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내가 그렇게는 못 살지(1) >
시황은 당황스러웠다.
여천의 기세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뛰어나다.
아니 위협적이다.
여천은 가만히 서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붉은 혈광이 넘실거리고 그의 몸 주위로 붉은 선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그 옛날 수많은 떠돌이 드래곤들과 싸우고 싸우던 그때의 여천은 5성의 신격을 갖춘 존재였다.
당연히 그 상태로 아스가르드에 종속되었기에 지금도 5성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여천이 천군 진영에서 2인자로 불리고 있는 것은 천군의 총애와 그 본인의 힘을 폭발시킬 수 있는 여천 본연의 힘. 그러니까... 바로 저것 때문이었다.
“우리의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여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그의 생기가, 그의 선천지기가 점점 붉게 달아오른다.
“대체 왜 자기 목숨을 깎아가면서까지 우리를... 흡!”
시황은 고개를 틀었다.
어느새 휘두른 건지 여천의 검이 시황의 옆머리를 스쳐지나간다.
시황은 직감했다.
지금의 여천은 8성, 8성의 힘을 갖춘 게 확실하다고.
“천군의 총애를 받더니 완전히 미친것이구나.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시황은 확신했다.
그가 8성의 힘을 뿜어내도 아직은 자신이 우위라고.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여천이 입을 열었다.
“광전사의 갑주에 내장된 혈기와, 진정한 혈기, 그 두 개는 다른 것이다.”
마치 누군가에게 교육을 해주는 여천의 모습에 시황이 인상이 구겨진다.
“지금 나를 가르치는 것이냐!”
“진정한 혈기는 생명을 에너지로 만들고 그것을 잘게 부수고 회전시키고 압축시켜 본연의 힘을 증폭시키는 것, 그리하여 압도적인 위용을 갖추는 것. 나는 하지 못했지만 그대는 할 수 있겠지.”
시황은 깨달았다.
여천의 저 말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아래에 있을 ‘이도’를 향한 것이라는 것을.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이도.
‘놈은 어디 있지?’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여천이 검을 휘두른다.
-!!
음속, 아니 그 경지를 뛰어넘은 공격이지만 시황은 당황하지 않았다.
강罡은 유流를 이길 수 없는 법.
시황의 양 팔이 부드럽게 뻗어나간다.
터억-!
퉁-!
기묘한 소리와 함께 여천의 검이 허공을 베고 그 검의 간격사이로 시황이 파고들어온다.
시황은 조용히 힘을 끌어올렸다.
지금의 여천은 8성을 넘어 9성까지 넘보고 있다.
폭주라는 단어가 부족하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그 폭주는, 여기서 끝날 것이다.
시황의 오른손이 기묘하게 꺾여 들어가며 엄지를 감싸자 그의 권능 [절단]이 발동된다.
순간 여천이 몸을 틀었다.
서걱-!
완벽하게 피하지 못한 걸까.
섬뜩한 피륙음과 함께 여천의 왼팔이 하늘 높이 솟구친다.
시황은 빠르게 판단 내렸다.
놈의 신격은 어느 정도인가.
9성에 버금간다.
놈의 주 무기인 검은 지금 어디 있는가.
잘려나가지 않은 오른팔에 쥐어져있었다.
그의 자세는 어떠한가.
반격을 하려는 자세다.
마지막으로 지금 내가 공격을 시도하면 누구의 공격이 먼저 상대에게 도달하겠는가.
시황은 행동으로 답을 보여주었다.
방어 자세, 유流의 극의 .
여천은 그 순간 검을 살짝 틀어쥐었다.
검의 달인인 여천의 장기, 회축廻畜
그의 검에 회전의 힘이 감돌고, 이어서.
콰아아앙-!!!!
굉음이 터져 나온다.
허공에 거대한 충격파가 그려지던 그때. 시황은 날아가고 있었다.
‘마지막에 회전의 힘을 더했군. 여천의 장기인 회축을 간과했어.’
상관없다.
다시 반격을 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바닥에 쳐 박힌 시황이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잠깐 멍한 표정을 짓는다.
왜, 놈이... 이도가, 눈앞에 있는 것이지?
그게 끝이었다.
쩌엉-!
시간이 잠시 멈췄고, 시황의 시간은 영원히 멈췄다.
***
시황의 목을 짓밟고 있던 형님은 멈춰선 세상 속에서 잠시간 홀로 그렇게 서있었다.
“처음부터 모든 게 꿈이었다면 어땠을까.”
형님의 자조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몬스터니 침식이니 이런 게 없었더라면 우리 인생은 조금 더 나아졌을까. 나는 복싱을 너도 복싱을.”
나는 형님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형님의 권능인 [정지].
내 계산에 의하면 세상이 멈추는 시간은 정확히 10초다.
그 시간동안 형님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아까 형님이 말했듯 리바운드.
멈춰진 세상에서 거대한 압력을 뚫고 공격을 하려면 그만한 고통이 몸에 가중되는 것은 당연지사.
지금 내 몸이 버티고 있는 것은 상승한 내 신체의 격과, 형님의 거대한 영혼. 그리고 내 영혼이 합쳐져 그 고통을 분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너한테 너무 많은 짐을 지게 하는 것 같네. 미안하다.”
왜, 사과를 하십니까.
“욕망에 먹히지 말고, 힘에 먹히지 말고 권좌에 먹히지 마라.”
갑자기, 무슨 소리하는 거냐고요.
“모자란 동생 때문에 대단한 형님만 마음 고생하네. 그치?”
상황에 맞지 않는 작은 농담, 이어서 형님이 씩 웃는다.
“저 여자애한테 잘 좀 해줘라. 심성은 착한 거 같던데.”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느낌이 이상하게 싸하다.
설마 이게 마지막인가?
그렇게 약 9초가 지났을 때.
“곧 다시 보게 될 거다.”
그 말을 끝으로 멈췄던 세상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쿵-!
머릿속의 굉음과 함께 나는 내 몸으로 돌아왔다.
얼떨떨해한다거나, 방금 전 형님의 말을 곱씹거나. 그러지는 못했다.
빠지직-!
찌릿!
온 몸에서 느껴지는 격통과, 뇌가 찌그러지는 말 같지도 않은 통증에 생각이 강제로 씹혔으니까.
젠장.
너무 아프다.
털썩-!
그 자리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이 양반이, 이런 건 미리 경고 좀 해주면 안 돼?
“이도님!!!!”
한수아가 달려오더니 나를 껴안는다.
고통 속에서도 그녀의 눈동자가 보인다.
아까 의식이 밖으로 밀려났을 때는 분명 약간의 경계하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무한한 신뢰가 들어있었다.
굳이 말로하지 않아도 나랑 형님을 구분 할 수 있다는 건가.
정말이지 여러모로 특이한 여자다.
그렇게 한수아가 나를 껴안고는 슈샤이어의 등에 올라탄다.
그 와중에 나는 보았다.
유리젤이 나를 ‘두려움’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조금 이해가 안가네.
왜 두려워하지?
실소가 터져 나오려다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미친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나.
한수아는 익숙한 것처럼 슈샤이어의 뿔을 잡아채고는 말했다.
빨리 도망치자고.
뭐가 그렇게 급한 걸까.
의문은 곧 풀렸다.
빛살 같은 속도로 도망치는 슈샤이어의 등에서, 나는 보았다.
하늘에 있던 여천이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채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착각일까.
여천과 눈이 마주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저 양반이 아까 뭐라고 했더라.
혈기의 본질은 에너지를 잘게 부수고 회전시키고 압축시키는 거라고.. 했었나?
나는 그 이상 생각을 이어가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
꿈인가.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죽은 줄 알았던 대의의 이면 소속의 실페리온을 보았고 그를 비롯한 이름 모를 7명 정도의 시련자가 나를 호위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거참, 진작 죽은 줄 알았는데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내 귓가에 실페리온의 목소리가 꽂혀든다.
“듣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하지 못했던 대답, 지금 하겠네. 우리는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네. 그러니 꼭, 살아남으시게.”
몇 번 만나지는 못했지만 실페리온이 어떤 성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짐작이 간다.
단호하되, 고향을 잃은 고통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그런 남자.
이게 꿈이라고 판단한 것도 무리가 아닌 게.
가장 최근에 보았을 때 그런 실페리온은 울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울고 있다.
“울보네. 나보다 나이도 많은 양반이.”
들렸는지는 모르겠다.
전부 꿈속에서 한 말이니까.
콰아앙-!!
콰앙-!!!
처음 들어보는 기운의 폭발, 마치 어떤 생명체가 스스로를 폭탄으로 만들어 터트린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다시 시야가 암전된다.
**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여전히 비몽사몽하다.
실페리온을 비롯해 총 7명이었던 시련자들은 이제 다섯 명만 남았다.
실페리온과 이름 모를 시련자 4명.
우리는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뒤에서 달려들고 있는 거인.
놈은 양 입 꼬리를 좌우로 쫙 벌린 채 기쁘다는 듯 웃고 있었는데, 오한이 절로 돋을 정도로 소름 돋는 표정이었다.
뭐랄까. 마치 자신에게 곧 들어올 거대한 보상에 눈이 먼 것 같은 그런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이번에도 듣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
“폭탄으로 시원하게 터트려버리고 기로 만들어진 창으로 놈들을 모조리 고슴도치로 만들었다지?”
각각 다른 두 목소리에는 웃음기마저 서려있는 듯 했다.
이어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대가 아스가르드의 세 지배자들을 땅에 떨어트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고맙다. 그대가 죽인 놈들 중에 내 백성을 죽이고 씹어 먹었던 개자식이 있었거든.”
이번에도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다.
머지않아 여럿이 동시에 자리를 박차는 소리가 들려오고 거인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크윽!! 이 잔챙이 새끼들이!!!”
콰아아아앙-!!
콰앙-!!!
콰앙-!!
***
다시 눈을 떴을 때, 멍청하게도 나는 그제야 이 모든 것들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진작 죽었을 거라 생각되던 대의의 이면 소속의 시련자들은 분명 어딘가에 숨어서 기회를 보고 있던 게 확실하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왜 보호하는지, 왜 이제야 나타난 건지.
나는 묻지 않았다.
“이제, 후우. 정신이 제대로 들었나보군.”
누운 채로 눈만 살짝 돌리자 힘겹게 웃고 있는 실페리온이 보인다.
그에게 말했다.
“이런 거, 전부 무의미 할 수도 있어.”
“너희가 시간을 번다고 해서 내가 확실하게 에피소드를 클리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래도 상관없네.”
상관이 없다?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가 대답한다.
“이미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목적을 이뤘으니까.”
이뤘다는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에피소드가 시작되기 전 메시지가 출력됐었네.”
나는 말없이 듣기만 했다.
“소모품처럼 살고 싶은 자를 제외하고 힘을 가지고 싶은 자, 싸우고 싶은 자, 목적을 이루고 싶은 자, 모두 타이탄으로 오라고.”
“그게 무슨 의민데?”
피식-
“글쎄, 나는 시스템이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하네. 그렇게 타이탄으로 강림했고 우리는 이미 타이탄으로 와있던 각 진영의 초월자들이 무언가 모략을 꾸미고 있다는 걸 눈치 챘지. 그들은 우리에게 협조하라했지만 우리는 그들의 제의를 거절했고 같이 강림한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죽었네.”
하아.
여전히 말이 기네.
“본론만.”
“본론. 그 만찬장에 있던 놈들과 방금 그대에게 죽었던 바알이라는 악마. 그들 모두가 우리에게는 원수였어. 하지만 우리가 가진 힘으로는 그들에게 죽음을 선물 해줄 수 없었네. 그대도 알다시피 우린 약하니까. 하지만 그대는 우리랑 달라. 그들을 모두 죽였어.”
그래서 고맙다고 한 건가.
“그대의 목적은 아스가르드의 세 지배자,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그대라면 가능하겠지.”
“아까도 말했지만 여기서 살아나도 딱히 내가 살...”
“그대는 신기한 인간이야.”
“막힌 상황에서도 항상 답을 찾아내니까. 이번에도 그대는 답을 찾아내겠지.”
이 양반이,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데?”
실페리온이 입을 다물고는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부디, 그대가 공백의 왕이 되었으면 하네.”
내 옆에서 달리던 실페리온이, 조금씩 멀어진다.
“우리도 후손들에게 할 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원수를 갚아 준, 그리고 갚아 줄 그대의 앞길에 약간이나마 도움이 되었다고, 그렇게 자신있게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정말로 고맙네.”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건지.
저게 마지막이었다.
실페리온은 저 말을 마지막으로 안개처럼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