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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어! 어째서 진거지!?"
시장선거를 위해 복귀했던 간부들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자 아직 전장과 계약이 되지 않아 연맹에서 대기하고 있는 간부들 중 하나인 바민은 분통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왜 아르토리우스님은 선거운동 자체를 하지 않으신걸까? 라티나. 뭔가 아는 거라도 있나요?"
늘 아르토리우스의 곁에서 그녀를 수행하는 비서역을 맡은 라티나를 향해 티르빙이 묻자 바민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르겠어. 허나 이 문제에 대해서 아르토리우스님은 따로 언급하지 않으셨어."
"젠장! 전선을 확장시켜서 저 빌어먹을 모험가 년들의 콧대를 무너트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은 모두 병신 짓이 되어버렸잖아! 어떻게 책임질거야!!"
아르토리우스를 대신해서 용병 연맹의 선거 운동을 해왔던 바민으로서는 분통이 터질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가 화를 내자 티르빙은 한숨을 내쉰후 그녀의 분을 달랬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아르토리우스님께서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이 역시도 예상한 일이시겠지."
"예상!? 이 엄청난 기회를 날려버린 거에 무슨 예상이 있겠어!? 하
.. 혹시 전쟁이 두려워진것 아냐?"
"말 조심해라. 넌 지금 너무 취했어."
바민의 앞에 놓여져 있는 독한 술 세병을 가리킨 라티나가 싸늘히 말했지만 바민은 그저 콧방귀만 뀌었다.
"전장의 여신? 무패의 아스? 하이고~ 무패 좋아하네. 저 병신같은 모험가들과 제작자 나부랭이가 힘 좀 합쳤다고 이딴 선거에서 패배했는데 무슨 무패야!?"
"말이 심하다! 바민!"
"심하긴 뭐가 심해!! 내가 이 선거운동을 하느라 얼마나 투자를 했는지 알아!? 다른 간부들도 불만이 크다고!"
"그래서?"
바민의 말이 점점 도가 지나쳐가자 라티나는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던 바민은 남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킨 후 말했다.
"연맹장을 바꿔야 하는 것 아냐?"
"바민!!!!"
해서는 안될 이야기다. 티르빙이 분노하며 외쳤을때 라티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 누가 연맹장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지? 너?"
"시켜만 준다면 패배한 개 따위보단 잘할 수 있을거라고."
"헤에~ 그게 정말인가요?"
문이 열리며 즐겁고 느긋한 목소리가 방에 울려퍼졌다. 그 말에 라티나와 티르빙의 몸이 딱딱히 굳었다.
"아, 아르토리우스님."
"이건... 그냥 너무 취해서 헛소리를 하는 것 뿐입니다. 바민! 어서 사과드려!"
아르토리우스가 웃으며 방으로 들어오자 티르빙과 라티나는 황급히 그녀에게 변명하고 바민에게 사과를 재촉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취한.그녀는 아르토리우스에게 사과를 하는 대신 그녀를 향해 비릿한 비웃음을 던질 뿐 이었다.
"헤헤~ 이게 누구야~ 패배한 개 아니신가...?"
"바민.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이제 들어가서 쉬는게 어떤가요?"
바민의 조롱에도 아르토리우스는 그저 생글거릴 뿐 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티르빙과 라티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바민에게 다가갔다.
"너 술깨서 이불 걷어차지 말고 지금 사과하고 끝내라."
"지금 정도도 충분히 이불 걷어찰 것 같은데..."
"놔바아아아! 할 말은 해야겠으니까. 왜 선거운동을 안한건데? 당신이 제대로 활동만 했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선거였는데 왜!"
"이유야 있지만 제가 그걸 당신에게 말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바민
용병 연맹의 룰은 알고 있죠?"
방긋 웃은 아르토리우스는 바민의 볼을 톡톡 쳤다.
"약자는 강자가 시키는 대로 하는것. 절 이길 수 없다면..."
아르토리우스는 살며시 바민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시키는대로 해."
"히익!?"
늘 부드럽고 태평한 목소리가 아닌 얼음장같은 목소리에 바민은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눈 앞에 있는 세상 물정 모르던 아가씨는 사라지고 거대하고 끔찍한 괴물이 서 있다는 기분을 느낀 그녀는 당황하다가 황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술이 너무 취해서..."
"후후훗. 사람은 늘 실수를 합니다. 이해해요. 그리고 그게 당신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요. 바민. 이제 들어가서 씻고 주무시겠어요?"
"네. 네에..."
아르토리우스를 꼬리내린 개라고 비웃던 바민은 그녀의 말 한마디에 겁먹어 꼬리내린 개 꼴이 되어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티르빙과 라티나는 비웃을 수 조차 없었다.
"저... 연맹장님."
"아. 티르빙.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래요?"
"말씀하십쇼. 어떤 일입니까?"
"모험가 길드에서 운현씨를 불러주시겠어요? 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강제로라도 데려왔으면 싶지만... 아마 지금이라면 그냥 올거에요. 그리고 만약 모험가 길드에서 방해를 한다면 다른 곳이라도 괜찮으니 약속시간을 잡아줘요. 이왕이면 중앙 분수대 근처의 카페... 그래요. 밀란이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티르빙이 밖으로 나가자 라티나는 우물쭈물 하다가 그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르토리우스님."
"네?"
"저기... 선거의 결과가..."
"아. 그거요."
빙긋 웃은 아르토리우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선거따위 이제 와서 별 의미가 없어졌거든요."
"예? 하지만 그것은..."
라티나가 당혹스러워 하며 말하려 하자 그녀는 그녀의 말을 끊은 후 담담히 말했다.
"제가, 저희가 해줘야 할 일을 대신, 그리고 더욱 잘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마셔! 마셔!"
길드 회관에서 떠들썩하게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운현은 쉽게 웃을 수 없었다. 어째서 아르토리우스가 조작을 해서라도 패배를 하려고 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싶어 현자의 시간이 걸린 상태에서는 답을 도출할 수 있을까 싶어 혼자 자위까지 해보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은 없었다.
"운현. 왜 그래?"
파티가 시작되고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뚱한 얼굴로 있는 운현이 걱정된 필레는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쓰게 웃었다.
"아니. 별 일 아니야."
필레는 자신이 하이딩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상아 역시 자신이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자신의 비장의 무기를 아직은 공개하고 싶지 않았던 운현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하자 필레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뭔가 숨기는게 있구나."
"그럴리가."
"내 눈 똑바로 보면서 말해봐."
"없어."
진짜로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하자 필레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영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그녀가 몸을 휙 돌리자 운현은 애써 웃으며 그녀의 목을 휘감아 안았다.
"자자. 마시자고. 기쁜 날 마셔야지 뭘 하겠어! 자! 풍악을 울려라!"
"이리오너라."
운현이 본격적으로 파티에 끼어 술을 마시려는 찰나 길드의 문이 열렸다. 그것에 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문을 연 사람을 보고 흠칫 놀랬다.
"아니 당신이 여긴 또 왜!?"
"또 깽판치러 왔냐!?"
모험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기를 들려 하자 큰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모험가 길드의 간부진들은 모험가들을 말렸다.
"무슨 일인가요. 티르빙."
티르빙의 라이벌이자 숙적이라 할 수 있는 필레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은 저번과 다르게 상아 뿐만 아니라 길드의 간부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었다. 아르토리우스가 와도 걱정되지 않을 상황인데 티르빙 혼자따위 겁날 게 없었던 필레가 묻자 티르빙은 그녀의 말은 무시한 후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아. 저기 있군. 이봐. 운현."
"저요?"
티르빙이 자길 왜 찾는 것일까? 운현은 그녀가 자신을 찾자 그녀에게 다가갔다.
"운현."
"아니. 여기서 뭘 어쩌지는 않겠지."
"연맹장님께서 널 찾는다."
'...마침 잘 됐군.'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런 짓을 한 것인지 운현도 궁금하기 그지 없었다. 혹시 자기 엿먹이려고. 아니면 그냥 고생 좀 해봐라 라는 생각으로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손에 든 맥주잔을 근처의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지금요?"
"음."
"그럼 가시지요."
"운현! 혼자 가려고!?"
"위험하다. 같이 가지."
상아와 필레, 그리고 다른 간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운현은 그녀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같이 가는 것이 좋을까?
'물어 볼 내용을 생각하면 그건 현명한 방법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아르토리우스가 부르는 거니 안전장치는 하고 가는게 좋지 않을까?'
"아무 힘도 없는 남자에게 해꼬지를 할 일은 없으니 걱정 마시지."
모험가 길드의 간부들이 나서려 하자 티르빙은 그녀들을 향해 비웃음을 던졌다. 그 비웃음에 발끈한 칼리아스가 무기를 들려 할 때 제니스는 손을 들어 올린 후 물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게 어떻겠어? 아르토리우스에게 전해. 용병 연맹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자고. 솔직히 말하자면 운현을 그냥 보내기에는 우리가 좀 두렵거든.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에게 꽤나 관심이 있는 것 같지만 우리 길드장과 귀여운 막둥이도 그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제가 받은 명령은 운현을 데려오라. 입니다. 그리고 운현. 당신도 아르토리우스님을 만나고 싶은 것 아닙니까?"
"쟤가 왜 만나고 싶겠어!?"
남의 속도 모르고 상아가 떠들자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티르빙씨. 제가 새가슴이라 솔직히 아르토리우스님을 만나뵙는 것이 좀 저어되는군요. 물론 아르토리우스님을 만나뵙고 싶기는 하지만 저희 길드의 간부진들의 의견도 그러하니 절충하여 제니스씨의 의견을 따르는게 어떻겠습니까?"
"흐음..."
아르토리우스의 명령도 정 안되면 약속만 잡고 오라는 정도였다. 그정도라면 자신의 임무는 완수한 셈이기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운현에게 말했다.
"한시간 후, 분수대 광장의 카페 밀란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티르빙이 나가자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다가 온 상아는 술기운때문에 달아오른 얼굴로 그의 팔을 잡았다.
"야야! 가지마! 그냥 여기서 술이나 먹자. 아주 오늘 그 건방진 계집애 제대로 엿먹여보자고!"
"그래! 그 재수없는 인간이 한 서너시간 정도 기다리게 하자."
'이 인간들이 자기가 당하는 거 아니라고 막말하네.'
아르토리우스에게 밉보였다가 큰일 나는 건 자기인데 속 편히 말하는 길드의 간부진들을 보며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운현이야 조금 자고 나왔지만 간부진들과 모험가들은 선거가 끝나고 돌아온 이후부터 퍼 마신 탓인지 꽤나 취한 상태였다.
"그럼 저와 제니스씨가 따라가면 되겠죠?"
"어? 나도 갈래."
"넌 여기 있어. 그렇게 취해가지고 가긴 어딜 가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비틀거리며 상아가 일어나자 운현은 그녀에게 핀잔을 준 후 만반의 준비를 위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게 있으면 세방은 막겠지.'
상아가 준 보호막 스크롤을 확인한 후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투표용지 하나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준비를 마치고 그가 내려오자 필레와 제니스는 벌써 무장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갈까?"
"네. 좀 여유있게 나가서 매복의 여부를 파악하는게 나을 것 같네요."
그 능구렁이 같은 아르토리우스가 길드의 간부도 아닌, 하다못해 길드원도 아닌 운현을 만나자고 연맹의 간부까지 보낸 것을 보면 뭔가 속셈이 있는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필레가 최대한 주의를 하자는 의미로 그렇게 말하자 펠리시아는 필레의 손에 작은 스크롤을 올려주었다.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터트려요. 신호마법이니까 우리가 바로 달려갈게요. 자자. 파티는 운현이 돌아오면 계속하고 숙취 해소제 먹을까요~?"
"엑... 그 맛없는걸?"
"난 거절할래..."
상아와 칼리아스, 에리스, 그 외의 길드원들은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지만 펠리시아는 싱글거리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다른 간부들은?"
아까 선거때 처음 보는 간부들이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운현이 묻자 필레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아. 던전에 다시 들어가셨어. 이번 선거 때문에 다들 나오신 거였거든. 하던 일은 마져 하셔야지."
"하아. 다들 힘드시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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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이 한시간 후 중앙 분수대 옆의 카페 밀란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아르토리우스는 나와 있는 상태였다. 갑옷도, 드레스도 아닌 평범한 여인의 일상복을 입고 앉아서 기다리던 그녀는 운현과 제니스, 필레가 안으로 들어오자 가볍게 손을 들어 흔들었다.
"여기에요~ 운현씨~"
마치 데이트 상대를 기다리는 것 처럼 그녀가 반기자 필레는 인상을 팍 구겼다. 그런 그녀를 향해 쓴웃음을 지은 제니스는 필레의 팔을 잡아 그녀가 화를 내려는 것을 막았다.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자."
"어... 음. 너희들은 좀 떨어져 있어줬으면 하는데."
"뭐? 무슨 생각으로!? 아르토리우스가 널 어떻게 하고자 하면..."
"아. 뭐 어떻게든 좀 막아낼 수 있으니까 말야."
"흐음... 혹시 길드를 배신하는 그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제니스의 질문에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 왜 사기를 쳤는데 그 사기의 결과가 피스나의 승리냐는 것 뿐이었다.
"그렇다면 조금 떨어져 있어주지. 위기시에는 바로 나서겠어."
제니스가 필레를 데리고 입구 근처로 가 앉자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그가 걸어오자 아르토리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운현에게 다가갔다.
"안아봐도 되나요?"
"아니 저희가 그럴 사이도 아니고."
"치. 치사하네요."
입술을 삐쭉 내민 그녀는 자리에 앉은 후 메뉴판을 들었다.
"여기 홍차는 무척 맛있답니다. 쿠키와 케이크도 그렇고. 어때요?"
"전 홍차요."
"그럼 저도 홍차. 케이크는 몽블랑과 치즈케이크면 괜찮죠?"
"네..."
아르토리우스가 주문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차와 케이크가 나왔다. 자신의 앞에 몽블랑을 가져다 놓은 그녀가 포크로 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고 부르르 몸을 떨자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물었다.
"꽤나 동요가 없으시네요. 패배를 하셨는데..."
"뭐, 예상했던 결과니까요."
운현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만 당신이 움직였으면 충분히 당신이 시장이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나요?"
"물론 그렇죠. 하지만..."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것은 피스나씨가 당선되는 것이었잖아요? 그럼 된 것 아닌가요?"
"이해할 수 없어요."
"뭐가요?"
아르토리우스는 빙긋 웃은 후 운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의 그 시선에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이게 뭔지 아세요?"
"그건... 투표용지군요. 제가 조작한."
용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린 후 답했다. 그녀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탁자를 톡톡 친 후 말했다.
"이게 왜 제 손에 있을까요?"
"당신도 뭔가 투표함에 수를 썼군요? 아하하핫! 이거 참. 우리 마음이 통한 것 같네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에요. 당신이 한 방법은 정말 대담했습니다. 시청 직원을 포섭해서 그녀와 동조해 투표용지 전체를 바꿔버리는 것. 당신이 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선거의 결과를 바꿀 수 있었을텐데 왜 되지 않은 겁니까?"
"그 답변은 아까 했잖아요. 당신이 원했으니까."
"저 좋아하세요?"
"좋아하냐 싫어하냐 물어본다면 지금의 당신은 별로..."
"........."
정말 사람 열받게 하는 답변이다. 제대로 된 답변은 하지도 않으며 사람의 속을 벅벅 긁는 그녀의 태도에 운현은 크게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맨정신으로 그녀와 이야기를 해봤자 나올만한 것은 없었다. 운현이 현자의 시간을 위해 화장실로 향하자 아르토리우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 세계에 남자의 수가 워낙 적다보니 화장실은 남녀 공용으로 쓰이게 되어 있었다. 결국 그녀와 같이 화장실에 들어가게 된 운현은 칸막이로 이루어져 있는 화장실의 칸에 들어간 후 짧게 숨을 내쉬었다.
'떠올라라!'
눈을 감자 떠오르는 자신의 동료들, 그리고 자신이 안았던 여인들. 그녀들의 아름다운 나신과 그 좋았던 쾌감을 떠올린 운현이 남성을 크게 세웠을 때 화장실의 문이 박살나며 열렸다.
"어머~ 이런 곳에서 빳빳하게 세우고 계시면 어떡해요~"
"우왓!?"
"후후후... 아까부터 안절부절 못하시더니 이것 때문이었나요? 절 보고서? 기뻐라~"
아르토리우스는 박살난 문고리를 그대로 둔 후 운현에게 다가갔다. 무섭도록 아름다운 아르토리우스가 가까이 다가오자 운현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사방이 막힌 터라 멀리 도망갈 수 없었다.
"으읍!?"
"쪼옥... 핥짝... 제가 편하게 해드릴게요~"
아르토리우스는 가볍게 웃은 후 그의 양물을 잡고 부드럽게 흔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길이 능숙하게 양물을 흝는 것에 운현은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윽...!"
"하핫! 귀여워..."
운현이 자신의 손길에 느끼는 것을 보며 즐기던 그녀는 손안에 있는 그의 남성이 크게 꿈틀거리고 진한 정액을 토해내자 자신의 손에 잔뜩 뭍어 있는 하얀 정액을 보았다.
"이제 조금 시원해지셨나요?"
[패시브 스킬 :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냉철한 이성 상태가 되었습니다.]
[지력이 100 상승합니다.]
"네. 고맙습니다."
의도한 방법은 아니지만 어쨌든 냉철한 이성 상태가 되었다. 운현은 자신의 남성을 바지 안으로 다시 넣었고 아르토리우스는 정액으로 더럽혀진 자신의 손을 씻은 후 다시 카페로 돌아갔다.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은 운현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기를 치셨다면 이유가 있겠지요. 단지 제가 원했기 때문에 굳이 그런 수고를 하셨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이유가 뭡니까?"
"당신이 원했기 때문이라니까요."
"제가 원한다면 지금 당신에게 자살하라고 해도 하실건가요?"
"그게 필요한가요? 그렇다면 하지요."
홍차를 한모금 마신 후 담담히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침묵했다.
'진짜 밑도 끝도 없군.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럼 한가지 묻겠습니다. 왜 제가 원한다고 당신이 그것을 따르려는 겁니까? 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제 목적 때문이라고 해두죠."
"그 목적을 들을 수 있을까요?"
운현의 말에 아르토리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물론이에요."
"......"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라고 해둘게요. 그 이상은 말해봤자 좋을게 없으니 말하고 싶지는 않군요."
또다시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다. 운현은 인상을 쓴 후 홍차를 마시며 물었다.
"지금 장난하십니까? 정말 제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면 미리 말씀을 해주셨어야 할 것 아닙니까. 제가 피스나씨가 당선되게 하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이런 식으로 일처리를 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저에게 의문을 품지 않았을 것이고 저를 경계하느라 제가 아무리 부르고, 또 찾아가도 피하거나 대화를 회피했겠죠. 당신은 저를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일이 아니었다면 제가 불렀을 때 당신이 순순히 나왔을 건가요?"
그녀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안그래도 아르토리우스를 꺼림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이렇게 불러봤자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이 만남을 회피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한 고생은 오히려 당신에게 많은 것을 주지 않았나요? 생각해봐요. 당신이 이 던전 도시에서 관련된 사람은 모험가 길드의 몇몇과 대장장이 힐더크 외에는 별로 없었잖아요? 하지만 이번 선거운동을 통해서 당신은 대장장이들 뿐만 아니라 제작자 연합의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어요. 그 뿐만 아니라 모험가 길드에서도 당신을 인정하는 이들이 많아졌죠. 거기에... 뭐 상인 조합에서 무언가를 얻은 것 같기도 하지만."
그녀의 말에 운현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신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는 아르토리우스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차분히 말했다.
"당신은 저의 적입니까?"
"둘도 없는 아군입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검이라고 보시면 될거에요."
이것만큼은 거짓이 아닌 듯 아르토리우스는 늘 짓는 태평한 웃음을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운명을 바꾼다는게 무슨 의미인가요?"
"나비효과라는 이야기를 아시나요?"
"그건..."
"제가 알던 어떤 분께서 말씀해주셨지요. 나비 한마리의 날개짓이 다른 나라의 거대한 폭풍을 만든다. 그것과 같아요. 제가 여기서 말실수를 한번 함으로써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지요. 그러니 자세한 것은 더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모두 예정대로 되어가고 있어요. 당신은 많은 것을 얻었고 또 저와 만나게 되어 저라는 강력한 아군을 얻었지요."
아르토리우스의 말에 운현은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에게 나쁠 것은 한가지도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의 입지는 높아졌고 많은 이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선거 기간동안 고생을 하게 되었지만 그 고생의 대가는 충분히 받았다. 그럼 된 것이 아닌가? 라고 납득을 하고 넘어가기에는 상당히 찝찝하지만 그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저리 나와버리니 운현으로서는 더 이상 뭔가 할 수 없었다.
"좋아요. 그럼 그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당신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으니 그 길을 제시해 주실 수 있겠죠? 설마 그것도 나비효과 때문에 안된다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의 질문에 아르토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정도는 허용 범위 내입니다. 당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은 간단합니다. 당신의 주변 사람들을 믿고, 그들에게 의지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
"강해지셔야 합니다.
"강해지라는 것은... 어느정도로?"
운현의 질문에 아르토리우스는 빙긋 웃은 후 말했다.
"최소한 저 이상으로."
"...그게 최소한이라구요?"
"네."
"허..."
끝이 보이질 않는다. 운현이 떨떠름하게 말하자 아르토리우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번 시장선거로 당신은 힐더크 뿐만 아니라 많은 대장장이들, 그리고 제작자들의 호감을 얻었어요. 그것으로 그들이 가진 비전의 장비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죠. 거기에 많은 모험가들이 당신이 노력한 모습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 던전에서 위기시에 많은 이들은 당신을 도우려고 할겁니다. 또한 모험가 길드의 간부들과도 친해져 만약 필요한 재료가 있다면 간단히 부탁하는 것만으로도 얻어낼 수 있을 것이고 이제 시장이 될 피스나의 은인이 되었으니 그녀가 만들 수 있는 무기들, 재료만 구하면 이 세상에 단 한자루만 있는 광검마저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해지지 못하는게 더 힘든 일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아르토리우스의 말에 운현은 입을 다물었다. 좋게 생각한다면 자신에게 나쁠 일은 단 한가지도 없었다. 물론 그 뒷맛이 무척이나 찝찝하긴 하지만 말이다.
"절 의심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라는 것은 진심이니까요. 원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옷을 벗고 당신의 양물을 핥을 수 있답니다. 해드릴까요?"
"어. 거기까지는... 음. 그럼 마지막으로 여쭤볼게요."
"얼마든지요."
"당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운명이니 어쩌니 말하는 것을 보니 단순한 용병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저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에게 휘둘리는 것은 딱 질색입니다. 이용당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납득할 정도의 대답을 해주지 않으신다면 전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
운현의 질문에 처음으로 아르토리우스가 입을 다물었다. 무척이나 곤란해하는 그녀의 표정에 운현이 희미하게 웃었을 때 그녀는 결국 크게 한숨을 토해낸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것만큼은 아직 말씀드릴 수 없어요."
"왜죠?"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요."
"그 때라는 것이 뭡니까?"
"죄송해요. 하지만... 저 역시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그 목적은 당신과 동일한 목적이 될거에요. 아니, 아마 당신이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 제 목적이 있겠지만. 아무튼 그것만큼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럼 이야기는 끝이군요. 저는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이런 만남은 없도록 하지요."
본의 아니게 휘둘리기는 했지만 많은 이득을 얻었다.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운현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싸고 닦지 않은 듯한 그 더러운 기분을 지우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르토리우스는 다급하게 외쳤다.
"300!"
".....?"
"레벨을 300까지만 올려주세요. 그럼 말씀드릴게요."
큰 결심을 한 듯 그녀는 꽉 깨물어 하얗게 되어버린 입술로 말했다.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는 듯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운현을 바라보았고 운현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당신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글쎄요. 당신의 행동은 예측 불가능이라서... 제 도움 없이도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겠죠."
"제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건가요?"
"알긴 하지만... 그것도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아르토리우스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겠다 싶은 운현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300이라고 했죠?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패시브 스킬 : 현자의 시간이 종료됩니다.]
[냉철한 이성 상태가 해제됩니다.]
[지력이 99 감소합니다.]
말을 마친 그가 멀어지자 아르토리우스는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짜 당신과 이야기하는 건 매번 긴장되네요.."
154====================
Run
어차피 레벨을 올리고 강해지는 것은 아르토리우스의 말이 아니라도 해야 할 일이었다.
'300이라... 뭐,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군.'
구덩이 함정으로 폭렙이 가능했고 기름함정 - 폭을 이용해 강한 몬스터를 쉽게 잡을 수 있게 된 이상 300까지 레벨을 올리는 일이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에 그녀의 말대로 이번 선거운동을 하며 많은 이들의 호감을 산 덕분에 장비나 재료를 구하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정말 강해지지 못하는게 더 어렵겠군.'
마음만 먹으면 바짝 레벨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이니 나쁠 것은 없다. 운현은 자신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라도 빨리 레벨업을 해야겠다 결심했다.
"무슨 얘기 한거야?"
"별 얘기 안했어. 용병 연맹의 용병이 되어달라고 하더라고."
"뭐!? 그, 그래서?"
"안한다고 했지. 난 천성이 모험가이고..."
걱정하며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필레의 허리에 손을 둘러 당긴 운현은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비볐다.
"꺄악!?"
"친한 사람들이 다 모험간데 굳이 거길 갈 필요는 없지."
"우왓! 우왓!"
운현의 갑작스러운 스킨쉽에 필레는 당황하며 버둥거렸다. 이런 필레의 모습에 운현은 상당히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
'역시 내 머리 위에 앉아 있으려는 여자는 피곤하구만...'
냉철한 이성 상태에서도 거의 밀리지 않는 말빨을 보여주며 대화 내내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던 아르토리우스보다 스킨쉽 한번이 이렇게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당황하는 필레가 차라리 더 나았다.
"저, 정말 뭐하는거야!?"
"에? 싫어?"
"그, 그, 그런건 아닌데... 으씨! 몰라! 바보야!"
운현이 실망한 얼굴을 짓자 그의 모습에 당황한 필레는 작게 말한 후 그의 입가에 웃음이 걸리자 자기가 놀림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의 가슴을 토닥거렸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제니스는 피식 웃은 후 말했다.
"거 하는 꼴만 보면 아무리 봐도 둘이 사귀는 것 같은데. 아니야?"
"아닌데요."
"으... 맞아요. 저희는 그냥 친구..."
"그렇게 친구하다가 여보되고 그러는거지."
"......"
"글쎄.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렇다고 치고라니..."
제니스의 말에 필레는 멍하니 히죽거리다가 그의 말에 시무룩해졌다. 그런 필레를 내버려 둔 채 운현은 제니스에게 물었다.
"오래 사셨다고 하니 좀 여쭤볼게 있는데요. 혹시 주변에 좋은 남자 있나요?"
"좋은 남자? 있지."
"솔로?"
"나이가 좀 많은데? 상아와 동갑인 엘프, 그리고..."
"리스트 좀 작성해주실래요?"
"왜?"
제니스가 궁금해하며 묻자 운현은 시청쪽을 바라보았다.
"아... 소개 시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윈드한테?"
"응. 야야. 사실 내가 이건 안말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거 정조의 위기가 있어서 사람들의 도움을 좀 받아야겠다."
모험가 길드의 수장인 상아를 위해서 이렇게 몸이 부숴져라 일을 했고, 또 이번 일로 길드 내에서 자신의 인망을 높인만큼 이정도 부탁은 괜찮겠다 싶은 운현은 제니스와 필레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한참 듣던 제니스가 키득거리고 필레가 분노로 얼굴을 붉게 물들이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그러니까 열과 성을 다해서 괜찮은 남자 좀 찾아봐줘. 길드에는 남자 없어?"
"으... 난 없는데. 벌써 몇번이나 해줬다고."
이미 윈드에게 길드원 중에 괜찮았던 남자를 소개 시켜 줬던 경험이 있는 필레가 머리를 감싸쥐고 신음하자 그녀를 보며 제니스는 빙긋 웃었다.
"남자 하나 때문에 우정이 파괴되겠군. 후후후. 뭐 나도 아는 남자들을 불러보지. 아무리 그 아가씨가 많이 차인다고 하지만 내 비장의 컬렉션들을 데려다 놓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휴우... 다행이다."
이걸로 윈드와 윈디아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생겼다. 자신이 해준다고 했던 것은 남자를 소개시켜주는 것이지 잘 되게 해주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소개시켜주고 잘 되면 좋은 것이고 안되면 마는 것으로 끝낼 생각을 한 운현은 아르토리우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확실히 나쁜 일은 없군...'
길드의 선거를 도우며 많은 이득을 얻었을 것이다. 라는 것은 확실히 사실이었다. 만약 선거를 돕지 않아 다른 간부들과 대면대면한 상황이었다면, 그리고 제니스와 이렇게 알게되지 못했다면 윈드에게 소개시켜 줄 남자를 찾기 위해 또 다른 개고생을 했어야 했으니 말이다.
"피스나씨에게도 요청해볼게!"
"아아. 그것도 좋겠군. 이번에 제작자 연합은 운현에게 큰 빚을 진 셈이니까 말야. 길드의 간부로서도 운현이 발렌타인 가문으로 가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을 것 같아. 운현 정도라면 레벨만 맞으면 당장이라도 길드의 간부로 끌어들이고 싶은데... 엄청난 레벨업 속도로 슈퍼 루키라 불리는 인재를 엄한 곳에 내어줄 수는 없지. 거기에 상아와 필레가 난리를 칠 테니까."
"고마워요. 제니스씨."
"별 말씀을. 우리 모험가 길드의 은인이나 다름없는데 뭐."
운현의 말에 제니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운현씨!!"
시장 선거가 끝나고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가 돌아왔다. 그간 별다른 일 없이 혼자 방에 있거나 상아, 필레와 놀러다니던 운현은 그녀들이 돌아와 자신에게 달려오자 그들을 끌어안아 반겨주었다.
"이야~ 몇일 못 본 사이에 많이 바뀌어졌는데? 좋은 방향으로 말야."
"헤헤헤~"
일단 그녀들의 복장이 많이 바뀌어졌다. 헤스티아는 몸매를 가리는 로브 대신 붉은색 천으로 만들어진 타이트한 짧은 상의, 무릎 위로 살짝 올라가는 치마와 갈색의 피부를 더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하얀 스타킹과 검은색 부츠로 복장이 바뀌었고 미야는 평소의 갑옷 대신 날렵한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는, 상아나 다른 숙련된 모험가들이 입는 백색의 슈츠를 입고 있었다.
바제트 역시 복장이 바뀌긴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갑옷 대신 연녹색의 촘촘한 사슬 갑옷을 위에 걸치고 하의는 조금만 움직여도 팬티가 노출 될 정도로 짧고 찰싹 달라붙는 녹색의 미니스커트를 입었으며 긴 부츠를 신었다.
"굿! 어디서 이런 복장을..."
"마법학교에서 좋은 아이템들을 팔더라고. 이번 기회에 장비를 싹 바꿨지. 후후후... 어때?"
"잘 어울려."
미야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운현은 그녀의 하복부를 가리키며 엄지손가락을 척 세웠다. 하의의 계곡 부근에는 지퍼가 있어서 그것만 열면 바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가 기분 좋게 말하자 미야는 얼굴을 붉힌 후 외쳤다.
"이, 이건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네 맘 잘 안다. 그리고 바제트. 야. 너 그거 입고 싸우면 맨날 팬티보이겠는데? 괜찮겠냐?"
"보는 사람이래봐야 너뿐인데 뭐. 상관없어. 그리고 이 치마가 얼마나 좋은 치만데. 입은 것만으로도 마력이 회복된다고."
"호오... 나도 갈 걸 그랬나?"
운현이 자신들의 아이템들을 보며 감탄하자 헤스티아는 방긋 웃은 후 운현의 팔을 끌어안았다.
"저희 없는 동안 별 일 없었죠? 이야기 듣기로는 피스나씨가 시장에 당선되었다고 하던데~ 역시 운현씨네요!"
"네 활약이 컸다면서?"
"이야~ 훌륭하다니까~"
세 여인들의 칭찬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무척이나 잘 된 일이다.
'운명 어쩌고만 빼면 말이지...'
아르토리우스와의 대화에서 남은 것은 찝찝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에 운현은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자. 장비도 바꿨고... 이제 슬슬 다음 단계로 진출해야겠지? 맡겨 둔 장비 받으러 가자. 짐만 풀고 내려와."
"응!"
여인들이 올라가서 짐만 풀고 바로 내려오자 그녀들과 함께 운현은 사무소로 향했다. 사무소에 있던 길드원은 운현이 다가오자 웃으며 그를 반겼다.
"어서오세요. 운현씨. 무슨 일이세요?
"맡겨 둔 장비를 찾으려구요. 다 됐나요?"
"아아. 잠깐만요~ 여기요."
사무소 밑에 보관해두고 있었던 커다란 가방을 들어 올린 그녀는 그것을 운현에게 건네주었다. 숏소드와 로브, 팔찌와 반지가 들어 있는 가방을 건넨 그녀는 운현의 숏소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소드 브레이커라는 무기에요. 2계층에는 갑각류 몬스터가 꽤 있는데 그들의 집게나 가시 공격을 이것으로 막기 좋아요. 거기에 관통 속성의 인챈트가 걸려 있어서 찌르기 데미지도 좋답니다. 한번 쥐어보시겠어요?"
"으음..."
손에 찰싹 달라붙는 가죽의 감촉이 마음에 든다. 그것을 오른손으로 잡아 몇번 휘둘러 본 운현은 단검 수준의 가벼움과 좀 더 긴 리치. 그리고 검날 사이에 나 있는 톱니들을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좀 익숙해 질 필요가 있겠네요."
"후후후... 운현씨 정도면 금방 익숙해지실 거에요. 그리고 이 로브는 헤스티아씨의 것이에요. 마력 회복과 최대 마력량이 증가하고 암속성 공격에 대한 방어력이 증가하는 로브입니다. 2계층의 중, 후반부는 언데드 몬스터가 많으니까 이걸 입으시는게 좋아요."
"언데드요?"
"네. 좀비나 구울같은... 아. 운현씨는 잘 모르시나요?"
"이름은 압니다만..."
"그럼 2계층에 진입하시고 나면 길드에 들러주세요. 2계층의 지도와 함께 몬스터들의 서식지, 그리고 그 몬스터들에 대해서 말씀드릴테니까요."
상냥하게 설명해 준 길드원은 주변을 두리번 거린 후 그에게 윙크했다.
"운현씨니까 이렇게 가르쳐드리는거에요~"
"하하... 이거 감사합니다."
"뭘요~ 그리고 이건 미야씨와 바제트씨 거에요. 2계층부터는 1계층보다 몬스터의 공격력이 강하답니다. 위기시에는 디펜스 업을 발동하셔서 몬스터와 싸워주세요. 바제트씨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2계층의 초반에는 갑각류 몬스터가 많은데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화살이 안먹힌답니다. 이 반지를 착용하시면 관통 데미지가 들어가니까 이걸로 단단한 껍질을 부수시길 빌게요."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요. 후후. 아. 그리고 계층주와 싸우기 위한 파티를 찾고 계셨죠? 마침 잘됐네요. 오늘 오후에 계층주와 전투를 하기로 한 파티들이 있어요. 운현씨의 파티까지 낀다면 총원 22명이겠네요. 지금의 계층주는 트롤이니까 상대도 좋구요. 지금 신청하시겠어요?"
"어쩔래?"
"음. 지금 하자. 또 파티가 모일때까지 기다리기도 힘들고 트롤이면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하니까 말야."
"네. 저도 그게 나을 것 같아요. 낮에 잠깐 새로운 장비들을 시험할 겸 던전에 갔다가 오후에 바로 계층주를 잡으러 가면 될 것 같아요."
"바제트. 너는?"
유일하게 팔짱을 끼고 생각을 하던 바제트는 운현의 질문에 길드원에게 물었다.
"전체 파티의 구성은 어떻게 되지?"
"음... 운현씨 파티까지 낀다면 탱커가 둘, 보조 탱커가 둘. 힐러가 바제트씨까지 포함하면 셋, 그리고 도적은 운현씨와 윌로네씨로 둘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딜러네요."
'윌로네라면...'
자신의 구덩이 함정을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꾸며 많은 코어와 사체를 날로 먹었던 여자 도둑이 아닌가. 운현은 그녀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좀 협박을 해서 뜯어낼 건 좀 뜯어내봐야겠군.'
"그정도라면야. 좋아."
파티의 구성이 나쁘다면 거절하려 했던 바제트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길드원은 방긋 웃었다.
"그럼 오후 세시까지 다음 계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마법문으로 가주시거나 두시까지 이곳으로 와주시면 됩니다. 그 앞이 신전에서 전투를 치루신 후 계층주를 꺾으시면 신전의 마법문이 활성화 될거에요. 그때부터 2계층에 진입이 가능하답니다."
두시까지는 시간이 꽤 있으니 운현 일행은 바로 던전에 들어가 장비의 위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역시 만만한 것이 홉고블린이라고 곧장 고블린 서식지로 향한 그들은 어렵지 않게 홉고블린들을 잡을 수 있었다.
"이야... 데미지가 확 늘어난 것 같은데?"
"레벨 업도 많이 했으니까요. 그리고 바람의 마력석 덕분이기도 하구요."
"이정도라면 진짜 문제 없겠다. 다들 괜찮지?"
"응."
"관통력이 확실히 좋아진 것 같은데? 이거 최고야."
장비를 바꾸길 잘했다 생각하며 바제트는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보았다. 전 같으면 그냥 몸에 깊숙히 박히는 것으로 끝났을 정도의 화살이 아예 관통을 해버리는 것을 보면 이번에 얻은 장비가 확실히 물건은 물건인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슬슬 그만하고 들어가자."
"어? 그렇지만 네 소드 브레이커는 아직 시험을 못해봤잖아."
"아까 고블린의 공격을 몇번 막았잖아. 그정도면 괜찮아."
한손검 숙련이 최대 레벨이라 그런지 소드 브레이커를 쓰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능숙하게 소드 브레이커를 가볍게 흔들어 허리의 검집에 넣은 운현은 단검을 가슴의 고리에 끼운 후 말했다.
"점심 먹고 기다리면 금방 파티 모이겠다. 어서 가자."
여유있게 점심식사를 하며 시간을 때운 그들은 시간이 되자 십여명의 사람들이 사무소 앞으로 모여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자! 오늘 트롤 잡으러 가시는 파티는 어서 오세요!"
모여있는 여인들 중 중갑으로 몸을 감싼 은색 단발 여인은 자신의 방패로 바닥을 쿵쿵 찍으며 외쳤다. 그녀의 외침에 다른 파티까지 모이고 운현들 역시 그쪽으로 향했다.
"에~ 안녕하세요! 저는 마인드 클랜의 파인이라고 합니다. 직업은 성기사구요. 탱커입니다. 예전 클랜을 따라 트롤 공략을 공부하러 그 공략에 참여한 경험이 있습니다. 트롤의 공격법이나 특성을 알고 있으니 제가 지휘를 했으면 합니다만... 괜찮으신가요?"
"파인씨면 괜찮아요."
"좋으실대로 하세요."
"마인드 클랜이라면 괜찮지."
꽤 인망이 있는 탱커인가보다. 그녀가 나서자 몇몇 사람들은 수긍했고 나머지는 일단 지켜보자는 생각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운현. 네가 할 생각은 없어?"
"음... 피곤할 것 같아서. 사실 좀 불안하기도 하고. 나는 공략법 모르면 누굴 이끄는건 피곤해서 말야."
'아는 사람들만 가는 것이라면 모를까 모르는 사람들까지 책임지고 싶지는 않지.'
과거 막공을 운영하다 열받아서 때려친 기억을 떠올린 운현은 괜히 나서고 싶지 않은 생각에 미야의 제안을 거절했다. 길드 사람들의 말을 들어도 트롤이 그리 강한 계층주가 아니라는 말과 함께 저 파인이라는 여자가 실제 공략하는 법을 배웠다고도 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럼 가겠습니다. 모두 힐링포션은 여유롭게 챙기셨나요? 임시이기는 하지만 지금만큼은 저희가 모두 한 팀이라 생각하시고 위기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바로바로 구해주시기 바랍니다. 자자. 자세한 설명은 신전에서 하도록 하지요. 그럼 출발!"
155====================
Run
"당신. 운현이라고 했지? 요새 길드에서 핫한 슈퍼 루키라던데... 반가워. 난 사제 에릴다라고 해."
"응? 아. 반가워."
길드를 도와 용병 연맹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든데다가 단기간에 레벨 100이 된 운현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길드에서 유명했다. 그런 그와 함께 하게 된 것에 즐거워하며 운현에게 다가 온 사제 에릴다는 그의 옆에서 걷고 있는 그의 동료들을 보고 빙긋 웃었다.
"이야~ 부럽구만~ 도적에 남자라니... 전생에 무슨 복을 쌓았길래... 역시 남자가 있으니까 레벨업이 빠른건가? 하. 나도 빨리 레벨을 올려서 클랜 직위를 높여야 남자가 낀 파티에 들어갈텐데."
"무슨 클랜인데?"
"마인드 클랜. 알아?"
"몰라."
"어휴. 마인드 클랜은 총원 80명으로 이루어져 있는 중견급 클랜이야. 클랜장의 레벨은 395의 전사 카루스님이시고. 카루스님은 알지?"
"모, 모르겠는데."
"아는게 뭐야?"
"아니 그렇게 말해도 내가 다른 클랜에 관심을 가지는게 아니라서."
"하아... 혹시 클랜 가입 권유는 받았어? 괜찮다면 너희들 모두 우리 클랜에 들어오는게 어때?"
그녀가 클랜 가입을 권유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주변을 보았다.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고 운현은 그것으로 대답을 끝냈다.
"쩝. 어쩔 수 없구만. 우리 클랜에 들어온다면 레벨업이 굉장히 빨라질텐데."
"클랜 안들어도 레벨업은 빠르더라."
그녀의 말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지금 파티에 익숙해져 연계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괜히 다른 클랜에 들어갔다간 연계를 또 연습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며 그가 거절하자 에릴다는 안타까운 듯 입맛을 다셨다.
"에이. 그럼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이번에 계층주를 잡고 2계층에 올라가면 사냥터가 겹칠 수도 있으니 그때는 잘 부탁할게."
"그래. 우리 위험할때 보면 힐 좀 넣어주라."
"하하하하. 서로 돕자는 거지? 좋아. 맡겨두라고."
운현과 악수를 한 그녀가 같은 클랜원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선두가 발걸음을 멈췄다.
"마미아님. 칼로이님."
일행을 이끌던 파인은 거대한 신전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인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의 인사를 받은 마미아는 신전 위의 단상에 올라간 후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마인드 클랜의 마미아라고 합니다! 이쪽은 칼로이구요. 저희들의 레벨은 210입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제가 여러분이 전투를 하는 것을 지켜 볼 테니 안심하시고 싸워주시기 바랍니다!"
"마미아님이나 칼로이님이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으시는건가요?"
"그래도 괜찮긴 하지만... 저희들이 끼었다간 여러분께서 계층주를 잡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니까요! 저희는 구경만 하다가 비상시에 움직일게요!"
"저렇게 끼어도 괜찮아?";
마미아의 말에 운현은 궁금해하며 다른 파티원에게 물었다. 그의 질문에 그녀는 쓰게 웃었다.
"중견급 이상의 클랜이 좋은 점이 이거지. 하급 클랜원의 성장을 위해 위험 요소에 대한 대비를 해주는 거. 계층주 정도 되면 전투를 하던 도중에 클랜원이 죽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거든. 그것 때문에 만약에 클랜원이 당할 것 같으면 끼어들어서 계층주를 제거해버리는거야. 물론 그렇게 된다면 그 달의 도전은 불가능해지지만... 죽는 것보다야 낫지."
"어? 한번 실패하면 한달 기다려야해?"
"응. 신전에 출입할 수 없게 되어버려."
"오호... 그렇구나."
계층주를 잡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을 못쓰고 있었던 운현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실패하면 한달이나 기다려야한다고...'
그렇게 되어버리면 시간 손해가 장난이 아니다. 여차하면 새롭게 얻은 기술을 써서라도 트롤을 잡아야겠다 생각한 운현은 자기 소개와 트롤에 대한 공략법을 모두 이야기한 마미아가 파티의 진형을 이야기하자 동료들에게 말했다.
"난 신전에 설치되어 있는 함정들을 해제해야 하니까 선두로 갈게. 다들 몸 조심하라고."
"후후. 걱정하지마!"
"운현씨도 몸 조심해요!"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힐해줄게!"
동료들의 인사를 받은 운현은 앞으로 나섰다. 그가 나오자 이번 공략대의 지휘를 밭은 파인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운현씨.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모험가 길드의 슈퍼 루키라죠?"
"아하하... 슈퍼 루키라고 할 정도는..."
"빠르게 레벨업해서 제대로 함정이나 해제할 수 있으려나 몰라..."
먼저 나와 파인과 인사를 한 듯한 윌로네가 투덜거리듯 말하자 운현은 그녀를 향해 히죽 웃었다.
"이야~ 숙련된 도적님이신가요?"
"흥! 윌로네. 너랑은 다르게 차근차근 정석대로 올라 온 진짜 도적이지."
"진짜 도적이라... 뭐 하는 짓을 보니 도적같긴 하던데요?"
"뭐?"
운현은 그녀가 성을 내려 하자 살며시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남의 함정을 자기 함정처럼 사기나 치면서... 진짜 도둑년 아니야?"
"...너. 설마."
"자! 그럼 가볼까요!? 함정 해제는 저희들이 알아서 할테니 서포트 잘 부탁드립니다!"
운현과 윌로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형성되자 파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쪽 벽에 있는거 해제해줘요."
"흥."
운현과 윌로네는 함정탐지와 함정해제로 신전으로 들어가는 함정들을 해제해나갔다. 도적이 둘이라 그런지 빠르게 함정이 해제되는 것에 파인은 기뻐했지만 윌로네는 속이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이봐."
"네?"
"재수없게 존댓말 쓰지 말고... 아까 그 말 뭐야?"
"말 그대론데? 내가 설치한 함정을 자기가 설치한 함정이라고 구라를 치다니. 구라치다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큭... 그게 네 함정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지?"
"증거? 증거는 간단하지. 너 구덩이 함정 팔 수 있어? 가능하면 내가 실수했다는 걸 인정하고 1000골드를 주지. 하지만 아니면 내가 네 소문을 길드에 내도 괜찮지?"
"......"
운현의 자신만만한 말에 윌로네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 저기..."
"뭐야?"
"그 소문... 진짜 낼거야?"
"글쎄? 딱히 나한텐 이득이 없지만."
"그, 그럼 조용히 입 닫고 있어주면 안될까? 응?"
그녀의 간절한 어조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 반응으로 운현은 구덩이 함정이나 기름함정, 가시 줄 함정 같은 특수 함정이 자신만이 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걸 어떻게 써먹을까...'
윌로네의 몸을 위 아래로 흝어 본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뭐. 하는 거 봐서."
"........"
그 이후 둘은 아무런 말 없이 함정을 해제해 나갔다. 그렇게 신전의 지하 1층의 계단에 있는 함정을 마지막으로 모든 함정을 해제하고 공략대가 지하 1층의 넓은 공동 안에 들어섰을 때 파인은 공동의 중앙에 서 있는 거대한 몬스터를 가리켰다.
"이 선을 주의해주세요. 여기까지가 트롤의 인식 범위입니다. 모두 준비가 되셨나요?"
파인과 중갑을 입은 기사, 그리고 미야, 숏소드와 방패를 든 전사가 앞으로 나섰고 그 뒤를 딜러진이 자리잡았다. 그 뒤가 힐러진, 나머지는 운현과 윌로네였다.
"그럼 시작합니다!"
마미아와 칼로이가 후방에 빠져 무기를 들고 지켜보자 파인은 강하게 외치고 탱커들과 함께 달려나갔다.
"쿠어어어어어어어!!!!"
자신의 인식 범위 안에 탱커들이 들어오자 트롤은 포효하며 자신의 커다란 해머를 휘둘렀다. 그 공격을 방패로 막아낸 파인이 지시를 내리자 탱커들은 빠르게 움직이며 트롤을 공격해 나갔다.
"트롤의 주의는 저희가 끌었습니다! 이제 시작해주세요!"
파인의 외침과 함께 딜러진이 달려들었다. 운현은 차분한 눈으로 전투의 진행 양상을 지켜보았다.
'헤에... 여유롭네.'
계층주라고 해서 긴장했지만 파인의 지휘는 꽤 좋았다. 탱커들을 이끌며 트롤의 주의가 딜러진에 가지 않도록 하던 그녀는 탱커들의 체력을 보며 힐러들에게 외쳐 체력이 많이 소모되는 탱커의 체력을 채우는 등, 거의 완벽에 가까운 지휘를 하고 있었다.
'저정도면 난 힘들겠군.'
운현 역시도 파티를 지휘하는 입장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은, 거기에 처음 보는 이들이 낀 상태에서 그들의 스펙을 듣기만 한 정도로 이렇게 잘 지휘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다.
"트롤의 무기가 바뀝니다! 준비하세요!!"
한참 공격당하던 트롤이 크게 맞고 뒤로 나가 떨어지자 파인은 강하게 외쳤다. 그녀의 외침과 함께 트롤은 바닥을 구르다가 해머의 머리 부분을 떼어낸 후 다시 달려들었다.
"욥!"
"받아랏!"
해머에서 창으로 바뀌고 트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쓸데없이 빨라진 트롤의 돌격을 함정을 설치하는 것으로 막아낸 운현과 윌로네에게 파인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고 함정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트롤을 공격했다. 무기가 바뀌며 풀려진 어그로를 다시 자신들에게 끌어모으려는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함정에서 풀려난 트롤이 창을 크게 휘두른 후 훌쩍 뛰었다. 아직 제대로 어그로가 끌리지 않은 상태인지라 딜러진에게 트롤이 공격하려고 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것을 막은 것은 다름아닌 미야였다.
"하아아아아아!!! 기공포!"
미야가 포효하며 도발을 쓰고 그녀의 주먹에 맺혀 있던 기환이 날아가 트롤의 등을 후려쳤다. 공중에서 공격을 맞은 트롤이 제대로 착지를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자 파인은 딜러진을 향해 외쳤다.
"공격 중지!"
그녀의 외침을 받은 딜러들이 공격을 멈췄을 때 파인을 비롯한 탱커들이 달려와 트롤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다시 어그로가 끌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파인은 딜러진들에게 외쳤다.
"다시 시작해주세요!"
또다시 안정적인 딜링이 시작되었다. 운현은 뒤에서 팔짱을 낀 채 그것을 지켜보았고 윌로네는 재미없다는 얼굴로 전투장면을 보다가 늘어지게 하품했다.
"귀족 직업은 이래서 좋네. 함정 몇번만 깔짝대면 되잖아. 안그래?"
"흠... 뭐 그렇긴 한데."
"슬슬 다음 페이즈로 들어갈 것 같은데."
"크어어어어!!"
한참 두드려 맞던 트롤이 분노하며 창을 집어 던졌다. 그 투창의 표적이 된 여 마법사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방어마법을 쓰려 하자 파인은 기다렸다는 듯 스크롤을 찢었다.
"찌직!"
"우웅!"
그녀가 마법 스크롤을 찢자마자 딜러진을 보호하는 보호막이 생성되었다. 그 보호막에 닿은 투창은 그대로 허공에서 방향을 바꿔 트롤에게 날아들었다.
"오!? 저거 뭐야?"
"몰라? 투척 반사 마법 스크롤이잖아. 이야... 저 파인이라는 사람은 마인드 클랜에서 꽤 키워주려는 사람 같은데? 저런 스크롤까지 주고."
"호오..."
자신도 마법 스크롤은 꽤 있지만 저런 마법이 있는 줄은 몰랐다. 운현이 감탄하자 윌로네는 혀를 찬 후 운현을 툭 쳤다.
"도적이라면 좋은 물건을 감정하는 눈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지. 만약 내 비밀을 지켜준다면 물건의 정보와 가치를 감정할 수 있는 감정안 스킬을 가르쳐주지. 어때?"
"그걸 내가 배울 수 있으려나?"
"일주일 정도면 배울 수 있을거야. 이걸로 끝내자고. 응?"
아이템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다면 전투 후 아이템을 처리하는 것에서 꽤나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윌로네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그나저나 당신. 그 함정 진짜 당신꺼 맞아?"
"여기서 보여줄까? 한번 빠져볼래?"
"사양이다. 사양."
윌로네는 쓴웃음을 짓고 다시 전투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전투는 거의 끝나가는 분위기였다. 자신이 던진 투창이 반사되어 복부가 꿰뚤린 것이 큰 타격이었는지 트롤은 휘청거리며 딜러진과 탱커진의 공격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걸로 마지막이다!"
트롤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자 파인은 자신의 방패를 든 후 힘껏 뛰어 그 방패로 트롤의 머리를 후려쳤다. 강력한 힘이 실린 방패의 공격에 트롤이 천천히 허물어지자 파인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외쳤다.
"승리했다!! 트롤을 잡았어! 다음 계층으로 진출이다!!"
"와아아아!!"
"이거 괜히 놀고만 있었던게 미안해지는구만."
"이게 역할이니까. 그럼..."
싱글벙글 웃으며 일행들에게 가려고 걷던 운현은 파인의 뒤로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뭐지? 라고 생각하자마자 그는 기겁하며 외쳤다.
"피해!!!"
"응...? 꺄아아아악!!"
트롤을 잡은 것에 안심하고 있던 파인이 허공을 날아 바닥을 굴렀다. 그것에 미야를 비롯한 다른 탱커진이 후다닥 뒤로 빠졌을 때 운현은 그것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뭐야!? 저거!?"
"저...게 뭔데?"
"이런 젠장!!"
"계층주를 잡았는데 왜!?"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마미아와 칼로이가 경악하며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녀들이 딜러진을 지나쳐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을 때 운현은 미야에게 외쳤다.
"미야아아아!! 뒤로 빠져!"
"뭔데!? 이게 도대체 뭔데!?"
검은 기운으로 감싸져 있는 인영은 마이아와 칼로이의 공격을 양 팔로 가볍게 막은 후 그들을 뿌리친 후 가볍게 자세를 잡았다.
"마인이다!!!"
156====================
Run
"뭐!?"
"마인이라고!?"
"마, 마인이 왜!?"
트롤을 잡았는데 어째서 마인이 나온 것인가. 공략대는 삽시간에 혼란에 빠졌다. 그들을 보며 운현은 윌로네의 멱살을 잡았다.
"정신차려! 빠져나간다!"
"하, 하지만...!? 마인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리가...!"
"도망칠 수 있어! 쟤들이 버텨주는 동안은 튈 수 있어!"
운현은 윌로네를 잡아 통로쪽으로 밀친 후 말했다.
"함정이 재설치 되었을 수도 있으니까 확인해봐! 함정을 해제해!"
"아, 알았어!!"
과거 홉고블린을 잡으려고 동굴에 들어갔다가 다시 들어갔을 때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던 기억을 떠올린 운현은 다급히 윌로네를 계단으로 보냈다. 만약 도망치는 와중에 함정이 작동된다면 도망치는 것 조차 할 수 없었다.
"빌어먹을!"
모두가 혼란에 빠져 있다. 지금 지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저 둘이 어떻게든 마인의 주의를 끌고 있지만 저 둘만으로는 힘겨워보였다. 마인의 주먹과 발길질 한번이 움직일 때마다 그 공격을 막는 저들의 몸이 붕 뜨는 것을 본 운현은 다급히 힐러진에게 다가가 외쳤다.
"바제트! 그리고 힐러들! 저 둘에게 힐 줘!!"
"아, 알았어!"
운현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힐러들이 그들에게 힐을 주기 시작하자 운현은 목걸이를 잡고 외쳤다.
"상아!!!"
"......."
상아를 소환할 수 있는 목걸이를 사용해 이 위기를 극복하려 한 운현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상아가 오지 않는 것에 당황했다.
"꺄아아악!"
"빌어먹을! 상아! 상아!!"
"뭐하는거야!?"
"씨발!!"
아무리 외쳐봐도 상아는 오지 않았다. 마인의 공격에 맞은 마미아가 나가떨어지고 쓰러져 꿈틀거리자 운현은 이를 갈며 외쳤다.
"젠장! 답 없다! 탱커진! 마인의 공격을 최대한 막으며 시간을 끌어! 딜러진 중 홀딩기 있는 사람들 다 나와서 저 마인을 막아!"
운현은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깨우며 지휘를 시작했다.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린다. 마인이라니. 왜 마인이 지금 나온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해소할 틈 따위는 없었다.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모두가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미야! 도발은 절대 쓰지마! 혼자 저 공격을 감당할 수 없을거야!"
"아, 알아!!"
용병 연맹의 간부들조차 버티지 못한 것이 마인의 공격이다. 고작 100 레벨에 불과한 미야가 집중 공격을 당했다간 그녀가 죽을 지도 몰랐기에 운현은 다급히 딜러진에게 말했다.
"마미아에게 힐링포션 먹여! 쟤 빨리 깨워야해! 힐러들은 칼로이에게 힐 집중하고!"
"아, 알았어!"
지금 믿을 것은 마미아와 칼로이 뿐이다. 그 중 하나가 나가떨어져버렸으니 그 공백을 100레벨의 탱커들로 메꿔야 한다. 운현은 자신의 방패를 잡고 미야에게 힘껏 던졌다.
"미야! 최대한 방어로 나가!"
"고마워!"
"확장 마법이 걸렸어! 3계층 몬스터의 공격까지 막을 수 있으니까 그걸로 어떻게든 버텨봐!"
운현의 외침에 미야는 바로 방패에 마력을 넣었다. 문짝 크기로 커진 방패를 들어 겨우겨우 마인의 공격을 막아내던 미야를 보며 안심한 운현은 마미아가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달려가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저거 뭐야!?"
"나, 나도 몰라!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단 말야!"
"마인을 상대해 본 경험은!?"
"이게 처음..."
"빌어먹을! 이중에 마인을 본 사람도 없어!?"
운현은 마미아의 멱살을 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운현은 빠득 이를 갈며 외쳤다.
"이런 씨...! 당신 빨리 가서 마인을 막아!"
"알았어!"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가 달려가 칼로이와 탱커들의 위치에 합세했다. 간신히 마인과 상대할 수 있는 정도가 되자 운현은 가벼운 차림의 검사에게 외쳤다.
"계단으로 가봐! 함정 해제가 얼마나 됐는지 확인하고 와!"
"알았어요!"
그녀가 달려가고 나자 운현은 마인이 있는 곳 바로 뒤에 구덩이 함정을 만들어내고 마인의 공격을 받아내는 이들에게 외쳤다.
"뒤로 좀 더 밀어!"
"하아아압!"
미야가 들고 있는 방패 뒤로 온 마미아와 칼로이가 방패의 양 끝을 잡고 힘껏 밀었다. 방패를 후려치던 마인이 세명의 힘에 밀려 뒤로 몇걸음 물러났을 때 운현은 바로 함정을 발동시켰다.
"푸쉿!"
"........"
갑자기 생겨난 구덩이로 마인이 빠졌다. 그것을 본 운현은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확인할 생각 말고 뒤로 빠져!!"
방패를 축소시킨 미야가 뒤로 빠지자 운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계단을 바라보았을 때 계단으로 올라가 윌로네의 진행 상황을 알아온 그녀는 절망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직 함정은 아직 반도 해제하지 못했다고 해요!"
"아아아!! 젠장! 누가 나 대신 지휘 좀 해줘!!"
최악의 경우가 발생했다. 그때처럼 함정이 다시 생겨나버린 것에 운현은 절망하며 외쳤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냥 하이딩 걸고 튈까...!?'
"운현씨! 이제 어떡해요!?"
"아아! 빌어먹으으으을!!! 저 새끼 올라오면 바로 홀딩기 걸어!!"
헤스티아의 외침에 운현은 자신의 사나운 운세를 저주하며 강하게 외쳤다. 그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덩이에서 마인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 순간 홀딩기를 걸 수 있는 이들이 연속적으로 홀딩을 걸었고 마인의 움직임이 멈춰지자 운현은 미야에게 외쳤다.
"나도 이제 모르겠다! 미야! 방패를 확장시키고 저놈에게 겨눠!"
운현은 주머니에서 기름함정 - 폭을 꺼내어 미야가 시킨대로 하자 바로 기름 함정 - 폭을 방패에 설치했다.
"시동어 화염! 외쳐! 화염!"
"화염!!"
"콰아아아아아아앙!!!'
"꺄아아악!?"
폭음과 함께 미야가 뒤로 밀려나갔고 모두는 침묵했다.
"지금 손놓고 있을때야!? 빨리 공격해!!"
마인이 검을 뽑기 전에 잡아야한다. 기름 함정-폭에 맞은 마인의 몸이 반쯤 날아간 것을 보며 운현이 외치자 딜러들은 마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 아야야야... 운현! 이건...!"
"사담은 나중.... 미야!!!"
비틀거리던 마인이 방패를 걷어찼다. 아직 자세를 제대로 잡지 못한 미야가 그 공격에 뒤로 밀려나 쓰러졌을때 검은 기운은 다시 마인의 몸을 재구축했다.
"빌어먹을!"
재구축된 마인의 손에 검은 기운의 검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운현이 이를 갈았을 때 마인은 뒤로 훌쩍뛴 후 검을 바닥에 박아 넣으며 포효했다.
"우오오오오오오오!!!"
공동이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에 운현의 옆에 있던 딜러들이 하나 둘씩 쓰러졌다. 운현 역시도 이 포효에 하마터면 기절할 뻔 했지만 겨우 정신을 잡을 수 있었다.
"운현씨!! 안돼!!"
"운현!!"
"큭...!"
'젠장! 보호막 스크롤을 찢을 시간이...!"
포효를 터트린 마인이 훌쩍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 목표가 운현이란 것을 알게 된 헤스티아와 바제트는 빠르게 뛰어 운현의 앞을 막았다.
"인탱글!"
"바인딩!"
"네 상대는 나다! 나에게 덤벼라!!
둘의 홀딩기, 그리고 미야의 도발이 마인에게 쏘아졌지만 마인은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그것을 모두 뿌리친 후 그들 앞에 섰다. 마인이 검을 들어올리자 헤스티아와 바제트는 망설임 없이 운현의 앞에서 그를 지키려하였다.
"........"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셋을 한번에 죽일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누군가 바인딩이라도 걸었는지 마인은 검을 당긴 상태 그대로 순간 딱딱히 굳었고 운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인의 심장 부근을 향해 소드브레이커를 힘껏 찔러 넣었다.
"푹!"
"........."
아무런 방해 없이 소드 브레이커는 마인의 가슴을 꿰뚫었다. 당겨져 있는 마인의 팔이 천천히 내려오고 마인의 몸이 기화하기 시작하자 운현은 소드 브레이커에서 손을 떼었다.
"허억... 헉..."
"운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자신의 앞에 나타나 있는 상아의 얼굴은 자신이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괜찮아!? 마력 방해가 심해서 올 수 없었어! 무슨 일이야!? 응!? 도대체 무슨...?"
상아가 거의 울 기세로 묻는 것과 사람들의 경악한 표정을 힐끔 본 운현은 방금 전 죽을 뻔 했던 긴장감이 풀리자 서서히 의식을 잃었다.
"흐어이고!"
눈을 뜬 운현은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꽤나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꿈이었나."
"운현씨! 정신이 들었어요!?"
"운현! 괜찮아!?"
"다친데는 없지!?"
운현은 옆에 있던 동료들이 다급히 묻자 고개를 갸웃거린 후 피식 웃었다.
"난 멀쩡해. 야. 근데 너네는 제정신이냐? 거기서 왜 끼어들어?"
운현은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마인의 공격을 몸으로 막기 위해 달려 든 헤스티아와 바제트. 그 둘이 자신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자 운현은 그녀들을 향해 퉁명스레 물었다.
"너희들이 막아봤자 그 마인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미야. 내가 도발쓰지 말라고 했지."
"그게...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어요."
"나도."
"네가 죽는 걸 보느니 차라리 내가 공격에 집중당하는게 낫지."
세 여인들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고 운현은 그것에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멍하니 자신들을 바라보자 헤스티아는 운현의 손을 꼭 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운현씨를 지킬거에요."
"말했잖아. 너의 힘이 되어주고 싶다고."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수호해주겠어."
그녀들의 말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된 여인들이 화를 내려 하자 운현은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도?"
"물론."
"하하... 이거 과분하구만..."
그들의 과한 사랑에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를 향해 헤스티아는 부드럽게 웃은 후 말했다.
"운현씨가 어떤 상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들은 절대 운현씨를 배신하지 않을거에요. 지금은 힘들더라도 언젠가는 저에.. 아니, 저희들에게 마음을 열어주세요. 네?"
"...알았어. 하하하... 좀 쉬고 싶다. 나가줄래?"
운현이 쓰게 웃으며 말하자 그녀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하아... 이거 진짜 과분해서 미치겠군."
자신은 전투 중에 하이딩을 걸고 혼자 도망칠까도 생각했었다. 상황이 급박한 탓에 그것을 실행하지 못했지만 기회가 되었으면 그랬을지도 몰랐다.
그런 자신에게 이정도의 호의라니. 운현은 자신의 쓰레기같음에 이를 감과 동시에 그녀들에게 모든 것을 오픈하고 그들을 사랑할 자신을 가지지 못했다.
"이제 나도 노력을 해봐야하나..."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것을 어찌해야 하는건가. 운현은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를 떠올리며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긴 해야지..."
그들이라면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라면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자기암시하듯 속으로 되뇌이던 운현은 문이 열리자 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슨 소리야?"
"어? 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온 상아는 운현의 앞으로 걸어간 후 그에게 휙 작은 구슬을 던졌다.
"이게 뭐야?"
"네가 잡은 마인의 코어."
"...근데 말야. 좀 궁금한게 내가 마인을 잡은게 맞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막타는 네가 쳤다던데?"
"......."
"아무튼 살아남아서 다행이다. 그리고... 그 기술 있잖아. 방패로..."
"응."
그러고보니 그걸 사람들 앞에서 써버렸다. 가뜩이나 슈퍼 루키라 불리며 관심을 받는데 더 관심을 받게 생겼다. 그것을 운현이 걱정하자 상아는 쓰게 웃으며 운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건 이 누나가 어떻게든 무마시켰다. 너는 차기 모험가 길드원이라서 길드 차원에서 너에게 스크롤을 하나 제공했다고 했어. 스승님의 마법 스크롤이라 그정도 위력이라고 해놨으니 그게 네가 쓸 수 있는 기술이라는 것은 아무도 모를거야."
"으음... 그럼 다행이군."
"그보다. 상황 설명을 들어보니 트롤을 잡고 마인이 나타난 거라면서? 진짜야?"
"응. 야. 이런 경우도 있냐?"
길드의 말대로 처음은 트롤이었다. 그런데 트롤을 잡자마자 마인이 나타나다니. 이래서야 무서워서 계층 이동을 하겠는가.
"아니. 진짜 이런 경험은 처음이야. 단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군."
상아 역시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일단 길드 차원에서 신전을 수색하고 조사해보기로 했어. 그 점은 걱정하지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거고 만약을 대비해서 당분간은 각 계층주를 만날 때는 길드의 간부 두명과 대형 클랜의 모험가들이 대기하기로 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네. 후우..."
운현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마인의 코어를 만지작거렸다. 그것을 잠시 바라 본 상아는 피식 웃은 후 차분히 말했다.
"그거 아홉개만 더 모으면 너도 광검 얻을 수 있겠네."
"어? 진짜?"
"응. 광검을 만들려면 마인의 코어 열개가 필요하거든. 그리고 유일한 제작자인 피스나에게 인정을 받아야해. 넌 이미 피스나에게 인정받았으니까 코어만 모아오면 되겠다."
"헤에... 그럼 모아주라."
"모아줄 수는 있지만 네 마력으로는 광검을 십분도 제대로 못쓸텐데?"
상아의 말에 운현은 인상을 팍 구겼다.
"어서 레벨 올려. 최소한 300정도는 되어야 전투 한번 하는 동안 광검을 쓸 수 있을테니까."
빙긋 웃은 상아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밖으로 나갔고 운현은 상아의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레벨 300이 뭔데 다들 300을 얘기하는거야?"
157====================
Run
[이름 : 한운현]
[Lv : 114]
[직업 : 도적]
[명성 : 1142]
[칭호 : ---]
[스테이터스]
HP : 9100
MP : 14000
힘 : 140
지력 : 217
체력 : 134
손재주 : 120
몸놀림 : 140
행운 : 110
보너스 스탯 : 101
"하. 이 넘치는 보너스 스탯을 어디다 쓸고. 아니 그보다 이거 이런 스탯으로 괜찮으려나."
운현은 스탯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레벨업당 3씩 상승하는 보너스 스탯은 그렇다고 치고 직업과 스탯의 괴리감이 장난이 아니다.
'마인이 센 놈은 센 놈이었나보군.'
하나 잡은 것만으로 레벨이 14나 상승한 것에 운현은 팔짱을 낀 채 스탯창을 보며 생각했다. 지력이 너무 높다. 현자의 시간 효과로 인해 영구적으로 지력이 1씩 상승하는 효과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쓸데없이 지력에 보너스 스탯의 투자가 많았다.
'슬슬 다른 곳에도 분배를 해야겠네."
손재주와 몸놀림, 힘에 30씩. 나머지는 비상시를 대비해서 쟁여둔다 생각한 운현이 스탯창을 닫았을 때 상아가 말을 걸었다.
"준비 됐어?"
"응. 이제부터 2계층이지?"
당분간은 각 계층을 넘어가는 신전에서 길드인원이 대기하며 조사를 하기로 했었다. 오늘의 책임자는 상아였는지 그녀는 신전에서 2계층으로 향하는 운현 일행을 만났고 그들을 배웅해주기 위해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1계층과 2계층의 몬스터는 차원이 다르니까 조심하도록 해."
"걱정 말라고."
히죽 웃은 운현은 상아에게 손을 흔들어준 후 일행들과 함께 마법문으로 들어갔다. 던전에 처음 들어올때와 비슷한 묘한 감각과 함께 주변이 바뀌는 것을 느낀 운현은 그 감각이 사라지자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가 2계층?"
"우와..."
"분위기가 안좋네요..."
1계층의 일반적인 평원과 다르게 2계층은 음산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던전에서 나가려는 듯 마법문으로 향하는 모험가들은 뻘쭘히 서 있는 운현 일행을 보자마자 웃으며 인사를 했고 미야와 헤스티아가 그들에게 인사를 하는 동안 운현은 길드에서 얻은 지도를 지도창에 등록한 후 바제트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가면 2계층 초반의 몬스터인 사이드 크랩을 만날 수 있겠네. 사이드 크랩은 거대한 게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집게발과 다리의 가시를 조심하라고 하는구만."
"구덩이 함정이 먹힐까?"
"그건 의문인데...결국 해보는 수 밖에 없다는 거네. 그럼 가자. 어떻게든 되겠지. 사이드 크랩이 얼마나 큰지도 모르겠고."
운현이 웃으며 말하자 여인들은 그의 말에 동의했다. 마법 문에서 삼십여분을 걸어 도착한 곳은 웅덩이가 많은 습지였다. 그 찝찝한 분위기에 미야가 인상을 썼을 때 운현은 몇몇 파티가 거대한 게를 상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 저게 사이드 크랩인가보다. 우와. 진짜 큰데?"
"그래도 저정도면 괜찮겠는데? 구덩이 함정 안에 다 들어가겠다."
"그럼 일단 하던대로 해볼까? 미야. 헤스티아. 준비 됐지?"
"응."
"네!"
"몰아올게. 준비하고 있어."
바제트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습지를 걸으며 사이드 크랩을 찾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네마리의 사이드크랩 무리와 마주치고 그들의 주의를 끌어 운현이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가볍게 바제트가 넘긴 어그로를 받은 미야가 사이드 크랩과 상대하는 동안 운현은 구덩이 함정을 설치했고 미야는 늘 하던대로 그들의 어그로를 유지한 채 운현의 뒤쪽으로 뛰어 이동했다.
"푸슛!"
"크로로로!!'
"콰직!"
구덩이 함정이 발동되며 옆으로 걷던 사이드 크랩들이 안으로 빠졌다. 살짝 고개만 틀어 내부를 본 운현은 사이드 크랩이 죽창에 꽂혀 꿈틀꿈틀 거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하하! 면적이 넓어서 더 좋구만! 불태우자!"
평소에 하던 방식대로 구덩이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른 운현은 사이드 크랩이 타오르며 나는 냄새에 코를 벌름거렸다.
"...어째 게 구이 냄새가 나는데. 게 먹고 싶다."
"운현씨..."
"몬스터 죽는 냄새를 보고 어떻게 그런..."
"뭐!? 그,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운현 의견에 동의. 나중에 우리 고향의 강에서 잡을 수 있는 게를 대접해주고 싶은데? 사이드 크랩보다 더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맛은... 사이드 크랩을 먹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더 맛있을거야."
헤스티아와 바제트가 질린 듯 말하자 운현은 당황하며 외쳤고 미야는 운현의 어깨를 톡톡 친 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나마 미야가 같은 편이 되어주자 운현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읏."
"치, 치사하게..."
"자자. 아무튼 이걸로 사이드 크랩을 쉽게 잡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런 방식으로 계속 사냥하자. 레벨 오른 사람 없어?"
"저 레벨 올랐어요."
"나도."
"난 아닌데. 운현. 너 레벨 몇이야?"
"114. 아. 그러고보니 너 마인에게 한방 먹였었지. 넌 레벨 몇이야?"
운현의 함정이기는 했지만 실제 발동시킨 사람은 미야이다보니 미야도 레벨이 꽤나 올랐을 것이라 생각한 운현이 묻자 그녀는 차분히 답했다.
"112."
"우와."
"저희는 아직 104인데. 역시 마인이 강하긴 강한가봐요."
"할 수만 있다면 마인만 잡으면서 레벨업 하고 싶다."
자신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공격을 했음에도 이정도의 레벨업이라니. 운현이 입맛을 다시자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다.
"절대!"
"안돼!"
"죽는다고!"
"아니 나도 할 생각은 없어. 이대로도 꽤나 레벨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이대로 가자고. 평균 레벨이 125쯤이 되면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언데드 말이죠?"
"응. 언데드를 상대해 본 경험 있는 사람."
운현 역시 언데드를 만나 본 적은 없었다. 좀비, 구울 같은 사체들이 죽음을 회피하고 발생하는 정도로 밖에 모르는 운현이 떨떠름히 묻자 바제트와 헤스티아가 손을 들었다.
"저요. 마법학교에 있을 때 언데드 토벌을 간 적이 있어요. 그때는 그냥 뒤에만 있었는데..."
"나는 직접 상대해봤지. 비록 좀비 한마리이기는 하지만 말야."
"상대하는 방법은?"
"첫번째. 신성력이 담겨 있는 무기로 공격. 아니면 성 속성의 스킬. 공격이든 힐링이든 하다 못해 신성속성의 부여든 상관없어."
"그리고 두번째는 화 속성의 공격이에요. 불로 태우는 것으로 그들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지요."
"일반 공격은?"
"데미지를 입힐 수는 있지만 큰 효과를 본다고는... 타격계열이 아니라면 데미지를 입히기 힘들거에요."
"그럼 난 일단 무리군. 타격계열이니까 미야는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는 건가."
운현이 묻자 바제트와 헤스티아는 서로를 본 후 쓴웃음을 지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하던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요? 구덩이 함정에 빠지면 좀비나 스켈레톤의 경우는 쉽게 그 위로 올라오기 힘들거에요. 그때 기름을 붓고 불지르는 것으로도 꽤 데미지를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그렇지만도 않아. 구덩이 함정이 주는 데미지는 그 안의 죽창덕분이라고. 단순하게 묶어두는 것이라면 구덩이 함정보다는 일반 함정이 낫지."
"으음... 그럼 생각해봐야겠네요."
헤스티아의 말에 운현은 고민했다. 지금까지 폭업을 가능하게 해줬던 구덩이 함정을 쓰지 못하게 된다면 다른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가 고민하는 동안 바제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후 외쳤다.
"지금 고민하지 말고 일단 전투부터 하자고! 레벨도 올랐으니까 새로운 재료로 새로운 함정을 만들어보는게 어때!?"
"그게 좋겠네."
사이드 크랩의 사체를 통해 새로운 재료를 얻을 수 있고 그것으로 새로운 함정 카드를 만들면 될 것이다. 운현은 바제트의 말에 동의하며 모두에게 말했다.
"그럼 평균 레벨이 오를때까지 오늘은 바짝 달리자!"
"오, 오오!"
사흘간 계속 같은 곳에서 전투를 해 결국 근처의 사이드크랩을 거의 박멸하고 나서야 운현의 파티는 전투를 마칠 수 있었다. 다른 파티와는 다르게 전투를 함으로써 흥분도에 의한 패널티를 받지 않은 덕분에 어렵지 않게 전투를 할수 있었던 그들은 파티의 평균 레벨이 125가 되자 길드로 돌아왔다.
"그럼 하루 쉬고 다시 가자. 난 새로운 함정을 연구해볼게."
"으... 힘들어. 그래도 같이 가자."
"혼자 가지마아..."
"혼자 가려구요? 괜찮겠어요?"
꾸벅꾸벅 졸고 있는 미야와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바제트. 그리고 피곤해하는 헤스티아가 물었지만 운현은 손을 들어올리는 것만으로 사양하고 길드 밖으로 나가 힐더크의 대장간에 들어갔다.
"어서와!"
자신을 반겨주는 힐더크에게 웃으며 운현은 쓱 손을 내밀었다.
"함정용 재료로 다른 거 있어?"
"음... 글쎄? 강철 실 말고는 마땅한게 없는데."
"다른 도적들은 어떤걸 구매해?"
"강철 실이 대부분이지. 그리고 고급 도적같은 경우는 클랜에 가입되어 있어서 클랜 소속의 대장장이나 다른 제작자들에게 연구비를 지불하고 특제 함정재료를 받는 것 같더라고."
"혹시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까?"
운현의 질문에 힐더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해. 특별한 재료를 이용해 좋은 재료를 만들어내는 거니까. 제작자들이 기술에 민감한 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시장 선거로 제작자들의 기술에 대한 집착과 욕구를 알게 된 운현은 힐더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강철 실만 잔뜩 얻어 온 운현은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성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니 당신 왜 또."
"워워. 우리 흥분 말자. 좀 구하고 싶은게 있어서 온거니까 말야."
운현이 성당으로 오자 성당 앞에서 빗자루질을 하던 레나는 인상을 왕창 구겼다. 그녀가 내쫓으려 하자 운현은 금화 주머니를 흔들며 말했다.
"언데드들에게 잘 통하는 성물같은거 없어? 간단한 것도 괜찮은데."
"...하아. 그런 것이라면 공물로 사용되는 성구를 사는게 나을거에요."
"아. 그때 그건가."
전에 필레가 공물을 바쳤던 것을 떠올린 운현은 레나가 가리킨 곳으로 걸어갔다. 성당 옆의 작은 건물로 향한 그는 안에 있는 사제복 여인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경을 쓴 검은 머리의 사제는 운현의 인사에 묘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다가 곧 마주 웃으며 인사했다.
"파르티님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대사제 카야라고 합니다. 남자분께서 이곳에 오시는 일은 드문데... 무슨 일이십니까?"
레나와 달리 배척하는 대신 부드럽게 자신을 반겨주는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공물을 잔뜩 구매해야할지도 모르는데 괜히 밉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에... 공물들 중에 신성력이 담긴 물건이 있나 싶어서요. 대량으로 구매할지도 모르는데 가격 괜찬은 것들이 있나요?"
"대량으로요? 얼마나요?"
"백에서 이백개 정도?"
만약 생각대로 신성력을 이용한 함정을 만들 수 있다면 구덩이 함정에 이은 폭렙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운현은 기대감을 품고 물었고 카야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어떨까요? 성자의 눈물이라는 공물입니다."
"오오... 작네요."
"작지만 굉장한 신성력이 담겨 있답니다. 다른 도시에서는 이것으로 언데드들을 쫓는다고도 하더군요. 좀비 정도라면 성자의 눈물로 정화시킬 수 있답니다."
"그래요?"
실제로 언데드들을 정화시킬때 쓰이는 것이라니. 운현은 그것에 만족하며 물었다.
"얼마에요?"
"하나에 5골드입니다만..."
"으음... 좀 깎을 수 없을까요?"
운현의 말에 카야는 미안하단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 오십골드를 내고 성자의 눈물 열개를 구매한 운현은 밖으로 나왔다.
"볼일 다 봤으면 이제 가시죠?"
"가긴 갈건데. 너 왜 그때 그렇게 나갔냐?"
"...그게요."
운현의 말에 레나는 주변을 두리번 거린 후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던전 도시에... 그리고 파르티 교단 내부에 다난교의 집행자가 있는 것 같아요. 롤랑님이 이 던전 도시로 오는 것은 본단과 이 성당의 몇몇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어요. 전 그분이 돌아가신게 그저 몬스터의 습격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만약 당신 말대로 다난교의 소행이라면..."
레나는 우울한 얼굴로 말한 후 한숨을 내쉬었다.
"교단 내에서도 피바람이 불겠지요..."
158====================
Run
********************
"그거 큰일이네."
솔직히 운현의 입장에선 다난이든 뭐든 관심이 없었다. 종교라는게 원래 다들 치고받고 싸워가며 쟁취하는 것 아닌가. 자신에게 피해만 안준다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운현이 영혼없이 말하자 레나는 그를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제가 당신에게 이런 얘기를 해봤자..."
"그래. 힘내렴. 화이팅!"
어차피 레나가 자신을 적대하는 이상 굳이 레나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었다. 운현은 그녀의 한숨 섞인 푸념에 대충 답해주고 길드로 돌아갔다.
"일단 이게 되나 안되나 모르겠네."
방으로 들어 온 운현은 가지고 있는 재료들을 늘어놓아보았다. 기름, 늑대 발톱, 늑대 이빨, 흰 거미의 실타래, 강철 실, 고블린의 손, 오크의 어금니, 성자의 눈물, 흙 그리고 마인의 코어. 그것들을 조용히 바라보던 운현은 기름통과 성자의 눈물. 그리고 강철 실을 손에 들어보았다.
"성유라는 것도 있으니까..."
예전 TV에서 교황이 성스러운 기름을 사람들의 머리에 조금씩 뿌려주어 축복을 내리는 장면을 보았던 운현은 기름과 성자의 눈물, 그리고 강철 실을 손에 잡고 재료 합성을 시전해보았다.
"오오! 이건 됐네!"
재료가 없어지고 한장의 카드가 손에 들어오자 운현은 크게 기뻐했다. 처음부터 성공이라니. 꽤나 운이 좋다 생각한 그는 그 카드의 글씨를 읽어보았다.
"성유 함정이라..."
기름 함정 - 폭과 비슷하지만 검은 기름이었던 기름 함정 - 폭의 그림과 달리 성유 함정은 기름의 색이 투명했다. 그것을 차분히 바라보던 운현은 그것을 주머니에 넣은 후 다른 재료로도 실험을 해보았다.
"성지...?"
여러가지 조합을 하던 도중 흙과 성자의 눈물. 강철 실을 조합했을때 운현은 새로운 함정카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다른 함정카드들과 다르게 함정의 모양이 아닌 그저 빛이 나는 땅의 모습이 그려진 것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뭐 이정돈가."
가진 재료로 이리저리 다른 조합을 해보았지만 정작 만들어진 카드는 성지 카드와 성유 함정 카드뿐이었다.
'빨리 실험해보고 싶은데...'
하지만 동료들은 녹초가 되었고 2계층을 혼자 들어가긴 힘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특수한 함정을 쓰려면 아무나 데려갈 수는 없었던 운현은 회관을 한번 둘러보고 히죽 웃었다.
"필레! 나의 소중한 친구야!"
"...이렇게 나오는거 보니까 또 나한테 뭐 시켜먹으려는거구나?"
식사를 마치고 차를 홀짝이고 있는 필레에게 다가간 운현은 그녀를 친근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불렀다. 그의 말에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고 운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친구야. 내가 좀 특수한 함정을 만들었거든? 그걸 실험해보고 싶은데 2계층에 혼자 가긴 무서워서 말이지. 괜찮다면 같이 가주지 않으련?"
"...맨입으로?"
"원하는게 뭐야?"
"으음~ 글쎄~ 뭘 해달라고 할까?"
장난스럽게 웃는 그녀를 향해 운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피식 웃었다.
"저번에 그 식당에서 저녁 사고 근사한곳에서 와인까지 사지."
"거기에 케이크와 커피까지 추가."
"콜."
'하루는 필레를 위해 투자를 해야겠군.'
필레를 꼬셔 그녀와 함께 2계층으로 들어간 운현은 사이드 크랩이 있는 곳이 아닌 언데드들이 출몰하는 구역으로 이동했다. 느린 걸음으로 걷는 좀비들을 본 운현의 표정이 푸르죽죽해지자 필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으... 이 냄샌 도대체..."
시체 썩는 냄새에 코가 마비 될 지경이다. 운현은 코를 잡고 인상을 팍 구겼다. 그런 그를 향해 필레는 작게 키득거렸다.
"그래도 냄새때문에만 힘들어서 다행이네. 좀비같은 언데드들을 처음 보고 기겁하는 모험가도 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일단 다른 함정들부터 시험해볼까."
운현은 가시 줄 함정을 설치해 좀비 한마리를 잡아보았다. 하지만 가시 줄 함정에는 예상했던 것처럼 좀비는 데미지를 받지 않는 듯 했다.
함정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던 좀비는 가시 줄 함정이 끊어지자 운현에게 달려들었고 그것을 필레는 가볍게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해치운 후 물었다.
"이게 끝이야?"
"아니. 잠깐만. 몇개만 더 해보자."
'기름 함정 - 폭은 쓸 필요 없겠지.'
현재 파티의 주력 딜이라고 할 수 있는 구덩이 함정이 얼마나 데미지를 줄 수 있는지가 궁금했던 운현은 좀비가 움직이는 길목에 구덩이 함정을 설치했다.
"푸슛!"
구덩이 함정이 발동됨과 동시에 그 안으로 좀비 두마리가 빠졌다. 하지만 좀비들은 큰 피해를 받지 않았는지 복부와 어깨에 구멍이 뚤린 채 엉금엉금 기어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으음... 역시 무린가."
"헤에... 저 함정은 도대체 뭐야? 신기한 함정들을..."
"자. 이번엔 진짜 실험이다!"
좀비들이 자신들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것을 본 운현은 성유 함정을 좀비들과 자신 사이의 루트에 설치했다. 좀비가 함정의 범위에 걸리자 운현은 함정을 발동시켰고 그 순간 폭발하듯 맑은 기름이 터져나갔다.
"갸아아아아악!"
"치이이이이이익!"
"윽!! 냄새!!"
성유가 좀비들의 몸을 뒤덮자 좀비들의 몸에서 지독한 냄새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성유에 고통스러워하던 좀비의 몸이 비닥을 구르는 동안 좀비의 비명소리를 들었는지 스켈레톤들이 운현을 향해 뛰어왔다.
"흥."
스켈레톤이 달려오는 것을 본 필레는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고 허리의 검을 뽑아 크게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은색의 반월형 검기가 쏘아져 스켈레톤들을 박살내버렸다. 단 일격에 다섯의 스켈레톤을 박살내버린 필레의 검격에 놀라던 운현은 그녀가 자신을 보며 빙긋 웃자 휙 고개를 돌렸다.
"헤헤~ 어때?"
"너도 강하구나. 하아..."
"난 길드에서 그렇게 강한 축에 드는게 아니라니까."
"으음... 아무튼 좀비들은..."
성유에 고통스러워하던 좀비들이 몸을 일으켜서 다가오자 운현은 방패를 들어 올렸다.
"이제 잡아야해?"
"아니. 잠깐만."
성유도 기름이니 불에 반응하지 않을까 싶었던 운현은 성유에 젖어 여전히 연기와 악취를 내뿜는 좀비가 방패에 달라붙자 시동어를 외쳤다.
"화염!"
"화륵!"
"갸아아아아!"
"불이 안붙네."
좀비의 몸에 불이 붙지 않는 것에 운현은 아쉬워했다. 어쩌면 화염이 약해서 그럴지도 몰랐다. 이 부분은 나중에 헤스티아와 있을 때 해보자 생각한 운현이 뒤로 물러나자 필레는 좀비들을 순식간에 쓰러트렸다.
"이제 끝났어?"
"아니. 하나만 더 해보자."
이제는 성지를 시험해봐야 한다. 운현이 카드를 들자 필레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카드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그 함정들은 도대체 뭐야? 내가 아는 함정들이랑은 다른데..."
"그런게 있어. 나중에 설명해줄게."
"쳇. 잠깐만 기다려. 다른 몬스터 데리고 올게."
필레는 빠르게 뛰어 좀비 하나와 스켈레톤 둘을 데리고 왔다. 그들이 필레를 공격하는 것을 본 운현은 그녀와 자신 사이에 성지를 설치한 후 외쳤다.
"필레! 내 쪽으로 뛰어와!"
"응!"
운현의 외침을 받은 필레가 훌쩍 뛰어 그의 옆으로 이동했다. 아직 그녀에게 어그로가 남아 있던 좀비와 스켈레톤들이 성지의 범위 안에 오자 운현은 성지를 발동시켰다.
"우우우우우웅!!"
낮은 진동음과 함께 성지의 범위로 설정되어 있던 대지가 환한 빛을 내었다. 그 빛에 휩쓸린 좀비와 스켈레톤들은 그것에 한참동안 고통스러워하다가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리고 코어 세개만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어!? 사체는!? 이만큼이나 잡았는데 레벨업도 안돼!? 이런 씨!? 이게 뭐야!?"
"이 반응은 사제들의 기술인 턴 언데드를 썼을때 반응인데... 도대체 무슨 함정인데 이런 반응이 나와?"
운현이 재가 되어 사라져버린 좀비와 스켈레톤을 보며 당황하자 필레는 더 당황했다. 둘이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또다시 스켈레톤들이 달려들었고 필레는 그들을 빠르게 잡은 후 말했다.
"여기서 얘기하긴 좀 그러니까 일단 길드 회관으로 돌아가자."
"어, 응."
필레와 돌아가며 운현은 이번에 만든 함정에 대해서 생각했다.
'성유 함정은 그냥 가시 줄 함정의 성속성 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군. 으... 성지. 이거 데미지는 좋은데... 사체는 못버네.'
2계층의 몬스터인 만큼 사체의 가격이 상당할 것이다. 그것을 그냥 날려버리고 코어만 받는 셈이 되어버린 것에 운현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자. 이제 설명해줘."
"으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여기까지 온 이상 함정 카드에 대해서는 오픈을 하는게 낫겠다 싶은 운현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중에 쉽게 도움을 받으려면 지금 얘기하는게 낫겠군.'
어차피 레벨업을 하며 새로운 함정의 제작은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이번 처럼 특정한 속성을 가진 몬스터를 잡기 위해 함정을 만들 경우 그 함정이 어떤 효과를 가지는지 매번 몸으로 때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레벨 높은 필레나 상아에게 도움을 받는게 낫겠다 싶은 운현은 자신을 향해 시선을 보내는 필레에게 담담히 말했다.
"그게 말이지. 난 다른 사람들이랑 다른 스킬을 가지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말이지."
가방에서 늑대 이빨과 늑대 발톱, 그리고 흰거미의 실타래를 꺼낸 운현은 그것을 손에 든 후 재료 합성을 시전했다. 그와 동시에 운현의 손에 있던 재료가 사라지고 카드가 한장 만들어지자 필레는 당황하며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특정 재료들을 합성해서 이런 카드를 만들 수 있어. 이 카드는 함정을 설치하는데 쓰이고."
"...처음 보는 스킬인데."
"응. 나도 이런 식으로 함정 카드를 만드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운현의 말에 필레는 잠시 생각하다가 서운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걸 왜 지금 말해주는거야?"
"음... 미안."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솔직히 사과했다. 운현이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는 것은 예상했지만 그게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되니 가슴이 아팠던 필레는 물기 젖은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언제쯤 다 말해줄거야?"
"얼마 걸리지 않을거야."
아르토리우스의 말대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믿고, 그들을 사랑한다. 거기에 이번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자신이 남들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으음... 뭐랄까. 내가 예전에 살던 곳에서 말이지. 정말 믿었던 친구와 정말 좋아했던 여자에게 배신을 당했거든. 참...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정말 등신 호구가 따로 없었지. 아무튼 그때 이후로 사람을 잘 못믿게 되었어. 난 그들에게 모든 것을 오픈했지만 그들은 중요한 것을 숨기고 있었지. 결국 난 그들에게 이용만 당했고 많은 것을 잃었어."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게 진짜일 줄이야. 필레는 무덤덤한 얼굴로 남 일 말하듯 말하는 그를 보며 아무 말도 못했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들을 못믿겠더라고. 아. 필레 너나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 상아. 그외에 다른 사람들이 날 정말 생각해주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그리고 나도 이제부터는 노력해보려고."
"...그래."
운현의 말에 필레는 입안이 씁쓸하다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얼마나 큰 배신을 당했길래 그러는 것일까? 그녀는 운현이 미안해하는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해?"
"응."
"어떻게 하면 그게 치료될 수 있을까?"
"글쎄? 병원도 다녀보고 의사와 심리 상담도 해봤는데 잘 안되더라고. 결국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다 날 떠났고 나 역시도 근처의 사람들에게 계산적이 될 수 밖에 없었어.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더라고."
"어..."
필레는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싶었다. 자신은 그런 일을 겪어보지 않았으니 그의 마음을 안다고 말할 수 조차 없었다.
"미안."
"응? 왜?"
"아, 아니. 내가 괜한 걸 물어봐서 네 마음에 상처를..."
"아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언젠가는 말해야 할 일이었는걸 뭐."
운현은 필레가 우울한 얼굴로 사과하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됐을때, 너희들만큼 나를 생각해줬던 이들이 있었더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겠지. 많은 것을 잃으며 난 부모님과 가족들의 신뢰도 잃어버렸어. 친구들도 떠났고 세상은 날 쓰레기라고 욕했지. 그렇게 혼자 있다보니 그렇게 된 것 뿐이지."
"........"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날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걸.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줘. 내가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아마 난 너를, 그리고 너희들을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될거야."
"어? 사, 사랑?"
"응."
운현은 필레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날 이만큼 생각해주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라고. 물론..."
"......"
"너희가 날 배신하면 난 진짜..."
"절대 그런 일 없을거야!"
자리에서 일어난 필레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널 배신할 일은 없을거야."
"내가 그 친구에게 뒷통수 맞기 전날 그런 이야기를 들었었지."
"......"
"하하하! 네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 그러니까 흥분하지마."
운현의 말에 필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네가 납득을 하고 받아들이는 날..."
"음."
"네 모든 것을 가르쳐줄거야?"
"응."
운현의 말에 필레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운현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스스로 걸어잠근 마음의 빗장을 풀 시간이.
'그런 것이라면...'
그녀는 쓴웃음을 짓고 있는 운현을 보며 피식 웃었다.
'기다려줘야지.'
159====================
Run
"그럼 이제 뭐할거야?"
"글쎄. 딱히 할 일은 없는데."
동료들은 아직 자고 있었다. 깨우기도 미안하니 혼자 돌아다닐 생각을 하고 있었던 운현이 어깨를 으쓱이자 필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데이트 하자."
"어? 지금? 시간 괜찮아?"
"응. 나 오늘 휴일이거든."
"흐음... 뭐 나쁘지 않으려나.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까. 아. 그 제니스씨는 어딨어?"
"제니스씨는 왜?"
"윈드씨 소개 시켜 줄 남자 어떻게 됐나 물어보게."
필레와 같이 다니면 항상 출몰하는 윈드였으니 이번에도 나오지 않으리라는 장담은 할 수 없었다. 운현은 만약에 대비하자는 생각에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운현. 몸은 괜찮나?"
필레와 함께 나온 제니스는 운현을 보고 빙긋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그가 던전에서 마인을 만나 쓰러졌다는 이야기는 꽤나 유명했다. 다행히 별 일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를 차기 길드의 간부로 점찍어 놓고 있었던 제니스는 운현의 몸을 걱정했고 운현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네. 별 일 없으니 걱정 마세요. 그보다 제니스씨."
"왜?"
"그... 윈드에게 소개 시켜 줄 남자는 어떻게 됐나요?"
"오오. 마침 내가 잘 아는 녀석이 있어. 과거 모험가였던 녀석인데 아직 짝이 없다고 하더군. 다음주 중으로 이곳에 온다고 하니 그 건은 너무 걱정마."
"혹시 거절하거나 그러지는 않을까요?"
"성격이 유한데다가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성격이라 대놓고 싫다고는 못할거야. 한달 후 발렌타인 가문의 가주가 올때까지만 사귀면 되는 것 아닌가? 나에게 빚도 있으니 그정도는 버텨주겠지."
"으음... 잘 되면 좋을텐데..."
"그 이후부터는 네가 신경쓸 일이 아니지 않아?"
"아니 그렇긴 한데..."
윈드는 어떻게든 커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윈디아가 문제다. 운현은 그녀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 가늠하기 어려워 낮게 신음했고 그를 향해 제니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발렌타인 가문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우리 모험가 길드를 무시할 수는 없어. 만약 그들이 너를 어찌 하려고 한다면 길드 차원에서 항의를 하면 될거야. 제작자 연합과 모험가 길드가 합세한다면 발렌타인 가문이나 상인 조합이라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을테니 말야."
운현의 걱정에 제니스는 웃으며 그 걱정을 달래주었다. 이제서야 안심이 된 운현은 그녀를 향해 빙긋 웃었다.
"고마워요."
"별 말씀을. 그럼 재밌게 놀다 와."
"아, 그리고 상아는요?"
"상아? 지금 에리스와 펠리시아를 데리고 던전에 들어갔어. 널 위한 선물을 준비하러 간다고 하더군."
"헤에... 뭘 가져오려나."
"글쎄. 그건 그때의 기대로 남겨두라고."
말을 마친 제니스가 안으로 들어가 사무소에 앉자 필레는 운현의 팔을 끌었다.
"가자!"
"응. 아. 그 전에 성당에 좀 들렸으면 하는데."
"성당에는 왜?"
"아까 그 함정의 재료가 성자의 눈물이거든. 당분간은 레벨업에 집중하려고. 시장 선거도 끝났고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없잖아."
"아.... 그렇지. 그럼 이제 자주 안올라오겠네?"
"삼, 사일 정도 던전에서 머무를 예정이니까 말야."
운현의 말에 필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2계층으로 들어가버리면 돌아오는 것에도 꽤나 시간이 걸린다. 운현과 만날 수 있는 건 길드 회관이 대부분이었던 필레는 그와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된 것에 아쉬워했고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빙긋 웃었다.
"그래도 자주 만나러 올게."
"으응. 레벨업 열심히 해. 제니스씨 말대로 레벨만 되면 길드원으로 추천할 생각이니까 말야. 헤스티아씨나 미야씨, 바제트씨 모두 소질은 있으니까."
"그런데 길드원이 되면 뭔가 이득이 있어?"
"혜택은 많아. 자세한건 나중에 가르쳐줄게."
일반 모험가에 비해 벌이는 적지만 사고를 당하거나 해서 모험가 일을 쉬게 될때도 일정 금액의 지원금이 나온다. 그 외에 던전 도시 내에서 꽤 많은 혜택이 있었깅 필레는 웃으며 말했고 운현은 그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원이라...'
어느정도 레벨이 오르고 돈을 모으면 안정적인 모험가 길드원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운현은 자신의 팔을 살며시 잡는 필레를 보며 물었다.
"내가 길드원이 된다면 네가 선배가 되겠네?"
"후후! 엄하게 가르칠테니까 각오하라고."
"그거 무섭구만~"
필레의 시덥잖은 협박을 웃으며 넘긴 운현은 그녀와 함께 대성당에 도착했다. 또 찾아 온 운현을 본 레나가 인상을 왕창 구기자 운현은 옆의 필레를 가리켰다.
"당신... 어서 오세요."
금새 표정이 바뀐다. 독실한 신자인 필레가 다가와 인사를 하자 레나는 그녀에게 인자한 표정을 지어주었다. 필레가 그녀를 상대하는 동안 운현은 성당 옆의 건물로 들어가 성자의 눈물을 있는대로 전부 구입했다.
'오백오십골드라... 성지는 진짜 함부로 못쓰겠구만.'
2계층의 사이드 크랩의 사체를 팔아 얻은 골드의 대부분을 날려버린 운현은 가벼워진 돈주머니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비자금으로 챙겨 놓은 돈이 있기는 하지만 이건 나중을 대비해서 모아놔야 했기에 운현은 성자의 눈물을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큼이나 성자의 눈물을 구입하시다니.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인가요?"
"아. 모험가입니다. 이제 저희가 상대해야 할 몬스터가 언데드라서요."
"아아... 그렇군요. 아, 혹시 괜찮으시다면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의뢰인가요?"
"네."
카야는 부드럽게 웃은 후 뒤쪽에 있는 상자를 뒤적거린 후 작은 그림을 내밀었다.
"2계층의 몬스터 중에 구울이라 불리는 몬스터 중 특별한 힘을 가진 구울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 구울을 퇴치하시고 코어를 구해다 주시겠나요? 보상으로는 파르티 교단의 축복을 받은 성스러운 메이스를 드리겠어요."
"성스러운 메이스라... 어떤 것인지 볼 수 있을까요?"
"그래요."
카야는 운현의 질문에 밑의 서랍에서 한자루 메이스가 담긴 상자를 꺼내어 주었다. 한손으로 사용하는 것인지 메이스의 자루를 잡자 운현은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기분을 받았다.
'이것도 한손무기 사용의 효과인가... 다른 무기도 사용 가능해졌으면 좋겠는데.'
"상당히 좋은 메이스네요."
운현이 메이스를 잡고 몇번 휘둘러 본 후 다시 상자에 넣자 카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본단 주교님의 축복이 걸려 있는 것이니만큼 사자에 대한 추가데미지 효과도 좋답니다. 몇개 남지 않았으니 빨리 구해주시길 바랄게요."
"알겠습니다."
가진 무기가 단검과 소드 브레이커밖에 없는 운현에게는 무척이나 탐날만한 무기였다. 언데드들에게 효율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다면 굳이 성지가 아닌 성유 함정만으로도 충분히 전투에 가세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지로 그 구울을 잡고 그 이후는 저것과 성유함정으로 잡으면 되겠군.'
성지로 잡으면 코어밖에 나오지 않는데다가 경험치도 얻을 수 없다. 운현은 저 메이스만 있으면 앞으로의 전투가 꽤나 순탄하게 흘러갈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
"그럼 금방 올게요."
"후후후... 다녀오세요~"
카야의 배웅을 받으며 나간 운현은 레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필레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자 레나는 또다시 인상을 구겼지만 곧 밝게 웃으며 떠나가는 필레와 운현을 배웅했다.
"너 저 여자하고 친해?"
"응? 레나 대사제님? 응. 무척 좋으신 분이라서 다른 사람들도 좋아해. 근데 그건 왜?"
"으음..."
"레나 대사제님이랑 무슨 일 있어?"
"아니... 에이~! 자자!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자!"
레나가 이상한 듯 바라보자 운현은 그녀의 손을 잡고 후다닥 뛰었다.
"후아~!"
저녁을 먹고 간단하게 산책을 한 후 카페에 들르고, 와인을 먹는 정도에 불과한 짧은 데이트였지만 필레는 꽤나 만족한 모양이었나보다.
운현의 팔을 살짝 잡은 채 헤실거리며 웃던 필레는 운현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걷자 그의 팔을 더더욱 끌어당겼다.
"운현."
"어?"
"저기..."
무언가 고민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골목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던 운현이 발걸음을 멈췄을 때 골목에서 나온 이들은 운현과 필레를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앗!? 너희!?"
"운현씨와 필레씨군요."
"으음..."
어쩐지 안마주치더라. 운현은 윈드와 윈디아가 양 손에 커다란 봉투를 들고 걷고 있는 것에 낮게 신음했다.
"호오..."
운현의 팔을 안고 있는 필레를 보며 윈디아는 안경 너머의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윈디아의 시선에 필레는 더더욱 운현의 팔을 안으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운현씨. 언니에게 소개 시켜 주실 남자는 찾으시고 이렇게 돌아다니시는 건가요?"
"네."
"어!? 진짜!? 누군데!?"
"제니스씨가 소개시켜 줄 사람이에요. 아직 나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제니스씨가 아끼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좋은 사람이겠죠?"
"어떻게 생겼는지, 나이는 뭔지, 이름은, 가족 계획이나 그런..."
"아니 아직 만나 본 적도 없는데."
윈드가 기뻐하며 묻자 운현은 볼을 긁적거리며 떨떠름히 답했다. 그런 그와 윈드를 번갈아 바라보던 윈디아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잘 됐으면 좋겠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그건 뭡니까?"
한아름 안고 있는 종이봉투를 가리키며 운현이 묻자 윈디아는 잠시 입을 다물다가 살며시 그것을 끌어안았다.
"아, 아무것도 아닙..."
"아아. 자위도구."
"........."
"아, 네. 그... 뭐랄까. 좋은 시간 보내세요."
"응!"
윈디아는 부끄러워하고 윈드는 당당했다. 이런 대범함을 보면 확실히 그녀가 가주감이다 싶었던 운현은 질린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고 윈디아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겨우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아, 아무튼 그 남자가 오면 먼저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죠."
윈디아아가 부끄러워하며 윈드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자 운현은 피식 웃었다.
"저 강철같은 여자도 할건 하고 사는구만."
다음날이 되자 운현은 동료들과 함께 던전으로 들어갔다. 곧장 2계층에 들어 선 운현은 어제 필레와 왔었던 언데드 출몰지로 향했다.
"어제 새로운 함정을 만들고 퀘스트 하나를 받아왔지."
"어떤 건데요?"
"함정은... 성지라는 것과 성유 함정이야. 일단 성지는 쓰면 언데드들을 한방에 날려버리지만 전투경험치를 못 먹고 사체도 잃어버리게 되더라고. 그러니까 가급적 쓰지는 않을 거고. 주로 쓸건 이 성유 함정이야. 말보다는 한번 보여주는게 좋겠군."
운현이 성유 함정을 걸었을 때 운현을 발견한 좀비 네마리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다가오면 올 수록 심해지는 시체 썩는 냄새에 여인들이 인상을 찡그리자 운현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저거 발동되면 냄새 더 나니까 각오해."
"으아... 이거보다 심하다고?"
"응. 그래도 익숙해지니까 괜찮더라."
"끄응..."
강렬한 냄새에 정신 집중이 힘들 정도다. 미야는 운현의 말에 미모를 찡그린 후 주먹을 쥐었다.
"도발 걸어?"
"일단 대기."
"치이이익!"
"갸아아아아아아!"
성유 함정에서 기름이 터져나와 좀비들의 몸을 적셨다. 좀비들의 몸이 타들어가며 연기와 지독한 냄새를 만들어내자 헤스티아와 바제트는 뒤로 물러나며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우웩! 이거 진짜 못참겠는데!"
"우우욱...!"
"코마개라도 하나 하고 다니든가 해야겠네..."
그나마 미야는 금방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아예 코가 마비되어버렸는지 인상을 구기기만 할 뿐 이었다.
"헤스티아! 쟤들한테 파이어 볼 싸봐!"
"우우... 네!"
운현의 말에 헤스티아는 좀비를 향해 파이어 볼을 날렸다. 방패의 화염으로 안된다면 파이어 볼의 온도라면 가능할까 싶었던 운현은 파이어 볼에 맞은 좀비들이 더더욱 고통스러워하다가 바닥에 털썩 쓰러지자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데미지 정도 밖에 안들어가는 것 같은데... 일단 방법은 뭐 있겠지."
"으으. 그래도 이정도면 빨리 잡는 것 아닌가? 힐링으로 지속 데미지도 줄 수 있으니까... 한번 해보자."
냄새 때문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바제트가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퀘스트를 클리어 하기 전까지는 내가 할 일은 함정 설치 뿐이군. 자. 그럼 잘 부탁해!"
160====================
Run
"하아..."
열무리째의 좀비와 스켈레톤을 잡고 나서야 운현 일행은 그나마 조금 쉴 수 있었다.
"똑같이 불태우는 건데 왜 이렇게 얘들만 냄새가 심할까?"
"으으... 그러게요."
"아마 언데드화되며 시독이 생겼기 때문이겠지... 헤스티아. 열 감지는 쓸 수 없지?"
"네..."
모두 시체들이라 그런지 특별한 구울을 찾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홉고블린이나 오크 워리어때와는 상황이 달라지자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한 후 말했다.
"음. 내가 좀 돌아다녀보고 올게."
"혼자 괜찮겠어? 같이 갈까?"
"아냐."
하이딩을 쓰고 돌아다니면 괜찮겠다 싶어 운현은 동료들을 떠나 홀로 주변을 돌아다녔다. 가끔씩 스켈레톤이나 좀비들과 마주 칠 뻔 했지만 하이딩을 쓰고, 하이딩 상태도 발각되면 함정을 쓴 후 그들이 함정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틈을 이용해 멀리 튀어 다시 하이딩을 써서 위기에서 벗어난 운현은 언데드들이 넘쳐나는 곳 중앙에 일반 좀비들과 다른 좀비를 볼 수 있었다.
"...크르. 크으으으으!"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머리에 긴 뿔이 나 있는, 일반 좀비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시체가 좀비와 스켈레톤을 지휘하고 있었다. 다른 시체 중에 그처럼 복부에 구멍이 뚤려 있는 시체들은 있었지만 뿔이 있는 시체는 없었다.
'설마 저건가?'
운현은 그 시체의 주변을 둘러본 후 한숨을 내쉬었다. 수가 적당히 많아야 도전이라도 해보지 주변에는 좀비만 해도 사십구가 넘고 스켈레톤만 이십여구, 그리고 복부에 구멍이 뚫린 시체가 열구가 넘었다.
'지금 상태로는 택도 없겠군. 조금씩 줄여나가든가...'
아니면 다 때려치고 성지를 활용하든가. 저 정도의 사체를 모아다가 가져다 팔면 이번에 성자의 눈물을 사느라 과도하게 쓴 골드를 메꾸는 것과 동시에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차라리 좀 더 레벨을 올리고... 으으으으. 그 메이스는 진짜 갖고 싶은데.'
지금까지의 전투를 보면 확실히 딜링이 부족했다. 일단 기존의 전투에서 운현이 주는 데미지도 쏠쏠했는데 그것이 거의 없고 바제트 역시 힐링만으로 데미지를 주는 터라 딜링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기존의 딜러 둘이 힘을 못쓰는 상황이니 전투가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반 메이스라도 사가지고 와서 싸울까...'
운현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파티원들에게 돌아왔다.
"어땠어?"
"음... 발견한 것 같기는 한데."
"한데?"
"수가 너무 많아. 저들을 줄여나가면서 하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은데..."
"얼마나 있길래?"
"대충 7~80 정도. 대부분 붙어 있어서 따로 떼오기도 좀 애매한 것 같아. 그리고 그 근처를 배회하는 좀비도 있고..."
"으음... 방법이 아예 없는 걸까."
"그런 건 아닌데. 아까 말했던 것처럼 성지를 쓰면 어떻게든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해."
"그럼 생각할 것도 없네. 그냥 하자."
"하지만 그렇게 되면 돈이랑 경험치가."
"괜찮아요. 이번에 운현씨가 의뢰를 성공하면 운현씨도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다시 전투를 해서 벌면 되니까요."
"응. 우리는 괜찮아. 라기보다는 성지가 아니면 클리어 할 수 없는 퀘스트 같은데 그냥 운현이 하고 싶은대로 해."
동료들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동의를 얻었으니 이제 움직이는 수 밖에. 그가 동료들과 함께 아까 전의 언데드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을 때 다른 파티가 끼어들었다.
"어라? 당신들. 혹시 구울 잡으러 가는거야?"
"응. 그게 구울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소리야?"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아까 전에 보았던 언데드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머리에 뿔이 달린 구울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 이거 골치아프네."
"왜?"
"그 구울은 구울 로드라고 하급 언데드들을 통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녀석이라... 상대하는게 쉽지 않은데."
"왜 쉽지 않지?"
"어중간하게 공격을 하다보면 그 놈이 레이스로 변신하거든. 레이스 알아? 실체가 없는 유령. 그게 되어버리면 진짜 처리하기 힘들어져. 마법이 걸린 장비가 아니면 데미지 자체를 입지 않으니까 말야."
"...진짜?"
"응."
"그럼 저 녀석은 어떻게 잡아?"
"사제들의 턴언데드, 아니면 고레벨의 모험가나 길드에 요청을 하는 편이지. 물론 그렇게 된다면 이득은 없지만 위험은 많이 줄일 수 있거든."
"으으으음..."
"가끔씩 그 녀석을 잡기 위해서 파르티 교단에서 움직이던데 이번에는 안오나보네. 저 녀석의 코어를 이용하면 상당히 강력한 성유물을 만들 수 있다고 하던데... 쩝. 어쩔 수 없나. 일단 그게 나왔다고 길드에 신고를 해야겠다. 저 녀석이 잡히면 또 한달동안은 안나올테니까 말야. 빨리빨리 잡아야지."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한 후 그대로 몸을 돌려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운현이 말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들은 운현을 의심의 눈초리로 살피더니 몸놀림이 날쌔보이는 여인 둘이 앞으로 튀어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급히 돌아왔다.
"진짜잖아!?"
"구울 로드다! 젠장! 오늘 사냥은 다했네!!"
그녀들까지 확인을 하고 나서야 여전사는 인상을 구긴 후 일행들을 데리고 사냥터에서 멀어졌다.
"운현씨..."
"끙. 정녕 답은 길드에 요청하는 수 밖에 없단 말인가."
"하지만 길드에서 이런 강한 몬스터를 처치하면 그 사체와 코어는 길드의 것이 되어버리잖아요."
"그래서 아쉽네. 금방 나오는 놈도 아닌 것 같고."
운현은 고민했다. 솔직히 잡고자 한다면 못잡을 것은 없었다. 만약 운현 혼자 있었다면 하이딩을 걸고 최대한 근접한 후 함정을 설치한 다음 곧장 미믹을 뿌려 구울 로드를 잡고 성지를 사용해 생기는 틈을 이용해 빠져나오면 된다.
"....으으으으으으..."
방법이 있지만 쓸 수 없다. 이 방법을 쓰려면 자신이 미믹맨이라는 것을 동료들에게 밝혀야 했다. 하지만 과연 동료들이 자신을 이해해줄 것인가? 그들이 자신에 대해 신고하지 않을 것인가? 그 자신을 가질 수 없었던 운현이 크게 갈등하며 신음하자 헤스티아는 운현의 손을 꼭 잡았다.
"어?"
"운현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는거에요?"
미믹맨인 것을 밝히게 된다면 인벤토리의 존재를 밝혀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포기하자. 그냥. 메이스 하나 들고 싸우는게 낫겠다...'
고작 메이스 하나 얻자고 자신의 비밀을 오픈하는게 좋을까? 마인을 상대하며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자신을 위해서 목숨까지 걸었다. 그런 그녀들이 자신을 배신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운현의 닫혀 있는 마음은 자신의 비밀을 알리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아... 진짜 돌아버리겠군.'
"아아아아아아아!!! 진짜!!"
이제는 퀘스트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꾸만 그때의 장면이 떠올랐다.
자신의 가장 친했던, 아니 친했다고 생각한 개자식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 서로 사랑했던, 사랑했더고 믿었던 갈보년.
그 둘이 알몸으로 누워 섹스를 하던 것을 목격한 기억.
그녀가 운현이 자기를 강간했다고 사람들에게 알린 기억.
아니라고 몇번이나 호소하고 외쳤지만 가장 친하다고 소문난 친구의 거짓 증언에 결국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하고 합의를 보기 위해 여기저기에 머리를 숙였던 것.
결국 어렸을 때부터 살던 동네에서 싸늘한 눈초리를 이기지 못하고 떠나버린 기억.
자신을 좋아하던 선생, 학교 친구. 그 외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일이 알려지자마자 바로 욕과 조롱을 해댔다.
그때의 굴욕감.
그때의 분노.
그리고
그년놈들의 비웃음.
떠올리기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억에 운현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내 모든 것을 오픈했다가...'
먼저 믿으면 손해를 보는 것은 자신이다. 타인을 신뢰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줘도 아깝지 않을 사람들이라 생각해 자신의 모든 것을 공유한 결과 일어난 일이다.
'젠장...'
또다시 떠오르는 것은 계층주를 잡을 때의 일이다. 마인이 검을 들어 자신을 죽이려고 할때.
집중 공격 당하게 되면 반드시 죽을텐데도 망설임없이 일부러 도발을 건 미야.
단 일격에 목숨을 잃을 것이 뻔한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앞을 가린 헤스티아와 바제트.
'그랬다간...'
두가지 상반된 기억이 머리 속에서 격렬하게 자리다툼을 시작했다.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기억을 세 여인들과의 기억이 점점 제압하는 것을 느끼며 운현은 붕붕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아아아!! 돌아버리겠다! 진짜!"
머릿속이 복잡해진 운현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가 전투 상황 외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라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크게 놀랬다.
"....일단 돌아가자."
운현이 선택한 것은 결국 회피였다.
"...운현씨."
헤스티아는 따뜻한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을 부드럽게 잡은 헤스티아는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 구울 로드를 잡기 위해서는 운현씨가 숨기고 있는 것을 밝혀야 하는 건가요?"
운현이 다른 도적들과 다르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일단 함정만 봐도 그렇다. 어떤 고레벨의 도적이라 할지라도 그와 같은 다양한 함정은 만들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날쌔게 움직인다 하더라도 혼자서 아무런 위험없이 던전을 오갈수 있을리 없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지금까지 그것에 대한 내색을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운현이 직접 이야기해주기를 기다린 것이었다.
"운현씨가 과거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어떤 일이 있어도 저희들은 운현씨의 편이 될거에요. 운현씨가 무슨 짓을 했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아아. 그런 이야기인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운현. 우릴 너무 얕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넌 나의 인연이다. 그 인연이 무슨 짓을 했다 하더라도 내가 널 배신할 것 같아? 절대 그럴 일은 없을거다."
"....하아."
그녀들의 응원에 운현은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굳게 닫아 놓은 문의 걸쇠가 조금씩 풀려나가는 것을 느끼며 운현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 그게 말이지."
"......"
"화 안낼거야?"
"네."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몇번이나 망설이며 입술을 달짝이던 그는 작은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사실 내가 미믹맨이야."
"...네?"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건 또 예상 못한 얘기군. 말도 안되는 소리를..."
"봐봐."
자신의 말에 어이없어하며 믿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쓰게 웃은 운현은 텅 비어 있는 벌판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을 여인들이 보자 운현은 인벤토리에 있는 미믹을 그곳으로 휙 던졌다.
"촤아아아악!"
운현의 인벤토리에서 나온 미믹이 검은 기운을 뿌리며 근처의 좀비와 스켈레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미믹을 스틸로 회수한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고 여인들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도시에서 있었던 미믹맨의 소행은 내가 한 일이야."
"...어... 그러니까."
"그 미믹맨이... 너라고?"
"으으음... 이건 진짜... 예상 밖의 얘기라 당황스럽구만.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왜 네가 미믹맨 짓을 한건데?"
"시장 선거에서 이기려고. 던전 도시에는 힘이 남아 돌지. 그 남아도는 힘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이라면 그 힘으로 내부 단속이라고 하라고 빅-빌런 미믹맨을 만들어낸거야. 바로 내가."
운현은 체념한 어조로 말했다. 어차피 이제 그들에게 마음을 열기로 노력하기로 한 이상 천천히 자신의 비밀을 오픈해야 했었다. 그 중 가장 찔리는 비밀인 미믹맨의 건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그는 눈을 감은 채 여인들의 말을 기다렸다.
"으음... 그렇군요. 고생 많았겟네요."
"어?"
"미믹맨이라... 저거 통제는 제대로 되는거야?"
"음. 꺼내고 다시 넣는 정도는? 완벽한 컨트롤은 힘든데..."
"그거 아쉽게 됐네."
"잘만 쓰면 던전 공략에 큰 힘이 될텐데 말야."
"어, 어라? 뭐야? 내가 예상한 반응은 이게 아닌데?"
동료들의 태평한 반응에 운현은 오히려 당황했다. 미믹맨에 의해서 꽤 이득을 본 모험가들이나 제작자들 중에서도 미믹맨의 위험성을 알고 발견 즉시 죽이는 것이 낫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반응이라니.
"아니...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운현씨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것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니까요. 운현씨. 미믹맨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운현씨가 그렇게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죠?"
"응."
"그럼 됐어요."
시원스레 헤스티아가 넘어가자 운현은 자신의 걱정과 우려가 정말 바보같은 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감동한 얼굴로 자신을 끌어안자 헤스티아는 피식 웃었다.
"진짜 바보같네요. 당신이 미믹맨이면 어떻고 일반인이면 어때요. 저희들은 당신을 사랑해요. 만약 당신이 악당이라 하더라도 당신을 이해하고 믿고 따를 거에요. 이제 좀 믿을 수 있겠어요?"
"으, 으응."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넌 나의 은인이며 리더이고, 또 나중에 남편이 될 사람이기도 해. 그런 사람이 악당이라고 해서 내가 배신할 것 같아? 웃기는 소리 하지마. 네가 악당이라면 나 역시 악당이다."
"어..."
"엘프의 집념과 집착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네가 어떤 일을 저질러도, 어떤 실패를 맛봐도 나는 네 곁에 있을거야."
헤스티아, 바제트, 미야는 운현이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하는 것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들의 모습에 운현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하하... 고마워.... 이해해주고 믿어줘서..."
"뭘 이런 걸로 감격해? 그런 것보다 우리같은 미녀들이 널 사랑해준다는 것에 더 감격해야지. 어때? 이제 우리를 사랑할 자신은 생기셨나?"
운현의 말에 미야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말에도 운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은 아니냐... 진짜 징하다. 좋아. 그래도 큰 산은 넘었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미믹은 몬스터들을 흡수하잖아. 설마 마인을 만들려는 것은 아니겠지?"
계층주를 잡을 때 봤던 마인의 공포를 떠올린 바제트가 떨떠름히 묻자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음. 작전은 이래. 일단 처음은 그냥 일반적인 전투를 하자. 그것으로 언데드들의 시선을 끌고 언데드들이 몰려들고 나면 일반 함정으로 최대한 묶어 둘게. 그리고 너희들은 최대한 빠져."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남아서 미믹으로 처리를..."
"...제정신이야? 어떻게 거기서 버티려고? 우리들이 도망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 좀비의 이동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으니까. 하지만 너는? 모든 언데드들이 우리를 쫓는다는 보장은 없어."
"어... 그 전에 하나 더 밝힐 게 있는데."
운현의 말에 바제트는 피식 웃었다.
"정말 숨기는 것도 많다. 그래서 이번엔 뭐야?"
"으으음..."
어차피 미믹맨에 대한 것도 깠는데 뭐가 두렵겠는가.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하이딩을 사용했다.
"헉!?"
"뭐, 뭐야!?"
"운현씨!?"
"이게 내 또다른 비밀. 하이딩이라는 스킬인데 신체를 숨길 수 있어."
"...혹시 죽은 사람 살리는 스킬 같은건 없어?"
바제트는 쓰게 웃으며 물었고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나씩 하나씩 오픈할 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 운현은 볼을 긁적거렸다.
"운현씨."
"응?"
"숨기고 있는게 얼마나 되요?"
"으음... 글쎄. 이제 얼마 없어. 나머지는 복귀하면 말해줄게."
자신이 이계인이라는 것, 그 덕분에 특별한 스킬과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 그 외에는 이제 숨길 것도 없다. 운현이 떨떠름히 말하자 헤스티아는 운현을 빤히 바라본 후 물었다.
"모두 밝힐 수 있나요?"
"... 미믹맨이라는 것도 밝혔는데 뭐..."
"하아... 좋아요. 그럼 됐어요. 운현씨. 정말 자신 있는 건가요?"
"응."
161====================
Run
"그럼 다들 준비됐지?"
운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해!"
"매스 힐링!"
바제트의 매스 힐링이 모여 있는 좀비들을 공격했다. 은은한 빛과 함께 좀비들의 몸이 크게 흔들리자 모여 있던 언데드들의 고개가 운현일행에게 꽂혔다.
"갸아아아아!!"
"달각! 달각!"
좀비들과 스켈레톤들, 그리고 구울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빠르게 달려오는 스켈레톤의 공격을 방패로 막아내거나 주먹으로 후려치던 미야는 머리를 잡으려 하는 손뼈를 잡아 집어 던진 후 강하게 외쳤다.
"아직이야!?"
"조금만 더 끌어!"
"쳇...! 하아아앗! 지뢰진!"
도발을 시전하여 어그로를 끈 미야는 주먹을 땅에 내리 꽂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 주변의 땅이 크게 출렁거렸고 도발에 끌려 미야에게 다가오던 언데드들은 모두 쓰러져버렸다.
"헤스티아! 파이어 월!"
"네!"
미야가 쓰러트린 언데드들과 아직 오지 못한 언데드들 사이에 파이어 월을 시전하여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은 후 운현은 빠르게 미야의 뒤에 성지를 시전했다.
"미야! 뒤로 와!"
"응!"
쓰러진 언데드들이 일어나기 전에 미야는 훌쩍 뛰어 운현의 뒤로 이동했다. 어그로를 유지한 채 그녀가 뒤로 빠지자 언데드들은 그녀를 잡기 위해 앞으로 이동했고 그 순간 성지가 발동되었다.
"그어어어어어어!!"
좀비들과 스켈레톤들, 그리고 구울 세마리가 성지의 빛에 감싸지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동안 운현은 힐끔 구울 로드를 보았다.
'안 움직이는구만...
운현 일행이 언데드들을 잡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 구울로드는 주변의 다른 언데드들을 지휘하는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운현씨! 파이어 월 끝났어요!"
파이어 월이 사라지며 기다리던 언데드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성지의 효과가 끝나고 언데드들이 소멸되자 운현은 성지가 생겼던 자리에 강철 실로 만든 함정을 설치한 후 외쳤다
"이제 튀어!!"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가 뒤로 도망치기 시작하자 운현은 곧장 하이딩을 걸었다. 난전 중이라 그런지 운현이 하이딩을 건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언데드들은 그를 지나쳐 여인들을 쫓기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함정에 걸려버렸다. 꽤 많은 수가 강철 실 함정에 걸리자 운현은 동료들에게 어그로가 끌린 언데드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정도면 괜찮겠지.'
좀비들과 구울의 이동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고 스켈레톤의 속도는 빨랐지만 아까 전 성지로 인해 꽤 많은 수가 잡혔으니 저들 정도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문제는 난데...'
성지를 사용해 주변의 언데드들을 최대한 제거하고 구울 로드를 미믹으로 잡는다. 운현은 침을 꿀꺽 삼킨 후 천천히 구울 로드를 향해 걸었다
운현이 다가오는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구울 로드는 남은 언데드들을 지휘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다. 다시 오와 열을 맞추어 언데드들을 모은 그가 움직이려고 할 때 운현은 그들이 움직이는 루트에 성지를 설치했다.
"거어어어어어!!"
구울로드까지 범위에 들어 오지 않았지만 대다수의 언데드들이 성지에 의해 정화되는 것을 본 운현은 당황하는 구울로드를 향해 미믹을 던졌다.
"카아아아아악!!"
미믹이 나타나 검은 기운을 일렁이자 구울 로드는 미믹을 향해 겁먹지 않고 달려갔다. 그것을 본 미믹에게서 검은 기운이 쏟아져 나왔지만 구울 로드는 그것에 맞고도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허..."
그래도 2계층의 강력한 몬스터란 말인가? 미믹의 공격에도 버텨낸 것에 놀란 운현은 미믹을 향해 구울 로드가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촤악!"
구울 로드의 주먹에 맞기 전 뒤로 빠진 미믹의 몸에서 나온 검은 기운이 구울 로드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그것을 본 운현은 히죽 웃으며 스틸로 미믹을 회수한 후 완전히 뻗어버린 구울 로드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역시 미믹이 짱이구만... 2계층의 미믹을 손에 넣고 싶은데..."
운현은 구울 로드의 사체를 마석에 담고 근처에 떨어져 있는 코어들을 회수한 후 동료들을 찾았다.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한덕분에 쉽게 그들을 찾을 수 있었던 운현은 분전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외쳤다.
"잡았어!"
"그럼 빨리 합류해!"
"좋아!"
바제트의 다급한 외침에 운현은 곧장 성지를 설치하여 수를 줄인 후 바제트의 뒤로 이동했다. 꽤 많은 수의 언데드들의 움직임을 막느라 헤스티아는 연신 파이어 월로 그들의 움직임을 막고 있었고 미야는 지뢰진을 날려 언데드들이 일어서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실질적인 공격은 바제트의 힐링과 매스 힐링 뿐. 이번에 새로 구입한 장비가 아니었다면 벌써 마력이 떨어질 뻔 했던 바제트가 낭패한 얼굴로 뒤로 물러나자 운현은 강하게 외쳤다.
"성지 설치할거야! 그리고 튄다!"
운현의 성지가 빛을 발하자 몰려 있던 언데드들이 정화되었다. 그 틈을 노려 운현은 파티원들을 데리고 빠르게 튀었다.
"허억...허억..."
언데드의 영역에서 벗어날때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튄 운현은 숨을 몰아쉬며 동료들이 무사한지 확인했다. 모두 지쳐보였지만 그래도 다들 큰 부상은 없는 듯 보였다.
"후아아아!"
"아이고 힘들어..."
"성공했어?"
미야의 질문에 운현은 히죽 웃은 후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구울 로드의 마석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본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르자 바제트는 숨을 정리한 후 운현의 어깨를 툭 쳤다.
"계속 여기 있는 것도 위험하겠군. 어서 1계층으로 가자."
"아아... 그래. 고생 많았다."
"널 위해서니까."
빙긋 웃은 바제트는 운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그녀의 애정이 담긴 손길에 운현은 쓰게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일단 돌아갈까?"
언데드들의 공격을 피해 길드 회관으로 돌아 온 운현은 피곤해하는 동료들을 먼저 방으로 돌려보내고 사무소로 향했다. 사무소에는 필레가 아닌 칼리아스가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간 운현은 그녀에게 마석 주머니를 내밀었고 그것을 본 칼리아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몇일 가 있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건 어디서 들었어요?"
"필레한테요."
"으음..."
"아무튼 정산인가요?"
"네. 그 마석 중에 구울 로드가 있는데 그 코어만 따로 빼주세요. 사체는 골드로, 코어는 저희 파티의 레벨업에 쓸게요."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마석 주머니를 들고 안에 들어갔다 온 칼리아스는 주먹만한 검은색 코어 하나와 작은 팔찌 하나, 그리고 금화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들고 나왔다.
"이게 뭐에요?"
"구울 로드가 가지고 있던 팔찌에요. 사자의 팔찌라는 건데 언데드들과 싸울거면 착용하시는게 좋아요."
그녀의 말에 운현은 그녀가 내민 팔찌를 받아 살펴보았다. 강철팔찌의 중앙에는 검은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진한 검은색 보석을 바라보던 운현에게 칼리아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사자의 팔찌는 착용자의 속성을 언데드로 바꿔주는 팔찌에요. 운현씨 파티의 탱커는 미야씨죠? 착용하면 언데드들의 공격 데미지를 상당부분 줄일 수 있답니다. 2계층 외에도 3계층과 4계층의 언데드들을 상대할 때 자주 쓰이는 팔찌거든요. 구울 로드에게서 나오는 경우는 드문데 운이 좋으셨네요."
"그러게요."
칼리아스의 설명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 팔찌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가 자신이 말한 방법대로 하려는 듯 하자 칼리아스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자의 팔찌를 착용해 속성이 언데드로 바뀌게 되면 힐링을 받지 못해요. 아니, 성 속성의 스킬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으니까 주의하도록 하세요."
"어? 그럼 힐링의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건가요?"
"네. 주의해야 할 사항이죠. 그리고 그 외에도 저 팔찌를 착용하면 언데드가 아닌 다른 몬스터들의 주의를 많이 끌게 되니까 그것도 조심하셔야 해요. 언데드들이 산자에 대한 증오심으로 움직이지만 산자 역시도 언데드들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거든요."
"잘만 쓰면 제대로 어그로를 끌겠는데요?"
"그게 그렇지만도 않아요. 그 팔찌를 착용하고 있으면 끊임없이 몬스터들이 공격해올테니까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어그로를 끌다가 위기에 빠진 파티도 많아요. 그러니까 언데드들이 많은 구역을 제외하고는 사용하지 말아주세요."
그녀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어그로 좀 더 끌겠다고 저걸 쓰다가 몬스터들에게 다굴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저, 절대 하면 안되겠군요."
레벨이라도 높으면 모를까 레벨도 낮은 주제에 몬스터들을 끌어들였다가 무슨 지옥을 맛보겠는가. 오늘 언데드들에게 몰리는 상황만 생각해도 끔찍했던 운현은 붕붕 고개를 가로저은 후 그 생각을 버렸다.
"후후후. 그런데 이 코어는 왜 따로 빼신거에요?"
"퀘스트 때문에요. 파르티 성당의 카야 대사제님이 요청하셨거든요."
"헤에... 괜찮은 보수라도 약속하셨나보죠? 구울 로드의 코어면 무척 귀한 것인데."
"성스러운 메이스요."
"파르티 교단의? 그거 괜찮죠. 좋겠네요. 그것만 있으면 2계층의 언데드들을 쉽게 잡을 수 있을거에요. 이야~ 또 금방 3계층에 진입할 수 있겠는걸요?"
운현이 웃으며 말하자 칼리아스는 박수를 친 후 방긋 웃었다.
"어서 레벨 300이 되어주세요."
"아니. 근데 레벨 300에 뭐 있나요? 상아도 그렇고..."
"레벨 300이 되면 스킬의 강화가 이루어지거든요. 그때부터 본격적인 고랭크 모험가라고 불릴 수 있으니까요. 함정 설치 스킬도 강화되어서 함정을 한번에 두개까지 설치할 수 있게 된답니다. 그리고 함정 해제와 자물쇠 따기 스킬들도 강화되어서 평소보다 빠르게 해제 가능해질거에요."
"오오... 그런."
그녀의 말에 운현은 감탄했다. 다른 건 모르겠고 함정을 두개 설치할 수 있다니. 지금까지 함정을 하나만 설치할 수 있어서 그 타이밍을 계산하는것이 무척 아쉬웠었는데 그것이 해소되게 생겼다.
"빨리 레벨을 올려야겠군요."
"후후.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럼 저는 이만!"
어서 메이스를 얻어 던전을 공략하고 싶은 마음에 운현은 칼리아스에게 인사하고 후다닥 성당으로 뛰었다. 오늘은 성당 바깥에 레나가 없어서 손쉽게 카야를 찾을 수 있었던 그는 카야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에게 구울 로드의 코어를 내밀었다.
"찾으시는 것이 이것 맞나요?"
"어디보자... 네. 이거 맞아요. 굉장히 빨리 구하셨네요?"
카야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내민 코어를 받아 서랍에 넣었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상자에 담겨져 있는 메이스를 상자째 운현에게 건네주었다.
"다음부터 이런 물건을 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운현씨에게 부탁드려야겠네요. 다른 모험가들보다 훨씬 빠르신데요?"
"하하하... 운이 좋았죠."
"운도 실력이랍니다. 그럼 다음에도 잘 부탁드려요. 혹시 성자의 눈물이 더 필요하신 것은...?"
"성자의 눈물 말고, 언데드 몬스터들에게 효과가 있을만한 무기는 없나요?"
"글쎄요... 축복받은 은으로 만든 제사용 은화살이라면 있지만. 가격이 비싸서... 그리고 운현씨는 궁수가 아니지 않나요?"
바제트가 활을 쏘는 대신 힐만으로 언데드를 상대했던 것을 떠올린 운현은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이정도면 딜로스가 상당히 줄어든다. 또다시 폭업의 찬스가 왔는데 돈을 아낄 필요는 없다 생각한 운현은 당당히 말했다.
"그거 좋네요! 얼만가요!?"
"한발에 20실버에요."
"...비싸네요. 좀 깍을 수 없나요?"
"아하하핫! 그럼 이 코어를 또 구해다주세요. 그럼 그때부터 한발에 10실버로 할인해드릴게요. 그리고 파르티 교인이 되시면 1실버를 추가로 할인해드리지요."
"끙... 하지만 한달 후에나 가능할텐데..."
"그럼 어쩔 수 없네요. 혹시 언데드들 중에 마법을 쓰는 언데드가 있다면 그 언데드의 코어를 구해다주시겠어요? 본단에 있는 제 지인 중에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연구용 자료를 보내드리고 싶어요. 그 코어 하나에 은화살 이천발을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찾아볼게요. 일단 은화살은 천발만 주세요."
"천발이나요? 자, 잠시만요."
운현이 많은 화살을 요구하자 그녀는 당황하더니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끙끙거리며 화살뭉치를 들고 온 그녀는 그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자. 이백발짜리 묶음 다섯개에요. 후우. 운현씨 덕분에 재고는 확실히 정리할 수 있겠군요."
'재고품을 정가 받고 팔다니...'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화살을 줄에 묶어 그것을 들고 운현은 곧장 길드로 향했다. 길드에 도착한 그는 동료들이 씻고 나와 테이블에서 간단한 차와 다과를 즐기는 것을 보고 씩 웃었다.
"나 왔어!"
"혼자 갔다 온거야?"
"기다렸다가 같이 가지..."
"뭔가 짐이 많네요? 뭔가요?"
162====================
Run
"아. 축복받은 은으로 만든 은화살. 바제트. 이제 힐은 그만하고 제대로 전투하자고."
"오오오! 이거 꽤 비싸지 않아?"
은화살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바제트는 기뻐하며 화살 뭉치를 받았다. 묵직한 무게에 놀란 그녀가 방긋 웃자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비싸지만 투자지. 매번 성지를 쓸 수는 없잖아. 이번에 꽤 많이 잡았지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적자라고. 그만큼이나 잡았는데... 끙."
성지로 잡은 언데드가 꽤 되기 때문에 사체를 많이 구하지 못했다. 코어는 레벨 업을 위해 모아둬야 했던 운현은 식사를 마친 후 동료들과 함께 사무소로 향했다.
"아까 모은 코어 레벨 업에 사용하면 몇이나 오르나요?"
"잠깐만요... 운현씨와 미야씨는 1레벨 상승, 나머지 분들은 2레벨 상승하실 수 있겠네요."
구울 로드의 코어를 제외하고 나머지 코어를 계산한 칼리아스는 운현 파티의 모험자 카드를 받은 후 계산을 마친 후 말해주었다. 그 말에 운현은 레벨업에 동의했고 칼리아스는 운현들에게 모험자 카드를 나눠준 후 방긋 웃었다.
"정말 레벨업 속도가 빠르시네요. 어떻게 전투를 하시는거에요?"
운현의 성유 함정과 성지로 인해 빠르게 잡을 수 있었던 것이지만 괜히 그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던 운현은 쓰게 웃었고 동료들 역시 그것에 대해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뭐, 나중에 운현씨가 길드원이 되신다면 알려주시겠죠. 아무튼 힘내주세요!"
"네! 그럼 저희는 다시 들어가볼게요!"
축복받은 메이스와 은화살로 무장했으니 이제는 두려울 것이 별로 없었다. 운현 일행은 다시 언데드들이 있는 영역으로 이동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좀비와 스켈레톤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 가볼까!?"
"응. 시작은 나부터?"
"은화살 맛 좀 보여주라고!"
"좋아!"
언데드의 영역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힐만 쓸 수 밖에 없었던 바제트는 싱글거리며 은화살을 시위에 먹였다. 팽팽히 당겨진 시위가 풀리며 은화살이 날아가 좀비의 머리를 맞추자 좀비는 큰 타격을 받았는지 뒤로 벌러덩 쓰러졌다.
"오오! 데미지가 먹히는데!?"
"갸아아아! 갸아아아!!"
아까 전 혹시나 해서 일반 화살을 쏘았을 때와는 다른 반응이 보인다. 화살에 맞아도 잠깐 흔들리는 것에 불과했던 좀비가 바닥을 구르며 은화살을 뽑으려다가 은화살을 잡고 또다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본 운현은 씨익 웃으며 메이스를 들었다. 단검이나 소드 브레이커와는 무게중심이 달라 어색했지만 이것 역시 사용하다보면 익숙해 질 것이다.
"성유 함정은 가시 줄 함정의 성속성 판이라고 생각하고 전투를 하자고. 코볼트 상대할때의 방식대로 간다! 헤스티아! 혹시 다른 무리가 오면 파이어 월로 막아줘!"
"알겠어요!"
"아. 그리고 미야."
"응? 왜?"
운현은 미야에게 사자의 팔찌를 넘겼다. 그것을 보고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운현은 사자의 팔찌에 대해서 설명해주었고 미야는 씨익 웃으며 그것을 팔에 착용했다.
"헤에... 안그래도 좀비나 스켈레톤의 공격이 매서웠는데 잘됐네. 고마워!"
"별 말씀을! 그럼 미야! 시작해!"
"하아압!!"
사자의 팔찌를 착용한 미야는 달려오는 좀비와 스켈레톤들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그녀의 주먹이 좀비의 복부를 후려갈기자 운현은 메이스를 들었다.
"바제트! 지원 사격해!"
"응!"
"미야! 10초 후 네 뒤에 성유 함정 만들거야! 사자의 팔찌 때문에 성유 함정에 걸리면 너도 데미지 입으니까 주의하라고!"
"알았어!"
미야가 어그로를 끄는 동안 운현은 주변을 살폈다. 아직 다른 언데드들이 오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쓸어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그는 성유 함정을 설치하자마자 외쳤다.
"설치했어!"
"하아압! 지뢰진!"
자신을 공격하는 언데드들을 뿌리치기 위해 지뢰진을 날린 그녀는 좀비의 몸을 걷어차고 그 반동을 이용해 운현의 옆으로 이동했다. 쓰러져 있던 언데드들은 미야를 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왔고 그 순간 성유함정이 발동했다.
"미야! 성유 함정이 발동한 동안은 파동권으로만 공격해!"
"응!"
"바제트! 헤스티아! 간다!"
성유 함정에 걸린 언데드들이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을 뒹굴자 운현은 메이스를 들고 달려나갔다. 후방에서 파이어 볼트와 화살 공격이 지원해주는 가운데 운현은 쓰러진 스켈레톤의 머리를 향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퍼걱!"
"와우...!"
단검에 비해 느리지만 확실히 데미지가 좋았다. 단 한방에 스켈레톤의 머리를 반 정도 부숴버린 운현은 꿈틀거리는 스켈레톤을 메이스로 열심히 후려쳤다.
"와... 그거 데미지 좋은데?"
"은화살도 괜찮구만."
축복이 걸린 메이스라 그런지 한방 한방이 주는 피해가 굉장했다. 몇번 때리지도 않았는데 스켈레톤이 완전히 쓰러진 것에 놀라며 운현은 나머지 좀비와 스켈레톤을 끝장냈다.
"진짜 빠르다. 속성 장비 맞춘 것만으로 이렇게 잡을 수 있단 말이지?"
"성유 함정이 주는 데미지도 괜찮은 것 같고... 자. 그럼 이대로 가볼까!?"
처음과 비교해서 거의 세네배는 빠른 전투 속도에 운현은 메이스를 꽉 잡으며 외쳤다. 그의 말에 여인들은 히죽 웃으며 무기를 쥐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추가 스탯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나저나 스킬포인트는 쌓여가는데 찍을 스킬이 없네.'
스탯 포인트야 적당히 분배하면 된다지만 넘쳐나는 스킬 포인트를 쓸데가 없었다. 강화가 가능한 모든 스킬들을 최대로 올렸지만 남은 스킬 포인트는 70이 넘었다.
'함정 설치나 다른 스킬들도 강화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무슨 생각해?"
"아... 별거 아냐. 다 씻었어?"
"응. 너만 씻으면 돼."
"알았어. 그럼 좀 기다리고 있으라고."
운현이 샤워실에서 씻고 나오자 어느새 식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늘 식사 준비는 미야가 했는지 그녀는 앞치마를 두른 채 싱글거리고 있었다.
"뭐야?"
"묘족 전통 음식이지."
"이래서 아까 시장에 가자고 한거였구나... 어디보자."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은 큼지막한 생선 스테이크였다. 알싸한 소스가 잔뜩 뿌려져 있는 생선토막을 보며 바제트는 포크로 생선살을 뜯어 한입 먹었다.
"으~! 매워!"
"무, 물 줘요!"
"하하하! 화끈하지? 묘족은 이렇게 먹는다고. 운현도 한번 먹어봐."
"어디... 맛있네."
"어? 안매워?"
바제트와 헤스티아는 운현이 예상 외로 잘 먹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운현의 입에는 꽤나 잘 맞는 음식이었다. 약간 매콤하다는 수준에 불과한 생선 살을 연신 입에 넣으며 운현은 미야를 향해 빙긋 웃었다.
"굉장히 맛있는데. 이런 건 오래간만에 먹는 것 같아."
"오래간만에? 이런 것 먹어 본 적 있어?"
"응. 내가 살던 동네에서..."
"운현씨."
생선살을 조금 발라 입에 넣은 헤스티아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살던 동네가 어디죠?"
"아아. 맞다. 이야기해주기로 했었지. 내가 살던 동네는 이 세계가 아니야."
생선살을 퍼먹으며 운현이 무덤덤히 말하자 여인들은 또다시 황당해했다. 그런 그녀들의 표정을 본 운현은 미야가 준비해 준 음료수를 한모금 마신 후 말했다.
"내가 살던 곳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야."
"그... 이계인? 그런 건가요?"
"어? 알어?"
"응. 전설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바제트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하지만 그 이계인들은 강한 힘을 가지고 세계를 뒤엎으려 한 악당들이라는데... 넌 그렇게 보이지 않는걸? 애초에 강하지도 않고 말야."
"강한 힘이 있었다면 이렇게 고생하지는 않았겠지. 내가 가진 힘은 별것 없어. 일단 레벨업을 하면 너희들과 다르게 추가적인 스탯 포인트와 스킬 포인트를 얻을 수 있어. 그리고 아까 말해 준 것처럼 나만이 가지고 있는 스킬을 강화할 수 있고."
"어... 그건 운현씨가 레벨업을 하면 할 수록 강해진다는 얘기라고 볼 수 있는건가요?"
헤스티아의 질문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긴 하겠지. 아마 동레벨의 도적보다는 강해질거야. 하지만 스킬을 빼놓을 수 없으니까 다른 전투직종보다 강해진다고는 볼 수 없지 않을까? 미야. 나랑 팔씨름 한번 해볼래?"
"응? 응."
전투직이며 힘을 주로 쓰는 미야와 팔씨름을 한 운현은 꽤 버티다가 자신이 진 것을 보여주었다.
"우와... 굉장한데?"
"내 힘은 일반 도적보다 약 3할 정도 강할 뿐이야. 다른 사람들의 획득 스킬을 보면 힘 강화라든가 체력 강화같은 게 있잖아? 그런 스킬의 보정을 받지 못하다보니 순수하게 스탯 빨만 받는 거지."
"다른 도적들이 얻는 강화 스킬은 받아요?"
"받아. 몸놀림 강화나 손재주 강화는 있어."
운현의 말에 헤스티아는 신기하다는 듯 운현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리구요?"
"음... 그리고 인벤토리라고 물품들을 마음대로 넣을 수 있는 아공간을 보유하고 있어. 미믹도 이 안에 들어 있지. 나만 꺼내고 넣는 것이 가능한."
운현은 옆의 주전자를 들어 인벤토리에 넣었다. 마치 마술사의 마술처럼 그가 들고 있던 주전자가 사라지자 여인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 그런데 그거 무제한이에요?"
"내가 알기론 그래. 넣고 다니면 무게도 안느끼고."
운현이 다시 주전자를 꺼내며 말하자 잠시 생각하던 미야와 바제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까지 무거운 짐 안들고 다녀도 된다는 거였잖아!?"
"이제부턴 네가 들고 다녀!"
"아, 알았어. 안그래도 그것때문에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거잖아. 화 내지 말라고."
바제트와 미야가 버럭 화를 내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처음부터 이것을 밝혔더라면 좀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을텐데.
"그래도 나도 짐 들고 다녔잖아. 우리 용서해주자."
"네가 말하면 안돼지! 네가!"
"끙... 화살 들고다니는 것도 힘들었는데 잘 됐네. 마법 주머니 무게 감당하는 것도 힘들었다고. 자. 여기."
"그래. 야. 이번 기회에 나도 좀 편하게 들고 다니자."
운현이 모두의 짐을 인벤토리에 넣어주자 미야와 바제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이정도면 강력한 힘인데? 짐을 들고 다니지도 않아. 레벨이 오르면 다른 직업만큼 힘을 쓸 수 있어. 또 없어?"
"어... 하나 있어."
"그거 혹시... 너 우리랑 자고 나면 갑자기 머리 잘굴리고 무표정하게 되는 그거 아냐?"
미야는 손가락을 튕긴 후 물었다. 다른 여인들 역시 비슷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인 후 기대감에 가득 찬 눈길로 물었고 운현은 피식 웃었다.
"맞아. 근데 다들 눈치챘어?"
"당연히 눈치채지. 하기 전에는 그렇게 부드럽게 안아주다가 끝나자마자 그렇게 냉정해지면 누구라도 눈치챌걸?"
"으음... 안걸린 줄 알았는데. 그래서 나름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그런 거라고."
"여자들만의 촉이죠. 그래서. 그건 뭐에요?"
"나도 이게 왜 발동되는 건지는 모르겠어. 으으음... 그 뭐라고 해야 하나. 현자의 시간이라는 스킬인데. 내가 만족할 만큼 사정하고 나면 매번 이게 걸리더라고. 걸리고 나면 지력이 상승하고 냉철한 이성이라는 상태이상에 빠져. 너희들이 본 건 그 상태이상에 빠졌을 때의 나일거야."
그의 말에 헤스티아는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혹시... 그때 운현씨가 다른 사람이 되거나 그런 건 아니죠?"
"응? 아냐. 그 상태가 되면 그냥 머리가 좀 팽팽 돌아갈 뿐이지... 그리고 좀 피도 눈물도 없어지는 것 같고."
비밀 유지를 위해 엄한 사람을 죽이려고 했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운현이 떨떠름히 말하자 헤스티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베시시 웃었다.
"다행이다... 만약 운현씨가 다른 사람이 된다면 굉장히 슬플거에요."
"음. 아무리 네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다른 남자와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알몸을 보이는 것조차 싫다고."
"나 역시 마찬가지야. 내 인연은 너야. 네가 다른 사람이 된다면...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만."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운현의 설명에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녀들의 모습에 빙긋 웃은 운현은 양 팔을 벌린 후 말했다.
"이제 다 오픈 했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밝힌 셈이야. 어때?"
"한가지 더 있어요."
"뭔데?"
"운현씨가 왜 저희들을 사랑하지 않는거죠? 이제 저희들을 믿잖아요."
"믿기는 하지. 그리고 좋아도 해. 근데 사랑은... 글쎄. 너희들을 보면 아끼고 싶고, 만약 너희들이 다치거나 죽거나, 배신을 한다면 난 저번 이상으로 미쳐버릴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사랑이냐. 라고 물어보면 좀 의문이군. 그건 좀 기다려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가?"
"그렇게 봐주면 고맙겠군."
미야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말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고 바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가 자신과 맺어지는 것은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거."
"뭐?"
"상아 길드장님이나 필레씨에게는 말한거야?"
"걔들은 대충 알어. 아, 물론 모든 것을 오픈한 것은 너희가 처음이야."
그의 말에 여인들은 히죽 웃었다.
163====================
Run
"어이구... 힘들다."
사흘간 던전에서 생활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식량이 많고 짐을 들고 다니지 않는데다가 전투를 하며 쌓인 흥분도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다들 초췌한 얼굴로 던전에서 나왔을 때 필레가 운현을 반겼다.
"별 일 없었지?"
"응? 어. 응. 별 일은 없었지."
"레벨 많이 올렸어?"
"후후. 이제 140이야. 정산해줘. 코어는 모두 경험치로 바꿔주고."
마석이 가득 담긴 주머니를 넘기며 운현이 말하자 필레는 그 무게에 방긋 웃었다.
"정말 이 속도면 금방 길드원이 될 수 있겠다. 아. 헤스티아씨랑 미야씨랑 바제트씨는 어때요? 길드원이 되실 생각이 있나요?"
"뭐 운현이 한다면."
"저도 괜찮아요."
"난 조금 생각 해볼게. 족장님에게 물어봐야 하거든."
바제트와 헤스티아가 느긋하게 대답한 것에 비해 미야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미뤘다. 그것에 운현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미야는 쓰게 웃었다.
"묘족의 젊은 사람들은 별로 없거든. 길드원이 된다면 던전 도시에서 살아가야 할텐데 그것에 대해서 족장님과 상의를 해야해. 아마 반대는 하지 않으실 것 같지만 말야."
"그럼 다행이네."
"후후후... 그래요. 미야씨는 묘족이셨죠? 길드원이 되신다면 묘족에 대한 지원까지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 묘족의 족장님도 오히려 찬성하실 것 같네요. 아. 그리고 운현."
"응?"
"이미 초보 모험가라고 하긴 뭐하지만. 너 모험가 교육 안받았잖아. 오늘 오후부터 시작이니까 꼭 들어."
"아... 맞다."
초보 모험가들을 위한 교육을 받지 않았던 운현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동료들을 보았다.
"어떡할래? 모두 받을 필요 없이 한명만 받아서 가르쳐주면 될 것 같은데."
"너는 어쩔건데?"
"난 받을거야."
바제트의 질문에 운현은 필레를 보며 말했다. 그녀가 빙긋 웃자 운현은 볼을 긁적거렸다.
"아무래도 파티 리더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좀 그렇잖아. 피곤하면 쉬도록 해."
"흐음... 그럼 둘씩 나눠서 가는게 어떨까요? 내일 바로 던전에 들어갈 것 아닌가요?"
"응. 탄력 받은김에 바짝 달려야지."
바제트가 쓸 은화살도 떨어졌고 함정 카드를 만들 재료도 얼마 없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구해와야 했기에 헤스티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저랑 바제트씨가 다녀올게요. 사와야 할건 뭔가요?"
"어? 괜찮겠어?"
"괜찮아요. 그렇죠? 바제트씨?"
헤스티아가 뒤로 물러나자 바제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끙. 어쩔 수 없지. 내 화살도 사야 하니까 말야."
"그럼 시간을 아낄 수 있어서 좋네. 일단 사흘치 식량. 그리고 성자의 눈물, 기름, 강철 실, 그리고 간식거리 정도? 그 외에 난 더 필요한 거 없어. 미야. 너는?"
"붕대랑 힐링포션이 필요한데. 매번 바제트에게 힐링을 요청할수도 없으니까 말야. 에... 그리고..."
"그냥 적어줘."
미야가 생각을 하자 바제트는 한숨을 내쉬고 종이와 펜을 넘겼다. 운현과 미야가 필요한 물품을 적어 넘기자 헤스티아와 바제트는 웃으며 길드 회관에서 나갔다.
"교육 잘 받아요!"
"우리한테도 가르쳐줘야 해!"
"알았어."
그녀들을 배웅한 운현은 다시 필레에게 시선을 돌렸다.
"운현."
"응?"
"동료 분들도... 알아?"
"응? 아아... 응."
운현이 가진 특수한 힘이 자신만 알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던 필레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런 그녀를 보며 미야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그거 말고도 더 아는게 많아요. 우리는."
"우우우우운혀어어어어언!"
누가 탱커 아니랄까봐 도발은 잘한다. 단 한마디로 필레의 심기를 건드린 미야는 싱글거리며 운현을 보았고 필레는 약간 화가 난 듯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나한테도 말해줘!"
"비밀은 원래 숨기라고 있는..."
"진짜 이러기야!?"
필레가 눈물을 머금고 째려보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밝히긴 밝힐 생각이었다. 그는 빙긋 웃은 후 손을 뻗어 필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걱정 말려무나. 친구야. 나중에 시간나면 너에게도 꼭 말해줄테니."
"뭘 말해줘?"
"깜짝이야! 넌 또 언제왔냐?"
자신의 뒤에 서서 뚱한 얼굴로 운현이 필레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지켜보던 상아는 목을 몇번 비튼 후 차분히 말했다.
"방금."
"던전 돈다고 하지 않았어? 꽤 오래 있을거라고 들었는데..."
"스케쥴을 잘못 잡아서 말이지. 오늘 강의는 나랑 펠리시아가 하니까 던전에서 사냥하다 부랴부랴 올라왔어. 그런데 뭘 말해주겠다는거야?"
"아아... 그거."
상아의 질문에 운현은 빙긋 웃은 후 말했다.
"내가 숨기고 있는 것들."
"...그걸 필레에게 말해준다라... 그럼 나는?"
"엉? 넌 거의 대부분 알고 있지 않나?"
"등신아! 그걸 네가 네 입으로 말해주는 거랑 내가 알아낸 거랑 같냐!?"
상아는 짜증을 내며 운현의 발등을 콱 밟았다. 그것에 운현이 고통스러워하며 폴짝폴짝 뛰자 미야와 필레는 상아를 노려보며 외쳤다.
"뭐하는 거에요!?"
"우리 운현한테!!"
"...하아. 우리 운현이래. 아이고 서러워서 살겠나. 누군 누구씨를 위해서 예정에도 없는 던전 뺑뺑이를 돌고 있는데. 으아~!! 서러워서 살겠나!"
상아가 자신에게 줄 선물을 위해서 던전을 돌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린 운현은 그녀의 짜증에 한숨을 내쉬었다.
"야야. 알았어. 너한테도 말해줄게. 어차피 너랑 필레한테도 말해주려고 했었어."
'이거 비밀을 오픈하니 이렇게 피곤해지는구만...'
"그거 진짜지?"
상아가 의심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자 운현은 그녀의 양 볼을 잡아 쭉 늘렸다. 말랑말랑한 찹쌀떡같은 볼이 쭉쭉 늘어나자 운현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으어 오으 아아 아..."
"뭐라는거야?"
"그럼 오늘 나랑 잘..."
"그냥 입 다물고 있어라."
운현은 상아의 말을 끊어먹고 필레에게 말했다.
"필레. 교육받으려면 신청해야 하는 서류같은 건 없어?"
"여기. 미야씨도 받으실거죠?"
운현과 미야에게 한장의 종이를 준 필레는 미야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 그러고보니 미야씨는..."
"에... 운현. 내것도 써줘."
"알았어."
미야가 공용어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운현은 그녀의 서류도 대신 작성해 필레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은 필레는 자리에서 일어나 운현과 미야를 데리고 길드 회관의 대회의실로 이동했다.
이미 꽤 많은 모험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에 운현은 짧게 혀를 찼다.
"이거 진짜 중요한 교육인 것 같은데..."
"당연하지.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인데 안받는게 이상한거라고."
"지금이라도 받으니까 다행이네. 아무데나 앉으면 되는거야?"
"응."
아무데나라고 해봤자 이미 앞과 중간쪽 자리는 만석이었다. 하는 수 없이 미야와 함께 뒷편의 구석진 자리에 앉게 된 운현은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들 저러지..."
"네 장비를 보고 그러는거지. 다들 레벨 10 안팍의 초보 모험가들이라고."
레벨 차이만 봐도 열배가 넘었다. 운현의 나이트호크 세트나 미야의 전신 슈트는 초보 모험가들에게는 꿈의 장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신기한 듯 운현들을 바라보았고 그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운현의 볼을 쿡 찌르며 필레는 빙긋 웃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교육 잘 받아."
"알았어. 걱정 말라고."
자리에 놓여져 있는 종이와 필기구를 가볍게 챙긴 운현이 웃으며 답하자 필레는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회의실 앞문이 열리며 상아와 펠리시아가 들어오자 운현은 펜을 잡고 필기를 준비했다.
"쿠우..."
"야야. 벌써 자려고 하면 어떡하냐?"
옆에 앉아 있던 미야가 고개를 숙이고 대놓고 졸려고 하자 운현은 당황하며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것에 미야는 울상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으으... 난 이런 교육에는 약하단 말야."
"끙... 그래도 좀 버텨봐."
"알았어..."
하지만 자신이 없는지 미야의 귀는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손을 뻗었다.
"읏...!? 너, 너 뭐하는..."
운현의 손이 자신의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오자 미야는 잠이 확 깬 얼굴로 그를 보며 속삭였다. 그런 그녀의 말을 모른 척 하며 앞을 보던 그는 더더욱 깊숙한 곳에 손을 넣고 그녀의 음부 근처를 톡톡 친 후 말했다.
"너 자면 여기서 더듬는다."
"...그, 그냥 방에서..."
"교육은 들어야지."
"거기 뒤에! 뭐하는거야!?"
"아. 죄송합니다."
상아가 속닥거리는 운현과 미야를 보며 소리쳤다. 지금은 교육장의 강사이니 운현은 그녀에게 사과한 후 미야의 허벅지에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
"집중해."
"으으으..."
운현의 손이 떨어지자 아쉬움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미야는 눈물젖은 눈으로 운현을 보았다. 하지만 운현은 그저 앞에만 집중할 뿐 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교육을 담당하게 된 펠리시아입니다. 이쪽은... 다들 아시겠지만 다시 설명해드릴게요. 현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인 상아님 입니다."
"와아아!!"
"길드장님!!"
'상아 인기가 대단하네...'
펠리시아가 상아를 소개하자 모험가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그들의 환호에 상아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린 후 입을 열었다.
"오늘의 강의는 모험가들이라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사항, 그리고 던전에서 지켜야 할 규칙, 그 외에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금기에 대해 설명할 예정입니다. 오늘의 교육이 이제 던전에 막 향하게 된 모험가분들의 피와 살이 되어 생존확률을 높여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럼,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상아의 인삿말이 끝나자 펠리시아는 준비한 차트를 펼치며 설명을 시작했다. 던전 도시의 시작과 모험가 길드의 역사에 대해서부터 그녀의 말이 시작되자 옆자리의 미야는 그것만으로도 버티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꾸벅였고 운현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물 상자를 발견하면 도적 직업이 아닌 이상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실패시에도 미믹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펠리시아의 설명이 끝나자 모험가 중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보물 상자를 가져오면 무조건 길드에서 열어야 하는 건가요?"
"물론 그런 건 아니랍니다. 파티원 중에 도적이 있다면, 그 도적이 자물쇠 따기 스킬을 익힌 상태라면 그 자리에서 도전해 볼 수 있겠지요."
"도적이 실패하면요?"
"도적의 자물쇠따기가 실패하더라도 미믹이 나온 적은 없답니다."
다른 모험가의 질문에 펠리시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164====================
Run
"그 외에 질문이 따로 있으신 분들 계신가요?"
"파티를 구하지 못하는 모험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한 모험가가 쭈뼛거리며 손을 들고 말하자 펠리시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본적으로 혼자서 던전에 들어가는 것을 길드 차원에서는 말리고 있습니다만... 혼자를 고집하는 분이 안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혼자 다녀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펠리시아의 대답에 그 모험가가 웃으며 묻자 상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담담히 말했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고, 또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요."
상아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차분히 모험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험가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던전을 탐험하는 직업이랍니다. 만약 구조 요청을 한다면 길드에서는 최선을 다해 찾아가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100% 구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1계층의 경우 90%의 확률로 구조가 가능하지만 계층이 높아지면 높아질 수록 구조 확률은 낮아집니다. 강한 모험가라 하더라도 몬스터에게 몰려 죽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니만큼 혼자 다니는 것을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지 말라면 꼭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길드에서는 제제하지 않습니다. 일례로... 저기 뒷쪽에 있는 남자분."
"어... 저요?"
운현이 손을 들어 올리자 상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몇번 혼자서 던전에 들어간 적이 있지 않나요?"
"네."
"그때 길드에서 말린 적이 있나요?"
"아뇨."
늑대 발톱을 구하러 간다는 명목 하에 몇번 혼자서 던전을 다닌 적이 있었던 운현은 떨떠름히 말했고 상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질문한 모험가에게 말했다.
"여러분 중에 클랜에 가입하신 분들이 있으실지도 모르고, 또 특수한 직업을 보유하고 계신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힘을 숨기기 위해서 홀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을지도 모르지요."
"......"
"물론 그것에 대해서 절대 강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명심해주세요. 모험가가 된 이상 자신의 목숨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것을."
상아의 말이 끝나자 질문을 했던 모험가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더 질문이 없는 듯 하자 펠리시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이상으로 교육을..."
"저기!"
"네."
"그... 질문은 아닌데요..."
"네. 괜찮습니다."
검사로 보이는 그녀는 상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상아님께서 가지고 계신 광검을 실제로 보고 싶습니다. 전 상아님이 광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그것에 반해서 모험가가 되었거든요."
"그렇다는데... 괜찮겠어요?"
"뭐, 상관없습니다. 펠리시아. 밖에서 벨 만한 것 좀 가지고 들어와줘."
"꺄~!!"
'저 광검이 진짜 물건은 물건인가보네.'
상아가 허리춤에서 광검을 꺼내자 모험가들은 신기해하며 그녀의 광검에 집중했다. 밖으로 나간 펠리시아가 커다란 나무 상자와 반쯤 우그러져 못 쓰게 된 플레이트 아머를 들고 들어 오자 상아는 광검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주웅!"
낮은 진동음과 함께 광검에서 빛이 솟아났다. 긴 검날이 만들어지자 모험가들은 감탄했고 그녀는 그것을 가볍게 까딱인 후 말했다.
"주왕!
까딱거리던 광검이 빠르게 움직여지며 플레이트 아머를 베었다. 단 일검에 플레이트 아머가 두쪽나버리자 모험가들은 박수를 쳤고 상아는 광검의 날을 해제한 후 말했다.
"이게 광검입니다."
"그 광검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도 광검을 쓰고 싶습니다!"
"흐음... 일단 재료를 모아야 합니다. 재료로는 아까 말씀드린 마인의 코어가 필요하고 그 외에도 다른 재료들이 필요하지요. 광검을 만들기 위한 방법은 극비이므로 자세한 것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만. 광검을 사용하기 위한 자질이 갖춰진다면 제가 몇가지 테스트 후 광검을 만들 수 있는 퀘스트를 드릴 것입니다. 그 퀘스트를 클리어하신다면 광검을 쓰실 수 있게 됩니다."
"그 퀘스트에 통과한 사람은 몇명이나 있나요?"
"어디보자... 지금까지 세명이군요. 길드의 제니스씨와 필레씨, 그리고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명."
'난가?'
상아가 자신을 보며 빙긋 웃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을 위해서 던전을 돌고 있었다더니 광검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나 싶었던 운현이 뿌듯해하는 동안 모험가들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제니스님과 필레님의 무기를 본 적은 있지만 광검을 쓰던 것을 본 적은 없는데요?"
"아... 광검을 만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과 광검을 쓰는 것은 달라요. 광검을 쓰기 위해서 필요한 자질은 검에 대한 높은 이해, 그리고 높은 마력이 필수입니다. 광검은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을 소모하거든요. 어중간한 레벨과 마력으로는 제대로 된 검날을 십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찰거에요."
"광검을 다루는 것이 그렇게 어렵나요?"
다른 모험가의 질문에 그녀는 부드럽게 웃은 후 그녀를 불렀다. 핑크색 긴 머리의 고양이 귀 여인이 꼬리를 흔들며 앞으로 나오자 상아는 그녀에게 광검을 넘겨주었다.
"에!?"
"한번 마력을 넣어보세요. 가능하시죠?"
"네!!"
감격한 얼굴로 광검을 잡은 그녀가 마력을 넣자 과도보다 작은 검날이 광검의 자루에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자 상아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때요?"
"어, 어렵네요. 마력이 쭉 빠져나가는게..."
"저도 해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저도요!"
광검을 실제로 만져볼 수 있다는 것에 모험가들이 손을 번쩍번쩍 들었다. 그들을 달래며 세명만 더 불러 광검을 만져보게 한 상아는 사람들이 흥분한 얼굴로 자신을 보자 부드럽게 웃었다.
"레벨 300에 도달하시고 저에게 오시면 자질을 판단해드리겠습니다."
"300이 되면 뭐가 바뀌나요?"
"네. 300이 되면 그때부터는 고급 모험가라고 불리게 된답니다. 이것은 저희 모험가 길드 뿐만 아니라 용병 연맹, 그리고 제작자 연합, 상인 조합,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대체적으로 300을 전후로 하여 특별한 스킬들을 익히게 되더군요."
"아하..."
"더 이상의 질문이 없으시다면 교육은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추가적인 질문이나 요청사항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길드 사무소를 찾아주세요. 저희들은 여러분들을 서포트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모험가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펠리시아는 교육을 종료시켰다. 교육이 끝나고 모험가들이 나가자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쉰후 미야를 톡톡 쳤다.
"미야. 일어나."
"으으으으..."
"내가 졌다..."
하도 자서 마지막에는 슈트의 지퍼까지 열어 직접 애무를 했는데도 미야는 애무만 끝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아버렸다. 그녀를 깨우다가 교육 내용을 놓치게 생긴 운현은 결국 혼자서 교육을 듣게 되었다.
"그냥 내가 모두에게 설명해줘야겠군."
교육의 내용은 상당히 알찼다. 공격의 속성, 각 계층의 대표적인 몬스터들에 대한 약점이나 공략법. 그 외에 대표 직업군별 전투법이라든가 야영시 주의사항, 흥분 억제제의 취급법 등 던전에 들어가는 모험가들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로 가득 차 있었던 교육을 이제야 듣게 된 것에 운현은 아쉬움을 느꼈다.
'앞으로는 게시판을 잘 보도록 하자.'
교육 내용 중에 길드의 공지사항이나 이슈 등이 길드 회관의 게시판에 있으니 매일 확인해달라는 말을 떠올린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필기한 종이를 챙기려고 할 때 단상에 있던 상아가 터덜터덜 운현에게 걸어왔다.
"어땠어?"
"잘하던데? 한 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듯..."
"후후후... 내가 이정도 하지. 교육을 몇번이나 했는데."
"다음에는 교육 안해?"
"음... 고급 모험가가 되면 하긴 하는데 듣는 사람은 별로 없어. 일단 그쯤 되면 대부분 클랜에 소속되서 300레벨이 되기 전에 클랜 내의 교육을 들으니까. 너와 네 동료들도 250레벨이 되면 길드원으로 데려올거고 길드원이 된다면 바로 교육이 시작될거야. 그러니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을걸."
"그렇구만... 아. 아까 말한 이름을 밝힐 수 없다는 사람은 나야?"
"응."
"자질 검사도 안해봤는데?"
"너라면 지금도 나 정도로 검날을 만들어내는 건 가능할걸?"
상아는 피식 웃은 후 그에게 광검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은 운현이 광검에 마력을 강하게 불어 넣자 광검의 날이 급속도로 커져갔다.
"천천히. 너무 많이 넣었어."
창 수준으로 검날이 길어지자 상아는 차분히 말했고 운현은 그녀의 말대로 광검에 불어넣던 마력을 줄여나갔다. 천천히 광검의 날이 줄어들어 상아가 쓰는 정도로 만들어지자 그녀는 빙긋 웃은 후 말했다.
"응. 이 상태로 한시간 이상 유지할 수 있으면 괜찮아. 마력량은 어때?"
"흐음... 지금도 십분은 여유있게 쓰겠는데?"
높은 지력 덕분에 MP가 늘어나 광검을 유지하는 것이 전보다 어렵지 않았다. 운현은 광검의 날을 해제한 후 그녀에게 돌려주었고 상아는 빙긋 웃은 후 말했다.
"마력 소모가 좀 있긴 한데 꽤 좋은 무기야. 쓸 수 있다면 쓰는게 좋지."
"다른 사람들은 왜 안써?"
"마력이 부족해서. 너나 내가 좀 특이한 거라고."
필요 이상으로 지력을 많이 올린 망캐라서 광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운현은 울어야 할지 말아야 할 지 고민이 되었다. 그런 그를 향해 피식 웃은 상아는 운현의 옆자리에서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나는 미야를 가리켰다.
"동료들에게도 잘 설명해줘.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시간 비워두고."
"아아. 알았어."
교육의 여파로 도저히 못참겠는지 미야는 졸린 눈을 비비며 방으로 올라갔다. 홀로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던 운현은 헤스티아와 바제트가 물건들을 들고 낑낑거리며 들어오자 얼른 나가 그것을 받아주었다.
"우와. 무거웠겠네."
"어휴... 힘들었어요."
커다란 가방 두개와 주머니 두개를 들고 온 그녀들이 웃으며 말하자 운현은 주변을 둘러본 후 그것들을 얼른 인벤토리에 넣었다. 겨우 무게에서 벗어나게 된 그녀들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자 운현은 시원한 음료를 시켜주었다.
"운현!"
"응? 오. 아르 아니야. 오래간만이네."
"이야~! 벌써 2계층에 들어갔다면서?"
운현이 동료들과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나타난 아르는 검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테이블 위에 상자를 올려 놓았다.
"까줘!"
"보물상자? 오... 이번엔 어디서 구한거야?"
"오크 로드를 잡았지. 너 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도 엄청 사냥하고 있다고. 새로운 동료도 영입했고. 인사해."
"안녕하세요. 마이엘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짙은 푸른색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검은 사제복의 여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녀에게 마주 인사한 운현은 보물상자를 톡톡 친 후 물었다.
"보수는?"
"다른 때랑 똑같지. 어때?"
"좋아."
운현은 락픽을 꺼내 자물쇠를 따기 시작했다. 아까의 교육을 보았던 초보 모험가들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운현이 상자를 여는 것을 지켜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물상자가 열리자 아르는 기대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는 건 내가 할게."
"그러게나."
어차피 1계층의 보물상자는 미믹을 만드는 용도로 밖에 쓰지 않은 운현은 별다른 관심을 끊고 그녀에게 보물상자를 주었다. 그것을 받은 아르가 보물상자를 열기 전 마이엘에게 말했다.
"축복 좀 줘. 축복 좀."
"언제나 행운이 가득하시길."
마이엘이 손을 머리 위에 올린 후 주문을 외우자 아르의 몸에서 녹색의 빛이 퍼져나갔다. 신성 마법은 본 적이 없었던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르는 마이엘의 손을 잡고 히죽 웃었다.
"파르티 교단의 사제가 아니고 지방의 작은 교단의 사제라는데... 힐량도 다른 사제들보다 높고 거기에 축복까지 받으니까 힘이 넘쳐나더라고. 물론 좀 더 피곤하긴 하지만 말야. 감당하지 못할 정도도 아니고... 우리가 이렇게 빨리 레벨업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마이엘 덕분이지. 후후후... 조금만 기다리라고. 자... 그럼 연다."
아르가 보물상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 그녀는 탄성을 내질렀다. 보물 상자 안에 있는 것은 수북한 금화였다. 척 봐도 삼, 사십개는 넘어보이는 금화에 아르가 기뻐하자 운현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
"이야! 대박이네?"
"축복을 받고 상자를 열면 이렇게 대박이 나오더라고! 흐흐흐흐! 역시 마이엘이 최고라니까!"
"다 주님의 은총 덕분이지요."
부드럽게 웃으며 아르의 포옹을 받아 준 마이엘은 운현에게 웃으며 말했다.
"운현님도 축복을 내려드릴까요? 이렇게 도움받게 된 것도 인연인데..."
"아, 오늘은 전투를 할 생각이 없거든요. 상자 깔 일도 없고. 나중에 던전에서 만나면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