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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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돌아갈거야?"

"난 시장에 좀 가보려고. 왜? 같이 갈래?"

"그러자. 나도 딱히 할 일은 없었거든."

"그나저나 너 옷 안불편해?"

평소에 볼 수 없는 상아의 드레스 차림이 마음에 들긴 했지만 꽤나 불편해보인 운현이 묻자 상아는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지. 어차피 시장 가는 길에 길드가 있으니까 들러서 갈아입고 가면 안될까?"

"안될거야 없지."

아직 해가 지긴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헤스티아와 약속한 것은 밤이니 상아와 좀 더 어울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생각한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상아는 피식 웃었다.

"누나랑 그렇게 같이 다니고 싶었어?"

"야. 꺼져. 나 혼자 갈거야."

"으아아~! 같이 가아~"

상아와 티격태격 장난을 치며 길드회관까지 간 운현은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터덜터덜 시장으로 향했다. 드레스도 좋고 틀어 올린 머리도 좋지만 역시 망토를 두르고 몸에 찰싹 달라붙는 슈트를 입은 상아의 모습이 더 익숙하다. 그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린 후 능글맞게 웃었다.

"아항~ 누나한테 새삼 반했구나?"

"응."

"어!? 어어... 그, 그래? 어이구~ 귀여운것 솔직하기두 하지~ 그럼 오늘 누나랑 야한 짓할까?"

"그럴까..."

"...진짜?"

운현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하자 상아는 움찔한 후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그 질문에 운현이 피식 웃자 상아는 장난스레 화를 내며 그의 옆구리를 푹 쳤다.

"이게!?"

"이상하네. 피스나랑 있을때는 먹혔는데."

"하하하..."

"끙... 근데 뭐 사려고?"

"아. 강철 실. 힐더크의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이제 그거 받기로 했어. 슬슬 오크를 잡으러 가야하는데 좀 강력한 함정을 만들 수 있으면 더 빠르게 잡을 수 있겠지."

"오오... 모험가가 된지 몇일이나 지났다고 벌써 오크를 잡으러가? 음음. 훌륭하다. 그 자세로 빨리 다음 계층으로 넘어가도록."

"시장 선거 도우란 얘기만 안했다면 지금쯤 한참 던전에서 레벨업하고 있었을 텐데..."

"그, 그건 미안. 그 대신 보상으로 2계층에서 구할 수 있는 코어들을 줄게. 그걸 쓰면 레벨업이 빨라질거야. 어때? 시장 선거를 돕는 걸 퀘스트로 해서 보상으로 주면 되니까."

운현이 투덜거리자 상아는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시장선거는 운현에게 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운현이 시장 선거에 개입하는 이유는 자신이 이계인임을 밝히지 말라는 것과 상아의 협박 때문이었고, 이제는 꽤나 운현과 친해진 상아는 그의 투덜거림에 미안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대신이라고 할 만한 보상을 그녀가 제시하자 운현은 팔짱을 끼고 물었다.

"몇개나 주려고?"

"40개 줄개. 지금 네 레벨이라면 2개당 1레벨을 올릴 수 있을거야. 어때?"

"그걸 파티원들과 나누면... 5레벨 올라가겠군."

"응. 괜찮지?"

"이왕 쓰시는거 좀 더 쓰시죠?"

"끙... 그럼 50개."

"그정도라면. 받아들이지. 그런데 고작 2개만으로 1레벨이 올라? 이거 차라리 코어를 사는게 낫지 않을까...?"

"코어가 얼마나 비싼데? 2계층의 코어 중에 제일 싼게 하나에 50골드야."

"...야 이거 그냥 돈으로 받으면 안되냐?"

"크크크크~ 안돼~ 빨리 레벨업 해. 난 너와 네 파티원들을 모두 길드원으로 끌어들이고 싶으니까."

"나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나머지는 왜?"

운현의 질문에 상아는 피식 웃었다.

"한명은 화염 마법사. 던전 내에서 그렇게 쓸모가 없다고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거든. 잘만 쓰면 어떤 마법사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어. 펠리시아도 화염 마법사고. 그리고 미야라는 격투가. 탱킹과 딜링을 할 수 있는 격투가 역시 잘만 키우면 어지간히 범용성 있게 움직일 수 있어. 그리고 드루이드는 말할 것도 없고. 어중간하기는 하지만 그 어중간함도 파티에 꽤 도움이 된다고."

"헤에..."

생각외로 고 평가를 받고 있는 자신의 파티원들에 운현은 감탄했다.

"그런데 길드원이 되려면 250이상 레벨을 올려야 하는 것 아냐? 좀 깍아줄거야?"

"그럴리가 있나."

택도 없는 소리 하지말라는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며 상아는 그의 볼을 꼬집었다.

"까불지 말고 열심히 던전 돌아. 길드원이 되기 전까지 길드에서 특정 모험가만 지원해 줄 수 없으니까."

"끙. 내가 길드에 들어가면 뭐 해줄건데?"

"일단 너희 파티를 해제시키고 각자 최소 4계층까지 돌아다닐 수 있도록 훈련시킬거야. 그리고 널 길드 간부로 만들어서..."

"만들어서?"

"난 좀 놀고 먹어야겠다. 너랑 펠리시아에게 다 맡기고 쉬어야지."

"......."

상아의 말에 운현은 인상을 팍 구겼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깔깔 웃던 상아는 어느새 힐더크의 대장간 앞에 도착하자 그에게 말했다.

"자. 어서 사가지고 와."

"같이 안들어가고?"

"음. 난 여기서 기다릴게."

상아가 손을 흔들며 배웅하자 운현은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의 모루에서 망치질을 하던 힐더크는 여전히 노출 많은 복장이었다. 그녀가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출렁이는 가슴에 그가 행복해할 때 인기척을 느낀 힐더크는 운현을 발견하고 밝게 웃었다.

"오오~ 어서와~"

망치를 내려놓고 달려 온 힐더크는 운현을 끌어안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가 자신을 끌어안자 가슴에 닿는 탱탱한 가슴의 촉감에 운현은 남성이 벌떡 서는 것을 느꼈다.

"후후후... 하고 싶지? 잠깐만 기다려줄래? 이것만 금방 만들고..."

"아, 아니 하고 싶긴 하지만 지금 밖에서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 말야. 오늘은 강철 실을 사러 왔어."

"그래? 아쉽네."

"그보다 연습은 했어?"

"응. 후후후... 네 생각을 하면서 많이 했지."

힐더크는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쓱 쓸어만진 후 긴 혀를 내밀어 두툼한 입술을 핥았다. 당장이라도 저 입술 안으로 남성을 밀어 넣고 싶어진 운현이었지만 운현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아를 생각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혼자 올 걸 그랬나?'

"잠깐만 기다려. 가지고 올테니까."

"몇개 있어?"

"지금은 열개밖에 없어. 9골드만 줘."

"으... 비싸네."

"어쩔 수 없다고. 자."

힐더크가 손을 내밀자 운현은 거금 십골드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은 힐더크가 안으로 들어가 작은 상자를 가져오자 운현은 안의 강철 실을 확인한 후 가방에 넣었다.

"다음엔 언제 올거야?"

"글쎄? 빠른 시일 내에 오도록 할게."

"후후후후... 언제든지 환영이야."

힐더크가 자신의 양물을 쓱 만지작거린 후 풍만한 가슴을 쓱 내밀자 운현은 순간 이성을 잃을 뻔 했다. 간신히 그것을 참고 밖으로 나온 운현이 숨을 몰아쉬자 상아는 그의 바지 앞섬을 본 후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말했다.

"거유가 좋으신가봐?"

"거유 좋지. 아니 난 가슴은 다 좋은데."

"욕망에 충실하구만."

"그게 바로 남자지. 자. 그럼 갈까? 시장 구경이나 하자."

상아의 머리를 마구 헤집은 후 운현은 앞서 걸었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빤히 바라보던 상아는 살짝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아와 함께 시장을 구경하며 운현은 주변의 분위기를 살폈다. 자신의 생각대로 전쟁이 대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치고는 시장의 분위기는 꽤나 괜찮았다.

"이거 얼마에요?"

"30실버에요. 하나 드릴까요?"

"아, 아뇨. 이거 저번달에는 얼마였어요?"

"음... 29실버 50쿠퍼 정도? 그렇게 가격 차이는 없어요."

"감사합니다. 밀가루 대신 이거나 주세요."

밀가루를 사지 않고 사과 두알을 산 운현은 하나를 상아에게 주었다. 사과를 먹으며 시장을 다니던 운현은 시장의 구석에 있는 작은 옷가게에서 점원 둘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시즌 지난 남자 옷이 뭐 이리 많아?"

"이거 그냥 팔면 안돼나..."

"재고랜다. 재고. 창고에 넣어둬."

수인족 여인 둘이 상자를 들고 나오는 것을 본 운현은 그녀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힐끔 상아를 보았다. 상아는 무기점 앞에서 무기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에게 시선을 주는 이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운현은 빠르게 스틸을 걸어 그 상자를 인벤토리로 옮겼다.

"운현! 이것 봐봐! 이거 어때? 이 단검 너한테 잘 맞을 것 같은데..."

"...뭔가 내용이 이상하지만. 이거?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별로 안좋은 것 같은데?"

척 봐도 자신의 단검보다 날이 나쁘다. 운현이 떨떠름히 말하자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린 후 운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단검 좀 보여줘."

"자."

상아에게 자신의 단검을 넘긴 운현은 그녀가 단검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살펴보자 침을 꿀꺽 삼켰다. 사교의 인신공양이 있었던 장소에서 들고 온 단검이다. 만약 그녀가 눈치챈다면 어떡하지? 라고 생각했던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걸려도 상관없겠지?'

물론 귀찮은 일은 있지만 상아는 자신이 이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몇백년 전에 있었던 사교의 의식과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가 더 잘 알것이기에 운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거 꽤 괜찮네?"

"어? 진짜?"

"응. 100레벨이 되기 전까지는 그냥 이거 써도 괜찮겠다."

"우와... 그정도야?"

"탄성도 좋고 경도도 좋고. 균형도 잘 잡혀 있고. 물론 코어를 활용한 더 좋은 무기들은 얼마든지 있지만 100레벨 전에 그런 무기를 쓰는 건 사치야. 그냥 이거 쓰도록 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다른건 몰라도 전투에 있어서는 상아의 경험이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운현은 군소리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돌아갈까?"

"벌써?"

"아니 더 할 것도 없고."

"그런가..."

상아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런 그녀를 보며 운현은 싱긋 웃었다.

"왜? 더 놀고 싶어?"

"음...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좋아. 그럼 더 구경이나 할까?"

"좋아!"

상아와 시장을 구경하며 이런 저런 군것질거리로 배를 채우고, 다리 근처에서 노닥거리다가 길드로 돌아온 운현은 어느새 해가 지고 있는 것에 감탄했다.

"시간 잘 간다."

"그러게 말야. 으으으으... 이제 시장 선거 때문에 골치아플 일 생각하니까 우울하기 짝이 없네."

"하아. 나도 우울하다. 진짜로. 내가 왜 이짓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하하하!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하라고!"

"그걸 굳이 벌써 할 필요가 있으려나. 아무튼 먼저 들어가. 난 좀 갔다올 곳이 있으니까."

"어디가려고? 같이 갈까?"

운현의 말에 상아는 반색하며 물었지만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반응에 상아는 풀죽은 얼굴로 타박타박 길드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와 헤어진 운현은 곧장 길드회관 뒤의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간 후 인벤토리에서 아까 훔친 상자를 꺼내었다.

"괜찮은게 있으려나..."

커다란 상자 안에는 많은 남성용 옷이 있었다. 그 옷들을 뒤적거리던 운현은 괜찮은 물건을 찾아내고는 씨익 웃었다.

"이거 좋군..."

흰색 바탕에 기하학적인 검은색 무늬가 들어가 있는 긴 망토와 비슷한 문양이 그려진 흰색 바지. 그리고 검은색 천 셔츠. 검은색 부츠. 검은 장갑. 얼굴의 반을 가리는 마스크. 그것들을 꺼낸 운현은 상자를 인벤토리에 넣고 그 옷만 따로 다른 상자에 담아 인벤토리에 넣었다.

"자... 나머지는 움직이는 것 뿐인가?"

운현은 히죽 웃으며 길드 회관으로 복귀했다. 그가 들어오자 모험가들과 길드원들은 우루루 그에게 달려갔다.

"뭐했어요?"

"진짜로 상아랑 그렇고 그런 사이야?"

"사실대로 말하시지!? 필레씨는 장난감이었던 거야!?"

"...이게 무슨."

몰려든 모험가와 길드원들 사이에서 당황하던 운현은 필레가 쓴웃음을 짓는 것에 손을 흔들었다.

"필레! 이게 뭔 일이야!?"

"그, 그게 말이지... 아하하하. 여러분! 운현이 곤란해하잖아요! 그만하세요!"

"시끄러! 운현에게 진실을 요구한다! 누구냐!? 필레냐!? 상아냐!?"

"그만하라구요!"

계속해서 묻는 길드원들과 모험가들의 질문에 운현은 황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길드회관 2층으로 도망치듯 올라갔다.

"아,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는 아니라니까요!?"

기자들에게 둘러쌓인 범죄자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가 후다닥 방 안으로 도망쳐 들어오자 마침 머리끈을 입에 물고 긴 머리를 틀어 묶으려 하던 헤스티아는 고개를 갸웃

"아무것도 아냐. 후우. 이게 뭔 짓인지..."

"에헤헤~ 그래도 들어오셨네요."

"음. 이따가 다시 나가야해."

"어딜요? 힝... 같이 안자요?"

헤스티아의 말에 운현은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깨끗한 이마에 키스하고 말했다.

"같이 잘거야. 그리고 너 나랑 하면 피곤해서 잠들잖아? 그때 갔다올거니까 걱정하지 마."

운현은 헤스티아의 따뜻한 몸을 즐기며 그녀에게 키스했고 헤스티아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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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흥분했었나보네."

꽤 오래간만에 헤스티아와 한 운현은 자신의 품 안에서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는 헤스티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 만족하지 못했지만 헤스티아는 무척 지쳤는지 그대로 곯아떨어져버렸다.

"하긴..."

끈적한 땀까지 흘리며 그렇게 열정적으로 움직였는데 피곤할만도 하지. 아마 여섯 일곱번 정도는 절정에 도달한 듯 싶었던 헤스티아를 떠올린 운현은 연결되어 있는 그녀의 계곡에서 남성을 쓰윽 뽑아내었다. 꽉 틀어막혀 있던 계곡은 약간 벌려진 채 주륵주륵 백탁액 뜨거운 액체를 흘려내었다. 그것을 보며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헤스티아의 작고 도톰한 입술을 핥았다.

"으으음..."

그가 자신의 입술을 핥자 헤스티아는 잠결에도 혀를 내밀었다. 다시 한번 짙은 입맞춤을 마친 운현은 천천히 입술을 떼어낸 후 헤스티아의 나신 위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럼 나가볼까..."

샤워를 마치고 평상복을 입은 운현은 터덜터덜 밖으로 나갔다. 이제 깜깜해진 탓인지 거리의 주변에는 가로등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넓은 길을 걸어 용병 연맹의 건물 근처로 간 운현은 용병 연맹의 용병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듯한 사람들과 험상궂은 인상에 모험가들과는 달리 노출 심한 갑옷을 입은 여인들을 본 후 싸늘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댁들에게 원망은 없지만 내 계획에 좀 말려들어줘야겠어.'

운현은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에게 신경을 쓰는 이들이 없다는 것을 보자마자 인벤토리에서 미믹을 꺼내었다.

"...촤아아아악!"

"꺄아아악!?"

"뭐, 뭐야!?"

"괴물이다! 괴물이다!!"

미믹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갑자기 상자가 나타나고, 그 상자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나오며 자신들을 공격하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미믹이 그들을 쫓고, 또 용병들이 그 미믹을 상대하기 위해 각자의 무기를 들자 운현은 조용히 하이딩을 걸고 어둠 속에 몸을 감췄다.

'하이딩이라고 해도 만능은 아니니까.'

하이딩을 건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상대가 자신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다면 최대한 은폐, 엄폐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근처의 커다란 상자 뒤에 숨은 운현은 용병들 열댓명이 모여 미믹을 상대하는 것을 보았다.

"크악!? 이런 개 씹!"

'그나마 다행이군.'

용병들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용병들은 그럭저럭 능숙하게 미믹이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2인 1조가 되어 커다란 방패로 미믹의 공격을 막으며 다른 한명이 미믹을 공격하는 방법으로 미믹을 압도해나가던 그들 중 하나가 미믹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을 때 미믹의 뚜껑이 부숴졌다.

"해치웠다!"

"촤아아악!"

"아아아악!"

뚜껑이 부숴져 더더욱 많은 검은 기운을 뿜어내게 된 미믹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근처의 용병들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공격하자 용병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목에 걸려 있는 피리를 불었다.

"삐이이익!"

"삐이이익!"

"삐익!"

"무슨 소리야!?"

용병 연맹의 건물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그 중에는 운현이 아는 얼굴도 있었다. 바로 헬하운드와 그들을 이끄는 헥토르였다. 그녀는 난장판이 된 바깥의 모습에 어처구니 없는 얼굴을 하다가 검은 기운을 물씬 뿜어내는 미믹을 발견하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저건 도대체 무슨...!? 도시 내에 몬스터가 들어왔단 말인가!?"

"헥토르님! 조심하십쇼! 강합니다!"

"촤악!"

"큭...!"

헥토르가 나타나자 미믹은 다른 이들은 무시하고 헥토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강력한 일격에 집중된 헥토르는 도끼로 그 공격을 막아내다가 헬하운드들에게 외쳤다.

"저 녀석이 나를 타겟으로 삼았다! 공격해!"

"예!"

"와아아아압!"

미믹이 헥토르에게 집중공격을 하자 헬하운드들은 안심하고 미믹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헬하운드들의 공격에 미믹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이 조금씩 부숴져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헥토르는 미믹의 공격을 쳐낸 후 공중으로 뛰었다.

"이걸로 끝내주지!"

"촤악!"

"헉!? 꺄아악!"

"꺄악!"

뒤로 스르륵 물러난 미믹이 주변에 검은 기운을 내뿜었다. 그 검은 기운에 감싸진 헬하운드들은 당황하며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녀들은 아무런 고통도 받지 못했다.

"가, 가 갑옷이!?"

"이럴수가... 비싼 갑옷인데!? 오크 코어가 들어간 갑옷이...! 으아아아! 용서 못해! 용서 못한다고!"

"아아아..."

헬하운드들의 몸을 감싸고 있는 갑옷들이 전부 사라졌다. 하의를 가리는 손바닥만한 작은 팬티를 제외하고 헬하운드들과 헥토르의 갑옷이 모두 사라지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칠 뻔 했다.

'거, 걸릴 뻔했네.'

하이딩이 걸려 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자신이 숨어 있다는 것이 밝혀질 뻔 했던 운현은 상자의 틈새로 최대한 여인들의 나신을 보았다. 갑옷으로 아슬아슬하게 가린 것도 좋지만 저렇게 나체인 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미믹의 공격을 피하거나 막으며 움직일 때마다 그녀들의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가 출렁이는 것을 보며 운현은 감탄하다가 미믹을 힐끔 보고 기겁했다.

'시발!?'

미믹의 상자는 거의 부숴지고 금방이라도 검은 기운이 폭발할 것 같았다.

'너무 쳐맞아서 부숴지려고 하는건가... 아!'

아까 전 미믹에게 공격을 당한 헬하운드 부대원의 외침을 떠올린 운현은 잽싸게 손을 뻗어 미믹을 회수했다. 스틸의 범위 안에 아슬아슬하게 있던 미믹이 사라지자 한참 미믹을 상대하던 헥토르와 헬하운드는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이게 무슨...!?"

"도대체 뭐지...?"

그녀들이 당황하는 동안 운현은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난 후 인벤토리 창을 보았다. 방금 전 쓴 미믹이 있던 칸의 상자는 다 부숴졌고 검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설마... 장비도 흡수한단 말인가...'

어지간한 장비들은 대부분 몬스터 사체를 가공하여 만든다. 그리고 더 좋은 장비는 코어까지 사용하여 만든다. 그것을 미믹이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운현은 심각한 얼굴로 미믹을 보았다.

'이거 상당히 골치아프게 되었는데...'

그냥 몬스터의 사체와 코어만 흡수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생각치도 못한 상황에 잠시 당황하던 운현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거 아주 재밌는 일을 할 수 있게됐어...'

혼자서 키득거리던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멀쩡한 미믹 하나를 꺼낸 후 하이딩을 걸고 인벤토리에 감춰 둔 마석을 들어 휙 던졌다. 허공에서 구르던 마석이 자신의 앞으로 오자 미믹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마석을 흡수했다.

'이정도론 변하지 않는건가...'

정확한 테스트가 필요하지만 그건 좀 위험하다. 하지만 테스트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운현은 멀리 미믹을 찾아 여기저기를 뒤지고 있는 나신의 헥토르와 헬하운드를 보며 말했다.

"앞으로 잘들 부탁하겠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어젯밤에만 용병 연맹 본부 근처의 상점가에 몬스터가 나타난 것에 용병 연맹은 비상이 걸렸다. 결국 밤새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순찰을 하게 된 용병 연맹의 간부인 푸른 긴 머리의 여인이 분통을 터트리며 이를 갈자 어젯밤 경계 책임자였던 헥토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못했다.

"넌 경계를 어떻게 서길래!? 그리고 몬스터 하나 잡지 못한단 말야!?"

"죄, 죄송합니다."

그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 다 잡았다 싶었는데 그 몬스터가 사라져버려 아무런 성과도 못낸 것이다. 거기에 처음 몬스터가 나왔을 때 자신과 부하들의 비싼 갑옷마저도 모두 잃었다. 그것에 그녀가 귀와 꼬리를 축 늘어트리고 시무룩해하자 티르빙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소리친 간부에게 말했다.

"그만해. 바민. 이런 일은 처음이잖아."

"하! 티르빙! 네 부하라고 감싸는거냐!?"

"그래. 내 부하니까 감싸지. 네 부하인데 감싸겠냐? 그리고 용병 연맹이 습격을 받을때 넌 뭘 하고 있었지? 내가 알기론 잔뜩 취해서 남창들과 뒹굴고 있었던 것 같은데?"

티르빙의 싸늘한 말에 바민의 얼굴이 붉어졌다. 회의장의 세 간부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비웃는 것이 보이자 그녀는 책상을 쾅 내려치고 헥토르에게 소리쳤다.

"헥토르! 간부로서 명한다! 너와 너희 헬하운드들은 감봉이다! 불만은 없겠지!?"

"...네."

"그리고... 오늘 경비 담당자는 누구야!?"

"접니다."

자리에 있던 다섯 간부 중 밝은 녹색 긴 머리칼 여인의 뒤에 앉아 있던 중갑에 보라색 머리칼의, 꽤나 거칠어보이는 인상의 여인이 손을 들어 올리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일어나자 바민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싸늘히 말했다.

"오늘 밤도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알고 있겠지?"

"예. 바민님. 철저히 경계를 하여 몬스터 발생시 즉시 처치하여 정체를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클로에. 넌?"

"나? 뭐... 난 오늘 휴가지만 내 귀여운 부하가 고생할지도 모르니 옆에서 도와주도록 하지."

나른한 목소리로 녹색 긴 머리칼의 여인, 클로에는 느긋하게 답했다. 그것에 바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자 헥토르는 자신을 바라보는 티르빙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죄송합니다. 티르빙님."

"됐어. 그보다 상자라고? 상자 안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모두를 공격했다?"

"예. 처음 보는 몬스터였습니다."

"흐음..."

"티르빙? 넌 뭔가 아는 거라도 있는건가? 예전에 모험가였잖아."

바민이 거칠게 묻자 티르빙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리 없지."

"뭔데?"

"내가 알기로 그런 몬스터는 미믹 외에는 없어."

"미믹? 미믹은 그게 아니잖아. 상자가 움직이는 거고 검은 기운을 뿜지도 않아. 그게 미믹이다."

바민이 고개를 갸웃거린 후 티르빙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티르빙은 그녀의 말에 다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깥의 미믹이 아니야. 던전의 미믹이지. 던전을 탐험하는 자들에게는 금기가 하나 있다. 절대 보물 상자를 부수지 말라는 것."

"뭐야? 그게? 보물상자를 부수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데?"

"미믹이 나타난다. 던전의 보물상자를 부수면 일정 확률로 미믹이 나타나게 된다."

"고작해야 몬스터 하나 발생하는게 금기라고 하는거야? 하... 이래서 모험가들은."

바민이 미믹을 우습게 보자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던 티르빙은 차분히 말했다.

"음... 한 십년쯤 됐나? 내가 모험가였을 때 이런 일이 있었지. 한 기사단이 훈련을 위해 던전에 찾아왔었어. 어지간한 바깥의 몬스터보다 던전의 몬스터가 강하니까."

"그래서?"

"그들은 성공적으로 1계층을 돌파하여 2계층에 진입했다. 그럭저럭 던전의 탐험은 잘 되고 있었어. 그들이 레드 와이어트만 잡지 않았더라면 문제가 없었겠지. 와이어트를 통솔하는 레드 와이어트를 발견하고 그들은 레드 와이어트를 공격해 토벌에 성공했어. 그때 그들은 보물상자를 발견했지. 길드의 주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레드 와이어트도 잡은 자기들이 뭐가 무섭겠냐며 미믹을 상대하기 위해 일부러 보물 상자를 부쉈고 미믹이 발생했다."

"그리고 어떻게 됐는데?"

"기사단 중 단 한명을 제외한 모두가 죽었다."

"...약한 기사단 아니야?"

"평균 레벨 190의 기사단이다. 그 기사단의 단장은 레벨 310 이었지. 단장 외에는 모두 죽어버렸고 단장은 반쯤 미친 채 복귀해 이렇게 말했다."

"뭐라고?"

"상자가 모두를 죽였다고. 상자에서 나타난 검은 인영이 모두를 찢어죽였다고. 그자는 자신을 일부러 죽이지 않고 관찰하듯 보다가 검은 기운의 검을 거두고 그대로 사라져버렸다고."

"...그 검은 인영은 또 뭐야?"

"미믹이 일정 이상의 몬스터 사체와 코어를 흡수하면 나타나는 마인. 마인은 미믹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가졌어."

"하아!? 그런 위험한 놈들이 지금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다는거야!?"

"하지만 이상하군."

"뭐가!?"

바민을 바라보며 티르징은 차분히 말했다.

"던전의 몬스터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도시에 출몰한 적이 없었다. 그 마법진은 어떤 몬스터도 통과하지 못해. 그런데... 그 미믹이 어떻게 바깥에 나오게 된걸까?"

티르빙의 질문에 모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티르빙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끔찍한 일이..."

그녀는 창문을 통해 모험가 길드 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계략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라."

"합!"

운현의 단검이 코볼트 마법사의 목을 꿰뚫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코볼트를 전부 잡는 것을 끝낸 운현의 파티는 서로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좀 더 강한 몬스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응. 더 깊게 들어가볼까?"

바제트의 제안에 운현은 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 난 아직은 여기가 좋을 것 같아."

"왜? 코볼트는 이제 쉽잖아."

"쉽기는 하지만 안정적이잖아. 조금만 더 하고 가자~ 응?"

운현이 조르자 바제트는 쓴웃음을 지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코볼트들한테 원수라도 졌어? 알았어. 그럼 몇일만 더 하고 진짜 오크 잡으러 가자."

"응!"

바제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대답한 운현은 인벤토리창을 보고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여기서 더 멀어지면 몰래 홉고블린을 잡으러 가기 힘들단 말야.'

자신의 속도 모르고 까르륵 웃으며 전투를 준비하는 파티원들을 향해 운현은 용병 연맹의 헥토르와 헬하운드들이 미믹을 상대하며 우왕좌왕하는 것을 떠올렸다.

'당분간은 보물 상자를 많이 모아둬야 하거든...'

113====================

terror

[레벨이 올랐습니다.]

[추가 스탯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오!? 이게 바람의 마력석 아니야?"

코볼트 마법사를 잡은 운현은 레벨이 오르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바닥에 떨어진 녹색의 작은 구슬을 보고 들어올리며 헤스티아에게 물었다. 꽤 많은 코볼트를 잡은 탓인지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는 헤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운현에게 다가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구슬을 보고 밝게 웃었다.

"네! 이거 맞아요!"

"이거의 가공은 어디서 해야 하는거야?"

"음... 인챈트 하려면 학교로 가야 하는데..."

"꼭 그래야 해? 그냥 인챈트 가능한 곳에서 하면 되는 것 아니야?"

헤스티아가 학교로 가버리면 시간이 붕 떠버린다. 한시라도 빨리 레벨업을 해야 하는 때 파티원이 부재가 생겨버리는 상황을 막고자 운현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모르니까 한번 해볼까요? 혹시 아는 곳 있나요?

"그거라면 내가 알지. 힐더크의 가게 옆에 인챈트를 할 수 있는 곳이 있어."

"그럼 내일은 그곳에 들러야겠네요. 이걸로 공격력이 더 오를거에요!"

"그거 잘됐네. 다들 레벨이 몇이야?"

"난 23."

"나는 21."

"저는 20이에요."

"내가 21이니까... 헤스티아. 20레벨이 됐으니까 열감지? 뭐 그런 스킬로 주변의 몬스터를 찾을 수 있다고 했지?"

"네."

"그럼 이제 홉고블린 잡자."

"홉고블린요? 으음... 괜찮으려나. 괜찮겠죠? 저희들도 많이 강해졌으니까요."

운현의 제안에 헤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눈을 감았다. 주변의 열을 탐지하여 적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열감지 마법을 발동시킨 헤스티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홉고블린의 위치를 알아냈는지 그곳을 향해 손을 들었다.

"저기로 가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럼 가보자!"

"운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벌써 꽤 많은 코볼트를 사냥했다. 이제는 코볼트를 잡는데 익숙해진 탓인지 한무리를 잡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몬스터인지라 잡다보니 흥분이 쌓이고 있었다. 수인인 미야나 엘프인 바제트는 어찌어찌 버틴다 하더라도 인간인 운현과 헤스티아의 흥분이 걱정된 미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고 헤스티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뭐."

"저도 괜찮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흥분 억제제를 먹어둘게요."

"운현."

"응? 왜?"

"그런데 넌 왜 이렇게 멀쩡해?"

"어? 그러게."

"지금까지 난 네가 전투를 하면서 흥분한 적을 본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아. 뭔가 방법이라도 있는거야?"

있을턱이 있나. 그 이유는 운현도 잘 모르는 것이었다. 그는 바제트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던 바제트는 운현에게 다가가 그의 양물에 손을 올렸다.

"왜?"

"흐음... 여기가 딱딱해지지 않은 걸 보니 진짜 흥분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 점점 커지는데?"

"야! 그렇게 만지는데 안커지면 그게 남자냐!? 고자지!?"

"후후후..."

"그, 그만들 하고 어서 가자!"

"그래요! 빨리 가요!"

바제트가 운현에게 다가가 그의 품에 찰싹 달라붙어 양물을 자극하는 것을 본 미야와 헤스티아는 빠르게 외쳤다. 그들의 외침에 바제트가 떨어지자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근데 진짜 왜 흥분 안하지?'

다른 남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들 역시 전투를 하면 적든 많든 흥분하게 되어 있었지만 운현은 평온 그 자체를 느끼고 있었다. 하반신의 성욕에 지배받는 대신 아직 머리가 활발히 돌아가는 것에 이상함을 느끼며 운현은 일행들과 함께 홉고블린의 서식지로 향했다.

'저번에는 방해를 받았지만 이번에는 괜찮겠지? 괜찮아야 할텐데...'

"저 안쪽에 홉고블린이 있는 것 같아요. 가죠!"

평소와 같은 방법으로 홉고블린을 사냥하기 시작한 운현 일행은 처음과 달리 어렵지 않게 홉고블린을 잡을 수 있었다. 홉고블린을 잡고 동굴로 들어간 운현은 보물상자를 발견하자 그것을 들고 나온 후 말했다.

"오우! 보물상자 얻었다!"

"와!"

"홉고블린이 서식하는 동굴에 있는건가? 이거 잘 됐군. 한번 열어 봐봐."

"잠깐만... 자."

"음? 와! 골드!"

운현이 보물상자를 열자 미야는 안에 있는 내용물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금화 열개가 들어가 있는 것에 미야와 바제트, 헤스티아가 환호성을 내지르자 운현은 그것을 보며 신음했다.

'쳇... 재료나 나오지.'

함정카드를 만들 재료를 얻길 바랬지만 그냥 골드에 불과할 줄이야. 운현은 입맛을 다시며 획득한 골드를 주머니에 넣은 후 파티원들에게 말했다.

"몇마리만 더 잡자!"

"응!"

'슬슬 나갈 때군.'

"자. 이제 나갈까?"

"으응... 네에."

"나도 조금 힘들다..."

"후우. 지치는구만."

그녀들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던전 입구를 향해 진행 방향을 틀었다. 그들이 느긋한 걸음으로 던전 입구에 도착했을 때 마침 던전 입구로 들어오는 여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 아르 아냐. 몸은 괜찮냐?"

"운현! 하하하. 우리야 괜찮지. 그런데 벌써 복귀하는거야?"

"응. 아직까지는 당일치기만 하니까. 너네는 어디로 가냐?"

"우리? 우리는 이번에 오크 잡으러 가려고."

아르와 루티, 헤라. 그리고 새롭게 추가된 검사와 사제를 데리고 한단계 높은 사냥터로 향한다는 그녀들의 말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오크를 잡을 수 있어?"

"너 레벨 몇인데?"

"난 21."

"그정도면 괜찮을걸? 가끔씩 오크 워리어가 나오기는 하는데 걔만 좀 주의하면 될거야."

"오크 워리어라..."

"걔도 홉고블린 처럼 세력을 구성하고 있거든. 거기서 운 좋으면 보물상자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지만 홉고블린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강하니까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응. 알았어. 좋은 정보 고맙다."

홉고블린을 몇마리나 잡았지만 레벨업을 못하는게 그냥 보물상자는 밤에 와서 혼자 터는게 낫지 않을까 싶었던 운현은 아르의 좋은 정보에 웃으며 감사인사를 했다. 그렇게 아르 일행과 헤어진 운현은 헤스티아를 번쩍 안아들고 말했다.

"자. 그럼 난 얘 부터 달래주고 올테니까 다들 할 일들 하고 계시게나."

"자, 잠깐! 운현!"

"응?"

"오늘 나랑 약속 있는거 기억하지?"

"물론이지."

운현이 헤스티아를 달래주러 간다고 하자 바제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다급히 물었다. 그녀에게 느긋하게 답해준 운현은 바제트가 안심하자 헤스티아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운현씨..."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을 끌어안는 헤스티아를 안아주며 운현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어제는 내가 만족할 만큼 못했으니까 오늘은 제대로 하자고."

"어? 운현."

헤스티아와 하고, 발동된 현자의 시간 동안 가시 줄 함정과 기름 함정을 만들어낸 운현은 현자의 시간이 끝나자마자 씻고 밑으로 길드회관으로 내려왔다. 그가 내려오자 회관의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던 바제트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헤헤~ 기대되서 말이지."

"아니 데이트라고 해봤자 도시 좀 돌아다니고 마는건데 뭘..."

"그래도~"

자리에서 일어난 바제트는 운현의 팔을 끌어안으며 그에게 밝게 웃었다. 예쁜 얼굴, 좋은 향기, 팔에서 느껴지는 딱딱함. 운현은 그 언밸런스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너 지금 가슴 보고 있는거야?"

"그럴리가."

바제트에게 있어서 최대의 역린인 가슴을 건드렸다간 데이트고 뭐고 바제트가 울부짖을게 뻔하기에 운현은 씩 웃으며 답했다. 그를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바제트는 운현의 팔을 더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럼 어서 가자. 나 배고파."

"그래. 뭐 먹고 싶어?"

"아무거나!"

여자들의 전가의 보도인 아무거나. 운현은 그녀의 말에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표정을 본 바제트는 까르륵 웃고는 그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일단 나가서 생각해보자~"

딱히 뭔가를 먹고 싶다기보다는 운현과 무언가를 공유하고 싶었던 마음이 더 큰 바제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운현보다 먼저 도시에 와서 다른 파티들과 돌아다닌 덕분인지 바제트는 꽤나 던전 도시의 여기저기를 잘 알고 있었다. 신기한 물품을 파는 잡화상, 향수점. 옷가게. 몇군데의 가게를 더 들리고 나서야 바제트와 운현은 조금은 시끌벅적한 분위기의 작은 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자들은 참 신기해. 사지도 않을 거면서 이렇게 구경하는 걸 좋아하다니."

"그게 매력 아니겠어? 그리고 남자들 중에도 이러는 사람들은 많다던데?"

"그래?"

"응. 내가 아는 아저씨도..."

"그래서 말이야! 용병 연맹에서 길드장이 나와야 한다는 거지!"

"아니 그렇지만 전쟁이 나는거잖아. 괜히 전쟁터에 끌려가는게 아닐까 싶어."

거친 분위기의 덩치 큰 여인이 맥주잔을 들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강하게 말하는 것을 들은 운현은 턱을 괴고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바제트 역시 시끄러운 소리에 눈쌀을 찌푸리고 그곳을 보았다. 여인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한잔 더 맥주를 돌린 후 다시 시끄럽게 떠들었다.

"자. 생각해보라고. 지금 국제적인 정세가 어때? 다들 너 죽이고 내가 살겠다! 이런 분위기잖아.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가 대표로 삼아도 괜찮은 사람은 역시 아르토리우스씨 뿐이라니까? 그녀가 지금까지 참전한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있어? 없어?"

"그거야 없긴 하지."

"거봐~! 무패의 아르토리우스~! 무적의 아르토리우스~! 그녀가 시장이 된다면 다른 나라들도 함부로 던전 도시를 공격하지 못할걸? 그리고 공격하면 또 어때? 우리에겐 용병 연맹이 있잖아!"

"흐음...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연? 용병 연맹은 아무리 던전 도시를 지키는 입장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용병이잖아. 더 큰 이득이 있으면 던전 도시의 안정보다는 다른 곳에 힘을 쏟지 않을까?"

"에에이~ 그게 그렇지만도 않다니까. 용병 연맹에서 전에 시장이 나왔을 때 어땠어? 다른 곳에 힘을 쏟았어? 아니라고. 그들이 한 일은 던전 도시의 수비를 더욱 단단히 하고 도시의 힘을 키웠잖아.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아니 더 좋지. 아르토리우스씨는 지금까지의 전쟁에서 단 한번도 진 적이 없으니까 더더욱 강한 도시를 꾸릴 수 있을거야."

"그럴까...?"

맥주잔을 들고 떠드는 그녀의 외침에 맥주를 받은 사람들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산 맥주를 마셨다. 그런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운현이 피식 웃자 바제트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시장 선거가 얼마 안남아서 그런지 요새 술집이나 음식점을 가면 저런 이야기들이 많더라고."

"너도 들은 거 있어?"

"음. 뭐, 용병 연맹만이 살길이다. 모험가는 그저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집단이다. 등등. 나야 그런거에는 관심이 없어서 떠드는 것은 그냥 듣고 넘겼지만 몇몇 모험가들이 그것 때문에 마찰이 생긴 적도 있는 것 같아. 지금 시청에 가보면 난동으로 잡혀 온 모험가들이 꽤 있을걸?"

"같이 싸운 사람들은?"

"글쎄? 훈방조치 되었다고 들었어. 아무래도 민간인이다보니 모험가들에 대한 제제가 좀 더 심한 것 같아. 그것 때문에 길드에서 항의를 했지만 시청은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가고 있어."

'확실히 시청은 용병 연맹의 입김을 받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군.'

용병 연맹이 어쩌고 저쩌고 떠드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모험가들을 모욕한 상대와 싸웠는데 모험가만 처벌을 받는다? 그렇게 된다면 그 안의 진실은 어찌되었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모험가가 더 잘못했으니 잡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또다시 여론은 모험가 길드가 잘못하고 있다. 라는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다.

'어차피 큰 상관은 없다만...'

지금 용병 연맹은 자신들의 상대가 모험가 길드라고만 생각하고 저렇게 나서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모험가 길드의 장인 상아가 아닌 제작자 연합의 피스나다.

'이 작전을 생각해 낸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군.'

피스나가 시장 선거에 나오고 상아가 출마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얼굴을 지을까? 운현은 그것을 생각하며 키득거렸고 그런 그를 보며 바제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거야?"

"아아. 아무것도 아냐."

"주문하시겠어요?"

"네. 감자튀김이랑 맥주. 그리고 닭가슴살 구이. 운현. 넌 뭐먹을거야?"

"음... 난 샐러드랑 스테이크. 그리고 와인 한잔 주세요."

114====================

terror

"후후후... 이렇게 둘이 마시는 것도 운치있고 좋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운현과 바제트는 술을 좀 더 마시기 위해 예전 운현을 빼고 여자들끼리만 갔다던 밀피유라는 가게로 향했다. 잔잔하게 연주되고 있는 음악, 시간이 멈춘 듯한 조용한 분위기. 바제트는 자신의 앞에 놓여져 있는 칵테일을 한모금 마신 후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넌 왜 아무렇지도 않아? 원래 술이 강해?"

"응? 그러게."

운현으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술에 취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술을 마시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정도로 잘 마시지는 못했다. 벌써 독한 칵테일을 네잔이나 마셨는데 취하기는 커녕 점점 정신이 멀쩡해지고 있는 그를 보며 감탄한 바제트는 운현의 빈 잔을 가리켰다.

"마스터. 여기 레드 크로스 한잔 더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세요?"

"네. 전 괜찮습니다."

바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인은 빠르게 칵테일을 만들어 운현에게 주었다. 반투명한 붉은색 액체가 가득 담겨 있는 잔을 받은 운현이 그것을 한모금 마셨을 때 바제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으... 나 화장실."

"응. 다녀와."

그녀가 화장실로 가자 운현은 혼자 앉아 술을 홀짝거렸다.

'이거 정말 이상한데...'

분명히 이정도로 술을 마셨으면 취해서 기절을 해도 모자랐을 것이다. 입 안에 들어 온 칵테일은 달콤했지만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술이 독했다. 하지만 그것도 마셨을 때 뿐이다.

"술이 굉장히 강하시네요. 레드 크로스를 그렇게 드시는 분은 처음 봤어요."

바의 마스터는 운현이 칵테일을 마시는 것을 보며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에게 쓴웃음을 지은 운현이 다시 한모금 마셨을 때 그의 옆에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다가와 앉았다.

"오래간만이네요?"

"어? 당신은..."

전에 미야와 강에서 놀때 만났던 여인이다. 그때는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오늘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곱게 화장을 한 미녀의 등장에 운현이 입을 열자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약간 처진 눈을 살짝 뜨고 그에게 물었다.

"오늘도 데이트이신가봐요? 다른 여자분이신데... 그 분과는 헤어졌나요?"

"아뇨."

"그럼 여러명과 만나는 거에요? 후후후..."

"이런 게 드문가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 그럼 저도 옆에 끼어도 될까요?"

그녀가 장난스레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녀이기는 하지만 뉘신지도 모를 사람과 함께 할 정도로 여자가 모자르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지금 운현은 더 이상 여자와 관련되는 것을 거절해야만 했다.

'바빠 죽겠는데 무슨...'

레벨업을 하고, 동료들과 관계를 맺고, 길드의 일을 도우고. 그 셋을 조율하는 스케쥴을 짜는 것만으로도 벅찬 운현은 더 이상 자신이 안을 여자를 늘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길드의 일이 종료가 된다면 모를까 그것이 아니라면 무리다. 운현이 거절하자 그녀는 아쉬운 듯 도톰한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흐음~ 아쉬워라."

"그런데 무슨 일이신가요?"

"아는 얼굴이 보여서 잠깐 온 것 뿐이에요. 괜찮다면 건배라도?"

"그거야 괜찮죠."

당장 그녀와 관계를 맺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정도는 괜찮겠지. 어쨌든 미녀이고 말이다. 운현은 잔을 들어 올렸고 그녀는 자신의 작은 잔을 들었다. 가볍게 잔과 잔이 마주치자 둘은 서로의 잔에 있는 술을 한모금 마셨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라도 하죠? 전 아스라고 해요."

"아스... 운현이라고 합니다."

"운현이라... 아무튼 반가웠어요. 다음에 만나면 아는 척이라도 해주시는거에요?"

빙긋 웃은 아스는 자신의 잔을 들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가 떠나자 바의 마스터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운현에게 물었다.

"손님. 혹시 직업이 어떻게 되시나요?"

"그건 왜요?"

"용병 연맹의 연맹장님이 손님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요. 잘하면..."

"...뭐요?"

"손님을 마음에 들어 한다구요."

"그거 말고 앞에. 용병 연맹의 연맹장이라구요?"

"네. 아스. 아르토리우스. 던전 도시를 지탱하는 네개의 기둥 중 하나. 어? 모르세요?"

"아르토리우스는 알지만..."

'저 여자가 용병 연맹의 연맹장이라는 건가?'

구석진 자리에서 다른 여인들과 술을 홀짝이던 그녀는 운현의 시선에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인사에 가볍게 답해 준 운현은 레드 크로스를 한모금 마신 후 생각했다.

'여기다가 미믹을 풀까?'

지금 보유하고 있는 미믹은 총 셋. 이 셋을 모두 풀면 여기서 아르토리우스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운현은 한참동안 고민했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걸론 무리겠지.'

상아와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그녀와 함께 있는 여인들이 단순한 일반인은 아닐 것 같았다. 괜히 아까운 미믹을 여기서 소비할 생각을 지운 운현은 바제트가 다가오자 그녀에게 웃으며 물었다.

"시원했어?"

"응~"

"슬슬 일어날까?"

"응? 벌써?"

"마실 것도 다 마신 것 같고. 좀 바람이나 쐬고 싶어서 말이지."

아르토리우스가 자신을 어떻게 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을 대비해야 한다.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제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분수대쪽으로 가자."

"어디든 괜찮겠지."

운현이 카운터로 가 계산을 마쳤을 때 가게의 문이 열리고 운현이 아는 얼굴이 모습을 보였다. 그들의 등장에 운현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어? 당신은."

"...아!"

"하아..."

"사인 받았어!?"

가게로 들어 온 것은 티르빙과 헥토르였다. 그녀들은 운현을 보고 당황하더니 후다다닥 달려와 운현을 잡고 물었다. 그녀들의 질문에 운현은 볼을 긁적거린 후 담담히 답했다.

"받긴 받았는데 지금은 없는데요."

"정말!? 이야~! 너 진짜 좋은 사람이구나!?"

"우리 대원들것도 받았어? 응?"

"다 받았어요."

"정말 고마워!"

둘이 호들갑을 떨며 떠들어대자 조용한 바가 시끄러워졌다. 자연스레 바의 손님들은 운현들에게 시선을 보냈고 그것은 아르토리우스와 그녀의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머? 티르빙. 헥토르. 그 사람과 아는 사인가요?"

"앗! 연맹장님!"

"왜 이렇게 늦었나요?"

아르토리우스가 살짝 처진 눈을 애써 끌어올린 후 억지로 만든 듯한 어색한 화난 목소리로 말하자 티르빙은 쓴 입맛을 다셨다.

"아침에 보고드렸던 미믹에 대해서 모험가 길드에 협조요청을 하느라 좀 늦었습니다. 아. 그리고 이 남자와는... 조금 개인적인 친분이 있지요. 그렇지?"

"네! 카를로스님의 싸인을 받아주기로 했거든요."

"오호... 정말인가요?"

"네. 뭐..."

틀린 말은 아니기에 운현은 아르토리우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에 싱긋 웃은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카를로스씨와 무슨 사이이신가요?"

"별 사이 아닌데요."

사실은 서로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사이이지만 아르토리우스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카를로스에 대한 호의적인 목소리에 운현은 떨떠름하 답했다. 하지만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의 대답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방긋 웃었다.

"저도 카를로스씨가 출연하신 연극은 무척 좋아한답니다. 혹시 카를로스씨와 또 만나실 일이 있으시면 제 싸인도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만날 일은 있겠지만 그때는 싸인 달라고 하긴 좀 그런데...'

아마 다음에 만날때는 서로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 그때는 싸인 달라고 해봤자 씨알도 안먹힐 것이다.

'거기에 그럴 의리도 없지.'

시장 선거에 나서서 피스나를 돕기로 한 이상 운현에게 아르토리우스는 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적의 부탁을 굳이 들어 줄 필요는 없기에 운현은 웃으며 말했다.

"만나게 된다면요."

"어머~ 고마워라. 그 보답으로 제가 오늘 술값은 내드릴게요. 얼마 나왔나요?"

"아. 괜찮습니다. 이미 계산했어요. 그럼 저희는 이만."

뭔가 더 이야기를 하려 하는 아르토리우스에게 가볍게 인사한 운현은 바제트와 함께 가게의 문을 열고 나갔다. 그들이 나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르토리우스는 그녀 특유의 부드러운 어조로 티르빙과 헥토르에게 물었다.

"티르빙, 헥토르. 저 남자에 대해 조사해보세요."

"예? 왜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몇가지 의문사항이 생겼거든요..."

아르토리우스는 살짝 웃으며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후아. 살떨리네."

"용병 연맹의 연맹장이라니. 이야~ 좋은 구경했다."

"좋은 구경이라니? 왜?"

"어? 몰라? 던전 도시의 4대 조직의 장 중 가장 보기 어려운 것이 바로 저 아르토리우스야."

"허. 그래?"

바제트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것 치고는 생각보다 쉽게 발견되는 것 같았기에 그가 궁금해하자 바제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응. 용병 연맹의 연맹장은 항상 다른 간부들과 같이 다니면서 모든 일처리와 다른 이들과의 대화는 그 간부들이 하거든. 그래서 그 천진난만해보이는 얼굴에 비해 속을 알 수 없는 능구렁이라고 소문나 있는거야. 실제로 그녀와 관계되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말야."

'그런 것 치고는 꽤나 나한테 관심을 가지는 것 같은데... 하. 이놈의 인기.'

어딜 가서도 죽지 않는구나. 적이든 아군이든 자신에게 호감을 갖는 것에 뿌듯해하며 운현이 씩 웃자 바제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아니 뭔가 되게 기분이 좀... 그나저나 용병 연맹장이 관심을 가질 줄이야. 후후. 역시 내남자."

"넌 다른 여자가 나한테 관심가지는게 그렇게 기분 좋냐?"

"후후후... 운현. 여자는 말야."

살며시 그의 팔을 끌어안은 바제트는 운현의 볼에 살짝 키스한 후 속삭였다.

"내 남자가 인기만점이라는 것에서 굉장히 뿌듯한다고~"

"그, 그러냐. 그럼 이제부터 다른 여자랑 노닥거려도 괜찮지? 아싸!"

"그거랑은 좀 다른 이야기지. 그리고 뭐라고 해도 넌 할거잖아."

"그렇긴 하지."

운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바제트의 이마에 키스했다. 독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는 있지만 운현의 이 자유분방함은 늘 마음을 어지럽힌다. 바제트가 복잡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왜 또."

"음... 넌 너무 프리덤해서 문제야. 나중되면 엄한 여자한테 촐랑촐랑 가버릴 것 같단 말이지."

"뭐 그게 내 매력이니까."

"...그런 매력아니어도 매력 많거든?"

"야. 말 나온김에 물어보자. 내 어디가 그렇게 좋냐?"

"그, 그런 걸 이런 자리에서 물어보는거야!?"

그가 키득거리며 묻자 바제트의 하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운현의 팔을 몇번이나 찰싹찰싹 때리며 화를 낸 바제트는 안고 있던 그의 팔을 풀고 후다닥 앞서 가버렸다.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자리에 서서 피식 웃은 운현은 앞서 걷던 바제트가 발을 멈추고 돌아보며 말하자 더더욱 크게 웃었다.

"빨리와! 바보야. 그... 치, 침대에서라면 가르쳐줄테니까!"

"하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바제트와 장난을 치며 길드로 복귀한 운현은 길드의 분위기가 축 가라앉은 것에 이상함을 느꼈다. 바제트를 먼저 올려보낸 그는 길드 사무소로 다가갔다. 필레가 아닌 실비아가 사무소에 앉아 있자 운현은 그녀에게 물었다.

"실비아씨. 무슨 일 있어요?"

"아... 운현씨. 그게요."

머뭇거리던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쉰 후 말했다.

"던전에서 미믹이 빠져나와 도시에 출몰했나봐요. 그것 때문에 지금 비상이에요. 저번에 1계층에 미믹이 발생한 일도 있고 해서..."

"흐으음... 그거 큰일이군요."

"그러니까요. 다른 몬스터도 아니고 미믹이라니. 자칫 잘못했다가 마인이라도 나타난다면... 어제 상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행히 1계층의 미믹인 것 같은데. 그 미믹에서 마인이 나온다면 정말 큰일이거든요."

"그러게요. 그런데 1계층의 미믹에서 마인이 나타나면 누가 상대할 수 있나요?"

"최소한 용병 연맹이나 모험가 길드의 간부급 둘 이상이 아니라면 힘들거에요. 1계층의 마인의 추정 레벨은 320이상이거든요."

"...와우. 그럼 미믹은요?"

"250정도? 1계층의 미믹이 가진 힘은 2계층 계층주와 비슷하다고 하니까요. 마인은 3계층의 계층주와 비슷하고..."

'이거 마인이 잘못 나오면 진짜 난리 나겠군...'

운현은 자신의 인벤토리 안에 있는 미믹을 생각했다. 헥토르와 헬하운드들의 장비를 흡수하고 거의 마인을 소환하기 직전까지 간 미믹을 떠올린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좃될 뻔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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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ror

마인을 소환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마인이 헥토르와 헬하운드들을 죽였다간 계획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운현은 하마터면 기껏 세운 계획을 무너트릴 뻔 했다는 것에 식겁하며 실비아에게 물었다.

"그정도나 강해요?"

"네. 물론 3계층의 계층주와 1계층의 마인이 붙어 본 적은 없지만... 상대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그정도 강함은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 같아요."

"허어..."

운현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실비아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휴우. 우리 모험가 길드 쪽에도 미믹이 나오면 큰일일텐데..."

"그거 정말 걱정이네요. 나올까봐."

실비아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해 준 운현은 곧장 바제트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운현이 들어오자 바제트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오! 왔어!?"

"왜 수건만 두르고 있어? 머리칼을 보니 씻은 것 같진 않고."

아직 뽀송뽀송한 바제트의 머리칼을 가리키며 운현이 묻자 바제트는 빙긋 웃은 후 그에게 다가왔다. 모델과도 같은 자신만만한 워킹. 물론 움직일때마다 출렁이는 그 무언가가 없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움직임이었다. 그녀가 다가와 자신의 목을 끌어안자 운현은 그녀의 나긋한 허리를 감싸 안았다.

"후후. 오늘은 같이 씻을까?"

"그거 좋지. 근데 자신 있어?"

"뭐가?"

"나랑 씻으면 하는 도중에 하고 하고 나와서도 할건데... 그냥 씻다가 너만 만족하고 끝나는 거 아니야?"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운현이 묻자 바제트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런 그녀의 볼에 쪽 키스한 운현은 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던 바제트는 결국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있나보네? 그럼 진심을 담아서 피스톤질을...!"

"아, 아냐! 너무 심하게 하진 말아달라고! 헤스티아나 미야한테는 부드럽게 해줬다면서 왜 나한테는..."

"아니 나름 부드럽게 해준건데..."

"그래도! 더 소중히 해달라고!"

입술을 삐쭉이며 바제트가 말하자 운현은 쓰게 웃었다.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운현이 욕탕에 물을 채우기 시작하자 바제트는 살며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는 수건을 풀었다.

"호오..."

욕실의 뜨거운 공기와 닿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나체를 보이는 것이기 때문일까? 바제트의 몸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핥는 듯 자신의 몸을 흝자 바제트는 애써 당당히 그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주었다.

"가슴은 그만 보라구!"

"하하하! 가슴 외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부분이 많으니까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운현은 바제트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딱딱히 솟아 있는 운현의 남성이 자신의 군살 하나 없는 아랫배에 꾹 닿자 그의 말을 믿은 바제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며 운현은 차분히 바제트의 입술을 빼앗았다. 달콤하고, 부드럽고, 배려심이 넘치는 입맞춤이 이어진다. 촉촉한 혀를 톡톡 건드리고 입 안을 차분히 누비던 운현의 입술은 바제트의 타액을 빨아들이고 그녀의 길고 탱글거리는 혀를 빨기 시작했다.

"으읍...읍...우우... 하아아아아... 응. 이런거 좋아..."

키스 한번으로 상당히 느꼈는지 바제트의 얼굴을 붉게 상기되었다. 하지만 격정적인 쾌락과는 다른, 배려심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키스가 좋았던 모양인지 그녀는 운현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만졌다.

"그... 헤스티아에게는 해줬다면서?"

"뭘?"

"씻겨주기..."

"아아. 그거? 왜? 해줘?"

"응!"

"좋아. 뭐 그렇게까지 원한다면야 못해 줄 것은 없지."

운현의 말에 바제트는 기뻐하며 욕실 의자에 앉았다. 매끈하고 깨끗한 하얀색 등을 보며 운현은 물을 뿌리기 전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입맞췄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 여기저기에 키스하고, 작고 가녀린 어깨를 핥으며 등줄기를 부드럽게 핥아 내려가자 바제트는 움찔거렸다.

"자. 그럼 씻길게."

"으응..."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쾌감을 토해낸 그녀가 답하자 운현은 적당히 뜨거워진 물을 바제트의 등에 뿌렸다. 욕실의 불빛에 비쳐 반짝거리는 바제트의 등에 차분히 비누칠을 시작한 운현은 그녀의 등에 거품이 많아지고, 그 거품이 이 조금씩 흘러내리자 들뜬 숨을 내뱉기 시작한 바제트에게 물었다.

"아직 앞쪽은 시작도 안했는데..."

"흐읏...후후... 네 손길이 너무 기분 좋아서 그래."

"그래? 아무튼 좀 참아봐."

"하아... 읏... 아, 알았... 흐으응!?"

운현의 손이 자신의 긴 귀를 부드럽게 쓸어만지며 귓바퀴에 비눗물을 뭍혀나가자 바제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의 그런 반응에 쓴웃음을 지은 운현은 더 이상 바제트가 집중하지 못하게 후다닥 몸을 씻겨주었다.

"자. 됐다."

"으으음... 이런 것도 좋지만 너무 빨리 씻긴 거 아냐?"

"왜냐하면 난 좀 더 너랑 목욕을 즐기고 싶거든."

"후후후... 그럼 이제 내가 씻겨 줄 차례인가?"

바제트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그의 몸에 거품을 뭍혀나갔다. 운현의 몸 여기저기를 씻긴 바제트는 그의 딱딱한 남성이 자신을 향해 꺼떡거리자 입맛을 다셨다.

"날 보고 이렇게 흥분해 있는건가? 하하하... 요 귀여운 녀석."

다리를 벌리고 쪼그려 앉은 바제트는 그의 남성을 긴 손으로 감싸쥐었다. 비눗물과 함께 자신의 양물에 주르륵 끈적거리는 침을 흘린 그녀는 운현을 올려다보며 앞 뒤로 손을 움직였다.ㅡ

"어때? 어때?"

"으읏...후우... 좋네."

"그래? 그럼 더 해줄게."

"웃...!"

비눗물과 섞인 타액 때문인지 더더욱 미끄럽다. 그가 움찔거리는 것이 귀여웠는지 바제트는 연신 입술을 핥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욕탕의 수증기 때문인지 더더욱 요염해보이는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그의 남성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흣...으으..."

딱딱히 솟은 유두와 비벼지는 것에 쾌감을 느꼈다. 다른 여자들처럼 부드러움은 없지만 나름대로의 즐거움은 있었기에 운현은 그녀의 손과 유두가 주는 쾌감에 결국 참지 못하고 사정했다.

"으읏! 싼다!"

"아앗!? 으으... 아까워라."

운현의 남성이 하얀 정액을 토해내자 바제트는 자신의 가슴에 뿌려진 끈적한 정액을 아까워하며 손가락으로 찍어 올려 빨간 혀를 내밀었다.

"쪼오옥...!"

자신의 손에 잔뜩 뭍어 있는 비눗물과 섞인 정액을 맛있게 핥아 먹은 그녀는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있는 남성에 물을 뿌려 비눗물을 모두 씻어낸 후 입맛을 다셨다.

"이제부터가 진짜야..."

"야. 너..."

"넌 너무 세니까 여기서 좀 힘을 줄여놔야지. 후후후후... 냠."

"우웃!?"

한번에 운현의 남성을 모두 입 안에 머금은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며 양 손을 올려 운현의 유두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가슴과 남성에서 오는 쾌감에 운현이 부들부들 떨자 바제트는 입 안의 혀를 더더욱 농밀하게 움직였다.

"쭈릅...춥...쭙..."

"큿...!?"

"하아... 냠... 후후후후... 좋아?"

"으응... 좋아..."

"그럼 날 사랑해?"

"....."

"쳇."

섹스를 하는 도중에는 통할 줄 알았건만. 바제트는 운현의 얼굴에 쓴웃음이 걸리자 입맛을 다시고 그의 남성을 핥는 것에 집중했다. 유두를 만지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그의 알주머니를 만지작거리자 운현은 진한 쾌감을 느꼈다.

"웃!?"

"아오 애아아..."

"아니... 그래도 좀 버티는게."

"쭙... 핥짝. 쳇.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운현. 바닥에 누워봐."

"왜?"

"빨리."

"음... 응."

그가 바닥에 눕자 바제트는 운현의 양 다리를 잡아 위로 올렸다.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보이는 알주머니를 길게 핥고 쪽쪽 빨며 다른 손으로는 그의 양물을 앞뒤로 흔들던 바제트는 천천히 혀를 움직였다.

"읏...!? 야! 거긴...!?"

"후후후... 이게 길드의 다른 모험가들에게 배운 비전이지."

바제트의 혀가 자신의 항문을 건드리고 핥기 시작하자 운현은 기겁하며 외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을 무시한 바제트는 더더욱 진하게 그의 알주머니와 항문을 번갈아 핥기 시작했다. 처음 느끼는 쾌감에 운현이 아까 전 바제트가 푼 수건을 꽉 잡자 바제트는 눈을 빛내며 빠르게 그의 남성을 흝던 손을 움직였다.

"큿! 싸, 싼..."

"아직 안돼."

"...뭐야..."

"후후후... 이번에는 입에다가 제대로 싸달라고."

바제트는 운현의 항문을 핥던 혀를 끌어 올린 후 그의 남성을 입에 물었다. 손으로는 알주머니와 허벅지, 항문을 자극하던 그녀는 운현의 남성이 입 안에서 커지며 뜨거운 정액을 뿜어내자 꿀꺽 꿀꺽 그것을 모두 마셨다.

"하아... 쓰다. 그렇지만..."

잘도 정액을 모두 삼켜낸 바제트는 흠뻑 젖은 자신의 계곡을 부드럽게 쓸어만진 후 말했다.

"정말 흥분되는 맛이야... 몬스터들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게..."

"크르르르! 못참겠다! 바젯!"

"꺄악!?"

운현은 바제트의 색기넘치는 모습에 결국 자신의 야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벌떡 일어난 운현이 자신을 덮치자 바제트는 깜짝 놀라며 그대로 쓰러졌다. 마치 일부러인 듯, 양 다리를 벌리며 쓰러진 바제트는 운현의 자신의 발목을 잡고 그대로 남성을 계곡 안으로 쑤셔 넣자 그 거친 움직임에 파르르 몸을 떨었다.

"오, 오늘은 부드럽게..."

"싫어!!!!"

"꺄아악! 흐아앗!?"

운현의 남성을 핥으며 이미 꽤나 쾌락을 받았던 바제트다. 그녀는 운현의 욕망에 넘치는 허리놀림에 결국 생각하는 것을 잊고 쾌락에 정신을 놓아버렸다.

"하악! 으읏! 하으으응!"

"우어어어어어!!"

성난 황소처럼 돌진해들어오는 그의 남성에 바제트는 허우적거리던 팔로 운현을 꽉 끌어안았다. 자신에게 달라붙은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그녀를 끌어안고 일어나 바제트의 계곡 안에 남성을 꽂은 채 그대로 그녀를 움직였다. 자세가 바뀌어 더더욱 깊은 곳에 남성이 박히게 된 바제트는 눈을 크게 뜨며 쾌락의 비명을 토해내었다.

"으으...!? 하으으읏!"

"싸, 싼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앙!!"

바제트 역시도 쾌감을 크게 받은 모양이다. 그녀의 눈이 흐려지며 아름다운 등줄기가 활처럼 휘었다. 자신을 끌어안는 힘이 더더욱 강해지고 양물을 감싸고 있는 질벽이 뜨거워진다.

"하아...하아..."

"으으으... 살살해준다면서..."

"네가 너무 야한 탓이야. 난 죄 없어."

"...흥."

"좋았으면서 뭘 그렇게 튕겨."

운현은 숨을 헐떡이며 자신에게 끌어안겨진 바제트가 휙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귀를 핥아 준 후 말했다. 그것에 바제트는 움찔하더니 운현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번엔 진짜 살살... 부드럽게 해줘야 해. 알았지?"

"분부대로 하지."

그녀를 안은 채 뜨거운 물 안으로 들어간 운현은 바제트가 욕실의 물을 입 안에 머금고 행구며 얼굴을 씻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응? 아... 키스하고 싶어서."

"그게 왜...?"

"아니... 그래도 네 거길 핥은데다가 정액까지... 그럼 키스하기 좀 그럴 거 아냐."

"크게 상관은 없는데. 뭐... 이미 해버렸으니 어쩔 수 없나?"

운현은 바제트의 입술에 쪽 입맞춰 주었다. 그의 키스에 방긋 웃은 바제트는 자신의 계곡 안의 남성이 안에서 꿈틀거리자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나 아직 느끼고 있는 중이니까 하면 안돼."

"알았어."

운현은 그녀의 말대로 그녀의 안에 양물을 넣은 채 목욕을 즐겼다. 꽤나 느긋하고 편안한, 그리고 가끔씩 쾌감이 느껴지는 목욕시간이 끝나고 운현은 그녀를 안은 채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고 나왔다.

"흣...으읏..."

양물은 여전히 계곡 안에 박혀 있는 상태였다. 그 상태로 움직이느라 쾌감을 받은 바제트는 운현이 자신을 침대에 눕히며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자 살며시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키스... 해줘."

"알았어."

운현의 달콤한 키스와 함께 천천히 그의 허리가 움직이자 바제트는 행복한 쾌감을 느끼며 그를 끌어안고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말했다.

'사랑해... 운현.'

116====================

terror

[패시브 스킬 :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냉철한 이성 상태가 됩니다.]

[지력이 100 상승합니다.]

"흐음..."

아까 두발을 뺀 탓인지 바제트는 운현이 만족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이불을 덮고 행복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운현은 침대를 톡톡 치며 생각했다.

'자... 앞으로의 움직임은 어쩔까...'

티르빙과 헥토르, 그리고 헬하운드 외에는 용병 연맹의 인물이 죽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그렇다면 마인이 소환되는 것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한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결정. 죽든 말든 신경쓰지 말자.'

운현은 차분한 얼굴로 자신으로 인해 타인이 죽는 것에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마인의 힘은 직접 눈으로 봐야했었다. 그렇다면 어느정도 강한 실험대상이 나오는 것이 좋겠지. 그가 무심한 얼굴로 밖으로 나왔을 때 바깥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인가하고 내려가본 그는 펠리시아와 칼리아스가 이를 드러내며 한 여인을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우리가 왜 너희를 도와야 하지? 아니, 바민.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 그때 우리 길드에 쳐들어왔던 너희들이 무슨 객기로 이따위 짓거리를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우리가 도와줄 것 같아?"

"던전 도시를 이루는 축 중 하나잖아. 그러니까 도와달라고. 그리고 그 미믹은 너희들이 맡고 있는 던전에서 나온 미믹 아닌가?"

"하. 증거 있어?"

칼리아스는 씨익 웃으며 살벌히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노출 심한 갑옷을 입은 여인은 자신의 푸른색 앞머리를 쓸어올린 후 짜증난다는 어조로 말했다.

"증거? 증거가 왜 필요하지? 바깥의 미믹은 그런 게 아니야. 그 미믹은 던전의 미믹이잖아!"

"가져와봐."

"뭐?"

"미믹 잡아서 가져와보라고!"

칼리아스는 그녀의 말에 이죽거렸다. 그 모습에 바민이 이를 갈고 주먹을 쥐자 펠리시아는 씨익 웃으며 칼리아스를 말렸다.

"자자. 칼리아스씨. 그만 하세요. 제가 얘기할테니까요."

"하지만 펠리시아!"

"네에~ 잘 알겠으니까요."

펠리시아는 칼리아스를 말린 후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자신의 앞에 서자 바민은 살짝 눈쌀을 찌푸렸다.

"뭐야?"

"그 전에 한가지 여쭙고 싶은데요."

"뭘?"

"혹시 용병 연맹에서 던전에 스파이를 잠입시키지 않았나요? 던전 1계층에 미믹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 적은 없나요?"

"그런 적 없어!"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바민씨. 저희도 지금 무척이나 바쁘답니다. 사람을 뺄 수 없어요."

"뭐가 그렇게 바쁜데!?"

"으음... 뭐라고 해야 할까요? 어떤 모종의 세력이 던전에 사람을 보내 미믹을 양산시키고 있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저희 길드의 간부들이 무척이나 바쁘답니다. 누군지 밝혀야 하고, 또 쫓아야 하니까요. 그리고 그 계집도 심문을 해야 하고."

"하지만 이대로는 시민들이 다친다고!"

"그걸 왜 저희가 신경써야 하는 건가요?"

"...뭐?"

"각자의 임무를 확실히 합시다. 바민씨. 요새 세간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어보니 모험가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던전을 탐험하는 것 뿐이지 실질적으로 도시를 위해 하는게 뭐가 있느냐. 였죠? 도시를 지키는 것은 용병 연맹의 일이라고. 그래요. 저희들은 모험가. 모험 외에는 임무가 아니지요. 물론 지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용병 연맹에서 협조 요청을 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임무가 당신들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요?"

펠리시아의 말에 바민은 빠득 이를 갈고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펠리시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결국 바민은 씩씩거리며 몸을 돌려 나가다가 휙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 말했다.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제 인생은 후회가 가득해요. 거기에 이번 일의 후회 한번 추가된다고 나쁠 건 없겠죠?"

부드럽게 웃는 그녀를 향해 이를 드러낸 바민은 휙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가 나가자 모험가들은 속이 다 시원하다며 박수를 쳤다.

"역시 펠리시아!"

"독설의 펠리시아라니까!?"

"어휴! 이 묵직한 팩트공격보소!!"

"후후후. 역시 팩트로 조지는게 짱이라니까!!"

"하하하하..."

모험가들이 자신을 치켜세우자 펠리시아는 어깨를 으쓱인 후 계단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운현을 발견했다.

"어머. 운현씨 아닌가요?"

"안녕하세요."

"음? 오오. 운현씨. 저번에 길드장이랑 데이트 갔다면서!? 아이고... 불쌍해라..."

진심으로 동정한다는 듯 운현을 보며 눈물지은 칼리아스는 더 이상 그를 보지 못하고 후다닥 사무실로 들어가버렸다. 그녀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운현은 펠리시아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요 며칠사이에 꽤나 분위기가 바뀌셨네요. 굉장히 침착해지신 것 같은데..."

"글쎄요. 괄목상대라. 남아는 삼일만 보지 못해도 성장한다고 하잖아요."

"후후후후... 이렇게 성장하신다면 얼마 안가서 길드의 큰 힘이 되어주실 것 같은데요?"

"그거야 두고 볼 일이죠. 그런데 아까는...?"

운현의 질문에 펠리시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젯밤 용병 연맹의 본부 근처에서 미믹이 출몰했다고 하네요. 던전의 미믹이요. 오늘도 미믹이 나타날지 모르니 모험가 길드의 길드원을 파견해달라는 요청이었어요. 아무래도 던전의 미믹이라면 모험가들이 더 상대하기 쉬울테니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거절의 이유가 진짜 그것 때문인가요?"

"그럴리가요. 그 여자는 지금 심문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요. 몬스터 피에 중독된 현상이 풀리기 전에는 아무것도 못해요."

"흐음... 그럼 이유는 뭐에요? 이대로 나간다면 모험가 길드의 입지가 좁아질텐데..."

"솔직히 저희는 좁아 질 입지도 별로 없는데요. 모험가들이 사고치고 다니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차라리 미믹에 의해서 용병 연맹의 힘이 꺽이는게 더 이득이에요."

펠리시아는 다른 간부들, 특히 상아와는 다르게 정세를 파악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법을 찾는 것이 능한 듯 보였다. 정의나 정, 그런 것 따위는 관계 없이 오로지 실리만을 추구하는 그녀의 말에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로 인해 시민들에게 피해가 생길 수 있는데요?"

"뭐, 그건 용병 연맹이 책임지겠죠? 아니면 시청이나."

"후후후... 그게 정상이죠."

"예. 정말 사람들은 자주 착각을 한다니까요? 던전에서 몬스터가 나왔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요? 던전 내부의 몬스터들이 난리를 쳐서 몬스터 사체와 코어를 습득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그건 모험가 길드의 일이고 문제에요. 하지만 던전 밖에서 던전의 몬스터가 난리를 치든, 마인이 날뛰든. 그건 저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니까요."

"......"

"운현씨도 이번 기회에 잘 알아두세요. 저희의 임무는 던전을 탐험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부가적인 임무는 모험가들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것이구요."

"펠리시아씨. 왜 길드장이 되지 않으신거에요?"

던전을 탐험한다. 모험가들의 권리를 향상시킨다. 펠리시아는 담담히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짚었다. 그리고 그것은 운현의 생각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쓸데없이 넷으로 나눠진 힘을 모험가 길드에 집약시키고 모험가들의 힘을 강화시켜 던전 도시를 통제하자. 운현이 상아에게 말했던 것과 비슷하게, 약간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펠리시아가 말하는 의미는 바로 그것이었기에 운현은 궁금해하며 물었다.

"에이~ 전 조직을 이끌만한 재목은 아닌걸요? 음. 굳이 한다면 군사나 책사정도?"

"결국 나서는 것은 광대에 불과하다는 건가요?"

운현이 무덤덤히 묻자 펠리시아는 진한 미소를 지은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나서는 것은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지요. 그런 면에 있어서 저희 길드장님은 무척이나 잘 어울리지 않나요?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나서고, 자신의 책임이 아닌데도 그것을 책임지려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지만 타인을 위해 그것을 포기하고. 그리고 진짜 자신의 마음조차 모르는 바보 같은 점. 후후후... 정말이지 귀엽다니까요."

펠리시아는 부드럽게 웃은 후 도톰한 입술을 핥았다.

"먹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죠..."

"상아를 좋아하세요?"

"당연하죠. 그렇게 귀여운데 말이에요... 후후후. 정말이지..."

"그렇군요."

"운현씨는 어때요?"

"저요? 저도 좋아합니다. 친구로서는."

운현의 말에 펠리시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어깨를 으쓱인 그녀는 운현의 볼을 톡 쳐준 후 담담히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운현씨나 길드장님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그건 제가 바보같다는 건가요?"

"아니요~ 귀엽다는 점이 말이죠."

펠리시아는 그의 볼을 톡톡 쳐 준 후 풍만한 둔부를 씰룩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운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내가 귀엽다라... 흥.'

운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콧방귀를 뀐 후 차분히 용병 연맹의 구역 쪽으로 걸었다. 그가 용병 연맹의 본부 근처에 도착했을 때 연맹의 용병으로 보이는 여인들은 3인 1조가 되어 순찰을 돌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들을 움직임을 차분히 바라보던 운현은 용병들을 지휘하는 것으로 보이는 좋은 갑옷의 여인이 정문에 떡하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인벤토리 안의, 조금만 더 코어를 흡수하면 마인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는 미믹을 본 후 싸늘히 웃었다.

'과연 마인은 어느정도 힘을 보일 것인가...'

다른 이들의 시선에 눈에 들키지 않게 차분히 인파 속으로 빠져나간 운현은 골목에 들어가 하이딩을 걸고 2층짜리 건물의 벽을 타고 올라갔다. 요철이 많은 덕분에, 그리고 레벨업으로 인해 힘이 오른 탓에 어렵지 않게 그곳을 오를 수 있었던 운현은 건물 위에서 용병 연맹의 입구를 향해 미믹을 그대로 던졌다.

"또 나타났나!?"

"꺄아아아악!"

"촤아아악!?"

"큭!?"

미믹이 검은 기운을 내뿜는다. 그 검은 기운을 중갑으로 막아낸 보라색 머리칼 여인은 자신의 갑옷이 한방에 반파된 것에 크게 놀랬다.

"아니!?"

"......"

중갑의 반이 날아가고 근육질의 육체가 드러났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킨 그녀는 미믹의 상태를 살폈다. 검은 기운을 넘실거리며 뿌리던 미믹의 기운이 천천히 안으로 사그라든다. 죽은 것일까? 라고 생각하기에 그녀는 저 앞의 반파된 상자가 부숴지는 모습에 눈을 땔 수 없었다.

"으으..."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이 터져나온다. 전쟁터에서도, 수세에 몰리던 전쟁터에서조차 이런 공포를 느낀 적이 없었던 그녀는 무기를 들고 외쳤다.

"모, 모두 나와!! 비상이다!!"

"우우우우웅."

낮은 진동음과 함께 상자의 금이 더더욱 짙어지며 하나 둘 씩 파편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원형으로 뭉쳐진 검은 기운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하자 그녀는 그것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주먹만했던 검은 기운은 금방 큰 키의 사람 모양으로 변화했고 그녀의 외침에 용병 연맹에서 간부급의 인원들 둘이 모였을 때 검은 기운은 완전히 인간의 형태를 갖추었다.

"저게... 뭐야."

바민의 중얼거림에 티르빙은 무기를 꽉 쥐고 검은 기운의 사람을 보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간신히 말했다.

"...마인이다."

"뭐!?"

"마인이다! 공격해! 저 자식이 검을 뽑게 놔둬선 안돼!!"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인은 한쪽 손을 용병 연맹의 간부들과 용병들에게 겨눈 후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아!!!"

[패시브 스킬 : 현자의 시간이 비활성화 되었습니다.]

[냉철한 이성 상태가 해제됩니다.

[지력이 99 감소합니다.]

117====================

terror

"와우."

하이딩을 건 채 2층 건물의 옥상에서 구경하던 운현은 마인의 강함에 감탄했다. 용병 연합의 간부로 보이는 여인 셋과 열명의 용병들. 그리고 시청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병사들까지. 그들이 합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인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주먹 한번, 발길질 병사들이 한번에 나가 떨어지자 운현은 히죽 웃었다.

'이정도면 꽤나... 잘하면 용병 연맹을 몰살시키는 거 아냐?'

차라리 이대로 용병 연맹이 다 쓰러져버린다면 속이 편하다. 귀찮은 선거따위 치루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핫!"

마인의 공격이 다른 용병을 친 틈을 노려 마인의 머리를 향해 봉을 찌른 그녀는 자신의 봉에 맞은 마인이 비틀거리자 외쳤다.

"마인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그런 방식으로 싸워선 안돼! 누군가를 방패로 삼아야 한다! 마인이 검을 뽑기 전까지는 그 방법 밖에 없어!"

"방패조!"

그녀의 외침에 바민이 이를 갈며 용병들에게 외쳤다. 명령을 받은 용병들이 등에 지고 있던 타워실드로 마인의 공격을 막아내자 바민과 티르빙의 공격이 이어졌다. 생각 외로 쉽게 마인이 공격당하자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쩝. 의외네. 약한...'

"촤아악!"

"젠장!"

한참 밀리던 마인이 바민의 발차기에 맞아 뒤로 나가떨어진 후 휙 공중제비를 돌며 착지했을 때 그의 손에는 어둠의 기운으로 일렁이는 검이 들려 있었다. 어느 틈에 검을 뽑은 것일까. 그것을 본 티르빙은 이를 갈며 외쳤다.

"빌어먹을! 모두 공격해!"

"하아아아압!"

티르빙이 그토록 경계하던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티르빙은 다급히 외쳤고 그녀의 외침을 받은 용병들은 방패를 앞세우며 마인을 향해 달려갔다.

"서걱!"

그저 검을 휘둘렀을 뿐이다. 단 한번의 휘두름에 다섯명의 용병들이 들고 있던 그들의 카이트 쉴드는 반토막이 나버렸다. 조금만 깊었으면 그대로 모두 목이 잘렸을 뻔한 상황.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강함에 티르빙은 이를 꽉 깨물었다.

"바민! 저 상태가 되면 막을 수 있는 건 너와 나 뿐이다! 너희들! 안에서 간부들 중 아무나 데리고 나와! 바민! 공격해!"

"으랴아아아압!"

바민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쏘아진다. 그녀의 주먹에 달려 있던 푸른 기운이 수십개의 구체를 만들어 자신에게 날아오자 마인은 가볍게 검을 바닥에 꽂은 후 포효했다.

"크허어어엉!!"

"펑펑펑!"

"...맙소사."

마인의 검에서 솟아오른 검은 기운의 벽은 바민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었다. 다시 마인이 검을 잡자 검은 벽을 사라졌고 마인은 검을 들어 바민에게 겨눈 후 가볍게 그녀를 향해 수직베기를 시전했다.

"위험해!"

"이게 무슨 짓...!"

"콰가가가각!"

티르빙은 멍청히 서 있는 바민의 복부를 강하게 걷어찼다. 그녀에게 맞을 줄 몰랐던 바민이 화를 내려는 순간 그녀가 있던 자리부터 약 10m 정도 되는 거리까지 무언가에 베인 듯 큰 홈이 새겨졌다. 돌바닥을 깨트리며 새겨진 긴 틈에 바민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것을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멈추지마! 어서..."

바민이 공포에 휩쌓이자 티르빙은 봉을 들어 마인에게 겨눴다. 자신을 향해 무기를 겨눈 티르빙을 말없이 바라보던 마인이 검을 크게 당겼을 때 마인의 복부에서 길죽한 은색의 검이 솟아올랐다.

"푹!"

"......!"

"촤악!"

마인의 복부에서 나온 칼날은 빠르게 마인의 어깨죽지까지 올라와 밖으로 나왔다. 사람이었다면 즉사의 상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인은 덜렁거리는 자신의 오른쪽 팔을 힐끔 응시하기만 할 뿐 전혀 고통받지 않은 모습으로 몸을 돌렸다.

"아르토리우스님!"

"어머~ 신기하네요. 이게 던전의 마인이라는 건가요?"

마인의 뒤에서 나타난 것은 용병 연맹의 연맹장 아르토리우스였다. 마실이라도 다녀오는 것인지 드레스나 갑옷이 아닌 평범한 처녀의 복장을 한 그녀는 자신의 공격에 맞고도 멀쩡히 움직이는 마인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크아아아아아!"

아르토리우스를 경계한 것일까? 마인은 티르빙이나 바민 대신 아르토리우스에게 포효하며 검을 들어올렸다. 척 봐도 강한 기술을 쓰려는 마인을 본 티르빙은 다급히 외쳤다.

"위험...!"

"촤악!"

"푸슈슈슈..."

"네? 티르빙? 뭐라고 말하려고 했나요?"

"하지 않네요. 하... 역시."

자신의 외침이 무색할 정도로, 아르토리우스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마인의 목을 베었다. 아무리 마인이라 하더라도 목이 베이는 데미지는 무시할 수 없었나보다. 떨어진 목과 몸은 검은 연기를 내며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검은색 구슬 하나만이 남았다.

"마인이다 뭐다 시끄럽게 굴길래 얼마나 강한가 했더니... 침착하게만 상대한다면 티르빙. 당신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군요."

"예? 하지만 저는..."

"티르빙. 당신은 당신 자신을 너무 낮게 생각하고 있어요. 역시 필레와 결판을 내지 못해서 그런걸까요? 아니면 저번에 패배를 해서 그런걸까요?"

"그, 그건 패배가 아닙니다! 그저...!"

몇일 전 모험가 길드를 습격하러 갔었던 티르빙은 그때의 굴욕적인 과거를 아르토리우스가 언급하자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떻게 말해도 패배는 패배다. 그녀가 우울한 얼굴을 지으며 아무런 말도 못하자 아르토리우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가볍게 끌어안아주었다.

"아아. 나의 귀여운 부하님.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당신이 필레를 쓰러트리는 날은 반드시 올거랍니다."

"...그런가요."

"물론이죠. 제가 보장할게요. 당신은 필레보다 강하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르토리우스는 힐끔 주저 앉아 있는 바민에게 시선을 던졌다. 추태를 보이게 된 바민이 얼굴을 붉히자 아르토리우스는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나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당신은 항상 이랬잖아요. 당신의 전투는 이런 대인 전투와는 맞지 않죠. 당신의 강함은 이런 곳에서 쓰이는 것이 아니에요."

"그, 그런가요?"

"물론이에요. 당신은 일군과 싸우는 것에는 익숙하겠지만 1:1 대결은 별로 안해봤잖아요? 각자 맞는 전투 스타일이 있는 것이니까 너무 우울해하지 말아요."

가볍게 바민을 위로한 그녀는 주변을 둘러본 후 차분히 말했다.

"오늘 여러분들은 아주 잘 싸워주었습니다. 용병 연맹은 무사합니다.  여러분은 안심하시고 생업에 종사해주시길 바랍니다."

"오...오오오오!!!"

갑자기 나타나 간단히 마인을 처리한 그녀의 말에 마인의 공포에 질려 있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녀는 그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강하게 외쳤다.

"미믹이든 마인이든, 외국의 막강한 군대든! 던전 도시는 저 아르토리우스가 지킬 것이니 걱정 마세요!!"

"와아아아아!!"

"아르토리우스님!!"

"역시 아르토리우스님이야!"

"던전 도시는 용병 연맹이 있으니 안심이라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들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아르토리우스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은 구슬을 들었다. 기이한 검은 기운을 내뿜는 구슬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은 후 용병들과 함께 용병 연맹의 본부로 들어갔고 사람들은 아르토리우스를 칭찬하며 해산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마인이 검을 뽑을 때 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아르토리우스가 나타나자 상황은 급반전했고 결국 마인이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운현은 안타까움에 이를 갈고 자리에서 이동했다. 적당히 사람들 틈 속에 들어가 하이딩을 푼 운현은 아르토리우스의 강함, 그리고 티르빙과 바민을 상대하며 전혀 밀리지 않았던 마인을 떠올렸다.

'간부급만 만나지 않으면 미믹으로도 충분히 혼란을 줄 수 있겠군. 그리고...'

문제는 아르토리우스다. 저 강한 미믹을 간단하게 해치우는 것을 보면 미믹 두세마리를 보내봤자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저 계집을 끝내려면 적어도 2, 3계층의 미믹이나 마인이 필요하겠구만.'

괜히 던전 도시를 지탱하는 네개의 조직 중 하나의 수장이라 불리는 몸이 아니라는 건가. 운현은 쓴 입맛을 다시며 생각했다. 천천히 거리를 걷던 운현은 근처에 작은 대장간이 보이자 좌판에 놓여져 있는 작은 해머를 스틸한 후 잽싸게 인벤토리에 넣었다.

"어!? 여기 있던 망치 어딨어!?"

잠시 딴데를 보던 대장장이 여인이 당황하는 것을 뒤로 한 채 한적한 골목에 들어 선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보물상자를 꺼내었다.

'그렇다면 다음 계획을 실행하는 수 밖에.'

아르토리우스가 강하다? 그녀가 미믹을 해치우고 마인을 쓰러트린다? 그렇다면 좋다. 이제부터 즐거운 술래잡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운현은 멀쩡한 보물상자를 하나씩 하나씩 부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낸 미믹은 총 열두개의 보물 상자 중 총 여덟. 2/3 확률로 미믹이 만들어진 것에 아쉬워하며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다른 쪽으로 움직인다.'

그가 이동한 곳은 용병 연맹의 구역이 아닌 상인 조합의 구역이었다. 용병 연맹이 있는 구역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도착한 운현은 차분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저기 좀 많군'

용병들이 많은 골목으로 들어 선 운현은 그곳의 진한 밤꽃 향기에 깜짝 놀랐다.

"헉."

은은한 청색의 빛이 넘실거리는 거리다. 깔끔한 양복이나 화려한 옷, 혹은 반나의 상태로 고급스러운 가게 앞에서 여성들을 유혹하는 남자들이 넘쳐나는 거리에 도착한 운현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남창 촌이구나!'

못 올 곳을 왔다. 운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려다가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턱 잡자 움찔했다.

"호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운현을 잡은 것은 나이 지긋하신 중년 여인이었다. 그녀는 운현의 몸을 위 아래로 핥듯이 바라본 후 천천히 입맛을 다셨다.

"후후후... 뭐, 남창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그래서? 얼마면 돼?"

"네?"

"얼마면 돼. 얼마면 돼냐고!"

운현을 벽으로 밀어붙인 그녀는 벽에 손을 가져다 대 운현의 턱을 잡고 강하게 말했다. 벽쿵을 여유있게 한 그녀의 행동에 운현은 미친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거 위험한데!?'

"아. 그... 한 일억골드 정도?"

"아하하하핫!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이 청등가의 주인이자 상인 조합의 부 조합장인 미라에게 그런 농담을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 하하하. 유쾌한 거야 말로 제 장점이죠."

"그래... 그 유쾌함. 내 침대에서도 해주겠어?"

"아뇨. 제가 좀 바빠서..."

"그래? 후후후...그럼 날 위해 시간을 좀 내주겠어?"

"이, 이것 좀..."

운현은 그녀에게 잡혀 있는 팔을 뿌리치려 해보았지만 그의 손은 마치 수갑에라도 걸려 있는 것처럼 꽉 잡혀 풀리지 않았다. 그가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며 더더욱 귀엽다는 듯 웃은 그녀가 입술을 핥았을 때 운현은 등 뒤에서부터 올라오는 소름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소리 질러도 괜찮아. 이 거리에선 내가 여왕이니까... 귀여운 것. 누나가 아주 오늘 제대로..."

능글맞게 말하며 미라의 손이 운현의 바지춤 사이로 들어가려 했다. ㄱ

"미라씨. 그만 하시죠."

얼음같이 차가운 목소리에 미라의 손이 멈춰졌다. 운현을 보고 있던 그녀의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졌고 그녀는 빠득 이를 간 후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머~ 조합장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후후후. 그게 말이죠~ 남창이 되고 싶다는 사람이 여길 찾아와서..."

"그런가요?"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 짙은 푸른색 머리칼. 백색과 청색으로 이루어진 깔끔한 복장을 입은 여인이 안경 너머의 푸른색 눈동자로 자신을 보며 묻자 운현은 붕붕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럴리가요! 전 모험가라구요!"

"모험가...?"

"뭐야. 모험가가 여긴 왜 온거야? 쳇."

운현의 말에 미라는 인상을 구기며 침을 퉤 뱉고 그대로 걸어가버렸다. 그녀가 남창들이 많은 곳으로 간지 얼마되지 않아 많은 남창들이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그런 그들을 쓰다듬고 더듬으며 즐기는 미라를 무심히 바라보던 푸른 머리의 여인은 운현에게 다가가 물었다.

"당신이 모험가 길드의 운현인 것입니까?"

"네? 어. 절 아세요?"

"......"

운현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한걸음 물러나 살짝 고개를 숙였다.

"윈디아 발렌타인. 윈드 발렌타인의 동생이며, 이 던전 도시 발티르의 상인 조합의 조합장이자 시장입니다.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군요. 언니에게 당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

"언니에게 남자를 소개시켜주기로 하셨다구요?"

윈디아의 싸늘한 시선에 운현은 움찔하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런 그를 차분히 바라보던 윈디아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좋은 찻집을 알고 있습니다."

118====================

terror

"......."

"......."

현 던전 도시의 시장이자 상인 조합의 조합장인 윈디아를 앞에 두고 운현은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말을 하려면 어서 하지 왜...'

"운현씨."

"네."

"저희 언니에게 남자를 소개시켜주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남자가 어떤 남잔지 제가 먼저 알 수 있을까요?"

"예? 어... 그게."

윈드에게 모험가들 중에 괜찮은 남자를 찾아 그를 소개시켜준다고 했지만 아직 찾지 못한 운현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의 그런 모습에 윈디아는 살짝 눈쌀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어색하고 차가운 분위기가 더더욱 무거워진다. 운현을 바라보는 윈디아의 시선에 냉기가 담기자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못찾았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럼 먼저 말씀드리지요."

"네?"

"저희 언니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나요?"

"어... 그게 그냥 간단한 정도는? 이름, 나이, 집안. 그리고 성격 정도?"

"성격은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좀 푼... 아니, 아니,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이 깊고 가문의 영향력을 자랑하지 않으며..."

"그런 것 말고. 여자로서의 성격을 여쭤보는 겁니다."

'아니 왜 내가 이런 질문을 받아야 하지?'

순간 울컥한 운현은 짜증을 내려다 윈디아의 칼날같은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그냥 지금은 얌전히 아는대로 부는 것이 옳은 행동 같기에 그는 차분히 말했다.

"여자로서의 성격은 잘 모르겠는데요."

"흐으음..."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겁니까?"

"언니가 저희 가문에 조만간 남자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가문은 축제 분위기구요. 발렌타인 가문의 가주이신 저희 어머니... 아, 제 친어머니는 아닙니다. 윈드 언니의 친어미니이시죠. 마이나 발렌타인님께서 한달 후 던전 도시에 찾아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럼 한달 안에 남자를 찾아야겠군요."

"가능하시리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기엔 힘들 것 같습니다만."

윈디아는 차분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그녀의 싸늘한 말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린 후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운현 역시 동감이었다.

"시간과 예산만 있다면 좀 더..."

"그 말씀은 쉽지 않다는 이야기군요."

"하아...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죠."

그의 말에 윈디아는 입을 다물고 생각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운현씨.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전 21살입니다."

"8살 차이... 나쁘지 않군요."

"...네?"

"고향이 어디시죠? 가족관계는? 다들 던전 도시로 모실 수 있으십니까?"

"이름없는 시골이라서... 가족들을 데려 올 수는 없습니다만."

"가문에 영향력을 끼칠 다른 가족도 없다라.. 더욱 좋군요."

"아니 뭐가 좋..."

"얼굴도 그정도면 괜찮고... 혹시 신체에 장애가 있거나, 병이 있으십니까?"

"아뇨. 그런건 없는... 설마!?"

운현은 기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경악하자 윈디아는 차를 한모금 마신 후 담담히, 하지만 싸늘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님께서 오실 때까지 언니에게 소개시켜 줄 남자를 찾지 못하면 당신이 나서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자, 잠깐! 제가 왜요!?"

"당신이 생각없이 남자를 소개시켜준다는 말을 해버린 탓에 언니가 가문에 그 이야기를 했고, 어머님께서는 그것에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가문의 일원이자 어머님의 딸이고, 언니의 동생으로서 어머님과 언니를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군요."

"아니 그래도! 윈드와는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에 불과한데..."

"혹시 사랑하거나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으십니까?"

"아뇨. 그건..."

운현은 필레와 상아,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를 떠올렸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사랑한다고 확정지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떨떠름한 대답에 윈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럼 된 것 아닙니까? 솔직히 저희 언니가 어디가 문제입니까? 집안 좋지, 얼굴도 그정도면 예쁘지, 거기에 기사로서 행동하여 책임감도 강하고 많은 훈련과 전투로 몸도 괜찮습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혹시 언니의 벗은 몸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 그럴리가요."

"벗으면 굉장합니다."

윈디아는 말한 후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황당해하다가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벗으면 굉장한건 다른 사람들도 많고. 아니1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전데요!?"

"최근 언니와 이야기를 했을 때 당신의 이름을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

"...네? 하지만 전 윈드씨와 딱히 뭔가를 한 적이 없는데요?"

운현은 윈디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윈드와 뭔가 같이 일을 한 것도 없고 하다못해 차 한잔 마신 적이 없었다. 한 것이라고는 던전 도시에 들어왔을 때 윈드가 자신을 구해준 것. 취해서 엉엉 울때 달래준 것이랑 필레와 데이트 도중에 난리를 치던 것을 막은 정도? 그 외에는 딱히 접점도 없었던 운현이 무척이나 떨떠름한 어조로 말하자 윈디아는 피식 웃었다.

"그런가요? 하지만 윈드 언니는 항상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말하더군요. '운현씨가 남자 소개시켜주기로 했어~'"

"...아니 그 아가씨는 진짜... 그리고 그건 제 이름이 중요한게 아니라 남자 소개시켜주기로 했어. 라는 것이 중요한거잖아요. 윈드씨가 저에게 마음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요?"

"살붙이고 살아가면 정이 붙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아니 그래도."

"하아... 꽤나 비싸게 구시는군요. 좋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도...?"

"윈드 언니와 결혼하시면 저와도 결혼할 수 있는 영광을 드리지요. 하시겠습니까?"

"하겠냐!!!"

운현은 결국 울컥해서 버럭 소리질러버렸다. 그의 외침에 찻집에 있던 사람들이 운현과 윈디아를 바라보았지만 운현은 그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결국 터져버린 짜증을 그대로 풀었다.

"지가 무슨 일이 있어도 윈드에게 남자를 소개시켜줄테니까 헛소리는 관두시지죠! 지금 당신. 이것 말고도 할 일 많지 않나요?"

"무슨 일 말씀이십니까?"

윈디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운현을 바라보았다.

"용병 연맹과 뭔가 꾸미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아아. 그것 말입니까?"

운현의 말에 윈디아는 피식 웃은 후 담담히 말했다.

"그저 저의 여흥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 따위는. 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가문과, 어머님과, 언니의 행복을 위해 움직이는 것 뿐이지요."

"....."

그녀의 눈에 담겨 있는 빛은 어딘지 이상했다. 던전 도시의 경영 따위 알바가 아니라는 뉘앙스가 거짓 같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운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 앉았다.

"당신이 원하는게 뭡니까?"

"아까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가문, 어머님, 그리고 제 사랑스러운 언니. 이 셋 외에는 딱히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만."

"...그런데 왜 시장이 된 것이죠?"

"언니가 던전 도시로 오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죠. 언니가 하고 싶다는 일을 저는 다 들어 줄 생각입니다."

"혹시... 윈드씨를 좋아하나요?"

"네. 제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언니입니다. 누가봐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 언니가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해서 제가 엄선하여 남자들을 소개시켜줬지만... 아쉽게도 잘 되지 않았더군요."

"지금까지 윈드에게 당신이 남자를 소개시켜줬다는 건가요?"

"네."

차를 한모금 마신 운현은 그녀의 분위기에 할 말을 잃었다. 혹시 백합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거기까진 좀 무서워서 못 물어본 운현은 용기를 내기 위해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녀가 차를 한잔 다 마시고 다음 차를 주문했을 때 겨우 물을 수 있었다.

"윈드씨를 사랑합니까? 아니 그, 남녀, 가족 관계를 제외하고. 성적으로."

"무슨 의미로 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윈드 언니의 행복을 바랄 뿐입니다만."

딱 잘라 부정하는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됐습니다. 윈드씨와의 일은 제가 알아서 하지요."

"만약 한달 후, 어머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남자를 찾지 못하면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발렌타인 가문이 단순한 가문이라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하군요. 한 국가의 대소사를 담당하고 있는 거대한 유력 가문입니다. 그런 가문의 가주가 헛걸음을 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거기에 어머님께서는 한달 후의 방문을 위해 불철주야 식사나 잠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시고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죠?"

"당신이 언니에게 남자를 소개시켜준다고 말했으니까요.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끄응..."

이렇게 나오면 또 할 말이 없다. 운현은 낮게 신음했다. 생각없이 지른 대가가 이거라면 자신이 책임지는 수밖에. 대충 그날만 때우고 헤어지자! 라고 생각한 운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제가 윈드씨의 애인 역할을 하도록 하지요."

"진심이십니까?"

"네. 약속하겠습니다."

그제서야 윈디아는 운현을 바라보던 차가운 시선을 풀었다. 더 이상 운현에게 관심이 없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운현은 자리에서 나갔고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던 윈디아는 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이걸로 언니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던 일은 해야지.'

윈디아에게 잡혀 쓸데없이 시간을 빼앗겼지만 할 일은 해야 한다. 운현은 상인 조합이 관리하는 영역에 들어선 후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휙 미믹을 소환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미믹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 미믹이 검은 기운을 뿜어내 사람들을 습격하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이게 뭐야!?"

"경비병! 경비병!! 아, 아무나 빨리 나와!!"

용병이나 조합의 병사로 보이는 이들이 미믹을 상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간부급 인사도 아닌 그들이 미믹의 공격을 당해낼 수 있을리는 만무했다. 결국 미믹의 공격에 그들이 모두 쓰러졌을 때 미믹은 한곳을 향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기점... 저기에도 코어가 들어간 장비가 있는 모양이군.'

꽤나 고급의 무기점의 앞까지 이동한 미믹이 검은 기운을 내뿜으려 할 때 미믹에게 화살비가 쏟아졌다. 아이템들을 흡수하려던 미믹은 그 공격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쏴라!"

미믹의 공격 범위 바깥에서 병사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십수명의 병사들이 쏘아낸 화살은 마력이 담겨 있는지 푸르스름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확실히 그것에 타격을 입은 미믹의 몸 여기저기가 부숴져 내려가자 운현은 싸늘히 웃으며 그들의 뒤로 다른 미믹을 하나 더 꺼내어 던졌다.

"촤아아아악!"

"으악! 이게 뭐야!?"

"또 나타났다!"

"젠장!"

한참 미믹을 압도하던 병사들은 자신들의 근처에서 새롭게 나타난 미믹이 공격을 시작하자 혼비백산하며 몸을 돌려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이미 미믹의 공격에 병사들의 반 이상이 당해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이게 무슨 소란들이냐!"

"콰지직!"

'저 기집애는 진짜...'

"윈드님!"

"윈드씨!!"

"음? 이건...?"

갑옷을 입고 있는 윈드는 일격에 미믹을 반파시켜버렸다. 윈드의 공격에 큰 상처를 받은 미믹이 스르륵 움직여 다른 미믹 쪽으로 갔을 때 그나마 멀쩡한 미믹이 검은 기운을 내뿜어 윈드를 공격했다. 하지만 윈드는 여유롭게 미믹의 공격을 검으로 받아낸 후 빠르게 돌격해 미믹을 베었고 그 미믹 역시 반파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젠장! 쟤는 왜 낄데 안낄데 모르고! 이러니까 애인이 없지!'

다된 밥에 코를 빠트려도 유분수지. 한참 제대로 깽판을 치고 있는데 윈드가 나서버린 탓에 아까운 미믹을 둘이나 잃게 생긴 운현은 사람들 틈새를 이동하며 스틸의 범위 안에 미믹을 두려 했다.

"호오... 저게 그 미믹이라는 건가?"

'조금만 더...'

"던전 도시를 위협하는 자는 몬스터든 사람이든 용서하지 않는다! 하압!"

운현이 미믹을 스틸로 회수하기 전에 공중으로 날아오른 윈드는 자신의 등에 있는 검까지 뽑아 양 손에 각각 하나씩 검을 잡고 휘둘렀다. 은은한 청색 빛이 퍼지며 그녀의 검이 미믹의 안에 있는 검은 기운에 꽂혔다. 그 순간 미믹은 박살이 나버렸고 사람들은 윈드가 미믹을 해치운 것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꺄악~!!"

"윈드씨! 멋져요!"

"최고에요~!!"

"하하하. 이정도는 당연... 윽, 윈디아 아냐?"

"윈드 경비대장. 순찰 업무 수행중이니 지금은 공적으로 대해주십시요."

"...시장님."

어느새 나타난 윈디아는 팔짱을 낀 채 윈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에게 움찔한 윈드가 검을 회수해 검집에 밀어 넣었을 때 그녀는 윈드에게 다가가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다치신데는 없습니까?"

"이정도야 아무렇지도 않죠. 그럼 순찰 업무로 복귀하겠습니다!"

윈드가 경례를 올리고 떠나가자 윈디아는 바닥에서 점점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한 미믹의 잔해를 본 후 슬쩍 사람들 틈 속에 서 있는 운현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시선에도 운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대로 몸을 돌렸고 윈디아는 그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빙긋 웃었다.

'젠장...'

기껏 얻은 미믹을 이렇게 날려버린 것에 운현은 아까워 미칠 것 같았다. 왜 거기서 윈드가 나선단 말인가. 상인 조합에도 미믹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알린 것은 크지만 그래도 좀 더 깽판을 쳐서 미믹의 위험성을 알려야 하는데 강자들에 의해서 너무 쉽게 미믹이 당해버린다. 운현은 인상을 왕창 구긴 후 중얼거렸다.

"되는 일이 없네."

119====================

terror

"뭐야?"

안으로 들어 선 운현은 길드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미녀를 발견했다. 그 미녀의 주변으로 티르빙, 헥토르, 바민,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지만 강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할버드에 중갑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저 여자는."

용병 연맹의 연맹주. 아르토리우스다. 마인을 손쉽게 제거한 강력한 힘을 가진 그녀가 여긴 왜 왔단 말인가. 운현이 긴장하며 모험가들 사이로 숨었을 때 길드 사무소의 문이 열리며 길드의 간부들과 길드장인 상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왜 피곤하게 오밤중에 찾아오고 그래?"

"이게 뭔줄 알아요? 상아씨?"

"그게 뭔..."

아르토리우스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 구슬을 본 상아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아르토리우스는 싸늘히 웃으며 말했다.

"오늘 용병 연맹에 던전의 미믹이 출몰했다더군요. 그 미믹이 마인을 소환하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오늘 던전에서 미믹이 발생했나?"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상아의 무거운 목소리에 펠리시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대답에 상아는 어깨를 으쓱였고 아르토리우스는 피식 웃은 후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 구슬을 가볍게 위 아래로 던진 후 상아에게 쏘아보냈다.

"탁."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검은 구슬을 잡은 상아는 아르토리우스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런 상아의 시선에도 아르토리우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들이 하는 일은 무엇이지요? 던전을 탐험하며 던전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과 동시에 던전에서 몬스터가 출몰하여 도시에 나타나는 것을 막는 것 아닌가요?"

"그랬나? 우리의 임무는 던전에서 몬스터가 도시로 나오는 것을 막는 것 까지는 아닌 걸로 알고 있었는데?"

"헤에... 그랬나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결국 모험가들은 이득을 위해서만 움직이겠다는 거군요."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상아의 까칠한 어조에 아르토리우스는 작게 키득거린 후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던전을 그토록 오랜 시간 탐험했는데 왜 미믹이 던전 밖에 생겨났는지도 파악하지 못하다니... 아니면 혹시 알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럴리가."

"그렇군요. 알겠어요. 그럼 이만. 늦은 밤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는지 그대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모험가들과 길드의 간부들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던 용병 연맹의 간부들이 밖으로 나가자 상아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 구슬을 보며 이를 갈았다.

"마인이 던전 도시에서 생성되었다 이거지... 긴급 사태다. 원인을 바로 찾아야겠어."

"알겠어요."

상아와 펠리시아, 그리고 다른 간부들이 급히 사무소로 들어가자 운현은 히죽 웃었다.

'좀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들 좋자고 하는 일이니 좋게 넘어가자.'

아침이 되자 운현은 동료들과 함께 던전으로 들어갔다. 오크 워리어에게서도 보물상자를 얻을 수 있으니 굳이 고블린과 코볼트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던 운현의 파티가 오크들이 서식하는 곳에 도착했을 때 운현은 오크들에게 쫓기는 모험가 파티를 발견했다.

"어쩌지? 낄까?"

"아무리 봐도 쫓기는 것 같은데..."

오크들의 수는 어림잡아도 열셋은 넘어보였고 쫓기는 모험가들은 다섯에 불과했다. 갑옷이나 옷, 드러난 피부의 여기저기에 피와 얼룩이 있고 궁사로 보이는 여인은 끊어진 활을 보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럼 끼자. 우리까지 끼면 위험해질때 저 파티가 우리랑 같이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아마 그렇겠지. 저 궁수는 좀 힘들어보이기는 하는데 말야."

"응!"

미야가 주먹을 꽉 쥐며 전의를 다지자 운현은 헤스티아에게 파이어 볼을 준비시켰다.

"이쪽으로 와!"

절망한 얼굴로 뛰던 여인들은 운현의 외침에 반색하며 그들의 뒤로 향했다. 그녀들이 자신들의 뒤로 오자 운현은 오크들이 오는 경로에 강철 실로 만든 함정을 설치했다.

"꾸오오오오오!"

"크아아아!!"

열 셋의 오크 중 두마리를 제외하고 모두 함정에 걸려버렸다. 흰거미의 실타래로 만든 함정과 다른 은색의 줄이 오크들의 몸을 묶자 운현은 헤스티아에게 외쳤다.

"파이어 볼 날려!"

"콰아앙!!"

준비된 파이어볼이 오크들이 묶여 있는 함정에 내리꽂혀졌다. 엄청난 폭음과 함께 오크들이 고통스러워하자 운현은 함정에 걸리지 않은 오크를 막고 있는 미야에게 지시했다.

"미야! 조금만 더 버텨! 어이! 거기!"

"고, 고마워! 도와줘서!"

"탱커 있으면 이리 와! 상처 입은 사람들은 알아서 치료하고!"

바제트가 화살을 쏘아내며 미야를 지원하고 헤스티아가 다시 파이어볼을 준비하는 동안 운현은 다른 파티의 여인들에게 지시했다.

"운현! 풀릴 것 같아!"

파이어볼의 폭염속이 점점 사그라들고 오크들이 이를 갈며 몸을 일으키자 운현은 단호히 외쳤다.

"바제트! 인탱글 준비해!"

"응!"

미야를 돕던 바제트가 오크무리를 향해 인탱글을 걸었다. 솟아난 덩쿨들이 오크 무리를 뒤감자 운현은 기름통을 들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하압!"

기름통을 있는대로 쏟아부은 후 뒤로 빠진 운현은 헤스티아의 파이어볼이 한번 더 작렬하고 엄청난 화염을 만들어내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 있는 여인들에게 외쳤다.

"쳐 놀지 말고 빨리 잡아!"

"아. 네!!"

오크들을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가 많았지만 적절한 함정과 헤스티아의 파이어볼, 그리고 쫓기던 파티에 있던 마법사의 윈드 볼에 의해 오크들은 모두 정리가 되었다.

"하아...고맙습니다. 저는 엘이라고 합니다. 이 파티의 리더죠."

녹색의 로브를 입은 짙은 밤색 단발 머리의 여인은 운현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운현 덕분에 살아난 셈인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동료들의 안전을 살폈다.

"흑... 레기가 다쳤어..."

"어서 올라가야 될 것 같아요."

사제로 보이는 여인은 레기라 불린 여인의 팔이 푸르죽죽하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녀의 얼굴도 피곤해보이는게 그녀를 회복시키느라 꽤나 고생한 모양이었다.

"오크들이 저렇게 많이 몰려다니는건가요?"

"네? 아... 아뇨. 원래 저정도 수도 아니고... 쉽게 잡을 수 있는데."

엘은 주먹을 꽉 쥐고 분한 얼굴로 말했다.

"어떤 파티가 저희에게 몬스터를 붙였어요.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된거에요. 저희는 삼일째 이곳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는데 흥분억제제를 먹어서 꽤 약해져 있었거든요. 슬슬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요?"

"네. 여러분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자세한 설명을 드리고 싶지만..."

엘은 동료가 걱정됐는지 다급히 말했다. 결국 그녀의 설명을 더 듣지 못한 운현은 팔짱을 끼고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주변에 앉아 있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야. 이거 이 근처에 몬스터 붙이는 자식들이 있나본데."

"그냥 도망가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미야는 꺼림찍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설레설레저었다.

"아까 엘의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어. 이거 우리도 조심해야겠군."

"하지만 아까 상대해보니까 대여섯 마리까지는 괜찮을 것 같은데?"

"자만만큼 무서운 것은 없지. 우리는 이곳에 온지 하루도 되지 않았어. 처음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어."

운현의 말에 미야는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그녀를 달랜 그는 자신의 말에 동의하냐는 의미로 다른 여인들을 보았고 바제트와 헤스티아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안전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

"그래요. 레벨업도 중요하지만..."

"헉! 오크다!"

헤스티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운현들을 발견했는지 일곱마리의 오크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에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외쳤다.

"미야! 준비해! 헤스티아! 아까랑 비슷하게 간다! 바제트! 미야! 이거 받아!"

그녀들에게 기름통을 나눠 준 운현은 미야에게 말했다.

"코볼트 잡을 때처럼 함정, 기름 연계로 간다!"

"응!"

다른 파티들이 오크들과 싸우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작전을 구상할 수 없었지만 저렇게 달려오는 어쩌겠는가. 다른 몬스터들에게도 잘 먹히는 작전을 말한 운현은 미야가 뛰쳐나가자 바제트에게 말했다.

"함정 효과 끝나면 바로 인탱글 걸어!"

"알았어!"

"헤스티아! 파이어 볼 날리고 바로 바인드 준비해! 바제트가 쏜 인탱글에 모두 맞으면 취소하고 딜링으로 간다!"

"알겠어요!"

모두에게 간단히 지시를 마친 운현은 오크들과 자신들 사이에 가시 줄 함정을 설치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달려오던 오크들은 운현이 설치한 가시 줄 함정에 걸려버렸고 운현과 바제트, 미야는 달려가 함정에 빠진 오크들에게 기름통을 던졌다.

"파이어 볼!!"

헤스티아의 지팡이에서 붉의 공이 쏘아져나갔다. 활활 타오르는 불의 공이 기름을 잔뜩 머금은 함정에 꽂히자 강렬한 폭염이 터져올랐다.

"쿠어!"

"쿠오오오오!!"

"바제트! 공격해! 미야! 도발 준비! 인탱글에 걸리면 한놈씩 끝장낸다!"

강렬한 불꽃 때문에 운현과 미야는 접근할 수 없었다. 그 사이 바제트에게 화살을 쏘아 공격하라 말한 운현은 단검을 꽉 쥔 후 오크들을 노려보았다.

"쿠어어어어!!"

불꽃이 사라지고 검게 그을려진 오크들이 엄니를 번뜩이며 운현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 히죽 웃은 운현이 단검을 척 들었을 때 미야가 포효했다.

"어딜 보는거냐아아아아!!!"

그녀의 도발에 오크들이 시선이 미야에게로 바뀌었다. 오크들이 자신을 공격하려 다가왔을 때 미야는 휙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바제트의 인탱글이 시전되었다.

"쿠어!? 쿠어어어!?"

"지금이다! 공격해!"

다행히 인탱글에서 빠져나온 오크는 없었다. 모든 오크들을 잡은 바제트가 다시 활을 들어 쏘기 시작하자 운현과 미야는 바제트가 공격하고 있는 오크를 공격했다.

"크어어..."

인탱글의 효과가 끝나기 전 세명의 집중 공격을 맞은 오크가 쓰러지자 어느새 마법을 완성시킨 헤스티아는 날카롭게 외쳤다.

"모두 물러나세요!"

두번째 파이아 볼이 쏘아져 오크들을 감쌌다. 기름을 먹이지 않아 아까보다 약했지만 그래도 그 강렬한 폭염에 오크들은 충분히 고통스러웠는지 비명을 내질렀다.

"헤스티아! 굿! 파이어 볼 얼마나 더 쓸 수 있어!?"

"이제 두번요!"

"좋아! 그럼 함정 한번..."

"우오오오오오!!"

운현이 함정을 걸려는 순간 불길 속에서 고통받던 오크가 자신이 들고 있는 창을 운현에게 던졌다.

"위험해! 운현!"

오크의 창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본 운현은 이를 갈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쿵!"

"크어...!"

방패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밀릴 정도의 충격을 받은 운현은 방패를 반쯤 뚫은 창날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자칫 잘못했으면 이 창에 맞아 사경을 헤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운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 죽여버렷!!"

120====================

terror

[레벨이 올랐습니다.]

[추가 스탯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운현! 나 레벨업했어."

"역시 오크부터는 잘 오르네. 강한 몬스터라 그런가?"

"확실히 그렇긴 해요. 파이어 볼을 네번이나 맞았는데도 살아 있는 걸 보면..."

고블린이나 코볼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함이다. 아마 오크 세마리쯤 뭉친다면 홉고블린 한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운현은 구멍뚫린 방패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5골드 날아갔네."

"그래도 방패 덕분에 산 셈이잖아."

운현이 침울해하자 바제트는 싱긋 웃으며 그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을 밀어낸 운현은 방패를 가방에 넣고 암가드를 들었다.

"일단 조심조심 사냥하자. 한방이 세네."

"응. 나도 주의할게. 어그로가 잘 풀리는 느낌이네. 미안. 운현."

탱커인 자신에게 공격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 운현에게 공격이 가버렸다는 것은 자신이 어그로를 끄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침울한 얼굴로 조심스레 말하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럼 앞으로는 조심들 하자고. 자. 헤스티아. 마력은 어때?"

"조금만 있으면 회복될거에요."

파이어 볼 네방을 다 써서 마력을 거의 소모해버린 헤스티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인가?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 난 주변 탐색 좀 하고 올게. 지형도 작전에 이용할 수 있으니까 말아지."

"혼자 괜찮겠어?"

바제트는 걱정스레 운현에게 물었지만 운현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 대답하고 터덜터덜 일행에게서 멀어졌다.

'흠... 슬슬 다른 함정카드를 만들어야 하는데...'

가시 줄 함정 말고도 강철 실을 이용한 다른 함정을 만들어 보고 싶었던 운현은 근처를 돌며 재료로 쓸만한 것이 없나 찾아보았다. 한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그는 울창한 수풀을 발견하고 놀라며 그곳에 다가갔다.

"이건 대나무?"

아무리 봐도 대나무로 밖에 보이지 않는 나무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린 후 단검으로 대나무를 잘라보았다. 역시나 쉽게 잘리지 않았다. 한참을 낑낑대며 대나무를 잘라낸 그는 대나무와 강철 실. 그리고 바닥에 있는 흙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에이~ 설마 되겠어~?"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안되면 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 운현은 강철 실과 대나무 하나, 흙 한줌을 양 손에 쥐고 재료 합성을 시전했다.

"헐!?"

놀랍게도 재료 합성이 성공했다. 그의 손에 있던 모든 재료가 사라지고 손에 들린 것은 한장의 함정카드였다. 그것을 본 운현은 침을 꿀꺽 삼킨 후 중얼거렸다.

"...구덩이 함정이라."

실제로 써보지 않으면 함정이 어떤 식으로 작동되는 것인지, 어떤 위력인지 알 수 없다. 전에 기름 함정 -폭도 그러지 않았는가. 실제 테스트가 필요했다.

'그럼 역시 만만한... 없군.'

토끼나 늑대, 아니면 고블린이라도 괜찮았지만 이 대나무 숲 근처에는 그런 동물따위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결국 운현은 고민을 하다가 이동을 시작했다.

'저기가 좋겠군.'

한참 오크들과 싸우고 있는 모험가들을 발견한 운현은 하이딩을 걸고 그 근처로 이동해 그들의 전투법을 구경하며 타이밍을 재기 시작했다.

'오호... 저렇게? 대체적으로 틀리지 않네.'

운현의 파티와 저 파티의 전투법은 큰 차이가 없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많은 수를 구속하고 빠르게 수를 줄여나가느냐였다.

"아아아아아~!"

하프를 튕기며 전장의 흐름을 조율하는 바드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지자 오크들의 움직임이 멈추고 순간 전의를 상실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안은 마법사는 마법을 외워 헤스티아의 파이어 볼과 비슷한 형태의 동그란 푸른색 공을 오크에게 쏘았다.

"쩌저정!"

푸른 빛의 공이 전의를 망각한 오크에게 맞아 푸른 빛을 뿜어내었다. 그 빛이 사그라들자 오크들의 몸은 딱딱한 얼음으로 감싸졌고 그 틈을 노려 전투를 하느라 진형이 무너진 이들은 다시 자리를 잡았다.

"윌로네! 함정 좀 써!"

"알았어. 뭐 그리 급해?"

귀찮은 듯 손을 휘저은 윌로네라 불린 여인은 대충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얼음의 구속에서 풀려난 오크들이 달려왔을 때 오크들은 함정에 걸려 흰 줄로 포박되었다.

"공격해!"

"오오오!!"

'이거 도적의 전투는 처음 보는데... 완전 놀자판이군.'

윌로네라 불린 여인은 전형적인 도적인 모양이었다. 후방에 빠져서 가끔씩 함정만 걸어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 생각했는지 직접적인 전투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큭!"

오크의 창이 공격하자 그것을 막아낸 여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탱커로 보이는 여인이 튕겨나가자 제대로 어그로가 끌려져 있는 오크 네마리는 그녀를 향해 돌격했고 그 순간 운현은 그들과 탱커의 사이에 구덩이 함정을 설치했다.

'범위는 가시 줄 함정 정돈가? 그래도 기름 함정 - 폭보다는 범위가 넓어서 다행이군.'

넉넉한 함정의 범위에 운현은 씩 웃으며 만족했다. 아직 자세를 잡지 못한 탱커를 잡기 위해 미친듯이 달려들던 오크들이 구덩이 함정의 근처에 도착했을 때 운현은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그것을 보았다.

"푸숙!"

오크들이 함정의 범위에 들어가자 함정이 발동했다. 주변의 땅과 비슷한 땅이 꺼지며 오크들이 구덩이 안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끄어어어억!!"

오크들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것에 운현은 자신의 생각대로 함정이 만들어졌다는 것에 만족하며 웃었다.

"이, 이게 뭐야!? 윌로네! 네가 한거야!?"

"응? 응? 그... 그게."

오크들이 구덩이로 빠져버린 것에 여인들은 당황하며 그곳으로 가보았다. 안에는 뾰족한 수십개의 대나무들이 있었고 오크들은 대나무에 몸이 꿰뚫린 채 죽어 있었다.

"...윌로네! 대단한데!? 역시 비싼 값을 하는구나!"

오크들에게 쫓겼던 탱커가 감탄하자 윌로네라 불린 도적은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불안한 얼굴로 휙휙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함정을 설치했더니 피곤하네. 너 살리려고 한거니까 오늘은 그만하자. 돌아가야겠어."

"어? 왜? 그 함정 한번 밖에 못써?"

"그래! 아무튼 내 덕분이 이번 전투가 쉽게 끝났으니까 저 오크들의 사체는 모두 내꺼야! 알았어!?"

"그, 그러지 뭐."

그녀의 강압적인 기세에 눌린 다른 여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던 운현은 피식 웃은 후 몸을 돌렸다.

'윌로네라... 남의 도움을 자기걸로 포장해서 이득을 받으려 하다니. 아주 좋은 성격이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사체가 담긴 마석을 챙기는 그녀를 보며 운현은 싸늘히 웃었다.

'이 빚은 꼭 받아주마.'

흰거미의 실타래로도 구덩이 함정 카드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의 생각대로만은 되지 않았다. 강철 실로만 구덩이 함정을 만들 수 있었던 운현은 아쉬워하며 남은 강철 실로 모두 구덩이 함정 카드를 만든 후 일행에게 돌아왔다.

"어디 갔다가 오는거야? 무슨 일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아아. 아냐. 후후후... 또 좋은 함정을 만들어냈지."

"무슨...? 그 기름 함정 같은거야? 으으... 난 그럼..."

아직 기름함정 - 폭의 위력이 두려웠던 미야가 떨떠름히 말하자 운현은 씨익 웃으며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런 거 아니야. 이번 함정은 구덩이 함정인데. 빈 구멍을 만들어서 그 안에 빠트리는거야."

"그게 뭐야...?"

미야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운현은 씨익 웃었다. 그 웃음에 바제트는 어깨를 으쓱인 후 활을 들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만만한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해야해?"

"일단 끌어와야지. 자자. 작전을 설명할테니까 잘 들으라고. 바제트. 넌 오크들을 끌어와. 그리고 미야는 오크들이 범위에 들어오면 도발을 걸고. 나머지는... 그때 가서 말해줄게."

아까 전의 오크들은 꽤나 공격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구덩이 함정이 데미지를 얼마나 주는지 확인할 수 없었던 운현은 일단 오크들을 구덩이에 빠트리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며 말했고 그의 말에 여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갔다올게."

"응. 조심해야 해."

"알았어."

바제트가 오크들을 끌어오기 위해 뛰어가자 운현은 미야에게 구덩이 함정의 범위를 가르쳐주었다. 가시 줄 함정 정도의 범위인 구덩이 함정의 범위를 파악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헤스티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는 어떻게 할까요?"

"잘만 되면 쉽게 싸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넌 쉬어도 될... 아니다. 일단 파이어 볼트는 준비해둬."

"알겠어요!"

"온다!"

벌써 오크 무리를 발견했는지 바제트는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달려오는 것을 본 미야가 외치자 운현은 구덩이 함정을 약속했던 곳에 설치한 후 바제트에게 외쳤다.

"미야가 도발을 걸면 빠져!"

행여나 바제트가 구덩이 함정에 걸릴까봐 걱정된 운현이 외치자 그녀는 달려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야!!"

"조금만 더!"

모든 오크들을 자신의 도발 범위에 넣기 위해 미야는 좀 더 오크들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하아아아아아아아아!!!!"

진각을 밟으며 미야가 포효한 순간 오크들은 바제트가 아닌 미야에게 적의를 돌렸다. 그것을 눈치챈 바제트가 옆으로 빠진 순간 미야는 훌쩍 뛰어 구덩이 함정의 범위에서 떨어졌다. 자신과 오크들의 사이에 구덩이 함정이 놓이자 미야는 바제트에게 시선을 돌리려 하는 오크에게 파동권을 쏘았다.

"크어!!"

오크들이 모두 자신을 향해 달려온다. 그것을 보며 미야는 주먹을 꽉 쥐었고 운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푸숫!"

맥없이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바닥이 허물어지며 그 위의 오크들이 우루루 구덩이 안으로 빠지자 운현은 환호했다.

"야호! 걸렸구나!!"

"크아어어어어어!!"

"...운현. 이 안에 뭐 있다고 했지?"

"너도 한방, 나도 한방. 공평하게 모두를 한방에 보낼 수 있는 죽창이 있지."

구덩이 안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오자 미야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고 운현은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죽지는 않은 모양이군.'

터덜터덜 걸어 구덩이 앞으로 간 운현은 죽창에 여기저기 찔린 오크들이 신음하는 것을 보았다. 미야와 바제트, 헤스티아까지 와서 그 광경을 구경하자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기름통을 들어 그 안에 뿌리기 시작했다.

"너네도 뿌려."

"응."

넷이 구덩이 안에 기름을 붓고 나자 헤스티아는 별 말 없이 구덩이 안에 파이어 볼트를 날렸다.

"화르륵!!"

"크아아아아아!!"

기름에 흠뻑 적셔진 오크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내는 것을 보며 운현은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죽창에 큰 상처를 받은 오크들이 허우적거리다가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본 그는 구덩이 함정의 위력에 감탄하는 여인들이 선망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며 양 팔을 벌렸다.

"날 경배하라."

"오오오오!! 대단한데!?"

"이거 굉장하잖아! 오크를 이렇게 쉽게 잡을 수 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한거야!?"

"굉장해요! 운현씨!"

"으하하하! 이걸로 레벨업이 무지하게 쉬워지겠구만!!"

[레벨이 올랐습니다.]

[추가 스탯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불타오르던 오크가 죽었는지 레벨 업 메시지가 떠올랐다. 운현은 눈을 번뜩이며 인벤토리 안의 남은 함정카드를 보고 외쳤다.

"자! 몰아와! 바제트!"

121====================

terror

바제트가 몰아오고 미야가 오크들의 주의를 끌고, 그 상태에서 함정에 빠트린 후 헤스티아가 마무리. 그냥 전투를 할때보다 확실히 빠린 사냥법에 운현 일행의 레벨은 빠르게 상승했다.

"이제 더 몰아올까!?"

"아니. 이제 못써."

"응? 왜?"

바제트가 신나하며 말했지만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덩이 함정 카드가 없다.

"아니 왜라고 해도. 아무튼 레벨업 꽤 했으니 오늘은 그만 돌아갈까?"

"으음... 뭐, 운현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바제트는 볼을 긁적거리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파티의 리더는 운현이고 이런 사냥법이 가능한 것은 그의 구덩이 함정 덕분이기에 운현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저녁에 뭐할건데?"

"음... 좀 할일이 있어. 길드의 일을 도와야해."

"운현씨. 운현씨."

운현의 말에 헤스티아는 그의 옷자락을 잡고 꾹꾹 당겼다. 그녀의 신호에 그가 고개를 돌리자 헤스티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지금 도시에 미믹이 나타나고 있다고 해요. 너무 밖에 돌아다니지는 마세요. 위험하다구요."

"하하하! 걱정마."

'그 미믹을 만드는게 나거든.'

마지막 말은 꼭 삼킨 채 운현은 헤스티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그것을 미야와 바제트는 부러운 듯 바라보았고 두 여인들도 쓰다듬어준 운현은 그녀들과 던전에서 빠져나온 후 곧장 사무소로 향했다.

"어서와~"

"후후. 이거 정산해줘."

"우와. 굉장히 많은데?"

평소 전투가 끝난 후 정산할 때와는 다르게 운현의 손에 들린 주머니는 꽤나 커다랬다. 꽉 차 있는 마석에 필레는 감탄하며 그것을 정산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야~ 오크를 이렇게 많이 잡았어? 어떻게 한거야?"

"후후후후. 그건 비밀이지."

"치사하게~ 가르쳐줘~"

"응. 그게 말이지... 음. 보는 눈이 많으니 나중에 얘기해줄게."

운현이 많은 양의 마석을 가져 온 것에 길드원들도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 시선에 운현이 쓴웃음을 짓자 필레는 아쉬운 듯 입술을 쭉 내밀었다.

"치. 알았어. 그럼 어떻게 해줄까?"

"코어를 모두 경험치로 전환하면 어떻게 돼?"

"이정도면 각자 8레벨 이상 올릴 수 있겠는데? 모두 바꾸면 운현이랑 헤스티아씨의 레벨은 37, 미야씨는 38, 바제트씨는 39가 되겠는걸?"

전투를 하며서 몇번이나 레벨업을 했던 운현은 오늘 아침에 비해 두배 가깝게 레벨이 오른 것에 만족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필레는 다른 사람들의 모험자 카드를 받아 레벨을 갱신하고 돌려주었다.

'스킬이랑 스탯 포인트를 뭘 찍을까~'

60이 넘는 스탯 포인트와 20이 넘는 스킬 포인트가 모였다. 싱글벙글 웃으며 운현은 스탯포인트를 내버려 두고 스킬포인트를 사용했다.

'하이딩은 꾸준히 써야하니 만렙을 찍어두는게 좋겠군. 그리고 나머지는... 체술인가.'

벽을 타고 움직이는 일이나 혹시 모를 포위 및 쫓기는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체술을 찍는 것이 좋겠다 싶은 운현은 하이딩과 체술을 모두 최대치 레벨로 상승시켰다.

"그런데 운현."

"응? 왜?"

"요새 밤에 돌아다니는 일이 많다면서?"

"응. 그게 뭐?"

"주의하도록 해. 미믹이 던전에서 빠져나와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용병 연맹 뿐만 아니라 상인 조합에까지 미믹이 나타났다고 하니까."

"윈드씨에게 들었어?"

"어? 어떻게 알았어?"

"어제 나도 그 자리에 있었거든. 이야. 윈드 진짜 강하더라. 미믹을 순식간에 박살내던대?"

"1계층의 미믹은 윈드 정도면 충분히 가능해. 하지만 마인이 된다면 윈드도 조금 힘들지 몰라. 괜히 그런 곳에 있다가 다치지 말라고."

"하하하. 알았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운현은 빙긋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갑옷을 벗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그가 길드회관에 내려왔을 때 테이블에 앉아 늦은 점심식사를 하는 상아가 보였다.

"왜 혼자 먹어?"

"아아... 시청에 끌려갔다왔거든. 피곤해 죽겠다. 도대체 왜 미믹이 나타나서 이렇게 사람 귀찮게 하는건지 모르겠네. 으휴..."

"그러게 말야. 그래서 이제 뭐 할건데?"

"음... 글쎄? 딱히 일은 없는데. 왜?"

"용병 연맹에 갔다오려고."

"뭐!? 네가 거긴 왜가!?"

"아아. 이거 가져다 주려고. 카를로스한테 싸인을 받았으니까. 그리고 용병 연맹 내부도 궁금하고 말야. 같이 갈래?"

'내부를 알아야 안에서 깽판을 치지.'

이왕 테러를 저지르는거 용병 연맹의 내부에서도 해 볼 생각으로 운현은 히죽 웃었다. 아르토리우스가 마인을 잡을 수 있다고? 그럼 어쩔건가. 아르토리우스의 몸은 하나뿐이다.

'아르토리우스만 피해서 미믹을 뽑으면 되겠군...'

미믹이 마석 안의 코어마저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운현에게 있어서 마인을 뽑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얼마나 코어를 먹여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당량만 먹여 놓으면 미믹이 용병들의 갑옷이나 무기를 흡수하여 마인을 소환할 것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리가 없는 상아는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내가 용병 연맹에 가면 아르토리우스가 얼씨구나 하고 날 잡아 죽이려고 할걸? 어제도 아르토리우스가 길드에 왔을 때 혼자 오지 않았잖아."

"왜 이렇게 사이가 안좋아?"

상아가 했던 말 치고 용병 연맹과의 사이가 굉장히 안좋은 것에 운현이 묻자 그녀는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넣은 후 떨떠름히 말했다.

"아아.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된다고 하지. 예전에 일이 좀 있었어."

"너랑 비교하면 다 애들인데 좀 봐주고 그래라."

"나도 노력하는 중이라고."

피식 웃은 상아는 스테이크를 반쯤 잘라 큰 덩어리를 한입에 넣고 와구와구 씹었다.

"깔끔하게 한방에 보내주려고 말이야. 다른 녀석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아르토리우스는 언젠가 끝장을 내버릴거야. 그 계집애는 도가 지나쳐."

"뭘 어쨌길래..."

상아가 누군가를 이렇게 싫어하는 것은 처음 보았던 운현은 그녀의 살기에 살짝 몸을 떨었다. 매번 푼수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역시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은 길드장인가보다.

"아무튼 난 갔다올게."

"그래. 몸 조심해. 내일까지 안오면 길드 간부들이랑 같이 쳐들어갈테니까 주의하도록."

"알았다."

은근히 자신을 걱정해주는 상아에게 웃어보이며 운현은 터덜터덜 길드를 나섰다. 그가 도착한 곳은 용병 연맹의 정문 앞이었다. 운현이 그 앞에서 어슬렁거리자 정문을 지키던 용병 한명은 거슬린다는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뭐야? 당신?"

"아. 전 운현이라고 하는데요. 티르빙과 헥토르를 만나러 왔습니다."

"티르빙님이랑 헥토르님을? 혹시 애인?"

"그런건 아니고요. 그냥 좀 불러주시면 안될까요?"

"흐음... 잠깐만 기다려."

운현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용병은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티르빙과 헥토르가 모습을 보이자 운현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여어."

"앗! 당신은!?"

"싸인은 받았어!?"

티르빙과 헥토르는 후다닥 달려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들의 손바닥 위에 카를로스의 싸인이 담긴 싸인지를 올려 놓자 그녀들은 눈을 반짝이며 기뻐 발을 동동 굴렀다.

"이야~!! 신난다!"

"카를로스님의 싸인!"

두 미녀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훈훈해진 운현은 그녀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다가 말했다.

"자. 그럼 부탁을 들어줬으니 내 요구사항을 얘기해도 되겠지?"

"어떤 것인데? 연맹을 배신하라는 것만 아니라면야..."

"용병 연맹 안을 구경하고 싶어."

"...뭐? 그건..."

"뭐야. 안돼는건가?"

"아니 그건 아닌데 지금 상황이... 좀."

헥토르는 볼을 긁적거리며 티르빙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요청에 티르빙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기밀구역을 제외한다면 어렵지 않지."

"좋아. 그럼 지금 괜찮아?"

"뭐... 상관없겠지. 헥토르. 넌 어서 가서 출입증을 가져와라."

"네!"

헥토르가 안으로 들어가자 운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믹과의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어 여기저기 부숴져 있는 주변을 보던 운현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미믹이랑은 붙어보니까 어때?"

"큭... 조금만 더 경험이 있다면 제대로 잡을 수 있을텐데."

"어제 시청의 윈드씨가 미믹 두마리를 순살했던데... 윈드씨보다 약한거야?"

운현의 질문에 티르빙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윈드... 응. 윈드씨의 실력은 나와 동급이거나 조금 강한 정도일거야. 아니지... 더 강할 수도 있지. 그녀는 상당한 기분파라 그럴 상황이 되면 더더욱 강해지니까 말야.."

"오오... 그렇게 강했단 말야!?"

남자에게 차여 훌쩍거린다던가 필레와의 데이트 도중에 질투심에 부들부들 떨던 윈드의 실력이 그토록 강할 줄이야. 운현이 황당해하자 티르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윈드가 들어 온 이후로 시청에 몇몇 왕국의 암살자가 잠입했었지. 시장을 죽이고 그 혼란을 틈타 던전도시를 차지하려고 말야. 개중에는 왕국 최강자라 불리는 이들도 있었는데 스파이들을 일격에 쓰러트린게 윈드야."

"헤에..."

"시장의 목숨을 아마 열번은 넘게 구했을걸?"

"시장이라면 윈디아 씨였나?"

"응. 그 열댓명의 암살자를 앞에 두고 시장을 지키며 단 한걸음도 물러나지 않은 채 홀로 싸워 그들을 모두 주살했어. 그녀가 쌍검을 든 상태로 진심이 된다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연맹장님이나 상아 길드장 정도일걸? 그리고 나?"

마지막은 농담이었는지 티르빙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윈드와 필레는 친구인데 티르빙은 그녀와 친구인 윈드에게는 딱히 감정이 없어보였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린 후 물었다.

"어? 그럼 윈드는 마인을 혼자서 잡을 수 있다는 거야?"

그의 질문에 티르빙은 움찔한 후 턱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는 헥토르가 임시출입증을 가져오고 나서야 조심스레 말했다.

"진심이 된 그녀라면 가능할지도...?"

"그렇구나..."

'마인으로 윈디아를 공격하는 일은 포기해야겠군.'

운현이 테러를 저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힘이 남아돌면 쓰게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지금까지 던전 도시를 위협하는 커다란 문제가 없어서 힘을 비축할 수 있었다면 그 힘을 쓰게 만들어 외부의 문제에서 눈을 돌리게 하려 한 운현은 미믹을 다룰 수 있는 힘이 생각보다 약한 것에 입맛을 다셨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아니, 오크를 이렇게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빨리 알았더라면...'

그렇다면 빠르게 2계층으로 진입해 미믹의 강력함으로 다른 이들을 공격했을 텐데. 운현은 아쉬움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니. 아무것도. 이걸 목에 걸면 되는건가?"

"응. 외부인들은 모두 그걸 착용해야 해. 헥토르. 내가 운현을 안내할테니까 넌 볼일을 보도록. 그 싸인지는 대원들에게 나눠주고."

"알겠습니다!"

헬하운드들이 기뻐할 것을 생각하니 얼른 그것을 가져다 주고 싶었던 그녀는 티르빙의 명령에 후다닥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럼 갈까?"

"응. 가자."

티르빙의 안내를 받으며 운현은 용병 연맹 안으로 들어왔다. 몇개의 연무장이 있는 앞마당을 지나쳐 모험가 길드보다 조금 작은 듯 보이는 대저택 앞에 선 티르빙은 입구를 지키는 용병들에게 말했다.

"내 손님이다."

"알겠습니다."

운현의 목에 걸려 있는 외부인 출입증을 확인한 그녀들이 경계심을 풀자 운현은 주변을 둘러보며 입맛을 다셨다.

'쉽게 잠입하는 것은 어렵겠군.'

1층에는 창문이 없었고 2층부터 창문이 있었지만 창살들로 막혀 있었다. 창살이 없는 창문은 3층부터 있었기에 운현은 잠입 루트를 천천히 머릿 속에서 천천히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다. 체술의 레벨이 MAX가 되었으니 이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정 뭐하며 남은 60의 포인트를 몸놀림에 투자하면 될 것이다.

'하이딩을 걸고 올라가면 되겠는데... 요철도 많고.'

2층 건물을 수월하게 올라갔었던 운현은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내부로 들어가는 방법은 어느정도 준비가 되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아. 건물이 참 좋다 싶어서."

"후후후... 내부는 더욱 멋있다고. 어서 와."

티르빙과 함께 안으로 들어선 운현은 그녀의 말대로 내부가 굉장히 화려한 것에 놀랬다.

"이게 무슨 용병들의 건물이야."

용병 연맹의 건물 내부를 본 운현은 길드의 건물이 차라리 용병 연맹의 건물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중세의 귀족들이나 살 법한 화려한 건물의 내부, 여기저기 있는 조각이나 그림들. 조신한 걸음걸이로 빠르게 돌아다니는 메이드들. 그들을 보며 운현이 감탄하자 티르빙은 키득거린 후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게 아르토리우스님의 힘이지. 아르토리우스님이 연맹장이 되기 전에는 이정도까진 아니었어. 그런데 아르토리우스님이 연맹장이 되시고 난 후 모든게 바뀌었지. 용병들의 처우. 대금. 돈 떼먹고 나르는 고용주에 대한 처벌. 등등. 용병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그분께서는 많은 힘을 쓰셨다고."

"허어... 그러면서 그렇게 강하다고? 무슨..."

마인을 굉장히 손쉽게 죽이면서 이정도로 능력이 있고 부하들에게 인망까지 있다? 운현은 자신이 상대해야 할 상대의 강함에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도 모험가를 관두고 용병이 되는 게 어때? 나도 한때는 모험가였다고."

"어? 진짜?"

"그래... 그런 적도 있었지. 자. 어디가 보고 싶어?"

"기밀 장소는 보여 줄 수 없다고 했잖아. 알아서 설명해줘."

"그럼 용병 연맹이 자랑하는 대욕탕부터 보여주지. 지금쯤이면 하급 용병들이 훈련을 마치고 씻고 있을 시간이니까. 괜찮겠지."

티르빙은 눈을 반짝이며 그를 데리고 1층의 통로를 지나갔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운현은 대욕탕이란 말에 깜짝 놀라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잠깐만! 대욕탕이라고!? 목욕을 할 수 있는 곳을 말하는거야!?"

"응. 왜?"

"그런거 보여줘도 괜찮아?"

"...좋다는거야 싫다는거야? 얼굴에 그렇게 기대감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하면..."

티르빙은 운현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후다닥 표정관리를 한 후 진지하게 말했다.

"꼭 보고 싶습니다."

여자들만 가득한 목욕탕을, 그것도 지금 목욕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곳을 구경시켜준다는데 테러가 문젠가. 운현은 눈을 반짝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122====================

terror

"우와아아..."

이것이야말로 신천지요, 지상낙원이다.

운현은 넓은 욕탕을 거리낌없이 완전한 나신으로 돌아다니는 많은 여인들을 보며 감탄했다. 물론 개중에는 남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남자들은 여인들의 수에 비하면 극히 적었고 그들을 시선에서 제외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냥 고개만 돌리면 됐으니까.

"하... 이런 천국같은 곳이 있다니."

"음? 모험가 길드에는 이런 곳이 없나?"

"있을리가 있나!!"

이런 곳이 있었다면 하루 한번 꼭 목욕을 했을텐데. 운현이 감동으로 부르르 몸을 떨자 티르빙은 피식 웃은 후 말했다.

"원한다면 목욕 정도는 시켜줄 수 있다. 우리 용병 연맹은 용병들의 복지에 큰 신경을 쓰지. 훈련의 강도가 강하면 그에 따른 피로가 쌓이는 것은 당연한 일. 그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서 마사지도 시행하고 있다. 어때? 한번 체험해보겠어?"

"으음..."

하고 싶다. 진짜 하고 싶다. 운현은 치솟는 욕구를 간신히 꾹 억눌렀다.

'씨발...'

피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을 간신히 억누른 운현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다른 곳 구경 시켜줘."

"흠. 뭐 그러지."

운현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티르빙은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얼굴로 그를 데리고 욕탕을 나갔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욕탕을 나가려던 운현은 멀찌감치서 들리는 신음소리에 티르빙을 잡았다.

"잠깐!"

"왜?"

"저, 저긴 뭐야?"

"마사지 하는 곳이지. 뭐냐. 흥미있어?"

"응."

"그럼 가보자."

티르빙은 운현을 데리고 마사지장으로 향했다. 대욕탕 한쪽 구석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가건물 안에서 여성의 신음소리가 들리자 운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으음... 이건."

"남성 모험가를 위한 여성 마사지사도 존재하지. 대부분은 남성 마사지사이긴 하지만 말야. 어때?"

"...정말 좋은 곳이구나. 여긴..."

이런 천국같은 곳에 자신의 손으로 테러를 저질러야 하다니. 지금까지 들지 않았던 죄책감에 운현은 속이 쓰려왔다.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은 티르빙은 운현을 데리고 가건물의 문을 열었다.

"헉!?"

"자... 다리 벌리겠습니다."

"으으음... 좋네."

문이 열리자 보인 것은 남자 마사지사에 의해 양 다리가 벌려지고 있는 바민의 계곡이었다. 무성한 수풀로 빽빽한 그녀의 계곡을 정면에서 보게 된 운현이 신음하자 그녀는 운현과 티르빙을 힐끔 본 후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뭐야? 저 남자는 새로운 마사지산가?"

"손님이다. 너는 훈련도 치루지 않았으면서 왜 여기 있는 거냐?"

"훈련 했어. 연맹장님과..."

"연맹장님과?"

"응. 지금 옆에 연맹장님 계셔."

그녀의 말에 운현은 아르토리우스의 미모를 떠올리고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마인을 한방에 잡은 아르토리우스의 무력은 사라져 있었다.

"나 좀 돌아다녀봐도 괜찮아?"

"안될건 없지만... 왜?"

"그, 그냥."

보고 싶다. 일은 둘째치고 그 미모의 여인의 나체라니. 그녀와 관계되는 것은 귀찮지만 나신을 보는 것은 다른 일이지 않은가. 운현이 자신을 설득한 후 말하자 티르빙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겠지. 너에게 용병 연맹을 구경시켜준다는 것도 알려줘야 하고. 너도 연맹장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니까 말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환호성을 지를 뻔 한 것을 꾹 참았다. 그렇게 큰 기대감을 품고 옆으로 간 운현은 기대감이 축 늘어지는 것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뭔가요? 사람 얼굴 보자마자 한숨은?"

아르토리우스는 마사지를 받고 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받고 있는 것이 맞았다. 다만 발만 마사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지. 하복부까지 내려오는 긴 셔츠와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반바지를 입은 채 미소녀들이 자신의 발을 마사지하는 것을 즐기던 그녀는 운현이 자길 보자마자 한숨을 내쉬는 것에 뚱한 얼굴로 투덜거리듯 말했다.

"연맹장님. 아시겠지만 이쪽은 운현입니다. 카를로스님의 사인을..."

"아아... 그 일때문에 왔군요? 그런데 여기에는 왜 들어왔나요?"

"용병 연맹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흐음... 뭐, 상관없으려나? 위험한 곳을 제외하고는 구경시켜주도록 하세요. 그리고 운현씨?"

"네."

"구경이 끝나면 잠깐 시간을 내어 줄 수 있나요?"

"어렵지 않지만... 왜요?"

"그냥요. 당신이 모험가 길드의 길드 간부들과 친하다고 하는데 그것과 관련해서 당신과 교섭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약간 처진 눈을 반짝였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운현은 잠시 생각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구경하도록 하세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아르토리우스의 나신을 보지 못해 실망감이 극대화된 운현은 티르빙과 함께 대욕탕 밖으로 나왔다.

욕탕의 뜨거운 기운때문인지 조금 붉어져 있던 티르빙은 1층의 중앙 계단 근처로 이동한 후 그에게 물었다.

"다음은 어딜 보여줄까?"

"숙소들은 어떻게 되어 있지? 이 건물 안에 있는건가?"

"음. 일반 용병들의 숙소는 부지 끝에 있는 건물을 쓰고 있지만 중급 이상의 용병들은 본부의 숙소를 쓰고 있지. 숙소를 보고 싶은건가? 그럼 따라와."

티르빙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간 운현은 그녀가 빈 방을 확인하고 문을 열자 그곳을 운현에게 보여주었다. 모험가 길드 숙소의 두배쯤 되는 넓이에 더욱 화려하고 고급진 내부를 보여준 그녀는 창문을 툭툭 치며 말했다.

"몇몇 길드원들이 통금시간 이후 허락받지 않고 놀러가겠다고 탈출을 시도한 터라 2층의 모든 방은 창살로 막혀 있지. "

"통금시간도 있어? 왜?"

"용병이라 하더라도 본질은 군대이니까. 군인에게 있어서 규율만큼 중요한 것은 없어. 밤에 나돌아다니며 사고를 쳤다간 그것은 규율을 무너트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최대한 위험을 배제하고자 하는 아르토리우스님의 생각이지."

"그렇군. 적어도 시민의 안전을 생각한다는 건가?"

"그것 뿐만 아니라 용병 연맹의 이름도 생각하는 거다. 우리 용병 연맹은 다른 용병들과는 달라. 체계적인 규율. 완벽한 상명하복. 하나와 같은 부대. 라는 컨셉으로 움직이고 있으니까. 다른 용병들이 의뢰주를 배신하거나 약탈을 한다고 하지만 절대 우리만큼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아."

"이름을 알려서 시장을 독점하려는 것은 아니고?"

운현의 질문에 티르빙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이야기를 하려던 그녀가 고개를 젓고 자신의 질문에 답하지 않자 운현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다음은 어딜 보고 싶나?"

"3층은?"

"3층은 간부들의 숙소와 연맹장님의 방이다. 별 것 없는데."

"그래?"

'사실 3층을 제대로 보고 싶은데...'

침입 루트를 확인하려면 3층 정도는 봐두고 싶었던 운현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네가 자랑할만한 것이 있나?"

"글쎄... 굳이 자랑할만한 것이라고는 훈련장 정도가 있겠군. 그 외에는 무기고라든가... 그정도뿐?"

"그럼 아르토리우스가 마사지를 끝낼때까지 그런 곳이라도 괜찮으니 구경시켜줘."

"좋아."

3층은 가지 못했지만 1층과 2층의 대부분을 구경한 운현은 자신의 지도창을 확인하고 씩 웃었다. 용병 연맹의 내부 지도가 등록이 된 것이다. 지도 내의 모든 방에 다 들어가 본 운현은 1층으로 내려왔을 때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하고 물었다.

"지하에는 뭐가 있어?"

"그것이 비밀 중 하나다. 이곳은 용병 연맹의 간부가 아니라면 들어갈 수 없어. 궁금하면 용병이 되고 레벨을 올려 간부가 되라고."

"그냥 안궁금해 하겠어."

"하... 그러든가. 슬슬 아르토리우스님도 돌아오셨을 것 같군. 갈까?"

"응."

'3층만 대충 확인하면 되겠는데...'

티르빙은 운현을 데리고 3층으로 올라가 화려한 방 입구의 문을 두드렸다. 그녀가 두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딱딱하지만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도록."

"예."

티르빙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에는 어제 보았던 용병 연맹의 간부가 있었다. 중갑에 할버드를 들고 있었던 그녀는 깔끔한 정장차림을 한 채 집무를 보고 있던 아르토리우스의 뒤에서 티르빙과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르토리우스는 티르빙과 운현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서류를 보고 있었다.

"라티나님. 안녕하십니까."

"음."

티르빙의 인사에 그녀는 가볍게 대답한 후 다시 정자세를 취했다. 마치 바위처럼 아르토리우스를 지키려 하는 듯한 그녀의 기세에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저 여자도 보통은 아닌 것 같군.'

"연맹장님. 운현을 데리고 왔습니다."

"후후. 고마워요. 티르빙. 운현. 잠시 저기서 기다려주겠어요? 이 안건이 조금 골치가 아파서 말이죠."

그녀는 하던 일을 끝내기 위해서 잠시 운현을 기다리게 하고 라티나에게 손짓했다.

아르토리우스에게 몇마디 들은 라티나는 운현을 옆의 테이블에 앉히게 하고 차와 다과를 준비했다. 그렇게 잠시. 그녀가 준비를 마쳤을 때 아르토리우스도 보던 서류에 서명을 한 후 운현이 앉은 테이블에 앉았다.

"연맹장님. 그럼 저는..."

"아아. 잠시 밖에서 기다려주겠어요? 이야기가 끝나면 운현을 보내줘야 하니까 말이죠."

"알겠습니다."

티르빙이 나가자 아르토리우스는 기품이 철철 넘처 흐르는 움직임으로 차를 마셨다. 그녀가 차를 마시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던 운현이 차를 한모금 마셨을 때 그녀는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어디. 용병 연맹을 보니 어떤가요?"

"무척이나 좋더군요."

"어디가 제일 인상 깊었어요?"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바민의 계곡이었다. 운현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자 그녀는 까르륵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모험가 길드에 비하면 전부 좋은 것 같지 않나요?"

"어? 제가 모험가라는 것을 밝혔었나요?"

"아뇨. 조사를 좀 해봤어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얌전히 차를 마시는 아르토리우스의 앞에서 운현이 긴장하고 있을 때 라티나는 준비된 케이크를 아르토리우스와 운현의 앞에 놓아주었다.

"라티나. 잠깐 나가 있어주겠어?"

"알겠습니다."

그녀마저 나가고 아르토리우스와 단 둘이 방에 남게 된 운현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르토리우스에게 물었다.

"왜 저를 조사하셨나요?"

"그 전에 제가 먼저 물어볼게요. 당신, 필레나 상아와는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더군요."

"뭐... 그렇죠."

"던전 도시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가... 모험가가 되고, 또 모험가 길드의 간부들과 그렇게 금방 친해진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그야... 그건 제 매력이 넘쳐 흘러서 그런게 아닐까요?"

운현이 능글맞게 넘기려 하였지만 아르토리우스는 그저 부드럽게 웃을 뿐 이었다. 쉽게 그녀가 수긍하지 않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후후... 뭐, 그건 어쨌든. 그런데 좀 이상하단 말이죠. 상아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티르빙과 필레는 무척 사이가 좋지 않아요. 거기에 티르빙은 전에 필레를 치기 위해서 모험가 길드를 습격했죠. 물론 실패하기는 했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왜 당신은 필레와 꽤나 친하면서 필레를 공격한 티르빙과 헥토르를 위해서 카를로스씨에게 사인을 받아다 준거죠? 그것도 직접 이곳 용병연맹까지 가져다 주기까지."

"그거야 제가 신사라 그런거죠. 하. 이노무 친절정신. 이것때문에 피곤해 죽겠...."

"........."

"딱히 별 이유는 없는데요."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지만 운현은 등이 축축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르토리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운현의 옆으로 가 그의 옆에 앉았다.

"그 케이크. 맛있어보이네요."

"그, 그러시면 드시죠."

"먹여주겠어요?"

"......."

그녀의 말에 운현은 포크를 들었다. 그가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 들어 올리자 아르토리우스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용병 연맹의 연맹장이라는 위치는 참 고달프죠. 타인이 먹여주는 것도 이런 위험한 물건으로는 불가능하니 말이에요."

"...이게요?"

자신이 총을 들고 와도 아르토리우스를 어쩌지 못할 것 같았던 운현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의 손을 가리킨 후 말했다.

"손으로 먹여주시겠어요?"

"아니 제가 손을 안씻어서..."

"여기 물수건이 있어요."

라티나가 준비해 둔 물수건을 들어 올린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의 손을 낚아챈 후 그의 손을 닦기 시작했다. 뿌리치려 했지만 미라에게 잡혔을 때처럼 그의 손은 마치 바이스에 걸린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자. 됐네요."

물수건으로 그의 손을 다 닦아낸 아르토리우스는 케이크를 가리켰다. 결국 손가락으로 자른 케이크를 잘라 그녀의 입 안에 넣어 준 운현은 그녀가 긴 혀를 내밀어 손가락을 핥자 기겁하며 손을 빼려 했다.

".....!"

하지만 운현의 손은 여전히 아르토리우스의 손에 잡혀 있었다. 결국 그녀가 손가락을 핥는 것에 저항하지 못한 운현은 그녀가 자신의 손가락을 쪽쪽 빠는 것을 끝으로 손을 놔주자 끈적한 타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손가락을 물끄러미 보았다.

"후후후... 맛있네요. 상아에게는 이런 것을 해주었나요?"

"그럴리가요."

상아와는 만나면 장난치고 서로 놀리기 바쁘다. 이런 관계라기보다는 친한 친구에 가까운 관계이기에 운현이 떨떠름히 말하자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의 볼을 쓰다듬은 후 조용히 말했다.

"저는 말이죠. 던전 도시가 너무 약하다고 생각해요."

"그, 그런가요? 그런 것 치고는 강자들이 엄청 모여 있는데."

들리는 얘기만 해도 어느 왕국의 강자가 윈드에게 개박살이 났다거나, 어떤 왕국의 전쟁터에서 용병 연맹이 다 뒤집어 엎어 전쟁을 끝냈다거나, 상인 조합이 어느 나라를 끝장냈다거나, 제작자 조합의 물건을 얻기 위해 어떤 귀족의 가문이 풍비박산이 났다거나.

소문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던전 도시가 약하다는 말에 운현이 의문을 품자 아르토리우스는 살며시 고개를 저은 후 말했다.

"물리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의식을 말하는 것이죠. 던전 도시. 말은 좋죠. 던전을 탐험하고 개발하고 발굴하며 연구하여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준다. 아주 말은 좋아요."

"그래서요?"

"그래서야 너무 호구같지 않나요?"

"...예 뭐..."

운현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아르토리우스가 말했다. 그녀는 던전을 이용하면 던전 도시가 던전 도시가 아닌, 대륙을 지배할 수 있는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제가 무슨 생각이 있겠습니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모험자에 불과한데."

"그런가요? 제가 보기에 당신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말이죠..."

그녀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아르토리우스의 손이 자신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흝고 지나가자 운현은 소름이 돋았다. 분명히 굉장할 정도의 미녀이고 그녀의 손은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왜 목에 칼이 들어오는 기분이 드는 걸까. 그가 딱딱히 긴장하자 아르토리우스는 운현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상아에게 전해주겠어요? 우리 서로 '쓸데 없는 이상한 짓' 은 하지 말고 제대로 얘기해보자고."

운현이 자신의 말을 듣는지 아닌지도 신경쓰지 않은 채 그녀는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당신도 쓸데 없는 이상한 짓은 관둬주세요."

123====================

terror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시겠나요? 그럼 됐구요. 후후후~ 이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끝났어요. 이제 나가보도록 하세요."

아르토리우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운현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벌떡 일어나서 나갔고 그가 나간 빈자리를 보며 아르토리우스는 담담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짓으로 힘빼게 하지 말아줘요."

"오? 나왔어?"

"으음..."

"표정이 왜 그래?"

운현의 하얗게 질려 있는 얼굴을 보며 티르빙은 당황했다. 안에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했길래 운현이 저렇게 됐단 말인가. 티르빙이 자신의 어깨를 잡자 운현은 흠칫 놀라며 그녀를 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갈래."

"어. 알았어. 가자. 부축해줄까?"

"부, 부탁할게."

티르빙의 부축을 받으며 용병 연맹 밖으로 나온 운현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설마 알고 있는건가? 그럴리가...'

하이딩이라고 해서 완벽하게 숨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이딩을 쓴 상태에서 발각된 전례가 있지 않은가. 운현은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두려움에 빠졌다.

"괜찮겠어? 혼자 갈 수 있어?"

"으응. 나 혼자 갈게."

티르빙조차도 무서워진 운현은 후다닥 길드를 향해 뛰어갔다. 최대한 멀리,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길드에 들어 온 운현은 사무소에 있던 필레가 나오자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왜, 왜 이래!? 갑자기!?"

"아, 아니 그게..."

필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빙긋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운현의 잔뜩 겁먹은 얼굴을 본 탓에 그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준 그녀는 운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괜찮아. 이제 안심해도 돼. 널 괴롭히는 자는 내가 막아줄테니까."

자신의 품 안에서 떨리던 운현의 몸이 점점 진정된다. 그제서야 운현을 놓아 준 필레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혹시 미믹...!?"

"아냐. 그런거. 하아. 고마워. 필레."

"별 말씀을."

상큼하게 웃으며 필레는 방금 전 자신의 품 안에 있었던 운현을 떠올리고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 순간.

"오오오오오오오!!?"

"이게 뭐야!?"

"으악! 눈꼴시어!"

"재수없어!"

필레가 운현을 안아 준 것을 본 모험가들이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회관에서 놀고 있던 모험가들의 우레같은 야유에 필레는 얼굴을 붉히고 도망치듯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사무소 안에서도 길드원들은 필레의 어깨나 등을 쳐주며 그녀를 놀렸고 결국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조금 안심이 된 운현은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주문했다. 자신의 앞에 맥주가 놓여지자 그것을 단번에 들이 마신 운현은 다음 맥주를 주문하고 생각했다.

'젠장... 아르토리우스가 알고 있단 말인가? 그럼 여기서 관둬야 하나?'

"운현씨?"

"아... 펠리시아씨."

"잠깐 괜찮나요?"

"네. 물론이죠."

펠리시아가 다가와 자신의 앞에 앉으며 묻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마주하며 두잔째의 맥주를 입에 털어 넣은 운현은 펠리시아가 말똥말똥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에게 물었다.

"왜요?"

"용병 연맹에 다녀오셨다죠? 별 일 없었나요?"

여기서 솔직히 밝히고 도움을 청하는게 나을까? 하지만 운현은 아직도 망설여졌다. 운현이 가진 힘은 다른 사람들이 가진 힘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지금이야 레벨이 딸려서 아르토리우스에게 공포를 느낀 것이지 만약 레벨업만 제대로 한다면, 그리고 3계층이나 4계층의 보물상자로 미믹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녀가 자신에게 준 공포쯤은 얼마든지 지울 수 있다는 생각에 운현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별 일 없었는데요."

"그런가요... 운현씨. 운현씨는 모험가죠. 저희는 모험가 길드의 간부랍니다. 저희에게는 운현씨를 도와야 하는 의무가 있고, 또 권리가 있어요. 무슨 일이 생기시면 부담갖지 말고 말씀해주세요. 저희는 항상 운현씨의 편이 될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큰 위험이 있을 때 모험가 길드에서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기에 그나마 부담을 줄일 수 있었던 운현은 펠리시아를 향해 빙긋 웃었다.

"늘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아. 그리고 상아 길드장이 찾아요."

"절요? 왜요?"

"글쎄요...? 가보시면 알겠죠?"

펠리시아의 말에 운현은 그녀를 따라 길드장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안에 들어선 운현은 서류에 빠르게 서명을 한 상아가 일어나며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녀를 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불렀어?"

"용병 연맹에 다녀온 거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안에 들어갔다면서?"

"어떻게 알았어!?"

"스파이는 우리도 넣었거든요."

"...그런가요."

모험가 길드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나보다. 이미 용병 연맹에 스파이를 넣어 두었다는 것을 밝힌 펠리시아가 베시시 웃자 상아는 뒤통수를 긁적거린 후 펠리시아를 보며 말했다.

"잘했어."

"별 말씀을요. 그럼 앞으로 첩보는 제가 맡는 걸로 알겠어요."

"하아... 알았어. 너에게 맡길게."

펠리시아는 방긋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상아와 단 둘이 남게 된 운현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 뒷조사를 한거야?"

"그럴리가 있나. 용병 연맹에 가 있는 스파이가 알려주더라고. 운현이라는 모험가가 용병 연맹에 있는 본부 건물 안에 들어갔다고. 그래. 들어가보니까 어때?"

"완전 좋던데!?"

"그, 그러냐? 어디가 그리 좋디?"

"일단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대욕탕."

"대욕탕? 아. 그 용병들이 모여서 목욕하는데? 그게 뭐가 좋아. 그냥 방에 욕탕 하나씩 놔주면 되는거지."

그의 말에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가락을 튕긴 후 퉁명스레 말했다. 여자들은 이해 못한다. 여탕에 대한 남자의 환상을.

"뭐, 그건 취향이니까. 그거 물어보려고 부른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피스나의 설명회는 어떻게 할거야? 아까 전에 피스나에게서 연락이 왔어. 그리고 이거. 이게 제품 설명서야. 그리고 이건 제작자 연합의 내부에서 피스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의 명단이야."

상아가 건네 준 자료를 천천히 읽은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주사위는 구르고 있었고 거기서 멈추는 것은 무리였다. 여기서 그만두면 전쟁은 일어난다.

"상아."

"응?"

"아르토리우스랑 네가 싸우면 누가 이겨?"

"허... 이거 어려운 얘기를 꺼내네. 1:1을 말하는거야?"

"응."

"내가 이겨."

단호하게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당황했다. 그 아르토리우스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구역질이 날 정도의 공포를 준 상대와? 이 푼수가? 운현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상아는 어이없어하며 그를 보았다.

"너 진짜 나를 너무 무시하는데. 내가 진심을 보여봐?"

"아,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래도 난 널 나름 친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너한테까지 공포를 느끼고 싶지는 않다."

상아가 지금까지 자신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서 운현은 이렇게 상아에게 막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상아가 아르토리우스처럼 자신에게 공포를 느끼게 한다면 운현은 상아를 돕는 일이고 나발이고 상아마저도 적으로 삼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운현이 떨떠름히 말하자 상아는 피식 웃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 운현에게 다가갔다.

"하지 말라니까 더 하고 싶은데~"

"하지 말라니까. 진짜."

"싫어~"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운현에게 다가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운현을 마주보았다. 양 팔을 그의 어깨에 올린 상아가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의 관계를 깨고 싶은거야?"

"으음... 뭐 그건 아니지. 나도 너랑 얘기하고 노는건 꽤 마음에 드니까."

더 이상 진도를 빼지 않은 상아는 운현의 말에 몸을 일으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것에 운현이 한숨을 내쉬자 상아는 와인을 가져와 한모금 마신 후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야?"

"으음... 네가 확실히 아르토리우스보다 강하다면..."

운현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할 일은 계속해야겠지. 내일 피스나씨와 만나야겠어. 그녀가 해야 할 발표회를 준비해야지. 시장 선거는 언제부터 시작이야?"

"이제 삼일 남았네."

"그럼 본격적인 유세나 정치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3일 남았다는 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녀의 말에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차분히 말했다.

"그럼 슬슬 시작해야겠네. 지금 할 일 있어? 없으면 피스나에게 가자."

"후우... 왜?"

"확인할게 있고 또 설명회를 위해서 상의해야 할 일이 있거든."

"으음,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너 드레스 입으려는거야? 그냥 가자."

"그치만 피스나가..."

"내가 막아줄게."

"어맛..."

담담한 운현의 말에 상아는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시선에 운현은 피식 웃었고 상아는 그의 웃음을 마주보며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바로 갈 수 있겠네."

상아를 데리고 피스나의 가게로 향하기 전, 힐더크의 대장간에 들린 운현은 오크를 잡아 얻은 돈을 거의 대부분 투자해서 강철실을 잔뜩 구매했다.

"오늘도 힘들어?"

"미안. 미안."

운현은 자신을 보며 아쉬워하는 힐더크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를 향해 아쉬운 얼굴을 하던 힐더크가 손님이 와서 나가자 운현은 무기 판매대에 잔뜩 올려져 있는 단검을 보았다.

'꽤 날도 괜찮고... 이정도면 괜찮겠지.'

그리 비싸지는 않아보이지만 날이 잘 갈려 있고 지금 당장도 쓸 수 있는 상자에 담긴 단검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본 운현은 그 중 하나에 스틸을 걸어 훔쳤다. 인벤토리에 얌전히 들어가 있는 상자를 보고 히죽 웃은 운현은 힐더크가 손님과 흥정하는 것을 보며 말했다.

"다음에 와서 한번 제대로 해줄테니까... 나중에 보자고."

"후... 어쩔 수 없지."

힐더크의 탱글한 둔부를 꽉 주물러주고 운현이 나오자 상아는 가로등에 기대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그에게 물었다.

"다 샀어?"

"응. 여기."

묵직한 주머니를 들어 올린 그는 가방에 그것을 담았다. 가방에 가득 차 있는 강철 실에 상아가 질린 듯 바라보자 운현은 묵직한 강철 실의 무게를 느끼며 즐겁게 말했다.

"이걸로 나도 폭업한다!"

"강철실 몇개로 뭘 어쩌려고..."

"후후. 보고만 있으라고."

"어서 가자."

운현의 자신만만한 얼굴에 상아는 어깨를 으쓱이고 앞서 걸었다. 그녀와 함께 피스나의 가게에 들어 선 운현은 가게 앞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그녀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어머? 어서 와요. 운현씨. 상아! 넌 또...!"

"상아의 옷 가지고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저 옷은 제 맘에 쏙 드니까요."

"후후~ 눈에 콩깍지가 씌이면 뭘 해도 이뻐보인다는데... 상아. 너도 제법이다~ 응?"

"아 지금 그런 얘기할 때가 아니라니까!"

피스나가 상아를 쿡쿡 찌르며 말하는 것을 본 운현은 피식 웃은 후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일 얘기를 하고 싶어서 온겁니다. 시간 괜찮으신가요?"

"뭐... 괜찮죠. 들어오세요."

운현과 상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 선 피스나는 그들에게 홍차를 따라 준 후 테이블에 앉았다. 잠시간 조용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감싼다. 그 분위기를 가장 먼저 깬 것은 다름아닌 운현이었다.

"마차에 대한 설명서는 잘 읽어봤습니다. 나쁘지 않더군요. 하지만 몇가지 기능이 더 추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운현의 설명을 차분히 듣던 피스나는 몇가지는 동의했지만 몇가지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충격 완충은 가능하지만... 이 상태에서 더 속도를 올리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럼 자동 조정장치는요? 입력된 길을 정해 놓으면 그곳으로 안정적인 이동이 가능하게 할 수 있지는 않나요?"

"물론 가능하기는 하지만... 좀 불안한데요. 말의 체력 문제도 있고."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죠."

"끄응... 이건 조정해볼게요."

"얼마나 걸리나요?"

"오늘 내일 철야 작업을 한다면 모두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테스트가 더 필요하긴 하지만..."

"그럼 좋습니다. 아. 그리고 피스나씨가 만든 물건을 산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나요?"

"예? 그건 왜요?"

"몇가지 좀 확인하고 싶어서요."

그의 말에 피스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안에서 장부를 가져왔다. 장부에는 그녀의 물건을 사간 사람들, 그리고 그 물건들의 종류와 가격에 적혀 있었다. 그것을 차분히 읽은 운현은 장부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것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상관없지만... 그건 어디에 쓰시게요?"

"선거를 위해서 써야 하는 겁니다. 내용물을 공개할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마세요."

"운현씨야 믿습니다만..."

자신을 위해서 움직여주는 운현인만큼 믿지 않을 수 없었던 피스나는 쓴웃음을 지은 후 상아에게 물었다.

"상아. 그런데 요새 미믹이라는 몬스터가 던전 밖으로 나왔다면서? 그건 어떻게 된거야?"

"그거때문에 머리 아파 죽을 것 같아. 도대체 이게 뭔 일인지..."

"너무 어렵게 생각하려는 것 아니야? 으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는데."

"말만으로도 고마워."

상아와 피스나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운현은 피스나가 준 장부를 차분히 읽었다. 대부분 모험가 길드와 제작자 연합의 영역에 피스나가 만든 물건들이 팔려나가 있었다.

"피스나씨, 피스나씨가 만든 물건들은 왜 이렇게... 상인 조합이나 용병 연맹에는 팔지 않은 건가요?"

"아... 제가 만든 물건들에는 무기가 될만한게 거의 없거든요. 그래서 그래요. 생활이 필요한 물건이나 제작자에게 쓰일만한 물건들이거든요."

"응. 너도 장기간 던전에 머무르면 알게 될거야. 피스나가 만든 물건들은 캠핑용으로 무척 좋거든."

"어떤게 있는데?"

"음... 텐트라든가, 아니면 불을 피우는 도구라든가. 그 외에 이것 저것. 모험가 길드에서도 피스나의 물건들을 파니까 한번 봐봐."

"알았어. 아무튼 이정도라 이거죠? 잘됐네요."

"뭐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본은 내일까지 적어서 드릴게요. 아, 설명회는 언제 하실 생각이에요? 가급적 시장선거 전에 했으면 좋겠는데."

"운현씨가 말씀하신 기능 다 달면 3일 후나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럼 그날 바로 하죠."

"귀신!?"

빡빡한 일정을 잡는 운현을 향해 빽 소리친 피스나는 휙 상아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그녀는 슬그머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결국 눈물을 글썽이며 피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더 볼 일은 없네. 상아. 너 뭐 할 일 있어?"

"응? 아니. 나도 그다지..."

"그럼 피스나씨. 수고해주세요~"

과한 일정 때문에 지금부터 바로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 피스나는 운현과 상아를 배웅하자마자 작업실로 들어갔다.

"더 볼 일 있어?"

"음... 아니. 이제 끝났어. 돌아가자."

상아와 함께 피스나의 가게에서 나와 길드로 돌아간 운현은 에리스가 상아를 불러 그녀를 데리고 가버리자 혼자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상아에게 맡긴다고 치고... 그럼 테러는 마저 해야겠군. 그 전에...'

운현은 2층에서 내려오는 동료들에게 손을 들었다.

"우리 밥먹으러 가자!"

124====================

terror

동료들과 밖으로 나온 운현은 상인 조합의 영역으로 들어가며 길가에 있는 좌판에 들렀다. 팔찌와 헤어밴드 등의 장신구들을 파는 곳에서 그가 발걸음을 멈추자 헤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게요?"

"음. 이거 괜찮아보이는데."

운현은 좌판에 있는 팔찌를 집어 들었다. 척 봐도 싸구려로 보이는 팔찌를 왜 마음에 들어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은 여인들은 운현이 그것을 구매하고 싱글거리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취향 독특해~"

"내 말이."

"취향은 존중할게요."

"왜!? 뭐!?"

운현은 팔찌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 팔에 끼웠다 풀었다 하며 길을 걸었다. 조금 더 걸어 안쪽 깊숙히 들어간 운현은 목표로 했던 가게에 도착하자 문을 열며 들어갔다.

"저번에 잠깐 왔었는데 냄새가 좋더라고."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음식을 잘 하기는 하나보네."

은은히 풍겨오는 닭구이의 냄새에 미야는 킁킁 그 향기를 맡고 히죽 웃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가게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은 그들에게 점원으로 보이는 여인이 다가왔을 때 가게 한쪽의 자리에서 어떤 여인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문제는 말야..."

운현이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을 마친 미야는 그녀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여기도 이러네."

"뭐가?"

"아니... 모험가가 나쁜 년들이다. 던전 도시를 지키는 것은 용병 연맹이다. 이렇게 떠드는 사람들이 요새 많아서..."

미야는 기분나쁘다는 듯 상인이 떠드는 것을 들으며 말했다. 한참 모험가는 나쁜년. 용병은 좋은 년이라고 그녀가 떠드는 동안 요리가 나왔다. 먹음직스러운 닭고기 통구이와 스프, 샐러드가 나오자 동료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닭고기를 잘라 나눴다.

"자. 맛있게 먹어."

기름이 줄줄 흐르는 닭다리를 접시에 담아 건네 준 바제트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운현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요새 내가 좀 돌아다니고 있잖아. 그런데 미믹이 도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면서?"

"네. 그 미믹 때문에 난리래요. 던전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면서."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이상한 이야기가 있더라고."

"이상한 이야기?"

남창이 아닌 듯한 남자가 가게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꽤 많은 여인들은 힐끔힐끔 운현이 있는 테이블쪽을 보다가 그가 말을 시작하자 자신도 모르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용병이 좋은 년이다고 떠들어대는 것에도 슬슬 지겹기 시작했던 그녀들이 자신의 말에 흥미를 가지는 듯 보이자 운현은 맥주를 한모금 마신 후 말했다.

"이 미믹이 나타나는 게 누군가의 의도적인 소행이라는 얘기가 있어."

"의도적? 그럼 던전에서 몬스터를 빼올 수 있다는거야?"

"응. 내가 듣기론 그랬어."

"근거가 있는 이야긴가요?"

"글쎄? 그저 소문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허언증일 수도 있지. 하얀 옷에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은, 마스크로 얼굴을 감싼 사람이 나타난 자리에 미믹이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러니까 너희들도 조심하는게 좋지 않을까?"

"저기... 그게 진짠가요?"

"예?"

운현의 말을 듣던 여인 중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은 후 운현과 그의 동료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는 상인 조합에 소속된 미시인이라고 합니다. 작게나마 신문사를 경영하고 있지요."

"어? 일간 발티르 정보의?"

"알아?"

신문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던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미야와 헤스티아, 바제트는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가 다른 여자들이랑 자든가 일하러 나갈때 할 일 없어서 길드에서 빈둥거릴때 몇번 봤어. 던전 도시에 대해서나 재밌는 소문, 이야기, 그리고 국제 정세 등이 실려 있는 신문이라고."

"오오... 그런게 있었나?"

"하하하... 아직은 작은 신문에 불과하니까요. 요즘은 이슈가 될만한 소식이 시장 선거 밖에 없어서 재밌는 이슈를 찾고 있었거든요. 괜찮다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에 운현은 빙긋 웃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수단이 생긴 것이다.

'신문사라... 이걸 이용하면 더 빨리 퍼지겠군.'

"자세한 것은 저도 잘 모르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이죠. 지금은 간단한 가쉽거리도 꽤 괜찮은 소재가 될 수 있거든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요새는 대부분이 시장선거에 관련된 소식들 뿐이라서... 소문도 괜찮아요. 그런건..."

말을 하던 그녀는 주변을 둘러본 후 운현의 귀에 속삭였다.

"꾸미기 나름이니까요."

"하하하하! 재밌는 방식이네요."

진실 여부는 관심이 없다. 그저 이슈거리만 될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태도로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키득거리며 한쪽에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시작은 용병 연맹에서에요. 처음 미믹이 나타난 것은 용병 연맹의 본부 근처였죠. 마침 저도 산책을 하다가 그 미믹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오!? 실제로 보신 건가요!?"

"뭐!? 운현! 너 그렇게 위험한 곳에 있었어!?"

운현이 미믹을 만났을 줄은 몰랐던 여인들이 기겁했지만 운현은 그녀들의 말을 무시한 후 미시인에게 말했다.

"그때 정말 혼란스러웠자. 이만한 상자에서 검은 기운이 터져나와 사람들을 습격했는데... 어휴. 진짜 무서웠다니까요. 저도 모험가이고, 또 던전에서 직접 미믹을 본 적이 있는데 그건 진짜 던전의 미믹이었어요."

"우와... 그래서요?"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미믹의 공격으로 용병 연맹의 헥토르씨와 헬하운드들이 자신들의 갑옷을 잃었죠.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미믹은 금방 사라져버렸구요."

"그렇군요... 근데 그 하얀 옷은...?"

"아. 제가 도시에서 미믹을 두번 발견했거든요. 처음은 용병 연맹. 그리고 상인 조합에서. 그때 저도 봤어요. 두번 모두 하얀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있었던 것을요."

"그냥 단순히 마주친 것이 아닐까요?"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구요."

"으음... 그런가요?"

그녀는 조금 약하다는 듯 아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저 소문이니까요. 자세하지는 않아요."

"휴우. 알겠습니다. 감사의 표시로 제가 맥주 한잔씩 돌릴게요."

그녀는 입맛을 다신 후 맥주를 주문하여 운현과 그의 동료들에게 돌린 후 자리로 돌아갔다. 같은 테이블의 여인들에게 무언가 이야기하던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고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운현을 향해 다급히 말했다.

"너 오늘 부터는 나가지 마!"

"미믹을 만났는데 자꾸 혼자 다닐거야? 너 그러다가 위험해진다."

"그래요! 가더라도 혼자 가지 말아요!"

"에이~ 별 일이야 있겠어?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그녀들에게 말한 운현은 미시인이 나간 문을 보며 싸늘히 웃었다.

'이제 소문에 살을 만들어줘야겠군... 신문이라. 생각보다 빨리 퍼지겠어.'

운현은 본 적이 없지만 할일 없는 사람들이 보는 신문이라면, 그리고 미시인의 말대로 요즘 시장 선거에만 기사가 집중되고 있는 이때 미믹에 관련된 기사가 신문에 올라온다면 그것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운현이 예상 밖의 일로 인해 즐거워하는 것을 본 여인들은 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배부르다."

"디저트 먹으러 갈까?"

식사를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운현은 움직이던 것을 멈췄다.

그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자 헤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응? 왜요?"

"내 팔찌."

"으이그~ 아까 전에 그렇게 뺏다 꼈다 하더니만..."

운현이 낭패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바제트는 쯧쯧 혀를 찼다. 그녀들에게 미안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인 운현이 몸을 돌리자 미야는 당황하며 외쳤다.

"에에~! 아까 그렇게 얘기했는데!"

미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지만 운현은 가볍게 손사레를 치는 것으로 그녀들을 먼저 보내고 상인 조합의 영역으로 향했다.

아까의 가게에 가서 일부러 두고 온 팔찌를 찾은 후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고 운현은 조용히 인파 속에 몸을 숨겼다.

그렇게 사람들 틈을 이동하며 혹시 모를 미행에 주의한 운현은 조심스레 상인 조합의 영역 안으로 더욱 들어갔다.

적당히 사람이 없는 골목으로 들어간 후 운현은 자신을 보는 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인벤토리에서 꺼낸 옷으로 갈아입었다.

"...좋아."

아까 전 미시인에게 이야기했던 복장을 입은 그는 후드를 뒤집어 쓴 후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서."

인벤토리에서 저번에 일레인에게 먹일때 썼던 고블린의 피가 담긴 통을 꺼낸 운현은 힐더크의 가게에서 몰래 훔쳐 온 단검에 고블린의 피를 잔뜩 먹였다. 붉은색으로 번쩍이는 단검을 허리에 차고 기존에 쓰던 단검을 상자에 담아 인벤토리에 넣은 운현은 차분한 걸음으로 거리로 나섰다.

후드를 뒤집어 쓰고 마스크를 쓰기는 했지만 던전 도시에서 후드를 쓰는 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용병이나 모험가 중에는 더 웃기는 마스크나 가면을 쓰고 다니는 이들도 많았다. 그렇기에 그런 복장을 하고 골목으로 나와도 운현은 별반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슬슬 시작해볼까."

상인 조합의 영역의 중앙 쯤 도착한 운현은 넓은 광장의 중앙에 미믹을 풀었다. 미믹이 모습을 드러내자 운현은 하이딩을 걸고 상황을 주시했다.

"아아아악!"

"또 나타났다!"

요새 던전 도시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미믹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미믹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파괴활동을 시작하자 운현은 팔짱을 낀 채 그것을 지켜보았다.

"촤아아악!"

"또 나타났나!?"

순찰을 돌던 병사들은 미믹의 등장에 호루라기를 불어 지원을 요청하고 미믹의 공격을 막으며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미믹이 병사들을 상대하는 것을 지켜보던 운현은 미믹의 검은 채찍에 맞은 병사가 나가 떨어지고 그 병사의 장비를 미믹이 흡수하려 하자 스틸로 미믹을 멈추게 한 후 하이딩을 풀었다.

"큭... 저건...!?"

사람들이 대피해 아무도 없던 공간에 흰 옷을 입은 운현이 나타나자 쓰러져 있던 병사들은 그를 보며 신음했다. 하나 둘 씩 몸을 추스린 그들이 정신을 차리려 할 때 운현은 다시 미믹을 소환했다.

"네놈이냐!?"

미믹을 던전 도시에 푼 자가 나타났다. 그것만으로도 병사들은 큰 적의를 품으며 그를 공격하려 했지만 미믹의 빠른 공격에 병사들은 제대로 공격조차 하지 못하고 쓰러져버렸다.

"아아악!"

"저기 미믹이다!"

지원 요청을 받은 병사들이 몰려오기 시작하자 운현은 또다른 미믹을 뽑았다. 두마리의 미믹이 주변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운현은 훌쩍 뛰어 광장 중앙의 높은 조형물 위로 올라간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정도면 시선 집중은 된 것 같고...'

가로등 불빛이 비춰지는 조형물 위에 당당히 선 채 운현은 스틸로 미믹을 회수하고, 다른 미믹을 병사들이 모인 곳에 보내어 그들을 공격해나갔다. 미믹에 의한 피해가 심해지자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하아아압!"

조형물 위에 있는 운현을 향해 병사들을 통솔하는 대장으로 보이는 여인이 창을 집어 던졌다. 오크의 투창에 비해 몇배나 빨랐지만 운현은 그 공격을 고개만 비트는 것으로 피해낼 수 있었다.

'체술의 영향인가?'

체술을 만렙으로 올린 덕분인지 몸놀림이 상당히 괜찮아졌다. 자신의 공격을 피한 운현의 몸놀림에 그 병사가 당황해 하자 운현은 다시 미믹을 회수한 후 그녀의 주변에 미믹을 던졌다.

"촤아아악!"

미믹의 검은 기운이 넓게 퍼져나가며 뭉쳐 있는 병사들을 후려쳤다. 그 공격에 병사들이 나가 떨어지자 운현은 주변에 병사들이 더 이상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미믹을 모두 회수했다.

"네, 네놈은 누구냐...!"

달빛을 받으며 조형물을 한 손으로 잡은 채 서 있는 그를 보며 병사들은 신음하며 물었지만 운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하!! 이게 왠 떡이람!?"

호탕한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운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커다란 배틀엑스를 들고 걸어 오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헥토르인가.'

초장부터 강력한 상대가 나타났다. 그녀를 바라보던 운현이 인벤토리에서 단검을 꺼내 한손에 쥐자 그녀는 운현에게 척 배틀엑스를 겨눈 후 싸늘히 말했다.

"네놈이 미믹을 소환해낸 놈이란 말이지...?"

"........"

"정체가 뭐냐?"

로브를 뒤집어 쓰고 마스크를 쓴 탓인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를 향해 운현은 말없이 단검을 겨눴다. 그런 그를 향해 더더욱 날카롭게 웃은 헥토르는 자신의 손에 침을 뱉고 배틀엑스를 꽉 잡았다.

"대답하기 싫으면 관둬. 잡아서 그 재수없는 마스크를 벗겨보면 되니까."

그녀가 자신을 향해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하자 운현은 훌쩍 뛰어 내려와 헥토르와 대치했다.

'이길 수 있을까?'

헥토르는 간부급 인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운현은 자신의 스탯창과 스킬창을 힐끔 본 후 단검을 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여차하면 튀지 뭐.'

몇번 붙어보고 안되겠다 싶으면 레벨을 더 올린 후 도전하면 된다. 그래도 모자란다 싶으면 미믹을 뽑으면 되고. 적당히 지금 상태의 자신의 위험성에 대해서 소문을 낼 필요가 있었기에 운현은 어느정도는 그녀와 붙어야겠다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헥토르의 전투는 그녀가 미믹과 상대할 때 몇번이나 봤다. 아예 엄두도 안나는 간부급이나 아르토리우스 정도가 아니라면 시뮬레이션상 몇십초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아아압!"

강한 기합과 함께 헥토르가 튀어 들어왔다. 예상했던 수준의 빠르기와 기세. 머리를 두동강이 내려는 듯 위에서 내리쳐지는 배틀엑스의 공격을 옆으로 굴러 피한 운현은 헥토르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모기가 무냐!?"

맨살에 주먹이 꽂혔지만 헥토르는 가렵지도 않았는지 그대로 도끼를 돌려 운현을 공격했다. 하지만 뒤로 그가 훌쩍 뛰어 자신의 공격을 피하자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이를 드러내고 살기를 피웠다.

"호오... 주먹은 약한데 몸놀림은 괜찮은걸?"

"......."

"남자냐? 여자냐? 흠. 아니지. 됐어. 그건 나중의 즐거움으로 해두고... 이번엔 진짜다!"

'여기까지도 예상 안.'

헥토르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지만 운현은 그녀의 공격을 제대로 피할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싸우는 것을 보지 못했더라면 이정도까지는 할 수 없었겠지. 운현은 그녀의 공격을 피하다가 빈틈을 보고 단검을 움직였다.

"스윽!"

"...하... 이제 공격을 한다 이거지."

단검이 스치고 지나간 팔에서 주르륵 피가 배어나오자 그녀는 그 상처를 혀로 핥았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단검을 들었다.

"흥... 고작 이정도 상처로 날 어쩔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125====================

terror

'불가능하지는 않군.'

치명타를 먹일 수는 없지만 작은 상처라면 가능하다. 운현은 싸늘히 웃은 후 인벤토리에서 고블린의 피가 담겨 있는 통을 꺼낸 후 단검에 발랐다.

"이 냄새는...!? 이건 몬스터의 피!? 네놈...!!"

운현이 통의 뚜껑을 열자 피어오른 달콤한 향기에 헥토르는 빠득 이를 갈고 도끼를 잡았다. 가벼운 상처라 크게 신경쓰지 않으려 했지만 몬스터의 피가 발려있는 단검의 공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계속 공격을 허용했다간 몬스터 피에 중독될 수 있는 것이다.

"하아아압!"

도끼가 빠르게 움직인다. 아까보다 더욱 거세어진 공격에 운현은 헥토르에게 몬스터 피가 담겨 있는 통을 던졌다. 그것을 도끼로 쳐낸 그녀는 운현이 빠르게 다가오자 그의 복부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퍽!"

왼쪽 어깨로 그것을 막아낸 운현은 어깨가 떨어질 것 같은 고통을 받으며 오른손의 단검을 그대로 찔러 넣었다. 그의 단검 공격이 팔을 크게 베자 헥토르는 낭패한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큭...!"

몬스터 피가 듬뿍 발라진 단검이라 그런지 벌써 어지럽다. 물론 평상시라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정도이지만 지금 적대하는 상대가 미믹을 소환할 수 있는 상대라면? 그녀는 왼쪽 팔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 어깨가 축 늘어져 있는 운현에게 도끼를 겨누고 달아오른 얼굴로 외쳤다.

"반드시 죽인다! 하아아아압!"

"........"

'아파 죽겠네... 더 이상은 힘들겠군.'

아까의 한방만 아니었다면 괜찮았겠지만 어깨를 맞은 충격에 더 버티기 힘들었다. 운현은 그녀가 다가오자 바로 플래시를 시전했다.

"번쩍!"

"윽!?"

"푹!"

헥토르는 자신의 복부에 단검이 꽂히자 놀란 눈으로 자신을 공격한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단검을 뽑아낸 운현은 뒤로 훌쩍 뛰어 물러난 후 다시 한번 플래시를 사용했고 환한 빛이 사라졌을 때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소멸해버렸다.

"크으윽...!"

"헤, 헥토르님!"

"괜찮으세요!?"

"으으으...."

복부에서 울컥울컥 피가 흘러나오는 것에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근육에 힘을 주어 상처가 더 벌어지지 않게 하던 그녀는 다가온 사람들이 힐링포션을 뿌려주고 복부에 붕대를 감아주자 주먹을 꽉 쥐며 땅을 내리쳤다.

"빌어먹으으으을!!"

그녀의 분노에 가득 찬 외침이 광장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녀의 그 외침은 특종거리를 찾아 헤메이던 미시인에게까지 들리게 되었다.

"하아...하아... 이 씨발..."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라는 생각에 운현은 골목에 들어와 간신히 인벤토리에 넣어 둔 힐링포션을 꺼내 그것을 들이마셨다. 세병째의 힐링포션을 마시고 나서야 겨우 고통이 사그라든다.

고통이 좀 가라앉자 간신히 옷을 갈아입은 그는 벽에 기대어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정도로 깽판을 쳐놨으니...'

미믹과 싸울때의 움직임을 보며 어느정도는 얕보고 있었는데 확실히 레벨 차이는 무시할 수 없었다. 마지막에 플래시가 아니었다면 일격을 날리기는 커녕 고통 때문에 그저 도망가는 것이 한계였을 것이다.

"후우우..."

한숨을 내쉬며 운현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몬스터를 공격할때와는 다른 감각이 손에 남아 있었다.

'사람을 찔렀다라... 이제 갈때까지 가는구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심을 챙기고, 이제는 사람까지 찔러? 순간 운현은 자기 자신이 무서워졌다.

'내가 이정도까지 쓰레기였나...'

이 세계에 온지 며칠이나 됐다고 과거의 자신이 점점 잊혀져가는 기분이다. 그저 빈둥거리는 백수가 이렇게까지 되다니. 환경이란게 참 무서운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킨 운현은 터덜터덜 길드회관으로 향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길드회관에 들어오자 기다리고 있던 여인들은 성을 내며 운현에게 다가갔다. 팔찌만 찾아온다고 했던 사람이 이렇게 늦은 것에 잔뜩 걱정하고 있던 그녀들은 운현이 쓴웃음을 짓자 당황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거야?"

"표정은 왜 이래?"

"또 미믹을 만났나요?"

"으음... 그게 말야. 팔찌를 찾고 너희를 기다리게 한 거에 대한 사과를 하려고 선물을 사러 그쪽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중앙 광장쪽에서 미믹이 나타났지 뭐야. 그 미믹 때문에 사람들에 밀려서 어깨를 다쳤어. 그리고..."

"그리고?"

"아까 내가 말했던 사람 있지? 하얀 옷을 입은..."

"응. 헉. 설마 진짜였어?"

"응.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 같아.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자유자재로 미믹을 소환하더라고. 그러면서 주변을 공격하다가 헥토르가 나타났는데 헥토르도 그 사람에게 당했지 뭐야."

"허어... 그런 일이."

"운현씨는요!? 운현씨는 안다친거죠? 네?"

"아까 밀렸을 때 다친 어깨 말고는."

"어떡해... 어서 들어가서 치료해요. 바제트씨. 운현씨에게 힐링을...!"

"알았어. 잠깐만..."

술을 마시느라 흐트러진 정신을 집중한 바제트는 운현에게 힐링을 걸어주었다. 자신의 마력이 다 할때까지 힐링을 건 바제트는 그의 표정이 한결 나아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너 혼자 다니지 마라."

"하하하... 그래도 좋은 구경했는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도 아니고 매번 이렇게 걱정이 되니..."

"알았어. 앞으로 주의할게... 우우. 오늘은 그냥 자야겠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던전에 들어가야 하니까. 아. 그리고 우리도 이제 슬슬 던전에서 머무르면서 레벨업을 하자. 바짝바짝 올려서 다음 계층으로 진입해야하지 않겠어?"

"흠... 오크를 그렇게 빠르게 잡을 수 있다면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맞아요. 거기다가 저희는 운현씨가 있으니까..."

살짝 얼굴을 붉히고 힐끔힐끔 운현을 바라 본 헤스티아는 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소로 향했다. 필레도, 실비아도, 하다 못해 다른 간부나 아는 길드원이 아닌 처음 보는 길드원이 앉아 있는 것에 운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어?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후후후... 전 운현씨를 잘 알아요. 무슨 일이신가요?"

이미 길드에서 꽤나 유명인인 운현을 보며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피스나의 가게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고 물었다.

"캠핑도구를 여기서 판매한다면서요?"

"아. 던전에서 머무르시게요? 그거라면 이쪽으로 와주시겠어요?"

운현을 사무소 안으로 데리고 들어 온 그녀는 사무소와 연결된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운현이 따라 들어오자 잔뜩 놓여 있는 도구들을 가리킨 그녀는 커다란 가방 하나를 가리켰다.

"이게 요즘 잘 나가는 텐트에요. 4, 5인용 텐트니까 운현씨의 파티가 쓰기에는 넉넉할겁니다. 그리고 이건 코펠과 버너구요. 그리고 또 이건 파이어 스타터. 그리고 이건...."

"다 해서 얼마에요?"

오크를 많이 잡아 짭짤하게 벌었고, 또 이번에 던전에서 머무르면 더 벌 자신이 있었던 운현은 대범하게 물었다.

"다 합쳐서 100골드입니다."

"...어, 엄청 비싸네요."

나이트호크세트 풀세트 가격이라니. 운현이 놀라며 묻자 그녀는 빙긋 웃은 후 말했다.

"그래도 비싼 값은 하는 물건들이니까요. 특히 이 버너같은 경우는 거의 반 영구적이라서요. 일년에 한번 여기에 코어를 넣으면 계속 쓸 수 있어요. 그리고 이 텐트는 마법적 처리와 함께 코어를 충전하는 것으로 쾌적한 내부 환경을 자랑한답니다. 그리고 설치도 쉽구요. 그것 뿐이냐! 이 텐트를 구매하시면 간이 샤워장도 드립니다. 자 보세요."

운현이 가격에 놀라자 그녀는 텐트가 들어 있는 가방을 가져와 가방 위에 붙어 있는 버튼을 누른 후 휙 던졌다. 허공을 날던 가방이 폭발하듯 터지며 커다란 텐트를 만들어 바닥에 떨어지자 그녀는 그것을 본 후 말했다.

"안에 들어가보시겠어요? 코어는 이걸 쓰면 되니까요."

"아... 네."

그녀의 말에 텐트 안으로 들어간 운현은 넓은 공간에 감탄했다. 그런 그를 보며 빙긋 웃은 그녀는 텐트의 입구에 있는 작은 상자에 코어를 넣은 후 버튼을 눌렀다.

"이 버튼을 누르면 시원해지고 이 버튼을 누르면 따뜻해집니다. 필요하신만큼 조절하시면 되요."

"오오... 진짜 좋네요."

텐트 외에도 다른 물건들의 설명을 들은 운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100골드를 지불했다. 이정도 물건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그가 순순히 돈을 지불하자 그녀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늘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그럼 이만!"

텐트와 캠핑용품이 담긴 가방을 들고 운현이 나오자 여인들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가방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진짜로 오래 버틸 생각인가보네."

"당연하지. 적어도 내일 모레까지는 던전에서 계속 레벨업 할거야. 각오들 하라고."

"아니 우리야 늘 각오가 되어 있지만... 운현 네가 당일치기만 고집해서 그런거잖아."

"그, 그랬나?"

미야의 말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당일치기를 고집한 것은 자신이었다. 지금까지야 레벨업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겠다 싶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시장선거의 결과에 따라 최악의 경우 전쟁터에 갈 수도 있었고, 또 카를로스의 압박도 있었으니 레벨업을 최대한 빨리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기에 운현은 자신의 생각을 바꾼 것이다.

"그럼 이제 가서 자자. 미야. 오늘 같이 자자. 아까도 말했지만 안할거야. 그래도 괜찮아?"

"으음... 뭐 어쩔 수 없지."

어제는 헤스티아와 잤으니 오늘은 미야의 방에서 잘 차례다. 운현이 묻자 그녀는 조금 아쉬워 하는 듯 했지만 운현이 다친 것도 있기에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히히. 꼬리 만지면서 자야지."

"너 자꾸 그렇게 흥분시켰다가 나 발정기때 어떡하려고 그래."

"그건 그때가서 생각해야지."

싱긋 웃은 운현은 미야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고 그들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헤스티아는 와인을 홀짝이는 바제트에게 말했다.

"바제트씨. 정말 운현씨를 어떡해야 할까요."

"저 프리덤함 때문에 그를 좋아하는거기도 하니까 난 그냥 내버려 둘래. 이제 슬슬 레벨업도 빨라지고 있으니 뭐... 그냥 열심히 레벨업 하는 수 밖에 없지 않겠어? 정 뭐하면 그를 잡아다가 창고에 가둬두고 어디 못나가게 하는게 제일 좋지만 말야."

"그, 그건 좀..."

"흐흐흥~!"

평소보다 두어시간 일찍 일어난 운현은 1층에 내려와 홍차를 주문했다. 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없는 회관에 앉아 홍차를 홀짝이며 다른 여인들이 나오길 기다리던 운현은 길드의 문이 열리고 커다란 신문 뭉치를 들고 들어 오는 소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벽의 한 구석에 신문뭉치를 척 올려 놓자 그녀에게 다가간 운현은 궁금해하며 물었다.

"안녕?"

"어... 안녕하세요!"

밝은 목소리로 그녀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운현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에 소녀는 히죽 웃었고 운현은 그녀가 올려 놓은 신문뭉치를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이게 일간 발티르니니?"

"네! 신문 사시게요? 한부에 30쿠퍼에요!"

"길드에는 그냥 주는 것 아냐?"

"그건 아니구요. 길드 사무소에 맡겨서 판매하는 거에요. 사실건가요?"

"한부 줘보렴."

어제 그 깽판을 쳤는데 그것이 실렸을까? 미시인에게 준 헛소문이 제대로 실렸을까? 운현은 궁금해하며 신문을 들었다. 신문의 제 1면에는 시청에서 조사한 다음 시장이 누구인가 라는 사설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넘기고 2면, 3면째 보았을 때 운현은 히죽 웃었다.

"크크크크..."

"에? 왜 그러세요?"

운현이 신문을 보며 키득거리자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 운현은 고개를 가로젓고 그녀에게 동전을 꺼내 주었다.

"던전 도시에 나타난 체제를 무너트리려는 빅-빌런 미믹맨... 남잔지 여자지는 모르겠지만 던전 도시에 나타난 악당 미믹맨이 용병 연맹의 맹장인 헥토르를 쓰러트렸다. 이것은 던전 도시에 대한 선전포고인가. 아니면 그동안 용병 연맹이 보인 무력에 대한 반격인가. 하하. 쓰러트리긴. 개뿔."

헥토르를 더 상대하지 못하고 그냥 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떠올린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복부에 칼빵을 놓아주기는 했지만 그정도는 힐링포션 한병이면 회복될 상처였다. 거기에 자신이 더 피해를 입지 않았는가. 어제의 기억을 떠올린 운현은 쓴웃음을 짓고 차분히 그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세부적인 내용은 지금까지 던전 도시에 나타난 미믹에 대해서였다. 미믹이 왜 나타났는지와 용병 연맹과 상인 조합이 집중적으로 공격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시장 선거시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용병 연맹의 쇼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모험가 길드의 말없는 반격인가. 온갖 추측과 흥미 위주에 불과한 내용들로 가득한 사설을 전부 읽은 운현은 신문을 팍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정도면 훌륭하군.'

용병 연맹의 기사가 앞면에 나오고 뒤에서 이런 기사를 다룬다. 그럼으로서 사람들은 서서히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빅-빌런 미믹맨... 뭐 나쁘지 않네.'

어차피 시장 선거가 끝나면 사라질 캐릭터인데 이름따위 중요하지 않았던 운현은 미믹맨이든 뭐든 큰 상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에 만족했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려면 제대로 된 이름이 필요하니까...'

미믹맨의 활동이 널리 퍼져야 한다. 그래야 용병 연맹의 움직임에 사람들이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왜 미믹맨이 용병 연맹을 공격한단 말인가. 왜 미믹맨이 상인 조합을 공격한단 말인가. 이게 모험가 길드나 제작자 연합의 수작이 아닐까? 아니면 다른 모종의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품게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였던 운현은 신문을 접어 인벤토리에 넣은 후 남은 홍차를 홀짝였다.

"일찍 나왔네?"

"응. 오늘 일찍 갈거라고 했잖아. 다들 준비됐어?"

"응!"

"네!"

"그럼 바로 가자."

126====================

terror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운현의 파티는 오크들이 서식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잠깐 주변의 탐색을 갔다온다고 말한 후 운현은 대나무 숲으로 이동했다. 그곳의 대나무와 흙을 이용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강철 실을 구덩이 함정카드로 변환시킨 운현은 100장의 카드를 손에 넣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이정도면 엄청 오르겠네."

전투 경험치와 코어를 경험치화 시켰을 때 잘만하면 여기서 100레벨을 찍게 생겼다.

그가 함정카드를 만들고 복귀했을 때 여인들은 지형상 안전한 장소에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아. 이것도 치자."

고블린을 잡을 때 구했던 방벽까지 만들고 나니 괜찮은 거점이 만들어졌다. 운현이 만족하자 그녀들은 빙긋 웃은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름 운치있는데? 물가 근처이기도 하고."

"응응. 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이 자리에서 캠핑을 했던 것 같아."

"얼른 가죠! 먹을 것도 잔뜩 가져왔으니까 걱정 없어요!"

헤스티아의 말을 시작으로 운현의 파티는 전투 지역으로 이동했다. 다른 곳과 비교해서 파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코볼트의 서식지였다면 벌써 세 네 파티를 보았을 정도를 걸었는데도 한 파티만 본 것이 다인 그들이 조금 깊숙히 들어왔을 때 헤스티아는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일곱... 아니. 여덟의 움직임이 느껴져요."

"오크야?"

"그건 잘 모르겠... 속도가 빨라졌어요! 오크에요!"

"바제트! 미야! 준비해!"

"알았어!"

그녀들이 움직이자 운현은 구덩이 함정카드를 꺼내들었다. 멀리서 움직이던 점 형태의 인영이 점점 가까워지며 모습을 보인다. 험상궂은 인상으로 달려오고 있는 오크들이 자신들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자 운현은 히죽 웃었다.

'어서 와라....'

"쿠어어어어어!!"

"이런 씨발!?"

멀리 있던 오크들 중 하나가 달려오는 기세 그대로 창을 던졌다. 정확히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창을 본 운현은 뒤에 있는 헤스티아때문에 피하는 대신 단검으로 냅다 창날을 쳐내었다.

"쩌엉!"

"아이고! 내 손!'

굉장한 힘이 실려 있는 창이었다. 그것을 쳐냄으로 손이 얼얼해진 운현이 고통스러워하자 헤스티아는 당황하며 운현에게 달려갔다.

"괜찮으세요!?"

"으씨... 투척은 조심해야겠구만."

안그래도 저번에 투척때문에 골로 갈 뻔 했던 기억을 떠올린 운현은 구멍이 뚫린 버클러를 왼팔에 착용했다. 그래도 한방은 막아주겠지. 라고 생각한 그는 바제트와 미야에게 일갈했다.

"제대로 끌어와! 한 놈도 놓치지 않겠어!"

"응!"

[레벨이 올랐습니다.]

[추가 스탯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후우...41인가. 쓸만한 스킬이 별로 안나오네."

운현은 레벨 업 메세지창이 떠오르자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여덟무리째의 오크들을 잡았지만 두 무리를 잡았을 때마다 레벨이 꾸준히 오르는 것을 보니 오크들이 경험치를 잘 주기는 잘 주는 모양이었다.

레벨업을 하며 배운 스킬들이 대부분 손재주 강화, 아니면 함정의 범위 증가 같은 강화류 스킬들이었다. 강화 스킬 외의 스킬이라고는 40레벨을 달성하며 얻은 추적술이라는 헤스티아가 가지고 있는 열추적의 하위호환에 가까운 별 의미 없는 스킬에 불과했다.

'헤스티아가 있으니 이건 별로...'

몬스터의 흔적을 쫓아 그 서식지나 위치를 알아내는 기술이지만 헤스티아의 열추적에 비하면 그리 좋은 스킬이 아니다보니 딱히 쓸 일은 없어보였다.

그 외에 함정의 범위 강화는 좋았지만 그렇게 크게 체감할 정도는 아니었다. 레벨당 습득 스킬표를 봐도 50레벨에 배울 밧줄 활용을 제외하고는 딱히 이렇다 할 스킬은 없었다.

파티의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그들 역시 기존 스킬이나 스탯의 강화류 스킬 밖에 얻지 못했다고 하니 딱히 새로운 작전을 짤 필요가 없었다. 운현이 스킬창과 스탯창을 보며 생각을 하는 동안 헤스티아도 레벨업을 했는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저 또 레벨업 했어요!"

"음. 난 아직이네."

"나도 올랐는데. 바제트가 레벨이 좀 높아서 그런가... 그래도 굉장한 속도기는 해."

고블린이나 코볼트를 잡을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레벨업 속도다. 이정도면 매우 감지덕지인지라 미야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미야!"

"응?"

그녀가 뒤를 돌아보고 있는 사이 언덕 위에서 오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 거렸고 한 오크가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을 본 운현은 선두의 오크가 창을 들어 올리자 미야를 밀었다.

"쿠어어어어어!!"

"콰직!"

미야의 몸을 노리고 날아오는 창을 운현은 버클러로 간신히 막아내었다. 또다시 구멍이 뚫려버린 버클러에 입맛을 다시며 운현은 오크들을 보았다. 여기저기 상처가 있고 굉장히 분노를 하고 있는 것이 다른 오크들과 달랐다.

"설마...!"

"어떤 미친 새끼들이야!!! 운현! 몬스터 붙이기에 당했어!"

분노하며 바제트가 외치자 운현은 언덕의 반대쪽에서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긴 금발에 눈꼬리가 가는 여인을 발견했다. 그녀가 긴 꼬리를 살랑이며 사라졌을 때 헤스티아는 다른 쪽 언덕을 보며 외쳤다.

"저쪽에도 있어요!"

두 무리의 오크들이 언덕 위에서 자신들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며 운현은 빠득 이를 갈았다.

전에 만났던 파티의 이야기가 떠오른 그는 당황하는 파티원들을 독려하며 외쳤다.

"젠장! 미야! 왼쪽에서 내려오는 오크들을 도발해서 함정으로 끌어! 오른쪽은 나와 바제트가 막는다! 헤스티아! 바인딩 준비해!"

"아, 알았어!"

"알겠어요!"

왼쪽이 오크들이 내려오는 루트에 구덩이 함정을 설치하고 운현은 바제트와 함께 오른쪽의 오크들에게 달려갔다. 운현과 바제트가 달려오자 오크들은 더더욱 포효하며 창을 들어 그들에게 겨눴다.

'상처가 있어. 역시 그년이...!'

아까 전 언덕에서 본 여자가 몬스터를 붙인 것이 틀림없다. 라고 확신한 운현은 그 여자의 얼굴을 뇌리에 밖아 두었다.

총 15마리의 오크. 한 무리라면 구덩이 함정으로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두 무리로 나눠진 탓에 그것도 힘들다. 한무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함정의 쿨타임이 돌아올때까지는 그냥 버텨야 하는 것이다.

'아깝지만...'

운현은 모아 둔 스킬포인트를 한손 검 숙련에 모두 투자했다. 한손검 숙련의 레벨을 MAX로 올린 그는 단검을 꽉 잡은 후 스킬 포인트를 낭비하게 만든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빠드득 이를 갈았다.

'찾아서 반드시 작살을 내주지.'

"운현!"

"웃차!"

자신들에게 몬스터를 붙인 여자를 생각하던 운현은 바제트의 외침에 몸을 옆으로 튕겼다. 오크의 창이 허공을 가르자 운현은 반쯤 박살난 버클러로 오크의 뒤통수를 후려친 후 그의 목에 단검을 꽂았다.

"크허어어!"

목에 공격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크는 크게 데미지를 입지 않았는지 포효하며 운현에게 창을 휘둘렀다. 그 공격을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피해낸 운현은 바제트가 인탱글로 두마리를 제외한 오크들을 포박하자 남은 두마리를 보며 외쳤다.

"헤스티아!"

"바인딩!"

"운현! 이놈들 다 빠졌어!"

도발로 오크들을 끌고 온 미야가 외치자 운현은 바제트와 헤스티아를 향해 급히 외쳤다.

"저쪽 마무리 지어!"

오크와 1:1로 대치하게 된 운현은 단검을 들어 오크에게 겨눴다. 그런 운현을 향해 콧김을 내뿜은 오크가 달려들어 창을 휘두르자 운현은 생각보다 느린 그 공격에 이를 드러내었다.

"약해빠졌구만!"

불과 어제 붙었던 헥토르의 공격에 비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공격이다. 그것을 여유있게 피해낸 운현은 오크의 빈 몸을 향해 단검을 내질렀다. 그의 공격을 모두 맞은 오크가 고통스러워하며 뒤로 물러나자 운현은 단검을 까딱거린 후 오크에게 뛰어갔다.

"안들어오면 내가 간다!"

헥토르에 비하면 쉽다. 무지하게 쉽다. 거의 가지고 노는 수준으로 오크를 공격하던 운현은 오크가 크게 창을 휘두르자 그것을 점프하여 피한 후 오크의 머리를 잡고 그 위에 무등을 탔다.

"푹! 푹! 푹! 푹!"

나이트호크 세트 상의에 끼워져 있는 송곳을 왼손에 들고 그것으로 오크의 눈을 사정없이 쑤신 운현은 오크가 몸을 크게 비틀자 그 위에서 뛰어 내렸다.

"....."

"우, 운현?"

"뭐하냐! 쟤들 인탱글 풀린다!"

"아! 응!"

운현이 오크 하나를 여유있게 상대하자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는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물론 레벨이 많이 오르기는 했지만 아직 오크를 여유있게 잡을 수 있을 정도의 레벨은 아니었다.

"웃차!"

오크의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찌르기를 피해내고 운현은 단검으로 오크의 목을 찔렀다. 단검의 끝까지 쑥 들어간다. 천천히 오크의 몸이 허물어지자 운현은 단검을 뽑은 후 자신의 앞에 가시 줄 함정을 설치한 후 기름통 두개를 던져 충분히 적시고 말했다.

"가시 줄 함정 깔았어. 이쪽으로 당겨."

"하아아아아아! 날 봐! 내가 너희들의 적이다!!"

운현의 말에 미야는 도발을 걸고 운현 쪽으로 이동했다. 그녀가 점프하여 자신의 뒤로 오자 오크들은 미야를 쫓아왔고 그들이 함정의 범위에 들어 온 순간 하얀 가시 줄이 그들의 몸을 덮었다.

"크어어어! 커어!"

"크아아아!!"

가시 줄 함정이 주는 지속 데미지가 오크들의 체력을 줄여나가고 그들의 몸에 상처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자 운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헤스티아에게 신호했다..

"헤스티아"

"예!"

헤스티아의 파이어 볼트가 기름을 머금은 함정을 덮쳤다. 함정의 지속시간이 끝날 때쯤 함정은 폭발하듯 불타올랐고 그 불꽃 속에서 오크들은 고통에 포효하며 하나 둘 씩 죽어나갔다.

"후우..."

두무리의 오크를 잡았지만 레벨이 오르지는 않았다. 상처를 얼마나 입혔는지 모르지만 이걸로 전투 경험치가 나눠진 듯 싶었다.

'이런 방식인가...'

오크들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힘들지만 스킬이 있다면 광역 데미지를 주고 도망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다른 파티에 붙여버리고, 만약 그 파티가 오크들을 처리하면 자신이 준 데미지만큼의 경험치를 먹는 것.

'혼자였지. 혼자라면 괜찮은 경험치겠지.'

얼마나 경험치가 갈지는 모르겠지만 여럿으로 이루어진 파티보다는 독식을 하는 셈이 되니 꽤 많은 경험치를 획득할 것이다.

'그게 아니면...'

경험치를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닌, 만약 엘루인처럼 용병 연맹의 스파이라면? 그렇게 되면 일이 골치가 아파진다. 엘루인의 레벨을 봐도 자신보다 훨씬 높았다. 미믹을 활용해 그녀를 잡았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실패한 이상 더 높은 레벨의 스파이를 움직였을 것이고 또 미믹을 상대로도 도망칠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혼자라는 보장도 없지.'

운현은 팔짱을 낀 채 생각했다.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그가 생각을 하는 동안 여인들은 한숨을 내쉬며 지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그래도 잡긴 잡았다."

"누가 쳐 놓은 덕분에 구덩이의 오크를 좀 빠르게 잡을 수 있었어."

"도대체 누굴까요?"

헤스티아가 얼굴을 붉히며 씩씩대자 운현은 팔짱을 낀 후 말했다.

"다들 다친 곳은 없지?"

"응. 그런데 운현."

"응? 왜?"

"너 엄청 잘 싸운던데? 그 몸놀림은 뭐야?"

"아. 하하하. 내가 좀 잘 싸우잖아."

한손검 숙련과 체술이 만렙이고, 또 헥토르와 싸웠던 경험 때문인지 오크 정도는 만만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헥토르와 싸운 것은 운현이 아닌 빅-빌런 미믹맨이다. 그 경험을 이야기 할 수 없었던 그가 느긋하게 답하자 미야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떨떠름히 말했다.

"하긴... 네가 좀 잘 싸우지."

미야가 납득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힐끔 언덕 위를 보았다. 숨는다고 숨었지만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그것을 조용히 주시하던 운현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후 말했다.

"슬슬 거점으로 복귀할까? 좀 쉬었다가 한번 더 하자."

그의 말에 헤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가 꽤 강한 몬스터라 그런지 얼마 싸우지 않았는데도 조금 흥분된 그녀는 운현의 손을 꼬옥 잡으며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 흥분했어?"

"네에..."

"그럼 일단 헤스티아부터 만족시켜줄게. 괜찮지?"

"응. 난 아직이니까."

"나도~"

미야와 바제트가 웃으며 말하자 운현은 헤스티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 베시시 웃은 헤스티아는 거점으로 돌아오자마자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식사 준비 좀 부탁할게."

"응. 저녁은 너희 둘이 하는거지?"

"그러지 뭐."

식사 준비래봤자 버너에 불을 피우고 간단한 요리를 하는 정도다. 운현은 여유있게 답한 후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달아올랐는지 헤스티아는 어느새 옷을 완전히 벗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 운현씨... 어서."

"헤에... 그렇게 급했단 말야?"

흠뻑 젖어 있는 그녀의 계곡을 쓰다듬으며 운현은 음흉히 웃었다. 그 웃음에 헤스티아는 손을 뻗어 운현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그래요. 급했으니까 어서요... 사, 사실 운현씨만 보면... 요새 젖는단 말이에요."

"하하... 그럼 해줄게."

운현은 자신의 바지춤을 풀며 부드럽게 웃었고 그 웃음에 헤스티아는 다가 올 쾌락을 기대하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127====================

terror

[패시브 스킬 : 현자의 시간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냉철한 이성 상태가 되었습니다.]

[지력이 100 상승합니다.]

쾌락의 여운을 즐기는 헤스티아를 보며 운현은 바지만 입은 채 샤워장으로 향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샤워장에서 몸을 씻은 후 갑옷으로 갈아입은 운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야와 바제트는 근처의 탐색이라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운현은 다시 텐트 안으로 들어간 후 헤스티아에게 말했다.

"나 잠깐 탐색 좀 하고 올게."

"네에..."

그녀에게 말해 준 운현은 헤스티아가 살며시 눈을 감자 그녀에게 키스해준 후 텐트의 뒷문으로 나오며 하이딩을 걸었다. 이것만큼은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길, 혹은 이쪽을 주시하지 않아주길 기도할 뿐 이었다.

'날 엿먹이고 무사할 줄 알았다면 오산이지...'

하이딩의 지속시간을 위해 보너스 스탯의 대부분을 지력과 몸놀림에 투자한 운현은 최대한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아까의 언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이딩을 MAX 레벨로 찍은 덕분인지 하이딩을 걸고 이동을 하고 있는데도 MP의 소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여유롭게 언덕을 타고 오른 운현은 아까 여인이 있던 곳의 흔적을 확인했다.

'발자국은 한 사람분... 쫓아볼까.'

하이딩을 풀고 다시 MP가 채워지길 기다린 운현은 MP가 다 채워지자 다시 발자국을 추적했다. 흙길인 언덕을 내려간 그는 언덕 밑에서 발자국이 사라지자 입맛을 다셨다.

'추적술을 써봐야 하나.'

40레벨에 배워서 별로 쓸모없다 생각한 추적술이라는 스킬을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운현은 언덕이 끝나자마자 사라진 발자국을 향해 추적술을 사용했다. 그 순간 아무것도 없던 평원에 붉은색의 발자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식으로 쫓으라는 건가...'

붉은색 발자국을 쫓아 운현은 빠르게 걸었다. 추적술과 하이딩을 동시에 쓰는 터라 MP의 소모가 상당하다.

운현이 MP의 반 가까이를 다 썼을 때 그는 자신들의 캠프와 같은 거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텐트 크기를 보니 2, 3인용... 젠장. 동료가 있었나?'

운현은 이를 갈았다. 만약 동료가 있다면 혼자서 잡기는 어려웠다.

'슬슬 현자의 시간도 끝날때가 됐는데... 일단 돌아가야 하나?'

하지만 상대의 캠프가 언제 이동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다 잡은 고기를 놔주는 것은 아까웠다. 운현은 잠시 고민한 후 상대의 정체만 알아내자 생각하고 추적술을 풀었다.

 "더러워서 레벨을 올리든가 해야지."

상아, 아니 필레 정도 레벨만 되었어도 건드리면 박살을 내버리면 되는데. 레벨이 후달리니 이런데서 조심을 해야 한다는 것에 운현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생각해보니까 빡치네. 이거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이래야하지?'

울컥한 운현은 단검을 꽉 쥐었다.

'미믹을 꺼내 모두 도륙을 내버릴까?'

여기가 바깥도 아니고 던전 내부이니 미믹을 소환해서 공격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었던 운현은 자신의 생각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러고보니 안될 것 없잖아? 아무튼 정체만 밝혀내고 쇼타임이다.'

운현은 싸늘히 웃고는 조심스레 캠프 근처로 이동했다. 행여나 하이딩 상태에서 자신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그는 캠프에서 모닥불을 뒤적거리는 여인을 발견하고 이를 드러냈다.

'보아하니 일행은 하나나 둘 정도 있는 것 같군.'

그녀가 끓이고 있는 주전자, 그리고 그녀의 옆에 놓여져 있는 머그컵 두개를 보니 그녀는 혼자가 아닌 듯 싶었다. 하이딩을 건 채 얌전히 기다리던 운현은 멀리서 장검을 든 여인이 걸어오자 숨을 삼켰다.

'저건?'

"아아. 피곤하다. 바민님은 사람을 너무 굴린다니까."

"어디 갔다오는거야. 루비."

"바민님 명령을 실행하고 왔다. 제길. 엘루인 그 멍청한 년이 걸리지만 않았어도."

"다른 모험가들은?"

"슬슬 처분을 할 때가 되서 다 처분했지. 이번 일만 끝나면 다시 연맹으로 복귀해야 하니까 말야. 후... 나도 이제 준간부가 되겠지? 크크크..."

운현이 길드에 왔을 때 그와 첫 섹스를 했던 여성이다. 운현은 그녀의 얼굴과 금발 여인을 번갈아 바라 본 후 생각했다.

'설마 그 클랜 자체가 용병 연맹의 스파이라는 건가?'

루비는 자신의 클랜에 들어오라 요청했었고 운현은 그것을 거절했었다. 만약 그때 가입을 했었더라면?

'알지도 못하고 뒈질 뻔했군.'

운현은 짜증과 분노, 그리고 하마터면 아무것도 모르고 이용당해 죽을 뻔했다는 것에 정신을 놓을 뻔 했다. 간신히 그것을 억누른 그는 주먹을 꽉 쥔 후 루비를 노려보았다.

'감히 이몸에게 엿을 먹이려 했단 말이지...'

자신이 있는줄도 모르고 금발 여인과 시시덕거리던 그녀가 금발의 여인의 가슴에 손을 가져가자 금발 여인은 그녀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슬슬 움직여야해. 강한 파티가 있었어. 이번엔 다섯 무리를 가져다가 붙일거야."

"헤에... 그게 가능하겠어?"

"페로몬 스킬을 쓰면 어떻게든 되겠지. 잘못되면 너만 믿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해달라고."

"후후후... 우리 마이나. 그렇게 이 언니를 믿고 있는거야?"

"당연하지. 고작 70레벨에 불과한 내가 140레벨인 네 레벨을 믿지 뭘 믿겠냐?"

집요하게 자신의 가슴으로 손을 넣는 그녀의 손을 쳐내던 그녀는 결국 포기하고 자신의 가슴을 내어주었다. 루비의 손이 가슴을 주무르며 목덜미를 핥자 그녀는 낮은 신음성을 낸 후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보군... 그렇다면 좋다.'

운현은 싸늘한 눈으로 그녀들을 노려보다가 캠프의 입구에 구덩이 함정을 걸었다. 어차피 저들을 내버려 뒀다간 오크 무리 다섯이 몰린다.

'솔직히 미안하지도 않군.'

운현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들이 함정으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푸슛!"

"꺄악!?"

"이건!? 아아아아아악!"

"커헉! 마, 마이나!!!"

함정이 발동되며 두 여인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그녀들의 비명과 루비의 비통한 외침을 들은 운현은 하이딩을 풀고 구덩이쪽으로 향했다.

"어이쿠. 함정에 걸려버렸구만. 뭐가 걸렸으려나...?"

"크윽... 다, 당신은...!?"

"엇? 사람 아니야? 어라? 당신. 루비잖아?"

죽창에 어깨가 꿰뚫린 루비는 마이나의 복부에 죽창이 뚫고 나온 것과 운현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이건 아니야!"

"글쎄... 뭐가 아닐까?"

"이건... 살려줘! 내가 하고 싶어서 한게 아니야! 이건...! 이 여자의 협박을 받아서...!"

방금 전까지 그렇게 마이나에게 엉겨붙던 그녀는 자신이 불리해지자 마이나를 버렸다. 그것에 충격을 받은 마이나가 경악한 얼굴로 서서히 죽어버리자 루비는 눈물을 흘리며 운현에게 외쳤다.

"살려줘! 이 여자는 용병이야! 그리고 난 용병 연맹의 협박을 받고 있었다고! 내가... 난 모험가야!"

"아. 그랬어?"

운현은 그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인 후 밧줄을 던졌다. 그 밧줄을 보고 루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의 어깨에 박혀 있는 죽창을 간신히 잘라내고 어깨를 빼었다. 구멍이 나 있는 어깨를 움직이지 못한 채 그녀가 한팔로 밧줄을 꽉 잡자 운현은 천천히 밧줄을 당겼다.

"고, 고마워! 고마워!"

운현이 자신을 살려주려하는 모습에 루비는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그렇게 그녀를 끌어 올려 준 운현은 루비가 구덩이를 바라보며 마이나의 시체를 보고 이를 갈았을 때 운현은 그녀에게 차분히 물었다.

"어깨 상처가 심한 것 같은데 힐링포션이라도 바르지 그래?"

힐링포션을 던져주며 운현은 단검을 뽑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살기에 움찔한 루비는 그를 경계하며 힐링포션을 꿀꺽 꿀꺽 마셨다.

"고...마워."

운현이 자신을 구해 준 것에 고마워하면서도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가만히 지켜보던 운현은 루비가 힐링포션을 마시자마자 그녀의 허리에 있는 검에 손을 가져가자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워워. 왜 이래?"

"마이나를 죽이다니! 이 개자식! 용서하지 않겠어!"

"마이나는 용병이고 넌 모험가라면서. 둘이 무슨 사이였길래 그래? 응?"

"닥쳐! 이 개자식아!"

운현을 향해 증오가 가득 담긴 시선을 보낸 그녀가 검을 뽑기가 무섭게 운현은 곧장 그녀에게 달려갔다. 1계층을 탐험하는 모험가가 보이는 움직임이라고 보이지 않는 그 빠른 움직임에 루비가 놀란 눈으로 검을 움직이지도 못하자 운현은 그녀를 향해 싸늘히 말했다.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어, 어떻게!?"

"퍽!"

자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그의 움직임에 놀란 루비는 복부를 그대로 맞아 뒤로 밀려났다. 막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셈인 그녀가 다시 구덩이 함정으로 떨어지자 운현은 구덩이 안쪽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솔직히 네년이 처음에 날 이용하려고 한 것만 아니었다면 고문을 해서 용병 연맹의 일로 이용하려고 했지만 말이지."

"커억...컥..."

이번에는 제대로 복부와 가슴에 죽창이 꽂혔다. 그녀가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던 운현은 기름통을 그녀에게 던졌다.

"생각해보니 이미 용병 연맹에 대한 작업은 잘 되고 있는데 굳이 변수를 추가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어푸! 어푸!"

"레벨이 높으니 대단하네. 생명력이 끝내줘. 아직까지 살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운현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파이어 스타터를 꺼내 마른 풀을 뜯어 불을 붙였다. 활활 타오르는 짚불을 본 루비는 증오가 가득한 눈으로 운현을 노려보며 힘없이 외쳤다.

"저... 저주... 쿨럭! 저주 받아라..."

"뭐라는거야."

루비가 토해내는 원망 섞인 저주를 귓등으로 넘기며 운현은 손에 들려 있는 불씨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기름으로 잔뜩 얼룩진 그녀를 향해 휙 던졌다.

"화르르륵!"

"아아아아악!!"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는 루비를 보며 운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70레벨인 마이나가 죽창에 제대로 맞고 한번에 죽어버렸다. 그렇다면 140레벨인 루비는 얼마나 걸리려나? 운현은 차분히 시간을 확인하다가 3분 정도 지났을 때 루비의 마지막 절규를 들었다.

"아아악! 다, 다난이시여! 어머님이시여! 당신의 곁으로 갑니다! 아아아아아악!!"

"다난?"

아르토리우스가 아닌 다난? 운현은 루비의 마지막 말에서 나온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신인가 싶기도 했지만 운현이 아는 신들 중에는 다난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뭐.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구덩이 함정의 위력을 대략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운현은 자신의 함정카드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정도면 2계층 초반에서까지 써먹을 수는 있겠구만."

[패시브 스킬 : 현자의 시간이 비활성화됩니다.]

[냉철한 이성 상태가 해제됩니다.]

[지력이 99 하락합니다.]

"이런 미친..."

냉철한 이성상태가 풀리자마자 운현은 이를 갈며 뒷걸음질 쳤다. 사라져가는 구덩이 안에서 자신을 증오가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는 루비의 얼굴이 보였다.

"내. 내가 사람을 죽였어...?"

이세계로 들어와 살아갈 각오를 다졌다. 몬스터를 죽이고 살아가는 모험가의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자신을 이용하려 했다 하더라도 자신과 살을 섞은 여인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었나?

그정도로 미친놈이었단 말인가?

운현은 치솟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몸이 떨려왔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아니, 자신이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내가... 한거야."

그녀들을 살려뒀으면 아군이 위험했다.

그녀들을 내버려 뒀으면 시장 선거에서 아르토리우스가 승리할 가능성이 상승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운현은 떨리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젠장... 죽일 수 밖에 없었잖아."

자기 합리화를 한다.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자신들이 위험했다. 그렇다면 하는게 옳았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린다? 손을 더럽히지 않고 영원토록 깨끗하게 살아갈 줄 알았단 말인가? 운현은 자신의 약한 모습에 이를 갈며 주먹을 꽉 쥐었다.

"퍽!"

자신의 볼을 강하게 때린다. 얼굴이 욱씬거리고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며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병신같이 굴지 말자. 응?"

타인을 믿지 않기로 하지 않았던가? 타인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이 자신을 배신할 가능성을 염두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사람 좀 죽였다고 이렇게 약해빠진 짓을 해?

자신이 먼저 치지 않았으면 아군이 몰살당할 판국인데?

고작 손 좀 더럽혔다고 이따위 약해빠진 짓거리를 한단 말인가?

이 세계는 한국이 아니다. 법과 사회 질서로 규범지어진 세상이 아니었다.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고, 주먹보다는 칼이 더 가까운 곳이다.

'그 전에 내가 한 일부터 되돌려보자고. 사람 사는 곳에서 미믹을 풀어 놓은 주제에 왜 이제와서 착한척이냐?'

아무리 작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민간인이 그토록 많은 곳에 미믹을 풀어놨다는 것은 그들이 죽어도 신경쓰지 않겠다는 것을 각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 미믹에 의해 인명피해가 안났을 뿐이지 얼마든지 인명피해가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루비와 마이나를 죽인 것은 자기 방어의 수단이었다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미믹에 의해 민간인이 죽었다면 그것에는 어떤 변명을 할 것인가?

"크크크..."

운현은 욱씬거리는 볼을 잡은 후 나지막히 웃었다.

이게 각오다.

이게 이세계에서 살아간다는 진짜 각오였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

운현은 처음 이세계에서 다진 군대 안간다고 좋아하며 다짐했던 각오가 아닌,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이세계에서 살아가고, 살아남기 위해서 얼마든지 타인을 죽일 수 있는 각오를.

"어디 갔다와?"

"응? 어. 탐색. 근처 좀 뒤지고 왔어."

"흐음... 혼자서 위험하게 시리."

운현이 돌아오자 식사 준비를 마친 여인들은 운현을 반겼다. 따뜻한 죽과 빵, 그리고 잘 익은 고깃덩어리다. 그것을 담은 헤스티아가 운현에게 내밀자 운현은 그것을 받은 후 빙긋 웃었다.

"고마워."

"뭘요.... 어!? 운현씨! 볼은 왜 그래요?"

아까 한대 때린 탓에 부풀어 오른 그의 볼을 보며 헤스티아는 다급히 물었다. 그녀의 외침에 미야와 바제트 역시 그를 보았고 그녀들의 걱정어린 시선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 이거? 새롭게 각오를 다진거지."

"무슨 소리야? 그게?"

"뭔 각오를 다지길래 상처까지... 치료해줄게. 잠시만."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 놓은 바제트는 운현에게 힐링을 걸어주었다. 따뜻한 기운과 함께 부풀어 올랐던 볼이 천천히 가라앉자 바제트는 빙긋 웃은 후 말했다.

"다음부터 각오 다질때 어디 때리지는 말라고. 몸 상하면 너만 손해야."

"그렇겠지. 하하. 고마워. 어서 먹고 또 전투하러 가자."

"응!"

그녀들의 대답을 들으며 운현은 가라앉은 볼을 쓱 쓰다듬었다. 어디 다쳐봤자 자신의 손해이고, 살인에 대한 고통과 공포, 죄책감에 물들어봤자 자신의 손해였다.

'그러니 난 한다. 내 비원을 이루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해주겠어.'

생각을 마친 운현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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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ror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비원이라니. 그런 것이 있었나? 그저 이세계에서 꿀빨면서 살아가는 것이 다가 아니었나? 그는 자신이 놓친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없었다.

"으으음..."

운현이 낮게 신음하자 음식을 먹던 여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보았다. 그들의 시선에 운현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별거 아냐."

그의 말에 운현의 동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운현이 입을 다물자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약간 묘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시간이 끝나자 운현은 애써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가볼까!?"

식사를 마치자마자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바제트가 몰아오고 운현이 함정을 만들고, 미야가 도발로 그들을 함정의 루트로 끌어들여 함정에 빠트리는 전투가 지속되는 동안 운현은 점점 전투가 익숙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

이세계에서 살아가는 각오를 제대로 다진 덕분일까? 팔의 움직임이 가볍다. 함정에 빠지지 않은 오크가 달려들어도 그들을 여유있게 상대하며 무감정하게 그들을 죽일 수 있었던 운현은 마지막으로 발악하듯 창을 질러오는 오크 두마리의 공격을 피해낸 후 빠르게 그들의 눈과 목에 송곳과 단검을 찔러 넣는 것으로 오크들을 처치하고 났을 때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헤스티아와 눈이 마주쳤다.

"왜?"

"운현씨. 괜찮아요?"

"엥? 내가 왜?"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욱 몸이 가볍고 움직임도 빨라졌다. 오크 한마리를 잡는 속도도 빨라졌다. 이상할 것이나 나쁠 것은 전혀 없었기에 운현은 궁금해하며 물었고 그의 질문에 바제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근데 왜 울어?"

"내가 울어?"

운현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오크의 피라고만 생각했는데 손가락에 찍혀 뭍어난 것은 투명한 물기였다.

"어... 그, 그러게."

운현은 당황하며 쓱쓱 팔을 들어 얼굴을 닦았다. 그런 그에게 다가 온 바제트와 미야가 걱정스레 바라보자 운현은 피식 웃었다.

"싸우다보니 눈에 뭐가 들어갔나보지. 난 괜찮아."

"으음... 괜찮다면 다행이지만."

"좀 쉬는게 어때?"

"조금만 더 하고. 나 레벨 49니까 한 두번 정도만 더 하고 쉬자."

결국 운현의 말에 동료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전투를 시작했다. 바제트가 오크를 끌어오러 간 동안 계속 운현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헤스티아는 운현의 옷을 잡고 꾹꾹 당긴 후 물었다.

"진짜 괜찮은거 맞죠?"

"진짜라니까~"

평소의 능글맞은 운현의 얼굴이다. 그것에 조금 안심한 헤스티아는 아까의 운현을 떠올리고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까 각오를 다졌다고 하셨을 때부터 운현씨. 전투할때마다 점점 표정이 무서워졌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음. 딱히 별 일 없었는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살인을 했다. 하지만 그것을 밝힐 수는 없지 않은가. 운현은 볼을 긁적거리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헤스티아는 살며시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운현씨.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줘요. 전 언제나 운현씨의 편이니까요."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네."

"사람을 죽여도?"

"운현씨라면 이유가 있었겠죠."

무조건적인 믿음이다. 그녀의 굳은 의지가 담긴 눈을 빤히 바라보던 운현은 그녀의 입술에 쪽 키스했다. 깜짝 놀란 헤스티아가 멍하니 바라보자 운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정말 힘들겠다 싶으면 반드시 말할테니까 걱정하지마."

"헤헤~"

"뭐야!? 뭐야!? 나도 해줘!!"

운현이 헤스티아와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내자 미야는 후다닥 달려와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도톰한 입술을 말없이 바라보던 운현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얼굴을 쓱 쓸어내렸다.

"에퉤퉤! 뭐하는거야!?"

"하하하하!! 귀엽긴!"

"으씨...!"

귀와 꼬리를 쫑긋 세우고 미야가 으르렁거리자 운현은 그녀를 꽉 끌어안고 키스했다. 그것만으로도 화가 풀린 미야는 운현을 올려다보며 베시시 웃었다.

"자. 그럼 집중하자고. 저기 바제트가 오고 있네."

운현이 미야를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본 바제트가 평소보다 빠른 움직임으로 달려왔다. 그녀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준 운현은 단검을 꽉 잡았다.

'단검이 가볍네.'

아까 전 오크와 싸울때보다 단검이 더더욱 가벼워졌다. 살인을 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옅어지는 기분 때문일까? 운현은 바제트의 뒤로 몰려오는 오크를 보고 피식 웃었다.

"자~! 와랏!"

[레벨이 올랐습니다.]

[추가 스탯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밧줄 활용 스킬을 획득하였습니다.]

[밧줄 활용 : 밧줄을 활용해 적을 묶거나 쉽게 갈 수 없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적을 묶는 것은 손재주, 이동은 몸놀림에 영향을 받습니다.]

"후우. 이제 50이네. 너희들은 어때?"

"저도 50레벨이 되었어요. 새로운 스킬은 파이어 월이네요. 불의 벽을 만들어내는 마법이에요."

"나도 50레벨 됐어. 난 지뢰진이라는 스킬 익혔어. 땅을 쳐서 지진을 일으키는 스킬인데... 한번 보여줄까?"

파이어 월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지뢰진이라는 스킬은 설명만 들어서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야는 주먹을 꽉 쥐고 기합성을 터트렸다.

"하압!"

"쿵!"

미야의 주먹이 땅에 꽂히자 그녀의 주변 땅이 흔들리며 커다란 자국이 생겨났다. 그것에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미야는 피식 웃었다.

"지뢰진은 데미지를 입힌다기보다는 나에게 어그로가 끌린 적들을 쓰러트리는 기술이야. 발 밑을 흔들게 해서 그들이 쓰러지고 더욱 많은 어그로를 끄는거지."

"음. 탱킹계열 스킬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을걸. 그렇다고 데미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말야."

"그럼 너는?"

"나? 난 매스 힐링. 사제들이라면 좀 빨리 배우는건데 난 지금 배웠네. 힐링에 비해서 집중을 많이 해야 하고 마력 소비가 심하긴 하지만 위급할때 쓰기에는 좋아."

"그런가..."

그녀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밧줄 활용이나 헤스티아의 파이어 월, 그리고 한참 전투 도중 위급시 모두에게 힐링을 할 수 있는 매스 힐링까지. 전투에서 활용하기에 따라 무척 좋은 스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걸 다 제쳐두고 쓸수 있는 구덩이 함정만 없었다면 말이지."

구덩이 함정의 엄청난 위력은 다른 스킬들을 다 씹어삼킬 수 있었다. 오크 한무리를 10분에서 15분만에 잡을 수 있는 위력인데 여기서 더 뭘 바라겠는가. 운현은 자신과 다른 이들의 스킬을 일단 기억 속에서 미뤄두었다.

"그럼 하던대로 계속 하자."

"응! 알았어!"

"그럼 갔다올게!"

"저는 좀 할일이 별로 없는 것 같네요."

바제트가 몰아오고 미야가 도발하고 운현이 함정을 만든다. 자신의 역할이래봐여 뿌려진 기름에 불을 붙이는 정도에 불과한 헤스티아가 씁쓸히 말하자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그래도 이번에 얻은 스킬이 파이어 월이라면서. 만약 잘못해서 두 무리가 온다면 다른 한무리를 파이어월로 묶어 둘 수 있잖아. 그것만으로도 꽤나 좋은 거라고. 위기 상황에 대응할 수 있으니까."

운현이 자신을 달래주자 헤스티아는 빙긋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운현 역시 마주 웃었다.

"어이구 힘들다."

아무리 구덩이 함정을 이용해서 전투를 쉽게 끝냈다고는 하지만 힘이 안드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방금 전의 전투는 구덩이 함정에 오크를 밀어 넣은 상황에서 갑자기 다른 오크 무리들이 이동하다가 공격한 것을 방어하며 일반 전투를 치뤄서 그런지 더 피곤하다.

단검에 뭍어 있는 오크의 피를 헝겁으로 닦아낸 운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료들 역시 꽤나 지친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오늘은 이쯤하자. 난 레벨 58이야."

"나도 58이야. 헤스티아. 너는?"

"전 57이요."

"난 59."

아침에 들어올 때 40이 안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하루만에 20이 넘는 레벨을 올렸으니 이제 슬슬 쉴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운현은 동료들과 함께 만들어 놓은 거점으로 돌아왔다.

"피곤할텐데 먼저들 씻어. 내가 헤스티아랑 같이 저녁 준비할게."

"응~ 고마워!"

"미야. 같이 씻을까? 샤워실도 넓은데."

"으음... 그러자."

오크의 피와 땀 때문에 온 몸이 끈적하고 찝찝했던 미야와 바제트가 같이 샤워실로 들어가자 운현은 눈을 빛냈다.

"운현씨..."

미야와 바제트가 샤워실로 들어가자마자 은근슬쩍 그가 샤워실로 가려고 하는 것을 잡은 헤스티아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그에게 말했다.

"어디 가시려구요?"

"아니 뭐 그냥?"

"이거나 잘라주세요."

쓴웃음을 지으며 헤스티아는 운현에게 고깃덩어리를 내밀고 말했다.

"같이 잘때는 얼마든지 샤워랑 목욕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훔쳐보려는거에요?"

"엿보기에도 나름의 미학이라는게 있단 말이지."

"됐거든요!"

그의 어처구니 없는 소리에 헤스티아는 빽 소리를 질렀다. 결국 그녀에게 잡혀 얌전히 저녁을 준비한 운현은 미야와 바제트가 나오자 헤스티아의 어깨를 톡 쳤다.

"너도 씻고 와. 아니면 다 먹고 같이 씻을까?"

"그, 그럴까요?"

운현의 말에 헤스티아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음~ 향기 좋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으며 미야는 간단하게 탱크톱과 반바지만 입은 채 운현과 헤스티아가 만든 요리를 향해 다가왔다. 말린 생선과 고기, 야채를 넣고 만든 잡탕죽과 빵, 삶은 고기가 준비되는 것을 본 그녀는 수저를 들어 잡탕죽을 맛보고 놀랬다.

"우와! 이거 맛있는데!? 누가 만들었어? 헤스티아?"

"아뇨. 운현씨가..."

"어? 이런 면도 있었네? 이건 어디서 배운거야?"

"그냥 대충 만들어본거야. 괜찮지?"

"응!"

"뭔데 그래? 나도 먹어볼래."

바제트까지 와서 죽을 한입 먹어보고 그녀 역시 맛있다고하자 운현은 기분이 좋았다. 요리를 해서 먹이는 기쁨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그가 싱글거리자 바제트와 미야는 운현과 헤스티아가 만든 요리를 간이 테이블 위로 가져갔다.

"잘 먹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운현과 헤스티아가 같이 샤워를 하는 동안 설거지를 마친 그녀들은 심심했는지 바닥에 누워 뒹굴거렸다.

"뭐해?"

"그냐앙~"

"심심해서. 미야. 뭔가 재밌는거 없어?"

운현의 몸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킨 바제트는 붕붕 고개를 저은 후 미야에게 물었다. 돗자리가 깔린 바닥에서 뒹굴거리던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킨 후 텐트 안의 자신의 짐에서 한벌의 카드를 꺼내왔다.

"이게 뭐야?"

"카드 점. 우리 부족에서는 장거리 사냥을 나갈때면 이런 식으로 카드 점을 치며 밤을 때우거든. 할 일 없을때는 꽤 재미나지. 어때? 한번 해볼래?"

"흠... 난 나중에."

"왜?"

샤워를 마친 운현이 갑옷을 챙겨 입으며 말하자 미야와 바제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이제 쉬는 것이 아니었나? 그녀들의 의문 섞인 시선에 운현은 텐트를 살때 같이 들어 있던 긴 밧줄을 챙겨 들었다.

"나 도시에 좀 갔다올게. 슬슬 함정 재료가 동이 날 것 같아서 말이지. 오늘 생각보다 많이 썼네."

남은 함정카드는 약 50장 정도였다. 이정도면 충분히 내일까지 쓸 수 있지만 올라가야 하는 핑계를 대야 했기에 운현은 함정의 재료를 구입하러 간다고 말했다.

"혼자 가려고? 위험할텐데?"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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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도망다닐게. 나도 추적술이 있으니까 그걸로 적당히 피해다닐 수 있어."

"그래도..."

걱정스럽기는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나보다. 미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갑옷을 챙겼고 운현은 다급히 그녀를 말렸다.

"아니! 진짜 괜찮다니까? 물건만 사가지고 바로 올거야!"

"던전을 너무 얕보는거 아니야?"

"너나 나 얕보지 마라. 나 운현이야. 도적 운현. 여차하면 함정걸고 튀면 되니까 진짜 걱정하지마. 피곤할텐데 여기서 쉬고 있어. 응?"

"우..."

"운현씨. 정말 괜찮겠어요?"

헤스티아가 얼굴에 걱정과 근심을 담으며 묻자 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 담겨 있는 고집을 눈치챈 그녀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조심하셔야 해요. 알았죠?"

"알았어. 자자. 한번씩 안아보고 가자."

운현은 세 여인들을 한번씩 끌어안아주고 짧게 입맞췄다. 그녀들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이자 운현은 송곳을 꺼내 나이트호크 세트의 갑옷 걸이에 걸고는 손을 흔들었다.

"갔다올테니까 쉬고 있어~ 정 늦겠다 싶으면 먼저 자도 괜찮아!"

"언제쯤 올건데요?"

"아마 여유있게 잡아도 세네시간은 걸리지 않을까? 간김에 요리용 재료도 좀 구입하고 싶으니까."

"알았어요. 잘 다녀와요~"

자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는 여인들에게 운현 역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렇게 그녀들과 떨어진 운현은 최대한 조심해가며 고블린의 서식 구역까지 이동했다.

'가기 전에 싹 털고 가야지.'

미믹도 보충할 겸 운현은 몇번 봐 둔 홉고블린의 서식지를 순회하여 보물상자를 훔쳐내었다. 열개의 보물상자를 획득한 운현은 동굴 하나에서 미믹으로 홉고블린을 죽인 후 망치로 보물상자를 부숴 일곱마리의 미믹을 얻었다.

이것만으로 한시간이 지나버린 것에 조급해하며 운현은 빠르게 던전을 빠져나왔다.

"운현? 내일까지 던전에 있으려던 것 아니었어?"

"함정 재료를 다 써서 보충하려고. 생각보다 많이 쓰네. 이거 환전해줘. 코어는 나중에 동료들이랑 같이 레벨업하는데 쓸게."

오크들의 사체가 담긴 마석 주머니를 올려 놓으며 운현이 말하자 필레는 그 양에 감탄했다. 하루만에 이만큼이나 모았단 말인가? 그녀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운현은 팔짱을 끼고 으스댔다.

"내가 진심으로 움직이면 이정도라고."

"우와... 대단한데? 금방 2계층에 진입할 수 있겠어!"

"응. 몇일정도면 가능할 것 같은데... 그나저나 별 일은 없지?"

"별일이래봐야 뭐... 요새 난리인 미믹때문이지. 신문 봤어? 미믹맨이라는 정신나간 사람이 미믹을 소환한다고 하는데. 조만간 현상금이 걸릴지도 몰라."

"그, 그래?"

특정인이 되어버리니 이런 위험이 있다. 운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후 필레가 건네준 골드를 받았다.

"꽤 많이 버네?"

"그래봤자 1계층에서 버는건데. 얼른 레벨 올려서 다음 계층으로 진입해야지."

"후후후... 화이팅! 열심히 해~"

처음에 모험가 안한다고 튕겨대던 운현을 떠올린 그녀는 운현이 사무소를 떠나자 손을 흔들었다. 그녀에게 인사해주고 밖으로 나온 그는 길드 회관 뒤의 상자에서 밧줄을 있는대로 챙겨 인벤토리에 쑤셔 넣은 후 빠르게 장을 보고 힐더크의 가게로 향했다. 달라붙는 그녀를 달래주며 대장간에 있는 강철실을 50개를 모두 털어낸 운현은 남은 시간을 확인한 후 인상을 구겼다.

'돌아가는데 한시간 잡고... 젠장. 한시간 반 밖에 없나.'

시간이 빡빡하다. 용병 연맹쪽으로 이동한 운현은 골목의 구석진 곳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자... 빅-빌런. 미믹맨의 등장시간이다.'

어제 왠 정신나간 놈에게 헥토르가 당하고 용병 연맹은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렸다. 비록 생명에 지장은 없다지만 간부 후보라고 할 수 있는 그녀가 듣도 보도 못한 잡놈에게 당한 것은 용병 연맹의 수치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피는 피로 갚아야 하는 법. 오늘도 그 미믹맨이 나타날 것을 대비해서 용병 연맹의 용병들은 비상을 선포하고 3인 1조로 조를 짜서 순찰을 시작했다.

"으아! 개새끼! 잡히면 죽여버린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 이게 뭐야!?"

"반드시 찢어 죽여버리겠어!"

으르렁거리며 용병들이 짜증과 살기를 내뿜는 탓에 사람들은 괜히 불똥이 튈까 그녀들을 피했다. 그렇게 거리를 걷던 그녀들은 흰색 옷을 입은 사람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그에게 다가갔다.

"네놈! 얼굴 좀..."

"화악!"

어깨를 잡아 돌린 순간 눈 앞에 하얗게 물들었다. 엄청난 빛에 세 용병들이 눈을 잡고 비명을 내질렀을 때 흰 옷은 그녀들에게 주먹을 내뻗었다.

"퍽! 퍽! 퍽!"

"컥!"

"크읏!"

"이 개새...!"

갑작스러운 섬광으로 시력이 한순간 마비되었던 여인들은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간신히 시야를 확보했다. 하지만 아까 전까지 있었던 그가 없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그녀들은 사람들이 경악하며 위를 가리키자 그곳을 바라보았다.

"이 개새끼! 커어억!?"

"피나!"

"빨리 줄을 끊어!"

"커억! 컥!!"

가로등 위에 올라가 있던 흰 옷이 밧줄을 움직여 갈색 머리의 용병의 목에 밧줄을 걸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단번에 그 용병은 목이 잡힌 채 공중으로 떠버렸고 그것을 보며 그녀의 동료들은 황급히 그녀를 풀어주기 위해 밧줄을 잘랐다.

"커헉! 쿨럭! 쿨럭!"

한순간이지만 죽음을 맛본 피나는 양 손을 벌리며 다가오라는 듯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흰 옷을 보며 이를 드러내었다. 그녀는 찢어진 목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힐링포션을 마신 후 허리의 검을 뽑았다.

"개새끼! 누군지 몰라도 넌 오늘 다 살았다!"

그녀의 분노를 여유있는 포즈로 받아낸 흰 옷의 앞에 상자가 생겨난다. 그에게 달려들려던 여인들이 발걸음을 멈췄을 때 그들의 전투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기겁하며 외쳤다.

"미믹이다!"

"빅-빌런! 미믹맨이다!!"

'이정도면 괜찮군.'

단 하루만에 공포의 대명사 미믹맨이 되어버렸다. 용병 연맹에게는 증오의 대상이며 시청에서는 현상금의 대상이 되었지만 운현은 지금 그것을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헥토르에게 한방 먹였으니 오늘은 다른 준 간부급이 왔으면 좋겠는데...'

미믹맨이 보통 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운현은 미믹이 날뛰는 것을 적당히 스틸로 조정해가며 주변을 경계했다.

"흣!"

"....!"

순간 뒷목이 따끔했다. 운현은 불길한 예감에 옆으로 굴렀고 그 순간 그의 목이 있던 자리에 검격이 날아들었다.

"...피했나? 제법이군."

'죽을 뻔 했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운현은 자신의 목에 검격을 날린 여인을 노려보았다. 자신에게 향해지는 그의 시선에 그녀는 검을 들어 그에게 겨눴다.

"네 놈은 누구냐."

"......"

척 봐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운현은 최대한 긴장하며 뒤로 물러났고 그런 그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은 그녀는 자신의 긴 검은색 머리칼을 질끈 묶은 후 양 손으로 검을 잡았다.

'갑옷도 안입었고...'

평상복을 입은 여인 치고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다. 거의 헥토르급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기세에 운현이 미믹을 꺼내 던지자 그녀는 빠르게 한걸음 걸어 미믹을 베었다.

"서걱!"

일격에 미믹이 반파된다. 그것에 운현은 깜짝 놀랬다. 헥토르와 같은 급이라고 생각했는데 윈드와 동격이라는 것에 운현이 긴장하자 그녀는 바닥을 뒹구는 미믹을 향해 검을 겨눈 후 씨익 웃었다.

"잠깐 스승님께 갔다 온 사이에 별 놈이 난리를 치는군."

"우르나님!"

"언제 오신거에요!?"

"저게 헥토르님에게 일격을 날린 미믹맨이라는 놈입니다!"

"호오? 그래? 이거 재밌는 녀석이군..."

그녀의 뒤로 헬하운드들이 모습을 보였다. 운현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들을 보았다. 자신에게 온 그녀들의 말에 우르나는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헥토르에게 한방 먹일 정도라면 꽤 하는 놈이겠지? 아니. 년인가? 뭐 상관없어."

우르나는 가볍게 검을 빙글빙글 돌린 후 운현에게 겨눴다.

"나는 우르나. 발티르 용병 연맹의 간부이자 천검자의 검을 잇는 자."

"...."

"간다. 던전 도시의 평화를 어그러트리는 자여."

낮은 말과 함께 그녀의 몸이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일격이 몸을 덮치려 하자 운현은 미믹을 꺼내 그녀의 공격을 막았다.

"미믹을 한마리만 소환할 수 있는 건 아닌가? 하하... 이거 재밌군. 아주 재밌어."

갑작스레 나와 일격을 맞게 생긴 미믹은 빠르게 검은 기운으로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자신의 공격이 미믹에 막히자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검을 들었다. 비록 반파되었다지만 아직 움직일 수 있는 미믹이 있고, 한대 맞은 것이 다인 미믹이 있다. 두마리 미믹이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데도 그녀는 오히려 재밌다는 얼굴이었다.

"돕겠습니다!"

"다른 간부님들을...!"

"끼어들지마!!!!"

엄청난 포효다. 분노와 짜증이 잔뜩 담겨있는 그녀의 외침에 헬하운드 뿐만 아니라 거리의 다른 사람들도 딱딱히 굳었다. 그녀는 휙 몸을 돌려 헬하운드들에게 검을 겨눴다.

"이건 나와 저자의 승부다. 끼어드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 하지만..."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우르나의 말에 결국 헬하운드들은 입술을 깨물며 운현과 마주하고 있는 우르나를 바라만 보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만족한 그녀는 운현과 미믹들에게 살기를 피어올렸다.

"스승님께서 빨리 던전 도시로 가라고 한 이유가 여기 있었군... 자! 와라! 나의 성장의 발판이 될 존재여!"

그녀의 강한 외침에 운현은 단검을 들고 그녀를 겨누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지? 포기하는건가?"

운현이 단검을 내리고 뒤로 물러나자 그녀는 이를 드러내며 검을 뒤로 당겼다. 그리고 그 순간.

"...네, 네마리!?"

운현은 둘의 미믹을 인벤토리에서 꺼내었다.

'어디 씨발 한번 죽어봐라.'

어차피 간부들의 강함을 알고 싶었던 운현이었다. 그렇게 싸우고 싶다는데 저 소원 정도는 들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뒷감당도 안해도 되고.'

파손될 미믹이 아깝긴 했지만 오늘 미믹을 새로 채웠다. 이왕 이리된거 아예 끝을 보자는 생각에 총 네마리의 미믹을 꺼내었고 그것을 보며 우르나는 당황했는지 딱딱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녀의 입가에 걸린 웃음은 점점 짙어져갔다.

"하... 하하..."

네마리의 미믹이 검은 기운을 넘실거리며 내뿜자 우르나는 딱딱히 웃었다.

"하하하하!! 그래! 이정도는 되어야 위기라고 할 수 있지! 자! 간다!!"

그녀가 달려들자 미믹들은 그녀를 향해 동시에 검은 기운을 내뿜었다. 그것을 검으로 막은 그녀가 반파된 미믹을 잡기 위해 검을 휘두른 순간 다른 미믹의 검은 기운이 다발이 되어 헬하운드들을 공격했다.

"꺄아악!"

"윽!"

"이 멍청이들아! 피해! 이런...! 역시 하등한 몬스터란 말인가!? 너희들의 상대는 나다!!"

그녀의 포효에 미믹들의 공격 대상이 바뀌었다. 우르나는 미믹들이 자신을 보자 싸늘히 웃으며 검을 꽉 잡았다.

"간다!!"

"허억...허억..."

미믹 넷이 완전히 파손되었다. 한, 두마리라면 모를까 네마리 미믹의 연계를 버텨내기에는 그녀 역시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큰 상처는 없었기에 그녀는 가볍게 숨을 고른 후 검을 들어 운현에게 겨눌 수 있었다.

"이제 네놈 차례군."

"......"

그녀가 자신에게 검을 겨누자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하! 도망칠... 생각...이 아니구나."

그녀는 자신의 앞에 새롭게 나타난 네마리의 미믹을 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운현은 여유롭게 팔을 뻗으며 상대해보라는 듯 제스쳐를 취한 후 옆의 건물 위에 밧줄을 던져 건 후 빠르게 그 위로 올라갔다.

"하...하하하! 좋아! 어디 한번...! 죽어보잣!!"

힘든 기색이 역력한 그녀는 오히려 더더욱 즐거워졌는지 이를 드러내며 검을 휘둘렀다.

'넷까지는 어떻게든 상대하는 것 같군.'

힘겹긴 하지만 우르나는 미믹 넷을 상대로 잘 싸웠다. 두번째로 상대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잘 버텨내는 그녀를 보며 운현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 운현은 뒤통수가 따끔한 것을 느꼈다.

"......"

천천히 몸을 돌린 운현은 상대를 확인했다. 짙은 은회색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검은 망토로 몸을 감싸 어둠 속에 녹아 있는 듯한 아름다운 소녀였다. 몸의 굴곡을 그대로 보이는 은색의 슈트를 입은 아름다운 소녀다.

달빛에 비추어진 은발이 바람에 흩날릴때 그녀는 자신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원통형 마법구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우우웅."

"네가 바로 그 미믹맨이냐?"

원통형 마법구에 빛의 검이 생성되었고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130====================

terror

'망할 기집애.'

운현은 상대를 보며 이를 갈았지만 여기서 자신의 정체를 들킬 수는 없었다. 그가 천천히 단검을 들어올리자 그녀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광검을 휘둘렀다.

"콰가가각!"

옥상의 바닥이 검격 한번에 갈라진다. 옆으로 구르지 않았더라면 저 검격에 두동강이 났으리라.

"쓸데없는 짓을. 가볍게 팔 한짝만 잘라줄테니까 얌전히 있어."

'너 같으면 가만히 있겠냐!?'

아무렇지도 않게 토막 살인을 예고하는 그녀를 향해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황급히 미믹을 뽑았다. 아르토리우스에게는 마인조차 상대가 안된다. 거의 그녀와 동급의 힘을 가지고 있는 상아에게 미믹이 시간을 제대로 벌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운현은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자 그녀에게 미믹을 던졌고 그 순간 광검이 빛을 발했다.

"서걱!"

'...한방에 잡을 줄이야.'

"어디 더 소환해보시지? 보아하니 1계층의 미믹인 것 같은데 2, 3계층의 미믹도 뽑아보지 그래?"

도발하듯 광검을 까딱거리며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더러워서 렙업을 해야지.'

2, 3계층의 미믹을 뽑을 수 있다면 이러고 있겠는가? 운현은 인벤토리에 있는 미믹을 하나만 빼고 모두 소환했다. 총 아홉마리의 미믹이 옥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검은 기운을 일렁거리며 위협하자 상아는 키득거린 후 광검을 꽉 잡았다.

"물량승부를 해보시겠다고...? 그거 좋지!"

넘치는 광기와 폭력이 터져나온다. 상아가 발을 구른 순간 그녀의 몸에서 폭사된 빛이 미믹의 몸에 적중했다. 아홉줄기의 빛에 미믹이 허공을 날아 바닥을 구른 순간 상아는 빠르게 운현에게 달려들었다.

"머리 대, 머리."

'팔만 자른다더니!?'

자신의 머리를 향해 그녀가 일격을 날리려 하자 운현은 이를 갈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방법은 없다. 운현은 그대로 플래시를 사용했다.

"윽!? 역시 쓰는군! 하지만 예측했다!"

하지만 상아 역시 그것을 예측한 모양이다. 눈을 감아 플래시의 충격을 피한 그녀가 곧장 검을 내리쳤을 때 그녀는 자신의 검이 허공을 가른 것에 이상함을 느꼈다.

"어...라?"

없다. 방금 전까지 사정거리 안에 있었는데 사라졌다. 그녀는 인상을 구기고 살짝 눈을 감아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옥상의 끄트머리에서 무언가가 움직인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야! 너! 설마...!?"

그녀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 거린 후 광검의 날을 해제하고 기척이 사라진 쪽으로 이동하려 하였다.

"상아 길드장!"

"아, 어. 응. 으음. 윈드. 너야?"

"큰 소란이... 방금 그 빛은 뭡니까!? 혹시 미믹맨은요!?"

윈드가 따지듯 묻자 상아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아하하하하! 사악한 미믹맨은 이 길드장이 쫓아냈으니 안심하라구!"

"쫓아내면 어떡해요! 쫓아내면! 잡아야죠!"

"아니 그게 걔도 만만치 않은 놈인지라... 미믹을 갑자기 이렇게나 소환하더니 튀어버렸다고. 그래! 내가 방심했다! 어쩔래!? 응!? 너 한번 얘들이랑 붙어볼래!? 너라고 안놓칠 것 같냐!?"

윈드의 외침에 상아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외침에 윈드는 주변의 미믹 파편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난 놈이었군요. 설마 상아 길드장님. 당신도 놓칠 줄이야."

"그러게 말야..."

윈드의 말에 상아는 피식 웃은 후 조용히 중얼거렸다.

"진짜 엄청난 녀석이지..."

"으씨. 망할 기집애."

다 된 밥에 재를 빠트려도 유분수지. 설마 상아가 거기 있었을 줄이야. 미행을 피하기 위해 하이딩을 걸고 최대한 이동하여 옷을 갈아입은 후 오늘 산 재료들이 든 가방을 인벤토리에서 꺼낸 운현은 아홉마리의 미믹을 일격에 반파시킨 상아의 힘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1계층의 미믹이라지만 저렇게 간단하게 박살을 낼 줄이야.

'450이 넘으면 저정도라는 건가...'

궁시렁 거리며 걷던 그는 중앙광장에 도착했을 때 가로등이 전부 꺼져 있는 것을 보았다. 평소라면 환한 가로등이 왜 꺼져 있는 걸까? 라고 고민하던 그는 파르티 성당쪽으로 검은 인영 몇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오밤중에 뭐하는 놈들이여."

궁금했지만 그것을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운현은 쫓아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그래도 골치아픈데 더 골치아픈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고민에 집중하며 길드를 향해 걸었다.

"그나저나 이를 어쩐다..."

상아라면 반드시 자신이 미믹맨이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뒤도 돌아보지말고 튀는게 낫지 않을까? 아니면 지금까지의 친분을 내세우며 싹싹 빌어? 그것도 아니면 그냥 개겨? 오크 잡아서 돈도 많은데 그냥...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들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운현은 일단 던전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지금까지 모험가 길드의 영역에서는 미믹을 뽑지 않았으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어보자 라고 생각한 그였지만 막상 길드의 문 앞에 도착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를 어쩌나...'

"어머? 운현씨?"

"헉! 깜짝이야. 펠리시아씨. 여긴 왠일로..."

"푸훗! 무슨 말씀이세요? 길드 간부가 길드에 무슨 일로 왔겠어요? 들어가시려던 것 아니었어요?"

"아니 그게..."

"어서 들어가요~"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운현은 그녀와 함께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들어갔다. 길드에 들어가자마자 모험가들이 칼을 들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던 운현은 예상 외로 조용한 길드회관의 모습에 당황했다.

"에?"

"왜 그래요?"

"아, 아뇨... 그게."

"오늘따라 이상하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 아뇨... 아. 저는 이만 던전에 들어가봐야해서. 그럼!"

이상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펠리시아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운현은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상아가 오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튀어봤자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상아가 무슨 생각을 할지 걱정되었던 운현이 겨우 거점으로 돌아왔을 때 동료들은 한참 카드 점에 집중하고 있었다.

"으음... 엘프의 카드점으로 해석했을 때 이건..."

"이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라고 해석될 수 있네."

"어머! 진짜요~!? 신난다~"

헤스티아를 상대로 점을 치고 있던 바제트는 그녀가 기뻐하자 방긋 웃다가 거점 근처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어!? 운현! 별 일 없었어?"

"앗! 운현씨! 어서 와요! 어디 다친데는 없죠!? 몬스터 만났어요!?"

"보아하니 큰 일은 없는 것 같군. 쳇. 틀렸나. 그래도 다행이야..."

운현이 나타나자 여인들은 하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달려갔다.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살피며 그가 다친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여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데리고 자리로 간 바제트가 운현에게 따뜻한 차를 주었고 운현은 그것을 받아 한모금 마신 후 차분히 말했다.

"응. 진짜 별 일 없었어."

"에이~ 그럼 믿을 수 없겠네요."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헤스티아는 미야와 바제트를 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미야는 빙긋 웃은 후 말했다.

"점이라는 것은 결국 앞길을 예상하며 그것을 기원하는 것에 불과해. 만약 진짜 이 점으로 운명이 정해진다면 어쩔건데? 그 운명이 자신이 정말 싫은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따를거야?"

"으음... 글쎄요? 운명에 저항해보려고 했겠죠?"

헤스티아의 말에 바제트는 쓰게 웃었다.

"엘프들의 오래된 고사 중에 이런 말이 있지. '순리를 따르라. 운명은 정해져 있고 그 운명에 사람은 휩쓸릴 뿐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무력하고 신에게 의지하게 된다.' 라고."

"말도 안돼. 그럼 운명이 너 내일 죽어. 이러면 그냥 죽어야 된다는거에요?"

바제트의 말에 헤스티아는 발끈하며 말했다. 그녀가 화를 내자 바제트는 키득거렸다.

"이게 인간과 엘프의 차이점이지. 순응하는 엘프. 저항하는 인간. 묘인족은 어때?"

"훗... 묘인족은 운명따위 믿지 않아."

"역시 투쟁이네. 엘프들은 전 종족을 통틀어 가장 장수하는 종족이야. 그런만큼 운명론이나 인연에 민감하지. 내가 운현에게 반한 것도 인연의 이끌림이니까."

"지금도 그래요? 만약 다른 인연이 나타나면요?"

"그, 그건 아니지만서도. 나에게는 운현 밖에 없다고! 운현! 믿지!?"

"어? 응. 그래.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왜 그런 얘기들을 하고 있어?"

자신이 오자마자 신나게 떠들어대는 여인들을 보며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명이니 별일이니. 이게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아~ 운현씨가 가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미야씨가 점을 치기로 했거든요. 그냥 이런 저런 점을 치고 있는데 운현씨가 무사히 돌아올지 아닐지 걱정되서 그것도 점을 쳐봤어요. 바제트씨나 헤스티아씨나 운현씨에게 뭔가 큰일이 터질 것 같다는 점괘를 보여주었거든요. 나쁜 일은 아니라고 하던데..."

"...아 그래?"

"어디 다친데는 없었죠?"

"응. 다친데는 없었지."

'큰 일은 터졌지만.'

자신이 미믹맨이라는 것을 상아에게 걸렸다는 큰 일이 터졌다. 운현은 미야와 바제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아. 너도 봐줄까?"

"음... 아니. 난 나중에 볼래."

결과를 확인하는게 두렵다. 자신에게 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맞춘 미야와 바제트였다. 괜히 점을 봤다가 안좋은 결과라도 나오면 어쩌나. 점같은 것을 믿지 않지만 괜히 찝찝한 기분에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흐음...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헤헤. 그럼 우리 이제 잘까? 불침번은 어떻게 하지?"

"내가 초번을 볼게. 생각할 것도 있고 말야."

"그럼 운현이 초번, 다음이 나. 그리고 세번째가 미야, 네번째가 헤스티아. 이런 식으로 하면 되려나?"

아무리 목책을 세워놓고 안전한 곳에 위치했다 하더라도 불침번은 필수라고 할 수 있었다. 바제트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고 모두 동의했다.

'이제 어쩐다...'

다들 텐트로 들어가자 운현은 모닥불을 뒤적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럭저럭 길드의 사람들과 친해졌고, 다른 곳에서도 슬슬 인정을 받게 생겼는데 다 버리고 튀어야 하게 생겼다.

'에이~! 좋게 생각하자! 좋게!'

여차하면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를 데리고 다른 나라로 가도 되고 정 안되면 혼자 튀어도 된다. 어차피 세상은 넓고 남자는 적지 않은가.

'내 한 몸 뉘일 곳 없겠냐...'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니 오히려 편해졌다. 운현은 팔자 좋게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가져다 대며 흥얼거렸다.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무슨 노래가 그래?"

"왜 안자고 나왔어?"

"그냥 잠이 좀 안오네. 엘프들은 잠이 별로 없거든."

"그런 것 치고 되게 잘자던데..."

"하하하. 그건 안전한 곳에서의 이야기지. 엘프들이 노예로 팔려간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어?"

"응. 그 뭐냐. 화장품이나 옷을 입히기 위한 노예로 삼는다고. 그거 노예라기보다는 스카우트 아니냐?"

운현이 묻자 바제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일을 하면 모험가나 용병만큼은 아니지만 안정적으로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지. 하지만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달라."

"뭐가 다른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엘프들은 운명을 믿고 인연을 따르지. 자신이 운명이 아니라 생각하고 인연이 아니라 여기면 그 일을 절대 하지 않는다고. 그런 그들의 의지를 어기고 억지로 잡아가서 하는 것이니까 노예라고 할 수 있는거지."

"그거 웃기네. 노예로 잡히는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냐?"

운현의 질문에 바제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바제트는 차분히 다가가 운현의 위에 앉았다.

"으쌰!"

"왜 여기 앉냐? 응?"

"의자가 없잖아. 그리고 좋으면서 뭘."

바제트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운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양물에 닿는 탱탱한 둔부와 바제트의 달콤한 체취에 상아에게 걸려서 두근거렸던 마음이 안정된다.

"자자. 이런 미녀가 다가왔는데 좀 안아주고 하라구."

"원하신다면."

자신의 위에 앉은 바제트를 운현은 꼭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댄 그녀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던전 안의 하늘.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 지 모를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뭔가 얘기를 할건데 말야..."

바제트는 그녀 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달콤한 바제트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자 운현의 남성은 더욱 커져갔다.

"정말이지. 분위기 잡는데도 이럴거야?"

"얘기해봐."

"음..."

엉덩이에 자꾸만 닿는 남성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바제트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가 계속 망설이자 운현은 그녀의 긴 귀를 살짝 깨물었다.

"아흣!"

"빨리 안말하면 몸에다가 물어볼거야."

"알았어. 알았다구. 정말... 화 안낼거지?"

"들어보고."

"그럼 말 안해."

"그럼 난 몸에다가 물어봐야지."

"나 화낼거야."

"알았어. 화 안낼게."

운현이 부드럽게 속삭이고 볼에 키스하며 천천히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자 바제트는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을 애무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엘프는 열살이 되는 생일을 맞이하게 되면 한가지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게 돼. 이걸 이그드라실의 축복이라고 하지. 천년의 삶을 약속받은 엘프를 가엾게 여긴 세계수 이그드라실이 내린 축복. 엘프들은 열살째 생일에 몸을 정갈히 하고 이그드라실님께 기도하지. 대부분은 자신의 반려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맺어지는지를 보고 싶어해.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호오. 그래서?"

"나 역시도 그것을 빌고, 또 그것을 보았지."

"거기에 내가 나왔어?"

"응."

바제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딱히 화 낼 건덕지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부터 인연이니 어쩌니 했던게 이것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그는 놀라지 않았다.

"고작 그거에 내가 화낼 것이라고 생각한거야? 날 너무 얕봤는데?"

"....하하하. 그, 그래?"

"혹시 더 있어?"

"더 있긴 한데..."

잠시 망설이던 바제트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운현과 마주보며 앉았다. 그녀는 운현의 얼굴을 양 손으로 잡고 입술에 쪽 키스한 후 말했다.

"그 미래에서 너의 얼굴은 엄청났어. 무척이나 슬프게 울고 있었어.모든 것을 다 잃은 사람처럼 펑펑 울고 있었어..."

131====================

terror

"내가 울었다고?"

"응."

"믿기지가 않는데..."

운현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싫으면 꺼져. 라는 마인드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딱히 무언가에 집착을 한 적도 없었다. 아직까지 큰 재산을 가진 적도 없었고, 가진 물건 중에 비싼 것도 없었다.

'여자친구도 없었으니...'

여자친구가 될 뻔했던 여자가 있었지만 운현은 그 여자의 얼굴이 머리에서 떠오르자 붕붕 고개를 가로저었다.

'빌어먹을.'

생각할 수록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운현은 말똥말똥 자신을 바라보는 바제트의 예쁜 얼굴을 잡고 그녀와 키스했다.

"으음...쭙...추룹..."

바제트의 긴 팔이 움직여 자신을 끌어안는다. 그녀의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진한 타액을 마음대로 마신 운현은 천천히 입술이 떨어지며 은색의 긴 실이 생기자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내가 울 일은 없을걸?"

"정말? 그래도 사람인 이상 울지 않을까?"

"기뻐서 우는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잃은 절망감? 그런 허탈감에 내가 울거라고는 상상되지 않는데..."

운현의 말에 바제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은 아직까지 자신이나 미야, 헤스티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았다.

"우리가 없어져도?"

"물론 상실감은 느끼겠지. 하지만 과연 내가 울까? 라는 것에는 의문이 생기는데."

"어련하시겠어."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코를 잡아 비튼 바제트는 운현의 손이 자신의 둔부를 떡주무르듯 주무르자 입술을 삐죽거렸다.

"사랑하지 않는다면서 잘도 만지네."

"뭐 그건 둘째치고. 바제트. 넌 그걸 믿어?"

"뭘?"

"너와 내가 맺어질때 내가 울고 있었다는 미래. 그 미래를 믿어?"

"으음... 지금까지 한번도 이그드라실의 축복이 빗나간 적은 없다고 했어. 그게 운명이고, 인연이라고..."

"흠..."

그녀의 말에도 운현은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이 그토록 울 사람일까?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바제트의 짧은 핫팬츠를 벗겼다.

"뭐, 뭐하려는거야!?"

"응? 하려고."

"우와아... 너 정말 대단하다."

바제트는 운현이 자신의 옷을 벗겨나가자 저항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질린 듯 말했다.

"하하하... 그래서. 내가 싫어? 아니. 좀 쓰레기 같지만 생각해보니 내 입장에서는 화낼 일이 아니지 않나?"

"뭐가? 읏..."

"나는 딱히 네 운명이니 그 이그드라실의 축복인지를 믿지 않지만... 그래도 넌 그걸 믿는다는 거잖아? 그럼 내가 이런 쓰레기같은 짓을 해도 넌 날 사랑한다는 거고. 그렇지?"

"...처음으로 운명을 거절하고 싶어졌다."

운현의 말에 바제트는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그런 그녀를 끌어안은 운현은 바제트의 입술에 입맞춘 후 속삭였다.

"어허. 일족의 전통을 무시하면 쓰나."

"으읏... 그, 치사한..."

"난 원래 치사하고 야비한 쓰레기지. 그런데 어쩌나? 우리 바제트는 그 쓰레기랑 운명으로 엮인 여잔데."

"너무해... 치. 그래도 그 운명대로라면... 넌 날 사랑하게 된다는 거잖아?"

"그렇게 믿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운현은 바제트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그녀의 깨끗한 이마에 입맞췄다.

"으음..."

그의 손길이 점점 농염해진다. 바지를 벗은 채 하의만 나체가 된 바제트는 자신의 질척한 계곡을 운현이 부드럽게 비비자 살며시 신음하며 몸을 떨었다.

"바, 밖에서 하는 건 처음이네..."

"어. 그러고보니 그러네."

지금까지 던전에서 한 사람은 헤스티아에 불과했다. 운현은 바제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의 이마에 키스한 후 귓볼을 핥았다.

"너희들이 괜찮다고 하니까 그렇지. 이렇게 밖에서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말야."

"...앞으로는 자주 해달라고 할게."

"참지 마. 참으면 병된다."

"후후후... 이미 병에 걸린 것 같은데?"

바제트는 운현의 바지춤을 살짝 쓰다듬은 후 그의 남성을 차분히 꺼내었다. 아까 전부터 딱딱해져 자신의 엉덩이 사이를 괴롭히던 그의 남성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킨 바제트는 살며시 허벅지를 벌렸다.

"주르륵..."

농익고 뜨거운 애액이 그녀의 탄탄한 허벅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자신의 애액이 방울져 떨어져 그의 남성 위에 떨어지자 바제트는 그곳을 빤히 바라보는 운현의 얼굴을 잡아 올린 후 키스하고 살며시 손으로 그의 남성을 잡았다.

"읏..."

애액이 뭍은 남성을 위 아래로 흝어주며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양 손으로 운현의 귀를 막은 바제트는 천천히 운현의 입술에 입맞췄다.

"쭈룹...춥..."

귀가 막힌 탓에 키스를 하는 소리에 더더욱 집중이 된다. 운현의 남성이 더욱 흥분하여 꺼떡거리자 바제트는 살며시 허리를 내렸다. 뜨거운 계곡과 남성이 맞닿자 바제트는 천천히 허리를 앞 뒤로 흔들었다.

"우웁!"

"후후후후... 어때?"

"조, 좋긴 한데. 안넣어? 너 지금 엄청 흥분한거 아니야?"

"이렇게 흥분시키면서 괴롭히면 네가 더 나한테 빨리 반하지 않을까? 아, 혹시 그거 아닐까? 네가 엉엉 울던게 네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자존심 그런걸 다 버리고 '사랑스러운 바제트! 지금까지 내가 멍청했어! 내가 갖고 있던 그 같잖은 자존심과 의심을 모두 버리겠어! 나와 결혼해줘!' 이런거."

"...퍽이나 그러겠다."

"아니면 이런 걸 수도 있지. '오오~! 바제트 여왕님! 저는 당신의 노예입니다! 그저 당신이 저와 결혼해주신다면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겠습니다! 흑흑흑~'"

"야. 쓸데없는 소리할거면 때려쳐."

운현이 어이없어하며 말하자 바제트는 키득거린 후 그의 남성을 손으로 잡았다. 이미 넘쳐 흐르는 애액이 가득한 계곡으로 몇번이나 문지른 탓인지 그의 남성은 미끌거리기 그지 없었다.

"후후후... 이걸 넣으려고 할때는 정말 매번 긴장된단 말이지."

"그래?"

"응. 사실 좀 편안하게 하려면 널 몇번은 보내주는게 낫겠지만 시간도 없고... 으읏...!"

"쯔륵..."

운현의 남성이 계곡을 파고든다. 딱딱한 그의 남성을 조금씩 받아들이며 바제트는 달콤하고 끈적한 쾌감의 비음을 터트렸다.

"으으음..."

"애들 깨겠다."

"다, 다들...흣...자. 자는거... 확인하고..."

"그래도. 좀 소리 좀 줄일... 야. 힘 주지 말고. 읏..."

살아있는 다른 생명체처럼 그녀의 계곡은 양물을 감싸고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남성을 조여오는 그 쾌감에 운현이 낮게 신음하자 바제트는 애써 웃으며 그에게 키스했다.

"쭙...쭈릅..."

"하아... 으..."

"후후...읏...후후후... 어때? 반할 것... 아흣... 같아?"

"그, 그러는... 너는?"

"나는 이미..."

사랑스럽기 그지 없다는 듯 운현에게 연속적으로 짧은 키스를 보낸 바제트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널 사랑하고... 있어."

"아아... 내가 답해주지 못하더라도?"

"운명은... 읏. 거스를 수...하아응... 없는 거니까 말야..."

바제트는 완전히 결합된 남성이 주는 쾌감에 몽롱해진 얼굴로 말했다. 주르륵 그녀의 도톰한 입술 사이로 투명한 타액이 흘러내린다.

그녀의 얇은 턱을 핥아 올리며 도톰한 입술에 키스한 운현은 바제트가 자신의 어깨를 잡고 헐떡거리자 그녀에게 물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

"하아...하아... 조, 조금만..."

"찔꺽."

"허윽...! 웁... 추룹..."

허리를 잠깐 움직인 것만으로도 큰 쾌감을 느꼈는지 바제트는 신음을 크게 토해낼 뻔 했다. 그것을 키스로 막은 운현은 자신의 입 안으로 바제트의 신음 소리와 함께 달콤한 숨결이 들어오자 살며시 그녀의 탄력적인 둔부를 주물렀다.

"으으...하으...으으으으..."

"익숙해지려면 멀었네..."

"그, 그러니까..."

바제트는 달콤한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익숙해 질만큼... 많이 해줘."

"학! 학! 하읏!"

신음성을 연신 토해내던 바제트는 그의 허리가 멈추자 달아오른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위에서 움직이려 했지만 쾌감을 이기지 못해 결국 자세를 바꿔 후배위 자세를 취하게 된 그녀는 운현이 수건을 주자 그것을 꽉 깨물었다.

"읍! 읍!"

계속 신음소리가 나면 동료들이 깰 것 같았기에 운현이 준 수건을 꽉 깨문 바제트는 운현의 허리놀림이 더더욱 거세어지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아아아앙!"

결국 수건을 놓치고 거친 쾌감의 비음을 터트려버린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채 엉덩이만 올리고 있자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깨던지 말던지. 양물에서 받는 쾌감이 너무 커 운현도 더 이상 약하게 하기 힘들었다. 운현은 탄력적이고 굴곡진 그녀의 둔부를 꽉 잡고 본격적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찔꺽! 찔꺽! 찔꺽!"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든 남성이 입구까지 빠지고, 다시 쑥 안으로 깊게 파고든다. 가장 안쪽의 약한 부분을 정확히 공략하는 운현의 움직임에 바제트는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그저 계곡과 둔부를 내어 줄 뿐 이었다.

"뚝...뚝."

운현의 양물과 바제트의 계곡에서 애액이 주륵 주륵 흘러내려온다. 그것을 보며 더더욱 흥분한 운현은 손을 뻗어 바제트의 딱딱한 유두를 비틀었다. 고통과 함께 찾아오는 짜릿한 쾌감에 바제트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던 그녀의 몸이 축 늘어진 순간 운현은 양물이 엄청나게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절정에 도달한 것일까? 운현은 아직 자신이 만족하지 못했는데 벌써 가버린 그녀를 끌어당겨 안고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추릅...쭙..."

"벌써 가버리면 어떡해."

"하으...으으... 미안해... 미안해요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갈때까진 버텨주겠지?"

"으응...응..."

힘없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운현은 그녀를 안아 들고 의자에 눕혔다. 길고 매끈한 양 다리를 쫙 벌린 운현이 빠르게 남성을 쑤시기 시작하자 바제트는 의자의 손잡이를 꽉 잡은 채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다.

"하으! 으하으으응!!"

하지만 참는 것도 잠시 뿐이다. 절정에 도달했던 육체는 다시 찾아오는 쾌감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또다시 절정에 도달했다.

"읏...!"

운현 역시 두번째로 조여오는 계곡벽이 주는 쾌감을 버티지 못했다. 허리끝이 짜릿해 질 정도의 사정감에 운현은 마지막 힘을 다해 그녀의 계곡 안쪽 깊숙한 곳에 남성을 밀어 넣고 사정했다.

"하으으...으..."

힘없이 신음을 토해내던 바제트의 몸이 축 늘어졌다. 매끈한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아까 씻어 뽀송뽀송하던 머리칼은 이마의 땀때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모닥불의 빛을 받아 그녀의 하얀 피부가 반짝이는 것이 요염하기 그지 없다.

운현은 바제트의 몸 위에 몸을 실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쪽...쪼옥...추릅..."

진한 키스가 이어진다. 양물과 음부가 이어진 상태로 키스를 나누던 운현과 바제트는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운현...."

"왜."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나도..."

"어? 진짜?"

"응."

이번 던전행이 끝나면 상아의 얼굴을 봐야 할 걸 생각하니 암울하다. 하지만 바제트는 운현의 속도 알지 못한 채 베시시 웃었다.

"헤헤헤~"

"더 하고 싶지만 무리겠지?"

"응... 미안해."

"아니 뭐. 괜찮아."

급한 불은 껐다 생각하면 되기에 운현은 천천히 그녀의 계곡에서 남성을 뽑아내었다. 끈적한 애액과 정액이 합쳐진 백탁색 액체가 주르륵 그녀의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것을 보며 운현은 바제의 볼에 키스한 후 말했다.

"씻고 오는게 좋지 않겠어?"

"이대로 있고 싶은데... 어차피 임신도 안하잖아."

"그래도 찝찝할거 아냐."

"내일 아침에 할래. 지금은 이걸 느끼고 싶어."

바제트는 운현의 볼을 쓰다듬은 후 자신의 군살 하나없는 매끈한 복부를 쓰다듬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물수건으로 자신의 양물을 닦았다.

"너도 닦아줘? 뭐 안에 있는건 그냥 내버려 둔다고 치더라도 허벅지랑 다른 곳의 건 닦아야 할 것 아냐."

"응!"

바제트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운현은 수건으로 그녀의 다리를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언제봐도 예쁜 다리다. 그녀의 매끈한 허벅지를 닦아 준 운현은 살며시 그녀의 허벅지를 핥았다.

"아하하... 간지러워."

"가만히 있어봐."

"자꾸 그러면 나 흥분한단 말이야."

"흐흐흐... 이대로 쭉?"

"안돼. 불침번 서야 하잖아. 너도 피곤할텐데 자야하고."

못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바제트는 운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잠깐... 그럼."

바제트는 돗자리를 펴고 그곳에 앉았다. 그녀가 긴 다리를 쭉 피고 앉은 후 자신을 부르자 운현은 그녀의 옆으로 가 앉았다.

"아니아니. 그러지 말고 여기 누워."

자신의 새하얀 허벅지를 가리키며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괜찮아?"

"난 밖에서는 잠 잘 안잔다니까. 이따가 깨워줄테니까 들어가서 자."

"흐음... 그럼 사양않고."

솔직히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이겠지. 상아에게 걸렸다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때문인지 운현은 그녀의 말을 거절하지 않고 냉큼 누웠다. 탱탱하고 부드러운 허벅지의 감촉이 기분 좋다. 운현이 손으로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편안한 표정으로 잠이 들자 그녀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게 얼마나 가혹한 운명이라도... 아마 난 널 사랑하지 않았을까?"

132====================

terror

아침이 되자 운현은 텐트를 걷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텐트를 해체하는 것을 본 헤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요?"

"아니 여럿이서 같이 자니까 좋아서."

"야, 야해요! 그, 그런건 위에서도 할 수 있잖아요!"

아침을 떠올리며 헤스티아는 얼굴을 붉혔다. 마지막 번을 선 그녀가 모두를 깨우러 들어갔을 때 바제트와 미야가 운현을 끌어안고 있었고 그녀들의 손이 운현의 몸을 더듬고 있었으며 운현 역시 미야의 가슴과 바제트의 엉덩이를 만지고 있었다.

"저한테는 안했으면서..."

풀죽은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잠버릇이라 어쩔 수 없는거지. 다음에 같이 잘때는 꼭..."

"정말이죠?"

"그래."

뭔가 안더듬어 준다고 화를 내는 상황이라니. 현실이었다면 귀싸대기를 맞아도 할 말이 없을 법한 상황이었지만 이세계다보니 이런 말로 다독여야 했다.

운현이 헤스티아를 달래주고 있을 때 나머지 짐의 정리를 끝낸 바제트와 미야는 짐을 가방에 담고 거점으로 삼았던 곳에 있는 커다란 바위 옆에 놓았다.

"식량도 오늘 점심 먹으면 끝날 정도네. 오늘은 얼마나 할거야?"

"음... 저녁 먹기 전까지는 전투를 계속 하도록 하자. 저녁은 위에 가서 먹자고."

"좋아."

"그럼 오늘도 힘차게 가볼까!?"

"저도 열심히 할게요!"

바제트와 미야, 헤스티아가 힘을 내며 말했지만 운현은 영 힘이 나지 않았다. 그만 축 늘어진 상태로 운현 일행은 또다시 오크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전투의 양상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다른 것은 한 무리의 오크와 상대하고 있을 때 다른 무리의 오크가 나타나는 정도였는데 그곳에서 헤스티아의 파이어 월이 빛을 발했다. 넓은 범위의 불의 벽을 만들어냄으로써 오크들의 진입을 막고 그 사이에 운현과 미야, 바제트가 구덩이 함정에 걸려 있는 오크에게 기름을 뿌린 후 파이어 월이 끝날 때쯤 미야가 도발을 걸어 오크들을 끌어오고 헤스티아가 구덩이 함정에 걸려 있는 오크들을 끝장낸다.

이런 방식으로 전투를 계속 하다보니 어느새 운현의 레벨은 71을 바라보게 되었다.

"엄청 빠르네."

"그러니까 말야."

간단하게 점심을 남은 빵으로 때운 바제트는 길드에서 팔고 있는 지도를 꺼내 보며 말했다.

"이제 슬슬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게 어떨까? 오크를 찾는 것도 이제 힘들 것 같아. 워낙 많이 잡아서 그런지 몰라도 오크가 없다."

어제와 다르게 오크를 몰아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 바제트의 말에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오크 워리어 잡아볼까?"

"엑? 가능하려나?"

"오크 워리어의 추정 레벨은 90이야.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에이~ 그래도 구덩이 함정도 있고 여차하면 기름함정이 있으니까..."

어제 상아에게 미믹을 너무 써서 조금이라도 미믹을 보충하고 싶었던 운현이 말하자 바제트와 미야는 고민했다.

"가요! 잡아봐요! 저희도 꽤 강해진 것 같은데... 아닌가요?"

홉고블린을 잡을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일단 각자의 스킬도 강화되었고 전투를 하며 손 발도 잘 맞았다. 그것 뿐만 아니라 운현의 구덩이 함정도 있는데다가 그의 말대로 정 안되겠다 싶으면 엄청난 위력을 자랑했던 기름함정을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일단 해보자. 안되겠다 싶으면 도망가는걸로 하고. 나 헤이스트 배웠으니까 헤스티아에게 걸어주면 되겠지."

70레벨이 되며 몸놀림을 빠르게 만들어주는 헤이스트 마법을 배운 바제트까지 그리 말하자 망설일 것은 없었다.

헤스티아가 열탐지 스킬로 일반 오크보다 더 크고 강한 열을 찾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는 한 부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걸어간 운현 일행은 홉고블린의 서식지처럼 한 길로 나 있는 숲길을 찾아냈다. 그 앞에서 운현은 일단 자신이 들어가 상황을 확인해보고 오겠다고 말한 후 수풀로 들어간 후 하이딩을 걸었다.

'홉고블린 꼴 날 수 있으니 아예 근처에 있는 것들은 싸그리 쓸어버리고 가야겠군.'

홉고블린은 고블린들이 살던 천막에 있는 항아리로 체력을 회복했다. 오크 워리어가 그러지 말라는 것은 없기에 운현은 최대한 주의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고 그 부락 안에 열마리 정도 되는 오크들이 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동굴은 없고... 저건가?'

다른 천막들에 비해 더 큰 천막이 부락의 중앙에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의 뼈로 장식된 천막의 안쪽으로 살며시 들어간 운현은 일반 오크에 비해 세배는 큰 붉은색 피부의 오크를 발견하고 움찔했다.

'확실히 강해보이지만...'

이마에 커다란 뿔이 있고 험상궂은 외모에 커다란 코 밑에는 두개의 큰 피어싱이 달려 있었다. 몸의 근육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꿈틀거렸고 오크 워리어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도끼에는 막 뭍은 듯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쟤 건가.'

오크 워리어의 손에는 곰의 머리가 들려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있는 거대한 곰을 본 운현은 침을 꿀꺽 삼킨 후 조심스레 천막을 빠져나왔다.

'먹을 수 있는건 저거니까 여차하면 저것부터 태워버려야겠군.'

다른 오크들의 천막을 뒤져보았지만 딱히 걱정될만한 것은 없었다. 문제는 홉고블린과 다르게 오크 워리어는 천막 안에 있어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그 상황을 바로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호. 저게 보물상잔가?'

오크 워리어의 옆에 놓여져 있는 상자를 보며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상대가 강해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보물상자까지 가지고 있으니 싸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 강해봤자 뭐...'

오크 워리어가 강해보이기는 했지만 운현은 그다지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상아에 비하면야.'

어제 상아와 맞부딪히며 정말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무엇인지 깨달은 운현이었다. 자신은 상대조차 할 수 없는 미믹을, 그것도 아홉마리나 눈깜짝할 사이에 박살을 내버린 그녀의 무력을 생각하면 그녀보다 덩치가 몇배나 큰 오크 워리어는 오히려 우습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럼 일단... 할 일은 이거군.'

잡몹처리.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인 후 일행들에게 돌아왔다.

"보긴 봤는데 저번처럼 잡몹 끌어오는 건 힘들 것 같아. 그냥 내가 끌고올게."

안의 상황을 말해 준 운현이 마지막으로 말하자 바제트는 걱정이 되었다.

"괜찮아? 그래도 내가 가는게."

"야. 나도 빨라. 왜 이래."

무려 용병 길드 간부의 공격까지 피할 정도의 몸놀림이다. 물론 거의 운에 가깝기는 했지만 말이다. 운현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바제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빠르게 활을 휘둘렀다.

"욥!"

"...진짜네. 미야. 몇번만 더 시험해봐줄래?"

"응."

미야 역시 운현이 간다는게 걱정스러웠던지라 바제트의 말에 바로 나섰다. 그녀가 주먹을 쥐고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내가 네 공격 다 피하면 인정해주는거지?"

"물론이지. 물론 진짜 때리지는 않을게. 너무 겁먹지 말라고."

딜탱의 특성상 자신의 주먹이 맞으면 아프다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미야는 방긋 웃으며 붕붕 주먹을 휘둘렀다. 바람 소리가 나는 주먹질에 운현은 히죽 웃은 후 양 팔을 벌렸다.

"와봐."

"핫!"

빠르게 파고 든 미야의 주먹이 턱을 노리자 운현은 몸을 비틀어 그녀의 주먹을 피했다. 그것에 놀란 미야는 몸을 돌리며 다리를 들어 올려 운현의 머리를 공격했고 운현은 그것마저도 옆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피해내었다.

"와... 굉장한데? 그럼 더 간다!"

몇차례나 미야가 공격했지만 운현은 미꾸라지처럼 잘도 피해나갔다. 자신의 모든 공격을 그가 회피하자 미야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정도면... 나도 인정."

"그럼 제 차롄가요?"

"넌 뭘 하려고?"

"음... 할게 별로 없네요. 바인딩이라도?"

"그건 피하는 거랑 상관없잖아!"

"헤헤헤~"

헤스티아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멋쩍은 듯 웃자 운현은 한숨을 폭 내쉬며 여인들에게 말했다.

"아무튼 걱정하지 말고 있어. 미야. 내가 몹 끌고 오면 도발 시전하고. 알았지?"

"걱정마."

그녀들에게 몇가지 작전을 말해 준 운현은 다시 안쪽으로 들어간 후 오크들의 부락에 들어가자마자 하이딩을 풀었다.

'여차하면 미믹을 꺼내자.'

바제트를 보내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만약 오크 워리어가 날뛰면 바제트가 도망치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은 오크 워리어가 날뛰면 미믹을 꺼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을 대비해 어제 일부러 미믹 하나는 남겨 둔 운현은 자신을 본 오크들이 살기를 줄줄 흘리며 무기를 들자 번쩍 손을 들며 외쳤다.

"하하하하하!! 사라바다!!"

"쿠오오오오!"

그가 곧장 몸을 돌리고 뛰기 시작하자 오크들은 미친듯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바깥 오크들이 날뛰는 소리에 오크 워리어가 밖으로 나왔지만 운현이 도망치는 것을 보고 흥미를 잃었는지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에 안도하며 운현은 오크들을 몰아 일행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왔다!"

"하아아아압!!"

운현이 자신을 지나치자 미야는 달려오는 오크들을 향해 포효했다. 그녀의 도발에 걸린 오크들이 운현이 아닌 미야에게 돌격했을 때 운현은 미야의 뒤에 구덩이 함정을 설치한 후 외쳤다.

"구덩이 함정 준비 완료! 뛰어!"

"얍!!"

몇번이나 본 구덩이 함정이다. 범위 정도는 눈을 감고도 파악할 수 있는 미야는 달려드는 오크를 걷어 찬 후 그 반동을 이용해 공중제비를 돌며 운현의 옆에 착지했다. 그녀의 도발이 걸려 있는 오크들은 고함을 외치며 그녀를 쫓았지만 결과는 다른 오크들을 잡을때와 비슷했다. 두마리를 제외한 모든 오크들이 구덩이 함정 안에 빠졌고 그 두마리는 동료들이 구덩이 함정에 빠진 것에 당황했다.

"파이어 볼트!"

"트리플 스트래이핑!"

두마리 오크를 향해 헤스티아와 바제트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두발의 파이어 볼트와 세발의 화살. 그것에 맞은 오크들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을 때 미야는 어느새 그들의 앞으로 다가가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하압!"

"우지지직!"

지뢰진이 발동되어 두마리 오크들이 쓰러졌다. 그들이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것을 본 운현은 온 힘을 다해 오크를 걷어찼다.

"꾸에엑!"

한마리 오크가 맞아 바닥을 구르다가 구덩이 함정에 빠졌다. 운현은 그것을 보고 히죽 웃은 후 단검을 들었다.

"요놈은 내가 맡을테니까 구덩이 애들 끝내!"

"응!"

"후. 그럼 가볼까?"

어렵지 않게 몰아 온 오크들을 끝장낸 운현 일행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오크 워리어를 상대하기 위해 부락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서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오크 워리어는 부락의 오크들이 전멸했는데도 나와보지 않고 있었다.

"잘됐지."

"응. 크고 단단한 죽창을 먹여주자고."

미야가 웃으며 말하자 운현은 오크 워리어의 천막 입구 바로 앞에 구덩이 함정을 설치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야와 바제트는 천막쪽으로 달려가 기름통을 던졌고 천막에 기름이 스며들자 헤스티아는 주문을 외웠다.

"파이어 볼!"

"콰아아앙!"

"쿠어어어.... 어!! 크억!!"

기름을 머금은 천막이 폭발하듯 불타오르자 안의 오크 워리어는 분노로 포효하며 나오다가 구덩이 함정에 그대로 빠져버렸다. 죽창에 제대로 걸렸는지 고통 섞인 비명이 구덩이 안에서 흘러나왔다.

"흐음... 어디."

제대로 걸린 것일까? 루비처럼 어깨나 다리 한쪽만 맞은게 아닐까 싶었던 운현이 구덩이쪽으로 다가갔을 때 그는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붕붕붕붕!"

구덩이 안에는 복부와 가슴, 그리고 팔과 다리에 죽창이 박혀 있는 오크 워리어가 굴욕과 분노로 눈물을 흘리며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필사의 힘으로 던진 것인지 그의 손에는 아까 들고 나왔던 도끼가 없었다.

"운현!"

"괜찮아!?'

"안괜찮을 뻔 했네."

레벨이 올라가고, 또 헥토르, 우르나, 상아와 상대한 경험이 아니었더라면 머리가 두쪽 날 뻔했다. 운현은 화가 치밀어 올라 일그러진 얼굴로 구덩이 안에서 비통한 눈물을 흘리며 적의 가득한 눈길로 자신을 쏘아보는 오크 워리어에게 싸늘히 말했다.

"아주 고맙다. 보답으로 화끈한걸 먹여주지."

[레벨이 올랐습니다.]

[추가 스탯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우와. 한번에 2레벨이나 올랐네."

바제트와 미야, 헤스티아는 기뻐하며 자신들의 모험자 카드를 보았다. 운현 역시도 스탯창을 보며 두개나 오른 레벨에 만족했다.

"이정도면 꽤 할만한데?"

"응. 마지막 발악은 좀 주의하는게 좋을지도 모르지만 말야."

아까 전 운현이 오크 워리어가 던진 도끼에 맞을 뻔했던 걸 떠올린 미야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럼 주변에 있는 오크 워리어를 다 잡고 복귀하자. 어때? 이거 잘하면 오늘 100레벨 달성하는거 아냐?"

"후후후... 그럼 바로 다음계층인가?"

"그거 좋지."

어서 다음계층으로 가서 새로운 보물상자를 얻고 싶었다. 더 강한 미믹! 더 강한 깽판! 그것을 원하며 운현은 활활 타오르는 오크 워리어의 천막을 보다가 활짝 웃으며 여인들에게 말했다.

"자! 그럼 어서 다른 곳으로 가자! 뛰어갈까? 시합하자! 꼴찌가 오늘 저녁 사기 어때?"

"그런걸 뭐하러..."

"비용은 공동 요금이잖아."

"1등하면 나랑 자기."

"우오오오옷!!"

"이야아아압!"

"아아앗! 치사해요!"

저녁 사기로 흥미를 끌지 못하자 운현은 혹시나 싶어 말해보았고 그 순간 바제트와 미야가 휙 달려나갔다. 그녀들의 뒤를 쫓으며 울상이 된 헤스티아가 달려가자 운현은 낮게 한숨을 내쉰 후 불타오르는 천막을 보았다.

"촤아아아악!"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나오며 불길을 삼켜버린다. 검게 그을려진 상자가 스르륵 미끄러지듯 이동하자 운현은 미믹을 보며 피식 웃었다.

"깨먹을 수고는 덜었네."

133====================

terror

"슬슬 나가볼까?"

열마리째의 오크 워리어를 잡고나자 바제트는 운현을 보며 말했다. 헤스티아도 더 이상 오크 워리어를 찾기 힘든 듯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으음..."

"왜?"

"아니 그게."

올라가면 상아와 만날 생각을 하니 올라가기 싫어진 운현이 머뭇거리자 미야는 운현의 뒤에서 끌어안았다.

"얼른 가자~ 나 씻고 밥먹고 싶어. 배고파."

"그, 그러자. 그래. 가야지..."

진짜 가기 싫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던전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털레털레 걸었고 여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칼같이 복귀하던 인간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게 이상한 것이다.

'레벨이 93이지만...'

상아에 비하면 쪼렙에 불과하다. 운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민했다. 아마 이번에 정산을 하면 100레벨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것만으로 상아가 공격을 했을때 상대를 할 수 있을까? 운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 젠장. 내가 이렇게 신에게 기도하게 될 줄이야.'

신이라는게 있다면 부디 상아가 눈치채지 못했길. 운현은 속으로 빌며 동료들에게 이끌려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였다. 터덜터덜 걸어 던전 입구에 도착한 그는 길드로 통하는 마법문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아!"

"왜?"

"나 늑대 몇마리만 잡고 갈게."

"응? 왜?"

"함정 재료로 생각난게 있거든. 오늘 저녁에 만들려고. 들어가서 밥 좀 시켜줘. 난 스테이크 먹을래."

"흐음... 알았어."

늑대 정도라면 운현 혼자서도 이제는 여유롭게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여인들은 운현이 늑대가 있는 곳으로 향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복귀했다. 그녀들이 던전을 나가는 것을 확인한 운현은 한숨을 내쉰 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간 후 다 부숴져가는 버클러를 들었다.

'일단 어떻게든 이걸로 좀 버텨야겠다.'

"촤아악!"

미믹을 꺼내자 미믹은 곧장 운현을 공격했다. 미믹의 검은 채찍이 자신의 버클러를 후려갈겨 두쪽을 내놓자마자 운현은 미믹에 스틸을 걸었다.

'레벨이 높아져서 그런가? 아예 못막을 정도는 아니구만.'

처음 미믹에 맞았을 때 거의 기절할 뻔 했던 운현은 쉽게 훔쳐배우기를 검은 채찍으로 교체했다. 늑대 한마리를 잡은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길드로 돌아갔다.

'설마 매복하고 있지는 않겠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운현은 조심스레 길드회관으로 통하는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문 열고 나면 상아를 비롯한 길드 간부들이 무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라는 두려움에 빠져 있던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문을 열었다.

"깜짝이야! 오! 운현 아냐?"

"아르?"

"이제 나오는거야? 와~! 들었어!"

"뭐, 뭘?"

"너희 파티 이제 100레벨이라면서? 축하해~! 엄청 빠른데?"

'니가 미믹맨이라며?' 라는 말이 나올까 긴장했던 운현은 아르의 축하에 떨떠름한 얼굴로 볼을 긁적거렸다. 그의 그런 반응에 아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니... 별 얘기는 없디?"

"뭔 얘기?"

자신의 질문에 아르는 이해를 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쉰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님 됐고."

"그럼 우리도 노력해야겠네. 먼저 2계층에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따라잡을테니까!"

아르와 아르의 동료들이 던전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게 된 운현은 저들의 반응에 의아해하며 길드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뭐지?'

길드 회관에서 놀고있는 모험가들 중에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적었다. 아니, 물론 남자라서 관심을 가지기는 했지만 빅-빌런 미믹맨이라는 것 때문에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운현씨! 어서와요! 저희 모두 레벨 100이 될 수 있다고 하네요!"

필레가 담당하고 있는 사무소의 앞에서 헤스티아가 발랄하게 웃었다. 사무소 안의 필레, 그리고 칼리아스는 운현에 대한 적의보다는 그저 순수한 축하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우와~ 대단한데요? 이렇게 단기간에 100레벨에 달성할 수 있는 파티는 처음인 것 같아요."

"역시 운현이라니까~!"

칼리아스와 필레의 칭찬을 받으며 운현은 속으로 엄청나게 긴장했지만 애써 멀쩡한 표정을 유지했다. 필레는 운현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의 모험자 카드를 받은 후 은색의 카드로 바꿔주었다.

"크흠. 여러분은 이제부터 2계층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2계층에 진입하기 위한 조건으로는 1계층의 계층주를 쓰러트리셔야해요. 원하신다면 2계층에 도전하는 파티를 모집해드릴 수 있답니다. 그리고... 오크 워리어의 코어와 시체를 보유하고 계신데 원하신다면 이것으로 2계층에서 쓰일만한 장비를 맞춰드릴게요. 어떠세요?"

"음... 장비를 바꿀 필요가 있나요?"

"길드에서는 추천을 하는 편이에요. 1계층과 2계층의 몬스터들이 가진 힘의 차이는 상당하니까요. 당장 100레벨의 몬스터와 101레벨의 몬스터는 종 부터가 다르거든요. 어떤가요?"

"그럼 만들어주세요. 뭘 만들 수 있나요?"

"어디보자... 파티 리더는 운현씨죠? 지금은 단검을 쓰고 계신 것 같은데 2계층에서는 갑각을 가진 몬스터들이 많답니다. 그걸 대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숏소드 수준의 무기를 드는 것이 좋아요. 운현씨에게는 그것을 추천하고 헤스티아씨에게는... 마력회복속도와 주문 속도 증가가 되는 로브, 그리고 미야씨에게는 방어력을 올릴 수 있는 디펜스 업 마법이 걸린 팔찌, 바제트씨에게는 명중률이 향상되고 화살의 관통력이 증가하는 반지를 만들어드릴 수 있어요."

"그럼 그걸로 해주세요. 괜찮지? 운현?"

"어? 응. 응."

지금 칼리아스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운현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필레의 눈치를 살폈다.

"왜 자꾸 힐끔힐끔 봐?"

"어? 응... 아니 뭐 그냥."

"후후후~ 이상해~"

그가 자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는지 필레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이런 반응을 보니 길드 간부들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눈치 못챘나!?'

운현은 막연한 희망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자 필레는 고개를 갸웃거린 후 말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계층주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최소 20인 정도로 공격대를 구성하는게 좋아. 원한다면 사람들을 모집해 줄게."

"2, 3계층에 진입해 있는 모험가가 도와줄 수는 없어?"

"응. 파티의 평균레벨이 100레벨이 넘어가버리면 계층주가 등장하지 않거든."

계층주를 잡지 못하면 다음 계층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해 준 필레는 운현의 모험자카드를 받아 비어있는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계층주를 잡으시면 이곳에 별이 새겨질거에요. 이 별이 없으면 다음 계층으로 가는 마법문을 통과할 수 없답니다. 아시겠죠?"

"알겠어요. 고마워요. 필레씨."

"늘 고맙네."

"고마워~"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가 감사인사를 보내자 필레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언제가 괜찮아?"

"언제든지 좋기는 한데... 가급적 빨리. 시장 선거 때문에 시간을 많이 뺏길 수 없거든. 당장 오늘도 괜찮은데."

"그건 좀 힘들거야. 마침 이번주 안으로 100레벨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파티가 몇 있으니까 그 파티와 조율하면 갈 수 있을걸?"

"그래? 그럼 최대한 빠른 쪽으로 해줘. 그리고 시장선거 날은 피해주고."

"알았어~"

딱히 별 일이 없자 운현은 안도했다. 상아가 그냥 입을 다물어 준 것 같아 기뻐하며 운현은 동료들과 함께 그들이 맡아 놓은 자리로 향했다.

"100레벨 달성 기념으로 파티할까?"

"오오!"

미야가 기뻐하며 환호하자 운현은 오크의 사체를 환전하여 받은 돈을 보았다. 금화가 잔뜩 들어 있는 주머니를 보며 그가 씨익 웃었을 때 바제트는 손을 들어 올리며 음식을 가지고 오는 메이드에게 외쳤다.

"여기야!"

커다란 닭고기 통구이 두마리와 야채 샐러드, 스테이크. 빵. 과일등등 음식들이 테이블 가득 놓여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운현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다 먹을 수 있겠어?"

"아~! 축하할 겸 해서 다른 사람도 끼기로 했거든."

"다른 사람? 누구?"

"저기 필레씨랑..."

"나."

무덤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운현은 그 목소리에 딱딱히 굳었다. 긴 머리카락이 귓가를 스치고 몸에 닿자 운현은 경직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 하하..."

"네가 100레벨이 되었는데 축하해줘야하지 않겠어? 그렇지?"

"...상아."

그녀는 씨익 웃으며 운현을 보았다. 그녀를 보며 미야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아 길드장님이 이번에 큰 돈을 벌게 생겼다고 오늘은 쏘신다고 하네~ 신난다. 잘 됐지?"

미야의 말에 운현은 무척이나 떨떠름한 어조로 답했다.

"그, 그래... 그래... 어, 엄청 잘됐네."

'설마 그 큰 돈이 날 팔아서 생기는 돈은 아니겠지?'

운현은 빅 빌런 미믹맨에게 현상금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말을 떠올리며 불안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야~ 처음에 운현이 모험가 길드에 들어왔을 때 얼마나 놀랬는지 몰라요! 그때 사람들이 다들 쳐다보고 난리였는데. 운현. 기억나?"

벌써 바닥에 굴러다니는 와인병이 열병이 넘어간다. 아까 전 메이드가 와서 치운 열병의 빈 와인병을 생각하면 이들이 스무병의 와인을 마신 것이었다.

그나마도 운현은 상아의 눈치를 살피느라 두어잔을 먹었을 뿐이고 상아도 평소와 다르게 딱 한병만 마셨을 뿐 더 이상 잔에 입을 가져가지 않았다.

결국 그 많은 와인은 이 필레,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가 전부 마셔버린 것이다. 헤스티아는 벌써 만취했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미야는 게슴츠레 눈을 뜬 채 필레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고 있었다.

"호오. 재밌네. 그래서?"

벌써 세번째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인데도 바제트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필레에게 이야기를 재촉했다. 운현이 모험가 길드에 들어왔을 때, 모험가가 되지 않겠다고 뻗대던 것. 그 이후의 이야기들. 필레의 말을 들으며 키득거리던 바제트는 운현의 어깨를 팡 치며 말했다.

"헤헤~ 이렇게 잘 싸우면서 왜 모험가가 되지 않으려고 한거야?"

"그, 그러게 말야. 아하하하~ 왜, 왜 그랬을까?"

"맞아. 그렇게 잘 싸우면서도 말이지. 자기보다 강한 자를 상대하면서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데."

상아가 와인을 한모금 마시며 무덤덤히 말하자 운현은 움찔했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 운현은 상아의 옆구리에 걸려 있는 광검을 보고 고민했다.

'저걸 스틸로 훔친다음에 냅다 던지고 튈까? 으아아! 하지만 필레를 생각하면 무기 없어도 잘 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도 없고... 미치겠다...'

빅 빌런은 개뿔. 그냥 얌전히 있을걸. 운현은 쓴 입맛을 다시며 와인을 한모금 마셨다.

"그래서? 그래서?"

"으으음~ 그래서 말이죠! 어제도 빅-빌런 미믹맨이 나왔는데에~ 그걸 상아 길드장님이 쫓아냈지 뭐에요~!"

"오오오! 대단한데! 길드장씨! 길드장씨가 그저 쫓아낼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그 녀석이 강했단 말야? 이거 무섭네~!"

운현이 상아의 눈치를 살피느라 잠시 이야기를 놓친 사이 주제는 요새 화제인 빅-빌런 미믹맨으로 변경되었다. 어제 상아가 미믹맨을 쫓아냈다는 이야기를 하며 필레가 방긋 웃자 바제트는 상아를 보며 감탄했다.

"음. 그러게 말이야. 고작 쫓아내는 정도 밖에 못하다니. 적어도 팔 한짝은 잘라두고 싶었는데. 아니면 어디 가지 못하게 양 팔과 양 다리를 잘라놓던가."

'누굴 오체불만족으로 만들려고!?'

상아가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자 운현은 그녀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넌 어떻게 생각해? 다음에 그 빅 빌런인지 뭔지를 만나면 어떻게 해줄까? 팔? 다리? 아니면 깔끔하게 숨통을 끊어줄까?"

"그, 그 녀석도 뭔가 사정이 있는 녀석이 아닐까? 우리 용서해주자."

운현의 말에 상아는 작게 키득거린 후 작은 목소리로 그의 귀에 속삭였다.

"하는 거 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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