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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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d
"여어! 이번에 2계층 계층주를 쓰러트렸다면서?"
길드로 복귀해 동료들이 방에 들어가서 쉬는 동안 혼자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던 운현은 자신의 등을 툭 치며 밝은 목소리로 누군가가 말을 걸자 고개를 돌렸다.
"아르."
"응. 어? 표정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아직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되어있는 상태라 그의 표정은 무표정이었다. 늘상 그의 실실 웃는 얼굴만 봐왔던 아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의 앞에 앉았다.
"우리 이번에 2계층 들어간다."
"계층주를 잡은건가? 다른 동료들은?"
"후후후... 응. 헤라랑 루티는 새로운 장비를 구매하러 갔어. 요새 전투가 잘되서 신나하더라고. 마이엘은 예전 동료들을 만나러 갔고. 아. 여기 맥주랑 감자튀김 하나."
아르는 금화 하나를 메이드에게 던졌다. 그것을 받은 메이드가 맥주와 감자튀김을 가져오자 그녀는 감자튀김을 운현에게 쓱 밀었다.
"같이 먹자고. 그런데 장비 보니까... 블랙플래그 세트 아냐? 우와... 그거 엄청 비싼데다가 구하기까지 힘든 갑옷인데. 역시 슈퍼 루키는 다르구만."
"뭐... 그나저나 2계층에 간다라... 혹시 내 장비 살 생각 없냐?"
"어떤거?"
"성스러운 메이스. 이거 한방이면 언데드들은 너 나 할 것없이 훅 가버리지. 어때?"
"아. 성스러운 메이스? 그거 좋은 대화수단이지. 그런데 그거... 예전에 카야씨가 퀘스트 보상으로 내놓았던 것 아냐?"
"알아?"
"응. 그거 탐내는 사람 많다고. 난 검사라서 사용 못하지만 전사나 사제들이라면 얼씨구나 하고 달려들 걸? 그리고 우리는 마이엘이 무기에 축복을 걸어줘서 굳이 필요는 없을 것 같네. 나중에 2계층에서 전투하는 파티한테 팔아봐. 못받아도 팔백골드는 받지 않을까 싶은데?"
"호오... 이게 그렇게 비싼건가?"
운현이 메이스를 꺼내며 말하자 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무래도 카야가 없으니까 더 그러겠지. 실제로 가지고 있는 사람도 몇명 없을걸? 희소성때문에라도 그정도는 나올거야."
"그렇구만. 좋은 정보 고맙다."
"별 말씀을. 아! 여기야!"
길드회관의 문이 열리고 헤라와 루티, 그리고 마이엘이 회관 안으로 들어왔다. 장비를 제대로 바꾼 것인지 헤라는 두터운 중갑. 루티는 깨끗한 궁사용 경갑을 착용했다. 하지만 마이엘은 전에 입고 있던 사제복을 그대로 입은 상태였다.
"아르! 네 무기도 사왔어! 어라? 운현 아냐? 오래간만이네! 이야~! 요즘 잘나간다면서? 어쭈? 블랙플래그 세트도 입고~! 진짜 잘나가네!"
자신이 입은 갑옷을 보자마자 헤라는 감탄하며 아르의 옆에 앉았다. 다가온 루티 역시 운현이 입은 갑옷을 보며 부러움에 혀를 내둘렀다.
"역시 슈퍼 루키... 으아. 부러워 죽겠네."
"우리도 그렇게 느린 건 아니니까 너무 그러지말라고... 마이엘?"
"네."
"표정이 왜그래?"
운현을 바라보는 마이엘의 얼굴이 점점 싸늘해지는 것에 아르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전에 봤을 때는 크게 신경쓰지 않더니 왜 이러는 것일까. 아르가 묻자 마이엘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죄송합니다. 몸이 좀 안 좋아져서... 그럼 저는 올라가서 쉬도록 하겠습니다."
마이엘이 떨떠름히 말하고 2층으로 올라가자 운현은 그녀가 올라가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싸늘히 웃었다. 그의 웃음에 아르와 헤라, 루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 뭐 먹을래?"
"아니. 나도 가서 쉴래."
"나도... 피곤스럽다."
"흐음. 그럼 가서 쉬어. 내일 아침에 갈거니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고. 남창 부르지 마라. 진짜 혼난다."
"알았어. 알았어."
아르의 말에 헤라와 루티는 실실 웃으며 길드회관의 2층 숙소로 향했다. 그녀들이 떠나가자 아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새들어서 남창을 부르는 일이 잦아져서 큰일이야. 돈을 모아서 더 강해져야 하는데... 예전엔 안그러더니 빠르게 레벨업을 하니까 좀 변한 것 같아. 역시 돈이 사람을 바꾸는 건가?"
"한낱 돈이 사람을 바꾸지 않지. 그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본성을 보여 줄 뿐이야."
"뭔 개소리야..."
운현의 말에 아르는 피식 웃고는 맥주를 홀짝거렸다. 가벼운 잡담을 나누며 맥주를 마시던 그녀는 맥주 한잔을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가서 쉬어야겠다. 운현 너는 뭐할거야?"
"아. 난 상아를 기다리고 있어. 들어가."
"헤에... 아쉽네. 슈퍼 루키가 혼자 있는데 한번 할까 했는데 말이지."
"나 비싼 몸이니까 예약걸어놔야된다. 일년 후에 보자."
운현의 볼을 쓰다듬으며 아르가 입맛을 다시자 운현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밀쳤다. 그의 거절에 아르는 기분나빠하지 않으며 피식 웃은 후 숙소로 돌아갔다.
"얘는 왜 이렇게 안와? 오늘은 안오려는 건가...?"
운현이 네잔짜의 맥주를 주문했을 때 길드 사무소의 문이 열렸다. 커다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으며 나온 그녀는 운현이 테이블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는 것을 발견하고 생긋 웃으며 걸어갔다.
"오옷! 운현! 언제 왔...어."
생글생글 웃으며 걸어 온 상아는 운현이 냉철한 이성 상태임을 깨닫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경계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피식 웃은 후 물었다.
"왜?"
"...아냐. 아무것도."
평상시라면 운현을 보자마자 그에게 안겼겠지만 상아는 그에게 안기는 대신 그가 앉아 있는 곳 맞은 편의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자 운현은 볼을 긁적거린 후 물었다.
"내가 이상해?"
"이상하다기보다는... 다른 사람같이 느껴져서 그래. 네가 운현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이건 기분 문제니까 말야."
"이래가지고는 너랑 못하겠네. 하고 나면 항상 이 상태가 되는데 말야."
"으음... 그래서 좀 고민이다. 근데 왜 혼자 있어?"
"이거 주려고."
운현이 품에서 목걸이를 꺼내어 건네주자 상아는 그것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상아의 반응을 기다린 운현은 상아가 천천히 목걸이를 돌려주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싸구려라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이왕 줄거면 그 냉철한 이성 상태가 아닐 때 주면 안될까? 아무래도 난 그 상태일때의 너랑은 좀 안맞는 것 같아서 말이지. 아, 싫다는 건 아니야. 그냥 어색할 뿐이야."
상아는 당황하며 고개를 붕붕 젓고 빠르게 말했다. 상아의 말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고 그것을 받았다.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 되든 안되든 결국 자신은 자신이다. 그녀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다. 운현은 그녀가 준 목걸이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부터 난 3계층이야. 위험해질지도 모르니까 잘 부탁해."
"으응..."
운현이 숙소로 올라가는 것을 보며 상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꽤 오래가는구만."
현자의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는 것에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남는 재료로 기름 함정 - 폭을 만들고 그 외에 잡다한 함정들을 만든데다가 잠이 안와 신문을 두 부나 봤는데도 현자의 시간은 비활성화되지 않았다.
"뭔가 이유라도 있는건가..."
레벨이 올라갈 수록 강화되는 것일까? 던전을 돌며 레벨이 상승하면 상승할 수록 현자의 시간이 지속되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에 운현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했다.
'이거 위험하겠는데...'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되어 있는 동안에는 전투가 무척이나 쉬웠다. 만약 현자의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서큐버스 퀸을 그렇게 상대하지 못하고 겁부터 집어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군."
그동안 꽤나 많이 현자의 시간이 되었지만 한번도 이 스킬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이 스킬의 정체는 무엇이길래 스킬창에도 등록이 되지 않고 자기 멋대로 발동되고 해제되는 것인가.
"지력이 상승하는 것 외에도 다른 효과가 있는 것 같은데..."
일단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감정의 대부분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색욕도 없고 성욕도 없고, 한없이 욕구가 사라져버리니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다.
'서큐버스 퀸을 상대할때도...'
아마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되지 않았더라면 당황하다가 그녀에게 정기를 모두 빼앗기고 죽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 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의 상태를 손쉽게 판단할 수 있었고 그녀가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강해지는 것은 좋은데..."
운현은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강해지는 것은 좋다. 하지만 자신이 알 수 없는 상태 이상으로 강해지는 것이니 그만큼 더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내 몸은 뭐지?"
서큐버스가 정기를 조금 흡수한 것만으로도 서큐버스 퀸이 되었다.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왜 자신의 정기를 흡수했을 때 그렇게 된 것이란 말인가. 서큐버스 퀸의 반응을 봐도 그녀 역시 잘 모르는 듯 했으니 그녀에게 물어 볼 필요는 없었다.
"환장하겠군."
그리고 의문은 하나 더 있었다.
'어째서 1계층에서 마인이 나온 것이지? 2계층의 신전, 그리고 1계층의 신전. 모두 내가 도전했을 때만 이런 일이 발생한 거였어.'
심각한 얼굴로 생각하던 운현은 주섬주섬 갑옷을 챙겨 입었다. 위험하긴 하지만 이 의문을 해소하기 전까지는 잠들 수 없을 것 같았기에 그는 조용히 던전 입구로 향했다.
'2계층부터 계층 이동의 마법문에 해독 불가의 마법문자가 적혀 있었다고 했지.'
"어디 가는거지?"
"아. 상아. 안잤어?"
"생각할게 있어서."
운현이 던전 입구로 향하는 것을 본 상아는 조용히 그의 뒤에서 물었다.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고 상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는데."
"2계층의 마법문에서 확인해보고 싶은게 있어."
"그거라면 내일 아침에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긴 하지만 그걸 확인하지 못하면 지금 상태가 풀릴 것 같지 않단 말이지."
"......"
그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상아는 인상을 구겼다. 늦은 시간에 운현 혼자 던전에 보내는 것은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니다. 상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잠깐 기다려."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온 상아는 슈트와 망토를 두른 채 걸어나왔다. 함께 가려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상아가 이를 드러낸 순간 길드의 바깥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콰아앙!!"
"이건!?"
"바깥에서 들렸어. 잠깐 갔다올게."
"혼자 갈 생각이야?"
상아가 몸을 돌리자 운현은 그녀의 팔을 잡으며 차분히 물었다. 다난교도의 습격일지도 몰랐다. 상아라면 크게 걱정되지 않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었다. 운현이 자신을 걱정하자 상아는 복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만약 다난교도들의 습격이라면 내가 빨리 움직여 다른 사람들이 올때까지 막고 있는게 나아."
"위험할텐데."
"흥. 날 얕보는거야? 난 이 모험가 길드의..."
"콰아아앙!!"
아까보다 더 강렬한 폭음이 들렸다. 상아는 빠득 이를 갈고 자신의 팔을 잡은 운현의 손을 뿌리쳤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상아!"
"미안하지만 지금의 너는 날 막을 수 없어."
말을 마친 상아가 밖으로 나가자 운현은 인상을 구겼다.
'따라가는게 나을까? 하지만..."
서큐버스 퀸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어느정도의 허세가 가미되었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다난의 광신도들에게도 이것이 통할까? 라는 것에는 의문이었다.
"어쩔 수 없군."
운현은 길드 사무소의 문을 발로 걷어찬 후 테이블을 뒤집어 엎어 소란을 피우며 외쳤다.
"습격이다! 모두 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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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d
"무슨 소리야!?"
"아까 폭음도 들렸어!"
대기하고 있던 길드원들이 운현이 만들어낸 소란에 뛰쳐나왔다. 무기를 든 그들을 향해 운현은 다급히 외쳤다.
"모험가 길드의 영역이 공격받고 있어요! 상아 길드장이 나갔는데...!"
"젠장! 무모하긴!"
"왜 혼자 나가!?"
운현의 외침을 들은 모험가 길드의 길드원들은 이를 갈며 바깥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가는 것을 본 운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창 밖을 보았다. 또다시 폭음이 터지며 창문이 흔들렸다. 꽤나 가까워진 폭음에 2층 숙소에서 자고 있던 모험가들이 하나 둘 씩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게 뭔 소리야...?"
"지금 습격받는거야!?"
그들도 창문 너머에서 보이는 불꽃과 폭음에 당황한 모양이다. 몇몇은 이 사태를 예측하고 장비를 착용한 채 나왔다. 그들이 1층으로 내려오자 운현은 강하게 외쳤다.
"모험가 길드의 영역이 공격받고 있다!"
"뭐!?"
"어떤 조빵매들이!?"
"용병 연맹인가!?"
아마 용병 연맹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모험가들은 다난교도들이 자신을 노린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을 끌어들여 다난 교도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약간의 거짓이 필요했다.
"그건 몰라! 하지만 모험가 길드가 공격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야! 그냥 두드려 맞을거야1?"
"그럴 수야 없지!"
"간다!"
장비를 착용한 모험가들이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하자 운현은 뒤로 한걸음 물러난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꽤나 고레벨로 보이는 모험가들과 길드원들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소에서는 완전하게 무장을 한 에리스, 필레, 펠리시아가 모습을 보였다.
"...무슨 일이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콰아아아앙!!!"
이제는 완전히 근접한 폭음이다. 운현은 이를 갈며 외쳤다.
"공격받고 있다고!"
"젠장! 상황파악할 여유따위는 없겠네. 필레! 펠리시아! 간다!"
상아가 없는 이상 탱커인 에리스가 지휘를 시작했다. 그녀의 외침에 필레와 펠리시아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운현."
"응?"
"조심해. 다난교도들일 수도 있으니까. 양동의 위험을..."
"알았어."
"모험가 중에 다난 교도가 없다고도 할 수 없어. 그러니까..."
"알았으니까 어서 나가봐. 기다리잖아."
필레가 운현과 말을 하는 것을 지켜보던 에리스는 바깥을 힐끔 본 후 다급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그녀의 그런 표정에 필레는 고개를 끄덕인 후 운현에게 살짝 키스하고 에리스의 뒤를 쫓았다. 그녀가 나가자 운현은 팔짱을 낀 채 생각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용병 연맹의 습격일 가능성은 상당히 낮았다. 일단 용병 연맹의 수장인 아르토리우스가 자신의 아군이라고 선언했고 그녀가 자신을 죽이고자 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는데도 그녀는 공격을 하는 대신 오히려 자신을 도왔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용병 연맹이 공격을 하는 것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제 3세력이라고 보긴 어려우니...'
"챙그랑!"
"큭!"
모험가 길드의 창문이 부숴지며 한 모험가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굴러들어왔다. 그녀는 깨진 유리창에 찢어진 얼굴에서 배어나오는 피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검을 들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검은 사제복의 여인의 복부에 힘껏 찔러 넣었다.
"푸욱!"
"컥...!"
'역시 다난교도인가.'
용병 연맹에서 자신을 습격했던 이들과 같은 복장이다. 그것을 본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운현씨!"
"이게 무슨 소리야!?"
"이거 설마...?"
장비를 입은 모험가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이에 끼어 있던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검은 사제복을 입은 여인의 시체를 발견하고 운현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고 운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개년들이..."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뒤에 빠져 있는게 좋겠어."
"이봐! 너희들은 뭐하는거야!? 요격해야지!"
모험가 길드가 습격받는다는 것에 모험가들은 상당히 열이 받은 모양이다. 그들이 외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미야와 바제트, 헤스티아에게 말했다.
"이대로 숨어 있을 수도 없겠군."
"하지만..."
"여기서 싸우지 않았다간 모험가들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어. 차라리 지금은 전장이 안전하다."
모험가들이 다들 나가서 싸우는데 뒤로 빠져 있다간 겁쟁이 소리를 듣는 것은 둘째치고 모험가들이 자신들에게 적대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가뜩이나 다난교도들 때문에 위험한데 던전에서 다른 모험가들에게 위협받을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싸우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를로스나 다른 강자가 온다면..."
"지금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겠지."
여차하면 하이딩을 써서 튀면 되고, 또 상아에게 받은 스크롤도 상당한 여분이 있으니 그것을 찢으면 된다. 그리고 지금은 현자의 시간이 발동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일반적인 상황보다는 상당히 유리했다.
'잘하면 카를로스를 여기서 잡을 수도 있겠군...'
"운현씨!!"
길드 사무소에서 나온 실비아는 운현을 향해 급히 외쳤다.
"지금 습격을 받고 있는 곳은 여기 뿐만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럼요!?"
"시청을 제외한 모든 조직이 공격받고 있는 것 같아요!"
"...총공격인가."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던전 도시의 4개 세력은 힘만 합치면 세계 제패를 노릴 수 있는 힘이 있는 집단이었다. 그런 집단들을 한번에 공격한다? 운현은 도대체 어떤 정신나간 년이 이따위 작전을 짠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면...'
충분히 승산이 있기에 도전을 한 것이든가. 어떤 상황이든 딱히 좋은 상황은 없었다. 운현은 실비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시청은요!?"
"시청은 지금 공격받고 있지 않은 듯 해요! 하지만 상인 조합과 제작자 연합에 병력을 보내느라..."
전투력이 강한 용병 연맹이나 모험가 길드에까지 병력을 보낼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것에 운현은 이를 갈았지만 곧 납득했다. 제작자 연합이나 상인 조합이 무너지면 던전 도시의 힘은 크게 약화된다. 지금 세계의 정세는 언제 대전쟁이 나도 모자른 상황. 던전 도시의 힘이 약해져 그곳을 다른 어떤 세력이 공격해 들어와 차지하기라도 한다면 그 세력은 강력한 힘을 얻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보면 타이밍은 참 좋군.'
"가자."
운현이 무덤덤히 말하자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난을 위하여!!"
길거리에 나오자 운현은 화려했던 거리에 피가 잔뜩 뭍어 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가 불에 타는 냄새, 사람의 피가 흘러나오며 만들어낸 질척함.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
어딘지 그립기 짝이 없는 감각에 빠진 그가 미소지었을 때 운현은 등을 밀려 앞으로 한발자국 나가버렸다.
"운현!"
"푹!"
자신이 서 있던 바닥에 화살이 꽂힌다. 건물 2층에서 큰 활을 들고 있던 검은 사제들이 화살을 쏜 것이다. 그것을 본 운현이 이를 드러낸 순간 바제트는 번개같이 활을 들어 화살을 쏘았다.
"핑! 핑!"
연이어진 두발의 화살이 사제들을 맞춘다. 그것에 맞은 사제들이 건물 바닥으로 떨어지자 바제트는 이를 갈며 외쳤다.
"젠장! 도대체 얼마나 온거야!?"
"저격에 주의해야겠네. 운현. 조심해. 저들의 목적은 너 같으니까."
"내가 아닐 수도 있지."
"뭐?"
"날 잡기 위해서라면 모든 세력을 공격할 필요는 없어. 그 전력을 모두 모험가 길드에 집중한다면 나를 잡기 더 쉬웠을 테니까. 하지만 다난 교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왜지?"
"지금 그거 생각할때야!?"
"다난을 위하여!!"
거대한 해머를 든 사제가 달려오자 미야는 그녀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미야의 주먹에 맞은 사제가 뒤로 나자빠진 순간 헤스티아는 지팡이를 흔들며 마법을 쏘아내었다.
"화르륵!"
불의 화살 네발이 날아가 검은 사제의 몸을 태운다. 그것에 고통스러워하던 사제가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것을 본 헤스티아는 이를 악물었다.
"운현씨! 적들이 몰려와요! 대충 열명정도! 아아!! 여기저기 불이 많이 나서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어!"
헤스티아는 자신의 열감지로 거리 저편에서 적들이 몰려오는 것을 파악하고 운현에게 외쳤다. 그녀의 외침에 운현은 서큐버스의 검을 가볍게 잡아 돌린 후 손을 뻗어 그들이 오는 위치에 가시 줄 함정을 설치했다.
'함정 카드를 많이 만들어 놓길 잘했군.'
성유 함정이나 성지는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현자의 시간이 안풀려 남은 시간동안 재료들을 모두 사용해 가시 줄 함정과 기름함정 - 폭, 구덩이 함정을 만들어 놓았던 운현은 넉넉한 카드를 보며 말했다.
"긴장하지 말고 하던대로 하자."
"응."
"사람을 죽이는 것은... 뭐, 적은 적이니까."
"저도 각오했어요."
운현이 다난교도들의 목표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예측한 그녀들은 각자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다난을 위하..."
"촤아아악!"
열명 남짓한 검은 사제들이 가시 줄 함정에 걸렸다. 그들의 사제복을 뚫으며 가시 줄 함정이 지속적인 피해를 만들어내자 헤스티아는 주문을 외운 후 지팡이를 들었다.
"파이어 볼!"
"콰아아앙!!"
함정에 걸려 있는 사제들에게 가차없이 파이어 볼을 날린 헤스티아는 자신의 마법에 의해 고통스러워하는 다난교도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각오는 했지만 실천은 힘들다.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끌어안아주었다.
"미안. 나 때문에..."
"아, 아뇨! 괜찮아요! 운현씨를 지키기로 결심했으니까요. 그, 그치만 조금만 더 안아줄래요?"
"그렇게 무서워?"
"아뇨. 운현씨 품이 좋아서..."
"아앗!? 치사해!"
"니네 러브씬도 좋지만 몰려오는 적은 상대해야 하지 않겠냐?"
운현이 헤스티아를 끌어안고 속삭이는 것에 미야와 바제트는 짜증을 냈다. 그것에 헤스티아는 뻘쭘히 웃으며 운현의 품에서 떨어졌고 운현은 골목에서 튀어나온 사제가 자신에게 단검을 휘두르자 그것을 잡아 그대로 엎어치기를 한 후 서큐버스의 검으로 그녀의 심장을 단번에 꿰뚫었다.
"푹!"
"커억...!"
"이런 상황이니까 주의하면서 이동하자."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여버린 운현의 모습에 바제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피식 웃었다. 역시 여러모로 의지가 되는 남자다.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은 바제트는 그의 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인탱글."
"으아아악!"
"트리플 애로우."
그녀의 활에서 쏘아져 나간 세발의 화살이 골목 안에서 마법을 준비하던 마법사의 몸을 꿰뚫었다. 하마터면 마법에 직격당할 뻔했던 운현이 어깨를 으쓱이자 바제트는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거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흥. 그나저나 상황 파악을 하는게 어려운데... 헤스티아. 다른 사람들이 어디에 몰려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조금 힘들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불때문에..."
거리 여기저기에 화재가 발생해서 열탐지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던 헤스티아는 우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상아나 길드 간부, 고위 클랜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다.
'그렇다고 얌전히 숨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상황을 모르면 움직이기 힘들다.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동료들에게 말했다.
"일단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이동하자. 모험가들이 많은 곳이라면 그곳에 있는 것이 안전하겠지."
따로 돌아다니다가 카를로스나 다른 강력한 다난의 집행자를 만났다간 최악의 결말을 가져 올 수 있었다. 모험가들이 많다면 그들을 선동해서 강자를 공격하게 할 수 있으니 괜찮겠다 싶은 운현이 말을 하자 헤스티아는 눈을 감고 다시 집중했다.
"분수대 광장 쪽에 그나마 사람들이 많이 있네요. 그쪽으로 가는게 나을 것 같아요."
"좋아. 그럼 그리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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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d
운현 일행이 분수대 광장 근처에 도착했을 때 모험가들이 사제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다양한 스킬들로 검은 사제들을 밀어붙이던 그들은 광장에 남아 있는 마지막 사제를 쓰러트리자 지친 기색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이제 없나?"
"이긴건가!?"
"하하하!! 봤냐! 자식들아! 이게 모험가의 힘이다!!"
누군가가 한 말을 다른 누군가가 받고, 또 다른 누구가가 고함으로 받았다. 모두가 환호하는 그 자리에 서 있던 운현은 이렇게 쉽게 끝난 것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리가...'
"콰아앙!!"
"헉!?"
"길드 쪽이다!"
'역시 이렇게 쉬울리 없었지.'
모험가 길드가 있는 쪽에서 폭음이 들려오자 모험가들은 당황하다가 그곳을 향해 뛰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모험가들의 틈에서 운현은 동료들과 함께 그들의 뒤를 따랐다. 어지간하면 군중 속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 그들과 함께 모험가 길드 앞에 도착한 운현은 지친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모험가 길드 앞에서 광검을 들고 서 있는 상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길드장님!"
"제길! 도망쳐!!"
상아의 입에서 나왔을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 외침이다. 그것에 놀란 모험가들이 무기를 꽉 잡았을 때 허공에서 검은 날개를 가진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장검을 쥔 검은 날개의 여인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내려오자 상아는 광검을 움직여 그녀를 공격했다.
"하아아압!"
"쉴드."
낭랑한 어조로 시동어를 외운 그녀는 가볍게 검을 내밀었다.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광검이 검에서 생성된 황색의 방어막에 막혀 튕겨져 나간 순간 그녀는 검을 당겨 상아의 머리를 공격했다.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비틀어 그것을 피해낸 상아의 손에서 마력탄이 날아들자 그녀는 검은 날개를 움직여 그것을 막아내었다.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 상아. 생각보다 약하군요."
"퉤! 집행자들을 그렇게 붙여 놓은 주제에...!"
"정 뭐하면 저기 있는 모험가들에게 저를 공격하라고 말씀해보시죠."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그녀가 말하자 상아는 힐끔 모험가들을 보다가 딱딱히 굳었다. 모험가들 사이에 있는 운현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굳자 검은 사제복의 여인은 허공에서 날개를 퍼덕여 몸을 돌렸다.
"오호... 저기 있었네."
"어딜 보는거냐!! 피오나!!"
그녀가 운현을 보자 상아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마력탄을 날렸다. 세개의 마력탄을 날개로 막기는 어려웠는지 그녀는 아까 전 상아의 공격을 막았던 것처럼 검을 내밀어 쉴드를 만들어 막아낸 후 운현을 향해 검을 뻗었다.
"레이저."
"우웅!"
"운현!! 피해!!"
"젠장!"
자신에게 정확히 겨눠진 검에서 보라색 기운이 뭉쳐지자 운현은 밧줄을 이용해 건물 위로 올라갔다. 그가 장소를 바꾸자 검을 움직인 그녀는 운현에게 검끝에 모여 있는 기운을 쏘았고 운현은 그것을 막는 대신 옆으로 굴러 피했다.
"우웅!!"
보라색 섬광이 자신이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레이저에 맞은 옥상의 난간이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 것에 운현이 침을 꿀꺽 삼켰을 때 피오나는 생긋 웃으며 검을 당기고 그에게 날아갔다.
"얌전히 죽어주시죠. 그리고 신성을 내놔요."
"미친! 너같으면 주겠냐!?"
서큐버스 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속도로 날아와 자신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피오나를 향해 욕지기를 내뱉은 운현은 검을 들어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쿠웅!"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힘에 운현은 뒤로 크게 밀려나갔다. 바닥을 몇번 굴러 자세를 잡은 그는 오른손이 뻐근한 것을 느끼며 이를 드러냈다.
"생각보다 꽤 하는군요. 그래봤자지만..."
자신의 일격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차보이는 운현을 향해 비웃음을 던진 그녀가 다시 검을 들었을 때 어느새 허공으로 뛰어 오른 상아는 피오나의 등을 향해 광검을 휘둘렀다.
"촤악!"
"큭!"
광검의 날이 검은 날개를 베었다. 아슬아슬하게 광검이 날개를 스치고 지나가자 상아는 이를 갈며 운현의 앞으로 이동해 그를 지켰다.
"운현! 도망쳐!"
"어디로?"
"...그건. 다, 다른 길드 간부들이 있을거야!"
"있었으면 지금 다 나왔겠지. 필레와 에리스, 펠리시아가 움직였지만..."
그녀들이 지금의 상황을 알고 있을까? 만약 알고 있다면 바로 와주었겠지만 아직까지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저 여자처럼 강한 자가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젠장!! 하필이면 제니스씨가 없는 날을 노리다니...!"
"어디갔는데?"
"그 남자 데리러!"
"제기랄..."
윈드에게 소개시켜 줄 남자를 데리러 제니스가 던전 도시에서 나간 날을 정확히 노린 것에 상아와 운현은 분통을 터트렸다. 제니스라도 있었다면 상황이 꽤 괜찮았을 것이다.
"우우웅!!"
피오나의 검에서 낮은 진동이 울렸다. 그 진동에 따라 붉은색 기운이 모이기 시작하자 상아는 빠득 이를 갈았다.
"젠장!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뭔데!?"
"강한 공격이야! 어떻게든 막아볼테니까 내 뒤에 숨어!"
"하아압!!"
상아는 광검의 날을 꽉 잡았다. 혼자라면 멀리 튀기라도 하겠지만 운현이 있는 이상 튈 수도 없다. 그녀가 이를 갈며 광검을 잡은 손에 힘을 넣었을 때 피오나는 진동이 멈춘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쿠우웅!!"
피오나의 검에서 터져나온 붉은색 기운이 운현과 상아가 있는 자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 공격에 상아가 이를 간 순간 운현은 그녀의 앞으로 튀어나오며 싸늘히 웃었다.
"뭐, 하는...!"
"찌직!"
상아가 준 스크롤을 찢은 운현은 청백색의 커다란 보호막이 자신의 몸을 가리자 보호막으로 충격파를 막아내었다. 어찌나 강한 공격이었는지 충격파를 견뎌낸 보호막은 유리처럼 깨져버렸다. 상아의 공격을 세번이나 막을 수 있는 보호막이 한방에 깨져버려지 운현은 그 위력에 몸을 떨었다.
"스크롤 얼마나 있어!?"
"개인 보호막은 이제 하나!"
"...그럼 그나마 다행이군! 운현! 조금만 더 버텨! 던전에 있는 길드 간부들이 복귀할테니까!"
자신이 주었던 보호막 스크롤을 운현이 사용해 경계해야 할만한 공격인 충격파를 막아내자 상아는 기분 좋게 웃은 후 광검을 잡았다. 피오나는 상아가 전의를 올리자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당신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요?"
"그거야 해봐야 아는 일이지!"
상아가 기운을 차린 듯 하자 피오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녀의 돌진 공격이 이어질 것을 예상한 운현이 긴장했을 때 피오나는 운현을 향해 갑작스레 손을 뻗었다.
"퍼엉!"
피오나의 손에서 화염으로 만들어진 공이 날아들었다. 파이어 볼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색이 달랐다.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불꽃의 공이 날아오자 운현은 보호막만 믿은 운현은 청염의 공이 보호막을 뚫지 못하고 사라지자 싸늘히 웃으며 밧줄을 던졌다.
"혼자 날지 말고 밑에서 같이 놀자고!!"
"건방지네요!"
자신의 발을 밧줄이 잡자 피오나는 검을 휘둘러 그 밧줄을 베려 하였다. 하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상아는 밧줄을 타고 뛰어 올라 피오나를 공격했다. 광검의 날이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들자 피오나는 이를 갈며 검을 움직였고 그것을 노린 상아는 광검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우우웅!!"
광검의 날이 평소보다 더욱 강해졌다. 마력을 쏟아부어 광검의 출력을 높인 상아의 일격에 버티던 보호막에 금이 가자 피오나는 이를 갈며 주먹으로 상아를 후려쳤다.
"큭!"
상아의 몸이 밀려나며 광검의 날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피오나는 상아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녀의 변한 안색에 웃으며 상아가 광검을 까딱거리자 운현은 밧줄을 풀어낸 후 말했다.
"얼마나 버텨야되지?"
"이제 십분정도. 길드에서 분명 연락을 했으니까. 던전에서 그들이 복귀하면 상황은 종료니까 조금만 참아!"
수십발의 검은 깃털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자 상아는 공중제비를 돌며 그것을 피해냈다. 피오나가 상아를 공격하는 틈을 노려 밧줄을 움직인 운현은 자신의 밧줄을 쳐낸 피오나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걸로 끝입니다!!"
자신을 노리며 피오나가 빠르게 날아들자 운현은 당황하며 뒷걸음질 치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것을 본 피오나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었을 때 운현은 양 손을 내민 후 싸늘히 말했다.
"누구 맘대로."
"파지지지직!!"
운현의 양 손에 검은색 전격이 맺혔다. 그것에 놀란 피오나가 방어 자세를 취하지도 못하자 운현은 손에 맺혀 있는 전격을 그대로 그녀를 향해 날렸다.
"파지지직!!"
"크악!!"
무려 4계층의 계층주 서큐버스 퀸의 기술이다. 마력량으로 따진다면 어지간한 3, 400레벨들과 동급이라고 생각하는 운현의 MP를 거의 반이나 사용해야 쓸 수 있는 기술인만큼 피오나라 하여도 이것에 맞고 멀쩡하진 못할 것이라는 계산에 일부러 헛점을 만들어 그녀를 끌어들였던 운현은 피오나가 바닥을 뒹굴며 꿈틀거리자 상아에게 외쳤다.
"끝장내!!"
"알았어!!"
운현이 쏜 전격에 맞은 피오나가 회복하기 전에 끝내야 한다. 그녀는 피오나를 향해 광검을 들고 달려갔다. 바람처럼 움직인 그녀가 피오나의 머리를 향해 광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운현은 옆 건물에서 상아를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검은 날개의 사제를 발견했다.
"상아! 피해!"
"젠장!!"
회심의 찬스를 날려버려야 하다니. 상아는 이를 갈며 발을 멈추고 뒤로 굴렀다. 그 순간 그녀가 있던 자리에 다섯발의 빛의 화살이 꽂혔고 상아는 하마터면 화살꼬치가 될 뻔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건 또 뭐야!?"
검은 사제복의 후드를 뒤집어 쓴 검은 날개 여인이 날아와 피오나를 부축했다. 그녀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킨 피오나는 시뻘개진 눈으로 운현을 노려보았다.
"개... 같은 자식...!"
저레벨이라 얕보고 있던 운현에게 이정도의 상처를 받게 되다니. 피오나는 전격이 준 고통에 몸을 떨면서도 운현을 증오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은 힘들다. 돌아가."
"저 개새끼를 죽이지 않으면 안가!"
힘겹게 검을 들어 올린 그녀의 모습에 검은 후드의 여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축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설 수도 없는 주제에 저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과 상대할 생각이란 말인가.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주먹을 들어 피오나의 복부를 냅다 후려쳤다.
"퍽!"
가죽터지는 소리와 함께 피오나가 축 늘어지자 검은 로브의 여인은 상아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오늘은 돌아간다."
"누구 맘대로!"
깽판은 깽판대로 치고 이대로 돌아간다? 상아는 버럭 화를 내며 광검을 잡았다. 그녀가 쥔 광검에서 빛이 터져나오자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가볍게 붉은색으로 빛나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콰아앙!! 쾅!! 콰광!!"
후드의 여인이 손을 올린 순간 거리의 여기저기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것에 상아의 안색이 딱딱히 굳자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계속 하고 싶으면 하든가. 거리를 다 날려버리고 싶다면 말이지... 내가 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폭발이 일어날텐데 말야."
"큭..."
저들을 지금 보내는 것이 제대로 된 선택일까? 위기에서 벗어난 후 폭발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상아의 머리가 복잡해졌을 때 운현은 한걸음 나서서 후드의 여인에게 말했다.
"그냥 가게 놔두면 폭발을 일으키지 않을건가?"
"그래."
"그걸 어떻게 믿지?"
"믿기 싫다면 관두도록."
"그럼 선제공격이다."
운현이 손을 뻗자 그의 손에서 전격이 일어났다. 교섭을 결렬시키려는 듯한 그의 행동에 상아는 이를 악물고 광검을 잡았다. 다른 때라면 어색하고 싫지만 이런 상황이 되니 냉철한 이성 상태가 된 운현이 오히려 믿음직스러워졌다.
"신용할 수 없는 상대를 신용하는 병신 짓은 없지."
"......"
운현의 말이 끝나자 후드의 여인은 손을 움직이려 했다. 그 순간 운현이 손가락을 까딱였고 그의 손에 있던 전격이 강해졌다. 잠시 움직임을 멈춘 후드의 여인은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어떻게 하면 믿어 줄 것이지?"
"솔직히 믿을 수 없는데."
"...그럼 답은 하나 뿐이군. 오늘... 던전 도시의 모험가 영역은 종말을 맞이하리라."
"네 종말도 맞이하겠지!!"
"콰아아앙!!"
"파지지직!!"
커다란 폭음이 터져나오자 운현은 그녀를 향해 전격을 날렸다. 그가 전격을 날릴 것을 예상하고 날개를 피고 허공으로 날아오른 그녀는 어둠 속에서 날아 온 검은 채찍에 맞아 추락해 쓰러졌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놀란 그녀가 자신을 공격한 쪽을 보았을 때 그곳에는 작은 상자가 검은 기운을 일렁거리고 있었다.
"하등한 미물따위가!"
"퍼엉!!"
자신을 공격한 것이 미믹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오른손을 움직여 미믹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이 붉게 타오른 순간 미믹은 폭발해버렸다.
"하아아아아!!"
"걸렸구나!! 요년!"
그녀가 미믹에게 신경이 팔린 틈을 놓치지 않은 상아는 번개처럼 달려가 쓰러진 후드의 여인을 공격했다.
"서걱!"
"아윽...!!"
오른쪽팔이 잘려나간다. 머리를 노렸지만 필사적으로 후드의 여인이 몸을 비튼 탓에 한쪽 팔만 자르게 된 상아가 이차 공격을 하려는 순간 그녀는 날개를 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피오나!"
"카악!!"
피가 터져나오는 오른팔을 잡으며 그녀가 외치자 피오나는 황급히 날개를 펼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녀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밤하늘로 도망가버리자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쳇. 놓쳤나."
"하아... 아깝다."
"놓친 걸 가지고 투덜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패시브 스킬 : 현자의 시간이 비활성화됩니다.]
[냉철한 이성 상태가 해제됩니다.]
[지력이 99 하락합니다.]
"타이밍도 맞았고."
운현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상아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끝났어?"
"어? 아. 응."
용케 현자의 시간이 종료된 것을 눈치 챈 상아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그의 품에 안겼다. 나른한 한숨과 함께 그녀의 몸이 축 늘어지자 운현은 상아의 몸을 끌어안아 들었다. 무척이나 가볍고 작은, 그리고 따뜻한 몸이다.
"야야. 일어나. 전투는 끝난 것 같으니까. 오늘의 MVP인데 멀쩡히 걸어나가야지."
"네 품에 안겨서 나가고 싶은데..."
아까 전 용맹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애교를 피우는 작은 소녀만이 남았다. 상아는 빙긋 웃은 후 운현의 입술에 키스하고 자신의 발로 옥상에 섰다.
"어휴... 힘들어. 그나저나 에리스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거야?"
"글쎄? 다른 곳에서 박터지게 싸우고 있지 않을까? 저런 년들이 달라붙으면 그들로서도 쉽지 않았을테니까..."
"쳇. 아. 운현."
"왜?"
"목걸이 줘."
아까 전 자신이 냉철한 이성 상태일때 돌려줬던 목걸이를 걸어달라는 상아의 요청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야. 그때도 나고 지금도 난데 왜 차별하냐?"
"난 지금의 네가 좋단 말야. 빨리 해줘. 자자."
아름다운 목을 내밀며 상아가 눈을 감자 운현은 주머니에서 꺼낸 목걸이를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자연스레 그가 자신을 끌어안자 상아는 운현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베시시 웃었다.
"자. 됐다. 잘 어울리네."
"후후후~ 나 정도 되면 뭘 해도 잘 어울린다고."
으쓱거리며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본 상아는 활짝 웃고 그의 손을 잡았다. 상아와 함께 건물 위에서 내려 온 운현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바라보자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와!! 상아 길드장 최고에요!"
"운현! 잘 싸우던데!? 역시 슈퍼 루키!"
"한번 만져보자!!"
모험가들이 상아와 운현을 잡으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의 곁으로 온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여성들에게 둘러쌓인 운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오밤중에 생 고생하느라 다들 수고 많았다! 아직 이 도시에 다난교의 악당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순찰 한번 하고 복귀하자!"
상아는 모험가들을 독려하며 앞서 걸었다. 그녀의 뒤를 많은 모험가들이 따라 걷기 시작했을 때 운현은 일행들과 함께 뒤로 슬쩍 빠졌다.
"운현씨. 아까 그자들은 뭐였죠?"
"글쎄? 생각을 해봤는데 말야..."
"...."
"나도 잘 모르겠어."
"뭐에요!? 정말! 장난은 그만 치라구요!"
진지한 어조로 그가 말하자 헤스티아는 어이없어하며 그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녀의 귀여운 행동에 키득거리며 웃은 운현은 미야가 다가오자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 다친데는 없지?"
"응. 우리보다 네가 더 걱정이다. 아까 보니까 번쩍번쩍 난리도 아니던데."
"뭐, 좀 그렇지."
운현의 말에 미야는 씨익 웃으며 그의 팔을 끌어안고 볼에 키스했다.
"꽤 강해보이던데 잘도 싸우던데?"
"후후... 이정도야 뭐."
"운현..."
운현이 동료들과 잡담을 하며 걷고 있을 때 골목에서 헤라가 걸어왔다. 많이 다친 듯한 그녀가 절뚝거리며 걸어오자 운현은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야! 넌 왜 이렇게 다쳤냐?"
"운현..."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헤라의 눈에는 촛점이 없었고 그녀의 손에는 무기가 없었다. 전투를 치룬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하기만 한 것으로 보이는 듯한 헤라의 모습에 운현은 그녀의 뒤를 보며 물었다.
"아르랑 루티는? 그리고 그 마이엘인가 하는 사제는 어디갔... 야. 뭐하냐?"
운현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헤라는 그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손에 담겨 있는 강한 힘에 운현이 당황하자 헤라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운현..."
"운혀어언!!"
절박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가 골목에서 터져나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복부에 긴 검이 꽂히고 한쪽 눈가에 긴 상처를 입은 아르였다. 검은 귀는 반쪽이 잘려져 검은색 머리칼을 피투성이로 만들고 있었다. 심한 상처를 입은 그녀가 비틀거리며 다가오자 사람들은 당황하며 그녀를 잡았다.
"넌 왜 이래!?"
"피, 피해... 마, 마이엘... 다난교...쿨럭!"
복부의 상처 때문인지 그녀는 피를 토하며 간신히 말하고 쓰러졌다. 그것에 의문을 품은 운현이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헤라를 밀치고 아르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헤라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모든 것은..."
"설마!? 운현!! 도망쳐!!"
그녀의 몸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까 전 후드의 여인의 손이 빛나던 것처럼 빛나던 그녀의 몸에서 강한 기운이 터져나오려고 할 때 운현은 서큐버스의 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헤라의 팔을 잘라 그녀를 걷어 찼다. 붉게 빛나던 그녀가 뒤로 밀려나가는 순간 미야는 운현의 앞으로 튀어나와 양 팔을 벌렸다.
"다난을 위하여...!"
"안돼! 미야!!"
살짝 고개를 돌린 미야가 빙긋 웃는 것을 보며 운현은 창백해진 얼굴로 외쳤다. 그녀를 잡아 끌어당기려고 손을 뻗은 순간 운현은 미야의 너머로 헤라의 몸에서 빛이 강해지는 것을 보았다.
"흑암권!!"
"콰아아아아아앙!!!"
아까 전 미야가 스킬을 사용한 순간 후드의 여인이 만들어낸 폭발과 같은 폭발이 헤라의 몸에서 터져나왔다.
192====================
Raid
"으으..."
온 몸이 아프다. 여기저기 쑤시지 않는 곳이 없다. 눈을 뜨는 것 조차도 힘겨웠던 운현은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끌어올렸다.
"여긴..."
"운현! 정신이 들었구나!"
"운현씨!!"
"괜찮아? 이게 몇개로 보여?"
"운현..."
낯익은 천장이다. 길드 회관의 숙소에 있는 방의 천장을 본 운현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가 비틀거리는 것에 바제트는 얼른 그를 부축해주었다. 바제트의 어깨를 잡으며 몸을 일으킨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죽는 줄... 미야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 본 운현은 다른 여인들의 몸에 상처가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번쩍 쳐들고 물었다. 그런 그의 질문에 여인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헤스티아도, 바제트도. 상아도, 필레도. 그리고 길드의 간부들 모두가 아무런 답변도 꺼내지 않았다.
"하하... 장난하지 말고. 그동안 내가 장난 친 것 사과할게. 자. 미야는 어딨어?"
"운현씨..."
헤스티아의 떨리는 목소리에 운현은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온 몸이 떨리고 구역질이 나려한다. 기억의 마지막. 폭발하려는 헤라의 앞으로 나서서 희미하게 웃고는 자신이 가진 최대의 방어기술인 흑암권을 펼친 미야의 얼굴이 떠오른 운현은 붕붕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아닐거야...'
그게 마지막일리 없다. 그게 끝일리 없다. 운현은 불안감을 지운 후 애써 웃었다.
"에이~ 장난 그만하라니까. 나 안 그래도 몸 아픈데 자꾸 이럴거야? 헤스티아. 미야 어딨어? 바제트. 응? 상아. 장난하지마~ 알았어. 알았어. 그동안 내가 너한테 장난친거 진짜 다 사죄할게. 그러니까..."
"....."
"미야... 어딨어..."
몸이 떨린다. 머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직감하고 있었다. 미야가 무사할리 없다는 생각은 머리 속에서 수도없이 맴돌고 있었지만 운현은 그것을 거부했다. 자신의 생각을 거부하고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야 어딨어!!!!"
"운현씨... 흑..."
분노와 걱정, 죄책감, 후회. 그 모든 감정이 섞여 있는 운현의 외침에 헤스티아는 결국 눈물을 흘려버렸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자 바제트는 그녀를 안아 준 후 음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운현... 미야는..."
"크, 크게 다친거지? 응? 그렇지?"
뇌내의 행복회로를 돌려 그나마 타협의 여지가 있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물었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만들어낸 불안감을 느낀 상아는 아랫 입술을 꽉 깨물었다.
"... 운현.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아니, 그때 순찰을 하는게 아니라 일단 복귀를 선택했더라면..."
"미야... 어딨는데..."
"운현... 미야씨는."
운현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의 목소리에 물기가 젖기 시작하자 필레는 주륵 흘러내린 눈물을 훔치고 조심스레 말했다.
"미야씨는... 이, 이제... 없어..."
"...하하... 그럴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정하지 않겠다. 운현은 필레의 말에 애써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럴리가 없어... 그럴리가... 그럴리가..."
멍한 얼굴로 기계처럼 반복하며 운현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맨발로 터벅터벅 걸어 바깥으로 나간 운현은 길드 회관에 많은 사람들이 누워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까의 폭발로 많은 이들이 다친 것이다.
"그럴리가..."
"운현씨!"
"...실비아씨. 미야는요? 미야 어딨어요?"
"....."
눈물로 가득 젖어 있는 운현의 얼굴을 본 실비아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운현은 간절히 말했다.
"미야... 어딨는데요? 네...? 지금 치료받고 있나요? 예? 어디 있어요... 어디 있냐고!!!"
실비아가 아무런 말도 못하는 것에 운현은 강하게 이를 드러내며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복작거리던 길드 회관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런 그들을 돌아보며 운현은 서서히 허물어졌다.
"우리... 미야... 흑... 어디있어요... 제발... 말해줘...큭...흐윽...흑..."
"운현씨..."
운현이 오열하는 것을 보며 실비아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항상 즐겁게 웃고 다니던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실비아가 입술을 꽉 깨물며 울음을 참으려 할 때 누군가가 운현의 어깨를 잡았다.
"제니스씨..."
"일어나."
"미야 어딨어요. 미야. 미야... 우리 미야... 지금 혼자 있어서 슬퍼할텐데... 아닌 척 하면서도 은근히 외로움 잘 타는..."
"따라와."
딱딱히 굳은 목소리로 말한 제니스는 운현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녀와 함께 터덜터덜 걸어간 운현은 길드 회관 바깥으로 나오게 되자 붕붕 고개를 저었다.
"여긴 왜요!"
"여기 있으니까."
"...여긴 시체들이... 있는 곳 아닌가요?"
"맞아."
"웃기지마!! 미야가 죽었을리 없어!!"
"미야는 죽었다."
"개소리 집어 치워...!"
"운현."
운현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자 제니스는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영원한 삶을 사는 이는 없다. 미야도 언젠가는 죽을 거야. 미야가 오늘 죽은 것은... 그녀의 운명이 여기까지였기 때문이겠지."
"닥쳐! 닥쳐! 그딴 개같은 운명론따위 듣고 싶지 않아! 미야 어딨어!"
"여기 있다."
제니스는 담담히 자신의 옆에 있는 커다란 천을 들었다. 이번 습격으로 죽은 모험가들과 민간인들을 모아 놓은 시체들 중 따로 빼 놓은 시체를 보여주며 제니스는 그에게 말했다.
"미야는 죽었다."
"그...럴리가..."
운현은 자신의 발 옆에 있는 하얀 머리의 아름다운 묘인족 여인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몸 여기저기가 화상과 얼룩으로 더렵혀져 있었다. 한쪽 팔은 기괴한 방향으로 비틀어져 있었고 매끈한 근육으로 감싸져 있던 복부는 시커먼 멍이 들어 있었다.
언제나 살랑살랑 흔들리며 자신을 건드리고, 또 만지면 간지러워하거나 기뻐하던 하얀 꼬리는 이제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는다.
쓰다듬어주면 부끄러워하면서도 늘 쫑긋 세우던 아름다운 하얀 귀는 이제 힘을 잃어 움직이지 않는다.
언제나 자신을 지키겠다고, 그리고 자신을 좋아한다며 속삭이던 저 작은 입술은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항상 자신만만하게 적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공격에도 한점 물러섬이 없던 아름다운 눈동자는 이제 빛을 발하지 않는다.
"털썩."
운현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미야의 얼굴을 만져 본 운현은 뇌내에서 가동하던 빈약한 행복회로가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아...으아...아....으...아..."
"운현."
"아아...으....으아...아아아!! 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 왜!! 왜!! 왜 미얀데! 왜!!"
다난교도가 원하던 목숨은 자신이 아니었던건가? 헤라를 이용해 자폭테러를 한 것도 자신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왜지? 왜 내가 살아남아 있고 미야가 저기 누워 있는거지? 왜?
"슬퍼하지 마라."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다른 이를 방패로 삼을거라고? 헤스티아든, 미야든, 바제트든, 상아든, 필레든. 그게 누구든 상관 없이 자신만 살아남으면 될거라고?
'미친새끼... 미친 새끼...!!'
자신에 대한 한없는 혐오감에 운현은 양 손으로 자신의 팔을 꽉 잡았다. 손톱은 그의 살가죽에 파고들었고 그것을 긁으며 운현은 이를 꽉 깨물었다.
'미친 새끼... 병신같은 새끼... 왜 그랬어... 왜...!'
왜 그녀를 안아주지 않았지? 왜 그녀를 밀치지 않았지? 왜 그녀가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을 말리지 않았지? 왜. 왜. 왜. 왜. 왜.
수많은 질문, 수많은 비난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큰 비난은, 자신을 한없이 증오하고, 자기 혐오를 느끼게 하는 질문은 하나였다.
'왜...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지? 왜 그녀의 마음을 알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지?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주제에... 왜...?'
과거에 배신을 당해서? 사람을 믿지 못해서? 하지만 그것을 잊기로 각오하지 않았던가? 그것에 얽메이지 않기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아아...아....아아아아!"
운현은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와 온 몸을 휘감는 슬픔에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며 짐승처럼 신음했다. 미야의 앞에 엎드린 채 그녀의 팔을 잡고 흐느끼는 그를 보며 제니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운현의 양팔에서 그의 손톱이 긁어 만든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본 제니스는 운현의 어깨를 잡았다.
"피가 난다. 치료를..."
"왜!!!"
"....."
"난... 왜...흑....으으...으아... 왜..."
뭐가 문제였던 것인가. 뭐가 불만이었던 것인가. 미야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에 자신한 것인가? 미야가 언제까지나 옆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인가? 사랑한다고 말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낀 건 아닌가? 과거의 일에 얽메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은 그저 허세에 불과했던 건가?
수많은 의문과 자신을 향한 질문에 운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변명을 하자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천마디의 변명을 해봤자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난 결국... 아무것도 변한게 없어...'
사람을 싫어하고 그들을 믿지 못하고, 그런 주제에 이렇게 주저앉아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흐느끼고 울던 그는 결국 몰려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했다.
"아아..."
운현의 신음소리가 잦아들자 제니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해버린 것을 본 제니스는 뒤따라 나온 여인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
"시체들을 모아. 장례식을 치뤄줘야지. 따로 장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시체를 돌려주도록 해."
길드 내 최고 연장자 답게 그녀는 슬퍼하는 사람들을 달래며 차분히 말했다. 기절한 운현을 필레가 안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상아의 어깨를 툭 쳤다.
"한 집단을 이끄는 수장이라면 타인의 죽음에 익숙해져야 하는 법."
"흑...하지만..."
"울지 마라."
제니스는 상아의 어깨를 꽉 잡아 준 후 안으로 들어갔다. 죽은 이는 미야 뿐만이 아니다. 모험가 길드의 영역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그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즐겁게 웃으며 농담따먹기를 하던 길드원, 항상 마석의 값을 가지고 싸우던 모험가. 모두 소중한 자신의 가족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에 상아는 죄책감과 함께 다난교도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
깨어난 운현이 다시 오열하다 기절하고, 다시 깨어나 오열하다 기절하는 것이 사흘동안 반복되었다. 그런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기절하지 않게 되자 헤스티아는 몇일 동안이나 울어 퉁퉁 불어오른 눈을 쓱쓱 닦으며 운현에게 말했다.
"운현씨... 물이라도... 마셔요."
"...됐어..."
자신 때문에 미야가 죽었다는 죄책감에 운현은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사흘간 그렇게 울었는데도 물 한모금 마시지 않은 운현이다. 그의 얼굴은 검게 죽어가고 있었고 몸은 말라가고 있었다. 그런 그를 더 볼 수 없었던 바제트는 운현의 멱살을 잡아챘다.
"정신차려!! 언제까지 죽음에 슬퍼할 생각이야!?"
"난... 하지 못했어."
"뭘!"
"그녀를 사랑한다고 조차... 그 한마디조차... 못했어... 그런 내가 무슨..."
"...복수는?"
"......"
바제트의 말에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허망함밖에 담겨 있지 않던 운현의 눈에 서서히 빛이 돌아오자 바제트는 그의 멱살을 꽉 잡은 채 말했다.
"미야는 너의 연인이기도 했지만 나의 친구이기도 했어. 그런 그녀가 죽은 것에 대한 복수는 하지도 않은 채 이대로 말라비틀어져 죽을 생각이야? 그렇다면 상관없어. 넌 여기서 얌전히 있어. 미야를 위한 복수는 나 혼자 할테니까."
"그건... 그건..."
운현의 눈에 빛이 살아나는 것을 보며 바제트는 부드럽게 웃었다.
"일어나. 그리고 먹고 마셔. 복수를 할거라면..."
바제트가 차분히 말하자 운현은 자신의 멱살을 잡은 그녀의 손을 보았다. 얼굴은 멀쩡해보이지만 바제트도 꽤나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늘 깨끗하고 부드러웠던 그녀의 손이 거칠어져 있는 것을 본 운현은 그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한다. 이대로 주저 앉아 있을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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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d
"일단 미야의 장례식은 어떻게 할거야."
"...그러네."
바제트의 질문에 운현은 눈을 감고 토해내듯 말했다. 복수라는 것으로 잊으려 했지만 자신은 미야를 보낼 각오를 아직 하지 못했다.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그녀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복수는 의미가 없었다.
"미야씨의 시신은... 따로 빼 놨어요."
헤스티아 역시 미야를 떠나보낸다는 것이 슬픈 모양이었다. 그녀가 작은 주먹을 꽉 쥐고 간신히 말하자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잘했어."
"...아뇨. 미야씨는 제 친구이기도 한걸요."
"어서 가자. 미야를 저대로 계속 둘 수는 없잖아."
운현이 천천히 스프를 마시는 것을 본 바제트는 그의 옷을 챙겨주었다. 사흘만에 탈수 직전까지 간 운현은 비틀거리며 그녀가 준 옷을 입었고 걱정스레 그를 바라보던 헤스티아는 운현이 옷을 다 갈아입자 그를 부축했다.
"가자."
미야의 장례식은 조촐했다. 참석자는 운현과 헤스티아, 바제트, 그리고 그녀와 인연이 있는 필레와 상아뿐.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다른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참가하지 못했다. 미안해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해 준 운현은 미야의 몸이 던전도시의 뒤에 있는 공동묘지에 뭍히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꾸욱..."
주먹을 쥔 손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미야의 몸이 흙 속에 파뭍히는 것을 단 한번의 깜빡임없이 지켜 본 운현은 그녀의 묘비가 세워지자 빠득 이를 갈았다.
"다난... 반드시...!"
"운현. 이거..."
운현에게 다가 온 필레는 그의 손에 작은 팔찌와 목걸이를 올려주었다. 블랙플래그 세트를 살 때 샀던 목걸이와 사자의 팔찌다. 목걸이는 폭염때문에 끝의 장식이 약간 녹아 있었지만 사자의 팔찌는 특별히 망가진 곳이 없었다.
"미야씨가 가지고 있던 물건 중에서 그나마 멀쩡한 거야..."
다른 것들은 폭발에 휘말려 부숴지거나 녹아버렸다. 필레가 아쉬워하며 조심스레 말하자 운현은 그것을 받아 인벤토리 안에 소중히 담아두었다. 이 안에 있으면 절대 잃어버릴 일이 없다. 그는 인벤토리 안의 내용물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것을 닫은 후 차분히 말했다.
"다난교도들은?"
"아직 그들을 찾지 못했어."
습격이 있었던 날 이후 다난교도들은 또다시 흔적을 감추고 사라져버렸다. 그 많은 수의 다난교도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사로잡은 다난교의 집행자들은 대부분 광기어린 얼굴로 다난을 찬양하며 고문을 버티지 않고 그대로 죽었고 결국 얻어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용병 연맹에서 연락은 왔어?"
"아니. 그들 역시 알아낸 것은 없나봐."
고문이라면 용병 연맹이 모험가 길드보다 더욱 잘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마저도 알아낸 것이 없다는 것에 상아가 아쉬워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비틀거리며 길드로 돌아갔다.
"운현. 괜찮아?"
"응. 이제 괜찮아."
괜찮을리가 없다. 하지만 억지로 그것을 가장했다. 지금 운현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다난 교에 대한 맹렬한 복수심과 그것을 위해 힘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상아조차 제대로 상대하기 힘들었던 다난교도들이다. 그 날개를 가진 집행자들이 덤빈다면 지금의 자신은 절대 그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운현은 복수를 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상아."
"응?"
"이번 사고로 파티가 꽤 깨졌지?"
"으응..."
부상자나 사망자는 모험가들 중에도 상당히 많았다. 그렇게 무너진 파티 중에 자신들처럼 복수를 원하는 이들이 없다고 볼 수는 없었다. 운현은 상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후 헤스티아, 바제트와 함께 길드로 돌아갔다.
"운현... 괜찮을까요?"
"그러길 바래야지... 우리도 돌아가자. 미야의 죽음에만 슬퍼할 여유는 없어."
다난교도들에 대한 분노는 운현만의 것이 아니었다. 필레도, 그리고 상아도 다난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
"200레벨대의 탱커를 모집한다고 하셨죠? 저는 마노라고 합니다. 레벨은 203. 성기사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파티원들이 둘이나 죽고 하나가 크게 다쳐서 더 이상 모험가를 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탱커 모집을 시작한지 이틀만에 운현은 자신을 찾아 온 금색 단발 머리에 성실한 인상을 한 여자 성기사와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이글거리는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다.
'성기사...'
그녀의 직업을 들은 운현은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그녀의 눈에 담겨 있는 분노. 운현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다난교에 대한?"
"...네."
빠득 이를 갈며 운현을 노려 보던 마노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해지고 싶어하는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나보다. 운현은 그녀의 장비를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난교도 일까?'
만약 루비의 일이 아니었다면 운현은 그녀를 파티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루비는 다난교도이며 전사이기도 했다. 그 말은 성기사라 할지라도 다난교도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떡하지...'
고민이 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의심을 하다보면 한도끝도 없다.
'최대한 주의를 하는 수 밖에 없겠군.'
만약 그녀가 다난교도라면 앞 뒤 볼 것없이 미믹을 소환해 죽이면 된다. 거기에 다크 라이트닝이 있으니 만약의 순간 그녀가 헛짓거리를 하기 전에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운현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동료들을 보고 말했다.
"지금 당장 출발할 수 있어?"
이틀동안 몸을 추스리는데 전념한 운현은 그나마 전투를 치룰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을 생각하며 다른 동료들에게 물었다. 그의 질문에 마노는 고개를 끄덕였고 운현은 옆에 있는 헤스티아와 바제트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괜찮아."
"당장 가죠."
한시라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한마리라도 더 많은 몬스터를 잡아 레벨을 올리고 다난 교도들을 쳐죽이고 싶다. 헤스티아와 바제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자 운현은 마노에게 말했다.
"지금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러시죠. 아. 말씀은 편히 하셔도 됩니다. 파티의 리더는 운현님이시니까요."
"그럼 그렇게 하지."
새로운 파티를 만드는 것은 운현들 뿐만 아니었다. 이번 습격으로 파티가 부숴져 새롭게 파티를 구성하는 이들은 각자 분노와 다난교에 대한 복수심을 담아 던전으로 향했다.
"여기가 3계층입니다."
"...덥네."
"사막계층이니까요."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어 더울만도 했지만 마노는 무덤덤히 바제트의 말에 답했다. 분위기가 무겁다. 운현도, 바제트도, 헤스티아도. 그리고 새롭게 영입된 마노도 말이 없었다. 묵묵히 걷던 그들은 길드에서 제공한 지도를 보고 초반의 전투를 할 수 있는 영역을 발견했다.
"전에 동료들과는 이곳에서 전투를 했었죠."
마노는 그리운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료를 잃은 것은 운현들 뿐만이 아니었다. 마노 역시도 이번 일로 동료들을 잃었다는 것을 상기한 운현은 서큐버스의 검을 잡은 후 말했다.
"그럼 전투는 어떻게 하지? 이곳의 몬스터는 어떤 몬스터가 나오는지 알고 있어?"
"네. 거대 전갈과 거대 코브라가 나옵니다. 모두 독을 가진 몬스터들이니 조심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저는 큐어 포이즌 마법을 알고 있으니 독에 걸리신다면 바로 치료해달라고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알았어."
"3계층 초반에 독을 가진 몬스터들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해독약도 꽤 사놨으니까 말야."
바제트의 말에 마노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바제트는 어깨를 으쓱였고 마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여긴 사막이 아니군. 이정도라면 괜찮겠는데..."
운현은 바닥을 쓱 쓸어보았다. 사막이라고는 하지만 이 일대는 단단한 흙바닥이라 발을 디디는데에는 문제가 없어보였다.
"우리와 함께 하게 되었으니 한가지 알아두는게 좋을거야."
"뭡니까?"
"나는 특별한 함정을 써."
"특별한... 함정이요? 슈퍼 루키라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습니까?"
마노의 질문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문이 불여일견. 운현은 구덩이 함정을 준비한 후 바제트에게 말했다.
"바제트. 한마리만 몰고 와줘."
"알았어."
바제트가 멀어지자 마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운현을 보았다. 그녀의 의문 섞인 시선에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은 운현은 바제트가 뛰어오자 마노의 등을 툭 쳤다.
"한마리라면 혼자서 방어 가능하지? 가서 막고 있어. 도발로 확실하게 시선 끌고. 도발은 있겠지?"
"도발 스킬은 있습니다만... 왜죠?"
"특별한 전투법이 있으니까."
그의 말에 그녀는 떨떠름한 얼굴을 한 채 앞으로 달려가 바제트를 공격하려는 전갈의 공격을 방패로 막았다. 그녀가 수월하게 공격을 막아내자 운현은 그녀의 뒤쪽에 함정을 설치한 후 외쳤다.
"오른쪽으로 빠져서 이쪽으로 와!"
"네!? 알겠습니다!"
미야만큼은 아니지만 몸놀림이 잽싼 그녀는 전갈을 방패로 크게 밀쳐낸 후 그의 말대로 크게 돌아 운현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마노의 방패밀치기에 맞아 스턴에 걸렸던 전갈은 커다란 꼬리와 집게를 내세우며 마노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왔고 그 순간 구덩이 함정이 작동했다.
"푸슛!"
"크에에에엑!!"
"...이게 무슨. 도적의 함정 중에 이런 것도 있습니까?"
"그래서 말했잖아. 특별한 함정이라고."
운현은 마노에게 기름통을 건네주었다. 바제트와 운현이 구덩이 함정쪽으로 걸아가자 마노는 그들을 따라 걸어갔고 운현은 구덩이 함정에 걸려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린 채 꼬리와 집게만 까딱거리고 있는 전갈을 향해 기름을 뿌렸다.
"헤스티아!!"
"파이어 볼!"
운현과 바제트, 마노가 기름을 다 뿌리고 물러나자 헤스티아는 구덩이 함정을 향해 파이어 볼을 날렸다. 그녀가 만들어낸 불의 공이 구덩이 함정 안으로 들어가 폭음과 함께 거대한 화염을 만들어내자 마노는 당황하며 물었다.
"이런 함정이..."
"...게 굽는 냄새 나네."
"......"
예전 사이드 크랩을 사냥할때를 떠올리며 운현이 씁쓸히 중얼거리자 바제트는 아무런 말 없이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운현은 피식 웃으며 마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받은 마노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그를 향해 물었다.
"이런 방식으로 전투를 하신 건가요?"
"응. 빠르지? 이 방식이라면 너도 레벨업을 빨리 할 수 있을거야. 다만..."
"다만?"
"네 몸놀림이 그리 빠르지 않으니까 주의는 해야겠군. 아까같은 방패 밀치기로 스턴은 얼마나 걸 수 있지?"
"몰려 있는 몬스터가 넷 이상이라면 많으면 최대 8초 정도 방패 밀치기에 튕겨난 몬스터에 맞은 몬스터들도 걸리는 거니까요."
"그정도면 괜찮군. 그럼 바제트. 셋에서 넷정도의 전갈을 몰아와줘."
"알았어."
바제트가 아까처럼 날쌘 걸음으로 뛰어가자 마노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운현에게 물었다.
"구덩이 함정의 약점은 없습니까?"
"그건 알아서 뭐하게?"
"제 근처에서 함정이 만들어지는 것이니까요. 만약 제가 걸린다면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 정도는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그런 건 없어. 굳이 있다면 함정의 범위 바깥은 안전하다는 것 정도겠지. 그리고 함정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몬스터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거. 언데드처럼 찌르기에 큰 타격을 입지 않는 몬스터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정도."
"...그렇군요. 어떻게 운현님 파티가 빠르게 레벨업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노는 운현의 대답에 고개를 숙여 감사인사를 했다. 그녀의 인사에 대충 답해 준 운현은 말없이 바제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원래 이런 분위기에선 누군가가 농담이라도 꺼내 이 분위기를 없애야 했지만 운현이나 마노나 그저 말없이 서 있을 뿐 이었다.
"그, 마노씨는 어떤 교단의 성기사신가요?"
그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헤스티아는 애써 웃으며 밝은 어조로 말했다. 그녀도 이렇게 밝게 말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있다간 한없이 우울해 질 것 같아서 말을 꺼낸 그녀는 마노가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아뇨. 아무것도. 저는 말씀드려도 아시지 못할만한 작은 교단의 성기사입니다."
"그런가요? 그런데 왜 성기사가 되신 건가요?"
"별로 말씀드리고 싶지 않군요."
필요한 말 외에는 딱히 하고 싶지 않았는지 그녀는 말을 끊어버리고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 함께 전투를 해야 할 사이인데 너무하다 싶었던 헤스티아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저 사람도 아직 잊지 못하는 것이겠지. 괜찮아."
"그치만..."
자신을 끌어안는 헤스티아의 머리에 입맞춰 준 운현은 다시 바제트가 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급하다. 빨리 전투를 하여 레벨을 올리고 싶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바제트가 언덕 위에서 모습을 보였다.
"전갈 넷!"
"마노. 준비해."
"네."
마노가 앞으로 걸어나가자 운현은 그녀의 뒤에 구덩이 함정을 설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제트를 쫓아오던 전갈들이 모습을 보였고 마노는 자신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메이스로 왼손에 쥐고 있는 카이트 쉴드를 쾅쾅 치며 외쳤다.
"내가 너희들의 적이다!!"
"캬아아!"
"쿠어어어!"
바제트를 쫓던 전갈들이 마노에게 달려들었다. 자신을 공격하는 전갈들을 잘 막아내던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운현은 담담히 말했다.
"준비는 끝났어."
"하압!"
"캬아!"
"카아아!!"
그녀의 방패밀치기에 맞은 전갈이 쭉 밀려나며 다른 전갈들과 부딪혔다. 그것에 그들이 비틀거리자 마노는 아까 보았던 범위를 비껴 지나가 운현의 옆으로 이동했다.
"캬아!"
스턴에서 풀린 전갈들이 마노를 쫓아 달려왔다. 일직선으로 달려오던 그들은 운현이 만들어낸 구덩이 함정에 걸렸고 운현은 마노에게 기름통을 건네주었다.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예."
3계층의 전갈 네마리를 이렇게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그녀는 운현과 바제트가 하는대로 구덩이 함정에 빠져 꿈틀거리는 전갈들에게 기름을 뿌렸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헤스티아는 파이어 볼을 날렸고 다시 게가 타는 냄새와 함께 운현은 미야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네가 말해 준 게 요리는 못먹어보겠네.'
운현이 타오르는 구덩이를 보며 미야를 생각하는 동안 마노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194====================
Raid
전투가 끝나고 운현 일행의 레벨이 210이 되었을 때 그들은 하루의 전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수십마리의 전갈을 잡고 나서야 그나마 안전한 곳에 캠핑을 할 수 있었던 운현 일행은 서로 아무런 말 없이 캠핑 준비를 시작했다.
"마노씨. 먼저 씻어요."
"감사합니다."
미야의 대신으로 탱커역을 맡은 마노의 몸은 엉망이었다. 흙먼지로 지저분하게 되어 있는 그녀에게 바제트가 말하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샤워장으로 향했다.
"어때?"
"솔직히 좀 찝찝한데."
바제트의 질문에 운현은 차분히 답했다. 오늘 하루 전투를 보자면 마노는 상당히 잘 싸워주었다. 미야처럼 빠르게 함정을 넘어오지는 못했지만 방패밀치기로 만들어낸 스턴을 이용해 그녀는 구덩이 함정을 이용한 전투에 금방 익숙해졌다.
"마노씨를 의심하는거에요?"
"가끔씩 날 노려보는 것을 보면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지."
"하지만..."
운현의 말에 바제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난교의 습격으로 사로잡은 이들 중에 실제 직업이 성기사가 아닌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개중에는 모험가로 위장하고 있었던 이들도 있었기에 바제트는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다난교도들이 모두 성직자는 아니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고민이야."
"최대한 주의를 하는 수 밖에 없겠네요."
파티에 탱커는 반드시 필요했다. 특히 운현의 구덩이 함정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바제트가 끌어 온 몬스터를 도발하여 한곳에 집중시키는 것이 필수였다. 방어력이 약한 운현이나 바제트, 헤스티아가 그것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노에 대한 시선을 늦추지마. 만약 그녀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만약 그녀가 다난교도라면 반드시 죽여버릴거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저도요."
"그 전까지는 일단 지켜보자. 그 수 밖에 없어."
만약 마노가 다난교도가 아니라면 같은 목적을 가진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까? 미야의 빈자리를 메꿔주며 레벨을 올릴 수 있다면 뭐든 상관이 없었다. 운현은 다난교도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곱씹으며 차분히 말했고 그의 말에 여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차하면 상아를 부를 수도 있으니까."
운현이 목걸이를 만지며 말하자 여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이야기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샤워를 끝낸 마노가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걸어나왔다.
"감사합니다. 저는 다 씻었습니다."
"그럼 우리도 씻자. 너희 먼저 씻어."
만약 마노가 쓸데없는 짓을 하면 막을 사람이 필요했다. 하이딩과 함정으로 상성을 씹어먹을 수 있는 운현과 다르게 헤스티아, 바제트는 1:1 대결을 하게 될 경우 상성상 성기사에게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운현이 헤스티아와 바제트에게 말하자 그녀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샤워장으로 향했다.
"운현님은 안씻으십니까?"
"쟤들 나오면."
뻘짓 못하게 감시할 필요가 있었기에 운현은 마노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그의 말에 마노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준비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캠핑시 식사의 준비는 대부분 미야가 했었다. 몇번 정도는 운현이나 헤스티아, 바제트가 했었지만 일행 중에 미야의 요리솜씨가 제일 좋고 그녀가 요리를 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그녀가 대부분 요리를 했었던 것을 떠올린 운현은 쓴 입맛을 다시며 마노에게 빵을 던졌다.
"간단하게 먹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빵이 담긴 주머니를 꺼낸 운현이 그것을 휙 던지자 마노는 가볍게 받았다. 그녀가 간이용 식탁을 설치하고 그 위에 빵주머니를 올려 놓는 것을 본 운현은 모닥불 위에서 끓고 있는 스프를 가볍게 휘저었다. 모험가나 여행자들, 용병들을 위해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스프를 그릇에 담은 운현은 마노와 함께 식사 준비를 끝냈다.
"어? 벌써 끝냈어요?"
"우리 나오면 하지. 운현. 넌 안씻으려고?"
"난 먹고 씻을게."
식탁에 앉은 운현이 무덤덤히 말하고 스프를 떠먹기 시작하자 바제트와 헤스티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릇에 스푼이 스치는 소리만 나는 조용하고 무거운 식사시간이 흘렀다. 식사가 끝날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운현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장 씻으러 갔고 그가 가는 것을 보며 마노는 조심스레 물었다.
"분위기가 상당히 안좋군요."
"좋을 수가 없죠..."
샤워를 마치고 돌아 온 운현은 무덤덤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는 파티를 지배하고 있었다. 굳이 그것을 풀어야 할 필요를 운현은 느끼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니만큼 오히려 감시하기 편하지.'
밝고 스스럼없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분위기라면 그 틈을 노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속이라면 서로 조심을 해야 하고 결국 그것은 움직임에 어느정도 제한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마노에 대한 신뢰를 할 수 없었던 운현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오늘 고생했으니까 마노는 불침번 서지 말고 쉬도록 해."
"예? 하지만..."
"파티 리더인 내가 말하는거니까 받아들여."
운현의 차분한 말에 마노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결국 입술만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운현은 바제트와 헤스티아에게 말했다.
"초번은 내가 선다. 둘번은 헤스티아. 말번은 바제트. 괜찮지?"
"응. 그렇긴 한데... 저 안에서 마노와 함께 자는게 괜찮을까?"
"특별한 문제는 없을거야."
텐트를 바라보며 그가 말하자 바제트와 헤스티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원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 이정도로 힘든 일일 줄이야.
"운현."
"음?"
"너도 이랬어?"
"뭐가?"
"너... 처음에 우리를 믿지 못했잖아. 그때도 이렇게 힘들었었어?"
바제트의 질문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상대방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항상 그것을 생각하며 계산적으로 사람을 대할 수 밖에 없었던 운현은 바제트의 말에 손을 들어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들어가서 자."
"....."
"...알겠어요."
운현의 말에 바제트는 아무런 말도 못했고 헤스티아는 무거운 어조로 말한 후 텐트로 들어갔다. 그녀들이 들어가자 운현은 의자를 끌어 앉은 후 타오르는 모닥불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다음날이 되자 운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별다른 일이 없었는지 조용한 텐트 안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마노가 자리에 없다는 것에 이를 드러내며 후다닥 일어났다.
텐트의 문을 열고 나간 그는 마노가 캠프 바깥에서 눈을 감고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운현이 천천히 팔짱을 꼈을 때 바제트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아직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있어."
불침번을 서며 마노가 나와 기도를 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왔던 바제트는 마노가 몸을 일으키고 눈물을 닦으며 걸어오자 그녀에게 물었다.
"이른 아침부터 기도를 하는군요. 무슨 기도를 드리신건가요?"
"굳이 말씀드릴 필요가 있나요?"
"같은 파티원인데 그정도는 밝힐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바제트의 말에 마노는 잠시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물론 같은 파티원이기는 합니다만 제가 영입된 것은 서로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닌가요? 당신들은 복수를 원하고 저 역시 복수를 원합니다. 그것을 위한 파티이니 정 뭐하시면 오늘까지만 파티를 하도록 하시죠."
"...그만. 바제트. 거기까지만 해둬."
"하지만."
"사과하지. 하지만 바제트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야. 어느정도는 서로를 믿..."
"당신도 저를 믿지 못하고 있지 않나요?"
마노의 말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다. 운현은 마노를 의심하고 있었다. 아니, 아마 지금 그는 상아와 필레, 헤스티아, 바제트를 제외한 모두에게 의심의 시선을 던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건 미안하군.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왜죠? 당신 말고도 파티원을 잃은 이들은 많아요. 하지만 다른 이들에 비해서 당신들의 파티는 뭔가 달라요. 다른 파티의 경우 복수를 위해서, 혹은 다시 파티를 구성하기 위해서 새로운 파티원이 오면 웃으며 반겨주었죠. 하지만 당신들은 처음부터 의심의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어요. 왜죠?"
"그건..."
마노의 말에 바제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운현이 다난교의 표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나을까? 그렇기 때문에 의심을 하고 있다. 라고 정직하게 밝히는 것이 나을까?
"미안. 그 이유는 말해 줄 수 없어."
"그럼 저와 같군요. 같은 파티끼리 숨기는 것이 있는 것은."
싸늘한 마노의 말에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파티를 하는 것은 무리다. 그는 마노를 향해 차분히 말했다.
"미안하군. 여기까지..."
"그 습격이 당신들과 관련되어 있는 건가요?"
마노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질문에 운현은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로 마주치는 눈동자. 마노의 눈에 담겨 있는 분노를 가만히 살핀 운현이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마노는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밝힐 수 없나요?"
"나와 관련되지 않았다."
운현은 거짓을 말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거짓을 말해봤자 의미는 없어보였다. 이미 마노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런가요? 하지만 그 날개를 가진 다난교의 신관은 당신을 보자마자 상아 길드장님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 당신을 공격했어요. 그 많은 모험가들 중에서 당신을 골랐죠. 그건 왜 일까요?"
"글쎄."
마노의 무감정한 눈에 운현은 이를 갈았다. 설마 눈치챈 것인가. 그렇다면... 운현이 천천히 다크 라이트닝을 준비하는 사이 그녀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부정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캬아아아!"
"캬아!"
"어째서!?"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몬스터들이 찾아오지 못할 지형에 자리를 잡았는데도 어째서 주변에서 몬스터의 소리가 들리는 것인가. 바제트가 당황한 얼굴로 활을 들었을 때 마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운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다난교는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모험가 길드를 습격한 거였군요. 그래서였어요. 그런가요?"
"다시 한번 말한다. 아니야."
"아뇨."
마노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본 후 이를 드러내었다.
"이상했어요. 왜 갑자기 다난교가 습격을 한 것인지. 그들이 왜 당신을 죽이려고 한 것인지... 하지만 그런 의문은 풀 수 없겠네요. 하긴. 아무려면 어때요."
"아니라고 했을텐데!!"
운현은 주변을 보며 손을 뻗었다. 전갈들의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언덕에서 몰려 온 전갈들이 하나 둘씩 내려오기 시작하자 마노는 자신의 팔을 걷으며 말했다.
"당신 때문에 한스가 죽었는데!!!"
"사자의 팔찌!? 스틸!"
마노의 팔에 채워져 있는 팔찌를 본 운현은 다급히 그녀의 팔을 가리키며 팔찌를 훔쳤다. 하지만 자신의 팔찌가 그의 손에 들어갔음에도 마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막을 수 있을 것 같나요? 사자의 팔찌를 찬 채 밤을 지새웠는데? 이미 3계층에 있는 대부분의 몬스터가 이리로 향하고 있는데? 당신들에게는 미안하군요. 하지만 운현 당신의 함정을 이용한 전투법 때문에 당신만 죽일 수 없었어요... 큭...쿠쿡...크크크... 아하하하하하하핫!!!"
"운현!! 위험해!"
"개년...!"
운현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자 마노는 얼굴은 환희와 기쁨으로 일그러졌다.
"여기서 나는 죽겠지! 하지만... 네놈 때문에 한스가 죽었다면...! 여기서 네놈의 죽음으로 한스의 죽음을 달랠 수 있다면! 상관없어! 같이 가자! 운현!!"
"헤스티아!! 나와! 돌파한다!"
운현은 빠르게 서큐버스의 검을 잡고 마노에게 달려갔다. 이미 많은 전갈과 뱀, 그리고 모래로 만들어진 골렘과 알 수 없는 몬스터들이 포위를 굳힌 상태였다. 여기서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자신을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던 마노는 운현의 공격을 피할 생각조차 없었는지 양 팔을 벌린 채 광기어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망설임없이 서큐버스의 검을 휘둘렀다.
"촤악!"
"한...스..."
운현의 검에 목이 베인 마노가 천천히 쓰러졌다. 그녀가 죽은 것을 확인할 겨를따위는 없었다. 운현의 말에 황급히 텐트에서 나온 헤스티아는 주변에 몰려 있는 몬스터들을 보며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설명할 틈은 없어!"
"운현! 위험해!"
"쿠웅!"
바제트의 외침에 운현은 바닥을 굴러 자리에서 피했다.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바위가 꽂혔다. 모래 골렘이 던진 바위라는 것을 알게 된 운현은 이를 갈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구멍이 없다. 방법은...'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운현은 목걸이를 잡고 외쳤다.
"상아아아아!!!"
195====================
Raid
"우웅!"
낮은 진동음과 함께 상아의 몸이 이전되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본 후 강하게 외쳤다.
"운현!? 이게 무슨 일이야!?"
"마노가 사자의 팔찌로 몬스터들을 불렀어!"
"젠장! 수가 너무 많은데!? 운현! 길드에 지원요청해! 지금 2계층의 신전에 길드원들이 있으니까 금방 올거야!"
몰려들기 시작한 몬스터들은 운현 일행을 향해 맹렬한 적의를 드러내었다. 사자의 팔지를 착용한 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미 몰려 있는 이들은 근처에 있는 그들을 적으로 삼은 것이었다. 헤스티아가 빠르게 길드에 지원요청을 하자 상아는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너무 수가 많아! 이정도면 3계층의 다른 모험가들도...!"
상아는 이를 갈며 손을 들어 올렸다. 빽빽하게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향해 손을 겨눈 상아는 마력을 집중했다.
"하아압!!"
방사형의 마력이 퍼져나가며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한방에 쓸어버렸다. 잠시 빈틈이 만들어졌지만 그 자리는 다시 몬스터들로 채워졌다.
"3계층의 몬스터가 다 몰려온건가!? 뭐 이리 많아!?"
상아는 이를 갈며 광검을 들었다. 그녀가 준비를 마치자 운현은 상아의 어깨를 잡았다.
"지금 저들을 다 쓰러트릴 수는 없어! 2계층의 마법문으로 후퇴한다!"
"큭. 그 방법 밖에는 없겠네!"
아무리 상아라고 하더라도 혼자서 이 많은 몬스터들을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녀는 운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스크롤을 헤스티아와 바제트에게 건네주었다.
"위기시 뜯어!"
개인 보호 배리어보다는 약하지만 그래도 위기는 넘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가 말하자 그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가 서큐버스의 검을 뽑아 들자 상아는 달리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상아가 달리며 광검을 크게 베어 몬스터들을 줄이고, 달리던 와중에 바제트와 헤스티아가 인탱글과 파이어 월로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막았다.
운현 역시 함정과 밧줄을 써가며 몬스터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으며 길을 뚫기 시작했다. 하지만 몬스터들의 수는 너무나도 많았다. 그들의 틈을 노리고 전갈이나 거대한 벌이 달려드는 것은 다반사였고 상아와 운현 일행들의 몸에는 조금씩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찌익!"
"우웅!"
더 버티기 힘들어지자 운현은 스크롤을 찢었다. 그와 동시에 일행의 몸에 반투명한 보호막이 생성되었고 상아는 이를 드러내며 광검을 들어올렸다.
"하아아아압!!"
광검의 길이가 한없이 길어진다. 광검을 꽉 잡은 상아는 운현과 그의 동료들에게 강하게 외쳤다.
"엎드렷!!!"
"주와아앙!!"
한계까지 길어진 광검이 주변을 갈랐다. 반경 십여미터에 가까운 범위를 광검이 쓸고 지나갔고 그 순간 그들을 노리던 몬스터들이 픽픽 쓰러져 죽어나갔다.
"하아..."
갑자기 마력을 끌어올린 탓일까? 상아의 얼굴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녀가 털썩 한쪽 무릎을 꿇고 쓰러졌을 때 다시 몬스터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입술을 꽉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난 상아는 운현이 건네 준 힐링포션을 마신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들이 죽이거나 막는 속도보다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속도가 더 많았다.
"젠장! 지원은 왜 안와!"
"챙그랑!"
전갈의 꼬리가 배리어를 후려친 순간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방패를 들었다. 그의 방패에 전갈의 집게가 부딪혔다. 그것에 운현이 비틀거리자 바제트는 전갈을 향해 화살을 쏘아 그 전갈을 물러나게 했다.
"찌익!"
바제트가 스크롤을 찢자 보호막이 다시 생성되었다. 몬스터들의 공격을 계속 받아내봤자 나오는 결말은 죽음 뿐이다. 운현은 빠득 이를 갈았다.
"상아!"
"왜!"
"미믹 꺼낸다!"
"뭐!? 미쳤어!?"
"여기서 너희가 죽는걸 보느니 차라리 마인을 뽑는게 낫지!"
미믹이 나오면 미믹은 몬스터들을 잡으려고 온 힘을 쏟을 것이다. 일반 몬스터에 비해 몇배나 강력한 미믹이라면 비록 1계층의 미믹이라 할지라도 몬스터들의 수를 줄이는데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미믹이 몬스터를 흡수해서 마인을 소환한다는 것이었다. 그 마인이 과연 자신들보다 몬스터를 더 우선하여 제압하려 할 것인가? 그것만큼은 운현으로서도 의문이었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허락 받을 시간따윈 없어!"
몬스터들이 몰려오며 배리어를 두들기는 것에 운현은 인벤토리의 미믹을 꺼내었다. 넷의 미믹을 그가 꺼내놓자 미믹들은 주변의 몬스터들을 보며 뿔뿔히 흝어졌다.
"촤아악!"
"촤악!"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미믹들은 신나게 검은 기운을 뿌려내었다. 하지만 1계층의 미믹이다보니 3계층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것이 만만한 것만은 아니었나보다. 대부분의 몬스터를 한방에 잡던 미믹은 2, 3번의 공격을 성공시키고서야 몬스터들을 잡을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미믹들도 피해를 입고 있었다.
"가자!"
미믹이 소환되자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몬스터들의 수가 조금 줄어들었다. 그것만으로도 한숨 돌릴 수 있었던 운현은 상아와 동료들에게 단호히 외쳤을 때 하늘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카아아아아아아!!"
"미친!? 사막 와이번이 왜 나와!?"
허공에서 날아오는 거대한 도마뱀은 괴성을 내지르고 수직 낙하했다. 몬스터들을 적, 아 구분 없이 해치우던 그들과 미믹이 마주쳤을 때 사막 와어번은 단검크기의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미믹에게 달려들었다.
"촤아악!"
미믹과 와이번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여파로 몬스터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본 운현은 거대한 벌이 자신을 향해 날아들자 서큐버스의 검으로 그 공격을 막아내었다.
"지금 멍하니 있을때가 아니야! 달려!"
"촤아아악!"
운현의 외침에 반응하듯 미믹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꽤 많은 몬스터를 죽이고 그들을 흡수한 미믹이 마인을 소환한 것이다. 검은 기운이 뭉쳐지며 인간의 모습을 만들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한 어둠을 보유한 마인은 주변을 가볍게 둘러 본 후 사막 와이번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쿠우웅!!"
미믹의 공격에도 큰 타격을 받지 않았던 와이번이 마인의 주먹 한방에 비틀거린다. 마인이 주변의 몬스터를 해치우기 시작했을 때 다른 와이번이 미믹을 물고 씹어삼켜버렸다.
'젠장. 마인이 하나나 둘만 더 나왔어도...!'
1계층의 미믹이라 그런지 3계층의 몬스터가 공격하는 것을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하나 둘 씩 미믹이 쓰러지고 박살나는 것을 본 운현은 마인의 뒤로 접근하는 몬스터를 향해 함정을 설치했다.
"크아아악!"
구덩이 함정에 빠진 몬스터들이 비명을 내지르자 마인은 힐끔 운현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자신을 도왔다는 것을 눈치챈 것일까? 마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달려오는 와이번의 머리를 향해 하이킥을 날렸다.
"퍼어억!"
"카아! 카아아악!"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던 와이번이 비틀거리며 쓰러졌을 때 마인은 오른손을 뻗었다. 자신의 손에서 길죽한 검은 빛의 검이 만들어지자 마인은 검을 크게 휘둘러 와이번의 목을 베었다.
"역시! 마인! 든든하구만!"
"지금 그런 소리 할때야!?"
아직도 몬스터는 많았다. 얼마나 많은 몬스터들이 여기 모인 것인가. 운현이 기뻐하는 것을 보며 타박한 상아는 광검을 잡고 달려드는 몬스터의 목을 베어넘겼다.
"뛰어!"
마인이 와이번을 잡고 몬스터들을 처치하며 시선을 끄는 동안 튀어야 한다. 강력한 마인이라지만 그라고 하더라도 혼자서 이 많은 몬스터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만무했다. 그저 시선이라도 끌어주는 것에 감사할 수 밖에. 상아의 외침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동료들과 함께 다시 뛰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엑!!"
평야지대를 벗어나 사막지대로 도착한 순간 운현은 이를 갈았다. 처음 보는 몬스터들이 사막에서 우글거리고 있었다.
"바실리스크는 왜 있어! 저건 지하에 있는 놈인데!!"
"저건 뭐야!?"
"바실리스크. 추정 레벨 290의 몬스터야. 도대체 사자의 팔찌를 얼마나 끼고 있었던거야!?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놈인데!"
"밤새. 마노라는 년이 우릴 죽이겠다고..."
"아아아아!! 도대체 왜!"
"운현씨 때문에 한스라는 사람이 죽었다고..."
"그게 왜 운현 때문이야!?"
상아가 이를 갈며 분통을 터트렸을 때 바제트는 바실리스크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발견 당했어!!"
사막지대를 어슬렁거리는 거대한 도마뱀들이 운현 일행을 발견했다. 거대한 악어를 닮은 바질리스크들이 어슬렁거리며 운현 일행을 향해 다가오자 운현은 빠득 이를 간 후 검을 잡았다.
"미믹 뽑는다."
"아아...! 그렇지만 미믹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지!"
아까처럼 마인이 소환되기를 바라며 운현은 미믹을 바실리크들 사이에 던졌다. 미믹이 검은 기운을 내뿜으며 바실리스크들을 공격하자 바실리스크 중 하나는 두터운 가죽으로 그 공격을 가볍게 버텨낸 후 입을 벌려 미믹을 물었다.
"빠각!"
"....."
"한방에 죽을 줄이야... 하하... 그럼 이제 답 없는건가?"
운현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리자 상아는 광검을 들어올렸다. 길드원들이 올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이곳에서 2계층으로 통하는 마법문까지는 얼마 걸리지않는다. 거기에 3계층과 4계층에 있는 길드원들까지 움직인다면, 버티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상아는 검을 꽉 잡고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말고 무기 들어. 너희들도. 길어야 십분이야. 십분만 버티면 돼."
상아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쉽게 장담할 수 없었다. 뒤쪽에서 몬스터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질리스크뿐이라면 모르겠지만 몬스터들까지 상대하며 과연 자신이 그만큼 버틸 수 있을까? 운현과 운현의 동료들을 지키면서? 그녀가 최대한 불안감을 삼키며 말하자 바제트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
상아의 말에 바제트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활을 들고 그 활로 운현의 머리를 냅다 후려쳤다.
"퍽!"
"아윽! 바, 바제트! 이게 무슨 짓이야!"
"바, 바제트씨!?"
"역시 한방에 기절 안하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녀는 화살을 들어 운현의 팔에 겨누고 그대로 쏘았다. 그 화살에 맞은 운현의 몸이 딱딱히 굳어지자 바제트는 빙긋 웃으며 운현에게 다가가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말했지?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지킬거라고."
"...너... 무슨..."
화살에 맞은 곳에서부터 마비가 일어난다. 입술을 달짝거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던 운현이 당황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바제트는 생글거리며 상아와 헤스티아에게 말했다.
"운현을 부탁해."
운현의 주머니를 뒤진 바제트는 자신이 원하던 물건을 발견하자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본 상아는 당황하며 외쳤다.
"미친 짓 그만해! 뭐 하려는거야!?"
"이것밖에 방법이 없어. 상아.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지키면서 길드원들이 올때까지 버틸 수는 없을거야."
"바제트씨! 안돼요! 안돼! 그건...!"
"너...너... 무슨..."
운현은 떨리는 눈으로 바제트를 보았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아까 전 마노를 죽이고 얻은 사자의 팔찌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사랑할거야. 어떤 일이 있어도 널 지킬거야. 운현... 넌 나의 운명이고 인연이며... 내 유일한 첫사랑이고... 짝사랑이야."
사자의 팔찌를 착용해 몬스터들을 유인하려는 것이다. 그녀의 생각을 읽은 운현은 힘겹게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마비에 걸려진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돌아가지 않는 혀를 굴려 그녀를 말리려 해보았지만 나오는 것은 헛된 신음성에 불과했다.
"아으...아..."
"사랑해. 운현."
운현을 바라보며 결국 한줄기 눈물을 흘려버린 바제트는 상아와 헤스티아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의 오른손에 팔찌를 착용했다.
"크오오오오오!!"
"카아아아아!!"
바제트의 손에 사자의 팔찌가 착용된 순간 바실리스크들의 시선이 곧장 바제트에게 꽂혔다.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몬스터, 그것도 무수히 많은 몬스터들의 시선을 받으며 바제트는 눈물을 주륵 흘린 후 씩 웃었다.
"운현! 살아야해!!"
눈물을 흘리며 밝은 얼굴로 외친 바제트는 곧장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를 쫓아 몬스터들은 방향을 바꿔 그녀를 쫓았다.
196====================
Raid
"안돼요! 안돼! 바제트씨! 안돼요!!"
"헤스티아! 위험해!"
헤스티아가 달려나가는 것을 잡은 상아는 바제트가 아닌 자신들을 공격하는 바실리스크를 향해 광검을 휘둘렀다. 광검에 맞은 바실리스크가 큰 충격을 받고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본 그녀는 이를 꽉 깨물었다.
"바제트가 만들어 준 기회야!"
"하지만! 이대로라면 그녀는 죽어요!"
"바제트가 아니었다면 우린 다 죽을지도 몰라! 운현을 죽일 생각이야!?"
상아가 멱살을 잡으며 소리치자 헤스티아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바제트가 몬스터들을 몰고 가버린 덕분에 사막지대에 우글거리던 바실리스크는 몇 남지 않았다. 그정도라면 상아는 운현과 헤스티아를 충분히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바실리스크들을 잡고 길드원들과 함께 바제트를 찾는 것 뿐이야!"
"크흣...흑..."
"그럼 빨리 도와."
헤스티아의 멱살을 놔준 상아는 광검을 꽉 잡았다. 마비상태에 빠져 있는 운현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본 상아는 바제트의 의지를 떠올렸다.
무서울 것이다.
두려울 것이다.
슬플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을 버렸다. 그것을 생각하면 상아는 운현이 죽게 놔둘 수 없었다.
"하아아압!!"
수마리의 바실리스크들이 덤벼든다. 그것을 향해 마력포를 쏘아내고 광검을 휘둘러 그들을 모두 잡은 상아는 헤스티아가 운현을 부축하자 싸늘히 말했다.
"마법문쪽으로 간다. 길드원들과 만나야해."
"흑...흑흑...네..."
애써 냉정히 말하고 있지만 상아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바제트의 몸놀림이라면 어쩌면. 최대한 빨리 찾으면 그녀가 살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아는 주변을 경계하며 마법문 쪽을 향해 걸었다. 마노가 불러 온 몬스터 중에 지하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던 바실리스크까지 올라 올 정도라면 그 위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푸화아악!"
"카르르르!!"
"샌드웜까지!?"
불길한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다.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모래 속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지렁이가 날카로운 이빨을 내밀며 포효하자 상아는 그것을 향해 광검을 휘둘렀다.
"푸화악!"
모래로 위장하고 있던 샌드웜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얼추 세어봐도 이십여마리 이상. 그들을 보며 혀를 찬 상아는 광검의 날을 해제한 후 양 손을 뻗었다.
"하아아압!!"
예전 미믹을 잡았을 때 사용했던 빛줄기가 꿈틀거리는 샌드웜들에게 날아들었다. 그것에 맞은 샘드웜들이 몸을 부르르 떨다가 폭죽처럼 터져버리자 상아는 다시 광검을 잡았다. 일격에 반을 날렸지만 아직 반이 넘게 남아 있었다.
"헤스티아! 열감지로 위치를 알려줘!"
"왼쪽에서 두마리가 와요!"
모래 속을 파고들며 지면에서 치고 올라오는 샌드웜의 특성 상 이들이 전부라고 볼 수는 없었다. 상아가 다급히 외치자 헤스티아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열감지로 다가오는 몬스터의 위치를 알렸다.
"핫!"
헤스티아의 말에 상아는 광검을 잡고 모래를 베었다. 그녀의 공격에 모래가 크게 일렁이며 축축한 무언가가 모래를 적셨다. 그것을 본 상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헤스티아에게 외쳤다.
"이대로 계속! 샌드웜의 독침은 사람에 따라 쇼크사 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니까 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해!"
"네!"
핸드웜의 이빨 위에 나 있는 긴 침을 가리키며 상아가 말하자 헤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열감지에 집중했다.
샌드웜을 모두 잡은 상아는 운현과 헤스티아를 마법으로 띄웠다. 좀 위험하긴 하겠지만 차라리 이대로 돌파를 하는게 낫겠다는 생각때문이었다.
"헤스티아! 열감지로 적이 있으면 바로 말해줘!"
"알겠어요!"
"크윽...윽..."
"운현씨! 정신이 들어요!?"
"바제트... 으..."
마비에서 풀려난 운현이 신음하자 헤스티아는 운현을 잡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운현이 눈을 번쩍 떴을 때 상아는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여기야!!"
상아의 외침을 들은 것일까? 펠리시아와 칼리아스는 상아와 운현, 헤스티아를 보고 당황하며 외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운현씨!?"
"운현을 죽이려고 마노라는 성기사가 사자의 팔찌를 착용했어. 그리고 바제트가 우리를... 운현을 살리기 위해서 사자의 팔찌를 착용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왜 그딴 미친 짓을!"
"빨리! 빨리 바제트를 쫓아야 해!"
운현의 다급한 외침에 펠리시아와 칼리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마비가 제대로 풀리지 않은 것인지 운현이 비틀거리자 상아는 그를 다시 공중에 띄운 후 칼리아스에게 말했다.
"칼리아스. 나 마력 좀 채워줘. 너무 많이 쓴 것 같아."
"네."
진지한 얼굴로 칼리아스는 상아의 등에 손을 대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른 푸른 기운은 상아의 몸으로 빨려들어갔고 그제서야 한결 나아진 상아는 광검을 잡은 후 말했다.
"빨리 달릴거야. 헤스티아. 몬스터들이 많은 곳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겠지?"
"네. 네!"
헤스티아는 눈을 감고 집중한 후 북쪽을 가리켰다.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기운이 그곳에서 느껴진 것에 상아와 펠리시아, 칼리아스는 다급히 그곳을 향해 뛰었다. 한참을 달려가고 나서야 우글거리는 몬스터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그들은 몬스터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인탱글을 걸고, 또 활을 쏘아가며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는 바제트를 볼 수 있었다.
"바제트!"
"운현...!"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지만 아직까지는 무사한 모양이다. 매끈한 팔에는 사자의 팔찌가 없었다. 어느정도 몬스터를 몰고나서 해제한 모양이다. 운현이 기뻐하며 외쳤을 때 펠리시아와 칼리아스가 마법을 준비했다.
"상아! 막아줘요!"
"알았어!"
강력한 마력의 움직임에 바제트를 쫓던 몬스터들의 대부분이 펠리시아와 칼리아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마법이 완성되기 전에 죽이려는 듯 몬스터들은 각자의 이빨이나 손톱, 집게를 움직였다. 하지만 칼리아스에게 마력을 나눠받아 힘을 되찾은 상아의 방어가 견고해 몬스터들은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썬더 볼트!"
"어스퀘이크!"
펠리시아의 마법봉에서 푸른 전격이 번쩍이고 칼리아스는 양 손으로 만들어낸 마법진을 몬스터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던졌다.
"콰과광!!"
"우지끈!"
수십, 수백 줄기의 전격이 허공에서 떨어져 몬스터들을 감쌌고 땅이 흔들리며 만들어진 균열 속으로 수많은 몬스터들이 떨어졌다. 마법 하나를 발동시킨 것만으로 모여 있는 몬스터들의 1/4를 잡은 펠리시아와 칼리아스는 다시 마법을 준비했고 그 틈을 노려 바제트는 운현을 향해 뛰어왔다.
"운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바제트다. 그녀가 자신의 품에 뛰어와 안기자 운현은 그녀를 부숴져라 꽉 끌어안았다.
"등신아! 무슨 생각으로 그딴 짓을 한거야!"
"운현! 운현! 운현!"
운현은 눈물을 흘리며 화를 냈다. 하지만 그 화에 담겨 있는 걱정과 안도, 행복을 바제트가 모를리 없었다. 같이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끌어안은 그들을 바라보던 상아는 피식 웃은 후 광검을 들어올렸다.
"이제 안심해! 조금만 더 잡으면 되니까!"
"콰아아앙!"
"퍼어엉!!"
압도적인 화력이 몬스터들을 쓸어넘긴다. 세사람만으로도 던전을 돌아다녀도 문제가 없을 정도라는 말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운현은 바제트를 끌어안은 채 그 막강한 힘을 보며 감탄했다. 다가오는 몬스터는 상아가 벤다. 그녀가 마법의 발동시간동안 지키면 펠리시아와 칼리아스의 마법이 발동되어 몬스터들을 갈아버린다.
"굉장하네요..."
같은 마법사인 헤스티아는 펠리시아와 칼리아스의 마법을 보며 감탄했다. 그녀의 중얼거림에 운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굉장하네..."
"슬슬 정리할까!?"
몬스터들이 거의 남지 않자 상아는 광검을 꽉 잡았다. 그녀의 마력이 광검에 주입된 순간 광검의 날은 길어졌고 상아는 포효하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달려오는 수십의 몬스터들이 광검에 맞아 순식간에 죽어버렸다. 어렵지 않게 몬스터들을 처리한 상아와 펠리시아, 칼리아스는 낮게 한숨을 내쉰 후 운현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예. 정말 고마워요. 정말... 정말..."
운현은 펠리시아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인사에 펠리시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뇨. 해야 할 일을 한것 뿐인데..."
"그래도 고마워요. 정말... 그나저나 굉장한 마법이네요."
"300레벨이 되어서 파괴마법을 습득했거든요. 회복마법은 쓸 수 없지만 회복이야 뭐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으니까요. 사제인 아둔씨도 있고 에리스씨도 있어서 저는 그냥 파괴쪽을 전문화시켰어요."
바제트를 잃을 뻔 했다는 것만으로도 운현은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구역질이 날 정도다. 운현이 쓰게 웃자 칼리아스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저는요?"
"칼리아스씨도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죠?"
"에? 아하하하~ 농담인데."
"상아. 너도 정말 고마워... 그리고..."
운현은 머뭇거리다가 작게 숨을 내쉰 후 말했다.
"사랑해. 미안해. 지금까지 말하지 않아서."
"에!?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운현의 말에 상아는 당황하며 붕붕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피스나씨의 말대로야. 한번이라도 더 사랑한다고 말하고, 한번이라도 더 안아주고, 한번이라도 더 웃음을 보고 싶어. 그게 내 진심이야."
"오오오~"
상아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이자 운현은 싱긋 웃은 후 헤스티아의 어깨를 잡고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헤스티아는 베시시 웃었다.
미야의 죽음 이후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녀에게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그녀를 그렇게 허망하게 보낸 것에 운현은 수많은 절망과 고통을 느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녀들의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서라도 운현은 말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헤스티아의 이마에 키스한 후 말했다.
"처음부터 정말 고마워. 내 첫 동료가 되어 준 건 너였지. 우리 서로 아무것도 모를때 같이 모험을 가고... 나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받아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날 사랑해 준 너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어. 헤스티아. 사랑해. 나와 함께해줘서 고마워."
"헤...헤헤헤~ 드디어 운현씨가...!"
헤스티아는 기쁨의 눈물을 주륵 흘렸다. 그녀가 훌쩍거리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마... 예쁜 얼굴 다 망가지네."
"흑...그치만...그치만..."
운현을 꽉 끌어안은 헤스티아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그런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 준 운현은 싱글거리며 자신을 보고 있는 바제트에게 걸어갔다.
"어디. 나한테도 말해보시지."
"넌 안돼."
"엥!? 왜!?"
"누구 마음대로 그딴 짓 하래."
"하하하~ 그치만."
바제트는 히죽 웃은 후 손을 들어 운현의 볼을 쓰다듬었다.
"말했잖아. 난 널 사랑하고, 넌 내 운명이라고.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무섭지 않아."
바제트의 아름다운 미소에 운현은 화가 풀렸다. 그는 빙긋 웃고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 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바제트. 항상 나와 함께 해주고, 내 길을 제시해줘서 고마워. 널 사..."
"푹!!!"
"랑...?"
바제트의 심장 부근에서 길고 날카로운 가시같은 침이 뻗어나왔다. 그것에 운현이 말꼬리를 흘렸을 때 상아는 창백한 얼굴로 외쳤다.
"샌드웜! 남아 있었나!?"
197====================
Raid
상아의 광검이 독침을 날린 샌드웜을 찢어죽였다. 하지만 운현은 그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독이 온 몸에 퍼져가는 것인지 바제트의 얼굴이 점점 퍼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아! 아아아아!! 아아! 안돼! 안돼!"
운현은 떨리는 손으로 인벤토리를 뒤졌다. 그 안에서 해독약을 꺼낸 운현이 바제트의 입 안에 해독제를 흘려 넣었지만 펠리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 해독제로는 안돼요! 고급 해독제는 없나요?"
"없어요! 이것밖에...!"
운현의 말에 펠리시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샌드웜의 독은 일반 해독제로는 해독할 수 없었다. 그녀는 빠르게 생각한 후 칼리아스에게 외쳤다.
"칼리아스! 2계층으로 가세요! 길드장님! 3계층의 신전에 있는 길드원들 중 사제가 있으면 어서 데려와요!"
"알았어!"
"응!"
펠리시아의 지휘 아래 둘이 바람처럼 튀어나갔다. 벌써 점이 되어 멀어진 그들을 신경 쓸 여력따위는 없었다. 운현은 바제트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을 잡자 애써 희미하게 웃었다.
"다...다...다시... 모, 못들...었..."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바제트는 간신히 미소지었다. 그녀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본 운현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빠르게 외쳤다.
"사랑해! 바제트! 사랑해!"
"하...하...드디어... 들었네... 역시...넌... 쿨럭!"
"말하지마! 말하지마아아!!"
"쿨럭! 쿨럭!"
독이 온 몸에 퍼지기 시작했는지 바제트의 몸이 크게 떨렸다. 검게 죽은 피를 토해내며 바제트는 다시 생긋 웃었다. 너무나도 약한 미소. 그녀의 미소에도 운현은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눈물이 바제트의 얼굴에 뚝뚝 떨어졌다. 그런 그의 볼을 힘겹게 쓰다듬은 바제트는 무척이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사랑...해..."
"나도 사랑해!!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죽지마...흑...으윽... 뭐든 할게. 내가 멍청했어! 내가! 내가 그 같잖은 자존심과 의심때문에! 널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어! 널... 흑... 제발...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해줄테니까!! 제바아아알!!!"
자신의 손을 잡은 바제트의 손의 힘이 점점 약해져간다. 떨리는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운현은 떨리는 손으로 바제트의 얼굴을 만졌다. 그의 손길에 바제트는 기분이 좋았는지 약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하하...콜록! 나한테... 빌거라고...했지?"
"얼마든지 빌테니까... 크흑... 제발... 흑...으윽... 죽지마..."
"바...보... 그만... 울..."
바제트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점점 말라간다. 잡고 있던 손의 힘이 풀려가고 그녀의 눈이 서서히 감기자 운현은 발작하듯 외쳤다.
"바제트! 바제트!! 안돼! 안돼애애애애!!!"
"툭."
운현의 얼굴을 쓰다듬던 손이 툭 떨어졌다. 운현은 그것에 아무런 말도 못했다. 바제트의 몸이 축 늘어진 것에 운현은 절망했다.
"큭...으윽...이게... 운명...크흐흑...윽... 운명이라고...? 이딴게...?"
바제트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울며 사랑을 고백할 것이라는 그녀의 말이 떠오른 순간 운현은 빠득 이를 갈았다.
"이딴게... 운명이라고!? 이딴게!?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
운명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라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어떻게 고작 몇일 사이에 다들 이렇게 죽을 수 있는 건가? 운현은 자신의 품 안에서 생명을 잃은 바제트의 시신을 끌어안은 채 오열했다.
"운현씨...흑... 바제트씨....흐흑....흐엉...너무해... 너무하잖아...!!"
미야가 죽은지 얼마나 됐다고 바제트까지 이렇게 죽어버리는 건가. 헤스티아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렸다.
처음 만났을 때는 특유의 마이페이스때문에 싫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그 마이페이스는 여유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가장 연장자인만큼 한발 물러서서 상황을 생각했고 늘 자신들에게 양보했었다. 좋은 친구이자 좋은 언니였던 바제트가 이제는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에 헤스티아가 서럽게 울자 펠리시아는 입술을 꽉 깨물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이런..."
"펠리시아! 데려왔..."
2계층에 있던 사제를 데려 온 칼리아스는 운현과 헤스티아의 오열을 보며 할 말을 잃어버렸다. 고작 사흘만에 파티원이 두명이나, 운현에게 있어서는 연인이나 다름없는 여인 둘이 죽어버렸다.
"...어째서 이렇게 된거지?"
"흑...흐흑...흑..."
칼리아스의 떨떠름한 말에 헤스티아도, 운현도 대답하지 못했다.
운현과 헤스티아가 울다 실신해버려 결국 그 둘을 데리고 길드로 복귀한 상아 일행은 길드의 휴게소에 그들을 데려다 주고 쉬게 만들었다. 상아가 울적한 얼굴로 복귀하자 사무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니스는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일이야."
"또 무슨 큰일인데요..."
바제트가 죽은 것만으로도, 그리고 삼계층에서 몬스터 웨이브에 가까운 현상이 발생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큰일이 난단 말인가? 상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제니스에게 다가갔다.
"지금 던전 도시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
"무슨 소문이요?"
"던전 도시를 다난교도들이 습격한 이유가 바로 운현때문이라는 소문."
"...어떻게."
제니스의 말에 상아는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최대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발설한 것이란 말인가? 상아의 표정을 보며 제니스는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했다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야. 지금은. 중요한 것은 지금... 여론이 너무 안좋다는 거지. 이번 습격으로 대장장이들을 이끌고 운현을 지지하던 힐더크가 죽었고 그 외에 꽤 많은 제작자들이 다치거나 자신의 작업장을 잃었어. 거기에 상인 조합 역시 마찬가지야. 상인 조합장인 윈디아가 하마터면 죽을 뻔하고 커다란 창고 다섯개가 불타 없어졌다고 하더군. 그것 때문에 망해버린 상인들이 한둘이 아니야. 그런 그들을 누군가가 자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계속 소문을 내고 있어. 피스나와 윈디아, 아르토리우스가 그것을 막으려고 해봤지만 역부족이야. 소문은 계속 퍼져가고 있다고."
"...하지만 그게 운현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운현을 노린 다난의 잘못이지. 하지만 말을 하면서도 상아는 자신의 말을 다른 이들이 따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 일만 봐도 그렇다. 다난의 습격이 운현의 잘못인가?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상아였지만 다른 이들 입장에서는, 이번 습격으로 동료나 연인, 친구나 가족을 잃은 이들 입장은 과연 그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모험가들은 아니라고 생각할거에요."
마노라는 예시가 생겨버렸지만 상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험가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롭고 태평하며 동료 의식이 강하다. 거기에 늘 죽음을 각오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마노가 이상한거지 모험가들은 달라요. 자신의 동료가 다른 집단에 의해서 죽었다면 모를까, 같은 모험가의 잘못. 아니 같은 모험가가 표적이 되어 그 공격에 휘말렸다면 그들은 같은 동료를 지키고 적을 향해 자신들의 무기를 들 사람들이에요. 절대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만약 모험가 동료 중 누군가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죄는 둘째치고서라도 그들을 보호하려고 나선다. 손해 여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있는 제니스였지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험가들이 지킨다고 하더라도 무리다.
"하지만 이곳도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 당장 상인 조합에서 자신들이 키우고 있는 암살자들을 보낸다면 어쩔 생각이야? 그들은 아주 무서워. 모험가 길드라고 하더라도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 그리고 이번에 마노의 일을 생각한다면 모든 모험가가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제니스의 냉정한 말에 상아는 입을 다물고 한참동안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하다 간신히 토해내듯 말했다.
"여기 외에는 없어요."
과연 운현을 보호할 수 있는 다른 곳이 있을까? 그제서야 상아는 다난교도가 왜 습격을 한 날 네개 조직을 모두 공격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건 협박이었다. 우리의 힘은 너희들을 전부 상대로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너희들이 혼자서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우리가 전력을 다하면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번 습격으로 다난의 집행자 중 정예라고 할 만한 이는 거의 잡지 못했다. 그나마 잡은 것이 중간관리자 정도에 불과했다.
"여기도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 상인 조합의 암살자를 생각한다면 말이야. 손해를 입은 상인들은 아주 무섭다고. 그들은 피값을 받아내는 것보다 자신들이 잃은 돈에 대한 복수심이 더 강한 자들이니까."
"하지만... 그건!"
"잊지마. 상아."
제니스는 상아의 손을 잡으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이번 습격에서 패배했어. 만약 그들이 전력을 다해 모험가 길드를 공격했다면 우리가 그들을 막을 수 있었을까?"
많은 손해를 입었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아마 던전도시가 생긴 이후로 이정도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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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스의 말대로 만약 이곳에서 보호하다가 모험가들이 다른 생각이라도 한다면?
만약 지금은 얌전히 있는 용병 연맹이 상인 조합과 제작자 연합을 이끌고 모험가 길드를 습격한다면?
만약 상인 조합이 제작자 연합과 손을 잡고 암살자들을 대거 고용해서 자신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복수를 하려 한다면?
과연 운현을 지킬 수 있을까?
던전 도시를 지탱하는 네개의 세력의 수장이라고 하지만 상아는 오늘만큼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상아는 힘겹게, 토해내듯 말했다. 자신을 잃어버린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최대한 안전한 곳으로 운현을 보내는 것 뿐이었다. 최소한 이 상황이 가라앉을 때까지만이라도. 그녀에게 물은 상아는 제니스가 잠시 생각하며 입을 다물자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은 곳은 네군데 정도 있지만 그 중 가장 괜찮은 곳은 필레의 영지군. 마침 윈디아가 큰 상처를 입어 본가로 복귀한다고 하더군. 시장직은 어차피 피스나에게 넘겨 줄 것이었으니까... 인수인계는 사흘 후면 끝난다고 하니 그때 같이 필레와 함께 그곳으로 몰래 보내면 될 것 같아."
윈디아가 복귀를 하면 자연스레 그녀를 지키는 병사들과 무사들, 그리고 윈드가 함께 간다. 필레의 영지는 발렌타인 영지의 근처에 있으니 그들이 복귀하는 길에 필레와 운현을 딸려보내면 다난교도들의 습격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저도 같이..."
"그랬으면 좋겠지만 너까지... 아니, 다른 길드 간부들이 함께하면 그 이동을 다난교도들이 의심할 수 있어. 같이 가지는 말고 몇일 텀을 두고 따라가는게 좋겠어."
상아가 운현을 지키려 하는 것은 이제 다난교도들에게 모두 알려졌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이동하고, 또 운현에게 호의를 보이는 필레까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면 다난교도들은 과연 운현이 모험가 길드에 있다고 생각을 할 것인가? 제니스의 말에 상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운현은 필요하다면 너를 부를 수 있잖아. 차라리 그곳에 도착하고 몇일 후에 널 불러달라고 하면 그곳에서 안전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길드장 자리가 걱정이라면 그건..."
"제니스씨에게 맡겨요?"
친절히 조언을 해주는 제니스를 향해 상아는 애써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그녀의 말에 제니스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동안 생각하다가 붕붕 고개를 저었다.
"미쳤냐? 내가 그걸 하게? 펠리시아에게 맡겨."
"쿡쿡... 난리를 치겠네요."
감정에 휘둘리며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자신보다 펠리시아나 제니스가 더욱 길드장에 걸맞아보이지만 그 둘은 정말 길드장의 자리에는 죽어도 앉고 싶어하지 않았다. 모험가 길드를 창설한 것은 제니스였지만 그녀는 창설하고 안정화되자자마 길드장의 자리를 상아에게 떠넘기고 탱자탱자 놀고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며 상아가 쓴웃음을 짓자 제니스는 빙긋 웃은 후 상아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넣었다.
"정신 바짝 차려. 운현을 지키려면 그 방법 밖에 없으니까. 남은 사흘간 그를 잘 지키도록 해."
"알겠어요. 고마워요. 제니스씨."
"뭘. 우리 사이에 그런 말 할 필요 없어."
"분명히 운현은 안전하겠죠? 그렇겠죠?"
"훗."
제니스가 빙긋 웃자 상아는 그녀에게 웃어보인 후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제니스는 자신의 앞에 놓여져 있는 식어빠진 차를 한모금 마신 후 안타까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운현은 안전하겠지만... 과연 다른 사람도 안전할까...? 결국 개인의 운명은 바뀌었지만 세상의 운명은 바뀌지 않았구나..."
제니스의 눈을 가린 천이 물기로 적셔진다. 적셔진 천에서 조금씩 물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제니스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너무나 만져 이제는 그 장식조차 알아 볼 수 없는 목걸이를 꽉 쥐고 힘겹게 중얼거렸다.
"아아... 현자여. 당신의 계획은 언제 시작되는 겁니까... 부디 저들을, 그리고 우리를 무한히 반복되는 이 저주받아 마땅한 운명의 굴레에서 구원해 주소서..."
"아...으..."
눈을 뜬 헤스티아는 자신이 낯선 천장 밑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늘상 입는 옷이 아닌 다른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다는 것에 놀랬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옆의 테이블 위에 자신의 장비가 곱게 놓여져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달칵."
"아. 일어났어요?"
나긋한 어조에 마음이 놓였다. 필레였다. 자신과, 미야와, 바제트처럼... 운현을 사랑하고 있는 아름답고 강한 여인. 그녀가 자신을 향해 쓰게 웃으며 다가오자 헤스티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여긴 어디죠? 바제트... 씨는요...?"
"아...그...게요. 여긴 길드 간부들만 들어 올 수 있는 지하 휴게소구요... 그리고..."
필레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의 모습에 헤스티아는 자신이 본 바제트의 죽음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헤스티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자 필레는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가 그녀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헤스티아씨..."
"바제트씨가... 왜 그 좋은 사람이..."
"...울지마세요."
"흑..흐흑...흑..."
자신을 꽉 잡고 흐느끼는 헤스티아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필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흐느끼는 것을 멈출때까지 기다린 바제트는 눈물로 엉망이 된 헤스티아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운현씨는요!? 운현씨는!?"
헤스티아가 다급히 묻자 필레는 쓰게 웃었다.
"아직 운현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
"지금 던전 도시의 상황이 좋지 않아요."
필레는 제니스에게 들었던, 그리고 자신이 도시에서 느낀 분위기와 상황을 헤스티아에게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다난 교도 던전 도시를 공격한 이유는 운현 때문이라는 소문이 났고, 그것 때문에 던전 도시에서 운현을 좋지 않게 보고 있다는 점. 모험가 길드에서 계속 해명을 했지만 이미 여론은 거의 운현을 잡아 죽여 다난교도들에게 넘기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는 것 까지.
"어떻게.... 운현씨는 잘못이 없잖아요!"
"맞아요. 운현은 잘못이 없죠. 하지만 광기는... 다난교도의 습격에 상처받고 분노하는 사람들은 또다시 그 습격이 생길까봐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잘못된 선택을 하죠."
"하지만... 하지만!"
"마노의 일을 생각해봐요."
필레의 말에 헤스티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운현에게 잘못은 없다. 하지만 마노는 그것이 운현의 잘못이라 생각하고 그 분노와 슬픔, 증오를 다난교도가 아닌 운현에게 풀려 했었다. 또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자신이라도 타인을 공격하다가 운현이 죽었다면 그를 죽이려 할지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필레의 말이 정 불가능한 일이라고만은 생각되지 않았다.
헤스티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그것을 보며 필레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새벽. 저희는 윈드, 윈디아씨와 함께 제 영지로 떠날거에요. 그때 헤스티아씨도 함께 하시겠어요? 아니. 함께해주세요. 분명 깨어나면 운현은 자책하고 괴로워할게 뻔해요. 힘들어하는 운현의 곁에는 헤스티아씨가 있어야 해요."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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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d
모험가로서의 꿈따위는 이제 필요 없었다. 운현을 지키고, 운현을 사랑하는 삶을 살겠다. 그와 함께 미야, 바제트를 위로하며 살겠다. 그리 다짐한 헤스티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필레는 빙긋 웃었다.
"운현은 옆방에 있어요. 가보시겠어요?"
"네..."
힘없이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헤스티아는 필레를 따라 옆방으로 향했다. 두터운 철문으로 만들어진 방문 앞에선 그녀는 방문의 손잡이에 걸려 있는 자물쇠에 열쇠를 집어 넣었다.
"왜 잠구신거에요?"
"운현이 날뛰며 자해를 할지도 몰라서요. 그의 인벤토리 안에 있는 것은 모르겠지만 저희는 지금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거에요. 들어가죠."
필레와 함께 안으로 들어 선 그녀는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방 안에는 뾰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벽마저도 푹신푹신한 천으로 빽빽했다. 벽에 머리를 아무리 부딪혀도 아프지 않을 것이다. 그 방의 중앙에 누워 있는 운현을 보자마자 헤스티아는 또다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이곳에서 자해를 하지 못하고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밖에서 문을 잠군... 헤스티아씨..."
"흑...죄송해요... 흑..."
헤스티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린다. 그것을 보며 필레는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안아주었다.
"괜찮아요. 다 괜찮을 거에요..."
근거없는 말이지만 그 말 밖에는 해줄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필레는 헤스티아를 안아주며 천천히 말했고 헤스티아는 그녀의 품에 안겨 또다시 엉엉 울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되나요?"
"훌쩍... 네."
"그럼 나가도록 하죠. 바깥에서 제가 운현을 지키고 있을게요."
한참을 울던 헤스티아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온 필레는 문을 닫고 열쇠로 잠궜다. 그녀가 방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자 헤스티아는 머뭇거리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저도 여기에 있으면 안될까요?"
"...그렇게 하세요. 의자를 가지고 올게요."
그녀가 떠나가자 헤스티아는 문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필레의 영지로 가서, 그곳에서 싸움과 관련되지 않은 조용한 삶을 살고 싶다. 그와 함께 미야와 바제트를 그리워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을 돌려보려고 했지만 미야와 바제트가 함께 했던 추억은 다시 헤스티아의 머릿속에서 샘솟듯 터져나왔다.
"흑..."
눈물이 난다. 그녀가 눈물을 쓱쓱 닦은 순간 위쪽에서 폭음이 들렸다. 미야가 죽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또다시 습격인가? 헤스티아는 지금 울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자신이 있던 방으로 돌아가 장비를 모두 착용한 그녀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꽉 잡았다.
"운현씨는... 제가 지킬게요."
이제는 운현을 노리는 이가 다난교도라고만 생각할 수 없었다. 상인 조합의 암살자일 수도 있고 제작자 연합의 사주를 받은 용병일 수도 있고 어쩌면 동료인 모험가일 수도 있었다.
'이곳에는 길드의 간부들만 출입하는 것이 허가가 되어 있어. 그 누구도 이곳에 들어오게 내버려둬서는 안돼.'
잠시 후면 필레가 돌아 올 것이다. 그녀와 함께 운현을 지킨다. 아니, 필레가 오지 않더라도 운현을 지킨다. 헤스티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 윗층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굴까...'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녀는 터벅터벅 걸어오는 소리에 긴장하며 마법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운현이라는 개자식을 내놔!!"
"힐더크씨를 살려내!!"
"당장 내놔! 또 이런 일이 생기게 할 수는 없어!"
모험가 길드의 바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성난 민중들, 그 가운데에는 이번 습격으로 망해버린 상인도 있었고 자신의 작업장을 잃어버린 이들도 있었으며 자신들이 따르는 대장을 잃은 대장장이들도 있었다.
"당장 내놔!!"
이들의 요구는 한결같았다. 운현을 내놓으라는 것. 운현을 다난교에게 넘기고 또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습격을 막자는 것.
그들의 목적이 운현이라면, 모험가 한명을 내어주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내어줘도 상관없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험가 길드 앞에서 횃불과 무기를 들고 시위를 하자 모험가 길드의 바깥에서 대기하던 모험가들은 싸늘히 이를 드러내었다.
"우리보고 동료를 팔라는거냐?"
"뒈지기 싫으면 짜져!!"
"우리가 구해 온 사체와 코어에 빌붙어 사는 것들이 이제와서 지랄이냐!? 당장 꺼져! 이 쓰레기들아!"
"뭐!? 쓰레기!?"
그들의 분노에 모험가들은 욕설로 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동료를 내어줄 수는 없다. 그것은 모험가들의 자존심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고작 그딴 새끼들의 습격에 겁먹어서 어떻게 살래!? 꺼져! 당장! 다난의 습격 말고 모험가의 검에 죽기 싫으면!"
모험가 길드를 지키고 있던 모험가 중 한명이 이를 드러내며 자신의 장검을 뽑아 겨누자 그것을 본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늘상 태평하고 농담을 좋아하는 모험가들이지만 그들은 용병 이상으로 늘 죽음과 맞닿아 있는 이들이었다. 고작 상업이나 제조업에 종사하는 자신들이 이길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숫자는 그들이 더 많았다.
"용병 여러분!!"
"아아..."
제작자 연합의 외침에 뒷편에 서 있던 용병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나섰다. 그들이 나서자 모험가 길드의 모험가들은 이를 드러내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하! 돈 따위에 팔려 온거냐?"
"아니. 용병은 돈으로 움직이는 거니까."
선두에 선,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여인은 자신의 도끼를 들어 올렸다. 커다란 배틀액스를 한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리는 그녀의 무용에 상인 조합과 제작자 연합의 사람들이 의기양양해지자 모험가 길드를 지키던 모험가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철컹!"
그 순간 모험가 길드의 창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사들이 활을 들어 겨눴다. 말싸움을 하는 동안 저격수들을 준비한 모험가들의 행동에 용병들은 이를 갈았다.
"꺼져! 화살꽂이가 되기 싫으면!"
"그럴 수는 없지."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강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에 모험가들은 긴장했다. 바민. 용병 연맹의 간부 중 한명이었다. 모험가 길드라면 이를 가는 그녀가 자신의 수족들과 함께 나서자 모험가들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듣기로 이번 일에 용병 연맹의 연맹장은 끼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제 있었던 협상을 통해 용병 연맹의 연맹장인 아르토리우스는 다난 교도따위에게 굴복하는 것은 던전 도시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딴 일에 용병들이 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을 떠올린 모험가 길드의 모험가가 말하자 바민은 키득거린 후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아르토리우스 얘기고. 우린 좀 달라."
"이미 용병 연맹의 간부들 다섯이 함께 하기로 했거든."
바민의 뒤로 건장한 체구의 여인들 다섯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나같이 보통 실력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 여인들이 나서자 모험가들은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서 가서 간부들 좀 불러와봐. 저들이 끼면 승산이 없어."
"상인 조합에서 돈을 엄청 준다고 했어. 용병에게 명령? 개소리지. 우리는 돈이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용병이라고."
"돈이면 지 부모도 팔 개같은 년들... 아르토리우스가 이걸 아나?"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때?"
바민은 히죽 웃은 후 도끼를 들어 그녀에게 겨눴다.
"중요한건 오늘 모험가 길드는 끝장이라는 거지. 그리고 새로운 연맹이 탄생할 것이다. 이 바민 슈트라우스 님이 연맹장이 된 새로운 용병 연맹이!!"
"......"
"부숴버려! 쓸어버려! 죽여버렷!!!"
"와아아아!!"
"이런 개! 공격해!!"
용병들이 달려오자 모험가들은 이를 갈며 그들의 공격에 대항했다.
"......"
헤스티아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복도를 바라보았다. 다가오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그녀는 지팡이를 들었다.
"어머. 헤스티아."
"......"
마법학교 동기, 자신의 친구, 아니. 친구라고 생각했던 여자. 에릴이 검은 사제복을 입은 이들과 함께 걸어들어오자 헤스티아는 말도 꺼내지 않고 곧장 준비한 마법을 날렸다. 세발의 파이어 볼트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에릴은 자신의 마법봉을 들어 마법을 발동시켰다.
"수와아악!"
마법으로 만들어진 물의 폭포가 파이어 볼트를 막아냈다. 하지만 예상보다 강한 파이어 볼트는 그녀의 물폭포를 뚫고 검은 사제들의 몸을 관통했고 그것에 놀란 에릴은 당황하며 외쳤다.
"뭐하는 짓이야!?"
"너 왜 여기에 있어?"
"흥! 길드장님의 심부름이라고."
"저들은?"
"아아... 길드장님이 운현을 내어주기로 했거든."
말도 안돼는 거짓말이다. 상아가 운현을 다난교도에게 판다고? 같잖은 거짓말을 마음대로 지껄이는 에릴을 향해 콧방귀를 뀐 헤스티아는 다시 마법을 준비했다.
"뭐, 뭐하는 짓이야! 이건 길드장님 명령이라고!"
"그럴리 없어."
"너 이딴 식으로 나오면 모험가 제명당한다. 당장 비켜!!"
"꺼져."
"화르르르륵!!"
에릴을 향해 차갑게 말한 그녀는 다시 마법을 발동시켰다. 이번에는 파이어 볼트가 아닌 파이어 볼이다. 복도에서 강력한 마법을 날리려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한 에릴은 뒤의 검은 사제들에게 외쳤다.
"막아!!"
"흡!"
"우웅!"
세명의 사제들이 나서며 방어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녀들의 손에 있는 지팡이에서 빛이 발하는 것을 보며 헤스티아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고작 너희가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슈우웅!!"
지팡이에서 생겨난 화염의 공이 사제들과 에릴을 향해 날아갔다. 빠르게 날아오는 무시무시한 기세의 불꽃에 당황한 에릴은 뒤로 물러난 후 자신의 앞에 물의 방어막을 펼쳤다.
"콰아아앙!!"
"꺄아악!"
"크아아악!!"
뜨거운 열기가 몰려오는 것을 그대로 받으며 헤스티아는 자신의 파이어 볼에 불타는 검은 사제들을 노려보았다. 그녀들이 만든 방어막과 그녀들의 몸, 그리고 물의 보호막 때문에 에릴과 그녀의 뒤에 있는 사제들은 무사했다.
"당장 튀어나가서 저년을 죽여!!"
에릴이 발작하듯 외치자 검은 사제들은 자신들의 검을 뽑으며 헤스티아에게 달려갔다. 그런 그들을 향해 차갑게 웃은 헤스티아는 마법봉을 가볍게 휘둘렀고 그 순간 그들의 진행방향에 불꽃의 벽이 생겨났다.
"아뜨거!"
"이런 개! 에릴! 넌 뭐하는거야!? 빨리 서포트해! 병신같은 년이!!"
"감히 누구에게!? 다난의 고위 집행자가 될 이몸에게 누가 그따위로 지껄이는거지!?"
"운현을 죽이지 못하면 넌 우리와 같은 일반 집행자에 불과하다!"
파이어 월에 막혀버려 진행을 하지 못하자 다난의 집행자들은 이를 갈며 그녀에게 외쳤다. 그들이 말싸움을 시작한 것을 보며 헤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빠르게 레벨업을 했다고는 하지만 혼자서 저들을 다 막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었다.
"...멜트."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헤스티아는 몸을 돌려 운현의 방문을 걸고 있는 자물쇠를 녹이기 시작했다. 헤스티아의 손에서 발생한 청염이 철문의 이음쇠를 녹여 아예 자물쇠를 풀 수 없게 만들어버리자 에릴은 그것을 보며 다급히 외쳤다.
"워터 볼!!"
"큿!!"
"치이이이익!"
에릴이 날린 워터볼에 적중당한 헤스티아는 뒤로 튕겨나가며 그녀가 만든 워터볼이 녹아내린 철문의 이음쇠를 식혀 딱딱히 굳히는 것을 보았다. 그거면 됐다. 그거면.
"크윽..."
가방에서 힐링포션을 꺼내 마신 그녀는 파이어 월이 점점 사그라들고 검은 사제복을 입은 이들과 에릴이 웃으며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다섯명...'
에릴의 워터 볼을 맞아보니 그녀의 레벨은 아직 200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승산은 있다. 하지만 다른 사제들은? 그들의 실력은 어떨까? 이야기를 들어보면 레벨 차이는 그다지 나 보이지 않았기에 헤스티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죽을지도 모르겠네... 그렇지만.'
그녀는 힐끔 운현의 방문을 바라보고 가방에서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운현에게 받은 마법 스크롤은 두장이 있었다. 3계층의 몬스터들의 공격에도 꽤나 버텨 준 이 보호막 마법이라면 저들을 쓰러트릴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쓰러진 상태에서 마법스크롤을 찢은 그녀는 자신이 마법 스크롤을 찢은 것을 에릴과 집행자들이 눈치채지 못하자 희미하게 웃었다.
"헤스티아~ 역시 공부만 잘하는 년은 안돼. 대세를 읽을 수 있어야지. 대세를. 이제 던전 도시는 우리 다난의 것이라고."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헤스티아를 조롱하며 에릴은 마법봉을 들었다. 그녀의 마법봉에서 푸른 빛이 흘러나오자 헤스티아는 입가에서 흐르는 피를 닦은 후 이를 드러내며 싸늘히 말했다.
"결국 대세? 넌 몰라."
"뭘? 공부밖에 모르는 너따위보다 세상은 내가..."
"한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강해지는지!"
"뭐!? 이 마력은 파이어 레이저!? 너, 너 220레벨이 넘었단 말야!? 미친! 3계층 진입한지 얼마나 됐다고!!"
몬스터 웨이브때 미친듯이 싸우느라 220레벨이 된 그녀는 220때 배운 새로운 마법을 발동시켰다. 헤스티아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몰려들자 그녀가 준비하는 마법이 무엇인지 눈치 챈 에릴은 다급히 집행자들에게 외쳤다.
"빨리 공격해! 저게 발동되면 위험해!"
에릴의 다급한 목소리에 집행자들은 의문을 품지 않고 헤스티아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들이 자신들에게 검을 휘두름에도 주문을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잡았다!"
"탱!"
"이게 무슨!?"
헤스티아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두른 집행자들은 자신들의 검이 투명한 방어막에 막혀 튕겨나버리자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주문을 마친 헤스티아는 눈을 빛내며 마법봉을 내밀었다.
"파이어 레이져!!"
그녀의 지팡이 끝에서 생겨난 붉은색 마력의 공에서 강렬한 빛의 줄기가 뻗어져 나가 집행자들의 몸을 갈라버렸다.
"시작해."
용병 연맹과 모험가들이 싸움이 붙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검은 제복의 암살자들이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하나 둘 씩 움직이자 후미에 서 있던 짙은 검은 복면의 여인은 천천히 자신의 두건을 벗었다. 두건을 벗은 순간 길고 풍성한 검은색 머리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것을 가볍게 쓸어 만져 정리한 그녀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여인에게 물었다.
"운현이 있는 곳은?"
"길드 지하의 간부 휴게소입니다."
그녀의 질문에 답한 여인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손을 잡고 그것을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잘했어. 그럼 이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그녀의 말에 여인은 허리를 굽힌 후 그녀의 신발에 입맞춘 후 최대한 경건한 어조로 말했다.
"네. 카야 데 다난 성녀님."
"...훗."
말을 마친 여인이 떠나가자 흑발의 여인, 파르티의 대사제로 신분을 위장하고 있었던 다난 교의 성녀 카야 데 다난은 모험가들과 용병들이 싸우는 틈을 노려 모험가 길드로 침입하는 암살자들로 위장한 다난교도들을 보고 싸늘히 웃었다.
"이것으로 다난의 세상이 온다."
199====================
Raid
"으으..."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든 운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막이 아니다. 푹신한 바닥에서 일어난 그는 바제트의 죽음을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왜 바제트가 그렇게 죽어야 하는 건가. 말도 안된다. 그 위험에서 다 벗어났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 것이 말이 되는 건가?
"이건 뭔가... 이상해."
아무리 죽음이 갑작스레 온다고 하지만 이렇게 타이밍 좋게?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콰앙!"
"...무슨 소리야."
운현이 운명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바깥의 폭음이 들렸다. 그것에 운현은 불안감으로 온 몸이 떨렸다. 지금 울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는 철문쪽으로 다가갔다. 미세하게 들리는 헤스티아의 신음소리와 그녀의 마법이 발동되어 터지는 소리가 들리자 운현은 철문을 두드렸다.
"헤스티아! 헤스티아! 도대체 무슨...!"
"운현씨! 안돼요! 나오면...!"
"안돼...!!"
온 몸을 감싸는 두려움. 헤스티아마저 죽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에 그는 철문을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철문은 고정된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헤스티아아아!!!"
"운현씨! 나오면 안돼요! 바깥에... 꺄악!"
헤스티아의 비명소리에 운현은 이를 갈았다. 공격당하고 있는 건가? 누구에게? 누구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다난이다.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다난이 헤스티아마저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운현은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으며 외쳤다.
"헤스티아! 문에서 떨어져!"
"....."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전투는 진행중인 모양이다.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자신의 방패를 꺼냈다. 방패를 확장한 그는 함정카드를 들고 방패를 꽉 잡았다.
"화염!"
"콰아아앙!!"
"크아악!!"
방패에서 터져나온 폭음과 불꽃이 철문을 날려버린다. 그 충격과 폭음, 그리고 날아가버린 철문에 맞아 검은 사제복을 입은 다난의 집행자가 깔려 죽어버리자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단검을 꺼내 잡고 바깥으로 나왔다.
"운현씨!!"
"하하하...! 드디어 찾았다!!"
"너희가..."
운현은 헤스티아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듯 하지만 목숨은 무사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있을까? 바제트의 일을 떠올려보면 안심할 수 없다. 저들을 모두 죽이기 전까지는.
"이야아아압!"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다난의 집행자의 검을 방패로 막아낸 운현은 단검을 들어 집행자의 복부를 찔렀다. 가볍게 들어간 단검이 살을 가르고 그녀의 내장을 찢자 운현은 뒤로 물러나며 헤스티아에게 스크롤 두장을 넘겼다.
"너마저 죽으면 난 살아갈 힘이 없다고!!"
"운현씨..."
"앞으로 이런 병신 같은 짓은 하지마. 제발..."
운현의 말에 헤스티아는 눈물을 흘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스크롤을 잡고 천천히 일어나 지팡이를 들어올리자 복도의 끝에 서 있던 에릴과 집행자들은 이를 갈았다.
"쳐!!"
"촤아아악!"
에릴의 외침에 집행자들이 달려오자 운현은 가시 줄 함정을 설치했다. 그들이 달려오다가 가시 줄 함정에 걸린 순간 운현은 옆으로 몸을 피했고 파이어 볼을 준비한 헤스티아는 가시 줄 함정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집행자들을 향해 파이어 볼을 날렸다.
"콰아앙!!"
"아아아악!"
파이어 볼이 터지는 폭음과 함께 집행자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 그것을 본 운현은 단검을 꽉 쥐고 불꽃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이제 남은 집행자는 둘, 그리고 저 여자는...
"에릴이라고 했던가."
"...쳇!"
운현이 나온 것만으로 상황이 역전되었다. 그의 상태는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에릴에 마법봉을 꽉 잡은 순간 복도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너무 느리군."
"아, 그... 이건...!"
"비켜. 역시 넌 자격이 없다."
"하지만! 조, 조금만 더 있으면!"
"항명인가?"
걸어 내려온 흑의의 여인이 말하자 에릴은 입술을 꽉 깨물고 증오 가득한 눈길로 헤스티아와 운현을 노려 본 후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빠지고 새롭게 난입한 적의 등장에 운현은 단검을 잡은 손을 들어 그녀에게 겨눴다.
"넌 누구냐."
"알 거 없다."
말을 마친 그녀가 달려오자 운현은 방패를 들고 싸늘히 말했다.
"그럼 죽어. 화염!"
"콰아앙!!"
"아아아악!!"
거친 기세를 뿜으며 달려오던 여인이 방패에 설치된 기름함정 - 폭의 화염에 휩쌓여 한방에 죽어버렸다. 그것을 본 에릴은 얼굴을 딱딱히 굳히고 마법봉을 들었다. 마법을 준비하는 그녀를 향해 운현은 단검을 힘껏 던졌다.
"푹!"
"아아악!"
어깨에 맞은 단검에 마법을 발동하는 것이 취소되었다. 그 순간 헤스티아의 파이어 볼트가 에릴 뒤에 서 있던 집행자들의 몸에 꽂혔고 운현은 빠르게 달려나가며 인벤토리 안에 있는 송곳을 잡았다.
"어, 어떻게...!! 운명은 오늘 네가 죽는....!"
죽음을 직감한 에릴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혹과 의심,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에릴은 자신의 목에 송곳이 꽂히자 고통을 느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퍽!"
그녀를 향해 발을 든 운현은 그녀를 그대로 걷어찼다. 그것에 맞은 에릴에 주춤거리다가 쓰러지자 운현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집행자의 검을 들었다.
"커헉...살려..."
"살려달라고? 너같으면..."
"아아... 컥... 으윽...!"
"살려주겠냐."
헤스티아를 공격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죽을 이유가 된다. 운현은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에릴의 목을 베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에릴이 쓰러져 죽어버리자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운현씨! 괜찮아요!?"
"사실 안괜찮지만..."
아직도 바제트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이래도 가만히 있다간 헤스티아까지 죽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움직여야 했다. 그녀 혼자 둘 수 없다는 생각에 운현이 애써 기운을 차리자 헤스티아는 그를 꽉 끌어안았다.
"운현씨... 흑...흑... 다행이에요... 다행이에요..."
눈물을 흘리는 헤스티아를 안아주며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만약 자신이 이 기름함정 - 폭을 쓸 수 없었다면 이대로 갇혀 헤스티아가 죽는데도 아무것도 못했을지도 몰랐다.
"운현! 괜찮아!?"
계단으로 발소리가 들렸다. 그것에 운현과 헤스티아가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 복도에서 상아와 필레가 모습을 보였다. 전투를 치루고 왔는지 그녀들의 몸 여기저기에는 피가 뭍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피로 보이지는 않았기에 운현은 안심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괜찮아. 헤스티아도."
"다, 다행이다... 다난 교도들이 움직이는 것을 놓쳐서 엄청 걱정했는데..."
운현이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던 상아와 필레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험가 길드를 습격한 용병과 암살자들을 막아내느라 다난 교도 몇을 놓쳤던 순간을 떠올리니 온몸이 오싹할 정도였다.
"네... 저도 괜찮아요."
"후우... 폭동은 진압되었어."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운현의 질문에 필레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보통 일은 아닌 듯 했다.
"던전 도시에서 운현 너를 다난교에 바치자고 폭동이 일어났어. 상인 조합과 제작자 연합에서 용병과 암살자를 고용해서 모험가 길드를 습격했고. 다행히 그들은 모두 막을 수 있었어."
"그런가. 그나마 다행이네..."
"그래서 말인데... 운현."
"응?"
"...일단 던전 도시를 좀 벗어나 있자. 던전 도시의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어. 상황이 조금 가라앉을때까지 피해 있는게 어떨까?"
상아의 말에 운현은 침묵했다. 필레와 헤스티아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녀들 역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좋아."
던전 도시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면. 그리고 그 위험 때문에 상아와 필레, 헤스티아가 위험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인다. 운현은 상아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들은 운현의 결정에 안심했다. 만약 운현이 복수를 하겠다고 날뛰면 그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고민이었던 것이다.
"복수는 나중에 해도 괜찮아. 지금은 힘을 기르고..."
운현은 침을 꿀꺽 삼킨 후 토해내듯 말했다.
"지켜야 해."
"후우... 그럼 됐어. 내일 새벽에 모험가 길드의 비밀통로를 통해 시청으로 가자. 윈드와 윈디아가 복귀할때 그 마차에 숨어서 가도록 하자. 필레가 함께 갈거니까. 그리고... 알지?"
"응."
상아가 자신의 목을 톡톡 치며 말하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자신을 도우려고 하는 그녀다. 그녀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무조건 적인 사랑에 운현은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어? 왜?"
"아냐. 고마워서."
"에... 뭘 이런걸 가지고."
운현의 감사 인사에 상아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며 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미야, 바제트에 이어서 헤스티아까지... 그녀들이 고통받고 괴로워하며 죽는 것이 운명이라면... 바꾼다. 내가 바꿔주겠어.'
아르토리우스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목적. 운명을 바꾸려는 그녀가 자신이 동료라고 말한 이유가 떠올랐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그들만이라도 지키겠다. 그들만이라도 살리겠다. 어떤 고통을 받더라도 그들의 죽음을, 그런 허무한 죽음을 막겠다.
다짐을 마친 운현은 눈을 빛냈다.
'슬퍼하고 좌절할 여유따위는 없어. 움직여야해. 운명이 그녀들을 죽이려 한다면... 그것을 막으려면... 생각해라. 운현. 아르토리우스는 운명을 바꾼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만약 그녀들이 운명에 의해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바꿀 수는 있을거야. 뭔가 방법이 있을거야. 생각해. 생각해!'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생각하던 그는 자신이 가진 패를, 그리고 이번에 헤스티아를 구하며 다난의 집행자들을 잡아 레벨이 올라 새롭게 얻은 스킬을 떠올렸다. 방법이 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다. 물론...
'더럽게 고통스럽겠지만 말이지... 하지만 어쩌면 이것도 운명일지 모르겠군. 하하...'
절로 쓴웃음이 나온다. 고통스럽고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언제 운명이 그녀들을 가져갈지 모르니까.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해야 했다. 그는 주먹을 꽉 쥐며 각오를 다졌다.
'해주지... 해주겠어.'
운현은 차분하게 상아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자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녀를 향해 운현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혹시..."
"시, 실패했습니다!"
"뭐...?"
집행자의 보고에 카야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패했다? 어째서?
"그... 알 수 없는 기술에 당해서 마리아가 죽었습니다. 저도 가세하려 했지만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과 간부들의 저항때문에... 죄송합니다!"
자신에게 사죄하는 그녀의 말에 신경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카야는 당황했다. 분명히 성공해야 했다. 이미 예정되어 있는 성공이었다.
"어째서...? 이건..."
그녀는 모험가 길드를 보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운명이 아니었는데...?"
"그딴 약해빠진 년을 보내니 일이 이렇게 된 것이지. 운명을 읽을 수 있는 다난의 성녀라고 하지만 결국 그냥 허세에 불과했군."
"아냐!! 무슨 소리야!? 운명은 이게 아니었다고! 다 맞았잖아!"
"어디가 다 맞았다는거지?"
카야의 발작적인 외침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사내는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다. 그 웃음에 이를 간 카야의 등 뒤에서 거대한 검은색 날개가 피어오르자 그녀를 바라보던 사내는 허리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어디 네 운명이 오늘까지인지도 확인해보겠어? 이 카를로스님을 상대로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사내. 카를로스의 이죽거림에 빠득 이를 간 그녀는 천천히 날개를 접었다. 지금 상태에선 그를 상대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날개를 접자 카를로스는 자신의 검에 가져간 손을 떼었다.
"이제부터 넌 빠져. 운명을 읽는다? 그런데 벌써 몇번이나 틀렸지?"
"다, 닥쳐! 대부분은 맞았다고!"
"하지만 완벽은 아니지. 운명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틀린 이상..."
카를로스는 히죽 웃은 후 담담히 말했다.
"네가 과연 다난의 뜻을 잇는 성녀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까?"
"카를로스... 네놈!"
"닥쳐. 미친년. 넌 이제부터 나서지마. 모든 것은 내가 지휘한다."
카를로스가 이를 드러내며 말한 순간 그의 뒤로 검은 사제복을 입은 여인 세명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을 든 사제, 창을 든 사제. 그리고 한쪽 팔이 없는, 활을 든 사제가 나타나자 카야는 이를 갈며 외쳤다.
"브릴! 가이엔! 마이엘! 배신한 것이냐!"
"조용히 하세요. 성녀... 아니. 카야 데 다난. 당신의 운명을 읽는 힘은 벌써 틀리지 않았습니까. 애초에 그 힘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의 그 어이없는 예언은 더 이상 믿을 수 없습니다."
검을 든 사제. 브릴의 싸늘한 말과 창을 든 사제 가이엔은 그녀를 비웃으며 자신들의 무기를 들었다. 떨리는 눈으로 그녀들을 보던 카야가 다급히 마이엘에게 시선을 보내자 마이엘은 피식 웃은 후 말했다.
"배교자 하나의 움직임도 예측 못하고, 내 팔이 날아가는 것을 숨기고 있던 당신을 따를 이유는 없지."
"아냐! 그건!! 그, 그것도 운명이 아니었다고! 원래 그때 운현이 죽었어야 했어!! 그, 그리고 그의 동료를 죽일 수 있었잖아!"
"그 수인족? 그년이 신성을 가지고 있었나? 카야 데 다난. 넌 이제 믿을 수 없어. 위대한 성자께서 남기신 유물을 그토록 사용한 주제에 결국 저딴 모험가 하나 못죽인 당신은 뒤로 빠져 있어. 네 말대로 운명이 다난에게 흐르고 있다면 당신이 나서지 않아도 되겠지."
마이엘이 분노를 담아 말하자 카야는 이를 갈았다.
200====================
Raid
"이제 떠나는 건가..."
"후후...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좋았을텐데."
운현을 향해 웃으며 필레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오래간만의 귀향이다. 그녀는 평소 입고 다니던 단촐한 옷이 아닌 전투용 슈트를 착용한 채 운현의 옆에 앉았다.
"필레씨. 필레씨의 영지는 어떤 곳이에요?"
"음... 꽤 괜찮은 곳이에요. 사람들도 순박하고. 근처에 호수도 있고... 경치도 좋고 한적한 곳이에요. 조금 심심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그러고보니 너와 상아가 만난 곳도 그 영지라고 했었지?"
"응. 저기... 운현."
"응? 왜?"
필레가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운현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물었다. 미야와 바제트가 그런 일을 당하고 나서 운현이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좀 더 솔직해진 듯한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든다. 잡고 있던 손에 깍지를 낀 필레는 조금 머뭇거리며 말했다.
"부모님께... 널 소개해도 괜찮아? 그, 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얼마든지. 나야말로 영광이지."
운현은 필레의 이마에 살짝 키스해주었다. 그것에 필레가 무척이나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하자 헤스티아 역시 그의 손을 잡았다.
"저두요! 이 일만 끝나면... 저도 운현씨를 부모님께 소개드리고 싶어요!"
"그 역시 영광이야."
경쟁하듯 말하는 헤스티아를 향해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의 미소. 헤스티아와 필레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윈드는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운현씨. 부탁인데 염장질은 좀 나가서 하시면 안될까요?"
"다른데라고 해봤자 마차는 하난데 어디서 하라고..."
부상 때문에 발렌타인 영지로 복귀하게 된 윈디아와 그녀를 호위할 겸 가문에 불려가게 된 윈드는 눈 앞에서 시시덕거리는 운현과 필레, 헤스티아를 향해 투덜거렸다.
"진짜... 소개받는 것도 물건너 갔고... 에휴..."
"하하...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좋은 남자가 나타나겠죠."
"좋은 남자라..."
윈드는 운현을 위 아래로 흝어본 후 입맛을 다셨다. 사나운 육식동물 앞에 놓여진 초식동물이 이런 기분일까? 운현은 오싹한 기분에 침을 꿀꺽 삼켰다.
"눈 앞에 있는것 같은데..."
"그러니까요. 음... 필레씨 영지로 가는게 아니라 발렌타인 영지로..."
"아, 안돼!"
"농담이에요."
윈디아의 말에 필레는 삐질 땀을 흘렸다. 전혀 농담같지 않은데 농담이랜다. 그녀가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보자 윈디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운현씨."
"네?"
"레벨이 꽤 오르신 것 같군요."
"그런 것도 아세요? 네. 지금 241이에요... 3계층에서 발생한 몬스터 웨이브때 레벨이 오른데다가 코어를 많이 얻었거든요. 그래서..."
"다행이네요."
윈디아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그녀가 침묵하자 운현은 윈드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엘프 남자는 만나봤어요?"
"만났어! 만났는데..."
울먹거리며 윈드는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날 보자마자..."
"보자마자?"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그냥 가버리더라고."
"...으음..."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윈드의 울적한 얼굴에 운현이 씁쓸한 입맛을 다시자 그녀는 운현에게 다가갔다.
"제발 부탁이야! 너밖에 없어! 날 보고도 싫어하지 않는 남자는!!"
"...윈드. 진정하는게 어때?"
필레의 싸늘한 말을 무시하며 윈드는 운현의 위에 앉았다. 그녀의 눈에 피어오른 광기에 운현이 움찔했을 때 윈디아는 그녀의 뒷목을 잡아 당겼다.
"그만 해요. 뭐하는 거에요? 발렌타인 가문의 차기 가주가."
"그치만!!"
"운현씨.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이런 언니이지만 그래도 생긴건 멀쩡하니 어떻게 한자리 안될까요?"
"....."
윈디아의 말에 운현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런 그를 꽉 끌어안은 필레가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마차가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빨리 왔네요."
"피스나씨가 새로 만든 마차덕분이죠. 하루만에 올 줄은 몰랐는데."
빙긋 웃은 필레는 운현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헤스티아와 윈드, 윈디아가 밖으로 나오자 운현은 주변을 보며 감탄했다.
"와..."
"아름답죠?"
생긋 웃은 필레는 그의 팔을 놓고 한걸음 앞서 걸었다. 온통 하얗다. 나무도, 성벽도. 그리고 성벽 바깥에 보이는 호수 위에도. 소복히 쌓여 있는 설원을 보며 운현은 감탄과 함께 의문을 품었다.
던전 도시에서 고작 하루 거리인데 이렇게 눈이 쌓여 있다니. 그가 놀란 얼굴을 하자 윈디아는 빙긋 웃으며 그의 의문을 해소시켜주었다.
"던전 도시는 던전의 마법때문에 사계절 따뜻합니다. 원래는 겨울이에요."
"그렇구나..."
이세계에 들어오고 나서 던전도시 인근에서만 머물렀던 그가 다른 지방의 날씨를 알리 없었다. 운현은 윈디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름답네요."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주변을 둘러보며 운현이 말했을 때 그의 뒤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퍽!"
"...윈드씨. 뭐하는거에요?"
"눈싸움!"
"애도 아니고. 언니. 그만해요."
"힝..."
윈드가 시무룩히 손에 들고 있는 눈뭉치를 떨구자 필레는 마차의 짐칸에서 두꺼운 망토를 꺼내어 운현과 헤스티아에게 건네주었다. 밖에 오래 나와있다보니 한기를 느꼈던 운현이 웃으며 그것을 받자 필레는 성문의 입구로 걸어간 후 방긋 웃으며 말했다.
"미니아 영지에 온것을 환영합니다. 영주로서 여러분의 방문을 진심으로 반갑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생글거리며 필레가 인사하자 운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마주 인사했다.
"모험가 운현.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필레와 함께 성에 들어 선 운현은 소담히 쌓여 있는 마을을 걸었다. 눈이 내려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환한 얼굴로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아까 윈드가 했던 것처럼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보며 훈훈하게 웃고 있는 부모들. 그들은 운현 일행이 탄 마차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와~! 저거봐요!"
커다란 나무에 얼음이 가득 맺혀있었다. 헤스티아가 그것을 보며 신기해하자 필레는 부드럽게 웃었다.
"파논 나무에요. 여름이 되면 차가운 열매를 맺어서 더위를 잊게 해주죠. 겨울이 되면 스스로 얼음으로 몸을 가둬 냉기를 축적시킨답니다."
"저런게 있었구나..."
이세계라는 증거가 몬스터 뿐만이 아니었다. 운현은 그것을 보며 낮게 중얼거렸고 필레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어때요?"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필레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것을 보며 운현이 빙긋 웃자 필레 역시 말없이 웃었다. 또다시 훈훈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려 하자 윈드가 나서려 했지만 윈디아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렸다.
"여기가 영주관저에요. 다들 내려요~"
오래간만에 집에 온 것이 기쁜 모양이다. 필레는 생글거리며 마차에서 내렸고 그녀를 따라 내린 그들은 그녀를 따라 영주관저 입구로 이동했다.
"어라!? 영주님!"
"오래간만이네요!"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나이 지긋한 정장의 노인과 메이드복을 입은 토끼 귀의 여인은 필레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달려갔다. 그들이 달려오자 필레는 손을 흔들며 웃었다.
"하스톤! 루카!"
"와! 윈드님이랑 윈디아님까지... 그런데 저 사람들은 누구에요?"
필레의 뒤를 따라 온 윈드와 윈디아를 보며 루카라 불린 토끼 귀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현과 헤스티아를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씨익 웃으며 필레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설마...?"
"으, 으응."
루카가 싱글거리며 묻자 필레는 살짝 얼굴을 붉히고 행복하게 웃었다. 그녀의 모습에 루카는 크게 기뻐하며 노인, 하스톤의 손을 꼭 잡았다.
"와!! 드디어 영주님이!"
"결혼을 하는거네!?"
"아, 아직은 아냐! 그냥... 지금은 뭐랄까. 여, 연인?"
"그게 어디에요!"
"생긴것도 멀쩡해보이고~! 역시 던전 도시로 가시길 잘하셨네요!"
그들이 웃으며 떠드는 모습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런 그들을 진정시킨 필레는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부모님은?"
"아. 지금 응접실에 계세요. 필레님 오신다고 기다리고 계시니까 어서 가보세요~!"
"무척 기뻐하실 거에요."
필레가 연인을 데리고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들이 얼마나 기뻐할까. 하스톤과 루카가 웃으며 말하자 필레는 웃으며 그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의 추운 날씨에 비해 안쪽은 훈훈하기 그지 없었다. 안내를 시작한 루카와 하스톤을 따라 복도를 걷던 운현 일행은 그들이 별다른 문양이 없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에서 다과회를 준비하고 있는 노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어서 오려무나!"
"오느라 고생 많았어. 많이 춥지?"
문이 열리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선량한 인상의 노부부가 일어나 말하자 필레는 그들에게 달려갔다. 그런 필레를 꼭 안아 준 그들은 문가에 서 있는 운현들을 보며 물었다.
"윈드와 윈디아는 알고 있고... 저 둘은 누구니?"
"혹시 네가 말한 그...?"
중년 남성이 웃으며 묻자 필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반응에 노인은 밝게 웃은 후 운현에게 다가갔다.
"반갑습니다. 하일 카드만이라고 합니다. 필레의 아버지입니다."
"운현이라고 합니다. 필레의... 연인이죠."
"아하하하하!! 던전 도시에 가더니 벌써 연인을 데려올 줄이야. 반갑습니다. 그럼 이쪽 아가씨는?"
"헤, 헤스티아라고 해요. 필레씨랑 같은 운현씨의 연인...이에요."
헤스티아가 머뭇거리며 말하자 하일은 씨익 웃은 후 그녀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아가씨."
"네, 네에..."
그의 부드러운 반응에 헤스티아는 마주 웃으며 그와 악수했다.
"운현씨라고 했나요? 저는 바밀리아. 필레의 어미되는 사람입니다."
하일이 헤스티아와 인사하는 동안 운현에게 다가 온 여인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운현이 가만히 바라보자 윈디아는 그에게 속삭였다.
"손등에 입맞추세요. 그게 예의입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운현이라고 합니다. 레이디."
"후후훗~"
바밀리아의 손등에 입맞춘 운현은 그녀의 밝은 웃음을 마주했다. 따뜻한 시선이다. 그것을 받으며 운현이 웃자 필레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님의 마음에 들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었다. 만약 부모님이 반대를 했다면 그걸 어떻게 막아야 했나 싶었던 그녀는 겨우 안도한 후 말했다.
"저희 얼마간 여기에서 머무르려고 하는데. 괜찮죠?"
"물론이지. 여긴 네 집이니까 말이야."
필레의 말에 하일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는 훈훈하고 평화로웠다. 하일과 바밀리아는 즐겁게 농담을 건넸고 윈드는 그 농담에 휘말려 허둥거렸으며 그것을 보며 모두는 웃었다. 그렇게 가벼운 티타임이 끝나자 필레는 윈드와 윈디아, 하일과 바밀리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헤스티아를 힐끔 본 후 운현의 옷자락을 꾹꾹 잡아 당겼다.
"잠깐 나갈래?"
"어딜?"
"으응. 내가 영지로 오면 항상 들리는 곳이 있어. 거기에 널 데려가고 싶어서."
"흠..."
필레의 말에 운현은 잠시 생각했다. 다난교도의 움직임이 있지 않을까? 그것을 생각한다면 여기 얌전히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었던 그가 고민하자 필레는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그렇게 말지 않아. 윈드나 윈디아의 걸음이라면 십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니까 말야."
"그정도라면 괜찮겠지."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레와 운현이 일어나자 하일은 그들을 본 후 손가락을 튕겼다.
"거기 가는거니?"
"네. 거기를 운현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흐음... 거기 경치가 아주 좋지."
하일은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이 헤스티아를 바라보자 헤스티아는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저는 나중에 가볼게요. 필레씨랑 같이 즐거운 시간 보내도록 하세요~"
"그럼 나는 가야... 아! 왜 꼬집어!?"
눈치없는 윈드가 일어나려 하자 윈디아는 그녀의 허벅지를 꽉 꼬집었다. 그것에 윈드가 화를 내자 자리에 있던 모두는 깔깔 웃었다.
"그럼 가볼까?"
201====================
Raid
필레와 함께 영주관저를 나온 운현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눈을 맞으며 차분히 걸었다. 마치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려는 것처럼 내리기 시작한 눈은 차갑다기보다는 오히려 포근하게 느껴졌다. 필레와 손을 잡은 채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을 뽀득뽀득 밟으며 걸어간 그는 작은 언덕 위에 도착하자 감탄했다.
"와우..."
호수와 산이 한눈에 보이는 절경이다. 그것을 보며 그가 감탄하자 필레는 운현과 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어때?"
"멋있는데!?"
운현이 감탄하자 필레는 생긋 웃었다. 그가 마음에 들어하자 필레는 한걸음 나서며 호수를 보았다.
"여름이 되면 저 호수에서는 영지민들이 모여 낚시를 해. 팔뚝만한 송어가 낚이기도 하고 커다란 잉어도 잡혀. 나도 가끔씩 가는데 사람들은 저곳에서 수영도 하고 그래. 차가운 호수라 날이 더우면 들어가서 열을 식히지."
"너도 해?"
"응."
"수영복 입고?"
"응? 아, 나름 영주라서 어느정도 분위기를 즐겨야 하니까..."
"보고 싶은데."
"저, 정마알... 후후... 알았어."
운현의 말에 필레는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하다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 오늘 내 방에 올래? 내 방을 보여주고 싶어..."
"응. 갈게. 꼭."
"약속이다!? 헤헤헤~"
필레는 기뻐하며 그를 끌어안았다. 필레의 향기가 콧가를 간지럽힌다. 그녀의 낭창거리는 허리를 꽉 끌어안은 운현은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필레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췄다. 그의 키스에 필레는 그의 팔을 꼭 잡았다. 입술와 입술만이 닿는 짧은 입맞춤이지만 필레는 그것만으로도 꽤나 기뻤는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가자! 다른 곳도 보여줄게."
"어딘데?"
"응. 상아 길드장님과 만난 곳. 이름 없는 사람의 무덤인데 여길 보고나면 거기에 자주 가거든."
"그래? 그럼 가자."
운현은 그녀의 손을 잡고 언덕을 내려와 천천히 걸었다. 영주 관저쪽으로 들어가다가 뒤로 빠져 잠시 걸은 그녀는 커다란 나무들이 많은 길을 걸었다. 오솔길을 걸어 숲 안쪽에 도착한 그녀는 그곳에 있는 작은 무덤의 앞에 도착했다. 장례용의 커다란 비석이 있는 곳 앞에 선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차분히 말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아. 누구의 무덤일까?"
"비석에는 안적혀 있어?"
"응. 그냥 비석일 뿐이야. 실제로는 무덤이 아닐 수도 있겠지. 그래도 난 이곳에 오면 왠지 모르게 무척이나 그리운 느낌이 들더라고."
"그래...?"
운현은 비석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향해 따스한 미소를 지은 필레는 눈발이 거세지기 시작하자 운현의 팔을 잡았다.
"이제 돌아갈까? 슬슬..."
필레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그녀가 허리의 검에 손을 가져가자 운현은 불안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설마?"
"누구냐."
"하하...! 잘도 눈치챘군."
나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운현은 빠득 이를 갈았다.
"카를로스...!"
"여기로 도망가면 모를 줄 알았나? 우릴 너무 얕봤군. 성자의 유물을 모두 활용하기로 한 이상 너희들따위는 우리 상대가 못 돼!"
카를로스는 허리에 걸려 있는 검을 천천히 뽑아 운현에게 겨눴다. 그런 그를 막으려는 듯 필레가 검을 뽑아 그를 막자 카를로스는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너 혼자서 우릴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카를로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나무 뒤에서 십여명의 검은 사제들과 검은 날개를 지닌 검을 든 사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등장에 필레는 더더욱 무심한 얼굴이 되었고 그녀의 기세를 보며 카를로스는 장난스레 몸을 떨었다.
"저 이계인을 내놔. 그럼 네 목숨은 살려주지."
"꺼져."
"그럴 줄 알았다."
필레가 운현을 보호할 것이라는 정도는 이미 예측한 상태였다. 카를로스는 어깨를 으쓱인 후 검을 들어 필레에게 겨눴고 그 순간 집행자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잡았다.
"다 함께 죽여버려라."
"흡!"
"상아!!"
운현은 목걸이를 잡으며 외쳤다. 하지만 상아는 나타나지 않았고 운현이 당황하자 카를로스는 배를 잡고 키득거렸다.
"아하하하하!! 네가 그년을 부를 것을 예상 못한 것 같냐!? 성자의 유물이 여기 있는 이상 그년을 부를 수는 없을거다!"
카를로스는 자신의 손에 걸려 있는 팔찌를 보이며 키득거렸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마력 방해때문에 상아가 올 수 없었다는 것을 떠올린 운현은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역시 하나하나 밉상인 놈이다.
"죽여!!"
집행자들이 달려든다. 운현을 뒤로 밀친 필레는 검을 당겨 크게 베었고 그 검격에 두명의 집행자가 쓰러졌다. 일검에 두명이나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집행자들은 필레를 공격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여덟명의 집행자가 필레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필레는 이를 갈며 검을 들어 바닥에 내리 꽂았다.
"하압!"
"퍼어엉!!"
검에 실려있는 기운이 폭발하며 집행자들을 감쌌다. 그것에 맞은 집행자들이 나가 떨어지자 카를로스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필레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 진짜 어이가 없군. 유물을 쥐어줘도 고작 저정도라니 말야. 너희들 도대체 그동안 뭐한거냐?"
카를로스가 빈정거리자 그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던 날개의 사제는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제가 상대하죠."
검은 날개의 사제가 걸어오자 필레는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기운에 이를 악물었다. 티르빙, 아니 그 이상이다. 상아 길드장과 비슷하거나 조금 낮은 듯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 그녀는 허리에 걸려 있는 폭죽을 운현에게 넘겼다.
"이걸 터트려줘!"
"퍼어엉!!"
필레에게 받은 폭죽을 터트린 운현은 폭죽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하늘을 수놓자 방패를 들었다. 지원하려는 운현의 모습에 필레는 씁쓸한 얼굴로 외쳤다.
"운현! 피해! 내가 막고 있는 동안 윈드를... 운현!!"
"채애앵!!"
"큭! 역시 이정도는 막을만 하네."
"호오..."
운현을 보며 흥미롭다는 얼굴을 한 사제는 그의 방패를 다시 후려쳤다. 하지만 그 공격 역시 방패에 막혀버렸고 검은 사제는 뒤쪽의 카를로스에게 말했다.
"카를로스님. 저 여자를 부탁합니다."
"고작 300레벨조차 되지 못한 도적 하나 못잡다니. 정말 다난 이년들은 뭐하는 년들일까?"
"...송구스럽습니다. 허나. 이자."
검을 든 사제는 운현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검을 겨눴다.
"강합니다."
"그냥 쳐 놀고만 있었던게 아니거든!!"
"고작 몇일만에 이정도라니..."
상아를 공격했을 때 만났던 운현이다. 그가 자신의 검을 막을 정도까지 성장한 것에 놀라면서도 그녀는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몇차례의 검격을 막던 운현을 향해 그녀는 발을 들어 그를 걷어찼고 방패로 막았지만 힘에서 밀린 운현은 크게 뒤로 튕겨져 나갔다.
"운현!"
"넌 니 걱정이나 하시지!!"
카를로스가 달려오자 필레는 이를 갈며 그의 검을 막았다. 이자를 상대할 여유따위는 없었다. 검과 방패가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필레는 표정을 점점 없애며 검을 움직여나갔다.
"챙! 챙! 챙!"
세차례의 검격을 막아낸 카를로스는 예상 밖으로 필레의 실력이 강한 것에 씨익 웃었다. 슬슬 몸에 열기가 돌아온다. 그는 뒤로 물러난 후 왼손을 뻗으며 외쳤다.
"라이트닝 볼트!!"
"파지지지직!!"
카를로스의 손에서 터져나간 전격이 필레의 검에 감싸졌다. 그 전격에 몸을 떤 필레가 기합성을 터트리며 전격을 날려버리자 카르로스는 키득거리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챙! 챙!"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큭..."
너무 멀어졌다. 이대로는 필레를 지킬 수 없다. 만약 그녀가 카를로스에게 죽기라도 한다면? 운현은 이를 갈았다.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젠 거의 넝마가 되어버린 방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푼 운현은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죽음을 받아들여라. 내가 너의 운명이고, 죽음이다."
그녀가 담담히 말하며 검을 들어 올린 순간 운현은 싸늘히 웃었다.
"그건 봐야 아는 일이지. 내가 너의 죽음이 될 수도 있을텐데 말야!!"
"미믹!?"
운현은 인벤토리에 남아 있는 미믹을 모두 꺼냈다. 1계층의 미믹 넷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자신에게 검은 기운을 뿜어내는 미믹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채앵!"
상아만큼은 강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녀의 공격에 미믹은 끝이 조금 부숴졌을 뿐 큰 상처는 없어보였다.
"숨었나...!?"
미믹을 소환하고 하이딩으로 몸을 감춘 운현은 미믹들이 그녀를 공격해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믹 네마리의 연속된 공격에도 그녀는 잘 버텨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미믹이 안된다면 방법은? 운현은 이를 갈며 방법을 생각했다.
"하아아아압!!"
생각할 여유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것인가? 눈 위의 발자국으로 운현의 위치를 파악하낸 그녀는 운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에 뭉쳐진 보라색 기운이 자신을 향해 터져나오자 운현은 바닥을 굴렀고 그 위치에 있던 미믹 하나가 완전히 부숴져 버리고 다른 하나가 반쯤 파손되어 바닥을 굴러 자신의 곁으로 온 것을 보았다.
"고작 1계층의 미믹따위가..."
"그래? 그럼..."
운현은 아까의 공격에 맞아 반쯤 부숴진 미믹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슨 짓을... 이런 미친!?"
운현의 인벤토리에서 자신이 그동안 미믹맨으로 활동하며 보물상자를 챙길때마다 쟁여 둔 마석을 모두 꺼냈다. 그의 손에 한움큼 쥐어진 마석을 본 그녀는 당황하며 검을 당겼다. 검에 강력한 기운이 걸리자 운현은 더 볼 것 없다는 듯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미믹의 안에 넣었다.
"1계층의 마인은 어떨까!?"
"우우우웅!!"
미믹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터져나왔다. 그 기운은 곧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마인이 소환되자 운현은 다시 하이딩을 걸었다. 미믹 둘과 검을 든 사제. 그를 본 마인은 미믹이나 운현이 아닌 검은 사제를 향해 달려갔다.
"이런 개같은!!"
마인이 그녀를 상대하자 운현은 미믹 하나를 회수했다. 마인이라면 가능하다. 그렇다면? 운현은 빠르게 달려 필레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챙! 챙! 촤악!!"
카를로스의 검격을 막아내던 필레의 팔에 피가 튄다. 그녀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뒤로 물러나자 카를로스는 그녀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검을 휘두르려다 움찔하며 뒤로 크게 뛰어 물러났다.
"화염!"
"콰아아앙!!"
방금 전 자신이 있던 곳에 엄청난 화염이 몰려들었다. 자신이라 하더라도 무방비 상태에서 저것을 맞았다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 카를로스가 등 뒤에서 식은땀을 흘리자 운현은 하이딩을 풀고 완전히 부숴져버린 방패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괜찮아?"
"도망치라니까!! 그 여자는 어떻게 됐어!?"
"그 여자?"
"아아아아아악!!"
"죽었거나 뒈졌겠지."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들은 운현이 씨익 웃자 필레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너 진짜... 남의 영지에다가 마인을 풀면 어쩌려는거야?"
"어쩌긴. 저 자식 잡고 상아 불러야지."
"진짜. 바보."
필레는 피식 웃으며 운현의 볼을 꽉 꼬집었다. 둘이 만들어내는 훈훈한 분위기를 가만히 지켜보던 카를로스는 피식 웃은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이지 스타일 구기는군. 개같은 이계인과 붙어먹는 년이라..."
"그 개같은 이계인한테 오늘 너 죽을텐데. 이 날만을 기다려왔다. 오늘 끝장을 보자."
운현이 서큐버스의 검을 잡아 겨누자 카를로스는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끼고 웃었다.
"하하하... 건방지게. 내가 모든 힘을 썼다고 생각하나?"
카를로스는 살며시 눈을 감고 양 손으로 검을 잡았다.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검은 날개가 돋아났다. 한쌍의 검은 날개가 모습을 보이자 필레는 운현이 건네 준 힐링포션을 마신 후 조용히 말했다.
"운현. 심상치 않아. 도망치는게..."
"하아압!"
아까보다 배는 빠른 속도다. 운현을 뒤로 당기며 카를로스의 공격을 막아낸 필레는 묵직한 일격에 뒤로 밀려나가면서도 검을 놓지 않았다.
"채앵! 채앵!"
카를로스의 검이 점점 빨라진다. 그것에 필레가 식은땀을 흘리며 검을 움직이자 운현은 그녀를 향해 손을 뻗고 외쳤다.
"필레! 뛰어!"
"알았어!"
필레가 함정의 범위에서 뛰어 올라 뒤로 물러나자 카를로스는 운현을 비웃었다. 이런 눈에 보이는 식으로 함정을 알리다니. 그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른 순간 운현은 히죽 웃은 후 그의 다리를 향해 밧줄을 걸었다.
"아닛!?"
"그걸 노렸다! 요놈아! 날개달린 것들은 항상 날아오르려고 용을 쓰지!!"
"이자식!!"
"하아아압!!"
운현의 밧줄에 잡힌 카를로스는 짜증을 내며 자신의 발을 묶고 있는 밧줄을 잘라내려 했다. 하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필레는 그의 밧줄을 밟고 뛰어 카를로스를 베었고 그 공격에 카를로스는 어깨에 상처를 입었다. 검을 쥐고 있는 오른쪽 어깨를 다친 카를로스는 허공의 필레를 향해 마법을 쏘았지만 어느새 밧줄을 놓은 운현은 필레의 다리에 다른 밧줄을 걸고 그녀를 확 잡아 당겨 마법을 피하게 만들었다.
"운현! 고마워!"
"뭘 이정도 가지고!"
"아아아악!! 이 개쌍년놈들이!!"
운현이 생각보다 큰 방해를 하는 것에 분노하며 카를로스는 발에 묶여 있는 밧줄을 풀어 멀리 던졌다. 그런 그를 향해 웃은 운현은 밧줄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어디 하늘에서 더 까불어보시지 그래?"
"큭...!"
허공에 있으면 밧줄에 잡힌다. 그가 이를 갈며 천천히 땅에 내려 온 순간 운현은 키득거렸다.
"걸렸구나! 요노무쉬키!"
"촤아아악!"
카를로스가 내려 온 자리에 함정을 설치한 운현은 함정에 걸린 카를로스의 몸이 실로 칭칭 감기자 필레에게 외쳤다.
"쳐!!"
"하아아아압!!"
함정에 걸려 바둥거리는 카를로스를 향해 필레는 빠르게 달려갔다. 딱딱한 강철의 실이 하나 둘씩 카를로스의 힘에 의해 끊기는 것을 보았지만 필레는 그 속도보다 자신의 검이 카를로스의 머리를 두쪽내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 예상했다.
"끝이다!!"
필레의 검이 움직이고 카를로스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운현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운현은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며 씩 웃었다.
202====================
Raid
"채앵!"
"...이런 씨발."
필레의 검이 긴 창에 의해 막혔다. 자신의 공격을 막은 자를 본 필레는 닥쳐오는 발길질에 밀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고 그 순간 창을 든 여인은 창을 크게 휘둘러 카를로스의 몸을 잡고 있는 함정을 풀어내었다.
"아아아아아악! 개새끼!!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함정에 의해 바닥을 굴러 흙과 눈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카를로스가 악귀같은 얼굴로 운현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를 마주하며 운현은 서큐버스의 검을 들었다. 숲 속에서 무기를 든 사제들 수십명이 나타난다.
"뭔 바퀴벌레도 아니고 자꾸 기어나와!? 진짜! 너네 도대체 몇명이나 온거냐!?"
"그걸 알려 줄 필요가 있나? 카를로스님. 준비되었습니다."
"하아...필레."
"...응."
정말 답이 없는 상황, 아니. 답은 하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 혼자서 정할 수는 없었다. 운현은 필레의 손을 잡으며 차분히 물었다..
"저 여자. 강해보이지?"
"응."
자신의 일격을 여유있게 막았다. 그런 자가 가세한다면 확실히 자신들이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저 뒤에 있는 년들도."
"...아까보다는."
"그럼 방법은 하나네."
"...마인? 하지만..."
과연 마인이 저들만을 공격할까? 다년간 던전을 돌며 마인을 상대해 보았던 필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인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녀가 회의적인 얼굴을 했지만 운현은 방법이 그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마석은... 없군.'
아까 전 마인을 소환하느라 그동안 쟁여 놓은 마석을 다 쓴 운현은 인벤토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코어를 꺼냈다. 마인의 코어. 1계층에서 잡은 마인이 떨어트린 그의 코어를 잡은 그는 자세를 갖추는 카를로스와 창을 든 집행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일반 마인이 나올지... 더 강한 마인이 나올지. 아니면 마인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
다른 코어들과는 아예 생김새와 색부터 다른 코어다. 이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운현도, 필레도 모르는 것이었다.
'미믹은 몬스터들의 코어를 흡수해서 마력을 모아 마인을 소환한다고 했어. 마인의 코어라면 반드시 마인은 나올테니까...'
아마 숲 속에는 검을 든 사제를 처리한 마인이 자신의 적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을 지도 몰랐다. 적이 없다면 역소환되어 사라질 수도 있었고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난 발버둥치겠어."
"으... 마음대로 해!"
"미안. 네 소중한 장소인데..."
"네놈... 네놈 죽인다! 죽여버린다!!"
"엄청 망가트리게 생겼네!!"
운현은 곧장 하이딩을 걸었다. 그의 몸이 사라지자 카를로스와 다난의 집행자들, 검은 사제들은 당황했고 운현은 빠르게 뛰어 그들의 근처로 이동한 후 미믹을 꺼내었다.
"촤아아악!!"
미믹의 검은 기운이 사제들을 덮쳤다. 갑작스레 나타난 미믹이 공격을 시작하자 당황한 그들이 한걸음 물러났을 때 운현은 손에 쥐고 있는 마인의 코어를 미믹의 뚜껑에 있는 구멍에 집어 넣었다.
"나와라! 마인!!"
"콰아아아아아앙!!"
"큭...!"
아까 전 마인을 소환했던 미믹과는 달랐다. 미믹의 뚜껑이 폭발하듯 날아갔고 남은 상자에서 검은 기운이 터져나왔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기운에 놀란 운현이 뒤로 뛰어 필레의 곁으로 물러났을 때 카를로스와 창을 든 검은 사제는 기겁하며 외쳤다.
"공겨..."
"촤아아악!!"
미믹의 몸에서 나오던 검은 기운이 움직였다. 그 검은 기운에서 튀어나온 마인은 1계층의 미믹으로 소환한 마인과 다르게 처음부터 양 손에 검을 쥐고 있었다.
두자루의 검은 빛의 장검을 든 마인은 자신을 공격하는 검은 사제들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휘둘렀다. 일격에 한명씩. 그들이 무기로 막으면 무기채, 방패로 막으면 방패채로 아무런 방해 없이 마인은 그들을 죽여나갔다.
"저거... 뭐야. 마인.... 맞아?"
마인을 꽤나 상대했던 필레마저도 이런 현상은 처음인 모양이다. 그녀가 떨리는 어조로 말하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이야. 저거 쎄네."
"너 무슨 짓을 한거야!?"
"미믹에다가 마인의 코어를 넣었지. 필레. 잘됐다. 튀자."
마인은 운현과 필레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자신을 공격하는 검은 사제들에게 가볍게 검을 휘두르던 마인은 창을 든 검은 사제와 카를로스가 덤벼들자 그들의 공격을 여유있게 막아낸 후 검 두자루를 땅에 꽂았다.
"콰아아앙!!"
"큭...!"
떨어져 있는 필레와 운현의 몸까지 흔들릴 정도의 충격파가 터져나갔다. 그것에 맞은 카를로스와 창을 든 검은 사제, 그리고 다난의 집행자들이 뒤로 튕겨져 나가 피를 토하며 비틀거리자 마인은 다시 학살을 시작했다. 충격파로 인해 막지조차 못하는, 무저항의 검은 사제들을 삽시간에 전멸시킨 마인은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카를로스와 창을 든 검은 사제에게 검을 휘둘렀다.
"채앵!"
"촤악!"
"아아악!!"
카를로스는 막았지만 창을 든 검은 사제는 막지 못했다. 일격에 목이 날아가버린 검은 사제의 시체가 툭 뒤로 쓰러지자 카를로스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너, 너 뭐야!? 뭐야!? 너 뭔데에에에!!"
"......"
마인은 한걸음 걸어 카를로스를 공격했다. 그의 공격에 카를로스의 머리로 향해졌을 때 마인의 뒤통수에 마력탄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퍼엉!"
"허억...허억..."
한쪽 팔을 잃고 복부에서 피를 흘리며 검을 든 검은 사제가 나무에 기댄 채 서 있었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날린 마력탄에도 전혀 충격을 입지 않은 듯한 마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를로스를 보았다.
"아....아으...아...!"
아까 전의 마력탄 때문에 흔들려 공격이 빗겨나갔다. 카를로스의 오른팔을 어깻죽지부터 완전히 잘라버린 마인은 자신의 떨어진 팔을 보며 신음하는 카를로스를 향해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안돼!!"
"푹!!"
다시 마력탄을 쏘려는 그녀를 향해 마인은 자신의 왼손에 들고 있는 검을 날렸다. 검은 기운으로 감싸져 있던 검은 빛살이 되어 검을 든 검은 사제의 머리를 반으로 쪼갠 후 나무에 단단히 틀어박혔다.
"...저, 저거 뭐야. 진짜..."
어린아이 다루는 것보다. 아니 개미를 짓밟아 죽이는 것보다 더욱 간단해보였다. 자신들을 그토록 고생하게 만들었던 저들을 저리 손쉽게 죽여버리는 것에 운현이 떨리는 어조로 중얼거렸을 때 마인은 카를로스를 죽이기 위해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콰앙!"
또다시 방해가 들어온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마인은 허공에서 자신을 향해 화살을 쏜 여인을 향해 검을 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빠르게 날아 바닥에 쓰러져 바둥거리는 카를로스를 잡고 허공으로 뛰어 올랐고 그런 그들을 보며 마인은 다리를 굽혀 크게 뛰어올랐다.
"이런!?"
단 한번의 도약만으로 자신들이 있는 위치까지 마인이 날아오르자 활을 든 검은 사제는 당황하며 밑으로 하강했다.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검에 놀란 그들은 허둥거리며 도망치려 몸을 돌렸다.
"그냥은... 못가!!"
활을 든 여인에게 안겨 있던 카를로스는 증오와 공포로 가득 찬 얼굴을 운현에게 돌리고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 붉은색 기운이 맺힌다. 그것을 본 운현이 움찔했을 때 그는 그것을 쏘아내었다. 그리고 그가 기운을 쏘아낸 순간 마인은 그를 안고 날아가는 검은 사제를 향해 검을 겨눠 검은 기운을 날렸고 그 검은 기운에 맞은 카를로스와 검은 날개의 사제는 그대로 추락해버렸다.
"우웅!"
붉은 빛이 자신의 심장을 향해 날아온다. 그 순간 운현은 누군가가 자신을 밀치는 것을 보았다.
"커헉!!"
"필레!!!"
"아으... 아... 운...현..."
필레의 몸이 축 늘어졌다. 점점 생명을 잃어가는 그녀를 보며 운현은.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웃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그는 미친듯이 웃었다. 필레는 웃고 있는 운현을 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가...내가... 내가아아아!!!"
떨리는 필레의 손을 꽉 잡은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싸늘히 웃으며 외쳤다.
"이 빌어먹을 운명이라는 놈이 날 엿먹일려고 개수작을 부릴 것 같더니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스킬창을 확인한 후 필레의 상처에 손을 올렸다.
"보험을 들어놨지."
약해져가는 필레의 심장박동을 느낀 운현은 이를 드러내며 강하게 외쳤다.
"그레이터 힐!!!"
운현은 모험가 길드를 떠나기 전날 밤을 떠올리며 훔쳐배우기로 배운, 고통과 괴로움을 겪으며 얻어낸 사제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회복 스킬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