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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 방패부터 고치러 가야겠군."
운현은 자신의 왼팔에 걸린 찌그러진 버클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게 아니었다면 아마 자신도 미믹에게 쳐맞고 죽었겠지. 5골드에 목숨을 샀다고 생각하니 전혀 아깝지 않았다.
"하아... 돈도 없는데 이게 무슨..."
하지만 아깝지 않은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당장 돈이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었다.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소지금을 확인했다. 이래저래 쓰다보니 남은 것은 금화 열아홉개와 은화 여덟개 뿐.. 방패 수리비래봐야 5골드가 넘지 않을테니 그것을 감안하면 이제 15골드 정도 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진짜 열심히 던전 돌아야겠네..."
이러다가 진짜 네명이 한 방에서 자게 생겼다. 그것에 우울해하던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린 후 손가락을 튕겼다.
"헛!? 그럼 포썸이 될 수도 있는건가!? 이제부터 그냥 돈 모으지 말고 레벨업에 투자해!?"
남자로서 기쁘기 그지 없는 상황을 '본의 아니게' 만들 수 있었던 운현이었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운현은 자신의 망상을 잠재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비만의 방패 전문점으로 향했다.
가게에 도착한 운현은 가게 앞에 앉아 방패를 정리하고 있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인사를 받아 준 비만은 운현이 베시시 웃으며 찌그러진 방패를 들자 어처구니 없다는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아니 사간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만들었어? 이게 그렇게 내구도가 약한 방패가 아닌데?"
"아뇨. 그게 미믹의 공격을 막느라..."
"어? 진짜!? 미믹의 공격을 막았다고? 아니 그보다 미믹을 만나고 잘도 살아있네..."
비만은 운현의 말에 감탄했다. 모험가였던 그녀였기에 미믹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쓴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으쓱였다.
"히야... 미믹의 공격을 막아냈는데 이정도면 훌륭하구만. 그래서?"
"이거 수리 가능해요?"
"수리... 는 힘들 것 같은데? 이건 이제 방패가 아니라 고철이야. 팔면 고철값으로 1골드는 쳐주지. 고철 수리해서 쓰다가 훅 가지 말고 그냥 새로 하나 사지그래?"
설마 수리불가일 줄이야. 운현은 아쉬움이 철철 넘치는 얼굴로 버클러를 보다가 결국 그녀에게 버클러를 내밀었다.
"...그럼 이거랑 비슷한 방패 하나 주세요. 이건 고철로 쳐주시고..."
어떻게든 나가는 돈을 줄여보려고 했지만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운현은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를 향해 쓴웃음을 지은 비만은 전의 상자를 가져와 열어 찌그러진 버클러와 비슷한 방패를 들어보였다.
"장식이 좀 다르긴 하지만 내구도나 탄성, 방어력은 비슷해. 사용법도 같고."
"오골드?"
"응."
"좀 깍아주시면..."
"하하하하!"
운현이 몸을 베베 꼬며 말하자 그를 보며 크게 웃은 비만은 방패를 다시 상자에 넣고 말했다.
"안살거면 꺼져."
"젠장."
씨알도 안먹힌 것에 운현은 이를 갈며 사골드를 지불하고 방패를 구입한 운현은 비어버린 돈주머니의 가벼움에 아쉬워하며 숙소로 돌아와 미야를 끌어안고 그대로 잠들었다.
다음날이 되자 운현은 동료들과 함께 길드회관으로 내려갔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운현은 주변을 둘러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자! 오늘은 홉고블린을 제대로 잡아보자!"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미믹 관련된 문제는 길드에서 처리했다고 하잖아. 마냥 손가락 빨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운현의 말에 바제트와 미야, 헤스티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미믹을 만나 죽을 뻔 했는데도 멀쩡한 운현이 신기한 것이다.
"운현씨... 괜찮겠어요?"
"나? 왜?"
"아니 그게..."
뭐라 말해야 할 지 고민하던 헤스티아는 운현의 손을 꼭 잡았다.
"운현씨가 당일치기 던전행만 하는 것은 다치고 싶지 않아서잖아요. 그리고 그때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득보다는..."
"아아. 그런 의미가 아니야. 길드에서 확실히 조사를 했다고 했고 이번 일을 심각성 때문에 1계층에는 길드 간부가 두명 상시 대기하기로 했다고 하네. 혹시 미믹이 발생한다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다고 하니까 말야."
"으음..."
"자자. 운현이 저렇게 이야기하고 또 길드 차원에서도 노력하고 있다고 하니까 이제 그만 걱정하자."
헤스티아의 시선에 바제트는 최연장자답게 둘의 대화에 끼어들어 중재안을 던졌다.
"그래도 헤스티아의 말을 완전 무시할 수 없으니 홉고블린은 나중에 잡자. 일단 레벨업을 위주로 전투를 하는 건 어때?"
"흠...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녀의 말을 들으며 운현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일레인을 잡은 이상 더 이상의 미믹이 발생할 일은 없었다. 아니, 일레인을 대신할 스파이가 한명 더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있으면 어쩔 것인가? 더 이상 미믹은 운현에게 있어서 위험요소가 아니었다.
"그럼 가자!"
싱글벙글 웃으며 운현은 동료들과 함께 던전으로 향했다.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운현 일행은 코볼트가 나오는 곳으로 향했고 도착하자마자 다섯 마리의 코볼트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늘 하던 방식대로. 괜찮지?"
"아아. 응."
활시위를 튕기며 바제트는 무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야 역시도 강해지고 싶기는 마찬가지였나보다. 그녀가 주먹을 꽉 쥐며 전의를 다지자 운현은 헤스티아의 볼을 톡톡 쳐주고 말했다.
"너무 겁먹지마. 그리고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도 그만."
"후우... 알았어요."
운현의 말에 헤스티아는 한숨을 푹 내쉰 후 빙긋 웃었다. 그녀도 전투 준비를 마치자 운현은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럼 시작은... 우리 헤스티아가 해볼까!? 파이어 볼 날려!"
"네!"
운현의 말에 헤스티아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문에 따라 헤스티아의 지팡이 위에 이글거리는 불의 공이 생성되었고 그녀는 지팡이를 겨누며 외쳤다.
"파이어 볼!"
불의 공이 빠르게 날아 모여 있는 코볼트 무리를 덮친다. 그것을 본 운현은 바제트와 미야에게 외쳤다.
"가자!"
"오오!"
확실히 파티가 강해지긴 강해졌다. 네무리째의 코볼트들을 무리 없이 해치운 운현 일행은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기로 하고 구석에 모였다. 그들이 쉬는 동안 운현은 정찰을 다녀오겠다고 말한 후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홉고블린 서식지로 향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곳에 도착한 운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하이딩을 걸었다.
'그럼 가볼까.'
적당히 고블린을 피해 동굴 안으로 들어간 운현은 잠을 자고 있는 홉고블린을 지나쳐 동굴을 수색했다. 동굴 안의 구석진 곳에 놓여져 있는 보물상자를 발견한 운현은 빙긋 웃은 후 그것을 들어 인벤토리 안에 넣었다.
"크어어어!"
"깜짝이야!"
보물상자를 움직이자마자 홉고블린이 깨어났다. 그것에 놀란 운현이 움찔하자 홉고블린은 정확하게 자신을 발견하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
'하이딩을 걸었는데도 본 거라는건가? 왜?'
그러고보면 하이딩도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스킬을 썼을 때 발견한 고블린도 있었고 던전 도시에 들어갈 땐 아무짓도 안했는데 자신을 보자마자 사슴이 도망간 적도 있었다.
'아무튼 지금은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니군.'
아무리 강해졌다고 하지만 혼자서 홉고블린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미믹을 꺼내어 휙 던졌다.
"우우우우우우!"
상자의 검은 기운이 일렁이자 운현에게 포효하던 홉고블린은 순간적으로 딱딱히 굳었다. 미믹의 위압감에 공포에 질린 홉고블린은 도망치기 위해 뒷걸음질쳐 동굴의 입구쪽으로 향했지만 미믹은 그대로 홉고블린에게 검은 기운을 쏘아내었다.
"퍽!"
단 한방에 홉고블린의 머리가 박살나버렸다. 두부 부숴버리듯 쉽게 홉고블린의 머리를 부숴버린 미믹이 검은 기운을 내뿜어 순식간에 홉고블린의 몸을 반쯤 감싸자 운현은 씨익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걸 먹으면 곤란하지."
그의 스틸에 당한 미믹이 다시 인벤토리로 돌아갔다. 검은 기운에 감싸져 있던 홉고블린의 사체는 검은 기운이 잠식한 하체의 대부분이 사라진 채 바닥에 놓여져 있었다.
'이정도면 몇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운현은 홉고블린의 사체를 보며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미믹은 코어와 몬스터의 사체를 흡수하여 마인을 소환한다고 했었다. 한두마리로는 마인을 소환할 수 없다면 어느정도까지는 미믹을 써먹어도 된다는 것 아닐까?
'아슬아슬한 줄타기이지만 방법이 없으니...'
위험하다 싶으면 그 미믹은 쓰지말고 다른 미믹을 쓰자. 라고 생각한 운현은 홉고블린의 사체를 마석에 담은 후 인벤토리 안에 넣었다.
'이건 나중에 레벨 좀 높아지면 그때 바꿔야겠군.'
파티가 홉고블린을 안잡았는데 홉고블린의 사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간 의심을 사게 된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고 입맛을 다셨다.
"하아... 이거 내 살 깍아서 장사하는 기분인데..."
보물상자가 있고, 열 수 있는 스킬도 있는데 먹지를 못하다니. 운현은 아까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장 돈이 없어서 빌빌대고 있는 판국에 이런 짓까지 해야 하다니. 그는 아르토리우스에 대한 원한을 마구 쌓으며 동굴을 빠져나와 일행들에게 돌아갔다.
"어디까지 갔다왔길래 이렇게 늦어?"
"저희 마력 회복 다 했어요."
"전투 하고 온건아니지?"
"응. 자자. 다 쉬었으면 다시 하자."
운현이 홉고블린을 죽이고 보물상자를 얻어왔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그녀들은 그가 웃으며 말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볼트 몇번만 더 잡으면 레벨업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 정도면 다음 몬스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응? 다음 몬스터가 뭔데?"
"윌 오 위스프."
"그게 뭐야?"
"음... 허공에 떠다니는 커다란 등불같이 생긴 녀석인데. 마법 공격과 물리 공격을 쓰는 녀석이라 상대하는게 꽤 골치아파. 강하기도 하고. 공격도 대부분이 범위공격인데다가 플래시라는 기술을 써서 시야까지 가리지."
"잠깐. 허공에 떠다닌다고?"
"응. 그래서 네 함정은 못쓸지도 몰라."
"우리 파티의 홀딩과 딜링의 주전력 중 하나가 함정인데... 괜찮을까?"
미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질문에 바제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윌 오 위스프의 체력은 코볼트 한마리보다 조금 많은 정도에 불과해. 그리고 많아야 두개체 이상 같이 다니지 않으니까 우리 파티 정도면 함정이 없어도 쉽게 잡을 수 있을거야. 한번 도전해보자."
바제트의 말에 운현과 미야, 헤스티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바제트의 인도에 따라 꽤 떨어진 곳에 도착한 그들은 주변에서 전투를 하고 있는 파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게 윌 오 위스프야?"
"응. 보니까 거의 다 잡은 것 같은데?"
바제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공에 떠다니던 등불 중 하나의 빛이 꺼지고 그 등불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하나 남은 등불을 공격하기 위해 그들이 무기를 돌린 순간 바제트는 차분히 말했다.
"플래시 나온다."
"화아아악!"
등불에 모여 있던 빛이 퍼져나간다. 그 빛에 휩쌓인 파티원들이 눈을 잡고 비명을 내질렀을 때 등불은 빠른 움직임으로 도망쳐버렸다.
"플래시에 맞으면 5초 정도 시력을 잃게 되지. 저걸 조심해야해. 원거리 딜러가 있으면 도망치는 윌 오 위스프를 잡을 수 있으니까 큰 문제는 없지만서도... 한마리일때는 도망가지만 두마리일때는 다른 윌 오 위스프가 공격을 하거든. 그러니까..."
"눈뽕맞고 얻어 터지기 전에 잡든가 막든가 해야된다는거네? 해결책은?"
"그냥 눈 감고 있어."
"되게 간단하네..."
"뭐, 데미지를 주는 기술도 아니니까."
생각 외로 간단한 플래시의 대처법에 운현이 떨떠름히 말하자 바제트는 히죽 웃었다. 그외의 윌 오 위스프를 상대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그녀에게 설명을 들은 운현과 미야, 헤스티아는 준비를 마치고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쟤 잡자. 마침 한마리네."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윌 오 위스프를 발견한 바제트가 조용히 말하자 미야는 운현에게 말했다.
"함정을 쓸 수 없으니까... 내가 먼저 나갈게. 괜찮지?"
"응. 일단 한번 상대해보고 어떻게 잡을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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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만 주의한다면 그렇게 어렵지 않은 몬스터 같아 보였기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미야를 보냈다. 미야가 빠르게 달려가 냅다 스매쉬를 갈기며 전투는 시작되었다.
"우우우웅!"
낮은 진동음과 미야의 스매쉬를 맞고 날아간 윌 오 위스프는 빠르게 운현들을 향해 날아왔다. 스매쉬 한방으로 어그로가 제대로 끌린 모양인지 윌 오 위스프는 미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허공을 날아 미야를 공격하던 윌 오 위스프를 향해 헤스티아가 바인딩을 걸자 운현은 날카롭게 외쳤다.
"점사!"
"오오오!!"
운현과 미야, 바제트의 공격이 윌 오 위스프에게 꽂혔다. 바인딩이 풀릴때까지 두드려맞던 윌 오 위스프는 큰 충격을 받았는지 비틀거리며 날았고 그것을 본 미야는 씩 웃은 후 공중으로 뛰어 윌 오 위스프를 향해 발을 내리찍었다.
"쿠웅!"
"이런 식으로 땅으로 떨굴 수 있으면 함정도 걸 수 있겠는데?"
"그러네. 다음에는 이런 방법으로 해볼까?"
땅에서 빌빌거리던 윌 오 위스프가 공중으로 떠오르자 운현은 윌 오 위스프의 뒤로 가 벌려진 틈새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날카로운 단검이 안으로 파고들자 윌 오 위스프는 부르르 떨렸고 잠시 후 안에 있던 불빛이 팟 하고 꺼져버렸다.
"이야. 쉽네. 코볼트보다 만만한데?"
연계 공격을 하는 코볼트는 코볼트 마법사 때문에 시간 제한도 있는데다가 가끔씩 기습 공격도 들어와서 상대하는게 만만하지만은 않았다. 그것을 생각하며 운현이 말하자 바제트는 싱긋 웃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응. 플래시 때문에 놓치는 녀석들이 많아서 그렇지 상대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아. 거기다가 지금 우리 파티의 공격력은 꽤 강하다고."
운현이 함정까지 활용한다면 헤스티아의 공격력이나 미야의 방어 무시 공격력, 그리고 바제트의 화살 공격. 운현의 단검공격, 이 공격들을 합한다면 윌 오 위스프의 다음 단계 몬스터인 오크까지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오크 잡으러 가는건 지금은 좀 무리인 것 같으니까 모두의 레벨을 20까지 끌어올린 후에 가자고. 코어를 전부 레벨업에 쓴다면 가능할거야."
"우리 돈 없어."
"당분간은 돈 쓸 일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돈이란건 있어도 있어도 모자른 것이다. 바제트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오며 돈이라는 것에 많이 힘들었던 운현은 떨떠름히 답했다.
"오크를 잡아서 돈을 모으면 되죠~"
"그래. 그래. 일단 강해지는 것을 목표로 하자고. 사체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는 있잖아. 정 없으면 돌아가는 길에 고블린을 잡아도 되고."
"흠..."
그들의 말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린 후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까지 이리 말했으니 진짜 돈 다 떨어지면 포썸을 시도해보자. 라고 생각한 운현은 의욕적인 얼굴로 외쳤다.
"마침 저기 두마리 있네! 가자. 이정도면 특별한 전략은 필요 없겠다. 이번엔 각자 알아서 잡자. 매번 내 지시를 받으며 싸울 수는 없잖아?"
"뭐 그렇긴 하지."
"알겠어요!"
"응. 너무 운현에게만 의존하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아. 나중되면 강한 몬스터들과 싸워야 하는데 그때그때의 상황 판단을 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크게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는 만큼 운현은 별다른 작전을 생각하지 않았다. 뭐가 있어야 작전을 세우지 않겠는가. 운현의 말에 여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럼 이번에도 내가 먼저 갈게. 함정 쓸거야?"
아까 전 자신이 윌 오 위스프를 내리차서 땅으로 떨군 것을 미야가 언급하자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함정을 쓰지 않고도 잡을 수 있는데 굳이 재료를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말에 미야는 주먹을 꽉 쥐고 달려가며 두 윌 오 위스프에게 파동권을 날렸다.
"펑! 펑!"
파동권에 맞은 윌 오 위스프가 뒤로 밀려나자 운현과 바제트는 각각의 윌 오 위스프에게 달려갔다.
"나에게 와라!!!"
미야의 도발에 윌 오 위스프는 자신들에게 달려오는 운현과 바제트가 아닌 떨어져 있는 미야에게 돌진했다. 두 윌 오 위스프가 허공을 날며 자신을 공격하는 것을 막으며 어그로를 제대로 끈 미야는 자신의 머리를 공격하는 윌 오 위스프를 잡아 그대로 바닥에 내던진 후 발로 걷어찼다.
"바인딩!"
헤스티아의 바인딩이 허공에 있는 윌 오 위스프를 붙잡았다. 남은 것은 바닥의 윌 오 위스프 뿐. 운현과 바제트, 미야는 바닥에 떨어져서 뒹굴고 있는 윌 오 위스프를 신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훗! 이것이 유대의 힘이다!"
"아니 유대라기보다는 다굴이잖아. 저 녀석 바인딩이 풀린다!"
한참 두드려 맞은 윌 오 위스프가 비틀비틀 허공으로 떠오르자 미야는 공중제비를 돌며 다시 윌 오 위스프를 내리쳤다. 그 공격에 다시 윌 오 위스프가 떨어지자 운현은 충격에 의해 벌어진 등불의 틈 사이에 단검을 찔러 넣었고 그것으로 윌 오 위스프의 불꽃이 꺼져버렸다.
그들이 윌 오 위스프 하나를 처리했을 때 나머지 윌 오 위스프의 바인딩이 풀렸다. 밝은 빛을 깜빡이던 윌 오 위스프가 부르르 떨져 바제트는 날카롭게 외쳤다.
"플래시다! 모두 눈 감아!!"
"화아아아악!"
"끄악! 내눈! 오! 마이 아이즈!"
"운현!?"
"운현씨!? 괜찮아요!?"
"너 왜 눈 안감았어!? 바보냐!"
"아이고~!! 내눈!!"
운현이 양 눈을 잡고 바닥을 뒹굴자 미야와 헤스티아, 바제트는 당황했다. 분명히 얘기를 해줬는데 왜 눈을 감지 않을 것일까. 라는 의문을 표시하기도 전에 미야는 윌 오 위스프가 도망치려 하자 바제트와 헤스티아에게 외쳤다.
"헤스티아! 운현을 봐줘! 바제트 저 녀석을 공격해!"
"알겠어요!"
"응!"
운현이 플래시에 의해 시력을 잃은 것을 확인했는지 윌 오 위스프는 빠르게 일행들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일반 공격과는 다른 바제트의 붉은 빛이 감도는 화살은 정확히 윌 오 위스프에게 명중했고 그것에 맞은 윌 오 위스프가 휘청거리며 멈추자 바제트는 미야에게 외쳤다.
"저 녀석을 쫓아! 슬로우 마법이 걸린 화살을 맞았으니 얼마 가지 못할거야!"
"알았어! 좋은 활 산 보람이 있네!"
바제트의 새로운 활이 가진 능력에 미야는 감탄하며 처음과 다르게 무척이나 느린 속도로 이동하는 윌 오 위스프를 잡고 바닥에 던졌다. 바닥을 구르던 윌 오 위스프를 바제트와 미야가 끝장냈고 그들은 헤스티아의 품에 안겨 있는 운현에게 달려왔다.
"좀 괜찮아?"
"으으... 이게 실명효과구만."
"바보냐!? 눈 감으라니까 왜 안감았어!?"
"나도 모르게 그만. 실수였으니까 봐줘."
"실수? 이게 그냥 실명효과였으니까 망정이지 진짜 눈이 나가버리는 거였으면 어떡하려고 했어!?"
"미안. 걱정시켜서."
"진짜 바보..."
바제트의 걱정이 잔뜩 담긴 노성을 들으며 운현은 그녀에게 사과했다. 그렇게 씩씩거리며 한참이나 운현을 쏘아보던 바제트는 주머니를 뒤져 작은 약병을 꺼내었다.
"단순한 실명효과이지만 강한 빛은 시력에 안좋다고. 다음부터는 조심해."
"알았어."
그녀가 건네 준 안약을 눈에 바른 운현은 눈을 몇번 깜빡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큰 피해를 입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운현이 걱정스러웠던 미야와 헤스티아, 바제트는 오늘 전투는 그만하기를 원했다.
"안되겠다. 윌 오 위스프는 나중에 잡고 오늘은 고블린 잡으러 가자. 쟤 또 플래시 맞을까봐 겁난다."
"응. 정 뭐하면 우리 셋이서 고블린을 잡을테니까 운현은 쉬고 있어."
"매번 운현씨에게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허... 굳이 그럴 필요까지야."
"누나 말 안들을래?"
바제트가 화난 목소리로 말하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고블린 정도라면 많은 무리가 아니면 저 셋이 충분히 잡을 수 있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던 운현이 동의하자 그녀들은 운현을 데리고 장소를 바꿨다.
후방으로 빠져서 함정이나 설치해달라는 그들의 요청에 응하며 운현은 처음으로 도적답게 전투를 했다. 뒤에서 타이밍에 맞춰 함정을 설치하며 파티원들의 전투에 도움을 주던 운현은 따끔거리는 눈이 가시자 씩 웃었다.
'이걸로 패는 하나 얻었군. 검증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말야.'
플래시에 당한 순간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5초 정도 지나자 다시 밝아지기는 했지만 원래의 시야를 찾는 시간까지 생각한다면 약 10초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운현은 생각보다 괜찮은 플래시에 만족스러워하며 생각했다.
'문제는 MP가 얼마나 소비되느냔데...'
검은 채찍과 비슷할 정도의 MP소모라면 의미가 없다. 운현은 스킬창의 훔쳐배우기가 플래시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며 이를 드러내었다.
'이제 나머지는 준비 뿐이네.'
생각치도 못하게 좋은 기술을 획득했다. 거기에 미믹의 검은 채찍에 비해 위험성도 적은 만큼 MP효율만 좋다면 꽤 쓸만한 기술 같았다. 운현은 씩 웃으며 고블린을 잡고 있는 파티원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거 좀 양심에 찔리는구만.'
자신이 일부러 플래시에 맞은 줄도 모르고 저렇게 열심히 전투를 하는 모습을 보니 운현은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밀도 비밀이거니와 자신이 하려는 일을 알게 된다면 저 셋은 반드시 반대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도 사람이긴 한가보네.'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이는 만큼 운현은 조금씩 그들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
"하아..."
"이얍!"
미야의 스매쉬를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고블린이 죽었다. 전투가 종료되자 미야는 어깨를 붕붕 저으며 히죽 웃었다.
"이제는 고블린도 만만하네!"
"그러게 말이에요. 후후후..."
"아니 고블린 잡고 이렇게 좋아하면. 그보다 운현. 이제 괜찮아?"
"응. 많이 좋아졌어. 나도 전투에 낄까?"
"흠..."
운현의 질문에 바제트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아니. 오늘은 나랑 데이트해야지."
"앗!?"
"자, 잠깐만! 난 어제 못했는데!?"
"그 대신 운현과 함께 자고 밤을 즐겼잖아."
당황한 미야는 바제트의 말에 빽 외쳤지만 바제트는 그저 웃으며 선선히 답할 뿐 이었다. 그녀의 말에 기가막힌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미야는 휙 운현을 노려보며 물었다.
"어쩔거야?"
"바제트. 미야의 말대로야. 그게 원해서 그런 상황이 된 것은 아니잖아."
"우... 그치만."
운현이 미야의 편을 드는 것에 바제트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아까 전 자신이 플래시에 맞은 것을 걱정하며 화낼때와는 반대로 귀엽기 그지 없는 그 모습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제트의 의견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지. 오늘 데이트는 미야와 하자. 그리고 밤에는 난 좀 할일이 있으니까. 나가야 하고.... 내일은 바제트와 데이트하고 자면되겠지. 그리고 다음 데이트는 헤스티아. 그런 식으로 적당히 조절하자고. 싸우지 말자. 파티간의 불화가 생긴다면 난 그냥 파티 깨버릴거야."
협박에 가까운 달램에 여인들은 움찔했다. 행여나 그런 것 가지고 파티가 어색해지거나 사이가 나빠진다면 운현이 아예 파티를 깨버린다는 것은 조그마한 것을 탐하려다가 큰 것을 잃는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셋 모두 깨달은 것이다.
"아, 알았어."
"어쩔 수 없네..."
"후후. 운현씨는 조율을 참 잘하시네요."
"뭐. 너희들이 날 좋아해주기 때문이지. 라고 해두면 되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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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l
운현의 말에 헤스티아는 방긋 웃었고 미야는 멋쩍은 듯 볼을 긁적거리며 살짝 얼굴을 붉혔고 바제트는 운현의 손을 꼭 잡으며 베시시 미소지었다.. 세 미녀들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인 후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가자."
'테스트는 내일 해야겠군. 그리고 보물상자를 얻는 것도...'
플래시의 효과를 시험하는 것은 밤에 몰래 나와서 던전에 들어가는 것으로 하자 생각한 운현은 파티원들과 함께 던전에서 나왔다. 평소 나오던 것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나오게 된 것이지만 여인들의 표정은, 특히 미야의 표정은 밝기 그지 없었다.
"에헤헤~ 데이트다~ 데이트다~"
"그렇게 좋냐?"
"응!"
"그래. 네가 좋아하니 나도 좋구나."
"흐힉!?"
운현은 살랑살랑 흔들리는 미야의 꼬리를 잡았다. 그의 손길에 깜짝 놀란 미야는 곧 개구진 얼굴로 꼬리를 움직여 운현의 얼굴을 톡톡 쳤다.
"꼬리가 좋아?"
"응."
"헤헤헤~"
그의 말에 미야는 우쭐한 얼굴로 방긋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욱한 헤스티아와 바제트는 서로의 장점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우, 운현씨는 제 긴 머리를 무척 좋아하신다구요!"
"내 작은 가슴도 좋아한다고 해줬어!"
"정말이야?"
"응."
운현은 미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무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평하게 아끼고 귀여워해줘야지 누구 하나만 편애하면 골치아프다.
"그, 그래...?"
"자자! 그럼 우리는 빠져줄테니까 둘이 재밌게 노셔~ 미야! 방해 안할테니까 나때 방해하면 안돼! 알았지?"
미야가 떨떠름히 고개를 숙이자 바제트는 헤스티아를 데리고 가버렸다. 그녀들이 사라지자 운현은 미야의 어깨를 감싸 안은 후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돌아다니는게 좋겠지?"
"으응."
"자. 가자."
"치..."
운현과 함께 돌아와 갑옷을 벗고 깔끔한 정장차림이 된 미야는 운현이 자신들이 사 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바라보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런 그녀를 힐끔 본 운현은 옷을 다 갈아입고 미야에게 다가갔다.
"왜?"
"너랑 데이트를 하는 건 좋지만 그래도 같이 못하는 건 좀..."
"뭐. 못버틸 정도는 아니잖아."
어깨를 으쓱이며 운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미야는 볼을 부풀리고 휙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귀는 쫑긋 솟아 있고 꼬리는 살랑살랑 흔들리며 운현의 팔을 감싸고 있는 것이 진심으로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앙탈에 운현은 히죽 웃고는 미야의 날씬한 허리를 감싸 안았다.
"왜~"
"내가 너랑 하고 싶은건 흥분도가 올라서 그런게 아니라구."
"그럼.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거야?"
"응. 그, 그리고 널 내 남자로 만들겠다는 공략도 있으니까..."
"그런거 안해도 공략 잘 되고 있으니까 걱정 마라."
운현은 시무룩히 말하는 미야를 향해 피식 웃으며 그녀의 하얀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검은색 정장과 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그 안의 짙게 탄 갈색의 피부. 그것들과 아주 잘 어울리는 회백색의 긴 머리칼이 자신의 손길에 따라 흔들리자 미야는 살며시 운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기분 좋다~"
"발정기는 언제라고 했지?"
"다음주 쯤에? 그때의 난 대단하니까 몸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헤에. 그거 무섭네."
자신이 안을때마다 항상 부끄러워하는 미야가 일부러 무서운 표정을 지어보았지만 그녀의 쫑긋 솟은 귀와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는 오히려 그녀의 귀여움을 돋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웃으며 운현은 미야의 깨끗한 이마에 살짝 입맞춰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볼까? 오늘은 뭐 하고 싶어?"
"으음... 운현은?"
"나? 글쎄?"
"딱히 정한 거 없으면 내가 하고 싶은 거 하자!"
"뭐... 상관없겠지?"
"일단은 멋진 식당에서 밥을 먹고! 멋진 까페에서 비싼 차를 마시고!"
"야. 우리 돈 없다."
"쿡쿡쿡... 농담이야."
운현이 떨떠름하게 말하자 미야는 키득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냥하게 웃은 미야는 운현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오늘은 돈 적게 들이면서 놀자! 우리 묘족의 방식대로 말야!"
"호오? 묘족의 방식은 어떻게 노는건데?"
"좋은 데 봐뒀으니까 따라와줘!"
미야는 밝은 얼굴로 운현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방 밖으로 나와 길드를 나가고. 던전 도시의 북쪽으로 이동하며 따사로운 햇살을 느낀 미야는 자신에게 이끌려오는 운현을 보며 말했다.
"오늘 날씨 되게 좋다~"
"그러네. 그 정장 덥지 않아?"
"아니. 별로. 묘족들은 대부분 이런 정장이 평상복이거든. 그리고... 후후."
"흠. 근데 그 안에 든건 뭐야?"
"비이밀~"
뭐 할거냐고 물어봤지만 미야는 이미 어제 예정되어 있던 데이트를 위해 준비를 다 했었나보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커다란 가방을 보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좀 가르쳐줘. 겁난다. 뭔 이상한 걸 할지."
"아하하핫! 분명 기분 좋을거야!"
하지만 미야는 장난스러운 얼굴만 그대로 유지할 뿐 운현의 질문에 답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던전 도시를 가로지르는 맑은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 였다. 햇살에 반짝이는 투명한 하천은 보는 것만으로 시원할 정도로 깨끗했다.
'환경 오염이 없으니 이게 좋군.'
한국에서는 정말 보기 힘든 강물에 운현이 감탄하자 미야는 다리 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밑으로 가자."
"헤에. 오늘은 물놀이를 하려고? 그거 입고?"
"음... 물놀이도 하고 물고기도 잡고!"
"엉? 물고기? 나 낚시 한번도 안해봤는데?"
"괜찮아~ 물고기는 내가 잡을테니까. 나 이런거 잘해! 텐트도 가져왔다고!"
그제서야 자신이 들고 있는 커다란 가방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미야였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운현을 데리고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다리의 그늘 밑의 서늘한 곳으로 간 미야는 숙련된 솜씨로 빠르게 텐트를 쳤다. 2, 3인용으로 보이는 작은 텐트를 빠르게 친 그녀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응."
운현을 내버려 두고 미야는 텐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멍하니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시간을 때우던 운현은 미야가 살금살금 나와 자신의 등 뒤에서 꼭 끌어안자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뭐 하느라 안에서... 오우!"
"짜잔! 어때?"
미야는 태양을 등지며 활짝 웃었다. 깨끗한 하얀색의 비키니를 제외하고 그녀의 매끈한 몸이 여실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꽤 타이트하고 작아 음모와 음부만 간신히 가리고 탱글거리는 엉덩이의 굴곡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비키니 하의에 비해 상의는 마치 래시가드처럼 목부터 가슴까지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난 가슴이 작으니까 이런걸 입는게 더 예쁘다는데. 어때?"
"오오오... 완전 잘어울리는데?"
애초에 모델같은 늘씬한 체형에다가 몸에 탄탄한 근육이 드러나는 몸을 가진 미야다. 어떤 수영복을 입어도 잘 어울릴 것이기에 운현은 진심을 담아 말했고 미야는 그의 순수한 칭찬에 잠시 멍해 있다가 얼굴을 붉히고 살짝 고개를 돌린 후 혀를 내밀었다.
"헤, 헤헤. 그렇게 바로 들으니까 좀 쑥쓰럽네. 흠흠! 자 그럼 이제..."
가볍게 손을 움직여 머리를 묵어 올린 미야는 운현의 옷을 잡았다.
"운현도 벗어야지?"
"나 갈아입을 옷 없는데?"
"그럴 것 같아서 가져왔어! 자자! 어서 갈아입고 와! 아님 내가 갈아입혀줄까?"
"응."
미야의 손길을 느끼려고 운현은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웃음에 침을 꿀꺽 삼킨 미야는 붕붕 고개를 저은 후 말했다.
"사실은 진짜 하고 싶지만 그러면 오늘은 같이 놀지도 못하고 계속 할 것 같단 말야. 이런 기회도 드문데... 난 좀 참을게."
"흠.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운현의 옷을 벗기며 자신이 참을 수 있을지 없을 지 가늠할 수 없었던 미야가 씁쓸히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텐트 안에는 무릎보다 조금 밑으로 내려오는 긴 반바지 수영복이 있었다.
"이건 누가 산거야?"
"내가!"
"고맙게 잘 입을게!"
"별 말씀을~"
텐트 앞에서 기다리던 미야는 운현이 텐트 밖으로 나오자 그의 반누드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킨 후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콩콩 때렸다.
"오늘은 데이트야! 오늘은 데이트야!"
"그래. 오늘은 데이트니까. 자 물놀이부터 할까?"
"음~ 운현은 수영 할 줄 알아?"
"수영이야 할 줄 알지만 이런데서 해본 적은 없는데."
"그럼 깊은데는 들어가지 말고 얕은 곳에서만 놀자. 자~ 가자~"
밝게 웃으며 미야는 운현의 손을 잡고 맑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꽤나 강한 그녀의 힘에 말려 같이 물 속에 들어가게 된 운현이 흠뻑 젖자 미야는 찬 물을 손으로 잡고 그에게 던졌다.
"스매시이!"
"끄악! 야! 진심으로 하잔 거냐!?"
"우럇!"
"어푸! 어푸!"
"얍얍!"
"크헉! 하, 항복! 어푸!"
"아하하하하! 너무 약하잖아~!"
운현도 미야의 공격에 발버둥과 물장구를 치며 반격하려 해보았지만 그녀가 뿌리는 물은 운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뭔가 요령이라도 있는지 운현이 있는 힘껏 물을 밀칠때보다 미야가 대충 물을 칠때 퍼지는 양이 더 많았다. 결국 항복을 외쳐버린 운현을 보며 깔깔 웃은 미야는 운현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물 많이 먹었... 꺄악!?"
"방심은 금물!"
"어푸!"
미야가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그녀의 얇고 탄탄한 허리를 잡아 휙 들어 집어 던졌다. 하늘을 날아 물에 빠진 미야가 허우적거리자 운현은 그녀를 향해 물을 쳐냈다.
"으하하! 반격... 어푸! 어푸푸!"
"했겠다아아!!"
결국 또다시 미야의 물줄기에 맞아버린 운현은 그녀의 물살을 피해 육지로 도망쳤다. 그런 그를 향해 싱긋 웃은 미야는 손을 쭉 내밀며 손가락을 벌렸다.
"승리!"
"그래. 니가 이겼다. 훌륭하다."
운현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그런 그를 향해 생긋 웃은 미야는 물 위에서 운현에게 손짓했다.
"이제 안할게. 운현. 저기 깊은곳으로 가보자."
"나 이런 곳에서는 수영 안해봐서 자신 없는데. 저긴 좀 깊은 곳 아냐?"
하천의 중앙을 가리키며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답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미야는 생글거리며 물에 잔뜩 젖어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올린 후 그에게 다가갔다.
"나 수영 잘해~ 내가 잡아줄게."
"진짜?"
"응!"
너무 밝게 웃는 탓에 할 말이 없다. 운현은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럼 가보자."
미야의 손에 이끌려 깊은 곳으로 들어간 운현은 배영을 하듯 미야가 몸을 뒤집고 자신의 몸을 끌어안자 깜짝 놀랬다. 이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운현은 자신을 안고 있으면서도 둥둥 떠 있는 그녀의 수영실력에 놀라며 물었다.
"너 수영 잘해?"
"묘족은 다들 이정도는 기본이야. 묘족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물고기거든. 사냥을 하려면 수영은 기본이지. 어렸을 때 제일 먼저 배우는게 수영인걸?"
"우와... 그렇구나."
운현은 정말 의외였다. 고양이 수인이길래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할 줄 알았지만 완전 물 만난 고기다. 흐르는 하천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느긋하게 헤엄을 치던 미야는 운현이 자신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지 싱글싱글 웃으며 그의 머리칼에 입맞췄다.
"이러고 있으니까 내가 널 독점한 것 같네."
"지금은 독점이잖아."
"음... 그렇긴 하지만 말이지. 좀 더 실감이 나. 내 고향의 강에 있는 기분이라... 헤헤헤~ 언니들이랑 어머니랑 동생들이랑 족장님이 내가 너랑 이러고 있는 걸 보면 깜짝 놀랄걸?"
"왜? 사고쳤냐?"
"사고라기 보다는 묘족은 남자를 찾는게 무척 어렵거든. 일단 사는 곳도 험지인데다가... 아무래도 남자들은 불편해하지. 남자들은 도시 좋아하잖아?"
"그래?"
"응. 묘족 남자들은 대부분 고향에 남아 있는 것보다 도시를 동경해서 도시로 가. 그리고 나중에 돌아와서 고향에서 살지. 젊은 남자를 만나기는 정말 힘들다고. 그래서 젊은 남자가 마을에 들어오면 거의 잔치 분위기거든. 후후후... 그때 짝짓기를 많이 하는데 한 남자의 품에 대 여섯명의 여자가 안기기도 해."
'그런 판타스틱한 곳이 있나.'
안그래도 하렘인데 그정도라니. 운현은 다음에 꼭 묘족의 마을에 가야겠다 다짐했다.
103====================
deal
"그럼 물고기를 잡아볼까? 운현. 잠수할건데 괜찮아? 물에서 눈 뜰 수 있어?"
"그거야 뭐 가능은 한데."
"그럼 잠수할게. 숨막히면 얘기해야해. 알았지?"
"응."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야는 운현의 팔을 잡고 쑥 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에게 이끌려 잠수를 한 운현은 정말 깨끗한 물 속에서 미야가 능숙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누가보면 묘인족이 아니라 어인족인 줄 알겠군.'
길고 아름다운 두 다리만 아니라면 차라리 인어라고 불리는게 나을 정도로 미야는 수영을 잘 했다. 빠르게 물 속을 헤엄치던 그녀는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물고기를 발견하자 여유있는 손놀림으로 물고기를 잡았다.
'세상에. 물 속에서 물고기를 저렇게 잡는단 말야?'
팔뚝만한 물고기를 잡은 미야는 운현을 힐끔 보고 물 위로 올라갔다. 고개만 빼꼼히 내 놓은 그녀는 물가로 헤엄쳐 나온 후 큼지막한 물고기를 텐트 앞으로 던지고 말했다.
"한 세마리는 더 잡아야 할 것 같은데. 같이 들어갈래? 아니면..."
"음. 내가 있는 것보단 네가 혼자 하는게 더 빠르지 않아? 네 수영 솜씨는 잘 봤으니까 다녀오려무나."
"알았어. 그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운현이 남는다고 말하자 조금 아쉬웠던 미야는 운현의 입술에 쪽 키스하고 활짝 웃은 후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물 속으로 들어가자 운현은 혼자 남아 찰랑이는 물에 발을 담궜다.
"재밌어보이네요~"
약간 차분해보이는, 하지만 부드러움이 가득한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뒷쪽에서 들려 온 목소리다. 운현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며 놀랬다.
'와우!'
마치 선명하고 깨끗한 피가 모여 만들어 낸 듯한 긴 붉은색 생머리, 그 머리칼 때문에 더욱 도드라져보이는 복숭아빛 피부. 약간 처진 듯한 눈매와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인상적인 미녀가 아름다운 장식으로 가득한 은백색의 갑옷을 입고 걸어오는 것을 본 운현은 그녀의 미모에 놀라다가 황급히 말했다.
"하하. 재밌죠."
"으음. 저기서 헤엄치고 계시는 분은 애인인가요? 잘 어울리네요~"
"애인은 아니고 동료에요."
"아하~ 그렇구나. 그렇지만 제가 보기엔 저 분은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죠?"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잘 어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의 웃음에 수정이 부딪히는 것 같은 맑은 웃음소리를 터트린 그녀는 운현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곳에는 데이트?"
"데이트... 뭐. 그렇죠."
"꺄악~ 남창같은건 아니죠?"
"무슨 그런 실례의 말씀을."
"헤에~ 좋겠다~ 던전 도시에서 남창 아닌 남자는 보기 힘든데."
"어? 그래요?"
"네. 대부분 남자들은 이곳에 남창을 하러 오는 편이거든요. 아니면 제작이나 상업쪽 일을 하죠."
"그렇군요..."
"텐트까지 치고 본격적이네요. 저도 캠핑같은거 좋아하는데 제가 아는 남자들은 같이 하려고 하질 않네요."
"그거 아쉽겠어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그녀가 실망한 듯 말하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웃음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거린 그녀는 텐트 앞에 놓여져 있는 커다란 물고기를 보며 말했다.
"저 물고기는 바린 송어라고 해서 구워먹으면 무척 맛있답니다."
"아하. 그런가요?"
"네. 그리고..."
"운현! 다 잡았... 누구?"
어느새 물고기 세마리를 잡고 나온 미야는 운현에게 웃으며 다가가다가 그의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보며 경계했다. 동료인 헤스티아와 바제트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엄한 여자가 운현의 옆에 있으니 기분이 나빠진 것이다. 그녀가 보내는 경계의 기세를 읽은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앗. 애인분을 화나게 만들어버렸네요. 죄송해요. 저는 항상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게 하는 것 같아서... 사과드립니다."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미야는 낮게 헛기침한 후 운현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크흠... 누구야?"
"몰라. 나도."
"......"
"더 이상 방해를 하면 곤란하겠죠? 너무 재미있게 노시는 것 같아서 아까부터 구경하고 있었어요. 후후. 그럼 방해꾼은 물러갑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그녀가 말을 마치고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자 미야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왠지 이상한 사람 같은데?"
"얼굴은 이쁘던데."
"흐으으으응~ 저런 여자가 취향이구나?"
"미녀는 다 좋지."
"으이그. 못말려."
운현의 맨살 옆구리를 콕 찌른 미야는 아직 살아 바닥에서 퍼덕거리는 물고기들을 모았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물고기를 해체하여 손질한 그녀는 근처의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운 후 준비한 석쇠에 물고기들을 올렸다.
"준비를 아주 제대로 해왔네?"
"응. 나 이런거 되게 기대했거든."
"물고기 구워 먹는거?"
"아니! 좋아하는 남자랑 같이 캠핑하는거!"
"소원 성취한거야?"
"응!"
방긋 웃으며 그녀는 타닥타닥 익어가는 생선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노릇노릇 익어 기름이 좔좔 흐르는 생선을 접시에 담은 그녀는 준비한 소스를 위에 뿌린 후 운현에게 내밀었다.
"자!"
"음? 먼저 먹지?"
"히히~ 어서 먹어봐!"
기대감이 가득 담긴 반짝거리는 눈으로 미야는 운현을 바라보았다. 척 봐도 살이 통통히 오른 생선은 잘 익어 무척이나 맛있어보였다. 미야가 준비한 소스에 생선의 살점을 잘라 찍어 먹어 본 운현은 그 맛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맛있는데!?"
"진짜!? 그지! 그지!"
운현이 맛있어하자 미야는 더욱 기뻤던 모양이다. 그의 감탄에 까르륵 웃은 미야는 다른 소스도 뿌려준 후 아까보다 더욱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으음... 이건. 오! 매콤한데!? 기름기 많은 생선이라 그런지 더 맛있어!"
"응! 이건 묘인족에서 만드는 소스야! 맛있지! 맛있지!"
"응. 이거 고향 생각나네."
첫 맛은 매콤하지만 끝맛은 부드럽게 달콤한 것이 마치 한국의 고추장을 먹는 기분이었다. 향수따위는 조금도 없었지만 그래도 매번 양식만 먹어서 이런 매콤함은 좀 그리웠던 그는 소스에 생선살을 듬뿍 찍어 입에 넣었다.
"후하! 맵다!"
"아하하하~ 너무 많이 찍으면 매워~"
운현이 자신이 한 요리와 자신의 부족이 만들어낸 소스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미야는 한마리 더 굽기 위해 석쇠 위에 손질된 생선을 올렸다. 그녀가 불에 집중하며 생선을 굽는 동안 운현은 생선살을 발라 소스에 찍은 후 미야에게 가져다 주었다.
"아. 해봐. 아."
"어? 어어!? 어... 응. 아앙~"
자신의 입 앞에 온 따끈한 생선살에 미야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부끄러운 듯 샐쭉 웃고는 입을 벌렸다. 그녀의 입 안에 생선살을 넣어 준 운현은 이번에는 자신이 먹은 후 다시 생선살을 발라주었다.
"운현 먹어. 난 나중에 먹어도..."
"에이~ 같이 먹어야 맛있지~"
그의 말에 미야는 더더욱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흥흥흥~"
준비한 돗자리 위에 앉아 운현이 바람을 쐬는 동안 그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기대고 운현을 올려다보며 미야는 즐겁게 콧노래를 불렀다. 자신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귀를 톡톡 건드리며 간지럽히는 운현의 손길과 물기를 날려주는 시원한 바람. 그녀는 그 어느때보다 행복한 기분에 살며시 손을 뻗어 운현의 손을 잡았다.
"왜?"
오른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운현은 미야가 자신의 왼손을 잡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질문에 그저 웃는 것만으로 답한 미야는 도톰한 입술을 살짝 벌렸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그러게. 가끔씩은 이런 여유도 좋은 것 같아."
항상 머리를 굴리고, 특히나 요즘에는 용병 연맹의 일과 시장선거의 일, 그리고 미믹과 자신의 숨겨진 힘의 정체를 알아내려 발버둥을 치느라 제대로 쉰 적이 없었던 운현은 이 여유에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손 안에 가득 담기는 부드러운 머리칼을 쭈욱 쓸어내린 운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미야의 시선에 빙긋 웃었다.
"고마워. 이런 시간을 마련해줘서."
"으응~ 내가 더 고맙지. 난 오늘 하고 싶었던 것 다 해봤는걸?"
"이게 전부야? 소박한데?"
"아니. 사실은 몇가지 더 있긴 한데 이건 여기선 지금 할 수 없는거라..."
"뭔데?"
"음... 첫번째는 마을의 축제때 너랑 같이 춤을 추는거야. 묘족의 축제는 정말 대단하다구. 만월의 달빛을 받으며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앞에서 묘족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제일 중앙에는 맺어진 커플들이 춤을 춰. 그건 정말...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자세히 설명을 하지는 못하겠는지 미야는 머쓱히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운현은 선선히 웃는 것만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그것을 본 미야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잖아."
"다른건?"
"다른건... 음... 너랑 같이 쇼핑을 하거나... 같이 놀러가거나... 아! 산에도 가보고 싶어! 거기서도 캠핑하는게 재밌거든!"
"의외로 야외에 다니는 걸 좋아하네."
"흐흥~ 묘인족의 특성입니다~!"
"그리고 또?"
"그리고~ 그리고~"
운현과 미야는 그렇게 다리 밑에서 시시한 잡담을 하거나 꾸벅꾸벅 졸거나 하며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다리 위에서 지켜보던 은백색 갑옷의 여인은 부러운 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아... 난..."
"아르토리우스님."
그녀, 용병 연맹의 연맹장 아르토리우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밑의 운현과 미야를 보던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앞에는 칠흑의 중갑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검은 머리의 여인이 할버드를 든 채 무뚝뚝한 눈으로 그녀를 본 후 굳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할버드의 라티나. 지금 복귀했습니다."
"아아. 라티나씨. 수고 많았어요. 어땠나요?"
"별 것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무엇을 그렇게 즐겁게 보고 계셨습니까? 너무 집중하시는 것 같아 차마 말을 못걸었는데..."
"별 것 아니에요. 그저 과거를 곱씹었을 뿐이죠. 그러고보니 라티나. 당신의 처음은 저와 같았죠?"
"...네."
아르토리우스의 말에 라티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어오는 바람이 왼쪽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간다. 흔들리는 머리칼 사이의 눈동자의 색은 검은색인 반대쪽의 눈 색과 다르게 붉은색으로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도 한때는 저렇게 즐거웠던 때가 있었는데..."
"이번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아르토리우스님의 숙원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부디 그래야죠..."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난간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린 후 성큼성큼 걸어나갔고 그녀의 뒤를 바라보며 라티나는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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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l
"오늘은 진짜 재밌었어!"
길드 회관으로 돌아 온 미야는 운현의 손을 놓기 아쉬운 듯 그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맞잡은 손에 운현 역시 힘을 넣었고 그것에 미야는 만족스럽게 웃은 후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진짜... 정말이야! 다음에는 꼭 같이 텐트에서 자자~!"
"그래. 그래. 다음에는 꼭 그러자."
"에헤헤~ 약속~"
운현의 입술에 다시 한번 키스한 미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던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린 후 빈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운현."
"응? 아. 필레. 오늘은 복장이 평범하네."
그녀의 몸매를 드러내는 타이트한 전투복이 아닌 사무를 볼 때의 펑퍼짐한 옷이 모습을 보이자 운현은 그녀의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 그를 향해 어깨를 으쓱인 필레는 조금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너 없는 사이에... 그가 왔다 갔어."
"그라면 누구... 아."
"응. 카를로스."
"진짜 잊고 싶었던 놈인데... 하아. 왜?"
"데이트 권 언제 쓸거냐고 하더라고. 쓸 거면 빨리 쓰라고 하던데? 이번 주 안으로 안쓰면 자기가 직접 찾아오겠다고..."
필레는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싫었는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그녀에게 쓰게 웃어 준 운현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어... 그러니까. 그렇군. 이 패도 있었지.'
"이번주 안이라고 했지? 필레. 오늘 시간 괜찮아?"
"응? 응. 난 이제 할 일 다 했는데."
"그럼 나한테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운현의 질문에 필레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혹시 카를로스 만나러 가려고?"
"응. 언제까지 미뤄두긴 좀 그래서 말이지."
"그런거라면 좀 기다려줄래?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올게. 그 남자가 본격적으로 덤비면 곤란하니 나도 준비를 해야겠어."
"그거 고맙네. 괜찮아. 상아도 데리고 갈거니까 준비 단단히 하고 가자. 죽일 수 있으면 지금 죽여놓는게 낫겠지."
자신을 죽이려고 적의를 품는 상대다. 그런 상대를 끝장낼 수 있다면 최대한 준비를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운현이 말하자 필레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후 길드 사무소로 들어갔다. 운현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 길드장 방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갔고 그의 등장에 서류를 읽고 있던 상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왜?"
"오늘 카를로스 만나러 갈거야."
"헤에... 오늘이야? 그럼 어떡하지? 함정이라도 준비할까? 그 놈이 널 치려는 순간..."
"날 미끼로 삼겠다고? 사양이다. 야."
카를로스를 죽이는 것은 좋지만 자신이 위험한 미끼가 될 생각은 없었다. 운현의 말에 상아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누구 데려갈건데?"
"일단 필레. 거기에 한 두어명 더 데려갔으면 좋겠지만..."
"마침 두시간 후에 다른 길드 간부들이 모두 복귀를 할거야. 카를로스를 만나고 온 후에 길드 간부들을 소개시켜주지. 시장선거때 움직이려면 그들을 모두 알아두는게 좋을테니 말야."
"그렇다면 감사히 받지."
"펠리시아에게 말해둘게. 삼십분 후에 길드회관에서 보자."
상아의 방에서 나온 운현은 메이드에게 1실버를 주고 카를로스에게 한시간 후에 중앙 분수대 앞에서 보자는 쪽지를 작성해 그녀에게 연극장의 카를로스에게 전달해 달라 부탁했다. 그것을 받은 메이드가 나가고 삼십분 후 상아와 필레가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운현은 그녀들과 함께 연극장으로 향했다. 어둠이 내려앉아 주변의 가로등이 길을 비추는 거리를 걸어가던 운현은 펠리시아가 보이지 않자 상아에게 물었다.
"펠리시아씨는?"
"아. 걔는 숨어서 따라올거야. 카를로스가 개수작을 부리면 바로 바인딩 걸고 공격하려고. 그래도 꽤 강한 놈이니까 최대한 주의해야지."
상아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스와는 이야기를 한번 하긴 했어야 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 빨리 끝내버리자는 생각에 운현은 심호흡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노을까지 완전히 져버려 어두워진 거리에 가로등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가로등의 환한 빛과 은은한 달빛이 어우러져 꽤나 밝은 받는 중앙 분수대에 도착한 그들은 중앙 분수대의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는 카를로스를 발견했다.
"이 대 배우 카를로스님을 기다리게 하다니. 간이 배밖으로 튀어나왔군."
"잠깐 타임. 나 화장실좀."
"......."
그가 싸늘히 말하자 운현은 손을 들어 올린 후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런 그를 멍청히 바라보던 카를로스가 이를 드러내자 상아와 필레는 자신들의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쓸데없는 짓은 관두지 그래?"
"함부로 움직이지 마십시요."
"하. 데이트 자리에 끼어드는 여자라니. 재미없군."
"니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재미 없거든? 그러니까 거기 얌전히 찌그러져 있지 그래?
"이하동문입니다."
날 선 둘의 반응에 카를로스는 이를 드러내며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오자 상아는 기쁜 얼굴로 광검을 잡은 손에 마력을 넣었다. 그녀의 광검이 빛을 발하고 필레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집에서 검이 반쯤 뽑혔을 때 운현이 돌아왔다.
"얘기하러 왔는데 쓸데없이 살기는 품지 말자고."
"허. 이런 상황에서? 지금 저들이 날 공격하고 싶어서 죽을 지경 같은데?"
"그거야 댁이 쓸데없이 시비를 거니까 그렇지. 이야기를 하러 왔잖아? 그럼 얌전히 대화나 하다가 헤어지자고. 피차 얼굴 보는 건 고역일텐데 말이지."
운현의 느긋한 말에 카를로스는 묘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그런 그를 무심히 마주한 운현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달빛 아래에서 만나 밀회를 즐겼으니 데이트는 끝난 것 같고."
"그렇지."
"그럼 조용히 얘기해볼까? 상아. 너만 이리로 와줘. 필레. 좀 떨어져 줄래?"
"왜!?"
"잠깐이라면 나도 몸을 지킬 수 있을테니까. 상아도 있고. 같이 있다가 얘가 함정이라도 쓰면 너까지 다치잖아?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하고 좀 떨어져 주겠어?"
필레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상아라도 없다면 모르겠지만 상아는 자신보다 강했다. 그녀가 있다면 카를로스가 운현을 공격해도 몇수 정도는 가볍게 막을 수 있을 것이고 그 사이에 자신이 난입하면 된다.
"하지만..."
"둘이서 압박을 해봤자 카를로스에게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듣기 어려울테니까. 안그래도 겁먹은것 같은데 말이지."
"하! 저 둘이 덤빈다고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응."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운현이 무덤덤히 고개를 끄덕이자 카를로스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입맛을 다셨다. 그를 향해 피식 웃은 운현이 손을 들어 올리자 필레는 결국 뒤로 꽤나 물러났다. 그녀가 물러나자 운현은 카를로스에게 조용히 물었다.
"왜 날 싫어하냐?"
"네가 이계인이기 때문이지."
'이건 넘겼군.'
이것을 필레에게 숨기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필레를 뒤로 떨어트린 운현은 일부러 작은 목소리로 물었고 상아와 필레에게 집중하고 있던 카를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운현과 비슷하게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게 큰 의미가 있는 건가? 그래. 인정하지. 난 이계인이다. 그렇지만 너희가 아는 현자와는 다른 사람이야. 현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 세계에 적응하고 이곳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어. 그런 각오도 다졌기에 내가 있던 세계의 힘이나 지식을 꺼내지 않으려고 해. 그런데도 내가 증오스럽나?"
"그래."
"어째서지?"
"그건 알 필요 없다."
"그럼 무조건적인 적의라는 건가... 대화로 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무래도 널 상대하려면 상당히 귀찮고 시간투자도 많이 해야 할 것 같거든. 좋은게 좋은거라고 웃으며 대화로 넘어가자. 어때?"
"개소리 집어 치워. 협상은 없다. 교섭은 안한다. 난 반드시 너를 죽이고 이 세계를 지킬 것이다. 이 빌어먹을 이계인 자식아."
운현이 손을 내밀며 말하자 카를로스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대고 그를 비웃었다. 그의 모습에 상아는 눈쌀을 찌푸렸지만 운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 볼 뿐 이었다.
"뭐 그럼 오히려 상대하기 편해졌군."
"뭐?"
"어떻게든 널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바꿀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넌 날 증오하고 적대하며 죽이려 들거잖아? 그럼 나도 답이 없지. 굳이 널 설득해서 마음을 바꾸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안들고. 굳이 할 일도 많은데 내가 왜 그래야 하냐?"
"하...! 같잖은. 너따위가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냐?"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해. 내가 왜 굳이 널 죽여야 하지? 내 주변엔 나 말고 널 죽일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당장 상아와 필레만해도 그렇고 말야. 너 혼자서 저 둘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흥. 내가 혼자라고 생각하는거냐?"
"이계인을 미워하는 무리라도 있다는거냐? 너처럼?"
"그건 말해줄 수 없지."
'만만한 새끼는 아니군.'
카를로스처럼 이계인을 이유없이, 아니 이유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운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증오하는 이가 없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특수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 혼자만 그 증오심을 품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에 운현은 일부러 그가 혼자라는 것을 주지시키며를 협박해보았지만 카를로스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은 채 그가 떠보는 것을 가볍게 넘겼다.
'그렇다면 몇가지 방법이 더 있긴 하겠지만...'
제일 좋은 방법은 지금 다짜고짜 쳐서 공격하는 방법이다. 운현은 상아를 힐끔 본 후 물었다.
"상아. 네 스승이 왜 카를로스를 죽이지 말라고 한거지? 지금이라면 네 복수를 완성할 수 있는 순간일텐데 말야."
"스승님의 유지는 제자들끼리 박터지게 싸우더라도 최소한 서로 죽이지는 말라는 것이었지. 그래서 그래."
"만약 카를로스가 날 죽이려한다면?"
"그럼 죽여야지. 스승님의 유지도 중요하지만 난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니까 말야. 카를로스. 만약 네가 운현에게 손을 대면 난 가만히 있지 않을거야."
"오우~ 무서워라. 그럼 이자가 모험가가 아니게 된다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겠지. 하지만 운현이 모험가를 관둘 일이 있을까?"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사람이라는 것은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는 것이거든. 예를 들면... 그래. 네 동료들. 그 동료들이 고문을 당하면 어떨까? 너와 꽤나 몸을 섞었던 것 같은데..."
"맘대로 해라."
"...뭐?"
"걔들도 모험가니까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보라고. 상아. 알지?"
"응."
운현이 무덤덤히 말하자 카를로스는 순간 당황하며 휙 상아를 보았다. 그의 시선에 상아는 천천히 광검에 빛을 불어 넣었고 그 빛을 본 필레는 빠르게 뛰어 운현의 옆으로 이동했다.
"운현씨! 길드장님!"
"아직 아니야. 그래서. 아무튼 나에 대한 적의는 풀 생각이 없다는 거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결론은 변함이 없는 걸로 가자고."
운현은 더이상 이야기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머리가 식으니 자신을 적대했다 하더라도 마음을 바꾸고 친하게 지낼 수 있다면 친하게 지내는 것이 나았다. 아직 카를로스가 자신에게 피해를 준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고 저렇게 공식입장을 표명한 이상 운현은 카를로스와 협상을 할 생각을 완전히 버렸다.
"밤길 조심해라. 빌어먹을 자식아. 언제 칼맞을지 모르니까."
"너도 밤길 조심해라. 언제 함정 밟을지 모르니까. 공연할때도 주의하고. 천하의 대배우 카를로스님이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대면 그 꼴도 재밌겠군. 연극배우가 아니라 코미디언이 되겠어."
"개자식."
"별 말씀을."
더 이상 운현을 보는 것도 짜증이 났는지 카를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떠나려 하자 운현은 품에서 꺼낸 금색의 카드를 들어 올렸다.
"갈땐 가더라도 이건 가져가야지? 여기 설명서 보니까 데이트 끝난 후 회수하라고 되어 있는데?"
"...내놔."
"주긴 주는데 이것 좀 해주라."
"......."
운현은 티르빙과 헥토르, 그리고 헬하운드들이 준 사인지, 그리고 펜을 들어 올렸다. 수십장이나 되는 사인지를 보며 카를로스는 빠드득 이를 갈았고 운현은 비릿하게 웃었다.
"결국 별 성과 없이 끝났네. 오늘 싸울 줄 알았는데 말이지."
"아. 성과는 있었어."
"무슨 성과?"
오늘 카를로스를 끝내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며 상아가 중얼거리자 운현은 무덤덤히 말했다. 그의 말에 상아는 이해를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운현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수십장의 싸인지를 들어올렸다.
"카를로스를 만나려고 한 이유가 이거였으니까."
"무슨... 너 무슨 생각하고 있는거야?"
"그래. 운현. 너 지금 좀 이상한데? 어디 아픈거 아냐?"
운현이 평소에 갖고 있는 장난기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상아와 필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그 시선을 받으며 운현은 씩 웃었다.
'미믹, 그리고 플래시, 거기에 이 사인지까지... 이제 행동 한번만 하면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겠군.'
[패시브 스킬 : 현자의 시간이 비활성화 되었습니다.]
[냉철한 이성 상태가 해제되었습니다.]
[지력이 99 하락합니다.]
105====================
deal
"하아... 그럼 시작해볼까."
길드로 복귀한 운현은 갑옷으로 갈아입은 후 잠들어 있는 바제트에게 피식 웃어 주었다.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그녀의 위로 이불을 제대로 덮어 준 후 그가 던전 입구로 향했을 때 그는 실비아를 만날 수 있었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그녀는 혼자서 심심했는지 길죽한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던전 입구에서 나와 던전에 들어 선 운현은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오! 안녕하세요! 운현씨. 혼자서 던전에는 왜 들어가시는 거에요?"
"아. 내일을 위해서 늑대 이빨이랑 발톱을 좀 구하려구요."
그의 말에 실비아는 살짝 눈쌀을 찌푸리고 운현에게 손가락을 척 올리며 말했다.
"지금 같은 시기에 혼자서 던전에 들어가는게 얼마나 위험한 줄 알아요!? 미믹이 돌아다니고 있다구요!"
미믹을 만들어낸 자는 잡았지만 몇마리의 미믹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부숴진 빈 상자로 보아 한두마리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 길드에서는 던전을 오가는 모험가들의 안전을 위해 각 계층의 입구에 길드원들을 배치시켜 놓았다는 이야기를 해 준 실비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현이 그저 싱글거리자 한숨을 폭 내쉬었다.
"에휴. 이러니 모험자들은... 무슨 일이든 안전이 최고라구요!"
"안전 좋죠. 안전. 그냥 늑대만 좀 잡고 바로 올거에요. 너무 걱정마세요."
"운현씨가 다치면 필레씨가 슬퍼한다구요."
"하하하하... 그런데 실비아씨."
"네?"
"혼자서 계셔도 괜찮아요? 미믹은 상당히 강하다던데..."
"아아. 1계층의 미믹정도는 괜찮아요. 예전에 혼자 잡아보기도 했고. 1계층 미믹은 음... 레벨이 250정도만 되도 혼자서 여유롭게 잡을 수 있어요."
"오오... 그럼 레벨이 250이 넘는다는 말씀이세요?"
"히히~! 길드원이 되려면 최소 레벨이 250이니까요. 전 지금 275에요."
"와..."
그냥 할일없이 돌아다니는 사람들로만 모여 있는 것이 모험가 길드인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능력자들이다. 운현이 감탄하자 실비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길드에 들어오시려구요? 운현씨는 레벨이 낮지만 뭐. 필레씨랑 친하니까 좀 봐드릴게요. 레벨 160정도만 찍고 오시면..."
"지금의 열배정도 되네요..."
"우와! 그렇게 낮았어요!? 홉고블린도 잡고 코볼트도 잡는 거 보니 꽤 되는 줄 알았는데."
운현의 말에 실비아는 놀라며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쓴웃음으로 답한 운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럼 계속 혼자 계시는거에요?"
"아마 세시간 정도? 그때 교대해준다고 하니까요. 아무튼 운현씨도 미믹이 나타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쳤다가 바로 구조요청 보내세요. 알았죠?"
"알겠어요."
실비아의 걱정서린 말에 운현은 웃으며 답한 후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미행에 주의하며 한참을 걸어 늑대가 나오는 평원에 도착한 운현은 슬그머니 수풀 속으로 들어간 후 하이딩을 걸었다. 잠시 멈춰서 미행하는 이가 없나 살핀 그는 미행하는 사람이 없자 하이딩을 풀고 그대로 홉고블린이 있는 부락으로 향했다.
"플래시가 MP를 조금만 썼으면 좋겠는데..."
검은 채찍처럼 MP를 확 가져가버리면 의미가 없다. 운현은 플래시의 MP소모량이 적기를 기도하며 하이딩을 걸고 부락 안으로 들어갔다. 세마리의 고블린들이 사냥해 온 사슴을 해체해 뜯어먹는 것을 뒤로 하며 동굴 안으로 들어간 운현은 코볼트의 몸을 북북 찢어 먹고 있는 홉고블린을 발견한 후 숨을 들이마셨다.
'이거 운도 좋군.'
그냥 찍었는데 동굴의 구석에 보물상자도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는 보물상자가 많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운현은 기뻐하며 하이딩을 풀었다.
"크르르!?"
아무것도 없던 빈 공간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에 고개를 돌린 홉고블린은 갑자기 나타난 운현의 모습에 기겁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홉고블린이 당황하는 것을 보며 척 단검을 올려 공격 자세를 취한 그는 홉고블린의 얼굴에 놀람이 사라지고 증오가 맺히자 스킬을 준비했다.
"크아...!"
"플래시!"
"화악!"
홉고블린의 외침이 터지려 할 때 운현은 바로 플래시를 시전했다. 그의 몸에서 폭발하듯 퍼져나간 밝은 빛에 홉고블린은 실명효과를 입었는지 비명을 지르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아무래도 제대로 먹힌 것 같다. 운현은 스탯창을 확인하고 입맛을 다셨다.
'20%라... 이거 좀 애매하군. 그래도... 이정도라면 괜찮아.'
"그럼 실험은 끝났고... 가 아니군. 한번 더해야 하네."
실명 상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홉고블린을 뒤로 한 채 운현은 밖으로 나왔다. 하이딩을 건 상태에서 고블린들이 뭉쳐 있는 곳 뒤에 가시 줄 함정을 설치한 운현은 하이딩을 풀고 곧장 플래시를 시전했다.
"크래랙!?"
"캬악!?"
"카아아!"
플래시에 일곱마리의 고블린들이 모두 당했다. 그들이 눈을 잡고 고통스러워하자 운현은 두 고블린의 멱살을 잡고 던지며 나머지 고블린을 걷어차 그들을 모두 함정의 범위 안에 밀어 넣었다.
고블린들이 함정 안으로 들어오고 가시 줄 함정이 발동되자 운현은 가시 줄 함정으로 데미지를 입고 있는 고블린들을 모두 죽인 후 스탯창을 보았다.
"다중 공격도 똑같은 MP소모라는건가. 이건 괜찮네."
죽은 고블린들의 사체를 마석에 담은 후 운현은 인벤토리창을 보며 필요한 보물 상자의 수를 생각했다. 적어도 8마리 이상의 미믹이 필요했다. 보물상자를 부순다 하여 100% 미믹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으니 10개 이상의 보물상자는 구비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운현은 동굴 속에서 들려 온 포효에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카아아아!"
"이거 아쉽네. 미믹이 조금만 약했으면 좋았을 것을."
홉고블린이 동굴 밖으로 빠져나오며 괴성을 내질렀다. 혼자서라면 홉고블린을 상대하는 것은 확실히 무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현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채 말없이 홉고블린을 바라보았다.
"크어!?"
자신이 죽일 듯 포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현이 전혀 겁먹지 않은 듯 하자 홉고블린은 당황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홉고블린은 자신의 해머를 들고 운현에게 달려왔고 운현은 그를 보다가 인벤토리에서 미믹을 꺼내 휙 던졌다.
"촤아악!"
인벤토리에서 빠져나온 미믹은 홉고블린을 보자마자 검은 기운을 뿜어내었다. 부숴진 상자 틈 사이에서 검은 기운이 채찍처럼 터져나와 홉고블린의 머리를 후려갈긴다. 단 한방. 단 한방에 홉고블린을 절명시킨 미믹은 자신에게 이어져 있는 검은 기운을 펼쳐 홉고블린의 몸을 반쯤 감쌌다.
"아아. 거기까지."
몬스터를 흡수하려 하는 미믹을 회수한 운현은 홉고블린의 사체를 보며 눈쌀을 찌푸렸다. 아주 잠시 뿐인데 검은 기운에 침식당한 홉고블린의 사체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침식당하지 않은 상반신만 남아 있는 것을 보며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또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절단면이 깔끔한 홉고블린의 사체를 보면 길드에서 무슨 소리를 할지 안들어도 뻔했다.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난감해하다가 그 시체를 마석에 담은 후 투덜거렸다.
"그냥 레벨 올려서 다른 능력 얻었다고 뻥쳐야지. 노답이네."
"하아..."
홉고블린을 일곱마리나 잡았지만 남는게 없다. 경험치도, 하다못해 코어도. 기껏 보물상자 네개만 획득하고 근처의 고블린 몇마리 잡은 정도에 불과한 것에 운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끙... 그렇다고 내가 미믹을 소환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힐 수도 없고.'
물론 밝히고자 한다면 밝힐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운현의 입장에서는 마냥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남자에, 도적이라는 희귀 클래스를 가지고 있는데 미믹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비만의 파티 꼴 나겠군.'
일단 길드 뿐만 아니라 심층을 탐험하는 모험가들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 것이다. 운현이 홉고블린을 잡은 것처럼 심층의 몬스터를 미믹으로 쓰러트리려 하는 무리들이 나타날 것이고 그들은 운현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당장 운현의 레벨이 낮으니 오히려 더욱 편하게 운현을 강간하며 미믹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운현은 자신의 생각에 붕붕 고개를 저었다.
"어우. 끔찍하다."
자신의 능력을 밝히는 것은 최소 400 정도의 레벨을 갖췄을 때의 일이다. 그때쯤 된다면 레벨업으로 인한 보너스 스탯 포인트만 가지고도 어지간한 이들 이상의 무력을 가질테니 말이다.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다면 보물은 그저 죄악에 불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운현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숨겨야겠다고 다시 다짐했다.
"그럼 돌아가볼까..."
어느새 던전에 들어온지 한시간이 지났다. 운현은 늑대가 있는 평원으로 가 늑대 세마리를 잡은 후 던전 입구로 걸어왔다.
"늦었네요? 걱정했잖아요."
"아, 늑대가 별로 없어서요.
늑대 잡으러 갔다는 사람이 한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자 실비아는 운현을 향해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에게 빙긋 웃은 운현은 볼을 긁적거리며 대충 둘러댔고 실비아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믹 때문인 것 같아요. 미믹이 움직이면 약한 몬스터들은 살기 위해 몸을 숨긴다는 말이 있거든요."
"헤에... 그거 무섭네요."
"아앗! 지금 저 놀리는거죠?!"
"하하하~ 설마요. 그런데 실비아씨."
"네?"
"꽤나 레벨이 높으신데... 지금 연세가...?"
"후후후... 운현씨? 여인에게 나이를 묻는 것은 실례랍니다. 이지만 뭐, 운현씨라면 괜찮겠죠. 전 92세에요."
"어? 혹시 인간족이 아니신가봐요?"
"네. 귀 보이시죠? 그리고 여기 뿔."
운현의 말에 실비아는 씩 웃은 후 자신의 약간 뾰족한 귀와 머리칼 사이에 있는 작은 두개의 뿔을 보여주었다. 처음 보는 종족의 특징에 실비아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귀족(鬼族)이에요. 처음 보시나봐요?"
"네."
"하긴 귀족은 뿔이 큰 사람들 외에는 알아보기 힘드니까요."
"아아... 그럼 던전 도시에는 언제 오신거에요?"
"음? 어... 운현씨."
"네?"
"저한테 관심있으세요?"
"있으면요?"
싱글거리며 운현이 묻자 실비아는 마주 웃은 후 그의 가슴을 톡 쳤다.
"에이~ 전 고향에 애인 있어요~ 그러니까 그러지 마시구요. 필레씨 한테나 더 관심 가져주세요."
"오!? 애인 있으세요!?"
"네! 이제 이년만 있으면 저도 결혼할거에요! 지금 열심히 돈 모으고 있거든요!"
"축하드려요. 그럼 아까 질문에 대한 답변 좀..."
"음... 전 한 십오년 쯤 됐죠."
장난을 그만 둔 실비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느긋하게 답했다. 그녀의 답변에 운현은 차분히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시장 선거할때도 계셨겠네요? 시장선거가... 4년에 한번씩 있다고 했었죠?"
"네. 처음 시장선거때는 수습 길드원이라 레벨 올리는데 바빠서 못봤는데 나머지는 길드 소속이라 그거 준비하고 돕는데 참가했었죠."
"누가 시장 후보로 나왔는지 기억하세요?"
"그럼요~ 음. 저저번에는 제작자 연합의 피스나씨랑 용병 연맹의 블라인씨. 아. 블라인씨는 이제 은퇴한 용병인데요. 전 용병 연맹장이에요."
"그렇군요. 그럼 다음은요?"
"저번에는 제작자 연합의 피스나씨랑 상인 조합의 윈디아씨요."
"...피스나씨가 계속 나왔네요? 다른 사람은요? 모험가 길드에서는 안나왔어요?"
"에이~ 시장직 같은 귀찮은걸 누가해요~ 상아 길드장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시장직 한번 하면 이를 갈면서 다시는 안한다고 하던데요?"
"어? 상아도 시장을 해본 적이 있나요?"
"네. 자료로 보면 정확하겠지만 아마 2~30년 전쯤? 그때 시장을 한번 하고 나서 절대 안한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러게요. 뭐, 각자 사정이 있는 거겠죠?"
실비아의 말에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인 후 씩 웃었다.
"더 물어보실 건 없으세요?"
"네. 이정도면 괜찮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실비아에게 인사를 하고 나온 운현은 조용히 웃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정보를 얻었다. 그는 그 정보의 확실성을 위해 곧장 상아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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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l
"이 늦은 시간에 왠일이야?"
벌써 꽤나 마셨는지 상아의 옆에는 빈 와인병이 다섯병이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상아가 다가오자 운현은 비틀거리며 일부러 자신의 몸으로 쓰러지려 하는 그녀를 휙 피했다.
"좀 잡아주지!"
"그렇게 취할 것 같으면 마시지나 말든가. 이게 뭐냐?"
"쳇... 뭐 그래서. 왜 왔어?"
아까 전의 비틀거리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상아는 똑바로 걸어 자신의 긴 쇼파에 앉았다. 그녀를 마주보며 앉은 운현은 탁자를 톡톡 두들기다가 말했다.
"사람 하나 소개시켜주라."
"누구?"
"피스나씨. 제작자 연합의 연합장."
"그 사람? 왜?"
"이유는 묻지 말고."
"소개시켜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 끙. 어쩔 수 없나. 그런데 그 사람은 남자 별로 안좋아하는데 괜찮아?"
"어? 혹시 남자야?"
뭔가 망설이던 상아는 볼을 긁적거린 후 떨떠름히 말했다. 약간 꺼려하는 듯한 그녀의 말에 운현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이 세계에 와서 남자를 싫어하는 여자를 한명도 만나지 못했다. 그나마 비만 정도가 자신을 보며 호감보다는 그리움을 느낀 정도일 뿐이지 그 외의 대다수 여자들에게 큰 호감을 샀던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 여자야. 여자 드워프. 나이가... 한 오백쯤 되나?"
"헤에. 나이가 많아서 남자를 싫어하는 건가? 근데 넌 왜..."
"나 뭐. 그리고 피스나가 남자를 별로 안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의미가 아니야. 그 사람한테는 남편이 있거든. 어떤 남자보다 더 훌륭하고 자기만을 사랑해준다고 그렇게 입이 닳도록 자랑을 하는 남편이 말야."
"헤에... 뭐, 상관없어."
"꼬시려고?"
"난 임자 있는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다네. 그런 문제가 아니고 물어볼게 있어서 말이야."
"물어볼거? 왜? 난 나름 친한 편이니까 어지간한건 내가 답해줄 수 있는데?"
상아의 말에 운현은 턱을 매만진 후 물었다.
"피스나씨가 시장 선거에 출마하는 이유가 뭐야?"
"응...?"
"아니. 질문을 바꾸자. 피스나씨가 시장 선거에 나온 횟수. 그리고 당선된 경력을 가르쳐줘."
"흐음... 피스나씨가.. 아마 10번은 넘지 않았을까? 그리고 당선된 적은 없지."
"10번을 넘게 출마를 하고, 한번도 당선된 적이 없다. 그런데 꾸준히 출마한다. 왜? 듣기로는 시장자리는 그렇게 좋은 자리가 아니라면서.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자리라고 하는데 왜 피스나씨가 출마하려고 하는거지?"
"아아... 그거?"
운현의 질문에 상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피스나의 개인적인 사유때문이야."
"개인적인 사유? 뭔?"
"아까 말했지? 피스나에겐 훌륭한 남편이 있다고."
"응."
"그 남편은 악신의 저주에 걸렸어. 아마 걸린지 이백년 정도 됐다고 하더군."
"악신의 저주는 꽤 오래 전에 있었던 것 아니야? 그게 왜...?"
운현은 필레와 연극을 볼 때 그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의 질문에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가락을 튕긴 후 붕붕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휴. 술 먹었더니 까먹었네. 넌 이계인이었지. 악신의 저주는 병의 이름이야. 악신의 저주 신화는 알고 있는 것 같으니 그건 따로 설명 안해도 괜찮지?"
"악신이 저주 내리다가 방해받아서 남자들의 수가 줄었다는거?"
"응. 그 신화에서 따온 병명이야. 악신의 저주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모두 남자들에게만 걸리기 때문이지. 한 이백년 전쯤? 그때부터 시작된 병인데 이 병에 걸리면 차츰차츰 정신을 잃다가 결국 아예 정신을 잃은 상태로 살아가게 되어버려. 마치 사람이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되어버리는 거지. 몇몇 사람이나 조직에서는 이걸 식물인간 상태라고 하더라고."
"왜? 갑자기?"
"응? 응. 이 병이 돈 초창기에는 가뜩이나 남자가 없는데 남자만 걸리는 병에 각 왕국에서는 비상이 걸려서 난리가 났었지. 그래서 각 국에서 공동으로 조사를 해봤는데 병의 시작지점에 왠 사교의 무리들이 제사를 지낸 흔적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지금 대륙에 있는 어떤 종교를 봐도 그런 제사는 아니었어."
"어떤 식의 제사길래..."
"음. 몬스터로 인한 강간. 그리고 살해. 인신공양이지."
"...뭐?"
운현은 그녀의 말에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이세계에 왔을 때 그 광경을 목격했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몬스터가 여자를 강간하고 있었고 고블린들이 남자를 강간했다. 남자들은 정기가 다 빨려 죽었고 여자는 자신의 심장에 칼이 꽂힌 채 죽어 있었다.
"자, 잠깐만. 그게 인신공양의 제사라고!?"
"응. 뭐, 사교 중에는 이런 식으로 제물을 바치는 제사가 많아. 그렇지만 몬스터에 의한 강간까지 포함되는 사교는 처음이라. 그때 꽤 많은 작은 종교들이 피해를 입었지."
상아는 놀라며 묻는 운현을 향해 빙긋 웃으며 차분히 말해주었다.
"악신의 저주는 그 이후로 한 오십년정도 계속 됐어. 그 이후로 사라졌지. 하지만 그때 많은 사람들이 악신의 저주에 피해를 입었거든. 피스나도 그 피해자 중 하나야."
"...일단 알았어."
시장 선거를 위해 물으러 왔다가 이런 정보를 얻게 된 운현은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자신이 깨어난 곳이 그 제사를, 아니면 그와 흡사한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아니 애초에... 내가 이 세계에 온 이유도...'
운현은 단순한 신의 변덕으로 자신이 이세계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자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왜 이렇게 얼굴이 파래? 아이구~ 무서워쪄용~? 오늘은 이 누나가 같이 자줄까? 웅웅?"
"기회 잡았다! 라고 소리치지 않았으니 칭찬해주지."
운현은 붕붕 고개를 저은 후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만져 애써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래서? 이백년이나 식물인간 상태로 남편이 있었는데 그게 뭐? 그게 피스나가 시장이 되려는 이유야?"
"응. 피스나는 뛰어난 제작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식물인간 상태가 된 남편이 언젠가 깨어날 것이라 믿고 그가 살아 있을 수 있도록 많은 도구를 만들었어. 마법으로 몸을 마사지하여 몸의 근육이 죽지 않도록 하고, 음식물을 액체로 변하게 하여 관을 통해 흡수시키게도 하고. 그리고 악신의 저주를 풀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하고 발명품을 만들었지. 악신의 저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자신이 만든 물건들을 무상으로 주기도 하고."
"차도는 있대?"
"아니."
"이거 안타까운 일이네."
"응. 악신의 저주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치료하지 못한 병이야. 심지어 파르티 교단의 성녀 마저도 불가능하다고 한 것이거든. 그럼 말 다한거지. 그래도 피스나는 포기하지 않았어. 더 많은 연구와 개발을 위해 피스나는 던전 도시의 시장이 되려고 하는 거야. 던전 도시의 막강한 힘과 조직력을 이용해서 악신의 저주를 풀려고."
"훌륭한 일이지만..."
"응. 안타까운 일이지만 악신의 저주에 당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지."
"그게 사람이니..."
타인의 고통과 슬픔, 괴로움보다 당장 내일 자신의 밥 한끼가 소중한 것이 사람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모이는 곳이 던전 도시인만큼 이 도시의 대부분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던전 도시가 발전하기를 바랬지 누군지도 모르는 이의 치료를 위해 도시의 방향이 진행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던전 도시는 하루에도 수백명이 들어오고 수백명이 나가. 물론 악신의 저주가 한참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때는 이곳에도 악신의 저주에 당한 남자들이 있었지. 하지만 그들의 가족들은 그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도시를 떠났어. 그렇게 점점 악신의 저주에 당한 피해자들이 도시에서 떠나게 되고, 피스나를 지지해주는 이들도 사라졌지.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어. 많은 물건을 만들고 그 지식을 제작자 연합에 베풀고. 그렇게 함으로써 제작자 연합의 영향력을 넓혀가려고 했지만... 뭐 계속 실패였지. 애초에 제작자라는 사람들은 좀 외곬수적이라서 자신의 일밖에 안보는 경향이 있거든. 자신의 연구뿐이지. 오로지."
"그렇군... 아. 야. 그러고보니 나 시장 선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르는데?"
"각 조직의 장. 그리고 각 조직에서 선택한 자기 조직의 간부 열명. 마지막으로 시청에서 무작위로 선별한 각 조직의 인원 40명. 총 204명의 투표로 결정돼. 개표는 투표에 참가하지 않은 이들로 시청에서 무작위로 선별한 각 조직의 인원 한명이 하고. 내가 안가르쳐줬던가?"
"응. 네가 도와달라는 것은 비밀 문서를 훔쳐오거나 그런 거였잖아."
"그랬었나... 미안. 근데 그건 알아서 뭐하게?"
"네 말을 들으니 점점 내 계획에 확신이 선다. 아주 좋아. 잘 됐어."
"응?"
운현의 말에 상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말 중에 어디 잘 될 만한 것이 있었던가? 그녀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너. 시장되기 싫지."
"음... 응. 아르토리우스가 시장이 안되면 난 그걸로 만족하는데."
"그럼 우리의 목표는 이걸로 하자. 피스나가 시장이 되도록 만들자고."
"...굉장히 무리한 얘기를 하는데. 평시라면 그렇다고 치자고. 매번 피스나는 아슬아슬하게 떨어졌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대륙의 정세가 무척이나 불안정해. 사람들은 안전과 힘을 바라고 있는데 연구를 원하는 피스나를 인정할 것 같아? 당장 제작자 연합에서도 이번은 그냥 넘기자고 피스나를 설득할껄?"
"제작자 연합도 전쟁에 찬성하는 건가?"
"그들은 기본적으로는 평화를 사랑하지만 전쟁도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들이야. 아무래도 자신들이 만든 무기들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보고 싶어하거든."
"그럼 더 잘됐네. 피스나를 소개시켜줘. 그녀를 설득해야겠어."
"뭘 어떻게 설득하려고... 아니 그보다. 자신있어?"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지."
운현의 말에 상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뭔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운현이 저렇게 자신만만한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야. 아까 그 표정보다 훨씬 낫다."
"아까 그 표정이라면..."
"카를로스 그새끼랑 만나고 있을때의 표정 말야."
"흠. 원래 미남은 뭔 얼굴을 해도 잘 어울리기 마련인데."
"어이구~ 그래쬬용?"
운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자 상아는 그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 준 후 와인을 들었다.
"오늘... 와인 먹고 갈래?"
"아니. 좀 무서우니까 들어갈래. 언제 시간 괜찮아?"
"언제든지. 피스나는 늘 공방에 있거든."
"좋아. 그럼 내일 던전에 갔다 온 다음에 소개시켜줘."
"알았어."
상아와 헤어지고 바제트의 방에 들어 온 운현은 갑옷을 벗은 후 바제트를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에 진하게 키스했다. 잠들어 있는 와중이라 정신을 못차리고 있던 그녀는 허우적거리며 몸을 비틀고 반항을 하려다 그가 운현이라는 것을 깨닫자 베시시 웃으며 그를 안았다.
"왜? 하고 싶어졌어?"
"응. 하고 싶기도 하고... 좀 부탁할 일이 있어서 말야."
"뭔데?"
"데이트 미루자."
"...뭐!? 싫어! 나 엄청 기대했단 말야!"
"그러니까 미안. 중요한 일이라서 그래. 참고로 말하자면 물론 여자를 만나러 가는 것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거 아니야. 일때문에 가는거라고."
"...일?"
운현의 말에 바제트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말은 통하는 것 같으니 다행이다. 운현은 그녀에게 차분히 자신이 길드의 일을 도와주기로 했고 그 일로 피스나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의 말을 모두 들은 바제트는 한숨을 푹 내쉰 후 그의 볼에 입맞춘 후 말했다.
"그런거라면 어쩔 수 없지... 그 대신."
"응?"
"오늘 밤은 날 만족시켜줘야해. 알았지?"
그녀가 부끄러워하며 기대감을 담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운현은 바제트의 입술에 키스한 후 말했다.
"물론이지."
아침이 되자 운현 일행은 곧장 던전으로 향했다.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빠르게 코볼트의 서식지로 이동한 운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들에게 말했다.
"어쩔까? 코볼트 잡을까 아니면 윌 오 위스프 잡을까?"
"몬스터를 빠르게 잡기에는 윌 오 위스프가 낫지만 개체가 적어서 경쟁이 붙으면 골치아프니까 그냥 코볼트나 잡을까요?"
어제의 경험을 떠올리며 헤스티아는 차분히 말했다. 잡기 쉬운 몬스터인 주제에 레벨이 높아서 그런지 윌 오 위스프는 등장하는 족족 다른 파티에게 잡히는 것을 보았던 그녀가 말하자 미야와 바제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나도 동감. 괜히 경쟁 붙으면 피곤하니까 싫어."
"나도 그래. 그리고 코어를 많이 획득할 수 있으니까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몰라. 우리의 목표는 레벨업이잖아. 안그래? 어서 레벨업 해서 오크 잡으러 가자."
"그렇다면 바로 시작하자. 작전은 따로 얘기할 것 없지?"
운현의 말에 여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무기를 잡았다. 그들이 마음을 먹자마자 수풀 너머에서 코볼트 다섯 마리가 모습을 보였다. 그것을 본 운현은 미야에게 외쳤다.
"미야! 출동!"
107====================
deal
[레벨이 올랐습니다.]
[추가 스탯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스킬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후우.. 이걸로 19인가."
근처에 있는 코볼트 무리를 학살하다시피 하며 미친듯이 전투만 해낸 결과 2레벨을 올릴 수 있었던 운현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후에는 피스나를 만나러 가야 하기 때문에 함정카드와 재료를 아끼지 않고 함정을 만들어 전투를 한 운현은 코볼트의 시체를 마석에 담은 헤스티아가 다가오자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었다.
"요새는 꽤 버티네?"
"헤헤헤~ 화염 마법사가 이래서 좋아요. 레벨이 오르면 오를 수록 흥분도가 상승하는 속도가 줄어들거든요."
"오? 그래? 그거 좀 아쉽..."
"그, 그치만 운현씨가 하고 싶다면 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구요!"
"그럼 여기서 할까? 응?"
운현이 자신의 탱글한 둔부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헤스티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고 은근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그들의 달달한 분위기에 코볼트의 시체를 모두 마석에 담아 온 미야는 뚱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우리도 있는데."
"좀 자제하지 그래?"
"자자. 너희들도 와라!"
"흥!"
"오라고 하면 못갈 줄 알고!?"
미야와 바제트가 달려들자 세 여인을 한번에 끌어안은 운현은 시간을 확인하고 입맛을 다셨다. 하고 싶기는 하지만 약속 시간을 맞추려면 이제 복귀해야 한다.
"오늘 밤에는 누구랑 자야해?"
"저요!"
헤스티아는 밝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어 준 운현은 헤스티아의 탱탱한 볼을 콕콕 찌르며 말했다.
"알았어. 밤에 찾아갈테니까 먼저 자고 있어도 괜찮아."
"안오는거 아니죠?"
"가급적 들어와야지. 일때문에 가는거니까 늦게와도 서운해하지 말고."
"헤헤~ 네~"
간단하게 헤스티아를 달랜 운현은 뚱한 얼굴의 바제트에게도 키스를 해주고 달콤한 말로 달래 준 후 던전에서 나왔다. 혼자서 미믹을 이용해 잡은 홉고블린의 마석을 제외한 나머지 마석을 모아 길드 사무소로 간 운현은 사무소 자리에 앉아 있는 필레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욥!"
"왔어? 오늘은 길드장님이랑 나간다면서?"
"어떻게 알아?"
"길드장님이 데이트라고 난리치던데? 좋으시겠어?"
필레의 말에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런 그녀들의 반응에 당황한 운현은 황급히 외쳤다.
"아냐! 그런거 아니야! 진짜 일이라고!"
"푸훗! 난 이해해. 길드장님이 원래 짖궂잖아.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길드장님이 원래 그러니까요."
"끄응..."
"하긴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니..."
"상아님이라면 이해가네요..."
'도대체 얘는 주변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걸까?'
무력이나 행동력은 인정하는 것 같지만 정신상태는 정말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의문이 들 정도다. 운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마석으로 가득 차 있는 주머니를 턱 올려 놓았다.
"우와! 많이 잡았네?"
"응. 이제부터 본격 레벨업을 하려고. 사체 빼고 나머지는 다 경험치로 바꿔줘."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주머니에 가득 담겨 있는 마석을 빠르게 분류한 그녀는 계산을 마친 후 운현에게 말했다.
"이정도라면 운현 혼자 레벨업을 한다면 23까지. 모두 같이 한다면 각각 1레벨씩 올릴 수 있겠는걸?"
"모두 1레벨씩 올리는 걸로 하자. 골드는?"
"25골드 30실버. 고블린과 코볼트의 장비까지 합친 가격이야."
"좋아. 그정도면."
단번에 늘어난 돈에 만족하며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필레는 운현과 헤스티아, 미야, 바제트의 모험자 카드를 받았다. 그녀의 조작에 의해 코어들이 사라져 모험자카드에 스며들자 운현은 자신의 눈 앞에 레벨 업 메시지창이 떠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자. 끝났어."
"감사~ 그럼 나중에 봐~"
"응~ 데이트 잘해!"
"데이트 아니라고!"
"아하하핫~"
놀리는 필레에게 빽 소리친 운현은 궁시렁거리며 헤스티아와 함께 방에 들어섰다. 방에 들어 온 운현이 옷을 벗는 것을 바라보던 헤스티아는 폴짝 뛰어 그의 반나신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응? 왜?"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아서요. 음... 잠깐만 이러고 있으면 안되나요?"
"안될건 없지."
시간을 확인한 운현은 자신의 품에서 애교를 부리는 헤스티아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있는 힘껏 그를 끌어안고 그의 살에 얼굴을 문대던 헤스티아는 팔에 힘을 풀고 그의 곁에서 떨어진 후 살짝 볽을 붉히고 베시시 웃었다.
"헤헤~ 나머지는 이따가 밤에! 오늘 꼭 와야해요!? 알았죠!?"
"노력할게."
"...온다고는 안해주시네요."
"아니. 그게 나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니까. 아무튼 쓸데없는데 들리지는 않을거니까 걱정하지마."
그녀는 그의 대답이 조금 아쉬운 듯 했지만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헤스티아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온 운현이 테이블에 앉아 홍차를 한잔 주문해 마시고 있을 때 길드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 길드장이 미쳤다!"
"드레스라니! 미친듯!?"
"왜! 뭐!?"
모험가들의 야유에 가까운 환호성에 밝은 목소리로 답한다. 운현은 그들의 환호성에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가 화들짝 놀랬다.
"...너 왜 그러고 입고 나왔냐?"
"응? 그 전에 해 줄 말은 없으신가?"
긴 머리를 곱게 틀어 묶고 엷게 화장까지 했다. 긴 귀에는 은색의 귀걸이가 찰랑거리고 아름다운 목에는 검은색의 밴드형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항상 입고 다니는 망토와 슈츠 대신 은백색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예쁘네. 잘 어울려. 평소에도 이렇게 입고 다니지 그러냐?"
"그,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니까 좀 부끄럽구만. 아하하하! 더 해! 더 해!"
운현의 칭찬에 잠시 당황한 상아는 곧 그녀 특유의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가슴을 탕탕 쳤다.
"에휴. 됐고. 왜 그렇게 입었어?"
"아. 이렇게 안입으면 피스나가 귀찮게 굴거든. 그래가지고 시집은 가겠냐. 어쩌고 저쩌고. 자기는 결혼했다고 아오... 나보다 나이도 어리면서."
"그러냐... 그렇다면 뭐. 가자."
"어? 나는 에스코트 안해줘?"
"해줬으면 좋겠어?"
"응."
고개를 끄덕이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녀가 바라보자 운현은 피식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
"하! 거절한다!"
"이 자식이!?"
"크크크. 농담이야. 자. 가실까요? 레이디?"
"후후. 그 에스코트. 받아주지."
엎드려 절받기에 불과했지만 상아는 그럭저럭 만족한 듯 운현의 팔을 잡고 나갔다. 그들이 나가는 것을 본 모험가들은 휙 필레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요?"
"필레! 너 지금 여기서 일할때야!? 안따라가!? 저러다가 뺏기는거 아냐!?"
"빼, 뺏기고 자시고 제 남자도 아닌데요. 뭐..."
필레의 힘없는 말에 모험가들과 길드원들은 한심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고개를 푹 숙인 필레가 한숨을 내쉬자 어느새 나타난 실비아는 필레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필레씨... 포기하면 그 순간 시합은 끝나는거에요."
"그, 그런거 아닌데... 아이 참..."
실비아의 말에 필레는 부끄러워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래간만에 입어서 되게 불편하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은 것이 영 어색했는지 상아는 엉거주춤 걸으며 투덜거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피식 웃은 운현은 그녀가 발을 멈추자 눈 앞의 커다란 건물을 보았다. 2층짜리 큰 건물의 앞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기계들이 넘쳐났다.
"이게 뭐야?"
"피스나가 만든 물건들. 이건 뭐라더라? 캡슐인가? 그런 거라는데?"
"캡슐? 그게 뭐야..."
"어. 생명 유지장치라고 정신을 잃은 사람들의..."
"아이고~ 이게 누구야? 상아 아냐!?"
상아가 장치를 보며 설명하려고 할 때 안에서 밝고 기운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에 상아와 운현이 시선을 보내자 안에서는 머리를 곱게 묶어 틀어 올린 작은 키의 여인이 후다닥 뛰어나왔다. 기름과 얼룩이 잔뜩 뭍어 있는 앞치마와 검은색 셔츠, 긴 바지를 입은 화장기 없는 소녀의 등장에 상아는 뒤로 휙 물러났다.
"나! 드레스 입었어! 만지지마! 기름 뭍어!"
"아아! 그래! 그렇게 입고 다니니까 얼마나 이뻐? 거봐. 이 아줌마 말대로 하고 다니니까 이렇게 훤칠한 남자도 데리고 왔구만~! 어른 말 들어서 틀릴 거 하나도 없다!"
"너 나보다 어리잖아!"
"결혼 안하면 다 애야. 이렇게 남자랑 살 붙이고 정 붙이며 이런 일~ 저런 일~ 하면서 살아보고 해야 이게 어른이 되는 거지."
아무리봐도 상아와 동갑, 혹은 좀 더 어려보이는 주제에 저렇게 말하니 되게 이상했지만 운현은 외견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허리에 척 손을 올리고 상아에게 설명해주는 그녀에게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운현이라고 합니다."
"어휴~ 그래요. 반가워요~ 피스나라고 해요. 우리 상아랑은 오랫동안 알고 지냈었죠. 우리 상아 잘 부탁드려요~"
남자를 싫어하는 것 치고는 굉장히 살갑다. 그녀의 반응에 운현이 힐끔 상아를 보자 상아는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저기 피스나. 이 남자는..."
"우리 상아가 속 많이 썩이죠? 나이는 되게 먹었는데 하는 짓은 완전 애라 힘들거에요. 그래도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 속은 되게 여리고 착한 애니까. 자자. 들어와요. 마침 잘 됐네. 이 아줌마가 맛있는 미트파이를 만들어놨거든~"
상아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운현은 힐끔 상아를 보았다.
"누가 여려?"
"...하아."
운현이 싱글거리자 상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상아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또 처음이다. 운현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상황에 키득거리며 상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자. 그럼 들어가볼까?"
"너랑 손 잡는 건 좋은데... 으. 속이 쓰리다. 이래서 망설였던건데..."
"하하하! 가자고. 맛있는 미트파이 준다잖아."
상아와 함께 안으로 들어 선 운현은 바깥보다 더 혼잡스러운 내부에 놀랬다. 정체 불명의 기계장치부터 마법이 걸린 도구들까지.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상아의 말만 아니었다면 이것저것 건드려 봤을 정도로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그것들이 쌓여 있는 방을 지나 안쪽으로 더 들어간 운현은 바깥과 다르게 굉장히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내부에 놀랬다.
"일반 가정집 같은데?"
"응. 피스나는 여기서 먹고 자면서 일해. 2층에 남편이 있거든."
"그?"
"응."
"어서 와요~ 피스나 아줌마의 특제 미트파이는 한번 먹으면 절대 잊을 수 없답니다~"
생글 생글 웃으며 피스나는 부엌에 마련된 테이블에 따뜻한 기운을 내뿜는 미트파이를 올려 놓은 후 쓱쓱 잘라 빈자리에 올려놓았다. 미트파이 외에도 커다란 고기구이라든가 야채 볶음이라든가, 몇종류의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차려 놓은 그녀는 자리에 앉은 후 운현과 상아에게 손짓했다.
"어서와요. 어서와."
"알겠습니다. 이거 초면에 굉장히 대접받는 것 같아 죄송하네요."
"별 말씀을 다하시네요~ 우리 상아랑..."
"아. 저 상아랑 그런 사이 아닙니다. 직장 동료에요. 제대로 소개를 못했네요. 모험가 운현이라고 합니다."
"으음... 그랬나요? 이 아줌마가 실수를 했나보네... 미안해서 어쩌죠?"
"하하. 괜찮습니다. 사실 제가 더 기분이 좋은걸요? 이렇게 미인인데다가 성격도 좋고 착하기까지 한 상아 길드장님과 엮어주시니 영광이네요."
'이게 점수를 따기 좋겠군.'
솔직히 말하자면 상아에게 나쁜 감정은 별로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협박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또 그녀 덕분에 카를로스에게서 죽을 위기까지 넘어섰다. 얼굴도 미인인데다가 하는 짓도 어떻게 보면 상당히 귀여운 만큼 그는 아무렇지 않게 피스나에게 말했고 그녀는 곧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거 봐~! 아줌마가 그랬지? 이렇게 입고 좀 얌전하게 다니면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을거라고?"
"...너 제정신이야? 아니면 진심?"
상아는 피스나의 말은 귓등으로 넘긴 채 상아는 당황하며 운현에게 속삭였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히죽 웃기만할 뿐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장난이지?"
"글쎄~"
"놀리지마."
"가끔은 나도 좀 괴롭혀보자."
늘상 상아의 진심어린 장난에 휘말려야 했던 운현은 키득거리며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런 둘을 본 피스나의 얼굴에 히죽거리는 웃음이 걸리자 상아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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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l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찾아왔어? 결혼 승낙 받으려고? 아유~ 이 아줌마는 무조건 찬성이야! 이렇게 훤칠한 사람이 착하기까지 하네. 후후. 설거지 도와줘서 고마워요~ 상아야. 네 인생에 이런 남자는 다시 오지 않을거야. 꼭 잡아. 내가 말했지? 남자는 말이야. 입맛을 잡으면 끝이라고! 이제부터 매일 나한테 와서 요리 배워. 내가 요한을 어떻게 잡았냐면..."
미트파이는 맛있었고 다른 음식들 역시도 맛있었다. 상아에게는 힘들었지만 처음으로 상아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운현에게는 즐거운 식사시간이 끝나고 운현은 피스나를 도와 설거지까지 해버렸다. 그것만으로도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피스나는 계속 상아에게 운현을 잡으라고 말했다.
"하하하!"
"웃기만 하지 말고! 야!"
"상아야. 그렇게 나오면..."
"아오! 진짜! 오늘은 일때문에 온거라고! 일때문에!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냥 평상복입고 올걸..."
평상복을 입고 찾아왔을 때보다 더 난감한 상황에 상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은 운현은 담담한 어조로 피스나에게 말했다.
"상아의 말대롭니다. 오늘은 일 때문에 찾아뵌거에요."
"일? 무슨 일? 뭐 의뢰하려고? 내가 상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뭐든 만들어 줄..."
"피스나씨. 시장 선거에 출마하실 예정이시죠?"
"......"
운현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이 나타나자 피스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피스나는 피식 웃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왜요?"
"야..."
"잠깐만."
"그건... 제가 운현씨에게 말해 줄 필요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피스나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리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담담히 말했다.
"요한씨... 남편이시죠? 요한씨를 위해서인가요? 악신의 저주에 걸린..."
"운현씨. 초면에 그런 걸 물어보는 것은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처음 봤을 때 지었던 푸근한 웃음이 아니다. 분노를 감추기 위한 웃음이 피스나의 얼굴에 떠오르자 운현은 작게 고개를 숙였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일 이야기에 포함되어있는 것이라서요."
"하아... 뭔가요? 당신도 이제 포기하라고 말할 생각인가요? 미안하지만..."
"아니요. 저는 피스나씨를 도우러 온 것 입니다."
"무슨...? 절 어떻게 돕는다는 건가요? 죄송하지만 운현씨. 운현씨도 모험가라고 했죠? 이래뵈도 전 꽤나 고레벨의 제작자입니다. 당신이 아니더라도 코어와 몬스터 사체를 가져다 주는 사람은 많아요. 이렇게 늙은데다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편이 있는 저 대신 저기 있는 노처녀 상아에게나 신경을 써주시겠어요?"
운현의 말에 피스나는 상냥한 어조로, 하지만 확실히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아마 이런 식으로 접근을 한 남자나 세력이 꽤나 있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보였던 호의적인 태도가 사라지고 적대적인 분위기로 그녀가 바뀌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 이제 20레벨밖에 안된 모험가입니다. 제가 마석을 가져다 드려도 피스나씨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겠죠."
"...그럼요?"
"피스나씨를 시장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
운현의 말에 피스나는 화들짝 놀라며 상아를 바라보았다. 장난기가 사라진 그 둘의 모습에 만족한 상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피스나는 놀란 얼굴을 진정시키더니 피식 웃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한 남자들도 많았죠."
"죄송합니다만 저는 좀 다릅니다. 진심이니까 말이죠. 저를, 그리고 모험가 길드를. 나아가 던전 도시를 위해서 피스나씨를 시장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운현의 담담하지만 진지한 목소리에 피스나는 살며시 상아를 보았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피스나는 한숨을 푹 내쉰 후 말했다.
"미안하지만 운현씨.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제가 아무리 세상 물정에 어둡다지만 그래도 한 조직의 장입니다. 지금 국제 정사는 흔들리고 있고 던전 도시는 그 흔들림에 맞서 싸울 힘을 바라고 있어요.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시나요?"
"네. 던전 도시를 연구 중심의 도시로 만들어 악신의 저주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할 방법을 찾는 것이잖아요? 틀렸나요?"
"맞습니다. 그러니 먼저 말씀드리지요. 저는 전쟁에는 관심도 없고 돈 버는 일은 더더욱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악신의 저주를 치료하는 것 뿐이에요. 제가 시장이 된다면 저는 던전 도시의 이익보다는 그것을 위해서 연구를 할겁니다. 그것을 알기에 제가 번번히 시장 선거에서 떨어지는 것이겠죠. 그런데도 저를 시장으로 만들겠다는 건가요?"
"예."
단호한 그의 말에 피스나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고 상아를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향해지는 그녀의 시선에 상아는 그저 어깨만 으쓱일 뿐 이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제가 연구하는 방향을 바꾸거나 다른 것을 만들게 하려고 이런 저런 제의를 했었지요. 그 중에는 저를 던전 도시의 시장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후후. 그래요.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죠? 대량학살 병기인가요? 아니면 순간이동기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아뇨. 딱히 원하는 건 없는데..."
"그게... 진심인가요?"
피스나의 눈에 더더욱 의심이 담겼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람처럼 위험한 사람은 없다. 피스나가 자신을 경계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제가 딱히 피스나씨에게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대량학살 병기... 근데 그거 만드실 수 있으세요?"
"만들수야 있죠.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만약 요한씨를 깨우는 대가로 그것을 만들어달라고 한다면?"
"그래도 만들지 않을거에요. 요한이 가장 싫어한 것이 전쟁이니까요. 전 그를 사랑하고 그의 신념과 의지를 존경해요. 요한은 의사였죠.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료하는 진짜 의사. 그와 처음 만난 것도 전쟁터였어요. 그 당시 저는 제작자가 아닌 전사였었답니다. 그런 저를 치료해주면서 그는 어째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인지,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분노로 울었어요. 그때 저는 그에게 반했습니다. 저를 반하게 하고, 또 사랑하게 만든 그의 의지를 어기고 싶지 않아요. 죽고 싶은 자들은 절벽에 떨어져 죽든지 하면 되는 것이에요. 왜 전쟁이라는 허무한 힘자랑을 해야 하지요?"
"아르토리우스가 시장이 되면 전쟁이 납니다."
"알아요. 그렇지만 대세는 어쩔 수 없죠. 만약 그녀가 시장이 된다면 저는 지금 생산된 무기를 제외하고 절대 무기를 만들지 않을 거에요. 다른 제작자들에게도 명령을 내릴겁니다. 제작자 연합에는 제 제자들도 꽤 있으니 어느정도는 제 명령을 따라주겠죠. 그 대신 치료하는 도구와 치료약의 제작에 힘쓸겁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에요."
"아뇨. 최대는 그게 아니죠."
피스나의 단호한 말에 운현은 차분히 말했다.
"당신이 시장이 되는 것. 그래서 전쟁을 막는 것. 그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최선의 일입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가능하다면?"
"....."
"당신이 시장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면? 당신이 시장이 되어 연구를 할 수 있고 전쟁을 막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방법이 있다면? 비록 적을지라도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당신은 도전해 볼 생각이 있습니까?"
운현의 얼굴에 담겨 있는 자신감에 피스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말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 대신, 그녀는 두근거림에 몸을 떨었다.
'요한을 위해서... 내가 연구를 할 수 있다고?'
"그게... 가능한가요?"
"물론 실패할 확률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짠 계획이 반드시 성공한다고 장담은 할 수 없죠. 하지만 만약 그게 먹힌다면 당신은 당신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상아."
"응?"
"이 남자... 뭐하는 남자야?"
그녀의 질문에 상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운현을 바라 본 후 귓가에 속삭였다.
"밝혀도 괜찮아?"
"안괜찮은데."
"어쩔 수 없구만. 이 남자는 그냥 모험가야."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뭔가 있긴 한가보네. 상아. 한가지만 더 물어볼게. 이 남자. 믿을 수 있어?"
"으음... 그러게."
피스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묻자 상아는 어깨를 으쓱인 후 능글맞게 웃으며 운현을 보았다. 그녀의 웃음에 운현은 손을 들어 상아의 볼을 꽉 꼬집었다.
"아야야! 믿어! 믿어도 괜찮아!"
"정말?"
"으으... 응. 그리고 아무것도 안해보는 것보다는 낫잖아?"
"하지만 네가 시장에 도전하는 것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건 그렇긴 한데. 왜 피스나씨를 고른거야?"
아르토리우스에 대항하려면 그나마 힘을 가진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 시장 선거에 나가는 것이 나았다. 피스나는 궁금해하며 물었고 상아 역시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둘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운현은 탁자를 톡톡 두들긴 후 말했다.
"이유는 두가지가 있어요. 첫번째. 아르토리우스가 지금까지 한 뒷공작들을 허사로 돌릴 수 있다. 두번째. 던전 도시에 있는 남아도는 힘을 전쟁이나 폭력만으로 소모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전쟁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다. 그것들만 제대로 해소할 수 있다면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아르토리우스의 시선을 돌리다니?"
"아아. 아르토리우스는 지금 상아 너를 무척이나 경계하고 있지. 그쪽에서는 지금 네가 시장으로 나오기로 알고 다른 이들에게 작업을 걸고 있을 거야. 너에 대한 흑색선전 같은거... 하지만 네가 출마하지 않고 피스나씨가 출마하게 된다면 아르토리우스의 뒷공작은 일단 무용지물이 될 수 있어."
"흑색선전. 으음... 그러고보니 요새 제작자 연합 내부에서 상아에 대한 평가가 많이 떨어진 것 같던데. 그것 때문인가?"
운현의 말에 피스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것이 있는 줄 몰랐던 상아가 눈을 휘둥그래 뜨자 운현은 피식 웃은 후 말을 이어나갔다.
"그 외에도 지금은 전쟁만이 살길이다. 강한 힘을 가진 자가 유리하다. 라는 식으로 대세이고, 또 많은 이들이 찬성을 한다고는 하지만 대세라는 것 만큼 하찮은 것은 없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예측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어. 그것은 적절한 선동과 날조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고. 그리고 대세에 휘말려서 자신의 의견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모두가 전쟁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되게 노골적으로 말한다. 너. 그 말은 유세나 사람들간의 교섭을 거짓으로 하자는 거야?"
"오오. 거짓은 곤란하지. 그건 나중에 후폭풍이 크거든. 그냥 약간 오해를 하게 만들자는 거야."
"오해라면?"
"뭐,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피스나씨가 시장이 된다면 용병 연맹의 무구들이 좋아 질 수 있다. 라거나, 상인 조합이 수송을 하기 위한 장비들에 추진 장치가 붙을 수 있다. 라거나."
"가능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꽤 시간이 걸려. 절대 일 이년 안에 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그거 잘됐군요. 혹시 이번에 만들고 있는 것 중이나 연구하다가 멈춘 것 중에 그런 것이 있나요?"
"시험작이라면... 전전 시장이 요청해서 만들던 것이 있엇는데... 수송용 마차야. 안정성을 올리며 더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도록 하게 하는게..."
"그럼 그것의 발표회를 가지죠. 그때 좀 무리를 해서라도 성능을 높이고 이것 저것 추가적인 기능을 붙여 발표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아직 시간과 예산이 부족해서 제대로 된 것을 만들지 못했고 양산이 힘들지만 양산만 가능하다면 수송에 혁신을 가져 올 수 있을 거라고. 음... 뭐 이름은 나중에 짓자."
"아니아니. 그런 것으로 가능해?"
"응. 일단은 지지율을 높이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게 중요하니까.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바라고 있는 이들에게 어필을 할 수 있지. 대세는 전쟁을 하자이지만 그 관심을 다른 곳으로 어느정도만 돌려도 괜찮아. 피스나씨. 지금까지 신제품의 발표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것 역시 쇼입니다. 쇼라면 화려하게 하는게 좋겠죠. 아. 상아. 시장 선거는 어떻게 이루어진다고 했었지?"
"각 조직의 장. 길드 간부 열명. 시청에서 선발하는 각 조직원 40명. 이들이 모여 투표를 하고 그 개봉을 마찬가지로 시청에서 선발한 각 1명의 길드 간부와 시장이 같이 해."
"그래? 그럼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군. 난 또 시의 전원이 하는 줄 알았지. 아무튼 일단 그 방법대로 가시죠."
"잠깐만, 두번째의 설명은 안했잖아? 힘을 해소할 수 있는 방향을 바꿀 수 있다니? 그건 또 뭔데? 사람들이 바라는 건 던전 도시의 힘을 강하게 하는 거라고!"
"그 전에 내가 묻지. 사람들이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그것을 막을 수 있는 힘을 원한다고 누가 그러디?"
"그건... 밖에 나가보면 그런 분위기가 가득하다고. 술집을 가봐도 그렇고... 다들 전쟁이 나기 전에 우리가 힘을 보여야 하지 않느냐. 라는 얘기를 하던데?"
상아의 말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과연 그럴까? 아니. 당선예측이라는 그 정보는 어디서 나온거야?"
운현의 질문에 상아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청... 에서."
"그 대상은? 당선 예측을 위해 조사와 설문을 한 대상은? 그게 어떤 집단이지?"
그는 당황하는 상아와 피스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결국 이것 역시도 선동과 날조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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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l
"하지만 시청이라고! 시를 담당하는 이들이 그런 짓을 했다는거야!?"
"너 시장 선거 나간 적있지. 된 적도 있어?"
"응."
"네가 시장이 됐을 때 설문 조사는 어떻게 시행됐고 지문은 어떻게 작성됐고 답안은 주관식인지 객관식인지, 그리고 누구를 대상을 했는지. 그 모든 것을 컨트롤했었어?"
"그런건 아닌데..."
"설문조사만큼 위험한 것은 없지. 대의를 설문과 통계로 읽는다? 이것만큼 바보같은 짓은 없는거야."
상아의 말에 운현은 빙긋 웃었다.
"물론 그게 그나마 대중적이고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기는 하지. 하지만 통계라는 것은 결국 설문지를 주고 그 설문에 응한 자들의 답변만 확인할 수 있는거라고."
운현은 한국의 여당이 했던 통계를 떠올리며 차분히 말했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자고. 도시 전체의 인원을 대상으로 설문을 했다고 치자. 강제성이 없는 설문이니 생업에 종사하거나 다른 일이 있는 사람은 그 설문을 안할 수 있지. 즉, 설문을 할 때의 시간대 역시도 중요해. 모험가들이 던전을 탐험을 많이 하는 시간대, 그리고 용병들이 전투를 치루러 나간 때. 그때 전 도시의 인원에게 설문을 했다면 설문의 대상은 누가 될까? 그리고 그 설문의 주 내용이 칼을 버리고 평화롭게 살아가자. 제조를 위한 연구를 통해 도시를 발전시키자. 이런 내용이라면? 답변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또 답변의 보기를 다섯개로 만들었을 때 매우 긍정, 긍정, 모르겠음, 부정, 매우 부정. 이렇게 나눴을 때 많은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할까?"
"그건..."
그의 빠른 질문에 상아는 대답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당연히 도시 내부에 있었던 이들의 취향에 맞는 답변이 많을 수 밖에 없겠지. 무기를 들고 전투를 하러 나간 이들이 없는 사이에 벌어진 설문조사니까 말야. 그 외에도 많아. 설문과 통계라는 것은 '언제'와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를 입맛대로 조절 할 수 있는거라고."
그의 말에 상아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한참 침묵하고 있던 피스나는 운현을 보며 천천히 물었다.
"그럼... 설문이 조작되었다는 건가요?"
"아뇨. 조작은 아니겠죠. 하지만 방식의 차이일 뿐이에요. 어떤 방식으로 통계를 내었느냐에 따라 다른거니까요."
피스나와 상아는 입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
"통계를 내는 방법은 뭐 그렇다고 치고. 아무튼 방법에 따라서 여론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용병 연맹이 대세라는 것도 쉽게 믿을 수 없겠죠. 사람은 연약한 존재. 만약 커다란 흐름이 있다면 쉽게 그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쟁인데?"
"용병 연맹이 전쟁을 할거라고 이야기했어?"
"응? 그건... 아니지만."
용병 연맹이 지금 내세우고 있는 자신들의 입장은 전쟁을 하자! 라는 것이 아니었다. 국제 정세가 이러하니 그에 맞추어 강한 자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 말이 전쟁을 대비하자 라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상아가 떨떠름히 말하자 운현은 그녀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거봐."
"그, 그렇지만 그들의 입장이!"
"사람은 한 입으로 얼마든지 두말을 할 수 있지. 아니, 아르토리우스가 시장이 되어 던전 도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해봤자 나중에 그녀가 시장이 되면 '상황이 이러하니 전쟁을 해야겠습니다!'라고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어."
운현의 말에 상아는 복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순진하네."
"수, 순진!?"
"한 조직의 장치고는 너무 무르구만."
"...아니 근데 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거야?"
"응? 어... 그게. 그런게 있어."
상아와 둘이 있을때라면 말해주겠지만 지금은 피스나도 있는 상황이다. 한국의 정치판을 보고 인터넷에 달리는 댓글들만 봐도 정치판이 개노답이고 공약이라는게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운현은 그녀의 질문에 떨떠름히 답했다.
'거기에 만화책도 추가.'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할 일 없을때 만화책에 몰두했었던 기억을 떠올린 운현은 볼을 긁적거렸다.
"아무튼 중요한건 그게 아니지. 중요한 것은 선거에서 승리하는 거라고. 자. 그럼 이제 두번째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지. 던전 도시에 남아 도는 힘을 전쟁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쓸 수 있다는 것. 전쟁을 준비해 온 상인 조합이나 용병 연맹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용병 연맹이 내세운 입장을 이용한다면 그건 충분히 가능하지."
"어떻게?"
"국제 정세가 지금 위험하니까. 그 국제 정세에 맞추어 우리는 기술력을 강화하여 내실을 단단히 다지겠다. 그것을 어필하면 되는거야. 기술력을 높임과 동시에 그 기술력과 생산품을 수출하여 도시의 힘을 강화시키고 도시를 확장한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이에 대한 반발로 군사를 보낸다면? 그것을 막기 위해 용병 연맹이 있는 것 아닌가? 라고 이야기를 하면 되는거야."
"물론 그렇긴 하지만 용병 연맹이 받아들일까?"
"받아들이게 해야지. 애초에 용병 연맹이 던전 도시에 자리를 잡은 이유가 뭔데. 지금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초기에 용병 연맹의 존재 의의는 던전 도시를 수호하는 것이었다고. '전쟁'을 일으키자. 가 아니야. 이런 어필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잘 먹힐 수 있어. 용병 연맹이 의도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관심이 전쟁으로 쏠리게 되었지만 그것에 오히려 불안해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그런 이들을 하나 둘 씩 끌어들인다면 충분히 피스나씨가 시장의 자리에 당선되는 것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야."
"끄응... 이제 난 모르겠다. 피스나. 어떻게 생각해?"
"....."
운현의 말을 잠자코 듣던 피스나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운현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테이블 밑의 손에서는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운현씨."
"네."
"생각보다 야비하네요."
"...야, 야비!?"
"네. 지금 운현씨가 하고자 하는 방식은 협잡이며 선동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상아와 다르게 피스나는 운현이 어떤 방식으로 선거를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인지 그 본질을 깨달았다. 그녀의 말대로 운현은 선동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그로 인해 지지율을 높인 후 나중에 생길 일에 대한 책임은 회피하자. 라는 것이었다.
'실팬가...'
피스나의 질문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다면 부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녀의 반응에 따라 앞으로의 계획을 모조리 수정할 지도 몰랐기에 운현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고 피스나는 입가의 미소를 더더욱 짙게 그렸다.
"아주 야비하고, 치사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믿을만 하네요. 좋아요. 당신의 방식을 따르겠습니다."
"엑!?"
"음? 뭔가요? 그 소리는?"
"아, 아니 싫다고 하려는 것 아니었나요?"
"그럴리가요."
피스나는 처음 봤을 때의 푸근한 웃음을 얼굴 가득 지으며 운현에게 말했다.
"오히려 안심이네요. 정정당당하게 진실만 가지고 승부하겠다. 진실은 통하기 마련입니다. 라는 거짓을 말하지 않고, 저에게 오히려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는게 말이에요. 최소한 아군은 속이지 않으신다는 것이잖아요?"
"뭐...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오픈을 해야겠지요?"
"어머? 그럼 같은 편이 되어도 속일 수 있다는 건가요?"
"안하겠다고는 못하겠는데요."
애초에 이미 알리지 않은 것이 꽤 많은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런 그를 향해 까르륵 웃은 피스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운현씨."
"네?"
"잠깐 밖에 나가주시겠어요? 상아와 둘이 할 얘기가 있어요."
"어... 무슨 말씀을 하시려구요? 제가 속인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후후후... 선거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러는거니까... 이해해주시겠어요?"
피스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운현은 그 말에 거역할 수 없는 힘을 느꼈다. 그가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가자 피스나는 다 식어빠진 홍차를 홀짝거리는 상아를 향해 말했다.
"상아."
"왜?"
"저 남자에게 관심 있어?"
"푸웁!? 뭐!? 뭐!? 가, 갑자기 그건 왜!?"
마시던 홍차를 뿜어내며 상아는 크게 당황했다. 아까부터 자꾸 운현이랑 엮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때는 운현과 같이 자신을 놀리는 기세가 강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정말 진지한 얼굴로 그녀가 묻자 상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망설이기 시작했다.
"그게... 과, 관심 있으면 뭐? 운현은 인간이야. 수명은 고작 100년 밖에 되지 않는다고. 내 남은 수명은 적어도 400년 이상인데... 그리고 나이 차이도 꽤 나고."
"상아."
진지한 그녀의 말투에 상아는 입을 다물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피스나는 차분히 물었다.
"네 스승님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어. 그리고 네가 아직도 네 스승님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도."
"아, 아니거든!? 그런 인간 이제 잊은지 오래거든!?"
"그런데 왜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가 되는 것을 거부하지?"
"아니라고! 나도 다른 남창들이랑 많이 자고 한다고!"
상아가 얼굴을 붉히며 빽 소리치자 피스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요한이 저렇게 되고, 난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한번이라도 더 사랑한다고 말할껄, 한번이라도 더 고맙다고 말할걸. 한번이라도 더 그에게 응석을 부릴걸. 한번이라도 더 그에게 안길걸."
"....."
요한의 이름이 나오자 상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피스나는 그녀의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요한과의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린 것일까? 피스나는 가슴에 주먹을 꽉 쥐고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그 눈물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지난 시간동안... 요한이 저렇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어. 아침에 나가지 말 것을. 의뢰따위 나중에 받을 것을. 아침에 일어난 그에게 웃어보일 것을. 그가 아침식사를 하게 할 것을. 출근하지 말고 같이 있어달라고 할 것을... 그가 쓰러지는 것 조차 보지 못한 나는... 나는..."
"피, 피스나."
"...후우우..."
한참이나 자책하던 피스나는 눈을 꼭 감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녀의 들썩이던 어깨가 천천히 잦아들자 상아는 작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그것을 받은 피스나는 얼굴을 닦은 후 말했다.
"운현씨가 인간이고 한정된 시간만을 살 수 있다면... 그렇다면 오히려 더욱 후회가 없어야 해."
"아니 그러니까... 나는 운현과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까."
"그렇지만 관심 있지?"
"......."
스승님 이후로 다른 남자에게 이렇게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남창들과의 섹스는 얼마든지 해보았고 다른 이들에게 안겨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때 그때일 뿐. 그들과의 감정은 그리 커지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처음에는 필레와 친하게 지내는 것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하지만 그가 스승님과 같은 이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과연 그런 걸까?'
상아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마음을 아직도 모르겠다. 좋아한다?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운현이 자신의 마음 한 구석에 있다는 것이었다. 일을 할 때나 다른 사람과 만날 때, 식사를 할 때, 밥을 먹을 때, 잠들기 전에. 가끔씩 그와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작게 키득거릴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분명히 따뜻하고 소중한 기억이었다.
110====================
deal
"흐음..."
피스나에 의해 밖으로 쫓겨나게 된 운현은 신기한 기계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때웠다. 평상시에는 볼 수 없는 물건들이 많았다. 머리에 쓰는 걸로 보이는 헬멧과 선글라스 같은 물건. 전선과 비슷하게 생긴 수많은 선들. 전자시계처럼 생긴 팔찌. 전신 슈트 등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며 몇가지는 건드려보던 그는 상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나오자 그녀에게 물었다.
"얘기는 끝?"
"응? 아. 응."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운현은 손에 들고 있던 헬멧을 자리에 놓으며 물었다. 그녀 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운현을 본 상아가 곧 원래의 표정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피스나가 찾아. 들어가봐."
"응."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내용을 알 필요는 없어보였다. 운현이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피스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운현씨. 저는 운현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어요. 제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설명해주시겠어요?"
"뭐 그거야 감사할 따름이죠. 자세한 것은 추후 설명을 하겠습니다만... 일단은 쇼입니다. 그리고 피스나씨는 피스나씨를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는 간부들과 길드원들의 명단을 작성해주세요."
"뒤의 것은 그렇다고 치고... 쇼는 뭐에요?"
"말 그대로 쇼입니다."
"어멋!? 전 유부녀라구요."
싱글싱글 웃으며 양 손으로 가슴을 가린 피스나의 모습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죄송하지만 임자 있는 여자에는 저도 관심이 없습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아까 새로운 마차에 대한 소개를 할 생각이라구요. 그것에 대한 정보를 저에게 넘겨주세요. 적절한 프로듀싱 후에 말씀드리죠. 그 마차에 제가 원하는 기능을 달 수 있을까요? 완벽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저 구색만 맞추면 되는 거니까요."
"헤에~ 재밌는 아이디어가 나오겠네요. 그런 치사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운현씨라면."
"치사하다니 좀 듣기 그러네요. 세상을 살아가는 진리를 잘 알고 있다고 해주세요."
"후후후후... 좋아요. 그럼 현자 운현씨라고 불러드릴까요?"
장난스럽게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현자라. 안 그래도 현자의 제자들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현자라는 타이틀까지 달면 더 골치아파질 것 같기에 운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좀 부담스럽네요.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피스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맞잡으며 악수를 한 피스나는 손을 뗀 후 운현의 앞으로 다가갔다.
"왜요?"
"저희 상아를 잘 부탁드립니다."
"에? 아. 예. 저희 길드장이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상아와 친하시죠? 전 상아보다 어리지만... 상아를 제 딸과 같이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는 나이에 비해서 생각하는 것이 어리고 행동도 미숙하죠. 그런 상아를 잘 부탁드려요. 운현씨가 옆에 있어준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긴, 그 나이 치고는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만약 모험가 길드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것만 아니었다면 여기저기 흔들렸을 것이다.
'아니... 이미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알게 모르게 용병 연맹이나 시청, 그리고 다른 조직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코어와 몬스터 사체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모험가들의 위치가 너무 낮다는 것에 운현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했고 피스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운현씨?"
'설마 피스나도?'
개인의 친분과 조직의 이득을 별개라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피스나에게는 무엇보다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피스나씨. 이건 개인적인 질문인데... 괜찮나요?"
"뭔가요?"
"요한씨는 지금 살아계신거죠?"
"...네. 제가 만든 생명 유지 장치 안에서 살아 있어요."
"그것의 작동원리를 대충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자세한 것을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4계층 몬스터 중에 몬스터들의 시체로 이루어진 플레시 골렘의 사체와 1계층의 마인을 잡았을 때 얻을 수 있는 마안석, 그리고 주기적으로 코어의 마력을 주입하는 것으로 작동하고 있어요."
"코어 외에는 소모품이 없다는 건가요?"
"네. 그건 왜요?"
"어떤 코어라도 상관없나요?"
"뭐... 그렇죠. 하지만 일정 양의 마력을 채우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아서..."
"알겠습니다."
운현은 빙긋 웃으며 피스나와의 이야기를 끝마쳤다. 운현이 왜 그런 것을 물어봤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피스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운현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말씀하신 것은 상아를 통해서 전달드릴게요~!"
"네. 부탁드립니다."
'코어를 이용해서 요한의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는 장비를 작동시키는 것이라면... 그녀라고 해서 아니라는 보장은 없지.'
모험가 길드가 맘만 먹으면 코어의 가격과 몬스터 사체의 가격을 확 올려버릴 수 있었다. 제작자 연합? 제작자들이 아무리 잘 만든다 치더라도 그만큼의 기술력이 다른 나라에 없다고는 보장할 수 없었다. 아니, 모험가 길드가 사체와 코어를 독점하고 모험가 길드 내에 설립된 제작자 조직을 만들어 그들에게만 공급한다면 제작자 연합따위 한번에 무너트릴 수 있을 것이다.
상인 조합? 상인들은 제작자 이상으로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이득을 원하는 상인은 얼마든지 있다. 그들에게 몬스터 사체와 코어를 거래할 수 있도록만 해주더라도 지금의 상인 조합은 단번에 무너질 수 있었다.
"용병 연맹이 제일 크군."
운현은 용병 연맹을 떠올리며 싸늘히 웃었다. 가장 의미가 없는 것은 바로 용병 연맹이었다. 던전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그들이 그래서 던전 도시의 주축 중 하나라고?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무력은 모험가들로도 충분하고 원한다면 돈을 주고 부릴 수도 있다. 용병은 돈으로 자신의 무력과 생명을 파는 이들. 결국 몬스터 사체와 코어를 독점할 수 있는 이상 의미는 없지.'
던전 도시의 초기 계획이고 이념이고, 그것은 초기의 일이다.
'흠...'
어찌할 것인가. 운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끼어들어 이것을 지적한다면 상당한 피바람이 던전 도시를 휩쓸것이다.
'던전 도시를 탐내는 나라는 많아. 개중에서 하나만 잘 고르더라도 성공할 것 같은데...'
용병 연맹과 상인 조합, 그리고 제작자 연합까지. 모험자 길드가 이 던전 도시를 완전히 차지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했다. 그것을 상아에게 제시해서 실행하는 것이 나을까? 그렇다면 전쟁따위는 얼마든지 막을 수 있고 던전 도시의 위상 역시도 높일 수 있었다.
'몬스터 사체와 코어로 만든 물품은 강력하지. 만약 모험가 길드가 던전 도시를 차지하게 된다면 다른 나라들 역시도 몬스터 사체와 코어를 빌미로 압박을 할 수 있으니... 제대로 된 상회만 고르면 대륙을 지배하는 것도 문제는 아니겠군.'
"피스나와 이야기는 끝났어?"
"응. 고생 많았다. 어떡할래. 들어갈까?"
"으음... 저기. 우리 나왔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자."
"그럴까? 괜찮은 곳 알아? 아니. 그보다 드레스 코드를 맞추려면 좀 분위기 있는 곳으로 가는게 낫겠군. 저번에 필레와 갔던 식당이 분위기가 아주 좋던데 그리로 가자."
"응. 알았어. 그리로 가자. 맛 없으면 알지?"
"먹어보니까 난 맛있던데. 입맛에 안맞으면 뭐, 나만 맛있게 먹도록 하지."
"자꾸 까분다? 누나한테 혼 좀 나볼래?"
운현이 느긋하게 말하자 상아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작은 주먹을 들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키득거린 운현은 앞서 걸어나갔고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상아는 아까 전 피스나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붕붕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괜찮았어."
상아는 나름 만족했는지 냅킨으로 작은 입술을 쓱쓱 닦았다. 그녀를 향해 히죽 웃은 운현은 후식으로 홍차와 쿠키가 나오자 홍차를 한모금 마신 후 말했다.
"야."
"왜?"
"좀 궁금한게 있는데 말야. 솔직히 이거 듣고 기분나쁠지는 모르겠지만. 모험가 길드는 왜 이런 식이야?"
"다짜고짜 무슨 소리야?"
"으음... 그러니까. 왜 몬스터 사체와 코어를 독점하지 않는건데? 몬스터 사체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코어는 던전의 몬스터만이 나오는 거잖아. 모험가들 외에는 사체와 코어를 구할 수 없는데 왜 이런 불편한 짓을 하는거지? 막말로 모험가 길드가 그것을 독점한다면 시장 선거고 전쟁이고 다 필요 없이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냐?"
운현의 질문에 상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부분의 길드 간부들이 자신에게 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에 그녀는 차를 홀짝인 후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조화를 깨는 일이지. 균형을 어그러트리는 일이기도 하고."
'알고 있긴 했군.'
이 좋은 방법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닌 듯 싶었다. 운현은 이유가 궁금해 자세를 바로하고 그녀의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세상을 혼자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모험가는 구하고, 제작자는 만들고, 상인은 그것을 분배하며 용병은 모두를 지킨다. 그리고 시청은 이 모든 것을 통제한다. 이상적이지 않아? 모두가 힘을 합친다면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내 생각은 그래. 사람의 행동은 제약적일 수 밖에 없어. 그 이유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지. 사회를 구성하고 그 사회의 구성원들과 연계를 하기 위해서는 네 말대로 당연히 균형과 조화를 이뤄야겠지. 하지만 그건 이상적인 이야기일 뿐이야. 누구나 다툼을 하고 누구나 욕심을 가져. 네가 생각하는 것은 그저 이상향에 불과하지 않을까?"
운현은 기본적으로 인간불신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든지 자신을 뒤통수 칠 수 있으니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 마인드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상아의 말은 그저 허황된 이상론에 불과했다. 상아가 말하는 것은 모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가정할 때의 일이다.
"만약 제작자들이 우리는 제작을 하지 않겠다. 라고 한다면 어쩔건데?"
"설득해야지."
"좋은 주먹 놔두고 왜 골치아프게 대화라는 쓸데없는 수단을..."
"주먹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어. 운현. 잘 생각해. 우리는 몬스터가 아니야."
상아는 운현의 말에 빙긋 웃은 후 손을 뻗었다. 자신의 손 안에 가득 잡힌 운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그녀는 설교하는 어머니처럼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사람이고, 대화를 통해 가장 이상적인 방향을 결정할 수 있어."
"그런 것 치고는 카를로스에게 하는 게 좀..."
"아. 개인적으로는 나도 법보다는 주먹을 따라. 하지만 난 상아 개인이 아니니까 말야.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안되지 않겠어?"
"그러니까 네 말은 다 도륙을 내버릴 수 있는데 참고 있는거란 말이지? 허..."
"그런 말은 아닌데..."
운현은 굉장히 어이가 없었다. 전쟁을 피하자는 것도 그렇고 이런 이상론까지. 정말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고집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운현이 빤히 자신을 바라보자 상아는 피식 웃었다.
"펠리시아나 칼리아스도 똑같이 이야기하더라고. 용병 연맹이나 상인 조합이 아무리 까불어봤자 몬스터 사체와 코어를 우리가 채집하고 보낼 수 있는 이상 그들을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곤란해. 우리가 안심하고 던전을 탐험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의 도움이 크니까 말야."
"하아. 난 모르겠다. 내가 만약 길드 간부가 되면 너부터 길드장에서 끌어내릴 것 같은데. 다들 속도 좋네."
운현이 투덜거리자 상아는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야. 나도 길드장은 너무 오래 한 것 같아서 그만두고 싶은데 마땅한 인재가 없네. 길드 간부 중에 한명 뽑으려고 해도 다들 싫다고 하니까."
"펠리시아? 그 사람은 어떤데?"
"능력있지. 똑똑하고... 네가 하는 것과 비슷하게 말하고. 하지만 앞에 나서는 건 별로라고 하더라고. 자기는 흑막 노릇이 더 좋다면서."
"칼리시아는?"
"걔도 베짱있고 똑똑하고 그런데 역시 하기 싫어해. 아니 길드 간부 중에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니까?"
'감투 쓰는게 귀찮은 사람들인가 보군.'
사람들 중에는 감투를 쓰고 앞에 나서서 지휘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고 귀찮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군대에서 분대장 달고 나니 보호관심병사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상아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운현은 그녀를 보며 빙긋 웃었다.
"이야~ 피스나씨 말대로 우리 상아는 무척이나 착하네~ 다른 사람들 대신 해주는거 아냐? 그럼?"
"차, 착하긴! 그런거 아니거든!?"
"에구에구~ 착하다~ 우리 할머니 착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