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 장 혈비도 무랑 (2)
방으로 돌아온 장천은 유문영이 한 말 때문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하지...젠장..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거야!'
복수란 말은 장천을 냉혹하고 강하게 만들었지만, 자신을 변하게 만든 것이 모
두 오해라는 것일 밝혀지자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장인을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능예와 아이를 볼 면목이 없지 않은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고심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져 왔다.
"누구냐!"
장천은 인기척을 느끼자 급히 옆에 놓여 있던 검을 들고는 소리쳤는데, 조용히
방문이 열리면서 한 여인이 다소곳한 모습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천마님의 분부로 화룡대주님을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은영영?!"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장천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니 바로 자신의
의형제였던 은조상의 여동생인 은영영이였기 때문이다.
"과연 화룡대주님이시군요. 일개 부단주에 지나지 않는 저를 알고 계시니 말입
니다."
은영영은 화룡대주라 불리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서는 그를 봐라 보았다.
장천은 현재 인피면구를 쓰고 있는지라 은영영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
로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고개를 든 은영영의 모습은 과거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였다.
성숙했다고나 할까? 지금의 얼굴에는 과거와는 다른 요염함이 서려 있었기 때
문이다.
"이상하군. 자네는 홍련교의 명문가인 은가장의 여식이라 알려져 있는데, 정체
도 알 수 없는 나의 수청을 들겠다니 말이야."
"화룡대주님 앞으로 교주의 좌에 오르실 문성님의 스승이신데, 어찌 저 같은 하
찮은 계집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옥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를 보며 장천은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떠나가고 그리고 돌아온 시점은 몇년 지나지 않았건만 그 동안 알고 있
던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가라 본좌는 수청을 들 여인 따위는 필요가 없다."
의형제였던 자의 여동생의 수청을 들 수 없는 장천은 고개를 돌리고는 차갑게
소리쳤는데, 잠시 후 스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오자 이상하게 생각하고는 돌아 보았다.
"큭!"
역시나 그 소리는 은영영이 자신의 옷을 벗는 소리쳤으니 이미 준비를 마치고
들어왔는지 겉옷을 벗자 실한오라기 없는 나신이 드러나 있었다.
"무슨 짓인가! 수청을 필요 없다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신의 몸으로 장천에게 들어와서는 그의 앞에 무
릎을 꿇고는 말했다.
"본녀는 화룡대주님의 수청을 들라는 명을 받았기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큭..."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는 그녀의 말에 장천으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장인의 문제에 이어 은영영의 문제까지 겹치니 그로선 갑작스럽게 닥친 일련의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젠장..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하지만 나신의 몸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은영영은 모습은 뭐라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지라 장천 역시 가슴이 떨려 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 이성이 남아 있는 장천은 장삼을 벗어서는 그녀에게 걸쳐주며 말
했다.
"그대가 누구의 명을 받고 있는지는 알고 있으나 본좌는 그것에 수긍할 수 없
구나."
"...."
"돌아가거라."
그녀에게 돌아가라는 말을 한 장천은 돌아서서는 의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녀는 새벽까지 똑같은 자세를 유
지하며 버티고 말았다.
"휴..."
이로 인해 장천 역시 잠을 한숨도 잘 수가 없었으니 아직도 무릎을 꿇고 고개
를 숙이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몸을 일으켜 주려 했는데, 그 때 은영영은 그
를 경직시키고 마는 한마디를 내던졌다.
"언제나 저에게 대하는 모습은 똑같군요. 두형..아니 장천이라고 해야하나."
"헉.."
놀랍게도 은영영은 장천의 정체는 너무나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알고 있었나?"
"물론이죠. 당신을 불괴곡으로 떨어뜨린 사람은 나였고....또 당신의 목소리...그
리고 느낌은 잊을 수 없으니까요."
은영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장천이 걸쳐 주었던 장삼을 벗고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흑발의 탐스러운 긴 머리 뒤로 드러나는 여인의 곡선의 미를 보며 장천의 얼굴
을 시뻘겋게 변할 수 밖에 없었다.
어젯밤 찾아 왔을 때 옷을 벗던 느낌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였기에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천마에게 밝힐 생각인가?"
장천은 그녀를 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는데, 천천히 옷을 걸친 그녀는 고개
를 돌려서는 말했다.
"당신이 불괴곡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저와 저를 따르는 한사람 뿐,
천마는 물론 오빠 조차 모르고 있어요."
"....."
차갑게 말을 건넨 그녀는 천천히 방문을 나서면서 말했다.
"천마를 조심하세요. 그는 당신을 노리고 있으니까요."
장천은 천마를 조심하라는 말을 하며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도저히 정신을 차
릴 수가 없었다.
자신을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다던 불괴곡에 빠뜨릴 때는 언제고 지금은 자신
을 위해하려는 천마를 조심하라는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이해 할 수가 없어..'
천마에 의해 교주의 좌에서 내려온 유문영이 열화의 계를 받는 시간은 정오였
기에 장천으로선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야기를 의논을 할 수 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 율명과
자신이 구해준 혈교의 소교주 뿐이였다.
"열화의 계에서 교주를 구하고 싶다고?"
"그렇소."
혈교의 소교주는 장천의 말에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를 죽이려고 할 때는 언제고, 지금에 와서 살리겠다니 한심하군."
"큭.."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닌지라 장천으로선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열화의 계에 사용되는 가마니는 내부가 직경 4미터 정도 되는 원형의 공간으
로 바닥은 강철로 뒤덮여 있고, 가마니에도 두꺼운 철판이 뒤덮여 있기 때문에
땅을 파서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
"그럼..."
"열화의 계는 불로서 죄를 태운다는 뜻이 포함된 형벌이다. 하지만 그 형벌에서
끝까지 살아 남는다면 신화로부터 죄를 사함을 받았다는 뜻으로 지금까지의 모
든 죄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
"하지만 열화의 계에서 살아 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소."
장천 역시 열화의 계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지만, 쇠도 녹일 것 같은 뜨거운
가마니 안에서 다섯시진을 버틸 수 있을 수는 없는 일이였기에 소교주의 말에
반박할 수 밖에 없었다.
"안에서 버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버틸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그의 말에 장천으로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는 오른 손을 들어 세개의
손가락을 들어서는 말했다.
"첫번째 북해빙궁의 빙정을 이용하는 방법, 그것을 먹고 운기조식을 취한다면
약 열두시진 동안 몸을 차갑게 변함과 동시에 열기가 침범하는 것을 막게되지,
물론 한가지 문제점은 빙공을 익힌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만."
"....."
"둘째 강시비법이 있다. 혈교의 교주에게만 내려오는 무적강시의 비법을 따른다
면 뜨거운 불길 정도야 쉽게 처리 할 수 있지. 물론 무적강시가 되면 죽는 것이
나 마찬가지이니 이것도 역시 제외이겠군."
"큭..."
두 가지 비법 모두 이루기 어려운 것인지라 장천으로선 그의 장난기 어린 말에
이가 갈릴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 세번째 방법은 내부에 특수한 기관으로 만든 방을 만드는 것이다."
"특수한 기관?"
"당나라때 기관진식으로 유명한 제갈유명이란 사람은 원수에게 잡혀 죽음을 당
할 위기에 처했지만, 갇혀 있던 곳의 물건을 통해 불길을 견딜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 삼일 낯 밤을 태운 불길에서 살아 남았다고 하지. 후에 그는 그 지식을
당의 황실에 전했다고 하지만 당이 멸망하면서 그 도면은 사라졌다고 하지."
"젠장! 사라졌으면 아무런 소용 없잖소!"
"그 도면을 백년 전에 혈교의 인물이 우연히 얻지 않았으면 말이지."
"아!"
소교주의 말에 장천은 크게 탄성을 내지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물론 알고 있지. 원한다면 정오 전 까지 한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것을 만
들어 줄 수도 있다네."
"부탁하오!"
"후후. 댓가는 지불해야 겠지?"
"물론이요. 무엇을 원하는 것이요."
"...흑마겸.."
소교주는 장천이 원하는 것을 말하라는 말에 흑마겸을 달라고 하니 그 순간 장
천은 몸이 얼어 붙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흑마겸을 원하고 있었소?"
"물론이지. 흑마겸은 혈교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였으니까."
"당신의 방 한구석에 상자가 하나 있을테니 그것을 열어보도록 하시요."
"응?"
"푸하하하! 바보! 흑마겸은 이미 건네준지 오래라고 쓸 수도 없는 물건이라 어
차피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건네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구시독인을 죽인 후 사
람을 시켜 네 녀석의 방에 갖다 놓은 것이 언젠데!"
"...."
그 말에 소교주는 잠시 등줄기의 땀이 흘러내릴 수밖에 없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쓸데없이 속물 짓을 하고 말았군. 알았다 형이 집행되기 한시진 전까지
물건을 만들어서 건네주도록 하지."
그를 보며 조용히 말한 소교주는 뒤로 돌아서는 사라지니 귀가 시뻘겋게 변한
것으로 보아 부끄럽기는 부끄러웠던 모양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