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진퇴양난 (1) >
욕실에서 같이 씻고, 다시 몸을 섞은 뒤 여화는 침대에 널브러져 잠이 들었다.
아니, 잠이 든 게 맞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적어도 눈을 감고 있으니 그냥... 잠을 잔다고 치자.
그런 그녀의 매끄러운 등과 마치 예술품처럼 가지런한 곡선의 조화를 이루는 가슴라인.
다시 봐도 여화는 아름다웠다.
그런 그녀를, 나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중간 내용이 많이 생략되며 내가 여화와 친밀해진 것처럼 보이긴 했으나 그건 결국 겉보기의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땀을 흘릴 정도로 몸을 섞어도, 그녀의 몸을 탐해도, 이건 앞서 말했듯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행위에 불과하다.
나는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생각할수록 우습다.
나를 죽이고 형님을 죽인, 그리고 지구를 멸망시킨 장본인이자 그것을 넘어 내가 지구를 구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그 근본적인 계기까지,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여화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여화에게 죽지 않았더라면 시련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시련자가 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여화와 몸을 섞을 일도 없었을 터.
이 흘러가는 상황들에 대해서 생각을 이어갈수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과거에 나를 죽인 존재와 손을 잡는다니, 이건 늑대를 잡으려고 호랑이랑 손을 잡는 격이 아니던가.
이게 옳은 일인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이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적어도, 속내가 어두컴컴해서 내 뒤통수를 후려칠 다른 놈들보다는 매우 직설적인 여화가 상대하기 편했으니까.
자는 척 하는 여화를 그대로 내버려둔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는 방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향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 자리한 생각은 하나였다.
이 엘리베이터를, 이곳 아스가르드가 아닌 지구에서 볼 날이 올까하는 그런 잡생각.
로비에 도착하고 걸음을 옮기려다 순간 흠칫했다.
“이제야 오는군.”
흠칫 할 수밖에 없었다.
로비 구석에 있는 한 개의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
그중 한 의자에 앉은 채로 눈앞에 다려진 커피를 음미하는 발락투스가 내게 인사했으니까.
솔직히 당황스럽다.
내가 여화의 방에 들어간 지 최소 서너 시간은 지났을 텐데, 저 모습은 뭘까.
설마 계속 저 자리에서 날 기다린 건 아니겠지?
힐끗 고개만 돌려 주변을 살펴보니 천군은 보이지 않았다.
거참.
발락투스라는 존재는 참 알다가도 모를 이상한 존재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가 나를 향해 작은 웃음을 짓더니 자기 맞은편 의자에 시선을 준다.
저기 앉으라는 것 같은데, 그다지 내키지가 않는다.
똥 폼 잡는 놈의 저 모습이 매우 아니꼬운 것도 한 몫 하긴 했지만 그냥, 저놈이랑 합석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를 스쳐지나가고 호텔 입구 문을 열어젖히려던 그때.
“지금이 마지막이네.”
그의 말이 나를 붙잡는다.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이라고?
“이 자리에는 천군도 없고 여화는 위층에 있을 터이니, 툭 터놓고 이야기 할 수가 있게 되었어. 여화와 관계를 원만하게 하라던 내 말을, 그대는 유의 깊게 들었던 것 같군. 그렇게 보이진 않았는데 말이야.”
듣자마자 인상이 팍 구겨진다.
뉘앙스가 참, 뭐라고 해야 할까.
2옥타브에서 3옥타브를 넘나드는 개 짖는 소리 같다고 해야 할까.
“말씀이 참 묘하네요. 마치, 우리 사이에 여전히 ‘끈’이 이어져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네? 사람 기분 참 묘하게.”
나를 조용히 응시하던 발락투스가 실소를 터트린다.
“대화는 서로의 말을 끝까지 들어야하는 것 아니겠는가. 천군과 내가 연합한 것은 결국 여화를 끌어내리기 위해서일뿐, 그 외의 다른 목적은 없네. 중요한건 내가 그대와 했던 ‘작은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거. 그게 가장 중요하네.”
아무래도 발락투스는 아까 전, 나를 붙잡을 때 ‘마지막’이라고 언급했던 것에 몇 가지 살을 보태고 있는듯했다.
그러니까.
“어쩌자는 겁니까. 저랑?”
“별거 없네. 그저 그대가 저 자리에 앉으면 여지가 있는 것이고 앉지 않는다면 그대는 나와 적이 되는 거야.”
눈짓으로 맞은편의 자리를 가리키던 발락투스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춘다.
그 감정하나 들어있지 않은 어두침침한 눈깔을 바라보며 나는 딱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이 새끼는 나를, 얼마나 멍청한 병신으로 보고 있는 걸까 하는.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이미 머릿속으로 결정했고 발락투스와 이야기하기 전에 모든 게 끝난 사안이다.
생각을 잠깐 멈추고는, 나는 그의 코앞에 있는 비어있는 목조 의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락투스가 살짝 기대감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제야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하겠...”
“제가 말입니다. 그쪽에 대해서 꽤나 재미있는 말을 들었거든요.”
의자의 등받이를 쓰다듬던 내가 발락투스의 말을 끊었지만 그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
“음.. 참 묘하네요.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에, 공백의 왕을 배신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발락투스가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는 밝혀질 진실이 조금 뒤늦게 밝혀진 이들이 지을법한 표정, 그의 모습을 유의 깊게 바라보던 나는 그의 모습에서 그것을 읽었다.
즉, 여화의 말은 진실이었다.
발락투스가 영면에 든 이유는 공백의 왕을 배신했기 때문이라는 그 말이, 진실이었다는 게 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그냥, 역겹다.
“여화에게 다 들었나보군. 하지만 이거 하나만 알아두게. 정확히 그것은 ‘배신’이 아니었어.”
이건 또 색다른 주제인가.
의문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대답한다.
“그저 그분과 나는 가는 길이 달랐을 뿐이네. 몇 가지 부연 설명을 하자면, 그는 자신을 모티브로 해서 생명체를 창조한 게 아니었다네. 그저 각각의 개성을 가진 생명체를 창조했지. 내가 그분과 가는 길이 다른 것은 필연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일어날법한 일이었네.”
“그래서요?”
“내가 그분을 배신했다면, 그분이 나를 소멸시키지 않았겠는가? 지금 그대의 앞에 내가 존재하니, 나는 소멸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그냥 잠을 잔 것에 불과해. 이게 그 증거라네.”
“그 양반이 생각보다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다면?”
“이 아스가르드에서 그분을 본 것은 오직 나밖에 없어. 생각을 한번 해보게. 내가 하는 말이 진실이겠는가 아니면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시스템에 의해 얼핏 들은 작은 파편들로 만들어낸 이야기를 퍼트리고 다닌 이들의 말이 진실이겠는가.”
갑자기 장르가 추리소설로 변한 느낌이다.
결국 진실은 나만 알고 있으니, 다른 놈들의 말은 믿지 마라... 뭐 이런 말인가.
“선동을 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진실을 밝혀내는 것은 어렵지.”
비수를 꽂아버리듯 말하는 발락투스의 태도는 매우 진지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지랄, 하고 있네.”
나도 모르게 속내를 그대로 내뱉고 말았다.
“...뭐?”
이미 엎질러진 물, 그냥.. 더 엎지르자.
“어이가 없네. 그래서 어쩌라고?”
“네가 공백의 왕을 배신했건 아니건, 네가 그놈이랑 뜻이 맞았던 안 맞았던 그딴 과거의 일을 내가 단 한번이라도 관심 가진 적이 있었냐?”
말이 자연스럽게 놓아진다.
맞지 않는 옷을 집어 던진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뭔가 되게 상쾌하다.
양손으로 탁자를 짚고는 당황을 숨기지 못한 발락투스의 눈을 그대로 직시했다.
“중요한건 이거잖아. 네가 모종의 이유로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고 영면에 들었다는 거. 네 입으로 말했지. 공백의 왕이랑뜻이 달랐다고, 결국 너는 공백의 왕이 하려던 일과 정 반대의 일을 하려고 했을 확률이 높아. 아니 확률이 아니지. 어떻게 포장하건 그게 진실일 테니까. 그런데, 그런 네가 나를 공백의 왕으로 만들고 그 2인자의 자리를 원한다? 내가 하도 이리저리 붙고 다니니까 병신으로 보이든?”
“결국 네가 내 아래로 들어온다는 건데. 신이 되는 나보다 더 힘이 강한 2인자? 너는 이게 상식적으로 맞다고 생각하냐?”
“오해가. 있는 것 같군.”
“오해? 오해는 네가 나를 이용하겠다고 마음먹고 그걸 행동으로 옮긴 순간부터 주둥이로 나불거려서는 안 되는 단어 아니냐?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너는 분명 나를 정면에 앞세워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 같거든. 그게 내 뜻과 똑같건 아니건 관심 없어. 이미 넌, 나한테 한번 이상 구라를 쳤으니까.”
한번 누군가를 이용해먹는 놈은, 또 다시 누군가를 이용해먹는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있듯이 그건 거의 필연적인 일.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왜 있겠는가.
하물며 이 발락투스는 수천 년 이상을 살아온 놈이다.
성격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기는 해도 분명 중심을 잡은 생각이 있을 테고 중립에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발락투스는, 어찌 보면 진정한 박쥐새끼라고 할 수 있었다.
“기회? 여지? 하도 개소리만 듣다보니까 내가 개가 된 것 같네.”
테이블을 짚고 있던 손으로 비어있는 의자의 등받이를 움켜쥐었다.
“...기회는 이게 마지막이네. 그 자리에 앉...”
발락투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 의자를 뒤쪽으로 그냥 집어던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그리고 내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뭔가, 매우 이질적이라고.
이내.
콰아앙-!
뒤쪽 어딘가에 쳐박힌 의자가 박살나는 소리가 로비에 울려퍼진다.
“기회가 뭐?”
명백한 거절의 의사를 보이며 씩 웃자. 발락투스가 쓰고 있던 가면에 금이 간다.
이어서.
쿠구궁-!!
발락투스의 몸에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해보자는 건가.
솔직히 힘으로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지만 그냥 꿀리고 싶지 않았다.
무시하고 나도 기운을 끌어올렸다.
[아스가르드의 제약이 발동합니다.]
[제약의 단계가 5단계로 올라갑니다.]
전에 받았던 고통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 온몸을 덮친다.
“버러지 같은 놈이... 주제도 모르고 감히...”
명백한 위협과 분노가 담긴 말에도 내 시선은 놈의 몸에서 떠나지 않았다.
치지직하며 타오르는 놈의 몸은 정말이지, 상황을 잊게 할 정도로 꽤나, 장관이었으니까.
으득-!
순간, 이가 악물린다.
내 몸을 짓누르는 제약의 고통에 덧씌워진 발락투스의 기운.
나는 절로 무릎이 꿇어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 순간 나는 귀기를 끌어올려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무의미했다.
“도마뱀아 아직도 안 갔니?”
가운을 걸친 여화가 로비로 내려왔으니까.
그 순간 내 몸을 짓누르던 발락투스의 기운이 흩어진다.
이어서 발락투스와 여화의 몸에서 동시에 치지직하며 스파크가 튀기기 시작했고 아스가르드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왜 남의 집에서 행패를 부리고 그러니? 그냥 적당히 하고 꺼지는 게 어때?”
분노로 이글거리는 발락투스가, 나와 여화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기운을 가라앉힌다.
그리고는, 그가 말했다.
“미친년놈들끼리, 아주 잘 만났군.”
저게 수천 년을 넘게 살아온 지배자라는 놈의 주둥이에서 나올법한 소리인가.
한결 편안해진 나는 근처 소파를 짚으며 말했다.
“무슨 삼류 악당이 할법한 대사 같은데.”
“그러게, 역시 우리 이도는 보는 눈도 남달라.”
여화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확신했다.
여화가 잠을 자는 척 했던 건, 호텔 로비에 발락투스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고 그가, 나와 무슨 대화를 나눌지 궁금해 했다는 것을.
그리고 발락투스, 이 새끼는 이번에도 나를 이용하려고했다.
만약 내가, 여화와 몸을 섞고 나름의 계약까지 맺은 상황에서 발락투스에게 붙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을 거고, 여화는 분노했을 것이며, 발락투스는 한 번에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슬며시 고개를 돌려 발락투스의 표정을 살폈다.
무언가 매우 아쉬워하는 그런 모습이 놈의 면상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했다.
놈은, 교활하고 이중적이고, 속내를 알 수 없는, 그런 양아치가 분명했다.
‘뒤통수 거하게 맞을 뻔했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는 여화를 바라보았다.
시스템의 제약으로 인해 분명 거대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게 확실했지만 여화의 표정은 생각 외로 매우 평화로웠다.
아니다.
평화롭다기보다는 매우 흡족해한다고 해야 할까.
굳이 그 이상 덧붙일 말이 없었다.
나는 소파에 걸치고 있던 팔을 거두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호텔 출입문 쪽으로 걸어가던 나는 마지막으로 고개만 살짝 돌려 여화와 발락투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뭔가 든든한 빽이 생긴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하긴, 고래들은 고래들끼리 싸우고, 새우는 새우끼리 싸워야지.
그게 공평한 싸움이니까.
그 와중에도 여화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게 시야에 들어온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대단한 여자다.
그리고 직설적인 것과 교활한 것에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나는 이 순간 한 번 더 깨달았다.
조용히 그 둘을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려 발바라 대륙으로 향했다.