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 이거,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2) >
멈춘 세상 속에서 나는 가만히 서있었다.
혼란스럽다.
이상하게 무기력해지는 기분이다.
거기다 답답하기까지 하다.
젠장
메시지는 명백했다.
지구를 멸망시켜라, 그러지 않는다면 너는 죽는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라는 건 여분의 목숨. 즉 대기자와 에피소드를 진행하는 영체 둘 중 어느 한가지의 죽음을 뜻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조금만 더 깊게 파고들어보자.
본래라면 시련자들은 여분의 목숨이 있는 사실을 모른다.
안다면 나와 같은 회귀자거나 혹은 미래를 아는 진짜 예지 능력자였겠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스가르드의 초월자들이 시련자들에게 너희 목숨은 사실 두 개였다느니 그러니 한번쯤은 죽어도 괜찮다느니 하는 말은 내뱉은 적이 없다.
뿐일까, 그와 비슷한 뉘앙스의 말조차 내뱉은 적이 없었으니 대기자 상태라느니 이딴 건 당연히 모를 수 밖에 없다.
그런 그들에게 시스템은 묻고 있었다.
그 힘을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할 수 있겠냐고.
episode #100은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게 분명하다.
조금 더 따져 묻는다면 이 Episode들은 결국, ‘목숨의 소모’를 기본적으로 하게끔 만들어져있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도 느껴진다.
14성.
이건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었다.
의념이 가는 곳에 손을 대면 그곳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었으며 침을 뱉으면 침이 닿는 모든 곳이 터져나가고 의념을 담아 발로 땅을 찍으면 행성이 진동할 힘이 분명하다.
이건 내가 여태껏 사용했던 귀기를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규격외의 힘.
이게 힘이다.
진정한 신에 근접한 초월자의 힘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걸 포기하고 죽으라고?
고개를 들자 멈춰진 세상 속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천군이 보인다.
저놈은 분명 내게 말했다.
자기가 살던 행성을 멸망시켰다고.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던 건지 의아한 수준을 넘어 혼란스럽기까지 했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간다.
선후관계.
놈이 행성을 멸망시킨 건 자기 백성을 구원해주기 위해서라는 구역질나는 명분이 아니었다.
천군은 그저 자기가 가진 힘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생각해보니 우습다.
결국 놈이 말하는 대의라는 건 자기 고향을 멸망시킨 정당한 이유로부터 파생된 변명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놈이 만들려는 세상은 말 그대로 변명거리를 위해 만들어진 세상이다.
하…
구역질나는 씨벌새끼.
그렇다면 발락투스는 어떠한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드래곤들은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바하로사라는 방랑자는 물론 지구를 침공했던 바하무트. 그놈들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이유는 자기들의 고향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이젠 추정을 넘어서 확신이 생긴다.
이상을 외치며 그나마 정당한 명분을 내세우던 두 지배자는 결국 자기들의 힘과 자기들의 고향이라는 선택지에서 놀랍게도 자기들의 힘을 선택한 놈들이다.
그렇다면 여화는 어떨까.
여화는 악마다.
그리고 악마의 고향은 ‘마계’다.
내가 아는 마계는 멸망하지 않았고 지금도 이 우주 어딘가에 멀쩡히 살아있다.
전생에서 지구와 침략 전쟁을 벌인 종족 중에는 악마도 있었으니 굳이 두 번 말할 필요도 없다.
여화는 분명 자기 고향을 멸망시키지 않았다.
누군가를 죽이고 부수는데 꼭 목적이 필요하냐고 묻던 그 여자가,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자기 고향을 지우지 않았다는 건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가장 미쳤고, 가장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되던 여화가 가장 정상으로 보이는 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아.. 미치겠네.”
머리가 복잡했지만 사실 더 깊게 고민 할 것도 없다.
나는 여분의 목숨이 없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를 클리어하지 못하면 모든 게 끝난다.
시작부터 달려왔던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지고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는 건데, 솔직히 아깝기도 했지만 지구를 완전한 안전지대 내지, 멸망이 닥쳐올 그 지옥 같은 미래를 막을 수만 있다면 이 힘을 나는 내려놓을 자신이 있다.
그런데 시발 밑도 끝도 없이 지구를 멸망시키라고?
내가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는 한 점의 보탬도 없이 그저 지구를 구한다는 일념 때문이었는데?
이게 이렇게 엿 같을 수가 있나?
아니지, 엿 같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씨발.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는 답도 없는 질문을 맞이했을 때보다 더 막막했다.
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구를 멸망시키면 목적을 잃는 것이고, 포기하자니 나는 그대로 죽는 거고.
딜레마도 이런 딜레마가 없다.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세상은 멈춰있었다.
...어라?
눈꼬리가 꿈틀하고 떨려온다.
대체, 왜?
왜 세상이 계속 멈춰만 있는 거지?
뭔가 이상하다.
그제야 나는 거대한 모순을 느낄 수 있었다.
에피소드가 지구를 멸망시키라는 선택지를 준비했고 그걸 내게 제시했다면 그 메시지가 뜨는 동시에, 혹은 시간차를 두고서라도 나를 지구로 보내준 다음 이야기를 진행시켜야 하는 게 정상이다.
심지어 episode #100에 대한 메시지에는 제한 시간도 제시되지 않았다.
생각해보자. 여태껏 에피소드는 어떻게 진행되었던가.
기차에서 생존해라.
발바라 대륙으로 이동 할 것이니 준비해라.
고블린이 소환될 테니 준비해라.
크레타노스가 소환될 테니 준비해라.
모든 에피소드는 극장에 준비된 좌석처럼 미리 배치가 완료되어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생각에 잠긴 시간은 분명 짧지 않았다.
적어도 4분, 길면 5분정도.
무언가 잘못된 건가 싶은 그때.
쿠궁-!
눈앞에 작은 게이트가 생겨났다.
...지금껏 했던 생각이 무의미해진다고 해야 할까.
뭔가 허탈했다.
이게 지구로 가는 게이트인가.
그래도, 일단 가보자.
게이트를 향해 한걸음 내딛기가 무섭게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언젠가 보았던 빌딩과 도심을 오가는 사람들.
빠앙-!!
경적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스포츠카를 타고 있는 남성이 창문 너머로 고개만 빼꼼 내민 채로 외친다.
“병신 같은 새끼야 빨간불인거 안보여!?”
설마 나한테 하는 소린가.
남한테 욕한 건 참 많았지만 막상 내가 욕을 먹어보니 기분이 참 묘하다.
순식간에 병신 새끼가 된 나는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나와 운전자를 번갈아 쳐다보고 이어서 다른 차들까지 멈춰 서고는 경적을 울려댄다. 분명 여기는 지구다.
내가 아는 지구, 내가 시련자가 되기 전 살았....
생각이 멈추고 말았다.
코앞에 얌체같이 생긴 남자가 내 한쪽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고 있었으니까.
보니까 방금 전 나한테 경적을 울려대던 스포츠카의 주인이었다.
“이거 웃기는 새끼네? 자해 공갈이라도 하려던 거냐? 세상 살기가 힘들어? 입고 있는 옷은 뭐야? 사극 찍다 왔냐? 이거 진짜 또라이 새낀가? 너 내가 누군지 알...”
우두둑-!!
“어라?”
남자는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됐나 보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내 가슴 어림을 서너 번 툭툭 치던 그의 검지가 절대로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굽혀진걸 보더니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질러댄다.
“아아아악!! 내 손!!”
주변을 울려대는 경적소리는 더욱 더 커져만 가고, 남자의 비명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파!!! 아프다고!!! 내....”
“닥쳐.”
내 말에 남자는 마치 거짓말처럼 비명을 멈추고는 고개를 들었다.
1성의 신격을 뿜어냈기 때문일까.
겁을 조금 심하게 먹은 느낌인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경적을 울려대던 차들까지 모두가 조용해지는 게 진작에 이럴걸 그랬나 보다.
무시하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정말 지구가 맞는 걸까.
대기자가 되었던 이들은 어떻게 된 거지?
실종자들은 아직 집계가 되지 않은 건가?
대체 오늘은, 며칠인 거지?
눈앞에 있던 남자에게 질문하려던 그때.
쿵-!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지진이 난걸까 하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이건 누군가가 자신의 기운을 퍼트린 것이다.
누굴까.
대기자가 되었던 헌터들인가?
그렇다고 치기엔 너무 뛰어난데?
기운이 퍼진 방향, 그 근원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린 나는,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형님?"
"오냐."
정지혁.
전생에서 지구의 시련자들중 유일하게 episode #100에 도달한 사람이자 힘을 포기하고 지구를 선택한 남자.
그리고 나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은 사람이자,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남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시간 맞춰서 왔네.”
“...시간이요?”
“그래 시간, 이제 모든 걸 끝낼 수 있겠어.”
형님은 후련하다는 듯 웃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를 준비해둔 것 같은 그런 형님의 모습이, 대체 왜 죽으려는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는 걸까.
내 착각이겠지?
“좀 걸을까?”
***
“지하철이 멈춰 있다는 거 알아채는 부분 말이야. 가장 너다웠다. 그땐 진짜 놀랐거든. 대단하더라.”
“오슨 발리스타를 너무 일찍 죽였던 거 아닐까. 왕 행세를 한 기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그 기간만큼 꽤나 많은 코인을 얻어냈을 텐데.”
“공개되지 않은 신화 아이템들이 정말 많은데, 그걸 하나하나 네 것으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네, 그걸 다 무시한건 개인적으로 매우 아쉽더라. 그게 다 새로운 이야기들이잖아? 소설로 따지면 수많은 이야깃거리, 너는 어땠냐? 적어도 후회는 없는 거지?”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다. 한수아라는 걔가 너를 정령계로 보낼 줄이야... 다시 생각해도 참 기발해. 그땐 너도 죽는줄 알고 엄청 아찔 했었거든.”
형님은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주된 내용은 내가 겪은 에피소드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느 부분은 아쉽다거나 어느 부분은 대단하다거나, 어느 부분은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등, 형님은 내가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잊지않고 있었으며 오히려 자기 일처럼 기뻐하기도 했고 슬퍼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형님을 바라보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형님의 이야기가 시작 되고나서부터 단 한마디의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과장된 형님의 모습과 작위적인 형님의 리액션.
느낌이 좋지 않다.
“표정이 별로 좋지가 않네? 똥마려?”
형님과 나란히 가로수 길을 걷던 나는,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는 형님의 눈을 직시했다
“모든 걸 끝낼 수 있다고 하셨죠?”
“그랬지.”
“그게, 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나는 진지했다.
하지만 진지한 내 물음에도 형님은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는다.
“뭐겠어. 말 그대로지.”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요.”
그제야 형님의 웃음이 사라진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냐?”
"...지구잖아요.”
“그래 지구지. 그것도 내가 만든 지구."
뭐라고?
“예?”
“기억 안 나냐?”
“무슨 기억이요?”
“전에 네가 나한테 이런 비슷한 장소에서 쓴소리 했던 거 같은데 정말 기억 안나?”
쓴소리라고 하면 하나밖에 없다.
혼자 궁상떨고 있던 형님에게 내가 정신 차리라고 몰아붙였던 그때, 분명 그때 말고는 없다.
그러다 순간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그때의 나도 지구로 돌아온 줄 알았었다.
하지만 내가 보았던 그때의 풍경들은 전부 형님이 만든 일종의 '가상 세계'였다.
설마... ‘만든 지구’라는 게...
“눈치챘나보네. 그럼 혹시 이것도 기억하냐? 내가, 너는 아직 여기 와서는 안된다고 했던 거.”
...언젠가 정신을 잃었을 때, 꿈속에서 바하무트가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때 형님이 나타나 내게 말했었다.
너는, 아직 여기 와서는 안 된다고.
“시공간의 균열이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냐?”
혼란스러운 마음을 최대한 감춘 채 고개를 저었다.
“길게 설명하지 않을게. 그냥... 의지가 담기지 않은 세상이라고 보면 돼. 반대로 말하면 시공간의 균열이 아닌 곳은 의지가 담긴 세상을 뜻하고.”
“의지가 담기지 않은 세상에 의지를 담으면 그건 현세에 존재하는 세상이 되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젠장.
시발.
빌어먹을.
본능적으로 이해했다고 해야 할까.
나는, 형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가 ‘지구’라는 거네요. 또 다른 ‘지구’.”
“그래, 그땐 미완성이었고 지금은 완성되었지. 여기는 Episode #100이 말하는 ‘지구’라는 조건에 충족하지만 너와 내가 살았던 그 ‘지구’가 아닌 다른 '지구'라고 할 수 있어. 이 정도면 내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지?"
길게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다.
형님은 내가 시련자가 되었을 때 나라면, 분명 Episode #100에 도달 할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것들이 그 결과물이다.
형님은 안배를 준비했다.
그것도 오직 나만을 위한 안배.
“자, 이도야. 그럼 너는 여기서 뭘 해야 할까?”
뻔했다.
나는 똑똑한 놈이 아닌데, 머릿속으로는 모든 게 이해가 간다.
그래서 더더욱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한수아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지구’를 멸망시키지 않고도 #100을 클리어 할 수 있는 수단이 눈앞에 있지만, 내 몸은 동영상을 정지시킨 것처럼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없었다.
젠장. 젠장.
그때, 형님이 양 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는다.
“망설이지마라.”
맙소사. 내 직감이 맞나보다.
아니, 내 가정이 맞았다.
그리고 지금 계속해서 불안했던 원인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제가 형님을, 죽여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