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 End(2)-完 >
조용히 고개를 들자 발락투스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고, 여화는 싱긋 웃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발락투스는 당황 그 이상의 감정을 몇 마디의 말로 표현하는 기염을 토해내고 있었다.
“어찌... 이게... 어떻게...”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그 모습에서는 여유롭게 춤이나 추자던 [시작을 알린 아룡]의 넉살스러움이나, [최초의 드래곤 발락투스]라는 거대한 이름에 걸맞는 위압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천 년, 아니 수만 년 이상을 살아온 발락투스이기에 지금의 내 힘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 것인지 몸소 깨달았을 터.
하지만 여화는 좀 달랐다.
“아 드래곤 새끼 거 더럽게 꽥꽥대네. 좀 닥쳐줄래?”
“네년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냐!”
“뭐래.”
“이 골빈 년이...”
마치 한편의 촌극을 보는 듯했다.
“쫄았으면 배 까뒤집고 손발이라도 휘젓고 있던가. 주접이란 주접은 혼자 다떨고 앉아있네.”
발락투스가 충격 먹은 듯 입을 떡 하고 벌리고, 여화는 그걸 보더니 븅신이라며 한마디 내뱉고는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얘기 좀 하자.”
무시하고 한걸음 앞으로 내딛자 여화가 두 걸음 물러선다.
“네 권능이 한 개에서 두 개가 된 건지 아니면 원래 있던 게 바뀐 건지는 관심 없어. 묻는다고 답해줄 것도 아니고.”
여화의 말이 이어졌지만 별 관심이 없다.
한 번 더 한걸음 내딛기가 무섭게 여화가 이번에는 뒤로 멀찍이 물러선다.
발락투스에게 쏘아붙인 게 무색하게도 여화는 분명 나를 겁내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다.
“그만 좀 올래? 난 아직 죽기 싫은데.”
“이보게 여화. 우리 힘을 합치는 게 어떻겠는가.”
발락투스의 제안에 여화는 코웃음을 치는 것으로 답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걷고 있는 나를 보더니 표정을 조금 굳혔다.
“일을 더 쉽게 풀 수 있는 방법이 나한테 있다면? 치고받고 싸우는 거 말고 원만하게 끝낼 수 있는 방법이... 야! 너 진짜 이럴 거야?”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조금 더 들어볼까.
그대로 걸음을 멈추자 여화가 작은 안도의 숨을 내뱉고 발락투스는 이번에도 신음을 삼켰다.
마치 이 무대에 자기 자리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런 표정이다.
됐고.
“방법? 무슨 방법?”
“권좌에 앉는 방법은 두 가지잖아. 하나는 자기 빼고 나머지를 전부 죽이는 거,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른 애들한테 인정받는 거. 여기서 네가 가장 강하다는 건 나도 알고 저 도마뱀도 알고 시스템도 알고 있을걸?”
“본론만."
“그러니까. 굳이 전부 죽일 필요가 있겠냐는 거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향후 나한테 걸림돌이 될 너희를 내가 왜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내 말에 여화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한다.
이상하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마치, 의구심 그 이상의 감정을 얼굴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하나.
여화가 말했다.
“회귀를 했다더니, 자세하게는 모르나보네?”
모른다고? 내가?
“애초에 시스템은 ‘지배자’를 네 명 이상 만들려고했었어.”
이건 또 뭔 개소리지.
“계속해 봐.”
“지옥도, 정령도, 천생도. 이 세 개는 이면 세계에 존재하지만 이면 세계가 아닌 곳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어. 네가 공백의 왕이 되어도 그 세 개의 도道를 다스릴 이를 뽑지 않는다면 원래 세상은 균형을 잃고 무너져내려. 신이 된 네가 세상을 하나하나 재 창조 한다면 모를까. 그 귀찮은걸, 아니 상상만 해도 귀찮은 그 일을 정말 네가 하려고?”
이 기묘한 대화에 발락투스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서고 여화는 확신어린 표정을 짓는다.
“진짜 모르고 있었나보네. 세 개의 도는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야. 내 말이 의심스러우면 시스템에 물어보던가. 솔직히 이제 와서 내가 구라를 칠 이유는 없잖아? 그리고, 내가 처음 에피소드를 진행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최소 수천 년은 지났어. 그 시간동안 세 개의 도를 다스리던 균형자들은 교체되지 않았지. 그 이전은 당연히 말할 것도 없고. 그런 걔들한테 하던 일을 계속 맡기려고? 내가 볼 땐 너, 그럴 놈 아니야.”
문득 떠오른다.
아수라의 지옥도를 클리어 했을 때, 나는 [균형자 후보]라는 칭호를 획득했고 아수라로부터 지옥도의 왕좌를 물려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사루는 또 어떠했는가.
자기는 지쳤다면서, 공백의 왕의 유지를 잇기 위해 지금껏 힘들게 살아 있는 거라고 내게 말했었다.
아직 만나보지 못한 천생도의 주인도 마찬가지일 터.
그들은 수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니, 정확히는 이 에피소드가 시작되고 나서부터 세상의 균형을 맞추고 있는 이면의 공신들이었다.
그들에게 내가 신이 되어서 또 다시 그 균형을 맞추라고 한다면 어떨까.
안식에 들고 싶어 하는 그들의 염원을 나는 무시하고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꼴이 된다.
그들은 이미 많은 것을 희생했고 많은 것을 지켜냈다.
너무 감정에만 치우쳐져있었다.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다시 생각했다.
그런 내 머릿속에 한국에서 6.25에 참전했던 용사들이 떠올랐다.
나라를 지켜내고, 자손과 미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던 이들.
그런 이들에게는 당연히 그에 걸맞는 대가가 있어야 한다.
그 대가가 희생의 연장선이 된다면 그건 대가가 아닌 벌이다.
나는 그럴 놈이 못된다.
여화는, 나름대로 나를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니까 네 말은, 정리하면 균형자가 되겠다는 거냐? 나한테 고개를 숙이고?”
“비슷하긴 한데. 너도 알다시피 나는 목숨이 여러 개잖아. 확실한건 아닌데 나는 그 세 개의 도를 한 번에 관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지옥도에는 내 여분의 목숨을 가진 나와 비슷한 ‘분신’을 넣고, 정령도에도 넣고, 천생도에도 넣고, 그러면 이야기가 편해지지 않을까? 어라? 이것 봐라? 정말로 이야기가 편해지네?”
여화의 말이 이어질수록 발락투스의 표정이 시시각각 처참하게 구겨지더니 여화의 마지막말에서는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결국, 발락투스는 죽여도 상관없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이 요망한 년이... 이보게, 이도. 나도 마찬가지라네. 비록 분신이나 여분의 목숨 같은 것은 없지만 오래 살아온 나는 경험이 있어. 지옥도든 정령도든 그 어디든 나는 제대로 다스릴 자신이 있다네. 이년의 말에 현혹되지 말게. 저년의 목숨이 여러 개인 것은 확실하나 그게 세 개의 도를 확실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고, 설령 관리 할 수 있다고 해도 하나하나 균형자로 인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조차 확실하지가 않아.”
긴장감이 확 무너질 정도다.
여화와 발락투스는, 내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전생에서 여화는 공백의 왕이 되었다.
그런데도 세상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세 개의 도가 여전히 유지됐다는 이야긴데, 대체 여화는 어떤 선택을 내렸던 걸까. 안식을 바라는 사루와 다른 균형자들에게 안식을 선물해줬을까.
아니면 자기 분신을 나눠서 균형자로 만들었던 걸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시스템의 말로 미루어보면 두 가지 전부 있을법한 일이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빠르게 결정 내렸다.
일단 자리를 박찼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발락투스는 내가 다가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고 뒤늦게 거리를 벌리려했지만 내가 놈의 목을 움켜잡는 게 더 빨랐다.
“컥 ..자.. 잠깐... 왜 나를?”
정말 몰라서 묻는 것 같다.
“넌 아무리 봐도 믿을만한 놈이 아닌 거 같아서.”
“...뭐?”
“드래곤 하트는 고마웠다.”
발락투스는 이게 최후 통첩이라는 걸 눈치챘다.
“이 멍청한... 이 밥버러지 같은 새끼가!!!!!”
“꼬우면 너도 회귀하던가. 안되겠지만.”
그대로 손에 힘을 주자.
우두둑-!
발락투스의 목이 ㄱ자로 꺾인다.
그대로 놈의 몸을 살짝 띄우고는 오른손에 기운을 응집시켰다.
그러다 문득 여천의 말이 떠오른다.
‘진정한 혈기는 생명을 에너지로 만들고 그것을 잘게 부수고 회전시키고 압축시켜 본연의 힘을 증폭시키는 것, 그리하여 압도적인 위용을 갖추는 것. 나는 하지 못했지만 그대는 할 수 있겠지’
여천의 말처럼 선천지기를 살짝 끌어올렸고, 그것을 잘게 부쉈다.
회전시키고, 또 회전시키자 내 기운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압축시켰다.
귀기와 혈기가 한데 섞여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지금, 나는 모든 것을 부술 수 있는 파쇄破碎의 주먹을 만들었다.
쿠구궁-!!
말도 안 되는 기운의 여파에 우주 전체가 진동하는듯했다.
이어서 검붉은 색으로 빛나는 내 주먹이 그대로 뻗어나갔다.
-!!!
청각조차 담아내지 못할 굉음이 우주를 휩쓴다.
먼지가 되어 흩날리는 발락투스를 나는 잠시간 바라보았다.
“...진짜 괴물이 됐구나.”
여화의 반응에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나는 이어서 여화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화는 아까처럼 뒤로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시도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나도 죽일 거니?”
여화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져 있지 않았다.
체념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죽일 거면 죽여. 그런데 하나 묻고 싶네, 너 혹시 ‘지구’를 멸망시켰니?”
여화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나는 그런 여화에게 답해주었다.
"아니."
여화가 싱겁게 웃는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려고?”
아까도 말했지만, 나름 고민을 했고 결론을 내렸다.
일단.
“네가 지닌 여분의 목숨이라는 거, 전부 꺼내봐.”
“진짜 한 번에 죽이려고 하나보네. 그래 네 말대로 할게.”
여화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이어서 그녀의 앞에 총 다섯 개의 수정구가 떠올랐다.
하나하나 거대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그것들은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분명 여화의 ‘영혼’이었다.
“원래 있던 네 영혼을 하나하나 잘게 쪼갠 거냐?”
여화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 다섯 개는 여화의 여분 목숨이자, 정확히는 여화의 분배된 목숨들이 분명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보면 볼수록 놀랍다.
여화의 격은 13성이다.
이 수정구는 아무리 봐도 여화의 격을 나눠받은 일종의 그릇일 확률이 높은데, 이런 그릇들은 대체 어디서 찾아내는 거지?
별거 아닌 고민이었고 깊게 생각할 필요 없는 고민이었다.
그냥 생각을 안 하려던 그때 하나의 수정구가 묘하게 내 시선을 잡아끈다.
주변에 있는 기운들을 흡수하려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흡수’라는 권능을 사용하는 것처럼.
설마.
“...이거 에릭인가 뭔가 하는 그놈으로 만든 거냐?”
여화가 긍정의 웃음을 짓는다.
나는 그런 여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구구절절 내 행위의 정당성에 대해 이것저것 설파하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정말이지.
“악연인지 인연인지 모르겠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기운을 끌어올렸다.
검지와 중지, 그리고 약지에 기운을 몰아넣었고 세 개의 수정구를 향해 겨눴다.
이어서, 기운을 방출시켰다.
퍼석-!
퍼서석-!
파삭-!
세 개의 수정구가 그대로 사라진다.
“으... 아프네.”
여화의 짤막한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은 나는 천천히 하늘로 올라섰다.
100km의 높이에 있는 권좌가 시야에 들어온다.
딱 중세시대 황제들이 앉았을법한 형태가 기본 베이스로 이루어져있었고 그 뒤쪽에는 세 개의 빛 무리가 기둥처럼 솟아난 상태였다. 하나는 마魔의 기운이었는데, 분명 ‘아수라’를 보았을 때 느꼈던 그 기운과 흡사했다.
그 옆에는 영혼 그 자체의 기운인지 뭔지, 사루를 보았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느낌이었고 그 옆에 있는 건 나 같은 쓰레기가 손대기엔 너무나도 성스러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짐작이 간다.
지옥도, 정령도, 천생도.
그 세 개의 상징을 뜻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그 자리에 선채로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드넓게 펼쳐진 우주.
감회가 새롭긴 했지만 글쎄. 새삼스럽지만 나는 권력욕이나 그런 건 없다.
그저 내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내가 앉아야했기에 이 자리에 왔을 뿐 다른 이유는 없다.
나는, 권좌에 앉았다.
띠링!
[권좌의 주인으로 인정받으셨습니다.]
제 2대 신이 탄생했다느니, 모든 것을 가지게 되어서 축하한다느니, 별에 별 메시지가 떠오른다.
그게 전부였다.
회한, 성취감.
그 어느 것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의무감 같은 그런 느낌이다.
이어서 권좌의 뒤쪽에 있던 세 개의 상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중 검은색의 상징이 아수라의 모습으로 변한다.
그가 말했다.
“정말 공백의 왕이 될 줄은 몰랐는데..”
정령도의 상징은 사루로 변했다.
“약속은 지켜 주실 거라 믿어요.”
나머지 하나의 상징은 정체 모를 한 남자의 모습으로 변한 상태였다.
솔직히, 천생도의 주인이라는 것 말고는 모르겠다.
워낙 접점이 없었어가지고, 아는 게 더 이상하다.
숨을 토해내며 왕좌의 팔걸이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다.
고블린 행성이 멸망 할 때였나.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분명 달라졌는데, 이상하게도 무언가를 얻었다는 생각이 들지가 않는다.
그냥, 여전히 외롭다.
공허하고, 가슴이 뻥 뚫린 기분.
그러다 떠오른다.
머릿속에 한 여자가 마지막 순간 웃던 그 모습이.
‘한수아.’
만나고 싶다.
아니, 만나야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가장 먼저 지구의 시간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이것 외에도 ‘신’으로써, 정리해야할 일이 몇 가지 남았다.
하아... 그래도.
“끝났구나. 드디어.”
***
한수아는 비몽사몽 했다.
마지막 순간, 온 몸의 살갗이 순식간에 끓어오르던 그 말도 안 되는 통증이, 마치 거짓말 같았다.
눈을 뜨자, 온몸이 푹신했다.
정말 얼마 만에 느껴보는 침대의 느낌인지.
한수아는 그대로 드러누워 한숨을 터트렸다.
적어도 후회는 없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몰라도 한수아는 이도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도는 대체 언제 오는 걸까.
한수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히 초인이라 부를 수 있는 한수아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도가 지구에 와서 처리하려고 했던 일들, 이도가 오기 전에 처리 해 놓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 순간, 한수아는 뭔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방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놀라웠고 눈을 의심할법했지만 한수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말하기 전에 한수아는 선수를 쳤다.
“오셨어요?”
이도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냐.”
132화. < End(2)-完〉끝 © 넉울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