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진퇴 양난(2) >
별들의 운하로 걸어가던 나는 맞은편 중세식 건물들이 즐비한곳에서 세 명의 이종족을 만났다.
이족보행을 하는 악어와, 검은색 피부의 다크엘프, 그리고 실페리온, 언제 봐도 그의 얼굴에 나있는 돌기는 참 인상적이었다.
그가 말한다.
“결정했네.”
많은 것을 함축한 말은 아니었다.
내가 아스가르드로 오면서 내 쪽으로 붙으라고 말했던 그 말에 대한 답.
실페리온은 내 쪽에 붙을 이들을 데려온 게 분명하다.
문제는 그 숫자가 턱없이 적다는 거.
나는 말없이 실페리온과 두 명의 이종족을 스쳐지나갔다.
의문 섞인 표정의 실페리온이 무언가 말하려던 그때.
[설마, 세 명이 전부는 아니겠지.]
혜광심어로 실페리온에게 의념을 보내자 그가 멈칫한다.
눈치 빠른 그가, 같은 혜광심어로 대답했다.
[당연히 전부는 아니네.]
나는 천천히 걷는 속도를 늦췄다.
[하나만 확실히 하자. 난 니들이 잃을게 없는 미친놈들이라고 생각하거든. 이 의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나는 아스가르드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지는 못한다.
여화와 연합을 하긴 했지만 그녀에게 얻은 정보가 확실하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물론 그녀가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신중에 신중을 기한 다해서 나쁠 건 없었다.
[전적으로 매우 동의하네.]
실페리온의 말에는 확신이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모자라다.
[잃을게 없는 미친놈은 잃을게 많은 미친놈들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지. 이 의견에 대해서는?]
자꾸 질문을 던지는 내 속내가 궁금했던 걸까.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니들을 소모품으로 써도 되겠냐고 묻고 있는 거다.]
실페리온이 멈칫한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던 두 명의 초월자중 이족보행을 하는 악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묻는다.
“왜 굳이 혜광심어로 묻고 답하는 거지? 우리가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인가?”
악어의 지능이 낮았던가.
그런 쪽으로는 내가 젬병이라 확실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저 질문을 던진 악어가 멍청하다는 건 확실하다.
그를 무시하고 실페리온에게 물었다.
[타이탄으로 강림한 대의의 이면 소속 초월자들은 몇 명이지?]
[...강림한 이들은 현재 총 25명. 타이탄으로 강림하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하면 31명이라네.]
31명이라.
생각보다 매우 적다.
[배신자들은 잡아 족쳤고?]
[...그렇다네.]
어떻게 족쳤는지는 관심 없었다.
정리하면.
[악에 받쳐 목숨을 버릴 정도로 다른 지배자들이 원망스러운 놈들이 총 31명이라는 거지?]
내 말에 담긴 뜻을 어렴풋이 짐작한 걸까.
실페리온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맹목적인 충성 같은 것은 바라지는 않는다. 아니, 애초에 생각도하지 않았지. 너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야. 각 진영에 속한 지배자들의 쫄따구들을 죽이는 거.]
[...]
실페리온도 알고 나도 안다.
대의의 이면에는 두 자리 수의 신격을 갖춘 존재가 아예 없다는 것을.
사실 당연한 거였다.
그런 초월자가 있었다면 대의의 이면이 구석에 숨어있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런 그들에게는 힘을 가진 강자가 필요하다.
그것은 결국 실페리온이 내게 관심을 두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침식으로 고향을 잃은 너희들은 지배자들을 죽이기를 원하지.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세 지배자를 죽일 거다. 너희들의 역할은 내가 그 무대를 만드는데 손을 보태는 거, 그게 전부야.]
내 면상에 금칠하는 것 같지만 솔직히 나니까 이런 말이 가능했다.
신체는 6성, 귀기를 끌어올린다면 9성에 이르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나는, 아직 에피소드를 중반부까지밖에 클리어 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에피소드를 전부 클리어 하게 되면 얻게 되는 힘은 어느 정도일까.
그 가능성 때문에 진영을 불문하고 내게 이런 관심이 쓸리고 있는 것이다.
실페리온이 묻는다.
[그대는 여화와 연합을 했지. 일시적이라고는 판단되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어. 대체 여화는 어떻게 죽일 생각이지?]
생각해보지 못했다면 거짓이리라.
나는 여화와 몸을 섞으면서 그 생각을 했었다.
여러 개의 목숨을 가진 여화를, 대체 어떻게 죽여야 할까.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리긴 했지만 역시, 맞춰야할 퍼즐이 부족하다.
여화를 어떻게 죽일 거냐고 묻는 실페리온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질문을 던질 사람은 실페리온이 아닌 나였고, 실페리온은 오직 대답만 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나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하나만 확실히 하자. 내가 니들을 써먹을 곳이 아무리 생각해도 딱 하나밖에 없어.]
[하나?]
진지한 표정으로 실페리온과 그 옆에 있는 두 초월자를 바라보았다.
[실천과 생각은 일치를 이루는 경우가 많지가 않아. 나는 너희가 정말로 어느 정도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가 궁금하네. 지구에는 이런 단어가 있거든.]
내가 맞춰야할 퍼즐.
그 퍼즐의 한 조각은 대의의 이면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그 퍼즐 조각의 역할은 하나밖에 없었다.
[자살 폭탄 테러라는, 아주 흥미로운 단어가.]
안 그래도 굳어져있던 실페리온의 표정이, 더욱 더 심각하게 굳어진다.
마치 석고상처럼.
***
익숙한 J사의 차를 타고, 우주를 가로지르던 내 머릿속에 뜬금없이 잡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옛날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은하철도가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실소를 터져 나온다.
잠시간의 여유 같지 않은 여유.
방금 전, 자살 폭탄 테러를 언급한 내 말에 실페리온은 침묵했다.
마치 깊게 생각할거리라도 있는 그 모습에, 나는 마저 생각하라며 그 자리를 피해주었는데, 솔직히 나같아도 곧바로 대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 만약 그 자리에서 실페리온이 망설임 없이 오케이를 외쳤다면 의심부터 했을 것이다.
솔직히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나는 실페리온에 대해서 잘 모른다.
안내자 쎄쎄에게 들었던 이야기의 파편들과 아스가르드에서 몇 번 안면 튼 게 전부였으니, 솔직히 잘 안다는 게 더 이상하리라.
그런데 실페리온을 넘어 그가 속한 단체인 대의의 이면을 잘 안다?
이건 터무니없는 개소리 일수밖에 없다.
다만, 나는 침식을 좋아하지 않고 실페리온도 침식을 좋아하지 않으며, 대의의 이면이라는 조직은 애초에 침식으로 멸망한 종족의 초월자들이 속한 단체라는 거.
그들과 나의 공통점은 이게 전부였고, 그런 상황에서 내가 그들을 신뢰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피라미드식의 절대적인 우위라는 자리를 확고하게 다진 지배자들과는 다르게 밑에서 발악하려는 그들이지만 믿고 안믿고는 역시 별개의 문제다.
당연하게도 그런 대의의 이면에게 내가 제안할 수 있는 관계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관계가 아닌 철저하게 비즈니스적인 관계 일 수 밖에 없다.
과연 내가 희생을 중요시하는 것을 알고 있는 그들은 내 ‘제안’에 대해서 어떤 결정을 할까.
확실한건 그들이 매달릴 구석은 나밖에 없다는 거.
운전석에서 눈을 감고 있던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긴 이야기들을, 굳이 길게 끌고 갈 필요가 있을까.
소름 돋는 생각이긴 한데, 내 머릿속의 계획이, 그러니까 구상하고 있는 퍼즐이 완성된다면 아마 모든 게 앞당겨질 것이다.
당겨질 확률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무조건 앞당겨진다.
슬쩍 고개를 돌려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위치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백미러에 내 얼굴이 비춰 보인다.
나는 웃고 있었다.
마치 미친놈처럼.
***
정면을 조용히 응시하던 박유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드래곤이 퇴화에 퇴화를 거듭한 상태에서 등짝에 달려있는 날개와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뺀다면 아마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하고.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잡생각을 털어낸 박유정이 천천히 손을 들어올린다.
짝!
조용히 박수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어서.
후우우웅-!!
조용히 돌풍이 몰아치며 수천마리의 크레타노스를 그대로 날려버린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인간 병사들과 오크 병사. 그리고 고블린들까지 감탄했다.
그녀의 위용은 누가 봐도 압도적이었으니까.
하지만.
-------!!!!!!
굉음이 울려 퍼지며 사방으로 퍼져나가던 수천마리의 크레타노스가 허공에서 그대로 터져버렸다.
박유정의 표정이 슬며시 굳어진다.
이건 다른 시련자들이 공격을 했다거나 스킬을 사용했다거나 하는 그런 게 아니었다.
애초에 이 요새에는 박유정 혼자밖에 없었으니까.
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뒤로 물러나요.”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락 요새’의 주민들과 병사들에게 후퇴를 명령한다.
살짝 고개만 돌려 요새 안쪽의 상황을 바라본 박유정은 이내 성벽을 짚고는 짧게 심호흡했다.
하늘에서 터져나간 크레타노스의 피가 요새 너머로 보이는 초원을 붉게 물들였고, 그 붉게 물든 초원에 그들의 살점들이 장식품처럼 널브러져있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수만 이상 개체의 크레타노스가 그 살점들을 씹어 먹는 그 과정들이, 박유정은 역겹다고 생각했다.
멍청하다 못해 역겨운 종족.
이미 각 지역에 출몰한 크레타노스를 수만 마리 이상 학살한 그녀였지만 지금은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
방금 전 단순한 기함만으로 공중에 있던 수백개체의 크레타노스를 터트려버린 괴물.
분명 외형은 붉은 도마뱀과 흡사했지만 다른 크레타노스들과는 달랐다.
게임으로 치자면 네임드 몬스터, 혹은 보스 몬스터.
분명 따로 이름이 정해져있을 테지만, 그 이상 박유정은 알지 못했다.
평소라면 메시지로 저 몬스터의 이름과 그에 대한 유래까지 설명해주던 초월자들이 너무나도 조용했으니까.
다만 저 괴물이 강하다는 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모든 신체 능력이 90레벨을 넘어선 박유정이 조용히 침을 삼킨다.
도망을 쳐야하나. 아니면 싸워야하나.
도망을 친다면 혼자서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싸운다면 백프로 죽는다.
지금도 저기서 여유롭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저 괴물은, 다른 머저리 같은 크레타노스들과는 다르게 매우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했으니까.
아니다.
이성적인 것을 넘어 저 모습은, 마치 먹이의 발악을 지켜보는 포식자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할까...’
박유정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사실 이미 답은 정해져있었다.
죽게 된다 하더라도 무조건 싸워야한다.
싸우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이도에게 죽게 될 테니까.
‘이게 그거구나. 호랑이를 피하려다 늑대를 만났다는, 아니지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거네.’
짧은 한숨을 터트린 박유정이 천천히 성벽위로 올라섰다.
이렇게 된 거 그냥 한번 해보자.
박유정은 몸의 모든 기운을 끌어올렸다.
후우웅-!!
박수도 치지 않았는데 그녀의 몸에서 바람이 뿜어져 나오며 그것이 그녀의 몸을 감싼다.
나풀거리던 머리카락 사이로, 정면의 ‘목표물’을 응시하던 박유정이 조용히 박수를 치려던 그때.
쩌엉-!!
공간이 찢겨지며 허공에서 한수아와 그녀를 보호하는 성기사 무리, 그리고 흑마탑의 탑주인 아퀴나스가 튀어나온다.
메스 텔레포트.
박유정은 이미 저 모습을 몇 번 보긴 했지만, 언제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고 생각했다.
“후퇴를 하라는 말은 들었어요.”
품안에 상자를 들고 램프의 지니 같은 유령과 동행하고 있는 한수아의 물음에 박유정은 말로 답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만 살짝 ‘괴물’쪽으로 이동시킨다.
마치 직접 보라는 것 같은 그 뉘앙스에 한수아는 순순히 요새위로 올라와 그 ‘괴물’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정령들을 소환해야 할 것 같군.
아스트레이의 말에 한수아는 침묵했다.
그냥 침묵이 아닌 긍정의 침묵.
그 모습에 박유정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터트렸다.
한수아.
그녀의 신체가 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녀가 부리는 ‘정령 소환술’은 위협적이다.
아니, 그냥 사기였다.
한수아가 고개를 돌려 박유정을 바라본다.
“여기만 정리되면 이번 에피소드는 끝나니까, 뒤에서 정령들을 조금 도와주세요.”
생각보다 정중한 그 말에 박유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만 정리되면 끝난다는 건, 이미 다른 지역은 모두 정리했다는 건가?
이어서 한수아가 조용히 정령을 소환하려하자 박유정은 잡생각을 끊었다.
그녀도 권능을 발동시키려던 그때.
쩌어어엉-!!!
메스 텔레포트가 발동되었을 때의 굉음과는 차원이 다른 굉음이 하늘에서 들려온다.
누구 더 올 사람 있냐고 물으려던 박유정은 그 입을 그대로 다물고는, 다른 말을 꺼내들었다.
“저건 또 뭐야.”
후우웅-!!!
하늘에서 한줄기의 빛이, 크레타노스들이 있는 한 중간에 천천히 내려앉는다.
박유정이 황당한 어조로 말했다.
“...스포츠카가, 저기서 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