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40)

Not Bad!

 2====================

Not Bad!

"크읏. 쿠리앗!"

얼굴에 축축하고 끈적한 액체가 달라붙는 듯한 기분에 청년은 천천히 눈을 떴다.

"크라. 크우앗!"

약한 불빛에 비추어진 무언가가 눈 앞에 보인다.

녹색의 우둘투둘한 거친 피부, 째진 눈, 갈색의 눈동자, 동화에 나오는 마귀같은 길쭉한 코, 툭 튀어나온 입.

그것에 놀란 청년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의 상반신을 무언가가 눌렀다.

"....!"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고 몸은 나신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눈 앞의 흉착한 괴물이 상체를 깔고 앉아 있었다.

"읍!"

양팔과 양 다리는 무언가로 묶여 있었다.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눈 앞의 괴물은 마치 웃기라도 하는 듯 두툼한 입술을 끌어올렸다.

"......!"

괴물의 손이 남성을 잡고 흝기 시작했다.

기분나쁜 쾌감에 온 몸에 오한이 감돌았다.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남성에 힘이 들어가자 괴물은 더더욱 짙게 웃고는 천천히 몸을 내렸다.

"으윽!"

괴물이 남성 쪽으로 몸을 내리는 것을 보며 섬뜩함을 느낀 청년은 묶여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힘을 주면 줄 수록 팔을 잡고 있는 무언가가 당겨지는 느낌을 받은 그는 온 힘을 다해 왼팔을 당겼다.

"푸슥!"

팔을 구속하고 있던 무언가가 풀리는 느낌을 받자마자 청년은 자신의 위에 있던 괴물을 강하게 밀쳤다.

"크르르르!!"

그것에 당황했는지 청년의 몸에서 떨어진 괴물은 으르렁거리며 다시 청년에게 달라붙었다.

"읍!"

괴물의 입이 열리며 날카로운 이빨들과 끈적한 타액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까 전 자신의 얼굴에 달라붙었던 것이 저 타액임을 청년은 직감하고 공포에 몸을 떨었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생긴 것인지에 대한 의문보다 저 이빨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다.

"읍!"

몸을 피하려 해도 양다리와 오른팔이 묶여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크르르!"

괴물이 달라붙는 것을 왼팔로 막은 청년은 필사적으로 오른팔에 힘을 넣었다.

왼팔과 마찬가지로 힘을 줄 수록 구속이 풀려나간다.

"푸슥!"

"퍽!"

오른팔의 구속이 풀리자 청년은 오른팔로 괴물을 후려쳤다.

공격에 맞은 괴물은 밀려났지만 별 충격을 받지 않은 듯 잔혹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달려들었다.

"으으읍!"

다시 한번 공격했지만 괴물은 풀쩍 뛰어 청년을 그대로 걷어차버렸다.

얼굴을 맞은 청년이 쓰러지자 괴물은 다시 청년의 위에 올라타 입을 벌렸다.

"으읍!"

상체를 강하게 누르는 탓에 몸을 일으킬 수 없다. 간신히 왼손으로 괴물을 막았지만 온 힘을 다하는 듯한 괴물의 힘을 왼손만으로 버틸 수는 없었다.

"으읍...읍...!"

필사적으로 오른손을 더듬어 무기로 쓸만한 것을 찾았다.

돌멩이라도 좋다. 아무거나 잡히는 것이 있다면 좋다.

고작 몇초에 불과한 시간이 수십시간처럼 느껴진다.

괴물의 입이 점점 가까워질 수록 오른팔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렇게 괴물의 입이 자신의 목 근처에 거의 도달했을 때 청년은 자신의 오른손에 무언가가 잡히자 더 볼 것 없다는 듯 손에 잡힌 것으로 괴물의 목을 후려쳤다.

"퍽!"

가죽이 뚫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제서야 자신의 손에 잡힌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던 청년은 괴물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괴물을 휙 밀쳤다.

괴물의 목에 꽂힌 것은 길죽한 뼈였다.

목이 관통당했는데도 살아있는 괴물은 비틀거리며 자신의 목에 밖혀 있는 뼈를 뽑으려 버둥거렸다.

"푸하! 뭐, 뭐야! 씨발!"

당황하며 황급히 다리를 본 청년은 양 다리가 밧줄로 묶여 있는 것을 보고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간신히 풀었다.

"젠장... 젠장..."

"탈그락."

목에 밖혀 있는 뼈를 뽑아낸 괴물이 핏발선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청년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괴물의 크기는 어린 아이처럼 작았다.

하지만 그 흉측한 외모와 아까 전 보였던 힘 때문에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크아아!"

피를 뱉어내며 뛰어든 괴물이 머리를 노리자 청년은 황급히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해낸 후 괴물을 잡아 그대로 던져버렸다.

"퍼억!"

벽에 충돌한 괴물이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것을 보며 청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목이 꿰뚫려도 살아 있었어. 이정도로 죽였다고 볼 수는 없어.'

청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기가 될만한 것을 찾았다. 나무토막, 반쯤 부숴진 의자. 책, 뼛조각.

그 외에 쓸만한 것이 없었던 청년이 절망할 때 쯤 청년은 자신과 괴물의 사이에 송곳 하나가 굴러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흐아압!"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몸을 일으키려 하는 괴물의 모습에 공포를 느낀 청년은 후다닥 뛰어 바닥의 송곳을 주웠다.

"푹! 푹! 푹!"

몸을 일으키는 괴물을 걷어차 쓰러트린 후 괴물의 양 팔을 양 다리로 누르며 청년은 미친듯이 괴물의 눈 부분을 송곳으로 내리찍었다.

"헉...헉...."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청년은 숨을 몰아쉬었다.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괴물의 숨은 끊어진 듯 보였다.

"도대체 이게 뭐야..."

자기에게 위해를 끼치려는 괴물이라지만 생명 하나를 죽인 것이다.

일반인이 벌레 이상 크기 되는 생물을 죽이는 경험은 극히 드물다.

태어나서 처음해보는 경험에 청년이 혼란스러워 할 때 그의 눈 앞에 반투명한 사각형 창이 떠올랐다.

[고블린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킬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추가 스탯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이게 뭐야..."

청년은 눈 앞의 메시지창을 보며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손을 뻗어 그것을 만져 본 그는 자신의 손이 그대로 통과하는 것을 보고 움찔 놀랬다.

[도움말 - 1: '메뉴'를 말해보십시요.]

반투명한 메시지창이 사라지고 다른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그것을 본 청년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메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년의 눈 앞에 또다른 창이 나타났다.

도넛 형태를 넷으로 잘라 각각 하나씩. 스탯, 스킬, 인벤토리, 로그라는 창이 떠오르자 청년은 떨리는 손으로 푸른색으로 점멸하고 있는 스탯을 눌러보었다.

[이름 : 한운현]

[Lv : 2]

[직업 : ---]

[명성 : ---]

[칭호 : ---]

[스테이터스]

HP : 1000

MP : 300

힘 : 5

지력 : 10

체력 : 5

손재주 : 5

몸놀림 : 5

행운 : 10

보너스 스탯 : 3

"이게 뭐야..."

청년, 운현은 자신의 눈 앞에 떠올라 있는 화면을 보며 멍청히 중얼거렸다.

"게임도 아니고... 이게 뭐야."

이런 현실같은 게임이 있을리가 있나. 운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타박."

현 상황에 대한 의문을 품을 겨를 따위는 없었다. 뒤쪽에서 들려 오는 누군가의 발소리에 운현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있어 그곳으로 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급히 그곳으로 이동해 구멍 안으로 들어간 운현은 최대한 숨을 죽이고 상황을 살폈다.

"크륵!? 크르르르!!"

들어 온 것은 운현이 죽은 괴물과 비슷한 모습의 괴물들이었다.

아까의 괴물과 다르게 각자의 손에는 작은 칼이 들려 있고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운현이 숨을 죽이는 동안 죽어 있는 괴물의 시체를 본 그들은 서로를 향해 몇번 으르렁거리고 들어 온 쪽으로 나가버렸다.

"......."

확실히 운이 좋았다.

만약 아까 전 괴물이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 그리고 저들처럼 무장을 하고 있었다면? 저기 굴러다니는 시체는 괴물이 아닌 자신이 될 것이다.

그는 공포로 침을 꿀꺽 삼킨 채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하아..."

너무 큰 공포때문인지 오히려 침착해진다.

운현은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송곳을 꽉 쥔 채 심호흡했다.

"...그래. 메뉴."

아까 전에 보았던 메뉴 중에 스킬이 있었다.

그 스킬을 이용하면 현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운현은 일말의 희망을 담아 스킬창을 열어보았다.

[보유 스킬 포인트 : 1]

[습득 가능 스킬]

- 한손무기 숙련 Lv 1 / 10 : 한손 무기를 능숙히 다룰 수 있다.

- 하이딩 Lv 1 / 10 : 기척을 숨겨 은신할 수 있다. Lv 3부터 하이딩 상태에서 이동이 가능하다.

"제길..."

지금 상황에서 쓸만한 스킬은 하이딩이었지만 지금 레벨로는 하이딩 상태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잠깐만."

스킬창을 닫은 운현은 메뉴에서 로그를 선택해보았다.

[로그]

[알트리아에 들어왔습니다.]

[고블린에게 포로로 잡혔습니다.]

[고블린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킬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추가 스탯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알트리아가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운현은 로그를 천천히 읽어보고 괴물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저게 고블린... 이다 이거지."

판타지 영화나 소설, 만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잡몹인 고블린이라지만 현실이 되니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운현은 고블린의 시체와 로그를 번갈아 읽어보고 눈을 감았다.

'정신 바짝 차려라... 잘못하면 죽는다.'

이제부터는 진짜다. 운현은 침을 꿀꺽 삼킨 후 빛을 내며 천천히 점멸하는 스킬창의 하이딩 부분에 손을 올렸다.

[스킬 - 하이딩의 레벨을 올리시겠습니까?]

"그래."

[하이딩의 레벨이 1 상승합니다.]

"좋아..."

이로서 하이딩 레벨은 2가 되었다. 얼마나 큰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스킬 레벨을 올린 운현은 천천히 심호흡하며 입을 열었다.

"하이딩."

[하이딩 상태로 변경됩니다.]

[이동시 하이딩 상태가 해제됩니다.]

"...좋아. 그럼 다음은..."

[하이딩 상태가 해제됩니다.]

로그에 차례대로 자신의 행동이 기록되는 것을 확인한 운현은 하이딩 상태를 해제한 후 움직여보았다.

생각대로 그 움직임은 로그에 기록되지 않았다.

운현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로그에 기록되는 것은 스킬, 그리고 레벨업, 그리고 어딘가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겠군.'

가설을 확인하려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태에서 움직였다가 고블린에게 걸렸다간 목숨이 날아간다.

"로그에는 던전 제 1계층이라고 적혀 있었으니 다른 적이 없다고도 못하겠군."

아까 보았던 고블린 세마리가 전부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신중히 움직여야 한다.

"하이딩."

스테이터스 창을 연 채 하이딩을 시전한 운현은 10을 세자 1씩 MP가 감소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게 100을 세어 10의 MP가 감소되자 하이딩을 풀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300을 세야 10의 MP가 회복되는군.'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조금 느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회복은 되니 말이다.

"그럼 다음은..."

주변을 돌며 던질만한 것들을 준비한 그는 구멍으로 돌아와 주먹만한 돌멩이를 냅다 집어 던졌다.

벽에 맞은 돌멩이가 아까 전 고블린들이 나간 통로로 들어가는 것을 본 그는 눈을 감고 최대한 기척에 집중했다.

'온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자 잽싸게 하이드를 건 운현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세마리의 고블린이 오자 인상을 구겼다.

운현이 하이딩을 쓰고 있는줄도 모르고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던 고블린들이 다시 통로로 나가자 운현은 MP가 다 채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돌을 집어 던졌다.

그렇게 열번쯤 했을때 드디어 오는 고블린의 수가 줄어들었다.

세마리에서 두마리로 변한 고블린을 보며 운현은 잠시 고민했다.

'두마리라면 상대할 수 있을까?'

답은 아니오. 였다. 아까 전 한마리를 잡은 것도 정말 요행이나 다름없었다.

운현은 침착하게 그들이 나가길 기다렸다가 다시 돌멩이를 던졌다.

또다시 열번 정도 그 짓을 반복하고 나자 들어 온 고블린의 수가 한마리로 줄어들었다.

만약을 위해 두번 정도 더 반복하고 나서야 운현은 구멍에서 나와 고블린이 이동하던 경로의 근처에 서서 돌을 던졌다.

"딱!!"

"키리리릭! 킥!"

짜증이 잔뜩 난 듯한 고블린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운현은 하이딩을 걸었다.

과연 저 고블린이 자신을 지나칠 것인가. 운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송곳을 꽉 잡고 기다렸다.

"키릭! 키리릭!"

씩씩거리며 소검을 들고 거칠게 걸어 들어 온 고블린이 자신의 앞을 그대로 지나치자 운현은 그제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키릭!?"

아까와 마찬가지로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고블린이 씩씩거리며 다시 통로로 나가려 하자 운현은 그대로 다리를 걸어 고블린을 쓰러트렸다.

"크렉... 읍!""

바닥을 나뒹군 고블린이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고 운현은 자신의 입을 막고 있던 재갈을 구겨 고블린의 입에 쑤셔 넣고 양 다리로 고블린의 양팔을 꽉 눌렀다.

입이 막힌 고블린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운현은 빠르게 고블린의 눈에 송곳을 쑤셔넣었다.

"읍! 읍!"

처음이 어렵지 두번째부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열댓번을 찌르고 나서야 고블린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운현은 고블린의 위에서 일어났다.

"레벨이 올랐나."

로그를 확인해봐도 레벨이 오른 것 같지는 않았다.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마리를 다 잡아도 오르지 않는다면 골치아픈데...'

최악의 경우 하이딩 없이 이 동굴을 빠져나가야 한다. 운현은 부디 세마리만으로 레벨이 오르길 기도하고 고블린이 떨어트린 소검을 쥐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아무리 운현이 검을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건 검이 아니라 쇳덩이 수준에 불과했다. 날은 뭉툭하고 여기저기 이가 빠져 있다.

거기에 균형도 맞지 않는지 손에 쥐고 있기가 더 불편했다.

"쳇..."

고블린의 옷을 벗겨 내 입어보려 했지만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

결국 고블린에게서 얻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운현은 고블린의 시체를 옆으로 치워놓았다.

"아무튼 다시 해봐야겠군."

[고블린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스킬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추가 스탯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3====================

Not Bad!

다행스럽게도 세번째 고블린을 처치했을 때 레벨이 올랐다.

운현은 고블린의 시체를 뒤져 쓸만한 것을 찾았지만 역시나 쓸만한 것은 없었다.

"꿀꺽."

긴장감에 목이 말라 절로 침이 삼켜진다.

하이딩 스킬을 3레벨까지 올린 후 운현은 하이딩을 걸고 스탯 창을 살폈다.

2레벨일때와 마찬가지로 MP의 소모량은 같았다. 그것에 안도하며 몸을 움직인 그는 몸을 한번 움직일때마다 MP가 감소하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쉽지 않구만."

그래도 멈추면 MP의 감소가 줄어드는 것에 안도하며 운현은 통로를 바라보았다.

'복불복이군.'

저 바깥에 수십의 고블린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이딩 상태를 눈치챌 수 있는 괴물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해야 한다는 것에 짜증과 분노, 공포가 치솟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었다.

저기 널부러져 있는 네마리의 고블린을 찾아 다른 괴물이 이곳으로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운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통로를 통해 나가는 것 뿐 이었다.

"하아..."

MP가 회복될 때까지 기다린 운현은 최대한 천천히, 소리를 내지 않으며 통로로 나갔다.

어두컴컴하고 좁은 통로라 움직이는데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쉴 수는 없었다.

간신히 통로를 빠져나온 운현은 넓은 공간에 들어서자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이게 무슨..."

여섯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고블린이 아닌 자신과 비슷한 인간의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것에 운현은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 했다.

손으로 입을 꽉 막아 비명을 참아낸 운현은 맞은편 통로쪽에서 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하이딩을 걸었다.

"캬륵! 캬르륵!"

지금까지 봤던 고블린보다 머리 두개 정도 더 큰 황색 피부의 고블린 한마리와 세마리의 고블린이 통로에서 나왔다.

황색 피부의 고블린은 다른 고블린들과 다르게 손에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었다.

그 고블린이 시체로 향한 후 도끼로 시체를 잘라내자 주변에 있던 고블린들은 신나하며 시체를 입에 물고 뜯어먹기 시작했다.

'...고어에는 면역 없는데.'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운현은 고블린들이 시체 하나를 끝장내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순식간에 시체 한구를 먹어치운 고블린들이 통로 밖으로 나가자 운현은 털썩 주저앉았다.

'저게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거지... 정신 바짝 차려야겠네.'

이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분석할 수 있는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운현은 하이딩을 건 상태로 시체들을 살폈다.

'그런데... 죄다 여자?'

시체들은 신기하게도 모두 여자였다. 붉은색부터 시작해서 금발까지.

각각 다른 색의 머리를 하고 나이도 달라보이지면 시체들이 모두 여자라는 것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설이나 게임에서 보면 여자는 새끼 생산을 위한 번식의 도구로 쓰이는게 아닌가?'

줄어드는 MP를 확인한 후 운현은 하이딩을 풀었다. 자신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이딩 뿐이었다. 쓸데없이 MP를 날릴 이유는 없었다.

"뭔가 쓸만한게 있나..."

시체를 뒤지는 것이 찝찝했지만 살기 위해서 뭘 못하겠는가. 운현은 눈을 질끈 감고 시체들을 향해 짧게 기도한 후 통통한 여자가 입고 있는 바지와 셔츠를 벗겨 몸에 걸쳤다.

'냄새가 죽이는군.'

시체 특유의 냄새에 인상을 구기면서도 운현은 시체들을 뒤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건 뭐지?'

[모험자 카드 - 도적을 획득하였습니다.]

[모험자 길드에 반납시 소정의 보상금을 받습니다.]

가죽 갑옷을 입은 늘씬한 여인의 몸을 뒤졌을 때 은화 몇개와 작은 카드를 발견한 운현이 카드를 이리저리 살폈을 때 메시지창이 떠오르고 로그에 기록되었다.

아까 전 옷을 입을때도 나타나지 않던 것이 로그에 나온 것에 신기해하며 운현은 시체를 모두 뒤졌고 그 결과 옷과 신발, 은화 열개, 동화 다섯개, 그리고 자신이 쥐고 있는 송곳과 비슷한 송곳 하나를 습득할 수 있었다.

'부디 좋은데 가시길.'

시체들을 묻어주지 못하는게 안타까울 뿐 이었다. 하지만 시체 묻어주다가 자기가 시체가 될 수 있으니 운현은 그저 명복만 빌어주었다.

"그럼... 아까처럼 해볼까..."

돌멩이와 잡동사니를 던져 보았지만 아까와 다르게 고블린들이 오지 않았다.

"...다 갔나."

약간의 기대감을 담아 운현은 어두컴컴한 통로를 지켜보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몇번 더 소란을 피워보았지만 역시 오는 고블린은 없었다.

"또 도박인가..."

통로를 바라보며 운현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통로로 들어갔다.

기척에 주의하며 통로를 빠져나가던 운현은 통로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하이딩을 걸고 잽싸게 통로를 빠져나갔다.

".....!"

"카르르! 카르륵!!"

"키륵! 크읏! 쿠리앗!"

수십마리의 고블린이 넓은 공동에 모여 있었다. 그것에 운현은 섬뜩함을 느끼며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히 하이딩을 쓰고 있는 운현을 발견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뭔 짓을 하는거야...'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니 지금까지 본 공간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동굴 안이라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너저분했던 다른 공간과 다르게 이곳은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었다.

운현이 나온 통로 맞은편에는 세개의 제단이 있었고 그 세개의 제단에는 인간으로 보이는 이들 세명이 전라로 묶인 채 공포에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뭘 하려는 거야...'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이지만 저들을 구할 능력도, 의리도 없었다.

그저 운현은 숨을 죽이고 하이딩을 쓴 채 숨어서 지켜 볼 뿐.

얌전히 기다리던 운현은 맞은편 제단 근처에 아까의 갈색 고블린이 올라가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 했다.

"....."

갈색 고블린의 뒤로 그 갈색 고블린의 세배쯤 되어보이는 거대한 괴물이 따라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저거랑 싸우면 난 무조건 죽는다.'

엄청난 공포감에 질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아버렸다. 그가 덜덜 떠는 동안 거대한 괴물은 자신의 하반신을 가리는 가죽을 풀어낸 후 제단의 가운대로 향했다.

"히이익! 살려줘!"

맑은 미성이 동굴 안에 울렸다. 그것에 고블린들이 환호하듯 괴성을 내지르자 거대한 괴물은 자신의 덩치에 걸맞는 양물을 그대로 여인의 다리 사이에 밀어 넣었다.

"아아아아악! 찢어져!! 아파아아악!"

고통과 공포의 비명이 터져나온다. 몇번 허리를 흔들던 괴물은 감질맛이 났는지 여인의 양 팔을 묶고 있던 천을 가볍게 뜯어버리고 여인을 자신의 몸 위로 올렸다.

'세상에나...'

엄청난 크기의 양물 때문에 여인의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이 보인다.

애니메이션에서나 보던 상황을 실제로 보게 된 것에 흥분은 커녕 공포만 느낀 운현은 다른 제단으로 고블린들이 이동하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와... 좃될뻔했네.'

고블린들은 두 제단에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타액을 강제로 먹였다.

그 순간 그들의 양물이 벌떡 일어났고 고블린들은 환호하며 바지를 벗었다.

'내가 저기 있을 뻔 했다는 거 아냐... 죄다 암컷인가.'

공포와 혐오에 몸부림을 치는 그들을 비웃으며 고블린들은 강제로 남자들을 범하기 시작했다.

마음껏 허리를 흔들어 사정을 강요하고, 남자가 사정하자 다른 고블린들이 타액을 먹여 양물을 세우게 하고, 다시 고블린들이 범하고.

거대한 괴물과 고블린들의 정사를 말없이 지켜보며 운현은 섬뜩함을 느꼈다.

'도대체 여기는...'

[MP가 10 남았습니다.]

'오 쉣!'

떠오른 메시지창에 운현은 기겁했다.

아직 저들의 정사가 끝나려면 한참 걸릴 것 같은데 MP가 10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100초 후에 하이딩이 풀린다는 말과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저 괴물들의 난교에 자신도 참가하게 된다는 것. 운현은 등 뒤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황급히 스탯창을 열었다.

'씨발! 또 도박이야!'

일반적으로 게임을 즐길때 지능을 올리면 MP가 증가한다.

스탯 창에서 강화시키는 것이 가능한 것은 기본 스탯 뿐, HP나 MP를 증가시킬 수는 없었기에 현 상황에서 믿을 만한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운현은 눈을 감고 보너스 스탯 포인트로 지력을 상승시켰다.

[지력이 상승합니다.]

[마법공격력이 상승합니다.]

[최대 Mp가 상승합니다.]

'휴...'

레벨업을 통해 얻은 스탯포인트 5를 모두 지력에 투자하고 나서야 원하는 메시지창을 확인한 운현은 최대 Mp가 150 상승한 것을 보고 안도했다.

'이거 여기 계속 있다가 좃되느니 좀 도망가 있는게 낫겠다.'

이정도 Mp라면 아까의 동굴로 돌아갈 정도는 충분했다.

운현은 한참 범해지고 있는 남녀들에게 잠시 안타까운 시선을 보낸 후 그대로 통로로 돌아갔다.

쓴 MP가 모두 회복되길 기다리고 나서야 운현은 슬그머니 통로 쪽으로 다시 몸을 옮겼다.

아까의 난교는 끝났는지 조용한 것에 안심하며 최대한 조심스레 이동한 그는 통로의 끝에서 하이딩을 걸고 밖으로 나갔다.

'으... 냄새.'

잔뜩 있던 고블린 대신 고블린들이 싸지른 것으로 보이는 퀘퀘한 애액의 냄새가 공동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MP를 아끼기 위해서 하이딩을 풀고 최대한 주변에 집중하며 운현은 제단 쪽으로 가 사람들을 살폈다.

'...쯧쯧. 극락왕생하시게.'

고블린들에게 당하던 남자들은 모두 죽어버린 모양이다.

피골이 상접한 채 망연자실한 얼굴로 죽어있는 그들을 보며 명복을 빌어 준 운현은 커다란 괴물에게 당하던 여인이 있던 제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

다른 남자들과 다르게 여인은 복상사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

심장 부근에 단검이 밖힌 채 음부에 피와 정액이 잔뜩 뭍어 있는 그녀를 보며 운현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짙은 금발에 하얀 피부. 풍만한 가슴이 매력적인 미녀가 저런 괴물에게 당해서 죽다니.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운현은 그저 미녀가 허망하게 죽어버린 것이 안타까웠다.

'눈이라도 감겨주자.'

측은함에 여인에게 다가간 운현은 그녀의 눈을 감겨주고 놀랬다.

'이건 또 뭐야.'

동글동글한 귀가 아니라 끝이 뾰족하고 긴 귀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운현은 남자들에게 걸어가 그들의 귀도 확인해보았다.

여인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귀 역시 뾰족했다.

'엘프?'

빼어난 미모. 뾰족한 귀. 그것을 보면 떠오르는 것은 엘프 밖에 없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엘프들의 시체에서 반지나 귀걸이, 목걸이 등 장신구들을 빼 주머니에 넣은 운현은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마땅히 쓸만한 무기는 없었다.

'이거 밖에 없나.'

엘프 여성의 심장에 밖혀 있는 검자루를 보며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이미 시체에서 옷까지 빼 입은 자신이 물러설 길이 어디가 있겠는가.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생각에 운현은 두 눈딱 감고 엘프 여인의 가슴에 밖혀 있는 검을 쑥 뽑았다.

'허어.'

푸르스름한 기운이 남아 있는 단검이였다.

송곳이나 고블린들이 사용하던 무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좋은 단검은 피조차도 뭍어 있지 않았다.

'이거 좋군. 뭐, 저 여자도 이런거 밖힌 채 죽느니 차라리 내가 쓰는게 낫겠지.'

뇌내 필터링으로 자기 합리화를 끝마친 운현은 송곳을 벨트의 고리에 걸고 단검을 쥐었다.

검자루 부분의 가죽이 손바닥에 찰싹 감기는게 상당히 고급품으로 느껴진다.

'그럼 여기서 나가야 되는데...'

운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를 찾았다.

그가 찾은 것은 두개의 통로.

석재로 서툴게 장식된 통로와 동굴로 보이는 통로.

그 둘 중 어느것이 맞는지는 운현도 알 수 없었다.

결국 또 도박을 하게 된 운현은 단검을 꽉 쥐고 천천히 동굴로 보이는 통로로 향했다.

"크르르..."

"......."

통로를 걷던 중 들려 온 소리에 운현은 단검을 꽉 쥐고 발걸음을 멈춘 후 바로 하이딩을 걸었다.

하지만 발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숨소리로만 들리는 것에 안도하며 운현은 하이딩을 풀고 조심스레 걸었다.

"크르르르.... 크르르르..."

통로의 끝에 도착하고 나서야 하이딩을 걸고 밖으로 나온 운현은 그 소리가 코를 고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안도하며 하이딩을 풀었다.

하이딩이 풀리고 나서도 주변의 반응은 없었다.

안심을 한 운현이 조용히 걸어 방 구석에 있는 해먹에 도착하자 그 위에 아까의 갈색 고블린이 누워 잠들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해먹의 뒤에 철창이 하나 있었고 포박된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작게나마 움직이는 것이 죽지는 않은 듯 보였다.

운현은 다시 주변을 살펴 다른 적이 있나 확인한 후 천천히 걸어 갈색 고블린의 앞에 섰다.

"크르르..."

운현이 코 앞에서 단검을 들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자고 있던 고블린이 더더욱 깊게 코를 골자 운현은 고블린의 주변에서 무기가 될만한 것을 치운 후 차분히 고블린의 목에 단검을 가져다 대었다.

'한방에 끝내자.'

해먹 위에서 자는 터라 고정시키기 어려웠다.

자칫 잘못해서 이 고블린이 소리라도 질러 다른 놈들을 불렀다간 일이 커진다.

운현은 긴장감에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며 고블린의 목에 댄 단검에 힘을 주었다.

"푹!"

"크륵...!"

목에서 느껴진 고통에 고블린의 눈이 떠지고 피끓는 소리를 내뱉었다. 주머니에 있던 천으로 고블린의 입을 막고 황급히 단검을 비틀어 몇번 더 찌른 운현은 고블린의 몸이 축 늘어지자 천천히 단검을 뽑았다.

"푸슈슈슛!"

[홉 고블린을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3 올랐습니다.]

[스킬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추가 스탯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4====================

Not Bad!

단검이 만들어낸 상처에서 피가 터져나온다. 그것을 보며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운현은 하이딩을 풀고 남은 MP를 확인했다.

'반 정도 썼군.'

통로 쪽에서 다른 기척은 없다.

운현은 안심하면서도 최대한 주변의 기척을 살피며 해먹 위의 고블린의 품을 뒤졌다.

'이건 또 뭐지?'

고블린의 품을 뒤져 얻어낸 것은 날개가 새겨진 작은 원형의 철판과 열쇠, 송곳 하나였다.

"흐음..."

철판은 일단 챙긴 후 열쇠를 들고 철창으로 향한 운현은 철창의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약간 뻑뻑함과 함께 철창이 열리자 운현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으으..."

'자는게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운현은 포박된 여인에게 가까히 다가갔다.

"이봐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꿈틀거리는 금발 여인을 톡톡 건드리며 작게 속삭인 운현은 그녀가 살며시 고개를 들자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어, 엄청난 미녀... 가 중요한게 아니지. 엘프?"

"당신은...? 누구...세요...?"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에 운현은 당황했다.

"아, 전 운현이라고 합니다... 아니 지금 자기 소개할 때가 아니잖아. 이봐요. 여기서 나가는 길 알아요?"

"....."

대답하기 힘들었는지 그녀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잡혀 있는 거 맞죠? 탈출할거에요?"

"네에..."

"좋아요. 그럼 협력합시다. 나도 여기 있긴 싫거든."

그냥 죽든, 정조를 빼앗겨 복상사 당해 죽든.

어쨌든 여기 계속 있다간 고블린에게 잡혀 죽게 될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계속 남고 싶을리가 없지.

운현의 말에 여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포박을 풀어 준 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일단 나갑시다."

"네..."

"아 젠장. 못걸어?"

"...미안해요. 힘이..."

부축해주는게 더 힘든 상황이다.

자꾸만 허물어지는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인상을 구긴 후 이를 갈았다.

'젠장... 나가는 길을 이 여자가 알고 있으니...'

살기 위해서는 협력해야 한다.

운현은 쓰러지려는 여인을 잡아 등에 업었다.

'여차하면 뒤에서 오는 공격은 대신 맞아주겠지. 일단 레벨부터 올리자.'

엄청난 미녀고 자시고 일단 자기부터 살아야 할 것 아닌가.

힘이 좀 들겠지만 아까 레벨업 하며 보너스 스탯도 얻었으니 여차하면 스테이터스를 상승시키자 생각하고 운현은 그녀를 업은 채 말했다.

"어디로 가야되요?"

"저쪽으로... 통로를 나가서 장식이 있는 통로로..."

"좋아. 갑시다."

여인을 등에 업은 채 운현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통로를 걸었다.

여인이 말한 통로로 들어서서 한참을 걷던 그는 다시 갈림길이 나오자 그녀에게 물었다.

"이번엔 어디?"

"가장 오른쪽..."

이런 식으로 몇번의 갈림길을 지난 운현은 통로 끝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이를 악물었다.

"이봐요. 아가씨."

"네..."

"밖에 고블린 있는 것 같은데 싸울 수 있어요?"

걷는 것 조차 힘들어 하는 여인이 싸울 힘이 있을리 만무하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역시나 돌아오는 답변은 고개를 젓는 것. 운현은 혀를 차며 그녀를 내려놓았다.

"잠깐 여기 숨어 있어요."

통로의 구석에 있는 바위에 그녀를 기대어 안보이게 한 후 단검을 쥔 운현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너무 걱정마요. 그래도 고블린들은 꽤 잡았으니까."

기습이기는 하지만 잡은 것은 잡은 것이다. 운현은 양 손에 각각 송곳을 잡은 채 조심스레 통로 쪽으로 이동했다.

'빌어먹을.'

세마리의 고블린이 무언가를 마시고 있었다. 그것을 잠시 지켜보던 운현은 그들이 마시고 있는 것이 사람의 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으악! 극혐!'

시체의 배를 갈라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컵에 담아 벌컥벌컥 마시는 그들을 보며 운현은 이를 갈았다.

'지면 나도 저꼴 난다는 거지... 그나저나 세놈이라. 개노답 삼형제네.'

하나, 아니 둘까지는 어떻게든 상대가 가능하겠지만 셋은 자신이 없었다.

운현은 여자를 버려야 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그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 동굴을 지난다 해서 통로의 끝이라는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길. 어쩔 수 없나...'

침을 꿀꺽 삼키고 운현은 하이딩을 건 채 조용히 걸었다.

자신을 눈치채지 못한 고블린들에게 최대한 다가간 운현은 두 고블린의 뒤에서 이를 악물고 단검을 입에 문 후 송곳 두개를 양 손에 쥐었다.

'눈치채지 마라...'

고블린을 죽이는 것이 이번이 네번째. 무언가를 죽이는 것이 익숙해졌는지 운현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천천히 두 고블린의 귀에 송곳을 가져간 운현은 고블린들이 건배를 하고 피를 마시는 순간 송곳을 그대로 찔러 넣었다.

"푸엑!"

"푸에엑!"

귓속을 관통해 단번에 깊숙히 꽂혀버린 송곳을 놓고 잽싸게 단검을 잡은 운현은 맞은편에서 당황하는 고블린을 걷어 찬 후 고블린의 목에 단검을 내리 꽂았다.

"크르륵..."

그대로 단검을 몇번 비틀어 목에 큰 상처를 만들어낸 운현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다른 두 고블린의 목도 걸레로 만들어버렸다.

"후아..."

순식간에 세 고블린을 처치한 운현은 레벨이 올랐나 로그를 확인해보았지만 아쉽게도 레벨이 오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잽싸게 고블린들을 뒤져 은화 두개와 동전 세개를 빼낸 운현은 묵직한 주머니 안에 그것들을 밀어 넣고 통로로 돌아갔다.

"하아...하아..."

상태가 많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숨을 헐떡거리는 여인을 등에 업은 후 운현은 힘을 1 올렸다.

[힘이 상승합니다.]

[물리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더 많은 무게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게 아니네.'

공격력 상승도 좋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현재 남은 보너스 스탯은 9. 지력을 제외하고 하나씩 다 올려 본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체력이 상승합니다.]

[Hp가 상승합니다.]

[지구력이 상승합니다.]

[손재주가 상승합니다.]

[명중률이 상승합니다.]

[치명타률이 상승합니다.]

[몸놀림이 상승합니다.]

[공격 속도가 상승합니다.]

[이동 속도가 상승합니다.]

[회피율이 상승합니다.]

[행운이 상승합니다.]

[치명타률이 상승합니다.]

[아이템 획득률이 상승합니다.]

'희대의 잡캐가 되겠군.'

누가 처음부터 설명해줬다면 그것에 맞춰서 스텟을 올리겠지만 그게 아닌 이상 일일히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여인을 들쳐메고 달릴 지구력이었기에 운현은 나머지 스탯을 체력에 몰빵했다.

'그래도 힘 하나 올렸다고 좀 가벼워 졌네.'

아까보다는 편해진 상태로 운현은 여인을 들고 동굴을 지나쳤다.

일자로 된 통로를 지나쳐 또다시 갈림길을 만난 운현은 여인에게 물었다.

"이번엔 어디야?"

"으으..."

정신을 잃으려 하는 것일까? 운현의 말에도 여인은 응답하지 않았다. 그것에 당황한 그가 무언가 말하기 전에 여인은 달콤한 목소리로 운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아... 날... 안아줘..."

"뭐래 이 미친여자가!?"

제정신인가? 잘못했다간 바깥으로 가는 통로가 아니라 황천길 가는 통로를 발견하게 생겼는데 저딴 소리를 내뱉다니. 운현은 황당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읍!"

"으음...쭙..."

등에 매달린 여인이 몸을 앞으로 당겨 운현의 입술을 빼앗았다.

달짝지근한 타액과 입 안 여기저기를 헤집는 혀놀림에 놀랄 겨를도 없이 운현은 여인이 자신의 등에 몸을 비벼대자 놀라며 외쳤다.

"내 첫키스가!? 이 미친 여자가! 나가서 얼마든지 해줄테니까 길이나 말해!"

"야... 약속이야... 저쪽으로."

"으썅. 섰네."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녀가 입맞추고 몸을 비벼대는데 안서는게 이상하다.

바지를 꿰뚫고 나올 것처럼 빳빳해진 남성에 엉거주춤 선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고 바지춤을 열었다.

"젠장..."

빳빳히 솟은 남성을 덜렁거리며 운현은 있는 힘껏 뛰었다.

등 뒤에서 여인이 계속 귓가에 숨을 불어 넣고 몸을 비벼대는 탓에 양물이 죽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터라 결국 그대로 계속 뛰게 된 운현은 갈림길이 나오자 외쳤다.

"어디야!"

"저기... 이제 끝..."

"크아아아아아!!"

"으악!"

뒤쪽에서 들려 온 괴성에 운현은 여인이 가르쳐 준 갈림길쪽으로 뛰었다.

기척을 살필 여유따위는 없었다.

통로를 빠져나온 운현은 통로 끝에 고블린 한마리가 당황하며 자신에게 몽둥이를 겨누자 냅다 송곳을 던졌다.

"크륵!?"

달려가는 그대로 송곳을 던져 고블린의 시선을 흐트리고 단검으로 고블린의 얼굴을 베었다.

크게 베어진 상처에 고블린이 고통스러워하자 운현은 단검을 입에 물고 고블린을 잡아 뒤쪽으로 던졌다.

"으라차!!"

기합성과 함께 날아간 고블린이 통로쪽으로 들어가자 운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맞은 편 통로로 뛰었다.

"콰직! 콰직!"

고블린이 던져진 통로쪽에서 무언가가 부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운현은 있는 힘껏 발을 놀렸다.

"크아아아아아!!"

쿵쾅거리는 발걸음 소리에 운현은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블린이 아니야.'

묵직한 발걸음 소리. 들려오는 포효. 홉 고블린이라고 해도 이정도는 아닐 것이다. 운현은 직감적으로 뒤에서 쫓아오는 것이 제단에서 여자를 탐하던 거대한 괴물임을 깨달았다.

"으아아아!"

빛이 보인다. 통로의 끝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발견한 운현은 미끄러지는 여자를 꽉 잡고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숲!"

그나마 다행이다.

평원이었다면 숨을 곳도 없었을테니까.

운현은 여인을 데리고 근처의 수풀로 몸을 가린 후 하이딩을 걸었다.

"크아아아!! 크아아아!!"

'히익...'

여인을 최대한 수풀로 가린 후 하이딩을 걸고 자신이 빠져 나온 통로를 응시하던 운현은 통로에서 나온 거대한 괴물이 무척이나 분노한 듯 육중한 도끼로 주변을 때려 부수는 것에 움찔했다.

'가라. 가라. 가라. 대충 부수고 가라. 좀.'

근처를 부수던 것만으로 화가 풀리지 않을 것일까? 괴물은 자신을 뒤쫓아 온 고블린들 중 하나를 양 손으로 잡아 그대로 '찢어'버렸다.

'오메... 힘 보소.'

5====================

Not Bad!

침을 꿀꺽 삼킨 운현은 고블린 하나를 손쉽게 찢어죽이고 다른 고블린을 죽이는 그 모습에 하마터면 오줌을 쌀 뻔 했다.

그렇게 밖에서 다섯마리의 고블린을 찢어죽여 분을 푼 괴물이 씩씩거리며 동굴로 들어가자 운현은 그제서야 하이딩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는 줄 알았네..."

"아하앙...나, 나 좀 어떻게..."

"잉?"

수풀에서 들려 온 달뜬 신음성에 운현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뜨헉!"

운현은 여인의 모습에 기겁했다. 매끈한 양 다리를 벌리고 열심히 하복부를 자극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운현이 침을 꿀꺽 삼키자 여인은 광기 어린 눈으로 운현을 응시했다.

아니, 운현의 빳빳히 솟아 있는 남성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이이!!"

군침을 삼키며 운현에게 달려 든 그녀는 강한 힘으로 운현을 쓰러트렸다.

강간을 당할 때 여자는 평소 세배의 힘, 남자는 일곱배의 힘을 낸다는 것이 사실일까?

그런 헛소리를 생각하며 운현은 자신의 옷을 마구 벗겨나가는 그녀의 행동에 다급히 외쳤다.

"야야! 해줄테니까 얌전히... 으헉!"

"찔꺽!"

찢듯이 자신의 바지를 벗어던진 여인은 이미 축축하기 그지 없는 음부를 운현의 양물에 갖다 댄 후 그대로 하복부를 내려버렸다.

"하아아앙!"

달뜬 쾌락의 비명과 함께 여인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여인의 음부에 들어가 있는 남성에서 쾌감이 맹렬히 치솟았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운현의 남성을 미친듯이 우물거리던 그녀의 음부는 운현의 남성이 폭발하려 하자 다시금 강하게 조여들어왔다.

"우웃...!"

단지 삽입을 당했을 뿐인데 사정감이 차오르자 운현은 결국 그것을 참지 못하고 사정해버렸다.

"히야아앙!!"

그의 남성에서 정액이 분출되자 그녀는 더더욱 짙은 쾌감을 내지르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운현을 내리깐 채 숨을 헐떡이며 쾌감을 즐기던 그녀는 다시금 광기 어린 눈빛으로 운현을 내려다보며 그의 입술을 빼앗았다.

"으읍! 으... 쭈룹... 자, 잠깐만!"

"추룹. 핥짝..."

운현이 고개를 돌리며 대화를 시도했지만 여인의 눈에 걸려 있는 광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녀는 양 손으로 운현의 얼굴을 꽉 잡고 다시 진하게 키스했다.

한번의 사정에도 자신의 안에서 운현의 남성이 단단함을 유지하고 있자 그녀는 그 상태로 허리를 흔들었다.

"윽... 내, 내 동정이..."

"하아...하아..."

운현의 중얼거림에 그녀의 눈빛이 빛난다. 그것에 운현은 움찔했지만 여인의 눈은 더더욱 광기와 탐욕으로 번뜩였다.

"히익~!!"

여인은 다시 정열적으로 허리를 흔들었다.

그 허리 놀림에 운현은 뇌가 녹아드는 쾌감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으음..."

싸늘함에 정신을 차린 운현은 어느새 밤이 되어 있는 것에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품 안에는 아까의 그 여인이 안긴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자신을 덥칠 때 보였던 광기는 찾아 볼 수 없는 여인의 미모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내 동정을 이런 미녀에게 주다니... 살아 있어서 욧가타...'

21년동안 소중히 간직한 동정을 이렇게 날려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따위는 전혀 없었다.

현실에서라면 실제로 보기도 힘든 미녀였으니 말이다.

물론 강간에 가까운 성교였지만 그래도 나쁠 것은 없었다.

'그나저나 여긴 도대체 어디지.'

자신의 품 안에서 꿈틀거리는 여인의 육체에 하복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운현은 그녀가 깨지 않게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주변은 숲이었다. 문명은 찾아 볼 수 없는 숲 속의 한가운데에서 운현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동굴에서는 살아남기 바빠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으니 지금이라도 상황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일단 이상한 건 이거지.'

메뉴를 불러낸 운현은 자신의 스테이터스 창과 스킬창, 로그 창, 인벤토리 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테이터스를 올리는 것으로 힘이 증가하고 지구력도 증가했다.

스킬을 씀으로서 목숨을 건졌다.

로그를 확인함으로써 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인벤토리창이군.'

운현은 허리에 걸려 있는 묵직한 주머니를 인벤토리 창에 가져갔다.

"호오."

손에 들려 있던 주머니가 사라지고 인벤토리의 빈칸에 주머니 모양의 그림이 생성되었다.

그것을 보며 감탄한 운현은 쓱 단검을 넣어보았다.

"이건 안들어가나?"

예상과 다르게 단검은 인벤토리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시 주머니를 꺼내고 주머니의 팔찌와 목걸이를 인벤토리에 넣어보며 몇가지를 확인하던 운현은 여인이 꿈틀거리자 살며시 등을 토닥여주었다.

"으으음..."

운현의 품 안에 있는 것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하복부에 닿는 부드럽고 탱탱한 가슴의 감촉을 즐기던 운현은 동굴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자 움찔 몸을 떨었다.

'지금 이럴때가 아니군.'

여인의 몸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다간 다시 저곳으로 끌려들어갈 수 있었다.

아니, 그냥 끌려들어가는 정도로 끝나는게 아니라 그 큰 괴물에게 사지가 뜯겨 죽을 수도 있었다.

"이봐요. 일어나봐."

"으음... 졸려..."

현 상황에 비해 상당히 태평한 목소리다. 운현은 소리를 지르려다가 행여나 들릴까봐 그녀를 다시 잡고 크게 흔들었다.

"일어나라고."

"으으..."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뜬 여인은 운현의 얼굴을 멍하니 보았다.

달빛에 비춰진 녹색의 눈동자가 아름답다. 살짝 치켜 올라간 듯한 눈꼬리는 그녀의 도발적인 매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오똑한 콧날과 연분홍빛의 촉촉한 입술. 복숭아 색으로 붉어져 있는 피부에 운현이 침을 꿀꺽 삼키는 동안 정신을 차렸는지 그녀는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서, 설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만지던 그녀는 무척 당황스러운 얼굴로 어쩔 줄 몰라하다가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건가요."

"응? 아니, 지금 상황 설명하기는 어렵고. 고블린들이 나올 것 같다고. 움직일 수는 있지?"

"아, 예. 물론..."

그제서야 상황의 위급성을 깨달았는지 여인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에서 나올때처럼 힘을 못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운현도 몸을 일으켰다.

'주머니가 인벤토리로 들어가니 상당히 몸이 가볍군.'

"그럼 일단 여기서 벗어나자고."

"......"

고개를 끄덕인 여인과 함께 운현은 최대 조심히 동굴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두어시간 쯤 지나 숲에서 빠져나오게 된 운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죽다 살아났네."

"......."

"이렇게 된거 통성명이나 합시다. 이름이 뭐요?"

"...레나. 레나 칼슈타인이라고 합니다."

여전히 복잡한 얼굴을 한 채 그녀는 운현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상당히 운현을 경계하는 태도였다. 그것에 운현이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레나는 다급히 물었다.

"그보다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죠? 당신은 누구에요? 다른 사람들은요!?"

"첫번째 질문에는 내가 당신을 데리고 고블린 소굴에서 탈출했기 때문이지. 두번째는 난 한운현이라고 하고. 세번째는... 음, 당신이 말하는 다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엘프들을 말하는 거라면. 이거 안타깝게 됐네."

"예...?"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거야."

운현은 인벤토리에서 주머니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은 레나는 주머니를 확인하고 절망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 어이! 괜찮아!?"

"어, 어째서 이런 일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절망하던 그녀는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어, 그게..."

말해줘도 될까? 잠시 고민하던 운현이 머뭇거리자 레나는 운현의 손을 꼭 잡고 간절히 바라보았다.

결국 그 시선에 눌려버린 운현은 동굴에서의 상황을 설명했고 차분히 그것을 듣던 그녀는 눈물을 주륵 주륵 흘리다가 절망한 얼굴로 풀썩 쓰러져버렸다.

"야! 뭐야!?"

너무 큰 충격을 받은 것일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절해버린 그녀의 모습에 운현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레나의 코를 살피고 흔들어보았지만 그녀의 정신은 돌아오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운현은 한숨을 푹 내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이나 자자."

정신을 차려보니 레나가 사라져 있었다.

거기에 자신이 주었던 주머니도 함께.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만한 것은 제단의 시체들에서 챙긴것만 가져간 것이었다.

그 외의 것들은 그대로 바닥에 남아 있는 것에 안도하며 운현은 입맛을 다셨다.

"쩝... 뭔가 썸이라도 생길 줄 알았는데."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녀가 사라진 것에 안타까워하며 운현은 주섬주섬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금화와 은화, 동화, 카드 하나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야."

[도움말 - 2: '지도'를 말해보십시요.]

그의 혼잣말에 대답하듯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그것을 본 운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도."

말이 떨어지자마자 운현의 눈 앞에 커다란 2차원 지도가 표시되었다. 붉은색 삼각형으로 반짝이는 것과 숲의 표시, 붉은색 삼각형 근처에는 길로 보이는 선이 보였다.

"흠."

붉은색 삼각형을 주시하던 운현은 여자가 걸어간 쪽으로 이동했다.

"이게 난가."

지도의 붉은색 삼각형이 이동했다. 그것을 보며 운현은 고민했다.

여기가 이세계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게 아니었다.

일단 자신은 살아 있었고 사람들과 대화가 통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괴물들이 존재했다.

'그래도 옷은 제대로 있는걸 보니 문명은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군.'

지도상의 선을 보며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터벅터벅 지도의 선을 향해 걸었다.

삼십분쯤 걷고 나서야 길가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던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지형과 지도를 살폈다.

'포장되지는 않은 흙길이군. 음... 길 바닥이 단단히 다져져 있는게 꽤나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모양인데.'

흙길이지만 단단히 다져져 있는 바닥을 손으로 꾹꾹 눌러 본 운현은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있음을 예측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이런 흙길은 얼마 가지 않아 잡초로 길이 사라진다.

길이 남아 있다는 것은 이 길을 이용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정도로 다져져 있다는 것은 곧 이 길을 이용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럼 이 방향으로 쭉 가면 마을이든 뭐든 나온다는 거군."

동굴에서부터 꾸준히 도박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최소한 지금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았다.

어제보다는 훨씬 좋은 상황에 안도하며 운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저건 뭐지."

다시 털레털레 걷던 운현은 길가 근처에 무언가가 서성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긴 뿔과 갈색의 털, 긴 다리를 움직이는 그것을 본 운현은 자연스럽게 중얼거렸다.

"사슴?"

근처에 사슴농장이라도 있는건가? 운현은 길가에 나와 있는 사슴에 황당함을 느꼈다.

'일단 조심하자.'

아무리 초식동물이라고 하지만 저 뿔에 받치면 위험하다.

왼손에 송곳, 오른손에 단검을 쥔 운현이 긴장하며 하이딩을 걸었을 때 그가 있는 쪽을 빤히 바라보던 사슴은 그대로 길 밖으로 도망쳐버렸다.

"휴우... 아쉽네... 가 아닌가."

하루를 꼬박 아무것도 먹지 못해 허기가 지기는 했지만 사슴을 잡는다 하더라도 처리하는 법을 모르니 의미가 없었다.

그나마 싸우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 것이 나으리라.

"그런데 눈치챈건가."

고블린도 하이딩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사슴이 자신을 눈치챘다?

운현은 신기함을 느끼며 다시 길을 걸었다.

그렇게 다시 삼십분 정도를 걷고 나서야 운현은 길의 끝에 거대한 성벽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으... 배고파 죽겠네.'

아까 놓친 사슴이 아쉬울 정도로 허기가 진 상태로 운현은 힘겹게 그곳으로 걸었다.

점점 가까워 질 수록 성벽의 문은 커져가고 있었다.

"정지."

6====================

Not Bad!

길의 끝에 도착한 운현이 거대한 성문을 올려다보자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운현에게 다가갔다.

'다 여자?'

근육질에 비키니 형의 갑옷을 입고 있고 창을 든 병사들은 모두 여자였다.

한국에서 만나도 꽤나 미형으로 보이는 여인들은 각자 들고 있는 할버드로 문을 가리며 운현에게 말했다.

"신분증을 보여라."

"에?"

"......"

애초에 정신을 차렸을 때 알몸이었던 운현이다. 그런 것이 있을리가 없었던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어, 음. 그 고블린들에게 납치당했다가 도망나온거라... 가진게 없습니다요."

괜히 개기고 버텨봤자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 같기에 운현은 저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남자?"

"남자가 왜 여길..."

하지만 운현의 말보다는 그의 존재에 여인들은 관심을 보였다.

그것에 운현이 의아해할 때 여인들은 서로를 보며 빙긋 웃었다.

"고블린에게 납치당했다가 돌아 온 남자라."

"혹시 모험가인가?"

"아뇨. 그런건 아닌데."

"뭐야..."

과하게 실망한 표정이다. 뭐가 잘못된 것인가.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여인들 중 짙은 금색 단발의 여인은 운현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후 낮게 헛기침했다.

"크흠! 고블린에게서 탈출했다고? 그런데 네가 입고 있는 옷은 뭐냐? 그 옷은 여성용의 옷 같은데."

"어. 이건. 거기서 발견한 시체의 옷을..."

"수상한 놈이군. 몸 수색을 해야겠어. 무기를 가진게 있나?"

"무기라고 할만한 건 이정도 밖에..."

그녀의 질문에 운현은 송곳과 단검을 내놓았다. 그가 준 송곳과 단검을 잠시 바라보던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뒤의 여인에게 건네주었다.

'뭐지?'

뒤에서 지켜보던 여인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히죽거리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움찔한 운현이 주춤 뒤로 물러나자 금발의 경비병은 한걸음 크게 다가간 후 말했다.

"뭔가 두려운 거라도 있는거냐? 혹시 도둑 아니야?"

"아, 아닌데요."

시체털이범이라면 맞겠지만 도둑은 아니었다. 어쨌든 죽은 사람들의 물건을 가져 온 것이니까.

하지만 이곳의 규정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는 운현은 움찔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에 그녀는 히죽 웃은 후 말했다.

"양팔을 벌리고 서라."

"아. 예."

그가 양 팔을 벌리고 서자 여인은 그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공항에서 몸수색을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던 운현은 여인의 손이 몸 여기저기를 더듬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몸은 상당히 괜찮군."

"가, 감사..."

"어디보자..."

"힉!"

운현의 몸을 더듬는 손길이 점점 더 농염해져갔다. 그의 가슴팍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내려가 그의 허벅지를 쓰다듬자 운현은 기겁했다.

"어허! 여기에 반입금지 물품을 숨겼을 수도 있잖아!"

"그, 그렇군요."

레나에 비해 떨어지지만 그래도 매력적인 미녀의 손길에 운현은 양물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속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참으려 했지만 그녀의 손길이 슬그머니 남성을 톡톡 건드리자 운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뭐야. 후후. 흥분한거냐?"

"으..."

성희롱 당하는 여자가 이런 기분일까?

그의 바지 앞섬이 부풀어 오른 것을 보며 여인은 입술을 핥았다.

"뭐야!? 뭐 이상한거라도 있어!?"

"잘 왔어. 수상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잘 잡아봐."

"알았어."

뒤에서 지켜보던 여인이 달려오더니 그의 아랫부분을 보고 기묘하게 웃었다.

붉은 스포츠 머리의 미녀는 실실 웃으며 운현의 뒤로 가 그를 꽉 끌어 안았다.

'뭔 힘이...'

"으햐악!"

등 뒤에서 느껴지는 물컹함과 가슴을 쓰다듬는 손길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쾌감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너... 이제보니 꽤 귀엽네? 후후."

붉은 머리 여인이 귓볼을 핥으며 속삭이자 운현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다, 당신들 도대체."

"가만히 있어보라고. 곧 너도 좋아질..."

"뭣들 하는거냐!"

허스키한 노성이 터져나왔다.

그 소리와 함께 운현의 몸을 만지던 손길이 떨어졌다. 안도감과 함께 아쉬움을 받은 운현은 소리가 나온 쪽을 바라보았다.

"......"

짙은 흑색 단발에 갑옷을 입은, 레나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미녀가 화난 얼굴로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에스카! 로지! 또 너희들이냐!"

"윽, 윈드 대장.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긴! 이번에는 못 넘어간다!"

"하지만 신분증도 없이 들어 오려는 녀석에 대한 검사는 경비병의 의무라구요!"

억울한 듯 외치는 금발 여인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던 기사갑옷의 여인은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것을 본 여인들이 후다닥 뒤로 물러나자 그녀는 싸늘히 그들을 노려본 후 운현에게 다가갔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군."

"아, 아뇨. 저도 좋았.. 이 아니라."

"음?"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래도 저 여자들의 상급자인 듯 보이는 그녀에게 운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이곳에 온 경위, 그리고 신분증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잠자코 운현이 말하는 것을 듣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신분증이 없다면 이곳에 들어 올 수 없다."

"윽..."

또다시 저 위험 속에 들어가야 하는 건가. 운현이 떨떠름한 얼굴을 하자 그녀는 미안한 듯 뒤를 가리켰다.

"그래도 내 부하들의 실례에 대한 사과의 표시로 임시 출입증을 발행해주지. 도시에 머무르고 싶다면 모험가 길드에서 신분을 등록하고 그곳에서 신분증을 받도록 해라."

"모험자 길드의 신분증이라. 이런건가요?"

고블린 소굴에서 얻은 모험자카드를 꺼내보이며 운현이 묻자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호오... 도적의 모험자 카드인가. 희귀한 것을 보았군."

"예?"

도적이 뭐라고 희귀한 것이라는 건가.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건 네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모험자 길드에 반납하는게 좋을 것이다. 소정의 보상을 줄테니 말야. 그보다. 이름이 뭐지?"

"운현이라고 합니다만."

"그래. 운현. 나는 윈드라고 한다. 발티르 던전도시의 북문 경비대장을 맡고 있지. 내 부하들의 실례는 다시 한번 사과하마."

딱딱한 어조로 말한 후 그녀는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사과에 운현은 당황하며 마주 허리를 숙였다.

딱히 위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큰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기에 운현이 별다른 말 없이 사과를 받아주자 그녀는 생긋 웃었다.

'예쁘네...''

"발티르 던전 도시는 초행이겠지? 도시의 지도를 주마. 지도를 보며 모르는 것이 있다면 주변인들에게 물어 모험자 길드로 가두는게 좋을거다."

"감사합니다."

멋쩍은 듯 웃으며 운현에게 작은 카드 하나와 지도를 넘긴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는 두 여인들에게 시선을 보내며 싸늘히 말했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일주일간 특별훈련이다. 성문 경비병이 임무 도중에 남자를 희롱하다니."

"그, 그게!"

"간만에 만난 남자라서...!"

"남자를 안고 싶다면 남창에 가면 될 것 아닌가! 변명은 죄악이다!"

버럭 소리를 지른 그녀가 가볍게 손인사하고 여인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덩그러니 성문에 남게 된 운현은 손에 들려 있는 지도와 카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창? 남자를 희롱? 도대체 뭐야.'

자신의 상식선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운현은 입을 다문 채 생각을 하다가 아까의 두 여인을 대체하기 위한 다른 경비병, 마찬가지로 여인 둘이 나타나 자신을 바라보자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모험자 길드로 가야겠군.'

7====================

Not Bad!

도시를 출입할 때 신분증을 원하는 것을 보니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분을 증명하는 것이 우선인듯 싶었다.

남창이니 뭐니 하는 것은 그 후에 알아봐도 좋다.

'이것도 되려나.'

지도창을 연 후 운현은 손에 들려 있는 지도를 지도창에 가까히 가져갔다.

[발티르 던전도시의 지도가 등록됩니다.]

메시지창과 함께 지도가 변경된다.

아까 전 보았던 지도와 함께 자신의 위치가 표현되자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되겠군.'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있는 건물 위에 쓰여진 글씨를 보며 운현은 생각했다.

'상당히 편하게 되어 있어.'

운현이 목표로 하는 모험가 길드 외에도 도구점, 무기점등 각 건물들의 위치와 그 이름들이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도대체 뭐때문에 이런 일이 나한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곳이 이세계라면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계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운현의 마지막 기억은 자신의 자취방에서 잠들었던 것 뿐 이었다.

'술을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술 많이 마셨던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다음달에 군대에 입대하게 되어 친구들과 매일같이 술을 퍼마시기는 했지만 그건 군 입대 전에도 있었던 일들이다.

단지 술을 마시고 자취방에서 잤기 때문에 이세계에 들어왔다?

그렇게 따지면 이세계는 제 2의 지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주변을 지나가는 이들의 대부분이 여자였다. 물론 남자도 있기는 했지만 대다수가 여성, 그것도 평균 이상의 미모를 지닌 여인들이였다. 머리색이나 복장이 각양각색인 미녀들이 즐비한 거리에 서서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헤벌쭉 웃었다.

"눈에는 좋네."

꽃같은 여인들이 살랑살랑 걷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잠시 길에 서서 주변의 풍경을 구경하던 운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모험가 길드로 향했다..

마치 중세를 연상케 하는 건물 앞에 도착한 운현은 지도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글씨를 확인한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보는 글씨인데 왜 읽을 수 있지?'

건물의 문 위에 걸려 있는 커다란 간판의 글씨는 확실히 운현 자신이 읽을 수 있는 글씨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현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았다.

모험자 길드.

할 줄 아는 외국어라고는 일본어 조금과 영어 조금 외에는 없는 운현은 이것 역시 이세계로 오게 되며 생긴 현상이라고 판단했다.

애초에 메뉴나 메시지창이 떠오르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상황인데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운현은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우..."

밖에서 보던 것과 마찬가지로 꽤나 넓은 건물의 내부는 혼잡스럽기 그지 없었다.

갑옷과 도끼로 무장한 근육질의 여인이나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든 여인, 자기 키보다 더 큰 창을 든 여인이나 단검으로 무장한 여인들이 테이블에 앉아 떠들거나 게시판 앞에서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남자?"

운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마시던 호쾌한 인상의 덩치 큰 미녀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했다.

"남자라고?"

"남자가 모험가 길드에?"

"어째서?"

"뭐, 뭐야. 이 과도한 관심은."

각자 하던 일을 멈춘 여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자 운현은 당황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의 등장에 가장 먼저 운현을 발견한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걸어갔다.

180이 넘는 키의 운현보다 조금 더 큰 여인은 덩치에 걸맞는 커다란 가슴을 출렁이며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온 몸이 근육인 듯한 하지만 과하지 않아 오히려 보기 좋은 그녀의 몸에 기죽은 운현이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씨익 웃은 후 운현의 손을 잡았다.

"남자 모험가는 또 오래간만이군. 술 한잔 할래? 내가 살테니까."

"어, 아니 잠깐만. 난..."

"빼지말라고. 자자."

운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운현을 이끌고 자신의 테이블로 이동했다.

그를 자신의 옆에 앉힌 그녀는 힐끔 힐끔 자신들을 바라보는 메이드복의 여인에게 말했다.

"사라. 맥주 한잔 줘. 그리고... 근데 이름이 뭐야?"

"운현."

"운현이 마실만한 음료도 주고. 뭐 마실래?"

"물이면 됩니다. 그리고 뭔가 먹을 것도 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허기진 배가 난리를 피웠다.

이곳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면 먹어두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 운현이 떨떠름히 말하자 그녀는 씩 웃었다.

"물과 스테이크 하나 줘. 힘쓰려면 먹어둬야 하니까."

"...엥?"

"후후. 이건 내가 쏘지."

"아니 그보다 힘을 쓴다는게 무슨..."

"보아하니 클랜에 가입한 것 같지는 않은데... 초보 모험자인가?"

"아니 모험자고 자시고..."

말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녀는 껄껄 웃은 후 운현을 위아래로 살폈다.

"몸도 괜찮은 것 같고. 어때? 우리 클랜에..."

"루비. 뭐하는 거죠?"

"쳇..."

그녀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테이블로 한 여인이 걸어왔다.

길죽한 귀의 연녹색 단발 머리칼을 하고 안경을 쓴 ,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슬렌더한 미녀의 등장에 운현이 놀라자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루비. 클랜에 남자 클랜원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식의 권유는 곤란해요. 자꾸 그러면 길드 차원에서 패널티를 먹일 거에요."

"너무 그러지 말라고. 필레 언니."

"언니!?"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어려보이고 이 여자보다도 어려보이는데!?

운현이 기겁하자 그를 보며 붉은 머리의 여전사 루비는 인상을 구겼다.

"앙!? 뭐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쳇. 뭐 됐어. 아무튼 잘 생각해보라고. 우리 클랜은 꽤 좋으니까. 생각 있으면 이따가 길드 회관 3층 11호로 오라고."

"아 예."

계속되는 필레의 시선에 눌린 루비는 입술을 삐쭉거리며 주머니에서 은화 두개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 놓고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필레는 한숨을 내쉬며 운현에게 빙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모험가 길드의 길드 사무원 필레라고 합니다."

"예. 저는 운..."

"운현님이시죠?"

"어떻게 제 이름을..."

운현이 놀라자 필레는 볼을 긁적거리며 부끄러운 듯 말했다.

"후후. 윈드는 제 친구거든요. 좀 어리숙해보이는 남자가 갈테니까 잘 안내를 해달라고 부탁받았어요."

"어리숙..."

살다살다 어리숙해보인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 보는 운현은 그녀의 말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틀린 말도 아니지.'

이세계는 처음이다. 세련되기는 커녕 기본적인 상식조차 알 수 없는 자신이니 어리숙해보일만도 했겠지.

속으로 납득을 한 운현은 메이드가 물과 스테이크를 가지고 나오자 그것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아. 식사를 하셔야 하나요?"

"네.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먹어서..."

"어머... 가여워라. 그럼 천천히 드세요. 기다릴테니까."

"예에..."

운현을 맞은 편에 앉으며 필레는 상냥하게 웃었다.

그가 다 먹을때까지 기다리려는지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메이드에게 커피를 주문했다.

"제가 있어서 불편하시더라도 조금 참아주실 수 있나요? 안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접근할 것 같아서..."

"아. 상관없어요.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익은 스테이크를 대충 썰어 입에 넣으며 운현은 주변을 살폈다.

자신을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대부분은 여인, 그것도 미녀들이었다.

'먹다 체하겄네.'

바로 앞에 있는 필레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그렇고, 소수이기는 하지만 남자들도 자신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혼자먹는 찐따라 쳐다보는건가. 그건 아니겠지?'

필레가 앞에 있으니 혼밥한다고 쳐다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가 있다는 건데.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짧게 혀를 찼다.

"쯧. 꿀꺽."

시선이 집중된 상황에서 스테이크를 다 먹은 운현이 물컵의 물을 단번에 비우자 필레는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맛있게 드셨나요?"

"네. 맛있었네요."

"그럼 이야기를 해볼까요?"

"예?"

"신분증을 만들려고 하시는 것 아닌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자. 따라오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필레의 뒤를 쫓아 운현이 도착한 곳은 작은 방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공간이 있는지 벽에는 두개의 문이 있었다.

꽤나 정갈한 방을 두리번거리는 운현을 향해 살풋 미소지은 필레는 그에게 몇장의 서류, 그리고 운현의 머리통만한 수정구슬 하나를 가져왔다.

"운현씨라고 하셨죠? 고향이 어디신가요?"

'이세계에서 왔다고 하면 믿을까? 그냥 미친놈 취급하지 않을까? 잘못했다간 해부라도 당하는거 아냐?'

자신을 신기한 동물 쳐다보듯 쳐다보던 길드의 사람들을 떠올리니 신중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운현이 머뭇거리며 아무런 말도 못하자 필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고향을 말씀하시기 어려우시면 말씀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모험가가 되려는 사람들 중에는 고향을 잃은 분들도 많거든요."

"그런가요."

"네. 아. 혹시 글을 읽고 쓰실 수는 있으신가요?"

"네. 뭐..."

"그럼 이것을 작성해주시겠어요?"

만년필과 함께 건네받은 서류를 보며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읽을 수 있다. 처음 보는 문자임에도 불구하고 간단한 신상명세를 기입하라는 내용을 읽은 운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펜을 들었다.

"....."

읽을때와 마찬가지다.

운현은 자신이 한글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제 멋대로 꼬부랑 글씨를 쓰는 것에 놀랬다.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서류의 내용을 채운 운현이 그것을 건네자 필레는 활짝 웃었다.

"글씨체가 참 예쁘네요. 스물 한살? 보기보다 어리시네요. 음... 이걸로 됐어요. 그보다 운현씨. 모험자가 되시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가요?"

"그. 그 뭐시냐. 제가 완전 깡촌에서 살다가 온거라 일반적인 상식은 잘 모르는데... 모험자가 뭔가요?"

어찌되었든 자신에게 호의적인 필레에게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어내보고자 운현은 아예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른다 말했다.

"에? 아. 그래서 출신지를 적지 않으신거구나... 그런데 여긴 왜 오신 거에요?"

"어. 그게... 깡촌에서만 살라니까 먹고살기 힘들어서..."

"후훗. 그런가요? 남자분이신데도??"

'남자가 무슨 상관이지?'

필레의 말에 운현은 궁금했지만 그것을 물어보는 대신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웃음을 보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 듯, 필레는 더욱 밝게 말했다.

"아무튼 잘 모르신다니 처음부터 가르쳐드려야겠네요. 이곳이 어디인지는 아시죠?"

"발티르 던전도시라고 들었습니다만."

"네. 이곳의 이름처럼 길드 던전 지하에는 던전이 있어요. 그 던전을 중심으로 발달했기에 던전도시라는 이름이 붙었죠."

'던전이라...'

"그럼 위험한 것 아닌가요? 제가 이곳에 올때 고블린에게 습격당했는데 던전 정도 된다면 더 위험한 괴물들이 있는 것 아닌가요?"

만약 이곳이 바깥보다 위험하다면 모험가 등록이고 나발이고 다른 곳으로 튈 생각을 한 운현이 묻자 필레는 손사레를 치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뇨.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던전의 입구는 마법석으로 보호받고 있어서 몬스터들의 침입이 불가능해요."

"그래도..."

"몇차례 몬스터들이 1계층... 아, 던전은 각 계층으로 구분되고 있어요. 던전 도시가 만들어지고 모험자들이 던전을 조사하며 탐험한지 벌써 300년이나 지났는데 5계층을 전부 조사하지 못했거든요."

"그럼 1계층만 있는 것 아닌가요? 그정도면 계층이라기보단..."

"조사자들에 의해서 다음 계층이 발견되었어요. 환경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보면 계층이라고 부르는게 맞을 거에요."

"그렇군요."

"아무튼, 1계층 던전의 몬스터들이 던전의 입구까지 몰려 온 적이 있어요. 오크부터 고블린, 코볼트... 꽤 많은 몬스터들이었지만 그들 모두가 입구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었죠."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어서? 하지만 뚫릴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물론 강한 마법이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던전의 각 계층은 누가 했는지 모르지만 현재로서도 밝혀지지 않은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어요. 각 계층의 몬스터들은 계층 내부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지만 다른 계층으로의 이동이 불가능한 것 같더라구요."

"그렇군요."

벌써 몇백년이나 안전하게 있었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운현이 납득을 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필레는 빙긋 웃었다.

"후후. 안심이 되시나요?"

"예? 아하하... 예."

"던전 안의 몬스터들은 바깥의 몬스터들과 다르게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요. 그 이유를 저희는 코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모험가들은 던전을 탐험하여 던전의 비밀을 밝힘과 동시에 몬스터를 처치하여 코어를 습득하는 이들을 통칭해요."

"그렇군요. 그런데 왜 그런 걸 모으는 거죠?"

"코어와 몬스터의 사체는 상당히 유용하게 쓰인답니다. 예를 들어 이거. 이름은 잡 파인더라고 한답니다. 5계층에서 출몰하는 오우거의 코어를 이용해 만든 마법도구에요. 사용자의 직업 적성을 알려주는 도구죠."

"아하..."

8====================

Not Bad!

수정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몬스터의 코어였단 말인가.

운현이 신기한 듯 바라보자 필레는 잡 파인더를 톡 쳤다.

"던전 도시는 이 코어를 습득하는 모험가들과, 코어를 가공하는 생산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도시에요. 만들어진 코어는 각 왕국으로 팔려나간답니다."

"코어는 이곳에서만 구할 수 있나요? 다른 몬스터를 잡아서는 불가능하고?"

"예. 바깥의 몬스터에게서 코어가 발견된 기록은 없어요."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후훗.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모험가가 되면 그만두지 못하나요?"

"물론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모험가는 자유직이나 다름없어요. 던전을 탐험한 후 얻은 돈으로 고향에 돌아가시는 분들도 계신걸요?"

"그렇단 말이죠. 그럼 하나 더. 모험가는 위험한가요?"

"으음... 아무래도 위험하죠."

운현의 질문에 필레는 떨떠름히 답했다.

운현을 모험가로 끌어들이고 싶은데 위험하다는 말을 했다가 그가 안한다고 할까봐 두려운 듯 보였다.

"하지만 남성 모험자는 상대적으로 여성 모험가에 비해 크게 위험하지 않을거에요."

"예? 그게 무슨...?"

"아무래도 남성 모험가는 드무니까요. 다들 지켜주려고 한답니다. 그러니 운현님이 모험가가 되신다고 하더라도 문제 될 것은 없을 거에요."

'남성 모험가를 지켜주려고 한다고? 도대체 왜? 아니 그보다 남성 모험가가 드물다고?'

"운현님?"

자신의 말에 운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필레는 자기가 무언가 잘못 말했나 싶었다.

그녀의 시선에 운현은 황급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으음... 그래도 위험한 것은 싫은데..."

"그럼 일단 적성만 알아보시겠어요? 적성에 맞지 않다면 하시고 싶으셔도 못할거에요."

모험가는 아무래도 전투직이다보니 위험이 없을 수 없었다.

그것에 운현이 부담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한 필레가 다급히 말하자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걸리는 건가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아요. 여기에 손만 올리시면 되니까요."

작정을 하고 나왔던 모양이다.

운현이 묻자 필레는 환하게 웃으며 잡 파인더를 내밀었다.

"우웅..."

잡 파인더에 손을 올리자 짧은 진동음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그것을 보던 필레는 진동음이 사라지자 잡 파인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떤가요?"

"우와... 레벨은 5인데 지력이 상당히 높으시네요. 적성도 무척 좋은 직업이구요."

'잡 파인더로 레벨까지 파악할 수 있는건가.'

초기 상태에서도 지력이 높았던데다가 MP를 높이기 위해서 지력을 더 찍었던 운현은 자신의 상태를 필레가 정확히 파악하자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직업? 뭔가요?"

"도적이요."

"........"

도닥붕이라 불리는 그 천민 직업이 좋은 직업이다? 운현은 어처구니 없다는 눈으로 필레를 바라보았다.

"왜요?"

"아니... 도적이 왜 좋은 직업이에요?"

"아하하. 운현씨는 잘 몰랐죠. 모험가 직업 중에서 도적은 상당히 좋은 직업이에요. 함정을 발견해서 해체할 수 있고 트랩을 설치해 안정적인 휴식장소를 만들 수 있어요. 그리고 잠긴 상자나 문을 열 수 있는데다가 도적 전용 스킬인 스틸을 사용해 몬스터의 갑옷이나 무기를 훔쳐 공격력과 방어력을 하락시킬 수 있어요."

"공격은요?"

"뭐 공격은 가능하지만 거의 하지 않죠."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상당히 다른 이야기에 운현은 입을 다물었다.

일반적으로 도적이라면 빠른 공속과 은신기를 이용한 높은 공격력이 특징 아닌가.

거기에 천민 딜러고. 오죽하면 도닥붕이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운현이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필레는 오히려 당황했다.

"왜, 왜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물어봐요! 도적은 각 파티에 필수적으로 한명 이상 있기를 바라니까요. 그렇지만 도적 적성에 맞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 여기 저기의 클랜에서 모셔가려고 난리를 친다구요!"

"...음, 뭐 일단 믿을게요."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이는 운현의 모습에 필레는 볼을 부풀렸다.

"으앗! 운현씨! 안 믿는거죠!? 그렇죠!?"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더 뾰로통해진 필레가 입술을 삐쭉 내밀자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인벤토리에서 모험자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고블린 소굴의 시체 옆에 떨어져 있던 것이에요. 이 사람도 도적 같은데 필레씨 말대로라면 귀중한 인원이 하나 사라지게 된거네요."

"이건!? 아아아... 휴스나씨가..."

"아시는 분인가요?"

"네. 몇일 전에 도적 직업을 얻으신 분이에요. 일년만에 도적 적성에 맞는 분을 찾아서 사람들이 노리던 유망주였는데... 어디서 이걸 구하신건가요"

"어, 그게..."

필레에게 고블린 소굴을 말해 준 운현은 그녀가 우울한 얼굴로 위치를 적고 중얼거리자 움찔했다.

"아아... 정말 아까운 사람이 가버렸어요. 가뜩이나 없는 도적 적성이 맞는 분이 줄어들어버렸네요... 어서 채워졌으면 하는데..."

안타까운 듯 중얼거리며 필레는 힐끔힐끔 운현의 눈치를 살폈다. 그 시선에 움찔한 운현은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그, 그런데 직업 적성에 맞지 않는 직업을 고를 수는 없는 건가요? 도적 직업이 그렇게 귀한 직종이라면 사람들이 오히려 몰릴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 적성에 맞지 않는 상태에서 그 직업을 얻게 되면 스킬을 배우지 못하거나 배워도 제대로 쓸수 없어요."

"예?"

"그것에 대한 조사를 길드 차원에서 해본 적이 있어요. 몇몇 스킬 같은 경우... 음, 예를 들어서 함정탐지는 던전 탐험시 필수적인 스킬이고 도적 선택시 레벨 10에 익히는 스킬인데 적성이 맞지 않는 사람은 그걸 30레벨에 배워요. 그리고 자물쇠 따기 같은 경우도 20레벨 이상 늦게 배우고요. 그리고 배워도 성공률이 낮아서 락핏만 날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고 하네요."

"그런..."

그럼 완전히 쓰레기가 되는 것 아닌가. 운현이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자 그녀는 슬픈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레벨 초기화도 불가능하니까요. 결국 그 분들에게는 막대한 포상금과 위자료를 드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해요."

"그렇군요."

"그러니 운현님!"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필레는 운현의 손을 꼭 잡았다.

"도적이 되실 생각이 없나요!?"

"그게..."

귀족 직업이고, 적성도 맞다면 도적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위험한 길을 걸을 필요가 있는가? 라는 의문에는 답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도 던전을 탐험하는 이상 위험은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고 운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운현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려 하자 필레는 거의 울 기세로 운현의 손을 꽉 잡았다.

"임시직이라도 좋으니까! 모험을 한번 해봐요! 모험은 좋은거라구요!"

"뭐가 좋은데요?"

"아직 끝을 보지 못한 던전의 끝을 찾아 떠난다! 그 와중에 보물을 얻고 부를 노린다! 더욱 강해져서 극한을 추구한다! 많잖아요!"

"그 와중에 죽을 수도 있는데요?"

"그, 그건 그렇지만..."

운현의 말에 필레는 풀이 확 죽어버렸다. 그것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싫다고 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남자들은 다 이러니까요..."

씁쓸한 얼굴로 필레가 중얼거리자 운현은 피식 웃었다.

"그럼 신분증만 만들어드릴게요. 운현님. 이곳에서 사실 생각이신가요? 돈은 있으세요?"

"듣기로는 모험자 카드를 가져다주면 포상을 받는다고 하던데."

"포상은 1골드에요."

"1골드면... 어느정도죠?"

"음... 길드 회관의 여관 숙박이 한끼 식사 포함 하루 5실버니까 20일 정도 머무를 수 있겠네요."

'한끼 식사 포함에 5실버라면... 음. 대략 1실버에 만원꼴 하는건가. 카드 하나 주워주고 꽤 괜찮게 벌었군. 근데 이게 소정이라고?'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그럼 운현님. 앞으로도 자주 뵙길 빌어요. 모험가 길드는 연중 무휴이니까 언제든지 찾아오시길 빌게요."

"네. 감사합니다."

"뭐 다른 궁금한 사항 있나요?"

"네. 어 그러니까..."

필레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운현은 기회다싶어 많은 것을 물어보았고 그녀는 성실히 답해주었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운현씨는 남자치고는 무척이나 예의바르셔서 저도 좋네요."

"하하...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볼게요. 많은 시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필레와 대담을 마치고 나온 운현은 힐끔거리는 여자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맥주를 하나 주문해 마시며 생각했다.

'자... 정리를 해볼까.'

첫번째. 이곳은 이세계이다.

몬스터를 제외하고 인간과 엘프, 드워프, 수인족, 호빗 등 우호적인 다수의 종족이 존재한다.

대륙 내 최북방과 최남단의 경우 아직 그곳에 대해 밝혀진 것이 없기에 종족을 모두 알 수는 없었다.

두번째. 신과 마법이 존재하고 과학이 발달되지 않은 세계다.

자신이 살던 세계와 비교해서 과학은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마법이 존재하고 스킬이라는 특수 능력이 존재했다. 재정일치 사회이며 현재는 파르티라는 여신이 주요 신앙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 외에도 다른 신이 있고 그 신을 믿는 교단이 있지만 파르티 교단에 비해 세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모든 이들은 태어나면 각 교단에서 세례를 받아 여신의 축복을 요청한다.

여신에게 축복을 받으면 마력, 신성력, 스킬 등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고 레벨업을 할 수 있게 된다.

세번째. 이 세계에 남자의 수는 적다.

태어나는 아이의 대부부은 여자로 태어난다.

그 비율은 대략 3:1 정도로 한 마을에 남자가 없어 여자들은 신랑감을 구하기 위해 도시로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물론 희소종 찾는 것처럼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남자들이 갑질을 하다보니 강제순결을 유지하다가 죽는 여인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 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 심지어는 몬스터까지도 적용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파르티 교단같은 경우는 남성의 조신함을 중시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는지라 남자들이 밖을 돌아다니거나, 심지어 모험까지 하는 경우는 그다지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였다.

네번째. 몬스터의 체액은 타 종족을 흥분시킨다.

강력한 몬스터든 약한 몬스터든 몬스터의 체액, 즉 타액과 피, 정액, 음액 등에 접촉하거나 그 향을 맡았을 때 남성이든 여성이든 최음효과에 걸리게 된다.

고레벨의 경우 저항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등급의 몬스터가 만들어낸 최음효과를 저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었다.

던전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몬스터가 존재하는 만큼 몬스터와의 전투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한번에 쓸어버릴 수 없다면 당연히 최음효과에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최음효과는 신체능력 저하, 집중력 하락으로 이어지고 자칫 잘못했다간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효과가 된다.

그것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남성과 결합을 하거나 흥분억제제를 먹어야만 한다.

하지만 흥분억제제는 신진대사를 저하시킴으로서 흥분상태를 억제시키는 것이기에 흥분억제제로 흥분을 저하시키면 흥분이 해소될때까지 능력이 저하되고 최악의 경우 스킬을 사용할 수 없게 되기도 해 전력을 크게 약화시킨다.

거기에 완전한 해소를 하는 것이 아니기에 결과적으로는 남자를 찾아야만 그 상태가 해소되었다.

그렇기에 각 파티나 클랜에서는 남성을 우대할 수 밖에 없었다.

전투를 치루는 것이 일상인 모험가들의 경우 던전 공략 및 효율적인 전투를 위해서 남자를 대동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남자가 있으면 흥분상태가 되어버린 몸을 식히기 위해 다시 던전을 나오며 시간을 날릴 일이 없으니 말이다.

다섯번째.

"흐음..."

운현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메뉴창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섯번째였다.

'다른 이들에게는 이런 것이 안보인다 이거지...'

메뉴창을 통한 스킬, 스테이터스, 로그, 인벤토리. 이 모든 것들이 이 세계의 인간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스테이터스는 레벨업시 직업이나 자질에 따라 자동적으로 알맞게 상승되고 스킬은 레벨이 되면 알아서 배워진다.

짐의 무게와 부피를 줄이는 인벤토리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재나 과거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로그나

지도 같은 것에 대해 물었을 때 필레는 고개만 갸웃거렸었다.

'즉 이세계진입에 따른 치트 능력이라는건데...'

다른 이들과 다르게 자신은 레벨업 시에 모든 능력치가 기본으로 1씩 상승하고 보너스 스탯이 3씩 주어진다.

그리고 스킬 포인트가 존재해 원할때 스킬을 배우거나 강화할 수 있다.

인벤토리를 통해 많은 짐을 패널티 없이 가지고 다닐 수 있다.

로그를 통해 현재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지도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여 길을 헤메지 않을 수 있었다.

'모험가에 완전히 특화됐군.'

탐험의 경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함정의 종류 중에는 마법 함정이 있어 함정에 빠진 이들을 다른 곳으로 텔레포트 시키는 함정도 있다고 한다.

그런 것을 당했을 때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파티원들과 합류하거나 도망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거 고민되는구만.'

운현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치트능력은 정말 모험가에 완전히 특화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필레에게는 대차게 모험가가 되는 것을 거절했지만 이런 힘이 있다면 도전하지 않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았다.

"좀 더 정보수집이 필요하겠지만서도..."

지금까지 얻은 정보대로라면 어쨌든 자신은 남자이니 꽤나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 말은 손쉽게 레벨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고 고레벨이 된다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가능성도 높아진다.

'던전 안의 몬스터는 바깥의 몬스터와 비교하면 몇배는 더 강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숙련된 모험가 집단과 다닌다면 큰 위험은 없다. 당분간은 포상금으로 생활하며 정보를 얻자. 이정도라면 여기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버틸 수 있겠지.'

운현은 손에 들려 있는 금화를 씁쓸한 눈으로 노려보며 운현은 가족들에 대한 생각을 했다.

매일매일 갈구고 도장에서 대련을 요구하는 호랑이같은 아버지.

상냥한 어조로 성적을 물어보거나 형과 비교하는 어머니.

그야말로 초인이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닌데다가 자신만 보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큰형과 작은형

항상 자신에게 달라붙어 괴롭히는 조카들.

"...이게 아닌데."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을 떠올리려던 운현은 가족들의 생각에 붕붕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친구들."

미소녀 피규어 모으는게 취미인 현성이

미소녀 게임 모으는게 취미인 자웅이

미소녀 야겜을 모으는게 취미인 은혼이.

"...아. 아냐! 내 친구들은 좀 더 고상한..."

인간관계가 그리 좋지 않은 자신에게 있어서 그나마 친구라 할 만한 인간들은 저 셋 뿐이라는 것을 다시 상기한 운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여자친구...! 는 없구나."

21년 인생 모태솔로로 살아 온 자신에게 여자친구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운현은 점점 한국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싶어졌다.

"그래. 내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해보자. 내가 한국에서 못한 일이 뭘까. 내가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은..."

대한민국 남성에게만 부여되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어... 이세계 개꿀."

운현은 이 세계에서 살아갈 각오를 다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