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장 재회 (5)
자신의 몸을 탐내던 형산파의 무사의 모습으로 바뀌어진 장천은 그의 옷을 뺏
어 입고는 창문을 열어서 들고 있었던 무음적(無音笛)을 불었다.
소리가 나지 않는 무음적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형태의 음파를 만들어 내는데,
홍련교 형산 지부에선 이 무음적을 들을 수 있는 새를 기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색의 아름다운 깃털을 가진 새와 함께 몇 명의 지부의 무
사들이 왔는데, 장천은 그들을 객점으로 올라오게 하였다.
장천은 그들을 보며 홍련교의 독문의 수신호를 보여주어 자신의 직위를 말해
주었기에 그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형산파의 무사의 모습을 한 그를 홍련교의
인물이라 믿었다.
"이 자의 신분과 이름, 특징을 알아보주게."
"예."
그 말에 쓰러진 형산파 무사의 얼굴을 본 그들은 책자를 뒤지며 한참인가를 뒤
적이더니 그자의 신상명세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강주영(康周永), 형산파의 이대제자로 형산오로 중의 하나인 양진(陽進)
의 이제자입니다. 특기는 검법으로 그 중 무궁칠혈검법(無窮七血劍法)이 가장
뛰어나다고 합니다. 가족사항으로 현재 금부의 부장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부친
강만(康滿)과 모친 뿐입니다."
"음..독자란 말이지, 이거 한 가문의 대를 위해선 죽이지 않는게 나을 것 같은
데...뭐 나중 일을 생각해서 인질로 잡아 둘까."
"알겠습니다."
장천의 생각을 이해했는지, 두명의 무사는 강주영을 보쌈해서는 밖으로 빠져나
가니 숨을 크게 들이 쉬어 마음을 안정시킨 장천은 천천히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는 두명의 형산파 제자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은 잘 끝내셨습니까. 강사형."
"물론이지, 고것 참 쫀득쫀득 한것이...흐흐흐."
어느정도 그 녀석의 흉내를 내는 장천이였지만, 쫀득쫀득하다는 표현과 함께 흘
러내리는 침을 닦는 것은 조금 과장이 아닐까 생각되는 장면이였다.
하지만 다른 두명의 제자들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보니 원래 행
실이 별로 좋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희들은 진수성찬을 취했고, 난 고것을 취했으니 이제 소화나 해볼겸 본파로
돌아가볼까?"
그 말에 두 청년은 얼굴이 시뻘개질 수밖에 없었는데, 눈이 유난히도 크게 보여
착한게 생긴 청년이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사형. 이곳에서 무림맹의 손님들을 맞이하기로 했지 않습니까."
"아! 그랬나?"
"...."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그였다.
장천으로선 그가 이곳에서 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었기에 별로 문제 될 것
은 없는 순간이였는데, 그 때 객점의 문에서 일단의 무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
다.
모두 일곱명의 무사였는데, 두명은 도복을 입은 도사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
두 병장기를 들고 있는 정파의 무사들이였는데,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장천
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객점으로 들어선 무사들 중에는 자신이 아는 얼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운사형과 무진형?'
놀랍게도 도사와 함께 들어온 사람 중에는 쌍도문의 요운과 무진이 끼여 있었
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없겠는가?
오래간만에 본 반가운 사람인지라 기쁘기 그지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기분을
만끽할 수가 없다는 것이 한이였다.
형산파의 강주영으로 모습을 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반가운 사람들과
흥겨운 재회를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들어오자 형산파의 제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났기에, 장천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보이는 도복을 입은 중년도사
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형산파의 제자 강주영이라 합니다."
"아!"
중년도사는 자신들을 맞이하러 온 형산파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인은 무림맹에서 온 무당파의 유운자(流雲子)라 하오."
하지만 장천은 자신의 소개를 해온 유운자 보다 쌍도문의 일행들에게 더 관심
이 쏠릴 수 밖에 없었다.
'조심해야겠군. 무진 형이라면 변장을 했다 해도 나라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을테니까..'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기는 했지만, 일단은 이렇게
만난 것 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장천이였다.
몇 년은 얼굴을 못 볼 것이라 생각한 사람인데, 어찌 이런 상황이라 아쉬워 하
겠는가.
간단한 상견례를 끝낸 장천은 그들을 안내하며 형산파로 올라갔다.
물론 이 일을 시작하기 전 지부에서 모아온 정보를 통해 어느정도 형산파의 위
치와 건물의 배치등은 다 암기해 놓은 상태였기에 별 문제는 없었지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였다.
사람간의 일이란 것은 단순히 알고 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이상, 속 안에 감추어진 감정 등과 같은 것으
로 사람을 대함에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잘 넘어가지 않는다
면 장천의 변장은 들킬 것이 분명한 일이였다.
형산파에 도착한 장천은 아쉽기는 하지만, 계속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위험하
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 배치된 홍련교의 첩자를 찾기 시작했다.
본단의 건물에 표식을 해둔 장천은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두시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한 청년이 바쁜 걸음으로 약속된 장소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
다.
장천은 그가 멀리서 걸어오며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홍련교의 수신호
를 보내니 그 역시 수신호를 통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신화천파(神火天播) 홍련래일(紅蓮來日) 신불이 하늘에 퍼지니 홍련의 날이 왔
도다.]
[홍련천하(紅蓮天下) 만인태평(萬人太平) 홍련의 천하는 만인을 태평 하리라.]
전음을 통해 간단한 홍련교의 구호를 주고받은 두 사람이였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있느니 만큼 그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강사숙께 인사드립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전음을 통해 자신의 소개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홍련교 백연대 십인장 궁명(宮明)이라 합니다.]
"왜이리 늦었는가!"
장천은 이 녀석의 성격대로 조금 화를 내는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백인장 두형이라 한다.]
"죄송합니다."
장천은 자신의 말에 고개를 연신 숙이는 그를 보며 어느정도 화가 가라앉은 표
정을 하고는 잡다한 말을 하니 그 이면에는 전음을 통한 정보교환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강주영이란 자로 변장을 했다하나 이자의 사람됨과 친분관계는 잘 알지 못하
니 자세하게 설명을 하기 바란다.]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장천은 구명과 함께 형산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설명을 듣기
시작하니 저녁무렵이 되어서야 어느정도 강주영의 사람됨과 친분관계를 숙지할
수 있었다.
형산파는 현 문주인 수안검(遂安劍) 인경(印鏡)이 자신의 지병 때문에 문주의
자리에서 나오려하니 이자를 두고 형산오로가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직급의 형산오로에게도 어느정도 무공의 고하가 있고, 인맥이 있으
니 현재로선 가장 문주에 가까운 이가 바로 양진이였다.
양진의 북경의 명문가인 강주영의 가문에서 자금적 지원을 계속 해주고 있는
형편인데다가, 무공 또한 형산오로 중 가장 뛰어나니 모든 이들은 그가 문주가
되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강주영은 기고만장한 상태였다.
그런 이유로 행실이 좋지 않은 강주영이 무림맹의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치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밤이 되자 장천은 생각하던 일을 진행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니 그가 가고 있는
곳은 형산파의 무서(武書)가 보관되어 있는 전각이였다.
밤이라곤 해도 실력있는 이대제자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아무런 문제 없이 장천
은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멈추어라!"
형산파 무사들은 무서각으로 걸어오는 장천을 보며 소리를 질렀는데, 그런 것에
도 아랑곳 하지 않은 그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는 말했다.
"평사형, 경사형 접니다. 강사제."
"강사제, 밤 늦게 이곳엔 웬일인가?"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은 평소에도 강주영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라 인상을 지으며 물어 보았다.
"잠시 막히는 곳이 있어서, 무서를 한번 흝어볼까 해서 왔습니다."
"해시에서 묘시까지에는 어느 누구도 무서관에 출입할 수 없음을 잊었단 말인
가?"
"헤헤 제가 그것을 잊었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궁금한 것을 떨칠 수 없으
니 어찌한단 말입니까."
"네 녀석이..."
"평사형..그만 길을 비켜주시지요."
"이.."
평사형이라 불리는 사람은 장천의 말에 노기가 치솟아 오를 수 밖에 없었지만
옆에 있던 가씨 청년이 그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그만두게 저 녀석을 쫓아냈다간, 오히려 양진 사숙에게 무공 수련을 방해한다.
꾸지람만 들을껄세.]
[하지만...]
[휴...자네가 하는 일이 문의 법규인 것은 알지만, 대세에 따를 수 밖에...]
이름난 정파일수록 문 내에 있는 파벌이 크게 갈리는 것은 보통이였으니 형산
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에서 어느정도 살아남기 위해선 힘이 있는 자에게 굴복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명문정파의 현실이였던 것이다.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강주영에게 길을 열어주는 평씨 청년이였으니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장천은 무서관으로 들어갔다.
'후후 생각보다 봉을 잡았군.'
강주영이란 자를 잡음으로써 일이 쉽게 풀렸기에 미소가 절로 나오는 장천이였
다.
여기저기를 뒤져보던 장천은 무서관에서 무서관의 한쪽에 시한장치를 해 놓았
다.
약간의 불씨와 기름을 통해 일정한 시간 후에 불이 붙게 만드는 장치였으니 앞
으로 세시진 정도 후면 무서관은 큰 불길에 휩싸이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일단 무서관만 태운다면 형산파는 외부의 일에 전혀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은 분명했으니 장천이 생각했던 계획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일이였
다.
모든 장치가 끝난 장천은 간단한 무서 하나를 꺼내어서는 털레털레 걸어 나오
니 등뒤로는 강주영을 욕하는 두 사람의 욕으로 따가울 따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