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를 한다는 건-124화 (123/131)

124화.  < 내 동생 잘 부탁한다.(1) >

세 놈이 천천히 내려온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여유롭다.

아니, 단어 선택이 잘못된 건가.

여유가 아니었다.

저건 승리를 확신한 자들의 그런 표정.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악마의 말에 코웃음이 터져 나온다.

“쟤네 다 희생시킨 거냐?”

말을 하면서도 최대한 힘을 모았다.

내색하지 않은 채 심호흡을 하며 주변 기운을 끌어 모으는데, 시발 방사능이 거슬린다.

이러다 엑스맨 되겠는데.

“나는 무의 극의를...”

“자기소개는 됐고,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이번에는 악마가 코웃음 친다.

“시간을 끌려는 것인가. 너무 노골적이군.”

무시하고 머릿속의 질문을 꺼내들었다.

“정말로 이해가 안가서 그래. 세 진영이 손을 잡은 거냐? 대체 왜?”

“왜 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군. 그럼 역으로 묻지. 왜 우리는 손을 잡아서는 안 되는가?”

이건 뭔 개소리지.

“그대도 알지 않은가. 현재 우리는 시련자인 상태. 이 에피소드를 끝내면 10성의 신격을 얻게 되지. 그 상태로 아스가르드에서 격을 뿜어낸다면? 그쪽에 종속되었을 때는 ‘히든 피스’를 이용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가능하지.”

“그래서? 천군과 발락투스, 그리고 여화까지 그 세 명을 제치고 마지막에 가서는 니들 세 명이 싸우겠다는 거냐? 공백의 왕의 자리에 앉는 건 단 한명인데?”

“우리는 주역이 되고 싶을 뿐, 이 이상 더 설명이 필요한가?”

아니, 필요 없다.

저 말 안에 내가 궁금했던 것들이 죄다 들어가 있었으니까.

그냥 힘을 가지려는 싸움에서 엑스트라가 아니라 주연이 되고 싶다 이거잖아?

그리고 핵심은 이게 아니었다.

‘시련자인 상태로 아스가르드에서 격을 뿜어낸다.’. 이게 핵심이다.

놈들의 행동과 지금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놈들이 가지게 된 시련자라는 직위는 #99까지의 에피소드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100까지의 모든 에피소드까지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혹시나 해서 아스가르드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라는 창에 y를 눌러보았다.

띠링!

[현재 에피소드 지역에서는 아스가르드로의 이동이 금지되어있습니다.]

흥미롭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다.

결국 마지막에 또 싸우게 될 놈들이 아스가르드의 세 명을 이기기 위해서 지금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다는 건데.

여전히 저놈들의 유대의 끈은, 굵지 않다는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찌릿-!

온몸에 오한이 돋는다.

주변 온도가 바뀌었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살기.

나는 그 이상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후웅-!

등 쪽이 따끔하다.

눈동자만 빠르게 돌려 확인해보니 내 뒤쪽에서 길쭉한 칼날 같은 것이 내 허리 쪽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강기로 만들어진 것 같은데 느껴지는 힘이 보통이 아니다.

한발만, 아니 0.1초만 더 늦었더라면 내 허리가 동강났을 것이다.

어떤 놈이 날린 건지는 모른다.

거인인지, 천사인지, 그것도 아니면 악마인지.

다만, 놈들은 전부 내가 죽여야 할 적이라는 거.

나는 자리를 박찼다.

후웅-!

귀기가 움직이며 코앞에 신의 창을 만들었고 나는 그것을 잡아챘다.

목표는 코앞에서 쪼개고 있는 악마다.

창을 집어던지기가 무섭게 놈이 살짝 고개를 옆으로 젖힌다.

후웅-!

빗나갔다.

아니. 상관없다.

기대도 안했으니까.

“허어... 내가 첫 번째인가.”

자조적인건지 한탄하는 건지 모를 묘한 뉘앙스의 말을 꺼내며 악마가 정체불명의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놈의 몸이 흐릿해지려던 그 순간.

나는 주먹을 내질렀다.

후웅-!!

내 주먹 이 놈의 몸을 관통한다.

주먹에는 타격감도 없었고 묵직함도 없었다.

잔상인가.

“처음부터 차근차근 계단을 밟으며 성장한 게 아닌 그대는.”

뒤쪽에서 들려온다.

이번에는 손등을 휘둘렀다.

또 다시 놈의 잔상을 꿰뚫는다.

이어서.

후욱하는 뜨거운 입김이 귓가에 느껴진다.

“9성의 힘을 견고히 다진 ‘우리’에게 상대가 되지 못해.”

씹새끼가.

영화 찍냐?

몸을 회전하며 깔끔하게 돌려차기를 날렸지만 역시, 이번에도 잔상이었다.

의문이 생긴다.

악마의 몸은 울긋불긋한 핏줄이 돋아나있는 거대한 근육들로 감싸진 상태다.

복싱으로 따지면 아웃복서가 아닌 인파이터에 가까운 몸.

그런데 인파이터에 가까운 놈의 움직임을 내가 잡아내지도 못한다고?

놈의 말마따나 같은 9성이지만 그 9성에서 머문 시간이 차이가 나기 때문일까.

그럴 리가.

짧게 심호흡했다.

한가지, 확인해야할 게 생긴 것 같다.

그 상태로 고개를 숙였다.

심장 어림에서 지끈거리며 올라오는 귀신의 기운을 한 번에 방출했다.

콰콰콰콰-!!!

사방이 믹서에 갈린 것처럼 갈려나가던 그때. 나는 두 가지 행동을 했다.

일단 왼손으로 작은 폭기를 응축시킨 채로 숨겨두었다.

그리고 45도 각도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거리를 벌린 악마가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마치 무엇을 보여줄까 하는 그런 궁금증이 담긴 표정이다.

그쪽을 향해 자리를 박찼고, 오른 주먹을 내질렀다.

파아앙-!!!

타격음은 없었다.

아까처럼, 놈의 몸은 사라진 상태였으니까.

“재롱을 부리...”

기다렸다는 듯, 놈의 인기척과 놈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온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다.

나는 놈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곧바로 왼손바닥을 펼친 채로 휘둘렀다.

퍼걱-!

타격감에 웃음도 잠시.

손바닥에 머물러있던 폭기가 그대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사방이 충격파로 갈가리 찢겨져나갔지만 놈은 그 자리에 서있었다.

빠르게 손을 거두고는 자세를 잡았다.

천천히, 놈의 얼굴을 덮고 있는 연기가 사라진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은 반 이상 녹아내린 놈의 얼굴과 완전히 터져버려 흘러내리고 있는 기묘한 액체.

승부가 난걸까.

아니.

나는 안면이 녹아내린 악마를 무시하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먼 곳에서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땅딸막한 키의 노인과 거인, 그리고 그 옆에는 내 뒤에 녹아내린 면상의 주인인 ‘악마’가 서있었다.

"분신인가?”

먼 거리였지만 놈이 씩 웃는 게 보인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짐작이 간다.

내 귓가에 숨을 불어넣었을 때.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 차이를 내가 못 알아챈다면, 나는 그냥 나가 뒤져야한다.

하긴 9성의 초월자가 이렇게 약할 리 없지.

놈들은 누구하나 먼저 나서서 나를 상대할 생각이 없다.

잠재적인 경쟁자.

미래의 경쟁자.

지금은 협력자.

다 무의미하다.

그걸로 확신했다.

“유대감은 없나보네.”

"..."

“원래 니들 계획대로였으면 내가 만찬장에서 피 튀기며 싸웠겠지. 약하다고는 해도 초월자는 초월자. 그런 놈들이 100명이 넘는데 내가 상처 하나 없이, 그것도 힘을 숨긴 채로 그들 전부를 죽이는 건 불가능해. 아마 빈사상태가 됐을지도 몰라. 그런 나를 기다렸다는 듯 너희가 나타나 가볍게 죽이려고 했을 텐데. 그렇게 안됐네?”

힐끗 뒤를 돌아보자 분신이라 추정되던 악마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나는 조용히, 자세를 잡았다.

“찌질이 새끼들이 꼴에 계략이랍시고 개소리를 늘여 놓고 있어.”

세 놈의 면상이 한꺼번에 일그러진다.

정말로 보기가 좋다.

그와 반비례하듯 검은 기운이 내 몸을 타고 아우라처럼 주변을 잠식한다.

달래줄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만찬장에서 벌어진 일들과 지금은 동일한 연장선에 놓여있다.

누가 처음 계획을 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놈들이 병신인건 틀린 말이 아니다.

“주접떨지 말고, 시간 끌지 말고, 세 놈 다 한꺼번에.”

살기로 넘실거리는 내 눈이, 놈들 세 명을 한 번에 훑는다.

“드루와, 씨발것들아.”

***

콰아아아앙-!!!!

콰아아앙-!!!!!

거대한 굉음이 연이어서 터진다.

슈샤이어의 등에 올라탄 한수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거리는 수백, 아니 수천 키로가 넘는 게 확실했는데도 여기까지 충격이 올 정도면, 대체 어느 정도의 싸움을 펼치고 있다는 말인가.

한수아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유리젤과, 여천.

갑작스럽게 등장한 두 조력자에 의해 주변에 있던 초월자들은 모두 정리가 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죽었다는 뜻.

그 일의 중심에는 유리젤과 여천이 존재했다.

각 원소의 정령왕이라 불리는 이들을 모조리 소환한 유리젤은 혼자서 10명 남짓한 초월자를 죽였고, 남은 이삼십 명 가량의 초월자는 여천 혼자서 죽였다.

그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붉은 잔상이 초월자들의 몸에 실선을 새겼고 그 실선은 곧 사선이 되었다.

여천은 단 5분도 지나기 전에 수십 명의 초월자를 죽였는데, 그 압도적인 위용에 한수아는 감탄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들 모두가 이도가 있는 곳으로 함께 움직이는 상황.

“엄청나군.”

다른 이들은 못 느꼈어도 여천은 느꼈나보다.

저 굉음의 중심지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누가, 누가 이기고 있어요?”

한수아의 물음에 여천은 말을 아꼈다.

직접 보면 알 테니까.

대답해주지 않은 여천의 태도에 한수아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격전지가 눈앞에 보인다.

운석이라도 맞은 것처럼 사방이 전부 터져있었고 멀쩡한 곳이 한군데도 없는 격전지.

황폐하고, 또 황폐했다.

농담이 아니고 핵전쟁이 일어났다면 이런 모습이 연출되지 않았을까.

한수아는 볼 수 있었다.

멀지않은 곳에 숨을 헐떡이며 서있는 세 명의 시련자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이도를.

***

“하아... 하아...”

숨이 턱 끝까지 올라온다.

“놀라워. 정말 놀랍군.”

“그대의 권능은 혹시 ‘죽음’을 예지하고 알려주는 것인가.”

몇 번을 격돌했는지 모른다.

놈들이 내게 달려들었을 때 예지가 보였다.

놈들의 공격에 팔이 잘리고 마지막으로 목이 잘려나가는 미래.

결론만 말하면 나는 죽지 않았다.

예지를 이용해 놈들의 공격을 회피했고 분신이라는 권능을 사용하는 악마, 놈의 본체의 팔을 잡아 뜯었다.

그 과정은 절대로 순탄하지 않았고 나는 머릿속으로 열 번이 넘는 죽음을 겪었다.

그래, 그게 전부였다.

[절단]이라는 권능을 사용하는 노인과, 무슨 권능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거인.

놈들의 협공에 나는 쓰러졌고 지금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그대는 우리가 가려는 길에 걸림돌에 불과해. 그러니 원망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배려해주는 듯한 노인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시발.

나는 패배했다.

아니, 패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지쳐있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했다.

벌어지지 않은 일이고,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나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적어도 한 놈 정도는 죽이자.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도야.

머릿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건 찰나에 불과했다.

콰아아아앙-!!!

한 팔밖에 남지 않은 악마가, 진지한 얼굴로 내 면상에 주먹을 꽂았으니까.

바닥에 핑퐁 하듯 몇 번 튕긴 나는 코를 훅하고 찔러 들어오는 흙냄새에 정신을 부여잡았다.

아픈 건 둘째 치고, 방금 뭐였지?

“네놈의 투쟁, 네놈의 이야기, 그동안 퍽이나 재미있었느니라.”

악마가 내게 사형 선고를 내리듯 무미건조한 대사를 내뱉는다.

아니 지가 세익스피어야 뭐야.

나는 땅을 짚고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보인다.

멀리, 한 6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이곳으로 오고 있는 한수아와 슈샤이어. 그리고 유리젤과 정체모를 남자의 모습.

살아있었구나.

유리젤과 슈샤이어는 내게 한 약속을 지켰다.

그런데, 나는 약속을 못 지키겠네.

지친상태로 고개를 돌리자. 악마가 여유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놈이 주먹을 들어올린다.

“내 이름은 바알. 네놈을 죽일 그 이름을 잊지 말거라.”

반격.

반격을 해야 하는데... 늦는다.

신체의 감각이 내 통제를 벗어난 느낌.

쌔애액-!!

놈의 주먹이 내 머리를 향해 내질러지던 그때.

두근!!

심장이, 강하게 뛴다.

-잠깐 나와봐.

익숙한 목소리, 형님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내 의식이 밖으로 밀려났다.

***

터억-!

바알은 의아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른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까.

분명 놈은 빈사상태다.

주먹 하나 쥘 힘도 없고 기운 한번 끌어올리지 못하는 게 확실한 살아있는 시체.

그런데 지금, 내 주먹을 막은 건가?

그때, 눈앞의 ‘이도’가 고개를 든다.

흠칫.

바알은 놀랐다.

그의 눈이 달라져 있었다.

외형은 귀기가 풀린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저 여유로운 웃음과 심해보다 더 깊은 눈동자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바알은 순간 확신했다.

눈앞의 이놈은 ‘이도’가 아니라고.

“네놈, 누구냐.”

바알의 말에 그가 대답한다.

“정지혁.”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