요! 운현씨. 어, 어쩌죠?"

"길드 간부들과 상아가 있으니까. 그리고 다른 클랜들도 있으니까 걱정 안해도 괜찮아."

"아크 리치라고!? 어떤 미친 새끼야!?"

길드 사무소의 문이 열리며 상아가 씩씩거리며 나왔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열명의 길드 간부들. 지금까지 얼굴을 본 적 없던 여인들도 포함된 그들이 성큼성큼 걸어나오자 상아는 이를 드러내며 회관에 있는 모험가 클랜의 간부들과 클랜장들에게 외쳤다.

"아크 리치가 떴다고 하니 잡으러 가자고!!"

"오오오!! 그럼 재료는!? 사체는 어떻게 분배할거야!?"

"길드 빼고 공헌도 가장 높은 클랜이 먹는거지 뭘!"

상아의 외침에 각 클랜의 장들과 간부들은 눈을 빛냈다. 아크 리치라면 5계층에서도 쉽게 보기 힘들 정도의 몬스터다. 비록 바깥에서 만들어져 코어는 없을지 몰라도 그 사체는 무척이나 비싸게 팔릴 수 있었다. 눈에 불을 켜며 그녀들이 무기를 들고 우루루 나가자 상아는 길드 간부들을 이끌고 나가려다가 운현과 헤스티아를 발견했다.

"운현. 넌 어떻게 할거야?"

"나야 여기서 기다리지 뭐."

클랜장과 클랜의 간부들이 따라간 만큼 한산해진 길드 회관이었지만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 그들을 흝어보며 운현이 말하자 상아는 피식 웃었다.

"제니스씨랑 칼리아스는 여기 있어줘요."

221====================

Turning Point

"에... 괜찮겠어?"

"응. 길드 간부가 이렇게 많은데... 길드를 지키기는 해야 하니까 부탁할게요."

"뭐 그런거라면야."

길드 간부와 길드장까지 모두 빠져버린 상황에서 습격이 들어오면 길드를 빼앗길 수 있었다. 그것을 사전에 막고자 제니스와 칼리아스를 길드에 대기 시킨 상아는 운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마."

아둔과 다른 길드의 간부 중 한명이 회복스킬을 쓸 수 있는 드루이드라고 했으니 필레와 상아의 안전은 문제가 없었다. 거기에 클랜의 간부들과 클랜장들까지 이만큼 나갔으니 더 걱정이 없어진 운현이 느긋하게 말하자 상아는 씩 웃으며 길드의 간부들을 이끌고 아크 리치를 상대하기 위해 나갔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을까?"

"아크리치라... 쳇. 마법 승부 하고 싶은데... 여기 맥주 한잔만 줘!"

제니스와 칼리아스가 남자 운현은 카야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곳으로 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운명의 공격만 막아내면 된다. 운현은 자신의 MP와 프리저브가 제대로 활성화 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그레이터 힐이 다른 스킬로 바뀌면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힘들다.

"저... 운현씨?"

"네?"

"저기... 운현씨는... 안가요?"

자신의 뒤에서 다가 온 실비아가 머뭇거리며 말하는 것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크 리치를 잡으러 안가냐는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전 안가요."

"헤, 헤스티아씨 때문에요? 여기에는 칼리아스님이랑 제니스님도 있는데 운현씨도..."

어색하다. 눈에서는 눈물이 나려 한다. 실비아를 빤히 바라보던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단검을 들어 탁자에 톡 꽂은 후 물었다.

"뭔가 협박이라도 받는건가요?"

"....어떻게...?"

실비아의 눈에서 주륵주륵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녀를 마주하던 운현이 단검을 꽉 잡자 실비아는 빠득 이를 갈며 검을 뽑아 운현에게 휘둘렀다.

"챙!!"

그녀의 공격을 여유있게 막아낸 운현은 그대로 튀어나가 실비아의 복부를 후려쳤다. 침투경에 맞은 실비아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쓰러지자 그것에 놀란 제니스와 칼리아스는 허겁지겁 뛰어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글쎄요..."

만약 대비를 하지 않고 아크 리치를 잡으러 가거나 아니면 카야를 찾으러 갔더라면 여기서 실비아에게 헤스티아를 뺏길 뻔 했다.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칼리아스와 제니스에게 말했다.

"실비아씨가 협박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아으...아..."

침투경에 맞아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을 구르던 실비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예쁘장한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운현과 헤스티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끄그... 그를... 구해야... 해..."

"실비아! 무슨 일이야! 말해!"

"헤스티아씨를... 카, 카야가... 흐흑... 제 약혼자를... 그렇게 운현을... 그윽... 데리고 오라고..."

침투경으로 고통이 상당할텐데 실비아는 타액을 토해내면서도 겨우겨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제니스와 칼리아스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운현씨를 왜?"

"너 아는 거 있어?"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어디로 데려오라고 했어!?"

운현이 고개를 가로젓자 제니스는 실비아의 어깨를 흔들며 물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품에 있는 쪽지를 내밀었다.

"...그때 그 건물인가."

"운현. 어떻게 할거지?"

제니스의 질문에 운현은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움직인다면? 그거야말로 카야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제니스와 칼리아스는 그녀의 약혼자를 구하기 위해 움직일 생각인 듯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운현은 움직일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헤스티아를 지켜야 해요."

"헤스티아씨는 길드원들이 지키면 되잖아요! 그럼..."

"죄송합니다."

칼리아스의 말에 운현은 냉정한 어조로 말한 후 고개를 숙였다. 실비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운현은 그녀보다, 그녀의 약혼자보다 헤스티아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어차피 회귀를 하면...'

회귀를 하게 되면 모든 것은 초기화가 된다. 이번의 삶은 어차피 망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망한만큼이라도 지키고 싶다는 것이 운현의 욕심이었다. 그가 냉정히 말하자 칼리아스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네. 제니스씨. 가... 제니스씨?"

"운현."

"네."

"운명을 바꾸려는 건가?"

"......!"

제니스의 담담한 말에 운현은 움찔했다. 제니스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그가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제니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예언이 현실이 되었군. 운명에 저항하는 자가..."

"무슨... 뭘 알고 있는거에요!? 뭘!?"

"현자의 예언이다.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가 나타날 것이고... 그의 절망과 슬픔을 이해해주라고. 그의 발버둥을 이해해주라고."

"...현자가..."

운현은 제니스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안대를 한 채 그의 시선을 받으며 제니스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부디 하는 일 성공하길 빌겠어. 나 역시도 운명의 피해자니까..."

"설마."

그녀의 씁쓸한 말에 운현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설마 제니스가?

"내가 그 하이엘프야."

하우드의 운명의 상대. 하지만 하우드가 운명을 거스르려 자신을 피하는 것 때문에 결국 그에게서 멀어져버린 제니스. 제니스는 천천히 자신의 안대를 풀었다. 두려움 때문에 세상을 보지 못하던 그녀는 안대를 풀고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슬픈 얼굴로 웃었다.

"부디 너의 노력이... 현자의 예언이 이루어지길 빌겠어. 실비아의 약혼자를 구하는 것은 우리끼리 가도 괜찮을거야. 그럼..."

제니스가 안대를 푼 것에 놀라 아무런 말도 못하던 칼리아스는 그녀가 나가자 허둥지둥 그녀의 뒤를 따랐다.

"현자의 예언이라..."

제니스의 정체를 알게 된 것도 놀랍지만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현자의 예언. 운현은 그녀의 말로 자신이 생각하고 가설을 세운 것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현씨?"

"아. 아아. 걱정마. 큰 일은 없을거야."

제니스와 칼리아스가 나갔지만 운현의 레벨은 450이었고 그레이터 힐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아군은 한명 더 있었다.

"라티나씨."

"예."

"대기하고 있다가 만약 카야가 나타나면 바로 아르토리우스에게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천장에서 들려 온 낮은 목소리에 헤스티아는 눈을 휘둥그레뜨며 놀랬지만 운현은 별다른 말을 해주지 않았다. 필요한 모든 준비는 이제 끝났다. 완벽하게 헤스티아를 지킬 수 있다.

'문제는 필레와 상아이지만...'

자신이 없다는 것에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큼의 사람들이 있다면 그래도 안전하지 않을까? 라는 작은 희망을 가지며 운현은 헤스티아의 손을 꽉 잡았다.

222====================

Turning Point

"여기에 그가 있다는 건가..."

"제니스씨... 운현씨와 했던 얘기가 뭐였어요?"

"으음... 그게요."

실비아의 약혼자를 구하기 위해 예전 실종자들이 잡혀 있던 오두막으로 이동한 제니스와 칼리아스는 오두막 근처에 있는 몬스터를 처리하고 지하실로 들어갔다. 음침한 분위기의 제단이 모여 있는 지하실에 도착한 그녀들이 불을 키고 주변을 두리번 거릴 때 지하실의 벽면에서 출렁거리며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저게 뭐야."

"...슬라임!?"

제니스는 이를 갈며 뒤로 물러났다. 부정형 몬스터인 슬라임이라니. 던전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골치아픈 몬스터의 등장에 그녀가 물러나자 칼리아스는 쓴 입맛을 다셨다.

"아. 슬라임이라니... 어쩌죠?"

"끙... 어떻게든 상대하지 않고 튀는게 낫겠..."

"철컹!"

"는데 역시 함정이었나."

제니스는 닫혀버린 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들이 어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벽면에서 흘러나온 슬라임은 점점 뭉쳐져 거대한 구형으로 변했다.

"어, 음. 일단 마법으로 상대를 해볼까요?"

칼리아스는 슬라임의 몸에서 조금씩 부정형의 긴 촉수가 나오려고 하자 떨떠름해하며 말했다. 슬라임은 베기나 찌르기 같은 일반 공격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타격 데미지도 받지 않고 오직 마법 공격. 그 중에서도 화염이나 수계 마법에만 영향을 받는데 칼리아스는 아쉽게도 대지계열 마법사였기에 슬라임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그냥 튀는 수 밖에. 방어나 좀 하고 있어봐."

검을 뽑아 잡은 제니스는 몸을 최대한 움츠리며 힘을 모았다. 그녀의 검에 푸른 빛이 모이자 슬라임의 몸에서 수십개의 줄기가 뻗어나왔다.

"우왓!?"

빠르게 넓은 범위의 방어마법을 펼쳤기에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저 촉수에 당할 뻔 했다. 촉수에서 뚝뚝 떨어지는 끈적한 액체가 바닥을 녹이는 것을 본 칼리아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저, 저거 속성이 산성인가본데요? 이거 빨리 안튀면..."

"하아압!!"

검에 모여 있는 기운이 폭발하듯 천장을 꿰뚫었다. 단번에 오두막의 지붕까지 날려버린 공격을 본 칼리아스는 슬라임의 근처에 수십개의 돌벽을 만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후 제니스와 함께 뛰어 올라 지하실을 탈출했다.

"슬라임까지 있을 줄이야. 저걸 준비한 걸까요?"

"슬라임은 정신지배도 안받아. 아마 이 몬스터 웨이브에 끌려 온 것이겠지."

아무리 다난교라고 하지만 그래도 슬라임까지 컨트롤 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 제니스가 떨떠름히 말했을 때 칼리아스는 그녀를 밀쳤다.

"위험해요!"

"푹!"

거대한 강철 화살이 방금 전 제니스가 있던 자리에 꽂힌다. 그것을 본 칼리아스는 이를 갈며 화살이 날아온 곳을 보았다.

"운현이 아닌데... 너희들은... 모험가 길드의 간부? 너희는 왜 여기 있는거지?"

"어...? 하하... 이게 누구야. 카야 아니야?"

시청을 습격할 때 모습을 보여 이미 던전 도시에서 미믹맨 이상의 현상수배범이 된 카야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걸어나오는 것을 본 칼리아스는 그녀에게 마법봉을 겨눴다. 그런 그녀를 무심히 바라보던 카야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고 그녀의 뒤로 검은 날개를 지닌 세 집행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세 집행자 중 하나의 손에는 창백한 얼굴의 금발 청년이 잡혀 있었다.

"역시 비열하기 짝이 없다니까. 인질이나 잡다니. 그러고도 너희가 신관이냐!?"

칼리아스의 비난을 귓등으로 넘기며 카야는 그녀와 제니스를 힐끔 본 후 아쉬움없이 손을 들었다. 운현을 끌어내기 위해서 인질을 잡았는데 그가 나오지 않았다면 인질은 필요가 없다. 카야가 손을 내리자 금발 사내를 잡고 있던 검은 날개의 집행자는 그의 목을 그대로 부러트려 죽여버렸다.

"미친..."

"실비아가 난리치겠네..."

저 남자를 구하러 왔는데 교섭조차 못해보고 죽어버렸다. 제니스는 쓴 입맛을 다시며 검을 들었다. 이왕 이리 된거 카야의 목으로 사과를 하자. 그리 생각한 그녀가 검에 기운을 모으는 동안 카야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너희들의 상대는 내가 아니야. 가자."

"펄럭...펄럭..."

검은 날개가 움직인다. 그녀들이 도망가려 하자 칼리아스는 당황하며 그들에게 마법을 쏘았다. 하지만 대지마법 전문인 그녀가 하늘을 나는 저들에게 쓸 수 있는 마법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아! 젠장!"

"칼리아스. 지금 신경써야 되는 건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왜요!?"

뚫린 구멍 너머로 슬라임이 꿈틀거린다. 그것을 보며 칼리아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만 기다려줘요. 어스퀘이크로 아예 땅 속에다가 묻어버릴거니까. 나중에 펠리시아 불러서 끝장을 내는게 낫겟네요."

칼리아스의 말에 제니스는 검 대신 근처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길고 두꺼운 철봉을 들었다. 저 촉수들을 상대하는 것은 검보단 차라리 이게 나았다. 산성의 촉수를 상대하다가 검이 나갈 가능성도 높았기에 철봉을 까딱거린 그녀가 양 손으로 철봉을 잡았을 때 다섯의 촉수가 마법을 준비하는 칼리아스에게 날아들었다.

"어딜!"

제니스의 손에 들려 있는 철봉이 움직이며 촉수를 쳐내었다. 철봉에 맞은 촉수가 터져나가며 다른 촉수가 움직이고, 그 촉수를 다시 철봉으로 맞춰 터트리던 그녀는 칼리아스가 주문을 완성시키자 뒤로 훌쩍 뛰었다.

"어스퀘이크!!"

"우두두두둑!!"

칼리아스의 마법봉이 촉수들이 나오고 있는 구멍을 가리키자 그곳을 중심으로 땅이 갈라졌다. 박살나기 시작한 대지는 곧 촉수들이 나오는 구멍을 막아버렸고 텅 비어 있던 지하실도 완전히 묻어버리려는 듯 대지는 움푹 움푹 파이고 있었다.

"흠. 이정도면 되려나."

오두막째 완전히 붕괴시켜버린 칼리아스가 마법봉을 거두자 제니스는 반쯤 녹아버린 철봉을 던진 후 던전 도시 쪽을 보았다. 많은 몬스터들이 던전 도시에 있는 아크 리치를 죽이기 위해 던전 도시를 공격하고 있었다.

"카야를 잡으러 가자. 그 여자는 운현을 노리고 있어."

"왜 그럴까요? 운현이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글쎄..."

칼리아스의 질문에 제니스는 쓴웃음을 지을 뿐 제대로 답해주지 않았다. 무언가 알고 있는 듯 하지만 말해주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한숨을 내쉰 칼리아스는 마법봉을 허리에 차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실대로 말하라구요. 실비아에게 해 줄 말도 생각해야 하니까..."

"운현은 운명을 거스르려는 자야. 비록 몇번의 성공이 있었지만 이미 치명적인 실패를 했지. 괜히 그를 건드리지 말자고."

"...뭔 소린지."

전후사정을 모르는 칼리아스는 제니스의 말에 투덜거렸지만 제니스는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 이었다. 더 이상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칼리아스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제니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치이이익!"

그녀의 드레스가 타오른다. 제니스가 터트린 촉수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그녀의 등에 달라붙어 제니스의 하얀 등을 완전히 지져버리는 것에 놀란 칼리아스는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소, 손대지마! 너도 다쳐!"

"하지만...!?"

제니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고통을 억누르려는 것처럼 간신히 버티던 그녀는 바닥을 굴러 그 촉수에서 쏟아진 체액을 흙으로 닦아내었다. 상처가 검게 물들었다. 근육이 거의 다 녹아버린 끔찍한 상처에 칼리아스는 황급히 힐링포션을 꺼내 그녀의 등을 치료해주었다.

"이거 큐어라고 해도 힘들겠는데요?"

이정돠 화상이라면 큐어라고 해도 완전히 치료하기 힘들 정도다. 그레이터 힐 정도 되지 않는다면 이 흉측한 화상은 낫지 않을 것이다.

"...이게 대가인가."

제니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통으로 하얗게 질려 있는 얼굴을 본 칼리아스는 그녀를 부축했다.

"얼른 길드로 돌아가요. 빨리 치료를 받아야..."

"후후후... 아니.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르지."

"무슨 개소리에요!? 빨리 치료해야지!!"

칼리아스의 말에 제니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 역시 운현. 당신이 운명을 바꾸려 한 노력의 대가겠지...'

운현은 헤스티아를 구하려 했다. 만약 헤스티아가 이곳으로 끌려왔다면 그녀는 죽음을 당했겠지만 운현은 실비아의 약혼자를 구하는 대신 헤스티아를 지키길 원했다. 결국 그것 때문에 자신들이 오게 되었고 카야는 헤스티아와 운현이 오지 않은 것에 실비아의 약혼자를 그대로 죽여버렸다.

'그리고 나 역시...'

헤스티아를 살리기 위해 운현이 운명을 바꿔버린 것이 아닐까? 제니스는 던전 도시를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운명을 바꿈으로서 생기는 여파가 부디 크지 않아야 할텐데...'

"쿠어어어어!!"

아크 리치가 고함을 터트리는 것을 본 상아는 광검에 마력을 넣고 자신에게 날아오는 마력탄을 튕겨내었다. 허공으로 날아간 마력탄이 폭발하자 그녀는 아크 리치를 공격하는 클랜원들에게 외쳤다.

"마지막 발악에 불과해! 얼마 안남았으니까 끝장내자고!"

"오오오!!"

상아의 지휘에 아크리치를 공격하는 이들은 지친 몸에 힘을 넣었다. 생각보다 강력한 아크 리치를 상대하면서 아직 한명도 죽지 않은 것을 보니 역시 길드장은 길드장이다. 상아의 뒤를 따르며 딜러진들이 각자의 무기에 마력을 불어 넣었을 때 상아에게 힐을 넣어주던 아둔은 아크 리치의 눈이 번쩍이자 다급히 외쳤다.

"시독!"

아크 리치의 입이 벌어지며 그의 입에서 생성된 불길한 녹색의 구체가 빛을 뿜었다. 시체로 만들어진 독성과 같은 마법이 선두에서 돌격하는 상아의 머리를 노리자 그녀의 옆에서 뛰던 필레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밀쳤다.

"치이이익!!"

"아아아악!!"

상아를 밀치느라 자신의 팔이 공격당했다. 시독이 가진 강력한 독성은 단번에 그녀의 팔을 녹색으로 물들였고 그것은 삽시간에 필레의 팔을 타고 그녀의 몸을 잠식하려 하였다.

"젠장!!"

자신을 구하느라 필레가 위기에 처해진 것을 본 상아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필레의 몸에 시독이 퍼진다. 시독이 몸을 장식하면 그레이터 힐이고 뭐고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아는 광검을 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서걱!"

"아으...!"

필레의 오른쪽 팔을 잘라냈다. 잘린 부위에서 피가 터져나오자 상아는 그녀를 밀치며 에리스에게 외쳤다.

"에리스! 필레를 치료해줘!"

"하지만...!"

"이미 시독에 의해서 녹아내렸어...! 미안하다! 필레!"

"윽...아니에요! 고마워요...!"

상아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면 아마 십초도 버티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팔이 잘린 충격과 터져나오는 피로 인해 얼굴이 하얗게 된 필레가 힘겹게 말하자 상아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크 리치를 보았다. 저 자식때문에...!

아크 리치의 표정없는 해골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상아는 시독을 다시 뿜어내려는 아크 리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서 생성된 구체의 마력탄은 빛처럼 날아가 아크 리치의 턱을 맞췄고 그 충격에 아크 리치가 시독을 쏘지 못하고 주춤거리자 그녀는 뒤를 보며 외쳤다.

"펠리시아! 잉켈!"

"썬더!"

"헬파이어!"

강력한 마법이 발동된다. 펠리시아의 마법봉에 맺혀진 전격이 아크 리치의 몸을 감싸고 잉켈이라 불린 길드의 간부가 가진 마법 지팡이에서 검은색 불꽃이 날아가 아크 리치의 몸을 관통하자 상아는 광검을 잡은 손에 최대한 마력을 불어 넣고 뛰어 올랐다.

"하아아아아압!!"

강한 기합과 함께 상아의 광검이 빛을 뿜었다. 수십줄기의 빛이 터져나온 광검이 아크리치의 몸을 부쉈을 때 상아는 대부분의 마력을 소모해 버린 탓에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주저앉아버렸다.

"하아...하아..."

"길드장!"

"잡았다!"

허물어지는 아크리치를 보며 모험가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모습에 기뻐할 여유도 없이 상아는 비틀거리며 필레에게 다가갔다.

"필레는?"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요... 다만."

검사에게 한쪽 팔이 사라진 것은 치명적이다. 필레는 오른손잡이였다. 강력한 우수 검사가 오른팔을 잃었다는 것은 검사로서의 생명이 거의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기에 상아는 눈물을 주륵 흘려버렸다.

"날 구하려다가..."

"울지 말아요... 상아 길드장님. 죽지는 않았잖아요. 사실 죽을 줄 알았는데..."

운명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운현의 말을 떠올린 필레가 희미하게 웃자 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회복한 아둔과 클랜의 다른 회복계열 직업을 가진 이들이 필레의 몸에 연속으로 힐을 넣어주자 겨우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 온 필레는 힘겹게 몸을 일으킨 후 말했다.

"후우... 이제 없는거죠?"

애써 웃어보이려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상아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223====================

Turning Point

'그년이 여기로 올 가능성도 생각해야해.'

자신 대신 칼리오스와 제니스가 간 이상 카야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운현은 서큐버스의 검을 꺼내 든 채 헤스티아에게 말했다.

"절대 어디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야 해."

"...알겠어요."

"와장창!"

창문이 깨지며 두명의 모험가가 날아들어왔다. 피투성이가 된 그들이 신음하는 것을 본 운현은 서큐버스의 검을 꽉 잡았다. 역시 오는 건가. 그가 긴장하고 있을 때 창문 너머로 카야가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양 옆에는 날개달린 집행자 두명이 다른 모험가의 목에 검을 겨눈 채 서 있었다.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손짓을 본 운현은 피식 웃었다.

"왔냐...!"

증오와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저 웃는 낯짝을 짓이겨버리고 싶다. 부들부들 끌어오르는 분노에 운현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을 때 운현은 누군가가 자신의 옷자락을 잡는 것을 보았다.

"운현씨..."

"아아. 그래."

도발에 넘어갈 이유는 없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말자. 헤스티아를 지키는 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지 저년의 목을 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라티나도 봤을테니...'

카야에게 원한이 있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길드 회관에 있는 다른 모험가들도 그렇고 지금 성벽에서 몬스터를 잡고 있는 아르토리우스와 용병 연맹도 그렇고. 이 던전 도시 내의 모두가 이런 깽판을 친 카야에게 원한이 있었다.

"등신같은 년."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아르토리우스가 올것이다. 아르토리우스와 모험가들. 그리고 라티나까지 낀다면 저년을 잡는 것은 일도 아니다. 운현은 느긋하게 웃으며 카야가 도발하는 것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다.

"엿이나 먹어."

"당장 나와라! 운현! 나오지 않는다면 이년들은 죽는다!"

"마음대로 하시지."

어차피 얘기 한번 안해본 여자들이 죽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운현은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었고 그것을 본 카야는 빠득 이를 갈았다.

"동료가 죽는 것이 두렵지 않나!?"

"그 동료 구하려다가 죽는게 더 두렵다! 모험가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상 목숨을 내놓은 것은 당연한 것이지. 괜히 나갈 필요 없잖아? 안그래?"

"그렇지."

"꼬우면 네년이 들어와라!"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주변의 모험가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길드 직원도 아닌 모험가들이 다른 동료를 구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자비를 베풀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위해서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운현이 느긋하게 웃자 카야는 빠드득 이를 갈았다.

"네놈...! 당장 성배를 내놔!"

"싫다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결국 인질들을 죽이는 것 아니야? 그럼 해봐. 그리고 또 어디까지 갈 수 있나보자."

어차피 시간은 자신의 편이다. 라티나가 오고, 또 아크 리치를 잡은 길드의 간부들과 클랜장들이 복귀하면 그때 움직여도 늦지 않다. 운현이 여유있게 말하자 카야는 뒤의 여인들에게 손짓했다.

"촤악!"

그녀들의 검에 의해서 모험가들이 죽었다. 목에서 피분수를 흘리며 모험가들이 쓰러지자 운현의 뒤에 있던 헤스티아는 그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이제 더 없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후회는 너나 하시지! 상아!! 쳐!!"

"뭐!?"

"아하하하하!! 등신! 쫄았구나!?"

"아무리 날고 길어봤자 결국 테러범이구만? 상아 길드장이 온다는 말에 그렇게 벌벌 떠는걸 보니!?"

"병신같은 년!"

운현의 외침에 카야가 흠칫 놀라자 운현은 그녀를 보며 비웃었고 회관 안의 모험가들도 그녀를 비웃었다. 한순간에 놀림감이 되어버린 카야가 이를 갈며 운현에게 손을 뻗었을 때 운현은 다시 외쳤다.

"아르토리우스! 지금이다!"

"또 속을 것 같냐!?"

"병신년."

"뭐!?"

건물 위에서 뛰어내린 아르토리우스는 무척이나 기쁜 얼굴로 웃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검이 그대로 내려지며 카야의 가슴을 깊게 베었을 때 운현은 당당히 외쳤다.

"지금이다! 모두 공격!!"

"개년!!"

"모두의 복수다!!"

"남의 도시에서 이런 깽판을 치다니!! 용서 못해!!"

카야가 깊은 상처를 입고 비틀거리자 모험가들은 기다렸다는 듯 뛰어나갔다. 적의 상처는 아군의 우세로 이어진다. 뒤로 물러나는 카야를 쫓으며 아르토리우스가 손짓하자 건물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라티나와 티르빙이 뛰어내리며 카야를 보호하려 하는 두 집행자를 공격했다.

"이년! 이 배교자년이!!!"

"아하하하하하!! 이번에도 네년의 목을 날리는건 내가 되는구나!! 아이 신나!! 아주 씬나!!"

광기어린 웃음을 터트리며 아르토리우스는 카야의 목을 향해 공격해나갔다. 연속된 공격을 간신히 버텨나가던 그녀가 손을 뻗었을 때 아르토리우스는 번개처럼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공격에 맞은 카야의 팔이 날아간 순간 마주 싸우던 검은 날개의 사제에게 발차기를 날려 그녀를 튕겨보낸 티르빙은 이를 드러내며 창을 꽉 잡았다.

"하아아압!!"

"카악!!"

티르빙의 손에서 쏘아져나간 창이 카야의 복부를 꿰뚫었다. 고통스러운 얼굴로 피를 토해내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올린 아르토리우스는 무척이나 기쁜 얼굴로, 황홀함에 가득 찬 얼굴로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단 일격. 그동안 던전 도시를 괴롭히던 다난교의 수괴 치고는 무척이나 허무한 죽음이었다. 혀를 빼물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죽어버린 카야의 머리를 들어 올린 아르토리우스는 그녀의 눈을 마주하며 히죽 웃었고, 잠시 후 더 이상 관심없다는 듯 뒤로 휙 던졌다.

'개먹이나 하게 줘 버려."

"아아아!! 카야님! 카야니이임!!"

카야가 아르토리우스의 손에 죽어버리자 검은 날개의 집행자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티르빙과 라티나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간의 공세에 불과했다. 몰려든 모험가들의 공격을 버텨내는 것에 벅차던 그들이 결극 티르빙과 라티나의 공격을 허용하여 틈을 보인 순간 모험가들의 분노에 찬 공격을 전부 맞아버렸다.

피곤죽이 되어 죽어버린 그녀들에게 모험가들은 침을 뱉었다. 이걸로 끝인가? 모든 것이 끝이란 말인가? 운현은 그나마 안도할 수 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렇게 좋아하세요?"

아직 전투의 흥분이 남아 있는지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이 안도해하자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저희들은 이제 끝이지만 운현님은 아직 아닌데."

"무슨..."

"뭔가 착각하고 계신가본데요. 헤스티아씨와 상아씨. 필레씨를 죽이려고 하는 건 다난교도가 아니에요."

"...뭐?"

그녀의 말에 운현은 뒤통수를 한대 크게 맞은 듯 했다. 그녀의 말대로다. 다난이 죽은 것은 그저 위협 하나가 사라졌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좋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은 운현이 입을 다물자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르토리우스는 빙글 검을 돌려 허리춤의 검집에 밀어 넣은 후 담담히 말했다.

"제 생각엔 운현님이 쓸데없는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빨리 포기하고 돌아가는게 좋을 것 같은데."

"네가 말하는 그 '쓸데없는 이상한 짓' 이라는 게 그녀들이 죽게 내버려두라는 거라면 사양이다."

운현의 싸늘한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웃음이었다. 순수하게 자신을 좋아하고 사랑스럽다고 바라보며 짓는 웃음이 아닌,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는 듯한 가소롭다는 웃음에 가까웠다. 그것에 운현이 화를 내려는 순간 아르토리우스는 어깨를 으쓱인 후 몸을 돌리고 가버렸다.

"...상아 길드장님이다!!"

"오오오!! 아크 리치를 쓰러트린건가!?"

"역시!!"

상아와 길드의 간부들. 그리고 각 클랜장과 간부들이 복귀하는 것을 본 모험가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기쁜 날이다. 비록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던전도시를 괴롭히던 다난교의 수장을 잡았고 아크리치라는 강력한 적을 제거했다. 이제 던전 도시를 공격하는 몬스터들만 해치우면 모든 적은 사라진다.

"와아!! 몬스터 잡으러 가자!!"

각 클랜과 모험가들이 바깥에서 던전 도시를 습격하는 몬스터들을 잡으러 가버리자 훵해진 길드 회관에 남은 운현과 헤스티아는 상아의 우울한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운현은 순간적으로 섬뜩한 생각에 그녀에게 달려가 물었다.

"어떻게 된거야!? 무슨 일이...!?"

"...필레가..."

"필레가 왜!? 설마!? 아, 아니지?"

"운혀언..."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필레의 목소리에 운현은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죽지 않았구나. 다행이다. 그가 기뻐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필레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을 들어 올리며 들것 위에서 힘없이 웃었다.

"...야. 너 팔... 왜 그래. 어디 갔어..."

검사인 필레의 오른팔이 사라졌다. 그가 당황하며 묻자 필레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상아 길드장님의 목숨을 살린 값이라고 해두자. 그래도 다행이라고. 상아 길드장님 덕분에 죽음은 면했으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운현이 화를 내자 필레는 쓰게 웃었다. 지금 누구보다 속이 상한 것은 다름아닌 필레일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며 운현은 화를 가라앉히고 그녀의 남은 손을 꼭 잡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후후후... 이것도 운명일까? 이제 검사로서의 필레는 죽었어. 남은 것은 여자로서의 필레일 뿐이지..."

"너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하냐... 하나도 재미없다고..."

필레의 말에 운현은 한방울 눈물을 흘리며 투덜거렸고 그런 그를 향해 필레는 빙긋 웃어주었다.

"...아쉬웠어요. 만약 제가 그레이터 힐을 쓸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필레씨의 팔이 저렇게 되지 않게 둘 수 있었는데..."

"....."

아둔이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하자 운현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둔의 그레이터 힐을 훔친 것은 자신이다. 운현의 얼굴이 딱딱히 굳자 필레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 잘못 아냐."

"하, 하지만..."

이번 습격에서 그레이터 힐을 쓸 일은 없었다. 그랬다면 아크 리치를 상대하러 가는 아둔에게 그레이터 힐을 돌려주는게 맞지 않았을까? 운현이 부들부들 떨자 필레는 힘겨운 어조로 말했다.

"네 잘못 아니야.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지마.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 왔다."

"다 끝났어?"

제니스와 칼리아스가 회관으로 들어오자 길드의 간부들은 제니스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랬다. 그녀가 눈에 묶고 있던 안대를 푸른 것이다. 그것에 그녀들이 놀라자 제니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슬슬 앞을 볼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이지. 그나저나... 필레. 살아 있었구나."

"...뭔가 말이 이상하네요. 제가 죽을 줄 알았단 말이에요?"

필레가 농담처럼 말하자 제니스는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어 준 후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에 무언가를 느낀 필레가 입술을 달짝이려고 할 때 뒤쪽에서 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니스님! 칼리아스님!! 미다스는요!? 미다스는 어떻게 됐어요!?"

오매불망 제니스와 칼리아스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실비아는 그녀들이 오자 다급히 다가갔다. 기대감에 차있던 눈이 점점 죽어간다. 돌아 온 것이 둘 밖에 없다는 것에 그녀가 절망하자 제니스와 칼리아스는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하하하... 거짓말이죠? 그렇죠? 미다스가... 미다스가 죽을리 없잖아요..."

"미안해. 실비아."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야!! 미다스가 왜!? 이번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미다스가 왜 죽어야 하는데!!! 말해! 어디에 숨겨놨어! 말해애애애애애!!!"

사랑하는 약혼자가 죽었다는 절망에 휩쌓인 실비아는 제니스와 칼리아스의 멱살을 잡으며 외쳤다. 상황을 모르는 간부들은 그녀를 떼놓으려 했고 헤스티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운현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저... 때문에?"

"...아니야. 그런거."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운현은 실비아가 눈물을 폭포수처럼 흘리며 절망하고 슬퍼하는 모습에 그녀를 차마 달래지 못했다. 만약 자신이 갔더라면 그는 살 수 있었을까? 만약 자신이 갔더라면 실비아는 저렇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 말자. 난 최선을 다한거야.'

만약 헤스티아를 지키지 않았더라면. 그녀를 보냈다면 더 큰 후회를 했을 것이다. 작은 후회와 큰 후회. 그것 중에 운현은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그의 얼굴을 보며 상아는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이제 좀 쉬자. 모두 고생했으니까..."

승리를 했지만 전혀 승리를 한 것 같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실비아의 비통에 가득 찬 울음소리만이 길드 회관을 울렸다.

224====================

Turning Point

다난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카야가 죽었다. 더 이상 다난교의 습격은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내려진 피스나는 던전 도시의 전시 행정을 다시 평시로 돌렸다.

많은 피해가 있었다. 몬스터 웨이브와 아크 리치의 공격, 그리고 카야의 습격.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죽었고 도시는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상인 조합과 제작자 연합은 부서지거나 다친 이들을 돕기 위해 많은 자금과 물자를 풀었고 용병들과 모험가들은 치안 업무와 복구를 도왔다.

모험가 길드는 그 자원을 마련하기 위해 던전 탐험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정도면 대중적으로는 좋은거지."

모험가 길드의 전시 체제도 끝났다. 길드의 간부들 중 절반과 고급 길드원들은 다시 던전을 탐험하고 던전 내의 모험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펠리시아가 정리한 보고서를 받아 읽은 상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필레는?"

"더 이상 모험가직을 할 수 없겠죠. 그만두기로 했어요."

"그렇구나..."

한쪽 팔을 잃은 이상 검사로서 살아갈 수는 없겠지. 왼손으로 검을 수련한다 하더라도 1, 2년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운현이 회귀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구나...'

필레가 팔을 잃은 것에 운현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둔에게서 그레이터 힐을 훔친 탓에 그녀가 검사로서의 삶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그는 자책하고 있었다.

"결국..."

"운현씨?"

"아. 응."

헤스티아가 말을 걸자 운현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운명. 도대체 그 운명이 뭐길래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것인가. 그가 멍하니 있는 것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필레는 어색한 몸놀림으로 그에게 차를 건네주었다.

"필레. 벌써 움직여도 괜찮겠어?"

"응? 아. 괜찮아. 좀 어색하긴 하지만."

필레는 자신의 빈 오른팔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녀가 느끼는 상실감이 전해질 정도의 웃음이다. 그 웃음을 보며 운현이 또다시 상념에 빠지려 하자 헤스티아는 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운현씨. 왜 자꾸..."

"아, 아냐."

"이제 다난교도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필레의 말에 운현은 입을 다물었다. 아르토리우스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적은 다난교가 아니다. 다난교는 그저 적들 중 하나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결국 운현이 상대해야 할 진짜 적은 운명이다. 언제 누가 필레나 헤스티아를 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제길... 피스나는 도대체 언제 연구를 끝내는거야...'

그녀의 연구가 끝나야 회귀를 시작할 수 있다. 운현이 초조해하는 것에 필레와 헤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뭐가 그를 이렇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이제 돌아갈까?"

"그래요. 운현씨도 상태가 그리 좋은 것 같지 않고..."

필레와 헤스티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운현은 그녀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많은 사람들이 부서진 거리를 복구하고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응시하던 그는 필레가 자신의 손을 꼭 잡자 쓴웃음을 지었다.

"자꾸 다른데 신경 팔거야?"

"미안. 그게 아니라..."

"꺄악!? 피해요!!"

부서진 2층의 건물의 커다란 벽돌이 허물어지며 헤스티아에게 떨어진다. 그것을 본 운현은 헤스티아를 잡아 당기고 방패를 들어 올렸다. 버클러에 맞은 벽돌이 부서지며 바닥에 떨어지자 운현은 그것을 보고 이를 갈았다.

'아직 안끝났다 이거지...'

"괘, 괜찮으세요?"

2층의 벽을 수리하던 제작자는 당황한 얼굴로 급히 내려와 물었다. 묵직한 벽돌에 맞았다면 큰일이 날 뻔 했다. 그녀가 사과하자 운현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인 후 헤스티아와 필레를 데리고 얼른 길드로 복귀했다.

"운현씨... 이것도."

"아마 그렇겠지..."

헤스티아의 머리를 정확히 노리고 떨어지는 벽돌을 떠올리며 운현은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은 아직 헤스티아를 놓지 않았다.

'계속되는 건가...'

필레가 팔을 잃은 지 사흘째 되는 날까지. 운현은 헤스티아와 필레를 죽이려고 하는 운명에 계속 저항했다. 길을 걷다가 떨어지는 벽돌이나 화분. 침대에서 자고 있는데 천장이 무너지질 않나 평소 잘 먹고 있던 음식이 상하질 않나.

그것을 막기 위해서 사흘동안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운현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필레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그에게 말했다.

"운현. 너무 고생하는 것 아니야?"

"상관없어."

약간 메마른 목소리에 필레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정도쯤 되니 운명이 진짜 자신들을 죽이려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루에도 몇번씩 사고가 터지고 그 사고를 운현이 막는다. 어쩌면 자신이 팔을 잃은 것도 운명이 자신들을 죽이기 위한 사전 작업일지 몰랐다.

'팔을 잃어 내가 저항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겠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 곁에서 떨어지지마."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운현 뿐이다. 자신의 곁에서 떨어진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운현은 헤스티아와 필레에게 단단히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그녀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옆에 붙었다.

길드 회관으로 돌아오며 마차가 덮치는 사고를 당할 뻔한 운현은 초췌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정신이 아득해 질 정도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운명의 공격을 혼자서 감당하는 것은 확실히 힘들었다. 집중을 조금만 풀었다간 언제 그 틈을 운명이 공격할지 몰랐던 그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 사무소에서 나온 상아는 운현과 필레, 헤스티아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괜찮아?"

"응."

상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한 운현은 그녀가 필레를 바라보자 눈을 감고 피로감을 조금이라도 줄이려 했다. 정신적인 압박이 보통이 아니다.

'이정도는 버틸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

하지만 이렇게 운명과 싸워가며 운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점점 명확해지는 것을 느꼈다. 운명과 싸우는 일은 쉽게 생각하고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좋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필레. 얘기는 들었어. 모험가 일은 이제 그만둔다면서?"

"에... 예. 뭐, 움직이는데는 문제가 없지만 아무래도 전투력이 크게 깎이니까요. 전처럼 싸울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필레의 말에 상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뛰어난 검사인 필레가 전력에서 빠진다는 것이 아쉬운 것이다. 그녀가 입술을 우물거리자 필레는 애써 밝게 웃었다.

"그렇지만 운현은 회귀를 할거잖아요. 모든 것이 되돌아간다면..."

"...그래. 운현. 언제 할 생각이야?"

"피스나의 연구가 끝나는대로 바로."

모든 준비는 이미 끝났다. 남은 것은 던전을 돌파하는 것 뿐. 이번 일로 던전 도시의 손해가 막중해 모험가들은 다음 계층으로 넘어가는 도전보다는 현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던전 탐험에 집중하기로 했고 그 덕분에 각 계층의 신전에 모험가들을 배치할 필요가 없어졌다.

'나한테는 다행스러운 일이지.'

미믹과 마석은 충분히 있었다. 이정도라면 혼자서도 6계층에 들어가는 것은 큰 문제가 없어보였기에 그가 안심하자 상아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피스나의 연구라면...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 그게 왜 필요하지?"

"그런게 있어."

"흐음... 운현."

"왜?"

"너 어제 얼마나 잤어?"

"한 삼십분 정도."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만약 조금만 집중을 잃고 의식을 잃었을 때 헤스티아나 필레가 죽을까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눈 밑으로 다크서클이 주륵 내려와 있는 그를 바라보던 상아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다가 네가 먼저 죽겠다."

"아직 멀었어. 이정도로 죽기는..."

"휴우... 너무 무리는 하지마."

"지금 무리를 하지 않으면 어쩌라는거야? 조금만 더 버티면 돼. 너희들을 살린 채 회귀를 하려면..."

아르토리우스는 죽든 말든 어차피 다시할건데 무슨 상관이냐. 라고 말했지만 운현은 도저히 이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버틸 수 있다면, 최대한 챙길 수 있다면 챙기겠다는 것이 그의 마음이었다. 그것을 차마 그만두라고 할 수 없었던 상아가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을 때 필레는 상아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실비아씨는요?"

"아... 그게."

카야에 의해 자신의 약혼자를 잃어버리게 된 실비아는 한없이 절망하다가 그대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녀를 위로할 새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에 모두는 안타까워했지만 운현만큼은 마냥 안타까워할 수 없었다. 자신이 헤스티아를 구하기 위해서 다른 이를 희생시킨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제니스씨도지...'

제니스는 등에 큰 상처를 입었고 아직도 신전의 신세를 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상처다.

'하지만 상관없어.'

누구를 구하든 결국 회귀를 하면 모든 것이 복구된다. 그렇다면 자신의 기분에 맞게 행동하면 되는 것 아닌가? 얼굴 한번 못 본 그를 구하는 것보다 운현은 헤스티아를 지키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운현이 그것을 생각하는 동안 상아와 필레, 헤스티아는 무언가 이야기를 나눈 후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상아. 할 일 없지?"

"응? 왜?"

"아. 피스나씨에게 갔다오려고. 연구가 얼마나 진행됐나 보고 싶어서..."

"그런거라면... 같이 가는게 낫겠지? 조금만 기다려줘."

"응."

시청에 도착한 운현 일행은 시청을 복구하는 사람들을 지나 시장실로 올라갔다. 여전히 정신없는 시장실의 앞에 도착한 운현은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장치를 조정하고 있는 피스나를 발견했다.

"피스나씨."

"어머? 운현씨. 상아도? 아... 헤스티아씨와 필레씨도 왔군요..."

얼굴에 기름이 뭍어 있는 피스나는 필레의 텅 빈 오른팔을 보고 우울한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이미 안면은 있었는지 피스나는 필레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괜찮을거에요... 이번 연구만 끝내면 의수를 만들어드릴게요."

"고마워요. 피스나씨."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연구가 얼마나 진행됐나 알고 싶어서요."

"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이제 내일이나 내일 모레쯤이면 완성될 것 같아요. 한번 해보시겠어요?"

피스나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것을 자신이 실험하는 동안 무언가 문제라도 생기면 바로 반응할 수 없다. 특히나 이런 곳에서는 더욱 더. 안전한 곳에서도 운명이 공격하는데 이런 폭발물 많은 곳에서 자신이 무방비 상태로 있었다간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그럼 다행이네요. 혹시 연구자료를 볼 수 있을까요?"

"연구자료요? 물론이죠."

운현의 질문에 피스나는 시장실 옆에 있는 작은 방으로 향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과 쌓여 있는 책들, 양피지와 두루마리들. 그것들을 가리키며 피스나는 담담히 말했다.

"여기 있는 모든게 자료들이에요.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보세요."

"마, 많네요."

"물론이죠. 여기에 들어간 기술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렇군요..."

운현이 당황하자 피스나는 자신있는 얼굴로 말했다. 시장실에 있는 커다란 캡슐의 안에 들어간 그녀는 그 안에서 접속기에 걸려 있는 부품을 떼어낸 후 다른 부품으로 교체했다.

"캡슐의 내부를 조정하는 일이 쉽지가 않네요. 혼자서 하려니까 더..."

"그래도 이정도나 하신 것을 보면... 요한씨는 아직도?"

"네.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것이 가상의 세계와 진짜 세계간의 구분을 명확히 하기 위한 안전장치를 만드는 건데... 그게 쉽지가 않네요. 장시간 가상의 세계에 있으면 그 세계를 진짜의 세계라고 인식하는 것이 문제라서... 그렇지만 그것도 얼마 안남았어요."

"대단하네요. 고맙습니다."

"네? 하하하... 뭘요. 근데 뭐가 고마운거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같은 것을 한대 더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운현의 질문에 피스나는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녀가 한참을 고민하자 운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오래... 걸리나요?"

"네. 적어도 반년 정도..."

"왜죠?"

"재료가 없어요. 주요 부품 중 몇가지는 연금술사와 협력해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거든요. 마석과 코어는 있지만 그게 만들어지는 시간까지 생각한다면..."

"...그렇군요."

그녀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 마세요!"

피스나는 예정대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녀가 만들어낸 장비와 연구자료들을 차분히 본 운현이 밖으로 나오자 필레와 헤스티아, 상아는 그를 따라 나왔다.

"저게 완성되길 기다리는거야?"

"응."

"왜?"

"...쓸일이 있거든."

225====================

Turning Point

하나 더 만드는데 반년이나 걸린다? 운현은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운명은 여전히 그녀들을 노리고 있었다. 괜히 버티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가 심각한 얼굴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운현은 누군가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기분에 고개를 번쩍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과 거리를 복구하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

"무슨 일이에요?"

"아무것도 아냐..."

기분 탓인가? 요즘 들어 예민해지기는 했다. 자신을 올려다보며 헤스티아가 묻자 운현은 쓰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인정 못해..."

카야는 운현을, 그리고 헤스티아를 노렸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죽어야 했던 것인가. 술에 잔뜩 취한 얼굴로 실비아는 운현과 헤스티아, 필레, 상아를 노려보았다. 내가 이렇게 불행한데. 왜 그는 저렇게 행복해야 하지? 이 불합리함을 용납할 수 없다. 그녀는 빠득 이를 갈고 그를 노려보았다.

"인정 할것 같아?"

그도 불행해야 한다. 그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그가 책임을 져야 한다. 불합리적이든 합리적이든 그딴 것은 상관없었다. 실비아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운현과 필레, 상아. 그리고 헤스티아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시고 있던 술을 바닥에 놓은 채 그녀는 기름통을 몸에 뿌렸다.

"....."

털레털레 2층의 건물에서 걸어 내려 온 그녀가 거리로 나오자 사람들은 그녀의 몸에서 나는 기름 냄새에 당황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운현 일행을 향해 흐느적 흐느적 걸어간 실비아는 운현과 필레, 상아가 자신을 발견하자 비틀거리며 뛰었다.

"하하하하하!! 같이 가자! 같이 죽어서 그에게 사죄해라!!"

'역시...'

운명을 바꾼 대가는 아직 남아 있었다. 헤스티아를 구하기 위해 실비아의 약혼자가 죽는 것을 방치했다. 그것에 대한 분노와 증오, 광기를 담아 실비아가 달려오자 운현은 검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벤다.'

실비아든 누구든. 그녀들을 공격하는 자는 죽인다. 운현은 싸늘한 눈으로 달려오는 실비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촤악!"

검날이 실비아의 몸을 베었다.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름 냄새에 헤스티아와 필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그녀를 아무런 거리낌없이 베어버린 운현의 거침없는 손속에 그녀들이 놀라는 동안 운현은 실비아가 주머니에서 발화장치를 꺼내자 이를 갈며 검을 움직였다.

"하하하!! 같이 죽는거다!!"

"화르르르륵!!"

몸에 불을 붙인 실비아는 내장이 반쯤 흘러나오는 고통 속에서도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을 흠뻑 적시고 있는 화염에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아아압!!"

기합성을 내뿜으며 실비아는 운현이 아닌 헤스티아를 향해 달려갔다. 그를 죽일 수 없다면, 그 역시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리라. 불길에 타오르며 실비아가 헤스티아를 감싸안으려 하자 운현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서걱!"

"....."

실비아가 헤스티아를 안기 전, 상아는 헤스티아를 당겼고 실비아의 목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원통한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실비아의 몸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며 운현은 천천히 검을 검집에 넣었다.

"너..."

손속에 자비따위는 없었다. 이야기를 들을 생각도 없고 타협할 생각도 없었다. 운현이 망설임없이 실비아를 죽인 것에 상아는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시, 실비아씨..."

실비아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에 헤스티아는 아직도 놀란 모양이다. 그녀를 잡아주며 필레는 한숨을 내쉬었다. 실비아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만약 자신도 운현이 다른 누군가 때문에 죽었다면 저렇게 나왔을테니까. 다만...

"운현..."

운현과 실비아는 나름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 것에도 운현은 전혀 문제가 없는 표정이었다. 오로지 할 일을 했다는 것처럼 무감정한 그의 얼굴에서 필레는 그가 마치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받았다.

"응? 아. 응."

"너..."

상아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 된거야?"

"그럴리가."

상아의 질문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 앞서 걷자 상아와 필레, 헤스티아는 왠지 모를 어색함을 느꼈다. 평상시의 운현이 아니다. 자신들을 지키려고 점점 운현이 변해가는 것을 느낀 그녀들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는... 운현이 망가져버려요."

"이렇게 둘 수는 없어."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운명을 막기 위해서 그가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필레와 헤스티아의 말에 상아는 떨떠름히 말했다. 운현은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그가 실비아를 죽인 이후 그는 점점 무감정하게 다른 이들을 대해가고 있었다. 오로지 자신들을 운명에게서 지키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바뀌어버린 그의 모습에 모두는 걱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잠도 제대로 안자고 먹지도 않아요. 이를 어쩌죠...?"

그가 저렇게 변해가는 이유를 모른다면 그것을 풀려고 해보겠지만 알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운명에게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운현이 혹사하는 것이었다.

"...이럴바에는 차라리..."

헤스티아가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리자 필레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것만은 안된다. 그렇게 했다간 운현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하지만! 운현씨가 회귀를 하면 모든 것은...!"

"실패를 한다면? 운현에게 두려움을 줘서는 안돼. 그가 미련을 갖지 않도록 해야해."

운현의 회귀가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그 회귀는 한번으로 족해야 했다. 만약 실패를 한다면 운현은 다시 회귀를 할 것이고 그 다음의 실패가 이루어진다면 다시, 몇번이고 반복을 할 것이다. 그가 다음 회귀에서 실패를 하면 그는 더 이상 회귀를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상아나 필레, 헤스티아는 그 말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다.

"운명과 싸우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알고 있는 것은 운현 뿐이야.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없어. 최대한 그가 회귀를 할때까지 살아남는 것 뿐이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상아는 맥빠진 어조로 말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짐을 그에게만 부여하는 기분에 참담해진 그녀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힘없이 매만졌다.

"......"

잠들어 있는 헤스티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운현은 창 밖을 보았다. 오늘도 잠이 오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언제 헤스티아나 필레, 상아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쉽사리 잠들 수 없었다. 잠깐 잠깐 눈을 붙이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아예 잠을 잘 수 없었던 운현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이마를 감싸쥐었다.

'차라리 다난이라는 명확한 적이 있다면...'

다난이 있을 때는 다난에 대한 걱정과 주의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에 주의를 해야 한다. 힘들다. 쉬고 싶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잠들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에 운현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차라리..."

차라리.

"...아르토리우스의 말대로 하는게..."

그녀들을.

"나을지도 모르는 건가."

죽게 내버려 두는게 옳을지도 몰라.

"...뭐?"

운현은 자신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에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후려쳤다. 미친 것 아닌가? 아무리 회귀를 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녀들이 죽는 것을 그냥 두고 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건가.

'내 목적은 그녀들을 구하는거야. 회귀를 반복하는게 아니라고.'

그녀들을 불합리한 운명에서 구원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목표다.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꺾어버릴 생각인가? 아무리 이번 삶에서 미야와 바제트를 구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렇다 하여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버릴 생각인가?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부여잡고 눈을 감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헤스티아를 꼭 끌어안은 그가 그녀의 향기에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동안 헤스티아의 눈에서는 조금씩 눈물이 흘러내렸다.

'운현씨...'

"다 됐어요!!"

어떻게든 버텨낸 것이 자랑스러울 정도다. 운현이 완전히 초췌해질 때 쯤이나 되어서야 피스나는 모든 연구를 끝마치고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녀가 자랑스럽게 캡슐을 톡톡 치며 말하자 운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건가요?"

"네. 후후후... 이걸로 요한과 만날 수 있어요. 보실래요?"

캡슐 안에는 금색 단발 머리칼에 얌전한 인상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그의 머리에 씌여져 있는 접속기를 가리키며 몇가지 설명을 한 그녀가 캡슐 안쪽에 있는 버튼을 누른 순간 화면이 밝아지며 그곳에서 캡슐 안에 있는 사내가 나타났다.

"...여긴."

"요한! 나야! 들려!?"

"피스나!? 뭐야!? 어떻게 된거야!? 여긴 어딘데!?"

"요한. 놀라지 말고 잘 들어. 넌 지금 악신의 저주에 걸려 있어. 너와 만나기 위해서 난... 흑...흐흑..."

기쁜 얼굴로 말하던 피스나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가 우는 것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요한은 힘겹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가상 세계와 현실이 만날 수는 없는 법. 그가 우울해하자 피스나는 눈물을 쓱쓱 닦았다.

"이제 조금만 기다려줘. 반년 안에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거야. 그럼... 그럼..."

"...알았어. 피스나. 그동안 정말 고생이 많았겠구나..."

피스나의 얼굴과 자신의 기억에 없던 장소. 그리고 주변. 그것만으로도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던 요한은 부드럽게 웃으며 피스나를 달래주었다. 그의 따뜻한 목소리에 피스나는 다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상아가 그녀를 달래주는 동안 운현은 요한이 누워 있는 캡슐에 다가갔다.

"당신... 어째서. 아니... 아닌가? 분위기가... 당신은 누굽니까."

"아. 저는 운현이라고 합니다."

"흑... 운현씨야. 운현씨 덕분에 이 연구를 마칠 수 있었어. 요한. 이게 다 운현씨 덕분이야."

그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하자 화면 안의 요한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운현씨. 덕분에... 덕분에 다시 피스나와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별 말씀을. 그런데 요한씨.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아직 어색해서 잘... 이게 가상의 세계인가요? 아무리 봐도 현실 같은데..."

요한이 앉아 있는 곳 주변은 울창한 숲이었다. 그 숲속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이제 되었다.'

가짜의 세계를 만들 준비는 끝났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회귀 뿐. 운현은 피스나의 초췌한 얼굴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이제부터 푹 쉬시고 양산화를 하시면 되겠군요. 혹시 필요한 물건이 있으시다면 저도 돕겠습니다."

"흑... 괜찮아요. 후후후... 요한. 이제 난 조금 자러 갈게. 어떻게 할래? 요한은?"

"난 조금 더 이곳에 있을게. 고마워 피스나. 이제 푹 쉬어."

그의 말에 피스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가 상아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로 향하자 운현은 캡슐과 그 안의 접속기, 그리고 캡슐 안에 누워 있는 요한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226====================

Turning Point

"상아."

"응?"

길드 회관으로 복귀한 운현은 저녁까지 기다렸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회관으로 내려 온 그는 필레와 헤스티아가 빵을 먹는 것을 보며 상아를 불렀다. 그녀를 데리고 자리에서 멀어진 운현은 필레와 헤스티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쟤들 네 방에서 재워도 될까?"

"그건 어렵지 않은데... 왜?"

"오늘 갈거야."

"...뭐?"

운현이 회귀를 결심했다는 것에 상아는 놀랬다. 이렇게 갑자기 간단 말인가? 그녀가 당황하는 동안 운현은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오늘을 기다렸어... 피스나의 연구가 끝나는 것을...!"

"자, 잠깐만. 너 설마...?"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 지 눈치챈 상아는 당황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아무리 막나간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좀 아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아챈 운현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잡혀 있는 손을 뿌리쳤다.

"미안하지만 이제 너도 날 막지 못해."

"하지만 그래서는... 그런 짓은 네가 더 힘들 뿐이야. 차라리 내가 같이 가서 설득하는게 낫지 않을까?"

운현은 피스나가 만든 장치를 빼앗을 생각이다. 그녀가 요한을 구하기 위해서 수십년을 고생하여 연구하고 만든 물건을 훔칠 생각인 것이다. 왜 그것이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운현은 운명과 싸워가면서 그 연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만큼 운현의 계획에 피스나의 연구가 필수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반드시 허락할거야. 그녀는..."

"아니. 불가능해."

"....."

"그녀에게 있어서 인생의 목표는 요한과 다시 만나는 것이었어. 아직 만나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성공한 것을 그녀가 쉽게 포기할 것 같아?"

"...하지만..."

"나는 한다. 무슨 희생을 해서라도 하고 말거다."

싸늘한 운현의 말에 상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까 헤스티아와 필레를 부탁해. 만약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다간...나는..."

"......"

"그러니까. 약속해줘."

"...알았어. 그 대신 너도 약속해줘. 만약 피스나씨가 깨어 있다면... 그녀에게서 힘으로 뺏지 말고 일단 이야기를 시도해줘. 피스나씨라면 반드시 이해해줄테니까."

결국 상아는 운현의 손을 들고 말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빙긋 웃으며 상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다시 볼때까지 부디 몸 건강히 있어줘."

"...마음대로 해. 이 바보야."

상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마 운현은 피스나의 장치를 빼앗고 바로 던전으로 직행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와 만날 일은 없어지겠지. 상아가 슬픔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운현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준 후 애써 웃었다.

"다시 만나면 나는 너를 보자마자 사랑한다고 말할거야. 그걸 받아들일 준비는 됐겠지?"

"훗. 웃기지마. 아마 내가 먼저 하게 될걸?"

상아는 운현의 입술에 키스한 후 여인들에게 돌아갔다. 그녀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던 운현은 조용히 길드 회관 밖으로 나갔다.

어두운 거리를 차분히 걸은 운현은 하이딩을 걸고 시청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하이딩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비병들을 지나 시장실에 도착한 그는 시장실의 불이 켜져 있고 목소리가 들리는 것에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자고 있었다면 그냥 훔쳐갔을 텐데. 하지만 더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끼이익..."

"아. 요한. 잠깐만. 금방 돌아올... 운현씨?"

"...피스나씨."

"어머... 이 늦은 시간에 왠일이에요? 우후후후~ 요한이 의심한다구요."

운현의 팔을 살짝 때리며 피스나는 베시시 웃었다. 그녀의 반응에 쓰게 웃은 운현은 최대한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저 기계. 저에게 주세요."

"...예? 아... 네. 그럴게요. 반년만 기다리시면 가장 처음 만드는 것은 운현씨에게..."

"아뇨. 지금 당장 필요해요."

"운현...씨?"

그의 표정을 본 피스나는 그게 진심임을 알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피스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왜 이게 필요하단 말인가? 운현은 성큼성큼 걸어 캡슐로 향했고 피스나는 당황하며 그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요! 왜 그러는 건데요!?"

"...미안해요. 피스나씨. 사실..."

운현은 피스나에게 조용히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자신의 정체, 운명. 그리고 헤스티아와 필레, 상아가 죽음의 운명에 처해져 있다는 것을. 그 모든 것을 운현이 이야기해주자 피스나는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 하지만. 그건... 미안해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안될까요? 넉달. 아니 석달만 기다려주시면 반드시 같은 것을 만들어낼게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운현은 회귀를 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실패한다면 어쩔 것인가? 아니, 회귀 자체가 불가능해졌다면?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연구 성과를 날려먹어야 했다. 만약 성공을 하지 못했다면 모를까 성공해서 요한과 이렇게나마 대화를 할 수 있고 그와 만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반년 후에 하나의 캡슐을 만들면 저 가상세계에서나마 요한을 끌어안을 수 있다는 것만 기대하던 피스나는 붕붕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고 사정했다.

'어쩔 수 없나...'

상아의 부탁을 들어줬다. 운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허리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가 자신을 해쳐서라도 자신이 만든 기계를 가져가려는 것에 피스나는 주륵주륵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말없이 지켜보던 요한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운현씨라고 했던가요. 당신 역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군요... 그렇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요한! 하지만!!"

피스나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며 요한은 빙긋 웃었다.

"어쩌면 이것 역시 운명일지도 모르겠네요. 운현씨. 한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제가 악신의 저주에 걸렸을 때... 저는..."

"아마 저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만났겠지요."

"...혹시 알고 있는 겁니까?"

그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울한 얼굴의 그를 차분히 바라보던 요한은 불안해하는 피스나에게 말했다.

"피스나."

"하지만! 하지만!!"

"괜찮아. 그라면... 만약 이 모든 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이라면 상관없겠지."

요한은 부드럽게 웃으며 운현을 보았다.

"부디 당신이 성공하시길 빌겠습니다."

"...저도 당신과 다시 만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요한의 몸이 천천히 화면에서 사라졌다. 스스로 접속을 종료하려는 듯한 그의 모습에 피스나는 부들부들 떨다가 눈물로 가득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성공할 수 있겠죠? 요한을 구할 수 있는 것이겠죠?"

"아마도... 당신이 만든 이 기계를 당신 이상으로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따라와요."

피스나는 운현을 데리고 연구자료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자료들을 피스나가 챙기자 운현은 그녀를 잡았다.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니 다 가져가야 할 것 같아요."

"이만큼을 다?"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안에 정신을 접속시키기 위한 기술은 한두가지 이론을 성립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 이 방에 있는 자료만으로도 부족할 수 있는데 그것을 모두 챙기겠다는 것에 피스나는 당황했고 운현은 그녀를 향해 쓰게 웃고는 책과 자료들을 인벤토리 안에 던져 넣었다.

"...신기하네요. 그건. 어떻게 된건가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피스나의 말을 들으며 운현은 방 안의 모든 자료를 챙겼다. 그가 자료를 모두 가져가자 피스나는 한숨을 내쉬며 캡슐을 열었다. 그 안에 있는 요한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피스나가 그를 들어 침대로 옮기고 몇가지 버튼을 눌러 화면과 캡슐을 분리하자 그녀는 그것을 운현에게 건네주었다.

"반드시... 반드시 성공해서...!!"

한에 받힌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요한이 다시 만나게 해드릴게요."

"...흑..."

요한과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헤어져야 하는 것인가. 그녀가 눈물을 흘리자 운현은 모든 것을 챙긴 후 밖으로 나왔다. 시청을 빠져나와 길드로 그가 복귀하는 길목에서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두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아르토리우스."

"그냥 가면 곤란하죠."

커다란 관을 들고 있는 라티나에게 다가간 아르토리우스는 손을 들어 그녀의 옷을 벗겼다. 풍만한 가슴골 윗부분에 있는 보석을 만지작거린 그녀는 운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성배를 주세요. 성배에 있는 신성을 이곳에 담아야 하니까."

"그 보석은 뭐지?"

"위신체에 들어가 있는 혼이에요. 위신체를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타인의 혼을 이곳에 집어 넣는 것 밖에 없답니다."

그녀에게 성배를 건네 준 운현은 아르토리우스가 라티나를 관에 눕히고 그녀의 가슴에서 보석을 빼내는 것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던 라티나의 눈이 천천히 감기자 아르토리우스는 성배를 그녀의 가슴 위에 올려 놓았다.

"이제 라티나의 몸은 순수한 위신체가 되어 신성을 보관하는 용기가 될거에요. 만약 신성이 필요하시다면 그녀를 안으시면 됩니다. 한번 할때마다 신성은 하나씩 운현님의 몸 안으로 들어가겠죠."

"영혼은 왜 뺀거지?"

"에... 그건 운현님이 시키신 일이라..."

"과거의 내가?"

"네."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좋다. 보석을 빼낸 아르토리우스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고 성배의 황금빛 기운이 라티나에게 옮겨지는 것을 기다렸다. 모든 빛이 라티나에게 흡수되자 텅 비어버린 성배를 운현에게 돌려 준 아르토리우스는 그의 입술에 키스한 후 볼을 쓰다듬었다.

"반드시 성공하시길 빌게요."

"그래."

아르토리우스를 지나쳐 관째로 스틸을 건 운현은 그녀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힐끔 보고 그대로 길드로 복귀했다.

"...무슨 소란이...?"

길드가 시끄럽다. 그것에 고개를 갸웃거린 운현은 기겁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길드 회관의 안에는 싸늘히 죽어 있는 헤스티아와 필레의 시체가 바닥에 눕혀져 있었고 그 앞에서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상아가 있었다.

"뭐...야?"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필레와 헤스티아가 왜? 운현이 당황하며 다가오자 상아는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흑...흐어...어윽...가, 갑자기...흑..."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227====================

Turning Point

"죽었어!! 심장이... 갑자기 필레와 헤스티아가... 흐어어엉! 아아아앙!! 아아! 으으으...!! 죽었어..! 흐어어엉!! 히, 힐을 쓸 새도 없이..."

상아가 눈물을 흘리며 패닉 상태가 되어버린 것에 운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결국은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만으로도,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옆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무력하게 죽어버린단 말인가.

'아니야.'

자신이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에게서 떨어진다면 헤스티아나 필레가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모르는 것이 아닌데도 운현은 그녀들을 지키는 것보다 회귀하는 것을 선택했다. 되돌릴 수 있다는 선택지에 눈을 돌린 것이다.

'짜증난다. 정말 이렇게 무력한 내가...'

허탈감보다 이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운명이라는 것에. 이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더러운 운명이라는 것과 그것을 만든 이에게 화가 치밀어 오른다.

"운...현?"

"...난 갈게."

"하지만!! 필레와 헤스티아가...!!"

"그래서 그런거다."

상아를 달래 줄 여유따위는 없었다. 운현은 운명이라는 거대한 적과 싸우는 것에, 그리고 이렇게 밀려버릴 수 밖에 없는 것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토록 노력을 하고 그토록 발악을 했건만. 결국 잠시 틈을 낸 것만으로도 이렇게 되어버렸다. 아니, 이런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는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우드의 연인은 결국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녀를 살리려고 불로불사의 영약까지 구해 온 그마저도 결국은 운명을 당해낼 수 없었지. 그렇다면...'

결국 자신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에 불과했는지도 몰랐다. 몇번 작은 승리를 이뤄냈다고 하여 자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힘이 필요해...! 이 더러운 운명도 내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힘이!!'

운명이라는 것에 막강한 증오심을 느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무력함에 한없는 분노를 느낀다.

'지금은 물러난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안된다는 말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에 절망한 그가 비척거리며 던전을 향해 걸어가자 상아는 운현을 잡았다.

"어쩌려고..!?"

"모든 것을 되돌릴거다... 반드시. 반드시...!"

어찌나 세게 이를 악물었는지 운현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것을 보며 상아는 눈물을 흘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 너 혼자 5계층에 보낼 수는 없어. 그곳까지 가는 길도 모르잖아. 내가 안내해줄게."

"알았어. 바로 갈거니까..."

필레와 헤스티아의 시체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겨우 도착한 신관들이 그녀들의 상태를 보는 것을 무시한 채 던전으로 향하는 입구에만 시선을 돌리고 있던 운현은 상아가 망토를 두르고 짐을 챙겨오자 그것을 받아 인벤토리에 넣은 후 곧장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1계층과 2계층을 돌파하고 3계층에 도착하자 운현은 상아에게 길 안내를 맡겼다. 몇백, 몇천번이나 왔던 길이기에 상아는 한번의 헤메임 없이 3계층의 신전에 도착했다.

"...너 4계층으로 갈 수 있어?"

"계층주를 잡아야지.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운현은 성큼성큼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2계층의 계층주를 소환할때와 비슷하게 생긴 구슬을 보며 그것을 꾹 누른 운현은 3계층의 계층주인 거대 골렘이 모습을 드러내자 아무런 거리낌없이 미믹을 꺼내었다.

"크오오오오!!"

포효하는 거대 골렘의 앞에 나타난 미믹 일곱. 그들은 검은 기운을 출렁이며 거대 골렘에게 적의를 품었고 그들을 말없이 바라보던 운현은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죽여."

2계층의 미믹이 일곱이다. 그가 하이딩을 건 순간 미믹들은 검은 기운을 내뿜으며 거대 골렘을 농락하기 시작했다. 전투? 그냥 학살에 불과했다. 미믹들의 공격에 버티지 못한 거대 골렘이 자신의 스킬을 쓰려던 순간 미믹들은 검은 기운을 모아 골렘의 심장을 파괴했고 거대 골렘은 제대로 힘조차 쓰지 못한 채 천천히 허물어졌다.

"촤악!"

거대 골렘의 코어와 사체를 미믹들이 흡수하려 하자 운현은 미믹들을 하나씩 스틸로 회수했다. 하지만 마지막 미믹은 회수하지 못했고 결국 2계층의 마인이 나타나버리자 운현은 그에게 다가가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땡그랑!"

1계층의 마인과 마찬가지로 2계층의 마인 역시 운현에게 별다른 저항 없이 그대로 죽어버렸다. 땅에 떨어진 코어를 주워 인벤토리에 넣은 운현은 마법문이 활성화되고 상아가 다가오자 그녀에게 말했다.

"가자."

"...응."

3계층의 계층주를 이렇게 빨리 잡을 줄이야. 하지만 놀랄 틈은 없었다. 상아와 운현은 곧장 마법문으로 들어섰고 4계층에 도착했다. 설원과 비슷한 느낌을 내는 4계층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스골렘과 아이스 타이거가 상아와 운현을 덮쳤다. 하지만 그들은 어렵지 않게 그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이런 놈들에게 시간을 날릴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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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계층을 돌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상아와 함께 4계층의 최단코스를 이용해 4계층의 신전에 도착한 운현은 3계층의 계층주를 잡을 때와 같은 방법으로 4계층의 계층주를 쓰러트렸다. 거대한 와이번이 쓰러지는 것을 본 상아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물었다.

"좀 쉬어야 하지 않겠어?"

계층주는 미믹으로 잡았다고 치더라도 전투를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운현은 몇일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 그가 슬슬 한계에 도달해 있다는 것은 눈에 뻔히 보였다. 지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상아가 조심스레 묻자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자."

"운현!"

"아직이야. 아직..."

이제 미련따위는 없다. 운현은 상아를 슬픈 눈으로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너마저 운명에게 당해버리기 전에... 간다. 가서 이 빌어먹을 운명을 바꿔버리겠어."

운현의 목소리에는 처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느낀 상아는 더 이상 쉬자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그럼."

그녀와 함께 마법문을 통과한 운현은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분위기가 다른 5계층의 분위기에 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부터는 주의해야 해. 잘못하면..."

"카아아아아!!!"

양 팔에 톱니가 달려 있는 거대한 짐승이 달려들자 상아는 광검에 힘을 넣어 그것을 공격했다. 광검에 맞고도 큰 피해를 입지 않은 듯한 그 괴물이 포효하는 동안 운현은 미믹을 소환한 후 미믹에게 마석을 먹였다.

"촤악!"

미믹에서 소환된 2계층의 마인은 곧장 그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인이 괴물과 싸우는 동안 운현은 상아를 데리고 자리에서 이동했다.

"저건 뭐야?"

"5계층에 출몰하는 헬하운드. 대부분은 저 몬스터야. 가자."

상아는 긴장한 얼굴로 대답한 후 운현과 함께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몇번 헬하운드와 마주쳤지만 그때마다 마인을 꺼내 헬하운드를 상대하게 해 겨우 전투에서 빠져나온 운현과 상아는 어느새 5계층의 신전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레이터 힐."

상아의 몸에 힐을 걸어 준 운현은 그녀의 몸에 나 있던 상처들이 사라지고 체력이 회복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전 헬하운드의 발톱에 맞았던 상아의 표정이 한결 나아진 것에 안심한 것이다.

"이제 회귀를 할거면서 그렇게 겁내지마."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운현의 모습에 상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하더라도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친 그의 볼을 만진 상아는 운현이 신전의 중앙에 들어서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곳에서는 계층주가 나타나지 않아. 무슨 짓을 해도 계층주와 만날 수 없어서 그 누구도 6계층에 들어갈 수 없었지."

"...이유는 알겠네."

"응?"

운현은 지금까지의 마법문과는 형태부터 다른 마법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것인가. 알 수 없다는 마법문자가?

"...준비가 된 자여. 너의 희망을 밝혀라."

"그것도 읽을 수 있어!?"

이계인의 특수한 능력으로 모든 언어를 읽을 수 있다고 한 운현이 마법문자까지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며 상아가 묻자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이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이건 말야..."

운현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원래 살고 있던 세계의 글자야."

"뭐?"

"한글이지. 내가 쓰던 언어. 글자. 이게 왜 여기에 적혀 있는지... 예상은 가네."

"무슨..."

운현은 마법문을 천천히 쓸어만졌다. 마법문에는 그 글귀 말고도 많은 글귀들이 적혀 있었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힘들다. 포기하고 싶다. 그래도 나는 할거다. 나는 그들을 잊지 않는다..."

"뭐...야? 뭔데? 뭔데!?"

상아가 당황하며 묻자 운현은 마법문 여기저기에 빽빽히 써져 있는 글귀들을 하나씩 읽었다. 처절함과 분노, 굴욕감, 무력함. 희망. 그 모든 것들이 이곳에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의 내가 도전한 증거들이구나."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단검을 꺼내었다. 많은 글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에서 마치 자신을 위해 마련된 듯한 빈 공간이 있었다. 그것에 단검을 가져다 댄 그는 천천히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성공한다..."

글자를 모두 적은 운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을 때. 그는 마법 문에 적혀 있는 글귀들과는 다른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앞에... 몬스터 조심? 상아!!"

"채앵!!"

마법문이 활성화되어가고 있는 와중에 신전의 벽이 열리고 헬하운드 셋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이 으르렁거리는 것을 본 상아는 곧장 그들의 중앙으로 뛰어 광검을 꽉 쥐었다.

"하아아아아아아!!!"

길게 늘어난 광검을 양 손으로 잡고 상아는 크게 몸을 돌렸다. 광검의 날은 헬하운드들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며 그들이 고통의 비명을 내지르게 만들었다.

"운현!!"

"젠장!"

마지막에 이런 공격이라니. 운현이 서큐버스의 검을 꽉 잡으며 달려나오려 하자 상아는 날카롭게 외쳤다.

"오지마!!"

"뭐!? 하지만!"

"거기 있어!! 마법문이 열리면 바로 들어가!!"

마법문이 활성화되는 것을 힐끔 본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다른 계층의 마법문과 다르게 마법문은 조금씩 빛을 발하고 있을 뿐 이었다. 아직 한 사람이 들어가기도 힘들 정도로 작게 밖에 활성화되지 않은 것에 운현이 검을 들어 올려 나가려고 하자  크게 뛰어 오른 상아는 헬하운드의 머리에 광검을 쑤셔 넣었다.

"푸욱!!"

"캐애애앵!!"

"하아... 하아... 운현! 검 좀 빌려줘!!"

광검은 그 날을 뽑아내는 것만으로도 마력을 소모한다. 상아는 운현을 향해 다급히 외쳤고 운현은 그녀의 말에 서큐버스의 검을 냅다 던졌다.

"고마워!!"

"째앵!!"

서큐버스의 검을 잡은 그녀는 달려드는 헬하운드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향해 검을 부딪혔다.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공동을 울린다. 두마리째의 헬하운드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하자 상아는 싸늘히 웃으며 그들에게 검을 겨눴다.

"운현!!"

서큐버스의 검을 쥔 채 상아는 운현을 향해 광검을 던졌다. 조금이라도 마력을 아껴야 하는 이때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치다.

"이걸 주면 넌 어쩌려고!?"

"하하하...! 날 기억해달라고! 하아아압!!"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상아는 헬하운드들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서큐버스의 검이 빛을 뿜었다. 광검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괜찮은 검인지라 헬하운드들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아보였다.

"상아!!"

"날 기억해줘!! 날 잊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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