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 만찬(2) >
“이해가 안가네.”
“무엇이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한가롭게 밥이나 처먹자는 니 말이, 이해가 안 간다고.”
살롬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경계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그대도 지금 보고 있지 않은가?”
보고 있다? 내가?
“무엇을?”
“우리가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을.”
코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싸울 의지가 없다?
누굴 병신으로 아나.
아까도 언급했지만 지금 내 주변을 포진하고 있는 시련자들은 힘을 갈무리한 상태다.
여화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눈앞의 살롬, 놈은 6성을 바라보고 있는 초월자라고.
그런 살롬의 기운을 나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도 하지만 글쎄.
지금의 나만해도 귀기를 끌어올려 9성의 신격을 뿜어내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1초에서 2초 남짓.
태세가 언제든지 돌변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이걸 증거라고 들이밀다니.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려다 그대로 다시 집어넣었다.
싸울 의지라...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하다.
잠깐만, 이거, 설마 그건가?
일시적인 휴전.
그 휴전을 세 진영 중 단 한쪽이 ‘먼저’ 깨게 된다면 집중 포화를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같이 일종의 ‘중립’에 선 놈이 그 휴전을 깨버린다면?
아비규환이 펼쳐질 수도...
‘아니지. 모자라.’
나보다 에피소드를 많이 클리어해본 놈들이 모를 리가 없다.
이 에피소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형님을 죽이거나 최후의 1인이 되는 것.
놈들이 말한 것 중 형님을 찾아 죽이는 건 가장 베스트 중에 베스트.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곳에 있는 모두는 10성의 신격을 얻게 된다.
즉, 모두가 힘을 얻지 못하게 한다는 살롬의 말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는 뜻.
놈이 말실수를 한 걸까.
아니면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 걸까.
‘아리송한데... 아니면 그냥 나를 꾀어내기 위한 술수인가.’
상황은 명확했다.
세 진영의 시련자들은 현재 작은 끈으로 연결되어있다.
너무나도 얇아서 살짝 건드리면 끊길만한 그런 끈.
‘만찬이라...’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것 같다.
“아직도 고민하는가. 우리는 그대와 할 말이 아주 많아.”
겉보기에는 호감이 잔뜩 묻어나오는 살롬의 말에 나는 반응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밥을 못 먹었어.”
자극하던 귀기를 조용히 가라앉혔다.
“실망할 정도의 만찬만 아니었으면 하는데.”
씩 웃으며 말하자.
“그건 걱정할 필요 없네. 아주 인상적인 만찬을 준비했으니까.”
마찬가지로 살롬이 작게 웃는다.
허허. 이 새끼, 지나치게 음흉한데?
***
범죄와의 전쟁이었나.
그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는 그들을 따라 만찬장으로 향했다.
당연히 주변도 관찰했다.
-타이탄은 생각보다 매우 평화로웠어 .
잿더미가 흩날리고 곳곳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걸리버 여행기가 떠오르더라, 적어도 발바라 대륙에서의 일을 겪은 우리가 보기에 타이탄은 낙원 수준이었어. 거대한 나무들과 내 크기만 한 갈대들이 즐비한 평원까지. 볼게 참 많았지.
거대한 나무라 추정되는 것들은 밑동부터 잘려 나간 것들과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두동강나 있는 것이 수두룩했으며. 갈대들이 있었다고 추정 되는 곳은 땅이 심각하게 파여 핵전쟁이 일어난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수도 없이 언급했지만 나는, 타이탄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가 많다.
정말로 많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타이탄은 들었던 이야기들과 너무나도 달랐다.
전쟁의 흔적, 아니, 일방적인 학살의 흔적이 즐비한 이곳을 어떻게 낙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타이탄은 대장장이들의 천국이었어. 행성 전체를 두르고 있는 용맥이라는게 있는데, 그걸 이용해서 무기랑 갑옷을 만들고 그러더라. 어느 정도냐면 대충 만든 게 전설 이상의 아이템일 정도였거든.
건질 정보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용맥.
지구에서의 ‘용맥’과 단어는 같지만 뜻하는 것은 다르다.
타이탄의 내핵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기운이 마나와 만나 행성 전체를 도포 두르듯 감싸고 있는 것, 그것을 이쪽에서는 용맥이라고 한다.
그걸 어떤 식으로 이용해야할지는 대충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상황인데 이거,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거기까지는 안가도 될 것 같다. “생각보다 과묵하군.”
중간에 생각이 끊긴다.
고개를 돌리자 살롬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갈 뻔했다.
괴물같이 생긴 놈이 끈적끈적한 눈깔로 나를 훑는 게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까칠하기까지 하고.”
이 새끼가 뭐하자는 거야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개인적으로 여화님을 홀린 그 솜씨가 매우 부러워. 정말이지 재미있는 인간이야.”
내 질문에 대답하는 건지 아니면 혼잣말을 하는 건지.
이 살롬이라는 놈의 화법은 적응하기가 정말로 어려웠다.
무시하고 윌의 속삭임을 발동시켰다.
‘대상자는 시련자 한수아’
머릿속에 작은 끈이 연결된 기분이 들기가 무섭게.
-이도님? 이도님이에요?
다른 사람이랑 착각할 정도로 내 목소리가 흔한 목소리는 아닐 텐데.
-주변 상황은?
-어... 글쎄요. 그냥 조용해요.
-조용하다고?
-예 주변에 아무도 없고 시체만 즐비해요. 여기 거인 족들이 산다는 행성 아니었어요?
두 번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
타이탄은 분명 거인들이 사는 행성이고 그들만의 문화가 꽃피워진 세상이다.
-살아남은 거인들은 거의 없는 거 같아요. 너무... 처참해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 타이탄에 있는 초월자들은 나와 한수아보다 일찍 이곳에 강림했다.
하루, 어쩌면 그 이상.
그 기간 동안 이놈들이 여기서 딱지나 치고 있었을 리 없지 않은가.
분명 여화는 타이탄에서 소규모 분쟁이 일어났다고 했었다.
‘스케일의 차이인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어디까지나 그녀만의 개인적인 기준이었나 보다.
‘2만 킬로미터면 적어도 이 행성의 절반 정도는 될 텐데 그 거리가 초토화되었다는 건...’
조금 과장이긴 하지만 이 타이탄에 살아남은 거인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었다.
-일단, 지금 내 위치 확인되지?
-네.
-지금 이쪽에 있는 시련자들은 대충 110 정도거든. 근데 이게 전부일 리가 없어.
모든 초월자들이 타이탄으로 강림했다면 그 숫자는 절대로 적지 않을 것이다.
최소 200에서 최대 300.
거기다 대의의 이면 소속인 실페리온도 보이지 않는다.
죽었을까?
글쎄, 확신할 수 없다.
그나마 확실한건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지금 이 행성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거.
-몸부터 숨기고, 가능하면 그 자리에 숨어있어. 이쪽 일 끝내고 갈 테니까.
-숨어요?
-그게 싫으면 내가 있는 쪽으로 오던지. 권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수아는 내 말에서, 지금 내가 어떤 모종의 일로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녀가 화제를 돌린다.
-…그런데 혹시 그거 들으셨어요?
들었냐고?
-뭘?
-안내자가 그러던데요. 타이탄에 있는 시련자들 중에 ‘인벤토리’를 사용 할 수 있는 건 저랑 이도님 둘뿐이라고.
-알고 있어.
-아... 그럼 대기실에서 저랑 이도님만 ‘상점’을 이용 할 수 있는 것도요?
-그래.
건너편 너머로 한수아가 시무룩해한다.
거참,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감정이 나오나?
생각보다 상황이 여유롭나보네.
-무슨 일 있으면 말하고, 죽지마라.
-...네. 이도님도요.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통신을 끊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살롬이 말한다.
“많이 아끼는 모양이군.”
“내가 내 사람은 잘 챙기거든. 누구랑은 다르게.”
살롬은 피식 웃었고 주변에 있던 시련자들도 피식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걸었고, 또 걸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눈앞에 거대한 성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부서진 곳 하나 없이 높게 솟아나있는 성벽.
그 높이만 해도 최소 400여 미터는 될법했다.
‘이거 진짜 걸리버가 된 기분인데.’
견고하기 그지없는 성벽은, 하나하나가 단단하기로 소문난 아다만티움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게 이쪽 세상에서는 철처럼 흔한 광석인걸까.
생각보다 재미있는 세상이네.
성벽 안으로 진입한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건물들의 외형이 내 시선을 잡아끈다.
일단 상점가, 주택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건물들이 부서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는데 그 외형이 매우 거대했다.
거기다 정면에 보이는 가장 큰 건물.
중국의 다이 노이 황궁에다가 스페인의 가우디 성당을 합친 외형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리 봐도 저기가 그 ‘만찬장’이라고 불리는 곳 인거 같은데.
만찬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황궁’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만찬장 앞으로 향하자 기다리고 있던 거인이 보인다.
“오셨습니까. 헤헤”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는 거인이 정중하다 못해 비굴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다.
당연히 그 대상은 나를 비롯한 수많은 시련자들이다.
힐끔 뒤를 돌아보자 시련자들이 감흥 없는 표정으로 힐끗 거인을 바라본다.
마치,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행동하는 그 모습에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거인을 바라보았다.
덩치는 약 5미터, 온몸에 걸치고 있는 옷들은 비단으로 되어있었고 군데군데 장식되어있는 보석들은 다이아몬드보다 비싸보였다. 진정한 의미의 사치품이 아니던가.
-타이탄에서 뭘 했냐고? 발바라 대륙에서도 전쟁을 했으니 뻔 하잖아?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인의 외형을 다시 살폈다.
-하긴, 조금 다르긴 했지. 그쪽 세상은 발바라 대륙과는 약간 다르게 황제를 만들기 위한 싸움이 메인이었으니까. 1황자 2황자, 둘 중 어느 한쪽 편에 서서 황제를 만들어보라는데 비굴하다 못해 무능한 2황자 새끼보다는 능력 있는 1황자가 낫겠다 싶어서 걔를 황제로 만들어줬었지.
그의 머리에 씌워져있는 왕관이 허울뿐인 허상처럼 보인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도 저 거인은 매우 만족해하고 있었다.
비굴한 모습과 만족감.
이게, 진정 한 종족의 왕으로써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태도인 것인가.
-2황자 이름이 펠레노리였나. 아마 걔가 황제가 됐으면 타이탄은 내분으로 일주일 안에 망한다에 내 손모가지 건다. 그놈 나라 팔아먹는데 아주 소질이 뛰어난 놈이었거든.
내가 걸음을 옮기지 않고 거인 왕을 바라보고만 있자 옆에 있던 살롬이 물었다.
“펠레노리라고 하지. 거인족의 왕인데, 혹시 아는 사이인가?”
그럴 리가.
피식 웃고는 만찬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그러고 보니 한수아한테 그 말을 안했네.
가능하면 여기로 오지 말라는 내 말의 저의.
그건 내가 여기서 뭘 하려는 지에 대한 답과 일맥상통한다.
사실, 뻔하지 않은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살짝 고개만 돌려 살롬과 눈을 맞췄다.
놈이 작게 웃고, 나는 즐겁다는 듯 웃었다.
‘전부, 죽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