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를 한다는 건-119화 (118/131)

119화.  < 준비 (3) >

한수아를 대기실로 보내고 나는 잠시간 발바라 대륙에 머물렀다.

나름 표정 관리를 하고는 있었지만 속은 타들어갔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에,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나는 양규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한수아를 제외한 모든 시련자들에게 이 대륙을 최대한 안정시키라는 말과 잘하고 있다는 등의 덕담을 건넸다.

그래 덕담.

딱 그거면 충분했다.

내가 세세하게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건 지금에 와서는 거의 무의미했으니까.

나를 제외한 모두는 이미 경험이 있고 내가 없는 시간동안 발바라 대륙에서의 일을 나름 깔끔하게 처리했다.

그런 이들에게 무슨 명령이 필요할까.

그들은 나의 승전을 위한 작은 파티를 준비하려했지만 이름만 파티였지 파고들면 파티를 가장한 논공행상의 현장이 될 확률이 높았다.

아니 높다기보다는 그냥 백퍼센트 확률로 그런 지루한 이야기가 펼쳐지겠지.

나는 당연히 그 파티를 거절했다.

내가 정치를 하려고 지금껏 달려온 게 아니니까.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나는 여태껏 군림했고 이제는 통치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발바라 대륙의 일을 손에서 완전히 내려놓았다.

이 이상 작별인사를 한다거나 그런 건 정말로 의미가 없다.

모두가 섭섭해 하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냥, 신경 쓰지 않았다.

뒤를 돌아 볼 여유가 지금의 내게는 없었으니까.

슬며시 손을 들어올렸다.

[대기실로 귀환하시겠습니까? Y/N]

Y를 가볍게 터치하기가 무섭게 내 몸을 빛무리가 감싼다.

그러고 보니 대기실에 가 보는 게 얼마만이지?

**

“오랜만이에요.”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쎄쎄의 인사에 작게 웃고 말았다.

“거의 2개월만인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너무 많아서 뭐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대답않고 눈앞에 보이는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먼지조차 쌓여있지 않은 걸 보니 이거, 혹시 매일 청소라도 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자연스럽게 먼지가 쌓이지 않는 건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놀랍네요. 여태껏 이도님 같은 시련자는 없었...”

“됐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경계를 그어야했다.

지금은 사적인 대화를 나눌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쎄쎄의 말을 중간에 끊은 나는, 딱 한 가지를 물었다.

“타이탄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지?”

약간은 기대했다.

쎄쎄는 명색이 안내자니까.

결론만 말하면 그녀는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종장. 이걸 소설이라고 친다면 이제 결말부분이 눈앞에 다가온 거죠.”

“결말?”

작게 한숨을 내쉰 쎄쎄가 조용히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오더니 내 앞에 다소곳이 앉는다.

“저는 모르고 있었거든요. 이 에피소드에 ‘불청객’이 있었다는 사실을.”

불청객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눈매가 살짝 찌푸려진다.

왜 자꾸 불청객이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걸까.

“처음에는 시스템도 그러려니 했었어요. 이도님의 성장이 유례없을 정도로 뛰어나다고는 해도 그에 근접한 채로 성장했던 이들도 분명히 있었거든요.”

누군지는 짐작이 갔다.

지금도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아스가르드의 머저리들.

“하지만 그들과 이도님은 달랐어요. 결론만 말씀드릴게요. 이도님의 성장이, 오직 이도님 스스로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는 걸 시스템이 눈치 챘어요.”

눈치 챘다고?

내 성장이, 나 스스로가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고?

순간 입술이 따끔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나보다.

그것도 매우 강하게.

“조금 혼란스러운데, 내 성장이 나 스스로 쌓아올린 게 아니라는 그 말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이레귤러.”

흠칫.

이레귤러?

“이레귤러란 세상의 균형을 파괴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괴물들을 통칭하는 말이에요. 그 기준은 본연의 신체 능력이 될 수도 혹은 가지고 있는 권능 같은 게 기준이 되기도 하죠. 엄밀히 말씀드리면 아스가르드의 세 지배자들도 이레귤러에요. 그들의 힘은 세상의 균형을 파괴하다 못해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는 괴물들이니까. 그래서 ‘페널티’가 생긴거에요.”

말없이 쎄쎄의 눈을 직시했다.

페널티라고?

“여태껏 모르고 있었어요. 이도님에게 가해졌던 ‘페널티’중 하나가, 에피소드를 처음 시작하고 나서부터 단 한 번도 이도님에게 적용된 적이 없다는 것을.”

이건 또 뭔 개소리인가 싶은 생각이 들려던 그때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쎄쎄가 말하는 페널티는 분명 이레귤러 칭호에 대한 페널티가 확실하다.

그 페널티에 대한 내용은 정확히 두개.

내가 스킬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과 효과가 있는 모든 아이템의 효과 감소 제한.

나는 여태껏 시스템의 기능을 이용해 스킬을 사용한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 첫 번째 페널티는 정상적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나조차도 애매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던 그 페널티.

그런데 그게, 적용이 되지 않고 있었다고?

“두 번째 페널티, 분명히 효과가 있는 모든 아이템을 사용할시 그 효과가 감소한다는 내용이었죠. 하지만요. 시스템이 말하는 ‘아이템’이라는 건 이도님이 입고 있는 그 흔하디흔한 갑옷과 이곳에 존재하는 침대나 책상, 이런 것들만을 한정하는 게 아니에요. 시스템에게 있어서 아이템이란 마나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기운, 대지의 흐름 귀신의 기운, 파멸의 기운, 바람의 기운 그 모든 것들을 총칭해요. 그러니까. 이도님은 에피소드가 진행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힘이 쭉 힘이 제한된 상태로 성장했어야 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네. 단 한순간도요. 오해할까봐 말씀드리는 건데, 이도님이 귀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리지 못한 것은 이도님의 몸이 그 격을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었어요. 그것과는 명백히 다른 거죠. 이도님은 머리가 좋으니까. 제가 지금 무슨 말하는 건지 아시죠?”

모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쉽게 말해줬는데 못 알아들으면 천치중의 천치일 테니까.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요. 이도님의 페널티는 분명 적용이 되고 있었어요.”

“...뭐?”

“적용이 되고 있었는데, 이도님이 아닌 다른 이에게 페널티가 적용되고 있었던 거죠.”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이게 뭔 소리야 자꾸?

내 표정을 읽은 쎄쎄가 부연 설명을 한다.

“이도님은 알고 있었나요? 누군가가 이도님의 페널티를 대신 분담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에피소드가 변한거에요. 이대로 변화없이 에피소드를 진행한다는 건 공정을 전제로 하는 시스템이 공정을 내팽개치고 불공정한 자세로 이도님에게만 너무나도 크나큰 혜택을 주는 것과 같으니까요. 쉽게 말하면 이런 거예요. 에피소드가 변한 이유는, 이도님과 그 누군가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라는 거.”

정신이 없었다.

짜증도 나고, 답답하기도 하고.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악惡을 지배하는 자가 당신에게 대화를 요청합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머릿속으로 작은 끈이 연결된다.

이어서 여화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잠자코 듣고 있었는데, 나 말이야, 이상하게 꽤 혼란스럽다?

네가 나보다 더 혼란스러울까.

-혹시나 했는데 너 정말로 양다리 걸치고 있었던 거니?

장난기 어린 여화의 말에 나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저 대화 요청은 그냥 무시 할 걸 그랬나보다.

그때였다.

띠링!

[타이탄으로 넘어가게 될 시련자는 이도, 한수아 총 두 명입니다.]

딱히 다른 의사를 내비친 적이 없었는데, 이 메시지는 갑자기 왜 뜨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던 그때.

[다음 에피소드 진입까지 10시간 남았습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쎄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매우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띠링!

[타이탄의 초월자들은 이 시간부로 ‘시련자’가 되었습니다.]

-...뭐?

“...뭐?”

여화도 당황했고 나도 당황했다.

[시작을 알린 아룡이 당황해합니다.]

[선에서 군림하는 자가 당황해합니다.]

다른 두 머저리도 당황했다.

지금 내가 잘못들은 건가.

시련자가 되었다고?

띠링!

[Episode #40-99. 종장]

[누가 왕인가. 누가 지배자인가. 대체 누가 모두의 위에 서 있을 수 있는가. 왜 누군가는 누구의 아래에 있어야하는가.]

[이 메시지는 모든 ‘시련자’들에게 공통으로 전달됩니다.]

[증명의 전장, 타이탄에서 스스로를 증명하십시오.]

...증명의 뭐?

멈추지 않고 출력되는 메시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종장이라고?

그리고, 99라고?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퀘스트 완료 조건입니다.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완료하십시오.]

[1. 최후의 1인이 되십시오.]

솔직히,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이미 에피소드가 10~15, 이런 식으로 압축돼서 공개된 적은 여러 번 있었으니까.

거기다 에피소드라는게 언제는 내 상식선에서 진행 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혼란스럽기는 해도 어떻게든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이후 이어지는 내용이 문제였다.

[2. 불청객 ‘정지혁’을 죽이십시오.]

불청객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했냐고 묻는다면 망설임없이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다.

불청객, 그 단어를 들었을 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단 한사람만 떠올랐었으니까.

정지혁.

형님은 불청객이라고 불리며 현재는 내 영혼 안에 자리해있다.

그곳에서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형님을 죽이려면... 어? 잠깐만.

-정지혁? 정지혁? 이상하게 익숙한데...?

젠장.

순간 소름이 돋는다.

내 영혼 안에 있는 형님을 죽이라는건, 결국엔 나를 죽이라는 거잖아?

-....그러고 보니 에피소드 초반에 네가 그러지 않았니? 정지혁이라는 시련자가 있냐고.

쓸데없이 여화는 기억력이 좋았다.

-이거 참, 일이 묘하게 돌아가네? 표정 보니까 그 정지혁이라는 애가 어디 있는지 너는 알고 있나봐?

여화의 말에 무언가 대답하려던 그때.

[퀘스트 완료시, 시련자들은 10성의 신격을 아무런 제한 없이 획득합니다.]

이건 또 뭔..?

[현 시간부로 아스가르드와 모든 시련자들간의 ‘통신’이 끊깁니다.]

그 말과 동시에 머릿속에 이어져있던 여화와의 끈이 강제로 끊겼다.

조금, 아니 매우 많이 당황스럽다.

고개를 들자 쎄쎄와 눈이 마주친다.

시스템이 나와 형님에게 벌을 주고 싶어 한다고?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두 가지 선택지 중에 내게 남은 것은 첫 번째.

타이탄의 모든 ‘시련자’들을 죽이는 것. 그거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힘의 차이와는 별개의 문제로 접근해야한다.

거기다 타이탄에 있는 초월자들은 나와는 다르게 선택지가 두 가지다.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싸우던지 아니면 형님을 찾아내 죽이던지.

초월자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전자가 아닌 후자를 택할 것이다.

하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형님을 죽이려면 내 영혼을 끄집어내야한다.

그 과정이 과연 순탄할까.

실험 대상이 되어 실험대 위에 누워서 팔다리 잘린 채로 내장을 적출당하는, 그런 과정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젠장.

상황이 너무 명백하잖아.

정말이지 나한테 뒤는 없나보다.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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