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이거,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1) >
멍했다.
얼마 만에 이런 기분을 느껴 본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과 용솟음치는 기운은 관심도 없었다.
상황.
상황을 좀 보자.
정령소환술, 내가 알기로 이 스킬의 본질은 결국 통로의 연결이다.
당연히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중추가 관리하는 통로.
원칙상으로는 통로를 만든 인간이 정령계의 통로를 넘어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정령계에서 나오는 정령만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통로.
그게 정령소환술의 본질이다.
발바라 대륙의 북부에서 나는 이 통로로 내가 만든 기운을 흘려보낸 적이 있었다.
이건 엄밀히 말하면 편법이었고 시스템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은 선이라는 점에서는 나름 정당한 수법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정령계를 통과했다.
이론으로 따져보면 정령계를 통과할 수 있는 정령이 내 몸을 완전히 감쌌고, 그 순간의 나는 ‘정령에게 먹힌 어떤 물건’으로 정의된 상태였다는 뜻.
그래서 정령계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고 이건 본래라면 불가능한 ‘편법’이었으며,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이걸 한수아가 생각해냈다고? 그 짧은 순간에?
그럴 리가.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누운 채로 힘을 회복시키고 있는 슈샤이어가 보인다.
“알고 있었냐?”
“무엇을 말이냐.”
“한수아가 이런 생각 하고 있는 거 알고 있었냐고.”
나를 보고도 놀라지 않은 슈샤이어의 태도는 이미 한수아가 이런 상황을 예견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가 힘겹게 숨을 토해내며 대답한다.
“정령계로 도망갈 수 있는가 없는가,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지.”
“언제?”
“네놈이 정신을 잃었을 때.”
"..."
이제야 설명이 된다.
내가 몸의 회복에 주력하고 있을 때 한수아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자기가 벗어나는 게 아닌 나를 벗어나게 하려는 방법을.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은혜를 입었다.
한수아는 나를 구했고 스스로를 희생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한수아의 목숨은 아직 하나가 남은 상황이고 지금쯤 지구에 대기자 상태로 있을 거라는 거.
머릿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듯하다.
‘먼저 가있을게요.’
실제로 메아리친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중요한건 하나다.
나는 이제 움직일 수 있고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
“갚을 빚이 점점 늘어나네. 형님이랑 한 약속도 지키기 버거웠는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슈샤이어가 흠칫 몸을 떨기 시작했다.
슈샤이어 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기운들이 내 움직임에 따라 요동친다.
마치 나를 겁내는 것 같은 그 모습에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갈무리했다.
“...아직 사루님께 말씀드리지 않았다.”
“뭐를?”
“뭔지는 네놈이 더 잘 알지 않느냐.”
여전히 건방진 늑대였지만 이제는 왜일까. 그냥 귀엽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이 말을 안했네.
“고마웠다.”
"...."
그가 슬며시 시선을 피한다.
그때 나는 볼 수 있었다.
슈샤이어가 누워있는 방향에 쓰러져있는 엘프를.
“쟤는 왜 저기서 저러고 있냐?”
분명 유리젤이었다.
그런데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이는 게, 일단 기절한 상태인건 확실했고 온몸의 기운이 요동치는 걸로 보아 꽤나 큰 중상을 입은듯하다.
조용히 그쪽으로 걸어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시간을 번다더니, 확실히 시간을 벌어주긴 했네. 몰랐는데 정령이라는 애들이 약속을 꽤 잘 지키네?”
슈샤이어가 코웃음을 치고 정신을 잃은 유리젤이 조건반사처럼 움찔거린다.
무시하고 기운을 끌어올렸다.
흐트러진 그녀의 장기를 원상태로 돌려주었고 찢어진 살과 으스러져있는 뼈를 강제로 회복시켰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대기실의 치유효과였었나.
쎄쎄가 말하기를 그건 천생의 법칙에 의거한 치유 어쩌구라고 했었는데 두 자리 수의 신격을 획득하게 되니 이젠 나 스스로가 그걸 사용할 수 있었다.
가히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내 유리젤이 정신을 차린다.
이어서 나는 슈샤이어의 상처도 치료해주었다.
“이제, 무엇을 하려는가?”
“뻔한 거 아니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눈앞에는 대기실로 귀환하겠냐는 알림창이 떠있는 상황.
“끝내러가야지. 이 모든 걸.”
y버튼을 누르려던 그때.
“사루님을 한번 만나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실소가 터져 나온다.
“만나서 뭐해?”
“지금 한가롭게 덕담 나눌 상황은 아니잖아? 그러니 일 전부 끝나면 한꺼번에 모아서 보는 걸로 하자고.”
슈샤이어가 여전히 건방진 놈이라고 혀를 차고 유리젤은 말없이 나를 쳐다본다.
꽤나 부담스러운 눈이다.
무시하고 y버튼을 누르자 내 몸을 빛이 감쌌다.
쎄쎄의 표정이 어떨지 꽤나 궁금하네.
***
"..."
대기실로 귀환한 나를 쎄쎄는 침묵으로 반겼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참 묘한 표정이다.
나는 쎄쎄를 무시하고는 침대에 대충 걸터앉았다.
조용히 고개를 들어 메시지창을 확인했다.
[Episode #100에 도전하실 자격을 충족하셨습니다.]
[당신은 Episode #100에 도전하실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도전한다면 얻을 것이요, 도전하지 않는다면 잃을 것입니다.]
최후의 에피소드치고는 설명이 꽤나 단순하다.
그리고 이거 말고는 따로 뜨는 메시지가 없다.
예를 들면 몇 시간의 대기 시간이라든지 어떻게 해야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는지에 대한 작은 설명 같은 거.
“Episode #100에 도전하려면 따로 시간이 필요한 건가?”
쎄쎄를 바라보며 묻자, 그녀가 조금 퉁명스런 표정으로 대답한다.
“회귀하신분이 그런 것도 몰라요?”
꽤나 까칠하다.
그런데, 그게 참 거슬린다.
“대답부터.”
“대답이라고 할 게 있나요? 모르는 게 없는 분 이시...”
“야."
“…네?”
이렇게 시시콜콜하게 잡담을 나눌 시간은 당연히 없을뿐더러 혼자 토라져있는걸 풀어줄 시간은 더더욱 없다.
“내가 네 기분도 신경 써 줘야하냐?”
“내가 개지랄할 시간이 넘쳐나는 놈으로 보이냐고.”
“...미안해요.”
이미 내게 고개를 숙이기로 했고 목숨을 구해달라고 구걸한건 쎄쎄다.
“두 번은 없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다음 에피소드로 진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도님이 원하시는 순간, 이도님이 다음 에피소드로 진입하겠다고 의사를 보내는 그 즉시 다음 에피소드가 열릴거에요. 그 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99와는 다르게 이번 거는 아예 말을 할 수 없는 제약이 걸려있으니까요.”
이제야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100은 전생에서 형님이 내게 말해주지 않은 유일한 에피소드다.
그 안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 혹은 어떤 게 준비되어있을지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정말 무책임하고 한심스럽기 그지없지만 정말이다.
회귀자라는 특수는 #99까지 허용되는 단어였을 뿐, 지금부터는 미지의 세계다.
대체 어떤 게 준비되어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도 큰 위험부담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에피소드를 피할 수는 없다.
클리어 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건 둘째 치고 모든 에피소드가 끝나야 멈췄던 지구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이 에피소드가 끝나야 공백의 왕을 가리기 위한 결정전이 벌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비는 역시 하나 밖에 없다.
10성의 신격을 발판으로 아스가르드의 히든 피스를 이용해 가지고있는 힘을 더욱더 성장시키는것.
고개를 들어 아스가르드로 이동하겠냐는 알림창을 바라보던 그때.
“기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조금 불안해서 그랬어요.”
조금 의문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가 말을 잇는다.
“막상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저도 모르게 혼란스러워서 그래요. 다시 사과드릴게요. 미안해요.”
적어도 쎄쎄는 진심으로 보였다.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안심한 표정을 짓는다.
그걸 마지막으로 나는 아스가르드로 이동했다.
**
아스가르드로 이동하자마자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은 아스가르드의 정중앙.
거대한 도심처럼 빌딩이 솟아나있고 어느 한쪽에는 중세시대에 있을법한 황궁 같은 게 있었으며 어느 한곳에는 공중정원 같은 게 자리해있었다.
아스가르드를 많이 왔던 건 아니었지만 딱 중심이 되는 이 ‘광장’으로 온 것은 처음이다.
“회귀자라...”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황궁 앞에 서있는 천군이 보인다.
그는 지금, 꽤나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솔직히 이해는 간다.
내가 회귀를 했다는 건 자기들은 모르는 미래가 과거에 벌어졌었다는 거고 그걸 자신들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꽤나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을 테니까.
“그대의 상식을 깨트리는 횡보와 이상하게 알고 있는 게 많았던 이유가 그거였었나. 새삼스럽지만 묻고 싶군, 미래를 알고 있던 네놈은 우리가 하는 일이 전부 우스워보였었나?”
이번에는 발락투스였다.
새끼들이 차례대로 말을 걸고 지랄이네.
거기다 내 대답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냥 저놈은 그렇게 단정 지은 것처럼 보이고 있었으니까.
무시하고 고개를 돌리자, 전에 보았던 킹스하운즈 호텔과 비슷한 빌딩 앞에 서있던 여화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눈으로 묻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과거에 너를 죽였었니?’
‘그래서 나를 그렇게 싫어했던 거니?’
‘결국, 너는 나랑 적으로 설수밖에 없는 위치였던 거니?’
짧은 순간이지만 꽤나 많은 대화를 나눈 것 같다.
사실 대화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그냥 대화를 나눴다고 치자.
나는 천천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띠링!
[아스가르드의 제약이 발동됩니다.]
6성의 기운을 끌어올리고. 차례대로 9성까지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쿠구궁-!!!
아스가르드 전체가 진동한다.
뚜둑하며 손가락이 부서지고 발가락이 부서지고, 균형을 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거대한 압력이 나를 짓누른다.
하지만 무시할 수 있었다.
[당신(인간)은 시련자 최초로 아스가르드의 7단계 제약을...]
[당신(인간)은 시련자 최초로 아스가르드의 8단계 제약을...]
미친 듯이 뜨는 알림음과 계속해서 올라가는 경험치와 신격의 레벨 업으로 인한 상처의 치유, 거기다 유리젤과 슈샤이어를 치료해주었던 그 치료 효과를 내 몸에 적용시키며 압력을 분산시키고 있었으니까.
10성의 신격을 끌어올렸다.
쩌저저적-!!!
땅이 갈라지고, 건물이 무너져 내린다.
방금 전 에피소드를 클리어하고 나서 얻었으나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수발이 자유롭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단순 계산에 의하면 10성까지 내가 얻을 경험치는 약 400%.
나는 10성까지의 기운을 끌어올렸고, 이어서 11성까지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11단계의 제약을 버텨냈다는 알림음이 뜨지 않는다.
이 히든피스는 오직 10단계가 끝이었던 걸까.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세 명의 지배자의 시선과, 흘러가는 분위기로 확신했다.
11성, 12성 이상의 제약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뿜어내고 있던 모든 기운을 몸 안으로 갈무리했다.
-!!!!
사방으로 먼지가 솟구치며 무너진 건물들의 파편이 강물처럼 흘러내린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14성.
내가 쌓아올릴 수 있는 제일 높은 신격이다.
그제야 보인다.
천군과 여화는 약 13성의 신격.
발락투스는 14성.
나도 14성.
드디어, 그들과 동일선상에 서게 되었다.
올려다볼 이가 없는 자리. 지금껏 메시지로 출력되었던 발바라 대륙의 지배자니, 자격의 증명이라니. 그딴 게 전부 허례허식처럼 느껴질 정도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네 번째 지배자가 되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Episode #100.
이것만 클리어하면 전쟁이 벌어진다.
공백의 왕, 그 권좌에 앉을 최종 1명을 뽑기 위한 거대한 전쟁.
그러고 보니 아스가르드에 온 뒤로 나는 한마디도 안했던 것 같다.
명색이 주인공인데 한마디는 해줘야지.
“조금 이따 보자.”
나는 생각했다.
아니, 의념을 보냈다.
Episode #100에 도전하겠다고.
동시에 지옥도로 갔을 때처럼 세상이 멈췄다.
이어서 내 머릿속으로 메시지가 흘러들어온다.
띠링!
[최후의 에피소드를 시작합니다.]
[Episode #100]
[‘지구’를 멸망시키십시오.]
[성공시 모든 신격이 (1) 상승합니다.]
[실패시 당신은 사망합니다.]
거울이 없어서 지금 내 표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한 가지는 확실했다.
좆, 됐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