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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를 한다는 건-123화 (122/131)

123화.  < 분노(2) >

“패?”

살롬이 헛웃음을 터트린다.

이름도 잊어먹을 뻔했던 코르셀리움이 자리에서 일어서려할 때 그 옆에 있던 이가 그를 막아선다.

쟤는 이름이 뭐였더라.

멜... 멜 뭐였는데, 기억이 안 나네.

나는 조용히 팔짱을 끼고 벌어지는 상황을 눈에 담았다.

이어서 살롬이 바깥쪽을 향해 가볍게 손짓하자. 멀리 있던 펠레노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밖으로 나간다.

“원한다면 보여주지. 우리들이 숨기고 있는 패를.”

무언가를 가지러 가는 걸까, 아니면 누굴 데리러 가는 걸까.

확실한건 묘하게 기대가 된다는 점이다.

뭘까.

나는 막대한 양의 코인으로 핵폭탄을 준비했다.

그렇다면 나보다 더 일찍 이곳으로 내려온 이놈들은 무엇을 준비한 걸까.

그 결과물은 머지 않아 밝혀졌다.

우선 레이놀즈가 등장했다.

그것도 누군가의 목을 움켜쥔 상태로.

순간 이가 악물린다.

농담이 아니고 폭탄을 그대로 터트려 버릴 뻔했다.

그를 보자마자, 아니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왜 미래의 내가 그렇게 분노했는지.

왜 미래의 내가, 이놈들을 전부 죽이라고했는지.

***

복부에 박힌 단검을 빼낸 한수아는 심상치 않은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20명 남짓한 시련자의 숫자가 더, 늘어나있었다.

24... 아니, 25. .

저게 전부일까.

아니면 더 올 시련자가 있는 걸까.

확실한건 상황이 좋지 않다는 점이다.

옆에 있던 슈샤이어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좆 된 거 같은데.”

바닥에 널브러진 아스트레이도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결국, 이렇게 죽게 되는군.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라느니 그딴 말은 여기서 통하지 않았다.

한수아는 직감했다.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죽음을.

시련자들이 주변을 포진 한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는 하늘에서, 누군가는 두 발로, 혹은 세 발로.

괴수들의 대행진.

한수아가 고개를 돌리고는 정령소환술을 시전한다.

“슈샤이어님. 고마웠어요.”

정령계의 통로까지 열어주는 한수아의 모습에 슈샤이어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다.

“유리젤님을 소환한다면 뭔가 달라질게 있을 텐데. 이대로 포기하는가?”

한수아는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다 자기 역할이 있는 거잖아요. 저는 여기서 퇴장해야 할 거 같아요.”

슈샤이어는 그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정령계의 통로를 향해 걸어가던 그가, 잠깐 한수아를 바라본다.

“정령계로 넘어 올 수도 있을 텐데, 정말로 죽을 생각인가?”

한수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그래도 후회는 없이 죽으니 다행이긴 한데... 조금 아쉽군.

“뭐가요?”

-끝을 보지 못한 거. 그대와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나보군.

한수아가 웃는다.

“고생 많으셨어요. 선생님.”

-...오랜만에 듣는군.

초월자들이 가까이 다가온다.

그들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죽이려는 의도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수아는 적어도 이곳에서 죽기를 바랐다.

이도는 보기와는 다르게 속정이 있는 남자다.

결국 최후의 1인이 되어야할 이도에게 있어서 자신은 그저 걸림돌일 뿐.

한수아는 후련했다.

그 순간.

콰아아앙-!!!

귀가 찢어질 듯 한 굉음과 함께 다가오던 시련자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한수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검붉은 갑주와 한손에 들려져있는 양날의 긴 장검.

한수아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도...님?”

저 갑옷.

분명 이도가 예전에 입고 있던 광전사의 갑주다.

설마 이도가 온 것일까.

그 먼 거리를 이렇게 순식간에?

그때 코앞에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그런 느낌도 잠시. 한수아는 짧게 실망했다.

이도가 아니었다.

굵직한 인상에 뚜렷한 이목구비는 미남이라고 부르기에 한 점의 어색함도 없었지만... 한수아는 저 남자를 처음 본다.

그런데 아스트레이는 아니었나보다.

여천?”

여천이라 불린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한수아를 바라 볼 뿐.

그가 말한다.

“그대의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그들이 파놓은 함정은 한 개가 아닌 두 개, 그대가 이도와 만나야 그가 눈치챌 수 있는 그런 함정이지."

아리송한 말이었다.

그때 눈치만 보던 슈샤이어가 정령계 너머로 무언가 신호를 보냈다.

이어서 유리젤이 넘어오는 그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던 여천이 조용히 한숨을 터트린다.

“하긴, 생각해보니 눈치 챈다고 해도 별 의미는 없겠군.”

아리송한 수준을 넘어 너무나도 의아스러웠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여천님. 왜 그쪽에 계신 겁니까.”

몰려있는 시련자들 중 한명이 물었지만 여천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정말입니까. 정말, 그쪽에 서려는 겁니까?”

여천이 조용히 장검을 고쳐 쥔다.

그 검이 붉은색으로 물들고, 멈췄던 시련자들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이유가 뭡니까. 대체 왜 그 ‘자리’를 거절하시려는 겁니까.”

여천이 조용히 고개를 돌린다.

그가, 아스트레이와 눈을 맞췄다.

“약속했거든.”

“약속이요?”

여천과 눈을 맞추고 있던 아스트레이, 그의 눈에서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눈물이 주룩하고 흘러내린다.

“아스가르드를 멸망시키겠다는 약속, 이제야 지킬 수 있게 되었어.”

아스트레이와 여천은 웃었다.

***

만찬장은 침묵에 잠겼다.

아니지.

침묵이라는 단어는 조금 부적절하다.

놈들이 준비한 패는 정말이지 별게 아니었다.

레이놀즈는 ‘한수아’를 똑 닮은 생명체를 데리고 왔고 지금은 탁자에 눕힌 채로 허리를 놀리고 있었다.

에로비디오 촬영 현장.

너무나도 적절했다.

맹의 증표에 의하면 한수아는 지금 이곳으로 이동 중이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그런데 눈앞에 한수아가 있다?

저건 가짜가 분명하다.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시련자가 자기의 모습을 한수아의 형태로 바꿨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뻔했고 그렇기에 화가 났다.

“헉-! 허억-!”

율리우스와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인 레이놀즈.

그의 신음 소리가 심각하게 거슬린다.

그리고 그 밑에 깔려있는 ‘한수아’는 인형이 아닌 실제 사람처럼 그에 맞춰 허리를 흔들고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이게 패라고? 이런 걸 준비했다고?”

어처구니가 없다.

시발.

내가 멍청했네.

내가, 병신이었네.

왜 저 병신짓거리를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걸까.

놈들이 나를 바라본다.

레이놀즈도, 그 밑에 깔려서 ‘한수아’를 연기하는 누군가도.

살롬도 펠레노리도. 그 모두가 내 입을 주목한다.

그래 귀 열고, 잘 들어라.

“그냥, 다 죽자.”

이후의 과정은 간단했다.

일단 귀기를 끌어올렸다.

시련자들이 반응했지만 그들보다 내가 더 빨랐다.

9성의 신격, 그리고 귀신의 형태를 띈 순간 폭탄을 터트렸고 그 자리를 박찼다.

-!!!

띠링!

[종의 한계를 뛰어넘은 시련자를 죽이셨습니다.]

[업적 「내가 제일 잘나가」를 달성하셨습니다.]

[200,000,000 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종의 한계를 뛰어넘은 시련자 50명을 죽이셨습니다.]

[5,000,000,000 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폭음.

귀가 멀어버릴 지경이었다.

허공을 박차고 또 박차고 계속해서 박찼다.

얼마나 올라왔는지는 모르겠다.

밑에 거대한 버섯구름이 펼쳐져있었고 살아남은 시련자들이 사방으로 도망치는 모습이 개미처럼 보이는 게, 보통 높이는 아닌가보다. 어림잡아 40, 아니 50.

최대 50명, 나까지 포함하면 51명이 핵폭탄의 여파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51이라는 숫자는 곧, 1로 변할 것이다.

손을 펼쳐들어 귀기를 개방했다.

우웅-!!

하늘이 떨리고 버섯구름이 아래로 짓눌린다.

허공을 가득 메운 내 귀기가, 하나둘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길고, 뾰족한 4m 크기의 창.

하나. 둘, 셋, 다섯, 일곱, 열, 열다섯.

그 숫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허공에 거의 백 개에 달하는 신의 창이 생성되었다.

아래에서 살아남은 놈들이 이 기운의 파동을 읽은 것인지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있는 나를 바라본다.

무시하고 의념을 보냈다.

'내려 꽂혀라.'

쌔애애액-!!!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앙-!!

콰앙-!!!

시련자들. 이름 모를 놈들이 창에 맞아 그대로 터져나간다.

띠링!

[종의 한계를 뛰어넘은 시련자 110명을 죽이셨습니다.]

[11,000,000,000 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딱 50명이다.

죽이고자했던 50명을 확실하게 죽였다.

그 외에도 펠레노리라는 거인족의 왕도 죽었고 저 만찬장 주변에 있을 거인들도 죽었다.

죄책감?

단 한 점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딴 건 사치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 착지했다.

방사능 때문인지 숨 쉬는 게 불편해지고, 주변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몸이 후끈 달아 올랐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문득 내 손을 바라보았다.

꽉 쥐어진 주먹.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다.

이 분노의 원인은 놈들의 준비가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시발.

초월자라는 단어를 한때나마 신과 동등한 단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보통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일을 쉽게 일으키고 해결하는 그런 존재.

당연히 그 환상은 깨졌지만 그래도 신에 가장 근접한 존재라는 것에는 아직까지도 동의한다.

여지껏 그들의 치졸함을 보면서도 그러려니 했었다.

감정을 가진 힘 있는 존재가 진영을 나누며 대립한다 해도 결국 그건 최적의 ‘균형’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놈들이 기껏 생각해서 한다는 게 약하디 약한 한수아를, 그것도 진짜 한수아가 아닌 것을 데리고 내 눈앞에서 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삼류 악당, 아니지.

길거리의 깡패 새끼들도 이런 개짓거리는 안한다.

그런데 자칭 ‘신’을 노리고 있는 천군이나 발락투스같은 지배자들을 모시는 놈들이 그런 행동을 한다고?

모든 게 거품이었다.

이런 새끼들은 힘을 가져서는 안된다.

병신새끼들.

“하아… 하아..”

힘을 너무 과도하게 쓴 걸까.

짧게 심호흡하고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새끼들.

잘 죽었다.

아니, 잘 죽였다.

그렇게 위안 아닌 안도감에 취해있을 때.

찌릿-!

뇌가 따끔했다.

외부적인 충격이나 그런 게 아니라, 마치 머릿속으로 번개가 한번 훑고 지나간 그런 느낌.

이번에도 느껴진다.

만찬장에서나 느꼈던 그 이질감이.

정말로, 이게 끝일까?

찌이이이이잉-!!

이명이 들려온다.

젠장.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눈앞이 깜깜해졌다.

++

“고생 많으셨어요. 이도님.”

눈앞에 한수아가 보인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형태인걸로 보아 나는 누워 있나보다.

한수아.

그녀의 옷은 찢어지고 몸에서는 상처로 인해 피가 흘러내리는 그 와중에도 그녀의 외모는 눈부셨고 그녀의 웃음을 안정적이었다. “...미안하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가져다댄다.

촉촉한 느낌이 뇌리를 타고 올라오자, 미래의 ‘나’가 눈을 감는다.

...

잠깐만, 눈을 감아?

이 멍청한 새끼가.

콰아아아아아아앙-!!!!

++

현실로 돌아왔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키스 한 번에 눈을 감아?

덕분에 얻은 정보가 없었다.

뭐에 죽는지도 모르고, 왜 내가 그렇게 힘없이 쓰러져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이가 없어서일까.

분노라는 감정이 가라앉자 상황을 조금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지쳤다.

전력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절반 이상의 힘을 한 번에 쏟아내 오십 명의 시련자를 죽였다.

그들의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만 보자.

지금 나는 ‘평소’보다 지쳤다.

지친 상태...

시발.

나는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최상급 회복 물약이라 불리는 엘릭서를 서너개 꺼내들고는 그대로 입안으로 들이부었다.

차가운 액체가 넘어가며 점점 이성이 살아난다.

놈들은 나한테 너무 쉽게 죽었다.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내 힘을 소모시키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파아아아아앙-!!!

하늘에서 폭풍이 몰아친다.

먼지가 사방으로 밀려나가고 어두웠던 하늘이 밝아진다.

젠장.

만찬장에 있던 시련자들은 나보다 약했다.

힘을 숨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대 8성의 초월자까지는 있었지만 그 이상의 초월자는 없었다.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누군가 있었다.

정확히 세 명, 그들이 나를 내려다본다.

한명의 거인과, 백발 머리의 땅딸막한 키를 가지고 있는 인간, 그리고 그 옆에는 머리에 세 개의 뿔을 달고 있는 악마까지.

놈들은 힘을 숨길 생각이 없는듯했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세세하게 느껴진다.

놈들은 모두, 9성의 초월자다.

느낌이 싸하다.

진짜 함정은 이거였나.

이거. 혹시...

‘...좆 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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