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 내가 그렇게는 못 살지(2) >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최대한 그대를 도울 겁니다.”
청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유리젤 이었다.
“확실하게 시간을 벌어드리죠. 30분, 아니... 1시간. 1시간이 최대입니다.”
그 말이 끝이었다.
그 자리에서 유리젤의 모습도 흐릿해진다.
이어서.
콰아아아앙-!!
콰아아앙-!!!!
뒤쪽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고 그 굉음이 마치 도플러 효과처럼 점점 멀어진다.
문득 하늘을 바라보자 석양이 지는 하늘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름답죠?”
뜬금없다고 해야 할까.
머리 쪽에서 푹신하게 느껴지던 무언가가 살짝 움직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베게라기보다는 어떤 생명체의 다리 같은...
아, 내가 뭘 베고 있나 싶었는데 한수아의 무릎이었구나.
“이런 풍경을 이도님이랑 함께 보게 되네요.”
상황에 맞지 않게 한수아가 밝게 웃는다.
근데, 마냥 밝지만은 않아 보이는 게 아무래도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그런 모습이다.
내 생각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지만 딱 하나 다른 건, 죽어도 그냥 죽을 생각이 없다는 거.
죽어도 그냥 죽을 순 없지.
“슈샤이어.”
“왜 부르느냐.”
까칠하다 못해 날카로운 슈샤이어의 어조가 퍽이나 반가울 정도다.
“불의 숨결, 알지?”
“불의... 뭐?”
“용맥의 중심지. 이 행성의 내핵, 너 명색이 정령이잖아? 정령의 눈이면 그쪽으로 가는 길이 보일 텐데 아니냐?"
“...설마 이 행성의 ‘중심’을 말하는 것이냐.”
“비슷해.”
말문이 막힌 것인지 슈샤이어가 잠깐 뜸을 들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됐고, 거기로 가자. 최대한 빠르게.”
참고로 내가 대기실에서 사용한 코인은 약 190억 코인이다.
실질적으로는 그냥 있는 코인을 거의 다 썼다고 보면 된다.
25억짜리 핵폭탄 2개와, 140억짜리 핵폭탄 1개.
25억짜리 폭탄 2개는 이미 사용한바 있고, 140억짜리는... 솔직히 가능하면 사용할 일이 없기를 바랐다.
이건 지금 이곳이 아니라 지배자들을 상대할 때 사용하려고 했으니까.
설명창에서 보았을 때는 작은 행성을 아예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이 있었으며 인류가 발명할 수 있는 최악이자 최고의 무기라는 설명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 위력은 분명 굉장할 것이다.
멀어지는 굉음을 뒤로한 채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 행성에 시련자들은 몇 명이나 남았을까.
전부 죽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어딘가에 숨어있는 놈들도 있을 테고, 조용히 기회만 엿보는 얌체 같은 놈들도 존재하겠지.
실제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다고 가정해야한다.
없다는 증거도 없었을뿐더러 확실한 건 없었으니까.
그게 정말로 거슬린다.
그리고 내가 죽는다면 이 에피소드는 그대로 종료된다.
그러니까, 내가 죽는다면 얌체 같은 새끼들이 숨어 있는 것만으로 보상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렇게 만들 수는 없지.
내가 그렇게는 못산다.
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었었지.
“터트릴 거야.”
“네?”
“이 행성, 터트릴 거라고.”
**
마나와 합쳐진 용맥이 행성 전체를 감싸고 있고 타이탄의 내핵은 그 모든 것을 컨트롤한다.
내핵에 거대한 충격을 주면 행성 전체에 거대한 압력이 생겨날 것이고 그 압력은 행성 전체가 타격을 받을만한 힘이 분명하다.
여기서 중요한건 이 140억짜리 핵폭탄이, 물리학의 최종 산물이라고 불리는 이 폭탄이 그 역할을 확실하게 해줄 수 있느냐. 그게 핵심이다.
원래는 폭군의 갑주를 찾으려고 했었다.
그게 유일한 해답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게 대체 어디 있는 줄 알고 찾는단 말인가.
보물찾기 할 시간이 넉넉했다면 모를까. 지금은 아니다.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감았다.
손가락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
젠장.
최대한 통각을 차단했는데도 뇌가 찌릿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힘을, 최대한 비축해보자.
***
콰아앙-!!
이자나기가 거대한 함성을 터트린다.
분노라는 감정이 잔뜩 들어가 있는 분노의 함성.
“이 잔챙이 새끼들이!!!”
아스가르드에서도 그렇고 이곳 타이탄에서도 그렇고, 대의의 이면이라는 조직은 반딧불과도 같은 존재였다.
아니지.
반딧불 수준도 아니고 그냥 폭풍우 속에서 간신히 숨결을 유지하는 촛불.
딱 그 수준이다.
당장 꺼지는 게 어색하지 않을 그런 수준.
그런데 지금, 그놈들이 앞길을 막고 있었다.
퍼어어어엉-!!!!
처음에는 무시했다.
관심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의 몸을 폭발물로 만들어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할 때 이자나기의 생각이 바뀌었다.
그들은 단순한 촛불 수준을 넘어 자신의 시간을 지체시킬 수 있을 정도로 제법 뛰어나다고.
이자나기는 생각했다.
그들의 재롱은 길지 않을 거고 결국 자신은 이도를 잡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그 생각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엘프와, 인어를 보고 조금 바뀔 수밖에 없었다.
엘프가 자리를 박차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자신의 바로 뒤.
이자나기는 예상했다는 듯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후우웅-!
그의 손은 허공을 가를 뿐, 목표로 했던 엘프는 그곳에 없었다.
순간.
후우웅-!!!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파공음에 이자나기가 고개를 숙인다.
사악-!
하지만 조금 늦은 걸까.
이자나기의 머리칼이 살짝 잘려나간 채로 허공에 수놓아진다.
힐끗 쳐다보니 참격이었다.
날아온 방향을 짐작해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공간 이동? 아니, 공간 이동이었으면 내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이건... 뭐지?’
이자나기는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주변 어디를 봐도 그 ‘엘프’가 보이지 않는다.
모습을 숨긴 걸까.
아니면 도망친 걸까.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자신의 눈을 피해서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재미있구나. 오냐. 한번 해보자꾸나.”
이자나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가 조용히 오른팔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더니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쳐들었다.
무엇을 하려는 걸까.
실페리온의 옆에 있던 시련자 한명이 이자나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3성의 초월자였지만 적어도 이자나기의 눈을 잠깐이나마 가릴 수는 있으리라.
그의 거리가 이자나기와 순식간에 좁혀지던 그때.
이자나기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순간.
콰직-!!
이자나기를 중심으로 땅이 푹석 가라앉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쿠구궁-!!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진동한다.
주변에 있던 모두가 살짝 당황한 그때.
이자나기의 주먹이 자살을 하려던 시련자의 머리를 터트렸다.
권능 [지진].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이자나기는 이 권능이 최소 상위권에 랭크될 정도로 뛰어난 권능이라고 확신했다.
혹자가 단순히 땅이 떨리는 게 무슨 권능이겠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설마 [지진]이라는 권능이 단순히 땅만 떨리는 권능이겠는가.
이자나기는 자신의 반경 50km의 땅을 향해 ‘의념’을 보냈다.
솟아오르라고.
쿠궁-!
땅이 한 번 더 들썩인다.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실페리온은 뒤늦게나마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뒤로 자리를 박찼지만 그의 주변에 있던 다른 시련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퍼석-!!
푸욱-!!!
땅에서 튀어나온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송곳이 실페리온을 제외한 모든 시련자들의 머리를, 그리고 심장을 꿰뚫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끝도 없이 펼쳐진 황폐한 평야에 돌로 만들어진 송곳이 수도 없이 솟아나있는 상태였다.
“...땅을 지배하는 권능이군.”
억눌린 실페리온의 목소리에 이자나기가 작게 웃는다.
이도가 빈사 상태였을 때 이 권능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이자나기는 진작에 뒤져버린 시황이나 바알, 그 둘과 끝까지 함께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으니까.
기회를 봐서 이도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모두를 죽이려고 했지만 타이밍이 어긋났다.
물론 정지혁의 어마어마한 권능을 보고나서 잠깐 주눅이 든 것도 있긴 했지만 이자나기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자나기는 한 번 더 팔을 하늘높이 들어올렸다.
지진을 한 번 더 사용하려는 그 모습에 실페리온은 무심결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유리젤이 보이지 않는다.
최소 7성은 넘어가는 그 괴물 엘프가 대체 어디로 모습을 감춘 걸까.
정말로 도망친 걸까.
실페리온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이도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거.
“묻고 싶군.”
실페리온의 말에 이자나기가 멈칫했다.
“무엇을?”
“나를 기억하는가.”
쓸데없는 질문이었지만 이자나기는 답해주었다 .
“기억하고말고. 그대는 문지기 아닌가.”
“문지기, 그래 그거면 되겠지. 나는 문지기였... 크흑.”
콰직-!
어느새 이자나기의 주먹을 꽉 쥐어져있었고 땅에서 튀어나온 수십 개의 마나를 머금은 송곳이 실페리온의 몸을 고슴도치로 만들었다.
“커..커 헉...”
어떻게든 시간을 벌고자하는 실페리온의 속내를 이자나기가 모를 리 없다.
이자나기는 코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문지기면 문지기답게, 그대로 죽...”
콰직-!
이자나기는 강제로 말을 멈추고 말았다.
주변에 알 수 없는 다섯 개의 작은 게이트가 생겨나기 시작했으니까.
‘이건 또 뭔...’
그렇게 생각한 순간.
투웅-!
왼쪽에 있던 게이트에서 불로 만들어진 화살이 튀어나온다.
위력은 형편없었지만 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이자나기는 맞서기보다 회피를 선택했다.
몸을 옆으로 튼 그 순간.
이번에는 정면에 있던 게이트에서 얼음으로 만들어진 화살이 튀어나왔다.
이자나기는 오른발에 힘을 주고 그 자리를 박찼다.
하지만 이건 뭘까.
허공에 떠있던 이자나기는 당황했다.
언제, 여기에 게이트가 생겨난 거지?
그 순간 게이트에서 한줄기 빛이 뿜어져 나왔다.
본능적으로 이자나기는 양팔을 교차하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퍼어어억-!!!
하늘로 솟구쳤던 이자나기가 맥없이 바닥에 쳐 박힌다.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실페리온은 볼 수 있었다.
게이트에서 검을 들고 공격을 시도한 ‘유리젤’과, 바닥에 쓰러진 이자나기.
그리고 주변에 생겨났던 게이트 중 한곳으로 유리젤이 몸을 밀어넣는 것과 그 게이트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까지.
실페리온은 확신했다.
‘시간, 확실히 벌 수 있겠구나.’
참으로 얌체 같은 엘프가 아닌가.
그렇게 실페리온은 눈을 감았다.
죽음이 가까워진다.
아니 잠깐.
실페리온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렇게 죽을 순 없다.
이딴 결말은 아니다.
실페리온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렸다.
몸을 파고든 열 개의 거대한 송곳을, 무시하고 엘프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던 이자나기를 향해 자리를 박찼다.
콰앙-!
죽음을 각오한 불굴의 의지가 실페리온의 몸에 깃든다.
이어서 그의 몸에 잠들어있던 인어왕의 피가, 그런 실페리온의 뒤를 받쳤다.
놀랍게도 실페리온은 이자나기의 코앞에 자리했다.
근접을 넘어 초근접의 거리.
경계하지 않던 이자나기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어서.
콰아아아아앙-!!!!
실페리온의 몸이 폭발했다.
***
폭음이 가시기가 무섭게 이자나기는 몸을 틀었다.
서걱-!
또 다시 생겨난 작은 게이트에서 검이 튀어나왔고 그게 이자나기의 팔을 살짝 스쳤다.
얕은 상처였지만 이자나기의 자존심은 큰 상처를 입었다.
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공격을 시도했지만 역시, 게이트는 모습을 감춘 상태였고 엘프는 온데간데없는 상황이다.
이자나기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래도 이 엘프를 손쉽게 따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약 10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이자나기는 한걸음 움직였다.
일부러 몸의 빈틈을 드러냈지만 유리젤은 반응하지 않았다.
또 다시 10분이 흘렀다.
한 번 더 빈틈을 드러낸 이자나기.
하지만 이번에도 유리젤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런 소득 없이 30분이 흘렀을 때, 이자나기가 자리를 박찼다.
그 순간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이자나기의 뒤쪽에 게이트가 생겨난다.
쌔애액-!
이어서 그곳에서 유리젤의 검이 이자나기의 뒷머리를 향해 직선으로 꽂혀들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일까.
이자나기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옆으로 틀었고 팔꿈치를 내질렀다.
퍼어어어어억-!!!!
쩌어어엉-!!
“흐윽...”
고통어린 신음을 내뱉으며 유리젤이 정령계 너머로 날아갔다.
이자나기는 확신했다.
몸의 모든 기운을 응축시킨 채로 내지른 공격이다.
죽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까처럼 깝죽(?)거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어서 정령계의 문이 닫힌다.
“별 잔챙이 같은 년이.”
짜증 섞인 숨을 토해낸 이자나기는 눈을 감고 다시 기운을 집중했다.
놓쳐버린 이도를 다시 잡아야한다.
어디로 갔을까.
놈이 힘을 회복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생각하면 놈은 힘을 회복하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가 가장 최적의 장소일까.
놈이 타고 있던 늑대는 분명 5성의 신격을 갖춘 정령이었다.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장소가 필요한 놈과, 놈이 이동 수단으로 사용하는 정령.
이자나기의 눈이 떠진다.
짐작 가는 곳이 있는 것처럼, 그의 몸이 정면을 향해 뻗어나간다.
이자나기는 이번에도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