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40)

Arg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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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gument

"와... 저게 진짜 갑옷이지."

풍만한 가슴과 음부만 간신히 가리고 있는 플레이트 아머를 보며 운현이 감동한 듯 말하자 미야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 그 시선을 무시하며 운현은 대놓고 여인을 위 아래로 흝어보았다.

풍성하고 단발에 약간 곱슬진 블루블랙의 머리칼을 대충 뒤로 묶었다. 쫑긋 솟아 있는 두개의 귀 중 하나는 반쯤 잘려나가 있었다. 야성미가 넘쳐나는 듯한 미형의 얼굴에 잘 어울리는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그녀는 조금 두툼한 입술을 꾹 다물고 주변을 쓰윽 흝어보았다.

근육질의 목과 튼실해보이는 어깨. 그 밑의 풍만한 가슴은 비키니형의, 하지만 화려한 금색의 장식이 달린 검은색 갑옷으로 감싸져 있었다. 식스팩이 확연히 드러나는 복부 밑에는 핫팬츠 같은 짧은, 어찌보면 꽤나 과격해보이는 짧은 갑옷으로 감싸졌다. 하갑 역시도 가슴을 가리는 갑옷과 마찬가지로 금색 장식과 검은색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하갑에는 수인족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블루블랙의 긴 꼬리가 털을 잔뜩 곤두 세운 채 경계를 하듯 바짝 서 있었다.

"저게 무슨 진짜 갑옷이야..."

한대만 맞어도 치명상을 입을 법한 노출도 심한 갑옷을 보며 미야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에 운현은 인상을 왕창 구겼다.

"저게 로망이라고... 햐. 좋다~ 너도 저런 갑옷 입어보는 건 어때?"

"저런 골빈년들이나 입을 법한 갑옷을? 사양이야."

"그치만 네가 입고 있는 갑옷도 그리 노출이 없는 건 아니지 않나?"

"돈만 생기면 제대로 된 갑옷을 입을거야."

운현과 미야가 여인의 갑옷을 가지고 떠드는 동안 군살하나 찾아 볼 수 없는 근육질의 미녀는 자신의 길고 탄탄한 다리를 움직여 안으로 들어와 들고 있는 도끼로 바닥을 내리쳤다.

"콰직!!!"

도끼질 한번에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이 크게 부숴졌다. 그 소리를 신호로 부숴진 문을 통해 열명의 수인족 여인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 온 여인들은 모두 앞서 들어 온 여인과 조금은 장식이 없지만 그래도 비슷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브라보!!"

"........"

"하, 하하하."

여인들의 노출도 심한 갑옷을 보며 운현은 감동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엄지를 척 내밀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자리에 있던 모험가들 뿐만 아니라 비키니 갑옷의 여인들 역시 별 희안한 놈 보듯이 그를 보았다.

"아, 이거 실례..."

"...쪽팔리니까 그냥 앉아 있어봐. 좀..."

운현을 앉히며 미야는 얼굴을 붉히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현 역시 집중되는 시선에 떨떠름하게 웃었다.

운현이 망쳐놓은 분위기를 쳐들어 온 여인들이 다시 살벌한 분위기로 바꾸려 하자 운현에 의해 멍해 있던 모험가들이 하나 둘 씩 일어났다. 그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잡았을 때 운현 근처에 있던 토끼 귀의 여인이 씩 이를 드러내며 싸늘히 말했다.

"하... 건방지게 용병따위가 모험가 길드에 쳐들어온거야? 고작 열한명이? 간이 부었구만. 그 간 내가 갖고 싶은데 말이지."

"용병은 코어가 안나와서 별로 수지타산은 안맞지만..."

"툭"

문을 통해 또다른 여인들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짙은 청발을 한, 운현이 좋아하는 비키니 갑옷이 아닌 전신을 둘러 노출을 완전히 없앤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여인과 그녀와 비슷한 갑옷을 입은 열명의 여인들 이었다. 왼쪽 눈가를 가르는 긴 상처 외에는 필레나 헤스티아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미모를 지는 선두의 미녀는은 한점의 감정없는 얼굴로 말했다.

"데려와."

"으윽..."

그녀의 말에 바깥에서 그녀와 비슷한 갑옷을 입은 여인들이 포박된 여인 셋을 데리고 들어왔다. 꽤나 두드려 맞은 것인지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서 피가 주륵주륵 흐르고 있는 여인들이 비틀거리며 들어오자 그녀들을 데리고 온 갑옷의 여인들은 그녀들을 거칠게 밀었다.

"우당탕!"

"큭..."

"호오... 이게 뭐야. 우리 모험가 길드 소속의 모험가 같은데... 얘들이 왜 이모양이지?"

토끼귀 여인의 미소가 점점 짙어진다.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 본 갑주의 여인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헥토르."

"예. 티르빙님."

헥토르라 불린 블루블랙 머리의 여인은 잔인한 웃음을 지으며 쓰러진 모험가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도끼가 천천히 들어올려지자 토끼귀 여인을 비롯한 모든 모험가들이 자기들의 무기를 뽑았다.

"헉!"

바닥에 내리 꽂은 도끼를 다시 들어 올린 그녀가 쓰러진 여인 중 하나의 머리에 도끼를 내리 꽂으려는 순간 운현은 온 몸에 오한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느낀 것이 자신만은 아니었는지 청발 갑주의 여인을 제외한 모두는 움찔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슨 짓입니까. 티르빙."

무심한 목소리가 살기로 가득한 길드 회관을 감쌌다. 그것에 운현은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필...레?'

지금까지 항상 상냥한 태도와 웃는 얼굴만 보였던 그녀였다. 미야가 길드를 사칭한 이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했을 때조차 웃으며 화를 냈던 그녀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진 것을 본 운현이 깜짝 놀랐을 때 그녀는 한걸음 한걸음 걸어 도끼를 들고 있는 헥토르에게 다가갔다.

"호... 호오. 마녀 필레 아니야? 아직도 그 미친년 밑에서 짖어대고 있는거였어?"

'마녀?'

헥토르는 필레의 무감정한 시선에 눌려 슬그머니 도끼를 내린 후 애써 비웃으며 말했다.

'마녀라니... 필레가?'

그 필레가 마녀라고 불린단 말인가? 운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필레와 헥토르를 보았다.

"당신이 이랬습니까?"

쓰러져 있는 모험가를 가리키며 필레가 묻자 헥토르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더 이상의 대답은 필요 없었는지 필레는 가볍게 손을 들어 토끼 귀 여인을 가리켰다.

"래비. 이분들을 치료해주실 수 있나요?"

"응? 아. 응."

필레의 살기에 눌려 있던 토끼 귀 여인. 래비는 고개를 끄덕인 후 같은 테이블에 있던 동료들과 함께 상처입은 모험가들을 데려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헥토르는 도끼를 들어 래비들에게 겨누며 외쳤다.

"이년들은 안돼!"

"됩니다."

"큭!"

들어올린 도끼 위에 손을 올린 필레가 차분히 말하며 손을 내리자 헥토르는 신음하며 버텨내려 하였다. 하지만 한손으로, 그것도 전혀 힘을 주고 있지 않은 듯한 필레의 힘을 버텨내지 못하고 헥토르는 도끼를 내려버렸다.

그녀의 도끼가 내려지자 래비와 그녀의 동료들은 쓰러진 모험가들을 일으켜 세워 뒤쪽으로 데리고 갔다. 길드회관에 있던 모험가들 중 힐러들은 쓰러진 모험가들의 몸에 힐링을 걸고 힐링포션을 발라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그들이 모험가들을 치료하는 동안 헥토르를 막고 있던 필레는 도끼에 올려 놓은 손을 치웠다. 계속 힘을 주고 있었는지 헥토르는 그녀가 손을 풀자 뒤로 물러나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으르렁거림은 관심없다는 듯 필레는 바닥에 파여 있는 흔적을 보고 살짝 눈쌀을 찌푸렸다.

"이건 모험가 길드에 대한 도전이라고 봐도 되는 겁니까?"

"도전? 하! 너희가 우리 용병 연맹에 도전한 것이겠지!"

필레의 목소리를 들으며 헥토르는 까득 이를 갈고 외쳤다. 그녀의 뒤로 수인족 여인들이 도끼나 해머를 들어 올리자 필레는 그녀들을 향해 손을 겨눈 후 담담히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건 명명백백한 조약 위반입니다."

"개소리 집어치워! 위반은 너희가 먼저 한 것 아닌가!?"

"그게 무슨 소리신지."

필레의 말에 헥토르는 휙 고개를 돌려 티르빙을 보았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헥토르의 옆으로 온 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두루마리를 필레에게 넘겼다.

"이걸 보시지."

"...이건."

차분히 두루마리를 펼쳐 읽어 본 필레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그것을 본 티르빙은 얼음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모험가가 수행한 퀘스트는 용병 연맹이 수행해야 할 퀘스트다. 던전도시의 조약을 위반한건 너희 모험자들이다."

"확실히... 올해 조약에서 요인 경호는 용병 연맹의 퀘스트였죠. 허나 이 퀘스트의 발주처는 발티르 시청. 시청에서 정식으로 저희 모험가 길드에 요청한 퀘스트입니다."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중요한 것은 그 퀘스트는 누가봐도 명백한 용병 연맹의 퀘스트라는 거지. 필레. 당신 정도라면 알텐데? 엘븐가드의 공녀를 수행하는 일과 그들의 경호는 우리 용병 연맹의 일이라는 것을 말야."

"그건 그렇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이 일은 시청에서 저희에게 의뢰를 맡긴 것입니다."

"그건 시청의 잘못이지. 시청의 행정처리가 잘못된 것을 우리에게 탓할 생각인가? 그리고 길드 내에서도 퀘스트의 분류는 할텐데. 당신들이라면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티르빙의 말에 필레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티르빙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개도 자기 밥그릇을 건드린 자는 문다. 하물며 엘븐 가드의 공녀를 지키는 일은 우리 용병 연맹에게 있어서 무척 중요한 일. 그에 대한 책임은 져야하지 않을까?"

"그래서 저들을 저렇게 구타한 것입니까?"

"구타? 고작 저정도로? 그리고 저들을 저렇게 만든 건 우리가 아니야. 우리가 한 것은 그저 포박에 불과해. 습격자들에게 당해 저렇게 되버린 것이다."

"......"

티르빙의 말에 필레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퀘스트를 하기로 했으면 제대로 했어야지. 저들이 저렇게 쓰러져 엘븐가드의 대사가 죽을 뻔했고, 그 일로 우리 용병 연맹의 명예가 크게 실추했다는 것까지 친다면 저정도 포박은 적절한 행동인 것 같은데."

"그래서요?"

"하지만 이 일로 우리 연맹장께선 무척 화가 나셨다. 고로..."

티르빙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고 그 순간 그녀를 따르는 여인들은 모두 무기를 들었다.

"한바탕 해주고 오라는 명을 들었지."

"이렇게 공격해들어오는 것이 의회의 조약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수를 한 것은 시청이고 잘못을 한 것은 모험가다. 그리고 피해를 본 것은 우리 연맹이지. 그럼 그 대가를 치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처음으로 티르빙의 얼굴에 표정이 생겼다. 더 없이 싸늘하고, 더 없이 잔혹한 미소가 걸리자 그녀는 들어 올린 손을 내리려 했다.

"우리가 뻘로 보이나!? 고작 저정도로 뭘 하겠다는건데!?"

확실히 수는 모험가들이 더 많았다. 여차하면 던전 입구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모험가들까지 부르거나 길드회관에서 머무르고 있는 모험가들도 부르면 된다. 그 생각을 하며 모험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필레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여러분이 움직이시면 더욱 큰 일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필레씨!"

"제가 해결하지요."

"호오... 아무리 마녀라고 하더라도 우리를 혼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필레가 담담히 말하자 헥토르는 씩 웃으며 도끼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필레는 그것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괜히 경거망동 하지 마십시요. 이번 일은 길드와 연맹간의 문제. 모험가들께서 움직이시면 일이 더 골치아파질 수 있습니다. 제가 다 해결할테니 여러분은 그냥 하시던 일을 마저 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래도..."

"두번 말하지 않겠습니다."

평소와 무척 다른 그녀의 모습에 모험가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은 여전한지 그들은 무기를 집어 넣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밖에서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하겠다고 한다면?"

"길드 회관 역시 길드의 소중한 자산. 여기서 싸우시겠다면... 저도 빈손으로 할 수는 없겠죠. 최대한 빨리 끝내드리겠습니다."

"바깥에서 한다면 빈손으로 싸우겠다는 건가? 하... 우릴 너무 무시하는 것 아냐?"

헥토르가 비웃으며 말하자 필레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낱 겁먹은 강아지가 짖는다하여 무시할 정도로 냉혈한은 아닙니다만."

"뭐!? 이런 개년이!"

"개는 당신이죠. 분명히 예전 저에게 덤볐다가 깨갱하고 도망쳤던게 기억나지 않나요? 겁먹은 개년?"

"썅!!"

"뻑!"

필레의 독설에 눈이 뒤집힌 헥토르가 도끼를 휘두르자 필레는 그것을 가볍게 피한 후 헥토르의 턱을 후려갈겼다. 단 한방에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헥토르는 이를 갈며 그녀를 노려보았고 필레는 담담한 눈으로 티르빙에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잘하면 마녀를 잡을 수 있는 기회다 이거지... 그럼 좋네. 밖으로 가지."

티르빙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말하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녀들이 밖으로 나가자 필레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래비. 죄송하지만 길드장님을 모시고 와주시겠습니까?"

"응. 알았어. 그런데 정말... 혼자서 괜찮겠어?"

"...어떻게든 버텨봐야죠."

자신만만하게 말할때와 다르게 필레의 목소리는 긴장되어 있었다. 역시나 허세였던 것인가. 운현은 쿠키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여차하면 끼어 들만한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은데...'

모험가가 된 이후 길드회관에 머무르며 운현은 필레에 대한 평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유능한 길드 직원. 사소한 것도 잘 챙기는 그녀였기에 그녀는 모험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망을 끌고 있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필레가 위험에 빠지면 얼마든지 난입할 사람들은 있어보였다. 길드가 위험하든 아니든 그런것과 상관없이 말이다.

'괜히 내가 낄만한 것 같진 않으니 얌전히 있자.'

이제 고블린을 상대하느라 바쁜 자신이 낄 수 있겠는가. 운현은 입을 다문 채 어깨를 으쓱이고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왜? 나가?"

"구경하러. 얼마나 쎈지 궁금하지 않아?"

끼고 안끼고를 떠나서 이런 싸움 구경은 쉽게 할 수 있는게 아니다. 흥미진진해지는 것을 느끼며 운현은 미야에게 말했다.

그리고 미야 역시 궁금했는지 히죽 웃으며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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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 회관 옆의 넓은 공터로 자리를 이동한 운현은 어느새 전투 분위기에 감싸진 주변을 둘러본 후 자리를 잡았다.

"하나씩 덤빌건가요? 아니면 한꺼번에?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개새끼들은 날뛰어봤자 개새끼니까요."

"이...!"

"개년이...! 감히 헬하운드의 정예를 무시하는거냐!?"

"헬하운드? 가소롭네요. 그래봤자 개새끼 아닌가요?"

무덤덤한 얼굴로 독설을 내뱉은 필레는 양 팔을 크게 벌렸다. 얼마든지 덤벼보라는 태도로 여유만만한 모습을 보인 그녀를 향해 헥토르와 그녀의 부하들은 이를 갈며 달려갔다.

"뒈져라!"

"썅년!"

강한 기세를 풍기며 여인들이 달려들었다. 그것에 이를 드러낸 필레는 몇번 뛰어 뒤로 물러난 후 벽과 벽이 만들어낸 구석으로 일부러 들어가서 빠르게 자세를 잡았다. 미야가 전투를 할 때 자세를 잡는 것처럼 왼손을 앞에 내민 그녀는 가장 먼저 날아드는 도끼의 날을 왼손의 손등으로 툭 쳐서 밀쳐내고 당긴 오른손을 뻗었다.

"퍽!"

"....."

'보, 보이지도 않았어.'

마치 섬광처럼 쏘아져나간 주먹에 맞은 여인이 뒤로 튕겨져 날아간다. 그녀가 한방에 쓰러져 꿈틀거리다가 기절해버린 것을 본 비키니 갑옷의 여인들은 침을 꿀꺽 삼킨 후 필레를 경계했다.

"왜요? 꼬리를 내리는겁니까? 어서 덤벼보시지요."

뻗었던 주먹이 다시 장전된다. 그녀의 자세는 처음의 자세로 바뀌었고 그것에 비키니 갑옷의 여인들은 이를 드러낸 후 동시에 달려들려다 멈칫했다.

"큭!"

"뭐하는 겁니까?"

일부러 코너로 들어간 이유가 있었다. 비키니 갑옷 여인들의 무기는 해머, 혹은 도끼 분. 찌르기에는 좋지 않은 무기들 뿐이었다. 결국 휘두르기만 해야 하는데 필레는 일부러 구석으로 들어가 벽으로 공격의 범위를 줄임과 동시에 포위되는 상황을 없애버린 것이다.

"덤비지 않을 겁니까?"

"비겁한...!"

"전술이라고 말해주십시요."

"계속 버틸 생각이냐!?"

"네. 저는 길드장님이 오실때까지만 버티면 되니까요."

헥토르가 이를 갈며 외쳤지만 필레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할 뿐 이었다. 원거리 무기라도 있다면, 아니면 마법사라도 있다면 원거리에서 계속 공격을 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마법사도, 궁사도 없었다.

"이...이! 쳐!"

"하아압!"

헥토르가 이를 갈며 외치자 두명의 여인들이 차례대로 필레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필레의 왼손에 의해 가볍게 방향이 바뀌었고 여인들은 공격에 실패한 대가로 필레의 펀치 한방에 하나 둘씩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야... 대단하네.'

그야말로 원펀맨, 아니 원펀걸이었다. 한방에 하나씩 쓰러트리는 걸 보며 감탄한 운현은 쓰러졌던 여인들이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거 한방에 쓰러졌으면 걍 누워 있지 뭔 좋은 꼴 보려고...'

"하아아압!"

부하들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며 더 이상 참지 못한 헥토르가 덤벼들었다. 그녀는 바닥에 구르고 있는 부하의 도끼를 잡아 던진 후 자신의 도끼로 필레의 머리를 부수기 위해 휘둘렀다. 연속된 두번의 공격.

하지만 강맹한 힘이 실린 공격에도 필레는 아까와 같이 무심한 얼굴이었다.

"터엉!"

왼손으로 날아오는 도끼를 잡아낸 후 그 도끼로 헥토르의 공격을 막아낸 그녀는 물흐르듯 안쪽으로 들어가 헥토르의 복부에 손바닥을 가져다대었다.

"뻐어어어억!"

가죽공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헥토르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녀를 가볍게 들어 옆으로 치운 필레는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이정도면 당신과 저의 실력차는 아셨을 것 같습니다만. 더 하시겠습니까?"

"끄윽... 네년..."

'와... 저걸 맞고 살아있어?'

소리만 들으면 삼도천 관광 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던 위력의 공격을 맞아놓고 헥토르는 아직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근성에 감탄한 운현은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했다.

"역시 필레야!"

"이래야 우리 필레 답지!"

필레가 순식간에 헥토르와 비키니 갑옷녀들을 제압한 것을 보며 모험가들은 감탄했다. 웅성거리는 주변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필레는 비키니 갑옷녀들이 헥토르를 잡아 일으키자 가볍게 손을 턴 후 말했다.

"그럼 티르빙. 당신도 하겠습니까?"

"당연하지. 여기서 길드의 간부를 하나를 은퇴시킬 수 있다면 이득인데 말이야. 마녀 필레가 검을 안들고 있는데 이런 기회를 또 언제 잡겠어? 거기. 헥토르를 치워."

헥토르가 질질 끌려 구석으로 이동하자 필레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웃음은 늘상 운현이 보던 편안한 웃음이 아닌, 상대방의 기분을 사정없이 흔들어버리는 비웃음이었다.

"저번에 싸웠을때에 비해서 약해빠졌군요. 용병 연맹도 이제 다 된건가요? 검도 들지 않은 검사와 싸워서 지는 전사라니..."

"어차피 헥토르가 널 이길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모든 것은 이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였으니까 말야."

비릿하게 웃은 그녀는 자신의 왼쪽 눈의 상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 빚을 갚아주지."

"...정말 집착도 심하시네요. 그게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피하지 못한 당신 잘못이지."

"맞아. 피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그러니 내 공격을 피하지 못해 당신이 죽거나 은퇴를 하더라도 그건 당신 잘못 아니겠어?"

싸늘히 웃은 티르빙은 옆의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곧이어 그녀의 손에 긴 장봉이 들어왔다. 그것을 가볍게 빙빙 돌린 후 자세를 잡은 티르빙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자... 내 공격도 그렇게 막아낼 수 있나 볼까?"

"후우. 조금 쉬어도 될까요?"

"될 것 같아? 너희들. 모험가들이 끼지 않게 막아. 필레가 지친 지금이 기회다."

티르빙은 담담히 주변의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녀의 명령에 헥토르의 부하들 뿐만 아니라 플레이트 아머의 여인들도 무기를 꺼내들고 모험가들의 앞에 섰다.

"여기서부터 끼어들면 죽는다."

"앙!? 누가 누굴 죽여!?"

모험가들에게 무기를 겨눈 여인들이 싸늘히 말하자 모험가들은 분노하며 무기를 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구경하던 운현과 미야에게도 검이 겨눠졌기에 그들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운현. 고블린 밖에 잡지 못하는 우린 뭘 할 수 있지?"

"우린 쓸모가 없다. 쿠키나 가져와라. 미야."

미야의 질문에 운현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한 후 답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거야?"

"진심이니까 어여 가져와."

운현은 무덤덤히 말했고 그 말에 미야는 굉장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까 전 필레가 아주 간단히 쓰러트린 비키니 갑옷 여자마저도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귀를 축 늘어트리고 길드회관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자 운현은 필레에게 힐끔 시선을 보냈다. 아까의 무력, 그녀의 강력한 힘. 그리고 그녀를 도우려는 모험가들. 이들 정도면 자신이 끼지 않아도 그녀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알아서 잘 하겠지.'

운현은 필레에게서 시선을 돌린 후 인파 속으로 몸을 옮겼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필레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아까와 같은 자세를 펼쳤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다. 내밀어진 왼손이 조금 떨리는 것을 보며 그녀로서도 아까 헬하운드의 정예들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검만 있었어도...'

검사인 그녀에게 있어서 검 없이 싸우라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나마 높은 레벨과 동료의 격투술을 배워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 저들을 쓰러트린 것만으로도 이미 필레는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역시 망할 개년...'

한쪽 구석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며 아파하고 있는 헥토르를 보며 필레는 속으로 욕지기를 퍼부었다. 티르빙과는 벌써 수십번도 더 싸운 악연 중의 악연이다. 모험가 길드와 대립하고 있는 용병 연맹의 간부 중 하나인 티르빙이 자신을 쓰러트리기 위해 연구와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아마 길드에 들어 온 그 퀘스트마저도 티르빙의 함정이 아닐까 싶었다. 그녀는 긴장되는 팔에 힘을 넣어 떨림을 멈추었다.

'다른 이들이 왔다면 차라리 나았으련만...'

티르빙이 자신의 부하들 중에서도 실력이 떨어지는 헬하운드를 데려 온 것도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는 것 쯤은 이미 눈치 챈 필레였다. 도끼나 해머 등의 둔병을 쓰는 그녀들이기에 그녀들이 쓰러지고 나서 무기를 빼앗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영악한 계집애. 저래가지고 시집이나 가려나 몰라.'

용병 연맹의 간부인만큼 좋은 집안의 잘생긴 남자와 알콩달콩 연애도 하고 오순도순 결혼도 하겠지. 필레는 입술을 꽉 깨물며 질투심을 키워나갔다.

'나도 길드의 간부지만 결국은 잡부인데... 으... 똑같은 간분데 왜 나만!'

끓어오르는 질투는 곧 분노가 되었고 그 분노는 필레가 소모한 힘을 점점 채워나갔다. 활활 타오르는 질투를 몸 속으로 보낸 그녀는 자신에게 겨눠진 봉에 집중했다.

'타이밍은 한번 뿐...'

지금의 위치에서 티르빙이 할 수 있는 공격은 하나 뿐이다. 티르빙과 수십번도 넘게 싸워봤기에 몇번이나 맛봤던 그녀의 필살기인 강력한 돌진 찌르기를 떠올리며 필레는 작게 숨을 내쉰 후 주먹을 꽉 쥐었다.

'할 수 있을까...'

티르빙의 찌르기는 일반 모험가나 창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녀의 찌르기 한방에 골렘이 박살났다는 소문까지 있으니 말이다.

'절대로 막아서는 안돼.'

마지막으로 티르빙과 싸웠던 것이 반년 전이다. 반년동안 자신은 길드의 업무 외에 길드장의 수발로 정신이 없어 수련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반년 사이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터에 티르빙은 참가하여 수많은 전투를 겪었다.

'피할 수 있을까...'

필레는 자신의 안에서 흐르는 의심을 잡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티르빙과의 전투 승률을 따지만 필레 쪽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최상의 상황일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신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아아아! 정말! 길드장님 바보!'

하필이면 이럴때 대기하고 있는 길드 간부들을 데리고 시청으로 출장이라니. 필레는 이를 갈며 길드장에 대한 원망을 키웠고 그 원망도 자신의 힘으로 돌렸다. 이제는 도망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맞서는 수 밖에. 필레는 빠득 이를 갈며 티르빙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몸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돌진을 위한 거리를 벌리는 행위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녀를 쫓을 수는 없었다. 아마 지금 움직였다간 티르빙의 봉이 자신을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공격을 당한다면 방어자세를 풀어야했고 그 틈을 노려 티르빙이 오히려 자신을 압박할테니 말이다.

'아아... 실패하면 데이트는 물건너가겠네...'

시야의 끝에 운현의 얼굴이 보인다. 그가 몸을 돌리고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필레는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몇일 전 길드에 들어 온 희귀한 남자 모험가. 지력이 높은데다가 희귀한 직업인 도적 클래스의 소유자.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겸손하고, 친절하며 항상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해주는 그에게 조금씩 마음이 두근거리지 않았다면 거짓이리라.

'그냥 오늘 데이트 하자고 할걸 그랬나... 아아. 집중. 집중.'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필레는 눈 앞에 있는 철봉에 집중하며 몸의 힘을 모았다.

'답은 카운터 뿐. 제대로 막지 못하면 데이트고 뭐고 다 날아간다. 이번 공격에 제대로 반격을 하면 데이트다! 정신 바짝 차려! 필레!'

어떻게든 티르빙의 찌르기를 피한 후 노출된 그녀의 턱을 공격해야 한다.

운현과의 데이트를 기대하며 필레는 티르빙을 노려보았다. 저 망할 계집애 때문에 이런 꼴이 되어버렸다. 그녀에 대한 분노를 다시 올리며 힘을 모은 그녀가 왼손의 주먹을 꽉 쥐었을때 만족할만큼 거리를 벌린 티르빙은 강한 기합성과 함께 힘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하아아압!"

"...큭..."

압도적인 기운이 그녀의 몸 주변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필레는 그녀가 힘을 모으는 것을 보면서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딱딱히 긴장한 채 자신 역시 최대한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녀가 힘을 모으는 동안 자신 역시도 힘을 모은 필레는 눈을 뜬 티르빙이 기합을 멈추자 이를 악물었다.

"간닷!!"

필레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 쯤은 진작에 알아챈 티르빙이었다. 일부러 그녀가 몰리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 시청으로 출장간 틈을 노려 길드 사무소를 습격한 티르빙은 필레가 길드 사무소를 지키기 위해 모험을 건 것에 만족했다. 거기에 만약을 대비해 헬하운드까지 버림수로 써버리고 나서야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만든 그녀는 히죽 웃으며 봉을 당겼다.

'네년이 이걸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난 반년간 전장에서 구르며 단련한 찌르기다. 그저 길드 사무소에서 어영부영 시간을 지낸 너와는 다르다. 자신의 공격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진 그녀는 날카롭게 외쳤다.

"간닷!!"

온 몸에 모여 있는 힘이 폭발하며 몸이 앞으로 튀어나간다. 순식간에 가속을 받은 몸이 저릴 정도로 아팠지만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었다. 필레를 꺽을 수만 있다면. 그녀를 쓰러트릴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몸이 부숴져도 티르빙은 상관이 없었다.

"....!"

자신의 속도에 반응하지 못한 필레가 당황하며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한 것을 본 티르빙은 손에 들고 있는 봉을 움직였다. 가속도와 함께 자신의 힘이 바람을 가르려는 순간.

"어!?"

자세가 무너져버렸다. 다리에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을 받으며 자세가 틀어지고, 공격이 흐트러져버린 티르빙은 황급히 자세를 다시 갖추려 했지만 필레는 어느새 놀란 얼굴을 웃음으로 바꾼 상태였다.

"말도..."

그녀의 주먹이 자신의 턱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티르빙은 정신을 잃어버렸다.

"......"

필레의 주먹에 맞은 티르빙이 쓰러지는 것을 본 운현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환호하는 모험가들과 황당해하는 용병들을 뒤로 한 채 길드회관으로 간 그는 자신에게 다가 온 미야가 쿠키를 내밀자 한입 베어 물고 말했다.

"끝났어. 더 이상 할일은 없어. 필레가 승리했다."

"그, 그래? 근데 얼굴은 왜 그래? 다리는 왜 절뚝거리고?"

운현이 절뚝거리며 들어온 것을 본 미야는 운현의 얼굴과 그의 다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힐링포션 좀 줄래?"

"응. 알았어."

미야는 운현에게 힐링포션을 넘겨주었다. 그것을 받은 운현은 의자에 앉아 바지를 걷어 올렸다. 그의 오른쪽 다리는 크게 부풀어 오르고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뭐야!? 어쩌다 이렇게 다친거야!?"

"아까 오다가 접질렀어."

"으... 아프겠다. 어떻게 접질렀길래 이정도야?"

"되게 심하게 접질러서 그래. 으으음... 아프네."

힐링포션을 다리의 상처부위에 바르고 한병을 모두 마시고 나서야 붓기가 모두 빠지고 푸른 멍이 거의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다리를 움직여 모두 나은 것을 확인한 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빈 힐링포션 병을 미야에게 주었다.

"아. 응. 근데... 킁킁. 이게 무슨 냄새야?"

미야는 코를 벌름거리며 운현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한참 그의 냄새를 맡던 그녀는 운현의 왼손을 잡고 그걸 끌어와 냄새를 맡더니 헤죽 웃었다.

"손에서 뭔가 좋은 냄새나네. 뭐 맛있는거라도 먹었어?"

미야가 눈을 반짝이며 입맛을 다시자 운현은 그저 씁쓸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냄새를 계속 맡던 미야는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저기... 맛봐도 괜찮아?"

"오히려 부탁하고 싶군."

"헤헤! 얏호!"

운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미야는 긴 혀를 움직여 그의 왼손 전체를 정성스레 핥았다. 그렇게 그의 손이 타액으로 범벅이 될때까지 핥은 그녀는 여전히 달아오른 얼굴이 된 채 몸을 베베 꼬았다.

"으응... 왠지 좋은 기분."

"가서 쉬도록 해."

"응..."

뭔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미야가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를 돌려보내고 처음으로 보는 텅 빈 길드회관을 보며 운현은 쓸쓸한 기분을 느꼈다.

여러가지로 복잡한 얼굴이 된 그는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며 냉철한 이성 상태에서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었다. 그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얼굴로 미야의 타액으로 범벅이 된 왼손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시는 네게 신세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미안하다. 또 너를 더럽히고 말았구나."

씁쓸히 중얼거린 운현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귀찮게 될지도 모르니 나도 대비를 해야겠군."

[패시브 스킬 : 현자의 시간이 비활성화되었습니다.]

[냉철한 이성 상태가 해제 되었습니다.]

[지력이 99 감소합니다.]

43====================

Argument

"와!! 필레! 대단해!"

자신의 손과 쓰러져 있는 티르빙을 바라보며 필레는 아직도 믿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환호성을 보내는 모험가들을 보다가 붕붕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래비는 궁금해하며 물었다.

"왜?"

"아, 아뇨. 아무것도..."

"이야~ 저 티르빙이 기술을 쓰다가 실수할 줄이야!"

"래비! 왔나요? 길드장님은!?"

필레의 질문에 길드장을 데리러 갔던 래비는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이미 오시고 계시더라고. 나 먼저 뛰어 오느라... 잊 곧 오실거야."

"휴우..."

상황이 이상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길드장이 복귀한다면 연속될 습격은 없을 것이다. 안도한 필레가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자 래비는 연신 감탄하며 말했다.

"이야~ 전장에서 뒹굴더니 오히려 1:1 전투에서 감을 잃은건가? 그 티르빙이 실수를 할 줄이야."

"래비. 상황을 봤나요?"

"응. 티르빙이 돌진하다가 갑자기 다리를 삐끗하더라고. 그때 네가 주먹을 날려서 이긴거잖아. 왜? 그게 아니야?"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래비의 모습에 필레는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고민하는 듯한 그녀의 얼굴에 래비는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럴수가..."

"티르빙 대장님이...!"

티르빙이 질 줄은 몰랐던 용병들은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로 무기를 들어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모험가들에게 겨눴다. 티르빙이라도 멀쩡하다면 모를까 저 필레가 이기고 모험가들이 포위한 이상 자신들이 싸워 이길 방법따위는 없었다.

"이게 무슨 소란들이지?"

모험가들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그녀들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물들었다. 모험가들이 길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길로 넷의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첫번째는 진한 흑발에 눈을 가리고 있는 작은 체구의 엘프 검사였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있지만 그 드레스에 달려 있는 뾰족한 장식들은 그 쓰임새가 무엇인지 잘 알게해줄 정도로 찐득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두번째는 은은한 성광을 내뿜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두툼한 메이스를 들고 있는 금색 단발의 거의 2미터는 되어보이는 키를 가진 성기사였다. 온화한 얼굴이지만 그녀의 이마에는 파란 힘줄이 돋아 있는 것이 무척이나 화가 난 모양이었다.

세번째는 진한 청발을 세갈래로 묶은 마법사였다. 안경을 쓰고 왼손에는 책을 든 그녀는 풍만한 몸매가 더욱 도드라지는 노출 심한 백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모두를 유혹할 듯한 그 요염한 몸매의 주인인 그녀는 용병들을 보며 얼굴 가득 히죽 웃고 있었다. 허나 그 안경 너머의 눈만은 광기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네번째는 작은 키의 어린아이였다. 뾰족한 귀가 특징인 은회색 긴 머리의 소녀는 몸에 찰싹 달라붙는 가죽옷을 입고 검은색 망토로 몸을 두른 상태였다. 강화 마법과 함께 오대 속성에 대한 저항 능력이 최대에 물리적인 보호 마법까지 걸어진, 거의 요새 하나를 건설할 가격인 최고급 매직 아이템을 몸에 둘러싼 그녀는 터덜터덜 걸어와 필레에게 말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네."

"마스터!"

안심한 듯한 그녀의 말에 필레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자신을 꽉 끌어안은 필레의 몸이 아직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고 필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생했어. 나머지는 내가 처리할테니까 쉬어."

"예에..."

필레의 몸에 힘이 빠진다. 마스터라 불린 여인은 뒤에 있는 성기사에게 필레를 데려가라 말한 후 몸을 돌렸다.

"히익!"

"이, 이동요새!"

"모, 모, 모험가 길드장님! 이, 이 일은..."

"사, 상아님! 이, 이건...!"

많은 모험가들을 눈 앞에 두고도 한점의 밀림이 없었던 플레이트 아머의 용병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변명을 하려 했다. 그런 그녀들의 말이 나오기 전 광기어린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던 마법사가 지팡이를 가볍게 흔들자 그녀들은 입만 벙긋 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에 당황하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몸 역시 딱딱히 굳어버렸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나선 소녀,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이자 이동요새라는 이명을 지니고 있는 엘프 소녀 상아는 검은색 망토를 걷히고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작은 원통을 손에 들었다.

"와... 저게 그거야?"

"광검 글래디에이터..."

"4계층의 마인을 쓰러트리고 얻었다는 그거?"

"저걸 얻으려고 마인을 수십번이나 잡았다던데..."

"우우웅!"

원통의 끝에서 빛이 터져나왔다. 순간적으로 나온 강렬한 빛에 그 자리의 모두는 눈을 감아버렸다.

"우웅...우웅...우웅..."

작은 번개가 파지직 튀며 광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것을 가볍게 흔든 상아는 천천히 광검의 날을 용병 여인들에게 가져갔다.

"으읍! 읍!"

마법에 의해 말을 할 수 없게 된 그녀들이 광검을 보며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하지만 상아의 손은 차분히 움직이고 있었다.

"읍!!"

광검의 날이 플레이트 아머를 갈랐다. 마치 두부라도 자르는 것처럼 깔끔히 잘려진 플레이트 아머가 바닥을 나뒹굴자 그녀는 나머지 여인들의 갑옷도 잘라버린 후 담담히 말했다.

"길드를 습격한 보답은 이거다. 그리고 너네 대장한테 전해. 치졸하게 이딴 개수작 부리지 말고 한판 뜨고 싶으면 얼마든지 덤비라고."

싸늘히 말한 그녀는 그대로 광검을 해제한 후 허리에 걸었다.

"으으..."

어찌나 공포에 질렸는지 플레이트 아머의 여인들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풀려버린 다리를 움직이지조차 못했다. 그녀들이 주저앉은 바닥이 축축히 물들어가는 것을 본 모험가들은 자신들을 지나쳐가는 상아의 강함에 할 말을 잃었다.

"살기만으로 지려버리게 하다니..."

"후덜덜하구만."

"앞으로 다시는 모험가 길드를 무시하지 마라."

"흑...흐에에엥!"

자신이 지려버렸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상아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여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펑펑 울었다. 그런 그녀들을 비웃으며 모험가들은 모험가 길드로 돌아갔다.

"우리도 가자. 일어날 수 있지?"

"예. 부축해줘서 고마워요. 이제 괜찮아요."

잠시 주저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을 회복한 필레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험가들의 뒤를 따랐다.

"어!? 이게 뭐야!?"

앞서 걷던 모험가들 중 거의 헐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복장을 한 마법사는 자신의 미니스커트 치마를 만지며 인상을 구겼다.

"킁킁. 이거 밤꽃냄새... 정액 아냐? 너 남창한테 갔다왔냐?"

"무, 무슨 미친 소리야? 가긴 어딜가!"

"너 사기치는거 아니지? 코어 얼마에 팔았어!?"

"아니라고!"

두 모험가가 서로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에 필레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언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그녀의 모습에 래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필레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래비는 그저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모험가들로 가득 찬 길드회관으로 내려 온 운현은 필레가 다가오자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야~ 필레씨. 대단하던데요?"

"......."

아무런 말 없이 필레가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그런 모습에 필레는 입술을 달짝거리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운현씨..."

"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앉으세요."

"여기가 아니라... 저기 좀 조용한데서."

"어... 뭐. 상관없겠죠."

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필레가 이끄는대로 길드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소 안에 있는 또다른 작은 방에 들어 선 필레는 운현이 안의 의자에 앉자 문을 막은 후 조심스레 물었다.

"운현씨... 아까 운현씨. 맞았죠?"

"...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운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하자 필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 모험가 길드 소속의 간부로 레벨 424의 검사에요."

"아. 그러시군요. 어쩐지 강하시더라. 그런데요?"

필레의 레벨이 상당히 높다는 것에 놀라며 운현이 물었고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차분히 말했다.

"이 방에 있었던 일은 무조건 비밀로 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제 몸에 위해만 끼치지 않으신다면야."

"운현씨에게 위해를 끼칠리 있겠어요?"

운현이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필레는 씁쓸한 입맛을 다신 후 말을 이어나갔다.

"제 목숨을 구해주신 분인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검사 레벨 400이 되면 스킬을 하나 얻게 되요. 그 스킬의 이름은 바로 '통찰'이라는 건데요..."

"....."

운현은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등줄기가 따끔거리는게 계속 얘기를 들으면 자신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능청스레 말했다.

"아. 그러고보니 제가 동료들과 약속이..."

"통찰 스킬은 자동 발생하는 스킬로 목숨이 위험해질때 그 위험을 감지하는 스킬이에요. 물론 일, 이초 앞의 순간을 예지하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말이죠."

"......"

자리에서 일어난 운현이 문쪽으로 다가갔지만 필레는 문에서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켜주시겠어요?"

운현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필레에게 말했다. 웃는 낯에 설마 침뱉겠냐는 생각으로 그가 말했지만 필레는 그저 운현을 물끄러미 바라 볼 뿐 이었다.

"티르빙의 공격은 제 예상보다 빨랐어요. 그녀는 밖의 모험가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약해지지 않았어요. 분명히 그 순간은 저보다 강했죠. 그때 통찰이 발동되었으니까요. 저는 제가 크게 다치거나 최악의 경우 죽을 것임을 예상했어요."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비켜주실래요?"

필레의 말을 끊으며 운현은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필레는 여전히 비키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였죠. 통찰이 해제되었어요. 그리고 한순간이지만 티르빙의 다리를 거는 운현씨가 보였어요. 그리고 다시 사라졌죠."

"......"

"오른쪽 다리를 보여주시겠어요?"

"어. 음. 그거 성희롱 아닌가요? 소리 질러도 돼요?"

필레가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며 말하자 운현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장난기 섞인 말에도 필레는 그저 진지한 얼굴로 응시할 뿐 이었다. 운현은 뒤로 물러난 후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싫다고 한다면요?"

"강제할 수는 없지요."

"싫은데요."

"그런가요...?"

그가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 필레는 빙긋 웃은 후 문에서 몸을 떼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게 다에요."

"하하하. 재밌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그럼 이만..."

"촤악!"

"......"

"역시."

필레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작은 페이퍼 나이프가 움직인 순간 운현은 자신의 오른쪽 다리가 시원해짐을 느꼈다.

"다리에 멍이 있네요."

"아. 이거요. 오늘 전투에서 다쳐서..."

"미야씨나 헤스티아씨에게 여쭤볼까요?"

"...하아."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설마 걸릴 줄이야.

"그런거 알아서 뭐하시려구요. 정당한 결투를 방해했다고 생각하시는건가요? 모험가가 끼면 길드가 위험해진다구요? 이건 길드와 연맹간의 일이라구요? 그런 것 따윈 관계없어요."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는 필레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운현은 차분히 말했다.

"....."

"저에겐 필레씨가 필요해요."

"...네?"

"........"

"........"

운현의 말에 필레는 순간 멍해진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못 들은게 아닐까? 다시 한번 그의 말을 되뇌인 그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당황했다.

"네에에에에에에에에엣!?"

"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말해놓고 보니 이상했다. 운현은 황급히 손을 휘저으며 자신이 한 말을 부정했다.

"저같은 초짜 모험가에게 친절히 대해주신 필레씨가 모험가로서 정말 필요한 분이라는거죠!"

"아! 아! 그! 그! 그렇. 그렇겠죠!? 아... 아하하하..."

"하하하..."

금방이라도 머리에서 김이 날 것처럼 얼굴과 목덜미, 귀까지 새빨개진 필레는 운현의 말에 멋쩍은 듯 미소짓다가 침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아아아아아..."

약 3초간.

길드장님과 길드의 간부들, 모험가들의 축복을 받으며 행복한 결혼식을 하고,

첫날밤은 달콤한 와인과 함께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서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함께 보내고,

허니문 베이비로 생긴 남자 아이는 운현을 닮아 상냥하고 착하며 여자들에게 인기가 최고이며,

그 남자아이의 동생인 여자아이는 아주 말썽쟁이이지만 자기 오빠와 아빠를 너무나 사랑하는 아이로 자라며 복작복작하지만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가 아들과 딸을 모두 결혼시키고 둘이서 언덕 위의 하얀 작은 저택을 지어 행복한 삶을 지내다가 서로 손을 잡고 한날 한시에 페르티의 품에 안기는 피날레까지 순식간에 상상했었던 그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아까 티르빙과 싸울때보다 더 안좋아보이는 필레의 표정에 운현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그냥 세상의 모든 걸 다 가졌다가 그게 고작 신기루에 불과했단걸 깨달은거에요. 몸 안의 혈관이 오폐수로 바뀌고 심장이 천갈래로 찢어지는 고통을 맛봤을 뿐이니까 걱정마세요."

44====================

Argument

"그거 심각한거 아니에요!?"

절망감 가득한 필레의 말에 운현은 당황하며 외쳤다. 하지만 필레는 붕붕 고개를 저은 후 얼른 표정을 다시 원래대로 돌렸다.

"전 괜찮으니 걱정마세요. 진짜에요. 아하하하... 아무튼. 운현씨. 어떤 기술을 쓰신 거에요?"

"그건 비밀이에요."

"말씀해주실 생각은?"

"없는데요."

운현은 딱 잘라 말했다. 헤스티아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것이다. 필레가 자기 스스로 오늘 이 방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자고 했으니 어기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 운현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제 스킬이 맞아요. 하지만 그것을 밝히기는 어렵네요.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저희 동네에서 나올때 익힌 스킬이라..."

"운현씨... 고향이 정말 어디에요?"

"밝힐 수 없습니다."

"끙..."

운현이 노코멘트로 일관하자 필레는 골치가 아팠는지 머리를 감쌌다.

"좋아요. 운현씨께서 그렇게 비밀이라고 하시니 저도 지켜드릴게요. 그렇지만 너무 무모했어요. 운현씨. 운현씨 레벨이 몇이죠?"

"저 이번에 십됐는데요."

"십... 운현씨. 티르빙의 레벨이 몇인지 아세요? 그 여자 반년 전에 저와 같은 레벨이었다구요. 반년동안 저는 던전 탐험을 제대로 못해서 레벨업을 못했지만 그 여자는 전장을 경험하며 레벨을 더 올렸을 거라구요. 그런 여자의 공격에 끼어들다니. 제정신이세요? 죽기 싫어서 모험가 안하시겠다고 하셨던 분이 왜 그렇게 무모해요!?"

필레는 화가 난 듯 운현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아까와는 다르게 분노로 얼굴이 붉어진 필레를 조용히 바라보던 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죄송해요. 필레씨. 하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움직였구요."

"운현씨."

"티르빙의 돌진은 조금 어설펐어요. 그녀의 봉은 오른팔로 지지되고 있었고, 그 탓인지 그녀가 첫발을 내딛었을 때 오른쪽으로 균형이 흐트러져 있었어요."

"그래서요?"

"강대한 벽일 수록 작은 균열에 무너지는 법이지요.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니 자연스레 오른쪽에 힘이 더 들어갔을테죠."

"......"

"달려들면서 오른발이 들렸을 때, 그녀의 발이 운동하는 방향은 아랫쪽이었죠. 한쪽으로 쏠리는 힘은 옆에서 주어지는 작은 힘만으로 방향을 틀어버린다는 것 정도는 아시죠? 전 그것을 노렸을 뿐이에요."

내딛으려는 발을 툭 건드린 것만으로 방향이 틀어진다. 빠른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안정적인 틀어진 방향은 티르빙의 움직임을 방해했고 그것이 그녀에게 틈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운현씨."

"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보니까 알았는데요."

운현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필레는 그것이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건... 상아님의 분석.'

뛰어난 검사인 자신조차 그 경지를 알 수 없는 길드마스터 상아의 스킬인 분석이 발동되면 운현처럼 자연스레 적의 약점을 찾게 된다. 그 어떤 이들에게서도 공격이나 방어의 약점을 찾아 그것을 공격하여 가볍게 승리해버리는, 천검자와 맞먹을 정도의 강자인 상아가 가진 분석의 효과와 같은 능력을 보인 운현을 멍청히 바라보던 필레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남자 모험가, 도적, 그리고 투명화할 수 있는 스킬을 보유한데다가 분석까지 가능하다? 필레는 운현이 그저 상냥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모해요! 그 힘을 트는데 얼마나 큰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거에요!?"

"뭐, 심해봐야 다리 하나 부러지는 정도? 다행히 금가는 정도에 불과한 것 같더라구요."

"운현씨! 치료는 제대로 한거에요!?"

대수롭지 않게 운현이 말하자 필레는 허겁지겁 주머니에서 힐링포션을 꺼내었다. 자신을 구하려다가 저 몸 사리는 남자가 다쳐버렸다. 그것에 그녀가 놀라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치료했어요. 힐링포션 효과 좋던데요?"

"하아아... 운현씨. 제발 걱정 좀 시키지 말아요. 저희 길드에서는..."

"저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을 했고, 그렇기에 끼어든거에요. 필레씨. 필레씨야말로 자기 몸 생각하세요. 필레씨는 필레씨 혼자만의 몸이 아니라구요."

"...네?"

또다시 몰려오는 핑크빛 상상. 필레는 붕붕 고개를 저은 후 가슴에 손을 올리며 외쳤다.

"아니! 그렇지만...!"

"다리 부러진 정도로 필레씨를 지킨 정도면 싸게 먹힌거죠."

"운현씨..."

핑크빛 상상이 다시 몰려온다. 이번에는 한순간 결혼식까지 생각했던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운현의 멱살을 잡았다.

"저따위보다 운현씨가 더 중요하다구요!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운현씨가 있으면 던전의..."

"그딴건 저에게 있어서 중요한게 아니에요. 잘 들어요. 필레씨."

그녀에게 멱살이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운현은 얼굴에 짓고 있는 씁쓸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공허해보이는, 하지만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심각할 정도의 두려움과 공포. 그것을 읽은 필레는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저에게 중요한 것은 던전의 공략이 아니에요."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제 안전, 그리고 제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의 평안입니다."

"소, 소중히?"

필레의 눈이 크게 떠진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하며 운현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그녀에게 말했다.

"필레씨 역시 저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입니다. 제가 이 모험가 길드에 왔을 때 처음으로 친절히 대해주신 분이고, 항상 제 걱정을 해주신 분이에요. 그런 분이 소중하지 않다면 누가 소중하겠어요?"

"운현씨..."

운현의 말에 필레는 살며시 그의 멱살을 잡은 손을 내려 놓았다. 이번에 밀려들어오는 핑크빛 망상은 막을 수 없었다. 입을 헤 벌리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필레는 퍼뜩 정신을 차린 후 붕붕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으! 오해하지말자! 운현씨는 그냥 날 동료로서 소중히 생각하는 것뿐이야!'

라고 생각은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게 그리 쉽게 정리가 되겠는가.

혹시나 라는 생각.

어쩌면 이라는 상상.

그래도 라는 상념.

필레는 애써 얼굴을 냉정히 만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생각이 위험을 부르는 거에요. 운현씨. 운현씨에게 제가 처음 모험가가 되는 것을 권했을 때 뭐라고 하셨었죠?"

"전 모험가가 될 생각이 없다고 했었죠."

"네. 운현씨는 자신의 몸을 소중히 생각하시는 분이잖아요. 앞으로는 이런 일이 있어도 운현씨는 나서지 말았으면 해요."

"아뇨. 전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나설겁니다만."

"운현씨! 정말 바보에요!?"

"사람에게 말할 때는 사람 얼굴을 보면서 하는 거랍니다."

버럭 화를 내며 몸을 돌려 벽을 본 필레는 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매만져보았다. 헤실헤실 풀려 있는 얼굴이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자신이 바보처럼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운현을 보지도 않은 채 차분히 말했다.

"말했잖아요! 레벨이 십밖에 안되는 모험가가 나설 일이 아니라구요!"

"레벨이 십이든, 일이든 그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가능성이 1할, 아니, 단 1푼! 1리만 있더라도 저는 도전할 겁니다."

"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그러다가 운현씨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다치는 정도로 필레씨를 구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이득보는 것이죠."

운현의 말에 필레는 순간 할 말을 잃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던 운현은 다시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필레씨. 바보에요?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왜 이해를 못해요? 저는 구할 수 있는 상황이 되다면 그것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당신을 구할겁니다. 왜 제 마음을 모르는거죠?"

그가 자신의 어깨를 꽉 잡는다. 고작 레벨 10에 불과한 그의 힘이 자신을 어찌 할 수 있을리가 없었지만 필레는 이 순간만큼은 티르빙의 공격을 눈 앞에 두었을 때보다 더욱 가슴이 뛰었다.

"...바, 바본가봐요오..."

운현이 자신을 바라보는 진지한 시선. 그리고 심장을 정확히 가격하는 그의 달콤한 말. 비록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말이 아닐지라도 필레는 온 몸이 심장이라도 된 것처럼 두근거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

"아. 죄송해요."

살그머니 풀린 필레의 손을 보며 운현 역시 잡고 있던 필레의 어깨를 놔주었다.

"저기... 그, 아, 알겠어요. 운현씨. 도, 도,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작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필레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살짝 문에서 물러났다.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채 문을 열어 준 필레가 고개를 숙인 채 있자 운현은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전 제 행동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네에... 그러니까 어서 나가주세요."

운현은 필레의 반응에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쉰 후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필레는 후들거리는 다리가 풀려 벽에 기댄 채 주르륵 주저앉아버렸다.

"어떡해..."

얼굴의 화끈거림이 지워지지 않는다. 필레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싼 후 작게 중얼거렸다.

"나... 진짜 어떡하지... 미쳤나봐..."

자꾸만 입가에 웃음이 피어오른다. 괜한 기대는 큰 실망과 허탈감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망상은 필레의 얼굴에 웃음꽃을 가득 피워나갔다.

"덜컥."

"어? 필레. 여기서 뭐해?"

"아. 응, 가이타. 그게."

길드 간부 중 하나인 성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필레를 보며 물었다. 그녀의 말에 필레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계속되는 웃음에 어깨가 떨렸고 그것을 보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우냐? 아까 무서웠구나? 으이구."

"아, 아니거든?"

"그럼 얼른 정신챙겨. 길드장님이 부르니까."

"...상아님이?"

길드장이 부른다는 말에 필레는 간신히 웃음을 지울 수 있었다.

지금은 운현과의 망상을 할 때가 아니다.

이 망상은 이따가 잠들기 전 행복한 꿈을 꾸기 위해 잘 쟁여두자 라고 생각한 필레는 주저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얼씨구? 아까 무서웠나보구만."

"아, 그게 아니라... 으으..."

운현때문에 허리와 다리가 풀려버렸다. 정말이지 심장에 안좋은 남자다. 필레는 아까 전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보던 운현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숙이고 베시시 웃었다.

필레에게 이끌려 들어간 길드 사무소에서 걸어나온 운현은 차분한 걸음으로 길드 회관 2층의 숙소로 돌아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헤스티아는 살며시 눈을 뜨며 빙긋 웃었다.

"운현씨... 왔어요?"

"아. 깼어?"

"으으응~"

침대에 걸터앉은 운현에게 잠에 취한 채 응석을 부리며 그에게 매달린 헤스티아는 운현의 다리에 얼굴을 기댄 채 다시 잠에 빠졌다. 나신으로 누워 있는 그녀의 하복부에는 싼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축축하고 끈적한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비단결같은 헤스티아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피곤해보이는군.'

운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까의 일을 생각했다.

'그래도 생각대로 흘러가서 다행이군. 필레가 눈치를 챘을 줄이야...'

자신이 숨긴 스킬에 대해서는 알릴 생각이 없는 운현은 필레에 대한 대응이 자신의 생각대로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에 만족했다. 그것으로 인해 필레의 마음을 건드린 셈이 되었지만 그정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더 좋은 일인가.'

필레의 표정이나 행동, 그것을 보면 필레가 자신에게 마음을 품게 되었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리 있겠는가.

'나쁜놈이 되어가는군.'

악의따위는 없었다. 그저 철저하게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필레의 마음을 이용한 것이지만 운현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이것으로 자신이 안전해지고, 자신이 이득을 볼 수 있다면 된 것이다.

이번 일로 필레는 자신을 의식하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보다 좀 더 자신에게 좋게 보이기 위해서 노력을 할 것이다. 그리 된다면 그 이득은 자신이 보게 되겠지. 운현은 필레에게 한 행동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흥."

잘못하지 않았다.

잘못되지 않았다.

이세계에서 살아가기로 각오를 한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이세계에 들어와 고블린을 처음 죽였을 때부터 각오는 다졌을지도 모른다.

자신 혼자 떨어진 이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가기로 한 각오. 그것은 타인을 희생해서라도 살아가겠다는 각오였다.

나지막히 콧방귀를 뀐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패시브 스킬 : 현자의 시간이 비활성화되었습니다.]

[냉철한 이성 상태가 해제되었습니다.]

[지력이 99 감소합니다.]

45====================

Argument

"무슨 일로 부르신거에요?"

길드 회관의 깊숙한 곳에 있는 길드장의 방으로 향한 필레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뾰로통한 얼굴로 물었다. 자기 혼자만 길드 회관에 내버려 둔 것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그녀의 불만 표시를 한 필레는 상아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당황하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너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이, 일은 무슨."

상아의 분석 스킬은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즉, 운현에 의해 마음이 흐트러져버린 것을 그녀가 눈치챘다는 것이기에 필레는 붕붕 고개를 젓고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했다.

"흠. 일단 앉아."

고작 십대 후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상아가 자신에게 반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필레는 기분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상아와 같은 모습일때도 상아는 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길드 간부 중 최고 연장자인 바르토보다 상아의 나이가 많다고 했으니 그녀가 자신에게 반말을 하든 말든 그건 큰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네."

"오늘 고생 많았다."

"네."

"....."

"....."

"그게 끝?"

"뭐. 여기서 더 해줘야해?"

상아가 뚱하니 말하자 필레는 이마에 빠직 혈관이 솟는 것을 느꼈다. 누구 때문이 이 개고생을 했는데. 그녀가 화를 내려 하자 상아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것 같은데 더 해줄 필요는 없잖아?"

"...아니 그건."

"남자 생겼냐?"

"아, 아, 아니거든요!?"

상아가 능글맞게 웃으며 묻자 필레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붕붕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를 보며 키득거린 상아는 푹신한 쇼파에 몸을 눕힌 후 말했다.

"용병 연맹과 조만간 마찰이 생길지도 모르겠어."

"걔들이랑은 평소에도 마찰이 있었잖아요."

"그 정도는 마찰이라고 부르기도 힘들지. 진짜 마찰이 생길거야. 아르토리아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거든."

상아의 말에 필레는 얼굴의 당황을 지운 후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아르토리아. 아르토리아 칼리우스. 용병 연맹의 연맹장이자 상아에게 있어서 필생의 숙적.

"이제 곧 시장 선거가 있을 예정이야. 지금 지지율을 따지면 나, 아니면 제작자 연합의 피스나가 시장이 될 가능성이 유력해. 애초에 상인 조합장은 시장 선거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니 실질적으로 봤을 때 내가 될 가능성이 높겠지."

던전 도시 발토르는 일단은 자치도시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네개의 국가들의 영토에 적절히 걸친 던전 덕분에 각 왕국은 던전도시의 지배권을 가지고 다투기보다는 그곳을 자치령으로 만들어 알아서 지지고 볶게 하였다.

던전을 탐험하고자 하는 모험가들은 각국에 있었고, 그 모험가들이 가져 온 코어와 몬스터의 사체로 아이템을 만들고 싶어하는 제작자는 각국에 있었고, 그 아이템을 대륙 각지에 팔고 싶어 하는 상인은 각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자금은 한 국가의 예산에 필적할 정도였다. 그것을 어느 국가 하나가 독점하지 못하도록 정상회의에서 던전 도시 발티르가 만들어졌을 때 각 국에선 자국의 인원을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하며 던전 도시에서 나오는 수입의 일부분을 받기로 결정되었었다.

하지만 던전 도시에서 나오는 막대한 수입을 독점하고자 하는 지배자는 당연히 나왔고 자치 도시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던 던전 도시는 강력한 힘을 가진 모험가들과 강력한 무구를 만들 수 있는 제작자들, 그리고 엄청난 자금을 가지고 있는 상인들에 의해 몇번이나 계속된 각 왕국의 침략을 막아내어 그 자치력을 유지했다.

허나 던전도시가 만들어진 목적은 던전의 개발과 탐험이었다. 계속되는 각국의 도발에 매번 모험가가 투입될 수 없었기에 던전 도시는 결국 외부의 적을 제거하기 위한 용병들을 끌어들일 수 밖에 없었다.

용병들 역시도 각 국의 전쟁에 휘말리는 것에 지겨움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던전도시라는 안정된 곳의 요청이 달갑지 않을리 없었다. 그 당시 거대 용병단의 단장이었던, 현재는 용병여왕이라 불리는 킬리아는 자신과 연계되어 있는 모든 용병들을 데리고 공격받고 있는 던전도시를 돕고 던전 도시의 한 세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용병의 수와 힘, 모험가들의 특수한 능력, 제작자들의 무구, 상인들의 정보와 금력. 이것이 결집된 던전도시는 몇백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며 자신들의 힘을 기르게 되었고 이제는 네개의 국가 어느 곳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강력함을 지니게 되었다.

고인 물은 썩는다 했던가.

아니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너무나도 강한 힘을 가졌지만 그것을 던전 도시의 유지와 던전의 탐색에만 쏟는 것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랜 전통인 각 국가에 수입을 보내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이들은 던전 도시가 가진 힘을 각국에 보여주어 공물따위 주지 말고 우리가 다 먹자는 제안을 하였고 그 제안이 나온 이후부터 던전 도시의 세력들은 각자의 이득을 위해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

"어... 음. 상인 조합은 왜 시장 선거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나요?"

던전 도시의 운영은 모험가 길드, 용병 연맹, 상인 조합, 제작자 연합. 이 넷의 크고 강력한 집단으로 이루어진 의회 의회의 투표에 의해 결정된 각 조직의 장 중 하나가 시장이 되어 시의 행정과 정책을 담당하는 시청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를 대표하는 자인 시장은 의회의 시장 선거를 통해 결정되며 시장은 던전도시의 정책 집행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 이득을, 가장 이득에 민감한 상인 조합이 포기했다는 것에 필레가 놀라며 묻자 상아는 마법사가 가져다 준 차를 한모금 마신 후 말했다.

"아. 고마워요. 펠리시아."

"별말씀을~ 오늘 고생 많았어요~"

필레는 자신에게도 차를 따라 준 여마법사에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본 여마법사 펠리시아는 자신의 잔에도 차를 따른 후 자리에 앉았다.

"아직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어. 하지만 이유는 예상이 가."

상인 조합의 조합장이 지난 5년간 시장직에 있으며 더러워서 때려친다. 라고 투덜거리던 것을 몇번이나 봤었지만 그런 표면적인 이유가 아님을 눈치채고 있는 상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아무튼 중립파를 표방하고 있던 상인 조합이 시장선거에 대표를 내보내지 않겠다고 나선 이상 남은 것은 과격파인 용병 연맹, 그리고 중립인 우리, 온건파인 제작자 연합뿐이야.

아마 이번 용병 연맹의 습격 사건도 아르토리우스의 개수작이겠지. 의회에서 표를 던질 수 있는 간부들을 하나씩 쓰러트리고자 하는."

"음..."

"오늘 내가 간부들을 데리고 시청으로 간 것도 그년이 불러서야. 쓰잘데기 없는 안건을 상정시켜 그것을 통과시키려고 하더군. 코어의 가격을 절반으로 줄이자는 말도 안되는 안건을 제시했기 때문에 빠질 수도 없었지. 하지만 그걸 제시 해 놓고 자기는 간부들을 절반만 데리고 나왔더군. 제작자 연합이나 상인 조합에는 그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고. 그래서 서둘러 돌아온거야."

"치사하네요."

필레가 떨떠름히 말하자 상아의 옆에 서 있던 마법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건 치사하다가 아니라 책략이라고 하는거야. 아르토리우스야 더럽기 짝이 없는 책사니까 그런 수 밖에 쓰지 못하는 거라고."

"하아... 그 사람은 진짜."

일전 보았던 아르토리우스를 떠올리며 필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생긴 것은 청순하기 그지 없는 귀한 가문의 아가씨처럼 생긴 주제에 하는 일은 음험하고 더럽다. 심지어 싸우는 수법 역시도 비열하기 그지 없었다.

상대방의 약점을 잡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뒤통수를 치는 것은 다반사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였다.

"그래서요?"

"치사한 수에는 치사한 수로 대응할 수 밖에. 필레. 당분간 길드 사무직을 맡으며 도적 클래스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체크해둬. 그리고 쓸만한 도적은 좀 빼놔."

"...뭘 하려구요?"

"그들의 능력을 활용해야지."

도적에게는 함정의 설치와 제거, 거기에 비밀문서를 보관해 둔 상자를 열 수 있는 자물쇠 따기 스킬이 있었다.

그들이 움직인다면 용병 연맹이 가진 비리나 약점을 찾아 그들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아요. 도적들이 그리 한가한 줄 알아요? 가뜩이나 도적 클래스가 없어서 던전 탐험에 에로사항이 많은데 시장 선거를 위해 그들을 투입하겠다구요? 일단 그들 중 할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저부터 반대에요. 모험가는 자유로워야 하고 어떠한 정치적 이념에도 이끌려서는 안되요. 그게 던전도시를 설립한 첫 모험가 레드 타르비우스님이 세우신 모험가의 이념이라구요. 그것을 정면에서 어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필레는 딱 잘라 상아의 의견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녀의 말에 상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하지만 필레. 이것 하나만 알아둬. 이번에 아르토리우스가 시장이 되면..."

상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말했다.

"전쟁이 일어난다."

"....!"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필레는 상아의 말에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상아의 얼굴은 진지하기 그지 없었다.

"그것도 던전 도시의 전 힘을 이용한... 모험가, 상인, 제작자. 그들을 가리지 않고 그 힘을 모두 이용해서 대륙 정복의 전쟁을 시도할거야."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지금까지 용병 연맹은 꾸준히 힘을 비축해가고 있었죠. 그들은 각지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여하며 많은 정보를 수집했고 각 왕국들이 가진 약점을 다수 보유하게 되었어요.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아르토리우스의 말대로 분명히 승산은 있어요."

"거기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상인조합에게 나쁜 일은 아니지. 그들은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운용해 더더욱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전쟁이 벌어지면 모든 물품의 가격이 올라간다. 지금 상인연합은 가진 부를 움직여 각지에서 식량과 철광석, 철괴등을 매입하고 있어. 현 시장의 정책은 처음부터 거의 방임주의였어. 던전 도시를 위해서 움직인다면 각 조직의 활동에 제약을 두지 않겠다. 딱히 딴지 걸지 않을테니 알아서 움직이라는 오더를 내린 후 뒤에서는 상인 연합을 움직이고 있었던 거야."

"....."

모든 조직의 활동에 제약을 두지 않는다. 그렇기에 상인들이 물건을 매입하든 매출하든 그것에도 제제를 걸지 않았던 것이다. 용병들이나, 제작자들이나, 모험가들이나 제약을 두지 않는다는 말에 그저 속편히 있는 동안 상인 조합은 상인 조합장이 시장으로 있는 동안 처음부터 전쟁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필레가 당황하자 상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알겠나? 지금은 선대의 이념을 지킬 때가 아니야. 현재를 지켜야 하는 거다."

"...좀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선대의 이념. 그리고 현재. 필레는 안그래도 운현때문에 복잡해진 머리가 더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상아는 미안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히 네 어깨에 짐을 실어 준 것 같군. 원한다면 휴가라도 쓰는게 어때?"

"...그토록 달라고 할땐 안주다가 지금요?"

"자. 이것도 줄테니까 화내지 말구요. 요즘 뜨고 있는 연극이래요. 표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투덜거리는 필레에게 펠리시아는 커다란 가슴골 사이에서 뽕하고 두개의 티켓을 꺼내었다. 그것을 받은 필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펠리시아를 보았다.

"이걸 어떻게 구하셨어요?"

본 사람들은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고 나올때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나온다는 연극표 발라치아의 하늘의 티켓을 그녀가 건네자 펠리시아는 히죽 웃었다.

"몇일 전에 한 퀘스트 보상이 그거였어. 난 같이 보러 갈 사람도 없고 일도 바쁘니까 항상 고생하는 필레에게 줄게. 필레는 모험가들과 많이 친하지? 한명 꼬셔서 같이 보고 와~"

생글생글 웃으며 펠리시아가 말하자 필레는 티켓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연극은 삼일 후에 시작된다. 그녀는 삼일 후, 운현과 데이트를 하기로 한 것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쟤 좀 보소. 너 진짜 남자 생겼냐?"

점점 얼굴이 붉게 물드는 필레를 보며 상아는 퉁명스레 말했다. 그런 그녀의 질문에 필레는 붕붕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에요! 남자는 무슨! 저 나가볼게요!"

더 이상 상아의 말이 나오지 않게 후다닥 그녀가 나가자 상아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진짜 남자 생긴거면 용서하지 않을거야."

"에이~ 왜 그래요~"

"나도 없는걸 쟤가 가지면 억울하잖아!"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상아가 말하자 펠리시아는 난처한 듯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대신 제가 있잖아요."

"난 남자가 좋다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후후. 몸은 좋다고 할거잖아요?"

펠리시아는 상아가 몸부림을 치며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려 하자 더더욱 그녀를 끌어당긴 후 긴 귀를 살짝 깨문 후 속삭였다.

"꺄아아악! 사람살려! 펠리시아가 또 덮친다!"

"후후후후... 오늘 밤은 길다구요~"

몸부림을 치며 펠리시아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펠리시아는 상아를 번쩍 들어 올린 후 긴 의자에 누웠다. 뒤통수에 닿는 펠리시아의 커다란 가슴에 부들부들 떨던 상아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이 지방덩어리 치워!"

"푹신하고 좋잖아요."

"좋긴 뭐가 좋아! 어서 치우라니까! 으아아아아! 닭살이이이!"

상아의 외침과 발버둥에 펠리시아는 더더욱 귀엽다는 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남자라면 눈물에 겨워 죽을만한 상황에서도 끔찍하다는 듯 부들부들 떨던 상아는 힘을 주어 그녀의 팔을 떼어낸 후 휙 몸을 일으켰다.

"너 자꾸 까불다가 맞는다?"

"어머? 절 이길 수 있나요?"

생글생글 웃으며 펠리시아가 마법서를 들자 상아는 씩 웃으며 자신의 광검을 잡았다. 금방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펠리시아는 자신의 마법서를 치운 후 어깨를 으쓱였다.

"치. 제가 길드장님을 다치게 할 리 없잖아요. 때릴데가 어디 있다고."

"너 진짜 나빴다..."

상아의 작은 키와 가슴을 흝어보며 펠리시아는 상냥하게 말했고 그것에 상아는 상처를 받았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후후후~ 정말이지~"

"....."

"귀.여.우.셔.라."

"으아아아아! 백년도 살지 못한 인간이 가슴만 커가지고! 건방지게!"

"오백년도 넘게 살았지만 요정도 밖에 자라지 못한 엘프가!"

한마디도 지지 않는 펠리시아의 모습에 상아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방을 뛰쳐나가버렸다.

"못됐어!"

"아하하하하~"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펠리시아는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 웃으며 의자에 앉은 후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시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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