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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를 한다는 건-120화 (119/131)

120화.  < 만찬(1) >

내 눈앞에 놓인 어마어마한 양의 아이템을 쭉 훑어본 쎄쎄가 말했다.

“필요한건 그게 다에요?”

대답하지 않고 아이템들을 하나하나 인벤토리에 쑤셔 넣었다.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으로 꽤나 작은 ‘어떤’ 물건을 손에 들자 그새를 못 참고 쎄쎄가 묻는다.

“스타킹이랑 여성용 생리대. 남은 건 대부분이 여성용 물건이네요? 그런 걸 왜... 혹시 이도님 취향이 그쪽이었어요?”

그럴 리가.

마저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고개를 들자 쎄쎄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마치 설명해주지 않아 삐진 듯한 모습인데, 굳이 설명까지 해줘야하나.

“혹시 코인이 넘쳐나서 뭘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서 그런거에요? 그렇다고 치기에는 벌써 100억 가까이 쓰셨는데, 하필이면 왜 그걸...”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냐?”

쎄쎄가 잠깐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설마 그 한수아라는 시련자한테 주려고요? 왜요?”

쎄쎄는 정말로 궁금해하는 듯했다.

아니, 궁금해 한다기보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전 바보가 아니거든요.”

바보 맞는 거 같은데.

“저는 분명히 기억해요. 이도님이 정지혁이라는 사람을 찾은 적이 있는 거, 그때 감정 변화가 꽤 극심하셨는데 아무리 봐도 이도님이 정지혁이라는 그 사람을 죽일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러면... 결국 그 한수아라는 시련자도 죽어야 하는데 마치 그 시련자를 챙기는 것 같은 모양새네요?”

“그래서?”

“아... 설마 그거에요? 신경 써주는 척 하다가 고통 없이 쓱싹?”

말없이 쎄쎄를 응시했다.

“아니..에요?”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

“진짜 아니에요?”

아니다.

내가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니까.

그런데 쎄쎄가 보기에는 아니었나보다.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그리고 ‘그것’들은 대체 왜 사신거에요?”

묘한 데자뷰가 느껴진다.

에피소드를 처음 진행할 때였나.

권총을 삿을 때, 쎄쎄가 지었던 그때의 표정과 흡사하다.

아니 매우 똑같았다.

당연히 나는, 그때처럼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

상점에서 산 ‘천의복’이라는 전설 아이템을 천천히 걸치며 바지를 입고 신발을 신었다.

이미 전설 이하 아이템의 효과는 지금의 내게 있어서 거의 무의미하지만 심리적인 문제라고 해야 할까.

평소 사용하지도 않던 투구까지 샀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너무 과묵하시네. 이젠 말해줘도 되잖아요? 보는 사람도 없는데.”

“보는 사람이 없다?”

“네. 없잖아요. 아스가르드랑 통신도 끊겼고 타이탄은 말할 것도 없고, 여기에는 이도님이랑 저, 둘 밖에 없어요."

쎄쎄가 천천히 다가온다.

“궁금한데, 이제 슬슬 말해줄 때 됐잖아요?”

그녀가 손을 뻗더니 내 볼을 가볍게 쓸어내린다.

“이도님은 누구에요? 대체 숨기고 있는 비밀이 뭐에요?”

그녀의 손이 점점, 내 목을 타고 가슴어림으로 내려온다.

여화와 한수아에 비하면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그래도 쎄쎄는 미인이다.

오히려 몸매 쪽으로만 보자면 여화를 능가할 정도의 폭발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니. 그러니까 지금 뭐하는 건데.

“이도님의 권능은, 대체 뭐에...”

터억-

내 배꼽 아래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손을 그대로 잡아챘다.

재미있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이제는 보는 사람이 없네?

“너, 나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나보네.”

당황도 잠시, 그녀가 싱긋 웃는다.

“궁금하다뿐일까요. 저는...”

“내 사람이 되고 싶다?”

싱긋 웃던 쎄쎄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진다.

단순히 안내자로서 무언가가 궁금했다고 생각 할 순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중간에 끊은 내가, 꺼낸 그 말은 지금의 맥락상 나와서는 안 될 말이었다.

왜 하필, 내 사람이 되겠냐는 말이었을까.

"아스가르드에 있는 초월자들은 죽음의 자유가 있지."

언젠가 얼핏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죽음의 자유를 포기하고 언제 끝날지 모를 게임에 종속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듣고 앞서 말했듯 얼핏 들었던 이야기들이라 자세하게는 몰랐지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안내자’라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안다. 아니, 알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될 수 있는 이들은 안내자말고는 없었으니까.

“죽음의 자유를 포기하고 스스로 안내자가 되었으면서 이제는 막상 에피소드가 끝난다니까... 죽기가 싫어졌나?”

에피소드에 종속되어 에피소드가 사라지면 같이 사라지는 존재.

그게 안내자다.

내 말투는 차가웠고 그걸 듣는 쎄쎄의 표정은 석고상처럼 점점 더 심각하게 굳어져가고 있었다.

쎄쎄가, 황급하게 내 팔에 잡힌 손을 빼내려했지만 무시하고 손에 힘을 주었다.

“물었는데, 죽음이 가까워지니까 죽기가 싫어졌냐고.”

“그걸... 당신이 어떻게...”

“생각해보면 웃기지. 안내자인 네가 대의의 이면 소속이라고? 웃기긴 했지만 그냥 넘어가자. 어차피 이제 와서 이런 대화는 무의미하니까. 그러니까.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으면 하는데.”

조용히 손에 힘을 풀었다.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선 쎄쎄가 한숨을 푹 내쉰다.

“본론이요? 본론. 좋아요. 저는 살고싶어요. 죽고 싶지 않다구요. 거기다 아무리 봐도 이도님은 공백의 왕이 될 거 같거든요. 지금 이 대화로 또 확신했어요. 이도님한테는 이 모든 상황이 뻥 뚫려있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고. 저는 이도님 편에 서고 싶어요.”

이게 본론이었다.

내가 왕이 되어, 그러니까 신이 되서 자기를 살려 달라는 거.

그런데, 수도 없이 말했던 거 같은데.

“난 자선사업가가 아닌데. 자꾸 자선 사업을 부추기네. 내가 왜?”

냉정한 내 말에 쎄쎄는 오히려 안도를 하는듯했다.

“역시는 역시네요. 저는 이래서 이도님이 좋아요. 거래라는 것에 대해서는 마치 강박증이 있는 것처럼 확실하니까.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정보에요.”

“정보?”

“많은 것을 알려드리고는 싶지만 아쉽게도 제가 지금은 시스템에 종속되어있네요. 이거만 말씀드릴게요.”

조금 궁금해지려고 한다.

대체 무엇을 말해주려는 걸까.

“타이탄의 초월자들은 비록 각 진영에 속해있다지만 연대감 같은 것은 없어요. 철저하게 힘의 상하를 기준으로 정립되어진 자리만 있을 뿐이죠.”

파스슥-

쎄쎄의 오른쪽 검지가, 신기루처럼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스가르드의 지배자들보다 더한 강자가 나타난다면 망설임 없이 그에게 고개를 숙일 수도 있는 게 그들이죠.”

그게 시작이었다.

쎄쎄의 엄지, 중지, 약지... 천천히 손목까지 완전히 사라진다.

“저는 그게 이도님이라고 될 거라고 확신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이도님의 신격은 현재로서 최대 두 자리를 넘지 못하는 상황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타이탄의 시련자들이 이도님을 따를까요? 아니요. 지금 그들에게 이도님은 단순한 눈엣가시에 불과해요. 물론 여화와 손을 잡았다지만 그건 아스가르드에서의 일, 타이탄은 아스가르드와 분리되었기에 여화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을거에요.”

이야기가 점점 길어진다.

“본론만 깔끔하게.”

“아스가르드와의 모든 연결이 끊기기 전, 발락투스와 천군이 타이탄으로 메시지를 보냈어요.”

조금 의아했지만 일단 넘어갔다.

딴죽을 걸 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이미 오른팔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어진 쎄쎄의 표정은, 차분한 목소리와는 별개로 너무나도 극심한 고통으로 일그러져있는 상태였으니까.

“정지혁, 그의 위치를 이도님이 알고 있다고. 악!”

파사삭-!

이번에는 쎄쎄의 오른 다리가 그대로 박살났다.

균형을 읽고 쓰러지려던 그녀가 빠르게 의자에 주저앉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결국 말했다.

“거기까지 하지.”

“휴우... 그럴까요?”

아니 잠깐만.

“그런데, 통신을 보냈다고?”

무언가 다시 말하려던 쎄쎄를 잠깐 손을 들어 막았다.

“또 몸 어디가 사라지는 거면 말하지 말고.”

“아니요. 이 정도면 괜찮아요. 아스가르드와 연결이 끊기기 전에 지배자들을 제외하고 남아있던 모든 아스가르드의 초월자들이 타이탄으로 강림했어요. 천군과 발락투스의 메시지를 가지고.”

“대의의 이면은?”

“그들도 전부요. 지금 아스가르드에는 단 세 명만 존재해요.”

생각보다 큰 정보를 얻었다.

그러니까 타이탄만 정리하면 복잡해질 거 없이 깔끔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거잖아?

띠링!

[잠시 후, 시련자 이도와 한수아는 타이탄으로 진입합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정도면 거래의 대가로 괜찮나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쎄쎄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그래, 이거면 된다.

천천히 심호흡했다.

팔의 근육과 손가락, 허벅지, 종아리, 발가락까지.

온몸의 근육을 재정비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빛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좋아. 가보자.

***

순식간에 공간을 뛰어넘었다.

싸늘한 날씨와 주변 곳곳에 보이는 거대한 나무들, 발바라 대륙이나 지구에서는 절대로 보지 못했을 그런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이어서 내 코에, 무언가 타는 냄새와 피비린내 같은 것이 느껴진다.

벌써 싸움이 시작 된 걸까.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내 주변에 적은 없다.

일단 품에서 맹의 증표를 꺼내들고는 한수아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그리고는 가볍게 혀를 차고 말았다.

가까울 거라고 생각 하지는 않았지만 이거, 생각보다 너무 멀다.

거리만 해도 얼추 2만 킬로미터, 아니 그 이상이다.

지구 중심을 관통하는 총 길이가 약 1.3만 km인 것을 감안한다면 절대로 단기간 안으로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윌의 속삭임을 발동시키려던 그때,

터억-!

착지음이 들려온다.

긴장의 끈을 조이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약 100m정도의 거리에 머리에 곧게 솟은 뿔 하나가 인상적인 도깨비가 서있었다.

그가 말한다.

“나는 여화님을 모시는 살롬이다.”

통성명을 하자는 걸까.

내가 여화랑 동맹 맺은 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무슨 의도일까.

그런 잡생각이 떠오르던 그때.

콰지직-!

터억-

터억-

공간을 찢고 네다섯 명의 초월자들이 바닥에 착지한다.

이어서 천천히 하늘에서 날개를 달고 있는 천사를 비롯해 거대한 덩치의 거인까지.

수십, 아니 최소 100이 넘는 초월자들이 내 주변을 포진한다.

정말, 무슨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전에는 초월자, 하지만 지금은 시련자.

이제는 나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굳이, 우리가 싸울 필요가 있는가?”

..응?

“우리는 여화님에게 충성을 맹세했지. 그런 여화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그대와 싸운다는 건 어불성설이야.”

“어불성설이라고?”

내 말에 살롬이라는 도깨비가 천천히 말을 잇는다.

“10성의 신격? 우리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네.”

“필요가 없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신격을 얻은 다음에는? 아스가르드에서 여화님과 남은 두 지배자들과 싸워야겠지. 지금 이 에피소드는 괜히 일만 크게 만들뿐인 분란의 조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렇기에 우리는 이 에피소드를 빠르게 끝내야하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놈은 지금 진심일까?

살롬이 다시 말을 잇는다.

“에피소드에 휘둘린다면 괜히 일만 크고 복잡하게 만들뿐이지. 그렇게 피곤하게 살 바에는 차라리 그 누구도 그 힘을 얻지 못하게 만드는 게 가장 베스트가 아니겠나.”

묘한 뉘앙스다.

그 누구도 힘을 얻지 못하게 만든다라..

그때, 하늘에 있던 ‘천사’와 어느 구석에 몰려있던 드래곤 중 한명이 앞으로 나섰다.

“나는 천군님을 모시는 멜레앙. 현재 이 타이탄에 있는 모든 선 진영 초월자들의 대표를 맡고 있지.”

“나는 아룡님을 모시는 코르셀리움. 타이탄에 있는 모든 중립 진영의 초월자들을 대표한다. 솔직히 그대는 물론이고 저 살롬도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그게 베스트라는 것에는 동의해.”

혹시나 했는데, 이곳에 세 진영이 전부 몰려있는 상황이었나 보다.

거기다 자기들의 힘을 완전히 억제하고, 갈무리까지 한걸 보니 누가 어느 수준인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다.

이거 상황이 참 묘하게 돌아가네.

“베스트라...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데?”

“우리는 정지혁이라는 불청객을 찾아야하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 정지혁이라는 불청객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줬으면하는데.”

쎄쎄의 말이 맞았다.

이놈들은 알고 있다.

내가 형님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것을.

쎄쎄에게 듣지 못했다면 오히려 이쪽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어야했을지도 모른다.

“왜 대답이 없는가. 우리가 판단한 그대는 현명한 지도자의 이상적인 모습이지. 그러니 현명하게 대답해줬으면 하는군.”

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놈들은 정말로 진심인걸까.

답이 내려진다.

그럴 리가 없지.

심장 어림의 귀기를 끌어올리려던 그때.

“일단 식사부터 하는 게 어떻겠나. 조금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이것 봐라?

한가롭게 밥이나 처먹자고?

이 새끼들이,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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