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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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하하."

이정도로 선을 그어놓고 깔끔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서로 상처받을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함께하기로 한 여자들을 너무 얕본 모양이다.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의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뭐. 생각보다 너희 터프하네. 아무튼 그렇게까지 말해준다면 나야 감사할 따름이지."

운현의 입장에서는 나쁜 일은 아니었다. 저토록 아름다운 미녀들이 올곧게 자신만을 바라본다고 선언하는데 나쁠게 뭐가 있겠는가. 운현은 그녀들에게 피식 웃어주었다.

"그건 그거고, 데이트는 좀 기분 나쁜데."

"음? 왜?"

"나도 아직 못한건데."

"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비록 오늘 파티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너와 몸을 섞은 이상 나름 연인처럼 행동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거고. 헤스티아. 너는 뭐 할 말 없나?"

"예? 아, 아니 저는 그... 그게. 에헤헤~"

"으음!? 그 반응은!?"

"뭐야! 헤스티아! 너는 기분도 나쁘지 않은 건... 설마!? 벌써 했나!?"

"했네! 했어!"

"에헤헤헤헤~"

헤스티아는 볼을 긁적거리며 멋쩍은 듯 웃었다.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미야와 바제트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운현을 보았다.

"어, 음. 너, 너희들도 할래?"

"...언제?"

"내일 모레... 는 또 일이 있어서 안되고..."

"또!? 이번엔 누군가!?"

"힐더크. 신세진게 있어서 갚아야 하거든."

"으으음..."

"그럼 그 다음날! 약속이야! 꼭! 응!?"

"알았어. 그리고 그 다음날 바제트와 데이트를 하면 되겠지?"

"으음. 좀 더 빨랐으면 좋겠지만 아직 미야와도 하지 않았다고 하니... 늦게 들어 온 만큼 양보해야겠네."

뚱한 얼굴이지만 그럭저럭 만족을 한 모양이다. 두 미녀들이 그제서야 화난 기색을 풀자 운현은 탁자를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그리고... 이번 전투를 통해서 확실히 할게 있어."

"뭘 말인가?"

"앞으로 확실히 강해지지 않는다면 절대 강한 녀석과 싸우지 않는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운현의 말에 미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한 녀석과 싸워 빠른 레벨업을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한 그녀가 물었지만 바제트는 운현의 말에 동감했는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의 파티는 너무 위태위태하네. 이번 홉고블린과의 전투를 생각해도 그렇지."

"음. 만약 기름 함정이 아니었다면 파티는 전멸을 당했거나 누군가가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지도 모르지. 파티 리더로서 그런 상황을 만든 것에 대해서 사과할게."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향해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그의 그런 행동에 미야와 헤스티아는 당황하며 손사레를 쳤다.

"아니! 아냐! 내가 탱킹을 좀 더 제대로 했으면..."

"그래요! 제가 바인딩만 제대로 걸었어도..."

"후후후. 보기 좋구만. 다른 파티같은 경우는 그런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파티원들을 신뢰하지 못해 파티가 해산되기도 하는데 말야."

파티원들을 믿지 않는다고 대놓고 말한 주제에 성실히 자신의 미스에 대해 사과를 하는 리더나, 그 리더를 응원하는 파티원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던 바제트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앞으로 강한 몬스터는 피하겠다면...?"

"홉고블린처럼 강한 몬스터는 적어도 공략법을 완벽하게 익히든가, 아니면 레벨을 더욱 높여서 여유있는 상황에서 잡도록 해야겠지. 퀘스트 중에 그런 것이 있다면 일단 미뤄두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하지만 퀘스트는 선착순이야. 다른 사람이 그것을 먼저 할 수도 있는거라고."

미야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어쩔 수 없다. 포기하는 수 밖에.

"나는 그래도 파티가 위기에 처하지 않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해."

"헤헤헤... 아야야..."

운현의 대답에 헤스티아는 기쁜 듯 웃었다. 그리고 그것은 미야와 바제트도 마찬가지였다. 운현의 신뢰 여부를 떠나서 그가 자신들을 단순한 돈벌이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느낀 것이다. 그녀들이 좋아하자 운현은 딱히 토를 달지 않았다.

"그나저나 숙취 대단해보이네. 약이라도 좀 사다줄까?"

"으응... 그냥 이거 먹고 오늘은 푹 쉴게요."

"으... 나도 그래야겠어. 바제트. 대단하네. 그렇게 마시고도..."

"얼마나 마셨길래?"

"그냥. 레이디킬러 일곱잔 정도?"

"그게 뭐야..."

이곳의 술은 맥주 외에는 먹어본 적이 없는 운현이 떨떠름히 묻자 바제트는 빙긋 웃은 후 운현의 볼을 쓰다듬었다.

"다들 자러 가면 우리 둘이 한잔 할까?"

"됐네요. 난 술 그렇게 많이 안마셔. 맥주면 충분하다고."

"이거 아쉽네. 후후훗... 그럼 나도 슬슬 올라가서 쉴래. 오늘은 어디서 잘거야?"

"쟤들 둘이 아파보이니 너랑 자야겠지? 방을 또 잡기는 그러니까."

"후후후후~!! 술이 강한 것도 좋구만."

"으으..."

"너무해..."

운현이 바제트와 잔다는 말을 하자 헤스티아와 미야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잠시 후 두통에 고운 미모를 찡그린 그들을 향해 피식 웃어 준 운현은 메이드가 따뜻한 스프를 가져오자 그것을 그녀들에게 주었다.

"이거 먹고 푹 쉬어. 다음부터는 그렇게 마시지 말고."

"으응..."

"알았어."

헤스티아와 미야, 바제트가 각자 방에 들어가고 난 후 운현은 혼자 테이블에 앉아서 맥주를 마셨다.

전투에 대해 생각할 것도 있고 향후 방침에 대한 것도 정해야 하기에 혼자서 생각을 하던 그는 누군가가 다가오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현씨! 혼자 계시네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

필레의 밝은 목소리에 운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꽤나 많았던 사람들이 별로 없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열시. 두시간이나 혼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끝나신거에요?"

"네에~ 늘 이러니까 지치네요..."

"수고하셨어요. 어때요? 맥주 한잔 하실래요?"

"음! 좋아요! 헤헤헤~"

기다렸다는 듯 필레는 운현의 앞에 앉았다. 그녀에게 웃어보인 운현은 맥주 두잔과 간단한 견과류를 주문했다.

"너무 늦게 끝나는 것 아니에요?"

"시장 선거가 얼마 안남았으니까요. 지금은 저희 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굉장히 바쁠거에요."

"그렇군요. 필레씨가 없으면 길드가 안돌아갈 것 같네요."

"에? 에이~ 그정도는 아니에요~"

운현의 농담에 필레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침묵한 필레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기... 운현씨. 내일 있잖아요."

"네."

"저기... 연극이 내일 정오에 시작하거든요. 그러니까..."

운현이 혹시나 잊어먹었을까봐 필레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렇게 자꾸 언급하니 집착을 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걱정하던 그녀는 운현의 입가에 걸린 미소에 안도했다.

"열한시에 분수대 앞에서 만날까요?"

"음? 필레씨의 집은 어디에요?"

"저는 길드에서 생활하고 있는데요?"

"그럼 같이 나가면 되지 않나요?"

운현도 길드의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는만큼 그냥 같이 나가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필레는 머뭇거리더니 볼을 긁적거리고 부끄러워했다.

"그, 그것도 좋지만 그래도 데이트 느낌이 나려면..."

"하아. 뭐 상관없어요. 그럼 분수대에서 만나기로 해요."

"야호! 고마워요~!!"

"엄청 기대하고 계신가보네요. 부담스럽네..."

"그, 그렇게 부담갖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냥 편하게 오세요!"

쓴웃음을 지으며 그가 말하자 필레는 붕붕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저 기대감 넘치는 얼굴을 보니 부담이 어깨에 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볼게요. 운현씨도 편하게 쉬세요~!"

운현이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자 부끄러워하던 필레는 맥주를 단번에 들이마신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망치듯 길드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트라..."

데이트라고 할만한 것은 헤스티아와 한번 했지만 데이트의 주도는 거의 헤스티아가 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로망을 운현과 함께 했기에 그다지 어색한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필레와는? 운현은 필레의 얼굴을 떠올린 후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잘 되려나..."

아침이 되자 운현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바제트의 팔을 치웠다. 입을 헤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자고 있었지만 워낙 예쁘다보니 그것도 그림이다. 도톰한 그녀의 입술 옆으로 흐르는 침을 닦아 준 운현은 바제트의 나신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팬티 하나만 입고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몸을 보니 아침부터 성욕이 일어났지만 시간이 얼마 없다.

'11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아침에 옷을 사야 한다. 지금 운현이 가지고 있는 옷은 길드에서 초보자들에게 제공되는 옷과 갑옷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데이트인데 나름 꾸미고 가야되지 않겠는가. 그간 전투를 통해 돈을 꽤 벌었고 이정도면 그래도 깔끔한 옷을 구매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니 걱정은 없었다.

"음냐아... 운혀어언..."

"할매. 이불 좀 걷어차지 마쇼."

매끄러운 긴 다리가 이불을 걷어찬다. 다리까지 쩍 벌리고 쿨쿨 자고 있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은 운현은 바제트의 몸에 이불을 잘 덥어주었다. 빠르게 씻고 준비를 한 후 밖으로 나온 운현이 길드회관 1층에 도착했을 때 길드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어머! 운현씨!"

"오늘이었죠!?"

"...어. 음. 네."

"후후후~ 자자. 이건 필레씨가 좋아하는 거에요. 평소에 필레씨가 데이트때 이런 거 하고 싶다 저런거 하고 싶다 했던 것들 적어둔거니까요."

"화이팅! 운현씨! 믿을게요!"

"가, 감사합니다."

어지간히 필레가 잘 되는 것을 보고 싶은 모양이다. 운현은 과도한 관심을 받으며 길드 회관에서 나왔다.

"하아... 일단 옷부터 살까."

"흐흐흥~"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따사로운 햇살도 기분이 좋고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바람도 기분이 좋다.

필레는 분수대 광장의 근처에 있는 가게의 유리에 비춰진 자신을 다시 한번 보았다.

붉은색 니트와 하얀색 가디건. 긴 검은색 치마와 갈색 부츠. 모두 깔끔하고 깨끗하다. 오늘을 위해서 데이트를 약속하자마자 쇼핑을 해 구매한 옷들을 입은 필레는 손에 들고 있는 작은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폈다.

"좋아!"

거울 안에는 평소에 볼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운현에게 관심을 가지기 전까지는 화장은 커녕 제대로 씻는 것도 힘들었던 나날이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화장까지 하다니. 거울 안의 자신을 보며 필레는 방긋 웃었다.

"음음! 이뻐! 아주 이뻐!"

거울을 닫고 그녀는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11시가 되려면 이십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으으... 너무 빨리 나왔나?"

너무 기대가 되는 탓에 한시간이나 먼저 나와 분수대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던 그녀는 점점 시간이 되갈 수록 바짝 바짝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휴우...진정하자. 진정하자. 필레."

용병 연맹의 숙적이라 할 수 있는 티르빙과 전장에서 마주했을때도 이 정도로 긴장한 적이 없었다.

이토록 심장이 뛰는 것은 어째서일까.

'아마 내가 그에게 반해서겠지...?'

다시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운현에게 반할 이유가 있었을까?

처음 만났을 때는 남창이 되려는 사람도 아닌 남자가 왜 모험가 길드에 왔을까에 대한 호기심이었고, 그가 모험가로 등록했을 때는 그가 과연 모험가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었다.

'아마 그때겠지...'

운현이 가진 특수한 능력으로 자신을 도와줬을 때. 그에 대한 호기심과 걱정은 모두 운현에 대한 호감으로 바뀌어버렸다.

'아아... 그땐 정말로...'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뛴다. 자신을 똑바로, 진지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떠올릴 수록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필레는 붕붕 고개를 저으며 달아오른 얼굴을 손부채로 식혀나갔다.

"아아. 정신통일! 정신통일!"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데이트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와 즐기지 않으면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흐흠. 흠!"

분수대 근처의 벤치에 앉아 필레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켜나갔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운현이 온다. 첫 마디는 어떻게 해야 할까? 늘 하던 것처럼 인사할까? 아니면? 아니면? 계속되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 필레가 한숨을 내쉬려 할 때 누군가가 뒤에서 자신의 눈을 가렸다.

'아이 참... 운현씨 장난도...'

얼굴에 닿은 손이 거칠다. 하지만 그 거침 때문에 오히려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느낀 필레는 살며시 몸을 일으킨 후 최대한 목소리를 조정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날씨가 참 좋죠~"

'좋아! 아주 좋은 목소리야!'

자신이 냈지만 참 듣기 좋은 목소리다. 눈이 가려진 채 그녀는 방긋 웃었고 그 목소리에 뒤에서 필레의 눈을 가린 사람이 답했다.

"...너 뭐 잘못 먹었어?"

"...헉!"

당황한 필레는 자신의 눈을 가린 손을 치우고 몸을 돌렸다.

"어쭈? 화장까지 하고."

"너, 너, 너, 너, 너... 왜 여기에!?"

필레가 기겁하며 묻자 목소리의 주인은 뒤통수를 긁적거린 후 환히 웃었다.

"길드에 가보니까 너 오늘 비번이라길래. 잘됐다. 나도 오늘 비번인데 같이 연극이나 보러갈까? 너 이거 보고 싶다면서. 이야~ 난 참 친구도 생각하는 좋은 여자라니까~"

그녀의 앞에는 편한 복장을 한 채 느긋하게 웃고 있는 윈드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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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방긋 웃는 그녀를 보며 필레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저번에 울며 운현에게 사귀자고 난동을 피웠던 윈드가 오늘 자신의 데이트를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

필레는 무척이나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티켓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거."

"응? 아아. 이거 구하느라 힘들었다고!"

손에 들려 있는 티켓을 팔랑팔랑 흔들며 그녀가 말하자 필레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이렇게 타이밍을 못맞출까.

"나 오늘 약속 있는데."

"약속? 누구랑?"

"어, 그게 말이지..."

고민된다. 말할까. 말까. 말할까. 말까. 한참동안 우물쭈물거리던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윈드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이 딱딱히 굳었다.

"서, 설마... 에이~ 그럴리가~ 필레가 그럴리 없지. 응? 우리는 친구잖아. 응? 그렇지? 응?"

몰려오는 불안감을 애써 부정하며 윈드는 딱딱한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보니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런 그녀의 간절한 시선을 슬그머니 눈을 돌려 회피한 필레는 윈드가 자신의 손을 꽉 잡자 당황하며 외쳤다.

"왜!?"

"...필레. 나의 소중한 친구야. 그때 일 기억나?"

"그, 그때라니?"

"팔리니아 몬스터 웨이브. 고작 오백의 기사들과 천명의 병사들로 일만에 가까운 몬스터들의 습격을 막아냈던 전투. 기억나지?"

"으, 으응."

모험가가 되기 전, 기사단의 기사로 활동할 때 있었던 최고, 최악의 전투를 윈드가 언급하자 필레는 그 기세에 눌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우리 약속했잖아.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어떤 공포가 있더라도 우리는 영원한 친구이며 동료라고. 그랬잖아... 그렇지? 언제까지라도 함께할 거라고. 함께라면 그 어떤 역경과 고난도 이겨낼 거라고... 그랬잖아? 그렇지...?"

이제는 눈에 눈물까지 고인다. 그녀의 부담스러운 분위기에 필레는 어떻게든 손을 빼려 했지만 윈드의 손은 강철처럼 굳어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응? 그렇지? 응?"

"아, 알았으니까 이것 좀 놔봐. 좀!"

"후우... 후우... 마음의 준비 좀 할게. 잠깐만..."

필레의 손을 놓아준 윈드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 후 긴장한 얼굴로 필레를 보고 물었다.

"오늘 누구 만나?"

"필레씨!"

부드러운 음성이 뒤에서 들려온다. 그것에 윈드의 몸은 돌처럼 딱딱히 굳었다.

"이정도면 괜찮으려나."

옷가게에서 산 검은색 슈트를 거울에 비춰보며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약간 달라붙는 것 같지만 이런 옷도 나쁘지는 않지. 하얀 셔츠와 군청색 슈트. 검은색 구두. 다 합쳐서 5골드 밖에 하지 않았다.

'되게 싸네.'

남성의 수가 적다보니 가격이 꽤 나올 줄 알았지만 오히려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며 연신 칭찬을 하고, 옷 한벌 더 줄테니까 오늘 밤 어떠냐고. 좋은 식당 알고 있다고 말하는 가게 주인의 유혹을 간신히 거절하고 나온 운현은 시간을 확인한 후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서오세요~"

화사한 꽃들이 놓여져 있는 꽃가게에 도착한 운현은 쪽찌를 펼쳐보았다. 길드원들이 적어 놓은 글귀를 차분히 읽은 그는 자신에게 다가 온 수인족 여성에게 물었다.

"하이라닌이라는 꽃이 있나요?"

"물론 있죠~ 어머! 남자분이 꽃을 살 줄은 몰랐는데~ 후후후. 연인에게 주는 꽃인가요? 완전 좋겠다! 으으으 부러워라~"

"아뇨. 그냥 늘 신세지는 분께 드리는 거라..."

"그래도 좋겠다!"

눈을 반짝거리며 즐거워하는 그녀를 향해 쓴웃음을 지은 운현은 그녀가 이끄는대로 가게의 구석에 놓여져 있는 작고 하얀 꽃을 볼 수 있었다.

"이게 하이라닌인가요?"

"네. 꽃말은 연인에게는 행복한 사랑. 그리고 손님처럼 신세진 분께 드릴때는 항상 감사합니다. 라는 뜻이 있어요."

"흠."

꽃집 주인의 말을 들으며 운현은 고민했다. 이중의 꽃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못하면 오해의 소지를 남길 수 있었다. 이미 필레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눈치 챈 운현이었다. 여기서 줄타기를 잘못하면 필레에게 천하의 개쌍놈 취급을 받을 수 있었고 그리 된다면 지금까지 길드에서 얻은 호감이 송두리째 박살나버린다. 운현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대에 대한 보답으로 줄만한 꽃은 없나요?"

"음... 그럼 이건 어떤가요? 친우에 대한 감사. 라는 꽃말을 가진 꽃인데. 벨리안이라는 꽃이에요."

"나쁘지 않네요. 이걸로 주세요."

"얼마나 드릴까요?"

"들고 돌아다녀야 하니까 한송이만 주세요."

"후후. 알겠습니다!"

백합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연한 자줏빛의 꽃잎을 가진 꽃 한송이를 그녀가 포장하는 동안 운현은 근처를 구경했다. 꽃 외에도 관상용으로 쓰이는 나무들도 꽤나 있었다. 이세계의 식물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운현은 자신이 아는 장미와 똑같이 생긴 꽃을 발견하고 꽃다발을 만드는 주인에게 물었다.

"이건 뭐에요?"

"장미요."

"아. 예."

다른 이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한쪽 벽가에 잔뜩 있는 대나무를 보았다.

"대나무도 있나요?"

"네. 죽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어요. 꽤 튼튼한데다가 탄력도 좋아서 활의 재료로 쓰인다고 하네요. 향기도 있는데다가 잘라서 도시락통이나 물통으로도 쓸 수 있어서 요즘 인기있는 재료에요."

"그래요?"

"네. 자. 여기요. 받으실 분은 좋으시겠네요~"

깔끔하고 예쁘게 만들어진 꽃다발을 건네준 그녀에게 일실버를 넘긴 운현은 꽃을 잡고 빙긋 웃었다.

"고맙습니다."

"헤헤... 그런데 어디 소속이세요?"

"네?"

"아니 남창... 아니세요?"

"...아닌데요. 남창."

"에엣!? 남창도 아니신데 꽃을 사는거에요!?"

운현이 입은 옷에 그가 꽃을 사는 것을 보고 영락없이 그가 남창이라고만 생각했던 꽃집 주인은 크게 놀라다가 우울한 얼굴이 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부럽다... 그 꽃 받을 사람..."

"아니 꽃 정도야 선물로 얼마든지 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래도... 그래도 부럽네요. 흐잉... 나도 받고 싶은데."

"어, 음. 조, 좋은 일 생기시겠죠. 그럼 이만!"

한없이 우울해하는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운현은 후다닥 가게에서 빠져나왔다.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다. 한가지 더 준비할 수 있을 것 같기에 운현은 쪽지에 적혀 있는 내용을 떠올린 후 다른 가게로 향했다.

"어서오세요~ 우와! 남자다!"

"뭐!? 남자라고!?"

그가 들어간 곳은 작은 봉제인형들을 파는 가게였다. 형형색색의 천으로 만들어진 봉제인형들이 잔뜩 있는 가게에 들어 선 그는 자신을 본 점원과 가게의 손님들의 쏟아지는 시선에 움찔했다.

'그냥 나갈까.'

"아. 가게를 잘못 들어온 것..."

그 과도한 시선에 굴복한 운현이 뒷걸음질을 치자 점원의 복장을 한 은색 긴 머리의 똑같은 얼굴을 가진 두 미소녀는 운현의 양 팔을 잡았다.

"들어올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나갈때는!"

"아니란다!"

"우와아아..."

그녀들에게 이끌려 가게의 안쪽으로 들어오게 된 운현은 이런 핑크핑크한 분위기에 압도되어버렸다. 그가 주눅든 얼굴로 뻘쭘히 서 있자 미소녀들은 운현에게 다가가 그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빙긋 웃었다.

"뭐 찾아요?"

"오빠는 잘생겼으니까 싸게해줄게!"

"으음. 그러니까... 호랑이 인형 있어요?"

"호랑이 인형요?"

"잠깐만~"

운현의 주문에 미소녀들은 빠르게 움직여 가게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인형을 찾는 동안 가게에 있던 손님들은 운현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그의 손에 들린 꽃을 보더니 주저하다가 다가와 물었다.

"저기... 어느 가게 분이세요?"

귀여운 인상을 한 뾰족한 귀의 여인이 묻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험가도 가게라고 할 수 있는걸까?

"예? 가게라뇨?"

"남창... 아니세요?"

운현의 대답에 그녀는 더욱 이상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닌데요. 남창. 아니 왜 자꾸 남창 소리가..."

"그런 옷에 꽃까지 들고 있으니까요."

아까 꽃집에서도 남창 소리를 들었던 운현이 떨떠름히 묻자 그녀는 미안한 얼굴로 볼을 긁적거렸다.

"하긴... 남창에서 이런 서비스까지 해줄리 없지. 에휴. 좋다 말았네."

"으으음..."

'어쩐지 싸더라니!'

지금와서 다른 옷을 사기에는 늦었다. 운현은 능글맞게 웃으며 시간 괜찮냐고 물어보던 옷가게 주인을 떠올리며 빠득 이를 갈았다. 그냥 깔끔하고 괜찮은거 달라고 한 과거의 자신을 때려죽이고 싶어진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 있어요!"

"자!"

두 미소녀가 가져 온 호랑이 인형을 받은 운현은 그것을 쿡쿡 찔러보았다. 안에는 솜으로 가득 차 있는지 푹신푹신한, 리얼한 호랑이가 아닌 귀엽게 캐릭터화 한 호랑이 인형을 그녀들이 건네자 운현은 그것을 가볍게 들어 본 후 물었다.

"얼만가요?"

"1골드."

"헉! 뭐 이리 비싸!?"

"인형은 원래 비싸다고!"

호랑이 인형 다섯개면 옷을 한벌 살 수 있다. 비록 그게 남창용 옷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운현은 인상을 구기고 1골드를 꺼내 그녀들에게 주었다.

"헤헤~ 감사합니다~"

"나중에 또봐~"

호랑이 인형과 꽃다발을 들고 운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분수대로 가면 시간이 맞을 것이기에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분수대로 향했다.

"응?"

분수대 근처에 도착한 운현은 필레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다가가다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윈드씨잖아?"

저번에 그런 추태를 보였던 윈드가 있자 운현은 무척이나 떨떠름한 얼굴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윈드는 완전히 술에 취해 자신에게 결혼하자고 압박을 가했었던 것이다. 설마 멀쩡할때도 그럴까? 운현은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그녀들을 향해 걸었다.

"필레씨!"

"아! 운현씨!"

운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필레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밝은 웃음을 마주한 윈드의 얼굴이 점점 더 썩어들어가는 동안 그녀는 윈드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다가 온 운현에게 말했다.

"일찍 오셨네요~? 아직 시간은 남았는데."

"필레씨가 더 일찍 오셨잖아요. 죄송해요. 준비 좀 하고 오느라."

"준비요? 무슨... 아! 옷이 바뀌었네요! 후후후... 정말 잘 어울려요."

필레는 눈을 빛내며 운현을 위아래로 흝어본 후 엄지손가락을 척 올렸다. 큰 키에 덩치가 조금 있는 지라 운현의 정장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남창들이 자주 입는 정장이기는 하지만 그가 남창이 아니라는 것은 자신이 더 잘아니 큰 문제가 없었던 필레는 남성성이 돋보이는 그의 모습에 감탄했다.

"이야~ 이렇게 보니까 정말 멋지네요~"

사실 저런 옷이 아니라 거적떼기를 입어도 눈에 콩깍지가 씌인 필레에게 있어서 운현은 멋지기 그지 없었지만 굳이 숨기고 있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필레는 윈드를 지나쳐 운현에게 다가갔다.

"응? 그건 뭐에요?"

사실 운현이 오자마자 1초만에 그를 완전히 흝어 본 필레였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운현의 손을 가리키고 물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꽃다발과 인형에 눈을 반짝반짝 빛낸 필레가 기대감을 품고 묻자 운현은 피식 웃었다.

"아, 이거요. 음. 뭘까요?"

"에헤헤~ 뭘까요오?"

필레는 살짝 허리를 숙이고 베시시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평소의 착실하고 친절한 모습만 보다가 이런 장난치는 듯한 모습에 운현은 순수하게 그녀가 귀엽다고 생각해버렸다.

"누구 주려고 샀어요."

"누구요? 누군데요? 누굴까요오?"

"제가 늘 신세를 지는 분이에요."

"그게 누구죠!?"

이제는 완전히 흥분 상태가 되어버린 필레다.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은 운현은 필레에게 그것을 건넨 후 말했다.

"상아 길드장님께 전해주시겠어요?"

"...아 예."

한순간에 업되어 있던 필레의 분위기가 다운되어버린다. 등 뒤에 어둠이 보일 정도로 풀죽은 필레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 순간 운현은 더 이상 참지 않고 키득거렸다.

"큭큭큭. 농담이에요. 상아 길드장님이 저한테 해준게 뭐 있다고. 항상 도와주고 조언해주신 건 필레씨인데요. 필레씨. 받아주시겠어요?"

"네에에에에!!!"

운현의 말에 다시 필레의 분위기가 밝아졌다. 얼굴에서 빛이 날 정도로 환해진 그녀는 벨리안과 호랑이 인형을 받고 어쩔 줄 몰라하다가 살며시 벨리안의 꽃망울에 코를 가져갔다.

"헤헤헤헤~ 향기 좋네요~"

꽃향기를 맡고, 인형을 잡은 후 꼭 끌어안은 그녀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또다시 베시시 웃었다. 이렇게 좋아하니 선물을 해주는 입장으로서 뿌듯하기 그지 없다.

운현과 필레가 서로를 마주보며 달콤하고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을 때 석화되어 있던 윈드가 풀려났다.

"자, 잠깐!!"

72====================

Date

운현과 필레가 만들어내는 달달한 분위기의 범위 안에 있던 윈드는 떨리는 손을 들었다.

"호, 호, 호, 혹시...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런거 아니지? 응? 아니라고 해줘. 필레. 우리는 친구잖아. 응? 언제까지 함께하기로 했잖아. 설마... 설마아아..."

지옥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이럴까? 윈드의 도톰하고 예쁜 입술에서 나오는 목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음울한 분위기에 운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 그게 말이지..."

"설마 너 혼자 어른의 계단에 올라가버리는 건 아니지이이이!? 데이트 아니지!? 응!? 아니라고 해! 어서!"

"크흠! 그... 그게."

"데이트 맞아요."

"!!!??"

필레가 차마 말을 못하자 운현은 그녀의 앞으로 나서며 윈드에게 차분히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윈드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버리자 운현은 고개를 돌려 당황하는 필레에게 물었다.

"아닌가요?"

"그게... 으으... 맞아요. 데이트에요."

운현의 부드러운 시선과 윈드의 간절한 시선을 번갈아 바라 본 필레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했다. 그 모습에 운현이 빙긋 웃자 윈드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흐...흐아아아아... 어, 어떻게...!? 어떻게 이럴수가!? 혼자 가버리려는거야!? 너도!? 다른 친구들처럼 날 버리고 혼자 가버리려는 거냐구우우우우!"

윈드는 입을 쩍 벌린 채 운현과 필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씩 웃었고 필레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살며시 운현의 뒤에 숨었다. 그것에 더 충격을 받았는지 윈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리...리...리!"

"리?"

"리...?"

차마 현실을 견디지 못한 윈드는 몸을 휙 돌리고 빼액 소리치며 달려가버렸다.

"리얼충! 폭발해라!!!!"

"......."

"......."

달려나가는 윈드의 뒷모습을 보며 운현과 필레는 아무런 말도 못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서 있던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몸을 돌려 필레를 보았다.

"괜찮아요?"

"예? 아? 예. 윈드는 제가 나중에 잘 얘기할게요."

"되게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아하하... 다른 친구가 약혼자 소개할때도 그랬는걸요."

필레는 쓰게 웃은 후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그, 그리고 선물 고마워요. 저 정말 기뻐요. 에헤헤헤헤~"

필레의 귀여운 웃음에 운현은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그의 웃음을 멍하니 바라보던 필레는 얼굴을 붉혔다.

"그럼... 가실까요?"

"네. 장소가 어디에요?"

"여기서 조금만 가면 돼요. 저기 파르티 성당의 바로 옆이니까요."

"...파르티 성당이요."

필레가 가르킨 쪽을 본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레나와 재회를 했던 곳 근처로 간다는 것이 상당히 찝찝했지만 저렇게 기쁘게 웃으며 자신의 팔을 잡고 끄는 것을 보니 가기 싫다고는 할 수 없었다.

"운현씨. 파르티님을 믿으시나요? 아니면...?"

"아. 저는 무교라서요. 혹시 종교를 믿지 않으면 안되는건가요?"

"아뇨. 파르티 교단이 대세이기는 하지만 교단의 교리가 종교의 자유는 보장하자. 라는 거라서... 저는 파르티 교도 거든요."

"헤에... 그래요?"

"네. 그래서 여기 지나칠때마다 기도를 하는데... 괜찮으시면 운현씨도 같이 가주실 수 있으신가요? 아! 물론 기도는 안하셔도 좋아요."

"예상외네요. 대중적인 종교고 많은 사람이 믿으니까 믿음을 강요할 줄 알았는데."

"후후후... 그런건 곤란하죠. 믿음은 강요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필레는 빙긋 웃은 후 운현을 데리고 파르티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운현이 저번에 보았던 분수대를 지나쳐 커다란 파르티의 여신상 앞에 도착한 필레는 미안한 얼굴로 그를 보며 말했다.

"운현씨.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세요? 공물을 사가지고 올게요."

"공물같은 것도 바치나요?"

"네. 그리 비싼건 아니에요. 공물 중에 제일 비싸봐야 일실버 밖에 되지 않는걸요."

"알겠습니다. 다녀오세요."

운현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은 후 필레가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가버리고 혼자 남게 된 운현은 여신상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날 여기로 데려 온건가..."

"당신. 왜 또 여길 온거죠?"

날 선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레나."

"그때 말하지 않았나요? 당신은 이곳에 오면 안됩니다."

"왜?"

"...그건."

"나도 한가지 묻지."

차라리 잘됐다. 레나와는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히 선을 그어야만 했기에 운현은 최대한 담담한 얼굴을 유지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때 나는 분명히 널 도왔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아니었다면 너는 그때 동굴에 있던 다른 사람들처럼 고블린에게 죽었을거다. 그런 너를 구출해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도 나고, 네가 발정이 나서 날 덥쳤을 때도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여 준 나다."

"...그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왜 넌 그런 짓을 한거지?"

"그런 짓이라면...?"

"너는 저번에 날 보고 물었지. '살아 있었군요?' 라고 말야. 그 말을 했다는 것은 내가 위험에 쳐했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는 것이겠지."

"....."

운현의 말에 레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표정에 생겨나기 시작한 불안감, 그리고 약간의 경계심. 그것을 그대로 받으며 운현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은혜를 원수로 갚을 생각이었나?"

"그,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하아... 운현. 당신은..."

운현을 가만히 바라보던 레나가 고민하다가 입을 열려고 할 때 공물을 사 온 필레는 후다닥 뛰어 운현에게 다가왔다.

"운현씨! 오래 기다리셨나요? 줄을 선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데 운현씨 표정이 왜 그래요?"

필레의 말에 운현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필레에게 늘상 보여주던 웃는 얼굴이 아닌 현자의 시간이 되어 냉철한 이성 상태일때의 디폴트 얼굴인 무표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운현은 황급히 미소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파르티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잘 어울리시는 커플이군요. 여신님의 축복을 받으러 오셨습니까?"

필레의 등장에 잠시 당황한 레나였지만 그녀는 저번에 보았을 때와 같은, 아이들에게 지어주던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필레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사제복을 입은 레나에게 얼른 마주 인사한 필레는 자신의 공물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네. 여신님의 축복을 받았으면 해서요."

"오호... 데이트 중으로 보이는데... 그런 가호를 받으시려는 이유가 뭔가요?"

금방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바뀐 레나가 놀리듯 묻자 필레는 당황하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조금 망설이던 그녀는 살짝 레나에게 다가가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아아... 그렇군요."

"네에..."

"다른 이들에게 데이트를 방해받고 싶지 않..."

"아아아! 그걸 말씀하시면 조용히 말한 의미가 없잖아요! 일부러 그러신거죠!? 그죠!?"

"후후후..."

기껏 운현에게 들리지 않게 이야기했건만. 필레는 운현을 힐끔힐끔쳐다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레나는 운현에게 잠시 싸늘한 시선을 보낸 후 공물을 양 손에 들고 기도를 시작했다.

"우우웅...!"

낮은 진동음과 함께 필레의 몸에 빛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몸을 상냥히 감싼 은은한 백색의 빛이 점차 사라지자 레나는 필레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톡 쳤다.

"은총이 가득하시길..."

"감사합니다. 대사제님."

"즐거운 데이트 되시길 바랍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레나가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필레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운현을 향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헤...헤헤. 저번에 길드장님 일도 있고 오늘 윈드 일도 있어서... 사실 방해받고 싶지 않았거든요... 오늘을 엄청 기대했는데..."

"그렇다면 저도 노력해야겠네요. 그런데... 궁금한게 있는데요."

"네? 어떤거요?"

"파르티 교단의 직급은 어떻게 되나요?"

"흠? 뭐.. 가장 낮은 직급은 수행 사제구요. 그 다음은 정식 사제. 그 위가 대사제. 그 위가 주교. 그 위가 대주교. 또 그 위가 교황. 마지막으로 성녀님이 계세요."

"호오... 모험가로 따진다면 대주교는 어느정도 되는건가요?"

"음... 글쎄요? 모험가 길드에 등록을 하러 오시는 방랑 사제분들 중에는 대사제를 역임하시다가 오신 분들도 계신데 그분들은 곧바로 4계층에 들어가셨으니까 적어도 200에서 300 정도는 되시겠네요."

'엄청 높군... 젠장.'

레나에게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한 찝찝함이 있지만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라도 들을 수 있었다.

아니, 지금같은 상황에서 만약 레나가 자기 죽으라고 내버려 두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어봤자 실질적으로 운현이 복수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어쨌든 복수든 뭐든 하려면 내가 레벨을 높여야 한다는 거군.'

"운현씨?"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데이트를 방해받는다... 하하하하하. 필레씨. 정말 기대 많이 하셨나보네요?"

"우우우우..."

필레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자 운현은 그녀의 신경을 돌리기 위해 짖궂은 어조로 말했다. 자신을 놀리는 그의 말에 필레는 얼굴을 붉히고 신음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하하하! 필레씨도 참 귀엽네요."

"귀, 귀여!? 헤... 헤헤헤... 헤헤헤헤헤~"

그의 말이 기폭제가 되어 필레의 얼굴을 폭발시켰다. 완전히 붉어진 필레가 바보처럼 헤죽거리자 운현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엣!?"

"좋은 자리 잡으려면 어서 가야죠."

"네! 네에에!"

운현이 이끌자 필레는 환하게 웃으며 그와 함께 걸었다. 손에서 땀이 나지 않을까. 혹시 긴장한 탓에 너무 세게 잡는게 아닐까 싶었던 그녀는 운현이 더욱 단단히 손을 잡자 그에게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까지 되었다.

"사람이 많네요. 정말 인기가 많은 연극인가봐요?"

"네... 네..."

"필레씨?"

"하우... 그, 배우도 잘생겼고, 그리고 그 뭐냐. 스토리도 좋고... 아! 맞아요! 그리고 연극이 끝나고 나면 관객 중에 추첨을 해서 상품도 준다고 해요! 다른 왕국에서는 이미 크게 인기를 끌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멍하니 서 있던 필레는 허둥지둥 운현의 질문에 두서없이 답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운현은 피식 웃은 후 잡고 있는 손을 들었다.

"손 잡고 있는게 불편해서 그래요?"

"아뇨!! 그럴리가요!!"

붕붕 고개를 저으며 그녀가 소리치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들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들의 시선에 필레가 고개를 푹 숙이자 운현은 싱글거리며 필레와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에에..."

"이렇게만 잡으면 불편하니까 이건 어때요?"

"흣...!"

운현의 손과 자신의 손이 깍지가 껴진다. 말로만 듣고 연극으로만 보고 소설로나 읽던 그 상황. 깍지끼며 손잡기가 실현된 것에 필레는 너무 놀라 덜덜 떨었다. 그리고, 그것을 불편하게 바라보던 여인들 분노로 몸을 떨었다.

"......."

그리고 그들보다 더 몸을 떤 것은 분노와 질투에 몸을 맡긴 채 그들을 지켜보던 윈드였다.

"어, 어떻게 저런... 부러운. 아니 치사한 짓을..."

"헤에? 진짜네."

"...상아 길드장님. 전 개인의 사리와 사욕, 그리고 질투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제 소중한 친구이며 던전 도시의 일축을 담당하는 모험가 길드의 핵심 전력인 필레가 이런 시기에 저렇게 무방비한 꼴로 다니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해서 움직이는 것 뿐입니다."

"응응. 알았어."

자신의 말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재밌다는 얼굴로 운현과 필레를 지켜보는 상아의 어깨를 잡아 돌린 윈드는 이마에 핏줄을 띄울 정도로 흥분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아시겠습니까? 비록 제가 시청 소속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나름 모험가 길드와 친분도 있고, 또 던전도시를 유지하는 데 모험가 길드만큼 좋은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시장선거가 얼마 남지 않아 몸조심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저렇게 무장도 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필레가 걱정되어서! 거기에 얼마 전에 용병 연맹의 기습까지 당해 더 조심을 해야 하는데! 그런데 저렇게 남자와 데, 데... 입에 담기조차 부러운... 아니 부끄러운 일을 하다니! 그런 녀석이라도 제 소중한 친구이기에 그녀를 지키기 위해 따라다니는 것이니 오해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냥 부럽다고 해라."

"부, 부럽긴 누가 부럽다고 하는 것입니까?"

73====================

Date

"이 연극은 정말 아름답고 슬픈 내용이에요. 운현씨 보고 우시면 안돼요!"

시작 시간이 되어 입장을 한 운현과 필레는 앞에서 두번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필레의 말대로 무척 인기가 많은 연극이라 그런지 넓은 공연장의 좌석은 순식간에 만석이 되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바글바글한 사람들에 놀란 운현은 몇몇 여인들이 손수건을 꺼내놓자 그것을 가리키고 물었다.

"필레씨는 아는 내용이에요? 필레씨 말대로 다들 울 준비를 하는 것 같은데..."

"아아. 이야기는 알아요. 연극으로 본 것은 처음이지만..."

"무슨 이야기죠?"

"어. 아주 먼 옛날. 대륙의 왕국이 나눠지기 전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지고의 왕국 이야기에요. 그 왕국의 시조인 루블란 대왕과 대왕의 참모이며 대륙의 현자라고 불리우던 피에톤님의 사랑 이야기요."

"호오..."

"일단은 시대적인 배경부터가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키니까요. 정말 모든 여자들에게는 꿈의 시대라고 할 수 있어요."

"왜요?"

"아. 기록에 따르면 지고의 왕국 시기에는 지금처럼 남자의 수가 적지 않았다고 하네요. 대부분의 여성들이 자신의 짝을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했어요."

"어? 그럼 지금은 왜 이러는 거에요?"

"음...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몰라요. 다만 파르티 교단의 기록에 따르면 과거 세상을 지배하려 했던 악신이 있었는데 파르티님께서 자매분들과 함께 그 악신을 물리쳤을 때 악신이 저주를 걸었다고 하네요. 대륙의 모든 이들을 죽이려고 저주를 걸었지만 여신님께선 모든 힘을 쏟아부어 그 저주를 막으려 하셨어요. 그렇지만 너무나도 지독한 저주라 여신님께선 모든 이를 구할 수 없었고 결국 대부분의 남자들이 목숨을 잃었죠. 그 저주의 여파 때문에 세상에 남자들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아하. 그렇군요."

"네.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 더욱 슬프고 애절하지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신분의 차이가 컸나보네요."

"아뇨. 그럴리가요. 피에톤 님은 지고의 왕국 공작가 가주였어요. 공작가라면 충분히 높은 가문이죠."

"그럼요? 나이차이인가?"

"그런 것도 있지만요. 피에톤님은 공작가의 가주이지만 그 가주직을 얻은 이유가 자신의 부모님과 형제들을 죽이고 그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었죠. 공작 부인은 대왕님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었거든요. 평판이 너무나도 좋지 않았죠. 거기에 왕가에서도 그를 받아들이면 대왕님을 모시지 않겠다는 이야기도 나왔었으니까요."

"허... 그런 배경이."

"네.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스스로 가진 능력을 뽐내면서 여인들을 마구 수집하고, 영지민을 괴롭히는 악당이었어요."

"악당... 그래도 재밌겠네요."

"루블란 대왕님은 아딘 왕국에서 인기 절정을 달리는 연극배우이신 라에칸님이 맡으셨구요, 피에톤 현자님의 역은 뇌쇄적인 매력을 가진, 아딘 왕국 뿐 아니라 대륙 최고의 배우이신 카를로스님이 맡으셨어요. 아. 이제 연극이 시작하려고 하네요."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법으로 밝혀진 조명이 점점 어두워지고 무대의 막이 오르자 운현의 손등을 톡톡 친후 무대를 가리켰다.

"대왕! 몬스터가 윌븐 영지를 함락시켰습니다! 어서 결단을!"

단상 위에 만들어진 화려한 옥좌에 앉아 있던 블루블랙 짧은 스포츠 머리에 선이 굵은 보이쉬한 여인이 서 있었다. 치렁치렁한 옷으로 가리려 했지만 빛에 비춰진 탓인지 그녀의 굴곡진 몸은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리 말하지 않았는가. 현자의 말을 따르라고...!"

"허나! 그자는 색욕에 미친 자로서...!"

"누가 색욕에 미쳤다고...?"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무대 뒤에서 흘러나왔다. 남자의 진한 목소리에 운현은 온 몸에 닭살이 돋는 것 같았지만 주변 여자들은 달랐다.

"꺄악!"

"비안님!"

"카를로스님!!"

"꺄아아아아악!"

"....."

무대 밖으로 걸어나온 것은 대왕과 같은 복장을 한 긴 청발의 미남 엘프였다. 날카로운 인상에 안경을 쓴 그는 왼손에는 한송이 장미. 오른손에는 한권의 책을 들고 검은색 망토를 두른 채 무대를 한바퀴 쭉 둘러본 후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토를 가볍게 풀어 휙 던졌다.

'저 새끼...'

관중을 보는 듯 하지만 운현은 그의 시선을 느꼈다. 안경 너머의 싸늘한 눈은 자신에게 향해져 있었다. 단순한 관심이 아닌.

명백한 적의다. 애초에 운현이 있는 자리를 알고 있었는지 그는 운현을 쭉 노려보며 당당히 외쳤다.

"이! 대륙의 현자이자! 대륙 최고의 낭만을 지키는 남자! 피에톤 비안이 그저 색욕에 미친 남자로 보였단 말인가!!"

장황하게 말을 마친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장미를 휙 던졌다. 관객석으로 날아가는 장미에 그 주변의 여인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그것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꺄아아악!"

"이건 내꺼야!"

"비안님이 주신 장미꽃의 향! 잊지 않겠습니다!"

장미꽃 한송이를 얻기 위해 난리를 치는 여인들과 그쪽을 보며 부러워하는 여인들의 모습에 운현은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뭐하는 새끼지...?'

구역질이 터져나온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운현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연극에 집중하는 필레의 모습에 차마 그 생각을 실천할 수 없었다.

'그래. 그냥 마음을 비우자.'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도 사라졌으니 그냥 연극을 즐기자. 운현은 자신에게 세뇌를 걸었다.

"흐, 흐읏!? 비안! 이게 무슨 짓인가!?"

"피에톤이라 불러주십시요. 나의 사랑스러운 전하."

'으아아아악!! 목소리만 들어도 역겨워!!'

"...이런."

하지만 필레의 손과 자신의 손은 깍지가 끼어져 잘 고정되어 있었다. 필레를 불러 그녀의 손을 풀려고 해보았지만 연극에 초 집중하고 있는 터라 그녀는 운현의 불편한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아."

"하악...하악..."

"오늘은 이거다."

'...걸그룹이 군대 위문열차 갔을때 이런 모습이겠군.'

당장 자위를 하지 않는게 신기할 정도로 여기저기서 침만 꼴딱꼴딱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서 고통받던 운현은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아아아아아!!! 피에톤! 나의 사랑이여! 나의 꽃이여! 그대는 이렇게 죽어버리고 말았으니... 나는 이제 이 차가운 옥좌에서 그대를 홀로 기다려야 하는구나! 나의 피에톤이여!"

결국 루블란 대왕을 죽이려던 암살자의 검을 대신 맞아 죽어버리는 피에톤을 끌어안으며 루블란 대왕의 역을 맡은 라에칸이 오열하는 것으로 운현에게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은 끝나버리고 말았다.

"짝짝짝짝짝!!!"

"휘익!"

"역시 멋져!"

주변 여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연극배우들이 나와 인사를 하는 것까지 다 본 운현은 초췌한 얼굴로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감았지만 소리가 다 들리니 자꾸 상상이 되버린다.

'제일 최악은 그거였지.'

루블란 대왕과 피에톤이 전장에 나섰을 때, 피에톤이 샤워를 하는 동안 루블란이 그의 옷을 끌어안고 그의 향기를 맡다가 피에톤에게 걸렸던 씬, 그리고 나서 그들이 엉키는 씬.

주변이라도 시끄러웠으면 괜찮았겠지만 정말 그 씬이 나올때는 관객들이 침을 삼키는 것 조차 잊은 채 그 씬에 집중을 해서 모든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꿈에 나올까 두렵다.'

루에칸의 신음소리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 피에톤 역을 맡은 배우, 카를로스의 신음소리는 듣는 것 하나만으로도 등 뒤에 소름이 바짝 돋을 정도였다.

아직도 저 둘의 신음소리가 귓가를 멤돈다. 운현이 똥씹은 표정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필레는 눈물을 쓱쓱 닦으며 운현을 보았다.

"운현씨. 아직 안끝났... 얼굴이 왜 그래요?"

운현의 손을 꼭 잡고 있던 필레는 그제서야 운현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의 얼굴이 완전 죽어 있는 것에 그녀가 당황할 때 무대에 서 있던 주연 라에칸과 카를로스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오늘 관람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모두 즐기셨나요?"

"네!!!"

"최고에요!"

"카를로스님! 사랑해요!!"

"휘이이이익!"

"하하하. 역시 카를로스씨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군요."

"라에칸님도 멋져요!"

"어쩜 그렇게 당하는게 잘 어울리시는지!"

"후후후. 고맙습니다. 여러분."

라에칸의 주관으로 관객들과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운현은 붕붕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챙긴 후 다른 남자들은 어떤 꼴인지 궁금해서 몇 안되는 남자들을 찾아보았다.

'저 새끼들은 뭐야?'

혹시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들도 혐오감을 느꼈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른 남자들은 의외로 멀쩡, 아니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환호성을 보내고 있었다.

'나만 기분나쁜 거였나!? 왜 다들 멀쩡하지? 역시... 저놈은 위험한 놈이다.'

운현이 처음만 보고 계속 눈을 감고 있어서 그랬지 연극은 정말 수준급이었나보다.

악단의 음악 연주도 그렇고 배우들의 연기력도 그렇고. 그 모든 것이 일류급인 연극이었다는 관객의 칭찬을 들으며 라에칸은 볼을 긁적거린 후 밝게 웃었다.

"아하하하하하! 과도한 칭찬에 몸둘바를 모르겠군요! 그럼 오늘의 하이라이트! 추첨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와아아아!!"

"여러분! 앉아계신 자리의 좌석 번호를 확인해주세요! 호명되신 분은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아주 좋은 상품이 준비되어 있거든요!"

"네에에!"

관객들의 함성을 받은 라에칸은 진행자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나오자 그것을 든 후 카를로스에게 내밀며 외쳤다.

"추첨은 카를로스씨께서 해주실 겁니다! 자! 여러분! 기대해주세요!"

"카를로스씨! 37번!! 제발요!"

"61번 뽑아주세요!"

"100번!!"

"58번!!"

'제발 31번만은 뽑지 마라... 널 바로 앞에 두고 맨정신을 유지할 자신이 없다...'

운현은 더 없이 간절히 빌었다. 자신이 앉아 있는 좌석번호인 31가 걸리지 않기를 간절히 빈 운현은 처음 불린 번호가 자신들과 상관이 없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59번!"

"아깝다!"

"얏호!! 나야! 나!!"

58번 좌석의 여인이 좌절하고 59번 좌석의 여인이 환호성을 내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것을 본 운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라에칸은 씨익 웃은 후 외쳤다.

"아직 8번 더 남았습니다! 자자! 여러분! 기대해주세요!"

'씨발!'

번호가 불릴때마다 심장이 쫄깃해지는 것을 느낀 운현은 필레가 이상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자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운현씨. 괜찮으세요?"

"아. 네. 그... 필레씨도 뽑히고 싶나요?"

"네? 저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데..."

"그런 것 치고는 재밌게 보시던걸요?"

"에헤헤~ 그랬나요? 전 연극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그래요?"

의외의 일면이다. 운현이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필레는 연극 무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무대 위에는 모든 것이 있으니까요. 진짜도... 가짜도."

"뭔가 철학적이군요."

"헤헤~ 그런 심각한 건 아니구요. 음... 조금 무거운 이야기인데 지금 하기는 그렇죠? 이따가 식사끝나고 해드릴게요!"

"궁금해서라도 들어야겠군요."

"그럼 식사하고 차마시러 가는거에요! 알았죠?"

"물론이죠."

운현이 웃으며 말하자 필레는 혀를 날름거리며 귀엽게 웃었다.

'작전 성공! 히히!'

행여나 운현이 연극 다 봤으니까 이제 해산합시다. 라고 할까봐 넌지시 운을 띄어 보았던 필레는 운현이 그것을 넙죽 받자 좋아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방방 뛰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사람들의 눈이 무섭고 또 잡고 있던 손을 놓칠 것 같았기에 그녀는 그것을 꾹 참아내었다.

"자... 그럼 마지막이네요!"

8명째의 관객이 주변 사람들의 시샘을 받으며 무대 위로 올라가자 관객들은 초 긴장 상태가 되어 카를로스의 손을 지켜보았다. 그런 그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카를로스는 커다란 통 안에 손을 넣은 후 천천히 제비를 뽑았다.

"마지막 행운의 당첨자는...!"

"제발...제발..."

"파르티님... 제발... 이제부터 주일에 성당 꼬박꼬박 나갈게요..."

"저는 공물도 제대로 바칠게요..."

"제발...!"

'제발 부탁이니 나는 뽑지 말아줘... 니 앞에서 내가 멀쩡히 있을 자신이 없다.'

한명 빼고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간절히 기도했다. 간절히 기원하면 전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고 했던가?

카를로스는 자신이 들고 있는 쪽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31번. 축하드립니다."

"아아아아아!!"

"아깝다!"

"파르티님... 어째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어!? 운현씨! 당첨되신 거 아니에요!?"

필레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운현이 일어나지 않고 딴청을 피우자 카를로스는 빙긋 웃은 후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외쳤다.

"자! 마지막 행운의 당첨자에게 박수를! 31번 관객분! 어서 나와주세요! 많은 분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운현씨! 어서 나가봐요! 와~ 저 이런거 당첨되는 사람 처음 봐요! 운현씨는 운도 좋으시네~"

속도 모르고 기뻐하는 필레의 얼굴과 무대 위에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카를로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 본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씨발.'

74====================

Date

"자! 이 축복받은 아홉분께 박수를!"

"와아아..."

정말 성의없는 박수다. 자기가 뽑히지 못한 것에 대한 이글거리는 질투에 운현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 당첨 소감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도 라에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첨자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첫번째로 뽑힌 당첨자는 부들부들 떨다가 눈을 빛내며 외쳤다.

"라에칸님! 언니! 팬입니다! 아니, 라에칸님을 사랑합니다! 저랑 사귀어주세요!"

"우우우우우우!!"

"저 개년!"

"죽어라!"

"하하하하! 아쉽지만 저는 연극과 결혼한 몸입니다. 많은 관객분들께서 사랑해주시는 만큼 그것만큼은 힘들 것 같군요."

"그, 그럼 포옹이라도..."

"그정도라면야."

"꺄아아아아아! 이대로 죽어도 좋아..."

라에칸에게 끌어안겨진 그녀는 비명을 내지르고 졸도해버렸다. 그녀가 쓰러지자 라에칸은 어깨를 으쓱인 후 도우미를 불렀다. 그의 부름에 나온 건장한 여성들은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는지 쓰러진 여성을 들것에 올리고 무대 밖으로 나갔다.

"자. 두번째 당첨자분!"

"저, 저도 포옹을!"

"하하하하~! 저 분처럼 쓰러지시려구요?"

"아, 아니에요! 전 절대로!"

"자신 있으신가요?"

"물론입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라에칸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서 행복해하던 여성은 라에칸이 자기를 놔주자 행복에 가득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늘을 제 생일로 하겠어요..."

"좋은 답변! 감사드립니다! 그럼 다음 당첨자분! 오! 이분은 아주 귀여우신 소년이군요! 어떤가요? 연극을 해 볼 생각이 없나요?"

세번째 당첨자는 작은 키에 쫑긋 솟은 호랑이 귀가 인상적인 호인족 소년이었다. 짧은 반바지가 잘 어울리는 홍안의 미소년은 우물쭈물 하다가 카를로스를 가리키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 저는 카를로스님과 아, 악수라도... 하, 할 수 있다면 저도 포... 포옹을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커다란 눈망울을 글썽거리며 그가 말하자 관객석에서 힘찬 반응이 터져나왔다.

"꺄아~"

"귀여워~"

정말 상반된 반응이다. 앞의 두 여인이 했을때는 기세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이런 반응이라니. 운현은 이세계의 무서움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귀여운 소년이 그렇게 말하니 어쩔 수 없군. 소년. 네 이름은?"

카를로스가 그 특유의 좋은 저음을 뽐내며 나와 묻자 소년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 저는 에이스라고합니다!"

"반갑군. 소년. 카를로스라고 한다."

에이스와 악수를 한 후 카를로스는 그를 부드럽게 감싸안아 준 후 볼에 입맞췄다. 그것을 본 관객석의 여자들은 자지러졌고 운현은 토할 것 같았다.

"자! 그러엄! 다음은...!"

그렇게 모두가 자기가 원하는 만큼 껴안거나 악수를 하는 것이 끝나고 운현의 차례가 되었다. 운현은 자신에게 다가 온 라에칸이 빙긋 웃자 하마터면 그녀의 죽빵을 날릴 뻔한 것을 꾹 참았다.

'날렸다간 난 여기서 죽겠지.'

"이거 참 잘생기신 남자분이시군요! 복장을 보아하니... 혹시 남창이신가요?"

'내가 다시 정장을 입으면 사람이 아니다.'

오늘만 해도 몇번이나 남창 소리를 들은 건가. 운현은 인상을 왕창 구긴 후 말했다.

"남창 아닙니다. 모험가입니다."

"오오오오오오! 목소리도 좋군요! 훌륭합니다! 혹시 연극에는..."

"저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이렇게 아쉬울 수가! 그럼 당첨자분께서는 다른 분들과 같이 뭔가 하시고 싶으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빨리 끝내줘요."

"하하하하하! 이런 반응은 처음이군요! 모두의 상식을 벗어나게 하는 말씀을 하시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이런 분이 연극 무대로 오셔야 하는데 말이죠!"

"......"

진심을 담았건만 농담으로 치부해버린다. 운현이 인상을 구겼지만 라에칸은 휙 몸을 돌려 무대의 중앙으로 가버렸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추첨을 시작하겠습니다! 준비된 상품은 이렇습니다! 첫번째! 루블란 대왕의 흉상입니다! 이것은 총 셋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

반응이 없다. 아무래도 꽝인가보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흉상을 그가 보였지만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후후후후... 이 반응은 예상했지요. 그리고 두번째! 저 라에칸과 카를로스가 그려진 대형 테피스트리입니다! 이것이 세개!"

"와아아아아!!!"

"갖고 싶다!"

"내놔! 내꺼야! 그거 받으려고 공연을 벌써 다섯번째나 보고 있다고!"

관객석에서 터져나오는 탐욕의 기운에 운현은 움찔했다. 아무리 봐도 저럴만한 가치는 없어보이는데. 테피스트리에는 갑옷을 입은 보이쉬한 모습의 라에칸과 카를로스가 흉물스러운 팬티만 입은 채 서로 끌어안고 입맞추는 것이 그려져 있었다.

'악! 내눈!'

하마터면 눈이 터질 뻔 했다. 운현은 휙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카를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훗."

"......"

그의 입가에 피어오른 웃음에 운현은 소름이 돋았다. 무섭다. 아니, 단순히 무섭다는 감정으로 끝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무언가 알고 있었고, 운현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웃고 있었다.

'뭐야...'

"핥짝."

"히익!?"

자신을 보며 카를로스가 입술을 핥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다리가 떨린다. 마치 뱀 앞에 놓여진 쥐처럼 부들부들 떨던 운현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라에칸은 환호하는 관객들을 진정시킨 후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좀 더 좋은 상품을 보여드리지요! 다음은 단 하나 준비되어 있는 상품들입니다!"

"설마...!?"

"금단의 그것!?"

관객들이 긴장하자 라도칸은 환한 얼굴로 외쳤다.

"카를로스씨와 제가가 무대에서 입었던 의상 세트입니다!"

"이런 씨...!!"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저거 받은 사람 나한테 팔아!!"

하마터면 욕할뻔 했다. 백번 양보해서 라에칸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의상 세트라니. 남의 옷에 냄새 맡는 취미따위는 없었던 운현은 그것에 열광하는 여인들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겨우 욕설을 참아낸 운현은 힐끔 필레에게 시선을 돌려보았다. 만약 필레가 저것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냥 인연을 끊을 생각이었던 운현은 필레가 다른 여인들과 다르게 순수하게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열띤 환호! 감사합니다! 그럼 나머지 두개는... 카를로스씨께서 말씀해주시죠!"

"발표하겠습니다. 하나는... 저기 있는 왕국 최고의 연극배우인 라에칸과의..."

"....."

"데이트 권입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안돼!!!! 인정할 수 없어! 데이트라니! 데이트라니!!"

"라에칸님! 뉘신지도 모를 여자와 데이트를 하면 그 여자도 죽이고 저도 죽을거에요!!!"

"아아아아악!"

엄청난 반응이다. 남자 톱 아이돌의 열애설이 발표되었을 때 팬클럽의 반응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그것에 운현이 두려워할 때 쯤 카를로스는 조용히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

그의 단순한 그 행위만으로 관객석의 분노와 함성이 잦아든다. 운현이 그것에 놀랄 때 카를로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단순한 데이트일 뿐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주십시요. 그리고 마지막은... 이것 역시 앞의 것과 비슷하군요. 저 카를로스와의 데이트권입니다."

"아아아아아아악! 안돼!"

"카를로스님! 제발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제바아아알!"

"쉬이잇. 여러분. 조용히해주세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단순한 데이트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에게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답니다. 저희 연극단은 오개월간 이 던전 도시 발티르에서 공연을 할 예정이니까요."

그의 말에 관객석의 분노와 허탈감, 반대가 가라앉았다. 그들의 심리를 자극한 것이다. 계속 반대했다가 데이트권이 아예 사라져버린다면 '어쩌면 혹시 내가 될지도 몰라.' 라는 희망마저도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럼 언제나 하던 것처럼 사다리를 타도록 하지요."

커다란 종이판이 세워지고 그 위에 준비된 사다리가 모습을 보였다. 총 아홉개의 시작점이 있었고 끝점에는 상품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가운데는 볼 수 없게 하얀 종이로 가려져 있었기에 사람들은 긴장하며 그것을 응시했다.

"자. 여러분. 번호를 선택해주세요. 아까 기절하신 분의 번호는 제일 마지막에 선택된 번호로 하겠습니다."

'나한테 있어서 대박은 저 테피스트리군. 입었던 옷 세트도 팔면 돈이 되겠지만 저거 팔아서 돈벌긴 싫다.'

데이트권은 아예 논외로 쳐버린 운현은 테피스트리에 시선을 잠깐 준 후 휙 고개를 돌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썩을 것 같다.

"아!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다른 상품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데이트권은 양도가 안됩니다. 아시겠죠?"

"네에!"

"절대 안넘겨요!"

'양도는 안돼도 안나갈 수는 있겠지.'

눈을 빛내는 다른 당첨자들과 다르게 운현은 만약 데이트권이 걸리면 돌아가자마자 그것을 불태워버릴 생각을 했다.

"그럼 여러분! 선택해주십시요!"

나온 순서대로 모두가 번호를 선택했다. 운현의 번호는 8번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마법에 의해 번호표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모두가 간절히 자신의 욕망을 위해 비는 가운데 번호표는 어느새 상품의 이름 위에서 멈춰서게 되었다.

'오... 마이...갓.'

"축하드립니다! 귀여운 소년분과 잘 생긴 남자분! 각각 데이트권에 당첨되셨군요!!"

운현은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하필이면 저 인간과의 데이트권이라니. 운현은 번쩍 손을 든 후 외쳤다.

"저는 저 사람보다 당신이 나은데 차라리 당신이랑 하는게 어떨까요!? 이 꼬마도 저 카를로스라는 사람을 좋아하잖아요! 전 여자가 좋아요!"

운현은 라에칸을 보며 간절히 외쳤다. 그의 시선에 라에칸은 살짝 얼굴을 붉힌 후 고개를끄덕이려 했으나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카를로스는 담담히 말했다.

"그건 거절이다."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글쎄? 왜일까?."

성큼성큼 다가 온 카를로스는 운현을 가만히 바라보며 싸늘히 말했다.

"너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거든. 그것도 천천히..."

"무슨 의미지!?"

단순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아니다. 이자는 그런 단순한 의미로 말을 거는 것이 아니다. 운현은 본능적으로 이 남자에 대한 지극할 정도의 혐오감을 느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은 구역질이 절로 나오자 그를 싸늘히 바라보던 카를로스는 가볍게 몸을 돌려 걸어갔다.

"후후후후..."

"꺅! 카를로스님이 저 남자를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셨어!!"

"엄마야! 나 어떡해! 카를로스님 너무 멋있어!!"

순식간에 부녀자들의 망상의 대상이 되어버린 운현은 카를로스를 죽일 듯 노려보았고 그 모습에 관객들은 더더욱 환호성을 내질렀다.

"...씨발..."

운현은 이 혼란스러운 광경에 결국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운현씨... 표정이 왜 이래요?"

자리로 돌아 온 운현은 허탈한 마음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를 보며 필레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내가 도대체 뭔 죄를 지었다고... 도대체 저새끼는 뭐야!?'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필레는 시무룩히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연극 별로 안좋아하시죠. 그런데 저한테 맞춰주시느라..."

"아, 아니에요."

자신의 운이 더러웠을 뿐이지 필레에게는 죄가 없다. 운현은 시무룩해진 그녀를 바라보며 애써 웃었다.

"필레씨 덕분에 정말 돈주고도 안할... 이 아니라 못할 경험을 하게 되었는걸요. 제가 언제 무대에 나가서 이런 걸 받아보겠어요?"

운현은 금색으로 반짝이는 카드를 흔들었다. 그의 말에 필레는 살며시 고개를 든 후 물기에 가득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인가요?"

"네. 물론이죠. 연극도 재미있었던 걸요?"

"그랬어요? 헤헤헤... 다행이다."

필레의 순진한 미소에 운현은 속이 무척 쓰렸다. 관객들은 어느새 나가기 시작해 입구 주변은 혼잡하기 그지 없었기에 그들은 관객들이 좀 빠지면 나가기로 했다.

"이런 연극은 자주 보시나요?"

"아, 아니요! 이 티켓은 저도 받은거라서 온거죠! 이런 비싼 티켓은 저 못구해요!"

"비싸요? 얼만데요?"

"한장에 사십골드요."

75====================

Date

"헉..."

나이트호크 세트 두부위 가격이다. 운현이 가격을 듣고 놀라자 필레는 빙긋 웃었다.

"이런 제대로 된 연극은 비싸지만 싼 연극. 그러니까 배우들이 모두 여자인 연극은 그리 비싸지 않아요. 이렇게 사람들도 많지 않구요. 그런 연극은 자주 보러 가요."

"비슷한 내용과 연출인가요?"

"네? 뭐... 내용에 따라서는요."

"그때는 꼭 같이 가시죠."

"예? 저, 정말요!?"

"네. 물론입니다."

남자가 나오는 연극이라 이렇지 여자들만 나오는 연극이라면? 그야말로 눈호강이다. 운현은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말했고 필레는 감격에 젖은 얼굴로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또 데이트를 하겠다는 말이야? 그런거야? 필레? 또 배신... 이 아니라 위험한 행동을 하겠다고?"

"길드장 허락도 없이 말야."

그들이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가운데 그들에게 싸늘한 목소리를 내며 다가운 두 여인의 등장에 운현과 필레는 딱딱히 굳었다.

"위, 윈드."

"댁은 또 왜..."

윈드와 상아가 씩 웃으며 나타난 것을 본 필레와 운현이 떨떠름히 말하자 그녀들은 피식 웃은 후 말했다.

"이런 시기에 그렇게 태평하게 돌아다니려고 하다니. 간이 부은 거 아냐? 하지만 어쩌겠어. 그래도 내 소중한 친구인데. 그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 윈드 발렌타인이 직접 나섰지. 기뻐해도 좋아."

"난 그냥 구경나왔어."

장검을 허리에 차고 경갑으로 무장한 윈드가 되도 않는 소리를 하는 것과 태평히, 그리고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 말하는 상아의 모습에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험하기 뭐가 위험하다는 거에요?"

"위험하지. 저기 봐봐."

"음...? 헉!"

상아가 광검의 자루로 가리킨 쪽에 시선을 돌린 운현은 기겁하며 움찔했다. 그곳에는 아직도 연극의 여운에 잠겨 있는지 펑펑 울고 있는 헥토르와 아닌 척 하면서 손수건으로 계속 나오는 눈물을 닦고 있는 티르빙이 있었고 그녀들의 뒤에는 헬하운드의 정예라고 불리는 여인들이 흐느끼고 있었다.

"저래도?"

"...끄, 끄응. 부정할 수 없네."

"흑흑... 정말 갓-연극이었어요... 그랬죠? 티르빙님?"

"훌쩍... 가, 갓은 무슨... 시, 시원찮았다. 흑흑... 피에톤님... 네번째 보는 거지만 정말... 정말 슬픈... 흑흑흑..."

"........."

운현과 필레가 말없이 저들을 바라보는 동안 피식 웃은 상아는 운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골치아픈 녀석과 엮이게 됐네."

"골치아픈 녀석이라뇨?"

"아아... 저 녀석 말이야."

상아가 이를 드러내며 무대쪽을 가리키자 운현과 필레는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느새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은 카를로스가 차분한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직도 남아 있었나?"

"어엇!?"

"피에톤님! 이 아니라 카를로스님!"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관객석에 남아 있던 티르빙과 헥토르는 카를로스가 걸어오자 당황하며 외쳤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그가 나온 것에 당황한 그녀들은 필레와 상아를 보고도 차마 움직이지 못했다.

"괜찮다면 지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말이지."

운현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 웃음에 운현이 이를 드러내자 카를로스는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뀐 후 손을 뻗었다.

"내 몸에 손끝하나라도 대면 혀를 깨물테다."

운현은 그의 끈적한 시선에 기겁하며 싸늘히 말했다. 그의 말에 더더욱 짙은 웃음을 지은 카를로스가 손을 더욱 뻗자 그의 팔을 잡은 필레는 입가의 미소를 천천히 지우며 싸늘히 말했다.

"당신이 연극계의 거물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운현씨께서 싫어하고 있으니 더 이상 접근하지 마시지요."

"호오? 이건 또 뭐야."

필레를 위 아래로 흝어 본 카를로스의 입가에 더할나위 없이 즐겁다는 웃음이 꽃피자 상아는 귀찮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여전하구만. 그 재수없고 느끼한 낯짝은."

"흥. 넌 아직도 있었냐? 볼 일 다 봤으면 꺼져. 얼굴만 봐도 구역질 날 것 같으니까."

"누가 할 소리를?"

카를로스의 입에서 거친 말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의 말에도 상아는 가소롭다는 듯 비웃을 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카를로스씨. 적당히 하시죠. 이 사람들은 제 친구입니다만."

"오오... 오너분의 따님도 있었나? 이거 쟁쟁한 사람들이 모여 있구만. 그 사람들의 중심에 있는게 저자라니..."

"운현씨가 싫어합니다. 그만두시지요."

"같잖은 계집이... 응? 호오... 이것 봐라. 보기보다 제법인데?"

"걔 무시하지마라. 레벨만 따져도 나랑 비슷하다."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한 상아가 천천히 광검을 들었다. 여차하면 베겠다는 느낌으로 그녀가 싸늘히 말하자 카를로스는 키득거린 후 한 손을 들었다.

"글쎄. 저기 있는 아가씨들이 함께한다면 너희들이라고 해서 무서울 것 같지 않은데?"

카를로스는 들어 올린 손으로 티르빙과 헥토르, 그리고 그 뒤의 헬하운드들을 가리켰다.

"큭..."

"자꾸 신경 건드릴래? 나 아직 너한테 화 풀린 거 아냐. 지금 당장 널 찢어 죽이고 싶은걸 꾹 참고 있는거 안보여?"

상아가 이를 드러내며 싸늘히 말하자 카를로스는 키득거린 후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내 힘과 맞먹을 정도인 자가 있는데 너와 맞부딪힐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지. 그리고 너와 싸우는 것은 스승님의 유지를 어기는 일이기도 하고 말야."

"...이거 반납할래."

"크크크... 거절하겠다. 어차피 너와 나는 한번 정도는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야해. 그리고 난 후에..."

그는 자신의 검은 눈을 번뜩인 후 운현을 향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그 후에 결정할 일이지."

운현이 금색의 카드를 내밀자 카를로스는 곧바로 웃음을 지우며 무대의 뒷편으로 걸어갔다. 그가 가버리자 상아는 인상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짜 귀찮네."

"아는 사람이야?"

"응? 아아. 응. 아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상아는 진짜 싫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떤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내 오빠야. 그리고 내 스승님의 또다른 제자이기도 하고."

"........."

"그리고 스승님을 죽이려다가 실패한 멍청이이기도 하지. 저 멍청이 때문에 스승님의 경계가 심해져서 나도 실패했거든. 그 원한. 아직 잊고 있지 않으니까 저 새끼가 까불면 말해. 모험가를 지키는 것도 모험가 길드장의 의무니까 말야..."

상아는 진심을 담아 으르렁거렸다.

"그, 그렇군."

상아의 몸 주변에 살기가 일렁거리자 운현은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저 카를로스라는 놈도 현자의 제자라면... 저 엘프의 레벨은 몇이야?"

"글쎄? 마지막으로 봤던게 십년 전이었는데 나랑 싸워서 비겼으니까... 적어도 450은 넘지 않았을까?"

"이거 무섭네."

그정도 레벨을 가진 자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할리 없었다. 운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자. 이거 갖고 있어."

운현이 떨떠름히 말하자 상아는 씩 웃은 후 주머니에서 작은 목걸이를 꺼내었다. 그것을 건네 준 상아는 한쪽 눈을 윙크한 후 운현에게 말했다.

"만약 카를로스가 뻘짓하면 강하게 내 이름을 외쳐. 그럼 바로 너에게 소환될테니까 말야."

"음. 이거 고맙군."

"뭘. 우리 사이에."

"자, 잠깐만요!? 상아님! 운현씨랑 무슨 사인데요!?"

"이럴수가! 동료라고 생각했더니 배신자였단 말야!?"

상아가 웃으며 운현의 볼을 꼬집자 필레는 기겁하며 그녀에게 물었고 윈드는 또다시 배신을 당했다는 느낌에 시무룩해졌다.

"쓸데없는 소리는 관둬. 이상한 소리 할거면 가라. 그냥."

"하하핫! 그럴수야 없지. 필레가 데이트를 한다는데..."

"한다는데...?"

"방해해야지."

"자꾸 이런식으로 나오면 진짜 약속이고 뭐가 다 엎어버린다."

운현이 짜증을 내며 말하자 상아는 키득거린 후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근데 나는 그렇다고 치고 얘는 어쩔거야?"

상아는 자신의 옆에 있는 윈드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무척이나 시무룩한 얼굴을 보니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같다.

"그, 그건 제가 어떻게든..."

"배신자아아아아아아..."

"못할 것 같은데?"

필레가 나서서 해결하려 했지만 그녀는 음울한 눈으로 필레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것에 그녀가 움찔하자 운현은 한숨을 내쉰 후 윈드에게 다가가 말했다.

"윈드씨."

"네에..."

"저번에 약속한 거 있죠?"

"네? 뭐요?"

"소개팅 시켜준다는거."

"...진짜 해줄거에요?"

"고향에 있는 녀석들은 부르기 힘들지만... 모험가 생활을 하다보면 좀 괜찮은 남자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에 윈드씨는 일등 신부감 같은데... 반드시 좋은 남자를 소개시켜줄게요."

"정말이죠!? 진짜!? 약속이에요!?"

"아, 알겠어요."

운현의 손을 꽉 잡으며 윈드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윈드는 그제서야 마음을 풀었는지 필레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친구야. 이 남자를 꼭 잡으렴."

"응? 아... 으, 으응."

윈드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필레가 당황하는 동안 그들에게 한무리의 사람들이 접근했다.

"잠깐. 이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호오... 용병 연맹의 애송이들 아닌가."

"애, 애송이... 에잇! 지금은 상아 당신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용병 연맹의 간부가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을 만났다. 우호적인 관계도 아니고 서로 적대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는 세력의 간부가 적은 수의 호위만 데리고 있는데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뭐에 신경을 쓴단 말인가. 운현은 티르빙이 자신을 쏘아보자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혹시 그때 걸린 것이 아닐까? 운현은 내심 무척 당황했지만 애써 그것을 숨긴 채 물었다.

"카를로스님과의 데이트권을 얻었지."

"...불행히도."

"부탁이다! 싸인 좀 받아다 다오!"

"......"

"나, 나도!"

"저도 부탁드릴게요!"

열둘의 여인들이 허리까지 숙이며 내민 것은 카를로스의 그림이 그려진 고급스러운 카드였다. 정중한 자세로 그것을 내민 그녀들의 모습에 운현은 당황하다가 필레를 보았다.

"어, 어쩌죠?"

"어쩌긴요. 다 찢..."

"아아아아! 부디! 제발! 내가 습격했던 것은 사과하겠어! 제발 부탁이다!"

굴욕적인 얼굴을 하면서도 무척이나 필사적인 모양이다. 티르빙의 간절한 말에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쉰 후 말했다.

"좋아요."

"정말인가!?"

"그 대신 이걸 가져다주면 제 부탁을 하나 들어줬으면 좋겠군요."

"얼마든지! 연맹을 배신하는 것만 아니라면...!"

"정말이죠?"

"음!"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티르빙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것을 본 운현은 티르빙이 건넨 카드만 받았고 헥토르와 다른 여인들은 당황했다.

"우, 우리 거는!?"

"아니 댁들에게 부탁할건 별로 없는데..."

"어떻게든 도와주겠어! 그러니!"

"...아, 알겠어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그녀들의 기세에 눌린 운현은 한숨을 내쉬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녀들이 희희낙낙 웃으며 공연장을 나서자 상아는 피식 웃으며 운현에게 물었다.

"속도 좋네. 적의 부탁을 왜 들어줘?"

"언젠간 요긴하게 쓰일 일이 있겠지. 적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 고개를 숙일 정도면..."

운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상아는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응?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우리가 여기서 더 할 일은 없는건가?"

상아는 윈드에게 물었고 윈드는 후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는 간다."

"필레! 화이팅!"

"으, 으응!"

아까 전까지만 해도 배신자니, 위험한 곳에 홀로 둘수 있니 없니 하며 붙어 있으려던 윈드와 상아가 휙 나가버리자 운현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지, 지친다..."

"후후후... 운현씨. 고생 많았어요. 운현씨 덕분에 윈드가 조금 마음을 놓은 것 같네요."

필레는 부드럽게 웃으며 운현을 칭찬했다. 만약 자신 혼자였다면 이렇게 윈드를 달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식사하러 가실까요?"

"그래요. 어서 가죠."

운현은 지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비틀거렸다. 그가 쓰러지려는 것을 부드럽게 감싸 잡은 필레는 운현의 안색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정신적으로 피로가..."

"어서 나가서 신선한 바람이라도 쐬는게 좋겠어요. 저... 걷기 힘드시면 부축이라도 해드릴까요?"

"고맙습니다."

필레의 호의에 운현은 부담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운현이 자신에게 몸을 기대자 필레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의 허리를 꼭 감싸 잡았다.

"으아아..."

"네?"

"아, 아니에요! 어서 가요!"

들뜬 목소리로 필레는 운현을 데리고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76====================

Date

"후우... 좀 진정되네요."

운현은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필레에게 차분히 말했다. 맑은 공기를 마시니 머리가 돌아가는 기분이다.

'정말 최악이었군.'

필레와의 데이트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카를로스를 떠올리녀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의 복장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자신에게 명백하게 적대적인 그 시선. 그것을 생각하며 부르르 몸을 떤 운현은 필레가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자 쓰게 웃었다.

"운현씨... 카를로스는 왜 운현씨에게 그런 시선을 보낸 걸까요?"

"눈치채셨어요?"

"네."

운현이 눈치챈 것을 필레가 눈치채지 못할리 없었다.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고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저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그냥 남자라서 마음에 안든다. 라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생각해볼만한 이유는 무엇이 있을까? 답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가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다른건 하나지.'

무대에서 소년을 끌어안고 볼에 키스해준 것을 본다면 그가 남자를 극혐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올 수 있는 답은 하나 뿐.

'내가 이계인이라서 그러는 거겠군.'

상아와 비슷한 이유로 자신이 이계인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외에는 마땅히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운현이 말없이 생각하자 필레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운현씨. 그 카드를 써야 하는거죠?"

"유효기간까지 버텨보려구요."

"카를로스와 만날땐 꼭 저를 불러주세요. 제가 운현씨를 지켜드릴게요."

필레는 진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운현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겠다는 결의가 담긴 그 시선에 운현은 피식 웃었다.

"엣!? 뭐, 뭐에요! 진심이라구요!"

"아아... 아니에요."

그녀의 예쁜 얼굴과 자신을 생각해주는 마음에 운현은 카를로스로 인해 썩은 눈과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을 받았다.

"필레씨."

"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은 운현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늘."

"에엣!? 아니에요! 그, 오늘 일도 저 때문에 생긴거나 마찬가지고..."

"아뇨. 그저 제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 작자는... 어떻게든 저를 찾았을거에요."

운현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말한 후 필레의 손을 잡았다. 그가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잡자 필레는 당황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운현...씨?"

"아까 저 솔직히 말해서 좀 무서웠거든요. 필레씨 덕분에 살았어요."

카를로스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을 때 필레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그를 막았다. 필레 정도라면 카를로스의 강함을 알았을 것이다.

"아뇨. 아뇨! 그건 당연히 해야 할..."

"그렇지만 회피할 수도 있었던 일이겠죠."

"그..."

"정말 고마워요."

"아니에요! 저, 저도 운현씨에게 도움을 받았던걸요! 그러니까..."

운현의 시선에 몸둘바를 몰라하며 몸을 베베 꼬던 필레는 퍼뜩 정신을 차린 후 붕붕 고개를 휘저으며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필레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 아뇨. 이런 분위기면 항상 방해가 들어와서..."

"아."

그러고보니 필레와 함께 있을 때, 뭔가 조금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지려고 하면 항상 방해가 있었다. 그게 상아든, 아니면 윈드든. 그것도 아니면 제 3의 인물이든. 필레가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에 운현은 피식 웃어버렸다.

"큭큭큭..."

"운현씨?"

"아아아. 정말이지. 필레씬 정말 귀엽네요."

"에? 귀... 귀... 귀엽다뇨!?"

"지금은 데이트 도중이었죠?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제대로 데이트를 즐기지도 못했는데. 오늘은 재밌게 놀아요."

운현은 잡고 있는 필레의 손에 깍지를 끼웠다. 그의 말과 그의 행동에 필레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 찼고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네! 좋은 식당 알아놨어요! 어서 가요!"

도시의 북동쪽에 위치한 식당으로 이동한 필레와 운현은 필레가 예약해 둔 식당의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하천이 보이는 좋은 분위기의 자리에 앉은 필레는 싱글벙글 웃으며 운현에게 물었다.

"운현씨는 음식 뭐 좋아하세요?"

"전 딱히 가리는 거 없이 잘 먹어요. 필레씨는요?"

"헤헤~ 저두요! 그럼 이건 어때요? 송어찜인데. 무척 맛있어요."

"와본 적이 있는 곳인가요?"

"네!"

"누구랑요? 남자랑? 흐음... 그럼 질투나는데요?"

운현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필레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마주 웃어주며 답했다.

"흐응~ 누굴까요~? 맞춰봐요!"

"윈드씨?"

"...한방에 맞출 줄이야."

"어? 진짜에요?"

"네에..."

필레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시무룩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인 후 웨이트리스가 다가오자 물었다.

"송어찜과... 와인은 어떤게 괜찮나요?"

"베티스트 주세요. 여기는 화이트 스파클링 와인이 맛있어요."

"그럼 그걸로 주세요."

간단하게 주문을 마치고 운현은 컵에 담긴 물을 한모금 마셨다. 그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필레는 씨익 웃으며 물었다.

"운현씨는 이런 가게에는 처음인가요?"

"네. 예전에 가족끼리 가본 적이 있긴 하지만 여자와는 처음이네요."

"가족들이요? 그러고보니 운현씨는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나요?"

"부모님이 다 계시고 형이 둘 있어요. 그리고 조카도 둘 있고."

"와... 좋겠네요! 남자만 셋이라니..."

이 세계는 현실과 다르다. 남자의 수가 극단적으로 적은 곳이다보니 남자 형제만 있는 것에 필레가 감탄한 것이다.

'내 입장에서야 죽을 맛이긴 하지만.'

"딱히 좋지도 않아요. 형들에게 맨날 구박만 받았거든요."

"응? 운현씨가요? 왜요? 이렇게 멋진 사람을?"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필레는 떨떠름히 물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껴주고 사랑해주기만 해도 모자랄 사람을 왜 구박한단 말인가.

"제가 형들만큼 하지 못해서겠죠. 형들은 저랑 다르게 우수하거든요. 부모님의 기대도 많이 받았고. 그 기대만큼 행동하기도 했구요."

"운현씨도 잘 하시잖아요."

"전 실패를 경험했으니까요. 물론 부모님께서 내색은 하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많이 실망하셨더라구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운현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명백한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필레는 붕붕 고개를 저은 후 차분히 말했다.

"한번의 실패로 좌절하지 마세요. 어떤 실패인지 모르지만... 운현씨는 제가 보기에 무척이나 멋진 분이에요."

"그런가요? 하하하... 이렇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도 이 도시에 와서 처음 받는 것이네요."

"의외네요. 운현씨는 성격도 좋고 멋지기도 해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사랑받을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만도 않아요. 저 성격되게 나쁜데요?"

"에이~ 거짓말~"

"진짠데. 하하하. 그럼 필레씨는 어때요?"

"네? 어... 전 멋지다고 생각해요."

"...예?"

"그, 그러니까 운현씨는 참 멋지다고..."

"아, 아니! 필레씨 가족관계 물어본건데."

"히잉!? 으, 아, 으으으... 그, 그렇군요. 하... 하하하하하... 크흠! 전 부모님이 두분 다 계세요. 형제 자매는 없구요."

"무남독녀인가요?"

"음, 뭐 그런 셈이죠. 사실은 저 양녀거든요."

"아... 그랬나요? 죄송해요."

운현은 괜한 걸 물었다는 얼굴로 미안해 했다. 그의 표정에 필레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양부모님들은 모두 좋으신 분이거든요."

"그렇군요... 그분들은 지금 뭘 하고 계세요?"

"제 영지에서 노후를 즐기고 계세요. 아, 전 귀족 아니에요. 그... 윈드와 함께 참여했던 필라니아 몬스터 웨이브때 포상으로 받았을 뿐이에요. 그... 신분차나 그런건 없으니까 편하게 하셔도 괜찮아요."

행여나 운현이 오해할까봐 걱정한 필레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녀가 당황하자 운현은 빙긋 웃은 후 물었다.

"헤에... 그렇군요. 그러고보니 필레씨와 윈드씨는 기사 동기라고 하셨죠? 발렌타인 가문이라는 명가의 후손인데 용케 친구가 되었네요."

"아. 그게 기사가 되면 자신의 성을 쓰지 못하게 되거든요. 몇몇 철없는 사람들이 자기 가문을 떠들고 다니지만 윈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냥 순수하게 기사로서 움직였죠. 후후후. 그리고... 그 가문 때문에 윈드와 친해졌는걸요."

"헤에. 진짜요? 왜요?"

"그게..."

운현의 질문에 필레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 고민을 하는 모습이다. 그녀가 입술을 우물거리자 운현은 볼을 긁적거렸다.

"말씀하시기 힘드시면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아, 그게... 그런게 아니라요. 이건 이따가 차 마시면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연극을 좋아하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인가봐요?"

"네. 헤헤헤..."

"그럼 괜찮아요. 그때 해주세요."

"네! 그런데 운현씨. 요새 던전 탐험은 어때요? 홉고블린도 잡으시고 꽤 잘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아아. 나쁘지 않죠. 홉고블린 잡을때는 진짜 무섭긴 했지만."

"그 상처. 어떻게 만든건지 가르쳐주실 생각은 없으세요?"

"으음..."

필레의 질문에 운현은 고민했다. 딱히 말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괜히 말했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었던 그는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해요."

"아, 아뇨. 운현씨가 자신만의 고유스킬로 한 것이라면 숨기셔도 괜찮아요. 아시다시피 저도 제 스킬은 감추고 다니는 편이니까요."

라고 말하는 주제에 필레의 표정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입맛을 다신 후 떨떠름히 말했다.

"나중에. 필레씨에겐 꼭 가르쳐드릴게요."

"후후후... 정말이에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식사 나왔습니다."

웨이트리스가 사뿐사뿐 걸어 송어찜을 놓아주었다. 큼지막한 송어와 커다란 빵. 그리고 샐러드. 거기에 화이트 와인까지. 순식간에 테이블이 음식으로 가득 차자 운현은 웃으며 말했다.

"맛있겠네요!"

"후후... 그렇죠? 여기 송어찜은 정말 괜찮아요. 어서 먹어요."

"네. 맛있게 드세요~"

필레와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운현과 필레는 서로 계산을 하겠다며 실랑이를 벌였고 결국 식사 비용은 운현이 내게 되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온 운현에게 필레는 뾰로통한 얼굴로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꽤 비쌌을텐데..."

"뭐. 필레씨를 위해서라면 이정도는 아깝지 않죠."

"정마알... 운현씨는 듣기 좋은 말만 해주시네요."

"필레씨는 늘 고생하니까 듣기 좋은 말로 조금이라도 더 치유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쿡쿡쿡... 절 생각해주시는 건 운현씨밖에 없네요. 고마워요. 잘 먹었어요. 후식은 제가 살게요. 운현씨. 단거 좋아하세요?"

"딱히 가리지는 않아요."

"그럼 맛있는 케이크 가게가 있는데 가시겠어요?"

운현을 향해 빙긋 웃은 필레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가 그를 데리고 케이크 가게로 향했다. 여자들이 좋아할법한 화려한 간판의 가게 안으로 들어선 필레는 2층의 야외 테라스에 있는 빈자리에 앉았다.

"몽블랑과 생크림 케이크가 괜찮아요. 여기는."

"혹시나해서 여쭤보는 건데... 여기도?"

"어... 음. 네. 그, 그래도 윈드랑만 온 건 아니라구요!"

"그럼요?"

"음~ 맞춰보실래요?"

필레가 생글생글 웃으며 묻자 운현은 피식 웃은 후 답했다.

"설마 상아 길드장님?"

"...어, 어떻게 알았어요?"

운현의 질문에 필레는 당황하며 답했다. 그것에 운현이 피식 웃자 그녀는 붕붕 고개를 저은 후 외쳤다.

"다, 다른 사람도 있어요!"

"길드의 사람들?"

"우우... 운현씨. 자꾸 정곡을 찌르지 말아요..."

77====================

Date

분위기 좋은 가게이지만 의외로 손님은 없었다. 열 테이블이 넘는 2층에는 운현과 필레, 그리고 구석에서 케이크를 쌓아두고 먹고 있는 여인 두명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덕분에 조용히 홍차를 마시며 케이크를 먹게 된 운현은 필레가 차를 홀짝이자 담담히 물었다.

"필레씨. 이제 괜찮나요?"

"네? 아... 네."

운현의 질문에 필레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운현씨. 혹시 적마족이라고 알고 계세요?"

"그게 뭔가요?"

"정말... 운현씨의 고향은 어디에요? 꽤나 유명한 이야기인데."

쓴웃음을 지은 필레는 자신의 귀를 보여주었다. 끝이 뾰족한 귀를 보여 준 후 니트로 가려져 있는 자신의 팔을 천천히 걷었다.

"여기 붉은색 문신이 보이죠?"

마치 붉은 이빨들이 가리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왼팔에 새겨져 있는 붉은 문신을 가리키며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적마족의 특징이에요. 뾰족한 귀와 왼팔의 붉은색 문신."

"그렇군요. 그런데요?"

"으음... 아까 연극장에서 악신의 이야기를 했었잖아요? 세상을 멸망시키려 했던 악신."

"네."

"그때 당시에 악신을 따르는 이들이 있었다고 하네요. 적마족의 문신은 그 악신의 추종자들이 아군을 구별하기 위해 새긴 문신이었다고 하구요."

"허... 그럼 필레씨도 그 악신을 따르는건가요?"

"그럴리가요. 애초에 말이 안되는 이야기죠. 학설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는, 그저 적마족을 경계하고 시기하려 하는 학자가 떠들어댄 이야기일 뿐인데요."

"그래요?"

"네. 다만 그 학자가 파르티 교단에 꽤 영향력이 있는 학자라는게 문제였죠. 그 학자의 주장때문에 적마족은 괜히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았어요. 물론 모두가 그 학자의 학설을 따른 것은 아니었죠. 학계에서는 그 학자를 종교에 빠진 얼간이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요."

"적마족에 대한 편견이라... 적마족이 일반인과 다른가요?"

"아뇨. 그냥 귀가 뾰족하고 팔에 문신이 있다는 것 외에는 다를게 없어요. 제가 본 적마족들 중에는 착한 사람도 있었고 나쁜 사람도 있었는걸요. 다들 똑같았어요. 주변의 사람들과 비교했을때도."

"그렇지만 알게 모르게 편견은 어느정도 있을 수 밖에 없었죠."

"헤에..."

운현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무덤덤한 시선에 조금 놀란 필레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운현씨는 예상대로네요."

"뭐가요?"

"제가 적마족이라는 걸 알아도 별로 바뀌는게 없잖아요. 그런 사람은 운현씨가 세번째에요."

"어? 그래요?"

운현이야 적마족이고 뭐고 아예 모르니까 그런다고 치더라도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 또있었단 말인가? 그가 궁금해하자 필레는 고개를 끄덕인 후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게 바로 윈드에요. 기사가 되었을 때 하급 기사들은 공동 목욕탕을 써야했죠. 이게 알려지면 상당히 귀찮아져서 숨기려고 했지만 결국 보일 수 밖에 없었고 몇몇 동료는 기분나쁘다는 듯, 몇몇 동료는 안쓰럽다는 듯, 몇몇 동료는 힘내라는 듯 저를 대했어요. 하지만 윈드만은 달라진게 없었죠. 그녀는 그저 순수하게. 저 필레를 그저 기사단의 동료로만 생각해왔어요."

"왜요?"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죠. 나는 적마족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 그 질문에 윈드는 무척이나 당연한 걸 말하듯이 말하더라구요. '네가 적마족이든, 엘프든, 인간이든. 그건 너를 뒤덮고 있는 껍질에 불과하다. 어쨌든 너는 나의 동료이고 나의 친구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나를 발렌타인 가문의 윈드 발렌타인이 아닌 기사 윈드로 바라보는 이상 나는 적마족 필레가 아닌 진짜 너. 필레를 받아들일 뿐이다... 라고요."

"오오..."

그 윈드가 저리 멋진 말을 했을 줄이야. 운현이 감탄하자 필레는 공감한다는 듯 키득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우습죠?"

"네. 왜 저런 멋진 여자에게 애인이 없는지 이해가 안되네요."

"저도 동의해요. 어서 윈드에게도 좋은 애인이 생겨야 할텐데."

윈드를 떠올리며 둘은 작게 키득거렸다. 반쯤 남은 홍차를 모두 마신 운현이 홍차를 리필하고 다른 케이크를 주문하자 필레는 포크로 접시에 남아 있는 몽블랑의 조각을 쿡쿡 찔렀다.

"지금와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윈드 역시도 발렌타인 가문이라는, 자신을 뒤덮는 껍질 때문에 무척이나 힘들어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발렌타인 가문의 윈드. 기사단의 윈드. 모두에게 주목받는 윈드. 그런 윈드가 아니고 싶었던 거였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는 윈드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적마족 필레... 사람들에게 동정받는 적마족 필레... 사람들에게 격려받는 적마족 필레... 그저 저는 필레로 보이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죠."

"흐음... 그렇군요."

"네. 그래서 제가 연극을 좋아하는 거에요. 저곳에서는 가짜 자신을 보이지만 연극이 끝나면 가짜에서 벗어나 진짜 자신을 보일 수 있으니까. 무대 위에서 가짜 자신을 보일지라도 사람들이 진짜 자신을 바라보고 좋아해주니까. 그래서 저는 연극을 좋아해요."

"그래서 자주 연극을 보러 가시는건가요?"

"네. 그리고 재밌잖아요. 운현씨. 재밌다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거라구요."

손가락을 올리며 필레는 깜찍하게 윙크했다.

"연극은 혼자 보러 가세요?"

"혼자 갈때도 있고... 길드의 동료들이랑 갈때도 있고... 윈드랑 갈때도 있어요."

"남자랑은요?"

"아, 아는 남자 없어요!"

운현이 짖궂은 웃음을 지으며 묻자 필레는 붕붕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 남자랑 연극 보러 간 것도 이게 처음인데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필레는 조심스레 말하고 베시시 웃었다. 그녀의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운현은 케이크가 나오자 포크로 잘라 한입 먹은 후 말했다.

"괜찮다면 저도 같이 보러가요. 그... 이번처럼 좀 남자가 나오는건 문제가 있지만."

다시 카를로스의 재수없는 얼굴이 떠오른다. 운현은 필레의 예쁜 얼굴을 보며 황급히 그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웠고 필레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기... 진심이세요?"

"물론이죠. 아. 저도 던전에 가야하니 자주는 힘들겠지만..."

"그, 그치만 운현씨는 동료들이 있잖아요."

"걔들요? 음. 뭐 그렇긴 하죠."

"싫어하지 않을까요...?"

필레는 약간 주눅 든 어조로 물었다. 지금도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 찔리는 편이었다. 필레가 보기에 운현의 동료인 헤스티아나 미야, 그리고 이번에 동료가 된 바제트는 분명히 운현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뭐, 싫어하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건 아니죠."

"에?"

"누군가에게 얽메이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죠. 필레씨. 맘 내키는 대로 사는 것도 중요한 거라구요."

아까 전 자신이 했던 포즈를 취하며 운현이 말하자 필레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키득거렸다.

"진짜요? 저 진심으로 알고 있을거에요? 좋은 연극 나오면 무조건 운현씨에게 같이 가자고 할거에요. 그래도 괜찮죠? 저 생각보다 응석 많이 부리고 그러는데... 정말 괜찮겠어요?"

"물론이죠. 카를로스의 일이 터진다면 필레씨에게 신세를 져야 하는데 이정도쯤이야."

"헤헤헤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필레는 무척이나 기쁜 듯 얼굴을 붉히고 웃었다. 그녀가 웃는 얼굴을 마주하며 운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걸로 카를로스에 대한 대책은 세웠군. 거기에 필레와도 친해졌고.'

필레에 대한 카를로스의 반응을 생각한다면 필레에게 호감을 사는 일은 무척 중요할 것이다. 상아의 말에 따르면 카를로스는 상아 자신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실력자라고 볼 수 있었다. 아까 연극장에서 카를로스가 함부로 덤비지 못한 이유가 상아 뿐만 아니라 필레와 윈드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운현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다른 이를 방패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필레씨는 언제부터 상아와 알게 된거에요?"

"예? 아... 그게. 제가 기사단을 그만두고... 어? 자, 잠깐만요."

운현의 질문에 필레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하다가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운현의 말투에서 이상한 것을 느낀 것이다.

"상아... 라뇨?"

"네? 모험가 길드장 말하는건데... 혹시 이름 모르세요?"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왜 길드장님을 그렇게 편하게 부르세요?"

"어!? 안돼요?"

자신이야 상아의 협박에 가까운 부탁에 질려 그녀에게 존대할 생각을 완전히 버렸다고 치더라도 필레에게 있어서는 직장 상사였다. 그녀와 있을 때는 상아에게 존대를 하는게 맞을까? 라고 생각한 운현이 떨떠름히 묻자 필레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게... 안될건 없지만... 그게..."

"으음?"

그러고보니 아까 전, 운현에게 상아가 '우리 사이' 라는 말까지 했었다. 분명히 자신보다 상아를 늦게 만났을 텐데 운현도 그렇고 상아도 그렇고 서로에 대한 거리감이 없어보였다. 그것에 불안감에 빠진 필레는 주저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상아 길드장님과... 무슨 사이세요?"

"별 사이 아닌데요? 굳이 말하자면 모험가와 모험가 길드장 사이?"

이계인과 이계인임을 눈치챈 사이라고 하기엔 좀 그래서 운현은 상아와 자신과의 표면적인 관계를 말했다. 그 말에 필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떨리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런 것 치곤 꽤나 사이가 좋아보이시는데. 서, 서로... 그... 말도 편하게 하시고. 저한테는 아직도 존대하고 그러시면서..."

"아아. 그게 걔는 좀 사정이 있어서요."

그 개막장에게까지 존대를 하고 싶지 않았던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운현이 존대를 하는 것은 처음 만난 사이, 그리고 존대를 할 만한 가치를 느끼는 상대에게만 하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늘 도움을 주는 필레에게까지 막 대하고 싶지 않았던 운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필레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무슨... 혹시 상아 길드장님과..."

"무슨 생각하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 아닙니다. 저 걔 짜증나서..."

"...그럼 운현씨."

"네?"

"저에게도 편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저, 저기 저는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나름 운현씨랑 친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서로 존대하는 것도 좀 어색하다고 생각되지 않을까. 라는 그런 생각이 드니..."

"그럴까? 이야~ 이거 편하네. 진작에 말해주지 그랬어~"

 운현이야 자신이 아쉬운 입장이니 필레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지만 언제 말을 편하게 할까 눈치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친해지려면 존대보다는 평대가 낫지 않겠는가. 직장 상사의 관계도 아니니 이정도 관계로 천천히 친분을 다져가면 일적인 부분에서도 좀 편하게 부탁을 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운현은 필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운현은 대놓고 말을 놓았다.

"...이렇게 쉽게..."

운현이 씩 웃으며 편하게 말하자 자신이 주저했던게 바보같아졌다. 필레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어쨌든 운현과 거리감을 줄였다고 생각하고 만족하며 웃었다.

"헤헤~ 그럼 우리 이제 편하게 이야기하는거지?"

"응. 근데 괜찮겠어? 윈드씨와 동갑 아니야?"

"응? 응."

"그럼 나보다 훨씬 누나..."

필레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티르빙과 카를로스를 상대할대의 싸늘한 무표정이 드러나자 운현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상아는 내 조상님 수준이지. 그리고 필레는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이니까 괜찮아. 하하하하! 우리 친구할까?"

'착한 여자든 이쁜 여자든 나이 얘기는 하면 안되겠군.'

"치, 친구? 으... 으응! 응! 앞으로 잘 부탁해!"

그의 말에 필레는 묘한 얼굴이 되어 더듬거렸다.

"지금은 친구..."

"그래서. 상아랑은 언제 알게 된거야?"

"음... 조금 일이 있어서 기사를 관두게 되었거든. 필라니아 몬스터 웨이브때 몬스터를 모두 잡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었거든. 누군가는 그 책임을 져야 했고 그 책임을 지기 위해서 상급 기사들은 전원 기사직에서 물러났어."

"그렇지만... 몬스터는 모두 물리쳤잖아."

"응. 그래도 책임은 져야했어."

무거운 얼굴로 그녀가 말하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과는 다른, 무척이나 성실한 여자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뜻을 걷고,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탁자 밑의 주먹을 꽉 쥐었다.

'나랑은 달라.'

"그렇구나..."

"표정이 왜 그래? 아하하... 내가 너무 무겁게 이야기했나? 아무튼 그런 일이 있어서 윈드랑 나는 기사단에서 나오게 됐어. 필라니아 몬스터 웨이브때 너무 고생해서 쉬고 싶기도 했었거든.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마. 응?"

"하아. 응. 그래서? 상아랑은 어떻게 만나게 됐는데?"

"몬스터 처치 포상으로 영지를 받았고 부모님을 그곳에 모신 후에 나도 한 일년정도 쉬었거든. 그때 쉬고 있던 영지에서 처음 상아 길드장님을 만났어."

"널 찾아온거야?"

"아니, 영지 북쪽에 있는 무덤에서 우연히 만났어. 매일같이 몸을 움직이며 전투를 하고 훈련을 하다가 막상 쉬려니까 몸이 근질거렸거든. 그래서 매일 그곳에서 훈련을 했어. 평상시와 같이 훈련을 하려고 갔는데 무덤가에 누가 쓰러져서 신음하지 뭐야. 그때 피투성이가 되서 쓰러져 있던 걸 내가 발견했지."

"상아가? 그 상아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고?"

"응. 놀랍지? 길드장님이 그렇게 다친 걸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야. 길드장님이랑 만난지 벌써 10년이나 됐는데 어떤 전투에서도 그렇게 다치지 않았거든."

"잠깐만. 10년?"

운현은 아까 전 카를로스와 만났을 때 상아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10년정도 전에 카를로스와 싸웠고, 그자와 비겼다고 했다. 그럼 필레의 영지에서 상아와 카를로스가 싸웠다는 것일까? 운현이 입을 다물자 필레는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왜?"

"아니. 아까 상아가 카를로스와 붙었고 비겼다고 했잖아. 그때 싸운게 아닐까?"

"그, 글쎄? 누구랑 싸웠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런가... 하긴. 뭐 이게 중요한가. 아무튼 그래서?"

"그리고 나서 상아가 도와준 답례라며 백수면 일자리 주겠다고 하더라고. 마침 잘됐다 싶어서 상아와 함께 던전 도시에 오게 되었어. 오자마자 실력 테스트라고 길드의 간부들과 붙었고 바로 간부 자리에 올랐어. 하아... 그치만 이럴 줄 알았으면 간부가 되지 말걸 그랬어."

"왜?"

"으응. 그냥 전투나 탐험 쪽만 할 줄 알았는데 간부들 같은 경우는 막내랑 막내 바로 위의 사람이 길드 사무를 봐야하거든. 나도 이런 서류 작업이나 사무 작업은 잘 못하는데..."

필레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그것때문에 나랑 만난 거잖아."

"...어? 어! 그러네! 헤헤헤~ 어떻게보면 잘된건가?"

운현의 말에 필레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방긋 웃었다. 그의 말대로다. 운현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고, 그와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십년간 길드 간부 막내 생활이 그리 나빴다고만은 생각되지 않았다.

"응. 응.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라고~"

78====================

Date

"아~ 오늘은 재밌었다~"

운현과 마주 잡은 손을 흔들며 무척이나 즐거웠는지 필레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크 가게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취향, 나이, 고향의 이야기, 기사단에서 있었던 일들. 사소한 잡담과 농담이 대부분인 대화였지만 필레는 시간이 이만큼 흘러가는 줄도 몰랐다.

"나도 재밌었어."

"헤헤~ 역시 생각대로야."

"뭐가?"

저음의 부드러운 음성에 필레는 살짝 고개를 돌려 운현을 보았다. 석양을 등진 탓인지 운현의 얼굴에 반쯤 그림자가 졌다. 그의 등에서 후광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을 받으며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필레는 살짝 시선을 돌린 후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말했다.

"역시 네가 좋아."

"응?"

입술만 달짝이는 수준에 불과했기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미소를 마주하며 필레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야.'

운현을 좋아하지만, 필레는 운현에게 그 마음을 고백할 수 없었다.

"운현. 넌 언제까지 사람들을 거절할 생각이야?"

"어... 뭐 이것도 얼마 못가겠지? 아무래도 동료들도 있고, 그리고 너도 있고,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이 잘 대해주니까 내가 사람을 못믿는 것도 얼마 가지 못할거야."

"그럼 언제쯤에 누군가와 사랑을 하게 될건데?"

"죽기 전에는 하겠지."

농담처럼 흘리려 하는 그를 보며 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해봤자 그것은 감정을 앞세운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기대된다. 네 옆에 누가 있을지."

"나도 기대된다. 내 옆에 누가 있을지."

'그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운현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필레는 그의 웃음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너무 욕심부리지 말자. 지금은 이정도로도 괜찮아.'

운현과 좀 더 편한사이가 된 것에 만족하자. 그에게 너무 집착하지말자. 집착이야말로 더할나위 없는 폭력이고 괴롭힘이다. 특히나 자신은 길드의 간부이고 운현은 길드 소속의 모험가다.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면 운현은 그것이 좋든 싫든 무거운 짐을 지게 될 것이다.

'이걸로... 충분해.'

과연 이걸로 충분할까? 필레는 순간적으로 속이 쓰려오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 돌아갈까?"

"조금 아쉽네...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그렇지만 너도 가서 쉬어야지. 내일도 일하려면 말야."

"난 이게 쉬는건데 말야."

"헤에. 그럼 술이라도 한잔 더 할까?"

"응!? 진짜!? 헤... 그치만 넌 내일 던전에 들어가는 것 아냐?"

"내일? 안가."

"왜?"

"약속있어."

"여자랑?"

"흠. 응."

내일은 힐더크와의 즐거운 한때를 보내야 한다. 필레와 친구가 되었고, 그녀가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이상 그녀에게도 선을 그어야만 했기에 운현은 담담히 내일 일정을 말해주었다.

"인기 많네~"

그의 말에 필레의 얼굴이 한순간 슬픈 표정으로 물들었지만 그 표정은 금방 웃음으로 바뀌어졌다. 눈치는 백단인 운현은 필레의 표정 변화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뭐 내가 한 인기 하지."

"헤헤~ 그런 것 같아. 그럼 술은 다음에 먹자."

노을을 배경으로 그들은 천천히 길드 회관 앞까지 걸어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발걸음이 느려지는게 필레는 아직 이 데이트를 끝내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태양이 지는 것처럼 그들이 걷는 길의 마지막은 찾아왔다. 길드 회관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필레는 아쉬운 얼굴로 잡고 있던 운현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다음에 또... 데이트 해줄거야?"

"영광이지."

"후...후훗... 정말 말은 잘해."

살짝 운현의 가슴을 톡 친 필레는 빙긋 웃은 후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정말 오늘 고마웠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즐거웠던 적은 처음인 것 같아. 남자랑 데이트한 것도 처음이고..."

"첫 데이트가 나였다니. 나로서도 영광이 아닐 수가 없구만."

"으음... 그럼 내 처음을 하나 더 가져가 줄 수 있어?"

"뭔데?"

"화 안낼거야?"

"일단 들어보고."

"약속해주면."

"싫다면?"

"우... 난 카를로스가 운현을 괴롭히려고 할 때도 그냥 나서줬는데..."

울상을 지은 필레의 모습에 운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필레가 뭘 할지는 대충 예상이 간다. 운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에는 맞춰주는게 낫겠지?'

"알았어. 화 안낼게."

"헤헤헤~ 그럼 잠깐 눈 감아봐."

"그래. 감았다."

운현이 눈을 감자 필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첫 데이트. 그리고 첫 사랑.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지만 그 감정은 숨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큰 폭력이 되어버린다.

'그렇지만...'

이런 방법은 치사하고, 또 야비하기 그지 없었지만 마음의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다. 필레는 살며시 운현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살며시 잡고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

입술과 입술이 닿는 것에 불과한 짧은 입맞춤에 불과했다. 고작 그 정도에 불과했지만 필레는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떨어지고 싶지 않은 입술을 천천히 떼어내며 까치발을 푼 필레는 운현이 천천히 눈을 뜨자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했다.

"그, 그... 이왕 받아주는 거 내 첫키스도 좀 받아줘."

"으음... 이것도 영광으로 생각할게. 그치만..."

"그냥 친구끼리의 인사라고 생각해주면 안될까?"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두려워하는 필레의 모습은 용병 연맹과 싸울때, 그리고 카를로스와 맞설때의 그 강한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보였다. 거절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그런 거짓말로 넘어가려 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안쓰럽고 애처로웠다.

'그래도 안되는건 안되지.'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운현은 거절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있는 필레는 운현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었다. 그것이 거짓이고, 치졸하기 그지 없는 방법임을 알고 있음에도 필레가 자신의 방식이 아닌 것을 선택한 것에 운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운현..."

"아아! 정말! 알았어! 친구끼리의 인사다 이거지?!"

필레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고인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에 그녀가 결국 눈물을 한방울 흘려버리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필레의 거짓말에 동의했다.

"친구끼리 인사니까 웃으며 받을게. 그렇지만 이런 첫키스는 노카운트 아니야?"

"헤... 헤헤. 그러네... 운현은... 정말 상냥하구나..."

"내가 뭐가 상냥해. 아무튼 들어가. 울지 말고."

운현은 필레의 눈가를 닦아 준 후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말에 필레는 애써 웃은 후 쓱쓱 남은 눈물을 닦은 후 후다닥 길드 회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이놈의 인기는 어찌해야 할꼬."

사람의 인생 중엔 살면서 인기 절정의 순간이 온다고 했다. 과거를 생각해봐도 그런 순간이 없었던 운현은 지금이 그 순간인가 싶었다.

'그런 것 치곤 나 답지 않게 의외로 줄타기를 잘 하고 있구만.'

바로 얼마 전까지 21년 모태솔로 동정이었던 주제에 이 엄청난 미녀들 사이에서 잘도 관계를 유지하며 즐길거 다 즐기고 있는 것을 보니 자기가 생각해도 참 대단했다.

"마치 누군가가 날 도와주는 것 같단 말이지..."

"엇? 운현이다!"

"운현씨!"

"여어! 데이트는 잘 했나?"

운현이 팔짱을 끼고 생각하는 동안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그것을 향해 고개를 돌려 본 운현은 자신의 파티원들이 한가득 손에 무언가를 쥐고 걸어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쭈? 옷 좀 봐라. 너 데이트 간다더니 남창에 면접보고 온거야?"

바제트는 운현이 입고 있는 정장을 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녀의 말에 미야와 헤스티아는 고개를 갸웃거린 후 운현의 옷을 보고 물었다.

"어? 이게 남창의 옷이에요?"

"그냥 정장 아닌가? 이런 옷은 흔하잖아."

"그렇지. 하지만 도시에서 남자 중에 이런 옷을 입는 사람은 대부분이 남창이라고. 깔끔하고, 어지간하면 잘 어울리니까 여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입지."

"마침 잘 됐다. 너 잘 아는 것 같은데. 그럼 남자들은 뭐 입냐?"

안그래도 오늘 정장을 입고 갔다가 남창이니 뭐니 쓸데없는 소리를 엄청나게 들었던 운현은 바제트에게 물었다. 그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바제트는 떨떠름히 답했다.

"아무거나 입어도 상관없는데. 정장만 좀 피하면 괜찮아."

하필 골라도 핵지뢰를 골라버렸다. 운현은 인상을 왕창 구긴 후 정장 마이를 벗었다.

"왜요? 잘 어울리는데."

"남창 같다잖아."

"그래도 어울리는 건 잘 어울리는거에요. 무척 멋져요!"

"응응. 그리고 정장이 꼭 남창의 옷은 아니야. 묘족의 부족이나 다른 왕국의 도시에서는 중요 행사가 있을 때 남자들이 정장을 입고다니는걸. 그러니까 일단 쟁여두는게 어떨까? 가격도 만만치 않았을텐데."

헤스티아와 미야는 운현이 정장을 벗어버리려고 하자 그를 말렸다. 그들의 말에 운현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일단 상의만 벗어 팔에 걸었다.

'5골드도 돈이지.'

"근데 너넨 그거 뭐야?"

"너 데이트 간다고 해서 우리끼리 놀다왔어. 남창에 간건 아니고. 쇼핑 좀 하고 수다나 떨고."

"재밌었어요! 다음에는 운현도 같이 가요!"

"응응. 바제트가 생각보다 웃기는 녀석이더라고."

"야. 너랑 나랑 나이차가 몇인데 녀석이냐? 언니라고 불러."

"미안하지만 난 나보다 가슴 작은 여자한테 언니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아. 꼬우면 좀 키워갖고 오든가."

"으아아아!!"

발광하려는 바제트를 헤스티아가 웃으며 달랬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벌써 꽤나 친해진 듯 보였기에 운현은 그나마 안심을 할 수 있었다. 바제트의 마이페이스적인 성격을 생각한다면 마찰이 있을 것이라 보였지만 그녀 나름대로 어느정도는 양보를 하는 모양이었다.

"훗. 가자! 밥먹으러! 오늘은 오빠가 쏜다!"

딱히 한 건 없지만 괜히 뿌듯해진 운현은 미야와 바제트의 머리를 양 팔로 감쌌다. 자연스레 헤드락을 건 자세를 만든 운현이 당당히 외치자 바제트는 운현의 팔을 푼 후 무덤덤히 말했다.

"어. 우리 밥 먹었는데? 아까 엄청 먹어서 이제 안들어가."

"...그, 그럼 나 먹는 거 구경이라도..."

"흐응~ 어쩔까~"

예상치 못한 대답에 운현이 당황하자 미야는 싱글거리며 운을 띄웠다. 그것에 운현이 무언가 말하려는 사이 길드 회관의 창문이 열렸다.

"그럼 나랑 먹자. 낮의 일로 할 얘기도 있고."

문을 열고 말을 건 사람은 무심한 표정의 상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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